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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화. 그대였군

누군가 들었다면 뭔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겠지.

당연하다.

다짜고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니.

증명할 방법이랄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님께선 잘 알고 계시겠지. 마법적 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제시가 어째서 그보다 상위 개념인 기이를 알고 있는지를.

"...설마?"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동감한다.

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악마 사냥꾼이거든. 그러니까 제시와는 마법과 기이에 관해서도 꽤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눴다는 거다.

대마법사가 후후─ 너털웃음을 뱉는다.

"그래, 확실히 그런 기억이 있네. 빌어먹게도."

제시의 머릿속 혹은 고깔모자에 담긴 기억을 되짚어본 건가.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표정이 조금은 심각해졌군.

슬슬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인가 봐.

'늦었지만.'

긍지에 살고 긍지에 죽는 그랑펠이다.

그런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가벼이 여겼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그 대가야 말할 것도 없겠지.

과연, 누구의 긍지가 더 올곧으며 광적인지 겨뤄보자고.

"한데, 기이를 향한 접근을 불허한다니. 제아무리 창시자라고 하더라도 그럴 권리가 있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그 말이 옳다.

기이를 향한 길이 진짜로 걷는 길도 아니고.

내가 가로막을 순 없는 일이지.

하지만 마법사는 아니면서도 마탑의 수석인 나다.

덕분에 마법사들이 무엇을 가장 꺼리는지는 잘 알고 있는바.

"그대들이 목표로 했던 마법의 극한."

그러니까 나는 선언했다.

"기이의 끝에는 내가 먼저 다다르겠다."

"...!"

이른바 당신들의 진리를 가로채겠다는 거지.

그거야말로 대마법사.

당신들의 긍지를 꺾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짧은 침묵 후 되돌아오는 질문.

"그건 우리를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침묵은 긍정이니까, 물론이다.

아, 기절한 제시는 무죄니까 빼고.

나는 머리를 굴렸다.

'마지막까지 종잡을 수 없이 요란한 하루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던가?

한 명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이랑 적대적인 관계가 되다니.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가 진짜 이게 맞나, 싶다.

그럼에도 의심은 하지 않았다.

'행운의 효과는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해 볼까?

지금 이 상황이 행운으로 취급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유달리 고달팠던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그러던 중 마탑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마르셀로의 글귀가.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목소리.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눈앞의 대마법사는 마탑에 관해 지나치게 상세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초월자의 격을 갖춰 시공간의 사교장에 진입했다는 건 마법사로서 적어도 '서클'을 형성했다는 뜻.

내가 아는 지식 속, 마탑에서 서클을 형성했던 마법사는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였군."

그와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

입맛은 이보다 씁쓸할 수 없었다.

역시, 아랫물이 맑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나.

'탑주가 생각하는 진리가 이따위였으니까.'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도.

그 아래의 선임, 숙련, 견습 마법사들도.

진리란 울타리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나 이 순간, 점멸하는 퀘스트 목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그래, 마탑은 이름뿐인 진리를 내던지고.

진정한 진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변화했으니까.

탑주, 당신이 마력 구체에서 부유하던 사이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지.

그 시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겠군.

"그대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연기에는 소질이 없군."

"...연기라고?"

"지금이라도 그만두기를 권하겠다."

"아까부터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거 알아? 이렇게 쉽지 않은 사내는 처음인걸. 게다가 연기라면 아까부터 때려치웠잖아? 이 수석, 그대가 사사로운 장난에도 정색한 덕분에."

아니.

내가 그만두라는 연기는.

제시의 흉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 그녀에게 견습 마법사 자격을 부여한 건 대마법사의 그릇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함이었나?"

"...!"

"허나,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

나의 말에 대마법사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선대 대마법사들과는 달리 그대의 육체는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뱉은 말이 사실이라면, 그 행동은 명백히 일인전승 절차에 어긋나는 행위일 터."

"...글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말했다시피 그대는 연기에 소질이 없네, 탑주."

"!"

내가 그만두라는 건 그놈의 자작극이다.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대마법사의 절차를 어겨가면서까지.

육체와 의식을 분리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이 일은 당분간 기밀로 치부하겠다."

탑주, 당신이 걱정돼서가 아니다.

"마르셀로 수석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군."

자신이 시한부의 저주로 죽어가던 순간까지.

탑주, 당신을 걱정하던 마르셀로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마르셀로의 이름을 꺼낸 순간.

탑주의 얼굴엔 더 이상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드륵!

신경질적으로 끄는 의자 소리.

그러더니 날카로워진 목소리가 이어진다.

"잠깐, 이대로 자리를 떠나도 되는 거야? 나라면 걱정될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이 아이의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협박인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거 같은데.

그 대사는 나도 똑같이 되돌려줄 수 있거든.

나는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탑주, 그대의 육체 또한 내 수중에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리고 다시 한번 조언하지. 그대는 아무리 봐도 연기에 소질이 없군."

게다가 탑주가 제시의 육체를 차지한 데에는.

대폭 상승한 행운이 영향을 끼쳤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나였다.

[남은 시간 : 3분 21초]

심지어는 본인의 입으로.

천운이 따라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했다고 말했으면서 말이지.

새삼스럽게 직업병 덕을 봤구나, 싶다.

'하도 악랄한 악마들만 상대해서 그런가.'

악의를 구분하는 거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러니까 무슨 사연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제시를 볼모로 협박해 오는 탑주에게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천하의 마르셀로가 존경해 오던 탑주였다. 그런 마르셀로의 보는 눈을 부정하면, 마르셀로 덕분에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나 자신을 부정하는 꼴이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집어치우라고 했던 연기는.

그 어울리지도 않는 나쁜 사람 연기를 말하는 거라고 탑주.

잘근─

탑주는 제시의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의가 없군, 이 수석. 그대는."

뭐?

예의가 없어?

격식에 죽고 못 사는 내가?

"상사의 치부를 꼭 그렇게 들춰야 하는 건가?"

...아, 계급을 들먹이면 할 말이 없어진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탑주의 안색이 다시금 바뀌었다.

상황에 따라 낯빛을 휙휙 바꾸는 게.

정말로 부장님을 보는 것 같아서 무섭다.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찰나.

"이 수석. 그대가 모든 걸 훤히 꿰뚫어 본 이상, 어쩔 수 없게 됐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나의 공범이 되어줘야겠어."

...그런데, 뭐요, 공범?!

내가 미쳤다고 구린내가 풀풀 나는 상사와 한배를 타랴.

썩은 동아줄은 붙잡지 않는 게 사회생활의 상책이란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시야가 점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성공)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잠깐, 거기부터 연기였어?'

아무래도 연기 못 한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는데?

*

드래곤이 활강했다!

그 속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두려울 것 없이 제로 산맥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나가던 플레이어들조차 멈칫하게 할 소식이었으니까.

"...저거, 설마 우리한테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세상에 입구까지 마중 나오는 보스몹이 어딨냐?"

"그렇지? 괜한 걱정이겠지?"

실제로 AAU에게서 정보를 전달받기 전까지.

제로 산맥의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었다.

워낙 높은 제로 산맥이어야지.

호열과 검성, 셰그윈이 맞붙었을 때 났던 굉음처럼 큰 소음이 아니고서야 들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제로 산맥 남서부.

거대 연합의 베이스캠프.

분석관, 남철민은 들어오는 정보를 읊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때와 유사한 현상이 포착됐다.... 현재까지 들어온 정보는 거기까지야. 그쪽도 별일 없는 거지?"

-응. 토끼들이 겁나게 빡세다는 거 말곤 없어.

"다행이네. 최정상에서 활강한 이후엔 어떤 곳에서도 드래곤의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다고 하니까.... 역시, 생성된 균열을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을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네."

-정말? 옆에 있는 전문가도 형이랑 똑같은 소릴 했는데.

"...전문가?"

남태민의 말에 남철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세상에 드래곤 전문가가 어디에 있다고....

아니지, 설마 호열 씨랑 함께 있는 건가?

-호열 씨가 아니라 용기사, 스칼 말하는 거야.

"난 또.... 가 아니라 스, 스칼?! 스칼이 왜 옆에 있어?"

-아, 그게 조금 전에 우리 쪽으로 합류했거든.

"뭐, 뭐어?!"

남철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칼이 누구던가?

신비주의 그 자체.

그 어떤 길드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던 플레이어. 더군다나 그 잠재력만큼은 히든 클래스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용기사!

그런 스칼이 거대 연합에 합류했다고?

순간, 머릿속에서 두들겨지는 계산기.

'잘하면 샤이닝도, 천하통일도....'

우리 거대 연합이 제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남철민의 상상의 나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토끼와의 사투를 끝낸 남태민이 말을 덧붙였으니까.

"맞아, 긍지더라고."

찌릿─

그 말에 곁에 있던 레오니는 눈을 흘겼다.

'아니, 그걸로 설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호열과 드래곤부터 클래스 퀘스트까지.

구구절절하고 복잡하게도 얽힌 스칼의 거대 연합 합류였다. 자초지종도 모자라 구구절절 설명해도 부족한 사연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긍지 한 단어로 퉁 치면 알아들을 수 있겠냐고!

"역시, 형은 이해할 줄 알았어."

"?!"

...그런데, 있었다.

레오니는 또 한 번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마, 내가 비정상인 건가...?

젠장,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짜 다들 미쳤어...."

그러나 레오니의 두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으, 으아아악!!"

애마, 알렉산더의 꼬리를 빗기던 스칼.

그가 기겁해서 소리쳤으니까.

히히힝!

퍽!

그 바람에 놀란 알렉산더가 날뛰며 뒷발질을 했지만.

정작 얻어맞은 스칼은 익숙한 모양인지,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히사기와 슈레이그가 걱정할 정도였다.

"괜찮으신 겁니까, 스칼 씨?"

"뭔가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는데."

"...어째, 스칼 저거 내가 알던 이미지가 아닌데. 언니?"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스칼에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말발굽에 사타구니를 얻어맞은 것보다도.

끔찍한 글씨가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아, 안 돼."

드래곤이 활강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설마 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새로운 퀘스트창이 반짝거리는 지금.

더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클래스 퀘스트 : 전룡소집(全龍召集)]

스칼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위대한 가문? 아르카나 대륙에 돌아와? 모든 용들이 집합해?!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요! 드래곤이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어디서 어떤 일을 벌이셨길래. 이런 퀘스트가...!!"

천운의 후폭풍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213화. 자리를 비우다

무섭다.

무서워.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니까?

스스슥─

책상 위.

수북하게 쌓인 수석의 업무.

나는 깃털펜을 휘갈기면서도 좀처럼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처음부터 모든 게 연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탑주의 연기는 고깔모자에 깃든.

전대 대마법사들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탑주는 괜히 탑주가 아니었다.

탑주가 제시의 기억을 훑어봤던 것처럼.

대마법사들도 탑주가 나와 대화를 나눈 기억을 살펴볼 수 있을 터.

'탑주가 입으로 내뱉은 말만 보면....'

의심할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까칠하게 나왔던 거였구나.

그 메소드 연기 덕분에 낌새를 알아차릴 순 없을 거다.

애초에 얼굴을 맞대고 있던 나부터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퀘스트창이 반짝거리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눈치가 없다는 건 아니다.

다짜고짜 공범이 되라니!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잖아, 그건?

'괜히 마르셀로가 존경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건가.'

플레이어의 전유물인 시스템창.

때문에 전대 대마법사들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사각지대인 시스템창을 활용해 내게 사건의 경위를 전해올 줄이야.

'그건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단 거겠지.'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카나인들에게도 [시스템]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념이었다.

천하의 마르셀로가 기이에 고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말이야.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과연, 탑주의 자리는 괜히 올라선 게 아니군."

어째 낙하산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기이에 있어서만큼은 조금은 어깨에 힘을 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나저나.'

결국, 탑주는 끝까지 나를 가늠해 본 모양이었다.

나를 신뢰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퀘스트 내용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능구렁이 몇 명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이게?'

대마법사의 음모도 아니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는 퀘스트.

이런 초고난도의 퀘스트를 탑주는 혼자서 수행하고 있던 거였으니까. 심지어는 그런 적들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면서 말이야.

'슬슬 이해가 되는데.'

어째서 탑주가 제시를 마탑에 입성시켰는지를.

탑주는 제시를 선택한 거겠지.

대마법사의 음모를 함께 막아낼 아군으로.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처럼 말하자면.

그게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스토리 라인이라는 거겠고.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자기가 스승이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하긴 본인조차 속여넘겨야 하는 연기였을 테니까.

여기선 탑주가 거짓말을 했다고 꼬투리 잡을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대마법사들의 음모가 뭐냐는 거다.

도대체 탑주는 어떤 음모를 알아차렸길래.

육체와 의식을 강제로 분리하고, 고깔모자라는 호랑이굴로 들어가서, 제시에게 대마법사 자리를 넘기는 도박 수를 던진 걸까...?

'결국, 그놈의 진리가 문제인가?'

진리라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카림제바.'

마탑의 지하.

무간에서 무너져 버린 두 명의 원로 마법사와는 달리.

카림제바는 절대영도에 얼어붙어 가면서까지 진정한 진리를 향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었다.

그런 카림제바가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벌였던 일은 다름 아닌 상위 마왕의 부활....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구린내가 난다.

마왕 쟁탈전 끝에 상위 마왕 중 하나인 가미긴과 마주쳤던 나였다.

덕분에 상위 마왕의 범상치 않음을 직접 확인했단 말이지.

일단, 상위 마왕하고는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가정해보자.

카림제바가 말한 '진정한 진리'.

그리고 대마법사들의 목적지인 '마법의 극한'을 동일시한다면....

'기이가 진정한 진리가 되는 건가?'

나는 탑주와 나눈 대화를 통해 마법의 극한이 기이라는 걸 파악했다. 아니, 파악한 걸 넘어서 내가 기이의 창시자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왔지.

내 입으로 내뱉었으니까.

탑주뿐만 아니라.

다른 대마법사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

'역시, 입으로 매를 버는구나.'

만약, 탑주가 아닌 다른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온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부디, 제시가 마력 탈진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야겠지.

탄식을 삼키기도 잠깐.

생각 끝에서.

나는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잠깐, 상위 마왕이 기이의 영역에 있는 존재라면.'

그런 전제를 깔고 간다면.

단번에 풀리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그랬다.

가미긴이 [『기이』]에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은 셈이잖아!

기이는 말 그대로 기이한 효과를 가졌다.

자그마치 화룡이라 불렸던 카림제바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허약했던 과거의 나한테 패배했던 건 기이에 관한 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미긴이 유일했다.

다시금 떠올려보는 가미긴과의 전투. 악크샨 선배님들이 도움이 없었더라면, 설령 기이를 발현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을 수 없었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상위 마왕.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기이의 영역'에 진입한 존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자 상위 마왕이 그토록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기이한 힘이니까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던 거였어.

나는 읊조렸다.

"그런가."

그래, 기이를 향해 달려나가던 게 나랑 마르셀로만 있던 게 아니었구나? 상위 마왕은 물론, 대마법사들도 기이를 향해 나아가고 있던 거였어.

근데, 말이야.

다들 명심하고.

주제 파악을 하라고.

"허나, 나와 같은 눈높이에 설 생각은 하지 말거라."

나의 흑역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나는 누구보다 먼저 기이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뿐만이 아니다.

기이에 상위 마왕이, 악마가 관련됐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랑펠은 더욱더 진심이 될 수밖에 없거든.

스샤샤샥─!

...아니, 그렇다고 이런 데까지 진심이 될 필요는 없는데.

어째 깃털펜을 놀리는 속도가 더욱더 신속해져 간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뿔싸.

어째 기이로 향하는 길보다.

고생길이 더 훤하게 열린 것 같다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진행 중)

그러나 모든 길도 한 걸음부터다.

탑주의 육체라면 마탑 최상층,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최상층을 찾는 건 수석의 업무를 마친 그다음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스슥─!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의 새로운 근위대장은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삼인자, 에노크 로렌이었다.

에노크는 문득, 예시카를 떠올렸다.

예시카는 어째서 그렇게 기겁을 했던 걸까?

"흐아암─"

하품이 다 나올 정도로 할 일이 없는데 말이야.

-"단장님, 제로 산맥 원정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예시카의 선언.

예시카가 나를 대신해 위험천만한 제로 산맥 원정을 대신 나서줄 줄이야. 에노크에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르콘의 승인 아래 예시카와 에노크, 서로의 직무가 바뀐 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 궁전 수호가 절대 만만한 임무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놓인단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황금 궁전에 얼씬거릴 수 있단 말인가? 무려 이호열 총대장님께서 매일같이 방문하시는 장소란 말이다.

물론, 총대장님께서야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언제까지고 자리를 지키고 계시진 않는다. 그럼, 그 부재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건 아니냐고?

아니, 뭘 모르는 소리를.

'산 너머에 또 하나의 산이 기다리고 있지.'

그렇다.

황금 궁전의 별실엔 엘시도어가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엘프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

저런 엘프를 어떻게 굴복시키신 건지는 모르겠다만....

암, 모든 게 이호열 총대장님의 능력이시겠지.

"이게 얼마 만에 꿀이냐?"

그리고 이런 꿀을 마다한 예시카의 덕도 추가.

그러나 에노크는 착각하고 있었다.

황금 궁전 근위대의 업무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해가 중천에 뜨고, 시곗바늘이 정확하게 정오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우르르─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황금 궁전 앞으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호열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들이었다.

난데없는 인파.

에노크는 반사적으로 소리치고 말았다.

"정지. 아직 이호열 총대장님께서는 복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통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이번에도 짜맞춘 것처럼 정갈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말이다.

"가위바위보!"

"아자! 저희 VBC가 먼저입니다."

"아니, 윤 감독님. 먹고 가위바위보 연습만 하셨어요?"

또한 순서를 정하는 나름의 절차도 존재하는 모양.

에노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이호열 총대장님의 덕분이라는 것을.

왜, 라이언 하트 기사단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었거든.

-"총대장님이 입만 열면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니까?"

-"사실 나도 마탑 마법사한테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뭐, 마탑에서 뭘 들어?!"

-"소문에 의하면 총대장님께선 이쪽 세상에서 아주 고귀한 혈족이신 것 같더라고. 콧대 높은 마탑 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니까."

-"심지어는 호멘이라던가. 그런 기도문도 있다고 했지?"

그저 호멘.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에노크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와중이었다.

다그닥─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그와 동시에.

기자들에게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에휴."

애마, 알렉산더를 타고 나타난 스칼이었다.

그간 신비주의를 고수해 오던 스칼이 아니던가?

그런 스칼의 등장에 환호해야 할 기자들이 시큰둥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또 왔어. 저거?"

"이젠 반갑기보다는 지겨운데, 진짜."

"류오쥔춘은 걱정도 안 된대요? 1레벨 차인데?"

놀라고,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대체 호열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란 말인가?

그동안의 신비주의가 무색하게도.

호열 앞에서만큼은 스칼은 지나치게 질척거렸다.

호열의 뒤를 쫓아 마탑과 유스라 왕국.

그리고 제로 산맥을 쏘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진짜 정말 미치도록 급한 일이라."

"뭐, 이번에도 특종감인가요 스칼 씨?"

"물론, 해결만 되면 정식으로 기자 회견 열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매번 같은 변명을 해가면서 은근슬쩍 맨 앞으로 나아가는 스칼이었다. 언제나처럼 예시카를 붙잡고 호소하려던 스칼은 흠칫했다.

"...예시카 브라이트 경은?"

"그녀는 제로 산맥으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오늘부터 황금 궁전의 근위대장은 저, 에노크 로렌입니다."

"아, 그렇군요. 에노크 씨."

"...?"

예시카는 경이고, 자신은 왜 씨란 말인가?

묘하게 거슬렸지만, 따지기엔 또 치졸해 보였다.

게다가 상대는 스칼이었다.

'용기사 스칼인가.'

대격변 이전, 제국에서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몇 안 되는 모험가 중 하나. 에노크 또한 기사이기에 용기사인 스칼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모험가 스칼이.

"아니. 그보다 긴급한 일입니다, 에노크!"

안절부절.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꼭 전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꼭 호열을 만나야 한다며 떼를 쓰고 있었다.

에노크는 그제서야 질색하던 예시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스칼에게 매일같이 시달린 거구나, 예시카....

단호한 예시카에 달리 에노크는 정이 많았다.

"경께서 복귀하신다면 전언을 전달하겠습니다."

게다가 스칼의 목소리가 워낙 호소력이 짙어야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칼에겐 호열에게 반드시 전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평소랑 대사가 조금 다른데?"

거기엔 웅성거리는 기자들의 바람잡기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칼은 이번에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근데 몇 시에요, 지금?"

"엥? 잠깐만, 훨씬 지났는데?"

"아니 호열 씨가 이러실 분이 아닌데?"

"혹시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거 아닐까요?"

"...설마?! 아, 안 돼!"

단 하루도 일과를 어기지 않았던 이호열.

그가 이례적으로.

하필이면 오늘 황금 궁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

.

.

마탑의 최상층.

흥건한 바닥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고 있다.

멈칫─

그 광경을 목격한 원로 마법사.

"...이호열 수석?"

유그위드가 간신히 말을 잇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처참하게 깨져버린 마력의 구체.

그 안에서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 마력의 정수.

탑주가 사라졌다.

◈ 214화. 당사자에게 묻도록

탑주가 사라졌다.

마탑, 선임 계급 이상의 마법사 전원은 크리스탈 홀에 신속히 집결했다.

물론, 거기엔 수석인 나도 포함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최초 목격자로서 크리스탈 홀 강단에 섰다.

이런 상황에도 목과 허리는 지나치게 꼿꼿하구나.

꼿꼿한 자세 덕분에 집결한 이들의 면면이 한눈에 보인다.

대다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군.

벤쉬와 뱅그릿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뱅그릿 선임?"

"소식 못 들으셨어요?"

"아니, 그게 정신이 없어서...."

"손에 들고 계신 그 종이는 또 뭔가요?"

"아, 이거 말입니까? 크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긴 뭐야, 나에게 불합격을 받은 출탑 신청서지.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 벤쉬뿐인 것 같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다수는 탑주와 접점이 없을 테니까.'

원로 마법사들과 대면해 본 선임 마법사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보다 더 보기 힘든 탑주와 마주한 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냐고.

물론, 몇 안 되는 이들이야....

지금도 충분히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르셀로에겐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

"탑주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마르셀로는 자리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그 현장을 처음 발견하신 건 이호열 수석이십니다."

그 말이 더없이 옳다.

그러니까 이렇게 강단에 꼿꼿하게 서 있는 거지.

이내, 유그위드가 마르셀로에게 눈짓하고는 말꼬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그런 이 수석을 제가 발견했지요."

그것도 맞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 말했다.

"그렇다면 불행 중 다행이네요! 다른 분도 아니고 이호열 수석께서 최초 발견자시라니. 분명,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찾아내셨을 테니까요!"

...저거, 나를 조리돌리는 건가?

의심할 정도의 발언을 내뱉는 건 벤쉬였다.

출탑 신청서의 복수를 이렇게 하는 건가, 싶었거늘.

벤쉬의 눈치야 경악스러울 정도니까 너그러이 이해해 주자.

사실 벤쉬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나의 똥고집이었으니.

내게 집중되는 시선─

분명, 내가 탑주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 짐작하고 있다.

단서보다도 명확한 퀘스트 목표가 눈앞에 떠오른 상태였거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실패)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그래,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다 생각했다!

분명 육체와 의식을 분리했다는데.

탑주의 육체는 어떻게 손가락을 꿈틀거렸던 걸까.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부터 불안 불안했다는 거다.

사건의 경위는 보이는 퀘스트 목표, 그대로였다.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던 탑주의 육체가 폭주.

구체를 깨부수고는, 의식은 그대로 고깔모자에 남겨둔 채 마탑에서 가출했다는 것. 탑주의 육체가 어디로 간 건지는 알 수 없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절대 호의적으로 나오진 않을 거겠지.

이렇게도 구체적인 사정과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거늘.

말했다시피 내 고집.

아니지, 그랑펠의 똥고집이 문제였다.

"마탑 최상층에 단서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단서는 내 퀘스트창에 있지.

최상층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치만.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는데, 어째서.'

항상 입으로는 매를 벌고.

말은 씨가 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냐, 그랑펠?

"아앗...."

나의 단호할 정도의 선언에 벤쉬는 흠칫 당황한 모습이었다.

옆자리의 뱅그릿이 그를 대신해서 입을 연다.

"그렇다면 탑주님의 행방에 대해 짚이시는 바는...?"

그에 관한 내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답하지 않겠다."

"...!!!"

자기변호를 하자면 이건 단순한 꼬장이 아니었다.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는 긍지 때문이지.

그렇다, 나는 탑주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이 일은 당분간 기밀에 부치겠다."

근데, 아무리 기밀이라도 그렇지.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조금은 돌려서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나의 뻔뻔한 선언에 크리스탈 홀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유그위드가 입을 연다.

"그렇다면 어째서 마탑의 최상층을 찾았는지, 이유 정도는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탑의 수석에겐 최상층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곤 하지만. 이 수석은 평상시, 최상층에 출입하는 일이 없지 않았나요?"

왜긴요, 당연히 퀘스트 때문이지.

그러나 애초에 탑주로부터 시작된 퀘스트였다.

뱉은 말에 따라서.

유그위드의 질문에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으니.

이번에도 내가 뱉은 말은 한결같았다.

"답하지 않겠다."

진심, 공포의 주둥아리가 따로 없구나.

내가 이렇게 수상한 사람이다.

광고하다시피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거늘.

그럼에도 나를 향한 눈초리가 의심으로 바뀌진 않았다.

'이런 반응은 좀 감동이네.'

물론, 의심받지 않는다고 끝난 건 아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르셀로의 시선.

누가 봐도 공허해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경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데에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 부디 이번만큼은 제 심정을 헤아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한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법사는.

그중에서도 마탑의 마법사들은 절대 성인(聖人)이 아니다.

이를 증명하는 마탑의 일화에 관해서는 멀게는 소문으로, 가깝게는 예시카를 통해서도 전해 듣지 않았던가?

'단순하게 방해가 된다고 일대를 날려버렸다니까.'

그런 마법사들이 누가 봐도 수상한 나를 이해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체감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확실히 마탑이 변했다는 게 느껴지는군.

그러나.

"유감이네. 마르셀로 수석."

"...경?"

"그럼에도 그대의 부탁에 응할 수는 없겠군."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사가면서까지 대답하지 않는 건 전부 마르셀로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나는 마르셀로가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애타게 기다리는 탑주는 이미 죽었으니까.'

육체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 탑주는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시에게 대마법사 클래스를 계승할 순 없었을 테니까.

그게 바로 내가 당황하지 않은 이유였다.

'이 또한 탑주의 계획 일부겠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퀘스트 목표에 떠오른 대로.

탑주, 자신의 육체가 사망해야지만 이뤄지는 계획.

그렇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셀로에게만은 절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경의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나에게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

.

.

벨리에는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를 바라봤다.

마티스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추궁이 아닌 절차에 불과했거늘.

그럼에도 최초 목격자란 이유로, 이호열 수석께서 단상에서 질문에 답하는 모습조차 보기 싫으시다는 거겠지. 사실 벨리에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모두가 같은 심정일 거야.'

숙련, 견습 마법사는 모를지라도.

이곳에 모인 선임 이상의 마법사 모두는 알고 있었다.

모험가였던 이호열 수석, 그가 마탑을 위해 짊어졌던 짐들을.

마탑의 과오.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 마법사들이 악마 숭배자로 밝혀졌던 순간, 이호열 수석께서는 쏟아지는 세상의 관심과 화살을 전부 자신에게 돌리셨었다.

뿐만 아니다.

휘청거리던 마탑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새로운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변화의 바람을 이끈 것도 이호열 수석이었다.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런 표정들이겠지.'

그런 이호열 수석이기에.

이 자리의 모두는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탑주의 행방불명에 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더라도.

수석님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다.

"질답에 이의는 없습니다."

"저 또한 남은 의문은 없습니다."

"슬슬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순수마력학, 뱅그릿 톰.

대지마법학, 마이아 데이안.

마법부여학, 키코 아르민.

정령마법학, 페이얀 롯....

"동의합니다."

끝으로 자신과 마티스 선임 마법사까지.

계급과는 무관했다.

원로, 유그위드도 선임들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크리스탈 홀에서 의견을 밝히지 않은 건 마르셀로가 유일했다.

'마르셀로....'

벨리에는 마르셀로에게 탑주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가끔은 마르셀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

벨리에는 마르셀로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탑주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인 뒤.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탑주가 사라졌다.

그 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한 건.

불행 중 다행으로 이호열 수석.

마르셀로는 누구보다 마음을 놓았었겠지.

이호열 수석이라면 틀림없이 탑주가 남긴 흔적에서 무언가를 포착했을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정작 이 수석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

모른다도 아니고, 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복잡한 마음이라는 걸 알아.'

마르셀로, 네 성격이라면.

감히 이 수석님을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그러나 벨리에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호열 수석의 심정도 마르셀로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벨리에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이 수석님....'

호열이 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수백만의 악마가 달려드는 와중에도 시무아르드가(家) 시한부의 저주를 해주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 때문에 피투성이로 마탑에 복귀했던 광경까지 목격했던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 진실을 말한다면 마르셀로는....'

분명, 이 수석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덕분에 마르셀로가 더 큰 자책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수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에게 격한 감정변화는 좋지 않다."

당부가 있었기에 여태껏 그날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벨리에였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벨리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거라 믿습니다.'

벨리에는 호열을 바라봤다.

크리스탈 홀을 빠져나가는 그 뒷모습을.

문득, 호열이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이 수석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었지.

-"본래 살아가는 건 고독 속에서 헤엄치는 것이다."

"...이번에도 혼자서 짊어지시는 건가요?"

벨리에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 무게를 견디실 수 있는 거죠?"

.

.

.

하여튼, 이놈의 흑역사가 여러 사람 헷갈리게 한다!

그냥 속 시원하게 모든 게 탑주의 계획이라고, 탑주가 제 발로 마력 구체를 깨고 마탑을 벗어난 거라고. 까버린다고 어디 덧이라도 나는 거냐고, 진짜.

'미안하다.'

특히나 마르셀로에겐 면목이 없다.

내가 마르셀로에게 여태까지 받아온 게 얼만데!

아무리 마르셀로를 위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사이에 쉬쉬해야 할 일이 생길 줄이야.

'아니, 그러니까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나의 자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뻔뻔하게 내뱉는 입.

"멋대로구나. 탑주여."

그거 대체 누가 할 소리냐, 그랑펠.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크리스탈 홀에서도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 플레이어에게 장비는 생명과도 같은 거니까. 게다가 여명 세트는 평상시 입고 다니던 정장과 큰 차이도 없었으니까.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펄럭─

근데, 이놈의 재킷을 일상에서도 어깨에 걸쳐두는 건 좀 심하지 않냐? 날 쳐다보는 시선이 괜히 차림새 때문에 그런 것 같고, 피해의식이 생긴단 말이다.

"제멋대로인 행동에 정식으로 책임을 묻겠다."

나도 네게 수치심에 관한 책임을 정식으로 묻고 싶구나, 그랑펠.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이제부터 나는.

검성, 셰그윈과 마찬가지로.

초월자, 그와 동시에 전대 대마법사인 탑주를 처치해야만 했으니까.

정확하게는 탑주가 아닌, '탑주의 육체'지만 말이야.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도 읊조렸다.

크리스탈 홀에서의 뒤끝을 더해서 말이야.

"마르셀로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탑주, 그대이지. 내가 아니다."

제발.

이번에도 그 말을 실현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

.

.

[아르카나 대륙 전기 공식 홈페이지]

※긴급 업데이트 공지

『여러분 곁으로 최악의 적이 찾아옵니다.

신규 보스 몬스터, 탑주가 추가됩니다.

출현 지역은 '지구 전역'입니다.』

그날 인류는 깨달았다.

아르카나 대륙의 초월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백 개의 운석.

"엄마!"

"저기, 하늘에서 별똥별이 엄청나게 떨어져요!"

"흐흐흑, 신이시여. 제발...!!"

절망 속에서 목격했다.

"유감스럽게도."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나는 신도, 미신도 믿지 않는다."

밤하늘로, 우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운석 무리.

"그럼에도 소원을 비는 중이었다면."

그런 초월자조차 능가하는 기이의 존재를.

"내가 대신하여 이루어 내겠다."

펄럭!

◈ 215화. 얼마든지 날뛰어 보도록

『여러분 곁으로 최악의 적이 찾아옵니다.

신규 보스 몬스터, 탑주가 추가됩니다.

출현 지역은 '지구 전역'입니다.』

충격적인 소식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건 다름 아닌 AAU였다.

신규 보스 몬스터가 탑주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윤수겸은 마른침을 삼켰다.

"최악의 적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게 될 거야."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마법사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레벨과 무관하게 클래스가 마법사 계열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유명 길드에 입단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일당백.

능력에 따라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존재들.

그 당시의 귀족 클래스 중 하나로 투자되는 비용을 포함. 육성 난이도는 극악이지만, 육성해 내기만 한다면 확실하게 보상을 거머쥐는 클래스였다.

"아르카나 설정이 그랬으니까요."

제국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드넓은 아르카나 대륙을 일통했다고 봐도 무방한 제국이었거늘. 무수한 병사 숫자와 비교해 제국 소속 마법사의 머릿수는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까놓고 밸런스 때문에 만든 설정이었지. 마탑은."

마법사는 아르카나 대륙의 균형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마탑은 그런 마법사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는 족쇄 역할을 했다.

허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마탑의 마법사들은 NPC가 아니었으니, 설정도 영원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 사실만으로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아직도 마탑이 현실에 등장한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완전 초비상이었죠, 저희."

"마탑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매일 야근이었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감사해야겠네요."

위험성만으로는 핵폭탄을 능가하는 마탑.

그런 마탑이 인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줄은 몰랐는데.

모든 게 마탑의 수석, 호열 덕분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업데이트는 더더욱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탑 측에서 들어온 연락은 없나?"

"그렇지 않아도 견습 마법사 자격으로 마탑에 머물던 플레이어들에게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사건과 관련해서 의견을 밝힐 거라고요!"

"후우. 일단, 마탑 전원이 돌아선 건 아니란 건가."

터져 나오는 한숨 속에서.

성현준과 윤수겸은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뻐금거리는 성현준의 입.

"왜, 이번엔 호열 님이 아닌 거죠?"

지금껏 대중에게 마탑의 태도를 밝히던 건 호열이었다.

마탑의 실세, 수석이자 플레이어.

호열만큼 현실과 마탑의 연결고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성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긴급 업데이트도 예상하고 먼저 움직이고 계신다든가?"

"아니, 설마가 아니야."

"네? 뭐 짚이는 거라도 있으세요, 선배?"

"탑주가 플레이어들의 적으로 돌아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호열 씨라면 분명 그 이유를 알고 계시겠지. 아니, 모를 수가 없어."

"...같은 마탑 소속이시니까요?"

"그래, 유그위드도 분명 파악하고 있을 거야."

윤수겸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윤수겸의 장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탑의 로비.

취재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원로, 유그위드.

-"설마, 탑주가 적의를 드러내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녀의 선언에 성현준은 말을 더듬었다

"...끼,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탑주가 가사 상태에 빠져 마력 구체 속을 부유하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AAU였다.

그러나 정확히 예상할 수 없다고는 해도, 비슷하게 추측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예상은 하고 있었던 반응이죠?"

"그래, 담담한 목소리를 보면.... 행방이 묘연해진 것까지는 알아차리고 있었던 눈치야. 젠장, 마탑에 무슨 떡밥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쵸. 어떤 설정이 어떤 식으로 실현됐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동안 수도 없이 목격하지 않았던가?

아르카나 대륙 전기의 밸런스를 해치지 않기 위해 추가했던 몇 줄의 설정들이 '실존'하는 부메랑이 되어 현실로 날아들었던 광경을.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의 추측은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절레절레─

생각을 떨쳐낸 윤수겸이 말했다.

"좋아, 당장은 닥친 위기만 생각해 보자고."

마탑의 사정?

그딴 건 눈앞의 위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대단하시다는 아르카나 대륙의 마법사들.

그 마법사의 정점, 탑주가.

인류의 적으로 등장한 상황이었으니까.

"젠장, 드래곤이 날아오른 게 얼마 전인데."

윤수겸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정도.

그만큼 답이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탑주는 균열에 등장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마탑에서 출탑.

곧바로 현실로 뛰쳐나왔단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듯.

업데이트 내역에도 똑똑히 명시되어 있다.

출현 지역이 '지구 전역'이라고.

"탑주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싸울 생각인 걸까요?"

"그런 기동력을 따라갈 수 있는 건...."

"플레이어 중엔 호열 씨밖에 없겠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는 AAU.

그러나 시작부터 틀렸다.

탑주에게는 포탈을 타고 동에서.

서에서 나타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위이잉─

요란한 경고음.

자동으로 전환되는 전면 모니터 화면.

갑작스러운 경고음이었지만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

최근 이것과 똑같은 경고음을 들었으니까.

그랬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드래곤이 날아올랐던 그 순간에.

지부장,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게도, 어나더 스페이스 호에서 도착한 교신이다."

그의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소행성 군집이 지구로 낙하 중."

"...네?"

"정황상 탑주가 발현한 메테오 스트라이크로 추정된다."

"!!!"

초월자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

아주 성대하게 날뛰어 주시는구나, 우리 보스!

마법 서적을 탐독하는 것 또한.

하루도 빼놓지 않은 일과 중 하나였다.

덕분에 잘 알고 있지.

반짝─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 유성우가 어떤 마법인지를.

'미친, 메테오 스트라이크 10연발이라니.'

아무리 계획 일부라고 하더라도.

지구를 날려버리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메테오 스트라이크.

웬만한 마법사는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하는 마법이었다.

발현 과정만 살펴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을걸?

무려 하늘도 아니고, 우주에 떠있는 소행성에 탐색. 낙하시킬 정도의 마력을 쏟아부어서 간섭하고, 발현 과정에 도달해야 하는 마법이란 뜻이다.

그 정도 마법 발현력을 갖춘 이가 몇이나 되겠냐고! 그런 의미에서 장담하겠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발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클'이 필요하다고.

나는 입을 열었다.

"탈출을 자축하는 것인가."

그 대단한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대한 감상평을 뱉었다.

"그러나 폭죽의 방향이 잘못됐군, 탑주여."

저런 핵폭탄이 폭죽이라니.

허세 진짜....

그러나 지키지 못할 말은 내뱉지 않는다.

『반전 마법』 발현.

나는 역행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바라봤다.

그래, 반대로, 하늘로 쭉쭉 뻗어져 나가는 게.

그랑펠 말대로 이제야 폭죽놀이 같긴 하네.

문득,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운석들이 거꾸로?!"

"잠깐. 이, 이호열이다!"

"뭐라고?! 어디?!"

"엄마, 별똥별이 아니라 폭죽놀이였나 봐요!"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시민들.

보다시피 이곳은 인구가 밀집한 도심지였다.

말은 태연하게 내뱉고 있지만, 진심으로 아찔해진다.

'내가 진짜 온 힘을 다해서 발버둥을 치고, 온갖 우물이란 우물은 다 파고 다니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영약까지 직접 키워서 먹고 서클을 형성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발버둥 치다가 다리에 쥐라도 났었다면?

이 순간, 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탐색조차 할 수 없었을 거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발현했다면 또 모를까.

타인이 발현한 낯선 마법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론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 또한 초월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발현력이란 마법에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거기엔 탐색 능력도, 간섭 능력도 포함.

그렇지 않아도 낯뜨거운 설정 덕분에 경이로운 수준이었던 그랑펠의 시야가 1,000퍼센트 더 밝아졌다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나와 그랑펠은 기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군.

『설정』과 [시스템].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을 알뜰하게도 써먹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언제까지고 탑주에게 휘둘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탑주의 마력흔을 추적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탐색하며 마력을 특정했으니, 어렵지 않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지체하지 않고 그 좌표를 향해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파이팅!!"

문득, 뒤통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는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뱉은 말.

그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내게 응원이 쏟아졌다.

"흐흑, 감사합니다.... 정말로...!"

"부디 이겨주세요, 호열 님!"

"긍지를 담아서 응원하겠습니다!"

...저런 소릴 직접 듣는 건 처음인데.

하긴, 플레이어들과는 많이 부딪혔던 나였지만.

일반인들하곤 마주할 일이 없었지.

그 사실을 의식해서일까, 어깨가 심히 부담스럽군.

부담감 때문이냐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뻔뻔하게 읊조렸다.

"실로 소박한 소원들이구나."

그렇다.

이놈의 긍지가 부담감을 느낄 리 없었으니.

어깨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당연히.

이 와중에도 펄럭거리는 재킷 때문이라는 것이다....

.

.

.

그나저나 상도덕이라는 게 없군, 레이먼 션.

아무리 긴급 업데이트라고 하더라도 내역에 레벨 정도는 공지해주는 게 국룰 아니냐고. 물론, 초월자부터야 레벨의 의미가 퇴색되는 경지라고는 하더라도.

'그래도 짐작은 할 수 있을 거 아냐?'

포탈에서 빠져나온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서클의 능력을 찍먹한 거나 다름없었다는 걸.

탑주에게는 전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전장을 창조할 수 있었으니까.

육안으로는 평범한 하늘, 땅, 산, 숲처럼 보였거늘.

일대에는 짙은 마력이 넘실거린다.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실체가 아니야.'

모든 게 '마력 덩어리'라는 것을.

내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게 전부 환각마법이었다.

진심으로 경이로울 정도의 마법 구현력이다.

'나스로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

그의 환각마법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보통의 환각마법이 대상을 속이는 것이라면, 이건 세상을 속이려 드는 수준. 실제로 나는 두 다리로 마력 덩어리를 땅처럼 딛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환각마법인가?"

내가, 그랑펠이 누군데?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기껏해야 100레벨 언저리였던 그 시절.

초청장도 없이 정기 학회가 열리는 마탑에 또각거리며 들어가서는. 탑주의 환각 마법을 간파했던 나란 말이다.

그러니까 태연하게 지껄일 수 있단 거지.

"탑주, 뜻밖에도 그대는 발전이 없군."

이런 깽판을 벌인 탑주에겐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나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탑주.

정확히는 탑주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적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 10연발에서 확실하게 파악했다.

그러니 나도 진심일 수밖에 없다.

정렬하는 육망성 브로치의 방향.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발동 중인 버프를 확인한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지만.

업데이트 내역에 적혀있던 대로.

탑주의 육체는 보스 몬스터 판정이다.

[육망성 브로치 2/6]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2/6]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천적관계]가 없는 상태에선 10퍼센트의 전력상승도 소중하지. 물론, 탑주와 비교하자면 보잘것없는 나의 마력량을 뒷받침해 주는 [첫 세계수의 축복]도 빠트릴 수 없다.

게다가 탑주의 육체.

그쪽은 나처럼 이런 마도구 하나도 없잖아?

마력 구체에선 맨몸으로 빠져나왔을 테니까 말이야.

펄럭거리는 여명의 재킷은 제쳐놓더라도.

나는 마탑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에픽 등급 아이템으로 둘둘 도배했단 말이다.

마지막으로.

본의 아니게 상위 마왕 덕분에 체감하게 된 기이의 위대함까지.

탑주라는 최악의 적을 상대로.

혼자서 나선 데에는 합리적이면서도 복잡한 계산이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득, 허공에 일렁이는 마력.

서서히 발현되는 포탈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 216화. 수업 (1)

"!"

눈동자에 확실하게 느낌표가 떠오른 걸 보니까 이번엔 제시 하인네스가 맞군. 그나저나 놀라야 할 건 나인데. 어째 제시 쪽이 훨씬 놀란 눈치다.

"이런 곳에서 오랜만에 뵙네요, 이호열 수석님!"

일단,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꾸벅─

직각으로 숙이는 자세가 정중해서 나도 모르게 화답했다.

"마력 탈진의 후유증은 나아진 모양이군."

안부를 묻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단도직입도 정도가 있지!

방금 말했잖아?

'사교장에서 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만난 기억도 없는데.

제가 마력 탈진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혹시라도 물어오면 어쩌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력 탈진...? 역시, 이 수석님이세요! 제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걸 알아보셨군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이럴 땐 쌓아둔 업보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그나저나, 나는 제시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여긴 좀 위험하지 않나.

'500레벨 초중반이었지.'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제시에게 이 전장은 무리다.

벌써부터 증거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미약하게 들썩거리는 어깨.

포탈에서 나타난 제시였다.

목적지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포탈 발현에 소모되는 마력량은 급격하게 상승하는 법.

호흡을 가다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제시는 포탈을 발현하는 데에 많은 마력을 소모한 거겠지.

제시가 탑주의 마력흔을 추적할 순 없었을 터.

그렇다면 역시.

클래스 퀘스트를 따라 움직인 건가.

슬쩍 주변을 살핀다.

아직까지 탑주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제시와는 의견을 교환할 필요가 있겠군.

적에 관한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시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니까.'

나야 탑주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건에 얽힌 사연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만.

구체적인 목적까진 알지 못했다.

퀘스트가 있긴 해도 지나치게 간결했거든.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라. (진행 중)

●탑주의 육체와 마주하라. (실패)

●폭주한 탑주의 육체를 처치하라. (진행 중)

처치하라.

그렇게만 적혀있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법사, 제시는 아니겠지.

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과연, 짐작하고 계셨네요! 클래스 퀘스트 때문이 맞습니다. 이 수석님에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가 기특해서가 아니다.

내가, 이호열이 기특해서다.

나, 진짜 날마다 죽도록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왜, 오늘만 두고 봐도 그렇다.

어찌어찌 잘 풀려서 긴급 업데이트를 해결하고 복귀한다고 쳐보자고.

그런 내가 유스라든, 마탑이든 복귀해서 할 일은 뻔했다.

[집념]을 향상시키겠다고, 육체를.

그것도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혹사하겠지.

어디 그것뿐이냐?

기이의 영역에 상위 마왕을 포함한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기이에 관한 연구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그러나 드높으신 긍지께서.

타인의 앞에서 엄살을 부릴 리가 없었으니.

나는 제시를 향해 의연하게도 말했다.

"알고 있다."

탑주가 한 말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력 탈진에 빠졌었으니까.

그나저나.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덧붙이자.

나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앗, 마력 탈진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력 탈진에 빠질 때까지 무리하는 건 자제해 주면 좋겠다.

내 천운은 진작 끝났거든. 고깔모자에서 어떤 대마법사의 인격이 튀어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다.

"네, 명심할게요!"

제시가 느낌표로 대답하기도 잠깐.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무엇이냐, 대마법사 클래스 퀘스트의 목표.

탑주의 계획은 과연...!

"이번 클래스 퀘스트는 [수업]입니다!"

...수업?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퍼즐처럼 흩어졌던 의문들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탑주가 제시를 마탑으로 불러들였던 시점부터 지금 이 순간.

제시에게는 턱없이 벅찬 이 공간으로, 제시를 이끈 이유까지도.

탑주는 고깔모자에 깃든 뒤에도.

차기 대마법사 제시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남겨둔 것이었다.

제시는 모험가다.

마법적 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대마법사들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다른 세계의 존재.

그런 제시에게 방대한 마법적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던 거겠지.

제시가 양손으로 지팡이를 꼭 붙잡곤 말했다.

"퀘스트 목표는 전대 대마법사의 육체와 조우하는 건데요! 약간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네요! 고깔모자 말고 육체는 처음 뵙는 거거든요!"

나와 제시의 퀘스트 목표를 비교해 본다.

'...나는 처치하라. 제시는 조우하라.'

뭔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군.

당연하게도.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제시는 내 퀘스트에 관해 알지 못하겠지.

그러니 마냥 설레는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제시 하인네스."

"네, 듣고 있습니다. 이 수석님!"

"이번 수업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하기도 전.

지구를 향해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10개나 발현했던 탑주의 육체가 아니던가? 하도 빌어먹을 상황을 많이 겪어서 말이야. 조금은 감이 생겼거든.

내 추측에 화답하듯.

변해가는 환각마법의 풍경 너머.

요동치는 마력의 물결 속에서.

탑주의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군."

그 말에 제시의 동공이 처음으로 내게서 떨어진다.

불투명한 마력 구체에서 빠져나온 탑주의 육체.

남자인가, 여자인가.

성별을 알아차리기 힘든 중성적인 외모.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초점 없이 공허한 눈동자였다.

이내, 제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수석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퀘스트 목표가 갱신됐습니다! 그런데...."

"말해도 좋다."

"그게 '이번 수업에서 살아남으라'라고 하시네요...!"

생존이라니, 제시에겐 불가능한 퀘스트 목표잖아?

하지만 어째서 제시에게 벌써부터 이딴 퀘스트 목표를 줬는지 알 것 같다.

분명, 그 고깔모자 속에서. 대마법사들의 의식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겠지, 탑주?

시간이 촉박한 거야.

더는 고깔모자 속에 존재하며.

제시를 돌볼 여유가 남아있지 않은 거야.

그런 상황에서 나를 떠올린 거겠지.

서클을 형성한 나라면.

게다가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제시와 함께라면.

먼 훗날 제시를 위한 안배를.

지금 시점에서 개시해도 된다고 판단한 거겠지.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약간 참관 수업 같은 느낌이잖아, 이거?'

육체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 탑주가 자신의 육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육체가 폭주해 제시를 헤치려고 든다면.

지켜보고 있던 나더러 처치하라는 뜻이 분명했다.

'아니, 진짜 부장님 같네.'

퀘스트 목표까지 들이대면서 부하 직원 부려 먹는 거 뭔데?

하지만 마냥 투덜댈 일도 아니겠지.

그도 그럴 게.

현재 탑주가 발현하고 있는 모든 마법은 말 그대로 차기 대마법사, 제시를 위한 것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처럼 마법 서적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초고위 마법이 쏟아진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부릅뜨고.

생각을 고쳐먹자, 호열아.

참관이 아니라 함께 수업을 받는다고 생각하자고.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내겐, 그랑펠에게는 목격하는 모든 걸 흡수하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좋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자, 탑주여.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부디 배울 것이 있었으면 좋겠군."

*

마탑.

유그위드는 집결한 선임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로써 마탑의 치부가 세상에 들통이 났군요."

이 수석, 특히 그대에겐 면목이 없답니다.

카림제바를 비롯한 원로들의 반란부터.

마탑을 지키기 위해.

또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에게로 모든 관심을 돌리던 호열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무색해지게도.

"곧장 초고위 마법 발현이라니. 기운도 넘치시지."

마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탑주.

우리 탑주님께서 거하게 뒤통수를 쳐주셨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그위드를 비롯한 이곳에 모인 선임들은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어째서 이 수석이 침묵을 지켰는지 알 것 같군요."

"수석께서는 차마 말씀하실 수 없으셨던 겁니다."

"마티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가 입을 열었다.

"이 수석께서는 늘 마탑을 우선시 여기셨습니다."

크리스탈 홀에서의 침묵 또한 배려가 확실했다.

탑주가 적의를 드러내고 발산한다면, 마탑이 나서서 탑주를 저지해야 할 터.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상황을 반가워할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탑주가 누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탑주의 행동이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 크나큰 위협이 된다는 것.

"이 수석에게 모든 것을 떠넘길 순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유그위드 님."

"이런, 벨리에 선임이군요."

"저 또한."

"오호, 나스로우?"

그들을 필두로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의견을 일치시켰다.

유그위드는 다시 한번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듯싶었다.

"다행이네요. 혼자 나설 걱정은 덜었어요."

그런 유그위드의 눈빛이 이내, 돌변했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카림제바나 세니오스처럼 『마법』에서 비롯된 이명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탑에 입성한 후.

선임에서 수석, 원로를 거쳐오며 뒤늦게 붙은 이명이었다.

유그위드에게 그런 이명이 붙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나서볼까요?"

인자한 미소 속에 감춰진 냉철한 판단.

유그위드에겐 결단력이 있었다.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거인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유그위드는 거인이었다.

스스로 내린 결정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었으니까.

서늘한 농담이 이어졌다.

"따지자면 이건 탑주를 향한 반역이 되겠군요? 뭐, 나쁘지 않습니다. 기왕 마탑에 발을 들인 김에 나이라도 내세워 탑주 자리에 앉아보는 것도 좋겠어요. 후후."

유그위드는 곧장 마력흔을 추적했다.

탑주의 마력흔보다는....

이 수석의 마력흔을 추적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겠지.

그리 생각했거늘.

유그위드가 너털웃음을 뱉었다.

"...정말로 보통이 아니군요, 이 수석?"

마력흔조차 추적할 수 없다니.

이게 바로 [『기이』]란 말인가요?

그대의 말이 맞았군요.

그대에게 서클은 거쳐 가는 경지에 불과했어요.

"그러니 탑주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하늘로 되돌려버린 거겠죠."

원로인 유그위드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기이.

신선한 충격에 감탄하기도 잠깐.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이 수석의 마력은 우리 같은 범인(凡人)은 감히 추적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선 것 같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마티스?"

"원로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뱅그릿, 그대가 보기엔 어떤가요?"

"네, 넵! 자, 잠시만요!"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그는 선임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마력감응력을 가졌다.

마력에게 선택받았다고 할 정도의 감응력. 축복에 가까운 재능이 제대로 된 마도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 뱅그릿을 선임 자리에 올려놓았다 해도 무방했으니까.

"유그위드 원로님의 말씀이 옳으신 듯합니다."

물론, 그런 뱅그릿에게도 무리는 무리였다.

"어쩔 수 없군요."

유그위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마르셀로 수석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마르셀로라면...."

"그러고 보니 보이질 않는군요?"

호열과 함께 기이의 길을 걷는 마르셀로라면.

마력흔을 추적하는 것쯤은 능히 해낼 수 있을 터.

유그위드는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이런."

벨리에가 흠칫해서는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유그위드 원로님?"

"아무래도 우리가 늑장을 부린 모양입니다."

"네?"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가 닿지 않는군요."

"그 말씀은...?"

"아마 마르셀로 수석도 이 수석과 같은 공간. 그러니까 탑주가 발현한 마력 소용돌이에 진입한 모양입니다. 이거, 두 수석을 쫓기에 늙은이는 무리란 걸까요?"

물론, 엄살이었다.

말했다시피 거인은 이미 발을 내디뎠으니까.

유그위드가 곧장 마르셀로의 마력흔을 추적.

이내, 포탈을 발현했다.

유그위드가 말했다.

"늦었지만, 부지런히 두 수석을 쫓아봅시다."

.

.

.

나는 맞은편에 선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이호열 수석.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마르셀로는 그렇게 말하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름대로 진지한 목소리인데.

내게는 이보다 웃긴 말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처럼 사적인 자리에서 나를 향한 마르셀로의 호칭은 '경'으로 고정되어 있었거든.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탑주? 그쪽이 알던 마탑이랑 지금 마탑은 좀 상황이 달라졌다고.

그러니까 이딴 유치한 환각 따윈 치워버리란 거야.

"수업이라 칭하기엔 지나치게 가볍군."

나는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정기 학회의 사전 검증이 이뤄지던 토파즈 홀.

그곳에서 내뱉었던 독설처럼.

"마탑의 체면을 떨어트리지 않기를 바란다. 탑주."

그런 내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그 의견에 동감입니다."

이번엔 진짜였다.

"당신이 알고 계실 리가 없으시겠습니다만. 경께서는 저를 그저 마르셀로라고 부르십니다. 수석이란 불필요한 칭호를 붙이지 않으시지요. 물론, 원로님들에게도 마찬가지십니다."

...어째 나를 존댓말도 모르는 놈이라고 돌리는 것 같다만.

어쨌든.

반갑다, 진짜 마르셀로.

그런데 어째 마르셀로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탑주 앞에서 아련해야 할 눈빛이....

어째 활활 불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르셀로도 마법사였단 사실을.

그랬다.

저 활활 불타는 눈빛은 만년설, 세니오스의 그 눈빛.

"뭐, 그래야 당신답지만."

나.

"아니, 한결같아 보이셔서 오히려 좋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꺾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탑주와 마르셀로의 관계를 단단히 착각한 것 같다...!

◈ 217화. 수업 (2)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 가문에 기생하던 마왕조차 탐냈던 재능의 소유자. 천부적인 재능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으니. 대륙 마도 가문에선 이런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시무아르드가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더니...."

"과연, 가문에 국한될 재능이 아니군요!"

"마탑의 선임 자리를 노려볼만한 재능입니다."

마도 가문이기에 마탑이 어떤 장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 그런데 마탑에 입성하는 것도 아니고 선임의 자리를 꿰찰 정도라 평가하다니.

누구 하나쯤은 과장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었거늘.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이런 소년이 모든 주류 분파의 마법을 익히다니요!"

열댓 살 무렵.

마르셀로는 마탑을 지탱하는 스무 개 분파의 마법.

주류 마법을 중급 수준까지 자유롭게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마르셀로가 마탑 입성에 발목을 붙잡힐 리는 없었다.

"저 가냘픈 소년이 시무아르드의 아이인가요?"

"오호라."

"견습을 두고 담소라니, 상당히 낯선 반응들이시군요."

마탑에서 견습 마법사는 햇병아리 취급이다.

분파에 소속될 수도 없으며 증명할 능력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르셀로는 예외였다. 그는 견습 마법사 때부터 수많은 선임의 눈총을 받았다.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이군.'

'탐나지만 위험하다.'

'...오히려 내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을 정도.'

고작 견습 마법사가 선임 마법사의 견제를 받는다?

과거에도, 지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니, 마탑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그와 같은 세대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죠."

제아무리 출중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마탑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니까.

설령 마르셀로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한들.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물론, 그런 안일함은.

"...시무아르드가 사전 검증을 통과했다고?"

"아직 분파도 택하지 않았잖아요?"

"설마, 견습 때 연구를 끝마쳤단 소린가!"

견습에서 숙련.

마치 진급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전 검증을 통과하고 정기 학회에 선 마르셀로 덕분에 사라져 버렸지만.

그 시점부터 마르셀로는 선임들의 경쟁 상대가 되었다.

"그가 어떤 분파를 선택하는지에 달렸네요."

"우리 중 한 명의 자리가 위태로워지겠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러나.

마르셀로는 또 한 번 예측을 뛰어넘었다.

선택하지 않고 창조해 낸 것이다.

『이론마법학』.

마법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완전히 새로운 분파를.

그 이후부터는 알려진 그대로였다.

이론마법학은 모든 마법을 한 단계 진보시켰으며 마르셀로는 그 공을 인정받아 선임 마법사. 그리고 유력 후보 마티스를 제치고 수석의 자리에 올라섰다.

가장 위대한 업적을 세운 최연소 수석의 탄생이었다.

그날, 마르셀로는 수석의 자격으로 원탁회의에 참가했다.

처음으로 탑주와 조우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흠, 수석의 무게를 견디기엔 한없이 병약해 보이는 꼬맹이로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선임의 자리로 돌아가 그 몸뚱이부터 돌보는 게 어떻겠느냐?"

"...!"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을.

벽, 탑주는 마르셀로에게만 가혹했다.

이론마법학 앞에서도 태도는 한결같았다.

"마법이란 글줄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꼬마."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이론마법학입니다. 그리고 성년이 훨씬 넘은 제게 꼬마라는 호칭은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런가. 알겠다, 마르셀로 꼬마 수석."

"...."

탑주는 시시콜콜 마르셀로의 꼬투리를 붙잡았다.

탑주를 제외한 마탑의 모두가 마르셀로의 재능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수석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날 정도의 모독이었다.

유그위드는 그 모습에 웃음을 삼켰었다.

"탑주께도 저런 삐뚤어진 면이 있으실 줄이야."

자신을 비롯해.

모든 마법사는 정상의 범주에서 어긋나 있다.

말했다시피 그건 마르셀로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쉽게 말하자면....

탑주와 마르셀로는 서로에게만 비틀어져 있었다.

"알고 계십니까? 그런 걸 꼬투리라고 합니다."

"무례하구나, 꼬마 수석."

"어순을 바꾼다고 담긴 의미가 달라지진 않습니다."

"알았다, 수석 꼬마."

"...."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천하의 마탑.

탑주와 수석 마법사가 최상층에서 이리도 유치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리라고는.

그러나 지독하게도 맞닿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평행선은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끊겨버리고 말았다.

"...탑주님?"

마치 번데기 속에 웅크린 애벌레처럼.

탑주가 마력 구체에 갇히고 말았으니까.

누구의 소행도 아니었다.

"확실하게도 탑주님의 마력흔이네."

탑주, 스스로 행한 일이었다.

마르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가로막았던 유일한 벽, 탑주.

그 벽을 자신의 힘으로 무너트릴 수 없게 된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세월이 흐르고 마르셀로는 끝내 인정했다.

"제가 무지했습니다."

탑주는 자신과 이론마법학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알아봤다는 사실을.

마르셀로는 탑주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이론마법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언젠가 탑주와 다시 만날 날을, 탑주에게 자신을 증명할 날을 기다리며....

.

.

.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마법사들은 죄다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어!'

마르셀로는 단순히 탑주를 존경한 게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탑주를 꺾어도 자신의 손으로 꺾겠다는 뒤틀린 감성.

그것조차 한 단어로 줄여보자면 '애증'이라는 것이었다...!

"말씀드리지 않고 뒤쫓아 송구합니다. 경."

송구할 것 없다, 마르셀로.

언제나 말하지만, 지원군은 언제나 다다익선이다.

다만, 양심상 끌고 올 수 있는 지원군이 많지 않을 뿐이지. 발버둥 치는 도중 잔뜩 끼어버린 거품 탓에 지독한 난이도에 휘말리는 내가 아니던가?

'사실 마음 같아선 총출동 명령이라도 내리고 싶다.'

거대 연합부터 라이언 하트 기사단까지.

든든한 지원군의 덕을 보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지금만 하더라도 몇몇을 제외하면 탑주와 마주해서 무사할 수가 없겠지.

특히 플레이어 쪽은 전멸이다.

'물론, 제시는 예외지만.'

탑주의 제자이자 편애를 받는 제시는 깍두기 취급이니 제외.

거기에 마르셀로가 합류하긴 했다만.

마르셀로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능력을 떠나서 나, 처음 봤거든.

"이에 관한 책임은 복귀 후 절차를 거쳐 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금 전해드린 사연 말입니다."

저렇게 의욕적인 마르셀로의 모습은.

오죽했으면 텔레파시에서도 감정이 느껴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겠네, 마르셀로."

마르셀로까지 합류한 이상.

이건 더 이상 제시만을 위한 수업이 아니게 됐다.

어깨너머로 대마법사의 마법을 습득할 나는 물론.

탑주에게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르셀로까지.

각자의 사연이 얽힌 전장이라는 거지.

"제시 하인네스 견습 마법사."

"네! 듣고 있습니다, 마르셀로 수석님!"

"그대에게도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는 대마법사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제시는 그저 마르셀로가 대마법사와 연이 있다고 짐작하는 모양이군.

물론, 마르셀로도 같은 처지다.

'탑주가 무의식 상태라는 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어.'

...아니, 애초에 탑주가 대마법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한 건가? 탑주 이전, 전대 대마법사들의 정체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만 봐도 가능성은 낮았다.

제시는 모험가였기에 대마법사란 게 알려진 특이한 경우였으니까.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

나는 일단, 한숨을 삼켰다.

'이거, 또 나만 마음이 무거운 거잖아.'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이보다 와닿을 수 없다...!

"와아, 이게 다 환각마법이었다니요!"

제시는 정말로 수업인 줄만 알고 있고.

"오랜만에 재회인데, 답조차 없으시군요."

마르셀로는 탑주의 껍데기에 말을 걸고 있다.

얽히고설킨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나만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란 것이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었다.

그랑펠의 긍지를 떠나서.

애초에 그럴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탑주의 육체가 출현합니다.]

"!"

출현 메시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지금까지는 예고에 불과했다는 것.

환각마법이 발현해 낸 풍경이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이내, 순수한 마력으로 전환.

그 상태에서 곧장 발화(發火)했다.

마르셀로가 이를 갈았다.

"정말로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계시는군요, 당신은."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모든 주류 마법을 이론으로 정립했던 마르셀로였다.

당연하게도 먹고 먹히는 마법의 상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뜻.

마르셀로가 곧장 물의 방벽을 펼쳤다.

"불에는 물...!"

제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저건.

간섭 과정에 들어간 수고를 따지면.

상위 마법 세 개를 동시에 발현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치지지직─!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물이 불에게 우위라는 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떨어질 때의 이야기지. 모든 걸 집어삼키는 겁화는 물조차도 증발시켜 버리는 법이니까.

"칫."

마르셀로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진짜로 흔한 광경이 아니네.

그나저나 언제까지 팔짱을 끼고 참관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이걸로 확실하게 깨달았거든.

탑주의 육체는 명백하게 폭주하고 있단 사실을.

"도가 지나치군."

분리된 의식과 육체에서 오는 괴리겠지.

'그 간섭 과정이 짐작조차 안 되니까.'

탑주조차 완벽하게 발현할 수 없었던 거겠지.

의식이 안배를 남겨뒀던 것과 무관하게.

육체는 그저 날뛸 뿐이라는 것.

그러니 이제부터는 더 이상 수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가 뱉을 말은 정해져 있었다.

"수석으로서 승인할 수 없는 수업이군."

...패기롭게 입을 떼긴 했는데.

상성을 앞세운 마르셀로의 마법조차 압살을 당할 정도였지. [첫 세계수의 축복]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마법만으론 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저쪽도 나와 마찬가지로 서클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결국, 시작부터 진심으로 갈 수밖에 없겠군.

나는 곧장 기이 발현을 준비했다.

역시나 가장 효율이 좋은 건 반전 마법이겠지.

그러나 속성 마법을 반전시키면 순수한 마력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탑주는 그 마력에 다시 간섭할 터.'

제아무리 탑주라고 하더라도 마력이 무한하지는 않다.

이만한 마력을 소모했다면 분명 육체에 부담이 올 수밖에 없겠지.

환각에 화염마법이라니.

마력 소모량으론 최상위를 다투는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그쪽 좋은 일을 해줄 것 같아?'

대마법사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치밀해야 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 중인 나의 마력 재생력은 최대치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마력의 우위를 앞세우겠단 것이다.

그런데.

"...!"

"...어?"

마르셀로와 제시가 멈칫거렸다.

아무런 감정변화도, 의식조차 느껴지지 않는 탑주의 육체에서 이상이 포착됐으니까. 탑주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경험했다고 알아차린 건가.

제시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분명, 마력 탈진이겠죠...?"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환각에 화염 마법까지.

연속으로 발현해 놓고선.

몸이 멀쩡할 거로 생각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이쯤에서 냉정하게 선언하겠다.

탑주, 그쪽의 계획은.

아무래도 대차게 실패한 것 같다고.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비틀어진 동경.

그러나 마르셀로는 분명 탑주를 존경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꿰뚫어 본 건 탑주가 유일했으니까.

"대체 무슨 이유로...?"

마르셀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비로소 그런 탑주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탑주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탑주가 아니었을 테니.

나는 입을 열었다.

"제시 하인네스."

"네, 듣고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야겠군."

"...아, 저도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고깔모자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제시는 말을 전해왔다.

직감할 수 있었다.

고깔모자 속에서도 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괜찮다.

모두에게 상처뿐인 수업은 여기서 끝이니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의 수업은 이쯤에서 끝내겠다."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집중하도록."

"...네?"

"이 수업은 수석인 내가 책임을 지고 끝마칠 테니."

메테오 스트라이크.

환각마법.

그리고 지금의 화염마법까지.

나는 탑주가 발현하는 최상위 마법들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내 입으로 지껄였던 것처럼.

감히 '초월자의 경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기이의 경지'에 올라선 것 같다고.

그 말인즉.

"그대의 발현에서 배울 것은 없었다."

"...."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변했다고."

이런 화염마법 따위야.

역상성인 빙결의 기이.

[『절대영도』]로도 상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쩌저저적!

순식간.

입김이 쏟아져나올 정도로 냉각된 일대.

나는 탑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나의 수업을 시작하겠다."

"수업 도중 질문은 받지 않겠다."

"대답하는 건 내가 아닌 탑주, 그대니까."

거참 뒤끝 한번 길구나, 그랑펠.

그런 의미에서 각오해라, 탑주.

사전 검증만으로도 마탑을 눈물로 적셨던 나였다.

그런 나의 첫 수업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니까!

.

.

.

요동치는 마력의 소용돌이.

뒤늦게 도착한 원로, 유그위드.

그리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은 목격했다.

"정말이지, 이 수석 그대는...!!"

◈ 218화. 수업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