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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화. 아르카나 (1)

[월드 퀘스트 : 악룡(惡龍) 사냥꾼]

사악한 용의 일족을 사냥한 자여.

산맥의 전설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제로 산맥 최정상에 도달하라. (진행 중)

깨워선 안 될 존재.

녀석을 처치하면서 시작된 월드 퀘스트.

그 존재를 아는 건 나밖에 없었다. 처치에 기여한 플레이어들도 퀘스트를 받긴 했다만, 일반 퀘스트에 불과. 한마디로 퀘스트의 '급'이 달랐으니까.

그런데 나더러 악룡 사냥꾼이라니!

스칼이 나의 이명을 알게 된 경위?

진심으로 고민해 보고 싶지 않았거늘.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이 이어진다. 보자, 아르카나 월드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월드 퀘스트였으니까.

'메시지겠네.'

왜, [세계수의 씨앗] 퀘스트 땐 모든 플레이어에게 메시지가 떠올랐었다. 히든 클래스, 용기사. 스칼에게만 악룡 사냥꾼과 관련된 메시지가 떠오른 거겠지.

'불행 중 다행인가.'

그래, 그걸 생각하면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자. 물론, 스칼이 카메라 앞에서 내 이름을 나불거린 순간부터 의미가 없어지긴 했다만.

'이건 삼고초려로도 부족하다, 스칼.'

나는 뒤끝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포탈로 향했다.

말했다시피 내겐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웅성웅성─

뒤편에서 떠들어 대는 기자들의 소리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방금 그 말은 스칼의 요청을 거절한 거죠?"

"이거 스칼 자존심 많이 구겨지겠는데?"

"거절을 넘어서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스칼과 만나는 걸 시간 낭비처럼...!"

마탑의 로비.

포탈이 존재하는 만큼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

마탑의 공동 수석으로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격식을 중시하는 만큼 절차 또한 중시하는 내가, 그랑펠이 아니던가? 우리집 안방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뭐라고 할 마음은 없단 말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심히 거슬린단 말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인파를 바라봤다.

아직 뭐라고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흡!"

곧장 찾아온 정적─

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을 열었다.

그건 명령이 아닌 엄연한 부탁이었다.

"또한 당분간 마탑 내부에선 정숙해 줬으면 좋겠군."

환자에게 절대 안정은 필수란 말이다.

.

.

.

마르셀로가 쓰러졌다.

마탑 치유학파 별실.

클레를 포함한 숙련 마법사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우리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클레?"

"일단, 진정하자. 다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어."

시무아르드가의 저주.

쉬쉬한다고 하더라도 발 없는 말은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게다가 저주의 당사자부터가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침대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마르셀로.

벨리에는 곁에서 마르셀로를 지켜봤다.

눈을 감은 모습은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똑같네."

자는 모습도.

미련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도 똑같아.

벨리에를 비롯한 선임 마법사들은 마르셀로의 유서를 전달받았다.

내용도 자신처럼 정직했다.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는 없고, 오로지 마탑만을 생각한 유서였다.

"젠장. 알고는 있었지만. 저주라고 해도 야박하지."

별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벤쉬의 목소리.

몇몇 선임 마법사들이 마르셀로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만남은 불가능하다.

이내, 벨리에의 시선이 허공을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허공에 떠오른 '저주의 문양'을.

마르셀로가 쓰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주의 문양은 점차 진해져 가고 있었다.

마치 마르셀로의 생명을 흡수해 가는 것처럼.

똑똑─

노크에 벨리에가 답했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마티스 선임."

문이 열리자 틈으로 언뜻 벤쉬의 얼굴이 보였다.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벤쉬의 호들갑은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

"저어엇...!!"

벨리에가 무어라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천적 관계.

탁─

곧장 마티스가 단호하게 문을 닫아버렸으니까.

그러고는 허공에 떠오른 저주의 문양을 바라봤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맞아요. 외형도 마법진의 구조가 아니죠."

"...."

물끄러미.

마티스는 반지를 바라봤다.

역시나 색은 변하지 않았다.

이질적인 마법, 흑마법.

흑마법진의 구조 또한 이질적이며 제각각이거늘.

저주의 문양은 흑마법조차 아니었다.

혹시나, 만에 하나 싶었건만.

벨리에는 쓰게 웃었다.

"마법도 흑마법도 아니다. 결국, 저희의 예상이 적중했군요."

"마르셀로 수석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말씀드렸던 대로. 억지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거죠."

치유 마법을 통해 육체의 기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

마티스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 정도의 치유 마법을 유지하는 데엔 막대한 마력이 필요할 터.

그러나 벨리에에겐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숙련 마법사들과 교대로 마법을 유지하는 것인가?'

아니, 치유학파 숙련 마법사들조차 이곳의 출입은 자유롭지 않은 듯했다.

마력의 한계가 왔어도 진작 왔어야 할 텐데.... 마티스의 우려스러운 시선이 이내 평상시와 다른 벨리에의 차림으로 향했다.

잠깐, 이제 보니 로브가 아니라 사제의 옷이 아닌가?

시선을 알아차린 벨리에가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이호열 수석께서 도움이 될 거라고 건네주셨습니다."

"...이 수석께서?"

"문양을 보니 여신교단의 마도구더군요. 아니지, 교단에선 마도구가 아니라 성물(聖物)이라고 칭하겠군요? 명칭이야 어찌 됐든 성물의 효과 덕분입니다."

이호열 수석이 건넨 성물.

덕분에 마르셀로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마티스가 침음을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섬세하셨군.'

여신교단의 성지, 뮤온을 구원했던 호열이었다.

여신교단의 성물을 호열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 여신교단, 그들이 긍지를 품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보답했을 테니까.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벨리에가 입을 열었다.

"결국,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이호열 수석의 복귀를."

"...."

들려오는 건 마르셀로의 숨소리뿐.

우울한 분위기는 좋지 않다.

벨리에가 분위기를 환기하려 입을 열었다.

"참. 마탑, 선임들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수석의 공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이 수석께서 아르카나로 향하신 이유를...."

이호열 수석이 밝힌 건 그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뿐.

목적은 밝히지 않았었다.

마르셀로가 쓰러진 지금, 호열은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했다니.

갑작스레 두 수석의 신변에 위협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자리를 비우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출탑 신청을 비롯한 나와 관련된 요청들은 며칠 동안 자제해 주면 좋겠군. 그대들의 양해를 바란다."

-"시무아르드 가문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신뢰하게."

벨리에, 마티스.

적어도 두 선임에겐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애써 입을 열 수 있었다.

"며칠쯤이야 가끔씩 마음 졸이는 것도 괜찮겠죠."

그러나 변화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

...저주의 문양이 이전과 다르게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

전까지는 그저 점차 선명해지는 데에 그쳤다면, 지금은 선명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경박한 발광이 마치 공포에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황한 벨리에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이호열 수석.

그가 마탑을 떠난 지는 채 한나절도 되지 않았거늘.

그는 벌써 아르카나 대륙을 밟은 것도 모자라서.

시한부의 저주, 해주의 실마리를 찾아냈단 말인가?

*

[노을이 내리쬐는 갈림길]

[적정 레벨 : Lv.380]

[붕괴 진행도 : 0.6%]

마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생성된 균열에 진입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자신이 없었거든.

'...현실로 돌아와서 포탈을 발현할 마력이 남아있을까.'

마탑까지 되돌아갈 자신이.

목적지는 균열이 아닌 아르카나 대륙.

현실로 복귀하는 방법?

나는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최후의 모험가]의 효과를 발동하는 것.

효과를 발동하기 위해서 아르카나 대륙에서 한 번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랑펠이 얌전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악마들로 득실대는 아르카나 대륙에서?

장담할 수 있었다.

나는 마력 탈진도 모자라서.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악마를 사냥하리라고.

'그러니까 최대한 가까운 균열을 택한 거지.'

여차하면 택시라도 불러서 마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쏴아아─

이내, 노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균열의 풍경.

그러나 오늘만큼은 팔자 좋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곧장 인벤토리를 열었다.

[만물과 통하는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누군가 몰래 감춰둔, 누군가 잃어버린, 어딘가에 숨겨진 무언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단 한 번, 무언가의 위치로 순간이동 할 수 있다.

단, 순간이동 효과 발동 시 모든 효과를 그 즉시 상실한다.]

[설명 : 사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마도구.]

마왕의 전리품.

곧장 효과를 발동시키기 전에 다시금 되새겼다.

잊고 있던 아르카나의 설정을.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아르카나의 시간 흐름은 현실보다 4배가 빨랐다.

현실에서의 하루가 아르카나에선 나흘이었단 거지. 설정이 대격변 이후에도 유효하다는 건 프로스트를 통해 검증이 됐다.

'생각하기 나름이겠네.'

덕분에 예상보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그럼에도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물론, 그건 나의 속마음.

"시간의 흐름조차 내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이래야 내 주둥이. 내 입방정이지.

망설임은 없었다.

포탈을 발현하듯 나는 머릿속에 좌표를 떠올렸다.

-"시무아르드가. 위치는 제국 수도성 동부. 나니아 호수 인근."

고오오─

[만물과 통하는 지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왕의 기운은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된 상태.

걱정할 것은 오직 아이템의 효과뿐.

쏟아지는 빛 속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

.

.

각종 광고에서 봤던 아르카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제로 산맥을 또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그 제로 산맥만큼이나 자주 등장했던 게 아르카나의 야경이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수십 개의 별.

현실의 달보다 커다란 별들이 아르카나의 밤하늘엔 가득했으니까. 그래, 아르카나 대륙에서 눈을 뜬 내가. 메시지 다음으로 목격한 건 아르카나의 밤하늘이었다.

끔뻑─

하늘에 박힌 거대한 동공.

아르카나 대륙을 감시하듯 내려다보는 시선.

나는 알아차렸다.

아니, 악마 사냥꾼인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랬다.

별 대신 아르카나의 밤하늘을 수놓은 건 악마의 눈동자.

나는 감상을 뱉어냈다.

"미관을 심히 해치는구나."

아르카나 대륙에 넘실대는 악의(惡意).

가슴 속 긍지가 언제보다도 격하게 반응했다.

악마와 같은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그랑펠이니까. 정말, 당장에라도 밤하늘의 눈동자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

그러나 긍지만큼이나 중요한 절차가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이유가 있단 말이다.

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시한부의 저주.

그 저주의 근원을 파헤치길 원한다.

─시무아르드 저택을 방문하라. (성공)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진행 중)

시무아르드가(家)에 얽힌 시한부의 저주를 파헤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과연,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마도 가문.

저택의 크기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

무엇보다도 외관이 멀쩡했다.

'북부 최대도시, 프로스트조차 함락된 현시점에서.'

날이 갈수록 예리해지고 광범위해져 가는 [천적관계].

악마 사냥꾼의 감각이 느끼고 있었다.

시무아르드의 저택 내부엔 악마가 존재한다고.

정체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퀘스트의 목표에 명시되어 있듯 그 악마는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일 확률이 높겠지. 나는 벨리에를 통해 들었던 시무아르드 부인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대모, 율라 시무아르드. 사실상 시무아르드의 가주나 다름없으셨죠."

단명하는 시무아르드 일가를 대신해 가주 역할을 맡아온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 그녀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던 벨리에는 관자놀이를 짚었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그분에 관해선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봤던 마르셀로의 모습은 기억 속에 선명한데. 유독 시무아르드 부인의 잔상만 도려낸 것처럼...."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마탑의 마법사들은 머리가 좋다.

견습 마법사만 하더라도 가문의 자랑이요, 재능의 총체요, 낯뜨거운 소리를 들었던 이들이 대다수였으니까.

벨리에는 그런 견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임 마법사다. 그녀가 말하는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는 건. 정말, 방금 본 것처럼 선명하다는 뜻이다.

'확실히 냄새가 났지.'

그래서.

거기서 반쯤 짐작했다.

그거 악마의 상태이상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 순간, 저택 앞에서 확신이 됐다.

시무아르드가를.

시한부의 저주로 집어삼킨 악마는.

백작 부인의 탈을 쓰고 있다.

새삼 느끼는 건데 말이야.

악마들은 참 겁도 없다니까?

마도 가문을 건드리다니.

하긴 반신(半神), 원로 마법사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악마도 있었구나.

새삼스럽게 악마답다는 생각이 든다.

저벅저벅─

문득, 어둠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턱시도를 차려입은 사내.

마력 램프를 손에 든 그가 나를 향해 말을 건네왔다.

"손님은 간만이군요. 어떤 용건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끼긱─

문을 개방하고 정중하게 나를 맞이했다.

"저는 시무아르드 가문의 집사장, 세오 하티프입니다. 저희 시무아르드가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쉬고 가시겠습니까?"

그래,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앞세우는 것도 악마답고 말이야. 그나저나 백작가의 집사답게 흠잡을 수 없이 예의가 바르다. 차마 거절할 수 없으리만큼.

"고맙네."

나는 집사장, 세오를 따라 시무아르드가에 진입했다.

누군가는 미친 거 아니냐고 묻겠지.

내가 봐도 미친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무거운 긍지.

마음 같아서는 악마가 살아 숨 쉬는 저택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었거늘. 마르셀로의 본가, 시무아르드 가문이었다. 저주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마르셀로를 향한 배려.

"그대들에겐 죄가 없으니."

그와 동시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시무아르드가를 섬기는 가신들에 대한 배려도 포함이다.

게다가.

"죄송합니다만,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엔 악마의 눈동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의 '안배' 또한 아까부터 구름 속에서 대기 중이었거든.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명령 대기 중]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게 시무아르드 저택.

악마의 아가리로 향했다.

◈ 140화. 아르카나 (2)

시간은 촉박했지만, 그래도 준비는 철저하게 끝마쳤다.

긍지에 짓눌려 아르카나 대륙에서 객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중 하나가 드워프들과 합을 맞추는 것이었다.

-"크신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시기를 조율한 건 역시나 뻔뻔....

아니, 믿음직한 하이엘이었다.

누굴 닮아서 일 처리는 확실하니까.

절차에 어긋남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런 메시지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멸망을 향해가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다.]

진입 알림 아래.

연달아 떠올랐던 메시지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일단, 첫 두 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퀘스트 관련 메시지다.

클래스 퀘스트를 포함.

현재 수행 중인 퀘스트는 여러 개였지만 보상이 지급될 퀘스트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백만의 공적치를 쌓았던 그 전쟁 퀘스트가 분명하다.

어떠냐, 정답 맞지?

[해당 세력과의 '맹약'이 유효합니다.]

[해당 세력과의 관계도가 이미 최대치입니다.]

[해당 세력에서의 영향력이 이미 최대치입니다.]

과연, 정답이다.

우쭐댈 새도 없이 메시지를 살폈다.

해당 세력은 당연하게도 드워프.

맹약은 악크샨과 드워프 사이의 맹약일 터.

여기까진 짐작했던 메시지였다.

그래서 그 대신 어떤 보상을 주는 걸까.

남 몰래 김칫국까지 마셨었단 말이다.

그런데.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이건 잔뜩 부푼 기대를 능가하는 보상이었다.

몇 차례, 지휘권을 획득해 본 나였다.

그러니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드워프의 결전병기를 지휘할 수 있다고?'

나, 이호열에게도 양심이 있다.

아무리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라고 한들.

알지도 못했던 악크샨의 맹약을 우려먹을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다, 내가.

기껏해야 드워프제 무기나 방어구 하나 정도.

보상으로 기대했던 나였거늘.

이런 보상을 쥐여주면 나의 양심이 흔들린단 말이다...!

드워프들이 누구던가.

마탑과 방향성은 다르지만 마탑에 버금갈 정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이들. 그 기술력의 집약체인 '아이언 캐슬'. 하늘을 나는 배가, 내 뒷배가 되어준다는 뜻이다.

'진짜 다 덤벼.'

악마고, 몬스터고.

[천적관계]가 발동되고 말고를 떠나서.

악천후만 아니라면 아이언 캐슬 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지 않을까? 왜, 지금만 하더라도 일당백 이상.

땅부터 하늘까지. 악마로 가득한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유유히 비행 중인 아이언 캐슬 호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 피곤한 성격.

빌어먹을 청렴결백을.

'긍지에 어긋나게 활용할 순 없겠지.'

이 올곧다 못해서 뻣뻣한 성격이.

'맹약'과 관련되지 않은 일에 아이언 캐슬 호를 써먹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괜찮다.

'결국, 목적은 악마 사냥이니까.'

이 또한 성전(聖戰)의 연장선과도 같았으니.

"자, 도착했습니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는 도중.

드디어 저택의 입구에 다다랐다.

역시나 스케일이 크군.

제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이런 대저택이라니.

마르셀로, 굉장히 잘사는 집 도련님이었구나?

쥐뿔도 없는 우리 그랑펠이랑은 다르게 말이야.

"정원 관리가 철저하군."

"하하. 저희의 노고를 알아봐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시무아르드가를 위해서. 저, 세오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 이호열.

그랑펠의 긍지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대청소를 했다.

주부 습진에 걸리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무렵.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집안일을 제대로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원룸에 집무실 정리정돈만 해도 그렇게 귀찮았는데.

이런 저택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의 수고를.

내가 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대들의 긍지를 내가 알았다."

"이런, 과찬이십니다."

내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세오의 시선이 호숫가를 향했다.

"나니아 호수의 풍경 또한 정원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호수의 풍경이 잘 보이는 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이라.

그러니까 하늘에서 끔뻑거리는 악마의 동공이 비치는, 저 호수 말하는 거지?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흠칫했겠지. 나랑 같은 걸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상태이상, 환각.'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 원흉이 악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세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그렇군."

그런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적당한 대답이었다.

그와 동시에.

세오가 저택의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시무아르드가를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끼기기긱─!

문이 열리자 악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악마 사냥꾼이 아니더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겠는데?

일단, 저택 내부가 지나치게 어둡잖아.

불빛 하나를 찾기가 힘들다.

활동에 무리가 있을 정도로.

"수고가 많군요. 엠마 양."

"아, 집사장님. 곁에 계신 분은...?"

"손님이십니다. 식사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주세요."

그러나 세오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눈치.

역시나 상태이상이라면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악마의 뱃속.

직접 들어와서 그 풍경을 확인하니 살짝 우려가 된다.

'최소 상급 악마.'

마도 가문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녀석이었다.

벨리에는 물론, 마르셀로 또한 상태이상에 빠진 상태란 걸 감안하면.... 상급이 뭐냐, 마왕급은 되겠는데? 진짜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짓을 했구나, 나는.

그러나 깨달았다고 한들.

나의 당당한 태도에 변함은 없었으니.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환대에 감사하네."

"아닙니다. 곧 가주님께서 내려오실 시간이니...."

세오가 안내하듯 손짓했다.

"괜찮으시다면 먼저 착석하시겠습니까?"

그의 권유에 따라서.

나는 식탁에 착석했다.

가지런히 놓여가는 식기들.

어둠 속에서도 격식에 어긋남 없이 움직이는 사용인들. 악마의 아가리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이런 상황에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어째서냐.

나는 이 순간 심히 흡족하다.

아니, 흡족한 것을 넘어서 마음이 편안할 정도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

그래, 그놈의 설정 때문이겠지!

그 탓에 현대인이라면 낯설어야 마땅할 중세풍 저택을.

무슨 우리 집 안방처럼 편안하다고 느끼고 있는 거야.

식기를 내려놓을 때도 달그락,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작은 꼬투리 하나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내 주둥이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시무아르드가의 사용인들에겐 정말로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는 말이겠지.

물론.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그쪽은 제외고.

위층에서 느껴지는 기척.

시무아르드 가문을 집어삼킨.

시한부 저주의 원흉.

악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께 저택 소개는 해주셨나요, 세오?"

"자세한 사항은 식사가 끝난 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대가 편하실 대로 하세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군.

하긴 세오가 마중을 나온 것부터 내 접근을 알아차렸단 소리겠지.

허나, 내가 악마 사냥꾼이라곤 상상도 못 할 거다.

[구마의식]을 발동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이내, 식탁에 가까워진 그림자.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

악마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왔다.

"이런, 소개가 늦었군요. 율라 시무아르드입니다. 본의 아니게 시무아르드 가문의 가주 역할을 맡고 있답니다. 그런데.... 낯선 의복을 걸치고 계시는군요?"

낯선 의복이라 하면.

나에게선 빼놓을 수 없는 정장을 말하는 거다.

그래, 현실에서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게 내 차림이다.

아르카나 대륙에서야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나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유?

간단하다.

나는 사냥감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

침묵─

갑작스런 정적을 사용인들도 알아차린 것인가.

잔을 채우는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용인들의 노고엔 또 감사해야 하니까.

"고맙네."

나는 침묵이 무색하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 아닙니다."

부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는 자신에겐 감사하다니.

사용인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한번 터진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척─

나는 잔을 들어 올린 뒤 허공에 휘저었다.

찰랑찰랑.

오묘한 붉은빛을 내뿜는 포도주.

내 평생 와인이라곤 몇 번 마셔본 적도 없었거늘.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묵직하면서 끈적임 없는 향이군."

포도 주스 냄새와 무엇이 다른지 나는 모른다.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숙성 기간."

당연하게도 이게 몇 년 산 와인인지도 모른다.

"만찬에 더없이 적합한 포도주로군."

...소믈리에야, 뭐야.

내가 뱉은 말이지만 의심이 될 수밖에 없다. 고작, 하나에 몇백 원짜리 녹차 티백을 마시면서도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이는 나였으니까.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마시지 않아도 훌륭하리라는 것을 알겠네."

"...가, 감사합니다."

사용인은 물론, 이번엔 집사장 세오까지 당황한 기색이다.

정작 중요한 말은 무시한 채 재잘재잘 떠들어 댄 나였으니까.

그런 내게 다시금 율라 시무아르드.

아니, 악마의 질문이 날아왔다.

"...포도주에 대한 지식에 상당히 해박하시군요. 혹시나 남부에서 오시는 길이신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말했잖아?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는 그저 마르셀로의 시무아르드 가문을 섬기는 사용인들을 위해서. '절차'를 지킬 뿐이라고. 그러니까 열등한 족속 주제에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금 흐르는 냉랭한 침묵─

나는 내 앞에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훌륭한 원물에 걸맞은 조리 방식이로군."

그나저나 음주는 하지 않아도 식사는 할 필요가 있다.

'왜,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아니지, 같은 말을 해도 순화해서 하자.

격한 활동 전후.

단백질 섭취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법이니까.

.

.

.

시무아르드 가문.

대모(大母), 율라 시무아르드.

그녀가 언제부터 시무아르드 가문의 어머니를 자처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는 없다.

심지어는 가문의 구성원들조차도.

그러나 율라를 의심하는 자 또한 없었다.

시무아르드 가문의 대를 내려오며 새겨진 상태이상.

'악마의 저주'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창 너머로, 율라는 호수에 비친 밤하늘을 바라봤다.

"황홀한 경치야."

마계에서만 보던 풍경이 아르카나 대륙에도 펼쳐질 줄이야.

과연, 수십 년을 하찮은 인간의 몸에서 썩은 보람이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

율라에게 섣불리 나설 생각 따윈 없었다.

아둔한 마왕들이나 가엾은 거악, 탐욕처럼 지옥에 처박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리석은 그들과 달리 자신은 나서지 않아도 힘을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너도 머지않았구나, 마르셀로."

인간은 어리석다.

그것이 마법사라 불리는, 인간 중에서는 그나마 영특한 이들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수명을 담보로 재능을 개화시켜 주는 거래라니.

"신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하겠어?"

속임수였다.

거래가 진실이며 정말로 효과가 있다고 믿게 하는 상태이상 덕분이었다. 알량한 자신감과 수명을 맞바꾸다니. 율라는 웃음을 흘렸다.

"나약한 인간. 뭐, 덕분에 나는 이렇게 성장했지만."

율라는 알고 있었다.

제물의 양만큼 중요한 게 질이라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시무아르드 가문의 핏줄은 최상급의 제물이었다.

그 제물 중에서도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녀석은 황홀할 정도의 먹잇감.

'그의 수명을 거두어들인다면 나는...!'

비로소.

마왕의 서열을 뒤바꿀 힘을 거머쥐게 되겠지.

인간의 살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짓 또한 관둬도 될 터.

그간의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가까운 시간만 남았을 뿐이었거늘.

"운 좋게도 유희거리가 굴러들어 오는구나."

가주를 연기하면서 손님을 맞이하는 이유?

말한 것처럼 단순한 유희였다.

공포에 질린 인간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하찮은 수족을 부렸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이었다.

'...무엇이냐?'

율라는 위화감에 휩싸인 상태였다.

은발, 사내의 반응이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자고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이미 공포, 그게 아니더라도.

동요하는 기색 정도는 보여야 했다.

어둠에 파묻힌 저택. 그런 저택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수족들. 거기에서 오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게 인간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저택에서 저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하다니?

'낯선 차림새야.'

율라는 머리를 굴렸다.

현재 아르카나 대륙은 마계 지각 변동으로 뒤틀린 상태.

지각 변동의 여파로 먼 지역에서 떠밀려 온 사내일까?

그래서 상황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건가.

사내의 심정을 떠보기 위해서 율라는 말을 걸었다.

"...낯선 의복을 걸치고 계시는군요?"

...허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었거늘.

그런 것도 아니었다.

"!"

무시였다.

"묵직하면서 끈적임 없는 향."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숙성 기간."

"만찬에 더없이 적합한 포도주로군."

놈은 건방지도록 꼿꼿한 자세로 잔을 흔들며 지껄이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

하찮은 종놈들과는 잘만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말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말조차 섞지 않겠다는 것처럼.

'감히 인간 따위가. 나를.'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율라는 억눌렀다.

'오히려 잘됐어.'

저런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저 오만한 얼굴이 어떻게 구겨지고 무너질지를 상상하면.

"내 자리는 치워도 좋아요. 엠마."

율라는 식기를 내려두고 사내를 바라봤다.

이번엔 노골적으로 악기를 발산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버틸 수 없는 수준으로.

그러나 사내는 기어코 접시를 말끔히 비워냈다.

"세오, 주방장에게 훌륭한 식사였다고 전해줄 수 있겠나?"

심지어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대체?'

위화감은 점점 커져갔다.

율라 또한 언제까지고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것일까?

"저희는 잠시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하찮은 수족들이 모두 물러갔다.

더 이상 연기는 필요 없겠지.

율라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연기는 끝났다."

오히려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은발의 사내.

뿜어댔던 악기가 무색하게도.

"...!"

사내의 눈빛에선 일말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합한 장소로 옮기도록 하지, 열등한 족속이여."

...열등한 족속이라고?

말의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율라의 시야가 바뀌었다.

"!!!"

마도 가문에 있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마법, 포탈이었다.

그러니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느 틈에 포탈을 발현한 거지?

율라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익숙한 장소, 저택 인근의 나니아 호수 위였다.

그런데....

그 황홀했던 경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밤하늘의 마안(魔眼)이 비추고 있어야 할 수면.

그러나 그 위에 떠오른 것은 오직 은발의 사내뿐.

"...마안이 사라졌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설령 마안이 눈을 감았다고 한들, 호수에 비치는 게 사내 하나뿐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환상을 보고 있다는 말인가...?

"설마?"

그와 동시에 율라는 알아차렸다.

그것은 직감.

천적의 앞에 놓인, 잊고 있던 사냥감으로의 본능.

"...악마 사냥꾼!!"

그러나 돌아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질문이었다.

"할 말은 끝났는가? 추악한 악마여."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시간부로 네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시무아르드가를 향한 사죄밖에 없을 테니까."

"...!!"

이내, 사내에게서 솟구치는 마력.

율라는 그제야 제대로 알아차렸다.

...놈이다!

저 녀석이 바로.

하나의 거악과 넷의 마왕을 지옥으로 보낸 악크샨의 생존자다.

.

.

.

[첫 세계수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141화. 화려하게 (1)

[퀘스트 : 시무아르드 가문의 의뢰]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시한부의 저주.

그 저주의 근원을 파헤치길 원한다.

─시무아르드 저택을 방문하라. (성공)

─시무아르드 백작 부인과 마주하라. (성공)

─율라 시무아르드에 빙의한 악마를 처치하고 저주의 계약을 파기하라. (진행 중)

갱신된 퀘스트 목표.

이 순간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한 나다.

펄럭거리는 [백색의 겉날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까지.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80]

[효과 : 속성 마법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증가하는 대신 그 파괴력이 30퍼센트 상승.]

효과는 양날의 검.

가뜩이나 마력 소모량이 극심한 속성 마법이다. 겉날개에 저장된 일백 개의 속성 마법을 쏟아냈다간 마력 탈진에 시달릴 게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악마에게 뒤덮인 아르카나 대륙.

생지옥 속에서 더욱더 드높아지는 그랑펠의 긍지.

『어쩌면 악마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악마 사냥꾼이란 그랑펠의 클래스가 아니라 그랑펠이란 인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내게 있어서 아르카나 대륙은 오히려 홈그라운드나 다름없었으니까. 상급 악마가 됐든, 마왕이 됐든. 목숨을 걸고 한 녀석쯤 쓰러트리는 건 무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첫 세계수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첫 세계수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생명력과 마력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내가 마력을 발산하기 무섭게 세계수의 축복이 발동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만반의 준비가 아니었다. 그저 예기치 못한 행운에 불과할 뿐.

[행운 : 7]

과연, 귀중한 1포인트를 행운에 투자한 보람이 있구나...! 그나저나 세계수, 이름값처럼 효과가 장난이 아니다. 당장만 하더라도 적잖은 마력을 소모하고 있는데.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아.'

비약초 버프 효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웬만한 마도구, 아이템도 이정도의 효과는 낼 수 없겠지.

그런 세계수의 축복은 내 자신감의 근거가 됐다.

한 발자국─

호수.

나는 마법을 발현, 수면 위를 걸었다.

마력에 쪼들릴 때엔 상상도 못 할 짓이다.

그러나 [천적관계]도 모자라 세계수 버프가 더해진 지금.

이 정도 수준의 마법 발현은 마력량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흔치 않은 기회가 온 만큼 조금 걸어보자.

그래, 물 위를 걷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만.

하지만 악마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면.

녀석이 한 발자국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구마의식은 이미 발동된 상황.

의식 속.

나와 녀석 사이의 정신력 싸움은 아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겠지.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가 악마 앞에서 꺾인다고?

나의 흑역사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보고만 있을 것인가? 마계여!!"

문득, 녀석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마왕이여, 거악이여! 그가, 녀석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주 그냥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구나.

보다시피 놀란 기색이 역력하군.

하긴 놀랠만도 하다.

'내 존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당연해.'

악마 사냥꾼에게 사냥당한 악마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으니까.

거악과 마왕들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걸.

악마들도 나름대로 눈치를 채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을걸.'

악마의 상식이 어떨진 모르겠다만.

상식적으로 누가 생각이나 하겠냐고.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 악마로 가득한 아르카나 대륙에 제 발로, 그것도 단신으로 쳐들어오리라고 말이야.

당사자인 나조차도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거든.

고오오─

그러나 예정에 있었든, 없었든.

다른 것도 아니고 마르셀로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랑펠의 긍지는 물론.

내가 수석의 업무에 파묻혀 과로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밖에 없었겠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냉랭한 선언.

그와 동시에.

쩌저저적─!

순식간에 빙결되어 가는 호수.

나는 녀석을, 사냥감을 향해 말했다.

"내가 네게 허락한 말은 시무아르드가를 향한 사죄밖에 없다."

[『기이』], 절대영도 발현.

"...!!"

녀석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

.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걷잡을 수 없는 한기가 엄습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큿!"

율라는 빠르게 판단했다.

푸확─!

한기가 전신을 타고 오를 수 없도록.

살갗 아래 감춰뒀던 손톱을 꺼내 자신의 발목을 잘라버렸다.

육체는 재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발목을 자르게 될 줄이야.

율라가 가쁘게 심호흡했다.

'...이게 구마의식이란 말인가?'

율라는 성전(聖戰)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우둔한 마왕, 악마들과 같은 취급을 받기는 싫었으니까.

그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악크샨의 최후를 감상했다.

그보다 좋은 볼거리가 없지 않겠는가?

인간 주제에.

악마를 업신여기던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

녀석들이 아군에게 배반을 당하고, 되려 악마들에게 사냥당하는 꼴이라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광경일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성전의 전개는 율라의 예상과 달랐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아군에게 배신당하고, 악마, 마왕, 거악에게 포위를 당한 위기 속에서도. 악크샨은 끝까지 악마를 사냥했다.

압도적인 머릿수의 차이에도 불구. 자신들에게 승산 따윈 없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꺾이지 않았었다.

그 결과.

악크샨은 십여 마왕을 처치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거악, 칠죄종 탐욕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악마 사냥꾼 손에 죽었다간 존재 자체가 지워지게 됐으니까.

그래, 악마 사냥꾼.

그들은 거악조차 공포에 질려 자결하게 만들 정도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천적, 악크샨의 절멸.

다른 악마들과 마찬가지로 율라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더 나아가 성전에 참전하지 않았던 자신의 판단에 또 한 번 감탄했다.

하지만 그 판단이 부메랑이 되어서 되돌아올 줄이야.

'어째서. 어째서 다른 게 보이지 않는 것이냐?'

마왕의 공석을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서열전을 우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됐지만, 율라에겐 경험이 부족했다. 더 나아가 천적, 악마 사냥꾼과 마주한 경험은 전무했다.

그런 율라의 시야?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호열.

정확하게는 호열'들'뿐이었다.

호수 위라는 특수한 공간.

똑바로 선 호열.

거꾸로 선 호열.

율리의 정신을 더욱 거세게 흔들었다.

율라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동안의 고생을 떠올렸다.

'참고 참고 또 참아왔다.'

이제 와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순 없단 말이다.

율라는 다시금 소리쳤다.

"보아라. 악마들이여. 이곳에 악마 사냥꾼이 있다. 방치한다면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존재가 이곳에 있단 말이다!!"

모든 것은 환각에 불과하다.

마안(魔眼)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 녀석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율라는 머리를 굴린 끝에 생각해 냈다.

'...그래, 시간을 끌자.'

아무리 천적이라고 해도 녀석은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

자신에겐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율라가 입을 열었다.

"우습구나, 악마 사냥꾼이여. 이제 와서 성전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악크샨, 너의 동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갈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최후의 악마 사냥꾼.

저 녀석과 악크샨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 율라는 말을 덧붙였다.

"네놈 정도 되는 악마 사냥꾼이 있었더라면 성전의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수십의 마왕을 척살하고, 거악을 자결로 몰고 갔지만 악크샨은 결국 패배했다. 전멸했다!"

나약한 인간이라면.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정신력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

'그 틈을 노린다.'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도.

돌아온 것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

"몇 번을 좋게 타일러도 조금도 발전이 없다니."

"...뭣?"

"과연, 짐승과 비교하기에도 짐승에게 미안해지는구나."

...대체 어떻게?

녀석에게선 일말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고를 덜어줬으니 어울려 주겠다."

저 오만한 시선은 무엇이란 말이냐?

오히려 자신을 내리깔아 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수고를 덜어줬다니?

그러니 나와 어울려 주겠다니.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사내는 말을 이었다.

"악크샨을 동정하는 것은 그들의 긍지에 대한 모독이다."

"동정하는 것이 모독이라고? 웃기지 마라!"

"또한 그들의 희생을 가엾이, 또 가벼이 여기는 짓이다."

"...!"

흔들림 없는 눈빛.

진심이다.

녀석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천적.

어째서 악마 사냥꾼, 그들이 악마의 천적이라 불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놈들의 사고방식은 나약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저 사고방식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게 분명하다.

천적이 말을 끝마쳤다.

"추악함에 익사할 시간이다."

.

.

.

...그러니까 어떤 심정으로 성전(聖戰)을 들먹인 건지는 짐작하겠는데 말이지. 그게 나한테 효과가 있겠냐? 현생을 사느라, 10년이 훌쩍 넘는 아르카나 공백기를 가진 나한테 말이야.

그래도 성전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고마운데?

덕분에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으니까.

왜, 거악 칠죄종 탐욕에게서 느꼈던 위화감.

거악이나 되면서 구마의식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었던 거.

칠죄종, 탐욕이 자결한 거라면 말이 된다.

어딘가 모르게 어리숙한 악마의 냄새가 났던 것도.

마왕, 데카라비아와 레벨이 비슷하던 것도.

악마는 성장형 몬스터.

거악도 예외는 아닐 테니까.

탐욕이 자결했다가 부활한 것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그런 의미에선 안도와 경악,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군.

새로 태어나자마자 650레벨이라니.

그렇다면 원래 탐욕은 대체 몇 레벨이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런 거악을 어떻게 자결하게 만든 걸까, 악크샨은.

'...동정할 게 아니라 칭찬해도 부족하잖아.'

마탑과 여신교단을 포함, 아직 밝히지 못한 세력들이 악크샨을 배반했다. 악크샨은 그런 불합리한 성전에서 탐욕을 자결하게 만들 정도로 몰아붙였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악크샨을 동정하는 것은 그들의 긍지에 대한 모독이다."

주고받음도 끝났겠다, 나는 경악하는 녀석을 향해 완드를 겨눴다. 구마의식에 허우적거리는 녀석에게 일백의 마법을 버텨낼 재간은 없겠지. 장담할 수 있었다.

녀석과 달리 나한테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끝이다. 하찮은 악마여."

무거운 긍지에 가라앉아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면서.

적정 레벨의 몇 배나 되는 거악, 마왕과 싸워온 나란 말이다.

[中]급에 다다른 [심미]의 효과.

속성 마법의 기폭제로 활용하기 위해 흩뿌려 둔 『라이트』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에서 자취를 감춘 아르카나의 별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화려하게.

별 하나하나가 겉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에 감응한다. 순수한 마력 구체가 속성 마법의 기폭제가 되어 저장된 마법의 파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말 그대로 백 가지의 색(百色).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속성 마법이 호수 위에 펼쳐졌다.

약간 불꽃놀이 같기도 하고.

호수가 빛을 반사하는 탓일까.

최소 배는 더 장관이다, 이거.

"비로소 아르카나의 밤하늘 같군."

오죽했으면 그랑펠의 심미안조차 흡족하게 여기고 있을까.

그러나 장담할 수 있었다.

구마의식에 빠진 녀석에겐 이보다 더한 공포도 없겠지.

그 추측을 뒷받침하듯 녀석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순 없단 말이다!!"

마지막 발광인가.

녀석의 몸에서 악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허공에서 일렁이던 악기가 문양의 형태로 변해갔다.

"마르셀로.... 녀석의 수명만 거머쥔다면 나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다.

나는 냉랭하게 선언했다.

"기대하지 않았거늘. 정도를 지나치는구나."

"...!"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다물어라."

흑마법, 『흑관』.

정신이 무너진 녀석이 중급 흑마법에 저항할 수 없을 터.

증명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왕, 율라에게 '침묵'이 발생합니다.]

그런 녀석에게 별이 쏟아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메시지도 잠깐.

나는 시선을 느꼈다.

구마의식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마왕의 죽음을 알아차린 것인가?

밤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악마의 눈들이 일순간, 나를 노려다 봤다.

그와 동시에 [천적관계]가 반응했다.

수백.

아니, 수천.

수만.

근방의 있는 모든 악마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없었다면 말이야.

그러나 이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렇게 고래고래 떠들어 준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고.

나는 시선을 옮겼다.

밤하늘의 마안(魔眼)에서 나의 뒷'배'로.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명령 대기 중]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공격 대기 중]

진짜 불꽃놀이를 시작할 시간이다.

◈ 142화. 화려하게 (2)

대모(大母).

언제부터 시무아르드가의 어머니를 사칭하고 있던 걸까.

빙의에서 해방된 그녀의 육체에서 빠르게 생기가 사라졌다.

구마의식이 발동된 상태.

빙의된 인간의 육체는 피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시신으로. 백골으로. 가루로.

악마와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인간의 육체가 버틸 수 없는 기간 동안.'

녀석은 시무아르드가를 기만한 것이었다.

슬슬 납득이 되는군.

마르셀로, 벨리에처럼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이들이 어째서 악마의 상태이상에 걸려있던 것인지 말이야.

'대대로 내려져 오는 상태이상이었던 거야.'

말 그대로 '저주'였다.

이내, 완전히 사라진 율라 시무아르드의 흔적.

나는 떠오르던 메시지의 끝을 붙잡았다.

─율라 시무아르드에 빙의한 악마를 처치하고 저주의 계약을 파기하라. (성공)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

반가우면서도 낯선 메시지였다.

클래스 퀘스트를 포함.

악마 사냥꾼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보상다운 보상을 받았던 게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꾸준하게 상승하는 스탯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보상이긴 했다만.

'거악을 잡아도, 마왕을 잡아도 말이야.'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던 메시지였으니까.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악크샨이 존재하던 시절의 의뢰가 아니던가?

역시나, 기대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악크샨과의 관계도가 상승합니다.]

[악크샨에서 영향력이 상승합니다.]

뭔데.

이거.

일단, 실망은 크지 않았다.

...그나저나 진짜 뭔 소리냐, 이거?

[악크샨의 절멸].

클래스 퀘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린 악크샨이었다.

그런데 악크샨과 관계도, 영향력이 상승했다...?

모순적인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긍지는 이어지는 법이다."

나는 한마디로, 복잡한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래, 현시점에서 악크샨에 대한 정보를 유추하긴 무리겠지.

그럴 상황도 아니고 말이야.

어쨌거나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계약 파기. 시한부의 저주도 사라졌을 거야.'

균열도 아니고 아르카나 대륙.

현실에 있는 마탑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순 없었지만, 믿음을 가지자. 그쪽까지 머리를 굴리기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아니, 급한 걸 넘어서 절망적이지 않나?'

하늘에 걸린 악마의 눈동자.

마왕, 율라의 말에 따르면 악마들은 저걸 마안(魔眼)이라고 칭하는 모양이었다. 과연, 보는 것만으로도 용도를 알 법하다.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아르카나 대륙의 동태를 파악하는 거겠지.

지금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는 것처럼.

그러나 모든 것엔 절차가 존재한다.

나는 긍지에 따라 순서를 지켰다.

"이제 그대는 편히 잠들어도 좋다."

무엇 하나 남지 않은 허공을 향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율라 시무아르드, 아니 이름 모를 시무아르드가의 아득한 조상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랑펠의 긍지가 위로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다는 거겠지. 악마에게 빙의 당했다고 한들, 자신의 육체로 자신의 후손을 해치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나의 뻣뻣한 인사가 심심한 위로라도 됐다는 것일까.

스스스─

찰나지만, 나니아 호수에 잔물결이 일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을 바라봤다.

"내 시선을 치켜들게 한 것까지. 처분에 반영하겠다."

항상.

언제나처럼 오만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지껄인 말과는 별개로 진짜 암울하다.

'마왕 압살의 효과가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인데.'

고작 마왕 셋을 짓밟았다고.

기세가 누그러진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르카나 대륙의 야경은 마경(魔景), 그 자체.

번뜩─

숙면에 방해라도 됐다는 것인가?

기껏해야 수십 개에 불과하던 마안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십에서 수백으로.

아니, 이제는 숫자를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득하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상승한 레벨.

덕분에 날카로워진 악마 사냥꾼의 감각.

넓은 감지 반경으로 몰려드는 악마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대체 목청이 얼마나 컸던 거냐.

새삼스럽게 원망스러울 정도의 물량이다.

밤하늘도 모자라서 땅끝까지 목소리가 닿은 건가, 진심.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아르카나 대륙의 모든 악마가 나를 주시하는 감각이다.

그걸 넘어서 최후의 악마 사냥꾼.

최후의 천적인 나를 죽이기 위해서.

몰려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짧게 소감을 뱉었다.

"절체절명."

나는 일단,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율라 시무아르드, 녀석과의 전투에서 소모한 마력은 대략 30퍼센트.

마왕, 플라우로스와 악룡을 쓰러트리기 전이었다면.

지금쯤 마력 탈진에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몰랐겠지.

'1포인트 차이는 갈수록 커진다.'

거기에다 세계수의 축복 버프까지 활성화된 상태니까.

그래도 정말 성장했구나, 호열아.

그러나 자화자찬할 여유는 없다.

남은 마력은 7할.

'떡칠한 마력 재생력 아이템을 고려해도....'

내게 몰려드는 악마에게 맞설 정도의 마력은 아니었다. 아니, 마르셀로. 반신, 세니오스나 카림제바가 와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어림잡아 수백만."

이것만큼은 허세가 아니다.

당장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악마들만 하더라도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진입을 결심했을 때부터 말이야.

"허나, 큰 위기는 곧 큰 기회인 법이다."

아르카나 대륙.

모든 악(惡)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천적, 악크샨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인 나를.

그러나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하찮은 하급 악마, 임프의 앞에서도.

악마들의 왕, 마왕의 앞에서도.

거악, 그리고 하늘에 떠오른 마안의 아래서도.

나는 언제나처럼 바로 섰다.

그래, 이 꼿꼿한 자세야말로 항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발버둥, 만반의 준비대로 움직였다.

"오거라. 오늘만큼은 어울려 주마."

만반의 준비라고 해도 별거 있나.

그냥 죽을 때까지 악마를 사냥하는 거지.

그래, 그게 그랑펠의 긍지는 물론.

나, 이호열의 생각과도 일치하는 결론이었다. 그야 경험치와 레벨이 그랑펠에겐 숫자에 불과할지 몰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수치들이었으니까...!

'잊지 말자, 사망 페널티.'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아르카나의 사망 페널티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했다. [최후의 모험가] 칭호 효과에서 알 수 있듯, 24시간 동안 아르카나에 접속할 수 없는 건 물론.

추가로 하락하는 경험치도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고생을 했는데 본전은 남겨야 할 거 아니야.'

사망 페널티를 만회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악마를 사냥하고 사망하겠노라.

그것이 나의 본심이었다.

속내는 몰라도 간만에 결론이 맞아서 다행이군.

덕분일까.

행동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챙─

나는 허리춤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생사의 전장에서 더욱더 선명해지는 검기(劍氣).

말했다시피 어차피 죽어야만 하는 전장이다.

경험치는 물론, 검기부터 본전을 남길 수 있는 건 전부 꺼내 들어야 한다.

"그대 또한 비로소 이빨을 세울 적을 만났군."

...맙소사.

진짜, 누구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젠 혼잣말도 아니고 아이템에게 말을 거는 경지라니. 그래도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마력으로 허공에 이빨,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를 띄워 올렸다.

그리고 전장을 응시했다.

쿠궁─

쿠구궁─

엄청난 진동.

그동안 현실에서, 균열에서 봐온 악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거대하다.

마왕이 아니면서도 그에 버금가는 악기(惡氣)를 내뿜는 짐승형 악마족 몬스터들. 직면하니까 납득이 된다.

어째서 아르카나 대륙이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못하고 무너졌는지가 말이야.

"걸음에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군."

교양을 떠나서 말도 통하지 않게 생겼다, 저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대군을 향해 나아갔다.

"더 이상의 소란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호수 인근, 시무아르드 저택.

저택 안에는 시무아르드의 사용인들이 있다.

기나긴 상태이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

상황을 파악하기에도 바쁘겠지.

그들을 전투에 휘말리게 할 순 없다.

단거리 텔레포트 연속 발현.

호수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과연, 목적은 오로지 나 하나라는 것인가.

데구르르─

마안들의 동공이 굴러가더니 금세 나를 포착했다.

보자, 호수 위가 아니니까.

이제부터는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마력도 없겠다....

정말 전면전을 치러야 할 순간이 왔다.

[현재 저장된 속성 마법의 수 : 31개]

백색의 겉날개, 저장된 속성 마법의 개수는 대략 서른 개.

전부 발현해 봤자 몇 마리 쓰러트리지도 못하겠는데.

그렇다면 [『기이』]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

[심미 : 中]

복사, 붙여 넣기처럼.

복잡한 간섭 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는 효과.

심미의 마력 효율엔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 그래, 나는 그런 심미를 더한 [『기이』]를 내가 가진 최강의 무기에 발현했다.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등급 : 유니크]

[제한 : Lv.800]

[효과 : 없음]

[설명 : 용이 되지 못한 지룡의 송곳니로 만든 검. 지룡의 태생적 한계로 특별한 효과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파괴력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지지지지직─

물고 물리는 속성 마법과 다르게.

파괴력 하나로 승부하는 순수마력학.

나는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의 마법을 떠올려 발현했다.

순수한 마력이 허공을 부유하던 지룡의 송곳니를 휘감았다.

그 순간, [심미]의 효과 발동.

[『기이』]의 발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마력의 용(龍)이었다.

마력의 잔량은 70퍼센트에 불과.

물론, 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도 '깨워선 안 될 존재'만큼 거대한 크기로 발현하는 건 무리였겠지만.

저기 보이는 짐승형 악마와 견줄 정도의 크기는 됐다.

나는 이빨을 드러낸 용의 목줄을 놓았다.

"마음껏 날뛰거라."

파지지직─!

파괴력 더하기 파괴력.

[『기이』]까지 더해진 지금, 그 상승효과는 단순한 더하기 이상이었다.

뻗어 나간 마력의 용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악마는 남아있지 않았다.

급이 떨어지는 악마는 순수마력의 파괴력에, 버텨낸 녀석들에겐 지룡의 송곳니가 파고들었다.

쉴 새 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물론, 태평하게 감탄할 여유는 없다.

이로써 마력은 탈진 직전까지 사용한 상황.

당분간, 더 이상의 마법 발현은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나는 누구보다 너희가 두려워한 천적.

악마 사냥꾼이니까.

오른손에는 검을 쥐고, 왼손은 인벤토리를 향해 뻗었다.

그런 내가 꺼내 든 건 다름 아닌 석궁.

[전설적인 암살자의 석궁]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00]

[효과 : 공격 시,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 발동.]

[설명 : 전설적인 암살자가 애용하던 오래된 석궁. 사용자의 기운이 깃들어 격이 상승했다.]

경매장에서 구매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이정도 아이템이면 경매장에 등록되는 일도 없겠지.

레벨 제한도 그렇고, 등급도 그렇고.

원거리 클래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아이템일 테니까.

그랬다.

이건 그림자 용병단의 2석, 울프 사카린에게서 받은 석궁이었다. 그와의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왕 압살 직후,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가야겠지.

-"함께 이런 위업을 달성해서 영광입니다. 경."

어째 키치보다 더욱 단장 같은 면이 있었던 그였다.

만반의 준비 과정에서 울프와는 또 한 번 대화를 나눴었다.

-"...물론, 사격이 제 전문이긴 하지만 그런 곳에 흥미가 있으셨습니까? 슬슬 다른 의미로 경이 두려워지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살 구멍을 하나 더 파두기 위해서 말이지.

태생적으로 단출한 악마 사냥꾼의 스킬창이었거늘.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선 몇 안 되는 스킬도 아쉬운 법이다.

"Skill"

은 마스터리 (91%)

사격 마스터리 (78%)

스킬 숙련도와 별개로.

울프는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모두 적중이라니...!"

-"이 정도면 제가 딱히 가르쳐 드릴 게 없는 듯싶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대단한 게 아니라 제가 미숙하던 시절 사용하던 석궁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팔기도 뭣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곤란하던 차에 좋은 주인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하르콘이나 마티스보다는 덜했지만 역시나 격한 반응이었었지. 멋진 거, 좋은 거라면 다 때려 박은 그 시절의 설정 덕을 또 한 번 본 것이었다.

철컥─

나는 울프의 석궁에 볼트를 장전했다.

당연하게도 촉이 은으로 된 은제 볼트였다.

과거, 은 화살 하나에 쩔쩔매던 내가 아니란 말이다.

청렴결백하다고 돈이 없다는 뜻은 또 아니니까.

오히려 돈을 대수롭지 않게 쓰는 것을 경계해야 할 정도로.

지갑 사정에 걱정은 없었으니까.

"다투지 말거라. 나눠주기에 부족함은 없을 테니."

볼트가 바닥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나는 전투 자세를 취했다.

"...!"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라이언 하트 기사의 자세.

달려들던 악마들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석궁을 연달아 발사했다.

푹─

한 손으로 재장전까지는 무리.

푹─

그러나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소량의 마력이 있다.

푹─

거창한 마법을 발현하긴 무리지만 장전 정도는 가능하다.

사격의 위력은 민첩 스탯에 비례한다.

[천적관계]로 전투력이 상승했다고 하더라도.

동레벨의 궁수 클래스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파괴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내겐 [은 마스터리]가 있다.

[천적관계]과 더불어.

대악마전 최고의 효율을 지닌 스킬 말이야.

그 숙련도 또한 극한에 가까워지고 있단 말이다.

"끄아아아아악!!"

"죽이겠다, 죽여버리겠다!"

"인간 주제에!"

제아무리 상급 악마라고 하더라도 치명타, 비틀거리게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악마들 사이로 쇄도해서 검기를 발산했다.

스와아악─!

빌어먹을.

사방, 시야 모든 곳이 악마다.

내가 진짜 소드 마스터도 아니고.

모든 공격을 회피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옆구리.

뺨.

등.

허벅지.

육체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몬스터한테 맞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젠장, 남태민과 레오니 같은 근접 클래스 플레이어들이 존경스러워지는데. 그러나 속내와 마찬가지로 고통 또한 티를 낼 수 없다.

격통에도 구부러지지 않는 자세.

그랑펠의 긍지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물론, 나 이호열에게 악으로 깡으로 모든 걸 온전히 견뎌낼 생각은 죽어도 없다. 그걸 위해 착용해 온 아이템들이 있단 말이다.

[정순한 에메랄드 반지].

피격 시, 생명력 회복 효과.

[숭고한 약속의 목걸이]

마찬가지로 피격 시, '중급 보호' 효과 발동.

구질구질하다고?

어쩔 수 없다.

이 순간만큼은 최후의 최후까지 구질구질해야 한다.

끝까지, 최대한 많은 악마를 붙들어 두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시간의 흐름 따위 내겐 상관없다고 했었나.

그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주마등.

극한의 극한.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든 전장.

덕분일까.

"...!"

육체의 감각이 한 꺼풀, 눈을 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바닥나는 생명력과 반대로.

언제부터인가.

검기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으니까.

'...검기가 아닌 검강(劍罡)이다.'

하르콘의 검이 그랬던 것처럼 짙게.

◈ 143화. 화려하게 (3)

귓가에 하르콘의 목소리가 맴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내가 정말 생사의 갈림길에 서긴 했나 보다.

이전까지는 이해가 될까 말까 했던 그 말이.

단번에 깨달아지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검을 바라봤다.

스스스─

검기의 윗 단계, 검강.

칠흑처럼 짙은 먹색으로 변한 날붙이.

그런 칠흑의 검신을 휘감아 오르는 은색의 기백.

사용자 고유의 색이라고 했었나.

...흑역사에 은발 머리를 형상화라도 한 건가, 뭔데.

어쨌든.

누가 봐도 나, 이호열의 검강이구나 싶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검기가 아닌 검강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그랑펠의 재능 덕분이겠지.

마법의 경지를 단번에 파악했던 것처럼. 검기와 검강이 얼마나 다른지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검강의 반열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곳인지도.

왜, 지금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랑펠의 재능으로도 빈사 상태가 돼서야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란 뜻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이 엄청난 성장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상태이상, '출혈'이 발생합니다.]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주의 : 생명력이 너무 낮습니다.]....

아까부터 반짝거리는 메시지가 워낙 번잡스러워야지.

스슥─

악마를 베는 검강도.

푸슉─

쏘아져 나가는 석궁 볼트도.

이전과 다르게 느릿하다.

정말로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게 느껴진다.

항상을 고집할 수밖에 없는.

그랑펠의 긍지로도 무리다, 이건.

그러나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기 전에도 짐작했던 것처럼.

푹─

스와아악─

나는 한순간도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움직임이 느려졌다면 느려진 대로.

기운이 남아있다면 한 마리라도 더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비명을 질러대는 육체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억지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랑펠.

정말이지, 흑역사답다.

죽음이고, 뭐고.

무엇하나 두려울 게 없던 질풍노도 시기의 망령답구나. 그러나 그렇기에 감사하다.

그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면, 이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전장이었으니까.

파지지지지직─!

소음과 함께.

허공에 흩어지는 마력.

한계에 다다른 마력의 용이 산화한다.

인벤토리로 되돌아온 [사악한 지룡의 송곳니].

이제 지상에는 나 혼자뿐이군.

수십, 수백만 악마의 시선이 오직 나에게로 쏠렸다.

[Lv.900 : 방랑의 거대 지옥견]

[Lv.950 : 절망의 전도사]

[Lv.1,000 :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하나같이 지랄....

아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레벨들이시다.

그러나 수치보다 나를 더욱 두렵게 하는 건, 이 수많은 악마 가운데서 상위 마왕은 한 녀석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뭐, 나 하나 잡는데.

높으신 분들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나는 읊조렸다.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가 미흡하구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도 말은 잘도 나온다.

허나, 놈들에게도 나의 한계가 보이는 걸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천하의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답구나! 나,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가 그대를 인정한다. 그대는 마지막까지 미련할 정도로 용감했다. 비겁한 인간들과 같은 취급을 하기엔 아깝군!"

마계 서부의 패자, 락시오로스.

거대한 짐승형 악마 위에 올라탄 녀석이 지껄였다.

"좋다. 그대에게 죽어서도 이 몸을 섬길 기회를 하사하겠다. 누구라도 좋다! 저 악마 사냥꾼의 육체를 차지해라! 빙의해라! 그리하면 나, 락시오로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마왕 쟁탈전에 참여할 영광을 하사하겠노라!"

마왕의 자리를 두고 쟁탈전까지 벌이시나 봐?

악마들 팔자가 아주 좋구나.

우리는 하루하루 균열에서 어떤 몬스터가, 악마가 들이닥칠지 모르고 살고 있는데 말이야.

거기에다가 뭐?

내게 빙의하겠다고?

'진짜 할 말은 많지만, 내가....'

사냥감과는 불필요한 대화는 섞지 않는다.

나는 말 대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철컥─

락시오로스, 녀석은 손바닥을 들어 볼트를 막아냈다.

먹힐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역시 간지럽다는 표정이군.

놈이 꿰뚫린 손바닥을 바라보곤 낄낄 웃음을 뱉었다.

"하하하!"

녀석의 동공이 검게 물들었다.

"이것이 최후의 발악인가? 악크샨 최후의 생존자여!"

부장님 말장난까지...?

가지가지 하는구나, 너도.

그러나 됐다.

척─

나는 검과 석궁을 쥔 양손을 늘어트렸다.

"드디어 깨달았나? 악마 사냥꾼이여! 끝났다! 모든 게!"

꼴깍─

악마들이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킬킬킬─

희열과 조롱이 절반씩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만하다. 인간답지 않게 오만하구나. 마왕과 거악을 사냥해서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냐? 혼자서 이곳에 찾아올 줄이야! 오만한 것을 넘어서 어리석다!"

그 선언에 밤하늘의 마안이 움찔거렸다.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밤하늘에 가득한 마안이 눈웃음을 지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떨어져서일까.

문득, 악크샨이 떠오른다.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긍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악마들과 맞서 싸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악마들의 조롱뿐이었겠지.

"어떤가? 이제 울부짖을 마음이 생겼는가? 어디, 먼저 뒈져버린 악마 사냥꾼들처럼. 네놈도 한번 울부짖어 보거라. 그 오만한 낯짝을 일그러뜨려 보란 말이다!"

락시오로스, 놈의 말대로.

죽음의 문턱에선 철벽같던 정신력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다물어라."

유스라.

프로스트.

텟퍼른.

악크샨.

경험이 있었기에.

몰랐어도 이젠 알 수밖에 없단 말이다.

인간의 긍지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악크샨의 절멸?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공백기에 벌어진 일이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러나 악크샨의 긍지를 알게 된 이상,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악마의 농간에 놀아났든, 뭐든.

결국, 아군에게도 버림을 받았던 그들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

이 피날레는.

악크샨을 향한 나의 애도다.

스윽─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뒤편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거함.

나의 뒷배, 아이언 캐슬 호.

지상에선 나 혼자였지만.

저 하늘 위엔 나도 너희처럼 띄워둔 게 있거든.

발광.

아이언 캐슬 호의 포신(砲身)이 이전과 다르게 반짝였다.

흐릿한 시야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마력 광선 사출포 장전 완료]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본전을 건지는 건 물론.

화려하게.

또 가치 있게 죽어야 하지 않겠어?

그랬다.

이 또한 만반의 준비 일부.

나는 아르카나 대륙, 수백만의 악마와 함께 사라진다.

지이이이이잉─!

드워프 기술력의 정점, 아이언 캐슬 호.

그런 아이언 캐슬 호가 전력으로 뿜어내는 공격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저 광선포는 내가 여태껏 봐온 그 어떤 마법, 스킬보다도 강한 위력을 가졌단 소리다.

거대한 마력의 응축.

그 탓에 구름이 걷히고 기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데구르르─

짓고 있던 눈웃음이 무색하게도.

마안들의 초점이 다급하게 굴러간다.

늦게나마 상황 파악을 한 거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늦었어.

"...!!!"

텔레파시처럼.

마안에게서 정보를 전달받는 모양이었다.

락시오로스, 놈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악마 사냥꾼이여! 발악에 불과하다! 네놈이 목숨을 내던져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이 자리에서 수백만의 악마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수천만, 아니 수억의 악마가 새롭게 태어난단 말이다!"

한결같지 못하군.

혀가 길어진 게 아까의 기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잖아.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지만, 할 말은 또 해줘야 한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수억의 악마 또한 사냥하면 되는 일이다."

"...뭣?"

이해가 안 되는 눈치겠지.

그럴 만도 하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어떻게 수억의 악마를 사냥한다는 건지, 마력 폭격에 같이 휩쓸리게 생긴 마당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거야.

그런데 멋대로 착각하지 마라.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

[최후의 모험가 :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망하지 않습니다. 사망 시, 즉시 현실로 귀환하며 일정 시간 동안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 쿨타임 : 24시간]

아르카나 대륙.

다시 진입할 방법만 찾으면.

얼마든지 네놈들 앞에 다시 나타나 줄 테니까.

정말, 수억의 악마를 처치할 때까지...!

누가 뱉은 말을 지키지 않고는 못사는 성격이어서 말이야.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

"나는 악마 사냥꾼."

"...!"

"내가 바로 너희의 천적이자 공포다."

태연하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을 끝마쳤다.

그러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 침묵이야말로 사냥에 임하는 나의 자세.

신호탄이란 소리다.

[비행 기계성, 아이언 캐슬 호 : 마력 광선 사출포 발사]

슈오오오오─!

이내, 가공할 만한 위력의 마력 광선이 시야를 뒤덮었다.

악마들의 처절한 비명 속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에 대한 처치 기여도가 인정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칭호, '숭고'를 습득합니다.]

[칭호,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발동됩니다.]

[즉시 현실로 귀환합니다.]

[쿨타임 : 23시간 59분.]

*

아이언 캐슬 호.

"...빌어먹을!!"

드워프 지도자, 체인워커 하드록이 울분을 토해냈다.

"정녕, 이 방법밖에 없었단 말인가!"

모든 것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악크샨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을 처치하기 위해 악마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악마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아이언 캐슬 호 비장의 무기를 사용했다.

정령, 하이엘을 통해서 계획을 전해 들었을 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 캐슬 호의 최대 출력이다.

제아무리 마법에 능통한 호열이라고 하더라도, 피해 없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를 믿어라. 호열 님께서는 그렇게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약이 무엇인가?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것.

더욱이 악크샨과의 맹약은 절대 거스를 수 없었다.

우려하면서도 그의 계획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예정된 수순이란 말인가?

체인워커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모든 상황을 목격했다.

"...저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물량이 아니야!"

"체인워커! 지금이라도 그에게 합류하는 게 옳다!"

"이대로 악크샨의 생존자를 잃을 순 없다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칼과 석궁을 늘어트린 호열을 포착했다.

누가 봐도 궁지에 몰린 상황이거늘.

정말 방법이 있단 말인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지만 체인워커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배신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그저 악크샨을 믿을 뿐."

철컥─

발사.

수백만의 악마를 집어삼킨 마력 광선포.

폭발의 후폭풍을 추진력으로 삼아 아이언 캐슬 호가 움직였다.

당연하게도 후퇴 또한 호열이 세웠던 계획의 일부였다.

체인워커가 빠득, 이를 갈았다.

"...우리가 그대에게 걱정을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상념에 빠지기도 잠깐.

"!"

하이엘.

정령에게 생각이 닿았다.

하이엘은 호열의 계약 정령.

호열이 살아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목격했다.

어째서인가.

우아함을 넘어서 '숭고'한 빛을 내뿜고 있는 하이엘을.

"하이엘, 호열 경은...?"

체인워커의 물음에 하이엘이 대답했다.

"우려할 것 없답니다. 무사하시니까요. 언제나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인자한 목소리로.

.

.

.

...마탑에서 가장 가까운 균열을 선택한 게 무색하게도.

'뭐지.'

육체의 상태가 더없이 멀쩡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VR 캡슐에 누워있다가 일어난 정도.

딱 그 정도의 피로감이다.

'밤부터 새벽까지.'

쉴 새 없이 치고받고 싸웠는데 말이야.

시간을 확인하니 정말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르셀로가 멀쩡한지부터 확인하는 게 절차였으니.

그런데 원탁회의에서 온갖 폼을 잡았던 게 떠올랐다.

그 난리를 쳐놓고 고작 두 시간 만에 복귀하는 것도 좀 민망한 일 아닌가...? 나는 그런 의미에서 균열을 둘러봤다.

역시, 떠올랐던 메시지도 살펴볼 겸. 겸사겸사 천천히 복귀하는 게....

"!"

그러나 나는 확인하고 말았으니.

그건 갈기갈기 찢긴 나의 재킷, 셔츠, 슬랙스였다.

상처는 남지 않았지만, 핏자국은 남는 법.

속살이 훤히 드러나잖아, 이거.

나도 민망한데.

그랑펠이 이런 넝마와 같은 차림새를 용납할 수 있을 리가.

곧장 포탈 발현.

두 시간 외출이고 나발이고.

일단, 옷부터 갈아야 입어야 한다.

나는 절제가 넘치는 동작으로 환복했다.

'갈아입고 다시 외출하든가 해야지.'

그러나 나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없는 척 좀 하면 어디 덧이라도 난단 말이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잠깐."

일단, 단추부터 채우고.

"들어와도 좋다."

나의 허락에 곧장 열리는 문.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벨리에였다.

스왈린 공작의 애장품을 착용하던 내게 벨리에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복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다.

"마르셀로. 아니, 마르셀로 수석이 깨어났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깨어났단 소리를 들으니까 안심이 되네.

"...?"

소식을 전해온 벨리에의 시선이 이내 의자에 가지런히 걸린 넝마로 향했다. 갈가리 찢기고 피에 물든 의복에 고정되었다. 내가 무어라 입을 열 새도 없었다.

"...이호열 수석님? 저 옷들은?"

벨리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체...? 아르카나 대륙에서 무슨 일을 당하신 건가요?"

...이놈의 성격.

틀린 말이라면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당한 게 아니다."

"...?"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네?!"

왜, 뭐, 같이 죽긴 했어도 틀린 말은 아니거든?

◈ 144화. 친히 어울려 주마

질문에서 알아차렸다.

'아직 깨닫지 못했구나.'

시무아르드가의 대모를 자칭하던 악마가 사냥당했다.

시한부의 저주도, 상태이상도 사라졌을 텐데.

벨리에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

균열을 거치지 않고서는 연결될 수 없는 두 세계라서? 뭐, 그게 아니라면 상태이상의 효과가 흐릿했던 만큼 해제됐을 때의 반동도 적다는 거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율라 시무아르드,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시무아르드가의 사용인들처럼 자초지종을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마르셀로도 포함이다. 이제 와서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자책감만 심해질 뿐이겠지.

악마 사냥꾼이기에 알 수 있다.

악마는 인간의 후회조차 악용하는 족속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그저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게 상책이었거늘.

그렇다고 이놈의 긍지가 그냥 넘어가려고 들지를 않았다.

"당한 게 아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

내 뻔뻔한 자랑에 벨리에가 흠칫했다.

언제까지나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한 목적은 시한부 저주 해금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굴러가던 벨리에의 녹색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수백만...! 이런! 마르셀로 수석 걱정에 잠시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결코 안전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역시 저 옷가지에 묻은 피는 이호열 수석님의...!"

벨리에가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역시 상처가 남아있으시겠죠? 수석님께서 내어주신 여신교단 성물 덕분에 마르셀로를 지금까지 보살필 수 있었습니다. 제게 부디 은혜를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여신교단의 성물(聖物)?

아, [악에 물든 의식용 로브]를 말하는 거구나.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하자 진짜 이름과 효과가 드러났었지.

[여신교단 대사제의 비단옷].

무려 700레벨 제한이 걸린 걸로도 모자라서 [치유] 관련 스킬 보유자만 착용할 수 있다는 추가 제한까지 걸려있던 아이템.

어차피 나는 써먹지도 못하는 거.

혹시라도 벨리에에게 도움이 될까, 건넸거늘.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그러나.

"그대의 마음만 받겠다."

"부상이 번지기 전에 어서 치료를...!"

"아니, 부상 따윈 없다."

말 그대로 다친 곳이 있어야지.

한 번 죽은 것치고는, 심하게 멀쩡히 현실로 돌아와서 말이야.

벨리에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하긴, 의문투성이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좀.'

두 시간 만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돌아와서는.

피에 젖어 갈가리 찢긴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또 다친 곳은 없단다.

시무아르드 가문은 어떻게 하고,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돌아왔다는 것인가? 행보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또 마르셀로는 멀쩡하게 깨어난 상태였으니까.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웃어도 좋다, 벨리에 선임.

원탁회의에서 그 난리를 치고 두 시간 만에 복귀라니.

뭘 하고 왔든 웃음이 나올만도 하지.

특별히 폭소를 허가한다.

그러나 이내, 벨리에의 손이 눈가를 향했다.

눈망울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아니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호열 수석님.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셀로 수석. 아니, 마르셀로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슥─

벨리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둘러댈 거리를 떠올릴 필요는 없었나.

하긴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 마르셀로, 우리 마탑의 진짜 수석님께서 무사하시다는 게 중요한 일이지. 감정을 추스른 벨리에가 입을 열었다.

"마르셀로 수석은 아직 별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래도 늦게나마 병문안을 가는 게 맞지 않나.

도의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건만.

나는 정 없게도 말했다.

"마르셀로의 안부는 회의에서 확인하도록 하지."

"...회의라면? 혹시 원탁회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네."

그랬다.

나는 목격하고 말았으니까.

처참한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자, 가정해 보자.

굳이 상위 마왕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당장 [마계 서부의 패왕, 락시오로스],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악마가 균열에 업데이트된다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세계는 또 한 번 충격에 마비될 수밖에 없으리라.

'악마들의 활동은 마왕 압살로 둔해진 게 아니었어.'

바로 잡을 건 바로 잡아야겠지.

마왕 압살은 '계기'에 불과했다.

데카라비아를 포함, 내가 마왕을 넷이나 사냥한 덕분에 마왕의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악마들 사이에서 공백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마왕 쟁탈전]이 열리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리하면 나, 락시오로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마왕 쟁탈전에 참여할 영광을 하사하겠노라!"

그래, 악마들이 잠잠했던 이유는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던 것뿐이었다.

나야 쟁탈전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까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수백만 그다음엔 수천만, 수억이다.'

폭풍전야.

쟁탈전이 시작되든, 끝나든.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악마들의 공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거세지리란 것을!

그래, 그에 대비하기 위한 원탁회의였다.

그러나 이 복잡한 사정을.

벨리에에게 조곤조곤 설명할 수는 없었으니.

나는 한 줄로 요약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마탑이 움직일 시간이 왔으니."

"...!"

물론, 나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말했다시피 이건, 나는 물론, 마탑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랜만에 권력을.... 아니, '권한'을 사용할 때가 왔다는 말이다.

*

정신은 또렷했거늘.

마르셀로는 침대에 누워 얌전히 이불을 덮은 상태였다.

절대 안정.

벨리에의 신신당부 때문이었다.

문 너머에서 외면할 수 없는 대화가 들려온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흐흑."

"...뱅그릿 선임, 우는 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벤쉬 윌리엄, 당신이 할 말입니까?"

"네? 제가 뭘요?"

"별실문에다가 귀를 바짝 대고서는 하여튼 호들갑을...!"

...우리가, 수석과 선임이 서로를 걱정해 주는 관계였나?

'아직은 낯설군.'

마르셀로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변화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지고, 마탑은 정말 많은 사건을 겪었으니까.

"경쟁으로 엮인 우리조차 단합하게 만든 거겠죠."

"수석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런, 마티스 선임? 계신지 몰랐습니다."

과연, 괜히 흑마도학의 선임이 아닌가.

별실의 구석.

그늘에 앉아있던 마티스가 마르셀로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마르셀로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르셀로 수석?"

"무리가 아닙니다."

마르셀로는 멋쩍게 웃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게 민망할 정도로 멀쩡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벨리에 선임은?"

"들를 곳이 있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아, 그런가요?"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졌다고.

마르셀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기절해서 필름이 끊기듯 쓰러졌던 그였으니까.

"저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 듯싶은데...."

벨리에가 자신의 치료에 힘을 썼구나,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티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마르셀로가 깨어나기 직전.

벨리에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벌써 무언가 실마리를 붙잡으신 것 같아요!"

-"저주의 문양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어."

모든 게 해가 저물기도 전에 벌어진 일.

마티스의 머릿속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호열 수석께선 아르카나 대륙에서 어떤 실마리를 붙잡으신 걸까?

어디까지 알고 대륙에 진입하기로 결정하셨던 걸까?

그러나 마티스는 침묵을 지켰다.

무엇이 됐든.

자신의 입으로 전할 소식이 아니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호열 수석께서는 예정대로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셨습니까? 아니, 그전에 마티스 선임. 저는 며칠 동안 쓰러져 있던 거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표정.

이걸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가?

채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하는 건가?

"몸에 피로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봤을 땐.... 못해도 닷새는 정신을 잃고 잠만 잔 것 같습니다. 아, 이렇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중얼거리는 마르셀로를 지켜보던 마티스는 이마를 짚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밀린 업무가 있을 리가 있나.

"저기, 마르셀로 수석. 그 업무는...."

물론, 마티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철컥─

벨리에가 다시금 별실로 돌아왔으니까.

"이호열 수석님께서 복귀하셨습니다."

뜻밖의 소식과 함께.

"...보, 복귀하셨다고요?!"

살짝 열린 문틈에서 들려오는 호들갑.

벤쉬의 달싹거리는 입술이 보였다.

곧 의문 가득한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아니, 이 수석께서 벌써 복귀하셨다고요?!"

"믿으라고 하셨으니까. 의심하진 않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금방?"

"그럼, 지금 이 수석께선 마탑에 계신 겁니까?"

평소 같았으면 벤쉬의 호들갑에 질색을 했을 마티스조차 침묵했다.

무엇보다 이호열 수석에 관한 소식이 우선이었으니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오직 한 사람.

"...벌써 복귀하셨다니요?"

시간 감각이 흐릿해진 마르셀로밖에 없었다.

벨리에는 후우, 숨을 골랐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졌던 일이야, 당사자이신 이호열 수석께서 원탁회의에서 어련히 밝히실 테니까....

"이호열 수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벨리에가 답해줄 수 있는 건 한마디밖에 없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자, 잠깐만! 뭐, 뭐라고요?"

"수, 수백만?! 제 귓구멍이 잘못된 거죠? 네? 벨리에 선임!"

우당탕─

이젠 아예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선임 마법사들.

벨리에는 모두의 앞에서 다시금 확실하게 선언했다.

"아닙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고작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악마를 사냥하고 마탑에 무사히 복귀하셨습니다."

"!!!"

그게 상식적으로, 마법적으로 말이나 된단 말인가?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마탑의 수석, 선임 마법사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굳이 지역을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악마족 몬스터의 활동이 잠잠해진 지금.

어떤 곳을 찾아도 플레이어들로 가득했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악마, 그 자식들만 없어도 할만하다니까?"

"진짜 내가 잠자기 전에 호멘, 호멘, 중얼거리면서 잔다."

"아, 그나저나 스칼은 어떻게 됐대?"

적정 레벨 균열에서 구르고 돌아왔어도.

이렇게 잡담을 나눌 힘이 남아있는 플레이어들이 말이다.

화제가 화제이니만큼 수다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뭐, 당사자들이 이야기가 없으니까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꼼짝이라도 하겠어? 이호열이 누군데. 공손하게 존댓말을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그렇지? 이름도 아니고 악룡 사냥꾼이라고 불렀잖아!"

"근데 스칼도 고집 장난 아니네. 나 같으면 지난번엔 말실수했다고, 미안하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몇 발자국이라도 물러날 텐데."

시답잖은 기싸움이 아니라 호열이 자신의 히든 클래스, [용기사]와 관련됐으니까.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게 뻔한 스칼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자존심 세울 때가 맞나? 난 모르겠다."

"근데 희한하지 않냐?"

"뭐가?"

"스칼, 그거 딱 봐도 관종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조용히 살아온 걸까?"

"어휴, 이젠 뭐 관상까지 보시게? 스칼 관상 볼 시간에 몹 면상이나 좀 잘 봐라. 아까 전에도 어그로 튀어가지고 나한테...."

물론, 플레이어들에게 중요한 건 세간의 소식보다 눈앞의 경험치와 아이템이었지만.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땡─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

뿌우─

그와 동시에 나팔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에 일제히.

서로를 마주 보는 플레이어들.

종소리는 몰라도 나팔소리가 울린다...?

흔치 않은 일.

아니, 대격변 이후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직감적으로 깨닫는 게 당연하다.

"...야, 큰 거 온다."

"형님들. 아무래도 뭔가 뜰 것 같은데요?"

"하씨. 뭔데, 뭔데."

꼴깍.

뿌우─

나팔소리가 길게 이어질수록 커져가는 기대감.

누군가 누누이 말해오지 않았던가?

기대감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커진 기대만큼.

아니, 그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전개가 펼쳐졌으니까.

그 무엇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플레이어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었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미친, 이게 무슨 퀘스트냐?!"

척 봐도 범상치 않은 퀘스트가.

.

.

.

유스라 왕국.

황금의 원탁.

나는 자리에 앉은 이들을 바라봤다.

유스라 국왕, 하쿠나.

프로스트의 영주 대행, 하르콘.

뮤온의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드디어, 시작이군요."

"성전,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비장감이 깃든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수억의 악마라고 했겠다....

이쪽도 머릿수 정도는 맞추고 시작해야 되지 않겠어?

◈ 145화.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1)

[권한] 기능이 막대하긴 하다만 만능은 아니다.

내 멋대로 퀘스트를 띄울 수 없다는 말이다.

뭐, 사소한 퀘스트 정도는 가능할 수 있긴 하겠지. 웬만한 플레이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심부름 퀘스트 같은 것 정도라면.

'물론, 이놈의 긍지가 허락하는 선에서 말이야.'

게다가 지금 이 순간처럼.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에 있는 플레이어. 모두에게 메시지로 떠오를 정도의 퀘스트를 내어주는 건 아무리 권한을 들먹여도 불가능하다.

나는 간만에 진심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군."

정말, 군소리 한번 하지 않아 줘서 감사하다...!

사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쿠나, 하르콘, 탈림까지.

그랑펠 정도까지는 아니겠다만, 다들 악마와는 악연이 있었으니까.

특히 의욕적인 건 하르콘이었다.

"무뎌진 검을 가다듬을 때가 왔군, 그래."

프로스트에 머물며 적성에 맞지 않는 영주 대행 역할을 수행하던 하르콘이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건 제국에 대한 충심 때문이겠지.

"경, 다시 한번 대륙의 상황을 말해줄 수 있겠나?"

하르콘이 물어왔다.

하쿠나와 탈림도 나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눈치.

나는 가감 없이 진실을 말했다.

아르카나의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건 은하수 따위가 아니라 무수한 악마의 눈동자, 마안(魔眼)이라는 것부터. 내가 쓰러트린 수백만 악마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

"은인이시여,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하쿠나가 안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 죽었는데, 무사히 귀환했다고 할 수 있나?

어쨌든, 하르콘과 탈림은 기사의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했다.

"수천 개의 마안이 하늘에 떠있다.... 전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겠군."

"사실상 대륙에 사각지대는 없다고 봐야겠군요."

"어디에 숨어도 악마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인가?"

"그리고 경의 말씀에 따르면 수백만의 악마들이 수십 분 만에 집결했다는 것인데.... 수백만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다만.

괜히 들었나, 싶을 정도로 암울한 상황이겠지.

세 사람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유야 간단했다.

막막하거든.

퀘스트를 통해서 모험가, 플레이어를 모집한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얼마나 되겠으며. 아르카나 대륙을 차지한 악마들과의 격차는....

멀리 갈 것도 없이 현실에 마왕이 출현했을 때만 봐도 알 수 있다.

'최하위 마왕, 데카라비아조차 쓰러트리기 벅찼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또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달랑, 석궁과 검 한 자루를 쥐고.

수백만의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해도 얼마나 상실한 거냐, 그랑펠.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

내가 바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답다.

하지만 덕분이다.

내가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하고, 더없이 절망적인 대륙을 목격했음에도, 항상의 자세로 다음의 수를 생각할 수 있는 건. 전부 네 덕분이다.

"그러나 괜찮네."

물론, 이놈의 입방정도 전부 너 때문이지만.

"?"

내 선언에 세 사내가 말을 멈췄다.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니까."

"...?"

하지만 정말, 우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

아르카나 대륙, 드워프를 포함해서 그쪽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으니까. 죽음의 순간, 나는 떠올랐던 메시지를 잊을 수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당신의 업적이 울려 퍼집니다.]

[아르카나 대륙의 생명들이 당신의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그래, 새로운 세계수의 출현이 본격적인 반격의 시작이었다면.

나의 희생은 반격의 양분과 다름없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다시 살아난 마당에.

희생이라고 말하기는 거창하긴 하지만....

'뭐, 양분을 한 번 주라는 법은 없잖아?'

원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거든.

[최후의 모험가] 효과가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에 접근할 방법만 알게 된다면, 양분 정도야 매일매일 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다.

'내 한 몸 바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남는 장사였거든.'

막대한 아르카나의 사망 페널티를 떠안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얻어낸 게 훨씬 많았단 말씀이시다.

그 보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또 한세월이다.

게다가 지금은 보상보단 세 사람의 의문을 풀어주는 게 우선 절차.

나는 말을 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도 성전에 참전한 이들이 있다네."

"...!"

"드워프. 악크샨의 긍지를 잇는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긍지를 관철하며 악마에 맞서 싸우는 대륙의 모든 이들. 그들 모두가 성전에 참전 중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

"...과연, 그렇군."

"경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늦은 것은 우리 쪽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늦게 성전에 뛰어든 만큼 본격적으로 전황을 뒤흔들어 줘야 하겠지.

그걸 위한 퀘스트였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성전 끝에 물질적인 보상은 없다."

빌어먹을 청렴결백 때문이 아니다.

보상과 전리품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면.

결코, 성전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테니까.

이것은 빼앗는 것이 아닌 대륙과 현실.

두 세계를 지키기 위한 전쟁.

"그러나 긍지가 남는다."

동시에 긍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으니까.

이쯤에서 입장을 바꿔보자.

지극히 현실적인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자고.

과연, 보상조차 걸리지 않은 퀘스트를 흔쾌히 시작할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의 전쟁도 아니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진짜 전쟁이다.

글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기대보다도 적지 않을까.

그러나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긍지가."

보상도 없는, 이따위 성전 퀘스트에 동참한 이들이라면.

그 어떤 악마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왜, 별다른 보상도 없는 악마 사냥꾼 클래스 퀘스트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나처럼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그저 나 같은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지켜보며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유를 가지자.

달칵─

황금 원탁 위.

나는 높여진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다들 식기 전에 드는 게 좋겠군."

"...아, 잊고 있었군."

"저, 초록색 차는 처음 봅니다."

언제나처럼 300원짜리 녹차 티백이 흔들거렸다.

*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해당 지역.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에서 떠오른 퀘스트.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전쟁 관련 퀘스트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 전쟁 퀘스트가 세 지역에서 동시에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떡밥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ㅁㅊ 괜히 악마족 몹들이 쏟아지던 게 아니었네;;;

-아니;; 우리가 성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겠냐고

-레이먼 션 슬슬 떡밥 회수 시작하는 거임???

-그나저나 이런 스케일 퀘스트는 첨 본다ㅋㅋㅋㅋㅋㅋ

비정상적으로 쏟아지던 악마족 몬스터들.

아르카나 대륙에서 성전이 진행 중이었다면 그 의문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플레이어들에게 성전 관련 퀘스트가 떠올랐는지도.

AAU 긴급회의.

"영국 측은 오늘도 불참입니까? 뭐, 됐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안부 인사는 생략이다.

회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성전이랍니다, 성전!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성전이요."

"다들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글쎄요."

"조금이라도, 아니 뭐라도. 꼬투리라도 좋습니다."

흐르는 침묵 속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일단, 여신교단이 관련된 건 확실해 보이죠?"

"그렇겠죠. 그러니까 뮤온에서도 퀘스트가 떠오른 걸 테니까요. 뭐, 프로스트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왕한테 완전히 집어삼켜질 뻔했으니까요. 원수라는 거겠죠. 그런데 유스라 왕국?"

유스라 제도는 몰라도, 유스라 왕국은 현실에서 부활한 고대 왕국이 아니던가?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꾹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이호열이겠지.'

다들 머리가 돌아간다면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겠지.

이호열, 그는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플레이어였으니까. 유스라 왕국이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선 반드시 이호열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모른 척을 할 수밖에.'

박민재는 모니터를 한 차례 둘러봤다.

AAU.

아르카나의 침식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 협력 기관.

그러나 그것은 대의적인 목적에 불과할 뿐.

그 이면에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박민재 지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덕분에 물음에 담긴 의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떠보는 건가?'

내가 이호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하는 거겠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자기네들 관계를 일반화하고 있군.

'빌어먹게도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있어야지.'

박민재는 깨끗한 척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은 사회란 흙탕물에서 굴러도 너무 오랜 세월을 굴렀으니까. 그러나 그 더러운 물을 이호열에게 튀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에겐 애초에 내 도움 따위 필요하지도 않았으니까.'

자신만이 아니었다.

AAU의 정보력보다도 앞서나가던 호열이 아닌가?

고작 AAU 지부장에 불과한 자신의 협력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겠지. 하지만 그걸 인정했다고 해서 말이야.

'또 가만히 보고만 있겠단 소리는 아니거든.'

그쪽들이 이호열한테 구정물 튀기는 꼬락서니를.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아?

말했다시피 자신의 옷은 이미 구르고 굴러서 더러워졌다.

흙탕물 몇 방울 더 튀기는 거?

아무런 타격도 없다.

아니, 대놓고 땅바닥을 구를 수도 있었다.

'제발,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이호열, 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랐다.

물질을 추구하지도,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가 걸어온 길은 오직 하나의 길.

'인류를 위해 걸어온 길에 끼어들지 말란 말이다.'

[깨진 차원의 틈] 균열을 시작으로.

[마왕성] 균열까지.

AAU는 물론, 어떤 강대국조차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던 균열들을 고독하게 해결해 왔던 그였으니까.

그래, 이호열이 걸어온 길이야말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영웅의 길이었다.

그러니까 박민재는 다짐했다.

'함께 걸을 수 없다면 방해꾼이라도 쳐내야겠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그런 박민재가 입을 열었다.

대놓고 정곡을 찔렀다.

"아는 바도, 짐작이 가는 바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

"이호열 플레이어, 그가 걷는 길엔 끼어들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도움을 주는 거라면 몰라도 혹시라도 발목을 붙잡을 생각을 하신다면...."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마찬가지로 발목을 내놓을 각오도 하셔야 할 테니까요."

.

.

.

AAU 회의 종료.

"많이 컸구만."

대격변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마탑 출현.

그걸 기회로 급성장한 대한민국이었다.

행운도 모자라서 이호열이라는 규격 외 플레이어의 등장까지. 덕분에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영향력은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치솟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박 지부장, 발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고 했었나?

유감스럽게도 발목을 붙잡을 필요도 없었다.

이번 퀘스트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이해관계가 없었으니까.

"인간이란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있군, 그래."

스읍─

사내는 연기를 머금었다.

인간이란 어리석으면서 영악한 족속이다.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보상도 전리품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건다?

긍지고, 인류의 평화고, 움직일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우─

"긍지라고? 하, 웃기지도 않은 소리."

비웃음 사이로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

.

.

"...?!"

그러나 사내의 비웃음은 담배 하나를 태울 때까지도 이어지지 못했다.

모니터에 떠오른 속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 건.

미국의 자랑, 샤이닝을 위협하는 신흥 세력.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

"거대 연합이 성전에 참전하는 건가요?"

"빠른 결정을 내리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보상도, 전리품도 없는 퀘스트에 참전한 이유가 뭡니까?"

쏟아지는 무수한 질문 속에서.

가온의 길드 마스터, 남태민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툭툭─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뭘 그리들 당연한 걸 묻느냐는 사람처럼 말했다.

"가슴 속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 146화.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2)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에 들어선 순간.

"미친놈아."

레오니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가슴 속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오소소, 닭살이 돋아 참을 수 없었다.

남태민은 억울했다.

"왜 난리야? 호열 씨가 하셨던 말이랑 똑같은데."

"미쳤냐. 똑같긴 뭐가 똑같아?!"

"한배를 탄 입장이지만. 망언이군요, 남태민 군."

"이봐요, 히사기 카즈마 씨. 그쪽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긍지보다 중요한 건 없다. 늦게나마 깨달았으니까요."

취재진들 앞에서 나랑 크게 다를 것 없는 말을 뱉어냈으면서 시치미를 떼다니.

절레절레, 히사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말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을 겁니다."

"뭐가?"

"굳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릴 필요까진 없었단 말입니다."

"엥? 그게 왜? 남자답고 좋잖아."

"원조는 너처럼 오글거리지 않았어."

똑같긴 개뿔.

더 이상 말을 섞어봤자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겠지.

좋다, 관두자.

시답잖은 인터뷰, 말싸움보다 중요한 게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바로 가치를 증명하는 것.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

세 사람은 퀘스트를 목격한 순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를...!'

어째서 호열은 악연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세 길드를 연합하게 한 것인가? 바로 이 퀘스트를 위해서였다고. 당사자인 세 사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상상해 봐. 우리가 예전처럼 활동했다고 쳐보자고."

일단, 하나는 상상하기도 전에 장담할 수 있었다.

히사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적어도 이나즈마와 가온은 서로 견제하느라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뤄낼 수 없었겠죠."

"맞지, 내가 하고 싶던 말이 그 말인데. 잠깐, 왜 또 이나즈마랑 가온이냐? 순서가 안 맞잖아. 순서가. 랭킹으로, 가나다순으로도 우리가 당연히 앞에 와야...."

"그렇지 않습니까, 레오니 씨?"

"오키. 지금만 봐도 알겠다."

과거, 길드 간의 경쟁.

균열을 두고 퍼스트 클리어를 겨루는 건 물론, 균열 내부에서도 신경전이 벌어지는 건 일상이었다.

서로가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다들 알아서 피해 준 덕분이지."

"저희들과 같은 균열에 진입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때도 이렇게 사냥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전투에 미친 광전사.

거대 연합 덕분에 직업병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레오니와 버서커 길드를 비롯한 가온과 이나즈마의 길드원들도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경험치를 획득했다.

그 결과가 레벨로 드러나고 있었다.

남태민, 408레벨.

히사기 카즈마, 405레벨.

레오니, 399레벨.

거대 연합의 상승효과만으로 가능한 성장은 아니었다.

그보다 큰 영향을 끼친 게 바로 마왕성 균열 공략.

일명, '마왕 압살' 이후로 악마족 몬스터가 모습을 감추듯 사라진 덕분이었으니까.

"단순하게 계산해도 균열 공략 시간이 배 이상 늘었어."

악마족 몬스터가 까다로운 이유?

성장형 몬스터니까 레벨이 높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상태이상. 특히나 누군가가 '공포'에 걸리게 된다면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남태민은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는 물론이고, 플레이어들 모두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니까?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호열 씨가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냐고."

"아니요."

"아니긴 또 뭐가 아닌데? 너는 어떻게 말꼬리마다...!"

이게 또 발끈하게 하네?

히사기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왕성 균열 따위야 고생도 되지 않으셨을 겁니다. 호열 씨의 수준에는 말이죠. 아시다시피 고작 10분 남짓한 시간에 마왕성 균열을, 셋이나 클리어하지 않으셨습니까?"

...들어보니까 또 틀린 말은 아니네.

근데, 맞는 말을 해도 꼭 저렇게 재수 없게!

다시 발끈하려던 남태민을 막은 건 레오니였다.

촤락─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

플레이어 랭킹란.

랭커들의 레벨을 살펴보던 레오니가 입을 열었다.

"류오쥔춘, 저것도 400레벨 찍었네."

"군주 클래스로 400레벨? 걔도 독종이다. 독종."

"그러니까 천하통일이라는 초거대 길드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겠죠."

다른 플레이어의 레벨을 살피자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두 협력자의 레벨. 레오니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쭈, 얘네들 좀 봐라?

"근데, 어째 둘 다 레벨 상승이 좀 더뎌진 것 같다?"

"...?"

"아니, 내가 399레벨까지 따라붙을 때까지 뭐 했냐 둘 다? 놀았지?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희 둘이 말싸움할 시간에 몬스터를 하나라도 더 사냥했으면.... 에휴, 됐다. 말해서 뭐 하냐."

남태민과 히사기가 억울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기요, 399레벨 씨. 그쪽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400레벨부터는 정말 차원이 달라집니다."

"뭐래."

"아니, 진짜 400레벨부터는 요구 경험치량이 말이 안 된다니까? 진짜 며칠을 적정 레벨 몬스터를 때려잡아도 레벨에 변동이 있을까 말까...!"

.

.

.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숭고]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90]

[능력치]

근력 : 72 / 민첩 : 77 / 마력 : 401 / 행운 : 7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50]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아르카나의 레벨 업 시스템.

100단위부터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 불만이 엄살로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아르카나 대륙 원정에서 시스템의 한계치, 무려 50레벨이나 상승해서 돌아오고 말았다...!

'사망 페널티를 받고도 말이지.'

눈을 감는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획득한 경험치가 하락합니다.]....

어마어마한 경험치가 하락하고도 여전히 한계치라니.

성급하게 퀴른베르크 기계탑 적금을 깼으면 괜히 억울할 뻔했잖아.

수치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그런가.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왔는지 실감이 됐다.

그래, 시무아르드가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마왕을 사냥한 것도 모자라서.

수백만의 악마와 함께 아이언 캐슬 호의 마력 광선포를 맞고 장렬하게 산화.

확실히 시스템조차 착각해서 칭호를 내려줄 정도로 엄청난 행동이었지, 진심.

"숫자 따위로 나를 재단할 수 없다."

...그래, 이번 입방정만큼은 인정한다.

그랑펠에게 있어서 레벨이나 적의 머릿수 따위가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러니까 수백만 악마 사이로 몸을 던졌던 거겠지.

진짜 무서울 것 없던 질풍노도의 시기답다.

어쨌거나, 50포인트부터 배분하자.

나는 언제나처럼 마력에 포인트를 몽땅 투자하려다가 멈칫했다.

왜, 사람은 주마등에서 무언가를 깨우친다고 하지 않던가?

덕분에 나도 한 가지를 깨달았거든.

"악마 사냥꾼에겐 악마 사냥꾼만의 사냥법이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악마 사냥꾼의 특징이야 한결같다.

악마를 사냥할 때 빼면 무엇 하나 내세울 강점이 없다는 것.

그건 스탯 포인트 투자 방법만 봐도 알 수 있다. 하나만 파도 아쉬운 스탯을 근력, 민첩, 마력에 나눠서 투자할 수밖에 없던 악마 사냥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투를 통해서 깨달았다.

그 육성 방식이 오히려 악마를 사냥하는 데엔 도움이 됐노라고.

근력으로는 검을 휘둘렀고, 민첩으로는 석궁을 다뤘으며, 마력으로는 마법을 발현하던 나였으니까.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야말로 바로 악마 사냥꾼.

자체였다는 것이다.

'근력과 민첩에도 포인트를 투자할 가치가 있어.'

기대 이상이었던 석궁.

무엇보다 검강(劍罡)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이상.

이전과 다르게 근력과 민첩 스탯의 중요도, 가성비가 급상승한 거나 다름없는 거겠지. 클래스 퀘스트 보상만으로도 충당하기엔 아쉽다는 말이었다.

'검술과 사격. 둘 다 영향을 끼치는 민첩에 조금 더.'

근력에 12포인트.

민첩에 15포인트.

그리고 마력에 20포인트.

나는 포인트 배분을 마쳤다.

이제 50포인트 중 남은 포인트는 3포인트.

정말 피 같은 포인트거늘.

'...그래.'

나는 두 눈을 딱 감고 행운에 3포인트를 투자했다.

1포인트도 아니고, 왜 3포인트씩이나 투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야 한 자릿수보다 두 자릿수가 더 보기 좋으니까.

[행운 : 10]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

나는 이 순간만큼은 요행을 바랐으니까.

인벤토리를 열어서 악마의 아이템을 꺼냈다.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한 마왕의 전리품.

[만물과 통하는 지도]는 순간이동 효과를 발동한 탓에 평범한 종이 쪼가리가 됐지만, 내겐 아직 마왕의 전리품이 둘이나 남아있었으니까.

'여유만 있었어도 둘 다 정화하는 건데.'

악마가 몰려올 줄은 알았어도 수백만이나 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정화한 마왕의 전리품은 하나였다. 그리고 제물로 선택한 전리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흉측하군."

눈깔....

아니, 플라우로스가 드롭했던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였다.

눈동자를 먼저 정화한 이유야 간단하다. 서열이 높은 마왕이 드롭한 만큼 더 좋은 아이템일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을 테니까.

물론, 마왕의 전리품 하나만 보고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건 또 아니다.

'본의 아니게 까볼 게 많아졌거든.'

정화된 마왕의 전리품을 위해.

칭호, [숭고]의 효과를 위해.

더 나아가서는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잘 풀렸으면 하는 마음까지 담아서.

'부디, 첫 단추라도 잘 끼울 수 있기를.'

구질구질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하나씩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안(魔眼)의 망원경]

1포인트.

[숭고 : 숭고한 자여, 아르카나 대륙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다.]

1포인트.

[속보 : 거대 연합, "긍지를 지키기 위해 참전 결정."]

1포인트.

과연...!

시스템은, 행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

마탑.

원탁회의가 열리는 크리스탈 홀.

숙련, 견습 마법사들은 입장하며 흠칫 놀라고 말았다.

"...웬일들이시래?"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 걸까?

선임 마법사들께서 먼저 크리스탈 홀에 착석해 계셨다.

단 한 분도 빠짐없이.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끈 건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였다.

"마르셀로 수석님, 다행이다."

"무사히 깨어나셨구나."

"몸은 완전히 괜찮아지신 걸까?"

웅성웅성─

들려오는 소리.

마르셀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어째서지, 육체에 활력이 넘쳤다.

마르셀로는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았다.

'...삐걱거리지 않는다?'

움직이기만 해도 신음하던 관절들이 멀쩡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심장의 통증도 사라졌다.

마르셀로는 의아한 마음에 벨리에에게 물었었다.

-"벨리에 선임. 제게 뭔가.... 치유 마법을 거신 겁니까?"

치유학파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만큼.

벨리에의 마법적 재능에 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혹시 치유 마법의 경지에 다다른 것일까?

그녀의 치유 마법 덕분에 육체에 활력이 도는 걸까.

그러나 벨리에는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게 가능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니랍니다."

마티스 선임에게 시선을 돌려봐도 명쾌한 답을 들을 순 없었다.

벨리에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떠오르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호열 수석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고 왔다."

이호열 수석.

혹시, 이 수석께서 아르카나 대륙에서 처치하고 온 수백만 악마 중에 '시한부의 저주'와 관련된 녀석이 있던 걸까? 물론, 저주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하진 않았다.

마도 가문, 시무아르드.

조부님도, 아버지도,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시한부의 저주가 아니던가? 몸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설령 정말 시한부의 저주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마르셀로는 실감이 날 수 없었다.

그러나.

꾹─

마르셀로는 주먹을 쥐었다.

그의 눈매가 이전과는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저주가 악마와 관련된 거라면.'

나는 더 이상 악마의 앞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경이 존경스러워집니다.'

마르셀로가 생각을 끝마친 순간.

호열이 크리스탈 홀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선집중.

순식간에 쏟아지는 관심.

무엇보다 안달이 난 건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중천에 뜬 해가 저물기도 전에 마탑으로 복귀했다.'

'수백만의 악마를 사냥하셨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드디어 그 영웅담을 들을 수 있는 건가? 하씨, 이럴 줄 알았으면 출탑 신청서에 목적을 대륙 원정이라고 써보는 건데...!'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각각 품은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의심이 아니라 호열의 행보엔 자연스러운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디 들어보자구요.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햇병아리 마법사들도 호열이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 순간, 크리스탈 홀의 모두가 호열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막대한 기대 속에서.

호열은 운을 띄웠다.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시작으로.

.

.

.

말로 백만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도 있거늘.

...그거 아무래도 내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꼿꼿한 자세로 우뚝 서서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지다니.

이딴 질문에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흐르는 정적─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도 바쁘거늘.

나는 침묵 속에서 한참 뒤에나 입을 열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뜸이 무색하게도, 뱉어낸 것은 고작 속담.

아르카나인들한테 대한민국의 속담을 들이밀 줄이야.

...나, 어쩌면 꼰대 수준을 넘은 게 아닐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뜻은 전달된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 이들이 보였거든.

호응해 줘서 고맙다, 뱅그릿 톰 선임 마법사.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

내가 딱히 줄 건 없어도 녹차 흔쾌히 내어주겠다.

다짐하기도 잠깐.

나는 얼른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백문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내가 말로 아무리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설명해 봤자 한 번 보는 것이 이해하는 데 빠를 것 같았거든. 그런 내가 꺼내 든 건 마왕의 전리품.

[마안(魔眼)의 망원경]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짧은 시간 동안 마안과의 시야를 공유한다.]

[설명 : 마계의 눈과 시야를 공유하는 눈동자. 그러나 명심하라. 깊게 들여다볼수록 저들 또한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아르카나 밤하늘에 떠올랐던 무수한 마안(魔眼).

무려 그 마안과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엄청난 효과.

아르카나 대륙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단 뜻이었다.

나는 낚은 월척을 자랑하듯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그대들에게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

.

.

크리스탈 홀.

수석, 선임, 숙련, 견습.

계급을 구분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은 채 경악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저런 지옥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단 말인가?

◈ 147화.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3)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만물과 통하는 지도].

마지막으로 [마안(魔眼)의 망원경]까지.

마왕의 전리품쯤 되면 그 효과가 현실이나 아르카나 대륙,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 듯했다. 에픽 등급이 괜히 에픽 등급이 아니라는 거겠지.

'물론, 효과가 사기적인 만큼 조건도 까다롭지만.'

만.통.지처럼 일회용까진 아니어도 망원경에도 조건이 붙어있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 즉 쿨타임이 존재했거든.

굳이 설명을 덧붙일 것도 없었다.

크리스탈 홀.

허공에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을 비추던 눈동자가 눈을 감았다.

효과 지속 시간은 10분 남짓이면서 쿨타임은 6시간이라니....

어째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이 두 눈으로 대륙을 목격했던바.

언제까지고 하이엘을 정보원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말로 하이엘이 정령왕급으로 강하다면 또 모를까.

누굴 닮아서 허우대만 심하게 멀쩡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망원경을 회수하며 말했다.

"이것이 현재 아르카나 대륙의 모습이다."

과연, 수백만조차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악마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악마, 또 악마.

진짜로 같이 죽었으면 억울한 죽음이 됐겠는데, 이거?

그런 악마들만큼이나 흔히 보이는 게 있다면.

짓밟힌 아르카나의 도시와 주민들이었다.

"...."

정적이 흘렀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충격이겠지.

침묵 속에서 점차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말도 안 돼."

"저래서 멀쩡한 도시가 있긴 한 걸까?"

"나 확실히 봤어. 제국 수도성 방향에서도 연기가...!"

마탑에 입성하는 순간.

속세와의 인연은 끊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르셀로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마탑의 마법사들은 마탑 외부의 일에 깊게 관여할 수 없는 것이 규율.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가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젠장."

선임 마법사, 뱅그릿이 이를 갈았다.

자연스럽게 드는 걱정까지 어찌할 순 없는 거겠지.

더 나아가서 뱅그릿은 평범한 가문의 자제였으니까.

다른 이들보다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저 처참한 모습이 반격을 시작한 아르카나 대륙이다."

"...!!!"

그랬다.

지금도 희망이라곤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거늘.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악마와 맞서는 아르카나인들이 있었다. 악크샨의 유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있었다. 드워프의 비행정이 있었다.

"내가 가감 없이 대륙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하다."

단순하게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단 말이다.

"아르카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긍지를 지키고 있다."

계속 말해왔듯,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대격변 이후에도.

자타공인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인 마탑은 그 어떤 사건에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몰랐어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됐거든.

설령 시스템은 여전할지 몰라도, NPC는 과거의 NPC가 아니라는 것을. 더 이상 시스템에 얽매인 NPC가 아닌 아르카나인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내겐 확신이 있었다.

마탑에서의 권한 기능 활성화?

아니, 그것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아르카나인들에겐 아르카나인으로서의 긍지가 있을 테니까.

저벅─

그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시점 마탑 유일의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아르카나 대륙에서 현실로.

악마와의 성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의 끝엔 보상도, 전리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오직 긍지뿐.

스스로의 긍지를 증명하라.

─해당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 (진행 중)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래서 이걸 참전해, 말아?"

이름부터 거창한 성전(聖戰)이시다.

그것도 모자라서 퀘스트 내용에 명시된 악마라는 구체적인 적까지.

악마족 몬스터의 출현이 줄어든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플레이어들은 다시금 악마족 몬스터의 위험성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질 않으니까 더 와 닿는 거 알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지."

"진짜 다시는 꼴도 보기 싫었는데."

퀘스트로 떠올랐다는 건 언제가 됐든, 놈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소리겠지.

플레이어 이전에 사람이니까.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아르카나 대륙 전기 시절 때였으면 몰라."

이건 게임이 아닌 현실,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던가?

보상과 전리품을 떠나서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근데, 피할 수가 없잖아? 예정된 현실이라고 악마들이 균열을 통해 현실로 넘어오는 건.... 그리고 그 균열에 진입할 수 있는 건 우리 플레이어들뿐이고."

"아니, 플레이어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로한테 미루면 뭐가 해결되는데? 균열 붕괴밖에 더 되겠어? 악마, 마왕이 현실에 풀려나는 꼴밖에 더 되겠냐고!"

"아니, 왜 나한테 성질을 내고 그래?"

"나도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부의 철벽, 프로스트를 무너트린 놈들이야. 플레이어들이 단합해도 모자랄 판에 벌써 이렇게 의견이 갈린다면...."

"아르카나도 막아내지 못한 악마의 침공을 겨우 우리만으로 막아낼 수 있긴 한 거야?"

"프로스트가 옛날 프로스트도 아니고...."

그러나 고민 따윈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바로 거대 연합이었다.

"...쟤네 미친 거 아니야?!"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어떤 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세 길드는 유스라 왕국 설립 초창기 때부터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길드였으니까.

그럼에도 의외였다.

"잃을 게 너무 많잖아?"

가진 게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은 법.

유스라 왕국 때처럼 얻을 게 있다면 모를까, 이번 퀘스트엔 보상이나 전리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까. 은혜를 갚는 거 아닐까?"

유스라 왕국, 국왕 하쿠나.

그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플레이어, 이호열.

호열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움직인 게 확실하다.

플레이어들은 추측했다.

-"가슴 속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툭툭─

남태민이 가슴팍을 두들기기 전까지는.

"...긍지? 저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그러나 거대 연합은 시작에 불과했다.

프로스트에서 포착된 또 하나의 움직임.

"자극이 될 것 같아서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천하통일과 더불어 유이(唯二)의 초거대 길드, 샤이닝.

그들 또한 성전에 참전을 결정한 것이었다.

아니,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여신교단 성지 뮤온.

유럽 연합 최강의 길드, 보헤미안.

길드 마스터, 가이버는 카메라 앞에서 능청을 떨었다.

"뭐, 사실 아직도 화살 맞은 데랑 뒤통수가 얼얼하지만. 성전에 성기사가 빠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죠. 게다가 빚은 악마 놈들에게 되갚아 주면 되는 거잖아요?"

거대 연합의 참전을 시작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길드는 물론이요, 각자 활동하는 플레이어들까지.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뮤온.

각 지역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플레이어들의 동향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마탑으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현재 마탑 포탈은 플레이어들로 인산인해입니다!"

퀘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포탈로 진입하는 플레이어들.

그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지켜보는 이들에겐 확실히 낯선 그림이었다.

"참나. 플레이어들이 저러는 건 또 처음 보네."

일반인들에게 플레이어란?

단지 플레이어라고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절은 한물간 지 오래였다. 애초에 플레이어들부터가 영웅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득 볼 게 없는데 목숨을 건다고? 진짜?"

"다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긍지가 뭔진 몰라도.... 뭔가 좀 낭만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막말로 류오쥔춘이 퀘스트에 관련됐다고 생각해 봐."

퀘스트에 보상과 전리품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긍지고 나발이고, 자기가 보상과 전리품을 가로채기 위한 개수작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게 당연했으니까. 굳이 류오쥔춘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명, 이호열만을 제외한다면.

그는 부와 명예를 좇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호열은 행동으로 보여줘 왔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을 들이미는 거악의 유혹 앞에서도.

-"어리석지 않은가? 눈을 감는 순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 속의 긍지뿐인 것을."

그 어떤 길드도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프로스트에 꼿꼿한 자세로 진입했던 것도.

정기 업데이트였던, 긴급 업데이트였던.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균열이라면 묵묵히 클리어해 왔던 호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의심은 없었다.

우려는 있더라도.

"...그래, 다 좋아. 이해할 수 있어."

"하씨, 또 뭐가 문젠데?"

"그래서 이 성전에 승산이 있느냐는 거야."

그건 객관적인 걱정이었다.

"이호열,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성지 뮤온. 그리고 우리 같은 플레이어들이 전부 성전에 참전한다고 쳐도. 상대는 아르카나 대륙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들이라고!"

그러나 그러한 우려 또한 기우에 불과했으니.

마탑의 로비.

포탈에서 머뭇거리던 플레이어들에게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떠오른 것.

"...!!!"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자타공인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그렇기에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마탑.

그들이 성전에 참여한다는 뜻.

"...잠깐, 이러면 말이 완전히 달라지잖아?!"

가능성이, 승산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

원로 마법사, 유그위드 뤼펭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얼마 전에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까짓 규율에 얽매여 소중한 것을 다시금 잃을 순 없겠죠?"

인자한 미소였지만, 악마들에겐 저것보다 섬뜩한 미소도 없겠지. 유그위드의 말인즉슨,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인 마탑이 성전에 참전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솔직하게 털어놓겠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그랬다.

마탑의 마법사들이야말로 최소 일당백의 전력들이었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을 포함해도 마탑보다 뛰어난 아군은 찾을 수 없겠지.

물론, 용마대전의 승자였던 드래곤들이 있긴 하다만....

'그쪽과는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다.'

아군인지, 적인지도 모르는 최종 콘텐츠와 엮이기엔.

아직은 내 레벨은 한없이 빈약했으니까.

원탁회의 종료.

그와 동시에 내 시야에도 [퀘스트 : 끝나지 않은 성전(聖戰)] 퀘스트가 떠올랐다. 나뿐만이 아니라 마탑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떠올랐겠지.

'모두가 알게 될 거야.'

마탑이 성전에 발을 담갔다는 사실을.

그런 마탑을 믿고 참전을 결정하는 플레이어들도 적지 않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곧장 유스라 왕국으로 향했다.

마탑이 합류하기 전.

그러니까 승산이라곤 쥐뿔도 없어 보이는 퀘스트를 보고도 참전 의사를 밝힌 고마운 이들이 있었으니까.

[속보 : 거대 연합, "긍지를 지키기 위해 참전 결정."]

처음 속보를 확인했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

설마 이것도 [행운]에 포인트를 투자한 덕분인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든든하다.'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의 거대 연합!

앙숙이던 가온과 이나즈마가 어떤 계기로 협력을 하게 됐는지 나야 모르는 일이었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그저 누구보다 먼저 성전에 함께해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으니까.

"과연, 긍지를 아는 이들이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데.

나보다 그랑펠이 흡족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러니까 고마운 만큼 성대한 환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청렴결백.

내 기준에서 환대라고 해도 별건 없었지만.

황금 궁전의 상징.

황금의 원탁.

이내,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호, 호열 씨? 여기 계셨어요?!"

"간만입니다, 호열 상. 계신 줄 몰랐습니다."

"...헉."

휘둥그레진 세 사람의 눈동자.

그렇게 놀랄 것까지 있나.

나는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에 앞서 차부터 한잔하겠는가?"

차라고 해도 300원짜리 녹차에 불과하거늘.

"...넵! 주세요! 아니, 주십시오?! 드디어!"

레오니의 격한 대답에 나는 생각했다.

'과연, 티백 녹차에도 급이 있구나.'

괜히 만족도 별 다섯 개짜리 녹차가 아니었다고.

.

.

.

덜커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찻잔을 들고 있던 세 사람이 화들짝 놀라서 켁켁거렸다.

...우리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 148화. 주제를 알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