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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화. 선물 (2)

귀철의 제련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거늘.

'날 위한 방어구까지 만들고 있었어?'

하이엘이 그에 관해 드워프들의 말을 전해왔다.

"그들은 산맥의 주인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간단했다.

드래곤의 강함이야, 드워프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

내가 드래곤과 맞서 비명횡사하지 않게 장비를 제련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쳐다보게 되는 복장.

그랑펠의 까다로운 심미안을 충족시키며 성능까지 뛰어난 장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대충 마법부여 효과만 추가한 정장을 입고 활동해 왔는데....

'나야 완전 고맙지!'

드워프의 방어구라니.

그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장비잖아!

무엇보다 심미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장비를 검수하는 게 하이엘이라잖아.

분신이라 불러도 될 만큼 그랑펠을 빼다 박은 하이엘의 외관.

그리고....

'...패션 센스.'

정령왕을 뺨칠 정도로.

어떤 면에서는 그랑펠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는 복장이었으니까.

드워프가 제작했으니, 성능은 걱정할 것 없겠고.

문제는 하나겠구나.

'레벨 제한.'

그렇게 생각하니 제로 산맥의 등장이 고마워진다.

[적정 레벨 : 누구에게도 권장되지 않음]

제로 산맥에서는 능력에 따라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나도 내 능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시 한번 느낀다, 선행 학습의 폐해를...!

모조리 건너뛰어 버린 중간 과정.

덕분에 나는 검강이고, 서클이고 능력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서클은 시스템으로 효과를 알려주기라도 했지.

검강은 정확한 효과를 가늠하기 힘들었으니까.

'결국, 그랑펠 말이 또 현실이 되는 건가.'

긍지와 제로 산맥.

무엇이 더 높은가, 겨뤄보자고 했던가.

정말 한계까지 부딪혀 가며 주제 파악을 하고, 레벨을 올려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른다.

나도 남태민이나 히사기, 레오니 같은 플레이어들과 똑같이 온종일 사냥에 매진할 각오를 해야겠지.

"마지막으로 귀철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철아.

부디 네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이엘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진짜로!

어떻게 다들 성격이 그 모양이니.

너희는...?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과 아직도 신경전 중이라니.

괜히 에고 장비가 아니라는 거냐?

하이엘이 그랑펠의 외관과 심미안을 빼다 박았다면.

디엔드는 흑역사를.

귀철은 그랑펠의 고집을 빼다 박은 것 같은 느낌이다.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개노답 삼형제야, 뭐야?'

근데, 그 셋을 합친 게 나였으니까.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네.'

그냥 관두자.

그나저나 방금 뭐라고 했니, 하이엘?

하이엘은 귀철의 말을 흉내 내듯 말을 이었다.

"더욱더 예리해져야 한다. 하늘의 별, 마안을 베어야 한다. 땅의 숫돌로는 부족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숫돌, '은하수 숫돌'로 나를 벼려내야 한다고...."

은하수 숫돌?

어째 들어본 적이 있다 했더니만.

그거 셰그윈이 찾던 마도구잖아?

반군에게 힘을 빌려주는 대신, 안토니움 창고에 있는 은하수 숫돌을 챙겨 받기로 했었다고. 셰그윈은 자신의 입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었다.

'뭔데, 귀철.'

...너 어떻게 그런 고오급 마도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데?

뭐, 그건 차차 묻기로 하고.

이건 눈치가 있다면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은하수 숫돌.

괜히 셰그윈이 노린 게 아닐 정도로 대단한 마도구인 것 같다. 하이엘의 말에 따르면 드워프들도 은하수 숫돌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하이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마도구를 요구하니, 월스와일도 난감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주군께서 명만 내려주신다면, 디엔드를 통해 귀철을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주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디, 디엔드가 누굴 설득해?!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아니, 귀철마저 걔한테 물들까 봐 무섭다.

제발 걔는 그냥 나서지 말라고 전해주라, 하이엘.

하지만 나는 아찔한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뻔뻔하게 읊조릴 뿐.

"우려할 것 없다, 하이엘."

"...주군?"

"은하수 숫돌, 그 행방은 내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주군!"

역시 그러실 줄 알았다는 것처럼.

감격과 믿음에 찬 눈빛도 보내지 말아주라, 하이엘.

그래도 큰소리를 쳐놓고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왜, 안토니움에서 내 영향력과 관계도는 최대치에 이르렀으니.

마탑에서 그런 것처럼 마도구를 대여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일 테니까.

나는 하이엘에게 말했다.

"안토니움에 전하거라."

"하이엘이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은하수 숫돌의 대여를 정식으로 요청.

이내, 하이엘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아르카나 대륙으로 돌아갔다.

자, 그럼 나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겠지?

'최대한 올려놔야 한다.'

새로운 장비가 그림의 떡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레벨, 그보다 커다란 그릇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나타났으니까.

"제로 산맥."

제로 산맥, 그 넓이는 호주와 비슷.

그 높이는 성층권을 가뿐하게 돌파할 정도. 그런 게 갑자기 솟아났으니, 마탑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구의 80퍼센트가 물에 뒤덮였을 거란 말이 새삼스레 와 닿는다.

"그만큼 높고 광활한 무대라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선 꽤 피곤한 일이 됐을지도 모른다.

제로 산맥에 진입해서는.

다짜고짜 몬스터들과 부딪히며 사냥을 시작하는 건 말이야.

왜,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잖아.

'십 년이 넘는 공백기는 무시할 수 없어.'

최후의 악마 사냥꾼.

덕분에 악마 쪽 지식은 빠삭한 나였지만.

평범한 몬스터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적절한 체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그랑펠이야, 몬스터를 두고 무슨 동물을 훈육하는 것처럼 쉽게 지껄이고 있었지만. 제로 산맥의 몬스터들은 절대 만만하지 않다.

천하의 탐험가 연맹조차 제로 산맥의 중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말 다한 거겠지, 뭐.

하지만 과거의 내가 아니거든.

인터넷에 정보를 검색하고, 검색 결과에 찡찡거리던 이호열이 아니란 말씀. AAU 유스라 지부의 총책임자, 짊어진 무게 덕분에 알게 된 정보가 있다는 말이다.

"십만(十萬) 동굴이라."

말 그대로 십만 개의 동굴.

설정상 아르카나 대륙 전기 최후반까지 무대가 될 수 있던 제로 산맥이었으니까. 개발 예정된 콘텐츠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했던 모양이었다.

'십만 개의 동굴.'

[던전], [전장], [미궁], [콜로세움] 등등.

동굴마다 특수한 속성이 존재한다고 했겠다.

십만 개의 콘텐츠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개발이 끝나기 전에 대격변이 터져버렸으니까.

AAU에 존재하는 십만 동굴에 관한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극히 일부만 해도 그게 어디냐.'

게다가 과거와는 다르게 내겐 긍지로 뭉친 아군이 있지 않던가?

악마 앞에서는 내가 그들을 이끌었던 것처럼.

일반 몬스터 앞에서는 내가 그들의 뒤를 쫓을 수도 있는 거지.

맞다, 그랑펠.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주고받음.

이른바 상부상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AAU의 정보]. 그리고 실현된 『제로 산맥』."

그랑펠의 의미부여는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내가 틀린 말이라면 반박이라도 하겠는데.

지나치게 거창해서 그렇지.

또 맞는 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결국, 이 또한 기이겠군."

그래, 이번에도 그놈의 기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긍지다.

나는 곧장 포탈을 발현했다.

좌표는 하루아침에 등장한 제로 산맥.

나는 포탈에 발을 내디디며 읊조렸다.

"기이에 관해서 나보다 앞서나가는 이는 없겠지."

또각─

"내가 길을 밝힐 테니, 얼마든지 뒤쫓아도 좋다."

*

고오오오─

제국 최고위 마법사, 내쉬 윌리엄.

내쉬가 마력을 발현하자 굳게 닫혀있던 황궁의 창고가 열렸다.

황실 기사들이 신속히 창고로 진입했다.

"으음."

잘근─

내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나도 몰랐던 은하수 숫돌의 존재를....'

보다시피 황궁의 창고엔 보물이 가득하다.

어떤 지역, 어떤 시기의 보물이 창고에 잠들어 있는지는.

그 주인인 황제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였다.

내쉬는 창고의 봉인 마법진을 바라봤다.

'혹, 저 마법진을 뚫고 투시를 했다거나....'

그러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무려 '대마법사'가 발현했다는 마법진이다.

제국이 세워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간파된 적이 없던 마법진으로, 설령 제국이 멸망하더라도 창고만큼은 열 수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마법이었다.

'내가 마법진에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제국과 서약을 맺었기 때문이니까....'

고민하던 내쉬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벤쉬 형님, 아무래도 저도 천성을 숨길 수 없는 마법사인가 봅니다.'

샘솟는 미지에 관한 탐구 욕구.

내쉬는 결심했다.

'물어봐야겠어.'

한없이 깊은 어둠, 이호열 경이라고 했나.

심지어 그는 모험가가 아니던가?

아르카나 대륙에 머문 시간 또한 짧을 테니까.

사실은 은하수 숫돌이 무엇인지.

그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해야 하는 일이었다.

철컥─

황실 기사들이 은하수 숫돌을 들고 나오자 내쉬는 다시금 창고를 봉인했다. 그러고는 황제를 알현했다. 내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내쉬."

"다름이 아니라...."

슥─

내쉬의 시선이 황궁 밖을 향했다.

정확히는 안토니움의 상공을 향했다.

하늘을 부유하는 거대한 선박.

드워프들의 아이언 캐슬 호가 보였다.

내쉬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 출궁의 허가를 받고 싶습니다."

계급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해 보이는 정령, 하이엘. 하이엘을 통해 호열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내쉬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군가는 묻겠지.

안토니움에 드워프들이 찾아온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지 않으냐고. 맞다, 영웅담에 대한 그것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내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직접 확인하고 싶다.'

그래, 이건 마법사로서의 탐구 욕구였다.

무엇보다 호열이 어떻게 은하수 숫돌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지.

어째서 필요로 하는 건지.

드워프들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이내, 황제의 입이 떨어졌다.

"내쉬."

"네, 폐하.

"그 출궁 요청은 허락하지 않겠네."

"...네, 네? 폐하?!"

그러나 제국 최고위 마법사의 자리란 무거운 법.

욕구에 따라 비울 수 없는 자리였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내쉬, 그대는 존재만으로도 안토니움의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아닌가? 당분간은 자리를 지키는 게 좋겠네."

반박의 여지가 없는 명답이십니다, 폐하...!

결국, 내쉬는 속으로 한탄하고 말았다.

형님, 저는 아무래도 부족한가 봅니다.

'...벤쉬 형님이셨다면 분명 폐하와 백성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게 하시면서도, 자유자재로 출궁하실 수 있었겠지요?'

형님에 비하면 이 아우는 아직 멀었나 봅니다.

.

.

.

마탑.

부유 정원.

벤쉬는 뱅그릿과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눴다.

그 주제는 당연하게도 제로 산맥에 관한 것이었다.

벤쉬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아주 신 나셨습니다, 뱅그릿 선임?"

"아닙니다. 하하."

"웃음기라도 지우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턱을 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벤쉬 윌리엄.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뱅그릿, 이 허당 같은 사내는 어찌 이렇게 운이 좋단 말인가?

'이 수석과의 접점부터가 특별했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카림제바에게 속아 넘어갔을 텐데.

벤쉬는 도무지가 이해가 되지 않아 투덜거렸다.

"시시한 출탑 목적이 뭐가 마음에 드신다고...."

크고, 화려하고, 뜨거운 출탑 목적!

위대한 마탑을 나서기 위해서는 위대한 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벤쉬는 출탑 신청서에 불허가 떨어질 때마다 그 목적을 더더욱 부풀렸다.

『상급 마도구를 대여, 악마를 태워버리기 위함.』

『상급 마도구를 대여, 악마와 그 주둔지를 태워버리기 위함.』

『상급 마도구를 대여, 균열을 몽땅 태워버리기 위함.』....

어째 그 방향성이 심히 잘못되었거늘.

"정 그러시다면 제가 한번 봐 드릴까요?"

"뭐요? 됐거든요, 뱅그릿 선임."

"그렇게 싫으시다면야 별수 없고요."

벤쉬의 드높은 자존심이 불허를 받은 출탑 신청서를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을 리 있으랴.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벤쉬는 고심 끝에 출탑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상급 마도구를 대여, 제로 산맥을 불사르기 위함.』

그래도 다행인 건 그 표정이 밝다는 것.

"제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도 오늘로 끝일 겁니다, 뱅그릿 선임. 이번에야말로 제 출탑 신청서가 통과될 테니 말입니다."

제로 산맥의 등장.

그건 곧 마탑의 역할이 늘어났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왜, 산맥의 최정상에는 마탑의 숙적.

드래곤이 잠들어있지 않던가?

혹시라도 그 잠룡들이 깨어나기라도 해봐라.

그 화를 감당할 수 있는 건 마탑밖에 없을 테니까.

우쭐─

어느샌가 팔짱을 낀 벤쉬가 말을 이었다.

"벤쉬 윌리엄에게 이보다 적격인 무대도 없겠죠."

화에는 화(火)로.

더욱이 마탑의 역할이 늘어난 만큼.

출탑 인원도 늘어난 상황이었다.

벤쉬는 진심으로 자신감이 넘쳤다.

양피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 어째서!"

──────

제로 산맥에서 마탑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들. 모든 선임이 마탑에서 그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따라서 벤쉬 윌리엄, 그대의 출탑 신청서는 불허하겠다.

──────

벤쉬가 절규했다.

"왜, 하필 남아있는 선임이 저랍니까?! 이 수석님!!"

*

제로 산맥.

가장 먼저 산맥을 밟는 건 우리다.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은 주먹을 쥐었다.

"비로소 나의 차례가 왔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샤이닝과 거대 연합.

그들이 마왕 쟁탈전이라는 턱없이 높은 벽에 부딪힐 때 천하통일은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플레이어적인 면에서도, 현실적인 면에서도.

인터넷에 흔히 떠돌던 질문.

만약,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가 불만을 가지고.

국가와 대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류오쥔춘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척─

류오쥔춘을 향해 경례하는 이들.

"주군의 무사귀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다.

폐쇄된 조국에서 류오쥔춘은 모든 실권을 차지했다.

공포를 앞세운 통치든, 뭐든, 아무래도 좋았다.

클래스, [군주]의 능력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으니까.

태평양을 가르는 붉은 함대.

류오쥔춘은 솟아난 제로 산맥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의 찬양을 마음껏 즐기거라, 이호열."

제로 산맥이라는 거대한 무대가 펼쳐진 이상.

네놈이 꽃밭에 물을 주는 여유를 부린 이상.

내가 너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니 말이다.

그렇게 다짐한 류오쥔춘은 제로 산맥에 진입했다.

"...!"

그리고 위화감을 느꼈다.

반짝─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구체.

누군가 발현한 마법.

라이트가 제로 산맥의 어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누군가 자신들보다 먼저 제로 산맥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누구냐?"

류오쥔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나밖에 없을 거다.

-"내가 길을 밝힐 테니, 얼마든지 뒤쫓아도 좋다."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개고생을 하는 인간은.

시스템이라도 이 서러움을 알아줘서 다행이었다.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 뭐든 최초가 좋다니까?

◈ 193화. 따라올 수 있겠나 (1)

제로 산맥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존재했다.

그저 발견한 것만으로 메시지가 떠오를 리가 없지.

[업적 : 제로 산맥의 그늘을 밝히다.]

[효과 : 제로 산맥에서 아이템 습득 확률 소폭 상승.]

[지속시간 : 23시간 59분]

최초 업적 달성.

대격변 이전에나 보던 메시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현실에 지역다운 지역이 업데이트된 건 제로 산맥이 처음이니까.

'균열은 기이한 공간이니까 뜨지 않았던 건가.'

뭐, 어쨌거나 반갑다 업적아.

효과도, 지속 시간도 소박했지만.

이게 어디냐.

서클을 개방.

대폭 상승한 마법 발현력.

덕분에 기초 마법, 라이트 정도는 마구잡이로 발현에도 마력량에는 기별이 가지 않았다.

드넓은 제로 산맥의 초입을 환하게 비추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란 거다.

두둥실─

'말 한번 잘못해서 이게 뭐냐, 진짜.'

어려운 일은 아니더라도.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거늘.

그나마 업적 효과가 내 마음을 달래주는구나.

물론, 그랑펠은 언제나처럼 초를 쳤지만.

"부귀영화란 허상에 불과하거늘."

아주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놈의 청렴결백!

그랑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너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호열아.

그야 제로 산맥에선 챙겨야 할 게 굉장히 많았으니까.

[만.통.지]의 효과가 유효하던 시절.

나는 본전을 뽑기 위해서 알고 있는 얄팍한 정보들을 만통지에 닥치는 대로 물었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비약초와 [육망성 브로치]에 관한 정보.

그렇다.

이 광활한 제로 산맥 어딘가에.

[육망성 브로치]와 비약초가 존재했다.

비약초도 그냥 비약초가 아니다.

고대 왕국 시절.

아르카나 대륙에서 이미 모습을 감췄다던 귀하디귀한 영약들이었다.

'드래곤 덕분이겠지.'

영약이 아무리 탐난다고 해도, 드래곤들이 잠든 제로 산맥을 오를 사람이 대륙 역사상 몇이나 됐겠냐고.

말했다시피 연맹 탐험가들조차 중턱에 다다르지 못하고 관둔 게 제로 산맥 탐험이었으니까.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파수꾼 역할에 충실하구나."

최강의 생물.

드래곤을 뭔 집 지키는 개처럼 부르지 마라, 그랑펠.

헛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날까 봐 겁나니까....

흠칫하면서도 머릿속에 정보를 되뇌어 본다.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없어.'

영약들은 제로 산맥 중턱 위쪽에 서식했다.

손때를 타지 않은 장소가 그쯤부터일 테니까.

뭐, 그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그나저나 육망성 브로치가 문제겠군.

"빛이 들지 않는 동굴이라."

그 당시엔 제로 산맥에 있는 동굴을 찾으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십만 동굴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되니까.

이렇게 막막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아니, 동굴에는 빛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한 거잖아?'

십만 개나 되는 동굴을 혼자서 뒤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좋다.

숲을 보자고,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플레이어 중 아무라도 좋다.

누구라도 '빛이 들지 않는 동굴'에 발견하고 진입해서 [육망성 브로치]를 획득하면, 내가 그 브로치를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돈 욕심이 없지. 돈이 없는 건 아니거든.'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지껄이고 말았으니.

"내게 어둠은 더없이 익숙하지."

부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은 자제해 주라, 그랑펠.

나는 언제나처럼 한숨을 머금고는 제로 산맥을 올랐다.

둥실─

내가 내디디는 걸음마다 빛의 구체.

라이트가 떠올랐다.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등장할지 모르는 제로 산맥.

'이거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괜찮다.

라이트는 곧 마력 덩어리와 같았으니까.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오든 즉시 라이트에 간섭.

마법을 발현해 대응할 수 있다는 소리다.

"밤의 산책도 나쁘지 않구나."

그랑펠은 태평해보일지 몰라도.

나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단 말이다....

*

지구상 유일한 AAU 협약 미가입국, 중국.

제로 산맥의 출현.

그 즉시 중국은 독자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그 움직임은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었다.

"중국의 함대가 제로 산맥으로 항해 중입니다!"

"이렇게 급진적인 움직임은 보인 적이 없었는데."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요?"

AAU 미가입국이라고는 해도 중국은 그동안 상식 밖의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중국이 AAU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 야심이 있어서가 아닌 단순히 자신들의 권력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제로 산맥에 함대를 파견했다.... 그것도 류오쥔춘을 비롯한 천하통일 길드원들을 태우고 말이지.'

AAU 지부장 회의.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던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출항 시각이 상당히 이른데요?"

"말씀대로네요. 정확하게는.... 정기 업데이트 내역이 떠오르자마자 출발한 것 같죠? 이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했다는 건데."

"확실히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중국의 함대가 출항한 시각은 제로 산맥의 등장으로 인류가 멸망하니 마니 떠들고 있던 때였다.

막말로 마탑과 호열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구가 멸망했을지도 몰랐을 상황에.

'파도에 휩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천하통일 길드원 전원을 태워서 제로 산맥으로 향했다고...? 쿠데타나 내분이 터질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고?'

사실 어떻게 보면 승부수라고 볼 수도 있었다.

AAU 미가입국, 중국.

동시에 성전에 참가하지 않은 천하통일.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제로 산맥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아는 중국은 그러지 않았을 거야.'

대격변 이후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지배하는 데 만족했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은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흐름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중국 내부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군요."

그게 어떤 변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짐작은 해볼 수 있었다.

AAU, 한때 아르카나의 창조주였던 그들이기에.

"...!!!"

지부장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군림할 수밖에 없는 [군주] 클래스 보유자, 천하통일의 길드 마스터를.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류오쥔춘. 앞으론 그의 행보를 주시해야 될 것 같군요."

*

마탑의 포탈.

플레이어들 또한 천하통일의 소식을 접했다.

"와, 얘네들 진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네."

"드미트리, 너는 배가 튀어나온 것 같은데...? 그나마 봐줄 만한 게 근육이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실연의 아픔으로 폭식이라도 했어?"

"...너 또 그건 어떻게 알았냐?"

"너 어제 눈물 셀카 올렸잖아~"

어쩜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하는 걸까?

티격태격─

카밀라와 드미트리가 말싸움을 벌이기도 잠깐.

"발이 빠르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까?"

록스가 중얼거렸다.

샤이닝과 천하통일.

록스와 류오쥔춘.

라이벌이기에 서로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정상, 언저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두 사내가 아니던가?

"천하통일은 도박수를 던진 거야."

"도박수? 왜 그렇게 생각해?"

"제로 산맥의 위험성보다 최초 업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겠지. 류오쥔춘의 [군주] 클래스는 업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군주].

히든 클래스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희귀한 클래스 중 하나였다. 아니, 랭커 플레이어 중 [군주] 클래스는 류오쥔춘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히든 클래스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드미트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군주의 클래스 효과라면...."

[군주]는 부하로 둔 이들이 획득하는 경험 일부를 습득했다.

그 경험엔 경험치는 물론.

버프를 비롯한 각종 업적 효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면만 본다면 군주는 사기적인 클래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걔는 그걸 거기까지 키운 것도 대단하다~"

군주는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육성이 불가능하다 평가받는 클래스기도 했다.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플레이어는 일방적으로 손해를 봤으니까.

드미트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자식은 그냥 나라를 잘 타고 태어난 거지."

"그래서 부러워?"

"미친 소리 하지 마.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그래서 자유롭게 뻥뻥 차이는 거구나~?"

또다시 티격태격─

시끄러운 것과 별개로 록스도 그 의견에는 동감이었다.

국가 차원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류오쥔춘은 절대 500레벨의 벽을 돌파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함대를 이끌고 제로 산맥을 찾았다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록스는 주변을 바라봤다.

인파 속에서 우뚝 솟은 두 사내의 머리.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곁에 있을 한 사람까지.

"그쪽도 같은 생각 중이겠지?"

.

.

.

남태민은 피가 끓어올랐다.

"아니, 이렇게 선수를 친다고?"

천하통일...!

AAU가 제로 산맥의 출현을 정식으로 발표하기도 전에 한 발짝 빠르게 움직이다니. 아무리 AAU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칙 아니냐고, 이건!

"아니, 같은 플레이어로서의 상도덕이 없네."

씩씩거리는 남태민을 말린 건 히사기였다.

"천하통일도 리스크를 감수했을 겁니다."

"리스크? 뭔 리스크?"

"현실에 나타난 제로 산맥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던 제로 산맥과 다를 테니까요."

"...?"

라이벌이란 타이틀.

그 앞에 '선의의'라는 수식어만 추가됐을 뿐.

히사기에게 설명을 듣기만 하는 건.

남태민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아니지, 그것도 호열 씨가 제대로 봉인하셨으니까. 아르카나 대륙 때랑 크게 다를 건 없을 텐데.'

결국, 남태민은 입을 열었다.

"잠깐, 신발 끈 좀 묶고 말하자."

"...그 갑옷에 신발 끈은 어디 있는 겁니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싸늘한 히사기의 뱀눈에도 남태민은 꾸역꾸역 허리를 숙여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뚱한 표정의 레오니에게 입을 뻐끔거렸다.

"...이거, 무슨 말 하는 거야?"

레오니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죽일까?'

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더 약이 오르는 느낌?

남태민과 히사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항상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보이고 들린다고. 이 덩치만 큰 새끼들아.'

레오니가 그런 뜻을 담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남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바바리안에 버서커가 뭔 머리를 쓰겠다고."

"?!"

...진짜 한 대 후려갈길까?

그런 충동이 치밀어올랐지만, 참아보자.

다짐했잖아?

나도 그 격식이란 걸 좀 가져보자고.

레오니가 용케도 입부터 열었다.

"바다에 솟아났으니까. 상대적으로 저레벨 몬스터가 등장하는 제로 산맥 아래쪽은 전부 바다에 잠겼겠지?"

"...와씨, 너 천재냐?"

"너도 뇌까지 근육은 아니잖아. 좀 써보는 게 어때?"

누가 봐도 격식과는 거리가 먼 회화였지만, 레오니는 스스로 만족했다. 욕지거리를 뱉지 않았으니, 그녀의 기준에서는 크나큰 발전이었다.

히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격변 이전, 우리가 알고 있던 제로 산맥의 정보는 모조리 쓸모가 없어진 겁니다. 저레벨 지역은 전부 태평양에 잠겼을 테니까요."

...뭐야, 다 듣고 있었어?

남태민은 모른 척하고 일어났다.

"확실히 일리가 있네."

해수면 위로 드러난 제로 산맥.

과연, 그 수준이 어떤지는 진입하고 맞부딪혀 봐야지만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천하통일은 도박수를 던진 게 맞았다.

"우리도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레벨 업은 물론.

라이언 하트 기사단을 비롯한 아르카나인들의 도움으로 강해졌다고는 해도 자만은 금물이었다. 성전에서 제 몫을 해내기까지는, 아직 한참 부족했으니까.

이내, 포탈로 진입하는 플레이어들.

시야가 바뀌자 그들을 맞이한 건 웬 빛이었다.

"뭐야, 이거?"

시차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태양마저 가릴 정도로 드높이 솟은 제로 산맥 때문인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구체, 라이트만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천하통일 짓인가?"

아니, 걔들이 누구 좋으라고.

그럴 리가 있나.

게다가 보이는 라이트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 정도의 라이트를 발현하기 위해선.

천하통일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이 마력을 쏟아부어도 부족할 터.

덕분에 생각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제로 산맥에 진입할 정도의 강자.

타인을 위해 어둠을 밝힐 정도의 마음씨.

라이트를 대규모로 발현할 정도의 마법적 능력.

그 모든 걸.

동시에 갖춘 이는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인가.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세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호열 씨?"

.

.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뭐지?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숭고한 짓을 한 거냐?

전부 사실대로 털어놔라, 그랑펠.

그러나 나의 성화에도.

그랑펠을 느긋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뒤쫓고 있는가. 나의 빛을."

그리고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우려하지 않고 나아가겠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악마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 194화. 따라올 수 있겠나 (2)

아르카나 대륙에 득실거리는 게 악마였으니까.

제로 산맥에 악마가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근데 너희도 그랑펠 이상으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무섭지도 않냐?'

잠자는 드래곤들은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제로 산맥의 몬스터가 무섭지도 않은 거냐고.

왜, 지금처럼 저지대 저레벨 구역 몹들이야.

호다닥─

내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망쳐 버렸지만.

위로 갈수록 강한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건 상식이다. 다른 걸 떠나서 드래곤에 주눅 들지 않고 서식하는 것만 봐도 한가락 하는 몬스터들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짐승조차 이토록 현명하거늘."

쪼렙 구간 구역에서 건방 떨지 마라, 그랑펠.

너는 흔한 토끼 앞에서도 폼을 잡고 싶어?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도 말을 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구나, 악마여."

[천적관계].

바람을 타고 풍겨오는 악마의 냄새.

레벨이 상승해서인가.

아니면 지옥의 악크샨 악마 사냥꾼에게 특훈을 받아서인가.

광활한 제로 산맥에서도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악마가 넘쳐나는 아르카나 대륙에서는....'

거의 상시 [천적관계] 발동 상태가 아닐까?

그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도록."

당장은 눈앞의 악마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지금.

제아무리 제로 산맥이라고 하더라도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중간과정을 건너뛰고 도달한 경지라고 해도 정도가 있다. 초월자의 경지, 서클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검강을 깨우친 나란 말이다.

'밑 빠진 경지라고 해도 몇 배나 상승하는 셈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간과정을 무시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완벽하게 깨우치면 몇십 배가 될지도 모르지.'

뭐, 순서야 약간씩 뒤바뀌더라도.

결국, 완전히 습득하면 해결될 일 아니겠어?

그런 의미에서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눈치가 빠르군.

내 존재를 알아차린 건가.

재빠르게 나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숨바꼭질인가."

튀어나오는 차가운 목소리.

"놀이에 어울려 줄 정도로 나는 한가롭지 않다."

악마에게만큼은 자비가 없는 그랑펠이었으니.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얼마든지 뛰어보도록 해라.

달리면서 힘을 빼면 더 좋다.

나야 포탈을 발현하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또각─

아무리 그래도 구둣발로 등산만큼은 좀 피하고 싶거든....

*

셰그윈은 공허한 눈으로 산을 올랐다.

목이 탔다.

불과 몇 분 전 샘에서 목을 축였건만.

갈증은 오히려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다시금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

철컥─

셰그윈이 검을 거두자 산맥이 피로 뒤덮였다.

산맥 고지대의 네임드 몬스터, 칠미호(七尾狐)가 절명했다.

셰그윈은 과거, 노쇠했던 자신의 육체를 떠올렸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근력이다.'

그 시절.

셰그윈은 제로 산맥을 올랐다가 꼬리 다섯 달린 여우와 마주쳤었다.

검성의 칭호답게. 그 시절에도 오미호를 압도했던 셰그윈이었지만 승부에 결착을 내지는 못했었다.

'내 육체는 확실히 강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강한 꼬리 일곱 달린 여우를 죽였다.

전성기 때보다 강해진 육체가 칠미호가 주술을 부리기도 전에 도륙을 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냐.'

셰그윈은 자신의 검, 아틀라스를 바라봤다.

검강이 발산되지 않았다.

검과 통하는 공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빠득─

셰그윈은 신경질적으로 이를 갈았다.

"...너마저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미련한 것.

"너만 멀쩡했더라도 이 거지 같은 산맥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셰그윈이 제로 산맥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검강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짙어지는 법.

다시금 검강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내가 너무나도 강해진 탓이다.'

타락하여 젊음을 되찾은 육체다.

웬만한 전투에선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조차 없겠지.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제로 산맥의 주인.

드래곤이라면 나를 생사의 갈림길로 몰아넣을 수 있을 테니까.

아틀라스, 그것이 네가 원하는 바라면 나는 그리하겠다.

셰그윈이 피식 웃었다.

"너도 주인이 죽는 꼴을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계속해서 산맥을 올랐다.

마법진이 새겨졌던 봉우리가 보였다.

과거나 지금이나 마탑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누구도 드래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마법진을 발현해 놓았을 줄이야.

'과거였다면 애를 먹었겠군.'

또한 그 마법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발현된 무수한 함정 마법들까지.

셰그윈은 봉인 마법진을 건드렸다가 함정 마법에 당해 적잖은 상처를 입었었다.

인간보다 악마에 가까운 육체가 아니었다면 다시는 걷지 못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

하지만 그 고생이 무색해졌다.

셰그윈은 목격하고 말았다.

분명, 자신이 무너트렸을 마법진이 새겨진 봉우리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무의식을 헤매고 있는 건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두개골이 제대로 흔들렸나 보군."

그렇게 착각할 법도 했다.

그야 밤하늘에서 더는 마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로 산맥에서 내려다보는 경치 또한 바뀌었다.

"...빌어먹을."

넘실거리는 저건 분명 바다다.

아르카나 대륙은 어디로 갔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온통 푸른 바다뿐이었다.

하루아침에 제로 산맥이 바다에 떨어졌다고?

그럴 가능성보다는.

자신의 감각이 고장 났을 가능성이 더 높을 터.

콰득!

셰그윈이 신경질적으로 나무를 내려치자 기둥이 그대로 꺾여서는 쓰러졌다. 셰그윈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생각해 보자,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졌는지를.

"...."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시공간의 사교장.

그곳에서 은발의 사내와 마주친 시점부터였다.

그래, 모든 원흉은 그놈이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안토니움을 함락시키고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제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도.

그 탓에 악마의 힘을 자각하게 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렇게 이를 갈던 때였다.

"?"

두근─

심장이.

두근두근두근─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

제로 산맥의 대요괴, 칠미호의 앞에서도.

심지어는 드래곤의 둥지를 앞에 두고서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뛰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경험이 없었다면 착각하고 말았겠지.

보여야 하는 마안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말아야 할 바다가 보이는 감각처럼.

심장에도 이상이 생긴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셰그윈은 심장박동의 원인 또한 알고 있었다.

'...녀석이다!'

이번에도 은발의 사내다.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그대는 사교장의 절차에 감사하는 게 좋겠군."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인내하고 있으니까."

-"검성. 아니, 악마보다 추악한 칼잡이여."

꿀꺽─

더욱더 목이 타들어 갔다.

셰그윈은 마른침을 삼키곤 뛰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한다.'

검성.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내가 도망을 치다니.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려 상위 마왕을 지옥에 떨어트려 만장일치로 초월자의 자격을 거머쥔 그였다. 검강을 발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거늘.

아틀라스가 응답하지 않는 지금은....

'내게 승산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신체 능력이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쉬지 않고 산맥을 가로질러서인가.

덕분에 녀석과의 거리가 벌어진 덕분인가.

심장박동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셰그윈이 걸음을 멈춘 그때였다.

고오오오─

셰그윈의 눈앞.

허공에 그려지는 마력의 빛무리.

포탈이다.

마력의 역광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가 점차 가까워졌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다시금 고장 나버렸다.

.

.

.

진짜로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거냐.

"셰그윈."

내가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이자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네 잘못은 아니겠지만, 대체 왜 그랬냐...?

필사적으로 도망가길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토끼가 도망치는 것처럼.'

나는 기껏해야 임프나 하급 악마인 줄 알았지!

왜, 악마들은 강해질수록 영악해진다.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냐고?

아니, 위험에 처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 아르카나 대륙만 봐도 그렇지.'

상위 마왕, 가미긴이 지옥에 떨어진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이보다 평화로울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하급 악마 나부랭이들이나 가끔 눈에 띄었지.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진명의 악마들은 [마안의 망원경]으로 둘러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을 정도로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까.

'그니까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내가 널 걱정하는 건 아닌데.

제로 산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무려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고, 드래곤이!

상상도 못 한 조우에 역정이라도 내고 싶었거늘.

'잠깐.'

이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로군. 마탑의 마법진을 파괴한 건."

세상에 어떤 간 큰 놈이 마탑의 마법진을 파괴했나 싶었는데.

그게 셰그윈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인데?

한 발자국─

셰그윈이 뒤로 물러나더니 입을 연다.

"역시 너로군. 마법진을 복구한 건."

당연하게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랑펠에게 있어서 셰그윈은 악마, 아니 악마보다 못한 존재였으니까. 한마디 말을 건넨 것도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크흐흐흐."

셰그윈이 흐느끼듯 웃었다.

왜 저래 또.

갑자기 섬뜩하게.

내가 흠칫하는 와중에 셰그윈은 말을 이었다.

"정말로 빌어먹게 일이 꼬여버렸구나."

...저기요, 그게 누가 할 말인데요.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셰그윈에게 내 말을 들어줄 여유는 없어 보였다. 셰그윈은 곧바로 검을 치켜들었으니까. 그런데 무언가 허전하다.

검강이 보이지 않잖아...?

"보아라. 아틀라스, 네 주인께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

아틀라스, 그게 검의 이름인가.

그나저나 죽을 위기라니?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솔직하게 쫄린다.'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

그것도 모자라서.

악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걸로 봤을 때....

셰그윈은 부담스러운 상대가 확실했다.

설령, 검강을 발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쾌검술이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

"아틀라스,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

"얌전히 고집을 꺾는 게 좋을 거다."

팟!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뭐가 저렇게 빠르냐.

여태까지 봐온 그 어떤 몬스터보다 민첩하다.

'전투 센스까지.'

악마로 타락한 셰그윈이었다.

그 외관은 청년이었지만, 인간 시절 그는 전성기가 훨씬 지난 검성이었다.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겠지. 과연,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도 넘쳐나는 모양이시군.

셰그윈이 지형지물에 몸을 숨겼다.

'이게 초월자의 능력인가.'

내 눈으로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속력이다.

새삼스럽게 셰그윈이 악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초전박살이 났겠구나 싶다.

그러나 악마로 타락한 이상.

"거기로군."

[천적관계]의 반경을 피해 갈 순 없었으니.

악마의 구린 냄새가 풍긴다는 말이다, 셰그윈.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다.'

...냄새로 쫓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셰그윈이라면.

내가 자신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검을 들고 내 숨통을 끊으러 달려들 테니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일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거든.

하지만 철면피가 있다.

"숨어도 숨길 수 없는 게 법이다."

그래, 항상의 자세.

장담하는데.

내게선 조금의 동요도, 빈틈도 보이지 않을 거다.

두근두근두근─

찰나의 침묵.

덕분에 셰그윈의 거친 심장박동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저건 분명 겁을 먹은 악마의 심장박동이었다.

'아까부터 왜 저렇게 쫄았는 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나는 저 착각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

'착각,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드는 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것만큼이나 자신 있는 일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뻔뻔하게 해낼 자신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나는 절도있게 팔을 치켜들었다.

"그 심장이 악기라도 되는 것 같구나."

품에서 꺼내 드는 것은 마왕, 암두시아스의 전리품.

"그렇다면."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아니, 이제는 [운율의 지휘봉].

나는 마왕의 전리품을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비명을 더한 이중주도 나쁘지 않겠군."

...뭘 더한 이중주?

아니, 됐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은 네가 뭐라 지껄여도 태클을 걸 여유가 없다, 그랑펠.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지휘봉을 꺼내 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혼자만 그렇게 빠른 건 조금 치사하잖아, 셰그윈?

슥─

지휘봉을 치켜들자.

둥실─

제로 산맥 곳곳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빛의 구체.

그래, 내가 발현해 둔 라이트들이었다.

슥─

두둥실─

지휘봉이 움직이는 대로.

순수한 마력 덩어리들이 따라 움직인다.

그러더니 이내.

"?!"

셰그윈조차 피할 수 없는 속도로 가속한다.

"비바체(Vivace)." - 화려하고 빠르게

내가 지휘하는 대로.

◈ 195화. 따라올 수 있겠나 (3)

제로 산맥의 어둠을 밝히는 라이트.

"이런 말 할 상황은 아닌데, 아름답네요."

"나만 그 생각한 게 아니었네."

"맥이 풀릴 정도로 반짝거리네요. 예쁘다...."

너무나도 밝아서 온기마저 느껴지는 빛의 구체.

그건 갖가지 복잡한 이유로.

호열의 이름만 들었다 하면 미간을 찌푸리는 드미트리가 말꼬리를 흐려지게 할 정도였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포탈에 진입할 때만 하더라도 잔뜩 긴장했다.

카밀라가 놀릴까 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탱커에게 어둠이 깔린 숲만큼 위협적인 전장은 없다.

울창한 숲에서 어떤 몬스터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이 숲이 어디 보통 숲이란 말인가?

제로 산맥이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경험했던 저레벨 구역도 아닌.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중턱 부근이란 말이다.

"드미트리, 온다."

문득, 들려오는 록스의 목소리.

정신을 차리자 달려드는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드미트리가 방패를 치켜들었다.

"오케이!"

쿵!

바짝 치켜드는 가드.

그러면서도 드미트리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만약, 라이트가 어둠을 밝혀주지 않았더라면....

쾅!

"읏...!!"

나는 지금의 일격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겉보기엔 흔한 토끼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토끼 주제에.

플레이어들에게 선공을 해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귀여운 생김새에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끼기긱─!

당겨지는 활시위.

카밀라가 화살을 입에 문 채 말했다.

"얘드 조으걸 얼므아나 즈어 머근 거야? (얘들 좋은 걸 얼마나 주워 먹은 거야?)"

제로 산맥 중턱 환경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보통 토끼가 아니라는 증거일 터.

하지만 말했다시피 '빛'이 있었다.

"대열 유지. 레벨이 높아도 일반 몬스터다. 패턴은 뻔해."

록스의 지휘 아래 샤이닝은 능숙하게 토끼들의 기습에 대처했다.

그동안 균열에서 악마족을 상대하며 극한 체험을 한 덕분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둠을 밝히는 라이트 덕분인가.

촤륵─

카밀라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환영인사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

쿵.

드미트리는 그제야 말없이 방패를 내려놓았다.

...얘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낌새를 알아차린 카밀라가 말을 걸었다.

"반응이 왜 그래? 우리 막내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없네."

"응? 뭐가? 또 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척─

드미트리의 두꺼운 손가락이 가리킨 건 빛의 구체였다.

아, 그거?

카밀라가 싱긋 웃었다.

"글쎄, 그걸 알면 나도 샤이닝을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우리 제시처럼.

"카밀라, 나 듣고 있어."

"헉. 정색하는 거 봐. 농담. 농담이야, 록스."

카밀라가 까르륵 웃다가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

"?"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우리 총대장님께서 이러시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번거롭고, 수고스럽게 나선 게 몇 번째라고 생각하는 건데? 설마,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드미트리?"

드미트리는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최소 900레벨....'

심지어 그것도 한참 전에 예상한 수치였다.

드미트리 또한 랭커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레벨 업에 모든 시간을 때려 박아도 모자랄 판에.'

이호열은 어떤 행보를 보였던가?

자신에게는 시시할 뿐일 균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마왕을 비롯한 조금이라도 인류에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들?

싹부터 짓밟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오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구축한 아르카나 세력을 움직여 뒤처진 플레이어들의 성장을 돕기도 했다.

그랬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야말로 그 한결같음의 증거였다.

절레절레─

이내, 드미트리가 고개를 저었다.

"...숲이 아니라 나무를 보고 있었나, 나는."

그런 사내를 단순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다니.

"이제 와서 깨달은 척? 그래도 멋없거든~"

오늘만큼은 카밀라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도 싸다.

찰싹!

드미트리가 양손으로 뺨을 거칠게 두드렸다.

"좋아, 이제부터는 조금 더 진지하게 가야겠어."

다짐하는 드미트리를 보고 록스는 쓰게 웃었다.

'이쯤 되면 인정하지 않는 게 이상한 거겠지.'

제시도 모자라서.

드미트리의 자유분방한 성격마저 바꿔놓을 정도라니.

나는 이호열에게 완벽하게 졌구나.

록스가 산맥을 수놓은 빛의 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검과 방패를 치켜들었다.

"억울하다면 부지런히 쫓아가는 수밖에 없나."

"...뭐라고 했어, 록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래, 나는 언더독.

애써 폼을 잡아도 근본부터가 개다.

누군가를 뒤쫓는 데에 이골이 난 사냥개란 말이다.

록스가 서포트 팀에게 명령했다.

"베이스캠프는 포탈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잡자. 일대의 몬스터도 정리했겠다, 여기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부탁할게. 다들."

"벌써 끝? 에이, 아니겠지. 록스?"

"맞아, 이제 막 사나이의 열정에 불이 붙은 참이라고!"

"물론, 성의를 봐서라도 더 나아가 봐야지."

그런 샤이닝이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두둥실─

"?"

별안간 공중으로 떠오르는 빛의 구체들.

"우와, 뭐냐. 엄청 예쁜데?"

그 장관에 놀라기도 잠깐.

쌔애애액─!

라이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제로 산맥을 가로질렀다.

"...!!!"

샤이닝뿐만 아니었다.

제로 산맥의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빛의 줄기 끝에 호열이 있다는 것을.

시야 확장 스킬, [이글아이].

독수리의 눈으로 제로 산맥을 둘러본 카밀라.

그녀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자, 잠깐만 얼마나 높이 올라간 건데?"

[이글아이]의 시야로도 닿지 않을 정도.

보는 그대로.

빛의 줄기는 산맥의 최정상을 향해 뻗어있었다.

놀라움은 곧 경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쿠구구구궁─!

대체 얼마나 큰 굉음이기에.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소리가 전해지는 걸까?

위쪽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드미트리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최정상 근처면 드래곤의 둥지 쪽이잖아?"

*

[운율의 지휘봉]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착용 시, 방대한 음악적 지식을 습득하며 그 음악적 지식에 걸맞은 효과의 버프를 착용자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것에게 부여한다.]

[설명 : 고상한 외관만큼이나 고상한 효과를 지닌 마도구.]

그랬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 [마안의 망원경]과 더불어 마왕성 압살 때 획득한 마왕의 전리품. 그 효과 덕분인가. 나는 익숙하게 음악 용어를 내뱉을 수 있었다.

척─

"비바체(Vivace)." - 화려하고 빠르게.

근데 하필이면 비바체가 뭐냐, 비바체가!

점점 빠르게, 라든가.

아니면 그냥 빠르게 여도 충분했잖아?

이런 장소에서 꼭 '화려하고'를 붙였어야 했니, 그랑펠?

포탈을 타고 와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거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야 살짝 고개를 들면 보이는 저게 바로 드래곤의 둥지였으니까...!

콰콰콰콰쾅─

나는.

그런 드래곤의 둥지 아래에서 요란하게 마법을 퍼붓는 중이었고.

진심으로 우려스럽다.

이렇게 시끄럽게 굴다가 드래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닐까.

'층간 소음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건데.'

깨어난다면 그 화가 나를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눈앞의 셰그윈을 상대하기도 벅찬데, 드래곤이라니.

그것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승부를 내는 수밖에 없겠지.

전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힘들었던 셰그윈의 움직임.

그러나 [운율의 지휘봉]을 치켜든 순간부터 전장을 지휘하는 건 나였다.

그래, 그놈의 비바체 덕분이다. 물론, 지휘봉이 나의 신체 능력까지 끌어올려 주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에픽 이상의 아이템이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휘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라이트.

그 못지않게 신속한 나의 탐색, 간섭, 발현.

라이트, 마력 구체가 각각 다른 마법으로 발현되어 셰그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불꽃, 냉기, 심지어는 시야를 흐트러트리는 환각 마법까지.

쏟아내는 마법의 개수가 나조차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이게 서클이라는 건가.'

정직하게 도달한 초월자의 경지가 아니었거늘.

지금의 효과만으로도 체감할 수 있었다.

어째서 원로, 유그위드가 자기 일처럼 흥분했었는지도.

그러나.

'조금도 벅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내게는 과분한 서클일 터.

하지만 나는 서클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걸 넘어서.

비로소 '전력'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서클을 형성한 지금에서야.

그랑펠의 설정이 제 위력을 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슥─

나는 무심하게 휘둘러지는 지휘봉을 바라봤다.

...이래선 진짜 지휘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인걸.

검성이자 대륙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셰그윈이 쏟아지는 마법을 피하는 데 급급해한다.

그 모습이 마치 쏟아지는 음표에 삐걱거리는 단원 같았으니까.

뭐라 그랬더라.

거친 심장박동과 비명의 이중주라고 했었나.

정말, 내뱉는 말은 실현해 내고야 마는구나. 그랑펠.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아니, 지름길을 가로지른 나와는 다르게.

셰그윈은 자신의 힘으로 경지에 다다른 초월자였다.

그런 나의 짐작에 화답하듯.

쌔애애애액─!

곧 거센 풍압이, 쏟아지는 마법의 음표들을 튕겨내 버렸다.

"빌어먹을 마도구로군."

스스스─

산맥에 피어오르는 먼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셰그윈.

걷혀가는 먼지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동공.

"그리고 빌어먹을 느낌이다."

검게 물든 눈동자.

셰그윈이 정말로 악마로 타락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같은 초월자끼리 무력에 위축됐을 리는 없어.'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악마 사냥꾼 대 악마로서.

나와 셰그윈은 체급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명의 악마, 셰그윈. 마왕이 아니다.'

마왕 정도는 돼야.

마왕 중에서도 악마 사냥꾼과 맞선 경험이 있어야지만.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천적관계를 극복한 적이 있어야지만.

천적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탐욕과 비슷한 경우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새롭게 태어났던 칠죄종 탐욕.

녀석은 거악이면서도 악마 사냥꾼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과거의 내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지옥에 처박혔었지.

셰그윈도 같은 경우다.

'악마로 타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천적에 대한 내성이 없다는 것.

미숙한 악마의 냄새가 난다는 것.

역시나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히 지껄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이 역시나 추악하다."

셰그윈의 입꼬리가 비뚤게 치켜 올라갔다.

"사교장에서도 느낀 거지만 말버릇 한번 대단하구나. 세상을 업신여기는 그 눈빛 또한 오만하고, 방자하다."

반말에 발끈하다니.

젊음을 되찾았어도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그나저나 내가 한 번쯤 쓴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랑펠.

'세니오스에게 끝까지 반말할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셰그윈.

그쪽이 존댓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니고.

나는 대꾸했다.

"착각하고 있군."

"...?"

"인간과 인간이 나눌 법한 대화를 늘어놓다니."

"...!"

"설마, 아직도 자신이 인간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빠득─

셰그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쯤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악마로 타락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악질이다.

단순하게 젊음을 되찾기 위해서 악마와 거래를 한 거잖아.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죄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셰그윈에게도 반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착각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아직도 내 귓가엔 인간들이 울부짖던 소리가 선명하니까.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도 잘못됐다는 것이냐?"

검은 동공에선 오히려 광기가 비쳤다.

"어차피 악마에게 유린당했을 목숨이다. 그런 이들을 제물로 바쳤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됐다는 것이냐? 나를 모독한 건 빌어먹을 악마 새끼만으로도 충분하다. 닥치란 말이다!"

솟구치는 악마의 기운.

셰그윈의 말뜻을 생각해 볼 수는 있었다.

실제로 아르카나 대륙은 악마에게 짓밟혔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그랑펠에겐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나의 입술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대는 외면한 것뿐이다."

"...외면했다고?"

"추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것뿐이다."

설교를 할 생각은 없지만, 합리화를 들어줄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랑펠은 이럴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죽어라 발버둥 쳐서 잠깐이라도.

아르카나 대륙에 평화를 가져온 우리다.

지껄일 자격 정도는 있다는 거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하찮은 변명이 그대가 관철해 온 긍지라면."

그러고는 천천히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진정한 긍지로 꺾어주겠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셰그윈에게 내리는 그랑펠의 처분.

나는 말을 이었다.

"시공간의 사교장에 전한다."

"...?"

"초월자, 셰그윈에게 시공간의 결투를 신청한다."

"!"

그러자 시야가 뒤바뀌었다.

"검을 들어라. 나 또한 검을 들겠다."

그래, '새로운 검'을 말이야.

◈ 196화. 목격자들

시공간의 사교장 혹은 고인물 커뮤니티의 절대적인 규칙.

서로 간의 모든 적대적 행위는 금지된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는 규칙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관점에서는 모르겠다만.

플레이어들은 자존심 하나만큼은 대단하거든.

당장 인터넷을 켜서 아무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둘러봐도 진행 중인 키보드 배틀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까.

그게 고인물, 초월자들만 모인 시공간의 사교장이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아니, 심하다면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런 규칙을 첫 번째로 걸어둔 건지도 몰라.'

만약, 시공간의 사교장에 저런 제약이 없었다?

그 호화스러운 공간에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았겠지.

하지만 분쟁은 막으려고 한다고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뭣보다 허구한 날 싸워대는 플레이어들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봤을 AAU가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에 대비한 규칙이 존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단, 고인물 커뮤니티를 통해서 결투 콘텐츠 진행 가능.]

AAU의 자료엔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그 말을 번역하자면....

『단, 시공간의 사교장을 통해 결투를 진행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미완성이지만 나름대로.

그와 관련된 추가적인 규칙과 목적도 있었다.

[결투는 아르카나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

[랭커들의 결투에 많은 시청자가 몰릴 것으로 예상]

[그로 인한 스트리밍 부가 수입은 승자에게 배분]

[플레이어들의 레벨 상승 욕구를 자극 가능]....

거기까지 확인했을 때는 AAU가 괜히 아르카나의 개발진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야 플레이어의 심리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으니까.

랭커들의 결투.

그걸 아르카나 홈페이지에서 생중계하고.

그로 인한 부가 수입은 모두 승자가 독식한다니.

'나라도 군침을 흘렸겠는데.'

적혀있던 것처럼.

일반적인 시청자들에게는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고, 플레이어들에겐 랭커가 되어야만 하는 또 하나의 목적이 될 수도 있었겠지.

물론, 모든 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나는 셰그윈에게 시공간의 결투를 제안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그랑펠의 말대로 가짜 긍지를 진짜 긍지로 꺾기 위해서?

아니, 그랑펠은 몰라도.

나, 이호열에게 그런 멋진 이유는 없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제로 산맥의 최정상.

드래곤의 둥지에서 강렬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마탑의 마법진 너머로도 이 정도 기운이라니.

장담할 수 있었다.

만약, 드래곤이 깨어난다면....

'진짜 못 막는다, 저건!'

봉인 마법진이 있지 않냐고?

그건 뭘 모르는 매스컴에서 떠들어 댄 말이고!

마탑의 마법진은 드래곤을 봉인하는 마법진이 아니다. 애초에 용마대전에서 참패한 마탑이 그런 마법을 발현할 수 있을 리가 있겠냐고.

'정말로, 드래곤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마법진일 뿐.'

마탑답지 않게 공을 들였으니까.

정말 웬만한 소란에는 깨어나기는커녕.

뒤척거리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다.

다시금 그놈의 비바체를 원망할 수밖에 없구나, 그랑펠...!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선 이게 최선의 판단이다.

[시공간의 결투가 승인되었습니다.]

의식 속으로 전투 장소를 옮기는 것.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을 때야.

결투 승패에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이야기다.

'목숨이 걸려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달라진 건 나도, 셰그윈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뿐.

셰그윈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검은 동공이 처음으로 나와 마주쳤다.

"이런 규칙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신입답지 않아."

과연, 검성은 검성.

초월자는 초월자였다.

[천적관계]를 오로지 강인한 정신력만으로 극복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쪽도 정신력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아서 말이지.

"결투에 응한 판단을 칭찬하겠다."

봐라, 상대를 앞에 두고 칭찬을 해줄 정도로 태연하잖아?

시공간의 결투.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한 게 당연하다.

셰그윈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군."

건방지게 칭찬해도 오히려 감사하다니.

뭐냐, 그 찝찝한 반응은?

하지만 셰그윈은 진심으로 고마운 눈치였다.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머릿속이 편안해졌다."

...아, 그런 말이었어?

나는 드래곤을, 셰그윈은 천적을 피하려는 악마의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시공간의 결투가 승인되었다는 거겠지.

이내, 공간에 풍경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채워지는 것은 필드.

관중석까지 존재하는 게 영락없이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화려하구나.

갖가지 금은보화로 장식된 사교장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경기장.

무엇보다 크고 웅장하다.

'의식'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면 보는 것만으로 압도될 정도로.

슥─

그러나 나도 셰그윈도 의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망설임은 없다는 것이다.

셰그윈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대답이 없는 거냐, 아틀라스."

검강을 발산할 수 없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건가.

마치 그동안 걸어온 길을 모조리 부정당한 것처럼.

처량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군.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셰그윈.

아틀라스와 별개로 그랑펠의 처분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니까.

나는 읊조렸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관철한 헛된 긍지."

"...?"

"그를 검에게 부정당한 기분은 어떠한가, 셰그윈."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악마 한정으로 그랑펠의 화법은 바가지를 긁는 데 타고났다. 지금도 셰그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좀 봐라.

물론 아직도 멀었다, 셰그윈.

"그러나 나 또한 부정해 주겠다."

지금부터는 순전 그랑펠의 긍지 때문이었다.

악마로 타락, 검강까지 발산할 수 없게 된 셰그윈이었거늘.

그럼에도 자신할 수는 없다.

천적관계, 서클의 마법, 마왕의 전리품으로도.

마냥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검성은.

"나의 검으로."

그런데 검 대 검으로 맞서겠다니요, 그랑펠 씨...!

정말로 빌어먹게도 무거우신 그랑펠의 긍지가 아니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발상이다. 하지만 내가 마냥 대책도 없이 지껄인 건 또 아니거든.

그렇다.

모든 건 한결같은 발버둥.

귓가에 들리는 말, 하나하나 놓치지 않은 덕분이다.

셰그윈, 그쪽이 했던 말을 말하는 거야.

-"그깟 왕관을 누가 쓰든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마도구, 은하수 숫돌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에게 힘을 빌려줬을 뿐이다."

은하수 숫돌로 화룡점정.

비로소 귀철의 제련이 끝났다는 뜻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결투에서 정령 소환이 가능한 것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당연하다 대답해 줄 수 있다.

불가능하다면 정령 마법사는 결투에서 손가락만 빨다가 패배하라는 소리잖아.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이엘.

어째서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하이엘뿐만이 아니었다.

빈 공간에서 콜로세움이 생겨났던 것처럼.

콜로세움의 관중석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

그런데, 다들 익숙한 얼굴들이다...?

나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결투는 아르카나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

...그게 이런 식으로 구현되는 거였어?

*

제로 산맥.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시공간의 결투, 참관에 응하시겠습니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

"...엥?"

"이거 나한테만 뜬 거 아니죠?"

"시공간의 결투라고? 이건 또 뭐냐?"

여태까지 본 적이 없던,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시스템 메시지는 스팸 메시지 따위가 아니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잠깐만."

쿠구구구궁─

빛의 줄기가 향하는.

동시에 굉음이 들려오는 곳.

이건 호열과 관련된 일이 분명했다.

슈슈슉─

메시지는 빛의 행렬을 따라 산맥을 가로지르던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에게도 떠올랐다.

가장 앞서나가던 레오니가 걸음을 멈췄다.

"...결투?"

클래스, 광전사.

레오니에겐 익숙한 단어였다.

클래스 스킬의 숙련도를 향상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전투를 반복해야 하는 광전사.

그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사냥터가 아닌 전투가 끊이질 않는 콜로세움이었으니까.

구구구궁....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잦아드는 소음.

그러자 산맥을 가로지르던 라이트도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레오니는 확신할 수 있었다.

휙─

고개를 돌려서 외쳤다.

"누구랑 뜨는 건지는 몰라도 맞짱 뜨러 간 것 같아!!"

맞짱이라니.

그러나 돌발 상황에서 격식을 챙길 틈은 없었다.

히사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결투가 그 결투였을까요."

남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뭐가 됐든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이야."

결투라고 하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대체 어떤 결투길래.

다른 플레이어에게까지 참관 메시지를 띄운단 말인가?

세 사람이 다시금 눈빛을 교환했다.

"승낙하자."

"승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해야지. 참관."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

[시공간의 결투장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뒤바뀌는 시야.

"!!!"

마치 포탈을 타고 워프한 것처럼.

모든 풍경이 뒤바뀌었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레오니였다.

"미친."

시공간의 결투장이라고 하길래.

콜로세움이 맞구나, 확신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콜로세움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따져도 이렇게 웅장한 콜로세움은 처음이었다.

스스스─

이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콜로세움 관중석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플레이어들.

옆자리의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 말고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록스, 카밀라, 슈레이그, 류오쥔춘...?"

뱀눈을 흘기던 히사기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제로 산맥에 진입한 플레이어, 모두에게 메시지가 떠오른 모양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메시지에 거절할 플레이어는 없었겠죠."

덕분에 콜로세움의 관중석은 빠르게 채워져 갔다.

"이, 이런 경기장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잠깐.

광활한 콜로세움보다 중요한 게 떠올랐다.

'...호열 씨는?'

남태민의 시선이 콜로세움 중앙을 향했다.

"!"

그곳에는 역시나 호열이 있었다.

언제나처럼 꼿꼿한 호열이.

그리고 맞은 편에는 사내가 있었다.

"...누구야, 저거?"

파란색 머리카락.

멀리서도 눈에 띄는 개성적인 외형이었다.

마주친 적이 있었더라면 쉽게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짚이는 바가 조금도 없었다.

'호열 씨랑 결투를 벌일 정도라면....'

플레이어 중에서 그만한 실력자를 알아보지 못할 경우가 있을 리가.

곧장 결론이 나왔다.

저 사내는 아르카나인이다.

생각하던 와중 관중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나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뭐? 누군데?"

"저 검 말이야! 본 적 있어!"

"검?"

그 말에 일제히 사내의 검을 향하는 시선.

모두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저렇게 화려한 검은 흔치 않았으니까.

그랬다, 저건 검성의 검이었다.

남태민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검성도 파란 머리 아니었나?"

"검성, 셰그윈."

"맞아! 그 이름! 나, 들어본 적 있어!"

히사기의 말에 레오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플레이어들이 기억하는 셰그윈은 중년.

아니, 그보다 노년에 가까운 사내였으니까.

"회춘의 묘약이라도 먹은 건가?"

"아무리 아르카나라고 해도 그런 아이템이 있다고?!"

"아니, 그 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또 있었다.

"...왜 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건데?"

제로 산맥에 들리던 요란한 굉음.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호열과 검성이었단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호열을 곁에서 지켜봐 온 남태민 일행조차도.

쉽게 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역시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이엘이다."

허공에서 우아하게 내려오는 하이엘.

그런 하이엘의 품엔 웬 '검'이 안겨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검을 호열이 받아 들었으니까.

웅성웅성─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니지?"

"설마 검성이랑 검으로 맞붙는 거야?"

"그것도 젊음을 되찾은 셰그윈이랑?"

"아무리 호열 님이라고 해도 그건...!!"

그러니까 마지막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철컥─

호열이 검을 치켜든 순간.

자신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이유도.

[업적 : '전설'을 목격하다.]

.

.

.

나는 떠오르는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몇 번이나 다시 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귀철아....

[등급 : 전설]

...너 대체 뭐가 된 거니?

◈ 197화. 전설의 출현

[?]

[등급 : 전설]

[제한 : 알려지지 않음]

[효과 : 알려지지 않음]

[설명 : 고귀한 자아를 가진 에고 소드.]

이름은 물음표.

그 제한과 효과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길고 긴 기다림 끝.

뭐, 이딴 에고 장비가 만들어진 거냐고.

나는 한탄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등급마저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전설...?'

알려진 바.

아르카나에서 가장 높은 아이템 등급은 [에픽]이다.

가장 높은 등급의 아이템답게 [에픽] 아이템은 절대 흔하지 않았다.

마왕의 전리품 정도는 돼야 [에픽] 등급으로 분류됐으니까.

'저, 전서어어얼?!'

그런데, [전설]이라니.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듯.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업적 : '전설'을 써내려가는 자]

[효과 : 모든 '전설' 등급 아이템 친화력이 소폭 상승]

[지속시간 : 영구지속]

그저 아이템을 손에 쥔 것만으로.

업적을 달성하게 되다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귀철아, 너 정말...!'

레전드로 꼬장을 부리더니, 진짜 전설이 됐구나.

하긴 귀철의 행보를 떠올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질 뻔했다.

그 재료부터가 에고 장비가 되는 귀철이 아니던가?

거기에다가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이 제련을 맡았다.

호화스러운 담금질에 방점을 찍은 건 검성이 탐낸 마도구, [은하수 숫돌]이었으니.

과연, 귀하신 몸일 수밖에 없겠지.

근데, 잠깐.

마냥 흡족하게 볼 메시지가 아니잖아, 이거?

'...친화력?'

업적의 효과가 어째 범상치 않았다.

대충 뉘앙스를 보니까....

설마, [전설]급 아이템은 사용자를 가린다는 건가?

'친화력이 낮으면 사용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우려할 건 없었다.

다른 전설급 아이템이라면 몰라도.

귀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일 테니까.

[이미 친화력이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

내가 귀철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귀철이 나를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나의 자신감을 증명하듯.

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나의 주인이여.

과연, 손에 쥐여오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귀철의 목소리가 머리로 전해져 온다.'

귀철을 쥔 오른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울림, 고동, 공명....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느낌.

셰그윈이 어째서 검에게 말을 걸어댄 건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전에 쓰던 검도 모자란 게 아니었는데.'

[무명 대장장이의 유작-장검].

280레벨 제한의 장비였지만, 그래도 [유니크] 등급 장비였다.

[출혈] 효과까지 붙어있어서 검강을 발산하면, 500레벨 대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거늘.

'이건 차원이 다르다.'

내가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정말로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

과연, 검성이기에 검을 알아본다는 건가.

"...!"

셰그윈의 눈빛에 동요가 일었다.

댁의 아틀라스가 대단한 명검인 것쯤이야, 나도 그랑펠의 심미안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한데. 성능으로 보나, 심미적 관점으로 보나.

이젠 우리 귀철이가 몇 수 위처럼 보이는걸?

"...하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생각이 맞았다. 네놈은 흔하디흔한 마법사가 아니었어. 마법은 물론, 그만한 검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춘 괴물이었구나."

셰그윈은 끅끅─ 웃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세우고, 만장일치로 시공간에 입성한 거겠지. 빌어먹게도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셰그윈. 뭐가 유일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고, 뭐가 검성이라는 말이냐."

...아니, 처량한 신세 한탄 중에 미안한데요.

지금 누가 누구더러 괴물이라는 거야?

셰그윈,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만장일치로 시공간 입성이었다니, 고맙기는 한데.

그 업적이 어디 나 혼자 힘으로 세운 업적이냐고!

상위 마왕, 가미긴의 처치.

그건 말 그대로.

천운(天運)이 따른 덕분이었다.

마왕 쟁탈전으로 '지옥의 문'이 열리고, 그런 지옥에서 악크샨 선배님들을 불러내고, 도움을 받은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좀 민망해하는 척이라도 하든가.'

말하나 마나 그랑펠의 목은 꼿꼿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입은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다....

왜, 관중석을 한번 둘러보자.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인파 앞에서 망언을 뱉는다?

상상만 해도 더없이 끔찍하다....

허나, 나는 간과하고 말았다.

하이엘, 디엔드에 이은 나의 또 하나의 분신을.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애송이가.

...갑자기 뭔데, 급발진이야?!

'뭣보다.'

너 지금 셰그윈한테 애송이라고 한 거니, 귀철아?

저래 보여도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랑펠도 그렇게 시비조의 단어를 내뱉진 않는단 말이다.

차라리 셰그윈이 알아듣지 못했다면 좋았을거늘.

검기의 사용자가 검기를 알아보듯.

셰그윈 또한 아틀라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듯.

귀철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더러 애송이라고?"

순간, 솟구치는 살기.

그러나 귀철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애송아, 네 검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냐?

"...!"

-그 끔찍한 비명을 듣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가엾이 여기다니. 검을 쥐고 휘두른 세월이 무색하구나. 역시 너는 잘못된 길을 걸었다, 애송이.

검 대 검으로.

나의 긍지로.

셰그윈의 긍지를 꺾어주겠노라.

다짐이 무색해지게도.

이거, 내가 할 말을 귀철이 벌써 다 해버렸잖아.

정말이지, 누굴 닮아서 말 하나는 잘하는구나.

물론, 언제나 그 뒷감당을 해야 하는 건 나지만.

"다물어라."

빠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쇄도해오는 셰그윈.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천적관계]는 쉽게 극복할 수 없다.

타고나기를 거악으로 태어난 칠죄종, 탐욕조차도.

경험이 없다면 극복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타타탓!

그러나 이 순간, 셰그윈의 움직임에 공포는 없었다.

악마와 계약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걸어왔던 자신의 검로(劍路). 그 행보를 귀철에게 모욕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천적에 대한 공포마저 집어삼켰다는 거겠지.

그러나 명심해라, 셰그윈.

나는 냄새를 쫓았다.

냄새가 풍겨오는 방향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모든 것이 그대의 선택이었다."

어차피 죽었을 인간들이었다고?

아니, 셰그윈 당신이었다면 구하고도 남았다.

그쪽은 단지 저울질 끝에 선택한 것뿐이다.

최악의 길을.

생각하는 내게 귀철이 말했다.

-부탁이 있다, 나의 주인이여.

챙!

맞부딪히는 귀철과 아틀라스.

귀철이 음성이 더욱 가라앉았다.

-이 결투를 내게 맡겨주겠는가.

진심으로 그보다 듬직한 말이 또 없구나.

왜, 지금만 하더라도.

나는 셰그윈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거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빨라...!!"

"전성기의 검성이야. 얼마나 강할지 짐작도 안 돼!"

"그런데, 그런 일격을 호열 님이 완벽하게 막아냈다고!!"

과연, 지켜보는 플레이어들의 눈이 정확하다.

폭발력만 따지자면 전성기보다 강성해졌을 셰그윈의 육체.

그 쾌속의 움직임을 오직 냄새를 쫓아서 막아낸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덕분에 살았다, 귀철아.'

그렇다.

모든 것은 에고 소드, 귀철 덕분이었다.

내가 검을 치켜든 게 아닌 귀철이 나의 팔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란 말씀.

하지만.

"목적은?"

나는 몰라도.

우리 그랑펠 님께서는 호락호락 허가를 내주실 리가 없었으니.

그래도 그놈의 절차 덕분에 귀철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애송이의 검을 구원하고 싶다.

과연, 그랑펠의 분신다운 목적이시다.

그랑펠이 인류를,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하듯.

귀철, 너도 같은 검을 구원하고 싶다는 거구나.

당연하게도 그런 목적이라면 그랑펠도 반대할 수 없겠지.

"허가하겠다."

귀철에게서 고동이 전해져 왔다.

-너그러운 자비에 감사를 표하겠다, 주인이여.

나는 콜로세움을 둘러봤다.

"데뷔 무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러고는 검강을 발산했다.

귀철의 검신을 타고 흐르는 은빛의 기백.

이내, 검강을 두른 귀철이 나를 이끌었다.

"뜻대로 날뛰어도 좋다."

가속했다.

'...근데, 잠깐만.'

내가 날뛰어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야.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내가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잖아, 이건!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귀철아, 네가 비바체보다 한술 더 뜨는구나....

.

.

.

쾌검(快劍).

속도에 중점을 둔 셰그윈의 검술.

그런 검술이 비롯되는 바탕은 육체였다.

검을 휘두르고 거두는 것은 검사의 육체였으니까.

그것이 셰그윈이 젊음을 갈망한 이유였다.

-"이건 계약입니다. 젊음을 거머쥘 수 있는 계약."

악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셰그윈은 자신의 노쇠한 육체를 바라봤다.

자신의 검로.

그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거늘.

자신에게 남은 수명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간악한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다물어라."

발검(拔劍).

검집에서 아틀라스를 빼 드는 속도 또한.

더는 쾌검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느릿했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성에는 가엾은 인간들에게 나눠줄 식량 따윈 없습니다. 굶어 죽거나 악마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당하다 죽겠지요. 셰그윈 경은 그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셰그윈은 주먹을 쥐었다.

결국, 은발 사내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그저 인간으로서 최악의 판단을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않겠다 결심했다.

검로의 끝에 다다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었으니.

'그런데, 정작 네가 나를 저버리는구나. 아틀라스.'

셰그윈은 사내의 검을 바라봤다.

흑색으로 물드는 검신(劍身).

은빛의 검강(劍罡).

마주한 사내의 검강은 지나치게 찬란했다.

셰그윈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래 봬도 검성이었으니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고유의 색을 가진다.

사내의 검강을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생사의 고비를 겪어왔는지를.

저런 괴물 같은 능력을 갖춘 사내가 어째서.

수많은 생사의 고비에 처했었는지도.

그래, 그는 고비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찬란을 넘어 '숭고'한 검강이 그 증거였다.

셰그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인정하마. 너는 내게 지껄일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네 말에 걸음을 돌리기에는.

나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그것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셰그윈이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그러니 모든 걸 네게 맡기마.'

나의 처분도.

검성의 칭호도.

그리고 아틀라스, 너도.

그러나 쉽게 넘겨주지는 않으리라.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보아라."

이것은 추악한 칼잡이의 알량한 자존심.

셰그윈은 신경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근육을 쥐어짜 냈다.

검강을 발산할 수 없는 지금.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우월한 육체 능력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내는 쾌속에 반응해 냈다.

챙!

츠릉!

챙!

그것도 모자라 쾌속을 따라오며 합을 맞췄다.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는 사내였다.

그 복장 또한 시공간의 사교장에서 봤을 때와 별다를 게 없었거늘.

예복에 가까운 불편한 차림으로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사내의 검이었다.

챙!

강렬하다.

아틀라스가 맞대결에서 밀릴 만큼.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검이란 말이냐.'

셰그윈이 의문을 되뇌는 순간.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애송이가 감히 이 몸을 가늠하려 들지 마라.

"...!"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검, 주제에 어찌 나의 머릿속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셰그윈이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도 네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네 검이 울부짖는 소리가.

"!"

-나는 네놈의 마음을 읽은 게 아니다.

"...그렇다면."

-네 검과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

흠칫한 셰그윈은 아틀라스를 바라봤다.

여전히 아틀라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의 검이 대신하여 말을 전해왔다.

-자신의 검이 분하고 원통해서 울부짖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다니. 신검합일의 경지가 무색하구나. 애송아.

...아틀라스가 분하고 원통해 울부짖고 있다고?

"!"

셰그윈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다, 검로(劍路)였다.

검의 길이기에.

검과 함께 걸어야만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만했다.

네가 없으면 걸을 수 없는 검로였거늘.

아틀라스, 너를 그저 휘두르는 무기로만 여겼다.

"...."

셰그윈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못된 길.

후회해도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끝으로 사내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관철한 헛된 긍지. 그를 검에게 부정당한 기분은 어떠한가, 셰그윈. 그러나 나 또한 부정해 주겠다. 나의 검으로."

'그대는 굳이 검을 들 필요가 없었거늘.'

비로소 말뜻을 깨닫게 되었다.

사내의 검강이.

어째서 그토록 숭고한 빛을 띠고 있었는지도.

셰그윈은 입을 열었다.

"그대의 뜻을 미련한 내가 알아들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사내의 배려.

검성, 아니 글러 먹은 노친네에 대한 구원.

"그 뜻에 전력으로 화답하겠다."

그러자 사내의 검이 말했다.

-오너라. 나는 오늘 쾌검을 베고, 나의 주인은 검성을 베리라!

그리고 승부가 났다.

서걱─

◈ 198화. 길을 밝히겠다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