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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검은 오랜만이군 (3)

차를 음미하며 그 감정 내용을 확인하기도 잠깐.

딸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핵심부터 말하자면 이러했다.

"아쉬운 일이구나."

일단, 아이템의 레벨 제한을 낮추는 방법은 마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 적용.]

[설명 : 흡혈귀의 혈액으로 가득 찬 오브다. 마력과 접촉할 때마다 그 혈액이 터져 나와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공격마다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라니.

나와는 궁합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거늘.

'마법은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니까.'

막말로 돌덩어리 하나를 잘게 쪼개서.

적에게 날려버린다고 생각해 보자.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추가 피해 효과가 적용되는 거니까.

데미지는 배 이상이 되는 셈이었다.

혹시라도 그 효과만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감정을 의뢰했었다.

'400레벨은 너무 먼 이야기니까.'

내 레벨은 고작 226레벨에 불과하단 말이다.

'물 건너갔군.'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추신에 시선이 갔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는 마탑에서도 살펴보기 힘든 효과를 가졌습니다. 그 이질적인 효과가 악마의 마도구와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바. 그렇기에 정식으로 [흡혈귀 백작의 오브]에 대한 연구 목적의 대여를 요청합니다.

"대여 요청인가."

확실히 악마의 아이템은 흔치 않았으니까.

게다가 [흡혈귀 백작의 오브]는 그 수준이 높았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스스스─

곧바로 양피지에 깃털 펜을 휘갈겼다.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당장의 효과를 떠나 나한테는 인벤토리만 차지하는 아이템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천하의 마탑이 아이템을 먹고 튀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지."

그래, 주고받는 게 있지.

나는 괜스레 브로치를 한 번 내려다봤다.

'...이게 또 할 말이 있어야 하니까.'

혹시라도 육망성 브로치를 반납하라고 했을 때.

[흡혈귀 백작의 오브]를 내밀면 어떻게든 미룰 수 있지 않을까?

마탑에 널린 마도구 수준을 고려하면 그냥 잊고 넘어가는 가능성도 있을지 모른다.

'내가 손해지만 400레벨까진 참아준다. 너그럽게.'

누가 알겠는가?

좋은 연구 결과가 나와 내게도 득이 될지도.

그 쓸데없는 기대도 잠깐.

다음 내용으로 넘어간다.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재료 아이템답게 내 요구 사항에 맞게 제작이 가능한 모양.

과연, 마탑이었다.

제작하기 전이지만.

대략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감정 결과, [피격 시, 생명력 회복] 효과 부여가 확인됩니다.

과거,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마탑이 어떻게 플레이어들의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제작하기 전에 효과를 알 수 있다니!'

그 효과에 적절하게 장비를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감정을 받은 이유가 있었구나.

그나저나 내가 이런 고급 서비스를 공짜로 이용하고 있다니.

'약간 출세한 기분이 드는 게 나쁘지 않네.'

피격시, 생명력 회복이라.

무엇보다 그 범용성이 좋은 효과였다.

딱히 클래스를 가리지 않는 효과라는 거지.

'나중에 되파는 것까지 생각하면....'

확실히 [장신구] 쪽으로 제작하는 게 낫겠군.

감정 결과에서도 [장신구] 제작을 추천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착용할 수 있게 레벨 제한도 내 수준에 맞출 수 있으니까.

"이 또한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다시금 깃털 펜을 집어 들기도 잠시.

마지막 아이템,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가장 궁금했던 감정 결과를 확인했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제작 시, 제작 아이템에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효과 부여 / 회피 확률 상승효과 부여 / 심미 스탯 개방 효과 부여]

[설명 :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다는 비단이다. 워낙 희귀하기에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의문이었던 건.

바로 [심미] 스탯이었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나오지 않았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마탑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의외의 결과였다.

"으음."

...마탑도 알지 못한다?

양피지엔 분명 '확인된 바 없는 미지의 능력'이라고 적혀있었다.

미지와 진리를 탐구하는 마탑답게.

[흡혈귀 백작의 오브]와 마찬가지로 추신이 덧붙여 있었다.

말하나 마나 정중한 대여 요청이었다.

그래, 궁금하겠지.

미지의 능력.

[심미]의 효과를 확인해야만 그 직성이 풀릴 거야.

하지만.

"유감이군."

이건 나도 양보할 수 없겠는데?

'이쪽은 연구 목적이 아닌 생존 목적이란 말이다...!'

물론, 레벨 제한이 낮을수록 장비의 절대적인 성능 또한 떨어지겠지만.

지금 내가 어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란 말인가?

어떤 재료가 됐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제작해서 써먹어야 하는 게 내 현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랑펠의 심미안.

"이미 쓸 곳을 정해둔 참이다."

그 드높으신 안목께선 이 비늘 비단으로 무엇을 만들지, 처음부터 염두에 둔 참이었으니까. 이내, 내 시야가 허전한 재킷 주머니로 향했다.

스슥─

그런 나는 최종적으로 양피지에 답신을 적었다.

──────

[흡혈귀 백작의 오브] - 대여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 장신구 제작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 행커치프 제작

──────

행커치프.

'...정말 나라면 상상도 못 했겠지.'

손수건이라니.

어쨌거나, 격식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그럴싸한 효과까지 챙길 수 있다면 좋으련만.

'뭐, 까보기 전엔 모른다는 거지?'

[심미] 스탯의 효과.

그건 나에게 달린 게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추신으로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 정도겠지.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결과물을 원한다.

스슥─

아주 나답게 말이다.

-마탑의 능력을 기대하지.

.

.

.

...그나저나,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마티스 딘 카를!

그 선임 마법사의 메시지를 잊고 있었다.

뒤늦게 그 내용을 확인해 본다.

아뿔싸.

[현자의 심심풀이]와 같은 증명 거리를 던져준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했을 것을. 이건 단순한 부탁에 불과하지 않은가?

-...부유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물론, 얼굴도 친분도 용건도 알 수 없었지만.

넓게 보자면 같은 직장 동료 아니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나는 비정규 임시직이지만 아무튼.

'아직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약속 장소에 나가기는커녕 사내 메시지를 읽씹한 꼴이라니.

'잠깐, 부유 정원이라면....'

마탑의 사교장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찾기야 어렵지 않았다.

연구실에 배치된 서적 중엔 마탑의 구조에 대한 서적도 있었거든.

물론, 사교장이란 사전 지식도 거기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책상에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여튼,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이놈의 성질머리!

그것에 융통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상호 간의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면 직장 동료라고 해도.

설령 약속 장소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을 때려치운 건 신의 한 수였다고!

지시한 내용에 따를 수 없다며.

바락바락 상사에게 대드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심지어는 그 머리카락까지 은발.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기다리고 있을 마티스에겐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고집이 꺾이지 않는다는 건.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인터뷰 거부라든가.

플레이어들에게 예절 교육부터 받으라고 했다든가.

말하자면 끝도 없지, 그 경험에 대해선....

-곤란하군.

그랬다.

달랑 네 글자.

그것이 나의 답신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양피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내일 오후 시간은 괜찮은가?

거절당한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칼답이었다.

이쯤 되니 그 목적이 궁금해진다.

선임 마법사, 분명 내 자격을 물고 늘어질 게 뻔하거늘.

나는 깃털 펜을 들었다.

-그것 또한 곤란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곤란하다.

오후엔 선약.

그러니까 검술 수련 일정이 잡혀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전달.

그러나 이번에도 즉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다음 날 오전 시간은 어떤가?

...이래서야 삼고초려가 따로 없잖아?

제갈량의 마음이 흔들린 이유를 조금은 알겠는데.

물론, 그랑펠의 고집은 제갈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고했으니.

승낙한 이유는 정 따위에 흔들린 게 아니요, 단순하게 약속 시각이 오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오전엔 어차피 마탑에 있으니까.'

어째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뀐 것 같다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전이라면 만나줄 수 있다."

...그래, 나 잘났다. 정말.

*

꾸욱─

검을 쥐어본다.

슉─

검을 휘둘러 본다.

그 일련의 행동을 반복해 본다.

'빌어먹을, 악마 사냥꾼.'

안타깝게도 단순하게 행동을 반복한다고 [스킬]이 생성되진 않았다.

아르카나에서 스킬이란 건 각 클래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야.'

꼭 클래스 고유 스킬이 아니더라도.

다른 계열 클래스의 스킬은 일반적으로 습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스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마법』이 그 무언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검기』 또한 그중 하나인 것 같다.

고오오─

나는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바라봤다.

내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쉽지 않겠지만 검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게."

거기엔 이해나 깊은 깨달음 따윈 없었다.

"자신이 검이고, 검이 자신이다... 앗?!"

마법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인 터득.

그저 보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

나는 검기 또한 따라서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르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 설마! 진정으로 가능할 줄은 몰랐거늘!"

물론, 내 검기는 하르콘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정확하게는 희미하다는 게 맞겠지.

예시카, 에노크와 비교해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호열 경,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곤 있는 건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하르콘.

그러나 그가 저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나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야 검기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몸으로 체감하는 중이었거든.

'...어째서 체력을 강조했는지 알 것 같다.'

검기에 휘둘린다고 했었나.

정말이지, 그 말을 백분 이해할 수 있었다.

뭉텅이로 체력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다...!

그저 검기를 발산하는 것만으로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육체에 피로가 누적되는 느낌은 덤이었다.

새삼스럽게 현실을 자각했다.

'중간 과정을 건너뛴 거나 다름없으니까.'

검기란.

분명 검술의 극에 가까운 경지겠지.

나는 그 경지를 밑 빠진 독에 채워 넣은 셈이니까.

체력이든, 뭐든 극심하게 소모되는 게 당연한 거겠지.

거기에다가 내 레벨을 생각해 보자.

고작 226레벨이다.

하르콘은 고사하고 430레벨의 예시카, 400레벨의 에노크와도 엄청난 격차가 난다.

근력과 민첩의 차이?

그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동안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해 온 나였으니까.

그럼에도 엄살은 부리지 않는다.

그 부족함을 보완할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클래스 퀘스트!'

무려 체력과 근력, 민첩 스탯을 동시에 보완할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니까 내색하지 않는다.

나는 검기를 거둬들이며 뻔뻔하게 말했다.

"오늘은 유달리 햇볕이 따사롭군."

날씨를 핑계 삼아서 식은땀을 닦아냈다.

...발버둥도 이정도로 뻔뻔하게 치면 재주다.

하르콘의 요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네. 호열 경! 그대는 검의 길을 걸어야 하네. 다섯 손가락이 뭔가? 적어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늘어놓던 하르콘이 말했다.

"사실상, 내가 가르칠 건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끝나긴 뭐가 끝나!

하르콘 같은 스승을 또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아직 뜯어먹을.... 아니,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검기의 습득 여부를 떠나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심정 같아서는 내 깨진 밑독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지금부터는 실전에서 깨닫는 단계니 말일세."

"실전이라."

"그렇다네! 때마침 이보다 좋은 환경도 없겠지. 유스라 왕국, 주변엔 마물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아하, 그런 뜻이었구나.

그렇다면 괜히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천적관계가 발동하지 않았을 때.'

내 전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 걸까?

솔직하게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주제를.

내 클래스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악마 사냥꾼.

악마를 사냥할 때가 아니면.

그 나사가 몇 개는 빠진 듯한 성능을 보여주는 클래스.

그런데.

'...어라?'

털썩─!

나는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며 생각했다.

이거 기대, 그 이상이다.

◈ 44화. 놀라움의 연속 (1)

하르콘은 말했다.

-그대는 검의 길을 걸어야 하네.

근데 그건 뭘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지.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중2.

그 시절 감성으로 좋은 건 다 가져다가 붙인 그랑펠의 설정이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하기엔 말 그대로 재능 낭비.

물론, 포기할 여건도 되지 못한단 말이다...!

'한 우물만 파선 부족하다.'

그건 애증의 클래스, 악마 사냥꾼 때문이었다.

말했다시피 악마를 사냥할 때를 제외하면 나사가 하나도 아니고 몇 개나 빠진 수준.

그 애매한 성능 탓에 스탯 배분도 애매하게 할 수밖에 없는 클래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

'하지만.'

특출난 곳이 없다는 단점.

그 단점을.

약점이 없다는 장점으로 바꾸겠노라.

나는 그 원대한 목표를 세웠었다.

무엇보다 내겐 그랑펠의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선택한 상대였다.

[은빛 갈기 표범 : Lv.300]

300레벨.

유스라 왕국에 리젠되는 몬스터 중에선 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레벨은 고작 226레벨.

그 레벨 차이를 고려했을 때.

나 혼자 녀석을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나사가 빠진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녀석을 상대로 선택한 이유?

단순하게도 긍지 때문이었다.

"그 건방진 성격이 고양이와 다를 바 없구나."

녀석이 먼저 이빨을 드러냈으니까.

이 성격에 그냥 넘어갈 순 없다는 거겠지.

그저 담담하게 정리하는 옷매무새.

"유감이지만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다."

철컥─!

훈련용 검을 빼 들었다.

훈련용 검이기에 날은 무뎠지만, 레어 아이템인 만큼 동 레벨의 검과 비교했을 때 공격력은 뒤처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겐 검기가 있었으니까.

고오오─!

검과 하나가 된 느낌.

나는 천천히 검기를 끌어올렸다.

...빌어먹을.

검에 희미한 빛이 서리기 무섭게 체력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자세에 흔들림은 없다.

"꼬리를 치켜세운 것치곤 얌전하구나."

캬르릉─!

짐승도 자기 욕은 알아듣는 것인가.

은빛 갈기 표범이 거칠게 포효했다.

그러나 녀석은 쉽게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이 자세 덕분이겠지.

"허나, 꼬리를 내릴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없다."

정확히는 체력이 없다...!

다가오지 않는다면 이쪽이 가는 수밖에.

그러나 나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제 파악, 그거 하나는 내가 잘하거든.'

제아무리 검기를 깨달았다고 한들.

나로선 검술만으로 녀석을 쓰러트릴 수 없겠지.

천적관계라도 발동된 상태라면 모를까.

'그건 그냥 스탯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검술에 영향을 주는 두 능력치.

[근력]과 [민첩].

레벨업 포인트를 마력에 올인한 탓.

클래스 퀘스트로 상승시킨 스탯이 있다고 해도, 동 레벨의 검사 계열 클래스들보다 절대적인 수치가 뒤처지는 게 당연하다.

'섣불리 움직이는 순간, 역습을 당하겠지.'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어뜯길지도 모른다.

74레벨의 격차는 그런 거였으니까.

그러나.

'그걸 아니까 그 개고생을 했던 거다. 내가!'

말했다시피 내게 한 우물만 팔 생각 따윈 없다.

콰드드득─!

즉각적인 마법의 발현.

가능한 이유는 그 간섭 대상이 '돌'이기 때문이었다.

탐색 과정에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될 만큼.

나는 이 유스라 왕국의 돌에 익숙했으니까.

캬, 캬릉─?

솟구치는 돌기둥.

당황한 녀석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그러니까 녀석은 깨닫지 못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알아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점차.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자세를 유지한 채 검기를 가다듬었다.

'되도록 빠르게 끝내야 한다.'

지금 나는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건 마력 소모만 봐도 알 수 있다.

천적관계가 발동 중일 때는 돌기둥 따위야 수십 개를 동시에 솟구치게 만들어도 멀쩡했었거늘.

'...진짜 아직 멀었구나.'

나사가 빠진 현재로선.

돌기둥 몇 개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다시금 템빨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육망성 브로치]라도 없었다면 나는 벌써부터 마력 탈진을 걱정해야 했겠지.

고오오─

솟구치는 돌기둥에 떠밀리듯 다가오는 표범.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 호흡과 보폭 또한 하르콘의 행동을 모방한 것.

그렇기에 빈틈은 없다.

스왁─!

알아차렸을 땐 늦었단 소리다.

캬아악─!!

대각선 베기.

희미한 검기를 두른 날이 표범과 맞닿는 순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검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르콘의 말.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이제부터 실전에서 배워야 한다.

하르콘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작은 떨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검기가 성장하고 있는 거야.'

이 또한 그랑펠의 재능 덕분이겠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털썩─!

표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뭐냐.

...설마, 죽었어?

나는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전투를 되돌아봤다.

'녀석을 유인하기 위해서 돌기둥을 발현했다.'

하지만 돌기둥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았다.

그래서야 검을 뽑아 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유인한 녀석을 단 한 차례.

검기로 베어냈을 뿐이었다.

그러자 녀석이 털썩─하고 쓰러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검기가 검술의 극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내 근력과 민첩의 합계는 고작 70이란 말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란 걸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쯤 되면 다시금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원대한 목표, 실현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내 표정엔 일말의 기쁨도 없었다.

이조차도 내게는 당연하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나는 획득한 전리품을 확인했다.

[순수한 은털]

[등급 : 매직]

[제한 : 없음]

[효과 : 없음]

[설명 : 모피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순수한 은이다. 은이기에 절대적인 가치는 크지 않지만, 활용에 따라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은이라.

설명에 나와 있듯 활용에 따라 쓸모가 있어 보였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야 전리품보다 더 귀중한 가능성을 목격한 참이었으니까.

'그래도 쉽지 않은 길인 건 분명해.'

부들부들─

수전증처럼 떨려오는 두 손.

검기를 발산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긍지에 가라앉지 않을 유일한 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그 실현 가능성까지 확실하게 목격하지 않았는가?

'검기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성장한다....'

지금만 해도 무려 74레벨의 격차.

나한테는 모든 전투가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나는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몸풀기 상대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 언젠가 이 허세도 현실이 될 날이 오겠지.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무섭다, 정말.

*

그림자 용병단.

아르카나 대륙에서 세 손가락으로 꼽히는 용병단 중 하나.

그러나 모험가들의 세계에 소환된 마당에.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명성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끄읏─!"

그림자 용병단장, 키치는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여기선 약간 고향 냄새가 나네."

질끈─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풀 정도로.

키치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의 검은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누가 알았겠어? 진짜."

전설 속 보물섬, 유스라 제도!

그림자 용병단 의뢰 목록 최상단에 대대로 남아있던 그 보물섬을,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키치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씁, 의뢰비 받아내야 하는데."

물론, 농담이었지만.

소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용병단.

그건 모험가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키치는 유스라 제도.

아니, 유스라 왕국에 대한 진실도 파악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고대의 왕국이었단 거지?"

그 왕국이 왕과 함께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거고.

그림자 용병단.

단장으로 있다가 보면 믿지 못할 소문과 의뢰를 많이도 듣게 된다만.... 이건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대형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용병단, 전원을 이끌고 찾아왔지.

"근데, 다 어디로 갔어. 얘네들?"

소수 정예, 그림자 용병단.

전원이라고 해봤자 열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는 건 너무하지 않아들?!

결국, 고생하는 건 단장인 키치였다.

그녀는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 익숙하지 않은데."

키치가 유스라 왕국을 찾은 이유?

간단했다.

키치는 유스라 왕국을 그림자 용병단의 주둔지로 삼을 계획이었으니까.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서의 주둔지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랑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잖아?'

어떤 의뢰든 가리지 않고 받았던 그림자 용병단.

그래서 그들에게 주둔지란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임시 거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험가들의 세계에 소환된 이상.

더는 그때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새 출발이라는 거지!"

이렇게 깔끔하게 새 출발을 할 기회도 없었다.

사업, 채무, 심지어는 원한 관계까지!

그림자 용병단을 붙들던 족쇄는 아르카나 대륙에 전부 남겨둔 채 소환됐으니까.

물론, 용병단 자금 또한 비밀창고에 남겨둔 채로 소환된 게 문제이긴 했지만....

"...어쨌든, 새 출발!"

유스라 왕국은 이제 막 재건을 시작한 고대 왕국 아니겠는가?

키치는 원대한 꿈에 부풀었다.

유스라 왕국의 개국공신으로 추앙받는 그림자 용병단!

펑펑 써도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깨끗한 돈!

키치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익숙하지 않아도 해봐야지."

키치는 유스라 왕국의 국왕과 만날 생각이었다.

능력이야 자신이 있었으니까.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는 경쟁자가 있긴 했다만.

"고향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가자구. 우리."

그림자 용병단에게도 상식은 있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물론이요.

황실과의 원한 관계는 쌓아두지 않았으니까.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자신들을 적대할 이유는 딱히 없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모험가들이 있기야 했지만.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경쟁자는 아니지~"

먼 훗날이면 모를까.

당장 모험가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게 불과 방금까지의 일이었다.

"...뭐야, 저거?!"

순간, 키치의 큰 눈망울이 가늘어졌다.

...나, 잘못 본 거겠지?

빽빽한 건물 사이에 갇혀있다가 간만에 고향 같은 풍경을 보니까.

눈알이 훼까닥 돌아버린 게 분명해.

하지만 가늘게 뜨고 자세히 봐도 확실했다.

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저건 분명 '검기'였다.

키치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모험가잖아?!'

모험가가 검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방금 내뱉었던 말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접근해 보자.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돼.'

만에 하나 검기의 사용자라면.

그 감각 또한 더없이 예리하리라.

어쩌면 자신의 은신 또한 간파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살금살금─

키치는 숨을 죽이고 접근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더욱더 믿지 못할 광경을...!

"!"

확실했다.

저건 검기였다.

그런데 저 땅에서 솟구치는 기둥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건 아무리 봐도 마법인데?!'

검기를 발산하면서.

동시에 저런 수준의 마법까지 발현한다고?

모험가가?!

"몸풀기 상대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단원들 앞에서 열변을 토해내도 믿어주지 않겠지.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건 현실이었다.

게다가 키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기가 눈에 띄게 짙어졌어.'

그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그건 키치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키치는 모험가, 사내를 바라봤다.

'대체 정체가 뭐야?'

저런 실력을 갖춘 모험가라면.

분명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

키치가 알고 있는 모험가 중에 저런 사내는 없었다.

'...어쨌든 다행이다.'

빠르게 유스라 왕국을 찾아온 판단이 옳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렇게 불쑥 튀어나온 모험가가 개국공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키치는 걸음을 서둘렀다.

"빨리빨리!"

찬란한 새 출발을 위해.

정직하게 벌고 펑펑 쓰는 삶을 위해.

그림자 용병단은 유스라 왕국에 충성을 다하겠다.

그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황금 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누군지는 몰라도 다신 만나지 마요. 우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모험가.

그 모험가, 호열의 권한 아래.

그림자 용병단의 미래가 놓여있다는 것도 모른 채....

*

검기의 후유증.

덕분에 녹초가 된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진이 빠졌다는 느낌이랄까.

...정말 마음 같아선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

"마탑엔 연차 같은 것도 없단 말이냐."

하지만 격식과 예절에 죽고 못 사는 이 몸께서.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

마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유 정원으로 향했다.

부유 정원.

마탑, 유일의 사교장.

그 이름에 걸맞게 훌륭한 외관이었다.

비현실적인 풍경이기도 했다.

자라난 꽃과 풀들이 지나치게 아름다웠으니까.

나는 심미안으로 그 풍경을 한껏 감상했다.

그런데.

유달리도 심기를 거스르는 형체가 있었다.

마치 그 부분만 먹으로 칠한 것처럼 검었다.

화사한 부유 정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중년 사내였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이라고.

다가가자 그 차림새가 더욱 눈에 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열 손가락의 반지.

그 하나하나가 마도구겠지.

'보석이 박힌 게 비싸 보이네.'

나는 사내와 마주 앉았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마티스를 부유 정원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으니까.

심미안이 이렇게 피곤하다.

"?"

그때였다.

마티스의 반지에 박힌 보석이 일렁이기 시작한 건.

일순간, 검게 변해가는 보석.

그건 칠흑을 넘어서 이질적일 정도의 흑색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선제압이야, 뭐야.

그런데 기선제압 같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째서인가.

나보다도 놀란 기색이 역력한 마티스가 있었으니까.

그가 변색된 보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감응력은 대체...?"

...감응력?

그건 또 무슨 소린데?

뭔지는 몰라도 나는 태연하게도 추궁했다.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

"그 반지가 약속의 용건과 관련된 것인가?"

달칵─

찻잔을 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명하게 대답하게."

◈ 45화. 놀라움의 연속 (2)

마티스 딘 카를.

그 또한 마탑의 마법사였다.

진리를 갈망하며 미지를 탐구하는 마법사.

어찌 보면 마티스는 다른 어떤 마탑의 마법사들보다도 그 욕구가 강한 셈이었다.

그야 마티스는 '흑마도'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깊은 어둠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다.'

흑마법.

마티스가 흑마도학을 정립하기 이전.

"세상에. 그딴 게 마법이면 우리 집 개가 똥을 누는 것도 마법이겠습니다. 똥 만드는 마법!"

흑마법의 취급은 좋지 않았다.

어떤 곳에선 민간 주술.

어느 곳에선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의 저주.

또 어떤 국가에선 불길한 마법이라 불리기까지.

그것이 마티스의 욕망을 자극했다.

'전부 사실일까?'

마티스는 흑마법에 몰입해 갔다.

그 결과 마티스는 흑마도학을 정립했고, 마탑의 선임 마법사가 되었으며, 한때는 유력한 수석의 후보가 되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수석의 자리는 마르셀로의 차지가 되었지만....

'그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지.'

다른 선임 마법사들의 예상과 다르게.

마티스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사사로운 곳에까지 생각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거늘. 내 역량이 부족한 건가.'

문득, 벽에 부딪히고 말았으니까.

아무리 고민을 해봤자 연구에 진전이 없던 것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

세계관 간섭이 시작됐다.

자책은 더욱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을....'

나는 대체...!

그러던 중 소식이 들려왔다.

"마티스 씨,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아니, 글쎄!!"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모험가를 공동 연구자로 선택했단 사실을.

'마르셀로의 선택이다.'

벽에 부딪혔기에 오히려 여유가 생긴 걸까.

그 선택에 순수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이런저런 마법사들과 다르게.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걷는 마법사.

어찌 보면 자신과 닮은 면이 많은 마법사.

그런 마르셀로가 내린 결정이니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대체 어떤 모험가이기에?'

물론 그 의문이 이해가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험가.

호열은 그 첫인상부터 심상치 않았으니까.

또각─

크리스탈 홀에 울리던 당당한 발걸음.

그리고는 거침없이 선언.

-나는 그대들의 장난에 어울릴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그것도 모자라 [현자의 심심풀이].

그 골치 아픈 난제를 곧바로 풀어버리다니.

그것만으로도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로의 선택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지금의 상황은 순전한 욕심이요.

탐구 욕구였다.

'이런 모험가가 존재했다니.'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흑마도학에 대한 감응력.

마티스가 호열에게 삼고초려를 하며 약속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요.

열 손가락에 하나하나 반지를 끼고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감응력 하나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니까.'

흑마도학이 주술 취급을 받은 이유?

간단했다.

흑마법은 다른 마법과 달리 확실히 이질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가장 큰 차이점은 발현자의 내면에 깊게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지.'

일반적인 마법이 마력을 기반으로 발현된다면.

흑마법은 오직 '적합한 마력'에만 감응했으니까.

그 적합한 마력이란 건.

발현자가 살아온 삶과 배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모험가 호열의 사연 따윈.

알 수 없을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행동은 그저 단순한 호기심.

그렇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마다 반지를 착용했다.

'이러면 작은 감응력이라도 감지할 수 있겠지.'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열 손가락의 반지가 전부 검게 변한 것이었다.

'...이런 색은 본 적이 없다!'

그것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게!

마치 흑마법의 본질처럼.

마티스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감응력은 대체...?"

도대체가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감응력이라면 자신을 가로막은 벽조차 단숨에 무너트릴 것만 같았다.

마티스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추궁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명하게 대답하게."

그래, 숨길 생각은 없었다.

마티스는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사내에겐 대체 어떤 과거가 있길래....'

이토록 뛰어난 흑마법 감응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

.

.

딸칵─

나는 흑마도학에 관한 설명과 현 상황에 대해 늘어놓는 마티스를 두고 찻잔을 기울였다.

'정말이지.'

...나는 이러다가 쪽팔려서 뒤질 게 분명하다.

뭐어어?!

과거에 기반하는 마아아아법?!

세상에 그런 마법이 어딨어!

어깨너머로 배울 마법을 찾기 위해.

넷튜브를 꽤나 뒤졌던 나였다.

자연스럽게 온갖 클래스의 마법사들을 봐 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되돌아봐도 흑마법사를 자처하는 플레이어는 본 적이 없었다.

'네크로멘서라면 몰라도.'

그러니까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흑마법이라니.

그런 괴상한 마법이 정말 있는 거냐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의심은 필요 없겠지.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그의 존재 자체가 흑마도학이 존재한다는 가장 큰 증거였으니까.

그러니까 그가 늘어놓는 말도 개소리가 아니라 전부 사실이란 소리였다...!

"반지의 보석이 검게 변할수록 흑마법에 대한 감응력이 뛰어나단 소리일세. 미세한 감응력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열 개의 반지를 착용한 것이거늘. 모든 보석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흑마법 감응력이 뛰어나아아?!

유감스럽게도 그건 나에게 있어서 칭찬이 아니었다.

그야 친절한 설명 덕분에 확실하게 깨달았으니까.

'...내 사인은 수치사가 될 게 분명해.'

그의 말에 따르면.

흑마법의 원천이 되는 것은 '적합한 마력'이며.

그 적합한 마력이란.

사용자의 과거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내 흑마법 감응력이 뛰어난 이유가....

'전부 내 흑역사 때문이란 거잖아!'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봤다.

'그래, 설정이 우울하긴 하지.'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 과거 설정이 특출난 흑마법 감응력이 됐단 소리겠지.

'좋아, 쪽팔림은 잠시 접어두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일단,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굳이 흑마법에 손을 댈 정도로.

그랑펠의 재능에 아쉬울 건 없었지만.

어찌 됐든 써먹을 게 많다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특히나 내 입장에선 말이야.

'대충 다른 마법보단 마력에서 자유로운 것 같으니까.'

오직 '적합한 마력'에만 반응한다고 했겠다.

마력과 적합한 마력은 완벽히 다른 개념이고.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다.

'마력 탈진 상태에서도 흑마법은 사용이 가능한 건가?'

...그게 가능하다면!

이 수치심을 꾹 참고 흑마법에 입문할만했다.

아니, 입문해야만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머리를 굴렸다.

하르콘이란 좋은 스승을 둔 덕분에 빠르게 검기를 발산하게 된 것처럼.

흑마법을 빠르게 습득하기 위해서도 좋은 스승이 필요하겠지.

그런 의미에선 마티스만 한 스승도 없으리라.

나는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심히 불쾌하군. 마티스 선임 마법사."

나로서도, 그랑펠로서도.

불쾌한 게 당연하지.

그 구체적인 사연까진 알 수 없다고 한들.

마티스가 얼핏이나마 그 과거를 엿본 셈이었으니까.

그것이 그랑펠에겐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과거이자.

내겐 감추고 싶은 흑역사란 말이다.

"그 행동에 대해선 할 말이 없네. 나의 불찰이었어."

마티스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이 무례에 관한 책임은 확실하게 지도록 하겠네. 상부, 원로회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여도 내 모든 잘못을 인정하겠네. 부디, 나의 기만을 용서하게나."

가히 사과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세.

격식과 예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모습이다.

그랑펠의 까칠한 성격조차 약간 누그러질 정도로.

"그 사과를 받아들이겠네."

물론, 말 한마디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흑마도학이라. 그에 대해 작은 흥미가 생긴 참이니."

"...그게 정말인가?"

내가 뭐, 뼈를 묻겠단 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흥미가 생겼다고 했을 뿐인데.

마티스는 크게 반색했다.

그가 조금이나마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불찰을 만회할 수 있도록. 흑마도학에 관해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겠네!"

분명 말한 거다?

모든 도움을 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9/20)

여덟 명에서 아홉 명이 됐다.

납득한 한 명이라면, 당연하게도 마티스인가?

그 추측이 옳다는 듯.

마티스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지금부터는 그 호칭에도 주의하겠습니다. 수석 마법사와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수석과 같은 지위에 있다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갑자기 존댓말까지?

부담스러운 게 당연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변화.

그러나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지. 마티스."

.

.

.

...추측하건대.

아무래도 마티스는 선임 마법사 중에서도 그 영향력이 상당한 게 분명했다.

그가 찬성표를 던지기 무섭게.

퀘스트창이 몇 번이나 점멸했으니까.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20/20)

그리고 결국에는 만장일치였다.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마티스가 찬성표를 던진 것만으로 번거로운 증명 과정이 모조리 스킵됐다.... 나는 그런 마티스에게 마지막쯤 가선 호칭도 빼고 말까지 놓아버린 것이었다.

'...정말 나답구나.'

그런 엄청난 짓을 벌여놓고서는.

나는 연구실에 돌아와 태연하게 마법 서적을 들추고 있었다.

사실 마르셀로한테는 더한 짓도 해봤으니까.

이렇게 느긋할 수 있다는 거겠지.

스스스─

이내, 양피지에 떠오르는 글씨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 그 내용이 하나같이 길었다.

슬쩍, 그 첫 줄을 읽어보니 축하의 메시지였다.

마르셀로부터 시작해서.

벨리에, 마이아, 나스로우....

이름만 들어본 선임 마법사들부터.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숙련 마법사들까지.

정식으로 마탑에 입성하게 된 내게.

축하의 뜻을 전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나는 곧바로 양피지에서 시선을 치워버렸다.

지극히 당연하기에.

축하를 받을 거리조차 아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하게 기뻐하면 어디 덧이라도 난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사서 피곤하게 산다, 진짜로.

신세 한탄도 잠깐.

[보상이 지급됩니다.]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법사의 탑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마법사의 탑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마법사의 탑에서의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잠깐만, 이거 보상이 상당하다.

어떻게 보면 마법사의 탑은 아르카나의 어떤 도시, 국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으니까. 그런 마탑과의 관계도와 영향력이 대폭 상승하다니.

'그냥 낙하산 때는 이런 것도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 근사한 연구실이 확실하게 내 것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막 그런다?

그나저나 새로운 기능이 활성화됐다라.

자연스럽게 유스라 왕국에 생각이 닿았다.

'권한 기능은 정말 어마어마했지.'

관계도와 영향력.

그 두 가지 수치가 모두 최대가 되어야 활성화되는 [권한] 기능.

그 권한의 한계는 간단하게 국왕, 하쿠나와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그림자 용병단 때 확실하게 확인했다.'

유스라 왕국에 몰려든 NPC들.

내 권한으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하쿠나가 국왕으로 있는 이상.

내가 그 정도의 권한을 휘두를 일은 거의 없겠지.

'...사실 나에 대한 하쿠나의 태도를 생각하면.'

내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하쿠나는 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내 말이라면 내렸던 결정을 뒤집는 것도 가능하리라.

물론, 최대치가 아니기에.

그런 [권한] 기능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대폭 상승했다니까.'

새롭게 활성화된 기능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문득, 마티스의 말이 떠올랐다.

'수석 마법사와 같은 지위라.'

그게 과연 어느 정도의 지위일까?

'수석 마법사는 마탑의 어떤 기능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내심 고민해 보던 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들겼다.

묻지 않아도 곧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입니다. 축하 인사와 약소하지만 전하고 싶은 성의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가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전하고 싶은 약소한 성의라....

나는 그 단어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뇌물이잖아, 그거.'

수석 마법사와 동등한 지위란.

선임 마법사에게 뇌물을 받을 정도의 위치란 것을.

뇌물.

평범한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뭐든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약소한 성의라고 하니까.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니까.

'그런 이유에서들 많이들 받아서 챙기시는 거겠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랑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칠죄종 탐욕조차 쓰러트리지 못한.

그야말로 청렴결백의 화신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내 대답은 단호했다.

"선임 마법사, 뱅그릿."

"아, 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그대는 축하와 성의를 전하기 이전에 예절부터 배우는 게 좋겠군."

"네, 그럼 잠시 실례.... 가 아니라? 예? 예절이라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나는 두말하지 않았다.

"나는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만남은 가지지 않는다."

삼고초려.

"방해 말고 돌아가도록."

나와 만나고 싶다면 적어도 세 번은 더 찾아오도록.

◈ 46화. 비겁하구나

실시간으로 발전해가는 유스라 왕국.

그 재건 속도는 가히 상식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쏟아붓는 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대격변 이후.

그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던 비전투직 플레이어들.

유스라 왕국이 재건에 돌입하자, 그들의 얼굴엔 간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드디어 생산직 떡상의 날이 오는 건가?"

"진짜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이었다. 균열에선 일반인이랑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래도 내 평생 플레이어로 돈을 버는 날이 오는구나!"

"어이, 김 씨. 떠들지 말고 벽돌이나 날라."

현실에 나타난 최초의 아르카나 국가.

유스라 왕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일단, 웬만한 기업에 버금가는 대형 길드.

가온과 버서커의 투자금만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온과 버서커의 공격적인 투자. 전문가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미래를 내다본 현명한 판단이다.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사실 먼 미래도 아닐 겁니다. 이 순간에도 가온과 버서커는 유스라 왕국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셈이니까요."

"지금 투자하는 금액은 조금도 아까운 게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가온과 버서커를 제외하더라도.

무지막지한 투자금을 싸 들고 유스라 왕국을 찾은 길드, 플레이어, 심지어는 국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적극적이었던 건 중국이었다.

"우린 유스라 왕국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합니다. 대국의 길드, 천하통일이라면 가온이나 버서커보다도 왕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제안과 함께 내미는 약소한 성의.

그러나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가 누구던가?

그는 탐욕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호열을 보며 얻었던 깨달음까지.

하쿠나는 모든 매력적인 제안을 냉랭하게 뿌리쳤다.

"내 결심에 변함은 없을 걸세."

그 결심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호열밖에 없겠지.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설 속 보물섬이라 불리던 유스라 왕국이 아니던가?

사실 채취한 광물만 내다 팔아도 재건 비용 정도야 충당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당사자들이었다.

벅벅─

레오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으아아아."

흘러나오는 절규.

잠자코 있던 길드원들이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언니, 또 왜 저래?"

"뻔하지. 또 쓸데없는 고민 하고 있을걸?"

"아, 그분 생각?"

망언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레오니는 심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뭔가 일이 굉장히 잘 풀리고 있는데.'

실시간으로 빚이 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은 뭐지?

물질적인 빚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레오니가 느끼는 건 마음의 빚이었다.

그래, 길드원들의 말대로 호열 때문이었다.

"왜? 도대체? 으아아아."

단순한 호의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친 보상이잖아?

준 도움에 비해 받는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레오니는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었다.

'뭐지? 이럴 인간이 아닌데? 진짜?'

벌써부터 막 좋아하면 안 될지도 모른다.

레오니가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호열과의 첫 만남.

'맞지. 맞지. 그 치사한 성격에.'

차 한 잔 나눠주지 않는 그 쪼잔한 성격에 말이야.

이런 호의를 그냥 베풀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레오니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근데 뭘 가져가겠단 거지?'

자신에게서 뭘 가져갈 정도로.

호열에게 부족한 게 있나...?

아무리 고심해 봐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멈칫─

머리카락을 못살게 굴던 레오니의 손이 멈췄다.

'...아니, 설마, 진짜로?'

...그 차가 그렇게 소중한 건가?

나한테 한 잔도 내어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그럼 안 되는데?

'얼마나 대단한 차길래?'

레오니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씹, 이게 다 너희 때문이잖아!!"

"...뭐라는 거야. 갑자기?"

"언니, 왜 그래? 히스테리 부려?"

어리둥절한 길드원들을 뒤로한 채.

레오니는 다시 고뇌에 빠졌다.

"...이래서야 언제 빚을 갚고, 언제 얻어먹냐."

"얻어먹어? 뭘? 아, 혹시 그때 그 차 말하는 거야?"

"닥쳐."

"언니, 그냥 물어보고 사서 먹으면 안 돼?"

"사 먹는 거랑은 다르다고. 니들이 뭘 알아?!"

"...누구 언니인지 몰라도 진짜 진상이다."

.

.

.

"형, 어떻게 생각해."

남태민은 형, 남철민에게 물었다.

형제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다.

"어떻게 생각하긴 그냥 어떻게 갚을까. 그 생각뿐이지."

아르카나의 공식 홈페이지.

새롭게 갱신된 길드 랭킹.

두 형제는 그 순위를 다시금 확인했다.

──────

1. 샤이닝 (-)

2. 천하통일 (-)

3. 가온 (+2)

4. 보헤미안 (-1)

5. 이나즈마 (-1)....

──────

무려 두 계단이나 상승한 길드 랭킹.

이나즈마를 넘어선 것도 모자라 3위로 올라선 상황.

기쁨에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형제는 담담했다.

"더 잘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자."

그야 그 순위 상승을 만들어 낸 건 자신들이 아닌 호열이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만약, 호열과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물론, 형도 이 자리에 없었겠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말 호열에겐 받기만 해온 것 같았다.

어떻게 갚아야 할까.

떠올리면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남태민은 의욕을 다졌다.

"호열 씨가 맡긴 유스라 왕국 재건부터 제대로 끝내자. 형!"

그런데 남철민의 표정이 심각했다.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된 형의 시선.

남태민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 또 지랄 시작이네?"

──────

[이 시각 국회는] "길드 랭킹 3위 진입, 정말 축하할 일... 그러나 신화 길드와의 비협력 아쉬워...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

──────

지독한 언론 플레이.

한두 번 시달리는 게 아니었다.

신화 길드.

그들이 정치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워낙 노골적이라서 이젠 네티즌들까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또 언플 시작이네 신화 새끼들ㅋㅋ

-실력으로 안되니까 추잡한 짓은 다 함

-아니 가온이 왜 지들을 이끌어줘야 함?ㅋㅋㅋ

단순한 욕설부터.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었다.

-얼마나 받아 처먹었으면 정치인이란 놈들이 하나같이 신화 쉴드를 못 쳐서 안달이냐?

함께 댓글을 읽어나가던 남철민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선을 좀 심하게 넘는데."

"백 퍼센트 동감. 근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네."

"뭐가?"

"아니, 신화 그 새끼들이 무슨 수로 그 늙은이들을 꽉 잡은 거지? 뭐, 예전부터 개수작 부린다는 거야 전부터 소문으로 들었는데.... 최근 들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듣고 보니까 그러네."

남철민은 동생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인이 얼마나 이미지에 민감한 족속인가?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최근 행보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반응이야, 성난 댓글 창만 봐도 알 수 있을 터.

그런 민심에도 계속 신화를 두둔하다니.

남태민이 주먹을 쥐었다.

"하여튼 별것도 아닌 것들이 귀찮게 하네. 정말."

이게 아르카나였으면 그냥 길드쟁 떴다. 내가.

"아주 그냥 개박살을 내버렸을 텐데!"

슉슉─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

남태민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기도 잠깐.

남철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됐든 하나는 확실하게 해야지."

"응? 뭘?"

"호열 씨한테 불똥 튀기는 일 없게 하는 거."

"아, 그거야 당연하지! 근데 어이가 없다. 진짜?"

남태민이 피식 웃었다.

"다들 완전 제대로 잘못 짚었다니까? 신화든, 정치인들이든? 결국, 거악을 쓰러트린 건 호열 씨인데 말이야. 우리가 한 거라곤 진짜 그냥 숟가락만 얹은 건데."

"그러게. 나도 그게 답답해서 죽겠다. 태민아."

거악, 칠죄종 탐욕.

무려 650레벨짜리 몬스터를 압도하던 호열.

하지만 세상은 그날의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 같아선 이것 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호열의 전투 영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야 호열 씨 전투 패턴이 분석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실 걱정할 게 없더라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를걸? 나도 저런 스킬 활용은 본 적이 없으니까."

유능한 분석관 남철민.

그조차 알지 못하는 스킬로 호열은 거악을 사냥한 것이었다.

이 녹화 영상이 공개되는 순간.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히겠지.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호열 씨 의사가 중요한 거니까."

"맞지. 말 나온 김에 문자라도 남겨둘까?"

"문자? 직접 얼굴 보고 하지, 왜?"

호열이 워낙 바빠야 말이지.

유스라 왕국에 머물러 있어도 보기 힘든 게 호열의 얼굴이었다.

남철민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호열의 일과를 체크했다.

"일단, 마탑에서 퀘스트 진행 중이셨잖아? 그럼 오전 시간은 훅 가버리고. 오후엔 유스라 왕국에 오셔서.... 근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호열 씨, 최근 들어 하르콘이랑 많이 붙어 다니시네?"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남태민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설마 또 퀘스트? 에이, 아니시겠지? 아무리 그래도 연관성이 없는데? 호열 씨는 마법사고, 하르콘은 기사니까."

"글쎄, 난 모르겠다? 분발하자. 태민아."

"으아악! 형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마찬가지로 절규하는 남태민.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게 생겼다...!

*

스킬처럼 성장을 수치로 확인할 순 없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있기에 알 수 있다.

고오오─

눈에 띄게 선명해진 검기.

며칠간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한 보람이 있는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회상에 빠졌다.

'말 그대로 진짜 죽을힘이었다, 정말....'

다시 한번 [천적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300레벨짜리 몬스터와 생사를 건 전투.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쉽지 않았다, 진짜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장 속도네. 호열 경!"

하르콘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어냈다.

"말도 안 돼...."

하르콘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검기 사용자인 예시카, 에노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생각도 못 했겠지.

그 희미했던 검기를 자신들 수준까지 끌어올렸을 줄은.

'내 개고생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검기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짙어진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이 유스라 왕국이 내게는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이었단 소리다.

최소 300레벨부터 높게는 400레벨까지!

돌아다니는 몬스터 하나하나가 내게 있어선 더 없는 강적.

'발버둥도 그런 발버둥이 없었을 거다....'

그런 녀석들을.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채.

검술만으로 쓰러트린다?

검기를 발산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력, 민첩 스탯.

하다못해 체력이라도 받쳐준다면 모를까.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은 어림도 없다.'

검기를 발산하기 무섭게 체력이 빠져나가는 게 현실이란 말이다...! 그러니 『마법』까지 발현해 가면서 발버둥을 쳤단 소리였다.

'구질구질했지, 정말.'

물론, 내가 내 입으로 그 사실을 말할 리는 없으니.

철컥─

나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훌륭한 가르침이었네. 하르콘 경."

배울 건 전부 배웠다.

그 뻔뻔한 선언에 하르콘이 지그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르친 게 뭐가 있겠는가? 내가 한 것이라곤 검에 대한 경의 재능이 깨어날 수 있게 약간의 계기를 준 것뿐이지. 예시카, 에노크. 보았느냐?"

하르콘이 두 기사를 바라보며 열변을 토해냈다.

그건 일종의 정신론이었다.

"저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호열 경께서도 사투 속에서 검기를 성장시키셨다.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가짐...!"

나랑 말이 잘 통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둘 다 꼰대라는 거지.'

한 명은 격식, 다른 한 명은 정신론.

더 듣고 있다간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다.

나는 자리를 떴다.

퇴근할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야.

포탈로 향하는데 별안간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남태민?'

가온의 길드 마스터.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려는 찰나.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기, 이호열 씨 맞으시죠? 민국일보. 정만석 기잡니다. 실례가 되는 건 아는데, 짧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방금 말했듯.

격식을 중시하는 꼰대.

내 심기는 그의 첫인사부터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지적했거늘.

인간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또 유스라 왕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던 날. 같은 자리에 계셨던 이호열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커지고 있는 가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런데 질문을 쏟아내는 정만석은 떨고 있었다.

그래, 내가 평범한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언론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던 이유는 전부 이 까칠한 성격 덕분이었으니까.

정만석 또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러니 떨림을 참고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대충 질문이 무슨 뜻인지도 알겠어.'

가온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라.

다른 언론사가 그랬던 것처럼.

민국일보도 신화 길드 측 사주를 받은 거겠지.

아는 사람만 아는 찌라시 같은 게 아니었다.

'대놓고 밀어주는 꼴이니까.'

그저 인터넷 뉴스, 댓글만 봐도 알게 되는 뻔한 수작이었다.

나는 정만석을 바라봤다.

그 동공에 드리운 것은 두려움.

'그 심정, 내가 또 잘 알지.'

위에서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거겠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의 비애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바로 전해라."

그건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행동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화 길드든, 뭐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뒤에 숨어서.

사람과 언론을 교묘하게 부리는 꼬락서니를.

드높은 긍지께선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됐든 상관없다. 유스라 왕국에 원하는 게 있는가? 그렇다면 비열하게 숨지 마라. 우스운 잔머리 또한 굴리지 마라."

그따위 행동은 귀족의 자세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냉랭하게 말했다.

"내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예?"

"그에 관한 모든 권한은 내게 있으니."

"...예에에에?"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죄.

삼고초려로도 부족할 테지만.

.

.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세상은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시, 실화야. 이 동영상?!"

남태민의 말대로.

◈ 47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1)

민국일보.

기자, 정만석의 손가락이 노트북 위에서 춤을 췄다.

타다다닥─!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이호열이 누구던가?

수많은 플레이어를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그 행보가 가장 믿기지 않는 플레이어! 무엇보다도 호열의 성격은 보도국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인터뷰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그 싸늘한 눈빛에선 살기가 느껴진다.

그 정도면 콘셉트가 아니라 진심이다....

마치 도살장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기분.

"...무례하다고 마법으로 묻어버리면 어쩌지?"

진심으로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들고 온 질문이 자신이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아무리 윗선에서 받아 처먹었어도 그렇지.

이건 대놓고 신화 길드 편을 들어달라는 것과 다름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이호열이 잘도 대답을 해주겠다. 진짜."

하지만 까라면 까야 하는 사회인의 비애.

정만석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질문을 건넸다.

제발, 땅에 묻지만 말아 주세요.

간절하게 빌면서.

그런데.

"대박이다. 대박...!"

이게 웬일이야?

천하의 이호열이 인터뷰에 응해준 것이다.

단답도 아니었다.

이호열의 기준으로 굉장히 성의 있는 답변이었다.

정만석은 어깨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타다다닥─!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저격할 줄이야."

비열하게 숨지도.

또 훤히 보이는 잔머리도 굴리지 말라니.

그저 받아적는 기자의 입장이거늘.

정만석은 솔직한 심정으로 약간 짜릿했다.

'...뭔가 얹혔던 속이 내려가는 기분?'

자신을 비롯해 얼마나 시달렸던 기자들인가?

근 며칠 동안 쓰기 싫은 신화 길드 기사를 쓰느라 손가락이 썩어들어가는 줄만 알았단 말이다. 그런 상황에 호열이 대놓고 원흉을 저격한 셈.

문득, 춤추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근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라.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니.

정만석은 혹시나 했다.

"...에이, 설마. 권한이 그 권한은 아니겠지?"

권한.

영지를 소유한 플레이어에게 활성화되는 기능.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야 쓰던 말이었다.

그야 플레이어의 영지가 현실에 업데이트된 전례는 없었으니까.

절레절레.

정만석은 고개를 털어냈다.

막말로 거악, 칠죄종 탐욕을 혼자 쓰러트렸다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지."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을 얻을 정도의 관계도, 영향력을 쌓진 못하는 게 당연하다.

정만석은 말뜻을 추측해 봤다.

"뭐, 국왕 하쿠나랑 친우. 그런 관계라는 건가?"

차라리 그쪽이 가능성이 높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만석이 뻐근한 손목을 풀었다.

"뭐가 됐든 대박 특종이니까. 이건."

게다가 단독 취재.

남에게 빼앗길 염려도 없다.

호열에게 고마워서라도 성의를 다해서 써야겠지.

다시금 정만석의 손가락이 움직이려던 순간.

지이잉─

진동하는 스마트폰.

부장님이었다.

장원급제한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크흠."

정만석을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정 기자! 이호열 만났어?

만나기만 했겠는가?

본부대로 인터뷰까지 확실하게 땄다.

정만석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 만났죠."

그런데 어째 반응이 심상치 않다.

-그래? 빨리 만났네? 혹시 취재 중인가? 이호열 가까이에 있어? 그러면 당장 취재 내용 수정하라고! 신화 길드 질문 같은 건 그냥 날려버려!

"...예? 뭐, 뭐라고요? 뭘 날려요?!"

잠깐, 목숨을 걸고 따낸 인터뷰란 말이다.

정만석은 찰나지만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윽박이 되돌아왔다.

-뭐야, 정만석. 너 방금 뜬 영상도 확인 안 했어?

"...영상이요?"

아뿔싸.

그 말에 정만석은 다급히 단톡방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곳엔 넷튜브 링크가 있었다.

그건 가온 측에서 공개한 동영상이었다.

"?"

그 동영상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유스라 왕국.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어?"

그날의 진실이 있었다.

*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던 월드급 메시지.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누군가가 '이호열'이었다!

가온이 공개한 영상엔 호열과 거악, 칠죄종 탐욕의 전투가 담겨있었다.

영상 도입부.

거악이 보여주는 위압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ㅁㅊ;; 남태민이랑 레오니가 저항도 못하네

-악마는 저 상태이상이 ㄹㅇ 골치 아프다니까??

-레벨을 생각하셈 650레벨임

그래, 녀석은 650레벨짜리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제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대응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남태민이나 레오니가 나약했던 게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장면의 파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상태이상 따윈 가뿐하게 극복했다는 듯.

거악을 향해 나아가는 호열.

그와 동시에 돌아오는 화면의 앵글.

-뭐냐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임? 진짜 모름;;

-지금 이호열이 상태이상 풀어준 거 맞지?? ㄷㄷ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호열이 입을 여는 순간.

남태민과 레오니도 상태이상에 벗어난 것이었다.

그런 호열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영상에 담겨있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곳에 내가 있다.]

그 부분에 남겨진 댓글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3:50! 3:50! 3:50! 3:50! 3:50! 3:50! 3:50!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호멘

-가온 나쁜 놈들아 이걸 이제야 공개하냐ㅠㅠㅠㅠ

얼핏 들었을 땐.

오글거리는 게 당연한 말이었거늘.

극적인 상황이 오히려 대사의 맛을 살린 셈이었다.

호열이 아니었다면 남태민과 레오니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활약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믿지 못할 전개가 시작된 건 그다음부터였다.

호열과 마주하자, 거악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리고 시작된 악마 사냥.

그래, 그건 사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농락이었다.

화면에 가득 찬 다채로운 마법의 향연.

-왔다ㅋㅋㅋㅋ돌기둥ㅋㅋㅋㅋㅋㅋ

-잠깐만 저 반짝이는 건 또 뭐임??

-생긴 게 꼭 총탄 같은데... 아니 이건 또 뭐냐?!!

-갑자기 화살이 됐는데???

그건 말로도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찰나의 시간.

얼마나 복잡한 스킬이 연계된 것이란 말인가? 그 장면을 저배속으로 재생하며 수십 번씩 들여다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내린 결론도 결국엔 똑같았다.

-그저 호멘

남철민이 호언장담했듯.

분석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 활용이었다.

[말이 되질 않는단 말이다. 내가 어째서 인간에게...?]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거악, 칠죄종 탐욕.

결국, 녀석은 비굴한 제안까지 건네왔다.

[그래! 좋다! 나와 계약을 하자! 나와 계약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보이지 않느냐?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모두 네 것이 되는 것이다!]

꼴깍─

거기서 군침을 삼킨 이들이 꽤 많았다.

그야 더없이 혹하는 제안이었으니까.

하지만 호열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모습이 추악하구나. 어리석은 악마여.]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냉랭한 목소리.

그것으로 전투는 끝이나 다름없었다.

[사, 살려줘! 아, 아직 죽고 싶지 않...!!]

목숨을 구걸하는 거악, 칠죄종 탐욕.

호열의 말대로였다.

거악이라고 한들.

호열의 앞에선 하찮은 악마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자비는 없었다.

어느샌가 손에 쥔 은제 단검.

서걱─

호열이 그대로 거악의 목을 쳤다.

-...와씨. 영화 벌써 끝났냐?

-아니!! 아직 끄지 마셈 쿠키 영상 남았다!!

-뭐야, 이제 보니까 저거 하쿠나 아님? 유스라 국왕이잖아

거악의 지배에서 벗어난 유스라의 왕.

그런 왕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주는 호열의 모습.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그 호열의 마지막 대사와 동시에.

엔딩 크레딧처럼 자막이 떠올랐다.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집 편집 잘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바지부터 갈아입고 온다

-그냥 이호열 대사 하나하나가 버릴 게 없음ㅋㅋㅋ

-이호열? 당장 호열 님으로 정정해라

-이거 편집하느라 지금까지 공개 못 한 거면 ㅇㅈ한다

그 파장은 넷튜브를 넘어 전 세계로 퍼져갔다.

속보는 기본.

긴급 편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국도 있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까? 이호열은 정보 공개를 하지 않은 최상위권 랭커가 확실하다고. 그 증거가 이렇게 영상으로 나온 겁니다!"

당연하게도 전부 호열을 둘러싼 이야기였다.

하지만 영상이 공개됐음에도.

호열에 대한 신비감은 꺼지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그런데 아무리 전투 영상을 분석해도 알 수가 없어요! 심지어는 그 클래스조차 짐작되질 않습니다. 마법사 계열이란 건 확실해 보이는데...."

"최소 500레벨. 아니, 550레벨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랭킹으로 유명세를 끌기 싫어 비공개로 놔뒀다는 주장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네요. 거악을 쓰러트리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는데. 그 사실을 지금까지 밝히지 않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어째서 지금 시점에서 이 영상이 공개된 것인가?

우스갯소리로 정말 편집에 공을 들인 탓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정말 누구 하나 예상치 못하게도.

대한민국의 한 일간신문에서 나왔다.

──────

[단독] 이호열, "유스라 왕국의 권한은 내게 있다… 숨지도, 잔머리도 굴리지 않는 게 좋아… 원하는 게 있다면 내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밖에.

실시간으로 폭발하는 기사의 댓글창.

그래, 이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와ㄷㄷ 상상도 못했다ㄷㄷㄷㄷㄷ

-신화랑 엮인 정치인들 똥줄 타겠네ㅋㅋㅋㅋㅋ

-ㄹㅇ개꼴보기 싫었는데 속시원하다ㅋㅋㅋㅋ

-이런 큰 그림이 있어서 영상 공개한 거였네ㄷㄷ

-이게 영웅이 아니면 뭐임?ㅋㅋㅋㅋ

추잡하게 얽히고설킨 재벌 길드 신화와 기득권층.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그들을 향한.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꼿꼿한 선전포고.

*

대한민국 재계 서열 1, 2위를 다투는 신화 그룹.

신화 그룹의 상징 중 하나인 서울 디럭스 미스 호텔.

최상층 프라이빗 룸.

그곳엔 함께 있어선 안 될 두 남녀가 있었다.

물론, 단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뿐.

침대에 누워있는 건 사내, 혼자뿐이었지만.

"음몽(淫夢)에 취한 모습이 우습구나."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

그녀는 황홀한 꿈에 취해있을 사내를 바라봤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어리석기는."

쾌락에 젖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서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겠지. 명성, 가족,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내팽개쳐 버린 채 말이야.

"그 바보들처럼."

훗─

백이설이 코웃음을 치기도 잠깐.

사내의 몸에서 빠져나온 정기가 백이설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백이설의 동공이 순간, 새까맣게 변했다.

지직─

세계 최고의 호텔 중 하나인 서울 디럭스 미스 호텔.

그중에서도 VIP를 대상으로 비밀리에 운영되는 프라이빗 룸이었다.

관리의 수준을 생각하면 전구가 깜빡거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지직거리는 전구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대로라면 상급 악마가 되는 것도 머지않았어."

백이설이 악마에게 빙의 됐다는 것.

백이설은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 한강이 아닌.

창가에 비친 자신을 보고 말을 걸었다.

"어때? 점점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니, 우리 아가씨?"

길고 하얀 손가락이 창문에 비친 백이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혹적인 음성이 이어졌다.

"물론, 네가 생각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쩌겠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인걸."

올라가는 입꼬리.

그 미소는 틀림없이 악마의 기만이었다.

"그래도 무너트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정기를 흡수했으니 용건은 끝났다.

백이설은 그대로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왔다.

대기하던 수행비서가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혹시 기사 확인하셨습니까?"

"이호열 씨 인터뷰를 말하는 건가요?"

"...알고 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프라이빗 룸에 입장하자마자 사내는 재워버렸으니까.

백이설에게 스마트폰으로 속보를 확인할 시간은 충분했다.

수행비서는 백이설의 반응에 흠칫했다.

'...알고 계셨다니. 자칫 잘못하면.'

신화 길드의 모든 게.

심지어는 오늘을 포함한 그간의 밀회까지.

세상에 훤히 드러날 수도 있는 위기란 말이다.

그런데 백이설에겐 조금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레오니 씨가 아니어서."

"...?"

"일이 굉장히 피곤해질 수도 있었는데."

백이설의 말에 수행비서의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백이설이 수행비서의 뺨을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 대표님...!"

"당신에겐 늘 신세만 지는군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겠지.

수행비서는 자신이 음마(淫魔), 서큐버스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당장 자신 또한 음몽의 희생자란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래, 수행비서뿐만 아니었다.

침대에 나자빠진 정부 관료부터.

기업인, 초신성, 심지어는 랭커들까지.

수많은 음몽의 희생자들이 백이설.

아니, 중급 악마 서큐버스에게 자신감이 되어준 것이다.

'혼자서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그게 사실이라도 상관없다고 여길 정도로.

'후후. 거악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나보구나.'

이호열, 그가 사내인 이상.

자신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

백이설이 수행비서의 뺨에서 손을 뗐다.

"모습을 드러내라고 하셨으니 드러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어디까지 드러내길 원하시는 걸까요? 지금보다 더 과감한 의상을 골라야 할까요?"

백이설이 눈꼬리가 휘어졌다.

"내일 일정은 전부 비워두도록 하세요."

이호열, 그를 만나기 위해 유스라 왕국으로 가겠다.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는 꿈에 부풀었다.

'상급 악마가 뭐야. 내가 거악이 될 수 있을지 몰라!'

자신의 발로 향하는 그곳이.

천적의 영역인지도 모른 채.

◈ 48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2)

치밀하게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당연히 해내야 할 일을 해냈을 뿐.

그러니 세운 업적은 떠벌리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을 숨기는 것 또한.

귀족의 태도와는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결국 피곤한 성격 때문이라는 거지.'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달칵─

"심히 유난스럽구나."

정말이지 담백한 감상이시다.

과거의 나였다면 말이야.

티타임은 개뿔.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반응이란 말이다.

폭발적, 아니 그것도 부족하다.

말 그대로 핵폭발 수준의 파급력이었다.

일단, 가온 측에서 공개한 거악과의 전투 영상.

'그 모습이 녹화되고 있었을 줄이야.'

원래는 몬스터의 패턴 분석 목적이었다고 했나.

거기에 우연히 내 모습이 찍힌 덕분에 나는 수고를 던 셈이었다.

아직도 내 말에 흠칫하던 기자, 정만석의 표정이 생생했으니까.

"그저 믿으면 되는 것이거늘."

무슨 교주처럼 말하는 나였지만.

그게 어디 믿기 쉬운 소리란 말인가?

유스라 왕국의 권한이 내게 있다는 건.

내가 유스라 왕국에서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웠고, 그 업적을 바탕으로 막대한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았단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현시점에서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업적?

기자로서의 눈치가 있다면.

그쯤에서 알아차렸을 거다.

내가 거악에게서 유스라 왕국을 구해낸.

월드급 메시지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

거악, 칠죄종 탐욕.

녀석은 650레벨, 그것도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결국, 하찮은 악마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뻔뻔하게 말하고 있지만.

라이언 하트 기사단, 가온과 버서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드넓은 황금 궁전에서 녀석을 찾지도, 찾는다고 해도 마력 고갈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아는 건 오직 나 혼자뿐.

게다가 편집 덕분일까.

영상 속의 나는 내가 봐도 강해 보였다.

정말 무슨 히어로 영화 보는 기분도 조금 나고 말이야.

그래, 다 좋았단 말이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지.

'빌어먹을 흑역사.'

언제나 이놈의 입방정이 문제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하쿠나에게도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 왔거늘.

내 흑역사를 바로잡을 시간은 대체 언제 오는 거냐고!

무엇보다 치욕스러운 건.

그 영상이 넷튜브를 비롯한 온갖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는 거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애증의 존재들이 내게 톡을 보내왔단 소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ㅁㅊ놈

굳이 동영상 링크까지 첨부해서 보내온 메시지.

나의 원수, 이예림이었다.

-열아 어째 갈수록 멋있어진다잉?

-근데 그 중2병 컨셉은 언제까지 고집하는겨?

-아니다 보니까 계속해도 되겠다~ 반응 좋네~

2호, 이지윤은 하나도 아닌 세 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막내야! 갈수록 듬직해지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아랑이도 삼촌이 왕자님 같다고 난리야! 언제 삼촌 볼 수 있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봐.

큰누나, 이은혜.

...그래, 큰누나는 착하니까.

그런 뜻으로 보낸 게 아니겠지만.

'...아랑아. 당분간 삼촌 볼 생각하지 말아줘.'

첨부된 사진.

TV 속 나를 보고 해맑게 웃는 아랑이의 모습.

조카에게 흑역사를 들킨 듯한 이 기분.

이 쪽팔림은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조금의 내색도 없다.

더없이 꼿꼿한 자세.

나는 차분하다 못해 경건하게 답장을 보냈다.

-전부 누님들께서 지켜봐 주신 덕분입니다.

빌어먹을, 예절과 격식.

윗사람인 누나들에게 공손한 태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곧바로 웬수의 메시지가 올라온다.

-언니들 얘 진짜 미쳤나봐

...됐다.

말해봤자 더 이상 말해봤자 피곤해지는 건 나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어서 떠오르는 큰 누나의 장문 메시지.

-엄마 아빠도 이번에 네 모습 보고 걱정 같은 거 한시름 덜어내신 것 같았어! 그전까지 말씀은 안 하셨어도 걱정 많이 하신 것 같았거든ㅜㅜ

어쨌거나 긍지 덕분에 가족들 걱정은 시키지 않게 됐으니까.

내가 오늘만큼은 효자다.

'이제부터는 내 걱정만 하면 되겠구나.'

나는 치솟는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참이었으니까.

'왜, 신화 길드 말이야.'

신화 길드는 내 심기를 거스른 죗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었다.

언론 뒤에 숨었던 만큼 그 역풍을 제대로 맞고 있는 거겠지.

"허나, 부족하다."

물론, 네티즌의 댓글 폭격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인터뷰가 아니었으면 말이야.'

내가 이런 치욕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을 터.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 수치심은 몇 배로 돌려주고 말겠다....

*

방송국 사이에선 눈치싸움이 한창이었다.

누가 먼저 이호열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것인가!

현재의 이호열의 화제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저 단독으로 이호열을 앵글에 담는 것만으로도.

최소 20퍼센트는 넘기는 시청률을 보장받겠지.

그러나.

"진짜 시청률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 가고 싶겠어?"

"안 그래도 까칠한 성격이 더 까칠해졌을 텐데."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설 수 있을까.

가뜩이나 취재하기 어려웠던 이호열.

그런 이호열이 사실 650레벨 몬스터를 혼자 쓰러트릴 정도로 강했단다.

그것도 모자라 여태까지와 다르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한 상황이다.

투데이 아르카나, PD 현용석.

일명 시청률에 미친놈도 이번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종진이 헬기 타다가 죽을 뻔했던 게 얼마 전인데. 또 사지로 보낼 순 없지. 이번엔 내가 한 번 참아줄게. 종진아."

현용석조차 그렇게 나오는데.

다른 방송국 상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호열은 포기하자.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고 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방송국 놈들이 아니었다.

이호열만큼은 아니고, 또 이호열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열렬한 반응이었지만....

시청률 하나만큼은 보장된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신화 그룹 본사 반응은 어때?"

신화 그룹 빌딩.

설치된 포토라인에는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도 가득 차 있었다.

사실상 이호열에게 공개적인 저격을 받은 신화 길드였다.

그 신화 길드는 신화 그룹의 계열사와 다름없었으니까.

찰칵─

연습 삼아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 하나가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보통이 아니네요. 신화도."

"그러게요. 정면 돌파를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여튼 우리 같은 일반인들로서는 플레이어들의 머리를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요?"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

그녀는 이호열의 인터뷰에 대한 답을 곧장 내놓았다.

──────

[속보] 신화 길드 백이설, "이호열, 찾아가겠다."

──────

다시 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태도였다.

아아─ 입을 풀고.

대본을 숙지하던 앵커가 감독에게 말했다.

"깔끔하게 인정해 버린 거잖아요? 비열하게 숨은 것도, 잔머리를 굴린 것도 다 자기들이라고. 뭐,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잡아떼려고 했으면 끝까지 잡아뗄 수 있었을걸? 왜, 우리 방송국만 해도 봐봐. 신화 놈들이 높으신 분들 멱살을 꽉 휘어잡고 있잖아."

"하긴 보도국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었죠. 자기들이 무슨 욕받이냐고."

이젠 여론조차 돌아선 마당에 정면 돌파라니.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건가?"

앵커가 중얼거리자 감독이 대꾸했다.

"아, 백이설 씨는 처음 보는 거지?"

"...네? 그렇죠. 실물은 처음이죠?"

"그럼, 그럴 만도 하지. 이따가 한번 봐봐."

"예? 뭘 봐요?"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될 테니까."

"...?"

보면 알게 된다니.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커지는 대답.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 나왔다!"

찰칵─!

곧 백이설이 포토라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그러나 백이설은 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어깨 위에 걸친 코트.

아래로 언뜻 보이는 파격적인 의상.

그러나 그보다도 화려한 외모.

백이설.

그녀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했었나.

앵커는 백이설과 마주하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예쁜 걸 넘어서.'

매혹적이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건 자신의 본업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감독이 넋이 나간 앵커에게 뻐끔거렸다.

-뭐해? 큐 싸인 떨어졌어!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앵커가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지금 신화 그룹 본사 앞에 나와 있습니다!"

.

.

.

마탑.

포탈에서도 백이설의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취재진은 떨어져 나갔다 해도 넷튜버 플레이어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에게도 이건 시청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큰 떡밥이었으니까.

왜, 딱 봐도 각이 보였다.

"저도 균열 뺑뺑이 돌던 시절에 신화 길드 놈들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네, 주작은 하지 말라고요? 어떻게 아셨어요?"

극과 극.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이호열.

마찬가지로 비호감의 끝을 달리는 신화 길드가 아니던가.

그 결과가 어떻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

넷튜버들에겐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었다.

-이게 화제가 되는 것도 웃긴다ㅋㅋㅋ

-ㄹㅇㅋㅋ 호열 님을 뭘로 보는 거임? 다들

-신화 길드 마스터에 재벌이면 다냐? 그렇게 따지면 이호열 뒤엔 유스라 왕국이 있는 건데ㅋㅋㅋ

-버르장머리 없게 뭐 이호열?! 저게 미쳤나

"맞습니다. 우리 호열 형님이 정의 구현 제대로 해주시겠죠!"

적당히 이호열 편을 들었다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신화는 정치인들 등에 업은 게 팩트라;;;;

-ㄹㅇ 그냥 좀 쉽지 않을 것 같은디?

-그리고 백이설이 협상 하나는 기가 막히잖아

-능력은 확실하지 ㅇㅇ;;

"역시 시청자 형님, 누님들.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또 적당히 위기감을 조성하면서.

시청자를 끌어모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거기에다가 살짝 눈치를 보면서 수금까지.

"그럼 또 우리 호열이 형님을 응원하는 마음에서 리액션 시원하게 한 번 가볼까요? 예? 응원하는 건 이호열인데, 돈은 왜 제가 받냐고요? 아니, 저도 먹고살아야지...."

자신을 둘러싼 소란.

그러나 그녀는 작게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어디 마음껏 지껄여 보렴."

어리석기는.

그 반응이 뒤바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는 포탈을 향해 나아갔다.

몸에 남아있는 백이설의 기억이 포탈이 어떤 것이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해줬다.

서큐버스는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혀를 찼다.

'어리석은 인간 주제에.'

쓸데없이 귀찮게 한다.

이내, 서큐버스의 시야에 들어온 유스라 왕국.

과연 이곳에선 고향의 분위기가 풍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번째 고향이려나.

언제까지나 자신은 지옥에서 태어난 악마였으니까.

서큐버스는 곧장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저게 내 손에 들어온단 말이지.'

이호열.

그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거란 상상은 하지 않았다.

백이설의 육체를 차지한 뒤, 자신은 급격하게 성장한 상태였으니까.

그래, 백이설의 기억에 남아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레벨이 올랐단 소리겠지.'

상급 악마를 넘볼 수 있을 정도로.

거기에다가 이호열도 어쩔 수 없는 사내가 아닌가.

"무슨 용건이십니까?"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 여기사와는 다르게.

그녀를 멈춰 세운 건 예시카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유스라 왕실 근위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백이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백이설입니다. 이호열 씨를 만나러 왔답니다."

예시카는 두말하지 않았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난 예시카였거늘.

서큐버스의 눈은 예리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구나.'

이호열, 그를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내는 전부 똑같은데 말이야.'

예시카의 실망한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황홀했다.

그래서일까,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에서 워낙 떠들어대야 말이지.

"드디어 도착한 거 같은데요?"

"쉬는 타이밍에 좋아요, 구독 부탁드립니다."

"...저도 들어가 보라고요? 아니, 제가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너무하십니다, 정말! 라이언 하트 기사단한테 칼 맞아 죽을 일 있습니까!"

그리고 예시카가 돌아왔다.

"...?"

그런데 어째서인가.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예시카는 이번에도 두말하지 않았다.

"돌아가시랍니다."

...잠깐만, 뭐라고?

도, 돌아가라고?

서큐버스는 어이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다.

제대로 전하지 않았겠지.

"똑바로 전한 건가요? 신화 길드의 백이설이 찾아왔다고...."

예시카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만남에 허비할 시간이 없다. 돌려보내라."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분명 그리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

"...."

그러나 넷튜버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뭐야, 그냥 거절도 아니고 문전박대?"

"분명 허비할 시간이 없다 했죠? 그럼 백이설과의 만남이 시간 낭비와 다름없다는 소리...?"

"혀, 형님들! 이거 백이설이 제대로 차인 것 같은데요?!"

◈ 49화. 허나, 숨어도 소용없다 (3)

빠득─

백이설, 아니 서큐버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건 당연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자존감이 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게다가 주변에서 쫑알쫑알.

신경을 돋우는 하찮은 인간들까지.

"와씨. 백이설 되게 쪽팔릴 것 같은데요?"

"표정 좀 잡아달라고요? 뒤돌 때 싹 클로즈업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저 기사님도 아름다우시네. 이따가 이름이라도 물어볼까요, 형님들?"

서큐버스는 이를 갈았다.

'...네가 감히?'

고작 인간 주제에 나를?

이호열이고 뭐고.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영악했다.

자신이 악마란 사실도 여태껏 들키지 않고 숨겨왔거늘.

고작 표정 하나를 숨기지 못할까.

"어쩔 수 없네요.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서큐버스가 예시카에게 웃음 지으며 돌아섰다.

'우쭐대는 것도 오늘만이란다.'

그래, 반전은 극적일수록 커지는 법이다.

오늘이야 시간이 맞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신과 마주하기만 한다면.

이호열이 매혹에 빠지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뭐든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두렴.'

이호열이든, 유스라 왕국이든, 저 건방진 여기사든.

결국, 내 음몽 앞에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서큐버스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고작 한 번의 문전박대.

복수는 비로소 시작된 참이었으니까.

.

.

.

정치, 사회, 스포츠, 연예....

신문은 그 면마다 다루는 주제가 다른 법이다.

당연하게도 다루는 취잿거리 또한 다를 터.

하지만 그 1면을 동시에 장식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신화 길드의 마스터 백이설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정치, 사회면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

박삼봉 의원, "원활하지 못한 협상 아쉬워... 신화의 성장은 대한민국 성장이라 봐도 될 것."

[단독] 기재부 관계자 曰, "낙수 효과는 증명된 이론... 신화 길드가 살아야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난다."

──────

재벌 그룹이던 시절부터 길드에 손을 뻗친 지금까지.

신화는 정치, 사회면의 단골손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예면까지 1면을 장식할 줄이야.

──────

[단독] 백이설, 밀당에서 완패? 팜므파탈 무너지나?

──────

그것도 굴욕적인 타이틀, 사진과 함께!

그 기사 사진에 당당했던 백이설의 모습은 없었다.

황금 궁전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백이설의 뒷모습.

그 아래에 붙은 짧디짧은 사족까지.

──────

▲일곱 번째 문전박대의 순간.

포토라인 앞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

삼고초려를 가뿐하게 넘겨.

무려 십고초려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안쓰럽게 느껴질 법도 한 뒷모습이었거늘....

유감스럽게도 백이설을 향한 동정론은 피어오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

-ㅋㅋㅋㅋㅋㅋ이럴 줄 알았다 내가

-이호열이 만만하냐고 아ㅋㅋ

-업보 제대로 돌려받네 쌤통이다

-정의구현ㅋㅋ

──────

그래, 모든 게 업보였다.

백이설의 동공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네가 쌓고 있는 것도 업보겠지."

...이호열!

인간에게 수차례 망신을 당한 악마로서의 굴욕.

마찬가지로 구겨진 서큐버스의 체면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배로 무너트린 그 사내.

이 수치심을 떠올리면 간신히 숨겨온 악마의 모습이 지금처럼 튀어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참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이야말로 그 업보를 치르게 해주겠어."

상급 악마를 넘볼 정도로 강해진 만큼.

끓어오르는 악마의 본성 또한 짙어졌으니까.

서큐버스는 흘러나오는 악의를 간신히 추슬렀다.

그리고 황금 궁전으로 향했다.

오늘도 거절을 당한다?

상관없었다.

오늘은 이호열,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니까.

기다리며 심심할 일도 없겠지.

시건방진 여기사와 눈싸움을 하면 되니까.

...그렇게 다짐했는데.

"안내하겠습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거늘.

보다시피 황금 궁전에 입성하고 말았다.

서큐버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명을 재촉하는군.'

과연.

이호열, 그 역시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했다.

그의 정기를 취할 생각을 하니 간신히 추스른 악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억누를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목전까지 온 참이니까.

"들어가시면 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예시카.

서큐버스는 곧바로 문을 두들겼다.

'...참을 수 없어!'

순간, 치솟는 갈증.

이호열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호열과 마주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곧은 자세.

호열은 책상에 앉은 채.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말했다.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다니."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잠깐만, 무언가 잘못됐다.

서큐버스는 그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호열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싹─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게 굳어오는 듯한 느낌.

그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

굴욕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오만한 시선.

이호열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백하게.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설마 악마라는 걸 눈치채고선 나를 여기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알아차리기 전에 도망쳐야 해.

매혹으로 시간을 벌자.

...자, 잠깐! 어째서 매혹에 빠지지 않는 거야?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서큐버스.

그 악마의 귓가에 천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

.

.

의아하단 생각은 들었다.

그건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최근 들어선 저희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했죠. 아무리 로비를 했다고 해도 대놓고 욕먹을 정도로 밀어줄 양반들이 아니거든요. 그 구렁이 같은 양반들이?"

원래 정치판이 그런 곳이니까.

이해관계에 따라 학연이고, 지연이고, 혈연이고.

끊어내고 갈라서는 게 그쪽 동네란 말이다.

"확실히 뭔가 있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걸 저희 측에선 알아낼 수가 없어서. 괜히 호열 씨를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서 면목이 없습니다. 정말."

남태민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왔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까 알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백이설이 악마에게 빙의됐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심지어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말이야.

번거롭게 몇 번씩 되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악마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 돌아다닌다?

유치한 복수를 떠나 그랑펠의 설정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래, 그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꿈에도 몰랐을 거란 소리다.

천적관계가 발동됐다가 꺼져버린 건.

정말 찰나였으니까.

'기척을 완전히 숨기지 못한 거겠지.'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신화 길드와 정치인들의 관계가.

'다른 것도 아닌 악마들의 상태이상이라면?'

플레이어도 아닌 민간인들을 다루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테니까.

그것이 내가 백이설을 들인 이유였다.

또각또각─

점점 커지는 구두 소리.

그와 동시에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백이설은 악마다.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문을 열다니.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나는 깃털 펜을 든 채 입을 열었다.

적어나가던 것은 흑마법의 기초 이론.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과연, 새까맣게 물든 백이설의 동공이 보였다.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꼿꼿하게 책상에 앉은 채로.

여전히 깃털 펜을 손에 쥐고는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허세가 가득한 태도가 따로 없었겠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아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떨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백이설이었으니까.

천적관계.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 스킬의 효과를 다시금 체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거악을 처치하기 전후, 굉장히 달라진 상태였으니까.

단순하게 레벨만 하더라도 그랬다.

거악, 칠죄종 탐욕을 처치하며 단숨에 50레벨이 상승했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레벨, 스킬, 수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장도 빼놓을 수 없다.

마탑에서 마법 서적을 독학하며 발전한 마법 발현력은 물론.

입문자 수준에 불과하지만 흑마법.

그것도 모자라 검술 훈련까지.

'결국, 이번에도 있는 거 없는 거 모조리 끌고 왔잖아.'

구질구질하든 어쨌든.

그 모든 성장이 나의 전투력이 됐단 말이다...!

성장한 전투력이 [천적관계]의 효과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게 느껴졌다. 느끼고 있는 건 백이설의 몸에 빙의한 악마도 마찬가지겠지.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이제 와서 발뺌하다니.

사리 분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 이유가 있던 거였어.'

수모를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와 만나려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그 목적도 짐작이 갔다.

유스라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나를 상태이상에 빠트리려는 계획이었겠지.

하지만 그 고생이 유감스럽게도.

나는 사냥감과 불필요한 말은 섞지 않는 주의다.

슥─

곧장 발현되는 마법.

복잡한 간섭 과정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와 녀석에겐 거스를 수 없는 체급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그 체급 차이는 [구마의식]에 악마의 아이템을 소모하지 않아도 될 정도.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필요한 건.

오직 악마에게만 피해를 주는 기본 효과뿐.

녀석을 의식에 초대할 필요도.

정신력 싸움도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그거야 녀석은 이미 공포에 질려있었으니까.

"나는 더 이상 중급 악마가 아니란 말이다! 상급 악마,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내 유혹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상급 악마?

거악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긍지다.

설령 '마왕'을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 당당한 태도에는 조금의 변함도 없겠지.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찮은 악마 따위에게 그 사연을 설명할 정도로.

그랑펠은 친절하지 않았으니까.

허공에 떠오른 건 수천. 아니, 수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은 단침.

[순수한 은털]

[등급 : 매직]

[제한 : 없음]

[효과 : 없음]

[설명 : 모피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순수한 은이다. 은이기에 절대적인 가치는 크지 않지만, 활용에 따라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무엇하나 허투루 사용할 수 없는 나의 발버둥.

검기 훈련 도중 쓰러트린 몬스터.

은빛 갈기 표범에게서 획득한 재료 아이템이었다.

나는 그 재료 아이템을 탐색해 무기처럼 활용할 가능성을 발견했었다.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건.

[스킬]로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마법』의 창의적인 발현.

스스륵─

털 하나하나가 나의 무기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재료 아이템을 날렸다고 아까워할 이유도 없었다.

은제 단검이 그랬던 것처럼.

『반전 마법』이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으니까.

망설일 게 없다는 소리였다.

스스슥─!

수만 개의 은제 단침이 백이설에게 쇄도했다.

공격력이 존재하지 않는 재료 아이템이기에.

그 파괴력은 오로지 나의 마력에 달렸겠지.

때문에 일격으로 끝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으, 으아아악!!"

풀썩─

백이설이 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연기를 하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급 악마라면서?

내가 급격하게 성장했다고 한들.

방금 마법은 제대로 된 공격 마법도 아니었다.

연금술에 기반한 단순한 견제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래서 의심도 해봤다.

과연 비열한 악마답게 죽은 척 연기까지 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아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백이설의 몸을 차지했던 게 정말 상급 악마였단 것도.

내가 그런 상급 악마를 압살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도.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잠깐. 몇 레벨이야, 이게?

◈ 50화. 프로스트 (1)

신화 그룹.

백이설에게 신화는 언젠가 무너트려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아래에서 무너트릴 수 없다면.

그 꼭대기에 올라서서라도 무너트려야 하는 산.

"독한 년."

백이설의 어머니는 그렇게 불렸다.

백이설은 아버지, 아니 백 회장의 배다른 자식이었으니까.

불공평한 일이었다.

잘못한 건 백 회장인데 손가락질을 당하는 건 엄마라는 게.

불합리한 일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신 것도.

-부디 조용히 살거라. 설아.

누구 하나 찾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백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백이설은 그 불합리를 참을 수 없었으니까.

독한 년이라고 그랬겠다.

그럼 독한 년의 피를 물려받았을 내가.

이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으로.

신화를 중독시켜 죽여버려야지만 이 원한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격변은 기회였다.

아니, 운명이었다.

과거,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시작했던 아르카나.

그런 아르카나가 현실이 됐다.

백이설은 그 운명을 놓치지 않았다.

제 발로 신화라는 호랑이 소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백 회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

[단독] 신화 그룹 백주성 회장, "백이설은 내 딸이다."

──────

신화 길드의 마스터가 되었다.

신화 길드가 신화 그룹의 정식 계열사가 되었다.

그래서 기쁘냐고?

유감이지만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을 텐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느낌.

정신이 돌아오는 때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올 때밖에 없었다.

"어때? 점점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니, 우리 아가씨?"

호텔의 전경.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저건 분명 자신이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의 비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가락도.

심지어는 말 한마디조차도 뱉을 수 없었다.

그런 백이설을 비웃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네가 생각한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후회한다고 해도 어쩌겠니?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인걸."

...그 말에 떠올렸다.

그래, 자신의 몸을 차지한 건 악마였다.

균열에서 마주쳤던 서큐버스.

그날의 기억이 찬찬히 돌아왔다.

균열 공략은 실패였다.

악마족 몬스터라니.

그런 변수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었으니까.

찌릿─

백이설은 자신에게 검을 겨눈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서큐버스의 상태이상에 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백이설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복수는 이제야 시작됐단 말이다.

백이설은 주먹을 쥐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백이설에게 악마는 속삭였다.

"황홀한 눈빛이야. 마음에 들었어."

[중급 악마, 서큐버스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빙의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백이설은 착각했다.

악마란 족속이 어떤 족속인지.

영혼을 판다고 그랬나?

거래를 떠나서.

악마에게 인간은 그저 전부 똑같았으니까.

그저 기만에 놀아나는 하찮은 존재.

후회한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단 소리였다.

백이설은 그제야 깨달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어.'

그래,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담하고 다시 무의식 속에 잠드는 과정을.

자신은 몇십 번이고 반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건 백이설을 더욱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다음엔 악마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과연, 하찮은 악마답다."

'...?'

그런데 뭘까, 이 목소리는.

하찮은 인간도 아니고 악마라니...?

그건 서큐버스가 아닌 사내의 목소리였다.

서큐버스조차 당황한 걸까.

동요하는 바람에 무의식 속에 잠들었던 백이설이 깨어났다.

그리고 백이설도 보게 되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마치 악마의 유혹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이, 이건 말도 안 돼!!"

악마를 사냥하는 호열을.

"아아악!!"

백이설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통쾌하다?

아니,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자신도 악마와 함께 숨을 멎어가는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단 고마워요.'

호열에게 감사하다는 것.

기억에 떠오르는 서큐버스의 만행.

그건 정말이지, 토악질이 나올 정도였다.

더 이상 그런 추태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죽을만한 보람이 있었네.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

슥스슥─

일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서명할 때나 들었던....

그래,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를 긋는 소리.

'...뭐야?'

뭔진 몰라도.

지옥에 떨어지고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이내, 천천히 눈꺼풀을 뜬 백이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역시나 호열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같은 한결같은 자세로.

무언가를 적어나가는 호열의 모습.

백이설은 눈을 몇 번 깜빡여보고는 현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나, 살았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상황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런.'

서큐버스에게 빙의됐었단 사실도.

그 때문이라고 해도 추태를 부리려던 것도.

호열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고마움을 떠나 창피한 게 당연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백이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던 때였다.

"정신이 드는가."

"...!"

호열이 말을 걸어왔다.

백이설은 반사적으로 호열을 쳐다봤다가 흠칫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세에 흐트러짐은 조금도 없었다.

...혹시 옆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로.

그 상태로 호열은 말을 이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나누도록 하지."

...상세한 이야기라니?

빠른 상황 판단.

백이설은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이런 협상 자리는 익숙했다.

그러니까 입장 정리도 빨랐다.

'...나는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입장.'

호열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갑.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자.

백이설은 어떤 거래가 됐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애써 굴렸던 머리가 무색하게도.

되돌아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되물음이었다.

"무언가를 제시해야 할 처지는 그대가 아닌가?"

"...?"

그것은 진정한 갑(甲).

"나는 아직 그대의 제안을 듣지 못했네. 유스라 왕국 재건에 참여하기 위해 신화 길드는 어떤 투자와 위험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를. 다음 만남에서는 확실하게 제시하게."

"...!"

비열하게 누군가의 뒤에 숨지도.

빤히 보이는 잔머리 또한 굴리지 않는.

그야말로 귀족으로서의 자세.

호열의 말에 백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습니다."

이런 상대를 멋대로 착각하고 오해하다니.

감사와 사과의 뜻을 담아서.

백이설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진심을 담은 제안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한마디로 나사가 빠진 상태.

거기에다가 검기 발산이라는 낯선 전투 방식까지.

그런 나는 기껏해야 350레벨짜리 몬스터.

그것도 고작 한 마리를 쓰러트리는 데에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레벨을 생각하면 그것도 대단한 거였지만.

그동안 쓰러트린 악마족 몬스터의 레벨을 생각하면 확실히 낮은 수준이었으니까.

그 탓에 내 레벨은 230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생각하면 결코 느린 속도는 아니겠지.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거지.'

하지만 그 맛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내심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38]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0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8]

백이설에게 빙의한 악마를 쓰러트렸고.

그러자 단숨에 8레벨이 상승한 것이었다...!

전리품이고 뭐고 마냥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는 악마를 사냥해야 한다.

나처럼 악마 사냥꾼이 천직인 사람이 또 없을 거다.

'어쨌든, 자화자찬보다.'

악마족 몬스터.

또 한 번 녀석들의 악랄함을 깨닫게 된다.

확실히 악마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랐다.

균열이 붕괴되고 놈들이 뛰쳐나온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알아차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인간에게 빙의하면 그만이니까.'

왜, 가장 약한 하급 악마 임프만 하더라도.

플레이어에게 쉽게 빙의할 수 있었잖아?

남철민이 당했던 것처럼.

'그것도 모자라 악마는 강해질수록 비열해진다.'

임프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정도로 티를 내기라도 하지.

백이설의 경우엔 악마에게 빙의 당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알아차린 이들이 없었다.

스슥─

문득, 나는 필기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심히 나를 번거롭게 하는구나."

어쩌면 백이설이 특이한 경우가 아닐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지금도 현실, 사회 곳곳에 악마가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겠지.

"내 연구를 방해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내겠다."

...그래, 나는 몰라도.

그랑펠이 그 꼴을 두고 볼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 사실 나로서도 나쁜 장사는 아니겠지.

기본적으로 악마족 몬스터는 레벨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악마족 몬스터의 천적이니까.

...오히려 이런 현실을 반가워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에 빠지기도 잠시.

지이잉─

문득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덧이 없구나."

그래, 하루라도 빼먹으면 서운하지.

오글거리는 대사도 잠깐.

알림을 확인했다.

음, 이건 꽤 중요한 일이다.

나는 드디어 깃털 펜을 내려놓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새롭게 떠오른 신규 업데이트를 확인하기 위해서.

.

.

.

커뮤니티엔 플레이어들의 설레발로 가득했다.

-일해라 레이먼 일해라 레이먼 하니까 진짜 일하기 시작하네ㅋ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드디어 정신 좀 차렸나?

-그래 이 정도 업뎃은 해줘야 밸런스가 좀 맞지ㅋㅋㅋ

크고 작은 균열이야, 별다른 업데이트 없이 계속 생성되고 클리어되고 있다 하더라도.

최근 신규 업데이트 콘텐츠의 밸런스 조절은 완전 실패였으니까.

아스큐라 백작도 너무하다 싶었거늘.

보물섬의 탈을 뒤집어쓴 거악이 나타날 줄이야.

그때 분위기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다.

-ㄹㅇ루 지구 멸망하는 줄ㅋㅋ

-이호열 없었으면 진짜 망했을지도ㅋㅋㅋ

-그저 호멘

그러니까 이번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 플레이어들이 환호하는 건 당연했다.

이건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업데이트였으니까.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북부 도시, 프로스트'가 추가됩니다.』

프로스트.

그건 아르카나 대륙 북부에 있는 대도시였다.

그래, 작은 마을도 아니고 무려 대도시.

플레이어들이 열렬하게 반응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야 대도시엔 상점과 대장간을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했으니까.

-유스라 왕국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유스라 왕국 하나로는 부족하지ㅋㅋ

-ㄹㅇ 도시는 많으면 많을수록 이득임

대도시 프로스트의 영향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에도 상당했다.

덕분에 랭커나 대형 길드는 프로스트에서 적잖은 관계도와 영향력을 쌓아뒀었다.

"반드시 가온에게 밀린 순위를 복구해야 한다!"

"...근데 가온도 프로스트에서 꽤 이름 날렸을걸요?"

"듣기 싫다. 무조건 해내야 한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정부 인사들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생성 위치를 빠르게 파악해야 하네."

프로스트.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르카나의 대도시가 조국의 영토에 나타난다?

대한민국의 마탑 효과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국가 경쟁력의 상승을 기대해 볼 만했으니까.

아르카나의 최고 전문가들.

AAU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엔 코스모의 개발 팀장.

현재는 AAU 지부장.

그들은 화상회의에서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

"유스라 왕국에 이어서 프로스트의 등장이라. 어쩌면 지금부터 인류의 반격이 될 수도 있겠네요."

"뭐, 사실 반격은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르죠? 그 최전방에 선 게 바로 이호열이구요. 그나저나 한국 지사 지부장님. 정말 이호열 플레이어에 대해 아시는 거 없습니까?"

"진짜 묻지 마세요. 저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니까요!"

엄살에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

.

.

그래, 신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건.

단 한 사람.

나밖에 없었겠지.

프로스트의 등장으로.

유스라 왕국의 영향력이 옅어질까 봐?

아니, 그따위 이유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점멸하는 퀘스트창]

프로스트가 꿈과 희망이 가득 찬 대도시가 아니란 것을.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먼저 알아차려서?

아니, 그따위 이유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부른다고 나타나는 모습이 하인과 다를 바 없구나."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마왕이여."

◈ 51화. 프로스트 (2)

고작 몇 시간이나 지났으려나.

설령 '마왕'을 데려온다고 하더라도.

이 당당한 태도엔 조금의 변함도 없을 거라고.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말이 아니라 생각조차 씨가 되는구나, 진짜.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진행 중)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응시했다.

악마들의 왕이라니.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그 마왕이 맞는 모양이다.

'찬물, 아니 이 정도면 얼음물을 끼얹는 거잖아.'

아무리 반전을 좋아해도 그렇지.

유스라 제도 때부터 선을 넘는 업데이트다, 정말.

다 떠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분위기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오랜만에 NPC들 볼 생각하니까 반갑네ㅋㅋㅋㅋ

-마스코트 말론 등장ㅋㅋㅋ

-말론? 그게 누구임?

-말론을 몰라? 츤데레 대장장이 하나 있음

-별명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지? 아마?ㅋㅋ

프로스트가 등장한다.

그 사실에 들뜬 커뮤니티였다.

하지만 나는 퀘스트 내용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로스트는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마왕과 관련됐으니까.'

마왕(魔王).

내겐 가깝고도 먼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야 아르카나가 가상 현실 게임에 불과하고.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 NPC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마왕, 녀석들이야말로 우리의 숙적이라 할 수 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덕분인가.

마왕에 대한 정보는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나는 깃털 펜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 거라."

마왕이 듣는다면.

어이가 없어 할 대사도 잠깐.

나는 그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펜을 움직였다.

──────

1. 마왕은 일반적인 악마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2. 마왕은 하나, 둘이 아니다.

3. 그 마왕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

──────

더 많은 것을 적어봤지만....

세 줄 요약하자면 이게 적절하겠지.

적어놓고 다시 보니까 더욱더 막막하다.

'반격이 시작된 게 아니라.'

본격적인 고생길이 시작된 거 아니야, 이거?

한마디로 마왕은 악마족의 보스 몬스터였다.

그러니까 대충 그 레벨을 생각해 보자.

일단, 아스큐라 백작하곤 그 앞 자릿수부터 다르겠지.

'그렇다면....'

비교 대상은 거악, 칠죄종 탐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된 예상이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악마 사냥꾼의 직감으로 깨달았던바.

'칠죄종 탐욕, 녀석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어.'

녀석에게서 보였던 어린 악마의 모습.

그렇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확실히 녀석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단 소리다.

내 기억에 따르면.

거악은 마왕보다도 높은 서열의 존재들이었으니까.

내가 말이야.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괜히 호들갑을 떨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고심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스슥─

한 줄로 덧붙이는 마왕에 대한 평가.

──────

허나, 내겐 하찮은 악마에 불과하다.

──────

그렇다.

상급 악마가 됐든, 마왕이 됐든, 상관없다.

'...사실 거악이 전리품이라도 떨어트렸으면.'

마왕보다 강하다는, 그 대단하시단 거악이시다.

그 전리품의 수준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아니, 거악의 전리품은 고사하더라도.

하다못해 클래스 퀘스트가 보상이라도 줬으면...!

'뭐, 조금 더 자신감이 생겼겠지만.'

그러나 내 자신감 따위.

그랑펠의 긍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했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왕을 자칭하며 비열하게 숨진 않으리라 믿겠다."

그것은 경고였다.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마왕이여."

결국,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무거운 긍지에 짓눌려 익사하지 않게 발버둥을 치는 것뿐.

제발, 내뱉은 말만 지키게 해주세요.

나는 간절하게 빌며 상태창을 열었다.

[행운 : 3]

그런 바람을 담아서.

행운에 1포인트를 투자하려다가 조금 더 썼다.

[행운 : 5]

아무리 미신이라고 해도 말이야.

마왕과 조우하는 마당에 숫자 4는 불길했으니까....

.

.

.

피와 살 같은 내 2포인트...!

무려 2레벨의 가치란 말이다.

그런 내 처절한 발버둥이 닿았던 것인가.

행운은 이번에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마탑의 연구실.

나는 책상 위에 전송된 마도구, 아이템을 확인했다.

──────

[흡혈귀 백작의 오브] - 대여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 장신구 제작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 행커치프 제작

──────

대여를 승인한 오브를 제외.

책상 위엔 두 개의 아이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장신구로 제작을 의뢰했거늘.

과연, 요구대로였다.

나는 에메랄드로 장식된 반지를 집었다.

[정순한 에메랄드 반지]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피격 시, 생명력 회복.]

[설명 :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된 반지. 명성 높은 대장장이라고 해도 에메랄드의 효과를 이 이상 끌어낼 순 없으리라.]

특수한 제작 방식.

그거야 마탑엔 대장장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제련, 가공, 구성까지.

그 모든 과정이 섬세한 마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덕분에 최상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었던 거겠지.

'...잠깐, 보통이 아닌데. 이거?'

짧디짧은 한 줄의 효과.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구체적인 조건이 붙지 않았단 소리였다.

쉽게 말해 맞으면 무조건 생명력을 회복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 생명력 회복 효과가 얼마나 될진 맞기 전까진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계속 포션을 먹는 상태와 다름없다.'

...이거, 기대 이상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시선.

나는 단정하게 접힌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으로 제작한 행커치프.

과연, 그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빛.

보기만 해도 귀하신 물건이란 티가 난다.

"과연, 훌륭하군."

그 정보를 확인하기도 전.

입에서 합격이 떨어질 정도.

그러나 그랑펠과 다르게 내게 중요한 건 그 효과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무려 '마왕 토벌'이라는 초대형 클래스 퀘스트를 앞둔 상태였으니까.

이내, 손수건의 정보가 떠올랐다.

[대작-비단잉어 비늘 행커치프]

[등급 : 유니크]

[제한 : Lv.200]

[효과 : 착용 시,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 / 모든 공격 회피 확률 상승 / 심미 스탯 개방]

[설명 : 더없이 희귀한 재료를 특수한 제작 방식으로 제작했다.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 대작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으리라.]

...잠깐, 대작이라니!

대작, 아이템 앞에 그 호칭이 붙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말하기 힘들 정도.

그거야 대작 아이템은 아르카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대장장이들도 일생에 한 번 만들까 말까 하다니까.'

왜, 대작 아이템을 경매장에 내놓는 것만으로도 해당 경매장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최대치에 이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당장의 성능.

다른 효과들이야, 미리 확인했던 그대로였다.

남은 건 마탑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심미] 스탯의 효과.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손수건을 곧바로 재킷 가슴 쪽 포켓에 꽂았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미 스탯이 개방됩니다.]

"!"

그와 동시에.

[심미]에 관한 지식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새롭게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생각했다.

[능력치]

근력 : 38 / 민첩 : 42 / 마력 : 186 / 행운 : 5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역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구나.

'상중하로 구분된 거겠지.'

심미의 효과를 생각하면 이쪽이 합리적인 표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눈으로 효과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마탑의 연구실은 적절하지 않은 장소였다.

그리고 그 전에 끝내야 할 계산도 있고.

'두렵다. 두려워.'

비용에 상관없이 최고의 결과물을 원한다고 했었나.

청렴결백은 개뿔.

'그랑펠, 이 호구야!'

하지만 이미 지나간 마당에.

과거의 나를 원망해 봤자 뭣할까?

또한 나가는 돈이 있어야 들어오는 돈도 있는 법.

무엇보다 내겐 아직 확인하지 않은 유스라 왕국에 대한 보상금도 남아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끔찍한 계산서를....

아니, 양피지를 확인했다.

수십, 아니 수백억이라고 해도 놀라지 말자.

다짐하면서.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

추신.

마탑은 수석 마법사 이상의 권한을 가진 마법사에게는 의뢰 비용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다 심도 높은 연구로 보답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과연, 행운에 투자한 2포인트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고!

*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신규 업데이트.

북부도시 프로스트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치가 포착된 순간.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프로스트가 일본 북해도.

홋카이도 인근 해역에 나타난 것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모든 것을 뒤집을 기회가!

히사기는 전율했다.

그간 얼마나 모진 수모에 시달렸던가?

"길드 랭킹 5위라니. 히사기, 이건 수치네. 수치야!"

그래, 수시로 변동되는 게 길드 랭킹이었으니까.

그저 순위가 떨어졌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나즈마의 위에.

그것도 두 계단이나 위에.

"...가온 그 무식한 새끼들이!"

대한민국의 가온이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금 상황을 뒤집을 기회가 왔다.

위이이잉─!

홋카이도로 향하는 전용기.

히사기는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게 우리 이나즈마의 편이다.'

그야 프로스트가 일본, 홋카이도에 나타났으니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도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프로스트가 홋카이도에서 포착된 순간.

치밀하게 작전에 돌입했다.

타국의 길드가 먼저 프로스트에 접근하지 못하게 번거로운 절차를 내세운 것이다.

'물론, AAU 협약 위반이다.'

AAU 협약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게 플레이어를 막아설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뒤따를 사회적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이나즈마에게 우선적인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반드시 조국에게 보답한다.'

비밀리에 홋카이도에 착륙한 전용기.

세차게 몰아치는 북풍.

히사기가 이나즈마 길드원들을 이끌었다.

"으으, 추워. 이래서 홋카이도가 싫다니까."

"너, 그거 돌려서 지역 비하한 거지? 이래서 교토 사람은."

"...뭐야. 지역 비하는 네가 한 거 아니야?!"

"다들 조용.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인다."

이나즈마가 단독으로 프로스트에 진입하는 것도.

일본 정부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막아서는 것도.

전부 프로스트에 위험 요소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발목 잡기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시간."

타국도 프로스트의 가치를 알고 있을 테니까.

"그동안 신속하게 프로스트의 관계도,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온, 그 녀석들보다 앞서는 것.

히사기는 미리 파악해 둔 정보를 떠올렸다.

'남태민은 프로스트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은 플레이어 중 하나다.'

남태민의 클래스는 야만전사, 바바리안.

바바리안은 프로스트 인근 숲에서 전직 가능한 클래스였다.

그런 바바리안 클래스 랭킹 1위가 바로 남태민이었다.

'프로스트에서 클리어한 퀘스트가 많을 수밖에 없겠지.'

개인으로는 남태민을 따라갈 순 없을 터.

하지만 길드 차원으로 보면 다르다.

히사기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가온은 유스라 왕국에 많은 것을 투자했다.'

프로스트에 과한 관심과 투자를 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절호의 기회였다.

히사기의 뱀눈이 번뜩였다.

'우린 다시 가온 위로 올라선다!'

그러나 그 결심은 곧바로 무너져 버렸다.

"...뭐, 뭐야 저게?"

높게 솟은 프로스트의 성벽.

그 성벽 위로 얼핏 보이는 무언가.

길드원 하나가 스킬, 천리안을 발동했다가 기겁했다.

"머, 머리예요! 사람 머리예요, 저거...!!"

"뭐가 저렇게 많아?"

"잠깐만. 저 턱수염은 말론이잖아...?"

"말론이면, 대장장이? 그 마, 말론이 죽었단 거야?!"

그래, 말론뿐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머리가 성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화르륵─!

그 순간, 프로스트 성벽 안에서 솟구치는 불길.

등골을 타고 오르는 공포.

꼴깍─

마른침을 삼킨 히사기가 곧바로 소리쳤다.

"당장 연락해! 병신같이 플레이어들 붙잡고 있지 말라고!!"

.

.

.

기대가 컸던 만큼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패닉에 빠진 건 당연했다.

"...저런 데에 어떻게 들어가란 거야?"

"프로스트를 함락시킬 정도의 악마란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공성전이야. 이거"

"레이먼 션, 이 미친 새끼! 또 통수를 쳤어!"

샤이닝과 천하통일.

그들을 비롯한 거대 길드조차 프로스트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반전이었다.

그러니까 이 암울한 분위기를 다시 뒤집기 위해선.

그에 준할 만한 충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호열이다."

지금처럼.

"아니, 잠깐. 이호열만 있는 게 아닌데?"

그랬다.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내, 경악으로 물드는 플레이어들의 얼굴.

"하르콘이다."

"뭐야, 이번에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나섰다고?"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저거 키치랑 그림자 용병단 아니야? 저 괴물들이 왜 이호열이랑...? 설마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모자라서...?!"

◈ 52화. 프로스트 (3)

AAU.

플레이어들 못지않게 충격에 빠진 게 그들이었다.

세계 각국의 지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프로스트가 함락됐을 줄이야.

그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일단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고요. 이걸로 확실해졌어요. 현실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아르카나 월드 쪽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게 말이죠."

그 말인즉슨.

아르카나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아니, 과거엔 게임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또 다른 세계가 됐다는 걸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그건 그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하지만 이건...!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다들 프로스트가 어떤 도시인지 알고 있잖아?"

"...제국 수도성과 맞먹을 정도의 공성전 난이도."

"그래!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리야. 악마 새끼들이 대체 어떻게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거지? 시간의 흐름을 생각해 봐도 물리적으로...?"

잠깐, 시간의 흐름?

아뿔싸.

왜 시간의 흐름이 똑같다고 생각했을까!

불현듯 설정이 떠오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달라...!!"

"뭐? 그게 뭔 소리야?"

"젠장, 까맣게 잊고 있었어. 현실의 하루가 아르카나의 나흘이라는 걸!"

현실의 24시간. = 아르카나의 96시간.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남아있던 설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단순한 설정을 간과하고 있었다.

"...현실보다 시간이 4배 빠르게 흐른다? 그럼 말이 맞아떨어져요."

"악마 새끼들이 갑자기 강해진 게 아니었다고?"

"빌어먹을, 그럼 프로스트가 함락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잖아?"

듣고 있던 모두가 순간.

끔찍한 가능성에 도달했다.

"...그럼 현시점에서 아르카나 월드는 대체?"

드높은 성벽을 자랑하는 프로스트조차 무너졌다.

작은 마을, 도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인류의 반격은 뭐가 인류의 반격이야. 대체...!"

아르카나 월드가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악마들이 아르카나 월드도 모자라 현실로 업데이트되고 있다는 것.

AAU는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플레이어들이 악마에게 함락된 프로스트를 재탈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들 봐?"

"...불가능해."

"최소 600레벨이라고 봤어. 랭커 플레이어들이 프로스트의 영주 자리를 눈독 들일 수 있는 시점을 말이야."

그런 프로스트가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건.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악마들이 600레벨.

그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악마족 몬스터를 현시점의 플레이어들이 쓰러트린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AAU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잠깐만."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상황실.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 떠오른 호열의 모습.

흩날리는 눈과 같은 색의 머리칼.

이번에도 정장과 구두.

그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

그 모습은 첫 등장부터 한결같았기에.

그것만으로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 AAU가 놀란 이유는 호열의 뒤를 따르는 NPC.

아니, 아르카나인들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다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들의 설정상.

아무리 관계도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기사단 이끌 순 없을 텐데...?

플레이어에 불과한 호열이 어떻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이끌고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그, 그림자 용병단!"

그림자 용병단.

그들까지 호열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저 흑막들이랑도 관계도를 쌓았다고...?"

흑막(黑幕).

그림자 용병단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야 간단하다.

지금까지야 검은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후반부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래, 굳이 비교하자면 그들은 마탑과 비슷한 위치를 가졌다.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제국을 넘어 대륙을 흔들 수 있을 정도, 라는 설정이었지?"

"플레이어가 현시점에서 그 진가를 알긴 힘들 텐데...? 물론, 말도 안 되게 비싼 의뢰비 때문에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하하...."

순간, 터져 나오는 헛웃음.

"마탑, 라이언 하트, 이젠 그림자 용병단까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헛웃음이라도 뱉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벌써부터 낙담하긴 이르단 소리였다.

호열의 등장으로.

AAU.

그들의 결론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단, 차분하게 지켜보자고요. 이호열의 행보를...!"

*

모든 것엔 사정이 있다.

"으으, 추워."

"나약한 소리 하지 말게, 키치 양. 우리에겐 프로스트 탈환이라는 사명이 있는 것을 명심하게."

"네에~ 알겠습니다. 근데 추운 걸 춥다고도 못하나? 으으, 유스라 왕국이 따뜻하고 햇빛도 잘 들어서 딱 좋았는데...."

내가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그림자 용병단과 함께 프로스트에 나타난 것에도.

전부 사정이 있다는 말이다.

.

.

.

'그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하르콘과 프로스트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그 기사단장인 하르콘이 아니던가.

당연하게도 공성전에 대한 경험도 풍부하겠지.

대충 공성전 팁 같은 거라도 얻을까, 싶어서.

그런데 하르콘의 반응이 의외였다.

"...프로스트가 함락됐다니? 경, 그게 사실인가!"

하르콘이 현실로 업데이트된 시점.

그 시점이 바로 프로스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 원정을 나서던 시점이었단다.

천하의 하르콘이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경, 내가 그 악마 군단장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벌어졌다는 것 아니겠는가! 하다못해 내가 폐하의 마지막 명이라도 제대로 수행해 냈다면...! 프로스트는...!"

악마 군단장이라.

'내가 마왕군 조직도까지 알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클래스 퀘스트.

마왕 토벌과 관련된 놈이라는 게 그 이름에서부터 물씬 느껴진다.

이거 잘하면 날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됐다.

'악마 군단장, 녀석의 정보를 알 수 있으면....'

미리 대비할 수 있으니까.

왜, 지금만 하더라도 대비할 게 많았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구마의식] 발동을 위한 악마의 아이템 구매겠지.

마탑에서 지출을 아낀 만큼 철저한 대비가 가능하단 것이다.

청렴결백하게 산 보람이 느껴진다.

그런데.

"경. 우리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함께 하겠네."

...이거 내 기대치를 한참 넘어선 말이 돌아왔다.

하르콘의 눈빛은 결연했다.

"폐하의 마지막 명은 악마 군단장을 토벌하라는 것이었으니까. 폐하께서 그 명을 거둬들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계의 악마 군단장을, 아니 악마를 토벌할 생각이네."

하르콘이 말을 이었다.

"경과 우리의 뜻이 일치한다는 소리겠지."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내 뜻이 무엇인가?

바로 클래스 퀘스트의 클리어.

'퀘스트를 도와준다는 거 아니야, 이거? 그것도 계속해서!'

이보다 든든한 지원군이 또 있을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세라.

나는 하르콘에게 곧바로 대꾸한 것이다.

"그대의 긍지를 존중하겠네. 하르콘 경."

.

.

.

그것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함께하게 된 사정.

그림자 용병단의 사정?

거기엔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까라면 까야겠지.'

나와 그림자 용병단.

관계는 그 시작부터 철저한 갑을 관계였으니까.

단장, 키치와의 첫 만남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히끅─"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제가 괜히 그 찔리는.... 아니, 흠칫해서요."

왜, 시작부터 날 보더니 딸꾹질을 해댔었거든.

나는 키치의 자기소개를 듣다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곳, 유스라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림자 용병단.

그저 돈이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왔다.

키치는 그렇게 자신들을 변호했다.

"...하하, 그렇죠?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네요. 히끅."

그 말은 사실이었다.

수소문하지 않고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의뢰비가 겁나게 비싼 용병단이다.

그 어떤 의뢰라도 처리해 줄 정도로 강하다.

다만 그 어떤 의뢰도 맡기기 싫을 정도로 가성비가 구리다.

"허나, 유감이군."

알려지지도, 평가가 나빠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돈에 움직인다?

"나는 그대들과 같은 이들을 싫어한다."

청렴결백 그 자체.

그랑펠에게 있어선 그보다 긍지 없는 족속이 또 없었으니까.

하쿠나가 어째서 이들에 관한 판단을 자신에게 부탁했는지 알 것 같았다.

"...히끅!"

오해는 금물이다.

저건 우는 소리가 아니라 딸꾹질 소리였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딸꾹질 때문이란 말이다.

물론, 설령 눈물을 보였다고 한들.

그랑펠이 눈물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시다.

그러나.

"하지만 그 다짐을 믿어보겠다."

"히끅? 네?! 다짐이라뇨?"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것."

스왁─!

나는 그들의 서류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그대들이 긍지를 찾아낼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그때 키치는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겠지.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림자 용병단에게 선언한 것이다.

"그대들의 다짐을 증명할 기회다."

그래, 그림자 용병단을.

마왕 토벌에 반강제로 끌어들였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

내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유스라 왕국이었으니까.

'빨대를 꽂고 싶으면 그 가치를 증명하란 말이다.'

키치는 말꼬리를 흐렸다.

"돈도 안 되고 위험하기만 한 의뢰네요...?"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제안이겠지.

하지만 그 과거는 버린다고 했으니까.

결국, 새 출발을 위해선.

"...그래도 할게요. 아니, 해야죠. 아니, 하겠습니다. 아니, 맡겨만 주세요. 히끅!"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또 조직 사회에 능숙하거든.

.

.

.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자발적으로.

키치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은 반강제적으로.

그것이 내가 그들과 함께 프로스트에 나타난 사정.

그런데 한 가지 사정은 간과하고 말았으니.

'왜 하필이면...!'

이번에도 러시아가 코앞인 북해도란 말이냐?

패딩은커녕.

코트 한 벌 걸치지 않은 나의 차림새.

나는 그저 현지 사정이 원망스럽다....

.

.

.

그러나 뼈에 사무치는 추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현실에 나타난 지옥.

불길이 치솟는 프로스트.

그 주변은 한기는커녕 열기로 가득했으니까.

하르콘은 감정을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드시 탈환하고 말겠습니다, 폐하."

프로스트와는 큰 관련이 없는.

나조차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거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심정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그러나 제국 최고의 기사단.

그들이 적을 앞에 둔 채.

감정에 휘둘릴 이들이 아니었다.

"경, 저곳에도 생존자는 있겠지?"

기사도.

지킬 것이 있을 때 그들은 더욱 강해지는 법.

두근두근─!

사자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악으로부터 프로스트를 탈환한다!"

함성과 함께 치솟는 사기.

'...저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앞으로도 내 클래스 퀘스트를 돕는다는 거지?'

나보다 뒷배가 든든한 사람이 또 없을 거다.

그런 용맹한 사자 심장의 기사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하르콘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경. 무엇보다 프로스트의 진입하는 것이 최우선이네."

나도 동감이었다.

[클래스 퀘스트 : 마왕(魔王) 토벌]

악마들의 왕.

그들의 마수가 뻗쳐오기 시작한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의 왕좌를 무너트려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북부도시 프로스트를 조사하라. (진행 중)

퀘스트의 최우선 목표 또한 프로스트의 조사였으니까.

일단, 저 굳게 닫힌 프로스트의 성문을 여는 게 순서다.

그게 아니라면 성벽을 무너트리든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막막한데 이거?'

이거야말로 공성전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진짜 공성전!

공성전에서 수성 측이 유리한 건 상식이었다.

'결국, 악마니까 함락시킬 수 있던 거겠지.'

그야 악마에겐 상태이상이 있었으니까.

정정당당하게.

공성전을 통해 프로스트를 함락시킨 게 아니라 비열한 수작을 부렸을 게 뻔했다.

그런 주제에.

자기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있다라.

"심히 건방지구나."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공성전에 있어서.

성문 혹은 성벽을 공략하는 데 필요한 건 공성 무기.

그저 프로스트를 날려버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사실 폭격기를 띄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겠지.

'균열처럼 접근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까.'

이것이 현대 문명의 힘이다.

어떠냐 악마 놈들아.

조금은 우쭐댈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생존자가 있어요!"

"뭐, 정말이야? 어디 봐봐."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 같은데요? 아니, 이미 죽은 건가?"

"이 악마 새끼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상공의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로는 안쪽엔 확실히 NPC.

아니, 아르카나인들이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들의 생사를 알 순 없다만.

폭발에 휘말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미사일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섬세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

당연하게도 그 무언가는 『마법』밖에 없겠지.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마왕.

프로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녀석의 악기(惡氣)는 성벽 밖의 내게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으니까.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탐색, 간섭, 발현.

신속하게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

나는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마법을 발현했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

나를 포함한 이 자리,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 53화. 착각은 자유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