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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 인내심의 한계다 (1)

바위가 찻잔으로 변한 것처럼.

찻잔의 형태가 바뀌어 간다.

그것은 마치 바위로 만든 방패.

나는 찻잔의 형태를 바꿔 벽으로 세운 것이다.

화살이 바위벽을 뚫을 순 없는 노릇.

후두둑─

수십, 수백 발을 쏴도 내게 도달할 수 없단 소리다.

나는 마력의 소모량을 확인했다.

'효율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거 아닌가?'

더 이상 [스킬]이 아닌 『마법』이기 때문일까.

확실히 넷튜브에서 연금술사가 했던 말과는 달랐다.

-짜잔! 형태가 바뀌었죠? 형태만 바꾸는 건 마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건 찻잔처럼 크기가 작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고요. 그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마력 소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야.'

내 마력은 못해도 3미터는 될 법한 방벽을 세우고도 멀쩡했다.

[천적관계]가 발동 중이라고 해도 놀랄 정도의 효율이었다.

뭐, 둘 중 하나겠지.

『마법』의 효율이 [스킬]보다 압도적으로 좋든가.

'연금술사가 넷튜브라고 약 팔았든가.'

왜, 게임에서도 종종 있는 유형이다.

너프나 캐릭터빨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서.

약캐처럼 엄살을 부리는 플레이어들이 말이야.

'악마 사냥꾼 한번 키워봐야 이게 진짜 약캐구나, 하지.'

물론, 뭐가 됐다고 한들.

이 순간,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방벽에 방어를 맡긴 채 반격을 준비했다.

활과 화살을 장비.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조잡한 화살.'

놀 궁수들이 사용하던 저 레벨용 화살.

당연하게도 그 공격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그러나 그 형태를 바꾼다면 어떨까.'

마력량은 충분했으니까.

나는 재빠르게 화살촉의 형태를 바꿔보았다.

보자,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게.

드릴이나 갈고리처럼....

[개조된 화살]

[등급 : 노말]

[제한 : 없음]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생]

[설명 : 변형된 화살촉이 살상력을 극대화시켰다.]

...뭐지, 이거?

기대 이상이다.

공격력은 물론,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발생 효과까지 가지고 있었다. 과연, 며칠 밤새 펜을 끄적거린 보람이 있구나.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끼긱─

그런 기쁜 마음과 별개로.

나는 차분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그래, 고작 화살촉 하나를 바꾼 것이다.

그랑펠에겐 호들갑 떠는 것을 떠나 언급할 가치도 없는 행동이란 거겠지.

슈슉─

과연, 양궁 금메달리스트도 울고 갈 평정심이시다.

그 덕분일까.

내가 쏜 화살이 수풀에 숨어있던 산적에게 적중했다.

[천적관계].

[개조된 화살].

거기에 없는 것보다는 나은 [사격 마스터리]까지.

그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린 결과.

푹─

적중.

[피로 물든 산적에게 '출혈'이 발생합니다.]

출혈이 발생했고.

후두둑─

다시금 쏟아지는 화살 비에 몸을 피한 사이에.

[레벨이 올랐습니다.]....

'출혈'에 빠졌던 산적이 사망.

다시금 레벨이 4개나 상승했다.

나는 상태창을 열어 그 스탯을 확인했다.

[레벨: 80]

[능력치]

근력 : 25 / 민첩 : 30 / 마력 : 18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13]

레벨이 오를 때마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급상승하는 아르카나의 시스템.

오죽했으면 랭킹 1위도 간신히 400레벨을 넘겼을까.

무려 10년도 넘게 서비스된 아르카나였는데.

'확실히 빠르다.'

그 시스템을 고려했을 때.

내 성장 속도는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랑펠의 성격 탓을 하기 이전에.

'이 정도는 기본이야.'

지금부터 축배를 들었다간.

클래스 퀘스트가 끝났을 땐 자축할 방법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거든.

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보유 포인트를 투자했다.

'근력과 민첩은 클래스 퀘스트를 반복해서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당장 전투에 도움이 될 마력에 올인이다.

[마력 : 31]

급격하게 상승한 마력량을 확인해 보자.

당연하게도 그 대상은 피로 물든 산적들이다.

나는 다시 한번 화살을 변형했다.

'이번에는 '발화'까지 연계해 볼까.'

단순하게 형태를 변형시키는 마법보다 마력 소모량이 훨씬 많았지만. 마력에 투자도 했겠다, 한 번쯤 그 위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필요하겠지.

'효율이 떨어지면 다음부터 안 쓰면 그만이야.'

...게다가 내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내 심장박동이야 어쨌든, 이건 명백하게 위기 상황이었으니까.

무려 200레벨이 훌쩍 넘는 몬스터들한테 포위당한 상태란 말이다!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이 주변에 있긴 했지만.

그들이 내 목숨까지 신경 써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 목숨을, 내가 챙기기 위해서.

이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온갖 발버둥은 다 쳐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화륵─

이내, 화살촉 끄트머리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른바, 수제 '파이어 애로우'란 거지.

나는 뻗어 가는 불화살을 보며 생각했다.

...뭐, 속도는 원조보다 훨씬 빠른 것 같기도 하고?

*

"저거, 진짜 정신 나갔네?!"

그렇게 소리쳤던 레오니였거늘.

곧 그 말꼬리가 흐려졌다.

"...네에에, 엥?!"

자, 잠깐만.

뭔데, 저거?!

찻잔이 거대한 돌벽으로 변했다!

이래 봬도 레오니는 랭커였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라면 충분했다.

그래, 어떤 스킬인지는 짐작이 갔다.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라 찻잔이 변했으니까.

확실히 연금술 계열 스킬이겠지.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금술사가 왜 균열에? 그것도 혼자?'

연금술사는 전투 계열 클래스가 아니었다.

대장장이나 세공사처럼.

연금술사는 생산직 클래스로 분류됐으니까.

근데, 그것도 모자라서....

저 돌벽은 어디까지 솟아오르는 거야?

"미친, 대장. 뭐야, 저거?"

그 높이가 3미터는 돼 보였다.

그 돌벽에 가로막혀 힘없이 부러지는 화살들.

레오니는 흠칫했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어."

마력 효율이 극도로 떨어진다고 소문난 연금술이었다.

그런 연금술로 저만한 돌벽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절대적인 마력량이 얼마나 된다는 걸까?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별안간 사내가 활을 꺼내 들었으니까.

레오니는 랭커의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래도 마력이 고갈된 모양이야.'

저만한 돌벽을 소환했는데.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겠지.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활로 시간을 벌겠단 생각이군.

하지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연금술사가 화살까지 잘 쏘면 그게 말이나 되는....

푹─!

"...마, 말이 안 되는데?! 대장?!"

단 한 발.

산적 하나가 휘청거리더니 곧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쯤 되니 관심은 자신들을 포위한 산적보다 의문의 사내에게 쏠리게 됐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길드원 하나가 '호크아이'를 발동했다가 말을 더듬었다.

"...잠깐만, 이번엔 또 뭐야."

"왜? 뭔데, 또?"

"저거 파이어 애로우 같은데? 뭐야, 쟤. 무서워."

연금술사.

궁사도 모자라.

이번엔 마법사?

순간, 레오니의 머릿속에 흘러가는 아르카나의 지식들.

'도저히 모르겠는데?'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저런 클래스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물론, 한 플레이어가 연금술도, 활도, 공격 마법도 사용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봐라.

저 뻗어나가는 파이어 애로우의 궤적을.

그 속도부터가 웬만한 마법사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버서커 길드의 마법사들이 저들끼리 속삭였다.

"너, 저렇게 쏠 수 있냐?"

"...아니. 되겠냐, 저게?"

"근데 저 사람 스태프도 안 들고 있지 않았어?"

심지어 그 모든 행동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신감 넘치는 것을 넘어서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각─

거기엔 사내의 복장이 한몫한 셈이었다.

레오니는 이제야 사내의 정장 차림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냥 미친 게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

양복과 구두를 신어도 충분하다.

자신에게 몬스터의 피 따위가 튈 일은 없으니까.

뭐, 그런 건가?

"역시 처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네."

몸풀기라고 생각했더니, 처음부터 은둔 고수가 나타날 줄이야.

광전사의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레오니가 쌍검을 치켜들었다.

챙─!

"이쪽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거든!"

"자, 가보자!"

"버프 부탁한다."

타다닷─!

좋아, 경쟁이다.

레오니와 길드원들이 산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사내, 호열은 쓰러지는 산적을 보고 생각했다.

'도와줄 줄 알았으면 티백 하나라도 나눠줄 걸 그랬나?'

*

균열 밖.

근방 상공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촬영 드론들이 떠다녔다.

세계 각지의 방송국.

넷튜버.

심지어는 길드들까지.

그 소속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가 같은 이유로 균열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과연, 신규 균열 첫 클리어의 타이틀은 어떤 길드에게 돌아갈까요?"

업데이트가 있을 때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길드와 플레이어들에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었으니까.

그들의 활약에 따라 주식 시장의 주가가, 더 나아가서는 국가들 간의 질서까지 요동치는 것이었다.

"특히나 이번 아스큐라 성채 공략에는 아주 큰 의미가 달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악마족 업데이트 이후, 가장 높은 레벨의 몬스터인 아스큐라 백작 아니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려 430레벨의 악마족 몬스터죠. 지금으로선 난공불락의 몬스터라고 평가되고 있는데.... 부디 우리 플레이어들이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야겠습니다."

"다행히도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리고 있습니다. 제보된 자료화면 함께 보시죠."

송출되는 자료화면.

과연,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영지의 외곽.

적정 레벨이 200레벨 중반인 만큼 유명 길드나 고레벨 플레이어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간혹가다 악마족의 악랄함이 드러나는 영상도 있긴 했다.

"이런, 상태이상에 빠진 플레이어도 있었군요."

"아, 괜찮습니다. 후방에 든든한 힐러가 받쳐주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저 정도 상태이상 정도야 말끔하게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자, 보시죠."

"과연, 세계 랭킹 1위! 샤이닝입니다."

모니터를 지켜보던 PD.

현용석이 코를 훌쩍였다.

역시 러시아 바람이 매섭긴 하다.

걸친 패딩 속으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킁. 근데, 확실히 악마족들이 까다롭긴 하네. 그 샤이닝이 시작부터 한 번 삐끗한 셈이잖아?"

"에이, 감독님. 바로 회복했는데~ 저건 노카운트죠."

"그거야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런 적이 있었나?"

투데이 아르카나.

현용석이 연출을 담당한 프로그램으로 평균 시청률은 11퍼센트.

지상파 방송이 아님에도 10퍼센트가 넘는 시청률이었다.

투데이 아르카나만큼이나 균열과 플레이어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적어도 대한민국에 또 없었으니까.

그 시청률이 균열과 플레이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역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투데이 아르카나를 1화부터 지금까지 연출한 현용석이다.

그런데 지난 회차를 되짚어 봐도 이런 적은 없었다.

샤이닝이 어떤 길드인가?

10위권 최상위권 랭커를 무려 넷이나 보유한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길드였다.

그 샤이닝이 고작 적정 레벨, 250레벨 균열에서 피해를 보았다니.

"확실히 물량부터 심상치 않긴 하네."

샤이닝 길드를 포위한 몬스터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공격당하기 십상이겠어.

현용석은 결론을 내렸다.

"악마족. 레벨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전개가 더욱 기대됐다.

빙글빙글─

현용석이 출연진들에게 손짓했다.

텐션을 조금 더 끌어올리라는 신호였다.

"과연. 그 난이도만큼이나 처음으로 균열을 클리어하는 길드에게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겠는데요? 세상에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는 셈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캐스터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촬영 드론을 모니터링하던 조연출이 외쳤다.

"어?! 선배, 떴어요! 첫 클리어!"

"균열 위치 어디야? 빨리 취재진 출발시켜!"

"보자. 어디냐. 이 근방이면.... 일단, 가온은 아니고요."

"쩝, 아쉽지만 별수 없지."

어쩔 수 없는 한국인.

내심 가온이 첫 클리어를 따내길 바랐건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조연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씨. 마더러시아. 뭔 놈의 나무가 이렇게 빽빽하냐."

"줌 최대한 땡긴 거 맞아?"

"네. 땡겼는데 나무에 가려서 안 보여요. 어디야, 대체?"

그때 드론 위치로 내달리던 취재팀에서 무전이 날아왔다.

-선배, 얘네가 진짜 첫 클리어 맞아요?

"맞지. 내가 이 상황에 장난치겠냐? 어디야?"

-...레오니요. 버서커 길든데요?

"...뭐, 뭣? 버서커라고?"

-잠깐, 레오니 앞에 저 남자 누구야? 한국인 같은데? 잠깐만요, 선배! 슬슬 다른 취재진들 몰려오고 있거든요? 일단, 인터뷰부터 따볼게요!

...한국인이라고?

유럽 연합 길드인 버서커에 한국인이 있었나?

현용석이 기억을 더듬던 그때.

곧 무전기가 다시금 지직거렸다.

현용석이 다그치듯 물었다.

"뭐래? 한국인이래? 무슨 관계래? 버서커 길드 맞아?"

-...네, 선배. 한국인 맞는 것 같긴 한데요.

"그런데?"

무전기에서 황당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짜고짜 '비켜라.' 이렇게 말해서 제대로 인터뷰를...!

휘이잉─

"...그래서 인터뷰를 놓치셨다?"

-아, 아니! 선배 그게 아니라 '비켜라.', '인내심의 한계다.' 딱 말하는데. 뭔가 거스를 수 없는 포스가...!

"아아, 걔 말엔 포스가 있고. 내 말엔 포스가 없다?"

-....

"뒤쫓아 가서라도 따오자, 인터뷰. 알겠지?

냉랭한 무전.

휘이잉─

그에 못지않게 차디찬 시베리아 고기압.

현용석은 패딩을 더욱 싸맸다.

역시, 러시아는 춥다.

◈ 12화. 인내심의 한계다 (2)

몰려드는 취재진들.

"정말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첫 클리어 축하드립니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첫 클리어 타이틀을 따내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번 균열이 평소와 달랐던 점이 있으시다면?"

버서커의 길드 마스터.

레오니는 짧게 대답했다.

"노코멘트."

그녀의 대답에 취재진들은 흠칫했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대답이 굴러들어 온 복을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 야구방망이로 후려쳐 담장 너머로 넘기는 수준이었으니까!

이번 신규 균열에 쏠린 관심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레오니의 말 한마디에 버서커 길드의 주가도.

그녀의 조국, 독일의 위상도 요동을 친단 말이었다.

"영어 몰라요? 할 말 없다고."

그런데 노코멘트라니.

게다가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게, 마치 화난 포메라니안 같은 모습이었다.

레오니가 그렇게 나오자, 취재진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쪽 인터뷰라도 따야 할 듯싶었다.

"언니, 기분은 알겠는데...."

"진짜 엿 같아."

"대장, 그래도 말이라도 좋게좋게 했으면...."

"으으, 병신!!"

길드원들의 말에 절규하는 레오니!

그녀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야 신규 균열 첫 클리어 타이틀은 버서커의 능력만으로 따낸 게 아니었으니까.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레오니가 뒤따르던 길드원에게 물었다.

"걔, 무슨 장신구 같은 것도 없었지?"

"그렇지. 양복에 귀걸이나 반지 꼈으면 눈에 확 띄었을걸?"

"미친, 근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는 거야?"

버서커가 첫 클리어를 따낼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전부 사내 때문이었다.

클래스조차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악마족들의 어그로를 모조리 끌어버렸으니까!

악마족들이 어떤 놈들인가?

틈만 나면 끊임없이 상태이상을 거는 놈들이다.

"장비빨도 없이 그걸 어떻게 견딘 거야, 대체."

환시, 환청, 환각 등등....

사제들의 버프나 정신력을 상승시켜 주는 장비가 없으면 금방 상태이상에 빠지고 만단 말이다.

근데, 사내는 그런 것도 없이 수백의 악마들에게 어그로가 끌리고도 멀쩡했던 것이었다.

"...젠장, 어쨌거나 다들 미안. 내가 너무 병신 같았어."

레오니는 길드원들에게 사과했다.

만약, 그 사내가 어그로를 끌지 않았다면.

지금쯤 길드엔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겠지.

자신이 내렸던 돌격 명령 때문에 말이다.

"언니, 우리 광전사. 미친년들이야."

"죽어도 전장에서. 그게 우리 좌우명이잖아, 안 그래?"

"대장, 괜히 똥폼 잡지 마요. 안 어울림."

그래, 그 말본새 덕분에 기운이 난다.

자책하던 레오니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근데, 그건 어디 갔어?"

"나오자마자 취재진이랑 얘기하더니 그냥 가버리던데?"

"...엥? 그냥 갔다고?"

이건 정말 의외였다.

레오니는 당연히 사내가 취재진들 앞에서 거만을 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전투 도중에도 정장에 구두까지 신고 있던 사내가 아니던가?

그런 콘셉트라면 당연하게도 쏟아지는 관심을 마다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게다가 활약을 하기도 했고....'

노코멘트.

레오니가 첫 클리어에 대해 입을 다문 것도 사내 때문이었다.

사실상, 사내가 없었다면 자신들은 아직도 균열 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테니까.

양심껏 스포트라이트를 사내에게 양보했던 것이었다.

"...근데, 그냥 갔다고?"

의문이 더욱 커지던 중.

길드원 하나가 손가락을 들었다.

"어, 저기. 저 사람들이랑 뭔 말 하다가 가버렸는데."

거기엔 어깨가 축 늘어진 취재진들이 있었다.

"하아. 진짜 난 선배한테 죽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카메라 감독.

톡톡─

문득,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

그가 고개를 돌렸다가 질겁했다.

뭐야, 여신인가.... 아니, 레오니잖아?!

아까는 분명 인터뷰 안 한다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 레오니 인터뷰라도 따가는 거야. 단독 인터뷰! 깨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칭찬을 받을 수도 있어.'

그런데 오히려 인터뷰를 당한 건 카메라 감독 쪽이었다.

레오니가 영어로 물었다.

"국적."

"예? 저, 저요?"

끄덕─

"대, 대한민국 VBC 보도국 소속 윤종민입니다."

...아니지, 종민 윤이라고 해야 하나?

윤종민은 더듬거리는 영어로 대답했다.

이럴 땐 플레이어가 부럽다.

플레이어들끼린 의사소통이 자유로웠으니까. 아르카나의 캐릭터가 덧씌워졌으니, 아르카나의 번역 능력까지 함께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영어로 인터뷰해야겠지?'

윤종민이 고심하던 때였다.

레오니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윤종민은 다급했다.

이대로 레오니까지 놓치면 난 정말 죽는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혀를 굴려 레오니에게 말했다.

"어떻게 한 말씀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플리즈!"

그 간절함이 닿았나.

레오니가 고개를 돌리더니 대꾸했다.

"한국엔 가온만 있는 게 아니었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레오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스큐라 백작 공략은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

'그 정장한테 밉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인터뷰를 하지 않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괜히 잘못 말했다가 사이라도 틀어지면 큰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뉘앙스가 좀 그런데?

'아니.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저런 괴물을.

적으로 돌렸다간 감당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레오니는 말을 아꼈다.

"노코멘트."

*

가온의 베이스캠프.

모락모락─

컵라면에서 올라오는 열기.

[한국엔 가온만 있는 게 아니었군요.]

태민, 철민.

남씨 형제는 레오니의 인터뷰를 시청 중이었다.

"뭐야, 얘? 누구 놀리나?"

남태민은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그야, 정말 간발의 차이였으니까.

남철민의 합류, 그의 분석을 바탕으로 가온은 빠른 속도로 균열을 정리했다.

샤이닝과 다르게 길드원이 상태이상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첫 클리어를 두고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퍼클 따놓고 뭔 소리여. 대체?"

뜬금없이 버서커 길드라니.

어디 그 비결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지켜봤는데....

"한국에 가온만 있는 게 아니었다라...."

"딱 저 소리만 했대. 뭐 기뻐하지도 않고."

"확실히 뭐가 있긴 한가 보네."

비교적 눈치가 빠른 형, 남철민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균열에서 한국 플레이어를 만난 모양이야."

"...뭐? 누구야, 그게? 혹시 신화 녀석들인가?"

세계 랭킹 5위, 가온.

세계 랭킹 41위, 신화.

대한민국 1, 2위 길드인 그들의 격차는 명백하게 벌어져 있었으니까.

정말, 신화를 두고 한 말이라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남철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신화 쪽은 아직도 균열 공략 중이야. 걔네 늦게 들어갔거든. 용병으로 영입한 플레이어까지 끌고 가느라."

"그래? 그건 다행... 이 아니라! 누굴 말하는 거야, 대체?"

"그러게 말이다. 그걸 모르겠네."

분명 균열 안에서 한국 플레이어를 만난듯한 뉘앙스인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에 대해선 노코멘트라니.

하지만 그건 버서커, 레오니의 입장일 뿐이다.

남철민은 컵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올렸다.

"이런 관심을 받게 됐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하긴. 자기 입이 막 간지러워서 못 참겠지."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해. 그 플레이어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을 때. 좋은 조건을 내밀어서 데리고 오는 거지. 투자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신규 균열 첫 클리어를 따낸 버서커 길드.

그 길드 마스터가 인정한 한국인 플레이어.

남태민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가온을 들먹이게 할 정도라고?"

개인이 됐든, 길드가 됐든.

확실히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최선이었다.

형제는 그렇게 뜻을 맞추고 젓가락을 움직였다.

후루룩─

"와. 그나저나 겁나 춥더라. 형."

"밖에서 앉아만 있는 나는 어떻겠냐? 얼어 죽는 줄."

"아니, 공략 중에 추워서 집에 가고 싶었던 건 처음이었다니까?! 사실 지금도 포탈 타고 한국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거든?"

*

...추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비켜라."

취재진에게 말했듯.

"인내심의 한계다."

진짜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러시아에서 서울, 마법사의 탑으로.

나는 포탈에서 나오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괜히 서울 땅값이 비싸진 게 아니라니까.'

총 소요 시간이 고작 20분 남짓.

마탑이 있어서 살았다, 정말.

내가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베이스캠프에서 몸을 녹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추위에 조금이라도 더 시달렸으면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을지도 몰라.

쏴아아─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얼었던 몸이 풀렸다.

마음 같아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다듬고 식사를 차렸다.

아무리 피곤해도 근손실은 용납할 수 없다는 거야, 뭐야.

어쨌든 식사까지 하고 나니까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다.

...위험했다.

영지의 외곽.

나는 그 균열에서 내 부족함을 깨달았다.

효율이 뛰어난 『마법』으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효율이 뛰어나다고 한들, 마력량엔 한계가 있었다.

'마력 재생량이 터무니없이 낮았어.'

그야 당연한 일이다.

무엇하나 뛰어난 게 없는 클래스, 악마 사냥꾼.

마력 재생에 관련된 스킬이 없는 건 물론.

나 또한 그런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결국, 나는 전투 도중 마력이 바닥나고 말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누군지 알았으면 감사 인사라도 했을 텐데.

12년 만에 복귀한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를 알아볼 수 있을 리가.

그래도 아직 세상이 살 만하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덕분에 레벨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86]

[능력치]

근력 : 25 / 민첩 : 30 / 마력 : 31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6]

'당장 착용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전리품도 획득했다.

[엉성하게 벼려진 사브르]

[등급 : 매직]

[제한 : Lv.180]

[효과 : 없음]

[설명 : 나름대로 훌륭한 무기였지만, 엉성하게 벼려낸 덕분에 오히려 그 날이 무뎌졌다.]

그러나 내 능력 부족엔 변함은 없다.

그러나 반성도 또한 없다.

『그랑펠에게 겸손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게 그였으니까.』

그래, 그 드높은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사서 고생할 수밖에 없는 가엾은 녀석.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반격의 서막]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마들에게 반격의 때가 왔음을 알려라.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그 목표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아스큐라 백작.

녀석이 공포를 느끼기엔 내 활약이 부족했다는 소리겠지.

내 부족함을 깨달은 만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시야가 반복 퀘스트를 향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2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1,000회 (진행 중)

●턱걸이 5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300회 (진행 중)

굴러야겠지.

게다가 아스큐라 백작의 균열 공략이 시작된 지금.

내게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병행이 필요했다.

몸과 두뇌를 동시에 쓰는 병행.

거기에 적합한 연구 대상을,

나는 오늘 이 두 눈으로 목격했다.

산적들 사이에서 무기를 휘두르던 플레이어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건.

역시, 양손에 검을 들었던 플레이어.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급해도 뒷정리가 우선이다."

달그락─

...일단, 설거지부터 끝내고 시작하지.

.

.

.

다음 날.

나는 내 피곤한 성격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의 긴박한 목소리.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러시아에 생성된 신규 균열들의 붕괴도가...!

◈ 13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1)

균열의 붕괴도가 급상승했다.

-[영지의 외곽] 균열 공략 달성률이 95퍼센트에 다다른 가운데. [백작가의 영지] 균열의 붕괴도가 무려 60퍼센트를 넘어섰다는 속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고작 하루였다.

균열의 붕괴도가 60퍼센트를 돌파한 것이다.

대격변 이후.

그간 수많은 균열이 생성되고 사라졌지만.

-그게.... 이런 케이스는 저도 처음 봅니다.

이 정도로 급격히 붕괴도가 상승한 건 이례적인 일.

그 이유를 추측하는 출연진도 있었다.

-붕괴 속도라는 게 원래 균열마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대체로 균열 속에 있는 몬스터가 강할수록 균열이 견딜 수 있는 시간도 짧아집니다.

-그 말씀은 균열 속 몬스터가 생각보다 강할 것이다?

-그렇죠. 문제는 붕괴 속도가 증가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균열 속 몬스터가 전보다 더 강해졌다'가 맞는 말이겠죠. 하루 전보다요.

그 말에 출연진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번 균열의 높은 난이도.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몬스터가 더 강해졌다니.

-...그렇게 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멀쩡한 몬스터가 갑자기 강해지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래,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몬스터가 그 이상 강해지는 것도.

그 때문에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하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의견을 모아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앵커는 이런 끝인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플레이어들이 희소식을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

.

.

나는 액정에서 시선을 뗐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어째 난 알 것 같은데?'

균열 속 몬스터들이 강해진 이유도,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한 이유도 말이야.

10년 만에 아르카나에 돌아온 주제에.

뭘 그리 아는 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 되물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악마에 관해서는 너희보다 많이 알고 있을걸?

끝나지 않던 악크샨에서의 훈련!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악마의 정보들.

그중에서 흡혈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피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눠줄 수 있다. 물론, 나눠줬던 능력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은 [피로 물든 짐승]과 [피로 물든 산적]에게 자신의 권능을 부여했다.

그 몬스터들이 플레이어에게 쓰러지면서 그들에게 나뉘었던 권능이 자연적으로 아스큐라 백작에게 되돌아갔다....

'그래서 균열 붕괴도가 급상승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야기가 맞아떨어졌다.

다음 전개도 예측해 볼 수 있었다.

'잠깐, 그럼 영지를 공략하면 성채의 붕괴도가 급상승한다는 거잖아.'

현재 붕괴도가 60퍼센트를 넘어선 걸 고려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90퍼센트는 되겠는데?'

어쩌면 성채 균열이 붕괴.

현실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는걸.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그 확률이 꽤 높았다.

그리고 그 레벨만 따져도 430레벨인 아스큐라 백작.

그 괴물이 더욱 강해진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평소와 같은 자세로 옷장을 연다.

격식에 따라 복식을 고른다.

당연하게도 어제와는 색만 조금 다른 정장.

그래도 추위에 떨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나는 정장 위로 먹색 롱코트를 걸쳤다.

...그래, 롱코트.

균열에서 활동하다 보면 질질 끌릴 것 같은데.

얼어 뒤지는 것보다야 낫겠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내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귀족은 주었다 빼앗지 않는다. 아스큐라 백작."

그것은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

그랑펠이 생각하는 귀족으로서의 긍지.

그 프라이드가 아스큐라 백작의 행동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각─

나는 구두를 신으며 덧붙였다.

"아니, 백작이란 칭호조차 아깝구나. 아스큐라."

누가 봤다면.

그럭저럭 괜찮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

꼬옥─

...손에 쥐고 있는.

이 녹차 티백만 아니라면 말이야.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에 감사하자.

나는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다.

[백작가의 영지]

[적정 레벨 : Lv.350~400]

[붕괴 진행도 : 66.1%]

다시금 균열의 정보를 확인.

곳곳에서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적정 레벨이 350에서 400레벨?! 미쳤구나, 진짜."

"1시간도 안 지났는데 붕괴도가 6퍼센트나 올랐어."

"아니, 영지가 이 정도면 성채는 대체 어떻다는 거야?"

수백 개에 다다른 [영지의 외곽] 균열은 전부 클리어했다.

이제 서른 개 남짓한 [백작가의 영지] 균열만 클리어하면 아스큐라 백작이 있는 [백작의 성채] 균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균열의 개수가 확연히 줄어든 만큼.

플레이어들 간의 눈치 싸움도 치열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적정 레벨이 무려 350~400레벨.

고레벨 균열인 만큼 그 경험치와 전리품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일 테니까.

균열의 수가 부족한 만큼 경쟁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나마 만만한 경쟁 상대를 찾으려는 눈치 싸움이란 거지.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은 그나마 형편이 좋았다.

"뭐, 샤이닝하고만 안 겹치면 되니까."

샤이닝을 제외한다면 누가 와도 해볼 만하다.

남태민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버서커란 복병에 최초 클리어는 빼앗겼지만, 샤이닝과는 정말 간발의 차였다.

남철민도 같은 생각이었다.

남철민이 태블릿 PC를 두들겼다.

"샤이닝 쪽도 바짝 약이 오른 상태겠지. 그런 녀석들이 우리랑 같은 균열을 선택해서 좋을 건 없을 거야. 같이 망하자는 꼴밖에 더 되겠어?"

그러니까 이 균열로 하자.

가온은 베이스캠프를 빠르게 선점했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던 불청객이 찾아왔다.

남태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하, 이 새끼들 봐라?"

길드 랭킹 4위, 이나즈마.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의 길드였다.

마법사의 탑이 솟아났다고 한들.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똥고집을 부린 탓.

비행기를 타고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러시아에 도착한 이나즈마가 균열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가 남태민을 바라봤다.

남태민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마디의 말도 오고 가지 않았지만.

서로가 그 속뜻을 알고 있었다.

남태민이 말했다.

"저 새끼가 한번 해보자는데. 어떻게 생각해, 형?"

남철민은 태블릿을 두드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먼저 자리를 잡았는데, 피하는 것도 영 모양이 안 살겠지?"

한국과 일본.

가온과 이나즈마가 같은 균열을 선택했다.

그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각국의 촬영팀들이 웅성거렸다.

"가온이랑 이나즈마가 붙어?! 무조건 특종감인데?"

그러나 이곳엔 특종감이 너무나도 많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소식들.

그중에서는 가온과 이나즈마의 대립만큼이나 관심이 쏠리는 구도도 있었다.

"세컨드 썬이랑 보헤미안. 경쟁자가 둘이나 붙어버렸잖아?"

"이거 버서커는 최초 클리어 땄다가 더 귀찮아진 꼴이군."

"상도덕도 없다. 그것들. 어째 유럽 연합이라면서 자기네들끼리 더 치고받고 싸운다니까?"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길드 랭킹 1위, 2위.

샤이닝과 천하통일이 맞붙었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샤이닝.

중국의 천하통일.

과연,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만한 경쟁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세계의 질서가 흔들릴지도 몰랐으니까.

"천하통일, 저것들 그냥 고춧가루 뿌리기로 작정했나?"

"이건 뭐 같이 망하자는 거 아냐?"

"둘이 붙으면 남는 것도 없겠다."

당연하게도 두 길드.

모두에게 남는 것 없는 장사였다.

새로운 균열의 경험치와 전리품을 가장 강한 경쟁자와 나눠야 하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물러나지 않겠지.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만 재밌는 구경이었다.

"자, 그럼 이쯤에서 투표 한번 받겠습니다!"

취재진들만큼이나 신난 건 넷튜버 플레이어들이었다.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들뿐.

어제만 해도 그들은 균열 내부 상황 중계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러니까 넷튜버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채팅 올려주세요! 후원 메시지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과연, 어떤 균열을 선택해야 가장 많은 시청자를 모을 수 있을까?

거듭되는 눈치의 눈치의 눈치 싸움.

그 눈치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

.

.

현재 기온 영하 5도.

실화냐고, 정말.

하루 만에 5도 넘게 떨어지는 게.

코트라도 걸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균열에 진입하기도 전에 얼어 죽었을 거야.

모락모락─

나는 찻잔의 온기에 손을 녹였다.

과연 『탐색』과 『간섭』 과정에서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인 보람이 있었다.

찻잔의 모양을 조금 더 복잡하게 구성했을 뿐인데.

영하의 칼바람에도 찻잔은 쉽게 식지 않았다.

'슬슬 익숙해지는 참이야.'

[스킬]이 아닌 『마법』에 말이다.

그런 마법을 빠르게 습득하는 그랑펠의 재능에도.

나는 잔을 비우고는 그대로 손잡이를 놓았다.

툭─

허공에서 찻잔이 다시금 변형.

떨어지는 순간, 돌의 형태로 돌아가 있었다.

'원상 복귀엔 탐색과 간섭의 수고 또한 줄어든다.'

이것 또한 마법에 익숙해지며 알아낸 활용법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이걸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느냐는 게 문제지만.'

그건 몸으로 부딪쳐 가며 알아볼 일이겠지.

물론, 이번 균열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 : Lv.390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 : Lv.350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 : Lv.300

애초에 만만하게 볼 수가 없는 레벨이잖아?

병사나 기사는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심복과는 무려 300레벨도 넘는 차이가 났다.

그러나 언제부터 내가 그런 것들을 따졌던가?

또각─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걸 말이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칠 뿐이었다.

우아한 백조가 가라앉지 않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듯.

나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악할 뿐이다.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그랬던 것처럼.

부디 그 노력이 의미가 있길 바라며.

또각─

나는 망설임 없이 균열에 진입했다.

.

.

.

균열에 진입하자 보인 건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들.

[백작가의 영지]라고 하기엔 너무 볼품이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두 풍경이 섞인 환경이라고는 해도 이건 심하다.

귀족으로서의 심미안이 절로 찌푸려진달까.

"형편없는 영지다. 아스큐라."

나는 코트를 흩날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그리고 이내,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병사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달된 송곳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갈증이라도 난다는 듯.

입가에선 끊임없이 타액이 흘러나왔다.

그런 병사가 기척을 알아차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드는 병사를 응시했다.

그래, 이로써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저건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권능의 탈을 쓴.

추악한 흡혈귀의 저주에 괴로워하는.

가엾은 희생자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금 말했다.

"다시 보아도 형편없다."

무너진 건물을 『탐색』, 그 형태에 『간섭』했다.

"허나 네게는 그조차도 아깝다."

이내 마법이 『발현』했다.

콰쾅─!!

.

.

.

쿠구구구웅─!

뒤편에서 들려오는 굉음.

"?!"

두 사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보였다.

빠득─

남태민과 히사기 카즈마가 동시에 이를 갈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적당히 하지?'

이쪽은 저쪽을 신경 쓰기도 벅차단 말이다.

◈ 14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2)

나는 무너진 폐허에 간섭, 그 형태를 변형시켰다.

쿠구궁─!

'제일 중요한 건 효율이다.'

그건 지난 경험에서 깨달은바.

산적과의 전투에서 나는 마력 고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깨달았다.

그 플레이어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황천에 잠겨 익사했겠지.

그렇기에 지난 밤새 고민했다.

'어떻게 싸워야 최대 효율로 싸울 수 있는지를.'

일단 '발화'를 포함한 공격 계열 마법의 효율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지난 균열에서 마력이 빠른 속도로 소모된 것도 '발화'를 사용하면서부터였으니까.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마력 효율이 가장 높은 마법은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눈앞의 광경이 내 대답이었다.

쿠구구구─!

무너진 폐허에서 발현된 마법.

그 마법의 여파로 폐허의 형태가 변했다.

거대한 장벽이 솟아올랐다.

나와 달려들던 병사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건 공격도, 방어 계열 마법도 아닌 [연금술 스킬]에서 영감을 얻은 마법.

그렇다.

연금술 계열이 내가 사용하는 마법 중에 그 효율이 가장 높았다.

'문제는 그 활용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

물론, 그 형태를 조금 더 복잡하게 바꿀 수야 있었다.

살상력을 추가해 벽에 가시를 돋치게 한다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무기 형태로 만든다든지....

'찻잔의 보온성을 극대화한 것처럼 말이야.'

살상력을 위해 갈고리 같은 복잡한 형태를 더하는 데엔 꽤 많은 마력이 소모됐다.

화살촉을 개조하며 체감했었지. 그 크기가 큰 만큼 복잡한 형태를 더하기 위해선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는 거지.'

게다가 굳이 필요도 없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번엔 허세가 아니라고.

과연, 그 레벨이 높아서일까.

거대한 벽이 솟아올랐는데 머뭇거림이 없었다.

병사는 그 벽을 재빠르게 돌아 내게 접근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더 빠를 거라고.

쿠르르릉─!!

"?"

여기엔 별다른 마력도, 수고도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떨어지던 찻잔을 다시 돌덩이로 바꾼 것처럼.

나는 돌벽을 다시금 폐허의 잔재로 돌려놓았다.

콰콰쾅─!

이건 마법의 파괴력 같은 게 아니다.

높이에서 오는 충격량.

문과라 그 공식은 잊어버렸는데....

어쨌든, 거스를 수 없는 물리적인 법칙이란 말이다.

쿠구구구웅─

돌벽의 높이만큼이나 그 파괴력이 대단했다.

찻잔을 통해 그 가능성을 짐작하긴 했다만.

솔직히 상상 이상인걸?

나는 마력의 소모량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앞으로도 계속 써먹을 것 같은데?'

돌벽을 세워 올릴 때나 마력이 소모됐지, 다시 되돌릴 땐 마력의 소모가 없다시피 했다. 역시 밤새 머리를 굴린 고생이 있다니까.

'...『반전 마법』.'

거창한 이름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효율이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물론, 『반전 마법』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레벨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레벨의 격차에도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처럼.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나는 돌무더기에 깔린 병사를 바라봤다.

드러난 것은 얼굴뿐이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게 들이밀고 있었다.

마무리하자.

은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과거라면 내구도가 신경 쓰여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겠지만.

이젠 괜찮다.

휙─

허공 위로 은제 단검을 던졌다.

탐색, 간섭, 발현.

순간, 은제 단검의 형태가 바뀌었다.

마치 길고 예리한 송곳처럼.

푹─

그 은 송곳이 병사를 관통.

붙어있던 숨을 끊어놨다.

나는 반전 마법으로 그 형태를 원상 복구시켰다.

손상됐던 은 송곳이 멀쩡한 은제 단검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내구도를 확인해 보니....

다행히도 역시나 무사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0레벨에 걸맞은 경험치량.

총 상승한 레벨은 5레벨.

나는 이로써 91레벨이 됐다.

얼핏 보면 완승처럼 보였겠지?

겉보기엔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하지 않고 병사를 압도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섭섭하다.

'...나도 할 수 있으면 그냥 편하게 싸우고 싶지.'

실상은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 치른 전투였으니까.

마력의 소모량은 물론.

무기의 내구도, 그 무기를 수리할 때 투자될 생활비까지.

가슴을 졸이며 전력을 기울였단 말이다...!

하지만 그 처절한 심정을 표출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듯.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는 무표정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또각─

내 속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일까.

멋스럽게 펄럭이는 롱코트를 보며 생각했다.

...득템도 못 했으면 내가 억울해서 죽었다. 진짜.

*

가온과 이나즈마가 맞붙었다!

세계는 몰라도 한국과 일본.

양국의 관심은 그 균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축구, 야구, 배구....

평범한 스포츠만 하더라도 과열 양상을 띠는 게 한일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경쟁엔 역대급 관심이 쏟아지는 게 당연했다.

왜, 한일전이라는 타이틀을 떼놓고 봐도 똑같았다.

그 배경만 하더라도 흥미진진했으니까.

"길드 랭킹에선 이나즈마가 4위. 우리 대한민국의 가온이 5위로 한 단계 뒤처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사실상 기세로는 가온이 우위가 아니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나즈마는 랭킹은 과거 2위에서 현재 4위까지 하락했거든요? 하지만 가온은 20위에 랭크된 이후 계속해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놓칠 수 없는 게 길드 마스터들 간의 라이벌 구도겠습니다."

남태민과 히사기 카즈마.

플레이어 랭킹은 11위와 6위로 히사기 쪽이 우위였다.

그러나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히사기는 남태민에게 줄곧 고전해 왔다.

콜로세움에서의 1대1 결투에서도.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서도.

남태민은 랭킹 차이가 무색하게 히사기와 막상막하였다.

그러니까 이런 볼거리를 놓칠 수야 없었다.

그건 생계형 넷튜버, 박휘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박휘강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균열로 달려왔다.

──────

제목 : 바퀴처럼 끈질긴 중계! 휘강이의 생방송~

──────

생방이 시작되기 무섭게 시청자들이 몰려들었다.

-여기도 가온이랑 이나즈마 중계방임??

-앵글 좀 다르게 잡아보셈ㅋㅋ

-3D로는 못 봐도 다양한 각도로는 봐야될 거 아니야~

시청자 수가 벌써 10명?

박휘강은 평소와 다른 관심에 놀랐다.

과연, 가온과 이나즈마의 맞대결.

시청자들의 채팅에서도 흥분이 느껴졌다.

"네, 조금 늦었지만 최대한 빠르게 쫓아가 보겠습니다!"

박휘강의 클래스는 탐험가였다.

전투 능력은 전무했지만, 중계 넷튜버로 살아가기엔 이보다 적합한 클래스도 없었다.

박휘강은 돋보기로 바닥에 찍힌 흔적을 포착했다.

"다들 여기로 갔네요. 한번 잘 뒤따라가 볼게요."

탐험가의 이동 스킬, '줄행랑'을 발동.

서둘러 뛰는 박휘강에게 시청자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아니 님아;; 솔직히 가온 찍는 한국인 넷튜버는 넘침;;

-시청자 모으려면 좀 차별화가 필요하지 않겠음??

-그냥 히사기 그 새끼 중심으로 찍어주시면 안됨??

-어차피 다들 방송 몇 개씩 켜두고 봐서 ㄱㅊ

-히사기 표정 썩는 것 좀 보게ㅋㅋㅋㅋ

...채팅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이 균열에 얼마나 많은 넷튜버, 방송국 소속 플레이어들이 모였겠는가?

뒤늦게 진입한 만큼 자신에겐 차별화된 앵글이 필요했다.

"역시 저보다 시청자님들이 방송을 더 잘 아시네요!"

그래, 히사기를 중심으로 중계하자.

일본인이 히사기를 중계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한국인이 히사기를 중계하는 방송은 상대적으로 드물 테니까.

박휘강이 결심한 때였다.

쿠구구궁─!

"뭐, 뭐야?"

별안간 근처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렸다.

-??? 방금 뭐임?

-어차피 늦었는데 확인하고 가죠

-와ㄷㄷ 귀 떨어지는 줄 다른 중계에서도 이 소리 들렸음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박휘강은 곧바로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저, 저분은 누구실까요, 여러분?"

길게 늘어진 먹색 롱코트.

그와 대비되는 은발 머리의 사내를.

채팅창에 물음표가 쇄도했다.

-?????

-쟨 또 뭐냐??

-가온에 저런 플레이어는 없는디… 이나즈마 쪽인가?

-아니겠지 길드원이 혼자 떨어져 있겠음?

-일단 플레이어는 맞지? 근데 웬 롱코트????

박휘강은 꼴깍─ 마른침을 삼키고 지켜봤다.

일단, 소음의 정체는 짐작이 갔다.

사내의 앞에 솟아오른 거대한 돌벽.

그 높이가 얼핏 봐도 10미터는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저게 튀어나오면서 난 소리 같아요."

박휘강이 카메라를 향해 속삭였다.

-...엥? 저 돌벽을 소환한 거라고?

-저런 스킬도 있냐?

-와씨 마력 오지게 썼겠는데?? 크기 보소

올라오던 채팅을 확인하려던 찰나.

돌벽 반대편에서 무섭게 생긴 병사가 뛰쳐나왔다.

박휘강은 흠칫 놀랐다.

'악마족!'

박휘강은 220레벨이었다.

상대적으로 위험한 지역을 탐험할 수밖에 없는 클래스 특성상, 그는 자신의 레벨보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많이 봐왔다.

하지만 악마족은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분명 상태이상 떴다.

박휘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잠깐.

불현듯 저 사내에게 생각이 닿았다.

"저, 저?!"

사내는 비무장 상태였다.

무기도, 방어구도 장착하지 않았단 소리였다.

심지어 그 자세 또한 무방비했다.

분명 병사가 접근하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어떻게 된 게 그 꼿꼿한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위, 위험한 거 같은데요?"

그러나 흐트러진 건 따로 있었다.

마치 접근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쿠구구궁─!

"?!"

돌벽이 산산조각이 나 무너져내린 것이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운석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충격으로 땅이 웅웅거리는 것도 모자라 흙먼지가 일대를 뒤덮었다.

"으앗. 잠시만요!"

박휘강은 서둘러 카메라 렌즈를 닦았다.

그러자 사내의 뒷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와;; 방금 뭐냐? 설마 노린 거야??

-ㅁㅊㅋㅋ 스킬 활용도 돌았네

-대체 클래스가 뭐냐 저거ㄷㄷ

-ㅋㅋㅋ다른 건 몰라도 자신감은 ㅇㅈ한다

-ㄹㅇㅋㅋ 괜히 코트 입고 온 게 아니네

꼿꼿하다.

돌벽이 무너져내릴 것도.

그 돌무더기에 병사가 깔릴 것도.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이내, 사내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찰나였지만, 탐험가의 눈썰미가 빛을 발했다.

박휘강이 말했다.

"...검인 것 같은데요?"

아니, 분명 검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허공에서 그 형태가 바뀌었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변한 검이 그대로 돌무더기에 깔린 병사를 처형했다.

그러더니 다시 검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저, 저건 또 무슨 장비일까요? 여러분들...?"

박휘강을 포함.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아니 살아있는 검이야 뭐야???

-ㄹㅇ 내가 봤을 때 최소 유니크다 저거

-고작 유니크? 진짜 살아있는 검이면 에고 소드라는 건데 유니크로도 부족하지 분명 모양만 바뀌는 걸 거임

-...근데 모양만 바뀌는 것도 대단한 거 아님?? 너네 본 적 있냐?? 일단 나는 없음

-나도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300레벨짜리 악마족 몬스터였다.

경우에 따라선 랭커들도 부담스러워하는 몬스터를 압도적으로 사냥하다니....

게다가 제대로 된 방어구는커녕 롱코트에 구두를 신은 채로 말이다.

-아ㅋㅋㅋㅋ이거 보느라 가온 쪽 까먹었네

-너두? 나두ㅋㅋㅋㅋ

-걍 한일전보다 저게 누군지 더 궁금하다

-ㄹㅇㅋㅋ

갑작스레 등장한 의문의 사내.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내에 대한 관심도가 그 수치로 나타나고 있었다.

──────

제목 : 바퀴처럼 끈질긴 중계! 휘강이의 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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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각─

나는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에게서 획득한 아이템을 확인했다.

플레이어가 되고 처음으로 만져보는 보라색.

그러니까 레어 아이템이었다.

[피의 저주가 깃든 목걸이]

[등급 : 레어]

[제한 : Lv.300]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 흡혈귀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일명, 악마의 아이템.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었다.

신규 업데이트로 악마족이 추가되면서 함께 추가된 아이템으로.

악마의 저주로 그 효과가 봉인되어 있다는 콘셉트를 가진 아이템들.

'효과에 따라서 당첨, 꽝으로 불린다고 그랬지.'

한마디로 뽑기 아이템이란 거지.

뽑기라.

게임 좀 해봤다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정말 악랄한 시스템이지.

'악마의 아이템이란 게 중의적인 표현이었구나?'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사용 방법이 틀렸어.'

그건 오직 악마 사냥꾼.

그러니까 현재로선 나만이 알고 있는 사용법이란 것이다.

◈ 15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3)

아르카나 세계관에는 수많은 신.

그리고 그런 신을 섬기는 종교가 있다.

신이 있으면 그와 대적하는 악마도 있는 법.

그 종교들에도 악마와 맞서는 사제들이 존재했다.

'구마 사제라고 했었지.'

물론, 내가 종교나 다른 클래스까지 파고들 정도로.

아르카나 세계관에 관심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것뿐.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악마 사냥꾼 퀘스트를 수행하며 지겹도록 들었던 게 바로 이 대목이었으니까.

-구마 사제들의 구마의식은 그저 악마를 내쫓을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 방식이 될 수 없지. 우린 그들과 다르다. 우린 악마를 찢어 죽이니까.

...아니, 그땐 정말 멋있게 느껴졌단 말이야.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설령 악에 빠져 악마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악마를 사냥할 뿐이다. 그것이 악마 사냥꾼의 길이니까.

근데, 크고 나서 보니까 막장도 이런 막장이 또 없다.

노동법은커녕.

인권부터 개나 줘버린 직장이었잖아, 이거?

'아무것도 모르는 중2, 청소년한테 말이야.'

잘 망했다, 악크샨!

내 흑역사를 남 탓으로 넘겨보기도 잠깐.

-그 차이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게 구마의식이다.

[구마의식].

천적관계와 더불어 악마 사냥꾼에겐 둘밖에 없는 고유 스킬.

나는 스킬창을 열어 그 차이점을 확인했다.

───────

구마의식 : 악마를 의식으로 초대한다.

───────

플레이어가 되고 나선 단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왜, 남철민에게 빙의한 임프와의 전투에서 말이다.

그 효과는 반쪽짜리.

아니, 그보다도 못했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효과밖에 발동되지 않았었지.'

빙의자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닌.

빙의한 악마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는 효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마의식에 필요한 제물이 없었거든.

-악마 사냥꾼의 구마의식은 제물에서부터 다르다. 다른 종교들은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제물을 필요로 하지만....

애초에 악마 사냥꾼들은 신 따위를 섬기지 않았다.

정말 신이 존재했다면.

세상에 악마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악마 사냥꾼들의 생각이었으니까.

-명심해라. 우리의 제물은 악이 깃든 모든 것이다.

그래, 악이 깃든 모든 것.

나는 과거 퀘스트를 수행하며 구마의식을 발동했을 때 그 제물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템이 바로 악마의 아이템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단순 뽑기 아이템이라고 여기는 이것이었다.

나는 목걸이를 바라봤다.

보고 있자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다.

'...이게 또 뽑아보고 싶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 있잖아?

괜히 나는 당첨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목걸이, 장신구였다.

일단, 레어 등급 아이템이라는 건 확정이니까. 마력 재생력 옵션이 하나라도 달려있으면.... 마력 효율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

그러나 나는 꽝, 당첨 여부를 떠나서.

이것이 쓸데없는 기대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에게 재물이란 덧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말이지.

더 나아가 악마의 아이템이 구마의식의 제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이 또한 하찮은 유혹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렸다.

그러나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랑펠의 고고한 성격은 제쳐놓고서라도,

이게 생각을 해보니까.... 아쉬울 게 아니었다.

'...잠깐, 제물을 사용한 구마의식이라면.'

구마의식의 효과도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까?

나는 과거 퀘스트에서 봤던 구마의식의 효과를 떠올렸다.

'...그 효과도 그대로 넘어왔다면.'

...이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고작 91레벨.

430레벨짜리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었다.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건 다름 아닌 퀘스트였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보통 퀘스트가 아닌 클래스 퀘스트.

사냥하는 게 아니라.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쯤은 가능하지 않을까?

어쨌든, 시도해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또각─

그 이유야 어찌 됐건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서일까.

나는 보다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 나의 보폭이 이내 멈춰 섰다.

...뭐가 저렇게 많아?

*

낌새를 느낀 건 대로에 진입했을 때부터였다.

폐허가 되기 전엔 번화가였겠지.

그러나 그 드넓은 거리에 그림자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심상치 않아.'

남태민의 직감이 경고했다.

현재 상황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그래,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질적이었다.

'개체 수가 너무 적어.'

[백작의 영지].

균열에 진입하고 처치한 몬스터의 수가 채 열 마리도 되지 않았다.

이나즈마 놈들에게 빼앗긴 게 아니냐고? 유감이지만 저쪽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찰하고 왔는데 마찬가지야."

은신 해제.

모습을 드러낸 길드원이 남태민에게 보고했다.

"지형을 보니까 모든 길이 중앙 광장에서 하나로 통하게 되어있어. 이대로 가면 이나즈마 쪽이랑 광장에서 마주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도 합류할게."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중앙 광장에 들어서자 이나즈마 놈들이 보였다.

히사기가 이쪽을 보더니 말을 건네왔다.

"이거 각오가 무색하게 평화롭네요. 안 그런가요?"

히사기 카즈마.

세상에 뱀 인간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뱀과 닮았다.

웃는 모습이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것만 같았다.

남태민은 인상을 구겼다.

"우리가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또 그런 서운한 소리를."

"지랄은 거기까지 하자. 이젠 귀찮다. 너도. 이나즈마도."

남태민은 히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에게 패배했을 때도, 녀석을 이겼을 때도.

히사기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지금처럼 소름 끼치게.

하지만 그것 또한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자신도, 가온도.

히사기와 이나즈마에게 더는 꿀릴 것이 없었으니까.

"귀찮다니. 한국인들은 너무 직설적이란 말입니다. 상처를 받게 돼요. 이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을 만큼."

남태민은 피식 웃었다.

"응.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그러시든가."

그 도발에 이나즈마의 길드원들이 발끈했다.

"저 새끼가 근데...!"

그때 남태민의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노야로, 빠가야로.

그 목소리가 발끈한 것치고는 워낙 커서 말이지.

이어폰의 음량을 키우자 남철민의 음성이 들렸다.

-아아, 이제 들리나?

"잘 들려. 소리 좀 키웠어."

-들린다니 다행이네. 근데 방금 그 말 꼭 해야 됐어?

"형, 균열에서는 그 기세라는 게 있어. 밀리면 안 되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남철민이 말을 덧붙였다.

-당장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샤이닝이랑 천하통일 쪽 정보를 입수했어.

"...뭐? 그것들이 우리보다 진행속도 빨라?"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따질 거 따지는 우리랑 다르게. 그쪽은 감정이 앞서는 치킨 게임 중이니까. 어쨌든 덕분에 패턴을 파악했어.

패턴을 파악했다.

그 소리에 한시름이 놓였다.

"정말이야? 우리 형, 분석관으로 앉힌 보람이 있네."

-이게 말로 표현하기가 조금 까다로워서 그래. 송출 화면 보면서 이야기할게. 근데,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주변에 보이는 게 없네. 아까부터 나무도 안 보이고?

"여기? 광장 같은데. 여러 갈림길이 다 여기로 통해있어."

-...뭐?

그 소리에 남철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당장 광장에서 나와. 빨리!

"...!"

당장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철민이 그렇게 말한 이상 따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히사기와의 신경전 때문이었을까.

빌어먹게도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광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그 굉음에 모두가 흠칫했다.

"...뭐야, 이거?"

"자, 잠깐! 땅이 울리는데?!"

"적이 온다! 위치를 파악해!"

스릉─!

남태민은 재빠르게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의 클래스는 야만전사, 바바리안.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커다란 대검을 치켜들었다.

-젠장, 어쩔 수 없나. 첫 충돌은 감수하는 수밖에.

"이거 기사들이지?"

-맞아. 350레벨.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들.

두두두두─!

과연, 기사라는 건가.

말을 타고 등장하다니.

레벨도 레벨이지만 기병이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남철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탱커를 앞세운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을 거야. 그 천하통일의 탱커 라인도 돌진을 완전히 막아서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좁은 곳에서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이렇게 넓은 장소에서 기병의 파괴력은 배가 된다.

문제는 또 있었다.

"...마스터!"

"말해. 듣고 있어."

"이거 세 방향 공격인데요? 우리가 온 남쪽을 제외하고 삼방향에서 기병들이 돌진해 오고 있어요!!"

삼방향이라니.

이래서는 희생을 감수할 앞선을 내세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상황은 이나즈마도 마찬가지였다.

히사기가 남태민에게 말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등 뒤를 맡기겠습니다."

...뭐, 등 뒤를 맡겨?

이 뻔뻔한 새끼가.

남태민은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남철민이 만류했다.

-네 기분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당장은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맡기는 수밖에. 우리가 동쪽, 이나즈마가 서쪽을 맡으면 남은 건 북쪽인가? 젠장. 난전은 피해야 하는데....

그래, 난전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플레이어 랭킹 11위.

남태민의 레벨은 368레벨로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보다 높았지만, 그렇지 못한 길드원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난전 상황이 되면 그 격차가 큰 피해로 이어질 게 뻔했다.

"...내 실수야."

심상치 않다.

직감이 경고했을 때.

순진하게 광장에 진입하면 안 됐다.

아니, 히사기랑 쓸데없는 신경전만 벌이지 않았어도....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북쪽은 내가 맡을게."

그런 남태민의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보다 강렬하게, 야만스럽게.

바바리안의 고유 스킬이 발동된 것이었다.

───────

광폭화 : 공격력이 대폭 상승하며 피해에 둔감해진다.

───────

-...미쳤어? 너 혼자 북쪽을 맡겠다고?

미친 짓이겠지.

하지만 실수엔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남태민이 비장한 각오를 다지던 그때.

드디어 백작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두두두─!

삼방향에서 들이닥치는 기병들.

그 위용은 실로 음산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피에 대한 갈증을 표출하는 듯.

거칠게 내뿜는 입김.

광폭화가 아니었다면 분명 위축됐겠지.

그러나 각오는 되어있다.

대검을 굳게 쥐던 순간이었다.

"?!"

쿠구구쿵─!

굉음!

말발굽이 내는 소리와는 달랐다.

말발굽이 땅을 울리게 했다면.

이건 마치 땅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듯한 박력이었다.

"...이거?"

이 굉음,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내가 동시에 멈칫했다.

그 머뭇거림이 경악으로 바뀌는 건 찰나였다.

"!!"

흔들리던 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성벽처럼.

어느새 아득하게 솟구친 그 돌벽이.

기사들의 돌진을 완벽하게 되받아친 것이었다.

"가, 갑자기 이게 뭐야?"

"...가온에 이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다고?"

"설마, 이나즈마 놈들 짓인가?"

소란 중.

또각─

문득, 광장을 울리는 청아한 구두 소리.

남태민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먹색 롱코트를 걸친 사내가 있었다.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한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잠깐! 저 얼굴은...? 맞는데. 뭐야, 이거? 서, 설마 저 돌벽을 소환한 게?! 아니, 잠깐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아니, 말이 안 되는데?!

*

나는 벽을 세웠다.

단순한 『마법』으로 치부하면 서운하다.

마력의 효율을 고려하는 것은 물론.

'이른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학창 시절 배운 기본적인 물리적 지식까지.

처절하게 끌어모아 토대로 삼아 올린 성벽이란 말이다.

그래, 보다시피 나는 매 순간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다는 것이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 16화. 고래 싸움에 또 고래가 (4)

문과인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과학 최고.

쉴 새 없는 메시지가 그에 대한 근거였다.

무려 350레벨의 몬스터였다.

그 돌격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어마어마하겠지.

말 그대로.

나는 스치기만 해도 사망 확정이다.

그러나 파괴력이 큰 만큼 그 반발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그쯤 나는 병사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땐 여기서 반전 마법으로 벽을 무너트렸지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좋지 않은 판단 같았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기사들의 돌격을 받아치기 위해 더욱 크고, 두꺼운 돌벽을 쌓아 올린 만큼.

무너졌을 때의 후폭풍도 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뭔지는 몰라도...! 일단 공격해!"

"기회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라!!"

기사와 뒤엉킨 플레이어들.

내게 플레이어를 피해가며 돌벽을 무너트리는 고급 테크닉 따윈 없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으면 말이야.

수고롭게 돌벽을 쌓아 올릴 필요도 없이 녀석들을 쓸어버렸겠지.

'그러니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현재 무엇보다 불리한 요소는 지형이었다.

'탁 트인 전장은 기병에게 유리하지.'

과연, 내가 돌벽을 세워 올린 방향을 제외한다면.

다그닥다그닥─!

"빌어먹을! 또 온다! 다들 이 악물어!!"

돌진, 후퇴, 다시 돌진.

말을 탄 기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대열도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설치는 꼴이 실로 오만하군."

그러니까 그 꼴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순 없다.

그래, 나는 적에게 유리한 지형을 바꿀 생각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탐색, 간섭, 발현.

그 일련의 과정이 더없이 신속했다.

쿠구구구궁─!

바닥에서부터 돌기둥이 솟구쳤다.

어느새 광장, 곳곳에 솟아난 돌기둥들.

히히히히잉─!

말들의 동요가 보였다.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탓이었다.

노린 건 아니었지만 몇몇 돌기둥은 직접적으로 기사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골절'이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게 '기절'이 발생합니다.]....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이러는 게 당연하지.'

효율이 높다는 것도 평범한 상황에서 한 이야기였다.

91레벨.

마력은 고작 42포인트.

그 정도 수치로 전장을 완전히 뒤바뀌어 놓았으니까.

내 마력은 고작 녹차 한 잔 우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건 반전 마법으로 플레이어들이 휘말리지 않는 선에서 벽과 기둥을 무너트리는 것뿐.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그랑펠의 긍지는 어떨지 모르겠다만.

애초에 내겐 저 기사와 뒤엉켜 싸울 생각 따윈 없었거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있었는데....

사라졌다는 게 맞겠지만.

"이 자식들 맷집이 장난 아닌데? 끈질겨."

"젠장. 출혈 떴다. 나 회복 좀 부탁해!"

"이 괴물 같은 새끼들. 말에서 떨어져도 장난 아니잖아?"

다들 적어도 300레벨은 넘겠지?

그런 플레이어들조차 고전하고 있었다.

과연, 기사들의 강함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런 기사들과 내가 뒤엉켜 싸울 수 있을까?

[천적관계]의 효과를 생각하면....

일대일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시시각각 그 상대가 뒤바뀌는 전장.

나는 그런 전장에 아군도 없이 혼자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마력을 전부 투자해 전장의 지형을 바꾼 것.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그 근거가 마찬가지로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아르카나의 경험치 시스템.

플레이어들은 처치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를 획득했다.

아르카나가 십 년 넘게 최고의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던 건.

보다시피 납득할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됐기 때문이겠지.

내 처치 기여도는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진 않을 것이다.

기사들에게 결정적인 상태이상을 유발.

그 기세를 눈에 보일 정도로 꺾어놨으니까.

그에 대한 근거 또한 메시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적을 처치할 때마다 한 줄씩.

그 근거가 추가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이 증명의 전장에서 관망 중이었다.

마력이 고갈된 이 순간에도.

'저건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을지도....'

부지런히 발버둥 치는 중이란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 376.

플레이어 랭킹 6위.

번개의 창, 히사기 카즈마는 생각했다.

'저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지?'

일단, 그 차림새부터 범상치 않았다.

균열에서 비무장 상태라니.

자신조차 방심할 수 없는 게 신규 균열이었다.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더욱이 이번 신규 균열에선 악마족이 출현했다.

'정신력 관련 장신구는 필수일 텐데...?'

그러나 마찬가지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펄럭─

바람에 흩날리는 롱코트.

또각─

그 당당한 구두굽 소리가 대변하고 있었다.

마치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것처럼.

두려울 것 없다는 듯한 표정.

긴장 따윈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자세.

과연, 그 사내의 자신감엔 근거가 가득했다.

"!"

벽을 세워 적의 돌격을 막아내다니.

아니, 그것도 모자라 광장 곳곳에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히사기는 사내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다.

'...기병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거야.'

사내가 노린 대로 기사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그것도 모자라 몇몇 기사들은 상태이상에 빠져있었다.

히사기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클래스도, 이름도, 마력량도, 심지어는 레벨도.

쉽게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저 괴물이 만약 가온 소속이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가장 중요한 건 저 사내가 가온 소속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가온 소속이었다면 따로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가온의 태도가 눈에 보였다.

'어쨌거나 기회다.'

히사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클래스, 마창술사.

파지직─!

히사기의 창에 번개가 휘감겼다.

번개의 창.

그 별명처럼 히사기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크르르...."

바바리안의 고유 스킬, [광폭화].

그 효과로 남태민은 짐승 같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가온의 길드원들이 남태민을 보고 말했다.

"이거 완전 마스터가 날뛰기 좋은 환경이 됐잖아?"

"저게 누구신지는 모르겠는데. 뭐,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감사 인사? 일단, 살아남을 걱정부터 하지?!"

하나하나가 유명세를 떨치는 가온의 플레이어들.

당연하게도 다들 그 유명세만큼이나 레벨이 높았다.

레벨이 높은 만큼 경험도.

그 경험을 통해 생긴 보는 눈이 있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였다.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벽과 기둥들.

그 탓에 기사들의 대열이 무너졌다.

그야말로 난전 상황.

그런 난전에서 남태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슈슉─!

남은 건 야성뿐.

오직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남태민.

커다란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서.

솟아오른 기둥을 올라타고는 기사들을 덮쳐버렸다.

그런 남태민의 귓가에 남철민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태민아. 지금 너한텐 어떤 말을 해도 못 듣겠지만 말이야.

똑같은 말을 또 하게 되는 수고가 있다고 해도.

입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게 내가 말했던 그 남자야!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아니겠지, 그럴 수가 없겠지.

짧은 시간, 수도 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 얼굴을 어떻게 잊겠어.

악마에게 육체를 빼앗겼던 자신을 구원해 준 사내.

아무리 봐도 그 은인의 얼굴이 맞았다.

더 나아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격식을 갖출 대로 갖춘 차림새까지도.

-...근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저 사내의 클래스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4호선 균열에서 사내는 분명 단검으로 임프를 사냥했었다.

물론,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다 신체 능력.

즉 [근력]과 [민첩] 스탯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갑자기 마법이라니. 이게 대체...?

하지만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마법은 [마력] 스탯에 영향을 받는다.

근력, 민첩, 마력을 전부 필요로 하는 클래스?

들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그 성능이 좋을 리가 없었다.

스탯 포인트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임프 앞에서도 멀쩡하길래. 그냥 정신력이 높구나, 생각만 했지. 진짜 마법을 쓸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그것도 저게 보통 마법이란 말인가?

화면으로 보고 있었지만, 광장의 크기는 못해도 축구장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사내는 그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벽과 기둥들을 세워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쿠르르릉─!

적절하게 기둥을 무너트려 기사들을 공격하기까지.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남철민은 분석관의 지식을 총동원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아르카나의 지식부터.

마찬가지로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동료 분석관들의 의견까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모아봐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분석관으로서 할 말이 아닌데. 모르겠다. 태민아.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한다, 동생아.

설령,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대적 관계만큼은 피해야 했다.

저 정도의 플레이어와 대립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왜, 지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형제가 쌍으로 도움을 받다니. 이걸 뭐라고 해야 돼?

만약, 사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상자가 속출했을 게 당연했다.

가온과 이나즈마를 따질 것 없이 말이다.

하지만 사내의 활약으로 전황이 바뀌었다.

사내는 혼자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플레이어란 소리였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근데, 하필이면 같이 본 게 이나즈마 녀석들이야.

이나즈마엔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그중에선 가온이 빼앗긴 플레이어들도 꽤 됐다.

조건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나즈마는 출혈이 발생하더라도 공격적으로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들을 영입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아 내세울 수 있는 조건이란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남태민이 히사기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거지.

남철민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

남태민의 이성이 돌아왔다.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맨정신에 들은 건 그 말뿐이었지만.

무엇을 양보할 수 없다는 건지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10대0? 콜. 거기에 뭘 더 얹어줄지 고민해 보자고."

같은 시각.

넷튜버, 박휘강의 채팅창은 폭주 중이었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저거 클래스가 대체 머임???

-고래 싸움에 끼어든 새우가 너무 크다ㅋㅋ

-소문 듣고 왔습니다 여기가 성지라면서요?

가온과 이나즈마.

두 길드 사이에 난입한 의문의 플레이어.

그런 플레이어를 처음부터 중계한 넷튜버가 있다.

──────

제목 : 바퀴처럼 끈질긴 중계! 휘강이의 생방송~

현재 시청자 수 : 68,923명

──────

그 소문이 퍼져 나간 덕분에 박휘강의 방송에는 무려 7만 명에 육박하는 시청자가 몰렸다.

놀라서 기절해도 모자랄 정도의 수치였거늘.

"와아...!!"

정작 박휘강에겐 시청자 수를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

그게 자신의 시청자 수보다도 훨씬 믿기 어려웠으니까.

"여러분들 보이시나요? 거의 다 이긴 것 같아요!"

남은 기사들의 수가 몇 되지 않았다.

그들조차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

플레이어들이 승리한 것이었다.

"진짜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이 아니시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박휘강을 비롯해 처음부터 사내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알고 있었다.

이 광장 전투에서 사내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ㅋㅋ 유입들은 에고 소드도 못 봤겠네~

-에고 소드?? 그건 또 뭐임??

-뭔진 몰라도 이름부터 보통 아닌데?

-못 본 놈들은 다시보기로 보고 와라ㅋㅋㅋㅋㅋ

-ㄹㅇㅋㅋ 간지 오졌음 그때

그래, 사내는 자신의 무기조차 꺼내지 않았으니까.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를 일격에 보내버린 그 무기 말이다.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지켜보시는 듯한 기분이시죠?"

그랬다.

사내는 벽과 기둥을 세우고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장 경험치와 전리품 따윈 중요치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희한하네 나 같으면 그냥 다 쓸어버렸다ㅋㅋ

-에고 소드 보고 왔는데 뭐냐? 개쩌네

-모양이 막 바뀌네ㅋㅋ 최소 유니크 예상합니다

-그 칼이면 기사들도 한 방 아니냐ㄷㄷㄷㄷ

...대체 정체가 뭘까?

사내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풀썩─

이내, 마지막 기사가 쓰러졌다.

그러자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설마, 한국인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번에도 빼앗길 것 같냐? 절대 안 놓친다.'

'적어도 이름이라도 여쭤보고 싶은데.'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에 홀로 서 있는 그 사내를 향해.

그런 사내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이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막대한 관심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처럼.

*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피곤하다.'

앞으로 마력을 바닥까지 쥐어짜 내는 건 자제하자.

아무래도 그 후유증이 상당했다.

마력 회복에 관한 장비가 하나도 없는 탓이겠지.

이름이 뭐냐고.

속해있는 길드가 있느냐고.

혹시 한국인이냐고.

사실, 대답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랑펠의 까칠한 성격을 떠나서.

나부터가 피곤해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다 할 장비 하나가 없어서.

마력 탈진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굳이 이렇게 붙들어야만 하는 것인가?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므로 질문은 받지 않겠다."

◈ 17화. 격이 떨어지는군 (1)

샤이닝과 천하통일.

세계 최강의 자리를 두고 균열에서 벌어진 격돌.

그 승자는 샤이닝이었다.

[샤이닝,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 레이드 성공…]

[플레이어 랭킹 2위 록스. 드디어 400레벨 고지 안착… 랭킹 1위, 스칼과는 불과 2레벨 차이.]

[전문가들 日, "제시 하인네스가 큰 역할을 했다."]

두 길드의 승패를 가른 건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이었다.

무려 390레벨의 악마족 몬스터.

상태이상을 걸어대는 악마족의 특성상.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과 맞설 수 있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으니까.

10위권 랭커를 무려 넷이나 보유한 샤이닝은 그에 대한 내성이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평균 레벨이 떨어지는 천하통일은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흐음."

세계 최강의 타이틀을 지켜낸 샤이닝.

그러나 길드 마스터, 록스의 표정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야 균열에서 빠져나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으니까.

"저게 뭘까? 다들 어떻게 생각해?"

베이스캠프, 마스터 실.

그곳엔 록스를 포함해 4인의 남녀가 모여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트 화면.

재생되는 영상을 지켜보던 흑인 사내가 말했다.

"나한테 물어봤자 모르겠다니까, 록스?"

플레이어 랭킹 8위, 드미트리.

그는 이 귀중한 시간이 아까웠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균열에서 실컷 구르다가 왔더니만.

갑자기 회의가 웬 말인가?

"록스, 너처럼 여자들이 줄이 서는 남자는 내 간절함을 몰라. 내가 어떻게 잡은 데이트인데! 바쁘게 사는 와중에 어떻게 뺀 진도인데! 그 고생을 저런 놈 하나 때문에 날리게 만들려는 거야?"

드미트리의 울분이 화면 속 사내를 향했다.

롱코트를 걸친 은발의 사내.

그 사내가 손짓하자 광장에 벽과 기둥이 솟아났다.

플레이어 랭킹 7위,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글쎄~ 나는 활잡이라 봐도 모르겠는걸~"

빙그르르─

그녀는 길게 늙어진 붉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그러더니 소파에 한껏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신경을 쓰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정말?"

록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사내가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거슬려서였다.

"글쎄. 질투라고 할까?"

"질투? 욕심도 많으셔, 우리 대장님~"

"록스, 흔히 있는 일이잖아. 매스컴이 별것도 아닌 신인 가지고 떠들어 대는 거. 시청률이 되고, 조회수가 되니까. 억지로 스타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다는 거지."

드미트리의 말이 맞았다.

그간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플레이어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뭐라도 된 것처럼 나서다가 균열에서 사망한 것만 쳐도 수백 명은 되겠지.

'근데, 왜 하필 이런 날 겹치냔 말이야.'

뭐, 놀라운 등장이긴 했다.

그 복장부터 시작해서 말이야.

하지만 단지 그뿐.

당연한 일이었다.

플레이어 랭킹 2위, 록스.

랭킹 1위, 스칼을 비롯해 저것보다 더한 괴물들을 자주 봐온 그가 아니던가.

그래도 형태가 바뀌는 검이라니. 사용하는 무기 하나만큼은 관심이 갔다.

"더 할 말 없으면 가본다?"

그때 카밀라와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큰맘 먹고 호텔 라운지 통째로 빌렸단 말이야. 환불도 안 되는 거. 데이트라도 성공해야 한다니까, 진짜."

"나도 들어가 볼게요~ 대장~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시고~"

우리 예쁜이도 안녕.

록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줄행랑을 쳐버린 두 사람.

이제 남은 건 한 사람.

플레이어 랭킹 4위, 제시 하인네스 뿐이었다.

"...?"

록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제시 하인네스가 화면 속 사내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평소의 제시에게선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래, 불과 몇 시간 전.

균열에서 몬스터를 사냥할 때도 보이지 않던 초롱초롱한 눈빛이란 것이다.

록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뭔가 좀 알 것 같아, 제시?"

"...되게 신기하네."

"신기해?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신기한데?"

눈여겨볼 게 있단 말인가?

그 이유를 듣고 싶어서 물었건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제시에겐 대답할 정신이 없었으니까.

'저건 대체 무슨 스킬이지?'

클래스, 마법사.

가장 흔한 클래스 중 하나였지만, 제시는 특별했다.

같은 클래스의 플레이어 중.

오직 단 한 명만이 수행할 수 있다는 클래스 퀘스트.

제시는 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 중이었으니까.

그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하며 제시는 수많은 아르카나의 마법을 느끼고, 깨닫고, 습득하게 됐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뭔가 달라.'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는 것.

물론, 자신도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효율은 굉장히 떨어졌다.

마력의 소모량은 커지고, 효과는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 속 남자는....

'그런 게 전혀 없잖아!'

아니지. 반대일 수도 있었다.

효율이 떨어졌는데도, 저 정도 효과를 내는 거라면?

대체 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걸까?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제시의 눈빛.

그건 록스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였다.

"...?!"

그 순간.

화면의 자막으로 사내에 관한 기사 한 줄이 스쳐 지나갔다.

[의문의 플레이어, "격식 떨어져… 질문은 받지 않겠다."]

...정말 저런 소릴 했다고?

록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 잘난 맛에 살기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록스였지만.

그조차도 저런 건방진 발언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뭐 하는 미친놈이지?'

샤이닝의 승리와 자신의 400레벨 달성이 묻힌 것도 모자라.

그 제시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거기에다 자신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성격까지.

믿기지 않는 포인트가 한두 개가 아니란 말이었다.

.

.

.

그래, 충격적인 데뷔였다.

의문의 플레이어, 호열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실화냐ㅋㅋ마법 스케일 한 번 지리네

-님들 7:10부터 가만히 서있는 거 보셈ㅋㅋ

-눈빛 봐ㄷㄷ지켜보는 내가 다 떨림ㄷㄷ

무엇보다 큰 화제가 된 건 호열의 행동이었다.

그런 호열의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자, 여기서 보시면 정말 비무장 상태입니다."

"정말 롱코트 안에도 정장 차림이네요?"

"손가락이나 목, 귀를 봐도 장신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맨몸으로 저런 마법을 썼단 말씀이시죠?"

"저게 말이 되는 겁니까? 박남봉 전문가님?"

허름한 방어구가 격식에 맞지 않았기에.

장신구는 그저 없기에 착용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전황을 보는 눈 또한 굉장히 뛰어납니다. 적들의 기동력이 문제가 된다는 걸 파악하고, 곧바로 지형을 바꿔버렸으니까요."

"다시 보니 조금만 늦었어도 아찔했네요."

"빠른 판단이 가온과 이나즈마를 살린 거나 다름없습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생각 또한 없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까지 끌고 올 정도로.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

"그것도 모자라서 여기. 여기서부턴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습니까? 이건 틀림없이 배려일 겁니다. 가온과 이나즈마. 어디 한번 제대로 겨뤄봐라. 그런 느낌인 거죠."

"배려요? 그 균열에서 배려요?"

"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건."

배려가 아니라 마력이 바닥난 것뿐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당사자인 호열밖에 없었다.

보는 눈이 특출난 랭커라 해도 다를 건 없었다.

길드, 버서커의 베이스캠프.

휘릭─

레오니가 덮고 있던 담요를 허공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야씨! 너희 내가 말했지?! 저거 보통 아니라고 했잖아?!"

"언니. 알겠어. 진정하고 이불 덮어. 그러다 감기 걸린다?"

"근데 이것들은 뭐? 내가 보는 눈이 없어? 콱씨. 진짜 다 뒤집어엎을까?"

길드, 이나즈마.

"그 은발 머리가 한국인일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야 하네."

"히사기 카즈마. 결단코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가온의 남씨 형제까지.

"진짜 멱살을 잡아서라도 날 설득시켰어야지."

"후우─ 그래, 내 실책이다. 저런 포텐을 못 알아보다니."

"...근데 다시 봐도 격식이 없긴 없었다, 그치?"

"그러게. 이건 뭐 인터뷰가 아니라 시장바닥이었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거 보니까 많이 참았구나. 난 괜히 또 오해할 뻔했네. 격식 없다는 게 내가 바바리안이라서 그런 소리 하는 줄 알았잖아."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라."

"뭐? 형까지 그러기야?!"

눈썹이 떨린 것 또한 마력 탈진의 후유증이었지만....

그조차도 알아차릴 수 없는 일이겠지.

어쨌거나 호열에 대한 관심은 한동안 식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어떤 채널을 돌려도 의문의 플레이어, 호열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야말로.

악마가 움직이기에 가장 좋은 때였다.

[백작가의 성채]

[적정 레벨 : Lv.400~450]

[붕괴 진행도 : 100%]

"...뭐, 뭐야? 방금까지 분명 90퍼센트였는데?!"

"다, 다들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욧!!"

붕괴도 100퍼센트.

균열이 무너지고 현실에 성이 생겨났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

그가 러시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붕괴였다.

곧바로 화면이 전환되고 앵커가 속보를 전했다.

신규 균열이 업데이트됐을 때.

가장 우려했던 일이 실현된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길드들이 속속들이 성채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지체하지 않고 성채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밝혀...."

그러나 호열은 이러한 전개 또한 예상하고 있었다.

-흡혈귀는 피를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눠줄 수 있다. 물론, 나눠줬던 능력을 다시 거둬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끝까지 방심하지 마라.

그러니까 방심은 없었다.

땀에 젖은 신체.

다시금 수북하게 쌓인 테이블 위의 종이 뭉치들.

더 나아가 상태창까지.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100]

[능력치]

근력 : 27 / 민첩 : 33 / 마력 : 51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0]

그 증거가 곳곳에 남아있었다.

고고한 채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백조는 한순간도 다리를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경야독.

나는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노력했다.

내겐 무려 12년의 공백이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야 상식이니까. 공성전에서 수비 측이 유리하다는 것쯤은.

...게다가 이건 심리적으로도 위축될 수밖에 없겠는데?

아스큐라 백작가의 성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크기였다.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큰일 나겠는데?"

"먼저 정찰대를 투입하는 게 어떨까요?"

"...아니, 본대를 나눌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 성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마치 칩입자는 언제나 환영이라는 것처럼.

덕분에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그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또각─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웅장함에 압도되지 않았느냐고?

다행인가, 유감인가, 그럴 일은 없었다.

그야 내 흑역사 속 클라우디 가문의 저택은 말이야.

이따위 성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광활했거든.

나는 성채의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비좁아 숨을 곳조차 마땅치 않겠군. 아스큐라."

더없이 자신감에 찬 투로 덧붙였다.

"허나 네게는 이조차도 과분하다."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가.

우드드득─

정원에 놓인 조각상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다. 적어도 10미터는 된다, 이거.

그 거대한 괴수 조각상이 살아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뛰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꼿꼿하게 멈춰선 채.

조각상의 면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런 내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재료도, 질감도, 깊이도, 그 형태도 형편없는 조각상이다. 이런 쓰레기 같은 조각상도 자랑거리라고 잘도 정원에 놔뒀군."

그랑펠의 까다로운 심미안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동감이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어도 '재료' 하나만큼은 말이야.

'내가 세우고 부순 벽하고 기둥이 몇 갠데.'

바위를 조각한 석상(石像).

그건 내게도 더없이 흔한 재료였으니까.

『탐색』과 『간섭』에 별다른 수고가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콰직─!

◈ 18화. 격이 떨어지는군 (2)

『발현』.

나는 석상의 형태를 변형시켰다.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근육질의 다리를 가늘게.

쿠드드득─!

그러자 석상이 균형을 잃고는 무릎을 꿇었다.

모든 건 석상이 몬스터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냐고?

그거야 업데이트 내역에서 확인했었으니까.

──────

신규 균열, '백작가의 성채'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 '아스큐라 백작' : Lv.430

──────

백작가의 성채.

출현하는 몬스터는 오직 아스큐라 백작 하나뿐.

그렇다면 직접적인 간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판단이 적중한 것이었다.

몬스터가 아니란 건 동시에 악마족도 아니라는 것.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탓.

마력 소모가 조금 있었지만, 뭐 괜찮았다.

"방금 무슨 소리가...?! 헤엑?!"

"...다들 봤어? 저 괴물을 단번에!!"

"다들 움직여!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야!"

꼭 내가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들은 많았거든.

내가 정문으로 들어간 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문지기 역할을 하던 석상을 쓰러트린 것이 쐐기를 박았고.

플레이어들이 밀물처럼 성,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또각─

무엇보다 내겐 확실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혼자서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리겠다?

그거야말로 오만이었다.

레벨만 놓고 봐도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100레벨 VS 430레벨

그러나 내겐 [구마의식]이란 카드가 있었다.

구마의식의 제물이 될 악마의 아이템도 제대로 챙겨온 참이었고.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구마의식을 통해 아스큐라 백작이 조금이라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그 뒤 나머지 과정이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맡기는 거지.'

어느 정도의 기여도는 인정될 테니까.

경험치를 얻는 건 물론.

운이 좋다면 전리품까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걷는 게 어떨까, 내 다리야?

근거에 기반을 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건만...!

내겐 그보다 더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마치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 내부를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따위 초상화를 보고도 식사가 넘어가는가? 비위도 좋군. 아스큐라."

문득, 나는 거대한 식탁에 이르러선 혹평을 쏟아냈다.

그 맞은편 벽면에 걸린 초상화.

그건 아스큐라 백작의 모습 같았다.

...너무 사실적으로 그린 거 아닌가?

피골이 상접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붉은 눈이며, 튀어나온 송곳니며.

그림 속 아스큐라의 모습은 흡혈귀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음산한 성의 분위기가 초상화를 더욱 무섭게 보이게 했다.

물론, 나는 그 초상화조차 심미안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부적인 묘사와 명암 표현이 서투르다. 화가의 그림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군."

...어째 남의 집에 들어와서 독설만 뱉는 것 같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싸가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혼자 활동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조각상과 마찬가지로 불합격이다."

또각─

*

아스큐라 백작의 성채.

역시, 만만하게 볼 균열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이들.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버프가 걸려있는데도 이 정도 압박감이라니."

"안 그러게 생겼어? 하나하나가 전부 기분 나쁜데."

엄살이 아니었다.

실제로 플레이어들은 성에 진입한 순간부터.

온갖 상태이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스큐라 백작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공포가 발생합니다.]

아스큐라 백작과 대면한 것도 아니었다.

곳곳에 걸린 아스큐라 백작의 초상화.

그저 초상화의 붉은 동공이 플레이어들을 지켜본 것뿐이었다.

"...찾았다!"

화르륵─!

그 초상화를 발견.

스킬로 태워버리자 그제야 조금 호흡이 편해졌다.

플레이어들은 혀를 내둘렀다.

"빌어먹을. 성, 내부, 모든 게 함정이야."

"그냥 공포스러운 연출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레벨 값한다 이건가? 까다롭네. 진짜."

그랬다.

단순한 연출이 아니었다.

조각상.

초상화.

하다못해 책장에 꽂힌 책, 한 권까지.

"...뭐야? '인간 요리'? 제목이 뭐 이래?"

"야! 그거 만지지 마!!"

"...?!"

그 모든 게.

플레이어들에게 상태이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길드, 가온.

남태민에게 분석이 전달됐다.

-그러니까 성 내부의 모든 게 함정이라는 거지.

"악랄하다, 정말. 악의가 느껴져."

-괜히 흡혈귀의 성이겠어.

남태민은 그간의 경험을 되돌아봤다.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을 포함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콘셉트는 새로웠다.

"옛날 같았으면 되게 좋아했을 텐데 말이야."

까다로운 만큼 공략하는 맛이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공략 실패는 더 이상 로그아웃이 아닌 사망이었으니까.

그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했다.

작은 숨소리에 담긴 고뇌를 알아차린 것일까.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법이 없는 걸 너무 답답하게 생각하지 말고.

"...뭔 소리래? 갑자기."

-보나 마나 또 자책하고 있겠구나, 싶어서. 그러지 말라고.

남태민의 클래스는 바바리안.

[광폭화]가 발동됐을 때를 제외하면 상태이상에 대한 저항력이 낮았다.

전사 계열 클래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힐러들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도움은커녕 부담이 되다니.

남태민의 우려는 떨쳐낼 수 없는 것이었다.

-맡은 역할이 서로 다를 뿐이니까. 다들 이해하고 있는데 말이야. 너 혼자 앞서나가서 괜히 오버하지 말라는 거지. 그래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역시 피는 속일 수가 없다.

남태민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뭐, 그렇게 잘 알아? 누가 보면 경험담인 줄 알겠네."

마찬가지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척하면 척이구나?

"...척하면 척? 뭐야, 진짜 경험담이야?"

-글쎄? 어쨌든 인생 선배로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그때였다.

별안간 앞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길드인가? 싶었는데, 인기척은 하나였다.

"누구지?"

호크아이.

길드원 하나가 향상된 시력으로 그 인기척의 주인을 파악했다.

"아스큐라 백작은 아닌 것 같고.... 여잔데요? 금발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잠깐만, 엄청나게 예쁜데요?! 그게 모자를 눌러써서 하관만 보이는데. 하관만 봐도 미인이라는 뜻...?! 아야, 왜 때려?!"

후우─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태민이 어이가 없어 고개를 내젓기도 잠깐.

귓가에서 남철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라고 했지?

당연하다는 듯한 말이 이어졌다.

-적정 레벨, 400~450. 그것도 모자라 가는 곳마다 상태이상이 터지는 이 성을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플레이어가 누가 있겠어? 한 사람밖에 없지.

남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한 명밖에 없겠지."

마법사, 그 이상의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

그녀가 확실했다.

*

나의 신랄한 평가는 계속됐다.

"구조 또한 고민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았군."

누가 보면 부동산 구경하러 온 줄 알겠어.

지금은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내가 지나온 성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입구 → 정원 → 복도 → 연회장 → 서재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계단.

이곳까지 진행해 오며 딱히 문제가 된 것은 없었다.

딱히 이상했던 것도 없었다.

아, 굳이 꼽아보자면 한 가지 있긴 했다.

아스큐라 백작의 초상화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

그 덕분에 쉴 새 없이 독설을 날렸다는 것 정도였다.

구조로 볼 때.

위층으로 계단은 이것 하나뿐이겠지.

반대편 길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스큐라 백작이 등장했으면 어떤 식으로든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그렇다면 아스큐라 백작은 2층에서 출현할 확률이 높았다.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 또한 불합격이다."

나보다 먼저 2층에 진입한 플레이어는 없는 것 같았다.

이 계단을 발견한 플레이어도 없었다.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걸음이 워낙 빨랐거든.

자신감이 넘치게.

올곧게 다리를 뻗으며 걸은 덕분이겠지.

내가 그 한결같은 걸음으로 계단에 다가가던 때였다.

"어!"

가냘픈 외마디의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커다란 고깔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고깔모자를 눌러쓴 여자였다.

내가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뭐냐. 이 속도는.

다리에 날개라도 달렸나, 싶어서 확인했건만.

나는 더욱 놀라고 말았다.

'...공중부양.'

다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구는 마력을 아끼려 과학까지 들먹이는데...!'

누구는 마력을 저렇게 물 쓰듯 쓰고 있다니.

마력의 빈부격차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색은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고깔모자가 올려다보았다.

...저래서야 보이기나 할까, 생각하던 찰나.

모자가 뒤로 젖혀지고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금발.

초록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본 것 같은 얼굴이란 건 아마도 굉장히 유명한 플레이어란 소리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덜 쓰라려졌다.

그래, 저런 공중부양을 개나 소나 쓸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저 봤어요!"

"?"

"당신, 되게 신기한 마법!"

그녀는 다짜고짜 내게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되게 신기한 마법' 씨인 줄 알겠다.

허나, 반짝거리는 동공을 보아하니.

악의는 없는 진심 같았다.

"그건 대체 무슨 스킬이었어요? 저도 처음 보는 스킬이었거든요! 저 수십 번씩이나 그 영상을 돌려봤거든요! 그런데도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모르는 마법 계열 스킬은 여태까지 없었는데!"

그런 소리였구나.

수십 번이나 돌려봤다는 영상은 광장 전투를 말하는 거겠지.

그곳에서 내가 사용한 마법이라면 벽과 기둥을 세우는 아주 간단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야 그건 『마법』이지, [스킬]이 아니었으니까.

"저,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불쑥─!

나는 내게 들이대는 얼굴을 바라봤다.

순수한 호기심에 우러나온 행동이겠지.

그녀가 알아듣고 말고를 떠나 옛날 같았으면 대답해 줬을지도 모르겠군. 그 매력적인 외모에 홀려서라도 말이야.

"그 신기한 마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예절을 갖추는 것."

"...네? 예절?"

"그것이 배우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나는 기어코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격 미달. 불합격이다."

"헉...."

느낌표가 물음표로.

또 마침표로 바뀌었다고 하면 표현이 될까?

그녀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대학에 불합격해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지 않을까.

찰나지만 차디찬 침묵이 흐르기도 잠깐.

문득, 내 시야에 글자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백작가의 성채.

등장하는 유일한 몬스터, 아스큐라 백작.

녀석이 출현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곳에 아스큐라 백작이 있었다.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흡혈귀였다.

"아스큐라."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대꾸했다.

"아스큐라 '백작'이다. 연약한 인간이여."

그 숨결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저 송곳니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일까.

그 농도가 굉장히 짙었다.

꽉─

넋이 나갔던 여자도 고깔모자를 눌러쓰고 지팡이를 다잡을 정도였다.

그러나 같은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웃고 말았다.

"백작? 그 농담은 합격이다. 아스큐라."

"...농담? 분명히 말했다. 나는 아스큐라 '백작'...!!"

"아니. 너는 귀족이 아니다."

[피의 저주가 깃든 목걸이].

나는 악마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추악한 저주를 권능이라 속이는 것. 그러한 저주 또한 자신의 권능이랍시고 나누어 주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 더 나아가 품격이라곤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성 안의 모든 장식들까지."

"...뭐라고?"

"네게는 귀족으로서의 긍지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스큐라. 그런데...."

나는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어째서 추악한 흡혈귀가 아직까지 귀족을 자칭하는 거지?"

그 도발이 신호탄이었다.

"닥쳐라!! 죽여버리겠다!! 버러지 같은 인간!!"

['피의 저주가 깃든 목걸이'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 19화. 격이 떨어지는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