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 * *

모든 언데드들을 정리한 우리는 T자 형태의 복도에서 우측으로 이동했다.

"이미 도착한 팀들이 제법 많군요."

"아니, 벌써 보스 룸에 도착한 팀들이 있단 말이오? 도대체 어떻게?"

내 말에 비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고창신이 비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우린 중간에 다른 팀과 싸우며 체력 소모가 제법 많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휴식 시간도 가져야 했고. 그 사이에 보스 룸으로 향한 팀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찾긴 어렵지만, 보스 룸에 가까워질수록 언데드의 숫자와 등급이 증가했으니, 그걸 따라온 팀들이 많을 겁니다."

오는 동안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던 모양이었다.

'제법이네.'

사실, 고창신의 말이 맞았다.

아무런 힌트도 없이 이런 미로에서 보스 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언제 보스 몬스터가 잡힐지 모르니, 바로 돌입하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

우리는 곧장 복도 끝에 있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직경 200미터짜리의 거대한 공동.

그 안에서는.

각종 마법이 흩뿌려지고, 스킬이 난무하며, 마구잡이로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공동 전체를 시꺼멓게 메우고 있는 언데드들.

그리고 중앙부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존재.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 한 손에 수정 구슬을 들고 있는 해골 몬스터가 있었다.

'리치.'

내 예상대로 보스 몬스터는 리치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리치의 상태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보스몹 레이드를 들어가려 할 때마다, 다른 팀에서 견제를 놨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치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흑마법을 난사하고, 각종 언데드들을 일으키며 플레이어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미션이 진짜 더럽네.'

리치는 시체만 충분하다면 계속해서 언데드를 소환시킬 수 있는 몬스터.

거기다 1회차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 맵이 인체 실험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엔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이 묻혀 있을 거라는 것.

아마 리치를 죽이기 전까진 언데드들이 끊임없이 소환되겠지.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어.'

리치는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듯, 특정 팀을 노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광역 마법을 쓰며 플레이어들 전체에게 딜을 넣고 있었다.

그러다가 특정 팀만 남게 되면, 그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리치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겠는데.'

한마디로, 미션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적아가 한데 뒤엉켜 있는 상황.

거기에다 꼬리를 물듯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함부로 리치를 공략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끌면 다른 팀들도 계속해서 합류할 게 분명했다.

심지어 데스 나이트들도 바글바글 대는 상황.

'차라리 잘됐어.'

이런 경우엔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일점사해서 리치를 빠르게 죽이거나.

'차분하게 한 명씩 계속 줄여나가는 거지.'

내 경우엔 후자가 훨씬 나았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1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언데드와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생명체' 니까.

"젠장. 계속해서 몰려오네! 이러다 여기서 다 만나겠어, 아주!"

"엇, 저 가면!"

"저 녀석이 렌이란 놈인가 본데."

우리가 보스 룸으로 들어오자, 몇몇 플레이어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곧장 우리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은 없었다.

워낙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함부로 움직였다간 집중포화를 당하게 될 테니까.

'다들 많이 지쳐 보이는군.'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에 모두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낡아서 넝마가 된 로브를 입고 있는 리치가 그나마 깔끔해 보일 정도.

잘만 하면.

이번 경기에서 피의 강화 특전을 켤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창신님. 리딩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프리롤로 움직이겠습니다."

"······?"

내 말에 고창신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내가 개인플레이를 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알겠습니다."

다행히 고창신은 이것저것 캐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피의 강화 특전을 켜기 딱 좋은 상황이야.'

보스 룸은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외곽에서 눈치를 보며 언데드들을 줄이고 있는 팀들.

중심부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하며 리치를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팀.

그리고 플레이어들에게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언데드들.

그런데 워낙 언데드의 숫자가 많다 보니까, 팀 단위로 뭉쳐 있음에도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뚫고 들어가기 딱 좋다는 거지.'

악마의 눈을 켜서 나와 가장 가까운 플레이어들부터 순서대로 체크해 봤지만, 딱히 조심해야 할 플레이어는 없었다.

거기다가 모두들 몇 군데씩 상처를 입거나, 지쳐 있는 상태.

가장 약해 보이는 녀석들부터 차근차근 죽여가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속으로 대충 계산을 끝낸 나는 벽력섬전을 휘두르며 보스 룸에 깔려 있는 언데드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찰그락- 찰그락-

그리고는 간결하게 창을 휘두르며 녀석들을 밀쳐내는 데 주력했다.

사냥이 아닌, 돌파에 집중한 공격이었다.

목표는 중심부의 팀들이 내 돌격을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다가가 기습하는 것.

콰지지지지직!

캉! 캉! 캉!

시뻘건 뇌전이 흩뿌려지며 데스 나이트들을 단숨에 갈라버린 나는 곧장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좋았어.'

한 무리의 데스 나이트들을 돌파하자 적들이 보였다.

놈들은 내가 바로 근처까지 다가올 동안에도 다른 팀을 견제하거나, 언데드들을 상대하기 바쁜 상태였다.

"유명 네임드다! 조심!"

"맞상대하지 말고 모두 뒤로 빠져요!"

내가 무리에서 빠져나와 홀로 돌격해오자,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모두들 침착하게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피의 강화 스텍을 빠르게 쌓아야 해.'

콰지지지지지지직!

나는 플레이어들에게 뒤엉킨 채 방패를 휘두르고 있던 기사를 향해 창을 내리쳤다.

그러자 기사가 자세를 낮추며 방패를 세우고 내 공격에 대비했다.

캉!

방패를 내리치자, 엄청난 반발력이 밀려 들어왔다.

'근력이 엄청난데.'

돌진하고 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띠링!

[플레이어 '프레틱'의 그림자에 표식이 등록되었습니다.]

내 돌격이 허무하게 밀려나자 주변 플레이어들이 피식 웃었다.

"뭐야. 고작 저 정도밖에 안 됐어?"

"괜히 긴장했네."

그렇게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지금!'

[플레이어 '프레틱'에게 <그림자 이동> 능력을 사용합니다.]

시야가 뒤바뀌자마자 곧장 창을 휘둘렀다.

스킬을 쓰는 나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간 이동이었는데,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진 플레이어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걱!

순식간에 나를 밀쳤던 기사의 목을 벤 나는, 적들이 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곧장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서걱! 서걱!

쿨타임이 제법 긴 그림자 표식을 아끼지 않은 효과는 대단했다.

단숨에 세 명의 플레이어를 처치하고, 그 안의 원거리 딜러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팀 단위로 뭉쳐 있는 상황에서 탱커가 뚫린 여파는 무척 컸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5/30)]

단숨에 5명이 넘는 플레이어를 처치하며 모든 스텟이 5%나 오른 것이다.

그리고 초인급의 경기에서, 5%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수치였다.

내가 파고드는 걸 본 한 창술사가 나를 향해 창을 뻗었다.

'어딜!'

나도 녀석을 향해 창을 맞찔러 들어갔다.

비슷한 창의 길이.

비슷한 타이밍의 공격.

그럼에도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나는 녀석의 창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고, 녀석은······.

푹! 푸쉬이이익!

띠링!

내 창이 정확하게 녀석의 목구멍을 꿰뚫고 빠져나오자, 엄청난 양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5%라는 숫자는 얼마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단 한 수만으로 승부가 갈려지는 초인의 세계에서, 메우기 쉽지 않은 수치였다.

그리고 그 수치는, 계속해서 커져 갔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앙!

때마침 벽력이 터지며, 사방으로 시뻘건 뇌전이 퍼졌다.

그 바람에, 영향권에 있던 두 명의 플레이어는 상반신이 그대로 사라졌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30)]

그리고 그때부터 보스 룸의 상황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처음이랑 딴판이잖아!"

"저 녀석부터 먼저 조져!"

고만고만한 수준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한 명의 독보적인 강자가 나타나니까, 서로 암묵적으로 날 먼저 제거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

띠링!

[<전광석화 > 능력을 사용합니다.]

[10초 동안 민첩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나는 곧장 아껴둔 한 수를 꺼냈다.

순간적으로 빨라진 움직임.

그로 인해 내게 향하던 공격들을 피한 나는 빈틈을 노리며 창을 휘둘렀다.

'방어가 좋네. 돌파.'

'목에 허점!'

'발이 느려. 따라붙으면 심장을 노릴 수 있겠어.'

초감각과 마력장의 조합은 이런 난전에 특화된 능력.

내 눈이 향하는 곳 뿐만 아니라 영역 전체를 읽어내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플레이어들 사이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봤자 하위 리그 때처럼 양학을 하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서걱! 서걱!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30)]

[<전광 석화> 의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전광석화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5킬 정도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천자 20%와, 최강의 성계 10%, 천둥의 숨결 15%, 거기에 피의 강화 13%까지 적용되면서 모든 스텟이 100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학살을 하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같은 팀원들이 엄호를 해주었다.

팅! 팅! 팅! 팅! 팅! 팅! 팅!

[웅크린 산신의 분노!]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고창신의 화살과, 로만의 대지 마법.

물론, 크게 유의미한 공격은 아니었다.

[차가운 염화의 방패!]

[향긋한 바람의 한숨!]

화살들은 탱커들에 의해 차단당했고, 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이 커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창신의 화살과, 로만의 마법을 막기 위해.

적들은 어쩔 수 없이 빈틈을 허용해야 했으니까.

서걱!

'쉽지 않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쉽게 죽어주지 않았다.

빈틈이 생기면 다른 플레이어가 커버해주고, 내가 먹잇감을 노리는 타이밍에 맞춰 내게 검을 휘둘러 왔다.

'체력 소모가 너무 커.'

거기다 상위 리그부터는 워낙 수비가 좋다 보니, 피의 회복으로도 감당이 되지 않았다.

천둥의 숨결 때문에 체력 소모가 2배로 늘어난 상황.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창신이 팀원들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나를 서포트 해주는 역할로.

"이든님. 왼쪽 공간 좀 잘라주세요. 그러면 렌님이 진형을 가르기 수월할 겁니다."

"예."

"로만님. 리치가 렌님을 타깃으로 영창중인 거 같습니다. 커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비욘님, 중앙에서 렌님이 받는 압력 좀 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없소."

안 그래도 피의 강화 스텍이 제법 쌓여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고창신의 지원사격은 내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됐어. 이대로라면 조금만 더······.'

―후후, 모두들 어리석구나. 힘을 합쳐 이 몸을 상대해도 모자랄 판에. 크흐흐, 이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이란 말인가.

[어둠의 소나기!]

그때, 천장에서 무수한 마법 비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의 전투를 여유롭게 지켜보던 리치가 쓴 마법이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보호 마법!"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은색 빗줄기가 플레이어들에게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 75화. 대가의 제단(5) > 끝

< 76화. 대가의 제단(6) >

[포근한 대지의 포옹!]

[오색 빛 바람의 우산!]

[열화의 진혼곡!]

굉음이 귀를 때리고, 보스 룸의 바닥이 박살 나며 파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대단위 마법의 위력은 엄청났다.

주변을 순식간에 초토화로 만든 것이다.

[마력 상쇄율 : 50%]

'위험했어.'

내게도 수많은 마법들이 향했지만, 다행히 전부 막아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플레이어들도 방어 마법을 통해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역시 상위 플레이어들이다 이건가.'

난전 상황, 거기다 날 집중적으로 상대하는 와중에도 민첩하게 대응한 것이다.

오히려 광역 마법으로 인해 언데드들의 피해가 더 큰 것 같았다.

'오히려 좋아.'

길을 막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정리됨에 따라 공간이 확보된 상황.

나는 기민하게 움직이며 창을 휘둘렀다.

공간이 확보되어 있을 때, 최대한 많은 킬 수를 올려야 했다.

"앞쪽에서 무너지면 안 돼!"

"젠장! 커버할 공간이 너무 많아요!"

내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빈 공간으로 침투하려 하자, 적 탱커들이 분주하게 발을 놀리며 공간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피의 강화로 인해 내 민첩이 너무 많이 높아진 상황.

서걱!

순식간에 내부로 파고든 나는 원거리 딜러를 최우선으로 죽인 뒤, 나머지 녀석들을 처리하는 식으로 팀을 와해시켜 나갔다.

"드디어 보스 룸에······!"

"헉, 모두 정지!"

"다들 나서지 마세요. 일단 상황부터 정리하고 움직이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으로 한 팀씩, 보스 룸에 딸린 수많은 복도들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팀들은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소곤소곤 대화를 하며 상황의 추이를 살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을 모두 정리하고, 놈들까지 죽이면 특전을 켜는 건 문제가 안 되겠어.'

이미 피의 강화가 20 스텍 가까이 쌓인 상황.

팅! 팅! 팅! 팅! 팅! 팅!

[아스라이 들려오는 바위의 노래!]

거기다 같은 팀원들도 킬 욕심을 내려놓은 채 날 서포트해주고 있는 상황.

더 이상 내 독주를 막아낼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띠링!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15(+5)(+47)] [민첩 :117(+5)(+50)] [체력 : 115(+5)(+41)]

[정신 : 159(+5)(+58)] [지력 : 22(+8)] [마력 : 127(+5)(+46)]

[각성 능력 : <초감각 > <특급창술 > <고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최상급검술 > <최상급단검술 > <최상급투척술 > <중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고급궁술 > <최상급검방술 > <최상급채찍술 > <중급둔기술 >]

[보유 스킬(5/5) : <침묵의 망토> <뇌신 > <천둥의 숨결> <마력 상쇄> <그림자 표식>]

[업적 특전 : 역천자] [차원 특전 : 최강의 성계] [종족 특전 : 없음]

└와, 뭐야? 아까랑 완전 딴판이 됐는데?

└방금 전까지 렌 까던 놈들 다 어디갔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갑자기 댓글창 조용해진거 봐라 ㅋㅋㅋㅋㅋ

└야 시발. 아까 전 모습은 충분히 욕 먹을만 했자나. 지금은 뭐.. 네임드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네.

└ㅋㅋㅋㅋㅋ 하여튼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는 ㅂㅅ들. 성계 대항전 다시 보기로 보고나 와라. 쟤가 고작 하위 넘버링에서 무너질 애로 보임?

└음. 마력 상쇄하는 스킬도 있는 것 같고. 보지도 않고 뒤에서 검이 날아오는지는 어떻게 아는 거지? 저것도 스킬인가? 거기다 그 보기 어렵다는 뇌전 속성 마나에. 지금 강해진 거 보니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기 보단, 누굴 죽일수록 강해지는 스킬이 있다는 게 더 합리적 추론 같음. 결론적으론, 스킬빨 ㅇㅇ

└스킬로 저 정도 능력을 낼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거임 ㅇㅇ 슬롯이 고작 5개밖에 안 되는데, 저런 수준이 나오려면 도대체 얼마나 좋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는 건지;;

└믿거 취소한다. 쟤는 진짜 물건이네. 방금 전에 넋을 놓고 봤음. 상황 판단력도 좋고, 과감하기도 하고. 스킬빨이라고 하더라도, 적재적소에 필요 스킬을 쓰는것도 중요한데, 순간 이동되는 스킬이라든가, 중간에 이속 빨라지는 스킬들의 타이밍도 적절. 그냥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짜 제대로 싸울줄 아는 녀석인듯.

└ㅋㅋㅋㅋㅋ 댓글 분위기 순식간에 뒤바뀐거 개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는 순간부터, 보스 룸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스텟이 높아질수록 %로 올라가는 스텟도 더 상승하니, 이젠 다른 플레이어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암흑에 잠긴 송곳니!]

리치가 날린 검은색 칼날 마법이 내게 쇄도했다.

곳곳에 광역 마법을 뿌리던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내가 위험 대상이라고 판단한 거군.'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리라.

이 안에서 내가 가장 위험인물이라는 것을.

견제 분위기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날 처리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리치에게서 날아오는 마법들을 피하며 플레이어들에게 창을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뒤로 빠지겠습니다."

"휴우. 이번 경기는 방법이 없군요."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자, 보스 룸에 있던 다른 팀들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고 사망하는 페널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무척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제 슬슬 리치를 공략해도 되겠는데.'

덕분에 보스 룸에는 이내 리치와 언데드, 그리고 우리 팀밖에 남지 않았다.

[몬스터 킬 수 현황]

[1위. '가디악' 2,791킬]

[2위. '로네스' 2,366킬]

[3위. '류천' 1,999킬]

[플레이어 킬 수 현황]

[1위. '렌' 34킬]

[2위. '가디악' 8킬]

[3위. '류천' 7킬]

[4위. '비욘' 6킬]

이제.

보스 몬스터, 리치를 공략할 시간이었다.

―심연의 늪으로 떨어진 영혼들이여. 차가운 침묵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모든 저주와 악의여. 전부 내게로 오라!

[사자死者 소환!]

리치가 들고 있는 수정 구슬이 빛나더니, 이내 기분 나쁜 마력의 충격파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처음 유적에 들어와, 언데드들이 등장했을 때의 그 떨림이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내가 죽여댔던 플레이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목이 떨어져 나간 기사, 팔다리가 뜯겨진 마법사, 복부가 찢어져 장기를 질질 흘리고 있는 궁수가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은 무척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녀석들의 살가죽, 근육들이 녹아 흐르더니, 이내 해골이 되어 데스 나이트와 데스 메이지로 변했다.

'본 게임 시작이군.'

―어리석구나. 죽음의 문턱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다니. 네놈들에게 내가 친히,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

리치가 자신의 주위로 데스 나이트들을 불러 모으더니, 들고 있던 수정 구슬을 번쩍 들었다.

[망자亡者의 넋두리!]

띠링!

[망자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근력 스텟이 -10% 하락합니다.]

[<마력 상쇄>가 저주를 상쇄했습니다.]

[근력 스텟이 -5% 하락합니다.]

순간 기분 나쁜 마력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광역 저주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리치의 저주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한 서린 비명의 채찍!]

[구천을 떠도는 원한의 울림!]

[피할 수 없는 필멸의······.]

미친 듯이 꽂히는 저주 마법들.

순식간에 스텟이 줄줄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개 같다는 거지.'

내가 이번 미션이 진짜 더럽다고 생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 같이 합심해서 잡아도 쉽지 않을 판에, 경쟁 구도로 만들어 놓다니.'

리치는 약자에게 절대적인 강함을 선사하고, 소수의 강자에게 취약한 몬스터.

전투가 장시간 지속될수록,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런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강자들끼리 경쟁을 붙여놨으니, 전투가 계속될 수밖에 없던 상황.

체력은 체력대로 빠지고, 거기에 이제는 저주까지 뿌려대니, 데스 나이트들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없다는 가정 하에 지만.'

하지만 나는 체력도 회복했고, 오히려 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황.

"리치 공략을 시작하죠! 렌님이 선두, 비욘님이 함께 길을 뚫어주세요. 로만님은 리치의 마법을 커버, 이든님이 저와 로만님을 지켜주세요. 전 데스 메이지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예!"

"알겠소!"

때마침 고창신이 리치 레이드를 선언했다.

나를 중심으로 하는 공략이었다.

내가 어그로를 다 먹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른 팀원들은 체력이 조금 빠졌을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조금 어렵긴 하겠지만.

이 정도라면 리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갑니다, 비욘님."

"뒤를 지켜 드리지."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나는 곧장 데스 나이트들을 뚫고 리치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늪인 줄도 모르고 뛰어드는군.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대의 자만이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

[영겁의 장막!]

리치의 주변으로 검은색 장막이 생겨났다.

버티기에 들어간 것이다.

캉! 캉! 캉!

단숨에 데스 나이트들을 헤치고 리치의 앞에 도달한 나는 곧장 보호막을 향해 창을 내리쳤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손아귀가 얼얼해져 왔다.

마력 상쇄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단단해, 때려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으랴아아아앗!"

후웅! 후웅! 캉! 후웅!

그 사이, 내 뒤쪽에 딱 붙어서 함께 중심부로 들어온 비욘이 주변으로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방패를 세운 채 접근해 오던 데스 나이트들이 튕겨 나갔다.

"로만님! 11시!"

"넵!"

"이든님! 왼쪽으로 조금만 이동하겠습니다. 각도가 안 나오는군요."

"예!"

후방에서는 로만과 고창신이 분주하게 데스 메이지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로 향하는 데스 나이트들을, 이든이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막아냈다.

'이든이랑 비욘이 잘 버텨줘야 할 텐데.'

리치 공략의 핵심은 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가 성공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은 필수.

고창신과 로만이 데스 메이지들로부터 마법 공격에서 나를 지켜줘야 하고, 이든은 그런 그들을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저 방어막을 두드리는 동안, 내 등 뒤를 지켜줄 존재는 비욘 밖에 없었다.

'좀 깨져라.'

캉! 캉! 캉! 캉! 캉!

나는 이를 앙다문 채 방어막을 내리치는 데 집중했다.

쐐애애애액! 캉!

근력과 민첩이 110을 넘어서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바람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방어막은 깨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색깔이 투명해지면, 이내 곧 다시 원래 색깔로 돌아오길 반복한 것이다.

리치가 내부에서 계속 마나를 채우며 방어막을 유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캉! 캉! 캉!

"아직 멀었소? 데스 나이트들이 방패로 밀고 들어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소!"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휘두르는 비욘.

한번 휘두를 때마다 숨을 헉헉 거리는 게 벌써부터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헉, 이든님! 조심!"

"로만님! 제가 데스 메이지들을 처리할 테니, 이든님부터!"

"괜찮습······ 크윽!"

저 멀리서 이든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데, 제법 안 좋은 상황인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띠링!

[플레이어 '이든' 이 사망했습니다.]

"고창신님, 이대론 저희도 위험합니다. 보호 마법을!"

"남은 데스 메이지부터!"

캉! 캉! 캉!

다시 서서히 연해지기 시작하는 보호막.

이제는 거의 반투명할 정도여서 내부에 있는 리치의 당황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띠링! 띠링!

[플레이어 '로만' 이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고창신' 이 사망했습니다.]

서걱!

등 뒤에서 무언가 절단되는 피륙음이 들렸다.

도끼를 잡고 있던 비욘의 양팔이 잘려 나간 것이다.

내게로 향하는 데스 나이트들의 검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방어막을 부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을 위기였다.

'젠장. 조금만 더 두드리면 되는데!'

그래서 곧장 방향을 틀어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하려 할 때였다.

"계속 휘둘······!"

푹! 푹! 푹!

내게 향하던 데스 나이트의 검들을 비욘이 몸으로 받아냈다.

그가 몸을 날려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 사이.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창을 내리쳤다.

캉! 캉! 캉! 쨍그랑!

'됐어!'

보호 마법이 사라지며 다급하게 양손을 휘젓고 있는 리치가 보였다.

―그, 그대도 죽음이라는 진리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내, 내가 도와주겠······!

이 개새끼.

드디어 면상에 창을 꽂아줄 시간이 왔다.

나는 녀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창을 내리쳤다.

서걱!

그러자 단숨에 반으로 갈라져 버리는 리치.

―크윽······.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러자 녀석의 몸이 축 늘어져, 바닥으로 허물어 내리더니,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스르르르르르륵-

주변에서 검을 날카롭게 세운 채 쇄도하던 데스 나이트들도 모래 알갱이처럼 변하더니, 사르르 녹아내렸다.

보스 룸에 서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다.

띠링!

[리치를 처치했습니다!]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팀 '투지', '소망'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팀 '투지', '소망' 파티의 사망자는 모두 부활합니다.]

'끝났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으스러지도록 창을 쥐고 있었더니,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처참한 광경의 팀원들이 보였다.

온몸이 난자되어 쓰러진 비욘.

목이 날아간 채 고꾸라져 있는 이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잘게 다져진 로만과 고창신의 모습까지.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몬스터 킬 수 현황 ― 12위. '렌' 1,371킬]

[몬스터 킬 수 12위 보너스로 10,000 P 를 지급합니다.]

[플레이어 킬 수 현황 ― 1위. '렌' 34킬]

[플레이어 킬 수 1위 보너스로 25,000 P 를 지급합니다.]

"쿨럭······. 쿨럭······ 우, 우리가······. 이긴 것이오?"

힘겹게 입을 연 비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욘이 바닥에 머리를 기댄 채 축 늘어졌다.

"고, 고생하셨소······."

나는 팀원들이 쓰러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준.

그들에 대한 예우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띠링!

[플레이어 '고창신', '로만', '이든', '비욘' 이 부활합니다.]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 의 1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52,5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22,500 P 차감)]

[기본급 +20,000 P / 승리 수당 +20,000 P / 추가 보너스 +35,000 P / 수수료 -22,5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25,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76화. 대가의 제단(6) > 끝

< 77화. 닮은 두 사람(1) >

경기장을 빠져나오니, 평소처럼 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예."

이전처럼 성대한 규모는 아니었다.

요 근래 팀 투지에서 경기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어난 덕분에 거의 매주 파티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금주령이 풀려 자유롭게 술을 먹을 수 있게 된 덕분에 더 이상 파티가 절실하지도 않은 상황.

이제는 파티라기보단 매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목을 다지는 자리 정도의 인식으로 자리잡힌 상태였다.

'나쁘지 않네.'

모두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술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

분위기도 잘 형성됐고, 최근 경기에 나간 플레이어들의 성적도 나쁘지 않다.

이제는 진짜로 내가 할 일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안우진님."

"아, 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세리안이 내게 술을 권했다.

"상위 리그 데뷔전을 치른 소감은 어떠신가요?"

"음. 상위 플레이어들부턴 기본기라든가, 수비적인 측면에선 어느 정도 완성돼 있다 보니까 쉽지 않더군요."

"그게 하위 리그와 상위 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이죠. 그래도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웃기고 있네.

나올 때만 해도 분명 사색이 되어 있었으면서.

내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응시하자, 아세리안이 빙긋 웃었다.

"안우진님만큼 기본기와 수비가 탄탄한 플레이어를 본 적이 없거든요. 다들 일정 실력이 되면 더 난이도가 어려운 스킬들을 연마하는데, 안우진님은 매일같이 기본기 훈련을 하고 계시잖아요."

음.

알고 있었구나.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초 공사가 튼튼해야,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하루 1시간에서 2시간씩 기초적인 찌르기와 베기, 막기 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앞으로 추가해야 할 훈련 같은 게 있을까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1회차 때 온갖 시행착오를 거친 후 만든 시스템이었으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내가 기초 훈련을 꾸준히 하고 있기에 2기수 사인방도 나를 따라 하고 있었다.

그건 그 밑의 기수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지금처럼만 유지된다면, 충분할 것이다.

띠링!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관객들이 당신을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로 선정하셨습니다!]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 보너스로 35,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5,000 P 차감)]

'퍼오블에?'

순간 상태창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1, 2회차를 통틀어 상위 리그에서는 처음으로 선정된 것이었다.

보너스는 무려 5만 포인트.

확실히 하위 리그와는 차원이 다른 보너스였다.

"어머! 안우진님! 정말 축하드려요!"

내가 퍼오블에 선정되었음을 본, 아세리안이 축하를 건네왔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상위 리그 첫 번째.

쉽진 않았지만.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온 것 같았다.

―상위 리그 데뷔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다!

―첫 경기부터 퍼포먼스 오브 더 하이블러드 선정!

―얘가 진짜 네임드라고? 얘가 진짜 네임드라고!

└진짜 한편의 오케스트라를 본 것 같았음. 처음엔 조용하게 흐르다가 서서히 고조되더니 나중에 뽝!!!!!!!

└얘가 왜 유명한지 알 것 같더라. 스타 플레이어가 될 기질이 충만해 보임. 원래 필요할 때 해결해주는 게 네임드임.

└렌렌 거리길래 뭐하는 얜가 했는데, 어느 새부턴가 나도 렌렌 거리고 있음 ㅋㅋㅋㅋㅋ

└다른 팀에서 온 플레이어들과의 케미를 위해 초반에는 필요한 역할만 딱딱 해주고, 어느 정도 각이 서자마자 바로 운전대 잡고 팀원들 보스 룸으로 쾌속 안내. 보스 룸에서는 진짜 자기 실력 터트리더니, 깔끔하게 리치까지 슥삭. 얘는 롱런 가능성 100%

└비아냥거리던 신들 강제로 아닥시켰음 ㅋㅋㅋㅋ 진짜 개쩔었음.

소속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참가하는 경기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그리고 활약하는 녀석들도 많아졌다.

일단 가장 먼저 주창범.

콜로세움에 들어온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벌써 7경기에 출전해서 5개의 승리를 챙겨 왔다.

거기다 퍼오블과 파오블까지 각각 1번씩 선정되었을 정도.

띠링!

[체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주창범이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구나.'

내가 가장 놀랐던 건, 당연히 모용악이나 고건하에게 밀릴 줄 알았던 주창범이, 오히려 녀석들을 밀어붙인다는 거였다.

그 둘과의 대련에서 승률 81%를 기록 중인 상황.

한마디로 팀 투지의 근접 물리 계열 중에선 두 번째로 강한 게 주창범이었다.

'녀석도 충분히 상위 리그에 올라올 수도 있겠어.'

내게 제대로 배운 덕분에 기초도 탄탄하고, 수비도 좋다.

거기에 저주셋과 훈련 커리큘럼 덕분에 여전히 스텟이 빠르게 오르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부족한 게 많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해나간다면 상위 리그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띠링!

[민첩 스텟이 1 상승합니다.]

'다른 녀석들도 잘 해주고 있고.'

제이스와 루치아노, 지그, 고건하, 모용악의 활약도 나쁘지 않았다.

주창범이 메인 이벤트에서 놀고 있다면, 사인방의 남은 세 사람은 코메인 이벤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준네임드로 들어온 고건하와 모용악도 마찬가지.

팜에 잘 녹아든 뒤로는 경기에 나갈 때마다 승리를 챙겨 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고작 두 경기 만에 메인 이벤트로 올라오다니.'

초특급 네임드, 카이로시아.

그녀는 두 경기에 나가 퍼오블과 파오블을 모두 따내며 승리했다.

한마디로 두 경기 모두 찢었다는 것.

'이러다가 정말 몇 경기 안에 상위 리그로 올라오겠군.'

아직 근접 전투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요즘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의 활약이 대단하군요. 블러드나이트 221부터 227까지 매 경기 승리를 거두고 있네요.

―저 팀이 정말 1년밖에 안 된 신생팀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나오는 플레이어들마다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뽑기 운이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네요. 소속 플레이어들이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어설픈 점이 많이 보였는데, 그 이후로 계속해서 눈부신 성장을 보이고 있거든요. 이건 팀의 훈련 커리큘럼이 무척 뛰어나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죠. 이상하게도 팀 투지에서는 이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팜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구요.

└투지가 진짜 애들 잘 키우긴 한가 봄. 어제 하위 리그 데뷔전 치른 투지 소속 플레이어 세 명도 보니까 엄청 잘 싸우던데.

└그래서 요즘 천사들이 팀 투지에 계속 문의 넣고 있다드라. 거기서 몇 년 구르고 나오면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거기가 렌 있는 곳 아님?

└ㅇㅇㅇㅇ 근데 걔는 원래부터 잘 싸웠···나? 초반에는 잘 모르겠네 ㅎ 하여튼 후반에는 원래 잘 싸웠음.

└하.. 씨발.. 우리팀 애들은 다 병신이던데.. 이게 다 내 탓인 걸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진짴ㅋㅋㅋ 한 천명 뽑아서 그중에 싹수 보이는 애들만 내보내는 거짘ㅋㅋㅋㅋ 설마 뽑는 애들마다 키워서 저렇게 내보내고 있겠냐? ㅉㅉ

3기수와 4기수의 활약도 도드라졌다.

물론 모두 다 생존해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3기수에서 3명, 그리고 4기수에서도 7명의 플레이어가 죽었다.

죽은 3기수 플레이어의 조에 속해 있던 4기수들은 1명씩 나눠서 다른 조로 보내졌다.

그리고.

200명이 넘는 5기수 플레이어들이 새로 팜에 들어왔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27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180 P가 정산되었습니다.]

[플레잉 코치 '렌'에게 225 P가 정산······.]

'나쁘지 않네.'

첫 달에는 1천 포인트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급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번 달에만 벌써 2,684 포인트.

첫째 달보다 무려 3배나 상승한 수치였다.

'이대로라면 1, 2년 정도 뒤엔 한 달에 몇만 포인트씩 들어오겠어.'

띠링!

[근력 스텟이 1 상승합니다.]

"후."

베드에 누워 벤치프레스를 하고 있던 나는 바벨을 내려놓았다.

팜의 상황은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안정화됐고.

계속해서 들어올 포인트는 내게 큰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67] [민첩 :70] [체력 : 70]

[정신 : 99] [지력 : 16] [마력 : 83]

마의 구간에 돌입한 내 스텟을 올리는 일 뿐이었다.

스텟이 70을 넘는 순간, 그때부터는 훈련으로 올리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한 달동안 죽어라 한다고 해도 1포인트 올릴 수 있을까 말까.

그렇기에 마의 구간 이후부터는 스텟 1 포인트만으로도 큰 차이가 났다.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도 아직까진 저주셋을 착용하고 훈련하면 미세하게나마 오르는 수준.

지금 이대로 포인트를 사용해 스텟을 92까지 올리냐.

아니면 80까지 어떻게든 끌어올린 다음에 100까지 올리느냐.

답은 정해져 있었다.

* * *

5평짜리 조그마한 방 안.

수명이 다된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벽 깊숙이 스며든.

찌든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우진아. 배 안 고파?"

나를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

닮은 듯, 미세하게 다른 얼굴.

깡마른 몸에 다 해진 옷.

나보다 더 큰 키.

'형······.'

형이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미김이 딱 하나 남았네. 형은 그냥 맨밥만 먹어도 되니까 우진이 너 먹어."

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언제나 내게 양보만 하던 형.

자신의 졸업식 날에도 다른 학교 앞에 가서 꽃을 팔아.

내게 용돈을 쥐여주던.

'바보 같은 사람.'

"응? 우진아 왜 울어? 밥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 형이 나가서 라면 사갖고 올까?"

흐릿해져 가는 눈을 서둘러 비볐다.

이까짓 눈물 따위 때문에.

형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라면 먹고 싶으면 말만 해. 형이 당장 나가서 사 올게."

이 바보야.

당신 지금 라면 사러 가는 거 아니잖아.

바로 옆에 사는 같은 반 누나한테 거지소리 들어가며 구걸하러 가는 거잖아.

동생을 위해서.

'대체 왜······.'

왜.

왜.

왜.

이런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데려가야 했을까.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을······.

'아, 안돼!'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는 형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제발.

제발 깨지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제발······.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목 놓아 울면서 부르짖었지만.

공허한 울림일 뿐.

"하."

잠에서 깬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 뺨을 타고.

손바닥에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꿈에서나마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허락받지 못 할 일이었나······.

한숨을 내쉰 나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띠링!

[<소모품:바카디 151>을 1,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환한 달빛이 팜을 은은하게 비치고 있었다.

저번에 혼자서 술을 마셨던 명상실의 지붕으로 올라간 나는, 내리쬐는 달빛을 맞으며 방금 구입한 양주를 꺼내 들었다.

독한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가슴 속에 사무친 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끄윽.'

술을 들이켜자,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초월 리그.'

죽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우리 가족들을 되살려 주기만 한다면 이까짓 몸뚱이.

얼마든지 불살라 버릴 수도 있었다.

만약 왕이.

거래 조건으로 내 심장을 원했다면.

난 웃으면서 가슴을 갈라, 제단 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보고 싶다······.'

그렇게 하염없이.

달빛을 바라보며 술을 들이켜고 있을 때였다.

"어? 안우진님?"

고개를 돌려 숙소 쪽을 보니, 하얀 원피스 차림의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거기서 뭐 하세요?"

"잠이 안 와서요."

내 말에 검지를 입가에 댄 아세리안이 뿅! 하고 사라지더니, 내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잠이 안 오신다고, 어머. 지금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걱정스럽게 날 바라보는 아세리안.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꿈을 좀 꿨더니."

"아······. 악몽을 꾸셨나 봐요."

악몽이라······.

나는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술 때문에 내 온몸이 뜨거운 건지.

아니면, 그리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뜨거운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뇨. 좋은 꿈을 꿨습니다."

"그럼 왜······?"

"깨기 싫을 정도로."

나는 꾸미지 않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꿈에서 나마.

우리 형을 만난 건.

"좋은 꿈이었거든요."

너무나 가슴 벅차고.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 77화. 닮은 두 사람(1) > 끝

< 78화. 닮은 두 사람(2) >

아세리안의 하루 일정은 모두가 잠잘 때 시작해서, 모두가 잠든 이후에 끝이 난다.

플레이어들이 그날 소화할 훈련의 커리큘럼과 식사부터 시작해서 아이템과 스텟 분석표, 그리고 오퍼와 이론 수업까지.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런 아세리안이 최근에는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추가되었다.

바로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인 라파엘과 만나는 것.

"앗, 라파엘님! 잘 지내셨나요? 하급신으로 승격한 이후에는 처음 뵙는 것 같아요."

"호오. 오랜만이군요, 아세리안님. 요즘 바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은요. 라파엘님이 보고 싶어서 왔죠!"

라파엘과 만나 그녀가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라파엘의 말에 귀 기울여 주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상위 리그의 게임 메이커.

안 그래도 경기 청탁 같은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신들의 방문을 피하는 그녀를 아세리안이 만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휴우, 다행이야. 그래도 예전에 밑에서 일했다고 문전 박대는 안 하시네.'

이전에 그녀가 라파엘의 부하 직원으로 있었으니까.

라파엘은 아세리안이 천사였던 시절, 능력을 높이 사는 치천사 중 한 명이었다.

그때 라파엘이 워낙 자신을 이뻐했기에,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이리라.

거기다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공개적인 자리로만 가지기도 했고.

"······그래서 요즘 골치가 많이 아프군요."

"어휴, 고생이 많으시겠죠.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저는 라파엘님이 중간계의 조화와 평화를 위해서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아세라인님처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앗, 라파엘님. 예전처럼 그냥 아리엘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오."

"여전히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아세리안님."

아세리안의 애교에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눈빛에서도 이젠 경계심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까지! 여기서 더 들이대면 피차 불편해질 수도 있어.'

그렇게 라파엘에게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 아세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 참. 아세리안님 팀에 렌이라는 플레이어 있죠?"

"네? 네!"

라파엘의 입에서 렌이라는 이름이 먼저 흘러나온 것이다.

아세리안의 입장에서, 라파엘과 만날 때 렌이라는 닉네임은 금기어나 마찬가지.

잘못하면 청탁을 하려는 걸로 오해해서, 징벌적 제재에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라파엘의 호감을 사는 선에서 끝낼 계획이었던 아세리안은 그녀가 먼저 렌을 언급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최근에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봤어요. 정말 대단했더군요. 그리고 한 편으로는 좀 부럽네요."

"뭐가요?"

"상위 리그에서는 그런 대규모 이벤트를 펼치기가 쉽지 않잖아요. 아무래도 지구 출신 플레이어가 없다 보니."

"맞아요!"

아세리안은 라파엘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라파엘은 노회한 치천사.

그녀가 이렇게 안우진의 닉네임을 꺼냈다는 것이, 왠지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말인데. 최근에 렌이 상위 리그로 올라왔죠? 혹시 렌에게 상위 리그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린다면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 좀 물어봐 줄래요?"

"성계 대항전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지요?"

듣는 순간 가슴 한켠이 싸했다.

참가할 의향이 있냐고?

설마······.

'혼자서라도 참가해 달라는 뜻인 거야?'

그걸 받아 들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무래도 라파엘이 너무 큰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아세리안은 호호, 웃으면서 물어보겠다고 즉답했다.

라파엘의 앞에서 싫은 티를 내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일단 안우진님께 먼저 여쭤보고, 아니라고 하면 내가 기회를 봐서 잘 말해봐야겠어.'

그렇게 라파엘과의 담소를 끝낸 아세리안은 곧장 팜으로 돌아와 안우진부터 찾았다.

그리고 꺼낸 성계 대항전.

"거절하겠습니다."

역시나 안우진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생각할 가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차피 지구는 최강의 성계라는 +10% 특전을 획득한 상황.

이 이상의 특전을 줄 건지도 명확하지 않은데, 무리해서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님. 그······ 아무래도 혼자서 성계 대항전 참가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제 막 올라온 신입생에게 혼자서 다른 성계 전체랑 싸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니······."

"아세리안님. 고위 리그는 여전히 플레이어의 숫자가 부족한 거 아시죠?"

"네에······."

"신들에게 포인트를 벌어, 상위 플레이어들을 성장시키려면 성계 대항전은 필수에요. 우리는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들 아닙니까. 솔직히 섭섭하군요."

"그래도 렌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라파엘이 손가락을 튕겼다.

"흐음.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충분히 가능성 있을 만큼 큰 메리트를 줄게요."

그럼에도 라파엘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죽했으면 메리트라는 얘기까지 들먹이며 얘기할 정도였다.

물론 그런 얄팍한 수에 당할 아세리안이 아니었다.

"메리트요? 형평성 문제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아마 이 부분은 다른 신들도 납득할 거예요. 혼자서 다른 성계 전체랑 싸우는 건데, 당연히 괜찮죠."

"어떤 메리트를······?"

"호호, 아쉽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마디로 성계 대항전이 직접 열린 이후에나 알 수 있다는 뜻.

결국 아세리안은 원치 않음에도 안우진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성계 대항전 내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를 달라고."

그런데 안우진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당연히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뭔가 방법이 있으신 게 분명해.'

안 그래도 라파엘과 계속해서 성계 대항전 문제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 불안했던 아세리안은 그 길로 곧장 그녀를 찾아가 안우진이 한 얘기를 전해 주었다.

아세리안은 라파엘이 기뻐하며 조건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를 쥐여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성계 대항전을 꺼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까.

"흐음. 감히 일개 플레이어가······. 협상을 하려고 한다라······. 그럼 가서 이렇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스킬 중 세 가지를 더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다고. 만약 이 조건에도 응할 생각이 없다면, 다시 저를 찾아와 얘기해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라파엘의 반응은 아세리안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설마하니,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도 주지 않을 생각으로 했던 제안일 줄이야!'

거기다 문제는 또 있었다.

라파엘의 기분이 제대로 상해버렸다는 것.

"아, 아니, 라파엘님! 사, 사실 그저 제 생각이었을 뿐이에요. 적어도 플래티넘 급 스킬 3개는 있어야 렌이 만족해하지 않을까 하는······."

아세리안이 다급하게 안우진을 감싸보려고 했지만, 돌아온 건 라파엘의 냉소 뿐이었다.

"아세리안님. 그 아이에게 똑똑히 전해 주세요. 치천사라는 존재가 어떤 위치인지 보여 주겠다고."

'안돼!'

보아하니, 안우진을 완전히 찍어 누르려는 눈치였다.

오랜 시간 라파엘과 함께 일해왔기 때문에, 그녀가 한번 칼을 뽑으면 뿌리를 뽑아 버리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아세리안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게 짓밟을 게 분명했다.

아세리안이 다급하게 라파엘에게 잘못했다고 매달렸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이 상태로 끝나선 안 돼. 그럼 안우진님은 영원히 오퍼를 못 받으실지도 몰라.'

그날부터 아세리안의 굴욕적인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라파엘을 찾아갔더니,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정말 악질이야.'

라파엘의 의도는 명확했다.

기다리라고 했으니, 시간이 늦었다고 돌아갈 수도 없다.

라파엘이 원하는 시간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며 반성하라는 것이리라.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인 아세리안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라파엘을 찾아가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굴욕적인 처사를 감내한 것이다.

결국 아세리안은 매일 같이 새벽이나 되어서야 팜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으. 오늘도 진짜 힘들었어."

그래도 이젠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라파엘의 마음이 풀린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오늘도 라파엘에게 시달린 아세리안이 조막만 한 주먹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집무실로 향할 때였다.

달빛에 비친 누군가의 그림자가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어? 안우진님?"

아세리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안우진이 혼자 달빛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순간 아세리안의 마음에 불안감이 치솟았다.

설마 PTSD?

지금까지 팀 투지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플레이어는 없었지만, 이곳에선 워낙 흔히 걸리는 병이다.

상위 리그 데뷔전을 가진 후 안우진에게 PTSD가 오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

"거기서 뭐 하세요?"

"잠이 안 와서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하게 풍겨오는 슬픈 기운.

아세리안은 서둘러 안우진의 곁으로 순간이동 했다.

"잠이 안 오신다고······ 어머."

그러자 어둠에 잠겨 있던 술병이 눈에 보였다.

안우진에게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지금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거예요?"

"네. 꿈을 좀 꿨더니."

"아······. 악몽을 꾸셨나 봐요."

"아뇨. 좋은 꿈을 꿨습니다."

"그럼 왜······?"

그러자 안우진이 활짝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

"깨기 싫을 정도로. 좋은 꿈이라서요."

그리고 무척.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설명할 수 없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동시에 느껴진다고나 할까.

'밖에 있을 때의 꿈을 꾸셨나 보구나.'

다행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씩 저마다 아픔을 간직한 채 들어온다.

안우진도 아마.

밖에서 뭔가 슬픈 일이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아세리안은 일부러 활짝 웃었다.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는 의미였다.

"아, 참. 다음 경기가 잡혔어요. 하이블러드나이트 118."

"······벌써 경기가 잡혔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안우진.

아세리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형은 팀 PvP 스토리 미션이에요."

"의외군요. 성계 대항전 직전쯤에나 가야 다음 오퍼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헤헤, 게임 메이커가 이번 경기를 인상 깊게 봤나 봐요. 안우진님은 어디서든 빛이 나시니까."

아세리안은 본인이 지금까지 고생했던 것들은 숨긴 채 안우진을 띄워 주었다.

자신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플레이어들을 서포팅 해주는 것.

지금까지 그렇게 팜을 운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스토리 미션이라. 쉽지 않겠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경기 준비도 제가 잘 도와드릴 테니까, 안우진님은 지금까지처럼 그저, 경기장 안에서 멋진 활약을 펼치고 돌아오시기만 하면 돼요."

아세리안의 말에 안우진이 피식 웃었다.

오퍼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길 잘한 것 같았다.

안우진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슬픈 기운들이 한결 가라앉은 것이다.

"언제나 아세리안님의 도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오히려 안우진님이 항상 절 도와주고 계신걸요. 요즘 하위 리그의 진행자들이 팀 투지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화수분이래요. 좋은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고. 그게 다 안우진님 덕분이에요."

아세리안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척 과장된 몸짓.

안우진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더 풀어주려는 의도였다.

다행히 아세리안의 의도가 잘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슬슬 가서 자야겠군요. 경기도 잡혔겠다, 내일부터 다시 지옥 훈련을 시작해야 할 테니까."

"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푹 주무시고 조금 이따 뵈어요!"

명상실의 지붕에서 뛰어내린 안우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곤 숙소로 들어갔다.

'휴우.'

그제야 아세리안은 참았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안우진은 사실상 팀 투지의 기둥과 같은 존재.

지금은 많은 숫자의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이 콜로세움에서 활약하고 있다곤 하지만, 안우진 한 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기장에서 활약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팜의 운영, 육성, 다른 플레이어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나아갈 방향의 개척까지.

안우진 하나로 인해서 팀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래서 아세리안은 안우진이 받는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 * *

―상위 리그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렌. 하이블러드나이트 118 출격!

―혼자서 전장을 지배한 렌. 과연 스토리 미션에서도 가능할까?

―상위 리그 게임 메이커 "렌이 상위 리그의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다.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던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의 귀감이 되어주어 감사하다."

―하위 리그에서도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의 약진. 이 모든 게 렌 효과?

└렌 112에서 출전하지 않았음? 118이면 고작 3개월 쉬고 나오는 거네.

└자주 보이면 좋지 뭘 ㅋㅋㅋ 온몸에서 찌릿찌릿 새어 나오는 뇌전은 개 멋있더라.

└윗 댓글 동감. 시각적 효과가 풍부해서 좋더라. 죽일 때마다 붉은 안개가 흡수되는 게 스킬인 거 같은데, 무슨 효과인지 모르겠네.

└상위 리그에서도 몇 경기 안 돼서 곧 컨텐더 획득할 듯 ㅇㅇ 개인적으론 쿠 훌린이랑 둘이서 일대일 뜨는 거 보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장난하냐 상위 리그 최강자인 쿠 훌린을 어디다 비벼 ㅋㅋㅋㅋ 렌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건 맞는데, 쿠 훌린이랑 비교하는 건 오바임ㅋㅋㅋㅋ

└ㅇㅇ 쿠 훌린한텐 게임도 안될 듯. 그래도 렌은 아직 신입생이니까 좀 기다려 보자. 쿠 훌린 고위 리그로 올라가고, 그 자리를 렌이 차지할 가능성은 있으니까.

아세리안에게 오퍼 얘기를 전달받은 이후, 벌써 2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이블러드나이트 118이 열리는 날 아침.

공터에는 카이로시아도 함께 나와 있었다.

그녀도 오늘 경기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였다.

나는 상위 리그, 그리고 카이로시아는 하위 리그 블러드 나이트 236에 참가한다.

그것도 메인 이벤트에.

공터에서 게이트가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데, 곁에 서 있던 카이로시아가 입을 열었다.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로 넘어가는데 1년 정도 걸리셨다죠?"

"예."

"저는 고작 세 달 만에 메인 이벤트네요. 상위 리그로 올라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카이로시아가 허리에 양손을 올렸다.

요 몇 경기 동안 경기를 그야말로 찢다시피 하다 보니, 자신감이 한껏 상승해 있는 모습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뭐.

사실, 그녀 정도의 괴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위 리그 시절 많은 네임드들을 만났지만, 아르웬만한 강자를 본 적이 없었다.

카이로시아는 그런 아르웬과 비견될 정도의 네임드.

그런 그녀가 나보다 더 짧은 시간 만에 상위 리그로 올라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제가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그때부턴 제게 예의를 갖춰 대해주시겠어요?"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여전히 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카이로시아.

그나마 나는 그녀를 전담으로 맡아 훈련했기에, 내게는 까칠하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팜에서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모습이 그녀에게 아니꼬워 보였던 모양이다.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카이로시아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발.

빨리 올라와서 포인트 쓸어다가 내 주머니에 넣어줬으면.

"흥. 말을 해도."

내가 비아냥대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나는 그녀를 무시로 일관할 뿐이었다.

애초에 카이로시아와 나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카이로시아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로 팜에 들어왔다면.

'난 대기만성형에 가깝지.'

기반은 이미 완성되었다.

아마 그녀가 상위 리그에 올라올 즈음에는.

내 성장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를 것이다.

띠링!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8 첫 번째 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2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알림창과 함께 공터에 2개의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그러자 나와 카이로시아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노심초사하며 보고 있던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그녀는 카이로시아를 바라보더니,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카이로시아님. 이번 경기에서도 좋은 결과 있길 바랄게요."

"네, 여신님. 최선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카이로시아가 깍듯하게 대답하더니, 씩씩하게 게이트로 들어갔다.

아세리안에겐 개기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의 개념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안우진님. 요 며칠, 훈련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 경기에서도 멋진 활약 기대하고 있을게요."

내게 활짝 미소 짓는 아세리안.

나는 평소처럼 가볍게 목례를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무척 화려하게 치장된 넓은 방이 보였다.

우당탕탕!

"누구냐!"

"전하, 어서 옥체를!"

방 안에 있는 인원은 총 6명.

방 한가운데, 금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아 있는 20대의 청년이 앉아 있고, 그 앞으로 중갑을 착용한 5명의 기사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왕, 혹은 그에 준하는 누군가가 거처하는 곳 같았다.

의자들이 거칠게 뒤로 내동댕이쳐져 있는 걸 보아하니, 우리의 등장으로 갑작스럽게 일어난 모양새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나처럼 주변을 살피고 있는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띠링!

[경기 : 상위리그-하이블러드나이트112의 두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스토리 미션(단체 PvP)]

[게임명 : 킹 메이커]

[맵 : 안티푸스(중)]

[관객 수 : 623,666 명]

[미션 : 라 제국의 3황자, '막시밀리언 프란츠 알브레히트 슈테판 폰 라' 를 황제로 만드세요.]

[장기 스토리 미션입니다.]

[현재 라 제국은 세 명의 황자가 황위 경쟁 중입니다.]

[3황자가 사망할 경우 미션에 실패합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5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3황자를 빠르게 황제로 등극시킬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경기 진행 시간 : 00:00:34]

이번 경기는 킹 메이커.

3황자를 황제로 만들라는 미션이었다.

'쉽지 않겠군.'

이 미션이 상위 리그에 배정되었다는 것은.

지금 3황자의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안녕하십니까, 렌님. 에밋입니다. 기사죠."

"고치우입니다."

"키아라 라고 해요. 정령사에요."

"테루오미라고 하오. 검객이오."

같은 팀원들은 기사 한 명, 궁수 한 명, 정령사 한 명, 검객 한 명이었다.

조합으로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랄까.

"렌. 창술사 입니다."

거기다 모두들 스텟도 준수했다.

'팀 운은 완전 좋군.'

쉽지 않은 미션이 되겠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는가! 이곳에 계신 분이 누군데 감히······!"

우리가 한가로이 인사를 나누고 있자, 황자를 지키던 기사 한 명이 살기를 뿜어내며 윽박질렀다.

아무래도 승급전 경기 때와 다르게,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모양인데.

'진행하기 전에 먼저 확실하게 끊어놓고 가야겠군.'

싸아아아아아아아아-

마음을 먹자, 살기가 내 몸에서 새어 나왔다.

"앞으로는."

방금 우리에게 윽박질렀던 기사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을 봐 가면서 살기를 드러냅시다."

아주 진득진득한 살기가.

"죽고 싶지 않다면."

"······!"

*2연참입니다. 뒤에 79화 있습니다.

< 78화. 닮은 두 사람(2) > 끝

< 79화. 닮은 두 사람(3) >

내 살기에 노출된 사람들이 벌벌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예 전의를 상실한 모습.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엘프, 키아라가 입을 열었다.

"우린 신께서 보낸 전사들이에요. 3황자님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왔죠."

"저, 정말 신께서 보낸 전사들이란 말이오? 날 황제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좋겠네요."

"오, 빛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시, 실례했습니다. 이쪽으로······."

3황자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드리더니, 우리를 의자로 안내했다.

곁을 지키던 기사들은 서둘러 검을 집어넣곤 우리에게 예를 표했다.

신의 전사라는 말 한마디에 저렇게 경계를 풀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란 뜻이리라.

"먼저 현재 상황부터 알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예!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키아라의 물음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상황은 진짜로 최악에 가까웠다.

황제가 죽고 1황자와 2황자, 3황자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내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최근에 2황자가 죽었고, 1황자가 황제에 등극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1황자의 병력은 20만. 거기다.

"······12명의 소드 마스터님들이 모두 1황자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저희는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술 병기라고 불리는 소드 마스터들까지 모두 1황자의 편에 섰다는 것은, 이미 끝난 싸움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지금 안티푸스의 바로 앞에는 한 명의 소드 마스터가 1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을 준비 중이었고.

한마디로 이들은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주면 좋겠소."

테루오미의 물음에 황자가 거대한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희가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형님, 아니 1황자는 여기. 수도인 안타레스에 있습니다. 신의 전사님들께서 1황자를 죽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황자를 죽여달라······.

어려운 미션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상위 리그 미션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3황자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황.

'영향력도 별로 남지 않았고.'

이럴 때 1황자가 죽는다고 해서, 3황자가 황제에 오를 수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미션은 황제로 만들라고 했단 말이지.'

아마,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역할 분담을 하죠. 제가 1황자를 죽이고 오겠습니다."

"렌님 혼자서 말이오?"

"예. 우리의 미션은 3황자님을 황제로 만드는 것 아닙니까. 결국 지금 여기 지도에 있는 모든 영토가 온전히 3황자님 손에 들어와야 한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제가 1황자를 죽이고 올 테니, 다른 분들은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얻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내 말에 상위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어떡하죠?"

키아라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죽여야죠. 실력 행사를 했는데도 머리를 조아릴 마음이 없다면."

"음. 좋네요. 렌님이 제일 위험한 역할을 해주겠다는데, 그럼 제가 여기. 남쪽 지방을 돌고 오겠습니다."

가장 먼저 찬성한 건 궁수인 고치우였다.

그러자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그럼 북부를 돌겠소."

"그럼 전 동쪽을 돌겠습니다."

중앙은 내가.

동쪽은 고치우, 북쪽은 테루오미, 동쪽은 에밋이었다.

남은건.

"아, 그럼 제가 서쪽을 가야······."

"아뇨. 키아라님은 3황자님을 지켜주셔야죠."

"그럼 서쪽은 누가······?"

"마침 수도인 안타레스가 서쪽에 치우쳐져 있군요. 1황자를 죽이고. 서쪽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1황자를 죽이는 것도, 서쪽을 돌고 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내겐 그림자 표식이 있으니까.'

그러자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1황자를 죽이고 오는 것도 쉽지 않은 미션인데, 서쪽 귀족들까지 복속시키겠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제 임무가 제일 막중하겠네요."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지도의 한쪽을 찍었다.

동북쪽 끝.

거기는 현재 우리가 있는.

안티푸스.

"일단 이 앞에 주둔했다는 1만의 병력과 소드 마스터를 제거해야겠죠."

내 말에 파티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게 최우선이긴 하겠네요. 이것도 역할 분담이 필요한가요?"

키아라의 말에 모두들 피식 웃었다.

그들에게는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상위 플레이어라는 건.

한 명 한 명이 소드 마스터 이상의 실력자라는 것.

그들이 1만의 대군 앞에서 움츠러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깜깜한 밤하늘에서, 환한 보름달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3황자를 지키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의 안내를 받아 성벽으로 오르니, 새까맣게 펼쳐져 있는 1만 명의 대군이 보였다.

적들은 안티푸스의 성벽과 고작 1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쳐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가 기습을 감행하더라도 얼마든지 막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 오히려 성문을 열고 별동대가 기습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바로 시작하죠."

나는 망설임 없이 20미터의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적이 몇 명이나 되든.

상관없었다.

내겐 블라디미르 가면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겠군요."

에밋이 목을 좌우로 풀며 검과 방패를 점검했다.

"음. 약자를 죽이는 건 성미에 안 맞소만. 오늘은 어쩔 수 없군."

테루오미는 길다란 카타나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저는 지휘관 위주로 저격하겠습니다.

활시위를 팅, 팅 소리가 나게 튕기며 고치우가 말했다.

"그럼."

천둥의 숨결과 특전들을 켜고 마력을 끌어올리자.

온몸에서 뇌전이 흘러나왔다.

"시작하겠습니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내 말이 끝나는 걸 기점으로 모두들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적이다!"

"적의 습격이다!"

땡! 땡! 땡! 땡! 땡! 땡!

뿌- 뿌우-

적 진영과 500미터 정도를 남겨두자 종이 울리고, 뿔피리가 울렸다.

적들은 기민하게 무장을 한 채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역시, 안티푸스의 병력이 기습하길 기다리고 있었군.'

마침 우리가 게이트를 타고 이동했을 때, 3황자와 기사들도 기습을 논하고 있었다.

근데 이 정도의 반응속도라면,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녀석들이 무엇을 준비했든.

소드 마스터를 상회하는 4명의 상위 플레이어들을 막기엔 한없이 부족할 테니까.

'일단 피의 강화 특전부터.'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꽈아아아아앙!

적 진영의 코앞에 도착한 나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벽력섬전이 한번 번뜩할 때마다, 병사들 서너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띠링!

[<청천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앙!

섬광이 번뜩! 하더니, 하늘에서 수많은 벼락이 내 주위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악!"

"아, 악마!"

근처가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싸움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서걱!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학살은.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지며 정점을 찍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벽력이 터지며 빛줄기가 하늘로 뿜어져 나가고, 청천벽력이 발동되며 수많은 벼락이 뿌려진다.

죽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내 몸으로 흡수되어 들어오는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이노오오옴!"

그때, 거대한 노호성을 지르며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노기사였는데, 느껴지는 마력이 상당했다.

'녀석이 소드 마스터인가 보군.'

나는 곧장 악마의 눈을 켜고 녀석의 스텟을 확인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발렌티노 레무스 폰 클라이스트]

[근력 : 102(+?)] [민첩 : 100+(?)] [체력 : 103(+?)]

[정신 : 92(+?)] [지력 : 3(+?)] [마력 : 100(+?)]

[업적 특전 : 소드 마스터의 위용]

"바, 발렌티노 후작님이다!"

"우와아아아아! 적을 죽여라!"

발렌티노라는 소드 마스터의 스텟을 확인한 나는 피식 웃었다.

하위 리그에서 만난 리암 수준의 스텟.

'운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라.'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상위리그]

[근력 : 132(+59)(+5)] [민첩 : 136(+61)+(5)] [체력 : 126(+51)+(5)]

[정신 : 173(+69)+(5)] [지력 : 26(+10)] [마력 : 147(+59)+(5)]

기초 스텟이 마의 구간에 돌입하면서.

그에 비례해서 상승하는 스텟의 양도 엄청나게 오른 상황.

발렌티노가 가지고 있는 스텟의 총합보다.

240 포인트나 높은 내가 녀석에게 질 확률은.

서걱!

"커헉!"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 이럴 수가! 소드 마스터를 단숨에······!"

"이, 인간이 아니야······."

"뇌, 뇌신이다! 뇌신이 강림했다!"

내가 단번에 발렌티노를 베어 버리자,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곤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력에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녀석도 인간이다! 모두 포기하지 마라!"

"이놈! 무기를 들어라, 어서!"

곳곳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병사들을 독려하거나, 목을 치며 내게 싸울 것을 명했지만.

푹! 푹! 푹! 푹! 푹!

고치우의 화살이 정확하게 이마를 관통하며, 녀석들의 소란을 잠재워 주었다.

'나쁘지 않군.'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해 보니, 다른 파티원들이 있는 곳도 다르지 않았다.

압도적인 살육에 모두들 무기를 버리며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이제는 서 있는 병사들보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병사들의 숫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고치우님. 포로들을 통제할 병사들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원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별로 크게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고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치우가 지원 병력을 부르러 간 사이, 나는 저항하는 병사들을 처리했다.

서걱! 서걱! 서걱!

그러다 보니, 끝끝내 다른 파티원들과도 중앙에서 만나게 되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드 마스터까지 처리한다고 고생하셨소."

"정말 대단하시군요. 하위 리그를 폭격하고 오셨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테루오미와 에밋은 무척 감탄한 표정이었다.

전투 중에도 내가 싸우는 모습을 간간이 관찰한 모양.

뭐, 벽력과 청천벽력 때문에 내가 싸우는 모습이 요란하긴 했지만.

그때였다.

띠링!

[서킷 브레이커 발동!]

[현재 진행되는 <킹 메이커> 미션이 일시 중단됩니다!]

순간 나는 눈앞에 뜬 상태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서킷 브레이커?

이게 뭐지?

지금까지 경기를 뛰면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에밋과 테루오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킹 메이커> 스토리 미션 팀은 지금 당장 에덴으로 이동하세요!]

[새로운 미션이 부여되었습니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2:00:00]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284,071 명]

눈앞에 뜬 새로운 미션.

'악마······ 처단?'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에밋과 테루오미 뿐만 아니라, 안티푸스에 있던 키아라와 고치우도 성벽에서 뛰어내려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2시간 안에 악마를 처치해야 하는 상황.

우리는 곧장 안티푸스의 바로 옆 도시인 에덴을 향해 달려갔다.

< 79화. 닮은 두 사람(3) > 끝

< 80화. 닮은 두 사람(4) >

*어제 2연참 했습니다.

혹시나 79화를 안 읽으신 독자분들은 79화부터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시점 변화 때문입니다.)

카이로시아는 안우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게 거만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묘하게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잠깐이지만 노예로서 살아보았던 카이로시아로서는, 위에서 내려보는 그 느낌이 너무 거슬렸다.

'레이디에 대한 예의도 없고 말야.'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안우진은 의무적으로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평소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끊이질 않던 상황.

그런데 안우진은 그런 자신의 외모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부분이.

묘하게 카이로시아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카이로시아는 안우진의 그런 반응이 상위 플레이어라는 자부심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제가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그때부턴 제게 예의를 갖춰 대해주시겠어요?"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자극했지만, 안우진의 건조한 대답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흥. 내가 더 빨리 강해지면, 그땐 무슨 표정을 지을지 보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를 넘어서던 카이로시아가 순간 움찔했다.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숲속.

거기에도 가면을 쓰고,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있었다.

순간 안우진이라고 착각할 정도.

창 대신 길다란 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게 다르달까.

'하. 이 인간이 제법 유명하단 말은 들었지만,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까지 있을 줄이야.'

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안우진의 반응이 거슬렸던 상황.

그 모습에 카이로시아의 기분이 팍 상했다.

저런 식으로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는 사람의 실력쯤이야 안 봐도 훤했다.

분명 자신의 약함을 숨기기 위해 저런 위압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거겠지.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36의 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소환 저지(팀 PvP 스토리 미션)]

[게임명 : 어둠의 태동]

[맵 : 에덴(대)]

[관객 수 : 32,666 명]

[미션 : 어둠의 교단이 에덴의 성전에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악마 소환을 저지하세요.]

[승리 조건1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강림석을 파괴하라―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사살하라―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악마 소환 의식은 앞으로 48시간 안에 완료될 예정입니다. 제한 시간을 넘길 시 미션은 자동으로 실패 처리 됩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강림석'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제물'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에덴은 어둠의 교단이 세운 도시 국가입니다.]

[성의 주민들은 모두 어둠의 교단의 교민입니다.]

[악마 소환 저지까지 제한 시간 : 48:00:00]

미션 내용을 본 카이로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이런 미션이 나오다니.

'주민들이 모두 적이라는 소리랑 마찬가지잖아.'

자신의 스타일 특성상 압도적인 화력으로 적을 몰살시키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잠입해서 무언가를 파괴하는 미션과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민들을 모두 죽이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내부로의 잠입은 필수였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죠. 저는······."

함께 들어온 기사를 시작으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그사이 카이로시아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들 장비가 좋네.'

네 경기 만에 컨텐더 자격을 획득하고 메인 이벤트에 참가한 자신과 달리, 모두들 경기를 많이 뛰어본 것 같았다.

실용성 있어 보이면서도, 각각의 장비들이 절제된 미를 뿜어대고 있었다.

아.

누구처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어두침침해 보이는, 딱 한 사람만 빼고.

그와 반면에.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으.'

안우진이 사준 검은색 로브와 검은색 장신구 세트.

아이템의 옵션은 무척 훌륭했지만, 아름다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검은색으로 사준 이유도 가관이었다.

눈에 안 띄어야 살 확률이 높다나 뭐라나.

'빨리 포인트를 많이 벌어서 내 취향에 맞는 걸로 사야겠어.'

그렇게 한 명씩 자기소개가 이루어지고, 검은 로브 사내와 카이로시아만 남은 상황이었다.

"검객입니다. 룬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푸흡."

닉네임까지 따라 했어?

하, 어이 없어.

검은 로브 사내의 닉네임을 들은 카이로시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서둘러 손으로 입가를 가려 봤지만,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외모를 힐끔거리긴 했지만.

"아, 미안해요. 자기소개 중이신데 제가 너무 교양이 없었네요. 카이로시아 입니다. 마법사예요."

"네임드!"

카이로시아가 자기소개를 하자,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의 명성이 어느새 하위 리그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은근한 눈길로 보내던 다른 사람들의 눈빛에 이제는 경외가 서려 있었다.

카이로시아는 저 눈빛들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리딩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그때부터 경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제한 시간은 48시간.

미션 진행 전에 필요한 정보 수집과, 진입로 설정 및 탐색까지.

해야 할 게 무척 많았으니까.

"성 내부로 진입하는 건 어렵지 않겠군요. 교단에 헌금을 내러 왔다고 하면 거의 들여보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악마 소환은 내성에 있는 교황청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외성은 그냥 진입하고, 내성부터는 잠입 혹은 돌파를 감행해야겠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런 숲속에서 쉬는 것보다, 차라리 일단 에덴으로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헌금을 내야 하는데, 모두들 골드를 일부 지출해 주셔야겠는데요?"

파티장의 말에 모두들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골드를 꺼냈다.

순간 카이로시아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앗. 골드가 없는데······ 어떡하지?'

사실 안우진이 챙겨 준 골드가 있긴 했었다.

그 골드들로 안우진이 챙겨 준 검은색 완드 대신, 지금 들고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완드를 사는데 다 써버려서 문제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경기장 내에서는 <스텟 상점><중개 거래소>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경기장 내에선 골드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다.

모든 포인트를 스텟 올리는 데에 투자하느라 남은 포인트도 얼마 없었기도 하고.

그래서 카이로시아가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팀의 가장 큰 전력이시니까, 제가 카이로시아님 몫까지 내겠습니다."

곁에 서 있던 검은 로브 사내가 자신의 몫까지 골드를 지불해 준 것이다.

아마 자신의 난처한 몸짓을 보고선, 민망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먼저 선수를 쳐 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카이로시아가 가볍게 목례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도 그 인간보다는 더 인간미가 있네.'

곁에서 봐 온 안우진은 정말.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이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곁에서 누가 죽어가고 있어도 쳐다도 안 볼 게 분명했다.

거기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훈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도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여유 시간이 생길 때면 마법 서적이라든가, 아니면 스텟 표를 꺼내놓고 분석하기 바쁜 인간이 안우진이었다.

무엇보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 보니, 인간성을 상실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됐을 정도랄까.

"오, 룬님. 이런 배려를 해주시다니. 하하,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좋네요. 왠지, 이번 경기는 잘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검은 로브 사내가 센스 있게 먼저 나서준 덕분에, 카이로시아에게 골드가 없다는 걸 눈치챈 파티원들은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골드를 좀 챙겨 다녀야겠어.'

카이로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미션.

헌금을 하겠다며 일정 골드를 지불하자, 경비병들은 몸수색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오, 정말 좋네요."

시스템에서 도시 국가라고 소개한 것 답게, 에덴 성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분위기는 악마를 소환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고 활기찼다.

쓰레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길거리.

길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은 깔끔하고 단정해서 이곳이 제법 부유한 도시임을 알 수 있었다.

"음.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군요. 이곳에서 악마 소환이 있을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메인 이벤트에서 허튼 미션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일단 내부로 들어가 보죠."

'뭐야, 메인 이벤트라고 해도 별거 없는데?'

안우진이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크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내성으로의 진입이 큰 난관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그곳에서도 자신들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교단에 헌금을 하러 온 김에 교황청을 보고 싶다고 하자 곧장 문을 열어준 것이다.

그렇게 내부로 진입한 파티원들은 교황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저녁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보름달이 밝게 뜬 밤이 찾아왔다.

"발각되기 전까진 잠입을 기본 베이스로 움직이고, 적에게 발각되면 바로 전속력으로 움직일 거니까 체력 분배를 잘 부탁드립니다. 선두는 저와 룬님이, 중심부에 카이로시아님과 마법사님들이, 후방은 판석님이 부탁드립니다."

에덴의 밤은 무척 고요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도시였달까.

"그럼."

불이 켜져 있는 곳은 교황청밖에 없었고.

그 외의 집들은 모두 어두컴컴했다.

"돌입합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미션 진행이 시작되었다.

'너무 상반되는 분위기라서 더 섬뜩해.'

푹! 푹!

교황청 입구를 지키고 있는 수비병들을 암살하고 내부로 향할수록 카이로시아의 마음속엔 불안감이 자리 잡았다.

이보다 활기찰 수 있을까 싶던 도시가, 마치 폐허가 된 유령 도시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교황청을 지키는 경비병의 숫자가 이렇게 적다고?'

카이로시아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함정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자, 잠깐만요. 이거 함정인 거 같아요."

"네, 저도 압니다."

하지만 파티장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다른 파티원들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문제냐는 표정.

"근데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

"함정일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이는 거니까요. 애초에 메인 이벤트가 이렇게 쉬울 리 없으니."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다른 방법이라······. 무슨 방법이 있죠?"

파티장의 물음에 카이로시아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함정인지 아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

거기에 제한 시간이 24시간도 안 남았으니, 시간도 촉박하다.

결국, 이 상황에서 파티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부딪혀가며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일단 성전에 도착해서 강림석과 제물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맞네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네요."

"아닙니다. 제가 충분히 설명해 드리고 시작하지 못했네요. 카이로시아님이 메인 이벤트 경기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걸 제가 간과했습니다. 그럼, 이해하신 걸로 알고 다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함정인 걸 알면서도 들어가야 한다라······.

카이로시아는 그 말이 못내 슬펐다.

자신들의 처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하지만 카이로시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너진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신들을 지옥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정적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초월 리그에 반드시 올라가야 했으니까.

그렇게 교황청의 중앙 로비까지 향했을 때였다.

"침입자다!"

"거룩한 신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이단이다!"

로비를 지키던 경계병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때부터 파티원들은 조용하고, 은밀하던 움직임을 탈피하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미션의 시작이었다.

[초록빛 하늘의 파노라마!]

[흩날려라, 열화의 꽃잎이여!]

선두에서 파티장과 검은 로브의 사내가 길을 뚫고, 그 중간중간마다 카이로시아의 옆에서 함께 달리던 마법사들이 지원 사격을 넣었다.

카이로시아는 지원 마법 대신,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일단 광역 마법으로 내부를 한바탕 휘저어 줘야겠어.'

그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제물로 쓰일 사람이든, 그를 지키는 사람이든 모두 죽여야 할 존재들.

한마디로, 성전 내부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여야 하기에, 광역 마법만큼 좋은 게 없었다.

"성전으로 돌입합니다!"

로비를 지나, 복도를 달리던 파티장이 이내 한쪽 벽에 달린 거대한 문을 밀치며 내부로 향했다.

그 뒤로 다른 파티원들이 기민하게 쫓아 들어갔다.

그래서 카이로시아도 모퉁이를 돌아 거대한 문 내부로 들어갈 때였다.

"······!"

"······!"

"······!"

성전 내부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흑기사들이 검을 빼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머리에 치솟은 작은 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거대한 육체를 가진.

'왜, 악마가······!'

악마가 성전 가운데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긴급!]

[미션 내용이 변경됩니다!]

[미션 : 생존]

[상위 플레이어들이 잠시 후 에덴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생존하세요!]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1:00:00]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옥죄는 악랄한 마기가.

카이로시아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모두 뒤로!"

그와 동시에 귓가로 날아드는 파티장의 목소리.

순간 정신을 차린 카이로시아가 영창하던 마법을 그대로 시전했다.

[피에 잠긴 바람의 꽃잎!]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 80화. 닮은 두 사람(4) > 끝

< 81화. 닮은 두 사람(5) >

└뭐야? 왜 악마가 이미 소환 돼있음?

└마계 놈들이 장난친듯. 안 그래도 맵 전체가 깜깜해서 안보인다 싶었는데, 하위 리그 게임 메이커 제대로 엿먹었네.

└하급 악마이긴 한데, 그래도 저 정도면 상위 리그 애들이 와야 하는 거 아님?

└안 그래도 상위 리그에 지금 서킷 브레이커 떨어졌음. 바로 옆동네, 라 제국에 있던 애들 전부 다 에덴으로 소환 당함.

└와 이 경기에서 죽는 애들은 어떡함? 막말로 하위 리그 경기라고 보내놨는데 상위 리그 경기였던 거자나. 팀 주인들이 가만 안있을 거 같은데.

└뭐가 됐든 난 개꿀~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 경기 봄 ㅋㅋㅋㅋㅋㅋ

└지금 상위 뛰는 애들 누구누구임? 네임드 있음?

└여기도 핑프가 있네 ㅡㅡ 앞으론 직접 찾아봐라. 오늘만 알려준다. 지금 상위 리그 경기 뛰는 애중에 그나마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애가 렌 있음.

└오오오오오오오오!!!!!! 상위 리그로 올라가고 나서 못 봤는데 개이득 ㅋㅋㅋㅋㅋ 얼마나 강해졌을지 좀 궁금했음ㅋㅋㅋㅋㅋ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59:59]

카이로시아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바람의 칼날이 되어 성전 내부를 휘젓기 시작했다.

덕분에 달려들던 수많은 흑기사들은 온몸이 조각난 채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카이로시아의 마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어.'

이 상태로 도망쳐 봤자 얼마 못 가 붙잡힐 게 분명했다.

[새빨간 보석의 눈물!]

카이로시아의 손에 만들어진 응축된 마나의 구슬.

툭! 화르르르르르르륵!

구슬을 떨어트리자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았다.

성전의 입구는 자신들이 들어온 곳 하나 뿐.

이 불길이 잠시나마 적들의 발을 묶어줄 것이다.

"카이로시아님! 어서!"

챙! 챙! 채채챙! 챙!

파티장의 외침과 동시에 날아든 5개의 화살.

검은 로브 사내가 카이로시아의 앞을 막아서더니, 화살들을 모두 쳐내 주었다.

"앗, 감사······."

"어서 가시죠."

그때부터 파티원들의 에덴 탈출이 시작되었다.

검은 로브 사내가 최선두에서 길을 뚫었고, 그 뒤에서 다른 검객들이 보조한다.

카이로시아와 마법 계열 플레이어들이 중간에 서고, 맨 뒤를 기사인 파티장이 커버하는 식이었다.

"이교도들이 도망친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피시옵소서!"

눈이 뒤집힌 채 달려드는 병사들을 가르며 검은 로브 사내가 병사들에게 길다란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르륵!

'어머, 뭐야!'

길다란 소태도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파란 불꽃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콰아아아아앙!

불기둥이 솟구치고, 주변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교황청 로비에서 침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파란 불꽃이 순식간에 곳곳으로 퍼지며 교황청을 집어삼켰다.

마법과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화력.

그 위용에 카이로시아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다.

"이교도들이여! 신의 징벌을 받으라!"

복도 맞은편에서 적들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맨 뒤에 등장한 존재들.

'흑마법사!'

채애앵! 채앵! 채채채채챙!

검은 로브 사내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파란 불꽃이 주변 공간을 휘감았다.

곁에 있기만 해도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엄청나게 뜨거운 불꽃이었다.

[밤의 짓누름!]

[싸늘한 어둠의 채찍!]

흑마법사들의 마법이, 적 병사들을 상대하는 검은 로브 사내에게 쇄도했다.

[열화의 진혼곡!]

그에 맞춰 시전되는 카이로시아의 마법.

녀석들이 아무리 마법을 써도, 마력 스텟이 90 포인트가 넘고, 고속 영창이 있는 카이로시아의 마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카이로시아의 마법이 흑마법들을 단숨에 찢어버리더니, 이내 흑마법사들 위에 떨어지며 엄청난 먼지와 굉음을 만들어 냈다.

[고요한 태고의 손길!]

[격랑 하는 겨울의 향기!]

그와 동시에 카이로시아는 두 개의 마법을 더 사용해, 등 뒤로 쫓아오는 병사들을 향해 마법을 흩뿌렸다.

"으아아악!"

"조, 조심해! 이교도들 중에 뛰어난 마법사······!"

서걱! 서걱! 콰과과과과과광!

그야말로 혼자서 학살하는 수준이었다.

꽈과과과광!

"끄아아아악!"

검은 로브 사내의 파란 불꽃과는 정반대의, 새빨간 불길이 복도로 퍼져나갔다.

이 정도라면 뒤쪽에서 쫓아오는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네임드!"

"이 정도라면 충분히 생존할 수 있겠군요!"

카이로시아의 활약에 다른 파티원들이 무척 고무되었다.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47:43]

교황청을 빠져나오니, 차가운 밤공기가 카이로시아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교도다!"

"신의 이름으로 네 놈들을 처단하리라!"

내부로 침투할 때 느꼈던 고요함은 온데간데없고,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흥!'

[통곡과 절망의 염혼!]

적 병력이 얼마나 되든 카이로시아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생전에 탐리엘에서, 자신의 역할은 전략 병기였으니까.

이런 다수의 병사들 위에 마법을 폭격하는 것.

그건 카이로시아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분야였다.

꽈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으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어둠의 신이시여!"

마력을 머금은 바람의 칼날이 적 병사들 사이를 휘저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고요한 바람이 공간을 휩쓸 때마다, 병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피, 피해!"

"으아아아악!"

그 압도적인 광경에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화르르륵! 화륵!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 로브의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한번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주변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초토화되었다.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그 덕에, 파티원들은 무사히 교황청 부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42:49]

―감히 성전을 더럽히다니! 네 놈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그때, 밤하늘에 악의로 똘똘 뭉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듣자마자 다리가 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포효였다.

'미, 미쳤어!'

악마가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온몸이 벌벌 떨렸다.

"어, 엄청난 기운이군요."

"순간 가슴이 섬뜩했어요."

다른 파티원들도 카이로시아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서 이쪽으로!"

검은 로브 사내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카이로시아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서둘러 에덴을 벗어나야 한다.

저 악마가 당도하는 순간.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었다.

"거짓된 신의 종자들이여!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그때, 누군가 고함을 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풀 플레이트 메일에, 가슴에 달린 휘황찬란한 휘장.

그리고 한눈에 느껴지는 방대한 기운까지.

"소드 마스터급 강자군."

"아무래도 교단의 팔라딘인 모양입니다."

"여기서 발목을 잡히면 안 되는데."

팔라딘의 등장에 파티원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딱 두 명만 빼고.

"바로 돌파하겠습니다."

[거인의 발걸음!]

카이로시아의 마법과 동시에, 검은 로브 사내가 망설임 없이 길다란 검을 휘두르며 팔라딘에게 쇄도했다.

"사이한 능력을 쓰는 놈이구나!"

화르르르르륵!

챙! 채챙! 챙!

팔라딘과 검은 로브 사내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사방으로 파란 불꽃이 퍼져나갔다.

하지만 팔라딘이 너무 강한 탓이었는지, 검은 로브 사내는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해럴드 사도님을 도와라!"

"이교도들을 처단해야 한다!"

팔라딘과 함께 왔던 흑기사들도 합류하며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제가 막겠습니다! 마법사님들께선 보조해주시고 카이로시아님은 뒤쪽의 병사들을!"

눈앞에 등장한 팔라딘 때문에 발목을 잡힌 사이, 뒤쪽에서는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난전 속에서 카이로시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차라리 보조하는 게 훨씬 낫겠어.'

판단을 마친 카이로시아가 마법사들에게 외쳤다.

"제가 보조를 설게요! 다른 분들께서 뒤쪽 병사들 좀 막아 주세요!"

"네!"

다른 마법사들에게 뒤쪽 지원을 부탁한 카이로시아는 곧장 마법을 영창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법을 써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팀에 있는 괴물과 매일같이 대련을 했었으니까.

[찍어 누르는 모래의 늪!]

카이로시아의 고운 목소리와 함께, 팔라딘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화르르르르르륵!

그러자 당장이라도 밀려 쓰러질 것 같던 검은 로브 사내가 팔라딘에게 맞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이로시아는 계속해서 마법을 쏟아냈다.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삭풍의 노래!]

[흔들리는 염화의 춤!]

[차가움을 머금은 꽃잎!]

카이로시아의 마법은 정확하게 흑기사들만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조심!"

"적 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끄윽!"

단말마도 내뱉지 못한 채 순식간에 마법에 폭격당하며 쓰러지는 흑기사들.

"헉, 헉."

단시간에 너무 많은 마력을 쏟아낸 탓에 카이로시아의 숨이 거칠어졌지만, 그녀는 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소성의 새벽 폭풍!]

쐐애애애애애애액!

카이로시아가 사용한 마법이 정확하게 팔라딘을 향했다.

팔라딘이 방패를 들고 마법을 방어하려 했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 로브 사내가 불꽃에 휘감긴 검을 휘둘렀다.

"끄윽!"

"사, 사도님을 먼저 구해라!"

"해럴드 사도님부터!"

사선으로 가슴을 크게 베인 팔라딘이 뒷걸음질 치자, 수많은 병력들이 그를 에워싸며 검은 로브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무리하지 말고, 도주부터!"

검은 로브 사내가 병사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팔라딘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파티장의 말에 다시 길을 뚫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허억."

"카이로시아님.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근데 당분간은 지원해드리지 못할 거 같아요."

"지금까지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카이로시아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마력 회복의 물약을 꺼내 마셨다.

안우진이 챙겨준 것이었다.

'하아. 하위 리그에서 몇 경기 뛰었다고 너무 자만했어.'

그제야 왜 그렇게 안우진이.

미친듯이 훈련에만 몰두 했는지.

왜 눈에 띄지 않는, 칙칙한 검은색 옷만 입었으며.

어째서 그렇게 악착같이 마법 서적을 뒤적이고, 여유시간엔 스텟 분석표를 들여다 보고 있었는지.

이번 경기를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나 꼼꼼하게 챙겨 줬는데.'

카이로시아는 다 마시고 비어버린 병을 보며.

안우진을 떠올렸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10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30:02]

한참 동안 병력들을 뚫으며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

"······!"

"······!"

뒤쪽에서 스멀스멀, 기분 나쁜 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마기가 느껴진다는 것은 단 하나.

"젠장. 악마가 벌써!"

아직 외성의 성벽까지 한참이나 남은 상황.

그런데 이곳에서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모두 찢어져서 도망치겠습니다! 건투를!"

파티장의 말과 동시에 파티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아. 아직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마력 회복의 물약을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카이로시아는 혼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챙기지 않은 채 도망치기 바빴다.

'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걸까······.'

카이로시아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살아생전에도.

그리고 죽어서도.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것 같······.

"꺄악!"

순간 누군가 자신의 허리를 안는 느낌에 카이로시아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어질어질한 상황에서도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다가온 검은 로브 사내가 자신을 어깨에 들쳐멘 채 달리고 있었다.

"왜, 왜 저를 구해주시는······?"

"동료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

검은 로브 사내는 묵묵하게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뚫었다.

그 모습에서 누군가가 연상되었다.

비슷한 말투와, 강한 실력.

그리고 가면과 로브까지.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이었다.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7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21:58]

외성의 어느 골목길.

그사이, 생존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3이나 줄어 있었다.

고작 10분 남짓한 시간에 세 명이 죽었다는 뜻.

"헉, 헉, 헉, 헉."

검은 로브 사내가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검은 소태도라고 불리는 양손 검.

그걸 카이로시아를 들쳐메고 있느라 한 손으로 휘두르니, 체력이 빠르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도 싸울게요. 내려주세요."

"싸울 수 있겠습니까?"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카이로시아를 내려 준 검은 로브 사내가 양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모여드는 병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이대로는 좁은 골목에서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열화의 진혼곡!]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카이로시아도 마법을 쓰며 최대한 병사의 숫자를 줄여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불꽃을 보고 골목으로 모여드는 병사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헉, 헉, 헉, 헉."

"이교도들이 지쳤다! 조금만 더!"

"신의 징벌이 있으라!"

병사들이 방패를 앞세우며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에서,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도록 공간을 잘라버리려는 의도였다.

'어떻게든 해야!'

카이로시아가 계속해서 마법을 흩뿌렸지만, 적 병사들은 시체를 타고 계속해서 넘어오고 있었다.

화륵! 화르륵!

챙! 챙! 챙!

검은 로브 사내가 청염을 뿜어대며 병사들을 뚫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대로는······.'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앙앙! 꽈아아아아아앙앙! 꽈아아아아아앙앙!

저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늘에 뇌전의 섬광이 번뜩이고, 묵직한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마법을 영창하려던 순간이었다.

흠칫!

그러고 보니.

'상위 플레이어들이 온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저 천둥소리가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무척 친숙한 느낌.

카이로시아가 익숙하게 느끼는 벼락의 주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가 왔어!'

순간 카이로시아의 온몸에 희열이 서렸다.

안우진이 오고 있었다.

< 81화. 닮은 두 사람(5) > 끝

< 82화. 닮은 두 사람(6) >

└왔다!!!!!!!! 그분이 왔다고!!!!!!!!!!!!!!!!!!!!!

└야 시발 ㅋㅋㅋㅋㅋ 맵이 에덴밖에 안 보이는데도 천둥소리만 듣고 왔구나 직감함 ㅋㅋㅋ

└속보 : 하위 리그 게임 메이커, 마음 졸이면서 보다가 발할라에서 숨 쉰 채 발견.

└가즈아아아아아아아아!! 싹 쓸어버리자고!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발광을 함? 또 나만 몰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위 리그 한 번도 안 본 뉴비 발견!

└반응 개웃기넼ㅋㅋㅋㅋ 다들 미쳐 날뛰는 것 봐. 누가 보면 대단한 네임드라도 온 줄 ㅋㅋㅋㅋ

└대단한 네임드 맞는데?

[현재 생존한 플레이어 수 : 7 명]

[상위 플레이어 도착 까지 : 00:20:37]

"이봐요!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상위 플레이어들이 왔어요!"

카이로시아의 말에 검은 로브 사내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저 천둥소리 들리죠! 저거 상위! 상위 플레이어라구요!"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 카이로시아의 말이 꼬였다.

'살 수 있어.'

사람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희망이 생기자마자 온몸이 가벼워진 것이다.

카이로시아의 말에 검은 로브 사내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륵!

"더 밀어붙여! 조금만······끄아악!"

"파란 불꽃이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백부장님! 이러다 다 타죽습니다!"

"상관없어! 영광스럽게 싸우다 죽으면 신께서 우리를 거둬, 큰 복을 내리실 것이니!"

"거룩한 밤의 세계를 위하여!"

'저 또라이들!'

카이로시아는 저도 모르게 교양 없는 단어를 떠올렸다.

교단이 세운 도시 국가라더니, 완전히 광신도들 소굴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이럴 정도라면,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원 병력은! 왜 지원 병력이 안 오는 것이냐!"

"배, 백부장님! 아무래도 다른 이교도들이 추가로 들어온, 헉!"

"뭐야, 왜 그래!"

"저, 저기를······!"

꽈아아아아아아앙! 꽈아아아아아아앙!

한밤중임에도 어마어마한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번뜩이는 섬광에, 골목길을 가득 메운 채 방패로 밀어붙이는 병사들이 한순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정도였다.

'지금이야!'

[새벽 폭풍 아래 부서지는 이슬의 조각!]

고속 영창으로 빠르게 완성된 마법이 한순간에 병사들을 덮쳤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쥐어짜 사용한 광역 마법의 효과는 대단했다.

병사들이 단말마도 내뱉지 못한 채 팔다리 할 것 없이 온몸이 터져나간 것이다.

"이쪽으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은 로브 사내가 파란 불기둥을 만들며 병사들 사이를 해쳐 나갔다.

덕분에 탈출할 수 있게 된 골목길.

대로 쪽으로 나와 성벽으로 향하려던 카이로시아와 검은 로브 사내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

"······!"

그리고 보게 된 광경.

'저게······ 안우진이라고?'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새빨간 뇌전.

그리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는 붉은 안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다섯 줄기의 벼락과.

간간이 솟아오르는 빛의 기둥까지.

순간 카이로시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병사들을 학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인세에 강림한 악마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저 사람이.

저렇게나 강했다고?

분명 팜에서 대련할 때만 해도 조금만 더 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자신과 같은 마법사 열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안우진을 상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저게······ 상위 플레이어.'

그러자 경기장에 입장하기 전, 안우진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제가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그때부턴 제게 예의를 갖춰 대해주시겠어요?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담담하게 읊조리던 안우진.

그는 비아냥댄 게 아니었다.

그저.

멋모르고 까부는 카이로시아의 응석을 받아준 것일 뿐.

순간 카이로시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그제야 이해가 됐다.

왜 아세리안 여신님이, 안우진의 말이라면 껌뻑 죽었는지.

왜 2기수 플레이어들과, 그 외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안우진을 향해 그렇게 경외심을 보였는지.

저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이, 이럴 수가······! 이게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위용이란 말인가!"

진심으로 싸우는 안우진의 모습을 보면.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사도님들을! 어서 사도님들을 모셔······끄윽!"

경외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

고개를 돌리니, 검은 로브 사내도 싸우는 것을 잊은 채 멍한 표정으로 안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심정도 아마 비슷하겠지.

하위 리그의 컨텐더라고 하는 건, 예비 상위 플레이어라는 의미.

그런데 막상 실제로 본 상위 플레이어의 수준은.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 인간이 아니야······!"

"도망쳐! 빨리!"

"모두 물러서지 마라! 거룩한 밤의 세······ 크윽!"

자신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저 멀리, 에덴 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불기둥이 솟구치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위 플레이어들이 있는 거였어!'

갑작스럽게 악마가 소환되어 서킷 브레이커가 터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위 플레이어들이 미션에 실패하면서 악마가 소환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카이로시아······!'

저 안에 카이로시아가 있다는 거겠지.

순간 나는 그림자 표식에서 카이로시아를 지운 걸 후회했다.

어차피 경기에 들어가면 새로운 사람들로 그림자 표식 목록을 추가할 거란 생각에, 바로 전날 카이로시아와의 대련에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최대한 빨리 가는 수밖에.'

에덴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카이로시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하급 악마를 상대로 이길 순 없을 테니까.

"누구냐!"

"정지! 이곳은 지금 들어갈 수 없다!"

에덴의 성문 앞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나를 막아 세웠다.

나는 망설임 없이.

서걱!

그들에게 벽력섬전을 휘둘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전속력으로 에덴까지 달려오느라 바닥을 찍었던 체력이.

서걱!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녀석도 이교도다! 전투 준비!"

"거룩한 신의 행사를 방해하려 하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더냐!"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교도를 처단하라!"

콰아아아아앙!

나를 막아서는 병사들을 도륙한 후, 성문을 부수고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자,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나를 바라보더니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 과 !@#$ 사이에 있는 !@#$!@#$를 !@#$!@#$

[미션 내용이 들어 있어 받을 수 없는 서브 미션입니다.]

[중급신 '루디악'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10분 안으로 외성의 중심부까지 이동할 것.

[보상 : 100,000 P]

'아 알았다고.'

아까부터 계속해서 울리는 서브 미션 창.

아무래도 하위 플레이어 중에 루디악이 아끼는 녀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위태로운 상황이기에, 저렇게 거금을 들여 중심부로 이동하라고 하는 거겠지.

'나도 지금 당신 못지않게 급한 상황이거든?'

체력 흡수를 할 수 있어서 전력 질주해온 나와 다르게,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은 체력 조절을 하다 보니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

그러다 보니, 나 혼자서 카이로시아를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루디악이 대충 중심부라고 힌트를 주긴 했지만, 에덴은 안티푸스보다 5배 이상 거대한 성.

중심부의 크기만 해도 안티푸스와 맞먹을 정도였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1:38:02]

전력으로 달려온 덕분에 악마 처치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좀 있는 상황.

'어그로를 최대한 끌면서 들어가야겠어.'

안티푸스의 거의 모든 병력이 중심부로 몰려가고 있으니.

일단 하위 플레이어들이 받을 압력부터 줄여야 한다.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그러려면.

'개 난장판을 만들어버려야지.'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나는 마력을 아끼지 않고 과감하게 뇌전을 뿌리며 빼곡하게 몰려있는 병사들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미 성계 대항전의 경험을 통해, 다수에게 창을 휘두를 경우 벽력이나 청천벽력의 발동 확률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아냈기에.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이렇게 많은 숫자의 병사들은 오히려, 내게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마침 벽력이나 청천벽력은 무척 요란하기에, 적의 시선을 끌기에도 좋은 스킬들.

"어, 엄청난 강자다! 사도님을! 사도님을 모셔 와라!"

"신이시여! 미천한 종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악마다! 악마가 틀림없다!"

벽력섬전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다섯 명에서 열 명의 병사들 목이 날아갔다.

하지만 내 압도적인 무력에도, 병사들은 눈이 뒤집힌 채 달려들었다.

'지들이 악마를 소환해 놓고, 누구 보고 악마래.'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어차피.

[승리 조건2 : 악마를 소환한 어둠의 교단 소속 교인들을 모조리 처치하라]

[남은 교인 수 : 229,666 명]

결국 이 안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녀석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서걱! 서걱! 서걱!

벽력과 청천벽력이 반복해서 터지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헤르세벨그의 이교도여! 안 그래도 너를 심판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음성.

힐끗 바라보니, 승급전 경기를 치를 때 헤르세벨그에서 만난 팔라딘이 내게 쇄도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그저.

'그때의 날 생각하고 덤비는 거라면.'

무심하게 벽력섬전을 그을 뿐이었다.

서걱!

'곤란하지.'

기초 스텟 자체는 얼마 안 올랐을지 몰라도.

띠링!

[발리노르인 '칼로스 아드리안 폰 루델리온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특전으로 인해 상승하는 스텟이 어마어마해, 승급전을 치를 때보다 총 스텟이 119 포인트나 오른 상황.

녀석은 내가 전력으로 휘두른 한 번의 공격조차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팔라딘을 두 동강 낸 나는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이럴 수가! 칼로스 사도님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 이교도를 처치하는 자에겐 신께서 큰 복을 내릴 것인즉!"

"도망치지 마라! 신께서 우릴 시험······끅!"

서걱!

미친 광신도 새끼들.

안티푸스의 평원에서 펼쳐졌던 전투와 다르게, 적 병사들은 부나방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무언가에 대한 믿음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연출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거겠지.'

띠링!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적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일반 병사든, 백부장이든, 흑기사든.

아니면 팔라딘이든.

서걱!

내 창을 피해내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렌님!"

"이미 한바탕 하고 계셨구려."

때마침 도착한 다른 상위 플레이어들이 합류하면서 전투의 양상은 더욱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예. 일단 이곳을······?"

싸아아아아아아-

알싸하게 풍겨오는 마기.

나는 마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마기를 뿌려대며 손톱을 휘두르고 있는 악마, 그 악마의 공격을 막고 있는 검은 로브 사내.

그리고 카이로시아가 있었다.

'저 개새끼가.'

감히 내 소중한 포인트 수급원을.

빠아아아악!

악마의 공격에 검은 로브 사내가 벽으로 튕겨 나가고.

카이로시아를 향해 손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전광석화를 사용하며, 곧장 악마가 있는 방향으로 바닥을 박찼다.

띠링!

[<벽력 >이 발동합니다.]

[1초 동안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때마침 이동 중에 벽력이 터지며 순간적으로 내 몸이 무시무시하게 빨라졌다.

비록 1초 밖에 되지 않아 금세 풀렸지만, 악마가 카이로시아에게 손톱을 휘두르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속도 그대로.

악마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

카이로시아에게 향하던 공격을 순간적으로 틀어, 내 창을 막아낸 악마.

녀석은 몇 걸음 뒤로 밀려났을 뿐,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헬리퍼]

[근력 : 148(+?)] [민첩 : 151(+?)] [체력 : 117(+?)]

[정신 : 99(+?)] [지력 : 1(+?)] [마기 : 142(+?)]

[종족 특전 : 하급 악마의 피]

'씨발.'

녀석의 스텟을 보는 순간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모든 특전을 다 켠 나보다도 훨씬 높은 스텟.

거기다 방금 녀석에게 창을 찔러 넣으며 느꼈다.

이 자식, 생각보다 단단하다.

'잘 죽지도 않겠어.'

악마가 창을 막아낸 팔뚝을 힐끗 보더니, 씨익 웃었다.

나는 녀석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카이로시아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 네에."

"일단 뒤쪽에 있는 상위 플레이어들에게 몸을 의탁하세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겁니다."

언제 악마가 다시 달려들지 모르는 상황.

나는 일단 그녀부터 대피시키고자 했다.

"네. 조심하세요."

카이로시아가 곁에 쓰러져 있던 자신의 동료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후.'

카이로시아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급 악마가 날 무시한 채 그녀를 노린다면, 온전하게 막아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후후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혹시 아나?

"······?"

―오랜만이구나. 렌이여.

악마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구지?'

애초에 이번 생애에선 악마를 만난 게 처음이었다.

녀석이 날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크흐흐, 보아하니 날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군. 아덴마하에서 너에게 신세를 졌지.

아덴마하라면 빛의 이면 경기를 펼쳤던 곳인데.

거기서 이런 녀석을 만난 적이 없는······?

설마?

"······레기아?"

< 82화. 닮은 두 사람(6) > 끝

< 83화. 닮은 두 사람(7) >

마계의 최하층.

왕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콜로세움 시스템에 강제로 접근하여 상위 리그 경기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안우진의 모습을.

그를 바라보는 왕의 자줏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반짝거렸다.

한참을 멍하니 응시하던 왕이 옅은 미소를 피웠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 * *

―크흐흐. 아덴마하라는 힌트만으로 용케 알아차렸군.

악마가 씨익 웃자,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녀석의 이빨이 보였다.

붉은색 눈동자와 머리 위에 작게 솟은 뿔.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는 손톱.

250cm는 나갈 것 같은 거대한 덩치에, 우락부락한 몸까지.

'녀석이······ 레기아라고?'

도저히 레기아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의 모습은 기괴해져 있었다.

향수도 뿌리고, 자신의 외모에 과하게 신경 쓰던 녀석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

'어떻게 된 일이지?'

녀석은 분명 내 손에 죽었다.

목이 꿰뚫린 채로.

그때 당시 피의 회복 메시지까지 떴으니,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죽으면······. 사후 세계나 콜로세움, 둘 중 하나로 가는 게 아니었나?'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었을 당시, 시스템은 분명.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녀석이 마계에서 왔다는 뜻.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마디를 툭, 뱉었다.

"마계는 지낼만한 모양이군. 이전보다 살이 찐 걸 보니."

―후후, 내가 마계로 갔다는 걸 알고 있었군. 그래서 단번에 알아본 거였어.

'죽으면 마계로 갈 수도 있는 거였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후후, 천계에서 광대놀음이나 하는 네 놈들보다는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 우리는 신께 맹종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부여받게 되니까.

"그런 것 치고는 별로 강한 것 같지 않은데."

그러자 악마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웃었다.

―크흐흐흐. 죽기 직전에도 과연 그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꾸나.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나야말로 녀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과연 죽기 직전에도 그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자고.'

녀석의 대화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마계엔 콜로세움 같은 시스템이 없다는 것.

광대놀음이나 한다는 의미는 아마,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뛰는 우리를 향한 비아냥일 것이다.

그리고.

'신이란 존재가 인위적으로 힘을 부여해주는 모양인데.'

어떤 메커니즘으로 힘을 부여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자원이 풍부하다면 얼마든지 고위급이든 초월급이든 찍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좀 부럽네.

'좋은 정보를 얻었어.'

뭐 어쨌든.

앞으로 계속해서 악마들과 만나 싸우게 될 내게 있어서, 이건 정말 귀중한 정보였다.

이걸로 녀석에게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이제는, 녀석을 죽일 일만이 남았다.

―간절하게 바라왔던 녀석을 만나니,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자,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 번 볼까.

악마도 마침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듯 양 손톱에 시꺼먼 마기가 모여들었다.

'맞상대하는 건 안 돼. 일단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일 때까지 시간 끌기부터!'

쐐애애애애애애애액!

채앵! 챙! 채채챙! 챙!

엄청난 속도로 달려든 악마가 손톱을 휘두르며 나를 밀어붙였다.

확실히 모든 면에서 나보다 스텟이 높기에, 공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무거웠다.

혼자서 상대하기엔 벅찰 정도.

하지만.

'별거 아니군.'

이곳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테루오미, 에밋, 고치우와 키아라까지.

내가 악마와 격돌하기 시작하자, 네 명의 상위 플레이어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피의 강화 특전의 유지 시간도 넉넉한 상황.

파티원들과 함께 진형을 짜고 녀석을 상대한다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승리 조건1 : 에덴에 소환된 악마를 처치하라]

[제한 시간 : 01:31:44]

"렌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홀로 녀석을 상대하느라 고생하셨소!"

때마침 병사들을 처리하고, 합류하는 파티원들.

테루오미와 에밋이 악마를 에워싸며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덕분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가 보냈던 하위 플레이어들은?"

"제가 성 밖까지 무사히 내보냈어요."

"감사합니다, 키아라님. 그럼 두 분께 적 병사들을 맡기겠습니다."

키아라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나는 다시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챙! 채챙! 챙!

공격을 넣겠다는 생각은 버린다.

지금은 철저하게 서포트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협공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테루오미와 에밋의 공격만으로도 충분해.'

욕심부리지 않는 것.

내가 가세하자마자 우리 세 사람의 협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동선이 꼬이지 않도록, 필요할 때마다 뒤로 빠졌고.

혹시나 두 사람에게 위험한 순간이 있다면 커버했으며.

공격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도록 공간을 잘랐다.

'당황하고 있군.'

초감각은 내가 빠져야 할 타이밍과 들어가야 할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핑! 핑! 핑! 핑! 핑! 핑! 핑!

고치우의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를 공격한 건 아니었다.

그저.

푹! 푹! 푹! 푹! 푹! 푹! 푹!

내가 피할 걸 예상하고, 가장 치명적인 부분에만 화살을 쏜 것일 뿐.

―크윽!

내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탓에, 악마는 고치우가 쏜 화살들을 하나도 피할 수 없었다.

팔뚝과 허벅지, 어깨까지.

곳곳에 화살이 박히며 몸을 휘청했다.

콰과과과과과광!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키아라의 물 속성 마법.

'제법인데.'

오늘 처음으로 합을 맞춘 사이임에도, 상위 플레이어들답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 순간 테루오미가 잔상을 남기며 바람처럼 악마를 향해 쇄도했다.

"내가 마무리하겠소!"

그가 악마를 향해 검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서걱!

악마가 발버둥 치며 휘두른 손톱에 테루오미의 가슴이 베였다.

뭐, 상처라고 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냥 생채기 정도였달까.

'뭐 하는 거지?'

그런데 악마의 다음 행동이 이상했다.

손톱에 옅게 묻어난 피를 혓바닥으로 핥은 것이다.

그것도 테루오미가 공격을 퍼붓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뭔가 있어.'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까.

나는 곧장 파티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뒤로 빠지······."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액!

악마가 잔상을 남기며 바람처럼 내게 달려들어 손톱을 휘둘렀다.

'방금 전에 쓴 테루오미 스킬!'

서걱!

워낙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공격이기에, 나 또한 악마의 손톱에 팔뚝을 베이고 말았다.

"······!"

"······!"

챙! 채챙! 챙!

다른 파티원들이 빠르게 나를 커버했기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지만.

―크흐흐, 맛있군.

손톱에 맺힌 내 피를 핥는 악마.

그 모습에 테루오미와 에밋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모두들 알고 있는 것이다.

방금 악마가 사용한 게 테루오미의 스킬이라는 것과.

―후후, 능력이 아주 좋구나.

핏방울을 먹는 녀석의 행위가 무슨 관련이 있음을.

'스킬을 복제하는 건가?'

이후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녀석의 스텟은 그대로였다.

악마의 눈으로도 녀석의 스텟창을 확인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고.

각성 능력을 가져갔는지는 조금 더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서 가능한 추론은 핏방울을 먹음으로써 타인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콰지지지지지지직!

'씨발.'

악마의 몸에서 붉은색 뇌전이 흘러나왔다.

녀석이 내 스킬을 그대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핏방울을 마시고 나서 테루오미와 에밋이 근접전을 펼쳤어.'

둘 중 한 명에게 그림자 표식이 등록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나는 테루오미와 에밋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 경기가 끝나면 헤어져, 언제 다시 적으로 만날지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어떤 스킬을 보유 중인지 공유할 수도 없는 노릇.

테루오미도 같은 이유로 본인의 스킬들을 얘기해주지 않고 있었고, 다른 파티원들도 그 이유를 알기 때문에 나와 테루오미에게 무슨 스킬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긴장감만이 높아지고 있을 뿐이었다.

―크흐흐, 갑자기 왜 그런 표정들을 짓고 있지? 푸흡.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냐? 자, 방금 전처럼 또 달려들어 보거라, 크하하하.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악마의 비웃음에 반응할 수 없었다.

나는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리고 다른 파티원들은 무슨 스킬을 가졌는지 모르기에.

―그럼 다시 한번 놀아보자꾸나!

악마가 붉은 뇌전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이대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그때부터 다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들 움직임이 한층 신중해졌달까.

챙! 채채챙! 챙!

녀석의 손톱과 부딪히자 뇌전의 데미지로 인해 팔이 저릿저릿했다.

콰과과과과과과광!

키아라의 마법이 녀석을 직격했지만, 이전과 달리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신하고 싸웠을 때의 느낌을 또 받게 될 줄이야.'

마력 상쇄 스킬 덕분이었다.

고작 스킬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녀석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그때였다.

"조, 조심!"

손톱을 휘두르던 악마가 갑자기 에밋의 앞에 나타났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에밋은 피할 수 없었다.

푹!

"에밋님!"

키아라의 외침에도, 에밋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장을 관통당하며 즉사한 것이다.

―후후, 이 녀석은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악마가 에밋의 피를 핥는 사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자 표식은 범용성이 뛰어난 고급 스킬.

그걸 사용하는 순간, 내가 녀석에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멍청한 자식.'

그 고급 스킬을 고작 한 명 죽이겠다고 사용하다니.

나였으면 타이밍을 봐서 못 해도 두 명 이상 죽일 수 있는 순간에 사용했을 텐데.

거기다 한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 수 있었다.

녀석이 가져간 것은 스킬뿐.

초감각 같은 각성 능력은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테크닉이 그대로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콰지지지지지직!

세 명의 스킬을 흡수한 악마가 이제는 고치우와 키아라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어딜!'

나는 경로를 끊으며 녀석에게 곧장 창을 휘둘렀다.

에밋과 테루오미가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지만.

적어도 그림자 표식급의 사기 스킬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플레이어들과 싸울 때도 녀석들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싸우는 건 똑같아.'

콰지지지지지지직! 퍼펑! 펑!

내 뇌전과 녀석의 뇌전이 창날과 손톱에서 부딪히며 격하게 터져 나갔다.

'아이템 효과는 복사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녀석의 뇌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는 뇌신과 벽력섬전으로 인해 완전히 새빨간 뇌전이.

악마에게선 뇌신 하나만 가지고 있을 때 나오는 연붉은 뇌전이 흘러나왔으니까.

만약 녀석이 아이템 효과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지.'

바로 도망쳐야 한다.

그만큼 블라디미르 가면의 효과는 사기적이었으니까.

"테루오미님이 적 병력들을 막아주시고, 키아라님이랑 고치우님은 제 엄호를!"

"알겠소!"

"알겠어요!"

초감각이 있는 나와 달리, 테루오미는 갑작스러운 스킬 연타에 반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는 원거리 딜러인 키아라와 고치우가 날 엄호하고, 테루오미가 적 병력을 막는 게 나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루오미가 후방으로 달려가고, 병사들을 향했던 마법과 화살들이 방향을 틀어 악마에게 향했다.

핑! 핑! 핑! 핑! 핑!

나와 악마를 향해 날아드는 무수한 화살과 마법들.

콰과과과과광!

하지만 그 무엇도 악마와의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크윽! 너에게 그런 스킬은 없을 텐데!

초감각과 마력장으로 공간 전체를 읽어낼 수 있기에,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들을 여유롭게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야를 차단하고 있어, 내가 피한 직후에나 화살과 마법이 날아온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악마는.

푹! 푹! 푹! 푹! 푹!

그 공격들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벌써부터 저릿저릿하네.'

녀석도 천둥의 숨결을 켠 것인지, 근력과 민첩 스텟이 15% 상승해 있었다.

스텟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데도 내가 녀석의 길을 막아설 수 있는 이유는.

콰지지지지지지직! 후욱!

손톱과 창이라는 각자 무기의 리치 차이와.

슬쩍슬쩍 몸을 틀 때마다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 그리고 키아라의 마법 엄호 덕분이었다.

'녀석에게 체력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는 바로 직전까지 병사들을 학살하고 왔기 때문에 아직까진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반면에 악마는 내가 오기 전부터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나와 테루오미, 에밋의 협공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방금 전부터는 천둥의 숨결을 사용하며 체력 소모가 두 배로 늘어난 상황.

체력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후, 내가 무섭더냐? 실력이 안 되니까 같잖은 짓을 하는구나.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내게 붙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화살과 마법 폭격을 맞게 된 악마가 비아냥거렸다.

도발을 해서 어떻게든 전면전을 펼치고 싶은 거겠지.

제대로 싸우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내가 곁에서 계속 공격을 흘려내며 진로를 막자 나부터 처리하는 걸로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런 악마의 비웃음을 나는 그저 무시로 일관한 채 공격을 흘려내는 데 집중했다.

―놀아줬더니 기고만장 해가지고!

순간 악마의 근처에 마나로 이루어진 육각형 모양의 거대한 막이 생성되었다.

기사인 에밋이 가지고 있던 방어 스킬 중 하나인 모양.

통! 통! 통!

악마가 거리를 좁히지 못하도록 찔러 넣는 공격들이 막에 튕겨 나갔다.

그 틈에 악마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검붉은 손톱을 휘둘렀다.

'어딜!'

방어 스킬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까지 내게 그런 식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플레이어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쥐새끼 같은 놈!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고 말겠다!

내가 빠르게 사각으로 움직이며, 직선으로 돌격해 오는 녀석을 벗겨내자, 악마가 으르렁거렸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엄습해오는 불안감.

뒷목이 쭈뼛쭈뼛해지며, 온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내 분신과 싸울 때 느꼈던······!'

쐐애애애애애애애액!

< 83화. 닮은 두 사람(7) > 끝

< 84화. 닮은 두 사람(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