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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화. 엘프 (1)

정기 업데이트.

새롭게 떠오른 업데이트 내역.

──────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지역이 찾아옵니다.

신규 지역, '전장 : 고통을 먹는 산짐승 vs 엘프'가 추가됩니다.

세력에 합류해 퀘스트 시작 가능.

단, 선택에 따라 특정 세력과의 관계도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고통을 먹는 산짐승 우두머리' : Lv.9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성체' : Lv.7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새끼' : Lv.500

──────

반응은 크게 갈리지 않았다.

"간만에 지역 업데이트인데.... 뭐?"

"전장?"

"내가 아는 그 전장 맞아?!"

[미궁], [던전], [전장]까지 현실에 생성됐다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플레이어들에게 전장은 횡재나 다름없었다.

"대충 눈치 봐서 이길 것 같은 세력에 붙으면 됐으니까요."

"전투 기여도에 따라서 퀘스트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일단,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명성이 올라갔었잖아. 그래서 전장만 찾아다니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지, 아마?"

"맞아요, 특히 용병들!"

전장, 바꿔 말하자면 전리품이 가득한 장소.

말마따나 누구보다 전장에 익숙한 건 용병들이었다.

그러니 최강의 용병단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림자 용병단, 그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쾅!

굉음의 근원지는 이번에도 락키드였다.

"전장이라잖아, 전장!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 아니었어, 다들?"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우렁찬 목소리.

덕분에 그림자 용병단에게는 적잖은 시선이 쏠렸다.

아까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테이블에 죽치고 있던 연맹 탐험가부터.

유명 길드의 정보원, 넷튜버 플레이어들까지.

"역시 락키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진짜 고막이 쓰라릴 정도야. 그래도 덕분에...."

"잠깐! 다들, 쉿!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것 같아."

주변인들의 시선 따윈 상관없다는 듯.

꼴깍─

단장, 키치는 잔을 비워냈다.

그러고는 락키드를 노려봤다.

"야, 말석."

"...엉?"

"석석석. 이 돌대가리가!!"

"!!!"

결국, 키치가 폭발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후폭풍이 얼마나 거센지는 그림자 용병단 전원이 알고 있었다. 슬금슬금. 알카리를 비롯해서 몇몇은 일찌감치 자리를 떠났다.

곧장 돌변한 키치의 눈매가 락키드를 향했다.

"넌,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니?"

평소의 술주정이 연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시선에선 명백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단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처럼 날카롭다.

...꿀꺽.

락키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이 천하의 락키드 님을 용병단 따위에 발을 붙이게 한 장본인다웠다. 그야말로 천살성. 하늘의 비수라고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기세로군.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야.'

키치의 손에는 무기 하나 들려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젖에 칼날을 들이댄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생사가 오가는 콜로세움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살기.

그러나 락키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이제야 좀 내가 아는 단장답군."

"지랄은."

...흥분했어.

키치는 락키드의 능청에 이성을 되찾았다.

젠장,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키치가 살기를 흩트렸다.

"미안, 신경 쓸 게 많아서 평소처럼 참을 수가 없었네."

정말로 빌어먹게도 신경 쓸 게 많아서 말이야.

다시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필이면 엮여도 그런 대사건에 엮일 게 뭐람!

'전장 수준이 아니잖아, 성전은.'

그랬다.

그림자 용병단 또한 성전에 참여하게 됐으니까.

자신들을 잘 아는 누군가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그림자 용병단에게 긍지라니, 그런 게 잘도 남아있겠다고.

맞는 말이었다.

키치가 성전에 참전한 이유는 뭔지도 모르는 긍지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이놈의 입방정!'

언제나 입이 문제였다.

키치는 유스라의 국왕, 하쿠나에게 정식으로 권유를 받았다.

성전에 참전할 의사가 있느냐고.

왕의 물음에 키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었다.

-"용병단 전원, 몸값만 맞춰주신다면야."

그림자 용병단의 몸값?

웬만한 용병단을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막말로 천 금을 가져와도 내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둘, 셋 정도의 인원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완곡한 거절이었다.

-'악마와의 성전? 그런 건 만 금을 준대도 안 한다. 진짜.'

그러나 키치는 간과하고 말았다.

유스라.

이 고대 왕국이 어째서 보물섬으로 불렸는지를.

"진짜아아아."

그것은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만 금으로 부족하면 십만 금을, 그로도 부족하면 백만 금을. 유스라 왕국의 재력은 키치의 예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아득하게! 키치는 자신의 주둥이를 두들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억만 금이라고 불러라도 보는 건데...!"

우려가 될 정도로 급격한 감정 변화.

"...키치, 취했나?"

"방금 이야기는 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술주정이었나 봐요."

"대낮부터 달리더니, 벌써 필름 끊긴 거야?"

지켜보는 모두가 술주정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락키드는 알고 있었다.

방금 전, 단장의 살기는 분명 진심이었다는걸.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었다.

"성전에 앞서서 몸풀기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몸풀기?"

"구경만 하고 온다고, 단장. 그것보다 다들 솔직해지는 게 어때? 솔직하게 궁금하잖아?"

"?"

"엘프가 어떻게 생겨먹었을지 말이야."

"...!"

키치는 락키드의 눈을 바라봤다.

반짝반짝한 게 포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네, 저거.

게다가 락키드의 말이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엘프라.'

드워프가 희귀한 종족이라면, 엘프는 전설 속의 존재였다.

갖가지 의뢰가 몰려드는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서 중에서도, 엘프와 관련된 의뢰서는 단 한 장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의뢰서에서도 말이다.

그것만 봐도 엘프가 얼마나 신비한 종족인지 짐작이 됐다.

'뭐, 갑자기 튀어나온 걸 보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흐음, 용병단에게 정보는 언제나 중요한 법이니까.

락키드의 말에 키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 대신 싸움은 절대 금지야."

"...뭐?! 전장에서 싸움 금지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단장, 혹시 내 걱정을 하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좀 감동인데!"

"감동은 지랄. 선금받은 게 있단 말이야! 어디 지금 네 몸이 네 건 줄 알아?! 혹시라도 다쳐서 성전에서 빠지기라도 해봐. 네가 의뢰비 대신 토해낼 거냐구!"

*

마탑.

유일한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가 입을 열었다.

"엘프라, 우리 이호열 수석의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 못할 정도의 소식이로군요. 그래서 문제는, 그 싸가지 없는 족속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느냐는 건데...."

...싸가지? 원로께서 시작부터 비속어라니요.

나는 속내를 감춘 채 유그위드를 바라봤다.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유그위드는 온화한 외관과 다르게 입이 걸걸했다. 이쯤 되면 확신할 수 있었다.

세니오스도 그렇고, 마법사들은 절대 외관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걸.

'첫인상을 믿지 말자.'

다만, 마르셀로는 예외다.

깡마른 몸은 여전했구나.

하지만 전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는 아니군.

개고생을 끝에 시한부의 저주를 해주한 보람이 있구나.

"현시점에서 엘프는 큰 변수입니다."

듬직하다, 마르셀로.

말 한번 잘한다, 마르셀로.

과연, 낙하산인 나와는 다르다.

마탑의 수석에 걸맞은 지식과 경험.

마르셀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하필이면 성전이 벌어진 지금. 그들의 고향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모습을 드러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잠깐만, 이거.

눈깜짝할 사이에 고급 정보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잖아?

엘프.

사실 업데이트 내역에서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빌어먹을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이 또 발목을 붙잡겠구나, 싶었거든.

그러나 문명의 이기.

인터넷을 열고 엘프에 대해 검색을 해본 결과.

10년 하고도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엘프에 관해서는 밝혀진 게 없었다.

심지어는 엘프가 전설에 불과한지, 실존하는지조차 플레이어들은 알아내지 못했단 뜻이었다.

그런데.

'싸가지 없는 족속인 것도 모자라서. 엘프의 고향이 시슬리라고?'

마르셀로와 유그위드의 입에서.

어떤 플레이어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가 술술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머릿속에 고이 새겨넣었다.

물론, 놀란 내색은 없었으니.

"경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마르셀로의 물음에 나는 뻔뻔하게도 답했다.

"과연, 그들의 의도가 불분명하군."

엘프가 어째서 악마와 맞붙었는지.

나로서는 사연을 알 방법이 없다.

[마안의 망원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과 재사용 대기시간을 생각하면.... 엘프가 얻어걸려 보이길 바라는 게 양심이 없는 거겠지.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그러나 악마들의 의도는 알 수 있겠지."

그렇다.

그랑펠의 고귀하신 긍지에 중요한 건 엘프가 아닌 악마라는 것.

그나저나, 레벨 한번 살벌하군.

900레벨이라니.

아르카나 대륙에서 봤던 거대 악마족 몬스터와 비슷한 수준이잖아?

물론, 레벨이 전부는 아니다.

950레벨 몬스터라고 해도 네임드 몬스터, 진명의 악마에 불과했으니까. 마왕이나 거악 같은 보스 몬스터와는 체급에서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겸손하게 생각해도....'

검강이라는 새로운 경지.

거기에다가 [첫 세계수의 축복]이 지속 중인 지금이라면.

'나,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 사전에 합의한 대로 움직이면 되겠군요?"

유그위드가 묻자 마르셀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탑에선 마티스 선임, 그가 나설 차례입니다."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마탑을 비롯해서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그림자 용병단까지. 이미 사전 합의에 따라서, 균열에 진입할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유그위드가 나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우리 이 수석께서는 쉬는 날이 없네요?"

쉬는 날이 없다.

만약, 직장 상사가 저런 말을 했다면.

약 올리는 건가, 진짜 한 판 뜨자는 건가, 싶었겠지만.

이 또한 내 입방정이 자초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깍두기였다.

나는 절차나 정해진 순서와는 무관하게 균열에 진입할 '권한'을 보장받았다는 소리다. 악마라면 두고 볼 수 없는, 긍지가 이렇게 피곤하다, 진짜.

그러나 처량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복귀한 후 원탁회의에서 나누도록 하지."

그래,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깍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자, 호열아.

그나저나 균열에 진입하기 전에 확실하게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어째서 두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 거지?'

엘프가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최근에 벌어진 일이겠지. 그런 엘프들에게 악마가 먼저 시비를 걸진 않았을 것이다.

악마들은 [마왕 쟁탈전]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도 바쁜데.

엘프를 건드릴 명분이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엘프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거잖아?'

기승전긍지.

그랑펠이 그랬던 것처럼.

엘프가 아르카나 대륙이 마수에 쑥대밭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움직였다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분명 싸가지 없는 족속이랬지?'

유그위드의 말이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질 줄이야.

그런 의미에서 동행하는 선임이 마티스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다른 선임, 그중에서도 벤쉬였어 봐라.

'잔소리하느라 균열 공략이 끝나도 모를걸?'

나는 집무실로 향했다.

곧장 찻물을 끓였다.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길 목적이 아니라 비약초 도핑 때문이다.

엘프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지금.

준비는 철저할수록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

달칵─

그러나 이내,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스마트폰에 떠오른 메시지.

속보 때문에.

[속보 : 신규 지역, 전장 전투가 종료된 것으로 보여...!]

[플레이어 曰, "떠올랐던 퀘스트가 클리어됐다."]

[전장 퀘스트에 참여한 플레이어는 없는 것으로 확인....]

플레이어들이 전장에 뛰어들기도 전투가 끝나버렸단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엘프와 악마.

두 세력의 전투가 예상보다 빠르게 결판이 났다는 것.

"차 한잔 즐길 시간도 주지 않는다니. 성급하군."

그 승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엘프와 악마.

둘 중 하나가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리였다.

.

.

.

락키드는 전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주했다.

길게 솟은 귀.

조각과도 같은 외모.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

저 녀석이 바로 엘프다.

기척을 알아차린 걸까.

엘프가 락키드를 바라봤다.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축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축복? 갑자기 뭔 개소리를."

"미련하게도, 축복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고는 검을 치켜들었다.

"역시, 악마고 인간이고."

"...?"

"상대할 가치도 없구나."

"...!"

콰콰쾅!!!

◈ 162화. 엘프 (2)

그림자 용병단.

그들의 강함은 오히려 대격변 이후에 널리 알려졌다.

과거엔 그림자 용병단의 명성을 소문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현실에서 그들의 능력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락키드는 유명인사였다.

"왜, 어제도 한 명 기절했잖아요."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에선 락키드의 술주정이 명물로 여겨졌다.

간혹가다 오지랖이 넓거나, 불의를 참을 수 없는 플레이어들이 락키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그 값을 호되게 치르곤 했다.

"말로는 고막이 터졌다나 뭐라나?"

그저 고함만으로 300레벨이 훌쩍 넘는 플레이어를 기절시켜 버리다니!

락키드를 둘러싼 소문은 거기서 끊이지 않았다.

주목받는 걸 즐기는 락키드가 아니던가?

락키드의 전투 영상은 인터넷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냥 무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ㄷㄷ

-괜히 그림자 용병단 소속이 아니잖음;;

-저 몸으로 이렇게 빨리 움직인다고? 말도 안 되네ㄹㅇ

그런 락키드에게 매스컴의 관심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역시나 관심이 고팠던 락키드였기에.

락키드는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ㄹㅇ? 콜로세움의 무법자가 락키드였다고?

-그 100승 무패의 검투사?

-아니 잠깐, 뇌까지 근육인 사내도 락키드라는데?!

-뭐야뭐야 인간의 탈을 쓴 오우거도 락키드였어?!!

간만에 들어도 뭣 같은 이명들이었지만.

락키드는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비로소 자신의 강함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콰콰콰콰쾅!

"이런 미친!!"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졌다.

카가가각!

튀기는 불씨.

락키드는 양손 도끼를 치켜들어 간신히 검격을 막아냈다.

그럼에도 전달되는 충격.

콰득!

밟고 있던 지반이 뭉개지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몸뚱이가 몇 발자국이나 뒤로 밀려났다.

락키드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엘프, 뭔지는 몰라도 빌어먹게 싸가지가 없군. 그래?"

다짜고짜 칼을 들이댈 줄이야.

그나저나, 한잔 걸쳐서 취하기라도 했더라면....

정말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척─

락키드는 도끼를 치켜들고 녀석과 눈을 맞췄다.

다시 봐도 이질적인 시선이다.

전장에서, 또 생사결의 결투에서.

수많은 이들의 눈빛을 지켜봤건만.

저런 시선은 처음이었다.

예를 들어 비교 대상을 꼽자면....

자신에게 노골적인 살기를 뿜어대던 단장, 키치를 예로 들어볼까.

'...저딴 걸 살기라고 볼 수 있을까?'

그녀와 다르게 녀석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벌레에겐 살기조차 내뿜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처럼.

업신여기는 눈빛이 분명했으니까.

"곱상한 쌍판부터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는데?"

싸움은 절대 금지.

신신당부한 단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걸려온 싸움을 피하는 것? 천하의 락키드 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콰득─!

락키드의 근육이 순식간에 수축.

콰쾅!

그대로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첫 합으로 깨달았다.

저 엘프 녀석 앞에서 힘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락키드의 도끼가 엘프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다시금 마주친 시선.

눈매가 여전히 오만하다.

'건방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고!'

락키드가 함성을 질렀다.

"내 이름은 락키드! 네 목을 취할 사내다!!"

그림자 용병단의 말석.

그러나 락키드가 그림자 용병단에서 최약체란 뜻은 아니다.

근력에서 나오는 일격의 파괴력.

그 공격 하나만큼은 용병단 내에서도 락키드가 최고로 꼽힐 정도였으니까. 그런 일격이 코앞에 드리운 순간이거늘. 녀석에게는 동요가 없었다.

"가엾구나."

단지 그렇게 지껄였을 뿐.

가엾다니?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혹시라도 개소리로 내 정신을 흔들 생각이라면.

'어림도 없다고 대답해 주마!'

스와아아악!

락키드가 이를 악물고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 순간 녀석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웬만한 마법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일격을 달랑 검 한 자루로 막아내겠다는 건가?

'건방진 새끼가.'

쾅!!!

거대한 도끼와 검이 맞닥뜨리는 순간.

부들부들─

무너진 건 오히려 락키드의 육체였다.

...막혔다?

나의 일격이?

고작 검 한 자루에?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락키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으로 어떻게?"

오만한 시선이 다시금 락키드를 향했다.

"이것이 바로 태생의 차이라는 것이다."

"...태생의 차이?"

"축복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것들의 차이."

다시금 튀어나온 '축복'이라는 개소리.

공격이 막힌 것도 빌어 처먹을 일인데.

정작, 눈앞의 녀석은 전투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있었다.

천하의 락키드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락키드가 다시금 완력을 끌어올리던 때였다.

"뭐,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

"그렇기에 하찮은 것들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단 뜻이다."

어디냐?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거늘.

시야에서 놈을 놓치고 말았다.

빠르다, 신속하다를 넘어서.

저게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이 맞기는 한 건가?

'차원이 다르다.'

락키드의 머릿속에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말.

-"이것이 바로 태생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이었나?

인간이 아닌 엘프이기에 저런 나약한 육체로 괴력을 내뿜을 수 있고. 인간을 초월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건가? 락키드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세상은 빌어먹게도 불공평ㅎ...!"

푹!

"컥!"

가슴팍을 파고드는 검.

수많은 전투 경험 덕분인가.

먼저 몸이 반응했다.

덕분에 검격은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 나갔다.

울컥!

"...미친 새끼. 그 개소리가 진심이었구나."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로써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엘프, 저 녀석의 공격에는 생명을 빼앗는다는 희열도, 고뇌도, 심지어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작은 벌레를 짓밟듯 자신의 심장을 노린 것이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괴물.'

엘프,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괴물이다.

락키드는 고꾸라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전투를 그려봤지만.

젠장, 승리하는 그림은 단 한 장도 없었다.

죄다 패배다, 빌어먹을.

"거 미안하게 됐수다, 단장."

락키드는 머릿속으로 더듬더듬 숫자를 떠올렸다.

보자, 주점에 달아놓은 외상만 따져도 내가 받을 의뢰비 몫보다 많을 텐데.... 단장이 내 몫까지 채우려면 성전에서 부리나케 고생 좀 해야겠군.

생각을 끝마친 순간.

락키드의 눈빛이 돌변했다.

갑작스럽지만, 강자와의 전투에서 숨을 거두는 건.

언제나 바라오던 죽음이 아니던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평생 갈 상처 하나를 남겨주는 것."

단장이나 울프 녀석이면 몰라도.

저딴 귀 큰 놈에게 이런 다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도끼를 뽑았다면 말이야.

그럴싸한 상처 하나쯤은 남겨주겠다는 말이다.

"으아아아아!"

기합과 함께 힘을 끌어올렸다.

입에서,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지만 락키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다. 재수 없는 쌍판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마."

어차피 꺼져가는 생명이라면 짧고 굵게 불사르리라!

.

.

.

플레이어들은 전장을 바라봤다.

"그래, 이게 바로 전장의 냄새지!"

퀘스트와 전리품이 존재하는 전장이다.

게다가 전장에 있는 게 전설 속 존재인 엘프라니.

플레이어가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예상과는 달랐다.

──────

'고통을 먹는 산짐승 우두머리' : Lv.9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성체' : Lv.700

'고통을 먹는 산짐승 새끼' : Lv.500

──────

최소 500레벨부터 최대 900레벨까지.

전장에서 놈들과 마주치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기겁했다.

'크다'를 넘어서.

거대하다.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다.

"아, 아니. 뭔 몬스터가 저렇게 커!!"

크게는 수십 미터.

새끼로 보이는 녀석조차 3층 높이는 될 정도의 크기였다.

게다가 머릿수도 지나치게 많았다.

전장 지역이 허허벌판에 생성됐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게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진짜."

악마의 규모에 압도되기도 잠깐.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머릿수를 맞추려면 엘프의 숫자도 그에 못지않게 많아야 할 텐데.

어째서인가, 시야에 들어온 건 고작 한 명의 엘프뿐이었다.

"설마, 저게 다?"

거대한 악마 대군에 맞서는 단 한 명의 엘프.

누구보다 빠르게 전장에 뛰어들려고 생각한 이들조차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되냐?"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진행 중인 지금.

아무리 전리품이 좋다고 하더라도 악마의 편에 설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선택지는 하나. 엘프에게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아니, 우리가 가세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패색이 짙은 전장에 뛰어든다?

망설여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슥─

"어, 어라?"

길게 늘어진 금빛 머리카락.

샥─

"잠깐만."

금빛 잔상만을 남긴 채.

엘프가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푹─

"...엥?"

그것으로 전투는 끝나버렸다.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듯.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장 : 고통을 먹는 산짐승 vs 엘프'이 종료되었습니다.]

보는 것도 모자라 동영상으로까지 기록된 결과였거늘.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혼자서 수많은 악마 사이로 뛰어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단 말인가? 모두가 경악하던 도중 몇몇 플레이어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잘하면 관계도 쌓을 수 있는 거 아니냐?"

"이제 막 현실로 소환된 참이니까."

"친절하게 안내해 주면서...!"

엘프, 상상조차 못 했을 수준으로 강하다.

겨우 검을 몇 번 휘두른 것만으로 900레벨 악마족 몬스터를 도륙 내버릴 정도로. 친분을 쌓아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플레이어들이 엘프 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

범상치 않은 눈빛과 마주했다.

엘프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한 것이었다.

악마를 바라볼 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눈빛이.

압박감에 모두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단 한 사람, 락키드를 제외하고는.

"그대는 우리의 축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축복? 갑자기 뭔 개소리를."

"미련하게도, 축복이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저런 압박감에도 평소처럼 말을 뱉을 수 있다니.

과연, 그림자 용병단원다운 담력이었다.

그러나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쾅!

엘프가 락키드에게 쇄도했으니까.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저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우, 우릴 진짜 죽이려고 한 거라고?!"

지켜보던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락키드를 응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나 응원이 무색하게도.

고작 두 합 만에 엘프의 검이 락키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바닥에 흩뿌려지는 혈액.

"...야씨, 이거 보고만 있는 게 맞냐?"

"아니,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봐도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요?"

엘프.

미지의 존재.

미지의 강함.

미지에서 오는 공포감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점차 둔해지는 락키드의 움직임.

몇 방울에 불과했던 피가 어느새 주변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저러다가 진짜 죽겠어!"

락키드가 쓰러지면, 그다음에는?

엘프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엘프에게는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야 엘프가 락키드와 나눈 대화라고는 고작....

"축복인가, 뭔가를 물어본 게 전부였잖아?"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건 락키드나 자신들이나 피차일반.

도망쳐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락키드에게 합류해야 하는가?

패닉에 빠진 플레이어들이 머뭇거리던 순간이었다.

"...거 지랄 맞게 강하군."

쿵!

피투성이가 된 락키드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어차피 꺼질 숨에 더 이상 관심 따윈 없다는 것인가.

엘프의 시선이 옮겨갔다.

락키드에게서 플레이어들 쪽으로.

누군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도망치기엔 늦었어요. 그리고 이대로 도망치면...!"

저 칼날은 취재진, 일반인들을 향하게 된다.

사실 예전 같았으면 말이야.

고민조차 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었겠지.

그러나 빌어먹을 퀘스트가 자꾸만 눈에 걸렸다.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그놈의 긍지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저런 싸이코 엘프에게서 내빼는 걸 몸이 거부했다.

물론, 모든 플레이어가 같은 심정은 아니었다.

"저, 전 몰라요! 저런 괴물을 어떻게 막겠다고!!"

"...합류하겠습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어쩐지 후원이 많이 터지더라니! 젠장, 형님들 저 먼저 갑니다!"

소란 속에서.

엘프가 걸음을 옮겼다.

검을 바로 쥐고는.

여전히 오만한 시선으로.

플레이어들에게 접근.

"...!!!"

...하려던 순간이었다.

고오오─

허공에서 마력이 일렁거렸다.

고위 마법, 포탈.

넘실거리는 마력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미지의 존재.

미지의 공포 앞에서도.

언제나처럼 긍지 높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멈춰라."

그저 말을 내뱉었을 뿐이거늘.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

멈춰라.

그 말에 복종하듯.

순식간에 멈춰버린 엘프.

"...!"

변화 없던 엘프의 얼굴에 동요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

.

.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 163화. 또 하나의 천적관계 (1)

나는 마티스와 마탑을 거닐었다.

거닌다고 해도 고작 계단 몇 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눌 새가 없다.

"이호열 수석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엘프였다. 유그위드나 마르셀로 못지않게 마티스도 엘프에 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흑마도학의 정립을 위해 대륙을 떠돌던 시기였습니다."

마티스는 다른 마법사들보다 출탑이 잦았던 모양이었으니까.

내가 출탑의 전권을 맡게 된 지금이야, 이유만 그럴싸하면. 그러니까 벤쉬 윌리엄처럼 헛소리만 적어놓지 않으면 출탑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의 마탑에선 출탑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지.'

마탑이 마티스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다는 증거겠지.

마르셀로 등장 이전.

유력한 차기 수석 마법사 후보로 여겨지던 마티스였으니까.

"고대의 서적에서 종종 엘프에 관한 글귀를 접했었습니다."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마티스의 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엘프, 장난이 아니잖아?

한마디로 아르카나 세계관에서 엘프들은 선택받은 유이(唯二)한 종족이었다. 명실상부 아르카나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과 함께 말이다!

흠잡을 곳 없는 용모는 기본.

세계수에서 성년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육체적, 정신적 능력은 인간으로선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쉽게 말하자면 좋은 건 다 가져다가 붙인 종족이 바로 엘프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거늘.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겁의 세월을 향유하는 존재들이라 전해졌습니다. 물론, 전설에 불과하기에.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그러니까 저런 능력을 가진 엘프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거잖아? 얌전하게 시슬리란 곳에 머물다가 갑자기 아르카나 대륙, 그것도 모자라서 현실에 튀어나온 거고.

머리가 지끈거렸건만,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태연하게 지껄였다.

그러고는 마티스가 발현한 포탈로 진입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확인할 좋은 기회겠군."

싸가지....

아니, 엘프와 마주하게 되는 마당에 쓸데없이 마력을 소모해서 좋을 건 없겠지. 이내, 순식간에 뒤바뀌는 시야. 이내, 나는 나의 판단에 감탄하고 말았다.

후각을 파고드는 피비린내.

상처투성이의 거구, 락키드.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들까지.

역시, 마력을 아껴놓길 잘했군.

"멈춰라."

무엇보다 먼저 이놈의 주둥이가 뛰쳐나갔다.

...언제나처럼 내뱉고 생각하니까 말이야.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는 걸로 봐서 악마는 처치된 거겠지.

문제는 그 수많은 악마를.

누가, 이 찰나의 시간 만에 쓰러트렸냐는 말이다.

분위기만 봐도 짐작이 가는데.

일단, 플레이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900레벨 악마족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현시점에서 나 빼고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락키드도 아닐 거다.

미래를 예측하고 움직인 게 아닌 이상.

시간상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저 엘프가 혼자서 모든 악마를 처치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락키드를 저 꼴로 만들었다.

이유?

그딴 건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저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까 다짜고짜 말부터 내뱉은 거겠지.

'...뒷감당은 내가 하게 생겼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저 엘프와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그림자 용병단의 락키드조차 저런 꼴이 됐는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

[천적관계]라도 발동된 상태라면 모를까.

특기가 주제 파악인 만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믿을 구석, 마티스는 어떤가?

솟구치는 이질적인 마력.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는 건가.

마티스는 시작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눈치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용마대전.

천하의 마탑에게 패배를 선사했던 드래곤이다.

그런 드래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존재가 엘프고.

비로소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실감이 된다.

하여튼 말로 매를 버는구나...!

그러나 더 이상의 자책은 없다.

그랑펠을 탓하기엔 눈앞의 엘프가 부담스러워도 상당히 부담스러웠으니까. 일단, 마력부터 장전하자. 검강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상대가 원하는 접근전은 해줄 필요가 없....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움찔!

"!"

엘프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누구보다 놀란 건 나도, 마티스도 아닌 당사자였다.

엘프, 메시지에 떠오른 정보에 따르면 엘시도어겠지.

엘시도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대체 무엇이냐?"

이호열이다.

이름 정도 대답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하지만 '당신'도 아니고 '너'라니.

격식 없는 질문에 대답할 리가 없는 나였다.

그런데, 어째 궁금한 게 내 이름이 아니었나 보군.

"어떻게 네까짓 인간이 어머니의 축복을...!!"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

[첫 세계수의 축복].

[축복의 위계질서].

[엘프].

비로소 나는 깨닫고 말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엘프와 관련된 거였나?'

추측이 확신이 된 건 축복의 효과 때문이었다.

생명력, 마력 재생력 효과는 그럴 수 있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거절'이라는, '친화력'보다 상위 개념의 효과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첫 세계수의 축복이 노화를 거절합니다.]

엘프가 영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군.

엘시도어가 나를 향해 살기를 뿜어댔다.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

"네놈에게서 어머니의 축복을 거둬가고 말 것이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는 마티스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겠지.

한껏 이질적인 마력을 끌어올렸는데.

엘시도어가 굳어버린 것도 모자라서.

축복인가, 뭔가 하는 말만 지껄이는 꼴처럼 느껴질 테니까.

나는 엘시도어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엘시도어에게 말했다.

"목적은 오직 축복뿐이었는가."

"뭐라고?"

"축복 때문에 이런 만행을 벌인 것인가."

사방이 락키드의 피로 흥건하다.

공포에 하얗게 질린 플레이어들의 얼굴까지.

그러나 엘시도어는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군."

이해할 수 없다고?

"가로막았기에 짓밟았을 뿐이다. 악마든, 인간이든."

나, 이호열은 참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랑펠은 아니었다.

나는 마티스에게 말했다.

"마티스, 락키드의 치료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맙군."

모든 것엔 절차가 있다.

엘시도어를 상대하는 것도 좋지만, 치명상을 입은 락키드의 부상을 치료하는 게 우선. 고용 관계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성전에 참전한 귀중한 전력이었으니까.

나는 엘시도어에게 말을 이었다.

"이유와는 별개로 이 행동에 관한 책임은 엄중히 묻겠다."

"오만하구나. 당장에라도 숨을 끊어놓고 싶을 정도로."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태도 또한 반영하겠다."

"...격식?"

"내 오후 시간을 빼앗은 것 또한 반영하겠다."

"...?"

엘시도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건가, 싶겠지.

그래, 다른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티타임 때문에 화났다는 건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라.

"이깟 축복이 그렇게도 탐이 났단 말인가."

다짜고짜 개소리를 지껄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검을 휘두른 건 선을 넘어선 방종이었단 뜻이다.

나의 물음에 엘시도어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졌다.

"어떻게 우리의 축복을 가로챈 건지 알 수 없지만, 원래부터 네 것이었던 것처럼 우쭐대지 마라. 너는 알지 못한다. 어머니의 축복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말은 똑바로 하네.

그래, 내가 세계수의 축복의 효과는 알아도 의미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수의 축복이 아무리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처럼 축복 때문에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찌를 생각은 없거든.

이 가슴 속에 긍지가 존재하는 이상.

"내게 축복 따윈 필요 없다."

더 나아가서 드높은 자존감을 가진 그랑펠에게 축복 같은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으니까. 엘시도어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축복의 위계질서.

정확한 효과를 알 순 없어도 일단 감사하자.

엘시도어의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한 덕분에 이렇게 뻔뻔하게 지껄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안도의 속마음이 겉으로 내비치는 일은 없었으니.

나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읊조렸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군."

"...?"

축복을 빼앗겨 천불이 난 엘프, 엘시도어.

"긍지를 잃은 그대들에게 축복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일 테니."

"...!"

그 속에 부채질도 모자라서.

"그대들이 세계수에게 버림받은 건 당연한 절차란 뜻이다."

"!!!"

기름을 쏟아부었다.

.

.

.

참상.

락키드가 엘프에게 난도질을 당하는 모습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정규 방송에서는 차마 송출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어진 키치를 대신해, 울프가 입을 열었다.

"전원 준비하도록. 이번에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영감님."

"잠잠하다 싶었더니 일이 터졌구만, 그래."

"...저저 내가 나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 귀찮아."

계약 혹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

그림자 용병단 단원들 사이에 우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원의 사망은 곧 그림자 용병단의 명예 실추.

락키드가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순 없다는 뜻이었다.

꼴깍─

알카리가 포션을 들이켜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와중에도 스크린에선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장에 있는 넷튜버 플레이어의 중계였다.

3석, 핸더슨이 냉정하게 전투를 평가했다.

"승산이 없군, 그래!"

핸더슨.

락키드가 도끼라면, 핸더슨은 거대 망치를 휘두르는 무투파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락키드의 완력을 잘 알고 있는 핸더슨이었다.

"어쩌면 우리로도 부족할 수 있겠어!"

보잘것없는 검 한 자루로 락키드의 일격을 막아내다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죽음을 각오한 락키드와 달리 엘프는 전력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철컥─

울프가 석궁을 장전하며 말했다.

"뭐든,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지."

"하핫!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나저나 영감님, 재촉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고위 마법, 포탈.

발현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락키드가 위험했다.

알카리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마법사도 아닌 늙은이에게 바라는 게 지나치게 많아. 마탑 마법사들, 그리고 호열 경을 봐서 눈이 높아진 탓이겠지. 포탈 발현은 탐색 과정부터 엄청난 집중을 요구하는 마법이라고. 알고 있는가들?"

쏟아지는 잔소리.

어쨌거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울프가 다리를 떨며 인내하던 순간이었다.

"어, 어어어?!"

정적에 빠진 황금 송아지 주점.

곳곳에서 설마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크린 속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의 움직임.

포탈 때문에.

"...영감님?"

하실 수 있으면서, 영감님 괜히 엄살을 부렸던 건가.

울프는 알카리 쪽을 바라봤다가 흠칫했다.

"이제야 간섭 과정이야. 아직 멀었네. 기다리게."

저건 알카리의 포탈이 아니었다.

마력의 빛무리 속에서.

그 정체를 먼저 알아본 건 플레이어들이었다.

"이, 이호열이다!!"

...호열 경이라고?

악마가 나타난 곳에 호열이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악부터 마왕까지.

악마가 나타나는 곳에는 그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상한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울프, 보고 있는가! 저 괴물이 멈춰 섰네!"

락키드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답무용.

호열에게 달려들던 엘프가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었다.

마법인가 싶어서 6석, 이자벨마를 바라봤거늘.

도리도리─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곳곳에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려!"

"멀리서 찍어서 그런가 본데."

"...하긴 이걸 가까이서 찍길 바라는 건 너무한 거겠지?"

호열과 엘프.

두 사람이 뭐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림자 용병단에는 입 모양만으로 대화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우수한 정보원이 있었다.

9석, 드쉐브가 입을 열었다.

"동행한 마법사에게 락키드의 치료를 부탁했어."

"!"

"그리고.... 그 책임을 엄중히 따져 묻겠다는데?"

화면조차 고르지 않아 모든 대화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울프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

"용병을 걱정해 주는 외뢰인은 오랜만인데."

그 순간, 알카리가 외쳤다.

"됐네, 다들 서둘러!"

포탈 발현.

더 이상의 인내는 없었다.

울프를 비롯한 그림자 용병단 전원의 눈빛이 돌변했다.

'제아무리 호열 경이라고 하더라도.'

울프는 호열의 육체적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격을 비롯해서 무언가를 습득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지만, 현시점에서 단순한 육체 능력만을 비교하자면....

'분명하게 락키드보다 아래였다.'

그런 락키드를 압도한 엘프를 상대하는 것?

호열 경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울프는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렸다.

울프만큼이나 많은 실전 경험.

다른 단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제압하는 게 좋겠군!"

시작부터 전력으로 임한다.

그림자 용병단이 무기를 치켜든 순간.

전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호열 경?"

엘프를 무릎 꿇게 한 호열이 보였다.

.

.

.

나는 자각하고 말았다.

[축복의 위계질서].

이거 [천적관계]보다 더한 천적 전용 스킬이잖아?

◈ 164화. 또 하나의 천적관계 (2)

엘프.

세계수에서 태어나는 존재들.

아무래도 그들에게 세계수의 축복은 태생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규율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엘시도어를 바라봤다.

'싸가지 없는 성격에 이런 수치를 참고 있을 순 없겠지.'

아무리 그랑펠에게 물들었다고 한들.

다짜고짜 엘프에게 꿇어라.

말할 정도로 중증 환자는 아니다, 내가.

격식을 강요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그랬다, 내가 엘시도어에게 건넨 말은 그저 한마디.

"우물 안 개구리에겐 예절 교육이 필요하겠군."

...순간, 꿇어라보다 개구리가 모욕적인 말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엘프의 땅, 시슬리에만 머물다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가.

엘시도어에게선 격식은커녕.

상식 수준의 화법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그러더니 한 차례.

메시지가 점멸하고.

지금이었다.

"...감히 나를."

털썩─

엘시도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모자라 손에서 검을 놓쳤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위계질서]의 효과였다.

'내 말에 거역할 수 없다는 건가?'

세계수가 얼마나 심하게 군기를 잡았길래!

얼핏이나마 사연을 짐작하고 있는 나조차도 흠칫할 정도의 광경이었는데.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래도 너무 놀라면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

그래서 그런가, 플레이어들 쪽은 오히려 고요했다.

"이 수석님. 이건...?"

천하의 마티스가 말꼬리를 흐렸으니.

슬슬 내가 어떤 짓을 저지른 건지 실감이 난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정말로.

나는 락키드 쪽을 바라봤다.

'일단, 무사해서 다행이고.'

마탑의 선임 마법사 정도 되면 다른 분야의 마법이더라도 중급 수준까지는 발현할 수 있다. 마티스라면 응급처치쯤이야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겠지.

꾸벅─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전부 달려온 건가?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용병단.

보이지 않는 단장, 키치를 대신해 울프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동료가 왔으니 더 이상 락키드 쪽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나를, 이 엘시도어를 이런 꼴로 만들고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남은 건 잘나신 엘프의 처분뿐이겠군.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유감스럽게도 한참 착각하고 있군.

'아직 본격적인 처분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무엇보다 [축복의 위계질서]가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지금. 내 자신감에는 근거가 생겼다는 말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 나누기에 이런 장소는 적합하지 않군, 엘시도어."

"감히 내 이름을...!"

"몰상식한 발언부터 자제하도록."

"...!!!"

[엘프, 엘시도어에게 '축복의 위계질서'가 발생합니다.]

일단, 그 주둥이부터 좀 다물고 시작하자.

*

AAU.

이번에야말로 변명은 없었다.

미국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 사태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엘프는 먼 훗날 등장할 미완성 콘텐츠였다.

확정된 설정은 단지 몇 가지 배경 설정에 불과했으니까.

그 설정에서 비롯된 엘프가 다짜고짜 인류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낼 줄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단 뜻이었다.

나비효과라고 하던가?

몇 안 되는 배경 설정 중 하나.

엘프는 영겁의 세월을 산다.

그 짧은 설정에서 저런 괴물이 태어날 줄이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기에.

미지의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무력(武力).

마왕을 포함해서 여태껏 봐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그러나 인류에겐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마왕의 앞에서도.

미지의 공포 앞에서도.

한결같이 꼿꼿한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이호열 플레이어에게 다시금 빚을 졌습니다."

이호열.

그는 흉신악살처럼 날뛰던 엘프를 멈춰 세운 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엘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

한 차례 고개를 숙인 짐 조슈아가 선언했다.

"이제부터 미국은 성전에 참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AAU 유스라 지부 창설 반대 의견 또한 전격으로 철회하며 유스라 지부의 발전을 돕기 위해서...."

드디어 고집이 좀 꺾이셨나?

"이걸로 만장일치군."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깊은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저 행동이 긍지에서 우러나온 행동인지.

아니면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화상회의 끝.

박민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변하고 있어, 이호열. 그를 중심으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레이먼 션, 당신도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나는 엘시도어를 궁전의 별실에 머물게 했다.

'이런 싸가지가 뭐가 예쁘다고 이 호화 궁전에.'

마음 같아서는 마탑의 지하.

무간에 가둬두고 싶었거늘.

무간이 어떤 공간인지는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의 몰골을 봐서 잘 알고 있었다.

엘시도어에게는 아직 물을 게 많았으니까.

폐인이 되어버리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나 아무리 심문이 급하다고 한들.

모든 일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

나는 마탑에서 수석의 업무를 처리하고 난 뒤에야 별실을 찾았다. 별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라이언 하트 기사단, 예시카와 에노크였다.

'나 때문에 야근이라니.'

까라면 까야 하는 사회인의 비애를 잘 알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특히나 예시카는 서큐버스 때도 그렇고, 일복이 넘쳐나는구나.

나는 두 사람에게 심심찮은 위로를 건넸다.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그보다 하르콘 단장님을 통해 경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식, 무슨 소식?

에노크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머릿속에 스쳐 가는 갖가지 기행.

설마, 나의 우산 격투 소식을 들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한없이 깊은 어둠 속 뭐시기?

그것도 아니라면 악룡 사냥꾼?

그보다 하르콘 씨, 그런 소문을 왜 부하직원에게!

"한 차례, 더 높은 경지에 이르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 검강(劍罡) 말하는 거였어?

젠장, 이 정도면 도둑이 제 발 저린 걸 넘어서 부러지는 정도 아닐까. 흑역사의 업보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순간, 수치심이 솟구쳤지만 철면피에 변화는 없다.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검기는 더욱더 짙어지는 법."

"...!"

"그대들에게도 깨달음을 얻게 될 날이 올 것이네."

그저 [최후의 모험가] 효과 덕분이었거늘.

의미심장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랑펠.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건진다고.

그냥 입 좀 다물자, 제발.

"그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마라, 예시카.

그 이상의 대화는 정신적 자해와 다름없었다.

나는 곧장 별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열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엘시도어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 □□□□."

정확히는 입을 뻐금거렸다.

[축복의 위계질서] 발동.

나는 엘시도어가 별실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그리고 정숙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명령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로 명령에 복종하듯.

엘시도어는 내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위계질서의 효과에 감탄하는 건 그쯤 해두고.

'엘프, 영겁의 세월을 사는 존재라고 했겠다....'

시슬리에만 머물렀다고 해도 짬밥이라는 게 있는데.

왜,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 관련 정보도 상당하지 않을까? 그중에서 고급 정보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보자.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허가하겠다."

"...?"

"그대들, 엘프는 성전에 관련되어 있는가?"

물론, 우선이 되는 것은 그랑펠의 긍지겠지.

엘프가 성전에, 악크샨의 절멸에 관련되어 있었는지.

그 여부에 따라 그랑펠의 심문 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

"그까짓 벌레들의 일에 관심 따위...."

스탑.

저기요,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나는 엘시도어의 말을 끊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만 답하도록."

"...아니다."

봐봐, 공손하게 대답하니까 얼마나 좋아?

빠득─

이 가는 소리.

엘시도어는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말 때문에 성질이 난 모양이었다.

물론 나, 이호열의 시선에서는 저것보다 심한 엄살도 없었다.

'나보다 훨씬 낫구만.'

과거의 흑역사도 모자라서.

실시간으로 흑역사를 더해가는 내 처지에 비하면 양반이네.

덕분에 나는 위계질서를 양심에 가책 없이 활용.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게 세계수의 축복 때문이었다는 것인가?"

"...그렇다."

"아르카나 대륙도, 악마 때문도 아니라."

"...그렇다."

엘프.

그들이 첫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 땅이자 자신들의 고향.

시슬리에서 아르카나 대륙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

첫 세계수가 자신들에게서 거둬간 축복.

그 축복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 행보에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짓밟았다."

"...그렇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진짜 긍지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네, 얘네!

관심사가 오직 자신들의 영생뿐이라니.

그저 입방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랑펠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내가 세계수였어도 말이야. 너희들에게서 축복을 거둬갔겠다, 진심으로.

'그나저나 축복이 원래는 엘프의 축복이었을 줄이야.'

나는 그냥 버프인 줄로만 알았지.

첫 세계수의 축복에 이런 뒷사정이 엉켜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정을 알고 나니까 나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도 짐작되는걸.

'내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다.

나는 또 한 번 엘시도어를 향해 선언했다.

"내게 축복 따윈 필요 없다."

"...아니다."

...내가 필요 없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순간, 의문이 들었다가 뒤늦게 이해했다.

맞다, 위계질서.

실수하지 않는 걸 보니까 군기가 바짝 들어있네.

"긍지와 맞바꾼 축복 따위."

"...?"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랑펠에게 첫 세계수의 축복?

말했다시피 단순한 버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힐러들의 버프도 냉랭하게 거절했던 내가 아니던가?

신 따위 믿지 않는다는, 종교적 이유를 들어가면서 말이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축복의 효과?

엄청나다.

마왕 쟁탈전도 모자라서, 상위 마왕들과 맞붙을 미래를 생각하면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끔찍하다.

'영생이라니.'

...그거 평생 그랑펠에게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잖아!

나이를 먹고 철이라도 들면 모를까.

어디, 그랑펠의 긍지가 세월이 흐른다고 꺾일 긍지란 말인가?

"...아니다!"

허나, 엘시도어는 언성을 높였다.

자신들에게서 축복을 빼앗아 간 녀석이.

정작 축복 따윈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는 꼴이었으니까.

'열이 받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하네.'

그래도 뭐 좋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나도 필요한 정보 하나 정도는 말해주지.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축복을 돌려받길 원하는가?"

찰나지만, 엘시도어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그렇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 없는 축복이라고 해도, 그걸 남에게 넘겨주는 방법?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거 모르거든.

나 또한 첫 세계수에게서 축복을 넘겨받은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원한다면 가져가 보는 게 어떻겠나?"

"...?"

"내가 세계수에게 선택받은 것처럼."

"...!"

"그대들 또한 세계수 앞에서 긍지를 증명해 내란 뜻이다."

나도 맨입으로 내어줄 생각은 없다는 말씀이시다.

*

마탑.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낸 플레이어들에겐 기회가 주어졌다.

마탑의 견습 마법사로서 능력을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가.

물론, 마탑에서는 첫걸음을 떼기조차 쉽지 않았다.

삐끗!

"으허억!"

"조심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런 걸 계단이라고 만들어 놓다니!

허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마탑의 계단.

적응을 논하기 이전에 감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반듯하게 왔다 갔다 한 거야?"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발을 헛디딜 만도 했건만.

마탑을 오르내리는 호열에게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으니까.

"그냥 호멘이다. 호멘이야."

중얼거리던 플레이어에게 불쑥, 누군가 다가왔다.

"까, 깜짝이야!"

"호멘이라.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경쾌하게 흔들리는 땋은 머리.

"...네?"

"흠흠, 참고로 저는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라고 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숙련 마법사면...?"

선배님이시다.

곧장 지브릴의 요지를 파악한 플레이어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호멘은 이호열 플레이어. 아니, 이호열 수석...."

지브릴은 잠자코 호열과 호멘에 얽힌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런 지브릴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착각하고 있었군요?

"위대한 가문의 수준이 아니라...."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신과 같은 위치에 계셨잖아요!

햇병아리 모험가에게 이런 귀한 소식을 얻게 될 줄이야.

이대로 입을 닦는 건 귀족답지 못한 행동이겠지.

지브릴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호열 수석께서 마탑에서는 어떤 존재이신지. 아직 짐작조차 못 하고 계실 당신을 위해서. 저,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 하나부터 열까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넵!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이호열 수석님께선 수백만 악마를 두 시간 만에...."

"네? 바, 방금 뭐라고요?!"

발 없는 말이 날개를 달고 활강하기 시작했다.

◈ 165화. 소중한 것을 남겼군 (1)

폭풍전야.

마왕 쟁탈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성전.

그럼에도 시간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 마지막으로 균열까지.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성장에 박차를 가했다.

"으아, 죽겠네 진짜!"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상이었다.

균열을 공략하고도 쉴 틈이 없다니.

자유로운 일과, 칼퇴, 저녁 있는 삶.

플레이어를 택한 가장 큰 이유가 사라져 버린 요즘이었다.

"그놈의 긍지가 대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꾹 참아야만 했다.

이를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버텨내야만 했다.

"그만 툴툴대. 너랑 엮여서 쫓겨나고 싶은 맘은 없거든?"

"뭐래. 쫓겨나긴 누가 쫓겨나? 내가 끝까지 버틴다."

"그래, 입만 좀 다물어 봐."

그야 이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자타공인 제국 최강의 기사단, 라이언 하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면.

플레이어들은 웬만한 명성으로는 사자 심장의 기사들과는 대화를 나눌 수도. 아니, 접점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성전을 앞둔 특수한 상황.

대화나 접점이 문제겠는가?

무려 사자 심장의 기사 지도 아래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기초 체력은 모든 것의 기본. 자, 뛰게나들!"

프로스트 훈련장엔 하르콘의 호쾌한 목소리가.

"훈련 도중 잡담은 금지입니다."

유스라 훈련장엔 예시카의 엄격한 목소리가 울렸다.

뮤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참회 기도만 몇 시간째야, 이게."

"하씨, 쥐 날 것 같아."

"전 하체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전이에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사제들의 입가에선 신음.

"내가 왜 성기사 같은 걸 선택해서는!"

"바바리안은 웃통이라도 깔 수 있지."

"판금 갑옷이 원망스럽다, 진짜...."

성기사들은 구슬땀을 쏟아냈다.

마탑의 사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탑의 도서관.

방대한 마법 서적의 양에 플레이어들은 우선 한 차례 감탄했다.

그다음엔 그 서적의 수준에 경악했다.

고위 마법에 관련된 서적이 이렇게 많았다니.

"...근데 이게 대체 뭔 소리냐?"

"탐색, 간섭, 발현...?"

"긍지 뺨 때릴 정도로 이해가 안 되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과 [스킬]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조차도 아직 완벽하게 이해 못 한 그 사실을. 이제 막 견습 마법사가 된 플레이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나. 수능 공부 다시 하는 것 같아."

"...공부하긴 하셨어요?"

"했으면 내가 아르카나에서 랭커를 찍을 수 있었겠니."

"뭐야."

실없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현학적인 내용.

과거의 마탑이었다면.

견습 마법사의 고뇌 따위엔 누구도 관심을 두지도 않았겠지. 각자가 잡히지 않을 진리만 보고 나아가던 게 과거의 마탑이었으니까.

뒤처지는 이들은 보살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뭐? 크리스탈 홀에서 비정기 학회가 열린다고?!"

마탑은 달라졌다.

더 이상 헛된 진리를 쫓지 않았다.

헛된 진리를 좇느라 자신들의 주변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드넓은 크리스탈 홀.

수석, 마르셀로가 크리스탈 홀 중앙에 섰다.

플레이어들 덕분인가, 평소보다 홀이 가득해 보였다.

'어느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이론마법학의 창시자.

모든 마법을 이론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평소 모든 것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봤던 마르셀로였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이 뒤따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그 수많은 상상 속에서도.

모험가들 앞에서 학회라니.

지금과 같은 풍경은 없었다.

'물론, 지금과 같은 내 모습도.'

육체는 여전히 앙상했지만 더 이상 삐걱거리지 않았다.

입으로 피가 역류하지도,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정신이 맑았다.

원래 머릿속이 이렇게 또렷한 것인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정도로.

그쯤 되니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졌다는 건가?'

호열 경이 처치한 수백만의 악마 중 저주와 관련된 녀석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우연이다. 그렇기에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거늘.

헛된 기대를 품지 않았거늘.

'그런 행운을 제가 거머쥐어도 되는 겁니까?'

시무아르드가의 저주.

먼저 떠난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듯 떠올랐다.

"...."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오르게 하였다.

이내, 마르셀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지금은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그래, 감상에 빠져있기에는 나아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

게다가 호열 경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가져다준 행운을.

단, 한순간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이론마법학은 추상적인 마법 구조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립되었습니다. 탐색이 무엇이며, 간섭은 무엇인가, 어떻게 마력에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가...."

.

.

.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락키드가 부상으로 치료 중인 지금.

주점엔 때아닌 평화가 찾아왔다.

크으─

피로를 씻어내는 술.

술을 목구멍으로 넘김과 동시에.

플레이어들은 경쟁하듯 엄살을 뱉어냈다.

"농담 아니고, 너희가 하르콘 단장 성격을 몰라서 그렇다니까? 괜히 사자가 아니야.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데...!"

"차라리 뛰는 게 낫지."

"뭐래?"

퍽퍽퍽.

자신의 허벅지를 거칠게 두들기는 사제.

그러나 표정엔 걱정스러울 정도로 미동이 없었다.

"새벽부터 조금 전까지. 무릎 꿇고 기도만 하다 왔다. 이거 봐, 하체에 감각이 없어. 아니, 그걸 떠나서 피가 안 통해서 머리가 핑글핑글 돌 정도였다니까?"

내가 불쌍하네.

아니, 내가 더 불쌍하네.

엄살이 오가던 와중에 들려온 소리.

쾅!

일단, 락키드는 아니었다.

"...넌 또 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그래?"

"마탑에서 무슨 일 있었어?"

"있었지. 내가 돌대가리라는 걸 깨달았지. 이거 봐. 이렇게 세게 머리를 박았는데도 멀쩡하잖아? 진짜 자괴감 든다. 탐색은 개뿔. 내 머리에 뭐가 들었나 탐색부터...."

마탑에서 어떤 고생을 했길래.

상태가 아주 심각해 보였다.

그래,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서로서로를 위로할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됐다. 한잔해."

짠─

술잔을 마저 기울이던 세 플레이어.

그중 한 사내가 문득 운을 떼었다.

"근데, 이호열 말이야."

"씁! 이호열이 뭐야. 우리 성전 총대장님한테."

"우리끼리만 있는데, 쫌. 하여튼 호열 님 말이야."

그놈의 호칭 때문에 말 한마디 하기가 힘들어서야.

사내가 멋쩍게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계시는 거지?"

그 어느 때나 당당한 호열이었다.

행보에 거침도 숨김도 없었으니.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마탑을 오가는 호열의 일과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하르콘은 말했었다.

"천하의 호열 경조차도 체력 단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행한다고...."

하르콘뿐만 아니었다.

"...잠깐만, 너넨 아직 그 소식 못 들었지? 마탑에 자자한 이호열 총대장님의 소문. 진짜 듣고도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마탑에도, 뮤온에도 자자한 호열의 영웅담.

대화를 나누고 나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체력 훈련도 모자라서 마탑에 복귀해서는 수석 업무를 처리하느라 집무실에서 꼼짝도 않는다고? 그러면서 균열이 생성되면 누구보다 먼저 나타나고? 그런 생활을 쭉 반복하고 있다고?!"

그게 정녕 사람이 맞단 말인가?

.

.

.

나, 이호열은 선언한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필요 없다고 했던 발언은 전격 철회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세계수의 축복이라도 없었으면.'

나 진짜 과로사로 황천을 건넜겠구나.

일단, 무엇보다 급격하게 늘어난 체력 단련량이 문제였다.

축복 버프 덕분에 육체에 피로도는 쌓이지 않았지만, 양이 늘어나니 투자되는 시간도 늘어날 수밖에.

지금도 봐라.

벌써 몇십 분 째 팔굽혀펴기만 하고 있다.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응시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3,500회 (성공)

●턱걸이 2,0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1,200회 (성공)

드디어 성공.

오늘도 버텼구나, 한시름 놓았구나.

하지만 입에서는 속내와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고통 없이는 없는 것도 없는 법이거늘. 이런 게 축복이라니."

...진짜 그놈의 똥고집!

그래 뭐,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왜, 가끔은 팔과 다리가 후들거려야 제대로 훈련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다음 일과를 떠올리면 이것만큼 배부른 투정도 없다.

스륵─

쉴 새 없이 책상에 반듯한 자세로 착석.

넘기는 것은 서적이었다. 파놓은 살 구멍, 우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날마다 읽어야 하는 책의 분야도 정말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구나.

'내 대가리로는 평생 붙들어도 이해를 못 했겠지.'

그러나 그랑펠의 두뇌가 있었으니까.

나는 보기만 해도 기겁할 양의 서적 지식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넣었다.

물론, 배움엔 끝이 없다고 하던가?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았지만 말이야.

또한 수석으로서의 업무까지.

그래도 다행인 건 마르셀로가 완전히 회복한 덕분에 업무량이 적어졌다.

게다가 마르셀로는 마탑에 입성한 플레이어들의 적응을 위해 애쓰고 있었지.

'내가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했었으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없다.

마탑의 견습, 숙련 마법사들에게 쏟아낸 것보다 더한 독설을 쏟아낼 게 뻔했으니까. 인터넷에 이호열 독설, 인성 논란으로 속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타인의 시선과 평가 따위 의미 없다."

당사자께서는 어련하시겠느냐마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나는 성전의 총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 거기에다가 플레이어들까지 가세한 성전의 총사령관. 정말이지, 미치도록 부담스러운 감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책을 떠맡을 짬밥이냐고 내가.'

마탑까지 갈 것도 없겠지.

하르콘만 하더라도 그 레벨이 무려 600레벨.

전투나 전쟁 경험 또한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러나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적어도 [마왕 쟁탈전]이라는 대사건을 앞둔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부족하거든.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 뻔뻔하게.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또 그런 거라면 자신이 있거든.

왜, 절대 꺾이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이 있었으니까.

『과소평가에는 증명을. 과대평가는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고야 말았으니까.』

물론, 덕분에 죽어나는 건 나였다.

독서가 끝나면 곧장 유스라 왕국으로 넘어가서 성전에 관한 대비를 해야 한다. 내가 괜히 세계수의 축복에 감사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실전감각을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겠지."

또 시간이 날 때마다 균열에 진입해서 검강 발산, 마법 발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사냥을 통해 경험치까지 적절하게 챙겨줘야 했으니까.

정말, 쉴 틈이 없잖아.

오죽했으면 녹차가 그리워서 입이 마르고.

티타임이 기다려질 정도다.

탁─

나는 책장을 덮고 나서 현재 생성된 균열의 정보를 살폈다.

보자, 현재 가장 높은 적정 레벨의 균열은....

...그런데, 뭔데.

뭐냐, 이 기사는?

[생생취재 : 마탑에 떠도는 소문.... 이호열, 수백만 악마를 고작 두 시간 만에 처치하다?]

틀린 말은 아닌데.

누가 봐도 오해의 소지가 분명하잖아?!

지금도 쏟아지는 과대평가에 다가가기 위해서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는 나였거늘.

거품이 꺼지기는커녕 더욱더 늘어나다니.

그러나.

"발 없는 말치곤 느리구나."

누구를 원망하겠냐?

모든 건 내 입방정이 자초한 일이었다.

결국, 부지런히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단정하고 꼿꼿한 차림새.

짊어진 무게에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

.

.

휘청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다짐이 무색하게도.

균열에 진입한 나는 내색하지 않은 채 긴장하고 있었다.

하이엘이 내게 고개를 숙인다.

"말씀하셨던 퀴른베르크 기계탑 심장부의 잔해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덧붙인다.

"그 손상 정도가 심각해 드워프들이 조금이라도 상태를 복원하려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저 하이엘, 호열 님의 부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면목이 없습니다."

지나치게 공손하다, 하이엘.

누가 보면 내가 세계수처럼 빡빡하게 군기라도 잡는 줄 알겠어.

나는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

"이것으로 충분하다."

처참하게 박살이 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심장부.

그 제작자인 드워프들조차 고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들, 문제없다.

나에게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애용해 오던 꼼수가 있었으니까.

『반전 마법』.

◈ 166화. 소중한 것을 남겼군 (2)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이 생성됐을 때 나는 기계탑의 구조를 깊게 『탐색』했었다.

왜, 그때 나는 지금처럼 레벨이 높지 않았거든.

록스 같은 고레벨 플레이어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꼼수가 필요했었으니까.

"...정말, 괜찮으신지요?"

하이엘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정말 괜찮다니까 그러네.

역시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모양이구나.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신속하게 이뤄지는 탐색 과정.

이호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랑펠의 재능이었다.

한번 탐색한 대상을 시간이 흘렀다고 잊어버릴 머리가 아니시라는 말씀.

더군다나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효과가 있다.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이 있었으니까.

곧바로 『간섭』 과정에 돌입했다.

새로운 형태로 발현하는 게 아니다.

그저 이전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뿐.

그러니까 더하는 것은 오직 『반전』뿐이다.

이내, 처참하게 박살 난 기계 장치에 마력이 스며들었다.

'의외인데?'

반전 마법의 최대 장점이라면.

아무래도 마력 효율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거겠지.

그런데 평소와 다르다.

빠져나가는 마력량이 상당하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 중이라는 걸 고려하면.

'뭔가 기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마력을 집어삼키고 있잖아?

그럼에도 버틸만하다.

과거, 쥐꼬리만 한 마력에 빌빌대던 내가 아니니까.

이내, 반전 마법 발현.

심장부의 기계 장치가 손상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이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과연, 괜한 걱정을 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여튼 그 말투는 멈추거나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구나.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겠지.

그보다 지금은 하이엘보다 기계 장치에 집중해야 할 순간이다.

철커덕─

철컥─

철커덕─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구조.

이내, 맞물린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기계 장치 중앙에서 마력이 일렁거렸다.

...이것 때문에 마력을 집어삼키다시피 한 거였나?

내 마력을 마력석 대체 연료로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도 잠깐.

눈앞에서 메시지가 점멸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를 습득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명성을 습득합니다.]

적금 만기.

감격할 새도 없었다.

곧장 기계 장치에서 걷잡을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스스스─

은빛 머리카락이 시야에 흔들거리고, 단정하게 정리한 옷매무새 또한 흐트러질 정도의 기세.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내 전신을 휘감아 왔다.

또 한 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니, 한 번이 아니잖아?

그러나 예상했던 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크샨.

악마 사냥꾼의 결전병기라 불리던 퀴른베르크 기계탑이다.

그런 결전병기가 처참하게 부서질 때까지 악마를 사냥했다면, 처치한 악마의 숫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장담할 수 있는 건, 못해도 나 정도는, 그러니까 적어도 수백만은 사냥하지 않았을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점멸하는 메시지.

잦아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 심상치 않은 기운.

그쯤에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거 한계치, 50레벨까지 가겠다.

100레벨마다 찾아오는 벽을 가뿐하게 부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경험치량이다, 이건...! 확신하는 순간, 시야에 무언가 일렁거렸다.

메시지, 그런데 레벨 업 알림 메시지가 아니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기억을 습득합니다.]

잠깐, 축적된 기억이라고?

그 순간, 시야가 뒤바뀌었다.

마치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시야로 바라본 아르카나 대륙의 전경이 눈앞에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쿠궁!

쿵!

쿠궁!

광물로 만들어진 기술력의 집약체.

그러므로 감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

-"악크샨의 유산이여,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하도록."

자신을 일깨운 목소리에 따라서.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지킬 뿐.

최후의 최후까지 악마를 사냥하다가 가동을 멈춘다.

쿵!

쿠궁!

쿵!

천지가 악마로 뒤덮였다.

덕분에 행보에 거침은 없었다.

악마의 습격 아래.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는 마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괴로운 듯 소리치는 사내였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새까맣게 빛나는 것은 악마의 그것.

"...내 이름은 마테다. 나는!"

악마가 확실하다.

사냥해야만 하는 존재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긍지에 따라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마테! 제발, 정신 차려!!"

인간이 악마에게 다가갔다.

다가간 것도 모자라 악마를 뒤에서 껴안았다.

어째서?

...쿠궁.

기계탑이 순간 가동을 멈췄다.

"...나한테서 떨어져!"

"그럴 순 없어."

"더 이상은 한계야. 부탁이야, 란샤."

부들부들.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건넸다.

은으로 만든 검.

은에 맞닿아 타들어 간 사내의 손아귀.

사내가 악마임을 다시금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로 나를 찔러 죽이거나, 당장 도망쳐."

그 행동은 악마가 아니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

"부탁이야, 란샤. 더느으으은...!!"

팟!

사내가 여자를 거칠게 밀쳐냈다.

"마테!"

바닥에 쓰러진 여자가 다시금 사내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하늘에 마안(魔眼)이 떠올랐다.

악마의 눈이 사내와 불타는 마을을 응시했다.

"도망쳐어어어어어!!"

콰직!

새까만 동공도 모자라 어깨에 돋아난 흉측한 날개.

사내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으로 변했다.

긍지에 따라 악마로 타락해 버린 인간을 사냥해야만 했거늘.

기계탑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안의 시야 공유.

마을 사람들이 채 대피하기도 전에 무수한 악마가 마을로 들이닥쳤다.

저런 속도라면 모두가 악마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꺼져라! 빌어먹을 새끼들!"

악마가 악마를 공격했다.

정확히는 악마로 타락한 사내가 악마를 공격한 것이었다.

악마들의 손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여자가 떠날 때까지.

악마는 악마를 공격했다.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처참한 몰골로 짓밟혀 죽었다.

쿠궁!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다시금 가동했다.

몰려드는 악마를 쉴 새 없이 사냥했다.

하지만 악크샨의 결전병기라고 한들.

물리적인 손상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철컥!

쏟아진 악마의 피가 톱니바퀴를 뻑뻑하게 만들었다.

그 여파가 하나둘 기계탑에 나타났다.

천천히, 기계탑이 기울기 시작했다.

무너져 가는 기계탑.

시야에 담긴 건 사내였던 악마와 도망치는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최후의 최후. 순간, 기계탑은 자신을 일깨웠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하도록."

과연, 나는 결전병기로서의 긍지를 다한 게 맞는가?

퀴른베르크 기계탑은 기억 장치 속에 의문을 새겨넣으려다가 그만뒀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악크샨의 결전병기답게.

기억 장치에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퀘스트 : 깨어난 결전병기의 의뢰]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의문에 대한 대답 대신 선택한 것은 긍지였다.

기계 장치의 기억은 남겨진 생존자들을 지키길 원한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를 구원하라. (진행 중)

.

.

.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고맙다."

그동안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마왕의 전리품으로, 또 한 번에 불과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했던 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아르카나인들의 모습과 육성을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기계 장치를 응시했다.

"덕분에 더없이 귀중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참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참상이다.

고작 균열에 위협받고 있는 현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게 기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기억 장치에서 목격한 아르카나 대륙은 악마들의 땅, 마계와 다를 것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현시점에서 성전의 승산은 몇 퍼센트나 될까?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길 수 없겠지.

단순한 계산이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마탑,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들까지.

현재 성전에 참전한 모든 세력의 힘을 합쳐봤자 아르카나 대륙에 가득한 악마와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랑펠은 악마 앞에서 머리로 움직이지 않겠지.

언제나 우선시되는 것은 가슴 속.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긍지였으니까.

"설령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다고 한들."

천적, 악마 사낭꾼이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내는 악마에게 빙의 당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다행이다.

"인간의 긍지는 꺾이지 않는다."

처참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인간의 긍지는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걸. 나는 기계탑의 기억 장치를 통해서 확인한 참이었으니까.

악마에게 몸과 정신을 빼앗겼으면서도.

사내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악마들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빙의에 거스르다니, 새삼스럽게 긍지의 힘을 깨닫게 된다.

나는 기계 장치를 바라봤다.

기억을 재생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는 것인가.

회전하던 톱니바퀴가 천천히 멈췄다.

경험치와 명성도 획득했겠다, 굳이 마력을 투입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기계 장치를 향해 말했다.

"악크샨의 결전병기로서 더없이 명예로운 최후였다."

...하다 하다가 기계 장치에 말을 걸다니.

민망할 법도 했거늘.

하긴 용 이빨한테도 말을 걸었었구나.

어쨌거나, 나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철컥─

기계 장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물론, 기계 장치는 멈췄어도 나는 멈추지 않는다.

그야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으니까.

[퀘스트 : 깨어난 결전병기의 의뢰]

악크샨의 전통.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이 해결하지 못한 의뢰는 다른 악마 사냥꾼이 이어서 수행한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또한 악크샨의 일원이었으니까.

좋으나 싫으나.

최후의 악마 사냥꾼으로서.

퀘스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를 구원하라. (진행 중)

"또한 그대들의 긍지는 내가 이어받겠다."

물론, 그랑펠의 긍지론적 관점과도 충돌할 일이 없었으니.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드레드센이라, 처음 들어보는데.'

어쩔 수 없는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 탓.

아르카나 대륙 어디에 있는지도.

또 안다고 찾아갈 방법도 없었지만.

뭐, 딱히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내게는 더없이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까.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하이엘보다 적응이 안 되는 이름이다.'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읊조렸다.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숲속.

산짐승을 쫓기 위해선 불씨가 필요했거늘.

"그럼 끌게요."

치직─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들은 애써 켜둔 횃불을 꺼버렸다.

란샤가 횃불을 꺼버리자 누군가 치맛자락을 붙잡아 왔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작은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란샤 언니야, 무섭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게 아니라 저 별이 무섭다."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마안이 있었다.

자신들을 찾기 위해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란샤는 꼬마의 얼굴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단단하게 일러뒀다.

"쳐다보지 마."

"...알았다."

"그리고 세상에 저렇게 못생기고 흉측한 별은 없어."

"그건 그렇다. 히히."

아이와 노인들을 보살피고 나니 밤은 더욱더 깊었다.

란샤를 비롯한 주민들은 산 아래를 바라봤다.

대륙은 언제나처럼 불타고 있었다.

란샤는 검을 바라봤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마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건넨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살 거야.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뭐, 뭔가 심상치 않네!"

은퇴한 용병, 가드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들어서 잠잠하던 악마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악마 병사.

쉴 새 없이 병장기를 나르는 작은 악마들까지.

그 모습이 마치....

"저건 '전쟁'을 앞둔 이들의 움직임일세!"

전쟁이라니?

란샤는 억울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가드너를 붙잡고 물었다.

"어제도. 지금도 전쟁 중이잖아요, 가드너 씨! 이미 우리 마을을, 드레드센을, 그이를 앗아가 버렸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빼앗아 가려고!"

"마음은 이해한다, 란샤. 하지만 나도 모르겠다."

드레드센뿐만 아니었다.

근방에 온전한 마을,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대규모 전쟁 준비라니.

한낱 용병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드너가 흠칫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

"모두, 서둘러. 이 산을 떠나야 하네!"

전쟁이 시작되면 빠른 속도로 물자를 소모하게 된다.

부족한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이제부터 악마는 산이란 산.

광산이란 광산은 전부 뒤져댈 게 분명했다.

"설명은 나중에. 아이들부터 깨우게, 란샤!"

가드너가 다급하게 외친 순간이었다.

"...!!!"

산 아래에서 악마들이 보였다.

가드너가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내려가는 길에!"

"다들 전투 준비!"

"아이랑 노인들부터 대피시켜!"

고작 임프와 비슷한 힘을 가진 하급 악마들이었지만, 드레드센은 작은 마을이었다. 병사는커녕 악마와 맞서 싸울만한 힘을 가진 이들은 이미 전사했다.

척─

란샤가 은검을 치켜들었다.

가드너의 곁에 나란히 섰다.

"란샤, 뭐 하고 있는 겐가!"

"저도 같이 맞서 싸우겠어요!"

"아니, 자네가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야!"

"아니요. 전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란샤는 마테를 떠올렸다.

너라면 분명 이런 걸 바라지 않았겠지?

그러나 란샤는 쓰게 웃었다.

'...그럼 나한테 이 검을 건네주지 말았어야지.'

설령 악마에게 목숨을 잃을지라도.

란샤는 당당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처럼.

가드너가 욕지거리를 뱉었다.

"제길. 내 나약함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때가 없구나, 란샤!"

모두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뜻을 모은 이들이 무기를 들고 악마들 앞에 섰다.

끼긱!

가드너가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를 놨다.

푹!

명중이었다.

"젠장."

하지만 악마는 조금도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가드너와 란샤를 비롯한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치맛자락에 남아있는 작디작은 무게감.

그래, 각자가 짊어진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것이야말로 시련조차 꺾을 수 없는 긍지.

긍지는 변화는 일으키고.

그런 변화는 기적을 가져오는 법이었다.

고오오오─

허공에서 일렁이는 기운.

모습을 드러낸 건 검은 형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검다.

"...가드너 씨, 저게 뭐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란샤?"

깊은 밤에 파묻혀.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그건 과거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어둠.

그러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

"주군, 한없이 깊은 어둠에 따라 드레드센을 구원하겠다."

.

.

.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고유 정령은 계약 관계를 초월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하이엘이 고유 정령으로 거듭난 순간, 기존의 정령 계약은 파기된 상태겠죠! 그러니까 이론상 하이엘과 무관하게 새로운 정령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수 있으시단 거죠! 앗, 혹시나 제가 주제넘게 참견한 거라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 167화. 소중한 것을 남겼군 (3)

란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둠이 악마를 집어삼켰다.

거기엔 소리도 소란도 없었다.

"가드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영문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르신."

상황을 그대로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악마가 나타난 것도 기겁할 일이었거늘.

그런 악마를, 정체 모를 어둠이 집어삼킨 상황이었으니까.

"대체...?"

가드너는 다시금 어둠을 바라봤다.

과거 용병으로 대륙을 떠돌던 시절.

마법사도, 마법도 목격했던 가드너였지만.

사람의 말을 하는 검은 '무언가'라니.

저런 건 본 적이 없었다.

문득, 란샤가 중얼거렸다.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응? 방금 뭐라고 한 거냐, 란샤."

"아무래도 자기 이름을 말한 것 같아요!"

"이, 이름이라고?"

이름치고는 굉장히 길지 않은가?

마치 위대한 가문의 귀족님 이름처럼.

란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군, 한없이 깊은 어둠에 따라서...."

한없이 깊은 어둠?

가드너는 미간을 찌푸리고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용병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다. 대륙에 떠돌던 수많은 이명(異名)들을 기억해 내기엔 그동안 퍼마신 포도주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름이나 소속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분명, 드레드센을 구원하겠다고 말했어요!"

말했다시피 드레드센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제국령에서도 변방.

대접받기 좋아하는 높으신 분들조차도 외면하는 곳이 드레드센이란 말이다. 관심을 두고, 애써 채찍질을 해봐도 나오는 게 없었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군."

가드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군이라 불릴 정도의 거물이 어째서 우리 같은 것들을 신경 쓴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한 건 드레드센뿐만 아니었다.

인근의 모든 마을, 도시, 심지어는 제국 수도성까지.

아르카나, 모든 게 악마의 손에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중에서 하필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구원한다고?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둠, 디엔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가슴 속 긍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긍지?"

"마지막까지 악마에게 굴복하지 않은 그 사내처럼."

"...!!!"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 사내는 마테를 말하는 게 확실했다.

꾸욱─

순간, 검을 붙잡고 있던 란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다짜고짜 긍지라니.

단번에 알아듣는 쪽이 이상한 거겠지.

란샤가 입을 열었다.

"...마테의 최후를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의문은 여전했다.

드레드센은 산골 마을이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보지 않는 이상,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투두두─

"?!"

란샤와 가드너를 비롯한 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기겁했다.

마안으로 형형한 밤하늘.

그런 마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형체.

저건 분명, '배'였다.

"뭐야, 저거!"

"가, 가드너 아저씨?!"

"라, 란샤! 나한테 물어도 모른다. 하늘을 나는 배라니!"

경악하는 이들에게 디엔드가 말을 이었다.

"설령, 세상이 그대들을 외면했을지라도."

"...?"

"나의 주군은 그대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그 목소리가 더없이 너그러웠다.

"나 또한 주군께 구원받은 것처럼."

*

마탑.

계단을 오르며 머릿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외면하고 싶었거늘,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주둥이가 결국 일을 냈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어둠'의 정령이시다.

나의 빌어먹을 작명 센스가 이런 식으로 발현될 줄 짐작했다는 말이다. 하이엘 때와 마찬가지로...! 너그럽게 퍼스트 네임까지는 봐줄 만했다.

'디엔드.'

하지만 역시나 뒤가 문제였다.

[디엔드 크리시아드 이터널 다크니스].

뭐든 적당히 해야지, 진짜로!

이터널 다크니스라니.

영원한 어둠이라니.

정말이지, 떠올릴 때마다 눈을 감고 영원한 어둠에 파묻히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이 샘솟는구나.... 하지만 이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이다.

그래, 정령이 둘로 늘어났으니 무거운 게 당연하단 뜻이다.

'그게 전부터 고맙긴 한데.'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은 양피지를 통해 서신을 전달해 왔다.

{고유 정령}은 계급도, 정령 계약조차도 초월한 존재. 그렇기에 기존의 계약은 파기된다고.

'왜, 하이엘이 자연 능력을 사용해도.'

내 마력량에는 변화가 없었으니까.

고유 정령이 뭔가 특별하긴 하구나, 나도 짐작하긴 했었지.

그런데 새로운 정령과 새로운 계약이 가능할 줄이야.

당연하게도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

그 기세는 등장만으로 페이얀의 계약 정령이자 상위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긴장하게 할 정도.

게다가 텟퍼른 미궁에서 어둠의 정령의 능력을 확인했던 나였으니까.

[어둠의 정령왕, 아케인 계약을 축복합니다.]

나는 계약을 맺고, 맺은 김에 이름까지 붙여줬다.

그 이름이 더없이 해괴해서 문제였지만 말이야....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하이엘과 디엔드는 달라.'

고유 정령으로 각성.

[숭고]의 영향으로 보다 성장한 하이엘이었지만, 애초에 태생이라는 게 있다. 하이엘은 숲의 정령으로 전투에 특화된 정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 누굴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것치곤 잘 싸우는 편이지만.'

줄기를 솟아나게 했다가 사라지게 했다가 요령껏 몬스터를 상대하기도 했다만.

어둠의 정령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디엔드에게 드레드센을 맡겼다.

[퀘스트 : 깨어난 결전병기의 의뢰]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의문에 대한 대답 대신 선택한 것은 긍지였다.

기계 장치의 기억은 남겨진 생존자들을 지키길 원한다.

─드레드센 마을 생존자를 구원하라. (성공)

그 결과가 메시지로 나타나 있었다.

과연, 수치심을 이겨내고 부른 보람이 있구나.

보란 듯이 성공할 줄 알았다, 디엔드.

'마력 소모량도 그럭저럭 괜찮았지.'

[첫 세계수의 축복]이 상시 발동 중인 지금.

마력 소모량에 쩔쩔매던 과거의 내가 아니란 말씀.

혹시나 디엔드가 강적과 마주해 내 마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뭐, 마력이 멀쩡한 걸 보면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지만.

또각─

나는 크리스탈 홀에 다다랐다.

원탁 회의.

플레이어들이 마탑에 입성한 뒤론 첫 원탁회의인가?

어째,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

물론, 내가 할 일은 없다.

나는 나를, 정확히는 내 입방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독설만 쏟아낼 게 뻔하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하고 말이야.

탐색, 간섭, 발현조차 모른다고.

잔소리를 쏟아낼 미래가 뻔히 보였단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가만히 입 꾹 다물고 있자.

그저 바지 수석으로서 회의에 참석만 하자.

다짐하는 와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 수석님."

벨리에였다.

인사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식이란 무엇인가?

정중한 인사에는 성심껏 화답하는 것.

마르셀로 걱정을 덜어서 그런가.

얼굴이 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군.

내가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어라?"

별안간 벨리에의 시선의 나의 가슴팍을 향했다.

정확히는 라펠의 브로치를.

벨리에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브로치가 하나 늘어나셨네요, 수석님? 그런데 뭔가 원래 착용하셨던 브로치랑 하나처럼 잘 어울리네요!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아름다워요."

작은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눈썰미는 물론.

심미적인 관점 또한 모자람이 없군.

합격이다, 벨리에 선임.

그랑펠은 물론이요, 나도 살짝은 우쭐거리고 말았다.

'알아봐 줘서 섭섭하지 않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544]

[능력치]

근력 : 90 / 민첩 : 100 / 마력 : 423 / 행운 : 10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50]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는 예상대로였다.

최대치, 50레벨이 단번에 상승했으니까.

덕분에 가뿐하게 500레벨 돌파.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를 착용할 수 있었다는 거지.

[육망성 브로치 2/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00]

[효과 : 모든 물리 공격 피해량 10퍼센트 상승.]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마탑에서 대여한 마도구들 없이 [심미]도 [中]으로 상승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가슴이 벅찰 수밖에.

그야 나는 이제 고작 한 개의 적금을 깼을 뿐이었으니까.

'보자, 아르카나 대륙에 기계탑이 몇 개더라?'

못해도 일백 개는 될 터.

머릿속에 숫자가 둥둥 떠다닌다.

어째 최근 들어 부탁하는 게 많아 염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부탁한다, 아이언 캐슬 호야.'

산산조각 났어도 상관없다.

부디, 기계탑의 잔해를 최대한 많이 찾아주길 바란다. 물론, 나의 복잡하고도 세속적인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일은 없었으니.

나는 간결하게 대꾸했다.

"고맙네, 벨리에 선임."

우당탕─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까워진 얼굴 하나.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무엇을 말인가?

출탑 신청서에 관한 이의제기인가?

나는 벤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새 브로치도 잘 어울리십니다!"

그 이야기였나.

세상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새로운 육망성 브로치는 나의 노력을 증명하는 훈장과도 같았으니.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냉랭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불필요한 대화는 삼가도록 하지, 벤쉬 윌리엄 선임."

"...네? 네에에?"

나와 벨리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벤쉬.

굉장히 억울한 모양이다.

사실 나야 벤쉬가 원망스럽긴 하다.

그놈의 출탑 신청서!

그따위로 적어서 제출할 거면 뭣 하러 매일같이 작성한단 말인가? 하지만 공명정대한 그랑펠에게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랬다.

모든 것은 단지 절차에 따라서.

마르셀로가 단상에 올라선 참이었으니까.

"회의 도중에 잡담은 금지다."

"...!!!"

크리스탈 홀을 봐라, 벤쉬.

아직 마탑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 플레이어들조차 조용하게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누구 하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벤쉬 윌리엄.

그대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출탑 신청서 그렇게 쓸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

진짜로.

.

.

.

"나 진짜 숨소리라도 들릴까 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잖아!"

"벤쉬 윌리엄이면.... 화염마법학 선임 마법사 아니야?"

"선임한테 그렇게 말한 거야? 진짜 무섭다, 이호열!"

"근데 이해가 되지 않아?"

"...엥? 뭐가?"

"아니,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것도 모자라서 수백만 악마를 사냥하고 돌아왔다고 하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다친 곳도 하나 없었다고 하고...!"

*

원탁회의가 끝나고 나는 균열에 진입했다.

[그리핀의 절벽]

[적정 레벨 : Lv.500]

[붕괴 진행도 : 14.7%]

500레벨을 훌쩍 넘어선 지금.

웬만한 균열의 적정 레벨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위험하지 않다기보다는, 어떤 균열에서 사냥해도 레벨 업은 무리라는 뜻에서 말이지.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균열에 진입한 이유?

뭐,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긍지에 따라서.

'드레드센의 주민들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야겠지.'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디엔드를 소환해야겠고, 하이엘을 통해서 아이언 캐슬 호의 상황도 알아둬야 한다. 겸사겸사 에고 장비의 진척도도 물어보자고.

하지만 그 전에....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

전봇대 위엔 어느샌가 독수리 머리.

맹수의 몸통을 가진 그리핀이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의 그리핀 : Lv.500]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까.

끼에에엑─!

시끄럽게 울부짖자 균열 곳곳에서 그리핀이 몰려들었다.

머릿수가 어림잡아 십수 마리.

나는 입을 열었다.

"불필요한 방해로군."

그런데 뭐, 나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참이었거든.'

지원자는 새든, 짐승이든, 뭐가 됐든 환영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꼬리를 흔들며 얌전히 굴어도 부족하거늘. 날개를 펼치고, 발톱을 세우고, 소란스럽게 떠들기나 하다니. 맹수와 새의 좋지 않은 점만 닮았구나."

특히 육망성 브로치의 방향을 신경 써서 정렬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오늘 훈육은 원탁회의에서 끝난 참이다."

그랬다.

지금이야말로.

육망성 브로치의 세트 효과를 확인할 기회였으니까.

◈ 168화. 제2획

세트 아이템의 효과는 제각각이다.

흔하지 않은 만큼 그 효과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보유한 플레이어들의 말에 따르면....

-"그냥 없으면 살짝 섭섭할 정도?"

-"희귀도 생각하면 그래도 가격 값은 하지."

-"원래 약간의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법이잖아?"

그러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진심으로.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니까?

모든 물리 피해량 10퍼센트 증가라는 효과가 있는데, 여섯 개 중 고작 두 개를 모아놓고서는 큰 세트 효과를 기대하는 건 양심에 털 난 거겠지.

[육망성 브로치 2/6]

[세트 아이템 효과가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 중인 세트 효과 : 2/6]

[1. 모든 기본 스탯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그런데, 뭐야 이거.

'모든 기본 스탯이면....'

[힘], [민첩], [마력], [행운].

네 개의 스탯을 각각 2포인트 상승시켜 준다고?

단순하게 따져도 8레벨이 상승한 것과 같은 효과잖아!

게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레벨 업 요구 경험치를 생각하면....

내가 들었던 말이랑 다른데, 이거?!

나야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스탯을 꾸준하게 향상시키고 있었으니까 체감되지 않는 것뿐이지.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은 정말 스탯 하나하나에 목숨을 건다.

'클래스에 따라 쓸데없는 스탯이 올라가긴 하겠지만.'

내 클래스가 무엇이던가?

무엇하나 특출난 게 없기에.

모든 스탯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육성해야 하는 악마 사냥꾼.

내게는 이보다 반가운 효과도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이거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두 개의 브로치를 착용한 덕분에 발동된 효과는 둘이었으니.

나는 곧장 두 번째 효과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읊조렸다.

"나쁘지 않군."

[2. 보스 몬스터 공격 시, 모든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효과다, 이거.

보스 몬스터가 어떤 몬스터들인가?

레벨을 뛰어넘은 강함을 가진 몬스터.

일반 몬스터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레벨의 네임드 몬스터보다도 수십 배까지 강해지는 몬스터였다. 생명력도 무지막지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 모든 피해량 10퍼센트 상승?

장담할 수 있었다.

8포인트의 스탯 상승쯤은 우습게 만들 정도의 효과다.

특히나 나한테는 이보다 반가운 효과도 없었다.

온갖 살 구멍,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악마 사냥꾼이라서?

그건 방금 언급했으니까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마왕과 거악.

게다가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같은 악마들까지.

당장의 마왕 쟁탈전뿐만 아니었다.

앞으로 성전에서 만나게 될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보스몹일 터.

보스급인 것도 모자라서 무지막지한 레벨까지 자랑하는 놈들에게 이보다 체감이 잘 될 효과도 없지 않을까?

좋아,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끼이이엑!

이내, 달려드는 그리핀 무리.

철컥─

꺼내 든 건 검과 석궁이다.

여유는 부릴 시간은 없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더없이 익숙한 마법보다는 비교적 떨어지는 근접 전투 능력의 향상을 위해 전투에 임하는 게 옳다.

꼬리 어쩌고, 날개, 발톱 저쩌고.

말은 거만하게 지껄였지만 이 녀석들도 절대 만만하지 않다.

[레벨: 544]

[능력치]

근력 : 102 / 민첩 : 112 / 마력 : 455 / 행운 : 12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0]

세트 아이템 효과로 모든 스탯이 2포인트씩 상승했다고 한들.

아직 근력과 민첩 스탯에는 부족함이 많았으니까.

고작해야 200~250레벨 근접계 플레이어 수준이겠지.

500레벨 대의 몬스터.

그리핀을 육체 능력만으로 상대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레벨을 숫자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두 반신(半神)들의 전투를 지켜보고는 『마법의 경지』를.

아르카나 대륙에서 주마등을 목격하고는 『검강(劍罡)』의 반열에 올라선 나였다.

좋은 설정을 다 때려 박은 그랑펠의 설정은 그 어떤 경험에서도, 무언가를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랬다.

또 한 번 목격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깨우칠 정도로 충격적인 무언가를.

슥─

순간, 육체가 가속한다.

"끼엑?"

창공에서 먹잇감을 포착하는 독수리의 시력으로도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잘 쳐줘야 250레벨, 내 육체의 수준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아니, 그걸 떠나서.'

이건 '인간'의 육체로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그래, 내가 모방한 건 드래곤과 같은 취급을 받는 종족.

엘프, 락키드에게 달려들던 엘시도어의 몸놀림이었으니까.

서걱─!

.

.

.

락키드가 부상으로 쓰러진 뒤.

그림자 용병단 단장, 키치는 나를 찾아왔었다.

황금 궁전의 집무실에 들어선 키치는 내게 말했다.

"말씀은 드리지 않았었는데, 저희 그림자 용병단에는 당한 만큼 갚아줘야 한다는 말이 있어서요. 어디에 있는 건가요? 그 귀 큰 녀석."

되갚아 주고 싶다는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엘시도어의 싸가지는 정말, 나도 열이 받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가?"

엘시도어는 지나치게 강했다.

설령, 키치라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키치가 긴 흑발을 쓸어넘기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승리까진 아니어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죠. 제가 보기보다 뒤끝이 좀 심해서."

아니, 사실은 내가 찔려서 그렇다.

엘프가 고향, 시슬리에서 뛰쳐나온 원인이 나였으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첫 세계수의 축복]의 축복 때문이었지만.... 그랑펠의 긍지가 엘프와 자신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삼자에게 떠넘길 리 없었으니.

나는 키치에게 선언했다.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명심하도록."

"...?"

"그대들을 책임지는 것은 나다."

게다가 현재 그림자 용병단은 유스라 왕국에 고용된 상태.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내가.

그랑펠이 그림자 용병단을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다.

"!"

키치가 멈칫하더니 웃었다.

이번엔 의미심장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울프 말대로 낯서네요, 이런 대접은."

물론, 그림자 용병단에게도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겠지.

심정을 알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나답게 있는 그대로를.

"또한 그가 목숨보다 값진 것을 뱉어내게 만들겠다."

"...!"

긍지를 증명해 내지 못하는 이상.

엘시도어에게 자유는 없었으니까.

키치도 그랑펠의 긍지론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걸까.

그제야 눈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역시. 그렇다면 믿고 있겠습니다. 이호열 총대장님!"

...이호열 총대장님이라니.

정말이지, 누가 들을까 봐 끔찍한 호칭이다.

영 적응이 되지 않는구나.

.

.

.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용병단.

그림자 용병단의 말석 락키드를 박살 내고, 단장인 키치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존재.

엘프, 엘시도어.

하지만 그건 기교나 전투력의 격차 때문이 아니었다.

'엘시도어의 말대로 그저 태생의 격차였지.'

제아무리 그랑펠의 재능이라고 하더라도 태생의 격차는 극복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 나는 어떻게 엘프가 그랬던 것처럼 육체를 비정상적으로 가속할 수 있는가?

슥─!

가속하는 육체.

인간의 근육과 관절로는 버틸 수 없어야 하거늘.

나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파열을 거절합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골절을 거절합니다.]

그랬다.

엘프들이 그토록 떠들어 대던 태생의 차이엔 아무래도 [첫 세계수의 축복] 영향이 상당한 모양이었으니까.

쉽게 말해 버프빨로 엘시도어의 움직임을 모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날개가 무색하게도."

"끼엑?!"

"한없이 느리구나."

서걱─!

...버프 덕분이면서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그랑펠.

"몇 번이나 말했듯 내 앞에서 수치는 무의미하다."

...수치는 몰라도 수치심은 유미의하단 말이다, 그랑펠.

쓰러진 그리핀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과연, 500레벨 제한 값을 한다는 건가?

두 번째 브로치의 모든 물리 피해량 증가 효과도 상당하다.

거기에 엘프의 몸놀림까지 더해지니까.

내 비루한 근력, 민첩 스탯은 충분히 만회하고도 남았다.

'체감하니까 더 기대되는데.'

세트 효과, 보스 몬스터 피해량 증가 효과는 어떨까?

그래도 눈치는 있다는 건가.

그리핀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뭐, 좋게좋게 넘어가자.

나도 사냥 목적으로 균열에 진입한 게 아니거든.

"비로소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군."

강제적 예절 주입.

주변이 잠잠해지자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이엘, 그리고 디엔드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내, 허공에서 하이엘과 디엔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희 쌍으로 뭐 하냐.

"하이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한없이 깊은 어둠, 나의 주군이시여."

언제나처럼 고상한 인사를 건네오는 하이엘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디엔드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주군이라니.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이내, 하이엘이 당당하게 말했다.

"디엔드와 기본적인 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연, 나의 분신이구나.

그래, 중요하지 예절 교육.

듣지 않아도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것 같구나, 하이엘.

그럼에도 상당히 벅차구나.

무거워서 뺨이 달아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구나.

두 정령을 소환하는 무게감이 이런 거였구나, 싶다.

'...되도록 하나하나씩 소환하자.'

특히 디엔드, 너와는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구나. 물론, 나의 속내는 드러나지 않았으니. 나는 너그럽게 읊조렸다.

"그대들의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아닙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주군이시여."

...제발, 둘 다 가만히 듣고 있어주면 안 될까?

허나, 내 마음속 절규가 무색하게도.

디엔드는 충직하게도 업무 보고를 잊지 않았다.

"주군의 명에 따라 드레드센의 생존자들은 아이언 캐슬 호에 피신한 상태입니다. 생존자라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스물 남짓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확실히 현시점에서 아르카나 대륙에 아이언 캐슬 호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겠지.

아이언 캐슬 호의 규모를 생각한다면야, 드레드센 주민을 수용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체인워커의 말에 따라 드워프들은 드레드센 생존자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인간과 드워프. 두 종족 사이엔 교류가 없다시피 했기에 융화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는구나, 하이엘.

내가 궁금한 게 바로 그거였다.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인 나야 드워프들과의 관계도가 처음부터 최대치였지만, 다른 이들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체인워커가 나서줘서 걱정을 덜었다.

"또한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듣고 있다, 디엔드."

"흩어졌던 세력들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슬슬 때가 온 모양이구나, [마왕 쟁탈전].

보자,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의 시간 흐름 차이를 고려하면....

이르면 다음 정기 업데이트 내역에 쟁탈전 관련 내역이 떠오를 수도 있겠는데?

물론.

"경고했거늘. 열등한 족속답게 알아듣지를 못하는군."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을 때부터 대비하고 있었던 바다.

게다가 이번엔 나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지 않았거든.

유스라, 프로스트, 뮤온, 마탑, 플레이어 연합....

아르카나 대륙에서, 또 현실에서 손꼽히는 든든한 아군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비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할 수 있었다.

"마왕 압살 때의 굴욕을 감사히 여기게 만들어 주겠다."

내뱉은 말을 반드시 실현해 내는 그랑펠의 설정까지 추가다.

물론, 그 뒷감당은 나 이호열의 몫이었으니까.

그때까지 준비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준비해보자.

나는 하이엘에게 물었다.

"귀철의 제련 상황은 어떠한가, 하이엘."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

그가 귀철의 제련을 맡았다고 했었지.

분명, 뭐라도 진척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어째 하이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에 관련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아이언 캐슬 호.

화르륵─!

초고순도 마력석으로 가열되는 초고열 용광로.

귀철은 완전히 녹아내린 상태에서 소리쳤다.

"부족하다. 나의 주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귀철은 모든 것을 목격했다.

"그는. 한없이 깊은 어둠."

"아니, 한없이 깊은 어둠 속 한 줄기 빛."

"그와 동시에 악룡을 사냥한 자."

모든 것을 목격했기에.

뒷말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어 캐슬 호가 귀철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또 다른 세계의 구원자이자, 그 세계를 구원한 것도 모자라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발버둥 치는 숭고한 자."

"그렇기에 나는 그에 걸맞은 무기로 태어나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

귀철이 드워프 최고의 대장장이 월스와일을 도발했다.

"이까짓 담금질은 그가 마시는 찻물보다 미지근하구나!"

"...!!!"

◈ 169화. 역시 총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