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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나는 우리가 있는 위치를 유추하며, 기어코 인근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연국(鸢國)이로군···."

나는 연국의 성 중 하나인 용혈성(勇穴城)에 도착하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괴인은 무작위로 우리를 계속 던져 놓는다. 하지만··· 그 무작위의 범위는 연국(鸢國)을 벗어나지 않는군.'

이웃 국가인 성제국, 벽라국 등 다른 국가도 많다.

게다가 딱히 그 괴인이 우리를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계속 연국 안으로만 떨어지는 거지?'

어떠한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운(運)인건가?'

만약 이것이 그저 우연이라면.

'운명(運命)···.'

나는 어쩐지, 어떤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운명'이라는 단어에 조금 더 촉이 오는 걸 느꼈다.

'나는, 분명 지난 삶에서. 회귀를 하기 전의 삶과 정확히 같은 날. 같은 때에 죽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일까?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고,

완전히 다른 의료 수준과 영양 수준을 유지하며 산 지난 삶이었다.

그러나 나는 회귀 이전과 완전히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은 것이다.

'내게 주어진, 수명(壽命)이 거기까지인 건가.'

어쩌면 나에게 허락된 운명이 딱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운명.

굉장히 형이상학적이고, 도저히 생각하기 싫은 것이었지만···.

어쩌면, 모든 존재를 이끄는 운명이란 것은 어쩌면 정말로 실재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김영훈 부장과 함께 성에 들어갔다.

나는 인근 약방에서 약초들을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호패와 옷, 집을 마련했다.

'기본적인 건 마련했으니, 이제 다시 단기적인 목표를 잡아야 한다.'

첫날 단기적인 목표로 오기조원에 이르는 걸 잡았다.

오기조원에 이르러야 수도자의 오행영근을 각성할 수 있고, 그래야지만 수도공법을 익혀 수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기조원을, 이번 생에 못 이룰 수도 있어.'

지난 생.

영훈 형님의 옆에서 그를 계속 따라다녔기에 조금 감각이 이상해지긴 했지만, 원래 절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따내는 경지가 아니었다.

삼화취정도, 오기조원도 마찬가지였다.

'절정 안에서도 상당히 경지가 나뉘고, 그 경지를 하나하나 넘는 것만도 벅차다는 게···.'

일반적인 절정 고수들의 의견이었다.

게다가 나는 안 그래도 무공에는 재능이 없는 둔재다.

아무리 시간을 들이더라도 이번 생애에 일류 고수조차 찍기 힘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나는 새로 산 집의 뒤뜰에서, 내가 알려준 단악검법을 본인이 어느새 개량해서 도법으로 연습하고 있는 김영훈 부장을 쳐다보았다.

단악검법은 지난 삶에서 제대로만 익히면 절정 고수에 이를 수 있는 무공이라고, 영훈 형님이 직접 말한 검법이었다.

아마 김영훈 부장의 재능이라면, 단악검법으로 6개월 안에 절정고수에 오를 것이다.

'영훈 형님··· 아니, 김영훈 부장님을 최대한 빨리 절정 고수로 올려놓는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것이 내가 절정까지 이르는 길을 최대한 단축하는 지름길이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2)

4개월 뒤.

김영훈 부장은 순조롭게 절정 고수의 경지에 이르렀다.

우적, 우적 우적···.

그는 내가 준 황주삼을 먹더니,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했다.

우우웅···.

그와 함께 그의 머리 위에서 삼화취정이 일어나고, 그는 절정 고수에 도달했다.

"하하, 완전히 세상이 달라 보이는군."

"···정말 몇 번을 봐도 엄청난 재능이군요."

원래는 절정에 이르기까지 6, 7개월은 걸리던 김영훈 부장이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예 일류 무공인 단악검법을 익히자 훨씬 절정에 이르는 난이도가 낮아진 건지, 그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2개월 앞서 절정에 이르러 버렸다.

심지어 단악검법을 수련하며, 단악검법의 형이 마음에 안 든다며, 단악검법의 형을 모조리 도법(刀法)의 형태로 뜯어고치며 단맥도법(斷脈刀法)이라는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기까지 했으니.

누가 봐도 기함할 무재(武才)였다.

"그러게 말일세. 나도 내가 신기한 것 같기는 해."

"···부장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그 가공할 재능에 감탄하며, 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내 그에게 건냈다.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

지난 생의 김영훈 부장이 오기조원에 이른 후 나머지 일생을 바쳐 만들어 낸,

대(對) 수도자용 무공.

그가 절정에 오를 4개월 동안 서책의 형태로 다시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저번에 책방에 갔을 때 발견한 무공서인데. 책방 주인이 엄청난 무공서라고 해서 샀습니다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적혀 있곤 해서, 사기당한 게 아닌가 부장님을 찾아왔습니다."

"흐음, 보지."

나는 그에게 월수궁무록을 건냈다.

얼마 후, 그의 눈이 커지며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무공인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래. 그렇겠군."

김영훈 부장은 머리를 꾹꾹 누르며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건 절정··· 아니, 절정에서 삼화취정에 오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공서야. 무시무시하군. 이런 무학 체계가 존재할 줄 몰랐어. 그야말로··· 이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자는 누구라도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걸세. 자네, 엄청난 기연을 또 가져왔군!"

"하하,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뿐인지라 사기당한 줄 알았다만 아니었군요. 그나저나··· 삼화취정은 절정과 같은 경지가 아니었습니까?"

절정에서 삼화취정에 오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공서라니?

"아하, 내가 절정에 이르는 걸 보고 착각했나 보군. 하지만 나도 내가 특이케이스라는 걸 안다네. 절정에도 단계가 있고, 절정 초기, 중기, 후기가 있네. 삼화취정은 그 중에서도 후기에 도달한 이들만 깨닫는 경지야."

"그렇군요···."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기이하게도, 무림맹 책사 자리까지 올라간 나였으나, 절정 이상의 무학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무림의 기준으로, 무인의 수준을 분류하는 단계.

일류, 이류, 삼류를 나누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무공(武功)을 익히기 시작한 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삼류(三流)였다.

초식(招式)과 내공(內功)을 하나라도 익혀, 전투에 활용이 가능한 이들은 삼류 초기.

초식과 내공을 둘 다 익힌 이들은 삼류 중기.

초식과 내공을 익히고,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이들은 삼류 후기로 분류되었다.

기본적으로, 초식과 내공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했다.

몸을 움직이는데, 동시에 몸 안에서 흐르는 기운을 동시에 통제한다? 심지어 잘못 기운을 통제하면 기혈이 꼬여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거나, 주화입마를 겪는다. 한 치의 실수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무공을 익힐 때는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지.'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공에 숙련되기 시작한 자는 이류(二類)로 취급되었다.

초식과 내공을 둘 다 동시에 사용하며, 그걸 전투에 활용할 줄 아는 이는 이류 초기.

초식과 내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숙련되어 전투에 활용하는 것에 어색함이 없는 것이 이류 중기.

초식과 내공을 사용하는 것이 무의식에 인이 박여, 의식하지 않더라도 초식이 묻어나오고, 준비나 연계 없이 내공을 사용 가능한 것이 이류 후기로 불렸다.

나는 지난 몇 개월간의 훈련으로, 지난 삶에서 도달했던 이류 중기의 무위를 다시 찾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실력이 이류 후반에 도달하는 것도 곧이다···!'

그렇게 무공의 숙련을 넘어, 무공이 완성(完成)되는 것이 일류(一類)의 경지였다.

초식과 내공을 사용하는 무공이 무의식에 인(印)이 박이는 걸 넘어, 완전히 몸에 체화되어 무공 안에서의 자유(自由)를 얻는 것이 일류 초기.

완전히 자유를 얻은 무공을 펼치며, 무공이 가진 의(意)를 깨달아 기(氣)의 사용이 능수능란해지며, 검기(劍氣)의 발출이 가능해진 경지가 일류 중기.

자신이 익혀온 무(武)와 의(意)가 완전히 녹아들며, 검사들이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깨달음을 얻어, 검기의 사용 시간과 검기의 준비 시간이 훨씬 짧아지는 것이 일류 후기로 불렸다.

이렇듯, 삼류 초반부터 일류 후반까지의 정보는 무림맹의 책사 역할을 하던 지난 삶에서 전부 수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대한 정보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

심지어, 영훈 형님은 측근인 내가 물어봐도 어색하게 웃으며 답을 회피했다.

'말해 봤자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고?'

심지어 일류 후기 극한에 이른 이에게나 간혹 화두를 던질 뿐, 그 어떤 절정 고수도 절정경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준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부장님, 혹시 절정의 경지는 대충 어떤 경지인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나는 혹여나 싶어 김영훈 부장에게 절정에 대한 단서를 질문했다.

그러나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지난 생과 똑같은 답을 던져 줄 뿐이었다.

"아, 미안하네만. 어차피 말해 줘도 이해가 안 될 걸세."

"···."

"자네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절정에 대한 정보를 미리 가지고 있으면, 헛된 망상과 공상에 사로잡혀 주화입마에 걸릴 수 있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자네가 보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니까 말이지···."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기왕 절정에 올랐으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나 알아볼 겸 도장 깨기를 하고 다닐 건데··· 혹시 따라올 텐가?"

"···뭐, 그러지요."

그리고, 한 달 후.

김영훈 부장은 용혈성의 모든 중소문파를 헤집고 다니며, 모든 문파의 간판을 따내 버렸다.

지난 삶에서 처음 주거지를 잡았던 서경성에는 사성삼마 같은, 세가 커다란 대문파가 일곱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국의 수도라는 특수성 때문이었고, 보통의 성에는 보통 대문파가 하나나, 많으면 둘 정도밖에는 없었다.

용혈성의 대문파는 가천보(茄川堡)라는 이름의 대문파가 하나 있었고,

김영훈 부장이 성내의 모든 중소문파의 간판을 뗀 탓에, 그들은 도장 깨기를 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긴장해 있었다.

"소문이 자자한 영 대협을 뵙게 되어 광영이올시다."

우리가 가천보에 찾아가자, 가천보의 장문인이 직접 나와 그를 반겨주었다.

"성내에 존재하는 소문파 쉰셋. 중소문파 서른둘. 중견문파 열하나. 도합 아흔여섯 문파의 간판을 떼어내신 걸걸한 대협께서 가천보를 찾아 주시다니, 허허···."

"원래 그렇게 많은 문파를 찾아다니며 간판을 뗄 생각까지는 없었소···."

김영훈 부장은 조금 싱겁다는 표정으로 장문인에게 말했다.

"한 문파에서라도 패배하거나, 무승부. 아니, 최소한 호적수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그대로 비무행을 끝낼 생각이었소만···."

"···한 명도 당신의 맞수가 되지 못했다는 거로구려."

맞는 말이었다.

일류 무공인 단악검법을 개조한 단맥도법을 극성으로 익혀 절정에 오르고.

타고난 재능을 극한까지 개화시켜 단번에 삼화취정에 도달한 그가,

오기조원에 이른 천하제일인이 남은 생을 바쳐 만들어 낸 천하일절의 무공.

월수궁무록을 익혔다.

용혈성 중소문파들은 물론이고.

나름 중견문파라고 취급받는 열한 개의 문파 중 어느 곳에서도,

그의 삼 초(招)를 받아 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여, 대문파라고 취급받는 가천보에서는 조금 다를 것이라 기대하겠소."

"하하, 물론이라오. 본문에는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고수들이 즐비하니, 영 대협의 눈높이에 맞는 이들이 있을 터···."

우리는 장문인을 따라, 가천보 내의 비무대로 향했다.

비무의 형식은 삼연전이었다.

가천보 내의 고수 중 세 명이 차례대로 나와 김영훈 부장을 상대할 예정이었고, 그는 세 명을 모두 쓰러뜨리면 가천보의 현판을 가져가는 식이었다.

김영훈 부장에게 한참 불리한 비무 형식.

그러나···.

"하하하, 상관 없네."

김영훈 부장의 눈에는 자신감이 한가득 차 있었다.

"월수궁무록은 무적(無敵)이야! 이걸 익힌 순간부터 나는 어른이고, 저들은 세 살배기 아이들이네. 꼬꼬마 셋이 연달아 덤벼 온다고 내가 왜 무섭겠나."

그리고, 가천보에서의 삼 연전이 시작되었다.

그의 삼 연전에서의 첫 상대는 가천보 장문인이었다.

"···허. 시작부터 당신이 장문인이 나올 줄은 몰랐소만···."

가천보 장문인, 문예익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본문의 장로 중, 용혈성 중견 문파의 최정상들을 삼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소. 필시··· 당신이 절정지경에서도 최정상에 있는 고수라는 것이겠지. 당신은 나를 비롯한, 가천보 원로원(元老院)이 상대해 줄 것이오!"

징―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징이 울렸다.

가천보 장문인 문예익.

그는 성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절정 고수였다.

'빠르게 해치우고 온 중견문파 열한 곳의 최정상 고수인 절정 고수들도, 문예익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던데···.'

나는 두 고수의 대결을 지켜보며,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지켜보았다.

스릉···.

김영훈 부장이 도를 꺼내 들었다.

가천보의 장문인 역시 그의 병기인 연검(軟劍)을 꺼내 들었다.

타앗!

먼저 움직인 것은 김영훈 부장이었다. 그는 일직선으로 장문인에게 달려들었고, 가천보 장문인이 연검을 휘두르자, 김영훈의 사방(四方)이 그대로 연검의 검세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파밧!

그러나, 김영훈 부장의 몸이 순간 일곱 갈래로 분영(分影)을 일으켰고, 일곱 갈래의 분신들이 연검의 결계 중 허술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흠!"

하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가천보 장문인의 연검이 뱀처럼 분신들을 쫓았다

슈칵!

슈칵, 슈칵!

연검이 수천 갈래로 갈라지며, 분신들을 베어 가르는 듯했다.

하지만 분신 중 실체는 단 하나도 잡히지 않았고, 연검의 결계 속에서 그의 그림자는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때였다.

부웅!

허공에서 김영훈 부장이 날듯이 뛰어내리며, 한 바퀴를 회전하며 장문인에게 쇄도해 갔다.

일곱 개의 분영을 아래쪽에 남겨 놓고, 실체는 허공으로 도약했던 것이었다.

"허억···!"

스릉!

그의 검날이 장문인 문예익의 목젖에 닿았다.

징―

김영훈 부장의 승리였다.

그가 승리하기까지 쓴 초식은, 2초식에 불과했다.

"도전자는 연전을 속행하시겠소이까!"

비무의 심판 역을 맡은 장로가 굳은 안색으로 그에게 물었다.

김영훈 부장은 비무대에서 내려오지조차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상대로 나온 것은 머리가 반질반질하게 벗겨진, 흰 수염의 노인이었다.

"가천보 태상 장로. 현 원로원 소속, 익천배라 하오."

대머리의 노인은 짧게 자기소개를 한 후, 바로 자세를 잡았다.

징―

징이 다시 울리고, 이번에는 익천배라는 노인 쪽에서 김영훈 부장에게 달려들어 갔다.

촤라락!

그 역시 연검이 무기였다.

하지만···.

징―

그 역시 십 초를 넘기지 못하고 김영훈 부장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래도 삼 초는 넘겼군.'

월수궁무록을 익힌 그를 상대로 삼 초를 넘겼다는 것 자체로, 어마어마한 강함을 증명했으나, 김영훈 부장은 여전히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이었다.

"···연전을 속행하시겠소?"

이젠 비무를 진행하는 장로의 얼굴은 숫제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속행하겠소."

삼 연전의 마지막 상대는 수수한 무복을 입은, 긴 수염과 흰 머리를 가진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가천보 태상 장문인, 현 원로원주, 팔직태라 한다. 보아하니, 세 번째는 넘겼군."

"호오···."

그리고, 가천보의 태상 장문인이라는 노인을 보고서야 김영훈 부장의 눈빛에 흥미가 돌았다.

"삼화취정의 고수시로군. 나 말고 이 성에서 삼화취정에 이른 자는 처음 보는구려."

"세 번째에 이른 놈들이 흔하지야 않지. 절대다수가 평생을 빨갛고 파란 그 안에서만 살아가니. 나 또한 자네 같은 고수를 만나는 건 오랜만이군."

"허어··· 나 말고 다른 삼화취정의 고수는 몇이나 만나셨소?"

"대부분 대문파의 원로원 소속 고수 중에는 한 사람쯤 꼭 세 번째에 이른 고수가 있지. 뭐 그 외에도 재야의 고수도 한둘쯤은 있고···. 정 궁금하면 연국의 성들을 돌아다니며 대문파를 들러보게. 그리고 듣자 하니, 중견문파들을 찾아가서 도장 깨기를 했다 하는데, 우리 경지에서 그런 잔챙이들은 도움이 안 될 걸세. 명심하게나."

"선배의 충고를 고맙게 듣겠소이다."

'세 번째? 빨간색, 파란색?'

나는 노인이 내뱉는 단서들을 정리하며 의문을 느꼈다.

'왜 삼화취정을 세 번째라고 표현하지? 빨간색이나 파란색은 또 뭐고?'

주변을 둘러보니, 비무대 주변에 있는 가천보의 다른 장로들이나 제자들 역시 눈을 부릅뜨고 둘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는 듯했다.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냐~"

징―

징이 울렸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달리 둘 중 아무도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

둘은 그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든 후 기수식을 잡고, 상대를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척!

처억!

기이하게도, 김영훈 부장이 자세를 바꿔 잡자, 가천보 태상 장문인 팔직태는 화들짝 놀라며 그 역시 기수식을 바꿔 잡았다.

이후 얼마간 둘은 서로 부딪히지 않고 기수식만 바꿔 잡기를 몇 번이나 이어 나갔다.

'이게 뭐야. 싸우는 건가? 수 싸움, 그런 건가?'

나는 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천보의 다른 제자들이나, 장로들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 김영훈 부장에게 패배해서 비무대를 내려간 장문인과 원로는 경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일어나고 있긴 한 거 같은데··· 절정 고수가 아니면 알아보는 게 불가능한 건가 보군.'

그때였다.

"허억! 헉···."

팔직태가 숨을 들이쉬며 외쳤다.

그에게는 어느새 식은땀이 잔뜩 돋아 있었다.

"무슨··· 무슨 무공을 익힌 거냐!"

"···이 무공은, 월수궁무록(越修窮武錄)이라 하오."

"월수궁무록··· 나는 살면서 그런 괴물 같은 무공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인간을 상대하라고 만든 무공이 맞긴 한가?"

"···?"

뭐지?

부딪힌 적도 없지 않나?

그때, 김영훈 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수(先手)는 양보하겠소."

"···정말 부럽구나. 가천보의 삼백 년 역사를 한 번에 부정할 만한 무시무시한 무공을 익힐 수 있다니···."

말을 마친 팔직태가, 기수식을 새로 잡았다.

부웅!

팔직태가 연검을 휘두르며 초식을 펼쳤다.

연검이 허공에서 낭창낭창하게 휘몰아치며, 김영훈 부장의 사방을 감쌌다.

장문인 문예익이 처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초식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영훈 부장은 장문인을 상대했던 것과 달리 분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사방 외의 유일하게 뚫려 있는 공간, 허공을 강하게 노려보며, 도를 들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쐐애액!

그때, 팔직태의 연검 끝이 화살처럼 허공으로 쏘아져 갔다.

부웅!

챙!

김영훈 부장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연검의 끝을 쳐 내고,

연검의 결계에서 빠져나왔다.

다음 순간, 그는 쏜살같이 팔직태에게 달려들어 도를 휘둘렀다.

콰앙!

거대한 폭음이 들리며 비무장 바닥이 갈라진다.

둘의 무기가 허공에서 부딪히며 불꽃을 토해 냈다.

"어엇···."

나는 순간, 둘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파앙, 파앙, 파앙!

파공음이 터지며 김영훈 부장의 신영이 흘깃 비췄다.

검세로 보아 찌르기를 한 것 같았는데, 팔직태는 눈으로 좇기도 힘든 그 찌르기를 모조리 피해내며 김영훈 부장과 간합을 주고받았다.

콰광!

팔직태가 흘려 낸 연검이 비무장의 귀퉁이를 폭발시켜 버렸다.

째앵!

김영훈 부장이 날린 도기 다발에 비무대 옆에 있던 징이 그대로 깨져 버렸다. 징 옆에서 심판을 보던 장로가 기겁을 하며 몸을 굴려 도기를 피했다.

파바밧!

김영훈 부장이 삼 보(步)를 밟으며 팔직태에게 달려들었다.

그 삼 보 안에서, 그의 기수식이 열 번은 더 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기수식의 전환 역시 너무 빨라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영상의 화면이 뚝뚝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젠장··· 여전히 절정 고수들은 괴물 같군.'

지난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주의 최측근으로 지내며, 절정 고수들의 비무를 몇 번 볼 기회도 있었다.

'그때도 뭐가 뭔지 단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었지.'

그나마 그때 비무를 많이 본 덕분에, 눈으로 쫓아갈 수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나와 경지가 비슷해 보이는 가천보의 제자나 사범, 호법들은 아예 눈이 풀려서 멍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고 있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슈칵, 슈칵, 슈칵!

팔직태의 연검이 허공을 가르며, 허공에서 세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가 한 번의 변화를 줄 때마다 오히려 팔직태의 몸 곳곳이 베여 나가며 도흔(刀痕)이 새겨졌다.

팔직태가 세 번의 변화를 일 초식에 담는 새, 김영훈 부장은 세 번의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쐐앵, 챙강!

김영훈 부장의 도가, 팔직태의 연검을 그대로 베어 버렸다.

연검이 잘려 나가 비무대 바깥으로 떨어졌다.

스릉―

김영훈의 도가 팔직태의 목에 닿았고, 팔직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패배다. 가천보의 현판은 떼어 주마. 본문은 삼 년간 봉문(封門)할 것이야!"

"···용혈성 어떤 문파의 무공도 가천보의 것만은 못함을 견식했소. 나 역시 배워 가는 게 많은 대결이었소이다."

두 무인은 서로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한 후,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자, 돌아가지, 서은현이."

"본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을 잡으셨습니까?"

"···내 실력이 아니네."

그러나, 김영훈 부장의 안색은 어째서인지 조금 침울한 듯했다.

"월수궁무록, 나는 그 무공의 가르침대로만 무공의 형(形)을 잡았을 뿐. 나는 그 무공을 장악하고 완전히 그 안에서 자유를 얻고, 월수궁무록의 의(意)를 얻지 못했어."

"···."

"이 무공을···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네만. 나는 이 무공의 창시자의 안배를 뛰어넘지 못했네. 내가, 이 무공의 창시자보다 한참 애송이라는 걸 알았네. 이 무공을 깊게 익히고, 펼칠수록 더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군···."

나는 자신이 자신의 무공을 자화자찬하며 우울해하는, 이 상황을 보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늘의 비무로 내 실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알게 되었네. 저 선배의 말대로, 앞으로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절정 고수들을 찾아 비무를 할 것이야···. 자네는, 따라올 건가?"

"···물론입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무(武)에만 몸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몸.

"저도 부장님, 아니, 형님을 따라다니며 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하겠습니다."

"하하, 기대하겠네. 그나저나 형님이라니, 조금 부끄럽군. 자네랑 내 나이 차가 얼마인데. 허허···."

"같은 동향 사람끼리 호형호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번 생 안에, 반드시 절정 고수가 되고 말 것이다.

하늘이 내린 재능(3)

영훈 형님이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난 생보다도 빠르군.'

5년.

무려 5년 만에, 그는 연국(鸢國)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 주와 성의 대문파들을 찾아가, 절정고수들과 겨루고, 그들을 전부 패퇴시켰다.

3년 만에 천하삼대도객의 좌를 차지했고, 2년 동안 나머지 천하삼대도객 두 명을 물리치며 연국제일도(鸢國第一刀)의 별호를.

그리고 그의 경지를 흠모한 서경성 사성삼마.

일곱 문파의 삼화취정에 이른 원로 고수들 일곱 명의 합공을 물리치고 칠 대 일로 싸워 격퇴시키며, 그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조금 허무하군."

"배부른 소리를 하십니다, 형님."

나는 그의 앞에서 단악검법을 수련하며 말했다.

지난 5년간, 비무가 없을 때는 영훈 형님이 나를 꾸준히 지도해 준 덕에, 내 무위는 이류 중반에서 이류 후반까지 올라왔다.

이제 초식이 완전히 체화되어 의식하지 않아도 검을 뽑으면 기수식이 잡혔고, 내공의 운용 역시 완전히 체화되어 별다른 준비 없이도 내공의 발출이 가능했다.

"배부르다니, 난 오히려 네가 부럽다, 은현아. 넌 이제 이류 후반이니, 앞으로도 싸우며 자신을 돌아볼 상대가 많겠지. 하지만, 이젠 나보다 전부 약한 놈들뿐인데··· 누구를 상대해야 하느냐."

"형님한테 패배한 사성삼마의 문주들이 들으면 복장이 터질 소리를 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 월수궁무록이라는 게 워낙에 규격 외의 무학 체계이니 말이야···. 이걸 이길 수 있는 무림인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다."

어쩐지 그는 조금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삼화취정의 다음 단계라는 오기조원의 경지조차 월수궁무록을 따라가다 보니··· 조금 있으면 도달할 거 같고. 그렇게 되면 합격진을 펼치면 조금이라도 해 볼 만했던 연국의 절정 고수들도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 같단 말이지···."

영훈 형님의 눈에는, 권태가 깃들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하느냐?"

나는 어쩐지 불길한 기색을 느꼈다.

'안 돼! 영훈 형님의 생각이 무림맹에까지 닿으면···.'

이번 생도 역시 꼼짝없이 붙잡혀서 소처럼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다.

지난 생에 한 번 해 봤던 직책이고, 지난 생과는 달리 이류 후기에 도달한 내 실력이니만큼.

훨씬 더 운영을 잘 할 수 있겠지만···.

'훨씬 더 오래 부려먹히겠지···!'

뭔가 빨리 다른 걸 생각해 내서 생각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여, 여행은 어떻습니까?"

"강호 유람 같은 거 말이냐? 지난 5년간 연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실컷 했는데···."

"아니, 연국 말고 말입니다. 이웃 나라인 성제국이나, 벽라국 같은 곳에도 무림이 있잖겠습니까."

"호오, 이웃 나라 무림에 가 보자는 건가."

"예, 그러면 형님의 입맛에 맞는 고수들도 만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뭐··· 월수궁무록에 도달할 만한 인간은 없을 것 같긴 하다만···."

그는 얼마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옆 나라 무림 유람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나와 영훈 형님은 6개월동안 성제국과 벽라국의 언어와 문자를 배우고, 각각의 나라 무림들을 유람했다.

***

다시 2년이 지났다.

영훈 형님은 벽라국의 삼화취정 고수 열두 명의 합공을 받고 그들을 패퇴시키며, 깨달음을 얻고 오기조원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환골탈태를 해서 나보다도 다시 젊어졌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벽라국, 성제국, 연국 삼국에서 모두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형님의 얼굴은 도저히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은현아, 이제 뭘 해야 하냐."

압도적인 권태.

그 어떤 무림인도 이젠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권태감.

월수궁무록 역시 극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만족감.

그는, 이제 무림의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하면 형님, 문파를 세워 보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일을 다시 제안했다.

"문파?"

"예, 전국 각지에서 인재들을 모아서 그들을 가르쳐, 형님을 상대할 만한 고수로 키워 내는 겁니다."

"흠, 아무리 인재들을 키워 봤자, 그들이 한 걸음 진전할 동안 나는 열 걸음을 또 앞서갈 텐데?"

"···."

재수 없어 보이지만, 사실이었다.

그 정도로 영훈 형님의 무공 재능은 정신 나간 수준이었으니.

"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한 문파 수준의 전력과 재력이 있으면, 저 역시 형님을 위해 재야의 고수들을 알아내서 초빙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이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 재야의 고수들은 무림인이 아닌, 내가 지난 생에서 알아냈던, 무림 곳곳에서 암약하던 수도자들이었지만.

'수도자 놈들은 도무지 개인의 일에는 간섭을 안 하려 하니···.'

천하제일인이 탄생하든, 뭐든 그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무림에 파란이 생길 만한 단체에는 꼭 개입을 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삼국을 돌아다니면서도 여태껏 수도자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뭐, 좋네. 그럼 내 명성으로 문파나 하나 만들어 보지."

그렇게, 천하제일인 영훈의 이름으로 문파가 개파되었다.

문파명은 월수궁무록의 이름을 따, 궁무전(窮武殿)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천하제일인의 명성 아래 무수한 무림인이 문파에 들어왔고,

그중에는 삼화취정에 이른 절정 고수도 일곱이나 되었다.

궁무전은 삽시간에 연국제일문파가 되었고,

나는 궁무전 부전주로서 3년 동안 궁무전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그렇게 3년이 지나 궁무전은 무림에서 상당히 안정을 찾았고, 연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거대문파가 되었다.

그리고 궁무전의 영향력이 무림 전체에 미칠 수준이 되자, 그들이 찾아왔다.

***

"수도자들?"

영훈 형님은 어느 날 우리를 찾아온 손님들을 보며 물어보았다.

"수도자들이 뭐요? 굉장히··· 독특한 기질을 지닌 이들인 건 알겠소만."

그들은 전부 다른 색의 장포를 입고 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었으며, 삿갓과 베일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의 특징을 추정할 만한 것은 목소리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목소리마저도 기이한 술법으로 변조했는지, 모두 비슷비슷한 목소리를 지녔다.

어느 날 나와 영훈 형님을 불쑥 찾아온 이들을 보며, 영훈 형님은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우리 궁무전더러 당신들 수도자들의 조직에 충성하라는 거요?"

그렇다.

그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기질'을 지녔다며,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권태가 사라진 채, 호승심으로 가득 차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었다.

"그렇소, 우리는 본디 선도(仙道)를 닦는 수도자의 일족. 우리는 속세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으나, 그래도 속세에 대한 최소한의 영도와 통제는 필요하다 느꼈기에 황실, 재계, 정계, 무림 곳곳에서 암약하며 그들을 후원하고, 지지하며, 그들의 권세가 이어지도록 도와 왔소."

"허허···."

"그 대가 또한 대단한 것이 아니요. 그저 당신들이 우리 수도자 일족에게 대대로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가 간혹 속세의 일에 간섭할 일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면 된다오."

"허허허··· 그것 참 신기하군. 그런 세상이 있었을 줄이야."

영훈 형님은 껄껄 웃으며, 우리를 찾아온 수도자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가,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지?"

그의 대답에, 수도자 세 사람에게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는 오늘 물러갈 것이나, 당신들의 문파에는 앞으로 모든 문파들이 교류를 끊을 것이오. 어떤 상단, 세가도 당신들의 제자를 찾지 않을 것이고. 관과 황실 역시 그대들의 꼬투리를 잡고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할 것이오."

"흐음, 그게 끝이면 별로 무섭지는 않은데."

영훈 형님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연국 전체와 싸우게 될 텐데 무섭지 않다라···. 정녕 광오하군."

"이 범인 녀석이 정녕 수도자의 앞에서 얼마나 그 교만한 콧대를 뽐내는 것이야···."

대표로 말하던 이의 뒤에 서 있던 다른 수도자가 살기를 드러내며 손을 들어올렸다.

촤아악!

순간, 별빛이 번쩍이는 듯하더니 수도자의 손에서 별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영훈 형님의 허리춤에서 도(刀)가 섬광처럼 뽑혀 왔다.

콰과광!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전각의 옆면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잘 붙어 있어라, 은현아. 내 뒤에만 있으면 안전할 게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먼지구름 속에서, 노기를 드러내고 있는 세 명의 수도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들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만···."

"감히 범인이 수도자를 향해 칼을 뽑다니!"

"당신들이 먼저 공격해 왔소만."

"시끄럽다! 이를 드러내는 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죽여서 꼭두각시로 만들 것이야!"

"선도니 어쩌니 하더니, 생각하는 꼬라지는 마두(魔頭)나 다름없군그래."

세 수도자는 각자 진언을 웅얼웅얼 외며 수인을 맺었다.

가장 앞에 있던 수도자가 무언가 또다시 법술을 펼쳤다.

슈각!

그러나, 법술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영훈 형님의 도에 베여 나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 영훈 형님이 그들의 사각으로 파고들어가, 세 사람의 배를 걷어찼다.

"커억!"

"으어억!"

"끄아아악!"

세 사람은 전각 아래로 떨어져 버리는 듯했으나, 중간에 기묘한 법술을 부려 떨어지는 속도를 줄였다.

그들이 입은 옷은 먼지가 잔뜩 묻었고, 영훈 형님에게 차인 곳은 완전히 찢어져서 넝마가 되어 버렸다.

"수도자 놈들은 들어라!"

영훈 형님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하게 그들에게 사자후를 외쳤다.

"나는 네놈들 따위한테 충성은 하지 않는다! 무림공적이든, 연국공적이든 만들어 봐라! 너희 같은 놈은 몇 놈이 오든 무섭지 않으니!"

쾅, 쾅, 쾅!

동시에, 그의 손에서 뿜어진 탄지(彈指)가 수도자들의 옆의 땅을 거대한 소리로 두들겼다.

"누구도 감히 내 위에 설 수 없다!"

세 명의 수도자는 씨근거리는 듯하더니, 기묘한 법술을 써서 달아나 버렸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옆에 다가가 물었다.

"···형님, 뒷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하하하, 뒷감당이라고 했나?"

그러나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워 보였다.

"뒷감당은 무슨 뒷감당! 나는 꺠달았다, 은현아!"

"뭐, 뭘 말입니까?"

"월수궁무록으로 무림인을 몇이나 상대하든 채워지지 않던 그 갈증! 아무리 싸워도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 그래, 그건 인간을 상대로 만든 게 아닌 무공을 인간을 상대로 써 왔기에 느꼈던 갈증이었어!"

그는 흥분에 가득찬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수도자! 그래, 분명 이 월수궁무록이라는 건, 저 수도자 놈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무공이다! 드디어! 드디어 월수궁무록의 목적성을 찾았다! 내 무(武)의 의(意)를 발견했는데, 뒷감당이 대수인 것 같으냐!"

"···."

"이 무공은 수도자 놈들과 싸우기 위한 무공이야! 그러니 더욱 더 성장하려면 수도자 놈들과 싸워야 하는 거지. 하하하! 드디어, 월수궁무록을 대성할 길이 보였구나!"

나는 여태껏 그와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성정을 전부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건, 정말 볼 때마다 다른 면이 있는 생물이로군.'

"문파 호법들과 장로들을 불러모아라! 오늘부로 너를 제외한 어중이떠중이는 전부 문파에서 퇴출시키겠다! 수도자 놈들이 지랄을 떨어 오겠다는데, 속 편히 제자나 가르칠 여유는 없지."

곧바로 그는 문파의 전 제자들을 집합시켜, 이류 이하의 제자들은 전부 집으로 돌려보냈다.

일류 중에서도 아직 검기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전부 돌려보냈다.

그렇게, 궁무전에는 삼화취정에 이른 장로 다섯.

일류 중기 이상의 제자 삼백셋.

그리고 이류 후기인 부전주, 나를 포함해, 약 310명의 인원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날부로, 영훈 형님은 삼화취정에 오른 장로들에게 월수궁무록을 가르쳤다.

또한 일류의 제자들에게는 월수궁무록의 이치를 담은 합격진과 검진 등을 가르치며 수도자를 상대로 어느 정도 밀리지 않게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넌 일단 최대한 빨리 일류로 실력을 올려놓거라. 이류 후기에서 일류로 인정받으려면 완전히 네 무공을 몸에 체화시키는 게 중요해."

매일같이 지옥 수련의 일환이었다.

단악검법이라는 무공이, 몸에 완전히 녹아들어 엉겨 붙을 때까지!

***

수도자들을 두들겨 패 쫓아낸 이후, 관청에서 허가를 내 주었던 궁무전의 문파 건물이 불법 건축물로 규정되어 우리는 문파 건물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관청으로부터 문파의 완전 해체를 명 받았다.

하지만···.

"무시해라."

형님은 간결하게 대답하며, 계속해서 장로와 제자들에게, 그리고 내게 무공을 지도할 뿐이었다.

관청의 명을 거부하고 달포가 지났다.

우리는 저잣거리에 영훈 형님, 그리고 내 얼굴이 그려진 수배서가 나도는 것을 발견했다.

관에서 우리를 역적으로 몰며 수배를 내린 것이었다.

"떠난다."

영훈 형님은 이번에도 간결하게 대답하며, 다섯 명의 장로와 삼백의 제자를 데리고 산야를 떠돌았다.

우리의 현상금을 노린 현상금 사냥꾼들이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형님에게는 도달하지도 못하고, 일류 수준의 제자들에게서 정리되었다.

그런 식으로 정리된 현상금 사냥꾼들이 일백에 달할 때쯤.

우리가 현상금 사냥꾼들을 죽인 것을 빌미로, 연국 무림 전역의 대문파에서 우리를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선언한다는 공동 성명을 내었다.

우리 궁무전은 궁마전(宮魔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영훈 형님에겐 극마(極魔)라는 별호가 붙어 버렸다.

우리에게 달린 현상금도 더더욱 늘어 갔고, 전국 곳곳의 무림 중소문파, 중견문파들이 지역에서 힘을 합쳐서 우리를 합공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월수궁무록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진 합격진을 운용하는 제자들의 선에서 전부 갈려 나가 버렸고, 궁무전, 아니, 궁마전의 악명은 계속해서 높아만 갔다.

어느 순간부터.

궁마전은 궁(宮)조차 아닌 극마전(極魔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형님에게 붙은 별호는 무극마(武極魔)로 진화해 버렸다.

우리는 한곳에서 머무를 수 없어, 연국 전역을 떠돌아다녀야 했고, 계속해서 연국을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문파들의 합공을 받아야만 했다.

***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무림공적 이후로 10년.

내가 회귀한 지는 햇수로 20년이 지난 지금.

영훈 형님의 칭호는 무극마에서 무극신마가 되어있었고,

세간에서는 우리를 극마전이 아닌 신마전(神魔殿)으로 불렀다.

10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실전경험을 겪은 3백 명의 제자 중 다수가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실전 경험과 더불어, 월수궁무록의 이치가 담긴 검진과 합격술을 끊임없이 펼쳤기 때문인 것도 있는 듯했다.

절정에 이르지 못한 이들도 역시 일류 최정상에 올랐고, 이들은 신마전 직속 신마대로 불리며 위명을 떨쳤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도록 토벌되지 않는 우리 신마전의 위명에 반해, 아예 신마전에 합류하는 사파와 마두들, 간혹 무극신마 영훈의 위명에 반한 정도문파들 몇몇의 합류로 인해,

신마전은 10년 전과 달리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식 신마전'인 '310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신마전의 명성에 이끌려 따라다닐 뿐인 이들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이제 신마전은 이제 하나의 종교 문파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세력과, 무극신마에 대한 광신으로 가득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과는 모든 것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나와 영훈 형님뿐이었다.

"어떻게 너는 아직도 겨우 일류에 턱걸이를 하고 있는 거냐? 10년 동안이나 실전 경험도 겪고, 내공도 쌓고, 계속해서 검법도 연습했으면서."

"예, 형님은 월수궁무록 대성할 만큼 달라지셔서 좋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재능이 없었고.

그는 여전히 재능이 넘쳤다.

나는 투덜거리며 계속해서 검법을 연습했다.

10년.

나는 10년을 계속 고련하여, 겨우겨우 검법에서 자유를 찾았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제대로 된 검기를 사용하며 일류 중반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신마전 부전주란 놈이 아직도 검기 하나 못 쓴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은현아? 네 별호가 뭔지 아냐?"

"제 별호가 뭡니까."

"네 별호가 없단 말이다! 일류 초반에 간신히 턱걸이한 놈이, 중요한 전투 때에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아무도 너를 신경 안 쓰고, 그래서 별호가 없어!"

"아니, 저는 보조직이지 직접 전투원이 아닌데 어쩌란 겁니까!"

그렇다.

나는 하도 무공에는 재능이 없어 10년 동안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변장술, 잠입술, 선동, 기관진식, 첩보 등을 익혀 신마전을 보조하는 것에만 힘을 썼다.

하지만 나라고 무공 수위를 높이고 싶지 않아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수련해도, 앞으로 나아가지를 않는데 어쩌란 거냐.'

일류 후반인 이들은 10년간 절정의 턱걸이를.

일류 중반인 이들은 10년간 일류 최고봉으로 올라갈 실력을 키웠다.

나만이 간신히 이류 후반에서 일류 초반에 턱걸이를 한 것이었다.

물론 일류라는 것은, 그 자체로 어지간한 대문파 장로, 중소문파 장문인에 버금가는 실력인 것은 맞았다.

아마 내가 대문파에 들어간다면 장로 자리는 꿰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하제일인이 익힌 천하제일 무공의 이치를 접하고, 천하제일인에게 가르침을 10년이나 받으며 끊임없이 실전 경험을 겪은 이들이, 절정 고수에 무수히 턱걸이를 하게 된 신마전이었다.

절정 고수의 턱걸이라곤 하지만, 절정 고수와 일류 고수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류 고수는 [절대] 절정 고수에게 이길 수 없다.

일류 고수가 절정 고수를 이기는 경우는 한 가지, 50명 이상의 일류 고수가 인해전술로 밀어붙여, 절정 고수의 체력과 정신력을 전부 소모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정도로,

일류와 절정의 차이는 심대했다.

그런 절정 고수들이, 신마전에는 바글거리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대문파 장로의 위치를 받을 내가 신마전에서는 최약체 취급을 받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니, 형님 제자인 장로들도 전부 제 공적은 인정하는데 왜 형님만 난리십니까?"

나는 내가 약한 편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단체에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방면에서 힘을 썼다.

지난 삶에서 무림맹 책사였던 것을 이용해,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서 정보전을 펼치고, 첩보와 잠입술, 변장술 등을 익혀 신마전에 유용한 정보들을 잔뜩 물고 왔다.

그러한 내 역할은 형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 다섯 명의 삼화취정 고수들 역시 인정한 바였다.

"형님만 너무 절 구박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널 구박한댔냐, 은현아. 내 동생이랍시고 10년째 지금 계속 지도를 해 주는데, 10년동안 아직도 일류에 간신히 턱걸이를 했단 게 답답해서 그런다!"

"아니, 일류가 뉘집 개 이름입니까? 보통 일반인은 이 나이 대에 일류 됩니다!"

물론 사실 나는 그 일반인보다도 못한 게 맞다.

지난 회차들을 따지면 내 나이는 백 살을 훌쩍 넘는다.

100년을 넘게 무를 수련하면서, 아직도 일류 초반이라는 건, 내 무공 재능이 정말 끔찍하다는 말이니까.

그저 회귀라는 사기로 인해 그 무공 재능이 감춰졌을 뿐.

"그 정도 무공 재능을, 솔직히 난 네가 어떻게 일류까지 갔는지도 모르겠다. 어휴··· 안 그래도 네가 가져온 정보 때문에 귀찮아 죽겠는데···."

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와 장로들이 영훈 형님의 부름에 한자리에 모였다.

"최근 들어,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 관과 무림이 합작해서 우리를 습격할 모양이다."

형님의 말에, 장로들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깟 버러지들이 뭐라고 그러시오."

"월수궁무록을 익힌 괴물들이 여기 여섯이나 있는데!"

"무극신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시는 듯하오."

그러자 형님이 나를 쳐다보며 눈짓을 주었다.

나는 첩보 공작을 해 모은 문서들을 펼치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관과 무림 뒤쪽에서 암약하는 수도자의 일족들이, 10년이 넘게 우리가 통제되지 않자, 직접 나서려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음, 수도자들···."

"부전주가 가져온 정보라면야···."

"부전주가 무공을 제외하면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니, 믿지 않을 수가 없겠구려···."

'방금, 칭찬이야 욕이야?'

나는 헛기침을 하며 정보를 얻은 경위를 설명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하여, 무림과 관이 합작해서 우리를 수도자 일족이 있는 곳으로 밀어 넣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할 예정이시오?"

나는 싱긋 웃으며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수도자 일족에게 당하기 전, 우리가 그들을 먼저 각개 격파하는 걸로 하지요."

"수도자를, 각개 격파?"

"그렇습니다. 수도자 일족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지금 속세를 조종하기 위해 암약하느라 연국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지요. 이곳저곳에서 암약하느라 따로 떨어진 이들을 각개 격파한다면, 그들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장로 중 한 사람이 내게 질문을 해 왔다.

"그렇다면 부전주께서는 암약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위치를 파악하셨소?"

"파악했습니다. 9할 이상은 현재 어디에 머무는지 알 수 있다 자신합니다."

"역시 부전주로군. 그 정보력은 믿고 있었소."

사실은 지난 생애에 무림맹의 초대 책사 권한으로 수도자들의 대한 정보를 미친 듯이 구하다가 알게 된 정보들이었다.

지금처럼 무림공적이 된 상황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정보들이긴 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기에 각자 기량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특히 부전주는 내가 책임지고 신마대 말단보다는 강해지게 만들어 주지."

영훈 형님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껄껄 웃었다.

"하하, 아침에 부전주가 전주께 혼나며 수련하는 걸 봤는데. 부전주는 그때부터 수련을 이어 오시던 거였구려!"

"정말 성실하시군, 하하하!"

"아무렴, 신마전 부전주가 신마대 말단보다 약해서야 쓰겠나."

장로들 역시 껄껄 웃으며 나를 놀려 댔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연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도자들을 각개 격파하기 위해 나섰다.

하늘이 내린 재능(4)

신마전이 움직였다.

전 무림이 다시 긴장했지만, 신마전은 그저 호극성이라는 작은 성의 작은 장원 하나만을 불태우고 사라졌을 뿐이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무극신마의 이러한 기행에 수군거렸으나, 진상을 아는 이들은 심각했다.

무극신마가, 수도자(修道者)를 참살했다!

무림의 최고위층.

상계, 정계의 최고위층.

또한 황실.

그들은 수도자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었고, 수도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체감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수도자를 참살한 무극신마에 대한 이야기는 하늘이 뒤집어지는 듯한 이야기였다.

***

"연국 곳곳이 혼란에 잠겨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잠잠하다.

무극신마 영훈이 한 짓이라곤, 그냥 장원 하나 태워 버린 거니까.

하지만 진실을 아는 이들은 굉장히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형님의 행보에 따라, 점차 파란은 커질 겁니다."

"뭐, 그 정도 파란은 상관도 없다."

정작 수도자를 참살시킨 본인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말이었다.

"놈들이 펼치는 기묘한 법술은, 익숙해지기만 하면 절정 고수만 되어도 파훼할 수 있는 것들이야. 그런 것들 따위는 아무리 해치워 봤자 월수궁무록을 더욱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강한 녀석들을 찾아다녀야겠어."

"뭐···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수도자는 많으니까요."

나는 씨익 웃으며, 연국의 지도를 가져와 펼쳤다.

지난 생애 동안 조사한, 연국에서 암약하는 수도자들의 숫자는, 영훈 형님이 만족할 만큼 차고 넘쳤으니까.

"다음 목표로 안내하겠습니다."

***

6개월 후.

신마전은 연국 곳곳을 헤집으며, 연국에서 암약하는 수도자의 일족들을 하나하나 참살했다.

대부분의 수도자는 일반적인 절정 고수에 맞먹었고, 삼화취정에 맞먹는 수도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형님은커녕 장로들도 전투에 나설 일이 없었고, 그저 신마대의 절정 고수들만이 힘을 썼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지.'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의 수도자들은 수도계에서도 가장 밑바닥이기에, 구차한 속세의 일들을 처리하는 떨거지들이다.

그 말을 반대로 하면, 가장 떨거지들조차 절정 고수와 맞먹는 존재들이 수도자인 것이다.

'이제, 슬슬 고위급 수도자들이 나타날 때가 됐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져.

그로부터 3개월 뒤.

신마전은 격이 다른 수도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

"듣자 하니, 범인 집단이 주제도 모르고, 수도가문 일족들을 참살하고 다닌다 하던데. 그게 너희들이냐."

어느 날.

참교성이라는 성에 머문다는 수도자를 참살하기 위해, 산길을 지나던 중.

청포를 입은 미청년 한 사람이 신마대의 앞을 막아서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신마대의 누구도 그를 경시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살기와, 압박감.

그는 분명 강력한 수도자였으니까.

"우리가 손에 넣은 정보로, 당신들 수도자 일족이 우리 신마전을 무림, 관과 합작하여 멸살(滅殺)하려 한다고 들었소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뿐이오. 만약 수도자 일족의 전령으로 온 것이라면, 이렇게 전하시오. 우리를 핍박하지 않으면 우리도 수도자 참살을 멈출 것이라고!"

미청년을 향해, 영훈 형님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미청년의 표정이 변했다.

"하, 하하···."

그는, 갑자기 미친 것마냥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흐하하하! 정말, 정말··· 아하하하하!"

저벅, 저벅···.

산길 주변으로 청포를 입은 소년, 그리고 청색 궁장을 입은 미녀가 걸어나왔다.

그들 모두, 미청년과 비슷한 수준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하하하하··· 정말 웃기기가 그지없군. 너희가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구나. 나를 웃기는 데에 성공했으니, 한 가지 수도계(修道界)의 기본적인 정보 하나를 알려 주마."

미청년은 왼손을 펼쳐 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연기(煉氣)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수도자의 경지 중에서 가장 낮은 경지를, 수도계에서는 연기기(煉氣期) 라고 부르지. 너희가 지금껏 쓰러뜨려온 수도자들은···."

"그것들이 연기기 수도자라는 건가?"

"아니, 아니야.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연기기는 총 14단계로 나뉘어진다. 1성(成)부터 14성(成)까지의 경지가 있는데, 숫자가 높아질수록 그다음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다. 14성(成) 수도자는 수도 일족에서도 중히 여겨지며, 1성(成) 수도자는 수도계의 천덕꾸러기쯤으로 여겨지는 것이지. 그리고···."

큭큭···.

미청년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을 펼쳤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一)자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까지 너희가 참살하며 거들먹거린 그것들은, 수도 일족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연기기 1성(成) 수도자들이었다. 우리 수도자들 중 가장 낮은 경지에서도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 너희 범인들의 고삐를 쥐고 제어하는 역을 맡았던 거란 말이다."

"···!"

그 말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난 삶에서는 이런 정보를 얻을 기회 자체가 없었다.

'연기, 축기, 결단 등의 경지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연기기 안에서 경지가 또 나뉘고, 지금껏 무림 곳곳에서 암약하던, 한 명 한 명이 절정 고수에 육박하던 수도자들이, 수도계의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었다니!

"참고로, 나와 내 친구들은 연기기 삼성(三成)의 경지에 올랐지. 지금껏 너희가 상대해 오던 찌꺼기 같은 것들과는 격이 다른···."

"그러니까, 14성까지 경지가 있는데. 너희 역시 3성밖에 오르지 못한 밑바닥이라는 거 아니냐."

영훈 형님은 미청년의 말을 끊으며 피식 비웃었다.

"똑같은 밑바닥 주제에, 1성이니 하는 놈들을 깔아뭉개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군. 최소한 내가 만난 녀석들은 하나같이 결사의 태세로 나를 맞이했다만. 너는 아가리만 터는 게 네가 익힌 법술이냐?"

"이, 이이익···!"

미청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냐, 이 범인 녀석. 그리 원한다면 내 힘을 보여 주마. 연기기 3성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우우우웅!

미청년과 그의 동료 둘.

세 수도자에게서 강력한 압박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훈 형님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조금 성가시긴 하겠군. 신마대! 합격진을 준비하라!"

동시에, 절정 고수들로 이뤄진 신마대가, 월수궁무록에서 파생된 합격진을 구사하며 세 명을 둘러쌌다.

번쩍!

동시에 별빛이 번뜩이며 삼 인의 수도자들이 법술을 쓰기 시작했다.

'빠르다!'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저 셋은 지금껏 만났던 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진언을 외지도 않고 저 정도의 법술을!'

보통의 수도자들은 전투를 시작하면 무조건 진언을 외며 법술을 준비했다.

그러나, 저들은 진언을 외우지조차 않고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보다 강력한 법술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분명 강하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우리가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을 펼쳐라!"

"월수진(越修陣), 개(開)!"

월수궁무록은 무적(無敵)이었고,

그것에서 파생된 모든 것 역시.

"몰아쳐라!"

최강(最强)이었으니까.

***

전투는 한 시진 후에야 끝이 났다.

절정 고수들이 펼친 합격진으로 인해, 우리는 겨우겨우 수도자 셋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

"앞으로 점점 강한 수도자들이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저들 또한 연기기 14성 중 3성이라는, 허약한 이들이었지요."

"그래도 장로들까지 가지는 않았다. 삼화취정에 이른 이라면 충분히 저 정도는 상대가 가능하다."

"하지만···."

"거기에 장로들에겐 월수궁무록까지 가르쳤지. 저 녀석들보다 훨씬 괴물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해도 딱히 문제는 아니다."

영훈 형님은 내 걱정을 일축해 버리며, 절대적인 자신감을 내비쳤다.

"수도자들의 싸움을 보면 볼수록, 확실히 느껴진다. 월수궁무록은, 저놈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라는 걸. 얼마나 강한 녀석들이 나타나든, 월수궁무록은 저것들에게서 완벽한 상성을 잡아 낼 수 있어!"

월수궁무록.

분명 저것은 훌륭한 무공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삶을 기억했다.

월수궁무록을 창시했던, 그때의 영훈 형님이.

'지난 삶에서의 영훈 형님은, 월수궁무록으로 수도자들을 이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도자를 만나면 목숨을 부지할 동아줄이라고만 표현했을 뿐.'

나는 지금의 과해 보이는 그의 자신감이, 어쩐지 불길함을 느끼며, 그저 긴장하라고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

***

점차 우리를 가로막는 수도자들은 강한 이들로 변해 갔다.

처음에는 청포의 미청년과 같은 연기기 3성 정도의 수도자들이 우리를 가로막았지만.

우리가 점차 그것들을 빠르게 썰어 버리자, 연기기 4성의 수도자가 우리를 찾아왔었다.

연기기 4성의 수도자는 단신으로 300여 명의 신마대가 펼치는 합격진을 상대했고, 결국 삼화취정에 이른 장로가 나서서야 죽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만난 것은 연기기 6성의 수도자였다.

연기기 6성의 수도자는 삼화취정에 오른 장로 한 명과 팽팽하게 겨뤘으나, 장로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간 덕에 겨우겨우 이길 수 있었다.

"월수궁무록을 익히지 않았다면, 나는 저자보다 한 단계 아래의 수도자에게도 고전했을 것이오."

삼화취정의 장로는 대결 직후 그 말로 연기기 수도자의 강인함을 증명했다.

그리고, 달포 후 우리는 연기기 7성에 이른 수도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연기기 7성의 수도자를 상대로, 삼화취정에 이르러 월수궁무록을 익힌 절정 고수 장로 다섯이 합공을 해야 했다.

겨우겨우 연기기 7성의 수도자를 참살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장로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극신마께 아뢰오. 연기기 7성. 저들 중 중반의 경지에 오른 이도 우리가 전력을 다해야 잡을 수 있었소이다. 한데 더 강한 이들이 나타난다면···."

"과연 우리가 그 이상의 수도자를 잡을 수 있을지···."

그러나 영훈 형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월수궁무록을 극한까지 운용해라. 월수궁무록은 수도자를 잡아 죽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공이다. 저들의 사각을 찔러 낼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자신감을 가져라!"

그렇게, 시간은 점차 흘러 갔다.

연기기 7성의 수도자를 죽인 후, 얼마간은 4성 이상의 수도자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즈음에서 첨벽성이라는 성에 터전을 잡고 신마전 본부를 다시 건설했다.

그 후 성 일대를 장악하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문파를 수립했다.

간혹 연기기 1성, 2, 3성 수도자들이 신마전 본부를 찾아와 습격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대다수의 연기기 수도자들은 신마대의 절정 고수들에게 잡혀 죽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조용함은 몇 년간 이어졌다.

***

부웅, 부웅!

나는 단악검법을 펼치며, 마침내 내가 추구해 오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검법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그 외의 것을 시도할 여유가 생긴다.

나는 그 여유 속에서, 극한의 의념으로 내공을 벼려내었다.

마치, 검과 손이 하나가 된 것 같다.

부우웅!

슈칵!

검이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예기(銳氣).

검에 덧씌워진 아지랑이.

검기(劍氣)였다.

"하, 하하··· 하하하하!"

나는 단악검법을 펼치며, 수련용으로 세워진 일장 크기의 바위를 베어 내 보았다.

슈칵!

바위가, 그대로 두부처럼 잘려 나가 버린다.

"드디어··· 일류 중기!"

검기란, 그냥 내공으로 칼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익힌 검법을, 무공을 극한까지 벼려내어, 내공을 발출(拔出)시키는 것.

그리하여, 해당 무공이 가지고 있는 특질을 극한까지 강화시키는 것.

그것이 검기였다.

단악검법 같은 경우에는 '베는' 특질이 가장 강한 무공이었기에 그 특질이 가장 강화된 것이었다.

연습하면 단악검법에 숨겨진 수많은 특질 역시 검기로 강화해서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10년. 일류 초기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다···."

이번 삶을 시작한 지 벌써 30년이다.

내 신체 나이는 어느덧 쉰아홉이었다.

거의 예순살에 도달해서야 일류 중반이었다.

'내 수명은 앞으로, 20년 남았다.'

그 안에, 과연 절정 고수가 될 수 있을까.

일류 고수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세간에 풀려 있는 정보를 모으며, 끝없는 노력을 통해 가까스로 도달했다.

하지만 절정 고수부터는, 세간에서도 극한의 재능이 없다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당장 신마대의 절정 고수들 역시 원래부터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고수들이었기에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이번 생 안에··· 가능할까?'

나는 어느새 주름살이 진 손을 내려다보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가능할지 말지를 생각하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검을 휘두르는 일이라면, 그저 휘두를 뿐.

내가 다시 단악검법을 펼치려 할 때였다.

콰아앙!

신마전의 전각 하나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이 정도 규모의 폭발은···."

수도자다!

내가 황급히 허공을 올려다보자, 나뭇잎 모양의 법기(法器)에 올라탄 수도자가 오연하게 신마전 본파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신마전주, 무극신마는 어서 나와 죗값을 받으라."

수도자의 음성이 본파 전체에 웅웅 울린다.

저릿, 저릿···.

나는 전신이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위험하다.'

지금까지 만나온 수도자들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본 가문의 연기기 자제들이 무극신마라는 범인 놈에게 잡혀 죽었다고 들었으니, 가문의 축기기(築氣期) 수사인 내가 상대해 주겠다."

그리고, 영훈 형님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작게 말했다.

"일단 신마전 바깥으로 피신해라.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고."

"형님?"

"축기기 수사라는 자··· 지금껏 봐 왔던 자들과는 비할 수가 없군."

"형님, 설마 형님께도 위험하신 겁니까···?"

"하하하, 그럴 리가."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기조원에 이른 무인이라면 누구든지 저자와 어느 정도 합을 맞춰 볼 수는 있을 게다. 그리고··· 나는 오기조원에 이르고, 계속해서 월수궁무록을 익혀 왔지."

쿠구구구구!

그에게서도 무시무시한 기파가 뻗어 나왔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절대 지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거라!"

파앙!

그가 땅을 박차고, 허공답보를 이어 가며 공중에 떠 있는 축기기 수도자를 향해 도신을 뽑아 들었다.

쩌엉!

빛이 터지며 굉음이 울렸다.

나는 그의 충고대로 다른 이들을 피난시키며 신마전 바깥으로 나갔다.

건물 위쪽으로, 수많은 빛과 굉음이 터지며, 축기기 수사와 영훈 형님의 신형이 비췄다.

축기기 수사라는 자는 법기를 타고 허공에 떠서 형님을 상대했고, 형님은 허공을 밟아 가며 월수궁무록의 무공을 사용해서 축기기 수사를 압박하고 있었다.

콰앙!

그러나, 축기기 수사가 일 장 크기의 파초선을 꺼내 부치자 형님이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축기기 수사는 품에서 하나하나 기이한 법기(法器)들을 꺼내 사용하기 시작했고, 형님이 밀리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후, 법기들을 잔뜩 꺼내 쓰던 축기기 수사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몸을 뒤로 빼려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 찰나.

영훈 형님의 신형이 사라졌다.

직후, 수도자의 목이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형님!"

나와 근처에서 전투를 관전하던 장로들이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달려갔다.

"허억···헉···."

그곳에는, 이제껏 누구와 싸워도 숨 한 번 헐떡인 적 없는 영훈 형님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전주님!"

"무극신마!"

"형님!"

우리가 서둘러 형님의 옆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봐라!"

그가 불쑥 도를 내밀었다.

"뭘 보란 겁니까?"

"뭘 보긴, 도신을 봐라!"

"도신···? 아···!"

그의 도는, 이가 다 빠져 있었다.

이제껏, 그는 딱히 보검이나 보도 같은 도구를 쓰지 않았다.

그저 조금 오래된 것 같으면 근처 마을 대장간에서 도를 구매해서 쓰고는 했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형님은 여태껏 평범한 도로 절세무공을 펼쳐 내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무림인을, 어떤 수도자를 상대로도 이가 빠진 적 없던 그의 무기였다.

"하, 하하··· 하하하하!"

영훈 형님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여태껏,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허접스러운 무기만 써 왔다만. 저 수도자 놈이 마구잡이로 꺼내 쓰는 괴이한 법기를 보며, 무기도 무사의 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 괴물딱지 같은 축기기 수도자를, 조금만 더 힘이 부족했으면 베지 못할 뻔했어!"

"으음··· 그 정도로 강했단 거로구료···."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오히려 한참 밝아져 있었다.

"그래, 무지막지하게 강하더군. 아마 오기조원에 이르지 못한 무인은 월수궁무록을 익혔더라도 상대가 불가능할 터다. 체급 차이가 너무 커! 숨 쉬듯이 호신강기를 운용하는 건 물론이고, 그 위에 방어 법술까지 덕지덕지 처발라 놓은 덕에 칼에 이가 다 빠져 버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월수궁무록을 대성(大成)하면! 저런 괴물딱지들도 충분히 잡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아아아!"

장로들 역시 그 얼굴에 희색이 맴돌기 시작했다.

"무인도! 수도자를! 이길 수 있다!!!"

영훈 형님이, 이가 빠진 도를 잡아들고 크게 외쳤다.

나 역시,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희망을 본 것인지.

절로 가슴이 울렁이는 느낌이었다.

"연국에서 암약하는 수도자 놈들을 몰아내고, 무림을, 무림인만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영훈 형님은 호기롭게 외치며, 하늘을 향해 도를 뽑아 들었다.

모두가 그의 사상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보여 주었으니까.

***

그리고 달포가 지났다.

50명의 축기기 수사가 몰려왔다.

하늘이 내린 재능(5)

꿈인가.

쏴아아아―

비가 떨어지고 있다.

하늘은 먹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하늘 아래, 청색의 장포를 입은 노인이 구름 형태의 법기를 타고, 무너진 신마전 본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수십 명의 청포를 입은 축기기 수사들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건만, 그들의 주변으론 보이지 않는 막이라도 쳐 있는 것인지, 빗방울이 그들 주변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신마전의 가운데에선 형님과, 신마대, 그리고 신마전의 장로들이 피 칠갑을 한 채 누워 있었다.

쿨럭,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며, 형님은 부러진 도신을 지팡이 삼아 겨우겨우 다시 일어섰다.

"괴물···이군. 축기, 후기란 놈은···."

허공에 떠 있는, 구름 형태의 법기를 탄 노인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범인(凡人). 나는 단순한 축기 후기가 아닌, 정귀··· 아니, 축기 대원만이라는 경지의 수도자이니. 그대는 결단기(結丹期) 직전의 수도자와, 축기기 마흔아홉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분전을 한 것이니라."

"분전은, 지랄··· 당신 하나 상대하기도, 벅찼는데. 나머지는 진법만 펼쳤, 으면서도···."

"흐음, 경지를 보아하니 무림인 중에서도 오기조원이라는 경지에 이른 것 같군. 맞나?"

쿨럭! 쿨럭!

영훈 형님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형님···.'

나는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채로, 영훈 형님을 바라보았다.

축기기 수사 한 사람의 손짓에 건물이 손쓸 새도 없이 무너졌고, 나는 건물 잔해에 깔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치명상은 아니다.'

지난 생, 나름 일류 의원이었던 나의 자가 진단이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으면 두 달 안에 일어날 수 있을 상처.

하지만, 지금 당장 형님을 미력하게나마 도울 수는 없다.

'아니, 깔리지 않았어도 어차피 도움은 안 됐겠지.'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나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했다.

축기 후기 대원만이라고 경지를 밝힌 청포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형님에게 말했다.

"비록 우리 수도가문 일족을 죽인 건 괘씸하고, 죽여 마땅하지만··· 네 재능을 높게 보아. 너에게 본 가문의 제자로 들어와 수도공법을 익힐 기회를 주마."

"수···도, 공법···? 그런 건, 당신들, 특별한 놈팽이들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너희 무림인들의 경지로 오기조원에 달하면, 범인 역시 우리와 같은 영질을 각성한다. 아마 너희의 오기조원이, 오행영통에 상응했던가? 너 역시 수도공법을 익힌다면 본 가의 좋은 인재가 되리라."

그 말에, 도리어 수도자들 쪽이 당황한 듯했다.

"하, 할아버님. 저 자는···."

한 축기기 수사가 뭐라 불만을 토로하려 할 때, 노인이 입을 웅얼거렸다.

무언가 전음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전음을 들었는지, 당황한 표정을 하던 축기기 수사들 모두가 피식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하, 그렇다, 범인. 너도 수도자가 될 자질이 있으니 기회를 주마."

"본가의 최고 수도공법도 주마. 너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으니."

"수도자가 되면 지금과는 비할 수 없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도리어 다른 이들이 영훈 형님에게 수도자가 될 것을 권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그들이 형님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함···정···."

함정이다.

저들은 분명 형님을 수도자로 받아들일 것은 분명했지만,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때였다.

쿨럭! 쿨럭!

형님이 피 칠갑이 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도자, 그래. 그거 좋지! 확실히 당신들의 무지막지함은 잘 알겠네."

처억!

그리고, 그는 부러진 도신을 수도자들을 향해 겨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한 채, 그는 외쳤다.

"하지만 말이지. 나는 당신들과 싸우며 깨달음을 얻었다. 덕분에 월수궁무록을 대성(大成)할 수 있었다!"

쿠웅!

그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보여 주마, 월수궁무록의 극한(極恨)을!"

"···그 부러진 도로? 동료들도 전부 죽었으면서?"

"···죽은 신마전의 동료들도, 네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기를 바랄 거다."

영훈 형님이 기수식을 잡았다.

'저 모습은···.'

나는 순간, 그의 모습에서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문득, 나는 어째선지 월수궁무록에 담겨있는 의(意)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난 삶, 영훈 형님의 절망에 찬 그 모습이 말해 주던 것.

파앗!

영훈 형님의 신형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청포 노인의 목전에 도달한 그는, 도를 휘둘렀다.

"흥, 어림없는 짓··· 음···!"

그리고, 청포 노인이 무언가 법술을 쓰려 할 때.

영훈 형님의 부러진 도가, 노인의 바로 옆 공간을 베어 내고, 노인의 옆을 지나갔다.

그저 허공을 베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잘린' 것인지.

노인은 크게 당황하며 영훈 형님을 그대로 놓쳐 버렸다.

영훈 형님은 노인을 지나쳐, 축기기 수사들의 포위망을 뚫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그렇다.

지난 삶의 영훈 형님이 만들어낸 월수궁무록.

수도자를 만나 절망에 빠진 천하제일인이 절망과 슬픔 속에서 창시한 무학.

그 무학에 담겨 있는 의(意)는,

―아우 서은현은 이 무공을 부디 후대에 남겨, 후대가 수도자라는 자연재해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동아줄로 만들어 다오.

보다 강력한, 항거할 수 없는 수도자의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내는 비법.

이것이, 월수궁무록이 추구하던 본래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익···! 저 맹랑한 범인 놈을 잡아라!"

파앗!

청포 노인은 구름 모양 법기를 타고 영훈 형님을 쫓아갔고, 다른 축기기 수도자들 역시 각자 비행법기를 타고 허공을 날아 그를 쫓아갔다.

장내에 남은 몇몇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무너진 신마전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저 아래 생존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우웅―

저들이, 나를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 수도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됐다. 절정경의 범인이 아니면 일류니 이류니 하는 찌꺼기들은 놔두고 저놈을 쫓도록. 어차피 나머지 잡것들은 범인들의 관청에 맡겨서 수배를 내리면 된다."

"옛."

축기기 수도자들은 나를 내버려 두고, 하늘을 날아서 형님을 쫓아가 버렸다.

그렇다.

나는 저들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류 찌꺼기.

별 볼 일 없는 잡것이기에, 목숨을 건진 것이다.

찌꺼기.

잡것.

범인···.

"커헉··· 끄으윽···!"

나는, 약하다.

쓸모없다.

무력하다.

그극, 그그극!

온 힘을 다해, 나를 덮고 있는 건물 잔해를 밀어 올렸다.

전신의 내공을 끌어모아 밀어낸다.

"끄···아아아아아!"

그그그극!

나는, 약하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해서,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래서, 기쁜가?

"흐아아아아!"

나는 간신히 잔해를 빠져나와, 빗물이 흐르는 바닥에 엎어졌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나는 한없이 약하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을 보완하고자, 변장술, 의술, 잠입술, 첩보술 기타 등등 잡기를 익혀 왔으나.

진짜 괴물들을 상대론 아무 손도 못 쓰는 것이다.

"으아아아아!"

나는 빗속에서, 그저 울부짖었다.

***

철퍽, 철퍽, 철퍽···.

얼마간 울부짖은 나는, 기력이 조금 회복되자 형님이 진각을 밟고 튀어나갔던 장소로 기어갔다.

주변에는 장로들과 신마대 절정 고수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나는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생존자가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마대의 인원들은 전원 사망해 있었다.

"···젠장."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형님이 진각을 밟았던 그 장소.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이건···."

도흔(刀痕)이었다.

그러나, 그 도흔이 형태를 이룬다.

이것은, 글자였다.

나는 황급히 도흔으로 다가가, 글자들을 읽었다.

'보름 뒤··· 수악사···.'

수악사는 첨벽성 바깥에 있는, 아무도 없는 절의 이름이었다.

도흔은 정말로 괴발개발로 쓰여 있어, 그의 글씨체를 잘 아는 내가 아니면 알 수 없도록 패여 있었다.

"보름까지, 기다려야겠군."

나는 빗속에서 내공을 운용해 기운을 회복한 후, 건물 잔해에 깔린 다른 생존자들을 구해, 장로들과 신마대의 인원들을 적당한 곳에 묻어 주었다.

"부전주님, 저희는 이제 어찌합니까?"

"무극신마께서, 만약 수도자들에게 패배해 돌아가신다면···."

"저희 신마전은 무림공적인데···."

"과, 관에서 저희를 수배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나는 다급한 얼굴로 내게 매달리는, 남은 전력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남은 이들은 모두 절정에는 이르지 못한, 최대가 일류 후반에 이른 이들밖에 없었다.

절정경의 고수는 전부 신마대에 속해 있었고, 신마대는 수도자들에게 대항하며 합격진을 펼치다가 싸그리 죽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선 상급자가 당황하면 대혼란이 일어난다.'

이들 중에서 폭동이 일어나, 나를 잡아 내 목을 관아에 바치자는 이들도 나올지 모른다.

"오늘부로."

지금은 일단 명목상으로나마 내가 상급자인 상황.

거기에, 지난 삶과는 달리 나는 일류 중기의 무사다.

일류밖에 없는 이들 사이에서 무시당할 정도의 실력은 아닌 것이다.

"신마전은 형태를 바꾼다."

지금은 단순히 혼란스러운 상황 정도가 아니다.

신마전의 구심점이던 무극신마, 영훈이 사라진 상황.

조직에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혼란은 급격히 커지는 법.

마지막 상급자로서, 최소한의 비전은 제시해 주어야 한다.

"현재 신마전은 무림공적 상태고, 관 역시 우리 대부분에게 현상금을 건 상태다. 구심점인 무극신마께서도 역시 현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다!"

내 말에, 남은 이들의 눈빛이 점차 흉흉해지고 있었다.

"만약 관이나 무림 문파들이 우리를 추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전멸이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

"무, 무엇입니까?"

"연국은 넓다! 그렇기에, 소식이 연국 곳곳으로 퍼지는 데엔 시간이 걸리고, 사람과 자원이 든다! 우리는 앞으로! 그 틈새를 파고들어, 연국 무림계의 정보를 장악한다!"

"그게 무슨···."

"내게서 첩보, 방첩, 잠입술, 변장술 등 기타 잡기를 배운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르친 그런 잡기들을 이용해 각 문파의 정보를 파악하고, 무림의 동향을 파악하는 조직으로 신마전의 방향성을 바꾼다!

앞으로 무림의 정보는 우리 손을 거쳐 전달될 것이며, 우리 손으로 조작될 것이다! 우리는 정보를 다룰 것이기에, 우리의 전신이 신마전이라는 정보 역시 우리의 손에 의해 조작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정보를 유통하고, 공급하며, 관과 무림문파들에게 거짓 정보를 팔며 우리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지난 삶 무림맹의 책사로 있을 당시, 온 무림의 정보와 사건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정보를 다루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도 상당수 알고 있다.

내 말이 어느 정도 신뢰를 주었는지, 남아있는 이들의 눈에서 흉흉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새로운 조직 체계를 정하고, 신마전 건물 곳곳을 뒤져 토지 문서와 금전을 찾아라!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새로 태어난다!"

나는 남아 있는 이들을 수습해, 빠르게 조직을 재정비하고, 그날 밤 다른 이들과 함께 첨벽성을 빠져나갔다.

***

보름이 지났다.

나는 형님이 적어 놓은 수악사로 향했다.

'뭐지? 아무도 없는데···.'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형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시 해가 지고.

밤이 되고.

그렇게 주야가 바뀌기를 사흘.

형님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즈음, 나는 수악사 곳곳을 뒤지며, 마침내 형님이 남겨 놓은 흔적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했다.

"후, 못 발견할 뻔했군."

나는 수악사의 대들보에 쓰인 도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도자들이 추격해 와, 너를 만나지 못하고 이곳에 서신을 남긴다.

나는 대들보를 향해 뛰어올라, 대들보를 그대로 잘라 내서 떨어뜨렸다.

대들보에는 작은 도흔들이 수십 개가 각인되어 있었고, 도흔들은 하나같이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악필이었으나, 그럭저럭 알아볼 수는 있었다.

나는 천천히 형님의 서한을 읽어보았다.

―그날, 나는 월수궁무록의 진의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월수궁무록이 수도자들을 잡아 죽이라 만든 무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완전히 잘못 짚었던 것이었어.

이 무공은, 수도자들에게서 도망칠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

―나는 그 날. 이 무공을 창시한 창시자의 절망을 뼛속 깊이 느꼈다. 필히 이 무공의 창시자 역시 압도적인 수도자를 만나 절망하고, 수도자에게 맞설 무공이 아닌, 그저 도망치는 무공을 창시하는 데에 그쳤던 것이겠지.

이 무공으로 그동안 수도자들을 참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던 것인 게야. 나는 이 무공을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자부했지만, 이 무공은 내세울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형님."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 글의 분위기에서, 나는 지난 삶의 형님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오기로 수도자들에게서 계속해서 도망쳐 볼 것이다. 마지막 오기로··· 정말로, 무공으로는 수도자를 대적할 수 없는지. 월수궁무록은 정말로, 도망치는 것에서만 끝나는 무공인지··· 아니면 내가 그 너머에, 조금이라도 더 닿을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앞으로 수도자들에게서 계속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지낼 것이다. 계속해서 극한의 영역까지 월수궁무록을 펼치며, 무공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진화시킬 것이야. 앞으로 너를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이제 수도자들이 다가온다. 언젠가, 살아남는다면 네게 찾아가마.

그것이 서한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저 역시, 어둠 속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형님."

나는 수악사에서 나와, 이제는 정보 조직으로 재편성된 신마전의 후신.

귀영각을 향해 돌아갔다.

***

10년이 다시 지났다.

나는 연국 곳곳의 어둠으로 귀영각을 침투시켜, 연국 곳곳의 정보를 유통하는 정보 시장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무림맹에서 몇십 년간 소처럼 일하며 정보를 다뤄 본 경험과,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었다.

다른 정보 조직이 우리에게 조금 저항하는 듯했으나, 결국 암중 혈투에서 패배해 버렸다.

우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마전의 후신.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단체의 나머지 잡졸들이 모인 단체였으며, 그 나머지 잡졸들의 무위는 하나하나가 일류 고수.

대문파 장로 수준이자, 중소문파 문주 수준인 이들이 즐비했다.

암중 혈투를 걸어 봤자 무력 수준이 우리 쪽이 압도적으로 높기에, 우리는 다른 정보 조직을 압도적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나마 우리를 상대할 수 있는 절정 고수의 경우, 애초에 이런 암중 혈투에 참여할 이유도 없이 그냥 자기 문파를 차리거나 대문파의 공봉, 혹은 원로로 들어가도 편하기에 아예 암중 혈투에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결국 귀영각은 5년 안에 연국 무림의 정보 시장을 완전히 손에 넣었고, 우리는 신마전이 우리의 전신이라는 정보를 완전히 통제하여 삭제시켜 버렸다.

나는 다시 5년 동안 귀영각을 안정시키며, 천천히 형님을 기다렸다.

***

신마전 멸문 이후 10년이 흘렀다.

귀영각은 완전히 연국의 정보 조직을 대표하는 문파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우리는 신마전의 잔당들은 완전히 토벌되었다고 속이고, 수도자들마저 왜곡된 정보를 믿게 만들어 우리와 신마전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 결과 우리는 아예 수도자들에게 후원을 받는 연국의 기득권층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10년 사이, 일류 후반에 있던 무사들 몇이 절정의 경계를 넘어 절정 고수가 되었기에 대외적인 전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풍족하다.

부족한 것은.

'나 자신의 실력.'

내 기억상.

내 수명은 이제 10년 남짓 남았다.

쉬잉! 쉬잉!

단악검법의 검세가 허공을 갈랐다.

10년 동안은 일에 치여서 무공을 제대로 단련하지 못했기에, 내 무공 수위는 일류 중반과 후반의 경계에 걸쳐있을 뿐이었다.

'한 발짝만 넘으면 일류 후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발짝이 넘어가지 않는다.

10년 안에, 하루라도 빨리 일류 후기에 도달하고, 최소한 절정의 단서는 잡아야 한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약한 채로만 있어야 한다는 거냐!'

내 몸은 어느덧 일흔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한참은 약한 것을 느꼈다.

'오기조원이 최소한의 목표이건만··· 아직도 일류 후반에를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내 재능은 비천한 것일까.

그를 고민하며, 한참을 검을 휘두를 때였다.

"여전히 검 끝에 잡념이 많군, 은현."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휙!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형님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인사는 됐고, 검이나 다시 잡아 봐라."

나는 그 말에 따라 단악검법의 기수식을 다시 잡았다.

"그 검법은 네 몸에 옷처럼 꼭 맞는 검법이다. 제대로만 사용하면 절정에도 오를 수 있어. 한번 펼쳐 봐라."

나는 그 말에 따라 단악검법의 형을 다시 펼쳐 보았다.

그걸 보면 형님은 내게 고칠 점을 말해 주었고, 나는 열심히 그 말에 따르며 검형을 고쳐 나갔다.

그런 조언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밤이 되자 형님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눈을 비벼 봤으나, 형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형님은 어느덧 다시 나타나 내게 무공을 지도해 주었고, 나는 군말 없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게 칠 주야가 지났을 무렵.

화아아악!

검이, 나와 녹아든다.

단악검법이라는 검법 자체가 내 혼(魂)에 섞여들어 나의 일부가 된다.

나는 순간, 어째서인지 앞으로 이 검법을 나뭇가지로도, 맨손으로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의지가 일자마자 자연스럽게 검기가 검을 덮었고, 검기의 안정성이 훨씬 높아졌다.

원래보다 한참은 더 검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이건··· 검신합일(劍身合一)!"

검신합일의 경지.

일류 후기의 상징.

"벽을 넘었군. 축하한다."

"···형님은 정말, 대단하시군요."

나는 솔직하게 감탄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몇 년간 아무리 애써도 넘을 수 없었던 경지를.

칠 주야간의 가르침으로 넘겨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넘겨 준 게 아니다. 네가 거의 경계에 발을 걸쳤기에, 등을 떠밀어 준 거지."

"그래도 그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어차피 이 이후로는 막 벽을 넘었기 때문에 네 스스로가 정리해야 해."

"물론이지요."

"그리고··· 절정경은 쉽지 않을 거다. 그 너머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절정 이후부터는 일류에서의 무학 체계를 생각하면 안 돼."

"평생을 들어 왔습니다."

"평생을 더 들어도 부족할 거다. 나는 장난처럼 넘은 게 절정의 벽이었지만, 재능 없는 너는, 수천 배, 수만 배의 노력을 들여야 겨우 벽에 닿을 수라도 있을 거다."

"유념하겠습니다."

"···그래."

영훈 형님은 품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책의 제목은 조수월무록(眺修越武錄)이었다.

"월수궁무록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몇 가지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몇 가지 기술을 더 추가했다."

그는 '몇 가지'라고 말했으나, 책은 지난 생에 받았던 것보다 확연히 두꺼워져 있었다.

거의 세 배는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수도자를 바라봤음에도(眺修)··· 그저 일반적인 무공을 넘어서는 것 외엔(越武)··· 별 볼 일 없는 기록(錄)일 뿐. 나는 끝내 수도자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

"축기기 수사들은 어찌어찌 따돌리고, 축기 후기도 마침내 베어 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결단기 수사는, 말 그대로 자연재해였다. 결단기부터는 인간 형상을 한 자연 현상에 가깝더군···."

"···."

"결단기 수사의 한쪽 손목을 베어 내는 데엔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 결단기 수사가 주문 몇 번을 외니 손목은 다시 자라나고, 나는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지."

그는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씁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지난 생보다 빨리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르고.

지난 생의 유산인 월수궁무록까지 익혔음에도.

지난 생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결과였다.

"아마 월수궁무록을 창시한 이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터다. 여기가, [끝]이라고. 더 이상 무림인은 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걸 느꼈을 테지···."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는··· 나를 제압한 결단기 수사가 나를 높게 봐 주어. 그 수사의 수도문파에 새로 입문하게 되었다. 무림에서야 천하제일이었지만, 수도문파에 들어가면 막내일 테지. 하하··· 수도문파에 들어가면 속세와 연을 끊어야 한다 하기에, 마지막으로 널 보러 왔다."

"···거기까지가··· [끝]이라면, 이건 왜 제게 주신 겁니까."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조수월무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차피 이걸 익힌들, 수도자에게는 도달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하,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후대가, 수도자들의 앞에서 최소한의 권리라도 챙길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해서 남기는 무공일 뿐이다. 구명절초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수도자들에게 우리 같은 범인이 인격체로 인정받기 위한 최소한의 '힘'일 뿐."

그는 서글픈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잔인하고 포악한 수사들이 많더군. 그런 자들 앞에서, 아주 잠깐의 틈이라도 얻을 수 있는 그런··· 그것은 그런 무공이다."

스르륵···.

어느새, 그는 내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치 허깨비라도 된 듯한 현상이었기에, 나는 놀라 기함했다.

"이, 이건···."

"조수월무록을 창시하며 만든 잡기 중 하나다. 조수월무록도, 월수궁무록과 같이 입문 조건은 삼화취정이니, 삼화취정에 이른 절정 고수에게 가져다주면 진가를 알아볼 거다. 또한 네 선물도 따로 남겨 놨으니, 앞으로 열심히 정진해서, 꼭 절정경에 이르길 바란다."

우웅···.

육합전성을 남긴 영훈 형님은, 그날 이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영훈 형님이 남기고 간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내 수련장 벽면.

그곳에는 도흔들이 새겨져 무공 구결을 이루고 있었다.

"이건···."

단악검법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류 후반에 오른 내게 맞춰 또다시 한번 개량된 단악검법이었다.

원래는 12초로 이뤄졌던 단악검법이었으나, 개량되며 12 초식이 추가되어 총 24 초식이 단악검법에 담겼다.

다행히도 본래의 단악검법에 연계된 초식이 추가로 생긴 느낌이었기에 익히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거기에 검신합일의 경지에 이른 탓인지, 검법의 숙련도가 매우 빠르게 오르는 느낌이었다.

"고맙소, 형님."

나는 단악검법 개량형을 익히며, 나지막이 형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