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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닮은 두 사람(8) >

순간적으로 악마에게서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한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이어 고막을 때리는 엄청난 굉음.

무시무시한 뇌전이 사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벽력!'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전에 한 번 겪어본 적 있던 감각이기에, 재빨리 뒤로 피해서 망정이었지, 잘못했으면 온몸이 조각나서 죽을 뻔한 것이다.

―크흐흐,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니!

어마어마한 위력에 악마도 헛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다행이야.'

장담할 수 있었다.

초감각이 보내는 신호가 아니었으면 나는 절대로 저 공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았어.'

지금까지 초감각이 보내온 신호는 단 두 번.

내 분신에게서 벽력이 터질 때와.

바로 지금.

두 상황의 공통점은 딱 하나였다.

'즉사에 준하는 공격을 받을 때 발동되었다는 것.'

아무래도 즉사할만한 상황에서는 초감각이 신호를 보내준다는 가설이 맞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엄청나게 값진 정보였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벽력에 대한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괴롭혀 주지.'

물론 고작 두 번으로 확신할 순 없지만.

방금 벽력이 터졌으니, 확률적으로도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악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1:16:27]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와중이었다.

물론 내게만 지루하고, 악마 입장에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일 테지만.

―허억, 허억. 이 지독한 새끼. 헉, 네 놈만큼은 허억, 어떻게든 죽이고야 말겠다. 허억.

천둥의 숨결 탓에, 녀석이 빠르게 지쳐갔다.

물론 녀석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남은 체력 : 26%]

내 체력도 이미 바닥을 찍은 지 오래.

'후우.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녀석을 끝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내가 뚫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치우나 키아라 역시 상위 플레이어.

내가 뚫린다고 해서 그들이 쉽게 죽진 않겠지만, 자칫 잘못해서 악마가 두 사람의 스킬까지 복제하면 이 전투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녀석이 키아라나 고치우에게 향하는 것 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테루오미님!"

"말하시오!"

"잠시만 교대를!"

내 말에 바로 달려오는 테루오미.

"헉, 잘 부탁합니다!"

그가 안정적으로 악마를 막아서는 걸 본 나는 빠르게 후방으로 달려갔다.

마침 피의 강화 특전도 끝나가는 상황.

병사들을 학살해, 체력도 채우고 피의 강화 특전도 다시 활성화 시킬 생각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기사님! 그 악마가 또 옵니다!"

"젠장! 모두들 물러서지 마라! 지금까지처럼 방패를 들고 밀어붙이는 것에 집중한다!"

키아라와 고치우를 지나 병사들에게 쇄도하자, 적 병사들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마력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병사들이 방패로 내 창을 막을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서걱!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

한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몸이 빠르게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헐떡이던 호흡도 안정화되었고, 폭주하던 심장 박동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후우. 좀 살겠네.'

그 빠른 회복에, 나도 모르게 희열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띠링!

[<피의 강화>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피의 강화> 로 상승한 스텟이 초기화 됩니다.]

때마침 피의 강화 특전이 종료되며, 스텟이 대폭 깎여나갔다.

그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스텍이 쌓여갔다.

'대충 회복했으니까 피의 강화 특전만 켜고 다시 교대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크윽!"

등 뒤에서 들려오는 테루오미의 신음 소리.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테루오미의 모습이 보였다.

└와 ㅋㅋㅋㅋㅋ 렌이 30분 가까이 혼자서 막아내던걸 테루오미는 1분도 못 버티네 ㅋㅋㅋㅋㅋ

└테루오미랑 렌의 수준 차이가 그렇게 심하지 않은 것 같던데, 왜 저렇게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거임?

└아니 오히려 상대가 바뀌자마자 악마가 더 강해진 느낌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렌이랑 테루오미랑 둘 다 기초가 좋아서 수비가 뛰어남. 대신 테루오미는 단순히 잘 막는 수준이고, 렌은 상대 스타일에 따라 카운터를 쳐서 상성으로 먹고 들어가는 게 있음. 그래서 렌은 잘 버텼고, 테루오미는 압도적으로 밀리는 거임.

└한마디로 테루오미는 스타일이 단조로운데, 렌은 되게 다양하다는 거잖아?

└고작 그거하나로 저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렌도 악마랑 맞다이 까면 개발림 ㅇㅇ 근데 상대의 강점은 최대한 억누르고, 약점을 공략하는 역상성 스타일로 나오니까 가능한 거ㅎ

└팀 투지 교육 시스템 한 번 보고 싶다ㅠ 요즘 투지 애들 기본기도 짱짱하고 성장률도 엄청 높던데..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저런 플레이가 가능한 거지?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고작 여섯 번의 창질만으로 피의 강화 특전을 켠 나는 곧장 악마를 향해 짓쳐들어갔다.

"테루오미님! 다시 교대를!"

"고, 고맙소."

다행히 테루오미가 무너지기 직전에 나와 바통 터치를 했기에, 악마가 키아라와 고치우에게 향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다행이야.'

테루오미 입장에서는 악마를 막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야 초감각과 마력장이 있어서 고치우와 키아라의 엄호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지만, 테루오미는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지는 몰랐지만.

―허억, 네 놈이 언제나 걸림돌이구나. 조금만 더 있었으면 끝낼 수 있었거늘.

내가 다시 창끝을 겨눈 채 견제를 시작하자, 악마가 으르렁댔다.

'이번에는 방해하는 수준이 아닐 거야.'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한 채 부지런히 움직이며 녀석을 괴롭힐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몰아붙일수록.

녀석의 얼굴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남은 체력 : 87%]

내가 피의 강화 특전을 다시 켜고 온 순간, 애초에 이 전투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허억, 헉, 이럴 수가.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헉,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떻게!

이전보다 훨씬 더 쌩쌩해진 상태였달까.

반면에 악마는 움직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느려졌다.

마의 체력 구간, 10% 미만으로 떨어지는.

생명의 번아웃이 시작된 것이다.

챙! 채챙! 챙! 챙!

―이번에도, 허억. 네 놈이냐! 어째서! 어째서 자꾸 중요한 순간마다 네 놈이, 쿨럭.

내 창을 막아내던 악마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울부짖는 녀석의 목소리엔 다양한 감정들이 들어 있었지만.

푹!

나는 철저하게 무시한 채 녀석에게 창을 휘두를 뿐이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때마침 발동된 벽력.

순간 엄청난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쐐애애애애애액!

내가 휘두른 창의 궤적은 한줄기 섬광이 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체력이 다 빠진 악마가 피할 가능성은.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전혀 없었다.

띠링!

[플레이어 '헬리퍼' 를 처치했습니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0:59:16]

[승리 조건1을 달성하셨습니다!]

온몸이 터져 나가고.

얕게 솟아오른 뿔이 돋보이는, 악마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녀석을 처치하자마자 나오는 알림 콜.

'후.'

나는 그제야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타임 어택 미션도 끝났고.

카이로시아도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

이제 남은 건.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193,666 명]

저 20만이라는 생명체를 모조리 죽이는 것뿐.

학살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시스템이 죽이라고 지정하면.

난 그저 죽일 뿐.

"이, 이럴 수가! 신께서 보내주신 사자님이!"

"안 돼!"

악마를 처치한 나와 키아라, 고치우는 곧장 주변의 병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테루오미 혼자서 막아내던 녀석들.

그걸 네 명이서 했으니, 얼마 못 가 그 많던 병사들을 시체로 만들 수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렌님!"

"혼자서 그 괴물을 막아내시다니!"

"과연 네임드라고 할 만한 실력이었소."

주변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고치우와 키아라, 테루오미가 감탄하며 다가왔다.

그들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 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아, 정말 쉽지 않았네요."

가볍게 숨을 돌리는 키아라.

마력을 제법 많이 썼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고치우도 계속해서 화살을 쏘느라, 손끝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후방에서 병사들을 막아냈던 테루오미도 제법 지쳐 보였고.

"조금만 더 고생하죠. 정 힘드신 분들은 잠시 에덴 밖에서 휴식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렌님은 계속 진행하시게요? 가장 무리를 많이 하셨잖아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키아라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버틸 만 합니다. 저는 바로 움직일 테니, 지금부터는 따로 행동하시죠."

"알겠어요. 에덴 남부로 가다 보면 호수 하나 있죠? 거기를 세이프티 존으로 할게요. 싸우다가 휴식이 필요하면 그쪽으로 오시면 돼요."

"예. 그럼."

키아라와 대충 만날 장소를 정한 나는 곧장 에덴의 내성 쪽으로 향했다.

다른 경기 때와 다르게 날 위협할 존재도 없고, 시간도 널널한 상황.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챙겨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이 정도 도시 국가를 운영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골드가 필요하지.'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바로, 이곳에 쌓여 있는 골드들을 챙기는 것.

마침 블랙 허브를 팔아 챙긴 골드도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교국이니까 아마 교황청에 쌓아놨을 거야.'

플레이어들에게 있어, 이런 미션은 보너스 스테이지와 같았다.

아이템이나 골드를 챙기기에 무척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길 곳곳에 널려 있는 시체와, 파란 불길이 일렁이는 건물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까지.

'치열한 전투였겠군.'

곳곳에 하위 플레이어들이 펼쳐놓은 전투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이교도다!"

"악마가 내성 쪽으로 간다! 어서 지원 병력을!"

콰지지지지지지직!

내성으로 통하는 성문 앞에서 불을 끄거나 시체를 수습하던 병사들을 단숨에 베어버린 나는 곧바로 교황청으로 향했다.

교황청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내성에서 가장 큰 건물이 교황청으로 쓰일 것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어디에 있으려나.'

교황청 내부로 들어온 나는 달려드는 생명체들을 모조리 죽여가며 방을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주민이 거의 30만에 육박할 정도로 거대한 도시답게, 교황청의 크기도 으리으리했다.

"이놈! 이교도 주제에 감히 신성한 곳에 발을 붙이다니!"

"해럴드 경이 안에서 치료를 받고 계신다! 이곳에서 놈을 반드시 막아야 해!"

내부로 향할수록 흑기사의 비율이 높아졌다.

녀석들을 죽이며 방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1층 로비에서 왼쪽 끝 방으로 들어간 나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

"어?"

병사들을 죽이며 들어온 방 안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녀석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일으키며 협탁에 놓인 검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우당탕탕탕!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녀석을 바닥에 패대기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군, 해럴드."

"크윽. 젠장! 간절히 죽이고 싶었던 녀석을 하필 이런 상황에!"

녀석은 승급전 경기에서 만났던 팔라딘, 해럴드였다.

나는 녀석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꺾으며 물었다.

뿌드득!

"궁금한 게 있는데. 이 도시를 운영하며 얻은 골드는 어디에 있지?"

"끄윽! 그걸 내가 너에게 말할 것 같으냐!"

뿌드득!

"골드는 어디에 있지?"

"끄아아아악!"

해럴드가 대답하는 걸 완강히 거부하며 입을 닫아버렸지만 상관없었다.

뿌드득!

어차피 입을 열게 될 테니까.

"내가 이 손가락만 꺾고 나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손가락을 다 꺾은 다음엔 하나씩 자를 거야. 아, 발에도 10개나 달려 있지. 그다음엔 눈을 뽑을 거고, 그다음엔 코를 부술 거야. 그리고 관절을 하나씩, 하나씩······."

뿌드득!

"끄아아악!"

"박살을 낼 거야. 어때, 얘기할 마음이 좀 드나?"

"퉤! 어서 죽여라!"

해럴드가 내게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좋아. 지금부터 굳이 물어보지 않을 테니, 말 하고 싶으면."

나는 인벤토리에서 고통 증폭의 물약을 꺼냈다.

"크릅. 쿨럭, 쿨럭."

그리고는 녀석의 입 속으로 콸콸콸 부어 넣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뿌드드드득!

"끄으윽!"

"언제든지 말하라고."

나는 그때부터 흑기사에게 내가 말한 순서대로 하나씩 하나씩 진행해 나갔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부러뜨리고.

잘라내고.

그리고 관절을 하나씩 부수려고 할 때였다.

"자, 잠깐······!"

해럴드가 눈물범벅이 된 상태로 악을 쓰며 입을 열었지만.

뿌드득!

내 양손은 멈추지 않았다.

"으아악! 자, 잠깐만! 얘기를! 얘기를 할 테니······."

뿌드드득!

"끄윽! 서, 성전! 성전 바닥을 살펴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성전이라고 대답하는 해럴드에게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무릎을 90도로 꺾었다.

뿌드드드득!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아아악! 말했잖아! 그런데 왜!"

뿌드드득!

"끄아악! 사, 사 층 대주교실! 대주교실에 있는 책장을 젖히면 있다고! 진짜로! 제, 제발 그만!"

이번엔 붉은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악마의 눈이 있는 이상, 내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느라 목소리가 완전히 가버린 해럴드.

녀석의 목을 쳐 깔끔하게 죽여 준 나는 곧바로 교황청의 4층으로 올라갔다.

4층엔 5개의 방이 있었는데, 가운데에 있는 방이 제일 커다란 걸로 보아, 대주교실인 것 같았다.

'책장을 젖히라고 그랬지.'

대주교실로 들어간 나는 벽 한쪽에 붙어 있는 책장을 밀었다.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조그만한 문을 열었을 때였다.

"······!"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의심했다.

그곳엔.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엄청난 골드와.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대충 봐도 등급이 높아 보이는 아이템들.

그리고.

'분명 마계에 있어야 할 아이템인데······!'

파랗게 빛나는.

가면 조각이 있었다.

< 84화. 닮은 두 사람(8) > 끝

< 85화. 혁명(1) >

'저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가면의 조각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여기에 있을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왜냐하면.

'분명 파란 가면 조각은······ 마계에 있다고 나와 있었는데.'

라이언의 트레이너 엔젤이 커뮤니티에 올렸던 게시글에는, 저 조각이 마계에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에나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팜으로 돌아가면 회귀했을 때 적어놓은 노트를 다시 펼쳐봐야 할 것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가면 조각을 주워들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가면에 합성하는 아이템이 확실했다.

'아이템 합성.'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파랑)> 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파랑)> 의 합성을 성공했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 을 획득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희열>]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 공작이 착용하던 가면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악마의 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피의 강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피의 흡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악마의 눈> ― 대상의 상태창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피의 흡수>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극소량의 스텟을 흡수한다. 한 가지 스텟만 흡수할 수 있으며, 흡수된 스텟은 영구적으로 유지된다.]

[등급 : 준신화]

상태창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잘게 떨렸다.

'생명체를 죽일 때마다 영구적으로 스텟이 상승한다고?'

정말로?

아무리 스텟이 높아도?

서둘러 심호흡하며 들뜨려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험해 보는 건 골드랑 아이템을 챙기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일단 골드랑 아이템부터.'

당장이라도 나가서 병사들을 죽여, 피의 흡수 능력을 써보고 싶지만, 이곳에 온 이유를 잊어선 안 된다.

나는 부지런히 비밀 창고에 쌓여 있는 골드와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 챙겼다.

비밀 창고답게 제법 높은 등급의 아이템들이 제법 많았지만, 아이템 정보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엔 이미, 피의 흡수를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기에, 어차피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창고에서 3천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과 각종 아이템들을 챙긴 나는 곧바로 교황청을 빠져나갔다.

띠링!

[관객들이, 당신이 교황청 내부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 합니다.]

"헉! 기사님, 이교도가 교황청에서 나옵니다!"

"이놈! 이교도 주제에 감히 성역을 더럽히다니!"

'피의 흡수를 사용할 제물들!'

그러자 애타게 찾고 있었던, 죽여야 할 생명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곧장 달려들어,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체력이 회복되고, 피의 강화 스텍이 쌓였다는 알림창과 함께 한 가지 창이 더 나타났다.

[<피의 흡수> 능력으로 극소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합니다.]

바로 미량의 민첩 스텟을 흡수했다는 알림창이었다.

'얼마나 오르는지는 안 나오는군.'

'극소량의' 라는 말로 미루어 보건데, 아무래도 시스템 창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양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곳엔 내가 죽여야 할 생명체가.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까.

미친 듯이 죽여대다 보면.

대충 얼마나 오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걱!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136,667 명]

내성과 외성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두르며, 피의 흡수 능력을 얻기 전보다 5만 킬 정도 더 했을 때였다.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알림창이 등장했다.

그동안 0.0001 단위로 오르고 있던 스텟이 결국 1을 채우며 스텟이 상승한 것이다.

물론 지력 스텟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내게 쓸모없는 스텟이라 굳이 카운팅하지 않았을 뿐.

지력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는 것과, 근민체 중에서 상대적으로 스텟이 낮은 근력이 가장 먼저 오른 걸로 보아,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텟이 높을수록 피의 흡수로 올리는 것도 어려워지나 보군.'

그래도 상관없었다.

5만 킬에 1 포인트만으로도.

내겐 너무나 값지고 소중했으니까.

거기다가.

'아직도 죽여야 할 녀석들은 차고도 넘쳐.'

이 정도라면 이번 경기에서 제법 많은 스텟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신이시여······."

내가 벼락을 뿌리며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자, 적들의 눈에도 서서히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오늘 자신들은 이곳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믿는 신이란 존재는, 그들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콰과과과과과과광!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굉음과 함께 엄청난 먼지가 피워 올랐다.

다른 쪽에서도 병장기가 부딪히고,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파티원들이 다시 사냥을 재개한 것 같았다.

'뺏길 수 없지.'

벽력섬전을 휘두르는 내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체력이 거의 무한대로 회복되는 이상.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부지런히 움직이면 충분히 많은 킬 수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서걱!

└ㅋㅋㅋㅋㅋㅋㅋ 눈에 불을 켜고 죽여대넼ㅋㅋㅋㅋ 저 정도면 사실 쟤가 악마 아니냐ㅋㅋㅋㅋ

└악마가 렌의 모습으로 변신한 건지 체크해 봐야 할듯ㄷㄷ

└ㅋㅋㅋㅋ 뭔 개소리야 미션 자체가 에덴에 있는 생명체 멸절인뎈ㅋ 근데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쫌 그런 면도 있는거 같기도 하닼ㅋㅋㅋㅋㅋㅋㅋ

└아까 왜 렌이 교황청 들어갔을 때 맵 안보임? 원래 플레이어 들어가면 안 보이는 곳도 보여져야 하는거 아님?

└하위 리그 게임 메이커 엿먹으라고 펼쳐놓은 장막 아직 회수 안된듯 ㅇㅇ;;

└그런거 치곤 아까 전에 하위 플레이어들 들어갔을 땐 보였잖아?

└???? 뭐임? 그 사이 새로운 장막을 쳤나? 이미 악마도 죽여서 그럴 이유는 없을텐데.

'후. 완전 대박인데.'

에덴을 가득 채웠던 비명 소리도 어느새 사그라들었고.

밤하늘에 고고하게 떠 있던 보름달도 슬슬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거의 밤새도록 학살을 하며 돌아다닌 것이다.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1,405 명]

[킬 수 현황]

[1위. '렌' 176,662킬]

[2위. '키아라' 39,762킬]

[3위. '고치우' 34,012킬]

[4위. '테루오미' 29,607킬]

파랑 가면 조각을 획득하고 내가 처치한 생명체의 숫자는 15만 명 정도.

그동안 오른 스텟은 근력 2, 민첩 1, 체력 1, 지력 17, 마력 1 포인트.

지력을 제외하고 스텟이 5 포인트나 상승한 것이다.

'그것도 고작 하룻밤 만에.'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물론 이렇게 대규모 학살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는 별로 없을 것이긴 하지만.

"쿨럭. 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구원해주소서······."

"으······ 내, 내 다리······."

"엄마······. 엄마······."

이제는 팔이나 다리가 잘리거나,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숨이 끊기길 기다리는 녀석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신을 찾는 녀석들.

그리고, 신의 부질없음을 느끼고.

"어, 엄마······."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 녀석들.

쩍! 쩍!

나는 돌아다니며 살아 있는 녀석들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는 미션이 떨어진 이상.

광신도든, 그게 아니든.

죽일 수밖에 없었다.

신음과 울부짖는 소리가 빠르게 줄어들어갔다.

결국 끝끝내 에덴 성에 서 있는 존재는 나와 파티원들 밖에 남지 않았다.

띠링!

[남은 교인 수 : 0 명]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경기 종료 콜.

그러자 맥이 탁, 풀리며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끝났군.'

상위 리그 미션치고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돌아다니며 학살을 한 탓에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다.

[하급 악마 사냥에 성공하셨습니다.]

[보너스로 20,000 P 를 지급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킬 수 현황 ― 1위. '렌' 177,392 킬]

[압도적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로 x 3 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긴급 미션 <어둠의 태동>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47,0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3,000 P 차감)]

[기본급 +25,000 P / 승리 수당 +25,000 P / 추가 보너스 +60,000 P / 서브 미션 수당 +100,000 P / 수수료 -63,0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35,000 P 로 책정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음 겪어 본 서킷 브레이커.

예상치 못하게 가면 조각을 얻었고.

'덕분에 스텟을 엄청 많이 올렸지.'

루디악이 걸어 준 서브 미션 덕분에 포인트도 굉장히 많이 벌었다.

거기다 무려 3천만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거금과 각종 아이템들까지.

이번 경기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어.'

이제 남은 건.

띠링!

[하위 리그 플레이어들은 각자의 팜으로 돌아갑니다.]

[서킷 브레이커가 해제되었습니다.]

[원래 진행되던 <킹 메이커> 미션을 계속해서 진행합니다.]

'돌아가는 일만 남았······ 뭐라고?'

눈앞에 뜬 알림 창에 나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하위 리그 플레이어들만······ 팜으로 보내준다고?

이대로 미션이 끝난 게 아니었나?

나는 곧바로 그림자 표식의 목록창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등록해 둔 3황자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사망했다는 뜻.

그것도 고작 반나절 만에.

'승리 조건에 3황자가 사망하면 안 되는 게 들어있지 않나?'

그럼 다시 미션이 시작되자마자 실패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띠링!

[<킹 메이커> 미션의 핵심 인물이었던 3황자가 라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안티푸스가 1황자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킹 메이커> 미션이 <혁명 > 미션으로 변경됩니다.]

[장기 스토리 미션입니다.]

[이번에 라 제국의 황제가 된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의 배후에는 악마를 소환하려는 흑마법사가 있습니다. 황제와 흑마법사를 처단하고, 라 제국을 멸망시켜, '생명의 신' 을 믿는 신성 제국으로 만드세요.]

[승리 조건1 : 안타레스에 있는 황제와 흑마법사를 처치하라]

[승리 조건2 :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와 교황이 함께 통치하는 신성 제국을 세워라]

[신성 제국의 황제는 '가렌 레온하르트 폰 그라센' 남작입니다. ― 그라센에 있습니다. 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생명의 교단 교황은 '에베렛' 입니다. ― 그라센에 있습니다. 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여러분을 '생명의 신'이 보낸 전사로 소개해야 합니다.]

[황제 후보와, 교황 후보, 둘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하면 미션에 실패합니다.]

[새로운 신성 제국 국민의 60% 이상이 '생명의 신'을 믿게 하지 못하면 미션에 실패합니다.]

"······."

새롭게 내려온 미션을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미션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상승한 것이다.

계승권자 중 한 사람을 황제로 만드는 것과, 아예 새로운 제국을 세우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키아라와 고치우, 테루오미도 알림창을 봤는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키아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렌님, 새로운 미션 내용 보셨나요? 미션 내용이······ 너무 말도 안 되는데요?"

"예. 봤습니다. 쉽지 않겠더군요."

"쉽지 않다뇨!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잖아요!"

그사이 도착한 고치우와 테루오미도 키아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내려온 미션이 취소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군요. 그렇지만, 서킷 브레이커 같은 이벤트가 흔하지 않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내려온 이상 수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수행하기 어려울 뿐이지, 위험한 미션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씩 소거해가며 진행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하나씩 소거해가며 진행한다······?"

"예. 일단 남작과 교황 될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보죠."

내 말에 파티원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경기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고 있다가, 새로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그라센으로 가야겠네요. 그라센이 어디더라······?"

"3황자가 보여준 지도에서는 남서쪽 끝에 있었습니다."

내 말에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북동쪽 끝에 있는 에덴에서.

라 제국을 횡단해, 남서쪽 끝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 * *

라 제국의 서남부 끝, 그라센 영지.

그곳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남작님! 맹스크 자작군을 막기 위해 출전한 병력이 발레타에서 전멸했습니다!"

"총대장, 벤야민 경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출전한 지 하루 만에 3천 병력이 전멸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전령으로 온 병사가 맹스크 자작군 사이에서 일리아스 백작님을 봤다고 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가렌 남작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맹스크 자작이 자신들에게 처들어온 것도.

그리고 소드 마스터인 일리아스 백작이 맹스크 자작군 사이에서 등장한 것도.

'도대체 왜?'

그것도 같은 1황자 파벌인 자신에게 공격해 들어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성 내에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을 소집하라! 로이크! 그대는 지금 당장 수성전을 펼칠 준비를 하라. 바위, 고철, 하다못해 농기구까지! 전부 다 쓸어오거라! 어서!"

"알겠습······."

"남작님! 맹스크 자작군이 도착했습니다!"

"벌써! 젠장. 로이크! 당장 뛰어가게!"

"예, 옛!"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남작은 서둘러 갑옷을 챙겨 입고 성벽으로 달려갔다.

이미 성 밖으로는.

뿌우――

척! 척! 척! 척! 척! 척!

1만이라는 대병력이 열을 맞춰 진군해 오더니, 뿔피리가 울리자 일사불란하게 멈춰 서고 있었다.

'젠장······.'

그라센의 병력은 고작 3천.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들까지 합쳐야 1만을 간신히 넘길 것이다.

그와 반면에 적들은 전문적으로 싸우는 병사의 숫자만 1만.

거기다 소드 마스터라는 전술 병기까지 포함된 상황.

가렌 남작은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까맣게 깔린 적 병력들 사이에서,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가렌 남작! 거기 있소!

그는 자신들을 쳐들어온 적 병력의 주인, 맹스크 자작이었다.

가렌은 성벽 앞으로 나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함께 현 황제 폐하를 모시던 사람들 아니오! 어찌하여 나를!"

―폐하께선, 제국의 국교로 녹스교를 생각하고 계시오! 하지만 경은 개종 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 않소!

"아니 뭔! 그딴 말 같잖은 이유로!"

맹스크 자작의 말에 가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작 그런 이유로 쳐들어온다고?

그것도 오랫동안 1황자를 모셔 온 자신에게?

'전쟁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라 제국은 따로 국교를 두지 않은 채 본인이 모시고 싶은 신을 섬겼다.

그런 의미에서, 모시는 신이 다르다고 전쟁을 벌인다?

지금까지 가렌이 살아온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개, 개종하겠소! 그러니 이만 병력을 물려 주시오!"

가렌의 가문은 대대로 생명의 신을 모셔 왔다.

하지만, 이대로 멸문당할 순 없는 일.

일단 개종하겠다고 해놓고, 몰래 모시면 그만이었다.

소나기는 피해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니까.

―이미 늦었소! 나는 폐하의 명을 받아, 귀하에게 신의 징벌을 내리고자 온 몸! 귀하가 어찌하여 징벌을 받는지 알려줄 뿐, 돌아갈 수 없소!

하지만 이어지는 맹스크 자작의 말에 가렌은 절망해야 했다.

아무래도.

본보기로 찍힌 모양이었다.

확실하게 한 명을 찍어눌러 놔야, 이후에 생길 반발들을 없앨 수 있을 테니까.

'생명의 신이시여······.'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가렌은 최선을 다해 저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함락되고, 그라센의 백성들은 모조리 도륙당하겠지.

저들에겐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한 명이라도 더 길동무로 데려가겠어.'

가렌이 이를 악물었다.

―전군! 진군하라!

뿌우우우―

적 병력들이 빠르게 진격해 들어왔다.

그 최전방에서는, 소드 마스터가 앞장서며 성문을 부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생명의 신이시여······!'

그때였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뒤에서 적 습격이다!"

갑자기 적들에게 떨어지는 마법 폭격들.

쉴새 없이 쏟아지는 화살비.

그리고.

"으악!"

꽈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앙!

갑자기 적 진영 한복판에서 나타난 가면을 쓴 괴인.

마른하늘에 다섯 줄기의 벼락이 떨어졌다.

"누, 누구냐!"

성벽 위에서 수성전을 지휘하려던 가렌 남작이 우뚝, 멈춰 섰다.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끄아악!"

뿌연 붉은 안개가 전장을 잠식해 나가며.

서걱!

공기 중에 흩날리는 시뻘건 피들로 범벅이 된 괴인의 모습은.

"아, 악마다!"

악마의 재림이었다.

< 85화. 혁명(1) > 끝

< 86화. 혁명(2) >

―안우정씨 되십니까?

"예, 그런데요?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포 경찰서 수사과, 지능범죄 수사팀의 송진우 경사입니다.

마포 경찰서 수사과?

송진우 경사?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안우정씨의 동생, 안우진씨가 주가 조작으로 인한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 그리고 배임과 횡령 혐의로 현재 마포 경찰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형사의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내 동생이 주가 조작? 배임, 횡령?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아닌가요? 제 동생은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적법한 과정에 따라 체포 영장까지 발부된 상태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안우진씨한테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마포 경찰서로 오시면 30분간 면회할 수 있습니다.

영장······?

그러면 정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안우정은 서둘러 지갑과 외투만을 챙긴 채 택시를 잡았다.

'우진이가······ 주가 조작을 했다고?'

경찰서로 향하는 내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약 20분간을 달려 도착하게 된 마포 경찰서.

곧장 민원실에 달려가 신분증을 보여주며, 동생의 면회 신청부터 했다.

그러자 경찰관 한 명이 다가오더니, 안우정을 어느 쇠문이 달린 방 안으로 안내했다.

'제발······.'

핸드폰도 들고 들어갈 수 없는 철통같은 보안에 안우정은 저도 모르게 겁이 덜컥 났다.

우리 우진이가 정말로 범죄를 저지른 거면 어떡하지?

어머니한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동생이 경영하는 회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수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혀, 형······."

면회실의 강화 유리 너머로.

수갑을 찬 동생 채 눈물을 흘리는 동생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뭐, 뭐야!'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애검인 레바테인부터 꺼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을 노리며 달려드는 적 병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동그란 공터.

그 위로 처져 있는 반투명한 파란색 막과, 그 너머에 펼쳐진 은하수들.

'경기가 끝난 거였어.'

상황 판단을 마친 안우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정님."

"이번 경기도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지. 수고했다."

자신을 반겨주는 팀의 동료들과 천사들.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는.

팜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 경기도 정말 쉽지 않았어.

"어? 우정님. 왜 눈물을 흘리고 계세요?"

그때, 자신을 반겨주는 동료의 말에 안우정은 급히 가면을 쓸었다.

그러자 가면 아래 흘러내린 눈물이 턱을 타고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아.

깨어나기 전에 봤던 동생의 얼굴 때문이었나.

'그러고 보니, 동생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 거 같은데.'

자신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에 안우정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악몽을 좀 꿨거든요."

"악몽이요?"

"네."

정말 오랜만에 꾼.

동생의 꿈.

"전 이만 가서 쉬어야겠네요."

"네, 이따 파티 시작할 때 불러드릴게요."

안우정은 활짝 웃으며 숙소로 향했다.

등을 돌리는 그의 입매가 차갑게 굳어졌다.

레바테인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형이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게.'

어떻게든.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고 말겠어.

* * *

서걱!

적 병사들 사이를 가르며 거침없이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이젠 뚫겠다고 마음 먹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창을 휘두르면, 그곳에 길이 생길 뿐.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적 군세를 반으로 가르며 나아가자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한 명의 기사가 보였다.

'여기에도 소드 마스터가 있었군.'

과연 4강 중 하나라고 불리는 발리노르.

전술 병기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악마의 눈으로 확인하니, 스텟도 제법 준수했다.

그래도 뭐, 별로 긴장되진 않았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많이 강해졌으니까.

파바박!

기사가 근처까지 다가오더니, 돌연 대쉬를 멈추고 내 주변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제법이네.'

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한눈에 꿰뚫어 본 것이었다.

"저는 라 제국의 백작, 일리아스 칼리오스 폰 베라 입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

"제 견문이 짧아, 귀하 같은 강자를 알아보지 못했네요.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학살하고 다녔음에도, 일리아스는 함부로 내게 달려들지 않았다.

"음, 밝히기 싫다면 저도 여쭙지 않겠습니다. 그럼, 왜 저희를 공격하는 건지만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저희가 그라센을 공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공격을 멈추고 돌아가겠습니다."

일리아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겠는데.'

상황 판단이 빠른 녀석이었다.

한눈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음을 알아채고,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라 제국을 멸망시켜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 녀석은 살려두면 안 되는 1순위 인물이었다.

이런 녀석들이 변수를 만들어내곤 하니까.

마음을 먹은 나는 곧장 일리아스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챙! 챙! 콰지지지직!

"크윽! 이유라도 말해 주시오! 어째서 이러시는 것인지!"

일리아스가 방패를 이용해 내 공격을 최대한 흘려내며 소리쳤다.

뇌전이 내부로 파고들어, 제법 통증이 심할 텐데도 녀석의 움직임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잘 막고 있긴 한데,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스텟, 테크닉, 체력, 그리고 현재 상황까지.

그 무엇도 녀석이 유리한 게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녀석이 날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콰직!

전혀 없었다.

"이봐 병사! 어서 맹스크 자작에게 전령을 보내라고 전해! 제국의 검들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 달라고!"

"아, 알겠습니다!"

제국의 검이라면, 라 제국 소속의 소드 마스터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녀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향한다면 제법 골치 아플 수 있긴 한데.

하지만 나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렇겐 안 될걸.'

어차피 개미 새끼 한 마리도.

푹푹푹푹푹!

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마력장 끄트머리에서, 고치우의 화살이 막 전장을 이탈하려는 세 명의 기병을 꿰뚫었다.

전령으로 나서던 병사들이었다.

"젠장, 젠장!"

내 어깨 너머로 그 광경을 본 일리아스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른 세 사람도 나 못지않은 고수인 걸 깨달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챙! 콰직! 채챙! 챙! 콰지직!

'슬슬 끝이군.'

계속해서 공격을 흘려내던 일리아스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빠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뇌전으로 인해 데미지를 많이 입은 상태에서, 체력까지 부족하다 보니,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전력을 다했기에 겨우겨우 내 공격에서 버틸 수 있었던 상황.

그런데 움직임이 느려졌다면?

서걱!

"크윽!"

더 이상 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휘두른 창에, 일리아스의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젠장······. 쿨럭. 이만 한 실력자가 도대체 어디서······?"

방패에 몸을 의지한 채 한쪽 무릎을 꿇은 일리아스가 피를 토하며 읊조렸다.

녀석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이마에선 피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으아아악! 도망쳐!"

내가 일리아스를 상대하는 사이, 많던 적 병력들도 다른 파티원들에 의해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온 땅을 가득 메운 시체 더미 사이에서 간간이 살아남은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푹! 푹! 푹!

그들도 결국 얼마 못 가 고치우의 화살에 차가운 땅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이제 남은 건.

일리아스 하나 뿐.

'잘 가라.'

이 전장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아 있는 그 기사에게.

나는 망설임 없이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서걱!

비통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을 구르는 머리.

그 뒤쪽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테루오미와, 키아라, 고치우가 보였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체력 스텟이 상승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오른다고?'

앞으로 더 확인을 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죽이는 상대의 스텟에 따라 오르는 양이 다른 모양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예. 세 분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쨌든.

전투도 끝났겠다, 우리는 여유롭게 그라센 쪽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그라센 측의 병사들은 모두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저, 저 악마가 다가옵니다, 남작님!"

"으으······ 다, 다 죽을 거야······."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채 벌벌 떠는 병사들.

그 사이로 하얀빛이 흘러나오는, 중갑을 착용한 인물이 보였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가렌 레온하르트 폰 그라센]

[근력 : 69(+?)] [민첩 : 67(+?)] [체력 : 68(+?)]

[정신 : 61(+?)] [지력 : 18(+?)] [마력 : 69(+?)]

'저 사람이군.'

가렌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따로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덕분인지, 함부로 화살을 날리는 병사는 없었다.

성벽 아래까지 다가간 나는 가렌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가렌님."

"······?"

"저흰 가렌님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신께서 보낸 전사들입니다."

내 말에 가렌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라든가, 그런 소리를 해대겠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해 들으면 고맙······.

"아, 악마가 아니셨소?"

"······?"

뭐라고?

키아라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해 준 덕분에, 우리는 가렌 남작 저택의 접객실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여기 에베렛이라는 분이 있나요?"

"생명 신의 예배당을 관리하는 사제의 이름이 에베렛입니다만······."

"아, 그럼 그분도 이 자리로 불러주시겠어요? 한 번에 설명하는 게 좋으니까요."

키아라의 말에 남작이 병사를 보내는 사이, 나는 접객실에 앉아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했다.

안티푸스에서 1만 병력을 물리치고, 곧바로 에덴으로 향해 악마를 처치한 다음, 교인들을 학살하고 다시 이곳까지 와서 또 전투를 치른 상황.

체력적으론 멀쩡했으나,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상당했다.

"남작님! 에베렛 사제님을 데려왔습니다!"

"오, 에베렛 사제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남작님. 저는 왜······?"

에베렛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사제였다.

그는 우리의 모습을 보곤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에베렛 사제님. 안녕하세요. 저희는 생명의 신께서 보낸 전사들입니다."

그때부터 키아라가 가렌과 에베렛에게 미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황자의 배후에 현재 흑마법사가 있으며, 그걸 알고 생명의 신께서 우리들을 보내주었고, 그로 인해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신성 제국을 세울 계획이라는 것까지.

그 얘기를 들은 가렌 남작과 에베렛 사제의 반응은.

"아······. 예에."

"그렇······군요?"

무척 벙찐 표정이었다.

하긴.

고작 네 명이 찾아와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을 황제와 교황으로 만들어줄 거라는데, 그 누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아, 그런 눈초리로 보지 마세요. 명령을 듣고 온 저희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니까요."

"크흠, 아닙니다. 그, 키아라 전사님? 신성 제국은 어떻게 건설하실 생각이신지······."

가렌 남작의 물음에 키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안타레스로 가서 황제와 흑마법사를 죽일 생각이에요. 일단 하나씩 순서대로 해 나가 보려구요."

"아······ 예."

"······."

그렇게 한동안 접객실에 침묵이 흘렀다.

가렌과 에베렛은 할 말이 궁해서.

그리고 키아라와 파티원들은 그 뒤에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렌님, 이건 어때요?"

"······?"

"종교는 신념의 문제라, 라 제국을 멸망시킬 순 있어도 신성 제국을 만드는 건 어려울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거구요. 조건에서도 나와 있었잖아요. 전 제국민의 60% 이상이 생명의 교단을 믿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그렇긴 하죠."

"황제와 흑마법사를 죽인다고 치자고요. 그럼 이제 막 즉위한 황제에게 후계자가 있을 리도 없을 거고. 다른 황자들은 이번에 다 죽었잖아요. 그럼 결국 각 지역의 대귀족들이 왕을 참칭하며 나서지 않겠어요?"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으로 봐도, 황족들이 모조리 죽은 상황에서는 언제나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혁명 미션을 위해서 그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황제를 먼저 죽이지 말고, 일단 생명의 교단부터 띄우죠. 거의 모든 인간들이 믿는 종교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만들면 되죠. 지상에 소환된 악마. 그 악마가 라 제국을 불태우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하여 생명신께서 보낸 용사들이 그 악마를 처단하고 라 제국의 평화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황제를 죽이고, 가렌 남작님을 적당히 띄어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되면 훨씬 쉬워지긴 하겠지만.

전제 조건이 필요했으니까.

"저희가 악마를 무슨 수로 소환합니까?"

"그럴 필요 없이 지금 있는 악마를 써먹으면 되잖아요."

"악마가 있다고요?"

내 물음에 키아라가 배시시 웃었다.

뭐랄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렌님이 악마 역할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니까 지금.

상황극을 하자는 뜻인 거 같은데.

그게 지금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그냥 척 보기에도······ 악마 같으시니까······."

키아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가렌과 에베렛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치미를 뚝 뗀 채 먼 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

어이가 없네.

"안 합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86화. 혁명(2) > 끝

< 87화. 혁명(3) >

악마 역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내가 이득 볼 게 없었다.

어차피 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은 이상, 대량 학살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악마 역할을 받나, 안 받나 피의 흡수로 올라가는 스텟의 양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악마 역할은 기각.

"음. 렌님이 싫다면 어쩔 수 없죠."

키아라의 실망 섞인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얘기한 거였어.'

진짜로 내가 악마 역할을 하길 바란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며칠 전에 악마를 죽이고 온 사람에게 악마 역할을 하라니.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중급신 '카론'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악마가 되어 라 제국을 멸망시키기.

[보상 : 10,000 P]

[고신 '이켈로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재미있을 거 같은데 악마 역할 한번 해봐라 ㅋㅋㅋㅋ

하면 내가 넉넉하게 용돈 줄게 ㅋㅋㅋㅋ

[보상 : 10,000 P]

[하급신 '벤테시키메'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이거 각이닼ㅋㅋㅋㅋ 악마 ㄱㄱ 안 하면 님 악플 ㅅㄱ

[보상 : 2,000P]

[대신 '헤카테'님이 서브 미션을 ······.]

[중급신 '메노이티오스'님이 ······.]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하는 서브 미션들.

너무 빨리 내려가서 보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건은 딱 하나.

악마로 분장해서 상황극을 할 것.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한 번 찾아보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말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서브 미션들이 쏟아졌다.

그 광경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거부하는 것 자체가 큰 리스크일 정도였다.

"······그래도 없다면 제가 악마 역할을 하겠습니다."

다른 파티원들도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파티원들에게까지 서브 미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조건은 안 봐도 뻔했다.

뭐, 내가 악마 역할을 수락하도록 만들라는 거겠지.

무거운 침묵 속에서 키아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더 좋은 방법이 있어도 하셔야겠는데요?"

"······."

젠장.

나는 어쩔 수 없이.

'서브 미션 일괄 수락.'

악마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띠링!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내용 : 악마 상황극을 펼쳐 <혁명 > 미션 수행하기.

[보상 : 174,000 P]

'고작 이런 걸로 17만 포인트나 준다고?'

보상 포인트를 본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서브 미션이 들어왔기에 어느 정도 포인트가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보상을 보자마자 동기 부여가 확실하게 차올랐다.

"마침 악마가 등장하기 좋은 아니, 악마 상황극을 펼치기 좋은 날이 있습니다."

그때, 가렌 남작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그게 언제인가요?"

"1황자 전하의 즉위식입니다. 앞으로 15일 후에 열린다고 공문이 내려왔었습니다."

"이제는 전하라고 부르시면 안 돼요. 가렌 남작님을 죽이려 한 상대인데."

"아, 예. 습관이 돼서 그만. 아무튼, 1황자의 즉위식이 열릴 겁니다. 그때는 어떠신지······?"

"즉위식이라면 제국의 전역에서 국민들이 몰려오겠군요. 악마 소환 작전을 펼치기 딱 좋네요."

키아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였다.

즉위식이라면, 엄청 커다란 이벤트가 될 게 분명했다.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일 테니까.

마침 날짜도 적당하게 남았고.

"그럼 사전 준비를 시작해 보도록 하죠."

그때부터 작전명 악마 소환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국 북부에 있는 도시, 노아.

중심부에 있는 골목길에서 나는 고치우, 그리고 한 중년인과 함께 있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질베스터.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에, 가렌 남작이 그라센에 있는 극단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라며 추천해 준 중년인이었다.

고치우가 질베스터에게 미리 준비해 온 피를 덕지덕지 발라주는 사이, 나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핵심은 공포 섞인 표정과, 1황자. 그리고 악마라는 키워드입니다."

"예, 옛!"

"고치우님이 타이밍 맞춰서 들어갈 거고, 저도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짧은 단막극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질베스터를 보자,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믿어도 되려나.'

이번 일은 디테일이 무척 중요했다.

관객들 중에 누구 한 명이라도 이게 연기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계획을 처음부터 수정해야 할 정도로.

'쯧. 믿어보는 수밖에.'

"다 됐습니다."

"음. 굉장하군요."

언제 어디서라도 위장을 하는 뛰어난 궁수답게, 고치우의 분장 실력은 무척 뛰어났다.

평범한 중년인이었던 질베스터가, 피를 흘리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이번 일은 두 분의 합이 무척 중요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침투 및 납치는 제 특기이기도 하거든요."

"예, 옛!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에 질베스터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술집을 향했다.

고치우도 어둠 속으로 스며들더니, 조용히 이동했다.

그 둘을 뒤로하고, 나는 달빛을 맞으며 근처 건물 천장으로 숨어들었다.

"이봐, 드레이코. 자네 저번에 에덴으로 상행 나갔다 왔다 하지 않았나?"

"크윽. 나쁜 년. 날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 잘 먹고 잘 살아라!"

"요즘 일 하는데 집중이 안 돼서 미치겠다니까. 자넨 안 그런가?"

취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오는 술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아래를 내려보니, 마침 질베스터가 술집으로 헐레벌떡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연극.

"사, 살려주시오! 누가 날 쫓아오고 있소!"

"······!"

피범벅이 된 질베스터의 모습에, 직전까지만 해도 시장통을 연상케 하던 술집으로 싸늘한 정적이 내리깔렸다.

이곳은 괜히 누군가의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간 칼 맞기 십상인 세상.

도와주고자 나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들 눈알을 굴리며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신지?"

보다 못한 술집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이때다 싶었던 질베스터가 준비했던 대사를 쳤다.

"1황자가, 1황자가 악마를 소환······!"

와장창창창!

그와 동시에 검은 로브와 복면을 쓴 고치우가 술집 창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헉. 저, 저놈이오! 제발! 제발 누가 나를 구해······!"

'제법인데?'

사색이 된 채 고치우를 손가락질하는 질베스터와.

그런 그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쳐 기절시킨 뒤 질베스터를 들쳐메는 고치우.

그리고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완벽한 한 편의 납치극을 보는 것 같았다.

고치우가 살기를 내뿜으며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노려보더니, 이내 입을 다물으라는 제스쳐를 취하곤 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술집에 웅크린 침묵은 고치우가 빠져나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됐어.'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들어선 안 되는 것이라도 들었다는 표정.

피범벅이 된 질베스터.

살기를 내뿜는 검은 로브의 괴인.

그리고 1황자와 악마라는 자극적 키워드까지.

'제대로 소문이 나겠군.'

아주 은밀하면서도.

조용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애초에 1황자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것 자체가 양지에서 뻗어나갈 수 없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확 퍼지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물 밑에서 올라오는 소문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이보다 더 추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살이 붙어서 퍼져나가리라.

"렌님. 다녀왔습니다."

그때, 내가 있는 지붕 위로, 질베스터를 들쳐멘 고치우가 나타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찮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어떠셨습니까?"

고치우의 물음에 나는 엄지를 들어 올렸다.

정말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정말 대단했습니다. 다 알고 보는 건데도, 섬뜩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자 고치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는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나는 기절한 척했던 질베스터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질베스터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였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내 칭찬에 질베스터가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로 노아는 끝이군.'

반신반의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이제 이런 식으로.

동쪽의 라스그리드와 서쪽의 베라.

그리고 남쪽의 네오발란스까지 진행하면 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그때부터 우리는 각 지역의 대도시들을 돌며, 소문을 퍼트리는 데 집중했다.

* * *

"폐하. 요즘 제국 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소문이라면?"

1황자 아니, 곧 황제가 될 루카스의 물음에 근위대장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감히 입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추악한 소문이었습니다."

근위대장의 말에 루카스가 검지로 팔걸이를 톡, 톡 두드렸다.

"그런데도 말을 꺼냈다는 건, 결국 내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 아닙니까. 편하게 말해 보시죠."

"죄송합니다, 폐하."

그때부터 근위대장이 제국에 나돌고 있는 소문들을 읊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악마를 소환한다는 내용부터.

이미 잡아먹히고, 악마가 루카스의 탈을 쓴 채 황제 행세를 하려고 한다는 것까지.

무려 수십 개가 넘는 내용들이 근위대장의 입에서 나왔다.

그동안에도 루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근처에 있던 귀족들의 안색은 창백해져 갔다.

'젠장. 큰일 났군.'

'그러게 얘기하지 말자니까.'

계속해서 검지로 두드리는 저 행동은.

루카스가 굉장히 기분 나쁠 때 하는 버릇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카스는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모두 나가보시죠."

"예, 폐하."

함께 있던 10명의 귀족들이 나가고, 이윽고 거대한 황제의 집무실에는 침묵이 어렸다.

그때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로 아스터 경."

루카스가 혼잣말을 하자, 아무도 없던 집무실에 검은 연기가 피워 오르더니, 이내 그곳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한 노인이 나타났다.

루카스는 그 노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나와 조로 아스터 경밖에 모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근데 제가 얘기하지 않았으니, 결국 조로 아스터 경이 발설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군요."

"껄껄. 안심하시오, 황제여."

"지금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닙니다."

"보자······. 소문이 총 스무 개 정도 됐던 것 같군요. 제가 퍼트렸다면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소문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3황자의 잔존 세력들이 황제를 음해하기 위해 퍼트린 소문 같소만."

괴인의 말에 루카스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편이 훨씬 더 가능성 있겠군요."

"황제를 그 자리로 올리기 위해 우리도 한 손을 보탰소. 이미 황제와 나는 한배를 탄 몸. 그런 소문을 뿌려봤자 손해 볼 것밖에 없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 소문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굳이 처리할 것 없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달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엔 마기가 서려 있었다.

"어차피 소문이란 실체가 없으면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니."

* * *

소문을 퍼트리고 난 이후, 우리가 한 일은 연출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니까. 시각적 효과를 주고 싶다는 거죠?"

"맞습니다. 흔히들 하는 생각 있지 않습니까. 악마가 등장할 때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불꽃이 사방을 휩쓸고."

"으음."

"지금 계획처럼 단순히 등장해서 학살한다? 그게 연쇄 살인마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 말에 키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하죠. 그럼 생각하고 있는 효과가 그 두 개뿐이신 거예요?"

"예. 가능하겠습니까?"

"마법진이랑 정령석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긴 해요. 근데 문제는 돈이죠."

"얼마나 필요합니까?"

"음······. 마법진에 뿌릴 미스릴 가루랑, 정령석이······ 못해도 50만 골드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최소 50만 골드라······.

고작 먹구름 좀 뿌리고, 불꽃이 일렁이게 하는 데 필요한 돈 치고는 무척 거금이었다.

'그래도 투자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단 말이지.'

제법 큰 돈이었지만, 나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에덴에서 3천만 골드라는 거금까지 챙긴 상황.

거기에 이번 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서브 미션 보상으로만 17만 포인트가 들어온다.

그렇게 생각하니, 50만 골드를 투자해 연출에 공을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 50만 골드는 제가 부담하죠. 아니, 100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기왕 할 거, 최대한 성대하게 진행해 보는 게 좋겠군요."

"성대하게요?"

"예. 그날의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라, 바로 제가 돼야 하니까요."

즉위식까지 남은 날짜는 1주일.

시간도 넉넉하고 자금도 충분한 상황.

기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 87화. 혁명(3) > 끝

< 88화. 혁명(4) >

즉위식 당일 아침.

나는 키아라, 고치우와 함께 라 제국의 수도, 안타레스의 중앙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식당 창가에 앉아 있었다.

"고치우님. 즉위식이 진행되면 저기. 지금 병사 세 명이 서 있는 곳 보이시죠. 저쪽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예."

즉위식이 열리는 곳은 안타레스의 중앙 광장.

하지만 지금은 즉위식 준비로 인해 민간인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막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 식당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라면 중앙 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으니까.

"사람이 엄청나게 많네요."

창가에 기댄 채 중앙 광장을 살펴보고 있던 키아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안타레스는 어딜 가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 앉아 있는 식당의 창가 자리만 해도, 엄청난 웃돈을 주고서야 구할 수 있었을 정도로.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거대한 행사니까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식당 한 켠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리허설 겸 상황 정리를 할 수 있는 것도 다······.

"밥 더 든든하게 먹어! 한 번 중앙 광장으로 내려가면 사람들 때문에 못 빠져나올 테니까!"

"햇빛이 뜨겁습니다요! 햇빛 가리개 사시오!"

"아니! 고작 도시락 7개에 30실버라니! 이런 바가지를 봤나!"

식당이 개판 5분 전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 본 결과, 작게 소곤소곤 대화해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적어도 이 식당 내에서는 없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결국 렌님이 악마 역할을 하시다 보면 백성들을 많이 죽이게 될 텐데."

키아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라 제국을 멸망시키라는 미션이 나왔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아······."

슬픈 표정을 짓는 키아라.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션이 내려오면 수행한다.

그건 초월 리그로 향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면.

벗어날 수 없는 절대 규칙.

우리의 신념이 어떻든 상관없다.

'그 규칙은 절대 깨지지 않지.'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신념? 가치관? 내 스스로를 위한 행복?

그런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

막말로 내가 대악마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저주와 원망을 듣더라도.

우리 가족들만 살려준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씁쓸하네요."

아무래도 그녀가, 이런 식의 스토리 미션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이건, 엘프처럼 종족 특전을 가지고 있거나, 애초에 높은 스텟으로 들어오는 네임드들이 대부분 겪는 일이었다.

그들은 워낙 빠르게 상위 리그까지 올라오다 보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성향인 신념 때문인 걸 수도 있고.

"하나만 생각하세요."

"······?"

축 처진 키아라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울 반대편에는 우리 각자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 저울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어디까지 내 던질 수 있는가. 키아라님은 어떻습니까. 신념? 가치관? 그런 걸 따질 만큼 소원이 간절하지 않으십니까."

"아······. 다, 당연히······."

"간절하시겠죠. 그럴 테니까 상위 리그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거고요. 그럼 하나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는가."

"하나만 생각해라······."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던 키아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에서는 씁쓸함, 우울함 같은 감정들이 사라지고, 반드시 해내겠다는 독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이벤트를 앞둔 상황.

그런 와중에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할 키아라가 흔들리면 계획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얼마 못 가서 죽겠군.'

지금이야 내가 그녀에게 일깨워주긴 했지만, 또다시 비슷한 상황이 오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서 흔들린다는 건.

콜로세움에선 죽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키아라와 달리, 곁에 앉은 고치우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이미 나처럼 마음을 다잡은 지 오래라는 것.

'고치우는 문제없을 것 같고.'

이 작전의 실행자는 단 셋.

나와 키아라, 그리고 고치우.

준비도 완벽하고, 키아라도 마음을 다잡은 것 같으니 남은 건 계획을 실행하는 것 뿐.

창가에 몸을 기댄 채 중앙 광장을 살펴보니, 즉위식 준비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잠시 후.

저곳에서 악마가 등장할 것이다.

벼락을 뿌리고, 피를 머금은 무서운 악마가.

"지금부터 중앙 광장을 개방하겠습니다!"

어느새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는 대낮이 되었다.

중앙 광장을 통제하던 기사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 사이로 고치우도 함께 끼어 움직였다.

중앙 광장의 중심부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사람들로 가득 차기 전에 자리를 잡아놔야 했으니까.

한적하던 중앙 광장이 순식간에 엄청난 인파로 뒤덮였다.

"앗!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모두 통제에 따라주십쇼!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로 연행될 수 있습니다!"

"자리를 잡으신 분들은 조용히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제법 직책이 높아 보이는 기사들까지 나서서 군중들을 통제하는 가운데, 중앙 광장에 펼쳐진 단상 위로 귀족들이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렌 남작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1황자에게 숙청 대상으로 오르고, 즉위식 초대장마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로 인해 테루오미가 그라센에 남아, 가렌 남작과 교황 후보인 에베렛을 지켜야 했다.

거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는 거대한 행사라 전투가 벌어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즉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기사의 외침에 웅성대던 관중들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군악대가 각종 악기를 두드리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차 일곱 대가 중앙 광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화려한 마차를, 앞뒤 좌우로 다른 마차들이 감싼 형태.

마차는 병사들이 몸으로 만든 벽을 따라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1황자 전하께서 들어오십니다! 모두 고개를 숙여, 전하께 예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중앙에서 통제하는 기사의 외침에 수만 명의 백성들이 자세를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저 녀석이 1황자.'

마차가 단상 바로 앞에 멈춰 서더니, 금발을 멋스럽게 넘긴 30대 초반의 남성이 마차에서 내렸다.

자신이 1황자 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금빛으로 칠해진 무척 화려한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암살하려는 존재들이 있다면, 무척 위험할 정도로.

'근처에 있는 녀석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였군.'

하지만 1황자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른 여섯 개의 마차에서 내린 기사들이 모두 소드 마스터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드 마스터들 사이로, 한 명의 노인도 함께 존재했다.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무척 중후하고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1황자를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흑마법사.'

나는 단번에 녀석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 : 조로 아스터]

[성향 : 절대 악]

악마의 눈으로 본 녀석의 성향이.

절대 악이었으니까.

"슬슬 시작할까요?"

1황자가 단상으로 오르자, 키아라가 내게 물었다.

"아뇨. 적당한 때가 분명히 올 겁니다. 그때까지 잠시 대기하죠."

지금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더 완벽한 타이밍을 찾고 싶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즉위식.

―나,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는 제국의 1황자이자, 정통 후계자로서, 선황 폐하의 자리를 이어받아, 앞으로 라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국법을 무겁게 받들되 억울한 이가 생기지 않게 할 것이고, 배곯는 이 생기지 않도록 나라의 재정으로 사치를 일삼지 아니할 것이며, 나아가 이 발리노르의 평화를 위해 언제나 앞장설 것임을 국민들 앞에서 맹세합니다.

루카스가 백성들 앞에서 즉위 서약을 한 뒤, 단상 위에 준비된 왕관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격한 환호 소리.

박수 세례와 환호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루카스가 왕관을 머리에 쓰자 중앙 광장에 나와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더 환호하라고.'

나는 그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게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 나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했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면.

더욱 타격이 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암 요제프 라데츠키 폰 요크샤 공작!"

"예! 폐하!"

"경은 나를 받들어 이 제국을 부유하고, 강하며, 평화롭고, 공정하게 준비가 됐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경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폐하!"

루카스가 호명할 때마다 귀족들이 한 명씩 나와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지루한 보여주기식 충성 서약 행렬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루카스가 제국을 더 번영시키기 위해서 국교를 정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녹스 교는 발리노르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교단! 우리 라 제국이 더 번영하기 위해서 앞으로 녹스 교를 국교로 삼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모두들 밤의 신을 찬양하십시오!

마나로 증폭된 루카스의 외침.

그 말을 듣는 순간 군중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니까.

"폐하께서 말씀 중이십니다! 모두 조용!"

기사들이 나서서 군중들을 통제해보려고 했지만, 한 번 시작된 파장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키아라님."

"네?"

"슬슬 시작할 타이밍이 된 것 같습니다."

"앗, 네!"

나와 함께 식당 옥상으로 올라온 키아라가 영창을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군중 속으로 스며든 고치우를 찾았다.

미리 약속해 둔 지점이 있었기에,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작합니다.'

마침 고치우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상황.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치우가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준비됐어요."

그 사이, 영창을 마친 키아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시작하죠."

작전명 악마 소환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꺅! 뭐야!"

"마법진! 여기 마법진이 형성됐다!"

고치우 주변으로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이 빛을 발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마법진이란 것 자체가 관중들에겐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지구로 표현하자면 폭탄이 설치된 거나 마찬가지랄까.

그 바람에 안 그래도 통제가 되지 않고 있던 관중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마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폐하를 지켜라!"

"저 마법진을 형성한 마법사를 찾아! 어서!"

군중들을 통제하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마법진을 향해 달려오고, 단상 위에 있던 소드 마스터들이 루카스를 에워싸며 주변을 경계했다.

"헉, 하, 하늘이!"

"이럴 수가!"

마법진을 피해 달아나던 사람들.

마법사를 색출하기 위해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와 기사.

단상 위에서 경계를 하던 귀족들과 소드 마스터 들까지 모두.

하늘을 바라봤다.

'제대로인데?'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할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화창한 하늘이.

순식간에 짙은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었다.

단숨에 주변이 어둑해졌다.

그때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법진 한가운데에서 여유롭게 서 있던 고치우가 마나를 실어 웃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그 바람에 중앙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치우로 쏠리는 순간!

"다녀오겠습니다."

"화이팅!"

띠링!

[플레이어 '고치우'에게 <그림자 교환>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한순간에 뒤바뀌고.

날 바라보는 수천, 아니 수만 쌍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마나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자, 몸속에 피어난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화륵! 화르르르륵!

띠링!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내 주위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거기에.

싸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짙은 살기까지 뿌려주자, 내게 달려오던 기사들이 순간적으로 멈칫할 정도였다.

'100만 골드를 쓰길 잘했군.'

당사자인 나도 섬뜩할 정도의 분위기.

아마 군중들의 눈에는 마법진이 펼쳐지고, 지옥문이 열리며, 지옥의 겁화와 함께 등장한 악마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악마다!"

"꺄아아아아악!"

"악마가 소환됐다!"

나는 주변에 있는 군중들을 한번 싹- 훑어본 후, 단상 위를 쳐다봤다.

그곳엔 당황한 표정의 황제, 루카스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기왕 쇼를 펼치기로 한 거, 제대로 해 주지.'

나는 그대로 벽력섬전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나는 중급 악마, 헬리퍼. 부름을 받고 왔다,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황제여."

"무, 뭐?"

"그럼, 계약에 따라."

그리고는 당황하는 루카스를 향해.

"라 제국 모든 백성들의 목숨을 대가로 가져가겠다."

싱긋 웃어주었다.

< 88화. 혁명(4) > 끝

< 89화. 혁명(5)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중앙 광장.

악마가 창을 휘두르며 학살을 시작하고, 광장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루카스는 자신의 바로 곁에 서 있는 조로 아스터를 노려보았다.

지금 중앙 광장에 소환되어.

"으아아악! 오, 오지 마!"

병사들에게 창을 휘두르는 저 녀석은 악마가 틀림없었으니까.

붉은 안개가 짙게 깔리며, 녀석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벼락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쨍쨍하던 하늘이 먹구름에 뒤덮이고, 마법진과 함께 등장한 저 녀석이 악마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로 아스터 경.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경은 타국 백성들을 제물 삼아 계획을 진행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루카스는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목소리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폐, 폐하.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제국의 황족이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도 언제나 여유롭던 조로 아스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대가 아니면? 저 악마가 지금 스스로 소환됐단 말인가?"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자리에서 악마를 소환하겠습니까?"

평생 누군가를 턱짓으로 부리며 살아온 루카스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노인네가 무척 억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단번에 내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어!'

이미 악마는 소환되었고, 단상 위에 있는 귀족들은 자신을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는 상황.

거기다 백성들의 민심을 잃을 가능성도 크고, 최악의 경우엔 국제적으로 고립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감히······!"

그렇기에 루카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악마 소환의 원흉을 조로 아스터로 몰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까.

그래서 루카스는 과감하게 행동했다.

"감히 내 즉위식 날에 악마를 소환하다니! 모두들 이 자를 포박하시오! 이 흑마법사가 나를 기만하고 저 악마를 소환한 원흉이오!"

조로 아스터가 악마를 소환한 것으로 몰면서 동시에, 자신은 악마 소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어필한 것이다.

조로 아스터가 황위 경쟁을 할 때 자신에게 엄청난 돈을 투자해 주거나, 흑마법사들을 파견해 주어 중도파에 있던 귀족들을 섭외해주는 등 정말 많은 일을 해주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덤으로 국교를 녹스교로 해주겠다는 것도 없던 걸로 할 수 있어.'

어차피 정치라는 건 주고받는 거래일 뿐,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니까.

그러자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조로 아스터를 단숨에 깔아뭉개며 그를 제압했다.

"제가 악마를 소환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폐하!"

"시끄럽다! 네 놈이 아니면 누가 악마를 소환했단 말인가! 우리 라 제국의 정의로운 귀족들? 아니면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그들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내가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저는 정말 모르는······."

"필릭스 경! 감히 신성한 라 제국에서 악마를 소환한 저 녀석의 목을 당장 베어 주시오!"

조로 아스터가 뭐라고 얘기하려 했지만, 루카스는 말을 자르며 녀석을 제압한 소드 마스터, 필릭스 후작에게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녀석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예, 폐하!"

"젠장! 내 도움으로 황위에 오른······."

서걱!

조로 아스터가 발악하며 루카스와 맺었던 계약에 대해 말하려 했으나, 필릭스 후작의 검이 먼저였다.

녀석의 목이 잘리며, 자신의 즉위식을 위해 준비된 새하얀 단상 위로 시뻘건 피가 뿌려졌다.

하지만 그런 쇼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눈초리엔 의심으로 가득했다.

자신과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고 있는 귀족도 있을 정도였다.

'젠장······!'

악마 소환은 어느 나라를 가나 금기시되어 있는 예민한 문제.

국가의 존폐를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위험하기에, 루카스를 향한 의심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소환된 악마가 단상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은 채 병사들과 기사들만 죽이고 있었기에, 더욱 의심스러울 게 분명했다.

"폐하. 정말로 저 악마를 소환한 게 폐하가 아니십니까?"

"아니오! 정말로 나는 모르는 일이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소!"

조로 아스터의 목을 친 필릭스 후작의 물음에 루카스는 떳떳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자신이 소환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 악마에게 멈추라고 한 번만 명령해 주시겠습니까?"

감히 한낱 후작이 자신에게 지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루카스는 현재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루카스는 곧바로 악마를 향해 소리쳤다.

"얼마든지! 악마여! 지금 당장 학살을 멈추어라!"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 달리.

악마는 바로 앞에 있던 병사의 목을 베는 걸 마지막으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저, 저 악마 새끼가!'

순간 루카스의 심장이 철렁했다.

도대체 왜?

왜 악마가 자신의 명령을 듣는 거지?

'진짜로 조로 아스터가 악마를 소환한 거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문이었다.

그가 정말로 악마를 소환했다고?

'조로 아스터가 소환한 게 아니야.'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조로 아스터가 소환한 거라면 애초에 방금 전처럼 무기력하게 죽었을 리가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니까.

"폐, 폐하. 정말로 저 악마에게 백성들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악마를 소환하신 겁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악마가 루카스의 명령에 따라 학살을 멈추자,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그 광경에 루카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니오! 내가 소환한 악마가 아니오!"

어찌나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루카스의 말을 믿는 귀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마를 소환하는 순간 다른 나라들의 공적이 된다는 걸 정녕 모르셨단 말입니까! 어떻게 즉위식에서 악마를 소환할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까!"

"내가 한 게······."

"이 일로 인해 그동안 라 제국이 쌓아 올린 영광스러운 제국이라는 이미지에 흠집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도대체 어찌하실 겁니까!"

"모두들 진정을······!"

"그동안 폐하께서 악마를 소환할 거라는 소문이 돌더라도 설마설마했거늘! 정녕 라 제국을 멸망시킬 생각이셨습니까?"

루카스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자신이 벌인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악마를 소환해? 그것도 자신의 즉위식 날에?

그래서야 무슨 이득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악마가 소환되어 날뛰고 있는 상황.

그런 이성적 사고가 가능할 리 없었다.

"이,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저 악마가 백성들을 학살하는 걸 그대로 두고 볼 것이오!"

그래서 루카스는 일단 시간부터 벌기로 했다.

저 악마를 퇴치하고 나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한 것이다.

"황제여. 곤란하다면 그 귀족들부터 먼저 대가로 가져가 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런 루카스의 계획을, 악마 녀석이 단숨에 어그러트렸다.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에 귀족들은 또다시 난리가 났다.

"서, 설마 백성들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신 겁니까!"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저 빌어먹을 악마가······!'

이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지금, 귀족들과 자신을 이간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오! 내가 소환한 게 정말 아니란 말이오! 이노옴! 어디서 이간질을 하려는 것이냐!"

루카스는 곧장 악마에게 역정을 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훗, 알겠다. 그럼 귀족들은 이후에 처리하고, 일단 백성들부터 가져가지."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지?

순간 루카스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악마 녀석이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으니까.

"살려줘! 끄윽!"

"진짜 악마다!"

"여, 영혼을 흡수하고 있어!"

악마가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창이 번뜩일 때마다 병사 서너 명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그 광경을 보며 루카스는 악마가 말 한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왜 저런 말을······?'

그리고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 지금 마음속으로 다른 명령을 내리신 게 분명합니다!"

'뭐, 뭐라고?'

가슴이 싸늘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내, 내가 명령한 게 아니오!"

루카스가 피를 토할 것처럼 항변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악마의 저 대답 하나로.

앞으로 악마가 벌이는 모든 일이 루카스의 의지라고, 이미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으니까.

'젠장, 젠장!'

도대체 왜?

저 악마가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저러는 것인가.

루카스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곁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던 소드 마스터들이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필릭스 경. 오스카 경. 헤이든 경. 일단 악마부터 처치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서 루카스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끝이야.'

자신을 지켜야 할 소드 마스터들이, 명령이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움직였다.

한마디로 더 이상 자신을 따르거나 지키지 않겠다는, 무언의 통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씨발.'

여덟 명의 소드 마스터가 나선 이상.

아마 저 악마는 얼마 가지 못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미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백성들이 죽은 상황.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쥐어짰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어떻게든 생각해내야 했다.

'안 그럼 처형당하고 말 거야.'

그렇게 여덟 명의 소드 마스터와 악마 간의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악마가 휘두른 창에서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붉은색 벼락이 사방을 휩쓸었다.

그 위력은 가히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오스카 후작님이······!"

단숨에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상반신이 터져 죽었다.

'지금까진······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것인가!'

남은 여섯 명과의 전투도 일방적이었다.

갑자기 악마가 사라지더니, 필릭스 후작의 뒤에서 나타나 추가로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죽인 것이다.

그 모습에 루카스는 가슴 한 켠이 서늘했다.

'제국의 검이라고 불리는 소드 마스터가······ 저렇게 쉽게 죽는다고?'

지금까지 그는 소드 마스터를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라 제국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검호들에게 내려지는 칭호가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그런 소드 마스터를.

악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륙하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제국의 검들이, 제국의 검들이!"

"이러다가 진짜로 라 제국이 멸망하겠소! 어서 저 악마를 막아야 하오!"

"하지만 제국의 검들께서도 녀석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막는단 말이오!"

소드 마스터들이 단숨에 도륙당하자, 귀족들 사이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하여 저들끼리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다.

그때였다.

"어차피 저 악마도 계약 관계로 이 땅에 소환된 것. 계약자를 죽이면 녀석이 물러나지 않겠소?"

"계약자라면······ 설마!"

단상 위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에 그의 뒷목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지금 귀족들은······.

'씨발.'

자신을 죽이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서둘러 양손을 내저었다.

"정말 내가 계약한 게 아니오! 정말이오! 일단 내 말부터······!"

루카스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호소했지만.

"그럼 죽입시다."

"어차피 라 제국의 모든 백성들과 귀족들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계약한 자요. 더 이상 한 나라의 군주로서 예우해줄 것도 없소."

이미 악마 계약자로 낙인찍힌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순식간에 말을 맞춘 후, 검을 빼 들며 다가왔다.

'이,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루카스가 등을 돌려 달아나려 했지만.

푹! 푹! 푹! 푹! 푹!

귀족들의 검이 먼저였다.

'이럴 수가······.'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하여 동생들을 죽이고.

푹! 푹! 푹!

황제에 오른 것이란 말인가.

순간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걱!

그렇게 제국의 황제가 된 첫날, 루카스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는.

렌에 의해 악마 소환자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넼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여태까지 본 경기 중에서 오늘꺼가 제일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

└루카스 어리둥절 ㅋㅋㅋㅋ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듯ㅋㅋㅋㅋㅋ 그것도 하필 즉위식 날엨ㅋㅋㅋㅋ

└ㅋㅋㅋㅋ 개웃기넼ㅋㅋㅋ 루카스 표정 봄? 렌 등장하는 순간부터 얼굴 존나 얼빵해짐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명 묻어 버리는 거 순식간이넼ㅋㅋㅋㅋ 내가 봤을 때 렌, 저새끼가 제일 나쁜 새끼임 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님들 이게 웃김? 신성 존나 쓰레기네.. 불쌍한 루카스..ㅠ

└윗댓 낄끼빠빠 해라ㅡㅡ^ 렌 아니었으면 루카스도 언젠가 악마 소환 했을 거거든?

└ㅋㅋㅋㅋㅋ 존나 기발하긴 했음 ㅋㅋ 씨발 이걸 해내넼ㅋㅋ

└진짜 ㄹㅇ 악마 인정합니다. 렌 저새끼는 악마가 분명해욬ㅋㅋㅋㅋㅋㅋ

'어?'

일곱 명의 소드 마스터를 죽이고, 마지막 남은 녀석에게 창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띠링!

[승리 조건1 : 안타레스에 있는 황제와 흑마법사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눈앞에 뜨는 알림창에 소드 마스터를 밀어내고 단상 쪽을 살피자, 막 목이 베여 죽는 루카스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먹혀들었군.'

그 광경에 나는 피식 웃었다.

소드 마스터를 여덟 명이나 상대하다 보니, 단상 위쪽까지 신경을 쓰고 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더 일이 잘 풀린 것이다.

"저 악마가 사라지질 않소!"

"아니! 계약자가 죽었는데 어떻게······!"

귀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소드 마스터들을 다 죽여 버리니까, 어떻게든 날 막기 위해 악마 계약자라며 루카스를 죽인 거겠지.

'생명의 교단을 띄울 일만 남았군.'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대륙에 진정한 악마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스텟 좀 제대로 올려 보자고.'

거기다 덤으로 황궁에 있는 골드도 챙기고.

< 89화. 혁명(5) > 끝

< 90화. 혁명(6) >

3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활기가 느껴지며, 온갖 인간들이 분주하게 성문을 드나들던 제국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 안타레스.

그런 대도시가 고작 3일 사이에 죽음의 폐허로 변했다.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하게 세워졌던 건물들은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바닥으론 피가 줄줄 흘렀으며, 하늘을 까맣게 메울 정도의 까마귀 떼들이 내려앉아 시체를 파먹었다.

'후. 피곤하네.'

이렇다 할만한 전투 없이, 학살만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나마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상승하는 기초 스텟과, 황궁에 있던 4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챙긴 덕분이었다.

지난 3일 동안 일반인 학살은 최대한 자제하며 안타레스에 있는 거의 모든 병사들을 죽이고 다녔다.

그 덕분에, 이제는 근민체가 80을 앞두고 있을 정도.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안타레스를 빠져나갔다.

'제대로 먹혔군.'

그런 내 사소한 행동에도 무수한 눈길이 꽂혔다.

모두 곳곳에서 숨죽인 채 날 지켜보고 있는 일반인들의 것이었다.

성문을 빠져나와, 안타레스의 남쪽에 있는 베라크루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침묵의 망토를 사용하며 근처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조용한 숲속.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근처에 있던 나무에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렌님."

나무 위에서 은신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고치우였다.

안타레스를 초토화 시켜야 하다 보니,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 미리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뒀던 것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고작 3일 만에 라 제국에서 헬리퍼라는 악마를 소환했다는 소문이 전대륙으로 퍼졌습니다. 제국 전역에 민심이 들끓고, 다른 나라들도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며 부랴부랴 용사 파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음.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훨씬 격렬했다.

뭐, 나한테는 무척 좋은 소식이었지만.

"사실상 라 제국은 멸망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영지를 다스리는 모든 귀족들이 라 제국과의 충성 맹세 선언을 철회했습니다. 뭐, 어차피 대를 이을 황족이 모두 죽은 이상 이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봐야겠지만요."

고치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가 미션을 수행할 때도, 라 제국을 멸망시키는 건 크게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생명신을 믿는 신성 제국을 세우는 것.

[생명의 신을 믿는 신도의 비율 : 0.1%]

당장 저 0.1%라는 비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성 제국을 세우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판은 다 깔렸어.'

그래도 전 대륙을 헬리퍼라는 악명이 휩쓴 이상.

저 비율을 6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제가 알아둬야 할 만한 게 또 있습니까?"

"현재, 다른 영지의 귀족들이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렌님을 토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숫자는 대략 20만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20만이라······."

그 정도면, 남아 있는 모든 귀족들이 전 병력을 긁어모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엄청난 대군이었다.

"그리고 라 제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다이애나 교국에서도 대신관과 팔라딘들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음. 그럼 슬슬 그라센에 생명신의 전사들이 등장했다고 소문을 뿌려도 될 것 같습니다."

"예. 그럼 내일 작전을 실행하겠습니다. 저들이 오기 전에······."

"아뇨."

"······?"

나는 그라센으로 돌아가려는 고치우를 붙잡았다.

20만 대군에.

대신관과 팔라딘까지.

"절 토벌하겠다는 군사들과 용사 파티를 다 죽인 뒤에. 그때 오시죠."

그 소중한 피의 흡수 제물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서.

피날레를 장식할 것이다.

"악마를 처단하라!"

"모두 물러서지 마라!"

"인류를 위하여!"

서걱!

베라크루스 대평원.

그곳에 20만 병력과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인류의 보존을 부르짖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하지만 20만이라는 그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숫자의 인간 중, 그 누구도.

서걱!

내 대학살을 막아낼 수 없었다.

지금 내 모습은 레이드 보스, 그 자체였다.

그것도, 죽이면 죽일수록 더 강해지는.

그때였다.

띠링!

[발리노르 세상의 균형을 흐트러트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학살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상태창 알림에 처음 보는 메시지가 등장했다.

아마,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가 보낸 메시지겠지.

경기 관리를 게임 메이커가 하니까.

'학살 자제? 웃기는군.'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기초 스텟은 미친 듯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

"으으······."

서걱!

달려드는 병사들에게 벽력섬전을 휘두르며.

나는 그 메시지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애초에 미션부터가 라 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나왔고.

내가 하고 있는 학살은 그 미션을 완수하기 위한 정당한 과정.

그런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학살을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카스 이 개자식! 500년 역사의 라 제국을······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트리다니······."

20만이라는 병사를 도륙하고, 마지막으로 적의 총사령관으로 보이는 기사를 베자, 그가 허망하다는 듯 읊조렸다.

서걱!

이걸로 라 제국 토벌대는 끝.

이제 남은 건 다이애나 교국에서 온다는 용사 파티를 사냥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씨 ㅡㅡ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뭔 ㅋㅋㅋㅋㅋ 갑자기 학살을 자제하랰ㅋㅋㅋㅋ 그럴 거면 애초부터 미션을 똑바로 내리든가 ㅡㅡ

└요즘 상위 리그가 예전같지 않네 ㅎ 이럴 거면 하위 게임 메이커랑 자리를 바꾸든가 해야 하는거 아님?ㅎ

└ㅋㅋㅋㅋㅋ 미션 내려놓고 파장이 커져가는 것 같으니까 이제서야 수습하는 것 보소~ 이래서 게임 메이커도 자질 테스트 해봐야 함 ㅎ 아버지 바로 곁에서 모시면 다임? ㅋㅋㅋㅋ

└님들 이거 익명 게시판이어도 게임 메이커한테는 누군지 보임 ㅋ 말 조심 ㅎ

└???? 우리 지금 상위 게임 메이커 욕하는거 아님 ㅋ 하위 게임 메이커 욕하는 중임~

└ㅋㅋㅋㅋㅋㅋ 근데 하위 게임 메이커는 일 ㅈㄴ 잘하고 있는데?

└그런가?ㅋㅋㅋㅋ 난 하위 리그를 안 봐서 몰?루

"다이애나 여신님의 이름으로!"

20만 병력과 귀족들의 학살을 펼치고 이틀 뒤.

다이애나 교국에서 온 용사 파티와의 전투가 펼쳐졌다.

팔라딘 일곱, 대마법사 셋, 추기경급 사제 둘.

그렇게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파티였다.

거의 소드 마스터 열두 명과 맞먹는 전력.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40(+5)(+59)] [민첩 : 144(+5)(+61)] [체력 : 134(+5)(+50)]

[정신 : 166(+5)(+62)] [지력 : 55(+21)] [마력 : 130(+5)(+50)]

뻥튀기되는 스텟이 무척 높다 보니, 이제는 근력과 민첩이 140을 넘어간 상황.

"벤야민 경! 어그로부터!"

챙! 채챙! 콰지지지직!

"크윽! 브랜틀리 추기경님! 악마를 잡아두기 어려울 것 같습······으악!"

"안 돼!"

녀석들이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나는 팔라딘들에게 발목이 잡힌 척 녀석들을 상대하다가, 빈틈이 보이는 순간 바로 사제와 대마법사들 사이를 갈랐다.

"이놈! 감히 여신님의 종을 해하다니!"

안정적으로 탱킹이 되는 중이라고 판단하고, 공격을 위한 마법과 신성 마법의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기에, 대마법사와 추기경의 목을 베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팔라딘들이 부랴부랴 나를 막아섰지만, 이미 세 대마법사와 두 추기경의 목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급 강자들을 죽였더니, 또다시 스텟이 상승했다.

'나쁘지 않군.'

그렇게 남은 일곱의 팔라딘들을 죽이려 할 때였다.

띠링!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승리 조건1 : 안타레스에 있는 황제와 흑마법사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승리 조건2 :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와 교황이 함께 통치하는 신성 제국을 세워라]

[승리 조건3 : 앞으로 1,000 명 미만으로 살해하라]

'미친.'

앞으로 천 명까지만 죽이라고?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왜?

콜로세움의 경기는 어차피, 신들의 유희를 위한 것 아니었나?

'뭔가가 있군.'

지금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 라파엘은 내게 계속해서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발리노르 세상을 그만 어지럽히라는.

'그러고 보니.'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며 긴급 미션을 받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치러지고 있는 경기까지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하급 악마 처치를 우선시했다.

그땐 왜 그런 일이 발생했나 했는데.

'미션을 통해 우리에게 중간계의 수호를 맡기고 있었던 거였어.'

이제야 퍼즐이 좀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느려졌소!"

"한계에 달한 모양이군! 이번 기회에 반드시 녀석을 처치해야······!"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전투에 집중하지 못한 사이, 일곱의 팔라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나는 둘러싸이지 않도록 곧장 뒤로 빠지며 팔라딘들을 견제하고 나섰다.

"일단 퇴로를······!"

'그림자 이동.'

그리고는 녀석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순간을 기다려, 그림자 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서걱!

갑작스러운 공격에, 순식간에 세 명의 팔라딘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런 미친!"

일곱 명일 때도 안 됐는데, 고작 네 명의 팔라딘이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 * *

대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베라크루스의 성벽 위.

고치우는 용사 파티와 렌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이 일었다.

"요, 용사 파티가······!"

"정말 인류에게 멸망이 찾아오는 것인가!"

고치우의 주변에서 렌과 용사 파티의 전투를 노심초사하며 보던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다.

악마 연극이라는 걸 알고도 보고 있으면 섬뜩할 정도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은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군.'

분명 렌이 강하긴 했지만, 처음 킹 메이커 미션을 받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뭐랄까.

혼자서도 에덴에서 만났던 하급 악마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슬슬 끝내도 되겠어.'

성벽에서 뛰어내린 고치우는, 베라크루스 안에 마련해 둔 은신처로 향했다.

그곳에는 키아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고치우님?"

"방금 막, 다이애나 교국에서 온 용사 파티가 전멸했습니다."

"와······."

고치우의 말에, 그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소드 마스터급 강자 열두 명을 혼자서 쓰러트렸다는 뜻이었으니까.

"진짜 대단하네요. 저랑 고치우님, 테루오미님이 한 번에 덤빈다고 해도 못 이기겠어요."

키아라의 말에 고치우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토벌에 나설 건가요?"

"렌님은 1주일 뒤에 오라고 했습니다. 다이애나 교국의 용사 파티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생명의 신께서 신의 전사들을 내려줬다는 것도 알려야 하니."

"휴우. 1주일 뒤면 이 미션도 끝나겠네요. 이번 미션은 뭔가 너무 긴 느낌이었어요."

"조금만 더 고생하시죠."

이제는.

단막극의 피날레가 열릴 일만 남았다.

―라 제국의 귀족들과 20만의 병력이 모두 베라크루스 대평원에 잠들었다.

―다이애나 교국에서 온 용사들도 모조리 악마에게 도륙당했다.

―곧,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20만 대군이 죽고, 용사 파티가 실패했다는 소식은 전대륙으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덕분에 라 제국은 어딜 가나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런 와중에 한줄기 희망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라센의 가렌 남작이 가문 대대로 생명의 신을 섬기는 기사였는데, 그의 기도를 받은 생명의 신께서 악마를 토벌하기 위해 신의 전사들을 내려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꼭 이렇게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어야 합니까?"

가렌이 금빛으로 번쩍이는 자신의 갑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관객들의 눈에 최대한 띄어야 하니까요. 그나저나 가슴을 펴고, 좀 더 늠름한 모습으로 가주시겠어요? 앞으로 황제가 될 분인데 지금처럼 쭈뼛거리는 모습은 좋지 않아요."

키아라의 말에 가렌이 말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가렌 남작과, 에베렛 사제, 그리고 키아라, 테루오미, 고치우까지.

지금 그들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라스그리드로 향하고 있었다.

악마 역할을 맡은 렌이, 살상은 최대한 줄인 채 건물들만을 파괴하며 공포심을 조장하느라, 동쪽 끝에 있는 라스그리드까지 갔기 때문이었다.

"악마를 토벌하기 위해 생명의 신께서 내려 주신 전사들이야!"

"신의 전사시여! 부디 우리를 구원하소서!"

"가렌 남작님! 제발 악마를 토벌해 주세요!"

렌에게 향하는 길은 무척 편안했다.

푸석푸석한 빵을 들고나오는 사람.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을 가져오는 사람. 거기에 한줄기 꽃을 꺾어 오는 사람까지.

어딜 가나 백성들이 뛰쳐나와, 손에 쥐여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라스그리드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대평원.

'미, 미친······.'

대평원에선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가 가득 펼쳐져 있고, 바닥은 붉게 물들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고고하게 서 있는 존재가 있었다.

악마 역할을 하기로 했던, 렌이었다.

'이 광경을 고작 한 명이 만들어 냈다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렌은 준비했던 대사를 외쳤다.

"천인공노할 짓을 벌여 놨구나, 악마여!"

수많은 사람들이 성벽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침묵으로 휩싸인 평원에 가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라스그리드를 바라보고 있던 렌이 가렌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치게 된 눈빛.

'으으······.'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켠이 서늘할 정도였다.

저택의 접객실에서 만났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

가렌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남은 대사를 마저 쳤다.

"생명의 여신, 이둔님의 이름으로 네 놈을 반드시 처단하고 말겠다!"

스르릉!

가렌이 검을 뽑아 높이 들자, 테루오미와 키아라, 고치우가 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가렌도 고삐를 당겨, 렌을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투.

쐐애애애애애애액!

'이게 정말 연기라고?'

테루오미가 전방에서 렌과 무기를 겨누고.

고치우, 키아라는 후방에서 마법과 화살 세례를 날렸다.

그럼에도 렌은 그 모든 공격들을 여유롭게 막아내며, 오히려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따스하게 감싸는 생명의 햇살!]

후방에서 에베렛이 신성 마법을 사용하자, 새하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무슨······!"

렌이 당황하더니, 움직임이 빠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악마가 약해지고 있다!"

순간, 라스그리드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듣는 순간 가렌 남작의 머리가 쭈뼛 돋을 정도로, 목소리만으로도 땅이 울릴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었다.

* * *

[<신화업적:역천자 >를 해제합니다.]

[<차원특전:최강의 성계>를 해제합니다.]

[<천둥의 숨결>을 비활성화 합니다.]

< 90화. 혁명(6) > 끝

< 91화. 혁명(7) >

에베렛의 신성 마법에 맞춰, 나는 역천자와 최강의 성계 특전을 해제했다.

그리고 언제 벽력이 터질지 모르니, 천둥의 숨결도 비활성화 시켰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특전은.

초반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활성화 시킨 피의 강화, 단 하나뿐.

'제대로 해야겠군.'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04(+5)(+23)] [민첩 : 106(+5)(+23)] [체력 : 108(+5)(+24)]

[정신 : 134(+5)(+30)] [지력 : 44(+10)] [마력 : 109(+5)(+24)]

특전을 끈 현재 내 스텟은, 테루오미보다도 낮은 수준.

그런 상황에서 키아라와 고치우까지 상대해야 하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애초에 관객들에게 연극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팀원들에게도 진심으로 할 것을 주문했고.

나는 곧장 스텝을 밟으며, 테루오미와 거리를 벌리는 데 주력했다.

"어딜······헉!"

그리고는 빈틈이 보일 때마다 빠르게 파고들며 허점을 공략했다.

인앤아웃으로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젠장!"

그때부터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내가 계속해서 공격하고, 테루오미는 수비만 하는 상황이 그려진 것이다.

그러자 테루오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스텟에서 자신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몰아붙이고 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 것 같았다.

리치에서부터 워낙 차이가 많이 나기에, 테루오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쉭! 쉭! 쉭! 쉭! 쉭!

그 사이, 고치우가 쏜 화살들이 날아왔지만, 그것도 별로 문제 되지 않았다.

'테루오미에겐 초감각이 없지.'

나와 다르게 테루오미는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의 방향을 알 수가 없으니까.

테루오미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방향에서밖에 날아올 수 없기 때문에, 예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콰과과과과과과광!

[마력 상쇄율 : 50%]

쏟아지는 키아라의 마법 폭격도 마찬가지.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앙!

섬광이 번뜩! 하더니, 하늘에서 수많은 벼락이 내 주위로 떨어졌다.

"으윽!"

뇌전이 사방을 휩쓸고, 청천벽력에 맞은 테루오미가 몸을 움찔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벽력과 다르게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움찔하는 테루오미를 돌파한 나는 말뚝 딜을 하고 있는 고치우와 키아라에게 쇄도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바닥을 박차고 뒤로 이동하면서 내게 화살과 마법들을 쏟아냈다.

팅! 팅! 팅! 팅! 콰과과과광!

두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며, 내게 쫓기는 쪽에서는 피하는 데 주력하고, 반대쪽에선 내가 따라갈 수 없도록 속도를 줄이는 데 주력해 나갔다.

날아오는 화살은 쳐내고, 마법은 부수며 따라다니길 한참.

'제법이군.'

두 사람을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테루오미와 가렌이 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마법과 화살 세례를 통해, 나를 몰이한 것이었다.

"악마여! 내 검을 받아라!"

그리고 등 뒤에서 날아오는 가렌의 검.

'조심.'

순간 나는 최대한 힘 조절을 하며 가렌의 검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가렌은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선, 절대로 죽어선 안 되는 존재.

거기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전투에서 뺄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최대한 집중하며 힘 조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죽엇!"

가렌에게 발이 묶인 사이, 테루오미도 합세하며 나를 밀어붙였다.

전력을 다하면서 동시에, 힘 조절을 해야 하는.

그런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나는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녀석들을 맞상대해 나갔다.

[포근한 생명의 가호!]

거기다 날아오는 에베렛의 신성 마법까지.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내가 조금씩 밀릴 수밖에 없었다.

'쉽지 않네.'

확실히 스텟이 낮아지니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챙! 채채챙! 챙!

거기다, 이들 중에서 그 누구도 죽여선 안 되는 상황.

그저 수비를 견고하게 하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한 명씩 떼어놓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제발······!"

라스그리드의 성벽 위에서 내가 쩔쩔매는 걸 본, 수많은 백성들이 함성을 쏟아냈다.

"생명의 신께서 보내주신 전사들과, 가렌 남작님이 악마를 몰아붙이고 있어!"

"저 무시무시한 악마가······! 생명의 신이시여! 제발,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인류의 멸망이라는, 절망 가득한 상황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난 것이다.

'됐어.'

다행히 우리의 전투를 보는 그 누구도,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뭐, 애초에 서로가 진심으로 무기를 겨눈 채 싸우고 있는 것이었으니,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테지만.

거기다 내가 그동안 만들어 놓은 악마의 이미지도 있었다 보니, 스토리텔링 적으로도 완벽했다.

이제 남은 건.

이 클라이맥스를 최대한 끌어, 여운을 깊이 새기는 것.

"모두들 이럴 게 아니라 생명의 신께 기도를 드립시다!"

"생명의 신, 이둔이시여!"

"저 악마만 물리쳐 주신다면, 평생 이둔님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이둔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테루오미가 견제를 위해 내가 내지른 창을 피하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스강!

간신히 테루오미의 공격을 막자마자 뒤쪽에서 가렌 남작이 검을 찔러 넣으며 짓쳐들어왔다.

스텝으로 거리를 벌리며 가렌의 공격을 피하자, 귀신같이 내가 피하는 곳으로 마법과 화살이 날아왔다.

쐐애애애애애애액!

'젠장.'

피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피해라도 최대한 줄이는 수밖에.

푹! 푹! 푹! 푹!

나는 급소가 아닌 곳으로 날아오는 화살은 맞아주고, 그 외로는 쳐내거나 부수면서 갇혀 있던 공간을 빠져나왔다.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힘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와.. 진짜 ㅈㄴ 잘싸운다..

└다른 애들은 진심으로 렌 죽이려고 싸우는 거 같은데 ㅋㅋㅋ

└저렇게 많은 페널티를 갖고 싸우는데도 버티네.. 렌은 테루오미 밀어붙일 때도 일부러 안 죽이고, 가렌한테도 힘 조절하면서 싸우는 중 ㄷㄷ

└ㅋㅋㅋㅋㅋㅋ 윗댓글 동감 ㅋㅋㅋ 가렌한테 힘 조절 하기 전까지는 진짜로 서로 죽이려고 싸우는 중인 걸로 알았음 ㅋㅋㅋㅋ

그렇게 한참 동안 버티는 데 중점을 둔 채 전투를 펼칠 때였다.

서걱!

가렌의 검에 내 왼팔이 허공을 날았다.

테루오미에게 공간을 차단당하고, 그사이 날아온 고치우의 화살과 키아라의 마법을 막느라 가렌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키아라를 보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엄청난 마법 폭격이 일대를 휩쓸었다.

살상, 혹은 타격용이 아닌 소리만 크고 먼지만 요란한 광역 마법이었다.

"처, 처치했나!"

"제발······!"

"이둔이시여!"

'끝났군.'

어마어마하게 피어난 먼지 속에서, 가렌과 테루오미가 내게 고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나는 가렌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먼지가 걷어지면, 관객들은 가렌이 날 쓰러트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악마를 쓰러트렸다!"

"가렌 남작, 만세! 생명 신의 전사님들 만세!"

내가 쓰러진 걸 본 백성들이 어마어마한 함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만으로도 땅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

순간 닭살이 쫙, 돋았다.

'해냈어.'

나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고꾸라트렸다.

그리고.

띠링!

[발리노르인 '질베스터'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며, 가렌 남작 저택의 접객실이 눈에 들어왔다.

마계에 역소환된 척 연출하기 위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 내가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 키아라가, 내 몸에서 검은 연기가 흩날리도록 뒤처리를 했을 것이다.

"수고 많으셨······ 헉, 팔이······!"

"괜찮습니다."

질베스터가 내 잘린 왼팔을 보고 당황하자, 나는 그에게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누웠다.

체력적 압박, 그리고 정신적 피로감이 한 번에 쏟아졌다.

[생명의 신을 믿는 신도의 비율 : 1.7%]

0.1%에 불과했던 비율이 순식간에 1.7%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그 상승은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어.'

지금쯤이면 아마, 가렌 남작이 검을 번쩍 들며 악마를 처치했다는 선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이 소문이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일과.

가렌을 황제로 세우는, 신성 제국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회복의 물약을 꺼내 단숨에 비운 뒤, 질베스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접객실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눈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괜히 누군가가 나를 침대로 옮기려고 하거나, 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잠결에 휘두른 창에 맞을 수도 있기에, 나는 질베스터에게 경고의 말을 남겼다.

"예, 옛!"

물론 질베스터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지만.

당황하며 접객실을 나서는 질베스터를 뒤로하고.

'피곤하군.'

나는 눈을 감았다.

"대륙 전역에 악마를 토벌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다이애나 교국은 가렌 남작님에게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고 칭하고 있다고 합니다."

1주일 후.

나는 가렌 남작 저택의 접객실에서 한쪽 팔로 푸쉬업을 하며 질레스터가 구해온 정보들을 듣고 있었다.

악마의 인상착의가 퍼져나간 탓에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렌 남작과 만난 첫날, 성벽 위에서 날 봤던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 키아라가 해당 사실을 말하거나, 작성하거나, 누구에게 알리면 사망하게 되는, 죽음의 서약을 맺게 했으니까.

"기존의 라 제국 영토 내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가렌 남작님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또한, 생명의 신을 국교로 하는, 새로운 제국을 세우는 것에도 찬성했습니다."

"······."

"그래서 먼저, 에베렛 사제님이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그 뒤에 가렌 남작님이 황위에 등극하는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승리 조건2 :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와 교황이 함께 통치하는 신성 제국을 세워라]

[생명의 신을 믿는 신도의 비율 : 92.3%]

푸쉬업 2천 개를 끝낸 나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질베스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식은 언제 열린다고 합니까."

"내일 입니다. 라 제국이 멸망하고,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에 지지하는 귀족들만 모여서 간략하게 치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림자 이동으로 그라센에 온 이후, 다른 파티원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모두들 가렌 남작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생명 신이 보내준 전사들이라는 타이틀로 얼굴마담을 자처한 까닭이었다.

'완전히 끝났군.'

생명의 신을 믿는 신도의 비율은 92퍼센트를 넘어갔다.

내일, 가렌이 황위에 오르는 순간 미션이 자동으로 성공 처리 될 것이다.

그래서 상태창을 보며, 혹시 모를 변수가 있나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승리 조건1 : 안타레스에 있는 황제와 흑마법사를 처치하라]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승리 조건2 : 라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와 교황이 함께 통치하는 신성 제국을 세워라]

[생명의 신을 믿는 신도의 비율 : 92.3%]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승리 조건3 : 앞으로 1,000 명 미만으로 살해하라]

[살해한 생명체 수 : 692 명]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미션의 조건 내용들이 주르륵 떴다.

순간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승급전 경기에서도 이런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혁명 > 미션을 완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스토리 미션 <혁명 >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게임 메이커가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 모양이군.'

별다른 변수가 없어, 내일 가렌이 황위에 오르고, 새로운 신성 제국이 탄생하는 게 확정되었다고 판단되어 경기를 종료하기로 한 것 같았다.

[공헌도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공헌도]

[렌 : 80%] [고치우 : 8%] [키아라 : 7%] [테루오미 : 5%]

[스토리 미션의 공헌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50,000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추가로 x 2 의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 118의 두 번째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240,8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03,200 P 차감)]

[기본급 +35,000 P / 승리 수당 +35,000 P / 추가 보너스 +100,000 P / 서브 미션 수당 +174,000 P / 수수료 -103,2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50,000 P 로 책정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종료 콜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경기에서도 정말 많은 걸 얻었다.

황궁을 털어 4천만 골드를 추가로 얻었고.

피의 흡수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스텟을 올릴 수 있었다.

이제는 기초 스텟이 80을 육박하는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스텟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오래 기다려 왔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91화. 혁명(7) > 끝

< 92화. 진일보(1) >

혁명 미션이 끝난 다음 날.

나는 아세리안이 마련해 준 집무실에 앉아, 경기에서 얻은 것들을 결산하고 있었다.

근력 7, 민첩 6, 체력 6, 정신 1, 지력 28, 마력 6.

서킷 브레이커와 혁명 미션을 뛰면서 내가 올린 스텟이었다.

'미친 듯이 올랐네.'

피의 흡수 능력을 얻은 후, 에덴과 안타레스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의 생명체를 죽인 덕분이었다.

소드 마스터들이나 팔라딘들도 엄청나게 죽여댔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유 골드 : 73,682,000 G]

에덴과 안타레스에서 얻은 7천만 골드에, 각종 아이템 들까지.

고작 한 번의 경기를 뛴 것 치고는 엄청난 수익을 얻은 것이다.

'쓸만한 스킬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보유 골드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중개 거래소를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다양한 스킬과 아이템들의 목록이 주르륵 펼쳐졌다.

[<스킬북:스킬 복제>]

[액티브]

[사용하면 대상의 스킬 한 가지를 복제해 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30 분]

[스킬 유지 시간 : 30 분]

[판매가 : 2,900,000 G]

[<갑옷:파괴왕의 갑옷>]

[파괴왕 종덕이 착용하던 갑옷. 갑옷임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보호하는 능력이 없다.]

[무언가를 부술 때마다 근력 스텟이 1 포인트씩 상승합니다.(최대 30 포인트, 5분 후 초기화 됩니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2,000,000 G]

[<신발:헤르메스의 날개>]

[<스킬북:마력 관통>]

[<장신구:열망의 ······.>]

[<스킬······.]< p>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쓸만한 아이템이나 스킬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쓸만한 건 있는데, 나와 시너지가 맞는 게 없었다.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 하나라도 올라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정말 좋은 아이템이나 스킬은 중개 거래소에 풀리는 일이 드물었다.

팔지 않고 자기가 사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으니까.

오죽했으면 플래티넘 급 이상의 스킬은 골드로 구하는 게 가장 쉽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올라온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에 등록되어 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아세리안이랑 상의 좀 해 봐야겠군.'

하루 종일 중개 거래소만 보고 있을 순 없으니, 대신 확인해 줄 사용인을 고용하든가 하는 방법으로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내가 체크한 것은 보유 포인트였다.

[남은 포인트 : 882,934 P]

'미쳤네.'

서킷 브레이커로 인해 진행하게 된 어둠의 태동 미션에서 14만 7천 포인트를.

그리고 혁명 미션에서 24만 포인트를 획득했다.

거기다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로 선정되며 3만 5천 포인트, 팀 투지에 낸 수수료 중 3%를 페이백 받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잭팟이 터졌어.'

사실, 루디악이 걸어준 서브 미션 10만 포인트와, 악마 상황극 수락으로 인한 17만 포인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많은 포인트를 얻지 못했을 것이었다.

기껏 해야 60만 포인트 언저리였겠지.

대충 상황을 정리한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77] [민첩 : 79] [체력 : 79]

[정신 : 99] [지력 : 34] [마력 : 80]

포인트를 사용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혁명 미션 이후, 커뮤니티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중간에 라파엘이 개입해서 미션 내용을 바꾼 것.

그리고 내가 발리노르에 있는 소드 마스터, 대마법사, 대신관, 팔라딘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버린 여파였다.

―발리노르 성계의 네임드 단체로 사망! 그로 인해 랜덤 뽑기 열풍! 도대체 하이블러드나이트 118에서 무슨 일이?

「하이블러드나이트 118 경기를 관람 중이던 신들이 대규모로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랜덤 뽑기를 위한 것!

'엥? 랜덤 뽑기를 하려고 관람중이던 경기를 이탈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신들이 많을 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상위 리그 경기 진행 중에 발리노르 성계의 유명 네임드들이 단체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게 됐다.

시작은 <킹 메이커> 미션을 받은 상태에서 서킷 브레이커가 터지면서부터였다.

그로 인해 기존에 있던 <킹 메이커> 미션이 사실상 소멸함에 따라, 상위 게임 메이커가 급하게 새로운 미션을 만들어야 했던 것.

새로운 미션의 이름은 <혁명 >.

미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중략-

그로 인해, 상위 게임 메이커에게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지고 있다.

애초에 미션을 허술하게 줘 놓고, 열심히 수행한 플레이어들에게 탓을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4강이라고 불리는 발리노르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게 된 만큼,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ㅋㅋㅋㅋ 거의 무림에서 정마대전 펼쳐진다고 정보 돌았을 때 수준의 랜덤 뽑기 열풍이었지..

└솔직히 중간에 미션 변경 뜰 때 개빡치드라 ㅡㅡ 보고 있는데 몰입감 확 깨짐.

└게임 메이커 해명이 더 어이없었음 ㅋㅋㅋ 서킷 브레이커 때문에 불가항력이었고, 렌이 그렇게 사이코패스처럼 죽여댈 줄 몰랐다 ㅇㅈㄹ ㅋㅋㅋㅋ

└사이코패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승리 조건으로 라 제국 멸망시키고 신성 제국 세우라고 한 게 누구였드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상위 플레이어라도 해도, 하위 넘버링 뛰는 애들이 난리 쳐봤자 얼마나 피해가 있겠어~ 이런 안일한 생각이었던거짘ㅋㅋㅋㅋ

└렌이 혼자서 라 제국 소드 마스터들이랑 다이애나 교국 팔라딘들 죽일 땐 가슴이 웅장해지더라 ㄷㄷ 진짜로 중급 악마라도 소환된 줄 알았음 ㅋㅋㅋㅋ

└하 ㅅㅂ 렌이 죽일 때마다 랜덤 뽑기 광클했는데 네임드 한 명도 안나옴ㅠ 하위 리그에서 더미로 던질 애들만 천 명 넘는듯 ㅠ

└윗댓 ㅎㅇ 난 그래도 라 제국 소마 한 명 뽑음 ㅋㅋㅋ

"안우진 님.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로부터 징계 공문이 내려왔어요."

"징계 공문이요? 죄목은 뭡니까?"

"학살을 자제해 달라고 했는데도 게임 메이커의 말을 무시한 죄목이라고 하네요."

"징계 내용은요?"

"기본급 10퍼센트 포인트 삭감. 그리고 6개월간 출전 자격 정지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기본급 삭감에, 출전 자격 정지까지?

애초에 자기가 미션을 똑바로 내려 주던가.

"죄송해요······. 제가 최대한 막아보려고 해봤는데······."

고개를 떨구는 아세리안.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세리안이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라파엘이 미션 내용을 어중간하게 내렸기에 발생한 일.

아니, 라파엘의 논리대로 굳이 따지자면 스텟을 올릴 생각에 학살을 멈추지 않은 내가 잘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한 번 제대로 엿을 먹여주고 싶은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권위를 이용해 찍어누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고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나, 초월 리그의 게임 메이커도 자기 마음대로 안 풀리면 이런 식으로 나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풋!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아하하, 안우진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그런데 게임 메이커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고위 리그나 초월 리그에선 이런 일이 없을 거예요. 게임 메이커가 경기를 주관하는 건 상위 리그와 똑같지만, 고위 리그 이상부터는 열두 주신이 함께 관리하거든요. 징계를 내리는 것도 그 열두 주신의 동의가 필요하구요."

한 마디로 게임 메이커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하위나 상위 리그와 달리, 제약도 많고 더 엄격한 절차와 감시가 존재한다는 것.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1회차 때와는 다르게, 라파엘과 계속해서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에, 답답하던 차였는데 아세리안의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좀 놓였다.

상위 리그만 벗어나면 이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좋게 생각하자.'

나는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이렇게 부딪힌다는 것 자체가, 2회차 때는 이슈를 끌고 다니는 스타 플레이어가 됐다는 거나 다름없다는 의미였으니.

'그래도 한 번 손봐주긴 해야 하는데.'

이젠 성계 대항전을 강요당하던 신입생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하이블러드나이트112, 그리고 118.

두 번의 경기를 통해 상위 리그에도 내 이름이 엄청나게 많이 알려진 상황.

물론 지금 당장 라파엘에게 비빌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올 것 같았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그렇게 이를 갈며 아세리안의 집무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아, 참. 이번 경기에서 스텟이 엄청 많이 오르셨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경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높진 않으셨는데······."

아세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내 기초 스텟을 계속해서 모니터링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경기 중에 특별한 능력을 얻어서요."

"와. 타이밍이 정말 좋네요. 안 그래도 이제 기초 스텟도 마의 구간에 다다르셔서 걱정이 많았는데. 아, 마의 구간 아시죠? 80부터는 훈련으로 스텟이 거의 안 오르거든요. 전 경기 직전에 포인트를 써서 스텟을 올리고 나가신 줄 알았어요."

아세리안이 잘 됐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잘 알지. 80부터는 스텟이 거의 안 오른다는 걸.'

하지만 나는 굳이 아세리안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럼 전 훈련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네, 오늘도 화이팅!"

어차피 곧 있으면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4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헉, 허억, 헉, 헉."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보며 나는 바벨을 내려놓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근력 : 80] [민첩 : 80] [체력 : 80]

'끝났다.'

나는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드디어 근민체를 80까지 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 방법이 옳았어.'

누워서 숨을 헐떡이는 동안, 많은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붉은 깃발전부터, 바로 직전에 뛰었던 혁명 미션까지.

스텟이 부족해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들을 견뎌내고, 결국 이 순간까지 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은, 기쁨을 참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아, 우진이형. 근력 훈련 끝나셨어요?"

체력 단련실을 나서려는데, 곁에서 함께 훈련을 하고 있던 주창범이 물었다.

"아, 예."

"그럼 조금 이따가 저랑 대련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대련이요?"

"넹. 원래 루치아노 형이랑 하기로 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피넛엘님이랑 대화 중이더라구요."

대련이라······.

'안 그래도 스텟 올리고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잘 됐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대련장에서 보죠."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는 주창범을 뒤로하고,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정말 오랜만에.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했다.

[근력 스텟을 구매하시겠습니까?]

[1스텟 당 9,000 P 가 소모됩니다.]

[Yes / No]

'왜 이렇게 어색하냐.'

그동안 괜히 사고 싶어질까 봐, 시스템 상점으로 접속하는 걸 최대한 자제 했었다.

그러다 보니, 스텟을 구매하겠냐는 알림창이 너무 낯설었다.

그럼.

이제 스텟을 올려 볼까.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Yes(선택) / No]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9,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9,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9,000 P 를 소모하셨······.]

버튼을 누르는 내 손길에는 망설임이라곤 들어있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인데.'

한 번 누를 때마다 내 안에서, 힘이 조금씩 샘솟기 시작했다.

마치, 피의 강화 스텍을 쌓을 때의 느낌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그렇게 한참 동안 울리던 콜이 멈췄을 때였다.

"하. 하하······."

내 앞에 떠 있는 상태창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10] [민첩 : 110] [체력 : 108]

[정신 : 99] [지력 : 34] [마력 : 80]

[각성 능력 : <초감각 > <특급창술 > <고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최상급검술 > <최상급단검술 > <최상급투척술 > <중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고급궁술 > <최상급검방술 > <최상급채찍술 > <중급둔기술 >]

[보유 스킬(5/5) : <침묵의 망토> <뇌신 > <천둥의 숨결>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거기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70에서 80 언저리였던 스텟들이.

모두 세 자리를 넘어가 있었다.

"하. 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 92화. 진일보(1) > 끝

< 93화. 진일보(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