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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착각은 자유겠지 (1)

[퀘스트 : 프로스트 탈환]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진 프로스트.

프로스트를 탈환하라.

그 용맹함엔 보상이 따르리라.

─현재 기여도 : 0p

...퀘스트다!

호열의 마법 발현으로 시작된 프로스트 탈환.

그와 동시에.

프로스트에 집결한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건 패닉에 빠졌던 플레이어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게 얼마 만에 퀘스트냐?"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지급되는 거겠지?"

"일단 들이받아 보자고."

"다들 준비해. 곧바로 공격할 거니까."

곧바로 공성전에 돌입하는 길드는 물론.

"형님들. 이거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겠는데요?"

심지어는 중계를 목적으로 프로스트를 찾은 넷튜버 플레이어들까지.

이번 퀘스트는 한때 아르카나를 즐겼던 이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퀘스트였으니까.

"애써 참고 있었는데 이러면 못 참죠, 저도!"

그 영향력이 상당했던 프로스트가 아니던가?

그런 프로스트의 마스코트와 다름없던 말론.

그를 비롯한 프로스트의 주민들이 머리가 성벽에 내걸린 상황.

간신히 억누른 감정에 퀘스트가 제대로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도 게시글이 폭주했다.

-퀘스트는 못참지ㅋㅋㅋ 쪼렙인데 나도 간다

-원래 공성전에서 중요한 건 물량임ㅇㅇ

-레벨 상관없으니까 일단 다 모이셈

-탈환하면 자랑거리 하나 생기는 거냐? 바로 간다ㅋㅋ

그래, 그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뀐 것이었다.

"심히 건방지구나."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성문을 향해 마법을 발현했던 호열 덕분에!

그런데 어째서인가.

정작 호열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의문에 빠진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야 호열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마법이....

"...저게, 뭐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형태였으니까.

프로스트의 성문은 두꺼운 강철.

무너트리기 위해선.

상당한 위력을 가진 상급 마법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이란 말이다.

그런데 호열이 발현한 마법, 저건 아무리 봐도....

둥실─

"...야, 저거 [라이트] 아니야?"

기초 중의 기초 스킬.

그 효과는 그저 어둠을 밝히는 것뿐.

단순한 마력 구체에 불과한 [라이트]가 아니던가?

"...뭐, 단축키 잘못 눌렀나?"

"미친놈아. 현실에 단축키가 어딨어."

"아니, 농담이지. 농담할 정도로 이상하잖아. 갑자기."

두둥실─

심지어 한두 개도 아니었다.

성문, 성벽을 향해 날아가는 마력 구체, 라이트.

"...마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진짜."

그 개수가 일백(一百)은 가뿐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낭비할 마력이 있다고?

플레이어들이 당혹감에 빠지려던 찰나.

라이트, 마력 구체가 성문과 성벽에 달라붙었다.

"...?"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화르륵─!

"...뭐, 뭣?!"

파지직─!

"형태가 벼, 변하고 있어?!"

휘이잉─!

"자, 잠깐만 뭔데?! 저 스킬은?!"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조차 감탄하게 하였던.

'기이'할 정도로 높은 호열의 마법 구사력이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눈으로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한 탐색, 간섭, 발현 과정의 연속.

물론, 모든 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대체 몇 레벨이란 거야, 이호열은...!"

탐색, 간섭, 발현.

그 마법의 기초조차 알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이 아니던가?

플레이어들은 그저 넋을 놓고 감탄하는 게 전부였다.

"과연, 호열 경...!"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 식견을 떠나서 언제까지나 그들은 기사였으니까.

뛰어난 수준이란 것은 알아보아도 그 이상의 평가는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이런 미친."

하지만 알고 있는 처지에선.

저만한 미친 광경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림자 용병단.

제7석, 알카리.

그가 코를 벌름거렸다.

"...!"

불어오는 바람에서 풍겨오는 마력흔.

그건 알카리의 굽은 척추를 움찔하게 할 정도였다.

알카리가 끌끌 웃음을 흘렸다.

곁에 있던 말석, 락키드가 딴죽을 걸었다.

"왜, 기분 나쁘게 웃고 지랄이야. 영감?"

"클클. 단장이 왜 따라나섰는지 알 것 같아서."

"뭐? 그 귀찮은 이유를 알겠다고? 뭔데, 그게?"

알카리는 단장, 키치를 바라봤다.

이런, 키치는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알카리가 알아서 대꾸했다.

"글쎄. 적어도 이번 의뢰에선 나서지 않는 게 좋겠어. 아니, 이번 임무만이 아니겠지. 적어도 저 귀족 나리께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상. 그 괴팍한 성격은 좀 죽이는 게 신변에 좋을 걸세, 락키드."

...노망났나, 이 영감탱이가?

락키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키치의 생각도 알카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겠지.

그야 키치는 지켜보았기에 알고 있었으니까.

'...이럴까 봐. 다신 만나지 말자고 했는데. 왜 하필!'

저런 고도의 마법을 발현하는 것도 모자라.

검기까지 다룬다는 사실.

거기에 한술 더 뜬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까지도.

그러니까 키치의 얼굴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길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마지막으로 호락호락하지 않던 그 성격까지.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걸린 것 같다고.

*

[퀘스트 : 프로스트 탈환]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퀘스트.

뭐, 이건 보너스 퀘스트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랄까.

'기여도 시스템인가.'

─현재 기여도 : 0p

용맹함에 보상이 따른다.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지급된다는 거겠지.

당연하게도 기여도 1위를 노린다거나.

그런 비현실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그냥 겸사겸사.'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머릿수를 봐라.

게다가 그들은 길드가 아니던가.

지금 같은 다수 대 다수의 싸움에 능숙한 게 당연했다.

물론, 나한테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그림자 용병단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활약이 내 기여도로 책정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랬으면 말도 안 했지, 내가.'

그러니까 주제 파악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그런 의미에서 최우선 목표는 '프로스트 조사'였다.

나는 마력 구체에 간섭, 발현하며 생각했다.

'연습해 두길 잘했군.'

마탑, 연구실에 불을 지를 뻔도 했지만 아무튼.

그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둔 보람이 있었다.

화염, 바람, 전기, 물....

순수마력학의 기초 마법, 라이트.

그 마력 구체에서 발현되는 다양한 속성의 마법들.

갖가지 속성 마법을 동시에 발현해서일까.

'마력 소모가 느껴진다.'

새롭게 개방된 스탯.

[심미]의 발동은 최대한 억눌렀거늘.

지금은 그 효과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귀중한 마력을 소모한 가치가 있었다.

갖가지 속성 마법이 맞물리는 발현의 현장.

'...찾았다.'

나는 그중에서 성문 공략에 가장 효과적인 속성의 조합을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 봐도 막무가내가 따로 없구나, 정말...!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최선이다.'

처절한 발버둥.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나만의 방식...!

화(火), 빙(氷).

프로스트의 성문은 그 두 가지 속성 마법의 결합에 취약했다.

원리나 이유?

그딴 건 모르겠다. 알았으면 말이야.

지금처럼 마력을 소모할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더 이상 알 필요도 없다.

'알아서 맞히나. 찍어서 맞히나.'

정답만 맞히면 똑같은 것이다.

남은 건 화력을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곧장 화염과 얼음을 발현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성문에 퍼부어지는 마법.

과연, 찍어서라도 때려 맞힌 보람이 있었다.

쩍─! 쩌저적─!

굳게 닫혔던 성문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째 플레이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성문을 이렇게 빨리 뚫었다고?"

"대체 뭐냐니까. 저 스킬? 파괴력이 장난이 아니잖아!"

"...실화냐?"

마음 같아선 말이다.

그런 평가들을 정정해 주고 싶었다.

'내가 없는 살림에 말이야....'

얼마나 발버둥 쳐서 성문을 공략했는데.

그걸 고작 단순하게 위력 덕으로 착각하다니...!

그러나 이 고고한 긍지가.

그런 사소한 사정에 꿈쩍도 할 리가 없다.

"경이 함께하는 이상. 우려조차 하지 않았다네."

물론, 그럴 새도 없었다.

무너지는 성벽.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기세.

철컥─!

내게 말한 하르콘이 투구를 바로 착용했다.

"호열 경. 이제부터는 우리가 길을 열겠네."

스릉─!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검을 빼 드는 순간.

쿠쿠궁─!

완전히 무너져내린 성벽.

그 순간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

─현재 기여도 : 5,000p

──────

성문을 무너트려서 기여도가 상승한 건가?

'5천 포인트라.'

그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알 순 없었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보너스 퀘스트고, 뭐고 다 떠나서....

무너진 성문에서.

이내, 프로스트의 악마가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과연, 마왕의 군단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오와 열을 맞춘 대열.

착용한 장비의 수준.

성벽이 무너지는 것조차 예상했다는 듯.

재빠른 움직임까지.

마왕군.

그래, 새빨간 피부.

머리에 돋아난 뿔만 아니라면.

그들은 인간의 군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그 모습엔 플레이어들의 기세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심상치 않아."

"섣부르게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거리를 유지한다."

여태까지 봐왔던 악마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녀석들은 체계적이었다.

울려 퍼지는 악마의 목소리.

"모조리 죽여라! 절대로 들여보내선 안 된다!"

일부는 공격 태세.

일부는 방어 태세.

심지어는 구체적인 작전도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바람에 흩날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더없이 무심하게.

"가소롭군."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그 어떤 악마조차 전부 똑같은 쓰레기에 불과하단 말이다.

저런 마왕군의 모습 또한 그저 비슷한 것끼리 모아서 세워둔.

그저 분리수거를 잘해놓은 쓰레기에 불과하단 소리였다.

게다가.

"예시카, 에노크."

"네, 단장."

"나와 함께 전방에서 놈들의 대열을 무너트린다."

"알겠습니다."

체계적인 걸로 따지자면 이쪽도 지지 않는단 말이다.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뿐만 아니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키치가 곧장 입을 열었다.

"...우리도 최대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각자 알아서들 잘. 다들 알겠지? 자, 시작."

철저한 갑을 관계로 맺어진 그림자 용병단까지.

그러니까 이건 이유 있는 자신감이란 소리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나서며 선언했다.

"낭비할 시간은 없다."

또각─

클래스 퀘스트.

그 최종 목표는 마왕 토벌이란 말이다.

"비켜라. 쓰레기들."

*

프로스트의 성문은 총 10개.

대도시인 만큼 그 성문의 개수 또한 많은 게 당연했다.

그건 퀘스트까지 떠오른 현재.

서로 경쟁해서 좋을 게 없는 거대 길드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특히나 길드 랭킹 1위와 2위.

샤이닝과 천하통일.

두 길드만큼은 확실하게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또 이런 거 전문이잖아. 안 그래, 록스?"

아르카나 시절.

영지를 보유했던 길드, 샤이닝.

샤이닝에겐 수많은 공성전 경험이 있었다.

그 샤이닝과 맞먹는 경험을 가진 게 바로 천하통일이었다.

게다가 공성전에서만큼은 천하통일은 샤이닝에게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우리에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겠지."

그건 바로 천하통일의 압도적인 길드원 숫자.

마스터, 류오쥔춘의 플레이어 랭킹은 14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하통일의 진가는 길드원들의 머릿수와 그들의 평균적인 레벨에 있었다.

"돌격!"

천하통일은 그 물량을 앞세운 전술을 펼쳤다.

성문에 쏟아지는 그들의 공격.

단숨에 마나를 쏟아붓고 후열과 교대.

마력과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교대.

"후후."

류오쥔춘은 미소를 흘렸다.

그래, 제아무리 샤이닝이라고 한들.

이번 공성전에서 자신들을 따라올 순 없으리라.

류오쥔춘의 퀘스트창이 반짝거렸다.

'이 기여도에 달린 게 엄청나겠군.'

현재 프로스트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그 영주가 살아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류오쥔춘의 기대가 점점 커져갔다.

'...만약 영주가 죽은 상태라면?'

그 기여도에 따라 프로스트의 새로운 영주로 서게 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대도시, 프로스트의 영주.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감히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거늘.

'압도적인 1위로 올라설 수 있다!'

천하통일은 물론, 자신까지도 말이야.

류오쥔춘은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기여도를 확인했다.

'록스, 너는 꿈도 못 꿀 기여도겠지.'

류오쥔춘은 길드 마스터로서 [지휘]에 대한 기여도를 톡톡하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샤이닝은 그럴 수 없겠지.

그건 제시 하인네스만 봐도 알 수 있다.

록스에겐 자신과 같은 지휘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의욕이 끓어올랐다.

"흐하하하하!!"

──────

─현재 기여도 : 120p

──────

같은 시각.

호열의 기여도가 5천 포인트를 돌파했다는 사실을.

류오쥔춘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압도적인 기여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마, 록스!"

그래,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

◈ 54화. 착각은 자유겠지 (2)

길드, 가온의 분석관.

남철민은 추가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마왕군 보병' : Lv.350

'마왕군 마물 기병' : Lv.400

'마왕군 백인대장' : Lv.420

'마왕군 투사' : Lv.420....』

"후우."

모니터와 그 업데이트 내역을 번갈아 보자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촬영 드론이 보내오는 영상 속 프로스트의 전경.

막막함이 앞서는 게 당연했다.

"성문을 공략한다고 끝나는 게 아닌가."

그래, 성문을 공략하는 데만도 고전하고 있었거늘.

진짜는 성문이 무너진 다음부터 시작이었다.

왜, 성문 뒤에 대기하고 있는 마왕군의 숫자를 봐라.

350레벨짜리 몬스터.

놈들이 못해도 천여 마리는 될 것 같았다.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스케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남철민은 다시금 업데이트 내역을 바라봤다.

"...마왕군이라."

마왕.

보스 몬스터가 악마들의 왕이라면.

그래, 프로스트가 함락된 것도 이상한 건 아니겠지.

남철민은 고개를 털어냈다.

인이어를 착용.

남태민을 포함한 가온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성문 뒤에 몬스터들이 대기하고 있어. 쉴 틈이 없다는 거지. 생명력, 마력 관리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을 거야. 기여도 퀘스트에 연연하지 말고."

지지직─

그 순간 끊겨버린 모니터 화면.

남철민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오케이. 우린 마지막 드론까지 추락."

마왕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놈들은 영악했다.

자신들의 정보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촬영 드론을 보이는 대로 파괴한 것이었다.

"그래도 싸게 먹혔다고 생각해.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녀석들의 원거리 공격 수단은 뛰어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제 남철민에게 남은 시야는 단 하나.

동생 남태민이 보내오는 영상뿐이었다.

그런데.

'조용하네.'

남태민이 평소와 달랐다.

형이니까.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들떴던 만큼 충격이 클 수밖에.'

남태민에게 프로스트는 의미가 큰 도시였으니까.

아르카나에서만큼은 프로스트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프로스트가 짓밟힌 것이었다.

그것도 현실에서, 생생하게.

남태민의 시야로 보이는 참수된 머리들.

남철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생의 침묵이 고요한 분노라는 것을.

그러니까 한마디를 덧붙였다.

"태민아, 너무 흥분하지 말고. 알지?"

뭐,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

사실 모니터로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조차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으니까.

긴장, 분노, 걱정, 기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 때문에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호열 씨밖에 없지 않을까?

그거야 그동안 보여준 모습을 떠올려봤을 때.

긴장한 호열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궁금해졌다.

"...좀 진전이 있으시려나?"

프로스트의 성문은 총 10개.

가온은 호열 측과 그 위치가 꽤 떨어져 있었다.

그런 남철민은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경악했다.

"...이, 이게 내가 알던 공성전이라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르카나의 상식.

그 분석관으로서의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

쿠구구궁─

성문이 무너진 건 신호탄이었다.

타다닥─!

하르콘, 예시카, 에노크를 필두로.

섬광처럼 뛰쳐나가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 뒤를 따라붙는 그림자 용병단.

나는 그 광경을 잠시 지켜봤다.

'강하다.'

찰나지만 그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마왕군이 아무리 군기가 바짝 들었다고 한들.

체급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고오오─!

검기가 피어오르는 하르콘의 검.

하르콘이 검을 휘두르자 곧장 대열이 무너져내렸다.

일격에 즉사.

들어 올린 방패조차 두부처럼 잘려버린 탓이었다.

"돌격!"

타다닥─!

적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사자 심장의 기사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마왕군 사이로 파고들어서는.

마왕군의 머릿수를 순식간에 줄여나갔다.

푹─

그들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스왁─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사자처럼.

콰직─

그런 사자의 심장처럼.

그들은 몇 배가 넘는 마왕군의 기세에도.

조금의 주눅조차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와씨.'

과연, 제국 최강의 기사단다운 위용.

마왕군이라고 할지라도 다수 대 다수의 싸움에선 저들을 따라올 수 없는 거겠지.

그래, 새삼스럽게 놀라기야 했다만.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야, 원래부터 대단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 용병단은 의외였다.

그 총원은 단장 키치를 포함해 고작 열 명.

그러나 그냥 봐도 알 수 있었다.

'개개인이 보통이 아니야.'

체계적인 움직임?

키치의 말대로 그딴 건 없었다.

하지만 각자가 알아서 마왕군을 농락하고 있었다.

거기에 합세한 플레이어들까지.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고맙네, 모험가여."

"힐러들은 바로 따라붙어! 길드, 파티 따지지 말고 부상자를 먼저 치료해!"

물론, 플레이어들이 합세한 이유는 기여도 때문이겠지.

공성 측이면 같은 아군이었으니까.

아군을 돕는 행위 또한 기여도에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었다.

이 냉혹한 사회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

그래, 전부 주고받는 게 있기에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또 사회 생활엔 빠삭하다.

'마력을 아낄 수 있겠는데.'

어쨌거나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전황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성문을 무너트리는 데 소모한 마력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 찰나의 휴식에서 나는 냉정하게 주제 파악을 끝마쳤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잖아, 이거?'

무엇보다 내 든든한 빽....

아니, 아군의 수준이 높아도 너무 높았다.

황제의 마지막 명이라고 그랬었나.

그것만으로도 의욕으로 충만해질 텐데.

생존자 구출과 프로스트 탈환이라는 목표가 생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아니던가?

그들의 사기는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게 당연했다.

게다가 내 예상보다 뛰어넘은 그림자 용병단의 전투력까지.

그러나.

'주제 파악을 했다고 해서 말이야.'

가만히 뒷짐 지고 있겠단 소리는 또 아니었다.

그거야 저 마왕군 한 마리, 한 마리가.

내겐 아까운 경험치이자 기여도였으니까.

물론, 마력은 최대한 비축해 둘 필요가 있겠지.

'거악, 칠죄종 탐욕 때를 생각하면....'

무기력한 녀석을 쓰러트리는 데에 마력을 모조리 쏟아부었던 내가 아니던가?

그때보다 성장했다고 해도 상대는 마왕이었다.

그 대비가 철저할수록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

마력을 최대한 비축하면서도.

적잖은 기여도를 획득해야 하는.

그러면서도 그랑펠의 긍지에도 어긋나지 않는 행동.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한 절제 또한 격식의 일부겠지."

...갈수록 뻔뻔해진다. 정말!

그래,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는 대충 넘어가자.

중요한 건 그래서, 그 행동이 무엇이냔 것이었다.

듣는 사람에겐 이보다 더한 수수께끼도 없겠지.

하지만 내겐 아니다.

그야 나는 이미 몇 번이나 해봤었거든.

그런 행동을 말이야.

검증은 진작 끝마쳤으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그 일련의 과정 또한 더없이 신속한 게 당연하다.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탐색 대상.

그리고 능숙한 간섭.

나는 발현된 마법을 보며 생각했다.

'날로 먹기, 그건 또 내가 전문이거든.'

콰드드득─!

*

프로스트엔 볼거리가 넘쳐났다.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는 성문만 하더라도 10개에 육박했으니까.

제각기 성문을 공략하는 상위 길드.

거기에다가 연예인 뺨치는 인기를 구사하는 스타 플레이어들까지.

그들의 모습만 하더라도 벌써 수십 개의 채널에서 송출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볼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건 누구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노트북 모니터 속.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로 나타나고 있었다.

"...국장님! 동 시간대 1위입니다!"

침묵 속에 터져 나온 소식.

VBC 채널의 시청률이 무려 20퍼센트를 돌파한 것이었다.

지상파가 아니란 것을 고려했을 때.

그 파급력은 배 이상이라 고려해도 과하지 않을 지경.

그러나 호들갑은 없었다.

심지어는 시청률에 사족을 못 쓰던 사장, 남진만조차도.

"시끄럽고. 일단, 저것부터 지켜보지."

"아, 네네. 죄송합니다앗...."

시청률 그래프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만큼 스튜디오 상황에 몰입했기 때문이었다.

지상파에 비해 편성에 융통성이 있는 VBC.

이번 특집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건 다름 아닌 투데이 아르카나의 PD, 현용석이었다.

모든 건 그가 강력하게 주장한 덕분이었다.

"한마디로 이호열 특집이란 거죠."

몇 시간.

아니,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 프로스트 탈환.

현용석은 그 긴 시간 동안 오직 이호열만 조명하는 특집 프로그램 편성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사실상 도박이었다.

아무리 이호열이 대단하다고 해도 모든 것엔 피로도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채널만 돌리면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지는데, 계속 이호열만 지켜볼 시청자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편성 회의에선 반대 의견도 많았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지. 내가...!"

그건 기우에 불과했으니.

이호열.

그의 맹활약은 채널을 돌리게 하기는커녕 리모컨을 건드릴 생각조차 들지 못하게 할 정도였으니까.

그 시작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쿠구궁─!

순식간에 성문이 무너지고.

시작된 플레이어와 마왕군의 전투.

그 모습에 출연자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호, 혼자서 성문을 공략해 냈습니다!"

"정말이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스킬 활용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하르콘의 검격!"

"플레이어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입니다. 저건."

"곧장 그림자 용병단도 따라붙는 모습인데요. 전문가님, 그림자 용병단의 수준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아르카나에서 용병에 대한 평가는 간단합니다. 그들의 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게 바로 의뢰비죠.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비는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아앗! 말씀드리는 순간!"

설명을 끊을 수밖에 없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잠자코 있던 호열이 다시금 마법을 발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콰드드득─!

그 익숙한 현장음과 동시에 잠깐 잊고 있었던 기억.

"그렇죠. 이호열 플레이어 하면 역시 저거죠!"

땅에서 솟구치는 돌덩이들.

과거, 호열이 처음으로 매스컴에 조명됐을 때.

호열을 연금술사로 오해하게 만들었던 그 스킬.

"우리 가온과 이나즈마를 위기에서 구해냈던 그 스킬입니다!"

돌기둥과 돌벽을 발현.

기병의 돌진을 저지하고 가온과 이나즈마를 보조하던 호열의 모습은 큰 화제가 됐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호열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강한 아군을 보조하겠다. 그런 생각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호열 플레이어가 강하다고 해도 플레이어와 아르카나인 사이에는 아직까진 큰 격차가 있다는 게 팩트...."

"아아닛! 말씀드리는 순간!"

그러나 이번에도 끊겨버린 설명.

이번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이 포착됐으니까.

화면을 지켜보던 출연진들이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무슨 스킬인가요? 전문가님?"

"모, 모르겠습니다. 저도 난생처음 봅니다만?!"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은 믿기십니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모습을 드러낸 건.

"계, 계단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가...!!"

성벽과 연결된 수십 개의 돌계단.

그리고 그런 계단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의 모습.

그것뿐만 아니었다.

슈슈슉─

날아드는 마왕군의 원거리 공격.

콰드득─

그에 반응해 솟구치는 거대한 방벽까지.

비록 전방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을지라도.

그런 호열의 활약을 단순한 보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그 영향력이 컸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이건 보조 같은 게 아니라....

"전장을 완벽하게 '지휘'하고 있어요...!"

전황을 완벽하게 통제, 조율하는 지휘관의 모습.

출연진들이 다시금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그림자 용병단마저 이끌고 있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는 모습입니다. 정말!"

"다시 보니까 저 복장도 약간 지휘자 같은 게...."

"이러면 기여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문가님?"

"이건 뭐, 이호열 플레이어가 차린 밥상에 다들 숟가락만 올릴 모습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마도 엄청난 기여도를 쌓았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호열.

그가 어떻게 지금까지 잠자코 있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그 클래스조차 짐작할 수 없는 것인가.

사회자가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그 과거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

쉴 새 없이 점멸하는 퀘스트창.

나는 현재 기여도를 확인했다.

◈ 55화. 심미 (1)

──────

─현재 기여도 : 11,600p

──────

일만 포인트 돌파.

마찬가지로 비교 대상이 없어서 얼마나 높은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말이야.

그쪽 기여도는 몇이냐고.

곁에 있는 플레이어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

하지만 사사로운 공적에 연연하지 않는 것 또한 그랑펠의 긍지였으니.

"고작 쓰레기를 치워냈을 뿐이거늘."

그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기여도라니. 당치도 않구나."

이렇게 말을 내뱉는 게 감상의 전부였다.

그렇다.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하시다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

'아니, 억울해서라도 자화자찬을 좀 해야겠다.'

상승한 기여도로도 알 수 있듯.

나는 버스의 승객으로서 역할을 다해낸 셈이었다.

내가 발현한 계단 덕분에 성벽 위를 점거한 플레이어들.

그들은 원거리에서 확실하게 아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견제는 말할 것도 없겠지.'

지원을 넘어선 선제공격까지.

'나머진 뭐 더없이 익숙한 거니까.'

방벽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쯤이야.

내겐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한 발현이었으니까.

그런 나의 보조를 받고 있는 게 누구던가?

"경의 도움으로 한결 움직임이 편해졌군!"

그러니까 나는 뻔뻔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버스 요금은 확실하게 냈다고.'

결코, 날로 먹지 않았단 것이다...!

또각─

그러니까 프로스트에 입성하는 지금 순간에도.

나는 먼지 한 톨.

피 한 방울 뒤집어쓰지 않았단 소리였다.

그런 나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프로스트'에 진입하셨습니다.]

북부도시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간다.

그 수식어가 바뀔 만큼.

프로스트는 참혹한 풍경이었다.

거리 곳곳에 경비병들의 시체가 널려있었고.

사방이 피로 흥건했다.

"...빌어먹을."

그 참상에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들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중에서도 몇몇 기사들.

그들이 바득바득 이를 가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올 정도였다.

하르콘이 차디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도시인 프로스트인만큼. 우리 기사단에도 프로스트가 고향인 이들이 적지 않다네.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긴 쉽지 않겠지."

과연, 억누르고 있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정말이지 잔혹한 풍경이었으니까.

'가상현실 게임 같은 게 아닌 현실이다.'

널브러진 시체는 더 이상 NPC가 아닌.

프로스트의 주민.

피에 젖은 거리.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까지.

이 모든 게 진짜, 현실이란 것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구역질을 참지 못했겠지.

저기 보이는 플레이어들처럼.

"...잠깐, 나 속이 안 좋아. 우웩."

"너무 무리하진 마."

"꼭 이럴 필요까진 없는 거잖아.... 씨발!"

시체는커녕 고기 핏물을 빼는 데에도 인상을 구기던 게 나였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긍지가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굽혀지지 않는 그랑펠의 긍지가.

그건 이러한 참상 앞에서도.

헛구역질을 한다거나.

눈가를 찌푸린다거나.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말했다.

"시신을 수습하지."

시신을 수습하겠다.

나의 말에 하르콘이 짐짓 놀라 되물었다.

"시신을 수습하다니.... 경, 진심인가?"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빤히─

키치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은 내게 미친놈 보듯 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나도 나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언제, 어디서 마왕군이 달려들지 모르는데 말이지.'

프로스트는 그 초입부터 건물로 가득했다.

건물, 건물마다.

골목, 골목마다.

매복한 마왕군이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란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체를 수습한다?

정말, 죽고 싶어 미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까.

모든 건 이 빌어먹을 놈의 긍지 때문이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는 고귀하다. 상대가 누구든 그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의 자긍심은 더없이 무거우며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그 긍지가 말해주고 있었다.

프로스트를 지켜가다 전사한 이들.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긍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긍지에 어긋나는 일?

설령 가라앉아 익사해 버리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긍지를 거스를 수 없겠지.

그러나.

'...내가 얌전히 가라앉아 죽을 것 같아?'

말했다시피 한두 번이 아니었다.

쥐뿔도 없이 아스큐라 백작 앞에 섰을 때도.

심지어는 그 대단하시다는 거악 앞에서도.

나는 죽다 살아난 경험들이 있기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건물에 기댄 채 숨을 거둔 프로스트의 병사에게 다가갔다.

아직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병사의 눈을 감겨줬다.

"그대의 긍지는 내가 이어받도록 하지."

그래, 가라앉힐 수 있다면 가라앉혀 봐라!

나는 누구보다 발버둥 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으니까.

그런 나의 행동에 하르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널브러진 시신을 고이 눕히고.

채 감지 못한 그들의 눈을 감겨줬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투구를 써서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집무실에서 발버둥 치던 나를 호위하던 예시카였다.

"...그리고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예시카는 투구 밑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뭘, 죄송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 뒷담화라도 했나.

그런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 상사 때문에 퇴근 못 하는 그 기분.

'나도 잘 알거든.'

그래도 내가 또 눈치 하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나는 곧장 깨달았다.

예시카의 고향이 프로스트라는 사실을.

물론, 악마에게 소중한 것을 잃은 심정을.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랑펠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감정에 치우치지 말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니까."

...그냥 좀 위로해 주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 거냐.

이럴 때마다 과거의 나.

그랑펠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말이야.

다 너처럼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고 말이야.

다행히도 예시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하르콘의 정신론 교육이 효과가 있던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던 찰나.

"...!"

문득,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잠깐 뭐야, 이거?

*

열 개의 성문.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인 공성전.

"...됐다!"

"그래, 양심이 있으면 열려야지. 새끼들아!"

"쏟아부은 포션이 몇 병인데!"

뚫릴 기색이 없던 성문이 드디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열이 공략해 낸 성문을 제외하면 그 속도는 전부 엇비슷했다.

"미친, 저 새끼들 포스 장난 아닌데?"

마왕군이 무너진 성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성벽 위 플레이어들의 존재.

"...잠깐, 저거 플레이어들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저길 어떻게 올라간 거지?"

"설마, 벌써 다른 쪽에서 넘어온 건가?!"

그랬다.

호열이 발현한 돌계단.

그들은 그 돌계단을 올라 성벽 위를 점령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이 성벽 위를 달려 다른 지역 성문에 도달.

마왕군 제압을 돕기 시작했다.

"역시 옮기길 잘했다, 그치?"

냉정한 사회.

당연하게도 거기엔 남을 돕기 위한 마음은 없었다.

모든 건 각자의 경험치와 기여도를 위해서였다.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게 바보였지."

"진짜로. 거긴 차원이 다르다니까? 봤지, 너도?"

"사냥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 그냥."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그림자 용병단까지.

그들이 가는 곳엔 숟가락을 얹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차라리 다른 성문 쪽으로 넘어가자고.

슉슈슉─!

그런 플레이어들의 지원 사격.

그건 마왕군의 대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모자라.

"...생각보다 적지 않아?"

예상했던 것보다.

뛰쳐나온 마왕군의 머릿수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호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킨 거야."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졌다.

이건 기회였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기에.

여태껏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던 샤이닝.

머리를 굴리던 록스가 판단을 내렸다.

"빠르게 프로스트 중심부까지 전진하자."

"오케이~ 저쪽한테는 약간 미안해지네."

"미안하긴 개뿔. 우리 챙기기도 바쁜 상황에."

"...근데, 우리 공주님은 또 어디 갔어?"

활시위를 당기던 카밀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스킬을 쏴대던 제시가 보이지 않았다.

록스와 드미트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시가 멋대로 사라지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어야지.

이호열,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사라졌다라.

"으음....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하지만 카밀라는 입을 다물었다.

미쳤다고.

제시한테 미움을 사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

.

.

호열 쪽으로 마왕군의 병력이 집중됐다.

그 소식은 누군가에겐 기회.

누군가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

가온과 버서커.

유스라 왕국을 완전히 비워둘 수도 없는 일.

그 탓에 분산된 전력에 본의 아니게 공동 전선을 펼치던 두 길드였다.

"...뭐라고?"

"이런 씹."

남태민, 레오니는 동시에 멈춰 섰다.

예상보다 수월하게 프로스트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게 전부 호열 덕분이었다니....

레오니가 빠득─ 이를 갈았다.

"빠져서 미안한데.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레오니는 곧장 호열 쪽으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걱정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아니, 절대 아니지.'

어디 호열이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거나 도움을 받을 위인이란 말인가?

이건 단순한 고집이었다.

더 이상 받기만 할 순 없다는 내 자존심.

"나는 무조건 찬성이야. 언니."

"그 결정, 그 결심 끝까지 응원해."

"닥쳐 그냥."

남태민도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호열 씨 쪽으로 합류한다."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거기에 그림자 용병단까지.

그들의 수준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 법.

큰 도움은 될 수 없을지라도 머릿수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두 길드의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결국, 남태민이 걸음을 멈췄다.

"먼저 가. 곧바로 뒤따라갈 테니까."

무너진 프로스트.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

남태민은 말없이 시체를 수습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그 끓어오르는 분노를 곱씹으면서.

그런 남태민의 퀘스트창 또한 점멸하고 있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클래스 퀘스트 : 야성의 증명]

"...!"

두 차례씩이나.

──────

─현재 기여도 : 3,300p

──────

*

그저 시체를 수습했을 뿐인데.

기여도가 상승했다.

이거, 상승한 기여도가 상당했다.

──────

─현재 기여도 : 19,600p

──────

나는 생각했다.

착하게 사니까 복이 오기도 하는구나...!

당연하게도 기여도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울며 겨자 먹기.

육체를 지배하는 긍지 때문에 했던 미친 짓이었단 말이다.

'기대를 안 해서 그런가.'

뭔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없었다.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림자 용병단.

단원 중 하나가 지붕 위에서 말했다.

"아주 그냥 대놓고 몰려오는데. 젠장, 귀찮아졌잖아."

그저 시체의 눈을 감기고.

바닥에 눕혔을 뿐이거늘.

그럼에도 시간이 지체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탓에 마왕군의 후속 병력이 몰려들고 있는 거겠지.

이내, 시야에 들어온 마왕군.

개성이 없던 [마왕군 보병]과는 외관부터 달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추가 업데이트 내역을 통해 확인한 녀석들의 레벨.

[마왕군 마물 기병 : Lv.400]

[마왕군 백인대장 : Lv.420]

[마왕군 투사 : Lv.420]....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녀석들은 내가 얼마 전 사냥한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보다 나약한 악마라는 사실을.

'그래서 머릿수가 어쨌다고?'

그 물량 또한 상관없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

내겐 『마법』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너라.

나의 경험치, 기여도들아.

물론, 건물로 가득한 전장은 비좁고 복잡했다.

아군은 물론, 자칫하면 건물이 붕괴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조차도 내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흐트러진 [행커치프]의 모양새까지도.

"낭비할 시간은 없다. 단숨에 끝내도록 하지."

그래,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스탯, [심미]의 효과를 확인할 순간이었다.

◈ 56화. 심미 (2)

[심미 : 下]

그 효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런 효과였다.

[모든 것에 심미적 감각을 추가한다.]

스탯의 개방.

머릿속에 그에 대한 정보가 스며들었을 땐.

...이게 뭔 개소린가 싶었었지.

그러나 백문불여일견.

나는 [심미]의 효과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 불순한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모든 것'에 심미적 감각을 추가한다.

내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효과도 없었으니까.

'다른 스탯과는 확실히 다르다.'

근력, 민첩, 마력 등등.

각 능력치엔 한계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근력 스탯이 마법의 위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순 없는 것처럼.

그것이 내가 심미를 이질적이라 평가한 이유였다.

'마법, 검술, 심지어는 흑마법까지도....'

심미는 정말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쳤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끌어다가 쓸 수밖에 없는 내게.

이보다 적합한 효과도 없다는 것이다...!

고오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심미적 감각을 가미한 『마법』.

그 발현 대상은 다가오는 마왕군.

'하나씩 확인해 보자.'

그 시작은 익숙하게.

콰드드득─!

이번에도 돌기둥이다.

그러나 심미적 감각을 더한 돌기둥은 이전과 달랐다.

땅에서 솟구치는 돌기둥의 모습은 마치.

"...경, 저건?"

하르콘이 짐짓 놀랐다.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됐다.

정작 발현한 나도 살짝 놀라버린 참이었거든.

"...멈춰라!!"

마왕군을 앞을 가로막은 건.

병사들이었다.

그래, 방금까지 우리가 수습했던.

프로스트의 병사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발현한 것이었다.

...와씨. 잠깐만.

얼마나 복잡한 간섭 과정이 들어간 것인가?

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왜, 은제 단검의 형태를 변형시킬 때만 하더라도 그랬다.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그 형태를 조금 비틀었을 뿐인데.

그에 소모된 마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조금 형태를 비튼 게 아니다.'

평범한 돌에서 조각상.

그야말로 형태를 창조한 수준이란 말이다.

심지어 그렇게 발현한 조각상이 백 개가 넘었다.

내 마력이 성장했고 [천적관계]가 발동 중인 상태라고 한들.

마력 고갈을 면치 못했겠지.

물론, 과거였다면 말이야.

나는 소모된 마력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다.'

그저 돌기둥을 발현하는 것보다야 소모량이 많았지만.

발현된 마법의 수준에 비하면야.

이건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의 소모량.

모든 건 심미 덕분이었다.

심미적 감각.

더없이 복잡한 간섭 과정을 단순화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뭐 단축키나 매크로, 복붙신공 같은 거겠지.

쓰지 않을 때보다야 당연히 번거롭지만.

고작 버튼 하나 누르는 것만으로.

그 출력은 몇 배, 아니 수십 배에 육박하는.

하지만 그 진실은 오직 나밖에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왕군이 멈춰서는 건 당연했다.

"저건 분명 우리가 쳐 죽였던...?"

"설마, 되살린 건가?"

"아니, 인간 주제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심지어는 지켜보던 그림자 용병단까지도.

"영감, 숨이라도 제대로 쉬어봐. 뭘 그리 놀라? 겨우 돌 조각 몇 개 튀어나온 게 전부인데."

"...락키드. 나는 네 그 무식함이 부럽다."

"뭐, 새꺄?! 무식하긴 누가 무식해 이 새끼가!"

시신을 수습하겠다.

선언했던 나를 미친놈 쳐다보듯 하더니.

이젠 어째 그 시선조차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다.

특히 키치, 저건 완전히 나를 괴물 보듯 하는 눈빛이잖아.

그러나.

"똑똑히 봐라. 하찮은 악마여."

내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할 생각도.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음조차 인간의 긍지를 꺾을 순 없는 법이다."

나는 시신을 수습하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대의 긍지는 내가 이어받도록 하지.

그래, 내뱉은 말을 지키기에도 급급하단 말이다...!

마왕군이 동요한 지금.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쌔애애액─!

병사 조각상.

그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마왕군을 향해 날려 보냈다.

무기 또한 조각의 일부이기에.

그 형태는 정교한 게 당연했다.

거기에다가 내 마력까지 더해진 셈이었으니까.

그 파괴력은 차고도 넘친 말이다.

콰콰콰쾅─!

정확하게.

오직 마왕군만을 공격하는 투척.

"으아아아악!! 씨발!!"

"죽은 새끼들이 어떻게...!"

"인간 주제에 잔재주를!"

과연, 레벨값을 한다는 것인가.

[마왕군 백인대장 : Lv.420]

정신을 차린 녀석이 아군에게 소리쳤다.

"속지 마라. 단순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단순한 눈속임이라.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과연, 내 기대가 너무나도 컸구나."

"...뭣?"

"우둔한 악마가 긍지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거늘."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거늘.

나는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말했다시피 심미는 모든 것에 영향을 끼쳤으니까.

'각 속성 마법과는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알아둘 필요가 있겠지.'

그렇다면 필요한 건 라이트, 마력 구체였다.

나는 라이트를 발현했다.

그 크기가 커다랄 필요는 없었다.

'큰 위력보다 섬세함이 요구된다.'

전장은 복잡한 시가지.

적과 아군을 구분하여 공격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크기를 줄이는 대신 그 숫자를 늘리는 편이 옳다.'

심미가 존재하는 이상.

그 간섭 과정에도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뭐,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둥실─

"...예쁘다."

"찬란하군!"

"영감. 저 보기만 해도 간지러운 마법은 또 뭐야?"

마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송이처럼.

심미적 감각이 가미된 마력 구체는 상당히 아름다웠다.

당연하게도 그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었다.

발현.

눈발처럼.

마왕군을 향해 날아간 마력 구체가 각 속성 마법으로 발현하기 시작했다.

각 속성 마법에도 심미적 감각이 가미되었으니.

불길은 고고하게 타오르고.

물은 고요하게 요동쳤으며.

요란한 벼락조차 마치 하늘의 심판처럼.

숭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광경이 뭐랄까.

나로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광경이 어떻든.

결국 악마를 사냥하는 과정.

그 방식이 어찌 됐든 지극히 당연한 일이란 것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비키거라."

물론, 내 속마음까지 태연할 순 없었다.

모든 건 아까부터 떠오르는 메시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점멸하는 퀘스트창 때문이었다.

──────

─현재 기여도 : 23,100p

──────

쏟아지는 경험치와 기여도.

나는 뻔뻔하게도 생각했다.

...이거, 기여도 1위도 노려볼만하겠는데?

*

프로스트.

미야의 집엔 더 이상 햇빛이 들지 않았다.

미야는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바라봤다.

며칠이나 됐을까.

아버지가 신신당부하고 문밖으로 나섰던 게.

-미야. 절대 문을 열어선 안 된단다.

미야는 남동생, 마크처럼 어리지 않았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프로스트에 악마가 쳐들어왔고 아버지는 악마와 맞서 싸우기 위해 집을 나섰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마크. 돌아올 때까지 누나 말 잘 듣고.

아버지가 다신 돌아오지 못하리란 사실도.

미야는 자신이 처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시련이 자신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마을이 악마에게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분명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는데.

어째서인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훌쩍."

하지만 미야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어도 마크 앞에선 울 수 없었다.

...마크?

미야는 힘껏 팔을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한데 아무리 팔을 뻗어도 마크의 동그란 뒤통수가 만져지지 않았다.

어디 간 거야, 얘가?

설마, 2층으로 올라갔나?

생각하던 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들었다.

"!"

마크가 커튼을 걷어버린 것이었다.

미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악마에게 들킬지도 몰라!

마크에게 속삭이듯 소리쳤다.

"마크...! 커튼 닫아!"

햇빛이 드리우는 마크의 얼굴.

어째서인가, 그런 마크의 입꼬리가 점차 올라갔다.

마크가 해맑게 말했다.

"누나, 눈 온다!"

...눈이라고?

프로스트엔 한동안 눈이 오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프로스트 숲에 지옥문이 열리는 바람에.

땅이 뜨거워져 더 이상 눈이 내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었는데....

도리도리─

'마크가 헛것을 본 거야.'

저 바보가!

미야는 얼른 마크에게 달려갔다.

어두컴컴한 집안.

이리저리 찍히는 바람에 아팠지만, 눈물을 꾹 참았다.

그리고 얼른 커튼을....

"...어?"

닫으려고 했거늘.

마크의 말처럼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둥실─

미야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아니, 눈이 아닌가?

함박눈이라고 해도 그 눈송이가 너무 커다랬다.

눈이 지붕까지 쌓였을 때도 이런 눈송이는 못 봤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반짝거렸다.

"...예쁘다."

눈을 보고 처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넋이 나간 미야가 마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누나, 우리 나가서 눈싸움하자!"

아빠는 마크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바보!"

미야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크는 바보가 확실했다.

미야는 정신을 차렸다.

이게 눈이든, 아니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빨리!'

악마에게 들키기 전에 커튼을...!

그러던 중 자연스럽게 보게 된 거리의 모습.

"...누나? 치사하게 혼자만 보냐!"

키가 작은 마크는 볼 수 없었지만.

미야에겐 보였다.

"...설마 구하러 온 거야?"

악마와 싸우는 기사단의 모습이.

미야는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기사단 옆에 낯선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

그 복장이 확실히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미야의 기억 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아빠가 우리 미야 정도 됐을 때였나. 다른 세계에서 온 모험가라 불리는 분들이 있었는데.... 아빠도 그렇고, 다들 모험가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

미야는 직감할 수 있었다.

'모험가다.'

저 남자가 바로 아빠가 말했던 모험가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아버지의 당부.

-미야. 누가 됐든 절대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단다.

...맞아, 아빠가 악마는 사람을 잘 속인다고 했어.

미야는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 저것도 속임수일지 몰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악마가 할 짓이 아니었으니까.

남자와 기사단은 시체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중에선 미야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한슨 아저씨...."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사를 받아주던 경비병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눈을 감겨주는 모험가.

그 모습에 미야의 마음이 움직였다.

"나도.... 나도 볼래. 누나!"

칭얼거리는 마크에게 미야가 말했다.

"...마크. 우리 눈싸움하자."

"...정말?!"

"정말이야. 약속."

미야가 마크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

나는 다시금 실감했다.

'그림자 용병단.'

그들의 실력을.

키치를 선두로 그들 사이엔 서열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서열이 무색하게도.

말석, 락키드조차 그 전투력이 무지막지했다.

지금도 보아라.

"떼로 덤벼라. 버러지 같은 새끼들."

락키드가 철퇴를 휘두를 때마다 마왕군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400레벨이 넘는 몬스터를 저렇게 학살하다니.

'저게 검기가 아니라는 게 더 놀랍다.'

락키드에게선 검기, 특유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순수한 근력만으로 악마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저런 그림자 용병단을.'

갑질 끝에 반강제적으로 이곳, 프로스트에 끌고 온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그 강함과 별개로 그들이 내게 호의적이란 것이었다.

"저희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보고 계시죠?"

"지켜보고 있다.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여, 여유요?! 으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단순히 실력에 대한 칭찬이었거늘.

뭔데, 저 반응은?

어쨌거나, 나를 괴물 보듯 한 시선과 별개로.

키치는 최선을 다했다.

"혹 괜찮으시다면."

키치뿐만 아니라 알카리라 불리는 노인도 내게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심지어는 포션까지 들이밀면서 말이지.

"약물 제작은 제 특기입니다."

그러나 이 고귀하신 그랑펠 님께서.

어디 남이 건넨 포션 따위에 의존할 위인이란 말인가.

나는 당연하게도 대꾸했다.

"호의는 알겠으나 나는 괜찮다."

"오오...! 본의 아니게 나리를 의심하는 꼴이 됐군요. 이 미천한 노인네의 노파심을 용서해 주십시오."

"?"

뭔데, 이 반응은 또.

어째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는 듯싶었다만.

지금 바로 잡기엔 상황이 적절치 않겠지.

나의 마법.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그림자 용병단의 협공.

덕분에 마왕군은 대패,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나서야 후퇴했다.

쫓아갈 필요는 없었다. 마왕 토벌이 목표인 이상,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겐 할 일이 있었다.

하르콘이 외쳤다.

"시신을 수습한다!"

가는 길마다 시체가 끊이질 않았으니까.

경비병의 눈을 감기던 내게 하르콘이 말했다.

"경. 나는 생존자가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네."

부들부들─

"그런데...!"

분노로 떨리는 하르콘의 어깨.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천하의 하르콘에게 이 정도의 원한을 사다니.

'누군진 몰라도 악마 군단장, 넌 진짜 큰일 났다.'

그때였다.

"...!"

퀘스트창이 점멸한 건.

나는 덕분에 하르콘에게 해줄 말이 생겼다.

"자책하지 말게, 하르콘."

"...?"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의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성공)

클래스 퀘스트.

그 마지막에 새롭게 추가된 목표.

─생존자를 구원하라. (진행 중)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대의 믿음은 틀리지 않은 것 같으니."

그 순간.

활짝─!

드리웠던 커튼이 열렸다.

"새, 생존자다...!"

그러나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마왕 토벌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었으니까.

◈ 57화. 우리의 긍지가 일치하는군 (1)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라. (0/10)

조사를 마쳐서인가.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목표.

보고 있으니까 점차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막아서던 이유가 있었어.'

마왕 소환 의식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기 위해.

마왕군은 필사적으로 앞길을 막아서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보니까 마왕군이 우르르 몰려온 이유도 짐작됐다.

이렇게 빨리 방어선이 무너질지 몰랐던 거겠지.

"생존자를 신속하게 대피시킬 방법이 있겠는가?"

하르콘이 그림자 용병단에게 물었다.

"글쎄."

글쎄?

그래서 방법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키치가 딴청을 피우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그러다가 다급하게 누군가를 불렀다.

"...알카리. 포탈, 포탈이 필요해. 히끅."

알카리라면 내게 포션을 권하던 노인이었다.

포탈을 발현할 수 있다면 마법사 계열 클래스겠지.

'포션 제조 쪽에 조예가 깊은 것 같던데.'

써먹을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한 번쯤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리께서 계셨기에 나서지 않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알카리가 내 눈치를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나저나 내가 있어서 나서지 않았다니.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물론, 발현할 수야 있겠지.'

마탑의 포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포탈을 발현할 수 있었다.

어떤 고위 마법이라고 한들.

그저 보는 순간.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을 깨달아 버리는 그랑펠의 재능이 있었으니까.

마력만 뒷받침되면 포탈을 발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다.'

방금 전 마왕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마력을 소모해 버렸단 말이다.

누가 알았단 말이냐?

생존자가 이렇게, 그것도 적지 않게 있을 줄이야.

"...감사합니다. 기사님들."

"아니. 우린 인사받을 처지가 아니란다."

"또 고맙습니다. 모험가님...?"

나는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녀를 바라봤다.

...제발 좀 겸손해라.

감사 인사를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지 말란 말이다.

나는 빳빳한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나머지는 전부 악마와 맞서 싸운 건가.'

숨어있던 생존자들은 전부 노약자들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한 이들.

빠르게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킬 필요가 있겠지.

'다만 혼란을 더할 필요는 없다.'

자신들이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생존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눈치였으니까.

그들에게 안전하면서도 익숙한 장소라.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한 곳밖에 없겠지.

"좌표는 유스라 왕국으로 설정하겠습니다."

알카리가 눈치껏 포탈을 소환했다.

좌표 사이의 거리와 포탈의 이용자 수가 꽤 많았기에.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카리가 포션을 물처럼 들이켰다.

하르콘이 예시카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그대들은 생존자들이 안정을 취한 뒤에 합류하도록."

생존자들의 이동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이 또한 기여도로 측정되는 건가.

나는 반짝거리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

─현재 기여도 : 32,700p

──────

...엄청난 상승 폭이었다.

하르콘이 내게 말했다.

"경.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신속하게 결착을 짓고 다른 생존자들 또한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생존자들이 이 거리에만 있으리란 법은 없을 테니까."

"나 또한 같은 생각이네."

"이런, 내가 경에게 괜한 소리를 했군."

착한 일을 하니 기여도가 따라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반대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신속하게 결착....

그러니까 마왕 토벌을 끝마쳐야 할 테지만.

'마왕 소환 의식이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스쳐 지나가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의 말.

그러나 뚜렷하게 도움이 되는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악마라면 몰라도 마왕까진.'

무려 10년 하고도 2년 전.

시대적 배경이 다르단 소리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든 의식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

[구마 의식]에도 악마의 아이템이란 제물이 필요하듯.

분명 마왕 소환 의식에도 제물이 필요하겠지.

'...잠깐.'

그렇게 생각하니까 불현듯.

거리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피와 시체가 끊이질 않던 거리.

나는 뒤를 돌아 다시 한번 그 참상을 바라봤다.

그건 마치 피와 시체로 그어진 하나의 선이었다.

"...!"

그 직선이 프로스트 중심가로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이 시체와 핏물이 제물이라는 건가.'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은 섣부른 추측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추측이 사실이 된다고 해도.

내 행동에 변함은 없겠지.

무릎을 꿇고 채 감지 못한 시신의 눈을 감겨줬다.

이들을 외면한 채.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래, 가슴 속 긍지가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추측이 맞아떨어진다면....'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저쪽이었다.

그야 시신을 수습하는 이 긍지 넘치는 행동이.

마왕 소환 의식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깽판을 치는 수준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유감이지만, 장단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

AAU.

지부는 바쁘게 움직였다.

마왕군의 등장.

확실히 거악 때와는 다른 상황이었으니까.

한국 지부, 성현준은 USB를 뒤졌다.

"제발. 제발. 뭐라도 좀 있어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코스모에서 사용하던 USB였다.

혹시라도 백업해 뒀던 작업 파일이라도 있을까.

성현준은 간절히 바라며 폴더를 뒤지기 시작했다.

"거악은 듣도 보도 못한 거였지만 마왕은 다르니까."

선배, 윤수겸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자신의 업무 노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했다.

"...차, 찾았어요. 선배!"

"뭐? 어디 봐봐."

"구체적인 정보는 아닌데. 여기 컨셉이요."

"그래. 맞지.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마왕.

먼 훗날 아르카나에 모습을 드러낼 보스 몬스터들.

그 시점은 정말 훗날이었기에.

찾아낸 백업 파일에서도 기본적인 콘셉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란 말인가?

손가락만 빨던 거악 때를 생각하자.

"맞아. 컨셉은 현실에 존재하는 마왕에게서 따왔었지."

그 콘셉트가 바뀌지 않았다면.

프로스트에 나타난 마왕 또한 현실.

그러니까 전설이나 설화 속에 존재하는 마왕이리라.

그나마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그래서 문제는 마왕이 어떤 놈이냔 거야."

"아, 그걸 알아내야 하는구나...!"

탁─!

성현준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그때 윤수겸이 노트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나도 찾았다."

"어? 뭔데요, 선배?!"

"마왕 레이드 스테이지 구성 컨셉."

스테이지 구성이라니.

그건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였다.

윤수겸이 쯧 혀를 찼다.

"근데 이것도 컨셉에 불과해서."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 컨셉은 남아있을 확률이 높아."

"어디 봐요. 마왕 소환 의식?"

윤수겸이 확신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 끝에 익숙한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여도 시스템! 선배, 이거 설마?"

"맞아. 진행 중인 퀘스트에도 기여도 시스템이 있지."

"근데 그 퀘스트는 프로스트 탈환이 목표잖아요."

"그래, 근데 크게 보면 말이야."

윤수겸은 모니터에 프로스트의 지도를 띄웠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 프로스트.

윤수겸이 프로스트의 성벽을 따라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어쩌면 프로스트를 탈환하는 게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는 것과 똑같이 취급될지도 몰라. 왜, 프로스트 도시 전체를 마왕 소환 의식 장소라고 생각하면 말이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현준은 다시금 윤수겸의 노트를 살폈다.

그러자 그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플레이어들의 프로스트 탈환 퀘스트 진행도에 따라서 마왕 소환 의식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선배 말은?"

"그럴 확률이 높다는 거야."

"만약, 마왕 소환 의식이 성공하면...?"

"거악 때처럼.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기적은 흔히 일어나는 게 아니기에 기적이라 불린다.

게다가 거악과 다르게 마왕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성현준이 한숨과 뒤섞인 말을 내뱉었다.

"누구든 기여도 좀 팍팍 따줬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현재 기여도 선두가 누구야?"

"음, 공개한 플레이어 중에선 천하통일이요."

딸깍─

성현준이 말을 이었다.

"천하통일 마스터, 류오쥔춘. 기여도 1,800."

"...천팔백?"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수치를 확인하니 어째 불안감이 더욱 심해졌다.

덜덜덜.

윤수겸이 다리를 떨다가 다시금 물었다.

"그럼 공개 안 한 플레이어들까지 예상한다면?"

"...그렇다면 역시 이호열이겠죠?"

"그래, 이호열이 아니면 그건 정말 중대한 버그다."

이호열의 활약!

그건 개발자의 시점에서 봐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지막지한 내구도를 자랑하는 프로스트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트리질 않나.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그림자 용병단.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그들을 지휘하질 않나....

"지금쯤 어디까지 전진했을까요?"

프로스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 탓에 프로스트에 진입한 호열의 모습을 촬영하긴 어려웠으니까.

호열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 VBC의 화면에도 연기만 찍혀있을 정도였다.

윤수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야 모르지."

다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린 우리가 할 일을 다 하는 수밖에.

윤수겸이 이내, 말을 이었다.

"계속 지켜보자고. AAU 체면이 있지. 적어도 마왕의 정체는 밝혀내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월급 루팡 소리 들을 수도 없잖아?"

"그래도 이호열이라면 5천 포인트 정도는 땄겠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5천은 너무 많나? 그럼 한 3천 포인트라도...?"

"어허. 지금 그런 거 생각할 때야?"

*

내 추측이 맞는다면.

가파르게 상승하는 기여도만큼.

──────

─현재 기여도 : 50,900p

──────

마왕 소환 의식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추측은 확신이 됐다.

"...뭔가 큰 게 날아오는데? 아, 겁나 귀찮아."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네, 저건.

어쨌든 그림자 용병단이 아니던가.

성격을 떠나 그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집단.

그가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그나저나.

'...날아오고 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래, 쫄려서 뒈지시겠나 봐?'

뛰는 것도 아니고 날아올 정도면 말이야.

마왕 소환 의식이 방해를 받아서 똥줄이 타고 있다는 거겠지.

머리를 굴린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뭐야, 저거.

비유가 아니라 진짜 날아오고 있다는 뜻이었잖아?!

펄럭─!

날갯짓 소리.

그와 동시에 걷히는 프로스트의 매캐한 연기.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새였다.

지옥에 사는 새가 있다면 저렇게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그 생김새가 없던 조류 공포증까지 생기게 할 정도였다.

녀석의 붉은 동공이 이쪽을 응시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저 거대한 새가 악마 군단장이라는 것을.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라. (0/10)

점멸하는 퀘스트창이 그를 증명했다.

그래, 저런 녀석을 10마리나 처치해야 한다는 거지?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나뿐만 아니었다.

누구보다 악마 군단장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던.

하르콘이 있었으니까.

"폐하.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고오오─

검기를 발산하기 시작한 하르콘의 검.

그런 하르콘의 검이 이제까진 볼 수 없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검기(劍氣).

성장할수록 짙어지고 고유의 빛을 띤다고 했었던가.

'그 경지까지 올라섰구나.'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나는 하르콘의 성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마음이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내 전우가 저렇게나 강하다.

물론, 지옥 악마 군단장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내려오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겠지.

허나, 생각처럼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하르콘에게 날개를 달아줄 순 없어도.

계단을 놓아줄 순 있거든 내가.

다만, 그전에 녀석의 움직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저 날개를 꺾기 위해 적합한 마법.

그러면서도 마력을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내가 마법을 선정하던 와중이었다.

쿠르릉─!

스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일순간 하늘이 어두워졌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고.

먹구름이 드리웠다.

'...이건.'

그 먹구름 속에서 지직거리는 뇌전(雷電).

이건 이전에도 본 적이 있던 마법.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킬]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그에 화답하듯.

[천벌]이 악마 군단장.

녀석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지지지지직─!

그 위력이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악마 군단장에게 원한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마력의 소모량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더없이 감정적이고 거친 발현이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그 스킬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군."

...부족하긴 개뿔.

정작 부족한 건 내 레벨이거늘.

그렇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곧바로 계단을 발현했다.

"경. 폐하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겠네."

이내, 하르콘이 계단을 밟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58화. 우리의 긍지가 일치하는군 (2)

연속 텔레포트.

커다란 고깔모자가 지붕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연속적인 스킬 발동으로 소모되는 마력이 상당했지만, 제시는 개의치 않았다.

-이호열. 그쪽으로 병력을 집중시킨 거야.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니까요.

제시가 지팡이를 다잡았다.

'아직 제대로 된 질문은 하나도 못 했는걸요!'

『마법』이란 건 정말 존재하는 걸까?

호열 덕분에 의구심을 버린 제시였다.

덕분에 진행이 더디던 클래스 퀘스트에도 진전이 있었다.

그러면서 새롭게 떠오른 궁금증들.

거기에 호열이 잠에 빠진 탓에 묻지 못했던 심사숙고한 질문들까지.

제시의 동공에 느낌표가 떠오른 데엔 전부 이유가 있던 것이다.

고깔모자가 한탄했다.

-이 스승이 위기에 빠져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을.... 불공평하다, 제자야. 내가 그동안 가르친 게 얼만데 서운하구나!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고깔모자는 더 이상 떠들지 않았다.

현재 제시는 '집착' 상태였으니까.

새로운 마법을 발견했다거나.

흥미로운 마법 서적을 펼쳤을 때.

누구에게도 방해받기 싫어하고, 또 손에 쥔 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그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대상이 단순한 마법이 아닌.

'호열의 마법'이라는 것뿐.

그게 고깔모자가 탄식을 뱉는 이유였다.

-...나라도 눈을 부릅떠야겠구나.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건만.

어울리지 않게 낮잠이 들었던 사내.

대마법사의 의식이 깃든 분신, 고깔모자가 아니던가?

살아온 세월만큼 사람 보는 눈.

아니, 마법사 보는 눈 하나만큼은.

자부심이 넘치는 고깔모자였다.

그래서 다시금 호열을 지켜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 재능은 출중해 보였지만....

모험가 신분으로 수석 마법사의 공동 연구자가 된 호열.

하지만 그 재능만큼.

하늘을 찌를듯한 자만심이 마음에 걸렸다.

고깔모자는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 훗날 독이 될 테지.

호열, 본인에게나.

혹은 자신의 제자에게나.

자신 또한 그 고충을 겪어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

휘이잉─!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그 덕분에 걷혀가는 매캐한 연기.

거대한 지옥조(地獄鳥)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깔모자가 제시에게 경고했다.

-제자야.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하지만 제시는 이미 스킬을 발동한 상태였다.

지옥조가 노리고 있는 게 다름 아닌 호열이었으니까.

제시의 몸에서 방대한 마력이 일렁였다.

그건 차고도 넘쳐흐를 정도의 마력.

"천벌."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집착.

설령 그게 지옥조가 됐다고 해도 예외는 없다.

그를 증명하듯.

파지지직─!

마력을 응축시킨 뇌전이 지옥조의 머리 위로 꽂혔다.

제시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마 군단장, 쿠피칸에게 '경직'이 발생합니다.]

제시의 방대한 마력을 쏟아부은 전력.

하지만 '기절'도 아닌 '경직'에 불과했다.

제시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최소 500레벨...!'

현재 자신의 레벨은 401레벨에 불과했으니까.

드륵─

지옥조, 쿠피칸의 동공이 제시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다음 차례는 너다.

마치 경고하는 것처럼.

하지만 한눈을 판 것.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파바밧─!

아래에서부터 솟구치는 섬광.

그 섬광이 찰나의 순간.

뎅겅─!

악마 군단장, 쿠피칸의 머리를 날려버렸으니까.

"...뭘까요!"

제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고깔모자는 알아차렸다.

허공에 수놓아진 계단.

섬광은 분명 저 계단을 밟고 하늘로 날아올랐단 사실을.

그리고 그 마법의 발현자 또한 알아차렸다.

-...기우에 불과했구나.

사람은 몰라도 마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그래, 저건 자만심 따위가 아니었다.

자만에 빠진 마법사가 타인을 위해 계단을 놓아줄 수 있을 리가?

마법사란 그런 족속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고깔모자였다.

-그저 자만으로 착각할 정도로 드높은 긍지였구나.

고깔모자는 가지런히 수습된 시체와 호열을 번갈아 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을 조금은 알겠구나, 제자야.

마법사란 족속은 훤히 꿰뚫고 있다 생각했거늘.

-지켜볼수록 기이한 사내로구나.

미지에 대한 탐구.

잊고 있던 마법사로서의 욕구가 되살아날 만큼 신선했다.

하지만 미지란 것은.

정말 종잡을 수 없었으니.

호열은 제시를 보자마자 냉랭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불합격이다. 제시 하인네스."

*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놈의 입방정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언행에 머뭇거림이라는 게 없다, 정말.

"불필요하게 힘이 들어간 발현. 평소와 다르게 과한 군더더기가 존재했다."

그래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납득할 수 있긴 했다.

"또한 주변 환경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발현이었다."

이곳은 시가지가 아니던가.

자칫 잘못하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가 스킬의 후폭풍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제시는 생존자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러게요.... 전 역시 부족한 게 많네요!"

그저 이해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유명인.

과연, 제시에 대한 취급은 나와 달랐다.

선택받은 마법사라 불리던 그녀였다.

하르콘이 제시를 알아보곤 반가워했다.

"제시 양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황궁에서 뵙고 처음이네요, 하르콘 기사단장님!"

"...제시? 설마, 그 제시 하인네스?"

소문에 민감한 그림자 용병단.

그들도 제시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 아르카나의 강자들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제시다.

'그런데 보자마자 뭐? 불합격?!'

그러나 뻔뻔하게도.

내 낯짝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하기야 이 입방정이 어디 사람을 가려가며 떠들어대던가.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뻔뻔해져야 한다.'

나쁜 놈보다 무서운 건 미친놈이다.

이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깨달은바.

그래, 피할 수 없다면 말이야.

차라리 미친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지금처럼.

누구 하나 의구심조차 품을 생각을 못 하게 말이야.

그건 내가 또 잘할 자신이 있는데.

자괴감을 피하고자 정신 승리를 하던 와중이었다.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몰렸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실까, 생각해서요!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동공에 떠오른 느낌표.

제시가 느낌표를 반짝이며 말했다.

'어째 도가 지나칠 정도로 많다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 전 떠올랐던 메시지.

[악마 군단장, 쿠피칸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떨어지는 콩고물 하나 놓치지 않겠노라.

나는 신속하게 계단을 발현.

하르콘을 보조해 처치 기여도를 인정받은 참.

그를 통해 레벨도 한 단계 상승했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50]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6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2]

드디어 250레벨.

일단, 보유 포인트는 전부 마력에 투자했다.

근력과 민첩은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상승시킬 수 있었으니까.

몸이 고생하더라도 귀중한 레벨업 포인트는 마력에 투자하는 게 맞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행운에 올인하고 싶다....'

하지만 행운은 불확실한 스탯이었다.

지금처럼 정말 간절할 때 적선하듯.

한 포인트씩만 투자하는 게 옳겠지.

'요행을 바라면 벌을 받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며 걸음을 옮겼다.

"제시 양의 말에 따르면 굳이 악마 군단장 놈들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어진 셈이겠군."

하르콘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전리품을 챙겼다.

나와 제시가 쿠피칸 사냥에 기여했다고 한들.

하르콘의 기여도를 따라잡을 순 없겠지.

전리품의 소유권이 하르콘에게 있는 게 당연했다.

"경. 그리고 제시 양. 미안하네만, 이 전리품은 내가 확보해도 되겠나? 폐하의 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증거로 남겨두고 싶네만."

하르콘이 커다란 깃털을 내밀었다.

...저거, 못해도 레어 등급은 되겠지?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바로 대꾸한 제시와는 다르게.

아이템 정보라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빌어먹을 청렴결백.

남의 것을 탐내지 못하는 내가 아니던가.

"물론, 그대의 의사를 존중하겠네. 하르콘 경."

미련은 가지지 말자.

게다가 아쉬워하기엔 아직 이르다.

악마 군단장은 아직 아홉이나 남아있었으니까.

나는 악마 군단장, 쿠피칸의 레벨을 가늠해 봤다.

'대충 500레벨 정도 되겠지.'

습득한 경험치량.

그리고 하르콘의 일격에 쓰러지던 걸 보면 그쯤 될 것 같았다.

'500레벨짜리 네임드 몬스터가 아홉이라.'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또각─

이 당당한 걸음이 허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한 번에 덤벼들 가능성도 있다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넘치는 자신감.

그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건.

당연하게도 아군들이었다.

게다가 아껴둔 마력까지.

시체를 수습하는 도중에도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궁금증은 여전히 유효한가?"

마탑에서 있었던 해프닝.

나는 따라서 수습을 거들던 제시에게 물었다.

뱉고 나서도 아뿔싸 싶었다.

같은 말을 해도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네! 심사숙고할 시간을 주셔서요!"

...이거 돌려서 맥이는 건가, 싶었지만.

반짝이는 동공을 보아하니 그런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뱉은 말도 있었기에.

나는 대인배스럽게 대꾸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시간을 비워둬야겠군."

"앗! 제가 시간을 맞추는 편이 낫지 않을런지요!"

"그편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지."

"네! 그게 예의니까요!"

제시의 격식에 무의식적으로 흡족해하기도 잠깐.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엔 제대로 차를 대접하지."

차를 대접하겠다.

그 말이 무엇이겠는가?

마침내, 마탑에 로켓 배송이 된다는 소리였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마탑 앞으로 주문한 물건이 도착한다는 소리였다...!

선임 마법사들을 납득시키고, 정식으로 공동 연구자의 지위를 획득한 뒤.

처음으로 진행한 일이 바로 로켓 배송 신청이었다.

권력이 이렇게나 달콤하다.

'뭐, 차라고 해도 겨우 녹차지만.'

청렴결백이라 쓰고 궁상이라고 읽는다.

알뜰하게 최저가를 찾아 주문했다는 소리였다.

그런 대화를 나누며 거리를 거니는데 문득, 기척이 느껴졌다.

"?"

골목에서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하르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오니 양? 그대들이 이곳엔 어쩐 일로?"

레오니와 버서커 길드.

그리고 뒤에 저들은....

가온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런데 어째 남태민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레오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그 심각한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있는 것 같았거늘.

정작 레오니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ㅊ, 차를 대접? 그, 그것도 제대로?"

그러나 더 이상 이유를 캐물을 순 없었다.

휘이이잉─!

예상했던 대로 악마 군단장, 놈들이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몰아치는 돌풍.

걷혀가는 연기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컨셉 하나는 일관적이네, 이번에도 새였다.

다만 그 형태가 달랐다.

악마 군단장, 쿠피칸.

녀석은 커다란 새였다면 저기엔 반인반조(半人半鳥).

조인(鳥人)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들이 섞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아니라 악마와 섞인 모습이었지만.

챙─!

놈들의 등장에 하르콘이 검을 치켜들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악마 군단장이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는 일이겠지.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처치하면 되는 일이니까."

쿠피칸을 일격에 처치하던 하르콘.

그 광경을 지켜봐서일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잖아, 저건.'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전리품은커녕 경험치나 기여도도 못 챙길 것 같으니까 말이야.'

겸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그랬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제시 하인네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한 버서커와 가온 길드까지.

그 고래들 사이에.

고작 250레벨에 불과한 내가 있다.

그러나 이 가슴 속 고고한 긍지가 주눅이 들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말했다시피 나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뻔뻔할 거면 제대로 뻔뻔해야 한다.'

나는 제대로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의 지휘를 맡지."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도 모자라.

이젠 최상위 랭커들까지 지휘하겠다니.

'황제도 하기 힘든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전장에는 경험치와 기여도가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전황을 지켜보며 마법을 발현하기도 잠깐.

나는 중대한 할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레오니."

"...?"

더없이 반가운 합류였다.

사사로운 사기진작 또한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이다.

*

투두두두─

상공 위를 비행하던 헬리콥터.

매캐한 연기 때문에 연신 헛기침을 하던 리포터가 소리쳤다.

"켁켁. 뭔가 거대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순간 휘청거리는 헬리콥터.

조종사가 다급하게 고도를 상승시켰다.

리포터가 다급한 현장감을 전해왔다.

"말씀드리는 순간, 비행형 몬스터가 등장한 것 같습니다!"

높아진 고도 탓.

카메라가 다급하게 줌을 당겼다.

그러자 흠칫할 수밖에 없는 화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스튜디오.

지켜보던 출연진들이 황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저게 뭔가요?"

"부리에 날개. 새 같은데요? 근데 무슨 새가 저렇게 크죠?!"

"잠시만요,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프로스트 상공.

거대한 놈들의 날갯짓 덕분에 연기가 빠른 속도로 걷혀갔다.

그러자 그 형태가 온전히 드러났다.

프로스트의 전황 또한 한눈에 들어왔다.

다급히 전해지는 대본.

대본을 확인한 앵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추가 업데이트 내역에 따르면 아무래도 저 거대한 새들이 악마 군단장인 모양입니다! 무려 50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들입니다...!"

그런데 잠깐.

어째서인가.

그 위험한 놈들이 한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앵글.

놈들이 향하는 곳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악마 군단장뿐만 아니었다.

"뭐, 뭐가 저렇게 많은 거죠!"

"마왕군의 행렬이 끊이질 않습니다...?"

"역시나 같은 곳으로 행군하는 것 같은데요?"

지상의 마왕군.

그 대규모 병력도 마찬가지로.

한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프로그램 취지에 맞게 카메라가 호열을 포착한 것은.

설마가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설마, 이호열 플레이어를 향해 몰려가는 건가요?!"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마치 다른 대형 길드는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건 오직 이호열과 그 일행뿐이라 말하는 것처럼. 마왕군은 모든 병력을 이호열 측으로 집중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출연진들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건 이호열 플레이어가 귀중한 시간을 벌고 있는 겁니다!"

"부디, 다른 길드들이 힘을 내줘야 할 텐데요...."

"이호열이라고 해도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단 말이죠!"

그러나 전황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저, 전문가님? 저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죠?!"

그 전장엔 지휘관이 존재한단 사실을.

"라이언 하트, 그림자 용병단.... 가온과 버서커. 그리고 제시 하인네스까지...?!"

그것도 어느 누구보다 유능한!

◈ 59화. 잡종

무려 다섯.

악마 군단장들이 호열 일행을 포위했다.

지켜보는 이들은 가슴을 졸이는 게 당연했다.

-ㅁㅊ 실화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지!!

-다른 길드들은 뭐함? 어그로 하나 못 끄네 ㄹㅇ

마왕군의 움직임?

적어도 플레이어들에겐 익숙한 패턴이었다.

가장 위협이 되는 적부터 처치하려는 몬스터의 습성.

아르카나에도 어그로 시스템은 존재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잠깐만요. 뭔가 익숙한 얼굴들이 보입니다?"

절망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확대되는 앵글.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제 눈이 틀린 게 아니라면 제시 하인네스 같습니다앗?!"

제시,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런 반응이 터져 나오는 게 당연했다.

제시는 언제까지나 샤이닝 길드 소속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제시였으니까.

-머임 설마 그 찌라시가 진짜였나?

-뭔 찌라시? 또 지들만 아는 얘기하네

-아니ㅋㅋ 제시가 샤이닝 탈퇴할 수도 있다는 거ㅋㅋ

-ㄹㅇ 개소리네 그건

-애초에 길드에 큰 미련 없다는 썰은 계속 돌았지ㅇㅇ

하지만 보면 볼수록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중계 화면 속 제시의 얼굴.

특히나 그 동공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게.

초롱초롱─

반짝거리고 있었으니까.

-아니 뭔가 되게 의욕 있어 보이지 않음??

-이게 내가 알던 제시 하인네스가 맞냐???

-ㄹㅇㅋㅋ 공식 석상에선 말 한마디 제대로 안하는데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출연진 중 하나가 자극적인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니까 이호열 플레이어와 제시 하인네스는 첫 만남이 아니죠? 왜,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 때도 말입니다. 둘이서 합을...."

하지만 그건 건드려선 안 될 화제였다.

이호열과 제시 하인네스가 누구인가?

대중적인 인기라면 플레이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스타 플레이어.

자극적인 소재라면 환장을 하는 매스컴조차.

그 역풍을 생각하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게 그들이란 말이다.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특히나 이호열은 더욱더!

시청자들이 게시판을 폭격하기도 전에.

진행자가 다급하게 변론을 시작했다.

"이건 황교준 전문가님의 아주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저를 포함한 VBC는 황 전문가님 의견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예? 아니, 잠깐만요. 제가 말실수를!"

게다가.

그 추측을 떠나서라도 명확한 이유가 있어 보였으니까.

이내, 허공에 발현되는 호열의 마법.

심미 스탯의 영향으로.

찬란할 정도의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속성 마법이 찬란하게 느껴질 줄이야...!"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네요."

"생성된 조각상이 악마 군단장의 다리를 붙잡았습니다앗?!"

화면으로 지켜봐도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저런 걸 눈앞에서 지켜본다면?

-...제시 저 마법 덕후가 눈돌아갈만 하네.

-ㄹㅇ 제시 눈이 괜히 반짝거린 게 아닌 거임ㅋㅋㅋㅋ

-설마 새로운 스킬인가? 그새 또 성장했다고?!!

-그냥 숨겨두고 있던 건지도 모르는 거 아님?ㅋㅋㅋㅋ

-숨기기는 걍 그동안 쓸 필요도 없던 거지

그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거늘.

위력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호열은 마법으로 전장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사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풍경.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

다섯 군단장의 날개가 꺾이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십여 분에 불과했다.

"...끝났습니다. 여러분."

출연진들이 어안이 벙벙한 만큼.

시청자들도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저 호멘

이로써 호열 측이 처치한 악마 군단장은 총 여섯.

추가 업데이트 내역에 따르면....

남은 건 넷에 불과했다.

-암만 그래도 넷 정도는 잡아주겠지ㅋㅋㅋㅋㅋ

-일단 샤이닝이랑 천하통일이 하나씩 컽 하겠고

-나머지가 각자 연합해서 사냥한다고 치면 될 듯??

그래서 다른 길드 쪽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채널을 돌린 시청자들.

그들 중 몇몇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쪽에서도.

전혀 상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악마 군단장과 홀로 맞서고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

그 정체에 대한민국의 시청자들이 경악했다.

"...야, 저거 남태민이잖아?!"

*

남태민은 흠칫했었다.

'클래스 퀘스트...? 갑자기?'

바바리안 클래스 랭킹 1위.

그간 클래스 퀘스트를 위해 온갖 소문, 퀘스트를 뒤졌던 남태민이었다.

정작 찾을 땐 단서 하나조차 찾을 수 없었거늘.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클래스가 퀘스트가 떠오르다니.

남태민은 조금 기뻤다.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위기에 빠진 프로스트.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이라면 성장은 보장된 셈이었다.

프로스트 탈환에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남태민은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야성의 증명]

우두머리가 숨을 거뒀다.

젊고 새로운 우두머리여.

진정한 야성을 증명하라.

"...!"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에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이유를.

우두머리.

그건 최강의 야만전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케른."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케른은 프로스트 인근 숲에 머물며 플레이어들의 바바리안 전직을 돕는 NPC였다.

하지만 남태민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아르카나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케른은 NPC가 아닌 자신과 같은 인간, 아르카나인.

'케른이 악마들에게 당한 거야.'

문득, 케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바바리안의 비기? 너, 그런 걸 원하는 거냐?

클래스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던 시절.

케른에게도 그 정보를 물었던 남태민이었다.

그때 케른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었다.

-비기 따위에 솔깃해하다니. 나약하구나, 아우여!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말의 뜻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형제여.

그랬다.

바바리안의 비기는 오직 '우두머리'에게만 주어지는 것.

우두머리, 케른이 숨을 거두자.

남태민에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단 소리는....

"...케른이 방금까지 살아있었단 거야."

씹어먹을, 악마 새끼들!

빠득─

남태민의 근육에 핏줄이 돋아났다.

남태민은 진심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친형, 남철민부터 의형제나 다름없는 케른까지.

악마 새끼들에겐 당하기만 해왔다.

우지끈─

남태민의 악력에 두꺼운 대검 손잡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남태민의 눈앞에 [악마 군단장, 호리칸]이 모습을 드러낸 건.

창으로 무장한 반인반조.

호리칸은 남태민을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창끝에 묻은 피를 보다가 부리를 열었다.

"이상하구나. 분명히 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죽였는데."

"...?"

"어째서 여기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짐승 놈이 있는 거지?"

"!!!"

짐승 놈.

야만전사, 바바리안을 속되게 일컫는 별명.

남태민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녀석이다.

케른을 죽인 게 바로 이 새대가리였다.

그를 증명하듯 귓가에 형, 남철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야, 남태민!! 정신 차려!! 그 새끼 최소 500레벨이야!!

500레벨.

자신의 레벨은 고작 374레벨.

당연하게도 이길 수 없겠지.

형의 말대로 도망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쿵─

여태껏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칠게.

도망쳐. 이길 수 없어. 레벨 격차가 너무 심해.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이성이 점차 흐려졌다.

전신의 근육이 더욱 격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육체의 고동만으로도 체력이 소모되는 게 느껴졌다.

"허억허억."

남태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피시식─

남태민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야성의 부름'을 습득하셨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클래스 고유 스킬, '야성의 부름'이 발동됩니다.]

우지끈─!

──────

야성의 부름 : 진정한 야성을 일깨워 야성이 대폭 상승한다.

──────

[야성].

바바리안의 클래스 고유 스탯.

바바리안이 폭발적인 괴력을 낼 수 있게 하는 게 바로 야성 스탯 덕분이었다.

그런 야성 스탯이 상승.

그것도 대폭 상승한다는 것.

그 육체 능력의 향상은 말할 수 없을 정도.

콰지지직─!

남태민이 쥐고 있던 대검 손잡이가 완전히 박살 났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쌔애애애액─!

남태민은 그대로 대검을 호리칸에게 내던졌으니까.

그 근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속도는 상상 그 이상.

날개 달린 호리칸도 완전히 회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쿠콰콰쾅─!

다급히 창을 치켜들어 대검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에 호리칸이 수십 미터나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날갯짓으로 위력을 상쇄하지 않았더라면.

무너진 건물 더미에 처박혔으리라.

부르르, 호리칸이 빠른 속도로 대가리를 털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짐승 놈답구나. 그 힘 하나는 대단해. 하지만 짐승은 짐승에 불과하다. 천천히 사냥해 주마."

펄럭─!

호리칸이 날개를 펼치고 비상했다.

'굳이 땅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지.'

그건 또 다른 짐승 놈을 상대하며 깨달은 교훈.

케른을 다 죽어가는 놈이라 생각해 날개를 접었다가 말 그대로 큰일이 날 뻔했던 호리칸이었다.

하지만 호리칸의 눈에 남태민과 케른은 다르게 보였다.

'비슷하지만 풍기는 냄새가 다르다.'

맹수와 맹수 새끼의 차이랄까?

맹수 새끼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다.

호리칸이 자만하던 때였다.

우지끈─!

"!"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남태민이 호리칸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린 탓이었다.

[악마 군단장, 호리칸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감히...!!"

호리칸이 재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팔뚝을 찔려 허공에서 그대로 추락하는 남태민.

하지만 그로 인한 충격은 없었다.

네발로 사뿐하게 착지.

대폭 상승한 야성이 남태민을 정말 짐승처럼 움직이게 하였으니까.

파박─!

남태민이 다시금 건물을 타고 뛰어올랐다.

"짐승 새끼가!"

호리칸이 다급하게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탁─

오히려 날갯죽지를 붙잡힌 호리칸.

남태민의 팔뚝이 움찔거리더니.

쫘아아아악─!

그대로 호리칸의 날개를 찢어버렸다.

[악마 군단장, 호리칸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호리칸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추락했다.

남태민은 그런 호리칸을 놓치지 않았다.

콰득─!

호리칸의 기다란 목을 붙잡고 비틀기 시작했다.

"...꾸웩!"

호리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놈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짐승 놈들은 평범한 인간과 달랐다.

그러나 자신 또한 평범한 새가 아니다.

'나는 새대가리, 쿠피칸과는 다르다...!'

날개를 잃어도 팔과 다리가 있단 말이다.

호리칸은 떨어지는 와중에 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남태민을 향해 창을 겨눴다.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피하려면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나.

푹─

남태민은 여전히 호리칸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분명 찌르는 느낌이 들었거늘...?

호리칸은 순간, 케른을 떠올렸다.

수십 일간 쉴 새 없이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되고 전신의 뼈가 박살이 났음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짐승 놈.

'빌어먹을...!'

호리칸은 깨달았다.

'이 짐승 놈도 똑같은 거야!'

그래, 짐승 놈들에겐 이성이랄 게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협박이 통할 리가.

호리칸은 하나뿐인 날개로 몸을 비틀었다.

효과가 있던 것일까.

"!"

목을 쥔 손아귀가 점차 느슨해지고 있었다.

"허억허억...."

극심한 체력 소모를 대가로 하는 [야성의 부름].

체력이 방전된 탓에 [야성의 부름]이 해제되고.

남태민의 이성도 돌아온 탓이었다.

물론, 호리칸에게 이유 따윈 중요치 않았다.

쿠당탕─!

굉음과 함께 바닥에 추락한 남태민.

호리칸이 그런 남태민에게 다가왔다.

"무식한 짐승 놈. 그 비참한 최후까지 똑같구나."

비참한 최후?

지랄은.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체력조차 없었기에.

남태민은 속으로 웃었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은데.'

왜, 호열 씨가 말했던 가슴 속 긍지가 무엇인지 말이야.

그래, 남태민을 움직였던 건 긍지였다.

지키고자 했던 케른의 긍지.

그리고 그 긍지를 외면할 수 없었던 자신의 긍지.

그렇기에 후회는 없었다.

"짐승 놈들은 어떻게 된 게 짐승보다 어리석구나. 짐승조차 천적을 만나면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치는데 말이야. 나, 호리칸 님이 고작 네까짓 놈에게 쓰러질 것 같았느냐? 착각도 정도껏 해라. 버러지 같은 인간."

짐승 놈이라.

그래, 대검까지 내던지고 네발로 뛰어다니고....

다른 사람이 보면 분명 그렇게 보였겠지.

남태민은 할 수만 있다면 묻고 싶었다.

'형도 내가 짐승처럼 보였어?'

라며 장난스럽게.

왜, 유언이 진지하면 말이야.

남겨진 사람만 슬퍼지는 법이니까.

물론, 추락하는 순간.

이어폰이 박살이 난 마당에 형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그러나.

또각─

그에 대한 대답은 확실하게 돌아왔다.

"짐승 놈이라니, 주제를 모르고 떠드는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나 이해한다, 하찮은 악마여."

호열에게서.

"!"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호열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길드원들이 보였다.

남태민은 직감할 수 있었다.

'...형?'

남철민, 그가 길드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남태민은 순간 흠칫했다.

'...그럼 혹시 네발로 뛰어다닌 것도 보셨나?'

누구보다 격식을 중요시하는 호열이 아니던가.

그것보다 격식이 떨어지는 모습도 없을 텐데.

그야 자신이 생각해도 짐승 놈이 따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긍지를 알지 못하기에. 긍지를 관철하기 위해 싸우는 인간을."

"...!"

"너희 악마라는 열등한 족속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내뱉는 호열.

남태민은 감격에 호리칸은 당황에 빠졌다.

'어째서?'

은발 머리의 사내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풍겨왔다.

...쿠피칸을 비롯한 여섯 악마 군단장의 피가 뒤섞인 냄새!

호리칸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사내가 바로 자신의 천적이라는 것을...!

'도, 도망쳐야 한다.'

온전한 상태라면 몰라도 날개가 뜯긴 상황이었다.

호리칸이 부리를 움찔거렸다.

'그래, 말로 녀석을 현혹하고 틈을 타서....'

"ㄲ, 꾸웨에엑!"

그러나 호리칸은 부리조차 벌릴 수 없었다.

화르륵─!

즉각적인 탐색, 간섭, 발현.

그 부리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아 올랐으니까.

고통에 몸을 비틀기도 잠깐.

"나는 사냥감과 대화하지 않는다."

호리칸의 귓가에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물어라. 잡종."

*

AAU 한국 지부.

"...믿기지 않아요."

넋이 나간 듯 모니터 속 호열을 바라보는 이들.

그 가운데서.

타다다닥─!

키보드를 두들기던 윤수겸이 입을 열었다.

"...알 것 같다, 현준아. 마왕이 어떤 녀석인지!"

"지, 진짜예요? 선배?!"

"그래. 99.9퍼센트 확실해."

드디어 밥값을 할 때가 왔다.

게다가 이건 누구보다 호열에게 도움이 될 정보였다.

◈ 60화. 자칭 마왕이여 (1)

감이 잡히기 시작한 건.

악마 군단장이 등장했을 때부터였다.

"...악마 군단장? 놈들이 왜요?"

"생긴 게 확실한 공통점이 있잖아."

"공통점이요?"

성현준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탁! 책상을 쳤다.

"아! 비둘기처럼 더럽게 비호감인 생김새!"

"후우─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아 왜, 뭔데요. 그럼."

"저것들 다 새대가리잖아."

"...새대가리? 어? 그렇네요."

각국의 랭커들이 모인 프로스트.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활약을 보이던 호열.

국뽕에 취해서일까.

놈들의 생김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뒤늦게 깨달은 성현준에게 윤수겸이 쯧 혀를 찼다.

"마왕들은 전설, 설화 속에서 그 컨셉을 따왔다...."

"네, 확실히 그랬었죠."

"그중에 새와 관련된 마왕이 존재해."

진지하게 말하던 윤수겸이 모니터를 돌렸다.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데카라비아?"

"그래, 데카라비아."

"새를 사역마로 부리는 72 악마 중 하나...?!"

성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배.... 이거 새대가리...!!"

"아니, 아직이야."

그것뿐이었다면 99.9퍼센트라고 확신도 안 했어.

딸칵─

곧바로 마우스로 화면을 전환하는 윤수겸.

모니터에 떠오른 건 프로스트의 위성 화면이었다.

성현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위성 사진은 왜요. 선배?"

"일단 봐봐."

"이건 처음에 같이 확인했잖아요. 연기가 뭔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 덕분에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뭘 새삼스럽게.... 어라?!"

선명하게 보이는 프로스트의 전경.

윤수겸이 뭘 놀라느냐는 듯 말을 이었다.

"악마 군단장 놈들이 날갯짓으로 연기를 날려버린 순간."

"와씨. 그때 캡처한 거예요, 선배가?"

"그래. 밥값은 해야지. 월급 루팡 짓도 질린다, 이젠."

"...잠깐만요. 선배."

들여다보던 성현준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문양.

그건 피와 시체로 그려진 별.

오망성이었다.

'...이거, 분명?!'

딸깍─

윤수겸 대신 마우스를 움직이는 성현준.

창을 전환하자 다시금 떠오른 데카라비아의 형상.

윤수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시에 오망성의 형태를 띤 악마지."

★과 ★.

두 화면에 떠오른 오망성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거 100퍼센트 확인해도 되겠어요, 선배."

"피와 시체로 그려진, 저 별 문양도 삘이 오지?"

"네. 분명, 마왕 소환 의식의 절차겠죠."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야."

"...?"

여기.

윤수겸이 마우스 커서로 가리킨 곳.

확대해보자 이상하게도.

그 일대에만 널브러진 시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악마들의 실수한 걸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

성현준이 설마 하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이쪽 일대면...."

"맞아. 이호열 진입 루트랑 맞아떨어져."

"그, 그 상황에서 시체를 수습하면서 나아간 거라고요?!"

"의도까진 알 수 없겠지만. 그런 거겠지."

그렇게 추측하자 어째서 호열 측에 그 많은 몬스터가 몰려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호열이야말로 직접적으로 마왕 소환 의식을 방해하는 존재였으니까.

윤수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우리가 이호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마왕의 정체를 안다면.

그에 대해 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데카라비아에 대한 정보는 중요했다.

"바로 찾아볼게요!"

분명 저장해 둔 자료가 어딘가에 남아있을 텐데.

검색창을 열고 파일을 뒤지던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선배. 찾았어요."

그런데....

이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뭐? 모든 식물과 '광물'에 대한 지식 보유?"

하필이면 광물이라니!

과거에도, 지금 순간에도.

돌을 활용한 연금술 스킬을 사용하던 호열이 아니던가?

빌어먹을.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전해주겠다고 다짐했거늘.

"기껏 찾은 게...."

하필이면 이런 비관적인 정보라니.

성현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대지 속성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상당하겠네요."

"새대가리를 생각하면 그 컨셉은 유효하겠지."

"...그래도 이호열이잖아요? 뭐, 다른 스킬도 많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주요 스킬 하나가 쓸모없어진 셈이야."

윤수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도 모자라 상대는 마왕이고."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주요 스킬 하나가 쓸모없어진다는 건.

굉장히 큰 페널티였으니까.

하지만 우려와 해야 할 일은 별개였다.

이내, 성현준이 심호흡과 함께 메신저를 열었다.

"후우. 가온 측으로 전달하면 되겠죠, 선배?"

"그러는 게 좋겠다. 이호열이랑 합류한 참이니까."

"...제발. 숨겨둔 비장의 수라도 있기를."

이호열이라면 모른다...!

성현준은 바라면서도 너무 과한 기대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호열은 언제까지나 마법사가 아니던가?

'갑자기 짜잔! 막 칼을 들고 싸운다든가....'

도리도리─

성현준은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간절하니까 쓸데없는 상상이 다 드네. 나도."

진짜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남철민의 브리핑.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군."

마왕의 정체가 데카라비아, 녀석이었구나.

물론,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에게서도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들이 주로 언급하던 마왕은 마왕 중에서도 고위 마왕....

쉽게 말해서 최상위 마왕들이었으니까.

'못 들어본 게 오히려 다행이네.'

그랑펠의 긍지야 그 어떤 악마 앞에서도 꺾이지 않겠다만.

그걸 긍지를 감당하는 나는 다르다.

언제까지나 발버둥을 쳐야 하는 입장이란 말이다...!

표정 변화는 조금도 없이 내심 안도하는데.

어째 주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난감하네요. 호열 씨.

남철민을 시작으로 한마디씩 거드는 이들.

"그러니까. AAU의 의견으론 광물을 활용하는 스킬은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거지, 형? 당연하게도 호열 씨가 주로 사용하는 돌기둥이나 돌벽 소환 같은 스킬도 무력화시킬 테고?"

부상을 치료한 남태민.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을 텐데.

정작 그의 얼굴엔 우려가 가득했다.

레오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그딴 게 다 있냐. 씨."

물론, 정작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연금술로 날로 먹어온 나지만.

내겐 연금술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나름대로 발버둥 친 보람이 있구나.'

역시 여러 우물을 판 보람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노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나의 검술 스승 하르콘이었다.

"좋지만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동료를 두었군. 경."

하르콘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하르콘은 내 진짜 적성이 검술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됐다.

그런데....

'그쪽 반응은 어째 짐작을 못 하겠는데.'

나는 키치를 바라봤다.

소름이라도 돋은 건가.

부르르─

키치는 몸을 떨었다.

물론, 깊은 생각은 없었다.

남의 생각이나 평가 따위야.

그랑펠에겐 신경 쓸 거리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 정작 신경 쓸 건 따로 있었으니까.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의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성공)

─생존자를 구원하라. (진행 중)

─마왕 소환 의식을 저지하라. (진행 중)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라. (10/10)

마지막 악마 군단장이 쓰러졌다.

이로써 퀘스트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퀘스트의 진행도가 성공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은 간단했다.

'아직 뭔가 남았다는 거지.'

악마 군단장이 모두 쓰러진 지금.

마왕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였다.

철컥─!

하르콘이 검을 집어넣고는 말했다.

"의지가 꺾인 녀석들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겠지."

사기가 꺾인 녀석들이다.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최선을 다해 처치하겠지.

경험치와 기여도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광장으로 가지."

프로스트 중앙 광장.

오망성의 중심.

즉, 마왕 소환 의식의 중심부에 도달하는 것.

방해꾼은 사라진 상황이었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프로스트 광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별의 중심부.

서로 맞물리는 획수만큼.

널브러진 시체는 산이요.

흩뿌려진 피는 마치 바다와 같았다.

그 참상에 하르콘을 비롯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고개를 떨궜다.

"신이시여. 저들에게 안식을."

빠득─

남태민이 이를 갈았다.

제시는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고.

레오니는 연신 욕지거리를 뱉었다.

플레이어라고 다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닐 테지.

이건 현실이었으니까.

NPC가 아닌 사람들이 죽어갔단 소리였다.

참담한 심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시체들 중 하나가 몸을 움찔거린 건.

"...아아."

그 신음에 모두가 반응했다.

"...생존자인가!"

"잠깐, 저 얼굴은...?"

"저거 프로스트 영주님 아니야?"

그래, 살아있던 건 프로스트의 영주였다.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시리온 백작...? 그대가 맞는가!"

"설마, 하르콘 경이십니까...! 이럴 수가!"

"오오, 신이시여."

시리온 백작.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는 저 시체들 사이에서.

어떻게 혼자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리온 백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제국이 우릴 외면한 게 아니었군요...!"

그건 지켜보던 이들이 의심을 거두기에 충분했다.

그 얼굴과 목소리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시리온 백작과 똑같았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마왕 토벌].

클래스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게다가 [천적관계]의 효과 또한.

프로스트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단 사실을.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내겐 경험이 있었다.

주변인은 물론, 세상을 속일 정도로.

완벽하게 백이설을 연기했던 서큐버스.

악마와 마주했던 그 경험이 말이야.

그래,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들던 의문이었다.

현실에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건.

고작 몇 년도 되지 않았을 텐데.

악마는 이미 현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악마들의 고향인 아르카나에서는.

얼마나 많은 악마가 인간들 사이에 숨어있다는 걸까.

당연하게도 내가 그에 대해 대답할 순 없었다.

그게 언제 적 아르카나 사정이란 말인가?

아르카나를 계속 플레이했다면 모를까.

내겐 십 년을 훌쩍 넘는 공백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저건 프로스트의 영주, 시리온 백작이 아니라는 것.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반짝거렸다.

─마왕 데카라비아를 처치하라. (진행 중)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보기 힘들 만큼 추악하구나."

"...!!!"

"연기는 거기까지다. 마왕."

그건 경멸이었다.

"열등한 족속의 왕을 자칭하는 자여. 부하를 사지로 내몰면서. 정작 자신은 인간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

고귀하신 귀족으로서.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마왕의 비열한 행적.

내 선언에 일행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열등한 족속의 왕이라니. 경, 그게 무슨?"

시리온에게 다가가던 하르콘조차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나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카라비아,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어리석게도 오해한 모양이구나. 인간아."

쿠드드득─

순간 변해가는 시리온의 육체.

그건 더 이상 시리온이 아니었다.

시리온의 몸이 사정없이 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이 내게 말했다.

"사지로 내몬 것이 아니다. 왕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지."

나는 곧 그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겨진 덩어리.

그 덩어리가 피와 시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칭찬해 주마. 네놈의 방해는 아주 유의미했다. 그러나."

방해라면 역시 시신을 수습한 걸 말하는 거겠지.

생각하던 순간, 사방에서 마왕군이 날아들었다.

정확히는 제물과 뒤섞여 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꼭 제물이 인간이란 법은 없다."

데카라비아, 녀석은 부족한 제물만큼 마왕군을 산 제물로써 흡수해 나갔다. 동시에 커져가던 덩어리가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피와 살점으로 이어 붙인 오망성.

별이 뜸과 동시에 하늘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이 온전히 부활한 것이었다.

[마왕, 데카라비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살아있는 지옥, '프로스트'에 진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내겐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입을 열었다.

"진정한 희생을 욕되게 하지 마라."

희생이란.

긍지를 위해.

프로스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나 붙일 수 있는 단어.

"네겐 그럴 자격이 없다."

점차 그랑펠에 몰입하고 있어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나 또한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일까.

이 순간만큼은 입이 까끌거리지 않았다.

오망성의 살점이 요란하게 떨렸다.

"그 오만함이 바닥에 처박힐 순간이 기대되는구나. 네 마법은 이미 간파하고 있다. 심히 유감스럽게도. 바위 또한 광물에 불과한 이상. 네 가장 큰 재주는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겠지."

...뭐?

가장 큰 재주?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그랑펠의 재주는 말이야.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거든.'

나는 태연하게 상태를 점검했다.

마력의 잔량은 충분하다.

흑마법이 요구로 하는 '적합한 마력' 또한 충만하다.

검기 발산을 위한 체력 또한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귀신 들린 명검'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마왕, 데카라비아를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그 추악한 입부터 다물어라."

"?!!"

"자칭 마왕이여."

화르륵─!

◈ 61화. 자칭 마왕이여 (2)

구마의식의 제물이 될 악마의 아이템.

미리미리 구매해 뒀었지.

구하는 데에 수고로운 건 없었다.

유스라 왕국의 재건 속도는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기본적인 상점과 함께 경매장이 문을 연 것이었다.

그것도 아르카나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경매장이.

게다가 이건 마왕을 위해 준비한 구마의식이 아니던가.

'부지런히 벌어둬서 다행이지.'

악마의 아이템 몇 개쯤이야.

내 통장 잔액에 흠집도 낼 수 없다.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확실하다.

나는 이어서 악마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제물이 많아질수록 의식의 효과는 강해지는 법.

['귀부인의 보석함'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목을 조르는 넥타이'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구마의식의 제물로 그 아이템들을 추가했다.

그렇게 시작된 구마의식.

나는 곧장 마법을 발현했다.

스스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잿가루를 탐색.

[심미] 스탯을 활용하여 간섭.

심미적인 감각이 가미된 불꽃을 발현했다.

화르륵─!

"그 추악한 입부터 다물어라. 자칭 마왕이여."

뛰어난 심미안만큼.

추악한 모습을 극히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랑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라비아는 봐주기가 힘들 정도겠지.

공포 영화, 그것도 고어 영화에서나 볼법한 몰골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상대는 마왕이다.'

악마 군단장의 레벨을 고려했을 때.

녀석의 레벨은 최소 600레벨.

거악, 칠죄종 탐욕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왜, 칠죄종 탐욕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한눈을 팔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화르륵─!

녀석에게 집어삼켜진 프로스트의 주민이 있었다.

심미적 감각을 더해 숭고하게 타오르는 불꽃.

타들어 가는 살점 속에 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이놈의 긍지께선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라비아가 불길 속에서 꿈틀대며 소리쳤다.

"...너, 너는!!"

나?

뭐, 어쩌라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삼가는 나였으니까.

나의 냉랭한 반응에.

타오르는 것도 부족해서 열불이라도 났다는 것인가.

녀석이 불길을 떨쳐내고 말을 이었다.

"...그래, 알겠다. 나는 '의식' 속에 들어온 거군."

과연, 악마들의 왕. 마왕이었다.

구마의식이란 걸 알아차리다니.

사실 뭐, 놀랄 일도 아니겠지.

문득, 떠오르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말.

-마왕과 마주하고 살아남은 악마 사냥꾼은 많지 않다.

악마 사냥꾼의 숙적이라 불릴 만큼.

마왕부터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치지지직─

타들어 가던 데카라비아의 살점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녀석이 히죽히죽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오만하구나, 인간. 마왕을, 이 몸을 의식에 초대하다니."

데카라비아가 감회에 젖은 듯 몸을 떨었다.

"이 감각이 나쁘지 않구나. 그래, 어울려 주마."

과연, 구마의식에 속수무책이던 악마들과는 다르군.

마왕답게 데카라비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여유까지 있는 모습이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의 말대로.

마왕 정도 되면 천적인 악마 사냥꾼을 되레 잡아먹는 것도 허언이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주제를 알아라."

『어쩌면 악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악마 사냥꾼이란 그랑펠의 클래스가 아니라 그랑펠이란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설령 마왕이라고 한들.

그랑펠의 고고한 자의식엔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을.

구마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력 싸움?

그 승자는 애초에 그랑펠로,

나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열등한 족속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

탐색, 간섭, 발현.

나는 데카라비아를 몰아붙였다.

거기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돌기둥을 발현하지 못하는 게 어쨌단 말이냐.

그건 파괴력보다 마력을 아끼기 위한 마법에 불과하다.

최소한의 투자로 날로 먹기 위한 발버둥이란 말이다.

그보다 출중한 위력을 가진 마법은 프로스트에 입성한 이후.

단 한 번도 발현하지 않았던 나란 말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잔량은 충분하다.'

마력에 여유가 있다는 것.

당연하게도 그 마력을 허투루 써버릴 생각은 없었다.

[천적관계]의 발동.

마력이 상승한 나지만 하찮은 레벨 탓.

절대적인 마력의 수치가 형편없는 나였으니까.

'중요한 건 가성비.'

언제나처럼.

내 방식대로.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르륵─!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

마법과 과학의 융합.

마르셀로가 내게 줬던 영감을 진보된 마법으로 발현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고작 초등 과학 수준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그 효율은 익히 확인했던바.

추가적인 마력의 소모 없이도 마법을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발현한 마법의 위력에 상관없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화염의 폭풍.

화염 폭풍이 지옥으로 변한 프로스트의 불길을 집어삼키며 더욱 크게 타올랐다.

거기에 간섭 과정에 더해진 심미적 감각이 있었으니.

오직 마왕을 심판하기 위해.

천국에서 강림한 불길처럼.

화염의 폭풍이 살아있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만, 길이 열렸는데?"

협공을 준비하던 이들에겐 길을 터줬고.

"...감히!"

데카라비아의 움직임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게 봉쇄했다.

"와아! 엄청나요!"

마법사들의 마법사.

대마법사의 제자라 불리는 제시조차 고깔모자를 들썩이며 감탄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내 발버둥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니까.

스스스─

나는 연달아 마력을 끌어올렸다.

'내가 제시도 아니고, 저런 마법을 난사할 순 없지.'

이번엔 평범한 마력이 아닌 '적합한 마력'을 말이야.

스탯이 아닌.

발현자의 삶과 과거에서 근간 되는 적합한 마력.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지.'

그 적합한 마력의 근원이 중2병이든, 어쨌든.

흑마도학의 창시자, 마티스가 인정한 흑마법의 재능을 썩히지 않았던 나였다.

나는 중급 흑마법, 『흑관』을 발현했다.

그 효과는 적에게서 감각을 빼앗는 것.

"...!"

가장 먼저 빼앗은 건 녀석의 입이었다.

[마왕, 데카라비아에게 '침묵'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입은 시작에 불과했다.

흑마법도 마법이기에.

흑관 또한 지속적인 효과가 있단 것이었다.

그래, 정확히는 녀석이 공포에 동요할 때마다.

녀석의 감각은 하나씩.

깊고 깊은 어둠 저편으로 소멸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데카라비아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자칭 마왕이여."

녀석이 지껄였던 말을 되돌려줬다.

"그 오만함이 바닥에 처박힌 느낌은 어떠한가."

*

...악마 사냥꾼!

이제야 알겠다.

감히 인간 주제에 건방질 수 있었던 이유를.

데카라비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알겠다. 나는 '의식' 속에 들어온 거군."

악마 사냥꾼?

놈들이야 성전(聖戰)에서 지겹게 죽여봤던 자신이 아니던가?

꽤 지난 이야기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불나방 같은 존재들이었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것들이었지.'

감히 마왕을 자신의 의식 속에 불러들일 줄이야.

데카라비아는 찰나의 순간.

판단을 내렸다.

'주제넘은 자아를 빼면 뛰어난 육체다.'

구마의식 속.

정신력 싸움에서 호열을 제압한 뒤.

호열의 육체를 차지하겠다고.

왜, 저 육체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보였으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라고 해도 다수와의 싸움은 부담이 됐으니까.

비열하게 도망치는 게 아니다.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것처럼.

그저 적절한 때를 노릴 뿐.

"그래, 어울려 주마."

하지만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게 대체?'

분명, 녀석의 의식 속에 들어왔다.

악마들의 왕, 마왕.

그 존재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자신이란 말이다.

의식 속에 자신이 들어온 것만으로.

웬만한 악마 사냥꾼은 미쳐버렸었단 말이다.

하지만 호열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것을 넘어서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화르륵─!

"!"

치솟는 불길.

화염의 소용돌이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다.

데카라비아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녀석이 만들어낸 과장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깨달아도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어떻게 마왕인 나를 정신력에서 압도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나더러 주제를 알라고...?'

데카라비아는 굴복하지 않았다.

불길 따위야 광물을 변형해 막아내면 그만이었다.

프로스트, 이 도시엔 돌을 비롯한 광물이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읍?!"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이 수작을 부렸다고...!

'마법인가? 아니,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허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현재 상황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데카라비아가 머뭇거리던 순간.

타오르던 불길 사이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슈슈슉!

화살이었다.

푹푹!

데카라비아는 살점에 꽂힌 화살에 분노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시야를 가리는 화염 폭풍만 없었어도...!

그러나 화살 세례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번엔 사방에서 마법과 비수가 날아들었다.

그중에선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일격도 섞여 있었다.

데카라비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무수한 제물만큼 완벽한 강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리도 무력하게...?

아니다.

아직이다.

데카라바리아가 안간힘을 다해 소리를 냈다.

"...으읍!!"

마왕군, 악마 군단장을 뭣들하고 있느냐!

본인이, 너희의 왕이 공격을 받고 있단 말이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하지만 이내, 깨닫고 말았다.

"...!"

악마 군단장, 마왕군은 더 이상 없었다.

살아남은 녀석들마저 자신이 제물로써 집어삼켜 버렸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자 호열의 냉랭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칭 마왕이여.

그랬다.

더 이상 자신을 왕이라 불러줄 이들은 없었다.

그때였다.

삐이이이─

귀가 먹먹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읍읍, 자신이 소리치는 소리조차.

데카라비아는 호열을 노려봤다.

'...이대로 끝날 순 없다.'

악마 사냥꾼.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그들의 위험성 또한 알고 있었다.

녀석들 손에 죽는 순간.

자신은 두 번 다시 부활할 수 없다는 사실도.

번뜩─

데카라비아의 살점에서 수천 개의 눈동자가 돋아났다.

파훼법을 찾아야 한다.

빠른 속도로 굴러가던 눈알이 일제히 멈췄다.

'...그래.'

더 많은 제물이.

더 많은 피와 살점이 필요했다.

데카라비아는 보다 쉬운 먹잇감을 노렸다.

'숨어있는 걸 모를 줄 알았나.'

건물에 숨어있는 프로스트의 주민들.

그들을 살려둔 이유야 간단했다.

살아있는 자들의 공포가 자신의 힘이 됐으니까.

하지만 이제 됐다.

'얌전히 피와 살점이 되어라.'

데카라비아의 오망성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광물로 지어진 프로스트의 건물들.

모든 광물에 대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에게 건물을 붕괴시키는 것쯤이야, 더없이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보아라.

지금처럼.

청력을 잃은 탓에 무너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보였다.

건물이 무너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그런데....

'이번에는 또 어째서냐?'

있어야 할 피와 살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데카라비아의 살점을 툭툭─ 뭔가가 건드려 왔다.

날아드는 건 작디작은 돌 조각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언뜻 보이는 형체.

그건 프로스트의 주민들이었다.

"?!!"

쇠약한 인간과 인간의 어린 새끼들이.

그림자 속에 꼭꼭 숨어있어야 할 그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데카라비아의 눈동자가 그 얼굴들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들에게서.

더 이상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 눈빛은 죽어가면서도 무기를 놓지 않던 놈들.

그래, 프로스트 병사들과 똑같았다.

데카라비아의 살점이 출렁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호열뿐만 아닌 인간이란 족속을.

데카라비아가 악을 썼다.

모조리 죽였단 말이다!

자식을 지키려던 어미를 죽였고!

어미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죽였단 말이다!

그런데도 굴복하지 않는다니.

그런데도 공포를 깨닫지 못하다니.

인간은 어리석기에 공포조차 알지 못하는 것인가.

혼란에 빠진 데카라비아.

녀석은 불길 속에서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결국, 최후의 발악까지 물거품이 된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불길이 살점을 태우기 시작했다.

타들어 가는 시야 속에서.

데카라비아는 호열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해도 너는 들을 수 있겠지.'

여긴 녀석의 의식 속이었으니까.

데카라비아는 물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인간은 굴복하지 않는 것이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냐.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공포 속에 뛰어드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 질문에 더 이상 마왕으로서의 체면은 없었다.

데카라비아는 절규했다.

'...제발! 부탁이다! 이렇게 빌겠다! 내게 알려다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호열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으니까.

마치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나누지 않겠다는 것처럼.

'제발!! 제바아아아아알!!'

.

.

.

"의문을 품은 채 죽어라. 그것이 너의 죗값이다."

기승전긍지.

그 단순한 사실을.

데카라비아가 알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나는 타들어 가는 불꽃을 바라봤다.

꺼지지 않을 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

털썩─

프로스트의 생존자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 끝났어."

"으흐흐흑."

"아버지, 어머니.... 흐흑."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애도하는 것처럼.

불꽃은 데카라비아를.

녀석에게 집어삼켜진 이들을.

단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숭고하게 타올랐다.

그 화장(火葬)을 끝마치고 나서야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레벨업 메시지.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프로스트를 탈환했습니다.]

[북부 도시, '프로스트'에 진입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한눈에 살피기 힘든 메시지들까지.

메시지로 난잡한 시야 사이로.

새하얀 무언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르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경. 알고 있는가? 프로스트에선 눈을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고 부른다네. 그 하늘의 선물을 거절하면 천벌을 받는다는 미신이 있지. 워낙 눈이 많이 내리는 북부이기에.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 쌓인 눈을 치우게 만든 것에 불과하겠지."

그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오늘만큼은. 나는 이 눈을 하늘의 선물이라 여기고 싶군."

나 또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프로스트에 북해도의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프로스트 탈환] 퀘스트의 조건 달성.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각자 자신의 기여도를 확인했다.

─현재 기여도 : 3,210p

─현재 기여도 : 2,940p

─현재 기여도 : 1,570p....

"...하씨, 너 기여도 몇이냐?"

"일단, 너부터 까봐."

"님선이요. 이천은 넘냐?"

기대 이상 혹은 기대 이하.

하지만 이 순간.

대다수 플레이어의 생각은 똑같으리라.

과연, 이호열은 어느 정도의 기여도를 획득했을까?

그 기여도에 따라 어떤 보상을 받게 될까?

동시에 호열을 향하는 플레이어들의 시선.

"대충 만 정도 되려나...?"

"뭐래. 만은 그냥 넘지."

"근데 표정이 왜 저래? 생각했던 것보다 낮나? 혹시 만도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근데, 이호열은 항상 저 표정이잖아."

역시나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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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여도를 확인했다.

◈ 62화. 그 어려운 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