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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6화. 운수 좋은 날 (2)

아르카나 대륙.

제국 수도, 안토니움.

상공에 부유 중인 아이언 캐슬 호.

"가끔은 제국의 밀맥주도 나쁘지 않더군."

"가끔? 말은 똑바로 해야지. 수십 년만 아닌가?"

"그런가? 으하하. 그래서 먹을 만했던 거였구만."

몸에 남아있던 제련의 피로감.

밑바닥에 깔렸던 진한 피로까지.

맥주로 흘려보낸 드워프들은 다시금 일과로 복귀했다.

악마들의 활동이 위축된 현재, 최우선 목표는 역시나.

"정찰 편대는 출격을 준비하지."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를 찾는 것.

그 역할을 수행하는 건.

아이언 캐슬 호 내부에 탑재된 소형 비행선, '셉터'였다.

각각 셉터에 오르는 드워프 조종사들.

베테랑 조종사, 거너가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근데, 체인워커."

"?"

"이건 음주 비행 아닌가? 으하하."

시답지 않은 농담에 체인워커가 반응한다.

"자네, 어떻게 된 게 맥주가 물보다 연하다고 투덜댔던 게 몇 시간 전이지 않나? 헛소리 그만하고 다녀오게. 슬슬 안토니움에서도 떠나야 할 때가 됐으니까."

호열의 상위 마왕 처치.

그 덕분에 찾아온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

덕분에 잠시나마 비행을 멈추고 안토니움에 머물던 드워프들이었다.

그러나 성전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다는 뜻.

"안토니움, 그중에서도 주점 상인들이 서운해하겠군."

"어디 보자, 우리가 올려준 매상이 얼마였지?"

"거너 님, 맹물 같다면서 혼자서 몇 통을 비우셨는지."

"내가 그랬나? 으하하."

월스와일은 허전한 선내를 바라봤다.

드레드센 마을의 생존자, 꼬맹이들이 뛰어다닐 땐 그렇게 정신이 사나울 수 없었는데. 막상 사라지니까 빈자리가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체인워커가 말을 건네왔다.

"떠나기 전에 황제를 만날 생각이네."

"그래? 자네가? 웬일로?"

악크샨의 절멸.

그 후로 인간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버린 드워프였다. 제국이라고, 황제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어찌 본다면 악크샨의 절멸은 영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제국의 책임이었으니.

"세월이 과거조차 잊게 한 건가, 체인워커?"

월스와일의 물음에 체인워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령 잊었다고 해도 잊을 수 없네."

악크샨, 그들을 위해서라도 뒤끝은 남겨두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동시에 호열이 있었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체인워커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다.

"그렇기에 고집을 꺾고 만나겠다는 걸세."

호열 경.

그대라면 분명 안토니움을, 제국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겠지. 때문에 체인워커는 정찰에서 수집한 정보를 황제에게 직접 전달할 생각이었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우리의 말을 새겨듣지 않겠나."

.

.

.

위잉─

셉터 호가 하늘을 활강했다.

소형 비행선의 크기는 마차보다도 작았다.

조종석의 크기 또한 드워프 맞춤으로, 드레드센의 꼬맹이들이나 간신히 탑승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보자. 잔해가...."

아담한 셉터 호여도 그래도 있을 건 전부 있었다.

드높은 상공에서 대륙에 널브러진 기계탑의 잔해를 찾아낼 정도의 기술력. 드워프 기술력의 집약체인 아이언 캐슬 호, 그 일부가 셉터 호였으니 무리는 아니지.

"?"

그런 셉터 호가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거칠게 요동치는 마력 감응 계기판.

거너의 얼굴에 순간 긴장이 서렸다.

"...최대치라고?"

최대치에 도달한 것도 모자라서.

계기판을 뚫고 나갈 듯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이 정도의 마력 감응력이라면 분명 원인이 있을 터.

거너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급격하게 하늘에 드리우는 먹구름.

번쩍─

"갑자기 벼락...?"

쿠르릉!

"이런 빌어 처먹을 날씨가 있나!"

셉터보다도 수백, 수천 배는 커다란 아이언 캐슬 호조차도 악천후 속에서의 비행은 자유롭지 못했다.

비도 모자라서 천둥 벼락이 내리치는 날에 셉터를 타고 하늘을 누빈다?

자살행위, 다른 말로는.

"드워프식 자연사겠구만, 이건."

이미 아이언 캐슬 호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황이다.

번쩍─

지금부터 부지런히 비행해도 무사히 복귀하란 법이 없을 정도로.

하늘에선 요란하게 벼락이 내리쳤다.

그러나 거너는 조종대를 돌리지 않았다.

"하늘아, 내가 이대로 물러설 것 같으냐?"

성전(聖戰)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악크샨,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그들의 최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

"벼락? 피하면 그만이지."

선언한 순간에도 요동치는 계기판.

근원을 찾기 전까지는 아이언 캐슬 호 조종대를 돌리지 않겠노라.

거너는 멈추지 않고 셉터를 조종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

모험가들의 세계로 옮겨간 제로 산맥.

덕분에 생겨난 광활한 평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을.

"저, 저건!"

기계탑의 잔해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셉터 호의 성능이다.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귀.

"...엘프?"

엘프,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려 일백(一百)에 가까운 엘프가 무리 지어 평지에 기립해 있었다.

"저들이 어째서?"

이런 장소에 모여있단 말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거너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종대를 세게 붙잡았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머리가 외치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러나 드워프 특유의 쇠고집도 오래갈 순 없었다.

반짝─

시야를 건드리는 빛.

처음에는 벼락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

벼락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하지만 지금의 섬광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정확히는 자신을, 셉터 호를 향해 뻗어져 왔으니까.

찰나의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끼릭!

경악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조종대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는 섬광.

그 잔향이 뒤늦게 고막을 강타했다.

지이이이잉─!

"!"

아이언 캐슬 호 마력사출포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굉음.

그러나 지금의 섬광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니었다.

거너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고, 고작 화살에 불과했단 말이다!'

피한 게 기적으로 말 그대로 천운(天運).

"벼락은 피해도 저런 건!"

끼리릭!

거너는 다급하게 조종대를 돌렸다.

엘프가 어째서 단체 행동에 돌입했는지.

그 이유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아냈다.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는 거군."

자신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에겐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활시위를 당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드워프들에겐 귀중한 정보였다. 제국에게도, 호열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쿠르릉─!!

"젠장,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쏟아지는 뇌우 속.

아이언 캐슬 호에 무사복귀 한 거너가 중얼거렸다. 곧장 체인워커에 달려가니, 이미 몇몇 드워프 조종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에 한창이었다.

"체인워커. 그리고 다들 할 말이 있네."

엘프의 등장이야말로 그 어떤 소식보다 중요한 정보일 터.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었건만.

아니었다.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지는 대화 소리.

"악마, 그 기운은 틀림없이 마왕급이었습니다."

"마왕이라고? 이런 미친...!!"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빌어먹게도 나 또한 목격하고 말았네."

"목격? 무엇을 말인가?"

"자네는 몰라도. 체인워커, 그대는 기억하고 있을걸세. 과거, 우리들의 왕께서 살아계실 적. 우리의 왕국에 찾아온 인간 사내 한 명을."

체인워커가 흠칫하여 되물었다.

"악크샨은 아닐 테고.... 설마, 우르스를 말하는 겐가?"

"맞네. 우리에게서 기계 팔을 얻어간 그 사내. 그 기계 팔이네. 그건 틀림없이 철완의 우르스였네! 그 작자가 아르카나 대륙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어!"

"맙소사."

맙소사라니, 체인워커.

"...이보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아, 거너. 그대도 무사히 복귀했는가?"

"체인워커, 방금 내가 들은 말들이 전부 사실인가? 악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철완의 우르스가 다시금 아르카나 대륙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그래, 들은 그대로네."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거너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나는 엘프를 목격했네. 그것도 일백(一百)씩이나."

"...!!!"

거너가 탄식 섞인 안도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다들 살아서 돌아온 게 천운이구만."

*

엄밀하게 따져볼까?

이게 정말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가 맞는지 말이야.

일단, [마안(魔眼)의 망원경].

마왕의 전리품을 인벤토리에 챙겨온 건 희소식이 분명했다.

마왕급 악마.

엘프.

초월자.

망원경이 아니었다면 까맣게 몰랐을 테니까.

그래, 좋게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사건이 터진 걸 시기적절하게 알게 됐으니까.

애써 행운 덕분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데.

진동하는 스마트폰.

AAU 측에서 도착한 재난 문자.

그와 동시에 플레이어에게만 발신되는 문자까지.

거기엔 분명 그 단어가 적혀있었다.

'드래곤'이라고.

드래곤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포착됐다고.

나는 산맥 최정상을 향해 읊조렸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조심성이 깊구나."

그랑펠어를 번역하자면.

기척도 없이 언제, 어디로, 날아갔느냐는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지구를 박살 내려고 들지는 않아서 말이야.

'게다가 AAU가 관측한 정보에 따르면.'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깨진 차원의 틈] 균열과 유사한 현상이 포착됐다고 했겠다.

그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드래곤은 균열을 열 수 있는 건가?'

불완전하지만 아르카나 대륙과 통하는 균열을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행운의 편지에 당한 기분이다!

악마에 엘프에 초월자에 화룡점정으로 드래곤까지.

말 그대로 전례 없던 초대형 사건이잖아, 이거?!

'이대로면 균열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긴급 업데이트로든, 정기 업데이트로든.

장담할 수 있었다.

현재 나의 전력은 물론이거니와 성전에 참전한 아군의 전력을 전부 규합한다고 한들. 저 사이에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드래곤과 엘프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나마 만만한 게 악마와 초월자였거늘.

어째 그 둘조차 범상치 않았으니까.

나는 다시금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망원경의 효과는 마안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이다.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마안의 감각이 느껴진다는 뜻.

그렇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보통 악마가 아니야.'

마안이 전율하고 있었다.

이런 건 마왕을 엿볼 때도 느낄 수 없던 반응이거늘. 상위 마왕은 모르겠다만, 서열 30위에 육박하는 중위 마왕들을 볼 때도 느낄 수 없던 반응이란 말이다.

게다가.

'하지만 마왕과는 다르다.'

외관상으로는 악마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노골적인 악기(惡氣)가 아니라면 악마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엘프를 앞에 두고도 주눅이 든 기색이 없어.'

엘프의 강함?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엘시도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800~900레벨에 육박하는 악마를 단칼에 도륙 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림자 용병단원, 락키드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엘시도어였다. 그런 엘프가 무려 백(百).

그렇다면 역시 가능성은 하나뿐이겠지.

"거악."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거악(巨惡).

진짜로!

거악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 일인데.

거악도 모자라 엘프, 저들과 같은 공간에 초월자가 있었다.

어떻게 초월자인 걸 알아볼 수 있었냐고?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마주쳤던 얼굴이었으니까.

'나한테 큰 관심이 없던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남녀 각각 한 명.

『사교계에서 그랑펠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 혹은 신기루와 같았다. 사교 자리를 즐기지 않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은 많지 않았거늘. 홀연히 등장하는 날에는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말았으니....』

사교장에서 그랑펠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초월자 중에서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거겠지.

커다란 골격.

아무렇게나 기른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실 외관으로도 평범한 축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큰 특징은 그 양팔이 기계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고.

뭐, 어찌 됐든 다들 나타난 건 좋다 이거야.

'그래서 다들 이유가 뭔데?'

문제는 그 목적이다.

'가만히 있다가 왜 그러는 거냐고!'

그랑펠의 성격 같았으면.

다짜고짜 포탈을 발현.

저 사이로 순간이동 하고도 남을 정도의 답답함이다, 이건!

"기이여. 이런 상황에서도 나의 발목을 붙잡는 것인가."

봐봐, 아르카나 대륙으로 갈 방법만 있었다면.

겁도 없이 저기로 달려갔을 거라니까?

내가 아는 그랑펠은.

그런 의미에서는 방법이 없어서 안도해야 하는 건가....

가출하려던 어이를 붙잡고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일단, 상황을 전하는 게 최우선이다.'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이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터.

그래야 어떤 식으로든 대비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쪽 상황도 크게 여유로울 건 없다.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면....'

무려 4배나 빠른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

당장 저 장소에서 사건이 터지고.

몇 시간 뒤.

현실에 균열이 생성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디엔드."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군."

"내 생각을 체인워커에게 전하도록 하여라."

텔레파시를 통해 전하는 머릿속의 정보.

이내, 디엔드가 명령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과연,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게 체감이 된다.

찰나처럼 느껴지는 시간에 체인워커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쪽의 소식까지 가져오다니. 그나저나.... 이어지는 디엔드의 말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진 그냥 다행이구나, 싶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체인워커라면 미리미리.

대비책을 세우고 있을 테니까.

경악한 이유는 지금부터다.

"또한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이 곧장 출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행선지는 제로 산맥 인근으로, 그 목적은 마을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 드레드센을 구원한 주군의 긍지에 따르기 위함이랍니다...!"

...감격에 겨워 말하지 마라, 디엔드.

나는 지금 진심으로.

머리가 깨질 것처럼 어지러우니까.

거악, 초월자, 엘프, 드래곤, 이젠 제국까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행운이 아니다.

행운의 편지가 확실하다고.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런가."

그랬다.

내가 번뇌하는 와중에도.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은 4배속으로 흐르는바.

이제부터 나는 최선의 판단을.

4배속으로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가서 전해라."

이런 상황에서도.

더없이 나답게.

뻔뻔하게.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이제부터 뱉은 말을 실현할 시간이다, 그랑펠.

◈ 207화. 운수 좋은 날 (3)

제국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황제는 찰나의 평화 속에서 판단했다.

수도성, 안토니움만 하더라도 그렇다.

제국 영토 대다수가 파괴된 지금 추가적인 식량 조달은 없다. 당분간은 제국의 창고에 저장된 식량으로 버텨낸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는....

"그런가.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때문에 드워프의 지도자, 체인워커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언제라도 각오하고 있던 덕분이겠지.

"대신들은 들어라."

황제는 신하들 앞에서 선언했다.

"그대들이 알고 있던 찬란한 제국은 무너진 지 오래다. 악마와의 전쟁으로, 부끄러운 내전으로. 우리의 제국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

황제 폐하께서 스스로 저런 말씀을 하실 줄이야.

신하된 자로서 면목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이들에게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제국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안토니움의 백성이 짧게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분인가?"

아첨하기 좋아하는 간신이 있었다면.

이쯤에서 황제 폐하의 이름을 부르짖었겠지.

그러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제국이다.

아첨할 간신배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누군가 답한다.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덕분입니다."

그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모험가, 이호열 경 덕분이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검성, 셰그윈을 비롯한 반군 연합을 안토니움에서 퇴각하게 한 그였다.

황제의 음성이 더욱더 결연해졌다.

"그는 황제인 나를, 제국의 수도인 안토니움을 특별히 여겨 구원한 게 아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변두리 영지, 드레드센 또한 구원해 냈으니까. 그렇다. 모험가가 황제인 나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을 통해 퍼진 호열의 영웅담.

황제는 그 일련의 경험에서 깨달았다.

"그는 어떠한 시련에도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합리화하지 않은 것이다. 타협하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자신의 긍지를 관철한 것이다."

나는 황제다.

나야말로 제국의 중심이기에 결코 휘청거려서는 안 된다.

황제의 자리를 핑계로 도피해 온 자신과는 다르게.

하지만 깨닫게 된 지금.

황제에겐 더 이상 물러설 생각 따윈 없었다.

다그닥─

갑옷도 모자라 투구까지 착용한 황제가 기병들 앞에 섰다.

모인 병력은 대략 오천(五千).

안토니움에서 용맹하기로 손꼽히는 병사들을 추려낸 것이었다.

황제는 가감 없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사지(死地)로 돌격할 것이다."

그래,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리라.

자신들에게 방해되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든 다짜고짜 살의를 드러낸다는 엘프 무리.

과거, 아르카나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미치광이 철완의 우르스.

그리고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인가.

마왕, 이상으로 악기(惡氣)를 내뿜는다는 악마까지.

그런 전장에서 기껏해야 5천의 제국 병사들?

드워프들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엘프의 화살 한 방에 전멸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황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곳에 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목적지는 제로 산맥 인근의 소도시, 폴스타.

현재 생존 중인 백성의 수는 대략 삼천 남짓.

삼천이라, 절대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하겠지.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지 않으냐고.

고작 작은 도시 하나에 황제가 움직일 필요가 있느냐고.

그자를 비난하지 않겠다.

자신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것은 계산의 영역이다.

"내 사전에 저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긍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두려운가?"

황제가 묻는다.

"아닙니다, 폐하─!"

사기충천한 대답이 이어진다.

안토니움에서 병사로서 생존한 이들이야말로 무수한 생사의 고비를 넘어왔을 터.

거기에 황제가 진두지휘하는 지금. 사지로 향하는 병사들의 기세는 오히려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다그닥─

출정.

안토니움을 떠나는 황제.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은 각오를 다졌다.

"폐하, 저도 원정에 함께하겠습니다."

형님과 다르게 마탑에 입성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다.

합류한다고 하더라도 아주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

그럼에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 내쉬에게 황제는 대꾸했다.

"불허한다."

"...네?"

"내쉬, 그대는 안토니움을 지키는 방패다."

"...!"

"그대라는 방패로 고작 나를 지킬 생각은 없다."

감동적인 말씀이었거늘, 내쉬는 내쉬였다.

형님, 저는 정말 폐하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게 맞을까요?

제 능력이 부족해서 써주시지 않는 건 아닐까요?

결국, 반신반의하면서도 대답했다.

"...내쉬 윌리엄, 폐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

망원경이 비추는 풍경.

디엔드가 전해 온 소식대로였다.

정말, 황제가 직접 이끄는 제국군이 난장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책임져라, 그랑펠.

전부 너한테 물든 덕분이잖아!

'전염병도 아니고, 뭔데, 진짜.'

그렇다.

이번에도 긍지가 문제였다.

솔직하게 긍지가 넘치는 행보이긴 하다.

혹시라도 백성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서는 황제라니.

좀 감동이네.

"그대도 비로소 깨달은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를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지 마라, 그랑펠.

게다가 마냥 흡족해할 일이 아니라고, 이건!

왜, 아까도 말했었잖아?

절대적인 열세.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마탑을 비롯.

온갖 강자들이 합류한 이쪽의 연합군조차도 열세란 말이다.

제국이라고 다를까.

심지어 황제의 검이나 다름없는 라이언 하트 기사단조차도.

이곳, 현실에 떨어진 상황이란 말이다.

'이런 말까지 하긴 싫지만.'

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누구 하나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는 순간엔 황제를 포함.

전원이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이 절망스런 상황에서 잘도 입을 털었구나, 그랑펠.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니!'

일단, 나의 최선을 떠올려본다.

말했다시피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는 방법은 없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의 효과를 아껴뒀다면 모를까. 그 효과는 상실한 지 오래전이었으니까.

'현재 마법부여학 수준으론 복구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나와 달리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디엔드.

그리고 하이엘을 통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건데.

'그것도 한계가 있어.'

{고유 정령}, 하이엘.

어둠의 정령, 디엔드.

정령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둘이라고는 해도.

저 난장판 속에서 활약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하이엘과 디엔드야.

여러모로.

내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니까.

'제국군을 보호하는 데까진 성공한다고 치자고.'

그런데.

황제와 제국군.

그리고 폴스타의 백성까지 구원한다고 해서 이 대형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건 저 난장판이 균열을 통해 현실로 넘어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일단락을 짓는 거란 말이다.

"디엔드. 주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일단, 디엔드를 제국군에게 합류시키는 건 바뀌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악, 엘프, 초월자라는 건데....

그나마 다행인 건 초월자의 정체라도 알아낸 건가.

"그대가 바로 소문의 우르스였군."

『철완의 우르스』.

알려진 것만으로 수십 개의 영약을 섭취했다는 서적 속의 인물.

그 덥수룩한 머리칼의 사내가 우르스였다니.

영약을 큰 부작용 없이 섭취할 수 있는 타고난 체질 덕분에 초월자가 되고, 정말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거겠지.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네.'

긴 세월을 살며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고 살아왔을 테니까.

내가 사교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든, 유난을 떨든, 뭐든.

큰 관심이 없던 거겠지.

'그런 우르스가 움직였다라....'

이유는 모르겠다만, 제발 서로들 시비만 붙지 않기만을 바란다.

하여튼, 자각이 없다.

당신들은 전부 다 거물이라니까? 작은 다툼이 일어나도 곧바로 대형사건. [전장] 균열이 생성되고, 긴급 업데이트가 떠오를 수도 있단 말이다.

하지만 나의 절박한 속내와 달리.

입에선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으니.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봐요, 그랑펠 씨.

듣는 사람 없다고 막말하기야?

그러나 드높은 긍지께서 내 눈치를 볼 리가 있나.

"아니, 그편이 옳겠구나. 내가 그대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순리일 테니까."

...진짜 미쳤나 봐!

하여튼 우리 위대한 가문 후계자님의 콧대 한번 높으시다.

거악이든, 엘프든, 우르스든, 주눅이 드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항상의 자세다.

그런데.

"...!"

덕분인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언제나처럼 냉철한 머리.

덕분에 나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나와 악마 사이의 천적관계.

그걸 뛰어넘는 '또 하나의 천적관계'를...!

[축복의 위계질서].

완전히 다른 두 세계.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현실에 묶여있는 나였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엘시도어에게는 [축복의 위계질서]를 들먹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있는 엘프들에게 위계질서의 효과를 바랄 순 없다는 뜻.

하지만 말이야.

[첫 세계수의 축복].

그거 나만 받은 게 아니거든.

그랬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고 '격'까지 상승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나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그 이름을 불렀다.

"하이엘."

*

태초의 산맥.

제로 산맥조차 아르카나 대륙에서 모습을 감추다니.

아젠트레스는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이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젠트레스는 동족들을 바라보았다.

가엾게도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이들.

더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게 됐다.

모두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젠트레스에게 엘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송구합니다, 로드. 놓치고 말았습니다."

상공에서 느껴지던 불순한 시선─

그 형편없는 고철 덩어리는 드워프 놈들의 것이었겠지.

짤막한 몸뚱이를 화살로 꿰어버리라고 명령했건만.

기껏해야 이 정도 거리에서 화살이 빗나갈 줄이야.

'천운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젠트레스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래, 모든 책임은 어머니.

우리에게서 축복을 앗아간 아둔한 세계수여.

그대에게 있는 것일 테니까.

저벅─

"어떻게 고민은 끝난 건가?"

아젠트레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바라보았다.

외관은 틀림없이 인간.

그러나 '존재'라고 칭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뭘 그리 노려보는 거지? 그쪽들이 원하는 건 간단하잖아, 영생! 밥상은 내가 저쪽에 깔끔하게 차려놨다니까. 솟구치는 '식탐'에 솔직해지기만 하면 된다고."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며 수많은 악마와 만났던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악마는 그들과 무언가 달랐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제3자.

엘프의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

'다르다.'

아젠트레스는 대륙에서 참살한 악마들을 떠올렸다.

악마는 하나같이 멍청하며 저열했다.

인간보다 무식한 존재가 바로 악마였다.

왜냐고?

-"제, 제발 목숨만은...!!"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엘프? 썩 괜찮은 몸뚱이구나."

악마들은 주제도 모른 채 되려 달려들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악마는 달랐다.

무엇보다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악마라고 다 같은 악마가 아니라고 그러네. 나는 결이 조금 다른 악마라니까? 누구보다 당신네의 심정을 나는 잘 알고 있지."

-"?"

-"나도 영겁을 살아왔거든. 좀 복잡한 존재라서."

칠죄종.

악마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칠총사 중 누군지는, 어차피 그쪽도 관심 없을 테니까. 소개는 생략하지. 내가 제안하는 건 하나. 단지 선택지 하나를 소개하려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지금이었다.

"간단하지? 타락하면 영생을 되찾을 수 있다."

아젠트레스는 그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엘프인 자신부터가 영겁의 존재였다.

덕분에 상대가 정말로 영겁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쿠릉!

아젠트레스는 뇌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나를 책망하는 것 같군요, 아둔한 어머니시여.

작게 읊조렸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아젠트레스의 안광이 번뜩였다.

"당신께서 먼저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생기를 잃어가는 몸을 바라본다.

칠죄종에게서 제안을 들었을 때부터.

내렸던 결정은 단 한 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먹겠다.

"좋아요. 다들 제가 차린 식사가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칠죄종은 그렇게 말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메뉴명은 '폴스타'입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저벅저벅─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마을이었다.

이제 와서 낌새를 알아차리고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한 짓에 불과했으니까.

칠죄종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예상치 못한 애피타이저까지 도착한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죠? 뭐, 우리 손님들에게 저 정도쯤이야.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다그닥─

들려오는 건 말발굽 소리.

아젠트레스는 입을 열었다.

"식탐은 죄악이다. 넘치는 것은 버려라."

타락?

착각하지 말 거라.

우리는 그저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것뿐이니까.

그 말에 칠죄종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찰나였다.

"이전의 실수를 만회하겠습니다."

끼긱─!

곧장 활시위를 당기는 엘프.

과연, 수천의 병사를 한 입 거리라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화살촉에서 일렁이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마력.

그러나.

"...?"

당겨진 활시위가 놓이는 일은 없었다.

엘프와 폴스타의 제국군.

그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작디작은 무언가.

그것은 더없이 고아했다.

'정령왕.... 아니, 그 이상.'

아젠트레스마저 착각하게 할 정도로.

우아한 외관을 뽐내는 정령.

그 정령이 곧, 입을 열었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마치 '누구'처럼 더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

"멈추어라."

"...!!!"

그러자 아젠트레스와 일백(一百)의 엘프가 정지했다.

◈ 208화. 운수 좋은 날 (4)

아젠트레스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손과 발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움직여 보려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봤거늘.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젠트레스 님...?"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동족, 모두가 자리에 멈춰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엘프조차도.

'저건 대체.'

아젠트레스의 시선이 하이엘을 향했다.

처음에는 정령왕이라고 생각했다.

감히 나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정령은 정령의 왕, 그대들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의문이었다. 정령왕이 어찌하여 대륙의 일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다행히도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하이엘이 주군의 명에 따라 명한다."

...주군이라고?

괜히 왕이란 칭호가 붙는 게 아니다.

진정으로 군림하는 존재이기에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풍겨오는 기세로만 보자면.

정령왕보다도 상위 존재일지 모르는 저 정령에게.

진정으로 섬기는 주군이 있다는 말인가?

'대륙에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내린 판단은 또 한 번 어긋났다.

아젠트레스의 동공이 확대됐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멈추어라."

축복의 위계질서...?

그 어떤 마법도, 정령의 자연 능력도 감히 자신들의 몸을 옥죄어 올 순 없다. 틀림없다. 저 말대로 이건 아둔한 우리의 어머니, 세계수의 힘이다.

"어라라라."

악취가 느껴진다.

칠죄종, 악마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알을 굴린다.

감히 이 몸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손을 흔들어댄다.

"이야, 이거 진짜로 멈춰버리셨네요? 우리 콧대 높으신 손님들께서 이렇게 순순히 멈추란 소리에 따를 리는 없겠고...."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뭔진 몰라도 잡힌 거구나. 약점."

나를, 엘프를 능멸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식사고, 거래고, 영생이고.

다 때려치우고 녀석의 목을 절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누구냐."

하이엘을 향해 간신히 말을 잇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러나 짧은 한마디에 담긴 살의는 더없이 흉흉했다.

거악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야, 이래서는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네."

그러나 호열의 분신이다.

작디작은 몸집을 가진 하이엘이었거늘,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더없이 올곧은 자세며 더없이 한결같은 표정까지.

하이엘은 답했다.

"나의 주군께서는 질문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

"그대에게 물을 자격은 없다."

정확히는 받아쳤다.

"감히...."

더욱더 거세지는 아젠트레스의 살기.

그건 깔깔거리던 거악조차 눈치를 보게 하는 수준이었다.

허나, 되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고고한 하이엘의 목소리뿐.

"엘프여, 그대는 어째서 거악과 마주했는가."

"!!"

그 질문엔 아젠트레스는 물론, 거악까지 흠칫했다.

그들의 시선에서, 하이엘은 조금 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으니까. 식사에 관한 것은 물론, 거악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하다니.

"씁. 오래 살았어도 유명인사까진 아닌데 말이야."

그런 하이엘의 비범함은 거악조차도 경계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저런 말도 안 되는 정령에게 섬기는 주군이 존재한다는 것.

'어디냐.'

아젠트레스는 감각을 일깨웠다.

분명, 주군이라는 자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터.

드높은 상공의 드워프조차 알아차렸던 엘프의 감각이다.

그 신경을 한껏 곤두세웠건만.

'없다.'

언제나처럼 하늘에 뜬 마안(魔眼)뿐.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이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의 주군께선 잡생각 또한 허가하지 않으셨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는 잡념.

"주군의 질문에 답하라."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

"...영생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굴욕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말을 내뱉은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치욕이다.

하지만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헛된 것을 쫓았구나."

"...?"

"그대가 갈망하는 세계수의 축복은 나의 주군께서 거머쥐고 계시니까."

그랬구나.

그 주군이란 놈이야말로.

우리에게서 어머니의 축복을 앗아간 존재로구나.

아젠트레스는 그 순간, 판단을 내렸다.

세계수의 축복의 행방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악마의 힘은 필요치 않았다.

'녀석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면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모습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만.

결국, 아르카나 대륙에 있을 터.

대륙 전역을 샅샅이 뒤지는 수고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만, 장사 방해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거악.

칠죄종, 식탐이 아니었다.

목적 달성이 코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정령 하나 때문에 모든 게 틀어진다고?

"유감이지만, 손님 여러분."

엘프를 향하는 식탐의 눈매.

"허가되지 않는 메뉴는 폐기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똑똑히 지켜보라고.

식탐은 악취를 흘리며 하이엘에게 다가갔다.

찢어진 것처럼 흉측하게 벌어지는 주둥이.

인간의 가죽에 가려져 있던 거악의 본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규율이라는 거 나한테는 효과가 없는 모양이니까."

세계수라니.

나는, 내 형제들은.

그런 어머니 둔 적이 없거든.

"...?"

그러나 식탐은 하이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식탐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으니까.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우르스였다.

철컥─

우르스가 철완을 들어 올렸다.

식탐은 멈칫했다.

'인간?'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인간을 초월한 것이었다.

설마, 이 녀석도 셰그윈과 같은 초월자인가?

아젠트레스도 흠칫한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놓쳤다?'

신경을 곤두세웠을 때.

우르스는 틀림없이 감각의 반경 안에 있었다.

그럼에도 놓쳤다는 건.

사내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것.

목적이 있는 난입이라는 뜻이었다.

엘프, 거악, 초월자.

드디어 서로가 마주한 순간.

우르스는 입을 열었다.

"엘프든 정령이든 누구든 좋다."

이어지는 말에 아젠트레스는 다시금 확신했다.

"부디 내게 세계수의 위치를 털어놓아라."

아무래도 모조리 도륙을 내야겠다고.

*

[마안(魔眼)의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난장판이 기어코 개판이 됐구나.

엘프야 [축복의 위계질서]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악하고, 우르스는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고생했다, 디엔드.'

황제가 이끄는 제국군.

그들이 폴스타의 주민을 구출해 안토니움으로 고삐를 돌리는 데까진 성공했으니까. 일단, 거악의 계획 하나는 막아낸 셈이였으니까.

그나저나 진심으로 치졸들 하시군.

'다들 이름값 좀 하면 덧이라도 나는 거냐고.'

그런 의미에선 잘하고 있다, 하이엘.

정말로 그랑펠 뺨칠 정도로.

하이엘이 뒷일 생각 없이 나서준 덕분에.

지켜보기만 하던 나도 대충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거든.

일단, 엘프는 정말로 한결같았다.

"긍지 없는 무의미한 삶을 갈구하는 것인가."

영생?

받은 것도 되돌려주고 싶다고, 나는.

아니, 평생 흑역사에 시달린다고 생각해도 끔찍한데. 흑역사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악한 짓을 대가로 영생을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진짜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괜히 너희 어머니가....'

아니, 세계수가.

축복을 앗아간 게 아닌 것 같다.

그 난폭한 엘시도어는 양반이었다고 느껴지게 할 정도라니.

하나같이 얼마나 개차반인 거야, 성질머리들이.

우르스도 참 여전했다.

'세계수가 목적일 줄이야.'

엘프와 거악이 대화를 나눌 때는 별 관심도 없어보이더만. 하이엘이 나타나고,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우르스는 전장에 끼어들었다.

'그놈의 영약 사랑.'

만물의 어머니인 세계수다.

그런 세계수에 내재된 기운은 영약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단지 어느 누구도 세계수를 씹어 삼킬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그러나 우르스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적의 일화만 보더라도, 영약을 향한 우르스의 광기는 세계수를 뿌리까지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진짜 꼬여도 엄청나게 꼬였다. 이거.'

각자의 이유로 다들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정면충돌은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대형사건.

균열 생성까지도 시간문제겠지.

나는 망원경을 바라봤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병 주고 약 주냐?

어쨌든, 대폭 상승한 행운이 도움되기는 했다. 사실 망원경의 지속시간은 제국군이 폴스타에 도착했을 때쯤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진 똘망똘망 눈을 뜨고 있군.

그래, 너라도 양심이 있다면.

되도록 눈을 감을 생각은 하지 마라, 망원경아.

'하이엘에게 저 전장은 무리야.'

나와 함께라면 모를까.

하이엘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하이엘이 저 삼파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막말로 축복의 위계질서를 요령껏 활용하면 또 모르지만.'

그랑펠을 쏙 빼닮은 하이엘이다.

나, 이호열처럼 잔머리를 굴려 위계질서를 써먹을 리가 있겠냐고.

결국,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약속되지 않는 만남은 한 번에 처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이런 상황에서도 말은 참 술술 나온다.

젠장, 균열이라는 변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나.

4배속으로 그에 관한 전략을 세워본다.

지금 당장 마르셀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쿠릉─!

"...?"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잠깐이나마 잊고 말았던 것이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 시스템을 통해.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쿠쿠구구궁─!

아르카나 대륙에 쏟아지는 뇌우(雷雨).

이내, 대륙의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 차원의 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러더니 이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다.

드래곤이다.

.

.

.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대륙에 울려 퍼진다.

그 울음소리는 서로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맞붙을 기색이었던 우르스와 식탐조차 멈추게 할 정도였다.

"흐음."

노룡, 유낙서스는 황폐해진 아르카나 대륙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거대한 동공으로 엘프를.

정확하게는 아젠트레스를 바라보았다.

유낙서스가 말했다.

"아젠트레스."

어머니시여.

"나의 어리석은 아우여."

어찌하여 당신께서.

저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가셨는지 알겠습니다.

유낙서스가 우레와도 같이 꾸짖었다.

"아직도 어머니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생물, 드래곤.

어머니의 축복 없이 드래곤 로어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인가.

전율하는 전신의 감각들.

그러나 덕분에 빌어먹을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젠트레스가 우득─거리는 목을 풀며 답했다.

"다물어라, 유낙서스. 도마뱀 자식아."

.

.

.

그러니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엘프의 이름이 아젠트레스고....

그런 아젠트레스가 드래곤, 유낙서스의 아우라고?

이건 예상치 못한 출생의 비밀인데?

잠깐만, 그러면 족보가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세계수.

드래곤.

엘프.

그리고....

나랑 하이엘?

순간, 나는 설마 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위계질서가 드래곤한테도 유효한 건가?'

거기까진 확신할 수 없다.

설령 형제라고 하더라도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엘시도어도 축복은 오직 엘프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했었으니까.

게다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세계수 족보의 막내로서 부탁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큰형, 쟤들 좀 어떻게 좀 말려 봐!

나, 이호열.

누나만 셋.

조르기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유낙서스는 더욱더 격노해 울부짖고 있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떠오르고야 말았다.

[노룡(老龍), 엘더 드래곤 유낙서스가 출현합니다.]

본격적인 출현 메시지가.

진짜로 말리기는커녕 싸우러 온 거구나.

형보다 누나가 낫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시도해 보자꾸나, 하이엘.

유낙서스에게도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한지를!

.

.

.

하이엘이 유낙서스의 콧잔등 위에 서서 말한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

그러자 우레가 잦아들었다.

◈ 209화. 운수 좋은 날 (5)

"쇠약해진 육체가 문제가 아니었구나, 아젠트레스. 네 영혼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파멸한 모양이니. 이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구나, 나의 아우여."

엘프.

저들이 어머니의 축복을 상실한 순간에도 유낙서스는 반신반의했었다.

제아무리 못난 아우여도, 고결했던 영혼만큼은 한결같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전부 나의 착각이었구나.

유낙서스의 눈동자가 지상의 악을 향했다.

저것이 바로 악마로군.

대륙과 어머니를 이런 꼴로 만든 존재들.

끓어오르는 감정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마계(魔界)로 활강.

저들의 땅을 대륙보다 처참한 꼴로 불살라 버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순 없겠지.

나의 어머니께서 그것을 바라시지 않았으니까.

세계수의 뜻은 유낙서스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이었다.

당신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부탁을 해온 것은.

그러니 따를 뿐이다.

그래, 언제까지고 잠에 빠져있는 것도 무료한 일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간만에 심장이 뛰었다.

'그 이후로는 처음이군.'

용마대전(龍魔大戰).

찰나의 유희는 나름대로 즐거웠거늘.

이번엔 과거처럼 즐길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목숨을 내던져야 했으니.

"알아듣지 못했다면 알아들을 때까지 꾸짖어 주겠다."

늙고 병든 나에게 걸맞은 전장이다.

아우, 아젠트레스와 엘프들은 물론.

억누른 감정을 표출하기에 적합한 악마 하나.

그런 악마와 마주한 인간까지.

모두의 눈빛은 각오가 된 듯 보였으니.

누구 하나 휘말려들 걱정하지 않고 날뛸 수 있겠구나.

'그대들이라면 어머니의 뜻을 실현할 수 있겠지.'

파지직─!

이내, 유낙서스의 몸에서 일렁이는 거대한 기운.

"!!!"

단순한 마력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얼마나 짙고 방대한 마력이라는 것인가.

마력이 시각화한 것도 모자라 일대의 기후.

심지어는 지형마저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내려치는 벼락이 유낙서스의 전신을 휘감은 순간이었다.

유낙서스의 시야 가운데 '무언가'가 난입했다.

그 실체는 작디작았건만, 어째서인가 커다랗게 보였다.

"!"

그럴 수밖에.

무언가, 하이엘이 내려앉은 곳은 유낙서스의 콧잔등이었으니까.

하이엘은 주군, 호열의 뜻을 충직하게 따랐다. 호열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는 또렷하게 말했다.

"축복의 위계질서에 따라 명한다."

"...?"

"진정하시길, 유낙서스."

드래곤과 엘프는 다르다.

같은 세계수에서 태어났지만, 그 외관처럼 가지고 태어난 능력도 달랐다. 만물의 지배하는 생물, 칭호에 걸맞게 드래곤에게 모자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는 그런 엘프를 가엾이 여겨 축복을 내렸다.

드래곤은 세계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받지 않은 것뿐이다. 필요치 않았으니까.

그들은 태생 자체로 완벽한 존재였으니까.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드래곤인 유낙서스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유효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하이엘의 말에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랬군.'

작디작은 정령에게서 어머니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느슨해지고만 유낙서스의 눈빛.

마치 어린 막내를 바라보는 것처럼 따뜻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대여.

"유감스럽게도 그 부탁에는 응할 수 없겠구나."

유낙서스가 뇌리로 전달해 왔다.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건 어머니의 뜻이니까.

텔레파시.

차원을 찢고 오갈 수 있는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그 목소리는 호열에게도 전해졌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여명이여.

.

.

.

드래곤이 얼마나 강하냐고?

그건 메시지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가 모인 전장이다.

적정 레벨로 환산하면 일천도 그냥 넘을걸?

어지간해서는 출현 메시지를 출력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유낙서스는 보란 듯이 출현 메시지를 띄워냈다.

그런 유낙서스가 [축복의 위계질서]에 멈칫했을 땐 흠칫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진짜 행운이었던 건가.

찰나의 순간, 혼자서 김칫국부터 마셨던 나였으니까.

드래곤을 위계질서로 부려 먹을 수 있다니!

월드 퀘스트, [악룡(惡龍) 사냥꾼]의 클리어는 물론.

드래곤의 능력으로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거잖아?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최후의 모험가] 효과로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나였으니까.

얼마든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장 속도를 낼 수 있을 터.

그러나, 김칫국이 괜히 김칫국이겠냐고.

나, 이호열.

누나만 셋인 막내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내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유낙서스의 시선.

그건 나를 바라보던 웬수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흠칫하기도 잠깐, 머릿속으로 유낙서스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텔레파시.'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완벽히 다른 두 세계.

일반적으론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드래곤만큼은 예외겠지.

균열에 얽매이지 않고, 차원을 찢고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오가는 데 텔레파시 정도야.

내가 놀란 건 텔레파시의 내용 때문이었다.

'여, 여명?!'

그 민망한 이름을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아니지.

그것보다.

'...죽는 게 어머니의 뜻이라고?'

첫 만남부터 대뜸 유언을 남기는 게 어딨어?!

나야 굴러 들어온 자식이니까.

집안 사정, 세계수의 뜻 같은 건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가족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위도 없다.

막내 취급은 집에서도 실컷 받고 있거든.

게다가.

'아니, 뜻이고 나발이고.'

유낙서스 씨.

그쪽이 날뛰시면 이쪽이 곤란해진다니까요?

엘프에 거악에 초월자만 하더라도 충분히 벅차단 말이다.

그런데 드래곤이라니.

균열의 클리어를 떠나 균열 자체가 버티지 못할 스케일이었다. 균열 생성 후, 얼마 가지 않아서 균열 붕괴도가 100퍼센트를 돌파해 버리겠지.

'그런 게 도심지에 생성된다면....'

그 전투의 여파로 도시가, 나라가, 대륙이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나는 잘도 입을 놀렸다.

"세계수의 뜻이라니. 착각이 지나치군."

태연하게도.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황제도 모자라서.

드래곤, 세계수 앞에서도 한결같이 꼿꼿하구나, 그랑펠.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였다.

유낙서스의 말만 들었을 땐.

세계수가 유낙서스의 죽음을 원하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래도 가정사는 들어보고 싶다는 거지, 굴러 들어온 막내로서.

"대화가 필요하겠군, 유낙서스."

물론, 텔레파시도 혼잣말도 닿을 리가 없으니.

나 혼자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았을 뿐이지만.

잡설은 거기까지였다.

이젠 정말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나도, 하이엘도 최선을 다했어.'

이쯤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럼에도 이 개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그나마 위안할 거리는 균열 생성 시기를 늦췄다는 것 정도려나.

'균열에서 모든 걸 쏟아부을 수밖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균열이 생성되면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답답하진 않겠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입은 쉬질 않는다.

"나는 행운 따위 믿지 않는다."

어쩐지, 그 소리를 이번에는 왜 안 하나 했다. [행운]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하려고 할 때마다, 미신을 운운하며 훼방을 놓던 그랑펠의 똥고집이 아니던가?

펄럭─

타이밍 좋게도 불어오는 바람.

"행운도 운명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요.

내가 속으로 빈정거리던 순간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하늘에서 포탈의 빛무리가 일렁였다.

...잠깐, 빗자루가 하늘을 날고 있다?

말 그대로 포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빗자루.

그런데 빗자루 위에 올라탄 여인이 낯설지가 않았다.

저 치렁치렁한 복장.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본 것 같은데?'

확실하다.

우르스와 더불어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내게 관심이 없던 또 한 명의 초월자다.

아니, 어떻게 보면 우르스보다 심했었지. 저쪽은 아예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는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않았었으니까.

'갑자기 또 뭔데.'

당연하게도.

나는 이 개판에 그녀가 등장한 이유 따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처럼."

...긍지에 가라앉아도 주둥이만큼은 떠오를 것 같구나, 그랑펠.

.

.

.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는 망망대해를 날았다.

남은 『영약 궐련』은 단 한 개비.

씁, 입맛을 다신 마녀는 아래로 보이는 남녘 바다를 노려봤다.

"...문어 대가리가."

심해 속에서 수천 개의 다리가 꿈틀거린다.

빌어먹을 환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무엇하나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부터 환청이 들려온다.

『도망가도 소용없다.

운명을 받아들여라.

네 손으로 종말을 시작하라.

고통스러운 삶을 애써 부여잡지 말거라.』

"진짜 궐련 땡기네."

『바다의 대흉』.

놈의 저주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값비싼 영약 궐련을 태울 때밖에 없었다.

심정 같아서는 사교장에서 궐련이나 태우며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고 싶었건만.

쿠르릉─!!

거대한 기운이 넘실대는 대륙을 보면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다.

흡연 욕구도 참아내고 쉴 새 없이 비행한 덕분인가.

어느덧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건만.

그 풍경조차 잊어버려 포탈조차 열 수 없었건만.

마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세월이라는 게 참 무서워."

개 같은 기억은 미화시키고.

그나마 좋았던 기억만 남겨두니까 말이야.

당신께서도 제 말에 동감하시겠죠?

"그러니 돌아오신 거겠죠."

마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영약 궐련의 부작용.

뿌예진 기억 속에서 제로 산맥 인근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 좌표를 포착.

허공에 포탈을 열었다.

과정은 더없이 신속했다.

마녀는 포탈에서 빠져나온 뒤 목격했다.

드래곤, 엘프, 거악, 초월자.

대륙이 요동치던 원흉을.

마녀는 혀를 찼다.

정말로 세월이 무섭다.

"마계도 그렇고, 시슬리도 그렇고, 제로 산맥도 그렇고."

과거에는 다들 정말 얌전했었는데 말이야.

마녀는 품속을 뒤졌다.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끼워 꺼내는 건 마지막 한 개비의 영약 궐련.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하게 마력을 써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 전에 머리를 맑게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종말을 시작하라.

연기를 들이켜자 귓가에 맴돌던 『바다의 대흉』의 목소리가 옅어진다. 그래, 그렇게 닥치고 있으라고 문어 대가리. 지금부터는 너도 듣는 처지가 되어야 할 테니까.

"후우─"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

마녀는 전장을 내려다봤다.

자연스럽게 가장 낯익은 얼굴로 시선이 갔다.

우르스.

처음 사교장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정말 햇병아리 같았는데.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사이에.

삐뚤어져도 한참을 삐뚤어진 길을 선택했구나.

"뭐, 귀쟁이들은 한결같이 재수가 없고."

싸가지에 비해 과분한 외모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엘프.

대체 무슨 복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마녀는 그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뱉었다.

"여전히 목청 하나는 끝내주시고."

드래곤, 유낙서스에겐 그다지 감정 없음.

마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옮겨갔다.

"그중에서도 너는 특히 눈치가 없구나."

칠죄종, 탐식을 향하는 눈초리.

바다의 대흉을 노려볼 때에도 평온하던 마녀의 심기가 격하게 요동을 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내뱉을 이야기에는 이 자리의 누구도, 심지어는 나조차도 무관할 수 없었으니까.

고오오오─

격동하는 마녀의 마력.

덕분에 전장 모두가 마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남쪽 바다의 마녀.

그녀가 어느 정도의 강함을 가졌는지를 떠나서.

이 자리 모두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작되는 마녀의 말.

"다들 주제 파악이라는 걸 하면 어떨까 싶은데."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마, 말도 안 돼!!"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

모두가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내 목숨에 맹세코 말할 수 있어."

마녀는 말을 이었다.

"클라우디가 돌아왔다고."

◈ 210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1)

나는 마안의 망원경이 보여주는 풍경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망원경을 노려봤다.

...눈, 제대로 뜨고 있는 거 맞지?

그래도 미덥지 못해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손길에 작은 행운이 깃듭니다.]

[일시적으로 망원경 조작에 능숙해집니다.]

[효과의 지속시간이 증가합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건데.

그동안 워낙 믿지 못할 일을 자주 경험한 나다.

그중에서도 오늘이야말로 역대 최고.

빌어먹게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내면서.

앞으로 장담하는 건 되도록 자제하자고 다짐한 나였거늘.

그럼에도 장담해야겠다.

유낙서스, 거악, 우르스, 아젠트레스와 엘프들까지.

전장에 선 이들에겐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옳든, 옳지 않든.

다들 정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싸움을 말릴 수 있는 존재?

장담하겠다.

현실에는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속에서 그런 존재는 없다고.

그러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쪽은 누구신데요?

포탈 속에서 빗자루를 타고 등장한 초월자.

그녀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강함을 따질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보다 모인 이들이 초월자 한 명에 위축될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저 이름 모를 초월자가.

싸움을 끝낼만한 소식을 들고 왔다는 것.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궁금증이 치솟았건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이유란 걸 들을 수 없었다.

텔레파시라니, 이 순간만큼은 마법이 원망스럽구나.

'치사하게.'

물론, 내가 망원경으로 관찰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리는 없고 단순하게 시끄러운 천둥소리 때문이겠지. 저런 굉음 속에선 아무리 목청이 커도 대화할 수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비로소 잠잠해졌군."

언제나처럼 말은 잘하는 그랑펠을 애써 외면하고는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결국,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유낙서스부터 거악까지.

모두가 거짓말처럼 싸움을 멈추고 해산.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서슬퍼런 눈빛들을 보면 미련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당장은 싸울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유를 알지 못해 끝맛이 시원하진 않았지만.

'후우─'

속으론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당장의 의문이야, 나 혼자만 궁금하면 끝나는 거였지만.

만약, 빗자루를 탄 초월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운수 좋은 날 결말이 날 뻔했으니까.'

그래도 지구 멸망 엔딩은 피한 건가.

그야말로 대폭 상승한 행운 덕에 만난 은인이다.

사람이라면 응당 감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거늘.

나는 한결같이 내뱉고야 말았다.

"말하지 않았나. 행운도, 운명도 개척하는 거라고."

하여튼, 한마디도 안 지려고!

물론, 아르카나 대륙에까지 들리진 않았겠지만.

나는 양심상, 철없으신 그랑펠을 대신해 심심한 사과를 전했다.

...그게 설명하기는 복잡한데, 사춘기라 미안합니다.

.

.

.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펼쳐졌던 개판.

대사건이 일단락된 시점에서 남은 효과의 지속 시간만큼은.

정말로 알차게 활용하리라, 다짐한 나였다.

그 시작은 의심이었으나.

은인의 등장으로 모든 게 평화롭게 끝난 지금.

행운의 효과는 증명된 셈이었으니까.

나는 재킷을 펄럭이며 숲속을 바라봤다.

[전쟁광 순록 : Lv.750]

[전쟁광 순록 우두머리 : Lv.800]

제로 산맥의 중턱.

외관은 몬스터보다 평범한 짐승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 강함은 무시할 수 없다. 대다수의 플레이어가 제로 산맥 토끼에게 호되게 고전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일반몹 다섯에 네임드몹 하나.'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황.

레벨 차이를 고려하면 초월의 경지에 이른 마법을 발현하지 않고 사냥하는 건 불가능하다.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서 마력을 제외한 스탯도 꾸준하게 단련하기는 했다만.

동레벨의 근접 계열 클래스 플레이어들보다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대들에겐 가혹한 일이겠지."

귀철을 손에 쥐었다.

"그러니 배려하마."

잠깐, 배려는 누구 마음대로 배려야?

설령 전설템, 귀철을 손에 쥔다고 하더라도.

귀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 이상.

나는 셰그윈과의 결투 때처럼 현란한 움직임을 펼칠 수 없었다.

물론, 나 이호열의 잔머리 같아서는.

'나야 평생 귀철한테 맡기고 싶지!'

사회가 괜히 분업으로 발달한 게 아닌 법.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우물이, 살 구멍이 많은 내가 아니던가? 검술에서만큼은 얌전하게 귀철이 이끄는 길로 따라가고만 싶은 게 사실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버스 승객이 되고 싶었단 거지.'

그러나.

"응답하라."

긍지가 남에게 운전대를 순순히 넘길 리 있으랴.

어떤 고생길이라도 첫 번째로 나서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랑펠이 아니던가. 결국, 개고생 하는 건 이번에도 나라는 말이었다...!

곧, 시작되는 전투.

느껴지는 에고 소드.

귀철의 음성.

-이것이 나의 주인이란 말인가.

귀철이 그렇게 말꼬리를 흐렸을 때는 흠칫했다.

검성, 셰그윈을 꾸짖을 정도로.

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귀철이 아니던가.

내 얕디얕은 밑천을 알아본 건 아닐까.

순간, 도둑이 제 발을 저린 거지.

하지만 기우였다.

-어떤 전장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라니.

...그래, 얘가 누구 분신인데.

-과연, 그런 마음가짐이 단기간에 검강을 그토록 짙게 만든 것이겠지. 역시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대의 검로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나의 주인이여!

한결같은 마음가짐?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

발버둥에 피어오른 한없이 풍성한 거품 덕분에.

적정 레벨만 따져도 최소 일백에서 수백 레벨이나 높은 균열과 몬스터만 상대해 오던 나였으니까. 심지어 검강의 성취를 이뤄낸 것도 한 번 사망한 덕분이었는데.

'때론 모르는 게 서로에게 좋을 때도 있는 거지.

귀철아, 네가 기쁘다면 다행이구나.

슥─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하고 귀철을 휘둘렀다.

꼭 검술이 아니더라도 『흑마법』부터 시작해서 『사격』까지.

내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우물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검술을 선택한 이유?

그건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미완성을 넘어 완성에 다다른다면.

서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효과가 개방될 터.

노력 대비 가장 큰 결과물이 예상되는 선택지를 고른 셈이지.

전쟁광 순록 무리와의 전투.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나의 승리였다.

재킷 하나는 착용한 게 아니라 걸쳤다고 하더라도.

에픽템으로 도배를 한 것도 모자라 전설템까지 손에 든 나란 말이다. 이 정도 레벨 차이 정도는 가뿐하게 무시할 정도의 템빨이란 거지.

거기에다가 미완성이라고는 하나 쾌검술까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은 3단계 상승해 598레벨.

600레벨에 가까워져서인가.

레벨 업이 더뎌진 게 새로운 벽에 부딪힌 게 여실히 체감됐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긴 하지만.

'지금도 종일 사냥 중이겠지, 다들.'

1레벨을 올리기 위해 하루가 뭐냐.

경우에 따라선 며칠씩 사냥을 멈추지 않는 플레이어들이다.

그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투덜거리지 말자, 호열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못 참겠는데?'

나도 참 진짜로 어떻게 된 게.

하나도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나는 상태창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집념 : 1]

[보유 포인트 : 3]

새롭게 개방한 스탯인 심미와 집념.

심미야 처음부터 수치부터가 상, 중, 하로 구분되어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포인트 분배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런데 집념아.'

너는 아라비아 숫자의 탈을 쓰고 그러면 안 되지!

'악크샨이 웬일로 사기 스탯을 주나 했다, 내가.'

누구보다 노오오오력을 중요시하는 악크샨.

그런 악크샨, 악마 사냥꾼들이.

날로 먹을 수 있는 스탯을 전수해 줬을 리가 있겠냐고.

나는 집념의 효과를 떠올렸다.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불굴에 가까운 그랑펠의 정신력 덕분인진 몰라도.

집념은 1포인트에 대략 스탯 50포인트의 효율을 보였다.

앞으론 1레벨에 50레벨의 효율을 낼 수 있겠구나.

흡족했었거늘.

역시나 김칫국이었다.

'집념을 상승시키는 법이야 뻔하지.'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가다겠지, 뭐!

집념이 개방된 순간처럼.

한계를 초월한 단련을 해야 할 게 뻔했다.

그런 의미에선 휴식을 취할 새가 없겠구나.

'그래도 행운 효과로 집념을 상승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사서 고생할 생각부터 하는 게.

어째, 나까지 그랑펠의 긍지에 전염된 기분이었지만....

흑역사에 시달리는 자괴감은 내일 느껴도 늦지 않는다.

[남은 시간 : 16시 14분]

나는 사이렌의 축복 지속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은 법이니까."

오늘은 왜, 그 소리를 왜 안 하나 했다.

*

마탑의 집무실.

[남은 시간 : 54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장담하겠다.

오늘처럼 고된 하루는 또 없을 거라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과에 시달리는 나였거늘. 그걸로도 부족해서 대폭 상승한 행운의 본전을 뽑기 위해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오갔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은 하루였군."

주둥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말 다 한 거지, 뭐.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찻물이 데워질 때까지 찬찬히 되새겨보자.

[집념 : 2]

일단, 고된 훈련 끝에 집념은 1포인트가 상승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흠칫했다.

행운이 대폭 상승했는데.

이런 훈련량에 고작 1포인트면 평상시엔 어떻다는 걸까.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

"요행은 요행에 불과한 법이었군."

찬물에 우러나는 신상 녹차는 취향이 아니라고.

이런 타이밍에 이야기하지 마라, 그랑펠.

그래도 집념의 효과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고생이었지.

팔굽혀펴기 도중 눈앞이 흐려지던 순간.

상승했던 집념.

그 효과로 상승한 근력이 무려 100포인트였으니까.

'평생 노가다 탈출은 불가능하겠구나.'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집념은 사기 스탯이 맞았으니까.

앞으로도 꾸준히 기절할 때까지 단련해야겠지.... 물론,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들른 유스라 왕국 집무실에서도 적잖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반가운 성과는 아무래도 국왕, 하쿠나가 직접 전해온 소식이었다.

-"그간 송구했습니다. 비로소 각오가 섰습니다."

하쿠나는 그동안 검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정확히는 날붙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칼과 창, 방패를 볼 때마다 고대 왕국 시절 지켜내지 못한 백성들이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자라더라도 저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그런 하쿠나가 과거를 극복한 것.

내게는 여러모로 희소식이었다.

하쿠나가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도 축하할 일이었지만.

덕분에 내 업무도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으니까.

조금은 숨통이 틔였달까?

또각─

한결 가벼워진 걸음.

마탑으로 복귀하니,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피지에 떠올라있던 글귀.

필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마르셀로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안부에 감사에.

요란한 수식어를 제외하고.

핵심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

탑주님께서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

마탑 최상층.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 구체 속에서 눈을 감고 부유 중인 탑주.

그런 탑주에게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움직임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게 아니라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지만.

'전례에 없던 일이라니까.'

평소보다 경쾌한 그의 필체.

마르셀로가 얼마나 들떴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물론, 나도 기쁘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마법사의 탑에 존재하던 모순의 실체.

진리 추구라는 마탑의 목적조차 불순해진 지금.

마탑을 그 기반부터 바로 세워라.

─탑주와 조우하라. (진행 중)

─도주한 악마 숭배자를 처분하라. (성공)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어쨌거나, 막막했던 퀘스트에 진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달칵─

찻잔에 뜨겁게 달궈진 물을 따르며 읊조렸다.

"마무리가 중요한 법이거늘."

그렇다.

이렇게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대략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물론, 남은 한 시간 또한 알차게 보낼 생각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입장할 예정이었거든.

'만나봐야지, 생명의 은인.'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이름 모를 각성자를 말이야.

행운이 대폭 상승한 지금이라면.

서로 엇갈려 만나지 못할 확률도 줄어들 터.

그러니까 나는 지금.

사교장 방문을 영 달가워하지 않는 그랑펠을 달래기 위해.

티백 녹차를 우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메뉴판에 별게 다 있던데 녹차는 없다니.'

나는 진지하게 읊조렸다.

"시공간에도 로켓 배송이 시급하겠군."

.

.

.

나의 육체를 지배하는 그랑펠의 격식이다.

사교장에서는 더욱더 격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는바.

한결같이 꼿꼿한 자세는 물론, 그 걸음걸이와 언행까지.

섣부르게 경거망동하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교장에 진입한 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경고'였다.

"정체를 밝혀라."

정말로.

마지막으로 장담하건대.

시공간의 사교장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까.

◈ 211화. 안부를 나눌 상황은 아니군 (2)

『시공간』 혹은 [고인물 커뮤니티].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엔 괴리가 존재했으니까. 설정만 존재하던 고인물 커뮤니티가 시공간으로 실현되면서 몇몇 요소가 추가되는 건 확인했던 바였다.

커뮤니티가 사교장으로 구현된 것부터 시공간의 결투가 콜로세움에서 진행되는 것까지. 물론,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칙은 있다.

시공간은 오직 초월자를 위한 공간이라는 것.

서클이라든가.

쾌검술이라든가.

그게 아니면 가미긴을 지옥에 처박아 넣은 나처럼.

누가 봐도 경악할 만할 업적을 세운다든가.

말 그대로 초월자.

고인물이라 불릴 '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특출나야 한다는 거지.'

아르카나 대륙에 시공간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까다로운 자격시험까지 생각하면 초월자의 수는 많을 수 없었다.

'내가 목격한 이들은 대략 열댓 명 남짓.'

기나긴 아르카나 대륙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시대에 획을 그은 인물들만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기분이군.'

하지만 내 특기가 무엇이냐, 주제 파악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초월자의 격을 갖추게 된 건.

나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마왕 쟁탈전으로 지옥의 문이 열렸던 특별한 상황. 거기에 [악크샨의 유지]로, 지옥에서 불러낸 악크샨 선배님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이란 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현시점에서 플레이어 중 나를 제외하면 시공간에 진입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라고.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나 히든 클래스라는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말이야.

현시점에서 시공간은 감히 플레이어가 넘볼 영역이 아니라는 거다.

또각─

그렇기에 나는 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는 진입할 수 없는 시공간의 사교장.

정말로 난데없게도.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낸 '고깔모자'에게로.

커다란 고깔모자.

그 얼굴은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늘어진 금발의 머리칼이 틀림없었다.

제시 하인네스였다.

나는 입을 열었다.

"정체를 밝혀라."

달칵─

내 말에 제시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는다.

'...잠깐만.'

이럴 때는 차(茶)를 향한 그랑펠의 광기가 도움되기도 하는구나.

풍기는 향으로 홍차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그래, 그게 바로.

나도, 그랑펠도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였다.

제시가 유일했었거든.

-"죄송합니다! 역시, 차는 맛이 없네요!"

내가 대접한 녹차를 남긴 사람은.

티백 녹차가 싸구려여서가 아니었다.

제시의 변명 아닌 변명에 따르면, 자신은 커피부터 홍차까지.

차라는 차는 사실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실토했었으니까.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는 거야.

"혹시, 벌써 제 이름을 잊어버리신 건가요?"

그러니까 그딴 연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거기선 물음표가 아니라 느낌표로 말을 끝내야 하거든.

"마지막으로 묻겠다."

"...?"

"정체를 밝혀라."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목소리 한번 냉랭하다.

덕분에 제시도....

아니, 제시가 아니지.

제시를 연기하는 저쪽도.

시치미를 떼어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은 것 같았지만.

슥─

천천히 움직이는 고깔모자.

고깔모자 아래에서 얼굴이 드러난다.

낯선 말투가 들려온다.

"뭘까,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달라진 건 없는데."

달라진 게 없기는.

동공에 느낌표가 없는 게.

딱 봐도 제시가 아니잖아.

'설마.'

그나저나 이놈의 직업병은 어쩔 수가 없구나.

겉모습은 제시 하인네스지만, 정신은 제시 하인네스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악마 빙의 가능성이었다.

'아니, 냄새가 나지 않아.'

게다가 [천적관계]도 발동되지 않았다.

이번엔 기승전악마가 아니라는 건가.

그래서일까, 더욱더 의문이 드는걸.

누구냐, 너?

"딱히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장난 좀 쳐보려고 한 거였거든. 이거, 내 머릿속을 꺼내서 보여줄 수 있으면 바로 내 장난기를 이해해 줄 텐데."

어설픈 연기를 집어치우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곳곳에서 늘어지는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겠지? 이 상황에 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날이 선 태도는 아니로군.

이내, 맞은편 의자를 향하는 시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남의 말에 따를 위인은 아니지. 무언의 제안을 외면하고 꼿꼿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제시의 탈을 쓴 누군가가 능청스레 중얼거렸다.

"아차, 격식. 제일 중요한 건데, 깜빡했네."

그러곤 사교장의 메뉴판을 띄웠다.

"차라도 대접할 테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격식에 살고, 격식에 죽는다.

존댓말에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애초에 목적은 빗자루를 탄 초월자였지만....'

현재 사교장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제시가 제시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지금.

이것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었다.

왜냐니.

제시의 몸을 차지한 그쪽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쪽은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입장이거든.

'인류의 핵심 전력 중 하나라고, 제시 하인네스는.'

클래스는 무려 대마법사.

제시의 잠재력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다고 들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말도 걸지 못할 NPC들이 제시에겐 호의적이었다고 했었지. 심지어 하르콘과도 안면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러니까 그 자초지종이란 걸 들어보자.

"저랑 같은 홍차로 하실까요?"

그 말에 나는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바라봤다.

유감스럽게도 시공간의 사교장에 녹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미 녹차로 충분한 도핑을 마치고 온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나는 미련 없이 말했다.

"잡설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더욱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길 사이는 아니니."

단순하게 홍차가 취향이 아닌 거면서.

녹차라면 좋다고 얻어 마실 거였으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덧붙이지 마라, 그랑펠....

*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 대륙엔 종종 그런 질문이 떠돌고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이들에게 마법사는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화룡, 카림제바.

만년설, 세니오스.

온순한 거인, 유그위드 등등....

더군다나 물고 물리는 상성이 존재하는 마법이다.

정답이 없는 가위, 바위, 보가 제일 재미있듯.

당대 최고의 마법사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정답은 없었지만, 적당히 떠들기 좋은 질문이었단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뚜렷한 최강이 없다면.

어째서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라 불린단 말인가.

몇몇 마법사들은 말해왔다.

"능력을 떠나 대마법사는 이명에 가깝지."

"일반적인 마법사와는 그 결이 다르니까."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네, 그쪽은."

"유일한 존재를 어떻게 다른 이들과 비교한단 말인가?"

그래, 대마법사는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단지 대마법사로 선택받는 것일 뿐.

그런 대마법사로 모험가인 제시 하인네스가 선택된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국의 황제조차도.

"어쩌면 이 또한 여신의 은총일지도."

언제나 마탑의 눈치를 봐야 했던 제국에는 더없는 기회였다.

대마법사인 제시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마탑이란 불안요소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변수에 변수로군."

마탑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례적으로 모험가인 제시의 마탑 입성을 허가했다.

자격 증명 과정을 생략하고 견습 마법사 계급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게 누구인가?

수석은 물론.

원로 마법사들조차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 모든 게 탑주의 뜻이었다.

탑주가 의식을 잃은 채.

마력 구체 속에서 부유하기 직전.

적어둔 서신의 유일한 전언이 바로 제시 하인네스의 처분이었다.

여기까지가 세간이 알고 있는 대마법사.

그리고 현시점의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에 관한 정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그게 끝이었을까?"

제시의 껍데기가 씰룩거렸다.

"마법사란 족속은 기본적으로 오만하지. 마탑의 수석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나?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원로, 수석, 선임, 숙련, 견습.

다섯 계급으로 분류되는 마탑의 마법사들.

그러나 어떤 계급도 스승과 제자로 칭할 순 없었다.

그나마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 선임과 숙련 마법사조차도 협력 관계에 불과, 선임 선출 기간에는 경우에 따라 경쟁 관계가 되곤 했으니까.

"대마법사라고 그 본성을 억누를 수 있었을까?"

곡선을 그리는 눈꼬리.

그 낯선 눈웃음이 다시금 제시가 아닌.

제시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타인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스승과 제자라.... 그렇게 생각했던 게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뭐,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야."

톡─

고깔모자의 챙을 건드리는 손가락.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었으려나?"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전대 대마법사들은 의식으로서 '고깔모자'에 깃들어 존재한다.

그 목적은 마법의 경지를 넘어선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

극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 바로.

대마법사들이 계승해 온 일인전승이라는 것이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으실까요? 대마법사의 실체가 생각과는 전혀 달라서? 우리 이 수석께서도 어쩔 수 없는 마법사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눈매가 초승달처럼 더욱 가늘어졌다.

"육체라는 족쇄는 식견을 좁게 만든다고 하지. 그렇다면 새로운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걸 넘어서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 태어난 모험가의 육체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다.

그것이 대마법사의 그릇으로 제시 하인네스를 선택한 이유였다.

제시의 탈을 쓴 대마법사'들'의 결정이었다.

"물론, 당사자가 모든 걸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마력 탈진으로 기절해 버렸지만."

대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지금처럼 정신을 잃었을 때나 이렇게 뛰쳐나올 수 있다는 거지. 누구의 의식이 발현되는지는 순전하게 운.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천운이었나?"

대체 이게 얼마 만에 하는 바깥 구경이야.

너스레도 잠깐.

대마법사 중 하나가 속닥거렸다.

"그런데, 그 내 몫의 금화는 바닥나서 그런데...."

비워진 찻잔을 들면서.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 아니지, 까요?"

그러자 마침내 잠자코 있던 호열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마법의 극한을 목격하기 위함이었나."

"맞아. 마탑식으로 말하자면 '진리'라는 거지. 사실, 그렇지 않아도 이 아이가 힘내준 덕분에 그 진리라는 게 슬슬 눈에 보이는 것 같거든. 신기하게도 그 어려운 개념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기이』]라고."

물론, 마법에 관한 이해력이 형편없기는 하다만.

그건 우리가 있으니까 우려할 건 아니지.

대마법사는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그릇의 역할이었으니까."

그건 명백한 사족이자 실수였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유감?"

"기이로 향하는 길."

그것은 오만이나 방종이 아니었다.

그만한 자격이 있기에 감히 내뱉을 수 있는 말.

확신에 찬 목소리가 대마법사에게 이어졌다.

"그 길에 자네들은 없을 테니까."

.

.

.

하도 애지중지하길래.

보통 고깔모자가 아니겠거니, 짐작은 했었다.

그런데, 대마법사의 의식이 깃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하나둘도 아니고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물론, 그 이유에 흠칫하진 않았다.

만년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그가 진작 마법사에 관한 환상을 제대로 깨주신 덕분이지. 마법사란 족속이 원래부터 글러 먹었다는 건 직접 봐서 잘 알고 있는 나였거든.

게다가 제시, 본인도 알고 있었겠지.

제시는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수행 중이었으니까.

플레이어의 특권인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상, 제시도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향하는지 시스템창을 통해 파악했을 거다.

문득, 떠오르는 대마법사의 말.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 아이, 꽤 노력하고 있었거든."

거악에 마왕에 제로 산맥까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

그럼에도 제시는 무력감을 딛고 일어섰다는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이 성장을 위해 제로 산맥을 찾은 것처럼. 제시도 성장을 위해 대마법사의 클래스 퀘스트를 진행했을 거다.

그래, 그게 제시의 긍지였겠지.

그런데 말이야.

뭐, 그저 그릇에 불과해?

그랑펠 앞에서 타인의 긍지를 업신여기다니.

대마법사, 당신들은 큰 실수를 한 거야.

"그 길에 우리가 없을 거라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가 그 [『기이』]의 창시자이자.

현시점에서 마법의 극한에 가장 가까운 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이 시간부로."

"...?"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기이의 창시자인 내가."

"...뭐?"

주제를 파악시켜줄 테니까.

"기이를 향한 그대들의 접근을 불허한다."

"!!!"

◈ 212화. 그대였군 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