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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화. 길을 밝히겠다고 하지 않았나

콜로세움 경기장.

버서커이기에 누구보다 결투의 흐름을 잘 알고 있는 레오니였다.

그래서 더더욱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봐요, 뱀눈 씨."

"듣고 있습니다."

"제대로 보고 있냐? 아니, 보이냐?"

도리도리.

남태민의 물음에 히사기는 고개를 저었다.

육체 능력이라면 어떤 플레이어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호열과 검성의 움직임은....

"차원이 달라."

라이언 하트 기사단장, 하르콘.

하르콘의 몸놀림을 떠올려 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세 사람 모두 훈련에서 하르콘과 합을 겨뤄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사자처럼 민첩하기는 했다만, 그래도 눈에 보이기는 했단 말이다.

쌔액─

푸화아악─

언뜻 형태를 포착하기 무섭게.

속도 탓에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찰나의 순간.

챙!

카릉!

챙!

오가는 수십 번의 합.

소리가 한 박자 느리게 귓가에 들려올 정도.

말 그대로 소리보다 빠른 움직임의 증거였다.

"카밀라, 뭐가 보여? 그치, 너한테는 보이겠지?"

관중석 또 다른 곳.

드미트리는 옆자리에 카밀라를 보챘다.

원거리 무투계 랭킹 1위, 카밀라가 아니던가?

그녀의 눈이라면 저런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겠지.

"그래서 누가 이기고 있는데, 응?!"

그러나 카밀라는 한숨을 삼킬 뿐이었다.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엥? 그게 무슨 소리야?"

"하나도 안 보여. 눈이 따라갈 수가 없다구."

"!"

록스조차 멈칫할 정도의 대답이었다.

카밀라의 시야야말로 샤이닝의 가장 큰 무기 중 하나. 자신들보다 수백 단계나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카밀라의 눈은 적의 움직임을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록스는 냉정히 생각했다.

'사실 놀라운 것도 아니야.'

검성.

동시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최강의 NPC가 누구인가?

떡밥이 돌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우연치 않게라도 셰그윈과 직접 만났다는 플레이어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의 명성은 서적에도, 소문에도, NPC들의 입에서도 끊이질 않았었다.

'검성이라면 충분히 저럴 수 있어.'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셰그윈은 젊음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르카나 대륙, 검의 정점이라면 저런 무위를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이호열이었다.

록스는 진심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대체...."

불과 조금 전까지.

호열의 범접할 수 없는 마법적 능력을 체감하고 왔다.

제로 산맥을 뒤덮은 라이트.

그런 라이트를 단번에 움직여 공격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정도의 마법 구현은 플레이어보다는 마탑의 수석에 어울렸으니까. 공동 수석인 이호열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이해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앞서나갈 생각인 거야?"

이제는 검으로 검성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다고?

그렇다.

저건 더 이상 아르카나 시스템의 영역이 아니었다.

'레벨로 설명할 수 없다.'

이호열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거다.

그 사실을 알아본 건 록스뿐만이 아니었다.

"...!"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

그는 호열과 함께 던전, [우울한 비의 도시]를 클리어하며 검기를 깨닫고 발산하게 됐다.

그렇게나마 강제적으로 눈을 떴던 덕분에 슈레이그에겐 보이고 있었다.

검성을 몰아붙이는 은빛의 검강이!

합을 겨루는 게 아니었다.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셰그윈이 호열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급급해하고 있었다.

슈레이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눈으로 따라갈 순 없었지만 검기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결투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니, 그걸 떠나서 진작 결판이 났어야 할 승부였다.

검기를 발산하게 된 슈레이그.

그렇기에 검기의 유무가 얼마나 큰 격차를 내는지.

나름대로 잘 알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기를 발산하지 못하고 있어.'

보이는 것은 오직 은빛의 검강뿐.

셰그윈의 검기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슈레이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호열이 셰그윈에게 몇 번씩이나.

아니, 수십 수백 번이나 수를 물러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다.

이 결투는 진작에 셰그윈의 패배로 끝났어야만 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보니, 모든 게 보였다.

챙!

셰그윈이 막아낸 것이 아니다.

그가 막을 수 있도록.

호열이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검기를 깨달은 슈레이그조차 간신히 진실을 알아차렸거늘.

지켜보는 플레이어들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곳곳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성과 대등하게 맞서고 계셔!!"

"말이 되는 일이냐고, 이게."

"이러다가 정말 이기시는 거 아니야?!"

승부는 결정됐다.

그러니 슈레이그는 흥분하지 않았다.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 있으신 겁니까?'

그때였다.

서걱─

소리와 함께 셰그윈이 무릎을 꿇었다.

허나, 호열은 단지 똑같이 검을 휘둘렀을 뿐.

셰그윈의 육체가 한계에 부딪힌 것이었다.

"미친...!!"

승기를 잡은 호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함성 속에서.

슈레이그는 생각했다.

'받아낼 수 있게 공격하고, 쓰러지면 기다린다....'

"...!"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셰그윈과 같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우산을 든 호열의 모습.

-"지금부터 그대가 할 일은 간단하다. 지켜보는 것."

-"정확히는 검기를 목격하는 것이다."

-"그대를 믿는 나를 믿어라."

슈레이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검성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

.

.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셰그윈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 귀철에게 몸을 맡긴 것도 모자라 검강까지 발산했으니.

시종일관 압도할 수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더군다나.

'...보인다.'

그랑펠의 무지막지한 재능이 있었다.

셰그윈의 쾌검에 실시간으로 적응해 가다니.

양심에 찔릴 정도로 잘났구나, 그랑펠.

그 결과, 나는 셰그윈에게 유효타를 먹였다.

서걱─

셰그윈의 왼팔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몰아붙인 것 같았거늘.

공격이 적중한 건 처음인가.

역시 괴물이구나, 검성은.

그런데 들려온 말이 예상 밖이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냐?"

...갑자기 뭔 소리래?

원하는 거야 당연히 승리다.

시공간의 결투에서 패배해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대에게는 수백, 수천 번이나 나의 숨통을 끊일 기회가 있었다. 어째서지? 악마보다 못한 내게 굴욕을 주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그대의 뜻대로 됐지 않았는가?"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셰그윈.

"막으라고 휘두른 공격조차 받아칠 수 없을 정도로. 내 육체는 한계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실화냐?

나한테 진짜 그런 기회가 있었다고?

흠칫한 나를 대신해서 귀철이 답했다.

-애송이가 아직도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했나.

...넌 또 왜 급발진을 하는 건데?

당연하게도 나, 이호열에게 별 뜻은 없었다.

내가 아니니, 그랑펠의 뜻이라는 건데....

나도 의외일 수밖에.

그랑펠이 누구던가?

악마와는 불필요한 말을 섞지 않을 정도로.

그랑펠은 악마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타락한 셰그윈에게도 그랑펠은 동정심 따윈 품진 않았을 터.

"검을 들어라."

내 생각을 증명하듯.

그랑펠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말처럼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인가.

셰그윈이 삐걱거리는 몸을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웃음을 뱉었다.

"단순한 악취미인가?"

그랑펠은 답하지 않았다.

물론, 답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그랑펠에게 악마는 취미조차 되지 못하는.

수고를 들일 가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인가?

서걱─

"...큭."

서걱─

"으윽."

어째서 그랑펠은 셰그윈과의 결투를 끝맺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래, 그 심오한 의문에 대한 답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겠지.

'...역시 꽃밭이구나, 그랑펠.'

현실에서 때가 묻은 나, 이호열과 그랑펠은 다르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변하기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랑펠은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랑펠은 인간이란 동물을 과대평가해도 너무 과대평가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곳.

제로 산맥에서도 마찬가지였지.

-"내가 길을 밝힐 테니, 얼마든지 뒤쫓아도 좋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긍지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불구덩이 속에 뛰어든 행보가 그 증거다.

그 순간마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때 묻은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거든.

지금이야 나를 평화의 상징이자 인류의 영웅이라 떠받들고 있지만, 언제 어떤 유혹에 등을 돌릴지 모르는 게 인간이란 생물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검을 들어라."

그랑펠은 인간을 믿는 것이다.

설령 악마에게 육신을 팔아넘겼다고 한들.

긍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결국, 모든 고생이 나의 업보 때문이라는 거구나....'

이 험난한 세상에.

네 고집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그랑펠?

나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나는 쭉 그래 왔던 것처럼.

발버둥 칠 수 있을 때까지 발버둥 쳐주겠다.

다짐하는데.

"...?"

간과하고 있었다.

사람은 없더라도.

시스템이 있었다는 것을.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셰그윈에게서.

.

.

.

천천히 눈이 감겨온다.

한계에 다다른 육체가 쉬고 싶다고 소리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한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나.'

시작부터 잘못된 길이었거늘.

어찌 그리도 멈추지 않으려, 꼬꾸라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달려왔단 말이냐, 셰그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아틀라스.

'모든 게 끝이다.'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검로가 아닌 잘못된 길에 들어선 내가 아니던가?

더 나아가 봤자 추악한 행보만을 보였겠지.

나를 멈춰 세운 사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셰그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용서는 바라지 않겠다.'

전해지지 않을 사과 또한 건네지 않겠다.

그저 나의 죄를 안고 지옥에서 죗값을 치르겠다.

그래, 그것이 인간을 저버린.

악마에게 걸맞은 최후일 테니까.

이젠 육체를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도.

"...?"

그래.

눈을 감았기에.

무엇하나 보이지 말아야 할 텐데.

어째서인가.

무언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한 갈래의 길이 보였다.

"이게 주마등이라면...."

셰그윈은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단순한 인생이었구나."

이것이 내가 택한 헛된 검로(劍路)라는 것이겠지.

과연, 그 추측이 맞는 듯싶었다.

길은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으니까.

"...."

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동시에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책임을 지고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셰그윈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검을 들어라.

"...?"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끝나서까지.

나를 꾸짖는 것인가, 그대는.

"...뭐, 좋을 대로 해라."

그대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겠지.

셰그윈이 씁쓸하게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어째서인가,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였다.

잘못 들어선 검로.

그렇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검.

아틀라스가 손에 쥐어있었다.

아틀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제 말을 들어주시는군요.

"...!!"

-고래고래 소리치느라 목이 다 쉬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어째서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아틀라스가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는 길, 그것이 저의 검로이니까요.

셰그윈은 입을 다물었다.

손끝에서 아틀라스의 고동이 전해져 왔다.

그런가.

그렇단 말이냐.

너는 잊지 않고 있었구나.

셰그윈은 애써 입을 열었다.

"...험한 길이 될 것이다."

-여태까지는 험하지 않았나요?

"영영 되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좋다고 되돌아오겠습니까?

"...이 길이 잘못된 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러냐."

마지막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검로.

"...!"

어째서인가.

그 어둠 속에 한 줄기의 빛이 드리웠으니까.

그건 숭고하게 빛나는 은빛의 섬광.

"쓸데없이 다정하구나. 그대라는 사내는."

셰그윈은 결국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울다가 웃으면 큰일이 난다고 하던데요.

"다물어라, 아틀라스. 너도 울지 않았느냐."

-누가 그랬습니까? 저는 검입니다. 검은 울 수 없습니다.

"그 코맹맹이 소리나 좀 어떻게 하고 말하는 게 어떠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건 소리를 지르느라....

길을 나아갔다.

.

.

.

회광반조.

셰그윈은 더없이 푸른 검강을 발산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틀라스를 품에 안은 채로.

어느샌가 노인으로 돌아온 얼굴.

입가에는 아련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귓가에 함성이 들려왔다.

"믿고 있었습니다, 호열 씨이이이!!"

"이겼어! 이호열이 검성을 이겼다아아아!!"

"이래서 전설 업적이 떠오른 건가?!"

"그치, 이게 새로운 전설이 아니면 뭐냐고!"

이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공간의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199화. 전해지는 승전보

AAU엔 난데없이 폭탄이 떨어졌다.

"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요? 또요?"

지부장 화상 회의.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뿐만 아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지부장들.

모두가 마치 짠 것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결투 참관 메시지가 떠서 승낙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시야가 바뀌었다."

"눈을 떴더니 웅장한 콜로세움이 나타났다...?"

"아니, 이걸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요."

마지막으로 한탄을 뱉은 건 박민재였다.

"이럴 땐 하루라도 플레이어가 돼보고 싶다니까요? 진짜로 우리 플레이어님들께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으실 테고...."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

그는 흥미롭다는 듯 으하하 웃어 재꼈다.

"슈레이그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화려한 콜로세움은 처음 봤다고 하던데요?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쳐서 말이죠!"

"보석과 황금으로 지어진 콜로세움이라니...."

"없잖습니까? 아르카나 대륙에도 그런 건."

개발자 시절을 되살려 기억과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봐도.

플레이어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콜로세움은 없었다.

아니지, 애초에 진입 방식조차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균열이나 포탈에 진입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죠! 그냥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이니까요!"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다르고요."

미국 서부 지부장.

조슈아는 록스 일행과 그와 관련된 대화를 나눴다.

적어도 수십 분은 콜로세움에서 결투가 진행되었다는데, 현실로 돌아온 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불과 수십 초도 지나지 않았다고 했었지.

"...대체 단체로 어딜 다녀온 거랍니까?"

하여튼, 빌어먹을 아르카나!

하나를 알게 되면 모르는 게 와르르 쏟아진다.

박민재는 답답한 심정에 고개를 떨궜다.

덕분에 자신의 정수리에 쏟아지는 지부장들의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근데 말입니다, 박 지부장님."

"듣고 있습니다. 저, 자는 게 아니라 생각 중입니다."

"알고 계실 분이 한 분 계시지 않습니까?"

"...예?"

은근한 목소리 고개를 든 박민재.

그에게 쏟아지는 건.

지부장들의 기대 어린 시선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설마, 유스라 총책임자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플레이어이자 유스라 지부 총책임자.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이호열.

'그건 좀.'

그러나 그런 호열과 단둘이 마주하는 건.

박민재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박민재는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검성, 셰그윈을 검을 쓰러트리시다니요! 완전 대박 사건!!"

애써 젊은이들의 단어를 빌린 효과려나.

지부장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셰그윈, 사실 플레이어더러 쓰러트리거나 대적하라고 설계한 NPC가 아니지 않습니까? 플레이어들에겐 범접할 수 없는 태산 격으로 만든 NPC잖아요."

그랬다.

어찌 보면 마탑과 마찬가지였다.

검성.

말 그대로 검의 정점.

너무나도 강했기에 아르카나 대륙에 영향을 끼치게 설계할 순 없었다.

오직 검밖에 모른다는 외골수 설정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었지.

"설정상의 나이를 생각하면.... 진작에 자연사했을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조금 더 플레이어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당장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요."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호열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다시 노인이 되더니만.

녹색 불길에 휩싸여 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단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망정이었다.

"...그런데 이건 알려져도 믿기 힘든 이야기겠는데요?"

아무리 목격한 플레이어가 많다고 하더라도.

단체로 환각을 목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인간적으로 너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가?

특히.

"아무리 이호열 총책임자님이라고 해도...."

검으로 검성을 꺾었다니.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셰그윈은 플레이어가 꺾을 수 있게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플레이어들이 알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치, 고유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도 이야기가 오갔다.

"글쎄요. 뭔가 착오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착오라뇨?"

"알다시피 검성은 정점으로 설계된 캐릭터입니다. 검으로는 이길 수 없도록 만들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노인으로, 아르카나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퇴장할 인물이었고요."

"...그거야 그렇죠."

"뭔가 플레이어들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요? 왜, 플레이어들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호화스러운 콜로세움도 모자라서,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 다시 노인이 돼서는 녹색 불길에 휩싸였다니."

...이거, 화제가 돌아가서 다행이기는 한데.

잠자코 듣고 있자니 또 열이 받았다.

박민재가 썩은 미소를 흘렸다.

조슈아, 감히 우리 총책임자님을 의심해?

앞에서 알랑방귀를 뀔 때는 언제고.

하여튼 추잡하다.

몇몇은 긍지라곤 찾아볼 수 없다.

"후하─"

레이먼 션에게 들이박았던 박민재의 본성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각 지부장에게 긴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

다름 아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업데이트 소식.

누군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오늘 목요일도 아니잖아? 설마 긴급 업데이트라고?!"

다행히도 최악은 아니었다.

떠오른 건 업데이트 내역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홈페이지에 떠오른 건 동영상 하나.

"...아르카나 공식 계정? 이거 레이먼 션이 업로드한 건데요? 잠깐, 레이먼이 동영상을 올렸다고? 업데이트 내역 말고 다른 게시글이 업로드된 건 처음이잖습니까?!"

"진정하고. 일단, 재생해 봅시다."

이내, 지부장 채팅룸에 공유되는 동영상.

"...!!!"

유달리 말이 많던 조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재생된 영상에 떠오른 것은 콜로세움.

검성과 마주한 호열의 모습.

그리고 화려한 공방 끝.

검성을 쓰러트린 호열이 꼿꼿하게 서 있었으니까.

*

그래, 화제가 될 수밖에 없겠지.

'내가 봐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박제된 셰그윈과의 결투.

플레이어의 시점에서 촬영된 게 아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들이댄 것 같은 앵글.

그리고 블록버스터 영화 뺨치는 편집까지.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이는 한 명밖에 없으리라.

'레이먼 션.'

아주 그냥 액션 영화 뺨치게 찍어주신 덕분에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셰그윈과 합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슬로우모션까지 걸어놓지를 않나. 포장도 모자라 금칠까지 덕지덕지 발라놓으셨다.

-실화냐고ㅋㅋㅋㅋ검성보다 더 검성 같은데?

-슬로우 걸었어도 눈이 따라갈 수 없음 ㄹㅇ

-내가 우산으로 싸울 때부터 알아봤자너ㅋㅋ 검술 실력

당연하게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그야 저 움직임은 나의 검술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으니까.

모든 건 에고 소드.

[전설]급 아이템.

귀철 덕분이란 말이다...!

'하여튼 철면피.'

그러나 내 얼굴에서.

그 진실이 드러날 리가 없었으니.

괜히 내가 봐도 놀랄 정도라는 게 아니었다.

알고 봐도 속을 정도로 표정이 진지한 게.

과연, 검성의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결투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구만.

달칵─

내려놓는 것은 티백이 잠긴 찻잔.

하지만 나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랑펠의 심기가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대에겐 자격이 없다."

마지막 순간.

셰그윈이 발산했던 더없이 푸른 검강.

그가 긍지를 되찾은 덕분인지.

그게 아니라면 칭호 [숭고]의 효과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의 마지막을 구경거리로 만들 자격이."

승리에 환호하는 이들을 책망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셰그윈과 나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잖아? 마지막 순간, 어째서 지옥의 불길이 셰그윈을 집어삼켰는지도 모를 거다. 지옥의 불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근데.

그쪽은 전부 알고 있잖아, 레이먼 션.

모든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그랑펠의 긍지께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서 말이야.

"언젠가 우리가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겠다."

언제가 될 줄은 모르겠다만.

나도 기대가 되는걸?

모든 일의 원흉이잖아, 레이먼 당신이야말로.

나도 갚아줄 게 있다는 말이다.

'그쪽만 아니었어도.'

내가 수치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됐다, 당사자는 듣지도 못할 신세 한탄은 관두자.

게다가 당장은 확인할 게 있었으니까.

시공간의 결투에서 승리.

승리로 지급된 보상.

그건 금화였다.

정확하게 일백(一百) 개.

"금화라...."

그놈의 청렴결백.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거든, 그랑펠.

하지만 그냥 금화가 아니니까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봐라.

[시공간의 금화]

[등급 : 에픽]

[제한 : 초월자]

[효과 : 시공간에서 화폐로 사용 가능.]

[설명 : 초월자의 영역, 시공간에서 통용되는 금화.]

시공간의 금화.

한마디로 [고인물 커뮤니티], 『시공간』에서 쓰이는 돈이었다.

상세한 쓰임새야 아직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AAU에서 전해준 정보가 있긴 했다만, 어떤 식으로 구현됐을지는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시공간의 결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래도 사교장에서의 사용법만큼은 이미 알고 있지.

"으음."

이거 봐.

차 주문하는 데 필요하다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

대체 얼마나 티타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데?

물론, 승리 보상은 금화로 끝이 아니었다.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결투 영상이 업로드된 참이다.

그에 따른 수익이 내 앞으로 떨어질 터.

그야말로 진짜 부귀영화였으니, 내게는 쓸데없는 보상이었지만.

'...적금이라 생각하자.'

모아두면 노후에라도 다 쓸데가 있겠지.

어쨌든, 형식적인 승리 보상은 거기까지.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칭호를 확인했다.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성취에 새롭게 떠오른 미완성 쾌검술.

그렇다.

이번에도 그랑펠의 재능이었다.

마법을 목격한 것만으로 따라 발현하듯.

셰그윈의 쾌검술마저 합을 겨루며 목격하고.

결국에는 습득해 냈다는 것이다.

'아직 미완성이라 효과가 명시되진 않았지만....'

갈고닦는다면.

서클처럼 제대로 된 효과가 떠오르지 않을까?

내게는 금화나 돈보다도 훨씬 와 닿는 수확이었다.

다른 누구의 검술도 아닌 검성.

셰그윈의 검술을 습득한 셈이었으니까.

나는 읊조렸다.

"그대의 검로는 내가 이어 걷겠다."

참 고상하게도 돌려서 말하는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뒤끝 한번 장난 아니구나, 그랑펠.

진정한 승리가 뭐냐고?

기승전악마.

당연하게도 성전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간 셰그윈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긍지를 되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악한 건 셰그윈의 연약함을 파고들어 기만한 악마였으니까.

'이렇게 또 긍지에 긍지를 얹는구나....'

백날 발버둥 치면 뭐 하냐?

버틸만하면 남의 긍지마저 얹어버리는데.

하지만 말했다시피 모든 것이 나의 업보겠지.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맞아, 홈페이지에 박제가 안 된 게 어디냐?'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이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개인정보를 비공개로 돌려놔서 다행이다, 진심....

.

.

.

시공간의 사교장.

보이는 건 테이블에 널브러진 여인 뿐이었다.

...저 사람, 언제부터 저러고 있는 건데?

사교장에 입장한 사내는 혀를 찼다.

"마녀님은 금화 벌어서 전부 연초 사는 데 쓰십니까?"

"주둥아리 다물지 그러느냐."

"...쩝,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네."

일출의 무사.

짧은 흑발의 사내는 자리에 앉았다.

짤랑─

금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곧장, 물이 담긴 컵 한 잔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크."

금화 한 닢짜리 『달의 정화수』.

삼키기 무섭게 육체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다.

사내는 사교장을 살폈다.

"...마녀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귀한 영약으로 만든 연초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무리 금화가 많다고 해도 과소비 아닙니까? 뭐, 금화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한 개비에 금화 열 개짜리 연초.

그걸 귀한 걸 언제나처럼.

뻑뻑 피워대는 '남쪽 바다의 마녀'님 말고는.

다른 초월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여러모로 바쁜가 보군."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지.

지금이야말로 초월자들.

각자가 자기 뜻을 펼칠 시기일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의외였다.

"웬일로 영감이 안 보이네."

셰그윈.

다른 초월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검로만을 추구하는 노인네.

"물어볼 게 좀 있었는데."

셰그윈이 젊음을 되찾았든, 뭐가 됐든.

사내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검에 관한 담론 말고는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사내의 시야에 문득, 양피지가 들어왔다.

힐끗─

사내가 연초 기운에 널브러진 여인을 흘겨봤다.

"이것도 확인 안 하셨네. 제가 까봅니다?"

사교장에 새로운 소식이 도착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늘.

대답도 못하는 게 저건 완전 중독이라니까, 중독.

사내는 고개를 내젓고는 양피지를 펼쳤다.

그런 사내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시공간의 결투에서 사망?"

...셰그윈, 그 영감이?

몇 차례 대화를 나눠봤기에 알 수 있었다.

셰그윈, 그가 상당한 실력의 검사였다는 것을.

애초에 자신과 같은 초월자가 아니던가?

"...어떤 놈이냐?"

사내는 그 상대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리고 흠칫했다.

그건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

그렇기에 추측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신참인가."

그랬다.

업적 평가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내의 이름이.

양피지에 적혀있었다.

사내가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

그때였다.

덜컥!

옆자리에 널브러져 있던 마녀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매서운 눈을 더욱 날카롭게 뜨면서.

사내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 이름, 다시 말하라고."

...이름?

길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나.

사내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러자 마녀가 되뇌었다.

"그랑펠.... 클라우디...? 크, 클라우디 가문...?!"

◈ 200화. 산맥이든 하늘이든 오를 뿐이다

목요일.

AAU.

약속의 시간이 지난 순간.

성현준은 으어어 탄식을 쏟아냈다.

"진짜, 이게 얼마 만이에요 선배?"

정기 업데이트 내역, 없음!

한동안 정기로도 모자라서.

긴급으로 업데이트를 쏟아내던 아르카나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몰라도.

"고맙다, 레이먼 션."

중얼거린 성현준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기억도 안 나요. 목요일 정시 퇴근이라니."

그런데 어째서인가.

장단을 맞춰줘야 할 윤수겸은 대답이 없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걸까.

성현준은 그를 바라봤다가 기겁했다.

"...선배,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응? 뭐 하긴 일하지."

"아니, 지금이 일할 때냐고요! 자축부터 해야지!"

그렇지 않아도 성실한 선배가 요즘 따라 더 성실해지셨다. 그 탓에 덩달아 피곤해지는 건 옆자리의 자신이었다.

왜, 박 지부장님부터 오가면서 한마디씩 건네오셨으니까.

-"요즘 신입들은 말이야. 파이팅이 없어."

이어지는 끔찍한 훈화 말씀.

그래, 선배님이자 보스의 말이니까 경청해 보자.

신입의 긍지를 가지고 들으려고 해봐도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야 시작부터 억울한 말이었으니까.

세상에 n년 차 신입이 어딨단 말인가!

AAU의 입사 조건?

단 하나였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코스모에 재직했을 것.

하지만 레이먼 션의 행방불명과 함께 폐사한 코스모가 신입사원을 뽑을 리가 없었으니.

"아니, 선배! 평생 막내가 말이 되느냐고요!"

성현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평생 신입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윤수겸을 향한다.

"선배까지 저한테 가혹하실 거예요?"

"아까부터 뭔 소리야, 대체."

"왜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시냐고요. 선배!"

야근을 왜 하기는.

드륵─

의자를 바짝 당기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윤수겸이 말했다.

"대리의 긍지."

"아, 진짜!!"

"하하, 농담이고 뭐라도 해야지."

윤수겸은 고갯짓했다.

수백 개의 모니터.

거기에 떠오른 건 플레이어들의 모습.

"너도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지 않아?"

정기 업데이트는 떠오르지 않았어도, 플레이어들은 멈추지 않았다.

제로 산맥 곳곳에서 사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윤수겸은 말을 이었다.

"다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고."

이전과는 달랐다.

플레이어들에게선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제로 산맥의 위험성 때문인지.

아니면 플레이어로서의 긍지 때문인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저들을 보고 있자니....

윤수겸이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이 양심에 찔린다는 거지."

그 말에 성현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래도 선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업무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났거늘.

누구 하나 자리를 뜬 이들이 없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건설적인 대화들.

"네임드몹 패턴은? 어떻게 뭐 좀 나왔나?"

"네, 종족별로 고유 패턴값을 찾긴 했는데.... 이게 제로 산맥 몹들한테도 적용이 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요."

"그거면 됐어. 판단은 우리가 아니라 플레이어들이 하는 거잖아."

털썩─

결국, 성현준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네. 아무래도 해야겠네요. 평생 막내."

평소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선배들이었거늘.

다 착각이었구나 싶었다.

'...아니지.'

이제야 비로소 코스모 시절.

하늘 같던 선배님들의 위엄을 찾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왜, 퇴근 안 하고?"

"됐습니다. 연차가 몇인데, 저도 신입 티 내기 싫거든요."

"그래? 그럼, 이것 좀 부탁해도 될까?"

"뭔데요?"

그렇지 않아도 어떤 것부터 손대볼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성현준은 윤수겸이 보내온 링크를 확인했다.

떠오른 건 이미지 파일이었다.

"도마뱀...? 이 아니라 이거 드래곤이죠? 날개!"

"응, 맞아."

"잠깐만, 드래곤을 저한테 맡기신다고요?"

어째, 드래곤의 사이즈가 아담하기는 하다만.

갑자기 용이라니.

끝판왕이라니.

영, 신입이 맡을 정도의 콘텐츠가 아닌뎁쇼.

"선배, 이건 좀...."

부담스러워진 성현준이 반문하려던 찰나.

윤수겸이 추가 자료를 보내왔다.

자료에 적힌 건 다름 아닌 클래스 목록.

"스압 뭐야, 새삼스럽게 진짜 많네요."

"그렇지? 전투 클래스만 따져도 수천 개니까."

"근데, 이걸 또 왜 저한테 보내신 건데요?"

그것도 드래곤 관련 파일이랑 같이?

"당연히 제로 산맥이 등장했으니까."

"드래곤이면 아직 한참 먼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미리미리 정보를 수집해 둬야지. 물론, 당장도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를 필요로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지도 모를 테고."

"엥? 누구요?"

"누구겠어? 그 클래스 목록에서 하나만 찍어 봐."

"클래스 목록에서.... 아!"

그 말에 성현준은 떠올렸다.

아르카나의 무수한 클래스.

그중 고작 백여 남짓한 히든 클래스 중 하나.

[용기사]의 존재를.

"스칼!!"

딸깍.

클릭과 동시에 떠오르는 용기사의 정보.

전직 조건부터 클래스 퀘스트 줄거리까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세상은 넓고 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스칼은 어떻게 이런 조건을 뚫고 전직한 걸까요?"

"플레이어들이 보통 사람이야? 오픈 초창기엔 근력 스탯 하나 때문에 며칠씩 목검만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뭐,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하지."

"하긴...."

성현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어느 정도 의문도 풀렸으니까.

슬슬 시작해 볼까.

그러곤 곧장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선배가 원하는 건 인류와 드래곤이 충돌하지 않는 선택지죠?"

"우리 서당개, 척하면 척이구나? 뭐, 진짜 먼 훗날이라면 모를까. 당장으로서는 승산이 없잖으니까. 호열 씨가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렇죠. 혹시라도 깨어나서 날갯짓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면 뒤따를 피해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역시, 스칼밖에 없겠네요. 그런 선택지는."

용기사는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테이밍]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용기사, 스칼의 클래스 퀘스트를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해야 하겠지. 보자.... 한참 동안 자료를 훑어보던 성현준이 드디어 그 시작점을 찾았다.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 여기부터려나?"

*

제로 산맥.

그 옥탑방엔 드래곤이 산다.

그렇기에 잊어선 안 될 퀘스트가 하나 있었다.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텟퍼른 미궁] 균열.

악룡, 깨워선 안 될 존재를 처치하고 떠오른 월드 퀘스트.

악룡을 처치하는 데 가장 많은 기여를 한 덕분인가.

나만 플레이어들과 다른 퀘스트를 받게 됐었지.

"제로 산맥, 그리 높지 않더군."

포탈로 순간이동 해놓고는 허세 부리지 마라, 그랑펠.

제로 산맥이 얼마나 높은 줄 알고서는 하는 말이냐고!

왜, 위성사진에서도 저거 엄청 크게 나온다니까?

그랑펠의 말대로.

나는 포탈을 발현.

당장에라도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도달하는 게 아니라 뒷감당이었다.

그러다 진짜로 깨어나면 어쩔 건데?!

비바체....

그러니까 드래곤의 둥지 바로 밑에서 셰그윈과 소란을 벌인 덕분에.

나는 미약하게나마 체감했다는 말이다.

드래곤의 압도적인 기운을!

드래곤과 비견되는 유이한 존재, 엘프.

엘시도어에게선 느낄 수 없던 압박감이었다.

물론, 내가 엘시도어를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건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나로선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거지.'

방금 말했던 [첫 세계수의 축복], [천적관계],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발버둥 치면서 본의 아니게 거품이 잔뜩 끼어버린 나였다.

하지만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제 파악.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초월자]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95]

[능력치]

근력 : 130 / 민첩 : 131 / 마력 : 514 / 행운 : 12 / 심미 : 中 / 집념 : 1

[보유 포인트 : 0]

애초에 마탑도 이기지 못한 게 드래곤들이다.

탑주가 행동불능에 빠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겠지.

드래곤이 깨어나고, 인류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순간에는....

나랑 너만 긍지에 가라앉아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니까, 그랑펠?

"허나, 산은 올라야 산인 법. 절차를 지켜야겠지."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제로 산맥이 괜히 거대하고.

괜히 그 꼭대기에 드래곤이 있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산맥을 오르며, 드높은 정상에 도달할 때가 되면 알아서 드래곤과 맞설 수 있는 레벨을 갖추게 되는 구조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AAU 선생님들?

'그래서 설정해 둔 것일 테니까.'

십만(十萬) 동굴을.

제로 산맥에 존재하는 십만 개의 동굴.

AAU의 설정에 따르면 [던전], [미궁], [유적], [전장] 등등.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한다고 했겠다.'

제로 산맥이 현실에 나타난 지금.

십만 동굴은 십만 개의 [균열]로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하겠는데?'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는 게.

역시 괜히 아르카나의 창조자들이 아니다.

전부 계획이 있잖아, 계획이.

'계획 없이 좋은 거, 멋있는 거, 있어 보이는 거라면 다 때려 박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그래도 어쩌겠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보자.

'사실 좋아할 게 아니긴 하다.'

드래곤.

균열 십만 개를 클리어해야 범접할 수 있는 존재.

그렇게 환산하니까, 얼마나 무지막지한 상대인지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선 잘했다, 호열아.

"십만 개의 동굴인가. 내게 안배는 필요치 않거늘."

그래, 위축되는 것보단 긍지 넘치는 게 나은 법.

물론, 그 무거우신 긍지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크나큰 부작용이 있기는 하다만.

주제 파악만큼이나 전문분야라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스칼과는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스칼의 클래스는 무려 히든 클래스, 용기사.

무엇보다 스칼은 나를 악룡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악룡 사냥꾼 퀘스트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거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어쩌면 드래곤과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가능성이라도 파고들어야 한다.

사실 십만 동굴을 전부 클리어하는 것도 큰 가능성은 아니었으니까.

아쉬운 놈이 더 치열하게 발버둥 친다고 생각하자고.

물론.

"스칼, 그대는 자격부터 갖추는 게 우선이다."

스칼은 그랑펠에게 밉보인 상태였으니.

나로서는 우려스럽다.

그랑펠의 쓴소리에 스칼이 토라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격식과 긍지를."

그런 의미에서 진정 좀 하자, 그랑펠.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부귀영화에 덧없으시고, 또 청렴결백하신 너는 알 턱이 없겠지만.

자고로 심적 안정에는 무언가를 사는 게 제격이다.

'쇼핑이 최고란 거지.'

그나저나.

"찬물에도 우러난다라. 흥미롭군."

고작 신상 녹차에 너그러워지다니.

너도 참 쉬운 남자구나, 그랑펠.

.

.

.

슥슥─

아르카나 공식 랭킹 1위, 스칼.

스칼은 빗질을 멈추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흔드는 자신의 애마(愛馬).

알렉산더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알렉산더?"

무엇이 잘못됐을까?

이호열.

인류의 영웅.

플레이어들에게도 한없이 자비로운 존재.

그런데.

어째서.

나하곤 말조차 섞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스칼은 여러모로 억울했다.

"실패도 모자라서 굴욕이라니. 괴롭다, 알렉산더."

스칼은 대다수 플레이어들과 달랐다.

정확히는 그 시작점부터가.

스칼이 그동안 극도로 정체를 숨긴 이유?

그건 자신의 가문 때문이었으니까.

본명, 스카라 로스차일드.

스칼은 지구상 몇 안 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막대한 부와 권력.

모든 것을 쥐고 태어난 그에게 인생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런 스칼에게 아르카나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 다른 세상이라니.

현실과 다르게.

쟁취할 게 한가득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스칼의 아르카나 플레이 목적은 간단했다.

아르카나 대륙을 내 발아래에 두겠다.

그런 목표를 가진 스칼에게 용기사는 더없이 적합한 클래스였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생물, 드래곤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만큼.

확실한 정복의 상징도 없을 테니까.

대격변 이후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스칼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균열을 클리어하고, 성장해 왔다.

안내자 역할을 해준 클래스 퀘스트를 따라서.

그런데.

"...이게 뭐냐고 진짜."

스칼의 퀭한 눈이 퀘스트창을 향했다.

[클래스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전설의 존재.

드래곤과 마주하려는 자여.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격을 갖추어라.

처음 클래스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는.

드디어 목표가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싶었다.

그러나.

─금역에 잠든 악룡을 처치하라. (실패)

난데없이 실패란다.

실패,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스칼은 기절할 뻔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실패.

실패의 쓴맛이 이런 거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단 말인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스칼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갱신된 퀘스트 목표.

─악룡 사냥꾼과 조우하라. (진행 중)

실패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누군가가 자신의 퀘스트 목표.

악룡을 가로챘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누군가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이 하도 떠들썩했어야지.

이호열.

금역, 텟퍼른.

악룡, 깨워선 안 될 존재.

머릿속에서 맞춰져 갔던 퍼즐.

그쯤에서 스칼은 움직였다.

-"떨거지는 필요 없다."

-"이호열, 나는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대단하신 악룡 사냥꾼 씨."

하지만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대단하다고 칭찬까지 했는데."

악룡 사냥꾼, 호열은 자신에게 시간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애마에게 한탄하는 와중.

"?!"

스칼은 접한 것이었다.

호열이 드래곤이 잠든 제로 산맥.

최정상 언저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툭─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빗.

"서, 설마."

...이호열도 드래곤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은 건가?

악룡을 처치한 지금이라면.

드래곤과 마주할 격까지 갖췄을 터.

혹시, 내가 실패한 퀘스트가 이호열에게 옮겨간 거라면...?

"!"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

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호열의 모습.

스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안 돼! 내 드래곤!!"

◈ 201화. 다만 그 전에 (1)

드높은 제로 산맥.

그럼에도 산이기에 산답게 오르겠노라.

다짐한 내게 필요한 건 준비였다.

철저하게 해야지, 등산 준비.

"산이라, 그저 계단처럼 오르면 되는 것을."

이봐요, 그랑펠 씨.

참 나, 누가 보면 내가 잘못된 건 줄 알겠네.

누가 봐도 그쪽이 이상한 거라니까?

'내가 마탑 계단에서부터 알아봤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또각─

거리는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르냐고.

그리고 복장도 말이야.

기능성 등산복까진 바라지도 않아, 내가.

아무리 [온기]와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 뒷산도 아니고 제로 산맥에서까지 정장은 좀 아니지 않냐?

그런 의미에서 확인해 두자.

드워프들이 나를 위해 제련 중이라는 새로운 방어구 말이야.

까다로운 심미안이 퇴짜를 놓지 않을까, 걱정은 한시름 덜어놓은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이엘이 살폈다면 착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

귀철의 제련도 끝난 참이었으니까.

슬슬 방어구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지 않을까.

그나저나 귀철하니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귀철의 난해한 아이템 정보창.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그 이름이 물음표인 이유는.

주인인 내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덕분이겠지.

"작명인가."

...제발, 의미심장하게 읊조리지 말아 주라, 그랑펠.

귀철에다가는 또 어떤 이름을 붙일까, 심히 걱정된다는 말이다.

'제한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뭐, 짐작이 되고.'

귀하신 [에픽] 아이템보다도 귀한 [전설] 아이템이다.

나야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의 효과 덕분에.

전설급 아이템을 사용하기 위해선 친화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사용 제한을 짐작할 수 없겠지. 적혀있는 것처럼 알려지지 않았다고 여길 만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효과는....'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귀철의 말.

-애송이가 감히 이 몸을 가늠하려 들지 마라.

걔, 분명 셰그윈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그 힘을 가늠할 수 없기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겠구나.

뭐, 실제로도.

귀철의 성능은 나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셰그윈을 압도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그것도 검 대 검으로.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이긴 했다만.

귀철이 아니었다면, 나는 셰그윈에게 언제 숨통이 끊겼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 그 쾌속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기도 벅찼으니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나는 셰그윈에게 천적빨도 모자라서 템빨까지 끌고 온 다음에야 승리할 수 있었단 말이었다.

심지어 셰그윈은 검기조차 발산하지 못한 상태였고.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나의 나약함을.

그러나 한탄하지 않겠다.

제로 산맥이라는 판이 펼쳐진 지금.

레벨은 쟁취하는 것.

실제로 제로 산맥이 업데이트된 이후.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의 레벨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인방.

──────

스칼 : 525레벨

록스 : 524레벨

류오쥔춘 : 523레벨

──────

각각 1레벨의 격차라니.

그건 셋과는 큰 접점이 없는 나조차도.

약간은 흥미진진해질 정도의 라이벌 구도였다.

하지만 조금은 의외인걸.

-근데.... 스칼은 이제 뭐함?

-ㅇㅇ?

-아니;; 다른 플레이어들은 제로 산맥에서 하루종일 사냥만 하는데 스칼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임? 자기 혼자만 제자리걸음 중이지 않음??

-ㄹㅇ 이러다가 록스한테 역전되는 거 아님?

-왜 록스임? 류오쥔춘한테 따일 수도 있지

-ㅋㅋ말이 되는 소리를 하셈

미국과 중국.

샤이닝과 천하통일.

록스와 류오쥔춘이 끼어있는 탓일까.

커뮤티니, 곳곳에선 키보드 배틀이 끊이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랑 별 관련도 없는 이야기.

궁금해도 쏟아지는 업무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겠지.

그러나.

'확실히 스칼의 활동이 뜸해졌지?'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퀘스트를 위해서도.

또 아주 작은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스칼과는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계획했던 바였다.

이 또한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무관하단 말씀.

나는 이내 읊조렸다.

"숫자에 연연하는 것은 좋지 않은 법이거늘."

하여튼 그놈의 고집.

귀철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나 했더니만.

다 너한테 배운 거였구나, 그랑펠.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다.

'이제부턴 레벨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레벨?

레벨 업마다 주어지는 포인트는 하나.

1레벨은 1스탯 포인트의 가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것이 아르카나에서 스탯이 달린 아이템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겪어보니까 알게 됐다.

체력 단련 보상이라든가. 비약초의 효과라든가. 스탯은 다른 방식으로도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걸.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제부터는 레벨보다 근본적인 능력을, 그릇을 성장시켜야 하니까. 사실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꼭 깨닫는 게 아니더라도, 악마족 몬스터만 봐도 알 수 있었거든.

"격은 숫자 따위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레벨의 일반몹과 보스몹이 다르듯.

일반적인 악마와 마왕은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으니.

그런 의미에선 우려가 될 수밖에 없다.

거악(巨惡).

그 녀석들은 대체 어떤 강함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상당히 찝찝해지는군.

'확실히 마왕들과는 다르다.'

데카라비아부터 시작해서 시무아르드 가문을 좀먹었던 율라까지. 마왕들은 제각각 움직임을 보였다.

그랑펠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지나치게 나댔다고나 할까?

'다시 태어난 탐욕을 제외하면....'

그에 반에 거악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상위 마왕, 가미긴이 지옥에 처박혔든 말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

그게 내가 언제까지고.

신세를 한탄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만약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라면....

나에게는.

아니,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에 시간은 많지 않을 테니까.

뭐, 그런 면에선 레벨 시스템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또 없겠군.

보다시피 플레이어들에겐 경쟁이라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레이먼 션."

그게 레이먼 션.

그쪽이 플레이어들에게 아르카나 시스템을 덧입힌 이유일까.

지금의 나, 이호열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게 안배 따윈 필요 없다."

말했던 것처럼 그쪽은 그랑펠한테 제대로 찍혔다니까.

"감히 나를 숫자로 가늠하려 들지 마라."

물론, 그건 그랑펠의 사정이고.

나는 주어진 시스템을 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선 우선, 1레벨이라도 올려보자.

[집념 : 정신력을 능력치로 환산한다. 집념이 상승할 때마다 환산되는 능력치가 추가로 상승.]

집념의 효율을 계산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내 팔자야.'

그런 의미에서는 참 인생사 새옹지마다.

직장인 시절.

부장님한테 깨져가면서도.

끌려가지 않았던 주말 등산을 다 가보게 생겼구나, 호열아....

*

아이언 캐슬 호.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은 무사히 안토니움에 정착했다.

덕분에 북적거리던 아이언 캐슬 호도 잠잠해졌다.

흐르는 정적─

드워프가 원래부터 과묵한 종족이라서?

그럴 리가 있나.

드워프가 금속만큼이나 달고 사는 것이 술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호탕한 웃음소리고. 정리하자면 지금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벌컥!

"...뭔가 자네들?"

귀철과의 자존심 한판 대결.

그 승부를 마친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은 며칠 동안 앓아누웠었다.

비록 짧더라도 굵은 강골을 자랑하는 게 드워프들.

그것도 모자라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한 제련이 아니던가?

월스와일, 자신도 얼마나 제련에 심혈을 기울였기에 이런 피로가 쏟아지는 것인가. 새삼스럽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아니, 왜 다들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 겐가?"

체인워커를 비롯한 모든 드워프가 아이언 캐슬 호의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 반응할 힘이 남아있던 젊은 드워프 하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월스와일 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렇다네. 그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네들?"

"그게....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하얗게 불태워? 뭘?"

"휴식하시는 동안 제련을 끝냈거든요."

그렇다.

탈진한 월스와일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드워프들은 호열의 방어 장비 제작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들기고 보석을 세공하고 심지어는 바느질까지 해가면서.

"뭐?"

그러니까 월스와일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제련한 귀철이야, 그 재료가 워낙 희귀하고 또 지랄.... 아니, 유별났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방어구엔 귀철에 비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일 요소가 없지 않았던가?

물론, 재료의 질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마력의 백금.

고순도 마력석.

남색 나비 실타래....

드래곤에 맞서는 호열을 위한 장비였다.

과거, 아르카나 대륙이 온전하던 시절. 저 재료 중 하나라도 대륙에 풀리게 된다면 그 가치는 웬만한 영지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그 말인즉.

"자네들, 대체 얼마나 무리를 한 게야?"

그저 탈진할 정도로 전력을 기울였다는 소리겠지.

월스와일은 당장 그 결과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체인워커!"

"...음? 깨어난 건가?"

"어디 있나? 자네들이 제련했다는 장비!"

"아, 그거라면 이미 하이엘께서 호열 경에게 전달하러 간 참이네."

"뭣? 벌써?!"

흔들흔들!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다니.

월스와일은 안타까운 마음을 체인워커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으로 표출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체인워커가 웃었다.

"으하하. 걱정할 것 없네."

"...?"

"자네가 제련한 에고 소드에 손색없는 방어구를 제련해 냈다고. 내가 장담하겠네. 우리가 자네의 손재주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체인워커의 눈매가 결연히 반짝였다.

"정말 최선을 다했으니 말일세. 믿어주게."

"...."

"게다가 우리도 호열 경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

"...!"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칭호가 괜히 뒤따른 게 아니다.

귀철과 수십 일 동안 한 치의 양보 없는 신경전을 벌인 것도 괜한 자존심을 부린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월스와일이 고집을 꺾었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체인워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자네에게도 한소릴 들으면 어쩌나 싶었네."

"자네에게도? 왜, 또 누가 뭐라고 하던가?"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던 모양이군."

"?"

체인워커가 속삭였다.

"귀철을 보는 줄 알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정령님들을 말하는 것이네."

체인워커는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귓가에 맴도는 하이엘과 디엔드.

귀철을 뺨치는 두 정령의 까다로운 요구사항들을.

-"한없이 깊은 어둠을 표현하기엔 부족하군."

-"조금 더 화려한 세공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한없이 화려할 필요가 있겠군."

-"저 또한 같은 의견입니다."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증명하듯 하얗게 질린 체인워커의 얼굴.

그 반응에 월스와일의 가슴 속에서.

간신히 잠재웠던 궁금증이 다시금 샘솟았다.

투박한 손아귀가 또 한 번 체인워커의 멱살을 붙잡았다.

흔들흔들!

"대체 뭘 어떻게 만든 게야, 자네들!"

"부탁인데, 그만 흔들면 안 되겠나?"

"설명하게! 당장 말해주게!"

"...진심으로 멀미가. 우욱!"

과연, 드워프는 흥이 넘치는 종족이다.

.

.

.

십만 동굴.

십만 개나 있다고 제로 산맥에 널려있을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면적은 호주에 맞먹을 정도. 그 높이는 성층권을 가뿐하게 돌파할 정도의 웅장함이시다.

'위치를 알고 있지 않는다면 찾기 어렵단 거지.'

그 증거로 플레이어들은 십만 동굴 중에서 단 하나의 동굴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AAU에게서 나와 똑같은 정보를 전달받았어도 말이지.

물론, 내게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한테는 「마법」이 있었으니까.

산맥을 뒤덮다시피 발현해 뒀던 라이트.

그 마력 덩어리를 탐색.

'간섭 과정에서 시야 공유를 더하면....'

이렇게 특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굴의 위치를.

포탈의 좌표는 발견한 동굴 앞.

고오오─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 진입했다.

이게 말은 굉장히 쉬워 보였지만, 마르셀로가 들어도 경악할 정도의 마법 발현일 거다.

애초에 시야 공유 간섭 과정 자체가 [마안(魔眼)의 망원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으니까.

'마법도 모자라서 아이템의 효과까지 어느 정도 따라서 발현할 수 있다니.'

새삼스럽게 서클이 대단하긴 하다.

서클을 형성함으로써.

비로소 그랑펠의 재능을 제대로 활용하는 기분이군.

그랑펠 성격에 어째 우쭐할 법도 한데.

이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구만.

동굴 앞에 서자 떠오른 메시지.

[던전 : 용암의 사이렌]

[적정 레벨 : Lv.800]

[붕괴 진행도 : 0%]

예상대로 동굴은 균열 취급이었다.

다른 점은 붕괴 진행도가 0퍼센트에 멈춰있다는 것.

제로 산맥이 이미 붕괴한 상태나 다름없는 덕분이겠지.

'천적관계 없이 800레벨 던전인가.'

그냥 몬스터라면 우려할 필요가 없었거늘.

나는 런던에서 던전의 위험성을 경험했었다.

던전의 변수를 생각하면 혼자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나 누가 혼자라는 거냐.

나에게는 누구보다 듬직한 동료.

아니, 분신이 셋이나 있는데.

하이엘, 디엔드, 귀철까지.

다들 어디에 내놔도 약간 낯 뜨거워진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곧장 동굴에 진입했다.

그러곤 우선 하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

그런데, 품에 안고 있는 그거.

혹시 내 새로운 방어구니, 하이엘?

아니, 근데 잠깐만.

무슨 방어구가 그렇게 휘황찬란한 건데?!

◈ 202화. 다만 그 전에 (2)

그랑펠의 심미안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나, 이호열의 수치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진짜로 뭐가 이렇게 화려해?!

외관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이걸 재킷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어디 중세시대 귀족.... 아니, 귀족도 웬만한 귀족은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만듦새구나.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의 원단.

그 오묘한 빛깔을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인가."

시각적인 표현 한번 죽여주는구나.

두 번 표현하다가는 나까지 죽이겠어, 아주.

'어쨌든.'

그 원단 위를 수놓은 건.

딱 봐도 무진장 비싸 보이는 은빛의 자수였다.

목 부분의 카라부터 라펠까지.

이어진 자수의 문양이 낯뜨거울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으니.

양쪽 어깨에 견장들은 또 뭐냐.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게 흔들릴 것 같은 모양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들여다보는데.... 이거 심지어 보통 은도 아닌 것 같은데?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

아르카나 대륙,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덕분에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의 백금]이다.'

마력의 백금.

광맥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물량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귀하신 몸.

당연하게도 그 효과 또한 일반적인 광물과 비교할 게 아니거늘.

그런 마력의 백금을 고작 재킷 하나에 얼마나 때려 박은 거야, 이게? 양쪽 어깨의 견장만 하더라도 그 무게가 몇십 돈은 족히 나갈 것 같은데.

베스트에, 벨트에, 바지에 소모된 무게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백금괴 단위로 마력의 백금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양심이 있다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군."

의복을 대할 때만큼은 한없이 진심.

까다로운 그랑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월스와일을 비롯해서 다들 엄청 고생했겠구나, 다들.

하이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군께서 흡족해하시니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 하이엘.

네가 여러모로 애를 쓴 것 때문에.

아니, 덕분에.

이런 방어구가 탄생한 거겠지.

어버이날 자식이 만든 카네이션을 받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건가.

그러니까 또 걸쳐볼 수밖에 없겠구나.

'다만 그 전에.'

장비의 스펙도 확인해 보자.

혹시라도 착용 제한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떠오르는 정보창을 하나씩 살펴나갔다.

그런데, 잠깐만.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트라우저]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셔츠]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베스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벨트]

[여명을 기다리는 자의 재킷]

세트 아이템이란 사실에 놀란 게 아니었다.

'여명을 기다리는 자아아아?!'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

그걸 보고 동트기 직전의 하늘빛이라고.

분명, 그랑펠은 그렇게 지껄였었지.

'드워프들이 그런 감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

이건 그랑펠을 똑 빼닮은 감성의 소유자만 할 수 있는 작명.

당연하게도 떠오르는 건 한 사람.

아니, 한 정령뿐이었다.

디엔드, 너로구나.

나는 흘러나오려는 탄식을 꾹 틀어막았다.

'...그래,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참아보자.

그저.

나만 조금 민망할 뿐이다, 호열아.

그런 의미에서는 성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착용하는 거라고, 정신 승리가 필요하다.

나는 차례대로 정보창을 살폈다.

"!"

그리고 흠칫했다.

[등급 : 에픽]

다섯 개의 장비, 모두가 에픽 등급이었다.

내가 [전설] 등급의 귀철을 습득했다고 한들.

에픽 아이템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마왕의 전리품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는 소리...!

"과연."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아니, 투자된 재료의 가치와 그걸 제련한 드워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에픽 등급은 적절한 판정일지도 모른다.

[제한 : Lv.500 / 높은 수준의 명성]

일단, 다행이다.

레벨 제한, 500레벨.

[높은 수준의 명성]이라는 추가 제한이 걸려있기는 했다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명성 정도야, 칠죄종 탐욕을 쓰러트렸을 때부터 충족시켰으니까.

내가 이렇게 성장했다.

속으로 우쭐거리기도 잠깐.

정보창과 별개로.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장인의 손재주로 착용 제한이 대폭 완화되었습니다.]

[적용된 장인의 손재주 효과 : - Lv.300]

...아니, 성장했다는 말은 취소.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장인의 손재주 효과가 아니었다면 레벨 제한이 무려 800레벨. 드워프가 아니었다면 바짓가랑이에 다리 한 짝 넣어볼 수도 없었을 뻔했잖아, 이거?

[효과 : 세트 아이템 착용 시, 발현]

[설명 :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를 위해 제작된 장비. 명품, 수작, 대작.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고귀함을 표현할 수 없기에 그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았다.]

설명에도 나와 있듯.

오직 여명을 기다리는 자.

그러니까 나만을 위해서 만든 장비라고 하니 고맙기는 한데....

어째 효과가 약간 특이하다.

'에픽 아이템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마왕의 전리품도 그렇고.

에픽 등급부터는 그 효과가 확실히 고유했다.

마안의 망원경이나 지휘봉만 하더라도 플레이어는 물론.

아르나카인들조차 의문스러워 할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효과는 성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아르카나 시스템에서 장비 아이템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따로 표시되지 않는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계산하고 수치화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착용 제한을 고려해도 특출난 수준이라면, 설명에서든 효과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어가 그 성능을 알아볼 수 있게 해줬으니까.

'하여튼 등급 값을 한다니까?'

물론, 에픽템이라 그런가.

설명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심상치 않았지만.

걱정할 건 아니다.

착용해 보면 알게 되지 않겠어?

'마침 테스트 장소도 있고.'

본래 장비의 착용 제한은 800레벨로, 현재 내가 진입한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의 적정 레벨과 같았다. 이보다 적절한 상황도 없다는 말씀.

둥실─

마력으로 허공에 옷가지들을 띄우고 환복한다.

뜬금없이 동굴 입구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다만, 절도와 자신감 넘치는 동작만큼은 어디 명품관 탈의실에서 갈아입는 것처럼 우아했으니.

남은 건 이제 재킷뿐이다.

옷가지 중에서도 유달리 화려한 재킷.

정말로 아뿔싸, 소리가 절로 나온다.

'뭔 파란 보석까지 달렸어. 진짜.'

훈장이야, 뭐야.

그렇게 재킷에 손을 뻗는데.

잠깐만,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하나같이 전부 똑같은 정보창을 띄웠으니까. 그중에서도 유달리 외면하고 싶었던 재킷의 정보 확인을 마지막까지 미룬 게 화근이었다.

[제한 : Lv.700]

장인의 손재주 효과를 적용받고도 700레벨.

그렇다는 건 원래는 일천(一千) 레벨짜리 아이템이라는 거잖아?

어째 내가 심각하게 휘황찬란하다 싶었다...!

나는 슬쩍 하이엘을 바라봤다.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럽구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하다.

앞으로 100레벨이나 남았다니.

700레벨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세트 효과도 확인할 수 없다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역시나 겉으로 드러나는 법은 없었으니.

촤락─

나는 뻔뻔하게도 재킷을 집었다.

그러고는 어깨 위에 걸쳤다.

그렇다.

이것이 현시점에서의 나의 최선이다.

왜냐고?

이놈의 레벨 때문에.

재킷에 팔 한 짝 넣어볼 수조차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인가.'

마력으로 어깨에 재킷을 자석처럼 붙여놓을 수 있다는 게.

그런 나의 모습에 하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하이엘, 그런 착용법은 차마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나의 몰골을 한번 살펴본다.

다른 플레이어의 장비들도 만만치 않게 판타지적이니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더라도. 어깨에 재킷을 걸치는 것만큼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구나....

'...받아들일 수 없다면.'

좋아.

빠르게 700레벨에 도달.

제한을 충족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레벨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레벨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심오한 모순 속에서 나는 걸음을 옮겼다.

또각─

아차.

말이 나온 김에.

이놈의 또각 구두도 어떻게 바꿔 신든가 해야지....

*

제로 산맥.

광활한 신대륙에서는 사냥이 한창이었다.

균열에서도 사냥은 계속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뭘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입장할 수 있는 균열과는 달랐다.

지역으로 추가된 제로 산맥.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은 현대의 화기에 무방비했으니까.

탕─!!

아르카나 대륙에선 들릴 수 없는 총성.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은 외쳤다.

"전군 전진!"

이유 없이 항공모함 편대를 이끌고 온 게 아니다.

제로 산맥이 균열이 아닌 지역으로 추가된 시점.

류오쥔춘은 모든 계획을 끝마쳤다.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뒤.

빛이 바랬던 조국의 군사력을 활용하겠노라고.

[군주]의 클래스 스킬 발동.

류오쥔춘의 눈이 빠르게 전황을 살핀다.

계속되는 사냥으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이 그들의 후방으로 병력을 투입했다.

탕!

투두두!

탕탕!

대격변 초창기.

세계는 현실을 범람한 몬스터에게 대응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했다.

과연, 인류를 지탱했던 [과학]의 힘은 위대했다.

몬스터라고 한들.

살상력을 극대화한 대 몬스터용 신무기를 견뎌내기는 어려웠던 것.

그러나 균열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뿐.

플레이어 중 그런 신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이 극소수에 불과할뿐더러.

신무기로 몬스터를 사냥해 봤자 막대한 경험치 손해는 물론, 스킬 숙련도조차 제대로 올릴 수가 없었으니까.

천하통일의 간부, 유지오.

"영락없이 고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가 감격한 듯 말을 이었다.

"역시, 류 군주님이십니다. 그런 애물단지들을 이런 방식으로 활용하실 줄은 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탄약, 수백 발을 맞고도.

최후에 최후까지 발악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물량에 장사는 없다.

쿠궁.

쿵.

쿠구궁.

곳곳에서 쓰러지는 산맥의 맹수들.

그러자 류오쥔춘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투입된 군병력은 일반인이 아닌 전원 플레이어였다.

천하통일에 입문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조국의 저레벨 플레이어들.

류오쥔춘에게 그들을 육성할 생각 따윈 없었다.

애초에 저들은 자신의 검과 방패조차 되지 못한 존재.

그저 디디고 나아갈 발판에 불과했으니까.

류오쥔춘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 오직 나만이 가능하다.'

플레이어에게 의존하던 다른 [군주]들은 모조리 도태됐다.

살아남은 건 플레이어들 위에서 군림하는 오직 자신뿐.

'제로 산맥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시간문제다.'

524레벨.

비로소 같은 눈높이.

록스, 나는 너를 뛰어넘겠다.

스칼,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류오쥔춘의 레벨 업 소식은 실시간으로 록스에게도 전해졌다.

"아니. 이러다가 따라잡히는 거 아니야, 록스?"

드미트리에 호들갑에 록스는 웃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웃어?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 진심?"

"뭐, 총까지 가져와서 쏴대는데 어쩌겠어?"

말과는 반대로 록스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목격하고도 깨닫지 못했나, 류오쥔춘?'

호열과 검성의 결투.

결투에서 록스는 깨달았다.

중요한 건 레벨이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호열이 플레이어에게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마탑을 비롯한.

아르카나 대륙인들과 교류할 기회를 주었는지도.

'레벨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걸.'

록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류오쥔춘의 방향성은 잘못됐다고.

그렇기에 조급한 마음 따윈 들지 않았다.

물론,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잠깐만, 록스?"

나무 위에서 주변을 정찰하던 카밀라가 흠칫했다.

"이거,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그건 카밀라에게 몇 안 되는 좋지 않은 기억을 심어준 인물이었다.

흔치 않은 카밀라의 반응에 록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류오쥔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라이벌.

"스칼이군."

정답이라는 듯.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산맥에 울렸다.

이내, 산맥 아래에서 스칼이.

황금빛 갈기를 흩날리는 그의 알렉산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칼의 등장을 마지막으로.

제로 산맥에 집결한 아르카나 공식 랭킹 1, 2, 3위.

카밀라가 찝찝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쟤 표정이 왜 저래? 화난 것 같은데, 록스?"

"!!"

무엇이 스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인가?

고조되는 긴장감 속에서.

점차 스칼이 가까워졌다.

.

.

.

스칼은 입안에서 되뇌었다.

"이호열."

...아니지. 만남에 앞서서 격식과 예절부터.

"이보시게, 호열 경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당사자가 듣는다면 기겁할 말을 잘도.

그런 스칼에게 록스는 물론.

샤이닝 길드 전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으니까.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은 멈추지 않았다.

쌔앵!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스칼.

정적 속에서─

"...엥?"

드미트리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203화. 너도 긍지냐?

거대 연합.

물과 기름은 나름대로 섞여가고 있었다.

[명검을 문 늑대개].

65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답게 그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스슥─

늑대개가 숲 사이를 누비자.

우지끈─

주변의 고목들이 순식간에 쓰러져 나갔다.

둥실─

허공에 뜬 드론.

전황을 지켜보던 남철민이 말했다.

"영리하네. 전장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있는데?"

괜히 혼자만 검을 입에 문 게 아니라는 건가.

늑대개는 야전사령관이라도 된 것처럼.

전장을 자신과 동족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히사기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늑대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개답지 않게 거치네요."

바뀐 지형 탓에 행동이 제약된 상황.

하지만 말했다시피.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물과 기름.

가온과 이나즈마는 서서히 융화되어 갔다.

남태민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착각하고 있구나. 똥개들."

"...?"

"하긴 늑대개가, 진짜 야성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야만전사.

바바리안, 남태민은 히사기에게 선언했다.

"저 검을 물고 있는 놈은 내가 맡는다. 원래 짐승이란 게 우두머리만 조지면 사기가 꺾이는 법이거든. 그때부터 한 마리씩, 알아들었지?"

거목들이 쓰러지며 만들어진 지형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민첩하다고 하더라도 두 발로 걷는 이상.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러나 남태민에겐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광폭화].

고유 스킬을 발동함과 동시에.

마치 네 발로 뛰는 것처럼.

몸을 숙인 채 뛰쳐나가는 남태민.

파바박!

과연, 야성을 그대로 간직한 짐승과도 가까운 움직임.

그 박력에 늑대개들조차 놀라서 깨갱거릴 정도였다.

히사기가 중얼거렸다.

"정말, 개 같으시군요."

욕도, 중의적 표현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감상.

남태민은 정말 사냥감을 포착한 사냥개라도 된 것처럼.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갔으니까.

히사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창사.

슈슈슉!

창 끝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리한 마력 줄기.

히사기의 창이 허공을 가르자 길목을 가로막았던 거목들이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히사기의 지휘에 따라 거대 연합의 플레이어들이 늑대개 무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태민과 히사기.

그리고 길드원.

각자는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아주 척척 맞으셔들."

뭐, 라이벌?

호열 씨만 아니었어도 상종도 안 해?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구라를 쳐도 그럴싸하게 치던가."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온과 이나즈마.

길드원 전원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악연으로 대립하던 시절.

서로서로 약점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던 경험 때문이었지만. 제삼자, 그것도 유럽인의 시선으로 한일 감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버서커 길드원들이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가끔은 소외감 든다니까, 언니?"

"미친, 소외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물론, 언니는 그런 거 못 느끼겠지만."

"흥."

광전사는 고독할수록 강해지는 클래스다.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전투가 계속될수록 전투력이 상승하는 클래스였으니까. 어차피 그런 광전사의 호흡에 페이스를 맞출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레오니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외로우면 너도 두 개씩 들던가."

어쩌면 그래서 쌍검에 이끌렸던 건지도 모르지.

이내, 제각각 날뛰기 시작하는 거대 연합.

그 광경에 흠칫한 건 다름 아닌 세컨드 썬이었다.

간부, 재커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슈, 슈레이그. 우리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슈레이그는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세컨드 썬 또한 정식으로 성전에 참전했던바.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연합과 호흡을 맞춰볼 생각에 그들의 뒤를 쫓았거늘.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재커리가 다시금 말을 잇는다.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저걸?"

각자의 개성이 강해도 너무 강하지 않은가!

세컨드 썬.

자신들부터가 최상위권 길드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전장에 체계적인 약속이나 호흡 따윈 없다는 것을.

하지만 슈레이그에게는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저게 최선일지도."

가온과 이나즈마, 버서커까지.

셋은 상위 길드 중에서도 특색이 뚜렷한 길드였다.

특히나 유럽의 버서커를 제외하면.

가온과 이나즈마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압도적인 위치에 속한 두 길드가 아니던가.

자신의 방식으로 랭커를 차지한 만큼.

고유의 스타일은 쉽게 변할 수 없겠지.

"무규칙 속의 규칙이라는 건가."

모순과도 같은 말.

그게 정말 실현이 가능한 것인가.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

그러나 슈레이그는 웃어넘겼다.

"뭐, 긍지라면 그걸 가능케 할지도 모르지."

과연, 그런 슈레이그의 생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

슈레이그가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에게 합류 의사를 전했다.

이야기는 속전속결이었다.

"긍지?"

"물론, 긍지입니다."

"호흡을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레오니, 한 사람만 빼고.

"???"

뭔데, 저것들.

자기들만 아는 암호야, 뭔데.

레오니는 어이를 상실할 지경이었건만.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다그닥!

알렉산더의 말발굽 소리였다.

히히힝!

샤이닝을 포함해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외면하듯.

스쳐 지나온 스칼이.

마침내 거대 연합 앞에서 멈춰 선 것이었다.

레오니는 순간 당황했다.

'얜 또 뭐냐.'

그렇지 않아도 긍지문답에 정신이 아득해졌던 참.

그런데.

난데없이 스칼이라니.

'실물은 처음인데.'

레오니와 버서커는 최근 들어 크게 성장한 플레이어, 길드였다.

두문불출하는 랭킹 1위, 스칼과는 접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그러나 나머지 세 사람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괴물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한 건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스칼이 최강자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히든 클래스빨이든, 뭐든, 어떻게든.'

그러나 대격변 이후.

호열의 등장 이전까지.

최강에서 내려오지 않는 스칼을 보고 남태민을 비롯한 랭커들의 생각은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 덕분이었다.

'괴물이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겠죠.'

목숨을 걸고 진입해야 하는 균열이다.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길드원들과 함께 진입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균열이란 말이다. 하지만 스칼에겐 몸을 담은 길드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스칼에게 동료라 부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느냐고 묻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스칼은 모습 자체를 드러내는 일이 적었으니까.

그런데.

"크흠."

그 스칼이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서서는.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 목적이 마냥 호의적이라는 법은 없는 법.

모두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채.

스칼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스칼이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체, 긍지가 무엇입니까?"

입이 열리자 탁─ 하고.

풀려버리는 긴장의 끈.

레오니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진짜, 진심으로, 너마저도 긍지라고?

*

"긍지의 행보에 방해가 되는군."

...오해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디엔드가 뱉은 헛소리란 말이다.

디엔드가 무어라 말할 때마다 저걸 그냥 아르카나 대륙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뭐, 백번 양보해서 틀린 말까지는 아니네.

실제로 행보에 방해되긴 했으니까.

'열기가 장난이 아니야.'

[용암의 사이렌]이라는 던전명에 걸맞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새빨간 용암의 바다였으니까. 근데, 그게 대체 긍지랑 무슨 상관이냐고!

'됐다. 말하면 나만 피곤해진다.'

급하게 디엔드를 외면한 나는 용암의 바다를 둘러봤다.

과연, 보통 동굴이 아니라는 비로소 실감이 난다.

용암의 호수도 아니고.

바다라고 비유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정말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과분한 것을 품고 있군."

...그나마 주어라도 생략해 줘서 고맙다, 그랑펠.

하다 하다 산맥에게 말을 거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진 않겠구나.

어쨌든.

시기가 적절하게 새로운 장비를 갖춰 입게 돼서 다행이다.

마법부여로 화염 속성 친화력을 떡칠하지 않아도 용암의 열기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에픽 등급의 위용이라는 거겠지.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기본적인 방어력과 속성 친화력은 일정 수준 이상 겸비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어째 길이 보이지 않는데.

다른 장소도 아니고 던전에선 당황할 일도 아니다.

다른 던전이 그랬던 것처럼.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겠지.

'괜히 던전 공략에 탐험가가 필수인 게 아니네.'

내 눈으로 벽면이라든가, 발밑이라든가, 둘러본다고 한들 뭐가 들어올 리가 없겠고.... 결국, 내 방식대로 용암의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는 소리.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건가.

"제 어둠은 용암의 강렬한 열기조차도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주군."

디엔드가 먼저 입을 열고.

"불꽃을 먹고 자라는 식물에 관해서는 저보다도 주군께서 더욱 잘 알고 계시겠지요? 혹시라도 제 축복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에 질 새라 하이엘이 고아하게 말을 잇는다.

고유 정령인 하이엘.

그리고 상위 정령조차 긴장하게 하는 디엔드다.

이 정도의 용암쯤이야, 식은 죽으로 만들 수 있겠지.

든든하구나.

든든해.

근데, 든든한 걸 떠나서 얘들아....

너희가 양쪽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나, 조금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말끝마다 주군, 주군...!'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면 어떡하니, 진짜.

'내가 이래서 둘 다 소환하는 걸 꺼린 건데.'

그럼에도 하이엘과 디엔드.

두 정령을 소환한 이유는 간단했다.

왜긴 왜야, 정령마법에 조금 더 친숙해지기 위해서지.

[초월자 : 그대의 초월적인 경지는 초월자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 현재 도달한 성취 : 서클 (모든 마법 발현력 1,000% 상승) / 미완성 쾌검술 / 없음 / 없음....]

정령마법 또한 마법의 한 갈래.

서클로 상승한 발현력을 제대로 써먹기 위함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만큼이나 학구열이 강한 누군가는 묻겠지.

정령의 {자연} 능력.

그리고 『마법』은 다른 개념이 아니었느냐고.

예리한 궁금증이다.

그랑펠이 칭찬과 함께 녹차 티백을 부상으로 내어줘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질문.

그렇다, 정령마법은 사실상 정령의 {자연} 능력을 보조하는 마법에 불과했으니까.

'페이얀 선임의 마법도 그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기이』}가 아니고서야 극복할 수 없는 마법의 한계였으니까.

하지만 나와 그랑펠은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야만 한다.

깨닫게 됐으니까.

어쩌면 기이야말로.

거품을 완전히 걷어내더라도.

내가 다른 이들보다 앞서는 유일한 분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 기이에 소홀히 할 것 같냐.'

무엇보다 상위 마왕, 가미긴에게도 먹혀들었던 기이다.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여러 개념의 기이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

"하이엘, 디엔드."

"하이엘, 듣고 있습니다."

"존명, 나의 한없이 깊은 어둠이시여."

...무슨 대답이 이렇게 길어.

어째 대답 때문에 벌써 힘을 빼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만.

용암 따위에 아까운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둘 다.

"힘을 비축해 두거라."

"?"

"용암 따위에 그대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플레이어나 아르카나인은 몰라도.

이래 봬도 기이의 선구자인 내게 용암 따위야.

설령 바다처럼 넘실거린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마침 새 장비의 성능을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고.

"...!!"

아니, 그렇다고 감격한 표정을 지을 것까진 없거든?

양쪽에서 쏟아지는 부담스런 눈빛 속에서.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

흩날리는 재킷.

마력에 감응해 일렁이는 백금의 자수들.

그런 내가 발현한 것은 [『기이, 절대영도』].

효과는 굉장했다.

부글거리는 형태와 빛을 유지한 채.

급속도로 얼어붙어 버린 용암.

절대영도가 만들어 낸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심미 : 上]

아무래도 심미가 한 단계 상승한 것 같다고.

그러나 기쁨에 솔직하지 못한 이놈의 주둥이.

나는 언제나처럼 지껄이고야 말았다.

"과한 열기는 사양하지. 찻물을 데울 필요는 없으니."

이런 상황에 찬물에도 잘 우러나는.

신상 녹차를 구매했다고 자랑하지 마라, 그랑펠.

됐다, 애써 걸음을 옮기는데....

"?"

문득,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잠깐, 추가 효과 개방이다!

◈ 204화. 이것이 나의 길이다

어쩐지.

절대영도에 얼어붙은 용암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싶었다.

이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바다처럼 물결치던 붉은 용암이 색을 유지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풍경.

그러니까 그랑펠식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루비의 바다와 같았으니.

상태창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촉이 왔다는 거지.

또각─

빙판 위를 걷는 거나 마찬가지.

더욱더 또렷한 구두 소리와 함께.

나는 얼어붙은 용암 위를 건넜다.

그나저나 간이 커도 상당히 크구나, 그랑펠.

'무섭지도 않냐.'

절대영도가 기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절대 녹아내릴 일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위를 걷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

마탑 계단과는 또 다른 공포감이다, 이거.

'우선 뭐가 보일 때까진 걸어야 해.'

순간이동, 포탈을 발현하기 위해선 목적지의 좌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암의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은 포탈을 발현할 수 없다는 뜻.

계속 아래를 내려다봐서 더 무서운 건가.

일단, 시선부터 옮겨보자.

마침 적절하게 떠오른 메시지가 있었다.

[심미 : 上]

상태창을 열어 확인해 본다.

확실하게 심미가 상승해 있었다.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여명 세트를 입었는데.

재킷, 하나 정도는 입지 않고 걸쳤더라고 하더라도.

심미가 상승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겠지.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그런데, 上을 찍었다고 추가 효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엇보다 나는 심미를 발동하지 않았다.

효과가 저절로 발동된 것.

'설마, 패시브 효과라도 추가된 건가?'

그래서 그 효과란 게 뭔데?

시뻘건 용암에 대한 공포감도 잊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데.... 어째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뭐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다시금 되새겨 보는 심미의 효과.

마법에 있어서 심미는 복사, 붙여넣기 신공과도 같았다.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복잡한 간섭 과정을.

극소량의 마력으로 대체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최근 사용 빈도가 뜸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지.'

과거, 마력에 허덕대던 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단순히 스탯만 놓고 따지자면 아직도 마르셀로는 물론.

대부분의 선임 마법사들보다도 마력량이 뒤처질 테지만.

'비약초도 모자라서 영약으로 기름칠.'

결정적으로.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무지막지한 버프가 상시 발동 중인 내가 아니던가.

덕분에 서클의 경지에 올라, 고위 마법을 발현하면서도 마력에 허덕대지 않을 수 있었단 거지.

'굳이 심미까지 발동할 필요가 없었어.'

마력에 쩔쩔맬 시기는 지났으니까.

그래서 추가 효과 개방에 조금 기대했건만.

어째....

'영 갈피가 안 잡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령 내 눈이 놓쳤다고 한들.

양쪽 어깨에 눈을 대신할 든든한 분신들이 있었으니까.

"주군, 길이 보입니다."

...길이 보여?

긍지의 길.

이딴 소리 하면 진짜 소환 해제해 버린다, 디엔드. 너.

나는 궁시렁을 삼키고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정말 길이 보였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형태로.

"찰나의 시간에 이리도 고아한 길을 발현하시다니. 주군에 비하면 저, 하이엘의 심미는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뭔데, 저 화려한 대로(大路)는?!

솟구쳐 오른 용암의 형태가 마치 조각과도 같았다.

비유하자면 개선문 같달까?

그래, 조각상처럼 복잡한 마법이 발현되는 것.

그것도 심미의 특징 중 하나였지.

하지만 문제는 그 스케일이다.

'크다.'

역시나 말도 안 되게 웅장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에 [심미]의 뛰어난 마력 효율을 고려하더라도.

마력이 왕창 빠져나가진 않았을까.

의심해 볼 정도로.

그런데.

'...추가 마력 소모가 없다고?'

그대로였다.

기이, 절대영도를 발현할 때 소모된 마력 말고 추가로 소모된 마력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디엔드의 말과는 다르게.

"이것이야말로 주군께서 열어주신 길...!!"

내가 나의 의지로 발현한 길이 아니란 거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여는 것.

그게 바로 上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구나?

*

유스라 왕국.

탐험가 연맹 본대.

연맹 탐험가들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었다.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되겠군, 아론."

"내가 너랑 경쟁? 주제를 알아라, 롬버스."

"하긴 내 주제가 그대보다 고상하긴 하지."

베테랑 탐험가 아론과 롬버스는 물론.

현역 탐험가로 복귀한 연맹장, 파비앙까지.

플레이어, 아르카나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긴장감 속에서 자신을 정비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엔 박휘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저희 탐험가들이 밥값을 할 때가 온 거죠!"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이야말로.

탐험가들이 긍지를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간만에 활기찬 분위기에 파비앙도 조금은 몸이 달아올랐다.

"엄밀히 따지자면 복귀 후 첫 행보도 아닌데 말이야."

텟퍼른 미궁 균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파비앙은 호열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그래 봤자 미궁이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했거늘.

호열이 아니었다면 공략은커녕.

미궁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첫걸음처럼 느껴지는 건가."

그러나 제로 산맥에서는 달라야만 한다.

그야 제로 산맥의 십만 동굴은 텟퍼른 미궁처럼 미지의 금역(禁域)이 아니었으니까. 파비앙, 자신만 하더라도 공략을 한 동굴이 십여 개는 되지 않았던가?

파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이야 전부 바다에 잠겨버렸을 테지만."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에게도 제로 산맥 중턱은 밟아보지 못한 장소였다. 그러나 산맥 저지대의 동굴을 탐험하며 나름대로 특징을 파악했던바.

파비방이 탐험가들 앞에 섰다.

"제로 산맥 출정에 앞서 그대들에게 전하겠네."

그 목소리에 집중되는 탐험가들의 시선.

"그대들도 알다시피 십만 개의 동굴에는 각자 고유한 규칙이 존재하네. 모험가들의 언어로는 필드 타입이 다르다고 하는 거겠지. 어떤가, 내 말이 맞나?"

파비앙의 물음에 박휘강이 넙죽 대답했다.

"넵, 정확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던전, 미궁, 전장.... 어떤 동굴에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지는 진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 그 기대감이 탐험의 묘미라고는 하나, 우리는 탐험가들은 더 이상 묘미만을 위해 탐험에 매달릴 수 없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비장감이 감도는 건 덤이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각자의 세계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성전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비전투 클래스인 탐험가가 총력전에서 활약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때문에 아쉬움을 삼키던 탐험가들이 아니던가?

'낯선 균열과는 달라.'

'던전은 내 전문분야라고.'

'미궁 공략 콘텐츠로 20만 구독자를 끌어모은 나다.'

갈증을 해갈할 기회가 왔다는 것.

파비앙도 모두와 같은 심정이었다.

피식,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탐험가로서 편견에 한 방 먹여줘야 하는 순간이겠지. 그래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답지 않은 짓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네. 그러니 다들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하도록 하게나."

앙숙인 아론과 롬버스만 봐도 알 수 있듯.

탐험가들은 서로가 경쟁자였다.

아르카나 대륙이 광활하다고는 해도.

결국 탐험 장소는 유한한 법.

그 때문에 자신의 탐험 요령을 다른 탐험가에게 떠들어대지 않았다.

탐험가들의 공생을 위해 설립된 연맹에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오가는 일이 없었다.

일종의 금기.

"첫째로, 필드에는 알려지지 않는 길이 존재하네."

그러나 파비앙은 연맹장으로서 금기를 깼다.

"...!!!"

탐험가들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파비앙은 전설의 탐험가로서 쌓아온 경험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잠자코 듣고 있던 아론과 롬버스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새로운 개념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길이라니요...?"

"던전이나 미궁엔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하지만.... 결국, 끝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게 탐험의 상식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상식으로는 그러네."

알려지지 않은 길.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수많은 필드를 공략해 온 자신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길을 목격한 건 단 한 번에 불과했으니까.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장소만 특별했던 건 아닐까요?"

"아니."

"!"

얼마나 단호한 대답인지.

박휘강의 입에선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 번밖에 목격하지 못한 이유? 단지 나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네. 하지만 보상은 확실했지. 그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을 거머쥐었으니까."

...무엇보다 값진 전리품?

"바로 진실을."

거기까지 말했어도 감을 잡지 못하는 탐험가들.

파비앙은 또 한 번 안도했다.

역시, 현역으로 복귀하길 잘했군.

이런 햇병아리들에게 모든 걸 맡길 순 없지.

그러곤 너그럽게 물었다.

"다들 생각해 봤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파비앙 연맹장님?"

"아론, 롬버스. 그대들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

"텟퍼른 미궁의 깨워선 안 될 존재."

아론과 롬버스는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거대한 동공을.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두 탐험가는 흠칫했다.

"녀석이 미궁의 암벽 속에 파묻혀 있던 이유를."

"!!!"

그제야 파비앙이 말한 진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엔 몬스터가 존재한다.

파비앙은 공략을 거듭해 오며 위화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어째서 그 심장부에는 언제나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인가를.

'그거야 당연히 게임이니까....'

"...!!!"

생각하던 플레이어들은 흠칫했다.

아니,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었다.

박휘강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전부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연맹장님?"

텟퍼른 미궁.

당시 그곳엔 박휘강도 있었다.

그 또한 전부 목격했다는 것이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그들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를.

그들과 깨워선 안 될 존재.

또 텟퍼른에 얽힌 사연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는데....

"정답이네, 모험가여. 여태껏 수많은 던전과 미궁, 온갖 필드를 공략해 온 나지만.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던 탐험은 고작 단 한 번에 불과했지."

"...설마, 그 한 번이라는 게?"

"설마가 맞네. 알려지지 않은 길에 진실이 있었네."

진실이라니.

파비앙은 대체 무엇을 목격한 것인가?

쏟아지는 눈빛 속에서.

파비앙의 눈이 빛났다.

"진정한 의미의 공략에 도달했다는 것이네."

*

사이렌.

언제부터일까.

인어(人魚)의 마모된 기억은 언제나 푸른 바다를 향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바다를.

정말로 우스운 일이지?

부글부글.

솟아오른 암벽 위에서 붉은 용암을 바라본다.

존재할 리 없는 기억 속에서.

사이렌은 바다를 떠올렸다.

바다는 이렇게 뜨겁지 않았지.

또 무의미하게 넓지도 않았지.

용암의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에는.

자신 말고도 다른 생명체들이 헤엄치고는 했으니까.

용암 말고는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시간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다를 상상할 때만큼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

그러나 종종 평온은 깨지곤 했다.

정확하게는.

누군가가 용암의 바다에 발을 들인 순간.

어째서인가.

사이렌은 자신도 모르게 흉포해지고는 했으니까.

어째서일까.

어째서 나는.

뜨겁기만 한 이 공간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걸까.

그것은 저주와도 같았다.

사이렌은 진심으로 바랐다.

누구라도 좋았다.

죽을 수 없어 살아있는 자신의 숨통을 누구라도 끊어주기를.

그런 사이렌의 귓가에 문득,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무언가를 단호하게 내딛는 소리가.

이상한 일이지.

가본 적이 없는 바다에서도.

용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소리였다.

바다든 용암이든 내디딜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정말 이상한 일이지.

멀리서 다가오는 형체.

한데 사내는 분명 용암을 걷고 있었다.

풍덩─

본심과 관계없이 사이렌은 암벽 위에서 용암으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 각인된 사명은 오직 하나.

용암의 바다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

더욱더 흉포하게 날뛰어야만.

그래야만 누군가 자신을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

피부와 비늘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워야 할 용암이 뜨겁지 않았다.

아니, 뜨겁지 않은 걸 넘어서 차디찼다.

"...!"

마치 상상 속에서 염원하던.

바다를 헤엄치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

.

.

심미(審美).

살필 심.

아름다울 미.

아름다움을 살펴서 찾는다는 뜻이다.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 화려하든, 험하든, 복잡하든 상관없다.

그랑펠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도달하고 말 테니까.

지금처럼.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수천 개의 갈림길 중.

단 하나의 길을 목격한 자여.

오직 그대만이 사이렌을 구원할 수 있다.

─용암의 사이렌과 조우하라. (성공)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진행 중)

물론, 그 고집을 감당해야 하는 나는 상당히 귀찮겠지.

그럼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용암을 바닷물처럼 냉각시키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제로 산맥 최정상, 용의 둥지.

"...."

노룡(老龍)은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산맥의 심장에서부터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사이렌이로군.

"...."

노룡은 생각을 곱씹었다.

과연, 나의 어머니시여.

세계수시여,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내, 노룡이 거대한 육체를 일으키며 말한다.

"영겁의 잠에서 깨어나라, 동족들이여."

드디어 때가 왔노라.

"여명이 도래했다."

◈ 205화. 운수 좋은 날 (1)

심미가 발현한 위풍당당한 개선문.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던전의 심장부가 있고.

던전의 보스몹인 사이렌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괜히 [上] 등급의 추가 효과가 아니라는 거구나.

'길찾기 서비스야, 뭐야.'

십만 개의 동굴.

이제 고작 첫 번째 동굴이었거늘.

시작부터 용암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꼴.

막막함에 자괴감에.

현자타임이 찾아올 뻔한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으니.

'잘하면 앞으론 솔플도 가능하다는 거잖아?'

결국, 파비앙이나 탐험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였다.

딱히 파비앙을 꺼릴 이유는 없었지만.

호열 경부터 호열 총사령관님까지.

파비앙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꺼려지는바.

'하이엘, 디엔드, 귀철도 모자라서 파비앙까지?'

그들의 수다를 듣고 있노라면....

뭘, 클리어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현기증으로 쓰러질지도 모를 것 같았으니까. 심미에 감사하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퀘스트 : 용암의 사이렌]

퀘스트가 떠오르더니 지금이었다.

♪♩♬─

울려 퍼지는 사이렌의 청아한 목소리.

디엔드는 드디어 입을 다물었고.

하이엘은 지그시 눈을 감고 감상평을 쏟아냈다.

"듣는 이까지 행복하게 해주는 노래로군요."

과연, 하이엘.

그랑펠의 분신답게 교양에 있어서만큼은 빠지는 구석이 없구나. 물론 클래식 음악과는 담을 쌓은 나, 이호열의 귀에도 감미롭기는 하다.

'그나저나.'

슬그머니 확인하는 마력량.

단숨에 절반이나 써버렸다.

그럴 만도 하다.

'원래 섬세한 조절이 어려운 법이니까.'

무작정 얼려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용암을 바다처럼 차갑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때문에 절대영도 대신 일반적인 빙결마법을 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하여튼 그랑펠 고집 한번 들어주기 빡세네.

─용암의 사이렌을 처치하라. (실패)

─용암의 사이렌의 염원을 이루어내라. (성공)

그럼에도 선택지 중에서 아래를 고른 건 잘한 짓 같았다.

그 사정을 모를 때는 몰라도.

알고도 사이렌을 처치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테니까.

무려 800레벨짜리 던전 보스 몬스터.

경험치가 아깝기는 하다만.

몬스터가 사이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경험이 쌓이고 짬밥을 먹어서일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던전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다.

배경과 설정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거고.

그러나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아르카나는 코스모, AAU의 영역 밖에 있었다.

AAU가 제공하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듯.

개발 단계에선 콘셉트에 불과하던 것들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처럼.

아르카나 대륙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들은 단지 균열을 통해 현실에 나타났을 뿐이었다.

'각자가 배경과 설정을 가지고서는.'

그래, 그것이 AAU가.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다, 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유였지.

'사이렌에게도 사연이 있던 거야.'

나는 그런 사이렌을 처치하는 대신.

그 사연에 얽힌 퀘스트를 해결한 거고.

'빡세다. 빡세.'

텟퍼른에서도 느낀 거지만.

어째 그 사연이라는 거 한 번도 쉽게 알려주는 법이 없다.

구시렁거리는 와중,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입니다, 주군."

사연 있는 자들의 동병상련이라는 건가.

먹구름처럼 물기를 머금은 디엔드.

역시나 그랑펠의 분신답게.

못지않게 손이 많이 가는구나, 너도.

'내가 아니면 누가 달래주겠냐, 또.'

하지만 그 전에.

퀘스트 보상부터 확인하자.

[던전 : 용암의 사이렌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던전의 보스인 사이렌을 처치하지 않았건만.

클리어 메시지는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 말인즉.

나랑 사이렌은 더 이상 적대 관계가 아니란 거겠지.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게는 사이렌이 시스템상으로 몬스터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나.

♪♩♬♩♪─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차가운 용암을 헤엄치는 모습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게다가 연달아서 메시지까지 떠올랐다.

[숨겨진 장소 : 용암의 바다에 진입하셨습니다.]

숨겨진 장소.

던전이 그 명칭부터가 바뀐 것이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과 같은 지역처럼.

[용암의 사이렌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용암의 바다에서의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용암의 사이렌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군.

해당 지역과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다는 건 다르게 말해서.

해당 지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다는 뜻.

'잠깐만.'

...이거 경험치를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다.

나 지금 제로 산맥 알박기에 성공한 거 아닌가?

십만 동굴 공략은 물론.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전초기지를 세웠단 소리지.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이번만큼은 한껏 폼을 잡아도 인정이다, 그랑펠.

먼 미래를 생각해 보자.

경험치보다 이쪽 선택지의 보상이 훨씬 나아 보였거든.

'지금이야 내 거품에.... 그것도 아주 풍성한 거품에 가려져서 악마 쪽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눈치였지만.'

성전에서만큼은.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은 변함없는 열세였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제3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몬스터를 아군으로 포섭한 것이었다.

'물론, 사이렌만 특이한 경우일 수도 있겠지.'

까놓고 인간과 악연으로 얽힌 몬스터도 얼마든지 존재할 테니까.

그러나 그걸 착각할 염려는 없다.

그래, 내게는 [심미]가 있었으니까.

그냥 길이 열렸을 때만.

퀘스트가 떠올랐을 때만.

따라가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말했다시피 쉽지 않은 길이다.

'아니, 막말로 방금 사이렌만 하더라도.'

그 사연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걸 실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나부터가 [첫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사기 버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니까.

웬만해선 실패할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의미에선 나, 대단한 일을 해낸 걸지도...?

"때론 낯선 길의 풍경도 나쁘지 않군."

그러나 긍지 높으신 그랑펠 님께서 자신의 고생을 남에게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으니. 나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건 역시 시스템밖에 없구나.

[사이렌의 노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남은 시간 : 23시 59분]

'!'

음알못인 내 귓구멍에도 음색이 참 감미롭구나 했더니, 버프였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행운] 스탯 상승 버프였다.

'대폭 상승이라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행운] 스탯의 역할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행운.

작게는 치명타를 때리고, 회피하게 해준다든가.

크게는 장비 강화를 성공하게 해준다든가.

기껏해야 그 정도에 불과했다는 거지.

하지만 역시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나였다.

왜, 1포인트씩.

[행운]에 적선하듯 투자할 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그리고 그런 [행운]을 미신이라고 외면했을 때는?

'갑자기 마왕이 쏟아지질 않나.'

하여튼, 난리가 났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였다.

버프의 지속시간은 오늘 단 하루.

남은 하루를 더없이 알차게 보내야 할 이유가 생긴 것.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이곳을 네게 맡기마."

백 마디 말보다 우리 사이엔 텔레파시가 효율적이지.

던전에서 지역이 됐으니까. 지역이라 부를만한 기반이 필요할 터.

당장은 어떻게 발을 디딜 공간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저 하이엘, 주군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 역할을 해줄 건 막대한 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났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 막대한 열기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블러디아 관상목'이다.

고오오─

하이엘은 곧장 {자연} 능력을 발현했다.

그러자 용암의 바다.

그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블러디아 관상목들.

관상목답게 화려하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있나.

입에서 그랑펠어가 쏟아진다.

"순수한 땅에 걸맞은 순수한 속내구나."

해석하자면 나무의 줄기가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게 나무 주제에 피와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용암이 뿌리, 줄기, 이파리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 같았거든.

─?

문득, 멈춘 노래.

사이렌이 용암 속에서 얼굴을 반만 내밀고는 자라나는 관상목을 살피고 있다. 놀랄 만도 하다. 실시간으로 울창해지는 게 보일 정도의 성장 속도였으니까.

뭐, 내게는 익숙하지만.

'비약초를 영약으로 키워낸 축복이라고.'

블러디아 관상목쯤이야.

쑥쑥 자라나게 하는 게 당연하지.

어느새 두꺼워진 나뭇가지가 발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안심하고.'

이제, 대폭 상승한 행운의 효과를 제대로 써먹어야 할 시간이 왔군.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사냥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레벨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면서도.

레벨을 올려야만 하는 모순에 빠진 상황이 아니던가.

몸을 돌리자 눈치 없이 펄럭거리는 재킷─

'한참 남은 레벨 제한은 둘째 치더라도.'

[집념]의 효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레벨을 올려 스탯 포인트를 획득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목표 좌표는 제로 산맥.

이제부터.

사연이 없는 몬스터는 두려움에 떨도록 하라.

"따라오너라, 디엔드."

*

어나더 스페이스 호.

지구 위를 공전하는 또 하나의 우주정거장.

대격변 이후.

균열에 대응하기 위해 떠오른 AAU 소속의 우주선이었다.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균열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게 바로 어나더 스페이스 덕분이었다.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없음─

계기판을 들여다보던 중년 사내.

그는 간만에 한숨을 뱉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 없는 거구나, 정기 업데이트."

"의심도 많으시지."

"의심? 컴컴한 우주를 떠다니며 지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없던 의심도 생길 수밖에 없을걸? 난 아직도 가끔씩 의심하거든."

우주에서도 선명하게 내려다보이는 제로 산맥.

어디 선명하게 보인다 뿐인가?

그 최고봉은 우주에서도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높게 솟아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그 꼭대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어나더 스페이스의 관측 렌즈를 통해 선명히 촬영되어야 하거늘.

"이게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하고 말이야. 우리가 렌즈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은 다 조작된 영상이 아닐까, 싶다는 거지. 봐봐,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주에 구름이라니."

우주에 안개라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덤.

마법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사내는 장난스럽게 화를 냈다.

"제기랄! 마법이란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만 않았어도 절대 인정하지 못했을 텐데. 빌어먹게도, 보고 말았어. 마법을 믿는 과학자라니."

한탄에 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간만에 활기차신 모습이 보기 좋으시네요. 뭐 레이먼 션이 빌어먹을 놈이긴 해도 여태까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업데이트 내역이 없다면 없다는 것.

내역에 떠오르지 않는 균열이야 문제없다.

기껏해야 적정 레벨 200 이하.

레벨 업에 열이 오른 플레이어들 선에서 금세 클리어되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좋은 날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구요."

"윽. 뭔데."

"찜질팩이요."

"이 뜨거운 걸 왜 얼굴에 덮어?"

"제가 대신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라고."

사내는 투덜거리면서도 어윽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긴 하네.

그렇게....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단잠에 빠진 순간이었다.

"서, 선배?"

"응?"

"저기, 저게...!"

"!"

툭─

반사적으로 부릅뜬 눈.

바닥에 떨어진 찜질팩.

다급한 목소리에 직감할 수 있었다.

터졌구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

긴급 업데이트.

그로 인한 균열의 출현.

어나더 스페이스 호의 역할은 단, 일각이라도.

신속하게 지구에 균열의 위치를 포착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마법."

그러나 과학을 기반으로 우주에 떠오른 어나더 스페이스 호가 아르카나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때문에 완전 자동화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두 세계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이면서도 마법을 목격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야만 했다.

"어디냐."

언제 눈을 감았느냐는 것처럼.

사내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사내의 시선이 계기판을 향했다.

그런데.

"...뭐야?"

포착되는 이상 징후 여전히 없음─

사내는 생각했다.

...진짜 몰래카메라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깨달았다.

"거기가 아니라 저, 저기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지구.

그랬다.

제로 산맥 최정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블랙홀...?!"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격하게.

균열과는 명백히 다르다.

이건 마치 힘으로, 억지로 공간을 찢는 듯한 광경.

"...!!"

그렇다.

두 사람은 비슷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의 출현에서.

"말도 안 돼."

그러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블랙홀처럼 일그러진 공간.

공간을 향해 활강하는 거대한 형체.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구에 무전을 보냈다.

"여기는 AAU 어나더 스페이스 호. 제로 산맥 최정상에서 이상 징후 포착. 드래곤이 공간을 찢고.... 아니, 차원을 찢고 활강하기 시작했다!!"

.

.

.

[마안(魔眼)의 망원경].

망원경이 비추는 아르카나 대륙의 풍경.

나는 더없는 배신감에 휩싸였다.

아니, 행운이 대폭 상승했다면서?

드래곤, 엘프, 초월자, 그리고 마왕까지.

그냥 행운이 아니라.

행운의 편지였냐?

이게 갑자기 무슨 난장판인데!

◈ 206화. 운수 좋은 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