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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그 어려운 걸 (1)

일십백천만십만....

─현재 기여도 : 897,340p

그래서 이게 높은 거야, 낮은 거야?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짐작이 되질 않는데.

이 성격 때문에 누굴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거늘.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지급됩니다.]

[프로스트와의 관계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프로스트에서 영향력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프로스트에서 '권한'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물어볼 수고는 던 것 같군.

대략 구십만의 기여도.

그 정도 기여도 수치면 관계도와 영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에 충분한 모양이었으니까.

그로 인한 [권한] 기능의 활성화까지.

'와씨. 잠깐만.'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한 번 겪어보는 게 낫다.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의 위력을 미리 맛본 나였다.

덕분에 나는 권한의 능력과 그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딱히 한계가 없다는 것이 그 한계!

권한 기능이 활성화된 순간.

사실상, 나는 해당 지역의 영주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유스라 왕국에서 내 결정을 막을 건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밖에 없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하쿠나가 내 말에?'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나는 그런 막대한 권한 기능을.

프로스트에서도 활성화한 것이었다.

TV, 인터넷 뉴스, 커뮤니티에서 봤던 프로스트의 가치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대한민국의 마탑 정도는 아니더라도, 분명 엄청난 경제 부흥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했었지. 다들.

'당장 그럴 순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복구하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무너진 건물만 해도 장난이 아니네요."

"...뭣보다 주민들 걱정도 해야 하고요."

지금의 프로스트는 말 그대로 생지옥에 떨어졌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크게 우려가 되진 않았다.

왜, 유스라 왕국은 프로스트보다 훨씬 심했었거든.

'주민은커녕 달랑 국왕 한 명.'

그렇게 시작한 유스라 왕국의 현재 모습을 보아라.

물론, 유스라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프로스트의 가치도 호들갑을 떤 만큼 유스라에 못지않겠지.

"또 생산직 플레이어들만 신나겠네."

"걔네들 고생한 거 생각하면 인정해 줘야지, 이건."

"그래, 뭐. 우린 경험치 쏠쏠하게 챙겼으니까."

그 권한은 기능은 차차 살피기로 하고.

그래, 경험치.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가 흠칫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95]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213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30]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을 처치한 것만으로 30레벨이 상승했다.

와, 생각보다 많이 올랐네. 이거.

광장에 강림한 녀석이 아니던가?

사방에서 몰려온 플레이어들에게 협공을 받았었지.

한마디로 그들과 처치 기여도를 나누고, 경험치 또한 나눠 챙겼단 소리였다.

'그런데도 30레벨이나 오른 건가?'

과연, 마왕다운 경험치를 뱉어내셨군.

물론, 내가 그만큼 처치에 많은 기여를 했단 소리겠지만.

자동적으로 전리품을 획득할 만큼 말이다.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인벤토리 오픈.

나는 마왕의 전리품을 확인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우선,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물질적인 욕구를 초월한 청렴결백의 화신.

그것도 모자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품.

그랑펠의 성격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침착하게.'

나는 다시금 떠오른 정보를 정독했다.

[불순한 지식의 오망성].

일단, 그 등급은 무려 [에픽]이었다.

[유니크]의 윗 단계.

현재 아르카나에 존재하는 아이템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란 소리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게 레벨을 비롯한 착용 제한이 없다는 것.

'막 700레벨 제한이었으면 나 진짜 억울해서 죽었다.'

그 정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악마의 저주만 풀어내면 곧바로 에펙 등급 아이템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악마의 저주를 풀어내는 것쯤이야.

적어도 내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보다시피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들을 봐라.

데카라비아.

녀석을 의식으로 초대하기 위해 제물로 사용했던 세 개의 아이템.

[귀신 들린 명검], [귀부인의 보석함], [목을 조르는 넥타이].

그 세 개의 아이템이 정화된 상태로 인벤토리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천만다행이다. 정말.'

대박을 건진 이 기분에 휘둘리지 않아서 말이야.

동요는 실수로 이어지는 법.

덕분에 나는 냉정하게 머리를 굴릴 수 있었으니까.

내가 성격이 이렇게 좋....

뻔뻔하게도 자화자찬하려던 찰나.

"?"

뭔데, 또 반짝거려. 이건.

점멸하는 퀘스트창에 시선이 향했다.

확인하니까 기대하지도 않았던 클래스 퀘스트였다.

─마왕 데카라비아를 처치하라. (성공)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마왕, 녀석이 있었던 곳을 쳐다봤다.

아스큐라 백작과 칠죄종 탐욕.

그 녀석들을 처치하고 난 뒤.

그 잔해에서 피어오르던 짙은 연기.

그때와 다르게 마왕, 데카라비아는 잔해 한 줌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단 말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하늘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탓.

다른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유달리도 짙은 연기.

그건 데카라비아가 있던 허공에서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연기를 바라보다가 헤아렸다.

'이걸로 셋인가.'

과거 클리어했던 클래스 퀘스트.

거기에 분명 '봉화'라는 언급이 있었지.

그럼 저 연기가 봉화라도 된다는 건가.

'그래서, 이게 누구 보라고 피우는 봉화인 건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

새로운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유산]

생존의 봉화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에 의해 소실된 그대들의 유산을 되찾아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잠깐만. 뭐?!

악크샨?!

내가 아는 그 악크샨?!

그것도 모자라서 유사아아아산?!

*

데카라비아.

마왕이 강림한 순간.

세상은 절망에 빠졌다.

압도적인 위압감!

피와 살점으로 빚어낸 거대한 오각별.

프로스트 광장에 떠오른 데카라비아의 형상은 멀리서 봐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시청자들은 물론, 스튜디오의 출연진들 또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런 마왕과 맞서고 있다니, 경이롭습니다. 플레이어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

그 공포가 가시기도 전에.

속속들이 속보가 도착했다.

"바,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마왕으로 추정되는 악마가 프로스트의 영주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간파해 낸 건...."

"설마, 이번에도 이호열 플레이업니까?"

"네, 그렇다고 합니다!"

현장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전해온 속보.

그래, 우리에겐 이호열이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공포감을 덜어내던 찰나.

스륵─

넘겨진 대본엔 AAU에서 발표한 성명문이 있었다.

"잠시만요. AAU에 따르면 마왕의 정체가 데카라비아라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데카라비아의 자료 화면.

거기엔 모두를 경악하게 할 정보가 있었다.

──────

모든 광물에 대한 지식 보유.

광물을 포함한 대지 속성 공격에 면역일 것이라 예상됨.

──────

"대지 속성 공격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이호열이었다.

대지 속성 공격.

그건 이호열의 주요 공격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그와 동시에 전환되는 화면.

이호열과 데카라비아의 거리가 눈에 띄게 좁혀져 있었다.

"전문가님, 어떻게 보십니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다.... 제 눈엔 그렇게 보여집니다."

"동감합니다. 스킬마다 숙련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선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호열 플레이어가 대지 속성 스킬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던 것? 다 노오력과 시간이 투자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래, 스킬도 스탯과 마찬가지였다.

한 우물만 파는 것도 힘들단 소리였다.

스킬 또한 그 숙련도가 상승할수록.

숙련도 상승을 위해 투자되는 시간과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한들.

다른 속성의 스킬을, 돌기둥이나 돌계단을 소환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순 없으리라....

화르륵─!

"저, 저게 뭔가요!"

...예상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었거늘!

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화염 폭풍은 무엇이란 말인가?

엄청난 열기.

헬리콥터 파일럿이 다급하게 고도를 올렸다.

카메라가 다급히 줌을 풀고 화염 폭풍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았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촬영하던 카메라 감독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람 같은데, 저거?"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실시간 중계.

마찬가지로 같은 화면을 지켜보던 스튜디오.

"그냥 화염 폭풍이 아니라 사람 아닌가요, 저거?"

"얼굴도, 긴 머리카락도, 그리고 저건 손 같은데요?!"

"착시 같은 게 아닙니다. 저건 여인의 형체가 확실합니다!"

"전문가님, 저건 대체 어떤 스킬일까요?"

"미천한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다! 그냥 보십쇼."

그 모습은 마치 프로스트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이 감싸 안아 떠받든 것과 같은 여인의 형태.

화르륵─!

화염 폭풍은 플레이어들에겐 든든한 보호막이, 동시에 데카라비아에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어주고 있었다. 거기에 더 이상의 반전은 없었다.

"끝났습니다, 여러분. 마왕이 쓰러졌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엄연하게 피해자들은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상처로 가득한 승리군요."

카메라가 주저앉은 프로스트의 주민들을 클로즈업했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하늘께선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내,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말이야.'

이쯤이 딱 끊기 좋은 타이밍이겠지.

악을 물리친 영웅도 등장했겠다.

다시금 평화도 찾아왔겠다.

다음 시즌을 예고하면서 깔끔하게 끝.

그러나 이건 현실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따질 게 남아있는 현실이란 거지.'

앵글을 지켜보던 PD 현용석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딱 한 컷만 더 잡자."

현용석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이나즈마였다.

조금이라도 감이 있다면 말이야.

당장부터 벌어질 전개를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흔히 있는 일이거든.'

신규 업데이트에 등장한 프로스트.

그 소식에 각국의 정부가 촉각을 곤두세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프로스트의 걸린 경제적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일본 정부는 춤을 추고 있겠지.'

프로스트가 홋카이도, 북해도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시커먼 속내는 금방 드러났었다.

자국 길드인 이나즈마를 제외한 다른 길드의 발목을 온 힘을 다해 붙들었었지. 엄연한 국제 협약 위반이지만, 위반할 정도의 가치가 프로스트에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마왕이 튀어나온 덕분에 빠르게 철수했지만.'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은 다른 법이다.

마왕이 사라진 현재.

일본 정부는 다시금 영토를 들먹이며 프로스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게 뻔해 보였다.

그런 일본 정부에 가장 걸림돌이 될만한 존재는 누구일까?

당연하게도.

'탈환 퀘스트에서 가장 높은 기여도를 세운 사람.'

바로 이호열이겠지.

"...내가 그렇게들 나오실 줄 알았지!"

그래, 흐름은 현용석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히사기를 필두로 한 이나즈마 길드 전원.

그들이 이호열 측으로 다가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현용석이 주문했다.

"사운드 잡을 수 있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케이. 그림에 만족해야겠네. 클로즈업 당겨 봐."

-표정하고 입 모양 위주로? 말 안 해도 알죠. 그런 건.

"좋았어."

아쉬운 대로 표정과 입 모양으로 상황을 추측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아쉬운 게 아니라 그 한 컷이라도 건져야 한다.

한일 갈등.

다른 건 몰라도 시청률 하나는 보장될 테니까.

이내, 서로 마주하는 이호열과 히사기 카즈마.

"...어?"

그런데 아무리 줌을 당겨도.

히사기의 표정도, 입 모양도 포착할 순 없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현용석은 펼쳐진 화면을 믿지 못해 눈을 끔뻑였다.

"...야, 종진아. 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고개 숙인 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 또한 현실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현용석이 다급하게 말했다.

"빠, 빨리 자막 띄워!"

중계 화면 밑으로 속보가 떠올랐다.

──────

히사기 카즈마를 비롯한 이나즈마 길드 일동.

이호열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는 듯 보여...!

──────

◈ 63화. 그 어려운 걸 (2)

윙윙─

시끄럽게 진동하는 스마트폰.

히사기 카즈마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보나 마나 역시나 놈들이었다.

곁에 있던 빡빡머리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즈마. 정말 괜찮겠어?"

"뭐가?"

"우리야 언제나 널 따르겠지만. 감당할 수 있겠냐고."

대한민국의 플레이어, 이호열에게.

일본의 자랑이자 상징인 이나즈마가 머리를 숙였다.

그 광경이 라이브 방송 중이던 플레이어들에 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중대한 신세를 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행동에 일본 정부 측의 지시는 없었다.

그랬다. 히사기가 내린 독단이었다.

히사기가 가늘게 눈을 떴다.

"글쎄. 그러는 너희들 생각은 어떤데?"

"...우리? 뭐 너랑 다르지 않겠지."

"본 게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야?"

까무잡잡한 태닝 피부.

끼어든 여자가 찍 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똥 같은 놈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프로스트.

같은 공간에서.

같은 플레이어의 시선으로 지켜봤기에.

이나즈마 길드원들은 마음을 다해 이호열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만약, 이호열이 없었다면 지금쯤 홋카이도는....

"몇십만. 아니지, 몇백만 국민의 목숨을 살린 사람한테 그 정도 감사 인사도 못 한다는 거야? 고작 한국인이란 이유 때문에? 전부터 생각했지만 윗대가리 새끼들은...!"

"화내지 마. 속만 상하니까."

"...후우. 그래서 갈 거야, 카즈마?"

빡빡머리가 거친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투로 물었다.

히사기의 뱀눈이 번뜩였다.

"그래, 노친네들한테 현실을 알려줘야 하니까."

.

.

.

드르륵─

히사기는 무릎을 꿇었다.

그를 둘러싸고 앉은 건 일본 정부의 각료들.

그들은 히사기를 향해 독설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히사기?"

"조선인에게 머리를 숙여? 멍청이 같은...!"

"가온이 이나즈마를 앞지른 지금. 자네의 행동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몰라서 그런 게야!"

낼름─

죽여버릴까.

히사기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진심으로 고민했다.

저 기름진 몸뚱이들을 꼬치처럼 꿰는 데에.

몇 초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참아야겠지.

자신은 몰라도.

자신의 어깨에 올라탄 동료를 위해서라도.

'바보 같았어.'

프로스트에서 히사기는 깨달았다.

여태까지 자신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단 것을.

[프로스트 탈환].

갑작스레 떠오른 퀘스트 덕분에 잊고 있었다.

기여도에 눈이 팔려 프로스트,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위치가 홋카이도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이호열과 마주한 뒤였다.

'다시 생각해도 할 말이 없군.'

정확히는 생존자를 구출하던 이호열을 목격한 다음.

생존자를 구출하는 것도 모자라.

널브러진 시체를 수습하기까지.

히사기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약, 이호열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홋카이도의 거주민들이....'

저들과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졌다.

'난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건 히사기뿐이었다.

이 윗대가리 놈들은 똑같았으니까.

"국익을 최선으로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쯧."

"그러게. 내가 놈들의 진입을 조금 더 늦추자고 말하지 않았나!"

"자네의 말이 맞네. 홋카이도 민간인이 수십 명쯤 휘말리고. 그걸 구실로 삼아서 미사일을 날려버렸더라면. 지금 상황보단 훨씬 나았겠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목숨은 헌신짝처럼 여기는 놈들.

착각이 깨지자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쓰다 버려지겠지.'

물론, 히사기는 얌전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히사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케를 홀짝이던 이들이 흠칫하며 물었다.

"뭐하는 건가, 히사기?"

"우리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허. 자리에 앉게!"

착각하고 있나 본데.

히사기는 대답 대신 살기를 내뿜었다.

클래스, 마창사.

플레이어 랭킹 6위.

그 이명은 번개의 창.

그가 작정하고 뿜어대는 살기는 뱀의 맹독보다 짙었으니.

"히, 히사기!"

"우리 말에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쨍그랑─

떨리는 손.

그들이 놓친 사케 잔이 깨지고.

사타구니가 사케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젖을 정도였다.

히사기가 대답했다.

"앞으로 이나즈마가 정부와 협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뭐, 뭣?! 그게 무슨 소린가!"

"그에 관한 처분은 마음대로 하시길."

히사기가 눈을 번뜩였다.

"어디 그러고도 숨이 붙어있을 수 있다면 말이야."

그 말에 각료들은 현실을 깨달았다.

"...!"

자신들이 쥐고 흔들었던 히사기의 위치를...!

강함을 따지자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플레이어.

그건 웬만한 경호원을 내세워도 히사기 앞에선 무의미하단 소리였다.

히사기를 막기 위해선 적어도 남태민 정도 되는 플레이어를 불러와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그쯤 되는 플레이어들은 사사로운 의뢰에.

돈 따위에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히사기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짜로 죽는다...!'

얼어붙은 각료들.

그들을 남겨둔 채.

"그럼, 뱀은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편히들 즐기시길."

히사기는 고개를 숙이고 룸에서 빠져나왔다.

결국, 저질렀군.

히사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국에서 살기는 글렀을지도 모르겠는데?"

당장이야 어쨌든.

통 안에서 빠져나간 뱀을 가만둘 리 없을 테니까.

히사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뭐, 망명도 나쁘지 않겠군."

자신의 조국은 쓸데없이 강대국이었으니까.

복잡하게 얽힌 국가 간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자신을 받아줄 나라가 많지는 않겠지만....

일본 정도는 신경 쓰지도 않을.

아니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 같은 이를.

히사기는 한 명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이나즈마 일동.

그 정중한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그릇.

그 행동에서 흘러나오는 격식.

히사기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잔고를 헤아렸다.

"...유스라 왕국 투자 이민엔 얼마가 필요하려나."

*

이 세계의 술맛도 차차 입맛에 맞아갔다.

"캬아. 난 이 초록색 병이 그렇게 좋더라~"

"싸구려 입맛 어디 안 가네. 단장."

"싸아구우려어? 너어어 내가 빈민가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지이?"

"...와. 단장 벌써 취했어. 진상."

술은 입에 대지 않는 자매님.

귀찮은 건 질색하는 꼬맹이.

나이 먹었다고 내빼는 노인네.

그 몇몇을 제외하고.

그림자 용병단은 정기 회의를 빙자한 술판을 벌였다.

키치가 히끅─거리다가 소리쳤다.

"야, 뚱땡이! 소리 좀 줄여!!"

"아씨, 잠깐만. 내가 나올 거라고. 여기에."

"진상에 개진상까지. 어휴."

요란한 TV 소리.

뚱땡이, 락키드는 TV 앞에 바짝 앉아있었다.

100인치짜리 TV 화면조차 아담하게 만드는 근육 덩어리.

그 위압감과 다르게 락키드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와. 이 좋은 걸 지들만 보고 있었네."

그냥 액자인 줄 알았건만.

뭔가를 건드리자 그림이 떠올랐다.

그것도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에선 억만금을 줘도 못살 물건이었다, 이건.

그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신기하거늘.

락키드는 흘러나오는 뉴스에 집중했다.

-이나즈마의 행동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 상당히 많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문가님? 그들의 행동이 일본 정부의 태도를 대변하는 걸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일본 정부 측 관계자에 따르면 이나즈마의 이번 행동은 정부의 의견과는 조금도 일치하지 않는....

관심도, 재미도 없는 대화가 오가는 도중.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료화면.

거기엔 아는 얼굴, 이호열이 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나는."

그래, 이호열.

락키드는 너그럽게 이해했다.

'뭐, 그 녀석도 좀 활약을 하긴 했지.'

하지만 이 락키드 님께서도 맹활약을 했단 말이다.

이호열을 칭찬한 것처럼 이 락키드 님도 떠받들란 말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같은 얼굴만 보여주는 건데?"

허나 그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아무리 기다려도, 채널을 돌려봐도.

온통 이호열 이야기뿐.

"...앞뒤 똑같은 뭐?! 갑자기. 뭔데. 이거."

속보가 그대로 끝나고.

얄미운 CF가 튀어나왔을 때.

락키드의 인내심이 폭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벌컥벌컥─

씩씩거리며 다가온 락키드가 양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덩치에 맞게 양주 세 병을 내리 비운 락키드가 억울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이호열 그것보다 못한 게 뭔데?"

또 시작이다.

평소처럼 가뿐하게 무시하는 말석의 투정.

반응한 건 취기가 오른 단장, 키치뿐이었다.

키치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마법도 못 쓰지. 싸움도 못 하지."

"마법은 그렇다 쳐도 뭐 싸움?! 마법사가 뭔 싸움을 한다고...."

"쯧쯧쯧. 넌 아무것도 몰라, 락키드. 히끅."

그 괴물은 말이야.

검기까지 자유자재로....

"히끅─"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몸이,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까진 꼭 해야 될 것 같았다.

키치가 락키드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 또 무슨 술주정을 부리려고."

"너보다 이호열이 훨씬 잘생겼어."

"뭣?! 뭐라고오오?!"

다른 건 다 참아도 그건 못 참아!

락키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 락키드에게 키치가 진심으로 덧붙였다.

"히끅─ 어쨌든 건드리지 마. 뒤지기 싫으며어언."

락키드도 눈치가 있었다.

'영감에 단장까지?'

알카리에 이어서 키치까지.

이호열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니까.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거기에 대해선 락키드도 이의는 없었다.

'...그 마법 하나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락키드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 억울함은 어디 가서 풀어야 하는 건데!!"

역시나 대답을 해주는 건 만취한 키치뿐.

"이호여얼? 지금쯤 마탑에 있을걸?"

락키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성실한 것도 정도가 있지.

유스라 왕국에서 지켜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호열만큼 세상을 피곤하게 사는 사람도 없으리라.

'그 강함이 이해가 되는군.'

그나저나.

"...근데 건드리지 말라면서. 그걸 왜 알려주는 건데?"

"너무 시끄러워서. 좀 맞으면 조용해질까 싶어서어어."

"찾아가서 맞을 생각 따윈 없거든. 그리고 뭐? 마탑? 그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데를 뭐가 좋다고 또 찾아가? 내가 미쳤어?!"

*

뚝뚝.

쏟아지는 구슬땀.

떠오르는 메시지.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가뿐하구나."

이 빌어먹을 놈의 허세.

근력과 민첩을 상승시켜주는 클래스 퀘스트.

유산소, 무산소 운동을 매일매일 반복하는 나였다.

막대한 운동량을 소화해 내니까.

스탯을 제외하고도 기초 체력이 상승하는 건 당연한 일.

"운동 후 마시는 차도 나쁘지 않군."

달칵─

갈증에 시달리며 즐기는 티타임.

나는 언제나처럼 질문을 던졌다.

'...진짜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

긍지에, 격식에 익사해 뒤지게 생겼다고.

하지만 나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도 발버둥을 친 덕분일까.

이젠 가라앉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라앉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이조차도 슬슬 익숙해지는구나."

그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으니까.

향상된 체력 덕분에 아무리 고된 일과를 소화해도 몸에 활력이 남아있단 말이었다.

정말이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지금만 하더라도 그랬다.

과거엔 육체의 피로를 핑계로 합법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었건만.

체력이 상승한 탓.

끝을 알 수 없는 그랑펠의 긍지 타령에.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게 됐단 소리였으니까.

마왕을 쓰러트리고 돌아오자마자 마탑.

그것도 연구실이라니.

그러나 더 이상 징징거려 봤자 뭣 할까.

'...됐다.'

이 긍지가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미련을 버리고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악크샨이라니. 그리운 이름이구나."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유산]

생존의 봉화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에 의해 소실된 그대들의 유산을 되찾아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우선 추측대로.

악마의 잔해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봉화가 맞았던 모양이었다.

생존의 봉화가 확실하게 전달되었다고 하니까.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겠지만.

데카라비아를 처치하면서 퀘스트 조건을 충족시킨 거겠지.

'다음 목표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악크샨의 유산이라.

그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당연히 악크샨 기지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 뭐.'

문제는 그 악크샨 기지가 아르카나에서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췄다는 거지만.

과거, 플레이어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망한 클래스니까 걍 지역 삭제 때린 거 아님??

-ㄹㅇ 업뎃 내역에 없는 것도 악마 사냥꾼 플레이어가 한 명도 없어서 그런듯

-용량만 잡아먹는 컨텐츠는 삭제하는 게 맞지 ㄹㅇㅋㅋ

뭐, 나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아르카나가 평범한 게임이었던 시절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됐다.

아르카나는 평범한 게임이 아니었다는 걸.

단순한 보물섬이라고 여겼던 유스라 제도에도.

고대 왕국과 거악이라는 스토리가 있었으니까.

악크샨 기지에도 얽힌 뒷이야기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게 클래스 퀘스트로 떠오른 거고....'

대충 알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과 재회할 날이 기다려지는군."

얼굴이나 그 이름 하나 기억 못 하면서.

진짜 뻔뻔하기 그지없구먼.

'퀘스트 목표야 때가 되면 알아서 떠오르겠지.'

그러니 당장은 주어진 일과에 충실히 임하는 게 옳다.

생각을 정리.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착석하기 무섭게.

스스슥─

양피지에 글씨가 떠올랐다.

그 발신인부터 확인하니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였다.

달칵─

나는 차분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떠오른 글씨를 읽어나갔다.

'...이건?'

그런데 그 내용이 의외였다.

그것도 상당히.

◈ 64화. 마탑 (1)

마탑.

무력으로 따지자면 아르카나에서 범접할 이들이 없는 집단.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조차.

그 영향력을 우려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원할 정도.

그러나 그만큼 막대한 위치에 있기 때문인가.

마탑은 아르카나의 그 어떤 이벤트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물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야.

그저 시스템의 한계라고 여기고 넘기면 되는 일이었겠지.

왜, 플레이어들이 활약할 이벤트에서 마탑이 끼어든다?

마탑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

플레이어들은 손가락만 빨게 될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마탑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

그랬다.

심지어는 현실에 소환돼서도 말이야.

그랬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나서서 행동하는 모습?

플레이어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

소식은 들었습니다.

프로스트에 강림한 마왕, 데카라비아를 처치하는 데에 신경을 쓰셨더군요. 마탑의 수석 마법사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단 말밖에....

──────

...이게 무슨 뉘앙스지?

아무리 다시 읽어본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탑의 실세.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보내온 편지가 확실했다....

그 성격을 생각하면 빈말은 절대 하지 못할 성격일 텐데.

이건 아무리 읽어봐도...?

'나서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느낌이 가득하잖아.'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곤 입술을 떼었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은 있는 법이지."

그래, 내게도 흑역사란 말 못 할 사정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확실히 사정이 있어 보이잖아, 이거?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

게다가 마탑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서일까.

마탑의 구조를, 그러니까 마탑이 굴러가는 꼴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나는 마탑에서 수행 중인 퀘스트가 있었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잠깐만, 이거 어쩌면.'

나는 늘어진 조각들을 멋대로 맞춰나갔다.

그래, 마탑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그 사정 탓에 마법사들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

마르셀로는 거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마르셀로의 공동 연구자이자 아군이다....

그러자 완성된 건 그럴싸한 행복 회로.

'...이거 퀘스트 끝에 있을 마탑의 사정을 해결하면.'

마탑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거 아닐까?

당연하게도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마탑에서 막대한 관계도, 영향력을 쌓게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렇다는 건....

'마탑도 든든한 아군으로...?'

아니, 앞서 나가지 말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게 당연하니까.

게다가 날로 먹기 좋아하다가는.

배탈이 나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옳다.

'퀘스트를 수행하다 보면 더 많은 걸 알게 되겠지.'

당장은 궁금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당사자인 마르셀로에게 물어보면 안 되냐고?

가능할 리가 있나.

말 못 할 사정을 캐묻는 것이야말로.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내가 마르셀로에게 보낼 답신이야 뻔했다.

──────

그대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한다.

──────

"면담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삼고초려를 들먹이기엔.

내가 받아먹은 게 너무 많다....

내가 또 주고받는 계산 하나는 철저하거든.

*

프로스트 쟁탈전.

그날의 여파는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가시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와 다르게 프로스트 쟁탈전에선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샤이닝과 천하통일.

길드 랭킹 1위와 2위.

그들의 건재함은 이번에도 증명된 셈이었다.

마왕군을 앞서는 그들의 전략과 전술.

과연, 공성전 경험이 헛된 게 아니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의외의 복병도 등장했다.

악마 군단장, 호리칸.

그 네임드 몬스터와 홀로 맞서던 남태민.

호리칸의 다리를 부러트린 것도 모자라 날개까지 찢어버렸던 그였다.

그의 호쾌한 전투를 보고 플레이어들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ㄹㅇ 남태민 드디어 클래스 퀘스트 시작한 건가??

-그런듯??? 다른 랭커들에 비해서 늦은 감이 있긴 하네

-오히려 대단한 거 아니냐? 클래스 퀘스트도 없이 10위권을 지킨 건데

-ㅇㅈㅋㅋ이제 떡상할 날만 남았다 가온 풀매수 가보자

그런 굵직한 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이나즈마의 정중한 태도라든가.

제시 하인네스의 샤이닝 길드 이탈이라든가.

그림자 용병단의 무력이라든가.

악마 군단장을 일격에 처치하던 하르콘의 모습이라든가.

워낙 벌어졌던 일이 많았던 프로스트 쟁탈전이었다.

뭐, 취향이야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가장 큰 관심사는 다를 수밖에.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객관적으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그러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는 누구란 말인가?

"역시 이호열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출연진들.

전문가가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일단, 그 능력부터 봅시다. 지겹게 자료 화면으로 보셔서 아시겠지마는. 이, 스킬! 이 스킬의 모습이 여태까지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던 스킬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프로스트에 나타난 화염의 여신.

당사자가 듣는다면 흠칫할 정도의 찬양이 이어졌다.

그저 [심미] 스탯을 활용.

심미적 감각을 더했을 뿐이거늘.

"그래서 제가 감히 예상해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는 화염 마법사 계열 히든 클래스 전직자가 확실할 겁니다."

화염 마법사?

그것도 히든 클래스라니.

엄청난 오해를 사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에 대해서도 의견은 갈릴 수밖에.

"전 반대입니다."

"오,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황 전문가님?"

"물론, 화염의 여신이 대단하긴 했지만. 보십시오. 여기 이호열 플레이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 보이십니까?"

그건 중급 흑마법, 흑관이었다.

"이건 전혀 새로운 계통의 스킬입니다! 그 외관으로 볼 때 흑마법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왜, 마탑에서도 정식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흑마법 말입니다!"

"그건 굉장히 흥미로운 주장인데요?"

"그렇습니다. 이호열 플레이어가 누굽니까? 플레이어 최초로 마탑, 그것도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자격을 획득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분명, 흑마법과 관련된 클래스로...."

마탑에서 호열의 위치야.

마법사 클래스 플레이어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으니까.

그 의견도 완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그 대단한 두 스킬을 동시에 사용했다는 거 아닐까요? 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전문가님께선?"

"...!"

"...그, 그건 말씀드리기 싫습니다."

진행자의 지적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두 사람.

전문가 체면이 말이 아니게 만드는 호열.

그래, 호열은 말 그대로 태풍의 눈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면서도.

온종일 매스컴에서 자신을 두고 떠들어댈지언정.

-그 와중에 생존자 구출도 모자라서 시체 수습도 했다잖아

-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면 뭐임ㅋㅋㅋㅋ

-그저 호멘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고고한 자세를 잃지 않는.

오히려 걱정하는 쪽이 이상해 보일 정도의 태도.

"...씹. 보고 싶은 사람 봐라."

그러니까 소중한 언니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삑─

레오니가 리모컨을 소파에 내동댕이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숨죽이고 있던 버서커의 길드원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 얼굴이 수척해졌어."

"속이 말이 아니겠지. 나도 그냥 가슴이 철렁했는데."

"진짜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까요?"

그건 프로스트 탈환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

프로스트 탈환 도중.

맞은편 골목에서 들려오던 호열의 목소리.

"뭐? 차를 대접해? 나 진짜 상상도 못 했잖아?"

그것도 차를 대접하겠다는 게 제시 하인네스였다.

길드원들 사이에서 제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내색은 안 해도 머리가 얼마나 복잡할까, 우리 언니.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으면 산발이 돼서...."

"그건 그냥 오늘 머리 안 감아서 그래."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안 먹기는. 방에서 피자 냄새가 진동하더라."

"...그럼 저 언니는 왜 오버하는 거야?"

아니, 하나만 하든가.

길드원들은 레오니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씹. 뭔데. 진짜."

폭신─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레오니.

레오니, 본인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알 수가 없었으니까.

차를 대접한단다.

그것도 제시 하인네스한테.

"...새치기 아닌가."

그건 확실히 불쾌한 일이었다.

누구는 말이야.

그 차 맛이 궁금해서 말이야.

주고받은 걸 따져가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는데.

분명, 그랬는데.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레오니.

...갑자기 웬 칭찬?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호열의 직설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그건 정말 움직임이 나쁘지 않아서 한 소리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동시에.

호열이 빈말은 절대 하지 못하는 성격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뭔데. 존나."

그러니까 겁나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퍽퍽─

"칭찬할 시간에 차 한 잔 타주든가. 씹."

레오니는 발을 굴렀다.

이 대가리를 비우려고 TV를 틀었건만.

아무리 채널을 돌려봐도 원흉, 호열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게 리모컨을 양보하고 방구석에 처박힌 이유였다.

"...게임이나 하자. 그냥."

그런 레오니는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다시금 기겁했다.

인터넷 메인 화면을 장식한 호열의 기사 사진.

정말이지, 어딜 가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

레오니가 이번엔 베개를 내던졌다.

"으아아아! 치사해서 안 마신다, 내가!"

.

.

.

"뭐랄까. 빼앗기는 기분인데."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그렇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록스. 가진 적도 없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저건 꼭 말을 해도...."

"뭐, 카밀라 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록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시 하인네스는 샤이닝을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대했으니까.

그녀가 샤이닝에 몸을 담고 있는 이유는 단지 가장 좋은 조건.

게다가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준 덕분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기분은 유쾌하지 않네."

무언가를 빼앗기는 기분이라.

록스에겐 확실히 낯선 감각이었다.

빼앗기는 것보다 언제나 쟁취하는 쪽에 섰던 록스였으니까.

"벌써 섭섭해하기는 이르지 않아?"

"야, 카밀라. 너 또 염장 지르려고 그러지."

"아니~ 제시는 샤이닝에서 나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벌써부터 감정을 잡고 그러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지. 진짜 나간다고 했을 땐 어쩌려고."

둔감한 드미트리는 평생을 지켜봐도 모르겠지만.

카밀라는 느낄 수 있었다.

록스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걸.

'숨결이 거칠어졌어.'

사격에 영향을 주는 바람.

그 바람 한 점 놓치지 않는 카밀라쯤 되니까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변화.

록스는 그만큼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겠지.'

아니, 용납할 수 없겠지.

'네 성격에 말이야.'

창립 멤버.

샤이닝의 초창기 때부터 카밀라는 록스를 지켜봐 왔다.

가진 것이 많아 억누르고 있는 록스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착각하고 있었어."

"또 싸우려고? 우리 좀 사이좋게 지나면 안 되냐?"

"뭘 착각하고 있었단 거야, 록스?"

드미트리의 애원도 무색하게 카밀라는 태연하게 물었다.

록스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호열 말이야. 여태까진 그냥 운이 좋았다고 여겼지. 아스큐라 때는 제시, 유스라에선 라이언 하트 기사단 덕을 톡톡히 봤다고 생각했어."

"...록스, 그건 팩트잖아."

"근데 착각이었어."

록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나보다 확실하게 강해."

아니, 랭킹 1위 스칼보다도 강하다.

그건 같은 플레이어이기에 느낄 수 있는 직감이었다.

록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최소 600레벨."

"...뭐?"

"잠깐만. 뭐가 600레벨이라는.... 야, 록스. 설마?!"

"최대 700레벨."

록스의 얼굴엔 농담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그게 내가 예상하는 이호열의 레벨이야."

*

...죽어도 모를 거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95]

[능력치]

근력 : 45 / 민첩 : 46 / 마력 : 243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내가 300레벨도 안 될 줄은 꿈에도 모를 거다, 정말...!

마탑, 토파즈 홀.

마탑의 대형 이벤트, 정기 학회.

정기 학회가 진행되는 크리스탈 홀에 서기 이전에.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하는 증명의 과정.

그 사전 검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바로 이곳.

토파즈 홀이었다.

나는 지금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자격으로 이곳에 앉아있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일단,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보여주겠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성공)

─수석의 무게 (반복)▼

그랬다.

이것은 수석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 공동 연구자.

그러니까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란 소리였다.

쉽게 말해서 업무라는 것이었다.

'...심히 부담스럽다.'

나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얼마나 대단한 작자들인지 잘 알고 있다.

수석과 선임 마법사는 논외로 두고 생각하더라도,

마탑 마법사들의 강함은 플레이어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천하의 제시조차 마탑에선 말단 취급이니까 말이야.'

나의 연구실에서 가졌던 티타임.

제시는 찻잔을 양손으로 쥐고는 정중하게 말했었지.

-견습 마법사인 제가 수석 마법사와 개인 면담이라니! 이건 더없는 영광이에요! 그래서 심사숙고한 질문을 준비해 왔습니다!

마법사들의 마법사.

그 제시 하인네스가.

마탑에선 숙련 마법사보다도 한 단계 아래인 견습 마법사란다.

그랬다.

그게 바로 내가 레벨을 들먹인 이유였다.

'견습도 아니고 숙련 마법사를 검증하라고...?'

...나더러?

300레벨도 안 되는 내가?

미치도록 부담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건 언제까지나 나, 이호열의 속사정.

토파즈 홀.

상석에 앉은 내겐.

부담이나 긴장의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석으로서 지녀야 할 격식.

그 격식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은 자세.

나는 태연하게 양피지를 살피고 있던 것이었다....

'...이 또한 나의 발버둥이겠지.'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게 낫다.

그 사실이야 진작 깨달았기에.

나는 신세 한탄을 그만뒀다.

정각.

시간이 되었으니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검증을 시작하지."

.

.

.

두근두근.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열심히 준비했으니까요...!'

마탑의 정기 학회.

발표자로서 크리스탈 홀에 서는 것은 마법사에겐 둘도 없는 영광이었다.

클레는 같은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의 말을 떠올렸다.

-긴장할 것 없답니다, 클레. 당신의 능력은 충분해요.

그래도 떨린다면 그동안의 노력을 떠올리세요.

-그럼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날 시기한 선임 마법사들의 질투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려요. 클레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랍니다.

벨리에의 차분한 음성을 떠올리자,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벨리에 님을 위해서라도...!

떨지 않고 검증을 이겨내겠어요.

'물론, 치유학파의 명예도 있겠죠!'

정기 학회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를 발표하는가?

그에 따라서 학파와 그 선임 마법사들은 체면을 세우거나 구기곤 했으니까.

최근 들어 아무런 발표도 해내지 못한 순수마력학, 뱅그릿 톰 선임이 받는 취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벨리에 님이 그런 수모를 겪게 할 순 없어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클레가 중얼거리던 도중.

문득, 토파즈 홀의 문이 열렸다.

"...?"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의기양양하던 숙련 마법사.

그녀가 울상이 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

그것도 모자라 팅팅 부어오른 눈두덩이까지.

그녀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게 확실해 보였다.

두근두근두근─

간신히 억눌렀던 클레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클레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대체 어떤 분이 기다리고 있길래...?

우려도 잠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다음. 클레 오디아."

...자, 잠깐만요.

'이 목소리는 분명?!'

클레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규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 모험가....

아니, '그분'께서...?

◈ 65화. 마탑 (2)

고작 300레벨.

원래라면 견습 마법사는커녕.

마탑 근처엔 얼씬도 못 했을 나의 초라한 레벨.

그러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는 마법사들의 연구 결과를 능숙하게 평가해 냈다.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그랑펠의 재능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굳이 예를 들 것도 없었다.

'정기 학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검증을 거쳐야 정기 학회에 설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정기 학회에서 발표된 모든 연구는 검증을 통과한 수준 높은 연구란 소리겠지.

나는 그런 정기 학회에서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발표한 진보된 마법을 태연하게 따라 발현했었으니까.

그래, 그런 재능을 가진 내게.

숙련 마법사들의 연구?

웬만하면 곱게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감이 넘치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따위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하려고 했단 말인가?"

"...옛?!"

이 까칠한 성격에.

돌려서 말하는 건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

물론, 모든 행동엔 격식과 긍지가 따라야 했다.

그저 수준 미달일 뿐이라면 나는 너그럽게 타일렀겠지.

그러나.

"첫 장. 스무 번째 장부터 서른 번째까지. 서적에서 가져온 문단을 교묘하게 단어만 바꾸어놨군. 이 논문에 정녕 본인만의 연구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숙련 마법사, 시릴 유베?"

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 게 문제였다...!

'서당 개도 삼 년 말이야, 풍월을 읊는다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닥치는 대로 마법 서적을 탐독.

그것도 모자라 발현 과정을 깃털 펜으로 깜지처럼 휘갈기며 되새기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게 알아서 잘 좀 하지.'

나조차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고운 말이 튀어나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탈락이다."

"폐기 처분하는 게 옳다."

"그대는 옮겨적는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군."

그러나 독설만 내뱉고 내쫓아버리는 것 또한.

수석이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니다.

스스슥─

나는 연구 논문에 깃털 펜을 휘갈겼다.

"...?"

"탐색 과정의 오류부터 수정하는 게 옳다. 간섭의 방식 또한 쓸데없이 꼬여있으며 비효율적이다. 실수라면 바로잡고, 버릇이라면 그 버릇을 버리면 되는 일이다."

"...!"

물론, 그 조언 아닌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버릇을 버리라니, 말이야 쉽지.

그러나 받아들이는 건 온전히 저들의 몫이리라.

"가,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게 돌려보낸 연구.

그렇게 내보낸 마법사가 벌써 스무 명째였다.

나는 내심 흠칫하고 말았다.

'...이러다 전부 퇴짜 놓는 거 아니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제대로 된 연구였다.

"클레 오디아."

"앗. 네, 넵!"

"쉽지 않은 연구를 택했군."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 오디아.

나는 그녀가 제출한 논문을 읽어나갔다.

──────

치유학 - 비약초의 육성법

──────

마탑에 존재하는 스무 개의 학파.

그 학파 아래에 존재하는 무수한 갈래.

그중에서도 이건 마이너한 분야였다.

클레가 살짝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카나에서 '비약초'란 영약의 재료가 되는 식물을 말했다.

생명력을 회복시키거나 마력을 재생시켜주는 포션 같은 거 말이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전공인 치유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치유학은 발현자의 마력만으로 대상의 생명력과 마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꽤나 흥미로운 접근법이군."

연구는 언제까지나 비약초의 '육성법'.

그러니까 비약초를 '육성'하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분야.

클레는 부가적인 설명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흥미롭다고 말해버린 탓일까.

"바, 방금 흥미롭다고 하셨...?"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연구를 이해하리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못한 모양.

거기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었다.

'대화를 나누기 잘했군.'

그림자 용병단.

제7석, 알카리.

나는 포션을 물처럼 들이켜던 그 노인과 대화를 나눴었거든.

마법, 그리고 포션, 재료가 되는 비약초에 대한 이야기까지.

혹시나 써먹을 곳이 있을까, 해서.

수 시간 동안 떠들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단 말이다.

"논리와 과정에는 비약도, 오류도 없어 보이니 필요한 것은 결과겠군."

덕분에 나는 그럴싸하게 떠들어댈 수 있던 것이었다.

나는 깃털 펜을 휘갈겼다.

"정기 학회에서 지켜보겠네."

그래, 이건 내게도 흥미로운 연구였거든.

'저질 레벨.'

그로 인한 저질 마력.

비루한 마력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건 장비 혹은 포션빨.

그러나 그랑펠의 심미안에 들어맞으며 뛰어난 효과를 가진 장비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이템의 물량 자체가 부족하단 것이다.

'하지만 영약을 제작하는 비약초를 육성할 수 있다면.'

귀한 포션을 대량으로 양산할 수 있단 소리겠지.

이건 혹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클레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신감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도록."

"...!!"

클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닷!"

좋아, 첫 통과였다.

그 뒤로는 다시 불합격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유감스럽게도. 눈이 썩을 것만 같군."

결국, 내가 검증 과정에서 통과시킨 연구는 단 한 개에 불과했다...! 너무 많이 떨어트렸나. 역시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결심하지 않았던가?

미친놈이 될 거라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미친놈이 되자고.

그러니까 나는 뻔뻔하게 생각했다.

'시킨 사람이 잘못이다.'

내 일 처리가 아니꼬우면 앞으로 시키지 말든가....

*

토파즈 홀.

"...뭐라고?"

검증을 마치고 각자의 연구실로 돌아온 선임 마법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분명, 통과를 자신한 연구들이었거늘.

불합격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실수한 건가?"

"...아니요. 저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뭣? 질문에 답을 못한 겐가?"

"아닙니다. 질문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에엥?"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 그 자초지종을 묻자 튀어나온 건.

당연하게도 이호열.

그 수석 공동 연구자의 이름이었다.

"굴러들어온 돌 주제에 감히?"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모험가 주제에,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자격이라니.

호열의 자질이 어떻든 자존심을 구겼던 선임 마법사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일은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었다.

"다른 이도 아닌 내가 검수한 연구란 말이다...!"

정기 학회엔 학파에 명예가 걸려있다.

때문에 토파츠 홀에서의 검증을 거치기 이전에.

학파 차원에서 내부 회의를 거치는 게 당연했다.

그건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 않으냐고?

몇몇 선임 마법사들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다들 그러면서 왜 아닌 척들 하냐며.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상부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겠군."

그런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흐음...."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다.

클레의 연구가 보란 듯이 통과됐으니까.

그것도 한창 소란스러운 호열의 판단으로.

클레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는 자신을 찾아왔었다.

"벨리에 님...!!"

처음에는 그 결과가 좋지 않았구나, 예상했다.

클레의 연구는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분야였으니까.

심사했던 이가 그 진가를 알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그러니 위로할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패를 양분 삼아 다음 학회를 노리면 되는 일이야.'

그런데.

"저 통과했어요!"

클레의 연구가 통과됐단다.

"그분께서, 아니 이호열 수석 공동 연구자님께서...!!"

그것도 수석 공동 연구자, 이호열에 의해서.

벨리에는 클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클레가 허튼소리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건만.

벨리에는 이번에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클레의 말에 따르면.

'...치유학, 약학, 제조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거잖아.'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그게 벨리에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였다.

"찬찬히 지켜보고 싶어서 찬성표를 던졌는데."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줄이야.

벨리에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쉽지 않을 거랍니다?"

벨리에는 선임 마법사들의 이면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변질된 집착.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게 바로 정기 학회였으니까.

호열은 그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셈이었다.

다른 선임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겠지.

"내일부터 마탑이 소란스러워지겠군요."

벨리에는 녹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러나, 저러나.

클레의 진가를 알아보다니.

벨리에가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적어도 저는 그들에게 동참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이번에는 물론, 앞으로도 말이에요."

.

.

.

그러나 벨리에의 예상과 달리 마탑은 잠잠했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뭐, 표절?"

"면목이 없습니다...."

"확실한 건가? 그가 확실하게 알아차린 거야?"

중요한 건 표절을 했다는 것보다.

그걸 호열이 정확하게 알아차렸느냐였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였으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도, 도저히 발뺌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서적, 몇 페이지, 몇 쪽, 심지어는 몇 번째 단락인 것까지! 이호열 수석 공동 연구자께선 서적을 전부 외우고 계셨습니다!"

그, 그런 게 가능하다고?

세상에 그런 괴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건 마르셀로보다도 심하지 않은가?

"자네가 뭔가 착각한 게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그 눈빛은 정말이지...!"

"아니, 다시 생각해 보게. 유도신문이라든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요. 다 제가 자초한 일입니다. 자꾸 그렇게 나오시면 저 선임 과정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어허. 이 사람아. 일단, 진정하고."

문제 제기를 준비하던 선임 마법사들은 머릿속이 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제를 제기해봤자 체면도 건지지 못하리란 계산이 나왔으니까.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하지."

그러니까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토파즈 홀.

불합격 퍼레이드는 계속됐다.

호열의 등장 이후.

마탑에 새로운 기류가 불고 있었다.

"으흐흐흑."

...눈물 바람과 함께.

*

과연, 내 생각이 옳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미친놈이 되리라!

내가 그 결심을 충실하게 수행해 낸 덕분일까.

나는 큰 문제 없이 수석으로서의 업무를 끝마칠 수 있었다.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성공)

─수석의 무게 (반복)▲

●토파즈 홀에서 검증을 진행하라. (성공)....

...문제는 이게 반복 퀘스트라는 거겠지만.

뭐, 이 정도 수고쯤이야.

그동안 마탑에서 얻은 이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주고받음에 확실한 나였다.

받은 것보다 더한 수고를 하게 된다?

다시 마탑에서 그만한 대가를 받아내면 그만인 일.

수석의 권한으로 마탑에서 뜯어먹을....

아니,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았던가?

일단, 마도구 대여부터 시작해서.

다른 플레이어들은 억 소리 나는 금액을 들여서 이용해야 하는 아이템 감정 서비스까지.

'수석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그걸 위해서야.

불합격을 외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결심도 잠깐.

나는 염동력으로 찻잔을 끌어왔다.

달칵─

그 찻잔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가는 시간은 마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이군."

허세 빼고 담백하게 말하자면.

그냥 벌써 목요일이 됐다는 소리였다.

신규 업데이트 내역이 떠올랐다는 말이었다.

"...음."

둥실─

염동력을 습득함으로써 완성된 격식.

이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찻잔을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염동력이 이렇게 편리하다.

쓸데없는 생각도 잠깐, 나는 입을 열었다.

"눈여겨볼 것은 없구나."

우선 유스라 왕국이나 프로스트 같은 대형 업데이트는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균열이 업데이트됐다는 소식이군.

물론, 그 균열의 적정 레벨이 상당해 보이긴 했다.

'400레벨이 그냥 넘네. 이젠.'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내역이겠지.

악마족 몬스터도 아니고.

긍지에 거슬리지도 않고.

뭐, 옛날처럼 생활비에 쪼들리는 처지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순간, 점멸하는 퀘스트창.

그와 동시에 똑똑─ 울리는 노크 소리.

...그럼 그렇다.

내 팔자에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나는 미련을 버린 채 대답했다.

"차 한잔하겠나?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66화. 마탑 (3)

달칵─

찻잔을 기울이는 소리가 연구실에 울렸다.

마르셀로가 차를 음미하더니 작게 탄식을 뱉었다.

"과연,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접객이라고 해도 고작 녹차 티백 하나를 띄웠을 뿐.

그 태도에 되레 내가 멋쩍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물론, 나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되받아쳤다.

"진정한 가치는 그 값어치와 희귀함에 있는 게 아니지."

아주 그냥 하나에 200원짜리 녹차 티백에 그놈의 의미부여를...!

이쯤 되면 잠자코 듣고 있는 사람도 문제다.

내가 말이야.

이렇게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발산하고 있는데.

"생각할 여지가 많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맞장구를 치면 어떡하란 말이냐?

물론, 마르셀로가 내 헛소리에 고개나 끄덕이려고 나를 찾아온 건 아니었다.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통해서 그 의도를 파악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성공)

─수석의 무게 (반복)▼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새롭게 생성된 퀘스트 목표.

기이(奇異)란.

기이하다, 할 때의 기이를 말하는 거겠지.

알고 있었지만 먼저 입술을 떼진 않았다.

그러자 찻잔을 내려놓은 마르셀로가 운을 떼었다.

"짐작하고 계신 대로 마탑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뭐야?

바로 그 얘기부터 꺼낸다고?

마르셀로의 성격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브레이크라곤 없군.

"그러나 죄송하게도. 지금으로선 그 사정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도 그 사정을 혼자 짐작하고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검증을 거치지 않았단 소리입니다."

마르셀로가 쓰게 웃었다.

살점 하나 없이 빼빼 마른 얼굴.

게다가 평소에 그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여서인가.

그 쓴웃음에서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달칵─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그 심정을 이해하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진짜 용건은 무엇인가?"

"...짐작하고 계셨군요. 역시, 무엇하나 숨길 수 없겠습니다."

알아차린 건 내가 아니라 퀘스트창이었지만,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이어지는 마르셀로의 말에 집중했다.

그 핵심만 정리하자면 이랬다.

"마법과 과학,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그 진보된 마법을 저는 '기이'라고 칭하기로 했습니다."

[『기이』]가 그런 뜻이었군.

그렇다면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개념엔 검증이 필요한 법이겠지."

내겐 그랑펠의 마법적 재능.

거기에 나, 이호열의 과학적 지식이 있었다.

그 두 개념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기이를 활용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은 아니겠지.

수석이라는 마르셀로부터 애를 먹고 있었으니까.

'그 기초부터 쌓아나가야 한다는 소리야.'

물론, 내겐 필요 없는 과정.

그러나 퀘스트가 있지 않던가?

그 퀘스트를 진행하며 '마탑의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곳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인가?"

내 물음에 마르셀로는 정중하게 답했다.

"계속해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균열을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균열?

이거, 내가 아는 그 균열 말하는 거겠지.

그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균열 말이야.

근데, 기이와 균열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흠칫하던 순간.

"...!"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아니, 균열 또한 기이와 같다.'

기이란, 완벽히 다른 두 개념의 융합.

균열 또한 완벽히 다른 두 세계.

현실과 아르카나가 뒤섞인 공간.

나는 그런 균열의 풍경을 떠올렸다.

지하철과 놀의 서식지를 절반씩 섞어놓은 듯했던 풍경.

그래, 그 풍경은 더없이 [『기이』]했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을 이해했네, 마르셀로."

"균열은 두 세계가.... 네? 이, 이해하셨습니까?"

그와 동시에 갱신되는 퀘스트 목표.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균열을 공략하라. (반복)

"당장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균열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면. 기이에 관한 탐구에 큰 진전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느슨해진 긍지를 긴장하게 하는 퀘스트.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해야겠지.

준비운동은 필수였다.

부지런히 발버둥 치기 위해서도 말이야.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클래스, 악마 사냥꾼.

[천적관계]가 없다면 나는 미친놈도 아니고, 나사 빠진 놈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자고 결심한 거다. 왜, 꼭 맨몸으로 발버둥 칠 필요는 없잖아?

'비약초, 포션, 템빨 등등....'

왜, 활용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써먹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게 내 방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나에게 마르셀로가 말했다.

"저는 동행할 수 없지만, 균열의 공략 또한 연구의 일부. 아니, 그저 단순한 연구가 아닌 진리를 향한 첫걸음과도 같은 일이겠지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마탑에 요청해 주시길."

...'무엇이든'이라.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내가 마탑에 뭘 요청할 줄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내가 진짜 무엇이든 보여줘 봐?'

정말, 기둥을 뿌리째 뽑는 게 뭔지 보여줘야 하나.

내뱉은 말은 쉽게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알려줄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빌어먹을, 청렴결백.

그랑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나는 쓸데없는 탐욕을 부릴 수 없겠지.

그러나 탐욕과 만반의 준비는 엄연히 다르기에.

마탑의 지원은 챙길 수 있는 선에서 챙겨둬야 한다.

달칵─

나는 번뇌를 거두고 마르셀로에게 찻잔을 들어 보였다.

"그럼, 마저 들지."

"향이 참 좋습니다. 차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녹차라고 부른다네."

"녹차라...."

"유감이지만, 그대에게 나누어 줄 몫은 없네."

"아아, 그럴 생각은...."

"허나, 이젠 로켓 배송이 있으니 상관없겠군."

"...로켓 배송?"

"그냥 녹차와 현미녹차. 무엇을 원하는가?"

"...그 둘은 무엇이 다른 겁니까?"

*

[『기이』]에 관한 접근.

그 기초가 될 균열 공략.

그 준비 과정의 첫 단계는 나를 아는 것이었다.

'지피지기.'

뭐,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인벤토리를 확인한다는 소리였다.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을 위한 구마의식에서 제물로 바쳤던 세 개의 아이템.

[귀신 들린 명검]

[귀부인의 보석함]

[목을 조르는 넥타이]

그 악마의 아이템은.

데카라비아를 쓰러트리면서 정화된 상태였다.

나는 심미안으로 그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나쁘지 않군."

그야 내가 경매장에서 직접 골랐던 아이템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깐깐하게 골랐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 건 그 레벨 제한이었다.

'자금이 많다고 한들, 제대로 써야 아깝지 않은 법이니까.'

나는 가장 먼저 검의 정보를 확인했다.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8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대장장이의 마지막 작품이다. 원한에 가까운 미련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되찾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였다.

[귀신 들린 명검]일 땐 생각도 못 한 능력치잖아, 이건?

무엇보다 유니크 등급의 장검이었다.

효과를 떠나서 기본적인 성능만 따져도....

구매 금액의 몇 배를 건진 거야, 이게?

'드디어 훈련용 장검에서 벗어나는구나.'

검술 수련.

그 과정에서 챙겨뒀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훈련용 장검].

그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아이템을 획득했으니까.

이제야 좀 입문자티를 벗을 수 있겠군.

나는 흡족하게 보석함의 정보를 확인했다.

[온기가 담긴 보석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보관한 장신구에 일정 시간 '온기'를 부여합니다.]

[설명 : 귀족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보석함. 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잠깐만, 이것도 유니크라고?

이쯤 되니까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나 보는 눈이 조금 있는 건가?

'장신구에 버프를 걸어주는 아이템이다.'

꽤나 특이한 형태의 아이템.

[온기] 버프라.

보기만 해서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뭐, 버프의 효과야.

차차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겠지.

마지막으로 나는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명품-스왈린 공작의 애장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50]

[효과 : 착용 시, 마력 재생력 소폭 상승 / 심미 스탯 소폭 상승]

[설명 : 스왈린 공작의 넥타이. 복잡한 사연에 걸맞은 저주를 품고 있었지만, 정화된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번엔 그냥 유니크도 아니고 명품?!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난, 경매에서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그랑펠의 재능이겠지만.'

분명, 심미안이 저주에 가려진 아이템의 본래 가치조차 평가해 낸 거겠지.

이 심미안 하나만 있어도 굶어 죽는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배가 뭐야.'

구매 금액의 몇십 배는 되는 이득을 보았으니까.

물론, 감정에 변화는 조금도 없었다.

이따위 사소한 이득에 흔들리기에는.

그랑펠의 그릇이 너무나도 광활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넥타이를 착용했다.

과연, 명품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대작보다야 떨어지지만.'

명품도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아이템 중 하나였으니까.

효과 또한 간단하지만 나에게 더없이 간절한 효과였다.

'마력 재생력 소폭 상승.'

소폭이라 큰 효과는 없겠지만.

브로치보다도 그 활용성이 높았다.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그런 조건 없이 마력 재생력이 상승한다는 것?

전투 도중이나 휴식 중일 때나.

마력을 재생시켜 준다는 소리였으니까.

마찬가지로 소폭 상승.

[심미]는 여전히 [下]등급에 머물러 있었지만....

'좋았어.'

경매장에서의 첫 구매치곤 아주 훌륭한 성과였다.

게다가 아스큐라 백작 균열 때 획득했던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도 잊지 않았다.

무려 300레벨 제한 아이템.

내가 이걸 착용할 수나 있을까, 싶었었는데.

그 300레벨까지도 고작 5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거울에 비친 차림새를 확인했다.

'정장에, 행커치프에, 넥타이에....'

어째 전보다도 더욱 격식을 차린 것 같은 모양새.

그런 차림새로도 모자라 은발 머리카락까지.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거늘.

어째서인가.

나는 거울 속의 내가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 또한 나다."

그랑펠, 나의 과거이자 흑역사.

이 이질적인 감정 또한.

흑역사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중 일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포탈을 통해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유스라 왕국에 생성된 신규 균열을 공략하기 위해서.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그게 누구 땅....

아니, 누구의 '권한' 아래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

.

.

유스라 왕국에 균열이 나타났다.

그 사실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건 없었다.

그저 신규 업데이트된 균열의 숫자가 늘어났을 뿐이었으니까.

그에 관한 정보를 전해온 건 남태민이었다.

"단순하게 균열 개수가 늘어났고. 그중 한 균열이 유스라 왕국 인근에 모습을 드러낸 거죠. 그리고 이건 저랑 형만 알고 있는 건데요...."

나는 곁에서 속삭이는 남태민을 바라봤다.

...그런 중요한 얘기를 나한테 해도 되는 거야?

나야 물론 고마운 일이었다.

남태민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최강의 플레이어이자 세계 랭킹 3위 가온의 길드 마스터.

그런 남태민이 입수하는 정보와 소문들?

나로서는 알 수 있는 턱이 없는 고급 정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군."

그리고 그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내 대꾸에 남태민이 말을 이었다.

"이나즈마가 일본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순간! 사실상, 일본 정부가 프로스트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명분도, 이유도 사라진 셈이죠."

고급 정보 중에서도.

프로스트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중요했다.

나는 프로스트에서 '권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진 프로스트의 주민에게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 슬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지.'

마왕, 데카라비아 토벌 이후.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정말 끈질겼다.

자신의 영토에 프로스트가 걸쳐있단 사실 하나로, 온갖 이유를 들어대며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댔다. 그러니까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히사기 카즈마. 그 녀석이 괜히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나즈마가 일본 정부에 등을 돌릴 줄이야.

남태민도 그게 의아한 눈치였다.

'물론, 내가 신경 쓸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게 조금 전이었는데.

"이호열 님을 뵙습니다!"

히사기 카즈마를 포함.

이나즈마 길드 전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금 궁전 앞에 이열로 가지런히 늘어선 채로.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머리를 굴려봤다.

나를, 유스라 왕국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남태민에게 들은 정보가 있어서일까.

그 의도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러나.

"유감이지만."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만 한다.

"나는 사전에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가지지 않는다."

"...!!!"

누가 됐든.

어떤 사정이 있든.

격식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란 말이다.

◈ 67화. 악크샨의 유산 (1)

고고하신 그랑펠 님께서.

찾아온 수고나 정성 따위를 고려해 주실 리가.

'그게 누가 됐든지 말이야.'

이나즈마.

지금이야 가온 밑으로 내려오게 됐지만.

오랫동안 길드 랭킹 최상위권을 지키는 명문 길드였다.

히사기 카즈마?

플레이어 랭킹 무려 6위.

내 옆에 있는 남태민보다도 레벨이 높았다.

대격변 초창기.

그가 창 한 자루를 들고 도쿄에 나타난 몬스터를 쓰러트리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일동 충격─

그래, 그들이 내 말에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걸 신경 썼으면 말이야.

'애초에 마탑 선임 마법사들을 문전 박대하지도 않았겠지.'

마탑의 선임들이 누구인가?

플레이어는 물론이요, 그랑펠과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들.

내겐 그런 선임 마법사조차 삼고초려 시킨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내 고집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히사기가 다시금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이 시간에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내일이라.

시간을 내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굳이 내가 만날 필요가 있을까.

'그 목적이야 대충 알겠다.'

이나즈마는 일본 정부와 연결고리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떠난다고 선언한 상태. 히사기는 유스라 왕국을 새로운 정착지로 생각하는 거겠지.

'그런 목적이라면.'

나보다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를 만나는 것이 옳다.

유스라 왕국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나다.

사실 이나즈마의 입국 심사 정도야.

내 권한으로 처리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모든 것엔 절차가 있는 법.

"그보다는 하쿠나 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좋겠군."

그래, 유스라 왕국은 하쿠나가 통치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디까지나 하쿠나가 도움을 청할 때만 그 '권한'을 사용해 왔다.

왜, 그림자 용병단 때처럼 말이다.

"...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와씨, 예의 바른 거 봐."

일동 다시 묵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나즈마 길드원들.

남태민이 혀를 내두르는 것처럼.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겠지.

물론, 나는 그 부담스러운 인사를 흡족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니.

정말, 어디 조직의 보스라도 된 기분이 이런 건가 싶다.

"개과천선했다는 걸까요? 그 뱀눈이 어떻게 저렇게 됐지?"

이나즈마를 지나친 지금.

남태민은 어째서인가 즐거운 눈치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가온과 이나즈마.

한국과 일본.

엇비슷한 길드 랭킹.

길드 마스터의 레벨까지도.

그들은 숙명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호열 씨만 안 계셨어도! 한마디 해주는 건데. 제가 또 이나즈마 놈들 속 긁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아, 근데 또 호열 씨가 안 계셨으면 그것들이 고개를 숙일 일도 없었겠구나...?"

쌓인 게 많긴 많았나 보다.

그런 남태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기도 잠깐.

나는 균열 앞에 이르렀다.

"적정 레벨 실화냐?"

"뭔진 몰라도 경험치 하나는 확실하겠네."

"그래도 균열이니까, 우리도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을까?"

몰려든 인파가 많았다.

플레이어에 아르카나인까지.

그 분위기를 보아하니.... 몇몇 플레이어들은 벌써 균열으로 진입한 모양인데? 나서서 유스라 왕국을 수호하려는 모습이 아주 바람직하군.

[퀴른베르크 기계탑]

[적정 레벨 : Lv.400]

[붕괴 진행도 : 0.1%]

...그보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잖아, 다들?

적정 레벨이 이보다 간결할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400레벨.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거늘.

남태민이 설명을 덧붙였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한때 저게 대체 뭘까. 혼자서 고민 많이 했었는데. 이제야 그 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됐네요!"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건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 세워진 탑이었다.

NPC들도 그 존재를 정확히 아는 자가 없고.

그렇다고 그에 관한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굳게 닫힌 입구를 여는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중에선.

남태민처럼 내심 기대했던 이들도 있던 모양이었다.

"형님들. 제가 또 누굽니까? 이 한 몸 바쳐서라도 기계탑 내부 확실하게 중계하겠습니다. 자,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육개장 값이라도...."

넷튜버들이 몰릴 정도로 말이지.

대륙 곳곳에 솟아있었던 기계탑.

같은 이름의 균열이 세계 곳곳에 생성된 이유가 있었군.

물론, 중요한 건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거침없이 내딛는 구둣발.

그 구두 소리에 집중되는 시선.

하지만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건.

플레이어들의 관심 따위도 아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아니, 무엇이 됐든지 상관없었다.

말했다시피.

"허가되지 않은 불법 건축물은 용납할 수 없다."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면 본보기를 보이는 수밖에.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진입하셨습니다.]

.

.

.

"...살풍경이네요."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균열까지 동행할 줄이야.'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내게 적정 레벨 400레벨짜리 균열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파티를 맺은 건 또한 아니잖아?

그러니까 빚을 지는 건 또 아니다.

'그저 남태민이 자발적으로 나를 따라나선 것뿐.'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과연, 기이한 풍경이로군."

내뱉은 말대로 [『기이』]한 풍경이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와 톱니바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유스라 제도의 모습.

일단,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내부가 이렇게 생겼구나."

"근데 뭐가 이렇게 없어? 휑하네?"

"긴장을 늦추지 마.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킁킁─

남태민이 코를 벌름거렸다.

바바리안, 발달한 후각 활용하는 거겠지.

남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피 냄새 같은 것도 안 나고요?"

무엇보다 입구나 출구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 같은 것도 말이야.

'...확실히 이상한데.'

내가 낌새를 느낀 만큼.

다른 플레이어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때였다.

취이이익─!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그 충격에 흔들리는 디딤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플레이어들.

"시끄럽군."

물론,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육체를 지배하는 품위.

몸에 배어든 격식이 이런 상황에서도 곧은 자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걸 떠나서라도 마탑의 아찔한 계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리게 된 내가 아니던가?

"시작부터 장난이라니."

덕분에 나는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슬슬 감이 잡히는데, 이거?

주위를 살피던 남태민이 흠칫했다.

"뭔가 되게 날카로운 톱니바퀴로 바뀐 것 같은데요?"

그 말대로였다.

벽면에 생김새부터 흉흉한 기계 장치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소리쳤다.

"설마, 함정인가?!"

"미친. 이렇게 거대한 함정은 본 적도 없어!!"

"...잠깐만, 저기 저거 포탈 아니야?"

반대편 끝.

솟구치는 선명한 푸른 빛.

'탐색, 간섭, 발현의 정도로 보아하니....'

저건 마도구, 그러니까 아이템을 활용한 포탈이로군.

마탑의 포탈과는 그 간섭 과정에서 차이가 있어 보였지만.

그 효과는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방식은 달라도 마탑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거잖아, 저게?

무엇이냐, 이 기계탑.

허나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오직 나뿐이겠지.

플레이어들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충 보니까 함정을 돌파해서 저 포탈에 도달하면 되는 것 같은데?"

그 흥분을 부추기듯.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함정 돌파]

정교한 함정을 피해 포탈에 도달하라.

그 순위에 따라 보상이 따르리라.

─현재 순위

●1위 : 없음

●2위 : 없음

●3위 : 없음

"호, 호열 씨! 호열 씨도 퀘스트 받으셨어요?!"

"함정 돌파,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렇구나.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경쟁 컨셉이었나 봐요!"

퀘스트, 그리고 보상은 언제나 반가운 거니까.

남태민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말이야.

무엇보다 저 함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탐색』 과정을 생략할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란 것이었다.

'모든 게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날카로운 톱니바퀴.

장전된 화살촉.

그 모든 게 '은(銀)'이었다.

나는 은의 특징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반전 마법』 덕분에 내구도에서 자유로웠지만.

그 이전엔 은제 무기 사용을 아끼던 나였다.

은제 무기는 그 내구도가 형편없었으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래, 은은 특수한 광물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광물.

그런 은제 무기를 내가 사용한 이유?

그거야 나는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은이 바로 악마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

저 함정은 의문스러워 보일 수밖에.

'은으로 함정을 만들 이유는 하나뿐이야.'

그래, 저건 '악마'를 처치하기 함정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시 한번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

이번엔 클래스 퀘스트였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유산]

생존의 봉화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에 의해 소실된 그대들의 유산을 되찾아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조사하라. (진행 중)

그러면 그렇지!

내가 뭐가 있을 줄 알았다니까?

근데, 잠깐만.

'...뭔가 이상하다?'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

그래,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악크샨의 결전병기이자 유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내 기억 속의 악크샨 기지는 뭐가 없어도 쥐뿔도 없었단 말이다...!

'이런 게 있었으면 플레이어들이 도망가지도 않았겠지!'

내세울 거라곤 헝그리 정신밖에 없던 악크샨 기지.

이런 근사한 게 있었으면 진작 보여줘야 할 것 아닌가?

괜히 플레이어들이 계정을 삭제하면서까지 악마 사냥꾼을 때려치운 게 아니란 말이다.

'그랬으면 덜 고독했을 거 아니냐고.'

그러니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랑펠의 재능이 알아본 탓이었다.

퀴른베르크의 기계탑.

그 초입부터 실감하게 되는 기술력.

마탑과는 다른 갈래로 발전한 기술력이었지만.

감히 마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단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의문은 해결할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단 소리겠지.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조사하는 것.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의문은 자연스레 풀리겠지.

그러니까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먼저 가지."

앞에 보이는 함정을 통과.

반대편의 포탈에 도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우수한 순위를 기록한다면?

뭐, 겸사겸사 좋은 거고.

'뭐가 됐든 보상이 주어진다니까.'

그나저나 정장에 구두라니.

누가 봐도 함정을 통과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복장이시다.

그러나 상관없다.

말했다시피.

앞에 보이는 기계 장치는 전부 은으로 만들어진 것들.

내게는 탐색 과정조차 생략할 정도로.

익숙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또각─

이런 함정으론.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단 소리였다.

*

퀴른베르크 기계탑.

갑작스럽게 떠오른 퀘스트와 함정들.

그건 유스라 왕국의 균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 생성된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그곳에 진입한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같은 퀘스트가 떠오른 것이었다.

"순위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고?"

"딱 3위까지만? 와 빡세네."

"경쟁 장난 아니겠는데?"

수많은 플레이어를 1, 2, 3위로 줄 세운다.

그 사실만 하더라도 관심이 쏠리기엔 충분했다.

상승하는 시청률.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넷튜버들의 시청자 수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에이, 근데 이거 공평하지가 않잖아?"

그와 별개로 함정 돌파가 시작되기도 전에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다.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그 결과가 뻔해 보였으니까.

"그냥 민첩 스탯 높은 순서대로 순위 찍히겠지. 뭐."

함정을 돌파하는 방식이야 클래스에 따라 다르겠지만.

높은 순위를 기록하는 데엔 민첩 스탯이 높은 플레이어가 유리한 게 당연했다.

방패나 마법으로 함정을 막아내면서 전진.

그냥 회피해 가며 전진.

둘 사이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채팅창에선.

벌써부터 몇몇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우리 카밀라 누님이 활약 때가 됐지ㅋㅋㅋㅋ

-남태민이 광폭화 쓰면 또 모르는 거 아님?ㅋㅋ

-근데 록스는 어디서 뭐함? 진짜 모름

-ㄹㅇㅋㅋ 자기가 제일 유리한 퀘스트인데 보이질 않네

-본인 카밀라한테 올인함ㅋㅋㅋㅋㅋ 정배 가보자

하지만 그 채팅창이 통일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이내, 플레이어들의 퀘스트창에 기록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현재 순위

●1위 : 1분 01초

●2위 : 4분 41초

●3위 : 4분 50초

고작 1분 남짓.

2위보다 무려 3분 40초가량 앞선 압도적인 기록.

그 기록의 주인공이 채팅창에 도배되고 있었다.

-그저 호멘

-그저 호멘

-그저 호멘...!

◈ 68화. 악크샨의 유산 (2)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플레이어들에게 함정은 익숙한 존재였다.

"드디어 보물...!"

"야, 잠깐만. 그 상자가 건들지 마앗!!"

"으아아악! 뭐, 뭐야?! 상자가 움직여엇?!"

"저 병신!! 미믹이다!!"

보물 상자로 위장한 몬스터, 미믹부터.

던전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함정까지.

그런 함정을 해체하는 스킬을 가진 탐험가 클래스는 물론이요, 함정 공략을 콘텐츠로 삼는 넷튜버도 있을 정도였다.

"에게? 겨우? 저 정도야 저한테는 너무 쉽죠~"

그래서.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함정이 튀어나왔을 때.

함정 공략 전문 넷튜버들은 앞다퉈서 방송을 켰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아깝네요. 진짜."

겉으론 아쉬워하고 있었지만.

이건 시청자를 끌어모을 좋은 기회.

중계를 통한 방송만으로도 이미 본전,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함정 수준은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저 패턴.

복잡한 패턴이 여태까지 봐온 함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기서 점프를 뛰면 가뿐하게...?!"

"아니, 이 타이밍에서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온다고요?"

"...형님들. 죄송한데, 저런 건 저도 못 깨겠는데요?"

기계탑의 기술력이 함정에도 녹아든 것인가.

한없이 정교해서 악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함정에 무릎을 꿇는 플레이어가 속출했다.

"아, 여기서 주춤거리면!"

"그렇죠. 바로 고슴도치 꼴이 돼버리는 거죠."

"기록은 물 건너갔네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큰 피해는 없어 보이네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략 난이도와 별개로 함정에 큰 살상력은 없어 보인다는 것.

함정들이 전부 은으로 만들어진 덕분이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경쟁 콘텐츠라는 게."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플레이어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떠올랐던 퀘스트 목표대로.

플레이어들을 경쟁시키고 그에 따른 보상을 지급하는 경쟁 콘텐츠가 확실하다.

"이건 뭐, 아예 판을 깔아줬네요."

"플레이어들한테 능력을 증명해 보라는 거죠!"

"자, 누가 1위를 기록하게 될지 지켜봅시다!"

그런 확신이 드는 순간.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그래, 그 막대한 관심 속에서.

드디어 호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되는 경악─

"이, 이게 대체?"

"뭐죠,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죠?"

"하, 함정이 고장 난 건 아닐 텐데?"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기계탑의 함정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고.

그게 갑자기 고장 날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눈앞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슈슉─!

함정이 빗겨나간다.

스슉─!

호열이 피해낸 게 아니었다.

스륵─!

호열은 그저 태연하게 걷고 있었으니까.

그랬다.

함정이 호열을 피해 가고 있었다!

마치 호열 주변에 방어막이라도 생성된 것처럼.

호열에게 날아든 함정들이 전부 빗겨나간 것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엔 해설이 필요한 게 당연했다.

폭주하는 채팅창.

하지만 어디까지나 함정 전문 넷튜버가 아니던가?

저런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대한 해설은 불가능.

"저, 저도 이런 방식의 공략은 처음 봅니다!"

"...그냥 걸어서 함정을 돌파할 줄이야."

"전 그동안 뭘 한 걸까요, 형님들?"

"...갑자기 은퇴가 마려워지네요."

저것 또한 스킬인가?

스킬이라면 세상에 저런 스킬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런 스킬을 사용하는 클래스는 대체?

결국, 언제나처럼 호열의 뒤를 쫓는 질문만 이어질 뿐.

그 경악 속에서.

호열이 반대편 포탈 앞에 다다랐다.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그것도 뛰지 않고 당당히 걸어서 달성한 기록.

다시금 채팅창이 폭발했다.

그저 호멘...!

*

탐색, 간섭, 발현.

그 세 단계 중.

가장 까다로운 단계는 단연 탐색이었다.

탐색은 그야말로 마법의 첫 단추.

잘못 꿰어버리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조차 없으며.

넘어간다 하더라도 마법의 효율이 지극히 떨어졌으니까.

'당연한 거야.'

왜,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조차 탐색 과정에서 군더더기를 걸러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아니, 그랑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시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가 지어낸 설정인지.

정말이지, 낯 뜨거울 정도로 대단한 재능.

덕분에 나는 걸어서 함정을 돌파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전부 은이라서 가능했던 거지만.'

가장 중요한 탐색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아무리 그랑펠의 재능이라고 해도 말이야.

낯선 탐색 대상을,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탐색하기는 무리였으니까. 만약, 은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함정이었다면....

'걷지는 못하고 뛰어서 돌파해야 했겠지.'

하나는 흘려보내고.

하나는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피해내는 방식으로 말이야.

뭐, 어쨌거나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현재 순위

●1위 : 1분 01초

●2위 : 4분 41초

●3위 : 4분 50초

기대하지 않았는데 1위라.

2위와의 기록 차이도 상당했다.

아무래도 함정의 수준이 높은 탓이겠지.

"와. 이 함정 장난 아닌데요. 호열 씨?"

남태민이 가쁜 숨을 내쉬며 도착했다.

기록은 경신되지 않았으니까.

3위 안에 들진 못한 모양이다.

남태민이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흐, 딱 10초가 부족했네."

남태민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난이도라.

역시 그 기술력이 심상치 않다.

그러니까 더더욱 믿기지 않는다.

'...이게 정말 악크샨의 결전병기라고?'

믿기지 않아 퀘스트창을 다시 확인해 봐도 안 믿긴다.

내가 알고 있는 악크샨 기지는 말이다.

정말 세끼 호밀빵을 챙겨준다는 것 말고는 쥐뿔도 없었다니까?

그런 악크샨이 이런 수준 높은 결전병기를 대륙 곳곳에 세워뒀다니....

'믿기지 않아서라도 알아내고 만다. 내가.'

알아내기 위해선 퀘스트를 진행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포탈을 바라봤다.

기계 장치형 아이템을 통해 발현된 포탈.

이 역시도 악크샨에선 구경도 할 수 없던 엄청난 기술력.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중심부]

[적정 레벨 : Lv.450]

[붕괴 진행도 : 0.1%]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적정 레벨이었다.

무려 450레벨이라니.

그러나 이전처럼 걱정 앞서진 않았다.

'적정 레벨이 플레이어 기준이 아닐 테니까.'

그래,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언제까지나 악마 사냥꾼의 결전병기.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탑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함정만 봐도 그랬다.

"가끔씩 이렇게 쉬어가는 균열도 나쁘지 않네요."

남태민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함정의 대미지는 미약했으니까.

함정을 피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잠깐 쉬어가는 균열, 단순한 경쟁 퀘스트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심각하단 말이다.

양보할 수 없단 말이다...!

'어떤 바보가 자기 유산을 양보하겠어?'

딱히 기대하진 않았건만.

남에게 빼앗기기는 또 싫은 법.

물론, 거기엔 퀘스트 보상도 포함이다.

그러니까 나는 조용히 포탈로 향했다.

"먼저 가지."

"네? 아,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다급하게 뒤따라오는 남태민.

포탈을 통과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록한 순위에 따라 팀이 배정됩니다.]

...잠깐, 함정 다음엔 팀전이냐?

흠칫하는 순간.

연달아서 떠오르는 글자들.

[당신은 '1위'를 기록하셨습니다.]

[압도적인 기록을 경신하셨습니다.]

[순위와 기록에 따른 당신의 팀원은 '1'명입니다.]

[현재 적절한 상대 팀을 탐색 중입니다....]

"!"

아니, 잠깐만.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솟구치는 억울함.

팀전에서 혼자라니...?!

남들보다 한참 앞선 기록을 세운 탓이 확실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따위 규칙이 다 있어어어?!'

사실 팀전이라고 해서 내심 안심했단 말이다.

내 곁엔 남태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포탈을 통과하는 순간.

그 위치가 엇갈린 모양이었다.

남태민이 보이지 않았다.

철커덕─

이내, 가동을 시작한 기계 장치.

증기를 내뿜으며 발판이 요동쳤다.

내 억울함과 별개로.

격식과 절차에 죽고 못 사는 육체는 상황을 납득했다.

"절차가 그렇다면 따르는 수밖에 없겠군."

...이따위 악법을 납득하지 마라, 그랑펠.

그래, 어쩌겠는가.

떠오른 메시지를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걸.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토너먼트]

승패에 따라 움직이는 발판.

승점, 30포인트를 쟁취해 가장 먼저 상층에 도달하라.

─현재 승점 (승 : +3p / 패 : -2p)

●1위 : 없음

●2위 : 없음

●3위 : 없음

철컥─

발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이유가 있었군.

이 발판이 이기면 위로.

지면 아래로 움직이는 거겠지.

그나저나.

'승점을 30포인트나 따야 한다고?'

1승에 3포인트였으니까....

무려 10승을 따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도중에 패배를 기록하면 애써 쌓은 승점을 까먹기까지.

무엇보다 핵심은 내가 그런 팀전에서 혼자라는 것이었다.

...고독하구나.

들려오는 건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뿐.

수다스러운 남태민이 그리워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퀘스트 보상이고 뭐고 설렁설렁....'

...그래!

퀘스트 보상!

불현듯 보상에 생각이 닿았다.

혹시라도 보상이 대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보상을 확인했다.

'...이건?'

*

시청률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내는 방송국 놈들.

스튜디오에선 이미 녹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토너먼트라니. 누가 설계한 기계탑인지 몰라도 칭찬하고 싶네요. 어디서 구경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플레이어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는 모습을요!"

"그렇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콜로세움에서나 할 수 있었던 구경을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덕분에 하게 됐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자, 상대 팀이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철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기계 장치.

그 위에 올라탄 플레이어들이 서로 마주쳤다.

진행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포탈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이 모두 한 장소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서로 다른 균열을 통해 입장한 플레이어들이 같은 팀이 됐죠?"

"이건 또 흥미로운 시스템이네요!"

"자, 일단 양측 인원은 3대3. 그 종목은...!"

양 팀이 올라탄 기계 장치.

그 정중앙에 떠오른 커다란 톱니바퀴 하나.

눈치가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시 저 톱니바퀴를 쟁탈하는 건가요?"

"저 톱니바퀴를 상대 팀보다 먼저 차지해서. 자신들의 기계 장치에 끼우는 게 승리 조건 같아 보입니다!"

"톱니바퀴를 끼워야만 기계 장치가 상층으로 올라간다라. 꽤나 그럴싸한 연출이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양 팀 사이에 벌써 신경전이 시작된 모양입니다앗?"

출연진들의 예상대로.

두 기계 장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이 비슷한 것 같은데요."

적절한 상대를 탐색한 끝에 만난 두 팀이 아니던가?

그들의 평균 레벨이 정확하게 같았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야, 잠깐만."

삑─

갑작스러운 음 소거.

뻐끔거리는 출연진들.

한창 중요한 순간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TV 소리를 왜 줄여! 미친 새끼야!"

"아니, 들어봐. 진짜 중요하다니까?"

"뭐가 또? 이 새끼 또 호들갑이네."

"아니! 호들갑이 아니라 이호열!!"

"이호열? 이호열은 갑자기 왜?"

토너먼트 퀘스트.

양 팀은 자신들과 비슷한 레벨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호열과 만나게 되는 상대측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을 따져본다면...?

"잘하면 이호열의 레벨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이호열의 레벨이라고?

그건 플레이어, 아니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만한 화제였다.

그 사실을 간파한 시청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호열의 등장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ㅋㅋ 그래서 이호열 언제 나오냐고ㅋㅋㅋㅋ

-ㄹㅇㅋㅋ 다른 것보다 이호열 언제 나오는지 기다리는 중

-이호열 누구랑 팀 됐단 소리도 없냐???

-넷튜브 다 뒤져봤는데 어그로 말곤 없드라 ㅇㅇ;;

물론, 기계탑 속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

철컥─

톱니바퀴를 끼우자 상승하는 기계 장치.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현재 승점 (승 : +3p / 패 : -2p)

●1위 : 15p

●1위 : 15p

●3위 : 13p

5연승.

획득한 포인트는 15포인트.

그 덕분에 상승한 순위는 공동 1위.

보다시피 자신보다 먼저 15포인트를 달성한 팀이 있었다.

록스는 그게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호열.'

함정 돌파에서도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던 호열이었다.

이번 퀘스트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나 록스에겐 자신이 있었다.

'이건 개인전이 아닌 팀전이다. 이호열.'

그것도 밸런스 시스템이 존재하는 팀전.

호열의 레벨이 높을수록.

그 팀원의 레벨은 낮을 수밖에 없을 터.

록스는 팀원이라는 구멍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우린 만날 수밖에 없다.'

15포인트를 따낸 팀은 단둘뿐.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컥─!

천천히 가동을 멈추는 기계 장치.

'와라.'

모습을 드러내는 기계 장치 위의 상대.

이내, 록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유감스럽게도.

록스의 예상은 정확하게 절반만 맞았다.

5연승.

15포인트의 고지.

그곳에 호열이 있긴 했다만.

정작 호열은 혼자였으니까.

그러니까 넘치던 록스의 자신감은.

'...혼자 5연승을 기록했다고?'

불안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불가능하다! 혼자서 대체 어떻게?!'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

정말, 말도 안 되는 운이었지.

철컥─

가까워지는 기계 장치.

떠오르는 메시지.

[현재 적절한 상대 팀을 탐색 중입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부전승 꿀을 빠는 것도 여기까지구나.'

내 레벨은 고작 295레벨.

그것도 모자라 나는 혼자였다.

내 수준에 맞는 적절한 상대를 찾을 수 있을 리가.

그걸 반대로 말하자면.

같은 승점의 팀들에게 나는 적절치 못한 상대라는 뜻.

덕분에 나는 다른 팀과의 경쟁에서 제외된 채.

부전승으로만 5연승을 따낸 것이었다.

[같은 승점의 상대가 '1'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젠 피할 수 없었다.

15포인트를 따낸 건 나를 제외한 단 한 팀뿐.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는.

'3명을 상대해야 하는 거지.'

그것도 나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과 말이야.

그러나 해볼 만했다.

저쪽은 계속해서 대전을 거듭해 지친 상태.

게다가 내겐 '퀘스트 보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전.

목숨을 건 결투 같은 게 아니다.

그에 따른 격식을 갖출 겸.

나는 가볍게 인사치레했다.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근데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나.

표정들이 왜 그래?

◈ 69화. 악크샨의 유산 (3)

[퀘스트 : 함정 돌파]

정교한 함정을 피해 포탈에 도달하라.

그 순위에 따라 보상이 따르리라.

─현재 순위

●1위 : 1분 01초

●2위 : 4분 41초

●3위 : 4분 50초

[함정 돌파] 퀘스트.

그 순위에 대한 보상.

그건 다음 퀘스트인 [토너먼트] 퀘스트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보상이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자 눈에 들어왔던 작은 기계 장치 하나.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 - 3층]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토너먼트에서 사용 시, 9포인트를 획득한다.]

[설명 : 퀴른베르크 기계탑 중심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승 레버. 기계 장치와 결합하면 3층을 단숨에 오를 수 있다. 단순해 보이지만 상당한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다.]

꽁승을, 그것도 3승씩이나 따낼 수 있다니!

[토너먼트] 퀘스트의 목표가 30포인트인 걸 고려하면.

아이템의 효과는 나름대로 굉장했다.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고독에 대한 보상이 고작 이거라고?'

9포인트를 깔아주면 뭐 하냐고.

만나게 될 팀은 전부 3명일 텐데.

포인트를 줘봤자 이대로는 까먹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끝까지 발버둥 치겠다.

무엇하나 허투루 써먹지 않겠다.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끌어오겠다.

내 좌우명대로.

설명창의 메시지 또한 대충 읽지 않았단 소리다.

'단순해 보이지만 상당한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다....'

나, 문과 출신 이호열이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

기계 장치를 대충 살펴보고.

보기보다 복잡하구나, 하고 넘어갔을 거야.

그러나 그랑펠은 아니었다.

마법 서적을 펼친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 끝을 보고야 마는.

검을 들면 녹초가 될 때까지 훈련을 멈추지 않는.

그랑펠의 육체가 이런 설명을 보고도 그냥 넘어간다?

"흥미롭군."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거지.

그랬다.

나는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 - 3층].

그 아이템을 바로 사용하지 않았다.

기계 장치 위에 꼿꼿하게 기립.

그 자세로 탐색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잡한 회로. 그를 구현해 내는 정교한 기술력."

그런 그랑펠의 재능과 심미안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단하군."

제작자가 누군진 몰라도 이건 정말 보통이 아닌 물건이라고.

웬만한 대상이었다면 탐색 과정은 금방 끝났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레버는 굉장히 복잡하며 정교했다.

광물의 종류로만 따져도 수십 가지.

각각의 부품의 설계 또한 완벽해 소름이 돋을 정도.

"더없이 훌륭한 마도구다."

기나긴 탐색 끝.

나는 그런 평가를 내렸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이 뻑뻑할 정도였다.

'부전승 시스템이 없었으면 그대로 탈락했을지도 몰라.'

레버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반격도 못 하고 말이지.

하지만 재능이 좋긴 좋았다.

어쨌거나 나는 탐색 과정을 끝마친 상태.

덕분에.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격식에 따라.

상대에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는 소리다.

그 자신감의 원천?

간단하다.

'기본적인 구조와 회로는 파악해 뒀다.'

그건 마법의 발현에서.

가장 큰 수고가 들어가는 탐색을 끝마쳤단 것.

나는 이제부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간섭할 수 있었다.

탐색 과정을 마친 바위에 간섭하듯.

시야에 보이는 기계 장치에 간섭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사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뭣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지는 몰라도.

그쪽은 큰 실수를 저질렀군.

'내 정중한 인사를 거절하다니 말이야.'

어긋난 예의에 대한 그랑펠의 감상.

퀘스트 보상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

두 의견이 일치한 순간.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디까지나 승패는 중앙에 떠오른 톱니바퀴를 차지하는 것으로 가려진다. 싸움이면 몰라도 톱니바퀴만 챙기면 끝나는 승부가 아니던가.

기계탑 일대에 간섭하게 된 내가 질 확률?

'그냥 기계벽 세우고 챙기면 되잖아?'

솔직히 말해서 없다고 자신한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뭐냐.

갑자기 항복해 버린다고?

나는 흠칫했다.

뭐, 팀 내 불화라도 있는 건가.

어째 표정부터 심각하긴 했지.

사정이 있는 것 같긴 하다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 결정을 존중하지."

그 마음이라도 바뀔세라.

나는 톱니바퀴를 챙겼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반신반의했거늘.

철컥─!

위이이잉─!

하강하는 상대 팀의 기계 장치를 지켜보고.

퀘스트창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현재 승점 (승 : +3p / 패 : -2p)

●1위 : 18p

●2위 : 13p

●2위 : 13p

3포인트를 획득해서 단독 선두 달성.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 - 3층]을 통해 벌어둔 9포인트를 계산하면....

앞으로 단 1승.

한 번만 이기면 나는 30포인트를 달성.

[토너먼트] 퀘스트를 1위로 통과할 수 있었다.

[현재 적절한 상대 팀을 탐색 중입니다....]

[같은 승점의 상대가 '0'팀 존재합니다.]

[상대 팀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누가 또 항복 안 해주나?'

허나, 부전승도 모자라 기권승까지 챙긴 마당.

이보다 더 날로 먹기를 바라면 체해도 할 말이 없겠지.

*

선두를 달리던 두 팀.

15p → 18p

15p → 13p

그들의 포인트가 뒤바뀌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은 꼴깍─ 침을 삼켰다.

"일단, 한 팀은 록스 팀이었지?"

샤이닝의 마스터, 록스.

록스를 포함, 그들의 팀원은 스트리밍이나 개인 방송 따윈 하지 않았다.

그들이 공동 선두가 됐다는 사실은 4승 그룹끼리 맞붙은 순간 알려졌다.

"저, 그때 심장 멎는 줄 알았잖아요!"

상대 팀의 시야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던 록스의 위압감!

플레이어 랭킹 무려 2위.

몇 없는 400레벨 대의 플레이어.

그런 록스가 등장했을 때.

지켜보는 이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치 카밀라가 있으면 록스도 있는 거지ㅋㅋㅋㅋㅋ

-록스 팀원 개부럽네 진심ㅋㅋㅋㅋ

-ㄹㅇㅋㅋ 버스도 저런 특급 버스가 없을 듯

그 기대에 부응하듯.

록스는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며 톱니바퀴를 쟁취했다.

밸런스 시스템이 적용, 평균 레벨을 맞췄다고 한들.

록스를 막아내긴 무리였던 것이다.

"헥헥. 진짜 경험치 값 제대로 하네요. 록스 님."

절대적인 레벨이 높아질수록.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아르카나의 시스템.

그 경험치량만큼 실력에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위 팀들의 멤버를 보시면 자! 다 한 명씩 최상위 랭커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록스, 카밀라,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남태민 플레이어까지요!"

그래, 밸런스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한들.

완벽하게 밸런스를 맞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기대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른 한 팀은 당연히 이호열 쪽이겠지?"

마왕, 데카라비아 레이드 때 선보인 압도적인 무력.

그 활약을 두고 호열의 레벨을 예측하던 이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 호열의 레벨을 정확히 가늠할 기회도 없었다.

철컥─!

"...자, 기계 장치가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단독 선두를 두고 펼쳐진 대결.

과연, 누가 패배했을 것인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건.

"록스?!"

록스였다.

패배를 기록 13포인트 그룹으로 떨어진 록스.

그런 록스에게 상대 팀의 질문이 쏟아졌다.

"위에 이호열 있던 거 맞죠!! 그쵸?!"

"아니, 이호열이 맞긴 한 건가? 본 사람이 있어야지."

"...근데 표정들이 다 왜 그래요?"

높은 레벨만큼이나 쌓아온 수많은 경험.

그건 남들보다 아는 게 많다는 뜻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기에.

록스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분명, 혼자였다.'

록스는 냉정하게 자신을 평가했다.

나 혼자서 세 명의 플레이어를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건 불가능했다.

밸런스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느냐고?

록스는 되묻고 싶었다.

'균열엔 적정 레벨이 존재한단 말이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그 적정 레벨은 무려 400레벨이었다.

게다가 이곳.

토너먼트가 진행 중인 중심부의 적정 레벨은 그보다 높은 450레벨이었다.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발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겠지.

'최소 300레벨은 돼야....'

아니, 그것도 한참 낮게 잡은 수치였다.

그럼에도 록스는 쉽게 충격을 떨칠 수 없었다.

그거야.

'그렇다면 이호열의 레벨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 900레벨과 맞먹는단 소리였으니까.

마왕, 데카라비아 레이드 직후.

호열의 레벨을 700레벨로 예측했던 록스였다.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뒤처져도 한참 뒤처져 있었어.'

900레벨이라니.

감히 따라잡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수치였다.

호열과 비교하자면 턱도 없겠지만.

자신도 최상위 랭커 중 하나였으니까.

레벨 하나를 올리기 위한 노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간 호열의 행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태도.

악마의 상태이상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정신력.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화려한 스킬들.

마지막으로 조금 전.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연하게 건네왔던 인사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었어.'

호열의 레벨을 고려하면 전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머리가 상쾌해졌다.

'목표는 클수록 좋은 법이지.'

드디어 맞지 않던 옷을 벗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남들을 내려다봤다고.'

그래, 언제까지나 자신은 밑바닥 출신.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갈 때.

더욱더 의욕이 생기는 언더독.

그런 록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긴 이르겠죠."

"...네?"

"어디까지나 룰은 먼저 30포인트를 획득하는 겁니다."

위엔 호열이라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꼭 그 벽을 무너트려야만 한다는 법은 없겠지.

왜, 다른 팀을 쓰러트려도 똑같이 3포인트를 따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 록스의 뜻을 알아차린 걸까.

팀원들도 충격에서 돌아왔다.

"...그렇죠! 이호열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최소 한 팀.

상대 팀이 같은 포인트를 달성할 때까지.

호열도 그 자리에 멈춰 기다릴 수밖에 없을 터.

록스는 그 시스템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록스가 팀원들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억울하잖아요? 우리만 이호열의 공포를 느끼는 건."

"그쵸.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인사를...!!"

그래, 승부처는 최소 27포인트를 따내는 시점.

단, 1승을 남겨뒀을 때부터였다.

'전략이 필요해.'

호열이 27포인트를 따낸 팀과 맞붙는 순간.

자신들도 27포인트를 따낸 또 다른 팀과 맞붙는다.

호열보다 먼저 승리를 따낸다.

호열보다 먼저 30포인트를 달성한다.

'이게 제일 쉬운 방법. 아니, 이 방법밖엔 없다.'

호열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기대할 바엔.

다른 팀들의 포인트를 조율하는 게 더 쉬워 보였으니까.

록스가 검을 치켜들었다.

"아, 아니! 록스 씨. 저희는 다짜고짜 싸울 생각은...!"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대답은커녕 검을 뽑다니.

당황한 플레이어들이 손사래를 쳤지만.

록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다.'

호열의 레벨을 짐작한 지금.

호열과의 경쟁이 무의미하단 걸 알게 된 록스였다.

앞으로 어떤 균열, 어떤 레이드가 됐든.

호열보다 큰 활약을 보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어쩌면 이호열보다 앞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팟─!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톱니바퀴를 향해 쇄도하는 록스.

하지만 록스는 알지 못했다.

단숨에 9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는.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의 존재를.

그런 호열에게 필요한 건.

단 3포인트뿐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같은 시각.

"올라오느라 수고했겠네만, 유감이군."

호열이 마지막 톱니바퀴를 손에 넣었단 사실도!

.

.

.

자신했던 대로 나는 낙승을 따냈다.

기계 벽으로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을 봉쇄.

가뿐하게 톱니바퀴를 손에 넣었다.

"...호, 호열. 이호열 씨 당신 설마 혼자서?"

"그렇다."

"어, 어떻게 혼자 여기까지...?!"

"격식과 절차는 지켜야 하는 법이지."

"?!!"

전에는 항복하더니.

이번에도 플레이어들은 크게 날뛰지 않았다.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표정만 똑같았을 뿐.

'어쨌거나 결과는 똑같았겠지만.'

뭐, 날뛴다고 하더라도 기계벽을 무너트릴 순 없었겠지.

저건 수십 가지의 광물이 뒤섞인 합금벽과 다름없었으니까.

돌벽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단단하거든.

이걸로 21포인트 달성.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 - 3층].

레버를 기계 장치에 결합.

철컥─!

레버를 잡아당기자.

슈우우우웅─!

무서운 속도로 기계 장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점멸하는 퀘스트창.

[퀘스트 : 토너먼트]

승패에 따라 움직이는 발판.

승점, 30포인트를 쟁취해 가장 먼저 상층에 도달하라.

─현재 승점 (승 : +3p / 패 : -2p)

●1위 : 30p

●2위 : 16p

●3위 : 15p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빨라지는 거야, 이거?

자이로드롭이야, 뭐야?

얼마나 높이, 또 얼마나 빠르게 상승하는 것인가.

귀가 먹먹해질 정도잖아, 이거어어?!

물론, 감탄할지언정 내색하진 않았다.

"찬란한 기술력의 정수로군."

...그래, 헛구역질하는 것보단 허세가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이내, 풍경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

마치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보듯.

퀴른베르크 기계탑 밖의 풍경이 보였다.

그 광경은 역시나 [『기이』]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기이한 광경.

그러나 저건 현실과 아르카나.

두 세계가 뒤섞인 모습이란 걸.

그러니까 깨닫고 말았다.

'...저게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남철민, 하쿠나, 백이설....

현실에 악마들이 들끓던 이유를.

그 순간,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두 개씩이나.

◈ 70화. 두고 볼 수 없군 (1)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먼저 점멸한 건 마탑, 마르셀로의 퀘스트였다.

─기이에 대한 접근 (진행 중) ▲

●균열을 공략하라. (반복)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하라. (성공)

균열을 공략하라.

그 아래에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

[성공]이라는 단어가 다시금 말해주고 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밖으로 보이는 저곳이 진짜 아르카나 대륙이라고.

내 기억 속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은 무려 12년 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래,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게 당연하겠지.

'그렇지만.'

이건 강산이 변한 수준이 아니잖아?

타오르는 숲과 대지.

일대를 뒤덮은 연기.

흔적도 없이 짓밟힌 마을.

처참하게 무너진 성벽은.

도시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시야가 닿는 곳마다 악마가 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긴 했다.

짧은 시간.

악마족 몬스터가 현실에 끼치던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은 현실보다 나쁘면 나빴지, 나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각한 상황 같은데....'

아르카나 대륙의 정확한 사정?

물론,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왜, 지금 보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도 퀴른베르크 기계탑 일대를 비출 뿐일 테니까.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냉정하게 생각해.'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라긴 했다만.

이번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 덕을 봤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중요한 건 현실이다.'

[『기이』], 그 자체.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연결하는.

균열이 존재하는 이상.

아르카나 대륙의 위기는 곧.

현실에 닥칠 위기나 다름없겠지.

'앞으로는 업데이트 내역에 의존할 수 없다.'

업데이트 내역, 전부를 불신한다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업데이트 내역 자체가 플레이어를 돕기 위한 거니까.

모든 건 기승전악마, 악마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그 정체를 숨기고.

'무언가'에 빙의한 채.

균열을 통해 현실로 범람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심히 비겁하군."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랑펠의 긍지가 그 꼴을 두고 볼 순 없다.

몬스터는 몰라도 악마가 현실을 활보하는 꼴?

그랑펠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균열 공략에 더 진심이 될 수밖에.'

기이에 대한 탐구도 모자라 긍지까지 건드린 셈이니까.

결국, 죽어나는 건 나와 발버둥 치는 내 다리겠지...!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해도 이상하지 않았건만.

"이 풍경 또한 용납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내게는.

아니, 그랑펠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말했다시피 악마가 활보하는 꼴?

목격한 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일지라도!

현실에서 아르카나 대륙에 간섭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이』]의 공간, 균열에서라면?

'아르카나 대륙에 간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증명하듯.

또 하나의 퀘스트가 점멸하고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유산]

생존의 봉화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에 의해 소실된 그대들의 유산을 되찾아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조사하라. (성공)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하라. (진행 중)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하라.

새로운 목표를 확인함과 동시에.

철컥─!

쉬이이이익─!

올라탄 기계 장치가 천천히 멈춰갔다.

이내, 시야에 펼쳐진 웅장한 광경.

거대한 톱니바퀴와 기계 장치가 서로 맞물려 있었다.

[퀴른베르크 상승 레버]를 탐색.

기계탑의 구조에 대해 대충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저 거대 장치는 레버 따위완 비교할 수도 없이 복잡한 회로로 설계되어 있었다.

"마치 심장과도 같군."

내뱉는 감탄.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최상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이곳이 바로 기계탑의 최상층.

눈치가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가동은 바로 이곳.

최상층에서 이뤄지리라는 것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또각─

거대한 기계 심장에 다가갔다.

누가 보면 걱정하며 묻겠지.

함부로 만져도 되는 거냐고.

그렇게 만지다가 고장이 나는 건 아니냐고.

충분히 용납할 수 있는 우려다.

방금 말한 것처럼 기계 심장은 그랑펠의 재능으로도 곧장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현학적이고, 복잡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악마를 사냥하는 데 필요한 건 지식 따위가 아니다."

그래.

복잡하든, 엄청난 기술력의 집약체든, 뭐든.

결국,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악크샨의 유산.

악마를 사냥하기 위한 결전병기라는 것이다.

"의식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기계 심장에 손을 얹었다.

악마 사냥꾼만의 의식을 시작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철컥─!

박동하기 시작하는 기계 심장.

끼긱─!

치이이이이익─!

거대한 기계 장치가 맞물려가며 기계탑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악마를 처치하기 위한 구마의식.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그 제물.

제물로 바쳐진 기계탑은 가동을 멈출 때까지.

아르카나 대륙에 활개 치는 악마를 사냥하리라.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가동을 시작합니다.]

쿠구구우우웅─!

점차 심해지는 진동과 흔들림.

흔들리는 시야 속, 메시지가 떠올랐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이제 곧 [『기이』]의 공간, 균열은 닫히게 된다.

시야가 돌아왔을 땐 현실에서 눈을 뜨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악크샨의 유산이여."

아니,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 하도록."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최후의 최후까지.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을 사냥하리라는 것을.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하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반격을 시작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

.

.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호열이다.

결국, 이호열이 균열을 클리어했다.

그 메시지는 퀴른베르크 기계탑, 모든 플레이어에게 떠올랐다.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활약. 무엇보다 이건 상상도 못 한 공략 속도였다.

"아니, 어떻게 단숨에 30포인트를 채운 거야?"

"마지막에 확인했을 때가 분명 21포인트였는데?"

"그, 그나저나 이거 왜 이런 거래요?!"

쿠구구구궁─!

이거 무너지는 거 아니야?!

호들갑을 떨게 할 정도로 기계탑이 요동치고 있었다.

의문과 호기심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위층에서 뭔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금방 균열 클리어한 거 보면 생각보다 뭐가 없었나?"

"아무리 그래도 뭐, 자폭장치 같은 건 아니겠지?"

"아, 답답해! 이호열은 스트리밍 같은 거 할 생각 없대요?!"

말도 안 되는 짜증을 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플레이어들에게도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누군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반격을 시작합니다.]

"!!!"

이번만큼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이호열이라고!

호열이 정말, 이 짧은 시간 만에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을 밝혀낸 것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결전병기라니?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반격을 시작합니다? 반격? 뭔 반격?"

"그럼 지금 흔들리는 게? 무너지는 게 아니라?"

"설마, 뭐 변신 로봇 같은 거였어?! 이거?!"

경악 또 경악─

그야말로 경악의 연속─

하지만 언제까지고 놀라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균열 클리어.

떠올랐던 시스템 메시지대로.

다시 눈을 떴을 땐 현실의 풍경이 반겨주고 있었으니까.

어안이 벙벙한 이 순간.

유스라 왕국에 생성됐던 균열.

그를 통해 기계탑에 진입했던 플레이어들은 생각했다.

'...아차, 이호열!'

'이호열은 어딨지?'

'...한마디라도 건지면 대박이다, 이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호열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매달려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이지, 폭풍이 몰아치듯 떠올랐던 메시지들.

위층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은 또 무엇인가?

반격 시작이라는데, 누구에 대한 반격이란 말인가?

결전병기는 또 무슨 떡밥인가?

그 덕분에 떠오른 궁금증이 한 트럭이었으니까.

지켜보는 시청자, 아니 전 세계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까 그에 대한 대답, 하나라도 건질 수 있다면.

"...좋아."

전 세계의 알 권리를 위해서 내가 나서리라.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플레이어들.

인파 중에서 호열을 찾는 것?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 머리카락부터 은발.

용모에서 오는 호열의 존재감은 묻히려야 묻힐 수 없는 것.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그 곁에 근육 덩어리 남태민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헉."

알 권리고, 비장한 각오고, 뭐고.

호열과 마주하는 순간.

입술이 얼어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물어보자니 떠올랐던 것이다.

그간 호열이 대중에게 보여준 싸늘한 태도가.

-아니 뭐함??? 질문 까먹음??

-ㄹㅇ 구독 두 번 누르게 하네

-걍 뭐라도 물어보자 제발!! 아니면 뭐 수금하는 거임?!

그건 시청자들의 성난 채팅보다도 두려운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던가?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처럼.

호열과 다시 마주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호열에게 밉보이게 된다면...?

'...이런, 미친.'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계탑에서 호열의 활약.

기품 넘치게 함정을 통과하던 모습.

1승을 따내기도 벅찬 토너먼트에서 순식간에 10연승.

그 광경을 직접 지켜봤기 때문에.

'내가 미쳤지!!'

뭣도 모르는 기자들처럼.

호열에게 들이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

플레이어들은 호열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발목을 붙잡고 매달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먼저 가지."

그런 호열의 한마디에 갈라지는 인파.

그러니까 호열은 그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옷에 주름 하나, 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후우."

그제야 튀어나오는 한숨.

남겨진 플레이어들에게서 변명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요?"

"그 싸늘한 표정 보셨잖아요? 진짜 자기 일 아니라고...!"

"구독 취소? 하세요. 아니, 얼마든지 해!! 조회수고, 댓글이고, 싫어요 테러고, 뭐고. 그딴 것보다 이호열이 훨씬 무서우니까!!"

*

나는 곧장 포탈로 향했다.

마탑에 도착.

계단을 올라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탁─

그 문을 닫고 나서야 실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대박을 친 거 같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최상층.

그곳에서 목격했던 마지막 메시지.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획득한 경험치와 명성이었다. 결전병기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있는 물건이란 말이다.

게다가 나는 이 두 눈으로 직접.

기계탑의 기술력을 확인했던바.

...어쩌면 더 이상 레벨 탓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야?

반격을 시작한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다.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를 사냥하면서 경험치를,

자연스럽게 활약하며 명성을 축적하겠지.

'그리고 그걸 내가 꿀꺽한다는 거잖아....'

그 기대감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도 이상하지 않거늘.

역시나 나는 태연하다 못해 뻔뻔했으니.

달칵─

나는 어느샌가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분위기 한번 내기 힘든 성격이시다. 정말.

물론, 차분하게 생각하면 기뻐하기엔 이르긴 했다.

어디까지나 '습득 권한'을 획득했다는 거지.

'습득했다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든, 명성이든.

어쨌거나 '습득'을 해야 내 것이 된다는 소리였다.

그 방법을 당장으로선 알 길이 없겠지.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했으니까.

달칵─

그러니까 지금은 이 설렘을 가라앉히는 게 옳겠군.

그래, 적금이라고 생각하고 잊고 살자.

레벨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게.

더 이상 구질구질하지 않기 위해.

미래를 위해 쌓아두는 적금인 셈이지.

스스슥─

물론, 내 손은 정신 승리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깃털 펜으로 양피지에 새겨넣는 글자.

그 수신인은 당연하게도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였다.

[마르셀로의 연구], 그 퀘스트 목표를 달성.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새로운 사실 또한 알게 됐다.

'그에 관해서 마르셀로와 대화를 나눠봐야겠지.'

균열에서 목격한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아르카나 대륙에 간섭할 수 있는 가능성.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정체까지.

나름대로 알아낸 것들이 많았기에 할 말이 많았다.

스스스─

이내, 양피지 위에 떠오르는 마르셀로의 답신.

분명, 할 말이 많다고 했건만.

"...!"

떠오른 첫 문장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 기술력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거늘.

...여기서 그 '종족'이 나온다고?!

◈ 71화. 두고 볼 수 없군 (2)

이건 양피지로 주고받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달칵─

"이 향이 그리웠습니다."

그렇다고 마주 앉아 찻잔을 주고받을 정도로 태평한 이야기도 아니거늘. 격식과 예절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마르셀로가 차를 음미하고는 말을 이었다.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드워프들의 건축물이 맞습니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 해버리다니!

그랬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녹아든 찬란한 기술력.

그건 바로 드워프들의 손길이었던 것이었다.

'...실화냐.'

드워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전설 속의 존재나 다름없었단 말이다.

하다 못해 엘프는 목격담이라도 있었지.

드워프에 관한 정보는 정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냥 밸런스 때문에 나중에 등장하는 거 아님??

-ㄹㅇ 드워프 무기 같은 게 벌써부터 쏟아지면ㅋㅋ

-전설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닐듯???

그래, 전해지는 거라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 정도.

드워프들의 장비는 억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든가.

드워프들의 찬란한 기술력은 마법과 비견될 정도라든가.

그래서 밸런스 패치의 희생양이 됐다든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이 없었잖아?

'기계탑의 기술력은 마탑과 비교될 정도였어.'

거기에다가 마르셀로가 시답지 않은 말을 할 리가.

아무래도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드워프의 건축물이 맞는 모양이었다.

"과연, 그만한 기술력은 흔치 않은 법이지."

짐작은커녕.

갑자기 튀어나온 드워프란 종족에 놀랐던 나였지만.

당연하게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말을 거들었다.

"드워프들의 극한에 다다른 기술력은 마법과 비교될 정도지요. 마탑과는 그 방향성이 다를 뿐이니. 기술을 갈구하고 갈고 닦는 그들의 심정 또한 이해가 됩니다."

진리를 위해 마법을 탐구하는 자신들이 있다면.

기술을 추구하는 드워프도 있다는 건가.

무언가 통하는 게 있다는 듯한 마르셀로의 말도 잠깐.

"그래서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격식을 갖춘 정중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 흡족한 태도에 나는 대꾸했다.

그 시작은 균열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퀘스트에 대한 이야기부터였다.

"기이의 공간, 균열에서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했네."

"...!"

"그대 또한 짐작했던바, 악마들이 활개를 치고 있더군."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반응.

마르셀로가 탄식을 뱉었다.

그러더니 힘들게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마탑, 그 이면의 가려진 사연.

정확한 사정이야 아직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반응으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수 없는 게 확실해.'

그 사정은 확실히 심각한 거겠지.

마탑의 실세.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조차 발이 묶여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금 의욕이 생긴다.

퀘스트를 통해서든, 뭐든.

마탑의 사연을 해결하기만 한다면...!

'마탑이란 엄청난 아군이 생기는 거야.'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장으로선 해결할 수 없겠지.

말하지 않았던가?

그건 마르셀로조차 해결은커녕.

입밖으로 내지도 못하는 사정이었으니까.

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저 너그럽게 때를 기다릴 뿐.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능성 또한 목격했네."

자책하는 마르셀로.

그에게 확실한 위로가 될 만한 일도 있었으니까.

마르셀로의 메마른 얼굴에 기대감이 내비쳤다.

"...가능성이라면?"

"균열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에 간섭했다는 소리일세."

"...!!"

물론, 다음 균열에서도 아르카나 대륙을 목격하고.

간섭할 수 있으리란 법은 없겠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악크샨의 결전병기로서 그 긍지가 다할 때까지 악마를 사냥하겠지. 드워프들의 기술력을 인정하는 만큼. 마르셀로, 그대도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게 좋겠군."

악크샨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굳이 숨길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숨기고 싶다고 한들, 숨길 수 있을까.

그랑펠의 사전에 떳떳지 못한 짓은 존재하지 않는 법.

마르셀로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긴 쏟아낸 이야기가 워낙 많았어야지.

이제 보니 차를 준비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말하느라 목이 탔겠는데.

"이런."

달칵─

같은 심정이라는 듯.

마르셀로가 빈 찻잔을 들다가 아차 하며 내려놓았다.

나는 너그럽게 말했다.

"한 잔 더 들겠는가?"

"아니, 더는 폐를 끼칠 순...."

"녹차부터 둥굴레 차까지. 어떠한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티백 컬렉션.

다르게 말하자면 청렴결백한 취향이 듬뿍 담긴 세일 품목.

마르셀로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보리차로."

"탁월한 선택이군."

"감사합니다."

"이 차 또한 챙겨 가게. 향이 나쁘지 않았네."

"이런, 염치가 없습니다. 분명, 지난번에 로켓 배송이란 존재를 일러주셨는데. 정작 저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라.

기껏해야 스마트폰 사용법.

스마트폰으로 쇼핑하는 법 정도가 필요하려나.

"그런가. 관한 의문이 있다면 언제든지 묻게나."

그런데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얼마든지 물어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 갈수록 뻔뻔함이 도를 지나친다, 정말....

.

.

.

집무실.

마르셀로는 한참이나 집무실을 서성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쉽게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마르셀로는 고개를 떨궜다.

"탑주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복잡해 혼잣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짐작하던 바이기에.

충격은 크지 않았다.

나설 수 없다는 무력감?

그 또한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할 가능성을.

호열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래,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악크샨이라니."

그래.

호열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그 이름, 악크샨.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악크샨의 결전병기였다. 악마 사냥꾼들의 무기였단 말이다. 그 결전병기를, 아르카나를 구원하기 위해 호열 경께서 가동하셨다....'

간신히 정리된 생각.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호열이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

마르셀로가 쓰게 웃었다.

"...어찌하여 또다시 빚을 지게 만드시는 겁니까?"

악크샨.

그리고 악마 사냥꾼.

그들에게 마탑은 갚을 수 없는 빚이 있었거늘.

마르셀로가 신음을 뱉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 빚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 채.

호열에게 또 한 번 신세를 지고 말았다.

마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무력감과는 확실하게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책감이었다.

빠득─

마르셀로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내겐 안타까워할 자격조차 없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

그리고 성전(聖戰).

과거의 역사에서 호열이 겪었을 시련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런 의미에서 마르셀로는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어찌 그렇게 담담하실 수 있는 겁니까?"

호열은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르셀로는 손에 쥔 티백을 바라봤다.

-이 차 또한 챙겨 가게. 향이 나쁘지 않았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경이었다면.'

나는 이런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까.

마르셀로는 자신이 없었다.

호열의 그릇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저는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습니다, 탑주님."

더는 호열에게 빚을 질 순 없다는 것.

탑주의 대답을 들을 순 없었지만, 마르셀로는 확신했다.

"경의 출신을 알게 된 지금. 탑주님도 저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겠지요."

그러니까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재개가 예정된 원탁 회의.

마르셀로는 그 회의에서 폭탄을 터트릴 생각이었다.

명분이야 충분하다.

왜, 호열 덕분에 균열의 가능성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드륵─

마르셀로는 서랍을 열었다.

"지금 제겐 자비를 받아들일 자격조차 없습니다."

물건은커녕 먼지 하나 없는 서랍 속에 티백을 놓았다.

이 서랍을 다시 열어볼 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마탑엔 이제까지와는 다른 흐름이 펼쳐지리란 것.

마르셀로가 낮게 읊조렸다.

"원로들께서도 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

그 시작부터 클리어까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흘러갔다.

어느 누구라는 건 AAU도 포함이라는 소리였다.

"선배, 저 그냥 사표 쓸까 봐요."

"사표? 갑자기 웬 사표?"

"진짜 시달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성현준은 억울했다.

AAU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게 없단 말이다.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자신이 아르카나의 개발진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상식적으로 우리가 많은 걸 알 수 있겠냐고요!"

아르카나는 게임에 불과하던 때부터 돈이 됐다.

아르카나에 관한 정보가 돈이 되는 건 당연한 이야기.

그러니까 콘텐츠에 대한 보안은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진이라고 해서 모든 정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행방불명된 CEO 레이먼 션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다들 뻔히 알고 있으면서들 말이야.

"왜, 자꾸 물어보는 거냐고요! 애꿎은 나한테!!"

벅벅─

성현준이 머리를 긁었다.

자신 또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기에.

윤수겸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다들 답답해서 그러겠지. 얼마나 궁금하겠어?"

"나도 모른다고! 나도 답답해서 죽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새벽부터 전화를 걸지 않나...."

"그럼 때려치우든가. 그래도 자유는 없겠지만."

"너무 냉정해요, 선배. 서럽다. 서러워."

"신세 한탄할 시간 있으면 이것 좀 봐봐."

"뭔데요, 또."

"뭐긴, 이호열이지."

"아, 진짜! 선배까지 이러기?"

이호열.

자기 이름 석 자보다 더 많이 듣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드르륵─

성현준은 툴툴대면서 의자를 끌었다.

그러자 모니터에 떠오른 호열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선배도 박휘강 구독하셨네요?"

"이호열 팬 무비는 기가 막히게 만들더라고.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바로 배경이 되는 퀴른베르크 기계탑.

마우스 커서가 휘적거리며 배경을 가리켰다.

"딱 보면 알지?"

"알죠. 퀴른베르크 기계탑. 뭔진 몰라도."

"정확한 표현이네. 그거."

성현준의 말대로였다.

알긴 알지만,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그게 AAU의 정보력의 한계였으니까.

무능력해 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거 한참 뒤에나 써먹을 거였잖아요. 원래는."

"그치. 어떻게 써먹을지는 우리도 몰랐지만."

"레이먼, 그 빌어먹을 자식은 알고 있었겠죠? 그 나쁜...!"

"어쨌든, 그에 관한 플레이어들의 증언이 있어."

플레이어들의 증언.

그건 바로 균열이 클리어되는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였다.

[누군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반격을 시작합니다.]

성현준이 순간 발끈했다.

"그래요! 제가 저것 때문에도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당연히 이호열이겠지. 물어봐서 친절히 대답해 줬더니만. 그런 건 자기도 알고 있대. 아니, 그럼 왜 전화한 거야? 대체?!"

왜 전화하긴.

윤수겸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마우스 커서가 두 번째 줄을 가리켰다.

성현준이 또 다시 열변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저도 궁금하다니까요?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뭔지도 모르는데. 뭘 위한 결전병기인지 어떻게 아느냐고요. 선배는 제 심정 아시잖아요? 그쵸?"

"아니, 거기 말고."

"예? 결전병기 쪽 말고요?"

다시 보니 커서가 가리킨 건 뒤쪽이었다.

"...반격을 시작합니다?"

윤수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하지 않아. 그건 하나의 약속이지."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저 메시지도 틀림없이 사실일 거야."

반격을 시작합니다.

성현준은 그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다가 흠칫했다.

"...잠깐만요, 선배. 반격이 시작된다는 거면?"

"맞아. 우리가 있는 현실이 아닌,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존재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반격이 시작됐다는 말이야. 현준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

"다, 당연하죠!!"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

목격할 순 없어도 예상할 수 있었다.

현실보다 시간의 흐름이 4배나 빠르다는 것.

그건 악마족 몬스터의 성장 속도도, 세력도 시간의 흐름 이상으로 빠르단 소리였으니까.

함락된 프로스트만 봐도 그 가설이 틀리지 않았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틀리지 않았다면...."

"생지옥에 가까울 아르카나 대륙에서. 시스템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의미한 반격이 시작됐다는 거야. 메시지 속 누군가. 그래, 이호열이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비밀을 밝혀낸 덕분에."

"...선배. 이거 보통 일이 아니지 않아요?!"

"그래, 보통 일이 아니지."

어쩌면 지금 호열이 해낸 일이 바로.

"이 엿 같은 상황에 대한 인류 최초의 반격일 테니까."

그것도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를 통틀어서 첫 번째 반격이겠지.

그 사실을 세상은 아직 모를지라도.

당사자인 호열은 분명 알고 있을 터.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나 같으면 동네방네...."

도리도리.

"아니, 동네방네가 뭐야. 세계에다가 떠벌렸을 텐데! 진짜 이호열 캐릭터 하나 독보적이지 않아요? 어쩔 땐 관종 같다가 또 어쩔 땐...."

"현준아. 인터넷에서 그런 거 보고 신성모독이라고 하더라."

"...예? 신성모독까지요?!"

"그래, 괜히 호멘이라는 말이 나왔겠니?"

"이거, 이호열 씨한테는 농담도 제대로 못 하겠네. 진짜."

성현준이 탄식하다가 윤수겸을 흘겨봤다.

"...설마, 선배도 뭐 그런 거 아니죠?"

윤수겸이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올렸다.

"호멘?"

"아, 선배애애!!"

*

...귀가 심히 간지럽다.

마음 같아선 귀를 후비고 싶었건만.

그럴 수 없었다.

또각─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격식.

나는 지금 프로스트 본성에 발을 들인 참이었으니까.

그래, 프로스트에서도 최대치에 이른 관계도와 영향력.

그 덕분에 활성화된 [권한]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72화. 거슬리는구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