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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화. 에고(Ego) (2)

흐릿하게 남아있는 '경지'의 경치.

나는 그 감각을 떠올리며 세니오스의 빙결마법을 발현했다. 원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비슷하게나마 따라 할 수 있는 나였다.

쩌저저저저적─!!

위력은 대단했다.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 Lv.560]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에게 '경직'이 발생합니다.]

[모스파이크 용병의 원혼

에게 '경직'이 발생합니다.]....

무려 560레벨짜리 몬스터가 아무것도 못 하고 얼어붙을 줄이야.

문득, [포식자의 늪지대] 균열에서의 사투가 떠오른다. 그래, 그때는 얼마나 구질구질했던가?

'마법도 모자라서 검술까지....'

검기(劍氣)를 발산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약한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하르콘의 자세를 따라 했었지.

그때와 비교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지금은.

'물론.'

단순한 고위 마법도 아니고.

경지급 마법의 발현.

카림제바 때와는 다르게 만반의 준비도, 비약초 도핑도 과하게 하지 않은 나였기에. 마력의 소모는 극심했다. 눈꺼풀이 떨릴 정도였지만 내색은 없다.

"단숨에 이 정도의 빙결마법을...!"

나는 냉기에 입김을 내뿜고 있는 클레에게 말했다.

"귀생초를 노리는 건 산 자들만이 아니다."

"아앗, 그렇군요!"

"명심하도록. 처분은 맡기도록 하겠다."

이것이 바로 수석의 권한.

나는 뻔뻔하게도 짬처리를 지시했다.

말 그대로 다 잡아놓은 몬스터였다.

딱히 경험치를 나눠 챙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단 말이다.'

귀철(鬼鐵).

만트라 광산에 귀철이 묻혔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네, 넵!"

나의 말에 클레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얼어붙은 원혼들을 처리했다.

그래, 이게 바로 조직 사회지.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내가 이렇게 계급장을 잘 써먹는다.

'그나저나 역시 마탑이야.'

클레 오디아.

그녀는 어디까지 치유학파의 숙련 마법사였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에 학파의 지식까지는 필요 없다는 것인가. 기초 마법을 발현, 순식간에 원혼의 처리를 끝냈다.

'제시 하인네스가 괜히 견습 취급을 받는 게 아니다.'

순간 흠칫했지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기여도가 더 큰 게 당연하지.

이보다 든든할 수 없구나, 마탑의 뒷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나의 시커먼 흑심이 내비칠까, 주의했거늘.

"와아, 이게 귀생초구나."

클레는 정신은 귀생초에 팔린 상태였다.

그래, 나도 그만 흡족해하고 비약초나 채집하자.

그 효과를 생각하면 당장 쓸모는 없겠다만.

뭐든 쌓아두다 보면 언젠가는 쓸 날이 오는 법이다.

"제 축복이 필요하시다면 말씀해 주시길."

잠자코 있던 님프가 말을 걸어왔다.

사색 겨우살이의 성장을 도왔던 님프가 아니던가.

자신의 전문 분야라는 거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귀생초의 효과는 당장 쓸데가 없다.

게다가 님프의 축복, {자연} 능력은 내 마력을 소모한다.

적어도 귀철을 습득하기 전까지. 축복은 봉인이다.

비약초를 채집한 나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역시나 여러 우물을 판 보람이 느껴지는데?

[포식자의 늪지대]에서 획득했던 아이템.

[하찮은 보관용 허리띠].

그 아이템에 달려있던 인벤토리 확장 효과를 추출.

의복에 부여한 덕분에.

인벤토리에 여유가 상당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귀생초가 됐든.

귀철이 됐든.

경험치가 됐든.

'최대한 꽉꽉 채워서 나갈 수 있다는 거지.'

탐욕처럼 보이지만 탐욕이 아니다.

청렴결백의 화신에게 욕심이 웬 말이냐.

그래.

이건 그저 거물이 되기 위해선.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다는.

목표가 생긴 나의 처절한 발버둥이란 말이다.

*

힐끗─

클레는 뒤집어쓴 로브 밑으로 호열을 바라봤다.

'...왜 그러신 걸까.'

전투불능에 빠진 원혼을 자신에게 맡기실 줄이야.

클레에게 호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레는 마탑의 숙련 마법사였으니까.

'뭔가 굉장히 낯설었어.'

호열의 행동이 흔히 봐온 마탑의 마법사들과 다른 탓이었다.

클레는 마법사란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마법이라면 모를까.

기본적으로 타인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단, 나부터도 그러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출탑에 앞서서 단단히 각오했다.

호열이 책임자로서 동행한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내 안전은 내가 지키자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

너그럽게 생각해서.

-"클레 오디아."

-"비약초를 채집하는 데에도 절차는 존재한다."

-"주변을 살펴라."

호열이 경고하고 원혼을 빙결마법으로 멈춰 세운 것까지는 납득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책임자시니까. 출탑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으셨던 거겠지.

'그런데 왜 마지막을 저에게...?'

클레는 원혼을 처치하면서도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숙련 마법사라서 수석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는 걸까.

선임 마법사이신 벨리에 님이라면 금방 알아차리셨을까.

'흐음....'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클레는 아까부터 힐끗 호열의 눈치를 살폈다.

그 낯빛에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모르겠어요. 벨리에 님!'

항상의 자세.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

물론, 그런 게 가능할 리는 없었지만.

절규하는 클레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인가, 의문이 드는가?"

...헉.

클레는 다시금 입을 틀어막았다.

이젠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마법도 사용하시는 걸까?

괜히 제 발이 저린 클레에게 호열의 말이 이어졌다.

"귀생초에 관한 이야기다."

...다행이다, 그 이야기셨구나.

"네. 귀생초와 광산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잘...."

그러나 말꼬리를 흐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르카나 대륙에 자라나는 비약초만 하더라도 수십만 이상.

각각의 효과와 특징까지 숙지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

"귀철이다."

"...네?"

"귀생초는 귀철이 묻힌 곳에서만 자라나는 비약초다."

"!"

...해야만 했는데?

'이호열 수석께서는 대체 어떻게 비약초에 관해 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 걸까요? 이런 건 마탑의 서적에서도 찾지 못했던 정보인데...?'

그리고 그런 귀중한 정보를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시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호열은 마법사답지 않았다.

...아니, 정말 마법사가 아니신 거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호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비약초가 자라나는 환경 따위. 그저 사용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쓸모없는 정보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나 또한 그대의 연구, 비약초의 육성법에 관해 고민하고 있기에 건넨 말이다."

"...!"

내 연구를 고민하고 계셨다고?

정기 학회가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역시 수석이셨다.

학회 때부터 지금까지.

업무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않으셨다니.

클레는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누가 시켜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못할 것 같아요, 수석!'

*

빌딩 숲과 뒤엉켜 더욱 복잡해진 광산.

길잡이가 되어준 건 다름 아닌 님프였다.

"이쪽으로."

님프는 나무를 비롯한 식물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귀생초에게 귀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이야기를 들어 그 위치를 파악한 덕분이었다.

'완전 지름길이네.'

[만트라 광산 - 1광구].

균열의 보스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철의 귀인]에게 향하는 최단 루트. [철의 귀인]에 관한 정보 또한 업데이트 내역에서 확인했었다.

[철의 귀인 : Lv.650]

그냥 650레벨짜리 몬스터구나.

상당히 빡세겠구나.

조심하자.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말이야.

귀철과 관련됐다는 걸 알고 보니까.

굉장히 그럴싸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이 커다란 광산이 그냥 폐쇄된 게 아니었단 거지.'

모든 광물에 관한 지식.

귀철에 관한 사전 지식에 없었더라면.

나는 [철의 귀인]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을 테니까.

이내, 앞서 나아가던 님프의 날개가 흐드러지며 멈췄다.

"이곳입니다."

나는 클레에게 말했다.

"클레 오디아,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몰랐을 땐 몰라도.

지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클레의 지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또각─

그런 나를 맞이한 건 커다란 철의 거인이었다.

족히 3미터는 될 것 같은 키에 빈틈없이 몸을 감싼 갑옷까지. 그 레벨이 650레벨이라는 걸 생각하면 위압감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 외형.

그러나.

"그 모습이 영락없는 전사로군."

나는 위축될 수 없었다.

그랑펠의 성격을 떠나서 알고 있단 말이다.

저 거대한 몸집이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 [철의 귀인]은 귀철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눈을 속일 순 없다."

귀철.

저거, 귀신들린 철이란 이름처럼 야비하잖아?

[철의 귀인]은 누가 봐도 전사였다.

검을 맞대고 싶게 생겼단 것이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저건 귀철이 만들어 낸 가짜였다.

원혼과 마찬가지로.

물리 공격이 먹히지 않는 유령이란 말이지.

"내게 그런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순간 필요한 건.

검이 아니라 마력이었다.

그래, 귀철을 습득하기 위해 비축해 뒀던 마력 말이다.

고오오오─

나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았건만. 레벨이 상승한 만큼 마력도 상승했다는 건가. 나부터가 달라진 마력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곧장 알아보다니. 아둔한 멍청이는 아니구나."

[철의 귀인]에게서 쇠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철의 목소리겠지.

철 주제에 말을 하다니.

과거의 나였다면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귀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말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랬다.

귀철이 전설 속 광물이라 불리는 광물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데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래, 귀철은 바로 에고소드의 재료였으니까.

에고 소드(Ego Sword).

자아를 가진 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떡밥만 가득하던 귀하신 존재. 그러나 플레이어는 물론, 아르카나인들조차도 에고 소드를 보유했다는 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귀하신 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귀철을 발견하는 것부터 문제다.'

귀철은 기본적으로 희귀한 광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보는 것처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다, 의지보다는 고집에 가깝겠지. 저건.

다시금 들려오는 치찰음.

"마법사여. 내가 그대에게 굴복할 것 같은가?"

쉽게 말해서 호락호락하게 손에 들어와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허상을 만들어 낸 것도 그 때문이겠지. 나는 귀철을 채취하는 법을 떠올렸다.

'인정을 받거나 굴복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쉽지 않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귀철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용병들도 원혼 신세가 된 거 아니겠어?

하지만 말이야.

'내 고집도 한 고집하거든.'

아니, 내게는 고집보다 더한 긍지가 있단 말이다.

나는 달려드는 [철의 귀인]에게 마법을 발현했다.

갑옷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그 실체는 유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택한 건 순수마법이었다.

슈슝─!

순수마력학 선임 마법사, 뱅그릿 톰.

나는 그가 주로 사용하던 마력의 광선을 열화판으로 발현했다.

마력 격차에 따른 위력의 차이는 [심미] 스탯을 가미해서 어떻게든 보완해 보자...!

슈와아악─!

그 노력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화려한 거.

하나만큼은 먹고 들어가서 말이야.

"...너는 보통 마법사가 아니구나."

지그재그.

뻗어가던 마력 광선이 휘황찬란하게 휘어지기도 잠깐.

슈슉─!

슈와악─!

[철의 귀인]을 이리저리 꿰뚫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다시금 느낀다.

내가 말이야. 괜히 [『기이』]가 '경지'와 비슷한 급이라고 지껄인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날 굴복시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녀석의 본체는 어디까지나 귀철.

[철의 귀인]이 다시금 일어섰다.

이래서 까다롭다는 거겠지.

'귀철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면.'

결국, 귀철을 파괴해야만.

끝없이 되살아나는 [철의 귀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나는 마력의 잔량을 확인했다.

남은 마력은 7할 정도인가.

'마력이 버텨주는 동안 귀철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아니, 있을까가 아니라.

'꺾어야만 한다.'

그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것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겠다고 다짐한 이상.

내게 귀철은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이 있다.

그래, 마력이 없으면 말이야.

뭐라도 끌고 오면 되는 거다.

내겐 그러려고 파놓았던 우물들이 있단 말이다.

이어지는 [철의 귀인]과의 공방.

마법사와 유령과의 상성.

덕분에 나는 녀석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소모되는 마력도 극심했다.

물론, 귀하신 몸답게 귀철의 고집도 꺾이지 않았고 말이야.

'결국, 다음 수를 꺼낼 수밖에 없는 건가.'

마법, 다음에는 흑마법이다.

마력은 없어도 '적합한 마력'은 충만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마법사...!!"

절규하듯 이어지는 귀철의 음성에 나는 멈칫했다.

"스스로 파괴될지언정 굴복하지 않는다. 나를 굴복시킬 수 있는 건 오직 내가 섬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검사뿐이다...!"

너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구나.

고집을 뛰어넘은 긍지 수준이야.

당연하게도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야 난 마법사가 아니거든.

철컥─

나는 태연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날에 일렁이는 검기(劍氣).

보잘것없던 나의 레벨.

-"생과 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검기는 더욱 짙어지고, 그 고유의 색을 띠는 법이니까."

덕분에 모든 균열에서의 전투가 내게는.

언제나 생사의 갈림길로 취급된 덕분.

나의 검기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짙어져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유의 '고고한' 빛을 뿜어냈다.

문득, 감격에 찬 귀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검기...! 그대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 108화. 에고(Ego) (3)

길드 랭킹 2위, 천하통일.

길드 마스터, 류오쥔춘에겐 목표가 생겼다.

"우리는 이번 기회에서 샤이닝을 뛰어넘는다."

기회는 당연하게도 신규 업데이트로 새롭게 생성된 균열이었다.

타도 샤이닝이야, 언제나 변치 않는 목표.

그러나 이번만큼은 더욱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샤이닝은 전례 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록스, 너는 전력에 큰 피해를 입었겠지.'

록스의 뒤를 이어 샤이닝의 2인자로 불리던 제시 하인네스.

──────

[속보] 제시 하인네스, 샤이닝에서 공식적으로 탈퇴...!

──────

그녀가 샤이닝이란 울타리를 뛰쳐나갔으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발표가 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곤두박질친 샤이닝의 주가. 그와 반대로 치솟은 자신들의 주가가 그 증거였으니까.

'뮤온에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여신교단의 성지, 뮤온.

처음엔 그 이용가치를 가늠해 봤다.

여신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여러모로 길드에 도움이 될 요소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뮤온이 인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더 이상 뮤온에만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만트라 광산 - 2광구]

[적정 레벨 : Lv.550]

[붕괴 진행도 : 0.8%]

"다들 균열로 진입한다!"

샤이닝의 위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 앞에서 류오쥔춘은 망설이지 않았다.

천하통일 최정예 전력을 이끌고 균열에 진입했다.

"물러나지 마라!"

"이를 악물고 버텨!!"

"뭣들하고 있나, 마법을 퍼부어라!"

공략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균열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전부 유령 속성인 게 컸다.

그에 대비해 무기에 속성을 부여해 유령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포션을 섭취했다고 한들.

"너무 빠르잖아, 저것들!"

"젠장. 벽으로 숨다니."

"머리 위로 날아다녀서 검을 휘두르기 쉽지 않습니다...!"

스스스스─

놈들은 대군을 농락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류오쥔춘에겐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천하통일을 최상위권 길드로 우뚝 서게 한 경험.

"쫓지 마라. 대열을 유지하라."

까다로운 패턴.

그러나 이보다 훨씬 까다로운 패턴을 가진 몬스터들을 많이 봐왔다.

게다가 절호의 기회인 만큼 철저한 준비를 했기에.

"우린 놈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류오쥔춘은 장기전도 자신이 있었다.

그의 지휘에 따라 천하통일은 차분하게 균열을 공략해 나갔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전군 대기."

광산의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곳곳으로 흩어진 수십 명의 탐험가.

이내, 그들이 무언가를 들고 본대로 복귀했다.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제아무리 복잡한 광산의 구조라고 해도 물량 앞에선 장사가 없는 법.

류오쥔춘은 탐험가들이 스킬을 발동해 작성한 지도를 살펴봤다.

수십 개의 지도에서 유달리 시선을 끄는 통로를 찾았다.

"유달리 자라난 잡초가 많군."

물론, 류오쥔춘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에겐 자신을 대신해 고생할 손과 발이 넘쳐났으니까.

그가 손짓하자 재빠르게 몇 개의 무리가 움직였다.

"정보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들이 탐험가의 지도를 가지고 광산 너머로 사라졌다.

이내, 류오쥔춘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균열의 보스 몬스터라 할 수 있는.

[철의 귀인]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전군 전진!"

[철의 귀인].

녀석만 쓰러트리면 균열은 클리어다. 단시간에, 그것도 완벽하게 신규 균열을 클리어해 낸다면 길드 랭킹이 뒤바뀌는 것도 헛된 기대는 아니겠지.

"쓰레기들이 쓸데없이 넘쳐나는구나."

철갑을 두른 거인.

그 덩치도 목소리도.

상당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거늘.

"전군 돌격!"

류오쥔춘.

그를 비롯한 천하통일의 플레이어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류오쥔춘의 클래스, [군주]의 특수 효과 덕분이었다.

───────

우두머리 : 전투 시작 후, 군주가 첫 피해를 받을 때까지 군주를 섬기는 플레이어에게 스킬, '사기진작'이 발동된다. '사기진작'의 효과는 군주의 레벨과 비례한다.

───────

초거대 길드.

천하통일이 류오쥔춘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는 이유.

그건 바로 [군주]라는 류오쥔춘의 클래스 덕분이었다.

류오쥔춘은 거인에게 달려드는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나의 검이자 방패다.'

말뿐이 아니었다.

저들이 벌어들이는 경험치가.

실제로 일정 비율로 자신에게도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그래, 이것이 바로 희귀 클래스 [군주]의 위력!

류오쥔춘이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류오쥔춘 또한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냉철하게 판단했다.

"크아아악!!"

쓰러지는 길드원들.

류오쥔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검과 방패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는 오직 하나.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류오쥔춘은 검과 방패를 휘둘렀다.

"결코, 물러서지 마라!"

[우두머리] 스킬의 효과 덕분.

그의 지휘에 따라 길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철의 귀인이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내가 증오하는 족속이었구나."

고작 몬스터 따위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쓴소리에도 류오쥔춘의 눈빛엔 흔들림 따윈 없었다.

적을 앞에 두고 동요한다?

군주된 자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 스스로 파괴될지언정. 네놈에게 무릎 꿇진 않겠다."

바라던 바다.

류오쥔춘은 쉴 새 없이 철의 귀인을 압박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그 내구도가 대단했지만.

몇 번이나 강조했다시피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콰직─!

이내, 들려오는 소리.

그와 동시에 발광하는 광산의 벽면.

류오쥔춘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 돌덩이가 네놈의 본체였나?"

처음부터 본체를 파괴했다면.

보다 빠르게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는 건가?

그러나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검과 방패는 넘쳐나니까.

[만트라 광산 - 2광구]를 오직 천하통일의 힘만으로 공략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떠오르는 메시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만트라 광산 - 2광구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류오쥔춘은 더없이 흡족한 미소를 흘렸다.

"정상의 공기를 만끽할 시간이군."

*

...아찔하다. 정말.

만약 나한테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고.

당연하게도 나는 귀철이 뭔지도 몰랐겠지? 그럼 철의 귀인을 쓰러트리는 데만 하더라도 개고생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운이 좋아서 귀철이 본체라는 걸 알았다고 쳐.'

그래서 귀철을 직접 공격.

귀철을 파괴해서.

철의 귀인을 쓰러트렸다고 생각해 보자고.

신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그건 에고 소드를 포함, 에고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귀철을. 내 손으로 박살 내는 꼴이나 다름없는 거였으니까.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진짜로.

모르는 게 약이라고.

끝까지 모른다면 모를까.

혹시나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그날부터 불면증 시작이지.'

물론, 귀철의 금전적인 가치를 짐작할 순 없었다.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로 그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귀철]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제작 시, 제작 아이템에 '에고'를 부여한다.]

[설명 : 영혼이 담긴 광물. 그 희귀함은 전설이라 취급받아도 손색이 없으며 그 가치 또한 감히 평가할 수 없다.]

그랬다.

그 대단하신 귀철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그래, 모든 건 검기(劍氣) 덕분이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귀철을 습득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귀철을 굴복시키거나.

그게 아니라면 귀철에게 인정을 받든가.

나는 후자, 귀철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현재로도 더없이 고고한 검기.... 그럼에도 그대에겐 아직도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나를 향한 귀철의 평가였다.

듣는 도중에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싶었거늘.

떠올려보니까 하르콘이 했던 말이랑 비슷하잖아, 이거?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네. 호열 경! 그대는 검의 길을 걸어야 하네. 다섯 손가락이 뭔가? 적어도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는...!"

귀철은 그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그대와 같은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나를, 그대가 나아갈 검의 경지로 데려가 줄 수 있겠는가? 나 또한 그대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나의 육신을 불사르겠다!"

마법에도 경지가 있듯.

검에게도 경지가 있겠지.

당연히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그랑펠의 재능을 썩힐 생각은 없으니까.'

게다가.

나름대로 착실하게 파놓은 우물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진 발버둥 쳐봐야겠지.

나는 그렇게 귀철을 손에 넣었다.

'뭐, 경험치는 얻지 못했지만.'

고작 경험치 때문에 귀철을 부순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철의 귀인]이 균열에서 사라졌다는 결과엔 변함이 없었으니까.

[만트라 광산 - 1광구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곧바로 무너져가는 균열의 풍경.

처음이 아니기에 적응했다는 것인가.

님프가 격식을 갖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 만남 때까지 부디 평안하시길."

...어째 말투가 갈수록 고상해지는 것 같았다만.

내가 말투로 트집을 잡을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님프를 역소환하고 클레를 찾았다.

"앗, 끝나셨을까요, 이호열 수석님...?"

역시나 짐작했던 것처럼.

클레는 무너지는 균열에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탑의 숙련 마법사라고 해도 처음 보면 놀랄 수밖에 없겠지. 나는 태연하게도 클레에게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그래, 눈을 감았다가 뜨면.

현실로 돌아와 있을 테니까.

왜, 지금처럼.

빌딩 숲 사이에서.

눈을 뜨자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뭐야, 벌써 클리어됐어?"

놀랄 법도 하지.

나도 흠칫할 정도였으니까.

뭐, 님프 덕분에 귀철이 묻힌 곳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찾은 건 그렇다 치고 넘어가더라도. 귀철을 습득하는 과정이 예상보다 크게 단축됐으니까.

"잠깐, 은발 머리에 저 복장.... 저거 이호열 맞지?!"

"젠장, 그럴 만도 했네."

"이호열이라고? 균열엔 또 언제 진입한 거야?"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

나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시선 따위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지만.

"...그런데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누구지?"

클레는 아니었다.

아니, 클레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마탑이 움직이게 됐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호열 씨 일행인가?"

"...잘 모르겠지만, 인터뷰 한번 따볼까요?"

"잠깐, 일단 눈치 좀 보다가...."

내가 출탑에 동행한 거 아니겠어?

또각─

나는 곧장 포탈로 향했다.

"가지."

내 말이 떨어지자 클레는 그제야 뒤를 따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클레에게 관심을 보이던 플레이어, 취재진들이 아쉬움에 군침을 삼키면서도 곧바로 걸음을 돌렸다.

-"정숙."

-"격식과 예절을 지켜라."

-"그대의 무례한 질문 따위에는 대답하지 않겠다."

그동안 내가 보여준 한결같은 태도 덕분이겠지.

물론, 클레가 그 사연을 알 순 없었으니.

클레는 포탈을 통해 마탑에 도착해서도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수석이고, 클레는 숙련 마법사다. 내가 구체적인 이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사회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몰라도 까라면 까는 게 계급 사회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모든 일정이 시간 내에 끝났군."

"...앗, 네!"

"이번 출탑이 그대의 연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아니, 부디 그러길 바란다.

마법의 경지도 모자라서 이젠 검의 경지까지.

목표가 원대해진 만큼 나한테는 약빨이 필수란 말이다....

*

출탑.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클레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클레를 둘러싼 숙련 마법사들.

그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바깥세상은 어땠나요, 클레?"

"균열은? 균열은 어땠어?!"

"아니, 여러분. 잠깐. 다들 조용히 해봐요."

...잠잠─

소란을 잠재운 건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지브릴이었다.

제국의 명문가 출신.

평소에도 숙련 마법사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큰 지브릴이었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흠흠, 아무리 궁금해도 순서는 지켜야지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별일은 없었던 거죠, 클레 양?"

클레가 고개를 끄덕이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호열 수석님과도 별문제는 없었고요?"

...아, 그랬지!

그러자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출탑 자체에만 집중해서 까맣게 잊고 말았다.

클레가 이호열 수석과 단둘이 출탑에 나섰다는 사실을.

"괴팍.... 아니, 워낙 까칠하시니까요. 수석님께서는."

"그렇죠? 말씀도 굉장히 직설적으로 하시죠."

"솔직하게 조금 무섭다고나 할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화.

도리도리─

잠자코 있던 클레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클레 양?"

모여든 이들이 흠칫할 정도로 격하게.

다들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신데!'

클레는 이번 출탑을 떠올렸다.

비약초에 관한 지식을 친절하게 알려주신 것부터.

원혼의 습격을 경고해 주신 것까지.

수석님께 직접적으로 받은 도움만 하더라도 몇 번이었던가?

'그것도 모자라서 제 연구를....'

벨리에 님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비약초의 육성법'에 관해서.

자신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셨으니까.

지브릴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그 반응은 뭔가요, 클레 양?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빨리 말해봐. 뭔데.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에~"

"클레! 너 정말, 그렇게 입 다물고 있기야?"

그러나 클레는 꾹 입술을 다물었다.

호열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그저 격식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격식에 맞게.

'수석님과 얽힌 일은 조금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다만, 호열이 오해를 받는 것 또한.

그저 보고만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다짐한 클레가 입을 열었다.

"...이호열 수석님은."

그래, 사실만 이야기하자.

이건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클레는 똑똑하게 지켜봤으니까.

균열에서 빠져나온 순간.

어째서일까.

자신에게 향하던 엄청난 관심과 시선.

혼란스러웠던 와중 들려온 목소리.

-"가지."

그랬다.

그 호열의 한마디에 수많은 인파가 갈라졌다.

그건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본 적이 없던 광경이었다.

황제의 명령, 황명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클레는 황제를 직접 본 적이 없었으니까.

클레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이호열 수석님께서는 이 세계의 귀족.

아니, 그것도 그냥 귀족이 아니라.

굉장히 높으신 귀족이 아니실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격식을 중시하는 호열의 성격 또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클레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마탑에서보다 마탑 바깥에서 훨씬 더 대단한 분이실지도 몰라요...!"

◈ 109화. 후회하지 않는가

AAU.

화상으로 진행되는 지부 회의.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 시발점은 역시나 호열이었다.

"이호열 플레이어부터 시작해서 혼란합니다. 혼란해."

긴급 업데이트.

그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던 11개의 [깨진 차원의 틈] 균열. 대체 호열은 균열들을, 어떻게 단시간 내에 클리어할 수 있었던 걸까?

행적을 좇는 데만 하더라도 벅찬 일이었거늘.

"어떻게 뮤온의 상황은 아직도 제자리인가요?"

바로 다음 날.

정기 업데이트에서 폭탄이 터져버렸다.

인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르카나인들이라니.

AAU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관측했을 땐 큰 변화는 없어 보입니다만. 뮤온 내부에서 인류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으면 커졌지, 줄어들었을 것 같진 않군요. 머리 위로 떠다니는 드론만 봐도 진저리가 날 겁니다."

여신교단의 성지, 뮤온.

뮤온이 적대감을 보인 만큼 세계도 뮤온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무엇보다 큰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여신교의 성녀, 프레이자의 존재였다.

"프레이자. 그 NPC 대체 정체가 뭘까요...."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부터 존재하던 프레이자.

그러니까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여신교의 성녀라면 분명 상당한 비중을 가진 NPC였다.

마을 주민처럼 인공지능이 무작위로 찍어낸 NPC가 아닐 텐데.... AAU 전 직원을 대상으로 공문을 돌려봐도 프레이자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결국, 답은 둘 중 하나겠군요."

"레이먼 션. 그가 관여한 게 아니라면...."

"우리조차 모르는 정말 미지의 존재라는 거겠죠. 유스라 왕국에 등장했던 거악처럼."

"뭐가 됐든 머리가 깨지는 것엔 변함이 없군요. 정말."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제시 하인네스의 샤이닝 탈퇴. 그리고 천하통일의 공격적인 균열 공략 때문에 결국 길드 순위가 바뀌고 말았습니다. 집계 이후 처음으로 천하통일이 길드 랭킹 1위에 올라섰죠."

힘의 질서도 그에 따라 요동쳤다.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는 공식적인 발표만 없었지. 사실상 거대 연합을 구축했다고 보는 게 맞겠죠. 그 세력은 천하통일과 샤이닝에 뒤지지 않으리라 예상됩니다."

여러모로 우려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대 연합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필이면 천하통일이...."

그랬다.

천하통일 뒤엔 중국이 버티고 있었으니까.

AAU와의 교류도 전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자 노선을 구축한 중국 말이다.

천하통일의 영향이 더욱 강해진 지금. 중국이란 변수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린 한계에 다다른 걸지도 모르겠네요."

대격변 이후.

AAU는 수많은 변수를 예측하며 아르카나의 침식에 대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근의 업데이트 동향은 그야말로 예측 밖.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엉킨 실타래 중 하나라도 풀렸으면 좋겠거늘.

침묵─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공교롭네요. 이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째 엉킨 실이 전부 하나를 향하고 있지 않나요?"

"...예?"

"긴급 업데이트로 생성된 [깨진 차원의 틈]이 된 것도. 제시 하인네스가 샤이닝 길드를 탈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여준 행적도.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라는 거대 길드 연합에도. 전부 이호열 플레이어가 관련되어 있잖아요?"

"...!"

"어쩌면.... 이호열 플레이어는 우리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뮤온. 그리고 프레이자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질문에 유달리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잠깐만요, 다들 그 눈빛 뭡니까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였다.

그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으며 호소했다.

"혹시 뭐, 저한테 기대하는 게 있으신가 본데요. 그런 생각들은 얼른 접으십쇼. 다들 이호열 플레이어랑 접점이 없다고 남 말 하듯 말씀하시는데. 인터뷰 못 보셨어요들? 그 끈질긴 기자들도, 넷튜버들도 벌벌 기는 게 이호열 플레이어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

요동치는 길드 랭킹.

길드 랭킹 4위, 보헤미안의 길드 마스터.

가이버는 치를 떨었다.

"꼬여도 이렇게 빌어먹게...."

뮤온에서 대역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대박이라 생각했던 뮤온은 당첨은커녕, 복권을 긁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은 시간만 날린 어제와 오늘.

천하통일은 신규 균열을 클리어.

기어코 길드 랭킹 1위에 올라서고 말았다.

"젠장."

물론, 신규 균열을 클리어한 건 천하통일뿐이 아니었다.

이호열이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의 증언으로는.

천하통일이 [만트라 광산 - 2광구]를 클리어했던 것과 이호열이 [만트라 광산 - 1광구]를 클리어한 시각은 유사한 모양이었다.

-아니, 이호열이 조금 더 빨랐음 내가 봤음 ㅅㄱ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천통보다 빨랐다고???

-혼자 아니었는데? 옆에 로브 뒤집어 쓴 사람 하나 있었음

-뭐지 로브면 마법사 아님??? 설마 마탑 마법사임??

-아니ㅋㅋ 뇌피셜 자제 좀;; 팩트로도 충분함

-ㄹㅇ 아무리 이호열이 수석이래도 마탑 마법사까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좀 오바지;; 그동안 마탑이 가만히 있던 거 생각하면

이호열.

그가 나타난 곳에 수많은 추측이 떠도는 것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까.

가이버는 질투가 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하필이면 가온, 이나즈마, 그리고 버서커냔 말이야!'

길드 랭킹 3위, 가온.

5위, 이나즈마.

가뜩이나 4위의 자리가 위태로운 지금.

위아래의 두 경쟁자가 서로 연합을 했단다.

거기에 같은 EU 소속인 버서커까지...!

'길드 랭킹은 물론, EU 최강이라는 수식어까지.'

이대로는 안 된다.

조급해진 가이버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신규 균열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말했다시피 [만트라 광산], 두 개의 균열은 호열과 천하통일이 이미 클리어해 버린 상황.

남은 균열에도 쟁쟁한 경쟁자들이 존재했다.

그런 가이버에게 남은 건.

'결단이 필요하다.'

역시나 뮤온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균열 근처에나 설치하는 베이스캠프를 뮤온 앞에다가 설치해 둔 것이란 말이다. 여전히 굳건하게 닫힌 뮤온의 성문. 가이버는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규율을 무시할 순 없겠지.'

아무리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고 한들.

여신을 섬기는 뮤온의 성기사들이었다.

섬기는 종교는 다르지만 가이버 또한 성기사이기에.

성기사의 엄격한 규율을 파악하고 있었다.

"성기사는 민간인을 먼저 공격할 수 없어."

"그래서 기어코 뮤온에 접근하시겠다?"

"지켜보고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까."

무기를 내려놓고 뮤온에 접근.

저들과 대화를 나눠보겠다.

가이버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근두근─

뮤온으로 나아가자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그건 약간의 기대가 섞인 심장박동이었다. 현재 뮤온엔 막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만약, 이야기가 잘 풀려서.

뮤온이 적대적인 태도를 바꾸고.

성문까지 개방한다면?

보헤미안은 물론, 자신의 주가 또한 치솟게 되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

성기사, 가이버의 상식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가이버 또한 랭커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순간, 발달한 그의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성벽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끼기기긱─!

저건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라고.

슈슉!

슈슈슉!

무기를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양손을 든 채.

뮤온으로 다가가던 가이버.

무방비 상태의 가이버에게 화살 비가 쏟아진 것이었다.

위협이 아니었다.

정말 목숨을 노린 선제공격이었다.

울컥!

"저 미친 새끼들이 진짜...!!"

가이버의 육체 곳곳을 꿰뚫은 화살들.

보헤미안의 길드원들이 나서서 화살을 쳐내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처럼 숨을 내쉴 수도 없었겠지.

그 사실을 깨달은 가이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뮤온도, 여신교도 내가 알던 이들이 아니야."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전파를 타고 말았다.

누구보다 격노한 것은 EU였다.

그들은 곧장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우리는 뮤온의 적대적 행위를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뮤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타국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결국 터질 게 터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NPC 몇몇에 불과하던 때라면 모를까.... 지역, 도시급 업데이트가 진행될 때마다 우려된 상황이었습니다. 애초에 아르카나인들이 우리 인류에게 우호적일 것이라 판단한 게 오판이었습니다."

게임에 불과하던 때라면 모를까.

저들이 인류에게 우호적일 이유?

솔직히 말해 하나조차 꼽기 어려웠다.

"어쩌면 유스라 왕국이나 프로스트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속보가 끝나고 정규 프로그램이 시작됐지만.

반복해서 재생되는 충격적인 자료 화면.

침통한 표정의 진행자들은 여전했다.

게다가 그런 반응 따윈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굳게 닫힌 뮤온의 성문까지도.

"뮤온이 계속해서 적대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그건 인류에겐 너무나도 큰 변수입니다. 최악의 경우엔 정말 뮤온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할지도...."

뮤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장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래, 한 사내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저 미친? 누구야, 저거!"

뮤온의 전경을 비추던 카메라가 다급히 화면을 확대했다.

겁도 없이 뮤온을 향해 다가가는 사내.

일단....

이호열은 아니었다. 하긴 이호열이 나타났다면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이 진동했겠지.

본사에서 이호열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넷튜버 새끼들 아무리 선을 넘어도 저렇게까지...?"

누군가는 그저 관심에 미친 넷튜버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넷튜버라고 하기에는.

사내에게선 촬영 장비 같은 게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 복장도 심상치 않았다.

고풍스러운 제복.

현실보다는 판타지 쪽에 가까운 걸로 봤을 땐.

플레이어가 확실해 보였거늘.

"누구 떠오르는 사람 없어?"

"저 정도 허우대면 엄청나게 개성 있게 생긴 것 같은데?"

"...글쎄요?"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유달리 큰 키.

쭉 뻗은 팔과 다리.

앙상하게 마른 몸까지.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거늘.

"...저런 플레이어가 있었나?"

플레이어 중에선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취재진들이 혼란에 빠진 것과 다르게.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보헤미안 길드 베이스캠프엔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다.

그래, 마법사들이었다.

"뭐, 뭐야? 어째서?"

정확하게는 정기 학회에 참석할 실력을 갖춘 마법사들.

"뮤온에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가 나타난 거지?!"

*

뮤온의 소식은 며칠째 세계를 뒤흔드는 중이었다.

마탑이 그 소식을 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르셀로는 작게나마 웃음을 흘렸다.

"경. 드디어 제 차례가 왔군요."

[『기이』]에 관한 연구부터.

악마 숭배자의 처분까지.

그동안 호열에겐 빚만을 져왔다.

"모든 것엔 주고받음이 있다는 것 명심하고 있습니다."

받기만 했거늘.

이제야 호열에게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

그러나.

"멋대로 나서선 안 될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뮤온이 얽힌 이상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여신교와 악크샨.

그리고 마탑까지.

그들 사이엔 '성전(聖戰)'이 얽혀있었으니까. 결심한 마르셀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장 호열을 찾아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달칵─

당연하게도 호열에게 동요는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행동.

마르셀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역시 경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군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렇기에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마르셀로가 말을 이었다.

"경,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호열 경이 알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도.

있었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 마탑의 과오가 원로 마법사.

아니, 악마 숭배자들 탓이었다고 한들.

그것이 변명이나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사실까지도.

게다가 경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지 않았던가?

"마탑이 경과 악크샨에게 '격식'을 지킬 수 있게 말입니다."

.

.

.

종종 플레이어들은 말했다.

"마탑? 솔직히 거품 아닌가?"

"아니, 보여주는 성과가 없잖아."

"꼼짝도 안 하는데 뭔 수식어만 그렇게 거창한 건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막말에 누구보다 격하게 반응하는 건 아르카나인들이었다.

정확하게는 과거, 마탑의 행보를 목격했던 아르카나인들 말이다.

"자네들은 본 적이 없어서 그러네."

"마탑의 마법사들은 인간이 아니야."

"부디, 마탑을 건드리지 말게. 불똥이 튀는 건 원치 않으니."

그러나 이 순간.

더 이상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그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이보다 더한 증명의 기회도 없으리라.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호들갑인지 아닌지."

"이호열이랑 같은 수석이니까. 대충 둘이 비슷하지 않을까?"

"잘하면 이호열의 전력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천하의 마탑.

그 수석 마법사가 과연, 어떻게 뮤온의 공격을 막아낼까? 그가 뮤온에 가까워질수록 지켜보는 이들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

그 기대 또한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가이버 때처럼 화살 비는 쏟아지지 않았으니까.

그저.

쿠구구궁─!

굳게 닫혔던 성문이 거짓말처럼 열렸을 뿐.

열린 성문 사이로 성기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모든 것은 성녀님의 안배. 우리에게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뮤온에 접근하는 자."

-"우리가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인류에게 적대적인 말을 뱉어내던 그 사내였다.

그것만으로도 경악할 일이었거늘.

이내, 지켜보는 이들은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마탑이 아르카나 대륙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고 불렸는지를. 어째서 제국의 황제들조차 마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공 아닌 조공을 바쳤는지도.

"...!!!"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무엇하나 두려울 게 없어 보였던 성기사.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르셀로에게 허리를 굽혔으니까.

충격─

누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호열이 저런 사람이랑 같은 급이라는 거야...?"

◈ 110화. 후회해도 늦었다

나는 떠오른 퀘스트를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악크샨의 절멸]

악크샨과 악마 사냥꾼의 절멸.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성전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라.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진행 중)

●마탑의 원죄를 파악하라. (성공)

잠깐, 이게 무슨 뜻이냐...?

그러니까 마탑도 성전과 관련되어 있었단 거잖아, 이거.

악크샨이 절멸하게 된 성전에 말이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수뇌부.

마탑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건 원로 마법사, 카림제바를 포함한 과반의 악마 숭배자들이었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탑은 성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이 아니었다.

"경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외면하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말씀하셨던 대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요."

마르셀로의 말에 따르면.

마탑은 그저 성전을 외면했을 뿐이었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마르셀로는 이렇게 덧붙였다.

"경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 털어놓게 되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습니다. 마탑은 경에게도, 악크샨에게도 크나큰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악크샨한테는 몰라도....

...나한테는 그렇게 정중하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니까?

성전이고 뭐고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까맣게 몰랐을 테니까.

내겐 10년 하고도 수년의 공백이 있단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가슴 속 무거운 긍지가 이끄는 대로.

나는 마르셀로에게 대답했다.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하게.

"그대를 이해하네. 마르셀로."

인자한 척하지 마라, 그랑펠.

너는 모를지라도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사회생활의 부조리함을.

'윗물이 썩었는데 아랫물이 뭘 할 수 있었겠어.'

까라면 까야 하니까.

성전에서도 마르셀로는 의견을 내지 못했던 거겠지.

그러나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여신교.

성지, 뮤온에 대기 중인 성기사만 수만 명.

그 거대 세력과 상대하기 위해선.

나부터가 거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늘.

"경,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신교보다 더한 세력, 마탑이 움직여 줄 줄이야....

마르셀로는 빈말이 아니라는 듯 '격식'까지 들먹이며 내게 의지를 보였다.

내가 해줄 말은 더없이 간단했다.

"그것이 마탑의 긍지라면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넙죽 고개를 숙여도 모자랄 판에도.

갑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다니.

그러나 철면피에 스스로 감탄하는 것도 하루 이틀.

나는 그 대신에 머리를 굴렸다.

'마탑이 움직여 준다면.'

수고롭게 돌아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같은 수석이라고 해도 낙하산과 엘리트는 취급이 다른 법.

일단, 나와 다르게 마르셀로에겐 명성이 있으니까.

'뮤온이 적대적인 기색을 거둘지도 모르는 일이지.'

마탑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래도 마르셀로의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나는 마르셀로에게 말했다.

"내가 의문인 건 프레이자의 존재, 그 자체라네."

퀘스트를 떠나서도.

그랑펠의 긍지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행보를 보여주는 성녀, 프레이자였으니까.

유달리 의심된다는 거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하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던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게 당연해.'

신성모독으로 여신교에게 몰매를 맞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생각했거늘.

"이해했습니다. 경께서는 그녀를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역시나, 마르셀로는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내 말이라면 작은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셀로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 길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간다고? 마음의 준비 같은 거 안 해도 되나?

우려가 들었지만, 마르셀로는 이미 연구실을 떠난 상태.

결국, 지켜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말로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나는 이윽고 속보를 통해 목격하고 말았다.

뮤온에 등장한 마르셀로.

그와 동시에 굳게 닫혔던 성문이 활짝─ 열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마르셀로를 맞이하는 성기사의 모습까지.

...실화냐.

마탑의 위대함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마탑의 낙하산으로서.

마탑의 후광 덕을 누구보다 많이 봤던 나였으니까.

그런데, 역시 진짜 수석은 달라도 뭐가 다르구나.

물론, 그런 속내와는 상관없이 나는 찻잔을 들었다.

달칵─

그 모습을 지켜보며 태연하게도 지껄였다.

"기사답게 최소한의 격식은 갖췄군."

동공에 씌인 격식의 콩깍지.

물론, 격식을 갖췄다고 해서 여신교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건 절대 아니다.

마르셀로와 성기사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포탈을 발현.

곧장 마탑으로 복귀한 마르셀로가 내게 나눴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경의 우려가 맞았습니다."

...내 우려가 맞았다고?

"성기사단장, 탈림. 그조차도 성녀, 프레이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랬다.

여신교의 성녀, 프레이자.

그녀는 가려진 막 너머에서 목소리와 예언만을 전해왔단다.

당연하게도 내가 할 말은 간단했다.

"격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군."

사람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말이야.

'...아니, 여기서까지 격식을 따질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대놓고 구리잖아, 이건?'

뮤온의 성문을 걸어잠근 것도 모자라서.

측근에게까지 정체를 숨기는 의문의 존재, 프레이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악마 냄새가 난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자칭 성녀의 말에 여신교단은 어째서 속아 넘어간 것인가? 그것 또한 악마의 힘, [상태이상]이라면 설명이 가능하다.

반신, 원로 마법사들에게도 유효했던 [상태이상]이니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쉽지 않겠는데.'

저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는 악마가 쉽게 모습을 드러낼까?

당연하게도 아니겠지.

'심판의 날'까지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던 걸 보면.

그전까지 프레이자가 모습을 드러낼 일은 없겠지.

'뮤온에 접근만 할 수 있어도....'

일단, 입성하기만 한다면 모든 게 확실해진다.

악마 사냥꾼 고유 스킬, [천적관계]의 효과는 전보다도 예리해진 상태. 뮤온, 내부에 악마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 기척을 감지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어지는 마르셀로의 말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경의 말씀대로. 저 또한 그녀의 정체가 의심되더군요."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뱅그릿 톰에게 물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할걸?

세상에 어떤 성녀가 단 한 번도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기에 성녀, 프레이자를 마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리까지 들었을 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프레이자가 초대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쯤이야 마르셀로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마탑이 어떤 집단인지를.

"그녀가 응하지 않으면 저희에겐 명분이 생깁니다."

섬찟한 말에 그제야 떠올렸다.

그래, 마탑은 자타공인 아르카나 최강의 무력 집단.

마탑이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할 때에 방해되는 것은 없었다.

흔적도 없이 아르카나 대륙에서 사라지거나, 사라지기 전에 알아서 길을 비키든가.

마탑과 직면한 이들에게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으니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난다.

그런 어마어마한 마탑이.

고작 나에게 격식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게...!

그러나 그랑펠의 자의식 또한 어마어마했으니.

내가 부담이란 걸 느낄 수 있을쏘냐.

나는 동요 없이 말했다.

"저들의 대응을 지켜보면 될 일이겠군."

그랬다.

이 순간, 부담스러운 건 내가 아니었다.

진짜 똥줄 타고 있는 이는 따로 있을 테니까.

자칭 성녀 프레이자, 그쪽 말하는 거야.

*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그는 베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드리운 막 아래에서 일렁이는 성녀, 프레이자의 그림자.

탈림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고해성사했다.

"...마탑, 그들이 뮤온에 찾아왔습니다."

성녀님을 지켜야 할 성기사거늘.

탈림은 면목이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아니고, 이 세계에서 마탑과 직면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마탑의 수석 마법사가 직접 뮤온을 찾아올 줄은 더더욱.

"성녀님의 규율을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

만약 자신이 기억 속에서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뮤온은 마르셀로의 손짓 한 번에 초토화가 됐겠지.

마탑의 마법사, 그들의 능력을 알기에.

탈림은 뮤온의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르셀로와 말을 섞고 말았다.

"그들은 성녀님과 대화를 나누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성녀님을 정식으로 마탑에 초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탈림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마탑은 어째서 성녀님과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 거지?'

스스로 그 이유를 하나씩 짐작해 보려고 하던 찰나.

성녀, 프레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요.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탈림."

그 나른한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

머릿속에 떠오르던 생각을 말끔하게 날려버릴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강한 힘이.

"저는 성녀님의 뜻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일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가요, 탈림.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나를 찾았나요."

"...그건."

"알고 있답니다, 그대는 두려웠던 거겠죠."

성녀님의 말씀이 옳았다.

마탑은 누구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탈림은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감스럽게도 그대에겐 믿음이 부족한 거겠지요."

"미, 믿음이 부족하다니요. 그게 아닙니다, 성녀님...!"

"아뇨.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대도 혼란스럽겠지요. 악마도 모자라 우리의 성지, 뮤온이 낯선 세계에 떨어지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탈림.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요?"

"...?"

"이 낯선 세계에서도 여신님의 보살핌은 여전하다는 걸."

"!"

그 말에 탈림은 떠올렸다.

여신의 보살핌이자 기적.

뮤온이 성지라 불리게 된 이유, '성자의 눈물'을.

그래, 프레이자 님의 말씀엔 틀린 것이 없었다.

탈림이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런가요, 탈림. 그럼 그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말꼬리를 흐리던 순간.

탈림의 머릿속에 강렬한 생각이 맴돌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여신의 계시'였다.

탈림이 말을 이었다.

"...계시대로 뮤온을 개방하겠습니다. 이 세계에 여신님의 기적을 증명하고 여신교의 위대함을 널리 퍼트리겠습니다. 마탑조차 막을 수 없는 세력을 일궈내겠습니다."

탈림의 선언에 베일이 잘게 흔들렸다.

어딘가 모르게.

흡족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

[속보] 여신교단 성지, 뮤온 전면 개방!

[속보] 이것도 마탑 효과? 닫혔던 뮤온의 성문이 열리다...!

[속보] 플레이어 曰, "뮤온에 기적의 샘물이 존재한다...!"

──────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뮤온에 마탑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가 나타났던 것도 놀랄 일이었거늘.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뮤온이 나서서 성문을 개방할 줄이야.

"마탑이 어떤 식으로든 뮤온에 개입했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대격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탑이 이렇게까지 전면으로 나서서 행동했던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아니, 세계 각국의 정부가 나서서 러브콜을 보냈을 때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아니겠습니까?"

대체 마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길래.

마탑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것일까.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호멘

과거와 현재의 마탑.

바뀐 건 수석 마법사.

호열의 존재밖에 없었으니까.

정작 호열은 뮤온 근처에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건만.

호열을 향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어떤 채널, 커뮤니티에 접속해도 그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

-아니ㅋㅋㅋㅋㅋ이게 노벨 평화상이 아니면 뭐임!!

-가이버 쓰러질 때만 하더라도 진짜 ㅈ된 줄 알았는데;;;

-큰그림 오졌다 진짜ㅋㅋㅋㅋㅋ

-균열 돌면서도 뮤온 쪽을 신경 썼다는 거잖아, 이건??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걸 동시에 해냈네ㅋㅋㅋㅋ

그런 호열에 관한 관심에 비하면.

아직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뮤온에 입성한 넷튜버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가는 정보도 하나 있었다.

뮤온, 정중앙에 위치한 호수.

그 호수를 채운 샘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거 샘물 효과가 심상치 않은데요, 형님들?"

"성기사들이 괜히 여신의 기적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어요."

"이, 이런 효과면 저도 여신교로 개종하고 싶어지는데요?!"

일파만파─

퍼져가는 호수 속 샘물에 관한 소식.

그 효과를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실시간 스트리밍을 타고 호수의 효과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으니까.

호수의 샘물이 정말 회춘의 묘약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넷튜버의 피부를 앳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자신.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치솟고 있는 여신의 기적, 샘물에 관한 관심.

당연하게도.

그 모든 사태를 확인한 호열은 언제나와 같았다.

거울 앞에서 가지런히 정돈하는 차림새.

그런 호열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또각─

뮤온을 향해서.

.

.

.

자칭 성녀님께서도 좀 치시는데?

스스로 뮤온을 개방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정말이지 비열한 수법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봐도 누명을 씌우려는 속셈이 분명했으니까...!

실제로 언론에선 떠들어 대고 있었다.

뮤온이 개방된 건 전부 마탑, 마르셀로가 움직인 덕분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런 마르셀로를 움직인 내 덕분이란다.

그래, 그게 바로 프레이자가 노린 거겠지.

개방된 뮤온에서 사건이 터진다면 그 책임의 화살은 마탑을.

더 나아가서 나를 향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로써 더없이 확실해졌다.

"비열한 족속답구나."

그런 쪽으로 머리가 굴러가는 건 역시 악마밖에 없겠지.

글쎄, 어떤 악마인지는 몰라도 능력 한번 좋다.

뮤온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서.

여신교를 내세워 마탑에 누명까지 씌우려고 하다니 말이야.

게다가 뭐라고?

회춘의 묘오오오약?

사람들이 몸에 좋다면 환장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는.

그런 식으로 신도를, 아니 인질을 끌어모으시겠다?

이거, 하마터면 굉장히 피곤해질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도는 좋았다고 할 수 있겠군.

물론.

"주제를 모르는 것만큼 하찮은 것도 없는 법이지."

내가.

너희가 성전이란 개수작을 부리면서까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들었던 천적.

악마 사냥꾼이 아니었다면 말이야.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 111화. 상황 파악이 되는가 (1)

자,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자.

여신교단 성지, 뮤온.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고 해도 성기사들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운 상태. 수만 개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녀, 프레이자를 찾아내야 한다?

정말이지, 막막한 상황이 아닐 수 없겠지.

"가이버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역시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분명하죠?"

"내가 알던 여신교가 괜히 그럴 리 없다니까요!"

"그나저나 역시 마탑이야. 움직이자마자 딱 해결이 되잖아."

게다가 플레이어들이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인지 실감하게 된다.

약간 수틀리면 엄청난 누명을 쓰게 생긴 참이니까.

그러나.

또각─

내 걸음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수만의 성기사가 어쨌단 말이냐.

뮤온의 웅장한 규모가 또 어쩌란 말이냐.

내게는, 그랑펠에게는 긍지가 있단 말이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무거워서 가라앉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긍지가...!

그런 긍지가 말해오고 있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악마와 같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

이 순간이 심히 마땅치 못하다고.

"거기로구나."

나는 시선을 옮겨 백색의 건물을 바라봤다.

과연, 아르카나 대륙 최대의 종교답다.

건물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시다.

그래, 저 안에 악마가.

자칭 성녀, 프레이자가 있는 것이다.

본성의 입구는 성기사가 가로막고 있었다.

"...와씨 싸늘한 표정 보셨죠? 저긴 못 들어가나 봐요."

플레이어 중 몇몇이 저 뮤온의 본성으로 진입하려고 했지만.

이미 제지를 당한 모양이었다.

시커먼 속셈으로 뮤온을 개방하기 했다만.

자신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소까지 드러낼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어리석다."

그런데 너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천적이 어째서 천적이라 불리는 건지 모르나 본데.

그 어떤 조건에서도 거스를 수 없으니까.

천적이라고 불리는 법이거든.

그래.

나는 뮤온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알아차렸다.

녀석의 위치뿐만 아니라.

뮤온의 성기사, 저들에게 깃든 건 '믿음'이 아닌.

악마의 [상태이상]일 뿐이라는 것도.

'악마에게 도달하기 위해선 저 성기사를 파훼해야 한다.'

그나저나 많기도 하다.

수만 명에 이르는 성기사의 방어선을 뚫는다?

엄두가 나질 않는 일이지만, 나는 그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을 실현케 하는 '집단'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렇다, 마탑. 무엇을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해내고야 마는 그 마탑 말이다.

'그런 마탑이 움직였다는 걸 너도 알게 됐으니까....'

지금처럼 뮤온을 개방한 거겠지.

지켜보는 눈을 늘리기 위해서 말이야.

물론, 마탑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세상이 지켜보고 있다고 한들.

내 말이라면 가로막는 적을, 수만 명의 성기사를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피하자. 마탑은 몰라도, 오히려 전 세계가 마탑의 눈치를 보게 될 테니까.

그로 인해 초래될 혼란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겠지.

그리고 그런 대혼란 속에서.

악마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교묘해.'

과연, 여신교를 집어삼키고.

성전이란 개수작을 부린 악마다웠다.

현실에서 봐온 악마들이랑은 차원이 다르잖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파놓았다.

'근데 구멍이라면 나도 좀 파거든.'

선택지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수만의 성기사에게 걸린 [상태이상]을 제거하는 것.'

아무리 마력이 넘쳐난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겠지.

마르셀로의 마력으로도 그건 좀 부담스러울걸?

게다가 자신들을 향해 마법을 발현하는 모습을.

[상태이상]에게 걸린 성기사들이 두고 보고만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

망설임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악마의 아이템을 꺼냈다.

[구마의식]의 제물이 될 악마의 아이템을.

['음울한 조각상'이 제물로 선택되었습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선택된 대상을 '의식'으로 초대합니다.]

'의식'.

악마 사냥꾼과 악마의 정신력 싸움이 이뤄지는 공간.

의식에 초대된 악마에게 [상태이상]을 유지할 여력은 없어진다.

설령 그것이 어떤 대단한 악마가 건 상태이상이라 하더라도.

그래, 나는 목격하지 않았던가.

거악, 칠죄종 탐욕.

그리고 마왕, 데카라비아의 상태이상조차도.

구마의식이 발동된 순간.

정확히는 내가 입을 연 순간.

무의미해졌단 것을 지켜봤었단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지.

오랜 시간 동안 기만하던 뮤온의 성기사들이 단숨에 네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게.

그러나 내게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악마 사냥꾼과 악마.

거스를 수 없는 천적이란 건.

그런 관계였으니까.

아니, 누구보다 네가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런 천적을 두려워했으니까.

악크샨을 성전으로 엮어서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거겠지. 이 순간 내가 악마를 알아본 것처럼. 구마의식이 발동된 순간, 녀석도 나를 알아봤을 것이다.

"그 소감이 어떠한가. 하찮은 족속이여."

물론, 내 소감이야 더없이 간단했다.

또각─

"잠깐. 이곳엔 접근할 수 없다."

상태이상은 사라진 상태.

성기사는 혼란한 와중에도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당당하게 차림새를 가다듬으며 선언했다.

"지금이 바로 그대가 기다리던 심판의 순간이다."

*

성기사, 탈림 에베르는 머릿속이 혼란했다.

'...나는 어째서 저들을 경계하고 있는 거지?'

멈칫─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민간인을 향해 검을 겨누는 것.

성기사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탈림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떠올렸다.

'...성녀님의 말씀.'

그래, 모든 건 성녀 프레이자로부터 시작되었다.

탈림은 프레이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다가오는 이에게 경고했다.

"잠깐. 이곳엔 접근할 수 없다."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지금이 바로 그대가 기다리던 심판의 순간이다."

"...!"

심판의 순간?

...심판?

그 단어에 탈림은 두통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심판의 날...!'

어렴풋이 프레이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뮤온을 벗어나선 안 된다고.

성녀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자신은 성기사의 규율을 어겨가면서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았던가?

"!"

그랬었다.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에게 짓밟히고.

죄 없는 이들이 살해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고향이 멸망하던 날까지도.

자신은 오직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뮤온에 처박혀 있었다.

"우욱!"

...내가 정말 그랬다고?

순간, 탈림은 억누를 수 없는 구역질이 치솟았다.

몸과 정신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탓이었다.

탈림의 가슴 속에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난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모든 건 성녀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성녀님이 우리를 옳은 곳으로 끌어주시리라 믿었으니까.

애써 의심을 거두는 탈림에게 목소리가 이어졌다.

"프레이자."

"...?"

"그대에겐 아직도 그것이 성녀로 보이는가?"

"...!"

신성모독이다.

평상시였다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겠지. 그러나 탈림은 그럴 수 없었다. 은발 머리칼의 사내,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체?'

프레이자, 그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아니, 언제부터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프레이자의 행보는 말이 되질 않았다.

여신교에겐 신도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거늘.

여신의 이름으로 악마에게 짓밟히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거늘. 프레이자는 지나치게 뮤온에 집착했다.

그러나.

'여신의 계시.'

그런 의심을 품을 때마다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의심을 잠재웠다.

꾸욱─

탈림은 주먹을 쥐었다.

'시험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 곧 평소대로 여신의 계시가 찾아올 것이다.

자신은 그저 여신의 계시대로 행동하면 될 일이었다.

"...어째서."

그러나 더 이상 여신의 계시는 없었다.

품어선 안 될 의심이 머리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거늘.

들려오는 건 오직 사내의 담담한 목소리뿐이었다.

"상태이상은 사라졌다."

탈림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상태이상이라고?"

일종의 저주들.

내가 그동안 저주에 걸렸다는 말인가?

그런 것치고 몸 상태는 온전했다.

탈림의 머릿속 의심이 더욱더 커져갔다.

'분명 상태이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어떤 저주인지 알 수 없다면.

무엇이 사라졌는지 거꾸로 되짚어 보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되짚어 봐도.

자신에게 사라진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신의 계시뿐이었다.

"우, 우우욱!!"

다시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뮤온에서, 타인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탈림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사내를 바라봤다. 그러나 사내의 표정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탈림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성녀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걷잡을 수 없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기에 사내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탈림은 간절히 바랐다.

부디, 사내가 대답하지 않기를.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악마다."

"아아...."

자신의 믿음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대답이.

.

.

.

뒤통수가 얼얼하겠지.

당장은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인데.

털썩─

나를 가로막았던 성기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플레이어들의 눈초리였다.

대화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니까.

'이거 또 괜히 이상하게 소문이 퍼지는 거 아닌가.'

그런 우려가 들었건만.

지금은 눈앞에 악마에 집중해야 할 때다.

각오를 다지는 내게 성기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믿을 수 없다."

그래, 믿을 수 없겠지.

근데 현실은 원래 추잡한 법이다.

"설령 프레이자에게 속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악마라는 말엔 동의할 수 없다. 성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여신의 보살핌이 있기 때문이다. 여신의 기적, 성자의 눈물이 온전한 것이 그 증거다."

말을 잇는 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 성지에, 뮤온에. 악마는 발을 들일 수 없다."

그런 뜻이었나.

프레이자를 믿는 거만 아니면 상관없다.

나도, 그랑펠도 무교지만 말이야.

이 세상엔 종교의 자유가 있다.

누가 뭘 믿든 나랑은 상관이 없단 말이지.

애초에 우리 부모님도 말이야.

한 분은 절에, 한 분은 교회에 다니시니까.

그러나 틀린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피곤한 성격.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여신의 기적 같은 게 아니다."

그래, 여신교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고.

언론에선 회춘의 묘약이라 호들갑을 떨었던 저거.

성자(聖子)의 눈물.

어째서 샘물 주제에 그런 효과가 있는지.

적어도 내 눈에는 그 이유가 제대로 보이고 있었으니까.

"성자의 눈물이란 이름처럼 특별한 것 또한 아니다. 노화에 작용하는 건 그저 샘 밑에 자라고 있는 비약초, '아리아 이끼'의 효과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외관이 평범한 이끼와 구분하기 어려우니까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탓. 그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뭐라고?"

"허나 아리아 이끼만으로는 저런 효과를 낼 순 없다. 아리아 이끼의 효과는 특정 온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못에 가라앉은 광물이 적정한 수온을 유지해 주고 있는 덕분이겠지. 주변 환경을 고려했을 때 '드뮨 월석'이 유력하겠군."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

그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진실.

내 추측을 뒷받침해 주는 건 퀘스트창이었다.

─성전에 참가한 세력을 파악하라. (진행 중)

●여신교단의 성자와 조우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의 실체를 파악하라. (성공)

●여신교단 성녀로 위장한 악마를 사냥하라. (진행 중)

●마탑의 원죄를 파악하라. (성공)

퀘스트창이 말해주고 있었다.

여신교단엔 애초에 성자도, 성녀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의 말에 성기사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아르카나 대륙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죄책감, 또는 후회겠지.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 심심치 않은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이 피곤한 성격에 그런 따뜻한 말이 가능할 리가 있나.

나는 나답게 입을 여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아주 그냥 속을 박박 긁는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여신교와 원수를 질 소리를 잘도 뱉는구나.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내 입은 잘도 지껄여 나갔다.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다."

"...?"

나의 말에 성기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표정이 마치 증거는 이미 충분하지 않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뭐, 멘탈이 제대로 깨졌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품을 만도 하겠지.

자신들의 성지, 뮤온은 완전히 악마에게 놀아난 꼴이었으니까. 다른 신은 몰라도, 여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그걸로도 충분하다 생각한 거겠지.

그러나 과대평가다.

"하찮은 악마 따위가 증거가 될 순 없으니까."

"...!"

그건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그랑펠의 긍지께선 그걸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고막을 때리는 굉음.

쿠쿠쿠쿠쿠쾅─!

뮤온의 순백색 본성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건물 틈 사이로 거대한 촉수가 튀어나왔다.

프레이자, 성녀를 사칭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거대한 촉수 덩어리.

그와 어울리지 않는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기사들의 반응으로 봤을 때 프레이자의 목소리였겠지.

"과연,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좋아. 보다 새로운 기만거리를 찾았으니. 유희는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겠다. 나름대로 즐거웠다. 허상에 미친 어리석은 여신교단이여."

짐작했던 대로.

의식 속에서도 멀쩡한 걸 보니까 보통 악마는 아니군.

게다가 떠도는 소문이라.

내 존재에 대해서도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너 제대로 실수했다니까?

내가 어떤 돌발상황에 휘말릴지 모르는 적진에.

혼자 왔을 것 같아?

그래, 당연하게도 내 뒤엔 마탑이 있었다.

그것도 세니오스의 사망 후.

악마에 대한 분노가 극에 이른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말이다.

저벅─

...그런데, 잠깐만.

이거 어쩌면 마탑이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철컥─

어느새 나와 나란히 선 성기사.

그의 눈빛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내, 결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심한 제게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릉─

그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진정한 믿음을 증명할 시간이다."

"여신을 기만한 악마를 심판할 시간이다."

"여신의 이름으로. 검을 뽑아라, 뮤온의 성기사들이여!"

그와 동시에.

나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여신교 성기사단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여신교 성기사단장, 탈림 에베르 휘하 46,800인의 성기사]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

◈ 112화. 상황 파악이 되는가 (2)

뮤온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그 소식에 누구보다 촉각을 세운 건 AAU였다.

지부를 구분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이번 사태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들을 그냥 놔둬도 되는 걸까요?"

"무슨 뜻이야, 그거?"

"프레이자라는 변수가 너무 크잖아요."

정체불명의 존재, 프레이자.

현시점에서 뮤온을 움직이는 건 성녀인 그녀였다. 차라리 뮤온의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민이 많아지진 않았을 텐데....

"우리 플레이어분들께서 말한다고 들으시는 분들인가?"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물론, 걱정하는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지켜보자고. 무엇보다 뮤온에 태도가 달라진 건 마탑, 마르셀로가 움직인 직후였으니까."

잠시 침묵하고는 모니터를 응시─

"결국, 이번에도 이호열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마탑을 움직인 건 이호열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이호열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뮤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차림새.

그러나 그 행보는 평소보다 더욱 파격적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흠칫할 정도로.

"...잠깐만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호열, 그의 앞에 성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누구보다 놀란 건 AAU였다.

프레이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성기사들의 설정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었으니까.

"성기사가 무릎을 꿇는다고.... 플레이어에게?"

"대체 쌓아둔 명성치가 얼마나 높다는 거지?"

"아니, 저건 명성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그래, 명성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성기사, 그것도 성기사단장이 무릎을 꿇을 정도.

그건 이호열이 여신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단 소리였다.

"여신교단의 퀘스트도 진행했었단 건가?"

"애초에 구현이 되기나 했던 거야, 그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호열은 대체...?"

그러나 경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구구궁─!

굉음.

갑작스레 무너지는 뮤온의 성채.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촉수 덩어리.

"뮤, 뮤온에 몬스터라고? 뭐야 저거?"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던 프레이자.

AAU에서 설마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게 프레이자의 실체였나...!!"

몬스터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강한지 약한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보통 놈은 아니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뮤온에서 성녀를 사칭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순 없었을 테니까.

"빨리! 플레이어들에게 연락해!"

미지의 존재.

그 위험성은 짐작할 수조차 없다.

모두가 섣부른 행동을 자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돌발상황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설마 이것도?"

이호열의 존재를.

촉수 덩어리의 존재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 자세엔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표정과 시선 또한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이호열의 곁에 성기사가 있었다.

스릉─

-"여신의 이름으로. 검을 뽑아라, 뮤온의 성기사들이여!"

한 명이 아니다.

거대한 촉수 덩어리를 향해 검을 뽑아 든.

수만 명의 성기사들이.

그 광경에 AAU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지부 모든 구성원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누가 AAU인지 모르겠는걸."

젠장, 누가 안티 아르카나란 말인가?

현실을 침식해 오는 아르카나.

그에 대응하고 있는 건 정작 이호열밖에 없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건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이호열은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준아, 너라면 저럴 수 있을 것 같아?"

윤수겸은 성현준에게 물었다.

뮤온에 촉수 덩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치더라도. 뮤온은 저 괴물의 아가리 속이나 다름없었다.

이호열은 저 괴물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잖아요. 목숨이 걸린 현실."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 하더라도.

나는 못 할 거야.

성현준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호열은 해내고 있었다.

아니, 벌써 몇 번이나 해냈다.

생색 한번 내지 않고서는.

그런 이호열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오직 하나.

"저 '숭고함'이 성기사들조차 따라나서게 한 건가?"

이호열의 손짓 아래 움직이는 수만의 성기사들.

여신교의 성기사가 외부인.

그것도 플레이어의 명령에 따르다니.

아르카나의 설정에 따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진짜 믿기지 않는 플레이어야, 이호열...!"

그래, 이 또한 현실이었다.

*

현실이다.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수만 명의 성기사가 나의 뒤에 서 있었다.

내가 남태민이나 히사기처럼 거대 길드의 마스터도 아니고. [군주] 클래스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병력을 언제 이끌어 봤겠는가. 확실히 부담감을 느낄 만도 한 상황이겠지.

"탈림 에베르.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도.

뮤온의 성기사, 그들의 지휘권을 거머쥐었다.

수만의 병력을 휘두르는 것?

아무리 그랑펠의 설정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적정선이 있었다.

내가 특별한 놈인 줄 알았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수만의 병사를 휘두를 생각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단 뜻이지.

더군다나 그땐 혼자가, 독고다이가 멋있다고 생각할 시기였으니까....

'이제부터는 내 영역이다.'

결국, 나 하기에 달렸다는 거다.

내 방식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래, 이호열의 방식.

이젠 익숙하다.

있는 거 없는 거 죄다 끌어오는 그거 말이야.

쿠콰콰콰쾅─!

촉수에 무너지는 뮤온의 성채.

그 또한 광물이기에 탐색 대상은 더없이 익숙하다.

탐색, 간섭을 생략하고 곧장 발현해 낼 만큼.

후두두두둑─

두둑─

둑두두두후─

무너지던 뮤온의 성채가 다시 세워진다.

흩어진 퍼즐이 저절로 맞춰지는 듯한 광경.

그 모습에 각오를 다진 성기사들조차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건물이 다시 세워진다아아...?!"

"...여, 여신이시여."

뭐, 내가 봐도 장관이긴 하다.

확실히 마법이 대단하긴 해?

모르고 보면 여신의 기적 같기도 하고 말이지.

그러나 그 실상은 실로 간단.

'『반전 마법』.'

단지 그 대상이 광범위해졌을 뿐.

반전 마법의 마력 가성비는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게다가 [천적관계] 발동.

광물이라는 더없이 익숙한 탐색 대상이기에.

나는 파괴된 뮤온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고도 마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의 심미적 가치는 흔치 않지.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

오직 심미적 관점에 따른 발현.

그러나 문제는 없겠지.

탈림이 내게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뮤온을 지켜주셔서."

나의 속내가 드러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충분했다.

촉수 덩어리의 성질을 긁기에도 말이야.

"건방져, 아주 건방지다. 감히 이 네프리피트를 상대하면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단 말이냐? 더없이 오만하구나.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다. 네 녀석들은 하나같이 주제를 몰랐으니까."

네 녀석들이라.

그건 악크샨의 악마 사냥꾼을 말하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악마 놈들은 확실히 말 하나만큼은 잘한다.

"그렇기에 그 최후가 어땠는가? 어디 보자. 성전(聖戰)에서의 네놈들의 추태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선하구나. 어리석었지. 마주한 적도 없는 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사지로 뛰어들다니."

괜히 뮤온을 차지한 게 아니라는 건가.

녀석의 말에 오히려 성기사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서걱─

탈림이 뻗어오던 촉수를 잘라내곤 나를 바라봤다.

"성전...? 설마, 당신께서는?"

악마 사냥꾼이냐고.

그렇게 묻는 눈빛이었다.

그래, 내가 악마 사냥꾼이다.

그것도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지.

시원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랑펠의 고집은 꺾을 수 없는 법.

"하찮은 사냥감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다."

철칙 하나.

사냥감과 불필요한 말은 섞지 않는다.

고오오오─

대답 대신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철저하게 무시당한 촉수 덩어리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구마의식] 발동.

나의 의식에 초대됐기에.

이 소란 가운데서도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던 거겠지.

이내, 늘어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런 놈들 중에서도 특히나 오만하구나. 그러니 용서할 수 없다. 감히 나를, 네프리피트를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뭐라고 생각하긴.

성녀 사칭범으로 생각하지.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고 서운해하진 마라.

그랑펠에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존재거든, 너 같은 악마는.

"거악의 그늘에 숨던 나약한 악마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나다! 어설픈 악마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가 나, 네프리피트란 말이다! 나의 힘은 상위 마왕에 범접한다!"

푸슈슈슈슉─!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촉수.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촉수가 나와 성기사들을 향해 뻗어왔다.

덩치만큼이나 광범위한 공격 패턴이다.

반드시 누군가는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쿠르르릉─!

있는 것.

없는 것.

구질구질하기로 마음먹은 내가 있다면.

쿠구구궁─!

나는 땅을 들어 올렸다.

정확하게는 암석으로 구성된 뮤온의 지표면을.

강도는 상당하면서도 심미적 관점에서도 모자라지 않는다.

내가 휘두르기에도 흡족한 무기라는 것이다.

쌔애애애액─!

그 형태는 원반처럼.

나는 공중에 떠오른 뮤온의 지표면을 조작했다.

뻗어오는 촉수를 잘라내기 위해서.

염동력의 마력 효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거늘.

이건 단순한 염동력이 아니다.

나는 확실하게 개념을 더했으니까.

『마법』, 염동력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개념.

[스킬], 동시사격을.

그래, [『기이』]라는 것이다.

스와아아아악─!

촉수를 가르는 수십 개의 원반.

그 위력은 『마법』이나 [스킬].

하나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후두두둑─

녀석의 촉수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절단'이 발생합니다.]

"!!!"

성기사들도.

네프리피트도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또각─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나의 걸음뿐.

나는 입을 열었다.

"착각이 크구나."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는 철칙.

그러나 틀린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피곤한 성격.

그러니까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고작 그따위로 상위 마왕을 자처하다니."

가만히 듣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상위 마왕의 부활.

그를 막기 위해서 나와 마탑은 쉴 새 없이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카림제바와 충돌.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가 전사했다.

천하의 마탑이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 막아낸 상위 마왕의 부활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냉랭하게 읊조렸다.

"그 희생을 가볍게 하지 마라."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

짐작했던 대로 녀석은 강했다.

[구마의식] 속에서 수만 명의 성기사에게 둘러싸이고 멀쩡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메시지에선 진명의 악마, 네임드 몬스터라 명시되어 있었지만.

악마족 몬스터는 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성장한다.

백이설에게 빙의했던 서큐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녀석도 성녀, 프레이자로 살며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겠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상위 마왕은 카림제바처럼 경지에 오른 이들조차.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런데 네가 상위 마왕에 버금간다고?

뮤온에만 처박혀 있어서 현실 감각이 떨어졌나 본데....

그런 네게 딱 어울리는 말이 있지.

"우물 안 어리석은 악마여."

쏘아붙이고는 마법을 발현했다.

"...감히!"

대답할 틈을 주지 않으면 대화가 아닌 법.

그런 내가 발현한 마법은 간단했다.

성녀도 모자라 상위 마왕을 자칭한다면.

어디 한번 이 경지부터 버텨 봐라.

[『절대영도』].

세니오스의 비전 마법.

굳이 따지자면 경지가 아니라 경지를 흉내 낸 거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이』]였다.

'짝퉁엔 짝퉁으로도 충분하다.'

오소소소소─

이윽고 [온기] 버프를 받고 있는 나조차도.

서늘함을 느낄 정도의 한기가 네프리피트를 휘감았다.

"!!!"

꿈틀대던 촉수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빙결'이 발생합니다.]

[진명의 악마, 네프리피트에게 '동상'이 발생합니다.]....

어떠냐, 이게 바로 냉혹한 우물 밖 현실이다.

.

.

.

'...말도 안 된다!'

얼어붙은 네프리피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기만해 온 인간들이 얼마인가.

흡수해 온 부정적인 감정은 또 얼마나 방대한가.

그를 통해서 강성해진 자신이 아니던가.

'어떻게 이 몸을...?'

그런데 저 악마 사냥꾼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의식에 초대하던 순간부터.

자신이 그 실체를 드러냈을 때도.

녀석에게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인간 주제에...!!'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런 녀석에게서 부정적인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녀석들의 동료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단 말이냐?'

성전(聖戰)을 언급하고, 악마 사냥꾼들의 처참한 최후를 언급했어도. 놈에게선 일말의 동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시종일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조차도.

'오만하다.'

그렇기에 즐거웠다.

높은 곳에서 추락시키는 것이 더욱 즐거운 법이니까.

하지만 추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 한 마리가 자신을.

이 네프리피트를 완전히 압도했으니까.

'오만한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네프리피트는 떠올리고 말았다.

아득히 먼 과거.

자신을 거둬준 거악(巨惡)의 목소리를.

-"악크샨의 처분은 네게 맡기겠다."

-"제가 그리 큰 영광을 받아도 되는지요...?"

-"알아서 하거라. 나는 만사가 귀찮구나."

칠죄종 나태.

그녀를 어리석은 구시대의 악마라 생각했다.

악마에게 천적이라니.

거악이나 돼서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계획대로 악크샨을 절멸시킨 순간.

네프리피트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미련하구나. 이런 자리를 내게 넘기다니!"

덕분에 뮤온을 차지한 자신은 그 어떤 악마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졌으니까. 나날이 강성해지는 능력. 보고 있자니 자신감이 치솟았다.

-"내가 마왕을 넘어 거악으로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태.

어리석은 그녀보다 위대한 진짜 거악으로.

네프리피트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천적을 만나기 전까지는.

'...움직여! 움직여야 한다!'

차갑다.

거대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한기였다.

시간의 흐름조차 얼어붙는 추위였다.

'다들 멈춰라. 내가 성녀다. 내가 프레이자란 말이다!'

그 가운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던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육체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한결같은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네프리피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내가, 이 네프리피트가 이대로 허망하게 죽는 건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거악들이, 마왕들이 악크샨을 그리도 두려워했는지를. 번거롭게 탈을 쓰는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악크샨을 절멸로 몰고 갔는지도.

결국, 네프리피트는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거악이시여. 나의 주인, 나태이시여! 나를 살려주소서!'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녀는 게으름의 근원이 아니던가?

반란을 거듭해 온 자신을 찾아오지도.

또 처분하지도 않았던 나태 그 자체였으니까.

자신을 구원하는 일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비이이이일어어어먹을...!!'

.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소멸하는 촉수 덩어리.

어지러이 떠오르는 메시지의 확인은 잠시 미뤄두자.

사냥도 끝났겠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나는 내게 다가오는 탈림에게 물었다.

"성전에 관해 여신교에게 묻겠다."

하여튼 이놈의 입버릇.

같은 말을 해도 참 건방지게 말한다.

그러나 건방지다고 대답을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방금도 메시지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성지, 뮤온과의 관계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성지, 뮤온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종교, 여신교와의 우호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게다가 내게는 마땅히 자격이 있었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여신교단 성기사단장, 탈림.

털썩─

그가 내 앞에.

정식으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으니까.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설령 '심판'이라 할지라도."

...잠깐, 나는 그런 심판을 말한 게 아니었는데.

오해를 바로잡을 새는 없었다.

지켜보는 시선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바, 방금! 여, 여신교가 책임을 진다고...?"

"뭘 책임진다는 거야?"

"심판...? 이호열이 여신교를 심판?!"

일단, 자리를 좀 옮기자.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은 장소로군."

"...이런, 안내하겠습니다."

"되도록 차를 들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좋겠네."

"...?"

전투 이후.

마력 보충은 내겐 더없이 중요한 절차란 말이다....

◈ 113화. 작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