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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

그날 밤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칠마존 회합을 마치고 곧장 나를 찾은 것이다.

"일단은 자네 섭혼마존을 죽인 혐의에서 벗어났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풍천교주의 눈을 피한 것인가?"

"저는 그날 밤새 어르신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요."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자네는... 승천하는 용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일들이 가능할 리가 없지."

"용은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미꾸라지에서 뱀 정도 되었지요."

"그럼 자네가 될 용은 대체 어떤 용이기에 뱀이 이 정도인가?"

내가 피식 웃자 혈천도마가 경고하듯 말했다.

"하나 긴장을 풀긴 일러. 칠마존 중에는 풍천교주의 말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까. 특히 가장 친하다는 마불이 가장 믿지 않는 눈치더군. 친하다는 말을 말지."

"어르신."

"왜?"

"혹시라도 마불처럼 딴마음이 생기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혈천도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그냥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웃고 있다가 서로 칼을 겨누는 순간이 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어서요.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거나, 아니다 싶은 것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괜히 참아서 화를 쌓지 마시고요. 지금까지 보신 거로 봐선, 제가 부족한 부분들은 제법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습니까? 절대 제가 어떻게 나올 거라 단정 짓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입을 열었다.

"이공자."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혈천도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반대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쩔 텐가? 자네가 봐서 내가 너무 못마땅하고 부족해 보이면? 내가 자네의 그 새로운 마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면? 지금은 괜찮고 좋아 보이는데, 볼수록 낡고 구태의연하고 지겨운 사람처럼 느껴지면? 그때 가서 매력이 하나도 없어지면 그땐 어찌할 텐가?"

혈천도마가 뜨거운 눈빛으로 덧붙여 물었다.

"나도 제거할 건가?"

제62회 주기 싫은 걸 주십시오.

의외였다.

혈천도마가 자신도 죽일 거냐고 물어올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제 마도는 객잔의 탁자를 부수지 않을뿐더러, 친구를 죽이지도 않습니다."

순간 혈천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내가 자네 친구인가?"

"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일반적인 친구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을 그는 알 것이다.

"그땐 어쩔 거냐고요? 저도 편하게 말씀드릴 겁니다. 눈치 보지 않고, 어르신 배려하지 않고, 그냥 말씀드릴 겁니다. 이러이러해서 마음에 안 듭니다. 너무 구태의연하십니다! 너무 지겹습니다. 예전 그 매력 다 어디 갔습니까? 찾아내십시오! 그렇게 머리 맞대고 어떻게 하면 서로 마음에 들지 방법을 찾을 겁니다."

"방법을 못 찾으면? 그래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노력했는데도 안 바뀌면 할 수 없죠. 지난 추억 뜯어먹으며 가야죠. 한데 노력조차 안 하신다? 그럼 한판 붙어야죠. 누가 잘못하든, 뭐가 불만이든 서로 두들겨 패면 속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나를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그를 만난 이래 가장 통쾌한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그가 내게 말했다.

"전에 자네에게 했던 말 중에서 바꿔야 할 말이 있네."

"뭡니까?"

"내 인생에 불운만이 가득했다는 말...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

이 순간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의 마음의 문이 조금 더 열리는 소리를.

나는 앞으로도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자주, 여러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순간이고, 그것은 구화마공만큼이나 내게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화무기여, 지금 너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느냐?

* * *

혈천도마도 떠난 늦은 밤, 뜻밖의 방문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풍천교주였다.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들어오시지요."

"긴히 할 말이니, 이리로 가세."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우린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섭혼마존이 여러 번 썼던 바로 그 마공이었다. 혈교 계열의 이 마공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풍천교주가 나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어떤가? 이 무공, 낯익지 않은가?"

풍천교주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처음 접하는 무공입니다."

"아닐 텐데? 섭혼마존과 싸울 때 이 공간을 보지 않았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풍천교주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자넨 이 공간에서 섭혼마존을 죽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딱 잡아뗐지만, 그는 확신에 찬 주장을 계속 펼쳤다.

"섭혼술을 펼친 공간에서 죽었기에 주화입마로 죽은 것처럼 보였지. 내 눈을 속일 순 없네."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증거는 없네. 어떻게 했는지 짐작도 안 되고. 한데 분명 자네가 죽인 것만은 확실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읽히지 않아서."

나는 내심 놀랐다. 결코 풍천교주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런 이유를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고 믿을 줄은 몰랐다. 이 믿음은 자신의 감을 믿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섭혼마존은 자네가 죽였네. 나 역시 자네를 읽지 못하니, 나도 죽을 수 있겠지."

"누구보다 현명하신 분께서 이런 오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정말 정확히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자넬 자극하려는 것 아니니 긴장 풀게. 난 섭혼마존처럼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기 실력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해십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자기 말을 계속했다.

"섭혼의 사술이 통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겠지. 구화마공을 전수받았겠지."

"만약 그렇게 확신하신다면 왜 마존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마존들 몰래 나에게 구화마공을 전수했다고 알리면 난리가 났을 텐데요. 특히 마불과는 친분이 깊다고 들었습니다만."

"무림에 친구가 어디 있나? 그때그때 필요해서 만나는 거지. 마불도 마찬가지일걸?"

"그럼 제게는 뭐가 필요하신 뭡니까?"

"이번 건은 내 호의일세. 오늘 찾아온 것은 내 호의를 잊지 말라고 생색 내려고 왔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풍천교주와 칠마존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아니면 애초에 그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가깝지 않은 관계였거나.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시죠. 아직까진 교주님은 제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뭐?"

"칠마존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이겠죠. 증거가 없으니까요. 칠마존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겁니까? 내가 이공자를 읽어낼 수 없어서 흉수는 바로 이공자요!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말씀 못 하시죠."

"적어도 자네일지도 모르겠다는 심증은 전할 수 있겠지."

"그럼 오히려 제게 유리하겠지요. 저놈 실력이 섭혼마존을 죽일 정도라고? 교주가 구화마공을 이미 전수했을 수도 있다고? 증거가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고. 앞으로 제가 국면을 휘어잡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오히려 저를 방해하셨습니다."

"뭣이?"

풍천교주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호의를 베푸시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대신 진짜 호의를 베푸세요."

잠깐 수세에 몰렸지만 그렇다고 풍천교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절대 어떤 결정도 내려선 안 된다는 인생의 가르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보세."

말이 끝나는 순간 주위가 바뀌었고 그는 곧장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음모의 냄새보다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우리 교주님은 제 발로 찾아와서 이렇게 호의를 베푸시려 하는구나.'

* * *

천마신교에서 제공해준 화려하게 꾸며진 큰 방에는 풍천교주와 신물들, 그리고 족쇄 사내만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음뢰종 앞에서 석상처럼 앉아 있던 족쇄 사내가 풍천교주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병신새끼야, 그걸 왜 내게 묻나?"

풍천교주에게 이런 욕을 한다는 것은 사지가 찢겨 죽을죄였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하나 폈다.

"이 방에 자네밖에 없는데, 그럼 누구에게 묻나?"

"네 뒤에 서 있는 사신에게 물어라. 네가 언제 뒈질지."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물어보니 사신이 이렇게 대답하네. 자네가 죽고 난 후에 내가 죽을 테니, 아쉽게도 자넨 내 죽음을 보지 못할 거라고."

"오래 살아서 좋겠다, 돼지 새끼야."

남자의 욕설에 세 번째 손가락을 펴며 풍천교주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두 번 남았네!"

남자가 풍천교주에게 할 수 있는 욕설이나 반말은 하루에 다섯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풍천교주가 욕을 들을 때 기뻐하는 이상 취향을 지녀서가 아니다. 이 족쇄를 찬 남자가 누구보다 뛰어난 후각을 지녀서도 아니었다.

풍천교주가 도를 넘은 무례에도 남자를 살려두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총명한 머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이 남자가 이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일 줄은.

하지만 한 방에서 오래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남자의 진가는 후각을 맡는 능력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판단력과 총명함이라는 것을.

그가 풍천교의 군사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날부터 풍천교의 진짜 군사는 족쇄 남자가 되었다.

욕을 들어가며 조언을 들었다. 그의 조언은 대부분 정확했고, 시간이 지나 이득으로 돌아왔다.

풍천교주는 남자에게 고통을 줘서 고분고분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족쇄 남자는 삶에 큰 미련이 없었고, 그렇게 압박을 가한다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 미련이 없는 남자였지만, 자결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 풍천교주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나?"

"너 같으면 좋겠냐?"

풍천교주가 네 번째 손가락을 펴는 것을 보며 남자는 족쇄를 손에 들고 흔들어댔다. 철렁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장소가 바뀌었다. 그곳은 푸른 들판이었다.

풍천교주는 그곳에서 남자의 만년한철 족쇄를 풀어주었다.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는 풍천교주가 목에 걸고 다녔다.

족쇄가 풀리자 남자의 표정도 풀어졌다.

자유가 된 남자는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하늘을 보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풍천교주가 와서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대가리만 큰 교주 놈아, 저리 안 비켜? 하늘 가리잖아!"

"가짜 하늘이다."

풍천교주가 마지막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 번의 기회를 다 쓰자 남자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교주님, 저는 그 가짜가 너무 그립습니다. 비켜주시지요."

마치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순간 태도가 바뀌었다.

풍천교주가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자네 조언대로 이공자에게 호의를 표했네. 한데 더 구체적인 호의를 요구하더군."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더없이 맑았다.

"정말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까?"

"이공자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면서요?"

"확실해."

"그런 사람이 후계자가 안 되면 누가 되겠습니까? 이제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섭혼마존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대단한 실력이긴 한데...."

"두렵습니까? 이공자가 교주님도 죽일까 봐?"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고. 마존을 죽이는 놈이 누군들 못 죽이겠나?"

언젠가부터 풍천교주는 족쇄 남자와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공자를 잡아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뭔가?"

"과연 천마신교 교주가 섭혼마존을 죽인 것이 이공자임을 모르고 있을까요?"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겁니다. 당대 천마는 비범한 사람입니다. 꿈도 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왜 조용히 있는 것 같습니까?"

"왜 그런데?"

"생각을 하십시오! 밥만 축내지 마시고!"

"방금 욕 아니었나?"

"아니었습니다. 목청이 컸을 뿐."

"조심하게."

"그러지요. 생각하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싫네. 생각은 자네가 하게. 내가 생각까지 한다면 자네가 살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남자는 풍천교주를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오는 말은 정중했다.

"비범한 사람이 침묵할 때는 뭔가 한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원일통?"

"거기까진 모르지요. 어쨌든 이번 일은 천마가 시킨 일이거나, 혹은 알고서도 모른 척한 일이 틀림없습니다. 섭혼마존은 팔마존 중 무림맹에서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중원인들이 교주님을 겁내듯이 말이죠. 한데도 아들이 섭혼마존을 죽이도록 허락했다? 이건 천마가 팔마존을 하나씩 교체하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팔마존을 자기 수족으로 바꾼 후, 천마가 어딜 칠 것 같습니까?"

"우리다?"

"당대 천마는 우릴 등 뒤에 두고 무림맹과 전쟁을 하진 않을 겁니다. 우릴 선봉으로 내몰거나, 아니면 없애고 전쟁을 시작하겠죠."

"젠장!"

"천마신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바람을 못 느끼면 뒈지는 겁니다. 섭혼마존은 다른 세상에만 처박혀 있다 이 바람을 못 느껴서 죽은 거죠. 우린 팔마존이란 벽 뒤에 숨어서 바람을 피하느냐, 천마라는 벽 뒤로 숨느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자네 생각은 천마다?"

"천마 쪽이 이깁니다."

"이유는?"

"검우진, 그 대단한 사람이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했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무조건 이공자에게 붙으십시오. 우선 선물부터 안겨서 그의 환심을 사십시오."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줘야 할까?"

"제일 주기 싫은 걸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자, 조언은 이제 그만!"

누워있던 사내가 소리쳤다.

"그만 방해하고 물러나십시오!"

이 공간만이 남자가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는 곳이었기에 가짜로 만들어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

답답했던 마음을 이렇게라도 풀려는 남자와는 달리 풍천교주는 뒷짐을 진 채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뭘 줄지를 결정한 풍천교주가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만들어진 공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제발! 조금만 더!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안 된다고!"

규칙까지 어긴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푸른 들판과 함께 남자의 자유도 사라졌다.

제63회 줄 것 잘 주고 와서는.

풍천교주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처음 찾아온 것처럼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닐세. 내 쪽으로 가세."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만들어진 공간은 황량한 황무지였다. 내 눈에는 이 공간을 나갈 수 있는 파훼법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바위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으니까.

"황량하지? 여기가 내 고향이라네."

"조용해서 좋습니다. 언제고 한 번 초대해 주십시오."

"그러지."

잠시 주위 경치를 바라보던 풍천교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서 생각해봤는데, 자네 말이 맞네. 나는 아직 자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더군."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 권의 비급이었다.

시공이환술(時空移換術).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무공일세. 이 무림에서는 오직 혈교의 정통 마공을 익힌 사람들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지."

"!"

"섭혼마존이 죽었으니 이 마공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겠군."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왔다.

섭혼술이나 사술은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이 무공만큼은 아주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 공간이 그대의 목숨을 구해줄 거야. 이 공간에 들어선 순간만큼은 자넨 원래 세상에서 사라진 상태니까."

그의 말처럼 시공이환술은 여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혼자만의 공간이 될 수도 있고 결정적인 순간, 위기를 벗어나는 회피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천마호신공을 배우는 셈이다.

회귀대법의 첫 재료인 음뢰종을 구하는 순간부터 혈안정수에 이어, 이 시공이환술까지. 나는 운명적으로 풍천교주와 깊은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어떤가? 이 정도면 호의로 충분하겠나?"

"넘칠 정도지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비급을 건네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면 그건 호의가 아니지요?"

내가 아쉬움을 표하자 그가 대답했다.

"먼저 내 패를 깐 것이 호의 아니겠나?"

이것저것 저울질하지 않고, 이 훌륭한 무공을 제시한 것부터 호의란 뜻이었다.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그러자 풍천교주의 시선이 다시 황량한 대지로 향했다. 바람이 모래를 일으키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풍천교주가 말했다.

"더는 이 먼지를 마시고 싶지 않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과연 그의 바람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중원진출이었다.

"그 첫걸음을 도와준다면, 시공이환술은 자네 것이네."

순간 설렜지만 나는 내밀었던 손을 과감하게 접었다. 욕심을 들키는 순간, 어떤 교섭도 불리해지는 법이니까.

"아쉽지만 그건 제가 결정할 내용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교주께서 결정할 일이겠지."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존들까지 나설 사안입니다."

풍천교 일이라면 반드시 마존들이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 비급을 주려는 거지."

"구체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이틀 후, 교주님과의 면담이 잡혀 있네. 그날 본교의 중원진출에 대해 담판을 지을 작정이야. 그때 자네가 함께 나서서 교주님을 설득해 주게. 그렇게 해준다고 약속하면 이 비급을 주겠네."

결과에 상관없이 비급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조건이 아니라 선물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나는 덥석 받지 않고 숙고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법이 틀렸습니다."

"무슨 말인가?"

"교주님과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아버지는 절대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풍천교의 중원진출.

지금껏 절대 불허였던 본교 정책과는 달리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풍천교를 쳐서 없애버릴 것이 아니면, 굳이 등 뒤에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둘 필요는 없었으니까. 친구보다 적을 더 가까이 두란 옛사람의 조언처럼, 풍천교를 가까이 두고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들고 있던 비급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면 해답을 들을 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나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풍천교주가 보통 담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어떤 내용인지 듣고 고맙다고 내미는 것과 미리 내미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으니까.

'이 사람, 내게 환심을 사려고 작정하고 왔구나.'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에 비급에 관해 설명했다. 어차피 내게 줄 비급이라면 최대한 기분 좋게 준다, 그는 거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물론 오랫동안 수련한 내가 펼쳤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이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지, 처음에는 주문을 온종일 외워도 만들 수 없을 거야. 무공에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도 빨라도 며칠, 길면 열흘 이상 걸릴 걸세. 오감이 둔한 자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평생 단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하기도 하네."

"교주님은 처음 만들 때 얼마나 걸렸습니까?"

"사흘 걸렸네."

사흘이면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는 의미.

"첫 시도 때 걸린 시간이 중요하다네. 그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후 비약적으로 시간이 줄어들게 될 거네. 다른 무공과는 달리 이 시공이환술만큼은 전적으로 무공을 펼치는 자의 무학에 대한 재능과 이해도에 모든 것이 달려 있지."

과연 나는 얼마나 걸릴까? 천무지체의 신체에 지금의 무학 수준이라면?

"이 공간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습니까?"

"내공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성을 이룬 상태에서 무리하면 반 시진 정도? 지금 자네와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내공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네."

"이 공간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까?"

영구적이란 말에 풍천교주가 피식 웃었다. 그 헛웃음에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의미가 담겼다.

"이곳에서 내공을 회복하는 양이 유지하는 양보다 많다면 영구적으로 공간을 열어둘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시공이환술을 익힌 사람들의 꿈이지. 혈교의 전대 교주 중에서도 아직 아무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네."

"가능하긴 하다는 뜻이군요."

"엄청난 내공을 지닌데다 하늘이 내린 무공 천재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 하늘이 내린 무공천재, 천무지체가 바로 나요.

나는 처음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걸릴까? 과연 언젠가 이 공간을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제가 이 비급만 챙기고 제대로 된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면요?"

"그럼 자넨 역대 교주 중 본교나 팔마존과의 관계가 가장 좋지 않은 교주가 되겠지. 아, 교주가 못 되겠지."

풍천교주가 비급을 내게 주었다.

"익히고 나서는 없애버리게."

아쉬움을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아까워하고 있었다.

"그러겠습니다. 대신 구결을 한 번만 해석해주시지요."

"해석을 해달라고?"

"이 비급 원본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옮겨 적으시다가 한 글자라도 틀렸다면, 문제가 생기겠지요."

"설마 날 의심하는 건가? 그럴 일은 없네!"

"교주님께서 해석해주시면 진의를 파악할 수 있겠지요."

순간 풍천교주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좋아. 구결을 해석해 줄 테니 잘 듣게. 워낙 어려운 무공이니 집중해서 잘 들어야 할 걸세."

그의 태도에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 내가 이 무공을 제대로 익힐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그만큼 무공이 어렵긴 했다.

하지만 난 풍천교주의 구결 해설을 들으면서 시공이환술의 묘리를 정확히 깨달았다. 한 차례의 해설로 내가 얼마나 깊이 이 시공이환술을 이해했는지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시공이환술을 전수받았다. 우리가 일시적 동맹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해답을 알려주게."

"풍천교가 중원진출을 하려면...."

나는 그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서환진의 후계싸움에 개입하십시오."

* * *

"내 것 빼앗기고 오니 더럽게 피곤하군."

거처로 들어온 풍천교주는 자리에 축 늘어졌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주기 싫은 것을 주면서 풍천교주로서의 고상함을 지켜내야 했으니까.

족쇄 사내는 그가 들어왔음에도 인사도 없이 혼자 멍하니 음뢰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풍천교주가 힐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자네가 시킨 대로 이공자에게 시공이환술을 전수해주었네. 이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족쇄 사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잘하셨습니다."

정중한 말에 풍천교주가 흠칫했다. 보통 욕부터 시작하는데, 이렇게 정중하게 시작한 날은 그가 기분이 안 좋은 날이다.

'조심해야겠군.'

이런 날은 꼭 마지막에 욕설이 한꺼번에 터지곤 했다. 자신도 사람인지라 쏟아지는 욕을 듣다 보면 일장에 그를 쳐 죽이고 싶을 때가 있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져선 안 된다. 족쇄 사내 없는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머리 쓰는 역할도 역할이지만, 매일 붙어 있던 말 상대가 사라지면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무슨 제안을 했는지 알고 하는 말인가?"

당연히 모르겠거니 생각했는데, 족쇄 사내의 입에서 검무극이 했던 말이 재현되었다.

"서환진 후계 싸움에 개입하라고 했겠지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자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나?"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알고 있었어? 뭐야, 알고 있었네. 이런 젠장! 자네가 그 방법을 아는데 아깝게 왜 이공자에게 시공이환술을 줘?"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은 섭혼마존의 제자들이 사부의 진전을 모두 이어받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교주님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겁니다. 교주님을 믿고 기꺼이 무공을 배우겠다는 사람을 후계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차기 섭혼마존의 사부가 될 수 있다면, 중원진출의 첫걸음을 뗐다고 볼 수 있겠지요.

듣고 나서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아,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감탄했었다.

한데 족쇄 사내도 알고 있던 내용이라면?

"아까운 비급을 왜 주냐고!"

검무극 앞에서야 대범한 척 굴었지만 아까워서 죽는 줄 알았다.

"말해! 어서 말해보라고!"

족쇄 사내 옆에 가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족쇄 사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뭐?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나 교주야, 교주라고. 너 오늘 죽어볼래?"

큰소리를 치면서도 풍천교주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욕이 터져 나올 순간이다.

하지만 족쇄 사내는 차분했다.

"우린 그 방법을 산 게 아닙니다. 이공자 역시 그 방법을 판 것이 아니고요."

"뭐?"

"교주님이 산 건 기횝니다."

"어떤 기회?"

"이공자를 교주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죠. 확고한 동맹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몇 번을 더 사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정말 자넨 이공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 확신하는가? 정말 차기 천마가 될 거라 확신하냐고!"

"모르죠."

"뭐?"

"앞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줄 것 잘 주고 와서 무슨 후회십니까?"

"아까우니까! 아까우니까 그러지!"

족쇄 사내에게는 교주로서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는다. 그를 죽이고 싶었을 때도 많지만, 그만큼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았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나?"

"이공자와 친해지십시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자네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이공자가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데...."

"이제 그만!"

결국 풍천교주의 걱정대로 족쇄 사내가 폭발했고 욕설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 한심한 새끼야! 선물까지 줘가며 기세 좋은 사람과 손을 잡았으면 그 기세에 올라탈 생각을 해야지, 왜 의심하고 지랄이야? 이렇게 머저리처럼 딴생각을 품으니 뒈지는 거다. 무림에서 개죽음당하는 것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머리 쓰랄 땐 안 쓰고, 안 써야 할 땐 쓰고! 믿어야 할 땐 죽으라 안 믿다가, 의심해야 할 땐 뜬금없이 쳐 믿고. 그래서 뒈지는 거다. 손가락 안 접어? 확 잘라버리기 전에! 오늘은 세지 마! 질문도 끝! 진짜 나 죽일 것 아니면 그 입 열지 마!"

입을 삐죽 내민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다 접자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들판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족쇄 사내가 정중히 말했다.

"교주님, 뭐가 궁금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제64회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풍천교주가 돌아가고 나는 처음으로 시공이환술을 펼쳐보았다. 내가 얼마나 빨리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할 생각은 없으니, 처음 만들어지는 공간이 최대한 빨리 만들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행히 풍천교주의 구결 해설을 들으며 시공이환술에 담긴 오의(奧義)를 꿰뚫어 파악했기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무공을 연마한 사람처럼 능숙하게 진기를 운용하며 구결을 펼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맑고 경쾌한 소리가 귓가에 울리면서 나는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성공이었다!

걸린 시간은 딱 두 시진. 재능이 뛰어난 사람도 며칠은 걸린다고 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낸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도 이렇게 빨리 공간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두 시진.

이 시간을 줄이고 줄여 섭혼마존이나 풍천교주처럼 자유자재로 이 무공을 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새로운 무공의 배움은 언제나 큰 설렘을 선사하지만, 시공이환술이 주는 두근거림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공간을 살폈다. 처음 만들어진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섭혼마존이 절벽을 만들고, 풍천교주가 황무지를 만들었듯 나 역시 나중에는 내가 원하는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롯이 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어서였을까? 놀랍게도 나는 이 텅 빈 곳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안락함을 느꼈다.

내가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과 노력과 후계 싸움과 화무기와 인간관계와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떨어져, 아무 생각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 그래서 좋았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기에.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유를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내공 소모가 엄청났다.

나중에 무공수준이 올라가면 갈수록 들어가는 내공이 줄어들겠지만, 지금 수준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내공이 빠져나갔다.

공간을 없애는 것은 쉬웠다. 구결을 외우자 곧장 앞서 들렸던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천천히 공간이 사라졌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 짧은 자유를 위해서는 심법으로 내공을 채워야 하고, 두 시진이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공을 채우고 다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이번에도 거의 두 시진이 걸렸는데, 체감상 아까보다는 아주 조금 빨라진 것 같았다. 그래, 자꾸 줄어들어라. 그래서 나도 순식간에 이 공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게 시공이환술을 펼쳐서 공간을 만들고 다시 없애고, 다시 만들어서 없애고.

날이 새도록 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에 푹 빠져들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만드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무공이 있다니!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 * *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 푹 빠져 있을 그 시각, 풍천교주와 마불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마불이 늦은 밤, 기별도 없이 풍천교주의 거처로 찾아온 것이다.

다탁에 마주하려던 마불은 종종걸음으로 족쇄 사내 앞에 가서 섰다. 마불의 키가 작았기에 거의 앉아 있는 남자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마불이 허리를 굽혀 족쇄 사내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마불은 조막만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릴까 말까 고민했다.

풍천교주는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불이 족쇄 사내를 구경거리 취급하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 수하를 무시하지 말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저 마불은 애초에 족쇄로 묶어 인간 취급 안 한 사람이 누군데로 시작해서 어쩌고저쩌고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불이 돌아서며 불쑥 물었다.

"이공자를 만났다고 들었소."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누런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풍천교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언젠가 교주가 될 수도 있으니, 만나봐야지요."

"교주는 대공자가 될 거요."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더라도 풍천교주는 알고 있었다. 마불이 대공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공자에게 혈천도마가 있다면, 대공자에게는 마불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꼭 그렇지만도 않더이다."

"무슨 말이오?"

"이공자가 황천각주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소? 누가 봐도 천마가 후계자 교육을 하는 것 같은데?"

"허허, 이 사람. 새외에만 있더니 통찰력이 떨어지셨구려."

마불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 후에 제 할 말을 이었다.

"나는 반대로 봤소. 후계자는 대공자로 삼을 거니, 이공자에게 다른 자리를 넘겨준 거요. 너는 그것으로 만족해라."

"그럴 수도 있겠구려. 오랜만의 중원행인데 대공자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니 아쉽소이다."

풍천교주는 결코 자신의 속내를 마불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대는 왜 대공자를 지지하는 거요?"

"대공자가 후계자가 될 테니까요. 당연한 질문을 하고 그러시오?"

"확신하는 이유는 뭐요?"

"그냥 내 예감이오."

풍천교주는 알고 있었다. 마불이 단지 예감만으로 이런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대공자와 관련한 일들을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다.

'이러니 어찌 우리가 친구라 할 수 있겠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공자와 관련해서는 절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테니까.

"이보시오, 교주."

"왜 그러시오?"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마시오. 이쪽에도 그대를 보는 눈이 여럿 있다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거요?"

"볼일이 끝났으니 꺼지란 말이시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내용은 날이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의 어조는 부드럽고 담담했다.

"그럼 그냥 두시오. 간만의 중원행을 즐기고 있으니까. 왜? 방값이라도 받아야겠소?"

"남의 집에 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셔야지, 안방에 똥을 싸서 되겠소?"

"허허. 어느 놈의 개가 싼 똥을 내 똥으로 오해받는구려."

"친구로서 해주는 충고요.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만 풍천교로 돌아가시오."

솔직히 풍천교주는 내심 당황했다. 마불이 와서 돌아가란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속마음을 떠나 겉으로는 그래도 서로 친한 척 예를 갖췄던 사이였는데.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존재요?"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시퍼런 칼날 그 자체였다.

"그럼 아니었소?"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지며 주위 공기가 일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러자 마불이 활짝 웃었다.

"농담이오, 농담. 이 사람, 장난 좀 쳤다고 정색하기는. 정말 새외에만 있다 보니 감이 많이 떨어지셨소. 실컷 놀다 가시오. 평생 나와 여기서 놉시다. 하하하."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풍천교주도 함께 웃었다.

"그런가 보오. 삭막한 모래바람을 너무 쐬니, 사람마저 삭막해졌나 보오. 새외는 그런 곳이라오."

"내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술 한 잔 사겠소. 우리 교주의 삭막함을 눈 녹듯 녹여주는 미녀들이 있는 곳에서 말이오."

"중이 그런 곳 다녀서 되겠소? 당신네 부처가 야단치지 않소?"

"내가 모시는 부처께선 때론 색불(色佛)로 현신하시곤 한답니다."

"좋구려."

두 사람이 마주보며 웃었다.

"자, 그럼 일간 자리 한번 가집시다!"

"좋소이다."

마불이 호탕하게 웃으며 방을 나갔다.

마불이 떠나자 풍천교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족쇄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초조해하고 있군요. 교주님이 이공자와 손을 잡으려는 것을 눈치챈 모양입니다."

"그게 이렇게 초조할 일인가?"

"그만큼 이공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잘 보고 있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자꾸 묻는 버릇 들이지 마시고."

"지금은 나와 본교의 생사가 달린 일이야. 그러니 비싸게 굴지 말게."

남자가 그를 향해 돌아앉으며 족쇄를 흔들었다.

풍천교주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남자는 날아갈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목에 걸린 열쇠로 만년한철 족쇄를 풀어주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자넨 왜 이리 이곳을 좋아하나?"

찰나의 순간 남자의 눈에 어떤 애틋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감정은 워낙 빠르게 사라졌고, 족쇄를 푼다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풍천교주는 보지 못했다.

"교주도 종일 족쇄에 묶여있어 보시오. 딱 하루만 역할을 바꿔봅시다."

"사양하겠네."

풍천교주는 잠시 사내가 자유를 만끽할 시간을 주었다.

오늘따라 사내의 감정은 차분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내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곧장 필요한 조언을 했다.

"마불은 어떻게 해서든 교주님을 돌아가게 만들 겁니다. 아마 자기네 교주를 이용하겠죠."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해서든 중원진출의 교두보를 세울 작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이공자를 찾아가서 이곳에 남을 방법을 물어보십시오. 그는 분명 방법을 알려줄 겁니다."

"혹 자네도 알고 있는 방법 아닌가?"

"설령 제가 알고 있더라도 이공자에게 선물을 주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왜 이렇게 이공자에게 매달려야 하는지."

"그럼 누구에게 매달릴 겁니까?"

순간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마는 자신을 싫어하고, 대공자는 마불을 비롯한 마존들이 지지하고 있었다.

혈천도마만이 정식으로 이공자와 손을 잡았을 뿐, 나머지 마존들은 중립이거나 대공자가 후계자가 될 거라 믿고 있는 형세. 그야말로 어디 한 곳, 발 디딜 곳 없는 신세였다.

"매달리기 싫으시면 새외에 틀어박혀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면 됩니다. 그럼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 수 있을 겁니다."

차라리 욕을 하면서 말했으면 덜 화가 났을 텐데, 정중히 말하니까 풍천교주는 더 화가 났다.

"그딴 말로 내 자존심을 자극하지 말게!"

하지만 남자는 풍천교주의 기분은 배려하지 않았다.

"이 싸움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잘 선택해서 끝까지 믿는다. 간단하죠?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패배자들은 끝까지 모르죠. 승리는 이 단순한 원칙들을 지키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걸요."

"잔소리는 그만! 훈계도 그만!"

"이 원칙을 못 지킬 것 같으면 마불 말처럼 우린 돌아가는 게 맞습니다."

닥치라며 버럭 화를 내려던 풍천교주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마불보다도 몇 배는 더 열받게 했지만, 듣고 보면 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풍천교주는 화를 내는 대신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공자에게 뭘 자꾸 주고 싶지 않다. 솔직히 아깝다. 아까워도 너무 아깝다. 앞서 준 시공이환술도 계속 후회하고 있다. 어제는 한숨도 못 잤다. 괜히 줬다는 생각 때문에."

새외무림의 지존인 자신이 이런 성격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핀잔을 듣고 산다는 것도.

"속이 좁고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풍천교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면서도 동시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감추고 살아왔는데, 한 사람만큼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데서 느끼는 동질감 같은 거였다.

"그래도 아까운 걸 어떻게 하나? 그런데 또 주라고?"

"선택했으면 믿는 겁니다. 주십시오. 다 주십시오."

"아깝다고! 하나도 주기 싫다고!"

보통의 경우라면 족쇄 사내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남자는 끝까지 차분했다.

"그냥 돌아가서 신물에 앉은 먼지나 닦고 종이나 치면서 삽시다. 교주 그릇에는 그게 딱 맞습니다."

풍천교주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빠져나올 거라고. 이 간장 종지 같은 소갈딱지를 부수고 빠져나오려고 이러는 거라고! 난 반드시 풍천교 본단을 중원에 세울 거다. 선대들이 못 이룬 것을 내 손으로 이룰 거다."

차라리 욕을 해줬으면 좋겠지만 족쇄 사내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

이후로 풍천교주는 한참을 생각에 잠긴 채 침묵했다. 화가 끔찍하게 많이 난 날이었는데, 오히려 가상의 공간은 그의 내공이 바닥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65회 거절하면 새외로 끌려갑니다.

일 때문에 마가촌 소지부에 갔다가 풍류주점에 들렀다.

언제나처럼 조춘배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출출해서 들렸소."

"좋아하시는 것들로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주방으로 달려가려던 조춘배가 문득 돌아서서 물었다.

"각주님. 뭐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시오."

"각주님이시라면 더 좋은 주점을 가셔도 될 텐데, 왜 항상 저희 주점을 찾아주시는지요?"

"그걸 아직도 모르겠소?"

"말씀해 주시지요."

"술 맛있지, 요리 맛있지, 분위기 좋지, 말 안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 알아서 척척 가져다주지, 주인장 잘 생겼지. 이유가 더 필요하오?"

"충분합니다.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활짝 웃으며 주방으로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곳 마가촌이 바로 내가 세우려는 마도의 기초가 되는 곳임을.

지금 와 있는 풍천교주도, 팔마존들도, 여기 있는 조춘배와 이곳 주민들만큼 중요하지 않다. 이곳을 잊는 순간, 제아무리 잘 포장해봤자 내가 팔마존들과 다른 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조춘배가 요리를 가져왔을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이 났다.

창가로 가서 내려다보니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덩치 큰 남자가 화를 내고 있었다. 딱 봐도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다.

"왜 째려봐 새끼야."

"안 째려봤습니다."

"째려봤잖아."

덩치는 망설이지 않고 손찌검을 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거짓말을 해!"

두들겨 맞던 남자는 가족과 함께 가던 길이었다. 부인이 나서서 말렸다.

"그만 하세요!"

"비켜! 계집이 어디서 재수 없게!"

놈은 여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거칠게 떠밀린 여인이 바닥에 쓰러졌고 예닐곱 살쯤 된 아이가 달려갔다.

"엄마!"

아빠와 엄마가 얻어맞자 아이는 너무 놀란 상태였다.

아이가 있음에도 덩치 사내는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가 울자 짜증을 냈다.

"안 그쳐 새끼야!"

아이에게까지 손찌검하려고 손을 번쩍 들던 순간.

퍽!

덩치가 뒤로 날아갔다.

쓰러져있던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덩치에게 한 방 먹인 것이다.

부인과 아이가 남자에게 달려갔다.

여인은 남편이 덩치를 쓰러뜨린 것에 놀랐다.

"당신이 어떻게?"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소."

때린 남자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서 가요."

"그럽시다."

가족들이 덩치를 피해 그곳을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뒤늦게 덩치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이 새끼! 어디 갔어? 찾아내서 계집년이랑 애까지 싹 다 죽여버린다. 아까 그놈 누군지 아는 사람? 어서 말해!"

놈이 구경하던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행패를 부렸다.

그때 이 층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 말에 덩치가 소리 난 쪽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지껄인 놈 누구냐?"

이 층 창가에서 손을 흔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만취한 남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급 무인 중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으니까.

뒤에 있던 조춘배가 평소 저잣거리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던 놈이라고 속삭였다. 말해주지 않더라도 평소 놈의 행실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구경꾼 중에서 날 알아본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경고해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눈이 마주쳤다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그 아비를 때릴 일이냐고."

"새파란 새끼가 어디서 훈장질이냐? 그리고 이 새끼야, 나도 맞았어!"

그건 내가 한 일이다.

만약 내가 나서서 놈을 벌줬다면 아이는 평생 아빠와 엄마가 맞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허공섭물로 물건을 움직이듯, 남자의 몸을 움직여 한 방 날린 것이다. 아이에게 용감한 아버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방 맞았다고 가족을 몰살해? 이게 그렇게까지 흘러갈 일이냐고?"

"내려와! 네가 대신 뒈져야겠다."

"그러잖아도 내려가려고 했지."

내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리자 덩치는 그때를 노려 내게 주먹을 날렸다.

날아든 주먹을 살짝 피한 후, 놈의 손목을 잡아 꺾었다. 꽈드드드득! 순식간에 팔이 빨래처럼 비틀렸다.

"으아아아악! 아파! 이 새끼. 너!"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놈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반대쪽 팔까지 꺾어서 으스러뜨렸다.

"으아아아아악!"

놈은 아파 죽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만취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기절했을 텐데, 그는 술기운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렇지?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지? 눈이 마주쳤다고 사람을 때릴 일도 아니고, 한 방 맞았다고 가족을 몰살할 일도 아니고, 술 처먹고 지랄했다고 팔 병신이 될 일도 아니었지?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느냐고. 아무 일 없어도 될 일인데."

남자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평생 남을 때리고 괴롭히며 살아온 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의 현명함도 발휘하지 못했다. 나중에 술 때문이었다고 후회하겠지.

"죽어!"

박치기하려고 몸을 날리는 놈의 단전마저 깨버리자 그제야 혼절했다.

나는 순찰하던 본교 무인들에게 남자를 황천각으로 이송하게 했다.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다 밝혀서 최대한의 형량으로 뇌옥에 가둘 생각이었다.

비참한 모습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인이라고 악행을 저질러도 된다는 법은 본교 어디에도 없소. 앞으로도 본교 무인 중에 이런 자가 나오면 저기...."

나는 주점 건너편 황천각 소지부를 가리켰다.

"저곳에 신고하시오!"

조춘배의 박수를 시작으로 모두 환호하며 박수쳤다. 과장 보태지 않고 마가촌에서 내 인기는 아버지를 능가했다.

조춘배가 와서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나도 함께 얻어먹으면 안 되겠나?"

돌아보니 놀랍게도 풍천교주가 서 있었다.

내가 조춘배를 보며 말했다.

"거절하시면 새외로 끌려갑니다. 풍천교주시니까요."

조춘배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요즘 나로 인해 거물급 손님을 여럿 받아본 그였는데, 이제 풍천교주까지 손님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층 항상 앉는 자리에 풍천교주와 마주했다.

"아까 했던 말, 진심인가? 마인이라고 악행을 당연시해선 안 된다."

"네."

"천마신교의 소교주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틀에 박힌 것은 싫어서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역시 난 구식이었구먼."

"젊은 사람들을 곁에 두십시오. 열린 마음으로요. 덕분에 혈천도마께서 요즘 젊어지셨습니다."

"그런가? 하하하."

나는 껄껄 웃는 풍천교주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한데 소문이 틀렸나 봅니다."

"무슨 소문?"

"교주님께서는 신물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외부에서 자주 뵙습니다."

지난번에 찾아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풍천교주는 자신의 원칙을 깨고 있었다.

"아마 풍천교의 교주보단 천마신교의 교주를 더 믿어서겠지?"

아버지를 믿기 때문이란 뜻이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일 것이다. 적어도 천마신교 내에서 자신의 신물이 도난당하게 두고 보지는 않을 거란 아버지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자, 드시지요."

고급요리만 먹는 풍천교주에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생각보다 형식을 따지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맛이 괜찮군."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술 대신 차를 마셨다. 풍천교주는 반주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식사 직후에는 항상 차를 마신다고 했다.

"시공이환술은 펼쳐보았나?"

"네."

"처음에는 다들 실패하니 너무 개의치 말게."

그는 내가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여겼다. 첫 시도는 아무리 빨라도 며칠은 걸린다 했으니,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의미는 당연히 실패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성공했습니다."

"뭐?"

"공간이 멋지더군요. 앞으로 이 무공에 푹 빠져들 것 같습니다."

풍천교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써 펼쳐냈단 말인가?"

"네."

"펼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두 시진쯤 걸렸습니다."

풍천교주가 깜짝 놀랐다.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헉'하고 짤막한 탄성까지 내뱉었다.

"정말인가?"

그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제 적성에 잘 맞는 무공인 듯합니다."

"솔직히 믿지 못하겠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무공의 천재가 아니라면 그건... 아니, 무공의 천재라도 두 시진은 불가능해!"

나는 더는 두 시진이라 주장하지 않고 차를 홀짝였다.

"정말인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보여줄 수 있겠나?"

예의상 이렇게 사람을 못 믿고 집요하게 파고들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심도 이해가 갔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고맙네."

속이 타는지 풍천교주가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마셨다.

나는 잠시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한데 오늘은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네."

"말씀하시지요."

"마불이 나를 새외로 돌려보내려 하고 있네."

"이유는요?"

"자네 때문이지."

"저 때문이라고요?"

"자네와 내가 손을 잡을까 봐 경계하고 있네. 그러니 내가 계속 있을 명분을 만들어주게."

날 찾아온 것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분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고 찾아온단 말인가? 이건 나와 가까워지기 위한 구실이다.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있다.

"그 대가로 뭘 주실 겁니까?"

"우리 사이에 야박하구먼."

"아직 교주님과 제게 '사이'는 없죠. 거래는 한 번 있었습니다만."

나는 빈틈을 주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여야 그와의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시공이환술을 두 시진 만에 연 것을 알려준 것도 그 때문이다. 나를 믿어도 된다는 무한한 신뢰를 주기 위해서.

"뭘 원하나?"

"가져오신 신물 중에서 하나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었다.

"자네 미쳤나?"

나는 차분히 되묻듯 대답했다.

"마존이 죽은 이 혼잡한 상황에서 중원진출을 꾀하려는 교주님만큼은 아니겠지요."

* * *

풍천교주와 함께 그의 거처로 들어갔다.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예상대로 그는 나와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의 소중한 신물까지 주면서. 이건 부탁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면서 나와 손을 잡으려는 것일까? 분명 그에게 어떤 심경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방에는 족쇄를 찬 남자가 음뢰종을 바라보며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혈안정수를 빼내 올 때, 그를 빼내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잠깐 생각한 적이 있다.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모른 척 풍천교주에게 물었을 때, 나는 보았다. 풍천교주가 그를 쳐다보는 눈빛을. 수하나 노예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남자 역시 풍천교주가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인사를 하지 않았다. 보통 돌아서 인사를 하기 마련인데.

나는 이들 사이가 일반적인 주종관계가 아님을 확신했다.

"음뢰종을 지키는 수하네."

"그렇군요."

풍천교주는 신물들을 쭉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신물 중에서 음뢰종과 혈불은 요구해선 안 되네."

"네, 알겠습니다. 저 종이 그 유명한 풍천교의 음뢰종이군요."

나는 처음 본 것처럼 음뢰종을 향해 걸어갔다.

회귀 전 인생에서 이 음뢰종을 가져오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종에 새겨진 악귀가 '또 너냐?'라며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보니 어떤가?"

"굉장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족쇄 사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사실 음뢰종보다 이 사내에게 관심이 갔다. 그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핑계 삼아 이쪽에 다가온 것이었고.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었고 눈빛은 맑았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의 마주침이었지만 왠지 쉽게 잊기 힘든 눈빛이었다.

"자, 골라보게."

"그러지요."

나는 천천히 신물이 올려진 진열대를 살폈다. 물론 나는 여기 있는 신물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신물 중 한 가지를 골랐다.

"이걸 주십시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때 나는 보았다.

풍천교주가 자신도 모르게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바로 그 순간, 풍천교주가 흠칫하며 입을 닫는 모습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신물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을.

'족쇄를 찬 남자가 풍천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66회 다 얻거나, 다 날리거나.

풍천교주의 표정에 아쉬움이 한가득했다.

정황상 족쇄 남자가 내가 고른 신물을 그냥 주라고 전음을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저 남자가 풍천교주의 결정에 끼어들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네가 고른 것이 뭔지 알고는 있나?"

"잘 모르겠지만 확 끌려서요."

내가 고른 것은 쇠로 만들어진 계란형의 작은 구체였다.

물론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무기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다. 이 알처럼 생긴 것 안에 든 것이 중요했다.

풍천교주가 구체를 들어서 아래쪽을 만졌다. 그러자 철컥하면서 알이 열렸다.

순간 강렬하면서도 묵직한 약향이 확 풍겨 나왔다. 안에 든 것은 붉은색의 영단이었다.

혈신단(血神丹).

풍천교는 물론이고 새외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영약이었다.

"혈신단이라네. 들어본 적 있나?"

"네, 정말 귀한 영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이렇게 귀한 것을 왜 복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미래를 위해 아껴둔 것이네."

"그 미래가 저였나 봅니다."

설마 이 많은 신물 중에서 하필 이걸 고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풍천교주는 다시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고개 숙인 족쇄 사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는 것을 보았다. 신안술로 시력이 좋아졌기에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음을 보내는 것이 확실하구나.'

다시 말해서 풍천교주가 저 사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적어도 의논은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일단 혈신단이 중요했으니까.

그들에게 시간을 줄 겸, 나는 모른 척 돌아서서 다른 신물을 구경했다. 혈신단 다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들이 보였다.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후 풍천교주의 선택과 행보에 달려 있었다.

잠시 후, 의논을 끝낸 풍천교주가 십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로 힘든 결정을 내렸다.

"좋네. 자네에게 혈신단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풍천교주가 여전히 혈신단을 손에 든 채 내게 물었다.

"이번에는 먼저 줄 수 없겠네. 신교에 계속 남는 방법을 말해주게."

혈신단만큼은 선뜻 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방법은 바로 이겁니다."

나는 풍천교주가 제지할 틈도 없이 그가 들고 있던 혈신단을 내 입에 넣어버렸다. 설마 그것을 먹어버릴 줄 몰랐던 풍천교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네! 뭐 하는 짓인가?"

뒤늦게 버럭 고함을 내질렀지만 나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약을 녹일 동안 호법을 서 주십시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혈신단의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풍천교주가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 * *

검무극의 운기조식은 한 시진째 계속되고 있었다.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는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장 죽이겠다고 펄쩍 뛰는 풍천교주를 족쇄 사내가 진정시켰다. 운기를 방해하지 말자며 대화도 무조건 전음으로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족쇄 사내였다.

―하하하하하.

―젠장! 망할!

족쇄 사내는 전음으로 계속 웃고 있었다. 반면 풍천교주는 쉬지 않고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이 자식 당장 죽여버릴까?

―죽이시오. 죽이고 천마신교와 전쟁 한번 시원하게 하시오. 당신이 천마에게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을 보고 싶소.

―젠장! 망할!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정말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먹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가 제시할 방법이 말도 안 되는 방법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먼저 복용한 것 아니겠나?

―죽이라니까요! 죽여요! 일장에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십시오.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다가가서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차마 머리통을 내리칠 수는 없었다.

―어휴, 젠장!

손을 내린 후 풍천교주가 음뢰종 옆으로 와서 주저앉았다. 족쇄 사내는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즐겼다.

―빌어먹을!

―교주가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겁쟁이라서? 그래서냐!

―아뇨, 이공자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명석한 자입니다.

―뭘 보고?

―교주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까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주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는 거죠. 이런 자라면 제대로 된 답을 줄 겁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원래는 몰랐는데, 혈신단을 먹는 것을 보니까 어떤 방법을 제시할지 알 것 같습니다.

―뭔데?

―나중에 운기조식을 마치면 직접 들으십시오.

―알려줘!

―교주님은 얼굴에 표가 나서 안 됩니다.

―소싯적에 도박해서 잃은 적이 없다!

―풍천교의 후계자 앞에서 실력을 발휘할 도박꾼은 없으니까요.

―흥!

풍천교주는 그나마 안도했다.

족쇄 사내가 친구에게 말하듯 편하게 풍천교주를 불렀다.

―교주야.

―어휴, 또 시작이네. 내가 네 친구냐!

―그냥 다 줘라. 다 줘도 되겠다.

―진심이냐?

―지금까지 이공자에 대해서는 날아든 정보만으로 판단했었지. 한데 오늘 직접 보니까 지금까지의 정보는 과소평가됐다.

―그게 네 눈에는 보이냐?

―보인다.

―난 왜 안 보이는데?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

―젠장! 좋아, 그렇다고 치자. 욕심이 그득해서 내 눈을 다 가렸다고 치자. 그래서? 다 주면 나는?

―중원에서 살 수 있잖아. 그게 꿈이었잖아?

―날 중원에서 살게는 해준다더냐?

―살게 해줄 마음이 있으니 저렇게 덥석덥석 받아먹는 거잖아.

―약속을 안 지키면? 우린 거지처럼 깨진 쪽박이나 들고 동냥이나 다녀야 할 거다.

―걱정마라. 내가 먹여 살려주마.

―뭐?

―철그렁철그렁 이 족쇄 끌고 약이라도 팔 테니까.

―....

풍천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공자가 후계싸움에서 져서 죽으면?

―원래 운명을 걸고 누군가에게 투자한다는 게 그런 거잖아? 다 얻거나, 다 날리거나.

―너, 나를 파멸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그걸 이제 알았어?

족쇄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교주야.

―반말하지 마라. 오늘 다섯 번 넘은 지 오래다.

―나는 너 이해한다.

―....

―버려야 얻는다. 교주나 나나 버리지 않고도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저기 앉아 있는 이공자 같은 사람이고.

―...젠장.

이윽고 검무극이 운기조식을 마쳤다.

눈을 뜬 검무극의 표정이 밝았다. 그러잖아도 맑은 그의 두 눈은 더욱 깊어져서 공력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깊은 두 눈은 보통 사람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눈빛을 바꾸는 모습에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대체 얼마나 공력이 깊으면?'

검무극은 자신 앞에서 감추는 것이 없었다.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강하니 믿고 따르시게나.

보여주는 강력함에 비해 검무극은 정중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간도 크군. 영약을 훔치고 그 앞에서 운기조식을 하다니!"

"영약을 훔치다니요? 대가로 영약을 받은 거죠."

"대가로? 무슨 뜻인가?"

"혈신단을 복용하기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교주님이 이곳에 머무르는 방법은 제가 이것을 먹는 거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

"내일 황천각에 오셔서 신고해 주십시오. 영약을 도둑맞았다고요."

"!"

"영약을 찾을 때까지 이곳에 계셔도 될 겁니다."

그제야 풍천교주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한데 조사를 하면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을 텐데."

"그 조사를 하는 곳이 바로 제가 수장으로 있는 황천각입니다. 교주님이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최대한 천천히 수사를 진행할 겁니다."

"아!"

풍천교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마신교의 내원에 도둑이 들었으니, 자신은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것이다.

또한, 사건조사를 검무극이 맡을 테니 자작극으로 들통날 일도 없었고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날 불필요한 마찰도 없을 것이다.

"돌아가실 날짜를 정하는 것도 저와 교주님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아! 그런 뜻이 있었군."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혈신단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검무극이 그곳을 떠나자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나?"

"이공자가 혈신단을 먹는 순간 알았습니다."

다시 족쇄 사내의 태도는 정중해졌다.

풍천교주가 혈신단을 보관했던 빈 껍데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데 이공자는 이게 혈신단이란 것을 미리 알았을까?"

"당연하지요."

"알았다고?"

"설마 용기가 예쁘게 생겼다고 그것을 집어 들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믿은 겁니까?"

"아니."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간 그렇게 믿었다. 자신의 신물을 이공자가 속속들이 알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이 정도 되는 인물이니까, 교주님이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족쇄 사내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론 족쇄 사내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혈신단은 너무 아까운데."

또다시 아까워하기 시작하는 풍천교주였다.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그가 방법을 제시해줘서 준 것이 아니라고 백번째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 퍼주고도 일이 잘 안 풀리면, 너 죽고 나도 죽는 거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에서 남자가 씩 웃었다.

"나 죽이고 꼭 죽는다고 약속한 겁니다."

"닥쳐!"

풍천교주는 빈 용기에, 족쇄 사내는 음뢰종에,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번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충격적인 소식이 교내를 강타했다.

풍천교주의 처소에 도적이 들어 신물을 도둑맞았다는 소식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내원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모두가 궁금해한 것은 대체 어떤 신물을 도난당했느냐였다. 하지만 도난된 신물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교내는 그 일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천마전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총군사 사마명이 이 사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천교주가 자작극을 벌이는 듯 보입니다. 본 각의 감시망에 따르면 풍천교주의 거처에 침입한 자가 없을뿐더러, 신물을 훔치려면 적어도 마존급 실력은 되어야 하는데, 제가 파악하기로 지금 그만한 실력자 중 풍천교주의 신물을 노릴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마명의 보고에 천마 검우진은 그의 말을 모두 믿었다.

"자작극을 벌이는 이유는?"

"아무래도 본교에 더 머물려는 것이겠지요. 신물을 찾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릴 겁니다."

"대체 왜 안 가겠다는 건가? 혹시 그 일 때문인가?"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풍천교의 중원진출에 대해 담판을 짓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번 일 둘째가 개입했지?"

"네. 풍천교주가 이공자에게 남을 방법을 부탁한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의 조사는 황천각에서 할 테니, 풍천교주는 한동안 본교에 머무를 수 있을 테고요."

"제법 잔머리를 굴렸군."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풍천교주와 마존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도착한 후 마존들과의 첫 회동 이후, 서로 만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그나마 친하다는 마불과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이번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사마명이 차분히 대답했다.

"당분간은 모른 척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검우진은 잠시 숙고했고 사마명은 그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사마명은 교주의 마음을 짐작했다.

결정이 곧장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역시 풍천교와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주는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저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이공자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검우진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세."

"네."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사마명이 검우진에게 말했다.

"만약 풍천교주와 이공자가 손을 잡게 된다면, 마불은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아마 본격적으로 대공자를 끌어들이겠지요."

사마명이 판단하기에 최근 이공자의 부각에도 대공자가 참고 있는 것은 교주의 눈치를 본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직까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 이어 풍천교주까지 손을 잡는다면,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검우진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생각에 잠긴 검우진을 뒤로 한 채 사마명은 천천히 피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는 궁금했다.

과연 교주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대공자가 돌아와서 싸움판으로 뛰어드는 것을 과연 허락할까? 형제의 싸움을 어떻게든 말릴까?

모든 것은 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제67회 한창 이럴 나이지.

다음 날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간 풍천교주와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교내의 사정이니 아버지도 대충 다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와서 말씀드리는 것과 사마명에게 보고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마침 아버지는 수련 중이셨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는 기별이 있었다.

"수련장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허공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버지의 수신호위인 휘였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

"오랜만입니다, 아저씨."

"네, 도련님."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어려서 휘의 손을 잡고 마가촌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길거리 음식을 사달라며 졸랐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날의 기억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저씨, 언제 얼굴 한 번 뵈어요. 제가 식사 대접 하겠습니다."

"네."

"편하게요, 아저씨."

그가 내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현재 나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에게는 기분 좋은 추억이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일상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와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아버지가 가장 믿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아버지는 명왕보로 공격을 해왔다.

점멸보로 피하면서 흑마검으로 아버지의 천마검을 쳐냈다. 흑마검과 천마검의 첫 격돌이었고, 오히려 그냥 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시도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내 경지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실력이 늘었구나!"

아버지 역시 명왕보의 경지가 훨씬 높아진 상태에서 공격한 것인데, 그것을 더 위험한 방식으로 막아낸 것이다.

"당연히 늘어야죠. 본교에서 무공수련을 제가 제일 많이 할 겁니다. 아니다, 두 번째겠네요. 이안이 제일 많이 합니다."

"왜 세 번째라고는 생각지 않느냐?"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풍신사보를 수련하고 계시는지 이 말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잘하고 계십니다. 꼭 대성을 이루셔야 합니다. 반드시요!'

아버지와 함께 수련장을 걸어 나왔다. 우린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일로 왔느냐?"

"풍천교주가 저와 손을 잡고 싶어 합니다. 느낌상 팔마존과 분열이 생긴 것 같은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굳이 그가 시공이환술을 전수해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풍천교주 역시 외부에 알리지 않을 내용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이번 일의 핵심을 이렇게 보고 있었다.

"마존들이 풍천교주를 이곳까지 끌어들인 것은 오만한 짓이었다. 그를 찾아가서 해결했어야 했고, 데려올 생각이었으면 모두가 찾아가서 부탁했어야지."

"풍천교주의 자존심을 잘못 건드렸군요."

그가 중원진출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그것들을 하나씩 들어내다 보면 가장 밑에 놓인 것이 정말 그의 상처 난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 아니라고 소홀한 것들이 결국 가장 큰 문제가 되지. 이번 일은 명백한 마존들의 실수다."

나는 아버지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마존들을 풍천교주와 싸움 붙여 구경하다가, 충성심이 부족한 것들부터 싹 없애버리고 싶으실 거다.

하지만 본교의 주력인 그들이 무너지면, 결국 무림맹이 치고 들어올 것이 뻔했기에 팔마존은 그야말로 아버지에게는 필요악인 셈이다.

"하면 풍천교주는 왜 아버지를 찾아뵙지 않고 저를 찾아온 것일까요?"

이번 대답 역시 아버지는 확고했다.

"첫째 이유는 나를 어려워해서고, 둘째 이유는 널 이용하기 쉽다고 여기니까."

"저를 이용해서 뭘 하려는 걸까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질문은 네 군사에게 해라."

"저는 군사가 없잖습니까?"

"구해야지."

"어디서 사마 군사님처럼 똑똑한 분을 구해옵니까?"

아버지는 그저 코웃음을 한 번 치실 뿐이었다.

"가진 분의 여유십니다!"

정말이지 사마명처럼 똑똑한 군사를 구하는 것이 내 지상과제다.

"넌 군사 없이도 잘해 가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만, 대부분 운이 좋아서 잘 풀린 일들이 많습니다."

회귀 전의 많은 경험을 토대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지, 나 역시 군사형 인물은 아니다. 혜안과 통찰력으로 나를 보필할 군사가 꼭 필요하다.

"이 질문만 대답해 주십시오. 풍천교주가 원하는 것이 뭡니까?"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의 꿈은 중원진출이다."

"신물을 지킨다고 권좌를 떠나지 않는 사람인데요?"

"그건 그 사람의 집착하는 성격이고."

"꿈은 중원진출이다, 이 말씀이군요."

회귀 전 인생에서 풍천교주는 중원진출을 하지 못했다. 화무기가 무림을 다 휩쓸어 버렸기 때문에, 감히 한 발짝도 중원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새외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데 내가 회귀를 함으로써 그의 인생도 바뀌고 있었다. 원래라면 오지 않았을 중원에, 그것도 본교에 직접 찾아오게 되었으니까.

"대대로 새외 혈교는 중원을 노렸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만,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바람은 그들의 핏속에 있다."

"이제야 저를 찾아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굳이 아버지에게 묻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처럼 굴었다. 때론 알아도 모르는 척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가증이라기보단, 아버지에 대한 예의였다.

세상 대부분 부모는 자식이 와서 이렇게 물어봐 주길 바랄 테니까. 아버지라고 다르실까?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시려다 아버지가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기왕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

"네!"

아버지가 밥 먹고 가라는 말씀이 제일 좋다.

하지만 좋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괜히 그랬다간 다음부터는 밥 먹고 가란 말씀은 절대 하지 않으실 테니 말이다.

절대 쉽지 않은 아버지다.

* * *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 황천각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바로 마불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한 번 온다는 것이 늦었네."

그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멀리서 볼 때보다 키가 더 작았고, 그의 황금색 피부를 보고 있자니,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불.

명실공히 형의 오른팔.

"자, 앉으시지요."

"그러세."

마불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누가 내려다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앉아서도 허리를 저렇게 꼿꼿하게 펴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친우가 중요한 신물을 도난당했으니, 내 어찌 그냥 있겠는가? 사건조사가 어떻게 되어가나 알아보러 왔네."

"현재 제가 직접 이번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도적이 든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천연덕스럽게 묻자 그는 그걸 몰라서 묻는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교 내원에 도적이 들었다는 사실을 어찌 믿겠는가?"

"풍천교주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 더 믿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시작부터 우린 팽팽한 기류를 조성했다.

그의 눈동자에도 은은한 금빛이 감돌고 있었다. 황금대라마공의 대성을 이룬 자만이 나타난다는 현상이었다.

과연 마불의 무공은 얼마나 강할까? 마불이 익힌 황금대라마공은 섭혼마공의 사술만큼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이었다.

"만약 정말 내원에 도둑이 든 것이라면, 본교의 명성이 크게 손상될 것이네."

"그렇겠지요."

"조용히 처리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말입니까?"

"그가 떠들어대지 못하도록 일단 새외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떤가? 어차피 그가 있다고 못 잡을 도적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명백히 나를 떠보는 말이었다. 그는 자작극이라 확신하고 있었고, 내가 그 일을 돕고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일개 각주인 제 말을 듣겠습니까?"

"풍천교주가 자넬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인사차 왔었습니다."

"풍천교주는 자네가 후계자가 될 거라 믿고 있네."

"그런 내색은 없었습니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갈 찾아갈 사람이 아니니까. 그는 누군가 와서 인사를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네. 그런 그가 자넬 찾았다면, 후계자의 가능성을 본 것이겠지."

말을 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내 반응을 살펴 속마음을 읽으려 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우리 아버지도 실패하는 시도다.

"이공자, 본교를 위해서 그를 돌려보내야 하네."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말이었다.

내가 그를 돌려보내려 하면 그걸로 좋은 것이고, 이 제안을 거절하면 본교를 위해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몰아갈 수가 있을 테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그를 돌려보내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말씀대로 그는 이번 일을 빌미로 본교의 평판을 깎아내릴 겁니다. 그럼 붙잡아둬야지요. 오히려 본교에 있을 때까진 함부로 입을 열진 못할 테니까요. 제가 넌지시 말해두겠습니다. 신물을 찾으려면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요."

순간 마불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는 혹 떼러 왔다가 하나 더 붙이고 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풍천교주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야. 분명 다른 속셈이 있네."

"그럼 제가 손을 잡는 척해서 그의 속셈을 알아내겠습니다."

"이렇게 고집이 세니 앞으로 훌륭한 황천각주가 될 듯하군."

"주로 옳다고 믿는 일에서 그렇습니다."

마불은 그 말을 자신이 옳지 않은 사람이라는 질책으로 받아들였다.

기회다 싶었는지 마불이 빠르게 손가락으로 수인(手印)을 지었다.

전법광인(轉法光印)!

순간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태양보다 강렬한 이 빛에 상대는 일순간 눈을 뜰 수가 없다. 이 찰나의 순간은 마존급 실력자들에게는 억겁처럼 긴 순간이었다. 여길 찔러 죽일까, 저길 찔러 죽일까? 아니다, 두 군데 다 찌르자.

나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기 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빛에 내 눈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몸에서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심에서 마불이 움직이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 순간 빛을 발한 것은 황금대라마공이 아니라 나의 신안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굳이 마불에게 내 실력을 그대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불은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한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날 바라보는 눈빛은 딱 이랬다.

내가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넌 이미 죽어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만만해도 될 사람이었다. 황금대라마공의 수인은 모두 다섯 개. 이렇게 눈을 가린 후 날아들 이후 공격이 얼마나 무서울지는 당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포까진 아니더라도, 짐짓 놀라고 두려운 반응을 의도적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경고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마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처음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을 때와 반대되는 말을 했다.

"난 자네와 자주 보고 싶네. 이렇게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나와 함께 하면 자네에게 좋은 일만 가득할 걸세."

"형과 많이 나누십시오."

나의 치기 어린 오만에 마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한창 이럴 나이지. 그럼 또 보세."

"살펴 가십시오."

그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가자 일부러 지었던 굳은 내 표정이 풀어졌고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방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보시오, 마불. 당신은 나를 자주 안 보는 게 좋을 거요. 나와 얽힌 마존들은 아직까진 세 부류밖에 없소.

친해졌거나, 친해지고 있거나, 죽었거나.

당신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오? 지금으로선 우리가 친해질 것 같진 않은데....

그럼 당신, 네 번째 부류를 만들 자신 있소?

제68회 끝까지 이공자.

"섭혼마존의 제자는 모두 다섯입니다만 그중에서 나이나 실력으로 볼 때 후계 싸움의 유력한 후보는 일제자 양도(梁導)와 삼제자 청선입니다. 참고로 청선은 여인입니다."

서대룡의 보고에 내가 물었다.

"서환진 내에서의 두 사람 평판은?"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경험과 무공실력은 양도가 우세합니다만, 서환진 내에서의 인기는 청선이 높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 비해 양도는 성격이 포악해서, 이미 여러 귀술사들이 그에게 다쳤습니다. 심지어 죽은 이들도 있고요. 그런데도 죽은 섭혼마존이 그를 아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죠."

"두 사람을 낱낱이 조사해. 무공, 재산, 능력, 취미, 인간관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알겠습니다."

"과연 풍천교주는 누굴 선택할까?"

내 질문에 서대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풍천교주가 그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합니까?"

"응. 그래서 섭혼마존 제자들에 대한 자료도 보내줬어."

"왜죠?"

"내가 서환진의 후계싸움에 뛰어들라고 했으니까."

"맙소사! 또 무슨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설마?"

어딘가에 생각이 꽂힌 서대룡이 전음을 보냈다.

―풍천교주도 죽일 겁니까? 아니면 양도? 청선까지요?

―내가 살인마냐? 다 죽이게.

그제야 서대룡은 안도했다.

"다행입니다."

"다들 내가 누굴 죽일까 봐 걱정하는 것이 요즘 내 모습이군."

"또 누가 걱정했습니까? 사부님요?"

"사부님?"

"아! 혈천도마 어르신요."

"아직 어르신께 사부라고는 안 부르지?"

"네, 허락 안 하셨습니다."

한데 서대룡은 그를 사부로 모시는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사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서대룡이 도마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혈천도마의 책 읽는 모습에서 이미 서대룡은 풍덩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풍천교주는 누굴 선택할까?"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수석 입학에 천재인 네가 모르면 어떻게 알아?"

"공부 열심히 해서 수석 입학이지 천재는 아니죠."

"천재라고 했잖아?"

"그건 각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고요."

"그때 잘난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잖아?"

"인정합니다. 제 마음속에 저도 어쩔 수 없는 허세가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 절 천재에서 실무에 능한 녀석 정도로 하향조절 해주십시오. 대신 두 사람 조사는 확실하게 해오겠습니다."

서대룡이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 * *

"그래서 우린 누구를 지지해야 하나?"

풍천교주의 물음에 족쇄 사내는 음뢰종만 쳐다보고 있었다.

"자넨 그 종은 왜 그리 쳐다보고 있나? 종에 새겨진 악귀가 말이라도 거나?"

그러자 족쇄 사내가 불쑥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무섭게 왜 이래?"

"가끔 내게 말을 걸곤 합니다."

"뭐라고 하는데?"

멍하니 악귀를 쳐다보며 족쇄 남자가 말했다.

"넌 왜 그렇게 사냐?"

잠시 흐르는 침묵.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예전에는 속 좁고 욕심 많은 한 인간 때문에 이러고 산다고 대답했었지요."

"지금은?"

"어쩌면... 꼭 그 인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뭐라던가?"

족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재촉하자 족쇄 사내는 풍천교주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뭘 자꾸 묻습니까? 조각이 무슨 말을 한다고. 미쳤습니까?"

풍천교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암, 내가 안 미치는 게 이상하지. 조만간에 내가 거기 앉아서 그 조각된 악귀와 대화를 나눌 거야. 넌 왜 그렇게 무시당하고 사냐고? 왜겠냐? 이 악귀 놈아, 네가 쭉 지켜봐서 알잖아!"

"청선입니다."

"깜짝이야! 제발 기수식이라도 취하고 찔러!"

종잡을 수 없는 족쇄 사내였지만 필요할 때 이렇게 답을 내놓기에 소중한 사람이었다.

"왜 청선인데? 내가 볼 땐 양도가 후계자가 될 것 같던데."

"그럼 그 사람을 선택하시든지요."

족쇄 사내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풍천교주가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갔다.

"왜 청선이냐고?"

"그냥 소신껏 양도로 선택하시오. 교주나 되는 사람이 언제까지 남 말에 따를 겁니까?"

"좋네, 소신껏 청선으로 하겠네."

풍천교주는 철석같이 족쇄 사내를 믿었다. 이유는 필요 없었다. 지금껏 그가 보여준 과거가 있었으니까.

"청선이란 말이지? 그럼 어떻게 그녀를 제자로 삼을 수 있겠나?"

"그건 나도 모릅니다."

"자네가 모르면 어쩌나?"

"여기 이렇게 묶여있으면서 그것까지 아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

그렇다고 풍천교주는 그의 족쇄를 풀어준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지금껏 온갖 말들을 나눴어도, 그 말만은 하지 않았다.

족쇄를 풀어주면 남자는 훨훨 자신을 떠나버릴 것이다. 세상 누가 이런 꼴로 만든 사람이 좋아서 남겠는가? 풀어주는 순간 끝이다. 그랬기에 족쇄를 푼다는 말은 풍천교주의 절대 금기어였다.

"내가 청선을 찾아가 볼까?"

"가서 뭐라 하실 거요?"

"내 제자가 되어라. 너무 고압적인가? 내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마. 어때?"

"그래서 잘도 제자가 되겠소."

"그럼 어떻게 하라고?"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속내를 알 수 없는 새외 늙은이가 와서 갑자기 제자가 되라는데, 교주라면 그 말에 넘어가겠소?"

"어림없지."

"남들도 마찬가지요. 그냥은 안 되는 일입니다."

"설마 자네 말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족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부가 돼서 무공도 가르쳐줄 건데? 대가를 치르려면 그쪽에서 치러야지."

"낡은 사고방식이오. 대가는 더 간절한 사람이 치르는 겁니다."

"싫네, 이제는 주는 게 아니라 받고 싶네. 나는 본래 받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내 신물을 채울 것을 잔뜩 싸 들고 와서 배우라고 해! 온종일 무릎 꿇고 마당에서 간청하라고 해!"

족쇄 사내는 다 주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기왕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대상은 청선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 누구?"

"이공자는 여기 신물을 더 원할 겁니다. 지난번에 신물을 둘러볼 때, 눈여겨보는 것들이 있더군요."

"망할!"

"이공자는 이번에도 해답을 들고 올 겁니다."

"또 이공자인가?"

탄식하는 풍천교주에게 족쇄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끝까지 이공자일 거요."

* * *

서대룡의 호언대로 적어도 그는 실무에는 확실히 능했다.

양도와 청선에 대해 낱낱이 조사를 해온 것이다. 그들의 집안과 가족은 물론이고 무공수준은 물론이고 성격에, 대인관계며,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까지 조사했다.

"한데 청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점을?"

"청선이 사우종을 만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사우종을?"

생각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네. 아무래도 접점이 없는 관계인지라, 혹시나 해서 보고드립니다."

서대룡은 내가 일화검존과도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따로 보고하는 것이다.

나는 사우종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는 섭혼술에 걸려 일화검존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죽었다. 누구의 섭혼술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던 죽음이었는데.

'아! 그것이 바로 청선의 섭혼술이었구나!'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하나의 결론.

"두 사람, 서로 사귀는 사이다!"

내 말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사귀어서 놀란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실을 앉은 자리에서 맞혀서 놀란 것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우종은 일화검존을 좋아하고 있었다. 청선과 사귀는 과정에서 그것을 들켰다면? 그의 죽음은 청선의 질투심과 분노가 만들어낸 결과가 틀림없다. 특히 청선은 젊었는데, 자기 남자가 나이 든 여자를 사랑한다면 그 자존심의 상처는 몸을 관통당할 정도로 깊을 것이다.

사귄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앞서 심혼대법의 시체들이 묻혀 있던 곳을 말해준 사람도, 능휴의 부채를 훔쳐서 그곳에 넣어둔 사람도 청선이 틀림없었다. 섭혼마존의 제자가 아니라면 알아내거나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더불어 사우종과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런 중요한 정보를 유출했을 리도 없고.

모든 것들의 아귀가 맞아떨어졌지만, 서대룡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뭔가 국면을 바꿀 생각이 나신 거군요."

"어떻게 알았어?"

"눈빛이 달라지셨거든요. 각주님, 천재를 왜 찾으십니까? 각주님이 천재신데."

"난 천재 아니지. 잔머리 굴리고, 이득 되는 것 안 놓치려는 정도고. 이런 머리 말고, 큰 머리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 조직에 그런 사람이 있는 거와 없는 거 차이가 크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대단하십니다."

"모르긴 뭘 몰라. 자네 조사 덕분에 알아낸 건데. 천재를 구해도 그 사람과 자네 안 바꿔."

"그러시겠죠. 어차피 둘 다 가지실 테니까요. 한데 어디 가십니까?"

난 이미 집무실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신물 벌러!'

이 역시 그에게 알려줄 수 없는 일이었다.

* * *

나는 그길로 풍천교주를 만났다.

그의 거처는 사건 현장이었고, 황천각주인 나는 언제든지 공식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어서 오게."

"잘 지내셨습니까?"

"보내 준 자료는 잘 봤네. 고맙네."

"별말씀을요."

그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는 족쇄 사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를 볼 때마다 이대로 스쳐 지나갈 인연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 시선이 다시 풍천교주를 향했다.

"서환진의 후계자 싸움에 뛰어들 방법을 찾으셨습니까?"

"아직이네."

"서두르셔야 합니다. 곧 마존들이 개입해서 후계자를 뽑을 겁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에서 나는 저 사람과 마찬가지로 족쇄를 차고 있다네. 하다못해 서환진의 후계자들을 만나는 일조차 쉽지 않네."

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후보 중 누굴 제자로 삼았으면 좋겠나?"

"청선입니다."

내 대답에 놀라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족쇄 사내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과연 그러했다.

"우리도 청선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네."

나는 사우종 때문이라지만, 저 족쇄 남자는 무슨 이유로 청선을 선택한 것일까?

"한데 그녀를 설득할 방법이 없네."

"만약 제가 청선을 교주님께 직접 찾아오게 할 수 있다면요?"

"찾아와서는?"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거죠. 밥을 지어서 떠먹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지."

"대신 신물 하나를 주십시오."

밝아졌던 풍천교주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자네 정말 뻔뻔하군."

"뻔뻔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합당한 대가 없이 친분이나 충성심을 앞세워 일을 시키는 건 아버지 시대에서나 통하던 일이죠."

"나 역시 그때 사람이라네."

"시대가 바뀐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앞에 앉은 제가 요즘 사람이란 것도요. 이게 싫으시면 화석처럼 굳어서 자기 좋은 곳만 바라보고 사셔야죠."

물론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기에 풍천교주는 인상을 굳혔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설득했다.

"이번 일은 젊은 사람 상대하는 일이니 제게 맡겨 주세요. 신물이 아깝지 않은 결과를 내겠습니다."

"잠깐 생각 좀 하세."

"그러시죠."

난 모른 척 신물을 구경하면서 족쇄 사내와 풍천교주 사이에 전음이 오갈 시간을 주었다.

이윽고 풍천교주가 내게 말했다.

"좋아,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결국 그는 족쇄 사내에게 설득된 모양이다.

"그녀가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말을 하는 것까지입니다. 그녀를 마존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교주님의 역량입니다."

"만약 그때도 도움이 필요하면 또 찾아와서 신물을 요구하겠지. 그냥 차라리 지금 다 가져가게!"

"제가 그럴 능력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교주님을 위해서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천교주에게는 정중히, 족쇄 사내에게는 스치듯 눈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길로 나는 한 사람을 찾아갔다.

이번 일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 바로 사우종이었다.

제69회 치사한 방법이 효과적이다.

나는 북천검가로 들어섰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사우종이 나를 일화검존에게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사 무인, 잘 지내셨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는 잘 지냈습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섭혼마존을 이용해서 나를 밀어내려다 실패했음에도 그 억하심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오늘 청선을 미끼로, 그의 숨겨진 야망을 이용해서 그를 낚을 작정이다.

"어서 오게!"

일화검존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한결 맑은 느낌이었다.

"더 젊어지셨습니다."

내 인사에 그녀는 나를 화단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보게."

그녀가 가리킨 곳에 싹이 돋아 있었다.

"자네가 선물로 준 그 씨앗이네."

"오! 벌써 자랐군요."

"그래, 생명이 이렇게 신비하다네."

우리 뒤에 서 있던 사우종의 기운이 더욱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 들어선 이후 내내 기를 발출해서 은밀히 그를 살피고 있었다.

처음 아버지에게 이 수법을 배웠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경지는 능숙해졌다. 상대의 존재나 외형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감정까지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은밀히 검존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우종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해주시겠습니까? 그에게 몇 가지 정보를 흘려야 해서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일화검존이 사우종에게 술을 가져오게 했다. 공손히 대답하고 돌아서는 사우종의 감정은 더욱 흉포해졌다.

술을 마시지 않던 그녀가 술을 마시고, 오직 내게만 반말을 하고.

그의 감정변화로 볼 때 아마도 내게 일화검존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추측하건대 청선과의 관계 역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닐 것이다. 그의 최후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잠시 후 사우종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을 때, 나는 한 가지 정보를 흘렸다. 일화검존에게 말했지만, 사실 사우종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현재 차기 섭혼마존은 일제자인 양도와 삼제자인 청선이 유력합니다."

청선이 언급되자 사우종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듣기로 양도가 더 유력하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한데 청선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죠."

"어떤 방법이 있나?"

일화검존이 나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왜 사우종을 두고 이런 대화를 하나 궁금했겠지만, 그녀는 전혀 표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마침 풍천교주가 본교에 와 있지 않습니까? 풍천교주와 섭혼마존이 배운 무공의 뿌리가 같습니다. 따라서 풍천교주에게 무공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청선에게도 승산이 있습니다."

"과연 풍천교주가 그녀를 받아줄까?"

"풍천교주는 받아줄 겁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예로부터 풍천교는 어떻게 해서든 중원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죠. 이런 상황에서 청선을 자신의 제자로 삼는다면, 중원에 남을 수 있는 빌미를 만드는 거니까요. 오히려 청선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왜인가?"

"섭혼마존이 평소 제자들 교육을 확실히 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숙적인 풍천교주에 대해 좋은 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요."

"그랬겠군."

"결국 이대로라면 양도가 섭혼마존의 자리에 오를 겁니다. 청선은 아쉽게도 마존이 될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요."

여기까지가 사우종이 술과 안주를 두고 떠날 때까지 들은 내용이었다. 나는 빠르게 말했고, 그는 천천히 술과 안주를 탁자에 올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떠났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들어야 할 핵심은 다 들었으니까.

나는 사우종이 반드시 청선을 설득해서 풍천교주의 제자로 들어가게 할 것이라 믿었다. 야심에 찬 그가 자신의 정인이 섭혼마존이 될 기회를 놓칠 리 없었으니까.

그가 완전히 떠났음을 확인하자 일화검존이 비로소 물었다.

"왜 이런 부탁을 한 건가?"

"사우종은 청선과 사귀는 사이입니다. 혹시 아셨습니까?"

"사우종이? 나는 몰랐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본 각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우종은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배후에서 선배님을 휘두르려 할 수도 있는 자입니다."

그녀에게 경고했지만 사우종이 그녀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말까지는 전하지 않았다.

"나도 대충 알고 있네."

"혹여 선배님에게 해가 될까 사우종을 주시하던 중, 두 사람이 사귀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 점을 이용할 일이 생겨 이런 부탁을 드린 겁니다."

"그랬군. 말해줘서 고맙네."

"제가 감사하지요. 마음으로 경계는 하시되 당분간은 사우종과 관련된 일을 평소처럼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겠네."

이번에 도움을 준 고마움은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으로 갚을 생각이었다.

"조만간에 비무 한번 하시죠."

"기대하고 있겠네."

솔직히 기대는 내가 하고 있었다. 신안술이 얼마나 실전에 도움일 될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일단은 이번 일부터 처리하고 나서의 일이다.

그곳을 떠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에서 뒷짐을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더는 이 모옥이 위선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 * *

오늘따라 사우종은 잠자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청선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쾌락을 느꼈다.

땀투성이가 된 채 두 사람은 침상에 나란히 누웠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평소 같지 않아서."

"그래서?"

"너무 좋았어."

확실히 사우종은 평소와 달랐다. 그가 먼저 그녀를 안아주며 물었다.

"요즘 바쁘지?"

"내가 마존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

"당신 생각은?"

"마존 자리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다만 사형을 이길 자신이 없어."

"당신은 반드시 마존이 되어야 해."

"왜?"

"당신 사형이 마존이 되면 당신을 살려두지 않을 거야."

"사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방금 망설였지? 왜 망설인 줄 알아? 사형이 그런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망설인 거야."

"...."

"차기 마존의 후계자로 언급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생사혈전을 펼쳐야만 내려올 수 있는 비무대 위에 섰어."

사우종은 진심으로 바랐다. 청선이 마존의 자리에 오르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섭혼마존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뒤에서 주무를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권력욕의 끝에는 여전히 삐뚤어진 욕망이 있었다.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언젠가는 검존을 내 여자로 만들 거다.'

청선은 벽에 붙은 일화검존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우종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떻게 하면 당신을 마존 자리에 올릴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어."

"있어. 한 가지 방법이."

"어떤 방법?"

"지금 풍천교주가 와 있잖아. 그에게 무공을 전수받으면 당신 사형을 이길 수 있어."

"말도 안 돼! 무공이 그렇게 금방 늘지 않는다는 것, 당신도 잘 알잖아?"

"당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잖아? 게다가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풍천교주야. 하나의 비기만 전수받아도 당신 사형쯤은 이길 수 있어."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면 다른 마존들이 날 싫어할 텐데?"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야. 일단 살고 생각해야지."

사우종이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는 쉬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