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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화. 압살

맹약.

그것은 드워프들의 왕이 살아있을 적의 이야기.

태산과도 같았던 드워프 왕을 무너트린 건 엘프도 아니요, 드래곤도 아니요, 작은 소악마에 불과했다.

"왕이시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니신지...."

너무나도 작았기에.

태산에게는 위협조차 되지 않아 보였기에.

처음부터 쳐내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조용히 하거라. 이런 바깥의 소문은 흔히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아르카나 대륙과의 접촉이 적은 드워프.

소악마는 대륙의 소식을 빌미로 드워프 왕의 신임을 얻었다.

녀석이 전하는 이야기엔 불순한 의도가 내비쳤다.

"인간 놈들은 드워프들의 기술을 두려워하면서도 시기하고 있답니다. 지금이야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인간들이지만. 나중에는 또 모르는 일 아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본 게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인가?

거짓인가?

허나 드워프들에겐 그 말의 진위를 가려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녀석의 '악의'에 놀아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닥쳐라."

"짐의 유희를 방해하지 마라."

"흐아암. 내정이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로구나."

태산은 빠른 속도로 악에 시들어갔다.

드워프 왕은 더 이상 없었다.

소악마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만 있을 뿐.

드워프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뇌했다.

"주군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정녕 없단 말인가?"

"빌어먹을...."

"우리들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질 않으시니."

"이래서야....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네."

마탑의 마법과 비견되는 기술력.

찬란한 기계 문명을 이룩한 명석한 두뇌.

허나, 그런 머리를 맞대어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뭐라고?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 나도 헛소리 취급을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하네."

오히려 드워프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날 정도로.

그 고뇌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폐하, 오늘은 어찌 홀로...?"

주군의 곁에서 맴돌던 소악마가 자취를 감췄다.

실로 기뻐해야 할 일이었거늘.

그럴 수 없었다.

"!"

어째서인가?

평소보다 더욱 검고, 짙어 보이는 주군의 새까만 동공.

평생을 들어왔던 그의 말투가 명백하게 달라져 있었으니까.

"오냐. 오늘도 떠들어 보아라."

"...?"

"짐의 기분이 오늘따라 상쾌하니. 어디 한번 실컷 지껄여보라는 것이다."

"!"

확실했다.

그건 소악마의 말투였다.

변화를 알아차린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반역죄라는 건 참 편해."

"...?"

"괘씸하면 그냥 죽여도 된다는 거잖아? 반역으로 몰아서."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칠흑.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고작 작은 악마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게.

그러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내라고? 인간이 어찌 우리의 고향을 찾았단 말인가?"

병사의 보고를 들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악크샨에서 온 악마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사냥 도중 느껴진 악마의 기척이 쫓았더니 이곳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

고작 한 명의 사내가 이 상황을 해결하리라고는.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그날 이후.

깨어난 드워프 왕과 악크샨은 맹약을 맺었다.

그것은 악마를 사냥하기 위한 협력이나 다름없었다.

"악마는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존재로군."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 세워진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바로 그 맹약의 상징이었다.

왕이 천수를 다하고 눈을 감았어도, 드워프들은 그 유지를 잊지 않았다.

성전(聖戰).

대전쟁을 앞두고도 드워프와 악크샨의 맹약은 굳건했다.

비로소 악크샨에게 졌던 빚을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악크샨과의 교류가 끊어진 것이었다.

"...악크샨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는군."

마법사들처럼 텔레파시를 주고받진 못했지만.

자신들과 악크샨 사이엔 그를 모방한 기계가 있었다.

자신들이, 드워프가 만든 기계였다.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확신할 수 있었다.

"대륙, 끝에서 끝이 아니라면야. 어느 지역에 있어도 목소리는 전해질 텐데.... 불과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잘만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악크샨에 불상사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는 일.

드워프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성전에 참여한 세력들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혹시나 악크샨에 관해 들어온 소식이 있느냐고.

그리고 알아차렸다.

"...무언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네."

여신교단을 비롯해서 하루아침에 돌변한 저들의 태도.

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어찌...!!"

고작 하루아침에 악크샨이 대륙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

.

.

성전에서 드워프들은 다짐했다.

자신들이 다시는 아르카나 대륙.

인간들에게 모습을 비추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성전을 둘러싸고 추악한 계략이 얽혀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악크샨이 사라진 이상, 그들에게 인간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는 종족에 불과했으니까.

그랬다.

아르카나 대륙이 악마에게 짓밟히건.

제국의 병사들이 전멸하던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철커덕─!

맹약의 상징.

자신들이 개발한 악크샨의 결전병기.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작동하기 전까지는.

"악마 사냥꾼! 악크샨의 생존자를 찾았다!!"

드워프들의 지도자, 체인워커 하드록.

체인워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자다."

마왕에게 마법을 쏟아붓고 있는, 저 은발의 머리칼의 사내가 바로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한 악마 사냥꾼이 확실하다고.

그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잔상 덕분이었다.

"그대들에게도 보이지 않는가? 공포에 떨고 있는 악마가."

과거, 드워프 왕.

아니, 왕의 탈을 쓴 소악마.

악마 사냥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빌던 녀석.

-"내, 내가 잘못했다. 살려줘. 제발!!"

지상의 마왕에게서 애원하던 녀석이 겹쳐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때에도 지금에도.

악마 사냥꾼에게 자비란 없었다.

"악크샨, 그대들에겐 또 한 번 신세를 지고 말았군."

그러니까 체인워커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이언 캐슬, 지금 당장 고도를 하강한다!"

지금부터가 바로 악크샨과의 맹약을 지킬 순간이었다.

*

푹찍─

악마 군단장, 에티오.

키치가 녀석의 목덜미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울컥울컥.

넘실거리며 쏟아지는 피.

키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피를 털어냈다. 적어도 비수를 손에 쥐고 있을 때만큼은 키치는 누구보다 잔혹하고 냉정한 살수였다.

그런데, 그런 키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저, 저 말도 안 되는 짓을 또...!"

지피지기.

키치에겐 웬만한 마법사 못지않은 마법적 지식이 있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마법사란 족속은 여러모로 원망을 사는 존재.

천금이 든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목숨을 원하는 의뢰가 종종 들어오곤 했었으니까.

"저렇게 퍼부어서는 피할 수도 없잖아."

그러나 호열이 발현한 마법은 차원이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법'들'이 맞겠지.

키치의 눈썰미로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다발적인 마법 발현의 향연이었다.

"과연."

마르셀로는 마도구, 백색(百色)의 겉날개를 알고 있었다.

마법을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는 마탑에도 흔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마도구로서의 활용 가치는 적다고 판단했다.

'저장을 통해 탐색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간섭과 발현의 반동은 오롯이 사용자가 감당해야 하니까.

일백 개의 속성 마법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들.

사용자가 끄집어낼 수 있는 마법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만 하더라도 채 십여 개의 마법을 끄집어내는 게 고작이었겠지.

그러나.

"경보다 그 마도구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이도 없겠군요."

호열에겐 기우에 불과했으니.

마르셀로는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역시 경이 있기에 저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

.

.

젠장.

아무리 꼼수에 최적화된 그랑펠의 육체라고 해도.

이번엔 그 반동이 심상치 않았다.

'...이 정도로 무식한 건 나도 처음이니까.'

비약초를 그렇게 퍼마시고.

마력재생력 관련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거늘.

역시나 일백 개의 마법을 동시에 끄집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마법들이 어디 보통 마법이냔 말이냐. 마력 먹는 하마가 따로 없는 속성 마법만 일백 개였다...!

마력 탈진.

전신에 옭아매는 탈력감.

그러나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마왕, 플라우로스를 응시했다.

빛 속성 마법이 녀석의 피부를 연약하게 만들고.

화염 속성 마법이 연약해진 피부를 불태운다.

거센 바람이 불길을 더욱 거세게 부추기고.

하늘에서는 심판, 벼락이 내리친다.

마왕 체면이고 뭐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을 거야?

그러나 압살(壓殺)을 위해 저장해 둔 마법들이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내가 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경지의 마법.

[『절대영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왕을 자처하는 열등한 악마여."

"...?"

"그 오만의 무게를 감당하라."

"...!"

[마왕, 플라우로스에게 '빙결'이 발생합니다.]

절대영도.

분자조차 움직임을 멈추는 극한의 온도.

빙결마법과는 극상성을 자랑하는 화염마법의 정점, 카림제바조차 어찌할 수 없던 [『기이』]. 녀석이 저항할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이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려 850레벨의 보스 몬스터.

정공법을 썼든, 꼼수를 부렸든.

혼자서 녀석을 쓰러트렸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레벨 업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요구 경험치를 가뿐하게 충족하고 넘어설 정도의 경험치를 습득했단 소리였다.

게다가.

[마왕, 플라우로스 vs 드워프]

마왕과 드워프.

승리하는 것은 누구인가?

마왕성과 비행정.

남겨지는 상징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그대의 판단에 달렸다.

공적에 따라 승리의 보상을 쟁취하리라.

─마왕, 플라우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라. (성공)

●마왕, 플라우로스를 처치하라. (성공)

퀘스트도 빼놓을 수 없겠지.

목표는 드워프를 도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보다시피 추가 목표, 마왕 플라우로스 처치까지 달성했다. 그래, 그로 인해 측정된 공적은....

─현재 공적 : 1,000,000p

정확하게 백만 포인트.

물론, 이 퀘스트를 진행한 플레이어는 나 혼자였으니까.

공적치를 비교할 비교 대상은 없었다.

그러나 나도 눈치가 있다는 말이다.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적으로 마왕을 홀로 처치했으니까.

'그래도 그 보상이란 걸 기대해 봐도 되겠지?'

문득, 떠오르는 [프로스트 탈환] 퀘스트.

그 퀘스트 보상은 관계도와 영향력 상승으로 인한 프로스트의 [권한 기능] 활성화였다.

하지만 나와 드워프들이 어디 관계나 영향력을 따질 사이란 말인가?

그보다 더 진한 맹약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말이다.

적어도 프로스트 때와는 다른 보상이 주어지겠지.

꼭 보상이 아니더라도 나는 드워프들에게 신세를 질 게 있었다.

인벤토리에 보관해 둔 귀하신 광물, 에고 장비의 재료가 되는 귀철을 말하는 게 맞다.

'이거 참 여러모로 할 말이 많은데 말이야.'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나는 빳빳한 고개를 들어 드워프들의 비행정을 바라봤다.

퀘스트도 성공했겠다.

마음 같아선 당장 드워프들과 조우.

느긋하게 티타임이라도 가지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늘.

[수렵의 마왕성 균열을 클리어하셨습니다.]

균열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

쩌적─

그와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하는 [『기이』]의 공간.

그 사이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현실의 풍경.

키치가 힐끗, 비행정을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저기 이렇게 헤어지셔도 괜찮으실까요?"

키치도 처음 진입하는 균열이 아니었으니까.

저들과 재회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내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하이엘."

나한테는 하이엘 크리시아드....

아니, 이하 생략.

아르카나 대륙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하이엘이 있었으니까.

"하이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근데 어째 더 우아해진 것 같다?

그 외관이 볼 때마다 달라지는 게 정령한테도 성장기가 있나, 오해할 뻔했겠는데. 그러나 나는 정령학 선임, 페이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가 하이엘이란 이름을 붙여준 덕분.

{고유 정령}으로 거듭나게 된 게 원인이겠지.

"...저, 정령과 계약도 하셨어요?!"

마르셀로는 하이엘과 짧게 눈인사를.

키치는 딸꾹질로 인사를 대신했다.

물론, 나까지 태평하게 인사를 나눌 새는 없다.

이 순간에도 균열은 붕괴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하이엘에게 텔레파시를 전달했다.

곧장 내 뜻을 알아차린 하이엘의 시선이 비행정을 향했다.

그러더니 곧장 고개를 숙이며 고상하게 인사했다.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이엘 소환에다가 텔레파시까지.

...이젠 진짜 마력의 한계다!

드러난 밑천을 바가지로 박박 긁어냈다, 정말로.

그러니까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펄럭─

지금만큼은 쓸데없이 화려하고 치렁치렁 거리는.

백색의 겉날개에 감사하다.

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춰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내게 키치가 딸꾹질을 간신히 멈추고 물었다.

"저, 그.... 전리품 같은 건 안 챙기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랑펠이야 청렴결백 그 자체.

탐욕을 초월한 인물이라고 해도.

나, 이호열은 아니다.

그런 내가 전리품.

그것도 마왕 드롭템을 잊어버릴 리가 있나.

[높은 처치 기여도로 전리품이 자동으로 습득됩니다.]

이미 내 인벤토리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말이다.

.

.

.

[수렵의 마왕성].

진입을 망설이던 플레이어들이 결국, 결심했다.

"...그래요.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호열 님이 계시는데!"

그동안 호열이 보여준 행보가 있었으니까.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 어떤 적정 레벨의 균열도, 누구보다 먼저, 또 두려움 없이 진입했던 호열이 아니던가? 그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내린 결정.

-수금 드디어 끝났네ㅋㅋㅋㅋㅋㅋㅋ

-자 들어가자

-몇 분은 더 끌 줄 알았는데 아니네ㅋㅋㅋㅋ

-방송감 다 살았음 ㄹㅇ

고작 1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차마 상상조차 하지도 못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플레이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자, 잠깐만요!"

-???

-아니 뭐하는데 ㅡㅡ

-개노잼

-ㅁㅊ? 여기서 수금각을 본다고???

-감다죽

폭발하는 채팅창.

그러나 오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앵글에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빛.

사라져가는 균열.

그 강렬한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호열과 두 사람.

그랬다.

호열이 [수렵의 마왕성]에 진입한 뒤.

정확하게 10분 41초 경과한 현재.

[수렵의 마왕성] 균열이 클리어된 것이었다.

정기 업데이트 직후.

등장한 세 개의 마왕성.

세 명의 마왕이 쓰러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이 대사건을 요약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었다.

그래.

그야말로.

압살.

◈ 120화. 파장

정기 업데이트로 모습을 드러낸 세 개의 마왕성.

경악스러운 업데이트 내역에 터져 나왔던 우려.

그런데 그 걱정이 무색해지게도.

"...야, 수겸아.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이호열이 행동에 나선 뒤.

고작 10분 만에 모든 게 끝나버렸다.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

꼰대. 아니, 하늘 같은 상사의 질문이었지만.

윤수겸에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꼬집─

일단, 꼬집은 뺨이 쓰라린 것을 보니 꿈은 아니다.

현실인 걸 알아차렸으니.

그렇다면 그다음엔.

"저도 최대한 납득을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부장님."

벌어진 상황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쉽게 믿기지 않았다.

윤수겸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양보해서, 마탑의 화력이 저희의 예측보다 훨씬 강했다고 생각해보자고요. 그런 마탑의 선임 마법사들이 움직인 것도 모자라서 그림자 용병단까지 합세한 거니까요."

어디 그들뿐이던가?

여신교단의 성기사단.

제국의 라이언 하트 기사단까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세력들이 진입한 마왕성 균열이었다.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봤다. 듣고 있던 성현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선배 말씀대로. 운율의 마왕성하고 방종의 마왕성까지는 저도 이해가 돼요. 그런데 마지막 수렵의 마왕성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납득이...!"

운율의 마왕성, 대략 일만.

방종의 마왕성, 대략 일백.

하지만 마지막 수렵의 마왕성에 진입한 건.

고작 셋에 불과했으니까.

"미치겠군, 정말."

모두가 한때 아르카나의 개발자였던 AAU 직원들.

업데이트 내역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공략 난이도를 비교하자면.

수렵의 마왕성이 다른 두 마왕성에 비하면 배는 까다롭다는 사실을.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그러니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박민재가 허탈한 웃음을 뱉으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는 거야, 이호열 당신은 대체?"

그건 강함, 레벨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내, 모니터에 떠오른 자막.

──────

마왕 압살!

──────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이건 그냥 승리도 아니고 압살이었다.

마왕들이 더러운 마수를 꿈틀거리기도 전.

그들을 완벽하게 짓밟은 꼴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했던 이유?

"이런 건 무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야."

"지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뭣보다 붕괴도 상승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어서...."

마치 마왕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있던 것처럼.

아니, 정확하게는 마왕들이라고 해야겠지.

그래, 마왕성 균열이 세 개나 등장할 줄 알고 있던 것처럼.

정기 업데이트가 떠오름과 동시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에 돌입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저런 아르카나 올스타들을 이끌고서는 말이지."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의 활약.

별안간 박민재가 흠칫했다.

'...설마, 꿈은 아니겠지?'

최근 들어 무리하긴 했는데....

아직까지 현실과 꿈을 착각할 정도로.

순수한 사람이 아닌데, 내가.

워낙 믿기 힘들 정도의 사건이라 말이지.

박민재가 윤수겸을 따라 볼을 꼬집어 보려다가 관뒀다.

"아니다. 됐다."

모니터 속.

넷튜버들의 앵글에 잡힌 호열의 모습.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한결같은 그 자태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다."

여전히 까칠한 태도까지도.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요?"

"진짜 저 같으면 어깨에 힘 빡 주고. 으스댈 것 같은데."

"영웅이 그냥 영웅이시겠어? 괜히 호멘거리는 줄 알아?"

*

마왕 압살.

악마를 향한 경고이자 선전포고.

승전보의 효과가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아르카나 대륙이었다. 비행정, 아이언 캐슬. 드워프들의 지도자, 체인워커가 지상을 내려다봤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최후의 악마 사냥꾼.

그가 모험가였다는 사실도.

또 아르카나 대륙과는 완벽히 다른 세계에서 마왕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서는.

그들을 사냥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해 냈다는 사실까지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 시각. 동시에 두 명의 마왕을 상대하고 있을 줄이야. 정작 같은 아르카나 대륙에 있던 우리는 알아차리지도 못했거늘...."

당연하게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호열의 안배, 하이엘 덕분이었다.

체인워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악천후에 휘말리지만 않았더라도....

"당신과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다행이었다.

하이엘, 정령의 말에 따르면 시기와 장소만 적절하게 맞출 수 있다면 재회를 할 수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물론, 체인워커는 쉽사리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이 천재지변을 그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드워프들은 균열을 거스를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 여겼다.

자신들의 명석한 두뇌로도 그 원인조차 짐작할 수 없었기에.

그런데 균열의 출현을 어느 정도나마 예측할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더 나아가 그자가 악크샨의 생존자, 최후의 악마 사냥꾼일 줄이야.

"하이엘, 정령이시여."

체인워커가 정중하게 하이엘의 이름을 불렀다.

감격에 젖은 그의 눈빛이 지상을 향했다.

체인워커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우리를 대신해 악크샨의 생존자, 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이 상황을 전해주십시오. 당신의 활약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입니다."

간절한 요청에 하이엘은 지상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루아침.

아니, 그것조차 과대평가였다.

현실의 시간으로는 10분 남짓이요.

아르카나 대륙의 시간으로도 고작 수십 분에 불과했으니.

그 규모에 비한다면 찰나겠지.

찰나에 마왕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세 마왕 중 하나, 플라우로스는 그 존재 자체가 말살.

어떤 방법으로도 강림할 수 없는 지옥에 처박힌 것이었다.

그 충격적인 사건은 악마들에게는 더없는 공포가.

악마에게 저항하던 이들에겐 용기가 되었다.

체인워커가 말을 이었다.

"보이십니까?"

"제국의 패잔병들이 결국, 마을을 지켜냈습니다."

"악크샨의 결전병기가 대도시, 작센을 탈환했습니다."

"피러니티 호수가 본래의 빛을 되찾았습니다."....

끊이지 않는 승전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나비효과.

그러나 이 또한 호열이 마왕을 압살한 이유 중 하나였으니.

하이엘은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분께선 이조차도 내다보고 계셨답니다."

물론, 그 사정을 알 턱이 없는 드워프들은.

"...뭐, 뭣?! 그게 사실이십니까?"

또 한 번 경악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

.

.

아르카나 대륙과 현실을 잇는 균열.

균열이 존재하는 이상.

아르카나 대륙의 변화는 현실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비롯된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당연하게도 플레이어들이었다.

-...님들 나만 그렇게 느낌?

플레이어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엔 비슷한 뉘앙스의 게시글들로 가득했다.

-아니, 최근 들어서 좀 잠잠하지 않음???

-ㄹㅇ 나도 균열 뺑뺑이 돌면서 한 번도 안 마주침;;;

-아니 버프 신경 쓸 필요 없어서 편해지긴 했는데....

-악마족 없어진 게 체감이 이렇게 클 줄이야

지긋지긋한 상태이상 유발자들.

눈엣가시 같던 악마족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마왕 압살 때문임 ㅅㄱ

이호열!

그가 악마들의 왕, 마왕을 압살.

그것도 셋이나 되는 마왕들을 말 그대로 짓밟은 덕분인 게 확실하다.

악마족 몬스터 출현이 잠잠해진 시기를 따져보면 그 추측엔 더욱 신빙성이 실렸다.

"이건 그냥 난공불락의 균열을 압도적으로 클리어했다, 대단하다, 그 레벨이 궁금하다. 그런 질문으로 수준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호열 플레이어가 마왕성 균열을 클리어함으로써 일어난 파장 말입니다. 무엇보다 골칫덩이였던 악마족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덕분에 플레이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균열이 진입할 수 있게 됐다.

그 덕분에 플레이어들의 레벨이 상승. 인류가 균열 침식에 저항할 힘을 키울 수 있게 됐다....

온갖 프로그램에서도 그 효과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삑─

삐빅─

삐삐삐삐삐삑─

위아래 어떤 곳으로 채널을 돌려도.

요란한 리모컨 소리에 남태민이 결국, 입을 열었다.

"야, 뭐 고장 낼 일 있냐?"

"시끄러."

"왜 심통이 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심통은 지랄."

그렇게 말했지만.

레오니는 심통이 난 게 맞았다.

마왕성 균열 출현.

그와 동시에 움직였던 호열과 세력들.

그 세력에 자신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반질반질.

히사기가 분신과도 같은 창을 손질하며 말했다.

"이나즈마, 버서커, 가온. 저희 세 길드가 연합했다고 하더라도. 800레벨의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마왕성 균열에 진입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맞지맞지.

남태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냉정하게 자신들의 전력을 돌아봤다.

"호열 씨 덕분에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야."

세 길드의 연합.

그 상승효과는 실제로 대단했다.

물론.

"...근데, 너 말하는 순서가 왜 그러냐?"

"?"

"이나즈마, 버서커, 가오오온? 왜 우리가 맨 마지막인데?"

"별 뜻은 없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뭐?! 습관? 조곤조곤 지껄이면 다인 줄 아나, 이거."

보다시피 완벽하게 호흡이 맞출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전보다 균열 공략이 수월해지고, 경험치 획득량도 많아졌으니까.

'그래서 의욕이 넘쳤었는데....'

레오니는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마왕성 균열로 다시금 깨닫게 됐다.

호열과 자신들의 격차를.

그러나 낙담은 없었다.

"...그렇단 말이지."

목표는 호열과 같이 서는 거지.

호열을 따라잡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이들에겐 확실한 목표가 생긴 참이었다.

마왕성 균열.

그곳에서 호열과 같이 선 이들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들과 같은 수준까진 올라서야지.

심통이 날 자격도 있는 거 아니겠어?

"좋았어. 됐어."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역시나 균열 공략.

그 사실을 알기에.

레오니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마왕을 압살해서 악마들을 잠잠하게 만든 이유가?"

우리들이 악마족 몬스터한테 발목 잡히지 않고.

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하려고...?

설마....

물론, 레오니는 촉이 상당히 무뎠고.

남태민과 히사기, 두 사람은 쓸데없이 귀가 밝았다.

"뭔 소린데, 그거? 자세히 말해줘 봐."

.

.

.

어딘가의 별채.

불빛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아니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모이는 건 간만이군요."

"어째 다들 더욱 기세가 흉흉해지셨네들."

"뭐, 살기 좋은 세상 덕분 아니겠습니까?"

컴컴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건 오직 검은 눈동자들뿐.

그들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복해서 재생되는 건 마왕성 균열의 클리어 장면.

누군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과 행동이라고 생각됩니다."

"어허! 말조심. 우리 마왕님들께서 들으실라."

"뭐, 들으시라고 하지요. 들을 수 있다면."

클클.

음산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잠깐.

다시금 말이 이어졌다.

"이 세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르카나 대륙에서야 저런 고전적인 수법이 먹혔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어림도 없지요."

"나서서 개고생을 하는 꼴이지."

"우리 마왕님들이 악마를 다룰 수 있으신지는 몰라도. 정작 인간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고 계십니다들. 오랜만에 세상 공기를 맡으셔서들 그러신가?"

빙의.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산 덕분에 자연스레 알게 됐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건.

저런 원초적인 공포가 아니라는 것을.

"머리를 쓰셔야지. 무식하게 뭐하는 짓들이신지."

"뭐,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소식이지요."

"맞습니다. 마왕님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걱정은 덜었으니."

마왕을 헐뜯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악마들에게 진정한 단합, 충성 따윈 없다.

간만에 한곳에 모인 이 자리에서도.

악마들은 어떻게 서로의 뒤통수를 칠까.

진지하게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서로들 알고 있기에.

만남을 자제해 왔건만.

오늘 이곳에 악마들이 모인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얌전히 지내는 게 어떠시겠습니까들?"

그런 악마들조차 단합하게 하는 존재의 출현.

그랬다.

바로 호열 때문이었다.

"구시대적인 존재들이라고 해도 마왕입니다. 그들의 강대한 힘은 의심할 바가 없지요. 그런데 그런 마왕들이 고작 10분 만에 짓밟혔습니다. 이호열, 그가 이끄는 세력에 말이지요."

"...확실히 경계할 필요가 있겠어요."

"아니지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

"우리는 그저 평소대로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이호열?

마탑?

그림자 용병단?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그건 적으로 만났을 때나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우린 지금처럼 뒤집어쓴 탈을 이용하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빙의한 자신들을 알아볼 순 없을 테니까.

섣부르게 나서서 설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괜한 의심만 사지 않는다면 이 흐름은 오히려 자신들에게 이득이었다.

"얌전하게 숨어서 힘을 기르자는 말이지요."

침묵.

반대 의견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부담스럽게 쳐다보고들 그러실까?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어둠 속에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뭐, 내가 초신성이라고 나댈까 봐 불안해서 그러시나?"

초신성.

강해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플레이어들. 악마에겐 더없이 적합한 그릇이었다.

진명의 악마, 데스퀴가 이 사내에게 빙의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데스퀴가 어둠 속에서 손을 내저었다.

"미쳤다고.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고."

마왕님을 셋이나 골로 보낸 이호열이다.

그를 노리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겠지.

그러나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데스퀴가 혀를 날름거렸다.

"뭐, 얌전히 구경만 할게. 멀리서 구경만. 그 정도는 괜찮잖아?"

*

악마들의 출현이 줄어들었다.

마왕 압살의 일시적인 효과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바란다.

하급 악마든, 진명의 악마든, 뭐든.

더도 말고 딱 셋 정도만 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왕, 암두시아스.

마왕, 키마리스.

마왕, 플라우로스.

세 마왕을 처치하고 획득한 전리품, 악마의 아이템.

나는 그 세 개의 [에픽] 등급 아이템의 효과가 심히 궁금하단 말이다.

더욱이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이란, 마왕 전리품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나로서는...!

"오후에 마시는 차는 황금과도 같지."

...아침에 먹는 사과도 아니고 뭔 소리야, 이게.

물론, 이 오글거리는 말 또한 항상.

나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평온한 시선으로 마왕의 전리품, 그 정보를 확인했다.

◈ 121화. 덧씌워져 가는 역사 (1)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7위, 암두시아스.

녀석이 떨어트린 전리품은 짐승의 뿔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지휘봉이었다.

그나저나 지휘봉이라니. 딱히 레벨 제한이 없는 걸 보면 효과가 평범하진 않겠지.

"열등한 족속치고 나쁘지 않은 안목이군."

일단, 그랑펠의 심미안에는 합격점이다.

뭐, 등급부터가 에픽이었으니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을지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지.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6위, 키마리스.

녀석은 지도를 뱉어낸 모양이었다.

지도라, 가장 먼저 보물지도가 떠오르긴 했다만.

지휘봉과 마찬가지로 정화하기 전까지 효과를 짐작하긴 어려웠다.

'그나저나.'

...그래서 내가 이걸 받아서 챙겨도 되는 건가?

무려 [에픽] 등급 아이템.

내가 요란을 떨어가며 설명한 것처럼 등급만 봐도 귀하신 아이템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정순한 지식의 오망성]의 효과를 알고 있는 나였다.

'같은 급의 사기템을 날로 챙기는 거잖아, 이건.'

암두시아스, 키마리스를 처치한 건 내가 아니었다.

전리품들도 각각 [운율의 마왕성], [방종의 마왕성]에 진입했던 선임 마법사들이 입수한 것.

그래, 그런 전리품을 마탑은 내게 건네온 것이었다.

이유는 더없이 간단했다.

-"활용법은 이호열 수석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게 단순한 아이템이었다면....

나는 청렴결백하신 성격 탓.

절대 전리품들을 받아서 챙기지 못했겠지.

그러나 악마의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마왕의 전리품.

더없이 부정한 기운을 띠고 있기에.

[구마의식]을 통해 반드시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뜻.

"그대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그랬다.

대의(大意).

그랑펠의 대의에 비하면야, 나의 물욕은 태산 앞 티끌과도 같았으니. 나도 뻔뻔하게 받아들였다.

그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격식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어?

암, 그렇고말고.

물론.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

[등급 : 에픽]

[제한 : 없음]

[효과 : 봉인됨]

[설명 :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그 효과가 봉인되었다. 제대로 된 효과를 알기 위해선 반드시 정화해야만 한다.]

서열 64위, 플라우로스.

녀석을 처치하고 습득한 이 전리품만큼은 정말 오롯이 나의 힘으로 쟁취한 거니까. 적어도 이건 조금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봐도 되지 않을까?

"미관상 흉측하군. 더없이 형편없다."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내 입으로 흥을 깨는구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생김새는 눈알 그 자체였다.

그러니 심미안으로 살피고 어쩔 것도 없다는 거겠지.

나는 인벤토리에 전리품들을 챙기고 시선을 옮겼다.

상태창으로.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25]

[능력치]

근력 : 67 / 민첩 : 73 / 마력 : 350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35]

착용했던 아이템을 해제한 덕분에 심미는 하향됐고.

마왕, 플라우로스를 처치하면서 상승한 레벨은 35레벨인가.

어마어마한 상승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게 플라우로스는 무려 850레벨의 보스몹이었으니까.

'100레벨마다 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야.'

날마다 체감이 되는데?

필요 경험치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게.

200레벨 대에서 300레벨 대로 진입했을 때도 느꼈던 바.

이젠 400레벨 대에 진입하는 바람에 레벨 상승 폭이 대폭 꺾인 거겠지.

나와 엇비슷한 레벨 대의 랭커들이 듣는다면.

배가 불렀다고, 만족하는 법을 모른다고.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지.

'어디 내 입장이 돼봐라. 안 그러게 생겼나.'

그러나 내게는 최상위 랭커에 버금가는 레벨도 부족하다.

쏟아지는 과대평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멀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선 희소식이었다.

"비로소 주제 파악이 되는 모양이구나."

악마들의 활동이 잠잠해졌다는 소식은.

물론, 악마 사냥꾼이기에.

나는 악마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단지 눈치를 보는 것뿐.

언제라도 다시 마수를 뻗쳐올 수 있는 게 악마란 족속이었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모습이 너희에겐 어울린다."

그러니까 나는 이 짧은 평화를 제대로 써먹어야만 한다.

그동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에만 급급했다면.

이젠 빠진 밑부터 제대로 복구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실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지.'

그나저나....

파놓은 살 구멍, 우물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군.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

무엇이든 그 첫걸음이 중요한 법.

또각─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우선 긍지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갈 길이 멀다면서 어디를 가느냐 묻는다면.

어차피 마탑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라 큰 문제는 없다....

보글보글.

나는 끓는 물을 보며 읊조렸다.

"물이 식기 전에 돌아오지."

*

가넷 홀.

반출된 최상급 마도구의 반납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몇몇 선임 마법사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특히나 아쉬워 보이는 건 화염마법학, 벤쉬 윌리엄이었다.

"뭔가 금방 끝나버렸군요."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요?"

"맞는 말씀이지만, 이거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

쩝.

벤쉬는 멀어져 가는 [소형 마력 태양]을 바라봤다. 제아무리 선임 마법사의 요청이라고 해도, 최상급 마도구의 반출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최상급 마도구로 무장한 선임 마법사.

그 자체만으로도 마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우려를 살 수 있었으니까. 애초에 벤쉬도 저 정도의 마도구를 다뤄본 건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화룡이 된 기분이었는데."

감질맛에 입맛을 다시는 벤쉬.

물론, 그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천적 아닌 천적.

마티스가 가넷 홀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티스는 청력까지 좋았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벤쉬 윌리엄 선임."

"...네, 네?"

"나는 화룡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라 말일세."

"아니, 저는 그런 뜻이.... 카림제바를 말한 게 아니라!"

"됐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 면담에서 나누도록 하지."

"...추, 추후? 며, 면담이라뇨?!"

마티스 선임과 면담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압박감에 속이 메슥거렸다.

일단, 피하고 보자.

벤쉬가 창백해진 얼굴로 가넷 홀을 빠져나가던 순간.

마르셀로와 치유학 선임, 벨리에가 그와 마주쳤다.

"얼굴이 창백하시네요. 좋지 않은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벨리에의 따뜻한 물음에 벤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조만간 심장이 좋지 않아질 예정입니다. 하하."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르셀로와 벨리에가 시선을 교환하기도 잠깐.

두 사람의 시야에 마티스가 들어왔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벨리에였다.

"간만에 뵙네요. 평안하셨나요?"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마왕성 균열에서는 두 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마티스 선임, 그리고 벨리에 선임. 본의 아니게 두 분에게 중책을 떠넘기고 말았군요."

호열과 마르셀로.

본의 아니게 두 수석이 같은 균열에 진입했었으니까.

나머지 두 균열의 책임자는 마티스와 벨리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티스는 고개를 저었다.

"고생은 제가 아닌 이호열 수석께서 하고 계시겠지요."

마탑에도 세간의 소식은 전해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마탑의 로비에서 모험가들이 나누는 대화만 듣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고마웠어요."

벨리에가 반출한 마도구를 반납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옥빛 눈망울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는 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세계 사람들은 남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더군요? 정말, 이호열 수석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게...."

물론, 이번 마왕성 균열에서는 정식으로 마탑이 움직였다.

자신들에게도 적잖은 관심이 쏟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벨리에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저는 지금 받는 관심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이호열 수석은 대체 어떻게 그 위치를,

막대한 부담감을 견디고 있는 걸까?

궁금한 걸 넘어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벅.

세 사람은 가넷 홀에서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마르셀로가 아까의 화제를 이어갔다.

"저 또한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에. 조금이나마 짐을 나눠서 지고 싶었는데. 경께서는 그조차도 쉽게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마르셀로 수석께서 부족하셔서 그러시는 게 아닐 겁니다."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하시니까요. 이 수석께서는."

호열만의 기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시선도, 평가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다.

"덕분에 마탑에 새 바람을 몰고 오셨죠. 몇 번씩이나요."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정기 학회, 사전 검증에서 벌어졌던 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선임 마법사, 학파의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불합격을 쏟아내던 호열이었다.

마티스와 벨리에.

두 선임의 호열에 대한 평가에 마르셀로는 작게 웃었다.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제삼자가 듣기엔 별다를 것 없는 인사치레.

그러나 마티스와 벨리에는 흘려들을 수 없었다.

"...."

마르셀로의 말에 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티스는 앞서가는 마르셀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전보다 야위었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마티스는 떨쳐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애써 화제를 전환했다.

"공교롭게도 저희 모두 행선지가 같은 모양이군요."

딱히 맞춘 것은 아니었거늘.

셋은 같은 곳을 향해 계단을 밟고 나아가고 있었다.

이내, 세 사람이 그 행선지에 다다랐다.

마르셀로가 말했다.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기 위해서 잊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숙련 등급 이하의 마법사들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소.

『만년설이 잠든 곳』

그 앞에서 마르셀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해낸 반격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고작 마왕 셋을 쓰러트렸을 뿐이었다.

악마에게 농락당한 마탑의 복수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겠지.

그러나 이건 엄연한 첫걸음이었다.

"...들어갈까요?"

침묵을 지키던 벨리에가 물었다.

세 사람이 『만년설이 잠든 곳』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마주했다.

"...!!!"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과.

.

.

.

흑역사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것.

덕분에 나는 그랑펠의 설정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설정들이 내게 끼치는 영향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나의 긍지가.

세니오스가 잠든 『만년설이 잠든 곳』을 찾은 이유 또한.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랑펠은 혼자다.

클라우디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동시에 악크샨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니까.

그런 그랑펠에게 마탑이란 새로이 몸을 담은 곳.

그런데 그 일원인 세니오스가 악마에게 목숨을 잃었다.

세니오스의 죽음이 스스로 바라던 죽음이었든.

설령 긍지가 넘치는 최후였든.

악마가 관련된 이상.

그가 마탑의 원로 마법사인 이상.

그랑펠에게는 절대 가볍지 않은 죽음이라는 거겠지.

그랬다.

마왕 압살.

거기엔 세니오스에 대한 애도도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그랑펠식 애도가 얼마나 전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나의 최선입니다.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하여튼, 님이라는 호칭은 애를 써도 나오지 않는구나.

나는 세니오스가 잠든 관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뭔데, 그 눈빛들은.

마르셀로, 마티스, 벨리에.

어째서인가.

상당히 감성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과.

*

톡.

"...?"

웬수가 괜히 웬수가 아니다.

3호, 이예림은 기척에 잠에서 깼다.

톡톡.

무언가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

이젠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짜아...."

더듬더듬.

이예림은 간신히 눈을 뜨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일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이예림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신음했다.

"이호열, 하나뿐인 내 동생아. 너는 잠도 없냐...?"

스팸 메시지도 이 정도는 아니다.

매일 아침 부모님을 향해 날아드는 안부 편지.

덕분에 이예림은 상대적 불효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최 여사님께서도, 플레이어인 호열이보다 네 혼삿길이 더 걱정이란 말씀까지 하셨을까?

벌떡─!

그러니까 이예림은 이불을 박차고선 소리쳤다.

"아니, 그냥 톡으로 좀 보내면 안 되냐?!"

드륵─!

창문을 여는 순간 날아드는 편지.

그 편지가 이예림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예림은 부글부글 끓는 속에 참을 인을 새겼다.

"너어어어어.... 이것도 마법이지?!"

나이를 먹었든, 철이 들었든, 뭐든.

웬수는 웬수다.

"...그래도 고생했으니까. 이 누님이 봐준다, 짜식."

가족은 가족이고.

◈ 122화. 덧씌워져 가는 역사 (2)

마탑.

유일의 사교 공간, 부유 정원.

담소 자리에서 눈치를 살피던 견습 마법사가 운을 떼었다.

"...있잖아. 뭔가 달라지지 않았어?"

질문에 서로 간에 오가는 눈빛들.

곧장 대답이 쏟아졌다.

"으음. 앞머리 잘랐구나! 훨씬 잘 어울린다!"

"뭐래?"

"뭐야, 아닌가? 그럼.... 너 살 빠졌구나! 볼이 홀쭉...."

"야!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엥,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뭐가 달라진 거지?"

도리도리.

그런 게 아니라!

견습 마법사가 격하게 고개를 내젓기도 잠깐.

더욱 은밀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분위기 말이야, 분위기. 나 말고 마탑 분위기!"

아, 그거 말하는 거였어?

견습 마법사라고 해도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

물론, 아직 학파조차 정해지지 않은 햇병아리기에.

견습 마법사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여태까진 뭔가 뒤숭숭했잖아?"

"그치그치. 이쪽 세계에 적응하기 바쁘셔서들."

"그랬는데. 요새는 뭐랄까. 절차가 생긴 것 같달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마탑의 행동이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나.

이곳 모험가들의 세계에서나.

마탑은 늘 한결같은 입장을 고수해 왔다.

마탑은 마탑 외부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법사들도 외부 활동을 최대한 자제해야만 한다는 규율.

"뭣보다 출탑이 가능해진 게 말이 안 돼. 상상도 못 했다구!"

그런 줄만 알았고,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는데.

별안간 출탑이 가능해졌단다.

물론,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과거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속닥속닥.

다시금 은밀하게 이어지는 담소.

"왜, 숙련 마법사님 한 분이 출탑에서 돌아오셨었잖아."

"맞다. 나도 그 소문 들었어!"

"그거 진짜 의외 아니야? 분명 선임 마법사님들도 출탑 신청서를 작성하셨을 텐데. 그런 쟁쟁한 선임들의 신청서를 제치고 먼저 채택이 되셨다는 거잖아."

마탑엔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그 계급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특히나 견습과 숙련 사이의 격차보다도.

숙련과 선임 사이의 격차가 몇 배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화제는 자연스럽게도.

"확실히 기준이 남다르시긴 한가 봐. 이호열 수석님은."

그런 결정을 내린 호열을 향하는 게 당연했다.

당사자로서는 알 턱이 없었지만.

은연중에 기대가 쏟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혹시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 아니야?"

"기회? 뭔 기회? 너 혹시...."

"야. 또 개소리하지 마라, 너. 출탑 말하는 거니까."

"아, 출탑? 하긴 출탑 신청에 제한을 두지 않으셨으니까."

그래, 그게 딱 병아리의 눈높이였다.

듣고 있노라면.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한편, 부유 정원의 또 다른 테이블.

테이블을 주도하는 건 숙련 마법사, 지브릴이었다.

"확실히 저희 학파 분위기만 달라진 게 아니었군요."

사교 자리에 둘러앉은 건 전부 숙련 마법사들.

대략 스무 명으로 마탑에 존재하는 모든 학파의 숙련 마법사들이 모인 셈. 드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지브릴이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탁!

지브릴이 하찮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눈매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선임들 사이에 저희가 모르는 사건이 있던 게 확실해요!"

각 학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의문은 확신이 되었다.

지브릴의 땋은 머리가 들썩거리기도 잠깐.

누군가 말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지브릴 양.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정기 학회 때만 봐도 아시잖아요? 선임들께서 이호열 수석, 이름만 들어도 바득바득 이를 가시던 거."

정기 학회에 앞서 진행되는 사전 검증.

토파즈 홀에서 불합격을 쏟아내던 호열이 아니던가?

물론, 불합격의 이유가 더없이 타당했다고 한들.

학파에게 정기 학회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호열을 향한 선임들의 뒤끝.

아니, 감정은 쉽게 사그라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했는데. 뭐 손바닥 뒤집는 것도 아니시고."

"저희 학파 가필드 선임께서도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아니, 그런 수준을 넘어서 완전 다른 사람들이 되신 것 같지 않나요?"

"...듣고 보니까. 뭔가 진지해지신 것 같기도 하시고들."

"비장해지셨다고나 할까요?"

이호열 수석에 대한 감정뿐만 아니었다.

유서 깊게 이어져 오던 학파 간의 신경전조차 사라진 듯한 느낌.

왜, 지금도 보다시피.

저기, 부유 정원 테이블에서 몇몇 선임들이 각자 얼굴을 맞대고 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유달리 우중충한 테이블을 바라보던 사내가 혀를 내둘렀다.

"근데 저 조합은 낯서네요.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네."

물론, 선임들의 개인사까지 관심을 둘 건 없겠지.

톡톡─

지브릴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분명 뭔가 계기가 있으셨을 텐데...."

대체 그 계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짐작 가는 건 역시나.

"이번에도 이호열 수석께서 관련되셨겠죠?"

지브릴은 질문을 던지고는 잠자코 있던 클레를 바라봤다.

이 자리에서 호열에 관해서라면 클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숙련 마법사는 없었으니까. 왜, 클레는 호열과 단둘이 출탑을 나섰던 사이였으니까.

"...그을쎄요? 전 잘 모르겠는걸요."

"클레, 너 진짜 그렇게 내빼기야?"

"아니, 진짜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라고!"

클레는 억울했다.

자신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클레는 어제 벨리에 선임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저는 오늘 또 하나를 깨달았답니다. 클레."

-"깨달으셨다니. 무엇을요, 벨리에님?"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의 뜻을요."

-"...?"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의아했다.

하지만 벨리에 선임의 눈빛이, 말하는 음성이 심상치 않았다. 깊은 감상에 젖은 듯한 벨리에 선임의 모습은 클레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일이 있으셨던 걸까?'

물론, 궁금하다고 해서 벨리에에게 캐물을 순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클레는 흠칫하고 말았다.

벨리에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수석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으셨겠죠."

-"...!"

-"제가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일 뿐."

...수석?

마탑에 수석이라면 단 두 분밖에 계시지 않았다.

마르셀로 수석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

벨리에 선임과 마르셀로 수석은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셨으니까.

그렇다면 벨리에 님이 말하고 있는 건....

호열에 관한 이야기가 확실했다.

그러니까 클레도 나름대로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사교 자리에 불려나온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죠?"

"...?"

"이호열 수석께서는 모험가들의 세계에서도 귀족, 그것도 굉장히 위대한 가문의 귀족이 확실하다...."

"지브릴, 그건...!"

클레는 경악했다.

말이라는 게 참 무섭다.

언제 소문이 저렇게 부풀려진 걸까?

저런 소문이 혹시라도 호열의 귀에 들어간다면?

순간, 머릿속에 울리는 호열의 목소리.

-"그대는 그저 격식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절대 안 된다.

더 이상 가만히 듣고 있을 순 없었다.

클레가 다급히 지브릴의 입을 막았다.

"으읍!"

부유 정원에 일어난 작은 소란.

그러나 역시나 눈높이가 다르기에.

소란 따위엔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선임 마법사들이었다.

애초에 그들에게 숙련 마법사들의 잡담 같은 게 귀에 들어올 정신은 없었다.

"어떻게 진전은 있으십니까, 뱅그릿 선임?"

"그냥 써보고 있습니다. 그러는 나스로우 선임께서는요?"

"글쎄요.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의의 경쟁 중이었으니까.

"저희 모두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군요."

정기 학회도 아니요.

다름아닌 출탑의 기회를 두고서.

물론, 그 경쟁에 끼고 싶어도 낄 수 없는 이가 하나 있었다.

"흡."

벤쉬는 입을 다물었다.

입방정의 업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차라리 뭐라고 말씀이라도 좀!'

1분 1초가 너무나도 길다.

오가는 말이 하나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면담이란 말인가?

그러나 벤쉬의 속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달칵.

마티스는 태연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이 수석께서는 차와 함께 생각을 곱씹는 것이시겠지.'

허나, 호열의 생각은 마티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왜, 어제만 하더라도 마티스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지 않았던가?

이 수석께서 자신들보다 먼저 세니오스 님을 찾으셨을 줄이야.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군.'

그러나 한 가지.

이호열 수석께서 티타임을 즐기시는 이유 정도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시간이 비교적 여유롭게 흐르는 것 같군."

"...네, 네? 어떻게 제 속마음을? 혹시 독심술?!"

"...?"

*

...심히 귀가 간지럽구나.

그러나 격식 없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정도 가려움은 각오했던 바였다.

'어딜 가도 내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언론은 물론.

플레이어 커뮤니티.

마탑.

심지어는 애증의 존재, 누나들까지.

모든 건 성대하게 마왕을 짓밟아 주신 덕분이겠지.

그러나 말했다시피 각오하고 예상했던 바.

게다가 어느 정도는 노리고 행동했거든.

지금까지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면.

이젠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악마의 활동이 잠잠해진 지금이 적기다.'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다질 적기.

물론, 방심은 없다.

나는 악마란 족속이 얼마나 비열한지 잘 알고 있으니까.

악마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것도 오래가지 않겠지.

뭐,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악마족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악마 사냥꾼.

속된 말로 나사가 몇 개나 빠진 클래스.

[천적관계]의 발동 여부에 따라 전투력이 몇 배나 차이가 나는 나였으니까. 게다가 [구마의식]을 통해 정화해야 하는 마왕의 전리품도 좀 있고....

"요행에 의존하는 건 좋지 않다."

물론, 언제까지나 악마를 만나기만 바랄 순 없는 노릇.

[천적관계]가 꺼진 상태.

그 상태에서의 전투도.

이번 기회를 통해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려고 파놓은 우물이 몇 개인데.

한 번씩은 다 써봐야지 않겠어.

스륵─

생각은 거기까지.

나는 곧장 출탑 신청서를 살폈다.

그나저나 뭐가 이리도 많단 말이냐.

투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이 또한 내가 자초한 일이요.

이제 와서 남에게 떠넘기는 것 또한 그랑펠의 긍지엔 있을 수 없는 일.

꼿꼿하게 세운 허리와 목.

내가 미동도 없이 신청서를 살펴보기도 잠깐.

문득,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페이얀 롯."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나는 그녀의 출탑 신청서에서 손을 멈췄다.

페이얀에겐 큰 도움을 받았었지.

덕분에 하이엘이 {고유 정령}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마왕성 균열에서도 고생해줬고.'

페이얀에겐 여러모로 사사로운 빚이 있었거늘.

나는 나를, 그랑펠을 잘 알고 있다.

바늘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절차에 충실하며, 공과 사에 누구보다 엄격하신 분이 바로 우리 그랑펠 님이시란 말이다.

사적인 감정은 존재할 수 없는 게 당연. 나는 지극히 공적인 시선으로 페이얀의 출탑 신청서를 살폈다.

"목적은 합당하군."

...그런데 일리가 있잖아, 페이얀의 출탑 목적?

무엇보다 끈질기게 '친목 도모'를 들먹이는 벤쉬보다야.

이건 훨씬 이성적이고 대의적인 출탑 목적이었다.

──────

계약 정령을 통한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를 수집, 교환.

──────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겉핥기 수준.

그런 나도 알아볼 수 있었던 정령의 가능성이었으니까.

균열에서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페이얀.

그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페이얀의 계약 정령은 파이어 드래이크....'

무려 상위 화염 정령이었다.

상위 정령이니만큼 아르카나 대륙의 상황에 관해서도 보고 들은 정보들이 많지 않으려나. 그 정보들이 내게는 물론, 마탑에도 큰 도움이 될 터.

"합격이다."

나는 페이얀의 출탑 신청서를 채택했다.

그러고는 곧장.

스스슥!

깃털펜으로 양피지에 글씨를 휘갈겼다.

출탑을 미룰 건 없었다.

때마침 적절한 균열이 생성된 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랑펠의 사전에 겸사겸사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뭐든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지.'

그런 내가 페이얀에게 남긴 말은 간단했다.

──────

이번 출탑에 인원 제한은 두지 않겠다.

출탑 목적에 부합하는 정령학파의 마법사가 있다면.

계급을 떠나 출탑에 동행해도 좋다.

──────

왜, 정령이든 정보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이른바 다다익선이라는 것이다.

*

[텟퍼른 울타리]

[적정 레벨 : Lv.450]

[붕괴도 : 3.2%]

플레이어 커뮤니티엔 간만에 활기가 돌았다.

-적정 레벨 450?? 악마만 없으면 우리도 할만 하지ㅋㅋㅋ

-ㄹㅇㅋㅋ상태이상만 아니어도 괜차늠

-일단 포션 값이 안나가니까 개꿀이자너

악마족 몬스터가 자취를 감춘 지금.

플레이어들에게 균열은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의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별다른 제약 없이 낮부터 밤까지. 온전히 사냥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야, 진짜 많이들 모였네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생성된 균열 중.

최고의 적정 레벨을 자랑하는 [텟퍼른 울타리]은 플레이어들로 붐빌 수밖에 없었다.

잡히는 앵글마다 들어오는 스타 플레이어들.

그중에선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그림도 있었다.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죠, 형님 누님들?"

뒤바뀐 힘의 질서.

각각 1위에서 2위로.

2위에서 1위로.

길드 순위가 바뀐 샤이닝과 천하통일이었다.

"말이 오가는 건 아닌데.... 딱 보기만 해도 아시잖아요?"

양측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건 아니었다.

-샤이닝은 딱히 할 말이 없을 듯??

-그치 제시도 탈퇴한 마당에ㅠㅠ

-록스 눈에 독기 가득한 거 보소

-근데 천하통일이 의외지 않음???

-ㄹㅇ호들갑 떨 줄 알았는데

정점을 빼앗긴 샤이닝은 샤이닝 대로.

정점을 빼앗은 천하통일도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다는 것처럼 들뜨지 않았던 것. 그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균열에서 마주한 두 길드였다.

"역시 뭔가 터져도 터지지 않겠습니까?"

말 그대로 폭풍전야.

볼거리, 넷튜브각이 넘쳐난다는 소리였다.

넷튜버 플레이어들은 [텟퍼른 울타리] 균열 초입부터 군침을 흘렸다.

그래, 마왕성 균열 때 얼마나 후회했던가?

'조금만 용감했어도...!'

이호열의 활약상을 단독으로 중계할 수 있었을 텐데.

허나, 누가 알았을까?

호열이 고작 10분 만에 균열을 클리어하고 나올 줄이야.

그 교훈이 있었으니까.

넷튜버 플레이어들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은 빠릿빠릿하게 진입해 보겠습니다!"

단, 한 장면.

단, 몇 분이라도 더 많이.

천하통일과 샤이닝의 자극적인 경쟁을 중계하리라.

하지만 그들의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 저게 대체?! 드, 드래곤? 아닌데, 대체 뭘까요?!"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거대한 도마뱀.

상위 화염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필두로.

정령의 군단이 균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리고 그 정령 군단의 중심에는.

"잠시만요...? 저거?!"

은발머리, 호열이 있었다.

◈ 123화. 뻣뻣한 게 아니다, 꼿꼿한 것이다

우물우물.

긴장한 탓일까.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정령학 선임 마법사, 페이얀 롯.

그녀는 뒤집어쓴 로브 아래에서 기억을 되짚었다.

출탑 선배이자 숙련 마법사, 클레 오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무엇보다 쏟아지는 시선이 되게 따가우실 거예요!"

과연, 선배님의 말씀이 옳았다.

균열 입구부터 쏟아지는 눈빛들이 장난이 아니잖아?

마탑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커졌을까?'

페이얀은 싱숭생숭한 기분에 들었다.

자신의 출탑 신청서가 채택됐을 땐 마냥 좋았거늘.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

출탑에 인원 제한을 두지 않으시겠다니!

이런 전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이다.

이호열 수석께서 자신의 출탑 목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탓일까?

숙련 마법사, 심지어는 견습 마법사까지.

별안간 정령학파가 단체로 균열 탐사에 나서게 된 셈이었다.

'긴장해서 그런가, 갈수록 배가 고프네.'

우물우물에서 우걱우걱으로.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절대 가볍지 않았다.

자신은 햇병아리, 코흘리개 같은 마법사들의 선임이 아니던가?

만약,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그래도 선임으로서의 체면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나부터도 낯설어서 떨고 있는데. 개뿔.'

하지만 이곳은 모험가들의 세계였다.

페이얀, 자신을 챙기기도 급급하단 소리.

물론, 자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와, 이게 균열이구나."

"...낯설다~ 이상해~"

"근데 어째 사람들 복장이 눈에 익다?"

"바보야. 모험가들이니까, 그렇지."

햇병아리들은 정작 마냥 들뜬 모양이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페이얀은 호열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떠올리는 클레의 조언.

-"그런데 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시선들이 따가울 순 있어도. 막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을 거거든요. 이호열 수석님이 곁에 계신다면 말이에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뭔 개소리야, 그게.'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

균열의 진입한 순간.

페이얀은 클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짜 다들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잖아?'

페이얀은 냉정하게 자신들을 바라봤다.

제삼자의 처지에서 봐도 이런 구경거리는 흔치 않겠지.

로브를 뒤집어썼다고는 해도, 소환한 정령까지는 감출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마탑의 마법사들이 떼거리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단체로 정령까지 소환했다?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난리가 날 정도의 사건인데.'

의아하게도.

'목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 정도의 거리.'

균열 안 모험가들은 자신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이어 드래이크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착각하기엔....

그 눈빛들이 명백하게 호열을 향해 있었으니까.

'저 많은 모험가가 수석님의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이지?'

꼴깍─

페이얀은 마른침을 삼켰다.

슬쩍, 호열을 흘겨봤다.

'...정말 이쪽 세계에선 엄청 대단하신 귀족이신 건가?'

햇병아리들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대로.

정말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라든가...?

그러나 그런 페이얀의 잡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 잠깐. 뭐라고?"

상위 화염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가 전해온 아르카나 대륙의 소식 때문에.

사실 페이얀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마왕성 균열에 진입.

마왕 압살에 기여를 했던 그녀였으니까.

"말도 안 돼!"

그러나 이건 그 예측을 한참 뛰어넘은 파장이었다.

다른 정령들이 전해온 소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단다.

파이어 드래이크가 열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새롭게 태어난 세계수가 모든 생명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덕분이겠지."

"...!"

웅성웅성.

세계수라고?

그것만으로도 놀란 듯한 햇병아리들의 반응.

그러나 페이얀은 다른 곳에서 놀라고 말았다.

페이얀은 그 세계수를 싹 틔운 게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호열 수석...!'

찰나의 순간.

핑핑 돌아가는 머리 회전.

그렇다면 현재 아르카나 대륙의 변화가.

'전부 이호열 수석의 손에서 비롯된 소리란 말이야?'

왜, 세계수를 싹 틔운 것도.

마왕을 압살한 것도.

전부 호열의 계획과 절차 아래에서 진행된 일이었으니까.

힐끗─

페이얀은 호열의 눈치를 살폈다.

'엄청난 일을 해내시고도 생색 한 번을 안 내시다니.'

정작 당사자인 호열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도 없었건만.

왜, 괜히 내 가슴이 들뜨는 걸까?

꼬르륵─

덕분에 연비가 좋지 않은 육체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뒤적뒤적.

로브를 뒤지던 페이얀이 뭐라도 입으로 쑤셔 넣던 순간.

햇병아리 하나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퀴른베르크 기계탑이요? 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구요?"

"그냥 움직인 게 아니다. 명백히 악마를 사냥하고 있다."

"...아, 악마를 사냥해요? 그 기계탑이?"

"켁켁."

"괜찮으세요, 페이얀 선임님...?"

"네, 네. 전 괜찮아요."

커흡.

하마터면 목이 막힐 뻔했다.

'그나저나 뭐? 퀴른베르크 기계탑이 움직여?'

페이얀도 상식 수준에선 알고 있었다.

딱, 드워프들이 세운 기계탑까지라는 것 정도만.

그런데, 움직였다는 것도 모자라서 악마를 사냥하고 있다니.

후두둑─

페이얀은 입술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떼며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이호열 수석님이 대단하셔도.'

혼자서 아르카나 대륙의 판세를 뒤흔들 정도로 활약하시는 건 불가능하시겠지. 무엇보다 이쪽 세계와 아르카나 대륙은 단절된 상태가 아니던가?

'누가 어떤 목적으로 가동한 건진 알 수 없어도.'

퀴른베르크 기계탑의 진격.

그것도 들려오는 승전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맞아, 이호열 수석님도 사람이시니까.'

그래, 그것이 페이얀의 상식이었다.

능력이 아무리 특출 나다고 해도 개인은 개인.

그 영향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물론, 그 상식은 곧장 무너져내렸지만.

"하이엘."

호열이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

"!!!"

페이얀을 포함한 모두가 정령학파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페이얀 선임, 저 정령은?"

작은 몸집.

그러나 풍기는 기운 절대 작지 않았다.

그랬다.

저게 바로 계급을 초월한 {고유 정령}.

숙련 마법사들의 물음에 페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고유 정령이에요."

"...고유 정령!"

"이호열 수석님께서 고유 정령의 계약자셨어?"

어지간히 놀란 나머지.

쉽사리 짹짹거림을 멈추지 않는 햇병아리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놀라는데.

하이엘이 세계수를 싹 틔워 {고유 정령}으로 거듭났다는 진실까지 알게 된다면 얼마나 경악할까? 허나, 페이얀에게 호열의 행적을 떠들 생각 따윈 없었다.

으쓱─

'그대들은 알면 다친답니다.'

...사실은 내가 수석님에게 찍힐까 봐, 이러는 거지만.

물론, 페이얀의 우쭐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하이엘이 말을 전해왔으니까.

"드워프들의 지도자, 체인워커 하드록. 그에게 호열 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체인워커 하드록, 그가 호열 님에게 전해온 전언이 있습니다."

하이엘은 정작 전언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늘.

페이얀은 소름이 돋았다.

잠깐, 드워프들의 지도자라고?

'...어째서 하이엘이 드워프들과 함께?'

드워프.

퀴른베르크 기계탑.

하이엘.

이호열 수석.

순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맞물려 가는 단어들.

그와 동시에 페이얀의 얼굴에 떠오르는 느낌표.

'...설마?!'

이내, 설마가 사람을 잡는 하이엘의 말이 이어졌다.

"첫째로 체인워커는 맹약을 잊지 않고 퀴른베르크 기계탑을 가동해주신 것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둘째로 마왕과 조우한 자신들을 위해 직접 행동하신 것에 대한...."

...자, 잠깐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야?

페이얀의 얼굴에 느낌표를 넘어서 경악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곧, 이 모든 게 한 사람.

호열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으니까!

*

장관이네, 이거.

마왕 압살 때는 서로 다른 마왕성 균열에 진입했었으니까.

페이얀의 파이어 드래이크를 두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괜히 상위 화염 정령이 아니구나.

화르륵─

화물 트럭만큼 거대한 육체.

저기 날개만 달렸으면 해츨링 드래곤으로 착각할 정도겠는데.

무엇보다 숨을 내쉴 때마다 불꽃이 일렁거리는 게.

보기만 해도 더워지는 기분이다.

그런 파이어 드래이크를 필두로.

소환된 정령이 대략 스물 남짓.

각 정령들마다 속성이 달랐으니까.

주변이 뜨거워졌다가, 싸늘해지고, 눈부시고....

하여튼.

그 요란한 영향력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페이얀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전부 정령 무리에서 한 발자국씩 거리를 둔 상태였다.

물론.

'...피곤하게 산다. 나도 진짜.'

폼생폼사.

우리 그랑펠 님께서 정령 군단이라는 멋진 배경 앞에서 물러나실 일은 없었으니. 나는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온기] 버프라도 챙겨서 다행이다, 진짜.

[온기가 담긴 보석함]에게 또 한 번 감사한다.

[온기가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 줍니다.]

시베리아 고기압.

프로스트의 강추위도 막아주는 [온기] 버프.

행커치프에 달린 화염 속성 친화력 효과.

덕분에 나는 정령들 사이에서도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어쨌든, 보람이 있었네.'

과연, 다다익선.

이 정도의 인원과 함께 균열을 찾은 수고가 있었다.

나조차도 새로운 아르카나 대륙 소식들이 꽤 있었거든.

물론, 큰 소식.

사건이라 부를만한 일들은 전부 하이엘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놀랄 정도의 소식은 없네.'

자, 그럼 이젠 하이엘의 차례였다.

나는 하이엘을 소환했다.

빠져나가는 마력.

그래도 이제 엄살을 부릴 정도는 아니네.

[마력] 스탯이 400에 가까워진 덕분이겠지.

이내, 정령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하이엘.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외관 하나만큼은 튀는구나.

그것도 굉장히.

이제 막 {고유 정령}으로 거듭난 것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은 관뒀다. 뭐 묻은 개가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였으니까.

'그나저나.'

지도자, 체인워커 하드록.

그를 포함한 드워프들도 나름대로 악마에 맞서고 있었구나.

하이엘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들이 몰아낸 악마의 수가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이엘의 진지한 눈빛이 나와 마주쳤다.

"그렇습니다. 모든 게 예상하신 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니. 뭐, 예상하긴 했는데.

그 정도까지 모든 걸 상세하게 예상하진 않았거든?

너 대체 어떤 텔레파시를 받은 거냐, 하이엘.

물론, 부정 따윈 할 수 없다.

"...켁켁."

하이엘에 말에 놀라 가슴팍을 두들기는 페이얀.

한술 더 떠서.

"예, 예상하셨다고? 모든 걸?!"

"야, 조용히 해."

"...쉿!"

그녀보다 더욱 놀란 표정을 짓는 숙련, 견습 마법사들.

정말로, 빌어먹게 피곤한 성격 탓....

나는 이 부담스러운 과대평가를 부정할 수 없단 말이다.

"그렇군."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뻔뻔함의 극치구만.

그 와중에 불현듯 엄습하는 불안감.

'...하이엘, 너 설마.'

드워프들한테도 똑같이 말한 거니?

나는 하이엘을 바라봤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는 듯.

꼿꼿하게 세운 목과 허리.

고고하게 빛나는 눈빛.

파이어 드래이크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깡다구.

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자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아니, 됐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도 없겠지.

하이엘이 드워프들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놨든 상관없었다.

몸이 녹초가 되는 것을 넘어서.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랑펠은.

쏟아지는 과대평가를 실현하고 말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텟퍼른 울타리]

[적정 레벨 : Lv.450]

[붕괴도 : 3.8%]

이런 균열을 그냥 지나치는 건 아쉬운 일이겠지.

나는 페이얀과 정령학파 마법사들을 바라봤다.

다들 계약 정령과는 간만의 재회겠지.

"혼자서 고생 많았어요, 닉스."

"노움, 너 어째 몸집이 더 커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없어서 편했나 봐? 부려 먹는 사람도 없고, 그치? 너 사실대로 말해!"

"...실피드. 아무리 반가워도 바람으로 머리카락 헝클어트리는 건 그만해 주겠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정령학 서적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정령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령과의 교감 능력이다. 정령 마법은 다른 마법과는 그 본질부터 다르다. 정령 마법은 마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정령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출탑의 목적은 달성했다.

절차에 충실한 그랑펠의 성격상.

당장 마탑으로의 복귀를 지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러나.

나는 퀘스트창을 바라봤다.

─수석의 무게 (반복)▲

●출탑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반복)....

저들이 정령 마법사로서의 본질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

그 또한 성공적인 출탑의 목표이자 수석의 무게겠지.

나는 페이얀에게 말했다.

"목적은 달성했지만, 복귀는 잠시 미루겠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이얀은 영문은 몰라도 내심 반가운 눈치였다.

파이어 드래이크를 소환하는 건 처음이 아니라 해도.

제대로 교감할 여유가 주어진 건 이 순간이 처음일 테니까.

'...교감이라.'

나는 하이엘을 바라봤다.

말했다시피.

지금도 거울을 보는 것 같단 말이다...!

우리 사이에 더 깊은 교감은 필요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하이엘에게 말했다.

"가지, 하이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린 교감 말고도 해야 할 게 산더미 같이 쌓였단 말이다.

하이엘의 {자연} 능력을 활용하는.

새로운 [{『기이』}]에 대한 가능성 탐구부터.

[천적관계]가 발동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전력 파악까지.

'부지런히 우물을 판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그 상대로 [텟퍼른 울타리]의 등장 몬스터.

[텟퍼른 허수아비]만큼 적절한 상대도 없겠지.

그럼 바로 시작하자.

챙─

나는 곧장 검을 치켜들었다.

.

.

.

챙─

페이얀은 자신이 헛것을 봤나 싶었다.

...뭐지?

이호열 수석께서 검을 뽑으셨다?

마법사가 검이라니...?

처음엔 그저 검의 형태를 띤 마도구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저 날렵한 몸놀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언제나 꼿꼿하게 척추를 세우고 계셨기에.

당연히 뻣뻣하실 것이라 생각한 게 착각이었나?

스르륵─

물 흐르는 듯 유연한 움직임.

스와악─

빠르고, 단호하게 허공을 가르는 검날.

털썩─

그와 동시에 쓰러지는 텟퍼른의 허수아비.

...어라라?

페이얀의 입술에서 외마디 음절이 늘어져 나왔다.

"...엑?!"

◈ 124화. 먹구름

[텟퍼른 울타리]

[적정 레벨 : Lv.450]

균열의 정보가 떠오르고.

플레이어들이 움직일 때만 하더라도.

[텟퍼른 울타리]의 주인공은 천하통일.

혹은 샤이닝이 될 것이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재 두 길드의 위상을 위협하는 신흥 세력.

가온, 이나즈마, 버서커.

거대 연합은 며칠째 다른 균열을 공략 중인 상태였으니까.

"텟퍼른 울타리는 포기하지."

"우리도 마찬가지. 들러리가 되긴 싫다고."

"가이버의 회복이 우선이야."

다른 거대 길드들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괜히 천하통일과 샤이닝 사이에 꼈다가는.

레벨업은커녕 경험치를 건지기조차 힘들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이호열. 아니지, 호열 님이 왜 이런 누추한 균열에...?"

[텟퍼른 울타리] 균열에 호열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정령 군단과 함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넷튜버 플레이어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미친. 뭔 상황인지는 몰라도 장난 아닌데요. 저거?"

"아르카나에서도 한 번도 구경 못 해본 게 정령들인데!"

"호열 님 덕분에 제대로 눈 호강 하네요."

호열의 등장만으로도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반가웠건만.

그런 호열도 모자라서 정령들이라니.

천하통일과 샤이닝의 경쟁을 능가하는 볼거리가 아닌가?

이내, 시청자들의 채팅이 쏟아졌다.

-ㅁㅊㅋㅋㅋㅋㅋㅋㅋ

-다 좋은데 괜히 가까이 가서 초지지 마라 진짜 ㅡㅡ

-ㄹㅇ 다른 플레이어는 괜찮아도 이호열은 건들지 말자

-ㅇㅈ 존중해줘야지 우리가 얼마나 덕을 보고 있는데

눈치로 먹고 사는 넷튜버 플레이어들이었다.

게다가 미쳤다고.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호열에게 다가갈 간 큰 이는 없었다.

"물론이죠.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격식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수십의 정령 앞에서 꼿꼿하게 선 호열의 모습.

그건 멀리서 바라보는 게 더욱 그럴싸한 그림이었으니까.

넷튜버 플레이어들은 순수하게 감탄을 뱉어냈다.

"...뭣 때문에 이 균열을 찾으신 걸까요?"

"저 옆에 로브를 뒤집어쓴 분들은 역시 마탑의 마법사들이겠죠?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을 테니까요."

"호열 님 레벨에 사냥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물론, 그와 별개로 의문은 여전했다.

그러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일행과 떨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한 호열.

그가 [텟퍼른 허수아비]에게 접근했으니까.

"엥? 그냥 사냥하러 오신 걸까요?"

향간에 떠도는 호열의 추정 레벨은 무려 900레벨.

그에 반에 [텟퍼른 허수아비]는 겨우 450레벨에 불과했다.

막말로 수십만 마리를 사냥해도 레벨은 오르지 않을 텐데....

호열은 어째서 [텟퍼른 허수아비]를 사냥하려는 걸까?

-...시작부터 검?

-오오, 평소랑 전투 패턴이 다르시네?

-아아, 뭐야 그런 거였나???

챙─

호열이 검을 치켜들고 나서야.

그 이유를 짐작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넷튜버 플레이어이자 탐험가.

"아, 그렇구나!"

유스라 왕국.

황금 궁전 광장 앞 모퉁이, 황금 송아지 주점.

스크린으로 중계를 지켜보던 박휘강도 그중 하나였다.

"텟퍼른 허수아비는 카운터형 몬스터거든요!"

아르카나 대륙 곳곳을 누볐던 탐험가의 지식!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상대에게 가장 까다로운 타입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한 번에 한 타입으로만 변신할 수 있어서. 파티만 잘 짜서 상대한다면 그렇게 까다로운 상대는 아닌데...."

보다시피 호열은 혼자였다.

물론, 레벨 격차가 어마어마하니까.

허수아비 하나를 상대하는 데 무리는 없을 터.

실제로 호열의 움직임엔 여유가 넘쳤다.

꿀꺽─

꿀렁이는 목울대.

락키드는 맥주 통을 단숨에 비웠다.

자리에 모인 애송이들은 알아볼 수 없어도.

자신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층 더 고고해진 호열의 검기(劍氣)를.

그런데, 저런 검기를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서.

괴물 같은 마탑 놈들 중에서도 수석?

반칙이잖아?

저런 건 무규칙 콜로세움에서도 반칙이라고.

"쳇. 멋진 거는 자기 혼자 다 하는구만. 저거."

락키드가 괜한 심술을 부릴 정도의 성장.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휘강은 더욱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텟퍼른 허수아비가 떼로 몰려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플레이어가 어떻게 행동하든, 허수아비 중 하나는 완벽하게 플레이어의 공격을 받아칠 수 있을 테니까요!"

말했다시피.

텟퍼른 허수아비는 카운터형 몬스터였다.

한 마리를 상대해야 할 때도 파티 사냥이 권장되는데.

그런 녀석들에게 오히려 둘러싸이게 된다면?

"레벨을 떠나서 상당히 피곤해질 수 있단 거죠."

아니, 호열은 이미 피곤한 상황에 빠진 것 같았다.

어느샌가 호열의 주변으로 몰려든 텟퍼른 허수아비들.

락키드의 입꼬리가 그제야 올라갔다.

'그래. 고생도 해보시고. 그 똥폼도 좀 구겨보셔야지.'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머리 회전이 빠른 락키드.

박휘강의 해설을 듣고 있자니.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쉽지 않겠단 견적이 나왔다.

"멀끔한 얼굴에 얼룩 좀 묻히시겠군."

크하하!

그러나 호탕하게 웃는 락키드는 모르고 있었다.

호열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물을.

살 구멍을 파놓았는지를.

카운터형 몬스터가 잔뜩 몰려들었다 한들.

호열이 쏟아내는.

『마법』, [스킬], {자연} 능력의 가짓수를 넘어설 순 없다는 말.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기이』}]를 제외하고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덕분에 무수한 텟퍼른 허수아비에 둘러싸여서도.

호열에게 배어든 품위는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으니.

-와씨 그냥 차원이 다르네ㅋㅋㅋㅋㅋ

-뭐임? 텟퍼른 허수아비를 스파링 상대처럼 쓰는 거임??

-ㅁㅊ 450레벨짜리를 연습 상대로 쓴다고ㅋㅋㅋㅋㅋ

덜커덕!

결국, 락키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말았다.

생긴 것부터 능력까지.

"불공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런 재수 없는...!!"

.

.

.

...놀라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퀴른베르크 기계탑부터.

새로운 세계수의 등장.

마왕 압살까지.

모든 사건에 호열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미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거늘.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아있을 줄이야.

화륵─

숨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

파이어 드래이크 콧방귀를 내뿜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배고프단 소리도 못하고 있군, 페이얀."

파이어 드래이크의 말이 맞았다.

뱃속에 든 거지도 놀라서 기절한 덕분일까.

쉴 새 없이 꼬르륵거리던 배가 잠잠했다.

'그나저나....'

페이얀은 호열을 바라봤다.

『마법』과 정령을 통한 {자연} 능력의 활용이야, 놀랄 일이 아니었다.

호열은 엄연한 마탑의 수석 마법사였으니까.

페이얀이 놀란 건 역시나 검술 때문이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알 수 있어.'

텟퍼른.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

탐험가 연맹조차 탐사를 끝마치지 못한 지역.

무엇보다 등장하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기괴했다.

텟퍼른 최외곽 울타리에 등장하는 허수아비만 하더라도.

'꽤 까다로운 면이 있으니까.'

어중간한 검술로는 텟퍼른 허수아비한테 생채기조차 입힐 수 없다는 말. 바꿔 말하자면 호열의 검술이 보통 수준이 아니란 소리였다.

"내가 말했지? 그 소문 사실이라니까!"

"위대한 가문, 그거?"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러실 수 있겠어?"

...삐약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왜일까?

페이얀, 본인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지.

무엇보다 페이얀은 재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서 혈통이 중요하지.'

대륙, 각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는 마도 가문의 후손들.

마탑에 입성한 마법사들 대다수가 그러했다.

간혹가다 뱅그릿 선임처럼 예외적인 이가 있긴 했다만....

그 숫자는 지극히 적었다.

'마르셀로 수석의 능력도 가문의 내력에서 비롯된 거니까.'

하지만 그 혈통의 힘이란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다.

마도 가문에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검사를 배출해 낼 순 없는 것처럼.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한 것처럼...!

그 사실을 알기에.

호열에 관한 의문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지나치게 다재다능하지 않으신가?"

저래선 마치 좋은 건 다 가지고 계신 것 같잖아?

*

...최근 들어 귀가 자주 간지럽다.

그러나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들 내가 뭔 짓을 하나 싶겠지.

'900레벨? 내가?'

하여튼 소문이 문제였다.

당사자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어느샌가 내 레벨은 최소 900레벨이 되어있었으니까.

심히 부담스러운 과대평가.

아니, 최근 들어서 경험치가 오르는 속도를 보면.

저게 가능한 수치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수치였다.

'물론, 내 입으로 진실을 말할 순 없다.'

피곤한 성격 탓이라 둘러대도.

누군가는 끈질기게 묻겠지.

그럼 그냥 랭킹 정보를 공개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럼 나는 대답 대신 상태창을 내밀어 주리라.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25]

[능력치]

근력 : 70 / 민첩 : 75 / 마력 : 385 / 행운 : 6 / 심미 : 下

[보유 포인트 : 0]

비공개 상태인 랭킹 정보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

그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다.

불필요한 오해는 일찍 일찍 바로 잡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그러나 플레이어 랭킹에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란 이름이 떠올라있는 꼴은 나는 죽어도 볼 수 없단 말이다...!

'진짜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

그래, 이건 그랑펠의 긍지가 아닌.

나, 이호열의 긍지가 걸린 문제.

'그럴 바엔 차라리 900레벨을 찍고 말지. 내가.'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달려드는 [텟퍼른 허수아비]를 사냥했다.

[천적관계]는 발동되지 않은 상태.

온전한 전력 테스트를 위해 비약초 도핑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검을 꺼내 들기 잘했다, 호열아.

역시, 나사 빠진 클래스.

악마 사냥꾼.

'빠르다.'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근력과 민첩 스탯을 최대한 끌어올렸건만.

레벨업으로 획득한 포인트를 전부 마력에 투자해 온 나였다.

[텟퍼른 허수아비 : Lv.450]

순수하게 스탯만으론 녀석을 따라가기 벅차단 소리.

그것도 모자라 이 녀석, 듣던 대로 상대하기 까다롭다.

'카운터형 몬스터. 공격에 따라 그에 대한 내성을 갖춘다.'

스와악─

검기를 발산.

공격력을 극대화한 검격을 맞고도 버텨내다니.

"칭찬해주마."

잘나신 그랑펠 님께서 그렇게 평가할 정도였으니까.

과연,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지역이라고 할만하군.

그러나 내게는 이보다 적절한 상대도 없었다.

"막아내는 재주는 있구나. 그러나."

고오오─

검격과 동시에 발현하는 마법.

하나를 막아내면 동시에 둘을 쏟아내면 된다.

만약, 한 마리가 더 달려든다면?

"이 또한 막아낼 수 있겠는가."

거기서 하나를 더 쏟아내면 그만이거든.

그동안 내가 파놓은 우물이 몇 갠대.

수십 마리 정도야 [{『기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단 말이다.

'상대할 만하다.'

제아무리 나사 빠진 악마 사냥꾼이라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스탯의 우위가 있었다.

나는 동레벨 대의 플레이어보다 스탯의 총합이 100포인트가량 앞섰으니까.

'클래스 퀘스트, 비약초빨이라는 거지.'

어떠냐, 나의 발버둥의 결과가.

후두둑─

나는 무너지는 텟퍼른 허수아비를 향해 읊조렸다.

"몸풀기 상대론 나쁘지 않았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다르게 담담하게 내뱉는 말.

다른 사람들.

"몸풀기 상대, 그 말씀대로였습니다."

또 하이엘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스스로 알고 있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발전이다, 호열아...!

이제 적어도 동레벨 대의 몬스터 앞에서는 구질구질할 필요는 없겠구나.

벅찬 마음 같아서는 이 성취감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거늘.

뒤통수가 따가웠다.

뒤를 돌아보니 페이얀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보였다.

간만에 정령과 교감하라니까.

왜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됐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

슬슬 마탑으로 복귀하자.

쿠르릉─

어째서인가.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운 균열의 하늘.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아갔다.

"하늘이 울부짖는군."

듣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하늘이 우는 것보다 내가 우는 게 빠르겠다.

어쨌거나 서두르자.

[온기] 버프가 만능이라 해도 비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

.

.

가장 먼저 낌새를 알아차린 상위 화염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였다.

엎드려있던 파이어 드래이크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페이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그 말에 페이얀은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주변에 맴도는 '이질적인 정령'의 기척을.

페이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이 기척은?'

...어둠의 정령!

그건 정령학 선임 마법사인 페이얀조차 단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는 정령.

그러니 페이얀이 떠올릴 수 있는 건 선임으로서 지닌 정령학에 관한 지식밖에 없었다.

──────

어둠의 정령은 그 태생부터가 다른 속성의 정령들과 다르다.

──────

어둠의 정령은 특정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페이얀이 그 조건을 떠올리다가 흠칫했다.

호들갑을 떠느라 잊고 말았다.

"이런...!"

이곳이 텟퍼른의 영역이라는 것을.

──────

어둠의 정령은 짙은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들. 그들이 출몰하는 곳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지역뿐이다.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곳, 그런 장소야말로 그들의 근원이었으니....

──────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이자.

탐험가 연맹조차 탐사를 끝마치지 못한 [텟퍼른].

그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역이었다.

거기에다 까다로운 두 번째 조건 또한.

──────

...해당 지역이 교감력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

교감력.

페이얀, 자신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소환한 정령들 덕분에.

[텟퍼른 울타리] 균열 안엔 충분한 교감력이 넘실거렸다.

페이얀이 소맷자락에 손을 집어넣었다.

"머저리 같았어."

군것질거리 따위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녀가 꺼내 든 건 마도구, 완드였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위험 변수를 간과했다.

페이얀은 잘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야 정령학 선임으로서 실격인데."

파이어 드래이크와 마찬가지로.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정령들.

숙련 마법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한 모양이었지만.

견습 마법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페이얀은 책임감을 느꼈다.

'적어도 모험가들이 휘말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다른 걸 떠나서 마탑의 명성만은 실추시킬 수 없었다.

소란을 일으키긴 싫었지만, 피할 순 없겠지.

말했다시피 어둠의 정령은 '이질적인 정령'.

'평범한 이들은 교감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

그랬다.

이질적인 마력.

흑마도학에서 말하는 '적합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만이 어둠의 정령과 교감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정도 수준의 '적합한 마력'을 갖춘 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엔 마티스 선임밖에 없어.'

하지만 이 자리에 마티스는 없었다.

그러니까 페이얀은 이를 악물었다.

"역시, 몰아내는 수밖에 없겠어."

"알아들었다. 페이얀."

"전력을 다해. 모험가들이 휘말리는 건 막아야 해."

그러나 페이얀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이 자리엔 마티스를 대신할.

아니, 능가하는 '적합한 마력'의 보유자가 있었다.

또각─

◈ 125화. 한없이 깊은 어둠 (1)

천하통일과 샤이닝의 신경전.

호열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그 팽팽한 긴장은 끊어졌지만.

샤이닝의 길드 마스터, 록스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여러모로 주제 파악을 하게 만드네.'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언더독일 때가 마음이 편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다.

자신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바로 언더독이란 위치였으니까.

그와 반대로 드미트리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호열, 저거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울분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악마족도 사라졌겠다. 상태이상 걱정할 것도 없겠다. 간만에 주가 좀 올려보려고 하는데. 저런 괴물이 왜 우리들 노는 균열엔 쫓아왔냐는 말이야. 내 말은!"

빙그르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던 카밀라가 코웃음을 쳤다.

"주가를 올려? 여자 꼬시려고 했던 거겠지~"

"...뭐?"

"왜, 약속이라도 했어? 인터뷰에서 이름 불러주기로~?"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호열 씨한테 툴툴대는 것도 부러워서 그런 거지?"

"부, 부러워해? 누가? 내가? 이호열을? 아닌데? 전혀?"

"풉─"

제시가 탈퇴했어도 두 사람 사이는 나아지는 게 없군.

말려봤자 소용없는 걸 알고 있다.

록스는 중재하는 대신 호열을 가리켰다.

"실전 감각을 유지하러 온 거겠지."

"실전 감각? 애걔? 이런 균열에서?"

"최대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해 보려는 거 아니겠어?"

"...그래?"

"두 눈 크게 뜨고 보라고 드미트리. 여자만 쳐다보지 말고~"

"야 너 씨."

[텟퍼른 울타리].

호열의 추측 레벨에 비하면 적정 레벨은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 하지만 현재 생성된 균열 중엔 가장 높은 레벨을 자랑하는 균열이었다.

"이호열을 탓할 게 아니라 그릇이 작은 걸 탓해야겠지."

악마족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마왕성]이나 [깨진 차원의 틈]처럼.

이호열을 담을 만한 균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록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거슬리는군."

심기가 불편하다.

류오쥔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호열의 등장으로 모든 화제가 그쪽으로 옮겨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까 말이야."

천하통일이 일궈냈던.

아니, 천하통일의 군주인 자신이 일궈냈던 업적들.

무려 샤이닝을 제치고 길드 랭킹 정상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조국을 넘어서 세상의 관심을 받아도 부족하거늘.

자신을 향한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호열."

그랬다.

자신이 무언가를 이뤄낼 때마다 호열이 있었다.

퍼스트 클리어라고 확신했던 [만트라 광산] 균열 때도 호열이 앞에 있었고. [마왕성] 균열에 관해선 아예 말할 거리조차 없었다.

고작 10분 남짓.

류오쥔춘이 채 길드 하우스를 빠져나오기도 전.

[마왕성] 균열은 클리어되어 사라졌었으니까.

찌릿─

류오쥔춘은 호열을 바라봤다.

플레이어의 시선이 아닌.

클래스, 군주의 시선으로.

'대체 어떻게 마탑을 움직인 거지?'

만약, 호열의 클래스가 자신과 같은 [군주]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호열의 추정 레벨은 최소 900.

900레벨의 군주라면....

마탑을 멋대로 휘두르는 것도 꿈이 아닐 테니까.

그러나 류오쥔춘은 알고 있었다.

'허나, 군주라면 저럴 수 없다.'

군주의 무기는 신하였다.

마법도, 검도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저기 호열을 봐라.

"...대체 뭐야?"

"그 포위망을 뚫어냈다고?"

"대체 공격 스킬이 몇 개나 있는 거야? 체크하고 있지?"

"네? 넵! 하고는 있는데 저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서...."

단신으로 대군(大軍)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류오쥔춘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거엔 저런 이호열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개인은 결국, 개인에 불과하다.

류오쥔춘은 개인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느샌가 마탑이 그의 행적에 함께 하고 있었다.

국왕, 하쿠나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유스라 왕국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신교단, 라이언 하트 기사단, 심지어는 그림자 용병단까지.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이닝 위에 이호열이 있었다.'

하늘 위에 하늘.

천외천이라는 것인가?

이제서야 록스의 태도가 이해가 됐다.

록스쯤 되는 사내가 어째서 이호열을 고평가했는지도.

류오쥔춘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런 상대의 클래스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니.'

꾸욱─

류오쥔춘은 답답한 마음에 주먹을 쥐었다.

길드원들에게 소리쳤다.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 공략을 시작한다."

쿠르릉─!

"쯧."

재수가 없으려니 이젠 비까지 오려는 것인가.

균열의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내, 모든 허수아비를 쓰러트리고 무기를 거둔 호열.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려는 모양.

류오쥔춘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

...순간이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랬다.

록스와 류오쥔춘.

같은 상황, 호열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지만.

이내, 두 사람의 생각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말았다.

"!"

두 사람.

아니, [텟퍼른 울타리]에 진입한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어둠의 정령이 출현합니다.]

...어둠의 정령이라고?

그와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호열을 향해.

"...설마, 이걸 위해서 텟퍼른 울타리에?"

.

.

.

다들 어째서 저렇게 심각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가.

나는 우려했다.

...혹시 내가 너무 추해 보였나?

어쨌거나 나는 저들에게 있어서 마르셀로와 같은 수석 마법사이거늘. 단숨에 쓸어버려도 모자란 허수아비들과 사투를 벌인 꼴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둠의 정령이 출현합니다.]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안도를 삼켰다.

괜히 놀랬네.

차라리 이런 거라면 안심이지.

'그나저나.'

터져도 크게 터졌구나.

나를 바라보는 페이얀의 눈빛이 사뭇 비장하다.

페이얀이 바짝 경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둠의 정령입니다."

어둠의 정령이라.

유감스럽게도 정령학에 관한 지식은 아직 겉핥기 수준.

당연히 어둠의 정령이 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다."

"...?"

이놈의 철면피.

그러나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메시지를 통해 어둠의 정령이 '출현'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마냥 합리화하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알아차렸으니까.

아니, 본능적으로.

육체가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신체에 흐르는 마력.

그것도 '적합한 마력'이.

그래,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마티스와의 첫 만남.'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마티스의 마도구, 반지가 나의 적합한 마력에 감응했다면.

지금은 균열의 환경, 그 어둠의 정령이라는 녀석이 내 적합한 마력에 감응하고 있단 거겠지.

"알고 계셨다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페이얀이 입술을 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정령학의 선임으로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전적으로 제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에 관한 처분은 상황을 수습한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책임은 중요하지.

그러나 누구의 책임인가?

정확히 가려내기 위해선 적합한 절차가 필요한 법.

나는 절차에 따라 페이얀에게 물었다.

"정황을 보고 하게, 페이얀."

"최대한 간략하게 전하겠습니다."

그런 페이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그냥 재수가 없었구만.

까다로운 어둠의 정령 출현 조건이 맞아떨어진 게 문제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가 책임질 것은 없다. 페이얀 선임."

"...?"

페이얀은 잠시 침묵했다.

이내,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린 모양인가.

내게 되물어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무슨 말이긴.

간단하게.

책임질 일이 생기지 않으면 된다는 소리다.

고오오─

몸에서 감응하는 '적합한 마력'.

나는 흑마법을 발현할 때와 마찬가지로.

차고 넘치는 적합한 마력을 제어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름만 같은 마력이지.

적합한 마력은 마력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

마티스와의 첫 만남.

-'마력 탈진 상태에서도 흑마법은 발현이 가능하다.'

그리고 첫 만남 이후.

흑마법의 활용 가능성을 파악했던 나였다.

그래, 『흑마법』 또한 내가 파둔 우물 중 하나라는 것.

물론, 흑마법은 개념이 정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야였다.

그러나 덕분에 흑마법에 관한 모든 서적을 탐독했던 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 저게 뭐야?!"

더욱더 어두워진 하늘.

그 하늘 아래 허공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형체.

저게 바로 어둠의 정령인가.

"메시지에서 분명 어둠의 정령이라고 했었어!"

"네?! 가까이 가서 찍어보라고요? 아니, 여러분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전 진짜 쫄리거든요? 저거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요!"

"다들 상태이상 저항력부터 체크하세요!"

상황 파악.

플레이어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리 회전이 빠른 플레이어들은 전투태세를 갖췄다.

예를 들면 천하통일이라든가, 샤이닝이라든가.

과잉반응은 아니겠지.

[어둠의 정령이 출현합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출현 메시지]는 존재했으니까.

메시지가 떠오르는 데엔 조건이 있었다.

"출현 메시지가 뜬 걸 보면 못해도 네임드몹이라는 소리인데! 형님, 누님들. 천통에 샤이닝에 호열 님에 정령들에 네임드몹 출현까지. 저 오늘 지나치게 운수가 좋은 것 같은데.... 설마, 저 오늘이 제삿날은 아니겠죠?!"

넷튜버 플레이어의 말 그대로.

해당 지역, 적정 레벨 수준을 넘어서는 몬스터가 출현했을 때 떠오르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괜히 마탑의 선임, 페이얀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던 게 아닌 거겠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텟퍼른 허수아비를 사냥하고 자신감이 넘쳐서?

그랑펠은 몰라도 내가 그 정도로 분수를 모르진 않는다.

그런 내가 두 다리를 땅에 곧게 뻗고.

허리부터 목까지 뻣뻣할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따라서 적합한 마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어둠의 정령과의 교감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이들 중 그 정도의 적합한 마력을 보유하신 분은 흑마도학 선임, 마티스 님밖에는...."

그랬다.

페이얀은 모를지라도 나는.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에게 인정받은 흑마도학의 원석(原石).

물론, 그 적합한 마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는....

알 수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뭐가 됐든 당장은 감사하자.'

덕분에 어둠의 정령과의 전투는 피할 수 있었을 것 같았으니까.

나는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어둠의 정령을 응시했다.

"이호열 수석님! 거리를 벌리시는 게...!"

페이얀의 우려 가득한 음성이 들려온다.

걱정할 만도 하겠지.

페이얀이 말했듯.

'어둠의 정령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게다가 어둠의 정령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나타나는 이질적인 존재.

그건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 자연 상태의 정령은 평범한 이들은 목격할 수조차 없거늘.

어둠의 정령은 보란 듯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어떤 위험성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는 거겠지.'

그러나 내겐 확신이 있었다.

녀석과 교감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감응하는 적합한 마력이 그 증거.

게다가 나는 적합한 마력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흑마법은 간단합니다."

마티스와 나눴던 대화를 가장한 과외.

나는 마티스에게 흑마법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마티스는 흑마법을 간단하게 설명했었다.

-"어둠은 더욱 짙은 어둠에 파묻히게 되는 것처럼. 흑마법 또한 더욱 적합한 마력을 쫓게 됩니다. 가령 지금 보고 계시는 것처럼."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마티스는 마도구를 꺼냈었다.

적합한 마력에 감응하는 나침반.

팽그르르─

나와 마티스 사이에서 회전하던 침은 결국, 나를 향했었지.

...그때의 감정은 정말이지.

흑마법에게 흑역사를 인정받은 듯한 씁쓸한 기분이랄까.

속내가 드러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지.

-"속성 마법 중에선 화염마법과 그 성질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관해 카림제바와는 필담을 나누기도 했었지요. 그렇기에 저는 그의 만행을 더욱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카림제바 때문에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만 안쓰러워진 꼴이었지만....

어쨌든, 나의 당당함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흑역사 때문이든.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랑펠의 피폐한 설정 때문이든.

나는 마티스를 능가하는 적합한 마력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런 내가 어둠의 정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가 어둠의 정령인가."

교감이 불가능하다면.

더 짙은 어둠이 다른 어둠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어둠의 정령을 굴복시키면 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 끌어올렸던 적합한 마력이란 말이다.

스스스─?

나의 말이 닿은 것인가.

검은 형체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녀석은 내가 끌어낸 적합한 마력을 살펴보고 있었다.

보다 가까워지는 녀석과 나의 거리.

"...잠깐, 우리 보고만 있어도 되는 거예요?"

"이호열, 무슨 생각이지?"

"호열 님이라고 해도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데...?!"

지켜보는 이들 중 동요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이엘뿐.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귓가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내가 그대에게 복종한다."

...잠깐만, 뭐라고?

내가 복종까진 이해할 수 있다.

말했다시피 흑마법의 성질을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뭐?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하, 한없이 깊은 어두우우우움?!

나를 쪽팔려 뒤지게 만드는,

그 괴상한 호칭은 또 무엇이냔 말이냐.

그러나 나는 내색할 수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한없이 깊은 어둠...!"

"어둠의 정령이 호열 님한테 복종을!"

"역시, 괜히 이런 누추한 균열을 찾으신 게 아니었어."

그랬다.

녀석은 이질적인 정령.

무계약 상태에서도 그 형체는 물론, 목소리까지도.

교감력이 없는 플레이어들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호열 수석님...?"

"수, 수석님이 어둠의 정령과 교감을...?"

"말도 안 돼!"

페이얀을 비롯한 마법사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 이러다가 정말 수치사하는 거 아닐까.

간신히 속마음을 추스르던 순간이었다.

어둠의 정령, 녀석이 다시금 그놈의 주둥이를 놀렸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아니, 그러니까 그놈의 호칭 좀 어떻게 좀...!!

"오직 그대만이 이 텟퍼른의 미궁을 풀 수 있다."

...뭐? 텟퍼른의 미궁?

살다 살다 이젠 정령 말도 끝까지 들어야 하는가.

예상치 못한 뒷말에 흠칫해하던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 126화. 한없이 깊은 어둠 (2)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각 불가사의가 무엇인지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10년이 훌쩍 넘는 공백기를 가진 나조차도 알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10대 불가사의 퀘스트]라니.

'이런 건 들어보지 못했다.'

공백기 때문이 아니라.

불과 직전.

[텟퍼른 울타리]가 떠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임??? 텟퍼른이라고??

-드디어 10대 불가사의 떡밥 풀리는 거임???

-레이먼 션 드디어 정신 차렸나봄?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떡밥 회수 시작인가??

그랬다.

10대 불가사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후반부 콘텐츠 취급을 받았으니까. 납득할 수 있었다.

텟퍼른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들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도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틀림없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분명 대형 퀘스트다...!

플레이어라면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는 대형 퀘스트.

물론 내게는, 그랑펠에겐 일희일비란 없었으니.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퀘스트창을 정독했다.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텟퍼른의 미궁을 파훼하고.

텟퍼른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라.

현재까지 밝혀낸 불가사의 : 0개 / 10개

─텟퍼른의 미궁을 목격하라. (진행 중)

과연, 연계 퀘스트였다.

스케일만 생각한다면 월드급 퀘스트에 버금가지 않을까?

하지만 마냥 좋아할 게 아니다, 이거.

누가 봐도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할 게 뻔했으니까.

'애초에 지금 시점에서 풀리는 퀘스트가 아닐 거야.'

그건 눈앞에 퀘스트가 떠오른 과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가사의 퀘스트를 가져온 건 어둠의 정령.

그 어둠의 정령은 우연이 맞물려 나타난 녀석이었으니까.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과 마찬가지로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시작된 거겠지.

'이거, 내 수준에서 진행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거늘.

역시나 피곤하신 성격.

내게 능력 부족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으니.

나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뜻을 내가 알아들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나 모든 일엔 때가 있는 법이다."

능력이 부족해서 둘러대는 게 아니었다.

모든 일까진 몰라도 적어도 퀘스트엔 때가 있으니까.

'여긴 엄연히 [텟퍼른 울타리] 균열이거든.'

최외곽.

텟퍼른의 미궁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물론, 어둠의 정령은 혼란한 상태 같았다.

"그러나 무언가 텟퍼른의 풍경이...."

균열이 뭔지도 모를 테니까.

말꼬리를 흐리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겠지.

나는 우려하는 어둠의 정령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대가 걱정할 것은 없다."

"...?"

"내가 그 시기를 알고 있으니."

"...!"

"때가 되면 내가 그대를 찾을 것이다."

거창하게 지껄였지만.

그저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퀘스트 목표가 떠올라야, [텟퍼른 미궁] 균열이라도 떠올라야 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는 말이 고상해서일까. 오는 말이 심상치 않았다.

"이런 나를 찾겠다...? 그런 뜻인가. 그렇다면 알겠다."

어딘가 동요하는 듯한 음성.

그것도 잠깐 진짜로 심상치 않은 말이 이어졌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내가 그대의 부름을 기다리겠다."

...진심으로.

그놈의 호칭 심상치 않네.

이 순간만큼은 그랑펠의 설정에 감사하자.

아니었으면 수치심에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도 모자라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뭐든 확실하게 해야지.'

나의 수치심과 바꾼 [10대 불가사의 퀘스트]란 말이다.

그 난이도가 어쨌든 놓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일단, 어둠의 정령과 재회하기 위한 다리를 깔아두는 게 우선이겠지.

"하이엘."

내겐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줄 나의 거울....

아니, 하이엘이 있다.

나는 하이엘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하이엘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어둠의 정령.

이질적인 기운은 같은 정령들조차 경계하는 눈치였다.

왜, 마법사들의 계약 정령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페이얀의 상위 정령 파이어 드래이크를 빼면....'

다들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그에 반에 하이엘은 멀쩡했다.

멀쩡한 것을 넘어서 그 우아한 자태엔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고유 정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대단하구나.

뻔뻔.... 아니, 듬직하다, 하이엘.

나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불필요한 소란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내 말뜻을 곧장 알아들은 것인가.

어둠의 정령이 대답했다.

"그대의 말에 따르겠다."

그와 동시에.

스스스─

거짓말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는 어둠의 정령.

지켜보는 이들의 소란이 들려온다.

"사, 사라지기 시작했어?!"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거지?"

"나 살짝 들은 것 같은데. 분명, 텟퍼른의 미궁이라고!"

"혹시 퀘스트일까요?"

소란 속에서.

어둠의 정령, 녀석이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기다리겠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내가 그 소리를 왜 안 하나 싶었다, 진짜.

순식간에 내게 쏠리는 시선.

웅성거리는 인파를 보니 실감이 난다.

나더러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니.

그걸 세상이 전부 들었다니.

철면피를 떠나서 나, 이호열의 정신력이.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다.

나는 페이얀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귀하지."

"네? 아, 넵! 이호열 수석님!"

페이얀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균열 밖으로 나서며 진심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마력 탈진에 시달릴 때가 훨씬 나았다고.

*

[텟퍼른 울타리].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적정 레벨, 450레벨.

평범하다면 평범한 균열에서 벌어진 일이 이렇게 화제가 될 줄이라고.

어디보다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는 건 넷튜브였다.

스스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어둠의 정령.

그 외형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위축되게 만들었거늘.

영상 속 다급한 목소리가 생생한 분위기를 배가 시켰다.

-"추, 출현 메시지까지 떴습니다! 어둠의 정령이래요!"

이내, 어둠의 정령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녀석의 앞에 호열이 있었다.

천하통일, 샤이닝은 물론.

호열과 함께 균열에 진입했던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그야말로 균열에 진입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어둠의 정령이었다.

-"자, 잠시만요.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런 녀석의 앞에서도 호열은 물러서지 않았다.

항상의 자세.

언제나처럼 꼿꼿하게 몸을 세운 채.

어둠의 정령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세상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그 대사가 이어졌다.

-"내가 그대에게 복종한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어둠의 정령을 복종시킨 것도 모자라서.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는 호칭까지.

당연하게도 세상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다.

-걍 미쳤네

-한없이 깊은 어둠ㄷㄷㄷㄷㄷ 포스 오진다

-그냥 딱 듣기만 해도 엄청나 보이지 않음?

-ㄹㅇ 록스가 그냥 했던 말이 아니라니까??

한없이 깊은 어둠.

그 호칭에서 큰 단서라도 잡은 것처럼.

매스컴에선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없이 깊은 어둠이 클래스와 관련된 호칭일지도 모른다. 그런 말씀이신 겁니까?"

"맞습니다. 여태까지 이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지 않았었습니까? 커뮤니티에 떠도는 추측이나 뇌피셜밖에 없었지요."

"전문가님, 비표준어는 조금 삼가해 주시는 게...."

"아니,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입니까? 다른 플레이어도 아니고 무려 이호열 플레이어의 클래스에 관한 단서를 얻은 건데요!"

어둠의 정령을 굴복시킨 걸 봤을 때.

역시나 흑마법과 관련된 클래스가 확실하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저는 히든 클래스라고 생각합니다."

"히든 클래스요?"

"그렇습니다. 흑마법에 관련된 클래스라고 한정하기엔 그동안 이호열 플레이어가 보여준 스킬들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뛰어난 검술을 보여주기도 했었지요."

"말씀대로 텟퍼른 허수아비를 상대할 때도 다양한 스킬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했었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히든 클래스, 한없이 깊은 어둠.

그것이 호열의 클래스일지도 모른다고.

샤이닝의 베이스캠프.

시끄럽게 울리는 TV 소리.

드미트리가 그보다 더 시끄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거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고!"

어둠의 정령을 굴복시킨 것도 모자라서.

뭐, 히든 클래스?

심지어 그 클래스명이 한없이 깊은 어둠?

"재수 없을 정도로. 멋있는 건 자기 혼자...!!"

울분을 토해내는 건 드미트리 뿐만 아니었다.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끄으으으윽! 빌어먹을!"

벌컥벌컥─

끊이지 않는 폭음.

좀처럼 취하지 않는 락키드가 취기에 비틀 거릴 정도.

락키드는 혀가 꼬인 목소리로 주정을 부렸다.

"끄윽. 흐아안없이 깊은 어두우움?"

락키드의 술주정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그림자 용병단에 입단하기 전.

명성이 됐든, 악명이 됐든.

하여튼 꽤 이름을 날렸었던 락키드였으니까.

그런 자신을 뒤따르는 호칭들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콜로세움의 무법자.

그래, 그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뇌까지 근육인 사내.

나중에 가서는 인간의 탈을 쓴 오우거라니.

물론, 그 별명들을 아직까지 지껄이는 이들은 없었다.

알아서 입을 닥쳤던 강제로 입을 닥치게 만들었던.

그렇게 잊히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락키드는 부러웠다.

"그 있어 보이는 호칭은 뭐냐고. 끄윽. 저저, 재수 없는...."

...쿵!

만취한 락키드가 테이블에 엎어지고 나서야 주점엔 평화가 찾아왔다. 드르렁─ 락키드가 코를 골기 시작하자 이제야 입을 여는 이들이 있었다.

"텟퍼른에서 저런 대형사건이 일어날 줄이야."

탐험가 연맹의 연맹 탐험가들이었다.

그중엔 박휘강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휘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맹에서도 텟퍼른에 대해선 딱히 알아낸 게 없죠?"

"그렇죠? 울타리 근처에서 맴돌던 게 끝이었을 거예요. 텟퍼른 안쪽에서 출몰하는 놈들은 진짜 장난이 아니거든요. 허수아비랑은 비교도 안 되죠."

"역시, 괜히 10대 불가사의가 아니네요!"

넷튜버 플레이어의 첫 번째 필수 덕목, 눈치.

박휘강은 눈치껏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나눴다.

그야 이런 자리는 쉽게 오지 않는 자리였으니까.

'탐험가 연맹 최상위 탐험가들...!'

플레이어, 아르카나인을 불문하고 다들 탐험가로선 명성이 드높은 이들이었다.

평소라면 한자리에 모이는 것조차 어려웠겠지.

'따지고보면 이것도 호열 님 덕분 아닐까?'

박휘강은 호열에게 진 빚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넷튜버 플레이어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엔 호열의 모습을 처음으로 중계했다는, 업적 아닌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성지순례 왔습니다

-여기가 이호열 처음 중계했다는 그 방송임??

-어허 예의를 갖추세요 이호열이 아니라 호열 님입니다

-그저 호멘

호멘이라니.

호열이 알게 된다면 기절초풍할 게 분명한 호멘이라는 단어도 그의 방송에서 처음 나왔었으니까.

그러니까 박휘강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텟퍼른의 미궁이라고 했겠다.... 분명 텟퍼른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으신 거겠지.'

박휘강은 호열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퀘스트가 됐든 가뿐하게 해내시겠지.

마왕을 압살하셨던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텟퍼른은, 10대 불가사의는 약간 궤가 다르다.

이어지는 탐험가들의 이야기.

"불가사의가 괜히 불가사의가 아니니까요."

"일단, 위험요소가 너무 많죠?"

"까놓고 어둠의 정령도 이호열 플레이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보물섬이라 불렸던 유스라 제도처럼 확실한 보상이라도 걸려있으면 모를까. 불가사의를 밝혀낸다고 해도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미궁이었다.

함정은 물론이요.

복잡한 구조까지.

탐험가 연맹이 밝혀내지 못한 지역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텟퍼른의 미궁에 탐험가도 없이 진입한다?

능력을 떠나서 피곤한 일에 시달리실 게 뻔했다.

물론, 그 사실을 탐험가들 스스로도 알기에.

분위기는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박휘강, 그는 이름처럼 끈질겼다.

"맞습니다. 불가사의가 괜히 불가사의가 아니겠죠. 하지만 달라진 게 있습니다. 호열 님에게도 텟퍼른에 관한 목적이 생기셨다는 거죠."

"...!"

그 말에 멈칫하는 탐험가들.

연맹 탐험가 중에서도 최상위 탐험가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만약,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텟퍼른을 탐험에 성공한다면...?

'다음 탐험가 연맹장 선거에서 높은 득표를...!'

'경험치가 뭐야. 레벨이 몇 단계나 오를 지도 모른다.'

'잠깐만, 이거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지 않나?!'

침묵 속 서로 간에 오가는 눈빛들.

박휘강은 속으로 미소를 흘렸다.

"무려 마왕을 셋이나 압살하신 호열 님이 말이죠. 이보다 든든한 지원군은 또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이건 못 먹어도 연맹 차원에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

유스라 왕국.

오랜만에 들린 나의 집무실.

나는 책상에 위에 놓인 서신 하나를 발견했다.

...뭔놈의 종이가 이렇게 휘황찬란하냐?

금박으로 장식된 건가.

나는 서신을 살폈다.

"우수한 품질이군. 허나 실용적이지 못하다."

충돌하는 심미안과 청렴결백.

그러나 그 내적갈등은 시작에 불과했으니.

나는 펼친 서신 그 첫줄부터 기겁하고 말았다.

──────

친애하는 한없이 깊은 어둠에게.

──────

...누군지 몰라도 나를 엿먹이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이거!

설마 3호, 웬수, 이예림인가?

아니, 톡을 보내면 보냈지. 이런 짓을 하진 않을 텐데.

간신히 억눌렀던 수치심이 끓어오른다.

당장에라도 서신을 찢어발기고 싶었지만.

"!"

그 발신인을 확인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

탐험가 연맹 연맹장, 파비앙 들롱

──────

탐험가 연맹.

그들이 내게 서신을 보내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읊조렸다.

"절차에 따라 그대들의 제안을 검토하겠다."

물론.

나를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 부른 것까지 감안.

최대한 공명정대하게 말이야.

◈ 127화. 한없이 깊은 어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