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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8화. 수업 (3)

사라진 탑주가 날뛰고 있다.

호열과 마르셀로.

두 수석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움직였다.

그럼에도 원로 유그위드를 비롯한 마탑의 선임들이 전원 출탑한 이유는 간단했다. 탑주야말로 마법의 정점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으니까.

호열이 서클을 형성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

그에 반해 탑주가 서클을 형성한 시점은 아득한 과거였다.

때문에 유그위드는 판단한 것이었다.

설령, 기이의 존재가 된 호열이라고 한들.

경험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으리라고.

물론, 크나큰 오산이었지만.

뱅그릿이 말을 더듬었다.

"지, 지나치게 일방적이에요!"

호열은 일방적으로 탑주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마치 '격'이 다르다는 것처럼.

탑주가 어떤 초고위 마법을 발현해도.

호열에게선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그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오늘만 몇 번을 놀라는지 모르겠군요."

이래서야 정말 노파심이 돼버리지 않았는가?

마법사의 결투는 검과 방패를 들고 싸우는 전사의 싸움과 다르다. 막상막하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력에서 비롯되는 마법이다. 더 강한 마법이 약한 마법을 집어삼키듯 승부가 갈린다는 뜻이다.

"역시, 탑주님. 저 정도의 화염마법을...!"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그런 마법의 성질을 무엇보다 잘 드러내는 마법 중 하나가 바로 화염마법이었다.

벤쉬가 화룡, 카림제바와 맞서길 꺼렸던 이유가 바로 화염이 더 큰 화염에 편승하는 성질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수석님이시라면.'

카림제바를 제압했던 호열이라면.

화염마법에 맞서 화염마법을 발현하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빙결마법이라뇨?!"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역상성으로 타, 탑주님을 제압하다니?"

한 번이 아니었다.

탑주가 특정 마법을 발현할 때마다.

호열은 오히려 그 마법에 역상성인 마법을 발현해 되받아쳤다.

그 광경은 마치....

정령학 선임, 페이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친절하게 알려주시는 모습 같지 않나요?"

"알려주다니, 무엇을요? 페이얀, 선임?"

"알고 있는 상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처럼요."

"...!!!"

그랬다.

마법을 발현하는 호열은 정말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리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들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마티스는 알고 있었다.

호열의 재능은 단순한 마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범접할 수 없는 적합한 마력.

흑마법에 관한 호열의 재능은 분명 마법적 재능.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마티스 선임?"

"이 순간에도 이 수석께서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진심인가요?"

"제가 농담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왜, 현실에 그런 말이 있다.

극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다르지 않다고.

그 말을 여기에다가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구나.

극도로 발달한 마법.

그 파괴력만큼은 기이와 다르지 않다!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마법 발현력이다.

같은 서클이라고 해도, 그 서클을 체화한 시간이 다르다는 거겠지. 내 마법 발현력이 서클의 효과로 1,000퍼센트 상승했다면, 탑주는 적어도 2,000퍼센트 출력으로 마법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다, 호열아.

'마법에서 격을 맞춰둬서 망정이지.'

비약초의 육성법에서 시작해서 영약을 키워내고 강제로 서클을 형성한 것까지. 그 개고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기이로도 저 무지막지한 초고위 마법을 되받아치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정해진 길이 꼭 답이란 법은 없다."

진짜로 수업하듯 말하지 말아줄래, 그랑펠?

나는 폭주한 탑주의 육체가 쏟아내는 초고위 마법을 모조리 무력화시키면서도, 재잘재잘 입을 열고 있었다. 애초에 탑주는 의식도 없는 상태인데 왜 말을 거는 건데.

"마법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저쪽엔 안 들린다니까?

"마법의 상성? 한계에 자신을 가두지 마라."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그런 명언 비슷한 말을 쏟아낸다.

정말로 말은 그럴싸하게 들린다.

'아르카나인들은 내가 지어낸 말로 속을지도 몰라.'

왜, 나는 탑주의 마법을 다방면으로 받아치면서 뱉은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인가, 제시의 동공에서도 느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계에 자신을 가두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제발.

세상이 모를지라도.

지껄이고 있는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내가 발현 중인 기이가 얼마나 단순한지를!

마법에 그냥 기초 과학 수준을 더한 것뿐이라니까?

그냥 인터넷에 검색해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과학 개념 몇 가지를 덧붙인 거란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건 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하긴 나도 그랑펠의 설정이 없었다면 마법의 구조는 개뿔.

마법이 스킬과 다르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근데, 아무리 뻔뻔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이런 걸로 우쭐대고 싶진 않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절규가 표출될 리가 있나.

입에선 더욱더 태연한 말이 튀어나온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당연히 대답은 없다.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의 뜻으로 알아듣겠다."

정말 한마디, 한마디 지껄일 때마다 수치심에 고통스러워지는구나. 하지만 이 뻔뻔함이 나의 수치심을 고려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나는 재킷을 펄럭이며 말을 이었다.

"수업을 재개하지."

.

.

.

마르셀로는 호열을 바라봤다.

과연, 경은 나날이 발전하시는군요.

특히나 기이에 관해서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마르셀로는 마법 못지않게 이 세계의 과학을 탐구했다.

그러나 새로운 개념을 간섭 과정에 더하는 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선 더더욱.

호열에서 탑주로 옮겨가는 시선.

압도적.

탑주에게 승산은 없었다.

탑주,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출혈량이 심상치 않다.'

탑주는 몸이 버티지 못할 수준까지.

마구잡이로 초고위 마법을 발현하고 있었다.

마르셀로는 이를 악물었다.

'각오는 됐습니다, 경.'

탑주께서 어째서 저러시는 것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물어도 대답조차 하시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명백하게 위험했다.

당장만 하더라도 호열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모험가들의 세계는 탑주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반파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마탑이 호열에게 진 신세를 생각하면.... 설령 호열이 움직이지 않았어도. 마탑이, 자신이 나서서 탑주를 저지했을 것이다.

탑주 못지않게 승부의 행방을 잘 알고 있는 건.

또 하나의 당사자 호열일 터.

그러나 어째서인가.

호열은 아까부터 승부에 결착을 짓지 않고 있었다.

탑주의 마음이 돌아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거늘.

호열은 자신이 뱉은 말을 오롯이 지키고 있었다.

"수업을 재개하지."

수업.

말 그대로.

탑주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것처럼.

그저 탑주의 마법을 받아칠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건 탑주가 눈을 뜨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려 왔던 자신조차 엄두 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르셀로는 탑주를 바라봤다.

그 외관은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동공뿐.

언제나 나른함이 깃들었던 눈빛이 더없이 공허했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당신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머리가 어수선했다.

그런 와중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습 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였다.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저분이 탑주님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셀로 수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시는 어째서 탑주가 대답이 없는지.

무차별적으로 마법을 쏟아붓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로서, 전대 대마법사인 탑주의 의식이 고깔모자에 깃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고뇌하는 마르셀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대의 말은."

마르셀로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탑주께서 전대 대마법사였다는 말입니까?"

제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셀로는 그제야 눈치챘다.

견습 마법사인 제시가 이런 공간에 있던 이유를.

그리고 떠올렸다.

탑주가 양피지에 남겼던 서신을.

"...그때부터 모든 게 계획된 것이었습니까?"

언제나 나른했던 그 얼굴.

낯빛 아래 숨겨진 목적이 있으셨던 거였군요.

하지만 어리석습니다, 탑주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니."

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고.

"그런 건 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호열을 지켜보며.

마르셀로는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까 탑주를 향해 소리칠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이것이 당신이 원한 결말이었습니까!"

탑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호열과 마법을 주고받을 뿐.

그럼에도 마르셀로는 목에 핏줄을 세우며 외쳤다.

"정말로 당신은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매 순간 후회했습니다. 어째서 당신께서 깨어있을 땐 나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했는지. 이제야 당신의 앞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탑주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저를 이런 식으로 기만하셨어야 했습니까!"

마르셀로의 외침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졌다.

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연이었지만.

마치 모든 게 대마법사인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 같았으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

마탑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중에서 벨리에는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마르셀로가 느낄 상실감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한결같은 건 오직 호열뿐이었다.

마르셀로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탑주와 쉴 새 없이 마법을 주고받는다.

무엇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탑주의 육체를.

정말로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그래, 누군가에게 그것은 미련하게.

또 누군가에겐 냉랭하게.

다른 누군가에겐 꺾이지 않는 긍지로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시스템이 바라보기엔 언제나와 같았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가장 험한 길을 걷게 되더라도.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숭고].

그런 숭고함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었다.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탑주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이런 마지막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늦었군."

호열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허나, 이제라도 깨달았다면 되었다."

.

.

.

그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됐잖아?

마법으로 비유하자면 탐색 과정부터 잘못됐다는 거야.

애초에 기이에 접근하는데, 목숨이 왜 필요한 건데?

무엇보다 그랑펠이 목숨을 담보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이들을 두고 보고 있을 것 같아? 그래, 대마법사 양반들. 그쪽을 말하는 거야.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탑주.

내가 그쪽의 계획에 얌전히 따를 거로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다.

나는 퀘스트 목표가 제시하는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의 존재를 알게 된 참이거든.

흩날리는 무수한 마력 입자들.

"...어라?"

그 마력의 입자들이 실이 되어 제시의 고깔모자를 휘감는다.

그래, 저 길이야말로 또 다른 길.

上에 도달한 [심미]가 제시하는 결말이다.

원래 배운 건 제때 써먹어야 잊어버리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제시의 고깔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툭─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고깔모자를 탐색한다.

육체와 의식을 강제로 분리하는 마법이라고 했겠다.

자연스레 고깔모자에 스며들었을 탑주의 마력흔을 헤아렸다.

마력흔에서 마법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네! 고개는 들지 못하지만, 듣고 있습니다!"

...너무 세게 고깔모자를 짚었나, 미안한 일이지만 사과를 건넬 새는 없었다. 절차에 따라서 그 당사자의 의견을 구하기도 빠듯했거든.

"그대에게서 스승을 돌려받아도 되겠는가."

"스승이라면, 탑주님의 의식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다."

곧바로 화답이 들려왔다.

"물론이죠! 그게 올바른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누가 가르쳤는지 예의 하나는 바르다.

두 당사자와 신속한 합의를 마쳤으니.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반전 마법을 발현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점멸했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실패)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많이 컸구나, 마르셀로 꼬마 수석."

"...!"

"그리고 거하게 신세를 졌군. 이호열 수석."

탑주의 의식이 육체로 돌아왔다는 것.

◈ 219화. 해프닝...?

AAU.

지부장들은 보고서를 넘겼다.

──────

공식 홈페이지.

긴급 업데이트 내역 업로드 이후.

01시 : 14분 : 58초 경과 시점.

──────

스륵─

──────

플레이어, 이호열.

미합중국 유타주에서 최초 목격.

대기권에 진입한 소행성 집단(미구현 스킬,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추정)을 다시금 우주로 되돌려 보냄. 이후, "소박한 소원들이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포탈을 발현.

이하, 목격자 목격담 첨부.

──────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어린이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니. 이거 그거잖아요?"

"맞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콘셉트 단계에 그쳤던 마법사 계열 클래스의 최종 스킬. 나 원 참, 그 스킬이 실존했다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인데...."

"한술 더 뜨셔서 되받아치기까지 하시다니."

"놀라기엔 이르죠. 다음 장으로 넘어가시죠."

스륵─

──────

남태평양 이스터 섬.

서쪽 해상에서 이상 현상 포착.

탑주가 발현한 마력 구름으로 추정.

이후, 대략 1시간가량 격한 마력 충돌 현상 발생.

──────

"마력이 충돌하던 그 시점부터. 아마도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는 탑주와 전투를 벌이고 계셨을 겁니다. 저 안갯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외부에서 포착된 관측 자료가 있긴 있습니다."

"주변 바다 일대가 증발했다가 다시금 얼어붙었다...? 잠깐만요. 저렇게 두꺼운 마력 구름을 뚫고, 저런 영향을 끼쳤다고요? 그럼, 저 안쪽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단 거죠?"

"불지옥과 얼음 지옥을 오갔겠죠."

"허."

지부장들이 혀를 내두르며 페이지를 넘긴다.

"마력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상황은 종료. 이후는 함께 시청하셨던 인터뷰 그대로입니다. 언제나처럼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께서 사건의 전말을 밝히셨죠."

모니터에 떠오른 인터뷰 영상.

-"탑주는 정신을 잃고 깨어난 상태였다."

"설마, 탑주가 그런 상태였을 줄이야."

"그보다 구체적인 사정을 밝히시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라면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분명 이것도 마탑 내부사정이셨을 텐데...."

"사건에 관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거겠죠. 수석으로서."

"원래 우리 같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 저 자신감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화면 속에서.

일말의 흔들림 없이 선언하는 호열의 모습.

-"허나, 이제 우려할 것은 없다."

"정말, 저렇게 든든한 말이 또 없군요."

"안심하면 안 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한 거에 경각심을 가져야지."

"그런데, 다들 그다음에 하신 말씀 이해하셨나요?"

"다음에 하신 말씀이요?"

"들어보세요."

-"이로써 수업은 끝난 참이니까."

난데없이 수업이 끝난 참이라니.

대체 무슨 수업을 말하는 걸까?

호열이 마지막에 남긴 말 한마디.

덕분에 세상의 관심은 다시금 호열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

-뭐긴 뭐임 참교육이겠지ㅋㅋㅋㅋㅋㅋㅋ

-이호열이 탑주를 참교육했다고???

-당연하지 그것밖에 더 있음??

-ㄹㅇ 제대로 밝혀진 건 두 사람 행적밖에 없긴 함

참교육이라니.

아주 그냥 거품기가 따로 없구나, 그랑펠...!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 서클을 형성하면서 기이의 위력 또한 급격하게 상승한 나였다. 덕분에 탑주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검성도 모자라서 이젠 탑주까지???

-이게 문무겸비가 아니면 뭐임ㅋㅋㅋㅋㅋ

-이러다가 다음엔 드래곤도 참교육하는 거 아님ㄷㄷ

그냥 담백하게.

사실만 늘어놓아도 과분한 기대가 쏟아졌거늘.

아무리 그래도 이건 거품이 심각하다...!

특히 마지막에 저 댓글.

뭐, 내가 드래곤을 참교육할 거라고?!

'얼마 전에도 말이야.'

사이렌의 축복으로 천운이 따르던 그날.

나는 [마안의 망원경]으로 살펴본 아르카나 대륙에서 목격했단 말이다.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의 무시무시함을! 드래곤, 그거는 그냥 체급이 다르다니까?

드래곤은 차원을 찢어.

내가 [미완성 쾌검술]을 완성하고, 검술로도 초월자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서 드래곤과 치고받고 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심각한데.

"세상이 소란스럽군."

달칵─

찻잔까지 기울여 가면서.

정말 남 이야기하듯 하는구나, 그랑펠.

허나, 그랑펠의 태도는 사실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소란스러운 건 나 때문이 아니니까.

순전 탑주, 그쪽 때문이었지.

나는 찻잔을 말끔하게 비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만 고생할 생각은 없거든.'

자, 이제 뒤끝을 갚아줄 시간이다.

.

.

.

마탑의 최상층.

"...."

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상할 순 있었다.

나, 지금 엄청나게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그럴 수밖에 없다.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웬 고양이 한 마리였으니까.

샥샥─

혓바닥 내밀고는 앞발 솜뭉치를 열심히도 핥는다.

이제서야 내 차가운 시선을 알아차렸나.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나오는 건 야옹─ 소리가 아닌 사람의 말이다.

"누구 덕분에 육체가 작살이 나서 말이네. 회복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잠깐 형태를 바꾸었지. 온종일 늘어져 있기에 이보다 적합한 형태도 없거든."

나도, 그랑펠도 답하지 않았다.

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내게도, 그랑펠에게도 고양이의 귀여움은 통하지 않는다.

덕분에 내 태도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탑주, 그대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다."

역시나 존댓말은 과감하게 생략.

다행히도 탑주는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않았다.

하여튼, 누구처럼 꼰대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대답이라, 마땅히 해드려야겠지. 그런 의미에선 입이 고양이가 되었어도 할 말이 없군. 그대도 짐작했다시피 나의 계획은 보란 듯이 실패해 버렸으니 말일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과연, 마르셀로에게 듣던 그대로네.

언행이 제멋대로다.

물론, 이쪽도 제멋대로인 걸로는 뒤지지 않지만.

"비약적인 간섭 과정이었다."

이거 봐라.

다짜고짜 잘못된 점부터 지적하는 거.

나는 탑주 상대로 사전 검증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성공적인 발현에 다다르고 싶었다면 탐색 대상에 보다 폭넓은 이해가 필요했다. 허나 무엇보다 가장 큰 실수는 육체에 남겨진 무의식을 간과한 것일 터."

탑주의 고양이 귀가 뾰족해졌다.

"...지독하게도 집요하구나. 한때, 잠깐이나마 그대에게 호기심을 가졌던 게 후회될 정도야. 그렇게 나의 치부를 철저히 들춰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가?"

물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말했잖아.

내가 마탑에 괜히 눈물 바람을 몰고 온 게 아니라니까.

"...빌어먹을 잔소리."

파바박─

탑주가 앞발로 한껏 솟은 귀를 털어내고 나서야 나의 훈수는 끝이 났다. 물론, 독설만 내뱉은 건 아니다. 칭찬할 부분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게 긍지였으니.

"그럼에도 메테오 스트라이크는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어깨너머로 제대로 배웠거든.

탑주의 육체가 발현했던 초고위 마법들을!

현시점에서 알차게 써먹을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발현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력 소모량이 극심하다는 걸.

탑주만 하더라도 반동으로 입에서 피를 뿜어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머릿속에 새겨놨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당장이 아니더라도 훗날 사용할 날이 올 터.

장담하건대.

내가 발현할 수 있는 마법 중.

메테오 스트라이크의 파괴력은 단연코 최강이었다.

'거기에 기이까지 더한다면?'

그 파괴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지 않을까.

탑주의 고양이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것 참으로 위로가 되는 칭찬이군, 이호열 수석. 육체에 남겨진 기억을 되돌아보니, 그대에게 유효하게 작용했던 마법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독설도 모자라서 이제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조리돌림이라니."

그러더니 진짜 고양이처럼 몸을 축 늘어트렸다.

"덕분에 피폐해진 의식이 더욱더 메말라 버렸다."

피폐해진 의식이라.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나는 탑주의 엄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의식의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탑주 또한 초월자였으니까.

『의식의 공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시공간의 사교장과 비슷한 의식의 공간이 분명.

고깔모자에도 존재할 테니까.

탑주가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대가를 치르고 있었지."

"대가라면."

"도대체 몇 대를 이어져 내려온 건지,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대마법사의 규율을 어긴 죗값이겠지. 추악한 계획을 저지하려던 게 죄라면 죄겠군. 그래."

추악한 계획이라.

마탑 퀘스트에 나와 있는.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말하는 건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탑주가 눈치껏 말을 이었거든.

"제자에게 텔레파시조차 보낼 수 없는 위기에 처했었지만.... 보다시피 이호열 수석, 그대 덕분에. 이렇게 고양이의 모습으로나마 살아남았을 수 있었군.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겠네."

누가 들으면 내가 고양이 몸에 의식을 되돌려놓은 줄 알겠다.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게 있었다.

그래서 대마법사들의 음모라는 게 정확히 뭔데?

"나의 치부를 비롯해서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의 구조까지 파악해 내는 이호열 수석, 그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추악한 계획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을 걸세."

탑주는 잔뜩 뜸을 들였다.

"부디 놀라지 말게. 대마법사, 그들은...."

솜방망이를 핥던 혓바닥도 멈추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악마와 목적이 일치하네."

악마라.

솔직하게.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아르카나 대륙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오직, 그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대마법사의 지식을 계승하며 새로운 그릇들을 세뇌시켜 왔지."

대마법사들이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의 멸망을 바랐는가?

이유까지는 알지 못해도 짐작하고 있었거든.

아르카나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대마법사, 당신들 같은 강자들이 멸망을 바랐으니까.

대륙은 악마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진 거겠지.

"짐작하고 있었다."

나의 담담한 대답에 탑주의 털이 곤두섰다.

"...짐작하고 있었다고?"

킁킁─

코를 찡긋거리더니 감탄사를 뱉는다.

"과연, 거짓말을 하는 냄새는 아니군. 이래서야 뜸을 들인 보람이 없구만, 이호열 수석. 은인인 그대에게 하나 정도는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아쉬워라."

도움을 주고 싶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탑주가 마탑에 복귀한 이상.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쪽에게 상당히 많은 일을 떠넘길 생각이었거든.

앞으로 내가 워낙 바쁘게 발버둥쳐야 해서 말이지.

물론, 당장 일을 떠넘기겠다는 건 아니다.

'요양 중인 사람을 너무 건드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슬슬 돌아갈까.

나는 발길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는 더 물어봐야겠군.

나의 반전 마법 덕분에.

탑주의 의식은 고깔모자에서 원래의 육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제시의 클래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이전에 그 불길한 고깔모자를 계속 쓰고 있어도 되는 건가.

탑주는 느긋하게 하품했다.

"무슨 걱정을 하는가 했더니만."

그러곤 다시금 자신의 솜방망이를 핥았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이호열 수석."

뜻 모를 말을 해왔다.

"그 늙은이들이 내 제자에게 한동안 말을 거는 일 따윈 없을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호열 수석, 그대의 기척을 느꼈으니까. 대체 어떤 미친 작자가 그대와 마주하고도 흑심을 품을 수 있겠는가?"

...잠깐만, 그 말은.

그거, 대마법사들이 나한테 쫄았다는 소리야?

뭐냐, 이쯤 되니까 슬슬 무서워진다.

나,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해진 건가?

.

.

.

쓸데없이 성실한 게 죄라면 죄다.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는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 말인즉.

밀린 서류를 처리하기 위해서 유스라 왕국.

집무실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과 조우했다.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용기사, 스칼.

집무실에 들어선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나이다, 이호열 경."

...이봐요, 스칼 씨.

당신은 왜 또 초면부터 말투가 그 모양이야?!

중세시대에서 방금 튀어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격식을 갖춘 인사는 또 대체 무엇이냔 말이냐. 하여튼, 그랑펠이 여러 사람 망쳐놓는구나.

속으로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용기사, 스칼이라면.

월드 퀘스트와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였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제로 산맥이 출현하고.

드래곤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금.

스칼과는 퀘스트의 퍼즐 조각을 맞춰볼 필요가 있겠지.

"자리에 앉지."

내 권유에 스칼은 곧장 자리에 착석했다.

그런데, 어째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차라도 한잔 나누려고 했는데.

그렇게 급하다면 어쩔 수 없지.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에노크는 전해왔다.

내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서.

스칼은 어제부터 황금 궁전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고.

'이게, 참 바람을 맞히려고 그런 건 아닌데.'

그렇지 않아도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스칼 입장에선 타이밍이 야속하다고 해야겠군.

괜히 내가 미안해져서 평소보다 너그럽게 말했다.

"용건을 말해도 좋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스칼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짐작했던 대로.

역시나,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그랬냐, 스칼?

아르카나 대륙에 누가 돌아왔다고?

위대애애애한 가문?

'그거 설마.'

에이.

아니.

...진짜로?!

◈ 220화. 내 두 눈으로

호령(號令).

호열이 아닌 호령이 맞다.

정확하게는 귀철이 제로 산맥을 호령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쥐고 휘두르는 귀철을.

마치 다른 집 검인 양 말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으하하! 좋다, 더 격하게 날뛰어 보거라. 야생이여!

내 검이라고 밝히기엔 심하게 부끄러웠으니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마디가 쏟아져 나온다.

마음 같아선 커뮤니티에 질문 글이라도 올려보고 싶어진다.

──────

Q. 원래 에고 장비는 전부 이렇게 말이 많나요?

──────

그럼 이런 답변이 올라오겠지.

──────

A. 에고 장비? 세상에 그딴 게 어딨음ㅋ

──────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거지.

귀철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어야지.

"끝까지 꺾이지 않았던 야성. 그대들은 충분히 명예로웠다."

이놈의 입!

보다시피 그랑펠과 귀철의 감성은 아주 그냥 천생연분 수준이었다. 덕분에 고통스러운 건 양쪽에서 시달리고 있는 나, 이호열뿐이라는 거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옛날보다는 나아졌지.'

플레이어로 막 각성했을 무렵.

고작 놀한테 예절 교육을 운운하던 때에 비하면야.

지금은 누구에게 이런 모습을 들켜도 둘러댈 명분이 있었다.

왜, 방금 처치한 몹만 하더라도 무려 700레벨짜리 몬스터였거든.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01]

[능력치]

근력 : 141 / 민첩 : 139 / 마력 : 517 /  행운 : 12 / 심미 : 上 / 집념 : 2

[보유 포인트 : 0]

추가된 하루의 일과.

제로 산맥에서 꾸준하게 몬스터를 사냥한 지도 나흘째였다. 덕분에 600레벨의 벽을 돌파하고, 1레벨이 추가로 상승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다.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얼마나 상승시켰는지.

그 점에 더욱 중점을 두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일단, 몬스터를 상대하며 되도록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밸런스 붕괴잖아?

서클의 효과로 발현력이 증폭된 마법이다. 이미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선 마법으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건 무의미하게 경험치만 채울 뿐이었으니까.

"무엇이든 효율이 중요한 법."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금과 같은 법이니까.

게다가 경험치야 아르카나 대륙, 퀴른베르크 기계탑에서 조달할 수 있다. 역시 유산이 최고다.

덕분에 이제부터 현실에서의 사냥은 단순하게 경험치를 획득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슥─

미완성 쾌검술을 가다듬는 노력은 물론.

석궁을 활용하는 사격술까지.

그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악마 사냥꾼답게.

근본적인 능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는 것.

'기이로 발전시킬 가능성도 있으니까.'

물론.

플레이어들이 알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육성 방식이다.

아주 그냥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답해주리라.

"때론 천천히 거닐어야 보이는 것이 있지."

아니, 그렇다고 낭만 넘치게 대답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 말이 더없이 옳다. 나의 주인이여.

넌 또 이런 말에 맞장구치지 마라, 귀철.

어쨌거나, 나는 나흘간의 가장 큰 성과를 불러냈다.

하이엘과 디엔드.

간만에 주어진 시간에 둘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거든.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이 주군의 부름에 답했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왜,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

무려 셋이나 되는 분신과 한데 마주한 나였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려 하지만 꾹 참아보자.

'일단, 디엔드는 기대했던 만큼.'

디엔드의 전력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강함을 짐작하고는 있었다.

첫 등장 때부터 정령학 선임 페이얀의 계약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긴장하게 하였던 어둠의 정령 디엔드였다. 못해도 상위 정령급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단 거지.

'하지만 하이엘은 간과하고 있었어.'

인정하겠다, 편견 때문이었다.

그야 나는 하이엘의 과거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간과했다. 하이엘이 포식자의 늪지대에서처럼 여전히 겉만 화려한 존재일 거라고.

'엘프를 멈춰 세울 수 있는 하이엘인데 말이야.'

그러나 하이엘은 엄연한 고유 정령이자 나와 함께 [첫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존재였다.

{자연} 능력이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다고 한들, 일반적인 몬스터들로서는 넘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 증거가 눈에 보였다.

짐승 타입 몬스터들이 전부 하이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녀석들이 온순한 게 아니었다.

호전성이라면 맹수도 치를 떨 초식 동물, [전쟁광 순록]도 섞여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도 교육한 거구나, 하이엘.'

누굴 닮아서 그런지, 일타강사라고 불러도 손색없겠구나.

그런 하이엘을 보고 있자니, 슬슬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째서 고깔모자 속 대마법사들이 나를 보고 잔뜩 움츠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나 할까?'

사실 당사자인 나도 새삼스럽게 놀랐거든.

첫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정령, 하이엘.

검성을 압도했던 귀철.

디엔드까지.

잔뜩 거품이 낀 나를 제쳐놓고 보더라도.

저 셋을 한 번에 다루는 이가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흠칫할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의미에선 더없이 든든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어야 했거늘.

이 순간, 나의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숲의 동물들에게 주군의 예절론을 설파했습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주접을 떠는 하이엘 때문에?

"저 또한 본받겠습니다, 주군."

그게 아니라면 그 유난을 보고 배우는 디엔드 때문에?

-과연...!

그것도 아니면 해괴한 풍경에도 감탄하는 귀철 때문에?

그래, 평상시라면.

이것만으로도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을 나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런 건 사소한 해프닝으로 만들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그렇다.

스칼이 내게 전해온 이야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위대한 가문'에 관한 소식 때문에.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노룡이 외쳤다.

아르카나 대륙에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노라고.

모든 드래곤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길 원한다.

─대륙으로 집결하는 드래곤을 목격하라. (선택)

스칼은 용기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내게 공유했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위대한 가문』

그 단어 위로 겹쳐 보이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왜, 세상에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서.

하필이면 '위대한' 가문인 건데?!

나는 최대한 냉정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클라우디.

그랑펠과 마찬가지로.

중2병에 시달리던 내가 설정한 가상의 가문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문이겠지.'

뭣보다 그 위대한 가문이 돌아왔다잖아?

'적어도 나는 과거를, 이름을 아직까지 잘 숨기고 있다고.'

애써 추스르는 속마음.

그럼에도 마냥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지금도 체감하고 있단 말이다.

좋은 걸 다 가져다가 붙인 그랑펠의 설정을!

'물론, 스케일이 다르긴 하지.'

보자....

어렴풋이 클라우디가(家)의 설정이 떠오른다.

그 시절, 삐딱하던 내가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정도.

쉽게 말해서.

그랑펠에 버금갈 정도로.

낯뜨거워지는 설정이 한가득이었지, 진심으로.

...정말로, 만에 하나.

그 설정들이 실현된다면?

혹시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클라우디가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장담하겠다.

적어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선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그런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아야겠지.

왜냐고?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나는 이 빌어먹을 이름을.

아르카나 대륙엔 물론.

현실에 밝힐 생각 따윈 절대 없으니까.

'특히 웬수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엔 진짜...!'

그러니까 나는 스칼에게 선언했었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

그런 뜻이 아니건만.

본의 아니게 뱉어버린 냉랭한 말.

스칼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부디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쪽은 목숨(수치사)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

AAU 유스라 지부가 창설된 이후.

각 지부들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지부장들뿐만 아닌 사원 사이의 교류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잦아졌다는 뜻.

윤수겸이 카메라에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야,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잘 지냈어, 톰? 카트리나도 여전하네."

"연락 한번 안 하다가 이제 와서 손 흔들기는."

"에이, 알잖아? 우리 보스가 누구인지."

"하긴 천하의 미스터 박 밑에서 죽어나가고 있겠지?"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CEO 레이먼 션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여러 의미에서 전설적인 인물.

그의 반골 기질이야 AAU가 코스모인 시절부터 전 지부에 자자했었다. 그런 박민재가 지부장으로, 윤수겸의 보스로 발령됐다는 소식에 조의를 표했던 톰과 카트리나였다.

"그래도 가끔은 부럽다니까?"

"미쳤어? 내가 부럽다고? 왜?"

"나름 가까울 거 아냐. 이호열 플레이어랑."

"나도 동감."

호열의 이름이 거론되자 카트리나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댔다.

자신들보다는 호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윤수겸이 아닌가.

카트리나가 의욕적으로 말을 이었다.

"접점이나 교류가 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뭐야? 대한민국 지부만이 알고 있는 이호열 유스라 총책임자님에 관한 정보는? 진짜 비밀엄수할게. 필요하다면 톰도 저기다 치워버릴게."

뭔가 했더니 그런 질문?

완전 헛물을 켜고 있다들.

윤수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희 긍지가 뭔지 알고 있니?"

"긍지? 알지. 이호열 총책임자님이 입에 달고 사시는 말."

"그래, 그런 분에게 특별 대우란 게 존재하겠어?"

"아...."

두 사람은 단번에 납득했다.

하긴 그동안 호열이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호열에게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겠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조차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공명정대한 호열이었으니까.

헛물을 켠 세 사람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옛날 추억을 되살려 보자는 거지?"

"맞아. 스토리 짜맞추던 그때 그 추억."

"초 쳐서 미안한데 말이야. 그게 의미가 있긴 한가?"

"톰, 제발. 미안할 거면 말을 꺼내지 마."

"카트리나, 쟤 옆구리 한 대만 때려 봐."

셋이서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냥 웃고 있을 순 없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까.

얻어맞은 옆구리를 매만지던 톰이 입을 열었다.

"우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시작하자고. 어쩌면 아르카나는 게임일 때부터 우리의 컨트롤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 전제를 깔고 가자는 거야."

"인정."

"오케이. 뭐, 정답은 레이먼만 알고 있겠지만."

매사에 비관적이지만 막상 하면 잘하는 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몇 개인지 덜컥, 겁이 난다는 거지. 왜, 악마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아르카나 대륙은 그래도 꽤 평화로웠잖아?"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제국 전쟁처럼 큰 사건들이 있긴 했다만, 이번 성전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게 뭔데, 톰?"

"핵심은 간단해."

그리고 예리했다.

"그 태평성대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기나긴 평화에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게 악마가 업데이트돼서 난장판이 된 게 아니란 거야?"

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제를 깔았잖아? 모든 게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설정 배경이 원래부터 존재했던 거라고. 최근만 하더라도 마탑이란 좋은 예가 있겠군."

"악마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건 설정 때문이 아니라...."

"탑주의 부재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모종의 사정이 있던 거다?"

"맞아. 그러니까...."

타닥─

톰이 키보드를 두들기자 올라오는 텍스트 한 줄.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평화가 깨진 데에도 이유가 있다."

.

.

.

시공간의 사교장.

흑색의 머리칼.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녘.

그곳에서 온 일출의 무사는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 애초에 아르카나 땅을 밟게 된 것도 '마계 지각 대변동' 덕분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는 알지 못했다.

"용감하구나. 그 이름을 언급하다니."

한 초월자의 말에 일출의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다니.

그동안 사교장에서 봐왔던.

무기력한 모습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그러나 일출의 무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설의 재림부터 대흉 토벌."

"심지어는 그대의 고향에 전해졌던 '그 사건'까지도."

"동쪽에서 온 무사여, 믿을 수 있겠나?"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엔 한 가문이 있었다는 걸."

"그렇다. 클라우디다."

"클라우디가 있었기에 대륙은 이제껏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클라우디가 사라졌기에 대륙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

말문이 막힐 정도로 충격적인 과거에.

◈ 221화. 그것은 어두운 역사

클라우디 가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인정한다면....

'납득이 된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에 펼쳐지고 있는 모든 사건을 설명할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목격하지 않았던가? 보란 듯 하늘을 활강하는 전설 속의 존재, 용(龍)무리를.

일출의 무사가 입을 열었다.

"...틀림없이 진실이겠지?"

그러자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모욕이군. 내가 그 이름을 거론하며 거짓을 더할 작자처럼 보이던가? 무지를 이해해 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네, 동녘의 무사여."

"그런 뜻은 아니었다. 단지...."

사교장에 정적이 맴돌았다.

'폭풍전야란 말인가.'

무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토록 사교장이 텅텅 비어버린 모습은 처음이다.

자신만 하더라도.

클라우디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꽤 긴 시간 사교장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간신히 눈앞의 초월자와 조우했다.

'그럴 만도 하겠군.'

클라우디를 둘러싼 과거사가 전부 사실이라면.

초월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나?"

"보기보다 호기심이 많군. 좋아, 들어보겠네."

"그런 위대한 가문이 어째서 자취를 감췄던 거지?"

초월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무지하기 짝이 없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야."

그러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그 질문엔 답변해 줄 수 없네. 내게는 그날을 거론할 자격도, 용기도 없으니까. 그러나 그대에게 한 가지 조언 정도는 해주지."

다짜고짜 조언이라니.

"방금 가졌던 의문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게나."

"...잊어버리라니, 어째서지?"

"그 호기심이 자네의 명줄을 앞당길 수도 있으니까."

의문을 가지는 것만으로 명줄을 앞당길 거라니.

이래서는 조언을 가장한 저주가 아닌가?

무사는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그러나 이내, 섬뜩한 말이 들려왔다.

"그대는 분명, 저주라고 생각했겠지?"

"...!"

과연, 초월자였다.

속마음을 꿰뚫어보다니.

역시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출의 무사는 착각하고 있었다.

초월자는 진심으로 무사의 무지를 안쓰럽게 여겼으니까.

그러니까 덧붙였다.

"동녘에도 저주란 개념이 있다면 딱히 설명은 하지 않겠네. 저주에 경계할 정도라면 그 위험성 또한 알고 있단 뜻일 테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관심을 끄라는 것이다."

무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저주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저주 혹은 흑마법.

그건 더없이 이질적인 힘이었다.

'끔찍한 경험이었다.'

일출의 무사, 자신 또한 저주에 당해 며칠 동안 목소리를 빼앗겼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덕분에 이어지는 초월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그것은 클라우디에 지고 만 헤아릴 수 없는 빚."

"...?"

"단지 엿보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저주에 시달리게 될 정도로. 아르카나의 어느 누구도 들추고 싶어 하지 않을 더없이 어두운 역사."

그렇다.

그것이 바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강자가 날뛰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런 클라우디가 아르카나에 돌아왔으니까.

그 어두운 역사를 클라우디, 스스로 들추기라도 하는 날에는....

"감히 누구도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테니까."

"...!!!"

*

칠죄종, 식탐.

칠죄종이란 이름은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칠죄종은 이제 자신을 포함해서 불과 다섯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지옥에 처박혀 버린 탐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질투의 행방은 묘연하기 그지없었다.

한쪽 팔이 잘린 채로 돌아다니던 것도 모자라서는.

이젠 대륙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식탐은 빠득 이를 갈았다.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머저리 같은 새끼."

"...?"

살기가 넘실거리는 혼잣말에 주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쑥대밭이 된 아르카나 대륙이다.

그런 대륙에서 운영 중인 주점이라면 그 수준은 말하지도 않아도 알만했다.

덜그덕─

삐걱─

덜그덕─

조악한 테이블에 깔린 냄새부터 지독한 싸구려 술.

가죽에 양념만 더했다고 하더라도 믿을 정도로 질긴 음식뿐.

손님들 또한 마찬가지다.

"술맛 떨어지게 지랄은."

"뭐, 동료가 어디서 뒈지기라도 했나? 으하하."

"거기, 닥치라고 새끼야.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피에 절은 검과 방어구.

피폐한 눈빛이 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한다.

버려진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남았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물론, 식탐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절대 있을 수 없다.'

무려 수십 년 전의 일.

돌아올 수 있었다면 진작 돌아왔을 것이다.

무언가를 잘못 알고서는 지껄인 말이었을 것이다.

식탐은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딴 개소리를 나더러 믿으라고?"

악(惡)에서 태어난 악, 그 자체.

당연하게도 타인의 말 따윈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토록 신경을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찬가지로.

개소리라고 여겼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단 거다.

악크샨의 부활.

개소리라 치부했던 소문.

하지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가.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식탐은 깨달았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식탐이 중얼거렸다.

"...돌아왔다면 누가 돌아왔다는 거지?"

그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미친 새끼가 내 목소리 안 들려?!"

"?"

"당장 꺼지라고, 이 새끼야! 니 새끼가 들어오자마자 술맛이 싹 달아났으니까. 아까부터 뭐라 뭐라 중얼거리질 않나. 악마라도 씌인 거냐? 엉?"

깨진 그릇.

식탐은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들을 바라봤다.

형편없는 음식이지만, 분명 자신의 식사였다.

시선을 옮겨 사내를 바라봤다.

"씐 게 아니라면?"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내가 악마라면 어찌하겠느냐고 묻는 거야."

"...!!!"

스릉─

감이라는 게 있다.

"역시, 악마 새끼였어!"

어떤 삶을 살아왔든 생사의 갈림길 하나만큼은 셀 수 없이 넘나들었던 사내들이었다. 식탐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곧장 알아차렸단 소리.

사내가 단검을 식탐의 목에 겨눈 채 으르렁거렸다.

"술맛이 달아난 이유가 있었어. 이 빌어먹을 새끼."

이내, 식탐을 둘러싸는 무리.

대략 스물이 훌쩍 넘어 보였다.

그러나 식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지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배를 채우긴 싫은데."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

와그작─

으드득─

우드득─

부서지고 깨지고 씹히는 소리.

"으으...."

주점의 주인장은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떨었다.

싸움을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

식탐의 손바닥으로 사내들이 빨려 들어갔다.

와드득─

그리고 끔찍한 소음만이 주점을 가득 채웠다.

손님의 호출이 들려왔다.

식탐이었다.

"주인장."

"...!"

"미안하지만 물 한 잔만 부탁하지."

어차피 저항할 힘 따윈 없었다.

사내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식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거,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적당히 시비를 걸어야지."

"죄송합니다. 조용히 하겠습니다."

"아, 그래 주겠나? 고맙네."

이런 주점에서 싸움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평상시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난장판이 된 주점을 정리하고, 수리비를 받아냈겠지만 사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악마가 있었으니까.

장정을 스물이나 집어삼킨 악마가.

"소문이 진짜든, 가짜든 유효한 해결책을 찾아야 해."

식탐은 사내가 공포에 떠는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간을 스무 명이나 집어삼킨 지금도.

머릿속은 여전히 클라우디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으니까.

고요해진 주점.

들려오는 건 공포로 뛰는 주인장의 심장 박동뿐.

덕분인가, 머릿속에 썩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서서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었어."

좋다.

미끼를 던지겠노라.

클라우디라면 반드시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그 미끼 역할엔 더없이 적합한 놈들이 있었다.

그래, 분수를 모르는 악마들 말이야.

마왕.

마계에서 태어난 잡종 주제에.

악(惡)의 왕을 자처하는 우스운 녀석들.

가미긴처럼 본래부터 존재했던 십좌(十座)의 마왕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었다.

아, 가미긴이 지옥에 떨어진 지금. 이제 진정한 마왕은 아홉밖에 남지 않았나.

"이거, 잘하면 여러모로 적합한 디너쇼가 될지도?"

좋아, 머뭇거려선 안 되겠지.

드래곤, 엘프, 초월자까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클라우디의 소식을 듣지 않았던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계산하지."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정말로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

주머니를 뒤지는 것처럼.

식탐은 아가리를 벌린 손바닥 속을 뒤졌다.

설령 금은보화라고 해도 그런 곳에서 나온 걸 받을 순 없었다.

이내, 식탐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여신이시여.'

이름 모를 악마에게서.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가 믿지도 않던 신을 찾던 그때였다.

문득, 식탐이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말이야."

"?!"

"술은 몰라도 음식 장사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내 뱃속에 있는 사내에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야. 저따위 음식을 입에 댔다면 그대를 먼저 집어삼켰을 것 같거든. 인간보다 맛없는 음식을 내놓은 죄로 말이지."

사악한 미소.

덜덜덜─

사내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고생하게, 주인장."

식탐이 완전히 주점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신의 보살핌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건 단순하게 악마의 변덕 때문이었다고.

*

하여튼 쉴 수 있는 날이 없구나.

나는 원탁회의를 마치자마자 집무실로 복귀했다.

원탁회의에서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원탁회의 이전에.

탑주가 나서서 자신이 벌였던 민폐에 관해 사과의 뜻을 밝혔었거든.

'...그거랑 별개로 묘하게 얄밉다.'

알다시피 원탁회의는 변화했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회의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마탑의 우두머리인 탑주가 빠져선 안 되는 법.

그런데, 설마 고양이의 모습으로 참석할 줄이야!

'아주 뻔뻔한 게 그랑펠 이상이야.'

견습, 숙련 마법사들이 탑주의 변신을 간파할 순 없었다.

하지만 탑주, 그쪽은 당사자잖아?

인간이면서 태연하게 고양이인 척하는 건 또 뭔데?

배를 만져도 가만히 있더니, 나중엔 아주 골골 소리까지 내더라?

'거, 팔자 좋으시네.'

누구는 방금까지 제로 산맥에서 사냥과 고뇌를 반복하다가 왔는데.

저렇게 태평하다니.

아무리 요양 중이라고 하더라도.

심보가 뒤틀리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위안거리를 찾자면....

'다음 주부터 정기 학회였나?'

나는 다짐했다.

이번 학회에선 탑주를 제대로 부려 먹겠노라고!

명분은 충분하다.

그랑펠의 긍지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게 있거든.

자리에 요구되는 책임.

높은 자리에 있다면 그 책임을 져야지, 우리 탑주님.

달칵─

물론, 나도 그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출탑 신청서.

보자, 찻잔을 내려놓고.

벤쉬의 출탑 신청서에 불합격을 휘갈기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본능에 따라 양피지로 시선이 옮겨갔다.

처음 보는 낯선 필체가 떠올라 있다.

나서기 좋아하는 이놈의 오지랖.

덕분에 마탑 전원의 출탑 신청서를 꼼꼼하게 살펴봤던 나였다.

그럼에도 낯선 필체라는 건 그 작자의 서신이라는 거겠지.

'탑주.'

크게 찍힌 도장이 필체의 주인을 확정 짓는다.

'뭔데, 이거.'

고양이 발바닥 직인.

그렇다.

확실히 탑주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왠, 직인?'

글씨를 썼으면 서명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뜬금없이 발바닥 도장은 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읽고 보니 확실히 직인이 필요한 사항이긴 했다.

그런데....

──────

현 탑주로서 차기 탑주로 이호열 수석, 그대를 추천하겠다.

──────

뭐어어어어?

나더러 탑주?

아니, 어딜 도망가려고 개수작이야!!

◈ 222화. 설명이 필요한가?

할짝─

혓바닥으로 솜뭉치를 핥는다.

탑주는 크리스탈 홀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원탁회의를 이렇게 바꾸어 놓을 줄이야.

굴러들어온 돌이기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건가.

"미야옹─"

그것은 흡족하다는 뜻이 담긴 울음이었다.

왜, 다른 건 다 떼어놓고 보더라도.

비로소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구나.

원형 구조의 크리스탈 홀에서 벌어지는 회의.

실로 원탁회의답다는 뜻이다.

"고양이?"

"혹시, 누가 데려오신 건가요?"

"아뇨! 입장할 때부터 앉아있더라고요."

"아이, 귀여워라. 이름이 뭐니?"

"클레, 지금 고양이에 한눈이 팔려있을 땐가요?"

본인더러 귀엽다?

폴리모프보다 못한 변신 마법조차 간파하지 못하는 견습, 숙련 마법사들이다. 귀엽다는 건 오히려 자신이 햇병아리들에게 해줄 말이었거늘.

"미야옹."

그래도 턱을 긁어주는 손길은 썩 나쁘지 않군.

결국, 탑주는 견습 마법사 플레이어의 무르팍에 자리 잡고 원탁회의를 지켜봤다.

모든 계급의 마법사가 한데 모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모험가까지 섞여 있다니.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저 모습도 마찬가지지.'

서로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선임들의 모습.

탑주는 골골 소리를 내며 생각했다.

이호열 수석, 아무리 보아도 그대가 나보다 낫군.

그러다가 문득, 킁킁 코를 찡긋거렸다.

'바쁜 모양이구나.'

제자, 제시의 냄새는 풍겨오지 않았다.

물론, 제시가 원탁회의에 참가했다고 한들.

먼저 다가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야 면목이 없지 않은가.

'못난 스승은 폐만 끼쳤으니.'

제시, 너라면.

분명 자신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었다고 자책을 했겠지.

모든 것은 나의 모자람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그러나 탑주는 제시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나은 스승을 찾아서 다행이구나.'

그래, 이호열 수석.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은 스승일 테니.

제시를 떠올리자 제시와 함께 있을 때가 생각났다.

그런 탑주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스마트폰.

툭툭─

탑주가 앞발로 플레이어의 손을 건드렸다.

"왜, 그래?"

"미야옹."

"놀아달라는 거야? 지금은 안 돼."

어차피 딴청을 피웠으면서 회의에 집중한 척하기는.

'이미 얼굴은 기억해 뒀다, 견습 마법사.'

내게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지 않으면 탑주의 권한으로 엄벌을 내리리라. 탑주의 치졸한 협박이 전해진 걸까. 플레이어가 스마트폰을 탑주에게 들이댔다.

"자, 이거라도 보고 있을래?"

화면에 떠오른 건 넷튜브 영상.

그 제목은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영상]으로.

어항 속 물고기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영상이었다.

탑주는 생각했다.

'과연, 흥미롭구나.'

...아니지, 이게 아니라.

'어디, 세상 소식을 확인해 볼까?'

고깔모자 속에서 제시의 감각을 공유했던 탑주다.

플레이어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에 관한 지식까지 섭렵한 마당에 스마트폰 조작쯤이야. 어깨너머로 보았다고 하더라도 숙지하고 있다.

꾹─

탑주가 발바닥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솜방망이를 따라 움직이는 화면.

그러던 중 탑주의 앞발이 멈췄다.

하늘을 수놓은 별똥별 무리.

'메테오 스트라이크.'

육체에 새겨졌던 기억에 왜곡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발현했던 거야.'

초고위 마법.

현시점에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발현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육체밖에 없었을 테니까.

꾹─

탑주는 그 영상에 발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이내.

"먀."

탄식했다.

자신의 몸이 이 꼴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런 초고위 마법을 10연속으로 발현하다니.

마력 탈진도 모자라서.

사망에 이르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폭주했었구나, 나의 육체는.

'무엇이 그리도 억울했던 게냐, 몸뚱아.'

하찮게 야옹거리기도 잠깐,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호열 수석은 어떻게 저걸 막아낸 거지?'

탑주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을 전부 되새겨 보았다.

그럼에도 마땅한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추락시킬 정도의 마법을 발현한다고 한들.

'하늘에서 그 잔해가 쏟아질 터.'

그게 바로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초고위 마법이자 종말을 불러오는 마법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그 해답이 이 영상에 담겨있다는 것이냐. 탑주가 극도로 집중해서 액정을 노려보았다.

"뭐야? 영상이 넘어갔네? 다시 틀어줄...."

"하악!"

"깜짝아! 알겠어. 안 만질게."

털까지 곤두세우며 그날의 전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

메테오 스트라이크가 하늘을 거슬러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탑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초초초고위 마법이란 말인가, 이호열 수석...?

*

마탑.

마르셀로의 집무실.

"역시, 제가 찾아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우려할 것 없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달칵─

나는 마르셀로가 내려놓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 잠긴 티백.

말할 것도 없이 녹차였다.

'여러 생각이 드는데.'

말하지 않아도 내 취향을 고려해 주는 것에 감사해야 하나?

그게 아니면 얼마나 녹차에 집착했길래.

마탑에서도 티백 녹차를 대접받는 사실에 민망해해야 하는 건가?

'...일단, 적시자.'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건 심적 안정이었으니까.

"향이 좋군."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마르셀로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고양이가, 탑주가 있었다.

탑주가 능청스럽게 말한다.

"우리 차기 탑주님께 직접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뭐래, 진짜!

내가 그놈의 차기 탑주 소리 때문에 심장이 철렁해서 달려왔구만.

게다가 찾아오긴 어딜 찾아오려고.

내가 괜히 마르셀로의 집무실을 빌린 줄 알아?

"유감이지만, 그런 친절은 사양하지."

나, 이호열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데에 큰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랑펠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데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그렇다.

옷매무새.

브로치의 각도에도 극도로 집착하는 그랑펠이다.

그런데, 고양이 털을 참을 수 있겠냐고.

심란한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르셀로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나저나 호열 경께서 차기 탑주라니. 저는 물론 찬성입니다만.... 갑자기 무슨 이유 때문이십니까? 앞으로 탑주님의 결정에 관해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이유를 묻는 건 좋은데.

당사자인 내 의견도 묻지 않은.

탑주의 독단적인 결정에 찬성부터 하지 말아주라, 마르셀로.

'그보다 이유나 좀 들어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탑주의 자리를 떠맡을 생각은 죽어도 없다.

수석의 무게.

심지어는 마르셀로랑 나눠 든 수석의 무게만 하더라도 무거워서 가라앉을 것 같단 말이다. 게다가 그랑펠의 오지랖이 어디 보통 오지랖이야?

'탑주의 무게를 짊어졌다간 나, 진짜 죽는다.'

그걸 떠나서도.

저 고양이가 얄미워서라도 탑주 자리를 떠맡을 생각 따윈 없다. 무단결근하다가 복귀하자마자 사직서라니. 대체 사회생활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나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덕분에 탑주는 느긋하게 운을 떼었다.

"나는 원탁회의 도중 알아차리고 말았네. 이호열 수석, 그대가 내 육체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막아냈는지를 말이야."

원탁회의 도중 그걸 알아차렸다고?

어떻게?

의문이 들어서 집중했더니만.

"스마트폰. 모험가들의 마도구를 통해서 말이지."

그거였구나.

어쩐지.

플레이어 무르팍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더라.

마르셀로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거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호열 경께서 분명, 그거 하나면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원하는 물건을 문 앞으로 소환하실 수 있다고 하셨죠."

내가?

언제?

하여튼 이놈의 입방정!

놀라서는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아, 로켓 배송.'

마탑에 로켓 배송을 요구할 때 그때가 분명하다.

이 또한 기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마탑에다가 배달 기사의 출입 허가를 받아냈었지.

"그렇다."

덕분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뻔뻔하게 대꾸.

그러고는 일단, 침묵을 지켰다.

이제부터는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진짜 탑주 자리를 떠맡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상사에게 불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나는 이어지는 탑주의 말을 더더욱 경청했다.

"이호열 수석, 그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다행인 건.

고양이의 몸으로는 아무리 무게를 잡아도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한껏 치솟은 꼬리가 탑주가 더없이 진심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대체 무엇이었나? 그 마법은."

"말씀 중에 실례지만, 그 마법이라면?"

마르셀로의 조심스러운 말에 탑주가 답했다.

"나의 육체가 발현했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하늘로 되돌려 보낼 수 있던 것이지? 마치 아무런 마법도 발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본래의 상태로 그대로. 설령, 기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마법이 있을 터."

더욱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끄럽게도 탑주인 나조차도 그대의 마법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없었네.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탑주의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호열 수석, 그대의 마법적 능력은 나를 아득히 넘어선 게 분명하니까."

...잠깐만, 그게 이유였어?

역시, 아무리 봐도 나한테 떠넘기려는 게 확실하다.

나는 내 입장에서 한마디라도 거들어 주려나, 싶어서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마르셀로 수석?

"반전 마법입니다."

"오호라, 반전 마법. 알고 있던 건가, 마르셀로?"

"그렇습니다. 저 또한 의문을 가졌으니까요."

부디 탑주와 진지하게 말을 섞지 마라, 마르셀로.

인정할 건 인정하는 나였지만.

오해는 제대로 바로잡아야겠지.

'기이라면 또 모를까.'

반전 마법은 그렇게 대단한 마법이 아니었으니까.

탐색 → 간섭 → 발현.

마법의 구조를 단순하게 역발현하는 것.

그게 반전 마법이었으니까.

"...네?"

마르셀로가 멍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져서인가.'

최근 들어 마르셀로의 다양한 표정을 보는 것 같은데....

이해하기가 힘들었나, 싶어서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친절하게 비유까지 덧붙였다.

"발현된 마법을 탐색. 마치 묶인 매듭을 차례로 풀어내듯. 간섭 과정을 역으로 수행하고 발현하면 그것이 바로 반전 마법이라는 것이다."

내가 설명했지만 참 명확하군.

그래, 묶인 매듭을 푸는 일련의 과정.

그것이 반전 마법에 들어가는 수고로움이었으니까.

물론, 남의 마법에 간섭하는 건 나한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간섭하는 건 서클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시도조차 못 해봤을걸?

그런데, 내 친절한 설명이 무색해지게도.

탑주는 코웃음을 뱉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이호열 수석?"

"그렇다."

그렇다니까요.

뭐, 대단한 게 있는 줄 아셨습니까?

그러니까 반전 마법을 핑계로 삼아서는.

얼렁뚱땅 탑주 자리를 떠넘길 생각은 그만두시죠.

"하하하. 경께서는 정말이지."

탑주만 코웃음을 뱉었다면 가뿐하게 무시했을 텐데.

마르셀로까지 웃고 있었다.

문득, 불안감이 느껴졌다.

'...나 뭐 말실수라도 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있는 걸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언제나처럼 당당히 고개를 세운 내게 탑주가 말했다.

"그랬군. 이제야 이해가 됐네. 그대에게는 메테오 스트라이크의 간섭 과정이 단순한 매듭처럼 보였던 거야. 그러니까 그걸 역순으로 발현할 수 있던 거였고."

"그렇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나, 싶었는데....

어째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었기에 그쯤에서 알아차렸다.

...혹시, 그 매듭을 푸는 게 정말로 거창하고 대단한 거였나?

탑주와 마르셀로.

두 사람의 마법적 재능은 마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가능할 줄 알았다.

왜냐니.

나부터도 그냥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알고 계십니까, 경? 저와 같은 범재들은 일반적인 간섭 과정에서도 꽤나 애를 먹습니다. 경께서는 매듭이라 표현하신 그 일련의 과정이 더없이 복잡한 난제 풀이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번엔 탑주가 마르셀로의 말을 거들었다.

"그런데, 그 간섭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파악하는 것도 모자라서는 발현까지 다다른다고? 정말로 찬란한 재능이 아닐 수 없군, 이호열 수석."

아무래도 반전 마법은.

날로 먹는 마법, 그 이상으로.

훨씬 대단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고맙군."

이런 분위기에서 우쭐거리지 마라, 그랑펠.

이러다가 정말로 나한테 탑주 자리를 떠넘기면 어쩌려고 그러냐.

물론, 너는 잘 해내겠지.

쏟아지는 과대평가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낼 테니까.

하지만 덕분에 고생하는 건 나란 말이다.

"탑주이기 전에 마법사로서 넘어갈 수 없는 일이군."

탑주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잇는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경."

마르셀로가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탑주로서 그대에게 정식으로 권유하겠네."

...아니, 잠깐만.

칭찬이 분명한데,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탑주의 꼬리가 살랑거림과 동시에.

시야가 점멸했으니까.

어허, 누구 마음대로 퀘스트를 들이미는 거냐니까?!

◈ 223화. 설명이 필요하다면 (1)

마탑.

흐르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저 사실 벌써 걱정이 앞서요...."

"이번엔 몇 명이나 눈물을 훔칠지."

"저는 그냥 이번 학회 포기하려고요. 자신이 없어요."

다가온 정기 학회의 중압감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달랐다.

숙련 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건 정기 학회가 아닌.

학회 이전에 거쳐야 하는 토파즈 홀 사전 검증이었으니까.

슥─

마탑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선은 자연스럽게 토파즈 홀을 향하게 된다.

숙련 마법사들은 그곳에서 들려왔던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그리고 발 없는 말엔 과장이 더해지는 법이었다.

"너희 그거 들었어?"

"뭘 들어?"

"아니, 마탑 괴담 말이야...!"

"괴담? 여기가 학교냐. 또 뭔 이상한 소릴 하려고."

"아니,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내가 확실히 들었다니까? 왜, 숙련 마법사님들이 하시는 말씀! 정기 학회만 가까워지면 저 토파즈 홀에서 처량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대."

햇병아리도 과할 정도.

플레이어들은 마탑의 모든 게 낯설었다. 더군다나 견습 마법사는 정기 학회와 큰 관련이 없었으니. 토파즈 홀에서 사전 검증이 이뤄지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덕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괴담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소문이 무색하게도.

괴담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었다.

부유 정원.

"...잠깐, 그 말 사실인가요?"

"헉헉, 물론입니다!"

가쁜 숨을 내뱉는 숙련 마법사, 린느.

마찬가지로 숙련 마법사인 지브릴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호열 수석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고요? 정말인가요?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저기. 지브릴 양, 잠깐 숨 좀 돌리고...."

"이건 중대 사항이에요, 린느!"

"사, 사실입니다! 방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지브릴이 린느를 추궁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브릴이 사전 검증 과정에 지레 겁먹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호열이기 때문이었다.

"제 상식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수석의 무게.

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이호열 수석님이셨다. 중대사가 끊이지 않는 바쁜 일정 중에도 무수한 출탑 신청서에 친히 서명을 해주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그런 이호혈 수석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

"분명, 이유가 있다는 뜻이에요."

지브릴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으시길래."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는 걸까요?

그런 지브릴과 별개로 몇몇 숙련 마법사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마탑에 눈물 바람을 몰고 왔던 이호열 수석이시다. 그런데 이번 사전 검증에 불참하신다니?

"우리 이거 기회 아니야...?"

"...나, 마음 바꿨어. 당장 검증 신청하고 온다."

"와씨, 깨질 각오하고 사전 검증 신청하길 잘했다."

그러나 크나큰 착각이었다.

호열이 자리를 비웠다는 건.

자신의 빈자리를 채울 안배를 준비해 뒀다는 뜻이었으니까.

토파즈 홀에선 눈물 바람이 아닌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탑 복도에 울리는 음울한 목소리.

"다음, 안단테 루스 숙련 마법사."

그렇다.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

같은 선임 마법사들(사실, 벤쉬 혼자만이다.)조차 두려워하는 그가.

호열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부디 그대는 나를 실망케 하지 말게나, 안탄테."

숙련 마법사들에겐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다....

*

모순.

지금 내 감정을 그보다 잘 표현할 단어도 없다.

"음."

반값 할인 중이라 구매한 녹차맛 쿠키.

그 쿠키의 맛이 괜찮은 듯싶으면서도.

흡족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수석의 업무 중 하나.

토파즈 홀 사전 검증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탑주가 건넨 퀘스트 덕분에 말이지.

"심히 아쉽군."

...그보다 주어를 똑바로 해라, 그랑펠.

누가 보면 내가 녹차 쿠키에 아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 거 아니야?

당연하게도 이 감정은 사전 검증을 향한 아쉬움이었다.

이놈의 책임감.

어쨌든, 이토록 막중한 수석의 업무다.

당연히 아무에게나 떠넘기지 않았다.

"그대라면 잘 감당하리라 믿는다."

나는 마티스에게 내 빈자리를 맡겼다.

마르셀로야 지금도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마르셀로 이전 유력한 수석 마법사 후보였던 마티스라면.

내 공백쯤이야 채우고도 남겠지.

-"경의 신뢰에 보답하겠습니다."

원래도 대외 활동을 잘 가지지 않는 마티스였거늘.

내 부탁에 생전 처음 사전 검증을 떠맡게 된 꼴이군.

그런 의미에서 마티스에겐 차 한잔 대접해야겠지.

나는 읊조렸다.

"마탑엔 여전히 불필요한 절차가 많구나."

아무리 퀘스트가 걸려있다고 한들.

그랑펠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남에게 자신의 짐을 떠맡길 위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티스에게 사전 검증을 부탁한 이유는 따로 있지 않았다.

마탑의 규율 때문이었다.

"이번만큼은 준수하지."

그래. 준수해야지 별수 있겠냐, 그랑펠.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정기 학회 참여자가 사전 검증까지 담당하는 건.

'그건 오지랖 수준을 넘어선 거라고.'

그나저나 정기 학회 참여라니.

진짜, 내 팔자야.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학파 창시]

고고한 마법적 성취를 이룩한 그대여.

정기 학회에서 그대의 성취를 증명하고.

새로운 마법의 창시를 알려라.

─정기 학회에서 '반전 마법'을 발표하라. (진행 중)

다짜고짜 고양이로 변했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탑주는 정말로 능글맞았다.

조삼모사를 아주 잘 써먹는다고나 할까.

학파 창시도 만만치 않게 꺼려지는 일인데.

'아무리 그래도 차기 탑주보다는 낫겠지....'

나도 모르게.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 팔자에 무슨 학회 발표냐고.

'그것도 정말 대단한 성취를 이룬 거면 또 몰라.'

반전 마법.

그건 말 그대로.

그냥 거꾸로 하니까 된 건데.

'무슨 학파를 창시하고 발표까지 하냐고....'

그러나 탑주는 물론이요.

마르셀로도 더없이 진심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마르셀로의 한껏 상기된 목소리.

-"규율에 따르면 탑주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성취를 증명해 마탑에 기여해야 합니다. 경의 반전 마법이라면 기여치를 채우고도 충분하겠지요. 그건 제가 창시한 이론마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의 마법이니 말입니다."

아니, 나는 승진 욕심 같은 거 조금도 없다니까 마르셀로?

심정 같아서는 이딴 퀘스트 따위 포기하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마르셀로의 말을 듣고 나자, 나도 모르게 혹하고 말았다.

'...기여치라.'

그거 [관계도]랑 [영향력]을 말하는 거겠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웬만하면 전부 최대치를 찍고 싶은 욕구.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나, 이호열의 물욕까지.

'최대치에 도달하고 [권한] 기능을 활성화하면....'

말 그대로 마탑을 주물럭거릴 수 있는 건가?

문득, 마탑에 발을 들였을 때의 각오가 떠오른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마탑에 쌓인 마도구를 마음대로 사용하겠노라.

다짐했었지, 아마.

물론, 이놈의 긍지가 사리사욕으로 마탑의 뿌리를 뽑는 걸 용납할 리가 없었지만.... 유스라에서도 그렇고, 뮤온에서도 그렇고 겪어봐서 알고 있잖아?

관계도와 영향력이 높아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걸.

'좋아, 해보자.'

사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은 것도 한참 전 일이었다.

문제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발표해야 한단 말인가?

'마르셀로, 심지어 탑주도 이해를 못 했는데.'

내가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정기 학회에 참석한 마법사들이 그걸 이해할 수 있겠냐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아는 그랑펠이라면 거기서 한술을 더 뜰 게 분명했으니.

"이보다 직관적인 마법도 없거늘."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되려 면박을 줄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지.

"허나, 이해하겠다."

더군다나 마탑은 과거의 폐쇄적인 마탑이 아니다.

이전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마법사로서 정기 학회에 참여할 터. 덕분에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플레이어들의 손가락을 타고 세계로 퍼져 나가겠지.

'...제발 낯뜨거운 짓만 하지 말자.'

그나저나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실상은 별거 없는 반전 마법이거늘.

그걸로 마탑에서 학파를 창시하게 되다니.

그 이름을 거품 학파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지금도 민망해질 지경인데.

스스슥─

이제부터는 그 거품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해야 했다.

드넓은 크리스탈 홀 청중 앞에서.

내 거품에, 금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깃털펜을 휘갈기며 침음을 삼켰다.

...녹차 쿠키가 유달리 씁쓸하구나.

*

정기 학회 당일.

학회 일정을 확인한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마, 마지막 순서가...?"

"이호열 수석님의 발표?!"

"이래서 사전 검증에 불참하셨던 거였나!"

"뭐라고? 이호열 수석께서 발표를?!"

지브릴과 클레를 비롯한 숙련 마법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탑의 수석 말고도, 워낙 맡은 직책이 많은 이호열 수석이 아니시던가?

클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로 대단하세요. 존경심이 들 정도예요."

비약초의 육성법.

정기 학회 발표를 준비하며 그 중압감을 경험했던 클레였다. 사전 검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크리스탈 홀, 강단에 서는 그 순간까지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했었다.

"저는 먹을 때도 잘 때도. 머릿속에서 연구 생각이 떠나질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다른 일정을 수행하시면서 학회 발표를 준비하신 거잖아요?"

잠자코 있던 린느가 꼬투리를 잡았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그건 아니죠, 클레 양."

"...네?"

"왜, 이 수석께서는 이번 사전 검증에 참여하지 않으셨으니까요옷?! 지, 지브릴 양?! 가, 갑자기 제 팔뚝은 왜 꼬집으시는 건가요?"

지브릴이 경멸 가득한 눈빛을 린느에게 쏟아냈다.

"숙련 마법사 정도 됐으면 마탑의 규율 정도는 숙지하는 게 좋겠군요, 린느. 상식적으로 학회 발표자가 타인의 연구를 사전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

"이번 발언은 좀 성급하셨네요, 린느 씨."

얼마나 망한 망언이었으면 클레까지.

린느에게 한마디를 덧붙였을까.

린느가 입을 다물자 지브릴의 낯빛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분명 엄청난 발표를 하실 거예요, 수석님이시라면요!"

견습 마법사.

플레이어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기 학회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늘.

플레이어 커뮤니티엔 학회 관련 게시글이 가득했다.

──────

일정 오피셜 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화냐? 이호열 수석 발표라고 ㄷㄷ

마지막에 큰 거 오냐???

피날레 확실하게 장식할듯 ㄹㅇㅋㅋ

그저 호멘

──────

입이 근질거렸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말했다시피 개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건만.

어째서인가, 선임 마법사 전원이 크리스탈 홀에 착석해 있었으니까.

누군가 속삭였다.

"...진짜 보통 발표가 아니긴 한가 봐요."

심지어는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까지도.

덕분에 정기 학회는.

거품처럼 잔뜩 부푼 기대감 속에서 시작됐다.

.

.

.

그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번 정기 학회의 파급력은 가히 역대 최고였다.

마법적 성취는 물론.

마탑을 넘어서 대중적으로도.

전 세계 모든 이들에게 『반전 마법』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으니까.

그렇다.

그 시작은 작은 소란으로부터였다.

마지막 순서.

호열이 강단에 선 그 순간.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클라우디?"

◈ 224화. 설명이 필요하다면 (2)

서열 63위.

마왕, 안드라스.

올빼미 머리의 악마가 부리를 열었다.

"본좌더러 마계의 잡종이라."

틀림없는 모욕.

그러나 안드라스의 반응은 평소의 모습과 달랐다.

파괴를 일삼는 그답지 않게 눈앞의 대상을 흥미롭게 바라볼 뿐.

그럴 수밖에.

자신과 마주한 것은 거악, 칠죄종 식탐이었으니까.

식탐은 이죽거렸다.

"마왕을 자칭하는 자여."

"!"

놀란 건 안드라스가 아니었다.

안드라스 휘하의 악마 군단장들이 흠칫했다.

마계의 잡종이란 모욕도 모자라서 왕좌까지 모독하다니.

아무리 거악이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안드라스는 이번에도 노하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실로 정확한 말이군."

"...!!!"

저런 망언을 인정하시다니?

악마 군단장들이 혼란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와 반대로 식탐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했다.

"주제를 알았나? 그대는 잡종이다. 나와 미련한 형제들처럼 악(惡)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며 십좌(十座)의 마왕들처럼 막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은, 반푼이 같은 존재란 의미다."

안드라스는 침묵을 지켰다.

'과연, 거악은 거악이로군.'

악크샨의 부활 이후.

안드라스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아르카나 대륙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지금.

자신을 포함한 마왕들은 고작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식탐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허나, 내가 그 잡종의 피를 극복할 방법을 알려주마."

더없이 혹하는 제안을 가지고서는.

식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는 거악.

악에서 태어난 악, 그 자체였다.

다른 마왕들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을지라도.

저 순수한 악을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드라스가 되물었다.

"내가 그대의 말을 신뢰할 것 같은가?"

식탐은 웃었다.

"믿고 말고는 그대의 자유다. 그러나 들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장담하지. 저열한 마계의 피 따위야. 보다 짙은 악을 집어삼키면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짙은 악이라."

흐르는 피의 묽고 진함은 갈릴지라도.

같은 악마의 피가 흐르기에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부정적인 기운에서 힘을 얻는 자신들이 아니던가.

안드라스의 부리가 벌어졌다.

"우스운 이야기군, 거악이여."

"우습다?"

"본좌는 이 대륙의 모든 것을 죽이고 죽여왔다. 시체로 산을 쌓았으며 피로는 강을 이루었다. 내게 저항한 이들은 갈가리 찢어 짐승의 모이로 던져줬으며 구차하게 살아남은 이들은 유린하다가 죽였다."

"오호라."

"그런 내가 행하지 못한 악행이 있단 말인가?"

식탐은 역시나 웃었다.

"당연하다."

"무엇이지?"

"너는 아직 들춰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들춰보지 못했다?"

"그 '과거'를."

시종일관 히죽거리던 식탐조차 '과거'를 언급한 순간.

그 낯빛이 바뀌었다.

안드라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 '과거'란 것에.

심상치 않은 것이 묻혀있으리라고.

그러니까 말했다.

"그런가, 그 과거가 나를 찾아온 이유로군."

"맞다. 나는 그대를 과거를 들춰낼 미끼로 쓸 예정이다."

"미끼라."

"과거를 들추기 위해 그대를 내던지겠다는 말이다. 그대가 과거와 마주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그대는 진정한 마왕으로 거듭날지도 모르겠지. 알다시피 공석이 생긴 참 아닌가?"

공석, 가미긴의 자리를 말하는 것일 터.

"내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가?"

식탐이 어깨를 으쓱였다.

"잡종이 왜 잡종인 줄 아나?"

"?"

"잡스럽고 차고 넘치기에 잡종이다."

순수한 악다웠다.

악마의 성질머리를 더없이 잘 알고 있군.

마치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이내, 안드라스가 답했다.

"제안에 응하지."

"올빼미라 그런가, 새대가리도 새대가리 나름이군."

"그래서 본좌가 들춰야 하는 과거란 무엇이지?"

그토록 대단한 과거라면.

분명, 복잡한 이야깃거리가 얽혀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식탐은 고작 '한 단어'를 뱉어냈을 뿐이었으니까.

"클라우디. 그거면 충분하다."

"...?"

"그 한 단어가 세상을 요동치게 할 테니까."

*

크리스탈 홀.

마탑의 공간답게 그 구조는 심히 판타지적이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게 화려한 원형의 공간처럼 보였거늘.

문으로 연결된 이면(異面)에는 특수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거다.

대기 공간.

쉽게 말해 다음 발표자를 위한 대기실이다.

물론, 평범한 대기실이었다면.

"나쁘지 않군."

그랑펠 입에서 이런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겠지.

특수한 구조라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을 거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크리스탈 홀의 전경.

분명, 크리스탈 홀에 딸린 문을 열고 입장한 대기실이었는데.

나는 크리스탈 홀을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순수하게 감탄하면 될 텐데.'

이것도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겠지.

"환각마법은 아니군."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내겐 더없이 익숙하다."

그야 익숙할 수밖에 없겠지.

프로젝터랑 유사한 간섭 과정의 마법이었으니까.

아르카나 식으로 말하자면....

마탑 버전 [마안의 망원경]이라고나 하면 되려나.

'다만 크리스탈 홀에서만 유효하지만.'

이름부터가 괜히 크리스탈 홀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마력석 중에서도 귀한 축에 속하는 '마력 크리스탈'로 지어진 공간. 사방의 마력 크리스탈이 마력을 증폭시켜 이런 사치스러운 마법 발현이 가능한 거겠지.

'그나저나....'

슬슬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탈 홀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홀에 가득한 기대감이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긴장했냐고?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뻔뻔하게 즐기고 있다면 모를까!

『반전 마법』

새로운 학파 창시를 알릴 발표를 준비하면서 나는 또 한 번 깨달았다. 그랑펠의 철면피 두께는 감히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두껍다는 사실을.

"그대들이라면 능히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이해를 못 해도.

내 잘못이 아니다.

이해를 못 한 그대들의 잘못이다.

'아주 그냥 긍지가 철철 넘치십니다, 우리 그랑펠 님...!'

나는 다시금 크리스탈 홀을 내려다봤다.

그랑펠의 심보를 알고 나서 기대 중인 마법사들을 보니.

마음이 편하려야 편할 수가 없다.

'저 기대감이 공포로 바뀌는 것도 머지않았구나.'

오늘은 또 어떤 언행으로.

마탑에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나조차도 짐작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진 최선을 다 해봐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포장했거든.

최대한 그럴싸해 보이게.

'사실....'

이게 또 적성에 맞기는 했다.

왜, 별것도 아닌 걸 포장하는 거.

그거 그랑펠의 주특기잖아?

노가다나 다름없는 육체 단련?

한계에 도전하는 숭고한 도전.

티백 녹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차.

단순한 웹서핑?

이 또한 기이를 향한 탐구.

'...늘어놓고 보니 심히 부끄럽기는 하다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이 포장 실력 덕분에.

발표 시간을 채우지 못할 걱정 하나는 덜어냈으니까.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빙결마법학 선임, 커튼 레블의 발표가 끝나고 드디어.

나의 순서가 오고야 말았단 것이다.

당당하게 기립.

또각─

나는 항상의 자세로 크리스탈 홀.

강단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여명의 재킷은 언제나처럼 어깨에 걸친 채.

평소였다면 자괴감을 호소했을 차림새이지만....

'차마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지금 내 머릿속엔 반전 마법의 발표를.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우선, 나는 크리스탈 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유그위드부터 뱅그릿까지.

원로부터 선임 마법사들은 전원 참석.

'...기지개 켜는 거 얄밉네.'

쭈욱─

내가 나타나자마자 고양이 몸을 늘리는 탑주의 모습도 보인다.

다들 모였으니, 질질 끌 것도 없겠지.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오오─

마력을 끌어올리자 크리스탈 홀을 장식한 마력 크리스탈이 감응해 반짝거린다. 마력 크리스탈을 투과한 마력이 마치 거대한 도화지를 펼치듯 허공에 흩뿌려진다.

'이제 보니까 시스템창 비슷하기도 하고.'

곧 마력의 입자들이 허공에 활자를 새겨넣는다.

손가락을 까딱일 필요조차 없다.

머릿속에 활자를 되뇌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허공에 떠오른 단어.

『반전 마법』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그랑펠이 좀 까칠하긴 해도 괴팍하진 않다.

소란스럽다고 윽박지르는 성격파탄자는 아니란 거지.

"...반전 마법? 그게 뭐야?"

플레이어들은 물론.

"반전 마법.... 혹시 무언가 알고 있나요, 클레 양?!"

"네? 그걸 왜 제게...?"

숙련 마법사.

"배, 뱅그릿 선임 혹시 뭔지 알고 있습니까?"

"아뇨. 저도 처음 듣는데요...!"

"잠자코 집중하는 게 어떻겠나, 벤쉬 윌리엄 선임."

"흐억."

마티스와 벤쉬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 전원.

"이런,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심지어는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까지.

다들 쉽사리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현재 크리스탈 홀에 반전 마법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나와 마르셀로, 저 능글맞은 고양이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반전 마법, 그 창시자는 나다."

첫 마디부터 직구.

내가 던진 말이었지만, 직구도 이렇게 정직한 직구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내뱉느냐에 따라서 다른 법이지.

쏟아지는 집중 속에서 나는 말을 이었다.

"반전 마법. 원리는 실로 간결하다. 탐색, 간섭, 발현. 마법의 구조를 그저 역순으로 나열한 것뿐. 그렇다. 반전 마법의 탐색 대상은 이미 발현된 마법이며 그 간섭 과정에 역으로 간섭, 본래의 상태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웅성거림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진다.

"...이, 이 수석님께선 아주 쉽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런 발현이 정말 가능한 건가요?"

"아니, 저건 마법 발현력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 발현력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금칠하면서.

나도 인지를 하게 됐거든.

'그랑펠의 재능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수준인지를.'

반전 마법의 창시자로서 단언하겠다.

내가 반전 마법을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하고, 덕분에 그 구조를 이해한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전에서 반전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반전 마법은 오직 그랑펠만을 위한 마법이란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태연하게도 말했다.

"그대들이 발현할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겠다."

어째 어감이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한데, 진심이거든.

"그대들은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까지 말했어도.

분위기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고.

마법 관련 지식에 정통할수록.

반전 마법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랑펠이 너그러워진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그랑펠의 인자함이 때론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되기도 하는 법. 서론부터 충격과 공포에 빠진 청중을, 우리 인자하신 그랑펠 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었으니.

나는 선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려하지 말도록."

"...?"

"그대들이 반전 마법을 이해할 때까지."

"...!"

"정기 학회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이해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수업이라고...?

그게 정말 청중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랑펠?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랑펠, 넌 절대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은 하면 안 되겠다.

전국 교수 협회도 경악을 금치 못할.

끔찍한 선언을 한 거라고, 너는 지금!

'그보다.'

나는 어쩌라고...?

빌어먹을 팔자야.

간신히 수치사를 피했더니, 과로사가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러나 착각이었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뭐야, 이거?"

이어 크리스탈 홀에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음─

아는 만큼 보였기에.

플레이어들은 내 반전 마법 설명에 집중할 수 없었겠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을 테니까.

'뱉은 말은 지킨다. 내가.'

너그럽게 이해한다고 말했었으니까.

학회 도중 스마트폰 알림 확인 정도야 이해하겠다.

그런데, 어째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긴급 업데이트라는데?"

"...마, 마왕이라고? 뜬금없이?!"

"아니, 잠깐만. 균열이 아니라 지역 추가라고?"

긴급 업데이트.

마왕.

균열이 아닌 지역 추가.

괜히 일제히 진동이 울린 게 아니라는 거였나.

그래도 거기까지는.

사고가 따라갈 수 있었다.

악마가 어떤 족속들인데.

악크샨의 부활.

가미긴 처치의 약빨이 영원토록 지속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깨닫고 말았다.

수치사를 피하긴 개뿔...!

"마왕이 누굴 찾고 있다는데?"

"찾는다고? 플레이어? 아니면 아르카나인?"

"잠깐만, 분명...."

고막을 파고드는 한 단어.

"클라우디! 클라우디라고 했어!"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크으으을라아아우우우디?!

내 이름....

아니,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 225화. 뇌리에 새겨주겠다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갈등의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보스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마왕, 안드라스 : Lv.888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악마 군단장, 파나룬 : Lv.600

악마 군단장, 유가르 : Lv.600....』

마왕의 출현.

업데이트 내역은 빠르게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제로 산맥에서 몬스터를 사냥 중이던 플레이어들은 물론.

유스라, 뮤온, 프로스트.

각 지역에서 훈련을 멈추지 않던 아르카나인들도 소식을 접했다.

망설임이란 없었다.

아니, 망설임을 넘어서 모두가 집결했다.

그래, 성전(聖戰) 아래 그들은 하나였으니까.

마왕과의 전투야말로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사건.

애초에 이날을 위해서.

사냥과 훈련을 반복해 오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프로스트.

라이언 하트 기사단.

단장, 하르콘은 투구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얄궂게도 하필이면 정기 학회 날이군."

소식이 호열 경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 선에서 신속히 끝내야겠지."

유스라 왕국.

그림자 용병단.

부단장, 울프는 키치를 바라봤다.

낮부터 술에 진탕 취해서는 기절이시군, 우리 단장님.

'귀찮지만 어쩔 수 없나.'

울프가 단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나타난 마왕성은 하나. 따라서 움직여야 할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셋이다. 보자, 낮잠 중이신 우리 단장님 빼면 전부 모인 것 같은데...."

"나! 나! 나!!!"

우당탕!

고함을 치며 울프에게 달려온 건 말석, 락키드였다.

락키드의 근육은 벌써부터 성이 잔뜩 나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은 또 해맑았다.

9석, 드쉐브가 이죽거렸다.

"성전에선 열심히 해도 포상 같은 거 없다니까?"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의욕적인 거야? 지켜보는 내가 귀찮아질 정도로."

"으흐흐. 소문을 들었거든."

"...소문? 뭔 소문?"

"친해지면 찻잔을 맞댈 수 있다는 소문!"

...술잔도 아니고 찻잔을 맞대?

심지어 술잔조차 사용하지 않는 락키드였다.

애초에 술이란 술은 전부 통째로 들이켜댄 그였으니까. 그런 락키드가 작디작은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꾹 참았다.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떨군 울프.

락키드가 그런 울프에게 애원했다.

"울프. 아니, 부단장!"

키치를 제외하고 용병단의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락키드였다.

그럼에도 부단장이라는.

깍듯한 호칭을 붙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 귀 큰 놈에게 수모를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찝찝한 뒤끝 때문이었다.

엘프, 엘시도어.

녀석에게 빚을 갚아주기 위해 황천을 헤엄쳐서 빠져나왔건만.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어느샌가 아군이 되어있었다.

그걸 넘어서 생명의 은인, 호열의 화원을 가꾸고 있었다.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락키드가 이를 갈았다.

"찻잔을 부딪치며 정식으로 허락을 받아낼 생각이거든."

그렇다, 찻잔을 부딪칠 상대는 바로 호열.

"그 귀 큰 놈과의 결투 승인을!"

구체적인 이유를 듣고 나니 그림자 용병단원들도 딱히 말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하면 되돌려준다. 그림자 용병단의 철칙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울프가 말을 이었다.

"그럼 나머지 한 명 지원받겠습니다."

흐르는 정적.

슥─

한 차례 단원을 둘러본 울프가 말을 이었다.

"그럼, 핌비로 당첨."

"...네? 왜 하필 전가요!"

"덩치에 활잡이. 남은 하나는 마법사가 적당하니까?"

"으으."

4석, 핌비는 투덜거리면서도 반발하지 않았다.

단장, 키치가 부재중일 때는 부단장 울프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으하하. 다들 잘 해보자고. 내 발목 붙잡진 말고."

점점 멀어지는 락키드의 시끄러운 목소리.

세 사람이 빠져나가자 아지트엔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6석, 이자벨마를이었다.

네크로멘서.

죽은 자를 다루는 만큼.

그녀는 숨결에 누구보다 예민하다.

이자벨마를이 키치를 바라봤다.

"어째서 잠든 척을 하신 건가요, 단장."

어떻게 알았느냐니.

들켰다느니.

키치는 평소처럼 능청조차 떨지 않고 작게 중얼거렸다.

"...외면하고 싶은 이름을 들어서 말이야."

*

성전 연합군.

거대 연합을 비롯.

천하통일을 제외한 대다수의 길드가 집결했다.

거기에 라이언 하트 기사단, 뮤온의 성기사단까지.

이전과는 다르다.

악마의 상태이상에 속수무책이던 과거와는 다르다.

악마 앞에서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사기가 치솟을 정도.

하르콘이 비장하게 읊조렸다.

"고대하던 순간이로군."

냉정하게 전력을 비교해도 우위였다.

호열과 마탑이 합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재 전력만으로 마왕성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다는 뜻.

그러나.

"문제는 마왕성이 균열이 아닌 지역으로 출현했다는 겁니다."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하던 남철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대도심.

빌딩 숲 사이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마왕성.

대다수의 시민은 대피한 상태였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듯 나타난 마왕성의 여파.

"쉽게 말해서 굴러들어 온 마왕성이 박혀있던 빌딩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왕성의 영지가 함께 묻어온 덕분에 지반마저 위태로워졌고. 그 바람에...."

남철민의 손가락이 향한 건 크게 기울어진 빌딩.

인접한 빌딩이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남태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저 빌딩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건물의 붕괴를 가속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안에서 구조대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구조대가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지만 늦었습니다."

전황을 파악한 하르콘이 말했다.

"우리가 진입하면 생존자를 구해낼 수 있겠는가?"

히사기가 실눈을 뜨고 대답했다.

"전부를 구해낼 순 없을 겁니다. 더욱 냉정하게 말하자면, 진입하는 순간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겠지요."

마왕성이 출현한 순간부터.

채 탈출할 새도 없이 가파르게 기울던 빌딩.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건만.

"젠장."

그럼에도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학으로는 마천루를 세울 수는 있어도.

그런 마천루의 붕괴를 막을 순 없었으니까.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그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너진 뒤를 생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탈림 경?"

"여신교단 사제들의 기도라면 일대의 생명력을 한시적이지만 극도로 높일 수 있으니까요. 설령 심장이 파괴되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고 하더라도, 숨은 붙어있을 겁니다."

"...!!!"

극단적인 선택지.

그러나 그마저도 반갑게 느껴질 정도로.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득, 마법에 생각이 닿았다.

"과학도, 기도도 안 된다면.... 마법은 어떨까요?"

물리 법칙에 구애되지 않는 마법이라면.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세컨드 썬, 슈레이그가 고개를 저었다.

"세컨드 썬 소속 마법사는 전원 정기 학회에 참석했습니다."

"거대 연합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도...."

샤이닝의 카밀라가 끝으로 손을 들었다.

"유감이지만 우리도 없어."

샤이닝까지 전멸.

그랬다, 이 자리에 마법사는 오직 한 명.

그림자 용병단원, 핌비밖에 없었다.

그러나 핌비조차도 고개를 내저었다.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는 건 어떤 식으로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건 어떤 마법으로도 불가능해요. 정 최선의 방법을 찾자면...."

까딱까딱.

핌비가 자신과 빌딩을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포탈을 연속으로 발현해서 구출하는 거려나?"

포탈이라면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생존자들을 구출할 수 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좌표를 수정하며 포탈을 연속 발현하는 건.

핌비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또한.

"그나저나 보고만 계실 건가요, 저거...?"

언제까지고 빌딩에 집중할 수만도 없었다.

이 순간에도 마왕성에서 풍겨오는 악기(惡氣)는 점점 거세졌으니까.

마왕성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레오니가 인상을 구겼다.

"...대체 클라우디가 뭔데 저러는 거야?"

"랭커 중에 그런 플레이어가 있었나?"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클라우디라는.

정체 모를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진퇴양난이었다.

누구보다 이해득실에 확실한 용병.

그렇기에 울프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핌비, 상황을 봐서 합류하도록 해."

"몇 명이나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네가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모든 생명을 구할 순 없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법도 있는 법이지.

들려오는 대화에 남태민은 이를 악물었다.

'결국, 이번에도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건가?'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불공평하다.

"...치사하잖아."

아르카나의 범람.

간신히 반격을 시작했다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모든 걸 완벽히 지켜낼 순 없었다.

무엇을 내어줘야 피해가 작을지 매 순간 저울질해야만 했다.

빠득─

이가 갈릴 정도로 억울하다.

그럼에도 머뭇거릴 순 없었다.

마침내 마왕성의 성문이 열렸으니까.

이 순간에도 저울질은 계속됐다.

결국,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겠지.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마왕성에 진입해야만.

도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핌비 씨."

"...네?"

"구조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한 놈도 놓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남태민을 비롯한 성전 연합군.

그들이 마왕성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이었다.

펄럭─

무언가가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모두의 시선.

포탈의 역광 속에서 드러나는 실루엣.

짙은 쪽빛의 제복.

제복을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휘장.

은빛의 머리칼.

그것은 진퇴양난 가운데 비추는 한 줄기의 빛.

"우려할 것 없다."

그 여명이 말했다.

"내가 왔으니."

.

.

.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말은 참 잘한다...!

정작, 그런 말을 내뱉은 나는 걱정돼서 죽을 것 같단 말이다.

왜, 지금 이 순간에도.

마왕성 쪽에선 끔찍한 이름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진짜, 뭔데.'

정기 학회, 그것도 나의 발표 도중이었다.

그럼에도 달려오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클라우디라니!

대체.

어째서.

그 이름이 악마들 입에서 나오는 건데?!

'...혹시, 악마들이 알고 있는 건가?'

내 이름을...?

악마 사냥꾼인 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악마들이 어떤 족속인지 잘 알고 있다.

악마란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서는 입이 가벼워도 그렇게 가벼운 족속들이 또 없다는 말이다. 만에 하나. 정말로, 악마들이 나의 이름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로 알고 있는 거라면....

'세상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야!'

수치사를 기다리는.

시한부 인생 확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목숨이 걱정돼서라도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수석의 무게는 어떻게 하고 학회를 내팽개치고 달려온 거냐고?

걱정도 팔자다.

그랑펠이 누군데?

그랑펠 사전에 저울질이란 없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도 없다.

그것이 그랑펠의 무거운 긍지니까.

남태민이 입을 연다.

근데, 어째....

심란한 표정이군.

"...반가워하면 안 되는데. 이런 마왕성쯤은 호열 씨가 계시지 않아도 공략할 정도가 돼야 하는데. 솔직히 마음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대들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위로하려고 건네는 빈말이 아니거든.

'클라우디란, 이름만 나오지 않았더라도.'

나는 지금처럼 이곳에 포탈을 열고 나타나지 않았을 거다.

내가 누군데.

이래 봬도 그 잘나신 총대장님 아니시던가?

덕분에 연합군의 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대들은 충분히 잘해내고 있다."

"...!!!"

무려 세 개의 마왕성을 압살했던 성전 연합군이다.

그때보다 다들 훨씬 성장했는데, 고작 마왕성 하나?

걱정한다면 그거야말로 아군을 향한 불신이겠지.

히사기가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학회는 어찌하시고 이곳에...."

말했다시피.

나는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학회의 발표도 포기하지 않았지.

크리스탈 홀을 뛰쳐나온 나의 출탑은.

『반전 마법』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야외 수업의 일원이었으니까.

"그 또한 우려할 것 없다."

그렇다.

지금쯤 크리스탈 홀에는 이곳의 전경이 떠올라 있을 거다.

왜, 크리스탈 홀 대기실에서 유심히 봐뒀었거든.

크리스탈 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투영하던 마법의 구조를.

쉽게 말해서.

마법을 발현.

크리스탈 홀에 실시간 중계 영상을 띄우고 왔다는 뜻이다.

마력 소모는 어떻게 하냐고?

그것 또한 우려할 것 없다.

[첫 세계수의 축복]만 하더라도 이제는 마르셀로, 탑주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나였다. (마력의 절대량은 아직 부족하지만, 마력 재생력이 무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악마를 만났잖아?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성전 연합군.

마탑의 마법사들.

그리고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을 카메라.

고오오─

그 가운데에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반전 마법』

그러자 붕괴하던 빌딩이 바로 서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진 유리창도.

구부러진 철근도.

무너진 외벽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지금껏 처절하게 발버둥을 쳐왔던 나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도.

희생하지도 않는 게 정말 가능하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친히 뇌리에 새겨주겠다.

반전 마법도.

"이 엄청난 마력량은 대체...?"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천적 관계도.

"호열 씨!"

마지막으로 긍지도.

그러니까.

그 입 좀 다물고.

좋게 말할 때 튀어나와라, 마왕.

그래, 그 빌어먹을 클라우디.

네가 그토록 찾는 클라우디가, 내가 이곳에 왔다.

◈ 226화. 네게 그럴 자격은 없다

크리스탈 홀.

허공에 떠오른 마왕성의 전경.

호열의 마법에 플레이어들은 기시감을 느꼈다.

"...근데, 약간 영화관 느낌 나지 않아?"

"비슷하긴 한데, 어떤 각도에서 봐도 똑바로 보여."

"쉽게 말해서 마법으로 스트리밍 중계라는 거겠지...?"

하지만 아르카나인들에게는 아니었다.

성전의 적, 마왕의 출현이었다.

웃음을 뱉을 상황은 아니었건만.

"하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는 이 마법의 진가가.

마르셀로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으니까.

현학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복잡한 간섭 과정이다.

원거리에서 마법의 발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마력이 소모될 터. 그것도 모자라 떠오른 시야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시야가 바뀔 때마다 탐색, 간섭, 발현의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는 뜻.

'같은 수석이라 불리기엔 제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마르셀로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

선임, 숙련 마법사들의 반응은 묘사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출탑의 목적.

반전 마법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야외 시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벤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건물 위태로워 보이지 않습니까, 뱅그릿 선임?"

"네, 확실히 그러네요."

"화염마법뿐만 아니라 스무 개의 마법 중 어떤 걸 들이밀어도...."

무너지는 건물을 완벽하게 보호할 순 없으리라.

양보해서 건물의 붕괴를 막는다고 하더라도.

사람까지 보호할 수 있는 섬세한 마법은 마탑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허나, 기존의 마법이 아닌 새로운 마법이라면?

이내, 호열의 모습을 비추는 시야.

어깨에 걸친 재킷이 펄럭이기 무섭게 주변에 마력이 발산한다.

그러자 모든 것이 반전되었다.

무너지던 건물이 바로 서는 것은 물론.

"뭐, 뭐죠? 저 마법은!"

"설마 저게 말씀하신 반전 마법...?"

"잠깐만요, 그냥 똑바로 세워지기만 한 게 아니에요. 깨진 유리창도, 무너진 외벽도 원래대로 복구되고 있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꺼졌던 불빛이 다시 들어오고 있어!"

지켜보던 이들의 심정까지도.

크리스탈 홀에는 잔잔한 충격이 흘렀다.

더 이상 우려는 없었다.

성전 연합군이 출격한 것도 모자라서 호열까지 합류한 상황이었다.

고작 마왕 하나가 대적할 순 없을 테니까.

"어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찰나에 얼마나 많은 간섭 과정이 이뤄진 거죠?"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개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렇다.

흐르는 충격은 오로지 반전 마법의 시연 때문이었다.

수석, 선임, 숙련, 견습.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학회의 여운에 빠져있던 순간이었다.

오직 고양이 한 마리.

탑주만이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 꼬리가 바짝 긴장한 듯이 곤두섰다.

'...클라우디.'

탑주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끊이질 않았다.

내가 고깔모자에서 갇혀있던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거지?

감히, 어떻게, 그 이름이 악마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들춰선 안 되는 과거를 어찌하여 악마 따위가...?

탑주가 몸서리를 쳤다.

'어찌됐든. 가엾을 정도로 미련하구나, 악마여.'

*

정문 개방.

마왕성에서 대군(大軍)이 쏟아져 나온다.

반전 마법으로 복구된 빌딩.

마지막 생존자들까지도 안전하게 대피를 끝마쳤다.

그래,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성전의 시작이었다.

하르콘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총대장이시여, 부디 명령을."

...공과 사는 확실하구나, 하르콘!

어쨌거나 나는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이었으니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나를 호열 경이라고, 격식 없이 부를 순 없다는 거겠지. 물론, 듣고 있는 나는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또각─

그러나 과분할 정도의 대접.

온갖 미사여구를 뻔뻔하게 즐기는 그랑펠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망설임 없이 최전방으로 나아갔다.

태연하게도 선언했다는 것이다.

"마왕은 내가 맡도록 하겠다."

사실 솔직한 심정 같아서는 말이야.

그냥 마법을 쏟아부어서 마왕성이고, 마왕이고 한 방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천적관계] 효과로 전투력이 몇 배나 상승한 지금이라면, 초고위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라도 발현할 자신이 있었거든.

하지만.

"마왕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대들에게 맡기겠다."

말했다시피 나는 자각하고 있다.

성전 연합군의 총대장이라는 나의 위치를.

아군의 능력을 파악하고 신뢰하고 실전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돕는 것 또한 총대장으로서의 업무라면 업무일 터.

'...어째 어딜 가도 업무가 끊이질 않냐?'

순간적으로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는다.

게다가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날려버리면 안 되겠지.

'클라우디.'

내 이름....

아니, 그 이름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들어서 알고 있는 건지.

나는 집요하게 추궁해야만 했으니까!

악마와는 말을 섞지 않는 주의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나의 목숨이, 수치사가 걸린 일이란 말이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척─

"전원 돌격 준비!"

하르콘이 검을 들고 외치자 연합군의 기세가 한껏 치솟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래도 그동안 헛수고를 한 건 아닌 것 같네.

'옛날에 비하면야.'

플레이어가 악마에게 속수무책이던 가장 큰 이유는 상태이상 때문이었다.

[공포]는 상태이상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왕 앞에서도 플레이어들이 공포에 질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공포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이.

저들의 가슴 속엔 존재했으니까.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로소 우리의 긍지를 증명할 순간이다!"

그래, 긍지다.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기어코 전부 물들여 버렸구나,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막중한 책임을 져야겠지.'

나는 지체하지 않고 포탈을 발현했다.

좌표는 마왕성의 주인, 마왕 안드라스의 코앞.

어떻게 구체적인 좌표를 특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클래스를 들이밀어 주겠노라.

[악마 사냥꾼]

좌표를 알고 있어서 가능한 게 아니다.

그저 냄새를 쫓을 뿐.

겁도 없이 내 흑역사를 떠벌린 사냥감의 냄새를 말이야.

나는 발현된 포탈로 나아갔다.

그 입방정에 책임을 질 시간이다, 안드라스.

.

.

.

마왕, 안드라스.

안드라스는 낯선 풍경을 바라봤다.

올빼미의 부리가 움직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거악이여."

아르카나 대륙도 마계도 아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

짐작할 수 있었다.

"본좌가 균열에 휘말렸다는 것인가?"

제로 산맥이 하룻밤 새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췄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마왕성 또한 균열에 휘말린 모양이겠지.

악크샨의 부활에서 절대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던가?

단순한 우연이라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클라우디...."

거악, 식탐이 알려줬던 그 이름.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낸 순간.

과거를 들춘 순간.

시야가 뒤바뀐 것이었다.

안드라스는 실감했다.

대체 이름에 얽힌 과거가 무엇이길래.

언급한 것만으로 이런 파문을 일으킨단 말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얽혀있는 모양이군."

직각으로 비틀어지는 올빼미의 머리.

"그렇기에 틀림없이 진실이겠지."

클라우디의 진실과 직면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십좌의 마왕에 준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안드라스는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좌는 자신이 있도다."

63번째 마왕.

그러나 서열은 숫자에 불과하다.

식탐에게도 말했듯 안드라스는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한계치까지 강해졌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역시 말했듯.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을 흐르게 했던 본좌였으니.

그 증거가 식탐과의 직면이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거악 앞에서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했을 터. 그러나 현재의 자신은 식탐과 거래를 맺을 정도였다. 천하의 거악과 동등한 위치에 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면.'

안드라스의 동공이 번뜩였다.

식탐.

그 시건방진 녀석을 도륙 낼 힘을 거머쥘 수 있었다.

안드라스가 음험하게 미소 지었다.

"날뛰어라. 외쳐라. 과거를 들추어라."

클라우디.

그 이름을 향해 욕망을 불태워라.

본좌의 병사들이여.

"내가 그대들을 이끄리라."

안드라스가 철퇴를 들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고오오─

허공에서 빛 무리가 일렁였다.

틀림없이 마력이었다.

안드라스의 올빼미 머리가 다시금 직각으로 꺾였다.

"의아한 일이구나."

이 세계 또한 마력이 존재하는 세계였나?

그것이 아니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아르카나 대륙에서 넘어온 존재란 말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본좌의 앞에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용건이 있을 터.

안드라스가 부리를 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그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소소─

본능적으로 올빼미 머리의 깃털이 곤두섰으니까.

'...어떤 놈이냐.'

마계에서도,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

안드라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지혜를 상징하는 올빼미답게 자각한 것이었다.

자신이 느낀 낯선 감각이 '공포'라는 것을.

'거악의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던 본좌다.'

그런 본좌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안드라스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게 할 존재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악마 사냥꾼."

녀석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가 분명하다.

안드라스는 곧장 철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다시금 되새겼다.

'본좌의 목적은 클라우디다.'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안드라스, 나는 갈등의 마왕이다.

분란과 선동에 있어선 누구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다.

안드라스가 소리쳤다.

"어리석구나.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여. 다짜고짜 본좌를 사냥하려고 들다니. 설령 그대가 나를 사냥한다고 하더라도 이 싸움은 나의 승리다."

마왕성 정문 개방.

악마 군단장들에게 진격을 명령한 게 한참 전의 일이다.

지금쯤이면 근방을 학살하기 시작했을 터.

그것도 모자라 악마 군단장을 비롯한.

모든 악마가 클라우디를 부르짖고 있을 터였다.

"네게도 들리지 않느냐?"

클라우디─

이 순간에도 어렴풋이 괴성이 들려왔으니까.

안드라스는 끝까지 버텨내리라 다짐했다.

클라우디, 그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 다른 세계에 도달했다.

또 한 번 격동이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째서냐?'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야 할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곧이어 마왕성에 심상치 않은 정적만이 맴돌았다....

'...정적이라고?'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과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병사들이 클라우디의 이름을 부르짖으리라고.

과거를 들추리라고.

그런데 어째서인가.

고요했다.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무려 칠만(七萬)이다.'

그 칠만의 병사가 전부 무수한 실전에서 살아남은 정예병이란 말이다.

그들조차 당해낼 수 없는 막강한 적과 마주한 것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명조차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마치 모두가 입을 다문 것처럼.

꿀꺽─

안드라스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던 순간이었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가 입을 열었다.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열등한 족속에게 격식을 운운할 생각은 없다."

"...?"

"그대들은 배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존재들이니까."

...갑자기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안드라스는 눈알을 굴리며 고심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그런가. 본좌가 방해가 됐다는 것인가.'

무엇에 방해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기회였다.

대화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안드라스가 부리를 열어보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묵인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

안드라스의 부리가 그대로 멈췄다.

이어지는 말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안드라스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마왕성이 갑작스러운 침묵에 휩싸였던 이유를.

'찰나에 칠만의 목소리를 앗아갔다...?'

녀석의 짓이다.

깨닫는 순간, 목격했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그에게서 넘실거리는 이질적인 기운을.

그리고 경악했다.

"!"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마왕인 자신조차 질식시킬 것 같은 저 기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잠식될 것만 같은 어둠.

그동안 마왕으로서 쌓아온 모든 부정적인 기운조차도.

저 한없이 깊은 어둠 앞에서는 사막의 모래알조차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놀라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이어지는 호열의 말에 안드라스는 깨달았으니까.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

"감히 그 이름을 함부로 내뱉지 마라."

"...!"

"잡종."

...허락하지 않았다고?

'서, 서, 설마...!!'

역시나 지혜로운 올빼미이기에 알아차렸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그가 바로 클라우디였다는 사실을...!

.

.

.

눈치를 보아하니 알아차린 것 같은데?

그렇다면 유감이군.

다른 건 몰라도 그 진실만큼은 누구에게도 들킬 생각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 시간부로 처분을 시작하겠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란 뜻이다, 마왕.

◈ 227화. 직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