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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화. 주제를 알아라

히사기의 뱀처럼 날카로운 눈이 동그래졌다.

다른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

아뜨뜨─

남태민이 뜨뜻한 녹차에 혼쭐난 입을 두들겼다.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요? 저희가요?"

[마안(魔眼)의 망원경].

지금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남아있어서 기다려야겠지만, 못 볼 이유는 없었다.

만.통.지처럼 일회용 효과도 아니고 말이야. 무엇보다 여러 관점에서 아르카나 대륙을 바라볼 필요가 있었거든.

'아르카나인이 아닌 플레이어의 관점으로.'

물론, 나부터가 플레이어긴 하다만.

내겐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기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현대문물, 인터넷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길 마련.

하지만 남태민을 비롯한 세 사람은 아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활동해 온 랭커들.

나보다 아르카나 대륙에 관한 지식이 해박한 게 당연하다. 그들의 관점으로 대륙을 본다면, 무언가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망원경을 꺼냈다.

쿨타임이라 그나마 눈은 감고 있었건만.

꿈틀대는 핏줄이 훤히 보여 역시 미관상 좋지 않았다.

"아이템이겠죠? 근데, 이런 아이템은 저도 처음 봐요."

"...죄송합니다. 신경 써주셨는데. 윽."

"뭔데? 히사기 씨, 당신 눈이 훨씬 무섭게 생겼어요."

쏘아붙이는 남태민.

히사기가 입을 막았지만 나는 너그럽게 말했다.

"이해하네."

그래,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

그랑펠의 심미적 관점에서도 수차례 불합격 통보를 받았던 망원경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레오니의 비위는 대단했다.

이런 걸 보고도 찻잔을 꽉 쥐고 있는 걸 보면.

'녹차가 유럽 사람 입맛에도 맞나.'

하긴 그랑펠 입맛에도 맞는데 이상할 것도 없지.

어쨌든, 망원경이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안부도 물을 겸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도 되겠는가?"

"아, 물론입니다!"

"저희보다 호열 상은 무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저기요, 히사기 씨. 대화 중에 갑자기 끼어들지 마시고, 계속 입을 막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격식을 갖춰서 정중하게 여쭤봅니다."

거대 연합이라.

셋 중 누구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참 대단한 결정이었다.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국가관계까지 얽혀있을 텐데.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연합한 세 길드였으니까.

"다들 눈에 띄는 성장을 이뤘더군."

빈말이 아니라 레벨을 보면 알 수 있었다.

400레벨 대에 진입한 남태민과 히사기.

뒤처지던 레오니도 399레벨이었던가.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충당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꾸준하게 레벨이 상승한 걸 보면, 정말 쉴 새 없이 균열에서 사냥만 한 모양이었다.

남태민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또 호열 씨한테 칭찬을 들으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내 입장에선 칭찬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

가뜩이나 든든했던 아군들이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서 더더욱 세력을 키워서 합류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 말을 잇는 히사기의 뉘앙스가 심상치 않았다....

"죄송하게도, 처음에는 호열 씨의 결정을 의심했습니다."

...잠깐만, 결정?

뭔 결정?

내가 뭔가 결정을 내렸나?

당혹스러웠지만, 언제나처럼 내색은 없다.

흑역사에 시달리게 되면서 깨달은 사실 하나.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절반은 간다는 것.

'...일단, 닥치고 있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까 슬슬 이해가 된다.

...이거, 그러니까 거대 연합을 만든 게 '나'라는 거잖아?!

이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도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 다들?

내가 그동안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긴 해왔다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냥 입방정을 떨고 싶지 않아서였는데.'

[포식자의 늪지대].

아니, [세계수의 비밀정원]에서부터 해몽은 시작된 모양.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원인 제공을 하긴 했군.

달칵─

심란한 마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울이는 찻잔.

이내, 나는 입을 열었다.

"나의 갑작스런 결정에 고생들이 많았군."

...진짜, 나란 놈!

한두 번도 아니지만, 경악스러울 정도로 뻔뻔하다.

그래, 뭐든 결과가 좋았으니까 다행이다 여기고 넘어가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우쭐대는 어깨 때문에 자괴감이 가시질 않는다.

"에이. 아닙니다, 호열 씨. 고생은요."

"죄송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큰 뜻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안 싸웠어요. 얘네들만 시도 때도 없이 싸웠지."

내 모진 말을 알아서 잘 걸러서 들어주다니.

세 사람에겐 더더욱 고마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결정을 더 이상 미룰 순 없겠지.

스르륵─

재사용 대기 시간 끝.

망원경이 다시금 눈을 떴다. 심미적 관점으로는 더욱 형편없어졌지만, 히사기는 입을 막지 않았다.

그도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겠지.

"아이템의 이름은 마안의 망원경. 효과는 아르카나 하늘에 떠있는 마안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마안을 통해서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단 말이라네."

"...마안(魔眼)이요?"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백문 불여일견.

나는 곧장 마안의 망원경 효과를 발동했다.

번뜩─

그러자 곧장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이 떠올랐다.

환상처럼 허공에 떠오른 풍경.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뱉었다.

"...와씨, 무슨 아이템 효과가?"

"과연, 괜히 에픽 등급 아이템이 아니라는 거군요."

"와, 미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대박."

때마침 밤인가.

그렇다면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

당연하게도 감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아르카나 대륙의 참상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

"설마, 저 하늘에 뜬 게 전부 마안이라는 건가요?"

"...잠깐, 멀쩡한 곳이 한 곳도 없잖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효과 지속 시간은 단 10분.

10분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스르륵─

망원경의 눈꺼풀이 감기자 찾아온 침묵.

원탁회의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마찬가지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테니까.

다른 게 있다면 입장의 차이 정도일까.

'고향도 뭣도 아니니까.'

플레이어와 아르카나인들의 입장은 달랐다.

아르카나 대륙이 멸망, 그다음이 현실의 차례라고 하더라도. 당장은 위협이 와 닿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성전(聖戰) 참전에 부담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고맙지만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한다.'

고마운 이들이기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해야 한다는 것.

이내, 침묵 속에서 남태민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어떤 대답이어도 괜찮다.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단 말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약간 고독하긴 하겠다만....'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인사였다.

"호열 씨, 저희에게도 진상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로서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

.

.

.

남태민뿐만 아니었다.

히사기, 레오니, 세 사람에겐 한 차례 경험이 있었다.

이미 목숨을 걸었던 경험이 말이다.

긴급 업데이트.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됐던 [깨진 차원의 틈] 균열.

그 예상 적정 레벨이 대략 900레벨 근처가 아니었던가? 300레벨 대, 지금보다 능력도 뭣도 없던 시절에도 죽음을 각오했던 과거가 있단 뜻이었다.

물론, 정말 목숨을 걸진 못했었다.

'누구' 덕분에 마탑에서 포탈이 감촉같이 사라졌었으니까.

그러나 그날의 경험은 세 사람에게 깨달음을 줬다.

능력이 있어야 도움도 될 수 있다는 것.

능력이 없다면 단순한 민폐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니까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호열 씨, 저희에게도 진상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태민은 입꼬리를 올렸다.

비로소 인정을 받은 것 같았으니까.

함께 나아갈 자격을 갖췄다는 인정.

다만, 무엇이든 확실하게 해야 한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퀘스트 목표처럼.

가치를 증명해 내야겠지.

히사기가 비장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반드시 가치를 증명해 내보겠습니다."

끄덕끄덕─

레오니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차를 대접받은 순간.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레오니는 알고 있었다.

'또 혼자 떠맡을 게 뻔하니까. 그때처럼.'

각자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어떤 시험이 됐든, 가치를 증명하고 말겠다고.

이내, 그런 세 사람에게 호열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는 없네."

"...?"

"그대들의 긍지를 내가 충분히 알았으니."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의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성공)

...성공이라고?

뭘 했다고 성공이라는 거지.

당황한 세 사람에게 호열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의 '권한'으로 증명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지."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기 전에 붙잡아 두자.

거대 연합이라는 전력은 너무나도 소중했으니까.

그런 호열의 속내가 얼굴에 드러날 일은 만무했으니.

"저 진짜 랭커 찍었을 때보다 더 성공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원로, 유그위드.

수석, 마르셀로.

그리고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

마탑의 수뇌부는 크리스탈 홀에서 회동을 가졌다.

원탁회의의 연장선은 아니었다.

숙련, 견습 마법사들에게 숨겨야만 하는 비밀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의견 교환의 장에 불과했으니까.

참석에도 의무는 없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뇌부 전원이 참석했다는 건.

드센 자존심을 가진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조차 타인의 생각을 듣지 않고는, 마땅한 답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한 심정이란 뜻이었다.

"어떻게들 생각하나요?"

먼저 입을 연 건 연장자이자 원로, 유그위드였다.

그녀는 모인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럼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 명이 빠졌을 뿐인데, 조용하군요."

이호열 수석, 존재감 하나만큼은 역대 마탑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최고라 봐도 무방하겠어요? 유그위드는 어깨를 으쓱이곤 마르셀로를 바라봤다.

"이 전쟁에서 승산이 보입니까, 마르셀로 수석?"

마르셀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희박합니다."

불리해도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적들은 아르카나 대륙도 모자라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까지 마수를 뻗쳐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비로소 균열이란 기이의 공간을 탐구하기 시작한 게 고작입니다."

마르셀로, 본인의 연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했거늘.

그조차도 이호열 수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물이었다.

잠자코 있던 벤쉬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치만! 이호열 수석께서는 아르카나 대륙에 다녀오셨지 않았습니까? 물론, 마왕의 전리품 효과 덕분이었다곤 하셨지만.... 그래도 그 마도구를 연구한다면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도구에 관한 연구라.

자연스럽게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에게 시선이 향했다.

키코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호열 수석께서 그에 관한 요청을 하셨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마법부여학의 수준으로는 그 정도의 마도구에서 효과를 추출하는 건 불가능해서...."

키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그 효과가 일회성일 줄이야.'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으셔서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셨다면.

시간을 조금만 더 주셨다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방법을 찾아봤을 텐데.

-"황금과도 같은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군. 키코 선임."

이 수석께서는 한마디 말만 남기시고는.

미련 없이 가넷 홀을 빠져나가셨었다.

쩝, 벤쉬가 입맛을 다시자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불리한 조건을 동등한 조건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탐구가 바로, 저와 이호열 수석의 공동 연구 과제였습니다. 허나, 현시점에선 언제 이론을 확립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긴말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결국, 우리는 불합리한 전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설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역습이나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이젠 마탑의 마법사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허나, 아르카나 대륙엔 아직도 악마와 맞서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승전보가 그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마탑이 할 일은 간단명료했다.

싱긋─

유그위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간단히, 뻗쳐오는 마수를 완벽하게 잘라내면 되겠군요?"

끄덕─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들의 눈에 비장감이 깃들었다.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이 단결한 순간.

마르셀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단순히 우연인가?'

이호열 수석, 그가 사냥한 수백만의 악마들 중.

시무아르드가(家) '시한부의 저주'와 관련된 악마가 우연찮게 포함됐을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분명 수백만의 악마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거늘.

마르셀로는 고개를 저었다.

끊임없이 생각해 봤지만 머리만 지끈거릴 뿐이었다.

다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시한부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더라도 괜찮다.

현재 육신의 상태는 최상.

이호열 수석이 아니었다면.

벌써 숨을 거뒀어야 할 몸이었으니까.

마르셀로는 악마를 향해 읊조렸다.

'당신들은 분수를 모르고 설쳤습니다.'

마르셀로는 마탑의 설립 목적을 떠올렸다.

진정한 진리 추구.

악마 숭배자, 카림제바.

그가 죽음의 순간까지 진정한 진리를 갈망했던 걸로 봐선, 어쩌면 마탑은 설립 때부터 글러먹은 집단인지도 모르겠지. 그러나 이호열 수석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긋났다면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다."

말씀대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마르셀로가 비로소 눈을 떴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를 바로 세울 때입니다."

.

.

.

깜짝이야.

별안간, 시야가 번쩍거렸다.

퀘스트창이었다.

별일 없었는데 웬일이래.

...설마, 클래스 퀘스트 훈련량이 늘어난 건 아니겠지?

나는 설마 하며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마탑의 재건]

한동안 잊고 있던 마탑 퀘스트.

어째서인가.

그 마지막 퀘스트 목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진정한 진리를 찾아라. (진행 중)

그런가.

마탑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덕분인가?

잠잠하던 퀘스트에 진전이 생겼다.

마탑의 진정한 진리가 뭔지는 모르겠다만.

나로서는 희소식이지.

'역시 마탑이다.'

나는 그저 퀘스트 목표만 충족시킬 수 있다면 만족이다.

물론, 내가 또 손가락만 빨고 있겠단 소리는 아니다.

나도 나름대로 현실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생겼거든.

나는 떠오르는 인터넷 기사 헤드라인을 훑었다.

[정부 관계자 曰, "이호열 플레이어의 독단적인 행동에 유감.... 대한민국 정부와의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힘의 집중? 우려의 목소리 커져....]

[AAU 관계자, "성전? 정말 진행 중인지 알 방법 없다."]

그러고는 나답게 감상을 지껄였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 또한 더더욱 짙어지는 법. 그러나 그림자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뒤꽁무니. 순서를 지킨다면 간섭할 생각은 없었거늘."

아니, 경고를 내뱉었다.

"앞서나가는 그림자에겐 자신의 처지를 자각시켜 줘야겠지."

◈ 149화. 우울한 비의 도시

대격변 초창기, 균열은 재앙이었다.

세계가 힘을 모아 달려들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던 대재앙.

상대적으로 각성한 플레이어의 머릿수가 적었던 건 기본.

지금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았었으니까.

덕분에 세계는 국가 간의 무의미한 경쟁을 그만두고 균열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했다. 그를 바탕으로 창설된 게 국제 협력 기관 AAU였단 말이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엿 같은 꼬라지가 없었다고."

덜그덕─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그는 휴게실에서 캔 커피를 뽑았다.

마찬가지로 캔 커피를 손에 쥔 두 사내, 성현준과 윤수겸.

성현준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 선배. 요즘 시대에 차 한잔 대접한다고 하고 300원짜리 캔 커피 쏘는 사람이 어디 있대요? 지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짠돌이."

쓰읍.

윤수겸은 입맛을 다시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얼마 만에 뽑아보는 자판기 캔 커피인가?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게 커피의 종류를 논할 때가 아니었다.

칙─

"다들 뉴스 쏟아지는 거 봤지?"

"네, 봤습니다."

"저는 지금도 보고 있는데, 진짜 열받네요."

성현준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이거 다 알면서 저러는 거잖아요? 애초에 돈이나 권력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대놓고 퀘스트를 띄우겠냐고요! 호열 님이 바보도 아니고!"

"내 말이 그 말이야."

보자, 더러운 사회에서 구른 게 벌써 몇 년째더라?

AAU 지부장 직함을 달고 정부 측 인사와도 자연스럽게 면을 트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면. 저런 모르쇠가 진짜 사람을 돌게 하는 일이란 것이었다.

"하나같이 명문대를 졸업하신 똑똑한 양반들이 우리 같은 소시민들도 뻔히 아는 걸 모르겠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거지. 욕 처먹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까. 끝까지 시치미 떼겠단 거거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간은 참 영악하다.

"어쩌면 인간이나 악마 새끼들이나 다를 게 없을지도."

"에이, 지부장님 말씀을 하셔도...."

"농담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거든."

플레이어들의 머릿수가 늘고, 시스템이 확립된 지금.

평범한 적정 레벨의 균열은 인류에게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균열로 인한 피해가 전무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대격변 초창기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무고한 시민이 매일같이 사망하고 있어. 그런데 높으신 분들이라는 양반들은 이제 좀 살 만해졌으니까. 아주 좆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굴리시네?"

지난밤, 그러니까 황금 같은 일요일 저녁.

박민재는 정부 측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다.

"이 양반들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격식이 없어. 격식이."

주말에 전화를 해?

다시 생각해도 성질 뻗치는 통화를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박민재가 이죽거렸다.

"이호열을 본격적으로 컨트롤하고 싶으시단다."

"...네?!"

"왜?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심상치 않거든."

이호열, 그동안 그가 보여준 행보가 어땠는가?

정점으로 불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대격변 초기, 영웅이라 불렸던 플레이어들처럼 묵묵하게 균열을 클리어할 뿐.

그런 이호열의 덕을 누구보다 많이 본 것?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정부였다.

"VIP부터 아랫선까지. 뒤쪽에서 있는 뻥카, 없는 뻥카 다 치고 다닌 거겠지. 이호열이 제멋대로처럼 보여도 다 우리랑 연줄이 있다. 뭐, 다른 국가가 속아 넘어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왜? 자기네들부터가 상부상조, 돕고 사는 협력 관계를 갖추고 있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나?

AAU 지부장의 입에서 쏟아지는 고급 정보.

혹시라도 누가 엿듣고 있을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윤수겸이 속삭였다.

"하긴 이나즈마부터가 그랬었죠?"

이나즈마의 길드 마스터, 히사기 카즈마.

홋카이도 프로스트 사태 직후.

그는 취재진 앞에서 일본 정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었으니까.

AAU 국제 협약을 위반한 것도 모자라 뒤편에서 구린 짓까지 하고 다닌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었지.

박민재가 코웃음을 쳤다.

"잘 생각해 봐라. 그때도 떠올려 보면."

"...?"

"일본 정부를 욕한 건 일반 시민이나 네티즌들뿐이었지. 가장 민감해야 할 국가들이 나서서 비판한 적은 없거든. 그 말이 뜻하는 게 뭐겠어?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자기네들 사정도 똑같단 말이지."

거기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 AAU까지.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께서는 그 연결고리를 개목걸이로 바꿔 채우고 싶으신 거다. 정말 간덩이도 크시지들 않냐? 막말로 플레이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한 트럭으로 죽어나갈 양반들이."

...이 정도면 사이다가 아니라 염산 아닐까?

듣고 있는 입장에서 속이 시원하긴 했다만.

누가 듣고 있을까 봐, 계속해서 눈치를 보게 될 정도로.

발언의 수위가 상당했다.

팅─

그러나 신경 따윈 쓰지 않는다는 듯.

박민재는 말끔하게 비운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았다는 거지."

"제안이요?"

"이호열하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 보란다. 나한테."

윤수겸과 성현준은 박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엄청난 제안을 내걸었을 게 분명하다.'

다른 국가의 지부장들이 AAU 협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정부와 협력한 데엔 전부 이유가 있겠지. 분명, 박 지부장님도 엄청난 제안을 받으셨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의문이었다.

성현준이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근데, 저희한테 이런 것까지 말씀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박민재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나쁜 짓을 할 거면 은밀하게 하는 게 기본이지."

그가 휴게실 문을 활짝 열어 재꼈다.

"나야 뭐, 당연히 거절할 거니까 말해준 거고."

"?!"

성현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면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제안이리라. 굳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협박 아닌 협박도 섞여 있을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물질적인 유혹까지.

박민재가 휴게실을 빠져나가자 성현준이 입을 열었다.

"선배, 선배는 안 놀랐어요?"

"놀라긴 했지. 지부장 자리를 다셨어도 예전 그대로셔서."

"...예전 그대로시라고요?"

"아, 넌 경력이 짧아서 모르겠구나?"

새록새록 떠오르는 코스모 재직 시절.

"우리 박 지부장님, 평사원 때부터 유명했거든."

"유명하셨다고요? 대체 뭘로요? 짠돌이로?"

"뭐, 그것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윤수겸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코스모 사원 중에서 유일하게. 천하의 레이먼 션한테 정식으로 개겼던 사람이거든. 우리 박 지부장님."

"...네, 네?!"

.

.

.

박민재는 답답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빌어먹을, 개발자가 언제부터 정장을 입고 다녔는지.

앞으로는 복장부터 편하게 해야겠군.

"언제 어디서 옷에 똥물을 튀길지 모르니까."

박민재는 지난번의 다짐을 떠올렸다.

이호열, 그와 같이 걸을 수 없다면.

그의 앞길에 끼어드는 방해꾼들이라도 쳐내겠다.

AAU?

높으신 분들?

오히려 좋다.

박민재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내 전문이거든. 윗선에다가 들이받는 거."

지금보다 쥐뿔도 없던 과거에도 하늘 같은 CEO 레이먼 션을 들이받았던 게 나란 말이다.

박민재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래, 좋아.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박민재가 지부장실 책상 앞에 착석했다.

"이호열 대신 내가 얼마든지 어울려 줄 테니까."

딸깍─

"...뭐야, 이거?"

그러나 당장 박민재가 나서야 할 일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없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박민재가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뭔 개소리야?!"

화면에서 재생 중인 건 실시간 보도 영상.

앵글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를 비추고 있었다.

이내, 화면에 자막이 떠올랐다.

[목격자 曰, 균열 생성과 동시에 런던이 사라져...!]

말 그대로.

보는 그대로.

런던이 비 안갯속으로.

감촉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

비상사태.

직전까지의 사소한 알력 다툼이 무(無)로 돌아갔다.

대격변 초창기로 돌아갔다.

이제까지와의 균열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래, AAU가 예고했던 아포칼립스의 시작을 보는 듯했다.

길드 랭킹 7위, 영국의 세컨드 썬.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는 침묵했다.

뚝뚝─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런던을 바라봤다.

...아니, 이제 이곳을 런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맑은 날이 드문 런던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차원이 달랐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비안개였다. 넓게 퍼진 안개 전부가 균열의 영역이었다.

윙윙─

진동은 아까부터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상부의 연락이겠지.

그러나 슈레이그의 머리는 아까부터 회전하기를 멈췄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데?"

런던, 전체가 균열이 되어버렸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런던과 함께.

런던의 시민들이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세컨드 썬의 간부, 재커리는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균열 내부엔 시민들만 있는 게 아니야. 플레이어들, 그중에서도 우리 세컨드 썬의 길드원들도 있다고. 크게 걱정할 것 없어. 잘 대처하고 있을 거야."

슈레이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하하,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

"이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알잖아?"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균열의 정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

[적정 레벨 : Lv.600~Lv.900]

[붕괴 진행도 : 0.1%]

날뛰는 적정 레벨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부터 [텟퍼른 미궁]까지.

이것보다 한술 더 뜬 적정 레벨을 자랑하던 균열도 있었으니까.

그래, 문제는 [던전]이었다.

균열 이름 앞에 붙어있는 저 두 글자.

슈레이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던전이야. 단순하게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클리어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거잖아. 빌어먹게도. 클리어 조건을 찾기 위해선 하나씩 부딪혀 가며 찾아봐야 한다고!!"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던전.

던전은 극악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포식자 구역]급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넘쳐나고, [미궁]급으로 위협적인 함정들이 가득한 곳. 그게 바로 [던전]이었으니까.

슈레이그의 목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기뻐했을 거야. 경험치 페널티를 감수하더라도. 던전의 보상을 생각하면 몇 번 정도는 죽어도 이득이니까. 그치만, 아니잖아? 목숨이 걸려있다고, 다들."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반드시 [던전 심층부]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강력한 몬스터와 함정으로 가득한 던전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규모는 어떠한가?

최소 런던이었다.

"...미안하다, 재커리. 나는 자신이 없어."

슈레이그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두려움.

균열이 플레이어도 아닌 일반인을 집어삼킨다?

그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일반인들은 균열에 진입할 수도, 목격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던전이어서일까. 런던도 모자라 시민들까지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서.

"저 안에, 저 안에 내 아내가 있다고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비안개를 일반인들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끊이질 않는 고함.

슈레이그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심정 같아서는 몇 번이고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뒤를 따를 길드원들이 있었으니까.

마땅한 계획도 없이 던전에 뛰어든다?

경험치를, 아니, 목숨을 버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단 말이다.

나 같은 게 뭐가 조국의 영웅이고 희망이란 말인가?

느껴지는 무력감.

쏟아지는 비가 몸을 축 가라앉게 하였다.

슈레이그뿐만 아니었다.

쏴아아아─

비안개에 휩싸인 런던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무겁게 짓눌렀다.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슈레이그, 아니 비를 맞는 모두가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쏴아아아─

그들의 몸이 차갑게 식어갈 때쯤이었다.

사정없이 퍼붓는 빗속에서.

구두 소리가 들려온 것은.

또각─

수많은 인파 속.

펼쳐진 단 하나의 검은색 우산.

마치 빗방울이 단 한 방울이라도 옷에 튀는 걸 용납하지 않겠단 것처럼.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은 한 사내.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들리는가, 슈레이그."

"...?"

그와 동시에 슈레이그 시야가 점멸했다.

[상태이상, '무력'이 해제됩니다.]

슈레이그는 그제야 자각했다.

'...나, 어느 틈에 상태이상에 걸렸던 거지?'

이내, 반사적으로.

자신을 상태이상에서 깨어나게 해준 사내를 바라봤다.

검은색 장우산, 그와 대비되는 은색의 머리카락.

호열과 마주했다.

슈레이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호열이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 런던의 안내를 부탁하고 싶네만, 가능하겠나?"

.

.

.

이 정도로 광범위한 상태이상이라.

적정 레벨만 봐도 최소 마왕급은 된다는 거겠지.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던전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당연하게도 나는 던전을 목격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느냐고 묻느냐면.

이번엔 그랑펠의 철면피보다는 나의 준비성 덕분이라고 당당하게 답해주리라. 정확히는 본전을 뽑고야 말겠다는 나의 처절함이 빛을 발한 거겠지.

맞다.

계획적으로 활용한 [만물과 통하는 지도]를 말하는 거다.

자켓의 라펠에서 존재감을 발하는 브로치.

[육망성 브로치 1/6]

[등급 : 유니크]

[제한 : Lv.100]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그래, [우울한 비의 도시].

저 비안개 너머에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가 있다.

◈ 150화. 눈물의 씨앗 (1)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위해 순간이동 효과 발동.

덕분에 모든 효과를 상실한 만.통.지였거늘.

순간이동 효과를 발동하기 전.

본전을 뽑기 위해서 해볼 수 있는 건 전부 시도했던 나였다.

혹시라도 효과를 추출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를 찾아가 보기도 했었지.

'성과는 없었지만.'

기대가 크지 않아서 실망하진 않았다.

마탑의 적자를 담당하는 마법부여학.

유니크 등급 아이템에서 효과를 추출하는 것만 하더라도 감지덕지한 게 현재 마법부여학의 수준이었으니까. 에픽 아이템에서 효과 추출이 가능하면 그게 말이 안 되는 거겠지.

'덕분에 더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사용했다.'

그 노력이 있었기에 미련 없이 순간이동 효과를 발동했었고. 만.통.지를 통해서 나머지 다섯 개 [육망성 브로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있었단 말씀.

사실 처음 효과를 발동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넘치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하늘조차 울부짖는 곳.

...이게 뭔 스무고개나 수수께끼도 아니고.

만.통.지가 내놓은 답이 단번에 와 닿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도움이 됐던 건 요놈의 입방정이었다.

-"하늘이 울부짖는군."

[텟퍼른 울타리] 균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 그렇게 지껄였던 내 주둥이.

하늘이 우는 것보다 내가 우는 게 빠르겠다고.

신세 한탄을 애써 삼켰던 기억이 떠올랐거든.

덕분에 런던에 생성된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를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만.통.지가 알려준 장소가 바로 저 던전이라는 것을...!

내 추측을 뒷받침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육망성 브로치가 떨리고 있다.]

과연, 살아생전 처음 영국 땅을 밟은 보람이 있다. 물론, 이 긍지 높은 발걸음이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한 일.

쏴아아아─

나는 쏟아지는 장대비, 우산 아래에서 입을 열었다.

"상태이상에 내성이 없는 이들은 되도록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군. 나보다는 그대의 말이 저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만."

영국의 자랑, 세컨드 썬.

그 수장인 슈레이그였다.

대한민국에서 온 나보다 그의 말이 힘이 있는 게 당연하다.

나, 이호열의 현실적인 관점과 더불어.

"...감사합니다."

슈레이그의 무너졌던 긍지까지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그랑펠의 긍지론적 관점까지 고려한 말.

슈레이그와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다들 균열에서, 비안개에서 멀리 떨어지세요!"

"취재? 지금 그럴 때 아닙니다!"

"젠장, 당장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요?"

소란 속에서 나는 비안개를 바라봤다.

눈앞에 떠오르는 균열 정보.

확실히 균열이 맞다.

'상태이상의 정확한 원인이 뭐지?'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역시나 악마였다.

그러나 이건 이제까지와 상황이 달랐다.

균열은 기이의 공간.

붕괴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악마가 됐든.

막말로 상위 마왕이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균열 외부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으니까.

"열등한 족속에게 그런 힘은 없겠지."

말 한번 잘했다, 그랑펠.

이건 입방정이 아니다. 애초에 악마들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면 말이야. 귀찮게 인간에게 빙의하고, 연기하면서까지 현실로 숨어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므로 가능성은 하나.

"던전의 특수성인가."

[던전]이기 때문에 균열 외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정말 가면 갈수록 가관이다, 아르카나 세계관.

악마와의 성전(聖戰).

하나만 신경을 써도 모자랄 상황에 던저어어언?!

'제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믿고 싶다.'

[미궁]도 모자라서 [던전]까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런던의 시민들이 균열 속에 갇혀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부리나케 런던으로 포탈을 타고 넘어온 거고.

정말로 피곤하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오지랖하고는.'

던전 균열이 아니더라도 처리할 게 얼마나 많았던가?

뭣보다 귀찮은 그림자들에게 처지를 자각시켜 주겠다고 다짐했었단 말이다.

그러나 그랑펠의 주둥이는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에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쏴아아아─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빗소리가 우렁차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무섭다 정말로.

해석하자면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거겠지.

하여튼, 절차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지켜주신다.

그러나 무거운 긍지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거든.

균열과 악마를 상대하기도 벅차다.

추잡한 사회에서 구르는 직장인 시절은 이미 졸업한 지 오래.

그림자고 뭐고, 귀찮은 건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슈레이그가 다가왔다.

한 손에는 우산.

다른 한 손에는 웬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들고서는.

"죄송하게도 제대로 대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종이컵에 그려진 녹색 로고가 익숙하다.

슈레이그가 내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 차를 좋아하신다는 건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지는 몰라서 무난한 아메리카노로 준비했습니다."

슈레이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부디 제게 런던의 안내를 맡겨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슈레이그에게 안내를 부탁한 이유는 간단하다.

던전이라고 하더라도 균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공간이라는 것. 당연하게도 현실의 지리라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잔을 받아 들며 대꾸했다.

"결단을 내려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곳까지 와주셔서...."

"아니, 마땅히 짊어져야 할 무게다."

"...!"

흠칫한 슈레이그에게 나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제발.

21세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설파하지 마라, 그랑펠.

그나마 내 입으로 귀족이란 단어까지 꺼내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나는 물끄러미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되었는가?"

"물론입니다."

"그럼 진입하도록 하지."

...마시기 싫다고 다급하게 말 돌리지 마라, 그랑펠.

하긴 비약초면 몰라도, 티백 녹차에 절여지다시피 한 나의 미각이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겠지. 비가 오는 날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한 게 없거늘.

변해버린 나의 미각이 심히 원망스럽구나.

나는 애써 미련을 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균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에 진입하셨습니다.]

*

쏴아아아─

쏟아지는 폭우.

빗소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요란스러운 앵커의 목소리.

지켜보는 이의 시선은 확실히 브라운관을 향하고 있었다.

-"속보입니다. 이호열 플레이어와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가 런던에 생성된 최초의 던전 균열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세계 각국이 우려를 표하던 가운데...."

스쳐 지나가는 자료화면들.

이상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그야 자료화면 속 풍경이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

런던이었으니까.

그러나.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는 모두가 자각하지 못했다.

화면에서 송출되는 전경이 자신들이 갇힌 런던, 균열 속이라는 사실은 물론.

자신들이 상태이상에 빠졌다는 사실까지도.

"...."

느껴지는 건 오직 무력감과 우울감뿐.

영국, 런던.

아니,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에 갇힌 이들이 점차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자니.

격식도 도움이 되는 때가 다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무식하게 커다란 장우산을 챙겨온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봐라, 옷에 비 한 방울이 튀지 않고 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우산을 치켜든 자세 덕분이었다.

'...아니, 이런 사소한 거에 흡족해할 때가 아니라.'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야가 제한적이다.

짙은 비 안갯속에서 언뜻 건물의 형체가 보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마찬가지로 주위를 살피던 슈레이그가 말했다.

"다행히도 런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가이드는 현지 가이드가 최고라니까?

슈레이그와 세컨드 썬 길드원들은 빠르게 지리를 파악했다.

그들이 나누는 브리핑엔 나도 귀를 기울였다.

"핵심은 던전 심층부의 위치를 파악하는 거야."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아르카나의 경험.

때문에 던전에 관해서는 아는 점이 별로 없는 게 나였다.

그래도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슬슬 감이 왔다.

'말 그대로 심층부만 찾아내면 되는 건가?'

[던전].

규모에 따라서 수십 개의 갈림길이 존재하기도 하고, 수백 개의 함정,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존재하기도 하는 위험한 장소. 그러나 심층부의 위치를 알기만 한다면....

"우리의 목적은 경험치나 전리품이 아니야. 최대한 빠르게 심층부를 찾아내고, 보스 몬스터를 제압해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최우선이다!"

몬스터나 함정 같은 다른 방해요소는 전부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었다. 물론, 쉽지 않겠지.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비안개가 아무래도 보통 안개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세컨드 썬의 길드원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잖아요."

그것은 위화감.

런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균열 내부였거늘.

어째서인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아요."

시동이 켜진 채 멈춰 선 자동차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상가 건물들.

거리 곳곳에 떨어진 우산까지.

모든 게 그대로거늘.

사람만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말을 잇던 플레이어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다.

"대체 이 짧은 시간 만에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거죠...?"

"혈흔이나 공격받은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아."

"슈레이그, 아까부터 계속 연락을 해보고 있는데.... 단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아.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받질 않아. 젠장, 뭐냐고 대체!!"

감정이 흔들리는 게 당연하다.

영국, 런던의 수도.

사라진 이들 중에 플레이어들의 동료 혹은 가족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금 무거워진 분위기.

이래서 [우울한 비의 도시]라는 건가.

진입하자마자 사기를 사정없이 짓밟아 놓는군.

그러나 나는 입을 열었다.

"모두 걱정할 것 없다."

"...?"

말했다시피 영국 땅을 밟는 건 처음.

당연하게도 내가 영국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허나 나는, 그랑펠은 남 이야기를 하듯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가슴 속의 긍지도 진심이며.

내뱉은 말도 더없이 진심이었거든.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진정한 [우울한 비의 도시]가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우리는 함정에 갇힌 모양이군."

"하, 함정에 갇혔다고요?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우리가 한 거라곤 그저 걸어서 비 안갯속으로.

균열에 진입한 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대들은 확신할 수 있는가?"

"화, 확신이요?"

"이곳은 던전, 무엇 하나 정해진 규칙이 없는 공간."

"...!"

내 속사정을 알고 있는 누군가는 말하리라.

방금까지도 던전 심층부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뻔뻔하게 말은 잘한다고.

과연, 반박할 수 없다.

이놈의 두꺼운 철면피엔 뒤집어쓰고 있는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꼭 지식이 있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때론 뻔뻔함이 실전에 도움이 되는 법.

내가 함정을 간파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하이엘."

읊조리던 순간, 분명히 빠져나갔던 마력.

그러나 하이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이곳이 균열 내부가 맞고, 하이엘이 소환된 것도 맞지만,

나와 하이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벽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살짝 머리를 굴려봤다.

어째서인가?

모든 게 그대로인데, 어째서 사람만 감촉같이 사라졌는가.

그에 관한 대답은 쏟아지는 '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바닥에 고인 비 웅덩이에서.

그랬다.

나와 하이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수면(水面).

나는 우산을 가지런히 접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나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본 슈레이그와 플레이어들.

그들이 목격한 것은 하늘에 비친 또 다른 런던의 풍경.

이내, 그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게 뭐야? 마치 거울처럼 하늘에 런던이?!"

"똑같아. 근데, 저쪽엔 사람이 있어!!"

"뭐, 그게 정말이야?!"

맞은 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이엘.

하늘과 땅.

어디가 수면 위이고, 아래인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뚝.

나는 턱 끝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쳤다.

"옷을 젖게 만든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

물이 문제라면, 그 물을 전부 없애버리면 되는 일이다.

물론, 쏟아지는 비를 증발시켜 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

마력이 넘쳐나도 『마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건.

그러니까 나는 하이엘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물은 '식물'의 양분이 되는 법.

그래.

고유 정령, 하이엘의 {자연} 능력을 발휘할 시간이다.

◈ 151화. 눈물의 씨앗 (2)

그랑펠의 철면피가 멘탈 관리엔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게 아니었다면 적잖이 놀랐을 것 같았거든.

[던전], 마음의 준비는 했어도 시작부터 지랄 맞구나 하고.

'과연, 소문대로야.'

함정이란 걸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아니, 함정을 건드릴 새도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려나?

나와 슈레이그를 포함해서 플레이어들이 한 일이라고는 비 안갯속으로 몇 걸음을 내디딘 게 전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생각해 볼 가능성은 한 가지다.

슈레이그가 머리 위의 런던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함정을 돌파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라는 건가."

뭐, 놀라긴 했어도 어이없어하는 눈치는 아니군.

던전이라면 있을 법도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과연, 경험자답다.

그런 의미에선 다행이었다.

"슈레이그."

"네, 듣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그대가 보기엔 어떠한가?"

나야 뭐, 틀린 그림 찾기를 할 정도로.

런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으니까.

끄덕─

슈레이그가 곧장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똑같습니다. 저쪽 런던에 시민들이 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죠. 그리고 알아차리신 것처럼, 함정에 빠졌단 말씀도 맞는 것 같습니다."

슈레이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쪽이든, 이쪽이든. 누군가는 말입니다."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단계라 생각하는 거겠지.

이내, 슈레이그가 길드원들에게 지시했다.

"탐험가들은 함정 구조 파악을 시작한다!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탐험가들을 보호하도록."

과연, 세계구급의 길드 세컨드 썬이다. 탐험가 연맹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육성해 낸 탐험가 클래스 플레이어들이 있다는 거겠지.

다만.

"미치겠네. 뭐, 이딴 함정이 다 있냐?"

적정 레벨 최소 600, 최대 900레벨 던전 균열.

'탐험가들이 부족한 게 아니야.'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이 와도 이런 함정을 단시간 내에 간파하기는 힘들걸.

그러나 말했듯 걱정할 건 없다.

나는 맞은편 런던에서 날갯짓하는 하이엘을 바라봤다.

"맞부딪힐 때가 있다면 유연하게 흘려낼 때도 있는 법."

쏴아아아─!

어째 내뱉어지는 투가 상당히 거창했지만.

누군가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그저 쏟아지는 비를 식물의 양분으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제발, 이런 혼잣말은 빗소리에 파묻혔으면 좋겠다....'

속으로 간절히 빌었거늘.

"...네? 혹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어코 슈레이그가 듣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격식.

정중한 물음엔 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켜보게나, 슈레이그. 곧 알게 될 테니까."

"...?"

나의 시선을 쫓아서 슈레이그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하이엘의 존재감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알아차린 슈레이그가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하이엘? 저건 이호열 플레이어 님의 계약 정령 아닙니까? 설마...! 정령 소환을 통해서 함정의 존재를 간파하신 겁니까? 역시, 대단하십...! 잠깐, 저건?"

하늘에 비친 또 하나의 런던.

그런 하늘에서 뻗어져 오는 무언가.

무언가는 '뿌리'였다.

그래, 물을 양분으로 삼는 식물의 뿌리.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또 도움이 되는구나.

아이템의 효과 덕분이었거늘.

나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단 사람처럼 뻔뻔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아르카나 대륙의 여름을 기억하고 있는가?"

일동 침묵─

갑자기 웬 추억팔이인가?

어리둥절한 눈치들이시다.

내 장단에 맞춰준 건 역시나 슈레이그뿐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헤시야스 같은 남부 지역의 여름은 정말 판타지스러웠죠. 한번 비가 내리면, 정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그치지 않았으니까요. 딱 지금처럼."

나의 입방정에 호응해 줘서 고맙다, 슈레이그.

마음 같아서는 칭찬 스티커 10장이라도 붙여주고 싶다.

왜냐면, 더없이 적절한 대답이었거든.

"정답이다, 슈레이그."

"네, 정답이라니요?"

"그대들은 헤시야스가 물에 잠긴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아니요. 제 기억 속에서는 없습니다. 다들 어때?"

절레절레─

서로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젓는 플레이어들.

뜬금없이 아르카나 대륙의 여름도 모자라서.

남부 도시, 헤시야스의 이름을 꺼낸 이유가 뭐겠는가?

바로 저 뿌리가 헤시야스에서만 서식하는 식물.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그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의 뿌리였으니까.

슈레이그는 찰나의 순간, 고뇌하고 있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네요. 헤시야스가 고지대도 아니고, 제국 수도성처럼 배수 시스템이 갖춰지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물에 잠기지 않았던 거지?"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힘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효과를 통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에 관한 지식. 그랬다.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는 한 그루, 한 그루가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나는 식물이었으니까.

'헤시야스에만 서식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만한 비가 내리는 곳은 제국에서도 헤시야스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이엘은 정말이지, 나의 분신이자 거울....

아니, 계약 정령다웠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구나, 하이엘.'

고유 정령으로 격이 상승하면서 {자연} 능력을 각성.

식물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하이엘이었다.

마력만 뒷받침된다면 식물을 자라나게 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는 뜻이다.

"잠깐만, 슈레이그. 저게 뭐지?"

내 말을 곱씹고 있던 슈레이그가 길드원의 부름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하늘에서 뻗어져 내려오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의 뿌리를.

슈레이그가 설마 하며 나를 바라봤다.

"...설마, 말씀하신 자연의 힘이라는 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줬다.

또 한 번 써먹는 말, 백문불여일견.

지금은 백 마디 말보다 지켜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거다.

보통 아쿠아리우 떡갈나무가 아니다.

무려 고유 정령.

하이엘의 축복을 받은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다.

게다가 양분이 되는 물은 차고도 넘치는 환경.

곧.

슈슈슉─

떡갈나무가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슈, 슈레이그! 나무! 갑자기 하늘에서 뿌리가, 나무가!!"

그나저나, 하이엘.

...누구 닮아서 너도 참 화려한 거 좋아하는구나?

간만에 허가된 {자연} 능력을 아주 마음껏 활용하고 있잖아. 마치 가로수라도 심는 것처럼. 런던 거리 곳곳에 뿌리를 내리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아무리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덕분에 마력 효율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이래서야 내 마력이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됐거늘.

...이상하다?

어째 마력 소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마력 효율이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보다시피 하이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을 쏟아붓다시피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저 정도면 나보다도 마력통이 큰 거 아닌가?

의문이 커져가던 찰나.

문득, 정령학 선임 페이얀 롯의 말이 떠올랐다.

-"수석님께서야 어련히 알고 계시겠지만, 고유 정령은 일반적인 계약 정령과 달라서요. '급'으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역시, 고유 정령으로 거듭난 덕분인가?

하이엘이 나에게 종속되지 않는 고유의 마력통을 가지게 됐다면 모든 의문이 설명 가능했다. 잘 자라준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알아서 잘 성장해 줘서 고맙다, 하이엘.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린 채.

점차 몸집을 키워가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들.

하나둘 새싹이 피어나기 시작한 순간.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뭐지?"

자욱하던 비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차올랐던 빗물도 메말라 갔다.

그리고 아까부터 퍼붓던 빗줄기조차도.

쏴아아아....

쏴아....

뚝....

뚝….

뚝.

"비, 비가 그쳤어요!"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와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점멸했다.

강렬한 빛이 쏟아지기도 잠깐.

시야에 들어온 건 마찬가지로 런던의 전경.

그러나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사, 사람이다! 시민들이야!"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깨워!"

"저기, 괜찮으십니까? 정신 좀 차려보세요!"

아직 의식을 되찾진 못한 것 같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런던 시민들과 조우했다.

나도 하이엘과 조우했다.

하이엘이 내게 고상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르심에 뒤늦게 응답하여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죄송할 게 뭐가 있니, 하이엘.

오히려 기특해서 칭찬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거늘.

그러나 상황파악은 언제나 중요했다.

나는 우선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뿐인가.

더 이상 또 다른 런던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다음에 하이엘에게 물었다.

"하이엘. 내가, 우리가 저들처럼 정신을 잃었던 건가?"

나의 물음에 하이엘이 대답했다.

"호열 님께서는 그저 꼿꼿하게 멈춰서 계셨습니다. 깨어나실 때까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보내신 텔레파시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그건 환각이었나.

제대로 함정에 걸렸었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던전]은 정말 지랄 맞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게 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단순히 던전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적정 레벨을 떠나서.'

당장 하이엘이 아니었다면.

나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은 상태이상에 빠진 채 비에 잠겨 익사해 버렸을 테니까. 그래, 거기에선 던전의 특수성을 넘어서 악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직감을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악마도 모자라서.

던전까지 생성됐다고 투덜거렸던 나의 행동을 반성한다.

이거, 던전과 악마가 세트였다니.

현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시궁창이었군.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비 안갯속에 모습을 감춘 악마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걸. 녀석이 현실에 숨어든 녀석이든, 아르카나 대륙에서 굴러먹던 녀석이든 말이야.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악크샨의 생존자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

내가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덕분에 비가 그친 지금.

시야를 가리는 비 안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는 훤히 보인단 뜻이었다.

열등한 족속, 네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말이야.

나는 슈레이그에게 물었다.

"슈레이그, 길 안내를 마저 부탁해도 되겠나?"

"아, 넵! 물론입니다."

"거리의 끝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 있는가?"

"상징이라면, 아무래도 첼시 브릿지 로드 인근에는...."

*

모두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은 했다.

새롭게 생성되는 균열이 언제까지고 지금까지의 균열과 같으리란 법은 없었으니까. 최악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닥친 위기에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AAU의 아포칼립스 선언도 그런 취지에서 발표된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 사태는 예상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직격탄을 맞은 영국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기자 회견장.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는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총리 관저 다우닝 가 10번지는 물론, 버킹엄 궁전의 왕실.

영국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까지.

던전 균열, 비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당장 군대가 움직여도 모자란 상황이었거늘.

비 안개, 균열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뿐.

당연하게도 영국의 길드, 세컨드 썬에게 세상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세컨드 썬의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슈레이그가 왜 저러는 거죠?"

"설마, 적정 레벨을 보고 쫄았나?"

"아니, 이건 쫄았어도 안 그런 척해야 되는 상황 아니에요?"

"그전에 슈레이그 성격에 저럴 리가 없는데."

"...잠깐만, 앵글이 좀 이상한데?"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상태이상이었다.

균열 인근에 내리는 비가 상태이상을 유발한다.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되는 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야 장우산을 치켜든 사내, 호열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AAU 대한민국 지부.

세 사내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현준은 호열의 등장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감성을 자극하신다니까요? 검은색 장우산이라니!"

"우산이 그냥 우산이지."

"...그게 뭔 감성인지 난 별로 알고 싶지 않다. 현준아."

그나저나 윤수겸은 지부장, 박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쯤 긴급 소집으로 바쁘셔야 할 때 아니신가?

지부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도 모자랄 사건이었으니까.

박민재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여기에 계셔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지들 아쉬울 때만 찾는 것들. 뭐가 예쁘다고 만나주냐?"

이호열은 오늘도 자신을 증명했다.

자신을 둘러싼 정부.

세계의 견제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영웅처럼 영국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하지만 나, 박민재의 그릇은 그렇게 넓지 않거든.

"괘씸해서라도 안 간다, 내가."

AAU.

하나의 기관으로 묶여있지만 사실상 지부마다 독립 기관이라 봐도 무방하다. 지부장 회의 몇 번 땡땡이 친다고 큰일 날 일은 없다는 말이다.

왜, 영국 지부장도 벌써 몇십 번씩이나 땡땡이를....

"...!"

잠깐만.

박민재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왜 하필 영국이지?

최근 교류가 뜸했던 AAU 런던 지부.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런던에 생성된 [던전] 균열.

이게 정말 순수한 우연일까?

"...젠장."

박민재, 혼자의 머리로는 추측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알고 있는 게 있어야 머리라도 굴려보는 거지.

그러나 박민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지부장님?"

물음에도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으로 드문드문 자판을 두들겼다.

발신인은 이호열.... 이면 얼마나 좋을까.

'번호를 알아야지. 원.'

그러니까 한 다리를 거쳐 갈 수밖에 없다.

발신인은 남태민으로.

전송된 메시지를 세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던전 공략 핵심은 던전 심층부 위치를 특정하는 것.

해당 균열, 던전 심층부의 위치는 첼시 브릿지 인근.

AAU 런던 지부일 확률이 매우 높음.]

.

.

.

"...AAU 측에서 뭔가 알아낸 건가?"

곧장 호열에게 메시지를 전달.

부디 도움이 되는 정보였으면 좋겠는데.

위이잉─

엥, 답장인가?

호열 씨가 벌써 메시지를 확인하셨다고?

어떻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남태민이 긴장된 눈빛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하하하."

그러고는 헛웃음을 뱉었다.

호열에게서 돌아온 답장은 이번에도 네 글자였다.

그러나 그 내용이 조금 달랐다.

-알고 있다.

"진짜 한없이 깊으셔서 그런가 예상을 할 수 없다니까?"

◈ 152화. 눈물의 씨앗 (3)

남태민이 보내온 문자.

[던전 공략 핵심은 던전 심층부 위치를 특정하는 것.

해당 균열, 던전 심층부의 위치는 첼시 브릿지 인근.

AAU 런던 지부일 확률이 매우 높음.]

그런가.

AAU 측에서도 무언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물론, 나도 [천적관계]를 통해 던전 심층부의 위치를 어림짐작한 상태이긴 했지만 말이야.

"...대격변 이후엔 AAU 런던 지부로 첼시 브릿지 로드의 상징이 바뀌었죠."

낯설다, 런던의 지리.

슈레이그의 가이드가 없었다면 지도 앱을 켜고 길을 찾아 나섰어야 했을지도 모르겠군. 물론, 번거롭다고 포탈을 발현하는 것도 부담된다.

'해당 좌표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되려 포탈이 함정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

더군다나 이번 던전 균열의 함정은 비와 관련되어 있지 않았던가?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었다.

지금도 충분히 찝찝하단 말이다.

더 이상의 강제 샤워는 사절이다.

"그나저나 보고도 믿기지 않습니다."

슈레이그는 감격에 겨운 목소리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빈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뭘 보고 저러나 싶어서.

나 또한 슈레이그의 시선을 따라 주위를 살폈다.

비가 그친 런던.

거리에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고작해야 십여 분.

거목으로 자라나기엔 턱없이 부족한 찰나의 시간이었건만.

과연,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시켰던 하이엘의 축복 효과다.

뿌리는 단단하며 줄기는 올곧게 뻗어있다.

그 위로 풍성하게 뻗어난 가지.

가지 끄트머리마다 찬란한 새싹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화려하잖아.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내 지식 속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는 절대 저렇지 않았는데.

그 이유야 짐작할 수 있다.

하이엘의 영향이겠지.

젠장, 입맛이 쓰다.

'내가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어.'

[심미] 스탯을 더한 나의 『마법』을 보는 것 같은 이 기분!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던가?

미안하다, 하이엘.

내가 바라보자 하이엘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숭고하심이 제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입니다."

그래, 다 내 영향이 맞다.

내가 안 좋은 물을 들여서 미안하다, 하이엘.

...그런데, 잠깐만 [숭고]라고?

마냥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그야 [숭고]는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새롭게 획득한 칭호였으니까.

나는 상태창을 열어 다시금 [숭고]의 효과를 확인했다.

[숭고 : 숭고한 자여, 아르카나 대륙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랬다.

길고 구체적이었던 [최후의 모험가] 효과와는 정반대.

달랑 한 줄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이유?

한 줄짜리 효과에도 뭔가 굉장히 있어 보였거든.

'아르카나 대륙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잖아.'

청렴결백에 영향을 받은 건지, 뭔지 알 순 없어도.

수백만 악마에게 달려든 나의 사투를, 시스템이 모른 척하지 않았단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사투를 통해 획득했던 이득들이 몇 개던가?

제일 중요한 마르셀로의 시한부 저주 해주부터.

[마안(魔眼)의 망원경].

사망 페널티를 무시할 정도로 엄청난 경험치까지.

그랬기에 칭호의 애매한 효과 정도야.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거늘.

기대가 없었기에 당첨의 기쁨이 더욱더 큰 걸까.

'...아무래도 뭔가 있다, 이거.'

말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숭고]엔 명시되지 않은 추가적인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랑펠의 문무(文武) 재능으로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렇군. 고생했구나, 하이엘."

벅찬 속내와 다르게 담담하게 내뱉는 말.

스륵─

하이엘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턱없이 부족한 제게 과찬이십니다."

물론, 계속해서 사이좋게 수다를 떨 여유는 없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던전의 심층부, AAU 영국 지부.

문득, 슈레이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적입니다. 숫자는 대략 다섯!"

슈레이그, 402레벨.

지금이야 남태민을 비롯한 다른 최상위 플레이어들과 그 레벨이 엇비슷했다만. 그는 한때 스칼, 록스와 더불어 세 손가락에 꼽히던 플레이어 중 하나.

철컥─

갑작스러운 적의 등장에도 침착한 태도가 그 증거겠지.

슈레이그의 클래스는 나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각성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많지 않은 플레이어 중 하나였거든, 슈레이그는. 알고 있던 이유? 간단하다. 그야 굉장히 멋있었으니까.

검사 계열 클래스, 펜서.

과연, 신사의 나라 신사다운 자태.

슈레이그가 무기를 꺼내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마치 커다란 바늘 같은 그의 무기는 플뢰레.

찌르기에 특화된 자검(刺劍).

"재커리, 들려? 상황은 어때? 시민들은?"

전투에 집중하면서도 쓰러진 시민들의 안전 또한 잊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그랑펠의 긍지가 흡족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직 몬스터들이 출현하진 않았다고? 그래, 다행이네. 그럼 지금부터 대열 갖추고 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래도 던전 심층부부터 몬스터가 출현하고 있는 것 같거든."

상황을 파악하고 전달하는 슈레이그.

나는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앞을 바라봤다.

'정확히 다섯.'

외형은 물을 가득 채운 마네킹이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물 인간 다섯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 파악 끝.

통화를 끝낸 슈레이그가 내게 말했다.

"추가 패치 내역에 따르면 녀석들의 이름은 우울한 도시의 망령. 그 레벨은 600에서 650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 감입니다만...."

빠득─

슈레이그가 이를 갈았다.

"망령이라면 놈들에게 물리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이름을 떠나서.

칼로 물 베기라는 옛말이 괜히 있겠는가?

딱 봐도 물리적인 공격은 먹히지 않게 생겼군.

부들부들─

검을 굳게 잡은 슈레이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저건 분노였다.

런던, 자신의 고향을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들이 눈앞에 나타났거늘.

"빌어먹을."

자신의 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에 화가 나는 거겠지.

그 심정은 백분 이해한다.

그런데 심정을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내가 '어느 정도'만 공감한다 말한 데엔 이유가 있단 말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 있는가?"

"...네?"

"정말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가?"

"그, 그건."

슈레이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 또한 옛날 같았으면 괜한 소리를 했다고.

또 어떤 오글거리는 말을 지껄이려고 이러느냐고.

속으로 신세 한탄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죽었다 살아나면서 깨달은 게 있거든.

'결국, 플레이어들의 힘이 필요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의 나는 수백만의 악마를 상대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플레이어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도 긍지는 기본.

뛰어난 실력까지 갖춘 플레이어들의 협조가.

그러니까 똑똑히 봐라, 슈레이그.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런 내가 손에 쥔 건 다름 아닌 검은색 장우산.

"...!"

나는 놀란 슈레이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대가 할 일은 간단하다. 지켜보는 것."

그러고는 검기를.

아니, 검강을 장우산에 집중시켰다.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검기를 목격하는 것이다."

"...거, 검기라뇨?!"

검기(劍氣).

다루기 이전에 목격하는 데만도 높은 자격을 요구하는 경지.

그러나 검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검사의 전투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나는 하르콘과 예시카, 에노크와 같은 검기 사용자들에게서 레벨 이상의 강함을 목격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런 검기를 두른 검은.

설령, 검이 아닌 우산에 불과할지라도.

망령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검기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위험하십니다. 더군다나 그런 우산으로는...!"

허나, 그 사실을 슈레이그가 알 순 없었으니.

경악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가만히 지켜보라고 했잖아.

'한 번 보는 게 이해가 빠를 테니까.'

달려드는 다섯의 망령.

나는 놈들을 향해 우산을 겨눴다.

우산을 휘감고 오르는 은빛의 기백.

스아악!

단호한 일격.

그와 동시에 무너지는 망령들.

슈레이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뭐야, 이게?"

그와 다르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우산으로 몬스터를 쓰러트렸다고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600레벨짜리 몬스터 다섯 마리를 일격에 처치.

500레벨에 육박한 레벨, 그것도 모자라 발동된 [천적관계]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아르카나 대륙, 수백만의 악마들 사이에서 사투를 벌인 경험 때문인가.

녀석들만으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진짜 많이 컸다, 이호열.'

내가 괜히 던전 균열에 혼자 진입한 게 아니란 말이다.

.

.

.

플레이어, 이호열.

추정 레벨, 최소 900레벨.

그의 강함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슈레이그, 그에겐 아르카나의 상식이 있었으니까.

과거 플레이어 랭킹 3위까지 올라봤다는 건.

현재 다른 랭커들이 느끼고 있는 고충이나 감정들을 슈레이그는 보다 먼저 경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호열, 저 사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주력 공격 수단은 마법.

허나, 검을 쥐어도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검을 다루는 모습이야 매스컴을 통해 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우산이라니.

우산으로 600레벨짜리 몬스터를 다섯이나 쓰러트리다니!

슈레이그는 주먹을 쥐었다.

'...이게 수준의 차이인가.'

격차.

이호열과의 격차만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현재 자신이 들먹일 수 있는 건 과거의 영광밖에 없었으니까.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진작 한계에 부딪힌 거겠지.'

정확히는 클래스, 펜서의 한계에 말이야.

현실, 직업에 귀천은 없을지라도.

아르카나의 클래스엔 귀천이 존재한다.

가장 최상위에 위치하는 게 귀하디귀한 히든 클래스.

히든 클래스의 전직자로는 스칼이나 제시 하인네스가 있겠지.

그들의 강함, 잠재력은 말로 설명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다.

그 아래로는 바바리안, 힐러 같은 인기 클래스가 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선택하는 만큼 성능 또한 뒷받침되는 클래스들.

만약, 운 좋게 클래스 퀘스트라도 수행하게 된다면.

히든 클래스에 버금가는, 아니 아예 히든 클래스로 전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저 밑바닥에는 자신과 같은 비인기 클래스가 있다.

슈레이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펜서는 겉만 그럴싸한 쓰레기 클래스라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따위 클래스는 선택도 하지 않았겠지.

기본적으로 검을 다루는 검사였으니.

공격력은 [근력] 스탯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거늘. 적의 약점을 노려야 하는 펜서에겐 턱없이 높은 [민첩] 스탯이 요구됐다.

근력과 민첩을 동시에 투자해야 하는 클래스라니.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효율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위력이다.'

젠장.

슈레이그는 자신의 플뢰레를 바라봤다.

결국, 걸림돌이 되는 건 공격의 위력이었다.

찌르기에 의존하는 공격 방식엔 취약점이 많았으니까.

'대체 클래스가 뭐지?'

마탑의 수석.

한없이 깊은 어둠.

악룡 사냥꾼.

호칭으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마법.

검술.

...그리고 우산 격투.

지켜보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슈레이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야.'

사실 주제 파악은 유스라 왕국 때부터 끝마쳤다.

그래서 낙심은 없을 줄 알았는데....

슈레이그는 분했다.

"...결국, 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건가."

런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거닐던 거리가 비 안개 파묻혔다.

런던의 가족들이, 동료가, 시민이 위기에 빠졌거늘.

자신의 손으로는,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무능하잖아."

슈레이그가 고개를 떨구던 순간이었다.

"집중하고 있나, 슈레이그?"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슈레이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소리와 같이 한결같은 자세.

우산을 검처럼 쥔 호열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대는 검기를 목격해야만 하네."

검기라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슈레이그는 스쳐 지나간 호열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부터 그대가 할 일은 간단하다. 지켜보는 것."

-"정확히는 검기를 목격하는 것이다."

과대평가다.

아무래도 나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레이그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검기라니.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다른 검사 클래스 플레이어들과 다릅니다! 더럽게 약하고 한계조차 뚜렷한 빌어먹을 펜서가 제 클래스니까요. 검기라는 걸 알지도 못하지만, 그런 걸 제게 기대하시는 건...!"

"알고 있다."

"...네?"

무엇을 안다는 거지?

펜서라는 나의 클래스를 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 한계를 안다는 것인가.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호열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

"스스로를 믿어라. 설령, 그럴 용기가 없다면."

더없이 진지한 음성으로.

"그대를 믿는 나를 믿어라."

.

.

.

알고 있다니까?

슈레이그, 그쪽은 내가 각성하기 전부터 알았던 몇 안 되는 플레이어였으니까. 게다가 뭐? 펜서가 더럽게 약하고, 한계가 뚜렷하다고?

이거 마음 같아선 악마 사냥꾼 일일체험을 시켜주고 싶은데.

'지금이야 많이 큰 덕분에 티가 덜 나지만 말이야.'

막 각성했을 무렵엔 내 레벨보다 한참 낮은 놀을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단 말씀이시다.

장담하는데 아무리 펜서가 애매한 클래스라고 하더라도 악마 사냥꾼을 따라올 순 없을걸?

세상에 스탯 포인트를 [근력], [민첩], [마력], [행운]에 동시에 투자하는 클래스가 또 어디에 있겠냐고.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대를 믿는 나를 믿어라."

내가 장담한다.

아르카나에서 랭킹 3위라는 건 재능이 없다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위치라고.

그러니까 고개를 들고 똑똑히 봐라, 슈레이그. 검기를 목격하고, 실체를 깨달아야만 하니까.

"그 손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면."

앞으로 닥쳐올 악마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내가 그랑펠의 화법으로 뱉어내기 무섭게.

다시금 [우울한 도시의 망령]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그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잡았던 폼이 무색할 정도로 많잖아, 저거. 나 혼자였다면 우산을 들고 천천히 상대하겠다만, 기절한 시민들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교육보다는 구조가 우선순위.

내가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순간이었다.

"!"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숭고한 자여. 그대의 숭고함이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

...내가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고?

뭔 변화?

그전에 숭고한 자라는 호칭은 좀 과하지 않나?

생각하던 와중.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떨리는 슈레이그의 목소리가.

"이, 이호열 플레이어님. 그 우산에 일렁거리는 은빛! 그 아지랑이 같은 게 설마 말씀하셨던 검기(劍氣)라는 겁니까? 잠깐만요, 그 전에 혹시 [숭고]가 뭔지 알고 계십니까? 방금 제게 어떤 메시지가...!"

검기를 목격했구나, 슈레이그.

그런데, 덕분에 나 또한 깨달았다.

칭호, [숭고]에 숨겨진 효과가 이런 거였구나?

◈ 153화. 선을 지키거라

[숭고]의 효과는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내 주변.

이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숭고한 자'의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찬란하게 빛나는 아쿠아리우 떡갈나무.

처음엔 외관만 지나치게 화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하이엘의 축복으로 어느새 잎사귀를 싹 틔운 떡갈나무에선 생명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생명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정말 메시지로 효과가 떠올랐거든.

게다가.

나는 쓰러진 시민들을 바라봤다.

...꿈틀.

아직 의식을 되찾기는 못했지만 미동도 않던 시민들에게서 움직임이 보였다.

상태이상과 폭우 때문에 바닥났던 생명력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거겠지.

'외관 못지 않게 효과도 거창해졌단 거야.'

이 정도 수준의 변화는 단순하게 나의 불순한 영향만으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변화.

하이엘의 말대로 [숭고]의 영향이 분명했다.

'슈레이그도 마찬가지다.'

분명, 은빛 아지랑이라고 했겠다.

확실하게 나의 검강(劍罡)을 목격했군.

직감했다.

메시지로 떠올랐던 작은 변화라는 게 슈레이그의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깊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찰박─

물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망령들.

나는 우산을 치켜듦과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쏟아지는 폭우를 증발시킬 순 없어도, 너희쯤은 문제도 아니다.

나는 물의 망령들을 향해 읊조렸다.

"인간을 흉내 낸 형상이라면 그 시작부터 틀렸다."

화르륵─!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닌 가슴 속 긍지. 긍지까지 모방할 순 없는 법이니까."

.

.

.

[숭고의 효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숭고라고?

메시지의 내용으로 봐선 버프가 분명했다.

그러나 의아한 일이다.

'뭐지?'

숭고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스킬인 것은 물론.

슈레이그, 자신에게 버프를 걸어줄 길드원은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주변 플레이어라고는 오직 한 사람.

호열밖에 없었단 말이다.

'정말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게 아닌 이상....'

우산으로 망령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자신에겐 버프를 걸어줬다는 말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부정했겠지.

하지만 저 사내라면 모른다.

우산 하나로 600레벨 몬스터를 사냥하는 호열이라면.

'...근데 나한테 버프를 걸어줄 이유가 없잖아.'

버프, 숭고.

그 효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효과가 있든지.

꽈악─

슈레이그는 주먹을 쥐었다.

'내가 활약할 순 없을 테니까.'

적의 레벨은 600레벨.

그에 비해 자신은 고작 400레벨 언저리.

그것도 모자라서 클래스는 펜서.

적과의 상성마저 최악이다.

'버프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슈레이그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는 건 고통스러웠거늘.

분명, 호열은 말했었으니까.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는 이호열을 믿어라.'

확실히 낯설었다.

슈레이그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서만 호열을 접했으니까.

무례한 질문은 가뿐히 무시하는 태도.

겸손보다는, 실력만큼 콧대가 드높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호열의 행보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나 같은 놈한테까지.'

거대 연합의 남태민, 히사기, 레오니.

그리고 대마법사, 제시 하인네스까지.

그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세력.'

게다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잠재력이 있는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과거의 영광을 근근이 이어오는 게 고작인 자신과는 급이 다른 재능의 원석들이란 뜻이다.

'...됐어. 이따위 감상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떠오르는 의문을 이겨내고.

현실과 직면하기 위해 고개를 치켜든 슈레이그.

고오오─

"!"

어째서인가?

그의 시야에 호열의 검강이 선명히 비치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게 바로 숭고의 효과인가?

슈레이그가 당황해 호열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찰박찰박.

다섯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거리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망령들.

'어느 틈에?'

슈레이그는 플뢰레를 치켜들었다.

검기라는 걸 목격할 수 있게 됐지만,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망령에게 피해를 줄 수단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어.'

무방비하게 쓰러진 시민들이 보였다.

호열이 망령들을 쓰러트릴 때까지.

고기 방패 역할이라도 해서 시민들을 지켜야 한단 말이다.

슈레이그는 전투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바늘처럼 뻗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젠장, 아무리 봐도 듬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전부 핑계에 불과하겠지.'

호열의 우산은 이것보다 훨씬 빈약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망령에게 피해를 줬다.

슈레이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플뢰레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책임은 부족한 내게 있는 거야."

검기조차 호열의 버프 덕분에 간신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하찮은 재능으로 검기를 흉내 내겠다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도 안 된다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를 믿는 나를 믿어라."

다시금 머릿속에 맴도는 호열의 목소리.

'그래, 나는 몰라도 이호열이라면 믿을 수 있다.'

슈레이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합류하겠습니다. 저를 이용하세요!"

클래스, 펜서.

제아무리 형편없는 클래스에게도 고유 스킬은 존재하는 법.

고유 스킬, [결투의 대가] 발동.

척─

슈레이그가 검을 세로로 치켜드는 순간.

망령들의 시선이 일제히 슈레이그를 향했다.

고유 스킬의 효과였다.

──────

결투의 대가 : 대상을 결투가 끝날 때까지 도발한다. 결투에 초대된 대상은 추가 고정 피해를 받지만, 이 효과는 사용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쉽게 설명하자면 대상을 펜싱 경기에 초대하는 것.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벌써 저질러 놓고도 또 한 번 놀랐다.

'1대1도 벅찰 텐데, 한 번에 스물이라니.'

모든 망령에게 [결투의 대가]를 발동.

망령들의 어그로를 자신에게 집중시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무모한 짓이다. 효과에도 적혀있듯 추가 고정 피해 효과는 자신에게도 유효했으니까.

'스치면 죽겠는데, 진짜.'

그러나 슈레이그에겐 믿음이 있었다.

설령, 자신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호열이라면 모두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척─

이내, 슈레이그가 망령들을 향해 플뢰레를 겨눴다.

그리고 흠칫했다.

"...!"

날카로운 플뢰레 끄트머리.

민망할 정도로 희미하고 흐릿했거늘.

그럼에도 피어오르고 있었으니까.

"...검기(劍氣)?"

검기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명해지는 법.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슈레이그.

그의 희생에 [숭고]가 감응하기에 충분했으니까.

*

[숭고한 자여. 그대의 숭고함이 작은 변화를 이끌었다.]

다시금 점멸하는 메시지.

그러자 슈레이그가 검기를 발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숭고. 역시, 이거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아무래도 상당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입수 난이도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습득 조건을 정확하게 알 순 없다만.

일단, 한 번 죽어야 하는 건 확실했으니까.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없었다면.'

이런 사기적인 칭호를 획득해 놓고, 효과를 확인도 못 하고 눈을 감았단 소리잖아? 늦게라도 알게 된다면 억울하게 관짝에서 눈을 부릅뜨고 기상할 정도의 효과였다, 진심으로.

나는 흥분한 속내를 가라앉히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숭고]의 정확한 효과는 숭고한 자.

그러니까 나, 이호열 주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말 그대로 주변에 있다면 대상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이엘부터 떡갈나무 그리고 슈레이그까지.

정령, 사물, 플레이어에게 전부 유효했으니까.

문제는 변화의 정도였다.

'메시지엔 분명 작은 변화라고 했단 말이지.'

허나, 결코 작다고 여길 수준의 변화가 아니었으니까.

'하이엘이나 떡갈나무는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슈레이그.

아무리 목숨을 걸었다고 하고, 그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단시간 내에 검기를 목격하고 미약하게나마 발산하게 된 데에는 '숭고'가 굉장히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잠깐만, 그러면 나중에.'

스탯이나 스킬 숙련도처럼.

숭고의 효과가 발전한다면.

작은 변화가 아니라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거냐?'

어디 꽃밭 같은 머리를 굴려봐라, 그랑펠.

나 이호열의 대가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단 말이다.

어쨌든, 뜻하지 않게 상당한 수확을 거뒀다.

숭고에 이런 효과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역시, 긍지롭게 살아야 복이 온다.

물론, 그랑펠은 몰라도 나는 긍지로만 살 수 없다.

"...검기?"

슈레이그가 검기를 목격하고, 발산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더 이상 비효율적으로 우산을 휘두를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긍지도 좋지만 챙길 건 챙겨야 하거든.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를!

혹시라도 꽁무니를 내빼면 굉장히 귀찮아질 테니까.

"벌써 오후인가."

신속하게 이뤄지는 탐색, 간섭, 발현.

너희한테는 유감이지만 이게 또 내 전문이거든.

마법으로 물을 끓이는 거 말이야.

"허나, 빗물로 차를 끓일 순 없는 법이지."

부글부글!

과연, 티타임을 포기한 나의 전력.

600레벨짜리 망령들 따위야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임드나 보스 몬스터도 아니고, [천적관계]가 발동된 상태에선 무리로 덤벼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씀.

[레벨이 올랐습니다.]

흔적도 없이 증발한 망령들.

내 쪽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슈레이그를 바라봤다.

과연, 레벨의 격차를 만회할 수 있는 검기답다.

게다가 검술 관련 스킬이라곤 전무했던 악마 사냥꾼과는 다르게. 슈레이그의 클래스는 검사 계열, 펜서였다. 근본 자체가 다르다는 거지.

슉슈슉─

또한 다른 검사 클래스와 차별화되는 펜서의 기동력까지.

다 피하고 다 때린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저게 진짜 검기의 성능이겠지.'

악마 사냥꾼.

뭐든 애매할 수밖에 나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 말이야. 허나, 낙담은 없다.

그랑펠의 드높은 자존감에는 어떤 시련도 흠집을 낼 수 없을 테니까.

결투 끝.

망령을 쓰러트린 슈레이그에게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훌륭한 결투였네, 슈레이그."

...스승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랑펠.

"아닙니다. 숭고의 효과가 아니었다면 저 혼자선 절대...."

"아니, 그대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결단이라. 해주신 말씀, 앞으로도 명심하겠습니다."

...장단을 맞춰주지 마라, 슈레이그.

가슴이야 언제나 당당하게 펴고 있었지만, 어째 한결 더 기고만장해진 기분이 든단 말이다. 그러나 의식하면 나만 괴로워질 뿐이다.

나는 얼른 시선을 옮겼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망령들의 계속해서 생성되겠지. 서두르는 게 좋겠군, 슈레이그. 하이엘, 이곳을 부탁하겠다."

뭐, 악마 사냥꾼이 검사보다 검기를 잘 다룰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냥 악마 사냥만 잘하면 장땡이지.

나의 말에 하이엘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맡겨주시길."

물과 식물.

{자연} 능력을 다루는 하이엘이 상성 상 유리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던 찰나. 노파심을 덜고 쓰러진 시민들을 맡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숭고의 효과는 하이엘에게도 여전히 유효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이엘 님."

꾸벅─

슈레이그가 정령왕이라도 본 것처럼 하이엘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발길을 서둘렀다.

과연, 현지인답게 지름길을 가로지르니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빌딩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바로 AAU 런던 지부인가.

일대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마치 잠자코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것처럼.

[던전, '우울한 비의 도시' 심층부에 진입하셨습니다.]

AAU 빌딩 내부에 진입하자 떠오르는 메시지.

슈레이그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맨 위층부터 내려오면서 조사하는 쪽이...."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슈레이그."

"...?"

그러나 아무리 숨을 죽여도 소용없다.

나한테는, 악마 사냥꾼의 감에는 훤히 보이니까 말이야.

천적관계, 발달한 악마 사냥꾼의 감각으로.

나는 빌딩의 층별 안내도를 훑었다.

"거기로군."

비로소 이 사태의 원흉이 보였다.

*

비가 그쳤다.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고 눈을 비벼봤거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어째서?"

완벽했다.

더없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름조차 없는 하급 악마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빙의한 인간 녀석.

자신은 가져보지도 못한 이름을.

녀석은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빙의하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모험가도 아닌 하찮은 인간 따위가.

아르카나 대륙에 대해 이 정도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르카나 대륙에서 태어난 자신도, 아니 웬만한 상급 악마도, 마왕도 모를 정도의 지식량이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녀석의 지식과 빌어먹게 우울한 도시의 분위기라면.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마왕,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균열이 던전으로 변한 순간, 생각은 확신이 됐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단 말이다!"

거리 곳곳에 솟아난 낯선 나무들.

소름 끼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저 나무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나무가 솟아난 뒤로 비가 그치고, 비 안개가 사라졌다.

계획에선 없었던 변수였다.

그 영향일까?

"!"

두근.

아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틀어진 상황을 탓해도 부족할 정도로 격하게.

물론,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끼긱─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렸으니까.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

"베이커 지부장님?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다행이다.

모험가, 슈레이그였다.

아직도 겉껍데기에 속고 있는 아둔한 인간 녀석이었다.

'...미련을 버리자.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된다.'

멍청한 놈을 속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방금 깨어난 척을 해서....'

그러나 안도하고 다음 수로 넘어가기엔 지나치게 일렀으니.

또각─

또 하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내, 베이커의 시야에 검은색 장우산이 들어왔다.

"...!!!"

그와 동시에 심장이 고장 났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 154화. 피어난 것은 (1)

악마의 기척이 느껴진 곳은 다름 아닌 지부장실.

AAU 런던 지부장, 베이커 채트.

악마는 베이커의 육체에 빙의해 있다.

그렇게 추측하는 순간,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이 풀렸다.

이 악랄한 [던전]의 구조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지.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

[적정 레벨 : Lv.600~Lv.900]

[붕괴 진행도 : 2.3%]

긴급 업데이트.

이번 던전은 예정된 업데이트가 아니었다.

뭐, [깨진 차원의 틈] 균열부터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쯤은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문제가 되는 건 그 적정 레벨이었다.

이게, 뭔가 애매했거든.

마냥 높은 것도 아니고 마냥 낮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 이호열이 혼자 당당하게 균열에 진입한 게 애매한 균열이라는 보증 수표.

뭐, 그것도 불규칙한 던전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다른 것보다 함정이 선을 넘었으니까.'

그건 플레이어가 간파할 수 있는 함정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악랄하다.

플레이어는 물론, 던전 균열에 갇힌 일반인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함정이었으니까.

심지어는 악마 사냥꾼, 천적이라는 나조차도 하이엘이 아니었더라면 간파하기 힘들었겠지.

'영락없이 고위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꼭 상위 마왕이 아니라도, 고위 악마 정도.

친절하게 예를 들어볼까?

아르카나 대륙에서 봤던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정도만 돼도 말이야. 기세가 등등해져선 벌써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테니까.

'락시오로스, 그랑펠 못지않게 오만했었지. 그거.'

마왕급이 되면 그 자신감은 정말 하늘을 찌를 정도라는 것.

하지만 이 녀석은 희한했다.

함정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AAU 런던 지부 구석에서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말했다시피 의문은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지부장, 베이커를.

아니, 악마를 바라봤다.

냉랭하게 읊조렸다.

"주제넘은 짓을 벌였군."

"...!!"

"주제넘은 짓...? 혹시 두 분께서 아시는 사이신가요?"

슈레이그는 어리둥절한 눈치다.

내가 아는 악마라면 이쯤에서 세 치 혀를 놀렸겠지.

어떻게 해서든 슈레이그를 속여넘기고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그러나 녀석에게는 그럴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아주 당연한 반응이다.

"허억허억."

악마 사냥꾼으로서 레벨이 상승.

덕분에 나와 악마의 [천적관계]는 더욱 확고해진 상태. 마왕도, 고위 악마도, 뭣도 아닌 녀석은 내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녀석을 내려다봤다.

"다물거라."

"...?"

"나는 네게 숨을 허락하지 않았다."

"...!"

평소 같았으면 말이지.

이젠 남이 숨 쉬는 것까지 통제하려고 드는 거냐고.

그보다 슈레이그가 보는 앞에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

이놈의 내가 입방정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속에서 분통을 터트렸을 나였거늘.

'딱. 오늘만큼은 그 심정에 공감한다, 그랑펠.'

이내, 나의 시선이 창 너머로 옮겨간다.

"이곳에서는 훤히 보이고, 들렸겠구나. 빗물에 잠긴 이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소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슈레이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말보다는 행동이었다.

챙!

슈레이그가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이호열 플레이어 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베이커 지부장?"

녀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내가 숨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공포에 질려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고 있었을 뿐.

물론, 대답은 필요 없다.

"허나, 네놈들의 하찮은 생각 따위 알 필요도 없겠지."

"...!!"

"그럼에도 명심하거라."

사냥감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그런 좌우명을 가진 그랑펠이, 내가.

마왕도 뭣도 아닌 악마와 대화를 나눈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것에는 정도가 있는 법.

그러니까....

"선을 넘지 말거라."

마력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우산을 치켜들 필요도 없었다.

그래, 경고면 충분했다.

[이름 없는 악마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이름 없는 악마에게 '질식'이 발생합니다.]

[이름 없는 악마아게 '사망'이 발생합니다.]

털썩─

목덜미를 부여잡고 그대로 쓰러진 베이커.

슈레이그가 다급히 달려가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봤다.

"일단, 숨은 붙어있습니다."

마왕의 전리품,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을 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름도 없는 악마를 상대로 마왕의 전리품을 제물로 바칠 필요는 없겠지.

'제물의 급에 따라서 구마의식의 위력도 달라지니까.'

물론, [구마의식]은 진작 발동된 상태였다.

베이커의 육체에 피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겠지.

슈레이그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베이커가 악마에게 빙의된 이유?

내가 심리학자도 아니고, 그딴 건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는 데까진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지. 가감없이 아주 담백하게.

"그는 악마에게 몸을 빼앗겼었다."

"...베이커 지부장님이? 그럴 수가! 빙의란 말씀이십니까?"

[빙의].

플레이어들에겐 낯설지 않은 디버프였다. 지금은 출현이 뜸해졌다고 한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균열에서 흔히 마주쳤던 악마족 몬스터였으니까.

"악마가 일반인에게도 빙의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대체 어느 틈에 사회로 숨어서....

중얼거리던 슈레이그가 흠칫했다.

그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이었다.

"잠깐, 그렇다면 제가 어제 만난 베이커 지부장님은...!"

붙어있었으면서도.

대화를 나눴으면서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니.

악마의 메소드 연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진실은 더욱더 잔혹하거든, 슈레이그.

'이건 시작에 불과하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이 있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어쩌면 현실은 아르카나 대륙보다 악마가 날뛰기에 적합한 장소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정해 보자. 만약, 베이커에게 빙의한 게 진명의 악마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악랄한 던전이 출현했을지도 몰라.'

AAU 지부장.

AAU의 전신이 아르카나의 개발사 코스모였던 걸 고려한다면. 베이커의 아르카나 세계관에 대한 지식은 웬만한 플레이어보다도, 악마보다도 뛰어났을 터.

이름 없는 악마는 그 지식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진짜 탈출이 불가능할 수준의 던전이 출현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중요한 건 위험 가능성을 알게 됐다는 것.

그렇다면 문제가 될 건 없다.

모든 건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슈레이그에게 말했다.

"놀란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네, 슈레이그."

"시작에 불과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했다시피 마왕 압살은 계기에 불과했다.

폭풍전야.

현재 악마들이 조용했던 이유가 [마왕 쟁탈전]을 앞두고 서로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는 걸.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던 나는 깨닫게 됐단 말이다.

본격적으로 쟁탈전이 시작되는 순간, 악마들의 활동은 지금까지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겠지.

"이번 사태는 예고에 불과할 정도의 사건이 올 테니."

"...!"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각.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던전 심층부, 사태의 원흉인 악마가 사망한 지금.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균열,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시련 끝에 피어난 긍지는."

그와 동시에 비안개가 걷혔다.

우울한 비의 도시라고 했던가.

런던을 잠기게 한 눈물이 메마른 것이다.

"그 무엇보다 찬란할 테니."

언제나처럼 말만 거창하게 지껄인 게 아니다.

런던의 거리거리가 물기를 머금은 나무로 가득했다.

눈물을 양분으로 삼아 피어난 아쿠아리우 떡갈나무로. 그래, 먹구름이 걷히고 내리쬐는 햇빛을 반사하는 나뭇잎들은 정말로 찬란했으니까.

그리고 찬란한 게 하나 더 있지.

[던전 클리어 기여도에 따라 전리품을 습득합니다.]

굳이 인벤토리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육망성 브로치가 빛나고 있다.]

찾았다,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

.

.

.

투두두두─

시끄러운 헬리콥터.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한다.

"머, 먹구름이 걷혀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외부인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비안개에 휩싸여있던 런던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외곽부터 서서히 걷혀가는 비안개.

가장 먼저 앵글에 포착된 건 플레이어들이었다.

"세컨드 썬의 길드원들입니다. 방금까지 전투 도중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요! 자, 잠시만요. 플레이어들 뒤에 쓰러져 있는 건...!"

정확하게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 중이던 플레이어들.

예고되지 않은 긴급 업데이트였지만, 실시간으로 추가되는 추가 업데이트 내역은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600레벨 몬스터, 그것도 망령들이 등장했잖아."

"웬만한 물리 공격엔 끄떡도 안 할 텐데?"

"그런 몹들을 앞에 두고 시민들을 보호했다는 거야?"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지, 쟤네?"

세컨드 썬.

길드 마스터, 슈레이그의 실력이야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간부, 재커리를 비롯한 길드원들의 평균 수준은 다른 길드와 비교해서 특출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분명, 길드원 모두가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꼴깍!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이들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크게 부상을 입은 플레이어도, 쓰러진 이들도 없었으니까. 더 나아가서 쓰러졌던 시민들조차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투두두두─

런던, 어느 거리를 비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균열, 그것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던전.

그런 던전 균열 속에 런던 전역이 뒤덮였거늘.

사상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보고 계십니까? 기적입니다.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영국.

아니, 전 세계가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이윽고 대기 중이던 구조대원, 군병력까지 투입된 순간.

런던에 발을 들인 이들은 목격할 수 있었다.

"...잠깐만, 여기에 이런 가로수 길이 있었나?"

눈물의 씨앗에서 피어난 숭고한 나무들을.

.

.

.

[런던 거리 곳곳에 의문의 나무 출현...!]

[세컨드 썬 길드원 曰, "나무가 생명력을 회복시켜 줬다."]

[생존자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한 플레이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전하고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나무였다.

다른 이들처럼 나무의 이름까진 알 수 없어도.

정체를 알고 있는 슈레이그였다.

AAU 런던 지부.

"잠깐, 슈레이그다!!"

그곳에서 슈레이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취재진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모두가 슈레이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슈레이그 씨,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혹시 AAU 런던 지부가 던전의 심층부였던 건가요?"

"이호열 플레이어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슈레이그는 작게 웃음을 삼켰다.

'내가 설 자리가 아닌데 말이야.'

주인공인 호열은 균열을 클리어하자마자 포탈 발동.

자리를 뜨고 말았으니까.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애원해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는 말만 남긴 채. 그러니까 슈레이그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오늘 일은 그저 예고에 불과하다.'

미련하게도 이제야 호열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그리고 마탑을 움직이면서까지 성전에 뛰어들었는지를 말이다.

그 뜻을 알게 된 이상, 슈레이그는 머뭇거릴 수 없었다.

'자신감? 한계?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없을지라도.

호열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슈레이그가 기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런던은 이호열 플레이어. 그에게 구원받았습니다."

"!!!"

*

지독한 격식과 절차.

심지어는 요놈의 입방정에도 조금은 적응이 된 참이거늘.

그럼에도 나, 이호열은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노예였다. 청렴결백이고 뭐고 [육망성 브로치] 효과를 확인하고 싶어서 서둘러 포탈을 발현한 걸 보면...!

유스라 왕국, 집무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육망성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과연, 세트 아이템이라는 건가.

두 개의 브로치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느껴진다.

...두 개를 결합하면 뭔가 추가 효과가 발동되는 건가?

어렸을 적 변신 합체 로봇에 흥분했던 것처럼.

기대감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러나.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그래, 다짜고짜 합체하기 전에 원래의 아이템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정보를 확인하기 전에 찻물을 끓이는 게 우선이겠지만.

부글부글─

하루라도 녹차를 거르면 입에 가시가 돋는 혓바닥도 참....

달칵─

어쨌거나, 나는 녹차 티백 담긴 찻잔을 기울이고 나서야 새로운 육망성 브로치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더없이 훌륭하군."

◈ 155화. 피어난 것은 (2)

"더없이 훌륭하군."

이 감탄사가 300원짜리 고오급 녹차 티백을 향한 게 문제였지만.... 흠, 그래도 공감할 수 있는 발언이다. 역시 환경이 중요하다니까.

'비에 쫄딱 젖고 나서 마시니까 그런가.'

여태까지 마셨던 녹차 중에 제일 괜찮다.

딱, 추운 겨울에 오뎅 국물 마시는 기분이랄까.

물론, 티타임은 길지 않았다.

그랑펠에겐 몰라도, 내게는 300원짜리 녹차 티백보다 훨씬 중요한 아이템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육망성 브로치 2/6]

총 여섯 개의 육망성 브로치.

그중 하나를 이미 보유하고 있는 나였다.

...굳이 따지자면 마탑에서 대여한 거지만.

나는 마탑의 수석이 아니던가? 내가 마탑이고, 마탑이 나라는 말이다. 마탑과 내가 마도구 하나를 장기 대여했다고 틀어질 사이가 아니라는 거지.

'그래도 내가 마탑에 해준 게 얼만데.'

고작해야 레벨 제한 100레벨.

가넷 홀에 널린 마도구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낮은 레벨 제한을 자랑하는 육망성 브로치였으니까. 그러니까 흠칫하는 게 당연하다.

[등급 : 유니크]

[제한 : Lv.500]

[효과 : 모든 물리 공격 피해량 10퍼센트 상승.]

[설명 : 여섯이 모여 하나가 되는 브로치 중 일부이다.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에 그 효과가 상당히 손실되었다.]

갑자기 500레벨 제한이라고?

상상도 못 한 수치가 튀어나왔다.

100레벨 그리고 500레벨.

이건 세트 아이템이라고 묶일 정도의 격차가 아닌데?

자그마치 500레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세 한탄을 늘어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누구던가?

아르카나 대륙에서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한 악마 사냥꾼.

'...이것도 따지자면 아이언 캐슬 호가 잡은 거긴 한데.'

아이언 캐슬 호의 지휘권을 획득한 내가 아니던가? 마탑과 마찬가지로 내가 드워프고, 아이언 캐슬 호라는 것. 그 증거가 이렇게 레벨로 나타나 있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94]

[능력치]

근력 : 84 / 민첩 : 92 / 마력 : 421 / 행운 : 10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4]

[던전 : 우울한 비의 도시]에 진입하기 직전, 490레벨.

던전 균열을 클리어하면서 4레벨이 올랐다. 과거엔 범접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을 500레벨까지 불과 여섯 계단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씀.

그러니까 내가 놀란 이유는 레벨 제한 때문이 아니었다.

"훌륭한 세공 솜씨로군. 불완전한 자체로도 가치가 있는 브로치다."

...물론, 브로치가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그랑펠.

그랬다.

내가 흠칫한 이유는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의 효과 때문이었다.

나는 첫 번째 육망성 브로치의 효과를 다시금 확인했다.

[효과 : 마법 사용 시, 소모한 마력 10퍼센트 회복.]

다시 봐도, 누가 봐도 마법사 아이템 효과였다. 이건.

그래서 약간은 기대했단 말이다.

레벨 제한이 다섯 배니까. 효과도 그 다섯 배가 뻥튀기된 게 아닐까. [천적관계]가 없더라도 마력에 시달릴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는.

[효과 : 모든 물리 공격 피해량 10퍼센트 상승.]

근데 뭐냐고, 이 뜬금포 터지는 효과는.

물리 공격 피해량 10퍼센트 상승이라니.

누가 봐도 마법사를 위한 효과가 아니잖아, 이거?

'그런데 편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보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보통 효과가 아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피해량을 증가시켜 주는 효과를 가진 아이템은 엄청난 취급을 받았다.

다만, 그런 아이템들은 대부분 양날의 검이었다.

멀리갈 것도 없이 마탑의 마도구, [돌개바람의 증표]나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만 봐도 알 수 있겠지.

고작 단 하나의 마법의 위력을 증가시켜 주면서 24시간짜리 쿨타임을 달고 있다거나.

피해량을 증가시켜 주는 대신 마력 소모량도 늘어나는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 있었으니까.

'근데, 조건이 없어.'

그것도 모자라서 범용성이 어마어마했다.

모든 물리 공격 피해량.

검을 휘두르는 거나 석궁 볼트를 쏴대는 것은 물론.

때에 따라 마법으로도 물리 공격 피해를 줄 수 있단 말이다.

돌벽이나 돌기둥.

광물을 탐색해 발현하는 마법들이 대표적인 예시겠지.

"착용하기에 부족함이 없군."

아니,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적절한 효과도 없다!

클래스, 악마 사냥꾼.

목적은 오직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서.

[근력] [민첩] [마력].

남들은 하나만 건드려도 모자란 스탯을 세 개씩이나 건드리던 내가 아니던가? 세트 아이템답지 않게 잡스러운 효과가 오히려 득이 될 줄이야.

과연, 세 개도 모자라서 [행운]에도 포인트를 투자한 보람이 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란 거지.'

두 개의 육망성 브로치.

함께 착용해서 그 세트 아이템 효과가 발동되는 순간.

추가 효과가 발현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니 부족한 건 500레벨까지.

6레벨이나 뒤처진 내 레벨밖에 없겠군.

비에 쫄딱 젖었지만 나쁘지 않은 런던 균열 공략이었다.

칭호, [숭고]의 숨겨진 효과를 알게 된 것부터. 기대와는 달랐지만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진 두 번째 [육망성 브로치]. 거기에 마지막으로 악마족 몬스터의 위험성까지.

"허나, 긍지와 오만은 엄연히 다른 것."

말 한번 잘했다, 그랑펠.

알고 있으면서 가만히 손을 놓고 있는 건 긍지 넘치는 게 아니라 오만에 불과하다.

더욱이 오늘의 런던 사태처럼 무고한 타인이 휘말리게 되는 일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겠는데?

AAU.

과연, 악마에게 빙의된 게 영국 지부장뿐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지부장님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주제 파악, 나는 내 위치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달칵─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들의 긍지를 살펴보겠다."

아쉬운 처지는 내가 아니란 거지.

그러니까 이제 격식과 절차에 따라서....

옷부터 좀 갈아입자.

아무리 [온기] 버프가 만능이라고 하더라도 속옷까지 젖은 찝찝함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

[슈레이그, "이호열은 런던의 구원자."]

[목격자 曰, "이호열의 계약 정령이 나무를 자라게 했다."]

[유명 식물학자,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나무...."]

언론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런던, 던전 균열, 그리고 이호열에 관한 소식을 쏟아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한 역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VBC 보도국.

타다다다닥─!

손가락에 불이라도 난 듯 키보드를 두들기는 기자들.

"어휴. 다들 열심히들 하시네."

불구경만큼 재밌는 게 또 없다고 하던가?

역시 옛말에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PD 현용석은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가며 염장을 질렀다.

"이야. 쉴 틈이 없네. 쉴 틈이."

런던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의 대변인이 돼서.

또 익명의 AAU 관계자가 돼서.

이호열에 관한 여론을 조성해 가던 언론이었다.

현용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개인적인 감정들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그러면 쓰나."

보도국에서 플레이어, 이호열의 악명 아닌 악명이야 유명하다.

웬만한 질문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격식과 예절을 갖춰 질문하더라도 돌아오는 건 짧디짧은 형식적인 대답뿐.

-"내부 사정이다."

적어도 내숭은 떨어주던 플레이어만 봐오다가 이호열과 마주치니.

기자들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심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이번 일은 엄연히 선을 넘었다.

쯧쯧, 현용석이 혀를 찼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말이야."

"...야이씨, 현용석! 부채질을 해라. 부채질을."

"아, 계셨어요? 정 선배?"

"이 자식아, 팀 꾸려서 보도국에서 빠져나갔다고 하더라도 꼭 이렇게 염장을 질러야 되겠냐? 네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 아니, 됐다. 말하기도 싫다. 꺼져."

지그시 눈을 감는 정 선배, 정이삭.

하지만 현용석이 누구던가?

VBC 내부에서는 좋게는 방송에 미친.

나쁘게는 그냥 미친 자로 통하는 그였다.

울상인 선배의 표정에 현용석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에휴, 답답할 텐데. 제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씩 쫙 돌리고 싶어도. 하필이면 오늘따라 지갑을 집에다가 두고 왔네? 어떻게 탕비실에서 시원한 냉수라도 한 잔씩 뽑아 드릴까?"

"저, 저 자식이 근데...!!"

결국, 폭발한 정 선배가 눈을 부릅뜬 순간.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또 여기 계셨어요? 씁, 내 발가락."

깨끔발.

운동화를 부여잡은 사내는 다름 아닌 투데이 아르카나 총괄 카메라 감독, 윤종진이었다. 주섬주섬. 간식부터 챙기는 윤종진을 보고 정이삭이 울분을 삼켰다.

"...저것들 아주 그냥 쌍으로 지랄을!"

우물우물.

과자를 입에 넣은 윤종진이 말을 이었다.

"핸드폰은 어디다 두고 진짜 사람 찾게 만들어요?"

"왜, 또 호들갑인데. 런던 출장 가고 싶어서 그래?"

"제발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확인하셨어요, 영상?"

"영상?"

뜬금없이 뭔 영상을 말하는 건데....

중얼거리던 현용석이 흠칫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면 당연하게도.

"...종진아, 설마 내가 말했던 그거냐?"

"네! 그거예요."

"뜨자. 여긴 보는 눈들이 너무 많다."

"야씨, 뭔데?! 떠들었으면 뭐라도 흘리고 가야지!"

정이삭의 애원을 외면한 채.

두 사내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거닐었다.

윤종진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CCTV 녹화본에 찍힌 모양이에요. 이호열 전투씬!"

기이의 공간, 균열.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탓일까.

균열 내부에서도 스마트폰과 카메라를 비롯한 현대의 물건은 멀쩡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생각히 닿았던 게 바로 런던 거리의 CCTV.

"젠장, 미치도록 부럽다. 영국 방송국 놈들!"

지금쯤 확보된 CCTV를 샅샅이 돌려보고 있겠지.

비안개에 둘러싸인 균열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또 누구보다 빠르게 이호열의 활약을 세계에 보도하기 위해서 말이야.

"흐흐."

"...근데 뭐가 좋다고 웃냐? 비행기 타게?"

"저 영국 유학파인 거 아시죠?"

"기초 회화도 못 하면서 유학파는 개뿔이."

"아니, 꼭 말을 해도 그렇게 사람 무안하게."

윤종진이 쩝 입맛을 다셨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라 낙담은 길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만큼은 할 말이 있었으니까.

"제가 영어 회화는 몰라도 유학생들끼리. 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다졌거든요. 그 인맥 덕분에 이렇게, 동영상도 하나 받았고요."

"...뭔 동영상?!"

"런던 거리에서 펍 운영하는 현지인 친구가 하나 있거든요. 거기 펍 CCTV 녹화본이에요. 저도 아직 확인 안 했는데. 펍 외부 CCTV에 이호열이 찍혔다고...."

"!"

샥─

눈보다 빠른 손.

현용석이 스마트폰을 낚아채고는 곧장 동영상을 재생했다.

이내, 떠오르는 런던의 전경.

"!!"

얼마 가지 않아 두 사내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현용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리 특종과 단독기사에 미친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은 도저히 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CCTV 녹화본 하나만 믿고 보도하기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 속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니까.

현용석이 어이가 없어서 스스로 되물었다.

"세, 세상에 우산으로 몬스터 때려잡는 사람이 어딨어?!"

.

.

.

누군가 커뮤니티에 던진 질문이었다.

──────

제목 : 근데 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해도 무리지 않냐?

내용 :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한테 쫄딱 망한 거잖아. 생각해보셈. 아르카나에 네임드 NPC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거기에다가 각 지역에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보스몹들도 있고. 근데 걔들도 못 막은 악마를 우리가 어떻게 막냐고.

──────

이호열?

물론, 대단하다.

추정 레벨 최소 900레벨.

마탑의 수석.

그것도 모자라서 고대 왕국 유스라 왕국을 재건하고, 프로스트를 구해내고, 여신교단과도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림자 용병단에 탐험가 연맹까지.

하여튼, 엄청난 세력들이 다 이호열 측에 붙었단 뜻이다.

"거기에 우리. 플레이어들까지 퀘스트로 참전했잖아."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전은 우리가 훨씬 불리한 싸움이지."

"아니, 그래서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고?"

"그게 아니라 그냥 우려가 된다는 거지."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아르카나인, 거대 길드, 심지어는 초신성들까지.

수많은 플레이어가 모인 이상,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섞여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과연, 이호열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구심점이 흔들리면 판이 흔들리는 건 당연하다.

마왕을 압살하면서 평화의 상징이 된 이호열.

런던 사태까지 완벽하게 클리어한 지금.

흔들리는 이호열의 모습이라.

쉽게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낙관적으로 바라보기엔 이호열이 짊어진 게 너무 많아."

이호열의 어깨는 무거워도 심하게 무거웠다.

세상이 이호열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말 그대로 초인(超人)의 잣대였으니까.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대단하면서도 가끔은 좀 안쓰럽달까."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쾅─!

주점에 굉음이 울렸다.

"으아아아악!!"

그보다 더한 괴성이 이어졌다.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의 명물이 된 락키드였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부숴버리다니.

언제나처럼 술주정을 부리는구나.

그 술주정이 오늘따라 심하구나.

플레이어들이 애써 무시하고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저 영상 뭐냐? 이호열 아냐, 저거?"

스크린 위에 떠오른 뉴스 속보.

재생되는 런던 거리의 CCTV.

거기엔 600레벨짜리 몬스터.

[우울한 도시의 망령]과 마주 서서 우산을 치켜든 호열이 있었다.

꼿꼿하지만 절대 뻣뻣하지 않은 동작.

호열이 우산을 휘두르자 망령들이 물처럼 거리에 흩어졌다.

락키드가 이를 악물었다.

'저건 검기가 아니다.'

검기의 수준을 넘어선 무언가다.

그 짧은 시간에.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서다니.

락키드는 속에서 울분이 끓어올랐다.

"술맛 떨어지는 소리 할 거면 꺼지는 게 어떠냐, 다들. 엉?!"

아까부터 재잘거리던 플레이어들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저 괴물 같은 게 안쓰럽다고오오?! 말도 안 되는 소릴!!"

.

.

.

나는 화면 속에서 우산 격투를 벌이는 나를 바라봤다.

...정말, 폼 하나는 제대로 잡는구나.

게다가 세상에 흑역사를 광고라도 하는 것인가.

하필이면 검은색 장우산이라니.

세상에 나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없다.

◈ 156화. 피어난 것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