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대체 어떤 놈입니까? 어떤 건방진 놈이 도련님 몸에 손을 댄 겁니까?"
이안은 피멍이 든 내 이마를 보고 흥분했다. 지금의 그녀는 친동생이 맞고 들어온 열혈 누나였다.
"알면? 복수해 주게?"
"해야죠. 말씀만 하십시오! 누굽니까? 내 당장 가서...."
"아버지께 맞았어."
"...."
"왜 안 가?"
갑자기 차분해진 이안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는 지키는 사람이지 공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내가 웃었다. 예전에는 못했던 농담과 장난을 이렇게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 살에 눈이 파묻히듯 사라지는 눈웃음을 보는 것도 즐겁고.
"참, 그리고 나 황천각주 됐다. 조만간 정식 발령 나면 황천각으로 들어갈 거다."
이안은 놀라다 못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황천각주가 되신 경사를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신다고요?"
"그게 뭐 별일이라고?"
"맙소사! 황천각이 얼마나 권위 있는 조직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자그마치 황천각주라고요. 죄를 지으면 마존들조차 황천각에 끌려가서 벌을 받는 그런 곳이라고요."
왜 모르겠는가? 아버지가 날 보내는 이유도 그 때문인데.
아마 내가 황천각주가 된 일은 또다시 교내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축하드려요,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
"한데 교주님은 왜 갑자기 도련님을 황천각주에 임명하신 거죠?"
"때려놓고 미안했나 보지."
"농담 마시고요!"
"내가 말씀드렸어. 본교는 바뀌어야 한다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망치는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
이안이 흠칫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죠?"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으로 평생 뚱뚱한 몸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본교로 만들 거다."
이안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게 있었을까?
"설마... 알고 계셨나요?"
"그래."
이내 그녀가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어려서 강제로 선택된 일일 뿐이다."
"아뇨."
이안은 단호했다.
"저는 분명히 기억해요. 그날 제게 말해줬어요. 전신석화공을 익히면 이러한 부작용이 있다고. 그러니 선택은 네가 하라고. 그래서 제가 선택했어요."
그 선택은 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을 테니까.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 이 무공을 익혀야 하는데, 부작용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선택은 강요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말을 하진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그녀의 자부심을 깎아내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 부작용 내가 고쳐줄게. 지금은 안 되지만 나중에."
이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못 고쳐요."
"나는 고칠 수 있어. 믿어라."
"네, 믿을게요."
그녀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아마 무공을 전수한 이가 말했을 것이다. 절대 부작용은 없앨 수 없다고.
더는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는지 이안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도련님이 황천각주가 되시면 기존 황천각주가 반발하지 않을까요?"
"어쩌겠어? 교주가 내린 명령인데."
사실 기존 황천각주는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예전 마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볼 때, 그는 마군에게 포섭되었거나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버지는 나를 임명한 걸 테고. 그의 사임 처리는 사마명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난 오히려 실무를 보는 무인들의 반발이 걱정이다. 난데없이 천마 아들이 각주로 획 떨어지면, 고깝지 않겠어?"
"획 하고 떨어진 사람이 너무 멋지고 훌륭한 분이니, 아무도 언짢아하지 않을 거예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다."
"월봉 주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정해져 있으니까요."
매번 날리는 그녀의 고정 농담에 미소지으며 미뤄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월봉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안, 이번 기회에 처리할 일이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네, 뭐든 말씀하세요."
"수신호위 이안, 그대를 이 순간부터 내 수신호위에서 해고한다."
이안의 그 큰 덩치가 펄쩍 뛰었다가 쿵 하고 내려왔다.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그녀는 놀랐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신호위에서 해고라고."
"진심이세요?"
"응."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진심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지만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진심이야."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아버지에게 복수를 안 해줘서."
농담에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스르릉.
그녀가 검을 뽑아서 자신의 목을 겨눴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저는 도련님의 수신호위로 죽을 겁니다."
이안아, 죽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내가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
"나와 이별하자는 뜻은 아니야. 내 소속 무인으로 남아야지."
"어휴!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죽을 뻔했잖아요! 목 좀 봐주세요, 상처 안 났나."
그제야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데 저는 수신호위가 천직입니다. 다른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대체 어떤 일을 시키시려고요?"
"무인, 이안! 이제 그대에게 새로운 직위를 내린다."
"네!"
"그대를 귀영대(鬼影隊) 대주로 임명한다."
앞서 수신호위에서 해임한다는 말만큼이나 그녀는 놀랐다.
"귀영대요? 본교에 그런 조직이 있었나요?"
"없다."
"없는 조직의 대주를 맡기신다고요?"
"앞으로 내가 만들 거다. 내 직속 조직으로 월봉도 교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내게 받을 거야."
"귀영대... 귀신의 그림자란 뜻인가요?"
"응.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내가 귀신이 될 테니 너희는 내 그림자가 되라는 거다."
일부러 그림자 영(影)자를 넣어서 이름을 지었다. 평생 내 그림자로 살아온 그녀였으니,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름이 될 것이다.
"이름은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교주님께 허락은 받으신 건가요?"
"아직."
본교에서 사조직을 만드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허락은 꼭 받아낼 거다."
"도련님은 해내실 거예요. 문제는 저죠."
"네가 왜?"
"왜라니요? 우선 제가 그런 대단한 조직을 맡을 실력이 안 되잖아요?"
"그건 걱정 마. 그 자리에 걸맞은 무공을 전수해 줄 거야."
"설사 제가 강해진다 해도... 제가 그런 자리에 어울리겠어요? 아무도 저를 따르지 않을 거예요."
따를 거다.
너란 사람의 인품에 반해서 다들 따를 거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들이 따르던 대주가 천하제일미란 사실도 알게 되겠지. 그래, 이 무림은 천하제일미가 이끄는 사상 최강의 조직을 보게 될 거다.
"이안, 넌 날 위해 귀영대주가 되어 줄 수 있느냐?"
그녀와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감은 바닥이었지만 '날 위해'라는 말이 들어간 이상,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좋아. 지금은 나 홀로 대주지만 나중에는 무림에서 가장 강한 조직이 될 거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네 기존 무공은 버리고 무조건 내공연마와 체력을 키우는 수련을 해라. 때가 되면 새 무공을 전수하마."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이안은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몰라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럼 앞으로 도련님은 누가 지켜줍니까?"
"애냐? 지켜주게. 무인이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지."
살에 파묻혀 작아진 그녀의 두 눈에는 오로지 걱정뿐이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돼. 월봉도 본교 대주들 중에서 최고로 많이 줄 거다."
"돈 없으시잖아요?"
"벌 거야."
"뭘 해서요?"
"돈 벌 방법이 다 있단다. 정 안 되면 천마전 마당이라도 쓸어야지."
"도련님, 저 돈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번 돈 다 모아뒀어요."
"돈은 항상 필요해. 그게 몸값이고, 자기 가치니까. 줄 만하니까 주는 거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
"...네."
"그리고 돈은 쓰기 시작하면 금방이다. 악착같이 더 모아. 인생 길어. 재수 없음 백 살까지 산다. 아니 반로환동(返老還童)까지 해서 다시 백 살 더 살아야 할 수도 있어."
내 농담 섞인 말에 이안이 웃었다.
예전의 나라면 그녀를 걱정했을 것이다.
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한평생을 살아보니 그건 다 헛된 걱정임을 알 수 있었다.
걱정 안 해도 되더라. 다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하고, 더 자기를 위하고, 잘만 살아가더라.
제24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정식으로 황천각주에 부임하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사이 나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앞으로 들어올 귀영대 무인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줄 생각이다. 충성이란 허울로 젊음을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능력만큼의 월봉으로 보답할 거다.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이라며 흥청망청 돈을 날리든, 땅 사고 집 사고 노후 준비를 하든, 도박만 안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나는 이 무렵에 큰돈을 벌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안에게 잠깐 바람 쐬고 오겠다는 서찰을 남겨둔 후, 은밀히 교를 나섰다.
내 삶은 회귀를 염두에 둔 삶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대법 재료를 구하느라 바쁘고 힘들게 보냈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기억해야 할 것들은 꼭 기억했다. 수십 년에 걸쳐 무림에서 있었던 여러 사건을, 그중에서도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사건들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이번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인근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사건이 발생한다.
수련도 할 겸 그곳까지는 풍신사보의 쾌속보로 내달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그 심오함에 빠져들었다.
쉴 때면 아득한 평원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고, 지평선에서 불어온 바람에 모래 먼지가 밀려오면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
사건이 발생하는 날에 맞춰 어느 날은 신나게 달렸다가 또 어느 날은 천천히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무이산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내가 낭인으로 떠돌 때 한 나이 든 낭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그는 한때 낭인사무소를 운영하며 수수료를 챙기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발생한 사건, 그가 술에 취할 때면 '참혹한 일이었지'란 한숨으로 시작하는 그 사건이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다.
나는 장사하는 사람에게 물어 이곳 낭인사무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저잣거리 끝 낡은 건물에 낭인들이 집합하는 장소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숨 막힐 듯 좁은 공간에 십여 명의 낭인들이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서 졸고 있는 낭인도 있었고, 병장기를 손질하거나,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몇몇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가 별다른 흥밋거리를 못 찾고 흩어졌다.
나는 구석진 책상에 앉아 뭔가를 작성하고 있는 중년인에게로 걸어갔다.
그를 보자 마음이 울컥했다. 그가 바로 낭인 시절 오늘의 일을 알려준 임추(林秋)였던 것이다.
"일거리가 있소?"
내 물음에 임추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 추천을 받고 왔나?"
"서광 형님이 가보라고 하셨소."
"서 무인과는 어떤 사인가?"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소."
"무슨 일?"
"형산(衡山)에서 형님 일을 도왔소."
"소동파 건이었지?"
"아니오, 남악파였소."
알고 있음에도 틀리게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갖 군상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나름 신중하게 신원을 파악하려는 임추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준비를 하고 온 상황이었다.
"서 무인의 추천이라면 믿을 수 있지. 오늘 당장 일할 수 있나?"
"물론이오."
"마침 오늘 큰 건수가 있는데 잘 왔구먼. 저기 가서 기다리게. 사람이 더 모여야 하니까."
나는 그가 말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몇몇 낭인들은 힐끗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나자, 임무에 나갈 인원이 다 모였다. 총 열다섯 명이었다.
지난 삶에서 임추는 이 일에 동원된 낭인이 오십 명이라고 했었다. 하여튼 술자리 낭인들의 허풍이란.
암튼 열다섯 명이라고 해도 큰 임무임은 확실했다. 보통 낭인들이 동원되는 일은 적게는 두셋, 많아봤자 예닐곱 정도였으니까.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라면, 떠돌아다니는 거친 인생을 이렇게 많이 쓰지 않았다.
"오늘 인솔은 양 무인이 맡을 거네."
소개받은 양당(梁當)은 오랜 낭인 생활로 잔뼈가 굵은 자였다.
"보수가 많은 만큼 위험한 임무다. 병신 짓 하는 놈은 내 손에 먼저 죽을 테니, 그리 알도록."
모두에게 경고한 후 양당이 내게 다가왔다.
"서 무인 추천이라고?"
"그렇소."
"실력은 믿어도 되겠나?"
"누굴 베면 인정받는 거요? 당신이오?"
너무 저자세로 나가도 낭인처럼 보이지 않을 거라서, 적당히 세게 나갔다.
"이봐, 건방 떨지 마라. 그러다가 그 모가지, 새벽이슬처럼 똑 떨어지는 게 이쪽 세계다."
나를 본보기로 낭인들의 기강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기에 굳이 시비 붙지 않았다.
"명령에 잘 따를 테니 걱정마시오. 난 돈만 받으면 그만이오."
"두고 보겠다."
그렇게 십오 명의 낭인들은 준비된 말과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몇 번의 접선을 통해 최종 장소를 파악한 후에야 여인과 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얼굴이 꼭 닮은 그들은 누가 봐도 모자지간이었다.
그들을 만난 후에야 양당은 이번 임무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린 저 두 사람을 남평(南平)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호위 임무에 낭인이 열다섯이나 동원되었다는 것은 이 여인과 소년의 신분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동시에 이들이 큰 위험에 빠져 있다는 의미기도 했고.
마차에 탄 아이가 창문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귀엽고 잘생긴 남자아이였다. 나는 아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아이가 꾸벅 인사했다.
성격도 좋아 보였고 교육도 잘 받은 아이였다. 함께 타고 있던 여인이 내게 가볍게 목례한 후 휘장을 닫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과 걱정이 가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낭인들은 말을 타고 앞뒤로 마차를 호위한 채 함께 달렸다.
마차는 말들이 지쳐 더는 달릴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멈춰 섰다.
말들을 쉬게 하면서 사람들도 요기하며 쉬었다. 양당은 준비해 온 육포를 낭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여인과 아이에게는 따로 준비한 음식을 주었다.
낭인들은 이번 임무에 평소 받는 돈의 두 배를 받았다. 이들을 인솔하는 양당은 몇 배는 더 받아 챙겼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언제 또 식사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다들 든든히 먹어!"
그렇게 반 시진 정도 휴식한 후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달리던 말에서 낭인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멈춰!"
낭인들이 멈춰서 쓰러진 그를 살폈다. 그는 시커메진 얼굴로 게거품을 물고서 죽어 있었다.
"죽었습니다."
보고하던 낭인이 함께 있던 동료를 보며 깜짝 놀랐다. 정확하게는 서로가 놀라고 있었다. 그들 역시 눈에 핏줄이 곤두서 있었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독?"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그들은 목을 부여잡으며 뒤로 넘어갔다.
"으윽."
낭인들의 얼굴과 몸이 시커멓게 변하며 줄줄이 쓰러졌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은 사람은 셋이었다. 우릴 이끌었던 양당과 또 다른 낭인, 그리고 나였다.
그들 두 사람이 나를 보는 눈빛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들이 독을 풀었구나!'
이건 나조차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과거 임추에게서 들었을 때는 외부 습격으로 낭인들이 당했고 그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 설마 인솔자가 음식에 독을 풀었을 줄이야.
아마 이자들은 자신들이 독을 쓴 것을 감추기 위해 시체를 모두 처리한 모양이다.
"너는 왜 죽지 않았지?"
양당이 놀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가 준 육포를 안 먹었으니까.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준 음식을 어찌 먹나?"
내가 회귀해서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지만,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다. 밥에 산공독을 탄 숙수가 그날 죽는다는 운명처럼, 오늘 이 낭인들의 죽음 역시 그러했다.
불필요한 살생은 막아주려고 해도,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생기는 것이다. 바뀔 일은 바뀌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차라리 그걸 먹고 죽는 게 나았을 거다."
바로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푸욱!
양당의 검이 다른 낭인의 등을 관통해서 가슴을 뚫고 나왔다.
"큭!"
남자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바보냐? 그놈이 나를 상대하게 한 후에 죽였어야지. 내 실력이 어떨지 알고?"
"이놈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놈이라 절대 먼저 싸우려 들지 않았을 거다. 어차피 내가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면... 그냥 네게 정신을 팔고 있을 때 죽여버리는 것이 낫지."
둘이 비슷한 실력이었던 모양이다.
"참 한심한 인생이다. 일렬로 서서 그렇게 상대의 등만 찔러대는 인생을 사니, 네 차례라고 안 오겠냐?"
"내 등 뒤에는 아무도 세우지 않을 테니, 걱정은 집어치워라."
"이렇게 동료들까지 죽이고 번 돈으로 대체 뭘 하려고?"
"할 거야 많지. 술 마시고, 여자도 사고."
"고작 그러려고 이 많은 사람을 죽여? 귀신들이 전부 매달릴 텐데, 무거워서 네 하물이 서기는 하겠냐?"
"이 머저리 새끼야. 네 목숨 걱정이나 해!"
놈이 동료를 죽여버린 것은 따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곳으로 네 명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복면을 썼고,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만이 복면을 쓰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과 걸음걸이에서 상당한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오셨소이까?"
양당이 정중히 인사했다. 말투나 행동으로 볼 때, 새롭게 등장한 이들이 양당을 고용한 것처럼 보였다.
복면을 쓰지 않은 남자는 양당과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마차를 보며 소리쳤다.
"그만 나오시오. 마차째 확 태워버리기 전에."
그러자 마차에서 여인과 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내렸다.
"어찌나 쥐새끼처럼 잘 숨어다니는지, 찾느라 혼났소이다."
여인이 남자에게 사정했다.
"권 무인, 우리 양이만이라도 살려주게."
여인은 남자를 잘 아는 듯 보였다. 권이라 불린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좋습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드리죠."
여인의 얼굴에 기쁨과 희망이 스치는 순간. 권이 야비한 본색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냐? 이 망할 년아. 무릎부터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상전 노릇이야?"
애타는 모정을 희롱하며 권은 껄껄대며 웃었다.
놀란 아이가 어미의 치마폭에 안겼다. 수하였던 이에게 수모를 당하자 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여인이 다시 사정했다.
"양이만 살려주면 그대가 받을 돈의 열 배를 주겠네."
"제아무리 돈이 최고라지만 목숨보다 중할 수는 없지. 당신 아버지도 이미 제압당해서 붙잡혔다. 다 끝났다고."
아버지가 제압당했다는 말에 여인은 비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권이라 불린 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에게 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권이 양당에게 물었다.
"저놈 뭐야? 수하 아니었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특히 아이를 감싸 안은 여인의 눈빛에는 변수를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난 천천히 걸어서 여인과 아이 앞을 막아섰다.
"난 돈 받고 이 두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사람이다. 지켜야 할 사람은 등 뒤에 세우는 사람이기도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여인의 손에 천잠사(天蠶絲)로 꼬아 만든 동아줄이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제25회 제대로 찾아오셨소.
"뭐냐니까, 저놈?"
권이 양당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직 없애지 않은 낭인 놈이오."
"없앴어야지! 원래 약속은 여자와 아이만 넘겨주는 것이었잖아?"
"내가 처리하겠소."
"당장 처리해!"
양당이 검을 뽑아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내 앳된 얼굴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만과 착각을 일으킬지, 얼마나 많은 양당을 불러올지.
"딱 보니 주인을 배신한 파락호 새끼들인데,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아마 살인멸구하고 네게 줄 돈까지 꿀꺽할걸?"
그러자 권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 주인을 배신한 파락호 새끼?"
"애 앞이라 그 정도에서 그친 거야."
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 이상하게 미친놈이네."
"정곡 찔리니까 당황했지? 정말 저놈 죽이고 돈 꿀꺽하려고 했었지? 그러지 마라, 저놈 동료들까지 다 죽이고 여기까지 왔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권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버러지 같은 낭인 놈이!"
권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부터 죽여!"
복면을 쓴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봐라, 저 새끼부터란다. 나 다음에 너라는 소리 아니냐?"
그 말에 양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망갈 때 가더라도 돈은 받고 가야지."
한 걸음 뒷걸음쳤던 양당이 흠칫 놀랐다.
"무슨 헛소리냐? 내가 언제 도망갔다고?"
그가 버럭 화를 내던 바로 그 순간.
쉭!
권이 기습적으로 던진 암기가 허공을 갈랐다. 갑자기 날아든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양당은 그대로 꼬꾸라졌다.
"병신이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고 있어."
나는 죽은 양당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살면 이렇게 온다니까, 네 차례도."
이번에는 권에게 말했다.
"너도 쟤랑 똑같아. 한 놈이라도 살려서 날 상대하게 해야지. 성질난다고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나? 다들 분노 조절을 이리 못해서 오래 살아남을 수나 있겠냐고?"
"저 새끼 주둥이질 언제까지 들을래?"
권이 소리치자 세 복면인이 검을 뽑아 들며 다가섰다.
과연 그들은 굳이 양당을 살려서 방패막이로 삼을 필요가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여인을 바라보며 아이 눈을 가리라는 시늉을 했다. 여인이 아이를 감싸 안으며 눈과 귀를 막았다.
난 이 싸움을 길게 끌지 않았다.
그들이 공격하기 전 내가 먼저 몸을 날렸다.
풍신사보 중 명왕보를 발휘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경지였지만, 상대를 갓난아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에게 방어하고 말고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번쩍하는 순간 난 상대의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고, 나를 인지하는 순간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사내의 복면 속 눈이 부릅떠지는 것이 보였다. 만약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 아니었을까 싶다. '헉! 뭐가...'에서 그의 목도 그어졌다.
세 번째 복면인은 동료 둘이 죽었음에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여전히 눈 한 번 깜박이기도 전이었으니까.
원래 내 무공에 풍신사보가 더해진 지금, 그들의 실력으론 백 년을 대비해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복면인 역시 명왕보로 파고들어서 비천검술로 베었다.
권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세 줄기 검선이 동시에 그어졌고, 수하들 역시 일제히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쾌검술?"
"쾌검술은 쓰지도 않았다만, 지금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구나."
"당, 당신 뭐야?"
공포에 질린 권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대답 대신 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요?"
"권원이란 자로 우리 집안을 지키는 가신 중 한 명이었어요. 저는 황금장주(黃金莊主)의 여식인 금사연(金司戀)이에요."
"황금장!"
나는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의 부친은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거상(巨商) 금아수(金阿洙)로 복건제일거부(福建第一巨富)이자 황금장의 주인이었다.
내가 먼 길을 달려온 이유였다.
황금장의 반란.
임추가 말해준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금장주가 가장 믿었던 가신에게 배신을 당해 목숨을 잃은 사건.
마침 일정이 바뀌어 놈들의 마수를 피했던 황금장주의 딸은 낭인을 고용해서 달아나려 했지만, 결국 모두 목숨을 잃었다.
"소협을 고용하고 싶어요. 부디 저희를 도와주세요."
"상황이 바뀌었으니 제 몸값은 비싸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쪽은 아무리 비싼 몸값이라도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부디 저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구해주세요."
그러자 권원이 내게 사정했다.
"날 살려주시고 우리 쪽에 붙으시오. 어르신에게 말씀드려서 저 여자보다 돈을 더 주라고 하겠소!"
"황금장주 딸보다 돈을 더 준다고? 어떻게?"
순간 권원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차갑게 꾸짖었다.
"가신이었다면서? 그럼 네 자리는 저 여인과 아이 앞이어야지."
권원은 필사적으로 내 검을 피하려고 했지만, 우리 둘의 실력 차이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발악으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원의 뼈와 살을 가른 내 검이 심장마저 꿰뚫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가 죽는 모습에 비로소 금사연은 안도했다. 물론 아이의 눈과 귀는 꼭 가린 상태였다.
나는 권원과 복면인들의 품을 뒤져서 암기로 쓸 비수를 챙겼다. 지금부터 가야 할 곳에는 적들이 버글거릴 것이다.
"갑시다."
"우리 양이부터 안전한 곳에 데려가야 해요."
내가 마부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타시오.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내 옆이오."
금사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실력을 직접 보았고 어차피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올라타자 마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여상(呂相).
황금장 수호세가인 여가장(呂家莊)의 장주이자 오늘 배신의 주동자.
그는 오늘 거사를 위해 장장 십 년을 준비했다. 그 세월 동안 황금장의 주요 무인들을 회유했고, 몇몇은 사고로 위장해 제거했으며, 회유와 제거가 불가능한 무인들은 멀리 외부로 내보냈다.
그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금사연과 함께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금사연과 아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수하들이 두 사람을 생포해 왔다고 착각한 것이다.
"으하하하!"
그로서는 이들 모자를 놓쳤다면 평생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권원은 어디 갔느냐?"
그는 내가 권원의 수하인 줄 알았다.
"죽었소. 나 빼고 다 죽었소."
내 말투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겠지만, 그는 다음 질문이 더 궁금했다.
"어떤 놈에게?"
"젊고 잘생긴 신비 고수였소."
"뭐라고?"
여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한심한 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적에게 그따위 칭찬을 늘어놓는 거냐?"
"사실이니까."
"좋다. 그렇다고 치고. 그럼 너는 어떻게 살아남은...."
여상이 흠칫하더니 상황을 파악했다.
"네놈이구나!"
나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상이 소리쳐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와 마차 주위를 포위했다.
"여자와 아이를 구했다면 멀리 달아날 일이지, 왜 호랑이굴로 다시 돌아왔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호랑이가 어딨나? 길러준 주인을 문 개새끼들만 득실대고 있구먼."
여상은 물론이고 주위를 둘러싼 자들이 살기를 뿜어냈다. 그들은 여상의 수족들과 배신한 황금장의 무인들이었다. 찔리는 것이 있기에 그들은 더욱 차가운 분노로 양심을 가렸다.
마차 옆에 선 금사연이 아들을 꼭 안았다. 공포에 질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겁을 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여유는 오직 강자의 몫임을 잘 아는 그녀였고, 상인의 혈육답게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내가 편히 싸울 수 있도록 아들을 데리고 마차로 들어갔다.
여상 역시 내가 보통이 아님을 느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소협은 누구시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한잔하면서 말씀 나눕시다. 좋은 술로 대접하겠소."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착한척해도 안 봐준다. 빌어도 안 봐주고. 그러니 마음껏 욕하고 지랄해라."
회유책이 먹히지 않을 것을 직감한 여상이 차갑게 명령했다.
"합공해서 죽여라!"
그는 '합공'이란 말을 강조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놈들이 달려들었다.
쉭! 쉭! 쉭! 쉭! 쉭!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내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피해야지, 튕겨내야지란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비수는 그 생각마저 끊어버리고 급소에 박힌 후였다. 달려들던 무인들이 후두두 떨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익혔던 비도술은 비도종사(飛刀宗師) 서문철(徐文哲)의 탈명비술(奪命秘術)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이보다 뛰어난 비도술을 찾지 못했으니, 평생 가져가도 될 무공이었다.
가져온 비수가 떨어지자, 살아남은 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비도술의 고수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아주 짧은 순간의 기쁨이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고수와 중수 사이의 여러 단계의 실력이었는데,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 앞에서는 어떤 변별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한바탕 장내를 휘젓자 적들은 모두 쓰러졌고 여상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대협께선 누구시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이 소협을 대협으로 만들었다.
"대협은 무슨! 그냥 지나가다 돈 냄새 맡은 칼잡이지."
"얼마면 그냥 물러가 주겠소?"
"돈 많아?"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는 있소."
"그렇게 돈이 많은 놈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네 인생을 바꾸고 싶었으면 네 돈을 써야지, 왜 딴 사람 돈을 건드려? 그것도 모시던 주인 돈을."
대답이 궁색한 여상은 입술을 잘근 깨물 뿐이었다.
그가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이던 바로 그때.
"검을 버려라!"
뒤쪽 건물에서 놈의 수하가 금아수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수하 딴에는 인질극을 벌여 나를 굴복시키려던 모양인데, 그 모습에 여상은 탄식하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금아수를 숨겨서 나와 협상을 하려 했는데, 멍청한 수하가 그를 밖으로 데려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졌기에 여상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나를 압박했다.
"어서 검을 버려! 안 그러면 황금장주는 죽는다!"
순간 한 줄기 검기가 허공을 찢어발겼다.
비천검법 제사식 염천식(炎天式).
원래도 거칠고 패도적인 검기발출식이었는데, 그것이 흑마검에서 강력한 내공까지 실리자 그 기세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힐 정도였다.
쿠콰콰콰콱!
살아 있는 것처럼 회오리치며 날아간 검기가 무인을 치고 지나갔다.
금아수를 방패 삼아 몸의 삼분지 이를 숨기고 있었는데, 드러난 삼분지 일이 사라지고 없었다. 금아수만 세워두고 죽은 몸이 털썩 쓰러졌다.
검기를 날리느라 내공을 쏟아낸 지금이 기회라 여겼는지, 여상이 벼락처럼 검을 내지르며 기습했다.
대비하고 있었기에 그 회심의 일격은 당연히 빗나갔다. 연속되는 공격에 여상의 허점들이 계속 보였다.
평생을 갈고 닦았어도 내게 안 될 텐데, 수련이 있어야 할 자리에 탐욕이 들어찼으니, 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곧장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놈에게 몇 수 더 기회를 주었다. 여가장주를 손쉽게 제압한다면, 나에 대한 궁금증과 환상이 너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상의 검이 요혈을 노리며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기에 공격은 필사적이었다.
보는 사람은 박빙의 승부에 숨을 죽였겠지만, 내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그렇게 삼십여 수가 지났을 때.
푹.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싸움은 끝이 났다.
내질러진 여상의 검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 검날에 금아수가 기뻐하는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여상의 공격을 비스듬히 교차한 내 검은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날 향한 여상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지만 나는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수호세가 가주잖소? 당신만은 이러면 안 되는 거였잖소? 다음 생에서는 돈을 벌고 싶으면 상인이 되시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살수가 되시고."
이미 절명한 여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검을 뽑자 그가 허물어졌다.
숨죽인 채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지켜보던 금사연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들과 함께 내렸다.
"아버지."
"할아버지!"
금사연과 아이가 금아수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사연아! 양아!"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금사연이 눈물을 흘렸고, 엄마가 울자 아이가 따라 울었다.
잠시 후, 갇혀 있던 황금장의 무인들이 풀려났다.
장내가 정리되자 금아수는 다시 한번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금사연에게 앞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자신을 구해준 것보다 딸과 손자를 구해준 고마움이 훨씬 컸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소협은 우리 가문을 멸문에서 구한 은인이시오. 부디 존성대명(尊姓大名)을 알려주시겠소?"
여상과 그의 수하를 단신으로 처리했으니 나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되었다.
"그냥 지나가던 낭인에 불과합니다."
"낭인왕(浪人王)이 왔더라도 이들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진 못했을 터인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내가 끝내 신분을 밝히지 않자 금아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금사연이 금아수에게 앞서 나와 했던 약속을 전했다.
"은공께 약속했어요. 보상은 돈으로 하겠다고요."
금아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딸을 칭찬했다.
"잘했다. 가장 확실한 약속을 했구나."
여유를 되찾은 그는 비로소 복건제일거부의 면모를 드러냈다.
"만약 은공께서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오늘 제대로 찾아오셨소."
제26회 많이 가져갈수록 인연은 깊어진다.
금아수가 황금장 지하의 비밀통로를 앞장서 걸었다.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벽과 천장, 바닥 곳곳에 치명적인 함정과 기관 장치가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뒤따르던 금사연의 긴장이 전해져왔다.
오직 길을 아는 자만이 갈 수 있는 복잡한 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황금장의 보물이 보관된 비밀창고였다.
"우리 목숨을 구해줬으니 전 재산을 줘야 마땅하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소."
"거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액수를 정해 보답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단 이게 어떻겠소? 이곳에서 은공이 한 번에 가져갈 수 있는 만큼 가져가시는 거요. 대신 수레를 사용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되오."
"제가 가지고 나오는 것까진 인정한단 말입니까?"
"그렇소."
"내공을 사용해도 됩니까?"
"물론이오."
"그럼 꽤 많이 들고나올 텐데요?"
"은공이 아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터, 이 정도는 보상해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한 시진 드리겠소. 괜찮겠소?"
"충분합니다."
나는 천천히 보물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검무극이 보물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금사연이 금아수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말이냐?"
"은공의 무공이라면 생각보다 많이 가져갈 수도 있어요. 아깝지 않으시냐고요."
금사연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내심 아버지가 나중에 화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재물을 모으는데 자신의 인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한데 그 인생의 많은 부분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저 안에 오늘 우리가 지켜낸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더냐?"
금아수가 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와 양이가 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너희들까지 잃었다면...."
금아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란 소릴 평생 듣고 살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식에 관해서는 피도, 눈물도 철철 흘리는 사람이었다. 다만 표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
오히려 이번 기회에 금아수는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모든 재산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혈육인데, 재산을 모으기 위해 혈육을 등한시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재산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자신이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하다 죽는다면 여한이라도 없지, 이번 경우는 믿었던 가신의 배신이다. 아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저 소협, 보통 사람이 아니야."
"네. 어린 나이임에도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내가 본 것은 실력만이 아니다."
"그럼 또 뭘 보셨죠?"
"그걸 뭐라고 표현할까 아까부터 고민했었다만, 생각해내지 못했다. 저 소협에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세가 있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만나온 그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렇게 여유로우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돈은 다시 벌면 되지만, 저런 사람과의 인연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지."
더구나 상대는 젊었다. 금아수는 딸과 손자가 이끄는 황금장의 다음 시대에서도 저 청년과의 인연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 가져가도 상관없다. 많이 가져가면 갈수록 우리와의 인연은 깊어질 테니."
* * *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평생 이런 보물창고는 두 번 다시 들어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한쪽에 금붙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쳐다보면 눈이 부실 정도였다. 불상과 무인상, 식기류와 장식품, 호랑이, 두꺼비, 거북이, 돼지 등 온갖 동물들까지. 그야말로 황금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잘 진열했을 터인데, 나중에는 그 개수가 너무 많아져 그냥 산처럼 쌓아둔 모양이다.
그 옆 장식장에는 진귀한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반지나 목걸이, 팔찌 등의 보석류부터 옥으로 만든 여인들의 노리개까지.
반대쪽 장식대에는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뒤로는 유명 화공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온갖 진귀한 것들이 가득했다.
다시 그 옆으로 나를 흥분시키는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두운 곳을 밝히는 야명주와 입에 물고 있으면 중독되는 것을 막아주는 피독주(避毒珠)였다. 특히 피독주는 크기가 아주 작은 최상품이었다.
그것이 각기 다섯 개씩.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보석들보다 더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야명주와 피독주부터 챙겼다. 그것들을 모두 챙겨 품에 넣었다.
어마어마한 가치가 품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다음으로 챙긴 것은 비싸게 팔 수 있는 반지를 손가락에 꼈고, 팔찌와 목걸이를 겹쳐서 찼다. 주렁주렁 무거울 정도로 찼다.
나는 금붙이들을 담을 것을 찾았다. 큰 혁낭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담을 만한 것이 없었다.
옷이라도 벗어서 담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구석에 세워진 옷감 원단을 발견했다. 살펴보니 그것은 새외에서 들어온 천잠사 원단이었다.
검으로 그것을 최대한 크게 찢어 커다란 보자기로 만든 다음 거기에 금붙이들을 쓸어 담았다.
내공을 사용해서 옮길 수 있으니, 이렇게 저렇게 배치를 바꿔가며 담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이 담았다. 그림이나 도자기는 남겨두었다. 구겨지거나 깨어질 위험이 있어서였다. 정확한 가치를 잘 모르기도 했고.
황금장주의 사정은 생각지 않았다. 적어도 재물과 관련해서 내가 걱정해줘야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한 시진도 꽉, 보자기도 꽉 채워서 보물들을 챙겼다.
비밀금고를 나오는 내 모습을 보며 금아수와 금사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내 몸집보다 훨씬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이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창고 문이 워낙 컸기에 그냥 나올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벽을 부수고 나왔어야 할 정도였다.
"약소하게 이 정도만 가져가겠습니다."
쿵.
보따리를 내려놓자 쿵 하며 바닥이 진동했다.
내 손가락마다 반지가 다 끼워져 있고, 목과 팔에 목걸이와 팔찌가 치렁치렁 감긴 것을 보더니 금아수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하하!"
"우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 재산이 축나니 슬픈 것도 사실이지만, 적어도 은공이 위선자가 아니란 사실이 기쁘오. 내가 아는 위선자들은 쓸데없고 하찮은 체면을 세우느라고 몇 가지 물건만 챙겨 나왔을 테지. 하지만 속은 얼마나 쓰리겠소? 나는 그런 위선자들은 딱 질색이라오. 욕심은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소중하면서도 중요한 감정이거늘."
그는 욕심 예찬론자였다. 그 욕심 때문에 복건제일거부의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 테고.
"천잠사를 찢어 보자기를 만든 것도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소."
"감사합니다."
"헤어지기가 아쉽구려.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시오."
"보물을 옆에 두고 술을 마시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다음에 뵙지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은공을 다시 찾아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때까지 많이 벌어두십시오."
그 말에 금아수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재물과 관련해서 솔직한 모습을 보일수록 그의 호감이 높아진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은공을 만나려면 어디로 찾아가면 되오?"
"중원 각지에 있는 서호객잔(西湖客棧)에 장주님 이름으로 기별을 남겨두면 제가 찾아뵙지요."
서호객잔은 본교에서 운영하는 비밀연락소였다. 이렇게 필요한 연락을 받아, 본교의 중요 인물들에게 기별하는 역할을 했다.
"과연 은공께선 범상치 않은 사람이구려."
금아수는 알 것이다. 비범한 사람들만이 이런 식으로 연락소를 운영한다는 것을.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은공의 무운을 빌겠소."
그렇게 황금장주와 깊은 인연을 맺은 후 나는 그곳을 나왔다. 황금장주와 인연은 나로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었기에 기분 좋게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 * *
나는 마을에서 마차를 구해 보물을 가득 싣고 교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황금과 보물을 나눠 팔았다. 한 곳에서 소화할 수 없는 수량이었기에 도시에 들를 때마다 여러 곳에 들러서 보석을 팔았다.
평생 중원을 헤매었기에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디에서 팔아야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야명주와 피독주를 제외하고 모든 금붙이와 보석을 팔아치웠다.
그래서 장만한 돈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중원전장(中原錢莊), 대륙전장(大陸錢莊), 풍운전장(風雲錢莊)에 나눠 맡겼다. 그렇게 내가 챙긴 돈은 무려 삼백팔십만 냥에 달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돈이었다.
'고맙소, 황금장주. 그대는 모르겠지만, 이 돈은 앞으로 무림의 전설이 될 조직의 초석이 될 거요.'
삼백오십만 냥은 전장에 남겨두고 삼십만 냥만 전표로 찾아서 돌아왔다.
교로 돌아오자마자 천마전으로 가서 아버지부터 만났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천마전을 태산처럼 지키고 계셨다.
피의 길, 붉은 융단을 걸어가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마명의 보고를 들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실 거다. 그 결정에 누군가는 살고, 또 누군가는 죽고.
과연 아버지는 이 삶에 만족하실까?
내가 그랬고 이안이 그랬듯, 아버지도 천마라는 자리로 떠밀렸던 것은 아닐까? 진정 원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데.
"출교했다고 들었다."
"돈 벌러 다녀왔습니다."
"돈은 왜?"
"언제까지 아버지 돈 쓰고 살 수는 없잖습니까? 앞으로 많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요."
"어디에 쓰려고?"
"사조직을 하나 가지고 싶습니다."
"사조직?"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매서워졌다.
"마존들도 각자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상대하려면 저도 조직이 있어야지요."
"안 될 일이다. 네가 가지면, 네 형도 가지려 할 테고. 마존들의 혈육이나 제자들도 가지려 들 거다. 불가!"
한 번에 허락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당장 급한 일도 아니었고.
한 명 두 명 좋은 수하들이 모여서, 언젠가 물이 넘치게 되면 그때는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조르지 않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돈은 많이 벌었느냐?"
"네, 많이 벌었습니다."
내가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아버지 겁니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자 내 손에 있던 봉투가 허공을 날아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더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상승의 묘리가 담긴 허공섭물(虛空攝物)이었다.
아버지가 봉투 속을 확인했다. 든 것은 십만 냥짜리 전표였다.
"이게 무슨 돈이냐?"
"아버지 용돈입니다."
"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저렇게 놀란 이유는 용돈으로 받기에 너무 큰 액수라서가 아니라 바로 용돈이란 말 때문일 것이다.
"나 돈 많다."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분이신 것. 방금 드린 돈은 저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 첫 용돈입니다."
잠시 전표를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아부하는 거냐?"
"앞으로 낯간지러울 정도로 아부를 많이 하겠지만, 이 용돈만큼은 아닙니다. 한번은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아버지."
정중히 인사하고 피의 길을 걸어 나왔다.
아버지의 시선이 그곳을 나올 때까지 내 뒤통수를 뜨겁게 달구었다. 지금 몹시 당황하고 계실 것이다.
역대 천마 중 아들에게 용돈을 받은 첫 번째 천마가 되셨을 테니까.
제27회 나는 들었다.
며칠 후, 나는 정식으로 황천각주에 올랐다.
아침 일찍 내 거처로 황천각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앞장선 사람은 함께 마군 조사를 했던 특별조사관 서대룡이었다.
"각주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서 조사관. 자네가 왔군."
"제가 지원했습니다."
사실 내가 황천각주가 된 것에는 눈앞의 이 작고 우울해 보이는 남자의 역할이 컸다.
"가시죠."
나는 이안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안아, 너도 함께 가자. 조직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배워야지."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안 데려갈 줄 알았는지,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뻐했다.
"우리 놀러 가는 것 아니다. 가서 배워.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고, 수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도 빠지지 말고 다 배워라."
"네!"
황천각에 도착했을 때, 조사관들이 모두 나와 입구에 늘어서 있었다. 새로 각주가 부임하면 이렇게 환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나가자 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나는 그들이 내 부임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호의적인 눈빛이었다.
그래서 옆에 서 있던 서대룡에게 슬쩍 물었다.
"환영하는 척 안 하면 월봉 깎는다고 했어?"
"아뇨."
"아닌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
그러자 서대룡이 발을 들어서 땅바닥을 내리찍는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이들의 환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마군 일대주 고당 때문이었다. 고당은 처음 조사를 나갔던 조사관을 살해했고, 이번에는 조사관을 다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고당의 머리통을 박살 내서 죽였으니 그들에겐 통쾌한 복수를 해준 셈이었다. 거기다 각주 자리에 앉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는 저항감은 천마의 혈통이 어느 정도 메워줬을 테고, 마군주까지 죽였으니 무공 실력 역시 검증된 상태.
"한 말씀 하시죠?"
서대룡의 말에 나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수하들을 향해 돌아섰다.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짤막한 말을 전했다.
"내가 각주가 돼서 그대들이 더 행복해질지 더 불행해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전보다 심장은 더 빨리 뛸 거다."
그 말만 하고 돌아서 건물로 들어갔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곧 알게 될 테니까.
집무실까지 안내한 서대룡이 돌아가려고 할 때, 내가 그를 남겼다.
"서 조사관,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서 조사관 보고 싶어서 왔지."
입에 발린 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서대룡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안아, 이런 무뚝뚝한 남자는 절대 피해야 해. 평생 재미없어."
"대신 진국일 수도 있죠."
이안이 서대룡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냐, 이 친구는 건더기 하나 없는 멀건 국이야."
이번에는 서대룡이 직접 나섰다.
"저, 진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싱겁지도 않습니다."
"오, 성격 있어. 앞으로 그 성격 필요할 때가 많을 거야."
눈치 빠른 서대룡은 내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뇨. 저 싱거운 국입니다. 제발 위험한 일에 절 찾진 말아 주십시오."
"그 멀건 국에 밥 말아 먹을 거야. 매운 양념 팍팍 풀어서."
서대룡이 뒷걸음질 쳤다. 괜히 겁먹은 척하지만, 서대룡은 용감한 남자다. 저 작은 몸집에 큰 용기와 기상이 깃들어 있음을 나는 안다.
"자, 본 각에 대해 말해줘. 나 하나도 몰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대룡이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황천각은 본교의 교칙과 법령을 수호하고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부정부패 척결은 물론이고 교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을 처리하죠. 총인원은 백 명으로, 조사관이 삼십 명이고 집행무인이 칠십 명입니다."
집행무인은 조사관을 보좌하며 호위하고, 죄인을 체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네."
"숫자가 많을 필요가 없는 조직이니까요."
황천각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권위 있는 조직이었다. 물론 마군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마인들 대부분은 황천각을 무서워했다.
"조사관 삼십 명 중에 특별조사관은 모두 다섯 명입니다. 특별조사관은 어렵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건을 주로 맡습니다만, 평소에는 일반 조사관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집행무인은 따로 조사관에 배정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지원을 나갑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서 조사관, 자네가 생각하는 황천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서대룡이 대답했다.
"본교의 어떤 조직도 팔마존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황천각을 콕 찍어 말하진 않았지만, 역시 팔마존이 가장 문제란 의미였다.
"자네도 그 영향에 속해 있나?"
"저는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외톨이라서요."
적어도 돈이나 승진을 위해 교내 정치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신념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투덜대는 불평분자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좋아. 너무 이상에만 치우친 사람은 나도 싫거든."
내가 힐끗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합리적인 사람 좋아해. 자기부터 챙기는."
자신을 두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안은 옅게 웃을 뿐이었다.
내 시선이 다시 서대룡을 향했다.
"자네가 그랬지? 본교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어떤가? 이제부터 나와 본교를 바꿔보는 것은?"
"그렇게 열정을 발휘하시다가 떠나버리시면요? 이렇게 갑자기 오셨던 것처럼요."
"나야 갈 때 되면 가야겠지."
"함께 열정을 불태웠던 저는 타버린 재 속에 홀로 남아야 하는데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원래도 외톨이라면서? 어때, 할래?"
내 뻔뻔함에 서대룡은 보란 듯이 큰 한숨을 내쉬었지만, 대답은 행동과 달랐다.
"하겠습니다."
"이유는?"
"이미 마군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네. 맡겨주십시오."
나는 기분 좋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서대룡은 굳게 맞잡았다.
'내가 가면 넌 어쩌냐고? 어쩌긴, 내 자리에 앉는 거지.'
암튼 생각보다 환대를 받으며 부임했고. 이제 필요한 것은 나란 사람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본보기가 필요했다. 아주 독하고 나쁜 놈으로.
"최근 팔마존과 관련된 사건 중에 내가 다시 챙겨야 할 사건이 있나?"
'다시 챙겨야 할'이란 말은 '부당하게 처리된'이란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서대룡은 내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당연히... 있습니다."
당연히란 말이 앞서 서대룡이 말한 황천각의 문제점을 되짚어주었다.
"가져와 봐."
잠시 후, 서대룡이 서류를 가져왔다.
사건 내용을 확인한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나 죽이려고 이러는 거지?"
서대룡이 가져온 사건은 하필이면 혈천도마와 관련된 사건이었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최근에 발생한 사건이고, 말씀하신 바에 부합합니다."
"그러니까 왜 하필 혈천도마냐고!"
지켜보던 이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도련님, 이번만큼은 참으셔야 해요. 도마 어르신께서 거의 폭발 직전 상태일 거라고요."
난 이안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런 이유로 덮기에는 거기 적혀 있는 사연이 너무 억울해. 이안, 읽어보고 덮을 수 있으면 덮어봐."
내용을 읽은 이안은 차마 서류를 덮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못 참겠네요."
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운명이 날 부른다면 가야지."
사실 이건 운명 같은 것이 아니다. 주위에 쓰레기들을 방치한 한 늙은이 때문에 벌어지는 필연일 뿐이다.
* * *
곽수(郭洙)는 술에 취해있었다.
그는 술로도 어쩔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무관을 다니던 아들이 친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것이다. 머리를 다친 아들은 열흘이 지나도록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풍류주점(風流酒店) 주인장 조춘배(曺春培)가 그의 앞에 앉았다.
"그놈들이 풀려났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곽수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젠장! 제기랄!"
황천각 조사관이 이번 일을 조사했다. 당연히 사고를 저지른 놈들이 뇌옥에 갇힐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세 놈은 무죄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친구와 비무를 하다가 다친 것으로 처리된 것이다.
"다 틀렸소. 이번 일을 주도한 애의 아버지가 백도귀(百刀鬼)라고 하더이다."
백도귀는 백 명의 도귀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저런!"
조춘배가 탄식했다. 상대 아버지가 혈천도마의 수하, 그것도 십도귀(十刀鬼)도 아닌 백도귀라면 이번 일은 이대로 끝이었다.
"황천각 조사관도 다 똑같은 놈이오. 그 새끼들이 더 나쁜 놈들이오."
"쉿! 목소리 낮추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조춘배가 주위를 살피며 그를 진정시켰다.
"들으라고 하시오. 황천각 개새끼들에게 나부터 죽이라고 하시오! 백도귀가 직접 와서 날 죽이라고 하시오!"
꽝!
곽수가 탁자를 내리쳤다. 술병이 흔들려 떨어지려는 것을 조춘배가 재빨리 잡았다.
"이 사람아! 제발 참게."
"아들놈이 깨어나지 못하면 마누라는 제 명대로 못 살 거요."
조춘배는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안다. 곽수에게는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이들 부부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다.
"깨어날 거네."
"만약 못 깨어나면 그놈 죽여버리고, 나도 자결하렵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죽일 수는 있고요?"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니 주점 입구에 청년 셋이 서 있었다.
"너는?"
방금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물은 사람은 가운데 청년이었는데, 이 청년이 바로 이번 폭행을 주도한 양호(梁湖)였다.
"아저씨가 뭔데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죽인다 만다 그러세요?"
곽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너!"
막상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양호를 만나자 그는 놀라고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버럭 소리쳤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지금... 내 아들 살려내! 살려내라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그의 감정은 격렬했지만, 양호는 심드렁했다.
"이 새끼야! 우린 너한테 사과 한마디 못 들었다!"
그러자 양호가 앞으로 나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네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됐죠? 나 분명 사과했어요. 그러니 아저씨도 이 새끼, 저 새끼 그만 하세요."
"뭐? 너 방금 뭐라 했어?"
"내가 아저씨 자식 아니잖아요?"
옆에 있던 두 놈이 킥킥댔고, 양호 역시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취기와 분노가 뒤섞인 곽수가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려 했고, 조춘배가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말렸다.
"참게. 참아!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참아!"
여기서 곽수가 검을 뽑았다간 양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다. 곽수는 외전의 하급 무인이었고, 양호는 나이는 어렸지만 어려서부터 제대로 무공을 익혀왔으니까.
"아저씨, 미쳤어요? 사과하래서 했는데 날 죽이려 하네."
그냥 가면 될 것을 양호는 작정하고 온 듯 계속 곽수를 자극했다.
"참, 양심 없네. 자, 죽여봐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라고."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곽수는 당장이라도 놈을 찔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길 수도 없지만, 설령 양호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건 더 큰 문제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다. 자신은 물론이고 의식을 차리지 못한 아들과 슬픔에 잠긴 아내까지 모두 양호의 아비에게 살해당할 테니까.
"자네들도 어서 가시게. 어서."
조춘배가 양호와 친구 놈들을 내보려고 했지만, 양호는 인간이길 포기한 놈처럼 굴었다.
"우리 동이가 누구 닮아서 겁쟁이인가 했더니 아버지를 닮았었네."
그 순간 곽수는 이성을 잃었다.
곽수가 검을 뽑았고, 기다렸다는 듯 양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얼굴을 가격당한 곽수가 뒤쪽 탁자에 부딪히며 자빠졌다.
"분명 저놈이 먼저 검을 뽑았어!"
뒤에 서 있던 두 놈이 증인이라도 된 양, 우리가 봤다고 소리쳤다.
양호가 달려들어 곽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창고나 지키는 놈이 감히 황천각에 날 고발을 해?"
놈이 돌아가지 않고 시비를 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황천각에 고발당하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났고, 분을 이기지 못해 화풀이하러 온 것이다.
그렇게 실컷 주먹질한 후에야 양호는 곽수의 몸에서 일어났다.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야. 집에 가서 돈 훔쳐 오라니까 그러데. 아버지가 피땀 흘려 번 돈이라서 안 된다고. 병신이 혼자 착한 척은. 나만 쓰레기냐고? 그러니 내가 안 때릴 수가 있어? 이게 다 아저씨 책임이야. 알았어?"
"... 네 입으로 자백했다!"
곽수의 입술은 터졌고 찢어진 눈 밑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이 순간 그는 어떤 희망을 찾았다.
"무슨 자백?"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들었다! 네가 우리 아들을 왜 때렸는지. 비무가 아니라 폭행이었다는 자백을 했어."
양호가 사나운 기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여기 내가 한 말 들은 사람 있어요?"
그곳에 손님이 여럿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 주점 주인인 조춘배도 나서지 못했다. 나서는 순간 이곳에서 장사를 접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것이다. 손님으로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들은 사람 없다는데? 히히히."
양호의 웃음에 결국 곽수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어흐흐흑!"
너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들을 혼수상태에 빠지게 한 놈이 자신을 희롱하며 웃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참담했다. 아버지로서 부끄러웠고 너무 미안했다.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흘러내렸다.
"병신처럼 어른이 운다. 정말 부전자전이다. 하하하."
양호와 함께 온 놈들도 킬킬대며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주점 이 층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들었다."
제28회 출발하니까 꽉 잡아.
이 층에서 들려온 말에 양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떤 새끼야?"
그때 다시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대뜸 욕이라니?"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아서 옥구슬 구른다는 표현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설령 이 여인에게 욕을 듣더라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저 머리통 속에 대체 뭐가 들어서 저 모양일까?"
"가정교육이 잘못된 거겠죠."
"부모가 방치해도 잘 크는 애들은 또 잘 큰단 말이지. 그러니 무조건 부모 탓을 할 수는 없지."
"맞는 말씀이세요."
평소라면 화를 미친 듯이 냈겠지만, 양호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색념(色念)이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만 봐서는 천하절색(天下絶色)일 것 같은데? 오늘 잘하면 뜨거운 밤을 보낼 수도 있겠구나!'
함께 있는 사내놈은 작살 내버리고, 여자를 취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겁 없는 상상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마가촌의 객잔이나 주점, 기루 등은 그 신분이나 실력에 따라 주로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이곳 조춘배가 운영하는 풍류주점은 하류 무인들이 오는 곳이었다. 당장 자기 아버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 수하들인 도귀들조차 오지 않는 곳.
그렇다고 이 마가촌은 지나가던 정파나 사파의 무인들이 들릴 곳도 아니니, 당연히 상대가 본교의 하류 무인이겠거니 단정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이 층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고작 백도귀의 자식이 대낮에 이런 횡포를 저지르는 것을 보니, 도귀의 위세가 가히 대단하구나."
"혈천도마의 위세를 업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양호는 의아했다. 감히 아버지를 얕잡아 보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지만, 상대는 혈천도마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떻게 자랐을지 상상이 간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큰 거죠."
듣고 있던 양호가 앞서와는 달리 점잖게 말했다.
"왕림하신 고인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셔서 이 아둔한 후배의 잘못을 짚어주시길 바랍니다."
자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덧붙여 말했다.
"병신아, 이럴 줄 알았냐? 어떤 연놈들이 신비인 행세를 하는지 몰라도, 당장 대가리 안 내밀면 뒤질 줄 알아라."
그러자 이 층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새파랗게 젊은 모습에 양호의 긴장이 풀어졌다.
"너냐?"
"그래, 나다."
"함께 떠들던 년은?"
그러자 이번에는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모습에 양호가 소리를 질렀다.
"으악! 뭐야?"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소협."
"정말 너야? 너냐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절세미녀가 아니라 뚱뚱한 여인이었다. 행복한 상상이 깨진 양호가 버럭 소리쳤다.
"이 잡것들, 뒈지기 싫으면 당장 내려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