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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과연 수석이군 (1)

쨍쨍한 태양.

그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유스라 제도.

아름다운 유스라 제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건만.

넷튜버, 박휘강의 얼굴엔 우울함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게요."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일까?

그건 박휘강의 생방송 제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

제목 : 이호열 님 팬방) 유스라 제도에서 대기 중~

──────

호열이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을 쓰러트리던 그날.

호열의 행보를 균열 초입부터 지켜봤던 박휘강이었다.

박휘강의 마음속에서 호열은 이미 영웅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일단, 시청자 수만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평균 시청자 50명을 넘지 않던 박휘강의 방송.

그런데 호열의 생중계 이후로.

-성지순례 왔습니다~

-이 방송이 이호열 처음으로 픽한 그 방송 맞죠?

-어허 이호열이라니 예의 없게

-호열 님이라고 하십쇼

화제를 탄 박휘강의 방송에 시청자들이 몰려들었다.

아니, 시청자 수를 떠나서도 박휘강에게 호열은 영웅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

제대로 된 무장조차 하지 않은 채.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와 기사를 압도하던 그 모습.

'...꼭 만화 주인공 같았었지.'

그랬다.

박휘강은 호열을 동경하게 됐다.

호열이 녹화된 영상을 직접 편집.

음악까지 넣어가며 하이라이트 영상을 만들 정도로.

그런 박휘강의 노고 덕분일까.

적어도 넷뷰트에선 호열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 관심의 수준이 사실상 호열의 대기방인 박휘강의 시청자 수로 나타나고 있었다.

──────

현재 시청자 수 : 19,412명

──────

유스라 제도 곳곳을 찍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포탈을 찍고 있을 뿐.

그런데도 시청자들의 채팅은 쉴 틈이 없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거 모름?ㅋㅋ

-근데 이호열 혼자 유스라 제도에서 버틸 수 있나?

-그게 뭔 뜻이냐?

-유스라 제도 보물섬이자너 존나 아이템 경쟁 오질 텐데 플레이어들이 다구리치면 어쩌나 싶어서 특히 초신성 그 새끼들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였다.

그 전리품에 관심이 집중된 만큼.

온갖 놈들이 죄다 몰려들 게 뻔했으니까.

그중에서도 '초신성'을 빼놓을 수 없었다.

초신성.

기존의 아르카나 랭커.

아니, 아르카나 체계를 위협하는 새로운 강자들.

그건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이후.

새롭게 두각을 나타낸 플레이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긴 그 새끼들은 수단 방법 안 가리니까

-그래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거지

-ㄹㅇ 비열한 새끼들임

플레이어를 비롯해.

웬만한 이들은 초신성의 실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야 아르카나 시절.

벌어졌던 격차를 현실에서 추월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초신성들에겐 꼭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 초신성들도 유스라 제도에 모여들었을 테니까.

플레이어는 물론, 길드도 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밖에.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저 호멘

-의심하는 놈들 하이라이트 영상 다시 보고 와라

물론, 그것 또한 급이 맞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시청자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호열이 보여줬던 압도적인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던 냉정함.

더없이 당당했던 태도.

세계의 관심조차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그릇까지.

보여준 게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데 호열 님이 오시기는 하는 거임?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러는 너가 제일 지금 의심하고 있지??

어째서인가.

호열은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역시 돈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그저 호멘

-ㄹㅇ 광고나 방송출연 안 하는 것만 봐도 알지

-보물섬이라고 허겁지겁 올 필요는 없으시다는 거지 ㅇㅇ

호열에 대한 광적인 믿음.

뭐든 좋게좋게 생각하는 시청자들이었다.

하긴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몇 시간째 포탈만 비추는 방송을 수만 명이나 보고 있는 거겠지.

다른 방송에서 유스라 제도의 실황을 중계하고 있을 시간에 말이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박휘강이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

앵글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반짝이는 모래사장.

높게 솟은 야자수.

그 풍경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정장과 구두.

그러나 복장조차.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특유의 아우라.

드디어.

호열이 유스라 제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호멘."

*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진행 중)

거악이라.

퀘스트를 확인했을 땐 설마 했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이 했던 말이 떠올랐거든.

-거악. 말 그대로 거대한 악마란 뜻이다. 나 또한 녀석들과 마주한 적은 없지만, 녀석들은 확실히 존재한다. 거대한 악이라는 것은. 워낙 거대하기에 도저히 숨을 수가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곧바로 수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 거악이 정확히 어떤 녀석들인지....

...수업은 이제 그만.

이쪽은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정기 학회에서 머리를 굴리다 왔단 말이다.

조금만 쉬자, 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포탈에 몸을 던졌다.

"...!"

그리고 유스라 제도에 발을 딛는 순간.

'...워낙 거대하기에 숨길 수가 없다.'

악마 사냥꾼의 말을 이해하고 말았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천적관계가 발동됐다는 것.

주변에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나는 허둥대지 않았다.

악마 사냥꾼의 직감.

구둣발 아래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스라 제도, 모든 곳이 거악의 영향권이다.'

이거 퀘스트부터 괜히 무게를 잡던 게 아니었잖아?

말 그대로 '거악'과 마주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겉보기엔 아름답게만 보이는 유스라 제도.

그 이면의 진실을 알게 됐건만.

당연하게도 내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넘쳤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 어떤 악마.

당연하게도 거기엔 '거악'도 포함되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게.

유스라 제도에 입성한 소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나는 구두 밑창 아래에서 느껴지는 거악에게 선언했다.

"굴욕적으로 엎드린 자세가 보기 좋구나."

.

.

.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유스라 제도'가 추가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금빛 모래 전갈' : Lv.390

'금빛 모래 독사' : Lv.400

'보석 수집 거대 박쥐' : Lv.400

'에메랄드 호랑이' : Lv.420....』

신규 업데이트 내역.

거기에 내가 유스라 제도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일단,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부터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균열이었다면 그 적정 레벨이 최소 400레벨부터 시작했겠지.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태평양 한가운데라 망정이지.'

신규 지역 업데이트의 경우엔 해당 지역에 출현하는 몬스터가 함께 소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제주도 바로 옆에 유스라 제도가 소환됐다고 생각해 보자.

'손쓸 새도 없이 균열이 붕괴된 셈이니까.'

지금쯤 국가재난 사태가 선포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모로 다행인걸.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본의 아니게 '거악', 녀석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명을 재촉하는 그랑펠의 성격은 둘째 치더라도.

나도 자신감이 있었거든.

'그래도 어떻게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천적관계.

거기에다 학회에서 어깨너머로 새롭게 습득한 마법.

마탑에서 대여한 마력 재생 아이템까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라고, 이건.

'아무리 그래도 에메랄드 호랑이는 부담스럽고....'

시작은 무난하게 전갈부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유스라 제도를 거닐던 중이었다.

크르르르렁─!

...깜짝이야!

그 울음소리부터 심히 웅장하다.

내가 들어왔던 놀, 피로 물든 늑대의 하울링.

그런 건 낑낑거리는 소리로 만들 정도의 박력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게.

딱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빌어먹을. 힐러, 나 상태이상 떴어!!"

"리커버리!"

"이런 씨발. 저 새끼 너무 반짝거려서 제대로 맞히기가 어려워요!!"

울창한 야자수림.

그 밑에서 날뛰는 에메랄드 호랑이.

과연, 레벨만큼이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 화려한 장비를 봤을 땐 분명 플레이어들도 한 실력 하는 이들일 텐데.

오히려 에메랄드 호랑이 쪽이 플레이어들을 사냥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겠지.'

지형이 에메랄드 호랑이, 녀석에게 너무 유리했다.

야자수림과 에메랄드.

에메랄드 호랑이는 위장 효과를 누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거기에다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까지.

시야가 교란되니 플레이어들은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씨바알. 그러니까 내가 인원 나누지 말자고 했잖아!"

"진짜 업적에 눈이 멀어서는...!"

"어쩔 수 없다. 상황 봐서 튀는 수밖에!"

듣자 하니 한 발짝 물러나는 모양이었다.

그래, 현명한 선택이다.

물량에는 장사 없는 법.

동료와 합류하면 에메랄드 호랑이를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합류할 동료 따윈 없다.

그러나.

저벅─

고작 호랑이를 피해 길을 돌아간다는.

그런 선택지는 더더욱 없다.

나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바스락─

정장에 맞닿는 야자수잎.

그 기척을 알아챈 플레이어들이 흠칫했다.

"...뭐야? 어라? 다, 당신은?!"

그런 플레이어들을 뒤로한 채.

나는 에메랄드 호랑이와 마주했다.

"맹수를 개처럼 다룰 순 없는 법이겠지."

『마법』을 발현했다.

"그러니 거칠더라도 이해하거라."

...언젠가 이런 대사에도 익숙해지는 날이 올까?

천만다행히도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마법을 발현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이 순간, 솟아오르는 벽이 그 증거다.

쿠구구궁─!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시급한 것은 녀석의 몸놀림을 제한하는 것.

그야 내 스탯으로는 녀석을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벅찼으니까.

근력 27포인트.

민첩 33포인트.

합계 60포인트.

천적관계로 스탯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해도 녀석의 레벨은 420레벨이다.

그런 녀석을 제멋대로 날뛰게 놔둔다?

그것만 한 자살행위도 없겠지.

그렇기에.

동서남북.

나는 맹수를 철창에 가두듯.

돌벽을 쌓아 올렸다.

쿠구구궁─!

과연, 마력에 포인트를 올인한 보람이 있는데?

마법의 발현이 전보다 훨씬 신속해졌다.

브로치의 효과도 꽤 쏠쏠했다.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10퍼센트의 차이가 이 정도로 체감이 될 줄이야.

'이 타이밍에 벽을 무너트리는 건 미친 짓이지.'

이전 같았으면 여기서 『반전 마법』을 발현.

쌓아 올린 벽을 무너트려 녀석에게 피해를 주려 했겠지.

그러나 에메랄드 호랑이의 날쌘 몸놀림을 떠올려 본다.

'마찬가지로 자살행위다.'

그건 파편을 전부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돌벽이 무너진 틈을 타서.

내 목덜미를 물어뜯고도 남을 수준의 움직임이었거든.

그러니까 나는 연속해서 마법을 발현했다.

화르륵─!

손바닥 안에서 일렁이는 화염.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학회에서 발표했던 진보된 마법.

'마력의 잔량은 충분하다.'

어디, 나는 그 파괴력을 제대로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손바닥에서 일렁이던 화염을 보다 크게 키워나갔다.

'원심력.'

간섭 과정에서 새로운 개념, 과학을 더한다.

화르르르륵─!

그런 내가 발현해 낸 것은.

말 그대로 화염의 폭풍.

그 화력은 발현한 나조차도 흠칫할 정도였다.

'...괜히 수석 마법사가 아니란 건가?'

생각보다 훨씬 훌륭하다...!

미안하다, 마르셀로.

탐색 과정에 괜한 태클을 걸어서 미안해.

그 화염의 폭풍이.

돌벽을 기어오르던 에메랄드 호랑이를 뒤덮었다.

굳이 그 파괴력을 비교해 보자면.

제시 하인네스.

그녀의 [천벌]보다는 훨씬 아래 단계인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 화염의 폭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내 손을 떠난 지금 순간에도.

에메랄드 호랑이를 불사르고 있었단 것이었다.

그 지속적인 피해까지 고려해 본다면.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에메랄드 호랑이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점멸하는 메시지들 사이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호, 호멘!"

◈ 27화. 과연 수석이군 (2)

호열이 유스라 제도에 나타났다!

그 속보에 박휘강의 방송에 시청자들이 몰려들었다.

──────

현재 시청자 수 : 98,731명

──────

보는 눈이 많아진 만큼.

채팅창도 빠르게 밀려 올라갔다.

-오늘도 정장임?? 춥나 덥나 한결 같네ㅋㅋㅋ

-컨셉이 아니라 찐이라니까

-ㄹㅇ 저 은발 머리도 염색이 아니라 자기 머리란 소문이 있음

-뭐래 그건 구라지

-그저 호멘

그 등장만으로도 술렁이는 시청자들.

시청자들의 수를 생각하면 방송 욕심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박휘강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언제까지나 중계는 호열 님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할 거니까요. 혹시라도 불편해하실 분들은 미리미리 나가주세요. 죄송합니다."

꾸벅─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박휘강.

누가 보면 호열에게 예절 교육이라도 받은 것 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이건 박휘강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방송이 흥한 게 나 때문은 아니니까.'

그저 운이 좋아서.

남들보다 먼저 호열의 진가를 알아보게 됐을 뿐.

박휘강은 그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호열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또 존재감 하나는 옅거든요? 막 위험한 던전 같은 곳에서 함정을 밟아도 발동조차 안 될 때가 있을 정도라니까요?"

-ㄹㅇ 그래서 휘강이 방송 본다

-ㅋㅋ다른 중계 넷튜버들이 좀 역겹긴 해~

-지가 좋아서 보러오는 것도 아닌데 수금까지 하니까

-ㄹㅇㅋㅋ

언제나처럼.

호열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아스큐라 백작 처치 이후.

치솟아 버린 호열의 존재감.

그런 호열이 유스라 제도에 나타나자,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중에는 제삼자가 보기에도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뭔가 눈빛이 살벌한데요?"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박휘강.

그의 눈초리에 호열을 노려보는 플레이어가 걸렸다.

어째 그 눈빛부터 범상치 않다 싶었는데.

-초신성이잖아 저거

-킨베르 그 쓰레기 맞네

-저저 꼬라보는 눈빛 봐라ㄷㄷ

-신성모독이다

킨베르.

초신성 중에서도 악랄하기로 소문이 난 플레이어.

그 패거리와 함께 균열에 들어갔다가 실종, 사망한 플레이어만 하더라도 한 트럭이라고 하던가.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증거만 있었어도 지금쯤 감방에 있을 그가.

호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근데 킨베르만 그런 게 아닌데요?"

유명 플레이어.

크게는 랭킹권 길드까지.

어째 호열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마치 강력한 경쟁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랄까?

-유스라 제도 전리품 나눠 먹기 싫다는 거겠지

-나 같아도 마주치기 싫을 듯?ㅋㅋ

-제발 우리 쪽으로 오지 말라고 기도하고 있다 백퍼

"...제가 다 쫄리네요."

그 견제엔 조금도 관계없는 박휘강도 위축될 정도.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호열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것을 넘어 당당했다.

그따위 시선 따위.

애초에 눈높이가 다르기에.

자신에겐 닿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호열은 곧장 야자수림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화르르륵─!

몰아치는 화염의 폭풍.

멀리서도 느껴지는 뜨거운 화력.

박휘강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미쳤다!"

야자수림에 벽이 솟아올랐을 땐.

호열, 특유의 전투가 시작됐구나 싶었다.

온갖 플레이어, 전문가들이 극찬했던 연금술을 베이스로 한 영리한 전투 말이다.

실제로도 효과는 충분해 보였다.

빠르게 솟아나는 돌벽 탓.

에메랄드 호랑이는 당황한 듯 보였으니까.

'그런데 저 화염 폭풍은 대체...!'

그야말로 상상 그 이상!

채팅창의 반응 또한 폭발적이었다.

-ㅁㅊㅋㅋ 슬슬 본 실력 꺼내네

-아니 연금술사라매ㅋㅋㅋ

-ㄹㅇ 저게 어떻게 연금술사임? 플레임 위자드도 저런 건 못한다

유스라 제도에 이제 막 입성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호열은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사그라질 줄 모르는 화염의 폭풍.

대체 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걸까?

"...에메랄드 호랑이를 원킬 내신 것 같은데요?"

420레벨 몬스터를 마법 한 방에 보내버리다니!

레벨이고, 클래스고, 마력이고.

"...그런데 표정 변화가 없으시네요?"

심지어는 그 그릇의 크기고.

어째 지켜볼수록 무엇 하나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 순간,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무튼 호, 호멘!"

*

...무언가 들어선 안될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러나 시끄러운 잡음 탓.

게다가 타인의 평가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성격 탓.

나는 태연하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승한 레벨은 총 12레벨.

과연, 420레벨 몬스터다운 경험치구나.

게다가 무엇보다 이번 전투는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아스큐라 백작 땐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구질구질하게.

돌벽을 세우고, 또 무너트리는 게 전부였던 지난날.

그 과거에 비하면 진짜 장족의 발전이다. 이건.

그러나 내가 그 심정을 표출하는 일은 없었다.

"과연."

짧은 소감.

그것조차 나를 향한 것이 아닌 마르셀로를 향한 것.

언제까지나 이 마법을 창시한 건 그였으니까.

그 마법을 이 정도로 구사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고고한 긍지께서 만족할 정도는 아니란 거겠지.

거기에다가.

'천적관계 효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현재 내겐 천적관계 효과가 적용 중이었다.

천적관계가 발동하지 않았다면?

저런 화염 폭풍은 발현할 수조차 없었겠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기에 만족할 수 없다.

물론,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겠지.

무려 420레벨짜리 몬스터, 에메랄드 호랑이.

그 외관부터 심상치가 않았단 말이다.

'진짜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게....'

꽤 괜찮은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았을까.

왜, 전설 속의 보물섬이라면서?

유스라 제도는!

머릿속에 가득한 흑심.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생각에 불과했다.

물질적 욕심에서 초월했다는 그랑펠의 설정.

'하긴 천억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덕분에 나는 무심하게 전리품을 습득했다.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제작 시, 확인 가능]

[설명 : 최상급의 에메랄드 결정이다. 에메랄드의 정순한 성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니크 재료 아이템인가?

'까다롭다....'

그야 재료 아이템이란 건 제작자의 실력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곤 했으니까.

같은 유니크 재료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제작자의 실력에 따라 유니크 혹은 그 이상의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까다롭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탑을 알기 전까지는.

그래, 내겐 마탑과의 인연이 있지 않았던가!

정확히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와의 인연이었지만.

"모든 것은 연구의 일환이다."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나는 실전을 통해 마르셀로가 창시한 마법의 위력을 증명한 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겐 요구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는 거지.

'잠깐.'

불현듯 떠오르는 마탑의 수준.

선뜻 대여해 준다는 마도구, 아이템들의 레벨 제한이 죄다 아찔했었지.

나로서는 사용할 날이 아득히 멀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 에메랄드 결정으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장비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재료 아이템을 획득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

행복 회로는 거기까지였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온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그 이호열 씨 맞으시죠?"

에메랄드 호랑이에 고전하던 플레이어들.

그들이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반응에 용기라도 얻은 건가.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 사실 반신반의했거든요? 영상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냥 매스컴에서 또 스타 플레이어 만들기 시작...."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던 사내가 결론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희와 함께 행동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앞으로 계속 같이하자는 게 아니라 딱 유스라 제도에서만. 어때요?"

그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거절하지."

"...네?"

불필요한 의심.

시기와 질투.

마지막으로 은근슬쩍 놓는 반말까지.

'무엇보다 반말 때문인 것 같지만.'

격식을 중시하는 그랑펠의 꼰대 기질이 말하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그대들과 동행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쪽과는 절대 엮일 일이 없다고 말이야.

내 말이 꽤 단호했던 것인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발길을 옮겼다.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진행 중)

퀘스트는 아직 진행 중이었으니까.

.

.

.

길드 랭킹 7위.

동시에 영국 최고의 길드인 세컨드 썬.

그들은 유스라 제도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려고 했다.

위로는 길드 랭킹 3위.

EU의 길드인 보헤미안이 있었고, 아래에서는 매섭게 치고 올라오는 버서커 길드가 있었으니까.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는 우리에게 굴욕이었다. 버서커가 퍼스트 클리어를 따낸 것에 비해 우리는 뭐 하나 내세울 업적이 없었으니까."

플레이어 랭킹 3위.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

그는 결단을 내렸다.

"유스라 제도는 그 굴욕을 만회할 좋은 기회야."

세컨드 썬은 인원을 나눴다.

인원을 나눠 최대한 많은 업적, 전리품을 노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졌다.

예상보다 유스라 제도의 몬스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탓이었다.

"젠장. 안 그래도 까다로운데!"

그것도 모자라 경쟁자들까지.

신경 쓸 게 너무나도 많았다.

결국, 슈레이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욕심이 과했어. 합류한다."

하필이면 천하통일이라니.

2위와 3위.

고작 한 단계 차이였거늘.

그 사이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존재했다.

슈레이그는 본대를 이끌고 다른 쪽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가까운 건 야자수림 쪽인가?"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어, 슈레이그.

뭐지.

평소처럼 남자답고 걸걸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주눅이라도 든 것처럼 기어들어 가는 음성.

슈레이그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설마, 누가 다치기라도 한 거야?"

혹시 에메랄드 호랑이라도 뜬 건가?

그렇다면 사상자가 발생했더라도 납득이 된다.

무려 420레벨짜리 몬스터가 아니던가.

서둘러 합류해야겠군.

슈레이그가 곧장 장비를 챙겨 들었다.

"합류하자. 기다려. 그쪽으로 바로 갈 테니까."

-...아, 안 돼. 오지 마!

"...갑자기 뭐야?"

-우리가 그쪽으로 갈게.

합류한다는 걸 보면 긴급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쪽에 합류해선 그 의미가 없었다.

"천하통일이랑 루트가 겹쳤어. 우리가 합류하는 게...."

-아니. 아니야. 차라리 천하통일이 나아!

"...무슨 뜻이야. 그게?"

-저 괴물보다는 차라리 천하통일 새끼들이랑 비벼보는 게 낫다고!

"괴물은 또 뭔 소리야? 말을 좀 사람이 알아듣게...."

-이호열!

...이호열?

그 이름은 갑자기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슈레이그에게 고함이 이어졌다.

-그 자식,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해!

슈레이그는 황당했다.

알려진 것보다 강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야 이호열은 이미 최상위 랭커 취급을 받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잠깐 할 말을 잃은 사이에 통화는 끝났다.

-어쨌든 우리가 그쪽으로 갈게.

"...뭐라는 거야, 이거?"

지이잉─

그 순간, 다시금 울리는 진동.

이번엔 서울이었다.

마탑 정기 학회에 참여했던 길드원.

슈레이그가 통화를 연결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다시금 구겨졌다.

"...뭐야, 너도 이호열이야?"

물론, 그가 정색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퀘스트를 받은 것도 모자라 마탑 상층으로 올라가?!"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이호열.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하다.

어째 그 개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퀘스트의 목표는 언제까지나 거악을 조사하는 것.

그것만으로 추측해 보자.

일단, 현재 거악은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니었다.

'웅크리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까.'

구두 아래로 느껴지는 기척.

몇 안 되는 악마 사냥꾼만의 감각이랄까.

덕분에 나는 금세 퀘스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사는 둘째 치더라도.'

일단, 이 거악을 깨우지 않는 게 최우선이겠군.

물론, 거악이 어떤 조건으로 깨어나는지.

당장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악크샨 악마 사냥꾼이 살아 돌아와도 모를걸?'

지금 정보만으로는 말이야.

그러니까 조사를 통해 거악의 정체를 밝히고 녀석을 깨우지 않고 처치하는 방향으로 퀘스트가 진행되지 않을까.

'그게 최선이겠네.'

내가 생각하던 때였다.

불현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1/10]

...붕괴 진행도?

그건 내게만 떠오른 메시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당황하는 플레이어들.

"붕괴 진행도라고?"

"업데이트 내역에 균열 같은 건 없었잖아?!"

"10분의 1? 심지어 퍼센트도 아닌데요, 이거?"

허나, 그들과 다르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랬군."

흩어졌던 퍼즐이 맞춰지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으니까.

◈ 28화. 라이언 하트 기사단 (1)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다.

'뭐, 3년까진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개보단 내 머리가 좋겠지.

덕분에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악크샨 기지에서의 수업을 말이다.

-칠죄종. 마왕과 마찬가지로 거악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지.

칠죄종.

그 흔히 말하는 일곱 개의 죄가 맞다.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음욕, 폭식, 나태.

그래, 그 단어에서부터 풍기는 거물의 향기.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이름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당장 놈들과 조우할 일은 없을 테지만. 인지하고 경계하도록. 언젠가 반드시 저 거악들과 마주치게 될 날이 올 테니까.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도 그렇게 말했었다.

거악, 강한 게 당연하니까.

그 시절엔 등장할 시기가 아니었단 소리였겠지.

부연 설명할 필요 또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10년 하고도 2년 전 이야기 아니던가?

'안타깝게도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야.'

나는 아르카나를 그대로 접어버렸었으니까.

다시금 12년의 공백이 뼈에 사무친다...!

그러나 당장은 충분했다.

'확실해.'

퀘스트창.

그리고 방금의 메시지로 확실하게 깨달았거든.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1/10]

유스라 제도에 웅크린 거악.

녀석이 바로 칠죄종, '탐욕'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붕괴 진행도도 이해가 된다.

'진행도가 전부 차오르면 거악이 깨어나는 거야.'

...와씨. 잠깐만.

순간 소름이 돋을 뻔했다.

문득 유스라 제도의 설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 제대로 함정이잖아?'

이거, 거악에게 너무 유리한 환경이 아닌가?

유스라 제도는 전설 속의 보물섬이었으니까.

탐욕은 제쳐놓고서라도.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설 속 보물을 찾고 싶겠지.

지금처럼 말이야.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

"샤이닝이었어! 벌써 섬 하나 공략 끝냈다는데?!"

"잠깐 그러면 10분의 1, 이거 뜻이...?"

"맞아. 아무래도 유스라 제도, 섬 하나를 클리어할 때마다 상승하는 것 같아. 그나저나 뭐 얻었대? 보물 말이야!"

"미쳤냐? 걔네가 그걸 순순히 공개하게? 근데 섬의 보물을 획득한 건 맞나 봐."

10개의 섬으로 이뤄진 유스라 제도.

그중 하나를 샤이닝 길드가 클리어했다.

그러자 붕괴 진행도가 상승했다.

'맞는 말이야.'

아니, 확실했다.

열 개의 섬을 전부 공략하는 순간.

유스라 제도에 잠든 거악, 탐욕이 깨어나는 것이다.

근데, 거악치고는 너무 치졸한 거 아니냐?

"비열하군."

거물이라면서 이런 함정까지 쳐두고 말이야.

"허나 비열하기에 악마겠지."

그것이 진실을 알게 된 나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진실을 깨달은 순간.

"!"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성공)

─칠죄종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하라. (진행 중)

불행 중 다행이다.

탐욕을 처치하라, 가 아니어서 말이야.

그나저나 처치나 저지나.

막막한 건 마찬가지다.

'가만히 있겠냐고.'

나는 다시금 플레이어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두르자. 섬의 보물인가, 뭔가. 우리도 하나는 먹어야지!"

"...근데 건드려도 되는 건가? 딱 봐도 붕괴 진행도가 상승할 것 같은데."

"선배, 그게 우리 알 바예요? 우리가 가만히 있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다른 새끼들은 붕괴도 같은 거 신경도 안 쓰고 보물만 찾아댈걸요?"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게 정상인의 반응이었으니까.

사람이 뭐 성인군자도 아니고 말이야.

보물 찾으러 왔으면 찾아야지.

'그리고 이게 함정인지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플레이어들만 그런 게 아니겠지.

이 순간, 유스라 제도의 모든 플레이어가 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그게 막막함의 이유였다.

나는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설득? 절대 불가능하지.'

잘도 내 말을 믿겠다.

일단 내가 악마 사냥꾼이란 것부터 안 믿을걸?

아르카나에 그딴 클래스가 어디에 있느냐면서.

있어도 10년 전에 전부 캐릭터 삭제했겠다면서.

그렇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내가 그 섬의 보물이란 걸 차지하는 수밖에!

퀘스트의 목표는 언제까지나.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 탐욕 없이 섬의 보물을 획득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것 또한 성인군자나 가능한 일이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성인군자가 바로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에게 재물이란 덧없는 것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가 부귀영화에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1,100억 앞에서도.

유니크 재료 아이템,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앞에서도.

탐욕은커녕.

입꼬리에 미동조차 없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서둘러야겠군."

모든 것은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서.

나는 섬의 보물을 차지....

아니, 독식해야만 한다.

*

샤이닝.

록스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붕괴 진행도? 카밀라, 드미트리."

"어, 나한테도 떴는데?"

"나도~"

세계 최고의 길드, 샤이닝.

플레이어 랭킹 2위, 록스.

재능은 물론, 축적된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 보물을 습득한 덕분인 거 같은데."

록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유스라 제도가 이렇게 싱겁게 보물을 내어줄 리는 없겠지. 본 게임은 총 10개의 섬의 보물을 전부 획득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되리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건가?"

"으으. 싫다~ 좀 편하게 가나 했더니."

"그나저나 제시, 이거는 언제 오는 거야? 아야!"

살살 좀 부탁해.

드미트리는 부상을 치료했다.

제시가 마탑의 학회에 참석하느라 빠졌다고 한들.

샤이닝의 전력에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제시가 없어도 그들은 섬마다 존재하는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고 섬의 보물을 획득한 참이었다.

"글쎄. 아직 연락은 없는데."

제시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그러나 록스는 마탑에서 벌어진 사건을.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길드, 샤이닝.

꼭 제시가 아니더라도 마탑 정기 학회에 참여할 수준의 플레이어는 차고 넘쳤으니까.

그런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말하고 있었다.

'역시 위험인물로 설정해 두길 잘했어.'

이호열.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물론, 이번 마탑 사건은 록스에게도 상상 이상이었다.

'상층엔 나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물론, 수석 마법사랑 대화도 못 해봤고.

그러니까 이쯤에서 확실히 해둬야 했다.

"우린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호의 혹은 적대.

이호열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했다.

록스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난 되도록 좋게 가고 싶은데 말이지. 안 그래?"

"찬성. 스칼 하나로도 피곤하다."

"나도 찬성~ 스칼에 제시만 해도 머리가 깨진다구."

그럼 딱히 적대할 이유는 없다는 걸로.

록스가 중얼거리자 카밀라가 속삭였다.

"뭣보다 제시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으면 다들 조심하는 게 좋을걸? 심상치 않아~ 눈이 반짝거리는 게. 꼭 내가 처음 사랑이란 걸 알게 됐을 때처럼...."

"그건 그냥 이상한 스킬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제시 눈이 반짝거릴 땐 그럴 때밖에 없잖아."

"...진짜 흥 깬다, 너. 그리고 네가 여자 마음을 알긴 알아? 하긴 알면 호텔 라운지를 통째로 빌렸다가 차이는 일도 없었겠지만~"

"...이게 미쳤나? 야, 너 말 다 했어?!"

어쨌거나, 샤이닝이 호열에 대한 입장을 결정한 순간.

또 한 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2/10]

본격적으로 시작됐구나.

역시 천하통일이 섬의 보물을 획득한 거겠지?

록스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말했다.

"슬슬 움직이자. 다음 섬으로."

*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2/10]

확실한 보상이 걸려있어서 그런가.

진행 속도가 빠르다.

이래서야 섬의 보물을 독식하겠다던.

내 원대한 포부를 수정할 수밖에 없겠는데.

'우선 이번 섬에서만이라도.'

반드시 섬의 보물을 획득해야 한다.

사실 하나만 해도 벅찬 게 당연하다.

샤이닝, 천하통일 같은 상위 길드들은 물론.

랭킹 1위, 스칼까지 움직일 확률이 높다고 했던가.

그런 플레이어들과의 경쟁에서 섬의 보물을 획득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섬의 보물을 하나만 획득해도 거악의 부활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만 부족해도 조건은 달성할 수 없으니까.'

...그나저나 궁금하긴 하다.

어떤 아이템이길래.

섬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걸까.

'이런 게 탐욕인가?'

물론, 이 탐욕에 몸과 정신에 휘둘리는 일은 없겠지.

왜,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던.

그랑펠의 긍지를 떠올려 본다.

그런 건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었거든.

그런 내가 야자수림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멀리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갑옷, 그것도 판금 갑옷인가.'

플레이어들로 가득한 유스라 제도에서 이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따져보자면 오히려 정장을 차려입은 내 쪽이 훨씬 이상한 모습이겠지.

아무튼, 내가 멈칫한 건 그 통일성에 있었다.

'전부 판금 갑옷을 입고 있다.'

못해도 백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런 이들이 전부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플레이어는 아니겠네.'

판금 갑옷을 착용하는 건.

전사 혹은 기사 계열 클래스의 플레이어들뿐.

'몰려다닐 이유는 없어.'

단일 클래스가 뭉쳐 다니는 것만큼 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NPC들인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내 당당한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덕분에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게 됐다.

어깨의 사자 머리.

나는 입을 열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건 무려 12년 동안 아르카나와 연을 끊었던 나라도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문양이었다.

사자 머리.

그건 제국 최강의 기사단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상징이었으니까.

'마탑처럼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소환된 거겠지.'

과연, 제국 최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무엇보다 오와 열이 딱딱 맞는다.

판금 갑옷도 먼지 하나 없이 거울처럼 빛나는 모습.

그랑펠의 심미안에서도 합격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과연, 명성대로군."

물론,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NPC도 마찬가지겠지.

내 혼잣말을 듣고도 그냥 넘기진 않는다는 소리다.

"그대는 누구인가?"

기사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물어왔다.

...뭐지, 저 동질감이 느껴지는 말투는.

나는 언제나처럼 대꾸했다.

"이호열이다. 이런 곳에서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잠깐, 누가 보면 진짜 사극 찍는 줄 알겠다!

이건 지금까지와 다른 종류의 쪽팔림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말이 통해서 수치심이 느껴진달까?

그러나 탐욕과 마찬가지로.

나의 내적 수치심이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사내에게 되물었다.

"나 또한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내 물음에 사내는 흠칫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림새를 보면 모험가가 분명하거늘."

추억 돋네.

NPC들은 플레이어를 모험가라 불렀었지.

그나저나 NPC한테까지 차림새를 지적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서러워서 방어구를 맞추든가 해야지, 진짜.

곧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다른 모험가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군. 나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다."

기사단장이었다니.

새삼스럽지만 내 간덩이에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이 정도면 간이 부은 걸 넘어선 게 아닐까.'

제국 최고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의 기사단장 앞에서도.

이렇게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다니.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마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에겐 더한 짓을 하고 온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모험가여.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사사로이 잡담을 나눌 시기가 아니군."

하르콘이 안타깝다는 듯.

말을 끝마치던 그때.

쿠우웅──!

시야가 흔들렸다.

정확히는 밟고 있는 땅이 흔들린 탓이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네임드 몬스터다.'

업데이트 내역에서 봤던.

열 개의 섬에 각각 한 마리씩 존재한다는 네임드 몬스터가 확실하다.

눈치로 봤을 때 하르콘은 기사들과 함께 저 네임드 몬스터를 사냥할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내 계획이 바뀌진 않겠지만.

"그대의 말이 맞군. 잡담을 나눌 새는 없겠어."

검과 방패를 꺼내 드는 기사들.

나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하르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모험가여. 저 마물은 위험하다. 물러나는 게...?!"

물러나는 게 뭐?

말꼬리를 흐리는 하르콘.

어째서인가, 그의 시선이 내 정장에....

아니, 브로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르콘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설마, 그 브로치는...? 모험가여! 혹시 그대는 마탑과 어떠한 접점이 있는 것인가?"

...잠깐만, 이건 좀 흥미로운 반응인데?

그러나 방금 말했던 것처럼.

내 입술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하르콘.

그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말하지 않았던가? 사담은 일이 끝난 뒤에 나누지."

쿵─!

◈ 29화. 라이언 하트 기사단 (2)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간이 배 밖으로 탈출한 게 확실하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로도 모자라서.

이젠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까지.

'명을 재촉하는 성격이다, 진짜.'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수준은 대단했으니까.

그 시절에도 말단 기사의 레벨이 300레벨은 됐다고 했었지.

대다수 NPC의 레벨이 고정적이라고 해도 기사단장, 하르콘의 레벨은 못해도 400이 훌쩍 넘으리라.

"...자네의 말이 맞군."

근데 뭐냐, 이 반응은.

내게 면박 아닌 면박을 받은 하르콘이었다.

'그냥 납득을 해버린다고?'

거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 용건이 있는 게 확실하다.'

정확히는 마탑에 용건이 있는 거겠지만.

하르콘은 이 브로치로 내가 마탑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정장에 꽂았던 브로치를 슬며시 내려다봤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아이템일 수도.'

그저 레벨 제한이 낮아서.

선택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서.

골랐던 브로치거늘.

하르콘이 알아보는 걸 보면 적어도 내 생각보다는 대단한 아이템인 것 같았다.

물론, 언제까지나 대여한 아이템이기에 반납해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최대한 써먹어야겠어.'

그때까지 뽕 뽑아야지.

내가 다짐하던 사이.

하르콘이 정신을 차리곤 외쳤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기사들이여!"

오글거릴 법도 한 대사이건만.

비장한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랑펠의 성격 덕분인가.

'그래도 폼이 나는데.'

나는 정렬한 기사들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도 잠깐.

쿵─!

굉음과 함께 네임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거북이었다.

맹수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송곳니.

금처럼 반짝이는 등딱지가 인상적인 거대 거북.

순간,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서 봤던 이름이 떠올랐다.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 : Lv.450』

하필이면 걸려도 제일 빡센 놈이 걸리다니.

무려 450레벨짜리 몬스터였다.

열 개의 섬으로 이뤄진 유스라 제도.

각 섬에 서식하는 열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

그중에서 가장 높은 레벨을 가진 게 바로 저 거대한 거북이었다.

시작부터 쉽지 않구나.

그러나 해볼 만할지도 모른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저 거북이가 악마족은 아니었지만.

거악, 칠죄종 탐욕 덕분에 천적관계는 발동 중이다.

게다가 그런 내 곁에는 제국 최고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있었다.

"그대가 마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위험하니 물러나라는 말은 주제넘은 말이 되겠지. 그러니 모험가여. 우리와 함께 저 마물을 쓰러트리지 않겠는가?"

어째서인지.

내게 굉장히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기사단이 말이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아르카나에서도 인맥인가.'

마탑의 후광이 이토록 밝을 줄이야.

어쨌거나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흔쾌히 응하지."

뻔뻔하게도 덧붙였다.

"허나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 경."

...내가 지껄이는 말이지만.

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사극 말투는 그렇다 치고 넘어가더라도.

'물에 빠진 거 건져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잖아, 이거?'

나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연합.

공동 전선을 펼친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갑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왜, 그 머릿수만 봐도 일 대 백이었다.

수준?

솔직히 비교하기도 민망하다.

내 레벨은 고작 146이었으니까.

'버스 승객이 오히려 버스비를 받겠단 말을 한 거야.'

그런데 도움 요청에 흔쾌히 응하겠다니.

그것도 모자라 도움에 대한 대가를 받겠다니.

...나, 몬스터에게 죽는 것보다 민망해서 죽는 게 먼저 아닐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랑펠이 죽고 못 사는 격식.

그 격식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말이었으니까.

"명심하겠네. 모험가여."

툭─!

주먹으로 심장을 두드리며.

비장하게 대답하는 하르콘.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사춘기라고 오냐 오냐 키우면 안 된다.'

이렇게 자꾸 받아주니까 버릇이 나빠지는 거라고.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의 내적 수치심과 맞바꾼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태워주는 버스에 탑승.... 아니, 연합을 펼치게 된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빚까지 지우게 만들었다.

거기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탑에 흠칫했던 하르콘의 반응까지.

'걸린 게 많군.'

저 황금 거북이 목에 걸린 게 말이야.

무엇보다 섬의 보물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잡생각은 없었다.

쿵─!

이쪽을 향해 송곳니를 들이미는 거대 거북.

"사자 심장의 기사들이여! 돌격하라!"

하르콘의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가는 기사들.

질 수 없다.

나 또한 『마법』을 발현했다.

*

박휘강은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대체, 뭐지? 이 상황은?'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 기운도 없었다.

에메랄드 호랑이를 가뿐하게 제압.

그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도록 놀랐었단 말이다.

기대 이상이었단 말이다.

-ㅁㅊ 여기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고?

-하필이면 NPC랑 루트가 겹치네 아ㅋㅋ

-이 섬에서 섬의 보물 먹긴 좀 힘들듯??

그래, 지나갔던 채팅대로.

이번엔 운이 없구나, 싶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어떤 NPC들인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마탑을 제외하고 최강의 무력 집단을 꼽으라면 한 손에 꼽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 무력만 따지자면 길드 랭킹 1위.

샤이닝 정도는 가뿐하게 압도할 정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호멘

전력이 아니라고 한들.

라이언 하트는 라이언 하트였다.

무엇보다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가 건재했으니까.

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그들과의 경쟁은 무리다.

시청자는 물론, 박휘강까지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전개가 시작된 것은!

-근데 하르콘 표정이 왜 저럼??

-겁나 놀란 것 같은데?

-뭐야 뭐야 또 뭔 떡밥 있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중계하겠노라.

멀리 떨어진 탓에 호열과 하르콘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표정들이.

또 길어지는 대화가 누가 봐도 심상치가 않았다.

게다가.

"엥? 자, 잠깐만요!!"

툭─

별안간 하르콘이 심장에 맹세해 버린 것이었다.

-아니 잠깐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거 황실에서나 하던 인사잖아ㅋㅋㅋㅋㅋ

-ㅁㅊㅋㅋㅋㅋ 저걸 왜 이호열 앞에서 하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호멘

사자의 심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에게 있어서 심장에 맹세한다는 건.

아주 큰 의미를 지녔다.

그러니까 궁금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성지순례가 시작되고 말았다.

──────

현재 시청자 수 : 512,998명

──────

그리고 지금이었다.

멈출 새 없이 증가하는 시청자 수.

그 수많은 시선 앞에서.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연합이 펼쳐지고 있었다.

-말이 되냐고 저게ㅋㅋㅋㅋㅋㅋ

그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파티라도 맺은 것처럼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을 사냥하는 호열.

천하의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함께 공동 전선을 벌인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거늘.

-...대체 클래스가 뭐야?!

-와 서포팅 실력도 ㅁㅊ네 그냥

-클래스를 떠나서 저런 스킬 활용이 말이 되나?

정작 시청자들은 순수하게.

호열이 보여주는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전투.

그걸 호열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중계가 아닌 직관으로.

감상 중인 박휘강이 할 수 있는 말은....

"...와아."

그 한마디밖에 없었다.

*

『마법』이 [스킬]보다 우위서는 점?

솔직히 이젠 잘 모르겠다.

'어쩔 수 없지.'

마탑에서 마르셀로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만나며 깨달았거든.

마법이 뛰어난 게 아니라 마법에 관한 그랑펠의 재능이 사기적이라는 것을.

'그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으니까.'

탐색, 간섭, 발현.

그 시작 단계에 불과한 탐색부터.

그만한 수고가 필요할 줄이야.

그런 면에선 스킬엔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그냥 외치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 단점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스킬은 창의적 활용이 불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파이어 애로우를 떠올리면 된다.

스킬의 경우.

파이어 애로우를 쏘는 것이 전부였다.

기껏해야 방향 조절 정도겠지.

하지만 마법은 다르다.

간섭 과정에 수고스러움을 더하면....

화르륵─!

강렬하게.

회전하며 타오르는 파이어 애로우를 발현할 수 있었다.

그 파괴력은 일반적인 파이어 애로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회전하는 파이어 애로우에 가속이 더해진 덕분에 그 화력도 더욱 거세졌으니까.

파바바박─!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인 파이어 애로우였다면 울창한 식생에 가로막혀 거북이 근처에도 뻗어 가지 못했겠지.

하지만 회전을 더하자 방해물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는.

우우우웅─!

거대 거북의 머리에 적중.

녀석이 신음할 정도의 피해를 줬다.

그만큼 쉽지 않은 발현이었다.

그 난이도는 물론, 소모되는 마력도 훨씬 많았으니까.

'물론, 나한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또 한 번 감사할 수밖에 없겠는데?

중2병에 시달리던 과거의 나에게 말이야.

물론, 내 마법만으로 녀석을 쓰러트리긴 역부족이었다.

'브로치의 효과가 적용 중이라고 해도.'

녀석의 체력보다.

내 마력이 고갈되는 게 먼저일 테니까.

하지만 이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리를 공격해라! 녀석이 무릎 꿇게 만들어라!"

보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높은 레벨만큼이나 기사들은 확실히 잘 싸웠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는 게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하르콘을 비롯한 기사들은 집요하게 거북의 다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다만 그 효율이 떨어질 뿐.'

능력 부족보다는.

상성이 좋지 않다고 말해야겠지.

유효타를 누적시키곤 있었지만, 녀석이 무릎을 꿇을 때까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두꺼운 녀석의 다리.

확실한 데미지를 줄 순 없는 부위였으니까.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4/10]

벌써 4개.

이 와중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러니까.'

여기선 조금 더 창의성을 발휘하는 수밖에.

나는 하르콘에게 말했다.

"하르콘. 내가 그대들을 보조하겠다."

"보조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모험가여?"

"내가 길을 열겠다."

"...?"

얼핏 들으면 굉장히 멋진 말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말 그대로 '길'만 열 생각이었으니까.

"마침 재료가 충분해진 참이다."

날뛰는 거대 거북.

녀석이 난동을 부리는 탓에 울창한 나무는 물론.

산까지 무너져내렸다.

거대한 바위가 적당한 크기로 쪼개졌다는 소리다.

탐색, 간섭, 발현.

일순간, 바뀌는 돌무더기의 형태.

나는 거기에 창의성을 더했다.

영감이야 마탑에서 얻은 참이다.

'정확히는 마탑의 계단에서 말이지.'

스스슥─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르는 계단들.

그 계단은 거대 거북의 유일한 약점.

거북의 머리를 향해 수놓아졌다.

'절반 그 이상의 마력을 소모한 보람이 있다.'

허공에 펼쳐진 수천 개의 계단.

내가 발현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다.

"자, 자네...!"

하르콘이 놀라 말을 더듬기도 잠깐.

그는 빠르게 내 의도를 파악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길이 열렸다. 기회를 헛되이 하지 마라. 속전속결로 끝낸다!"

타닥─!

계단을 타고 오르는 기사들.

과연, 사자의 심장들이다.

마탑 계단에 쫄았던 나랑은 다르네.

나는 곧바로 반전 마법을 발현.

그들이 밟고 오른 계단은 허물고 새롭게 계단을 수놓았다.

마탑의 계단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빈약한 마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철저한 마력 절약 정신.

계단을 허공에 띄우는 데에도 마력은 소모되니까.

마력이 빠져나갈 구석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착각하기 딱 좋겠네.'

그 속사정을 모르고 보면 말이다.

이만한 고위 마법도 없게 보이겠지.

다시금 내 처량한 처지를 실감하게 된다.

호수 위의 백조.

우아함을 연기하면서도.

쉴 새 없이 다리를 허우적거려야 하는 내 신세.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억울하지 않았다.

타다닷─!

계단을 타고 올라.

푹─!

푸욱─!

거대 거북의 목덜미에 꽂아 넣는 기사들의 검격.

그와 동시에.

내게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가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에 대한 처치 기여도를 포기합니다.]

[기사, '에노크 로렌'이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에 대한 처치 기여도를 포기합니다.]

[기사, '예시카 브라이트'가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에 대한 처치 기여도를 포기합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 끝에서.

[포기한 처치 기여도가 양도됩니다.]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명예롭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여."

◈ 30화. 상대를 잘못 골랐군 (1)

사자들의 우두머리.

하르콘 킹스가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의문이 앞섰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황제께서 마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그들에게 보낸 선물 중 하나.

조각난 듯한 외관.

하지만 그 자체로도 작품 같은 자태.

저건 육망성 브로치가 확실했다.

저런 수준의 마도구는 절대 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저 마도구를 어떻게 모험가가...?'

마탑은 집단, 그 이상의 집단이었다.

오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마법사들.

만약 그들이 대륙의 패권에 관심이 있었다면.

'대륙을 통일하는 데까지 채 일 년도 걸리지 않았겠지.'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호열이라고 했나.

그 이름부터 모험가가 확실하거늘.

'무슨 수로 마탑의 마도구를 소유하고 있느냔 말이다.'

마탑에서 마도구를 탈취했다?

불가능하다.

그건 생각할 가치도 없는 가능성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마탑이 그에게 마도구를 내어줬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솔직하게 하르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모험가에게?'

진리를 탐구한다고 한들.

마탑은 누구에게도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래, 그들은 일종의 '자연재해'였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라면.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아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다.'

하르콘은 결심했다.

"그대가 마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위험하니 물러나라는 말은 주제넘은 말이 되겠지."

원인도 모른 채.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진 현 상황.

하르콘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도뿐이었다.

그런데 마탑과 관련된 모험가를 만나게 될 줄이야.

'마탑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 아니, 벌써 해결책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이건 마탑과 접촉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였다.

설령 그 자연재해에 휘말리는 꼴이 될지언정.

하르콘은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모험가여, 우리와 함께 저 마물을 쓰러트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이전에 검증이 필요했다.

저 모험가가 정말 마탑과 관련이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천운으로 육망성 브로치를 획득한 것인지를.

'만약, 그 능력이 의심된다면....'

브로치의 출처를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 이유야 어찌 됐든 저 마도구는 황제의 하사품이었으니까.

제국 최강의 기사단이자 황제의 수족이라 불리는 라이언 하트.

그 단장인 자신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으리라.

'보면 알게 될 일이다.'

그 속내를 충분히 감췄다고 생각한 하르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에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허나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음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킹스가드 경."

...이럴 수가 꿰뚫어 보다니!

그것도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하르콘은 그 짧은 대화에서 깨달았다.

'내 의도를 파악했으면서도 흔쾌히 응했다.'

주고받음이 있음을 명심해라.

그러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실수했군.'

그 의도가 드러난 시점에서 자신과 모험가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랬다.

이제 증명하는 건 모험가가 아닌 자신들이 된 셈이었다.

"명심하겠네. 모험가여."

그 불찰을 참회하는 듯.

심장에 대한 맹세.

그리고 지금이었다.

스스슥─

하늘에 수놓아지는 계단.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계단이 사라지고 다시금 떠오르는 기이한 광경.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타다닷─!

하르콘은 그 계단을 오르며 방금의 대화를 떠올렸다.

-하르콘. 내가 그대들을 보조하겠다.

-보조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모험가여?

-내가 길을 열겠다.

하르콘은 이를 악물었다.

'이러고도 황제의 기사라 자신할 수 있겠는가!'

불필요한 의심을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배려를 받고 있었다.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야 할 시점에서 말이다.

빠득─!

"이제는 그대를 실망시키지 않겠네. 모험가여."

정신 집중.

고오오오─

은은하게 발광하는 검.

검강.

이내, 하르콘의 검이 거북의 목을 꿰뚫었다.

연달아서 기사들의 검격이 날아들었다.

마물의 숨통을 끊었건만.

하르콘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내겐 자격이 없는 게 당연하다.'

고작 공적을 포기하는 것으로.

모험가, 호열에게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빚을 더 졌다면 모를까.

그러니까 하르콘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가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빠르게 정비를 마친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험가, 이호열과 함께한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 반가운 메시지는 정확하게 스무 번째에서 멈췄다.

단번에 20레벨이 상승한 것이다.

과연, 네임드 몬스터.

그것도 유스라 제도에서 가장 강한 녀석다운 경험치다.

'이걸로 166레벨인가.'

빠른 속도로 레벨을 올리고 있지만....

부족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의 전투만 해도 그랬다.

'300레벨만 됐어도 말이야.'

마탑에서 이 브로치보다 좋은 마도구를 빌려서.

그 마도구의 효과로 마법을 난사해 가며 거대 거북을 사냥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안 되는 것을 한탄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기에.

'됐다. 됐어.'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높은 기여도로 자동 습득했다는 전리품.

정확히는 섬의 보물을 확인하기 위해서.

[섬의 보물, 부서진 왕관]

[등급 : 에픽]

[제한 : Lv.500]

[효과 : 없음]

[설명 : 오래된 왕관이다.]

...뭐냐.

밸런스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정보창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등급이었다.

노말 ▶ 매직 ▶ 레어 ▶ 유니크 ▶ 에픽

성격 탓에 온몸으로 티는 내지 않고 있지만.

나는 심히 놀란 상태였다.

에픽 등급 아이템이라니...!

'에픽이면 아르카나 역사상 몇 번 등장하지도 않았잖아?'

물론, 내가 아르카나를 떠난 10여 년 동안.

내가 모르는 에픽 등급 아이템이 드롭됐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에픽 아이템은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그에 대한 정보 자체가 없었으니까.

'경매장에서도 거래된 내역은 없었으니까.'

그것이 내가 균형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 이유였다.

그래, 에픽 등급이면 말이야.

그 거창한 등급에 걸맞게.

대단한 효과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레벨 제한은 더럽게 높으면서.'

효과가 없다니!

심지어 설명도 달랑 한 줄.

성의란 게 보이지 않았다.

섬의 보물은 개뿔이 섬의 보물이다...!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감정 기복.

물론, 내색하는 일은 없었다.

이런 따위 걸로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건.

굳이 설정을 들추지 않아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

게다가 또 하나의 증거가 있었다.

[붕괴 진행도 : 4/10]

역시, 내 추측이 맞았다.

붕괴를 진행시키는 건 섬의 보물 그 자체가 아닌.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드는 것.

보물 중 하나인 왕관이 내 인벤토리에 들어왔지만, 진행도가 상승하지 않은 게 증거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품지도 않았던 탐욕이지만.'

있었어도 금방 사라졌을 거다.

왕관의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말이야.

'하지만 뭔가 숨겨진 게 있을지도 모르지.'

에픽 등급이 괜히 에픽 등급이겠냐고.

내가 애써 위안하듯 생각하기도 잠깐.

'...그나저나 왜 포기한 거지?'

하르콘을 비롯한 기사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처치 기여도를 포기한 덕분에 경험치를 독식한 것도 모자라서 섬의 보물까지 자동으로 습득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전개이건만.

"과연, 그 명성만큼이나 명예롭군.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여."

...어련하시겠어?

나는 그 과잉 친절 또한 당연하다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유는 알아야겠다.

내가 해둔 말이 있기도 하고.

'주고받음을 명심하라니.'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입 다물 걸 그랬다.

내가 그런 후회를 하던 와중이었다.

"또 한 번 그대에게 빚을 지고 말았군."

...뭐요? 빚을 져? 그쪽이?

대체 어떤 빚을 졌다는 걸까.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길을, 계단을 놔줘서? 그게 그 정도라고?'

하지만 나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꾸했다.

"명심하고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겠지."

"물론, 그대의 말은 이 심장에 새겨뒀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덕분일까.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거 어디서부터 착각하고 있는 거야?'

되짚어 봐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할 필요 또한 없겠지.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수밖에.'

거기에다가 이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던가.

착각 이상의 것을 받게 된다?

간단하게 되돌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 기준점이야, 뭐.'

드높은 긍지 탓.

남에게 빚지고는 못사는 그랑펠이 더욱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르콘이 투구를 벗자 중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기사 단장치고는 수려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그가 다시금 가슴에 주먹을 얹고는 내게 말했다.

"그대에게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 유스라 제도에서만큼은 우리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겠네."

이게 아르카나 게임 속이었으면 말이다.

쉴 새 없이 스크린샷을 찍어댔을 거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저런 말을 하다니.

인생 업적이라며 호들갑을 떨면서.

'...이건 그만큼 놀라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당신의 파티에 참가합니다.]

유스라 제도 한정이지만.

그들이 내게 충성을 맹세한 덕분일까.

자동적으로 파티가 생성됐다.

눈앞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 머리 위로 저들의 레벨이 보인다는 소리였다.

[하르콘 킹스가드 : Lv.600]

[예시카 브라이트 : Lv.430]

[에노크 로렌 : Lv.400]....

600레벨.

그 숫자를 보는 순간.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현재 유스라 제도의 그 어떤 플레이어, 길드도 내 파티의 전력을 따라올 순 없을 것이라고...! 고작 166레벨 주제에 이런 파티의 파티장이 되다니.

'적어도 부담감은 느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젠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내 사전에 부담이란 단어 따윈 없었으니.

"자네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하르콘 경."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그런 내가 기사단을 이끌고 할 일은 명확했다.

또각─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섬으로 가지."

어떻게 해서든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것!

*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5/10]

떠오르는 메시지.

킨베르는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진정하자."

초신성.

자신이 그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이 인내심이 한몫했다.

참고 또 참고.

결국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 참아내는 이 인내심이.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6/10]

"...씨발!"

그러나 보물섬이라는 환경 탓일까.

유달리 참기가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움직여.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겠어.

-그러다가 보물을 빼앗기면 어쩌려고.

"...입 닥쳐."

포기한 게 아니었다.

그저 확실한 기회를 노릴 뿐.

킨베르는 자신을 영리하다고 믿었다.

"뭐든 치고 빠질 때가 있는 법이야."

수십,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을 살해하고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자신이 그 믿음의 근거였다.

그런 킨베르가 숨을 죽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유스라 제도의 먹잇감은 사냥하기 쉽지 않았거든.

'겁쟁이 새끼들.'

플레이어들은 길드, 못해도 파티 단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사냥감이 무리에서 떨어졌을 때.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끝이다.'

그 소란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땐 사냥의 성공 여부를 떠나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게 끝장난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킨베르는 이곳에 잠복했다.

'외딴곳에 떨어진 이 섬에 말이지.'

떨어진 거리만큼 도달하는 플레이어들도 적으리라.

킨베르는 다시금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대가리가 꽃으로 가득 찬 병신들."

쉬운 길을 놔두고 뭐하러 어려운 길을 돌아가지?

킨베르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너희가 현실을 모르는 덕분에."

나는 지름길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킨베르가 눈빛을 번뜩이던 그때였다.

"...오호라."

멀리서 사냥감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과연, 포탈에서부터 눈여겨본 보람이 있었다.

"이호열."

충격적인 데뷔를 보여준 플레이어.

그의 강함?

킨베르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TV, 인터넷, 어떤 매체를 틀어도 한동안 저 녀석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었으니까.

그러니까 먹음직스럽다는 것이었다.

"뭘 모를 때가 딱 좋을 때거든."

자신이 정말로 뭐라도 된 듯.

헛바람으로 가득 찼을 때.

그때가 사냥감을 풍선처럼 터트리기 좋을 때였다.

"그 오만함이 오늘 너를 죽게 만들 거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준비는 치밀했다.

디버프, 상태이상, 레어 등급의 맹독 등등....

혼자로선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수단들.

킨베르가 신호를 보냈다.

"다들 준비해."

그러나.

킨베르의 신호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킨베르? 새끼야, 준비하라며?

"...."

-이 새끼 왜 말이 없어?

귓가에 울리는 일행의 성난 목소리.

하지만 킨베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호열.

그리고 마치 녀석을 호위하듯.

그 뒤를 따르는 판금 갑옷의 기사들.

무엇보다 저 사자 문양은.... 틀림없었다.

저건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었다.

"저, 저게 말이나 되는?!"

킨베르는 실감하고 말았다.

"...오만한 게 아니었어."

그 어떤 지름길을 가로질러도 도달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그때였다.

'이, 이럴 수가....'

...은신한 나를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이호열.

그와 나란히 걷던 중년 기사와 눈이 마주친 것은.

◈ 31화. 상대를 잘못 골랐군 (2)

언제는 당당하지 않았겠느냐만.

애써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다...!

[하르콘 킹스가드 : Lv.600]

제국 최강의 기사단을 파티원으로 둔 상황.

내 평생 이런 거물과 언제 또 엮여볼 기회가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기회를 최대한 굴려야 한다.'

행운 스탯에 투자한 포인트 덕분인가.

어쨌거나, 두 번 다신 오지 않을 천운이겠지.

인연은 유스라 제도에서 끝이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리라!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그 첫걸음은 당연하게도 섬의 보물을 확보하는 것.

물론, 내 인벤토리엔 섬의 보물인 왕관이 있었다.

탐욕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붕괴 진행도는 상승하지 않았었지.

그러니까.

'일단, 거악이 깨어나는 건 막았단 소리야.'

─칠죄종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하라. (진행 중)

아직 섬의 보물이 남아있어서 그런가.

퀘스트는 진행 중이었지만 말이다.

'지금부터 보너스 스테이지란 거지!'

섬의 보물을 획득하는 것도.

몬스터를 사냥해 전리품을 얻는 것도.

모든 게 나 하기에 달렸단 소리였다.

이젠 동료가 없다고 처량한 척 엄살을 피울 수도 없다.

'변명도 못 하지.'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들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나와 나란히 걷던 하르콘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전설만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군. 단 한 가지만 빼면 말일세."

...한 가지?

그런데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자, 하르콘이 질문을 던져왔다.

"호열 경. 그대는 나무 위의 쥐새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잠깐만.

지금 뭐라고 그랬어?

'...호, 호열 경?!'

뭐냐, 듣기만 해도 낯 뜨거워지는 그 호칭은!

모험가 이호열에서 호열 경으로.

호칭이 달라진 이유는 짐작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하르콘은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나에 관해 굉장히 좋은 착각을.

'오해? 할 수 있어.'

거기에다 하는 짓에 말투까지 봐선.

영락없이 귀족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가끔 나도 착각한다니까?

싸구려 녹차가 정말 감미롭게 느껴지고 막 그래.

그러나.

'막상 들으니까 죽을 것 같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다.

호열 경이라니.

무엇보다 누나들, 그중에서도 3호.

그 웬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시라도 알게 된다면 이건 평생 놀림감이었다.

흑역사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단 말이다.

'인연이 유스라 제도에서 끝나 천만다행이야.'

우리 제발 밖에선 마주치지 말자.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태연하게도 대꾸했다.

"하르콘 경.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수고스럽지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만."

"그대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수치심을 억누르자 대화의 내용이 떠올랐다.

나무 위, 쥐새끼라고 그랬었나.

다람쥐를 말하는 거야, 뭐야.

'여긴 다람쥐도 레벨이 높나?'

수고스러워도 처리하는 게 낫다니 말이다.

어디, 만렙 다람쥐 구경이라도 해보자.

내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8/10]

...와씨, 하나 남았잖아?

내가 습득한 왕관은 빼고 생각해야 하니까.

다시 봐도 섬의 보물은 하나가 남은 게 맞았다.

그 소리는 이 섬에 유스라 제도의 모든 플레이어가 몰려든다는 소리였다.

이거 다람쥐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따라줄 수 있겠는가?"

철컥─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발검하려던 하르콘이 검을 집어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호열 경. 이 섬에서 우리는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리라 약속했으니."

하르콘의 서늘한 눈초리가 나무 위를 향했다.

"쥐새끼 또한 한동안 근처에 얼쩡거릴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말일세."

정말 다람쥐라도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려다가 관뒀다.

과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

그것 또한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탄식을 삼켰다.

이 피곤한 성격에 적응하고 있는 내가 원망스러워서.

*

강도, 협박, 살인.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만, 심판은 없었다.

되려 자신에겐 초신성이란 거창한 칭호까지 붙었다.

"세상에 신이 어딨어? 있었으면 난 진작 뒈졌겠지."

그런 킨베르에겐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 한들.

이 맹독에 걸리면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다.

자신보다 높은 레벨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죽어 나간 플레이어만 해도 셀 수 없었다.

약한 놈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그 악랄한 킨베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르콘 킹스가드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살기에 몸과 정신이 마비됩니다.]

[상태이상 : 공포가 발생합니다.]

미안하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 저게 하르콘 킹스가드...!!'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그 우두머리 사자, 기사단장.

그저 눈을 마주친 것뿐이었다.

킨베르는 손가락 하나 움찔거릴 수 없었다.

'제, 제발...!'

철컥─

검을 뽑는 소리.

그와 동시에 들리는 냉랭한 목소리.

"하르콘 경.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수고스럽지만 처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킨베르는 공포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애애애!'

할 수만 있다면.

땅에 머리를 박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결정을 존중하겠네."

청천벽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순간 킨베르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

바지가 젖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수치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이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넌 틀렸구나.

이건 동료의 목소리인가.

아까부터 신경을 자극하던 환청인가.

구분조차 되지 않던 그때.

"하지만 지금은 나를 따라줄 수 있겠는가?"

...어?

"물론일세. 호열 경. 이 섬에서 우리는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리라 약속했으니."

철컥─

하르콘이 호열의 말에 검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정말 자신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그들과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킨베르는 정신을 차렸다.

"...살았어?"

...나, 어떻게 살았지?

킨베르가 중얼거렸다.

"살려준 건가?"

이호열, 그 녀석이?

바지에 오줌까지 지려버린 내가 불쌍해서?

아니면 나 같은 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쥐새끼라서?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킨베르는 눈가에 눈물을 훔쳤다.

"씨바알...."

오직 한 가지 감정.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에 킨베르는 흐느꼈다.

킨베르는 다시금 깨달았다.

'...차원이 다르다.'

하르콘 킹스가드.

그건 괴물, 그 이상의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하르콘을 검과 방패로 부리는 이호열.

킨베르가 끊겼던 통화를 다시 연결했다.

-킨베르, 병신아. 이제 들리냐?

-신호한다면서 닥치고 있으면 어쩌잔 거야?

동료들의 성화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유스라 제도에서 손 뗀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야!!

"마지막으로. 뒈지기 싫으면 이호열은 건들지 마라."

-뭐?!

뚝─

고함이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킨베르는 유스라 제도에 한순간도 발을 붙이고 있고 싶지 않았다.

이호열 혹은 하르콘.

만약, 둘 중 하나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목이 달아날 것 같았으니까.

.

.

.

"이 병신 갑자기 왜 이래?"

초신성, 박현중은 빠득 이를 갈았다.

킨베르 새끼가 제멋대로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만.

오늘은 조금 선을 넘었다.

"이 개새끼 진짜."

오늘을 위해 투자한 금액만 해도 얼마인가.

어중간한 사냥감으론 적자였다.

대박은 몰라도 최소 중박은 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박현중은 점점 초조해졌다.

'...내 사정 뻔히 알면서 킨베르 새끼야!'

실력을 떠나서 같은 초신성을 믿는 게 등신 같은 판단이었다.

언제 뒤통수를 칠 줄 모르는 새끼들인데.

박현중은 이를 악물었다.

"넌 몰라도 나는 이대로 못 물러나."

그때였다.

귓가에 목소리가 들린 건.

-할 수 있어.

-간단한 일이잖아. 죽이고 빼앗는 건.

-이제 다 왔어. 분발해 봐.

"...뭐야, 씨발."

분명 통화는 끊겼건만.

선명한 목소리에 박현중은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뭐라도 해내고 만다. 내가!"

-뒈지기 싫으면 이호열은 건들지 마라.

"...뭔진 몰라도 뒈지긴 싫으니까."

이호열, 그 자식은 빼고.

*

투두두두두─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태평양 위를 비행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건 당연하게도 유스라 제도.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헬리콥터 위에서 촬영하는 게 최선이었다.

유스라 제도엔 살아있는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앵글이 아쉽네. 종진아, 너 그냥 번지 점프 한번 하면 안 되냐? 낙하산도 메고 있잖아."

VBC 보도국.

현용석의 짓궂은 농담에 엄살 섞인 대답이 들려온다.

-우욱. 안 그래도 멀미 때문에 죽겠는데. 진짜!

"밥값은 해야지. 이거 기회란 기회는 다 놓치고."

-우욱! 진짜 뒤끝! 이호열 얘기를 아직까지...! 우웩!

밥맛 떨어지게, 진짜.

현용석은 잠깐 헤드셋을 벗었다가 썼다.

"그래도 고생했다. 네 덕분에 시청률은 순항 중이야."

생방송 중인 투데이 아르카나.

현재 실시간 시청률은 15퍼센트.

물론, 그 시청률을 견인한 건 헛구역질을 하는 윤종진이 아니라 가온 덕분이었지만.

샤이닝이 섬의 보물을 두 개나 획득했든, 뭐든.

결국, 국민의 관심은 대한민국의 길드.

가온에게 향하는 게 당연했다.

-잘 찍혔어요? 마지막에 장난 아니었는데.

"여기 몹들이 커서 그런가. 오히려 멀리서 찍은 앵글이 훨씬 괜찮더라고. 시청자들 반응도 장난 아니었어. 너 멀미시키는 보람이 있다."

-다행이네요. 알아줘서. 우욱!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고 섬의 보물을 획득한 가온.

시청률을 떠나서 현용석도 흥이 날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피날레만, 한 컷만 확실하게 따자."

마지막 섬으로 모여드는 플레이어들.

많은 플레이어가 모이는 만큼.

당연하게도 흥미를 자극하는 그림이 연출되리라.

-뭣보다 이나즈마 녀석들 얼굴은 꼭 클로즈업해서 따려고요. 그것들 우리한테만 싸가지 없게 굴던 거 생각하면 아주 그냥 굴욕 사진을...! 우웨엑!!

"...너 때문에 오늘 밥 다 먹었다."

그래, 윤종진의 말대로였다.

하다못해 이나즈마, 히사기 카즈마의 표정 변화만 담아내도 대박이었다.

가온과 다르게 일본의 길드, 이나즈마는 섬의 보물을 하나도 획득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길드 랭킹이 바뀔 수도 있겠는데."

점점 커지는 기대감.

투두두두두─

헬리콥터가 가온을 뒤쫓아 마지막 섬으로 날아가던 순간이었다.

-와씨. 다들 엄청나게 빠른데요?

"왜? 벌써들 도착했어?"

-잠깐만요. 줌 땡겨 볼게요.

확대되는 송출 화면.

그러자 윤종진이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와. 장관이네. 이거."

샤이닝과 천하통일을 비롯해서.

섬의 중앙으로 몰려드는 길드와 플레이어들.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데요. 선배?

"아니, 난 처음 보는 거 같다. 애초에 이렇게 모일 일이 없잖아? 균열에선 붙어 다니면서 경쟁해 봤자 서로 득 될 게 없으니까."

-보물섬 덕분에 좋은 구경 해보네요. 정말.

과연, 마지막 섬에선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PD가 아니라 시청자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용석은 프로였다.

"일단, 가온이랑 이나즈마 앵글 먼저 따놓자."

-오케이. 잠깐만요.

"끝내놓고 마음 편하게 봐야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면 앵글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확실한 장면을 하나쯤은 따둬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소리를 듣고 있지만.

윤종진 역시 프로였다.

"오케이. 우리 태민 씨 마스크 좋고."

앵글에 떠오른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의 얼굴.

그런데 잠깐만.

어째서인가.

남태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다...?

아니, 저건 경악을 넘어서서 절규가 아닌가!

"뭘 보고 저러는 거야...?"

나도 그게 궁금하다!

순간, 빠르게 돌아가는 윤종진의 카메라.

그리고 그곳에는.

"...야아아앗?! 서, 선배! 호열, 이호열!!"

이번에도 이호열이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현용석.

그의 얼굴이 윤종진과 마찬가지로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선배. 사자! 어흥! 사자!! 그 사자 문양!!

VBC를 따라 요동치는 헬리콥터들.

"...라이언 하트 기사단?! 뭐야, 무슨 전개야. 이거!"

이내, 모든 카메라가 같은 앵글을 담기 시작했다.

◈ 32화. 기초가 중요한 법이지

절규.

남태민의 얼굴이 동명의 명화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아아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다니.

몬스터는 보이지도 않는데.

광폭화라도 발동시킨 건가.

"뭐야. 갑자기 뭔데, 남태민?"

"형, 뭐 잘못 먹었어요?"

"그러게 내가 아까 컵라면 작작 먹으라고...."

길드원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린 건 역시나.

물보다 진한 피.

형, 남철민밖에 없었다.

-...후우. 그래, 내가 쎄하다 했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호열 영입 추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유스라 제도를 공략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이언 하트 기사단.

저 괴물 NPC들을 이끌고 나타나다니!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했으면 충격이라도 덜 했을 것을.

하지만 이로써 깔끔하게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태민아. 이제 우린 플랜 B로 갈 수밖에 없다.

과연, 분석관답게 빠른 판단을 내리는 남철민이었다.

그가 말하는 차선이란 간단했다.

-우호 관계, 그게 안 되면 적대 관계만큼은 피해야지.

감당할 수 없으면 건드리지도 말자.

남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직접 보니까 분노조절장애가 잘해가 되네."

사람만 한 대검과 한손검.

크기는 다르지만 하르콘과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는 남태민이었다.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의 차이를.

그건 옆 섬에서 건너온 광전사도 마찬가지였다.

"으갹?!"

괴상한 소리를 낸 건 레오니였다.

"...언니, 그거 뭐 새로 개발한 애교임?"

그 입 닥치라고.

당장 태클을 걸어줘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전투밖에 모르는 광전사의 본능.

레오니는 반사적으로 견적을 내기 시작했다.

'...전면전? 기습? 다구리?! 아니 뭘 어떻게 해도.'

하르콘 킹스가드.

저 늙은이에겐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레오니는 벅벅 머리를 긁었다.

"으아아씨. 진짜!!"

마지막 섬이란 말이다.

섬의 보물을 획득하지 못한 만큼.

제대로 미쳐 날뛰어 주겠다, 다짐했는데.

"이건 반칙이잖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라니.

갑자기 저것들이 튀어나오는 게 어딨어?

이래서야 섬의 보물은커녕.

네임드 몬스터에게 처치 기여도나 따낼 수 있을까.

터벅터벅─

레오니는 죽상이 돼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엥?"

작은 키.

상대적으로 좁은 시야 탓이었다.

레오니는 그제야 남들보다 한 박자 뒤늦게.

기사들과 함께 있는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거...?!"

반짝거리는 판금 갑옷의 기사들 사이.

먹색 정장을 차려입은 은발의 남자.

호열을.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샤이닝.

"한국의 애송이가 어떻게?"

천하통일.

투두두두─

심지어는 하늘 위의 헬리콥터까지.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호열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향했다.

.

.

.

보자.

내 평생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 기절할 일이건만.

"최소한의 격식들은 갖췄군."

나는 그 엄청난 관심을 오히려 흡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유의미한 발전이다."

이 뻔뻔함을...!

지금 그런 말이 나오느냐고.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단 말이다.

지금의 침묵, 시선들이 절대 고운 반응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 같아도 놀랄걸?'

웬 플레이어 하나가 제국 최강이라 불리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이끌고 나타나면 말이다. 그것도 섬의 보물을 앞둔 상황에 말이야.

'경계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미치겠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연합.

이건 착각으로부터 시작된 관계가 아니었던가?

정확히는 나에 대한 과대평가로부터 시작된 거겠지.

그런 나를, 다들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까.

고민해 본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166레벨이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이러다가 거품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나중에 사기꾼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했을지도 모르지.

과거의 나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당했다.

그랑펠의 영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야 나는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

언제나 발버둥 치고 있기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어째 갈수록 설정 속.

그랑펠과 비슷해져 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흑역사는 몰입하는 게 아닌, 극복하는 것.

그랑펠 또한 과거의 나에 불과했으니까.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이군.'

그래도 지금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곁에 있던 하르콘이 내 말에 장단을 맞춰줬거든.

"과연, 기강이 확립된 모습이네만. 호열 경의 작품인가?"

어째 나보다 한술 더 뜨는 감이 있었지만.

어쨌든, 이젠 눈앞에 적에게 집중해야 한다.

유스라 제도의 마지막 네임드 몬스터.

[용암 거대 비단잉어 : Lv.420]

흐르는 긴장감 가운데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과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작부터 화끈했다.

구구구궁─!

"...느껴져? 땅이 흔들려!"

"지진인가?"

"아니야. 터진다. 화산 폭발이야!!"

플레이어들이 소리쳤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퍼퍼펑─!

섬 중앙,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붉은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네임드 몬스터는 네임드 몬스터라는 건가.

확실히 레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군.

"쫄 거 없어. 계획대로 간다."

"화속성 저항 옵션 달린 장비, 다들 챙겼지?"

"쿨타임 되는 사람? 나 축복 한 번만 걸어줄래?"

물론 당황하거나 우왕좌왕하는 플레이어도 없었다.

업데이트 내역에서 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용암' 거대 비단잉어.

이름만 봐도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

"이건 썩 좋지 않군."

하르콘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르카나에서 소환된 NPC들이 홈페이지에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확인했다고 해도 대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

잠자코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네. 하르콘 경."

허세가 아니었다.

화속성 저항 장비?

화속성 저항 버프?

그런 게 왜 필요한가.

『마법』이 있는데.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조금이지만 재생된 마력까지 8할 정도인가.'

과연, 브로치의 효과에 만족하지 않고 마력을 아낀 보람이 있군.

마지막 섬에서 이런 마력이라면.

걱정하지 않고 마법을 발현해도 괜찮겠지.

나는 말을 끝마쳤다.

"대책도 없이 그대들을 이끌고 오진 않았으니."

*

투데이 아르카나.

전문가들이 송출되는 화면에 열변을 토해냈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격변 이전, 이후를 살펴봐도 전례가 없는 일인 건 확실합니다! 플레이어가 기사단을. 그것도 제국 최강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대동하고 나타나다니요!"

"동의합니다. 첫 등장 때부터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이호열!"

"방금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이호열 플레이어도 섬의 보물을 획득했다고 합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연합으로 네임드 몬스터,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을 쓰러트렸다고 합니다!"

"황금 송곳니 거대 거북이라면 신규 업데이트 내역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을 자랑하던 네임드 몬스터 아니었습니까? 전문가님?"

가온의 활약.

그로 인해 들떠있던 스튜디오 분위기가 더욱더 뜨거워졌다.

이호열, 그의 인터뷰 태도가 솔직하든 건방지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활약이라면 앞으로 할 말 못 할 말 다 해도,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이호열 플레이어!"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

출연진들이 여운에 취해있기도 잠깐.

네임드 몬스터,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장부터 요란스러웠다.

"과연, 네임드 몬스터답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네요."

상공에서 촬영한 덕분에 뒤바뀌는 전황이 한눈에 보였다.

솟구친 용암이 빠른 속도로 섬을 뒤덮어 가는 광경.

전문가들이 우려를 표했다.

"...까다롭겠는데요?"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대비를 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건 환경뿐 아니었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뒤덮은 용암을 헤엄치기 시작하는 용암 거대 비단잉어.

풍덩─!

그 거대한 몸집으로 용암을 튀기며 날뛰어 대는 녀석.

사방으로 용암이 튀는 게 당연했다.

플레이어들이 고전하는 모습도 그대로 중계됐다.

"...버프가 아니었으면 큰 피해를 볼 뻔했습니다."

"상당히 귀찮아요. 아예 싸워주질 않습니다."

"도망만 치고 있는데, 오히려 플레이어들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어요! 비단 금붕어! 생선 주제에 왜 이렇게 영악한가요!"

"전문가님, 금붕어가 아니라 잉어...."

"그거나, 그거나. 둘 다 생선 대가리지 않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낼 정도로.

전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녀석에겐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

출렁이는 용암 때문에 근접 전투는 불가능.

마법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을 날려봤자 녀석은 용암 속에 숨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출연진들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모았다.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때였다.

그 예측이 뒤집힌 건.

별안간 확대되어 가는 중계 화면.

잠자코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다.

"자, 잠시만요! 지금 용암이 갈라지고 있습니다앗?!"

*

언제까지나 절대적인 척도가 되는 건 레벨이었지만.

때로는 상성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단장님."

600레벨의 하르콘.

그에겐 42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겠지.

다가갈 수만 있다면.

아니, 녀석이 공격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조금의 피해를 감수한다면 하르콘은 녀석을 회 떠버리듯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틈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는구나."

그러니까 상성이라는 것이었다.

그 환경에서나 성격에서나.

그러나 그 상성이 내게는 다르게 적용된다.

나는 용암을 바라보았다.

탐색.

이 용암은 [스킬]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널브러진 돌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부 그랑펠의 설정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

물론, 돌처럼 익숙한 재료는 아니기에 창의적인 간섭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는 마법을 발현했다.

간섭 과정에 더한 것은 단순한 위치 조작.

낯선 탐색 재료이기에 마력의 소모량은 상당했지만.

발현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스오오오─!

이내, 용암이 갈라졌다는 소리였다.

하르콘이 내게 말했다.

"잠깐이나마 그대를 의심했던 내가 미련하게 느껴지는군. 호열 경!"

놀란 기색이 역력한 하르콘.

그 대단한 하르콘이 놀랄 정도였으니까.

플레이어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런 미친...!"

"하다 하다. 이젠 용암을 갈라?!"

"진짜 무슨 스킬인지 감도 안 잡힌다고!"

스킬과 다르게 창의적인 발현이 가능한 마법.

그랑펠의 머리로도 깨닫기까지 며칠이 걸렸는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고 해도 알아듣진 못하겠지.

그러니까 나는 하르콘에게 말했다.

"이번엔 수고롭게 계단을 오를 필요가 없네. 하르콘 경."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

이런 상황에서도 잘도 농담이 나오신다.

하르콘이 검을 빼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

"더해진 배려에 화답하지 않을 수 없겠군!"

갈라진 용암 사이로.

쇄도하는 사자 심장의 기사들.

순수하게 감탄이 나온다.

'누구 파티원인지는 몰라도 든든하다. 다들.'

그러나 내 할 일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마력이 남아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파티를 맺은 이상.

어느 정도 처치에 기여를 해야 경험치도, 전리품도 획득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많은 마력을 소모할 순 없다.

하르콘과 기사들이 용암에 휩쓸리지 않을 때까지.

지금의 발현을 유지해야 했으니까.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극히 소량.'

내가 극히 소량의 마력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가장 익숙한 탐색 재료인 '돌'에 간섭하는 것 정도.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상성에서 우위라고 자신한 이유였다.

갈라진 용암.

그 탓에 빠르게 식어버린 용암의 형태가 바뀐다.

'...뭐, 어쩔 수 없지.'

구질구질하게 싸우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결국, 또 한 번 초등 과학 과정을 끌고 올 수밖에 없겠군.

용암이 식어서 만들어지는 건 현무암.

명칭은 달라도 언제까지나 그 본질은 돌덩이.

돌,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탐색 재료란 것이다.

그러니까 탐색, 간섭, 발현.

그 일련의 과정은 신속하며.

마력의 소모량 또한 극히 미비하다.

콰드드득─!

곧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석창(石槍).

슈슈슈슉─

나는 그 석창을 용암 잉어의 옆구리를 향해 날려 보냈다.

"...이런 미친!!"

"시, 실화냐. 진짜?!"

"우,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이 순간, 나에 대한 시선 따윈 상관없었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끌어오는 마법의 발현.

그것 또한 나의 방식이었으니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명중이군."

◈ 33화. 진정한 천적 (1)

푹─!

[용암 거대 비단잉어 : Lv.420]

상대하기 까다로운 패턴만큼 그 본체는 약할 수밖에 없다.

저렇게 날뛰는데 생명력까지 높다면 그건 더 이상 420레벨 몬스터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푹─!

푸욱─!

돌의 창.

석창으로도 유효타를 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용암이 갈라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인가.

거대 비단잉어는 옆구리에 수십 개의 석창이 박힌 채.

꼬리를 버둥대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모습이었다.

그 빈틈을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놓칠 리가 없었다.

고오오오─

하르콘의 검이 짙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저건 스킬 같은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이유?

간단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얼마나 강한 거야?'

그의 드높은 경지를.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다시 생각해도 좋은 건 다 가져다 붙였군.

그랑펠은 설정상, 마법적 재능에 버금가는 무재(武才)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검을 빛나게 만드는 하르콘의 경지도 가늠할 수 있는 거겠지.

'확실히 마력과는 다르다.'

다만 마법과는 다르게 엄두가 나질 않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조금은 흥미가 생기는군."

나는 거만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안 된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야.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도 넘치는 게 나을 테니까.

물론, 검에서 빛을 뿜어내는.

하르콘의 경지를 목표로 한다면.

내 몸뚱이에서 피로가 떠날 날은 없겠지만 말이야.

스오오오─

과연,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하르콘은 정말 용암 거대 비단잉어를 회 떠버렸다.

"다들, 정신 차려! 기회다!!"

"처치 기여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해!"

"일단 갈라진 용암 사이로 달.... 려어어엇?!"

다른 플레이어들이 숟가락을 얹을 새도 없었다.

철컥─

하르콘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전투가 끝나버린 것이었다.

쿵─!

그러자 거대 비단잉어의 대가리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그대로 끝.

그와 동시에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승한 레벨은 10레벨.

166레벨에서 176레벨이 됐다.

'경험치가 나쁘지 않은데.'

이건 좀 의외였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파티를 맺었기에.

나 또한 처치에 기여를 해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용암과 떼어놓고 보면 용암 거대 비단잉어 자체는 까다로운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그 점에서 적잖은 기여도가 인정된 모양이었다.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아니, 적잖은 게 아니라 절반 그 이상인가 본데?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획득한 섬의 보물이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섬의 보물, 비단잉어 비늘 비단]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제작 시, 제작 아이템에 화염 속성 친화력 상승효과 부여 / 회피 확률 상승효과 부여 / 심미 스탯 개방 효과 부여]

[설명 :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다는 비단이다. 워낙 희귀하기에 그 가치는 누구도 감히 평가할 수 없으리라.]

와씨.

에메랄드 결정에 이어 또 재료 아이템.

하지만 이건 투정 부릴 수준의 아이템이 아니었다...!

'확정된 효과만 3개가 넘는다고?'

순수한 에메랄드 결정.

그 효과는 제작 뒤에나 확인할 수 있었다.

말했다시피 제작자의 숙련도에 따라 그 효과가 변동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비단에는 그런 조건 따윈 붙어있지 않았다.

'다른 효과는 그냥 넘어가더라도 새로운 스탯 개방.'

[심미]라....

들어본 적도, 그 효과도 알 수 없는 스탯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고유 스탯 하나 없는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뭐든 새롭게 개방된다면 감사하게 써먹을 수 있겠지.

과연,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할 만했다.

"아름답군."

무엇보다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것.

그게 품질에 대한 가장 큰 보증이겠지.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잠깐만 섬의 보물은?"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네임드 몬스터가 쓰러졌지만,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제대로 격식을 갖춰 공손하게 묻는다면.

대답해주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 나를 보는 눈빛들이 더 심상치 않아졌는데?

데구르르─

눈알이 굴러간다고 표현해야 할까.

메시지창과 나를 번갈아 가며 보는 듯한 시선들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신경 쓸 정도로.

나는 한가롭지 않았다.

'하얗게 불태웠군.'

마력 탈진.

마력의 고갈이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전신에 기운이 빠진다.

다행히도 용암 거대 비단잉어가 쓰러지자, 화산 분출은 멈추고 용암도 빠르게 식어갔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마법을 유지할 필요도 없겠지.

이내, 내게 다가온 하르콘.

"감탄할 수밖에 없는 마법이었네. 호열 경!"

그의 말에 나는 두 번 경악했다.

'오히려 감탄한 건 난데?'

그의 겸손에 한 번.

'아니, 그보다 사람들이 다 듣고 있는데. 뭐?!'

...호열 경?

그 낯부끄러운 호칭에 또 한 번.

찰나의 시간.

재차 경악한 나였지만 내색은 없다.

나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대꾸했다.

"그대의 검술 또한 훌륭했네. 하르콘 경."

다행이라면 그런 나를 보고 비웃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하겠지.

말했잖아?

메소드 연기에 가끔씩 나도 착각할 정도라니까.

"...말도 안 돼."

"나 하르콘이 저렇게 공손한 거 처음 봐."

"말투도 뭔가 거만한 게. 설마, 하르콘보다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정정해 주고 싶었다.

작위는 개뿔 쥐뿔도 없다고.

그리고 거만한 말투라니.

이것은 내게 있어서 최고로 공손한 태도라는 것도.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

별안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9/10]

붕괴 진행도가 상승했다.

당연하게도 내게만 떠오른 메시지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뭔가 좀 뒤늦게 떠오른 것 같은데...."

"잠깐만, 애초에 숫자가 안 맞는데. 이거?"

"혹시 다른 곳에 섬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 거 아냐?!"

다른 플레이어들은 혼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획득한 섬의 보물은 붕괴 진행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니까.

그건 내게.

그랑펠에겐 탐욕이란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메시지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군가 획득한 섬의 보물.

그 섬의 보물이 또 한 번 탐욕에 물든 것이라고.

*

초신성.

박현준은 계속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정말? 마지막이야. 더는 기회가 없는데?

-계속 그렇게 지켜만 보려고?

-보물을 원한다면서? 너 겁쟁이구나.

들려오는 목소리.

허나 박현준은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는 환청인가?

의심하고 경계하는 게 당연했지만.

박현준에게 그럴 정신은 없었다.

"시끄러.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박현준은 전황을 살폈다.

그러던 중 호열을 목격했다.

내빼기는 했어도 초신성끼리 최소한의 의리는 남아있었던 건가?

킨베르의 말대로였다.

만약, 뭣도 모르고 호열을 건드렸었다간....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그대로 인생을 하직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 지금 상황을 보면 실감할 수 있었다.

용암을 가르는 것도 모자라 수십 개의 석창을 날려댄다.

그리고 그런 호열의 곁에는 최강의 NPC 집단 중 하나인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있었다.

킨베르 새끼가 내빼지 않았다고 해도 호열에게 덤비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겠지.

이대로면 호열이 섬의 보물을 획득하는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씨이발. 존나게 안 풀리네."

하지만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난 끝이야."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섬의 보물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런 박현준의 귓가에 또 한 번 환청이 들렸다.

-그럼 뺏으면 되잖아?

-갈망하는 게 뭐가 나빠.

-눈치 볼 게 뭐 있어?

그냥 빼앗으면 된다.

'눈치 볼 건 없다.'

그 소리에 박현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래!"

호열이 안 된다면 다른 녀석을 죽이고 빼앗으면 된다.

그리고 박현준은 알고 있었다.

섬의 보물을 획득한 놈 중 가장 쉬운 먹잇감을.

"탐험가 연맹 새끼들이 있잖아...!"

탐험가 연맹.

유스라 제도를 찾은 NPC 집단 중 하나였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탐험가들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전투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그건 이번 섬의 보물을 획득했을 때도 나타난 특징이었다.

'분명 싸우지 않고 섬의 보물을 획득했다고 했어.'

그건 탐험가 클래스만의 방식이었다.

박현준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래, 중요한 건 방식 따위가 아니었다.

'그 새끼들이 섬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박현준이 이어폰을 착용했다.

"나는 탐험가 연맹을 사냥한다."

-...누구냐? 너 미쳤어? NPC를 건드린다고?

-하하. 킨베르도 너도 제대로 미쳤구나!

-진심이야?

플레이어를 사냥하는 것과 NPC를 사냥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이건 탐험가 연맹,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었다.

탐험가 연맹이 아르카나에서 끼치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성적으로 저질러선 안 되는 짓이었다.

그러나 박현준은 저질렀다.

"책임은 내가 진다. 지켜보기나 해."

[칠죄종 탐욕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참을 수 없는 욕구에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상태이상 : 탐욕이 발생합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이었다.

박현준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봤다.

"씨발."

탐험가 연맹 소속 NPC를 죽였다.

플레이어를 죽일 때와 똑같았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놈을 죽인 것이다.

이제 와서 사람을 죽였다고.

동요할 정도로 박현준은 무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동안 죽여온 플레이어가,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씨발!"

섬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떠오른 메시지가 그 사실을 깨닫게 했다.

[유스라 제도가 탐욕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붕괴 진행도 : 9/10]

그럼에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씨발. 씨발."

박현준은 미친 사람처럼 옷을 풀어 헤쳤다.

"으으으!!"

답답한 가슴을 마구잡이로 긁어댔다.

그때 비명에 인파가 몰려들었다.

"모험가님? 혹시 방금 무슨 소리...?"

"으, 아아아아! 줄리? 정신 차려! 줄리!!"

"설마, 당신이 줄리를...!!"

추궁해오는 탐험가 연맹의 탐험가들.

박현준은 의아했다.

'...나, 왜 이러고 있지?'

죽였으면 도망쳐야지.

왜 여기서 가슴을 긁어대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못 참겠다고. 씨바알!"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손톱으로 긁어서는 답답함을 해갈할 수 없었다.

상태이상, 탐욕의 효과.

판단력이 흐려진 박현준은 망설이지 않았다.

푹─

단검으로 자신의 답답한 가슴팍을 그어버렸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해.

-하지만 네 죽음은 숭고한 희생이 아닌 탐욕에 눈이 먼 네가 자초한 거니까. 안타깝게도 내가 네게 내어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네게는 먼지 한 톨도 내어줄 수 없다는 말이야.

"...!!"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기만하는 악마의 목소리가.

[붕괴 진행도 : 10/10]

.

.

.

[붕괴 진행도 : 10/10]

붕괴 진행도는 손쓸 새도 없이 상승했다.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스라 제도의 거악이 태동합니다.]

[붕괴가 시작됩니다.]

쿠구구궁─!

흔들리는 시야.

거대 거북이나 화산 분출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말 그대로 유스라 제도, 각 섬이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결국, 뭔진 몰라도 붕괴된 건가?"

"그래, 이대로 끝나면 던져왔던 떡밥치고 너무 섭섭하지!"

"거악이라는 걸 보면 틀림없이 악마족일 거야. 빠르게 장비 스위치 하자고."

과연, 상위권 플레이어들이 모인 만큼.

최악의 경우까지 예상해 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플레이어들의 수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하르콘이 내 판단에 힘을 보태줬다.

그의 눈빛이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이 기운은 악마로군."

무려 600레벨.

400레벨이 훌쩍 넘는 네임드 몬스터를 일격에 끝장내던 하르콘에게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거악이 왜 거악이라 불리는지.

실감할 수 있는 등장이었다.

유스라 제도.

열 개의 섬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균열이 맞물려 무너지고.

유스라의 제도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거대한 황금의 궁전.

마치 탐욕이란 단어를 형상화한 듯한 광경.

그래도 악마 사냥꾼이라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탐욕으로 쌓아 올린 궁전.

저 안에 거악, 칠죄종 탐욕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걸.

그 순간,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성공)

─칠죄종 탐욕의 부활을 저지하라. (진행 중) ▲

●섬의 보물이 탐욕에 물들지 않게 하라. (보류)

●칠죄종 탐욕의 화신을 처치하라. (진행 중)

직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지 않았다.

되도록 조용조용하게 끝내고 싶었단 말이다...!

애초에 내 상태는 말이 아니란 말이 아니었으니까.

"거악을 자처하는 비열한 악마여."

무엇보다 가장 큰 건 마력 탈진.

당장 마력이 바닥난 마당에 거악이든, 거악의 화신이든.

녀석을 처치하는 건 무리....

'?'

뭐지, 마력 탈진의 무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력감은커녕 오히려 전신에 활력이 넘쳤다.

'!'

비로소 나는 떠올리고 말았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악마 사냥꾼과 악마.

그 천적관계를 초월한.

그랑펠과 악마 사이의 관계를.

『어쩌면 악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악마 사냥꾼이란 그랑펠의 클래스가 아니라 그랑펠이란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가볍게 정리하는 옷매무새.

가다듬는 브로치의 방향.

나는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지옥에 처박힐 시간이다."

◈ 34화. 진정한 천적 (2)

마력 탈진으로 무기력하던 몸이 멀쩡해진 이유.

'아무래도 상승효과 때문이 아닐까.'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천적관계가 단순하게 전투력을 향상시켰다면.

그랑펠과 악마의 관계가 마력 재생력을 비롯한 부가적인 능력치를 상승시켜 준 거지.

'꺾이지 않는 긍지.'

언제나처럼 올곧을 수 있게 말이야.

기뻐해야 하건만,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그야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랑펠의 설정이란 건 절대 만능이 아니란 점을.

'...벌써부터 무섭다.'

그 설정을 실현하는 데엔 노력이 동반됐으니까.

반복 퀘스트의 체력 단련으로도 모자라 빼곡하게 채워야만 했던 A4 용지까지.

희대의 천재라는 설정 때문에 꼬박 까먹던 날밤이 며칠이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고생조차 감수할 만했다.

'다른 악마도 아니고 거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악의 화신이었지만, 어쨌든.

천하의 하르콘마저 긴장하게 하는 적이란 말이다.

그런 녀석과 마력 탈진 상태로 맞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우선 감사하게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르콘이 다가왔다.

"호열 경, 설마 그대가 유스라 제도를 찾은 이유가...?"

갱신된 퀘스트 때문이었다.

풀어 말하자면 거악 때문이 맞겠지.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네. 하르콘 경."

"...!"

그 동공이 확장되기도 잠깐.

하르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 불찰입니다, 폐하.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르콘에게 폐하라면 황제를 말하는 것이겠지.

혼잣말에 대꾸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뭐가 불찰이라는 걸까.

머리를 굴려볼 상황도 아니었다.

"...다들 전투 준비! 온다!!"

탐욕을 형상화한 듯 화려한 궁전.

그 주변에서 병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으니까.

소환된 것도 아니고 솟아난다는 표현이 맞았다.

후드드득─!

정말 땅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거든.

누군가 소리쳤다.

"언데드다!"

과연, 그 말이 정확했다.

흙을 파헤치고 나타난 건 스켈레톤이었다.

'언데드는 악마족이 아니지만....'

나는 스킬창을 확인했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천적관계는 역시나 발동 중이었다.

거악이 웅크리고 있을 때도 발동 중이던 천적관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지금에선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다.

나는 전황을 둘러봤다.

다급한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진입하려면 일단 쓰러트려야겠는데요?"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싸워야 해!"

"그러는 게 좋겠어요. 안쪽에선 경쟁이 더 심해질 테니까요!"

악마 사냥꾼인 나와 다르게.

플레이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황금 궁전과 거악을 공략할 생각으로 들떠있어 보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황금 궁전.

그 외관부터 뭔가 대단한 전리품이 쏟아질 것처럼 생겼으니.

탐욕, 그 자체.

황금 궁전은 그 존재만으로.

플레이어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청렴결백의 상징.

그랑펠에게 탐욕이란 존재하지 않는 감정.

판단력 또한 그대로라는 말이다.

덕분에 나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마력을 아껴야 한다.'

거악의 화신.

그 강함은 아스큐라 백작과 비교할 수 없겠지.

내게 스켈레톤 따위에게 낭비할 마력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내겐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있었으니까.

유스라 제도 한정이라곤 해도 말이다.

"하르콘 경. 자네의 다짐은 아직도 유효한가?"

"물론."

그렇게 대답한 하르콘이 투구를 착용했다.

철컥─

그러고는 기사들과 함께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대의 검과 방패가 되리라 폐하께 다짐했으니. 호열 경, 그대에겐 우리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통솔할 권한이 있네."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더욱이 그대가 악마를 처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적어도 내가 적 앞에서 조금도 물러날 일은 없을 걸세."

오와 열을 맞춰.

내 앞에 정렬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다든가.

우쭐대는 기분 따윈 들지 않았다.

그들의 충성심조차도 당연하게 여기는 내가 있을 뿐.

'...피곤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짊어진 게 있기에.

책임은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것이다.

뭣 하러 이런 피곤한 설정까지 가져다가 붙인 걸까, 과거의 나는...! 적어도 이건 확실했다. 그냥 멋있어 보이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 거야.

물론, 그 진실과는 무관하게.

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들을 향해 말했다.

"언데드와 맞서기 위해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겐 축복과 가호가 필요하다. 협력해 준다면 나는 그 호의에 깊이 감사하지."

...부탁하는 것도 뻔뻔하다!

한마디로 버프가 필요하단 소리였다.

신의 축복과 가호.

스켈레톤을 비롯한 언데드들에겐 그것만 한 약점도 없었으니까.

당연하게도 내게 그런 스킬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명령이라면 몰라도, 부탁이라니.'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책임질 게 생겨서 철이라도 들었단 거야. 뭐야.

그것도 모자라 호의에 감사하겠단다.

물론, 플레이어들이 듣기엔 여전히 건방지겠지.

구체적인 보상도 없이 그냥 감사로 퉁 치겠다니.

게다가 내게 향하던 곱지 않은 시선까지 고려하면.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을....

"우리가 도와주겠다... 요."

"저희가 협력하겠습니다!"

...것이라 생각했거늘.

어째서인가, 동시에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두 남녀를 바라봤다.

...잠깐, 우리 구면 아닌가?

*

결국, 끝까지 차오른 붕괴 진행도.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황금 궁전.

남태민이 중얼거렸다.

"결국 형 말대로 됐네."

-조심해. 태민아. 쉽지 않을 거야.

유스라 제도.

전설 속 보물섬이라고 하기엔 너무 잔잔했다.

물론, 열 마리의 네임드 몬스터가 보물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던져진 떡밥이 워낙 거대했었으니까.

남철민이 말을 이었다.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가자.

멍하니 황금 궁전을 바라보던 남태민.

...나, 왜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거지?

황금 궁전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 어, 그래. 형. 정신 차려야지."

남태민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온의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상대는 악마족이야. 정신력 강화 아이템, 버프. 준비할 수 있는 건 미리 준비해 둬. 언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르니까.... 뭐, 말할 필요도 없었네."

땅에서 솟아나는 스켈레톤들.

악마족에 이젠 언데드까지?

"아주 그냥 지랄 나셨군."

남태민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던 순간이었다.

"협력해 준다면 나는 그 호의에 깊이 감사하지."

...이 목소리는?

호열의 목소리였다.

남태민은 물론이요.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남철민까지.

-태민아. 기회다. 이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호열의 호의라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를지라도 형제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호열의 능력을 확인한 게 몇 번이던가?

그러니까 놓칠 수 없었다.

"저희가 협력하겠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씹, 뭔데?"

자신을 굉장히 아니꼽게 올려보고 있는 레오니와.

"우리가 도와주겠다... 요."

레오니, 그녀가 억지 존댓말까지 써가며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그 미친 것들이 옆구리를 찔러댔거든.

꺄악꺄악.

까마귀처럼 소리까지 질러대면서.

"언니, 호의라잖아!"

"빨리빨리!"

"아니, 씹."

물론, 레오니 본인의 의지도 조금은 있었다.

가온의 남씨 형제와 마찬가지로.

'저 괴물.'

레오니 또한 호열의 능력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목격만 했는가?

호열 덕분에 버서커 길드는 신규 균열 최초 클리어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뭐, 은혜를 갚는 셈이지.'

은혜는 갚을 수 있을 때 갚아둬야 했다.

무엇보다 레오니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유감이지만.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호열의 좁은 속을 말이다.

레오니는 속으로 킥킥 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자기가 먼저 호의를 잊지 않겠다 했으니까.'

잘 끝나면, 차 한잔 정돈 얻어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별안간 가온이라는 거대한 불청객이 나타난 것이었다.

찌릿─

가온과 버서커.

야만전사와 광전사.

호열을 사이에 둔 채.

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신경전은.

"그대들을 기억하고 있다."

"...!!"

고작 한마디에 끝나버렸다.

*

세상이 이렇게 따뜻하다.

구면이라고 해도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않았는데.

이렇게도 흔쾌히 나서주다니.

나는 아직 세상에 정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후회되네.'

남태민과 레오니.

둘 다 아스큐라 백작 균열 때 인연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착한 사람들한테 말이야.

'격식이 떨어진다느니. 내어줄 차는 없다느니.'

...아주 그냥 할 말, 못 할 말 다 했군.

물론, 그랑펠에게 후회란 없는 단어였으니.

나는 태연하게 말하는 게 전부였다.

"호의는 잊지 않겠네."

"에이."

그런 나의 말에 남태민이 손사래를 쳤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가온.

그리고 그런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

과거 플레이어에게 관심이 없던 나라고 해도 남태민을 모를 순 없었다.

대한민국에서만큼 남태민은 플레이어를 넘어선 영웅이었으니까.

"이 정도로 호의는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열 님.... 아니지, 호열 씨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호열 씨에겐 받은 도움도 있는데요!"

도움이라는 건 역시, 광장 전투를 말하는 거겠지.

그걸 도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운이 좋았지.'

마법이라고 해도 그저 벽을 세우는 게 전부였던 시절.

상성에서 유리한 기병을 만나 대승을 거둔 것뿐.

그러나 후회와 마찬가지로.

그랑펠에겐 겸손 또한 없는 감정이었다.

"그런가.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겠지."

라이언 하트 기사단도 모자라 가온까지?

...모르겠다. 이젠 나도 이런 내가 두렵다.

나는 레오니를 바라봤다.

"그대들의 행보 또한 지켜보고 있네."

버서커 길드.

가온만큼은 아니어도 상위 길드 중 하나였지.

그녀가 쌍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정작 착용할 수 있는 검이 없어 제대로 따라 해보진 못했지만.

"히익."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인가.

레오니는 내 말에 흠칫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직설적인 성격이 이런 의문을 지나칠 리 없다.

"무엇에 그리 놀라는 건가?"

"아, 아니요. 놀라긴 뭔. 내가...요?!"

하지만 말하기 곤란한 걸 억지로 추궁할 정도로.

그랑펠이 또 속 좁은 귀족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게다가 지금은 사이좋게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황금 궁전으로 돌입만 남겨둔 상황.

하르콘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고맙네,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의 축복이 악과 맞서 싸우는 데에 큰 힘이 되겠군."

버프로 무장한 라이언 하트 기사단.

내게도 힐러로 보이는 플레이어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 필요하신 버프가 있으실까요? 여신의 기도라든가, 축복이라든가. 가온 길드에선 제 스킬 숙련도가 가장 높거든요!"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나는 신 따위 믿지 않는다."

...진짜 미치겠다. 내가 정말!

오글거리는 대사.

그런 대사를 내뱉고도 변하는 기색도 없는 낯빛.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눈앞에 거악보다 입을 여는 게 무섭다...!

'기도는 정신력에 축복은 육체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거니까.'

둘 다 나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버프였다.

그러니까 그저 버프는 필요 없다는 소리였단 말이다.

빌어먹을.

내적 수치심이 끓어오른다.

그러니까 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탐욕의 궁전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또각─

누군가 말꼬리를 잡기 전에...!

*

AAU 한국 지부.

성현준은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

뒤늦게 추가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뭐야? 추가 패치 떴어?"

"네, 선배. 확실해요. 이건 레이먼도 예측하지 못한 거예요!"

유스라 제도.

아니, 정확히는 유스라 왕국.

그건 성현준이 아르카나의 개발자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준비하던 대형 콘텐츠였다.

성현준뿐만 아니라 아르카나 개발팀이라면 유스라 왕국을 모를 수 없었다.

"아니, 혼자 할 거면 제대라도 하든가!"

그 원망의 대상은 레이먼 션.

대체 뭘 잘못 건드렸길래.

"...현준아. 나만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착각하실 리가요. 유스라 왕국은 멸망했다는 설정이었어요. 레이먼 션, 그 자식이 행방불명되고 코스모가 망할 때까지도요!"

"근데, 왜, 저게 이제 와서...?"

현시점에선 존재하지 않는 황금 궁전이 다시 나타난 걸까? 그것도 거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와 함께 말이다.

"칠죄종 탐욕은 또 뭐야? 지만 아는 거 추가하고."

그래도 다행인 건.

뒤늦게라도 추가 업데이트 내역이 올라왔다는 것.

그 내역에서 조금이라도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추려내야 했다.

그게 AAU의 역할이었으니까.

그러나.

"...서, 선배?"

성현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미친."

선배 윤수겸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하얘지는 머릿속.

성현준이 애써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있잖아요! 거기에다가 이호열도 있고. 대형 길드도 아직 건재하고...."

"라이언 하트 기사단? 게네들이 여기에 목숨을 걸 거 같아? 여태까진 어떻게 운 좋게 같이 다녔을지 몰라도 더 이상의 도움을 기대하긴 힘들어."

"...맞는 말이지만."

하지만 곧바로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윤수겸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불가능합니다! 누구도, 절대 진입하면 안 됩니다!"

그 모니터에 떠오른 건.

절망적인 업데이트 내역.

『신규 붕괴 균열, '황금 궁전'이 추가됩니다.

적정 레벨 : Lv.600~650

신규 보스 몬스터, '칠죄종, 탐욕의 화신' : Lv.650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잠들지 못하는 병사' : Lv.500』

윤수겸이 소리쳤다.

"진짜 이러다가는 다 죽어요!!"

.

.

.

그러나 그 예상은 틀렸다.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

그건 마치 한 줄기의 섬광과도 같았다.

그 섬광이 적정 레벨 600에서 650레벨.

붕괴 균열, 황금 궁전을 가로질렀다.

예상은 또 한 번 틀렸다.

그 최전방에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이 있었으니.

"사자 심장의 기사들이여."

하르콘의 검이 검강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빛 또한 검강에 뒤지지 않게 결연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예상은 전부 틀렸다.

"심장을 바쳐라. 호열 경이 거악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었으니.

"찾았군."

멀리서 왕좌가, 칠죄종 탐욕의 화신이 보였다.

◈ 35화. 청렴결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