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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격이 떨어지는군 (3)

-악마를 의식에 초대한다. 거기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은 그렇게 말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의식이다. 정해진 법칙에 따라 악마를 멸하기 위해 진행하는 행동. 설명이 필요한 것은 두 번째다. 그렇다면 그 의식에 초대된 악마는 정확히 '어디'에 초대됐다는 걸까?

툭툭─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건드렸었다.

-그래. 바로 악마 사냥꾼의 '의식'에 초대되는 것이다.

.

.

.

나는 아스큐라 백작을 의도적으로 도발했다.

"어째서 추악한 흡혈귀가 아직까지 귀족을 자칭하는 거지?"

나의 물음에 살기를 내뿜는 아스큐라 백작.

그 모습에 마지막 말까지 덧붙여야 했나,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게다가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아스큐라 백작의 레벨은 430.

그것도 모자라 나눠줬던 권능을 모두 회수한 상태였다.

실질적인 강함은 레벨, 그 이상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 괴물을 100레벨에 불과한 내가 상대하는 것?

[천적관계]와 『마법』이 있다고 한들.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마의식]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의식에 악마를 초대한다.'

쉽게 말해 내 머릿속에 악마를 들여온다는 것이었다.

과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나는 몇 번이고 구마의식을 진행해 봤었다.

다시 떠올려봐도 그땐 정말 겁이 없었구나 싶었다.

구마의식 도중, 필수적으로 겪게 되는 공포 게임 뺨치는 연출. 그걸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봤었으니까.

그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처럼 나설 수 있었다.

'의식의 주도권은 정신력에 달렸다.'

정신력 싸움이라.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러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행동이란 말이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그랑펠의, 나의 의식에 초대된 아스큐라 백작.

나는 녀석을 응시했다.

이 순간, 저 붉은 눈동자에 나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

.

.

"!"

아스큐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분명, 계단 위에 서 있는 건 나였는데...?

'뭐냐. 어째서?'

나와 녀석의 위치가 뒤바뀐 거지?

녀석이 계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대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길래.

고개를 아무리 뒤로 젖혀도,

그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아스큐라는 소리쳤다.

"비열한 수를 썼구나. 인간!!"

그러자 더없이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열하다라. 무엇이 비열하다는 건가, 아스큐라?"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거만한 태도.

아스큐라는 위화감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자신은 살기를 발산했단 말이다.

하찮은 인간이라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을 텐데.

어째서인가, 녀석은 멀쩡했다.

아스큐라가 입을 열었다.

"...그래. 속임수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와 나의 위치가 뒤바뀐 것도. 아무리 고개를 치켜들어도 널 바라볼 수 없는 것도. 모든 게 하찮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또각─

귓가에 울리는 구두굽 소리.

이어 거만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런가?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고 있나 보군."

"...?!"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뜻이냐?

아스큐라는 속으로 소리쳤다.

'아니다. 틀림없다. 단순한 속임수다!'

내 눈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그저 자리가 바뀐 것뿐이다.

내가 한눈을 판 틈을 타서....

"!"

...아니다, 나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방심도 하지 않았다.

분명, 주제도 모를 소리를 내뱉는 놈을 찢어버릴 생각으로 움직였단 말이다.

그런데 대체 어느 틈에 위치를 바꿀 정도의 속임수를 부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도 나의 성에서.

"그렇다면 봐라. 아스큐라."

"...?"

"네게는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그 질문과 동시에.

무언가가 시야를 가렸다.

그것은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라!!"

쿠구궁─!

정확히는 석관(石棺).

거대한 바위의 관이 자신을 덮쳤다.

아스큐라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위험하다.'

그 모양이 관이라고 해봤자 별다른 효과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크기였다.

평범한 돌덩이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저런 크기라면 위험했다.

"사라져라!!"

스오오오─!

석관을 향해 쏘아낸 마력.

그러나 어째서인가.

석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스큐라는 당황했다.

'이게 대체...?'

절반 이상의 마력을 사용했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흠집조차 낼 수 없단 말이냐.

당황도 잠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심각한 상태 같군. 아스큐라."

...용서할 수 없다!

순간, 아스큐라의 형태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정확히는 수백 마리의 박쥐로 흩어진 것이었다.

"젠장!"

박쥐에서 흡혈귀로.

모습이 돌아온 아스큐라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석관을 피할 수 없었기에.

최후까지 아껴뒀어야 할 일회성 도주기를 사용해 버렸다.

"거친 숨소리에서 또한 품격이라곤 느껴지지 않는군."

"...닥쳐라!"

"그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또각─

다시금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녀석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스큐라는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어리석구나. 인간.'

제 발로 굴러들어 온 기회였다.

어떤 속임수를 썼길래.

그 모습조차 쳐다볼 수 없어서 답답했건만.

'그 계단에서 내려온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아스큐라는 숨을 골랐다.

포착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송곳니를 가다듬었다.

또각─

연신 귓가에 들리던 구두 소리가 멈췄을 때.

아스큐라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경악했다.

"...어, 어떻게?"

분명 계단에서 내려왔단 말이다.

같은 땅을 딛고 서 있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는 거지?

"새로운 시야는 어떤가, 아스큐라. 아니, 추악한 흡혈귀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은 나의 성이다.

내게 속임수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사내가 말했다.

"설마, 이곳이 아직도 자신의 성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게 무슨...?!"

"제대로 봐라, 흡혈귀."

"...?"

사내의 말에 아스큐라는 주위를 살폈다.

"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째서 초상화에...?"

네 녀석의 얼굴이 있는 것인가?

곳곳에 걸어둔 자신의 초상화들이 전부 사내의 초상화로 바뀌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아스큐라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귓가에 여전히 여유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든 것이 너의 공포다."

*

쌔애액─!

몰아치는 바람.

제시 하인네스가 고깔모자를 부여잡고는 말했다.

"제,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요...!"

꽉─

붙들었던 지팡이가 무색할 정도로.

제시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97레벨.

플레이어 랭킹 4위.

그 전투력으로는 랭킹 2위, 록스를 능가하며.

랭킹 1위, 스칼과도 비교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라서?

아니.

결코, 아니었다.

상대는 43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

그것도 악마족이었다.

그 제시조차 등장만으로 긴장하게 만든 강적이란 말이다.

그래, 제시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전부 '되게 신기한 마법 씨' 덕분이었다!

"뭘까요! 저 과잉대처는!"

되게 신기한 마법 씨.

그래, 호열은 그저 돌기둥을 세웠을 뿐이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그런데 아스큐라 백작의 대응이 너무 과했다.

'저 크기라면 저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과도하게 마력을 집중.

돌기둥을 쳐내려고 했던 것도 이상한 행동이었는데....

심지어는 그조차도 빗나가 버렸다.

쿠콰쾅─!

그 탓에 성이 무너져내려 하늘이 드러났다.

그것도 모자라서는 허물어지는 돌기둥을 피하려고, 갑자기 박쥐로 변해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요!"

그 시선 또한 불안정했다.

아스큐라 백작은 아까부터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쁜 숨을 쉬고, 허공을 향해 고함까지 질러댔다.

나중에 가서는 자기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기겁을 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어째서일까.

제시는 저런 백작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드디어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건 아무리 봐도 상태이상, 공포잖아요!"

.

.

.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아슬아슬했다.

나는 레벨의 격차를 여실히 느꼈다.

무엇보다 실감한 것은 아스큐라 백작의 마력.

'스쳐도 사망이다. 이건.'

악마 사냥꾼, 그 클래스 하나만 믿고 덤벼들었다면.

지금쯤 나는 황천을 건넜겠지.

그렇다고 근접전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아스큐라 백작은 허공에 손을 휘저었을 뿐인데.

그 여파로 주변 사물들이 박살 나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롱코트에 정장 차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방어구를 걸쳐도 한 방이었을 거다, 저런 거에 스쳤다면.

그러나 그건 나의 사정이었다.

아스큐라 백작으로선 알 길이 없는 나의 속사정.

그 증거가 연달아서 메시지로 떠올랐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성공)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남은 것은 공포에 빠진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하는 것뿐.

"...네, 네가 나의 공포라고? 그, 그럴 리가 없다."

전의를 상실한 흡혈귀.

쉬운 사냥감처럼 보이겠지만 내겐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일격으로 아스큐라 백작을 끝낼 자신이 없었다.

내겐 그만한 위력을 가진 마법이나 육체 능력이 없었으니까.

'역부족일 거야.'

물론, 플레이어들과 접촉하며 그들의 스킬을 보고 흉내 내기는 해봤다.

하지만 스탯과 장비가 문제였다.

제아무리 악마족에 강한 은제 무기라고 해도.

그 절대적인 공격력이 형편없었으니까.

'나의 나약함이 원망스럽다.'

경험치를 독식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나는 은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형태에 간섭, 모양을 바꿨다.

4개로 나뉜 은제 단검.

그 형태는 말뚝과 비슷하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슈슈슉─!!

전의를 상실한 아스큐라 백작.

그에게 은 말뚝을 날려 보냈다.

푸푸푹─!!

가뜩이나 짧은 은제 단검을 사분할했다.

말뚝의 크기는 그보다 작아질 수밖에 없다.

"아, 안 돼애애애액!!"

그러나 공포에 빠진 아스큐라 백작은 다르게 느낀 모양이었다.

정말, 거대한 말뚝에라도 박힌 듯.

아스큐라 백작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허나 공포만으로 적을 쓰러트릴 순 없다.'

저 상태이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말했다.

"뒤처리를 맡기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내 부탁에 고깔모자가 들썩거렸다.

"네? 뒤를 맡기신다니요! 다 끝내놓으시고는! 저한테요!"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가.

솔직하게.

능력이 부족하다고.

대답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랑펠의 고귀하신 성격상.

아스큐라 백작에게 죽으면 죽었지.

자신의 능력 부족을 고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앗! 죄송해요! 예의를 챙겨야 하는데! 방금 말대꾸는 잊어주세요!"

그렇게 말한 고깔모자가 곧바로 스킬을 영창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고오오오오─!

지팡이의 끝에서 응축되는 마력.

흩날리는 금발의 머리카락.

동공에 서리는 푸르스름한 빛.

뒤바뀌는 주위의 공기.

순식간에 요동치는 하늘의 풍경.

"천벌."

그 순간.

파지지지직─!!

하늘에서 강렬한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 위력에 일대가 진동했다.

쿠콰콰콰쾅─!!

뒤늦게 울리는 천둥.

굉음에 고막이 얼얼할 정도였다.

'이게 상위 플레이어들의 능력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넘볼 수도 없는 수준의 파괴력이다.

아스큐라 백작도 모자라, 플레이어한테서까지.

어째 오늘은 격차를 실감하는 일이 잦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강력한 스킬로 아스큐라 백작의 숨통을 끊어놓았다고 한들. 아스큐라 백작을 저 지경으로 만든 나의 기여도가 더 클 게 확실했으니까.

그를 뒷받침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스큐라 백작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그 모든 게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에.

조금도 놀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나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가 흠칫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여기선 놀라는 게 맞겠는데?

◈ 20화. 애증의 존재 (1)

높은 처치 기여도.

그 덕분에 자동으로 획득한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먼저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목걸이였다.

악마의 아이템.

구마의식의 제물로 선택되었던 그 목걸이.

당연히 증발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등급 : 레어]

[제한 : Lv.300]

[효과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스킬 '중급 보호' 발동.]

[설명 : 전장에 나서는 연인을 위한 목걸이다. 상대방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에 마력이 깃들어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됐다.]

있었다.

그것도 저주가 해제된 상태로.

'구마의식이 정화 작업을 대신한 건가?'

처음으로 획득한 레어 아이템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 탓.

내색은 할 수 없었지만, 얼마나 속이 쓰렸는데!

그런데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이거.

게다가 피격 시, '중급 보호'가 발동하는 효과.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당첨 정도는 되지 않을까.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그것도 충분한 성과였는데, 유니크 아이템까지.

인정하자.

이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동요 따윈 없다는 듯.

흔들림 없는 시선을 옮겼다.

오브.

그것은 새빨간 구체였다.

마치 붉은 피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것도 악마의 아이템이군.

그 효과가 봉인되어 있기에 어떤 아이템인지 아직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일단, 등급이 [유니크]라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400레벨 제한을 가진 유니크 아이템.

...이거, 되게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 스쳐 지나가듯 봤던 기사들이 떠오른다.

아이템 하나에 수억, 수십억이 오간다고 했었지, 아마?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남에게 넘긴다?

고작 돈을 벌기 위해서?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가 그걸 용납할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400레벨.

어째서인가.

당장으로선 아득하게만 느껴져야 할 그 숫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단순한 자신감, 어린 시절의 치기 때문인가?

아니, 이것 또한 근거에 기반을 둔 확신이었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34]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51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34]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함으로써 획득한 경험치.

고깔모자와 경험치를 나눴음에도 무려 34레벨이 상승했다.

아르카나의 경험치 시스템에서 단숨에 34레벨 업이라니.

...이 정도면 신기록이다.

그 레벨 상승에 더해.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성공)

●흡혈귀를 사냥하라. (성공)

클래스 퀘스트까지.

그 근거들이 있기에.

나는 지금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획득한 아이템 앞에서도.

"와! 이게 뭘까요?"

지금의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저 고깔모자 앞에서도 말이야.

그나저나....

나는 시선을 옮겨 고깔모자를 바라봤다.

그래서 뭔데, 저건.

툭툭─

그녀가 지팡이로 재가 된 아스큐라 백작을 건드렸다.

재라고 해도 겨우 한 줌이나 될까 싶었다.

그런데 그 잔해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냄새 같은 건 안 나는데요!"

나도 모르게 구겨지는 미간.

품위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의 영향도 있었지만.

내 심정이라고 다를 건 없다.

아니, 코까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을 필요까진 없잖아....

그러나 확실히 이상했다.

그저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 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반격의 서막'에서 '태동'으로.

클래스 퀘스트에 진행이 있었다.

나는 떠오른 퀘스트창을 읽다가 납득했다.

저 연기가 괜히 피어오르는 게 아니었군.

육체 단련 이외에 당장 주어진 목표는 없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적절한 때가 오면 알아서 퀘스트가 시작되겠지.

뭐, 그전까지는 개인 정비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격차를 느낀 만큼 발버둥 칠 시간도 필요한 참이었으니까.

"제시!!"

그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제시, 고깔모자의 이름인가.

확실히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어쨌든, 제시가 불러들인 번개 때문인가.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아스큐라 백작은? 어딨어? 안 보이는데?"

"잠깐. 제시, 너 지팡이로 건드리고 있는 거. 그거 뭐야?"

"...뭐, 뭐야. 제시, 너 설마?!"

빤히─

제시는 대답하지 않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제시였다.

"예의.... 잘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어지는 건 때아닌 자기소개.

"제 이름은 제시 하인네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그 질문에 주위를 둘러봤다.

확실히 광장 전투 때와는 달랐다.

...꼴깍.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제시와 마찬가지로.

다들 엄청난 수준에 오른 플레이어들이겠지.

그런 대단한 이들이 내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분명, 부담스러워해야 하는 상황이거늘.

나는 오히려 그들의 태도에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 절제된 침묵에 격식을 느낀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세겠지.

그러나 착각은 없다.

이 변화 또한 나의 흑역사.

나였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대답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호열이다."

*

이호열.

제시 하인네스와 함께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한 정체불명의 플레이어.

그 이름 석 자가 세상에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의 활약이었으니까.

"아스큐라 백작의 레벨은 무려 430레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레벨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을 거란 예측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런데 단둘이서 그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하다니요!"

"정말, 한국을 넘어서 세계가 놀랄 일이 아닐 수 없겠네요. 어떻습니까?"

"실제로 그 해외 반응이 굉장히 뜨겁습니다."

VBC의 간판 프로그램, 투데이 아르카나.

전문가 패널들이 열변을 토하기도 잠깐.

"큐."

PD 현용석의 사인과 동시에 자료화면이 떠오른다.

현용석이 헤드셋을 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의 곁엔 카메라 감독 윤종진이 있었다.

윤종진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선배. 진짜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니까요?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가온 길드 뒤만 졸졸 쫓아가고 있는데. 어라, 갑자기 성이 무너졌네? 그것도 모자라서 우르르 쾅쾅! 거기에 벼락이 쳐!"

눈을 지그시 감고.

마찬가지로 계속하란 사인을 보내는 현용석.

그러자 변명 아닌 변명이 이어진다.

"와,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죽나, 형한테 특종 놓쳤다고 죽나 똑같겠다. 싶어서 어쨌든 뛰어갔어요. 뛰어갔는데.... 거기에 딱 제시 하인네스가 있는 거야. 근데 뭐야, 이거. 그때 그 은발 머리가 또 있네?"

"그래서."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줄 알았죠. 제가 선배한테 얼마나 깨졌어요? 버서커 때 그렇게 놓치고, 바로 광장 전투가 터졌는데.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이번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터뷰를 따겠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따온 게 고작 이 한마디냐?

[나는 이호열이다.]

현용석은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정말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단 말이다.

그러나 누굴 탓하겠는가.

"...그래, 제대로 물어볼 정신이 없었겠지."

애초에 누가 거기서 달랑 본명만 말할 줄 알았겠냐고!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

랭킹 페이지에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결과가 없었다.

'이호열'이란 닉네임의 플레이어는 말이다.

물론, 있기야 있었다.

하지만 그저 같은 닉네임을 썼을 뿐.

진짜 이호열이 아니었단 소리였다.

"...진짜 뭐 하는 자식이지?"

신규 균열에서 이호열이 관련된 사건만 해도 몇 개인가?

버서커 길드의 신규 균열 최초 클리어부터.

가온과 이나즈마와의 공동 전선.

제시 하인네스와의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까지.

그들 중 하나만 하더라도 자신의 주가를 엄청나게 띄울 수 있는 일이었다.

무명에서 랭커.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남긴 말이 고작....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나는 이호열이다.]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밝힌 이름마저도 아르카나 닉네임이 아닌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간 방송국에서 구르며 온갖 연예인, 플레이어를 다 봐왔건만.

"나도 처음 보는데. 네 탓을 하는 것도 그만해야겠다. 이제."

그래, 현용석만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

"형.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가 다행인데?"

천정부지로 치솟아 버린 호열의 주가.

그런 호열을 가온이 품는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실감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남철민.

남태민이 그런 형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보는 눈. 그거 하나만큼은 제대로 살아있단 거잖아?"

"뭐래? 나도 저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어."

"아니, 저건 상식 밖이니까 형 탓이 아니지."

그러나 아직 호열의 영입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남태민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해도 가장 유리한 건 우리야. 우리한테는 호열 씨 번호가 있잖아. 그리고 아주 격식 있게 접근할 수 있는 건덕지도 있지."

"...건덕지?"

"왜, 광장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

광장에서 쓰러트렸던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

가온은 그들에게서 전리품을 획득했었다.

이나즈마와 절반씩 나눠 가진 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양과 질이 상당했다.

"호열 씨 활약이 아니었으면 그 전리품을 얻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 활약만큼 전리품을 나누겠다는 거지. 그게 예의이자 격식 아니겠어?"

남철민은 고민했다.

행보로 볼 때.

호열은 단순히 돈에 좌우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엔 합당한 명분이 있었다.

이내, 남철민의 눈에 다시금 의욕이 타올랐다.

"...태민아. 이제부터 네가 형 해라."

샤이닝 길드.

카밀라는 붉은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제시. 너 진짜 아는 거 없어~?"

"없어."

"정말, 그렇게 시치미 뗄 거야?"

제시의 능력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카밀라였다.

선택받은 마법사.

그런 제시의 화력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녀였으니까.

그럼에도 이번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몰라. 나한테 묻지 마."

끈질긴 질문.

제시는 누구에게도 봤던 걸 말하지 않았다.

그게 호열에 대한 '예의'였으니까.

카밀라는 한숨을 쉬더니 양손을 들어 올렸다.

"포기. 더 안 물어볼게.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지 마~"

그나저나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걸까?

제시는 뚫어져라 태블릿 PC를 보고 있었다.

힐끗─

드넓은 궁수의 시야.

그 화면을 확인한 카밀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한국식 인사? 배꼽에 손? 그런 건 왜 보고 있어 또?"

세계가 '이호열'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선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니까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

볼록─

튀어나온 뺨.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

앙증맞은 손가락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방긋─

그러더니 화색이 도는 얼굴로 애타게 엄마를 찾는다.

"엄마. 호여리 삼촌이다!!"

.

.

.

위이잉─

나는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보고 생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발신인을 확인하니 누나 3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전화를 받는 순간.

1, 2, 3호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오리란 것을.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어렸을 땐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면서.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이제 서로가 없이는 못 사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나 지금이나 죽어나는 것은 나란 말이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상대로 1호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호열. 우리한테 할 말 없냐?

할 말이야 많다.

"진정해라. 나의 누이들이여."

...일단, 이 말투부터 시작해서 말이지.

◈ 21화. 애증의 존재 (2)

벌컥─

1호, 이은혜.

이준욱 사장, 최강희 여사.

슬하 사남매 중 유일한 기혼자.

"아랑이. 호열이 삼촌 안녕하세요~ 해야지."

"호여리 삼촌 안녕!!"

큰누나가 딸, 아랑이의 손을 꼭 잡곤 내 자취방 문을 열었다.

2호, 이지윤.

2호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내게 말했다.

"호열아, 너 염색 대박 잘 됐다. 완전 아이돌이여. 아이돌."

3호, 이예림.

그 웬수가 나를 보더니 썩은 미소를 날렸다.

"아이돌은 개뿔. 엄마 아시면 기절하시겠다. 얼마나 고생했길래. 벌써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다고. 아드님께서 아빠보다 머리가 일찍 새버리셨어."

현관문으로 들이닥치는 네 명의 여인.

예전 같았으면 당황했으리라.

숨겨왔던 걸 들킨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뻔뻔했다.

"간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누님들."

고개도 모자라 허리까지 숙이는 정중한 인사.

그 격식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내 인사에 되레 심각해진 건 누나들이었다.

2호가 쿡쿡─ 웬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얘 컨셉 아닌가 봐."

"그러게 말이야. 우리 싸가지 호열이는 어디 갔냐."

"내가 누이라고 불렀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나는 통화에서 사정 대부분을 설명했다.

얼마 전, 플레이어가 됐다.

그 영향으로 말투와 외모가 바뀌었다.

그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직장을 관두었다.

마지막으로 뉴스 속 이호열은 내가 맞다고.

그러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면서.

당연하게도 내게 거절할 권리는 없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말이지.'

지은 죄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1, 2, 3호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말빨에 시달리고 있노라면, 그들의 괄괄한 성격까지 내 잘못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스를 수 없는 천적관계라는 거지.

그러나 말했듯 나는 달라졌다.

천적 앞에서도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내 말에 서로들 눈빛을 교환한다.

"...너, 뭐냐?"

"우리 호열이 여친 생겼니?"

"다정해서 좋은데, 왜 그래? 호열아, 큰누나는 커피~ 아랑이도 뭐 따뜻한 거 마시고 싶어요? 삼촌~ 아랑이도 주세요~"

나는 능숙한 솜씨로 찻잔을 꺼내고 차를 준비했다.

곳곳을 둘러보던 2호와 웬수가 속닥거렸다.

"저거 여친 생겼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할 수 없다니까? 그리고 뭐야, 저 찻잔 봐봐. 아주 그냥 섬세한 게...."

"그렇다고 치더라도 집이 너무 깨끗한데? 머리카락 한 톨도 안 보이고."

"이거 이거 냉장고 봐봐. 너 딱 걸렸어. 이호열."

웬수가 냉장고에서 양상추를 꺼내 들었다.

2호는 닭가슴살을 집었다.

"냉장고에 이런 거밖에 없는 거 보니까 여친 다이어트 중이구나? 누나들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뭐 하는 사람인데? 몇 살이야? 예뻐?"

...아무래도 풀어야 할 오해가 많겠군.

그 후,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덕분에 대부분의 오해는 풀렸다.

확실한 증거가 있었거든.

"...양상추랑 닭가슴살을 네가 먹는 거라고?"

"몸 좋아진 거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야."

"말이 돼? 자취하면서 혼자 끼니 챙기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이예림. 세상을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 네가 호들갑 떨어서 괜히 나도 우리 막내 여친 생긴 줄 알았잖아."

"그럼 이 찻잔도 호열이가 고른 거야? 되게 안목 있네~"

격식에 따라 다과를 준비하기 잘했군.

역시 따뜻하고 달달한 게 들어간 덕분일까.

그 반응들이 한층 유해졌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는 웬수는 빼고 말이지.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화제가 있었다.

큰누나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 할 만해?"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에 담긴 속뜻은 간단치 않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

플레이어 활동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부터도 먼저 말할 수 없었다.

위험한 걸 위험하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웬수가 경고했다.

"너, 우리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천적이 괜히 천적이 아니란 건가.

하긴 어렸을 때부터 기가 막히게 거짓말인 걸 알아차렸지.

그러나 이 순간, 내겐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적성에 맞습니다."

혈육에게 걱정 따위를 시키지 않기 위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신감의 표현.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에서 나는 나의 잠재력과 한계를 깨달았다.

자신의 그릇을 알았기에.

적어도 악마족을 때려잡는 것만큼은 정말 적성에 맞았기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뭐,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

"이예림, 또 너야. 내가 말했지? 호열이가 너냐고. 너랑 다르게 어렸을 때부터 혼자 알아서 잘한다니까, 호열이는? 적성에 맞으니까 뉴스에서도 맨날 호열이 얘기겠지."

"그래? 막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누나가 마음이 좀 놓이네."

...예상보다 쉽게 넘어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 덕분인가.

어쨌든, 나는 큰누나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빠 엄마? 오늘도 새벽부터 만두 빚느라 바쁘셔서 아직은 모르시지. 근데, 온종일 뉴스에서 네 얘기라 곧 알게 되지 않으실까? 뭐, 머리색도 그렇고. 체격도 그렇고. 워낙 달라졌어도 엄마 아빠가 널 못 알아볼 리도 없으니까."

"나두나두! 호여리 삼촌 알아봤어!"

쓰담쓰담─

나는 아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께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군요."

"됐어. 우리가 말할게."

...네가?

웬수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랑 다르잖아. 어디 여행을 간다고 해도 집에 올 때까지 걱정하시는데. 네가 우리한테 말한 것처럼. 그렇게 담백하게 말해버리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그러니까 알아서 대신 말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래, 나로서도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별안간, 피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근데 아버지, 어머니, 누이, 누님. 그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나만 그런 거 아니지?"

"...?"

"보자, 한 10년쯤 됐나? 이호열, 이거 완전 중2병 걸려서. 갑자기 우리한테 존댓말 쓰고. 엄마, 아빠한테도 문안 인사 올린다고 하고."

"...!"

"그래도 그땐 귀여웠지. 일단, 얼굴이 귀여웠어. 그때는. 지금은 역변했는데.... 아니지. 지금 보니까 다시 그때 얼굴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생각하니까. 호열이, 너 은발로 염색하고 싶다고 막 떼쓰지 않았었나?"

줄줄이 읊어지는 나의 흑역사!

...아무리 생각해도 천적이었다.

악마 사냥꾼과 악마, 그 이상의 천적이 확실했다.

.

.

.

나는 내 품에서 잠든 아랑이를 조심스레 건넸다.

속닥속닥─

"가볼게. 연락하고."

"잔소리 좀 하고 싶은데. 할 게 없네, 쩝."

"간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툭─

웬수가 발을 끼워 넣었다.

"이 누님이 마지막으로 잔소리 하나."

"...?"

"힘들면 바로 때려치우기. 사실 그 말 하려고 왔어. 우리."

언니들은 끝까지 말 못 한 것 같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을 때 저축 잘하기. 뭣보다 보증 절대 금지. 알지?"

그 소리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보증은 절대 안 되지.

우리 집에 빨간딱지가 왜 붙었었는데....

'...잠깐, 그게 아니라.'

균열 클리어 보상금!

청렴이고 결백이고 챙길 건 챙겨야 한다!

*

균열 클리어 보상금.

플레이어들의 주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균열의 적정 레벨에 따라 그 보상금의 액수가 측정되며, 기여도에 따라 플레이어들에게 보상금이 차등으로 지급됐다.

그 보상금을 제공하는 데엔 국가들도 있었다.

범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한폭탄, 균열.

그런 균열을 처리한 플레이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국가 차원의 보상금은 말 그대로 짜디짰다.

"국가 예산에 한계가 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좀 늘려줘야 하지 않나?"

"이래서야 인건비도 안 나오겠네, 이거."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건 누구인가?

아르카나의 개발사, '코스모'였다.

아니, 이젠 코스모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겠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퇴사.

AAU로 이직했으니까.

그러니까 단 한 명.

코스모의 CEO, '레이먼 션'이라는 소리였다.

마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르카나의 홈페이지는 그 격변에 맞춰 변화했다.

랭킹 시스템의 개편은 물론.

신규 업데이트 공지.

균열 클리어 현황까지.

대격변.

말 그대로 게임처럼 뒤바뀐 세계가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아르카나의 홈페이지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사회 곳곳에선 레이먼 션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레이먼 션이 대격변의 원흉이 맞다고 쳐봅시다. 그가 여전히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홈페이지 덕분에 인류는 대격변 이전보다 오히려 진보하지 않았습니까?"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홈페이지 덕분에 유지된 사회 체계.

현실을 침범한 아르카나 문명.

상호 교류의 상승효과로 실제로 세계는 대격변 이전보다 진보해 왔으니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만.... 재평가 이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레이먼 션이 정말 대격변에 대비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하게 지금처럼 여론을 돌리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건지를 말이죠."

물론, 의견 차이는 한동안 쉽게 좁혀지지 않겠지.

그러나 적어도 플레이어들만큼은 레이먼 션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코스모, 레이먼 션이 지급하는 균열 클리어 보상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쿡쿡 쑤시던 통증이 다 사라진다."

"그래. 이게 금융치료지."

"이거 때문에 플레이어 생활을 못 접는다. 내가."

그 막대한 보상금은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다면 악랄했던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월 이용료를 떠올리면 됐다.

한 달에 수십만 원.

그것도 모자라 천만 원에 이르는 전용 접속기의 가격까지.

코스모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향후 수십 년간.

플레이어들에게 막대한 균열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그 원금이 보존될 정도의 액수였다.

그러니까 신규 균열 클리어 보상금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 적정 레벨만 놓고 봐도 역대급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으니까.

길드, 버서커.

덥수룩한 주홍색 단발머리가 움찔거렸다.

화면에 떠오른 숫자를 세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뭐냐, 이거?"

"무슨 일인데. 숫자가 너무 커서 읽기 힘들어, 언니?"

"콱씨. 닥쳐봐. 다시 세는 중이니까."

일십백천만....

공을 세던 레오니가 경악을 삼켰다.

...뭐, 뭐가 이렇게 많아? 실화냐?!

길드, 가온.

남태민과 남철민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적정 레벨을 생각해도 장난 아니잖아."

"...납득할 수 있는 액수야.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까다로웠잖아, 이번 균열. 우리랑 이나즈마만 하더라도 겨우 백작의 영지에서 참패를 당할 뻔했고."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런 단위는 처음이라...."

마찬가지로 제시에게도 질문이 쏟아졌다.

"제시, 그냥 앞자리만 알려주면 안 돼?"

"싫어."

"궁금하단 말이야~ 우리가 이만큼이나 받았는데, 넌 얼마나 받았을지."

그래, 각각 이유가 있었다.

버서커는 신규 균열 최초 클리어.

가온은 같은 균열 중 가장 까다로운 함정 균열을 격파.

제시는 아스큐라 백작을 처치했으니까.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생긴다.

그 모든 사건 관여한 호열에겐.

과연, 어떤 단위의 보상금이 책정됐을까?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

그 표정만 봐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

.

.

.

나는 숫자를 헤아렸다.

"...."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억십억백억ㅊ....

그 천문학적인 숫자 앞에서 뻔뻔하게도 입을 열었다.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하다."

◈ 22화. 신규 업데이트

1,100억 원.

몇 번이나 다시 세어봐도 확실했다.

저 천문학적인 단위의 숫자가.

입금 신청만 하면 내 계좌로 입금될 돈이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이 무서워지려고 한다.

1,100억이라니.

로또에 몇 번이나 당첨돼야 하는 금액이야, 저게!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금을.

당연하다 여기는 내 모습이었다.

혼자 살기에 나쁘지 않았던 월급.

그럼에도 각종 생활비에 피눈물을 흘리던 과거.

에어컨, 보일러 가동 시간에 집착하던 덥고 추웠던 날들.

그 시절의 내게 1,100억이란 거금이 주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일단, 확실한 건 불면증 확정이다.

매일 밤, 집에 강도가 드는 건 아닐까. 갑작스럽게 회사를 때려치웠다가 동료가, 부장님이 알아차리는 거 아닐까. 은행 직원이 빼돌리면 어떻게 하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겠지.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

이 남다르신 금전 감각이 말이야.

그 설정 덕분일까.

내 머리는 하얘지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무장이다."

그래, 시급하긴 하지.

55레벨에서 134레벨까지.

무엇보다 레벨이 많이, 그것도 급격하게 상승했으니까.

현재 내가 사용하는 장비 아이템은 솔직히 있으나 마나 한 수준.

고레벨 몬스터 앞에선 롱코트를 걸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소리다.

'머리를 잘 써야겠는데....'

그런데, 그게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급격하게 상승한 레벨에 맞춰 아이템을 맞췄다고 치자고.

그다음 레벨업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물론, 다음 균열에서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레벨업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겠지.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

상승했다고 해도 겨우 134레벨.

내 수준에선 하급 악마족 몬스터, 임프를 잡는 것만으로 레벨이 오른단 말이다.

'지금 레벨 대에 맞는 아이템을 구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억 원을 들여서?

절대 아니겠지.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른다.

그럼 아이템을 맞추지 않겠다는 소리인가?

언제 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균열에 진입해야 될지 모르는데?

아니, 그것도 절대 아니다.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다.

'스펙보다 그 효과가 진짜인 아이템들.'

왜, 공격력이나 방어력 같은 절대적인 능력치보다.

그 효과 덕분에 높은 가치를 갖는 아이템들.

'레벨 제한과 상관없이 좋은 효과를 가진 아이템들이 있으니까.'

현시점에서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아이템이었다.

그중에서도.

'마력 재생력이 조금만 받쳐줬어도....'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

나는 이번 아스큐라 백작 균열에서 마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마력 탈진으로 위기였던 순간을 제외하더라도, 마력이 부족해 아쉬웠던 적이 몇 번이나 됐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력 재생력을 보완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럴싸한 고레벨 장비 아이템을 맞출 때까지 말이다.

당연하게도 비싸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마법사 계열 클래스는 귀족으로 취급받았다.

멋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뛰어난 성능만큼이나 육성에 투자되는 금액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런 마법사들에게 필수적인 게 바로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이었다.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그 가치는 더욱 상승했겠지.

...진짜 억 소리가 수십 번은 나올지도 모른다.

아이템 하나에 수십억이라니!

내가 그런 아이템을 파는 게 아니라 사는 쪽이 되다니.

정말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지만.

내 감정에 동요는 없었다.

테이블 앞에 착석.

등받이에 한껏 붙인 올곧은 자세.

가끔 여유롭게 기울이는 찻잔까지.

수십억, 아니 그 이상의 아이템이라고 한들.

그랑펠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순 없다는 거겠지.

1,100억을 받게 됐든.

온 세상이 내게 집중하든.

필요 이상의 고민은 없다는 것이다.

사각사각─

다시금 채워나가는 A4 용지.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2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1,000회 (성공)

●턱걸이 5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300회 (성공)

마찬가지로 채워나가는 반복 퀘스트.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들이 그 증거리라.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의 마이웨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2 때 내가 정말 이랬다고?

하지만 그따위 생각은 곧 접어버렸다.

오늘의 수치는 하나뿐인 조카, 아랑이 앞에서 흑역사를 들춰진 것만으로 차고도 넘친단 말이다.

*

때론 밝혀지지 않아 더 가치 있는 것도 있는 법.

"대체 그 정체가 뭘까요?"

현재 호열의 처지가 정확히 그러했다.

제시 하인네스와의 아스큐라 백작 레이드.

그러나 그 사건의 진상은 정확하게 밝혀진 게 없었다.

호열과 제시.

그 당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영상부터 보시죠."

쿠쿠쿵!

바닥에서 솟아나는 돌기둥부터.

호열의 앞에서 무너지는 움직이는 석상까지.

그런 호열의 정체를.

하다못해 클래스라도 밝혀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는 이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말이 되는 일이어야 말이지.

영상을 들여다볼수록 호열에 대한 신비감만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연금술이 확실하단 겁니다."

"연금술이라고요?"

"네. 여기 확대해 보시면.... 확실하게 보이시죠? 폐허의 잔해가 돌기둥으로 바뀌는 모습이 정확히 말이죠. 이건 영락없이 연금술.... 근데 또 말이 안 되는 게 연금술에 소모되는 마력량이 얼마나 극심한데.... 참나 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건지...."

"저기, 전문가님?"

전직 아르카나의 운영진들.

AAU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AAU 한국 지부.

최근 들어 성현준은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털썩─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그가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저 진짜 죽겠어요."

"왜 또?"

"어딜 가도 이호열. 이호열. 아주 그냥 난리를...!"

친구, 사촌, 심지어는 아버지 어머니까지.

아주 그냥 이호열에 대한 문의가 쇄도했다.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게 얼마 만에 등장한 스타 플레이어인가?

가온의 남태민 이후로 대한민국에 저만한 활약을 보인 이는 없었다.

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도 한동안 그 얘기만 가득한데.

호열은 메달이 아니라 붕괴된 균열, 그 대재앙을 처리한 진짜 영웅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나도 퇴근하면 애들이 난리야. 아빠, 자기한테만 살짝 알려달라고. 학교 가서 얘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한다고."

"그게 미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는 게 있어야 알려주지!"

둘은 동시에 모니터 속의 호열을 바라봤다.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스킬은?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린 건 또 뭐고!

과거 아르카나의 운영자였던 그들도 호열의 레벨을, 아니 클래스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성현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피곤할 것 같다는 거예요."

친절하게 대답 좀 해주면 좀 좋아?

따지고 보면 모든 원흉은 호열의 인터뷰였다.

호열의 활약만큼이나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 까칠한 인터뷰 말이다.

-ㅋㅋㅋㅋㅋㅋㅋ컨셉 지리네

-표정 보임? 그냥 자신감이 넘침

-균열이 아니라 무슨 런웨이 온 사람 같음

-아니 저게 컨셉이라고? 저기 몰린 랭커들 앞에서 컨셉질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함?? 저건 찐임

"궁금해 죽겠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이걸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아르카나의 운영자였던 시절부터.

AAU의 직원인 지금까지.

그들의 필수 덕목은 비밀 유지였다.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듯.

불필요한 언행으로 사회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목요일이 기다려진 건 처음이에요."

오늘은 목요일.

신규 업데이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신규 업데이트 내역이 공개되면 호열에 관한 관심도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그럼 내 청력도 보호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성현준은 내심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떠라. 떠...!"

그 간절한 기도가 닿은 덕분일까.

아르카나 홈페이지에 신규 업데이트가 공지됐다.

"떴다!"

그 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AAU의 직원들.

성현준도 내역을 확인하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뻐하면 안 되겠지만 나도 살아야지!'

균열은 언제까지나 시한폭탄.

그러나 난데없이 등장한 호열의 존재는.

자신의 청력과 정신건강에 닥친 재앙이었다.

드륵─

성현준은 마우스 휠을 돌리다가 씨익 웃었다.

길었다.

균열만 달랑 있는 업데이트 내역이 아닌.

실속이 가득한 업데이트였다.

'이런 업데이트 규모라면....'

호열에 관한 관심도 조금은 시들해지지 않을까?

성현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같은 시각.

플레이어들도 신규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했다.

"자, 잠깐. 실화냐? 진짜 이게 떴다고?!"

"...이러면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겠는데?"

"진짜 딱 이번 업데이트까지만 좀 참지."

"하씨. 경쟁자만 하나 늘어났네."

경쟁자.

당연하게도 호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야 이번 업데이트는 대규모 업데이트.

아니, 과거 아르카나를 플레이해 봤던 이들이라면 그 내역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설렐 수밖에 없는 업데이트가 분명했으니까.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유스라 제도'가 추가됩니다....』

유스라 제도!

그건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아르카나에게 숱하게 퍼져있던 소문 속의 섬이었다.

퀘스트, 보물지도, 더 나아가서는 NPC들까지.

유스라 제도를 '보물섬'으로 언급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게 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보물 수준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 정보를 입수한 플레이어들은 그 보물섬을 찾기 위해 대륙 곳곳을 뒤졌었다.

그러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될 때까지 유스라 제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전설처럼 내려오는 환상의 섬인 줄만 알았는데....

"병 주고 약이라도 주는 건가?"

아스큐라 백작 다음으로.

그 유스라 제도가 업데이트된 것이었다.

"괴물이란 괴물은 다 모이겠네. 진짜."

그런 보물섬을 랭커를 비롯한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있을까?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두각을 나타낸 건 다름 아닌 호열이었다.

그러니까 호열에 관한 관심은 커지면 커졌지, 절대 사그라들 수 없다는 소리였다.

"이번엔 진짜 격식을 갖춰서...!"

그게 좋은 의미에서든.

"대국의 천하통일에 치욕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좋지 않은 의미에서든 말이다.

유스라 제도.

그 보물섬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받는 호열.

그러나 그 관심, 견제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열은 언제나와 같았다.

유스라 제도.

그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

그 거만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

.

.

유스라 제도?

여긴 또 뭔데.

나는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최근 들어 느끼지만....'

10년의 공백이라는 게 확실히 심각하긴 했다.

왜, 최근만 해도 그랬다.

그 고깔모자....

아니, 제시 하인네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스큐라 백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천벌].

그 스킬의 위력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다만.

그녀가 무려 랭킹 4위의 플레이어였다니.

'나는 그런 사람한테 예절을 갖추라고....'

예절을 갖추는 게 사람의 기본이라고.

뜬금없이 설교를 늘어놓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결국 굉장히 공손한 자기소개를 받았었지, 나는....

그 만행이 다시금 떠올랐건만.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새로운 차도 나쁘지 않구나."

그러시겠지.

무려 하나에 200원짜리 녹차 티백이니까!

...됐다.

그만 생각하자.

어차피 이 성격은 고민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었으니까.

제시가 랭커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한들.

그녀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업데이트 내역을 보고도 태평할 수 있는 건.

성격 때문만이 아니었다.

10년의 공백?

그런 건 문명의 이기.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단 말이다.

'유스라 제도라.'

그 분량으로 볼 때.

이번 업데이트의 핵심이 분명했다.

곧바로 초록 창을 띄워 검색창에....

"?"

유스라 제도라고 입력하려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업데이트 내역 맨 마지막.

"...이것은?"

단 한 줄의 문장이 내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 23화. 이의를 제기하지 (1)

『이제부터 마법사의 탑, 정기 학회가 재개됩니다.』

대한민국의 상징, 마법사의 탑.

그저 포탈을 이용하는 용도가 아닌.

언제 한번 제대로 들러보자고 결심했었지.

그 이유야 간단했다.

'그곳엔 [스킬]이 아닌 『마법』이 있다.'

포탈처럼.

그랑펠의 재능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마법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기 학회라니.

10년의 공백은 둘째 치더라도.

지금이야 마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만.

내 클래스는 언제까지나 악마 사냥꾼이었다.

'정기 학회는 또 뭐냐?'

당연하게도 마법사들의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그러나 상관없었다.

"때마침 들러보려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이게 또 어디 가서 쭈뼛댈 성격은 아니잖아?

낯선 마법사의 탑이라고 한들.

런웨이의 모델처럼.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정기 학회라.

그곳에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손해 볼 건 없겠지.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아스큐라 백작.

랭킹 4위, 제시 하인네스.

그 둘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지금.

내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는 아니란 것이었다.

"준비해야겠군."

이제부터라.

언제 정기 학회가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겠지.

격식과 절차에 죽고 못 사는 성격.

그런 내게 지각이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나는 곧바로 마탑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뭐, 준비라고 해봤자....

달그락─

"미루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다."

설거지밖에 더 있겠냐마는.

*

마법사의 탑.

숙련 마법사, 클레는 로브를 눌러썼다.

설레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마법사의 탑이 모험가들의 세계에 소환된 이후.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

덕분에 제대로 굴러가지 않던 마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기 학회가 재개되다니.

탑주를 비롯한 윗분들의 결정이라, 숙련 마법사에 불과한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알아내신 걸까? 기대된다.'

하지만 그녀 또한 마탑의 마법사.

마법에 관한 순수한 탐구가 최우선이기에.

정기 학회가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클레가 오늘 맡게 된 역할은 모험가, 정확히는 초청된 모험가들의 안내역이었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아실 만큼 아시는 분들이니까요.'

무려 마탑의 정기 학회다.

최소 숙련 마법사, 그것도 철저한 검증을 마친 연구부터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학회란 말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무나 초대를 받을 순 없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마탑이 붐비네요."

허공을 수놓은 계단 위에서.

클레는 포탈 앞에 몰려든 인파를 바라봤다.

대다수가 모험가들이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유스라 제도가 발견됐다니까요."

유스라 제도.

오래된 마법 관련 서적에도 그 이름이 몇 번씩 등장하곤 했다.

과거, 굉장히 부유했던 왕국이었다나 뭐라나.

"괜찮은 마도구라도 가져왔으면 좋겠네요."

전설 속의 보물섬.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인 클레가 아니던가.

그녀의 관심은 금은보화보다 마도구에 향하는 게 당연했다.

어쨌든, 슬슬 정기 학회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역시 크게 할 일은 없네요."

다 환각 마법 덕분이겠죠?

클레는 가뿐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플레이어들은 볼 수 없었다.

말했듯 정기 학회 당일, 마탑에 걸리는 환각 마법 덕분이었다.

마탑의 정기 학회.

그 명성만큼이나 발표되는 결과물 또한 뛰어나다.

그에 관한 기밀 유지는 필수적인 것.

초대받은 이들만 학회에 참석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초대장이 없으면 저는 물론, 그 누구도 쉽게 이 계단을 눈치채고 올라오지도 못할 테니까요.'

물론, 그에 관한 특별 규정이 있긴 했다.

이 환각 마법을 간파한 이가 있다면.

초대장 없이도 정기 학회에 참관할 수 있다는 규정.

하지만 있으나 마나 한 규정 아니겠는가?

'무려 탑주님의 환각 마법이라고요!'

그런 수준에 오른 이가 학회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클레의 어깨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괜히 막 내가 대단한 마법사가 된 것 같고....

"제 목소리도 들리지 않겠죠."

이런 기회에 혼잣말 좀 많이 해두자.

적막한 마탑.

때론 입에 거미줄이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또각─

그때였다.

"...?"

구두굽 소리.

정확히는 계단을 오르는 소리였다.

로브를 뒤집어쓴 클레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초청된 모험가는 전부 참석했을 텐데요?'

제시 하인네스를 비롯해서.

초청한 모험가들은 학회가 진행되는 장소로 안내했다.

무엇보다 클레, 본인이 안내를 맡았기에 틀림없었다.

그럼, 저 사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지 몰라요.'

모험가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클레는 로브를 살짝 젖히고 사내를 바라봤다.

은발의 머리칼.

흑색 눈동자.

그리고 길게 늘어트린 코트...?

아니, 차림새만 봐도 모험가가 확실했다.

여유롭던 클레가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뭐, 뭔가 착오가 있던 걸까요?!'

제가 초청자 명단을 잘못 확인했다든가?!

클레는 로브 속에서 양피지를 꺼내 확인했다.

"...새롭게 추가된 모험가는 없는데요?!"

그렇다면 대체 누구실까요, 저분은...?

그런 클레에게 사내가 말했다.

"학회를 참관하고 싶다."

"그.... 그 초청장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유감이지만 그런 건 가지고 있지 않다."

"...네, 네에에에?!"

잠깐만, 말이 되지 않았다.

초청장 없이 계단을 오르고, 내게 말을 걸었다고?

그건 환각 마법을 간파했다는 소리와 다름없었으니까!

클레는 속으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환각 마법이란 걸 정확히 간파하진 못했을 거야.'

그래, 무려 탑주님이 영창하신....

"그보다, 훌륭한 환각 마법이군."

"...헤, 헤에에엑?!"

클레는 다시금 경악했다.

훌륭한 환각 마법이라니.

이 사내는 탑주님의 환각 마법을 간파한 것도 모자라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칭찬받아 마땅하다."

타, 탑주님이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노, 농담이겠죠?'

클레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바라봤다.

더없이 진지한 무표정.

자신을, 아니 모든 것을 내려 살피는 듯한 시선.

거기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농담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모험가 중에 이런 인물이?'

이런 분이 왜 이제서야...?

조금도 생각지도 못한 전개.

당황한 클레는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러나 할 일은 해야만 했다.

클레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규정에 따라 장소로 안내하겠습니다."

.

.

.

과연, 마탑의 정기 학회라는 건가?

그 입장 과정부터 장난 아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감탄했다.

'환각 마법. 그런데 단순한 환각이 아니다.'

또각─

보는 것처럼.

계단을 직접 밟고 오를 수 있었으니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수준의 『마법』인지.

희대의 재능충이란 그랑펠의 설정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깨닫지 못했겠지.

그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과연, 칭찬받아 마땅하다."

극찬 중에서도 극찬이었다, 저건.

제시의 [천벌]과 비교하는 것도 이 계단에 미안한 일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마력의 문제였다.

나는 속으로 대충 계산했다.

'내 마력이 1,000쯤 되면....'

그래도 비슷하게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야 보는 순간.

탐색, 간섭, 발현.

나는 이 환각 마법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물론, 마력 일천(一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말이다.

'1,000레벨은 돼야 한다는 거잖아?'

그러나 낙담은 없었다.

정기 학회는 이제 시작된 참이었으니까.

나는 아까부터 움찔거리는 로브의 뒤를 따랐다.

'학회에서 나약함을 보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품고서.

*

크리스탈 홀.

정기 학회가 열리는 마탑 내부의 공간이었다.

그 광활한 크기는 도저히 마탑 내부에 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

바닥, 벽면, 천장.

심지어는 참관석까지.

모든 것이 크리스탈로 이뤄진 이 공간이 마법의 신비감을 더욱 배가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루해요."

제시 하인네스가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녀의 고깔모자가 들썩였다.

-제자여. 적어도 학회에서만큼은 졸지 말 거라.

"...노력해 볼게요. 으하아암─"

-적어도 마르셀로의 차례까진 참아야 하느니라!

고깔모자 스승님의 잔소리.

이것도 하루 이틀이어야 겁먹는 체라도 하지.

제시는 졸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솔직히 들어도 잘 모르겠어요."

마법이라고 해봤자 스킬에 불과했다.

습득하고, 마력을 소모하고, 외치기만 하면 발동되는 스킬 말이다.

그런데 탐색이다, 간섭이다, 뭐다.

왜 그리들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건지.

"퀘스트 아니면 땡땡이쳤을 거라구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마법사 중 마법사라 불리는 제시였지만.

그녀에게도 마탑의 수준은 너무 높아 따라가기 벅찼다.

그저 개입하지 않을 뿐.

마탑과 그런 마탑 마법사들의 수준은 아르카나 최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제시가 한껏 기지개를 켰다.

"마르셀로까지. 그렇게 말씀하셨죠?"

마르셀로.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며 마탑을 자주 드나들었던 제시였으니까.

탑주와 원로들을 제외.

마탑의 실세라 불리는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였으니까.

"진짜 천재는 제가 아니라 저쪽이겠죠."

천재.

제시 하인네스를 칭하는 수많은 호칭 중 하나.

그러나 제시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회의 발표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무슨 천재란 말인가?

날마다 온갖 스킬북, 마법 서적을 들추고 있긴 하다만.

낯선 지식을 습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개념이 다를 뿐. 언젠가 이해할 날이 올 게다.

고깔모자가 위로하듯 들썩이던 순간.

마침내 기다리던 마르셀로의 발표가 시작됐다.

길쭉한 다리.

메마른 얼굴.

덕분에 도드라진 광대뼈.

크리스탈 홀.

중앙에 선 사내.

마르셀로가 그간 연구 성과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탑은 모종의 이유로 모험가들의 세계에 소환되었습니다. 사실 마탑뿐만이 아니죠. 이건 시작에 불과할 겁니다. 세계관 간섭은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계관 간섭.

마탑에선 신규 업데이트를 그렇게 불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제시의 눈이 반짝였다.

"그 이유를 밝히는 데엔 많은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마탑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의 발표가 그 신호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발표 제목은 융합.

그 거창한 제목에 맞게 내용 또한 충격적이었다.

"과학. 모험가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저는 그 과학에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마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 말입니다."

과학을 언급할 줄이야.

제시는 흠칫 놀랐다.

마법과 과학은 공존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셀로는 그 발상부터 천재가 확실했다.

또한 우수한 발표자이기도 했다.

과학.

아는 개념이 나오자 제시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그 발표에 빠져들었으니까.

"그러나 그 융합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할 것입니다. 완벽하게 다른 두 개념을 융화하기란, 쉽고 어려움을 떠나 어떤 변수를 가져올지 모르니까요."

마르셀로는 그렇게 말하며.

마법을 발현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어난 화염의 구체.

눈치챌 수 있었다.

저게 마법과 과학이 융합된 발전된 마법이란 것을.

"물론, 그 과정에서 모험가 여러분에게 협조를 구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그 소리에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저거 퀘스트 준다는 소리 아니야?"

"와씨, 지루한 거 참은 보람이 있다. 진짜!"

"요즘 퀘스트가 얼마나 귀한데!"

작은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르셀로는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받겠습니다."

정적─

누가 감히 질문할 수 있겠는가?

마탑의 마법사들도, 플레이어들도.

마르셀로에게 건넬 만한 질문은 없었다.

그야 마법과 과학.

완벽히 다른 두 개념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게 당연하니까....

척─

"?"

...어라?

제시는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의문을 제기해도 되겠는가?"

그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품위.

제시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되게 신기한 마법...! 아니, 이호열 님!"

그래, 의문을 제기한 건 호열이었다.

호열과 마르셀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열이 물었다.

"나는 그대의 탐색 과정에 군더더기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이래서야 마치 추궁하는 꼴이 아닌가?

그것도 마탑의 실세, 수석 마법사를 말이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그런데, 어째서인가.

마르셀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 24화. 이의를 제기하지 (2)

마르셀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군더더기라고?'

마탑의 실세, 수석 마법사.

그 자리는 결코 쉽게 오를 수도.

지킬 수도 있는 자리가 아니다.

능력은 물론.

수석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끊임없는 성과를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탐색 과정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당연하게도.

마르셀로는 수석 마법사란 자신의 위치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뭐?

탐색 과정에서의 군더더기가 존재해?

'심지어 모험가...?'

게다가 그런 지적을 해온 건 모험가였다.

수석 자리를 탐내는 선임 마법사들조차 입을 다물고 있거늘.

마법에 관해 무지한 모험가가.

어찌 저런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리스탈 홀.

"일 났군."

"마르셀로 성격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그나저나 저 사내는 대체 누군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청중이 웅성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훌륭한 발표에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은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곧 마르셀로가 폭발하리라.

선임, 숙련 마법사 가리지 않고 독설을 내뱉는 독사로 변해서는....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잠깐, 저 대답은 무엇인가?

청중이 동요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마르셀로가 틀림없이 폭발할 것으로 생각했건만.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혹시 뭔가 일리가 있는 질문이었나?"

문득, 작게 들려온 목소리.

마르셀로는 속으로 대답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군더더기는 존재한다.'

그건 괴리 때문이었다.

마법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과학.

그 두 가지 개념을 융합해 새로운 마법을 발현했다.

그 과정은 심히 비효율적이었다.

마르셀로만 하더라도 이 보잘것없는 화염의 구체를 발현하기 위해 수개월을 매달린 참이었으니까.

사실 되물은 지금도 마르셀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란 말이다.'

허나 드높은 프라이드를 가진 마르셀로라고 한들.

언제까지나 그도 마탑의 마법사였다.

학회에서 지적을 받는 것?

그따위 수치보다.

마법, 본질에 관한 탐구가 최우선이란 소리였다.

그래서 사내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마르셀로의 질문.

그에 청중의 시선이 사내에게 집중됐다.

잠자코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야야, 잠깐 저거 이호열 아니야?"

"이제야 눈치챘어? 저런 은발 컨셉충이 또 있겠냐?"

"봤지? 내가 우리 과라고 했잖아. 근데 무슨 연금술사 이 지랄. 딱 봐도 우리 마법사 클래스처럼 고귀함이 몸에서 묻어나오는 게...."

"거, 학회 중에 예절 좀 지킵시다."

예절.

그것도 호열의 앞이 아니던가.

그 소리에 플레이어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제시는 아까부터 말을 걸어오는 고깔모자의 말도 무시한 채 허리를 곧게 편 상태.

배꼽에 양손까지 모은 아주 공손한 자세였다.

쏟아지는 관심.

"...와씨. 없던 울렁증도 생기겠다."

"나였으면 말 더듬었다. 진짜."

"그냥 혀 깨물었지."

게다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마탑의 마법사들이었다.

위축될 법도 하건만.

호열에게선 긴장의 'ㄱ'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열은 여전히 크리스탈 의자에 착석한 채였다.

그 곧은 자세에도 변화는 없다.

그런 호열이 대답했다.

"나 또한 그 괴리를 경험했다.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경험했다고?

아니, 그전에 자신이 괴리를 느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린 것인가?

당황한 마르셀로.

이내, 그를 위로하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

화륵─

이내, 호열의 손바닥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 화염이 회전하며 화염의 구체로 변해갔다.

마르셀로의 것과 똑같이 생긴.

"...!!!"

그 광경에 크리스탈 홀은 충격에 빠졌다.

물론, 당사자인 호열은 태연하게 말을 끝마쳤지만.

"간섭 과정에서 원심력을 이용한다라. 과정은 미숙했으나 그 결과는 나쁘지 않군. 훌륭한 발표였다.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

화르륵─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는 화염 구체.

나는 탄식을 삼켰다.

...이렇게 활용할 수도 있었구나.

그저 마력 효율이 좋지 않아 사용을 꺼렸던 발화.

그런데 원심력이란, 초등학교 수준의 과학을 더했더니 그 마력 효율이 대폭 상승했다.

보다시피 적은 마력으로도 오랫동안 발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화염 구체뿐만이 아니었다.

학회에서 발표된 마법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물론, 내 형편없는 마력으로는 발현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이 즐비했다만.

'머릿속에 다 남겨뒀으니.'

마력만 뒷받침된다면 곧바로 발현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엔 극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훌륭한 발표였다."

무엇보다 마르셀로에게선 동지애가 느껴졌다.

나도 괴리감에 고생 꽤나 했었지.

과학과 마법처럼.

서로 완벽히 다른 두 개념.

[스킬]을 『마법』으로 변환하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아무리 대단한 마탑의 수석 마법사라고 해도 며칠은 고생했을 거야?

저 피골이 상접한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자, 잠시 휴식을 가지고 학회를 재개하겠습니다!"

벌써 쉬는 시간인가.

나는 여전히 손바닥 위의 화염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다 크게 발현했을 때도 이 마력 효율이 유지될까.'

그럼, 조금은 덜 구질구질하게 싸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내게 누군가 다가왔다.

해골....

아니,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였다.

'...뭔데.'

나는 속으로 흠칫했다.

내심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그의 연구 결과를 지적한 꼴이었으니까.

그것도 정기 학회란 대단한 행사에서 말이다.

"내게 용건이 있나.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물론, 내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이 몸뚱아리가.

주둥이가 이렇게 거만하게 생겨버린 걸 어쩌겠는가?

그런데 이어지는 마르셀로의 말이 생각 외였다.

"모험가, 이호열 님."

마르셀로는 격식을 갖춰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제 연구에 함께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순간, 내 시야가 점멸했다.

[퀘스트 : 마르셀로의 연구]

마법사의 탑,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한 차원 진보한 마법에 도달하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마르셀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진행 중)

...마법도 모자라서 퀘스트까지?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역시 학회에 참석하길 잘했다고.

*

유스라 제도.

태평양 한가운데.

쾌청한 하늘.

푸른 바다.

적당히 산들거리는 바람까지.

그것만으로도 휴양지에 온 것처럼 설레는데.

"언니, 뭔가 좀 아르카나 시절 느낌 나지 않아?"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그때. 생각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키니라도 챙겨올걸."

전설 속의 섬.

유스라 제도는 그 풍경도 가히 전설적이었다.

유스라 제도의 하나하나, 모든 것이 세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던가.

과연, 그 자연경관부터 어지간한 휴양지보다 아름다웠다.

"비키니 같은 소리 하네. 정신 사나우니까. 닥쳐봐."

물론, 싸움밖에 모르는 광전사.

레오니에게 그런 감성을 바라는 건 무리였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모래사장 위.

레오니는 짝다리를 짚고선 삐딱하게 포탈을 바라봤다.

"존나 많네. 리얼로다가."

플레이어들?

몰리는 게 당연하다.

유스라 제도가 어떤 곳인가?

과거,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모두가 찾던 보물섬이었다.

그 진상이야 까봐야 알겠지만.

기대감만으로 이만한 길드, 플레이어가 몰려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네, 저는 지금 유스라 제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유스라 제도와 플레이어들을 촬영하기 위한 취재진들도 뭐, 당연한 것이었다.

"저건 예상 못 했네."

그런데 NPC들까지 몰려올 줄이야.

'아니지, 이젠 아르카나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아르카나에서 소환된 이들까지 유스라 제도에 몰려든 것이었다.

몬스터나 균열엔 관심이 없어도 보물엔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아, 대가리 쑤셔."

또 경쟁자가 한 트럭 추가됐다...!

레오니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충 둘러봐도 대단한 NPC들이 행차하셨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 그림자 용병단에. 어쭈? 탐험가 연맹도? 아주 그냥 다들 보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구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번에도 한결같다는 것이었다.

마탑이 어떤 집단인가?

마법사, 하나하나의 무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과거, 마탑이 움직이면 아르카나의 질서가 바뀐다는 말도 있었을 정도였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연구에만 집중하는 게.

밸런스를 위한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있었단 말이다.

"후우─"

게다가 일당백의 괴물도 빼놓을 수 없겠지.

무엇보다 이번 유스라 제도엔 스칼이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았으니까.

랭킹 1위, 스칼.

그의 비상식적인 강함을.

레오니는 같은 랭커로서 잘 알고 있었다.

'...아, 스칼에다 한 명 더 추가.'

이호열까지.

막막하구만.

레오니는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그래도 뭐 하나 건져야지."

그래, 자신만 경쟁을 걱정하는 게 아닐 것이다.

포탈 주변.

플레이어, 길드 간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뒤질 수야 없지.

"...언니, 왜 눈을 그렇게 떠?"

"저 새끼들이 띠껍게 꼬나보잖아."

"그냥 언니가 귀여워서 쳐다본 거 아닐까?"

"귀엽긴 씹."

레오니가 가뜩이나 삐딱하게 뜬 눈을 더욱 치켜뜬 순간이었다.

위잉─

새하얀 손목 위.

스마트 워치가 진동했다.

레오니는 통화를 연결했다.

"엉. 학회 벌써 끝났냐? 바로 오게?"

길드 랭킹.

21위에서 한 단계 상승한 20위.

버서커 길드에 마탑 정기 학회에 초청받은 길드원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

이상한 건 길드원이 전해오는 말이었다.

"...뭐? 이호열이 수석 마법사를 꼽줬다고?!"

-아, 언니! 진짜 언어 순화 좀! 꼽준 게 아니라 지.적.

"그게 그거지 이씨. 그래서 깨졌어? 욕먹었어?"

그러게 아무리 잘났어도 말이야.

사람 봐가면서 뻗대야지 말이야.

마탑, 그것도 수석 마법사한테 개겼단다.

레오니는 킥킥 웃음을 삼켰다.

"먹을 걸로 치사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뒤끝 쩐다, 이 언니.

길드원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잠깐.

레오니가 경악했다.

"뭐, 뭐?! 인정해? 그 마탑 수석 마법사가?"

그 싸가지들이 지적을 받아들였다고?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퀘, 퀘스트까지 받았어...?"

그 순간, 레오니는 상상하고 말았다.

괴물.

그 괴물이 마탑을 등에 업은 채.

유스라 제도에 등장하는 끔찍한 상상을...!

부르르─

레오니는 오한이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얼른 통화를 끊어버리고 말했다.

"우린 속전속결로 간다. 다들 준비해!"

그리고 그런 호열의 소식은.

레오니에게만 전해진 게 아니었다.

"응. 듣고 있어."

"...이호열?"

"역시 마법사였구나, 그 새끼."

마찬가지로 정기 학회에 참여했던 길드원들.

그들에게 속보를 전해 받은 이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마탑한테 퀘스트를 받아?"

"착각한 거 아닌가? 확실한 정보인가!"

"코앞에서 고개를 숙여? 그게 말이나 되는...?"

"형.... 우리 어떡하냐?"

서울의 이호열.

그가 태평양 한가운데.

유스라 제도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었다.

*

당연하게도 나는 마로셀로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뭔지는 몰라도 퀘스트였다.

누구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퀘스트 말이다.

그것도 연계 퀘스트!

게다가 마탑의 퀘스트면 그 보상도 쓸만하겠단 생각이 들었거든.

왜,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나 지금 어디로 끌려가는 거지?

'보상은 또 어딨고?'

나는 마르셀로의 뒤를 쫓아 마탑의 상층으로 향했다.

그 계단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두둥실─

내가 허공에 발을 내디디면 그곳에서 부유하던 대리석이 내 발을 떠받치는 구조였다.

놀이기구야, 뭐야.

와씨, 예전 같았으면 한 걸음도 못 걸었을 거다.

정말로.

"다시 한번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마찬가지로 허공을 부유하는 나무문.

그 고풍스러운 문짝 앞에서.

마르셀로가 내게 말을 이었다.

"이곳이 모험가, 이호열 님께서 사용하실 연구실입니다."

설마, 이 연구실이 퀘스트의 첫 번째 보상인가?

그런 내게 마르셀로가 덧붙였다.

"연구에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길."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

감히 예상해 보건대.

마탑에 연구실을 배정받은 플레이어는 내가 최초 아닐까.

하지만 태연하게도.

나는 그 과잉 대접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럼 지금 바로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지."

책상 위.

양피지에 펜을 휘갈겨 나갔다.

──────

1. 마력 재생력 관련 마도구....

──────

아주 당당하게도.

25화. 낙하산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그것은 변하지 않는 천성.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양피지에 목록을 추가해 나갔다.

──────

1. 마력 재생력 관련 마도구

2. 초급 마법 관련 서적

3. 중급 마법 관련 서적....

──────

뻔뻔하게도.

많은 것을 요구해 미안한 마음이 들진 않느냐고?

유감스럽게도 들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나는 이 과한 대접에 반드시 보답해 내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고생하는 건 나라는 거지.

뭐, 대충 가불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요구사항으로 가득 채운 양피지를 마르셀로에게 건넸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그게 전부야?

그렇게 뻔뻔하게 마음은 먹었어도.

마르셀로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는 다시 한번 내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모험가, 이호열 님."

그러고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당장으로선 제대로 된 연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적하신 대로 제 탐구 과정에 군더더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쓴웃음을 짓는 마르셀로.

살점 하나 없는 얼굴이라 그런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니 동정심이 싹튼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냥 보이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어.'

타고난 재능.

이건 노오오오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물론, 그런 속내를 뱉을 정도의 인성은 아니다. 내가.

"기다리지. 그대가 괴리를 극복할 때까지."

말은 거창하게 했다만.

실상은 간단한 말이었다.

다음 퀘스트가 떠오를 때까지.

그냥 기다리겠단 뜻이었거든.

마르셀로가 조금은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이 연구실과 연구에 필요한 모든 것은 요청 후 자유롭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탁─

마르셀로가 연구실을 떠나고.

나는 연구실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풀렸다!

급발진하던 주둥이를 원망했던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

나는 내심 생각했다.

'...설마, 이것도 행운 덕분인가?'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34]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84 / 행운 : 3

[보유 포인트 : 0]

34레벨 상승.

나는 보유 포인트 33개를 마력에.

나머지 하나를 행운에 투자했었다.

'사실 더한 행운은 바라지 않았는데, 진짜.'

왜, 클래스 퀘스트만 하더라도.

행운에 투자한 대가로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근데, 또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랬다.

'이게 행운의 영향이란 법은 없지만.'

어째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할 때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지 않나?

어쨌든, 좋은 징크스라고 생각하자.

생각을 정리하자 그제야 연구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실치고는 엄청나게 호화스럽네.'

연구용 책상, 책장, 하다못해 깃털 펜까지.

무엇하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건.

대단한 수준이라는 거겠지.

'플레이어들의 돈이 다 여기 있구나.'

과거, 악랄하게 골드를 빨아들이던 마탑.

지금이야 포탈의 사용료도 받지 않고 있지만.

게임이던 시절엔 정말 악명이 높았었지.

'한마디로.'

플레이어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연구실이란 것.

나는 그에 대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녹차가 없는 건 아쉽군."

그래, 요구사항에 녹차 티백도 적을 걸 그랬....

'아니, 그게 아니라.'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고 있다, 나란 놈...!

무려 마탑이다, 마탑.

아르카나에서 최고로 꼽히는 세력 중 하나란 말이다.

그런 마탑에 수석 마법사 덕분에 연구실 하나를 꿰찬 지금.

내 처지는 영락없이 낙하산과 다를 게 없단 소리였다.

'마냥 좋아할 상황이 아니란 거야.'

왜, 낙하산이라는 것도 기준치는 갖춰야 한다.

적어도 낙하산 기능은 할 수 있어야.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오랫동안 구름 위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뭐, 여태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거든.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였다면.

이번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겠지, 또다시.

그런 의미에서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스스슥─

"!"

문득, 책상 위의 양피지에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과연, 마탑 마법사들의 메신저 같은 건가.

마법사답군.

생각하기도 잠깐, 나는 흠칫했다.

-요청하신 마도구가 가넷 홀에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요청한 마도구라는 건....

'마력 재생력 관련 아이템.'

최소 수억에서 수십, 백까지.

마탑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더한 아이템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아이템을 연구 목적으로 요청.

대여하여 사용할 권리를 얻은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낙하산한테 그런 걸 선뜻 내어줘도 되는 거냐고.

부담스러워하는 게 정상이건만.

나는 당당하게도 깃털 펜을 집어 들어 휘갈겼다.

-마탑의 안목을 기대하지.

*

마탑의 최상층.

천장을 수놓은 발광체 탓에 역광이 드리웠다.

마르셀로는 다섯 개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저들이 바로 마탑의 원로 마법사들이었다.

"자네의 판단을 존중하겠네.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로들의 호출은 예상했던 것이었으니까.

'모험가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으니.'

그것도 그 연구가 어디 보통 연구란 말인가?

어쩌면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연구였다.

그렇기에.

마르셀로는 마탑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벌였다.

'그 지식이, 재능이 꼭 필요하다.'

보는 것만으로 곧장 마법을 따라 발현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따라 발현한 마법이 어디 보통 마법이란 말인가?

마르셀로에겐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는 괴리에 대해 알고 있다.'

정확히는 그 괴리를 극복한 것처럼 말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모험가가 어떻게 마법의 개념을 이해한 거지?'

자신만 하더라도 과학이란 개념에 고전하고 있거늘.

그러나 확실한 건 이번 연구에 그가 큰 도움이 되리란 것이었다.

침묵하는 마르셀로에게 그림자들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 판단에 관한 책임은 확실히 져야겠지."

책임?

마르셀로는 터져 나오려던 비웃음을 삼켰다.

'그대들이 책임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가?'

이상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머저리들.

마르셀로는 원로 마법사를 증오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이 마탑의 수많은 모순을.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물러가 보게,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이내, 그림자들이 돌아섰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마력 구체가 보였다.

그 마력 구체 안에서 부유하는 사람의 형체도.

"더 이상의 소란은 방해가 되지 않겠나?"

그 물음에 마르셀로는 고개를 숙였다.

빠득─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언제까지 침묵하실 생각이십니까? 탑주님...!'

*

가넷 홀.

석류에 물든 것처럼 붉은 공간.

그곳엔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있었다.

"요청하신 마력 재생력 관련 마도구들입니다."

...그나저나 뭐가 이렇게 많아?

그래도 마탑이기에.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물량에서부터 기대 이상이었다.

나는 하나씩 마도구, 아이템을 살폈다.

[빙결된 지식]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50]

[효과 : 빙결계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50퍼센트 회복.]

[설명 : 위대한 빙결계 마법사의 유품이다. 생전 그가 이룩했던 마법적 지식이 목걸이에 그대로 빙결되어 보존되어 있다.]

...잠깐, 시작부터 미쳤다.

무려 550레벨 제한 유니크 아이템이라니.

플레이어들 수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이건.

게다가 그 효과부터 장난이 아니다.

빙결계 마법 한정이라지만 소모한 마력을 50퍼센트나 되돌려준다니.

'...레벨이 오를수록 효율이 말도 안 되겠네.'

왜, 고위 마법들은 그 마력 소모량이 상당했으니까.

정말 부르는 게 값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한테는 그림의 떡이었다.

'550레벨이라니. 400레벨도 넘게 부족하잖아.'

사소한 것에서도.

내가 낙하산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허나, 당연하게도 속마음을 내비치는 일은 없다.

"훌륭하군."

나는 태연하게 말하곤 다음 아이템을 살폈다.

...그런데, 어째?

[제한 : Lv.500]

[제한 : Lv.600]

[제한 : Lv.450]

다 레벨 제한이 너무 높았다.

나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내 수준을 뭐로 보고...!'

과대평가도 이런 과대평가라니.

다른 마도구를 보여달라고.

당장이라도 말을 바꾸고 싶었지만.

양피지로 전달한 메시지가 있지 않던가?

'마탑의 안목을 기대하긴 뭘 기대해!'

진짜,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내게 문득, 유달리 작은 아이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건 목걸이나 반지도 아니고....

설마, 브로치인가?

내 관심을 알아차린 것인지 마법사가 말했다.

"그건 불완전한 마도구지만, 혹시나 하여 준비해 뒀습니다."

불완전한 마도구라.

일단, 확인해 보자.

...어라?

일단, 레벨 제한은 합격이다.

[육망성 브로치 1/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100]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지금까지 대단한 아이템만 구경해서 그런가.

효과가 밋밋한가, 싶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빙결계, 화염계, 다 제약이 있었어.'

소모된 마력을 50퍼센트, 40퍼센트씩 돌려준다고 한들.

까다로운 조건이 덧붙었었다.

하지만 브로치엔 보다시피 조건이 없었다.

'게다가 내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내 전투 스타일이라고 해봤자, 뭐.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이든, 과학이든.

그냥 있는 거 없는 거.

전부 끌어다가 처절하게 싸우는 게 내 방식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여기 놓인 그 어떤 아이템보다 나에게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걸 대여하지."

무엇보다 까다로운 그랑펠의 심미안에도 합격.

내 선택에 마법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마도구는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해도 쓸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죽어도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대답했다.

"나에겐 이걸로 충분하다."

"그러시군요! 그 뜻 잘 알겠습니다."

뭐지, 저 감탄한 듯한 표정은.

어째 내 말뜻을 오해한 듯싶었지만.

내게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그래, 당장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 봤자 뭐하겠는가?

그럴 시간에.

어떤 거목이라도 오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다시 발버둥 칠 시간이군.

나는 곧바로 가넷 홀을 빠져나왔다.

그런 나의 행선지는.

발아래로 보이는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유스라 제도....

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균열이었다.

'주제 파악해야지.'

보물섬, 유스라 제도.

그 별명부터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최소 적정 레벨이 350레벨이었다.

430레벨.

그 레벨보다도 강한 아스큐라 백작도 쓰러트렸으면서.

무엇을 겁내느냐고 묻는다면.

'악마족이 없다...!'

그야 유스라 제도엔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아스큐라 백작 영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천적관계]의 효과가 컸다.

효율이 뛰어난 『마법』이 있긴 했지만.

그 마법조차 향상된 마력이 없었다면 몇 번 발현하지도 못했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다짐했던 바였다.

무엇보다 지금 나는 기반을 다지고 있었으니까.

그 기반을 다지기에 적합한.

마탑이란 뒷배도 얻은 참이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유스라 제도는 나와는 거리가 먼....

"!"

그때였다.

잠잠하던 클래스 퀘스트창이 점멸한 것은.

[클래스 퀘스트 : 태동]

서막이 오르고 봉화가 피어올랐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으로 뒤덮인 세상을 밝혀나가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유스라 제도의 거악을 조사하라. (진행 중)

...잠깐만, 이러면 말을 바꿀 수밖에 없잖아?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브로치를 정장 라펠에 꽂았다.

전장에 나서는 것치곤.

너무나도 고상한 전투 준비.

그러나 나는 더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실전만큼 효율적인 훈련도 없는 법이다."

◈ 26화. 과연 수석이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