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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계속 서북쪽으로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점점 올라가면서 쾌속보 역시 속도가 올라갔다.

경공에 특화된 고수가 아니라면, 이제 어지간한 고수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속도였다.

미친 듯이 달리다 내공이 떨어지면 숲속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운기조식하며 쉬었다. 내공이 차면 다시 달렸고, 내공이 떨어지면 또 운기조식했다.

달리다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알려준 기발출을 이용해서 사냥했다.

이젠 저 멀리 숲속에 있는 멧돼지가 금방 느껴졌다.

그렇게 멧돼지를 잡아 모닥불에 굽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합류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회귀 전 그들과는 워낙 많이 만나고 가깝게 지내던 터라, 그들이 편하고 좋았다.

목적지를 절반쯤 남기고부터는 그때부터는 속도 조절을 했다.

어차피 너무 일찍 도착해도 소용없었기에 나는 이번 여정 자체를 즐겼다.

오를만한 산이 있으면 올랐다. 물론 그냥 걸어서 오르지 않고, 절벽을 타고 올랐다. 내공 없이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오르며, 몸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근육이 부족한 곳은 어딘지.

내공을 주로 쓰다 보면 본연의 육체에 소홀하기 마련인데, 거기에서 진짜 고수와 어중간한 고수의 차이가 나게 된다. 진짜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을 놓치지 않는다. 작은 것의 차이가 결국 전부라는 것을 알기에, 몸 구석구석 하나하나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절벽을 오르다 저 멀리 노을이라도 지면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에 걸터앉아서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안과 중원유람을 떠나자고 약속을 했지만, 절벽 끝에 이렇게 걸터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안보다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난다.

아버지와 같이 여행하고 싶었다. 함께 이런 경치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과연 내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이렇게 아버지에게 친밀한 감정이 생길 줄은 회귀 전에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쩌면 나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여정을 즐기다가도 달려야 할 때는 숨이 터지도록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쾌속보의 경지가 한 단계 올랐다. 달리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들어가는 내공은 줄어들었다.

"하하하하하하!"

나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길을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올라가면서 느끼는 건데, 쾌속보는 사람의 본성을 건드는 무공이었다. 달렸을 때의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는 무공이었기에, 계속 달리고 싶은 중독성까지 있었다.

이제 길 가던 사람이 나를 보아도 내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로 지나갔다. 그야말로 쌩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대화를 여러 번 들었다.

"방금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나?"

"뭐가? 난 못 봤는데?"

딴생각하고 걷다간 내가 스쳐 지나간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한 단계 더 오르면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모를 것이다. 사람이 지나간 건지 새가 지나갔는지.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어떨까?

어쩌면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본교의 그 누구도 내 목적지가 이곳일 거라 상상하지 못할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새외 풍천교의 본단이 있는 홍산(紅山)이었다.

회귀대법의 첫 번째 재료인 음뢰종을 구한 곳.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제52회 너처럼 널 싫어하면.

내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홍산 아랫마을 객잔이었다.

객잔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일하는 이들도 정신없이 바빴다.

입구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오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주방과 손님을 오가며 요리를 나르는 꼬마가 보였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귀 전 삶에서 음뢰종을 구하러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저 꼬마가 다 큰 어른이 되어 나를 맞이했었다. 어려서 얼굴 그대로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나를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무사님, 보시다시피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방은 있느냐?"

"아뇨, 방도 없습니다. 혈신제(血神祭) 때문에 손님이 몰려서요."

"혈신제는 언제 열리느냐?"

"정확히 십 일 후입니다. 저 길 끝에 다른 객잔이 있는데 아마 거기도 사정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

정신없이 바쁜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또 다른 손님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혈신제 열흘 전, 적절한 시간에 잘 도착했다.

혈신제는 일 년에 한 번 풍천교에서 혈신을 모시는 가장 큰 의식이다.

섭혼마존의 사술을 막기 위한 세 번째 방법으로 두 달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혈신제.

오직 이 혈신제가 열리는 날, 섭혼마존을 제압할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혈신제 날이 두 달 후였기에 망정이지, 시기가 안 맞았으면 섭혼마존을 죽이는 일이 일 년 후가 될 수도 있었다.

과거에 음뢰종이 보관된 풍천교주의 권좌로 잠입하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풍천교주가 위급시 탈출하는 비밀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정작 잠입해서 신물을 빼내 온 것은 채 반 각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

어렵게 비밀통로를 알아냈지만, 여전히 음뢰종을 훔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문제는 풍천교주였다.

그는 대부분 시간을 권좌가 있는 그곳에서 보냈다.

밥도 거기서 먹었고, 심지어 잠도 그곳에서 잤다. 그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짧은 시간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음뢰종을 비롯한 신물들이 보관된 곳에 만년한철로 된 철창이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풍천교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물을 지키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만년한철로 된 족쇄를 차고, 음뢰종 주위에서 지박령(地縛靈)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뿐더러,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누군가 접근해오면 바로 알아차려서 풍천교주에게 경고해줬다.

따라서 풍천교주의 눈을 피해서 신물을 훔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음뢰종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일 년에 딱 한 번, 철창이 올라가고 풍천교주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있다.

바로 혈신제가 열리는 날이다.

이날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풍천교주가 권좌를 나가서 대연무장에서 예법을 치른다.

그때 이곳에서는 음뢰종을 지키는 족쇄 고수가 법도에 따라 서른여섯 번 종을 치게 되는데, 내가 노린 것이 바로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종을 치던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 종소리 이후, 풍신교주가 대연무장에서 권좌까지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다경(一茶頃).

차 한잔 마실 그 짧은 사이에 나는 기적을 이뤄냈다.

나는 수십 번에 걸쳐 도주 연습까지 했기에, 풍천교도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조사하고, 잠입하고, 포섭하고, 싸우고, 연습하고... 그때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번에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음뢰종과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부피가 큰 음뢰종을 훔쳐 나오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으니, 이번 풍천교행은 고생한 지난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 볼 수 있겠다.

나는 잠시 객잔 앞에 서서 오가는 인파들을 구경했다.

혈신제가 열리면 풍천교와 교류하는 수많은 방파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기 때문에, 객잔은 물론이고 길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기에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죽립까지 눌러쓰고 내 정체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저잣거리의 여러 상회에서 야영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들과 기본적인 식량, 그리고 약을 달이는데 필요한 약탕기를 샀다.

그리고 마지막 도착한 곳은 약방(藥房)이었다.

"기화초를 달라고?"

약방 늙은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화초는 비싼데."

기화초는 오직 이곳 새외에서만 나는 약초로, 중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근에 얼마나 합니까?"

"얼마나 필요한데?"

"두 근 필요합니다."

"한 근당 팔십 냥은 줘야 하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귀한 약초라."

"알겠습니다. 그 가격에 두 근 사겠습니다."

"한데 기화초는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기화초는 평소 잘 사용되지 않는 약초였기에 노인이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목소리 역시 내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도 모릅니다. 위에서 시켜서 사는 거라서."

노인이 더는 묻지 않고 기화초를 가져왔다. 내게 약초를 확인시켜 준 후 노인은 기화초를 잘 포장해서 주었다. 나는 노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곳을 나왔다.

약방을 나선 나는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약방을 찾아갔다. 이번엔 찾은 것은 귀룡나무와 규화였다.

그곳에서 두 약재를 구한 후,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의 약방을 찾아서 독말풀과 백단향을 구입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약초를 구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약초를 모아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곳에서 다 산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삶에서의 귀찮음은 금전적인 손해로 돌아오지만, 무림에서의 귀찮음은 목숨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필요한 약초를 모두 구한 나는 그길로 산으로 올랐다.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 예전에 기거했던 동굴이 그대로 있었다. 그곳을 깨끗이 치우고 약부터 달였다.

재료에 따라 각각 달여야 하는 약재도 있고, 함께 달여야 하는 것도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달여야 했다.

이 약은 바로 족쇄를 찬 고수의 후각을 마비시킬 수 있는 비약이었다. 젊어서부터 평생을 붙잡혀 있다고 했으니, 지금도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당시에 이 비법을 알아내는데 걸린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약을 달이는 동안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처음 배울 때 죽을 뻔했지만,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죽마고우가 돼버린 천마호신공이다.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천마호신공만의 특별함을 느낀다.

천마호신공의 특성 때문일까? 위기가 오면 나를 깨우고, 스스로 발동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천마호신공이 살아 있는 무공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구화마공과 어울려지면 더욱 강력해진다고 알고 있으니, 어서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밤늦도록 수련하다 동굴을 나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회귀 전에도 이곳에 서서 밤하늘을 보았었는데, 그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마음이 하나 있다.

그때는 오직 돌아가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이제는 돌아가겠다는 그 자리에 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대신하고 있다. 특히 서대룡이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잘 배우고 있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 다 부정하겠지만 은근히 닮은 그들인데.

'잘하고 있겠지?'

* * *

수련 첫날, 서대룡은 마당에서 혈천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왔는데 혈천도마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배우다니, 정말이지 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혼자서 도를 휘둘러보았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역시 너무 무겁다.

괜히 힘 빼지 말자는 생각에 그는 혈천도마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서대룡은 혈천도마의 거처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닫힌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흠칫하고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혈천도마가 함께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훔쳐보냐?"

"으헉!"

깜짝 놀란 서대룡이 비명을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기다리다가 혹시 안에 계신가 해서요."

"이공자가 출교했다지?"

"네."

"두 달쯤 걸린다지?"

"들으셨군요."

"누군가 실종되거나, 혹은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충분한 시간이겠군."

서대룡이 재빨리 말했다.

"각주님은 워낙 총명하신 분이시라, 겨우 두 달 사이에 그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리라곤 믿지 않으실 겁니다."

"총명한 사람이니 이미 벌어진 비극도 금세 잊겠지."

혈천도마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눈알을 파내는 시늉을 했다.

"앞으론 절대 훔쳐보지 않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뭐해?"

"아, 네. 갑니다!"

서대룡이 후다닥 마당 가운데로 달려갔다.

혈천도마가 서대룡에게 도를 쥐는 법과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천 번!"

서대룡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팔백오십삼, 팔백오십사...."

도는 천근만근 무거워서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어휴, 더는 못해!'

서대룡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설령 혈천도마가 보고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원래라면 집에서 간식 먹으면서 침상에 누워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인데.

'괜한 짓을 했나?'

막상 몸이 힘드니까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기왕 마음을 먹었는데!'

첫날부터 수련을 못 채우고 쫓겨나면 검무극 볼 면목이 없다.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서 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간신히 천 개를 채웠다.

"해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대룡은 손에 든 도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고 묵직한 도의 이 느낌! 그래, 이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뒹굴뒹굴하는 인생보다는 더 괜찮은 삶으로 안내해주겠지.

그때 창문이 열리며 혈천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면 그만둬라. 안 말린다."

서대룡이 벌떡 일어났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왜?"

"평생 이런 기회는 안 올 테니까요."

"나는 절대 내 독문무공을 전수하지 않을 건데?"

"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한 기회는 마존님께 무공을 배울 기회를 말하는 겁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말해줄 겁니다. 이 아버지가 말이다, 소싯적에 혈천도마님께 무공을 배웠단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무인으로 살면서 그 정도 추억 있으면 된 거죠."

"혼인할 생각은 있구나."

"네, 저는 하고 싶습니다."

"왜?"

"자식을 키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던 부성애(父性愛)를 주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사연과 비애가 있었다.

"네 아이가 너처럼 널 싫어하면?"

"그러면... 이 훈련 제 자식에게도 좀 시켜주시겠습니까?"

서대룡의 말에 혈천도마가 피식 웃었다.

혈천도마를 웃겼다는 생각에 서대룡도 괜히 기분이 좋아 활짝 웃었다.

혈천도마가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천 번 더!"

제53회 변수는 사절이다.

"하아, 하아."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서대룡의 거친 숨이 밤하늘을 향해 퍼져나갔다.

휘영청 떠 있던 달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과 이후 저녁 전에 시작한 수련이었는데 지금은 자정이 훌쩍 지났다.

'결국 해냈다!'

단 한 번도 못 휘두를 것 같은 상태에서 다시 천 번을 다 휘둘렀다. 이 무거운 도를 하루에 이천 번이나 휘두르다니.

서대룡은 자신이 해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뒤에 가서는 자세도 다 무너졌겠지만, 이를 악물고 휘둘렀다.

이제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했지만, 서대룡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이 쏟아졌다.

서대룡은 꿈을 꿨다.

검무극이 적들에게 포위된 채 위기에 빠져 있었다. 부상당한 그에게 적들이 달려들던 바로 그때.

벼락처럼 뻗어 나간 도기가 적들을 휩쓸었다. 도기에 휩쓸린 적들은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곧이어 한 송이 매화꽃이 도도히 떨어지듯 자신이 적들과 검무극 사이에 내려섰다. 도법의 최고수가 된 지금은 혈천도마처럼 커다란 대도를 들고 있었다.

검무극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각주님!"

자고 있던 서대룡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른팔! 와주었구나!"

울컥한 감정이 실린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이 적들을 향해 돌아서며 멋있게 말했다.

"제가 왔으니 쉬십시오! 한숨 푹 주무세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

서대룡은 본능적으로 그 말을 흘려들으며 돌아누웠다. 이렇게 즐거운 꿈을 깨고 싶지 않았다. 고수가 되어 천하를 돌아다니는 꿈은, 자신의 진짜 꿈이기도 했으니까.

서대룡은 계속 잤다.

꿈속에서 위기에 빠진 미녀들을 구해준 후,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여인들이 자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잠에서 깼다. 그녀들 중에는 후배인 조향도 있었다.

이렇게 웃으면서 잠에서 깬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로... 근데 여긴 어디지?

낯선 천장.

아니,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설마?'

서대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비명을 질렀다.

"윽!"

좋았던 꿈과는 별개로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누가 밤새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서대룡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술을 마시고 잤던 바로 그 혈천도마의 침소였다.

'맙소사!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두 번째 천 번을 다 휘두르고 바닥에 누웠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다행히 혈천도마는 방에 없었다.

그가 끙끙대며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창가로 걸어갔을 때, 서대룡은 흠칫 놀랐다.

어제 자신이 도를 휘둘렀던 마당에서 혈천도마가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바로 달려나가서 인사부터 하려던 서대룡이 멈춰 섰다.

도를 휘두르는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힌 것이다.

혈천도마는 어제 자신을 가르쳐줬던 바로 그 자세로 도를 휘둘렀다. 도를 쥐는 법도 똑같았고, 휘두르는 방법도 같았다.

그 순간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르쳐준 수련은 혈천도마가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 그가 했던 수련이었음을.

'나를 고생시키려고 아무렇게나 막 시킨 것이 아니었어.'

그때 등 뒤에 눈이 달렸는지 도를 휘두르던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각주 없다고 농땡이 쳐도 되는 거냐?"

"헛! 그러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으악! 저 늦었습니다."

서대룡이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저 가보겠습니다."

서대룡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또 재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혈천도마가 돈을 주거나, 보도를 주거나 했어도 이렇게 울컥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기쁘겠지만, 지금의 감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혈천도마에게는 누군가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자기 침상에 재우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이 느낌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다음에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있으면 아무 객방에나 던져두십시오. 죽이지만 마시고요. 그럼 이따 오후에 뵙겠습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게?"

"와야죠."

"아프다고 봐주지 않는다. 오늘도 이천 번이야."

이천 번이란 말에 온몸이 질색하며 안된다며 아우성을 질렀지만, 입은 네! 라고 말했다. 어차피 입은 안 힘드니까.

힘차게 대답한 후 서대룡이 달려나갔다.

"지각이다! 지각!"

정말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오늘 또 수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싫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혈천도마에게 계속 배우고 싶었다. 솔직히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 * *

며칠에 걸쳐 달인 약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제조한 약을 손바닥 크기의 약병에 넣었다. 아직 혈신제까지 오 일의 시간이 남았다.

약이 만들어졌으니 오늘은 비밀통로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풍신교주의 권좌까지 정찰을 가볼 작정이다.

하산한 후 내가 도착한 곳은 풍천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무지였다.

그곳은 말라비틀어진 몇 그루의 나무와 바위들, 버글대는 독충과 독사들, 그리고 바람에 날아온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곳이었다. 종일 있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그런 곳.

그곳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바위 양쪽 아래에 숨겨진 장치를 연속해서 조작했다.

스르륵.

그러자 바위가 열리며 통로가 나왔다. 그때도 감탄했지만, 지금 봐도 정말 잘 만든 기관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표가 나지 않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지.

바위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내부에서 다시 숨겨진 장치를 조작하자 바닥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야명주를 꺼내 들고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통로는 넓었다. 위급 시에 음뢰종을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 같았다. 덕분에 이곳을 통해 음뢰종을 빼돌릴 수 있었지만.

나는 약병을 꺼내 약을 얼굴과 손에 발랐다.

이 약을 바르면 후각이 뛰어난 고수가 내 냄새를 맡지 못한다.

나는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권좌가 있는 방의 비밀통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예전에는 더 가까이 가서 살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안전하게 살펴볼 방법이 생겼으니까.

나는 눈을 감고 기를 발출했다. 한 줄기 기가 통로를 따라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더 간 기가 비밀통로에 닿았다.

이렇게 가늘고 길게 기를 발출해서 실전에서 탐색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줄, 아버지에게 처음 이 비법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통로의 작은 빈틈 사이로 기가 빠져나갔다.

내 기가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던 그 순간.

한쪽 편에서 굉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풍천교주다!'

과연 교주답게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기를 그와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내가 찾은 것은 그 후각에 민감한 고수였다.

과연 그는 음뢰종 근처에 있었다.

두 사람을 모두 확인하자 내 기는 사라졌다. 어차피 한 번 겪었던 일이니, 굳이 발각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무사히 정찰을 끝낸 나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육포로 식사를 마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남은 오 일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산속에만 틀어박혀 지낼 것이다. 괜히 돌아다니다 운명에 떠밀려 이상한 사건에라도 얽히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변수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은 내 지난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 *

혈신제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출발 전 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오늘 일이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아버지가 섭혼술을 막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보다 백배는 더 쉬운 방법이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다.

부디 내 생각이 맞아떨어져서 무사히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산을 내려갔다.

풍천교로 향하는 길은 예식에 참여하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여러 부류였다. 풍천교와 교류가 있는 대문파의 수장부터, 눈도장이라도 찍고 싶어 하는 소문파의 무인들, 참석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는 장사치들까지.

혈신제가 열리는 날에는 모든 사람이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이렇게 걸어서 풍천교로 가야 한다. 이것이 혈신제의 권위였다.

나는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비밀통로가 있는 황무지로 향했다.

그곳을 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쩌지? 갑자기 행사가 취소되면 어쩌지? 풍천교주가 직접 종을 치는 것으로 바뀌면? 그것을 얻는 방식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이렇듯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려고 덤벼든다.

이럴 땐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런 불운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 설령 찾아오더라도 잘 이겨낼 거라는 믿음. 불안에 맞서는 가장 좋은 무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니까.

비밀통로를 통해 풍천교주의 권좌가 있는 방 근처까지 도착한 나는 그곳에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냄새를 못 맡게 하는 약물을 얼굴과 손, 몸에까지 다 바른 상태.

언제 움직일 것인가는 정해져 있었다. 음뢰종을 치기 시작해서 서른여섯 번을 쳤을 때가 내가 작전을 개시할 시간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세며 기다렸다.

종을 서른세 번 쳤을 때 천천히 움직여서 비밀통로 아래로 갔다.

서른다섯 번째 종소리가 났을 때 나는 조용히 권좌 옆 바닥의 비밀통로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족쇄에 묶인 고수가 마지막 종을 치려는 중이었다. 풍천교주는 신물이 있는 이곳에 다른 사람은 일절 들이지 않았기에, 이곳에는 오직 족쇄를 찬 남자뿐이었다.

그가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종을 치는 순간.

나는 풍신사보를 발휘했다. 족쇄 무인을 향해 암영보를 발휘해서 다가갔다. 귀신처럼 소리없이 다가가서는 그의 마혈과 수혈을 동시에 찍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선 채로 잠이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최고의 기량이 연이어 발휘된 수법이었다.

그렇게 그를 제압한 후 나는 음뢰종 뒤에 세워진 혈불(血佛)로 갔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풍천교주가 이곳까지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 일다경.

감고 있던 혈불의 눈을 꾹 누르자 혈불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혈불은 무서웠다.

다시 한번 더 누르자 눈동자가 앞으로 쑥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눈동자 안에 하얀 액체가 삼분지 일쯤 들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먼 길을 달려온 이유다.

섭혼마존이 익힌 섭혼술의 뿌리는 혈교 마공이었다.

그 혈교의 후신이 바로 이 풍천교다.

여기까진 아버지도 알고 계신 사실인데, 딱 하나 모르시는 것이 있었다.

혈안정수(血眼淨水).

풍천교의 교주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성수였다.

이 혈안정수를 눈에 넣으면, 혈교 사술의 파훼법이 보인다. 사술의 본질을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듣기로는 교내의 반란을 막기 위해 예로부터 만들어져 전수되었다고 하는데, 제조법이나 관리법은 오직 교주와 그 후계자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절대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풍천교주의 아들 능백군(凌白郡)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음뢰종을 들고 달아나느라 이것을 넣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드디어 혈안정수를 얻는 순간이었다.

나는 혈불의 눈동자를 꺼냈다. 눈동자 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똑!

오른쪽 눈동자에 담긴 혈안정수는 오른쪽 눈에 한 방울.

똑!

왼쪽 눈동자에 담긴 혈안정수는 왼쪽 눈에 한 방울.

혈안정수가 눈에 들어가자 눈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고통은 있었지만 다행히 앞이 보이지 않거나 하진 않았다.

눈동자를 원래 자리에 놓자 안으로 들어갔고 혈불이 다시 눈을 감았다.

눈동자 속에 남은 정수는 충분했기에 다음 후계자에게는 문제없이 넣어 줄 수 있을 것이고, 이 혈안정수 두 방울이 사라진 사실조차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하 통로로 들어가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두 줄기 지풍을 날렸다.

쉭.

족쇄 고수가 잠에서 깼다.

그는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주위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 정도 되는 고수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한 수였다.

저 남자는 무슨 사연이 있어 저렇게 묶여있을까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를 그를 구해줄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내 회귀로 바뀌는 운명에 속한 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때가 되면 대법 재료들과 관련된 기연들을 하나씩 거둬들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섭혼마존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혈안정수를 얻었다.

이유야 어쨌든 큰일을 해냈을 때의 기쁨은 있는 법. 특히 이번처럼 이전에는 가져보지 못한 능력을 얻게 되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단지 섭혼마존을 죽일 수 있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화무기를 향한 나의 여정에 이 새로운 힘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비밀통로를 나온 후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혈신제를 즐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교를 향해 내달렸다.

마지막까지 변수는 사절이었다.

제54회 당황하니까 신비스럽지 않네.

밤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내가 혈천도마의 거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군요."

혈천도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경계를 서는 녀석들 혼내야겠군."

"그러지 마십시오. 조용히 어르신 뵙고 싶어서 은밀히 들어왔으니까요."

그가 내 행색을 살피더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이제 막 교로 돌아온 것인가?"

"네."

"설마 돌아와서 나를 제일 먼저 찾아왔나?"

"감동을 파괴해서 죄송합니다만, 아버지는 일찍 주무셔서요."

"어쨌든!"

"네, 맞습니다. 어르신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그러면서 가져온 술병을 흔들었다. 혈천도마가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술은 그의 거처 후원에서 마셨다.

방해받지 않게 그곳을 지키던 수하들을 모두 물렸다.

"자네가 출교한 지 벌써 두 달이나 되었나?"

"두 달이 채 안 되었습니다."

이번 출교에서 쾌속보의 경지가 오르면서 돌아올 때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서 조사관 무공수련은 잘 되고 있습니까?"

"쥐방울만 한 녀석이 꽤 열심히 하고 있다네."

혈천도마의 입에서 '꽤 열심히'란 말이 나왔다. 이 낯선 표현이 이들의 관계가 지금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삐딱한 듯 보여도, 심지가 곧은 아입니다."

"내겐 한 번도 삐딱한 적 없었는데?"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녀석이기도 하고요."

아마 열심히 하면서도 눈치도 많이 볼 테고, 그 와중에도 또 할 말은 다 하고 있을 거다. 혈천도마는 그런 녀석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한데 아까 얼핏 보니 읽으시던 책이 시화집이던데 정말 시를 읽으시는 겁니까?"

"왜? 나는 시를 읽을 수준이 안돼 보이나?"

"수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울리지는 않네요."

"나도 소싯적에는 책을 좋아했네. 한동안 잊고 살았을 뿐이지."

이 깡마르고 깐깐해 보이는 사람의 젊은 시절이라, 잘 상상되지 않는다.

"젊었을 때는 어떠셨습니까?"

"뭐... 어둡고 우울했지."

"서 조사관하고 비슷했군요."

어쩐 일인지 혈천도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어차피 다 지나가 버린 시절인데."

혈천도마가 술을 비웠다. 나는 말 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지나가 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은 뭐라 위로할 말이 없다. 나도 한번은 겪었던 일이었으니까.

"갔던 일은 잘되었나?"

"네."

"또다시 풍파가 일겠구먼."

네라는 대답에서 어떤 자신감을 읽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무슨 일로 나간 줄 알고요?"

"피바람 일으킬 일이겠지."

"저에 대한 심각한 오해십니다. 저는 평화를 좋아합니다."

"평화는 나도 좋아해. 내 손으로 다 꿇리고 난 후에 찾아오는 그 적막하면서도 피비린내 나는 평화 말이야."

나는 웃으며 술을 마셨다.

"오래간만에 나가니 좋았습니다. 다음에 저와 바람 쐬러 나가시죠?"

"나가면 죽이고 싶은 놈들 천지라서... 그냥 본교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네."

그가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하게. 후계자 싸움에서는 한번 삐끗하면 그대로 끝이니까."

"제가 삐끗하면 어르신은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대공자에게 다시 줄을 대야겠지."

"냉정하시네요."

"당연한 거지. 몸통이 죽었는데 날개만 퍼덕이면 뭐하겠나? 딴 몸통 찾으러 가야지."

혈천도마라면 진짜 그럴 것이다. 하루 이틀 안타까워한 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 대공자에게 선을 대겠지. 놀라운 것은 그런 모습을 상상해도 그리 밉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혈천도마의 장점이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날 끝까지 도와줄까 배신할까,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가 무너지면 떠날 사람이고, 아니면 내 옆을 지킬 사람이다.

"제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뭔데?"

"오늘 저와 밤새 술을 마셔 주십시오."

"어렵지 않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마시자더니 어딜 가나?"

"술도 좀 더 사 오고 안주도 준비해오겠습니다."

"애들 시키면 되지."

"제가 사 오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나는 이 술자리에 끝내주는 안주를 만들어 올 작정이다. 지난 두 달 동안 마련한 내 안주를.

나는 오늘 섭혼마존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출교했다가 돌아온 날, 그를 죽일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밤새 혈천도마와 술을 마신 사람이 될 거다. 그가 내 행적의 증인이 되어 줄 테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온 나는 암영보를 발휘하며 서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섭혼마존은 오늘따라 흥분해 있었다.

매번 있는 심혼대법이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검무극이 와서 대법을 중단하라고 협박하고 간 뒤 처음으로 하는 심혼대법이었다.

천마를 입에 담으며 협박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심혼대법을 중단했다.

물론 안 들키면 되겠지만, 이미 상대가 심혼대법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검무극이 출교했다는 소식은 오히려 의심을 더했다. 자신을 안심시킨 후, 증거를 찾아내려는 수작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인내의 한계가 왔고 결국 오늘 심혼대법을 재개했다.

이렇게 공백을 두고 심혼대법을 할 때면 언제나 어린아이를 선택했다. 이럴 때면 어린 심혼이 가장 맛있기 때문이다.

밀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던 섭혼마존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괜히 뭔가가 따라오는 것 같고 오늘따라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행이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그림자가 뒤를 지켜주는 흑영비술(黑影祕術)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장담했다. 오직 천마를 제외하고 자신의 등 뒤에 몰래 설 수 있는 사람은 본교에 없다고.

섭혼마존이 밀실로 들어섰다.

벽에는 온갖 기괴한 문양과 글자들이 가득했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향이 사방에 피워져 있었다.

밀실 중앙 제단에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섭혼마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아이를 깨우려던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

섭혼마존이 반격하려 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짝!

뺨을 얻어맞은 섭혼마존의 고개가 돌아갔다.

속수무책으로 뺨을 허용한 후에야 쌍장을 휘둘러 상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로 훌쩍 물러난 섭혼마존에게 상대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하지 말랬지?"

섭혼마존은 그제야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검무극이었다.

섭혼마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충격이었으며 수치였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당황하니까 당신, 전혀 신비스럽지 않네."

순간 섭혼마존이 흠칫했다. 원래라면 그는 목소리로 사람을 현혹했다.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반복되었으며, 속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옆집 남자가 화가 난 모습이었다.

"이게 당신 본질인가?"

발끈 분노할 법도 했는데 섭혼마존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내가 이공자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맞아도 싸."

맞아도 싸다는 말이 반복되면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평소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 좀 당신답네. 이래야 죽일 맛도 나지. 아까 그런 모습은 실망이었어."

섭혼마존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공자, 내 질문부터 답하게. 대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인가?"

"당신 따라 들어왔지."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겠지만 내 대답은 사실이었다.

섭혼마존은 언제나 자신의 뒤를 흑영비술로 지켰다. 풍신사보가 대성을 이뤘다면 모를까, 아직은 그의 흑영비술을 피해서 암영보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혈안정수를 눈에 넣은 내게 흑영비술의 파훼법이 보였고, 그것을 파훼하는 순간 내 암영보가 먹혀들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자에 내가 숨어드는 격이었다.

"내가 어떻게 들어온 것이 뭐가 중요하겠어? 왜 들어왔느냐가 중요하지."

섭혼마존은 이 상황에서도 딱 잡아뗐다.

"아직도 심혼대법 타령을 할 거면 물러가게. 나는 그딴 대법 모르니까."

"그럼 이 아이는 누구지?"

"불쌍한 고아네. 내가 데려가다 무공을 가르치려고 데려왔지."

"당신은 겁쟁이야."

"뭐?"

이번에는 내가 그를 흉내 냈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만!"

그의 외침에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대체 언제까지 모른 척 할 거야? 당신 용기는 약자의 몸에서 심장을 꺼낼 때만 생기는 건가?"

섭혼마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휘이이이잉.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 했다.

"내 경고를 그새 잊었나? 날 다시 보게 되면 영원히 원래 세상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가 귀곡성처럼 스산하게 들려왔다.

섭혼마존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겁주지 않으면 겁나서 견딜 수 없나 보군."

"정말 놀랍군. 아무리 교주 아들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나이에 이런 기백을 보이지?"

그의 눈동자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나를 탐색하기 바빴다.

"날 죽이러 온 거지?"

"그래."

"대체 뭘 믿고?"

뭘 믿고란 말이 메아리치듯 반복되었다. 지금의 메아리는 나를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메아리가 뚝 끊어지면서 그가 물었다.

"교주가 보냈나?"

이번만큼은 그 어떤 다른 잡음도 들어가지 않은 물음이었다. 내가 독자적으로 이런 행동을 할 것으로 생각하긴 어려울 테니까.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아버지가 직접 오셨겠지. 아버지 성격 몰라?"

섭혼마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그의 중얼거림과 바람 소리, 온갖 괴이한 소리가 뒤섞였다. 그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이야기하자."

"이 공자 유언인데, 들어줘야지."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와 난 경치 좋은 정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사이에 놓인 다탁에는 미지근한 차까지 올려져 있었다.

"이공자."

원래 그의 목소리, 그가 평범한 남자로 돌아왔다.

"피차 서로를 죽여야 한다면 마지막으로 우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세."

"그러지."

"우린 마인이라네. 그것도 모든 마인들 위에 군림하는 마존이지. 약자들에게 선택권을 줄 만큼 우리의 인생이 호락호락한 삶인가? 저 약해빠진 것들의 심장을 빨아먹어서 더 강해지는 것이 뭐가 어때서? 탐욕은 우리의 권리 아닌가? 내 모든 선택은 천마신교를 위한 것이었다!"

화무기가 오지 않았고 내가 본교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쩌면 난 이런 섭혼마존을 못 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본교가 강해질 수만 있다면, 이 명분을 핑계 삼아 애써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운명은 달라졌다. 그때의 나와 지금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아이의 심장을 꺼내서 강해지려는 자와는 같은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거짓말이다."

"뭐?"

"당신이 심장을 탈취한 것은 본교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가 진짜 본교를 위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복수의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팔마존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의 질기고 긴 수명에는 수천 명의 무고한 생명이 녹아들어 있다.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위하다가... 당신은 괴물이 돼버렸어."

나를 빤히 쳐다보던 섭혼마존은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고작 스물 남짓한 애송이가 날 이렇게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 흑영비술을 피해 날 따라 들어올 수도 없고, 내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지. 넌... 이공자가 아니다."

지금껏 커졌다 작아졌다만 반복했던 섭혼마존의 눈동자가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눈부시게 휘황찬란한 자색(紫色)의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자색의 안광이 내 눈으로 뿜어지며 그 너머에 있을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물었다. 그의 질문은 심연에서의 울림처럼 깊고 무겁게 다가왔다.

"너는 누구냐?"

제55회 내가 너를 안다.

자색의 광채는 한 가지 금지된 마공의 사용을 알렸다.

상대에게서 진실의 대답을 듣는 독심탈혼술(讀心奪魂術)이 발휘된 것이다.

독심탈혼술은 교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교도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금지된 무공이었다.

무공 자체가 상대의 마음을 읽고 대답까지 끌어낼 수 있기에, 여러모로 악용될 소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데 섭혼마존은 금기를 어기고 독심탈혼술을 시전한 것이다.

상위 실력의 귀술사들도 모두 독심탈혼술을 펼칠 수 있었는데, 각자의 실력과 내공에 따라 그 성공률이 달랐다. 실력이 높아질수록 자색이 짙어졌다.

섭혼마존의 독심탈혼술은 그야말로 기억조차 못 하는 내용까지 끌어낼 수 있음을 저 휘황찬란한 자색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검무극이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

"당신을 조사했소. 성격부터 모든 것을 다."

눈을 통해서 침투하는 독심탈혼술은 혈안정수를 넣은 내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독심탈혼술에 걸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를 보면 나 역시 그에 대해서 알게 되는 바가 있을 테니까.

"이번 일의 배후에 교주가 있느냐?"

"없소."

섭혼마존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역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였다.

"너는 왜 온 것이냐?"

"당신을 죽이러 왔소."

"이곳에 온다고 누구에게 말했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섭혼마존이 독심탈혼술을 풀었다. 교주가 시킨 것이 아니라면, 더는 내공을 소모해가며 독심탈혼술을 펼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독심탈혼술에 드는 내공과 심력 소모는 그 어떤 사술보다도 심했다.

이곳에 온 것을 누구에게 알렸느냐는 물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음을.

"이공자, 그대는 오늘부로 그대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네."

"나도 나지만, 당신은 나를 죽이고 뒷감당을 할 수 있겠소?"

"뒷감당을 왜 내가 하나? 혈천도마가 해야지. 자네를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니야. 자넨 혈천도마를 죽이려다가 놈의 손에 죽게 될 거다."

내게 섭혼술을 걸어서 혈천도마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혈천도마를 이길 수 없을 거라 여기니, 결국 혈천도마에게 죽을 거라는 결론.

"당신다운 생각이군."

"나답다는 것이 뭐냐? 왜 자꾸 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는 거지? 날 조사했다고? 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부터 엉터리 조사야."

말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렬한 빛들이 날아들더니, 이내 나는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혈천도마를 죽여라!

그 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섭혼마존의 목소리로, 다음에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이안의 목소리로, 서대룡의 목소리로. 내가 아는 모든 목소리로 그 말을 반복했다. 심지어 나는 물론이고 혈천도마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귀를 막아도 그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 명령을 뇌에다가 망치로 박아넣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터질 것같이 아팠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한 상황에서도 이 정도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섭혼마존의 섭혼술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저 멀리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저 빛이 이 섭혼술의 파훼법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은 커졌고, 그것은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깥에 섭혼마존이 서 있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스스로 눈을 뜬 거지?"

빛으로 걸어 나온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는 눈을 뜨는 행위였던 모양이다.

"섭혼술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눈을 뜨지 못하는데?"

"혈천도마와 정이 많이 들었나 보오. 그를 죽이고 싶진 않아서."

다시 한번 주위가 빙글빙글 돌면서 강렬한 빛이 날아들었다. 다시 어둠 속이다.

―혈천도마를 죽여라!

더 많은 내공을 투입한 더욱 강력한 섭혼술이었다. 처음의 섭혼술이 작은 망치로 뇌에 박아넣었다면, 이제는 커다란 망치로 두들겼다.

하지만 여전히 푸르스름한 빛은 존재했고, 나는 그곳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고 나서도 머리가 빠개질 듯 어지러웠으니, 섭혼마존의 섭혼술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섭혼술에 걸리지 않는 거지?"

"도마 어르신과 끈끈한 정 때문이라니까."

"헛소리!"

"당신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군."

"그럼 정 없는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다음 순간 주위가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바닥이 꿀렁거리면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눈과 입이 길게 찢어지고 팔다리가 기다랗게 붙은,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한 그런 괴물들이었다.

그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것들이 나를 향해 덮쳤다.

나는 그것들을 흑마검으로 베었다.

시커먼 괴물들의 몸에 푸르스름한 빛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어떤 것은 머리에, 어떤 것은 배에, 또 어떤 것은 팔에. 혈안정수는 정확히 이 사술의 파훼법을 보여주었다.

내가 정확히 빛을 찌르자, 놈들은 하얀 빛무리가 되면서 사라졌다. 정확히 급소를 찌르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고 끝까지 상대를 공격하는 악령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것으로는 결코 막지 못할 적이었다.

모든 괴물을 베어버리자 어두웠던 주위가 밝아지며 섭혼마존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사술을 발휘했다.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통나무 위에 서 있었다.

진짜 바닷물이었다. 분명 인간의 정신을 조종해서 만들어낸 환상일 텐데, 빠지면 죽는 진짜 바다였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서 뭔가가 이쪽을 덮쳐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거대한 해일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자연의 분노.

정파인들이 왜 섭혼마존을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체 이 거대한 환상을 일개 인간이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겠는가?

가까이 밀려든 해일은 절벽처럼 높았다. 너무 높아서 끝이 아득할 정도의 해일이었다.

하지만 해일 어디에도 파훼법은 보이지 않았다.

피할 곳이 없었기에 그대로 파도에 휩쓸렸다.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짓눌리듯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천마호신공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이 충격에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물속을 휩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푸아!"

나는 수면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또 다시 해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해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 어떤 고수도 결국 탈진해서 죽고 말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파훼법을 찾아서 나가야 했다.

나는 주위를 살폈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서 푸르스름한 빛이 있는지를 찾았다. 하지만 바닷속은 캄캄할 뿐이었다.

두 번째 해일에도 휩쓸렸다. 천마호신공으로 충격을 최소화한 후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는 망망대해였다.

이 넓은 바다를 뒤져서 파훼법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갈매기도 없고, 바위섬도 없고,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바닷물과 나밖에 없는데.

'뭐라도 있어야 찾을 텐데.'

바로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생각해보니 뭐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나는 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닷물을 박차고 날아올라서 한 가지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을 찾지 못하고 세 번째 해일에 휩쓸렸다.

다시 네 번째 해일이 오기 전, 또다시 바다 위를 날아올라 열심히 한 가지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찾으려던 것을 찾아냈다.

'제발! 이것이길!'

내가 찾은 것은 맨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서 있었던 통나무였다.

통나무를 돌려보니 아래에 푸르스름한 빛이 나 있었다.

혈안정수는 언제나 정확하고 빠르게 파훼법을 알려주었는데, 이번에는 등잔 밑이 어두웠다. 망망대해에서 오직 나를 지켜주는 그것이 파훼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면 원래는 위쪽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통나무가 파도에 돌아가면서 빛이 아래쪽을 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번째 해일이 덮치기 직전, 통나무를 흑마검으로 베었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밀려들던 해일은 사라졌고, 동시에 바다도 사라졌다.

비장의 한 수였을 텐데, 섭혼마존은 자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았다.

곧장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섭혼마존은 그가 가진 필살의 비술을 쏟아붓고 있었다.

내 주변으로 삼십여 개의 거울이 서 있었다.

거울에 내 인생이 담겨 있었다.

어릴 때의 모습도 있었고, 지금의 모습도 있었으며 중년의 모습, 그리고 노인이 된 나의 모습도 있었다. 마치 삼사 년의 시간을 두고 나의 평생을 거울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거울 속 나를 보았다. 대부분 회귀 전에 한 번은 겪었던 나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겪어보지 못한 나이를 보여주었다. 특히 마지막 거울에 비친 나는 너무 늙어서 나라는 것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물었다.

"뭘 그리 후회하고 있나?"

거울 속의 나는 말라비틀어진 채 큰 방에 홀로 누워 허망한 눈빛으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죽음을 함께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외롭고도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건 내 미래가 아니다. 섭혼마존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아마 성질 급한 누군가는 이 거울을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겠지.

나는 손을 뻗어 거울 속 노인의 모습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에 그렇게 피를 많이 묻히고 살았는데, 행복한 죽음을 바랐더냐? 욕심이다, 무극아. 화무기를 죽이고 살려야 할 사람들을 살려냈다면, 이런 죽음도 괜찮다."

나는 나를 위로했다. 실제 나의 죽음은 어떠할까? 저렇게 홀로 쓸쓸히 죽을까? 아니면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웃으면서 죽을까?

"괜찮으니까 잘 가라. 내가 너를 알고 있다."

거울 속 나를 어루만져 주었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다시 앞쪽으로 돌아와서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한 거울 앞에 섰다. 몇 년 후의 내 모습이었는데, 거울 주위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 그럼 나가볼까?"

쨍강!

흑마검을 휘둘러 거울을 깼다.

박살 난 거울 너머 놀란 섭혼마존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이 거울인지 알았지?"

수십 개의 거울 중 단 하나의 거울만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거울이었다.

"만약 다른 것을 잘못 깨면 거울의 숫자는 두 배로 불어난다. 또 잘못 깨면 두 배로 불어나고. 영원히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지."

"나는 운이 좋소."

"운이 좋아서 나왔다고? 운이 좋다고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섭혼마존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이제 놀람은 충격으로 바뀌었고 공격이 실패하던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구화마공을 익힌 것인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그렇다고 단정했다.

"미친 교주 같으니라고! 우리들 몰래 이미 후계자를 정했어?"

그는 그렇게 오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사술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단 하나였으니까.

섭혼마존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날 죽이는 칼로 자식을 이용해? 더러운 새끼! 교주는 단 한 번도 속마음을 보인 적이 없었지. 언제나 뒤통수나 치고."

"잠깐! 한가지는 짚고 가자. 이 일 말고 아버지가 뒤통수친 적이 뭐가 있지?"

"뭐?"

"언제나 뒤통수를 친다면서? 다른 뒤통수에 대해 말해보라고."

섭혼마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파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을 당신이라고 했어. 당신을 높이 산다는 뜻이지. 그런 당신에게 뒤통수를 쳤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화난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아버지는 끝까지 당신 죽이는 것, 망설이셨어. 어쩌면 이 일로 내가 점수를 잃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이러지?"

"곰곰이 생각해봤어. 농사짓고, 장사하고, 학관도 다니고 무관도 다니고. 그냥 평범하게 잘살고 있었어. 한데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서 산채로 심장이 뜯긴다?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원래 인생은 불공평한 거다. 억울하면 고수가 되든지."

"그 억울함, 오늘은 당신이 다 가져라."

내가 구화마공을 익혔다고 오해하고 있었음에도 섭혼마존은 기가 죽지 않았다.

"날 조사했다고 했나? 그래, 잘 조사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열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 못 했을까? 교주가 날 배신하고 죽이러 드는 날을?"

여전히 그는 이 상황을 아버지가 꾸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왜 심혼대법에 빠져들었는지 아느냐? 고작 조금의 내공을 얻기 위해서?"

"아니었소?"

"당연히 아니지."

섭혼마존의 몸 주위로 시커먼 연기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날더라 괴물이 되었다고 했나? 진짜 괴물을 보기나 했고?"

검은 기운 속에서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변신이었다. 몸집이 더 커졌고 피부가 검게 변했다. 길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새하얀 광채가 흘러나왔고 귀는 악귀처럼 솟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커다랗고 붉은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는 모습이 비쳤다.

저것은 환영인가, 실제인가?

변신한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도를 보였다. 차갑고도 견고했다. 나는 긴장했다. 이 마공은 구화마공을 대비한 필살의 한 수였다.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너희의 그 잘난 구화마공을 찢어 발겨주마!"

그가 뿜어낸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그냥 마기가 아니라 암흑마기(暗黑魔氣)였다.

제56회 그때는 오래 사시오.

암흑마공(暗黑魔功)은 금지된 마공이다.

일반적인 마공에 비해 훨씬 패도적이고 강맹하지만 그 위력만큼이나 부작용도 컸다. 암흑마공을 익힌 자들은 대부분 마공에 잡아 먹혀서 주화입마에 빠져 살육을 일삼다가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 천마신교에서는 암흑마공을 익히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암흑마기는 바로 암흑마공을 익혔을 때 나오는 마기였다. 그 기운이 워낙 강대해서 나는 상대의 기세부터 꺾으려 했다.

"뭔 이런 쓰레기를 익혔소?"

"쓰레기에 묻혀서 죽을 때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세."

"괜히 당신 죽이러 왔군. 그냥 뒀어도 암흑마공의 부작용으로 죽었을 텐데."

"부작용으로 죽을 일은 없다. 심혼대법으로 얻은 내공으로 부작용을 막는데 성공했으니까."

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예감하며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섭혼마존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 주위를 검은 기운이 휘감았다.

기운이 사라지자 그의 손에 한 자루의 흑검이 들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보통 검이 아니었다.

"너를 죽이고 언젠가 네 아비도 내 손으로 죽여서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할 것이다."

"당신은 겁이 많아서 그렇게도 못할 거다. 그 목숨 부지하며 한평생 야욕을 숨긴 채 살아가겠지."

실제로 회귀 전 인생에서도 그는 암흑마공을 익힌 것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비장의 한 수로 끝까지 가져간 것이다.

우린 서로에게 분노했고, 그 분노만큼 검에 내공을 실었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꽝!

귀를 찢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섭혼마존도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내공에서 우린 박빙이었다. 그가 앞서 여러 차례의 섭혼술로 내공을 소모하지 않았다면, 변신한 그는 내공으로 나를 압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암흑마공의 힘.

나는 처음부터 비천검법으로 상대했다. 내가 지닌 최고의 초식만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다.

제일식 균천식이 발출되었다.

쉬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섭혼마존을 양단했다. 하나의 완벽한 선이 그어졌을 때, 허리가 잘렸어야 할 섭혼마존은 위로 솟구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굵직한 목소리로 터져 나오는 섭혼마존의 외침!

"인멸(人滅)!"

빛처럼 빠른 검이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여섯 개의 검선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점멸보를 써서 피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곳에서 여섯 조각으로 잘려서 죽었을 것이다.

"귀멸(鬼滅)!"

섭혼마존 역시 허술한 공격으로 내게 기회를 주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앞서보다 더 강하고 빠른 두 번째 초식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 있던 공간이 열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열두 개의 검선이 동시에 생겼다 사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번 역시 점멸보로 피했는데 아까보다 아슬아슬했다.

그가 세 번째 초식을 날리기 전에 비천검법 제이식 변천식이 발출되었다.

내 검이 섭혼마존 앞에서 열두 번 변화했다.

섭혼마존은 피하지 않고 일일이 검으로 공격을 쳐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변천식이 만들어 내는 변화가 커질수록 섭혼마존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광채가 강렬해졌다. 마지막 열두 번째 변화를 쳐낸 그는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섬멸(殲滅)!"

점점 강해지는 그의 세 번째 초식과 비천검법 제삼식 현천식이 동시에 발출되었다.

다행히 스물네 개로 쪼개지는 공간에 나는 없었다.

나는 피했지만, 섭혼마존은 피하지 못했다.

촤아아악!

현천식이 섭혼마존의 어깨를 찢었다. 하지만 몸에서 피는 나오지 않았다. 검게 변한 피부는 보의처럼 튼튼했다. 그 단단함을 바탕으로 섭혼마존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쇳소리로 잠식당한 그의 외침!

"파멸(破滅)!"

화려하게 수놓아지는 마흔여덟 개의 검선. 그의 검광이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커졌다.

강력했지만 단 하나, 그에게 허점이 있었다. 이 마공을 통한 실전경험이 부족해서, 공격이 단조로운 면이 있었다. 만약 내가 저 무공을 사용했다면, 나는 결코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피한 나는 검기 발출식인 제사식 염천식을 날렸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검기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섭혼마존을 강타했다. 쓰러질 듯 크게 휘청한 섭혼마존이 다시 몸을 가누었다. 원래라면 잘려져 사라졌어야 할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섭혼마존의 입가에서 한줄기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여전히 그는 견고해 보였다.

"이공자, 왜 구화마공을 발휘하지 않는 거냐?"

섭혼마존의 목소리는 쇳소리로 바뀌어 사람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그가 익힌 암흑마공과 동화되었다는 의미다. 이대로라면 그는 결국 마공에 잡아먹힐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마공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그는 무리하고 있었고, 나는 그만큼 위험해졌다.

"구화마공을 쓰지 않아도 당신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의도적인 자극이었다. 박빙의 싸움에서 평정심을 잃는 순간, 목숨도 함께 잃게 되니까. 그리고 이번 자극은 다른 노림도 있었다.

"네 자만이 결국 너를 죽음으로...."

섭혼마존이 말을 꺼내는 순간, 비천검법 최고의 쾌검식 제오식 창천식이 발출되었다. 말을 하는 상대의 호흡을 끊는 회심의 공격이었다.

창천식은 정확히 놈의 목을 갈랐다. 하지만 목은 잘리지 않았고 주르륵 검은 액체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창천식에도 목이 잘리지 않는다고?

"당신, 정말 괴물이 되었군."

내 말에 섭혼마존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격분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것 같았지만, 그의 호흡은 일정했다. 그에게 격장지계(激將之計)는 통하지 않았다.

비장의 절초를 날릴 기회를 노리며 우린 하늘로 날아올랐다.

솟구치면서도 검과 검이 끝없이 맞부딪쳤다.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감싸면서 승천하듯, 우린 서로를 휘감으며 검을 나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오직 검과 검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검광만이 그곳을 가득 채웠다. 섭혼술만 사용한다고 알려진 섭혼마존이 이런 마공을 최후의 한 수로 숨겨두는 곳, 이런 곳이 바로 무림이다.

화려한 난전의 끝, 우리가 서로에게서 떨어지던 그 순간, 섭혼마존의 눈빛이 새하얗게 빛났다.

'위험하다!'

섭혼마존이 마지막 한 수를 날렸다. 완벽한 쇳소리로 터져나오는 그의 외침!

"천멸(天滅)!"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기회는 곧 나의 기회기도 했다. 우린 같은 기회를 보았고, 그 빈틈을 향해 검을 날렸다.

명왕보와 함께 비천검법 제팔식 황천식(黃泉式)에 내 모든 내공을 쏟았다.

쉬이이이이이익!

촤아아아아아악!

두 개의 빛이 교차했다.

내가 서 있던 쪽에 화려한 검광이 그려졌다. 공간이 아흔여섯 개로 조각나면서 한 면 전체가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경탄할만한 장관이었다.

섭혼마존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경탄할만한 장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흑마검에 관통당한 심장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검은 액체가 아니라 붉은 피였다. 힘차게 꿈틀대던 그의 거대한 심장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불신 가득한 그에게 나는 차분히 말했다.

"당신 심장이 너무 커서, 찌르기도 쉽더군."

어찌 그래서겠는가? 무고한 사람들의 심장을 탈취한 탐욕 때문에 오늘의 최후를 맞은 것이란 말을 그렇게 한 것이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면서 변신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았던 그는, 다시 마가촌에서 열 명은 구해올 수 있을 것 같은 세상 평범한 사람으로 변했다.

"...구화마공이 아니었는데?"

"명왕보와 비천검법 제팔식의 결합이었소."

"명왕보?"

"풍신사보의 명왕보요."

"어떻게 네가 풍신사보를?"

"당신에게 죽지 말라고 하늘이 안배해 주셨나 보오."

헛말은 아니었다. 풍신사보가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의 싸움에서 죽었다.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마존을 상대하면서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것을.

솔직히 나는 혈안정수를 얻었기에, 그를 이길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비장의 한 수를 지니고 있었다. 풍신사보가 아니었다면 내가 죽었을,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한 수였다.

혈천도마도, 일화검존도, 남은 다른 마존들도. 보이는 것과는 다른 한 수를 분명 숨겨두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강해졌다.

섭혼마존을 죽여서 더 강해진 것이 아니라, 두 번 다시 방심하지 않을 것이기에, 강해진 것이다.

섭혼마존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가 죽어가면서 그가 만든 공간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커졌다 작아졌다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던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져갔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반드시 죽인다."

나는 저주로 맞대응하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오래오래 사시오. 이런 방법 말고도 분명 좋은 방법들이 있을 거요."

내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라 말하려 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더 지독한 저주였을 수도 있고, 마지막 후회를 전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섭혼마존이 고개를 떨구며 절명했다. 동시에 그가 만든 세상이 사라졌다.

우린 처음 심혼대법을 진행하려던 그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죽어서도 섭혼마존은 마지막 신비를 선사했다.

섭혼마존은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은 채 죽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미친 듯이 싸웠는데 마치 주화입마로 죽은 것처럼 외상 하나 없었다.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자신의 세상에서 죽은 것이다.

나는 제단에 누워있는 아이를 안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좋은 술과 안주를 사서 혈천도마에게 돌아왔다.

아이는 서대룡에게 맡겨서 은밀히 부모를 찾아주라고 했다. 대법에 희생될 뻔한 아이라고 말해줬기에, 눈치 빠르고 똑똑한 서대룡은 알아서 비밀리에 잘 처리할 것이다.

"왜 이리 오래 걸렸나? 정말 안주를 직접 만들었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안주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뭔 소린가? 대체 어떤 안주인데?"

내가 사 온 요리를 보더니 혈천도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 걸릴 요리가 아닌데?"

나는 웃으며 혈천도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자, 한잔 받으시지요. 아직 밤은 깁니다."

"늙은이 체력이 자네와 같나? 밤새우면 종일 골골이다."

"아직 팔팔하시잖아요? 자, 오늘은 신나게 드시지요."

"이공자, 오늘 자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좋습니다."

"뭐 때문에?"

"그냥 오랜만에 어르신 뵈니 좋습니다."

혈천도마가 대체 무슨 속셈이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내가 다녀온 사이에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것을.

오랜만에 만난 우린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마셨다. 그를 만난 이후 이렇게 시원하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것은 지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우린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무림 정세에 대한 이야기며, 무공에 관한 이야기며, 서대룡과 검존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의외라 생각하겠지만 우린 둘 다 말이 많아서, 술자리의 화제가 떨어지지 않았다.

"쥐방울이 왜 마음에 들었는지 아는가?"

"왜입니까?"

"첫날 내가 물었네. 자넬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못 바친다고 하더군."

"이 녀석, 혼내야겠군요."

"그때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지."

"서 조사관에게 직접 말해주십시오. 아마 좋아할 겁니다."

"일없네."

"그럼 다음에 제가 말해주죠. 이런 건 누군가 해줘야 합니다. 이런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꾸기도 할 테니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자넨 정말 온갖 사람을 다 챙기는군. 이러다간 마구간에서 말똥 치우는 놈도 챙기겠어. 왜, 가서 함께 사료나 주지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일 아닙니까?"

"난 평생 자네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네."

"본교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천마신교가 될 겁니다. 한 세대쯤은 그런 본교도 괜찮지 않습니까?"

혈천도마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날 보는 그의 눈빛이 깊었다.

"이공자."

"네."

"내게 술 한잔 따라주게."

지금까지 매번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따르는 이 술이 다른 술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나의 좌사에게 첫술을 따릅니다."

뭔 헛소리냐며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그는 말없이 술을 받았다. 나는 잔 가득 술을 부어주었다.

혈천도마는 한참 동안 그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술을 다 비웠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나를 따르고자 하는 결심을 한 것이 아닐까?

물론 짐작만 할 뿐이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도마가 불쑥 말했다.

"좌사가 높나? 우사가 높나? 기왕이면 높은 걸 시켜주게."

잠시 멍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우린 밤새 술을 마셨다.

이렇게 좋다가도, 어느 날 한마디 말실수 때문에 관계가 틀어져 버리는 것이 사람 관계다. 그렇기에 계속 쌓아야 한다. 한두 번의 실수 정도로는 틀어지지 않는 굳건한 관계가 될 때까지. 그게 술자리든 싸움박질이든, 선물이든, 조심스러운 충고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이든. 그게 뭐든 다지고 쌓고 또 쌓아야 한다. 실수는 나도 하고, 그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오늘 보니 잘 생기셨습니다."

"미친놈."

혈천도마가 자신의 멸천대도를 들어서 우리 얼굴을 비췄다.

"자, 똑똑히 내 얼굴 보면서 다시 말해보게."

"하하하."

"왜 웃기만 해! 어서 잘 생겼다고 말하라니까!"

"술 취했을 때는 여자에게 고백하면 안 되겠습니다."

혈천도마가 아부꾼을 잡아냈다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진짜 내 사람을 얻는 행운은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한 사람 중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것일 테니까.

제57회 다른 괴물이 나오지 않기를.

다음 날, 섭혼마존이 죽었다는 소식이 교를 강타했다.

근래 여러 사람이 죽었지만 마존의 죽음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교내에 비상이 내려졌고,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사건조사를 나간 것은 우리 황천각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특별조사관 전원과 집행무인 이십 명이 서환진으로 갔다.

섭혼마존의 거처 앞에는 그의 제자들과 귀술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 우리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황하고 있었고,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마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일단 우리 출입을 막고 보자였다.

나는 굳이 그들과 충돌하지 않았다.

"좋네. 그럼 마의 어르신이라도 들여보내 주게. 시체가 부패하지 않게 처리해야 하고, 정확한 사인은 밝혀야 하지 않겠나?"

마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고, 본교 마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를 믿고 존경했기에 그 제안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한참 동안 꼼꼼히 검시하고 나온 마의가 나와 섭혼마존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스스로 내기를 과하게 발출하면서 심장과 전신 혈맥이 크게 손상돼 죽은 거로 보이네. 주위에 침입한 흔적이나 싸운 흔적이 없고, 극독에 중독되지도 않았으니 주화입마에 빠져 죽은 것 같네."

그 말에 제자들이 탄식했고 나는 내심 기뻐했다.

마의의 입에서 주화입마라는 말이 나온 이상, 흉수를 찾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환진에서 나와 천마전으로 보고하러 가는 길에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죠?"

"뭐가?"

"있잖아요, 그거."

감히 말로 할 수 없었는지 서대룡이 전음을 보냈다.

―각주님이 섭혼마존 죽인 것 아니죠?

―왜? 내가 죽인 것 같아?

―...어제 아이를 제게 데려오셨잖습니까? 심혼대법에 희생될 뻔한 아이라고요.

어디 그뿐인가? 두 달 전 출교할 때, 그는 내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눈빛이란 말도 했었다. 이제 그 불가능이 가능이 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말 알고 싶어?

―아뇨, 아닙니다! 차라리 모르렵니다. 전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서대룡이 황천각 쪽으로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저 멀리 천마전이 보였다.

과연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 * *

천천히 걸음을 옮겨 피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오늘은 총군사인 사마명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자 사마명이 내게 물었다.

"이공자, 출교하신 일은 어땠습니까?"

"일은 핑계고, 잘 놀다 왔습니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군사님도 일만 하지 마시고 바람도 좀 쐬시고 농땡이도 치십시오."

"평생 안 놀다가 한 번 노는 그날, 보통 적들이 쳐들어오죠."

사마명의 농담에 우린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으로 인사를 마친 후 섭혼마존의 죽음에 관해 보고했다.

"마의께서 주화입마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내 말에 아버지와 사마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그 결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마존이나 되는 인물이 갑자기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섭혼마존쯤 되는 분이 주화입마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황천각에서 사건을 조사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마존들이 나서서 조사할 겁니다."

"우리가 하지 않고요?"

"대대로 마존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천마전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요."

"뭐, 그렇다면 나서지 않겠습니다. 저희야 편하고 좋죠."

그렇게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사마명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마명이 물러나자 아버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죽인 거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섭혼을 어떻게 죽인 거냐고?"

아버지의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궁금함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에게 미련을 가지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

이놈이 대체 어떻게 섭혼을 죽였을까? 그것도 주화입마를 사인으로.

"이럴 때 멋지게 대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죽였다고. 한데 과대평가십니다. 제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섭혼마존을 주화입마에 빠져 죽게 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실 아버지에게는 솔직히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혈안정수를 구한 방법에 대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섭혼마존이 주화입마에 빠져 죽은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주화입마가 아니라 싸우다 죽은 것이 되었다면 사인을 철저히 분석해서 누가 죽였는지부터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나는 시체를 어딘가에 묻어야 했을 테고. 어쨌든 여러모로 지금보다는 골치 아팠을 것이다.

"저는 어제 도마 어르신과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제 행적은 그분이 보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둘이 함께 가서 죽였느냐?"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버지, 이건 하늘이 내린 벌입니다. 섭혼마존은 사람의 심장을 산채로 파내는 괴물이었습니다."

어차피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믿고 계신다.

그럼에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아버지에게는 부담이 될 진실이었으니까. 마존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도 눈을 감아줘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잠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섭혼이 죽었으니 조용히 있던 마존들도 움직일 거다."

팔마존은 생사공동체다. 한 사람의 죽음은 곧 전체의 위협. 아버지가 나를 의심하듯, 그들 또한 나를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난 아버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괴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 *

천마전을 나온 내가 찾아간 곳은 북천검가였다.

나를 맞이한 사람은 사우종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공자님."

그는 평소보다 더 밝은 얼굴로 나를 대했다.

'사우종아, 사우종아. 엄밀히 따지면 섭혼마존은 네가 죽인 것임을 알고 있느냐?'

그가 섭혼마존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나는 심혼대법에 대해 알지 못했을 테니까.

이 상황에서 가장 놀라고 당황한 사람이 바로 이 사우종일 것이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섭혼마존이 죽었으니까.

모옥 앞까지 나를 안내한 그가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좋은 놈이 아님은 확실한데, 그렇다고 섭혼마존을 끌어들인 일로 그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모른 척 놈을 주목하고 있다가 역으로 이용할 일이 있으면 그때 이용할 작정이다.

"어서 오게, 이공자."

예전에는 돌아보지도 않고 화원 손질만 했던 일화검존이었는데, 이제 반갑게 나를 맞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출교했다고 들었네. 잘 다녀왔는가?"

"네. 바람 좀 쐬고 돌아왔습니다."

"이공자는 볼 때마다 일취월장하는군."

"제가 달라진 것 같습니까?"

나와 사흘간의 비무 때문일까? 확실히 나의 변화에 민감한 그녀다.

"당장에라도 비무를 신청하고 싶은 욕심이 들 정도로."

"조만간에 자리 한 번 가지시죠."

"좋네. 언제라도 환영일세."

나는 그녀를 위해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이건 약소하지만 선배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내가 가져온 것은 이 지역에서는 구하기 힘든 씨앗이었다.

"향기가 좋은 꽃이라기에 가져왔습니다."

"오, 살면서 씨앗 선물은 처음인데?"

"저도 처음입니다."

"고맙네, 내가 잘 키워보겠네. 자, 들어가서 차 한잔하세."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단아하게 꾸며진 그곳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집이 아늑하고 좋습니다."

"좋긴. 늙은 여자 혼자 사는 곳이라 별것 없다네."

"늙다니요. 저와 함께 항주 거리를 한 번 걸어보시죠. 아마 사내놈들이 열 걸음 걸을 때마다 와서 같이 술 마시자고 수작 부릴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검술이 뛰어나다는 칭찬보다 이런 칭찬에 약한 그녀다.

"다음에 한 번 가시죠. 도마 어르신도 함께."

도마가 언급되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직 도마와는 여전히 사이가 나쁜 그녀다. 중간에 내가 끼어있기에 되도록 표를 내지 않을 뿐. 여전히 도마와 화해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섭혼마존이 죽었다는 소식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그 죽음에... 자네가 관계되었나?"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순간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나를 향한 호의와는 별개로 섭혼마존의 죽음은 다른 마존들을 긴장시키는 일이었다.

하나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은 아주 오랫동안 내려오는 그들의 생존원칙이었으니까.

"마의께서 주화입마로 죽었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걸 믿는 마존은 아무도 없을 것이네."

"그래도 저는 아닙니다."

단호한 내 말에 일화검존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지만, 속마음에서도 거둬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마도 비무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박빙의 실력임을 알았으니까.

"자네가 일으킨 파문에 호수가 출렁대고 있으니까. 아, 자넨 호수가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지? 자네가 몸을 담그는 순간, 평온했던 호수는 이미 바다로 바뀌었다네. 섭혼마존이 첫 번째로 그 바다에서 익사했지."

"저는 그 바다에서 낚시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빠뜨려 죽이진 않습니다."

"그 말은 맞겠네. 도마를 낚았으니."

"선배님은 어렵겠습니까?"

"낚은 고기를 풀어주면 가능할지도. 도마가 잡혀 있는 어망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옅게 웃었고 그녀는 웃지 않았다.

"사람 일이란 모를 일이야. 섭혼마존은 그토록 제 몸을 사리고 아꼈던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제일 먼저 죽을 줄이야."

"서환진이 당분간 혼란스럽겠습니다."

"후계자 싸움이 벌어질 거네."

마존이 죽으면 후계자가 뒤를 이어받는데, 남은 칠마존 중 네 마존의 인정을 받으면 후계자가 된다.

섭혼마존에게는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 죽었기에, 그 다섯 명 중 제일 뛰어난 사람이 섭혼마존의 뒤를 이을 것이다.

"누구를 지지하십니까?"

"그건 왜 궁금한가?"

"기왕이면 우리 쪽 사람이 이어받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 쪽?"

"네, 우리 쪽요. 비무친구인 우리요."

그녀가 도마를 떠올리기 전에 선수를 쳤다.

비무친구란 말이 우스웠는지 비로소 그녀가 옅게 웃었다.

"비무친구와는 뜻을 함께할 수 있지."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눈 후 작별을 고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바쁜데 와줘서 고맙네."

일화검존이 마당까지 따라 나왔다.

"이공자. 낚시를 하다 보면 어떤 물고기는 쉽게 낚이고, 또 어떤 물고기는 물속에서 팽팽하게 버티지. 한데 조심하게. 어떤 물고기는 튀어나와 낚시꾼을 공격할 수도 있고, 심지어 배를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네."

한마디로 도마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팔마존들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게, 나는 아직 잡힌 물고기 아니네."

"이런 충고를 해주시는 것만 해도 반쯤은 잡힌 물고기 아니겠습니까?"

일화검존은 반쯤 잡혔다는 말에도 그리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어쩌면 딱 그 정도라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다음에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모옥을 나서서 조금 걷다가 돌아보니 그녀는 마당에서 내가 준 씨앗을 흙에 심고 있었다. 무섭게 나를 노려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런 관계가 된 것이다.

그녀 말이 맞다. 사람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아버지나 일화검존의 경고대로 그날 바로 칠마존들의 회합이 있었다.

섭혼마존의 죽음 때문에 마련된 특별회합이었다. 오직 마존들만 참석하는 회합이었기에,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아버지조차 알지 못했다.

회합이 있던 날 밤,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술 있나?"

제58회 당분간은 죽이지 마.

혈천도마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찾았다.

나는 집에 사둔 술을 가져와서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술을 몇 잔이나 연거푸 마신 후에야 혈천도마가 분노한 이유를 밝혔다.

"병신 머저리들이 대놓고 나를 따돌리더군."

"하하하."

"웃자고 한 소리 아니네."

"죄송합니다. 설마 따돌림당하는 마존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혈천도마가 장난 아니라는 듯 더욱 눈을 부라렸다.

"죄송합니다. 대체 어떻게 따돌렸기에요?"

"아무도 내게 말을 안 걸더군."

"평소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뭐 말을 잘 걸진 않았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지. 차라리 내게 대놓고 따졌으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겠지."

"뭘 따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이야, 자네!"

"네? 저요?"

"그들은 자네가 나와 작당해서 섭혼마존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네. 그래서 나를 따돌리는 거지."

"우리가 그랬습니까?"

"우린 안 그랬지."

혈천도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그랬겠지. 자네가 죽였지?"

"왜 다들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요즘 손에 피를 가장 많이 묻힌 사람이 자네니까. 그 손에 섭혼의 피가 묻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자네지?"

나는 대답 대신 혈천도마를 응시했다. 내 눈빛에서 그는 읽었을 것이다.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것을.

"왜 내게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말로 안 했지. 눈빛으로 했지."

딱 잡아떼려고 들었으면 잡아뗐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내게 긴장감을 가지라는 의도였다. 친한 것은 친한 것이고, 나와 그는 주군의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딴마음 품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라는 의도다. 사람 관계에서 적당한 긴장감은 실수를 줄여줄 테니까.

두 번째 이유는 그를 믿어서였다.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고, 말해줘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 때문에.

"자넨 정말 나를 믿는군."

"믿지 않는다면 어르신을 좌사에 앉히지 않았겠지요."

"나는 좌사이기 이전에 팔마존의 한 사람이라네."

"팔마존이지만 제 좌사이십니다."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다간 언젠가는 등을 찔리게 될 거네."

"쉽게 믿은 것 아닙니다. 어르신과 제게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겁나지 않나?"

"뭐가요?"

"팔마존의 적이 된다는 것."

"정확히는 사마존이죠."

"사마존?"

잠시 멍하게 날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술잔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언제 셋이나 더 죽였나? 누구누구 죽였어?"

버럭 소리치는 그에게 나는 재빨리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 아닙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혈천도마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 사마존은 뭔 소리냐?"

"제 계산을 들어보십시오. 섭혼마존이 죽었으니 이제 칠마존이죠? 어르신 빠지면 육마존, 검존은 절반만 제게 넘어왔으니 오마존 반. 일단 오마존 반이 제 적이라고 치죠. 이 상황에서 어르신과 검존 선배 두 분이 놀고 계시지는 않을 거잖아요? 두 분이 합쳐서 일마존 반을 맡아서 상대해 주시면, 정확히 사마존이 남습니다. 그래서 제 상대는 사마존이란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더 적을 수도 있습니다. 칠마존 중에서 나와 손을 잡을 사람이 둘만 더 있어도, 저는 이마존만 상대하면 됩니다. 쉽죠?"

혈천도마는 만난 이래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좋아, 자네가 이 정도 미친놈인 줄은 내가 익히 아니까 넘어가고. 자네가 하나 생각 못 하는 것이 있네."

"뭡니까?"

"나나 검존은 절대 마존들과 싸우지 않을 거네."

나도 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내려온 마존들만의 철칙이니까.

"압니다. 싸움은 제가 할 테니, 저를 배신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야. 상황이 하는 거지. 그러니까 날 믿어선 안 돼."

"네, 배신당할 상황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나는 믿음으로 혈천도마를 대했다. 그게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술을 마신 후 그가 쏟아내듯 말했다.

"까닥 잘못하면 죽는다고, 이 자식아!"

순간 내 가슴이 격동했다. 버럭 내지른 말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낀 것이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우린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술잔이 비면 따라주었고, 또 술을 마셨다. 술병이 다 비어갈 때 그가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가 전에 그랬다. 혈천도마가 나보다 더 감정적이라고. 그때 그는 부정했지만, 그는 분명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말을 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마존들이 이번 사건을 밝히기 위해 한 사람을 불러들였네."

"누굽니까?"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흘러나왔다.

"풍천교주."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풍천교주라니? 내가 음뢰종을 구하고, 혈안정수를 구했던 바로 그 풍천교다.

"풍천교주는 왜요?"

"섭혼마의 사술은 혈교의 마공을 바탕으로 하거든. 자네도 잘 알겠지만 혈교는 바로 풍천교의 전신이었고. 그러니 풍천교주가 섭혼마의 시체를 보면, 사인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지."

"풍천교주는 절대 자신의 권좌를 비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올 거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는요?"

"어떻게든 오게 만들 테니까. 팔마존의 힘을 무시하지 말게. 그들은 어떻게든 풍천교주가 이곳에 오게끔 할 거야. 협박하든, 보물을 안기든, 어떻게라도 말일세."

과거 혈교 시절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교와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고,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세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후 풍천교로 바뀌면서 관계는 달라졌다. 팔마존들이 그들과 손을 잡으면서 우방 아닌 우방으로 자리 잡은 풍천교였다.

"풍천교의 신물은 어쩌고요?"

"알아서 하겠지. 정 불안하면 다 싸 들고서라도 오겠지."

"차라리 시체를 그곳으로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부패하지 않게 처리해서 마차로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풍천교주가 이곳에 오는 것은 비단 검시 때문만은 아닐세."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더 있지. 첫 번째는 마존들이 반드시 흉수를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거지. 팔마존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교는 물론이고 무림맹이나 사도맹에게까지 보이려는 거다. 이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

"풍천교주까지 움직인다고 보여주려는 거군요. 마존을 건들면 반드시 복수한다고."

"그렇지."

"두 번째 이유는요?"

"교주님 때문이네."

"아버지요?"

"교주님에게 보이려는 거다. 현재 풍천교와 천마신교가 우방인 이유는 교주 때문이 아니라 팔마존 때문이란 것을 과시하려는 거다."

팔마존은 끝없이 아버지를 견제해 왔다. 어쩌면 아버지가 나를 끌어들인 것 역시 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 번째 이유는요?"

"자네지."

"저요?"

"만약 자네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면, 풍천교주는 자넬 통해서 그 사실을 반드시 알아낼 거야. 자네란 사람을 파악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죽였는지 알아내겠지."

맞는 말이었다. 풍천교주라면 내 눈에 혈안정수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숨겨야 한다. 만약 밝혀지면 팔마존이 해오는 복수는 둘째치고, 그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후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한데 괜찮으십니까?"

"나? 내가 왜?"

"저와 공범이 되셨잖습니까? 저와 밤새 술을 마셨으니, 함께 움직였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술 마시다 잠깐 졸았는지도 모르지."

여차하면 그렇게 빠져나가겠다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를 데리러 팔마존 중 누가 갔습니까?"

"팔마존이 간 것은 어찌 알았나?"

"당연히 중요한 사람이 갔겠지요. 전부가 다 몰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닙니까?"

"마불이 갔네."

팔마존 중 일인인 마불은 풍천교주와 친분이 깊었다. 그를 보냈다는 것은 풍천교주를 반드시 데려오겠다는 의지.

내가 웃으면서 혈천도마에게 물었다.

"쫓아가서 마불을 죽일까요? 아님 출발하는 풍천교주를 죽일까요? 아니면... 둘 다 죽일까요?"

"그랬다간 새외 무림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가 분열되면 병신 같은 무림맹 놈들은 잘 있다 갑자기 마교 타도를 외칠 테고. 사도맹은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눈이 시뻘게지겠지."

"저와 시원하게 피 한 번 뒤집어쓰시죠."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으시게."

"어르신과 저, 공생공사(共生共死) 아니었습니까?"

"이공자,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생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네. 나, 가네."

혈천도마가 내 방을 나갔다.

나는 마지막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풍천교주가 온단 말이지?'

* * *

다음 날 아침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태사의에 앉아 있지 않고 창가에 서 계셨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이리 오너라."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가 서 계시는 곳까지 걸어갔다.

"벌써 서환진이 시끄럽다고 들었다."

"귀신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권력 싸움 시작이겠지요."

하루아침에 주인을 잃은 서환진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의 중심에 슬픔은 없었다. 평소 오직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섭혼마존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귀술사들은 오직 다음 섭혼마존이 누가 될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잠시 나갔다 오너라."

"어딜 말씀이십니까?"

"중원에 있는 황천각 지부를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또한 팔마존이 풍천교주를 불렀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를 걱정해서 외부로 내보내려 하신다는 것을.

"절 내보내는 일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유는?"

"팔마존이 섭혼마존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풍천교주를 불렀습니다."

과연 아버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계신 거다. 어쩌면 마존들 중 누군가 아버지의 수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실력 좋은 세작(細作)이 팔마존의 동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 있거나.

"이런 시기에 교를 나가면 저를 의심할 겁니다."

"이미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풍천교주를 부른 거고. 풍천교주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네가 어떤 수법으로 섭혼을 죽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반드시 네 짓임을 밝혀낼 거다."

"저 아닙니다, 아버지. 무림맹에서 자객을 보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저들이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건데, 그들은 지금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무림맹과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해도 적어도 사흘 전에는 그 징후를 포착해낼 것이다.

"정말 이번 일을 무탈하게 넘길 자신 있느냐?"

"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

예전에도 같은 질문을 하셨다. 같은 대답을 다른 식으로 했다.

"아버지가 저였다면, 교를 나가셨겠습니까?"

"아니."

"전 아버지 아들입니다."

"그래, 넌 내 아들이지, 내가 아니지."

"대신 아버지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흉내의 대상이 아버지라면, 흉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버지는 더는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한 가지는 명심해라."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실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풍천교주는 죽이면 안 돼."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절 걱정한 것이 아니라, 풍천교주를 걱정한 겁니까?"

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덧붙였다.

"다른 마존도 안 돼! 당분간은 아무도 죽이지 마."

"제가 죽인 것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잡아뗐지만 이미 아버지는 문을 닫고 나간 후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피의 길을 걸어 천마전을 나왔다.

풍천교주를 죽이다니요? 제가 풍천교와 풍천교주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데요. 제겐 보물창고처럼 고마운 사람입니다. 다만 이곳까지 와서 저를 압박한다면... 그는 제게 더 고마운 사람이 될 겁니다.

제59회 때론 속보다 껍데기가.

눈에 혈안정수를 넣은 것을 들키지 않을 방법은 내가 아는 한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은 환골탈태(換骨奪胎)다. 신체가 완전히 바뀌면서 혈안정수를 넣은 것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 방법은 구화마공의 대성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서 지금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두 번째 방법은 몸 전체가 아니라 내 눈만 바꾸는 것이다.

눈을 바꿀 수 있느냐고?

있다. 당대에 딱 한 사람이 내 눈을 바꿔줄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본교 내에 있다. 문제는 과연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거다.

그 당사자는 피 냄새를 가득 풍기며 나를 맞았다.

"이공자, 어서 오게."

"잘 지내셨습니까, 마의 어르신."

그 사람은 바로 마의였다. 옷에 묻은 피는 환자의 피였다.

"나야 항상 같지."

"쉬어가면서 일하십시오. 피곤해 보이십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마의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황천각주가 된 후 여러 차례 일로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온 약초가 있어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내가 준비해 온 선물을 그에게 주었다. 일반적으로 의방에 들어오는 약초가 아닌, 내가 특별히 외부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오, 이렇게 귀한 약초를. 고맙네."

"별말씀을요."

"자, 차라도 한잔하세."

"네."

마의와 같이 차를 마셨다. 몇 마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의가 넌지시 물었다.

"내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은데?"

"맞습니다. 사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하시게."

"바쁘신 분이니 말 돌리지 않겠습니다. 제게 신안술을 시술해 주십시오."

순간 마의는 깜짝 놀랐다.

신안술(新眼術).

무인의 눈을 강화시키는 시술로, 신안술을 시술받으면 일반 시력은 물론이고 동체시력까지 비약적으로 좋아진다. 또한 눈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영향에도 쉽사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 빛이나 어둠, 물 속이나 연기 속, 그 모든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눈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 효과가 너무 뛰어나서 신안술(神眼術)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신안술을 시술받으면 풍천교주가 내 눈을 살펴도 혈안정수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안술은 오래전에 실전된 비술로 알려져 있었다.

마의의 표정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내가 신안술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우연히라도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마의는 모른다고 잡아떼지 않았다. 그가 궁금한 것은 내가 어찌 알았느냐였다.

마의가 신안술은 익혔다는 것은 지금부터 먼 훗날 알게 된다.

대법 재료를 구하러 다시 교로 돌아왔을 때, 마의는 이미 죽은 후였다. 그의 수제자인 호백(湖伯)이 신의의 자리에 있었는데, 모든 사실은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호백은 당시 교주였던 주백도에게 신안술을 바쳤다.

그 일로 인해서 마의가 신안술과 그에 필요한 약물을 제자인 호백에게 전해준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지 않았을 때, 마의가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아!"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내게 알려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수제자 호백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마의가 신안술을 펼쳐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신안술의 재료가 자신에게 전해져서 당시의 교주에게 펼쳐줄 수 있었다고, 모든 게 사부 덕분이라고 회고한 것이다.

그랬기에 마의는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신안술을 거절했지만,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은 신안술을 내게 시술해 주란 의도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안술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인 극락관음초(極樂觀音草)의 열매는 구하기가 극히 어려워 신안술은 당대에 딱 한 번만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신안술을 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마의가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기다렸는데, 이윽고 마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신안술을 펼쳐주면 이공자는 내게 무엇을 해줄 텐가?"

"지금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대신...."

마의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교주가 되겠습니다."

"!"

"교주가 되면 마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마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의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나는 안다.

마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신안술을 거절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신안술을 받으면 마의의 부탁을 들어줘야 해서.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는 달리 거절할 생각이 없다. 마의의 부탁을 들어줄 작정이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텐가?"

"네. 대신 딱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부탁이면 충분하네."

"약속드립니다."

이제 마의가 판단해야 할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후계자가 될 자신이 있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후계자가 될 것 같습니까?"

최근 내 행보라면 분명 마의도 주목하고 있었을 터.

"자네의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오히려 넘친다고 볼 수 있지. 하나... 자넨 너무 맑아. 과연 교주 자리에 어울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네."

"오히려 잘됐습니다."

"무슨 뜻인가?"

"신안술로 이 맑은 눈을 감춰주십시오. 새 눈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농담처럼 말했지만 마의는 웃지 않았다. 그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두고 있었고, 그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이니 숙고하시고 연락주십시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자, 끝으로 하나만 묻지."

"네."

"자네가 교주가 되면 무림맹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인가?"

"그때 정세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정파든 사파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남자든 여자든 절대악이라 판단되면 반드시 처단할 겁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모범답안임을 알았기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 * *

사흘 후, 혈천도마가 의방을 찾았다.

마의는 진료하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며칠간의 고민이 피로가 되어 그의 얼굴에 쌓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죽을 때가 된 거냐?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냐?"

마의가 사람을 보내 은밀히 보자고 기별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조용히 이곳을 찾은 것이고.

"우리야 죽을 때가 머지않았지."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워라. 우리라는 말을 집어치우든지."

"너는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서 그러냐?"

"세상에 미련 없다 하는 놈들이 속은 더 지옥이더라."

두 사람이 이렇게 허물없는 친구로 지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날 부른 걸 보니, 사람 살리는 일이 이제 지겨워진 게냐? 같이 사람이나 죽이러 갈까?"

마의는 옅게 웃었다. 거르지 않고 말을 막 내뱉는 혈천도마와는 은근히 잘 맞았다. 성격이 달라서 친하다는 말, 혈천도마와의 관계를 보면 이해가 된다.

혈천도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뭐 하나 묻고 싶어서 불렀다."

"뭔데?"

"이공자를 왜 선택한 거냐?"

순간 혈천도마가 빤히 마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껄껄 웃었다.

"그놈은 정말 손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의방 샌님까지 싸움터로 불러내는 걸 보니. 대체 그건 왜 묻는 거냐?"

마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네 말마따나 사람 살리는 일이 지겨워진 모양이다."

혈천도마는 통쾌하게 웃었지만 마의는 여전히 진지했다.

"왜 이공자냐?"

"왜긴. 교주가 될 것 같으니까 선택했지."

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교주가 검무극에게 자신의 신안술을 알려줬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 사실로 봤을 때,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마의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평생 딱 한 번 쓸 기회를 쓰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 그로 인해서 자신의 평생 숙원을 이루느냐 마느냐도 달려 있었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혈천도마의 솔직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놈에게 말려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천외신단을 녀석의 입에 넣어 주고 있더라.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

"이공자가 그러더군. 자기 마도에서는 객잔의 탁자를 부수지 않는다고. 그래서 선택했다."

마의는 잠시 멍하게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이런 황당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검무극의 마음도, 혈천도마의 마음도.

"하긴, 넌 그만 부술 때도 되었지."

마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불러놓고 어디 가? 한잔해야지."

"다음에. 그땐 내가 살게."

"늙은이들에게 다음이 어디에 있나? 오늘 사!"

하지만 마의는 이미 그곳을 나간 후였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혈천도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부지런해서 쉽게 죽진 않겠다."

물론 마의가 아니라 검무극을 두고 한 말이었다.

* * *

자다가 눈을 떴다.

천마호신공이 방문자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침상에서 일어나 검을 차고 밖으로 나가보니 마당에 마의가 서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나는 마기를 전혀 발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는가?"

"잠을 자다 눈을 딱 떴습니다. 마치 운명처럼요."

굳이 운명이란 통속적인 말을 덧붙인 이유는 나이 든 사람에게 너무나 잘 먹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운명이었겠거니 하지 않으면 정리하기 힘든 일들이 많은 나이였으니까.

"나는 평생 사람을 살려왔네."

"훌륭하신 일입니다."

마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라네. 내가 사람을 구한 것은 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른 척 물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의가 본교에 투신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의원으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천의(天意)를 거스르는 일. 그래서네. 그 죄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애썼지."

긴 한숨을 내쉰 마의가 내게 물었다.

"자네가 교주가 되면 그 사람을 죽여줄 텐가?"

"네."

"왜 누군지 묻지 않나?"

"어르신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악인일 테니까요. 저는 어르신을 믿습니다."

"내 속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때론 속보다 껍데기가 중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의라는 껍데기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껍데기가 아니죠. 마의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까지 들인 노력을 저는 믿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믿음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삶과 죽음, 그가 죽이려는 사람까지, 그에 대해서 전부 다 알고 있기에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내 눈을 그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를 죽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네. 잘못하다간 여러 사람이 휘말려 죽게 될 걸세. 그래서 내 바람은 다른 희생 없이 그자만 죽이는 거지.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아버지가 거절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아버지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데, 한 개인의 원한을 위해 움직이기에는 천마라는 자리는 지극히 무거웠으니까.

"제가 더 강해져서 불필요한 희생 없이 그자만 죽이겠습니다."

"약속해주겠나?"

"네."

"만약 내가 먼저 죽게 되더라도, 이 약속을 지켜주겠나?"

"약속하겠습니다. 놈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을 때 그자에게 속삭여주겠습니다. 마의께서 보낸 검이라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지 마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윽고 마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네, 자네에게 신안술을 시술해 주겠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감사는 신안술이 끝나고 난 후에 하게. 자, 가세."

"지금 하시려는 겁니까?"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해야지. 내일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 알고? 왜? 싫은가?"

"그럴 리가요. 가시죠."

난 성큼성큼 걸어가는 마의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이 눈으로 보는 마지막 세상이다.

제60회 숨겨둔 꼬리가 많답니다.

마의가 향한 곳은 의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로 나를 데려갔는데, 그곳 지하에는 중요한 시술을 위한 밀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벽을 채운 장식장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온갖 약병과 약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약초에 관해서는 전문가인 나조차도 처음 본 약초들이 많았다.

"위험한 시술이니만큼 준비할 것이 많네."

"천천히 하십시오."

"실패하면 어쩔 텐가? 눈이 실명할 수도 있네."

그가 내 의지를 떠보기 위해 물어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신안술에 실패한다고 실명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런 위험성을 지닌 시술이었다면, 감히 천마에게 시술을 바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의가 실패하는 환자라면, 그건 제 운명이 박복해서겠지요."

내 믿음에 마의는 피식 웃으며 비밀금고에서 시술에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왔다.

곧이어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을 피웠고, 침을 소독했다. 여러 약물을 배합했고 어떤 것은 끓여서 식히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상의를 벗은 채 침상에 누워서 약향이 나는 따뜻한 천을 두 눈에 대고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 눈에 여러 약물을 시차를 두고 넣었다. 물처럼 맑은 것도 있었고, 피처럼 붉은 것도 있었다. 독물처럼 녹색의 액체도 있었고, 내 검강처럼 푸른 것도 있었다. 나는 마의를 완전히 믿었기에 마음 편히 눈을 맡겼다.

여러 약물을 눈에 주입한 후 마의가 침을 놓았다. 눈 주위는 물론이고 얼굴과 가슴까지 침을 빼곡히 놓았다.

"자, 이제 한숨 자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천마호신공에게 마음으로 말했다. 너도 오늘만큼은 긴장 풀고 푹 자라고.

오랜만에 잘 잤다.

이렇게 푹 자본 적이 얼마 만인가 싶을 정도로 곤히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굴과 몸에 놓았던 침은 이미 다 회수된 후였다.

마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내가 깨어나자 내 쪽으로 걸어왔다.

"기분이 어떤가?"

"좋습니다."

"눈은?"

"더 좋습니다."

정말 눈이 맑아졌다. 원래도 좋던 시력이 더 좋아졌고, 시야가 너무나 맑았다. 안개 속을 나온 것 같았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 지금까지 눈을 감고 살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주위가 선명했다.

"따라오게."

그와 함께 밀실을 나와 일 층으로 올라왔다. 우린 나란히 창가에 섰다. 해는 중천에 있었다.

"해를 쳐다봐보게."

해를 정면으로 쳐다봤기에 눈이 부실만도 했는데, 하나도 부시지 않았다.

"어떤가?"

"눈이 부시지 않습니다."

"저기 멀리 보게."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을 거리에 있는 것들이 또렷이 보였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잘 보였다. 거기다 눈에 힘을 주자 보이지 않아야 할 것들까지 다 보였다.

"잘 보입니다. 저기 나뭇가지에 기어가는 개미까지 보입니다."

내 말에 마의가 웃었다.

"농담 아닙니다."

"알고 있네, 농담 아닌 것. 기뻐서 웃었다네."

"아, 정말 대단합니다."

"자, 다시 날 따라오게."

이번에는 마의가 나를 지하 밀실에 마련된 캄캄한 방으로 데려갔다.

내력을 끌어올려야 희미하게 보였던 시야가,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잘 보였다.

"잘 보입니다. 저기 놓인 약병도, 벽에 걸린 그림도, 다 잘 보입니다."

"됐네, 시술은 완벽하게 성공했네. 자네 눈은 다시 태어났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신안술을 원할 때만 해도 주목적이 풍천교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신안술의 효과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신안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 상태를 표현할 말은 이것뿐이리라.

내 눈은 대성을 이루었다.

어두운 방 밖으로 나온 나는 마의에게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당황한 마의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왜 이러나?"

"어르신께서는 평생 한 번 쓸 수 있는 비술을 제게 쓰셨습니다. 이 은혜는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반드시 갚겠습니다."

"고맙네. 자네가 교주가 되면 누굴 죽여야 할지 말해주겠네."

마의가 내 손을 굳게 잡았고, 나도 힘을 주었다.

마의의 거처를 나서는데 사방에 보이는 것이 달랐다. 정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혈안정수도 그렇고, 신안술도 그렇고. 풍천교와 내 눈은 운명처럼 얽혀 있었구나. 어쨌든 고맙소, 풍천교주.'

그렇게 풍천교주는 의문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 * *

무공에 있어 눈이 좋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초식은 더 정교해졌고, 정교해진 만큼 강해졌다.

사실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실전에서일 것이다. 이전에는 피할 수 없었던 공격을 피할 것이고, 볼 수 없는 기회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쾌속보로 달릴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중에 대성을 이루면 극한의 속도를 과연 내 시력이 받쳐줄까 걱정했는데, 이제 그 걱정은 사라졌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눈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나는 황천각 일은 서대룡에게 맡긴 후, 한동안 수련장에 틀어박혀서 무공과 몸이 새 눈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동안 무공수련에 푹 빠져 있다가 오랜만에 이안을 찾아갔다.

"이안아, 놀자!"

이안은 무공수련에 열중이었다.

"안 돼요! 이십 번 반복해서 수련해야 해요."

"뭔 초식 수련을 하루에 이십 번이나 해?"

"하루에는 육십 번이에요. 저녁 수련이 이십 번이지."

"맙소사. 병난다, 병나."

"이미 병났어요. 수련 안 하면 잠이 안 오는 병요."

"오늘만 쉬자. 나랑 가서 술 마시면 잠 잘 올 거야."

"다하고요."

"몇 번 남았는데?"

"여덟 번요. 그렇게 방해하시면 더 오래 걸릴 거예요."

나는 짐짓 입을 삐죽 내밀며 그녀가 무공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리가 덜 돌아갔다."

"왼쪽이 빈다."

"이번에는 더 빠르게."

그녀의 자세를 교정해주면서 나는 이안이 무공에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그녀는 금방 이해하고 잘 배웠다.

나는 그녀의 초식을 두어 번 더 지켜보다가 오늘은 해줄 말이 없음을 느끼고 천마호신공 수련에 빠져들었다.

섭혼마존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수련했던 무공이 천마호신공이었다. 천마호신공은 익히면 익힐수록 느낌이 새롭다.

언제나 그렇듯 나와 가장 깊이 교감한다. 마치 살아있는 무공을 익힌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긴, 이 정도로 깊이 교감하니 잠든 나를 깨우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천마호신공의 수련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눈을 떴을 때, 이안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끝났어?"

"네. 이십 번 다 채웠어요."

"가자, 술 마시러! 배고파 죽을 것 같아."

"당연하죠. 꼬박 사흘을 굶으셨으니까요."

"뭐? 사흘이라고?"

"네. 무려 사흘 동안 운기조식하셨어요."

"내가?"

"절 찾아오신 것이 사흘 전이었어요. 무아지경에 빠져드신 것 같아서. 일부러 말도 걸지 않았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몇 시진은커녕 한 시진도 수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 잤나 본데?"

"혹시 그러신가 해서 살폈는데, 주무시진 않았어요.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기도 하셨고요."

정말 무아지경에 빠졌었나 보다. 수련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깐만."

나는 자리에 앉아서 한차례 천마호신공을 발휘했다. 이전보다 훨씬 원활하고 정확하게 진기가 운용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천마호신공에 큰 진전이 있었다. 그간 계속되었던 수련이 쌓여 있다가 이번 무아지경을 통해 경지의 상승으로 이어진 모양이다.

"성과가 있으셨죠?"

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하게 밥 사도 될 정도로."

"축하드려요, 도련님."

"고맙다. 네 덕분이다."

"왜 제 덕분이죠?"

"네가 수련 끝까지 해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았으면 옆에 앉아서 무아지경에 빠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 그렇네요! 밥 사세요!"

"사야지, 먹고 싶은 것 다 사주마!"

서둘러 이안과 함께 수련장을 나섰다.

"너도 굶었지?"

"아뇨. 저는 밥 먹었어요."

하지만 이안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내가 굶은 채 운기조식을 하는데, 혼자서 밥을 먹을 그녀가 아니었다. 혹시 내 무아지경을 방해할까 봐 사흘간 수련도 멈추었을 것이다.

"미련곰탱이."

"아니죠. 정말 미련곰탱이면 굶은 것을 들키지 않았겠죠. 전 이렇게 슬쩍 들키면서 제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수하인지 과시하잖아요? 오히려 점수를 딸 절호의 기회로 삼았죠."

"여우다, 여우."

"그럼요, 아직 숨겨둔 꼬리가 많답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도련님과 함께 걷는 것 오랜만이에요."

"그렇구나."

"좋네요, 역시."

역시란 한마디 덧붙임이 사람 기분을 참 좋게 만들었다. 나도 좋다, 이안아.

이안과 함께 마가촌 풍류주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주님."

반갑게 맞아주는 조춘배를 보니 그의 요리가 떠오르며 더욱 허기가 졌다.

"빨리 내주시게!"

"네, 경공으로 달려갑니다!"

술만 먼저 주고 조춘배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우린 빈속에 술부터 한잔 마셨다.

"캬아! 죽인다."

"으윽! 독해요. 저는 정말 죽겠어요."

잠시 후 요리가 나오자 우린 딴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게걸스럽게 다 먹어 치웠다.

그렇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술과 함께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평소 궁금했던 것을 내게 다 물었고 나는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했다.

내 비천검법은 십성 대성이 깨진 후 그 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시술받은 신안술이 좋은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대룡에게로 화제가 넘어갔다.

"참, 서 조사관은 잘 있죠?"

"잘 있겠지. 나도 요즘 수련한다고 통 못 봤다."

"다들 바쁘네요."

"모르긴 해도 잘할 거다. 일도, 수련도."

"서 조사관이 도마 어르신과 잘 지내는 것 보면 신기해요."

"잘 지내는지는 모르지. 만날 혼나서 매일 밤 베개가 젖을 수도 있어."

이안이 재밌다며 깔깔 웃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은근히 도마 어르신이 좋은 분 같으세요."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돼. 서 조사관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네게도 좋은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상대는 마존이다. 조심해."

"네, 명심할게요."

"언젠가는 네가 실력으로 이겨야 해."

순간 이안이 흠칫했다.

"제가요?"

예전처럼 '제 실력으로 어떻게 마존을 이길 수가 있겠어요?'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비천검술을 전수받은 이상, 그런 말은 나나 아버지에 대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노력할게요."

"알지? 어설픈 실력이 제일 먼저 죽는다. 기왕 발을 디뎠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네!"

나는 술잔을 들었고 그녀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비천검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귀영대 수하들을 모으자. 조장급만 제대로 모으면 나머지는 쉬울 거야."

"혹시 생각해 두신 사람들이 있나요?"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둘 정도는. 나중에 나와 가서 고용해야지."

"누구죠?"

"지금 알면 괜히 놀라기만 할 거야. 때가 되면 알려줄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벌써 제 심장이 막 뛰네요."

"그럴 때는 술이라는 좋은 해결책이 있잖아?"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우리 기분만큼이나 경쾌했다.

"술도 더 시키고 안주도 더 시켜요."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은데?"

내 시선을 따라 이안이 일 층을 내려다보았다.

주점으로 빠르게 들어온 서대룡이 이 층 우리 자리로 올라와서 앞으로 내가 요리해야 할 새로운 대상에 관해 보고했다.

"지금 막 풍천교주가 본교에 도착했습니다."

제61회 나도 죽일 건가?

풍천교주와 마불이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풍천교주 능파소(凌派素)는 풍채와 혈색이 좋았고 벽이라도 뚫을 것 같은 강렬한 안광의 소유자였다. 그는 새외제일공으로 알려진 앙천대마기(殃天大魔氣)를 대성한 인물로 새외 무림을 지배하는 절대자였다.

한때 혈교가 천마신교와 힘을 나란히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풍천교로 넘어와서는 상대적으로 힘이 많이 약해져서 천마신교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그는 풍천교를 떠나오면서 교를 대표하는 열 명의 최고수들인 십대마인(十大魔人)과 일백의 정예 혈나군(血奈軍)을 함께 데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뢰종과 혈불을 비롯해 그의 권좌에 있던 모든 신물을 가지고 왔다. 그냥 만년한철 철창 안에 넣어두고 데려온 고수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겠거니 싶지만, 그는 절대 신물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천마신교 내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한 사람이 바로 함께 걸어들어온 마불 저라반(楮羅般)이었다. 그는 보통 어른의 반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 누구라도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게끔 하는 것은 키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과 손은 물론이고 온몸이 황금색이었다. 그래서 마치 동자승처럼 작은 황금 불상이 움직이는 느낌을 주었는데, 바로 그가 익힌 황금대라마공(黃金大羅魔功)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피의 길을 걸어 태사의 아래까지 도착했다.

먼저 풍천교주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신교의 주인이시자 천하무림의 종주를 뵙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마 검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이게 몇 년 만이오?"

차분한 인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풍천교주의 귀에 박히 듯 날아들었다. 내공이 깃들지 않았음에도, 내공이 깃든 말보다 더 강렬하게 날아든다는 것은, 천마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당당한 풍천교주였지만, 천마에게만큼은 주눅이 들었다.

"근 십 년은 족히 된 듯합니다."

"잘 지내셨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탈합니다."

풍천교주는 천마를 만나면 절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싸움, 그 쓸데없는 것을 왜 하나?

이번에는 검우진의 시선이 마불을 향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네."

"친우를 만나러 간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풍천교주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마불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할 때, 검우진이 딱 잘랐다.

"시간도 늦고 오시느라 힘드셨을 테니, 오늘은 이만 가셔서 쉬시고 밝은 날 다시 봅시다."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는 형식적이고 짧게 끝났다.

원래 천마와 풍천교주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풍천교는 대대로 천마전이 아니라 팔마존과 친분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천마신교와 혈교 사이에는 몇 번의 전쟁이 있었다. 태생적으로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천마전과 맞서는 팔마존들이 풍천교와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풍천교주가 마불과 함께 천마전을 걸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새외 지존이 왔는데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해야지. 너무하는군."

"밤이 늦었잖소."

"그럼 더 잘 대접해야지."

마불의 불만에 풍천교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이간질하지 않아도 그쪽 교주와 친해질 일 없소. 그러니 그만하시오."

"이간질이라니요? 이건 그대의 자존심과 명예와 관련된 일이오."

풍천교주는 천마가 그의 말을 딱 자른 것을 이해했다. 마불은 때때로 사람의 감정을 건드는 말을 잘 내뱉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해서 상대의 속을 뒤집는 악취미가 있다.

"가서 시체부터 봅시다."

"내일 보지 않으시고요? 피곤할 텐데, 주무시고 내일 봅시다."

"잠은 죽어서 잡시다."

"그럼 그럽시다. 다들 뭔 고집들이 이리 센지."

마불이 그를 데리고 시체가 있는 장소로 갔다. 섭혼마존의 시체는 썩지 않도록 얼음창고처럼 추운 곳에 약물까지 발라서 보관하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곧장 시체를 검시했다.

마불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풍천교주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체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일일이 그의 장기와 혈맥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냄새를 맡기도 했고, 식어버린 시체에 내력을 주입하기도 했다.

이윽고 꽤 오랜 시간의 검시가 끝났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손상을 입었고 심장에 큰 무리가 갔소. 이건 섭혼술을 연속해서 발출하다가 벌어진 일이오."

"주화입마란 말씀이시오? 아니란 말씀이시오?"

"사인은 주화입마가 맞소. 하지만 섭혼마존은 자신이 개방한 세상에서 누군가 싸우다 죽은 것이 확실하오."

마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구려."

"확실하오. 문제는 섭혼술을 썼음에도 죽었다는 점이겠지요."

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믿기 어렵소. 서환진을 침입해서 섭혼을 살해하고 빠져나갈 정도의 고수가 누가 있을지."

그러자 풍천교주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천마가 죽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린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소. 섭혼은 정파 놈들을 상대할 때 가장 큰 전력을 차지하는 인물이오. 평소 교주가 섭혼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교주가 죽였을 리 없소."

조심스러운 풍천교주에 비해 마불은 편하게 교주를 언급했다. 교주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럼 흉수로 여겨지는 다른 자가 있소?"

"한 사람 있긴 하오."

"그게 누구요?"

"교주의 둘째 아들이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교주의 아들을 흉수로 의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교주의 아들쯤 되니까 이런 짓을 저지를 능력도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는 내내 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이런 위험한 상황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풍천교주는 아무런 감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짱돌이라도 하나 주워서 일어나는 것이 그였고, 돌로 머리통을 갈길 때까진 웃어주는 것도 그였으니까.

"내일 당장 이공자부터 봅시다."

* * *

서대룡이 아침 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려다 내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뜻이야?"

"이제 새외까지 각주님에게 덤벼들잖아요?"

"다 덤비라고 해."

"그러겠습니다. 그 싸우는 자리에 저만 없으면 되죠."

"미안하지만 그 자리에 항상 있어서 오른팔이라 불릴걸?"

서대룡은 짐짓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롭다는 시늉을 했다.

"자네, 무공을 배우면 어두워질 거라더니, 여전히 밝은데?"

"그게... 저도 어두워질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공 배우는 것이 즐겁습니다."

"무공 배우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혈천도마가 좋은 것은 아니고?"

잠시 사이를 두고 서대룡이 말했다.

"... 싫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진."

"아직까진? 점점 좋아질 거란 예고 같은데?"

"만약 그렇게 되면... 오른팔 잘라내시고 어두운 사람으로 한 명 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처럼 어둡고 삐딱하고 재밌는 사람을 어디서 구해? 내게서 달아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저야 좋지만요."

그때 황천각 수하가 보고했다.

"풍천교주가 오셨습니다."

"모셔라."

서대룡이 재빨리 집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지지 마십시오!"

"함께 있어 줘."

"인생은 각자도생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벌써 닮아가냐?"

서대룡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잠시 후 풍천교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새외지존을 뵙습니다."

내가 정중히 인사하자 풍천교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공자, 오랜만이네. 어릴 때 봤는데 이제 어른이 되었군."

"교주님은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풍천교주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일정이 바쁘실 터인데 어찌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멀리서도 듣는 귀가 있네. 근래 이공자의 명성이 본교에까지 들리더군."

"허명에 불과합니다."

"겸손하기까지."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에 그와 마주 앉았다.

"섭혼마존의 죽음에 교주께서 크게 상심하신 것 같았네."

그가 슬쩍 아버지를 언급하며 섭혼마존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내 대답 한마디 한마디에서 뭔가를 파악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아꼈던 마존 중 한 분이셨지요."

"대체 누가 죽였을까?"

"살해당하신 겁니까? 주화입마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때 풍천교주의 눈에서 한 줄기 기운이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표가 나지 않은 은밀한 기운이었을 텐데, 내게 그 기운이 눈에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무형의 기운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원래라면 그냥 느껴지기만 했을 기운인데, 이제는 그것이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단지 신안술 때문만도 아니고, 혈안정수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내게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혈교 무공에만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인의 기운에도 통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왜 웃나?"

"오랜만에 뵈니 기분이 좋습니다."

"나 또한 기분이 좋네."

이 와중에도 그의 기운은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온몸 구석구석을 다 살핀 후 마지막으로 내 눈을 살폈다. 혹시라도 혈안정수와 같은 신수를 눈에 넣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안술로 새롭게 변한 내 눈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발출한 기운이 다시 눈으로 회수되었다.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은 정말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이만 가보겠네."

"아쉽네요. 좀 더 있다 가십시오."

"얼굴 봤으니 됐네. 바쁜 사람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뵙지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생긴 능력, 고맙소.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풍천교주는 내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물론 그가 원해서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운명적으로 자꾸 뭔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그가 싫지만은 않다.

* * *

검무극의 집무실을 나선 풍천교주를 마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소?"

"이공자는 전혀 섭혼술과 관련이 없었소. 섭혼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그를 제압하려면, 불문이나 도가의 무공을 극한으로 익히거나, 비슷한 수준의 사공을 익혀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소."

"그 말씀은 검무극이 흉수가 아니란 뜻이오?"

"그렇소."

"확신하시오?"

"나를 믿지 못한다면 왜 이 먼 곳까지 부른 거요?"

"중요한 일이라 재차 확인한 것이니 기분 나빠 하지 마시오."

말은 그러했지만 마불은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확실하오."

"갑시다. 칠마존을 소집할 테니, 그 앞에서 이야기를 해주시오."

"됐소. 당신이 가서 내 말을 전하시오. 어차피 같은 말이니."

"그래도 되겠소?"

"알 될 것은 또 뭐겠소?"

마불은 풍천교주가 이번 중원행에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럼 그럽시다."

마불이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그가 칠마존의 회합에 가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불 하나 앞이 아니라 일곱 명 앞에서 거짓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풍천교주가 다시 검무극이 있던 처소를 돌아보며 나직이 되뇌었다.

"이공자 대체 어떻게 섭혼마존을 죽였나?"

놀랍게도 그는 검무극이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풍천교주는 마불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오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왔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를 넘어선,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선택이었다.

풍천교주는 마불이 사라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