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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화. 간단한 문제였군

적정 레벨 900레벨.

아니, 나중에 가서는 무려 일천(一千).

평범한 균열이 아니다.

버그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저런 균열이 튀어나오는 게 어디 있냐고!"

"진짜 그 행방불명됐다는 그 선임 마법사 때문 아니야?"

"진입해봤자 개죽음당할 게 뻔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균열에 호열이 입장하는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디오를 채워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진행자는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초 단위를 넘어 분으로 이어지는 정적─

방송사고가 분명했거늘.

시청자는 물론.

PD 현용석마저 진행자의 심정에 공감하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거지, 우리?"

"선배, 이거 꿈 아니겠죠?"

"아니. 아무리 이호열 님이라고 해도 저건."

이제껏 호열이 보여준 활약?

충분히 놀라웠다.

아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스큐라 백작부터 마왕 데카라비아까지.

최상위 랭커 플레이어들과 비교해도.

압도적 우위에 있는 적만을 쓰러트려 온 호열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저 균열은 누가 봐도 갑작스럽고 위험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호열은 망설임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거침없이 균열로 진입했다.

그런 호열의 모습이 전파를 탄 것이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

인류의 평화를 위한 걸음이다.

저것이야말로 숭고한 태도다.

플레이어를 넘어선 인류의 영웅이다.

잠자코 경청하던 록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대단하지, 이호열.'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의 경험.

그를 통해 이호열은 최소 900레벨이다.

호열의 레벨을 가늠했던 록스였다.

"근데, 이호열한테는 이것도 대수롭지 않은 일일걸."

그러니까 이호열이 적정 레벨 900레벨 균열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록스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이호열이 호열했네.' 그 정도의 감상이랄까?

그래도 놀랄 일이 하나 있긴 했다.

"제시? 너 미쳤어?"

제시가 호열을 따라 균열에 진입하겠다고 말했거든.

카밀라가 기겁해서는 물었다.

"방금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연관된 이상 나서서 좋을 게 없다고. 그런데 뭐 하러 그런 데를...?"

그러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제시의 차가운 표정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굳이 나서서 제시를 말리지 않았겠지.

동료보다는 비즈니스 관계.

따지고 보면 제시는 언제든 샤이닝 길드를 떠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제시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조언이 필요할 때였다.

"가봤자 방해만 될 거야."

"...뭐?"

"이호열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제시."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게다가.

"이호열은 혼자가 아니잖아."

"!"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제시?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야. 그 잘난 선임 마법사 중에서도 최고인 수석 마법사라면서?"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록스의 말대로.

그의 능력을 어떤 플레이어보다 잘 알고 있는 제시였다.

머리 위의 고깔모자도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그래, 마르셀로가 함께라면 안심이지 않느냐?

제자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 하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마르셀로, 녀석이라면.

선임 마법사가 적대적으로 나온다고 하더라도.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기에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동행하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깔모자는 마탑의 쓸데없는 규율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마르셀로, 그 말라깽이 꼬맹이가 규율의 모순을 알면서도 어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그런 마르셀로가 규율을 어기고, 마탑 외부로 나섰다라....

-한동안 마탑이 들썩거리겠구나.

불변의 마탑에도 변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달라진 거라곤 고작 한 사람.

호열밖에 없거늘.

과연, 이 정도는 돼야 내 흥미를 자극한 사내라 할 수 있지.

'저도 알고 있어요.'

제시는 그제야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가뜩이나 하얀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해졌다.

'알고 있는데....'

록스의 말대로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아서?

혹시나 호열의 마법을 영영 볼 수 없게 될까 봐?

지금은 고민해 봤자 대답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이 순간.

제시에게 보이는 건 오직 화면 속 균열이었으니까.

물론,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결같은 보폭.

한결같은 차림새.

한결같은 인터뷰까지.

-"질문은 받지 않겠다. 내부 사정이다."

말 그대로 무사귀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그래, 이놈의 내부 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탈 발현.

마탑으로 복귀.

나와 마르셀로, 그리고 뱅그릿은 마탑의 계단을 올랐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대의 잘못이 아닙니다. 뱅그릿."

"용서는 그대의 발표를 기다린 청중들에게 구하도록."

어쩜!

같은 말에 대꾸해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마르셀로의 위로처럼 뱅그릿에게 잘못은 없었거늘.

이놈의 주둥이는 한 마디도 곱게 내뱉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물론입니다. 다시 붙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게 뇌물이나 건네려던 뱅그릿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아예 사람이 바뀐 것 같잖아.

이유는 몰라도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쓸데없이 목에 들어간 힘 좀 빼라고....'

말했다시피 내가 한 거라곤 뱅그릿에게 독설을 내뱉은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 심각한 상황에서 학회나 운운하고 말이야.

"뱅그릿.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대의 신변입니다."

나는 마르셀로의 말에 퀘스트를 확인했다.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수석 마법사,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진행 중)

그래, 퀘스트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란 소리겠지.

마르셀로는 그런 면에서 철저했다.

쿵─

마르셀로의 마력에 감응.

거대한 문이 열리자 크리스탈 홀의 전경이 보였다.

크리스탈 홀엔 뱅그릿을 포함.

선임 마법사 전원이 모여있었다.

각자 대기 중이던 선임 마법사들이 입을 열었다.

"뱅그릿, 무사했군요!"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습니다."

"영문은 몰라도 일단은 다행입니다."

"마르셀로 수석!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눈치를 보아하니.

마르셀로가 수석 권한을 발동.

선임 마법사를 전원 소집한 모양이었다.

뭐, 나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선임들에겐 설명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뱅그릿의 신변 보호, 그리고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잠시만 대기해 주시길. 확실한 답을 가지고 돌아오거나,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과연, 마르셀로.

무려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가 모인 공간이었다.

누군가 뱅그릿의 신변을 위협하려 든다고 한들.

저들의 눈을 피해 뱅그릿을 해치는 건 불가능하겠지.

불필요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이해가 됐다.

'의심의 눈초리가 향할 곳은 위쪽이니까.'

위쪽, 마탑의 수뇌부.

뱅그릿에게 상태이상을 걸었던 것도 모자라서. 그가 균열로, 그것도 악마가 튀어나오는 균열로 향하게 한 건 다름 아닌 원로 마법사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

그리고 마르셀로는 지체하지 않았다.

다시금 계단을 올랐다.

"원로들이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악마와 관련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경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면목이 없습니다."

나도 상상도 못했다.

악마가 마탑까지 마수를 뻗쳤을 줄이야.

그러나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저 추측에 불과하다는 거지.

가능성이 아주 높긴 하지만.

나는 침통한 표정의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고개를 숙여야 할 건 그대가 아니라네. 마르셀로 수석."

"...?"

"면목이 없어야 하는 건 그대가 아닌 저들이니까."

어느덧 다다른 마탑의 최상층.

내가 말하는 저들은 당연하게도 원로 마법사들이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

지위가 높아질수록 책임 또한 무거워지는 법.

설령 몰랐다고 해도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랑펠의 긍지가 원로들의 무능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뭐가 이렇게 밝냐.

마탑의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

역광이 비친 탓에 얼굴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의 숫자로 원로들의 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네 명인가.

그래, 저 중에 악마와 관련된 자가 있다는 거겠지.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악마에게 빙의 된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화의 흐름에 따라선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충분했다.

'내 팔자이지만, 팔자 한번 사납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랬던가?

내가 마탑에.

그것도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직위로 입성했다고.

나를 부러워하던 이들에게 이 상황을 보여주고 싶다.

마탑.

알고 보니까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 집단이 없다.

하다못해 돈에 목숨을 거는 그림자 용병단도 이렇게 썩지는 않았다, 정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선임 마법사들 간의 사이가 괜히 나쁜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악마를 놓쳐서 못 챙긴 경험치라도 챙겨주려는 거냐.'

그런 뜻이라면 전력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상대는 무려 원로 마법사였으니까.

그저 마주했을 뿐이거늘.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긍지가 움직인 이상.

두려움도 떨림도 없다.

설령,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더라도.

나는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악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생각했던바.

그러니까 이쪽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거든.

크리스탈 홀에 모인 선임 마법사들이 그 준비였다.

지금쯤 뱅그릿이 현사태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겠지.

-확실한 답을 가지고 돌아오거나,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마르셀로의 신호가 바로 전면전의 시작.

그러나 전개는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

"!"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빠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어째서 네 분밖에 계시지 않는 겁니까?"

...뭔데, 원래부터 4명이 아니었다고?

.

.

.

원탁 회의가 연기되고.

뱅그릿 톰이 행방불명되고.

이 사건에 악마가 관련된 것까지 알게 된 순간.

마르셀로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심지어는 원로 마법사들과의 전면전까지도.

그러나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다.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에 관한 이야기라면 알고 있네."

"심히 유감이네, 마르셀로."

"우리 원로 중 악마 숭배자가 있을 줄이야. 증거를 포착했을 땐 이미 늦어버렸네. 마탑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뒤늦게라도 그를 쫓으려 했지만 보다시피."

악마 숭배자...!

원로들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마르셀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과 전개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저 말을 믿어야 하는가?'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저들의 말 무엇하나 믿을 수 없다!'

원로 마법사들의 모순은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설령 저들이 악마와 관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거늘.

악마까지 끼어든 지금 순간.

마르셀로의 머릿속은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숭배자가 정말, 하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로들이 저런 태도로 나온 이상.

내게 선임 마법사들을 움직일 명분이 있는가?

'빌어먹을.'

마르셀로는 이를 악물었다.

구체 속에서 부유하는 탑주를 바라봤다.

'탑주님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답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군."

...그런데 대답이 들려왔다.

탑주가 아닌 호열에게서.

잠자코 있던 호열이 입을 연 것이었다.

"이곳에서 악마 숭배자의 냄새가 풍기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상한 일이군. 그대들의 말에 따르면 악마 숭배자는 이미 마탑을 떠났을 텐데 말일세."

"...!"

그런 호열의 얼굴에서는.

복잡하거나 심란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떠오른 것은 오로지 확신.

"단순히 냄새가 배어들 정도로. 오랜 시간 악마 숭배자가 이곳에 머물러서인가. 그게 아니라면 또 다른 악마 숭배자가 감히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어서인가."

"!"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 질문에 마르셀로는 원로들을 바라봤다.

반응을 살필 수 없었다.

역광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고 대답하는 이도 없었다.

허나 호열은 그조차도 예상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면 바꿔서 묻겠다."

그건 마르셀로조차 생각지 못했던 핵심.

"뱅그릿의 출탑을 승인한 과반은 누구인가?"

...그랬다!

선임 마법사 뱅그릿의 출탑.

그와 같은 결정엔 수뇌부 과반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런 호열의 말뜻을 원로 마법사들도 알아차린 것인가.

"!!!!"

네 개의 그림자가 곧장 둘로 나뉘었다.

저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도주한 자까지 셋. 이제야 확실하게 과반이 보이는군."

호열이 마르셀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 그런가,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

.

[퀘스트 : 마탑의 진실]

마법사의 탑엔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을 밝혀내고.

마탑과 진리를 바로 세워라.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수석 마법사,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성공)

─원로 마법사들 가운데 악마 숭배자를 색출하라. (진행 중)

내가 입방정을 떤 이유야 간단하다.

지금이 아니라면.

이 퀘스트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난이도가 말이 되질 않았다.

마탑의 마법사.

그것도 원로 마법사들이란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얼굴조차 구경할 수 없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설령 얼굴을 맞대는 사이가 돼도 문제는 여전하다.

그 직위를 떠나서 저들이 풍기는 위압감만 봐도.

마르셀로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뭐?

악마 숭배자라고오오오?

심지어 얽힌 악마의 수준도 장난이 아닌 놈이었다. 마력을 쏟아붓다시피 한 일격을 맞고도 한쪽 팔만 내놓고 도망친 녀석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을 종합하자면.

이건 성공하라고 떠오른 퀘스트가 아니었다!

애초에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크다.

원로 마법사와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다음에.

퀘스트를 수행하면 되지 않느냐고?

오늘 있던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뱅그릿에 대한 계획이 실패했으니.

다음엔 더욱더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게 뻔했다.

그 계획을 전부 막아내면서.

레벨을 올리고 성장까지 한다고?

불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 지금이라면.

그 이유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

내 뜻을 알아차린 마르셀로가 행동에 돌입했으니까.

그래, 그것은 신호였다.

마탑의 최상층.

발현된 포탈.

연결 좌표는 크리스탈 홀.

이내, 빛 무리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상대가 원로 마법사에 악마 숭배자면 어쨌단 말이냐?

이쪽은 원로 마법사가 둘.

수석 마법사가 하나.

선임 마법사가 스물.

그리고 나, 이호열이 있단 말이다.

그래, 이건 호가호위 수준을 넘어선 무언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더없이 뻔뻔하게 말했다.

"기만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어리석은 숭배자여."

◈ 82화. 드디어 움직이는가 (1)

견습 마법사.

한 명의 마법사가 마탑에 발을 들이기 전.

그들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다양했다.

불세출의 천재.

마법 신동.

하다 못해 가문의 자랑이라든가.

나름대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수밖에.

그러나 마탑에 입성하고 난 뒤.

이제껏 자신이 습득한 지식이 고작 바닷물에 물 한 컵에 불과하단 사실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는.

수식어 따윈 잊어버리는 것을 넘어 부끄럽다고 여기게 된다.

그저 마탑의 햇병아리가 되는 것이다.

"...있잖아.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런 햇병아리들이 하는 일이야 뻔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삐약거리는 것.

그런데.

"그치? 나만 느낀 거 아니지?!"

오늘따라 부유 정원에 울리는 삐약 소리가 유난히도 은밀했다.

혹시라도 누가 듣고 있을까.

목소리를 낮추고 나누는 대화.

그 대화의 주제는 당연하게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지 않아, 저거?"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선임 마법사.

선택한 마법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지만 올라설 수 있는 자리.

당연하게도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모두가 자신이 선택한 마법이 최고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서로 사이가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인사도 안 하실 때인데...."

더군다나 지금은 정기 학회 기간이 아니던가?

선임 마법사들이 가장 예민해지는 때가 바로.

학파의 명예가 걸린 정기 학회 기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부유 정원의 풍경은 마탑의 햇병아리들에겐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왜 저렇게 모여들 계신 거야?"

"그것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야야, 저기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님도 계셔."

그랬다.

행방불명 됐던 뱅그릿 톰.

그를 포함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가 모두 한 테이블에 모여있던 것이었다.

크리스탈 홀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거늘.

이곳은 사교 장소, 부유 정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얘기만 나누시는 게 아니야."

테이블 위 차려진 식사.

선임 마법사들이 조식 만찬을 가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

병아리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앉으면 뭐가 좀 들리지 않을까?"

"너 미쳤어, 리첼? 눈치라는 게 없구나? 숙련 마법사들이 부유 정원에 얼씬거리지 않는 걸 보면 모르겠어? 보통 일이 아닌 거라고!!"

"당연히 보통 일이 아니겠지. 뱅그릿 톰 선임이 돌아왔으니까. 근데 솔직히 궁금하잖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마주 앉아서 식사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진 거...."

...아니, 그런데.

저걸 사이가 좋다고 봐야 하는 걸까?

정작 선임 마법사들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들 엄청나게 피곤해 보이시는데."

"꼭, 누구한테 시달리신 것처럼...."

"야, 저분들이 누구한테 시달리실 분들이야?"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전부는 아니었다.

그 가운데 평소와 다를 거 없는.

그래, 한결같은 이가 하나 있었으니까.

그래, 대단한 선임 마법사들을 시달리게 할 수 있는 존재.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수석 공동 연구자 호열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자세는 더없이 모범적.

꼿꼿하게 세운 허리부터 팔과 목의 각도까지.

마치 격식이란 단어를 의인화한 듯한 호열의 모습.

"...혼자만 되게 잘 드시는 것 같지 않아?"

허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선임 마법사들과 달리.

호열은 태연하게 식사 중이었으니.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한 소리 들으신 거 아닐까? 왜, 정기 학회 때 봐서 알잖아.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발표가 없었지, 아마? 전부 지적을 받았잖아."

"그런 얘길 부유 정원에서 한다고? 밥 먹으면서?"

"에이. 아무리 깐깐하셔도 그런 짓까지는 안 하시겠지."

"맞아. 밥 먹는데, 일 얘기는 진짜 선 넘는 거라고!"

그러나 병아리가 어째서 병아리겠는가?

알고 있는 것도.

그 눈높이에선 눈치를 살펴도 딱히 보이는 게 없기에.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허나, 이번만큼은 햇병아리.

견습 마법사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이제라서 알게 돼서 다행입니다."

"언제라도 바로 잡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겠죠."

불과 몇 시간 전.

이곳 마탑의 최상층에서 벌어진 일은.

오직 원로 마법사들과 두 명의 수석.

그리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만이 알고 있는.

마탑의 '내부 사정'이었으니까.

다섯의 원로 마법사.

그들 중 과반인 셋이 악마 숭배자였다니.

대체 그들은 언제부터 악마에게...?

정말 고기를 씹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것인가?

마치 다른 걸 씹고 있는 듯한 표정의 선임 마법사들.

머릿속이 심란한데, 목구멍으로 뭐가 제대로 넘어가는지 알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이들이 부유 정원에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을 거르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지."

단지 호열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침묵 속.

선임 마법사들은 호열을 바라봤다.

...정말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호열은 모험가.

따지고 보면 얼마 전까지 외부인이었다.

하지만 마탑의 위상이야 모험가들 사이에서도 익히 알려졌던바.

그런 마탑이 악마 숭배자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니.

자신들처럼 충격을 받을 법도 했건만.

호열은 태연하게 고기를 썰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탑의 최상층.

원로 마법사들과 대적했을 때 보여줬던 태도까지.

원로 마법사가 어떤 존재던가.

그들이야말로 마법으로서 천지(天地)를 뒤흔들 수 있는 반신(半神)들.

같은 마법사라면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내뿜는 마력에 짓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압도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호열은 자신들과 달랐다.

압도되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원로 마법사들에게 말을 건넬 정도였으니까.

'분명 어리석은 숭배자라고....'

그것도 한껏 가시가 돋친 말을.

그 사실을 직접 목격했기에.

호열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극적으로 변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 만약 호열이 없었더라면.

뱅그릿 톰을 되찾지 못했을지도, 수상함을 느끼고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 그 최악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그랬다면 아직도 마탑은 악마 숭배자들의 기만에 놀아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랬다.

스스로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마탑의 모두가 호열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

그것이 호열의 식사 권유를 거절할 수 없던 이유였다.

불과 하루 사이.

마탑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인 호열이었거늘.

정작 호열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평소와 같아 보였다.

눈치를 살피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그래, 평소와 같다는 것.

예절과 격식에 더없이 민감하다는 것.

그런 호열이 테이블을 바라보곤 말했다.

"때론 식욕보다 중요한 것도 있는 법이지."

"...!!!"

식욕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가?

모인 이들만 해도 스무 명이다.

그에 따른 답이야 각자 다른 게 당연할 터.

'아뿔싸. 식사 예절에 어긋났다는 건가?'

'이런 포크랑 나이프를 반대로 들었다...!'

'...혹시 저만 다른 메뉴를 시켜서 그러시는 걸까요?!'

그러나 그 행동은 모두가 같았다.

호열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포크와 나이프.

비로소 제대로 된 식사가 시작됐다.

*

그래, 입맛이 없어도 먹어둬야 한다.

당장 오늘부터 일정이 바빠질 테니까.

사람은 뱃심으로 움직이는 법이거든.

물론, 그래도 제일 바쁜 사람은 나겠지.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팔자였다.

바람 잘 날이 없는 내 팔자.

마탑의 최상층.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곳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원로 마법사.

아니, 이젠 악마 숭배자라고 부르는 게 맞겠군.

그들이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꼴에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알았다는 거겠지.

나는 거기서 깨달았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것을...!

오히려 전면전을 각오한 덕분에 가능했던 전개.

그 결과 퀘스트는 성공.

[퀘스트 : 마탑의 진실]

마법사의 탑엔 모순이 존재한다.

모순을 밝혀내고.

마탑과 진리를 바로 세워라.

─마탑의 수뇌부와 얽힌 수석 마법사, 뱅그릿 톰을 확보하라. (성공)

─원로 마법사들 가운데 악마 숭배자를 색출하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마탑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마탑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나는 성공하지 말라고 떠오른 퀘스트를.

보란듯이 성공해 낸 것이었다...!

그로 인한 보상은 꽤 컸다.

마탑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으니까.

지금만 하더라도 마탑에 뜯어먹는 게 더 많은 내가 아니던가?

귀한 마법 서적은 물론.

대여가 승인된 마도구, 아이템 반출.

그리고 방금 먹은 공짜 아침까지.

'그 최대치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웬만한 보상보다도 마탑과의 관계도, 영향력 상승 보상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걸 말이지. 물론,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탑의 스케일에 맞게.

퀘스트 또한 연계 퀘스트였으니까.

역시나 절대 쉽지 않은 연계 퀘스트 말이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진행 중)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진행 중)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과연, 마탑이시다.

받은 만큼 구르라는 게 분명했다.

아주 그냥 시작부터 퀘스트 목표가 쏟아진다. 쏟아져.

무엇보다 퀘스트 목표가 하나같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일단, 탑주만 하더라도 말이야.

최상층에서 얼핏 봤을 때에도.

멀쩡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는 목표는 또 어떠한가?

이건 원로 마법사를 찾아내서 결판을 내란 소리였다.

화룡점정으로 마탑의 궁극적인 목표인 진리 추구까지.

그 목표들을 보고 있자니....

정말 마탑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관계도와 영향력이 대폭 상승해서.

이런 퀘스트까지 받게 된 건가?

뭐, 어쨌든. 그 원대한 목표에서도 알 수 있듯.

당장 깰 수 있는 퀘스트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 퀘스트 이름부터 [마탑의 재건]이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 설계된 지 모르는 마탑을 바로 세우는 일이니까. 쉽지 않은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모든 건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법.

또각─

그러니까 나는 발을 내디뎠다.

마탑의 지하(地下)를 향해서.

*

마탑엔 지하 공간이 존재한다.

그 지하 공간의 역할은 단지 마탑을 떠받드는 것.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 많은 마탑이다.

그 구조부터 과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

겉보기엔 그다지 높지도 광활하지도 않은 마탑이거늘.

정작 마탑의 내부는 셀 수 없이 많은 층과 그런 층마다 드넓은 공간이 존재했으니까.

마법으로 세워진 마탑이라는 것이다.

그런 마법의 탑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단단한 토대가 필요했다.

그 어떤 마법의 마력에도, 영겁의 시간에도, 흔들림 없이 언제나 항상(恒常)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그래, 마탑의 지하는 그 항상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정확한 명칭은 무간(無間).

이름에 걸맞게도 지옥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그런 무간지옥에 떨어진 이들이 있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 원로 마법사라 불렸던 악마 숭배자들.

마탑 역사상 최흉의 죄인들이었다.

'빌어먹을 공간이군.'

마법의 '경지'에 다다른 원로 마법사들.

허나, 그들의 마력도 무간에서는 무쓸모한 것이었다.

고고하다 자부한 정신력도 마찬가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거지? 일주일? 한 달?'

시간 감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고장이 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무간이 벅찬 것은 자신들만이 아닐 테니까.

"마르셀로. 언제부터 눈치챈 것인가?"

그 사실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마르셀로, 저 애송이를 구슬려서.

이 쇠창살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빌어먹을 무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벗어나기만 한다면....'

이 치욕을 배로, 아니 그 이상으로 갚아줄 수 있으리라.

말로 상대를 기만하는 것?

그보다 쉬운 일도 없었다.

마탑조차 자신들의 혀에 속아왔으니까.

게다가 저들에겐 자신들과 말을 섞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의 행방을 알아내야 할 테지.'

도주한 나머지 한 명을 찾아 단죄하는 것.

그게 현시점에서 마탑의 최우선 목표일 테니까.

그러니까 희망을 품었다.

'...정신만 차리면 산다.'

물론,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오셨습니까?"

침묵을 지키던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그 인사가 향한 곳엔 이호열이 있었다.

모험가이자 마르셀로가 선택한 공동 연구자.

그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무엇이냐?'

그에게선 당황한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무간이었다.

처음 발을 디딘 자는 제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든.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항상의 공간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저 녀석을 속여야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감각이 고장 나서 느끼는 착각인가?

그게 아니라면 진정 현실인가?

'불가능하다...!'

또르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

무간.

항상의 공간이라.

마르셀로에게 그에 관한 설명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이거 완전히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겠다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무간을 더없이 편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착각이 아니었다.

마르셀로만 하더라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거든.

물론, 악마 숭배자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군.'

그나저나.

자신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모르는 모양인데.

이거, 대충 상태를 보니까....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진행 중)

예상보다 빨리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단순하게 도주한 악마 숭배자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악마에 관한 정보는 물론.

'어찌 됐건 원로 마법사란 자리에 있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고급 정보도 알고 있지 않을까?

물론, 급할 건 없었다.

이 무간의 공간은 내 편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홈그라운드란 소리였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굳이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한결같은 태도야말로 항상.

"심문을 시작하지."

그런 의미에서 좋게좋게 말했거늘.

...어째, 표정들이 더 울상이 됐냐?

그 이유를 나야 알 수 없다만.

동정심과 같은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

그 또한 항상이란 말이다.

◈ 83화. 드디어 움직이는가 (2)

AAU의 공식 회의.

각 지부의 지부장들이 하나둘씩 화상 채팅에 로그인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몰골이라 불러야 하나 싶게 처참했다.

카메라 빨을 탓하기도 무리였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혈색이 좋지 못했으니까.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말 그대로 폭풍과도 같았던 일주일을 보냈으니까.

그러나 엄살을 부릴 순 없었다.

"고생은요. 진짜 고생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요."

자신들보다 더한 고생을 한 사람.

아니,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으니까.

고생의 무게를 측정할 순 없겠지만, 장담할 수 있었다.

각 지역 AAU의 직원들의 노고를 전부 합친다고 한들.

그 한 사람이 짊어진 무게에 당해낼 순 없으리라고.

"정말 끔찍한 일주일이었죠?"

"지금도 아찔합니다. 아주 그냥."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가슴이 철렁였는지."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실종됐다.

그야말로 초비상사태.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마탑의 마법사들은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마탑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런 마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선임 마법사가 행방불명.

혹시라도 그가 플레이어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재앙이 될 뻔했습니다. 대재앙."

"우리 한국 지부장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겠네요."

"...지나간 일이라서 그런가. 이젠 한숨이라도 나오네요."

그런 마탑이 위치한 대한민국, 서울이었다.

마탑 효과로 찬란한 경제 성장을 일궈냈던 대한민국.

그러나 동시에 선임 마법사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던 것 또한 대한민국이었다.

"하마터면 지구 상에서 서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데!!"

다시 생각해도 아찔했다, 정말.

만약 그 아찔한 상상처럼 서울이 전장이 됐더라면.

그로 인한 피해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였겠지.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 플레이어에게 신세를 졌군요."

그랬다.

동시에 대한민국에는. 서울에는. 마탑에는.

자신들보다 더한 고생을 한 플레이어.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맹활약, 그 자체.

아르카나의 전문가를 넘어서 아르카나 세계관에 적잖은 기여를 했던 AAU 임원들조차 호열의 활약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처음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대단하긴 하지만 수석 마법사와 같은 직위라뇨? 아무리 이호열 플레이어라고 해도 어디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보통 자리입니까?"

"그런데, 쓸데없는 의심이었단 거죠."

"맞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균열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

적정 레벨 900~1,000레벨.

버그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균열을 보란 듯이 클리어한 호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사복귀 할 줄이야!"

"전 지금도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궁금해 죽겠다니까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에요."

"에이, 그래도 소용없을걸요?"

인터뷰 곤란.

내부 사정.

애원한다고 한들.

호열이 보여준 단호한 태도가 꿈쩍하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사실은.

"그까짓 인터뷰 몇 번 안 하면 어떻습니까? 할 말 못 할 말 다하면 어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호열인데. 이번만 해도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게."

그래, 호열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스타 병에 걸려서는 언동을 조심하지 못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왜, 그 첫 등장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았던 태도를 보여준 호열이 아니던가?

"인기를 넘어서 거의 신앙심 수준이죠. 대중들의 반응은."

모두가 괜스레 호멘을 중얼거리는 게 아니란 말이었다.

지부장들이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웃을 수 있는 것도 호열 덕분이겠지. 그러나 AAU는 알고 있었다. 아니, 우려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호열 플레이어를 제외한다면...."

만약 호열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플레이어들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NO'였다.

"솔직히 격차가 너무 심하죠."

"900~1,000레벨 균열을 누가 클리어할 수 있겠습니까? 수석 마법사가 동행했다곤 하지만 그 수석 마법사를 움직인 것도 이호열 플레이어의 능력입니다. 그것도 개인 능력."

"결론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분발할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플레이어들도 이번 사태를 통해 느꼈으리라.

자신들의 무력함을.

그런 의미에서 신규 업데이트는 희소식이었다.

무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건 레벨.

그 레벨을 올리는 데에 필요한 건 경험치.

이번 신규 업데이트된 균열에서는.

적어도 경험치 하나만큼은 제대로 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간만에 [포식자] 컨텐츠라."

"이거, 최상위권 플레이어들끼리 신경전이 장난 아니겠는데요?"

"포식자 구역에선 신경전 정도면 양호한 거죠. 뭐."

.

.

.

──────

신규 균열, '포식자의 늪지대'가 추가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광기 어린 이리' : Lv.450

'광전사 블러드 고블린' : Lv.460

'스카이 블레이드' : Lv.500

'누더기 투사' : Lv.520....

──────

목요일.

버그가 아닌 진짜 신규 업데이트.

그 업데이트 내역에 커뮤니티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적정 레벨 미쳤겠는데 ㄹㅇ???

-이호열 빼고는 다들 긴장 좀 해야될듯?ㅋㅋ

-근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음?? 통일성이 없네 몹들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등장하는 몬스터에겐 일관성이 있었다.

[놀 서식지]라면 놀이 등장하는 게 당연했고, [고블린 서식지]라면 고만고만하게 생긴 고블린들만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균열은 조금 이상했다.

[포식자의 늪지대].

늪지대란 이름으로 봐서는 악어나 리자드맨이 등장할 법했거늘.

종족은 물론, 서식하는 환경까지. 몇몇 댓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등장하는 몬스터들에게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비슷한 점을 찾자면.

레벨 정도랄까?

그러나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균열로는 등장하는 건 처음이지? 포식자 구역."

"맞지. 등장했었으면 댓글 반응이 이럴 수 없을걸."

"딱 적절한 시기에 등장했네."

대화를 나누는 가온의 남씨 형제.

당연하게도 둘은 아는 사람에 속했다.

남태민이 입꼬리를 올렸다.

"간만에 원 없이 싸울 수 있겠는데. 안 그래, 형?"

포식자 구역.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그 이름대로 포식자들이 몰리는 구역을 뜻했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에 통일성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

인근 지역에서 포식자라 불리는 녀석들이 모여든 곳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몰려든 이유까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늪지대에 존재하는 전리품을 두고 포식자들끼리 전투를 벌인다는 거다."

히사기가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가 됐다.

늪지대에 존재하는 전리품.

그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강한 몬스터들이 몰려든 장소.

그게 바로 포식자 구역.

이번에 나타난 균열, [포식자의 늪지대]라는 것.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었다.

"그 말은 몬스터끼리도 서로 싸운다는 말씀이십니까?"

"저저, 이 자식아! 너 포식자 구역이 처음이냐?"

"네, 처음인데요...?"

"뭐, 진짜 처음이라고?!"

큼큼, 처음이면 낯설 만도 하지.

냅다 화부터 냈던 게 미안했던 모양인지.

빡빡머리 사내가 헛기침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 포식자 구역에선 몬스터들끼리도 싸운다. 싸우는 걸 넘어서 서로 죽이기까지 하지. 말했잖아? 애초에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놈들이라고. 혈연, 지연 봐줄 게 없다는 소리란 거지."

그랬다.

포식자 구역은 단 한 순간도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

당연하게도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수준도 레벨, 그 이상이었다.

포식자 구역에서 등장한다는 건 그런 사투의 연속에서 살아남았단 소리였으니까.

"잘 걸렸다. 포식자 새끼들."

"...그래, 잘 걸리긴 했네. 근데 있잖아, 언니."

"뭐?"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안 닥쳐?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 진짜."

아니, 괜찮지 않았다.

존나게 열이 받은 상태였으니까.

레오니의 삐쭉 튀어나온 입술이 그 속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 그러게 우리가 평소에 일찍 일찍 자라니까...."

적정 레벨 1,000.

호열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균열에 들어갔던 것?

'내가 알고 있어 봤자 달라질 건 없었겠지....'

자신이 합류해 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됐을 테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상태로 꿀잠을 퍼질러 자다가 깨어나서 알게 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란 말이다...!

'나 진짜 병신 같다.'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뭐랄까.

무력감과는 또 다른 감정.

무력감을 뛰어넘은 자괴감이랄까.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깨달았다.

"그냥 다 다물어. 이제부터 잠은 죽어서 잘 생각이니까."

포식자의 늪지대.

신규 균열에서 닥치는 대로 레벨을 올리겠다고.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

전투를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광전사에게 그보다 적합한 사냥터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품는 건 레오니만이 아니었다.

"1차 목표는 더도 말고, 딱 10레벨만 올리기."

"우리 천하통일의 최우선 목표는 늪지대의 전리품이다."

"여기서도 넷튜브각 오지게 많이 나오겠는데?"

각자의 목적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포식자라면.

강자라면 [포식자의 늪지대]에 모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품고 있는 생각은 각자 다를지라도.

모두가 같은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호열을.

"호열 씨를 따라잡는 건 무리라도 분발해야지."

"홋카이도의 신세를 갚기 위해서라도."

"...설마 이호열이 나타나진 않겠지? 아니, 1,000레벨짜리 균열도 클리어했으면서. 이런 균열까지 넘보는 건 너무 상도덕이 없는 거잖아?!"

*

와씨.

빡세네, 이번 균열?

등장하는 몬스터가 최소 450레벨이라니.

무엇보다 포식자 구역이란다.

쉽게 말해 전투에 미친 몬스터들만 몰려드는 콜로세움이라는 소리다.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심히 소란스럽겠구나."

아니, 소란스러운 걸 넘어서 나한텐 너무 가혹하다...!

내 레벨은 고작 296레벨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전투가 끊이지 않는 균열이라니.

'마력이 남아나지 않겠는데.'

육망성 브로치와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의 효과로 마력 재생력을 꽤 끌어올리긴 했다만.... 낮은 레벨 탓에 절대적인 마력량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포식자가 아니라고.'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심문도 끝나지 않은 상황.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이런 흉흉한 균열 따위 무시하고 싶었거늘.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

●균열을 공략하라. (반복)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하라. (성공)

균열을 공략하라는 반복 퀘스트도 모자라서.

균열이 아르카나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 내가 아니던가?

더 나아가서 악마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단 말이다.

이놈의 긍지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격식에 죽고 못 사는 피곤한 성격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그런 의미에선 여러 우물을 파둔 게 다행이로군. 계속되는 전투 도중 마력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래 봬도 써먹을 수 있는 게 꽤 있거든.'

일단, 흑마법도 있었고.

휘둘러볼 기회는 없었지만, 검술을 수련했던 나였다.

그 수련 기간은 짧았다고 한들. 그랑펠의 재능에 더해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이라는 우수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나란 말이다.

"씁쓸하지만 향긋하군."

또한 아까부터 홀짝이고 있는 비약초로 만든 차까지.

'맛은 없어도.'

정기 학회를 준비하며 비약초에 관한 서적을 탐독한 보람이 느껴지는군. 그저 차로 마시는 것만으로도 비약초는 꽤 유의미한 효과가 있었으니까.

[3시간 동안 생명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확인해볼 게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꺼내 든 것은 작은 오각별 조각.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했던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이었다.

그래, 가설을 검증할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설명 :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지식이 담긴 마도구.]

...그래, 내가 느낌이 왔었다니까?

과연, 에픽 등급 아이템!

그 효과부터 무지막지하다.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광물과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니!

나름대로 예상은 했었지만, 실망이 클까 기대하지 않았거늘.

'이건 기대 이상이잖아?'

다른 플레이어들은 몰라도.

나한테는 이보다 잘 써먹을 수 있는 효과도 없겠지.

모든 광물에 대한 지식 습득?

광물을 탐색 대상으로 하는 마법의 효율이 증가한다는 뜻.

모든 식물에 대한 지식 습득?

모든 식물엔 당연히 비약초에 관한 지식도 포함이란 말이다.

그래,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면 어쨌단 말이냐?

나한테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있단 말이다...!

당장 균열로 달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감이 치솟았거늘.

허나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균열에 진입할 때 진입하더라도.

마무리는 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정기 학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것이 정기 학회 주관자의 긍지라는 것이다.

.

.

.

두 명의 원로 마법사.

그리고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들은 크리스탈 홀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뱅그릿의 발표를 경청하는 호열을.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기회입니다.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 그들에게 짓고만 마탑의 씻을 수 없는 죄악. 더불어 이호열 경에게 지고만 빚을 갚아나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원로 마법사가 침음을 흘렸다.

"분명 탑주께서도 그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안건을 용인하겠네. 마르셀로."

"...!"

◈ 84화. 늪에서 피어나는 (1)

[포식자의 늪지대]

[적정 레벨 : Lv.500]

[균열 붕괴도 : 0.9%]

균열의 좌표는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 최북단.

대한민국과는 이역만리쯤 떨어진 곳이었지만.

마탑의 포탈이 있는 이상.

거리가 문제가 되진 않았다.

"으에취! 뭔 놈의 날씨가 이렇게 추워?"

"냉기 속성 저항이고, 뭐고. 바람이 뭐 이러냐."

"으으, 차라리 늪지대에 빠지는 게 낫겠다. 정말!!"

그래, 문제가 되는 건 역시나 차디찬 칼바람.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앞에는 벌써 플레이어들의 베이스캠프가 깔려있었다.

먼저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정보에 따르면 균열의 스케일은 포식자 구역이란 명칭답게 광활했다.

"희소식이지, 뭐. 깔린 몹이 많다는 거니까."

"희소식 맞냐? 적정 레벨 500레벨이라고. 이 균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몰라? 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은 겁이란 게 없어요."

당연히 클리어하는 데까진 꽤 시간이 소모될 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는 필수란 것이다.

물론, 베이스캠프가 도착하기도 전.

먼저 균열에 진입한 이들도 있었다.

추위를 견딜 수 없었거나.

의욕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단 소리겠지.

쑤욱─

걸음마다 발이 빠지는 늪지대의 환경.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이동속도가 소폭 하락합니다.]

그러나 투덜거릴 여유는 없다.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이곳은 강자들이 모여드는 포식자 구역.

보이는 몬스터 하나하나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뜻.

위이이이잉─

그 말은 곧, 저 곤충처럼 보이는 녀석도 보통이 아니란 소리였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사마귀, 스카이 블레이드. 녀석의 앞다리가 반짝거렸다.

스와아아악─!

분명 피해냈거늘.

거센 풍압에 몸이 밀려나는 느낌이 들 정도.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사냥할 맛이 나지."

최강의 바바리안, 남태민.

덕분에 시작된 클래스 퀘스트를 성실하게 수행해 온 그였다.

처음엔 발동시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야성의 부름]도 이젠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했다.

팟!

그런 남태민이 늪지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락한 이동속도 탓.

점프력도 낮아질 수밖에 없었거늘.

"형님들. 남태민 아주 그냥 날아다니는데요?!"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남태민은 폭발적인 속도로 사냥감을 추적했다.

야성에 휩싸인 동물과도 같은 움직임.

녀석이 남태민의 접근을 저지하긴 역부족이었다.

"이게 또 악마 군단장도 조져봤던 남태민이거든요!!"

강자가 모여드는 포식자 구역?

호열의 뒤를 쫓으며 그보다 더한 녀석들과도 싸웠던 남태민이 아니었던가?

악마 군단장, 호리칸도 그 강적 중 하나.

그러니까 전투는 길지 않았다.

푹─

날개가 뽑히고 앞다리고 뽑히고 그다음엔....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중계하던 사내가 카메라에 대고 외쳤다.

"제가 말씀드렸죠? 눈 호강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ㄹㅇㅋㅋ남태민 그냥 날개 달았네 진짜 ㄷㄷ

-클래스 퀘스트 뜨기 전에도 히사기랑 비볐었지??

-렙차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거였음ㅋㅋ 그때부터

-쟨 그냥 싸움을 잘함ㅋㅋ

전투에 몰입한 시청자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포식자 구역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네임드 몬스터급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사냥에서도 박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친. 남태민한테 바로 다음 몹이 달려들었는데요?"

심지어 그런 전투가 쉬지 않고 벌어진다니.

괜히 넷튜버들이 컨텐츠 냄새를 맡은 게 아니란 소리.

다른 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 버서커가 괜히 미친 광전사라 불리는 게 아니네요...."

계속되는 전투.

상처를 입을수록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광전사.

레오니에게 포식자 구역은 최적의 사냥터.

"확실히 샤이닝하고 천하통일 쪽은 효율적으로 움직이네요. 길드원들을 파티 단위로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몬스터들한테 습격 각을 안 내주는 것도 그렇고. 무서울 정도로 각이 잡혔네. 다들."

길드 랭킹 1, 2위.

샤이닝과 천하통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몬스터를 사냥해나갔다.

게다가 균열이 나타난 위치가 위치인 만큼.

간만에 주목을 받고 있는 EU의 길드들까지.

그들의 전투.

아니,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투를 보고 있자니.

정말 콜로세움이 따로 없단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과연, 끝까지 서 있는 투사는 누가 될 것인가?

"누가 됐든 멀쩡하게 서 있긴 힘들 거라고 장담할게요."

푸욱─

어찌 됐건 이곳은 늪지대였으니까.

그저 서 있는 것만 해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넷튜버로 살다 보면 느는 것은 입담뿐.

덕분에 뱉을 수 있던 말장난이라는 거지.

그러나 장난은 몰라도 장담은 남발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전투를 반복해서 녹초가 됐든.

발이 푹푹 빠지는 늪지대가 됐든.

멀쩡한 것을 넘어 고고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내.

"...떠, 떴다!"

호열이 있었으니까.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 진입한 호열은 늪지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시선이 평소보다 더 서늘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숨을 지키고 지켜보던 넷튜버가 속삭였다.

"비장한 표정이 딱 포식자 구역을 접수하러 온 거 같죠?"

말을 내뱉는 순간.

쏟아지는 채팅.

"으앗. 말실수 죄송합니다."

그 반응에 넷튜버가 얼른 반말을 주워 담았다.

정중하게 격식을 차렸다.

"정정하겠습니다! 접수하시러 행차하신 것 같으시죠?!"

*

항상(恒常).

나의 차림은 언제나와 같았다.

북극이 코앞이라는 균열의 위치?

이젠 추위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한테는 [온기] 버프가 있었으니까.

[온기가 담긴 보석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보관한 장신구에 일정 시간 '온기'를 부여합니다.]

[설명 : 귀족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보석함.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마왕 데카라비아와의 전투.

장검, 그리고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과 마찬가지로 구마의식의 제물로 바쳤던 아이템. 그 효과는 장신구에 [온기] 버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온기가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 줍니다.]

그 효과는 단순했거늘.

체감 상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두툼한 코트를 걸치지 않아도, 기능성 타이즈를 입지 않아도 정말 춥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칼바람을 맞아가며 청승을 떨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균열에 진입했건만.

나는 곧장 멈춰 서고 말았다.

허리춤 언저리까지 오는 늪지대.

당연하게도 옷이 더러워진다.

그것은 심히 격식에 어긋나는 꼴이다.

모든 건 피곤한 성격 때문이라는 것이다.

늪지대보다 더러운 자취방에서도 잘만 살던 나였거늘.

그래도 이런 차림에 늪지대에 발을 들이는 건 좀 찝찝하긴 하네.

그 탓에 늪과 뜻하지 않은 눈싸움을 하던 도중이었다.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

늪지대를 떠다니는 연잎이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연잎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이젠 아니었다. 내게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있었으니까.

"유달리 커다란 잎."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 식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단 말이다.

"흑연꽃이군."

덕분에 나는 연잎의 정확한 명칭과 특징까지 읊조릴 수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과정을 생략할 정도로. 저 연잎이 내겐 익숙한 탐색 대상이라는 거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마르셀로나 뱅그릿처럼 텔레포트를 난사하고 싶었다.

마탑의 수석, 선임 마법사처럼 되고 싶다는 게 너무나도 큰 바람이라고 한다면. 왜, 제시 하인네스처럼 공중부양이라도 하고 싶었다.

'진짜 마법사처럼 말이지.'

그러나 고작 296레벨.

그보다도 비루한 마력량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나.

[천적관계]가 발동됐을 때라면 몰라도 나는 마력을 아껴야만 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었으니까.

'이것이 나의 최선이라는 말이다.'

복잡하고 구질구질해도 어쩔 수 없다.

마력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현실.

탐색은 생략.

나는 곧바로 연잎에 간섭했다.

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히 강도를 조정하는 수준의 간섭.

마력을 불로 바꾸고, 전기로 바꾸는 것보다야.

마력 소모가 적은 건 당연한 일.

사뿐.

나는 그 연꽃 위에 올라탔다.

마탑의 계단도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는 나였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쁘지 않구나."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래, 나의 복잡한 속사정을 알 수 없는 플레이어들에겐.

"...저 스킬은 또 뭐, 뭐죠?!"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나 싶겠지.

그러나 남들의 시선 따위 고려하지 않는 이 몸이시다.

막말로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거든.

'아니, 그걸 넘어서 뻔뻔하게 심문까지 했지.'

그러니까.

"듣던 대로 성급하군."

나한테 문제가 되는 건 몬스터밖에 없단 말이다.

과연, 싸움에 미친 몬스터들만 있다는 포식자 구역.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달려드는 몬스터가 한 마리.

꿈틀꿈틀─

살기를 내뿜는 새빨간 동공.

늪지대 밑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몸집.

쉴 새 없이 날름거리는 혀까지.

업데이트 내역에서 봤던 이름이 하나 떠오르는군.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 Lv.530]

시작부터 쉽지 않다. 정말...!

레벨이야,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적정 레벨 500레벨짜리 균열이 아니던가.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보다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녀석들만 해도 업데이트 내역에 수두룩했었지. 어쨌든, 맹수 포식자란 수식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대체 뭘 집어삼킨 거야?'

뱀인가, 뱀 모양 항아리인가.

얼마나 많이 집어삼킨 거야, 이거.

가뜩이나 거대한 크기가 더욱 불어나 있는 모습.

그러나 아직도 배가 차지 않았다는 건가.

키아아아아아─!

녀석이 나를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예상했던 대로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그것이 위협에 대한 나의 감상.

"그중에서도 식사 예절부터 배우는 게 좋겠군."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마력 가성비.

마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전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선 있는 것 없는 것을 전부 활용해야 했다.

그것도 적재적소에 말이지.

'진짜 잘 생각했다. 과거의 나야.'

나와 녀석의 레벨 차이는 대충 230레벨.

심지어 녀석은 악마족 몬스터도 아니다.

1레벨, 1레벨의 격차가 큰 아르카나 시스템.

그 점을 고려한다면 녀석과의 1대1 전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지. 더군다나 내 클래스는 무엇하나 특출난 게 없는 악마 사냥꾼이니까.

그러나 내 특기는 주제 파악.

그 사실을 알기에.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부터 노력해 온 나란 말이다.

매일 같이 클래스 퀘스트를 반복하면서 [근력], [민첩] 스탯을 향상.

그것도 모자라서 마법 서적 닥치는 대로 읽던 지난날들. 내가 그 개고생을 괜히 해온 게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 개고생에는 검술 훈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8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이다. 원한에 가까운 미련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되찾았다.]

그랑펠의 재능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건가.

손에 감기는 손잡이의 느낌이 더없이 익숙했다.

한동안 검을 잡지 않았어도 그 감각이 선명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맹수 포식자여."

나는 몸을 낮추고 말을 이었다.

"사자를 집어삼킬 자신은 있는가?"

라이언 하트.

사자 심장의 기사들이 목표로 하는 무결점의 자세.

당연하게도 내게 습득까지 이르는 중간 과정 따윈 없었다.

나는 그저 하르콘의 자세를 보고 따라 했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단순하게 검을 겨눈 것 같은 이 자세가.

어째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이유 따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이이이잇─?

뭐, 효과만 있으면 된 거 아니겠어?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다가오던 녀석이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키야오오오─!

수많은 맹수, 그리고 자신과 같은 포식자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녀석이었다.

사선(死線)을 넘어온 경험으로. 내 자세에서 하르콘의 기척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지.

그나저나.

'...이건 꽤 중요한 정보인데?'

그저 검을 쥐고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라.

...실용성이 장난이 아니잖아. 이거?

한마디로 허세라는 것이다.

무결점의 자세가 어째서 무결점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거늘.

그 효과만큼은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나였으니까.

왜, 지금처럼 말이다.

탐색, 간섭, 발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에게 쏟아지는 마법.

검을 겨눈 나를 여전히 견제하고 있는 탓인가.

녀석은 속수무책으로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에게 '화상'이 발생합니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나는 그 모습을 항상의 자세로 바라봤다.

"식사 중엔 불필요한 대화를 삼가는 게 격식이다."

혹시라도 자세가 흐트러졌다가 역습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늪지대를 부유하는 연잎.

그런 연잎 위에 올라선 호열.

그 모습엔 조금의 위태로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연잎 위에 피어오른 연꽃처럼 위화감이 없었다.

"...저 스킬은 또 뭐, 뭐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거늘.

"거, 검인데요 저거? 어라? 지팡이도 아니고 검은 뭐죠?!!"

그런 연꽃에 생각지도 못한 칼날이 피어났으니.

경악이 튀어나올 수밖에.

더 나아가서.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냥 검만 들었는데 몹이 멈춰버렸다고???

-그저 호멘

그 칼날이 보통 예리한 게 아니란 것까지 알게 된 순간.

-잠깐, 나 저 자세!! 저거 하르콘 분석 영상에서 봤었음!!!

-ㄹㅇ??? 무슨 뜻이냐 그 말???

-설마 이호열 하르콘 수준으로 검술까지 쓸 수 있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지사─

◈ 85화. 늪에서 피어나는 (2)

"지랄하고 자빠졌네."

처음 그 게시글을 봤을 땐.

어그로도 뭐 이딴 하급 어그로가 다 있나 싶었다.

-님들아 이호열 검술도 쓸 줄 안다는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에휴. 수준 봐라."

이호열이 누구인가?

그 대단하신 마탑의 수석 마법사와 같은 대접을 받는 플레이어. 그 후광을 빼놓고 보더라도 어떤가? 그동안 호열이 전투에서 보여줬던 화려한 마법 스킬을 보고도 저런 소리에 낚인다고?

타다다닥!

한숨과 함께 두들기는 키보드.

주르르륵─

갱신되는 댓글 창.

-뭔 개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어ㅋㅋㅋㅋㅋㅋ

-개소리 아닌데? ㄹㅇ임

-ㄹㅇ같은 소리하네 아르카나 해보긴 해봄? 아알못 티내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게.

아르카나가 어떤 게임인지 알지도 못하는 모양.

아르카나엔 괜히 클래스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었다.

백 번 양보해서 예를 들어볼까?

만약에.

이호열이 뭐가 아쉽다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에 하나 이호열이 검술을 배우고 싶어서 검을 휘두른다고 생각해 보자.

-뭐, 그런다고 검술 스킬이 띠링하고 떠오를 것 같음???

그래, 아무리 연습을 해봤자 헛수고.

스킬도 스탯도 뭣도 안 되는 헛수고라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클래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이 아르카나의 상식.

그러니 게시글이 어그로 취급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냐. 단체로 도배를 한다고?"

이호열이 검을 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게시판에 끊이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또 어떤 놈이 알바를 풀었나 싶었겠지.

하지만 알바라니.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

'...이호열이 알바를 풀 이유가 있나?'

대체 뭐가 아쉽다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건 홍보나 찬양 같은 게 아니었다.

이호열, 마법사 계열 클래스가 검을 쓴다니.

상식을 벗어난 헛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머리가 굴러갔다.

"이거 또 어떤 추잡한 놈들이."

이호열 안티들이 알바를 풀었구나.

커뮤니티 눈팅을 하다 보면 눈치라는 게 생기는 법.

예리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우스.

"하여튼 분탕들. 어떤 놈들인지 걸리기만 해봐."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교묘하게 자신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끼워팔 터.

그런데.

"...?"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다른 길드, 플레이어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전부 다 이호열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뭘까, 이 상식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

느껴지는 위화감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그래. 딱 한 번만 속아준다. 내가."

그런 마음으로 클릭한 넷튜브 링크.

이내, 모니터에 떠오른 화면.

거기엔 정말 호열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미친!! 뭔데, 이거?!"

그랬다.

이 순간.

호열과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의 전투는 수십 개의 카메라를 통해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 실시간 영상은 무엇하나 조작되지 않은 현실이라고.

"그냥 아무것도 못 하는데요? 530레벨짜리 몬스터가?"

그 전투를 표현하자면 한 단어로 충분했다.

압살.

호열이 포식자의 늪지대 터줏대감, 아나콘다를 사냥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사냥이라 부르기도 과분했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호열은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와씨. 진짜 차원이 다르네...."

"누구는 이렇게 진흙탕에 빠져서 고생인데."

"천 레벨짜리 균열도 클리어했던 이호열인데. 뭘."

그 행동이 뜻하는 바를.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있는 건 마찬가지로 균열에서 사냥 중이던 플레이어들이었다.

저런 아나콘다 상대쯤이야.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

"하르콘이랑 괜한 친분이 있던 게 아니었어."

검을 겨눈 자세.

그 자세를 보니까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관계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호열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르콘과 똑같은 자세가 증거였다.

"마탑에서처럼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사실상 확정적이지. 그것도 보통 자리가 아닐걸?"

"천하의 하르콘이 경이라고 부를 정도니까."

"그럼 제국 황실하고도 친분이 있다는 소리 아냐...?"

"진짜! 그게 말이 되냐고!!"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기사단.

플레이어가 어떻게 그 두 집단에서 한자리를.

그것도 누가 봐도 보통 자리가 아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된 게 머리를 굴리고 고민을 할 때마다 호열에 대한 의문은 커져만 갔다.

"어떻게 그동안 소문 하나도 안 난 거야?"

지금만 하더라도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호열의 존재감.

분명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호열은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저런 상식을 벗어난 플레이어에 대한 이야기는.

그 과거가 심각하게 궁금하다!

지켜보던 이들이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털썩─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녀석의 숨이 멎었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뭣한 전투가 끝난 것이었다.

포식자의 늪지대.

전투가 끊이지 않는 콜로세움.

그 치열한 전장의 승자치고.

호열의 모습엔 한 치에 흐트러짐도 없었다.

혼자만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처럼.

아니, 혼자만 장르가 다르다는 것처럼.

그래, 그런 호열의 모습은 더없이 이질적이며 고고했다.

마치 늪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

...정말, 다큐가 따로 없다.

그것도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극한의 리얼 다큐멘터리.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래도 경험치가 위로가 되는구나.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그 레벨답게 뱉어내는 경험치가 상당했다.

거악이나 마왕처럼 보스 몬스터급의 경험치는 아니었다만.

나는 그런 경험치를 독식한 셈이었으니까.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14]

[능력치]

근력 : 53 / 민첩 : 60 / 마력 : 244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8]

단번에 18레벨이 상승했다는 말이다.

절대적인 레벨이 낮아서 레벨이 많이 오른 것뿐이지만.

이런 조삼모사라면 환영이다.

무엇보다 아침에 세 개든, 저녁에 네 개든.

'내가 뭘 가릴 입장은 아니거든.'

조금 전, 아나콘다와의 전투를 복기해도 그렇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쳤었다면.

검을 겨눈 자세가 흐트러졌었다면.

'곧바로 역습을 허용했겠지.'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상태.

제아무리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끌어올린 근력과 민첩 스탯이 있다고 한들.

나는 레벨업을 통해 획득한 포인트를 전부 마력에 올인. 가끔 행운에 투자해 왔으니까.

'신체 능력만으로 피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당연하게도 마법을 발현.

피해를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럼 그때부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순환이 시작되는 거지.

예상에 없던 마법 발현 → 절대적인 마력 부족 → 포식자 구역답게 다시 전투 → 다시 예상에 없던 마법 발현 → 다시 절대적인 마력 부족 → 또다시 전투....

그러니까.

'나는 진지했다.'

그게 제삼자에겐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전투에 임했단 소리였다.

그 결과, 경험치에 전리품까지 획득할 수 있었단 말이다.

[두꺼운 아나콘다 가죽] - [등급 : 레어]

[녹아내리는 호박석] - [등급 : 레어]

[독기가 스며든 자작나무] - [등급 : 유니크]

전리품은 무려 셋.

그 등급도 레어, 레어, 유니크였다.

'괜히 배가 빵빵하게 부풀었던 게 아니었네.'

전부 재료 아이템이었지만.

세 개씩 떨어트린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로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과 식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상태.

"그럭저럭 가치가 있겠구나."

녹아내린 호박석.

그리고 아나콘다의 독기에 범벅된 자작나무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지를 곧장 알아차렸거든.

물론, 녀석의 위장 속에 있던 전리품이기에.

'약간의 가공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마탑의 기둥을 뽑을 시간이군.'

마탑의 서비스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공짜로.

그 또한 정정당당한 수석의 권한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쉴 틈이 없잖아?

포식자 구역이라는 거.

부시럭─

한 마리를 쓰러트리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다른 몬스터가 나타났다.

뱀, 그다음에는 쥐냐? 물론 그 생김새부터 평범한 쥐는 아니었다.

[잔혹한 청소부 : Lv.550]

그 크기는 사람과 비슷하군.

크기를 넘어서 뒷발로 걷고 앞발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석궁에 도끼에 방패까지.

장비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과연, 쥐라고 다 같은 쥐가 아니라는 거겠지.

녀석의 기다란 꼬리가 움찔거렸다.

아직 손에 검을 쥐고 있어서 그런가.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는군.

'그럼, 우선.'

포인트 투자부터 하자.

아쉬운 나로서는 스탯 포인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보유 포인트는 18포인트.

나는 전부 마력에 투자하려다가 1포인트를 남겨뒀다.

...그래, 운칠기삼이라는 말도 있는 법.

마력에 1포인트를 더 투자한다고 한들.

이곳은 적정 레벨 500레벨의 균열이 아니던가?

1포인트의 마력으로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요행을 바라는 것이 옳다.

나는 행운에 1포인트를 투자했다.

[행운 : 6]

...그런데 왜 하필이면 6이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분명, 사(死) 포인트를 피한다고 2포인트를 투자했었지.

결국 악마의 숫자 6을 거쳐 갈 수밖에 없거늘.

이거, 다른 게 조삼모사가 아니었잖아?

그러나 이젠 투자할 포인트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미신은 미신에 불과하다."

어째 운에 투자한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 언제까지 미신을 의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악마의 숫자라면.

'오히려 나쁘지 않다.'

아니, 차라리 악마가 나타나 준다면 나로서는 감사한 일.

다 필요 없고 [천적관계]만 발동된다면.

이런 연잎을 타고 다닐 필요도.

나 혼자 다큐멘터리 장르를 찍을 필요도 없을 테니까.

영양가 없는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우지끈─!

뭔 소리야. 이건 또.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본다.

늪지대 곳곳에 솟아오른 거목.

녀석이 그 거목의 밑동을 이빨로 갉아대고 있었다.

우지지지직─!

이빨이 커서 그런가.

거목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순식간에 기울어져 갔다.

녀석의 의도는 명백해 보였다.

'전장을 자신하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생각이겠지.'

거목이 쓰러지는 순간.

늪지대가 한순간 출렁일 테니까.

그 틈을 노리려는 거겠지.

'역시, 만만치 않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턴이 지랄 맞다고 할 수 있겠군.

보스몹도 아니고 고작 네임드몹 수준에 불과한 녀석들이.

하나같이 상대하기 까다롭잖아.

허나 그 수고가 무색하게도.

까드득─!

탐색 과정을 생략할 정도로.

나는 아르카나의 모든 식물을 훤히 꿰뚫고 있단 말이다.

당연하게도 녀석이 이빨로 갉아대던 거목.

[츄키라 나무]에도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까드드득득─?

탐색은 생략.

간섭은 경도의 강화.

이윽고 발현.

드드득─?!

아무리 애를 써도 거목을 무너트릴 순 없다는 소리다.

나는 당황한 거대 쥐, [잔혹한 청소부]를 응시했다.

불필요한 대화는 필요 없었다.

검을 겨눈 상태로 마법을 발현.

굳어버린 적을 상대로는 [심미]를 가미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고려할 것은 오직 마력 가성비.

녀석에게 쏟아붓는 수많은 마법 중.

[잔혹한 청소부에게 '동상'이 발생합니다.]

녀석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는 마법을 찾아내는 것.

무식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내 수준보다 훨씬 강한 적을 연이어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엔 없단 말이다.

'이유 따윈 알아낼 수도, 알고 싶지도 않거든.'

그저 효과가 있다는 것만 알면 될 뿐.

'동상이면 냉기가 약점이군.'

나는 상급 빙결 마법 『서리』를 발현했다.

스오오오오─!

녀석을 향해 뻗어 나가는 서릿발.

서리는 투사체 속도는 느릿하기 그지없거늘.

파괴력 하나만으로 상급 마법으로 분류되는 마법.

쩌적쩌저적─!

보다시피 순식간에 늪지대가 얼어붙는 것은 당연한 일.

찍찍찌지익─!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검 끝에 대한 압박감.

상태이상 '동상'의 영향으로 저하된 이동속도.

서서히 엄습하는 서리까지.

나는 냉기보다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그것은 늪지대의 오물 한 방울 튀기지 않겠다는 의지.

'게다가.'

나는 거목, 츄키라 나무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위태롭게 흔들리던 거목.

그 꼭대기에서 발광하던 '비약초'를.

'거목이 쓰러지면 비약초도 늪지대에 빠질 거 아냐.'

그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저 귀한 비약초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 86화. 늪에서 피어나는 (3)

유스라 왕국.

자본과 노동력이 투자된 고대 왕국은 어느덧 그럴싸한 도시의 모습을 갖췄다. 과거 아르카나의 대도시에 버금갈 정도로 번화한 모습으로.

"이야. 하루하루가 다르네."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엔 플레이어들이 모여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지금처럼 주점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었지.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옛날 생각나네. 안 그러냐?"

아르카나가 현실이 되고 자신들이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리운 주점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잠시나마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도 들었거늘.

"와, 장난 아닌데, 저 몹들?"

주점 외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

재생되는 화면이 이것이 추억이 아닌 현실임을 각인시켜 줬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이제는 NPC가 아닌 아르카나인들에게도.

아직 대낮이거늘.

만취하신 그림자 용병단 단장님께서 주정을 부렸다.

"에이씨. 저거. 저 덩어리 머리 좀 치우라고 해봐아아."

술잔을 쥔 키치의 손이 움찔거렸다.

키치를 자극한 건 화면을 가로막고 있던 근육 덩어리.

"그냥 팍! 때리고. 슉! 피하고."

락키드였다.

그 덩치 때문에 불편해 하는 이들이 하나둘이 아니었건만.

"답답하게 뭐하는 거야, 저 새끼들!!"

"...아씨. 귀청 떨어지겠네."

"뭐라고? 크게 말하쇼. 안 들리니까!!"

따가운 눈초리만으로는.

현대문물에 매료된 락키드를 막을 순 없었다.

락키드가 맥주를 통째로 집어 들었다.

꿀꺽꿀꺽─

싸움이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분돼서 목이 타는군.

락키드가 연달아서 잔을 비우곤 말했다.

"단장! 우린 저런데 갈 계획 없나?"

"히끅. 가도 너는 안 데리고 갈 거야아. 짜식아."

"뭐, 뭐라고?!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주 그냥 화면 다 가리고. 내가 괘씸해서라도.... 히끅!"

풀썩─

그 술주정을 끝으로 테이블에 뻗어버린 키치.

"잠깐, 단장!!"

락키드가 키치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뭐가 좀 보이네."

"저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참...."

"참자. 저 근육 덩어리 성격 잘 알잖아."

플레이어들이 락키드의 진상에 혀를 내둘렀다.

그들의 추태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림자 용병단과 같은 아르카나인.

탐험가 연맹이었다.

"민폐도 저런 민폐를. 괜히 제 얼굴이 다 빨개지네요."

"아니요. 사람 사는 게 다 이렇죠. 뭐."

"그래도 포식자 구역이니까.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탐험가 연맹.

말 그대로 탐험가들이 모인 집단.

연맹의 가입 조건은 간단했다.

하나, 탐험가일 것.

당연하게도 탐험가 클래스 플레이어라면 탐험가 연맹에 가입하는 게 기본이었다.

탐험가 클래스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위험 지역을 탐험해야만 했다.

그러나 전투 계열 클래스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탐험가의 전투력.

그런 탐험가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정보력 덕분이었으니까.

"왜, 포식자 구역엔 진귀한 것들이 많거든요."

탐험가들끼리는 서로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돕고 사는 것이 강호의 도리.

연맹 탐험가의 말에 박휘강의 눈이 반짝였다.

"몬스터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벌인다는, 그 전리품 말씀하시는 거죠?"

"뭐, 그건 흔히 알려진 정보고. 다른 전리품도 있죠."

"다, 다른 전리품도 있나요? 저런 늪지대에?"

"물론이죠. 그런데 이거 계속 말을 해서 그런가? 목이 조금 타네~"

물론, 정보를 맨입으로 주고받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박휘강이 눈치껏 맥주를 주문하자 탐험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고, 괜찮은데.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꼴깍─

그리고는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크. 비약초라고 들어보셨죠?"

비약초?

물론, 알고 있다.

포션의 재료가 되는 풀 같은 것들.

"그쵸. 흔히들 포션 재료라고 생각하는 약초들이요. 그런데 그건 정말 흔히 알려진 비약초들의 효과고요. 정말 진귀한 비약초들이 또 따로 있거든요? 근데, 참. 이건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극소수인데...."

말꼬리를 흐린다는 것.

맥주에 어울리는 안주가 없다는 뜻.

역시나 눈치 빠른 박휘강이 주문했다.

"여기 치킨도 되죠?"

어떠냐, 이것이 현대문물 치맥이다.

정보를 내놓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겠지?

과연, 닭다리 하나를 뜯고 나자 탐험가가 술술 말을 뱉었다.

"귀한 비약초는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대요."

"...네? 그,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귀한 대접을 받는 거죠. 그중에서도 최고는 마력을 영구적으로 증가시켜 주는 비약초들. 한때 아는 탐험가들 사이에서만 소문이 쫙─ 돌았었죠. 그거 하나만 발견해도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된다고."

"!"

"포식자 구역처럼 특수한 지역에 그런 희귀한 비약초가 자라날 확률이 높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같은 탐험가들은 정말 목숨을 걸어야 획득할 수 있겠지만. 생명수당은 톡톡히 된다는 거죠."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다?

그건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준다는 뜻이었다.

박휘강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스탯을 얼마나 상승시켜 주는지는 모르지만.'

단, 1이라고 해도 그 효과는 엄청났다.

1레벨의 가치와 맞먹는다는 소리였으니까.

물론, 레벨업을 제외하더라도.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방법까지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클래스 퀘스트는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클래스 중 단 한 명.

그것도 조건을 갖춘 자만 시작할 수 있는 게 바로 클래스 퀘스트.

대다수의 플레이어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소리.

그러니까 비약초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도 과장은 아니겠지.

'고레벨로 갈수록 레벨 하나 올리기가 힘들어지니까.'

이내, 박휘강이 팬심을 담아 기도했다.

'제발!'

호열 님이 어떻게 비약초 하나라도 습득하시기를...!

호열 덕분에 넷튜브 구독자도, 조회수도 떡상했던 박휘강이 아니던가? 마음 같아서는 이 귀한 정보를 호열에게 전하고 싶었건만....

방법이 없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친. 저 스킬은 또 뭐야?!"

그런 박휘강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환되는 앵글.

화면에 떠오른 호열의 모습.

거기엔 마법도 모자라서.

검까지 손에 쥔 호열이 있었으니까.

"뭐야, 저거?"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락키드였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락키드는 검을 쥔 호열의 자세를 알아봤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단장하고 그 노인네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니었잖아!"

그들의 말대로 호열은 강자가 분명했다.

들끓는 락키드의 전투 본능.

도전하면 안 되는 상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피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호열의 활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이어지는 호열의 마법, 서리.

그 발현에 주점에는 다시금 경악이 터져 나왔다.

"느, 늪지대가 얼어붙고 있잖아."

"빙결 마법도 보통 빙결 마법이 아닌 것 같은데?!"

"야, 너 빙결계 특화잖아. 저 스킬 이름이 뭐야?"

"몰라. 저런 스킬은 나도 배우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고."

잠자코 화면을 지켜보던 락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추운 건 프로스트에서 눈 맞았던 걸로 충분하지."

진상, 락키드조차 분노를 조절하게 하는 호열.

그 광경에 박휘강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저런 호열에게 비약초가 필요하기나 할까?

그래, 필요한 건 기도가 아니라 믿음이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박휘강이 경건하게 읊조렸다.

"호멘."

*

광활한 포식자의 늪지대.

각자 사냥에 집중하던 플레이어들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호열 씨도 오셨다고? 정말?"

-몰랐는데. 바로 균열 들어가셨다고 하더라고.

"아니, 형! 좋아하시는 차라도 좀 챙겨 드리지!"

반가워 하는 남태민, 남철민 형제부터.

"언니, 들었어?"

"...."

"이호열 균열에 진입했대~"

우린 분명히 말했다?

싸우느라 몰랐다고 핑계 대면 안 돼?

전투에 완전히 몰입한 광전사, 레오니.

"상도덕이 없네, 정말!"

그리고 샤이닝 길드에까지.

평소답게 엄살을 부리는 드미트리였지만.

이번만큼은 저 엄살에 공감할 수 있었다.

팟!

카밀라가 활시위를 놓고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욕심이 많네. 우리 호열 씨는."

욕심쟁이, 이호열.

제시도 모자라서 이런 균열까지 클리어하러 오다니.

"...우리 호열 씨? 둘이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 부분에서 되묻는 게 맞아?"

"뭐? 그건 또 무슨 뜻인데?"

"아니야~ 네가 왜 여자한테 인기가 없는 줄 알겠어~"

"아니, 왜 또 갑자기 지랄인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그 다툼에 끼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투.

그와 별개로 굴러가는 머리.

언더독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이호열이 균열에 진입했다.'

그가 경험치가 부족해서 이런 균열을 찾았을까?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적정 레벨 500레벨 균열에서 사냥을 해봤자 호열의 요구 경험치엔 기별도 가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 호열에겐 분명 균열을 찾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록스의 추측은 맞아떨어진 듯싶었다.

"잠깐만."

궁수 계열 클래스의 정점, 보우 마스터.

정점이란 칭호에 걸맞게 광활한 그녀의 시야.

카밀라의 시야에 호열이 포착됐다.

정확하게는.

"우리 호열 씨가 또 뭘 하고 계시는 걸까?"

허공을 수놓은 계단.

그 계단을 당당히 밟고서는.

어딘가로 향하는 호열의 모습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래야 이호열이지.

짐작하고 있던 록스를 포함.

모든 플레이어의 관심이 호열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

...슬슬 랭커들이 엄살을 부렸던 게 이해가 되는데.

1레벨이 오를 때마다 늘어나는 요구 경험치가 상당하다.

[맹수 포식자 아나콘다 : Lv.530]

[잔혹한 청소부 : Lv.550]

보다시피 레벨이 더 높은 몬스터를 사냥했거늘.

상승한 레벨은 10레벨이었다.

[레벨: 324]

내가 아르카나의 복잡한 경험치 시스템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200레벨 대에서 500레벨 대 몬스터를 잡는 것과 300레벨 대에서 500레벨 대 몬스터를 잡는 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뜻이겠지.

실제로도 차이가 있기는 했다.

'여유가 생겼달까.'

검술과 마법의 동시 운용.

나는 처음과 다르게 잔뜩 긴장하지 않아도 적을 쓰러트릴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 무시무시한 적응력 또한.

무지막지한 마법적 재능도 모자라서.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을 지닌 그랑펠 덕분이겠지.

[역병 서린 석궁] - [등급 : 매직]

[역병 서린 석궁 볼트] - [등급 : 매직]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 [등급 : 레어]

[잔혹한 청소부]를 쓰러트리고 획득한 전리품 역시도 셋.

뭔가를 주렁주렁 들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군.

세 개의 전리품 중 눈여겨 볼 만한 건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정도겠지. 인벤토리를 소폭 확장시켜주는 실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탈락이다."

그랑펠의 심미적 관점에서는 형편없었지만.

'파는 건 의미가 없다.'

청렴결백한 성격을 떠나서.

내겐 균열 클리어 보상금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과거의 이호열이었다면 하루도 편히 잠이 들지 못할 정도의 거액이 통장에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정산받을 보상금이 훨씬 많단 말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오늘 경험으로 확실하게 느꼈다.

우물은, 살 구멍은 많이 파놓을수록 좋다는 걸 말이야.

그런 내가 떠올린 건.

마탑에 존재하는 스무 개의 학파 중 마법부여학이었다.

정기 학회를 준비하면서 마법부여학에 관한 서적 또한 수십 권을 읽었었지. 학파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두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이템에서 효과를 추출할 수 있다.

추출한 효과를 다른 아이템에 부여할 수 있다.』

듣기만 해서는 쉬워 보였거늘.

문제는 그 과정에 있었다.

아이템, 마도구는 천하의 마탑조차 정복하지 못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까.

효과를 추출, 그 효과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날려 먹는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들었거든.

'항상 기가 죽어있었지. 아마.'

마법부여학 선임 마법사, 키코 아르민.

가뜩이나 작은 체구.

그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잔뜩 굽히고 다니던 그녀였다.

만약, 마탑이 실적을 따지는 기업이었다면.

키코의 마법부여학은 언제나 적자를 기록하는 부서였겠지.

키코가 눈치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따위 사정 따윈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뻔뻔하게 선언했다.

"모든 성공엔 반드시 실패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 나는 마탑의 기둥을 뿌리 뽑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마탑의 자본, 아이템을 제물로 마법부여학을 진보시키겠노라.

그 재료가 될 게 바로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라는 것이다.

'인벤토리 여유도 많을수록 좋으니까.'

앞으로는 균열에서 챙길 게 많을 것 같았거든.

왜, 지금처럼 말이야.

스스스─

나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계단을 발현했다.

계단을 오르는 이유야 간단했다.

츄키라 나무 꼭대기에서 발광하던 비약초.

사색(四色) 겨우살이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사색 겨우살이라니.'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를 통해 습득한 방대한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대박이라고.

사색 겨우살이는 신체 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그러니까 스탯을 영구히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색.

네 가지 빛이라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그것도 무려 4포인트의 능력치를.

단순하게 따져도 무려 4레벨의 가치.

끔찍한 단련 클래스 퀘스트 몇 번의 가치냐, 이게?

게다가.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에서 비약초의 육성법.

그 연구의 가능성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 연구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는다면....

'사색 겨우살이 같은 비약초를 양산할 수 있다.'

내가 괜히 요란을 떤 게 아니란 말이다.

다시금 깨닫게 된다.

역시 우물은, 살 구멍은 많이 파놓아야 한다는 걸...!

그 엄청난 효과에 걸맞게.

사색 겨우살이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자라났다.

사람이 됐든, 몬스터가 됐든.

보는 이라면 매료될 수밖에 없는 외관과 효과를 자랑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나무 꼭대기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마터면 나도 지나칠 뻔했었지.'

[잔혹한 청소부]가 나무를 갉아대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대의 희생에 감사하지."

긍지높게 감사를 전하고.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나를 칭찬하고.

가슴 벅찬 미래를 그리며 계단을 오르기도 잠깐.

나는 거목의 정상에 도달.

사색 겨우살이를 발견했다.

...그런데 무엇이냐.

사색 겨우살이보다도.

"...!"

희귀한 '존재'가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 87화. 늪에서 피어나는 (4)

하위 숲의 정령 님프.

나비 날개를 펄럭이던 님프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상해졌어."

포식자의 늪지대에 낯선 풍경이 덧씌워진 탓.

"그래도 숲처럼 보이는데...."

님프가 미간을 찌푸리며 안간힘을 썼다.

하위 정령이라고 해도 자신은 어엿한 숲의 정령이었다.

낯설게 보이긴 하더라도.

저 숲도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하는 숲일 테니까.

숲과 교감하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으리라.

"...어라?"

그런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교감은커녕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님프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축─

팔랑거리던 날개가 늘어졌다.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을까?

그래, 모든 건 악마 때문이었다.

'지금쯤 내가 태어난 숲은....'

님프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숲은 그 어느 것보다 강인하다고.

동물이 나뭇가지를 꺾고, 인간이 나무를 베어낸다고 한들.

숲은 신음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자연재해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견뎌온 게 바로 아르카나 대륙의 숲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들 미안해."

악마에게 불살라지던 숲은 비명을 질렀다.

정말 지옥불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끔찍한 비명을.

님프는 그런 숲에서 악마를 피해 포식자의 늪지대로 도망쳤다.

숲에 남았더라면 자신도 타락해 악마와 다름없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도 마음은 가벼울 수 없었다.

"포식자의 늪지대라면 악마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숲, 바람, 물, 불....

자연은 아르카나 대륙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런 자연에 깃든 정령들은 아르카나 대륙 소식을 잘 알고 있었다.

악마들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지도.

악마들은 영악했다.

악마는 자신들이 무너트릴 수 있는 곳만을 침략했다.

그런 의미에서 포식자 구역.

이 포식자의 늪지대는 악마에게도 만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아무리 정을 붙이려고 해도 적응이 안 되는걸."

그럴만도 하지!

님프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늪지대에선 정말이지, 밤낮 가리지 않고 전투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멀리 날아볼 걸 그랬는데.

"제로 산맥까지는 날아가는 건 무리더라도."

왜, 여기보다 나은 곳을.

조금이라도 조용한 곳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와서 다른 지역까지 날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야 난 바깥소식을 모르는걸."

악마는 자신들의 세력을 더 확장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악마들은 더더욱 강해졌겠지.

과거엔 안전했던 곳도 지금은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늪지대가 어딘가 이상해지기도 했고."

그것만 해도 골치가 아팠거늘.

늪지대와 뒤섞인 숲.

정체불명의 풍경.

또 어떤 일이 벌어진 거람.

님프가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몰라. 지금은 쉴 거야."

사색 겨우살이 아래에서 눈을 붙여야겠어.

숲과 교감하려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소모된 마력.

사색 겨우살이의 기운으로 마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

님프의 단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각─

들릴 리가 없는 낯선 이의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단잠에서 깬 님프는 잠결에 생각했다.

'늪지대에서 이런 발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어떻게 발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는 거지?

'여긴 나무 꼭대기인데?!'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건 은발 머리칼을 가진 사내.

사내가 허공에 떠오른 계단을 오르며 낸 소리였다.

영문은 알 수 없었거늘.

간만에 본 인간이었다.

'뭐야, 괜히 놀랐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정령을 볼 수도.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뭐, 이름도 계급도 없는 정령이었을 때야.

그 사실도 모르고 숲을 찾은 인간에게 말을 걸곤 했었지.

그러나 단 한 번도 대답이 돌아온 적은 없었다.

'더 잘래. 피곤하단 말이야.'

그게 정령의 상식.

저 사내에겐 자신이 보이지 않겠지.

그래, 반드시 그래야만 했거늘.

어째서인가.

시선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눈을 뜨니 착각이 아니었다...!

사내는 분명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그것도 굉장히 싸늘한 시선으로.

님프가 설마 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보여...?"

*

정령학.

마탑에 존재하는 학파 중 하나로.

그 선임 마법사는 페이얀 롯이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식욕이 상당했지.'

뱅그릿 톰 사태 이후.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과 함께했던 아침 식사.

깨작거리던 선임 마법사 틈에서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던 게 페이얀이었지.

당연하게도 정령학파 또한 정기 학회에 연구를 발표했었으니. 나도 정령학에 관해서는 수박 겉핥기 수준 정도로는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내 눈에 왜 보이는 것이냐?'

나는 정령을 보고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은 마법사들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볼 수 있는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머리를 굴려본다.

하도 여러 가지 마법 서적을 읽어대서.

지식에 착오가 생겼나?

아니, 이호열의 대가리면 몰라도.

그랑펠의 두뇌에 그런 착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그랑펠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내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그래, 정령을 목격할 수 있는 조건이 떠올랐거든.

그것은 정령학 입문 서적.

첫 번째 페이지.

두 번째 문단에 서술되어 있던 글귀.

『무계약 상태의 정령을 목격할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뛰어난 마력 감응력과 더없이 맑은 정신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정령 계약자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정령과 계약을 맺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더없이 맑은 정신.

그리고 비교적 어린 나이.

그걸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철이 없어야만, 자연의 정령을 볼 수 있다는 뜻.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랑펠이 나의 학창 시절, 흑역사라는 것을.

그래, 마왕이 됐든 거악이 됐든.

전부 하찮은 악마라 여기는.

그랑펠의 정신 상태는 가히 꽃밭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어쨌거나.

'내가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게 아니란 소리다.'

사색 겨우살이 아래에서 뒤척거리는 정령.

당연하게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얕은 지식이기에.

뚫어져라 보는 것만으로 정체를 추측할 순 없었다.

그러나.

"혹시, 내가 보여...?"

그렇다고 얌전하게 반말을 듣고 있을 그랑펠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떻게 발견한 비약초, 그것도 사색 겨우살이인데.'

정령에게 양보할 생각 따윈 없는 나, 이호열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마탑의 수석 공동 연구자, 이호열이다."

"...마탑?"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이름 모를 정령이여."

잠이 덜 깼군.

정령은 상황파악이 안 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게 침묵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다시금 떠오르는 정령학 입문 서적의 지식.

두 번째 목차.

첫 단락.

첫 문장.

-정령엔 그 계급이 존재한다.

하위, 중위, 상위.

그리고 정령왕.

정령 간에는 철저한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내겐 할 말이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령과 마찬가지로.

마탑에도 계급은 존재했으니까.

'페이얀 롯.'

그녀가 선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유?

그건 그녀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 상위 정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확한 명칭은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그러니까 나는 가감 없는 사실을 말했다.

"나는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의 계약자."

"...!"

과연, 계급 사회가 좋긴 좋다.

높으신 분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는군.

물론,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페이얀 롯 님이셨...!"

"그녀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의 수석 공동 연구자."

"...네, 네?!"

"소속과 신분을 밝혀라. 작은 정령이여."

나와 님프.

그 관계를 엄밀히 따지면 남남이었다.

그러나 같은 계급 사회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법이거든.

'괜히 영화에서 느그 서장을 들먹이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이렇게 계급 사회에 능통하다.

나, 자신의 사회력에 감탄하던 그 순간.

정령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하위 숲의 정령, 님프라고 합니다."

효과가 굉장하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까지 할 줄이야.

그런데, 어째 님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님프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이었다.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님의 계약자이신 페이얀 롯 님보다도 한 단계 높은 계급의 마탑 수석 공동 연구자 이호열 님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잠깐, 뭔 놈의 수식어가 본론보다 장황하냐.

이것이 계급 사회의 폐해로구나.

그러나 흡족하게 여겼으면 여겼지.

민망한 속내를 드러낼 순 없는 나였다.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듣겠다."

숲의 정령이 어째서 포식자의 늪지대에 있는 것인가?

그 원초적인 궁금증은 대화를 나누며 해소가 됐다.

사실 듣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생각하면, 모든 사건의 원흉은 대부분 악마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금처럼."

"?"

"갑자기 늪지대의 풍경이 바뀌었어요. 늪지대에 숲이 겹쳐 보여서 숲과 교감을 시도해 봤는데.... 제가 무능한 탓일까요. 헛수고였어요. 저, 님프는 어떤 목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균열에 관한 이야기였군.

님프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르카나 대륙의 사정을 유럽 스칸디나비아의 숲에다가 물어봤자 대답이 돌아올 순 없다는 것이다.

"저는 낙담한 나머지....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사색 겨우살이는 은은한 마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사색 겨우살이 근처가 정령에겐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장소란 거겠지.

"혹시나.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님의 계약자이신 페이얀 롯 님보다도 한 단계 높은 계급의 마탑 수석 공동 연구자이신 이호열 님께서는.... 이 숲에 대해서. 아니, 이 상황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실까요?"

알다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놈의 칭호부터 어떻게 좀 하면 안 될까?'

하지만 역시나 속마음은 드러낼 수 없는 것.

나는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 균열에 관한 설명이야 간단하게 끝났다.

님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테니까.

"사라졌던 마을이나 숲. 마탑도 전부 이런 식으로...?"

"그렇다."

"그, 그 말씀은. 저도 수석 공동 연구자님과 같은 세계로?!"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지역이 추가될 때.

혹은 균열이 붕괴됐을 때의 이야기였으니까.

포식자의 늪지대.

등장하는 몬스터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저력을 생각한다면 균열이 클리어 되지 못할 확률은 낮겠지.

그런데, 잠깐만....

불현듯 가능성이 떠올랐다.

포식자의 늪지대를 클리어하면.

[『기이』]의 공간, 균열은 사라지고.

포식자의 늪지대는 다시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간다.

문득, 시선을 옮겨 안도하는 님프를 바라봤다.

"후아. 그건 다행이다아아."

그 안도가 무색해질 법한 생각을 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

내가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목격했던 처참한 풍경.

그리고 [『기이』]의 공간, 균열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 의존하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이 통하는 존재가 아르카나 대륙에 있다면....'

아르카나 대륙의 구체적인 상황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잖아, 이거?

그 정보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여러가지 계획을 세울 수도.

상황에 따라서 만반의 준비를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존재했다.

아르카나 대륙에 말이 통하는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을 따져야만 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

어떤 장소가 균열에 휘말릴 줄 알고 다음 만남을 기약한단 말인가?

우연을 기대하기엔 그 확률이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겠지.

'하지만 그 존재가 정령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확률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정령과 『계약』을 맺는다면 말이야.

나는 정령학파의 최우선 과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단절된 관계의 극복』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벽히 다르기에 완전히 단절된 두 세계.

설령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정령을 소환할 순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가능성을 보았기에.

정기 학회에서도 거만하게 지껄였었지.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연구할 가치가 있겠군."

그랬다.

[『기이』]의 공간, 균열에서라면.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랑펠의 두뇌가 말해주고 있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건 님프와 계약을 맺는다면.

균열에서 님프를 소환할 수 있게 된다는 뜻.

즉,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단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하위 숲의 정령, 님프."

"아, 듣고 있습니다."

"내가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다."

새삼스럽게 자각한다.

나는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았구나.

이 계약에서 갑(甲)은 님프고, 을(乙)이 당연히 나였다.

말했다시피 누구나 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정령이다.

수천 가지 클래스가 존재하는 아르카나에 정령술사 클래스가 없다는 게 그 증거.

정령들의 능력은 [스킬]이나 『마법』과는 또 다른 {자연}의 영역이었으니까.

'내 레벨을 생각한다면.'

님프에게 거절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지.

정령들에겐 아쉬울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저, 정말이십니까? 제, 제게 어찌 그런 말씀을...?"

어째 님프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님프가 감격한 표정으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님의 계약자이신 페이얀 롯 님보다도 한 단계 높은 계급의 마탑 수석 공동 연구자이신 이호열 님께서...! 어째서 저 같은 하위 정령과 계약을 맺어주신다는 것인지...? 당연히 저, 님프로서는 크나큰 영광이지만!!"

정령과 계약이라니.

기뻐해야 하건만.

어째서냐.

나는 정말이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

.

.

허공에 떠오른 계단.

달려드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와중에도.

플레이어들의 관심은 호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올라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대체?"

도저히 짐작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호열의 뒤를 밟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애타는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시야에 무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진입한 모든 플레이어에게 떠오른 메시지였다.

[누군가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계약을 축복합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이....]

메시지는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플레이어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 이호열이 또!!"

◈ 88화. 늪에서 피어나는 (5)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플레이어들에게 정령은 환상 속의 존재였다.

"아니, 정령이란 게 진짜 있긴 한 거야?"

"누가 봤으면 벌써 넷튜브에 올라왔겠지."

"뭐, 던져둔 떡밥 같은 거 아닐까? 언급만 해둬서 기대감을 끌어올린 다음에. 신규 업데이트 때 신규 클래스 정령사가 등장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왜, 정령을 목격한 플레이어도.

정령과 관련된 클래스를 가진 플레이어는 없어도 정령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서적과 NPC들이 떠드는 이야기들이 그 증거였다.

"근데, 그래서 그 업데이트는 언제 한대?"

"이번 주에도 이번에도 그런 내역은 없는데?"

"아니, 잠깐. 나 전직도 안 하고 몇 달째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그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정령이란 존재는.

극소수만 목격할 수 있는 희귀한 존재였으니까.

자연스럽게 정령에 관한 관심은 서서히 식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이후엔 말할 것도 없었다.

균열이 나타나고, 현실에 몬스터가 돌아다니는데.

존재하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정령?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균열에서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시청자 여러분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 진입한 플레이어에게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누군가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누군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단다.

"아니, 전투하기도 박찼을 텐데. 계약이라뇨!"

"그것도 어디 보통 계약입니까? 정령과 계약이랍니다. 떡밥만 무성하던 그 정령 말입니다!"

"지켜만 보는 저희로서는 믿기 힘든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콜로세움이나 다름없는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정령과 계약했다는 누군가가 누구인가?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단 한 사람밖에 없지 않았던가?

늪지대.

끊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

그 가운데서 마치 늪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홀로 고고했던 플레이어가 있었으니.

바로 그 이호열이 분명했다.

"거봐! 내가 분명 뭐가 있다고 했지?!"

이호열이 누구인가?

적정 레벨 900~1,000레벨 균열에서도 멀쩡하게 귀환한 플레이어. 그런 이호열이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단순하게 경험치를 위해 포식자의 균열을 찾진 않았을 터.

-사실 계단 떠올랐을 때 다들 짐작하지 않았음??

-ㄹㅇㅋㅋ 그러니까 다들 빡집중 빡기대했지ㅋㅋㅋㅋ

-근데 이건 그 기대 이상인디?

-정령은 상상도 못했다 진짜ㄷㄷㄷㄷ

쏟아지는 채팅, 그대로였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이호열이었기에.

한껏 고조됐던 기대감.

그리고 그런 기대감에 당연하다는 듯.

이호열이 화답한 것이었다.

"이호열 플레이어는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군요!"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

직접 메시지를 확인한 플레이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니, 놀랐다면 오히려 더 놀랐겠지.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고?"

"아니, 진짜 뭔데! 검술로도 모자라서 이젠 정령이야?!"

"그만 징징거려봐. 무슨 메시지가 계속 떠오르는데?"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계약을 축복합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이 깃듭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하는 경험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하는 전리품의 가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정령왕의 축복.

축복의 효과는 무려 경험치와 전리품 드롭율 상승.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가장 희귀한 버프였다. 높은 레벨만큼이나 아르카나의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조차.

"겨, 경험치랑 드롭율 상승 버프라고?!"

"나도 한두 번밖에 본 적이 없는 버프인데."

"10퍼센트도 아니고 20퍼센트 상승이잖아...?"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을 벌인 거야, 이호열!!"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록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 짐작을 제대로 뛰어넘어주시는군."

과연, 레벨 격차만큼.

자신과 이호열의 눈높이엔 격차가 있다는 거겠지.

당연하게도 보는 그림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와씨. 정령은 생각도 못 했는데. 역시!!"

남태민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었다.

그래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는 호열에 대해 아는 게 많다고 자부했건만. 아무래도 호열의 그릇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것 같았다.

"...정령과 계약? 갑자기?"

...차 한 잔 얻어 마시기 어렵네, 진짜로.

메시지 때문인가, 광전사의 광기 때문인가.

레오니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각자 호열과 얽힌 관계가 다르니까.

메시지에 대한 반응은 각자 다른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메시지 속 누군가는 이호열이 분명하다는 것.

그러니까 대다수의 관심은 허공에 떠오른 계단으로.

호열이 모습을 드러낼 계단으로 쏠리는 게 당연했다.

넷튜버들이 벌써부터 입맛을 다셨다.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가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사실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저 최초라는 타이틀이 더 중요한 것.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다.

또각─

"!!!"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

『정령과의 계약』

수박 겉핥기라고 해도 그것은 그랑펠의 엄격한 기준.

정령학 관련 서적도 몇 권을 읽었던 나란 말이다.

정령에 관한 기초적인 상식이 있다는 거지. 당연하게도 정령과의 계약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심 안도했다.

'만약, 중급 정령을 만났다고 해봐.'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고, 계약이고, 뭐고.

모든 게 그림에 떡에 불과했겠지.

그건 계약 조항 때문이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성질에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성질이라는 것은 계약자의 전반.

그걸 쉽게 말하자면 나는 플레이어니까.

플레이어 기준으로 고려했을 때.

'내 상태창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겠지.'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가 대식가인 이유도 정령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제가 연비가 좋지 않거든요."

상위 불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

파이어 드래이크는 계약자인 페이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모양이었지.

한마디로 계급값을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조차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라서 식사량 수준에서 끝난 것이라고, 페이얀은 다람쥐처럼 부푼 얼굴로 말을 이었었다.

-"그래도 마력 탈진으로 고생하던 때에 비하면야."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가?

무엇보다 나는 뱅그릿 톰과의 전투에서 그의 마력량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엄두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마력량.

같은 선임 마법사니까.

페이얀의 마력량도 뱅그릿과 큰 격차가 나지는 않을 터.

그래, 상위 정령이라는 건.

압도적인 마력의 소유자인 페이얀조차 마력 탈진을 호소하게 하는 존재란 말이었다...!

'나한테는 하위 정령도 차고 넘친다.'

그러니까 주제 파악은 자연스럽게 끝났다.

게다가.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계약 성립.

님프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비루한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말이다!

그동안 레벨업으로 획득한 포인트를 마력에 올인하다시피 투자. [육망성 브로치]와 [명품-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으로 마력 재생력을 끌어올렸기에 망정이지....

정령이 괜히 정령이 아니구나, 진짜.

정령학이 마탑에서도 괜히 선택받은 마법사들의 학문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당혹스런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없다.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변화했군."

계약자 성질.

그러니까 나의 영향으로 님프는 그 외관부터 변해있었다.

그 몸집은 여전히 요정처럼 작았거늘.

어째서인가, 그 작은 몸집에선.

이전과 다르게 기품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런가요? 이 또한 호열 님의 영향력 때문이겠지요."

...그나저나 그 말투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그랑펠의 엄격한 기준에도 어긋나지 않는 격식 차린 말투.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령이 계약자의 성질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의 참뜻을.

나, 그랑펠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변화한 님프의 자태 또한 이해가 된다.

지금보다 훨씬 뭐가 없던 시절에도 하르콘에게 '경' 소리를 듣던 내가 아니던가? 그것도 모자라서 상태창에 존재하는 [심미] 스탯의 영향까지.

'이거 겉모습만 봐서는 하위 정령이 아니라.'

무슨 정령여왕 같잖아?

나는 그런 님프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이런 게 바로 거울 치료, 반면교사로구나.

'비루한 나랑 계약한 덕분에.'

그 외관만 그럴싸해진 님프의 모습.

좋지 않은 영향력을.

괜한 물을 들인 것 같아 책임감을 느낀다.

진심으로.

님프가 절제된 고갯짓으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우아하게 늘어진 나비 날개, 풍성하고 길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복장까지.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저는 제 변화가 마음에 듭니다. 호열 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래, 그래도 계약 당사자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래도 부담스러운 사극 말투는 어떻게 하고 싶었거늘.

속내는 드러낼 수 없기에 속내인 법.

"지적할 곳이 없군."

님프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바로 사색 겨우살이에 손을 뻗었다.

내겐 여유가 없었으니까.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마력이 빠져나간다....'

유난을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정도의 소모량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단 말이다.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의 축복 담긴 축하 메시지를.

'경험치에 드롭율 상승 버프까지.'

축복은 [포식자의 늪지대]에 내려진 것이었으니까.

다른 플레이어들도 똑같은 효과를 누린다는 뜻.

조금만 머뭇거려도 몬스터가 남아나지 않겠지.

나약함을 탓하며 징징거릴 시간도 아깝단 말이다.

그래, 레벨이 부족하다면 올리면 되고.

레벨업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마력이라면.

비약초를 씹어서 삼켜서라도 도달하면 되는 일이다.

내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단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살랑살랑─

님프가 우아하게 사색 겨우살이를 향해 날아갔다.

"이 사색 겨우살이를 필요로 하시는 거라면."

"?"

"제가 축복을 내려 드리겠습니다."

...축복이라고?

갑자기 축복이 웬 말이란 말인가.

정령에 관한 지식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한 나였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사르르─

그저 한 차례.

님프가 사색 겨우살이를 어루만졌을 뿐이거늘.

고오오오─

사색 겨우살이의 빛이 더욱 선명해졌으니까.

"...!"

사색 겨우살이는 성장할수록 그 빛이 더욱더 짙어진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를 통해 습득한 아르카나 대륙 모든 식물에 관한 지식.

'이거, 혹시?'

그리고 나는 거기서 목격했다.

『비약초의 육성법』

엄청난 잠재적 가치를 가진 연구가 나아갈 방향성을!

*

또각─

위에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

기다리던 넷튜버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호열. 아니, 호열 님이 내려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넷튜버들의 스트리밍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방송국들도 있었다.

그동안 환상 속 존재처럼 취급받던 정령이 아니던가?

정령의 실체가 밝혀지는 상황.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화제가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그런 정령과 계약한 게 누구인가?

바로 이호열이었다.

"실시간 시청률 15퍼센트 돌파...!"

그 기대감이 시청률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도 정령에 관한 지식은 아르카나의 서적이나 입에서 입을 통해 많이 알려진 편이었다.

덕분에 현실적으로 상황을 보는 이들도 있었다.

"능력을 떠나서 상위급 정령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들이 아니라고 하니까요."

"이호열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높은 계급의 정령과 계약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계급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플레이어 최초로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의견은.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라졌다.

날갯짓하는 정령의 모습.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흘러나오는 기품.

"저, 저게 정령...?"

"후광 뭐야."

"저건 예쁜 걸 넘어서 아름답잖아...."

그 자태는 호열의 곁에서도 빛이 바래지 않을 정도.

그 모습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누군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저 정령 누가 봐도 못해도 상위, 아니 정령왕급 아닙니까?!"

.

.

.

빤히─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님프가 입을 열었다.

"과연, 호열 님께서는 이런 자리에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계약 정령으로서 이런 시선에 익숙해지겠습니다."

너, 그랑펠에게 제대로 물들었구나.

그러나 그 말이 현명하다.

이놈의 성격이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님프, 네가 적응하는 쪽이 편할 거란 뜻이지.

'물론, 집중되는 시선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말했던 것처럼.

나는 한시가 바쁜 사람이란 말이다.

랭커인 그쪽들과 다르게 내 레벨은 형편이 없단 말이다.

경험치, 드롭율 버프 1분 1초가 아쉬운 입장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않았다.

이곳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레벨: 324]

나는 아직 경험치가 고프단 말이다...!

◈ 89화. 늪에서 피어나는 (6)

[포식자의 늪지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생성된 균열을 앞에 두고.

그 어떤 이들보다 자신감이 넘친 건 유럽 최강의 길드.

보헤미안이었다.

"그동안은 그냥 운이 없었던 거라고."

"그래! 마탑도 모자라서 뭔 놈의 균열까지 아시아 쪽에만 생성됐던 건지. 이제야 슬슬 밸런스가 맞아가는 모양이네."

"정확히는 아시아 아니면 러시아였지? 모스크바나 홋카이도나 그 추위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샤워하는데 얼어 죽는 줄 알았잖아. 진짜."

그들은 유럽 연합 EU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 지원 덕분인가.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성기사 랭킹 1위이자 길드 마스터인 가이버.

그가 오랜만에 미소를 흘렸을 정도였다.

"균열 공략이 끝났을 땐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중 하나가 바로 길드 랭킹이었다.

샤이닝, 천하통일의 뒤를 이어 만년 3위 자리를 고수해 오던 보헤미안 길드였다.

앞서 가는 이들과의 격차는 크다고 한들. 따라잡히지 않을 자신은 넘치던 가이버였다.

후발주자라고 해봤자.

일본의 이나즈마, 한국의 가온 정도였으니까.

그 작은 나라에서 플레이어들이 활약하면 얼마나 활약을 하겠으며.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EU를 등에 업은 자신들을 쫓아올 순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무언가 어긋났다.

만년 3위.

보헤미안이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4위, 이나즈마도 아닌 5위, 가온에게.

"콜로세움에서 행운은 없는 법이지."

그래, 가온에겐 행운이 따랐을 뿐이다.

가이버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까 포식자 구역이 균열로 등장했을 때.

그 넘치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가온은 물론이고 천하통일까지...!"

보헤미안과 마찬가지로 EU의 지원을 받는 크고 작은 길드들. 홈그라운드인 유럽에 나타난 균열인 만큼. 가이버는 모든 패를 치밀하게 활용했다.

"마스터. 마력이 한계입니다!"

후방에 위치한 서포터 플레이어들.

가이버는 그들을 기계 부품 갈아 끼우듯.

플레이어들을 균열 밖으로 내보냈다.

"2팀. 곧바로 진입한다."

사실상 수십 개 길드의 연합 전선.

거기서도 고레벨의 플레이어를 가려낸 덕분.

교체 투입된 플레이어들의 레벨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후방에서 지원할 정도는 충분했던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오로지 몬스터 사냥에만 집중한 가이버와 보헤미안 길드원들이었다.

이런 가파른 경험치 상승폭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간만에 체면 좀 세우겠는데? 안 그래, 가이버?"

가이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균열에서만큼은 자만해도 좋았다.

샤이닝도 천하통일도.

자신들처럼 압도적인 사냥 속도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대로만 간다면. 가온 따위가 다시는 랭킹을 넘보지 못하게....

"...이호열이 균열에 진입했다고?"

잠깐, 누가 진입했다고?

이호열!

빠득─!

그 이름에 가이버의 미간에 핏줄이 돋아났다.

듣기만 해도 신경이 돋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녀석 때문에 가온이 3위 자리를.'

가온에게 따랐던 갖가지 행운.

그중에서도 가장 큰 행운이 바로 이호열이었으니까.

유스라 왕국에서도, 프로스트 쟁탈전에서도.

가온은 이호열과 연합한 덕을 톡톡하게 봤었다.

'버서커 놈들도 마찬가지지.'

고작 10위권 대에서 오가는 길드 랭킹.

아직은 경쟁자로 여길 가치도 없었지만.

버서커 또한 EU의 지원을 받는 길드였다.

'영국, 세컨드 썬은 더 이상은 유럽 연합 소속이 아니니까.'

EU내에서는 보헤미안의 뒤를 이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한 길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가이버는 이호열의 등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뭐가 아쉽다고 이런 균열에 진입한 거지?'

아무리 포식자 구역이라고 해도.

이호열에겐 너무 쉬운 수준의 균열일 터.

분명, 다른 목적이 있는 거겠지.

'...설마 그 다른 목적이?'

혹시 가온이나 버서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길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송골송골.

순간, 가이버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반드시 내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는 것.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

가이버의 가슴 속에 조급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페이스를 끌어올리겠다. 1팀 재진입!"

"1팀은 아직 마력 회복이 덜 끝났을 텐데요?"

"상관없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그러던 중 메시지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정령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

이호열이다.

정령과의 계약이 목적이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잠깐.

'...정령이 여기에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던 건가?'

역시 대단하군, 이호열.

그러나 이호열이 대단한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이버는 뒤따르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무려 경험치와 드롭율 상승 버프.

가이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템포를 끌어올린 판단이 옳았다.'

그 어떤 길드보다 빠른 진행 속도.

덕분에 가이버는 늪지대에 중앙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신의 선물이군."

대박을 거머쥘 기회를!

균열 중심부에선 몬스터가 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귓가에 분석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관으로는 누더기 거인. 그리고 흑철수리로 예상됩니다.

이어서 전해지는 업데이트 내역의 정보.

[누더기 거인 : Lv.600]

[흑철수리 : Lv.600]

무려 600레벨의 네임드급 몬스터.

그 두 마리의 몬스터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같은 레벨만큼이나 치열한 전투인가.

두 마리 모두 적잖은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

가이버가 입맛을 다셨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이지."

그래, 이건 두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할 기회였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을 테지만. 녀석들은 서로에게 집중한 상황. 그 틈을 노린다면 일망타진이 가능하리라.

'다만, 빼앗기기 전에.'

경험치, 드롭율 버프가 활성화된 지금.

다른 길드들도 자신들처럼 속도를 내겠지.

이런 기회를 눈앞에서 놓칠 순 없었다.

성기사 랭킹 1위.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으로 획득한 스킬.

[성전사의 가호] 발동.

촤아아아악─!

가이버에게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이버가 소리쳤다.

"나를 중심으로 뭉쳐라. 돌격한다."

인접한 아군에겐 공격력, 방어력 버프를.

적에겐 지속적인 피해를 주는 스킬.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답게 그 효과는 말할 것 없이 걸출.

"오오! 이게 가이버 씨의 스킬!!"

"효과가 상당하잖아."

"역시, 괜히 랭커가 아니야."

그로 인한 사기진작 효과는 덤이었다.

슈슈슉─!

가이버의 지휘에 따라서.

쏟아지는 화살 비와 공격 스킬들.

가이버를 선두로 돌격하는 플레이어들.

"누더기 거인부터 처리한다!"

흑철수리가 물고 늘어지는 틈을 타서 뒤를 노린다.

펄럭─!

"?!"

그러나 그 계획은 흑철수리의 날갯짓에 물거품이 됐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흑철수리가 방향을 바꾸고는.

후방의 서포터 플레이어들을 노린 것이다.

가이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대체?"

방금까지 서로 죽일 듯 싸우던 놈들이.

순식간에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가이버가 다급하게 외쳤다.

"전원 후퇴! 후방을 보호한다!"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

돌격의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젠장,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가이버는 이를 악물었다.

'조급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 판단이 잘못된 건 아니다.

이런 패턴은 너무하지 않은가?

이건 함정이었다.

누구라도 걸릴 수밖에 없는 교묘한 함정 말이다...!!

*

...와, 살벌하게들 싸운다.

포식자 구역에선 플레이어가 없을 때도 몬스터들끼리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저것들 정말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있잖아?

고고한 시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님프가 입을 열었다.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호열 님."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약 정령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계약 조항을 떠나서라도 정령은 계약자의 성질에 영향을 받게 되니까. 한 마디로 님프의 빠릿한 상황 파악은 나의 영향이라는 말이다.

어디 보자.

늪지대를 부유하는 연잎 위에서.

나는 전황을 지켜봤다.

'이제 곧 늪지대 중심부인가.'

님프의 말에 따르면.

중심부에선 더욱더 활발히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었지.

그 중심부에 전리품이 있는 탓이었다.

'그 증거로 여기서부터 서로들 멱살을 잡기 시작했고.'

플레이어는 뒷전.

자기들끼리 사투에 한창인 몬스터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말이지.'

저 전투에 난입하고 싶었다.

두 녀석 다 기운이 빠졌으니까.

둘 다 사냥하고 경험치든 전리품이든.

날로 먹고 싶었단 소리였다.

'날로 먹는 게 아니라 상식적인 판단이지.'

솔직히 누가 이런 기회를 외면할 수 있겠냐고.

그러나 전투에 미친 만큼.

다른 의미로 미친 내가 아니던가?

나는 님프에게 말했다.

"서로의 긍지를 건 전투다."

그래, 긍지에 미친 나란 말이다...!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전리품을 쟁취하기 위해서.

포식자 구역으로 몰려든 몬스터들.

그 행동을 그랑펠의 긍지는 합당하다 여기는 거겠지.

게다가.

"그 사투에 난입하는 것은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 틈에 끼어들어서 뒤통수를 노린다?

역시나 긍지에 부합하는 이유가 없다면.

나는 절대 날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님프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인다.

"과연, 그런 뜻이 계셨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을 짓지 말아줘.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애원도 잠깐.

나는 미련을 버렸다.

'솔직하게 사냥할 자신은 없다.'

사실 날로 먹기 위해 젓가락질 할 기운도 부족하지.

무엇보다 님프와의 계약으로 빠져나가는 마력량이 부담이 됐다.

계약을 맺은 만큼 님프도 전투에서 활약하겠지만, 그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정령을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확인한 정령, 님프의 능력은 단 하나.

사색 겨우살이의 성장을 촉진했던 축복뿐.

사실 그것만 해도 님프와의 계약은 엄청난 성과였다.

왜, 나는 거기서 『비약초의 육성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으니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목격했거든.

[스킬], 『마법』과는 또 완벽히 다른.

정령의 {자연} 능력을...!

그건 정령학 관련 서적에도 명시되어 있던 바였다.

'다른 마법사들은 몰라도 나한테는.'

그 말이 뜻하는 건 간단했다.

써먹을 수 있는 기이의 가짓수가 늘어난다는 것.

나는 기이의 가능성을 지난 균열에서 목격했단 말이지.

'『마법』만으로는 뚫어낼 수 없던 균열 조각.'

그 마법도 어디 보통 마법이었냐고.

파괴력이라면 마탑에서도 한손에 꼽힐 뱅그릿의 순수마법이었다.

나는 그런 뱅그릿의 마법으로도 뚫지 못한 균열 조각을.

[심미]와 『마법』이 합쳐진 [『기이』]로 뚫어냈었단 말이다.

'[{기이}]가 될 수도, {『기이』}가 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자연} 또한 살 구멍, 파놓은 우물이 됐다는 뜻이겠지.

그것도 쉽게 마르지 않는 우물이!

"마치 태풍의 눈 같군요."

잡생각은 거기까지.

님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유유자적이란 말이 어울리는 나의 모습.

중심부, 전리품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들끼리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서로 싸우느라 나 같은 저레벨 플레이어한테는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거겠지.

나야 뭐 오히려 감사한 일이었다.

'레벨만큼 전리품도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포식자 구역.

포식자라 불리는.

네임드급 몬스터를 끌어당기는 전리품은 과연 무엇일까?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래, 상태이상에 걸린 것처럼.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그 전리품 말이다.

'악마의 아이템일 확률도 낮지 않다.'

그래.

악마가 관련됐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랑펠의 긍지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거겠지.

'정말 나서서 피곤하게 산다.'

이내, 늪지대 중심부에 다다랐다.

시야에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뭔가를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것 같은 플레이어들을.

'이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좀비 거인과 거인 못지않게 커다란 독수리.

두 마리의 몬스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내가 생각만 했던 걸 실천한 모양인데?'

그 결과, 개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저 꼴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저 플레이어들은 동료라도 있지.

나는 혼자였다.

'경험치, 드롭율 버프를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본 채.

그대로 황천행이었겠구나.

말 그대로 남 좋은 일만 하다 죽었을 뻔했다는 말이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려도 부족했건만.

나는 뻔뻔하게 지껄였다.

"긍지를 가벼이 여긴 죗값은 큰 법이지."

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커다란 바위가 바로 이곳에 모인 이들이 갈망하는 전리품입니다. 정확히는 저 바위 안에 있을 무언가가 모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겠지요."

보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여태껏 누구도 전리품을 차지할 수 없었는가?

전투가 끊이지 않는 포식자 구역이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저 바위를 부수고 전리품을 차지할 틈을 주지 않은 거겠지.

그러나.

"저건 바위가 아니다."

그 전제부터 잘못됐다.

말했듯 저건 바위가 아니었으니까.

"씨앗이다."

그래, 지식이.

정확히는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으로 습득한 지식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건 바위가 아닌 식물의 씨앗이라고.

"...씨앗?"

하위 정령이라고는 해도 숲의 정령이었다.

숲의 정령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의 씨앗이라면?

◈ 90화. 늪에서 피어나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