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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래서, 엘프가 사는 에버글로우 숲으로 가서 '엘렌시아'라는 나무의 수액을 얻어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비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장가(?)를 읊어주러 온 로이드를 향해 단호한 눈길을 보냈다.

"그런 거라면 저도 못 도와드립니다."

"와.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불가능한 도움이니까 말입니다."

"근데 조금 전엔 하겠다고 고개 끄덕였잖아?"

"그때는 에버글로우 숲으로 갈 거란 말씀을 안 하셨으니까요."

"아하. 쉬운 일일 줄 알고 넙죽 고개를 끄덕였는데 지금 보니까 영 아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했던 말을 뒤집고 한 발짝 빼시겠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긴 개뿔. 맞는데?"

"...."

"천하의 하비엘 아스라한이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

"왜? 내가 틀린 말 했나?"

"...."

하비엘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로이드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이드 님."

"어. 변명해봐."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이십니다."

"에버글로우 숲에서 엘렌시아 수액을 채취하는 게?"

"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예."

"어째서?"

"엘프는 애초부터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종족이니까요. 로이드 님의 시도는 불가능한 일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결과를 맞이할 겁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다른 해법을 찾고 피난민을 보살피는 데에 집중하는 쪽이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 합니다만."

사실이다.

최소 500년가량.

엘프와 교류한 인간이 없다는 것이 로라시아 대륙 유사종족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들은 완고합니다. 인간과의 교류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딱 한 군데에서만 들어봤습니다. 동화책이지요. 어린아이들이 즐겨 읽는."

"...."

"그걸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는 뭐, 정신연령이 여섯 살쯤에 머물러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여섯 살? 근거는?"

"엘프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제가 믿었던 게 딱 여섯 살 때까지였거든요."

"흐음, 그러니까 지금 내 정신연령을 돌려 까기 하시는 거다?"

"아닙니다."

"그럼?"

"돌직구를 꽂는 겁니다만."

"헐. 대놓고 돌직구래."

"사실이니까요."

"근데 돌직구라는 말도 이젠 막 쓴다?"

"로이드 님이 몇 번이나 사용하시니 이젠 저도 그 뜻을 조금은 짐작하게 됐습니다."

"...쩝. 근데 어떡하냐. 이번엔 네가 좀 틀린 거 같은데."

"틀린 것 같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엘프들이 사는 그 숲에서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얻어올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지. 무슨 말씀은 개뿔."

"...."

"뭐. 왜. 뭐. 왜 또 가자미눈 뜨고 쳐다보는 건데."

"별건 아니고, 내일 아침에 주군을 찾아뵈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로이드 님을 정신치료, 혹은 요양 차 왕도에 보내야 하나 상의 좀 드리려고요."

"...."

쯧.

로이드는 입맛을 다셨다.

시종일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려는 하비엘.

녀석이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치료 드립은 좀 쎄긴 하지만 뭐, 저러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지.'

진짜로 무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언급한 에버글로우 숲의 엘프 종족.

그들은 인간과의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섞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다.

함부로 숲에 들어오는 이는 무조건 척살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 로라시아 대륙 사람들에게 엘프와 협상을 하겠다는 말은?

21세기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팬티 바람으로 탭댄스를 추고도 무사하겠다는 선언과 동급인 헛소리였다.

'실제로 몇백 년간 어떤 누구도 그들과 대화를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 어떤 강대한 군주도, 왕도, 황제나 소드마스터 검사조차도.'

모두 실패했다.

소드마스터의 무력도 소용없었다.

숲에서 신출귀몰한 엘프들 앞에 소드마스터는 그저 굼뜬 술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인식을 처음으로 깨게 되는 사람이 하비엘이고 말이지.'

에버글로우 숲의 개척자.

하비엘 아스라한.

지금 눈앞에서 엘프와 협상이 불가능하다며 돌직구를 뿌리는 놈이 나중에는 에버글로우 숲의 엘프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온갖 모험을 겪고, 썸까지 탄다.

'거기까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좀 얄밉네.'

소설 철혈의 기사.

그 내용을 떠올리던 로이드는 도끼눈을 뜨고서 하비엘을 째릿 흘겨보았다.

'생각해보니까 진짜로 그래. 소설 속의 이놈, 은근 가는 곳마다 썸을 탔단 말씀이지. 이건 무슨 리얼 여심 폭격기도 아니고 진짜.'

근데 더 웃긴 건 하비엘이 그 모든 여인네들에게 남극 빙하급 철벽을 쳤다는 거다.

떠올려보니 그런 점이 한층 더 얄미웠다.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인마."

"...안 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솔로부대의 숙적... 아니, 상상력을 좀 발휘해보란 말이다."

"상상력을요?"

"어."

로이드는 잡념을 접어두었다.

다시 본론이었던 에버글로우 숲의 기억을 떠올렸다.

"에버글로우 숲의 엘프들? 문제없어. 엘렌시아 수액? 얻어올 수 있어. 정말이야."

만약 그 말대로 된다면.

그래서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채취할 수만 있다면.

지금 고민하고 있던 배관의 단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 언급된 엘렌시아 나무 수액.

그 수액을 굳혀 만들어낸 물질이 작중 최강의 열기 차단 능력을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소설 속 하비엘이 그 수액을 굳혀서 특수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으니까. 그걸 입고서 드래곤을 상대했으니까.'

상대는 지옥의 불길을 내뿜는 화룡이었다.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브레스도 엘렌시아 수액을 굳혀 만든 갑옷을 녹이진 못했다. 아니, 갑옷 안쪽으로 전달되는 열을 거의 99퍼센트 넘게 차단했다.

'무려 3연속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았어. 한데 그 직후에 하비엘이 내뱉은 혼잣말이 대박이었지. 아, 따끈따끈하다, 라고 했던가.'

심지어 겨울철 난로가의 포근한 담요가 생각난다며 졸음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비엘은 화룡의 브레스로부터 완벽히 안전해졌고, 3일 밤낮에 걸친 치열한 근접전 끝에 화룡의 뿔을 잘라냈다.

철혈의 기사.

그 위대한 모험의 한 페이지였다.

"그러니 에버글로우 숲에 가서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얻어오면 돼. 그것만 구해서 단열 배관에 바르면 중앙난방실의 열기를 아무런 손실 없이 아파트 전체로 공급할 수 있어. 확실해."

그리고 남는 수액은 좀 꿍쳐뒀다가 더 큰 돈벌이로 이용하고.

로이드는 꿍꿍이와 확신을 담아 하비엘을 쳐다보았다.

녀석도 이쪽을 향해 굳은 눈길을 보냈다.

"...."

"...."

그렇게 얼마나 시선을 마주했을까.

마침내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어."

"동심, 아닌 겁니까."

"당연하지."

"좋습니다. 그럼 에버글로우 숲으로 정말 찾아가게 되시는 거라면, 그곳의 엘프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협상으로 이끌어내서 엘렌시아 수액을 얻어오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건 네가 협조를 약속하면 말해줄게."

"제가 약속을 하면 말입니까?"

"어. 아무한테나 알려주기 싫은 비결이 있으니까. 그래서? 안 갈 거야?"

"...."

"싫으면 마라. 나 혼자 가지, 뭐. 대신 엘렌시아 수액을 구해오는 일이 한참 늦어지겠지. 피난민들은 내년에도 아파트 입주를 못 할 거고. 아아, 슬퍼라. 우리 매정한 아스라한 경이 협조만 좀 해줘도 피난민들이 내년에 고생을 좀 덜 할 텐데."

"...."

"만약 아파트만 지어지면 첫눈이 오는 날엔 다들 포근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거야. 아이들은 눈사람을 굴려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까르륵 웃으며 썰매도 타겠지. 하지만 그건 현실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안타까운 상상 속 미래로만 그치게 될 거야. 왜? 우리 매정한 아스라한 경이 협조를 안 해주고 있으니까."

"...."

"그래서 어떤 피난민 소년은 내년 겨울 혹한의 칼바람 속에서 '아아, 파뚜라슈...'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떨굴 거야. 그것뿐이겠어? 어떤 가련한 소녀는 '성냥 사세요... 흐흑, 성냥 사세요...'를 외치다가 절망해서 미약한 성냥불을 쬐며 추위 속에 눈을 감겠지. 이게 다 어째서 생기는 비극일까? 간단하지. 우리 매정한 아스라한 경이 협조를 안 해주고 있으니까."

"...."

"아아, 하지만 그렇듯 수많은 비극이 매몰차게 몰아쳐도 우리의 매정하신 아스라한 경은...."

"갑니다. 가."

결국, 하비엘이 이를 갈며 말했다.

로이드의 눈동자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가?"

"예."

"나랑 같이?"

"...예."

"에버글로우 숲으로?"

"후우, 예."

한 대 칠까.

하비엘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대답했다.

로이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꽃이 피어났다.

"진즉 그럴 것이지."

"하면 알려주시지요."

"뭘? 에버글로우 숲에서 엘렌시아 수액을 가져올 방법?"

"예."

궁금했다.

대체 또 무슨 기막히고 기발한 방법이 있다는 걸까.

그게 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완고하기 짝이 없는 엘프들에게 엘렌시아 수액을 얻어낼 수 있다는 걸까.

하비엘은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짐했다.

아까 저녁에 봤던 피난민 꼬마와 장님 어머니.

그런 불행한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겠노라고.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좀도둑질만 아니면 뭐든지 하겠노라고.

그렇게 하비엘이 굳은 각오를 되새기는 순간.

로이드의 입술 끝이 미묘하게 휘었다.

"방법이야 간단해."

그가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훔치면 돼."

128화. 협상 테이블을 오픈합니다 (1)

에버글로우 숲.

모든 것이 아스라이 빛나고.

모든 사물이 따스하게 보존되는 곳.

그래서 일 년 내내 봄이 유지되는 신비의 숲.

다만 이곳이 처음부터 특별한 장소였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동부산맥 속의 그저 평범한 숲에 불과했다.

그러다 300년 전, 한 무리의 엘프들이 이곳에 정착하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한때 드래곤을 섬겼던 엘프의 후손들이었다.

인간 세상에 염증을 느꼈다.

잠적을 선택했다.

이 숲에 특별한 마법을 걸었다.

자신들만의 낙원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일 년 내내 추위가 없어. 지나친 더위도 없고. 완벽한 봄날만 영원히 이어지는 장소랄까."

그러한 에버글로우 숲의 초입.

그 신비한 광경을 둘러보며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실제로 와보니까 진짜네.'

아니, 너무 진짜라서 소설과 완전 딴판이었다.

자신이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것과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냥 봄이 아니야. 너무 심한 봄이랄까. 조금 전까지 숲 밖에서 느껴지던 한겨울 칼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이름도 모를 꽃이 다 피어 있고, 나비에 꿀벌에 봄철의 트레이드 마크인....'

"...엣취!"

꽃가루를 흡입한 하비엘이 재채기를 했다.

로이드가 기겁했다.

"야, 쉿."

"죄송합니다. 에, 에...."

"코랑 입 막어, 얼른."

"...읍췹!"

하비엘이 간신히 재채기 소리를 죽였다.

로이드의 눈빛이 따갑게 날아왔다.

"너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지?"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재채기를 발사해? 혹시 엘프 누나들 만나보고 싶은 거냐?"

"으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나온 지라."

"혹시 꽃가루 알러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닙... 에... 에에...."

"으악?"

"에... 흐우... 괘, 괜찮습니다."

"...."

전혀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로이드는 미심쩍은 기분을 만끽하며 물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알러지 맞는 거 같구만. 그럼 곤란해. 너도 여기 보이지? 꽃가루가 사방에 풀풀 날아다니는 거."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꽃가루가 좀 많다 수준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겨울철 미세먼지보다 더했다.

그냥 아주 옛날식 분필 지우개를 코앞에서 팡팡 털어대는 기분이었다. 혹은 함박눈처럼 꽃가루가 펑펑 날린다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광경이었다.

이곳이 일 년 내내 봄이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하비엘에게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던 꽃가루 알러지가 있다면?

그건 좀 곤란해진다.

"그래도 너 소드마스터잖아. 재채기는 조절 안 되는 거야?"

"안 됩니다."

"왜?"

"생리현상이니까요."

"잠깐. 그럼 소드마스터가 되어도 소변을 무한대로 참는다거나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예."

"흐음, 소드마스터도 별거 아니었구만."

"...."

"어쨌건, 이대론 안 되겠다. 일단 너 이거라도 좀 둘러라."

"...."

하비엘은 로이드가 내미는 손수건을 받았다.

복면처럼 얼굴에 둘러 코와 입을 막았다.

숨쉬기가 조금은 편해졌다.

"따라와."

로이드와 함께 숲 외곽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문득, 8일 전 로이드가 밝혔던 계획이 떠올랐다.

'훔치면 돼.'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훔치잔다.

그러면 단열재 문제가 해결된단다.

해서 자신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대했다.

다른 곳도 아닌 에버글로우 숲에서 엘프들의 눈을 피해 수액을 훔치겠다니.

차라리 닭에게 검술을 가르쳐서 호랑이 사냥을 시키겠다는 계획이 더 현실성 있게 느껴질 정도였다.

'설령 나라고 해도 그래.'

물론 자신은 소드마스터이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없었다.

다른 장소였다면 엘프들의 눈을 속일 수 있겠지만, 이곳이 에버글로우 숲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숲의 작은 공기 변화까지 모두 알아차린다고 하지. 그런데 그들을 속이겠다니. 로이드 님이 내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계신 건 아닐는지.'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염려와 상관없이 계획은 추진되었다.

그날로 로이드는 남작을 찾아갔다.

자신의 계획을 상세히 밝혔다.

남작과 로이드 사이에 약간의 고집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와 같았다.

로이드의 한결같은 고집과 꼼꼼한 계획 앞에 남작은 예스맨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린 출발했지.'

다음 날 아침, 남작령을 출발했다.

7일의 여정 끝에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

마침내 지금, 생각지도 못한 작전을 듣게 되었다.

"좋아.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엘렌시아 나무 수액 채취 말입니까."

"어."

걸음을 멈춘 로이드.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분명 뭔가를 준비해왔을 것이다.

로이드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이곳은 엘프들의 숲이니까.'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설령 자신이 소드마스터라 해도 그랬다.

적어도 이 숲 안에서는 엘프들의 감각이 자신과 대등할 테니까.

'그런 엘프들의 감각을 속이고 엘렌시아 나무 수액을 채취하겠다니. 대체 무슨 계획을 짜놓은 걸까.'

하비엘은 굳은 표정으로 로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덕분에 잠시 후 로이드가 대답을 돌려주었을 때 그의 표정은 한층 굳어 버리고 말았다.

"뛰어."

"예?"

"뛰라고. 쭈욱."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뛸 줄 몰라?"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네."

"그러니까, 그냥 뛰라는 말씀입니까?"

"어."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최대한 여기서 멀리,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최대한 소란을 피우면서 뛰어. 숲 속으로. 아, 그렇다고 길을 잃어버리진 말고."

"...미끼가 되라는 말씀이로군요."

"응."

"제가 위험해질 거라는 걱정은 안 하십니까?"

"응."

"...."

"난 내가 걱정되는데?"

"그게 무슨...."

"생각해봐라. 넌 소드마스터잖아?"

"그렇지요."

"거기에 트리플 써클도 지녔지?"

"예."

"그러니까 에버글로우 숲의 엘프건 뭐건 아무리 덤벼봐야 너한테 큰 위협까지는 안 될 거거든."

"그걸 확신하시는 겁니까."

"어.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너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확신하고."

"로이드 님이 말입니까?"

"응."

이건 정말 확실하다.

로이드가 주위를 힐끗 둘러보며 말했다.

"너야 네 한 몸 지키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지만, 난 뭐 개뿔이라도 있냐."

"그래서 제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엘렌시아 수액을 채취하겠다는 뜻인 겁니까."

"이젠 좀 감이 오나 보네."

"하지만 너무 위험하실 텐데요."

"괜찮아. 나름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

"설마요."

"그럼?"

"로이드 님을 잃어버렸다고 주군께 혼날 것이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아하. 고용불안정의 시대에 어울릴 법한 실직의 공포가 밀려오셨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눈물 나게 고마워라. 너 안 짤리게 해줄 거니까 네 몸이나 잘 챙기셔."

"...알겠습니다. 그럼 믿어보도록 하지요."

"알았으면 얼른 가든가. 30분 뒤까진 꼭 돌아오고."

하비엘은 짧게 고개 숙였다.

저토록 고약하게 틱틱 쏘아대는 도련님.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다.

자신이 미끼라고는 하지만 오늘 밤, 훨씬 위험을 자초하는 쪽은 명백히 로이드다.

'부디 무사하시길.'

로이드가 엘프들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고 수액 채취를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위험천만한 시도보다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는 되돌리기엔 다소 멀리 왔다.

'게다가 로이드 님, 여전히 자신만만하시기도 하고.'

이제는 안다.

로이드가 저런 태도를 보일 때는 반드시 숨겨둔 뭔가가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걸 믿고 함께할 수밖에.'

스르릉!

검을 뽑았다.

뽑았다 싶은 순간 땅을 박찼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맹수가 포효하듯.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마나 써클을 충돌시켰다.

투확!

맹렬한 발파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여기에 내가 있다. 잡을 수 있으면 와서 잡아봐!'

하비엘은 더욱 빠르게 숲을 내달렸다. 로이드가 있는 곳에서 최대한 멀어져 갔다.

그런 그의 뒤로 연녹빛 인영 수십 개가 날아가듯 숲을 가로질렀다.

'거 참, 빠르긴 진짜 빠르네.'

하비엘이 숲의 중심을 향해 달려간 직후.

로이드는 수풀 속에 숨을 죽이고서 하비엘이 사라진 쪽을 관찰했다.

이미 하비엘의 뒷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허공을 향해 쏘아지는 발파가 보였다.

때때로 연녹빛 섬광이 번득이는 모습도 보였다.

'엘프들이겠지. 벌써 추격을 시작한 거구나.'

역시 엘프들의 감각은 대단하다.

적어도 이 숲에서만은 그들을 속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건 지상에 있을 때의 얘기고.'

주위를 충분히 더 살핀 후에야 로이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어느새 삽이 들려 있었다.

'땅속이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지. 완전히 속일 수는 없겠지만 잠시나마 시간을 끌 수는 있을 테니까.'

스각, 스각.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땅을 팠다.

다행히 흙이 촉촉하니 부드러웠다.

돌멩이도 별로 없었다.

덕분에 땅 파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의 신중한 삽질이 이어질수록 비스듬한 굴이 깊어졌다.

50센티, 1미터, 2미터.

그렇게 로이드는 완전히 굴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쯤에서 1차 위장.'

굴 밖으로 나와 나뭇잎과 잔가지를 적당히 덮어놓았다.

동물이 지내는 굴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

다시 굴로 돌아왔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땅굴 파기다. 에너자이저.'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에너자이저(改)가 발동됩니다.]

[트리플 써클의 효율성이 극한으로 발휘됩니다.]

[20분간 절대로 지치지 않습니다.]

키이이이잉!

'후아, 이 느낌도 오랜만이구만!'

온몸에 힘이 쑴펑쑴펑 샘솟았다.

세 갈래 써클이 최대 속도로 회전했다.

그와 더불어 절대로 지치지 않는 이온음료 광고스러운 활력이 솟구쳤다.

'가즈아!'

파파파파팍.

여전히 소리는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삽질만은 맹렬하게 끊임없이.

수평으로 굴을 팠다.

지면 아래로 이동했다.

5미터, 10미터, 20미터를 전진했다.

물론 그동안 전혀 지치지 않았다.

또한, 전진할 방향도 미리 봐두었다.

'대강 이쯤이면 뿌리가 나올 때가 됐는데?'

사실 그가 처음 굴을 파기 시작한 지점은 엘렌시아 나무가 있는 곳에서 20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무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냥 몸을 드러내고 수액 채취를 시도했다간?

나무줄기 껍질에 칼집을 내려다간?

'호되게 당할 거야.'

확실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 걸 봤다.

어느 모험가들이 그런 방식으로 수액을 채취하려 들었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엘프들에게 붙잡히던 장면이었던가.

그걸 떠올리며 로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의 시도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방법이 잘못됐어. 첫째. 지상에서 몸을 노출시키고 있었지. 둘째. 이게 좀 큰데, 줄기 껍질에 칼집을 아무리 내도 수액 같은 거, 하루에 몇 방울 모으지도 못해.'

수액을 빠르게, 많이 모으려면 줄기가 아닌 뿌리를 노려라.

그것이 그 모험가들의 실패가 준 교훈이었다.

엘렌시아 나무가 수액을 뿌리에 보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굵은 뿌리 몇 줄기만 슥삭 잘라가서 짜내면 된다는 말씀.'

로이드는 자신의 계획을 점검하며 막바지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에너자이저 옵션이 종료되기 얼마 전, 마침내 엘렌시아 나무뿌리를 발견했다.

'좋아, 보인다.'

츠츠츠츠츠!

아까부터 계속 발동하고 있던 또 다른 스킬 옵션.

측량의 지하 스캐닝으로 땅굴 앞쪽 5미터의 공간이 훤히 파악됐다.

덕분에 보였다.

'뿌리다. 확실해.'

삽질에 더욱 힘을 실었다.

마침내 삽머리가 뿌리 근처까지 닿았다.

터컥!

그 순간 로이드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빙고.'

찾았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삽질을 한층 섬세하게 바꾸었다.

마치 티스푼으로 미끌거리는 도토리묵을 떠올리듯. 혹은 모처럼 찾아낸 왕건이 귀지를 부스러뜨리지 않고 발굴하듯.

엘렌시아 나무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흙만 조심스럽게 긁어내고, 파냈다.

그렇게 얼마나 땀 흘렸을까.

마침내 엘렌시아 나무뿌리가 횃불 빛 속에 그 자태를 드러냈다.

'후아.'

장난이 아니다.

로이드는 감탄하며 옆에 놓아두었던 횃불을 집어 들었다.

엘렌시아 뿌리는 두툼했으며 마치 유리처럼 투명했다. 그 매끈한 껍질 속에 우윳빛 액체가 잔뜩 담겨 있었다.

'저게 그 수액이로구나.'

확인을 했으면 채취를 할 차례.

그는 뿌리 세 줄기를 깔끔하게 잘라냈다.

수액을 흘리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몇 겹이나 감싸 배낭에 넣었다.

채취의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는 안심하지 않았다.

섣불리 굴을 빠져나가려 들지도 않았다.

대신 횃불을 들어서 남은 뿌리에 바싹 갖다 댔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툭 내뱉듯 말했다.

"거기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누님들, 동작 그만. 더 다가오거나 이쪽으로 계속 활을 겨누면 이 뿌리, 횃불로 확 지져 버릴 겁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땅굴 내부에 퍼졌다.

땅굴로 들어오던 엘프 여인들이 멈칫했다.

"지금... 막다른 굴에 몰린 주제에 우리를 상대로 인질극이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무리의 선두에서 로이드의 등을 향해 활을 겨누던 엘프 여인, 뮤이라가 당혹스러운 되물음을 내뱉었다.

로이드가 여유롭고도 해맑게 웃었다.

"네."

저들은 이쪽을 쏘지 못한다.

그러니 이건 무조건 통한다.

그는 확신을 담아 횃불로 뿌리 끝을 지졌다.

"마음에 안 들면 쏘시든가."

129화. 협상 테이블을 오픈합니다 (2)

"마음에 안 들면 쏘시든가."

"...!"

치지지직!

불꽃이 날름거렸다.

엘렌시아 뿌리 끄트머리가 지글지글 타올랐다.

엘프 여인 뮤이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얼마나 태워 드릴까? 미디움? 웰던?"

"...그, 그만!"

"그쪽이 살벌하게 겨누고 있는 활부터 내리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

"...."

뮤이라의 목젖이 출렁였다.

나무가 더 다치는 건 안 된다.

차라리 자신의 몸이 타 버릴지언정, 저건 아니다.

결국, 그녀는 당겼던 시위를 느슨하게 풀었다.

활을 늘어뜨렸다.

"자, 요구를 들어줬으니 나무를 괴롭히는 건 그만."

"물론이죠."

로이드가 횃불을 살짝 당겼다.

자글자글 비틀어지던 뿌리 끄트머리에 평화가 돌아왔다.

'일단 인질극은 성공.'

로이드는 굴 내부를 돌아보았다.

방금 갓 파낸 비좁은 굴이었다.

한 사람이 통과하기도 빠듯했다.

그런 좁은 굴 끄트머리에 자신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출구 방향에서 엘프 여인 다섯 명이 무장 상태로 자신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꼼짝없이 갇혔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이들에게 걸릴 것은 일찌감치 예상했다.

엘프들의 숲에서 엘프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계획을 잡았지.'

소설 철혈의 기사.

거기서 본 엘프들의 특성을 참고했다. 연구했다. 파헤치고,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게 몇 단계의 작전을 세웠다.

1단계 작전은 하비엘 미끼 던지기.

2단계는 땅굴로 뿌리까지 접근하기.

3단계는 엘렌시아 뿌리를 불로 지지겠노라 인질극을 벌이며 협박하기.

'그리고 4단계는 인질 교체.'

로이드의 한 손이 품속으로 움직였다.

안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것을 꺼냈다.

바로 아까 굴을 파기 직전, 뿌리까지 잘 보존해가며 미리 뽑아서 챙겨두었던 들꽃 한 송이였다.

"...!"

이쪽이 들꽃을 꺼내 들자마자 또 한 번 흔들리는 엘프들의 표정.

그걸 보며 로이드는 들꽃에 횃불을 바싹 들이댔다.

"다들 물러서. 이 꽃이 타는 꼴 보기 싫으면."

"무, 무슨 그런 악독한!"

"어서."

엘프들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보면 대체 왜 저러나 싶을 정도였다.

겨우 꽃 한 송이일 뿐인데.

뭔가 귀하거나 엄청난 꽃도 아닌데.

그저 이름도 모를 흔해빠진 들꽃에 불과한데.

'하지만 이게 먹힌다는 점이 엘프들의 비밀이지.'

로이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다.

소설 철혈의 기사.

거기에 나오던 엘프들의 특성.

그건 바로 '광적인 식물 애호가'라는 점이었다.

'그냥이 아니야. 광적이라는 게 포인트야.'

말 그대로 식물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영화 미저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

어쩌다가 실수로 도토리 한 알을 밟으면 우울증에 걸리는 종족. 나뭇가지를 타다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나뭇잎 한 장을 찢으면 종일 실의에 빠져 펑펑 우는 종족.

그런 종족이 엘프였다.

한데 그런 그들 앞에서 들꽃 화형식을 벌이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당연히 엘프들의 반응이야 뻔했다.

"...."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로이드는 더욱 눈을 부라렸다.

"계속. 더."

"...."

엘프들이 천천히 물러나고.

로이드는 그만큼 다가섰다.

엘프 여인, 뮤이라가 이를 갈며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그런 협박 정도로 이 숲을 빠져나가진 못할 텐데."

"그건 이쪽이 할 걱정이고."

"...."

"더 물러서세요. 계속 쭉쭉. 훠이."

"...싫다면?"

"이 꽃이 타는 거고."

"그 꽃이 타면 그쪽도 우리 손에 죽을 텐데?"

"그럼 오늘까지만 사는 거지, 뭐."

"...."

"인생 뭐 있나."

엘프 여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건 기 싸움이다.

밀리는 쪽이 말린다.

그러니 잃을 것 없는 놈이라는 인식을 심어야 한다.

다행히 그런 심리전이 먹힌 걸까.

엘프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러났다.

"잘 생각했어."

아무리 봐도 이건 이쪽이 영락없는 악당인 상황이다.

그렇게 자괴감을 만끽(?)하는 사이, 엘프 여인들이 굴 끝까지 물러났다.

로이드가 턱짓으로 명령했다.

"나가. 밖으로."

"...."

엘프 여인들을 굴 밖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로이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연하지. 뒤통수에 화살 박힐 일 있나.'

굴 밖은 탁 트인 공간이다.

어디서 저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걸 잘 아는 로이드는 굴 출입구 안쪽에서 버티기를 시전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슬슬 하비엘이 돌아올 때가 됐는데.'

아까 보낼 때 일러두었다.

30분 뒤까지 꼭 돌아오라고.

그러니 녀석이 돌아오면?

녀석과 함께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엘프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이 숲을 벗어날 것이다.

그 정도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엘프들과 싸우거나 이 숲을 점령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그저 튀는 게 목적이니까. 그 정도라면 소드마스터인 하비엘이 가세한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야반도주.

그게 자신이 계획한 오늘 작전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나저나, 엘프는 진짜 엘프네.'

하비엘을 기다리는 동안 로이드는 엘프 여인들을 뚫어져라 감시했다. 행여나 그들이 이쪽으로 활을 겨눠 순식간에 쏘지는 않을까 경계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피부는 하얗고. 귀는 뾰족. 게다가 침입자를 잡으러 달려온 이들이 모두 여자. 엘프족은 남자들이 집안일 하고 여자들이 활 쏘고 다닌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남자들은 거처에서 가사노동을.

여자들은 숲을 내달리며 경계 활동을.

그게 소설 철혈의 기사에 나오는 엘프들의 풍습이었다.

사실 별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남자 엘프들은 대체로 여자보다 체격이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가니까. 그래서 숲을 거닐 때 밟는 풀을 더 많이 다치게 하니까.'

그래서 엘프 여인들은 풀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보법까지 익힌다고 했다. 그 보법을 완벽히 익혀야만 비로소 성인으로 인정받고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던가.

인간의 관점으로는 조금 웃기긴 했다.

하지만 저들의 광적인 식물 사랑을 감안해 보면?

나름 합리적인 풍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건, 그건 그렇다 치고. 다들 왜 저렇게 야위었지?'

엘프 여인들과의 기나긴 대치.

그러다 보니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보였다.

그건 바로 엘프 여인들이 심각할 정도로 야윈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잘못 본 게 아니야.'

캄캄한 밤이다.

달빛과 일렁이는 횃불 빛이 전부다.

그럼에도 너무나 확연하게 보였다.

'그냥 날씬한 게 아니야. 야위었어.'

로이드의 시선이 엘프 여인들의 얼굴로 향했다.

다들 하나같이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 아래쪽도 다들 푹 들어가서 퀭했다.

안색도 그리 밝지 않은 듯했고, 활을 쥔 손아귀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잠깐. 이거, 뭔가 있는데?'

촉이 번득였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엘프들의 면면을 살폈다. 주위로 보이는 숲을 관찰했다.

그러자니 아까는 도둑질 직전의 긴장감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숲, 동물이 안 보여.'

숲이다.

그것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숲이다.

심지어 사시사철 봄날만 가득한 이상적인 숲이다.

한데 그런 숲에 동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녀야 할 다람쥐나 청설모가 없었다. 잠시만 귀를 기울이면 당연히 들려와야 할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숲은 지금, 너무나 텅 빈 적막에 휘감겨 있었다.

'이게 가능한 건가?'

의아해졌다.

그러다가 다시금 엘프 여인들의 모습에 눈길이 닿았다.

식물을 너무나 사랑하는 엘프 여인들.

마치 긴 시간 굶은 것처럼 수척한 모습.

동물이 보이지 않는 숲의 텅 빈 광경까지.

'이거 설마.'

로이드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눈에 보이는 정보.

떠오르는 추측과 추리.

퍼즐이 뒤섞이며 맞추어지고.

가능성이 떠오르며 반짝이다.

마침내 하나의 가설을 빚어냈다.

로이드는 그 가설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새로운 계획 하나를 떠올렸다.

계획의 신호탄을 입으로 쏘았다.

"저기 혹시... 고기, 좋아하세요?"

"...!"

엘프 여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설 적중.

로이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맞네, 맞아. 고기 많이 굶으셨네.'

식물을 사랑하는 엘프족.

광적으로 사랑하며 아끼는 엘프족.

그래서 식물을 상하지 않게 하는 엘프족.

당연히 그들은 절대로 식물을 먹지 않으리라.

어떠한 과일도, 씨앗도, 잎이나 줄기, 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 전부 하드코어 육식파야.'

고기.

오로지 고기만 먹는다.

한데 지금 저렇게 메마르고 수척한 모습이라는 건?

'고기를 못 먹었다는 뜻이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왜 그럴까를 생각해보았다.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몬스터 도미노. 그 현상이 여기까지 영향을 끼친 거야.'

생각해보면 이 에버글로우 숲도 동부산맥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몬스터 도미노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터다.

그 결과는?

'뻔하지. 몬스터 무리 일부가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피웠겠지. 물론 엘프들에게 격퇴되었겠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을 거야. 난데없이 처음 보는 몬스터 무리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기존에 여기서 살던 숲의 동물들이 죄다 서식지 교란을 겪었을 테니까.'

들리지 않는 새 지저귐.

보이지 않는 작은 동물들.

그것만 보아도 이미 뻔했다.

많은 숫자의 작은 동물들이 불안감을 느껴 서식지를 옮겼을 터다. 그걸 잡아먹는 더 큰 동물들도 덩달아 서식지를 옮겼을 터다.

'그래서 이 숲에 서식하는 동물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든 거야. 엘프족의 입장에서는? 사냥감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거지.'

일정 기간 사냥에 애로사항이 생겼을 것이다.

열심히 뛰어다니고 활을 쏘아도 모두가 먹기엔 턱없이 부족한 고기만 얻었을 것이다.

그러한 로이드의 추측과 가설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뮤이라를 비롯한 엘프 여인들은 상당히 굶주린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사냥을 성공했던 게 언제였는지.

깔끔하게 말린 육포를 씹었던 게 어느 날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도 않을 정도였다.

배가 고팠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부족의 모든 이가 그러했다.

여인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어린아이들도 그러했다.

생각보다 심각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한데 대책이 없었다.

이 에버글로우 숲은 물론이고 근방 모든 숲에 동물이 급격히 줄었다. 사냥감 자체가 드물어졌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런 현상도 회복될 것이리라. 자연은 빈틈을 싫어하니까. 먼 훗날엔 떠났던 동물들이 돌아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숲이 활기를 되찾을 터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그때까지 굶으며 버틸 수는 있을까.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골치가 아픈데.'

이렇듯 인간까지 함부로 숲에 들어왔다.

감히 엘렌시아 나무의 뿌리를 훼손했다.

아름다운 꽃을 인질로 삼아 협박까지 서슴없이 가해 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신,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문답을 나누다가 빈틈이 보이는 즉시 화살을 이마에 꽂아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엘프 여인 뮤이라가 따지듯 물었다.

로이드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따로 꿍꿍이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협상을 원합니다."

"협상?"

"네."

"우린 인간과 협상하지 않아.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지금 협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게다가 조금 전엔 제 협박도 들어주셨는데. 알고 보면 협박도 협상의 일종이 아닐까요."

"그런 억지는 통하지 않아. 물론 협상 따윈 할 생각도 없고."

"그럼 이대로 횃불 꺼지면 저 죽이시게요?"

"죽는 것이 두렵나?"

"당연하신 말씀을."

말과 달리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마성의 단어를 툭, 내뱉었다.

"삼겹살, 구워드릴 수 있는데."

"...뭐?"

"지글지글. 자글자글. 아아, 기름기 고소한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노릇노릇. 한쪽 면이 고소하게 익을 때쯤 홱 뒤집어서 또 굽고. 그러다가 잘 익었다 싶으면 가위로 슥슥 잘라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기름장에 찍어서... 어흐으."

"...."

엘프 여인들의 눈빛이 살짝 몽롱해졌다.

로이드의 혓바닥이 계속 움직였다.

"혹시 돼지고기가 취향이 아니시면 닭고기도 있습니다. 왜냐. 치킨은 진리이자 빛이니까요. 그러니까 깨끗이 씻은 닭을 소금으로 버무려 주는 겁니다. 우유를 붓고 하루를 보관했다가 165도로 7분 동안 지글지글. 2차로 175도에 3분 동안 자글자글. 상상해보시죠. 그렇게 튀겨낸 닭다리를 한 입 깨물 때 혓바닥 위에 우아하게 배어날 육즙을 말입니다. 통통한 가슴살이 벌어지며 내뿜을 향긋한 향기를 말입니다."

"...."

"아, 취향이 고급져서 소고기가 좋다고요? 역시 소고기는 스테이크 아니겠습니까. 일단 소고기 부챗살에서 핏물을 뺍니다. 거기에 소금으로 밑간을 하지요. 그 뒤는요? 간단합니다. 센 불로 달군 철판에 부챗살을 촤악! 1분씩 굽고 뒤집을 때마다 기름이 막 튀면서 추악! 중불로 낮추고 취향껏 구울 때 육즙이 쫘악! 레스팅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여러분의 침샘도 쭈아악!"

"...."

"자, 어떻습니까."

꿀꺽.

엘프 여인들은 말 대신 군침으로 대답했다.

로이드가 원하던 협상 테이블 오픈의 순간이었다.

130화. 협상 테이블을 오픈합니다 (3)

쐐애애액-!

화살이 날아왔다.

공기가 갈라졌다.

아니, 공간이 쪼개졌다.

콰학!

날아온 화살이 바위에 틀어박혔다.

그 직후, 하비엘이 바위에 박힌 화살을 밟았다.

투팟!

섬전 같은 도약.

그러나 도약을 즐길 틈은 없다.

연이어 날아온 화살 세례가 일제히 뒤통수를 노리며 번득였기 때문이었다.

투콰콱! 콰학!

허공에서 급히 몸을 틀었다.

다섯 발의 화살이 전신을 스치듯 지나갔다.

흙이 드러난 맨바닥에 세 발, 바위에 두 발이 틀어박혔다.

그 순간, 하비엘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저 엘프들에게 이 밤의 어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 저들은 절대 나무나 풀이 다치지 않도록 활을 쏜다.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했다.

숨 막히도록 빠른 추격전이었다.

어둡고 빽빽한 숲 속을 내달리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매번 소름 끼치도록 빠르고 정확한 사격이 날아왔다.

심지어 저 화살들은 반드시 풀이 없는 맨바닥, 혹은 바위에만 꽂히도록 날아오고 있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내 움직임을 감각만으로 정교하게 예측하고 있어. 그 순간에 화살이 도착할 지점의 각도와 환경까지 모조리 계산하고 있어. 그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담아내서 활을 쏘는 거야, 저들은.'

생각할수록 어마어마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타닷!

착지했다.

다시 땅을 박찼다.

나무와 나무 사이.

덤불과 덤불 사이를 돌파하며 내달렸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뒤통수와 등이 저릿저릿하다.

이쪽을 겨누고 있을 수십 발의 화살촉.

그 번득임 담긴 살기에 등가죽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하지만 쉽게 잡혀줄 순 없어.'

자신이 잡히면?

로이드 님이 위험해진다.

그러니 절대로 잡혀줄 순 없다.

이대로 계속 아슬아슬하게 저들의 추격을 받는 것.

그것이 오늘 밤 자신이 수행할 최선의 역할일 것이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하비엘은 더욱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점점 포위망이 좁혀져 왔다.

쐐애액, 쐐액-!

뒤에서만 날아오던 화살이 점점, 옆쪽에서도 날아왔다.

"...!"

스카칵!

검을 휘둘렀다.

두 발은 검풍으로 베어냈다.

나머지 한 발은 검신으로 깎아내듯 튕겨냈다.

겨우 미간에서 주먹 하나를 남긴 거리에서였다.

"...."

점점 내몰린다.

이래선 곤란하다.

'30분 안으로는 돌아오라고 했는데.'

무작정 도망만 치는 것이 오늘의 역할이 아니다.

효율적으로 시선을 끈 뒤에는 로이드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것 또한 타이밍이 어긋나면 로이드가 위험해질 터.

과연 30분 안에 그곳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조금 빡빡하겠군.'

어떻게 내달려도 끝까지 쫓아오는 엘프들이었다. 매번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사격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상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던 길을 되짚어가야 한다니.

그건 즉, 저들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어 돌파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망설일 틈이 없다. 더 갔다가 돌아가려면 늦을 거야.'

하비엘은 결단을 내렸다.

저 앞쪽에 보이는 개울에서 몸을 돌린다.

엘프들의 포위망 속으로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오러가 담긴 검격으로 전신을 방어한다.

가능하다면 발파를 위협적으로 내쏘아 저들을 물러나게도 한다.

'좋아.'

순식간에 계획을 정리했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을 뛰었다.

쐐애액, 쐐액, 타타탁, 네 발의 화살이 뒤꿈치를 스치며 지면에 박혔다.

그 순간, 하비엘의 눈이 번득였다.

'지금!'

타악!

순식간에 몸을 돌렸다.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찬란한 광휘, 오러를 일으켰다.

콰아아아-!

오러가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뿌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결을 따라.

꽃가루 날려오는 흐름 따라.

폭풍 같은 57번의 검격을 사방으로 떨쳐냈다.

차카카카카칵! 카카카칵! 쓰카칵! 콰츠칵! 처커컥!

그를 향해 날아온 86발의 화살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단지 잘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화살촉이 있는 쪽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살촉이 없는 뒤쪽 절반이 숲 곳곳으로 날아갔다.

화살을 쏘아낸 자가 있는 지점을 향해서였다.

"...!"

엘프 궁수들이 경악했다.

이번엔 명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인간, 갑자기 오러를 일으키는가 싶더니 모든 화살의 뒤쪽 절반을 쏘아낸 자에게 되돌리듯 날려 버리다니!

"크읏!"

"큽!"

반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엘프가 속출했다.

누군가는 어깨를, 또 누군가는 정강이를 맞았다.

그러나 다친 자는 없었다.

순간의 따끔함과 통증이 회초리처럼 경고를 새겨주었을 뿐.

하지만 엘프들은 그 따끔함에 정신을 팔 틈이 없었다.

'저 인간, 우리를 돌파하려 하고 있어!'

어느 엘프 궁수가 눈짓으로 말했다.

다른 궁수들도 이내 하비엘의 의도를 깨달았다.

투콱!

아까보다 한층 거친 기세로 돌진해 오는 은발의 인간.

아까처럼 피할 뜻도 없어 보이는 거침없는 돌진.

그 뜻은 뻔하다.

도주가 아닌 돌파.

혹은 정면충돌 감행.

"...!"

물론 물러나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하비엘의 의도를 깨달은 86인의 엘프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시위에 걸었다.

이제 하비엘과의 남은 거리는 약 50미터.

모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하비엘의 달려오는 속도.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

밤 공기에 담긴 습도와 꽃가루 농도.

그 모든 계산이 감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내 엘프들의 번득이는 화살촉이 일제히 전방 24미터 지점을 겨누었다.

그들의 눈동자에 살기가 배어났다.

전방 24미터.

바늘구멍처럼 작게 드러난 수풀 사이의 틈새.

오늘 밤, 숲을 침범한 은발의 인간은 저 장소에서 화살꽂이가 되어 생을 마감하리라.

쯔그그즉!

궁수들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활시위가 최대로 당겨졌다.

활이 부러질 듯 휘었다.

시위를 놓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

휘파람 소리가 흘러왔다.

나직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그래서 오직 엘프의 청력으로만 들을 수 있는 신호.

추격과 교전 금지를 명령하는 휘파람이었다.

"...."

궁수들은 의아함을 느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곳에 저 휘파람이 날아온 이유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신호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부족이 숲에서 살아오며 몸에 새긴 법칙이다.

스윽.

엘프들이 활을 거두었다.

그리고 숲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는 너도밤나무 잎사귀가 드리우는 그림자 너머로. 또 누군가는 늘어진 넝쿨과 넝쿨 사이의 틈새로. 그리고 어떤 이는 달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바위 뒤편으로.

숨을 쉬듯 물러났다.

모두가 스르륵 사라졌다.

마치 물에 녹는 설탕처럼.

숲의 그림자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듯 퇴각했다.

덕분에 하비엘은 의아함을 느꼈다.

타다닷!

엘프들이 설정했던 살상 구역을 단숨에 통과했다.

그 순간 그는 검으로 전신을 보호하듯 기파를 발산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뭐지?'

아무도 자신을 쏘지 않았다.

화살이 한 발도 날아오지 않았다.

아니, 그걸 논하기 전에....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어.'

하비엘은 돌진을 멈추지는 않았다.

자칫 걸음을 멈추었다간 죽이기 딱 좋은 표적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엘프들이 노리는 바일지도 모른다.

그는 계속 숲을 내달리며 의아함을 추슬렀다.

'이상하군. 뭐지.'

계속 달리는 동안 자신을 노리는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조금 전까지의 그 치열하던 추격이 한바탕 거짓말이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기묘하군.'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하비엘은 오히려 더욱 긴장하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로이드 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제발 그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하지만 불안했다.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추격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을 놓아주는 저들의 태도도.

달리는 걸음과 걸음마다 그의 불안감을 일깨우고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잠잠하기에 더더욱 불안해졌다.

'혼자 놔두고 오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자신이 미끼가 되어준다 해도 로이드 님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던 건데.

그런데 믿고 맡기라는 로이드 님의 말을 너무 믿어 버렸다.

나름 충분한 대비책이 있겠거니.

편리하게 떠넘겨 버렸다.

로이드 님을 지키는 것.

그 막중한 책임을 말이다.

'제발. 로이드 님.'

아무 일 없이 무사하길.

평소처럼 태연하고 뻔뻔하게 자신을 맞이해주길.

시답잖은 농담과 야유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주길.

하비엘은 바라고 또 바라며 숲을 가로질렀다.

달음박질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바위를 단숨에 뛰어넘고, 그루터기를 건너,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를 가로질렀다.

복면처럼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손수건마저 풀어헤쳤다.

꽃가루가 마구잡이로 들어와도 상관없었다.

그는 재채기를 할 정신도 없이 내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출발했던 곳.

로이드를 두고 온 장소에 도착했다.

"로이드 님!"

터크거거걱!

전력으로 내달린 끝에 추락하듯 착지해 미끄러졌다.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뿌렸다.

다급히 찾았다.

로이드 님은?

엘프들은?

발견하는 즉시 반응하리라.

설령 엘프 몇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평생 그들의 원한 가득한 추적을 받게 되더라도.

로이드 님부터 구출하리라.

살기를 머금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아니, 발견 당했다.

"여어. 왔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

어쩐지 고소한 냄새가 흘러오는 곳.

그곳을 향해 하비엘의 고개가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섬광을 뿌리듯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목격했다.

로이드가 있었다.

엘프 궁수 다섯 명이 있었다.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의 중앙에 놓인 것은 아담한 불판.

그리고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가고 있는 고기.

그러니까 지금 로이드 님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응? 삼겹살 구워먹고 있는데?"

"저... 분들은요?"

하비엘의 손가락이 살포시 떨렸다.

뻘쭘하게 앉아 있는 다섯 엘프를 가리켰다.

로이드가 해맑게 대답했다.

"같이 먹고 있는데?"

"...."

"마침 잘 왔네. 여기, 앉아."

바닥의 바위, 자기 옆 빈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로이드.

하비엘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연히 삼겹살 자글자글 익는 불판을 사이에 두고 엘프들과 합석하여 도란도란 둘러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인사해. 이쪽 분들은 엘프 궁수. 특히 이분의 성함은 뮤이라. 여기 에버글로우 숲에 자리 잡은 물망초 부족의 족장이시래."

"...."

"보셨죠? 이 녀석이 좀 무뚝뚝하고 인사성이 없는 편이라. 아까 얘기했던 제 호위기사, 하비엘 아스라한입니다."

"...."

뮤이라라고 불린 여인과 엘프 궁수들이 이쪽을 향해 어색한 눈짓으로 인사했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하비엘은 생각했다.

이거, 저쪽 엘프들도 뭔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거, 대체 무슨 상황인 겁니까."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다.

로이드에게 반쯤 따지듯 물었다.

억울했다.

진심으로 걱정했는데.

그래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그런데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로이드 님과 엘프 족장이 도란도란 불가에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다는 말인가.

'하나도 이해가 안 돼.'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이드는 여전히 뜻 모를 웃음만 씨익 보이는 게 아닌가.

"무슨 상황이긴. 협상 중이지."

"협상 중이라니요?"

"설명은 됐고. 구경이나 해. 자, 집게. 고기 안 타게 제때 잘 뒤집고."

"...."

얼결에 집게를 받았다.

멍한 정신으로 불판 위의 삼겹살을 뒤집었다.

그동안 로이드와 엘프 족장 뮤이라의 대화가 이어졌다.

"하하, 고기 맛이 어떻습니까?"

"...좋군요."

"그렇죠? 제가 듣기로 엘프분들은 불을 쓰시지 않는다고 하던데."

"물론입니다. 불은 식물을 괴롭히고 희생시켜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냥감을 생고기 상태에서 말려 육포로 가공하는 겁니까?"

"그것도 꽤 맛있습니다."

"이 삼겹살보다요?"

"...."

"역시. 삼겹살은 언제나 진리이고 답이지요. 그런데 혹시 석탄 냄새가 고기에 배거나 해서 거슬리지는 않습니까?"

"전혀요."

뮤이라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불판 아래, 이글거리는 석탄을 향했다.

"놀랍습니다. 설마 나무를 희생하지 않고, 마법에 기대지 않고도 불을 피우는 방법이 있었다니."

석탄.

불타는 돌.

아까 처음 봤을 땐 너무나 놀란 그녀였다.

놀라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불이 붙는 돌이라니. 이런 게 있는 줄은 몰랐어.'

저게 있으면 나무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불을 피울 수 있다.

그 말은 즉, 사냥감을 맛있게 구워서 먹을 수 있다는 뜻.

석탄을 보는 뮤이라의 눈에 갓 끓여낸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욕망이 피어났다.

물론 그 기색을 감지하지 못할 로이드가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엘프가 석탄에 꽂힐 줄은 몰랐네.'

그냥 모닥불에 보태서 넣으려고 챙겨온 석탄이었다. 추운 여정에서 힘을 얻으려고 가져온 돼지고기와 불판이었다.

한데 그게 이렇듯 엘프와의 협상에서 킬링 아이템으로 활약하게 될 줄이야.

솔직히 이건 큰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그로서도 예상 못 한 행운이었다.

"뭐 어쨌건, 하던 협상을 계속하자면... 제 요구를 들어주시면 저희도 매달 넉넉한 양의 고기와 석탄을 꾸준히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석탄을요? 이 불타는 돌을?"

"예."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돌 아니지만.

수억 년 전에 죽어서 묻힌 나무지만.

뭐, 그런 것까진 알려주지 말자.

로이드는 입을 싹 닦으며 말했다.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제게 엘렌시아 뿌리 수액을 채취할 권리를 허락해줄 것. 물론 마구잡이로 채취하진 않을 겁니다. 그쪽 분들의 입회와 감독하에 정확한 양을 지키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리고요?"

"고층을 두려움 없이 넘나들며 철근공으로 일해 줄 엘프 백 명만 저희 영지로 보내주시죠. 외주 인력 파견 형식으로."

기름진 고기.

신기한 석탄.

두 가지 카드를 틀어쥔 로이드의 제안이 실체를 드러냈다.

131화. 철근 위에서 춤을 (1)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부터가 프론테라 남작령입니다."

"...."

귓가에 들려오는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의 목소리.

물망초 부족장, 엘프 뮤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숲을 벗어나며 확 트여 오는 시야.

그 앞에 펼쳐지는 생소한 풍경.

'저곳이 인간이 사는 땅인가.'

그녀는 찬찬히 프론테라 영지를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남쪽에서부터 흘러오다가 시계 방향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는 프로나 강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서쪽으로 크게 돌며 북쪽으로 흘러나가는 반원 안쪽에 프론테라 남작령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쪽은 산맥 기슭에 닿아 있고 나머지 삼면은 강에 둘러싸여 있구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식물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고 있어.'

영지 곳곳에 드문드문 자리한 여러 촌락.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논과 밭.

남쪽에 광대하게 펼쳐진 개간지.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수확하기 위해 꾸며진 공간이었다.

집과 여러 건축물도 마찬가지였다.

'나무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어.'

통나무집도, 헛간도, 창고도, 대부분이 나무를 재료로 삼아 지어져 있었다.

그 불편한 사실이 뮤이라의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저 나무들은 가엾게도 장례 의식을 못 받았겠지.'

인간들은 그 정도까지 식물을 아낄 줄은 모른다.

당연히 죽은 나무에 대한 예우 또한 차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런 광경을 보면 저절로....

"혹시 불편합니까?"

"...."

이쪽의 심정을 헤아린 걸까.

어느새 옆에 나란히 선 로이드.

그가 던져오는 물음에 뮤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두에겐 각자의 살아가는 다른 방식이 있는 거니까요."

"다른 방식이라니요?"

"예를 들자면 스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스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이쪽을 향한 로이드의 쓴웃음이 살짝 짙어졌다.

"머나먼 지방에서 활동하는 승려, 일종의 사제입니다."

"사제라. 그런데 왜 그런 분들을 언급하는 건가요."

"당신들과 완전히 반대되는 식성을 지닌 분들이거든요. 그분들은 오로지 식물만 먹습니다."

"무슨 그런...."

뮤이라는 기겁했다.

식물만 골라서 먹는 자들이라니. 그런 끔찍한.

하지만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기 위함이지요. 생명을 지닌 것을 존중하는 생각 때문이랄까요. 물론 개중에는 그 계율을 지키지 않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지키려 노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엘프 분들이 식물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려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거니까 조금만 이해해주시면 좋겠다는 뜻으로 드린 말입니다."

"이해라. 며칠 전에 당신이 제안했던 협상처럼 말인가요?"

"예."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로이드의 모습.

그걸 보며 뮤이라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불쑥 숲에 들어온 침입자.

무도하게도 엘렌시아 뿌리의 수액을 가져가려던 자.

그러다가 적발된 상황에서 인질극까지 벌였던 자.

당황하기는커녕 넉살 좋게 고기까지 구워준 자.

심지어 고기와 석탄을 빌미로 협상까지 제안했던 인간.

그녀는 지금도 그때 로이드가 꺼낸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협상이라는 건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거리를 좁혀가는 방법입니다."

의아했다.

뭔 말인가 싶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뭐, 굳이 억지로 거리를 좁히지 않아도 됩니다. 결렬되는 협상에도 나름의 의미는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게 거리를 좁히려고 벌인 시도 자체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관계가 되는 거랄까요. 그토록 협상 불가를 외치던 그쪽 분들과 제가 이렇게 나란히 마주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처럼 말입니다."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쨌건, 제가 드렸던 제안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죠. 매달 그쪽 부족에게 필요한 식량인 고기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고기를 구울 때 사용할 불에 타는 돌, 석탄도 함께 말입니다."

"대신 우리는 그쪽에게 엘렌시아 수액을 채취할 권리와 일꾼 100명을 제공하라는 건가요?"

"예, 정확하십니다."

"...."

"제안이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혹은 더 받아내고 싶은 조건이 있으면 얘기하세요."

"말하면 들어줄 건가요?"

"그건 들어보고요."

"...."

이런 게 인간이 말하는 협상이라는 걸까.

상대가 내미는 조건.

이쪽이 제공할 것들.

그 사이의 이득을 따지는 행위.

실로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그저 평생 숲을 활보하며 사냥을 하는 평온한 삶만 살아왔는데.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협상이라는 낯선 경험 앞에 뮤이라는 망설였다.

고민에 잠겼다.

'이럴 때 어머니가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한때 '가펠 영지'라는 곳에서 인간과 교류했던 어머니, 로슈아.

친했던 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자 숲으로 돌아왔고 자신을 낳았다 하셨던가. 그 후로 긴 삶을 누리다 식물의 영으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긴 유언이 떠올랐다.

'인간과의 우정은 찰나에 불과하다고 하셨지.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너무나 일찍 죽어 덧없이 떠나 버린다고. 그러니 친구인 인간만 믿으라고, 그들 종족 자체를 신뢰하면 곤란해질 거라고 하셨지.'

그럼 눈앞의 로이드라는 인간은?

'친구는 아니야. 하지만....'

적은 아닌 것 같다.

그 증거로 협상이라는 걸 제안하고 있다.

게다가....

"갑옷은 왜 벗는 거지요?"

"아, 계약서를 만들려고요."

"계약서라니요?"

"말 그대로 계약 내용을 보존하는 겁니다. 서로의 협상 결과를 증거로 남겨서, 훗날 발생할 수 있을 오해와 분쟁을 예방하고 줄여주는 중요한 문서랄까요."

"그 계약서라는 걸 남기면 서로 다툴 여지가 사라진다는 건가요?"

"예, 대부분은요."

"대부분이라니...."

"세상에 완벽이라는 건 없으니까 말입니다. 자아, 어쨌건 끄응차. 이걸 이렇게 뒤집고, 잘라내서...."

푸욱!

로이드가 가죽 갑옷을 벗었다. 어깨 보호대를 떼어내더니 뒤집고, 단검으로 푹 찔렀다. 잘라냈다. 네모 반듯하게 만들고 펼쳤다.

이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거, 계약서로 쓰려고요. 보통은 계약서라는 걸 종이로 만드는데 그쪽 분들은 그거 싫어하실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쪽 분들 기준으로는 종이도 식물을 괴롭혀서 만드는 물건일 테니까. 맞지요?"

"...."

"그래서, 이제 생각은 좀 정리하셨는지?"

"네."

불타는 돌과 고기.

충분히 좋은 조건이다.

특히 식량난에 허덕이는 부족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뭄의 단비 같은 제안이다.

게다가 단순한 말을 통한 약속이나 호언장담이 아닌, 대등한 관계의 계약서를 만들자는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이쪽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의 가죽 갑옷을 잘라내는 모습은 뜻밖이기도 했다.

그렇게, 뮤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쪽의 제안을 받도록 하지요."

"그럼 엘렌시아 수액과 일꾼도?"

"물론입니다."

그렇게 조건을 받아들였다.

계약서 2부를 작성하고 나누어 가졌다.

덤으로 인력 파견 외주계약서도 작성했다.

때문에 부족의 원로들에게 강한 질책을 들었다.

귀한 식물 뿌리를 함부로 내어줬다고.

인간에게 숲을 개방한 꼴이라고.

'하지만 부족의 아이들이 굶는 것보다는 나아.'

부족장으로서 내린 현실적인 타협이자 결정이었다.

질책이라면 기꺼이 받고 감수하리라.

대신 받아낼 이득을 확실히 챙기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뮤이라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프론테라 남작령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옆에 나란히 선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그쪽의 말대로군요."

"예?"

의아한 듯 이쪽을 쳐다보는 로이드.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뭐든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른 거겠지요. 알겠습니다. 인간의 입장도, 우리와는 다른 생활방식도. 그럼 우리가 일할 곳은 어디죠?"

"아, 바로 작업 시작하시게요?"

"네. 그게 협상과 약속이었으니까요."

석탄과 고기.

받는 만큼 열심히 일하리라.

그녀의 말을 들은 로이드가 흡족하게 웃었다.

"일단 일하는 법부터 배우시고요. 자, 이쪽으로."

뮤이라와 엘프 일꾼 100명을 영지로 안내했다.

남작부부에게 소개했다.

남작가의 사람들도, 영지의 주민들도 처음으로 보는 엘프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당황하고, 신기해했다. 어떤 청년은 첫사랑에 빠졌으며, 어느 소녀는 선망의 시선을 보냈다.

그랬기에 그들이 하게 될 일을 로이드가 밝혔을 때, 남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저들이 철근공이 될 거라고?"

"예."

"그, 그게 가능하겠니?"

"물론입니다."

"...."

로이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더욱 당황했다.

"으음, 그래도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 나는 걱정이구나."

"혹시 저들의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녀린 느낌 때문인가요?"

"어, 외모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게 조금 잘못이라는 건 알지만... 으음, 그런 걱정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구나."

남작이 주저하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가 보기에 엘프들은 신비롭고 여린 사슴처럼 느껴졌다.

평생 거친 일과는 담을 쌓은 요정 같은 존재로 보였다.

한데 그들을 아파트 건설 현장에 투입하겠다니.

심지어 고되기 그지없는 철근공 작업을 시키겠다니.

"너도 알고 있을 게다. 그토록 거칠고 호탕한 오크 전사들도 철근공 작업을 하면서 무섭다고 연일 난리인 판국이란다. 너무 높다고 어찌나 우는 소리들을 하는지. 네가 없는 며칠 사이에 그게 더 심해졌고 말이다."

"압니다. 그래서 저들을 데려온 겁니다."

"저 엘프들을?"

"예."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고소공포증과 제일 크게 담을 쌓은 이들이니까요. 덤으로 완력도 생각보다 엄청난 분들입니다."

"완력이 뛰어나다고?"

"예. 우리 인간보다 열 배가 넘는 긴 삶을 살면서 숲을 뛰어다니고 활을 쏘는 이들이니까 말입니다."

활쏘기.

흔히 게임에서 민첩성 스탯과 많이 연관되는 행위.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그냥 다른 게 아니라 매우 달랐다.

한 번이라도 활쏘기 카페에 가 본 사람들은 온몸의 근육으로 뼈저리게 절감할 것이다.

활쏘기에 필요한 능력은 민첩 따위가 아니라 근력이라는 것을.

"젊음을 누리는 기간이 우리보다 훨씬 깁니다. 그만큼 근육 생성 기간도 훨씬 길 거고 말입니다. 그 세월 동안 매일 활쏘기를 하는 이들입니다. 당연히 완력은 말하지 않아도 뻔할 테고요."

인간보다 훨씬 긴 젊음.

그만큼 더 오랜 기간 분비되는 근육 성장 호르몬.

그동안 매일 활을 쏘며 단백질 듬뿍 고기만 미친 듯이 먹어대는 육식 애호가들이었다.

알고 보면 온몸이 말근육 그 자체인 분들.

까고 보면 어지간한 특수부대 델타포스쯤은 유치원생 취급할 어마무시한 분들.

그게 바로 가녀린 엘프의 실체이자 진실이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세요. 저분들 관리도 저한테 맡겨두시고요."

"으음, 듣고 보니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그렇게 남작에 대한 설득도 성공.

다음 날부터 로이드는 엘프 일꾼들에게 일을 가르쳤다.

애초에 건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엘프들이었다.

그들에게 현장의 개념과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특히 안전 교육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

'다행히 기본적으로 몸 사리는 성향이 탑재되어 있어서 딱 좋아.'

엘프들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천천히 배우지만 확실히 익혔다.

현장의 안전에 대한 부분이 특히 그랬다.

그렇듯 기본적인 교육을 마친 후에는 본격적인 철근 작업을 가르쳤다.

"자, 철근을 놓는 걸 배근 작업이라고 합니다. 여기처럼 이렇게, 이렇게. 설계를 정확히 지켜서 철근을 놓는 게 중요하지요. 그리고 교차된 철근을 묶을 때는 이거, 후커라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철근을 묶는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갖가지 기술을 전수했다.

시멘트 거푸집을 결속하는 요령.

타설물의 압력에 형틀이 기울거나 터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동바리'라는 걸 시공하는 방법.

시멘트 굳히기가 끝난 후 거푸집을 해체하는 절차와 안전 수칙까지.

며칠에 걸쳐 빡쎈 교육과 실습을 반복했다.

그동안 수없이 엘프들을 갈구고, 몰아붙였다.

"거기, 철근 그렇게 묶으면 터집니다. 혹시 고기 먹기 싫으십니까?"

"저기요? 바닥에 먹선 쳐놓은 대로 까셔야지요? 안 그러면 오늘 고기, 못 드릴 수도 있는데?"

"이봐요, 누님. 동바리 그렇게 해놓으면 다 내려앉아요. 사고 난다고요. 사고가 나면? 오늘 저녁 삼겹살은 상추로 싸서 드릴 겁니다?"

특히 갈굼으로는 상추, 깻잎, 양배추 쌈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했다.

새참 시간에 좋아하는 고기를 쌈에 싸서 주면?

송송 자른 고추와 마늘까지 넣어주면?

물론 먹게 하진 않았다.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거의 모든 엘프들이 진심으로 기겁했다.

마음이 여린 몇몇은 잘못했다며 왈칵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렇듯 혹독한(?) 특훈 덕분에 며칠이 지나는 사이, 엘프 일꾼들은 철저한 철근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물론 로이드도 함께였다.

"당분간은 제가 직접 현장에서 여러분의 작업을 감독하고 살펴볼 생각입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이 작업에 익숙해지실 때까지. 그러니까 제 잔소리를 덜 듣고 싶으시면? 현장에 빨리 적응하시면 됩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엘프들이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현장에 투입되고도 저 인간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니.

절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로이드의 스파르타식 갈굼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상추쌈을 대면하는 경험이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어. 두 번 다시 겪기 싫어!'

엘프들은 결심했다.

오늘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리라고.

그래서 로이드의 인정을 받아내리라고.

더는 상추쌈을 목격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살 수는 없다고.

그러한 각오와 집중력이 엘프들의 타고난 고공 운동 능력을 200% 이끌어냈다.

타앗! 샤샤샥! 끼릭, 끼리릭! 타탓!

고소공포증을 호소하는 오크 전사들 때문에 한동안 공사가 중지되어 있던 아파트 102동 현장.

그 꼭대기에서 엘프 철근공들이 말 그대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132화. 철근 위에서 춤을 (2)

타앗!

철근을 박찼다.

허공에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뮤이라는 생각했다.

자유롭다.

그리고 익숙하다.

지상으로부터 십수 미터의 높이.

아름드리나무 대신 철근과 시멘트로 쌓아올린 건물.

그 현장의 꼭대기에서 비상하며 그녀는 놀랍도록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숲에 돌아온 것 같아.'

평생을 살아온 에버글로우 숲.

떠나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벌써 그리웠다.

그곳의 풍경, 공기, 냄새.

그 모든 것이 시시각각 떠오르던 요즘이었다.

한데 지금은?

아파트 건설 현장 꼭대기에서 몸을 날리는 지금 이 순간은?

숲을 향한 그리움이 놀라울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뜻밖의 익숙한 감각 덕분이었다.

'숲과 비슷하니까. 높이도. 공간도.'

높게 솟은 아파트 건물과 기둥은 나무줄기처럼 느껴졌다.

곳곳에 체결되어 비죽비죽 솟은 철근은?

숲의 무성하던 나뭇가지를 연상시켰다.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느낌도 비슷해.'

타닷! 파아앗!

철근 꼭대기로 뛰어올랐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주위를 살피듯 현장을 둘러보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엘프들도 비슷한 감각을 느끼는 걸까.

다들 지상에 있던 때와 달리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바람결에 몸을 싣듯 현장을 뛰어다녔다.

아니, 날아다니고 있었다.

휘리릭, 철컥!

엘프 철근공들이 순식간에 철근을 옮기고, 묶었다.

바람을 타고서 춤추고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층과 층 사이를 오갈 때는?

아예 곡예를 부렸다.

파아앗!

뮤이라는 건물 밖으로 몸을 던졌다.

십수 미터의 허공이 그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상으로 추락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보아둔 착륙 지점.

그곳에 추락방지망이 있었다.

철그덕!

추락방지망 끄트머리를 솜털처럼 밟았다.

박차고, 도약했다.

탄력을 살렸다.

순식간에 아래층으로 진입했다.

그곳에 깜빡하고 놓아두었던 도구를 챙겼다.

위층의 현장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닷!

추락방지망을 박차고.

아파트 외벽을 밟았다.

아니, 아예 외벽을 따라 수평으로 몸을 기울인 채 내달렸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바람처럼 위층 창틀을 붙잡고 들어갔다.

계단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위로 올라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불과 2초 남짓.

그렇듯 보통의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동작을 완성하고도 뮤이라를 비롯한 엘프들은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않았다.

숨 쉬듯, 혹은 평범하게 걷듯.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엘프 철근공들은 로이드에게 교육받은 작업 기술을 잔 실수 한 번 없이 완벽하게 발휘했다.

'대박. 이건 레알 기대 이상인데?'

현장을 감독하던 로이드는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저 엘프들.

어쩌면 철근공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절로 그런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데려오길 정말 잘했어.'

이 정도면 믿고 작업을 맡길 수 있다.

이쯤이면 더 감독할 필요도 없다.

'그래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도 있으니까. 아예 현장 아래 지상에 짚더미나 두툼하게 깔아줘야겠네.'

혹시나 실수해서 추락방지망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한 안전 대책만 추가로 마련해줘야겠다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그는 현장을 벗어나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상층, 아파트 안뜰에선 오크 전사들이 현장을 올려다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멋지다, 꾸이익!"

"엘프 최고, 꾸익!"

"그동안 높은 곳에 올라가려니까 너무 무서웠다, 꾸이익!"

"난 여자친구한테 매일 저녁마다 혼났다, 꾸익!"

"난 마누라한테 혼났다, 꾸이익!"

"난 아들한테 혼났다, 꾸익!"

"거짓말쟁이가 나타났다! 여기 이놈들 전부 솔로다, 꾸이익!"

...이라는 식이었다.

즉,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엘프들 덕분에 오크들은 철근공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소공포증에서도 해방되었다.

'게다가 저 엘프들, 작업 속도가 상상 이상이야. 저 속도라면 더 추워지기 전에 102동도 8층까지 다 올릴 수 있겠어.'

어느새 성큼 다가온 본격적인 겨울.

내심 그게 걱정이던 로이드였다.

기온이 더 내려가서 영하의 날씨가 시작되면 시멘트 타설 작업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동결융해 현상이 일어나기 딱 좋으니까.'

동결융해(凍結融解, freezing and thawing).

그건 겨울철 시공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현상 중의 하나였다.

'콘크리트에도 물이 쓰이니까. 그런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버리면? 당연히 콘크리트에 함유된 물이 얼어 버리지. 부어 놓은 콘크리트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내부에서 수분이 응결되고 얼음이 생겨 버리는 거야.'

그 상태로 콘크리트가 말라붙으면?

수많은 얼음 덩어리와 입자가 콘크리트 내부에서 분리된 채로 불순물처럼 남게 된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기온이 올라가면 그제야 뒤늦게 녹는다.

양생이 끝나 다 말라붙은 콘크리트 내부에 생뚱맞은 물방울 덩어리가 수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럼 대략 그 공사는 망했다고 봐야지.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계 강도에 한참 모자라게 되거든. 쩍쩍 금이 가거나, 부스러져 내려앉거나, 내부의 철근이 부식하거나, 심하면 팝 아웃(Pop-Out) 현상까지 일어나서 주먹만 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퍽퍽 뜯겨 나오게 되니까.'

말 그대로 대참사가 일어난다.

쓰려도 못 쓰는 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데 한 동에만 천 단위의 거주민이 사는 아파트가 그래 버리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로이드는 어깨를 부르르 털었다.

그래도 엘프 철근공들의 작업 속도를 보자니?

그런 걱정은 덜어도 될 듯했다.

'지금까지는 기온이 그럭저럭 괜찮아. 그러니 더 추워지기 전에, 며칠 안에 8층 작업을 끝낸다.'

그 각오로 그는 현장을 독려했다.

엘프 철근공들을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독촉했다.

덕분에 마무리가 지지부진하던 8층 현장이 숨 가쁘게 돌아갔다.

불과 여드레 후에 시멘트 타설 작업까지 마칠 수 있었다.

'좋아. 너무나 좋아.'

로이드는 크나큰 만족감을 느꼈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에 102동 건물까지 다 올렸다.

그 말은 즉, 겨울 동안 101동과 102동의 단열, 난방 등의 공사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101동이랑 102동. 두 건물을 프로토타입으로 삼는 거야. 그 데이터와 경험을 바탕으로 봄이 오면 103동부터 본격적인 꿀벌 아파트 단지 시공에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로이드는 곧바로 다음 작업에 돌입했다.

잠시 미루어두었던 101동 난방 공사였다.

"그래서, 이 귀한 수액을 콩기름에 섞는 겁니까?"

"어."

난방 배관의 단열 성능 업그레이드를 위한 비장의 무기.

엘렌시아 수액 약간을 콩기름에 부었다.

그러자 하비엘이 요상한 눈빛을 보냈다.

꼭 지금 뭐하냐고 묻는 듯한 시선.

로이드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엘렌시아 수액이 많냐? 아니, 전혀. 이거 원액으로 쓰기엔 너무 아까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 희석해서 쓰는 겁니까?"

"어."

"한데 어째서 하필이면 콩기름인 겁니까."

"구하기 쉬워서 값이 싸고 방수 성능까지 있으니까."

게다가 냄새까지 고소하니 좋다.

그렇게 로이드는 엘렌시아 수액과 콩기름을 섞었다.

한데 그 비율이 문제였다.

1 : 1?

물론 아니었다.

그럼 양심적으로 1 : 10?

그것 또한 당연히 아니었다.

"설마 로이드 님은...방금 원액을 한 방울만 똑 떨어뜨린 걸로 '섞었다'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로이드의 작업을 구경하던 하비엘은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당연했다.

지금 로이드는 말 그대로 엘렌시아 원액과 콩기름을 1 : 99쯤으로 섞고 있었다!

그러나 대꾸하는 로이드는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야, 원래 세상이 다 이런 거야. 어디 가서 음료 하나만 사보면 바로 알걸? 원액이 1퍼센트만 섞여도 감지덕지인 거라고."

진짜로 세상이 그렇다.

마트만 가보면 안다.

과일 맛 음료 아무거나.

혹은 과일 맛 젤리 같은 걸 봐도 그렇다.

이름에는 오렌지니 딸기니 거창하고 큼지막하게 써놨지만, 정작 성분표를 보면 과일이 1퍼센트도 들어가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다.

어릴 때 그걸 처음 깨닫고는 그 얼마나 쓰라린 스크래치가 동심에 새겨졌던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스크래치와 함께 가슴에 새겨진 자본주의적 교훈을.

더러운 상술이 알려주는 원가 절감의 마법을!

"그러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 성능 테스트도 해봤고."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자, 이 단지 받으시고. 붓도 받으시고."

"...."

"뭐 해. 얼른 와."

로이드는 하비엘을 이끌고 101동 난방실로 갔다.

난방실에서 아파트로 뻗어 들어가는 각각의 배관을 가리켰다.

"배관 보이지? 이제부터 배관에 엘렌시아 단열 크림을 바른다. 실시."

"엄밀히 따지자면 콩기름 단열 크림 아닙니까?"

"쓰읍. 1퍼센트가 중요한 거라니까."

"...."

그렇게 둘은 모든 배관에 엘렌시아 단열 크림을 꼼꼼히 발랐다. 야물딱지게 부채질도 해가며 말렸다. 그 위에 짚더미도 추가로 두껍게 둘렀다. 새끼줄로 짚을 묶어 고정했다.

그리고 단열 성능을 테스트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어떠냐?"

"뜨끈뜨끈합니다."

"그렇지?"

"예."

예전에는 미지근하다 못해 싸늘하던 8층 배관이었다.

한데 엘렌시아 단열 크림을 추가로 발라주고 나니?

마치 바로 옆에 난방실이 있는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이 정도면 됐어. 대만족이야.'

밀짚과 왕겨, 석회를 섞어 바른 기존의 단열재.

그 위로 엘렌시아 단열 크림과 추가적인 짚더미.

그렇게 몇 겹이나 신경을 쓴 보람이 느껴졌다.

한데 그때였다.

"저기, 로이드 님."

"음?"

하비엘이 이쪽을 불렀다.

한데 그 목소리와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건 마치....

"너,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지?"

"...."

"맞네. 딱이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금 날 부를 때 저기, 라고 운을 뗐잖아?"

"...."

"너 평소에 아쉬운 거 없으면 날 그렇게 부르는 일이 잘 없거든."

"...."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일이 뭔데."

"피난민들 말입니다."

"어."

"그들 중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주로 이곳에 우선 입주시키는 건 어떨까 합니다만."

하비엘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뜨끈뜨끈한 난방 배관.

그걸 만지다 보니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장님 어머니를 모시던 어린아이. 잘 있을까.'

당시의 상황이 생각났다.

그곳의 광경도 떠올랐다.

열악했다.

나름 공들여 만든 피난민 텐트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텐트는 결국 텐트였다.

몸이 멀쩡한 사람도 지내기 불편할 듯했다.

하물며 어딘가 불편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터다.

"아무래도 피난민 캠프에서는 모든 게 노출된 공동생활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집단생활보다는 아파트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게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흐음."

로이드는 하비엘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나름 합당한 구석이 있었다.

"하긴. 아픈 사람들을 북적이는 텐트에 두는 것도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

"예. 그럴 거라고 봅니다."

"그럼 우선은 오르내리기 편한 3층까지만 입주를 시켜볼까? 환자 위주로 선별해서?"

"좋은 생각이십니다."

일단 101동은 기본적인 설비는 갖추어진 상태였다.

특히 난방과 내부 마감은 거의 다 만들어졌다.

공동 식당이나 화장실도 조금 더 손을 보면 된다.

당장 들어와서 요양하고 지내기엔 큰 무리가 없을 터다.

'게다가 실제로 입주민이 들어와서 사는 모습을 보면 나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설계와 실제 생활이 다를 수 있다.

집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층간소음, 결로, 외풍, 채광, 환기, 등등.

지을 때는 몰랐던, 혹은 예상하지 못했던 불편함을 정작 살면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겨울 동안 환자들이 여기서 지내는 모습을 관찰하면?

그렇게 환자들을 베타테스터로 활용하면?

봄철에 시작할 103동부터의 공사.

그 설계에 개선점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생활에 더 편리하도록 업그레이드 설계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그럼 우선 환자부터 선별하고, 상대적으로 몸이 더 불편한 사람들을 1층으로 입주시키면 되겠네."

그렇게 첫 입주가 시작되었다.

피난민 캠프의 환자들이 101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들 감격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난데없이 일어난 몬스터 도미노 현상.

그 재난에 휩쓸려 집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병들고 다친 몸으로 피난길을 헤쳐 왔다.

열악한 피난민 텐트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몇 달 만에 제대로 된 거처를 얻었다.

감격의 눈물보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감사할 데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흐흑...."

첫 입주 대상에는 장님 어미와 어린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아들에게 주어진 작은 거처를 매만지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로이드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념비적 시공 업적 획득]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 최초로 아파트 건설과 첫 입주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첫 입주에 성공한 피난민들은 평생 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며, 이 영지의 가장 충실한 주민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토목공학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아파트의 선구자로 역사에 이름이 새겨질 것입니다.]

[기념비적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7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783]

오랜만의 RP 획득이었다.

로이드는 훈훈해지는 기분을 애써 갈무리했다.

장님 어미를 향해 짐짓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은혜는 무슨. 그저 아들만 잘 키우시면 됩니다."

그럼 그 아들이 장성해서 이 영지의 일꾼이 되고.

자신은 그 일꾼을 열심히 굴려서 이득을 뽑아내고.

이득이 점점 커지며 꿀단지가 빵빵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후후후. 내가 아파트를 공짜로 지어주는 건 줄 알아?'

당연히 아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아니, 자신이 공짜를 얻는 일은 있어도 남한테 내어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설령 피난민들이 상대라 해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야. 조금만 더 있으면 돼. 다들 영지에 조금 더 정착하고 컨디션이 올라오면 그때부턴 얄짤없이 굴려줘야지.'

밥값을 톡톡히 하도록 굴릴 것이다.

그렇듯 로이드가 야물딱진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던 때였다.

누군가가 현장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로, 로이드 님!"

누군가 해서 돌아봤더니 남작가 저택의 하인이었다.

하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다급히 말했다.

"방금, 바, 방금!"

"방금 뭐. 무슨 일인데. 숨넘어가겠다. 천천히 말해봐."

"그, 그게, 칙사가 왔습니다."

"뭐?"

칙사가?

국왕이 보낸?

하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지금 저택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칙사가 왔다니.

날 기다린다니.

그 대목에서 로이드는 묘한 촉을 느꼈다.

'어라. 이거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정원에서 남작 부부와 담소를 나누는 칙사가 보였다.

예전, 크레모에서 기가티탄을 잡은 공적을 세웠을 때 칙령을 가져왔던 바로 그 칙사였다.

한데 칙사는 같은 사람인데, 이쪽을 대하는 태도가 그때와 달라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쪽을 보자마자 공손히 예를 표하는 칙사.

예전엔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그땐 이쪽에게 편하게 하대를 했었는데.

"...."

점점, 촉이 또렷해진다.

로이드는 톡톡 튀어 오르는 촉을 느끼며 말했다.

"우선 절차부터 행하시죠."

"예, 그러도록 하지요. 흠흠!"

칙사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칙사단의 수행원이 두루마리를 가져왔다.

국왕이 내린 칙령이었다.

로이드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칙사의 칙령 낭독을 기다렸다.

그리고 예감했다.

자신의 촉이 맞을 것 같다고.

저 칙령, 어쩐지 자신이 예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 같다고.

이윽고 칙사의 칙령 낭독이 시작되었다.

"예부터 짐을 포함한 선대의 많은 왕들께서는 왕국의 귀족, 시민, 그 외 만백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소 뻔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책임을 느꼈고.

지금도 불철주야 애쓰고 있으며.

근래 발생한 재난에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고.

이러한 사태에 팔 걷고 나선 프론테라 영지의 공훈을 치하한다.

등등. 등등.

수많은 미사여구와 칭찬이 이어졌다.

그걸 듣는 동안 로이드의 입술도 함께 달싹거렸다.

자신이 느낀 촉과 예감을 담아.

어느새 굳어가는 확신을 싣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칙사의 칙령 낭독.

로이드의 작은 독백.

두 목소리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다.

"지령. 상기한 공적을 근거로, 프론테라 영지를 백작령으로 승격한다."

133화. 세상에 공짜란 없다 (1)

"지령. 상기한 공적을 근거로, 프론테라 영지를 백작령으로 승격한다."

엄숙한 선언의 끝자락에서 침묵이 불어왔다.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칙령을 낭독한 칙사도.

그의 수행원들도.

곁에 나란히 무릎 꿇은 하비엘도.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잠시 후.

남작, 아니, 이제는 백작으로 승격된 프론테라 백작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끄흡, 흐흡, 흡!"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억누르려 해도 쑴펑쑴펑 피어나는 감격.

그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펄럭이는 풍선인형처럼 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귀로 듣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앞에 서 있는 칙사.

그가 든 칙령 두루마리.

엄숙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선언.

모두가 진짜이며, 실화이고, 실제다.

'우리 가문에 이런 축복이....'

프론테라 백작은 흐느낌을 애써 참아내며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칙사의 칙령 발표가 이어졌다.

"지령 2호. 이러한 승격 조치에 따라 프론테라 백작령과 기존 크레모나 지방의 중심 영지인 크레모 백작령 사이에 위계서열 혼선이 발생할 수 있는바, 이에 프론테라 백작령을 특별 직할시의 형식으로 크레모나 지방의 행정 조직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을 명하는 바이다."

'오호라.'

발표를 듣던 로이드의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갔다.

'특별 직할시로 독립이라. 귀족 사이의 서열 족보가 꼬이는 걸 방지하는 조치인 거네.'

생각해보니 당연한 조치였다.

원래 프론테라 영지는 크레모나 백작령의 하위 행정조직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한데 그러다가 백작령으로 승격이 되면?

단숨에 크레모 백작과 동등한 지위를 얻는 셈이다.

한 지방에 두 개의 백작가문이 양립하는 불편한 모양새가 된다.

즉, 크레모 백작과 프론테라 백작 사이의 위계서열이 꼬이는 것이다.

'그러니 행정구역을 나눠서 독립시키는 게 낫지. 역시 국왕 누님.'

검을 잘 쓰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력도 수준급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칙사가 바야흐로 백작령 승격에 따른 각종 혜택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지령 3호. 이로써 프론테라 백작령은 동부 지방 재건의 중심지로 설정된바, 이에 따라 향후 20년간 왕실에 대한 일체의 세금 상납을 면제하는 바이다."

'오옷?'

눈이 번쩍 뜨였다.

혜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령 4호. 왕실은 향후 10년간 프론테라 백작령의 재건에 쓰일 예산과 물자를 특별 편성하여 지원할 것을 공표한다."

'허허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꿀 같은 혜택은 또 있었다.

"지령 5호. 프론테라 백작령에 인접한 라코나 자작령을 프론테라 특별 직할시의 예하 영지로 하사함을 알린다."

'라코나 자작... 크하하핫!'

이 대목에서 로이드는 그만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하마터면 빵 터질 뻔했다.

그 뒤로도 각종 혜택이 발표되었다.

왕실 중앙은행으로부터 최저의 금리로 투자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 귀족원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 왕실과 혼약을 맺을 수 있는 자격, 하위 영지로부터 병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 하위 영지 영주의 임명과 파직에 대한 인사권까지.

갖가지 자잘한 혜택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언급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막강한 권한과 혜택이었다.

일개 남작령이던 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상, 프론테라 백작을 향한 축하와 축복을 담아 짐의 뜻을 전하노라. 공용력 618년 1월, 왕도 마젠타에서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공표함."

탁!

두루마리가 감겼다.

칙사가 정중히 웃었다.

"감축드립니다, 프론테라 백작님."

"아, 감사하... 아니, 고맙네."

프론테라 남작, 아니, 백작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칙사에게 축하의 인사를 받을 때도.

주위의 하인과 하녀들이 환호할 때도.

영지의 각 촌락에 떠들썩한 소식이 전해지는 와중에도.

저택으로 들어와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저녁 식사를 마주하는 때까지도 계속 그러했다.

그저 얼떨떨했다.

발이 둥둥.

정신이 동동.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백작이라고?'

그는 멍한 기분으로 스푼을 들었다.

양송이 수프를 떴다가, 접시로 다시 흘렸다가, 다시 떴다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평생 이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만 여겨왔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막대한 빚에 시달려 왔던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기에 이제부터 모두가 더 정신 차려야 합니다."

"...."

"저기, 제 말 듣고 계신가요?"

"어?"

멍해진 귓가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고 식탁 건너편의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로이드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맺혔다.

"조금은 실감도 안 나고, 멍하고, 얼떨떨하시겠지요. 솔직히 저도 그렇습니다."

"어, 으음, 그렇긴 하구나."

"예. 그러니 이제부터 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저도, 모두도 말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니?"

세상 침착하게 들려오는 로이드의 목소리.

덕분에 프론테라 백작도 조금은 차분해질 수 있었다.

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백작령 승격 조치의 의도가 굉장히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의도라. 혹시 국왕 전하의?"

"예."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몬스터 도미노 현상 때문에 동부산맥 일대의 수많은 영지가 박살이 났습니다. 그 상황에서 피난민이 몰려와 있는 우리 영지를 백작령으로 승격시킨다는 건 곧, 이곳을 재건의 중심지로 삼겠다는 뜻이겠지요."

"재건의 중심이라."

"덕분에 바빠질 겁니다."

"그렇겠구나."

프론테라 백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러했다.

"한결 높은 신분과 함께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내려주신 게로구나. 게다가...."

"이젠 시골 귀족 신분에 만족하면서 소소하게 꿀 빠는 생활은 끝난 거지요. 판이 커졌달까요."

로이드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살짝 쓴웃음으로 변했다.

프론테라 가문이 백작가로 승격된 것은 좋았다.

수많은 혜택과 강력한 권한도 주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질 일도 많아졌다.

말 그대로 시골 귀족으로 누릴 것만 누리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과는 멀어지게 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모에 휘말릴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국왕 알리시아가 왕위를 지키는 동안은 확실히 그럴 것이다.

자신이 보유한 찬사, '마젠타노를 업은 자'의 효과 덕분이었다.

'찬사 등급은 왕국 야사. 효과는 무려 '역모나 반역에 대한 어떤 의심도 받지 않음'이지. 한마디로 쩔어. 게다가 효과가 발휘되는 지역은 왕국 영토 전체인 데다가 기간은 국왕 알리시아가 재위하는 기간과 일치해.'

따지고 보면 엄청난 효과였다.

자신이 지닌 찬사 중에 솔직히 제일 꿀 같은 옵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족으로 살면서 제일 엿 같은 게 억울한 역모에 연루되는 일일 거니까.'

수많은 역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흔하디흔한 사극 드라마를 봐도 그랬다.

아무리 권세가 막강한 귀족이나 특권층이라도?

역모 한 방이면 모가지가 쑹컹 날아가기 일쑤였다.

심지어 그 역모가 억울한 누명이나 의혹에 불과하더라도 사약 한 뚝배기 드링킹을 당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건 이 동네도 다르지 않을 거고 말이지.'

한데 그러한 역모 의혹을 받지 않는다는 건 대단한 옵션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쟁쟁한 백작가로 신분이 상승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터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왕 가문의 위세가 올랐고 권한이 커졌으니, 이제부터는 그 권한을 적절히 활용해야겠지요."

"권한을 활용한다라. 특별히 생각해 둔 방안이 있는 것이더냐?"

"예."

"그래, 어떤 방안이더냐."

프론테라 백작이 물어왔다.

로이드가 생각을 정리했다.

때마침 신분이 상승했다.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그러니 이럴 때 권력의 꿀맛을 적절히 휘둘러 봄도 바람직할 터.

"남쪽의 라코나 자작 말입니다."

"라코나 자작?"

"예."

예전에 이쪽을 괴롭혔던 라코나 자작.

그랬다가 수도세 철퇴를 맞았던 자작.

그 자작의 정수리에 권력의 참맛을 새겨 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일단 내일 아침에 라코나 자작을 호출하시죠."

다음 날 아침이 밝아왔다.

라코나 자작은 문자 그대로 콧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이미 지난 밤 칙사의 방문을 받은 그였다.

국왕의 칙령을 받들기도 하였다.

프론테라 영지가 백작령으로 승격되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자신의 영지가 프론테라 백작가의 휘하 영지가 되었다는 사실도 모두 통보받았다.

지방의 알찬 부자 영주 라코나 자작.

그런 그에겐 실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무슨.... 프론테라 남작, 그 쥐뿔도 없는 자가 백작이 됐다고? 심지어 내 윗사람이 되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싶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믿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칙령은 절대적인 왕명이다.

선포되는 즉시 효력을 발휘한다.

그걸 잘 아는 라코나 자작은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평소엔 폭신폭신 가볍게만 느껴지던 이불이었다.

한데 걱정거리가 잔뜩 생기고 나니, 그 이불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무겁고, 쓸데없이 덥고, 불쾌하게 휘감겼다.

심지어 베개도, 잠옷도 모조리 불편해졌다.

'하아. 난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서는....'

한숨이 자꾸만 푹푹 흘러나왔다.

프론테라 영지에 대해 찔리는 구석이 유난히 많은 그였다.

한숨을 내쉴 때마다 과거 자신의 악행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주르륵 펼쳐졌다.

프론테라 남작을 수시로 괄시하기는 기본.

연회장에서 모욕을 준 적도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어떠했던가.

마레즈 개간지를 둘러싼 갈등을 조장했다.

그 끝에 프론테라 영지로 흘러드는 강을 오염시켜 협박까지 감행했지 않았나.

'이제부터 어떡해야 하는 거지.'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졌다.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다.

진짜로 이제부터 어떡할까.

선물이라도 준비해서 달려가 아양이라도 떨어야 할까.

혹은 지난날의 잘못을 다시금 사죄하며 점수를 따볼까.

고민과 뒤척임 속에 보낸 밤이었다.

한데 아침이 밝자마자 프론테라 영지에서 사람이 왔다.

백작님이 부르신단다.

'헉.'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올 것이 이렇게도 빨리 왔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의복을 갖추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리고 백작이 된 아르코스 프론테라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흠흠. 오랜만이군요, 라코나 자작."

"배, 백작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예... 예?"

"땀을 많이 흘리시는데."

"아, 아닙니다. 옷이 조금 더워서... 그나저나, 백작으로 승격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사실은 그 축하를 받고 싶어서 이렇게 얼굴 좀 보자고 부른 거지요."

"그, 그렇습니까."

"후우, 설마요. 농담입니다."

"그, 그렇군요! 아, 아하하하."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백작의 썰렁한 농담에 영업용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반응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비로소 조금씩 실감이 났다.

예전엔 귀족으로 취급해 주기도 싫었던 잔챙이 프론테라.

그랬던 그가 이제 내 윗사람이 되었구나.

그러한 실감은 따로 불려 간 집무실에서 프론테라 백작의 아들, 로이드와 대면하면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자작님?"

"...."

"못 본 사이에 조금 수척해지셨네요? 낯빛도 칙칙해지셨고, 다크써클도 생기셨고. 혹시 요즘 잠이라도 부족한 건 아니신지. 이거, 자장가라도 불러드려야 하나."

"...."

"어이쿠. 쓸데없는 인사가 길었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할까요. 자, 이리로."

"가, 감사합니다."

그는 로이드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도 못한 채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꿈지럭거렸다.

그런 이쪽을 향해 로이드가 씨익 웃었다.

"혹시 긴장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안 잡아먹습니다."

"...."

"네, 그렇게 말입니다. 앉은 자세라도 편해야지요."

로이드가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서 라코나 자작은 더욱 불안해졌다.

앉은 자세라도 편해야 한다니.

그 말은 즉, 이제부터 이쪽을 불편하게 해줄 용건을 잔뜩 꺼낼 거라는 뜻인가.

절로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3초 뒤부터 그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수도세를 인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어이쿠. 그렇게 너무 놀라진 마시고. 사실 이유야 간단합니다. 이제 겨울이 몰려오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요."

"겨울에 날씨가 추워지면 상수도 안에서 흐르던 물이 얼겠죠?"

"예."

"그러면 배관이 펑 터지겠죠?"

"예, 예...."

"배관이 터지면요? 자작님네 라코나타 원단을 염색할 맑은 물이 공급되지 않겠지요?"

"그렇...겠지요."

"그러니까 추위 때문에 상수도 배관이 얼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써 드릴 계획입니다. 관리를 해야지요. 한데 관리를 하려면? 당연히 돈이 들지 않겠습니까?"

"...."

"이거 다 자작님을 위해서 들이는 수고와 노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상수도관 관리를 안 하면 누가 손해를 보겠습니까? 누구 눈물샘에서 피눈물이 팡팡 터지겠습니까? 그래도 그냥 모른 척할까요? 아니지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자작님의 불행이 제 불행 아니겠습니까?"

"그, 그렇습니까...."

"당연하신 말씀을. 그러니까 관리비 상승에 따른 수도세 인상은 불가피하다, 이 말씀인 겁니다."

"하면 수도세를 얼마나...."

"소박하게 지금의 세 배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이 미친 날강도야!

하마터면 자작은 저도 모르게 빽 외칠 뻔했다.

저 로이드라는 놈은 악마, 그 자체다.

그는 울분 속에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며 간신히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반문했다.

"세... 세 배 말입니까?"

"설마 많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

"그렇죠? 달랑 두 배만 내는 게 아니라서, 이제야 비로소 합당한 수도세를 내게 되었기에 안도하시는 거 맞으시죠?"

"...."

"자작님, 저는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아주 잘 이해하는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실시간으로 붉으락푸르락.

울상이 되어가는 라코나 자작의 얼굴을 보니 이처럼 상큼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행패?

불합리한 갑질?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예전에 라코나 자작이 이쪽을 괴롭힌 전력이 있어서?

아니었다.

'이건 지극히 현실적인 조치에 불과하니까.'

전격적인 수도세 인상.

사실 이건 단순한 화풀이나 감정적 쾌락을 위한 조치가 아니다.

오히려 냉정하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한 행동이다.

지금, 프론테라 백작령이 처한 현실 때문이었다.

'왕실에 대한 세금 면제. 거기에 대규모의 지원금. 하지만 그럼에도 돈이 끝도 없이 들어. 계속 필요해. 재원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해.'

그러던 차에 라코나 자작령이 휘하 영지가 되었다.

심지어 라코나 자작령은 피난민을 감당하고 있지도 않았다.

즉, 이쪽 덕분에 몬스터 도미노 현상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피난민은 떠맡지 않는, 꿀만 빠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그건 또 그냥 못 봐주겠거든.'

십시일반.

상부상조.

이쪽이 감당하고 있는 피난민에 대한 부담.

그걸 휘하 영지인 라코나 자작령도 함께 짊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게 바로 지극히 현실적인 조치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알아본 바로 자작령은 자금 사정도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그러니 세 배 정도로 올린 수도세 정도는?

힘겹게나마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참에 우리 백작령 공병대의 규모도 한층 늘려볼까 합니다. 자작님네 영지의 병력을 최대한 선별해서 말이죠."

너만 꿀을 빨 수는 없다.

내가 빨지 못하면 너도 못 빤다.

아니, 내가 뺑이를 치면 너도 함께 쳐야 한다.

네가 나보다 훨씬 많이 쳐야 내 속이 편해진다.

그렇듯 철두철미한 물귀신적 모토에 입각한 로이드의 명령이 속사포로 이어졌다.

134화. 세상에 공짜란 없다 (2)

"고, 공병대를 말입니까?"

"예. 어떤 친구들인지는 보셨지요?"

"물론...."

봤다.

지난번 상수도를 설치할 때였던가.

토목 시공에만 잔뼈가 굵은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기, 그런데 그 공병대를 늘리는 일에 어째서 제 영지의 병사들을...."

"재난 극복, 모두가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로이드의 태연한 목소리.

그걸 듣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저 말에 숨은 뜻을 단박에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 말씀은...."

"네, 짐작하셨군요. 그 짐작이 맞습니다. 어째서 프론테라 백작령이 특별 직할시로 지정되었겠습니까? 이번 몬스터 도미노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재건의 중심지로 삼겠다는 국왕 전하의 복안이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그 재건 작업에 손을 보태기 싫으신 거라면 뭐, 이제 곧 다가올 첫 분기 보고 때가 기대되네요. 재건에 반대하시는 자작님의 뜻을 아주 상세히 국왕 전하께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저, 저기! 제 물음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라면요?"

"그게...."

"병사, 지원하실 겁니까?"

"...."

라코나 자작은 숨이 턱 막혔다.

사실상 이건 지원이 아니다.

그저 일방적인 징발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쪽이 너무나 확실한 명분을 틀어쥐고 있다.

'재건 작업은 국왕 전하의 지시. 공병대는 재건 작업에 앞장서는 핵심 인력. 그런 공병대로의 병력 차출을 거부했다간? 난색을 표했다간?'

국왕과 왕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힐 것이다.

아니, 극단적인 경우엔 역모로 내몰릴지도 모른다.

'저놈이라면 그렇게 만들고도 남을 놈이야. 충분히 가능해.'

라코나 자작은 로이드를 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로이드 프론테라.

혓바닥에 악마 수십 마리를 키우는 놈.

저놈이라면 특유의 악랄한 혀 놀림으로 자신을 천하의 쓰레기로 포장하여 국왕에게 알릴 것이 뻔하다.

그러면 자신은 빼도 박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상사를 맞이하게 되리라.

라코나 자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면 공병대로 차출하실 병력 규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건 자작님의 양심과 성의에 맡겨보도록 할까요?"

"...."

제발, 살려줘.

차라리 그냥 몇 명을 보내달라고 딱 잘라서 말해줘.

라코나 자작은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로이드는 화사하게 웃었다.

원래 음식 메뉴 물어볼 때도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제일 곤란한 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심과 성의에 맡겨서.

적절한 규모를 정해서.

그 두루뭉술한 말에 자작은 아득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으리라.

그는 그런 자작의 부담감에 더욱 크고 아름다운 쐐기를 투콱 꽂아 넣었다.

"공병대 지원 규모는 알아서 정하세요. 내일 정오까지 보고서를 올리시면 됩니다."

"보고서를... 내일 정오까지 말입니까?"

"네."

"거기에 몇 명을 보낸다고 써야...."

"알아서 하시라니깐요? 양심껏. 성의껏. 우리의 우정이 변치 않을 적절한 숫자를 적어서. 부디 제가 슬퍼지는 일이 없도록. 알겠습니까?"

"...."

"자,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까요."

팔락.

로이드가 서류를 경쾌하게 촥촥 넘겼다.

그의 계획안이 착착 드러났다.

피난민에 대한 식량과 의복 지원.

각종 공사에 필요한 목재 등의 물자 지원.

자작령에 거주하는 기술공 전원에 대한 차출 계획 등등.

그야말로 이름만 '지원과 차출 계획'이지 실상은 '착취 계획'이나 다름없는, 일방적인 명령의 퍼레이드였다.

하지만 라코나 자작에게는 반항할 방법이 없었다.

저항할 명분과 역량 또한 찾아볼 길이 없었다.

그저 무력감 속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끄덕이는 것만이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리액션일 뿐.

"...알겠습니다."

역시.

과거에 악하게 사는 게 아니었다.

이웃 영주가 조금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막 대하는 게 아니었다.

뒤늦은 뼈저린 후회가 라코나 자작의 골수까지 스몄다.

그러나 그 후회는 말 그대로 너무나 늦은 것이었다.

'당연하지. 한 번 찍힌 놈은 끝까지 머리통을 찍어 버리는 게 내 철칙이니까.'

사람은 바꿔서 쓰는 게 아니다.

특히 이쪽에게 악의적인 위해를 가한 놈은?

이쪽이 약점을 보이는 순간 언제든 또 그 짓거리를 반복할 것이 뻔하다.

그게 로이드의 생각이었다.

아니, 경험이었다.

대한민국의 고시원에서 살던 무렵.

그곳에서 얻었던 쓰라린 교훈 덕분이었다.

'옆방에서 공무원 공부하던 그놈, 지금 생각해도 밥맛이야.'

고시원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던 무렵이었다.

옆방에 골 때리는 사람이 있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던가.

한데 밤만 되면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댔다.

그냥 볼륨만 높게 트는 정도가 아니었다.

여행 가방 크기의 우퍼 스피커로 틀었다.

둥둥둥 저음 소리가 벽과 바닥을 타고 입체 서라운드로 이쪽 방까지 울려댔다. 아니, 침대까지 진동이 전해질 정도였다.

문방구에서 파는 귀마개 따위로 차단될 진동이 아니었다.

참다못해 고시원 총무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딱 하루 잠잠한가 싶더니 다음날부터 또 우퍼 스피커 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결국, 옆방 문을 두드렸다.

얼굴을 맞대고서 정식으로 따졌다.

그랬더니?

황당하게도 주먹이 날아왔다.

'진짜 미친놈이었지, 그 인간.'

너무나 다짜고짜 날아온 주먹이라 한 방 얻어맞고 말았다.

눈앞이 번쩍.

눈가에 시커멓게 멍이 들었다.

때맞춰 달려온 총무 덕분에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억울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폭행으로 고소하겠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인간, 안색이 싹 변하더니 나한테 싹싹 빌기 시작했어.'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걸까.

정말 불쌍할 정도로 이쪽에게 빌었다.

혹시나 벌금형이라도 받게 되면 고시원비 내기 어려워져서 방 빼야 한다고.

한 사람 인생 구해주는 셈 치고 한 번만 봐달라고.

무릎을 꿇고는 눈물까지 보이며 매달렸던가.

'그래서 나도 마음이 약해졌지.'

자신이 너무 매몰찬 거 아닌가.

그런 회의감이 불쑥 치밀었다.

결국, 용서해 주고 말았다.

그리고 한 달 뒤엔 크게 후회했다.

그 인간, 1개월쯤 눈치를 보더니 다시 우퍼 스피커를 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어오, 지금 생각해도 빡치네.'

옛 기억에 잠겨 있던 그는 얼굴이 확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때의 빡침 가득한 교훈이 알려주고 있었다.

라코나 자작.

저 자는 그때 고시원 옆방에 있던 놈과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쉽게 용서해 주고 포용해 주면?

그러다 약점을 보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뒤통수를 치고 약점을 물어뜯을 자다.

강약약강.

강한 상대 앞에 자연스레 꼬리 내리는 타입.

상대가 약한 걸 아는 순간 한없이 악랄해지는 본성.

그런 종류의 인간이니까.

'그러니 용서는 없어.'

이렇게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잘근잘근 착취하고 뽑아먹으리라.

이쪽이 위라는 사실을 뼈와 영혼에 똑똑히 새겨 주리라.

그는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라코나 자작을 쳐다보았다.

"혹시 오늘 말씀드린 조치들이 서운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아니시죠?"

"...예."

"다행입니다. 자작님이 너그러우셔서."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그만...."

"벌써 가시게요?"

"아, 예."

"흐음, 섭섭해라."

"...."

"오신 김에 거기 뒤쪽에 계신 쿠르노 경, 오랜만에 우리 하비엘이랑 대련 좀 붙여보고 가셔도 될 텐데. 오고 가는 대련 속에 실력도 함께 키우고. 흩날리는 땀방울 속에 우정도 피워내고. 다 이렇게 교류하고 친목도 키워가고,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움찔!

말없이 자작을 수행하던 쿠르노 경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로이드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휘었다.

"아, 혹시 기저귀를 안 채우고 데려오셨습니까? 그럼 대련은 곤란하겠네요."

"...."

"농담입니다. 하하하! 웃자고 한 이야기인 거, 아시죠? 우리 사이니까?"

"아, 하하하... 우리 사이니까."

허튼짓하면 죽는다.

말 그대로 국물도 없다.

라코나 자작은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을 향해 빙글빙글 웃는 로이드 프론테라.

그의 눈에 웃음기가 없다는 걸 깨달은 덕분이었다.

'....'

꿀꺽.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눈동자.

라코나 자작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지못해 웃어야 했다.

그렇듯 한참이나 로이드의 비위를 맞춰주고 나서야 곱게(?) 물러날 수 있었다.

"후우."

라코나 자작을 내보낸 로이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딱 좋아. 적당히 기도 죽였고. 얻어낼 것도 충분히 얻었어.'

세 배로 올린 수도세.

공병대로 차출할 병력.

옷감과 목재 등의 물자까지.

모두가 피난민 캠프를 운용하고 영지를 키워가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자원이었다.

'그러니 이제 움직여야지.'

이제는 다음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다.

그는 집무실 한쪽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챙겼다.

그걸 들고 하비엘과 함께 피난민 캠프로 갔다.

"아앗? 로이드 님?"

한참 점심 배급을 준비하던 병사들이 보였다.

이쪽의 등장에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보내어 왔다.

로이드는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어, 그래 나야.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해."

"...."

당연히 병사들이 그를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일터이건 상급 관리자가 현장을 방문하면 일하는 사람들은 괜히 바빠지고 분주해지는 법.

느긋하게 젓던 국자가 눈에 띄게 바빠졌다.

수프와 빵을 옮기던 일손이 분주해졌다.

식판과 스푼을 놓는 동작도 빨라졌다.

덕분에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거 조금 미안해지네.'

자신의 등장 때문에 분주해진 배급조 병사들.

그런 그들의 속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는 그였다.

이런 상황.

자신도 제법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군대에서. 명절에 사단장이니 정치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병사들 위로한답시고 방문하면 부대 분위기 끝장났었지, 아주.'

원래는 쉬어야 할 휴일이었다.

민족의 명절을 만끽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단장이나 군단장, 정치인 등의 높은 분들께서 부대를 방문해주시면?

아이쿠 성은이 망극하여라를 외치며 부대의 모든 시설을 때 빼고 광내느라 등골이 휘어야 했다.

쉬는 거?

휴일을 즐기는 거?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도 민폐 끼치지 말자. 최대한 용건만 빨리 마치고 뜨자.'

괜스레 분주해진 병사들.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한쪽에 고이 접어두었다.

용건을 마치고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급을 받으려고 줄을 선 피난민들이 가득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근처를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피난민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기, 저분? 혹시 그분 아니신가?"

"누구?"

"누구긴 누구야. 로이드 님. 이곳 영주님 아들."

"아! 그분?"

누군가의 눈빛이, 손짓이 그를 가리켰다. 확인했다.

웅성거림이 점점 퍼져갔다.

"정말이네. 로이드 님이셔. 진짜 로이드 님이야."

"듣기로는 저분이 우릴 받아달라고 여기 영주님을 설득하셨다지?"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이 피난민 캠프도 저분이 만들어주신 거래요."

"이 따뜻한 바닥을 저분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배급을 위해 서 있던 줄이 뭉개졌다.

뭉개진 인파가 로이드 주위로 몰려들었다.

웅성거림이 환호와 감사의 목소리로 변해 갔다.

"진짜다, 로이드 님이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아들이 살았습니다!"

"저도 그래요! 로이드 님 덕분에 우리 가족이 따뜻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소란이 피난민 캠프 전체로 번져 갔다.

다른 배급장에 줄을 서 있던 인파까지 몰려왔다.

이내 수천이 넘는 사람이 로이드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엄청나군.'

로이드와 나란히 걷던 하비엘은 저도 모르게 경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광경은 맹세코 처음이다.

수천이 넘는 인파였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단 한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고맙다고,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언젠가 꼭 보답을 드리겠노라고.

누군가는 맨발로 달려왔다.

또 누군가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누군가는 주름 가득한 손으로 로이드의 손을 뜨겁게 붙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로이드는 인자한 미소와 눈빛으로 피난민들의 성원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었다.

실로 가슴 따뜻해지는 모습이었다.

감동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 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비엘의 눈매가 샐쭉해졌다.

눈동자에 의심의 빛을 떠올렸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는 로이드는 저렇게 마냥 인자하기만 한 인간이 절대로 아니니까.

'쪼잔하지. 짠돌이야. 소금쟁이보다 더해.'

사실이었다.

자그마한 손해에도 질색을 했다.

동전 한 닢, 단추 한 알이라도 손해를 보면?

며칠은 족히 끙끙대며 투덜거리곤 했다.

세상에 저런 짠돌이가 있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한데 수천, 수만이나 되는 피난민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어. 왕실의 명령 때문에? 나중에 영지의 인구로 흡수될 거라는 장기적인 안목 때문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로이드 님의 성격으로 봐서는... 분명 뭔가 더 있을 거야.'

아무리 왕실의 명령이 있어도.

중장기적 이득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고 당장 엄청난 손실과 수고를 대가 없이 감당할 인간이 아니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자선사업가와 가장 거리가 먼 인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는 설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자신 있게 로이드를 지목할 것이다.

'그런데 피난민들의 감사와 감격을 받으며 그저 허허거리고만 있다고? 저 치사하기 짝이 없는 좀생이가? 천만의 말씀.'

저 인간의 쪼잔함과 얍삽함은 항상 곁에서 지켜본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러니 저 인간.

분명히 뭔가 노리는 게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하비엘은 가자미눈을 빛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아까 집무실에서부터 챙겨온 상자.

그 속에서 로이드가 꺼낸 서류 뭉치가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예예, 이렇게 알아서들 모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주목. 여기, 계약서를 좀 봐주실까요?"

팔랑팔랑.

피난민들을 향해 계약서를 흔들어 보이는 로이드.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놀부 영감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칠 법한 미소가 상큼하게 피어나 있었다.

135화. 세상에 공짜란 없다 (3)

"자아, 이건 계약서라는 겁니다."

팔랑팔랑.

로이드가 손을 흔들었다.

그 손에 들린 계약서가 보란 듯이 팔랑거렸다.

자연 피난민들의 시선이 계약서를 향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계약서냐. 뭐, 에둘러 말하지 않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밝히겠습니다. 바로 '동부산맥 계단식 농경지 개간 공사에 대한 참여 신청서'입니다."

"...."

계단식 농경지 참여... 뭐?

길고도 복잡한 이름이었다.

피난민들 대부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줄여서 '개간지 공사 참여 신청서'라고 하겠습니다."

"...."

아하.

개간지 공사를 하신대.

그래서 참여 신청서를 잔뜩 가져오셨대.

그런데 왜?

피난민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로이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들을 위해 가져온 겁니다. 왜냐. 정착하셔야지요. 복잡하고 비좁은 캠프에서만 지내실 게 아니라. 설령 아파트에 입주하고 나서라도. 가족이 일굴 땅을 얻고, 돈도 벌고, 다시 사람답게 사셔야지 않겠습니까?"

"...."

"다들 지금처럼 지내시는 거, 결코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이드의 말이 모두의 가슴에 작은 조약돌을 던졌다.

조약돌 떨어진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피난민 모두가 생각했다.

저 말, 맞다고.

마침 그런 생각, 하고 있었노라고.

이대로 거지처럼 사는 거, 이젠 지쳐가던 참이라고.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피난민들의 가슴속에 떠오른 솔직한 감정이었다.

비록 지금은 집과 터전을 잃고 피난민이 된 터였다.

말이 피난민이지, 그저 거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신세였다.

이곳 프론테라 영지의 일방적인 호의에 기대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버린 인생.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대다수가 원래 이런 삶을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피난민이 되어 헐벗은 어떤 이는 한때 많은 땅을 소유한 지주였다.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밭을 일구던 농부였다. 또 누군가는 나무꾼이었고, 어떤 이는 양 떼를 키웠다.

설령 소작농이었을지언정 나름 열심히 땀 흘리며 그 대가로 가족을 먹여 살리던 성실한 가장이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처럼 모든 걸 잃은 거지가 되어 피난민 캠프에 의존하는 신세는 아니었다.

아니, 앞으로도 이런 의존적 상황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 그게 사람 마음이니까.'

로이드는 생각했다.

땀 흘리며 일을 하더라도 집단 텐트보다는 내 집에서.

얼굴도 모르는 다수가 아닌 내 가족과 함께.

그렇듯 오순도순 인간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

그게 누구나 품을 당연한 소망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랬어.'

문득, 대한민국에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부모님과 집을 모두 잃은 직후의 시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인생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때였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어.'

처음엔 친구들 자취방에 얹혀 지냈다.

우정의 이름에 기대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할 짓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눈치가 보였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신세만 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네 자취방을 나왔다.

학교 동아리방에서 지냈다.

하지만 금방 후회했다.

'거기선 더 눈치가 보였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알바를 했다.

약간이나마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고시원에 들어갔다.

몸은 조금 힘들어졌을지언정 마음은 차라리 그게 편했다.

'자유가 보장되는 내 공간이 필요했던 거야. 아마 이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이겠지.'

얹혀살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자존심 상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마 다들 그런 심정일 터다.

로이드는 피난민들의 그런 심리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계획을 꾸렸다.

그 계획이 바로 지금 발표하는 개간지 개발 계획이었다.

"설명하자면 간단합니다. 개간지 개발 공사에 참여하세요.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에게는 개간지를 분양해 드릴 겁니다. 즉, 농사짓고 정착할 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저와 여러분 사이에 그걸 약속으로 남기기 위한 서류이고 말입니다."

팔랑!

다시금 계약서를 흔들었다.

웅성거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재빨리 계약 테이블을 차렸다.

"자, 선착순입니다! 늦으면 일자리가 가득 차서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선착순.

어느 세상에서나 집단을 대상으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마성의 단어.

그 단어에 이끌린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계약 테이블에 앉았다.

"저기, 이 계약서에 서명하면 일할 수 있는 겁니까요?"

"물론이지."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계단식 농경지를 만드는 공사에 참여할 거야."

"공사라고 하시면...."

"삽질. 곡괭이질. 혹은 흙을 퍼서 옮기거나. 혹시 삽질 안 해봤어?"

"아뇨, 익숙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평생 흙 만지며 산 놈입니다요."

"좋아. 딱 내가 찾던 바람직한 인재상이네."

"그, 그렇습니까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여기 서명?"

"아, 예."

그렇게 한 사람.

"저어... 여자도 일할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노가다엔 남녀가 따로 없거든."

"그럼 저, 할게요."

"남편은?"

"허릴 다쳐서요."

"그래. 고생이 많았겠네. 여기 서명하면 돼."

그렇게 두 사람.

"저희 형제 전부 참가하겠습니다!"

"어, 그건 곤란한데."

"예? 어째서 말입니까?"

"한 가정에 한 사람만 참여 가능해. 보다시피 지원자가 넘쳐날 예정이라서."

"그런...."

"혹시 형제들이 모조리 참여하면 더 많은 논밭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거야?"

"예...."

"그런 기대는 접어 두시고. 대신 형제들끼리 돌아가면서 일할 수 있잖아? 그럼 그만큼 일이 덜 힘들 거고, 남들보다 적은 수고로 땅을 얻을 기회니까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해."

"...."

"혹시 싫어?"

"아,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오케이. 여기 서명하시고."

그렇게 세 사람.

다시 다섯 사람.

열 사람을 넘어 백 사람.

백을 넘어 천을 헤아리도록.

수많은 지원자들의 명단이 계약서를 빼곡하게 채워갔다.

그럴수록 로이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알차게 피어났다.

'좋아. 반응 좋고. 계약도 순조롭고.'

어차피 떠맡은 피난민이다.

결국엔 주민으로 정착시킬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을 자연스럽게, 합법적으로, 서로 윈윈하는 조건으로 개간지 개발에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설마 처음부터 계약을 위해 캠프를 방문한 거였습니까?"

"어, 당연하지."

피난민 캠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계약서가 담긴 상자를 들고 따라오던 하비엘.

그가 던져오는 질문에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차피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잖아?"

"...."

"뭐. 왜. 뭐. 설마 내가 얌체 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문득이지만, 로이드 님이 이런 시골에서 태어난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로이드가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하비엘이 뜻 모를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 왕도에서 태어나셨다면 대단한 협잡꾼 정치인이 되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혹은 아첨을 일삼는 간신배라거나."

"...."

"그게 아니라면 혀놀림 하나로 뒷골목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거, 내가 그런 놈으로 보였던 거야?"

"예."

"평소부터?"

"예."

"헐. 1초도 고민 안 하고 대답하는 것 좀 봐."

"솔직한 느낌이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하비엘은 그만 싱긋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로이드가 미처 생각지 못한 말을 덧붙였다.

"그런 얌체 같은 잔머리를 좋은 곳에 써 주셔서 다행입니다. 고맙기도 하고."

"...."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겁니까?"

"어, 욕인지 칭찬인지 판단 좀 해보느라고."

"당연히 욕입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화는 안 내시는 겁니까?"

"어. 타이밍 놓친 거 같아서. 뒷북치면 추하잖아."

"사실은 칭찬이었는데."

"안 믿어."

"정말입니까?"

"그럼 뒤늦게 감동의 눈물이라도 뽑아 주랴?"

"부탁인데 참아 주시죠. 소름 끼칠 것 같습니다."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래."

로이드도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듯 둘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때 많은 빚에 깔려 허덕이던 가문.

내세울 것 하나 없던 초라한 시골 영지.

그랬던 곳이 어느새 이렇게 컸다.

그만큼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전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된 걸까.

로이드도, 하비엘도, 그건 알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이 밝았다.

로이드는 본격적인 개간지 공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 첫 과정은 언제나 그랬듯 측량이었다.

'휴우. 보기보다 경사가 제법 심하네.'

이른 아침부터 석탄 광산을 지나 동부산맥 기슭을 올랐다.

개간지 공사를 통해 논밭으로 탈바꿈시킬 땅.

그곳의 경사와 토질, 물 빠짐을 면밀히 파악했다.

'공사가 조금 까다롭긴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가 최적지야.'

누군가는 왜 하필이면 산기슭을 개간하느냐 물을 터다.

영지에 다른 땅이 없냐고.

평평한 빈 땅이 많지 않냐고.

당연하다는 듯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프론테라 영지에는 대규모의 논밭을 꾸릴 공간이 별로 남지 않은 터였다.

'남쪽은 마레즈 개간지를 만들며 개발을 끝냈지. 서쪽은? 우리 영지 구역이 아니야. 아무리 백작령으로 승격했더라도 영지 밖의 땅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지. 거긴 국왕 누님네 땅이니까.'

그곳을 함부로 개간하면?

심하게 말하면 반역이 된다.

물론 반역으로까지 몰리진 않을 테지만, 최소한 문책을 받거나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은 충분했다.

'굳이 그런 정치적인 부담을 질 필요까진 없지. 그럼 북쪽이 남는데, 거긴 또 농경지로 만들기엔 땅이 영 별로거든.'

사실 처음엔 영지 북쪽 지대를 개간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아파트 시공을 시작하면서 그 생각을 접었다.

토질이 상상 이상으로 구렸기 때문이었다.

'농지로는 너무 적합하지 못했어. 잡초만 겨우 자랄 땅이었지, 거긴.'

결국, 남는 곳은 영지 동쪽인 동부산맥 기슭밖에 없었다.

일단 비옥했다.

오랜 세월 낙엽과 부엽토가 쌓여 있었다.

초목을 정리하고 평탄화만 시킨다면?

충분히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땅이었다.

게다가 영지의 구역 밖이기는 하되,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국왕의 땅이 아니기에 개발에 부담이 없었다.

아니, 개발에 성공한다면 왕국의 영토를 늘렸다는 소소한 공적을 내세우기에도 안성맞춤이리라.

'그러니 이곳이 딱 좋아. 영지 내부의 자투리땅은 나중을 위해서 비워 둬야 하고.'

기존의 촌락과 촌락 사이.

아직 쓰임이 없는 자투리 대지.

그곳은 나중에 확장될 주거 지역이 차지할 땅이다.

혹은 상업지구가 들어서야 할 공간이다.

영지가 더욱 성장할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로이드는 그러한 대한민국표 신도시 계획적 청사진을 가슴에 품고서 측량 작업을 이어갔다.

측량이 완료된 뒤는 시공 방법을 결정할 차례였다.

로이드는 며칠 동안 침실에 틀어박혔다.

측량 결과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옹벽. 그게 이번 개간지 공사의 핵심이야.'

경사가 가파른 산기슭이다.

그곳을 깎아 농토를 만드는 일이다.

자연히 동남아시아에서 볼 법한 계단식 논밭을 모델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계단식 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어설프게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바엔 내 방식대로 가자. 이걸 대규모의 연속적 옹벽 시공이라고 생각하면 돼.'

옹벽.

누구나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조물이었다.

산이든 언덕이든.

비탈을 깎은 자리에 세운 콘크리트벽.

그걸 옹벽이라고 보면 된다.

도시의 산동네.

혹은 고속도로나 국도 주변.

눈길을 돌려보면 옹벽은 어디에나 흔하고 평범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실상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흔해 보여서 만만해 보이지. 그냥 벽만 세우면 될 것 같지. 하지만 달라. 절대 만만하지 않아. 조금만 설계가 잘못되면? 혹은 시공에 하자가 있으면? 어느 순간 손 쓸 틈도 없이 와르르 무너져.'

그렇게 도로가 유실된다.

혹은 집이 파묻힌다.

산사태가 일어난다.

그만큼 옹벽은 철저한 계산과 정확한 시공이 필요한 구조물이었다.

'그래도 할 수 있어. 설계 스킬을 활용하는 거야.'

대규모의 계단식 농경지.

그 수많은 층을 각각 지탱할 수직 옹벽.

로이드는 그 구조물을 '돌망태 옹벽'으로 짓고자 마음먹었다.

'여기선 이게 딱이야.'

가끔 국도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보면 그런 곳이 있다.

산을 깎아놓은 곳.

그 깎인 면이 돌덩이로 된 곳.

그곳이 철망으로 덮여 있는 모습을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알뜰살뜰하게 '낙석 주의' 표지판도 데코레이션으로 붙어 있고 말이다.

그게 바로 일종의 돌망태 옹벽이었다.

'상대적으로 시공이 간단하지. 철망을 미리 짜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굵은 자갈과 쇄석을 우르르 쏟아넣으면 되니까.'

사실 처음엔 일반적인 콘크리트 옹벽을 만들까도 싶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었다.

'한겨울 시공이야. 너무 추워. 백 퍼센트 동결융해 생길 각이야. 시멘트가 제대로 양생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방울이도 좀 쉬어야 돼. 요즘 아파트 짓는다 뭐다 하면서 계속 화산폭발 스킬을 펑펑 써댔잖아?'

방울이가 많이 혹사당한 상태였다.

그런데 또 일을 시키면?

계속 화산폭발 스킬을 쓰게 하면?

'안 돼. 당분간 쉬는 게 나아. 안 그럼 걔 똥꼬 까져.'

자고로 아무리 일이라지만 방귀도 적당히만 뀌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로이드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근데... 돌망태 옹벽을 만들려고 해도 또 문제가 있네.'

문제는 바로 철망을 만들 소재였다.

'와이어? 안 돼. 방울이도 좀 쉬어야 되니까. 그냥 철근? 남는 거 없어. 비축해둔 걸로 아파트 시공에 쓰기도 빠듯해. 그럼 밧줄? 그것도 좀 아쉽지. 강도가 너무 약한 데다 햇볕에 장시간 노출되면서 푸석푸석해지고 약해질 테니까.'

로이드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생각해볼수록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철망으로 쓸 와이어를 뽑거나 구한다고 해도 또 문제가 남아. 아연 도금을 해야 돼. 안 그럼 철망에 녹이 슬 테니까. 녹이 슬면? 부스러지고, 끊어지고, 철망이 터지고, 옹벽이 불안정해지고,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안 돼. 그럴 순 없어.'

사실 그냥 아연 도금을 하면 된다.

하지만 돈이 너무 든다.

가뜩이나 간당간당한 주머니였다.

왕국에서 지원받는 금액으로도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연 도금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자. 돈이 덜 드는 다른 방법이나 소재를 찾아내는 게 베스트야.'

그때부터였다.

그는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한 고민에 빠졌다.

돌망태 옹벽에 쓸 철망.

비싸게 아연 도금된 와이어 말고.

값이 싸면서도 질기고, 튼튼하며, 부식과 변화가 없을 소재.

'떠올려라. 으으, 떠올려라.'

고민으로 가득한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다.

사흘이 넘어가고, 나흘째가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적절한 방법이나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덕분에 로이드는 식사마저도 깨작깨작.

온종일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지냈다.

덕분에 그와 붙어 다니는 환상종들도 걱정이 늘어갔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뽀도동? 뽀동?"

결국, 보다 못한 뽀동이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고민에 잠겨 있던 로이드를 향해 조언을 해주었다.

"뽀동! 뽀도동? 뽀동!"

"...뭐? 이참에 새로운 친구를 뽑아보면 어떻겠냐고?"

"뽀동!"

뽀동이가 동그란 고개를 뽀잇 끄덕였다.

책상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있던 로이드가 고개만 까딱, 뽀동이를 향해 돌렸다.

"혹시 환상종 랜덤 뽑기를 해보라는 거야?"

"뽀동!"

"예를 들자면, 지금 내 고민을 해결해줄 친구가 나와주길 기대하면서? 튼튼한 철망에 쓰일 소재를 만들어줄 수 있는?"

"뽀도동!"

"흐음, 그게 잘 될까 모르겠네."

"뽀동?"

"그거 말 그대로 랜덤인 거잖아. 어떤 환상종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뽀도동?"

"그런데 내가 원하는 녀석이 딱딱 맞춰서 나와줄까? 좀 회의감이 드는데."

사실 그랬다.

환상종 랜덤 뽑기.

그건 말 그대로 랜덤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지금까진 운이 좋았지만 이번에도 그래 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로이드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이다.

뽀동이나 방울이 때도.

하망이를 뽑았을 때도.

모두 운이 기막히게 좋았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데 그때였다.

지금껏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방울이가 나섰다.

"방울! 빠방울, 방울!"

"...뭐? 그게 아니라고?"

"방울!"

방울이가 고개를 끄덕.

뒤이어 세 환상종이 각각 한 마디씩을 보탰다.

"하마망? 하망, 하마망!"

"뽀동! 뽀도동!"

"방울!"

어느새 나란히 서서 이쪽을 향해 조언을 들려주는 세 환상종.

그 조언을 귀에 담으며 로이드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뭐? 랜덤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고?"

136화. 프리미엄 랜덤 뽑기 (1)

"...뭐? 랜덤의 확률에 특별한 영향을 주는 방법이 있다고?"

"뽀, 방, 하!"

세 환상종이 동그란 머리를 끄덕.

어찌나 세게 고개를 끄덕였는지 통통한 뱃살도 뽀잇 출렁거렸다.

로이드가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자세를 고쳐잡으며 물었다.

"확률에 영향을 준다니. 그럼 설마 내가 원하는 종류의 환상종이 나올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인 거야?"

"뽀, 방, 하!"

"...."

너무나 확신하며 대답하는 모습.

환상종은 거짓말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저 대답은 진짜다.

'어, 그렇다면 이거. 큰 도움이 되겠는데.'

로이드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굴려보았다.

자신은 지금 돌망태 옹벽의 철망에 쓸 소재를 고민하고 있던 상황.

그런데 그 철망을 만들어줄 환상종이 떡하니 나와 준다면?

'한 큐에 고민 해결이지.'

아무리 봐도 핵이득이 확실했다.

로이드는 기대하며 물었다.

"그럼 그 방법이 뭔지 알려줄 수 있어?"

"뽀동!"

뽀동이가 해맑게 웃었다.

"뽀도동! 뽀동! 뽀동동!"

"뭐? 간절히 원하면 된다고?"

"뽀동!"

"...."

"뽀동, 뽀도동, 뽀동!"

"그러니까, 어떤 능력을 지닌 환상종이 나와 주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이미지를 잡고서 간절히 염원하면 그 마음이 결과에 영향을 주는 거라고?"

"뽀동!"

뽀동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

그러면서 제 뱃살을 퐁퐁 때렸다.

"뽀도동, 뽀동!"

자신이 증거라고.

방울이와 하망이가 증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반신반의하던 로이드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은 의심을 내려놓았다.

'으음. 어쩌면 저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간절한 염원과 확률의 변화.

얼핏 들으면 얼토당토않은 소리 같았다.

하지만 뽀동이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겪었던 랜덤 뽑기를 돌이켜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지금까진 운이 굉장히 좋았지.'

정말로 그랬다.

뽀동이도.

방울이와 하망이도.

모두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던 순간에 가장 적절한 능력을 가지고 소환된 녀석들이었다.

'종합적인 굴착 능력이 필요하던 때에는 뽀동이가 나왔지. 터널 시공을 할 때는 방울이가 나왔고, 마레즈 개간지의 물을 제거할 때는 하망이가 나와 줬어.'

지금까지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여겨 왔다.

이것 또한 랜덤의 축복인 거라고.

한국에선 죽어라 안 걸리던 로또 운이 여기로 몰빵된 것 같다고.

그렇게만 생각해 왔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닌 듯했다.

'마냥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어. 이 아이들을 뽑을 때 내가 간절히 바라고 염원하며 무의식중에 그렸던 이미지. 그게 랜덤 뽑기의 확률에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닐까.'

문득, 한 줄기 희망이 엿보였다.

가능성의 향기가 솔솔 피어났다.

로이드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결심했어."

세 환상종을 보며 활짝 웃었다.

"우리, 네 번째 랜덤 뽑기를 해 보자."

"뽀, 방, 하!"

덕분에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가 신이 났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뽀동이가 환영 팻말을 꺼냈다.

방울이는 현수막을 짜란 펼쳤다.

하망이는 색종이 가루 뿌릴 준비를 했다.

"...설마 평소부터 준비해 두고 있었던 거야?"

"뽀, 방, 하!"

"새 친구 뽑는 날 써먹으려고?"

"뽀, 방, 하!"

"근데 여기서 뽑진 않을 건데. 여긴 침실이라서."

"뽀, 방, 하!"

"빨리 나가자고? 연무장으로?"

"뽀, 방, 하!"

"저기, 그래도 당장은 조금 곤란할 거 같거든? 우리 기다리자. 인적 없을 밤까지."

"뽀, 방, 하?"

"아무래도 지금은 대낮이라 보는 눈이 많을 것 같아서. 다들 내가 소환 마법으로 너흴 뽑은 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랜덤 뽑기를 실행하는 모습은 가급적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게 나을 거야."

확실히 그랬다.

백작 부부도, 하비엘도, 영지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두 RP의 존재는 까맣게 모른다.

다들 이쪽을 소환 마법에 능통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따 하비엘 재우고 나서 자정에 연무장으로 가자. 괜찮겠지?"

"뽀, 방, 하!"

"그때까지 그거 계속 들고들 있을 거야?"

"뽀, 방, 하!"

"아직 자정까지 반나절 넘게 남았는데?"

"뽀! 방! 하!"

"...."

그동안 새 친구를 뽑아 주길 엄청나게 기다렸나 보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자정의 달빛을 받으며 로이드는 연무장에 내려갔다.

마음속으로 이번에 뽑히길 바라는 환상종의 능력을 떠올렸다.

'철망을 만들어 줄 녀석. 혹은 철망으로 쓸 대체품을 생산해 줄 녀석이 나와 주면 좋겠는데.'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간절히.

이미지를 그리면서 염원했다.

그리고 랜덤 뽑기 메뉴를 열었다.

딩동.

[환상종 랜덤 뽑기]

[R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랜덤 뽑기 비용 (4회차) = 150 RP]

[현재 보유 중인 RP : 4,783]

'좋아. RP는 완전 넉넉해.'

그동안 자린고비처럼 악착같이 RP를 모았다.

정말 위급한 일이 아니면 쓰지도 않고 아껴 두었다.

덕분에 무려 5천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RP가 모여 있었다.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가즈아!'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는 염원하는 환상종의 능력과 이미지를 떠올리며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랜덤 뽑기를 실행합니다.]

파아앗!

허공에 창백한 빛이 생겨났다.

달빛 아래의 어둠을 잠식하며 회전했다.

그걸 보며 로이드는 자세를 살짝 낮추었다.

어깨의 힘을 빼고 빛의 덩어리를 주시했다.

그런 그의 자세는 마치 날아오는 공을 기다리는 야구 외야수의 모습과 흡사했다.

'분명 뭔가가 튀어나올 거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창백한 빛이 번쩍이고.

새로운 환상종이 이름을 외치며 등장하고.

자신을 향해 날아와서 폭 안기곤 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그렇겠지?'

로이드는 빛의 덩어리를 주시하며 기다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와서 안길 새로운 환상종을 기대했다.

그런데....

파츠츠츠으... 푸슈슈....

빛의 덩어리가 회전을 멈추었다.

이내 흐려지는가 싶더니 빛이 사라졌다.

그때까지 빛 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꽝! 아쉽네요. 다음 랜덤 뽑기를 기대해 주세요♥]

"...."

휘이잉.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로이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뭐 이럴 수도 있지. 랜덤이니까. 그렇지?"

"뽀... 동!"

뽀동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환영 팻말을 슬그머니 내렸다.

로이드는 흔들리려는 멘탈을 단단히 추슬렀다.

'그래, 맞아. 랜덤이니까. 충분히 꽝도 뜰 수 있는 거였어.'

이게 현실이다.

지금까지 운이 너무 좋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한 번의 실패에 쉽게 흔들리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는 다시금 랜덤 뽑기 메뉴를 열었다.

[랜덤 뽑기 비용 (5회차) = 225 RP]

[현재 보유 중인 RP : 4,633]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좋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로이드는 더욱 독한 다짐을 머금었다.

아까보다 한층 맹렬하게.

아까보다 훨씬 간절하게.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렸다.

그리고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랜덤 뽑기를 실행합니다.]

파아아앗!

창백한 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세차게 회전하며 사방을 밝혔다.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발!'

그러나 그 염원도 헛되이.

점점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눈앞에 또 끔찍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2연꽝! 아쉽네요. 다음 랜덤 뽑기를 기대해 주세요♥]

휘이이잉.

"...."

뭘까.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이 기분은.

허락도 없이 눈앞에서 부어지는 탕수육 소스를 목도하는 듯한 이 아비규환적 느낌은, 대체 뭘까.

그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이."

"...."

"간절히 염원하면 이루어진다며."

"...."

방울이가 환영 현수막을 슬그머니 접었다.

로이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침착. 침착.'

흔들리지 말자.

랜덤의 결과일 뿐이다.

그냥 오늘 운이 조금 나쁜 거다.

혹은 지금까지 매번 좋았던 운의 값을 지금 두 번의 꽝을 통해 치른 거다.

그러니까 세 번째는 잘될 거다.

"후우."

멘탈을 다잡았다.

다시금 환상종 아이들을 믿어 보자고 다짐했다.

한편으로는 설마 세 번이나 꽝이 뜨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결의를 품고서 또 시도한 세 번째 랜덤 뽑기.

그 결과로 믿기지 않는 메시지를 마주하게 된 것은.

[3연꽝! 정말 아쉬워요. 다음 랜덤 뽑기를 기대해 주세요♥]

휘이이이잉.

"...."

인생,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현실, 원래 이렇게 하드코어한 시궁창이었던 걸까.

그런데 언제부터 눈가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거지.

그 순간이었다.

"하망!"

눈치 없는 하망이가 들고 있던 색종이 가루를 활짝 뿌렸다.

그 서슬에 뽀동이와 방울이가 목을 움츠렸다.

눈시울을 훔치고 있던 로이드가 말했다.

"전부 대가리 박어."

"...뽀! 방! 하!"

처처척!

뽀동이도, 방울이도, 하망이도 열외란 없었다.

주먹만 한 녀석들이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뽀잇 박았다.

그런 녀석들을 보며 로이드가 눈시울을 훔쳤다.

"하아."

RP, 진짜 힘들게 모았는데.

열심히 공적과 업적 세워 가면서 쌓았는데.

쓰고 싶은 충동까지 참아 가면서 알뜰살뜰 아꼈는데.

그런데 3연꽝이 뜨는 동안 무려 713이나 되는 RP를 날려 버렸다.

덕분에 5천에 육박하던 RP가 이제는 4,070이 되어 버렸다.

'후아. 이거 진짜 실화냐.'

씁쓸했다.

허탈하기도 했다.

도박에 눈이 멀어 재산 날려 먹고 패가망신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싶었다.

'쯧. 랜덤 뽑기, 계속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간절히 바라면 뽑기 결과에 영향이 간다는 거, 낭설인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자신감이 팍 쪼그라들었다.

'이쯤에서 멈추는 게 현명한 걸지도 모르겠는데.'

또 한다고 해서 제대로 환상종이 뽑힐 거란 보장이 없었다.

전처럼 마냥 운이 좋을 거라는 기대는 접는 게 옳을 듯했다.

게다가 이제 랜덤 뽑기를 하면 7회차 시도가 된다.

덕분에 뽑기 비용도 무려 507 RP로 치솟은 상태였다.

'만약 또 시도했는데 꽝이 뜨면....'

남은 RP는 3,563이 된다.

그래서 멘탈이 깨지면?

오기가 치솟으면?

또 시도를 하면?

그런데 또 꽝이 뜨면?

'아마 8회차 랜덤 뽑기 비용은 760 정도가 되겠지. 그럼? 남은 RP는 2,803이 되는 거야.'

순식간에 반 토막만 남는 RP.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행동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만두자. 감정에 휩쓸려서 계속 시도하다간 RP도 털리고 멘탈도 나갈 거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판단은 냉정하게.

행동도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랜덤 뽑기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대로 창을 닫으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맑은 알림음과 함께.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히든 조건 달성 : 3연꽝]

'어?'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는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어갔다.

[당신은 일정 RP를 소모하여 히든 조건인 <환상종 랜덤 뽑기 3연꽝>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조건 선택형 프리미엄 랜덤 뽑기> 기능이 오픈됩니다.]

'무슨.'

로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내심 바라는 환상종의 능력과 이미지.

그 염원이 랜덤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던 뽀동이의 조언.

'그게 사실이었던 거야?'

확실하다.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다들 기상."

"뽀! 방! 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뽀잇 일어났다.

로이드는 녀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뽀동아?"

"뽀동!"

"저기, 네가 했던 말이 이거였어? 프리미엄 랜덤 뽑기?"

"뽀동!"

"그럼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뽀도동?"

"3연꽝을 해야 이 기능이 열린다는 거 말이야."

"뽀동!"

"그럼...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나한테 랜덤 뽑기를 권했던 거야?"

"뽀도동!"

물론이라는 듯 고개를 뽀잇 끄덕이는 뽀동이.

방금까지 벌을 서고 있었던 사실을 벌써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면 이쪽의 그런 실수까지 모두 이해해 주는 걸까.

만면에 너무나 해맑은 웃음만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화풀이를 했다.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면 항상 자신이 잘되기만을 바라는 아이들인데.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아이들인데.

그런 마음을 몰라 주고 순간의 손해에만 눈이 멀어 울컥하고 말았다.

'이런 이기적인 속물 같으니라고.'

자신의 뺨이라도 셀프로 때리고 싶었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까지 알아주는 건지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가 살곰살곰 다가왔다. 손등에 온몸을 보비작대며 이쪽을 격려해주었다.

"뽀! 방! 하!"

"으음, 이번엔 잘될 거니까 프리미엄 랜덤 뽑기, 해보라고?"

"뽀동! 방울! 하망!"

"...그래, 고마워."

반성은 가슴속에.

지금은 일단 아이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로이드는 다시금 랜덤 뽑기 메뉴를 열었다.

아래쪽을 보니 새로운 메뉴가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프리미엄 랜덤 뽑기]

[약간 더 많은 RP를 투자하여 소환자가 원하는 능력의 환상종을 뽑을 확률을 대폭 증가시킵니다.]

[조건부 뽑기 비용(1회차) = 800 RP]

[현재 보유 중인 RP : 4,070]

[조건부 랜덤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좋아. 이판사판이다.'

이미 여기까지 온 마당이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 보자 싶었다.

로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YES를 선택했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원하는 환상종의 능력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주세요.]

시키는 대로 했다.

열심히 떠올렸다.

돌망태 옹벽을 시공하기 위한 철망.

그 철망을 만들어 줄 능력이 있는 환상종.

'튼튼하고 질기고 변형이 없는 철사나 밧줄. 그런 걸 뽑아 주는 환상종을 원해.'

그렇게 염원하는 순간이었다.

[원하시는 조건이 등록되었습니다.]

파아앗!

선명한 메시지와 함께 화려한 빛이 떠올랐다.

달빛 아래의 어둠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맹렬히 회전했다.

마침내 새로운 환상종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꼬밍!"

빛 속에서 힘차고 야물딱진 외침이 울렸다.

137화. 프리미엄 랜덤 뽑기 (2)

"꼬밍!"

빛 속에서 들려오는 힘차고 야물딱진 목소리.

나온다.

이번엔 확실하다.

뭔가가 나오고 있다.

로이드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빛 속에 비치기 시작한 실루엣을 살펴보려 애썼다.

그 순간이었다.

"꼬미밍!"

파츠직!

화려한 빛 속에서 작은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이쪽으로 날아왔다.

품에 폭 안겼다.

"꼬밍!"

"...어?"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보송보송 새하얀 털이었다.

'솜털? 아니, 깃털인가?'

새하얀 깃털로 덮인 통실한 2등신 몸매.

힘차게 파닥대는 자그마한 날개 한 쌍.

동글동글한 머리는 몸통만큼 컸다.

대신 부리는 앙증맞고 눈은 까맸다.

그러니까 이건....

"뱁새?"

"꼬밍!"

주먹보다 작은 뱁새 한 마리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야물딱지게 대답했다.

마치 어미를 향해 부리를 짹짹 벌리는 아기새 같은 모습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저기, 있잖아."

"꼬밍?"

"너 이름이 꼬밍이인 거지?"

"꼬밍!"

"그런데 왜 지금 뱁새가 나와?"

"꼬밍?"

"아니, 으음,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긴 한데, 으으음, 난 사실 '튼튼하고 질기고 변형이 없는 철사나 밧줄, 그런 걸 뽑아 주는 환상종을 원한다'라고 조건을 붙였거든."

조건을 붙일 수 있는 프리미엄 랜덤 뽑기.

당연히 그 조건에 맞는 녀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거미나 그런 비슷한 녀석을 기대했는데.'

튼튼한 거미줄이라면 철사나 철망 역할을 충분히 해 줄 수 있다.

그러니 제발 거미 형태의 환상종이 나오면 좋겠다.

솔직히 그렇게 원했었다.

한데 지금 결과는....

'뱁새라니.'

프리미엄 랜덤 뽑기마저도 망한 건가.

거미줄과 연관이 1도 없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뽑기 한 번에 소모한 RP를 생각하자니 속이 쓰리다 못해 역류성 식도염에 당첨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크흑, 내 RP. 800이나 썼는데. 그걸 어떻게 모았는데.'

이번에 대륙 역사 최초로 아파트를 지은 업적으로 받은 RP가 700이었다.

그러니까 역사적 업적을 세워야 겨우 얻을 RP를 이번 뽑기 한 번에 다 때려 박은 셈이었다.

'후우, 아니다. 그래도 뭔가 분명 유용하게 쓸 방법이 있을 거야.'

로이드는 고개를 휘휘 흔들었다.

멘탈을 다잡았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하망이도 처음엔 망한 뽑기인 줄 알았는데 대박이 났지 않았던가.

일단은 이 아이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확인이 우선이다.

"그러니까, 너도 쪽지 가지고 있지? 설명서 쓰여 있는."

"꼬미밍? 꼬밍!"

"있구나? 혹시 보여 줄 수 있어?"

"꼬밍!"

뱁새, 꼬밍이가 제 가슴으로 부리를 묻었다.

이윽고 폭신한 가슴 깃털 속에서 우표 크기로 접힌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받아 펼쳤다.

역시나 깨알 같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로이드는 안구에 힘을 주었다.

[꼬밍이 사용설명서]

[꼬밍이는 귀여운 뱁새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 주세요.]

[꼬밍이는 소환자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환상종은 평생의 반려동물이자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함부로 유기하지 말아 주세요.]

[꼬밍이는 두 가지 종류의 해바라기씨를 먹음으로써 덩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 : 꼬밍이를 거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 = 12시간]

[파란 해바라기씨 : 꼬밍이를 아담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대화 최대 유지 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먹여 주세요. 거대화 상태에서 파란 해바라기씨를 먹지 않고 12시간을 넘기면 꼬밍이는 탈진 상태에 빠집니다. 탈진 상태에 빠진 경우, 저절로 아담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대신 24시간 내에는 거대화가 불가능해집니다.]

[2색 해바라기씨 세트 구매 비용은 1 RP입니다.]

[꼬밍이는 거대화 상태에서 다양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꼬밍이 보유 스킬 목록>

[거미줄 뽑기 (Lv. 1)]

[거미줄 뿌리기 (Lv. 1)]

[둥지 엮기 (Lv. 1)]

[끙까 폭격 (Lv. 1)]

'뭐지, 이건.'

설명서를 다 읽은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밍이에게 전혀 생각지 못한 생뚱맞은 스킬이 2개나 붙어 있는 걸 본 까닭이었다.

'둥지 엮기나 끙까... 새똥 폭격이야 뭐, 뱁새니까 그렇다 치고. 거미줄 뽑기? 거미줄 뿌리기? 저게 왜 붙어 있는 거지?'

이상했다.

설마 새똥 대신 거미줄을 뿜어내기라도 한다는 걸까.

로이드는 손바닥 위의 꼬밍이를 마주 보았다.

"저기, 꼬밍아?"

"꼬밍!"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꼬미밍!"

"너, 거미줄을 어떻게 뽑는 거야?"

"꼬밍? 꼬미밍! 꼬밍!"

질문을 받은 꼬밍이가 보란 듯이 몸을 홱 돌렸다.

그제야 꼬밍이가 등에 메고 있는 아담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 모양 가방이었다.

그걸 본 로이드가 한쪽 눈썹을 꿈틀, 치켜들었다.

"잠깐. 설마...."

"꼬밍!"

"그 거미 인형처럼 생긴 가방에서 거미줄이 나오는 거야?"

"꼬밍!"

"실화냐."

"꼬밍!"

"너, 설마 가방이 본체인 건 아니지?"

"꼬미밍!"

"...."

힘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꼬밍이.

덕분에 로이드는 희망의 서광이 비치는 걸 느꼈다.

'어쨌건 다행이다. 거미줄이야. 이번 뽑기, 폭망은 면했다!'

거미줄.

내심 가장 원했던 종류의 능력이었다.

돌망태 옹벽을 세우려면 어떻게든 녹슬지 않으면서 튼튼한 철망이나 와이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로이드는 귀밑까지 찢어지려는 입꼬리를 수습하며 말했다.

"흐흠! 좋아. 그럼 테스트를 좀 해 봐야겠네."

"꼬밍?"

"가방에서 뽑는다는 거미줄 말이야. 그게 어느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지 테스트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닌 옹벽의 핵심 재료로 쓰일 거미줄이었다.

얼마나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는지.

고온과 저온의 환경에서는 어떨지.

물에 젖은 상황에서는 어떠한지.

최대한 다양한 상황에서 능력을 테스트하고 검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거미줄이 얼마나 튼튼한지에 맞춰서 설계를 해야 하거든. 안 그러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니까. 옹벽이라는 거, 사고가 났다 하면 대형사고일 확률도 높아서."

실제로 그랬다.

옹벽은 대부분 비탈지나 경사지를 깎아낸 지역에 세운다.

그런 시설 아래에는 도로나 집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옹벽이 무너지면?

수십, 수백 톤의 토사가 도로나 집을 향해 쏟아져 내린다.

말 그대로 산사태가 일어나는 셈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그 거미줄로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을 논과 밭을 지지할 옹벽을 만들 생각이거든. 그런데 옹벽이 무너지면? 산사태가 일어나면? 큰일이 나는 거지. 안 그래?"

설명을 마친 로이드가 빨간 해바라기씨를 내밀었다.

한데 꼬밍이가 조금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꼬밍...."

빨간 해바라기씨를 받아먹지 않았다.

씨앗과 이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게다가 그 눈빛에 묘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

"음? 왜 그래?"

"꼬미밍...."

"혹시 해바라기씨 싫어해?"

"꼬밍, 꼬미밍."

"그건 아니고, 그냥 귀찮아?"

"꼬미밍! 꼬밍! 꼬미미밍! 꼬밍!"

"으음, 그러니까, 일하기 싫고 만사가 다 귀찮다고? 하늘을 나는 것도 싫고, 거대화도 싫고, 그냥 소환된 김에 살아가는 거니까 없는 셈 치고 알아서 뒹굴거리게 놔둬 주면 고맙겠다고?"

"꼬밍!"

꼬밍이가 자그마한 날개를 파닥대며 고개를 뽀잇 끄덕였다.

로이드는 난감함을 느꼈다.

'이건 무슨 백수 지망생도 아니고.'

일을 시키려고 소환한 환상종이다.

그런데 일을 하기가 싫단다.

종일 뒹굴거리며 살고 싶댄다.

이 녀석, 귀여운 겉모습과는 달리 굉장한 귀차니스트인 듯했다.

'쓰읍. 이건 곤란하지. 아암, 곤란하고말고.'

바야흐로 경기불황, 고용불안정의 시대에 이토록 뻔뻔한 백수 지망생이라니.

아직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앞으로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니.

'그건 내가 용납 못 해.'

주인인 자신도 매일 일만 하며 사는 판국이다.

빨고 싶은 꿀단지에 손가락 한 번 못 찍으며 살아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냉큼 드러누워서 뒹굴거리겠다니.

그 심보가 괘씸하게만 느껴지는 로이드였다.

'게다가 너한테 투자한 RP가 얼만데!'

프리미엄 랜덤 뽑기를 위해 무려 800 RP를 소모했다.

게다가 그 전에 터졌던 3연꽝의 참사까지 합치면?

도합 무려 1,513이라는 어마어마한 RP를 퍼붓고 때려 부어서 뽑아낸 녀석인 셈이다.

그런데 벌써 쉬겠다니.

'이건 완전 축구나 야구로 치면 구단 역사상 최고액 몸값 지불하고 영입한 선수가 입단식 치르자마자 훈련 거부에 파업 선언하는 꼴이잖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이 꿀 빠는 삶을 누리기 전에는 환상종들의 사전에도 백수행이란 없다.

그 원칙(?)을 마음에 새기며 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를 향해 말했다.

"얘들아?"

"뽀, 방, 하?"

"군기 좀 잡자?"

"뽀! 방! 하!"

로이드의 말에 세 환상종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로이드와 신입 환상종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이들이었다. 소환되자마자 백수행을 자처하는 신입의 모습에 내심 개탄하던 아이들이기도 했다.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고.

우리 땐 소환되면 바로 일부터 시켜 달라고 눈빛 반짝거리는 게 당연한 예의였다고. 아이고 주인님 저한테만 다 맡겨 주세요 외치는 게 당연한 미덕이었다고.

이렇듯 개념을 상실해 버린 환상종계의 세태에 혀를 차며 뽀동이와 방울이, 하망이가 다가왔다.

꼬밍이의 어깨에 짧은 팔을 턱 걸쳤다.

"뽀도동? 뽀동?"

"꼬밍?"

"뽀동?"

우리, 얘기 좀 할까?

뽀동이의 친절한 말에 꼬밍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꼬밍이는 아무것도 모르고서 세 선배 환상종을 따라 연무장 구석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밤하늘 휘영청한 달을 바라보았다.

"아, 거 참 군기 잡기 좋은 날이네."

우지끈, 퍽팍, 삐약, 와당탕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어쩐지 깃털이 군데군데 빠진 꼬밍이가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단숨에 손바닥까지 날아올라 오더니 반짝이는 눈동자로 외쳤다.

"꼬밍!"

"음? 제발 일 시켜 달라고? 빨간 해바라기씨가 미치도록 먹고 싶다고?"

"꼬미밍! 꼬밍!"

"그래, 잘 생각했어. 형아 누나들이 친절하게 사회생활 알려 줬구나?"

"꼬밍!"

힘차게 뽀잇 고개를 끄덕인 꼬밍이가 부리를 벌렸다.

로이드가 보람차게 웃으며 해바라기씨를 들었다.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아니, 그냥 성공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꼬밍이가 뽑아 주는 거미줄은 그야말로 초대박이었다.

'이건 그냥 실제 거미줄 이상인데?'

가방에서 뽑는 거라고 해서 짝퉁 취급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질기고 튼튼했다.

거미줄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힘껏 당겼다.

끊어지긴커녕 늘어나지도 않았다.

그 상태에서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다.

마나 써클을 하나씩 늘려가며 회전시켰다.

증폭된 마나의 힘을 실어서 더욱 세차게 거미줄을 당겼다.

그렇게 세 개의 써클을 한계까지 동원했다.

아스라한 스킬의 전용 옵션, 잠력 폭발(改)까지 동원했다.

키이이이이잉!

순간적으로 30초 동안 마나 증폭률이 5배로 폭증했다.

"끄으으읍차아!"

온 힘을 다 쏟아부었다.

그러고서야 거미줄이 '살짝' 늘어났다.

기어코 끊어지지 않은 채 버텨낸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아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자연계에서 거미줄은 가늘면서 튼튼한 소재의 대명사다.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동일한 두께의 강철보다 3배가량 뛰어난 인장강도와 탄력성을 자랑할 정도다.

심지어 내구성마저 뛰어나서, 2~30년쯤 시간이 흘러도 강도가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습기에도 강하지. 변형이 거의 없고 햇볕에 장시간 노출돼도 튼튼함을 잃지 않아.'

그런데 꼬밍이가 뽑아 주는 거미줄은?

그보다 한결 뛰어난 듯했다.

게다가 옹벽 시공에 유용하게 쓰일 또 하나의 장점마저 있었다.

'끈적해!'

테스트를 위해 움켜쥐었던 거미줄을 떼어내느라 한참 용을 써야 했다.

힘으로는 떼기가 너무 어려웠다.

칼로 긁어냈다.

그러고도 잘 되질 않았다.

급기야 콩기름을 잔뜩 묻히고서야 간신히 떼어낼 수 있었다.

이토록 강력한 점성.

이건 엄청난 장점이었다.

'당연하지. 이걸로 옹벽에 쓸 돌망태 틀을 만들면? 안쪽의 돌을 단단히 붙잡는 건 물론이고, 옹벽 안쪽의 토사도 완벽하게 잡아둘 수 있어.'

옹벽 안쪽.

비탈을 깎아낸 절토면과 옹벽 사이의 공간.

현장에서 '뒷채움재'로 불리는 토사가 들어가는 자리.

그곳의 안정적인 지지력 확보는 옹벽 시공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한데 거미줄의 엄청난 끈끈력이라면?

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지지력을 확보할 수 있을 듯했다.

'돌망태는 물론이고, 옹벽 안쪽 공간에 거미줄로 짠 그물을 층층이 쌓는 거야. 거미줄 그물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일정 두께의 흙을 덮고. 또 그 위에 그물과 흙을 덮고. 마치 빈대떡이나 파전, 팬케이크를 쌓아올리듯이.'

바로 현대적인 옹벽 시공에서 흔히 사용하는 보강토 옹벽(Mechanically Stabilized Earth=MSE), 그중에서도 HDPE 지오그리드를 사용하는 방식의 시공을 응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오그리드 시공에 돌망태 방식을 합치면 돼. 그걸 이 거미줄로 연결해서 만들면? 천 년은 물론이고 만 년도 거뜬할 거야.'

뚜두둑!

로이드는 손가락을 뚝뚝 풀었다.

할 수 있다.

자신의 설계 능력.

환상종들의 힘과 스킬.

새로이 가세한 꼬밍이의 거미줄.

거기에 하비엘과 바이에른 경, 공병대와 피난민들까지 대규모의 인력 동원까지 합해진다면?

이번 옹벽을 활용한 계단식 농경지.

아예 대대손손 물려줄 세계문화유산급 결과물로 만들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로이드는 본격적인 설계에 돌입했다.

설계를 마치자마자 시공에 착수했다.

덕분에 공사에 참여하게 된 피난민들 사이에 파다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영지의 도련님, 듣도 보도 못한 환상종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공사에 동원하시는 걸 봤다고.

아무래도 소환 마법의 천재이신 것 같다고.

로이드를 향한 추앙의 목소리가 드높아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