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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청렴결백 (1)

하르콘은 제국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주군의 씁쓸한 음성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시련이 끝나지 않는군. 하르콘."

"...폐하."

"신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대체 무엇일까? 황제가 되어도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군. 빛 하나 들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야...."

악마가 나타나고 모험가들이 사라졌다.

그것도 모자라 제국의 영토가, 백성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심지어는 마탑조차.

하르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악마라고.

그러나 이유를 안다고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 강함을 넘어서 악마와 맞서 싸우는 것은 절망의 연속이었으니까.

그의 주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서부에서 악마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 군단장이라. 이번 원정에서도 수천 명의 병사가 죽어 나가겠지. 내 손으로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거야."

"폐하, 그런 말씀은...."

"하르콘. 나는 매일 밤 신에게, 여신에게 묻는다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이런 우리를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긴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라도 알려달라고."

황제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응답은 없었지."

하르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군의 검으로서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악마 군단장을 처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폐하."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원정 도중 정신을 차렸을 때.

"...!"

하르콘은 낯선 세계에서 눈을 뜨고 말았다.

그때 처음으로 하르콘은 주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정말, 신에게 버림받은 듯한 그 기분을.

"어째서냐! 어째서 우리가! 우리는 악마 군단장을...!!"

이 낯선 세계는 모험가들의 고향.

사라졌던 모험가들이 이곳에 있다.

증발했던 건물, 백성, 마탑 또한 이곳에 존재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그대들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혼란에 빠진 건 모험가들의 고향도 마찬가지였으니.

악마의 마수가 이곳까지 뻗쳐온 것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생각이 닿은 것은 마탑이었다.

'혹시 마탑이라면.'

그들의 지혜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있진 않을까.

그러나 황제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마탑의 마법사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도움을 바라는 건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소문이 들려왔다.

"...유스라 제도?"

전설 속의 보물섬.

유스라 제도가 이 세계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실낱같은 희망?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설령 유스라 제도의 보물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 보물이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에도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유스라 제도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질 수 없다.'

모든 일의 원흉이 악마라면.

그런 악마의 농간에 끝까지 저항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사내, 모험가와 만났다.

'저 브로치는? 분명 마탑의...!'

처음에는 둘도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모험가가 있을 줄이야.

그를 통한다면 마탑에 접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 생각이 달라졌다.

'...내 불순한 목적을 알아채고도.'

문제 삼기는커녕.

너그럽게 넘어갔다.

그 너그러움은 전투에서도 나타났다.

그만한 마법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그저 길을 열어주다니.

오만한 마탑의 마법사들을 익히 봐온 하르콘.

그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참된 귀족의 태도로다...!'

그때부터였다.

"호열 경."

모험가, 호열에 대한 칭호가 바뀐 것은.

그러나 감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섬이 흔들리고 모습을 드러낸 황금의 궁전.

하르콘은 소름 끼치는 기운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도 악마가 존재하다니.'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녀석이었다.

하르콘은 탄식을 삼켰다.

'결국, 이번에도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단 말인가?'

하지만 탄식은 곧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

"거악을 자처하는 비열한 악마여."

"...!!"

그것 역시도 호열 덕분이었다.

하르콘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악마.

그것도 거악을 자처하는 녀석 앞에서 이리도 자신감이 넘칠 수 있단 말인가?

'그 흔들리지 않는 기품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태도는 자신, 심지어 황제에게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르콘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제 불찰입니다, 폐하.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호열 경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제국에 악마들의 마수가 뻗쳐오기도 전에.

녀석들을 처단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도 잠깐.

이내, 하르콘의 눈매가 번뜩였다.

'그래. 이건 실수를 바로 잡을 기회다.'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 없었다.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도 악마는 존재했으니.

이것이 신의 시련이든, 천벌이든 상관없었다.

'맞서 싸우리라.'

이 세계의 악마조차 처치하지 못하면서 어찌 제국과 황제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하르콘의 결심을 지지하듯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과연, 호열 경다운 선언이로군.

'어쩌면 우린 마음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네.'

하르콘이 웃음을 머금었다.

두근─

잠자던 사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라이언 하트 기사단.

어째서 이들이 아르카나 최강의 기사단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알겠다.

까드드득─

뼈 갈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스켈레톤들.

저 볼품없는 놈들의 레벨이 무려 500레벨이었다.

확인하는 순간,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니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이도 지랄 났네. 진짜루."

물론, 그 표현 수위에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동감한다.

아무리 거악이라고 해도 난이도가 뭐 이래?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저런 게 한두 마리였으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멀리서 봐도 빼곡할 정도로 많다.

언데드가 그 약점이 명확한 종족이라고 한들.

레벨 차이가 이렇게 극심하다면 약점조차 무뎌질 수밖에 없겠지.

'아무래도 마력을 아끼는 건 불가능한 건가.'

...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심장을 바쳐라. 호열 경이 거악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문득, 들려오는 하르콘의 외침.

"심장을 바쳐라!"

그에 라이언 하트 기사들의 사기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최전방으로 나서는 기사들.

그들이 말 그대로 스켈레톤을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하르콘을 포함한 3인의 기사들.

[하르콘 킹스가드 : Lv.600]

[예시카 브라이트 : Lv.430]

[에노크 로렌 : Lv.400]

고오오─

은은하게 빛나는 하르콘의 검날.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해골들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르콘의 레벨은 스켈레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러나 예시카와 에노크.

저 두 기사의 활약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레벨에서는 확실한 열세다. 하지만.'

하르콘만큼은 아니더라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레벨, 그 이상의 강함이라는 것.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빛나는 검. 역시 저건가.'

고오오─

하르콘처럼 선명한 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시카와 에노크.

두 사람의 검에서도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게 레벨조차 상쇄하는 강함의 원천이군.

나는 그랑펠의 시선으로 그 빛을 바라봤다.

마치 처음 『마법』을 목격했을 때처럼.

탐색, 간섭, 발현....

나도 모르던 단어를 종이에 휘갈길 때처럼.

나는 저 빛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기(劍氣).'

정말 그런 게 존재하는가?

나조차도 의문이 뒤따랐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마법처럼 경험해 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그리고 이 순간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나저나 뭐? 날 위해서 심장을 바쳐?'

어째 갈수록 극진해지는 하르콘의 태도였다.

'무섭다. 무서워.'

물론, 나는 그 선언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연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같이 있던 플레이어들은 격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저 정도의 친밀도를 쌓은 거야?"

"으으, 괴물이다. 괴물."

"역시 상상 이상이십니다, 호열 씨!"

남태민.

최상위 랭커 플레이어에게도 흔한 광경은 아닌 모양.

이거,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한 상황이기도 하겠지?

뭔지는 몰라도 우쭐하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 어깨는 무거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피곤한 설정 덕분에.

나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희생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찾았군."

왕좌에 앉아있는 그림자.

그 머리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칠죄종 탐욕의 화신 : Lv.650]

나는 그 거악의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또각─

자신감 넘치게 내딛는 걸음.

꼿꼿한 허리와 목의 각도.

드높은 왕좌에도 굽히지 않는 시선.

나는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앉아있을 생각인가. 하찮은 악마여."

언제나처럼.

"열등한 족속답게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구나."

.

.

.

"!"

남태민과 레오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다들 물러나!!"

"가까이 오지 마!!"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악마족이었다.

절대적인 레벨보다 강한 것은 기본.

끔찍한 상태이상을 걸어대는 악마족.

'머릿수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자신보다 레벨도, 장비 아이템의 수준도 떨어지는 길드원들은 조금도 견딜 수 없다.

그런 판단에 내린 명령이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씨발 진짜."

레오니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신이라고 멀쩡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레벨은 352레벨.

무려 300레벨의 차이였다.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지?"

369레벨.

남태민이라고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광전사와 야만전사.

전황이 불리할수록 그 투쟁심이 상승하는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 뛰어난 전투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좆 됐다고.

그러나 두 사람은 상황 판단이 빨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짐이 될 순 없다.

결심한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일단,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텨보겠습니다. 다만, 더 이상 상태이상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면.... 제가 눈치껏 전투에서 빠지겠습니다."

"나도... 요. 일단 싸우다가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아킬레스건 끊어버릴 테니까... 요."

"오,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

스스로 아킬레스건을 끊겠다.

과연, 광전사와 야만전사다운 선언.

듣기만 해도 무식한 방법이지만 최선의 판단이었다.

두 사람은 흔히 봐왔으니까.

상태이상 걸려 아군에게 칼을 겨누는 플레이어를 말이다.

아군에게 위협이 될 바엔 차라리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나았다.

부상이야, 살아남으면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

"...?!"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왕좌에 앉아있던 녀석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뭐야, 이 메시지는?

"이런 씹."

단 한 순간도 저항할 수 없다고?

보통 악마가 아니다.

말 그대로 '거악'이다.

이대로라면 상태이상에 걸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아군에게, 호열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른다.

빨리 물러서야....

[참을 수 없는 욕구에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냥 이 답답한 가슴을 그어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닐까.

[상태이상 : 탐욕이 발생합니다.]

두 사람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으려던 순간이었다.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다."

그건 더없이 너그러운 목소리였다.

"이곳에 내가 있다."

가슴 속에 들끓던 탐욕조차 잠재울 만큼.

챙─

바닥에 떨어지는 두 자루의 검.

...내가 무슨 생각을?

그 말에 불현듯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그건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호열이 거악의 상태이상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거만하게 왕좌에 앉아있던 것치고는.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불안하게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에 대한 증거.

['흡혈귀 백작의 오브'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악마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 36화. 청렴결백 (2)

구마의식 발동.

이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다.

나는 왕좌에서 일어난 거악을 바라봤다.

[칠죄종 탐욕의 화신 : Lv.650]

그 외관은 사내였다.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과는 다르군.

'오히려 남철민 때와 같다.'

남철민이 임프에게 몸과 정신을 빼앗겼다면.

저 사내는 칠죄종 탐욕에게 빙의당한 거겠지.

임프와 칠죄종 탐욕.

하급 악마와 거악.

그 격에는 레벨보다 더한 격차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 이곳에 내가 있다."

이젠 그럭저럭 참고 넘길만한 오글거리는 대사도.

절대 꺾이지 않는 가슴 속 긍지도.

나는 평소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되물어 주고 싶은 마음인걸.

뭐, 거악이나 되면서 악마 사냥꾼 처음 보느냐고.

근데 말했다시피.

슥─

사냥감과는 말도 섞지 않는 성격이라서 내가.

거악, 녀석이 놀란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상태이상에서 벗어났어?"

구마의식이 시작된 순간.

곧바로 정신을 차린 남태민과 레오니.

'내색은 못 해도 진짜 찌르는 줄 알고 식겁했다, 내가....'

그건 동시에 녀석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망설임은 없었다.

슥─

나는 은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탐색, 간섭, 발현.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단검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마력의 잔량은 충분하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리고 가온과 버서커, 두 길드의 도움으로 나는 마법 하나 발현하지 않고 거악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보다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다.'

아스큐라 백작 때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그땐 은제 단검에서 발현한 은말뚝을 꽂아 넣는 게 고작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 후로도 멈추지 않고 발버둥 쳐왔다.

이 고고한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지 않게 최선을 다했단 말이다.

그 발버둥의 결실이 눈앞에서 펼치고 있었다.

콰드드득─!

궁전의 밑바닥.

돌, 대리석에 간섭.

순식간에 벽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은제 단검을 탄환의 형태로 발현.

살상력 강화를 위해 탄환의 외관에도 간섭한다.

회전력의 상승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소용돌이.

그러니까 드릴 형태가 적합하다.

둥실─

허공을 부유하는 수백 개의 은제 탄환.

조잡한 말뚝에서 수백 개의 탄환이라니.

감격스럽다.

깜지를 쓰듯.

하루하루 A4 용지를 가득 채운 보람이 느껴진다.

그러나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

그것도 모자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 어깨엔 귀족으로서의 책임이 짊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겐 『마법』만 있는 게 아니다.'

마법과는 명백히 다르지만.

서로의 장단점이 있는 [스킬] 또한 존재한다.

───────

사격 마스터리 (26%) : 사격의 정확도가 상승한다.

───────

탄환에도 사격 마스터리 효과가 적용될까.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그 사실을 알 순 없겠지.

그러니 지금은 더욱 확실한 길을 선택할 순간이다.

콰드드득─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오르는 대리석 파편.

나는 마법을 발현.

대리석 파편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

은제 탄환과 대리석 화살대를 이어 붙였다.

화살은 확실하게 사격 마스터리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마법과 스킬의 융합.'

거기에다가 구질구질하게 하나를 덧붙이자면....

질량이 커질수록 그 위력도 커지는 법.

상식 수준의 과학까지 추가다.

그래, 이것이 내가 보는 풍경이었다.

"...대단하군. 호열 경."

남의 평가 따윈 안중에도 없는 성격.

하르콘에게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고 한들.

심정에 들뜸은 없었다.

그저 나는 이 순간 궁금할 뿐이었다.

우두커니 멈춰 서있는 거악의 시야가 말이다.

*

'...나는 지키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이 유스라 왕국의 마지막 왕.

하쿠나의 미련이었다.

유스라 왕국에 부족함은 없었다.

땅과 바다에서 나는 음식은 메마르지 않았고, 반짝이는 보석들이 넘쳐났으며, 백성에게서도 근심이나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도 아름답지 않은가?"

하쿠나는 그런 자신의 왕국이 보기에 흡족했다.

그래서 자랑스럽게 섬을 찾은 이방인을 대접했다.

자신의 보물과 백성을 자랑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유스라 왕국에 정박한 거대한 함선.

이방인이 군대를 이끌고 유스라 왕국을 침략했다.

땅, 바다, 광산.

심지어는 백성들까지 포로로 잡아들였다.

다툼이 없던 유스라 왕국.

당연하게도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왕국의 모든 것이 짓밟혀 나갔다.

"서둘러 도망치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크흑! 왕이시여. 부디 훗날을 기약하셔야 합니다!"

"왕이시여! 어서...!! 크아악!!"

하쿠나는 왕좌에 앉아 쓰러지는 병사를 바라봤다.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고 있었다.

멍하니 참상을 목격하던 하쿠나가 멱살을 잡혔다.

이방인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미련한 족속에겐 너무 과분한 섬이라서 말입니다."

"...고작 그따위 이유 때문인가?"

"당연하지! 미련한 왕이여. 당신께선 이 보석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우리 왕국에선 이 보석 하나로 평생을 먹고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보석이 여기선 애새끼들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어! 미개하기 그지없지!"

"...내게 말한다면 나누어줄 수 있었다."

"먹고 떨어지란 소린가? 지랄이군."

훽─

이방인은 하쿠나가 쓰고 있던 왕관을 낚아채곤 그를 내동댕이쳤다.

왕좌 앞에 쓰러진 하쿠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의 것이다.

유스라 왕국.

이 섬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란 말이다.

누구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단 말이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탐욕스러운 어리석은 왕이여.

"...?"

누구의 목소리인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힘을 원하는가?

...그저 나는 원한다!

나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좋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내, 고막을 찌르는 소름 끼치는 비명.

이후 찾아온 기나긴 어둠....

그리고 지금이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는 지금 전설 속의 보물섬 유스라 제도에 나와 있습니다."

전설 속 보물섬이 아니다.

유스라 왕국은 오직, 나만의 왕국이다.

"일단, 섬의 보물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야."

섬의 보물이 아니다.

오직 나만의 보물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가만히 있을 거야?

-다들 네 보물을 빼앗고 있는데?

-네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 나만이 널 도울 수 있을걸?

그렇다면 나를 도와라.

아득히 먼 옛날처럼.

나를 도우란 말이다.

-...옛날? 뭐, 아무래도 좋아. 계약 성립이야.

그리고 어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자신의 왕좌가 보였다.

황금의 궁전이 보였다.

과거처럼 궁전에 들이닥치는 쓰레기들이 보였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계약을 맺은 이상.

몸과 정신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나의 왕국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까짓 육신 따윈 얼마든지....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런데, 너는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어째서인가, 자신의 몸이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은발.

이질적인 차림새.

그러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

자신의 몸을 차지한 녀석이 정체 모를 사내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녀석은 자신의 입으로 아무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나약한 인간이여,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라. 나는 거악, 칠죄종 탐욕이다. 비록 화신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너 같은 인간쯤은...!!"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콰드드득─

"이, 이게 대체?"

그저 뒷걸음질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땅에서 헤아릴 수 없이 거대한 벽이 솟아올랐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 안 돼!"

허공에 떠오른 수백 개의 은 덩어리.

몸을 차지한 녀석이 격하게 반응했다.

하쿠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래서 어떻게 내 보물을 지키겠다는 것이냐!'

약속과 다르지 않은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입으로 내뱉는 말만 들려올 뿐.

"말이 되질 않는단 말이다. 내가 어째서 인간에게...?"

푹─!

이내, 직접적인 격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거대한 은화살이 날아드는 것도 모자라.

꺼지지 않는 화염이 몸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하쿠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보물들을 빼앗기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래! 좋다! 나와 계약을 하자!"

...뭐라고?

"나와 계약한다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보이지 않느냐?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모두 네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드높은 천장.

찬란한 장식.

광활한 크기.

이 황금 궁전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단 말이다!

하쿠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속았다.'

하쿠나는 그제야 떠올렸다.

자신이 계약한 녀석의 정체를.

스스로 말했다시피 이 녀석은 악마, 그것도 거악이었다.

'결국, 너조차도 나를 기만한 것이냐?'

절망감에 분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더없이 차가운 음성이 들려온 건.

"그 모습이 추악하구나. 어리석은 악마여."

흔들림 없는 목소리.

은발 사내가 말을 이었다.

"덧없는 것에 매달리는 모습이 심히 하찮다."

...덧없다?

이 찬란한 황금 궁전이?

이해할 수 없는 건 하쿠나도,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너, 그게 무슨 소리...?!"

말문이 막혔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르르륵─!

황금 궁전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대리석, 황금, 보석.

무엇하나 가리지 않았다.

모든 게 재가 되어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절규하는 악마의 목소리.

이내, 시야에 비치는 사내의 얼굴.

사내의 동공이 보였다.

'!'

동요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자신에게 황금 궁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모든 부귀영화가 재로 변하는 것 또한.

익히 경험한 적 있다는 것처럼.

사내의 동공은 더없이 잔잔했다.

그 잔잔한 호수 같은 동공에 비추는 것은.

'...저 모습이 정말 나란 말인가?'

탐욕으로 타락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이었다.

또각─

사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리석지 않은가? 눈을 감는 순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 속의 긍지뿐인 것을."

긍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하쿠나는 깨달았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결국, 지키고 싶다는 건 변명이었다.

하쿠나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던 병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그들은 웃고 있었다.

못난 자신을 왕으로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하쿠나는 절망했다.

'그런데 나는, 나는...!!'

욕심을 넘어선 탐욕 때문에.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고귀하게 희생한 병사들을 되살려 다시금 그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포로로 붙잡힌 백성을 구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 칠 수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외면했다.

그런 자신에게 군주로서의 책임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섬의 보물을 지키겠다는 탐욕만이 남았을 뿐.

"악마 따위가 어찌 긍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만."

사내의 말이 옳았다.

타락한 자신의 모습은 악마와 다름없겠지.

그런 자신에게 긍지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답답하던 가슴이 차분해졌다.

'...미안하구나.'

늦었지만 곁으로 따라가겠다.

하쿠나는 눈을 감았다.

순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사, 살려줘! 아, 아직 죽고 싶지 않...!!"

서걱─

고맙다, 이름 모를 은인이여.

더 이상 자신이 추태를 부리지 않게 해줘서.

"...?"

...그리고 하쿠나는 눈을 떴다.

어째서 눈이 떠지는 거지?

분명 목에 칼이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졌거늘.

게다가 지옥에 떨어진 것치곤 너무 밝은 것이 아닌가?

"...!"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

그곳엔 은발의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그대는 긍지를 가져라."

...이건?

그런 사내의 손에는 왕관이 들려있었다.

빛이 바랬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하쿠나, 자신의 왕관이었다.

"...?!"

사내가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며 말했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거, 확인하는 데만 한참이겠네.

제대로 된 정산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나는 섬의 보물, 왕관을 꺼내 들었다.

[섬의 보물, 부서진 왕관]

[등급 : 에픽]

[제한 : Lv.500]

[효과 : 없음]

[설명 : 오래된 왕관이다.]

"그럼에도 그대는 긍지를 가져라."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방금까지 거악에게 휘둘렸던 사내와 이 낡은 왕관에 얽힌 스토리 따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왕관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지.

[히든 퀘스트 : 유스라 왕국]

전설 속 보물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난 왕은 과오를 바로잡고 긍지를 되찾기 원한다.

─유스라 왕국의 왕에게 왕관을 하사한다. (진행 중)

뭐, 당장은 그거면 된 거 아니겠어?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잠깐만.'

시야를 가득 채울 정도로 끊임없이...!

◈ 37화. 고대 왕국 유스라

유스라 제도.

아니, 전 세계.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같은 메시지가 출력되는 것.

즉, 월드급 메시지.

아르카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의 대사건이 벌어졌단 뜻이었다.

"봤지? 보통 업데이트가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보물섬이 아니라 고대 왕국이었다니...."

"이러니까 그렇게 떡밥을 던지고 뿌려댔던 거야."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먼저 출력된 메시지는.

플레이어들에 의해 일반인들에게도 전달됐다.

박휘강, 그를 비롯한 넷튜버 플레이어들이 곧장 속보를 전한 덕분이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냈대요!"

"미친. 형님들. 이거 콘텐츠각 오지게 섰는데요?!"

"누군가가 누구냐고요? 아니, 저 같은 하꼬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또!!"

마찬가지로 흥분한 시청자들.

-보물섬이 고대 왕국이었던 거임??

-그럼 엄청 부자나라였다는 거네ㄷㄷ

-고대 기름국 뭐 그런 건가?ㅋㅋㅋㅋㅋ

-일단 복구만 되면 지리겠는데???

고대의 왕국이니만큼 그 복구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과거의 영광을 복구한다면 유스라 왕국은 엄청난 가치를 가질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전문가님. 방금 들어온 속보가 사실이라면 이건 최초의 국가 단위의 업데이트가 아닙니까? 사상 최초로 현실에 아르카나의 국가가 소환됐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엄청난 대사건이라고 봐야죠!"

"그 가치를 예상해 볼 수 있을까요?"

"일단, 간단하게 아르카나에서 제국이 수행했던 역할을 한번 살펴본다면. 그냥 어느 정도만 복구가 돼도 유스라 왕국은 최초로서 엄청난 가치를...."

현실에 소환된 최초의 아르카나 국가.

그것이 바로 유스라 왕국이었으니까.

새로운 국가의 등장.

그것도 고대의 왕국이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과거.

그 시절에도 월드급 이벤트가 분명하거늘.

심지어 현실에, 그것도 최초의 국가 단위 업데이트로 유스라 왕국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순간.

뜨거운 감자, 유스라 왕국에 흐르는 긴장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세계 최고의 길드, 샤이닝.

길드 마스터, 록스는 전투 도중 멈춰선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잠깐, 과거를 되짚어보자.

무려 500레벨짜리 스켈레톤.

황금 궁전에 진입하자 녀석들이 무리로 몰려들었다.

제시가 빠진 지금.

샤이닝도 전력이라고 볼 수 없긴 했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스켈레톤 군대는 너무 강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스탯에 비해 패턴이 단순하다.'

높은 레벨.

끈질긴 생명력.

하지만 정작 공격해오는 방식이 단순했다.

무기를 휘두르는 것조차 엉성하게 보일 정도로.

'충분히 공략할 만하다.'

그게 록스가 물러서지 않은 이유였다.

물론,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도 고생할 가치는 충분했다.

그냥 악마도 아니고 거악.

게다가 보물섬이란 특징을 고려했을 때.

드롭될 전리품의 가치는 상당할 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파사삭─

갑작스레 스켈레톤들이 무너져 내렸다.

뼈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 광경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황금 궁전의 주인, 거악이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샤이닝, 길드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스켈레톤 밭을 뚫고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그게 가능해?"

"어떤 자식들이지? 천하통일? 아니, 그 좆밥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가 뭐라고?

천하통일이 들었다면 두 번 억울할 소리였다.

"분명합니다. 또 샤이닝, 그 새끼들이...!"

샤이닝과 천하통일.

그 악연만큼이나.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들이 이 스켈레톤 포위망을 뚫어냈다?

아니, 불가능하다.

록스와 류오쥔춘.

두 길드 마스터가 동시에 말했다.

"천하통일이 아니야."

"샤이닝이 아니다!"

길드원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건 그들만의 의문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메시지 속 '누군가'가 누구란 말인가?

*

[히든 퀘스트 : 유스라 왕국]

전설 속 보물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과오를 바로잡고 긍지를 되찾기를 원한다.

─유스라 왕국의 왕에게 왕관을 하사한다.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히든 퀘스트...!

정말 이런 퀘스트가 실존했다니.

처음에는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검색해 봐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처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던 시절의 이야기.

그때 아르카나의 퀘스트란 퀘스트는 전부 찾아봤던 나였다.

정말 온갖 퀘스트가 있었지만, 히든 퀘스트라는 건 듣도 보도 못했었다.

그러나 내게는 눈치가 있었다.

아르카나를 떠난 12년의 세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눈치라는 걸 키웠단 말이야.

'...뭔가 심상치 않은데.'

무엇보다 퀘스트의 조건이 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왕관.

무려 에픽 등급의 아이템을 왕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능력치가 형편없던 게. 다 이유가 있던 거였나?'

기대는 한참 전에 사라졌으니까.

청렴한 그랑펠의 성품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사내.

아니, 유스라 왕국의 왕에게 왕관을 씌워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그칠 줄 모르고 떠오르는 메시지.

[유스라 왕국과의 관계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유스라 왕국에서 영향력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왕국과의 관계도, 영향력, 권한 기능까지?

당연하게도 내겐 낯선 단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도, 뭐 지금도.

특정 국가와 관계되거나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눈치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젠 그 위치라는 게 달라진 것 같은데?

'무엇보다 최대치라는 게 중요하다.'

거기에다가 '권한' 기능 활성화라.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거 말고도 떠오르는 메시지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잠깐만, 뒤로 밀어두자.

일단, 전리품은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인가.'

그냥 재수가 없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빙의한 악마는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직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겠지.

그래도 아쉬움은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줄인지 세는 것보다 상태창을 확인하는 게 빠를 지경.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26]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126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50]

거악, 칠죄종 탐욕을 처치.

덕분에 상승한 레벨이 무려 50레벨이었으니까...!

개인 최고 기록을 넘어서 이게 시스템상 최대치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경험치였다.

하지만 결코 과한 보상은 아니었다.

'혼자서 650레벨짜리 몬스터를 잡은 셈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만큼 강해진 걸까.

아스큐라 백작을 상대하던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때의 나는 제시 하인네스의 힘을 빌려 녀석을 쓰러트리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물론, 단기간에 많은 일이 있긴 했지.

'마탑 학회에 참여하고, 마법에 대해 깨닫고....'

그 마법의 발현력 또한 향상시키기도 했다.

브로치라는 템빨도 빼놓을 수 없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가온, 버서커의 협력.'

그것도 모자라서 현재 나는 마력 탈진 상태였다.

구마의식 탓에 반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을 쓰러트리는 데에 아껴둔 마력을 모조리 써버렸다.

그러나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칠죄종 탐욕.'

그것은 악마 사냥꾼의 감각.

나의 성장과 별개로.

거악을 자처하는 녀석에게선.

확실히 미숙한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구마의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구마의식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

그건 악마 사냥꾼에 대한 지식 또한 없다는 소리였다.

'거악이면서 천적인 악마 사냥꾼을 몰라본다?'

...글쎄, 지금의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는 지옥에 처박혀 결코 되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건 거악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득, 떠오르는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한마디.

-그것이 악마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나는 시선을 들어 칠죄종 탐욕의 잔해를 바라봤다.

스스스─

아스큐라 백작이 그랬던 것처럼.

녀석의 흔적에선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이쪽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르콘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는가, 호열 경?"

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대꾸했다.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네."

거창하게 말했지만 단지 퀘스트를 수행한 것뿐이다.

그러나 이 속내라는 게 말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것이었으니.

하르콘의 눈가가 이제까진 볼 수 없던 모습으로 글썽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후회할 수밖에 없군."

...제발 울지 마라, 하르콘.

울기까지 하면 내 양심의 가책은 더욱 심해지니까.

그런 분위기를 환기한 건 사내였다.

아니, 이젠 유스라 왕국의 왕이라 부르는 게 맞겠지.

"...은인이시여.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내게 물었다.

그래도 왕인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왕이 고개를 조아리는 상황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내가 있었으니.

나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는 이호열이다."

.

.

.

최대치의 관계도와 영향력.

나는 그 메시지의 위력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유스라 왕국의 왕, 하쿠나.

오래전 멸망한 고대 왕국의 왕이라고 한들.

그 지위는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건재한 황금 궁전을 봐라.

막말로 이 궁전 하나만 내다 팔아도 서울 빌딩 숲을 모조리 사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호화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황금 궁전의 주인이자 유스라 왕국의 국왕.

하쿠나가 내게 물어왔다.

"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도 아주 공손한 태도로.

예절 교육 같은 건 한 적이 없거늘.

모든 건 히든 퀘스트의 보상 때문이겠지.

물론, 나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유스라 왕국을 재건하는 게 옳겠군. 국가에 필요한 게 무엇인가. 그것은 나보다 하쿠나,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는가?"

왕이라고 해도 나의 주군이 아니다.

고개를 조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 나조차도 납득이 되는 그랑펠의 태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엇보다 놀란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봐라.

"...태민이 형.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요?"

"언니. 수석 마법사한테 태클 걸었다고 놀랄 게 아니었어. 세상에 왕한테 말을 놔?!"

"와씨. 저거 한결같이 또라이."

그 마지막 말엔 나도 심히 동감하는바.

이내, 하쿠나가 대답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은인이시여. 그럼에도 긍지를 가지라, 말씀하셨지만.... 저는 우려가 됩니다. 백성을 등 저버린 왕을 누가 믿고 따를 수 있을지...."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믿고 따르는 것은 그대가 하기에 달린 것이다. 유스라의 왕이여. 벌써부터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늘. 그럼에도 그대는 걱정이 되는가?"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그런가."

참으로 쓸데없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유스라 왕국의 가치.

그건 아르카나의 물정을 잘 모르는 나조차도 어마어마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유스라 왕국은 보물섬이 아니던가?

그 주변에 출현하는 몬스터는 물론, 땅에서 나고 자라는 자원들까지.

비교하자면 유스라 왕국은 떡상할 일만 남은 저평가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막말로 무급으로 부려 먹는다고 해도 하쿠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쌓기 위해 줄을 설 플레이어가, 길드 단위로 널렸단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나의 '권한'으로 제안하겠네."

지금이 바로 활성화된 '권한' 기능을 활용할 때군.

왜,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유스라 왕국의 재건에 이바지할 이들로 이 자리에 모인 라이언 하트 기사단, 가온, 그리고 버서커 길드를 추천하는바."

"...!!!"

"하쿠나 왕이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하쿠나가 내 제안을 거절할 일은 없었다.

일동 경악─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생각했다.

적어도 이 유스라 왕국에서는.

그대들이 거절할 권리보다 나의 권한이 우선이다.

꼬우면 나처럼 권한 기능 활성화해 보든가....

*

거악이 사라진 지금.

천적관계도, 그랑펠과 악마 사이의 서사도 없다.

나는 무리했던 만큼 그 반동을 그대로 느끼고 있단 소리였다.

젠장, 몇 배로 힘들다...!

마력 탈진의 여파로 전신이 후들거린다.

무엇보다 눈꺼풀이 감겨온다.

또각─

그러나 인터뷰 요청 따윈 가볍게 무시할지언정.

이 걸음걸이가 흐트러지는 법은 없었다.

긍지가 이렇게 피곤하다.

나는 포탈로 향했다.

"호열 씨,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온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마지막까지.

남태민이 이토록 고마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왕국의 재건을 위해 일한다는 것.

말했다시피 유스라 왕국과의 관계도, 영향력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봐라, 하쿠나. 무급 봉사라고 해도 줄 설 거라고 했지, 내가?

"고맙습니다. 빚은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쭈뼛거리긴 했다만.

레오니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경우엔 내 독단이었다.

"하르콘 경. 내가 괜한 짓을 한 건가?"

"결코 아니네, 호열 경. 낯선 도시에 머무는 것보다 우리에겐 이곳의 환경이 더욱 익숙하니 말이야. 오히려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네."

무엇보다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이곳에서 무뎌진 감각을 단련할 수 있다며 좋아했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레벨을 생각하면 그들에게도 충분한 수련이 되겠지.

'돌아가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스라 왕국의 가능성.

그중에서 내가 써먹을 수 있는 건....

고민하던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더 이상 깊은 고민은 무리다.'

눕고 싶다.

심히 칼퇴근이 하고 싶다.

자고 싶단 말이다.

포탈을 통해 마탑에 도착.

나는 연구실에 들른 뒤.

양피지를 통해 감정을 맡긴 뒤 귀가할 생각이었다.

연구를 핑계 삼아 감정 요청을 맡길 아이템은 세 개.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된 400레벨 제한 아이템, [흡혈귀 백작의 오브].

에메랄드 호랑이를 처치하고 획득한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마지막으로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까지.

그러나 나의 칼퇴는 연구실 문 앞에서 멈춰버렸다.

"앗!"

문을 가리고 서 있는 커다란 고깔모자.

또각─

내 발소리를 알아차린 것인가.

고깔모자가 움찔거리기도 잠깐.

모자 아래에서.

느낌표가 떠오른 동공이 반짝였다.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호열 님!"

꾸벅─

정중하게 숙이는 머리.

가지런히 배꼽에 얹은 손.

쓸데없이 예의가 바르다.

"죄송하게도, 마법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이 있어서요!"

...차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기다린 시간만큼 심사숙고한 질문이라 믿겠다."

나는 문을 열었다.

"들어가지. 제시 하인네스."

◈ 38화. 성능 테스트 (1)

기나긴 기다림.

그건 그녀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는 스승조차 놀랄 일이었다.

고깔모자가 들썩였다.

이게 정말 자신의 제자란 말인가.

탄식을 뱉으면서.

-...제자야. 낙담이라는 감정을 아느냐.

"...."

스승의 질문.

그러나 입 밖으로도, 머릿속으로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시의 시선은 스마트폰 액정.

정확히는 영상 속의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승, 고깔모자는 또 한 번 탄식했다.

-나의 마음이 무너진다. 무너져...!

대마법사의 지혜가 깃든 고깔모자.

사실상 대마법사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이런 게 이 세계의 언어로 현타라는 것이구나....

그런 고깔모자가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영상 속 사내, 호열.

하나뿐인 제자를 바꿔버린 그 사내 때문이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기는 했다.

지금의 영상만 봐도 그렇다.

모험가가 확실하면서 마법을 자유자재로 발현한다.

모험가 특유의 틀에 박힌 발현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법에 의구심을 품던 제자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어떻게 이해하신 걸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거늘.

갑작스럽게 정기 학회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발표를 지적.

심지어는 그의 마법을 따라 발현하기까지 했다.

그건 탐색, 간섭, 발현.

자신의 제자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법의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했단 소리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천재 그 이상의 재능이다.

물론 고깔모자는 그 감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 이유야 어떻게 됐든.

제시는 비로소 마법에 대한 의구심을 지운 상태였다.

그게 스승으로서 섭섭한 점이었다.

내가 백날 말해도 믿질 않더니.

어찌 사내를 보고 바로 그 마음을 바꿔버린단 말인가?

-사랑스러운 제자야. 남자는 다 늑대다!

물론, 농담이었다.

남자여서가 아닌 같은 모험가이기에.

자신과 같은 모험가가 마법의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제시 또한 편견의 벽을 깰 수 있었던 거겠지.

-나는 딱 봐도 안다. 저 날카로운 눈빛이며 오만한 말투. 확실하다. 저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확실해. 분명 여자를 고생시킬....

또각─

별안간 들려온 소리.

거침없이 뒷담화를 내뱉던 고깔모자가 움찔했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와아! 부러워요! 호열 님!"

제시의 눈동자에 느낌표가 돌아왔다.

마법사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 중인 제시.

마탑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마법사들의 연구실을 구경하기도 했던 그녀였다.

"숙련 마법사님들 연구실보다 훨씬 좋아요!"

하지만 그런 제시조차 마탑의 하층.

그러니까 견습, 숙련 마법사들의 연구실에 출입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호열의 연구실에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지."

"아, 넵! 기다릴게요!"

"유감이지만 내어줄 차는 없군."

"...차요?"

"마탑엔 로켓 배송이 되지 않는다."

...차는 어떤 차를 말하는 걸까.

아메리카노? 홍차?

로켓 배송?

로켓 배송이란 건 새로운 마법인 걸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제시는 꾹 참았다.

'심사숙고한 질문...!'

이런 사소한 궁금증에 질문 기회를 날릴 순 없었으니까.

제시는 접객용 테이블에 앉아 호열을 기다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겠지?

힐끗─

제시는 고깔모자 아래로 눈치껏 동공을 굴렸다.

슥스슥─

호열은 책상에 앉자마자 깃털 펜을 쥐었다.

그러더니 거침없이 양피지에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제시는 흠칫했다.

'돌아오자마자 연구라도 하시는 걸까요?'

괜히 방해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

제시는 실례를 무릅쓰고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혹시라도 방해될라.

이젠 호열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런데.

"?"

...어째 너무 고요하다.

언제부터인가.

깃털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힐끗─

호열을 바라보니 그대로였다.

의자 등받이에 곧게 붙인 허리.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턱과 목과 팔의 각도.

그래, 자세는 아까와 조금의 변화도 없었거늘.

"!"

그 눈꺼풀이 감겨있었다.

보기만 해도 불편한 자세.

처음엔 잠이 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명상 중이신가, 넘겨짚어 생각하는 게 고작.

그러나 주의를 집중하자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호열은 수면 중이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자세로.

'역시, 오늘은 안 되겠어요.'

제시는 조심스럽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연구실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멈춰 섰다.

호열이 잠든 책상 앞에서.

힐끗, 제시는 호열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든 호열의 모습은 확실히 새로웠다.

도리도리─

그것도 잠깐 제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어요!'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살포시─

제시는 연구실 문을 닫고 나서야 깊게 심호흡했다.

제시가 고깔모자, 자신의 스승님에게 속삭였다.

"피도 눈물도 없으시긴요. 저렇게 인간미 있으신데."

.

.

.

...졸았나.

눈을 뜨니 그 자세 그대로였다.

새삼 무리했다는 게 느껴지는군.

사실 내가 한 일은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것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이렇게 숟가락 들 힘조차 없을 정도로 허약하다.

'...잠깐.'

그나저나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든다.

뭔가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한....

그래, 제시 하인네스.

"이런."

연구실에 제시는 보이지 않았다.

빠져나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얼마나 깊게 잠든 거냐, 나는.

그 시간을 확인하니 대충 다섯 시간이 흘렀다.

...이 불편한 자세로 내리 다섯 시간을 잤다고?

그럼에도 배기는 곳이 하나도 없다니.

이건 격식이 몸을 지배하는 수준이다.

아무튼, 제시에겐 미안한 일이 돼버렸다.

질문을 받아준답시고 잠이 들어버렸으니.

'좋지 않은데.'

제시 하인네스.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그녀와의 관계는 중요하다.

최상위 랭커와 원수를 져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만.

그 레벨을 떠나서 제시는 내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정확히는 제시의 스킬이 영감을 주는 거지만.'

어쨌든, 다음에 만나면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 주자.

긍지 때문에라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거든, 내가.

"차가 없어 아쉽구나."

...접대용 녹차 티백도 좀 구비해 두고 말이지.

어느 시점부터 잠이 든 건가.

그건 양피지를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감정 요청까진 하고 잠들었구나.

양피지에 요청에 대한 답변이 떠올라 있었다.

-알겠습니다. 감정 요청하신 물품들로 어떤 마도구를 제작할 수 있는지. 요구 사항에 부합할 수 있는지. 상세히 분석하여 보고하겠습니다.

내 요구 사항은 간단했다.

무엇보다도 레벨 제한.

그 효과에서 타협하는 한이 있더라고 해도 당장 쓸 마도구, 아이템이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리면서 50레벨이 단숨에 상승했다는 거겠지.

나는 그 답변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

...흥정에서 최악의 대사 아닌가, 이건?

그러나 그랑펠만큼이나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부귀영화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모험가를 후려치는 건 몰라도 같은 마탑 마법사까지 뜯어먹진 않겠지.

나는 양피지에서 시선을 옮겼다.

책상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책더미를 향해.

그건 연구를 빌미로 마르셀로에게 요구했던 마법 서적들.

가장 위에 놓인 서적을 펼치자 정말이지, 아직도 낯선 단어들이 보인다.

"그렇군."

물론, 더 낯선 건 그런 서적을 이해하는 나의 모습.

이해하기까지 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정기 학회에 발표됐던 마법과 개념들.

그와 비교하면 이건 유치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런 수준 낮은 마법 서적을 필요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 수준이 형편없으니까.

쉽게 말해 밑 빠진 독.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둥실─

허공에 떠오른 마력의 구체.

순수마력학의 기본 마법, 라이트.

주위를 밝히는 초급 중의 초급 스킬.

마법사 계열 클래스로 전직하는 순간.

익히게 되는 초급 스킬 중 하나였다.

그런 기본 스킬을 이제서야,

그것도 스킬이 아니라 마법으로 익히게 된 이유?

간단하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악마 사냥꾼이니까.

물론, 천하의 마탑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나를 악마 사냥꾼이라곤 상상조차 못 하겠지.

새삼스럽게 나의 클래스 정체성이 떠오른다.

그러나 좋게 좋게 생각하자.

'기본기를 쌓는 거야.'

밑 빠진 구멍을 막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뒤늦게 초급에 입문하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이지 않으냐고.

그런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건 스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마법과 스킬은 다르다.

마법은 스킬과 달리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두둥실─

나는 라이트를 반복해서 발현했다.

이내,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마력 구체.

초급 마법이라고 해도 그 본질은 마력의 덩어리.

다시금 탐색, 간섭, 발현.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면....

화르륵─

마력 구체는 불덩어리가 될 수도.

파지직─

전기 구체가 될 수도.

휘이잉─

심지어는 작은 폭풍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마력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말이지.'

그 속성이 다른 마법.

수십 개를 동시 발현해서일까.

...소모되는 마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천적 관계가 발동 중일 때도 쉽게 사용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다시금 깨닫는다.

아직도 한참 나약하다.

빠르게 상승했다고 해도 고작 226레벨.

무거운 긍지에 탓에 언제 가라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이쪽도 기본기가 부족하단 소리였다.

'진짜 쉴 틈이 없겠는데.'

양쪽으로 밑 빠진 독을 막으려면 말이야.

발버둥 치다가 쥐라도 나면 어떡하지.

내가 영양가 없던 고민을 하던 와중이었다.

똑똑─

"?"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누구인가.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으니까.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성공)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0/20)

그래, 어째 잠잠하다 싶었다.

수석 마법사.

제아무리 마탑의 실세라고 해도 모든 마법사가 마르셀로의 결정에 납득하는 건 아닐 테지.

더군다나 나는 낙하산,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낙하산 성능 테스트쯤이야.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들어오게.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문이 열리고 마르셀로가 들어왔다.

어째 전보다 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냄새 때문인가?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허공에 불덩어리가 일렁거렸으니까.

탄 냄새 때문이라면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혹시라도 빌린 연구실을 태워 먹기라도 해봐라.

내가 됐든, 마르셀로가 됐든.

배상할 금액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끔찍하다.

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았는지 알고 있네."

"...아, 혹시 들으셨습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마르셀로는 진심으로 미안한 눈치였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은 수석 마법사란 제 위치 때문입니다. 수석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임 마법사들은 끊임없이 수석 마법사에게 그 자질을 증명하길 원합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낙하산 태워준 사람한테 사과까지 받을 정도로.

"아니, 부족한 것은 그대가 아닌 저들의 믿음이겠지."

...뭐, 조금 오글거릴 순 있어도.

배은망덕한 놈은 아니다, 내가.

게다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자리라고 했나?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것 또한 그랑펠에겐 익숙한 자리였으니.

나는 더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셀로에게 덧붙였다.

"그 자리에 익숙해지게.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

.

마르셀로는 잠시 우두커니 멈춰 섰다.

마법흔.

발현된 마법이 남기는 흔적.

아직도 연구실에 흩날리고 있는 그 마법흔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복잡한 탐색과 고도의 간섭이 반복되어 발현되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연구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르셀로가 흠칫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수준의 마법을 동시에 발현했다고?'

마력의 고저를 떠나 '기이'할 정도의 마법 이해도.

그러나 마르셀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부족한 것은 그대가 아닌 저들의 믿음이겠지.

자신조차 믿음이 부족한 자가 될 순 없었으니까.

마르셀로는 다급히 호열의 뒤를 따라나섰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 어떤 결과물을 발표할 때도 이러지 않았거늘.

처음으로 선임 마법사들의 반응이 기대됐다.

◈ 39화. 성능 테스트 (2)

스무 명의 마탑 선임 마법사.

그들은 각 학파를 대표하는 마법사들이다.

당연하게도 서로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가뜩이나 그 자존심이 강한 마법사들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거늘.

선임 마법사는 수석 마법사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

그건 오직 한 세대에서.

정점에 오른 마법사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세대의 선임 마법사들은 그럭저럭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모든 건 공공의 적,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덕분이었다.

"쯧쯔. 언젠가 사고를 칠 줄 알았습니다."

"맨날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으니 감각이 무뎌진 거지."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 아니었습니까?"

크리스탈 홀.

정기 학회가 개최됐던 공간에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이 속내를 숨긴 채 담소를 나누는 이유야 간단했다.

"모험가와 공동 연구라니. 이게 무슨."

마르셀로의 결정.

그 오판을 문제 삼기 위해서.

마르셀로를 수석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그 자리를 공석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현될 가능성은 차고도 넘쳤다.

무엇보다 모험가라니.

"후후. 의지할 곳이 그렇게도 없었나 봅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그러니까 세계관 간섭이 일어나기 전.

모험가들은 미지의 존재였다.

그들은 죽어도 되살아나는 불사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더 이상 불사 능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하나뿐이던 가능성조차 사라진 것이다.

"정기 학회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해도 말일세. 아직까지 진실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맞습니다. 뜬구름 잡는 연구가 팔을 허우적거리던 모험가에게 우연히 얻어걸린 것인지도 모르는 일입죠!"

"뭣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험가 주제에 마법을 이해하고 있다는 게."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크리스탈 홀.

그 특수한 공간에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았거늘.

파르르─

어째서인가.

그녀의 늘어진 연녹색 곱슬머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벨리에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으니까.

'아, 웃겨. 정말, 그러고들 싶을까?'

모험가, 이호열에 대한 감상이 아니었다.

벨리에, 그녀 또한 아직 호열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르셀로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마르셀로.

마법도, 학파도 가리지 않았다.

마탑, 심지어는 마탑 외에서 전수되어 온 마법까지.

마르셀로는 그 방대한 마법을 이론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론마법학을 창시했다.

그 위대한 업적 덕분에 마르셀로는 선임 마법사가 됐고, 그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수석의 자리를 차지했다.

'백날 떠들어 봤자 그 업적에 흠집이라도 날까?'

수석의 자리가 아무리 탐난다고 해도 말이야.

사실 저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정상적인 방법으론 마르셀로의 자리를 빼앗을 순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이번 기회에 목숨을 거는 거겠지.

조소를 거둔 벨리에는 주변을 둘러봤다.

'...물론, 어느 누구보다도.'

흑마도학파, 마티스 딘 카를.

저 사내가 가장 이를 갈고 있겠지.

사파 취급을 바던 흑마도학을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마티스였다.

마르셀로가 혜성처럼 등장하지만 않았더라도 현재 마탑의 수석 마법사는 마티스가 되었을 거란 게 중론이었다.

'뭐, 그래요. 만약은 만약에 불과하지만.'

벨리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슬슬 시간이 됐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시간에 맞춰 입장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만?"

그래, 저들 말대로 자격 증명은 이미 시작됐다.

수석 마법사와의 공동 연구.

수석 마법사와 같은 대우를 받는 만큼.

그에 대한 엄격한 자격 증명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모험가 주제에.

자격 증명을 통과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들지 않았다.

'이렇게들 이를 갈고 있는데.'

당장 저 굳게 닫힌 출입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삼중으로 발현된 서로 다른 계열의 봉인 마법.

그건 벨리에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마르셀로라면 모를까.'

본인을 포함해 웬만한 선임 마법사들조차 저 봉인을 풀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자격 증명은 불합격으로, 이미 그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이었다.

왜,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철컥─!

"...?"

그때였다.

첫 번째 봉인이 해제된 것은.

아니, 소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철컥─!

철커덕─!

연달아 울리는 소리.

순식간에 삼중 봉인 마법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마법의 발현자인 3인의 선임 마법사들이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저걸 저렇게 금방 파훼했다고?"

"...설마, 마르셀로. 마르셀로인가?"

열리는 문.

그러나 그곳에 마르셀로는 없었다.

홀로 서 있는 역광 속 하나의 그림자.

그 순간, 벨리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설마?'

그건 치유학파의 숙련 마법사.

클레가 전해왔던 이야기.

-저기, 벨리에 선임 마법사님. 만약에. 진짜 만약에요. 초청장 없이도 제게 말을 걸어오는 분이 있었다면.... 그건 그분께서 탑주님의 환각 마법을 간파했다는 뜻이겠죠?

클레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아이가 아니거늘.

그래서 벨리에는 되물었었다.

왜, 그런 자가 있었느냐고.

-그 은발 머리에.... 아,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말을 끝마치진 않았지만.

그 아이, 클레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또각─

이내, 역광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벨리에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

그의 머리카락은 확실하게도 은발이었으니까.

.

.

.

크리스탈 홀.

정기 학회가 열렸던 이곳을.

이렇게 빠르게 다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모인 이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퀘스트에 적힌 대로 스무 명이군.

과연, 선임 마법사라는 것인가.

하나같이 풍기는 분위기가 흉흉하다.

느껴지는 위압감만 비교하자면....

'모두가 하르콘보다 확실히 위다.'

하르콘의 레벨은 무려 600레벨.

그럼 이 마법사들의 레벨은 대체 얼마나 된다는 거야?

새삼스럽게 마탑의 수준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또각─

좋으나 싫으나.

나는 그 시선을 즐기듯 크리스탈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누군가 문에 장난을 쳐둔 모양이군."

굉장히 불쾌하다는 것처럼.

이 불쾌함의 원인은 명확하다.

나는 지금 미치도록 퇴근하고 싶다...!

학회, 유스라 제도, 다시 학회가 열렸던 크리스탈 홀.

연구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긴 했다만.

그걸로 혹사당한 몸의 피로가 풀릴 리 없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떠오른 퀘스트였다.

아무리 내가 증명에 익숙하다고 해도 말이야.

이건 너무 격식에 어긋나는 일정이 아닌가?

마탑에는 노동법도 없다는 거야, 뭐야.

"나는 그대들의 장난에 어울릴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야근은 지긋지긋하단 말이다...!

그런 나의 불만이 전해진 것인가.

몇몇 이들에게서 흠칫하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이따위 장난으로 내 시간을 허비한 것이라면."

나는 집에 가고 싶단 말이다.

"그에 관한 책임은 정식으로 따져 묻겠다."

뜨거운 물을 끼얹고 싶단 말이다.

"!!!"

그런 내 말에.

유달리도 크게 반응하는 세 사람이 보였다.

왜 저러나, 생각하기도 잠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3/20)

그리고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결정에 대한 이의를 철회하겠습니다. 모험가, 이호열의 공동 연구 자격 또한 인정하겠단 소리입니다."

나는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그래, 진작 그렇게들 나오셨어야지.

*

[누군가 유스라 제도의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르카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누군가'는 누구인가?

매스컴에겐 그것만 한 가십거리도 없었다.

오히려 밝혀진 게 없으니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그건 아무렇게나 떠들 수 있단 소리였다.

시청률을 위해.

최대한 자극적으로.

"역시, 저는 스칼이라고 봅니다."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 말씀이십니까?"

"네, 스칼이 어디 섬의 보물 하나에 만족할 위인입니까? 그 신비주의 컨셉을 깨지 않으려고 거악을 잡고도 모른 척하는 거겠죠."

역시 스칼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장에는 크나큰 맹점이 있었다.

"야씨, 스칼이 쓰러트렸으면 레벨이 올랐겠지."

그랬다.

현재 스칼의 레벨은 406레벨.

650레벨에 육박하는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렸다고 하기엔 그 상승폭이 너무 적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가능성.

"내 생각엔 역시 라이언 하트 기사단밖에 없다니까?"

그게 확률이 가장 높은 선택지였다.

더군다나 라이언 하트의 경우엔 목격자도 있었다.

"완전 하나의 섬광 같았다니까요? 막 스켈레톤을 박살 내버리고 전진하는 게!"

650레벨.

플레이어로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수치의 몬스터.

하지만 제국 최강이라 불리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면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겐 조력자가 있었다.

"가온과 버서커. 마지막으로 이호열까지. 그 정도 전력이면 그래도 비벼볼 만하지 않았을까? 왜, 하르콘이 전력을 쏟았다고 치면 말이지."

추측과 토론 끝.

여론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거악,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린 것이라고. 그러나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처지로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어휴. 이걸 보여줄 수도 없고. 진짜!"

속 터진다. 내가.

퍽퍽!

TV를 보다가 가슴을 두드리는 남태민.

그에게 공감하는 건 역시나 형밖에 없었다.

"아주 그냥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이상한 쪽으로 펼쳤네. 우리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결국, 거악을 쓰러트린 건 호열 씨 혼자였는데."

남철민에겐 그날의 진실이 영상으로 남아있었다.

남태민의 시야로 지켜봤던 그날의 전투가 말이다.

그건 몇 번이고 돌려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호열과 마주하자마자 동요하던 거악.

그런 녀석에게 쏟아붓던 스킬 폭격.

그건 이제까지 본 적이 없던 압도적인 전투였다.

남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분, 나는 이해할 수 있지."

"아, 그랬었지! 형도 임프한테 빙의 당했었으니까."

"그래. 내 꼴이 딱 저랬을 거야. 그때 임프 녀석 완전 공포에 질렸었거든. 역시 호열 씨 앞에선 임프든 거악이든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다시 깨어난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유스라 제도의 진실을 밝히는 호열의 모습.

남태민이 목소리를 깔고 호열의 대사를 따라 했다.

"과오를 바로잡을 시간이다. 이름 모를 왕이여. 캬."

이게 드라마고, 이게 영화지!

그렇게 영상이 끝나자, 남태민은 또 한 번 절규했다.

"...으으, 이런 서사시가 또 없는데!"

이걸 우리밖에 볼 수 없다니.

저런 뇌피셜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그 이유야 간단했다.

"답답해도 참아야지. 별수 있겠냐."

무엇보다 영상엔 호열의 전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영상을 호열의 허락 없이 공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남철민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혹시 나중에라도 필요하실지 모르니까. 녹화 영상은 고이 간직해 둬야지. 그런 의미에서 보는 눈이 적었어서 다행이었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제외.

호열과 거악의 전투를 직접 지켜본 건 남태민과 레오니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길드원들에겐 일찌감치 퇴각 명령을 내렸었으니까.

"그러게. 면목 없을 일은 애초에 만들질 말아야지."

호열에겐 또 한 번 큰 빚을 졌다.

자신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호열은 유스라 왕국 재건에 참여할 기회를 줬으니까.

덕분에 남태민과 가온의 길드원들은 [유스라 왕국 재건]이라는 귀한 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니까 그 은혜에 보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진짜 열심히 해보자, 형."

모든 일엔 주고받음이 있다.

여태까진 받기만 했으니.

언젠가 주는 입장이 되기 위해서라도.

다짐하던 남태민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는 입조심 잘하겠지?"

.

.

.

"아, 귀 간지러워."

벅벅─

레오니는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머리를 긁는다고 복잡한 머릿속이 풀릴 리는 없었다.

에라이씨.

레오니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콘을 내던졌다.

"안 봐."

어디 재밌는 거 안 하나.

싶은 마음에 채널을 돌렸는데.

어딜 틀어도 전부 유스라 왕국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날의 진실이니, 뭐니.

누가 거악을 잡았느니.

소파에 축하고 늘어진 레오니.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야."

나는 전부 알고 있거든?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있는 우월감.

그 우월감이란 건 레오니에게 나름대로 소중한 것이었다.

"언니,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뭐씨."

"아니. 우리만 빠지라고 해놓고 무슨 일이 있었냐구!"

"몰라. 나도."

"아, 치사해!!"

친자매나 다름없는 길드원과도 공유하기 싫을 정도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퀘스트까지 받아온 거래?"

레오니는 그냥 어깨를 우쭐거려줬다.

다만, 그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버서커 길드의 영향력과 랭킹은 자연스럽게 상승하겠지. 그래, 길드 마스터로서는 분명 순수하게 좋아하는 게 맞는데....

'...이래선 또 빚진 거 아니야?'

나 이러다가 차 한잔, 얻어먹을 순 있는 걸까...?

고민하던 레오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뭐 하고 있을까."

"뭐 하고 있긴. 언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자고 있겠지."

"...뭐, 뭐래? 누가? 누가 자?!"

"누구긴 누구야. 이호열 말하는 거 아니야?"

"뭐, 뭐래?! 아니거든! 니들이 뭘 알아?! 안 닥쳐?!"

.

.

.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나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

씻고 난 뒤 곧장 침대에 뛰어들려고 했건만.

육체가 거절했다.

나의 나약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거악을 쓰러트렸다고 한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비롯한 다른 플레이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자였다면 거악에게 도달하긴커녕 스켈레톤에게 둘러싸여 마력 탈진에 빠졌을 테니까.

그 사실을.

가슴 속 긍지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2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1,000회 (성공)

●턱걸이 5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300회 (성공)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털썩─

나는 기절하듯 바닥에 쓰러졌다.

...빌어먹을, 흑역사.

극복하려다가 내가 먼저 죽겠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나는 간신히 상태창을 열었다.

◈ 40화. 성능 테스트 (3)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226]

[능력치]

근력 : 33 / 민첩 : 35 / 마력 : 126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50]

육체 단련 퀘스트의 보상으로 상승한 근력과 민첩.

그 수치를 계산해 보자....

같은 레벨보다 대충 10~20레벨 정도 앞서있는 건가?

'반복 퀘스트로 이 정도 격차라니.'

다시 한번 체감한다.

클래스 퀘스트, 유난을 떨 정도로 대단하다.

물론 육체 단련 퀘스트를 통해 상승한 건 근력과 민첩.

마법으로 주로 활용하는 내겐 당장 큰 영향은 없겠지.

하지만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 무엇하나 특출난 것이 없던 클래스, 악마 사냥꾼.

그 새로운 육성법을...!

사실 거창하게 육성법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악마 사냥꾼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읊조렸다.

"...고독하구나."

고독하긴 개뿔.

땀에 젖어 방바닥에 쓰러진 게 처량하면 몰라도.

누가 들으면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아무튼.

말했다시피 특출난 것이 없다는 건.

하기에 따라 약점이 없다는 말도 될 수 있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

한정된 스탯 포인트.

그 포인트를 분산 투자한다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이었으니까.

예를 들면 간단하다.

마법사 계열 클래스가 근력을 상승시켜 봤자....

'그 근력을 활용할 수가 없는 거지.'

마법사 계열 클래스에겐 근력에 영향을 받는 스킬이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악마 사냥꾼은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는 클래스였다.

'그럴싸한 전투 스킬 하나 없다니!'

천적관계와 구마의식.

오직 악마에게만 효과가 있는 클래스 고유 스킬뿐.

이렇게 콘셉트에 충실한 클래스도 또 없겠지.

그 탓에 스탯 투자에도 정해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스킬은 없어도 나한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그게 여태까지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한 이유.

거기에다가 나는 새로운 가능성까지 목격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정확하게는 세 명의 기사.

하르콘.

예시카.

에노크.

그들의 검에 일렁이던 기운 말이다.

'검기(劍氣).'

아직 그 명칭은 확실하지 않았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본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탐색, 간섭, 발현으로부터 시작되는 마법 또한.

누군가에게 물어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그냥 이 머리가.

그랑펠의 잘나신 재능께서.

보자마자 깨달아 버린 거였지.

'중요한 건 이름 같은 게 아니다.'

그래, 중요한 건.

내가 그 '검기'란 걸 다룰 수 있느냐는 것뿐.

검기의 위력이야 직접 지켜봤었으니까.

'예시카, 에노크. 두 사람과 스켈레톤의 레벨 격차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지.'

누가 보면 욕심이라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쪽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건.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야 한단 말이다!

훈련 퀘스트로 상승한 근력과 민첩을 포함.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획득할 보상.

하나하나를 백 퍼센트 활용해야만.

이 무거운 긍지를 뒷받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분간의 일정은 확정된 셈이다.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3/20)

마탑의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유스라 왕국에 들러야겠지.'

하르콘에게 검기에 대한 정보를 확인.

검기를 습득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수련까지.

...젠장, 벌써 피곤하다.

그러나 고생 끝에 낙이 오는 법이다.

나는 다시금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성공)

─칠죄종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라. (성공)

...그래!

클래스 퀘스트 보상을 생각해서라도 참자.

스탯만큼이나 엄청난 보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빌어먹게도.

이 청렴결백한 몸과 정신엔.

퀘스트 보상에 대한 욕심도 없었으니.

"다시 검을 잡기 위해선 체력을 길러야 한다."

그 퀘스트 내용 중 보이는 것은 오직 단 한 줄.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뚝뚝─

나는 다시금 팔굽혀펴기를 시작한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팔뚝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잠도 마음대로 잘 수 없다니. 내 인생아.'

내가 이렇게나 가엾다.

*

최근 매스컴에서 각광받는 직업이 있다면.

그건 단연 플레이어 파파라치였다.

줄여서 플파라치.

"아,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제가 누굽니까?"

유안준은 꽤 잘나가는 플파라치였다.

그의 사진 한 장이 수백만 원.

동영상은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그의 촬영물이 좋은 대접을 받는 이유야 간단했다.

"어디서도 못 볼 굴욕 사진 건져 드리겠습니다."

찰나를 포착한 플레이어들의 굴욕 사진.

그 어느 플레이어라고 해도 유안준의 앵글을 피해 갈 순 없었으니까.

랭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란 소리였다.

돌아갈 것도 없이 플레이어 랭킹 8위, 드미트리.

그도 유안준 덕분에 굴욕적인 기사에 시달렸었다.

[단독] 드미트리, 연애에 있어선 초보자?

그 기사에 첨부된 사진이 바로 유안준의 작품.

통째로 빌린 호텔 라운지.

무릎을 꿇은 채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하는 드미트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드미트리의 표정은 물론이요, 당황한 상대방의 반응까지 선명하게.

-엌ㅋㅋㅋㅋ차였어ㅋㅋㅋㅋㅋ

-이건 취재 내용이 더 웃김ㅋㅋㅋㅋ

-사귄 지 일주일 만에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했대ㅋㅋㅋㅋ

-생긴 거랑 다르게 순정남이네 ㄹㅇㅋㅋ

덕분에 드미트리는 길길이 날뛰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걸리면 죽여버리겠다고!

물론, 유안준은 걸리지 않았고 그러니까 오늘도 이렇게.

마탑에서 잠복하고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유안준은 오늘의 피사체를 떠올렸다.

"그냥 낚기만 하면...!"

대어도 이런 대어가 없다.

오늘 유안준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이호열이었다.

그래, 이건 드미트리보다 큼지막한 대어였다.

이호열, 그가 누구인가?

최근 들어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플레이어!

무엇보다 그 행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

유스라 제도에서는 네임드 몬스터를 두 마리나 처치한 것도 모자라 무려 650레벨짜리 몬스터.

거악, 칠죄종 탐욕까지 쓰러트렸다.

'정확히 따지자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업적이겠지만.'

그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이끌다시피 한 게 이호열이었으니까. 게다가 무엇보다 이호열에겐 스타성이 있었다.

거침없는 입담.

콘셉트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코스튬.

무엇보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스킬 활용까지.

이호열의 인기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안준은 알고 있었다.

'높게 날수록 떨어졌을 때 아픈 법이라고.'

완전무결.

그 완벽에 가까운 이미지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다.

큰 굴욕 사진도 필요 없겠지.

그저 가볍게 휘청거리는 사진을 찍기만 해도.

그 고고한 이미지에 흠집이 나기엔 충분하리라.

"원래 환상은 천천히 깨지는 법이거든."

그런 의미에 마탑은 최적의 장소였다.

무엇보다 저 오금이 저리는 계단을 봐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유안준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딱, 한 컷만 건져보자."

이호열.

소문에 의하면 마탑의 수석 마법사에게 퀘스트를 받았다고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면 그 모습을 포착할 수 있겠지.

유안준이 대포 카메라를 숨기고 잠복하던 그때였다.

포탈 주변에 몰려있던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호열이다!"

"야, 유난 떨지 마. 밉보일 일 있냐?"

"격식을 갖추란 말이야. 속닥거리지도 말고."

이해가 되는 반응들이었다.

대다수 플레이어들은 이호열, 그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왜, 밉보인 상태에서 저런 이호열을 균열에서 마주친다고 생각해 봐라.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물론, 그건 균열과 몬스터 사냥을 목표로 하는 플레이어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유안준은 슬쩍 카메라를 꺼내고 줌을 당겼다.

'자, 찍어볼까.'

입맛을 다시던 유안준.

그러나 그의 얼굴이 굳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각─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유안준은 어이가 없어 입까지 벌어졌다.

아무리 줌을 당겨도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굴욕은커녕 이건 화보잖아?!'

일반 촬영.

연속 촬영.

한 장은 걸릴 법도 하거늘.

어떻게 된 것인가?

보기만 해도 아찔한 계단을 나아가면서도.

그 표정과 자세에 굴욕은커녕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호수 위에 평온하게 떠 있는 백조.

도리도리─

유안준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호열 화보?

이런 사진은 이미 넘쳐난단 말이다!

막말로 넷튜브만 들어가도 이호열 팬을 자처하는 놈들이 올린 영상이 한가득이란 말이다.

필요한 건 오직 굴욕의 순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찍으면....'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모공 사진이라든가.

유안준이 플파라치 본능에 이끌려.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어이, 거기 잠깐 정지."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카메라 들고 있는 그쪽. 잠깐 나 좀 봅시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거대한 근육 덩어리.

드미트리가 있었다.

그가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 구면이지? 우리 호텔 로비에서 봤잖아."

순간, 떠오르는 한마디.

누군지 몰라도 걸리면 죽인다.

뚜둑─!

주먹을 푸는 드미트리를 보고 유안준은 깨달았다.

'낚싯대로 백조를 어떻게 낚겠다고...!'

설쳤던 내가 정말 주제 모르는 놈이었다며.

퍼억─!

*

스스스─

양피지 위에 떠오르는 소식.

-마도구, [현자의 심심풀이]가 반출되었습니다.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선임 마법사들이 결국, 마도구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역풍이 두렵지도 않은가 봐요?'

몇몇 선임 마법사들이 요청한 마도구.

[현자의 심심풀이].

그건 일종의 퍼즐이었다.

마법과 결합하는 순간.

난제가 되어버리는 퍼즐.

선임 마법사들의 마법이 깃드는 순간.

그건 크리스탈 홀의 잠금장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난제가 되겠지.

'마르셀로가 이의를 제기해도 할 말 없겠는걸요? 물론, 마르셀로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억지를 부리시는 거겠지만.'

선임 마법사 기준.

온종일 매달려도 [현자의 심심풀이]를 풀기 위해선.

최소 십여 일은 걸리겠지.

그 바보들의 생각이 훤히 보였다.

이호열, 그 모험가가 퍼즐에 매달린 사이.

온갖 트집을 잡아댈 생각인 것이다.

'보나 마나 뻔해.'

못 풀면 못 푼대로 난리.

풀었을 땐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고 난리.

어떤 트집을 잡아서도 생떼를 쓰시겠지.

물론, 벨리에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글쎄요. 그냥 얌전히 지켜보는 게 좋을걸요?"

벨리에.

그녀에게 모험가, 이호열의 자격을 증명하고 싶단 마음 따윈 없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 클레.

그 아이에게 다시금 진상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네, 맞아요. 그분이었어요!

이호열의 인상착의를 듣고.

클레는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랬군요. 그분이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님께서 공동 연구자로 추천하신 모험가셨군요! 다행이다...! 전 제가 엄청난 착각을 한 줄 알고...!

착한 아이, 클레.

그녀는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을까?

"그것과 탑주의 환영 마법을 간파한 건 별개의 이야기란다."

당연하다.

탑주가 발현한 환영 마법은 벨리에, 자신조차.

아니, 천하의 마르셀로조차 간파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아직 믿지 못한단다.'

그러니까 모험가, 이호열.

그를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그것은 마탑의 마법사로서의 본능.

'미지에 대한 순수한 탐색 욕구라는 거겠죠.'

자고로 탐색엔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법이니까.

벨리에가 풍성한 깃털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양피지에 차분하게 써 내려갔다.

그것은 마르셀로의 결정에 대한 납득.

이호열의 공동 연구 자격을 인정하겠단 내용이었다.

'...늦었군요.'

그에 대한 답필이 돌아온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요?

벨리에가 의문을 가지기도 잠깐.

스스스─

양피지 위에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벨리에가 조금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과반 달성까지 2표 남았습니다.

...잠깐만.

2표밖에 남지 않았다니?

당황한 벨리에가 늘어진 녹색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 하얀 손가락을 접어보았다.

"어제까지 3명. 그리고 나...."

다른 선임 마법사들이 찬성표를 던지진 않았으리라.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벨리에, 그녀조차 클레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결코 섣부르게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을 터였으니까.

그렇게 합해서 4표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4표는 어디에서 왔다는 것인가?

벨리에가 설마 하며 중얼거렸다.

"혹시...."

불현듯, 떠오른 [현자의 심심풀이].

'몇몇' 선임 마법사들이 반출했다던 그 마도구.

벨리에는 양피지에서 그 몇몇의 이름을 확인했다.

"...커튼, 도로시, 마이아, 벡스!"

그 몇몇은 정확하게 네 명이었다.

그 소리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벨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현자의 심심풀이를 간파한 거예요...!!"

.

.

.

책상 위에 널브러진 [현자의 심심풀이].

어려울 건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마법을 탐색하고 반전 마법으로 풀어내면 됐으니까.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8/20)

그래, 이런 수준이라면 빨리빨리 끝낼 수 있겠다.

기왕이면 뭐든 빨리 끝내고.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검을 쥐는 게 낫겠지.

나는 그에 대한 소감문을 양피지에 휘갈겼다.

'피곤해서 그런가. 까칠하긴 했었지.'

왜, 어제 일에 대한 사과도 약간 담아서.

-만약 유치한 장난이 아닌 증명 과정이었다면 기꺼이 환영하겠다.

◈ 41화. 검은 오랜만이군 (1)

환영한다는 쪽지까지 보냈거늘.

...어째 잠잠하다.

나는 양피지에 휘갈긴 글씨를 바라봤다.

'사과도 제대로 전했는데 말이지.'

다음 증명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가?

뭐,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게 아니더라도 할 일이야 넘쳐날 지경이었으니까.

일정이 빡빡하단 소리다.

나는 읽고 있던 마법 서적을 덮었다.

'슬슬 가보자.'

유스라 왕국으로.

언론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유스라 왕국에 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누구보다 신이 난 건 대한민국의 매스컴이겠지.

가온과 버서커.

오직 두 길드만 수행하게 된 유스라 왕국 재건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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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전문가 日, "가온과 이나즈마 순위 변경 확실시돼.... 3위 진입도 꿈이 아니다."

[이 시각 국회는] "가온이 이끌고 신화가 뒷받침하는 미래를 꿈꾼다...." 이번 성과는 국책의 결과물이라는 자화자찬 이어져....

[단독 인터뷰] 남태민 인터뷰 거절,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

──────

그런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플레이어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다, 정말.

상상해도 얼마나 피곤한가?

뭔 한마디만 해도 쏟아지는 훈수에.

계속되는 억측에.

인터뷰 요청까지.

'그런 의미에선 감사할 수밖에 없군.'

이 까칠한 성격에 말이야.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카메라 앞에서 필터로 거르지 않고 내뱉었던 말들.

...정말 다시 떠올려도 오글거려 죽을 것 같은 대사였지만.

그래도 그 덕분인가?

내겐 섣불리 기자들이 다가오는 일이 없었으니까.

아니, 기자들뿐만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다.

마탑의 로비.

포탈 주변에 몰린 많은 플레이어들.

"아니, 그냥 그 시간에 균열이나 돌자니까...?"

"헉. 이호열이다. 이호열!"

"쉿! 일단, 다 입부터 다물어."

흐르는 정적─

시끄럽던 그곳이 일순간 조용해진다.

과거의 나였다면 안절부절못했으리라.

이것들이 날 따돌리나.

괜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확실하다.

이런 반응에도 슬슬 적응되고 있었으니까.

나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 침묵을 흡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과 비슷한 그림이 떠올랐다.

'...하긴.'

이 성깔은 잘나가는 플레이어들만 모아둔 랭커들 앞에서도.

심지어는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 앞에서도 한결같았었지.

그러니까 이 정도는 굳이 감상을 남길 필요도 없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또각─

나는 포탈에 진입하며 생각했다.

어떻게 갈수록 뻔뻔해지냐, 호열아.

.

.

.

유스라 왕국을 찾은 이유야 간단하다.

'하르콘을 만나야 해.'

그에게 '검기'에 대한 의문을 물어봐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할 건 확인해 봐야겠지.

청렴을 떠나 얻은 걸 활용하지 않는 건 멍청한 거니까.

'암, 그렇고말고.'

히든 퀘스트를 성공하며 획득한 보상.

유스라 왕국과의 관계도, 영향력이 최대치로 상승한 나였다.

그 결과, 유스라 왕국에서의 [권한] 기능이 활성화됐다.

'제대로 알아두자.'

나는 그 권한 기능을 정확히 파악해 둘 생각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왜, 인터넷에서 적잖이 떠들어 대야지 말이야.

-ㄹㅇ 가온이랑 버서커는 축복받은 거 아니냐?

-퀘스트로 관계도, 영향력 쌓아두면 나중에 왕국 재건 끝났을 땐 작위 같은 것도 받을 수 있는 거잖아? ㄷㄷ

-샤이닝이나 스칼은 속 터지겠다ㅋㅋㅋㅋ 유스라 왕국에선 레오니랑 남태민한테 존댓말 써야댈지도 모름ㅋㅋㅋㅋ

관계도와 영향력.

그에 따른 작위 획득의 가능성까지.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내려오는 상식이요.

그게 바로 플레이어들이 관계도와 영향력에 집착하는 이유였다.

'물론, 규모에 따라서 중요성이 달라지긴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의 영향력.

한 국가에서의 영향력.

그 둘을 같은 선에 두고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왜, 마을 촌장이 작위를 줄 순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스라 왕국에서의 관계도와 영향력의 가치는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다.

무엇보다 유스라 제도는 최초로 현실에 등장한 아르카나의 국가였으니까.

-일단 포텐이 미쳤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전설 속 보물섬인데ㅋㅋ

-작위고 뭐고 광산 소유권 하나만 따도 ㄹㅇㅋㅋ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발전 가능성!

원래부터 그 자원이 풍족한 유스라 왕국이거늘.

최초 등장 국가가 되면서 그 자원을 백분 활용하며 발전할 기회가 닿은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의 기대감도 덩달아 커지고 있었다.

-일단 주변에 몬스터가 리젠되는 게 크다

-왕국이랑 사냥터 왔다갔다하면서 레벨 올리고ㅇㅇ

-나중엔 뭐, 경매장이나 상점도 생기지 않을까??

-ㄹㅇ 그냥 지금이라도 가온이나 버서커에 말단으로 들어가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 다들???

-ㅁㅊㄴ 누가 받아준 대냐?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내 기대감도 덩달아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대치라니까.'

...뭐, 콩고물이라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이번에도 나를 움직이는 건.

이 가슴 속의 긍지였다.

"현명하게 판단해야겠군."

막대한 영향력.

그 영향력과 동반되는 책임감.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는 속으로 탄식을 머금었다.

'...이래서 뭐가 남겠냐고!'

자고로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이다.

말하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직장인으로서.

사회란 정글에서 구르며 깨달은 진리거늘.

'...어라?'

하지만 나의 신세 한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최대치의 관계도와 영향력.

그게 보통 보상이 아니란 것을.

이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굳이 나서서 챙기지 않아도?'

멀리 보이는 황금 궁전.

그 궁전을 배경으로.

나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 하나.

사내는 바로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였다.

"오셨습니까? 은인이시여!"

나는 환하게 웃는 하쿠나를 보며 생각했다.

'왕이 버선발로 맞아주는 모습을 보고도 당연하다 여기다니. 어쩌면 이거 갈수록 뻔뻔해지는 게 아니라...?'

내 뻔뻔함은 이미 최대치에 다다른 게 아닐까, 하고.

*

"하나, 둘!"

우렁찬 기합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온인가?

"목소리가 작구나. 다시!"

어째서인가, 머릿속이 차분했다.

모험가들의 세계로 소환된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이 든 날이 없었거늘.

어젯밤엔 단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하르콘은 주변 풍경을 바라봤다.

모험가들의 말로 빌딩이라 부르는 건물도.

요란스러운 철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고향과 비슷한 유스라 왕국의 환경 때문일까?

'아니.'

하르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을 괴롭히던 건 조급함이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무사하실까?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편히 눈을 붙여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 섣부른 걱정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게 호열 경 덕분이군.'

그래, 모든 게 호열 덕분이었다.

하르콘은 호열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까.

'당황스러운 것은 호열 경도 마찬가지였겠지.'

자신들의 고향과 모험가들의 세계.

두 세계가 뒤섞이는 대격변.

혼란스러운 건 모험가들도.

호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악마의 출현까지.

자신들처럼 낙담할 여지는 충분했거늘.

하르콘은 다시금 감탄을 삼켰다.

'경은 어찌 그리도 차분할 수 있었던 걸까.'

호열에게선 작은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었지.

심지어는 칠죄종 탐욕.

자신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거악과의 전투에서도.

그런 호열의 행동에서 숭고한 결단이나 희생은 없었다.

마치 그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거악에게 나아가는 호열만이 있었을 뿐.

그것이 하르콘의 정신을 깨우는 데에 큰 영향을 줬다.

'그 결단조차 호열 경에게는 당연한 일이라는 거겠지.'

이 얼마나 커다란 그릇을 가진 사내란 말인가?

단연코 그런 호열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거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물론, 노력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

두근─

어찌 보면 당연한 그 한마디가.

멈춰있던 사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였다.

그래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은 다시금 훈련을 시작했다.

챙─!

맞부딪히는 기사들의 검.

하르콘이 열정적으로 기사들을 고양시켰다.

"날을 세워라! 자세를 가다듬어라!"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계의 악마조차 쓰러트리지 못하면서 어찌 고향의 악마를 쓰러트린단 말인가!"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챙채챙─!

하르콘은 이를 악문 기사들을 보고 생각했다.

'더 이상 미련은 없다.'

호열을 통한 마탑과의 접촉.

하르콘은 그에 대한 계획 또한 거둬버렸다.

그것 또한 한시라도 빠르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조급함에 저지른 실수였으니까.

깨달음을 얻은 마당에 실수를 반복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경에게 또 한 번 배려를 받았군."

유스라 왕국 재건에 동참하게 됐지만.

그건 훈련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왕국에 위협이 될만한 마물이나 적을 처리하는 게 기사단의 역할이었으니까.

하르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기합 소리.

차분한 머릿속.

아마도 한동안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그런 하르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바, 방금 뭐라고 했는가? 호열 경?"

이번에도 다름 아닌 호열 때문이었다.

당황한 하르콘이 되물었다.

"그건 설마, 검에 입문하고 싶다는 말인가...?!"

.

.

.

"후우─"

한숨과 함께 예시카는 투구를 벗었다.

땀에 젖은 흑갈색 단발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그녀의 가늘어진 눈매가 하르콘을....

아니, 정확하게는 하르콘 곁의 은발 머리.

호열에게 향했다.

'마법사.'

그것도 마탑과 관련된 마법사.

예시카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

그 목표로 향하기 위해 움직이던 그들의 행보를.

'...미친놈들.'

그건 '절멸'이었다.

걸림돌이 됐다는 이유.

단지 하나만으로 그 지역의 모든 게 반나절 만에 증발해 버렸다.

예시카는 그 뒷수습을 위해 그곳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수습할 것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라도 휘말린 사람이 있었는지.

그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심지어는 풀 한 포기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호열은 무언가 달랐다.

정말, 마탑과 관련된 마법사가 맞단 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엇보다 자신을 떠받치던 돌계단과 용암을 가르던 그때 호열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러나 예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그 기억만큼이나 선명한 게 바로 편견이었으니까.

'...아직 잘 모르겠어.'

정말, 다른 마탑 마법사들과 다른 것일까?

하지만 이내, 들려오는 대화는.

그런 예시카의 의심 섞인 눈초리조차 휘둥그레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르콘 경. 검기란 실존하는 것인가?"

...검기(劍氣)라고?

잠깐만, 어떻게 마법사가 검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단장님께서도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야 검기라는 건....

"호열 경, 그게 무슨 소리인가?"

"검기. 그대의 검에 일렁이던 빛을 말하는 것이네."

"...설마, 호열 경. 자네 그 빛을 본 겐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는 수련.

그 두 가지가 동반되어야 간신히 검기를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검기를 다룰 수 있겠군."

검기를 다루겠노라.

호열이 그렇게 선언해 버렸으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에노크가 중얼거렸다.

"...뭐라는 거야? 저 마법사 나리."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예시카도 같은 심정이었다.

'사실 알아차린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야. 그런데?'

검기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문제란 말이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서조차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이는 단장을 포함, 자신과 에노크에 불과했으니까. 무엇보다 호열은 마법사가 아니던가?

예시카는 솔직하게 어이가 없었다.

"그 전에 제대로 검을 쥘 수나 있겠어?"

호열에게 검을 건네는 하르콘.

'단장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예시카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야 마법사의 육체는 나약하니까.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책을 펼치는 마법사들이다.

그런 가냘픈 팔뚝으로 어떻게 검을 휘두르겠다고....

"...?!"

그러나 예시카의 편견은.

스륵─

"...뭔데. 저 마법사 나리?"

호열이 걸쳤던 재킷을 벗는 순간.

말끔하게 깨져버렸다.

하얀 셔츠 아래로 드러나는 근육.

그건 마법사의 신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 보였으니까.

'...피부가 하얘?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예시카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기도 잠깐.

호열은 하르콘이 건넨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치켜드는 순간.

"!!!"

일동 경악─

◈ 42화. 검은 오랜만이군 (2)

나는 경악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훈련용 장검]

[등급 : 레어]

[제한 : Lv.20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매우 낮은 확률로 상태이상 '기절' 발동.]

[설명 : 훈련용 장검이다. 날이 뭉툭해 살상력이 떨어졌지만, 워낙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져 웬만한 둔기보다 성능이 좋다.]

과연, 제국 최강이라 불리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다.

'훈련용 검이 레어 등급이잖아.'

그 레벨 제한도 무려 200레벨.

거악을 쓰러트리지 못했더라면 나는 착용하지도 못했단 소리잖아, 이거?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지만.

내가 경악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말보단 행동이 와닿는 법이지. 일단, 받게나. 호열 경."

하르콘이 건넨 훈련용 장검.

그걸 손에 쥐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

팔굽혀펴기.

버피 테스트.

달리기.

턱걸이....

그건 단련이 아닌 혹사에 가까웠으니.

그 혹사의 후유증이 묵직한 장검을 쥐는 순간.

격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진짜 사서 고생한다. 그것도 생고생을!!'

긍지를 떠나서 미련한 거잖아. 이건?!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내가 중학교 2학년이 아니었겠지.'

그러니까 극복해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으윽, 진짜!'

나는 근육통을 이겨내고 검을 치켜들었다.

물론, 내색은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애써 자세를 잡아본다.

단검은 많이 휘둘러 봤거늘.

이렇게 제대로 된 검은 플레이어가 되고선 처음 쥐어봤다.

장검을 쥐는 자세조차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되살렸다.

'...하르콘이 검을 어떻게 쥐었더라?'

빛을 발하는 건 이번에도 역시나 그랑펠의 재능.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 와닿을 정도였다.

나는 기억 속 하르콘이 그랬던 것처럼.

검을 쥐고 자세를 낮췄다.

검에 관해선 문외한에 가까운 나였기에 정확한 평가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대충 엉성한 자세는 아니지 않을까.

완벽하게 모방한 덕분인가.

왜, 빈틈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무엇보다.'

저 반응들을 보면 말이야.

"...이럴 수가."

"...!!!"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각자 휴식을 취하던 기사들이 홀린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관심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내가 아니던가?

'진짜 이놈의 근육통만 없었어도...!'

고통을 꾹 참고.

나는 물 흐르듯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다.

슥─

대각선 베기.

이 또한 하르콘의 일격을 모방한 것이었다.

글쎄,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이건 모방이었으니까.

'마법과 똑같단 거지.'

한마디로 이것도 밑 빠진 독이라는 것이다.

뭔 놈의 밑 빠진 독이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도 없는 것보단 밑 빠진 독이라도 있는 게 낫다.

어쨌거나 채우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이런, 잠깐 상념에 빠져버렸군."

문득, 하르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지켜보던 기사들에게 말했다.

"정규 훈련은 여기서 마치도록 한다. 각자 일과에 나서도록."

순식간에 해산하는 기사들.

자리엔 나와 하르콘만이 남았다.

'...갑자기 뭔진 몰라도 기회다.'

근육통에 비명을 지르는 몸을 조금이라도 휴식할 기회.

그나저나 훈련용 장검이 왜 훈련용인지 알겠다.

이렇게 무거우니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근력 운동이 되는 거겠지.

아무튼, 내가 검을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호열 경, 자네는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는군!"

"무슨 말인가?"

"아닐세. 다시 한번 그 검격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봐요, 하르콘 씨.

진짜 당신까지 이러기야?

정말 어깨가 빠질 것 같단 말이다...!

그러나 고귀하신 그랑펠 님에게 엄살?

그런 건 사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으니.

나는 육체조차 초월해버린 긍지로 다시금 검을 바로 쥐고는 휘둘렀다.

"과연,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웃음이 나오냐?

그렇게 따져 묻고 싶었건만.

그럴 수 없을뿐더러 하르콘이 말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호열 경, 그 검격은 역시 내 모습을 모방한 거겠지?"

"과연, 알아보는군. 하르콘 경."

과연,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600레벨이란 수치가 무색하지 않다.

'단번에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도 말을 이었다.

"배움을 원하는 이상, 기본적인 지식은 숙지해야 하는 것이니 말일세. 그러나 나에게 토대가 될만한 것은 하르콘, 그대의 검술밖에 없었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간단하다.

하르콘의 검술 정도 돼야 배울만하다는 소리였다. 이건.

하다못해 내게 검술 관련 스킬이 하나라도 있다면 긍지 때문이라고 둘러서라도 대보겠다. 하지만 나한텐 개뿔, 쥐뿔도 없단 말이다...!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구나.'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기에.

나는 낯짝 하나 바꾸지 않고 검을 거뒀다.

철컥─

이젠 한 번 더 보여달라고 해도 못 보여준다.

아직도 손가락 마디가 저려온단 말이다.

다행히도 앙코르 요청은 없었다.

이내, 하르콘이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나 또한 긴장할 수밖에 없겠군. 경이 나를 통해 검술에 입문하고 싶어 한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적잖이 부담되는 일이거늘...."

그 눈빛이 의욕으로 타오르는 듯했다.

"경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건 더 이상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 이거, 평온한 나날은 물 건너갔군!"

평온한 나날이 물 건너갔다니.

'왠지 모르게 불길한 소리다, 그거?'

아니, 그것보다도 천부적인 재능이라니.

내가 보여준 거라곤 그냥 하르콘을 모방한 준비 자세와 겸격밖에 없었다.

거기서 재능을 알아차릴 만한 게 있단 말인가?

"따라 하려고 한들,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일세."

하르콘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쥐었다.

조금 전 내가 취했던 준비 자세로 돌입했다.

과연,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건가.

나는 보자마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빈틈이 보이지 않는 자세였다.

틈이지 보이지 않기에.

섣불리 다가설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자세.

그래, 마치 사자를 앞에 둔 것만 같은 위압감.

하르콘이 호탕하게 웃음을 뱉었다.

"하하하. 이제야 기사들이 기겁하듯 놀란 이유를 알겠는가, 호열 경? 이 기본자세야말로 사자 심장의 기사들이 목표로 하는 최종 단계."

그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그런 자세를 그저 보고 따라 해버린 것이라네!"

나를 천부적인 재능이라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착각이란 말이다.

"역시, 자네의 그릇은 감히 헤아릴 수 없군. 호열 경."

그릇이 아니라 밑 빠진 독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진실을,

내 입으로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자네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러한 거겠지."

담백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다.

왜, 마법만 해도 그랬으니까.

'이제야 깜지 쓰기에서 벗어나나 싶었더니.'

재능과 노력은 별개라는 듯.

매일매일 밤을 지새우던 나였으니까.

검술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겠지.

그렇기에 나는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근육통으로 움찔거리는 팔과 다리.

이 고통이 맛보기에 불과할 거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고독하구나.'

내 발버둥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

문득,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계를 뛰어넘은 훈련을 해냈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훈련에 대한 보상이라면....

'...스탯 상승이다!'

나는 곧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각각 2포인트씩 상승한 [근력]과 [민첩].

정정하겠다.

내 억울함을 알아주는 건 역시 너밖에 없구나.

클래스 퀘스트야!

*

호열은 자리를 떠났거늘.

하르콘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하."

그건 순수한 기쁨이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단장으로, 황제의 검과 방패로 느끼는 기쁨이 아닌 한 사람의 무인(武人)으로서의 기쁨.

그래, 굳이 비교하자면 이건 원석을 발견한 광부의 희열과 비슷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법사.

그것도 마탑을 드나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호열 경이 천하를 놀라게 할 무재(武才)였다니!

하르콘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경이 쥐어야 할 건 지팡이가 아닌 검이었던 게야!"

물론, 하르콘은 마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호열의 마법적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저런 무재를 따라올 순 없으리라.

저건 대륙을 통틀어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재능이 확실했으니까.

그러니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호열 경은 반드시 무(武)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하르콘이 내린 결론이었다.

"본의 아니게 내가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됐군."

자신의 가르침에 실망해 무에 관한 관심 또한 끊어지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그게 하르콘이 평온한 나날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 이유였다.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나도 수련을 시작해야겠군."

그래도 긍정인 것은 호열 경에겐 관심이 있어 보였다.

'특히나 검기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검기도 곧장 따라 발산하는 건?"

도리도리─

하르콘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였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말려야만 했다.

검기를 다루기 위해선 반드시 절대적인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검기에 휘둘리고 만다.'

하르콘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물론, 경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명 호열의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

당연한 일이다.

재능과 체력은 별개의 것이었으니까.

그 재능과 무관하게 여태껏 마법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호열 경이 아니었는가?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체력이 바닥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하르콘은 침음을 머금었다.

"미리 사과하겠네, 호열 경."

그래도 기초 체력은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호열 경에게 체력 단련을 시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니까 하르콘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란 것이다.

호열의 팔이 떨린 이유?

그건 천하의 라이언 하트 기사들도 버티지 못할 훈련량을.

고작 새벽 시간 만에 소화해 낸 탓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기우란 소리였다.

"아무래도 내가 함께 뛰어야겠군.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네."

물론, 그 쓸데없는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

.

.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호열.

그 숨소리가 더없이 평온하다.

심지어는 지친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르콘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소리쳤다.

"호열 경, 어제와는 너무 다른 모습 아닌가?!"

이게 장검 하나에 쩔쩔매던 호열 경이 맞단 말인가?

*

체력 단련이야 나한테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2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1,000회 (진행 중)

●턱걸이 5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300회 (진행 중)

굳이 시간을 내지 않고 반복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매일같이 땀을 흘린 보람이 있었다.

무력은 몰라도 체력 하나만큼은 라이언 하트 기사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으니까.

그 덕분일까.

-...호열 경. 아무래도 내가 그대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네.

하르콘도 더 이상의 체력 단련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심 아쉬웠지만, 별수 없는 일이겠지.

지금처럼 새벽에 땀을 쏟는 수밖에.

마탑의 연구실.

업무용 책상에 앉기 전.

접객용 테이블 위 찻잔으로 향했다.

그 곁에 놓인 건 마도구, [간이 램프].

부글부글─

회로에 마력을 불어넣기 무섭게 끓는 물이 생성된다.

마탑의 마도구답게 그 수준이 상당하다.

"신기하구나."

물을 끓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끓는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으니까. 비효율적이지만 수준은 높은 게 딱 마탑과 어울리는 마도구였다.

"이런 사사로운 것보다 로켓 배송이 우선이거늘."

안타까움에 혀를 차본다.

나는 집에서부터 챙겨온 녹차 티백을 우려냈다.

한 모금.

한가로운 티타임을 즐기기도 잠깐.

나는 책상에 앉아서 양피지를 확인했다.

과연, 전달된 소식이 있었다.

그나저나 누군지는 몰라도 성질 한번 급하시다.

발신인 이름이 가장 앞에 있는 건 또 처음 보네. 내가.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선임 마법사라.

그렇다면 용건이야 굳이 안 봐도 뻔하다.

─능력을 증명한다. (진행 중)

●과반수의 선임 마법사를 납득시켜라. (8/20)

능력을 증명하란 소리겠지.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겠으니까.

나머진 잠시 뒤에 확인하자.

'그보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아랫줄에 떠올라 있었으니까.

-감정 요청하셨던 마도구, [흡혈귀 백작의 오브].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에 대한 감정 결과입니다.

곧바로 그 내용을 확인했다.

◈ 43화. 검은 오랜만이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