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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화. 피어난 것은 (3)

런던 사태의 파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계가 주목한 건 급변한 영국의 태도였다.

영국, 대격변 이후 세컨드 썬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국가.

그런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가 선언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성전에 참전합니다."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에 뛰어들겠다고.

세컨드 썬은 영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까.

사실상 영국의 참전이라고 봐도 무방한 발표였다.

"세컨드 썬까지 움직일 줄이야."

"진짜 이러다가 천하통일도 뛰어드는 거 아니에요?"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에이, 감독님. 농담도 못 해요? 그나저나 장관이네요."

런던 거리에 피어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들.

이 나무들이 바로 삭막하고 뻣뻣한 영국을 변하게 한 일등공신이겠지. 아니, 굳이 따지자면 그런 나무를 싹 틔운 이호열이 일등공신이려나?

"일개 플레이어의 영향력 수준을 넘어섰어."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스칼은 제쳐놓더라도.

랭킹 2위 자리를 지키던 록스만 봐도 그랬다.

플레이어로서는 명성이 드높던 록스였지만, 국가를 움직일 정도의 힘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이호열은 달랐다.

"완력으로 꼬장을 부린 게 아니라, 이 마음부터 움직이게 만든 게 더 대단한 점이죠!"

과연, '런던의 기적'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활약이었다.

물론,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하나가 더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화창했건만. 거리엔 우산을 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여기가 거기 맞죠? 이호열이 망령을 쓰러트렸던!"

호열의 우산 격투.

거리 곳곳에서 우산을 치켜들고 명장면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실 전투라고 해도 우산을 한 차례 절도 있게 휘두른 것뿐이었지만.

덕분에 평범한 시민들이 흉내를 내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 현장이 하나의 신드롬으로 전파를 타고 뉴스로 보도될 정도였다.

유스라 왕국.

잠자코 화면을 지켜보던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진짜 장난 아니다."

대검을 휘두르는 바바리안.

물리 공격이 먹히지 않는 망령을 상대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남태민이었다.

마찬가지로 광전사, 레오니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산에 마력이라도 둘렀나? 뭔데."

뭐냐고, 진짜로.

호열의 우산 격투 영상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됐다.

성장했어도 호열과 자신들의 격차는 아득하게 벌어져 있다는 걸.

마창사, 히사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날붙이에 마력을 휘감아 싸우는 것은 히사기의 주특기.

덕분에 그 특징을 누구보다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력을 사용하신 건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의 의문은 더더욱 깊어졌다.

"그럼, 진짜 저 우산이 유니크템이라도 되는 건가?"

"씹, 진짜 말이 되는 소릴...."

"아니, 호열 씨가 보여주신 그 눈깔은 말이 되냐 그럼?"

"...그것도 말이 안 되긴 하는데, 하씨."

그런 세 사람의 곁으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프로스트에서 유스라 왕국으로.

라이언 하트 기사단의 정비를 위해 움직인 하르콘이었다.

"앗. 하르콘 단장님, 간만에 뵙습니다."

유스라 왕국을 재건하며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는 동고동락한 남태민과 레오니였다. 뒤늦게 합류한 히사기도 하르콘과는 어느 정도 통성명을 마친 상태.

덕분에 하르콘은 개의치 않고 물어왔다.

"호열 경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나 보군."

"아, 혹시 소식 들으셨을까요?"

"경의 소식이라면 던전 균열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역시, 프로스트에도 호열 씨 소문이 자자했군요?"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호열 경이 움직였다, 균열을 클리어했다, 맹활약했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소문들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하르콘의 눈이 남태민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향했다.

"...경?"

난데없는 하르콘의 혼잣말.

혹시 스마트폰을 처음 보시는 건가.

아니면 우리처럼 우산 격투에 놀라신 건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던 세 사람.

"이건!"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중 정답은 없었다.

하르콘은 정말 세 사람과 다른 걸 보고 있었으니까.

칠흑처럼 검게 물든 장우산.

그런 장우산을 타고 오르는 은빛 기백.

틀림없었다.

"...그런가. 그것이 경, 고유의 빛인가?"

하르콘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체 어느 틈에 검강(劍罡)의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검강?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랭커가 괜히 랭커가 아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쌓인 눈치가 있다는 말이다.

검강이 바로 우산으로 망령을 쓰러트린 능력의 이름이구나.

세 사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르콘 단장님, 그 검강이라는 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마탑의 집무실.

"불합격이다. 벤쉬 윌리엄."

언제나처럼 수석의 업무에 시달리고 있던 나를 일깨운 건 진동이었다.

쉬지 않고 울리는 허벅지의 스마트폰.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애증의 존재들이 확실하다.

...진심으로 무시하고 싶었건만.

이놈의 예절이 연락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쌓인 단톡방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를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 저장한 웬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2호의 메시지도 최대한 흐린 눈을 뜨고 살폈다.

그런데....

큰누나, 누나까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진짜로!

단톡방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

아랑이다.

정확하게는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는 하나뿐인 내 조카.

세상 사람들이 다 우산을 휘둘러 대도 참을 수 있다. 나한테 통제할 명분도 없으니까.

그러나 하나뿐인 내 조카가 나의 흑역사에 물드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과연, 훌륭한 자세로구나."

아랑이를 진지하게 평가하지 마라, 그랑펠.

물론, 동영상이 전부는 아니었다.

웬수라도 혈육이라고.

놀림 끝엔 결국, 다들 내 안부를 물어왔으니까.

'물론, 뉘앙스가 좀 그렇긴 한데.'

성전 퀘스트에 대해서도 소식을 들은 모양.

혼자 다니다가 친구들이랑 같이 활동하게 된 거냐며.

그래도 친구들이 있다니.

전보다 마음이 놓인다는 말이나 하고 말이야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물론, 예절에 따라서 정중하게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이쯤에서 그만하자.

더 이상 웬수들과 말을 섞었다가는.

나, 이호열의 정신력이 버티지를 못한다.

나는 다시금 업무로 눈을 돌렸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리.

내 성전 퀘스트엔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퀘스트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내가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위치가 아니긴 하지.

물론, 플레이어들의 퀘스트는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웅성웅성─

집무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증거겠지.

마탑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몰려든 플레이어들이었다.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들은 약간 들뜬 모양이었다.

나와 제시 하인네스를 제외하고, 마탑에서 직위를 가진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다면.

마탑에 입성해 직위를 받게 되는 것도 모자라서.

마탑의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단다.

기대감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엄격할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악마와 맞서게 되는 성전 퀘스트다. 플레이어의 능력, 높은 레벨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에 내가 평가하겠다고 나섰어 봐.'

마탑의 숙련 마법사들은 기본이요.

벤쉬 윌리엄에게 그랬던 것처럼.

경우에 따라선 선임 마법사에게도 퇴짜를 남발하는 내가 아니던가?

그래서 진심으로 우려하기도 했었다. 내가 플레이어 평가까지 도맡았다가는 단 한 명도 마탑에 입성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는 게 아닐까, 하고.

"아쉬운 일이군."

아쉽기는 개뿔.

너는 매사에 감사할 필요가 있다, 그랑펠.

뭣보다 평가에까지 손을 벌렸다간 진짜 죽는다, 죽어.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진행 중)

●팔굽혀펴기 3,000회 (진행 중)

●턱걸이 2,0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1,000회 (성공)

...진짜 피곤해서 죽는다는 말이다.

[근력]과 [민첩]에 스탯을 투자한 이후로 클래스 퀘스트의 요구치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수치들이다.

물론, 내색은 조금도 할 수 없었으니.

나는 그저 태연하게 읊조릴 뿐이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큰 힘이라고 하기에 내 [근력] 스탯은 일백도 되지 않거늘. 어쨌든, 클래스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평가 말고도 할 일이 과분하게 많다는 뜻이다.

지이잉─

별안간, 또 한 번 진동하는 스마트폰.

이번에는 전화였다.

웬수, 이예림이 하다 하다가 이젠 말로 내 정신을 공격해 오려는 건가? 다짜고짜 의심부터 했는데, 미안하게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던 남태민이다.

"듣고 있다."

...여보세요라고.

좀 평범하게 인사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아나는 거냐.

이래서 되도록 통화를 피하고 싶은 건데.

다행스럽게도 남태민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허억. 허억. 호열 씨, 통화 괜찮으세요?"

반응과 별개로 어째서인가,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 목소리였지만.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태민이 곧장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죄송한데, 그 검강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건가요?!"

...검강(劍罡)이라고?

그 말에 직감할 수 있었다.

하르콘에게 체력 단련을 받고 있구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거.

"그렇다."

역시, 나만 체력 단련으로 개고생 하는 건 억울하단 말이지.

*

"검강은 그대들이 넘볼 수도 없을 정도로 아득한 경지라네. 그 이전에 검기라는 또 하나의 산, 그 정상에 반드시 올라서야 하니까 말일세."

하르콘은 말을 이었다.

"그런 검기를 깨우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육체가 필요하지."

그런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 뛰어라!

호열과 통화 중인 남태민.

레오니는 남태민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물었다.

"...뭐래. 아니, 뭐라고 그러시냐?"

제발, 검강 같은 건 없다고.

하르콘이 헛소리를 한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전투랑은 다른 체력 소모야.'

폐가 비명을 지른다.

끊었던 욕지거리가 다시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러웠으니까.

하지만 바람이 무색하게도.

도리도리─

남태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르콘 단장님 말이 맞았어. 하셨대."

"이런 걸? 진짜?!"

"레오니 양, 더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습니다."

히사기의 얼굴에 비장감이 깃들었다.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하르콘이 농담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야 검강이라니.

아르카나에서 그런 스킬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까.

"검강도 검기도, 호열 상이 있다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있단다.

"호열 씨도 체력 단련을 하셨다니. 따라야지."

그리고 했단다.

미친 광신도들이야, 뭐야.

레오니가 두 사람의 광기에 혀를 내두르는 사이.

두 사내가 이를 악물고 달려나갔다.

젠장, 이해는 안 되지만 뒤처질 수는 없다.

균열이 그리워질 줄이야.

레오니가 이를 악물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야, 남태민! 근데 AAU 얘기는 뭔 얘기야?!"

.

.

.

띠링─

박민재는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남태민].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가온.

길드 마스터, 남태민이 AAU 대한민국 지부장과 면식이 있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남태민 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보자."

슬쩍.

달력을 향하는 박민재의 시선.

아무리 봐도 예정된 행사 같은 건 없는데. 공적인 일이라면 몰라도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이내, 박민재가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눈을 끔뻑였다.

믿기지 않아서.

"...뭐?!"

다시 봐도 그 내용이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플레이어 이호열. AAU 회의 참석 요청]

이호열이 AAU 회의에 참석한단다...!

그동안 AAU 대한민국 지부에서.

아니, 지부를 떠나서 AAU가 이호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구애를 보냈던가?

그러나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던 이호열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포기한 지가 오래전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그 천하의 이호열이.

먼저 자신을 통해서 접촉 의사를 밝혀오다니.

"오케이. 무조건 오케이!"

AAU 각 지부의 일정을 조율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이 시차 같은 걸 따질 때인가?

갑은 언제까지나 이호열이다.

을은 그저 따를 뿐.

박민재가 허겁지겁 답장을 보냈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벅찬 가슴을 억누르기도 잠깐.

문득, 박민재에게 떠오른 격식과 예절.

우당탕!

박민재가 다급하게 지부장실을 뛰쳐나갔다.

재수가 없게도 그와 마주친 건 다름 아닌 성현준이었다.

박민재가 성현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 현준아. 나, 그래도 꼰대 티 좀 벗겨지지 않았냐?"

"...네? 아, 네. 그렇죠?"

"그치? 근데 아무리 내가 편해도 주머니에서 손은 좀 빼고...."

*

마왕 쟁탈전이라는 초대형 업데이트 예정된 지금.

불필요한 사건 휘말리는 건 극구 사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런던 사태와 같은 일을 되풀이할 순 없다.

말했다시피 AAU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하지만 그전에.

유스라 왕국 집무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싸늘한 시선으로 훑었다.

서류의 목적은 면담 요청.

서류의 제출자야 과거에도, 지금에도 잘 알고 있다.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

하지만 그 절차가 잘못됐다.

"불합격이다. 스칼."

한없이 깊은 뭐시기만으로도 충분했거늘.

악룡 사냥꾼이라는 또 다른 내 이명을.

세상에 퍼트린 데에 대한 사과가 우선이란 말이다....

◈ 157화. 고개를 들어라

아르카나 상공.

아이언 캐슬 호의 드워프들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야간 비행.

마안(魔眼)이 눈을 뜨는 탓에 악마들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지는 밤이거늘. 평소와 다르게 아이언 캐슬 호가 밤에도 비행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이유?

"정말, 믿기지 않는군."

번거롭게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으랴.

모든 게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모험가, 이호열 덕분이었다.

"어찌 다른 세계에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드워프들의 지도자, 체인워커는 하이엘의 말을 떠올렸다.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 정도 예상이야 자신들도 할 수 있었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비장의 무기로 수백만 악마를 쓸어버렸던 아이언 캐슬 호였으니까.

그러나.

"체인워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상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날고 있는 우리보다도 정확하게 대륙의 전황을 파악하는 게!"

그 말대로였다.

구름 속 항해를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정보라니.

이런 건 자신들의 기술력으로도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지난밤에도 그렇고. 그 능력의 한계는 대체...!"

체인워커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그저 신뢰하게나."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약이었거늘.

맹약 관계이기에 믿을 수밖에 없겠지.

거기에다가 지금은 이유 같은 걸 찾을 때가 아니었다.

호열의 부탁 아닌 부탁을 위해 움직이기도 벅찼으니까.

-"결전병기의 잔해를 수습하고 싶다고 부탁하셨습니다."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이 순간에도 대륙 곳곳에서 악마를 사냥하고 있는 기계탑이었다.

악마들의 세력이 강성해진 만큼 모든 기계탑이 멀쩡할 순 없었다.

제작자로서 짐작해 보건대....

적어도 대여섯 채의 기계탑은 수명을 다해 가동을 멈췄겠지.

체인워커의 미소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우리조차 신경 쓰지 못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군."

철은 그저 철에 불과하다.

철로 만든 기계 또한 그저 기계에 불과하다.

그렇게 여겨온 자신들의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호열은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대한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잔해라도 수습하길 원하는 거겠지. 그 마음을 늦게라도 깨닫게 된 지금.

만회를 위해선 서둘러 기계탑의 잔해를 수습해야 했다.

"자, 다들 서두르게나!"

철컥─!

다시금 맞물리는 기계장치.

그때였다.

차가운 아이언 캐슬 호에 온기가 돌았다.

"!"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열의 부름에 소환됐다가 다시금 아이언 캐슬 호로 복귀한 것이었다. 체인워커가 재빨리 하이엘에게 다가갔다.

"하이엘, 호열 경께서 무언가 말씀하신 게 있으십니까?"

하이엘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하이엘의 품속에는 웬 돌덩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정확하게는.

"대장장이여, 나를 최고의 무기로 벼려내라."

"...!"

말하는 광석(鑛石)이.

드워프가 어떤 종족인가?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마탑의 마법과 비견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이들이다. 아무리 희귀하다고 한들, 광물이라면 두들길 만큼 두들긴 광물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체인워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 이건 귀철? 대체 이 귀한 걸 어디서?"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 이호열.

그의 그릇은 깊어도 너무 깊었다.

정말, 한없이 깊다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

유스라 왕국의 집무실.

...어째 귀가 심히 가렵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귀를 후비는 것은 격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게다가 내가 또 귀 가려울 짓을 많이 하긴 했지.

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우산 격투부터 시작해서....

됐다, 말하면 나만 괴롭다.

"여전히 오만하구나."

...갑자기 웬 자기소개인가, 싶었거늘.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을 향한 읊조림이었다.

지속 시간 끝, 다시금 눈을 감은 [마안(魔眼)의 망원경].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쟁탈전."

마왕 쟁탈전.

내전을 앞두고 악마들이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떠올려 보면, 마왕의 자리에 도전할 만한 녀석들이었지. 하나같이 외관에서부터 일반적인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르달까.

"왕을 자칭하는 것도 모자라 순위까지 매긴다?"

뭐, 그랑펠의 입장에서야 그것보다 우스운 일도 없겠지.

"열등한 족속답게 무의미한 짓을 골라서 하는군."

다 똑같은 사냥감에 무슨 숫자를 붙이나, 하고.

그러나 나, 이호열은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그날.

수백만 악마들 사이에 뛰어들었던 그날.

나는 제대로 깨달았단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스케일이다.'

대형 이벤트를 넘어선 월드급 이벤트라는 거지.

그 탓에 반드시 업데이트를 통한 균열로 생성.

현실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를 비롯해서 갖가지 방식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는 나였거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의 성장이었다.

자연스럽게 상태창을 향하는 시선.

[레벨: 494]

"숫자 따위로 나를 재단할 순 없다."

...한결같네, 진짜로.

근데,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레벨에 의존하는 게 아닌 근본적인 성장 또한 중요하니까.

마법적 지식을 쌓는 것은 물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검강을 가다듬는 것.

사격을 포함해 애써 파놓았던 우물.

살 구멍들이 막히지 않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근데 레벨도 똑같이 중요하거든.'

[천적관계]를 떠나서 레벨이 높아서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챙길 수 있는 건 미리미리 챙겨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신세 한탄을 했다시피, 500레벨에 육박한 레벨을 올리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쓰러져 가는 고목 동산]

[적정 레벨 : Lv.400~Lv.450]

[붕괴도 : 3.1%]

[식인곤충 서식지]

[적정 레벨 : Lv.450]

[붕괴도 : 10.1%]....

현시점에서 생성된 굵직한 균열들을 살펴본다.

뭐, 다른 플레이어들처럼 온종일 균열에서 몬스터만 때려잡는다면야. 약간은 레벨과 경험치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럴 시간이 없다.

몸이 두 개라면 모를까.

이런 수준의 균열은 시간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드디어 고이 간직했던 적금을.

깨버릴 때가 왔다는 것이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경험치가 축적됩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명성이 축적됩니다.]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에 대한 습득 권한을 획득합니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에 축적된 경험치와 명성을 말하는 게 맞다.

그런 나의 원대한 계획을.

하이엘을 통해 체인워커에게 전달해 뒀다는 말씀.

그중 하나만 회수해도....

'...적어도 수십 레벨은 확 오르지 않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이번만큼은 기대해 볼 만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악크샨의 결전병기다.

성전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거악과 마왕을 몰아붙였던 천하의 악크샨.

"그대들의 긍지를 잊지 않겠다."

그래, 잊지 않고 제대로 써먹어 주겠노라.

물론, 그런 나의 구구절절한 속마음을.

체인워커를 비롯한 드워프들에게 전할 순 없었으니. 최대한 간결하게 하이엘에게 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더해서 말이야.

'더 이상 제련을 미룰 이유가 없어.'

귀철, 에고(Ego) 장비의 재료가 되는 광물.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만큼 어떻게 제련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신경이 쓰였던 건 레벨 제한이었지.

'아무리 좋아도 착용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으니까.'

레벨을 고려해서 제작한다면 그 성능이 모자라고.

성능을 최우선으로 제작한다면 레벨 제한이 높아질 게 뻔했으니까.

딜레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경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무조건 성능이 최우선이다!

800레벨 제한의 아이템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착용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아이템을 『마법』, [심미]로 활용했던 나였으니까. 템빨 덕분인가,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귀철을 제련해서 만들 에고 장비도 마찬가지겠지.

'...잠깐,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더 활용도가 높아지는 거 아닌가?'

순간, 그럴싸한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나중에 완성된 에고 장비를 앞에 두고 생각해도 늦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워프들에게 귀철의 제련을 맡긴 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호열아.

하이엘에게 덧붙였던 마지막으로 말은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지만.

-"또한 그 수고비는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전하라."

그놈의 얼마든지!

누가 귀족 아니랄까 봐, 청렴결백하게 모은 돈을 정승같이 써버리게 생겼구나.

어쨌거나 지껄여 버린 이상.

그저 제련 값을 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대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졌으니까.

드워프들의 기술력과 긍지야 조금도 의심하지 않거늘.

사람 속은 또 알 수가 없는 법이거든.

직접 얼굴을 맞대봐야 알 수 있다는 말씀이시다.

그런 나의 행선지는 AAU 대한민국 지부.

가볍게 정리하는 옷매무새.

이내,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포탈을 발현했다.

"말했듯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다."

그 말인즉슨.

오후인 지금은 24시간 중에서도 특히 귀한 시간대라는 것.

다들, 부디 약속시각을 잘 지켜주기를 바란다.

마탑, 초인이라 불리는 선임 마법사들 앞에서도 눈치를 보지 않았던 나의 꼰대력이다. AAU 지부장들 앞이라고 자제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

AAU 대한민국 지부.

대회의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였다.

베이커가 박민재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미스터 박, 얼굴이 많이 좋아졌군요!"

저 양반이 저렇게 살가운 양반이 아니었는데?

AAU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협조적이지 않았던 영국이었다.

지부장인 베이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박민재의 기억 속에서.

베이커가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일찍 오셨군요. 베이커 지부장 님."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라뇨. 설마, 이호열 플레이어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반가워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잖아?

당사자가 참석하는 마당에 불필요한 오해를 쌓는 건 금물.

박민재가 재빨리 악수했던 손을 놓고는 말을 이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도 오늘 처음 뵙는 겁니다."

"네, 초면이죠? 미스터 박과 얼굴을 맞대는 건 처음이군요!"

"...아니, 그쪽이 아니라 저조차도 이호열 플레이어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는 뜻입니다."

"아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베이커는 그제야 박민재가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방금의 인사는 호열을 향한 감사 인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

"제 마음을, 지금처럼 말 몇 마디로 대신할 생각은 없거든요."

악마에게 빙의당했다.

베이커가 그 사실을 자각한 건.

슈레이그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난 다음이었다.

일반인, 플레이어들보다 정신력이 낮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악마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겨 의식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호열이 그런 나를 구원해 줬다.'

아니, 그걸 넘어서 런던을 구해냈다.

신세를 졌다, 인사 한마디로 은혜를 갚는다는 거야말로 신사답지 않은 행동이겠지.

그건 자신뿐만 아니었다.

같은 날, 균열에 휘말린 총리께서도.

여왕께서도 자신에게 같은 뜻을 전해오셨으니까.

"미스터 박."

"네, 듣고 있습니다. 베이커 지부장님."

"이제부터 우리 영국은 행동할 겁니다."

"...행동이라면?"

중국처럼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노선을 타겠다는 말인가?

순간, 긴장한 박민재였거늘.

기우에 불과했다.

베이커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왔으니까.

"긍지에 따라서 움직이겠단 말입니다."

"...!"

두 사내가 의미심장한 대화를 끝마친 순간이었다.

임박한 시간에 맞춰 세계 각국의 지부장들이 모여들었다.

과연, 박민재의 예상대로였다.

'다들 부리나케 달려올 수밖에 없었겠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비공개 긴급회의.

참석하지 않는다면.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이호열이 참석하는 회의에 불참한다?

어떤 극비 정보를 놓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물론, 더 나아가서 각자의 꿍꿍이속도 있겠지.

'특히 미국.'

미국은 동부와 서부에 두 개의 AAU 지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둘 중 하나만 참석해도 됐을 텐데. 굳이 두 지부장님께서 참석 의사를 밝히신 걸 보면....

어째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덜덜덜.

'내가 억울할 건 없지만, 괜히 신경 쓰이잖아.'

박민재가 긴장감에 다리를 떨기도 잠시.

어느덧 정각, 약속 시간이 되었다.

그 순간,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달라졌다.

고오오오─!

허공에서 마력의 빛무리가 일렁였다.

포탈에서 이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전에 말을 맞춘 것도 아니었거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이커를 시작으로.

짝짝짝─

곳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랬다.

이해관계를 떠나서 호열이 보여준 활약은 AAU의 창설 목적과 더없이 부합하는 행동이었으니까. 진짜 영웅의 등장에 찬사를 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수 소리는 길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박수가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조금의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호열이 입을 열었으니까.

"시간 관계상 환대는 생략하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 탓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그보다 더욱 냉랭한 호열의 시선이 회의실 시계를 향했다.

이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또한 시간조차 엄수하지 못한 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

그와 동시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거늘.

회의실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쿵!

.

.

.

좋아.

이제 퇴로는 없다.

악마는 고개를 들어라.

◈ 158화. 상상 그 이상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능구렁이였다.

누구보다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으며.

그 권력을 눈치껏 휘두를 줄 아는 자들.

전 세계의 협약으로 출발한 AAU라고 한들, 세월이 흘렀다.

아르카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겠다는 설립 목적?

그보다는 이해관계가 우선이 된 지 오래란 뜻이다.

정부와 플레이어들 사이, 선을 넘나들며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해오던 게 AAU의 지부장들이었다. 한마디로 줄타기의 달인들이란 말이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이 있었다.

'기자 나부랭이들과 같은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이호열, 지나치게 건방져.'

'사람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플레이어, 이호열.

그와 마주하더라도 기세가 꺾이지 않을 자신이.

물론, 알량한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뚝─

끊겨버린 박수 소리.

뭐라고?

환대는 생략하겠다고?

처음 들었을 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사양하는 것도 아니고 생략하겠다니.

말의 뉘앙스가 미묘했으니까.

부담스러워서 거절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마치 지극히 받아야 할 환대지만.

부득이하게 시간 관계상 생략한다는 말투였다.

"...!"

급속도로 냉각된 분위기.

덕분에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있던 지부장들.

이내, 우렁찬 소리가 그들을 움찔거리게 하였다.

쾅!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마력이 일렁이는 것으로 봐선 이호열의 마법이 분명했다.

미국 서부 지부장, 짐 조슈아는 당황했다.

'그놈의 화장실엔 왜 가서는.'

동부 지부장이 입장하지 못한 채 문이 닫혀버렸으니까.

'...제길, 혼자서는 부담스러운데.'

미합중국 대통령을 포함.

온갖 자리에서 온갖 인물들과 독대해 본 경험이 있는 짐 조슈아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호열은 심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시시껄렁한 안부를 나누는 거면 몰라도 오늘은....

'미래에 관해 나눌 이야기가 많다고.'

이호열과 진지하게 의논하려던 제안이 있었단 말이다.

그 탓에 짐 조슈아가 애써 입을 열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아직 입장하지 못한 지부장님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개회를 몇 분만 늦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단호한 대답.

"또한 시간조차 엄수하지 못한 이들과 나눌 이야기는 없다."

"...!!!"

단 몇 분도 기다려 줄 수 없다니.

지나치게 칼 같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한 표정을 지어봤자 소용없었다.

또각─

호열은 그대로 단상으로 나아갔으니까.

호열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세계 각국에서 날고 기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AAU 지부장들이다. 그들의 앞에서 조금은 위축될 법도 했건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은.

더없이 꼿꼿한 자세.

그리고.

"...!!!"

심상치 않은 눈빛이었다.

간혹가다 간담을 서늘케 하는 플레이어들의 시선과는 달랐다.

가진 건 힘밖에 없다는 걸 자랑하듯.

다짜고짜 살기를 뿜어대는 눈빛이 아니란 뜻이었다.

어찌 보면 평온한 것을 넘어서 무심해 보일 정도의 시선.

그러나 어째서인가?

그 눈빛이 자신들의 속내를 훤히 훑는 것처럼 느껴졌다.

꼴깍─

곳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감에 누구 하나 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다.

불과 수십 전까지 품었던 생각이 무색해질 정도의 압박감.

...크나큰 착각이었다.

이호열은 일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지부장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

.

보자, 일단 [천적관계]는 발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게 바로 악마 숭배자의 존재였다. [천적관계]만 믿고 있다가 마탑에서 크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말이야.

'기척도 느껴지지 않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를 제외하면.

악마에게 빙의되거나 깊게 관련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근데, 다들 표정들이 왜 그러실까.

뭐, 찔리는 거라도 있는 분들처럼.

잠깐, 찔리는 게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시긴 하겠구나?

악마와 격식에 어긋나는 짓만 제외한다면.

한없이 너그러운 그랑펠의 마음씨와는 다르게.

나, 이호열의 속내는 그렇게 넓지 못하다.

뒤끝 때문에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AAU 관계자, "성전? 정말 진행 중인지 알 방법 없다."]

그런 기사가 한두 개였다면 내가 이해를 하겠는데 말이야.

'정말,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기사가 쏟아져 나왔었지.'

특히 익명의 해외 관계자님들께선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오죽했으면 그랑펠 입에서 주제 파악 좀 하라는 말이 튀어나왔겠냐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군."

...아니, 그렇다고 입방정을 떨라는 건 또 아니었는데.

자초지종도 없이 뱉어낸 말이었거늘.

곳곳에서 흠칫하는 이들이 보였다.

진짜 찔리는 게 있나 본데?

어쨌거나, 됐다.

뒤끝을 풀려다가 새로운 흑역사를 쌓게 되는 건 사양이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대들에게 묻겠다."

과연, AAU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AAU 내부에 악마 존재 여부.

그와 더불어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 그것이었다.

예정된 스토리와 다르게 급변한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미궁]이나 [던전] 같은 아르카나 설정들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걸 확인한 참이었다.

그런 정보들을 제대로 써먹기만 하더라도 앞으로 예정된 업데이트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대들은 성전에 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 물어봐야겠지.

그런 나의 말에 몇몇 이들이 눈에 띄게 흠칫했다.

얼추 보이네.

말 많은 익명의 해외 관계자분들이 누군지들 말이야.

그쪽들은 특히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알지 못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는가."

나, 이호열의 뒤끝뿐만 아니라 성전(聖戰)은 악크샨의 절멸과도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랑펠의 긍지 또한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것은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네만."

AAU, 이름값을 하란 말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

.

.

남태민에게 연락을 받은 뒤부터 박민재는 한순간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호열, 그가 주도한 회의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자는 자신이었으니까.

책임자.

말 그대로.

박민재는 모든 걸 책임을 지려고 생각했다.

'회의 끝에 어떤 결과가 벌어지든지 상관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호열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이라면 발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고, 경고도 했겠다.

더러운 사회의 구정물 같은 건 자신이 얼마든지 뒤집어쓰겠다, 다짐까지 않았던가?

'또 샌드백 역할은 익숙하거든.'

하지만 회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히려 호열이 자신들을 추궁하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치솟던 기세는 어디 가고 다들 입만 꾹 다물고 계신다들.

이 광경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평생 소화제가 필요 없었을 텐데.

비공개회의로 진행한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문득, 옆자리의 도쿄 지부장 오카자키가 말을 건네왔다.

"다들 할 말이 없는 모양입니다."

호열의 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AAU, 터무니없는 능력 부족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불필요하게 시끄럽기만 하다.

정말이지, 촌철살인이 따로 없다.

자신이라고 예외는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주제 파악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거든.

주제도 모르고 설쳐댔던 그쪽들과는 다르게.

"양심이 있다면 잠자코 있어야죠. 저처럼요."

간혹가다 양심에 털이 난 사람처럼.

뻔뻔하게 입을 놀리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이해관계라는 게 상당히 복잡한 일이라."

"정보 공유 이전에 윗선에 보고하고 컨펌이 내려와야...."

"누구보다 잘 아시다시피 균열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지 않습니까? 플레이어 이전에 국민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규제를...."

다들 말 한번 그럴싸하게 잘하신다.

하긴 저런 처세술이 있으니까.

여태까지 지부장 자리에서들 버텨온 거겠지, 다들.

하지만 혓바닥도 상대를 봐가면서 놀려대야지.

"옳지 못한 절차는 없으니만 못하다."

몇 안 되는 인터뷰 영상, 기자 회견에서도 느낀 거지만.

호열의 화법에 돌려 말하기란 존재하지 않았다.

직설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오직 핵심.

무엇보다 틀린 말이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변명은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진정으로 묻겠다. 그대들에겐 긍지가 남아있는가?"

"...."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박민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넙죽 대답하고 싶어도.'

이제와서 긍지를 쫓기에는.

자신은 사회의 구정물을 뒤집어써도 흠뻑 뒤집어썼다.

'증명조차 할 수 없는 꼬락서니군.'

플레이어들처럼 목숨을 걸고 성전 퀘스트에 참전할 수도 없었으니까. 말로만 긍지가 남아있다고 대답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적.

질문을 던진 호열이 무안해할 정도로 조용하다.

박민재는 슬쩍 호열의 안색을 살폈다가 흠칫했다.

"...!"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과 눈빛이었거늘.

어째서인가, 호열의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가 인자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천하의 이호열이다.

때로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단호한 이호열이란 말이다. 멋대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박민재가 애써 시선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좌석 저편에 앉은 베이커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뭘 보는데?'

별안간 마주친 시선.

눈이 마주친 것도 모자랐는지 베이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박민재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대화.

-"긍지에 따라서 움직이겠단 말입니다."

...설마?

박민재의 설마 하는 생각은 현실이 됐다.

베이커가 입을 열었다.

"남아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설령 가슴 속에 긍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비장감이 서렸다.

"잃어버린 긍지를 되찾기 위해 행동하겠습니다."

"...!!!"

소리 없는 경악─

영국을 대표하는 런던 지부장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런던 사태가 영국에 미친 영향력이 저리도 컸단 말인가?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 이호열을 제외하고는.

"그런가. 그렇다면 바꿔 묻겠다."

"...?"

"그대들에겐 긍지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

박민재는 그제야 깨달았다.

얼핏 느껴졌던 따스함은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돈과 명예를 좇지 않는다.

오직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버그 수준에 가까운 균열에 진입하고, 공략해 온 이호열.

박민재는 그제야 따스함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저건 영웅에게서 흘러나오는 '숭고'함이었다.

박민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같은 놈들이 긍지를 쫓을 자격이 있는 건가.'

글쎄, 그 판단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말했다시피 갑은 언제까지나 이호열이니까.

"후우─"

한 차례 심호흡한 박민재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저희 일본은...."

"그렇다면...!"

"아니, 저희도...!"

변화가 일어났다.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계 각국의 AAU 지부장들을 모아두고 긍지론을 설파한 보람이 있구나. 싸늘한 정적이 흐를 땐, 정말 심히 뭣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거늘....

'여러모로 다행이다.'

역시, 칭호의 효과다.

괜히 습득 조건이 까다로운 게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또 한 번 그랑펠의 긍지에 감사하게 된다.

아무리 사기적인 칭호라고 해도 발동 조건은 존재한다.

[숭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변화를 일으킬 정도의 행동을 해야만 그 효과가 발동된다는 뜻이다.

'이놈의 긍지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그런 의미에서 그랑펠의 긍지는 어찌 보면 숭고함.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한결같은 행동에 효과가 발동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물론, 지금의 시선은 굉장히 부담스럽다.

나의 흑역사에게 감동의 눈빛을 보내지 말란 말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그랑펠.

괜히 당당해져서는 가슴을 더욱 활짝 펴지 말란 말이다.

'아니, 됐다.'

하지만 과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지.

그래,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말뚝을 박는다는 게 맞는 표현이려나.

'원래 신뢰는 쉽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머릿속이 꽃밭인 그랑펠은 몰라도.

사회인이었던 나는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런던 사태와 같은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동등한 위치에서 AAU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제안하겠다."

물론, 나의 '권한' 아래에서 말이지.

"나는 AAU 유스라 지부 창설을 원한다."

"!!!"

◈ 159화. 축복 (1)

미국.

AAU 서부 지부엔 비상이 걸렸다.

지부장, 짐 조슈아.

자정, 야밤에도 지부장실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우리 보스가 저럴 사람이 아닌데....

"야근이라고? 천하의 짐 조슈아가?"

정기 업데이트가 있는 목요일은 물론이요, 긴급 업데이트가 떠올랐을 때도 그놈의 워라벨을 운운하던 짐 조슈아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금요일.

평소 같았으면 개인 요트에서 불금을 즐기고 계실 양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걸까?

"카트리나, 어떻게 생각해?"

"응? 뭐라고 그랬어?"

"아니 짐 말이야. 저럴 사람이 아니잖아."

"보스? 하긴 웬일인가 싶긴 하네."

"거, 반응 한번 김빠지게 싱겁네."

쪽쪽─

사내는 빨대를 빨며 머리를 굴렸다.

분명, 저러는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지.

"한국으로 출장 갔다 왔지? 서부, 동부 두 사람 다."

"응, 지부장급 회의랬지."

"...근데,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니, 지부장급 회의라면 그동안 화상으로도 잘만 해왔었잖아. 근데, 갑자기 해외로 출장을? 그것도 하필이면 태평양 건너 한국으로? 그럴 이유가 있느냐는 거지."

굳이 이유를 꼽아보자면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긴 했다.

"...혹시 이호열 때문인가?"

한국에는 이호열.

런던 던전 균열을 클리어한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막말로 이호열이 이런 균열을 클리어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출장도 모자라서 복귀해서 야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 이유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혹시 회의에서 뭐, 쓴소리라도 들었나?"

"누가? 우리 보스가? 누구한테?"

"아니, 누구한테든. 애초에 근무 시간부터 놀러 나온 사람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그냥 농땡이 좀 치다가 높으신 분들 비위나 맞추느라...."

타다다닥─

상사의 뒷담화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가려던 도중.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카트리나, 어째 영혼 없이 대답만 한다 싶었더니.

"뭐야, 또 뭘 그렇게 두들기고 있는 건데?"

"아, 이거? 별거 아니야."

"맨날 별거 아니래. 봐봐, 봐도 되지?"

드륵─

카트리나가 의자를 뒤로 빼자 모니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모니터에 떠오른 사진들이 보였다.

사내가 되물었다.

"...잠깐만, 여기 런던 아니야?"

"응, 맞아."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사진은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대격변 이전, 아르카나의 개발사.

AAU 덕분에 나무의 이름은 뒤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진 상태였다. 사진도 모자라서 떡갈나무에 관한 정보를 타이핑하던 카트리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딱히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 아니고."

"어디에 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정성껏 정리하신다고? 뭔데, 비밀로 할게. 나한테만 말해줘. 이번에는 또 어떤 가설인데?"

"음, 그래. 좋아."

딸깍─

드래그되는 타이핑 부분.

사내가 눈치껏 글자를 읽어나갔다.

"많은 수분을 필요로 하는 것 외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특징이 없는 게 특징인가? 뭐 이런 사소한 정보까지 적어놓은 거야."

"확실히 다르니까."

"다르다고? 뭐가?"

"런던 시민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아."

...잠깐, 그러고 보니까.

굳이 인터넷을 켜서 인터넷 기사를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요 며칠 동안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게 런던에 관한 소식들이었으니까.

"따뜻한 생명력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하지 않았었나?"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확실한 효과였어. 그건."

"그렇지. 플레이어에겐 메시지가 떠올랐다고 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어째서 카트리나가 나무 사진 따위를 수집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니깐 이게 보통 아쿠아리우 떡갈나무가 아니란 거지?"

카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단계에서 말할 건 아니지만.'

생명력과 관련된 나무라면....

적어도 카트리나의 기억 속에서.

아르카나 세계관에 그런 나무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세계수.

물론, 런던에 피어난 수백 수천 그루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가 세계수란 뜻은 아니었다. 그저 생명력이란 한 가지 특징이 겹친 것뿐이니까.

그러나 접점은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이호열.'

호열에겐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던 과거가 있었으니까.

카트리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게 맞을까?

무엇보다 런던의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는 저절로 자라난 게 아니었다. 정령, 하이엘. 이호열의 계약 정령의 능력을 통해 피어난 것이었으니까.

우연이라 여기고 넘어가기엔 무리가 있겠지.

물론, 그렇다고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호열, 그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나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수가 관련된 지금.

언제까지 '그 종족'이 가만히 있진 않는다는 것.

카트리나가 방해꾼을 몰아냈다.

"자자, 이제 비켜주시고요."

"아니, 그래서 이게 다야? 뭐, 가설 없어?"

"현시점에서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뭔데, 그 듣기 싫은 말투는?"

만약, 그 종족이 균열을 통해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파장은 감히 생각하기 힘들 정도겠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떡밥만으로도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카트리나가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금이라도 실컷 떠들어 두자."

"그 의미심장한 대사는 또 뭔데?"

"곧 쉬고 싶어도 쉴 새가 없는 날이 올 것 같으니까."

"...진짜 주말 앞두고 망언을!"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했거늘.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들에게 시간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었다. 별 대신 밤하늘에 떠오른 마안(魔眼)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절이 바뀌듯 단지 야경이 바뀐 것뿐.

"무의미하구나."

영겁과도 같은 세월을 살아오며 엘프들의 감정은 무뎌졌다.

마계에서 뛰쳐나온 악마들.

그런 악마에게 고통받는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

엘프의 시선에서는 그 또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다.

자신들의 고고한 눈높이에서 인간과 악마는 크게 다를 것 없이 열등했으니까. 전쟁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아르카나 대륙엔 다툼이 끊이질 않았었다.

"허나, 어머니께서는 저희와 뜻이 다르신 모양이군요."

엘프들의 고향, 시슬리.

시선이 향한 곳엔 세계수가 있었다.

생기를 잃고 쓰러져 가는 세계수가.

당신께서 위기를 느끼고 대륙 곳곳에 씨앗을 흩뿌린 탓이겠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거늘."

세계수, 어머니의 앞에서도 눈빛에는 겸손이 없었다.

"쇠약해지셨군요, 만물의 어머니시여."

세계수의 주변에 남아있는 강렬한 야성의 기척.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영겁의 세월을 향유하는 드래곤의 기운이었다.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시건방진 도마뱀 놈들에게까지 손을 벌렸단 것인가?

엘프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어머니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뜻에 따를 순 없습니다."

엘프들은 세계수 앞에서 선언했다.

"우리가 당신의 노파심에 휘둘릴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날 엘프는 세계수의 의지에 반기를 들었다.

대륙 절멸의 위기?

어쩌란 말인가.

개미집이 박살 나든, 개미들의 왕이 바뀌든.

우리들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다.

말했다시피 시간은 우리들 앞에서 관대했으니.

훗날 되돌아보면 모든 게 무의미했던.

지나간 일에 불과할 테니까.

그랬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무뎌진 감정.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오만.

엘프들에게 긍지나 숭고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긋난 자식의 모습을.

어머니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는 없었다.

설령 생명력을 잃고 쓰러져 가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

변화는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관대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생기를 잃지 않았던 육신에는 피로가 쌓였고, 휴식조차 필요치 않았던 정신력 또한 삐걱거리기 시작했단 말이었다.

엘프들은 직감했다.

"빌어먹을!"

세계수가 자신들에게서 '축복'을 거두어 갔다고.

어찌, 어머니가 자식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축복을 거두어 갔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 축복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이 세계수의 의지를 거슬렀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신해 축복을 받을 이들은 대륙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자격 미달이었으니까.

쓰러져 가는 세계수 앞에서 엘프는 목을 놓아 외쳤다.

"어머니시여, 설마 인간을 가엾이 여기시는 겁니까? 인간이 악마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들의 본성은 악마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의 고통 또한 그간 쌓아온 업보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수에게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련한 저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축복을 빼앗겨 영생을 잃었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지금처럼 시슬리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서 축복을 빼앗아 간 이들이 누구인지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그 축복을 거머쥘 자격이 있는지 우리들의 눈으로 지켜볼 것입니다."

만약, 그럴 자격이 없는 이라면.

무너져 가는 세계수.

노쇠한 당신을 대신해서 다시금 거둬들이리라.

쓰레기들에겐 터무니없이 과분할 그 축복을.

"가로막는 것은 얼마든지 짓밟아도 좋다."

엘프의 출정.

영겁의 세월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든다.

비를 쫄딱 맞아서 돌아다닌 후유증인가.

몸살 기운이 올라오는 건가, 싶었는데.

[온기] 버프가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

'게다가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하고 왔으니까.'

황금 같은 주말을 앞두고 AAU엔 폭탄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겠지. 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핵폭탄급 선언이긴 하다. AAU 유스라 지부라니, 다들 생각도 못 했을걸?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한 법."

[『기이』]의 공간, 균열.

당연하게도 기이엔 기이로 맞서야 하는 법이다.

사실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정보야 지금으로서도 충분했다.

내 공백이 무색해질 정도로 든든한 아군이 있었으니까.

마탑.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탐험가 연맹....

전부 나열하기도 힘든 아르카나 세력들부터.

거대 연합을 비롯한 플레이어들까지.

그것도 분야별로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AAU에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애초에 AAU는 자신들의 한계를 진작 인정했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 관한 정보.

더 정확하게는 아르카나 시스템에 관한 정보였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좋으나 싫으나, 목숨을 걸고 그 사실을 증명했던 내가 아니던가? [칭호] 시스템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죽었다가 현실에서 되살아난 것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그러니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간만에 맞는 말이다, 그랑펠.

성전(聖戰)은 물론이요.

아르카나의 침식에서 현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또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과거 아르카나의 개발진이었던 AAU의 정보는 큰 도움이 되리라.

'사실 유스라 지부까지 갈 필요가 없긴 했는데.'

이놈의 드높은 긍지께서 편한 길을 택할 리가 있나.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근데, 또 마냥 틀린 말은 아니라 투덜댈 수가 없다.

만약, AAU를 통해서 정보를 전달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가 왜곡된 정보를 전달해 올 가능성?

차고도 넘친다.

왜, 회의에서 보내오시던 눈빛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거든.

내가 조금만 어리숙하게 굴었어도 온갖 개소리를 지껄였겠지.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AAU 유스라 지부.

그러니까 내가 지부장급이 된다면.

그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AAU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이유가 바로 지부들의 상호견제 덕분이었으니까.

'게다가 AAU에도 아군이 좀 생겨서 말이야.'

런던 지부장, 베이커를 시작으로.

그랑펠의 긍지론에 마음을 바꿔먹은 분들이 계시단 말씀.

당연하게도 나의 제안이 거부될 명분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주고받음이 있는 법.

나 또한 AAU 측에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를 제공할 생각이었거든.

"그들뿐만이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실상은 당당하기에 무엇 하나 숨기지 않는다는, 피곤한 긍지 때문이었지만. 뭐, 이유는 덧붙이기 나름이지. 그나저나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4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3,000회 (성공)

●턱걸이 2,000회 (진행 중)

●버피 테스트 1,000회 (진행 중)

늘어난 체력 단련 요구량!

날마다 훈련량을 채우긴 위해선 멀티태스킹이 필요한 지경까지 왔다. 왜, 운동하면서도 머릿속에 마법 서적의 지식을 쑤셔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젠장, 시작하기도 전에 눈앞이 아득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근력], [민첩]에 포인트 투자도 안 했을 텐데.

그러나 투덜대 봤자 소용없다.

가슴 속에 긍지가 존재하는 이상.

나는 그 어떤 체력 단련 퀘스트라도 뜨거운 녹차를 들이켜면서 해내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잔말 말고 시작하자.

하나, 둘....

"마법진이라. 흥미로운 간섭 형태로군."

...일천(一千).

●버피 테스트 1,000회 (성공)

...그런데 뭐냐, 이거.

체력 단련도 모자라서 마법 서적의 내용까지 꾸역꾸역 훑었거늘.

몸에도, 두뇌에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상승한 스탯 때문인가, 생각해 봤는데.

고작 스탯 몇 포인트 상승했다고 가능한 변화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런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잠깐만, 그 말도 안 되는 축복이 영구 버프였다고?

◈ 160화. 축복 (2)

[쓰러져 가는 고목 동산]

[적정 레벨 : Lv.400~Lv.450]

[붕괴도 : 13.2%]

시간은 오후에 마시는 차와....

아니, 황금과도 같다.

냉정히 말하자면 시간 낭비라는 것이다.

494레벨.

이런 적정 레벨의 균열에서는 온종일 사냥을 해도 레벨 업은 꿈도 꿀 수 없을 테니까. 물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균열로 진입한 데엔 이유가 있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하루가 지나고, 두 눈을 비비고 살펴봐도 변함이 없다.

아르카나 대륙, 수백만 악마 앞에서 주눅 들지 않게 해줬던 세계수의 축복 버프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축복이라, 과한 배려로군."

입방정 때문에 버프가 사라지면 그건 정말 네 탓이다, 그랑펠.

과한 배려가 아니라 절을 해도 모자랄 정도의 효과였으니까.

'효과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비약초는 물론, 웬만한 아이템보다도 뛰어난 효과를 자랑했던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 게다가 [천적관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균열을 둘러봤다.

썩은 거목 속에서 꿈틀대는 거대 애벌레들.

미관상 심히 좋지 않게 생기긴 했다만 악마족 몬스터는 아니다.

당연하게도 [천적관계]가 발동될 리 없다는 것.

그러나 세계수의 축복은 아니었다.

딱히 발동 조건이 없다!

악마 앞에서도, 애벌레 앞에서도 효과가 똑같았으니까.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실화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체감이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했던 시절이라면, 버그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해도 모자랄 정도로 말이야.

특정 퀘스트에서 활성화되는 버프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속시간을 떠나서.'

나는 한 번 죽은 것도 모자라.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현실로 복귀한 상태란 말이다.

말 그대로 항상.

영구 지속되는 버프가 아니고서야 지금까지 효과가 남아있을 순 없다는 뜻. 나는 끌어올린 마력으로 하이엘을 소환했다.

이내, 허공에서 하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언제 들어도 부담스러운 인사는 여전하구나, 하이엘.

그런데 뭐냐...?

한결같이 고아한 외관에 놀라기에는 눈에 익은 하이엘이다. 그럼에도 저 '빛'은 심히 낯설다. 배경에서부터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후광은 대체 뭐냐고.

'설마, 너도 경지에 오른 거니. 하이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하던가.

저 빛에 나의 검강이 겹쳐 보이는 이유가 뭘까.

칠흑을 타고 오르는 은빛.

그래, 흑역사를 형상화한 듯한 그 빛 말이다.

'...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어떻게든 성장했다면 그걸로 기쁘구나, 하이엘.

실력보다 허우대만 심각하게 멀쩡한 나와는 다르게 속부터 무럭무럭 성장하거라...! 물론, 그런 나의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나는 본론부터 꺼냈다.

"하이엘, 그들은 무사한가?"

여기서 그들은 드워프였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 회수.

그들에게 나는 부탁을 해둔 참이었으니.

[마왕 쟁탈전].

대사건을 앞두고 악마들이 활동을 자제하고, 힘을 비축하는 시기라고는 하더라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을 직접 목격했다.

그것도 모자라 [마안의 망원경]이 사용 가능해질 때마다 대륙의 상황을 살폈단 말이다.

'저쪽 동네는 위험해도 너무 위험해.'

그러니 먼저 안부를 묻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뜻.

하이엘이 정중하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호열 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자신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고. 그들 또한 감사하다 전해달라 부탁해 왔습니다."

...아니, 근데 잠깐, 멈춰라. 하이엘.

내가 보살피긴 누굴 보살폈다고 그래?!

과대해석도 이런 과대해석이 없잖아?

'슬슬 두렵다.'

드워프들 사이에서 나는 대체 어떤 이미지로 비치고 있을까?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드높은 긍지엔 한 치의 수치심도 없었으니.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무사한 모양이군."

무사하지 못한 건 네 양심밖에 없다, 그랑펠.

"말씀하셨던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잔해도 발견했습니다. 다만, 악마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어 회수하는 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합니다."

역시, 하늘을 나는 게 좋긴 하구나.

퀴른베크크 기계탑의 잔해를 벌써 찾을 줄이야.

내가 찾는다고 상상해 보자, 정말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르카나 대륙에 갈 방법이 없는 건 첫째.'

기계탑의 위치조차 모르는 건 둘째 치더라도 말이야.

아르카나의 하늘엔 마안이 떠있다.

단거리 텔레포트든, 포탈이든.

순식간에 내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눈깔들 말이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찾아서 적금을 타기는 개뿔.

그 전에 악마한테 붙들려 사망, 현실로 쫓겨나기만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역시 기술 만세다.

하이엘이 연달아 소식을 전해왔다.

"마지막으로 귀철의 제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귀철.

에고 장비.

기계탑 못지않게 그에 관한 소식도 궁금할 수밖에.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대장장이로 손꼽히는 월스와일. 그가 본격적으로 담금질을 시작했습니다. 결코, 호열 님에게 누가 되지 않을 장비를 제련해 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참 고마운 말인데....

한편으로는 두렵다.

성능이 최우선이라고 못 박아두기는 했다만. 레벨 제한이 너무 높아도 그건 그거 나름대로 슬플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역시나 이놈의 입방정.

"훌륭한 태도로군. 그에게 기대한다고 전해주겠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생했구나, 하이엘."

우리 드높으신 그랑펠 님의 긍지에 레벨 제한 따위 숫자에 불과할 테니까.

나도 이쯤 되면 자포자기다. 어떤 결과물이 나오든 당장 착용하는 건 무리겠지.

'차라리 꼼수 사용할 방법을 더 연구하는 게 낫겠다.'

그 또한 살 구멍이니라....

합리화는 그쯤에서 끝마쳤다.

균열에 들른 이상.

하루 종일 사냥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확인해 볼 게 있었거든.

맞다,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 효과를 말하는 거다.

[썩은 수액 괴물 : Lv.420]

[거대 썩은 수액 괴물 : Lv.450]....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지금.

마법을 쏟아붓지 않는 이상, 가뿐하게 쓰러트릴 수 있는 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저 녀석들 [독]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거목조차 썩게 하는 맹독.

늪이 연상될 정도로 끈적한 독기.

무엇보다 굉장히 찝찝하다.

"유쾌하지 못한 장소군."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그놈의 격식에 죽고 못 사는 그랑펠의 감상은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

벌레들이 악마도 아닌 마당에, 옷과 구두에 독을 튀기면서까지 움직일 명분이 없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또각─

나는 당당하게 독의 늪에 발을 내디뎠다.

[온기] 버프의 효과를 믿어서?

아니다.

온기가 버프가 범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긴 했다만, 독에 대한 면역력까지 상승시켜 주진 않는다. 그렇다면 공중부양인가? 그것도 아니다.

구두 소리가 들렸듯 나는 확실하게 독의 늪을 밟았으니까.

그랬다.

이것도 [첫 세계수의 축복] 버프의 효과겠지.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첫 세계수의 축복이 독을 거절합니다.]

[독].

기절이나 출혈 같은 디버프의 일종.

친화력이나 저항력을 상승시켜 독에 대해 '면역'이 되거나 스킬을 통해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거절'이라니.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잖아, 이거.

"허나,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절.

말 그대로 몸에서부터 독을, 디버프를 밀어내는 느낌.

나, 이호열의 비루한 표현력은 잠시 접어두고.

그랑펠의 표현력을 빌리자면....

"알겠는가. 이것이 격의 차이다."

...격의 차이 같은 소리 하네!

젠장, 오글거리는 걸 넘어서 진심으로 부정하고 싶건만.

이게 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휘저어도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첫 세계수의 축복]이 독을 완전히 거절하고 있었다.

그 순간, 엄습하는 거대한 그림자.

꿈틀거리던 [거대 썩은 수액 괴물]이었다.

느린 속도를 보완하기 위한 매복이었나?

신속한 탐색, 간섭, 발현.

나는 거목에서 떨어지는 녀석을 향해 마법을 발현했다.

고작 450레벨짜리 몬스터에게 거창한 마법은 필요 없다.

거창한 말은 빼놓을 수 없어도 말이야.

"아직 분수를 깨우치지 못한 애벌레여."

그나저나, 자괴감은 잠시 잊어두자.

오늘은 엄청난 수확이 있었으니까.

'거절. 이거 어쩌면....'

독뿐만 아니라 웬만한 디버프는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물론, 진지하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나한테도 양심이라는 게 있거든.

'사실 지금 버프만 해도 말이 안 되잖아.'

생명력, 마력 재생력 버프만 하더라도 유니크 아이템을 둘둘 두른 것보다 세계수의 축복 하나의 효과가 뛰어났으니까. 그러나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검을 쥐고, 검강을 발산하는 순간.

"!"

이질적인 감각이 손을 타고 올랐다.

클래스 퀘스트도 모자라서 레벨 업 포인트까지 [근력]과 [민첩]에 배분하고 있는 나였거늘. 그동안 [마력]에 투자한 포인트가 워낙 많았던 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여전히 밑 빠진 독.'

밑 빠진 독에서 물이 줄줄 새어나가는 것처럼.

내 몸뚱이는 검기를 발산하기에 최적화된 몸이 아니었다.

자세를 흉내 내는 정도면 모를까....

하르콘이나 슈레이그처럼 유려하게 검을 다루는 건 불가능하단 말이다.

검기 위 단계의 경지.

검강에 이르렀으니 빠져나가는 물의 양은 더 상당해질 수밖에.

한마디로 검강을 발산하면 육체에 쌓이는 피로도가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마치 내일의 체력을 끌어오는 것처럼.

그런데.

'가볍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잖아.

검을 쥔 손에도, 다리에도,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첫 세계수의 축복이 노화를 거절합니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

'자, 잠깐 뭐라고?!'

노화를 거절했다고오오오?!

이쯤 되니까 슬슬 무서울 정도다.

...나 대체 세계수한테 어떤 축복을 받은 거지?

*

플레이어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여신교단 성지, 뮤온.

마지막으로 마탑까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성전에 참전할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하라.

당연하게도 평가의 기준은 엄격했다.

마찬가지로 지역을 떠나서 곡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미친, 300레벨로도 부족하다는 거야?"

"레벨이 중요한 게 아니라 긍지가 중요하다잖아."

"긍지? 그놈의 긍지가 대체 뭔데?!"

뭐긴 뭐야 긍지가 긍지지.

"긍지를 모르는 것부터가 긍지가 없는 거니까."

그저 호멘.

박휘강은 작게 읊조리며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목표 옆에 새롭게 갱신된 두 글자, [성공].

"진짜 탐험가 하길 잘했다...!"

성전에 긍지는 있어도 귀천은 없었다.

클래스에 따라서 통, 불통의 여부가 가려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성공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떠오르는 지난날들.

"다 덕분입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레벨.

그러나 높은 탐험가 연맹 공헌도가 있었다.

적정 레벨에 굴하지 않고, 온갖 균열을 탐험한 경험이 가산점을 받아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저 호열 님의 발자취를 따른 덕분이었지만.

"호멘."

오늘도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박휘강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비로소 성전에 참전했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때였다.

물론, 일개 탐험가 하나의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단 뜻이었다.

물론, 그건 박휘강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탐험가 연맹.

유스라 왕국 본대에는 많은 탐험가가 모여 있었다.

연맹장, 파비앙 들롱을 비롯해 아론, 롬버스.

명성이 자자한 최고위 탐험가들까지.

모두가 성전에 참여한 탐험가들이었다.

"크흠."

파비앙이 헛기침을 하자 시선이 집중됐다.

"이런 좁은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탐험가를 보는 건 또 처음이군. 앞으로는 서로들 친하게, 또 살갑게, 안부도 물어가며 지내는 게 어떻겠나들?"

파비앙의 농담에 탐험가들은 서로서로 흘겨봤다.

농담이라도 할 말이 있지.

특히 아론과 롬버스의 사이에선 불꽃이 튀었다.

"경쟁자와 살갑게 지내라니. 우습군."

"웃지 마라, 아론. 가뜩이나 못난 얼굴이 더 일그러지니까."

"뻔뻔하기 그지없군, 롬버스. 연맹 공헌도를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나의 외모까지 음해하려고 드는 것인가? 마도구를 들여다볼 시간에 거울을 들여다보는 게 좋겠군."

잠자코 듣고 있던 박휘강은 생각했다.

...둘 다 똑같이 산적같이 생겨선 왜 저래?

그러나 중요한 건 말싸움 따위가 아니었다.

탐험가들이 모인 데엔 명분이 있었으니까.

파비앙이 말을 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전쟁은 끊이지 않았었지. 그러나 우리 탐험가들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네.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서 우리 같은 탐험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끄덕끄덕─

경청하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탐험가의 능력은 미궁이나 던전 탐험에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파비앙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악마와 맞서는 전장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겠지. 고작해야 마도구를 활용해서 아군을 보조하는 것 정도려나?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우리의 전장은 조금 다르지 않은가?"

그랬다.

전쟁과는 다르다.

적어도 이 성전에서는 탐험가가 활약할 수 있었으니까.

[균열]이라는 기이의 공간이 존재하는 지금.

파비앙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아르카나와 이곳. 두 세계가 뒤섞인 균열은 그야말로 미지의 공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니 말일세.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탐험이 아닌가? 게다가 이 탐험의 끝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리품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무언가를 낚아채듯.

"설령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르카나 대륙과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 두 세계에서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것. 그래, 그것이 바로 우리 탐험가들의 긍지 아니겠는가?"

미지를 향한 탐험이야말로.

탐험가들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파비앙이 덧붙였다.

"비로소 우리 탐험가들의 싸움을 시작할 시간이 왔다는 말이네."

.

.

.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정기 업데이트는 중요했다.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은 탐험가 연맹 본대.

업데이트 내역에 관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끝없는 새로 고침도 잠깐.

"잠시만요!"

누구보다 빠르게 박휘강이 외쳤다.

그리고 업데이트 내역을 살폈다.

그런 박휘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호, 혹시에 엘프에 관해서 알고 계신 분 있으실까요?!"

◈ 161화. 엘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