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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거슬리는구나 (1)

프로스트는 제국의 영토였다.

영주, 시리온이 사망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한마디로 모든 건 제국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뚜벅뚜벅.

프로스트의 본성.

구두 소리가 성내에 울리기 무섭게.

기사들이 내게 경례를 해왔다.

웬 기사들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네, 호열 경."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그가 나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했다.

"역시, 나 같은 칼잡이에게 이런 업무는 쉽지 않네."

그래, 제국의 절차에 따라.

프로스트의 영주 대행을 맡은 것은 하르콘이었다.

현실에 소환된 아르카나인 가운데.

제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게 바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 결정엔 내가 관여했다.

"그대라면 분명 잘 해낼 걸세."

최대치에 이른 관계도와 영향력.

그 덕분에 활성화된 [권한] 기능.

그래, 그 권한 기능은 실로 막강했거든.

'하르콘의 고집을 꺾게 할 정도로 말이지.'

탐욕 가득한 나, 이호열이라면 또 모를까.

격식과 절차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이 아니던가?

프로스트가 어디에 버려진 땅도 아니고.

제국의 영토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제국의 절차를 어기고 영지를 꿀꺽하는 것?

'그랑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거지.'

물론, 처음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청렴결백하신 그랑펠과 달리 나는 평범한 인간.

그것도 모자라 주변에서 유난들을 떨었어야지.

-프로스트의 경제적 가치는?

-日 정부, "프로스트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AAU, "국제 협약은 결코 무시되어선 안 되는 것...."

신규 업데이트 내역.

그곳에 프로스트란 단어가 떠올랐을 때부터.

프로스트가 마왕의 마수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언론은 프로스트의 가치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덕분에 나도 조금은 기대를 했었단 말이다.

혹시 내가 프로스트의 영주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고.

-"제국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지만, 나보다는 역시 호열 경이 대행의 자리에...."

심지어는 하르콘조차 그렇게 말할 정도였었지.

그러나 그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권한] 기능을 작동.

프로스트의 상태를 확인하고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북부도시, 프로스트]

[상태 : 최악]

...이거, 괜히 나서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현재 프로스트의 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

유스라 왕국의 초창기 때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유스라 왕국이 아무것도 없던 제로부터 시작했다면.'

프로스트는 오히려 마이너스였으니까.

"주민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쉽지 않겠지만,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네."

하르콘의 말대로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

마왕이 남긴 후유증을 극복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 떨어졌단 사실까지 알게 됐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또 다행이었다.

'...나 같은 놈이 새로운 영주라고 설쳤어 봐.'

괜한 반발심까지 심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잘해봐야 본전이었다. 이거.'

그랑펠의 피곤한 성격 덕을 자주 보는군.

나는 근심이 가득한 하르콘에게 덧붙였다.

"그 자리에 익숙해지게나. 하르콘 경."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네."

"아니, 그대는 반드시 익숙해져야만 하네."

"...경,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과연, 하르콘은 눈치가 빨랐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그를 통해 목격하게 된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마르셀로와 마찬가지로.

하르콘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어느 정도 짐작하던 바였네."

하르콘이 크게 심호흡을 하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짐작이 확신이 되니 감정이 격해지는군."

이내,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경의 말대로. 자리에. 무게에 익숙해지겠네."

그래, 하르콘은 익숙해져야 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프로스트 사태 같은 상황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제국의 황제라도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하르콘의 어깨는 더더욱 무거워져 가겠지.

'...와씨. 이제 보니까 좋을 게 없었잖아?'

이게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영주 자리라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책임질 게 워낙 많아야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권한] 기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영주는 아닌데, 또 영주와 맞먹는 권력.'

물론, 그 막강한 기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순 없었다.

사리사욕대로 휘두르는 권력?

그랑펠의 긍지가 그를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왜, 지금처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거면 또 모를까.

"복구 현황은 어떠한가?"

"길드가 나서준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네."

"그런가. 작업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좋겠군."

스스슥─

나는 곧장 깃털 펜을 들었다.

프로스트 재건.

전반에 걸친 서류들을 살피고 수정할 점을 찾아냈다.

왜, 개선할 점이 눈에 훤히 보였거든.

당연하게도 이것도 그랑펠의 설정 덕분이었다.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설정 속에서.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던 그랑펠이 아니던가.

영지 경영 전반에 걸친 지식?

마법이나 검술에 대한 재능처럼.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문제점을 파악.

그 보완점까지 내놓을 수 있었단 소리였다.

그러니까 하르콘이 나를 격하게 반긴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단 소리다.

"끔찍하군! 경이 없었다면 나는 큰 실수를 할 뻔했어."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지."

"경의 겸손이 되려 나를 부끄럽게 만든 말이야. 정작 호열 경은 실수하는 법이 없지 않은가?"

...뭐하냐, 얼른 대답해라.

매 순간, 순간이 학창 시절 실수의 결과물이라고!

허나, 나의 심정과 다르게.

나는 뻔뻔하게도 침묵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하르콘이었다.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경과 대화를 나누니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군. 물론, 경에게는 또 한 번 신세를 지고 있지만 말일세."

신세라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오히려 나였다.

나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무력을.

아주 사골처럼 우려먹지 않았던가...!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이곳.

프로스트만 하더라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없었더라면.

마왕 토벌은커녕 마왕 구경도 못 해봤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구질구질하게 말꼬리를 늘리지 않았다.

그저 간결하게 대꾸할 뿐.

"모든 일엔 주고받음이 있는 것. 개의치 말게나."

...간결하게 뻔뻔하다!

정말이지 나답기 그지없는 대답.

"하하. 명심하겠네."

하르콘이 호탕한 성격이라 다행이군.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문득, 집무실 창밖에서 소음이 들렸다.

투두두두─

'헬리콥터잖아.'

헬리콥터가 프로스트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하르콘이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시카의 말에 따르면 프로스트의 주민들이 저 하늘을 나는 철 덩어리를 불안한 시선으로 본다고 하더군.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반응이겠지.

우리가 몬스터를 보고 경악했던 것처럼.

아르카나인들에게 현대 문물도 낯선 존재일 테니까.

현실에 소환된 이상.

적응해 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헬리콥터엔 무언가 매달려 있었다.

가지런하지 못하고 치렁치렁하게.

그에 대한 나의 반응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싸늘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심미적으로 심히 거슬리는군."

*

가치가 있는 것엔 사람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게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할지라도.

끼이이익─!

확성기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튀어나오기도 잠깐.

한껏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부는 당장 난민들을 추방해라!"

"추방해라! 추방해라!"

"조국을 위한 국민의 뜻을 거스르지 마라!"

이 무렵의 홋카이도는 원래도 바람잘 날이 없었거늘.

"올해는 징하다. 징해."

민국일보의 정만석을 비롯하여.

일본, 북해도에 모인 대한민국의 기자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북해도의 칼바람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저 시위대 때문이었다.

"진짜 소름 끼친다니까요? 아니, 저러고들 싶나?"

"난민이 뭐야. 난민이."

"자기들도 다 지켜봤을 거 아니에요. 프로스트 주민들이 어떤 상황을 겪어왔는지. 진짜 같은 사람이라면 저럴 수가 없을 텐데."

저건 시위라고 불러주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야 기자들의 눈엔 불순한 목적이 뻔히 보였으니까.

정만석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보나 마나 극우 집단한테 자금을 받았겠죠."

"정부 성향부터가 그쪽인데, 오죽하겠어요?"

"급한 거죠. 사실 일본 상황이 말이 아니잖아요?"

프로스트를 선점하기 위해 국제 협약마저 어겼던 일본 정부.

자국의 이나즈마 길드를 위해 도박수를 던진 것이었건만.

정작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를 필두로, 대다수의 이나즈마 길드원들이 유스라 왕국으로 대놓고 이주해 버린 것이었다.

한동안 난리가 났지.

"사실상 망명이었죠. 그건."

"이나즈마랑 일본 정부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악수 끝에 이젠 무리수까지 던지네. 일본 이미지 나락 가네~"

"어차피 협약 위반한 마당에 끝까지 질척거리는 거겠죠."

투두두두─

대화를 나누던 도중.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

기자들은 탄식도 모자라 셔터까지 눌러댔다.

"저거 현수막에 뭐라고 쓰여 있는 거래요?"

"꺼져. 일본 만세다. 한껏 순화해서 대충 그런 내용이네요."

"대박이네. 저것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국제 협약이 괜히 국제 협약일까.

아무리 억지를 써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일본 정부가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프로스트에 영향력을 끼칠 순 없단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억울하니까 찔러라도 보려는 건지....

아무리 그래도 이쯤이면 찔러보는 수준을 넘어섰다.

상공에 저런 현수막까지 띄우다니.

"의도도 없고. 저건 그냥 순수한 악의잖아요."

악의(惡意).

그래, 가치가 있는 곳에 사람이 꼬인다면.

사람이 꼬이는 곳엔 '악마'가 나타나는 법이었다.

지금처럼 부정적인 기운이 넘실거리는 곳엔 더더욱.

"잘하고 있군."

시위대와 기자들이 가득한 가이드 라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 마에다 켄지는 몸을 떨었다.

추워서? 아니.

소름이 끼쳐서?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마에다는 차오르는 고양감에 몸을 떨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마에다는 더 이상 정부의 각료가 아니었다.

'뭐,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엔 악마가 빙의한 상태였으니까.

마에다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어리석다. 전부 어리석어."

인간이란 어리석었다.

마에다 켄지라고 했나?

이 별 볼 일 없는 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 녀석의 말 한마디에 추잡한 꼴까지 보이는 걸까.

물론, 말했듯 어리석은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주군이시여. 당신도 굉장히 어리석었습니다."

마왕, 데카라비아.

그래, 한때 자신의 주군이었던 악마도 어리석었다.

마왕군 백인대장.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녀석은 비열하게 웃었다.

"언제까지나 악마는 악마다워야 하는 법이지요."

비열하게, 그리고 악랄하게.

악마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은 어리석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마왕군에서 탈영해서, 이렇게 인간의 몸을 차지했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부르르─

어리석은 마왕은 죽었고.

자신은 이렇게 살아숨쉬며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 황홀감에 취했던 마에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런, 기자분들이시군요."

마에다 켄지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민주주의 국가 아닙니까? 다른 의견은 있어도 틀린 의견은 없는 법 아닙니까? 언제부터 시위에 조건이 붙어야 했습니까? 안 그래요? 그나저나 당신들, 국적이 어딥니까? 뭐, 한국?! 그래, 그 속내들을 알만 하군!!"

멋대로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인간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요동을 쳤으니까.

뒷수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마에다 켄지.

놈의 육체가 쓸모없어진다면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때쯤이면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강한 악마가 되어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마왕처럼 어리석게 죽을 생각은 없다.'

왕을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비열하고, 악랄하게, 악마답게.

인간에게 빙의해 살아가리라.

그런 의미에서 녀석은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마왕을 쓰러트린 놈.'

분명, 이호열이라고 했던가.

이호열, 녀석의 육체에 빙의할 수 있다면 최고였다.

별 볼 일 없는 마에다의 육체로도 보는 것처럼.

인간을 휘두를 수 있었거늘.

마왕을 쓰러트린 이호열의 육체를 차지하게 된다면....

'...나는 마왕,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래, 그게 자신이 프로스트를 찾은 이유였다.

이호열의 육체를 차지할 자신?

그야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

마왕처럼 내가 악마다, 떠벌릴 생각은 없었으니까.

제아무리 마왕을 쓰러트린 놈이라고 해도.

마에다의 육체에 빙의한 자신을 알아볼 순 없겠지.

방심한 순간을 노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낚시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미끼를 던졌다.'

시위대와 헬리콥터라는 미끼를.

'이호열, 녀석이 미끼를 물기만 한다면...!'

마에다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투두두두─!

헬리콥터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굉장히 다급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기자들이 소리쳤다.

"자, 잠깐만. 저거 불난 거야? 설마?"

"헬기 고장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현수막이 불타고 있는데요?!"

"...!"

이내, 마에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역시 인간은 어리석어!'

이호열, 녀석이 미끼를 물었다.

마에다는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이건 명백한 적대행위입니다.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프로스트에 들어가서 직접 결판을 짓겠습니다!"

물론, 마에다의 착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로스트에 발을 내디딘 순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 무엇이냐. 이 시선은?'

천적과 마주친 사냥감의 공포를!

.

.

.

레벨이 올라서인가.

신체의 감각이 한층 더 예민해졌다는 걸 실감한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 73화. 거슬리는구나 (2)

마치 탐지기라도 작동시킨 것처럼.

신체의 감각이 예리하게 작동했다.

"...!"

느껴지는 악마의 기척.

[천적관계]가 발동되는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녀석의 위치.

악마가 프로스트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어쨌든, 장하다. 이호열.

'이게 장족의 발전이 아니면 뭐냐. 진짜.'

문득, 떠오르는 악마와의 첫 만남.

남철민에게 빙의한 임프조차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였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이게 같은 악마 사냥꾼이 맞나 싶을 정도.

'아무래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레벨이겠지.'

그래, 그땐 고작 55레벨에 불과했으니까.

현재는 295레벨.

무려 240레벨이나 레벨이 상승했으니까.

게다가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근력과 민첩 스탯까지 챙기며 향상시킨 나다. 그래도 보람이 있구나. 달밤에 체조한 보람이 있어.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그런 의미에서 대체 뭐하는 녀석인가, 싶었다.

프로스트에.... 아니, 그냥 프로스트가 아니지.

최대치의 관계도와 영향력.

내가 [권한] 기능을 활성 시킨 프로스트에.

잡상인도 아니고 감히 악마가 발을 들여어어어?!

악마가 누구인가?

그랑펠에겐 헬리콥터 현수막보다도 미관을 해치는 존재.

"그렇기에 열등한 족속답다."

그 처분은 현수막처럼 태워버리는 걸로도 부족하단 소리였다.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포탈, 랭커 플레이어들조차 사용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고위 스킬.

당연하게도 내게 그런 고오급 스킬 따윈 없었다.

그럼 어떻게 포탈을 발현한 거냐고 묻는다면.

뭘, 새삼스럽게.

스킬과는 엄연히 다른 마법이라는 거지.

'악마의 위치는.'

기척이 느껴진 곳.

그 좌표는 프로스트 성문 앞.

거리도 멀지 않고, [천적관계]도 발동 중이겠다.

기세 좋게 포탈을 발현했건만.

'...마력 먹는 하마네. 이거?'

마력이 눈에 띄게 날아가 버렸다.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런 포탈을 어떻게 유지하는 거야?'

마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마탑과 비교되는 드워프들도 진짜 장난이라고.

그러나 이 호들갑을 내색하는 일은 없다.

뚜벅.

"...뭐, 뭐야?!"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

거기에 악마를 앞에 둔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말이야.

허공에 열린 포탈.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

그 광경에 동요한 중년 남자가 한 명 보였다.

"저기. 무,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마에다 켄지. 십여 년 동안 꾸준하게 정치계에 몸을 담고 있는...."

아니, 그건 겉모습에 불과하겠지.

당연하게도.

그따위 변명에 장단을 맞출 내가, 그랑펠이 아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사냥감과는 말을 섞지 않는 법이라고.

흐르는 정적─

녀석은 이제 애원하다시피 말하고 있었다.

"...그래! 제가 크나큰 실수를 했습니다. 시위대는 물론, 헬기를 띄운 것도 제 불찰입니다. 다시는 프로스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정치계에 몸을 담았다.

그 소리에 짐작하긴 했다만.

역시, 이 녀석 짓이 맞았군.

'예상보다 더하는데.'

백이설 때도 느꼈던 거지만.

악마는 가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었다.

백이설에게 빙의했던 서큐버스.

서큐버스가 신화 길드의 마스터. 그리고 재벌 2세란 백이설의 지위를 적극 활용한 것처럼. 이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인데?

'악마의 기척을 느끼는 감각이 발달한 게.'

악마들이 교묘하게 숨어들수록.

내 예리한 감각이 빛을 볼 테니까 말이야.

생각하던 도중.

문득, 플레이어들의 대화가 들렸다.

"와씨, 호열 님이다!"

"...근데 뭔 상황이래?"

"몰라. 일본 정치인이 사과 박은 것 같은데? 그냥 시위한 거랑 헬리콥터까지 띄운 거 미안하다고. 방금 막 고개까지 숙였음."

"리얼? 안 그래도 시끄러워서 정신 사나웠는데."

...근데, 잠깐. 다 좋은데.

뭐, 호열 님? 경도 모자라서 이젠 니이이임?

그 심히 부담스러운 호칭은 또 무엇이냔 말이다.

물론, 내 심정과 달리.

허나, 그 호칭 또한 마땅하다.

육체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여 버렸으니.

'그래,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저 플레이어들은 생산직 클래스였으니까.

유스라 왕국 재건 때부터 프로스트 복구까지. 본의 아니게 생산직 클래스 일자리 창출을 이뤄냈던 나였으니까. 물론,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 사과할 거면서 왜 저랬대?"

"호열 님이 오시니까 바로 꼬리 내린 거지."

"쌤통이다. 안 그래도 방해됐는데."

쏟아지는 시선.

보는 눈이 많으니까.

안심이라도 한 건가.

악마가 안도하는 게 보였다.

'헛웃음도 안 나오는 착각이네. 그거.'

나는 몰라도 그랑펠은 참지 않는다.

보는 눈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고.

저 사내에게 빙의한 악마를 불태워 버렸겠지.

그러나.

"아야! 얼굴에 맞았잖아!"

"그러게. 누나한테 덤비지 말랬지!"

"이씨. 이제부터 누나라고 안 봐줄 거야!"

긍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 노력하는 프로스트의 주민들.

그들 앞에서 보란듯이 악마를 불태우는 것?

아물어가는 상처를 다시 들춰내는 것?

그딴 건 긍지가 아닌 고집에 불과하다고.

오고가는 눈 뭉치.

나는 눈싸움에 열중인 아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녀석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라."

"다시라면? 아, 사죄하겠습니다! 시위대도 모자라...."

"아니, 다시다."

"예? 넵, 다시 사죄하겠습...."

"다시."

"?"

나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사과할 대상을 똑바로 봐라."

악마의 사죄를 받을 건.

프로스트의 주민이지 내가 아니다.

내 뜻을 알아차린 녀석이 아차 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게 됐다. 얘들아."

남매가 동시에 흠칫하더니.

이내, 누나가 동생을 등 뒤로 숨겼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법을 발현했다.

그래, 사과는 사과고 악마는 사냥해야지.

내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이 몇 갠데.

저런 악마쯤이야, 조용하게 사냥하고도 남는다.

왜, 서큐버스 때처럼 말이야.

그럼에도 나를 돕겠다는 건가.

"저리 가!!"

휙─

동생 쪽이 사내의 얼굴에 눈덩이를 던졌다.

퍽─

얼굴 한복판에 스트라이크.

그와 동시에 발현하는 마법.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타이밍이 딱 맞았는데, 이거?

*

마에다 켄지.

"으음."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병원 침실에서였다.

마에다가 눈을 뜨자마자 곁에 있던 사내들이 입을 열었다.

"마에다 상, 정신이 드십니까?"

"뭔가 굉장히 오랫동안 잠든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런!"

"?"

마에다의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는 이들.

마에다는 의아했다.

말 그대로 정말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난 기분이 들었으니까.

굳이 비유하자면. 그래, 깊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있다가 깨어난 기분이랄까.

마에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 깊은 꿈에서도 일을 하다니. 나 원 참."

단편적으로 꿈의 잔상들이 떠올랐다.

현장에서 시위대와 함께하고.

헬리콥터까지 띄우고.

기자들과 인터뷰도 하고.

...마지막엔 뭔가 높으신 분을 만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마에다의 말에 사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가?'

긴장하기도 잠깐.

마에다가 인상을 찌푸리곤 말했다.

"TV 좀 틀어보게."

"...예?"

"자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잠든 사이에 있던 일을 설명해줄 건가? 다들 말이야. 플레이어라고 자만하지 말고 눈과 귀를 열라고. 뉴스라도 봐야 세상 굴러가는 꼴을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마에다가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집었다.

"나와 함께 일하려면 그 사실을 명심하라고."

그래, 사내들은 전부 플레이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나즈마를 대신할 정부의 개라고 할까.

마에다는 쯧 혀를 찼다.

'말 하나 알아먹지 못해서 어떻게 부려 먹는단 말이야.'

이나즈마와 비교해서 그 수준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다.

그러나 그건 마에다의 착각이었다.

사내들은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라 못한 척한 거였으니까.

다름 아닌 마에다를 위해서.

삑─

이내, TV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목소리.

-인터넷에서 입수한 자료 화면입니다.

화면에 떠오르는 프로스트.

추하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중년 사내.

마에다가 쯧쯧 아까보다 강하게 혀를 찼다.

"누군지는 몰라도 남자가 저렇게 굽실거려서야...?!"

그러다가 깨닫고 말았다.

마에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자신이 아니던가?

"저, 저게 대체?"

"진정하십쇼.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

설마 꿈이 아니었던 건가?

시위대, 헬리콥터, 그리고 높으신 분까지.

그게 전부 현실이었다고?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상한 일이다.

기억이 이렇게 흐릿할 리가 없거늘.

고뇌하던 와중이었다.

연달아 자막이 떠올랐다.

-마에다 켄지. 일본 정치계의 더없는 굴욕!

"내, 내가. 이 몸이 정치계의 굴욕이라고?"

삑─

그래, 원래부터 저 방송사는 편파적이었다.

한류를 찬양할 때부터 알아봤다.

성난 마에다는 채널을 돌렸다.

다른 채널에선 분명 제대로 된....

"!"

타이밍 좋게 떠오른 자료 화면.

퍽─

거기엔 눈덩이를 정통으로 얻어맞는 자신이 있었다.

정확히는 손자뻘이나 될까.

사내아이가 던진 눈덩이에 맞고는 기절해 버린 자신이!

할 말을 잃어버린 마에다.

보다 못한 사내들이 입을 열었다.

"뇌에 이상은 없지만, 기억 상실이 의심된다고...."

"그러니까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마에다 상, 계속 보셔 봤자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삑─

삐빅─

정말이었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나오는 건 자신의 굴욕과 추태.

혹은 이호열에 대한 칭송뿐.

-프로스트의 주민들을 위해 사과를 받는 장면은 정말이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이호열 플레이어의 자세를, 우리 일본의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하지 않나....

"으아아아아아악!!"

마에다는 괴성을 질렀다.

정말 기억 상실이란 말인가?

사고가 따라오질 못했다.

소리치던 마에다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서 내가 추태를 부릴 때 자네들은 무얼 하고 있었지?"

"저희는 말씀하셨던 대로 대기를...."

"대기? 내가 사회적으로 사망에 이를 때까지 대기하는 게 정말 자네들의 임무였나! 내가 보잘것없는 너희 같은 놈들을 이러려고 데려온 줄 알아?! 능동적으로 생각하라고!!"

괜한 불똥이 튄 것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자신의 추태.

마에다는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바보 같은 새끼들! 키워보려고 한 내가 등신이었지!"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륵─

"병원에선 정숙해야지. 그게 예절이고 격식인데."

"...?"

"움직이지 마. 너희로 꼬치 만드는 데에 몇 초 안 걸린다."

"히사기! 자, 자네가 여기엔 무슨 일로...?"

히사기 카즈마.

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히사기가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몰라서 묻나? 알잖아."

병실에 대기 중이던 마에다 측, 플레이어는 총 여섯.

그에 비해 히사기는 혼자였다.

그럼에도 여섯의 플레이어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위압감!'

독사가 내뿜는 살기가 이런 것일까.

히사기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걸 체감하고 있었으니까.

털썩─

히사기가 마에다의 침대 옆에 앉았다.

"물어서 왔어. 윗대가리들한테 말이야. 아, 이제 존댓말은 생략할게. 그쪽도 알잖아? 나 정부랑 연 끊은 거."

"...그러도록 하게."

"그나저나 미쳤어?"

"그, 그게 무슨?"

"단독으로 저질렀다면서 이번 일."

순간, 치솟는 히사기의 살기.

히사기가 말을 이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말이야. 나한테 뒤지기 싫으면 프로스트랑 이호열 쪽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쪽도 알고 있었을 거잖아."

"나도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잘...!!"

"아, 기억이 안 나시나? 그것참 편리한 변명이네."

가벼운 대사.

그러나 히사기의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뇌물 먹인 판사한테나 통할 말은 집어치우고. 의사한테 듣고 왔으니까. 이 대가리에. 사진상에서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는다는데. 어째서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저, 정말이네. 기억이 나질 않아. 제발 믿어주게!"

"글쎄. 조언대로 능동적으로 생각해 보는 중이야."

"...!"

얼어붙었던 플레이어들이 흠칫하기도 잠깐.

히사기가 말을 이었다.

"근데 역시 안 되겠다."

"어흐흐흑. 나도 답답하네. 정말 기억이...! 아니야, 기억이 나질 않아도 사죄하겠네. 내가 다시 프로스트를 찾아가서 사죄를...!"

"그게 아니지. 이번엔 대상이 아니라 시작부터 잘못됐잖아."

히사기가 친절하게 풀어서 말했다.

"그냥 얼씬도 하지 말고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지. 그게 가해자의 반성이라고, 마에다. 그냥 눈에 띄지 않는 게 최고의 사죄니까."

"그렇게 하겠네! 그러니 부디 목숨만은...!"

"글쎄. 다시 한번 능동적으로 생각해 보고."

"크흑!"

오열하는 마에다.

이쯤 하면 됐나.

히사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플레이어들에게 속삭였다.

"끊어진 줄은 그만 잡고 있는 게 좋을 거야."

"...!"

"제대로 눈 밖에 났거든. 끝이라는 거지."

히사기가 덧붙였다.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하자면 줄은 매달릴수록 끊어지더라."

"...명심하겠습니다."

"좋았어."

히사기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계속 능동적으로 생각해 볼 테니까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마에다. 나는 이호열 씨처럼 자비롭지 못하거든. 그런 의미에서 호열 씨한테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마에다는 공포에 질려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언제나 히사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겠지.

허튼짓은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드륵─

히사기가 떠난 병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사내들은 한숨을 뱉었다.

'저게 바로 히사기 카즈마.'

최상위 랭커의 위압감인가.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정신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런 히사기 상보다도....'

그동안 보여준 활약은 물론.

히사기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현까지.

플레이어들은 간신히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대체 이호열은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96]

[능력치]

근력 : 45 / 민첩 : 46 / 마력 : 243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

고작 296레벨이라니.

성장했다는 게 무색하게 빈약한 레벨이다.

그러나 주제 파악 하나는 잘하는 나이기에.

"후우."

이렇게 나약한 육체 단련에.

클래스 퀘스트에 진심일 수밖에.

그래도 오늘은 희소식이 하나 있어서 덜 고독하군.

나는 땀을 닦아내고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 74화. 기우에 불과하다 (1)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마탑의 이벤트.

곧 정기 학회가 시작된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게 정기 학회는 더없이 중요한 이벤트겠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는가."

왜, 지난 정기 학회를 떠올려보자.

뭣도 모를 그 시절에도 마르셀로의 진보된 마법, [『기이』]를 비롯해서 그저 학회에 참여한 것만으로 유용한 마법을 습득했던 나였다.

그런 마탑의 정기 학회야말로.

내게는 마법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대형 이벤트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흥미를 자극하는 법이지."

그래, 이번만큼은 이 허세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균열 공략에 구체적인 명분이 생긴 나였으니까.

보다 적극적으로 균열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상당한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균열에.

'레벨이 부족하면 다른 쪽에서라도 채워야 한다.'

그래서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희소식이란 거지.'

물론, 첫 정기 학회 때와는 달리 나는 처지가 바뀌었다.

퀘스트에도 나와 있듯.

나는 마르셀로의 공동 연구자로서.

수석의 무게를 짊어지게 됐으니까.

"그에 걸맞은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무게와 자리에 익숙한 그랑펠 님이시다.

덕분에 고된 육체 단련이 끝나자마자.

나는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곧장 책상으로 직행.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인 마법 서적에 손을 뻗었다.

그래, 이 묵직한 마법 서적들이야말로.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란 것이다.

"보다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단 뜻이겠지."

정기 학회에 발표되는 연구.

모든 마법은 검증을 거친 수준 높으면서도 새로운 것들.

내겐 짊어진 무게가 있으니, 과거와는 다르게 무엇하나 대충 지켜볼 수 없겠지.

쉽게 말해서 드높은 긍지께서는 발표자들의 노력을 가벼이 취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스륵─

...결국, 죽어나는 건 이번에도 나라는 말씀.

어째, 최근 들어 자취방에 가본 기억이 나질 않는데.

마탑의 연구실.

프로스트.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다시 마탑의 연구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그 세 곳만 오고 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아예 이사하는 게 낫겠군.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잡념은 여기까지다."

촤르륵─

나는 마법 서적을 펼쳤다.

투정이 무색하게도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집중이 필요할 정도로 살피는 서적은 다름 아닌 '비약초'에 관한 서적이었다.

토파즈 홀에서 이뤄졌던 사전 검증.

내가 통과시킨 몇 안 되는 연구들.

그중 하나가 바로 비약초의 육성법에 관한 연구였으니까.

"새롭군."

마탑에서도 낯선 분야라고 했으니까.

내게도 낯선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랑펠이 누구던가?

자신조차 낯선 주제를 정기 학회에 세울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 연구를 통과시킨 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사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된 게 뭐가 이렇게 많아.'

치유학, 약학, 제조학....

외울 건 뭐가 또 이렇게 많다는 말이냐.

그랑펠의 재능이 없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다. 진짜.

하지만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달린 법.

'피할 수 없다면.'

그래, 즐기자.

행복한 미래를 꿈꾸자.

비약초의 육성법.

그 연구가 미래에 값비싼 영약이 되고 포션이 되리라.

김칫국이라도 마셔보자고.

물론, 이제야 체념한 머리와 다르게 육체는 이미 즐기고 있었으니.

"기대되는구나."

스륵─

연구실엔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게 당연하다.

*

삑─

채널을 돌려본다.

-가온 길드와 더불어 이호열 플레이어의 가치는 감히 측정하기조차 힘들다고 할 수....

삑─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 떠오른 메시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건 역시나 이호열 플레....

삑─

-여기서 보여준 기계 장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스킬. 온갖 플레이어들, 클래스를 수소문해봤지만. 저런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는 찾을 수가 없....

어떻게 된 게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이호열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에휴."

최강희 여사는 바닥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핑계를 내세울 수도 없었다.

"뭔, TV만 틀면 얼굴이 나오니까."

솔직한 심정으로 같이 사는 바깥양반 얼굴보다도 아들내미 얼굴을 더 자주 보는 것 같았다. 자기 얘기를 하는지, 모르는지.

싹둑─

바깥양반, 이준욱은 무언가를 집중해서 오려내고 있었다.

"당신 또 신문 오려요?"

"엉?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주 그냥 신문에 이호열 아들내미 이름만 나왔다 하면 가위를 꺼내 가지고는."

"허허.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하기엔 그 입가가 귀에 걸렸다.

신문 기사 스크랩.

최강희 여사의 말대로 이준욱의 새로 생긴 취미였다.

누군가는 궁금해서라도 묻겠지.

딸부잣집 막내아들.

아들내미가 나온 신문을 오려서 보관하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고.

물론, 최강희 여사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당신, 그렇게 모은 기사만 한 박스도 넘는 거 알아욧? 아니, 박스가 뭐야. 이놈의 집구석 어디를 들추기만 하면 신문지가 튀어나오는데...!"

"어허. 이 사람아. 다 그게 나중에 추억이 되고...."

"이 핸드폰으로 뉴스도 보는 세상에 말이야. 지난번에 신문 캡처하는 법도 예림이가 알려줬잖아요? 꼭 종이신문을 오려서 모아야 한다느니. 제대로 정리도 안 하면서 아주 그냥 고집은."

그랬다.

하루 이틀.

신문 한 줄 두 줄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호열.

아들의 이름이 나온 기사?

일간 신문 하나를 사면 거짓말 조금 보태 하나 걸러 한 기사에 호열의 이름이 보였다.

정치, 경제, 심지어는 연예 스포츠 신문에서까지.

호열의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흐아암─ 뭐야. 둘이 또 싸워?"

"싸우긴 누가 싸운다고 그래. 이 좋은 날에."

"저저, 아주 그냥 저 가위는 끝까지 손에서 안 놓지."

3호, 이예림에겐 익숙한 풍경.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TV 속 동생의 얼굴도 더없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요것 봐라? 이예림이 입맛을 다셨다.

"엄마, 내일모레 생일인데 호열이한테 연락 없었어?"

"바쁜데. 걔가 연락할 정신이 어딨겠니."

"아니, 암만 바빠도 엄마 생일 까먹는 아들내미가 어딨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한들.

동생은 동생.

아들은 아들.

이예림이 큼큼 헛기침을 뱉었다.

"내가 아주 하늘 같은 누나로서 한마디 해야겠어."

물론, 그건 핑계.

이예림의 속내는 시커멨다.

그저 동생을 놀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거, 내가 자취방에서부터 알아봤다니까?"

왜, 닭가슴살부터 샐러드 재료까지.

언니들은 이호열에게 속았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그래, 이예림은 그때부터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런 이예림의 시선을 끈 건 다름 아닌 연예 신문에서 접한 호열의 기사.

이예림이 냉전 중인 갱년기 부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는 외국인 며느리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외국인 며느리는 제시 하인네스였다.

제시가 자신의 길드도 뒤로 하고 호열에게 합류했던 사건은 여러모로 큰 화제를 끌었으니까. 물론, 보는 것처럼 이예림의 촉을 끌기도 했고.

"이 가시나. 너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그러지?"

"...이씨. 재미없게. 그럼, 아빠!"

"엉?"

"아빠는 재벌집 며느리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재벌집 며느리는 신화 길드 마스터, 백이설이다.

호열에게 몇 번이고 문전박대당했던 그 백이설 말이다.

지금이야 잠잠해졌지만, 그땐 충격이었지.

팜므파탈로 여자들 사이에서 은근히 인기를 끌던 백이설.

그녀가 자신의 동생, 호열에게 그런 수모를 당하다니.

'언니들도 호들갑 장난 아니었지. 그때.'

혹시 호열이한테 우리도 모르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거 아니냐며 말이야.

그러나 이런 이예림의 망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콩!

"아야! 엄만, 왜 머리를 쥐어박고 그래?!"

"이 가시나는 꼭 뭔 일만 있으면 호열이 놀려먹으려고."

"놀리는 게 아니라 분명 뭔가 있다니까? 엄마가 남녀 사이에 그 복잡 미묘한 관계를 알긴 알아?! 그게 썸이라도 타는지 누가 아냐고!"

싹둑─

잠자코 신문을 오리던 이준욱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니까. 아주 척척박사니까 느그들을 낳았지."

그것도 연년생으로 사 남매를....

물론, 그 말을 끝맺을 순 없었으니.

결국, 최강희 여사께서 폭발하셨기 때문이었다.

"다들 조용!!"

두 사람 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아들이 날마다 TV에 얼굴을 비춘다고 하더라도.

어머니의 마음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호열은 플레이어였다.

지금까지야 걱정하는 쪽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호열은 위기랄 것도 없이 잘해내고 있었지마는....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란 말이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지."

가끔 들르면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일 텐데.

호열이 워낙 바쁜 걸 알았기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챈 이예림이 말했다.

"이러니까 아들내미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는...."

그러나 등짝을 얻어맞기도 전에.

툭툭─

"...이게 무슨 소리래요?"

무언가 창문을 건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창문 쪽으로 향한 이준욱이 기겁했다.

"으억! 저, 저게 뭐야?"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무언가.

그건 날개 달린 종이뭉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이 발현된 편지였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던 편지가 정확하게 최강희 여사의 품에 떨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편지라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무슨 영화 같은 상황이냐, 싶었겠지만.

이젠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우, 우리 호열이가 보낸 거겠죠?"

그랬다.

사실 그 외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동그랗게 말아서는.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에선 기품이 흘러나왔으니까.

이예림이 은근하게 물었다.

"얜 톡으로 하지. 뭔 이렇게까지 한대? 그치, 엄마?"

"그러게. 한창 바쁠 텐데...."

"으이구.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잘했다, 내 동생.

아무리 바빠도 엄마 생신은 챙겨야지.

최강희 여사의 밝아진 얼굴에 이예림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엄마, 얘 진짜 미쳤나 봐!"

촛농을 뜯어내자 들어온 건.

이게 대체 몇 자란 말인가?

쓰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 장문의 편지.

"...호열이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니?"

그것도 단어 하나하나에서 격식이 묻어져 나오는 글줄들.

물론, 편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최강희 여사가 둘둘 말린 편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그 외관이 더없이 익숙했으니까.

이예림이 흠칫했다.

"티백 아냐, 그거? 녹차? 뭐래, 그거?"

빼곡한 편지.

마침내 그에 관한 추신을 찾아낸 최강희 여사가 말했다.

"...비약초? 비약초로 만든 차라는데? 호열이가?"

*

편지를 보내는 데엔 영화처럼 올빼미도 필요 없었다.

필요한 건 그저 조금의 마력뿐.

창문을 열자 비행을 시작한 편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말이야.

격식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석하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엄마, 최강희 여사의 생신이 내일모레였다.

정기 학회만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 가족 행사에 참석했겠지.

그런 의미에선 정기 학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왜, 글로 적은 것만 하더라도 수백 줄인데.

그걸 말로 전한다고 생각해 봐라.

'심지어 그걸 누나들 앞에서?'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정말로.

어쨌든, 비약초로 만든 차를 동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분 다 건강을 챙기셔야 할 나이셨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비약초로 만든 차가 도움될 거다.

포션과 영약의 재료가 되는 비약초가 아니던가?

우려낸 차도 그와 비슷한 효과가 있는 게 당연했다.

'책을 들여다본 보람이 있네.'

당연하게도 그건 비약초에 관한 지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기 학회를 앞두고 온갖 마법 서적을 들춰본 덕분에 비약초의 활용법에 대해서도 대충이나마 감을 잡은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멀었다."

물론, 감을 잡았다는 거지.

깨달았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비약초에 관한 지식은 마법처럼 본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한 마디로 외워야만 하는, 암기 과목이라는 거지.

게다가 비약초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자라는 식물이었다.

광활한 아르카나 대륙.

자라나는 비약초만 하더라도 수백, 수천만 가지라고 했지.

그런 비약초에 대한 지식을 쌓는 다라....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

의심부터 들었거늘.

말했다시피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도 되니까.'

스륵─

그러니까 아쉬운 사람이,

레벨이 아쉬운 나는 우물을 팔 수밖에 없단 말이다.

다시금 들여다보는 비약초 관련 서적들.

그러나 나의 독서는 오래가지 않았다.

──────

비약초는 아르카나 대륙에 자라는 식물의 한 분류로서....

──────

"...!"

문득, 그 구절에서 떠올린 것이다.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에 관한 정보를.

그래, 데카라비아는 새를 사역마로 부리며.

모든 광물과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식물.

그렇다는 건 비약초에 관한 지식도 포함된다는 거잖아.

그래, 내게는 그런 데카라비아가 남긴 전리품이 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그것도 이름과 등급부터 심상치 않은 전리품이...!

'...잠깐, 이거 불순한 지식이라는 게 설마?'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게다가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랑펠의 성격까지.

그러니까.

그저 무심하게 내뱉을 뿐이다.

"모든 가설엔 검증이 필요한 법이다."

◈ 75화. 기우에 불과하다 (2)

검증이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다른 게 아니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 능력이 봉인된 악마의 아이템이니까.

단순하게 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이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아이템의 효과를 당장 확인할 순 없었다.

"모든 것엔 적절한 때가 있는 법."

[구마의식]을 통해 악마의 아이템 정화하는 것도.

사냥할 악마가 있어야지 가능한 법.

물론, 마탑의 서비스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것도 수석의 권한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마탑에 정화를 비롯한 감정을 맡기게 된다면.

마탑 또한 이 아이템의 존재를, 그 효과를 알게 된다.

남을 통해서 효과를 알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약간 김이 새는 일이거늘.

심지어 마탑이 어떤 존재들인가?

끝없이 지식을 탐구하는 집단.

왜, 아스큐라 백작을 처치하고 획득한 아이템, [흡혈귀 백작의 오브]처럼 대여 요청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요청해온다고 하더라도 거절할 테지만.

'무엇보다 내가 정화했을 땐 꽝이 없었거든.'

그래,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거였다.

[구마의식]을 통해 악마의 정화한 악마의 아이템들은 그 효과가 하나같이 특출났었단 말이다.

언급했던 [흡혈귀 백작의 오브]부터.

현재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까지.

'물론, 악마를 사냥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악마 사냥꾼이기에 알고 있다.

악마는 찾으려고 들수록 더욱 숨어드는 비열한 족속.

되려 잊고 있을 때.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나온 셈이겠지.

일단, 닥치고 닥친 일부터 처리하는 게 옳다고.

여기서 닥친 일이라는 건 당연하게도 퀘스트.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는 데 필요한 행동?

그 또한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스륵─

역시나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

마탑의 정기 학회.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였거늘.

단언컨대 이번 정기 학회만큼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회차도 없었으리라.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호열 때문이었다.

"마탑이 어떤 곳입니까?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중 하나. 그것도 모자라서 지식의 상아탑을 쌓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런 마탑에 정식으로 인정을 받다니요. 대단합니다, 이호열 플레이어!"

"그것도 어디 보통 인정입니까? 견습도 아니고, 숙련도 아니고, 심지어 선임 마법사도 아니고! 단 하나뿐이라는 수석 마법사와 같은 지위를 인정받는...."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방송국 놈들은 일찌감치 샴페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건 시청률이 보장된 소재 중 하나였으니까.

VBC.

녹화가 한창인 스튜디오.

프로듀서, 현용석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국뽕만 한 치트키가 또 없지."

"요즘에도 그런 게 먹혀요, 선배님? 요새 젊은 애들 보면 아주 기겁을 하던데. 별것도 아닌 걸로 호들갑을 떤다고. 가끔 반응 살피려고 SNS 보면 난리도 아주 그냥!"

"쯧쯧. 국뽕도 국뽕 나름인 법."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이건 합법적인 국뽕이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 그치는 게 아닌 전 세계적인 스케일.

과장이 아니었다.

"봐봐. 심지어는 일본에서도 난리야. 이호열 보고 동아시아의 우수함을 증명했다느니. 저런 이호열이 홋카이도를 위해서 맹활약을 했다느니."

"...와씨. 진짜네요?"

"다들 몸은 솔직하단 거지."

현용석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단순히 국뽕을 넘어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솔직히 조금 그랬거든. 마탑의 태도가 말이지. 물론, 마탑 득을 크게 본 입장에서야 할 말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마탑은 명백하게 우리를, 인류를 내려다봤잖아?"

그 명성만큼이나 고압적인 자세.

포탈을 상시 개방한 것을 제외한다면.

마탑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는 제대로 얼굴을 비춘 적도 없었지.

만약, 마탑이 협조적인 자세로 나왔더라면.

현실의 상황은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런 종류의 비판이 계속돼도 마탑에 변화는 없었다.

그래, 그런 고고하다 못해 뻣뻣한 마탑에.

호열이 보란 듯이 입성한 것이었다.

그것도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지위로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뭔가 마탑에 한 방 먹인 기분이랄까?"

"에이, 선배. 뭘 또 그렇게까지."

"기왕 먹여준 거 또 한 방 제대로 먹여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무리 호열 씨라 그래도 그건 무리죠. 선배."

현용석의 말에 조연출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우리 호열 씨, 얼마나 눈칫밥을 먹고 있겠냐고요. 그 대단한 양반들 눈에 얼마나 눈엣가시 같겠어요? 저도 처음 이직했을 때, 아이디어 회의 때마다 얼마나 눈치가 보였는데...!"

"뭐야, 그랬어? 말을 하지."

"말로는. 선배, 회의 때마다 한숨만 푹푹 쉬셨으면서. 어쨌든, 저만 해도 그랬는데 얼마나 부담이 되시겠냐고요. 여기도, 저기도, 전부 아르카나인. 심지어 그 대단하다는 마탑의 마법사들뿐인데."

"음. 일리가 있는 말이네. 그거."

어쨌거나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서 마탑에 입성한 호열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능력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현용석은 잘 알고 있었다.

마탑이라고 다를 건 없겠지.

그러니까 여기선 기대보다는 응원하는 게 맞았다.

"그래도 지켜보자고. 이호열이라면 또 모르지."

정기 학회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매스컴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그것도 마법사 계열 클래스 플레이어들은 이번 정기 학회에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속속들이 마탑으로 모여드는 플레이어들.

그들의 얼굴엔 비장감이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그 또한 호열 때문이었다.

"오늘은 진짜 안 졸아야지."

"그건 기본이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근데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거냐?"

마탑에 입성하게 된 호열의 업적!

그건 바로 지난 정기 학회 때 벌어진 '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직접 그 사건을 지켜봤던 플레이어들의 기억 속.

호열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진짜."

"어떻게 태클을 걸 생각을 했지?"

"그것도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한테...!"

그 충격이 워낙 강렬했어야지.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당돌한 지적이 마탑의 퀘스트와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그 광경을 지켜봤기에.

플레이어들은 비장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솔직히 우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혹시 그때 이호열 대사 기억하시는 분 있으세요?"

"탐색 어쩌구.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하, 내 빡대가리."

탄식도 잠깐.

플레이어들이 정기 학회 초청장을 꺼내 들던 찰나였다.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커다란 고깔모자를 뒤집어쓴 제시 하인네스였다.

꿀꺽─

순간, 마법사 클래스 플레이어들 사이에 찾아온 침묵.

이미 아득히 높은 곳으로 멀어져 버린 호열.

그런 호열을 경쟁자로 볼 순 없는 일이겠지.

'가장 거슬리는 건 제시야.'

'이번 학회의 가장 큰 걸림돌.'

'확률 따지자면 역시 제시 하인네스가....'

덕분에 제시는 본의 아니게 만인의 경쟁자가 된 셈.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제시의 입꼬리는 한껏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야, 웃고 있는데?"

"어째 처음 보는 것 같다? 제시가 웃는 거?"

"...웃으니까 더 예쁘네."

"미친놈아. 정신 차려. 경쟁자라니까?!"

물론, 제시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자'는 있어도 말이다.

제시의 머리 위, 고깔모자가 들썩거렸다.

-제자야, 학회를 기대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가 좋구나.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에서, 이제야 마법사다운 티가 나는구나. 그동안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그러나 침묵─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 정적에 고깔모자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고깔모자가 더욱 격하게 들썩거렸다.

-...제자야. 학회 때문에 설레고 있는 거 맞겠지?

설마, 아니겠지?

제발,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다오.

허나, 간절한 애원에도 제자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타다닥.

아찔한 마탑의 계단을 오르던 제시가 문득 멈춰 섰다.

정기 학회가 진행되는 장소, 크리스탈 홀.

제시는 그 입구에서 작게 심호흡했다.

'...왜 제가 떨리는 걸까요!'

그래, 긴장해야 할 건 호열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제시는 마탑을 드나들며 달라진 공기를 미리 느끼고 있었으니까.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을 담당했던 호열.

그런 호열 덕분에 얼어붙은 마탑의 분위기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들 지켜보고 계시겠죠.'

특히나 눈에 불을 켜고 있을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정기 학회의 결과에 따라 학파의 명예와 입지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호열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낸 것과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선임 마법사들이 호열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리가 없겠지.

"!"

그 예상대로.

크리스탈 홀에 들어서자 선임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 숫자를 헤아리니 무려 전원 참석.

'마티스 님까지?'

심지어는 학회에 좀처럼 참석하는 일이 없던 흑마도학, 마티스 딘 카를 선임 마법사도 보였다.

확실히 여태까지와 다른 기류가 크리스탈 홀에 맴돌고 있었다.

그래.

이 순간 크리스탈 홀에 흐르는 정적.

그 속에선 각자 다른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퀘스트에 대한 욕구를 불태웠고.

누군가는 사전 검증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호열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홀에 울리는 구두 소리.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선언한 것이었다.

"정기 학회의 주관.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는 원탁 회의에 참석하는 관계로 이번 정기 학회에 불참한다. 그러므로 그 절차에 따라."

누군가의 걱정이 무색해질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로.

"이번 정기 학회의 주관자는 내가 될 것이다."

*

정기 학회.

원탁 회의.

하필이면 마탑의 두 중요 행사가 겹치다니!

누가 일정을 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여기가 사회였어봐라.

시말서로도 부족할걸. 이건?

'마르셀로, 나를 너무 과하게 신뢰하고 있어.'

나에게 정기 학회라는 짐을 떠맡기다니.

마르셀로에게선 우려하는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지.

-"도와주신 덕분에 원탁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됐습니다."

대체 원탁 회의가 뭐길래.

정기 학회까지 나에게 짬처리를 맡기고 참석한단 말인가?

처음엔 의아했지만.

그 사정을 듣고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탑의 실세라 불리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원탁 회의에선 가장 낮은 직책이었단 소리다.

탑주.

원로 마법사.

그리고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들의 회동이 바로 원탁 회의.

그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뭘.'

나는 탑주는커녕 원로 마법사들도 만나본 적 없었으니까.

원래부터 그 얼굴을 보기 힘든 존재들인 것 같긴 했지.

심지어는 선임 마법사들 중에서도.

윗분들과 마주한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들었다.

그런 의미에선 약간은 기대가 되는데.

-"반드시 좋은 소식을 들고 오겠습니다."

마르셀로가 그렇게 덧붙였거든.

높으신 분들이 참석하는 회의.

거기서 오가는 안건 중에 좋은 소식이라면....

'큰 거 온다.'

뭔지는 몰라도 기대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나 이호열의 잡념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 속내라는 것이었다.

"저는 간섭 과정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학회에 집중하고 있었다.

연구를 발표하는 숙련 마법사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다.

말했다시피 정기 학회에 발표되는 마법들은 한 차례 검증을 마친, 수준 높으면서도 새로운 마법.

뭐든 써먹어야 하는 내겐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엇보다 나는 수석으로서의 무게를 짊어진 상태.

수석(首席)이 무엇인가?

등급이나 직위 따위에서 맨 윗자리.

다른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를 차지한 이상.

긍지가 그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긍지!

덕분에 새벽까지도 온갖 마법 서적을 들추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숙련 마법사의 연구 따위가 흡족하게 보일 수는 없었다.

이곳이 토파즈 홀이었다면 가차 없이 불합격을 외쳤겠지.

하지만 이곳은 정기 학회가 진행 중인 크리스탈 홀.

그것도 모자라서.

나는 마르셀로를 대신해 절차에 따라 그 주관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수석으로서 너그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정녕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것이 나의 기준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

.

.

"그게 정녕 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

이어지는 호열의 말.

선임 마법사, 나스로우의 얼굴이 점차 변화해 갔다.

'감히 환각 마법에 관해 무엇을 안다고!'

분노에서─

"...이, 이럴 수가."

경악으로─

◈ 76화. 기우에 불과하다 (3)

환각 마법.

그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한계가 너무나도 뚜렷한 마법.

"저는 극심한 마력 소모를 보완하기 위해 간섭 과정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가지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자신의 직접 검수한 만큼.

제자의 발표는 옳았다.

환각 마법의 뚜렷한 한계.

그것은 바로 극심한 마력 소모에 있었으니까.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 모든 마법에 한계는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감수하더라도.

환각 마법의 가치와 가능성은 다른 마법보다 크다고.

나스로우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기에 내가, 이 나스로우가 택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선임 마법사란 직위가 무엇인가?

해당 마법학파의 최고 권위자라 칭하기에 마땅한 이들.

그들이 자신의 마법을 최고라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최고라 여기지 못하고 의심을 품었다면.

선임 마법사란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겠지.

그러니까.

나스로우가 분노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말 최선이냐고 물었다."

"한계라면 극심한 마력 소모를 말씀하시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스로우는 비웃었다.

'한계를 들먹이다니.'

호열을 보고 코웃음을 칠 정도로.

저건 지적이 아닌 명백한 실수였다.

말했다시피 분야를 떠나 모든 마법엔 한계가 존재했으니까.

'자충수를 두시는군.'

그러나 이어지는 호열의 포석(布石).

그에 나스로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건 던지는 자충수가 아니었다.

'감히...!'

맞붙어 보자는 승부수였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법이다. 그대는 정말 환각 마법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마법이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탐색 과정부터 불합격이다."

나스로우가 환각 마법에 매료됐던 이유?

간단하다.

환각 마법은 없는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까.

다른 마법과 다르게 탐색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마력 소모는 극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냐?'

그렇게 생각했다면 불합격이라고?

이건 환각 마법 자체를 부정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스로우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지는 호열의 말.

"마력이 존재하는 이상, 마법에 무(無)라는 것은 없다."

계속되는 포석.

그 말엔 나스로우도 맞수를 둘 순 없었으니까.

'...옳다.'

거슬러 올라가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환각 마법의 탐색 대상은 마력, 그 자체였으니까.

그렇기에 마력 효율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

"오직 순수한 마력만이 환각 마법의 탐색 대상이 될 수 있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환각 마법의 한계 극복은 그 탐색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걸 오류로 취급하다니.

다시 들어도 환각 마법을 기초부터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나스로우는 인내했다.

'그 말엔 책임이 필요할 것이다.'

환각 마법의 본질을 부정한 호열이었다.

그에 관한 근거를 내놓아야 할 터.

그럴 수 없다면 저건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했다.

나스로우는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탐색 대상은 빛이 될 수도, 대기 중의 공기가 될 수도 있다. 마력을 탐색 대상으로 삼는 것보다 그 효율이 뛰어날 테니까. 주변 환경에 따라 적절한 탐색 대상을 선정하는 것. 그 또한 환각 마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에 필수 덕목이다."

...빛과 공기가 탐색 대상이 된다?

그 말에 나스로우는 흠칫했다.

마찬가지로.

그 말뜻을 이해한 숙련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허, 허나. 그 말씀은...?"

"그렇다. 우수한 탐색적 재능이 요구된다는 소리겠지."

"그, 그런!"

나스로우는 침묵했다.

'일리가 있다.'

그래, 호열의 말대로였다.

마력이라는 탐색 대상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 환경에 따라 탐색 대상을 선정한다면.

환각 마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탐색 대상이라도 순수한 마력보다는 효율이 뛰어날 테니.'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익숙해져야 할 탐색 대상이 한두 개가 아니란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호열의 말.

"그대가 택한 환각 마법이니. 그 무게에 익숙해지게나."

그 말에 나스로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

그래, 자신이 환각 마법을 택했던 이유.

환각 마법이 다른 마법보다 뛰어나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다른 마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환각 마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환각 마법의 무게에 익숙해지라는 것.

그런 환각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뜻.

당연하게도 거기엔 조금 전 호열이 언급했던.

'우수한 탐색적 재능도 포함된 거겠지.'

나스로우는 호열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제아무리 마법적 지식이 뛰어나다고 한들.

이건 고민이 없다면 내놓을 수 없는 방안이었다.

그 말인즉슨.

호열이 환각 마법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소리였다.

나스로우는 생각했다.

'정말, 마법사가 맞단 말인가?'

동족이기에 알 수 있었다.

마법사란 더없이 이기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호열은 달랐다.

고심하던 나스로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본의 아니게 빚을 져버렸군요."

정기 학회는 이제야 시작됐거늘.

그 시작부터 숙련 마법사도 아니요.

선임 마법사에게까지 빚을 지게 만드는 호열이었다.

*

"...저게 뭔 소리냐?"

"탐색? 간섭? 발현은 또 뭐야. 진짜로!"

"아, 번역 기능은 뭐하냐고 저런 거 번역 안 해주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이번엔 졸지 않겠노라.

굳은 다짐이 무색해지게도.

플레이어들에게선 탄식이 떠나질 않았다.

"야, 남태민. 너는 뭐 알겠냐? 철민 오빠도 알아듣겠어요?"

가온 길드 소속, 마법사 클래스 플레이어.

그녀가 이어폰을 향해 물었다.

호쾌한 목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내가 어떻게 아냐? 그나저나 호열 씨 진짜 장난 아니다.

-그러게. 뭔지는 몰라도 전문가 포스가 느껴지는데?

-저러니까 마탑에서도 수석 대접을 받으시는 거겠지.

-마탑 마법사가 대꾸를 못하잖아?

-캬. 진짜 걱정할 걸 걱정했어야 됐다. 호열 씨가 누군데!

...그래, 나도 바바리안한테 물어볼 걸 물어봤어야지.

말했다시피 이곳.

크리스탈 홀에 모여든 플레이어들은 이번 정기 학회에 많은 것을 걸었다.

혹시라도 퀘스트를 따내고,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호열처럼 마탑에 입성하게 된다면?

무려 마탑과의 접점이 생기는 것.

그야말로 엄청난 퀘스트 보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길드가 달라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들, 뭐라고 말 좀 해봐. 다 들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어폰에 대고 속삭이는 플레이어는 한두 명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만무했다.

길드의 분석관들이 매달린다고 한들.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탐색, 간섭, 발혀어어언? 이게 무슨 개소린데? 그냥 스킬명만 외치면 나가는 거잖아. 마법이란 건!!

『마법』과 [스킬]은 완벽히 다르다.

호열조차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며칠이 걸렸거늘.

플레이어들이 머리를 맞대봤자 알아차릴 수 있을 리가.

그러나 단 한 명.

제시 하인네스만큼은 예외였다.

길드 랭킹 1위.

샤이닝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어서?

아니, 정작 제시는 이어폰조차 끼고 있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에겐 단지 고깔모자라는 스승.

그리고 호열과의 면담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와아."

그렇다고 해도.

제시조차 많은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균열 공략, 몬스터 사냥, 만사를 뒤로 한 채.

온종일 마법 서적을 들춘 끝에.

탐색, 간섭, 발현.

이제야 비로소 마법의 구조를 이해했을 정도랄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단해요!"

호열의 비범함을 알아차리는 데엔 말이다.

고깔모자가 어김없이 한탄했다.

-매일같이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구나.

단 하루.

불과 몇 시간.

호열과의 짧은 문답에 제자를 빼앗겨 버린 듯한 이 기분.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고깔모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그저 평가하는 것과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것.

그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한다.

재능은 필수, 시간과 고민이 요구된다는 소리였다.

고깔모자가 들썩였다.

-과연, 내 흥미를 자극한 사내답구나.

대마법사의 흥미를 자극하는 사내라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취급을 받고 있는지를.

당사자에게 직접 알려주고 싶었거늘.

그럴 수 없다는 게 원통할 뿐이구나.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았다.

-간만에 학회다운 느낌이 드는걸.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탐구.

대마법사에게도 흡족한 광경이었다.

이 또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려주고 싶거늘.

참다못한 고깔모자가 제자에게 속삭였다.

-제자야. 언젠가 저 사내의 머리 위에 나를 얹어주지 않겠느냐? 까칠한 성격에 그 꼴을 허락하지 않겠지만. 왜, 변명은 하기 나름 아니겠느냐? 그래. 그 마법 학교 영화처럼 핑계를 대보자꾸나! 나도 그 모자처럼 말을 할 수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

그러나 고깔모자는 이내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이어지는 발표.

잠자코 있던 호열이 또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문이 드는군."

"...!"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 효과와 기전이 전혀 다른 비약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를 들면 라그라리 잎사귀와 카니리아 꽃잎."

다리조차 꼬지 않은 더없이 올곧은 자세.

또한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는.

자세보다 올곧은 화법.

"두 비약초는 외형과 서식 환경까지 동일하지만, 그 효과는 명백하게 다르지. 그대가 제시한 육성법이 두 비약초를 비롯한 모든 비약초에 공통적인 육성 효과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질문에 고깔모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약초에 관한 지식까지?

말했다시피 이건 재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시간과 진중한 고민이 필요하단 말이다.

설마, 하는 가능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설마 정기 학회에 발표되는 모든 연구를...!

먼저 살피는 것도 모자라서.

개선 방향까지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고민해 왔다는 소리란 말인가?

그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때문에 경악하고 있는 건 고깔모자뿐만 아니었다.

"!"

나스로우를 시작으로.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

커튼, 마이아, 가필드까지.

"!!!"

발표가 계속되고.

호열이 입을 열수록.

그 경악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전 검증에서 쌓였던 감정?

호열에게 보내던 곱지 않은 시선?

그따위 감정 따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몇몇 선임 마법사들을 반성하게 할 정도였다.

'선임이라는 나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던 발상이다...!'

'저 자가 나보다도 많은 고민을 했다는 소리인가?'

'부끄러워요. 제겐 선임의 자격도 없어요!'

그러나.

시선 따윈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는 듯.

호열의 안색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니.

호열은 그저 다음 발표자를 호명할 뿐이었다.

"다음.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

물 만난 고기.

분명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단순하게 지켜보는 처지가 아닌.

수석이자 주관자로서 참석한 정기 학회.

그 무게를 실감해야 하거늘.

'아주 그냥 입만 열면....'

나는 정말이지, 물 만난 고기처럼 나대고 있었다!

연구 하나하나마다 태클을 걸고 있다는 소리였다.

발표하는 입장에서.

이런 내가 얼마나 밉상으로 보일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더더욱 못할 짓을 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교수가, 직장 상사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꼴이잖아, 이건?

그것도 모자라서 뭐? 그게 최선이냐고?

'그야 최선이니까 학회에 발표했겠지!'

나는 물 만난 고기, 그중에서도 미꾸라지가 아닐까.

왜,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것처럼.

학회에서 내 존재감은 미꾸라지 그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생각했다.

'꼬우면 다음부터 시키지 말든가.'

그래, 어중간한 것보다는 미친놈이 되는 게 낫다.

결심했던 대로 뻔뻔하게 학회를 끝마치자고.

그래도 다행인 건.

적어도 헛소리를 늘어놓진 않았다는 거겠지.

'고생한 보람이 있군.'

온갖 서적을 붙들고 산 보람이 말이야.

마법에 관해 뭣도 모르던 시절.

예를 들면 지난번 정기 학회가 그랬다.

그땐 정말이지, 그랑펠의 재능에 의존해 멋대로 지껄였다면.

그래도 지금은 머릿속에 든 게 있었다.

'물론, 다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공부한 거긴 한데....'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써먹기 위해 쌓았던 지식이 도움이 됐단 소리다.

물론, 그게 나대는 데에 도움이 됐다는 게 문제였다만.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아쨌든, 정기 학회도 퀘스트도 이제 끝이군.

나는 마지막 발표자를 호명했다.

"다음.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이번 정기 학회에 연구를 발표하는 유일한 선임 마법사였다.

계속되는 순수마력학파의 부진.

그를 쇄신하기 위한 발표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선임 마법사부터야 사전 검증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그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어떤 심정일지는 짐작되는데.'

뱅그릿 톰.

나는 그를 뇌물로 기억하고 있었다.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입니다. 축하 인사와 약소하지만 전하고 싶은 성의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가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모든 선임 마법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순간.

내 연구실 문을 두드렸던 게 바로 뱅그릿 톰이었으니까.

'낙하산에 매달려볼 정도로 불안한 입지라.'

...어째 고운 말은 안 나올 것 예감이 드는군.

그런 나의 예상은 어떻게 보자면 적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입을 열지 못했으니까.

정적─

나의 호명에도 뱅그릿은 크리스탈 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크리스탈 홀에 뱅그릿 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선임 마법사들이 수군거렸다.

"어디 간 거지?"

"아까까진 분명 저 끝자리에...."

"뭐, 급한 용건이라도 생기셨나?"

"학회보다 급한 용건이 어딨단 말인가!"

수군거림은 커졌다.

기다림은 계속됐다.

그러나 뱅그릿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뱅그릿 톰.

그에게 무슨 사정이 생긴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주관하는 정기 학회다.

내겐 성공적으로 학회를 끝마쳐야 한다는,

퀘스트 목표가 있단 말이다.

나의 긍지가 이런 변수를 용납할 순 없었다.

주목되는 시선 속에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절차에 따라서...."

◈ 77화. 수석의 품격 (1)

"정기 학회는 일시 중단하도록 하겠다."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는 성공적으로 정기 학회를 진행하는 것.

마지막 발표자인 뱅그릿을 건너뛰고 학회를 끝낸다?

그것을 성공적인 마무리라고 할 순 없는 노릇.

나의 긍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뱅그릿 톰. 그가 강단에 서는 순간, 학회를 재개하지."

뱅그릿을 크리스탈 홀에 세우고야 말겠다고!

그나저나 내 멋대로 학회를 진행해도 되는 건가?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나는 다시금 생각할 뿐이었다.

꼬우면 시키지 말았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뱅그릿 톰.

그가 어디에 모습을 감췄는지는 알 수 없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물론, 그 이전에 현 사태에 관한 책임을 따져 묻도록 하겠다."

적절한 사유가 없다면.

그러니까 긍지께서 합당하다 여기실 이유가 없다면.

적잖이 고생 좀 하게 될 거다,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

정적─

다른 이는 몰라도 호열이 강단에 올랐다.

예의와 격식을 더없이 중요시하는 호열이다.

그것도 모자라 '절차'란 단어까지 꺼냈으니.

감히 누구 하나 잡담하거나 경청하지 않을 수 있으랴.

웅성웅성─

그런 호열이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가자.

플레이어들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야씨, 이거 퀘스트 아니냐?"

"딱 봐도 퀘스트각인데?"

"뱅그릿 톰 찾아오면 그때부터 퀘스트로 연결되는 건가?!"

냄새가 났다.

그것도 대형 퀘스트의 냄새가.

무려 마탑의 마법사, 그것도 선임 마법사가 행방불명된 상황이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기 학회에 초청장을 받았다는 것?

쌓아온 경험치만큼 보는 눈치가 있다는 소리다.

"일단, 지켜보자고. 의외로 싱겁게 끝날 수도 있잖아?"

싱겁게 끝날 가능성.

뱅그릿 톰이 마탑 내부에 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뭐, 긴장이 풀린 나머지 어딘가에서 졸고 있다든가."

그런 가능성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임 마법사가 그럴 수 있을까?"

마법사 계열 클래스이니만큼.

마탑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

선임 마법사가 그런 실수를 보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호열을 시작으로.

모든 선임 마법사들이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간 순간.

플레이어들도 자리를 박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실해. 뱅그릿 톰은 마탑 외부에 있다!"

"들었지? 뱅그릿 톰,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어떻게 생겼냐고? 잠깐만,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크리스탈 홀.

그 자리에 남은 건 한 사람.

제시 하인네스 뿐이었다.

제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깔모자는 들썩이지 않고 대답했다.

-확실히 전례에 없던 일이구나.

지금이야 그 명성이 퇴색되었다고 한들.

무려 마탑의 정기 학회였다.

그 정기 학회의 발표를 앞두고 사라졌던 마법사?

대마법사로서의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뱅그릿 톰은 선임 마법사였다.

"이번 연구에 많은 것을 거셨다고 들었는데...."

마탑을 자주 드나들며 견습, 숙련 마법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제시. 그래서 뱅그릿의 처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제시가 중얼거렸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기신 거예요."

-분위기로 보자면 그렇겠지. 허나, 제자야.

"네?"

-이번 일엔 나서지 말도록 해라.

"...?"

스승으로서의 노파심이 아니었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그 말에 담긴 속내를 알아차린 제시가 흠칫했다.

"...뱅그릿 선임께 무슨 일이 생기는 게 가능한 걸까요?"

그랬다.

뱅그릿 톰.

마탑에서의 입지를 떠나 그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

인간보다는 초인(超人)에 가까운 존재.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제시는 잘 알고 있었다.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그런 뱅그릿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일이라면?

이내, 제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들 퀘스트 같은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스승님의 말대로 연관되는 것조차 위험할 정도로.

*

마탑.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의 행방불명.

그 소식은 AAU에도 전달되었다.

"선배! 어떻게 입수한 거예요, 이 떡밥은?"

"어, 왔어? 스트리밍 중인 넷튜버가 있었거든. 정기 학회를 시작부터 방송했더라고. 간도 크지 않냐? 걸리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다시보기가 남아있었어요? 앞으로 좀 돌려봐도 돼요?"

"물론이지."

윤수겸이 되감기 버튼을 클릭.

그러자 떠올랐던 채팅창도 역행하기 시작했다.

채팅창을 바라보던 성현준이 흠칫했다.

근데, 어째 채팅창에 똑같은 말만 가득하다...?

"호멘. 호멘. 호메에에엔? 오늘 도배 장난 아닌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지. 장난 아니었거든. 아까."

"아무리 그래도 몇 시간 동안 도배를 한다고요? 그런데 강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같이 도배하고 있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또 말하자면 길어지는데.

쪽쪽─

윤수겸이 아메리카노를 빨고는 오늘의 기적을 설파했다.

과장하는 게 아니었다.

호열이 보여준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활약이었으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성현준이 기겁하며 되물었다.

"수, 숙련 마법사들을 되레 가르쳤다고요?!"

"그래. 아주 그냥 연구 방향성까지 제시하더라."

"그게 말이 돼요? 아니, 이해가 안 되는데?"

플레이어에 불과한 호열.

그가 어떻게 마탑의 마법사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성현준은 아직도 납득이 안 된 모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렇죠. 더 납득이 안 되는 게 있으니까."

"뱅그릿 톰."

그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행방불명됐다는 것.

그게 AAU에 비상이 떨어진 진짜 이유였으니까.

성현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갑자기 어디로 튄 거래요?"

"그건 지금부터 파악해 봐야지."

"아니, 진짜. 뭐, 다른 NPC가. 아니, 다른 아르카나인이 행방불명이 됐다고 하면 그렇구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넘어가겠는데...!"

말했다시피.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존재들이던가?

심지어 뱅그릿 톰은 그중에서도 선임 마법사란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AAU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활동하라고 설정된 NPC들이 아니잖아요. 마탑의 마법사들은? 게네들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국이고 뭐고, 마탑을 제지할 수 있는 건...."

윤수겸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오버하지 마. 누가 마탑이 단체로 움직였대? 그냥 뱅그릿 톰이 혼자서 멋대로 사라진 것뿐이지."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선배! 만약에. 진짜 만약에. 플레이어들 추측대로 뱅그릿 톰하고 관련된 퀘스트가 떠오른다고 쳐봐요. 막말로 플레이어들이 뱅그릿 톰하고 대적하는 일이 생긴다고 쳐보자고요."

"야. 상상하기도 싫다. 그건."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만약, 뱅그릿 톰이 플레이어들의 적이 된다면.

그는 마왕, 데카라비아보다 강대한 적이 될지도 모르겠지.

"뭐가 꼬여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야, 대체."

으아아악─

신음하며 머리를 쥐어뜯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니까 성현준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도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선배, 윤수겸은 걱정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으니까.

"...선배는 괜찮아요?"

"응? 뭐가?"

"아니, 예전 같으면 나보다 더 난리를 치셨을 양반이...."

"아, 믿음이 생겼거든."

"믿음? 선배, 어디 뭐 종교 믿기로 시작했어요?"

"종교?"

윤수겸이 피식 웃었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는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다시금 재생되는 영상.

스피커에서 호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뱅그릿 톰. 그가 강단에 서는 순간, 학회를 재개하지."

"!"

그래, 호열이 있었다.

행방불명된 뱅그릿 톰.

그 대단하시다는 선임 마법사보다도 높은 직위.

무려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는 호열 말이다.

"마탑의 설정을 떠올려 봐. 운 좋게 수석 공동 연구자 자리에 앉게 됐다고 해도,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금방 지위를 박탈당했을 거야. 마탑의 수석이란 그런 자리니까."

윤수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절로 믿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것도 모자라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을 올렸던 호열이 아니던가?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호멘, 호멘. 도배가 멈추지 않던 이유를 좀 알 것 같네요."

물론, 호열만 믿고 있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없는 일이겠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두 사람의 생각.

'호열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

눈빛 교환도 잠깐.

타다닥─!

성현준과 윤수겸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니까. 버그가 터진 건 아니겠고."

"그럼 모습을 감춘 데에도 뭔가 목적이 있는 거겠죠?"

"맞아. 그 목적을 알아야 어디로 갔을지 추측이라도 해볼 수 있어. 문제는 그 목적을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건데.... 일단, 마탑 설정부터 뒤져볼까?"

*

그래.

모든 행동엔 목적이 있는 법이다.

지금과 같은 뱅그릿의 돌발 행동에도 목적은 있겠지.

그래서 뱅그릿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게 묻는다면.

"용변이 급했다고 한들. 양해를 구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잠깐, 아무리 예절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크리스탈 홀에서 어떻게 화장실이란 단어를 꺼내겠냐?!

사람들에겐 수치심이란 게 존재한단 말이다, 그랑펠.

보다시피 영양가 있는 대답은 나올 순 없었다.

하지만 뻔뻔하게 헛소리를 뱉는 나와 다르게.

그 목적을 짐작할 수 있는 이가 있었으니.

"과연, 짚이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마르셀로였다.

마르셀로가 움푹 팬 눈을 부릅떴다.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뱅그릿이란 인간을 잘 알고 있다 생각합니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문제까지 말입니다."

과연, 그렇다면 나한테 성의를 가장한 뇌물을 건네려던 것도 이해가 가는군. 자신감이 없어서 뇌물 따위에 의존하려던 거겠지.

끄덕끄덕─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사로운 문제에 불과합니다. 누군가는 줄어든 입지 탓에 심리적 압박을 받은 뱅그릿이 학회를 앞두고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는 순수마력학의 선임 마법사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셀로의 말뜻은 간단했다.

고작 이따위에 압박감에 종적을 감출 정도로.

마탑의 선임 마법사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거기에 대해선 나도 더없이 공감하는바.

"그렇기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마르셀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원탁 회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뜸을 들인 이유가 있었구나!

원탁 회의란, 마탑 수뇌부의 회동.

그 수뇌부 회의에서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내심 궁금했던 게 사실이었지.

물론, 내색은 없었다.

이럴 땐 포커페이스에 감사한다. 정말.

"예정되어있던 원탁 회의가 연기되었습니다."

...그런데 뭐? 연기가 됐었다고?!

잠깐만, 그러면 나는 왜 그 고생을 한 거란 말인가!!

순간, 속에서 들끓는 억울한 감정.

'포커페이스에 감사하기는 개뿔!'

그 따위 감사는 취소하겠다.

이러다가 나는 화병으로 단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나 나는 미동도 없는 어조로 되물었다.

"원탁 회의의 연기는 언제 결정된 사안인가?"

"짐작하신 대로. 정기 학회 도중에 결정되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뱅그릿이 크리스탈 홀을 떠난 시점과 유사합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건 뱅그릿 톰의 행방불명이 마탑의 수뇌부.

탑주 혹은 원로 마법사와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이거,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분명, 마르셀로도 그런 뜻으로 말을 꺼낸 것이거늘.

이건 무슨 음모론도 아니고.

갑자기 높으신 분들이 튀어나오니까 흠칫할 수밖에 없군.

하지만 말했다시피 내색은 없다.

그런 나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마르셀로가 작게 웃었다.

"역시, 그 또한 짐작하고 계셨군요."

"?"

"그렇습니다."

짐작하긴 내가 무엇을 짐작했단 말인가?

어째 더 놀랄 것이 남아있다는 듯한 이야기.

나는 마음을 다잡았지만 헛수고였다.

"이것이 말할 수 없었던 마탑의 사정입니다."

그 순간,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진실]

마법사의 탑엔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을 밝혀내고.

마탑과 진리를 바로 세워라.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진행 중)

...이렇게 연결되어 있던 거였어?

위에서부터 얼마나 복잡하게 꼬여있는 거야, 이거.

마르셀로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할 때부터 직감했건만.

정작 실체를 알게 되니까 충격이 배가 되는 것 같다.

'그냥 마탑 마법사도 아니고 수뇌부라니.'

그러나 속내와는 다르게도.

나는 대꾸했다.

더없이 뻔뻔한 음성으로.

"그대의 고충을 이해하네.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바보들이라니까? 머리를 써야지!"

마탑의 로비.

그곳에서 몇몇 플레이어들은 대기 중이었다.

"무작정 뛰쳐나가서 어쩔 건데? 그럼 걔가 짜잔하고, 마중이라도 나온대?"

뱅그릿 톰을 찾아 나서는 것도.

뭔가 단서를 찾아야 찾아낼 수 있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다들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래! 모르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우리처럼."

그 플레이어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호열이었다.

호열 또한 뱅그릿 톰을 찾아 나설 게 분명했으니까.

호열이 누구인가?

마탑의 수석 공동 연구자.

당연하게도 마탑에 관한 정보가 누구보다 많을 터.

"이호열만 쫓아가면 뭐라도 나올 거란 말이지."

따라가되 이호열보다 먼저 뱅그릿 톰을 찾아낸다면?

퀘스트와 보상은 우리의 차지다.

그게 바로 대기 중인 플레이어들의 목적이었다.

또각─

기다림 끝.

들려오는 구두 소리.

"이호열이...."

하지만 그 불순한 목적은.

"...다아앗?!"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뒤에 저 해골은 또 뭐야? 스켈레톤?"

해골도 아니었다.

그저 해골처럼 메마른 사내였다.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를 알아본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으니까.

"마,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가 어떻게 이곳까지...?"

"잠깐, 포탈로 향하고 있어요. 저 두 사람!!"

"마탑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설마, 이호열 때문에?!"

◈ 78화. 수석의 품격 (2)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지껄인 대사 중에 뭔가가 있었나?

"그대의 고충을 이해하네."

그건 그냥 인사치레였다.

그래, 마탑 수뇌부가 이번 일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게다가 그런 엄청난 일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하루하루가 고뇌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겠지.

마르셀로가 야위어가는 이유가 괜히 있던 게 아니었다.

"비로소 수석의 무게를 실감하는군."

역시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그다음 대사도 그런 뜻에서 뱉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간만에 외출이군요."

마르셀로가 나를 따라나선 것이었다.

절대 움직이지 않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중에서도 수석 마법사인 마르셀로가.

나와 동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화냐.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때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들과 달리 마탑의 마법사들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별다른 활동이 없던 존재들이었으니까.

제국의 황제조차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단 말이다.

'...플레이어 최초가 아니라 역사상 최초 아닐까, 이거?'

그런 생각에 속마음이 들뜨기도 잠깐.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래, 마르셀로가 움직인 데엔 이유가 있을 거야.'

다르게 말하자면.

[퀘스트 : 마탑의 진실]

마법사의 탑엔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을 밝혀내고.

마탑과 진리를 바로 세워라.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진행 중)

이 퀘스트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소리겠지.

딱 봐도 그래 보였다.

퀘스트 목표가 뱅그릿 톰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니까.

뱅그릿 톰이 누구인가?

무려 마탑의 선임 마법사였다.

만약, 뱅그릿이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자.

'나 혼자서는 절대 무리다.'

마법에 관한 재능, 지식을 떠나서.

내 레벨은 고작 296레벨.

덕분에 절대적인 마력량이 형편없었으니까.

[천적관계]가 발동될 일도 없겠고.

나는 마력의 체급 차이로 뱅그릿에게 압살을 당하겠지.

그렇게 주제를 파악하자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과거.

예절을 들먹이며 뱅그릿을 문전박대했던 나의 모습...!

괘씸죄가 추가돼도 억울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건.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마르셀로, 내겐 그보다 든든한 지원군도 없었으니까.

"아직 청중들이 남아있었군."

로비까지 내려오자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뭔가 속닥거리는 게 놀란 눈치가 확실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나도 경악을 했었으니까.

물론, 지금처럼 내색은 못 했지만.

"괜찮은가?"

남의 시선, 평가 따위야 하찮게 여기시는 나는 상관없었지만.

마르셀로는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본데?

"이곳까지 내려온 순간, 예상했던 일입니다."

그렇겠지.

지금 마르셀로는 마탑의 수뇌부.

그들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리가.

'뭐, 나도 다를 바 없고.'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줄 몰랐거늘.

마탑의 수뇌부와 마르셀로.

나는 그 사이에서 마르셀로의 라인을 타버린 것이었다.

...빌어먹게 어렵다. 사회, 아니 마탑 생활!

게다가.

정기 학회 주관자로서의 긍지가 걸린 문제가 아니던가?

설령 마르셀로가 나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놈의 긍지께서는.

기어코 뱅그릿을 강단에 세워야만 직성이 풀렸을 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마르셀로가 말을 덧붙였다.

"또한 경에게 언제까지 빚을 지고 있을 순 없습니다."

빚?

나한테 빚을 졌다고?

뭐, 나 몰래 부유 정원에 외상이라도 달아놨나 싶었건만.

애초에 공짜잖아. 선임 마법사 이상은.

게다가 내가 마탑에서 앞으로 뜯어먹을 게 얼마인데....

나도 모르는 빚 정도야 상관없었다.

그래야 나도 청렴결백 따지지 않고 필요한 걸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개의치 말게나."

"...?"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니."

그 순리는 당연하게도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는 것.

마탑의 기둥을 뽑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란 거지.

내 말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마르셀로가 흠칫하더니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포탈에 도달.

잡담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이제부터는 뱅그릿의 확보.

그 하나의 목표만 생각해야겠지.

'그래서 어디로 튄 거냐, 뱅그릿 톰?'

그에 대한 답은 마르셀로가 내놓았다.

순간, 마르셀로의 몸에서 일렁이는 마력.

...소름이 끼칠 정도로 광범위한 규모의 발현!

방대한 마력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도 아니었건만.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실감했다.

다행이다. 마르셀로가 내 편이라서.

그래도 내가 인복 하나는 괜찮다.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잠깐.

마르셀로가 마력을 거둬들였다.

"이 세계에 뱅그릿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격하는 순간.

마법의 구조를 파악하는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조금 전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도 파악한 나였다.

그래, 마르셀로는 그 찰나의 시간.

이 세계, 지구에서 뱅그릿의 위치를 추적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뱅그릿의 마력을 탐색.

전세계라는 광범위한 지역에 간섭.

추적 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진짜 상상초월이다.

괴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전 세계에 간섭이라니.

대체 마력량이 얼마나 된다는 거야.

물론, 나는 놀란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답이 나왔어? 뭔 소리야. 또."

"우리 헛수고한 것 같은데? 저건 무슨 암호도 아니고!"

"이 세계 없다면 어디 있다는 거야?"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나는 그 뜻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뱅그릿이 이 세계도, 아르카나 대륙도 아닌.

[『기이』]의 공간.

균열 속에 있다는 사실을.

*

마르셀로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개의치 말게나. 모든 일엔 순리가 있는 법이니."

그건 호열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되뇌어 보아도 마르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개의치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탑은 악마 사냥꾼에게, 악크샨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단 말이다.

그러나 호열은 그 빚을 갚으라고 하기는커녕 순리라고 말했다.

'...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호열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기에.

그런 과거를 순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일까.

마르셀로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욕심이 생겼다.

'저도 그 미래를 목격하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서둘러야만 했다.

그것이 마르셀로가 호열과 동행한 이유였다.

'이번 수는 명백히 악수였습니다.'

그것은 원로 마법사들을 향한 읊조림.

그 목적은 알 수 없다만.

원로 마법사들은 뱅그릿 톰을 마탑 밖으로 떠밀었다.

뱅그릿의 의지일 순 없었다.

마탑의 마법사는 수뇌부의 승인 없이는 마탑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내가 아는 뱅그릿은 그런 사내가 아니다.'

그래, 그것은 동료에 대한 확신이었다.

능력에 비해 자존감이 지극히 떨어지는 그 사내가 마탑의 규율을 어긴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장담할 수 있었다.

'이 악수가 되려 그대들의 목을 죄어갈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뱅그릿의 신병 확보가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뱅그릿의 증언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마르셀로는 원로 마법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결코 살려두지 않겠지.'

마르셀로는 지체하지 않았다.

추적 마법을 발현.

뱅그릿의 위치를 특정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계획적이다.'

서울, 아니 지구라는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뱅그릿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순수마력학의 선임 마법사.

섬세하게 마력을 다루기로 유명한 뱅그릿이 아니던가?

그는 단서가 될만한 마력흔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뱅그릿은 균열 속에 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군."

역시나 호열에게 설명 따윈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균열 속에 있다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

균열.

그곳은 마르셀로조차 이제야 첫발을 내디딘 [『기이』]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런 균열 속에 있는 뱅그릿을 찾아내는 것?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그런 곳에 있었군. 뱅그릿 톰."

...일이거늘?

설마, 호열 경께서는 그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것인가!

말했다시피 호열이라고 해도 마법으로 균열 속 뱅그릿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할 터.

대체 어떻게 뱅그릿의 위치를 알아냈단 말인가?

경악하는 마르셀로.

그런 마르셀로에게 호열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이엔 기이로 맞서야 하는 법."

.

.

.

그대로 포탈에 진입.

뒤바뀌는 풍경.

나는 탄식을 머금었다.

...아주 그냥 말은 잘한다. 그것도 허세 넘치게.

'그냥 문자를 받은 게 전부면서 말이야.'

내가 뱅그릿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던 이유?

간단했다.

남태민한테 전달받았거든.

정확히는 남태민을 통해 내게 전달된 AAU의 정보를 말이야. 그 메시지엔 신규 업데이트 내역과 균열의 위치가 첨부되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신속하지.'

대격변 이후.

균열에게 시달렸던 인류였다.

덕분에 균열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

그거 하나만큼은 마법보다 빠른 게 당연했다.

왜, 요즘 인공위성은 사람 얼굴도 촬영할 수 있다는데 말이야. 균열 찾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이다.

'한마디로 과학의 힘이란 거지.'

기이엔 기이로 맞선다....

그러니까 또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거?

물론, 같은 말을 해도 잔뜩 힘을 줘서 말한 덕분인가.

"지난번에 언급하셨을 때와는 또 다른 발현...!"

마르셀로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여기서 지난번은 티타임을 가졌을 때겠지.

손가락만 까딱하면.

필요한 물건이 마탑 앞까지 도착한다고.

로켓 배송의 위대함을 설파하던 나였다.

나는 그저 다른 앱을 실행했을 뿐이거늘.

마르셀로에겐 그게 새로운 발현으로 보이는 모양.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의문이 있다면 언제든 묻게나."

이걸 듣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고작 알려줘 봐야 스마트폰 사용법 정도면서 말이야.

생색은 엄청나게 부린다. 진짜.

물론, 지금은 사이좋게 떠들 상황이 아니었다.

뒤바뀐 시야.

이내, 모습을 드러낸 균열.

마르셀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것이 기이의 공간, 균열이군요."

그래, 저 균열 안에 마르셀로가 있다.

확신할 수 있는 이유야 간단하다.

신규 업데이트 내역.

그리고 균열에 접근한 순간.

떠오른 메시지.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을걸?

*

호열을 제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플레이어는 제시 하인네스가 유일했다.

퀘스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탑의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만에 하나 그가 폭주라도 하기 시작한다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플레이어들이 뱅그릿을 자극하게 놔둘 순 없었다.

제시는 샤이닝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신규 업데이트? 뭐야, 오늘 목요일 아니잖아?"

예상치 못한 업데이트 내역이 떠올랐으니까.

예정된 신규 업데이트가 아니어서일까.

그 내역은 간단명료했다.

"...이런 미친. 이게 뭐야?!"

하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

신규 균열, '깨진 차원의 틈'이 추가됩니다.

적정 레벨 : Lv.900

──────

"...적정 레벨이 900레벨이라고?"

"오류 아니야? 오타라든가?"

"그, 그래! 9랑 6을 뒤집어서 썼을 수도 있잖아?"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탑에서 터진 사건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업데이트 내역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잠깐, 내가 상상하는 게 현실이 된 건 아니겠지?"

"마탑의 선임 마법사. 그 괴물이 저 균열 안에 있다고?"

"적정 레벨이 900인 것도 이해가 되는데...?"

900레벨.

실로 압도적인 수치.

그건 퀘스트에 목숨을 걸었다고 다짐한 플레이어들조차 포기하게 할 정도였다.

아니, 플레이어뿐만 아니었다.

길드들도 이런 큰 위험을 감수하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뒤따를 수밖에 없는 생각.

"...그럼 저 균열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더 나아가 저런 균열이 붕괴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소식이 전해진 건 그때였다.

"호열 씨?"

이호열.

그가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남태민은 직감할 수 있었다.

호열이 저 균열에 진입할 생각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문자를 보냈다.

"제가 거기서 도움이 될진 모르겠는데요."

곧바로 협력하겠다고.

남태민은 주먹을 쥐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냐고?

어차피 호열이 없었다면 프로스트에서 죽거나, 죽는 것보다 못한 상태로 살아가야 했겠지.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서 호열이 형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맨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겠습니다."

그런 남태민이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

...어째 옛날 생각이 나는 답장이 도착했다.

곤란하군.

그때 받았던 답장보다는 딱 두 글자 더 많았지만.

담긴 뜻은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부 사정이다.

"...내부 사정?"

남태민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이건 마탑 내부의 사정이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집안싸움이라는 거지.

물론, 지원군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긴 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적정 레벨이 900레벨인 게 뭐 어쨌단 말인가?

저 균열 안에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있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내 옆에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있단 말이다.

그래, 이것은 근거 넘치는 자신감.

고상한 표현으로 호가호위라는 것이다.

[깨진 차원의 틈]

[적정 레벨 : Lv.900]

[균열 붕괴도 : 4.8%]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더없이 뻔뻔한 목소리로.

"신속히 끝내도록 하지."

◈ 79화. 수석의 품격 (3)

[깨진 차원의 틈].

그 이름에 맞게 균열의 풍경은 심상치 않았다.

원래도 기이한 풍경을 자랑하는 균열이긴 하다만.

여긴 기이한 수준을 넘었잖아.

'대충 그래픽이 깨졌을 때랑 비슷한데.'

무엇보다 현실과 아르카나.

두 세계 중 어느 하나의 풍경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억지로 균열을 열어놓은 듯한 광경이랄까....

'잠깐.'

그러고 보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오늘은 목요일이 아니었다.

신규 업데이트.

신규 균열이 등장하는 날이 아니란 것이었다.

그렇다면 [깨진 차원의 틈]은 예정된 균열이 아니란 소리.

억지로 열어놓은 균열 같다는 내 감상도 헛소리는 아니겠군.

"모든 균열이 이렇게 생겼습니까?"

"아니. 기이의 공간은 이토록 형편없지 않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과연, 마르셀로였다.

균열에 진입한 건 처음일 텐데.

곧바로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다니.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말씀대로. 내부 사정이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건 없겠지요."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마탑의 수뇌부가 연관된 일이었다.

선임 마법사가 행방불명된 것도 모자라서, 그의 행방불명이 마탑 수뇌부에 연관되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파급력이 장난이 아니겠지.

"신속히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마르셀로의 선언.

다시금 말한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진심으로.

그런 마르셀로의 몸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한 차례 지켜봤기에 그 탐색 과정을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추적 마법이었다.

이내, 마르셀로의 퀭한 눈매가 번뜩였다.

"뱅그릿의 마력을 포착했습니다. 포탈을 열겠습니다."

그 즉시 포탈을 발현.

...나 같았으면 방금 두 번의 발현으로 마력이 3분의 1은 날아갔을 텐데.

마르셀로에겐 조금의 마력 소모도 없어 보였다.

다시금 주제 파악을 하게 된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그러나 나의 존재감만큼은.

남들에 절대 뒤처지지 않았으니.

또각─

"...누구냐!"

모든 건 이놈의 구두 소리 때문이겠지.

그랑펠의 성격에 인기척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 보폭엔 언제나 힘이 넘치는 법.

"마, 마르셀로 님? 이호열 공동 연구자까지?"

덕분에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뱅그릿과 마주할 수 있었다. 헝클어진 갈색 곱슬머리. 심히 당황한 듯한 그 반응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적대적인 것 같진 않은데.'

나보다 먼저 입을 연 건 마르셀로였다.

"뱅그릿. 어떤 사연인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마르셀로 수석. 저, 저는."

"우린 당신을 추궁하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닙니다."

"...!"

뱅그릿이 고개를 떨궜다.

다시 한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나 혼자 이 균열에 들어왔어 봐라.

'아주 그냥 시작부터 독설을 내뱉었겠지.'

뭐, 뇌물을 주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느니.

너 때문에 내가 주관한 학회를 망쳤다느니.

이것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말로 설득하기는 불가능한 상황 같군.

뱅그릿의 몸에서 마력이 일렁거렸으니까.

"...당신이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르셀로 수석. 하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순수마력학.

비효율적인 탐색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순수한 마력을 무기로 삼는, 그렇기에 파괴력만큼은 어느 마법에도 뒤처지지 않는 마법. 그런 순수마력학의 정점이라 불리는 뱅그릿 톰.

고오오오─

그가 마법을 발현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하시길."

스오오오오─!

보자마자 파악할 수 있었다.

응축된 마력의 광선.

마법의 구조는 분석할 것도 없이 간단명료.

탐색 대상은 오직 방대한 마력.

오로지 파괴력만을 극대화한 간섭.

그리고 더없이 신속한 발현.

"!"

콰콰콰콰쾅─!

그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치지지지직─!

대지가 분쇄되고 대기가 요동쳤다.

솟아오르는 흙먼지조차 흔적 없이 증발했다.

...실화냐.

더욱 무서운 건 뱅그릿의 마법에 살의가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 뱅그릿은 단지 우리를 멀리 떨쳐낼 생각이었다. 마법의 빗나간 궤도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빗나간 마법의 파괴력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이라니.

이게 마탑의 선임 마법사란 말인가?

괜히 마탑이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마르셀로는 방어막을 발현, 후폭풍을 상쇄했다.

정말이지, 마력이 넘쳐나기에 가능한 호신법이군.

'미치도록 부럽다.'

당연하게도 나는 마력을 최대한 비축해야 하는 처지.

언제나처럼 구질구질하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탐색 대상은 이 공간에 넘실거리는 순수한 마력.

정확히는 뱅그릿의 마력이었다.

나는 몰아치는 마력의 후폭풍을 탐색.

간섭하여 마법을 발현했다.

당연하게도 복잡한 간섭은 불가능하다.

말했다시피 그 위력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휘말리지 않기 위해선 간섭 과정을 단순화해야 한다.

물론, 필요하지도 않았다.

탐색 대상은 그저 순수한 마력.

나는 이런 순수한 마력에 어떻게 간섭하여 발현해야 하는지.

경험을 통해 습득한 참이었으니까.

두둥실─

허공에 떠오른 수백 개의 마력 구체.

그래, 라이트였다.

순수마력학의 기초 마법 라이트 말이다.

"...!!"

순간,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들.

마르셀로와 뱅그릿은 어째 못 볼 거라도 본 눈치였다.

온갖 고위 마법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이런 하찮은 기초 마법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하지만 이것이 내 최선이자 내 방식이다.

296레벨이라는 하찮은 수치로.

900레벨 균열에서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란 말이다.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단 말이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환영 인사치고는 격하군.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구질구질하게 되받아친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뱅그릿이 소리쳤다.

"젠장, 제발 저를 가만히 놔두십시오!"

이쯤되면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 아닐까.

스오오오오─!

뱅그릿이 다시 마법을 난사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마르셀로도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신속한 발현.

콰콰쾅─!

방대한 마력이 충돌하는 현장.

그 승자는 명확해 보였다.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런 무의미한 짓을 원치 않습니다. 뱅그릿."

저것이 바로 마르셀로가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이유.

그래, 현존하는 마법 대다수를 이론으로 정립하는 데에 성공한 마르셀로였다.

그 말은 물고 물리는 마법의 상성을 마르셀로보다 잘 알고 있는 마법사도 없다는 소리였다.

"젠장!"

결국, 물러난 건 뱅그릿이었다.

단거리 텔레포트.

뱅그릿이 다급하게 몸을 피했다.

...전장이 균열 속이라는 것에 감사한다.

현실에서 이 난리를 쳤다고 생각해봐.

벌써 빌딩이 수십 채는 날아가고, 산이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스케일이었다. 그러나 이 승부의 결말은 뻔해 보였다.

수석과 선임.

그 차이는 명백해 보였으니까.

뱅그릿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인가.

섣불리 마법을 발현하지 못했다.

그런 뱅그릿이 빠득─ 이를 갈고는 말했다.

"...알고 계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이게 바로 이유였습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

뱅그릿이 마르셀로를 노려봤다.

"제국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마도 가문의 핏줄로 태어나,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마르셀로 수석께서는 평생 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실 겁니다."

마르셀로, 집안이 굉장히 좋았군.

그런데 갑자기 나는 왜 쳐다보는 건데.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호열 공동 연구자."

나는 괜히 도둑이 제 발이 저려 흠칫했다.

...설마 내 흑역사를 알아차린 건가?

위대한 클라우디 가문의 후계자이자,

낯뜨거울 정도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까지?!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설정은 오직 나만의 비밀.

"찰나의 시간, 순수마력학으로 제 마법을 되받아칠 정도의 여유라니. 제게도 당신과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이곳을 찾아올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보다시피.

단순하게 내 재능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다.

뱅그릿은 수면 아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얼마나 발버둥 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저런 배부른 소리를 못 하지.

내 꼰대적인 생각에는 마르셀로도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뱅그릿. 당신은 큰 오해를 하고 있군요."

"오해...?"

"당신의 시샘을 살 정도로 제 인생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르셀로 수석?"

"머지않아 이해하게 될 겁니다."

단순하게 위로하려는 말이었을까.

뱅그릿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뱅그릿이 다시금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아니, 이해를 바라기 전에 당신이 나를 이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르셀로 수석? 내겐 핏줄도, 재능도 없단 말입니다. 수석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같은 놈 때문에 곤두박질치는 순수마력학의 입지를...!"

문득, 마르셀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력에 비해 자존감이 형편없다고 했었나.

그보다 뱅그릿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도 없겠군.

마탑의 다른 마법사들이 저 말을 듣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예상이 갔다.

나야 뱅그릿의 불우한 가정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런 후광 없이도 마탑에 입성했단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 선임 마법사가 됐고.

결국엔 자기 자랑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더는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들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투정은 거기까지다. 뱅그릿 톰."

"...투정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자네의 핏줄도, 재능도 궁금하지 않다."

핏줄과 타고난 재능만으로 누군가를 평가한다?

그런 행동을 그랑펠의 긍지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물론, 구체적인 사연을 듣는다고 달라질 긍지는 아니었다.

그래, 이 순간.

빌어먹을 긍지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학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정기 학회의 마지막 발표자.

뱅그릿 톰을 크리스탈 홀에 세우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궁금한 것은 오직 자네의 연구이지."

"...!"

"가문이나 혈통, 재능 따위가 아니다."

나의 말에 뱅그릿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 학회!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은 반응인데.

마르셀로가 그제야 한숨을 뱉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긍지께서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전에."

"?"

"현 사태에 관한 책임을 따져 묻겠다."

그래, 뭐든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겠지.

최선을 다해 준비한 학회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급하게 균열을 찾아오게 된 이유.

그런 균열에서 핏줄과 재능의 차이를 운운했던 이유.

마지막으로 마탑의 수뇌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까지도.

긍지께서 합당하다 판단할 정도의 사유를 제출해야 할 거다.

그래야만 정기 학회에 연구를 발표할 수 있을 테니까.

뱅그릿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기 학회 도중 원로 마법사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이 균열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과연."

거기까진 예상했던바.

나는 물었다.

"이따위 균열이 학회보다 중요하다 여긴 이유가 있겠군."

"그, 그건.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뱅그릿은 정말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원로께서는 분명히 이 균열에 진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균열 속에 진리가 있다? 원로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틀림없습니다. 균열 속에 그대가 추구하는 진리가 있을 거라고. 그 진리를 거머쥐면 누구도 자네를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마르셀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뱅그릿. 진리란 그리 쉽게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요. 쉽게 거머쥘 수 없기에. 진리라고 불리는 것까지 말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런 말에 판단력이 흐려진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애써 생각해 내려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나누도록 하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양해를 구하는 마르셀로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지가 납득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저런 수상한 대화를 나눴다는 건.'

원로 마법사에게 뱅그릿을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니까 의문은 더욱 커졌다.

어째서.

마탑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원로 마법사가 선임 마법사인 뱅그릿 톰을 해치려고 했을까?

그것도 진리를 들먹이며 뱅그릿을 균열로 유인한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복잡하다.

뭔 놈의 내부 사정이 이리도 복잡하냔 말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군.

그러나 얽히고설킨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쉽게 풀려버렸다.

콰직─!

"!!!"

균열 속에 울리는 굉음.

마치 깨진 그래픽과도 같은 풍경이 무너져 내린다.

그 무너진 틈에서 거대한 손아귀가 튀어나왔다.

콰지직─!

검고 흉악한 손아귀가 공간을 낚아챘다.

콰지지지직─!

공간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그 광경에 뱅그릿은 물론, 마르셀로조차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차렸다.

뱅그릿이 어째서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는지.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균열로 그를 유인했는지.

또한 저 거대한 손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든 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덕분이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예민해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

후각도 발달을 한 것인가.

어째 시작부터 구린내가 난다 싶었다, 내가.

"어리석게도."

나는 인벤토리에서 제물을 꺼내 들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열등한 족속이여."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를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아직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아서겠지.

물음표, 악마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악마라고 한들 어쨌단 말이냐.

그랑펠은 악마를 앞에 두고 망설일 수 없다.

나, 이호열도 마찬가지다.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 내 양옆엔 마탑의 수석과 선임.

마르셀로와 뱅그릿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제대로 걸렸다는 것이다.

설령, 마왕이 됐든. 거악이 됐든.

이 순간만큼은 경험치에 불과하단 소리였으니까.

◈ 80화. 수석의 품격 (4)

마르셀로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와 뱅그릿 선임이 보조하겠습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관한 대화.

덕분에 마르셀로는 내가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마가 튀어나왔으니까.

여기선 내 전공을 인정해 준다는 거겠지.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마르셀로나 뱅그릿이 전력으로 나서기라도 해봐라.

'아까 그 흙먼지처럼 콩고물도 증발해 버릴걸?'

콰지지직─!

공간을 찢어발기고 나타난 악마의 손아귀.

크다는 것만 빼면 여전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허나, 그 강함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마왕보다 강하겠지.'

이건 함정이었다.

그것도 마탑의 선임 마법사, 뱅그릿을 위한 함정.

뱅그릿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의 마력이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원로 마법사께서 어째서...?"

뱅그릿은 생각하고 있겠지.

만약, 자신이 혼자였다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그에 관한 대답은 전문가인 내가 대신해 줄 수 있었다.

'죽거나 빙의 당해서 육체를 빼앗겼겠지.'

원로 마법사의 말에 뱅그릿의 판단력이 흐려졌던 이유.

틀림없다.

그건 상태이상이었다.

상태이상에 걸린 상태에서 저런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

제아무리 뱅그릿이라고 해도 그건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보다시피 뱅그릿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 열등한 악마여."

설령 물에 빠지더라도 주둥이는 떠오를 것 같은 나.

"뱅그릿,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있었으니까.

나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말했다.

"뱅그릿 톰."

"듣고 있습니다."

"이번 전투로 사유 제출을 대신하도록 하지."

"사, 사유 제출이라면...?"

"정기 학회는 그대의 발표만을 앞두고 중단된 상황. 학회를 재개할 정도의 가치가 그대가 연구한 순수마력학에 있는지를. 이번 정기 학회의 주관자인 내 앞에서 증명하도록."

"...!"

그래, 피할 수 없는 긍지라면.

이렇게 써먹기라도 해야 한다...!

내가 노리는 건 간단했다.

'방금처럼 뱅그릿의 마력에 간섭한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

내 마력량에 딱히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상대적인 것이다.

내 곁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마력의 소유자들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나는 이 괴물들이 마법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봤다.

'심지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어.'

두 사람의 마법엔 살의가 담겨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저 녀석의 경험치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넋 놓고 있으면 내게 떨어질 건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구질구질할 수밖에 없단 소리였다.

물론 그런 속내가 겉으로 비칠 리는 만무하다.

"처음 학회를 주관하시는 경께서 저보다 나으시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학회 이야기를 꺼내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걸 떠나서.

얼마나 뒤끝 있어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한 미친놈이 되는 것까지도 각오했던바.

그런데.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뱅그릿의 반응이 의외였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말이야.

나에겐 희소식이었다.

그렇게 말한 뱅그릿이 어느새 마법을 발현하고 있었으니까.

고오오오오─!

그래, 이번엔 살의(殺意)가 담긴 마법을.

콰드드드득─!

오직 파괴력만으로 마법을 줄 세우자면.

순수마력학의 마법은 한 손가락에 꼽히는 마법.

방대한 마력에 파괴력을 극대화한 간섭이 더해지는 순간.

가공할만한 압력의 마력 광선이 손아귀를 향해 뻗어 갔다.

그때였다.

콰직─!

손아귀가 큼지막하게 조각을 뜯어냈다.

그 조각을 마치 방패처럼 치켜들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위력을 떠나서.'

엄밀히 따지자면 저건 균열의 조각.

즉 [『기이』]의 조각.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 합쳐진 방패였다.

어찌보면 가장 순수한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마력학의 마법은 저 기이의 방패를 뚫어낼 수 없을 터.

과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쿠구우웅─

균열의 조각과 마력 광선이 부딪혔다.

마력 광선이 흩어지고 사방으로 마력이 흩날렸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냐?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가. 하찮은 악마여."

애초에 나는 이 상황을 노리고 있었다.

"방패 뒤에 숨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확히는 뱅그릿의 마법 발현 직후.

흩날리는 방대한 마력을!

그런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실로 어리석군."

곧장 넘실거리는 방대한 마력을 탐색.

더없이 익숙한 과정으로 간섭.

발현.

그러자 떠오른 것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라이트.

뱅그릿이 말을 더듬었다.

"...그 찰나의 시간에?"

기초 마법을 사골처럼 우려먹어서 놀란 건지.

그 경악의 이유를 나로서는 알 수 없다만.

중요한 것은 뱅그릿의 반응 따위가 아니다.

두둥실─

순수마력학의 기초 마법.

순수한 마력 구체, 라이트.

그 마력의 구체는 어떠한 종류의 마법으로도 발현될 수 있다.

물론, 그 간섭 과정에 따라 소모되는 마력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순수마력학이 오직 파괴력만을 극대화하는, 비교적 단순한 간섭에 집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니까.

그러나.

'나는 아니다.'

그래, 내겐 『마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우물만 파지 않았기에.

써먹을 수 있는 [스탯]이 있었다.

[심미 : 下]

[모든 것에 심미적 감각을 추가한다.]

단축키, 매크로 혹은 복붙 신공.

쓰지 않을 때보다야 번거롭지만.

고작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

그 출력은 몇 배, 수십 배에 육박하는 [심미]가 말이다.

『마법』과 [스탯].

이 또한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즉 이 또한 [『기이』].

하지만 그 효율이 뛰어나다고 한들.

간섭 대상은 무려 수천 개의 마력 구체, 라이트였다.

실화냐.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밑 빠진 독처럼 줄줄 새는 거잖아, 이거?!

"방패 뒤에서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없다."

물론, 내색은 할 수 없다.

목부터 척추까지.

빳빳하게 세운 자세.

나는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냥법을 결정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이니까."

사냥법이라는 것은 마법의 종류.

그랬다.

나는 심미 스탯의 효과를 발동.

수천 개의 라이트에서 각각 다른 마법을 발현한 것이었다.

무엇이 녀석에게 효과적인 마법인가?

고민할 시간에 그냥 있는 마법, 없는 마법 전부 때려 박는 게 효율적일 테니까. 정말이지, 나다운, 무식하기 그지없는 발현이라는 것.

그래도 심미적 감각이 추가돼서 그런가.

"과연...!"

펼쳐진 건 마르셀로조차 감탄할 정도의 장관이었다.

화염, 물, 얼음, 뇌전, 바람....

갖가지 속성.

온갖 분야의 마법들이 뒤섞인 광경.

그중에는 날카로운 무기의 형태를 띤 것도.

그런 무기를 집어든 병사의 형태를 띤 것도.

그런 병사를 태운 말의 형태를 띤 마법도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한 감상평을 내렸다.

"아직 미숙하군."

그렇게 말한 이유야 간단했다.

[심미 : 下]

심미 스탯은 아직 '하'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지금도 화려한 게 한 폭의 그림 같은데.

나중에 中이나 上으로 향상된다면.

대체 어떤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는 걸까.

"저, 저런 게 미숙하다니요! 대체 어느 부분이!!"

그 진실을 알 턱이 없는 뱅그릿이 절규하다시피 말했다.

심미 스탯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뭐, 엄청 대단한 마법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일단, 화려하니까 먹고 들어가는 게 있다는 거지.

돌격─

이내, 그 수천 개의 마법이 쇄도했다.

역시나 빛을 발한 건 심미적 감각.

정말 살아 움직이는 군단처럼.

손아귀가 들어 올린 균열 조각을 끼고 돌아가며 선회.

녀석에게 데미지를 입히기 시작했다.

[구마의식]은 아까부터 발동된 상황.

녀석에게 심미가 가미된 마법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잘은 몰라도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뱅그릿이 보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화려하게 날뛰는 것처럼 보이겠지.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게 '절단'이 발생합니다.]

*

칠죄종, 질투는 소리쳤다.

"빌어어어어어먹으으을!!"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내 팔이!!!"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팔을 앗아간 녀석이 악마 사냥꾼이란 소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아아아아!!"

칠죄종, 탐욕.

마왕 데카라비아.

그들의 존재가 지옥에 처박힌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 저 녀석에게 당한 것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팔을 앗아간 그 건방진 녀석에게!!

녀석이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

그건 마주하는 순간 알아차렸다.

녀석은 다짜고짜 자신을 의식으로 초대했으니까.

감히 칠죄종이자 거악이라 불리는 이 몸을...?

애초에 노렸던 것은 마법사 놈의 육신이었지만.

악마 사냥꾼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재밌을 것 같았거든.

성전(聖戰).

그곳에서 악마 사냥꾼 놈들의 표정은 참 볼만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거악인 자신을, 의식 속에 불러들인 순간부터.

녀석의 정신력은 온전할 수가 없었을 텐데.

"열등한 악마여."

어째서인가.

녀석은 멀쩡했다.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었다, 그런 내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가. 하찮은 악마여."

"방패 뒤에 숨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실로 어리석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녀석의 정신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칠죄종이자 거악인 이 몸을 오히려 사냥하려 들고 있었다!

...위험하다.

아니, 내가, 이 몸께서 위험하다고?

그래, 이건 천적에 대한 공포.

거악으로서 잊고 있었던 감각을 일깨울 정도였다.

칠죄종 질투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래, 이건 예기치 못한 사고이니라.

이따위 감각?

악마 사냥꾼?

이 몸께선 칠죄종, 거악이시란 말이다.

녀석 곁에 마법사 놈들만 없었어도 저 녀석쯤은...!

그렇게 이를 악물던 순간이었다.

"사냥법을 결정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이다."

들려오는 서늘한 음성.

그와 동시에 틈 너머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공중에 떠오른 그것은 하나의 군세(軍勢)였다.

"!"

어디서 튀어나온 거란 말이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군단이었다.

수천, 아니 수만은 될 것 같았다.

이내, 군단이 자신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스오오오오─

공포에 질린 나머지 감각이 고장 난 것인가.

뜨거운 열기.

차가운 한기.

저릿거리는 전기.

갖가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장 난 감각이 끊임없이 경고했다.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 돌진은 더없이 신속해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마법사 놈들의 마법처럼.

"으아아아아아아악!!"

군단인지, 마법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과 격돌.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자신은 팔 하나를 잃은 채 도망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서냐?"

인간 주제에 대체 무엇이냔 말이냐?

"인간 주제에에!!"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그런 동료를.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이냐?

질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뿐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최근 뒤바뀌기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의 판세.

원흉이 됐던 건 악마 사냥꾼들의 결전병기였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드워프 놈들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악크샨 기지는 궤멸.

악마 사냥꾼은 전멸한 지금.

그 결전병기를 작동시킬 수 있는 건.

제작자인 난쟁이 놈들밖에 없을 테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결전병기를 작동시켰다는 것?

드워프들이 은신처에서 대륙으로 튀어나왔단 소리였으니까.

흔적만 쫓으면 놈들의 은신처를 찾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드워프들의 흔적은 포착되지 않았었지.

그런 상황에서 녀석과.

악마 사냥꾼과 마주친 것이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것도 저 녀석의 짓이었다고?!"

질투가 들끓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에에에!!"

녀석은 차원을 드나들었단 소리였다.

결전병기를 작동시킬 정도로 자유자재로.

자신조차.

아니, 그 어떤 거악이라고 해도.

그 정도로 다른 차원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질투에 사로잡혀 잠깐 잊고 있던 감각.

다시금 공포가 깨어났다.

"혹시 녀석은 나보다도 높은 경지에 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지만.

인정한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시종일관 자신을 내리깔아보는 듯한 녀석의 시선도.

감각이 따라가기조차 벅찼던 녀석과의 전투도.

차원을 뛰어넘은 녀석의 행적도.

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자신을 향했던 경고도.

"오른팔을 잃은 악마여. 내가 그 사실을 기억했다."

녀석은 악마 사냥꾼.

녀석에게 빼앗긴 오른쪽 팔은 절대 재생시킬 수 없다.

다시 마주친다면.

녀석은 외팔이인 자신을 반드시 알아보겠지.

그다음엔...?

"내가, 이 몸이 지옥에 처박히는 건가?"

나도 탐욕처럼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주제 파악이란 걸 하게 됐다.

"...나는 이 상처로 족하다."

그래, 아르카나 대륙에 만족하자.

다시는 다른 차원을 드나들 생각조차 하지 말자.

적어도 저 악마 사냥꾼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동안에는...!!

*

[깨진 차원의 틈]

[적정 레벨 : Lv.900]

[균열 붕괴도 : 51.2%]

급격히 치솟는 균열 붕괴도.

그러던 중 적정 레벨에도 변화가 생겼다.

[적정 레벨 : Lv.900~Lv.1000]

적정 레벨, 무려 일천(一千).

플레이어들이 제각기 소리쳤다.

"이거 뭐라고 드립도 못 치겠습니다. 형님들!!"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대체 안에선 무슨 일이...!"

"...이호열, 괜찮은 거 맞겠죠?"

호열과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두 사람이 균열에 입장한 지도 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균열 붕괴도가 치솟는 걸로도 모자라.

균열의 적정 레벨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우려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균열 속에서 일렁이는 형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

또각─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생채기는 물론, 먼지 한 톨 뒤집어쓰지 않은 모습으로.

그런 호열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

그러나 언제나처럼.

호열은 냉랭하게 선언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 사유는 더없이 간결했다.

"내부 사정이다."

◈ 81화. 간단한 문제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