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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화. 작명 (1)

뮤온의 외곽.

마르셀로와 선임 마법사 몇몇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희도 합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경의 신호가 있기 전까진 대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르셀로 수석께서 그러시다면야."

그 계략에 놀아난 경험 덕분일까.

뱅그릿은 악마란 족속을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됐다.

악마를 상대하는 건 능력을 떠나 언제나 방심해선 안 되는 일이란 것 또한.

뱅그릿은 과거, [깨진 차원의 틈]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자신은 악마의 의도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나만 그랬던 거라면,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여기겠지만.'

원로 마법사들도 악마 탓에 판단력이 흐려지시지 않았던가.

'이호열 수석께서도 조심하셔야 할 텐데.'

그의 능력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었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상대는 악마였다.

그것도 여신교를 농락한 악마.

뱅그릿이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하자 마르셀로가 말했다.

"경의 뜻이 어떤지를 몰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

"그리 걱정할 건 없을 겁니다."

뱅그릿과 달리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으니까.

호열이 마법사가 아닌 악마 사냥꾼이란 사실을.

악마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유일한 천적 말이다.

"이건 경의 전공분야나 다름없으니까요."

...악마를 상대하는 전공?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람.

뱅그릿의 미간 주름이 더욱 깊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

쿠구구궁─

진동과 함께 저 멀리.

뮤온의 중심부에서 솟구치는 촉수가 보였다.

그 크기가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았다.

"가증스럽군."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는 감정을 억눌렀다.

마탑에 마수를 뻗쳤을 때부터 짐작은 했거늘.

아르카나 대륙은 정말 악마들에게 놀아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완벽하게 감정을 추스르는 건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 바람에 마티스의 반지가 검게 물들었다.

"우리가 저들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군요."

마탑이 미리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르카나 대륙이 이 지경으로 엉망이 되진 않았을 터.

분노를 곱씹는 마티스에게 마르셀로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바로 잡는 것 또한 저희 몫이지요."

그랬다.

원래라면 저 악마를 처분하는 것 또한 자신들의 몫이었거늘.

어째서인가, 이번에도 경께서 나서고 말았다.

'알 순 없지만, 행동에 뜻이 있으신 거겠지.'

그러나 이내 마르셀로는 호열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느샌가 달라진 성기사들의 눈빛.

이윽고 죽음을 불사하고 악마에게 달려드는 그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떠오르는 호열의 생각.

'...설마 여신교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신가?'

성녀에게, 악마에게 농락당한 여신교가 최후의 긍지를 지킬 수 있도록. 경께서는 저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악마를 처분할 기회를 주신 것인가...!

마찬가지로 호열의 뜻을 짐작한 마티스.

그가 마르셀로와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내는 감탄하듯 말을 뱉었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께서는 정말이지...."

"저희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고를 하시는군요."

마르셀로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다.

'내가 만약 경이었다면....'

악마에게 놀아났다고 해도, 성전에서 악크샨을 배신한 여신교는 경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호열은 어떠한가?

'원수, 악마의 앞에서도 여신교의 긍지를 생각해 주시다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이 아니었다.

경께서는 마탑의 원죄 또한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으셨던가.

그러니까 이해를 하지 못한 건 뱅그릿과 화염마법학 벤쉬 윌리엄 선임뿐이었다.

둘 또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 답답함을 참다 못해서 작게 속삭였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걸까요?"

"차원이 다른 사고? 그것도 못 알아듣는 우린 뭐가 되는 거지?"

"...그냥 솔직하게 여쭤보는 게 어떨까요?"

"진심입니까, 뱅그릿 톰 선임?! 제가 지난번에 마티스 선임과 균열에 진입해서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으면서요?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숨이 막혀서!"

*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그와의 대화에서 새롭게 알아낸 사실은 딱히 없었다.

그를 포함해서 뮤온의 모든 이들은 네프리피트의 [상태이상]에 휘둘렸던 것뿐이었으니까.

달칵─

[30분간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해하네."

그래, 까라면 그저 깔 수밖에 없었단 거겠지.

마탑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뮤온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성전에 관심조차 없던 마탑과 다르게.

뮤온은 성전에 발을 들였다가 뺀 모양새였으니까.

마탑보다 심하게 악크샨의 뒤통수를 때린 거긴 하다만.

'내 뒤통수는 아니잖아.'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

거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그랑펠의 성격.

마지막으로 무거운 긍지가 있었으니까.

"악크샨은 그저 최후까지 긍지를 지켰을 뿐."

성전(聖戰).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은 악마와 싸우다 전멸했다.

설령 악마의 계략에 빠져 절멸했다고 한들.

그들의 긍지가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동정하는 것?

적어도 악마 사냥꾼들끼리는.

서로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랑펠의 긍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물론, 나의 복잡한 심경을 탈림은 알 수 없으니.

탈림에게 나는 그저 너그러운 악마 사냥꾼으로 보이겠지.

그 증거로 탈림은 감격해 말을 이었다.

"저희 여신교는 더 이상 악마에게 놀아나지 않겠습니다. 성녀의 정체를 간파하신 경이시라면. 저희가, 여신교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알고 계시겠지요."

[천적관계]가 있는 이상.

나아가야 할 방향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역시나 과대평가다.

그러나 과대평가 또한 내게는 자연스러운 것.

당연히 뻔뻔하게 납득해 주신다.

탈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이제라도 여신교는 지키지 못한 악크샨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지키지 못한 악크샨과의 약속.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여신교가 이 성전(聖戰)에 동참하겠습니다."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현실에도 악마들의 마수가 뻗쳐오고 있는 현재.

과거 성전의 연장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여신교의 전력을 직접 눈으로 파악했으니까.

'막막했을 거야.'

수만의 성기사.

그런 성기사들을 보조하는 사제들까지.

만약, 그들이 [상태이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면....

전개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을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런 여신교가 성전에 동참한다는 것.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에 이어서.

아르카나 최대의 종교 여신교까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프로스트. 그리고.'

주고받는, 비즈니스 관계로 얽힌 길드들까지.

내 지원군들이 많아도 이렇게 많다.

그러니까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진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호열.

너만 잘하면 된다, 그랑펠.

'...제발 겉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대화는 그쯤에서 정리했다.

뮤온이 현실에 업데이트된 이상.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이야 충분했다.

여차하면 지금처럼 포탈을 발현하면 되는 일이다.

"저, 탈림 에베르는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엔 내가 차를 대접하지."

"...감사합니다. 이호열 경."

...아니, 나야말로 감사하지.

여신교에 마력 재생력을 향상시켜 주는 비약초 차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다면 지금쯤 내겐 포탈 하나 발현할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또 한 가지 교훈을 얻었군.

경지급 마법은 함부로 흉내 내는 게 아니다....

내 주제를 알자.

다짐하면서 나는 포탈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좌표는 마탑.

네프리피트 사냥으로 상승한 레벨.

지나간 메시지.

획득한 아이템까지.

나름대로 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

.

.

포탈 너머로 사라지는 호열을 보며.

탈림은 작게 읊조렸다.

"모든 일에 여신의 지혜가 함께하시기를."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들리게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러나 탈림이 호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저는 믿습니다."

탈림은 창밖 너머의 인파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성자의 눈물'에 몰린 이들을.

호열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여신의 기적 같은 게 아니다."

성녀가 악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여신의 기적, 성자의 눈물마저 부정당했을 때.

자신에게 여신에 대한 믿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호열은 말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다."

그 말에 탈림은 혼자 생각했다.

'어쩌면 경이야말로 여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성녀와 성자의 눈물.

거짓에 휘둘리던 자신들을 불쌍히 여긴 여신께서.

호열을 자신들에게 보내주신 게 아닐까, 하고.

탈림은 쓰게 웃었다.

"...경께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시겠지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호열.

그런 호열이 되려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니.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탈림은 작게 읊조렸다.

"허나, 양해주십시오. 경."

그러고는 뮤온을 바라봤다.

한차례 소란이 훑고 지나간 뮤온.

어린 사제들은 충격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자신처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자신의 어깨 위엔 저들이 있었다.

"잠시나마 제가 무너지지 않을 힘이 되어주십시오."

물론, 호열이 버팀목이 되어준 만큼.

자신도, 여신교도 호열에게 더없는 힘이 되어줘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 탈림의 시야엔 여전히 성자의 눈물이 보이고 있었다.

"우선 여신의 기적, 그 진실을 밝히는 것부터."

*

그나저나 그런 우연이 있을 줄이야.

'착각할 만하지.'

성자의 눈물.

샘, 밑바닥에 깔린 '드뮨 월석'이 '아리아 이끼'의 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을진 상상도 못 했는데. 자연 상태에선 특별할 게 없는 아리아 이끼였으니까.

진가가 밝혀지지 않은 현재.

그 가치는 효과에 비하면 거저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지금은 구하려고 구할 수가 없다.

내가 진작에 모조리 사들였거든.

왜, 우리 최 여사님 생일 선물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최 여사님에게 보냈던 비약초 티백.

그게 바로 아리아 이끼로 만든 티백이었으니까.

그 효과엔 어째 여사님보다 누나들이 더 난리였다.

대체 그 차 이름이 뭐냐고.

농담이 아니라 엄마랑 같이 밖에 나가면 4자매로 착각을 받을 정도라며. 그 기억을 떠올리니까 귓가에 3호, 웬수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어우 시끄러.'

어쨌든, 탈림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리아 이끼의 효과가 밝혀지는 일은 없겠지.

플레이어들 입장에선 그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 효과를 가진 아리아 이끼를.

헐값에 팔아넘겼단 사실을 알게 돼봐라.

'나 같으면 억울해서 잠 못 잔다.'

귀철도 그렇고.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있다는 게 아니다.

물론, 아는 게 힘이라고.

나는 아리아 이끼를 잔뜩 쌓아두고 있었지만.

"연구에 재료는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청렴결백의 화신.

모든 건 탐욕이 아니라 『비약초의 육성법』.

연구의 일환이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90]

[능력치]

근력 : 65 / 민첩 : 70 / 마력 : 335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10]

성녀, 프레이자.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를 사냥함으로써 10레벨이 상승했다.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든다.

쏟아지는 과대평가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그래도 봐줄 만한 레벨이 됐다는 게.

'랭킹권이다.'

그래서인가.

랭커들이 했던 말도 이해가 된다.

레벨 업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요구 경험치가 너무 많다고 징징대던 그 인터뷰들.

나도 절대적으로 공감되는군.

딱 10레벨이라니.

그러나 수만 명의 성기사들과 경험치를 나눴다고 생각하면 또 괜찮은 수치였다.

물론, 수만의 성기사가 처치에 기여를 했다고 해도. 가장 높은 기여도를 쌓은 건 나였다.

내가 말이야.

괜히 유사 경지급 마법을 발현한 게 아니란 말이다.

[악에 물든 의식용 로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네페르피트를 쓰러트리며 획득한 악마의 아이템.

유니크 등급이지만 제한이 걸려있지 않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꽝일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마법부여에도 발을 걸쳐두지 않았던가.

'효과만 쓸만하면 좋겠는데.'

추출해서 다른 아이템에 부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 악마의 아이템이라고 하니까.

불현듯 마탑에 뜯겼던....

아니, 대여해줬던 악마의 아이템 하나가 떠오른다.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 적용.]

[설명 : 흡혈귀의 혈액으로 가득 찬 오브다. 마력과 접촉할 때마다 그 혈액이 터져 나와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아스큐라를 처치하고 획득했던 그 아이템.

아득히 먼 수치라고 여겨졌던 400레벨까지도 10레벨밖에 남지 않았구나. 장하다, 이호열. 여태까지 어떻게 긍지에 가라앉지 않고 잘도 버텼구나.

'400레벨 달성하면 바로 회수해야지.'

과거에도 생각한 거지만.

추가 피해 적용 효과는 그 범용성이 무궁무진했으니까.

나는 인벤토리 속 귀철 또한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귀철까지 그럴싸한 장비로 제련할 수 있다면.'

나 스스로 거물이 되는 건 몰라도.

장비 하나만큼은 거물급으로 맞출 수 있을 텐데.

물론, 벌써 군침을 삼킬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귀철을 어떻게 써먹을까에 관한 고민은.

드워프들과 조우한 뒤에 해도 늦지 않겠지.

좋아.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했을 때였다.

문득, 양피지에 글씨가 떠올랐다.

스스스─

.

.

.

"후우─"

정령학파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는 힘차게 깃털펜을 내려놓았다.

...저질러 버렸다!

그러니 뭐 어쩌겠는가?

우걱우걱─

상위 정령의 계약자.

그 계약 탓에 형편없는 신체의 연비.

대식가, 페이얀은 습관처럼 쿠키를 씹었다.

"마르셀로 수석. 우물우물. 전 당신만 믿어요. 우물우물."

분명, 걱정만큼 매정하신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겠다?

걱정하면서도 깃털펜을 끄적인 이유.

모든 건 이호열 수석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다.

이호열 수석이 정령과 계약했다는 그 소문!

정령학의 선임으로서 놀라긴 했다만, 그 대화 주제만으로 호열에게 편지를 남긴 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소문. 그래, 파이어 드레이크에게 들은 아르카나 대륙의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힘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셨더라면...."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운 그 정령은.

분명 엄청난 '격'의 상승을 이뤘어야 했다.

아르카나 대륙, 모든 정령이 알아차릴 정도의 격의 상승 말이다.

그러나 페이얀은 균열에서 소환한 자신의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거라도.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이게 도움이 될지, 실례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페이얀은 변명하듯 입을 우물거렸다.

"막 번거로운 것도 아니고. 정령에게 새로운 이름만 지어주셔도 그 격이 상승하는 거니까. 세계수의 발아라니. 그 정도 업적이면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고유 정령'이 될 게 분명한데. 게다가 이름을 붙이시지 않을 특별한 이유 같은 것도 없으실 테니까...!"

◈ 114화. 작명 (2)

일단락된 성지, 뮤온의 사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시한폭탄이 해제된 셈이었다.

플레이어, 가이버를 공격한 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뮤온을 둘러싸고 때아닌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근데, 거기서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딱!"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마탑의 개입.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개방한 뮤온.

그리고 조금도 예상치 못한 촉수 괴물의 등장까지.

급변하던 뮤온의 상황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성기사들의 돌격ㄷㄷ]

[조회수 : 132,407,117]

수만 명의 성기사들.

그들이 촉수 덩어리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

그러니 덧붙여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성기사들을 손짓 하나로 지휘하는 호열의 모습을.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다니까요?"

"본 사람만 알지. 그 기분."

"마음대로 영상 공개할 수 없는 게 아쉽습니다. 정말."

물론, 영상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호열이었으니까.

아무리 조회수와 어그로에 미친 넷튜버라고 하더라도.

물불을 가려야 할 줄 아는 법.

요즘 같은 때에 마음대로 호열의 영상을 올렸다간 관심은커녕 허락은 받고 올리는 거냐며 역풍을 맞았으니까.

호열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는 호열이 찍힌 영상을 공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을 라이브로 지켜본 이들이 몇 명인가?

그 수많은 플레이어, 시청자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호열, 그는 정말 급이 달랐다고.

"수만 명의 목숨이 내 손에 달린 거 아냐! 나였으면 부담감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을 텐데.... 아주 그냥 행동에 거침이 없으시던데."

"근데 성기사들 없이도 혼자서도 사냥할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더라고요. 그 거대한 촉수 덩어리를 단번에 얼려버리는 거 보셨죠들?"

"그래서 그 스킬 정체가 뭐래요? 엥?! 빙결마법사들도 모를 정도의 고위 마법이라고요? 진짜 끝이 없네. 괜히 수석 마법사가 된 게 아니라는 건가."

그뿐만 아니었다.

전투가 끝난 뒤.

호열과 여신교의 성기사단장이 나눈 대화도 화제가 됐다.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인류에겐 적대적인 말을 쏟아내던 그가.

호열 앞에서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은 것도 모자라서.

"딱 목소리 깔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

-아니 그냥 책임만 진다고 한 게 아니었음ㅋㅋㅋ

-ㄹㅇ 그 책임 심판이라고 해도 받아들인다고 했지??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거임???

책임, 더 나아가서 심판을 받겠다고 선언하다니.

그 파장은 호열이 보여준 전투보다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여드는 인파 탓일까?

호열과 탈림은 자리를 옮겼으니까.

그 뒤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 플레이어가 해냈군요."

호열이 해냈다는 것.

왜, 지금만 하더라도 호열이 없었더라면.

나서서 촉수 덩어리를 처치하지 않았더라면.

뮤온의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목숨이 지금처럼.

안전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남태민, 레오니, 히사기였다.

"봤지? 호열 씨 걱정할 시간에 우리만 잘하면 된다니까!"

"저 수준을 따라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 닥치고. 휴식 끝. 이렇게 쉬고 있을 여유는 없어."

"...뭐야, 저거? 방금까지 제일 난리를 치더니."

"난리? 누가? 언제? 내가?! 지랄. 아니거든?"

현재 호열에게 자신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

호열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그들은 뮤온 사태 속에서도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제시 하인네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런 빙결 마법까지! 역시, 대단하세요!"

아는 만큼 보이는 호열의 경지.

정작 제시보다 유난을 떠는 건 고깔모자였다.

고깔모자가 들썩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벌써 경지에 올라섰을 줄이야. 제자야, 갈 길이 멀구나.

또한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감하는 이들도 있었다.

AAU였다.

그들은 지부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뮤온 사태로써 확실해졌습니다. 아르카나의 업데이트는 우리 AAU가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습니다."

흐르는 침묵─

사실 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던 몬스터들이 등장했을 무렵부터.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균열에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했을 때부터겠지.

누군가 쓴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벅차했던 저희인데. 또 하나의 세계가 된 지금, 아르카나 대륙의 흐름을 예상하는 건 불가능하죠."

AAU는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능함이 더욱더 뼈저리게 다가왔다.

또 누군가 말했다.

"공식 발표가 머지않은 것 같군요."

공식 발표.

AAU의 한계를 세계에 알리는 것.

그 여파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지금만 하더라도 AAU의 정보만 기다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상당했으니까.

그러나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울했던 회의가 끝났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는 심호흡했다.

"...인류에게 살아날 구멍이 있나."

그는 아르카나의 개발자였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 당시엔 서비스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서비스가 예정됐던 콘텐츠들은 많았다.

많은 예시를 들 것도 없겠지.

단 하나, '용(龍)'.

그래, '드래곤'만 하더라도.

"언젠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어?"

균열에든, 현실에든 말이야.

박민재는 그 드래곤에 맞서는 인류를 떠올려봤다.

시뮬레이션을 그려봤다.

"괜히 빌어먹게 세게 개발해서는."

후우─

그럴수록 나오는 건 깊은 한숨뿐이었다.

플레이어들이 레벨업을 하고, 인류가 군대를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남는 건 패배. 혹은 패배와 다를 바 없는 승리뿐이겠지.

그러나 박민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목격한 살 구멍.

유일한 가능성 한 가지를.

"...이호열."

그건 바로 플레이어 이호열이었다.

그에 관해선 AAU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없었다. 이호열의 레벨은 물론, 그의 클래스까지도. 그러나 그가 보여준 행보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쪽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뮤온 사태만 하더라도.

호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사람이라면 찰나의 감정은 숨길 수 없는 법. 갑작스러운 촉수 덩어리의 등장에도 호열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던 게 그 증거겠지.

"나 같은 지독한 현실주의자한테도 희망을 품게 하는군."

사람들이 어째서 이호열에게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내, 박민재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래. 희망이고 뭐고 되는 데까진 해봐야 하지 않겠어?"

그래.

가능성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결국엔 모 아니면 도였다.

박민재 또한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준비가 됐단 말이었다.

그런 박민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했다.

유일한 희망, 호열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

그러나.

'AAU는 이미 각국의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AAU가 전면으로 나설 수는 없다. 게다가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만 내부 정보를 제공한다는 건.... 설령 그게 이호열이라고 하더라도. 한국을 견제할 목적으로도 반대할 이들이 넘쳐나겠지.'

그럼에도.

박민재는 다짐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개인, 박민재의 긍지를 건 일탈이라는 거지."

물론, 그 일탈은 첫걸음부터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나저나 이호열 씨랑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자라서....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게 될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그 차가운 눈빛.

까칠한 태도.

끈질긴 기자들도, 넷튜버들도 벌벌 기는 이호열.

박민재는 결국 또 한 번 앓는 소리를 뱉어냈다.

"빌어먹을 팔자. 반 백 살 넘어서 예절 교육부터 다시 받게 생겼군. 어떻게 몸에 밴 습관부터 좀 빼야겠는데...."

문득, 그가 지나가던 두 사람을 붙잡고는 물었다.

"야, 수겸아. 그리고.... 그래! 성현준 사원."

"네? 박 지부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내가 꼰대냐?"

"...예? 갑자기 그, 그게 무슨?"

"어허. 묻는 말에만 네, 아니오로. 내가 꼰대냐고."

물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 법....

*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조금 억울하다.

수면 시간도 길지 않은데.

어째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뚝뚝─

장담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육체 단련 때문일 거다.

클래스 퀘스트는 바뀌어도, 언제나 그 첫 번째 목표를 차지하고 있는 목표 말이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의 절멸.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전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

●3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2,000회 (성공)

●턱걸이 1,0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500회 (진행 중)

[근력], [민첩] 스탯도 레벨과 같았다.

절대적인 수치가 높아질수록.

1포인트를 올리기 위한 훈련량이 달라진다는 뜻.

목표치는 언제나 숨이 넘어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가뿐하군."

가뿐하긴 개뿔이 가뿐하시다.

오늘도 몇 번이나 기절할 뻔했으면서 그놈의 허세는.

그나마 이전과 다르게 나아진 건 약빨.

비약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랄까.

달칵─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적절한 휴식이 근성장에도 도움이 되는 법이지."

시원한 얼음물도 모자랄 판에 쓰고 뜨거운 차라니.

이게 죽을 맛이구나 싶다.

그래도 몸에 좋은 거니까 꾹 참아본다.

이거라도 먹어야지 몸이 버텨줄 테니까.

나는 숨을 고르면서 다음 퀘스트 목표를 확인했다.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의 실체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로 위장한 악마를 사냥하라. (성공)

●마탑의 원죄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와 관계된 목표는 전부 성공했거늘.

[악크샨의 절멸]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아직도 악크샨의 뒤통수를 친 세력이 남아있다는 거겠지. 문득,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 사냥꾼들, 다들 하나같이 성격이 괴팍했지.'

왜, 그 말이다.

당신이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 훈련장에선 악마가 따로 없었지.'

악마 사냥꾼들에게 그것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친절한 NPC와 비교되던 악마 사냥꾼들의 태도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으니까.

'그런 걸 멋있다고 생각하다니. 취향 참.'

물론, 그 당시 내겐 그런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단순히 밉보여서 뒤통수를 맞았다?

아무리 혹시나 해도 있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건.

"이 또한 하찮은 족속의 농간이겠지."

결국, 기승전악마 때문이겠지.

아르카나 대륙 최대 종교, 여신교의 성녀부터가 악마였으니까.

악마의 마수에게서 안전한 지역과 세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휴식은 길지 않았다.

달칵─

내려놓는 찻잔.

...마저 채워야지, 버피 테스트 500회.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한시라도 발버둥을 멈춰선 안 되는 법이다.

.

.

.

물론, 밤낮으로 고생하는 내게도 희소식은 있었다.

정령학파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가 양피지로 전해온 서신.

그 글줄에 뜻하지 않게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독성 포자의 쉼터]

[적정 레벨 : Lv.350]

[붕괴 진행도 : 0.1%]

나는 균열에 진입했다.

업데이트에 명시되지 않는 일상적으로 생성되는 흔한 균열.

내 레벨과 적정 레벨을 고려했을 땐 출몰하는 몬스터 수백 마리를 사냥해도 레벨 하나 올리기 어렵겠지.

그러나 내 목적은 레벨 업이 아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하이엘."

그 순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마력.

고오오─

이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님프였다.

그것도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한 자태를 자랑하는 님프.

그랬다.

나는 페이얀이 전해온 정보대로 님프에게 이름을 붙였다.

내가 알고 있는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으니까.

'정령에게 이름이라는 게 그런 의미가 있을 줄은 몰랐지.'

페이얀의 말에 따르면.

정령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릇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님프를 계약 후에도 계속해서 님프라 부른 탓.

님프는 세계수의 발아라는 엄청난 업적을 세워 {고유 정령}으로 거듭날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겉만 그럴싸하게 변화한 게 전부였단 소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나도 모르게 안도했었지.

'내 마력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그 안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나는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해괴한 이름을 지어낸 나의 작명 센스를.

님프가 고아한 인사를 건네온다.

"하이엘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랬다.

'하이엘'.

정확하게는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그랑펠 못지않게 긴 풀네임.

그것이 바로 내가 붙여버린 님프의 이름이었다...!

...젠장.

하이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건만. 당연하게도 내색은 없었다.

나는 뻔뻔하게도 하이엘에게 용건부터 물었다.

"아르카나 대륙의 정황은 어떠한가."

곧장 이어지는 하이엘의 보고.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이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이엘이 전해온 소식에, 불현듯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사건이라면 어쩌면....'

...다음 정기 업데이트로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

◈ 115화. 마왕성 (1)

드워프들이 조금 더 본격적으로 '활동'에 돌입했다는 소식.

여기서 활동은 당연하게도.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이 경우엔 쓸어버린다는 표현이 맞겠군.

하이엘은 섬뜩한 말을 고상하게도 뱉어냈다.

"비행정에서 쏟아지는 불길이 악마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렸습니다."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 처음으로 기계탑을 목격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드워프들의 기술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사실 백 마디 말보다 천하의 마탑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

한마디가 더 와닿는 설명이겠지.

그러나.

"그에 따라 악마들의 저항도 거세졌습니다. 새로운 세계수의 출현 이후. 달라진 아르카나 대륙의 기세를 다시금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어지는 하이엘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왕이 날뛰기 시작했단다.

그것도 동시에 셋씩이나.

"세 마왕들이 서로 힘을 합하거나 연대하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힘이 정점에 이른 상황. 드워프들의 비행정 또한 하나의 마왕 앞에서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반격의 서막을 올리고.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시키고.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웠다고 한들.

아르카나 대륙은 여전히 악마의 손바닥 위.

지금도 보다시피.

고작 마왕 셋이 움직였을 뿐이거늘.

아르카나 대륙에 불던 반격의 바람이 잦아들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 마왕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대격변 이후 처음이라는 것을.

'그쪽도 쫄리는 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너희 실수했다.

마왕, 그것도 한 번에 셋씩이나 부활해 준 덕분에.

이건 영락없이 '대사건'이 됐으니까.

아르카나 대륙을 뒤흔들 만한 대사건!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대사건들엔 어떻게든 플레이어들이 개입할 수 있었거든. 나는 아득한 기억.... 어디 보자, 10년 하고도 수년 전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당시 제국의 정복 전쟁만 하더라도.'

그 당시엔 대사건이었으니까.

악크샨에 처박혀 있던 나를 포함.

아르카나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주어졌었다.

제국 혹은 제국의 반대편.

선택한 세력에 붙어서 활약하고 기여도를 쌓아 퀘스트가 끝난 뒤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았었지. 그러니까 내가 괜히 설레발을 떤 게 아니란 말씀이시다.

'하나면 몰라도 셋? 무조건이지. 이건.'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정기 업데이트에선 어떤 식으로든 마왕이 등장하리라고.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마왕은 셋이니까.

'어떤 녀석이 걸릴 진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마왕의 수준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데카라비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는 것 정도겠지.

데카라비아는 엄연하게 현실에 소환된 프로스트에서 강림했었다.

현실이 아무리 시궁창이라도, 이미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아르카나 대륙보다는 못하겠지.

아르카나 대륙에서 부활한 마왕이야말로 진짜 마왕의 포스를 뿜어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악마든, 마왕이든. 상관없다."

당연하게도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그런 마왕이 하나가 됐든, 셋이 됐든. 상관없다."

그랑펠의 설정?

물론, 영향이야 있겠지.

그러나 그 설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동안 나도 성실하게 발버둥을 쳐왔단 말씀이시다.

너희가 아르카나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것보다도 훨씬 더!

[권한] 기능을 활성화한 유스라 왕국과 프로스트.

마탑.

그리고 여신교의 성지, 뮤온까지.

그 확실한 빽....

아니, 근거들이 내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떨구지 않는 고개.

반듯하게 세운 허리.

당당하게 편 어깨까지.

내가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태연하게 말을 끝맺었다.

"내겐 사냥감에 불과하니까."

계약 관계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는 것인가.

하이엘이 진심을 담아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 또한 받은 이름에 부족하지 않은 결과를 보이겠습니다."

...마음은 알겠다만.

이름을 붙여준 건 그만 언급하는 게 좋겠다.

특히나 타인에게 그 풀네임을 말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까지 사사로이 신경 쓰는 성격은 되지 못했으니.

나는 곧장 해야 할 일에 돌입했다.

해야 할 일이라고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하다.

'균열에 진입했으면 클리어하고 나가야지.'

다음 정기 업데이트 때까지도 며칠 남지 않은 지금.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적다고 해도 티끌 모아서 태산이 되는 법이다. 게다가 이 균열에서는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꽤 눈에 띄었다.

[독성 포자의 쉼터]

독약의 재료가 되는 맹독 식물부터.

그 독초(毒草)들 사이에서 자라는 희귀한 비약초까지.

그래, 역시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을 점검해두는 편이 옳겠군.

적정 레벨 350, [독성 포자의 쉼터] 정도면.... {고유 정령}으로 거듭난 하이엘의 전력을 살펴보기에 적합한 수준이지 않을까.

"하이엘, 길을 열 수 있겠나?"

무엇보다 이런 수준이라면 [천적관계]가 발동하지 않아도 나 혼자서도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악마 사냥꾼이란 나사 빠진 클래스라도 390레벨을 허투루 먹진 않았단 거지.

그런데.

"뜻대로 길을 열겠습니다."

...뭐냐, 이거.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하고 말았다.

무언가 대단한 행동을 한 아니었다.

하이엘은 그저 우아한 손짓으로 허공을 가로저었을 뿐이었거늘.

파사삭─

사사삭─

스스스─

일대에 가득했던 [LV.300~LV.350] 식물계 몬스터들이 바스러졌다.

흙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실 솔직하게 기대하기는 했다.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부터가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가. 그 호들갑을 통해서 {고유 정령}이 계급을 초월한 정령이란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으니까.

허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래서 적당히 기대했지만.

그러나 이건 처음에 품은 기대 그 이상이잖아.

하이엘이 입을 열었다.

"이름을 하사받기 전까지는 그저 축복을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면. 이름을 하사받은 뒤엔 축복을 거둬들이는 능력 또한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이엘은 어디까지나 숲의 정령.

'식물 한정으로 유효한 능력이겠지만....'

그걸 참작하더라도 위력적인 능력이었다.

흡족하다.

하이엘의 성장 자체만으로도 흡족하거늘.

나는 저 {자연}에 새로운 개념을 더해 [『{기이}』]로 활용할 수도 있었으니까.

"훌륭하구나."

그랑펠의 높은 기준에서도 합격점이 나올 수밖에.

하지만 이어지는 하이엘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닫았다.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거든.

"하이엘 크리시아드 포시즌 리프. 하사해 주신 이름에 걸맞게. 저는 저들에게 따뜻한 봄이 될 수도, 혹독한 겨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결정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십니다."

참으로 충직하고 든든한 말이었거늘.

저 빌어먹을, 작명 센스....

나는 심히 낯뜨거운 기분이 솟구치고 말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내색은 없다.

나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곧 그 능력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하이엘."

이런 전력이라면 곧 직면하게 될 대사건.

마왕과의 전투에서도 하이엘은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과거를 잊기 위해선.

결국, 현실을 충실하게 사는 것밖에 없다.

나는 하이엘이 연 길로 걸음을 옮겼다.

또각─

*

프로스트.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스트엔 활기가 넘쳤다.

피와 시체가 즐비했던 거리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모험가들로 인산인해였다.

"물론, 그 풍경이 낯설기는 하다만."

프로스트의 성채.

절차에 따라서.

프로스트의 영주 대행 업무를 수행하던 하르콘은 잠시나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프로스트의 전경을 바라보게 될 줄이야.

"이것도 슬슬 적응되는군."

그래, 낯선 풍경조차도 적응되고 있었는데.

어째 뻐근한 몸은 좀처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르콘은 괜히 어깨를 돌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네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거늘.

책상에 앉아 깃털펜만 끄적거리고 있었으니까.

좀이 쑤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 선에서 처리하지 못하면 경에게 일을 떠넘기게 되는 거니까."

호열에게 또 그런 민폐를 끼칠 순 없는 노릇.

그런 의미에서 하르콘은 호열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하르콘은 호열이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 한때나마 지켜봐서 알고 있었으니까.

오전에는 검술 훈련.

오후에는 유스라 왕국의 안건 처리.

밤부터 새벽까지는 마탑에서 연구.

게다가 프로스트엔 모험가들이 가득했으니까.

모험가들을 통해 전해 듣는 이 세계의 소식도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호열의 활약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하루 간격이면 그래도 양반이었지.

고작 몇 시간.

아니, 몇 분 간격으로 호열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어댈 때도 넘쳐났다.

"장담하는데 경은 황제 폐하보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어."

호열과 황제.

둘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하르콘이기에 할 수 있는 말.

그 말에 공감하는 건 하르콘만이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

TV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락키드였다. 그 덩치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뒤에서 보이는 건 반쪽짜리 스크린뿐.

"야! 안 비켜어어?"

그나마 그림자 용병단장, 키치가 있을 땐 다행이었다. 안하무인 그 자체인 락키드라고 할지라도 단장인 키치의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했으니까.

그러나 오늘 락키드는 혼자였다.

"...저것 좀 어떻게 치워버릴 수 없나."

"미쳤어? 저 괴물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

"그래, 오늘은 그냥 얌전한 거에 만족하자."

"아씨. 큰 화면으로 봐야 하는데."

속닥거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

뒤통수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

그러나 락키드에게 그딴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보면 볼수록...."

다혈질, 더러움, 괴팍함 등등.

락키드의 성격에 관한 평가는 갈릴지 몰라도 그 실력에 관한 평가가 갈리는 법은 없었다.

콜로세움의 우승자, 뒷세계의 거인, 전투 기계.... 락키드에겐 칭송이나 다름없는 칭호들이 그 실력에 관한 증거였다.

"미친 양반이시구만."

꿀걱─

내려놓는 커다란 술잔.

천하의 락키드에게도 미쳤다고 인정을 받은 건 당연하게도 호열이었다. 락키드는 스크린 속에서 재생되는 호열의 영상을 지켜봤다.

전투 기계란 칭호답게.

기계처럼 호열과의 전투를 그려봤다.

전투의 조건 설정은 실전과 다름없게.

'특급 암살 의뢰. 표적은 이호열.'

일단, 전투에 앞서서 알카리.

그 노인네에게서 갖가지 포션을 뜯어내야겠지.

온갖 속성 저항 포션을 그것도 최상급으로 구해야 하니까.

시작하기도 전부터 성공 보수가 거덜이 나겠군.

'물론, 마법 저항력을 높인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를 완전히 상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호열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락키드는 호열의 검술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에휴. 씨벌."

몇십 번이고 전투를 상상해 봐도.

도저히 호열에게 이길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호열의 태도였다.

자신감 넘치는 저 오만한 표정.

여유가 드러나는 게.

호열은 아직도 자신의 전력을 드러낸 적이 없는 거겠지.

"근데 기구하구만 그쪽도."

아르카나 대륙과 달리 모험가들의 세계엔 제약이 많았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막대한 힘은 곧 자유나 다름없었지만.

이쪽 세계에서 힘에는 쓸데없는 관심과 책임이 따랐다.

딱히 배운 게 아니라 호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AAU 측은 이른 시일 내에 이호열 플레이어와 접촉...."

타인의 관심과 시선을 즐기는 편인 자신이었거늘.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락키드는 잠깐 상상해봤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 속.

여자가 떠드는 게 호열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면 어떨까?

그러자 저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여러모로 피곤하겠어."

락키드조차 호열이 짊어진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락키드보다 호열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심정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같았다.

그러니까 호열이 보낸 서신이 자신들 앞으로 도착한 순간, 그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하르콘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너무 평화롭다 했어. 내 팔자가 그럴 리가 없는데에에."

키치와 그림자 용병단.

"모든 순간,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길."

탈림과 여신교단 성지, 뮤온.

"기다리던 소식이었습니다."

양피지를 통해 호열의 뜻을 알게 된 마탑까지.

각자 움직이는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서신의 내용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기사단.

아르카나 대륙의 흑막.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

아르카나 대륙의 정점.

하나하나가 거대 세력.

그런 이들이 고작 서신의 내용에 지레 겁을 먹고 내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 내용이 마왕(魔王)과 관련된 일일지라도.

.

.

.

돌아오는 목요일.

아르카나 정기 업데이트 내역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

현실에 마왕성이 나타났으니까.

──────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

그것도 세 채씩이나.

세상은 그제야 AAU의 발표를 재평가했다.

-"이제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의 위협은 끝났습니다."

그랬다.

이건 예측 밖, 규격 외의 업데이트였다.

마왕성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라니.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세계는 곧 알게 됐다.

"...잠시만요. 저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조차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결같은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호열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호열은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시각.

프로스트.

유스라 왕국.

뮤온.

그리고 마탑에서 포착된 움직임.

세계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서, 설마 저들 모두가 이호열 플레이어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개에.

.

.

.

단순한 사냥이 목적이 아니다.

마왕이 전면으로 모습을 드러낸 지금.

필요한 것은 구질구질한 사냥이 아닌 확실한 승전보.

그렇기에 전했던 서신이다.

그렇다.

오늘 나는.

아니, 우리는.

마왕을 압살(壓殺)한다.

◈ 116화. 마왕성 (2)

확실한 승전보.

그를 위해 내게는 착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아니, 착실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르콘 휘하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여신교단.

마탑.

이유를 불문하고, 나를 따르는 아군에게 밑천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간만에 마탑, 가넷 홀에 들렀다.

비로소 390레벨.

받는 과대평가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겠다만.

'몇 달 전에 비하면 성장했지.'

가넷 홀의 마도구를 둘러보고 있자니.

처음 가넷 홀에 들렀을 때가 떠오른다.

레벨 제한 때문에 군침만 질질 흘리다가 결국, 100레벨 제한짜리.

이 [육망성 브로치] 하나를 챙겨서 나온 게 고작이었지.

그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선택지가 많아졌다.

"이호열 수석님께서 마지막이시군요."

가넷 홀을 관리하는 숙련 마법사.

그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그러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디 수석님의 안목에 맞는 마도구가 남아있길 바랍니다."

가넷 홀의 마도구야.

내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 대부분이거늘.

하지만 나는 곧장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목적은 마왕을 압살하는 것.'

나는 마르셀로를 포함한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에게 그 계획을 전달했다.

내 뜻은 정확하게 전달됐는지. 그 이후로 양피지엔 [마도구 대여]에 관한 글줄이 끊임없이 떠올랐었다.

'다들 어마어마한 마도구를 빌려 가셨군.'

[환상의 황금상].

[소형 마력 태양].

[대현자의 지팡이]까지....

대충 둘러봐도 굵직한 마도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선임 마법사들이 대여해간 거겠지.

분명 사용할 수 있어서 대여한 걸 텐데 말이야.

나는 보이지 않는 스무 점의 마도구를 대충 떠올렸다.

'그중 레벨 제한이 가장 낮은 게 800레벨이었으니까.'

선임 마법사들의 레벨은 최소 800레벨이라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또 한 번 격차를 깨닫는다.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했거늘.

'하늘과 땅 차이구나.'

더군다나 나는 카림제바와 세니오스.

그리고 그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상위 마왕의 존재까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늘과 땅. 그리고 그런 하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외천(天外天)의 존재들까지.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군.'

원대해도 너무 원대한 목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기가 떨어질 법도 하겠지.

그러나 내가, 그랑펠이 어디 평범한 사람이던가.

"나쁘지 않군."

천외천의 하늘조차 찌를 수 있을 듯한 드높은 긍지!

덕분에 나는 태연하게 대여할 마도구를 고를 수 있었다.

어차피 선임 마법사들이 대여한 마도구들은 390레벨에 불과한 나로서는 착용조차 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으니까.

"이걸로 하지."

나는 내 수준에 맞는.

그나마 착용이 가능한.

총 세 점의 마도구, 아이템을 대여했다.

[돌개바람의 증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80]....

반지, 의복, 그리고 완드.

그랑펠의 심미안에도 부합하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레벨 제한의 아이템은 그렇게 셋 정도였다.

내가 선택한 마도구에 숙련 마법사는 흠칫한 눈치였다.

"...정말 이 마도구들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걸 고르고 싶어도 레벨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

물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

가슴 속에 긍지가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나는 뻔뻔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

이내, 내게 쏟아지는 존경 가득한 시선.

어떻게든, 오해한 게 분명하거늘.

그 시선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심히 민망하구나....

.

.

.

그러나 그 수치심과 별개로.

그랑펠의 안목은 대단했다.

그 증거가 상태창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390]

[능력치]

근력 : 67 / 민첩 : 73 / 마력 : 350 / 행운 : 6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0]

[심미] 스탯이 상승했다.

아마도 [명품] 아이템을 추가로 두 점이나 착용한 덕분이겠지. [下]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던 스탯이 상승해서 좋기는 하다만....

그를 체감하기란 제대로 된 마법을 발현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안달 낼 필요는 없었다.

──────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신규 균열, '마왕성'이 추가됩니다.

──────

예상했던 그대로.

업데이트 내역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것도 셋씩이나.

뭐, 이런 최악의 상황조차 예상했기에 놀람은 없었다.

나는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깃털펜을 들어 양피지에 휘갈겼다.

스스슥─

──────

지금부터 절차에 따라 마왕을 압살한다.

──────

*

[마왕성] 균열.

붕괴 진행도는 실시간으로 치솟고 있었다.

평범한 균열이 기껏해야 0.1퍼센트씩 붕괴도가 상승하는 시간에 마왕성 균열은 그 10배인 1퍼센트씩 붕괴도가 상승하고 있는 탓이었다.

"...이런 붕괴 속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속에서 얼마나 날뛰고 있다는 거지?"

"균열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힘이라는 건가?"

수많은 우려 속에서.

떠오른 추가 업데이트 내역.

거기엔 마왕성 균열의 적정 레벨이 명시되어 있었다.

[운율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방종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수렵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50]

"...!!!"

그 내역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게 아니면 내 눈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쓸데없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수치였다.

"800레벨짜리 균열이라고? 저런 걸 대체 어떻게...?"

[깨진 차원의 틈] 균열과는 상황이 달랐다.

긴급 업데이트와 정기 업데이트의 차이.

확실히 버그 같은 게 아니란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경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적정 레벨에 이어서 마왕성의 주인.

마왕들의 레벨까지 떠오른 것이었다.

[마왕, 암두시아스 : Lv.800]

[마왕, 키마리스 : Lv.820]

[마왕, 플라우로스 : Lv.850]

"이런 미친."

그야말로 마왕(魔王).

그 강림만으로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들.

셋 중 레벨이 가장 낮은 암두시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인류는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세 명의 마왕 중 최약체에 불과하다니.

"...선배, 지부장님?"

성현준.

윤수겸.

그리고 AAU 한국 지부장, 박민재.

그들 또한 그 절망적인 업데이트 내역과 마주했다.

성현준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 그래요! 뭐, 이번 마왕성은 어떻게 핵폭탄을 투하해서라도 막아낸다고 쳐요. 그다음은요? 그 다음 마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저희?"

마왕, 데카라비아.

녀석을 통해 알아냈던 마왕에 관한 정보.

마왕의 모티브는 72 악마이며.

마왕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한다.

서열에 따르면 데카라비아는 최하위권에 속한다.

그 정보는 이번에 등장한 세 마왕에게도 유효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성현준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박민재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괴물들이 고작 67, 66, 64위에 불과하다는 거잖아."

67위, 암두시아스.

66위, 키마리스.

64위, 플라우로스.

그랬다.

녀석들 또한 넓게 보자면.

데카라비아와 마찬가지로 72 마왕 중에선 약체에 속했다.

"지부장님...."

불과 며칠 전, AAU는 주제 파악이란 걸 끝마쳤다.

과거처럼 모든 위협을 예측할 순 없겠지만, 아르카나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지금처럼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그런데.

"...이래서야 저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최소 800레벨, 최대 850레벨.

저 마왕들이 약체라면.

대체 상위 마왕들의 레벨은 어떤 수준이란 말인가?

저건 말 그대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간신히 끝낸 주제 파악조차 부정당하는 현실이었다.

"빌어 처먹을."

박민재는 침음을 삼켰다.

절망, 컴컴한 어둠 속에 처박힌 느낌.

그래서일까.

며칠 전, 자신이 떠올렸던 유일한 살 구멍.

희망인 이호열에게 생각이 닿았다.

'이호열의 예상 레벨은 대략 900레벨.'

플레이어는 플레이어가 더 잘 알아볼 테니까.

록스를 비롯한 랭커들의 평가와 그동안 보여준 행보를 종합해 예측한 이호열의 레벨이었다. 박민재는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의 상식을 끄집어냈다.

'일반적인 몬스터였다면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벨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러나 네임드 몬스터만 하더라도 레벨을 능가하는 강함, 까다로운 패턴이 존재한다. 그 사실을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상대는 마왕이었다.

업데이트 내역에도 명시되어 있듯 보스 몬스터란 말이다.

'제아무리 이호열이라고 해도....'

게다가 레벨이 50에서 100이나 앞선다고 하더라도.

보스 몬스터를 홀로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보스 몬스터에게 도달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겠지.

'시스템상, 네임드 몬스터가 열댓 마리는 붙어있을 테니까.'

잘근─

박민재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데카라비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네임드 몬스터, 악마 군단장은 물론. 어마어마한 물량을 자랑하는 마왕군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포위망을 뚫고 마왕에게 도달한다고?'

하나라면 모를까.

마왕성 균열은 총 셋이었다.

심지어.

'프로스트 때와는 상황도 달라.'

당시 프로스트는 완전히 데카바리아의 영역이 되지 않았었다.

플레이어들에게 떠올랐던 탈환 퀘스트가 그 증거였다.

그러나 이번엔 마왕성, 마왕의 본진에 쳐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략의 난이도가 차원이 다르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굴릴수록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지부장님. 이호열 플레이어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래? 진짜 한결같네."

"호열 씨한테는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건가."

그렇기에 이호열, 그가 움직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들뜬 매스컴과 다르게 자신들은 이미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지 않았던가?

"젠장."

이호열.

그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불편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속속들이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바, 박 지부장님?!"

프로스트, 라이언 하트 기사단.

유스라 왕국, 그림자 용병단.

성지 뮤온, 성기사단.

그리고 마탑까지.

그들이 마치 이호열의 발걸음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박민재는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이게 무슨 치트키를 쓸 수 있는 게임도 아니고."

플레이어로서는 움직이는 게 불가능한 세력을.

"동시에 넷이나 움직이고 있다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림자 용병단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목숨도 거는 게 아르카나의 용병들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

하지만 나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설령 관계도와 영향력이 최대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최우선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란 말이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설마, 이호열이 저들의 신념조차 움직이게 하였다는 것인가?

설마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성현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왕성 균열 클리어."

물음에 박민재와 윤수겸, 두 사내는 침묵했다.

라이언 하트 기사단과 뮤온의 성기사들.

그들의 수준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이호열에게 큰 전력이 되겠지.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할지 몰라.'

역시나 하나라면 모를까.

마왕은 셋이었으니까.

그러니 마왕성 공략의 행방은 그림자 용병단과 마탑에게 달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준은 아르카나의 개발진이었던 자신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하나는 흑막. 하나는 대륙 최고의 무력 집단.'

부디 그 호칭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불편한 감정과 마찬가지로.

그 기도도 오래가지 않았지만.

.

.

.

[운율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균열 붕괴도 : 17.9%]

[보스 몬스터 : 마왕, 암두시아스]

▶ Lv.800

[네임드 몬스터 : 악마 군단장, 블랙혼 및 28마리]

▶ Lv.650

[몬스터 : 악마 군단장 휘하 대략 100,000마리]

▶ Lv.500

[진입자 명단]

[마탑 :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딘 카를 / 화염마법학 선임, 밴쉬 윌리엄 /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

[그림자 용병단 : 2석, 울프 사카린 / 6석, 이자벨마를 / 7석, 알카리]

[여신교 :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휘하 18,000여 명]

지켜보는 이들이 그 자세한 면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마탑과 그림자 용병단에 관해 알려진 정보 또한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장담할 수 있었다.

펼쳐진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허공에서 소멸하는 균열.

균열이 클리어 됐다는 뜻.

믿을 수 없는 건 그 시간이었다.

"이, 이거 꿈 아니죠. 선배?"

그들이 마왕성 균열에 진입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벌어진 광경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박민재가 중얼거렸다.

"...짐작은커녕 상상조차 못 한 수준이었어."

말 그대로.

마왕성이 짓밟힌 것이었다.

◈ 117화. 마왕성 (3)

그림자 용병단.

말석, 락키드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다수와의 전투를 즐기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상황과 마주할 일조차 없다.

하나의 표적을 암살하는 의뢰만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의뢰비를 자랑하는 그림자 용병단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다수와의 전투에 능숙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운율의 마왕성]

서열 67위 마왕, 암두시아스.

녀석의 영역, 균열에 진입한 순간.

악마들이 달려들었다.

"말년에 팔자가 사납군. 안 그래요, 영감님?"

2석, 울프 사카린이 알카리에게 말을 건넸다.

철컥─

물론, 악마가 달려드는 와중에 손은 쉬지 않는다.

그는 양손에 각각 석궁을 장비했다.

알카리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다.

"뭐, 어쩌겠나. 단장의 뜻이니 어쩔 수 없지."

"우리 단장께서 대체 뭘 보셨길래. 이렇게 꼼짝도 못 하시는 걸까."

푸슉─

철커덕─

푸슉─

발사와 장전을 반복하는 석궁.

뻗어 나가는 볼트 하나가 마왕군 열댓을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마왕군의 평균 레벨은 무려 500레벨.

그 방어력을 고려한다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정도의 광경.

그러나 알카리는 눈도 깜짝 않고 대꾸했다.

"그러게. 허구한 날 낮잠만 자고 있으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거 아닌가? 짧게 설명하지. 그 락키드조차 꼬리를 내렸네."

보자, 이게 적당하겠군.

마찬가지로 달려드는 마왕군.

알카리가 품속에서 꺼낸 포션병을 내던졌다.

쨍그랑!

그 즉시 퍼져 나가는 맹독.

"으아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나의 주인이시여!!"

"너무 아파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이 울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마왕군이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녹아내렸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 위력에 놀랄 법도 하거늘.

서로의 실력이야 익히 알고 있는 그림자 용병단이었다.

그러니까 울프는 다른 곳에서 놀랐다.

흠칫.

"...뭐요? 천하의 락키드가요? 인정했다고요?"

말석, 락키드.

그 위치야 말석이지만, 거기엔 사정이 있었다.

만약 자신들이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아르카나 대륙에 머물러 있었다면.

장담컨대 락키드는 자신보다 상석(上席)의 멱을 따고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물론, 그 목이 내 목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와. 그건 조금 충격이면서도 서운한데요? 나도 아직 락키드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우리 자매님은 알고 계셨나?"

6석, 이자벨마를.

"...."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에 변화라도 보이면 모를까.

눈을 완전히 덮은 앞머리 탓에 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알카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에게 대답을 기대한 건가?"

"아뇨. 뭐, 그냥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정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이 독약부터 한잔하는 게 어떻겠나?"

"아니, 영감님. 무슨 놈의 농담이 그렇게 재미도 없고 섬뜩하기만 하십니까?"

이자벨마를.

그녀는 보는 것처럼 말수가 적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 자와는 말을 섞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새로운 주인을 섬길 시간이랍니다."

그녀는 네크로멘서였으니까.

삐그덕─!

울프와 알카리가 쓰러트렸던 시체들이 되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되살아난 망령들은 흔한 스켈레톤 따위가 아니었다.

본 워리어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까지.

소환된 데스나이트의 숫자만 하더라도 한 손가락을 넘겼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다그닥!

다그닥!

그 말을 증명하듯 살아난 강령들은 매서운 속도로 악마를 짓밟아 나갔다. 그 세력을 빠른 속도로 불려 가며 마왕군에 빈틈을 만들었다.

거기에 울프와 알카리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었으니.

"길이 열렸다! 전군 돌격! 여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탈림 에베르.

그가 이끄는 여신교 성기사단에게도 활약할 여지가 생겼다.

탈림은 다시금 감탄을 삼켰다.

'강하다.'

서로의 구체적인 사정까진 알 수 없었으니까.

탈림은 저들이 그림자 용병단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상당한 실력자들이야.'

그러나 그들의 실력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과 성기사들은 협력해서 쓰러트리는 게 고작인 마왕군을, 단 셋이서 쓸어버릴 수 있다니.

'과연, 경의 밑엔 저런 자들이 있는 것인가.'

물론,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탈림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림자 용병단.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감탄 중이었다는 사실을.

"그래도 제가 직접 보진 못했어도 납득은 됩니다. 영감님."

울프는 세 명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수석이면 저것들보다 강하다는 거잖아요."

그런 울프의 시선을 느낀 건.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이었다.

벤쉬는 힐끗, 이자벨마를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아군에 저 정도의 네크로멘서도 있었군요."

감상평은 그 정도로 담백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었으니까.

"뭐, 아직 멀었지만."

마탑에 강령술학 선임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 어떤 수준의 강령술이라고 한들.

자신이 추구하는 마법보다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

게다가 눈앞엔 악마가, 그것도 마왕이 있었다.

마탑을 기만하고,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의 목숨마저 앗아간 주적이 앞에 있었다.

또한, 이호열 수석에게 '마왕 압살(壓殺)'이라는 출탑의 목적까지 들었던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이 수석께서는 확실한 승리를 원하시고 계시네."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는 마왕성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기라도 한 것인가.

생김새부터 다른 악마 군단장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마티스가 말을 이었다.

"버러지들을 짓밟게나, 제군들."

그림자 용병단, 여신교단 성기사들의 활약.

덕분에 마법을 발현하는 데에 방해는 없었다.

그러니 자제는 없다.

전력도 모자라 마도구의 사용까지 허가된 지금.

벤쉬의 손아귀에선 작은 기계구가 떠올랐다.

[소형 마력 태양].

환각마법학 선임, 나스로우도 마도구를 사용했다.

[환상의 황금상].

마티스의 몸에선 이질적인 마력이 솟구쳤다.

겁화가 악마, 악마 군단장, 심지어는 마왕 암두시아스조차 가리지 않고 불태웠다.

끔찍한 환각에 빠진 악마들이 서로의 몸을 찌르고, 난도질했다.

허나, 그들은 그 사실을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티스의 흑마법이 그들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모든 감각을 앗아갔으니까.

그랬다.

[운율의 마왕성]은 그것으로 무너졌다.

알카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클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을 초월한 초인들이었다.

울프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석궁을 거둔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마탑이 대륙에서부터 잠잠했던 이유를 알겠네요."

비유하자면 마탑은 거대한 맹수.

그런 마탑에 비하면 나머지는 일개미, 후하게 쳐줘봤자 병정 개미에 불과했다.

저 맹수들에게 개미가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 그전에 개미들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긴 할까?

그 격차 때문에 보는 시야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

"이제 보니까 현명한 분들이셨네."

맹수가 개미들의 다툼을 중재할 수나 있었을까? 괜히 발자국 한번 잘못 떼었다가는, 그 한 걸음에 수백 마리의 개미가 짓밟힐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

절레절레.

문득, 울프가 내젓던 고개를 멈췄다.

'그런 마탑을 움직였다는 거잖아. 이호열이란 사내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그 눈으로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길래."

마탑을 움직인 것일까?

그러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거 궁금해진 개미는 얌전히 등에 업혀 있어야겠는데?"

이제야 단장, 키치의 판단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무너지는 균열.

쏟아지는 빛.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때도 경험했던 균열 클리어였으니까.

마티스를 포함한 선임 마법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눈치를 살피던 벤쉬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다음 균열로 지원을 가는 건가요?"

스스로 생각해도 마왕성을 일찍 짓밟은 것 같았다.

게다가 벤쉬는 약간이지만 고양된 상태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자유롭게 마법을 발현한 덕분이겠지.

게다가 손에 들려있는 최상급 마도구의 위력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물론.

"경거망동하지 말게. 벤쉬 윌리엄 선임."

"아, 넵."

마티스의 말에 벤쉬는 헉, 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마티스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출탑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네. 절차를 어기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

"무, 물론이죠.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어떻게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벤쉬는 변명하면서도 자신의 운을 원망했다.

선임 마법사가 한두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나 되는데.

왜 자신은 마티스 선임과 붙어있는 일이 이리도 많단 말이냔 말이다.

"저는 단지 걱정돼서.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허나 그 속마음 따윈 알아줄 생각 따위 없다는 듯.

마티스가 벤쉬의 말을 끊었다.

"그런 생각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모독이네."

"...말씀이 옳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나 그냥 닥치고 있자.

벤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마티스는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이호열 수석에 대한 의심이 되겠지.'

이번 일을 계획한 것은 이 수석이었으니까.

마티스에겐 신뢰가 있었다.

그러니까 걱정이나 미련 없이 마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

.

.

[방종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00]

[균열 붕괴도 : 20.1%]

[보스 몬스터 : 마왕, 키마리스]

▶ Lv.820

[네임드 몬스터 : 악마 군단장, 살룻 및 19마리]

▶ Lv.670

[몬스터 : 악마 군단장 휘하 대략 50,000마리]

▶ Lv.530

[진입자 명단]

[마탑 : 치유학 선임, 벨리에 유시아 / 순수마력학 선임, 뱅그릿 톰 / 대지마법학 선임, 마이아 데이안 / 정령학 선임, 페이얀 롯]

[그림자 용병단 : 3석, 핸더슨 / 4석, 핌비 / 5석, 헤르키오라 / 8석, 나디보 / 9석, 드쉐브 / 10석, 락키드]

[라이언 하트 기사단 : 기사단장, 하르콘 휘하 100여 명]

쿠콰콰콰쾅─!!

마왕성에 쏟아지는 무자비한 마법 폭격.

락키드는 혀를 내둘렀다.

콰득!

양손에 쥐고 있던 마왕군의 머리통을 으스러트렸다.

일종의 화풀이였다.

"불공평해. 굉장히 불공평해."

간만에 쓰는 몸이었다.

전장에서 가장 높은 공적을 세우리라 다짐했거늘.

저런 마법을 쏴대는 것은 반칙이 아닌가?

물론, 락키드는 낙담하지 않았다.

"좋아. 그 잘나신 마력도 언젠간 바닥이 나겠지!"

그와 반대로 내 육체는 지치지 않으니까.

격차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금 락키드의 눈가에 드리운 광기.

그가 단신으로 마왕성에 돌진했다.

"저 멍청이는 귀찮지도 않나."

9석, 드쉐브는 무기조차 꺼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어 보였으니까.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상석들의 생각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파이어 드래이크. 과연, 드래곤에 비견될 만한 위력이네요."

"이래서야 차원이 다르잖아. 차원이."

"부러워. 부러워. 부러워."

"흐흐! 의욕이 꺾이는구만!"

그림자 용병단의 정보 수집원.

드쉐브는 고개를 돌려 전황을 둘러봤다.

'고작 네 명의 마법사.'

마탑.

그들에 관한 이야기야 워낙 무성했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소문, 그 이상이었다.

저들은 세상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괴물.'

그 마법사 하나하나의 전력이 말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시선을 끄는 건 저 녹색 머리칼의 마법사, 벨리에였다.

'저 여자의 마법이 다른 마법을 방어하고 있어.'

마왕성에 진입한 락키드와 라이언 하트 기사단.

벨리에의 치유 마법이 그들을 보호했다.

마왕성을 박살 내는 마법에 아군이 휘말리지 않도록.

드쉐브는 설치는 락키드를 아니꼽게 바라봤다.

"저 병신은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있을 텐데...."

드쉐브의 생각과 달리 락키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하르콘과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락키드와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전장에 나선 하르콘이었다.

스왁─!

억눌려있던 검기의 발산.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마왕군.

그 위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락키드가 입맛을 다시게 할 만큼.

"...재밌는데!"

물론, 하르콘에겐 락키드와의 경쟁 따위는 안중에도 있지 않았다.

하르콘은 이번 전투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르콘은 호열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마왕을 압살한다라...."

아르카나 대륙에 날뛰는 악마를 처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압살해야만 한다니. 호열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하르콘은 그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경?"

-"필요하기 때문일세."

-"...필요하다? 무엇이 말인가?"

그것은 악마를 쓰러트리는 데에 급급했던 자신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이유.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호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경고이자 선전포고가."

그랬다.

마왕을 압살하는 것.

그것보다 더한 경고이자 선전포고는 없겠지.

그건 공포의 대상인 악마에게.

되려 공포감을 심어주겠단 소리였다.

'참으로 호열 경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로군.'

하르콘은 전장을 둘러봤다.

어느새 전투는 끝나있었다.

하르콘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보다시피 경에게는 실현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하지."

그림자 용병단도 모자라서 마탑까지 움직일 줄이야.

그러나 하르콘은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를.

그건 호열의 존재감이 세상을 넘어서.

악마에게도 드러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경의 존재가 평화,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만약, 호열이 흔들리게 된다면.

호열 덕분에 유지되던 평화도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하르콘은 그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은 무게를 지고 있던 사람을 곁에서 지켜왔으니까.

'폐하....'

바로 제국의 황제였다.

황제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괴로워했었다.

그러니 하르콘은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차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호열이 그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이 말이다.

그야 하르콘은 여태까지 봐오지 않았던가?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서 호열이 받고 있는 취급을.

"경은 이미 충분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국에서는 황제에 대해 쉽게 떠들어 댈 수 없다.

황제에 대한 반역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험가들의 세계에선 그렇지 않았다.

어딜가도 호열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게 그 증거.

하르콘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경밖에 없겠어."

그런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하르콘에게 걱정은 없었다.

설령 지금처럼.

호열이 단, 두 사람과 함께.

마왕성 균열에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

.

.

[수렵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50]

[균열 붕괴도 : 22.1%]

[보스 몬스터 : 마왕, 플라우로스]

▶ Lv.850

[네임드 몬스터 : 악마 군단장, 에티오]

▶ Lv.800

[몬스터 : 악마 군단장 휘하 대략 10,000마리]

▶ Lv.650

플라우로스.

그 순위 값을 하신다는 건가.

대충 내역만 봐도 셋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마왕이었다.

악마 군단장의 레벨이 무려 800으로 마왕인 암두시아스와 그 레벨이 맞먹었으니까. 마왕군들의 평균 레벨 차이 또한 150레벨에 육박했다.

'양보단 질이라는 거겠지.'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드워프의 비행정을 가로막은 마왕이 플라우로스라는 걸.

그러니까 녀석이 있는 [수렵의 마왕성] 균열을 찾았다.

물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쪽이 정예로 나선다면 이쪽도 정예로 맞서야겠지.

그런 나의 곁엔 두 사람이 있었다.

"신속하게 끝내는 게 좋겠습니다."

마탑의 수석, 마르셀로.

"진짜아아. 내 팔자야."

그림자 용병단 단장, 키치.

한 사람은 나서서, 다른 한 사람은 끌려오다시피 한 거지만....

어쨌든, 이들의 전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보다 든든할 수도 없다.

물론,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심정은 조금 다르겠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세 개의 마왕성 균열.

그중 가장 위험한 균열에 고작 셋이서 진입하는 꼴이었으니.

그러나 말하지 않았던가?

목표는 사냥이 아닌 압살이다.

셋이서 이 정도 균열은 해결해야 압살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래야 하르콘에게 말했던 것처럼.

악마를 향한 경고이자 선전포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들에게는 물론.

현실, 인간에게 빙의한 악마들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적당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마도구, 아이템도 잔뜩 빌려 왔다고.

[돌개바람의 증표]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그런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시작하지."

펄럭─

백 가지 색으로 빛나는 백색의 겉날개.

나는 망토를 흩날리며 균열로 진입했다.

.

.

.

과연, 예상했던바.

하늘을 나는 거대한 기체(機體).

드워프의 비행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

그와 동시에 메시지가 점멸했다.

퀘스트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퀘스트'들'이.

◈ 118화. 마왕성 (4)

[수렵의 마왕성].

균열의 위치가 포착되자 플레이어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선 호열보다 빠르게 균열에 도착한 이들도 있었다.

언제나 한결같이 행동하던 호열이 아니던가?

"장담합니다. 호열 님이라면 백 퍼센트 이 수렵의 마왕성으로 오실 거예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요? 아니, 딱 패치 내역 보면 모르시겠어요?"

플레이어로서 먹어온 짬밥이 있는데.

균열 공략 난이도 파악쯤이야.

패치 내역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우리 호열 님이 뭐, 누구한테 어려운 일을 미루시는 분입니까?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들은 엄두도 못 낼 균열에 진입하시고,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주셨잖아요?"

과연, 그 예상은 적중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다른 균열에 관한 소식.

[운율의 마왕성]에도.

[방종의 마왕성]에도.

호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속보였다.

[수렵의 마왕성],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삼켰다.

'이거 월척이다.'

머릿속에 펼쳐지는 대박각.

이 순간, 움직인 거대 세력만 하더라도 몇이던가?

잠잠하던 라이언 하트 기사단에 그림자 용병단.

여신교단의 성기사들은 물론.

사실상 처음으로 외부 활동에 돌입한 마탑까지!

'사실 그 활약만 찍어도 대박이지.'

그래, 하다못해 그들의 활약상만 앵글에 담을 수 있어도 엄청난 관심을 끌 수 있을 터.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호열이 남아있었다.

"기대되지 않으십니까? 호열 님이 그 세력을 이끄는 모습!"

그건 관심이고.

조회수고.

넷튜브각을 떠나서.

아르카나의 플레이어였다면 가슴이 설레는 상상인 게 당연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플레이어 하나가 이 정도의 세력을 이끌고 균열을 정복하러 나설 날이 올 줄이라고는.

그리고 그 막대한 기대 속에서.

호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두 명의 아군과 함께.

"...어라?"

기대가 의문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실화냐? 겨우 3명??? ㄹㅇ루??

-아니 이건 [깨진 차원의 틈] 때랑은 이야기가 다르자너ㄷㄷ

-그니까 그건 버그 같은 거였고 이건 정기 업뎃인데....

[운율의 마왕성]에 집결한 병력은 수만.

[방종의 마왕성]에 집결한 병력은 일백.

그 규모를 알고 있었으니까.

"...뭔가 상상과는 조금 다른데요?"

세 개의 마왕성 균열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수렵의 마왕성].

더 많은 전력이 투입되리라, 예상하는 것이 당연했건만.

또각─

균열에 접근하는 건 진짜 호열과 두 그림자뿐이었다.

허나, 가까워질수록 의문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만요, 여러분. 저거 혹시...?!"

강렬한 인상을 자랑하는 마탑의 수석, 마르셀로.

명성 혹은 악명으로 자자한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 키치.

이내, 그림자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가슴이 웅장해지는 조합이다 진짜ㄷㄷㄷ

-ㅁㅊㅋㅋ 3명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인가??

-사실상 올스타 아니냐?

두 사람의 레벨이나 실력이 공식적으로 공개된 적은 없거늘.

그들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명성이 자자하던 최강자들이었다.

그런데.

-근데 잠깐만 저거 뭐임??

그런 이들에게서 시선을 앗아갈 정도.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호열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와, 장난 아닌데요."

"대충 봐도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호열 님, 장비의 수준이 어마어마해지신 것 같습니다!"

유니크 아이템을 셋이나 추가로 장비한 호열이었으니까.

확실히 전보다 장비의 수준이 상승하기는 했다.

하지만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상승은 아니었거늘.

시선을 집중시키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게 만든 것.

[심미 : 中]

모든 건 상승한 심미 스탯 덕분이었다.

그러나 마탑조차 알지 못하던 [심미] 스탯의 효과였다.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지고.

지켜보는 눈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진상을 알 순 없으니 그저 감탄하는 것이 고작.

그 가운데서 호열이 입을 열었다.

"시작하지."

펄럭─

그와 동시에 나부끼는 호열의 망토.

그건 펄럭거리는 날개와도 같았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심판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

또각─

두려움? 망설임? 우려?

무엇하나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보폭.

호열과 마르셀로, 그리고 키치까지 균열에 진입한 순간.

그 자태에 넋이 나갔던 플레이어들도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럼 저도 빨리!"

저 정도면 그냥 찍기만 하더라도 명장면이었다.

그 생각에 균열에 진입하려던 플레이어들을 멈춰 세운 건.

"...!"

다름아닌 메시지.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균열의 정보였다.

[수렵의 마왕성]

[적정 레벨 : Lv.850]

[균열 붕괴도 : 23.0%]

"...."

무려 850 적정 레벨의 균열.

이럴 때 떠오르는 말.

스치면 사망.

혹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는 속담.

'아무리 그래도 조회수랑 목숨을 바꾸는 건 좀....'

플레이어들이 망설이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호열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압살.

고민할 시간조차 많지 않다는 걸.

"잠시만요.... 그래! 버프도 좀 걸고, 심호흡도 좀 하고요!"

그들이 알 순 없었다.

*

"불쌍한 내 인생...."

키치는 중얼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어쩔 수 없이 끌려나서긴 했지만, 이런 일은 질색이었다.

무엇보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어. 이건 정당방위야.'

이호열,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그래, 상황을 봐서....

'튀는 것까지 생각해 두자.'

그러나 키치의 불순한 생각은 그저 생각에 불과했으니.

그건 곁에 있는 두 사내 때문이었다.

젠장 할 마탑의 공동 수석들 말이다.

마르셀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키치는 경악했다.

'...저게 진짜 마왕성을 바라보며 할 말이 맞아?'

뭐, 말 뿐이라면야.

못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왜, 자신만 하더라도 유스라 왕국에 붙어있기 위해서.

마음 속에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뱉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거짓말에 능숙한 키치이기에 알 수 있었다.

마르셀로의 말은 더없이 진심이라는 것을.

"차가 식기 전쯤 끝나겠군."

...물론, 호열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한술 더 떴다.

차가 식기 전에 끝내겠다니.

마왕성을 무슨 모래성만도 못하게 여기는 발언이잖아?

키치가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후우─"

유스라 왕국에 빌붙기 위해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냈건만....

거짓말을 간파한 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이용하고 있는 호열이었다.

그 사내가 자신의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금.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내 팔자에."

키치는 꿍꿍이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저 조무래기들이 내 몫은 아닐 테고.'

마왕이나 간부의 목만 따면 다 끝나는 거겠지?

표적을 떠올리는 순간.

돌변하는 키치의 눈빛.

그 기척의 변화는 마르셀로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뛰어난 암살자로군.'

저 정도의 실력을 갖췄으니, 경께서 대동하신 거겠지.

마르셀로의 키치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

가까워지는 마왕성.

그와 동시에 굉음이 고막을 강타했으니까.

쿠구구궁─!

그건 상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내, 먹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비행정이었다.

마르셀로는 놀라지 않았다.

호열에게 사정을 들어서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키치는 아니었다.

"뭐, 뭘까요? 저게...?"

그림자 용병단의 단장.

키치는 아르카나 대륙에 떠도는 소문과 전설, 그리고 정보에 능통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기계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했다.

"저, 저렇게 큰 게 어떻게 하늘을?"

균열 밖, 모험가들의 세계에서야.

비행기라고 부르는 엇비슷한 걸 본 적이 있지만.

저건 아르카나 대륙에서 떠오른 물체였다.

그런 키치에게 태연한 음성이 들려왔다.

"비행정."

"...비행정?"

"과연, 드워프 기술력의 집약체답군."

"...!"

드워프라니!

비행정이 뭔지는 몰라도 드워프가 어떤 종족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림자 용병단에게 들어오는 의뢰 중. 간혹가다 드워프가 제작한 장비를 수소문하는 의뢰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근데, 어떻게 놀라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둘 다?'

아니, 두 사내 중에서도 특히 이호열.

그의 반응은 마치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키치는 자중했다.

약점을 잡히는 바람에.

내가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라고.

'뭐, 미래를 내다보는 게 아니고서야.'

아르카나 대륙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쪽 세계에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호열의 말에 키치는 경악하고 말았다.

"듣던 대로 그대들은 과거의 맹약을 잊지 않았군."

...듣던 대로?

뭐야, 정말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야?

그나저나 과거의 맹약은 또 뭔데.

뭐야, 무서워.

키치는 다시금 슬금슬금 호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어도.

'허튼 생각 같은 거 일찌감치 접길 잘했다....'

.

.

.

드워프 기술력의 집약체.

비행정을 목격함과 동시에.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두 개씩이나.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의 절멸.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전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의 실체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로 위장한 악마를 사냥하라. (성공)

●마탑의 원죄를 파악하라. (성공)

●드워프들과의 맹약을 확인하라. (진행 중)

성전(聖戰).

드워프들 역시 악크샨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 그 사건에 엮여있는 모양이었다.

하이엘을 통해 알게 된 아르카나 대륙의 소식이 있었으니까.

'짐작하고 있었어.'

대륙에서 자취를 감췄던 드워프.

그들이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 가동 이후 모습을 드러냈단다.

비행정을 이끌고 아르카나 대륙의 악마를 사냥하기 시작했단다.

그 소식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었던 거지.

'마탑과 마찬가지로 드워프들도 악크샨에 빚을 졌다고.'

나는 퀘스트 목표를 바라봤다.

'그냥 약속도 아니고 '맹약'이라....'

아무래도 드워프들은 성전에서 어겼던 맹약을.

이제 와서라도 지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

설령 그 앞을 가로막는 게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 증거가 다음 퀘스트창에 나타나 있었다.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마왕과 드워프.

승리하는 것은 누구인가?

마왕성과 비행정.

남겨지는 상징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그대의 판단에 달렸다.

공적에 따라 승리의 보상을 쟁취하리라.

─세력에 참가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라. (진행 중)

●마왕, 플라우로스 측에 참가한다. (선택)

●드워프 측에 참가한다. (선택)

─현재 공적 : 0p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비행정은 마탑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비행정을 걸고, 마왕과 전투에 임했다는 것.

이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듣던 대로 그대들은 과거의 맹약을 잊지 않았군."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들은 몰라도.

나는 당한 게 없었으니까.

의심은커녕 앙금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건만.

나는 뻔뻔하게도 지껄였다.

"나는 더 이상 그대들의 긍지를 의심하지 않겠다."

물론, 선택도 끝냈고 말이야.

[진영 선택 완료.]

[드워프 측에 참가하셨습니다.]

[마왕, 플로우로스가 당신의 세력을 적대합니다.]

마왕성에서 느껴지는 기척.

과연, 데카라비아 때와는 기세부터가 다르신데? 어중간한 정신력이라면 곧장 상태이상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압감이다, 이건.

그러나 이곳에 어중간한 이는 없다.

마르셀로와 키치는 물론이거니와.

내가, 천하의 그랑펠 님께서 악마에게 위압감을 느낀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마르셀로와 키치.

그리고 나는 곧장 전투에 임했다.

강조했다시피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런 내게 공방을 주고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던가?

나는 현재 적용 중인 버프의 효과들을 상기시켰다.

[1시간 동안 모든 마법의 위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3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증가합니다.]

[30분 동안 마력 재생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약빨.

좋다는 비약초란 비약초는 물배가 찰 정도로 섭취하고 왔단 말이다.

거기에다가 고르고 고른 마탑의 마도구, 장비의 효과까지.

[돌개바람의 증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효과 : 착용 시, 1분간 발현하는 모든 마법의 파괴력이 100퍼센트 상승. - 재사용 대기시간 : 24시간]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80]

[효과 : 속성 마법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증가하는 대신 그 파괴력이 30퍼센트 상승.]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효과 : 착용 시, 사용자가 발현하는 속성 마법을 저장.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겉날개의 색에 비례하며 저장된 마법을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감소. - 현재 저장된 속성 마법의 수 : 100개]

아이템의 효과에서 알아차릴 수 있듯.

나는 일백(一百)의 속성 마법을 때려 박을 생각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실로 무식하기 그지없는 방법이군.

'겉날개의 효과로 탐색은 생략한다고 해도....'

간섭에서 발현까지의 과정을 생략할 순 없으니까.

웬만한 마법사는 시도조차 못 할 활용이란 것이다.

그랑펠의 재능 덕분에 써먹을 수 있는 꼼수란 거지.

그러나 이것이 나의 전력이자 최선이다.

펄럭─

마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날개처럼 펄럭이는 백색의 겉날개.

나는 겉날개의 저장된 마법들을 떠올렸다.

저장된 마법을 불러오는 것이기에.

탐색 과정은 생략.

허나 간섭 과정에서 [심미] 스탯의 활용은 잊지 않는다.

...실화란 말이냐.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력이 빠져나간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는다.

약빨, 템빨, 설령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해도.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악마 앞에서는 휘청거리는 모습조차 내비칠 수 없다.

그것이 나란, 그랑펠이란 인간이란 말이다.

나의 처절한 발현을 알아차린 마르셀로가 외쳤다.

"길을 열겠습니다."

나의 꼼수 따위완 비교할 수 없는 신속한 발현.

증발하듯 삭제된 일만(一萬)의 마왕군.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마왕 군단장, 에티오였다.

"!!!"

그러나 녀석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진짜아 내 팔자야!"

스와아아악─

키치의 비수가 녀석의 다리를 난도질한 탓이었다.

쓰러진 에티오 너머로.

비로소 마왕, 플라우로스가 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악에 물든 의식용 로브'가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마왕, 플라우로스를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

.

.

덜커덕─!

요동치는 비행정, 아이언 캐슬.

"빌어먹을. 하필이면 천둥 번개라니."

아이언 캐슬의 유일한 약점, 악천후.

위대한 기술력의 집약체라도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순 없는 탓이었다.

마왕을 앞에 둔 지금, 이럴 새는 없었거늘. 그래도 쉴 새 없이 조타를 돌린 덕분일까.

"됐다. 빠져나왔어!"

아이언 캐슬은 뇌우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 드워프들의 시야에 마왕성의 전경이 보였다.

"...자, 잠깐.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정확히는 무너지고 있는 마왕성이.

그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

악마도 아니고 마왕을 몰아붙일 수 있는 존재라니.

"설마...?"

적어도 과거, 맹약을 맺었던 드워프들은 알고 있었다.

"악마 사냥꾼! 악크샨의 생존자를 찾았다!!"

◈ 119화. 압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