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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도미노를 뒤집는 방법 (2)

"비버벙!"

투콰아아앙-!

박력 넘치는 포효성이 울렸다.

더욱 맹렬한 타격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그 결과는 지극히 파괴적인 것이었다.

"...크워어억?"

메가라니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열 개가 넘는 이빨이 후두둑 부러져 날아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벙이의 몸길이는 100미터.

꼬리를 제외해도 거의 80미터.

게다가 몸길이에 비해 통통한 체형.

덕분에 체중이 무려 3천 톤에 육박했다.

그러한 무지막지한 체중이 모조리 실린 앞발 펀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의 펀치 일격에 비벙이는 자신의 혼까지 실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첫사랑 방울이를 위한 진심이었다.

"비벙! 비버벙! 비벙!"

콰앙! 투콰아앙! 콰아앙!

왼발, 오른발, 왼발.

세 발의 3천 톤 펀치가 휘모리장단으로 쏟아졌다.

그때마다 메가라니아의 전신이 태풍에 휩쓸린 발목 양말처럼 허우적거리며 떠올랐다.

"쿠, 쿠웨에에엑!"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메가라니아의 몸길이는 고작(?) 50미터.

체중은 비벙이의 1/4 남짓한 700톤밖에 되지 않았다.

"비벙!"

투콰학!

비벙이의 앞발이 또 한 번 작렬했다.

"코웨엑!"

지금껏 쏟아진 다섯 발의 펀치.

그것만으로도 이미 메가라니아는 심각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그런 메가라니아를 향한 비벙이의 결정타가 작렬했다.

"비버벙!"

꽈작!

커다란 앞니로 메가라니아의 뒷덜미를 물었다.

통째로 들어 올렸다.

휘둘렀다.

놓았다.

후아아아앙-!

50미터 몸길이, 700톤 거구의 메가라니아가 수십 미터 높이로 떠올랐다. 아니, 날려갔다. 무려 400미터 가량 바람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추락했다.

콰아아앙-! 쿠콰콰!

허위허위 날려간 메가라니아의 거체가 지면에 수십 미터 길이의 고랑을 남기며 처박혔다.

그걸로 메가라니아는 전투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크, 크르르르... 쿠웨엑...."

만신창이가 된 메가라니아가 간신히 일어났다.

죽지 않은 것이 용한 상태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메가라니아의 주위에는 다른 메가라니아 여섯 마리가 더 있었다.

함께 무리를 이루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녀석들이라고 함부로 송곳니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방금 지면에 처박힌 메가라니아가 바로 무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다.

"크, 쿠웨에엑! 쿠웩!"

만신창이가 된 우두머리 메가라니아가 결국, 몸을 돌렸다.

꽁무니를 감추고 힘겹게 동쪽으로 달아났다.

우두머리가 도망치니 나머지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비버벙! 비벙!"

비벙이가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면서 슬쩍 서쪽을 살폈다.

그곳에 로이드 일행이 있었다.

정확히는 로이드의 어깨에 올라타 있는 방울이가 있었다.

'비벙, 비버버벙....'

제발 이 모습을 멋지게 봐줬으면.

비벙이는 간절히 바라며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로이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 녀석, 너무 티를 내네.'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솔로지.

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든다.

로이드는 비벙이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방울아?"

"방울!"

"부탁이 있는데, 비벙이한테 한 번만 방울 흔들어줄 수 있어?"

"빠방울?"

"그냥 쟤 사기진작 좀 해줄까 싶어서."

"방울!"

방울이가 동그란 머리를 뽀잇 끄덕였다.

사실 방울이도 비벙이가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성으로서가 아닌, 같은 환상종 친구로서였지만.

"방울! 빠방울!"

잘했어, 새 친구야.

방울이가 통통한 꼬리를 살포시 들어서 흔들었다.

딸랑딸랑,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격렬한 펀치질로 거친 숨 내쉬던 비벙이의 만면에 핑크빛 미소가 푸근하게 맺혔음은 물론이었다.

'흐음, 딱 좋아.'

적당한 포상도 안겨줬으니 이제는 이쪽의 일을 할 차례.

"다들 여기서 잠깐 기다리도록."

일행 모두를 대기시켰다.

혼자 동쪽으로 걸었다.

서서히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

웅성거리며 서 있는 수백 명의 오크 전사가 보였다.

로이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오크 전사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오랜만입니다, 족장님!"

"으음, 꾸익?"

가장 덩치 큰 전사, 강철모래 오크 족장 아쿠쉬가 귀를 움찔거렸다.

사실 그는 제법 당황하고 있던 상태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꾸익.'

최근 연달아 부락을 덮쳐온 몬스터들의 습격.

그 앞에서도 꿋꿋하게 맞서온 아쿠쉬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사납기 짝이 없는 메가라니아 무리.

무려 여섯 마리나 되는 괴수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오크 전사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물러서지 않도록 선두에서 포효하고, 투창을 내던지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기세로 뭔가가 돌진해 왔다.

곁을 쿵쿵거리며 지나갔다.

일격으로 메가라니아의 면상을 돌려 버렸다.

심지어 물어서 들어 올리더니 저기 부락 경계 너머까지 던지고 쫓아내 버렸다.

'저건 대체 뭔가, 꾸이익?'

무시무시한 메가라니아를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던져 버리다니.

그런데 그게 비버를 닮은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었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데 그다음엔 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거, 우리 부족의 명예 전사지만 허약한 인간 로이드의 목소리 같은데, 꾸익.'

착하지만 조금 모자란(?) 녀석.

그것이 족장 아쿠쉬의 기억 속 로이드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러한 추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로이드의 모습을 발견했다.

"허허, 꾸이익?"

친구다.

절로 미소가 나온다.

족장 아쿠쉬는 큼직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큼직한 대흉근에 지렁이 같은 힘줄이 부르륵 솟았다.

"여긴 어쩐 일인가, 친구? 오늘 이곳은 위험하다. 특히 허약한 친구에게는 더 위험하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꾸익."

"위험하다뇨. 혹시 몬스터 때문입니까?"

"그렇다, 꾸익!"

아쿠쉬가 웃음을 털어내며 도끼를 들었다.

동쪽에 버티고 서 있는 비벙이를 도끼로 가리켰다.

"수많은 몬스터가 계속 쳐들어오는 요즘이다. 오늘은 메가라니아까지 왔다. 그런데 지금은 더한 놈마저 나타났다. 매우 위험하다, 꾸익."

"아, 저 녀석 말씀인가요?"

"그렇다, 꾸익."

"그거라면 괜찮습니다. 저 녀석, 제가 부리는 녀석이거든요."

"...뭐, 꾸익?"

"진짭니다. 이름은 비벙이라고 하고요."

"...."

메가라니아를 일격에 날리는 괴물을 부린다니.

뭐 이런 친구가 다 있지.

족장 아쿠쉬는 약간은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한데 여긴 어쩐 일인가? 혹시 같이 싸워주러 온 건가, 꾸익?"

"뭐, 비슷하긴 합니다."

오랜만에 치르는 해후의 기쁨은 나중에.

일단 지금은 찾아온 용건부터.

"최근 많이 힘겨우셨을 줄로 압니다. 로커스 메뚜기에 마스토돈에 오늘은 메가라니아까지. 엄청난 최근이셨죠?"

"푸흥! 그럭저럭 몸 풀기 좋은 날들이었다, 꾸익!"

"물론 그러실 줄로 압니다. 한데 이런 사태가 생긴 원인을 혹시 알고 계신지요?"

"모른다, 꾸익!"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원인과 해결책을 함께 알려드리려고 말입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사실 그는 이제부터 몬스터 도미노 현상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이 사태를 일으킨 술탄국에 거한 반격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반격 작전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인 술탄국.

로이드는 우선 그들의 만행을 족장 아쿠쉬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당연히 아쿠쉬는 분노했다.

아니, 오크족 전사들 모두가 격분했다.

그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이제부터 며칠간, 이 일대에 얼쩡거리는 모든 몬스터를 무차별로 사납게 공격할 겁니다. 물론 공격의 중심은 비벙이가 맡게 될 거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크 전사들은 비벙이의 공격을 받아 겁에 질린 몬스터들을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종의 몰이꾼.

그렇게 몬스터들을 동쪽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명심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몬스터들이 다치는 것까진 괜찮습니다. 하지만 가급적 죽이지 말고 살려 보내세요."

"어째서인가, 꾸익?"

"그래야 살아남은 몬스터 사이에 소문이 퍼지지요. 그러면-"

"그러면, 꾸익?"

"여지껏 동쪽에서부터 이리로 달려온 몬스터 무리 전체의 방향이 바뀌게 될 겁니다. 그들이 이쪽으로 왔을 때처럼. 동쪽을 향해서. 도미노의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그건, 꾸이익!"

"제 뜻을 아셨습니까?"

"아니. 복잡하다, 꾸익!"

"뭐, 어쨌건 술탄국 놈들의 서쪽 국경이 난리를 겪게 될 거라는 소리입니다."

"그건 마음에 든다. 당장 하자, 꾸익!"

...그렇게 하여 그날부터 바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양심의 가책도 별로 없었다.

뒤집히게 될 몬스터 도미노의 방향.

그렇게 피해를 입게 될 술탄국의 서쪽 국경.

다행히도(?) 그 국경 지대에 민간인 거주 구역이 없다는 점 덕분이었다.

'놈들의 서쪽 국경은 황량하지. 그래서 영지도, 마을도 없어. 오직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뿐.'

그러니 이번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을 불쌍한 양민은 없을 터.

게다가 요새화된 국경의 군대이니 사상자도 별로 없을 터.

'대신 몰려오는 몬스터 무리들을 격퇴하느라 신나게 뺑이는 치겠지. 게다가 술탄국 상부에서도 느끼는 바가 있을 거고.'

자신들이 몬스터 도미노를 일으킬 수 있다면.

상대편에서도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

그러니 몬스터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행위는 똑같은 반격과 보복을 불러올 수 있다.

로이드는 술탄국의 상부에 그런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는 감히 이런 뻘짓을 시도할 생각도 못 할 테니까.'

핵무기와 비슷한 원리였다.

상대가 핵무기를 지니고 있다면?

이쪽도 핵무기를 함부로 쓰기 어려워진다.

그렇듯 너희만 그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따끔한 교훈을 새겨주는 것.

그게 앙갚음을 겸한 이번 작전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그러니 다들, 시작합시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작전을 시작했다.

비벙이와 오크 전사들, 하비엘과 백색창기병까지.

모두가 대활약을 펼쳤다.

인근 모든 황야를 이 잡듯이 뒤졌다.

몬스터 머리털만 보여도 우르르 달려가 난리를 피웠다.

때리고, 조르고, 꺾고, 던지고, 포효하고, 위협했다.

이쪽에게 걸린 모든 몬스터들이 기겁해서 동쪽으로 도망갔다.

그렇게 엿새가 지났다.

그때쯤 되자 근방을 얼쩡거리는 몬스터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놈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며 반대쪽으로 몰려가게 된 까닭이었다.

즉, 작전의 성공이었다.

"후우, 그래서 말입니다."

도미노 되돌리기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의 일이었다.

그동안 몬스터 습격의 등쌀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오크족 부락의 중심에서, 로이드는 족장 아쿠쉬를 향해 제안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이참에 부족의 터전을 옮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터전을? 옮기자고, 꾸익?"

"그렇습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에 가시풀 가지를 던져 넣으며 로이드가 말했다.

"물론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 소중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번 일로도 드러났겠지만, 이곳은 탁 트인 곳이라 방어에 너무 취약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꾸익."

"압니다. 하지만 터전을 옮기면 더욱 강해질 것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뭐? 더 강해진다고, 꾸익?"

"예."

"어떻게 말인가, 꾸익?"

"으음, 사실은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제가 일찌감치 석빙고를 지어드리기도 했지만, 우선 이곳 황야는 식량 사정이 너무나 열악합니다. 그래서 심히 안타깝습니다. 영양학적으로 근육을 키우기엔 별로 안 좋은 곳이랄까요."

"...뭐? 근육, 꾸익?"

'근육'이라는 말에 족장 아쿠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도란도란 모닥불가에 앉아 있던 다른 오크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좋다.

슬슬 먹힌다.

로이드는 슬며시 떠오르려는 미소를 참아내며 말했다.

"잘 쉬고 잘 먹어야 합니다. 운동하는 것만큼이나 근육을 키우는 데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족장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으음, 그렇다, 꾸익."

"그래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족장님과 여기 전사분들이 전통에 얽매여 있기에, 더 큰 근육을 키워내질 못한다는 비극적인 현실 때문에 말입니다."

"더 큰 근육이라고, 꾸이익?"

"그렇습니다."

"어, 어떻게, 꾸익?"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으음, 사실 이거 아무한테나 알려주는 건 아니긴 한데, 그럼 어디, 조금만 들어보시겠습니까?"

"빨리 말해라, 꾸익!"

"네, 좋습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로이드가 손을 들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동부산맥을 가리켰다.

"털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사슴이 풀밭을 뛰어다닙니다. 통통한 멧돼지가 꽃밭을 뒹굴거립니다. 그 위로는 산비둘기와 꿩이 푸드덕 날갯짓을 하는군요. 생각해 보십시오. 힘차게 움직이는 산비둘기 가슴살을. 격렬하게 맥동치는 꿩 가슴살의 육즙을."

"꾸, 꿀꺽, 꾸익."

"예, 맞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시냇물에는 온갖 물고기가 물 반 고기 반으로 헤엄쳐 다닙니다. 산속 1급 청정수에는 가재도 많이 살지요. 단백질 가득한 알집 통통하니 품은 가재 한 마리, 통으로 쪄서 먹으면 그 영양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근육, 꾸익!"

"역시 족장님이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잘 아시는지."

"그럼, 저 동부산맥으로 터전을 옮기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건가, 꾸익?"

"당연합니다. 게다가 이거, 잘 따져보면 부족의 전통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꾸익?"

전통, 이라는 말에 족장 아쿠쉬가 움찔했다.

로이드가 그 허점을 푹 찔렀다.

"생각해 보십시오. 족장님의 조상님들도 대단한 근육의 소유자들이셨지요?"

"물론 그렇다, 꾸익!"

"그러니 후손들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시겠습니까?"

"근육, 터질 듯한 근육, 꾸익!"

"바로 그겁니다. 역시 족장님을 믿었습니다. 제가 딱히 알려드리지 않아도 이렇게 현명하시지 않습니까."

"그럼, 조상님들께서도 우리가 더욱 든든히 먹고 우람한 근육을 지니게 되길 바라실 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꾸익?"

아쿠쉬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물론 동부 산맥에 사냥감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산맥에 전사들을 보내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사 몇을 며칠이나 걸리는 거리까지 파견 보내는 것과 부족의 터전을 아예 울창한 수림 속으로 옮기는 것은 효율 자체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날 것이다.

"그, 그렇지만 조상의 터전을... 꾸익...."

"조상님들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우리가 우람한 근육을 지니면, 꾸익?"

"당연하지요."

로이드의 은근한 속삭임.

그 유혹이 아쿠쉬의 근육질 달팽이관을 자극했다.

함께 두런두런 앉은 전사들의 욕망을 푹 찔렀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좋다! 오늘부터 우리 부족의 터전은 동부산맥이다. 우리를 안내하라, 꾸익!"

...그렇게, 강철모래 오크 부족은 전격적인 이사를 감행하게 되었다.

로이드의 입장에서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카푸아 호수의 터줏대감인 비벙이. 거기에 동부산맥에 터를 잡게 된 오크 부족. 이로써 두 가지의 방벽이 동쪽에서 우리 영지를 지켜주게 된 거야.'

게다가 영지에 뭔가 일이 터지면?

오크 부족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한결 쉬워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지긋지긋한 물리적 위협은 끝이다, 끝.'

로이드는 확신했다.

금융적 위기 다음으로 자신의 꿀단지인 영지를 위협한 물리적 위협. 그 모든 위험 요소를 마침내 막아낼 수 있게 되었노라고.

덕분에 모든 일을 마치고 남작령으로 돌아가는 로이드의 걸음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이제 딱 한 가지 일만 남았어.'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과제.

드디어, 왕도에서 받아온 공사대금으로 남은 사채를 모조리 갚을 때가 왔다.

119화. 기쁜 날 (1)

로이드는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주위의 풍경이 낯설었다.

남작가 저택이 아니었다.

창문을 열면 허름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웅장한 산맥이 보이는.

지난 1년 반 동안 어느새 익숙해진 남작가의 침실과 다른 곳이었다.

'왕릉?'

푸른 하늘과 초록빛 풀밭.

곳곳에 둥그렇게 솟아 있는 수십 미터 크기의 둔덕.

언젠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주 왕릉의 풍경처럼 보였다.

"하...."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어째서 내 눈높이가 낮아져 있는 걸까.

마치, 열두 살 소년 시절의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

나, 설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을 쳐다보았다.

작았다.

여리고 말랑말랑했다.

삽질을 하느라 생긴 손바닥의 굳은살도.

군대에서 작업하다가 얻은 손등 위의 흉터도.

아직 없다.

멍하니 꼼질거려 보는 손바닥도, 손등도 영락없는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자신은 분명 어젯밤 늦게 남작령으로 돌아왔는데.

그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오늘, 눈을 뜨면 남작가에 남은 사채를 모조리 정리하겠다고 다짐하며 곯아떨어졌는데.

'어째서 난데없이.'

황당함을 삼키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수호야. 마이 기다맀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투박하고 무뚝뚝한 목소리. 엄마가 그렇게 고쳐보라고 잔소리해도 끝내 못 고치시던 사투리 억양.

그럼에도 그 투박한 무뚝뚝함 속에 가끔씩 배어나던 따스한 마음.

"...아버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해를 등진 그림자가 서 있었다.

이내 몸을 낮추더니 이쪽과 눈높이를 맞추며 싱긋.

"이야. 니가 우짠 일이고. 아빠 보고 아부지라 다 카고."

"어, 그게...."

"인자 보이 우리 아들 다 키았네. 요 있다. 무라."

"...."

아버지가 내민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까스활×수 한 병.

캐릭터 그림 있는 판박×껌.

'이거, 진짜로 그날인 거야?'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쁘셨다.

그래서 당신과의 추억이랄 게 별로 없었다.

둘이서 여행을 가 본 기억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기억이 바로 이 순간이다.

열두 살의 초가을.

아버지와 둘만의 경주 여행.

그날은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더랬다.

파란 하늘, 초록빛 왕릉, 하얀 구름까지.

모처럼 아버지와 손을 잡고 제법 많이 걸었더랬다.

아니, 그 전에 귀×테를 깜빡해서 멀미가 심하게 났었던가.

"와? 이상하나? 아빠가 따주까?"

"...."

"자, 얼른 묵고 트림 한 번만 하믄 된다. 얼른."

"...."

얼결에 까스활×수를 받았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뭔가가 가슴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걸 억지로 삼키듯 활×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자, 이거도."

"...."

어느새 아버지는 껌 포장도 푸셨다.

그렇게 내미는 스티커 껌.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판박×껌.

"...."

이거, 진짜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아버지의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셨다.

"괘안나? 트림이 안 나올라 카나?"

"아, 아뇨. 그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뭔가 할 말은 잔뜩 떠오르는데, 가슴이 계속 뭉클거려서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괜찮아요."

간신히 말했다.

아버지가 싱긋 웃으셨다.

"진짜로?"

"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손을 뻗었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걸었다.

열두 살 시절, 그날처럼.

"...."

조금은 알겠다.

꿈이 확실하다.

너무 생생하긴 하지만, 이건 꿈이다.

그런데 이 꿈은, 언제 깨는 걸까.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의 얼굴, 언제까지 볼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도중이었다.

"근데 수호야."

아버지가 부르셨다.

이젠 속 괜찮은데.

혹시 아직도 걱정하시는 걸까.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의 눈빛이 떨리는 게 보였다.

어느새 그렁그렁해지신 눈매로.

한숨 섞여든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니 그동안 진짜로 고생 많았데이."

"...네?"

이건 기억에 없는 말인데.

열두 살 시절의 그날, 이런 대화는 없었는데.

조금은 멍해지는 가운데, 아버지의 코끝이 붉어져 갔다.

"미안하다. 이래 부족하고 못난 애비 만나가꼬 애꿎은 니만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고."

"...."

"그래서 아빠는 니가 더 대견하다."

"그게...."

"장하다, 우리 아들."

툭툭.

"...."

눈을 떴다.

이내 보이는 것은 낯익은 실내.

지난 1년 반 동안 익숙해진 남작가 침실.

"하아."

아침이구나.

꿈이었구나.

몸을 일으켰다.

평소처럼 하녀를 불렀다.

하녀가 받아온 세숫물로 얼굴을 씻었다.

옷을 갖추어 입고, 아침을 먹었다.

하비엘을 깨우고, 계획대로의 일을 시작했다.

행정관을 부르고, 심부름을 시켰다.

"샤일로 씨와 미트로프 씨, 돌아왔대?"

"아, 예, 로이드 님. 이틀 전에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하여간 그 양반들, 위험한 냄새는 기똥차게 잘 맡는단 말이지."

몬스터들의 습격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영지를 도망친 두 사채꾼들.

그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쓴웃음이 나왔다.

"잘됐네. 둘 좀 불러줘."

"알겠습니다. 혹시 따로 전하실 말씀도 있으신지?"

"그런 건 뭐하러. 그냥 불러. 아, 아니다."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오래 묵은 인연을 즐겁게 매듭지을 때가 왔습니다, 라고 전해주면 딱 좋을 거 같네."

"예, 명하신 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물러나는 행정관.

그 뒤로 기다렸다.

샤일로와 미트로프.

두 사채꾼이 연락을 받고 오기까지 반나절을 생각에 잠겨 보냈다.

솔직히 말해서, 싱숭생숭했다.

'오늘이 사채를 완전히 청산하는 날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혹은, 새벽에 꾸었던 꿈 때문에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기분도, 감정도 명확히 정리할 수 없는 가운데, 두 사채꾼을 맞아들였다.

"허허허. 이거, 오랜만입니다?"

"어이쿠, 우리 도련님은 여전히 신수가 훤하시네."

선물용 와인을 들고 와 너스레를 떠는 두 사채꾼 샤일로와 미트로프.

전엔 저 면상들이 정말 지긋지긋했는데.

지옥까지 쫓아올 얼굴들 같아서 불편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절로 나오는 쓴웃음을 누르며 말했다.

"이렇게 와 주시니 반갑습니다. 두 분 모두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

"허허, 죽을 뻔했지요."

"메뚜기 떼가 어유, 그게."

"다행입니다. 그 와중에도 무사하셔서. 이렇게 오늘, 남은 빚을 받아가실 수 있게 되셔서."

너스레를 떨던 샤일로와 미트로프.

두 사람의 얼굴이 웃던 모습 그대로 쩌적, 굳었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당한 기색으로 물어오는 두 사람.

"남은 빚을 받아갈 수 있다니요? 그게 무슨?"

"설마...."

"예, 맞습니다. 오래 묵은 인연을 즐겁게 매듭지을 때가 왔습니다. 제가 보낸 사람이 그렇게 전했을 줄로 압니다만."

"...."

두 사채꾼이 침묵했다.

그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일어섰다.

"금액 확인이 우선이겠지요. 따라오시죠. 이쪽으로."

오늘, 드디어 남은 빚을 다 갚는다.

문득 드는 그 생각에 무릎이 잠시 떨렸다.

마지막 빚 정리 과정은 간단했다.

허무하고 허전할 정도로 단순했다.

왕도에서 국왕에게 받아온 수표를 건넸다.

수표에 기재된 금액과 국왕 서명의 진위를 확인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확인했다.

남은 빚이 사라졌다는 확인 서류를 쓰고, 서명과 지장을 남겼다.

그게 끝이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사무적인 악수 한 번.

그렇게 두 사채꾼을 보내는 게 과정의 전부였다.

"...."

원래 산더미 같은 빚이라는 거, 다 갚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그냥 아무런 실감도 나지 않고.

오히려 허전한 기분만 들고.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약간의 허탈함마저 드는 이런 기분이 정상인 걸까.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빚을 모두 청산한 후의 기분.

전에도 막연히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수백 번도 넘게 상상해봤다.

이곳 남작가에 오고 나서 뿐만이 아니었다.

고시원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과거에 빚을 다 갚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했더랬다.

그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비슷했다.

혹시 로또라도 걸려서 지금 쌓인 빚을 한 번에 갚으면 뛸 듯이 기쁠 거라고, 부모님과 기념으로 여행이라도 가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런 상상 어디에도 이런 허전한 기분은 없었는데.'

막상 다가온 지금의 이 순간.

한없이 기쁨을 누릴 것만 같았던 이 순간.

실제로 겪어보니 별것 아니었구나, 라는 기분이 들어 헛웃음만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주위 다른 사람들의 기뻐하는 반응.

그것 덕분에 빚을 갚았다는 실감이 조금이나마 들었다.

"허, 허허허! 이런... 이런...!"

그렇게 기뻐하는 남작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남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떨리는 뒷말을 연신 삼켜댔다.

결국엔 다른 말은 더 못하고 이쪽을 와락 끌어안아 주었더랬다.

한참이나 등을 토닥여 주었더랬다.

그리고 남작부인은 그 곁에서 그렁그렁한 눈길을 보내왔던가.

마치, 잘했다고, 장하다고 말하듯.

"...."

어째서 꿈속의 아버지가 보여준 눈빛이 떠오른 걸까.

그 밖에도 다른 이들도 모두 찾아왔다.

가문의 막대하던 빚을 정리한 공적에 찬사를 보내어 왔더랬다.

"로이드 님. 정말로 장하십니다. 어떤 누구라도 이런 일, 쉽게 못 해냈을 겁니다."

"한때 로이드 님을 오해했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로이드 님."

행정관과 바이에른 경의 우직한 진심이 전해져 왔다.

그 외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는 하인과 하녀들.

영지를 걷다가 길에서 마주한 농민들.

모두가 갖가지 찬사를 보내어 왔다.

'소식 참 빠르네.'

빚을 갚은 게 점심 무렵인데.

사채꾼들이 다녀간 지 서너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 해가 미처 기울지도 않았는데 영지 구석까지 떠들썩한 느낌이다.

축하드린다고.

정말 대견하시다고.

살면서 이만큼 칭찬을 들어본 날이 있을까 싶었다.

덕분인지 덤으로 새로운 찬사까지 생성되었다.

딩동.

[당신은 오랜 시간 동안 보인 다양한 재치와 기지, 성실함을 통해 가문의 막대한 빚을 정리하는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이들이 감탄과 찬사를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새로운 찬사, <프론테라의 장남>이 생성되었습니다.]

[프론테라의 장남]

[찬사 등급 : 지역 민담]

살다 보면 빚을 질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신세도 질 수 있지.

하지만 말이지.

가끔 인생의 불운이 덮쳐올 때.

감당하지 못할 빚이 어깨에 얹힐 때.

대부분 이들은 그 사실에 절망한단다.

자신의 운명과 불운을 한탄하며 주저앉는단다.

그게 나쁜 건 아니야.

어찌 보면 당연한 거야.

사람이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저분이 대단하신 거지.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는데.

모두가 불가능할 거라 여겼는데.

쉽게 절망하지도, 주저앉지도 않으셨거든.

그러니 아들아.

너도 언젠가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저 사람이 이룩한 업적을 떠올려 보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법이니.

[찬사 효과 : 크레모나 지방 한정으로 최상급의 경제적 신용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당신은 언제나 가장 낮은 금리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투자금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투자받은 금액에 대한 어떠한 채무 독촉도 받지 않게 됩니다.]

[찬사 유지 기간 : 평생]

[찬사가 매달 제공하는 CP : 2]

[현재 보유 중인 CP : 2]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좋은 옵션이었다.

게다가 기간마저 평생이다.

만세가 절로 나올 정도다.

한데 오늘은 그게 안 된다.

평소와 다르게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 때문일까.

로이드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창을 한 번 스윽 확인하고는 닫아 버렸다.

대신 곁을 나란히 걷는 이를 불렀다.

"어이."

"예, 로이드 님."

"네 아버진 어떤 분이셨어?"

"...."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싱긋, 미소가 나왔다.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개인적인 질문인데 예의 없이 물은 거라면 미안."

"...오늘 뭐 잘못 드셨습니까."

"아닌데."

"그런데 어째서 그리도 쉽게 사과를 하시는지."

"그냥.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 아니겠냐."

그렇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아주 가끔은 로이드 프론테라가 아닌, 김수호로 돌아간 것 같은 날. 언제나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서 숨 한 번 크게 쉬어보는, 그런 날.

"...투박한 분이셨습니다."

하비엘의 목소리가 불현듯 귓가를 톡톡.

두드리듯 나직한 혼잣말처럼 이어졌다.

"사실 너무 어릴 때라서 선명한 인상은 아닙니다. 유리 몇 겹을 겹쳐놓은 것처럼 흐릿한 기억이 다지요. 그래도 여전히 기억나는 한 가지는, 제 아버지가 무척 투박한 분이셨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기억하는 건데?"

"밤에 잠들기 직전에야 등을 툭툭 두드려주시던 손길, 그게 다였거든요."

노을 속에 하비엘의 웃음이 번진다.

"바쁜 분이셨습니다. 종일 얼굴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기다리다가 늦게야 겨우 잠들곤 했습니다. 아니, 어머니께 혼나기 싫어서 잠든 척만 했습니다. 자정까지."

"자정이 되면 돌아오신 거?"

"네."

녀석의 눈길은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짙어지는 노을일까.

과거의 기억일까.

"매일 늦게까지 일하다가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면 잠든 척하던 제 등을 흙 묻은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주곤 하셨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 커다란 손바닥의 굳은살 감촉. 토닥이는 것조차 서투르던 손짓...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어쩌면 우린 참 비슷한 건지도.

그 뒤로 하비엘과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누는 말 대신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나란히.

그렇게 한참을 걷다 저택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하비엘을 재우고, 침실로 돌아왔다.

"후우."

평소와 비슷한데 평소와 뭔가 다른 이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그래서 내 기분이 어떤 건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웃겨, 진짜로.'

절로 나오는 헛웃음 삼키며 누웠다.

불 꺼진 침실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새까만 천장 너머로 아릿한 기억이 새록새록.

누렇게 낡은 일기장처럼 펼쳐졌다.

어리던 때의 나날들.

부모님의 모습들.

어려워졌던 집안 사정.

감당할 엄두도 나지 않던 빚더미.

그 무게에 어깨 굽으시던 부모님의 뒷모습까지.

'진짜로, 웃겨.'

다시금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자꾸만 콧등이 시큰해진다.

오늘도 어젯밤과 같은 꿈을 꾸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저, 여기서나마 해낸 것 같아요.'

그렇게, 울었다.

이 세상에 온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120화. 기쁜 날 (2)

꼬끼오.

아침이 밝았다.

그 소리에 로이드는 눈을 반짝 떴다.

"후아."

일어나자마자 눈두덩부터 비볐다.

지난밤 꿈의 흔적을 서둘러 지웠다.

평소처럼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하비엘을 깨웠다.

그랬더니 하비엘 녀석이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툭, 꺼내는 것이 아닌가.

"혹시 간밤에 우셨습니까?"

"뭐?"

"눈두덩이 약간 부어 있으십니다. 흰자위도 좀 충혈된 것 같고 말입니다."

"아, 이거?"

서둘러 웃었다.

"잠을 뒤척여서 그래. 아, 어젠 심장이 벌렁거려서 진짜."

"심장이요?"

"어. 앞으로 무슨 꿀을 빨면서 살까 싶어서."

사실이다.

센치한 기분은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으니까.

그것도, 빚이라고는 한 푼도 찾아볼 일 없는 금융적 클린 라이프의 시작이 이제부터니까.

"생각해 봐라. 빚은 다 갚았지. 영지 운영도 탄탄하지. 자작령에서는 매달 수도세도 따박따박 들어오지."

그것 또한 사실이다.

열거해보면 이곳 남작령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온갖 호재가 널리고 널린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메뚜기 떼 때문에 약간 피해 입은 마레즈 개간지? 문제없어. 방울이가 화산 폭발로 숯으로 만든 메뚜기 시체 있지? 그거 곱게 갈아서 밭에 뿌렸더니 대박이라더라."

"설마 비료로 말입니까?"

"어. 고추며 옥수수며 그냥 아주 쑴펑쑴펑 자란다던데?"

"흐음, 다행이로군요."

"거기에 오크 부족도 제대로 자리 잡은 거 같고."

"하긴, 저도 그 소식은 들었습니다. 새 터전으로 삼은 카푸아 호수 인근에 사냥감이 아주 널렸다며 매우 만족한다고 하던데요."

"어, 맞아. 비벙이도 제 역할을 해주고 있고."

그 100미터 사이즈의 환상종은 오늘도 카푸아 호수에서 첨벙첨벙.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포효도 우렁차게 꼬박꼬박.

이쪽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고 있었다.

비벙이의 첫사랑 대상이 된 방울이의 공훈(?)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건 그렇게 걱정거리도 없고. 탱자탱자 살아갈 일만 남은 거 같고. 그래서 잔치 좀 벌여볼까 싶은데."

"잔치라니요?"

"뭐, 빚 다 청산한 기념이랄까. 몬스터 습격을 무사히 막아낸 세레머니랄까. 안 그래도 원래 이 시기쯤엔 추수감사제, 그런 것도 하잖아? 그러니까 겸사겸사."

"괜찮은 의견이신 듯합니다."

"...네가 어쩐 일로 내 칭찬을?"

"그냥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냐."

"예."

이쪽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하비엘.

최근엔 전보다 쌀쌀맞은 기색이 많이 줄었다.

아무래도 0의 장벽을 뚫고 플러스까지 올라온 호감도 덕분인 듯했다.

"뭐, 어쨌건 그걸 건의 좀 드려 보려고."

남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축제를 열어 보자는 의견을 밝혔다.

당연히 남작은 열렬한 예스맨이 되어 주었다.

"내 듣기에 매우 좋은 의견이로구나. 거기에 더해서 축제가 끝나면 우리, 이참에 가족여행 한번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느냐."

"네? 여행이요?"

"그래, 여행."

남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전에는 한두 해에 한 번씩은 다 함께 가족여행을 즐기곤 했지 않느냐. 한데 그 일이 생긴 뒤로는 도통 뜸했지 않니."

"아...."

아무래도 사채를 떠안게 된 이후를 말하는 것 같다.

이어지는 남작의 말을 들어보니 그 추측이 맞는 듯했다.

"그러니 이런 때가 기회이지 않겠느냐. 빚이 가득하던 동안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이번에는 모처럼 큰 고비도 넘겼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남작의 얼굴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 뒤로도 로이드는 남작의 말을 한참 들어야 했다.

주로, 이 계절에는 어디어디가 여행지로 제격이라더라, 라는 식의 남작의 가족여행 계획 김칫국 퍼레이드이긴 했지만.

"네, 좋습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러하냐?"

"예. 대신 계획은 전부...."

"걱정 말고 이 아비에게 맡기거라. 이런 계획 하면 내가 아니더냐."

"하하, 그런가요."

"아암, 그렇고말고."

남작이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가족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가족여행이란 걸 해본 게 언제였을까.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학과 엠티? 오티? 근데 그건 가족여행도 아니고.'

더듬어보자니 가족끼리 오붓하게 여행을 다녀온 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였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고 나서는 그런 기억, 찾아보려도 없었다.

'게다가 몇 년 동안은 여행이란 것 자체를 아예 못해봤지.'

사실이었다.

이곳 세상에 떨어진 뒤로는 언제나 일만 하기 바빴다.

남작가에 얹힌 빚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는 와중에 크레모에도, 왕도에도 다녀왔지만 그건 여행이 아니었고.'

공무를 위한 출장이다.

그러니까, 일이다.

그건 여행으로 인정할 수 없다.

게다가 이곳 세상으로 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땐 여기서보다 더했지. 고시원에서 썩어가던 때였으니까.'

여행은커녕 숨 한 번 돌리러 겨우 시외버스 타고 어딜 다녀오는 것마저 엄두가 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갑자기 동해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다.

가서 아무것도 안 해봐도 좋았다.

여관이고 뭐고 안 잡아도 됐다.

살아가려니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이렇게만 있다간 가슴이 터질 거 같아서.

그냥 바다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외버스를 타보려 했다.

하지만 관뒀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복 버스비가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버스비를 쓰면 고시원비를 낼 돈이 모자랄 것 같았다.

'비참했어.'

겨우 만 몇천 원 남짓 때문에 조촐한 걸음조차 포기하고 돌아오던 길은 얼마나 암울했던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남작가문의 든든한 재정이 있다.

큰 낭비를 하지만 않는다면, 탕진에 눈을 뜨지만 않는다면 평생 안정적으로 풍족하게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남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걸음이 가벼웠다.

다음날부터 영지 축제를 즐기면서도 그러했다.

'이게 사람 사는 거로구나.'

맛있는 음식.

일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일상.

이쪽만 보면 친절하게 웃는 사람들.

마치 자신을 위해 세팅된 천국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그렇게 축제가 사흘째 이어지던 날이었다.

'편하다.'

축제마저 익숙해진 그는 아예 침실에 누워 온종일 뒹굴거렸다. 서재에서 집어온 책 몇 권을 읽으며 모처럼 무료하고도 잉여로운 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에 게임 생각도 나고.'

한국에 있을 때 공짜로 즐기던 게임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렇듯 심심할 때 시간 때우기로는 그런 게임만 한 게 없는데.

'사냥이라도 좀 배워 볼까.'

현실 헌팅 게임.

그거라도 안 하면 살이 찌진 않을까.

소파에서 뒹굴대며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무렵이었다.

똑똑똑.

"로이드 님, 계십니까."

노크와 함께 하비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드는 소파에 나뒹굴던 자세 그대로 대꾸했다.

"어, 있어. 들어...."

"지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벌써 들어왔냐."

얼굴을 덮고 있던 책을 치웠다.

그러자 보이는 하비엘의 표정.

제법 굳어 있다.

한데 그냥 일상적으로 굳은 얼굴이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 제법 되기에 알아볼 수 있는 기색.

"무슨 일이야?"

짓궂은 장난?

아니다.

뭔가 크든 작든 일이 생긴 모양이다.

역시나 돌아오는 하비엘의 대답이 심상치가 않았다.

"제가 무어라 딱히 정의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럼?"

"직접 나와서 확인해 보셔야 할 듯합니다."

"...."

녀석을 따라나섰다.

저택을 나와 영지 중심 마을로 내려갔다.

사흘째 축제가 열리고 있던 흥겨운 현장이었다.

한데 지금은?

'뭔가 어수선한데.'

취한 듯 흥 넘치던 류트와 노랫소리가 멎어 있었다.

그 빈자리에 영지민들의 삼삼오오 웅성거리는 소리가 채워져 있다.

그러한 주민들의 시선은 모두....

'저 사람들, 누구지?'

일군의 사람들을 향해 쏠려 있었다.

숫자는 약 70에서 80명 정도.

복장이 모두 한결같다.

군인이나 무장 집단이라서?

아니다.

한결같이 헐벗었다.

원래는 멀쩡한 셔츠나 외투였을 옷.

지금은 온통 때가 타고 찢겨져 있었다.

무릎이 해지고, 소매가 뜯기고, 제대로 기워놓지도 못했다.

그 빈틈으로 엿보이는 속살엔 뼈와 가죽만 남았다.

발바닥은 더욱 처참했다.

신발 비슷한 것이나마 제대로 갖춰 신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헝겊 누더기로만 대강 발을 동여매고 걸었는지, 온통 갈라지고 깨진 발바닥과 발가락에 피고름과 흙과 먼지가 엉켜 엉망진창이었다.

'무슨 이런.'

한마디로 만신창이다.

눈과 볼이 움푹 들어간 얼굴도.

온통 떡이 진 머리칼과 지친 표정도.

로이드는 영지 주민들 사이를 지나 헐벗은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거기, 혹시 우리 영지의 주민들인가?"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였다.

"아, 아닙니다요, 도련님. 혹시, 도련님께서 이 영지의 주인이십니까?"

"주인은 아닌데."

"아, 그러면...."

"주인 아들."

"아."

헐벗은 무리 중에서 대표로 보이는 사내.

이제 서른을 조금 넘겼을까 싶었다.

이쪽을 향해 간곡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참으로 죄송하지만...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련님."

"으음."

"여기, 어린아이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많이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저 가축에게 먹일 것이라도, 어른은 빼고 어린아이들에게만이라도 조금만 내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사내가 울먹이며 넙죽 엎드렸다.

헐벗은 무리 전체가 넙죽 엎드렸다.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아."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온 걸까.

혹시 거지?

그렇게 보기엔 너무 숫자가 많았다.

남녀노소, 연령층도 지나치게 다양했다.

로이드가 말했다.

"댁들 먹일 음식 정도 제공할 형편은 충분히 되니까 그만 진정하고. 응? 일단 그쪽은 나와 이야기부터 좀 해보는 게 순서일 듯한데."

"이야기를... 말씀이십니까?"

"안 잡아먹어. 식량 줄게."

"아, 알겠습니다."

비척비척 일어난 남자가 냉큼 다가왔다.

로이드는 주민들에게 물과 스프 등의 소화하기 좋은 음식부터 가져와 헐벗은 이들에게 제공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남자를 한쪽으로 데려와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댁들 누구야?"

난데없이 축제가 벌어지는 영지에 나타난 헐벗은 무리.

아무리 봐도 뭔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최악의 경우, 외국의 첩자가 이들 중에 섞여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데 이내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희는 소르티노 남작령의 주민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영지 산 소르티 촌락의 니콜라스라고 합니다. 원래 제 아버지가 촌장이셨는데, 이번 난리가 벌어진 통에...."

"잠깐. 소르티노 남작령의 주민이라고? 댁들이?"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왔어? 그런 몰골로? 게다가, 난리라니?"

로이드가 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르티노 남작령이라면 우리 영지에서 제법 남쪽에 떨어져 있는 곳인데?'

그런데 거기 주민들이 어째서 이런 몰골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답은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에 있었다.

"몬스터가 마을을 덮쳤습니다."

"...뭐?"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였습니다. 그, 무슨, 이름이 헤라클레토라고 하던가요. 풍뎅이를 닮은 모습에 덩치가 2미터는 넘는 놈들이... 그야말로 벌떼처럼 날아왔습니다. 나무라는 나무, 풀이란 풀은 모조리 갉아 먹었습니다."

"그게 무슨...."

"그 습격으로 터전을 잃었습니다. 물론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주님의 독려를 받아 가며 재건을 위해 움막이나마 세우고 밭을 다시 일구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저희를 저버렸습니다."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헤라클레토가 저흴 습격하고 바로 닷새 뒤에, 또 다른 몬스터 무리가 마을을 덮쳐 왔으니까 말입니다."

"...."

로이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들어보니 무슨 사연인지 알겠다.

"...몬스터 도미노."

"예?"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어쨌건 그래서 댁들 영주는?"

"헤라클레토 다음으로 영지를 덮친 몬스터 무리와 싸우다 실종되셨습니다. 아마도...."

"잡아먹혔겠지."

"...예."

남자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말했다.

"영주님과 그 일가족마저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희끼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저 목숨 하나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절반 이상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겨우 여기까지...."

"고생이 많았겠군."

"...크흑."

끝내 남자가 눈물을 보였다.

비로소 로이드는 사태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소르티노 남작령. 우리 영지보다 한참 남쪽에 있긴 하지. 하지만 그 영지의 동쪽에는? 마찬가지로 동부산맥이 있어.'

동부산맥은 그야말로 길고, 광대했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길이만도 수백 킬로미터에 달했다.

당연히 동부산맥에 접해 있는 영지는 이곳 프론테라 남작령 하나만이 아니었다.

줄잡아 수십 개의 영지가 동부산맥에 접해 있었다.

그리고....

'동부산맥에 인접한 대부분의 영지가 이번 몬스터 도미노 현상의 범위에 들었겠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남을 도울 여력까지는 없었다.

나름 자기 영지를 꾸리는 영주들이 알아서 잘들 대처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거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될 환상종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도, 잘 훈련된 공병대와 국왕이 파견해준 백색창기병도 없었지.'

한데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 도미노를 막아낼 수 있었을까.

답은 아니다, 였다.

"일단 음식부터 들도록 해. 몸도 녹이고."

"정말로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 은혜는...."

"은혜 같은 거 들먹이지 마. 부담스러워. 며칠 몸 추스르다가 좀 나아지면 가급적 다른 영지로 떠나든가."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남자가 매달릴 것이 부담스러워서?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 못 한다고,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을 금세 까맣게 잊어서?

모두 아니었다.

'이거, 어쩌면 저런 사람들이 끝도 없이 몰려올지도 몰라.'

어수선해진 축제 현장을 떠나 남작가 집무실로 향하는 로이드의 걸음.

어느새 바빠져 있었다.

머릿속도 마찬가지였다.

며칠간 늘어져 있던 뇌세포를 모두 일깨웠다.

이번 일로 예상되는 앞날을 꼼꼼히 계산하고 따져보았다.

'적어도 스무 군데 이상의 영지가 박살 났을 거야. 그럼 거기서 발생한 피난민이 어디로 몰려들까? 서쪽으로? 아니. 거긴 또 다른 산맥이 있어서 못 건너. 남쪽? 외국이야. 몬스터들이 몰려올 동쪽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면 움직일 곳이 북쪽밖에 없다.

한데 그 북쪽 경로에서 그나마 멀쩡한 영지가 바로 이곳, 프론테라 남작령일 것이다.

게다가 이제 계절마저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그럼 저런 행색에 식량도 없이 크레모까지 가는 것도 무리겠지. 그 말은 곧....'

피난민들이 움직일 북쪽의 경로.

그 경로에서 아직 멀쩡한 영지.

그나마 걸어서 이동할 엄두가 나는 곳.

'빼박 당첨이네. 여기밖에 없잖아.'

와드득.

대규모의 피난민이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매정하게 내치면?

틀림없이 왕실로부터 엄한 문책을 받을 것이리라.

'이거, 또 일복 터지겠네. 젠장.'

대체 꿀단지는 언제쯤에야 마음 놓고 핥을 수 있는 걸까.

쑴펑쑴펑 치솟는 비애감을 싣고서 남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로이드의 걸음이 더욱 바빠졌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상상초월의 규모로 몰려들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긴급 도시 계획이 착착 세워지고 있었다.

121화. 투자금 뜯어내기 (1)

"당분간 조금 바빠질 것 같습니다."

"엇?"

까각?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탓이었을까.

남작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조각용 칼이 휙 밀려났다.

남작의 반대편 손에 들려 만들어지고 있던 목각인형에 기다란 흠집이 생겨났다.

"어이쿠, 이런...."

안타까운 표정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프론테라 남작은 목각인형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바빠질 것 같다니?"

"그보다는 그거, 괜찮으세요?"

"아, 괜찮다. 어차피 깎아낼 자리니까 지장은 없단다. 손도 다치지 않았고."

"다행이네요."

로이드는 말과는 달리 다소 안타까운 기분을 느꼈다.

남작이 즐기고 있던 목각인형 만들기라는 취미.

가문이 사채에 짓눌린 이후로 끊었던 취미라고 들었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시작했다.

빚을 다 갚았으니.

가문의 위기가 끝났으니.

모처럼 되찾은 일상을 조용히 즐기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그 일상도 당분간은 또 접어야 할 듯하다.

"피난민이 우리 영지에 왔습니다."

"뭣?"

다시 조각칼을 들어 흠집을 손질하려던 남작이 멈칫했다.

"피난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말 그대로입니다. 숫자는 약 팔십 명쯤 됩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알아보았더냐?"

"예. 남쪽의 소르티노 남작령입니다."

"뭐? 잠깐. 소르티노라면...."

"예, 동부 산맥에 인접한 곳이지요. 우리와 비슷하게."

"...."

남작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동부 산맥에 인접한 영지.

그 뜻을 깨달은 탓이리라.

로이드가 말했다.

"불행히도 몬스터 도미노 현상에 대처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영지 자체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소르티노 남작 일가는?"

"행방불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극이...."

"일단 피난민들에게 따뜻한 물과 음식을 제공하라 일러두었습니다. 다만,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로이드는 남작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아마 더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고 말한 것이로구나."

"예."

"하면 다른 영지들의 소식은? 들은 바가 있더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대부분 소르티노 남작령과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남작의 입이 다물렸다.

믿기는 어려웠지만 충분히 실감은 갔다.

처음 영지를 덮쳐오던 수십만 마리의 메뚜기 떼.

남작 또한 그 충격과 공포를 직접 겪은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런 사태가 생겼다면 그걸 막아낼 수 있는 곳은... 많진 않았겠지.'

지금도 종종 그날의 꿈을 꾸는 남작이었다.

그럴 때면 식은땀에 온몸이 푹 절어 잠에서 깨어나 뒤척이곤 했다.

하니 이건 그냥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다.

딸각.

남작이 목각인형과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하면... 그 피난민들이 우리 영지로 오게 될 것이란 말이더냐?"

"예."

"얼마나?"

"거의 대부분이라고 봅니다."

"뭐?"

"그래서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천 명은 기본에, 만 단위를 가볍게 넘길 거 같은데요."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소 수천에서 만 단위를 가볍게.

그건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던 남작의 입장에서도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숫자였다.

당연했다.

지금껏 자신이 다스려온 프론테라 남작령.

이 영지의 인구를 다 합쳐도 5천 명이 안 됐으니까.

즉, 지금 자신의 아들은 앞으로 이곳 영지 인구의 몇 배가 넘는 피난민이 한꺼번에 몰려들 거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상황이 아무리 그래도, 정말 그렇게 되겠니?"

"아마도 그럴 거라고 봅니다."

"...."

꿀꺽, 남작의 목젖이 출렁였다.

로이드의 말은 언제나 옳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아들이 하자는 대로 해서 손해를 본 적이 있었던가.

그 말을 믿고 따라서 지금껏 얻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아들의 말을 믿을 근거도 충분했다.

"하긴. 생각을 해보니 네 말이 일리가 있겠구나."

남작이 신중한 표정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동부 산맥에 인접한 영지는 대부분 큰 피해를 입었을 테지. 게다가 그 서쪽에 인접한 영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야."

"예, 그럴 겁니다."

"그렇지. 그렇게 보니 피난민이 갈 곳이 그리 많지 않겠구나."

"예. 더 서쪽은 다른 산맥이 놓여 있고, 남쪽은 타국이지요."

"그렇다고 몬스터가 몰려오는 동쪽으로 움직일 수도 없을 테니, 결국 갈 곳은 북쪽뿐이고...."

"그 경로에서 멀쩡한 영지는 아마 우리와 라코나 자작령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이곳 지방의 중심도시인 크레모가 있긴 하지만, 거긴 너무 멀죠."

"그렇지. 설상가상으로 겨울까지 오고 있으니 굶주리고 헐벗은 피난민의 입장에선 크레모까지 가는 건 너무 힘겨운 일이 되겠지."

"예. 아마 겨울을 보낼 적당한 곳으로 몰려들 겁니다."

"그게 우리 영지가 될 거란 뜻이로구나."

"네."

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역시 남작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난세를 헤쳐나갈 독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최소한 주변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줄은 아는 사람이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게 정말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입니다. 사람들이 왕창 몰려들기 전에 일단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가지라면?"

"피난민을 수용할 때 가장 시급한 것, 식량과 거처겠지요."

"식량과 거처라."

남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축제를 중단해야겠구나. 조금의 음식이라도 더 비축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수만 명이 겨우내 먹으며 버티기에는 한참 모자랄 듯한데."

사실이었다.

현재 영지에 비축된 식량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마레즈 개간지가 첫 수확을 맞이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개간지를 처음 꾸리느라 시행착오도 많았다.

아직은 영지민들이 겨우내 먹을 식량까지만 그럭저럭 감당할 정도밖에 안 됐다.

한데 피난민까지 추가되면?

심지어 그 피난민의 숫자가 영지민의 몇 배나 된다면?

그건 답이 없다.

남작은 우선 떠오르는 생각을 말했다.

"수입이라도 해야 하나? 크레모에서?"

"뭐,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차선책으로 남겨두고 싶네요."

"그 말은 즉, 최선책이 따로 있다는 소리더냐?"

"예."

"그게 무엇이더냐."

"메뚜기요. 저번에 방울이 화산폭발로 잡은."

"...."

남작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 그 메뚜기 사체를 먹이겠다고? 피난민들에게?"

그거, 그랬다간 거부감에 다들 토하는 거 아닐까.

혹은, 다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민란이라도 일으키는 건 아닐까.

남작의 와자작 얼어붙은 대뇌피질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사실 무리도 아니었다.

메뚜기를 먹는다는 것.

그로선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이곳 로라시아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었다.

대한민국 출신인 로이드와는 다르게 말이다.

'메뚜기 그거, 보기엔 좀 그래도 잘 구워서 먹으면 맥주 안주로 제법 괜찮은데, 뭘.'

게다가 대한민국의 대다수가 즐기는 간식인 번데기를 떠올려 봐도 그랬다.

한국인인 그와 로라시아 대륙인인 남작.

둘 사이의 벌레 음식에 대한 거부감의 기준 자체가 달랐다.

로이드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안 죽습니다. 아니, 생각보다 맛있을 겁니다. 영양도 엄청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레를...."

"게다가 작은 벌레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괜찮을 겁니다."

"더 괜찮을 거라고?"

"통째로 먹을 일이 없을 테니까요."

로이드의 한쪽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몸길이가 70센티나 되는 메뚜기들입니다. 머리나 다리를 떼어내고 껍질을 벗겨서 알맹이만 남겨도? 족히 50센티는 될 겁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예. 그걸 단숨에 다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테이크가 그 크기라고 생각해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

남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제 슬슬 감을 잡아가는 듯하다.

"어차피 살코기 부위만 잘게 잘라서 먹을 거라는 말이로구나?"

"예, 바로 그겁니다."

로이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사람 심리가 원래 그렇다.

음식 재료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수록 사람은 큰 거부감을 느낀다. 호불호가 심해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요리에 원형을 감추기 위한 재료 손질이 들어간다.

게다가 피난민들은 먹방 BJ나 푸드파이터가 아니다.

50센티나 넘을 원형을 그대로 갖다가 먹을 사람은 없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메뚜기 고기가 제공될 때는?

잘게 잘려 가공된 상태로 식판에 오르리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메뚜기 살코기에 대한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메뉴 개발이 필요할 듯하고 말입니다."

"메뉴 개발이라니?"

"맛있게 먹으려면 필수일 테니까요."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이제는 움직이죠.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남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피난민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로이드의 예상이 정말로 맞다면.

지금 당장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남작령이 분주해졌다.

앞으로 몰려들 대규모의 피난민.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착착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대량으로 확보한 메뚜기 고기의 가공이었다.

이미 화산폭발 스킬에 의해 바삭바삭 구워진 놈들이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서늘하니 보관 상태마저 훌륭했다.

그걸 손질했다.

가공 작업의 지휘는 하비엘이 맡았다.

"자, 다들 날 보고 따라 하도록. 여기부터 이렇게. 이렇게."

그가 단검으로 시범을 보였다.

슥슥, 바싹 구워진 메뚜기 껍질이 순식간에 벗겨졌다.

새우 같은 새하얀 속살이 금방 자태를 드러냈다.

"참 쉽지?"

"...."

당연히 절대 쉽지 않았다.

경비대 병사들이 끙끙대며 껍질을 벗겼다.

그렇게 알맹이만 남은 메뚜기 살코기는 영지 아낙네들의 손에 맡겨졌다.

아낙들은 남작부인의 지휘를 따랐다.

"사실 제가 아까 살짝 맛을 봤답니다."

남작부인이 점잖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낙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인께서 저걸 먼저 드셨다고? 맛을 봤다고? 저 징그러운 메뚜기를?

"예, 맞아요. 씹고, 삼켜 보았답니다.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지요."

"...."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약간 강한 양념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살짝 누린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랍니다."

남작부인이 우아하게 웃었다.

낡은 책자 하나를 조리대 위로 탁, 올려놓았다.

"다들 이 요리책을 아실 거라 믿어요. 네, 양식 있고 기품 있는 부인들이라면 당연히 한 권씩은 지니고 있을, 혹은 지니고 싶어 할 명품 요리책, '용왕님의 셰프가 되겠습니다'랍니다."

"어머나."

아낙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수런거림이 일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용왕님의 셰프가 되겠습니다.

저 요리책은 그야말로 로라시아 대륙에서 수백 년째 최고로 손꼽히는 명품 요리책 중의 하나였다.

무려 수백 년 전,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을 모시다가 색시까지 된 어느 이국의 소녀가 직접 집필하여 남긴, 그야말로 전설로 불리는 희귀한 요리책인 까닭이었다.

"네, 다들 아시는 그 요리책이 맞답니다. 우리 아들이 지난번에 흑마법사를 퇴치했던 거,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흑마법사의 소굴에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하여 이참에 이 요리책을 참고해서 메뚜기 요리를 개발해 볼까 하는데, 다들 어떠하신가요?"

"...!"

아낙들의 고개가 빛의 속도로 끄덕여졌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피난민의 식량을 준비하는 가운데, 로이드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데 그의 바쁨은 다른 이들의 것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는 걸었다.

오로지 종일 걸었다.

매일, 온종일, 영지 곳곳을 걸어 다녔다.

마치 산책에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하염없이 걸었다.

때론 발길을 멈추고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거나 고민에 잠기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로이드는 며칠 동안 영지 구석구석까지 직접 걷고, 둘러보고, 또 걸었다.

가히 대동여지도를 그려낸 위인인 고산자 김정호의 혼이 빙의하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영지민들은 아무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이유가 있으시겠지. 로이드 님이시니까."

"아무렴요. 로이드 님이시니까 말입니다."

"그렇지요. 로이드 님이시니까요."

이제 프론테라 남작령의 골칫덩이이자 걸어 다니는 행패, 역병보다 더 기피 받던 망나니 도련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의 모든 행동은 한마디로 정의되고, 이해되었다.

로이드 님이시니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제는 숫제 로이드가 종일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다녀도, 설령 앞구르기 뒤구르기 덤블링을 방방 뛰면서 다녀도 주민들은 '로이드 님이시니까'라는 아량 넘치는 한마디로 그를 이해할 기세였다.

어쨌건 그렇게 보름 정도가 더 흘렀다.

그동안 로이드의 예언이 차곡차곡 실현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계속 몰려들었다. 더 몰려들었다.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작은 그룹은 열 명 남짓.

큰 그룹은 백 명 이상.

남녀노소.

동부 각지.

곳곳의 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이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진짜로 상황이 그렇게 되자 프론테라 남작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이걸, 어찌하면 좋겠느냐?"

피난민이 몰려들기 시작한 지 16일째가 되던 날 아침.

남작이 로이드를 불러들였다.

불안 담긴 목소리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후우. 내 너의 말을 듣고서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긴 하였다만, 막상 이렇게 끝도 없이 사람이 몰려드니 두려운 마음부터 드는구나."

솔직히 사실이었다.

예상은 했다.

피난민이 엄청나게 몰려올 거라고.

마음의 준비와 각오도 나름 다져 두었다.

한데 이런 사태를 실제로 겪고 보니까?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규모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까?

피부로 뭔가 확 실감이 되었다.

막연하던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느껴졌다.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나름으로는 메뚜기 고기라든가 여러 준비를 하였다만, 이 아비는 두렵기만 하구나. 과연 저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숫자만 받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내보내야 할는지. 당장 저들에게 차가운 바람을 피해 눈 붙일 곳을 마련해 줄 수는 있을는지. 온통 염려가 되어 어젯밤엔 잠도 이루지 못하였단다."

"흐음, 그러십니까."

"그렇단다. 대관절 이 사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그래서 말이다. 이 아비가 듣기로 최근 네가 영지 이곳저곳을 구석구석 살피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혹여, 일전에 말하지 않은 저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찾아낸 것이더냐?"

남작은 며칠 전에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로이드가 종일 영지 곳곳을 걸어 다닌다고 했던가.

그래서 짐작했다.

자신의 아들이 측량이라는 걸 하고 있으리라고. 며칠 전, 메뚜기 고기를 언급하던 때에 은근슬쩍 숨기듯 말해주지 않았던 주거 대책을 준비하는 것이리라고.

과연 그러한 남작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예, 대책을 준비해 뒀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다행이다. 그래, 대책이 무엇이더냐?"

"뭐, 당장 지을 임시 천막 같은 건 당연한 거고 말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최종적으로는?"

남작이 희망을 담아 물었다.

로이드가 상큼하게 생긋 웃었다.

"혹시 아파트라고, 들어보셨습니까?"

122화. 투자금 뜯어내기 (2)

아파트.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주택 양식.

수도권이나 지방 광역시, 중소도시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시골 읍내에도 반드시 보이다 못해 없으면 허전하고 섭섭하며 저녁 밥상에 김치가 빠진 것 같은 위화감마저 푸짐하게 선사해 주는 건축물.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의 아파트의 위상이었다.

당연히 로이드도 한국에서 살 때 아파트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무렵부터 쭈욱. 집이 경매로 팔려가기 전까진 그랬지.'

대한민국 표준형 34평 아파트.

거실 하나에 방 셋.

베란다엔 아버지가 키우시던 화분이 늘어서 있고.

소파 뒤편 벽에는 엄마 취향의 포인트 벽지가 부담스럽게 붙어 있던.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촌스럽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어서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딱 그런 집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그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때로는 엄마가 욕실 청소를 하신 날이면 맡을 수 있던 희미한 락스 냄새마저 꿈속에서 느껴 보기도 했다.

그만큼 아파트는, 그 당시의 집은 로이드에게 그립고 그리운 곳이었다.

'물론 여기서 그런 아파트를 지을 생각은 아니지만.'

일단 그러기엔 여건이 안 된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지금 자신이 남작에게 제안하는 아파트 건설.

그건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피난민 수용을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고민했습니다. 넓지 않은 면적에 최대한 많은 인원이 효율적으로,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을 방법을 말입니다."

"으음,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아파트, 라는 것이더냐?"

"예."

선뜻 이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는 남작.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개념 앞에 약간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런 남작을 향해 로이드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가 고안하거나 떠올린 개념은 아닙니다. 전에 제가 왕도에 갔을 때 줄리앙을 보러 아카데미에 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으음, 그랬지."

"그때 줄리앙을 기다리던 중에 아카데미의 서재에 꽂혀 있던 어느 책자에서 우연히 본 개념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런 책자,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걸 남작이 확인할 방법 또한 없다.

그러니 이런 순간에는 마음 편히 하얀 거짓말을 섞어도 된다.

어차피 나중에 그런 책자, 없어졌나 보다,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때 제가 본 책자에는 고대 왕국들의 건축 양식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그럼 네가 말하는 이 '아파트'라는 것이 고대의 건축 양식이라는 뜻이더냐?"

"예, 바로 그겁니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로 실화이며, 실제다.

물론 그게 로라시아 대륙이 아닌, 지구의 고대 건축 양식이라는 점이 살짝 훼이크지만.

"고대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로마'라는 제국이 있었습니다. 그 제국에는 '인술라(Insula)라고 불리는 다층의 다세대 주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술라?"

"예. 나무와 벽돌, 진흙과 고전적인 시멘트로 만든 건물이었습니다. 보통은 붕괴를 막기 위해 6층까지 만으로 제한을 두었는데, 가끔은 10층을 넘겨 짓는 경우도 있었다더군요."

"허허, 10층이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 외에도 이슬람이라고 불리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그곳의 카이로라는 도시에는 7층 높이의 아파트가 즐비했는데, 한 건물에만 수백 명이 모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한 건물에 수백 명이나?"

"네. 높은 경우엔 14층 아파트도 있었는데, 그 옥상에는 정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봤습니다."

"허허. 거의 왕성 같았겠구나."

"물론입니다. 특히 예멘의 '시밤'이라는 곳에는 흙으로만 쌓아올린 11층 높이의 아파트도 있다고 전해지고요."

"흐음... 그 말은 즉, 방금 말한 경우들처럼 수직으로 쌓아올린 건물을 지어서 한정된 땅에 많은 피난민을 수용하겠다는 뜻이로구나?"

"예, 그겁니다."

로이드는 확신을 담아 미소 지었다.

남작에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건설 개념을 알려주는 중이다.

자로고 이런 순간에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이 아니겠는가.

'당연하지. 이럴 때일수록 뻥카를 섞는 한이 있더라도 어필을 제대로 해야 해. 그게 사회생활에서 이득을 보는 법이니까.'

문득, 한국에 있던 때가 떠올랐다.

딱히 복잡한 사회생활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흙먼지와 시멘트 가루 날리는 현장에서도 그랬다.

뭔가를 잘했다는 보상을 받아내려면 반드시 티를 내야 했다.

설령 정치질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랬다.

대개 어느 현장에서건 일 잘한다고 칭찬 들으며 더 좋은 팀으로 영입되는 사람은, 보통 평소부터 자신의 실력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티를 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즉, 실력에 어울리는 입을 털 능력이 있으면 같은 능력만 지닌 사람보다 더 좋은 보상을 받고, 많은 돈을 벌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입을 털어야 한다.

이게 훌륭한 거라고.

성과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로이드는 옥장판 방문 판매 영업사원의 마인드를 다지며 입술을 츄릅 적셨다.

살랑거리는 혓바닥에 힘찬 기어를 넣었다.

"일단 아파트를 짓게 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 피난민에 대한 행정적인 관리가 편리해집니다."

"행정적인 관리?"

"네. 예를 들어 한 동에 천 명이 거주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천 명을 한 단위로 묶고 대표를 뽑아 숫자를 파악하고, 건강 상태 등을 진단하고, 구호 물품을 지급하는 등의 관리 체계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흐음, 그럴듯하구나. 그럼 두 번째 장점은?"

"수직적으로 쌓은 주택에 다수의 인원이 거주하게 되니, 인원당 필요로 하게 되는 실질적인 토지의 면적이 줄어듭니다. 그리 크지 않은 우리 영지의 실정을 생각하면 꽤 매력적인 장점이 되겠지요. 이게 세 번째 장점과 연계됩니다."

"세 번째?"

"예. 훗날 저 피난민이 우리의 영지민으로 정착했을 때 아파트 주위로 상권이 발달하게 될 겁니다."

"상권이라니? 주점이나 잡화점, 음식점 같은 것들 말이더냐?"

"네. 말 그대로 아파트 덕분에 인구밀도가 높아진 지역이 생기는 겁니다. 좁은 지역에 인구가 많다는 점은 곧, 그 지역의 경제적 구매력이 높다는 말과 똑같은 뜻이 되겠지요."

실제로 그랬다.

대한민국에서는 정말로 철저하게 그러했다.

언제나 상권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집중된 인구.

탄탄한 구매력.

덕분에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알아서 상권이 들어서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오고, 각종 프랜차이즈 레스토랑과 카페, 학원, 병원, 마트, 미용실, 편의점이 간판을 내걸곤 했다.

인구가 상인을 유혹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또 하나. 짓기도 편리합니다."

"어째서 그렇더냐?"

"규격화가 되니까요."

로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 동 안에 수백 세대가 입주한다고 치면, 그 수백 세대의 집이 모두 똑같은 모양을 하게 됩니다. 마치 틀로 찍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그만큼 짓는 것도 편해지고, 나중에 관리하기도 편리해지죠. 게다가 겨울철 단열에도 유리해지고 말입니다."

"단열?"

"예. 각 세대, 집의 양쪽 옆과 위아래가 전부 다른 집으로 서로 둘러싸여 있을 테니까요. 집 안의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적다는 뜻일 거고, 그만큼 겨울철 난방이 수월해질 겁니다. 덜 춥겠죠."

"과연...."

남작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가 열거하는 장점들.

들어보니 모두 그럴듯했다.

게다가 로이드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장점마저 대단원의 피날레처럼 남작의 구미를 푹 찔러 왔다.

"거기에 마지막 장점. 유사시 영지의 방어가 유리해집니다."

"방어?"

편리한 행정에.

토지 면적 절약에.

활발해지는 상업에.

건설과 관리의 편리함에.

거기에 영지의 방어력까지?

남작의 동그래진 눈앞에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펜을 들어 테이블 위의 종이에 슥슥,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중간이 텅 비어 있는 도넛 같은 모양의 그림이었다.

"아까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고대의 아파트 양식이 또 있거든요. 이겁니다. 푸젠 지방의 '토루'라고 불렸던 건물입니다. 이렇게 생겼지요. 중앙에 널따란 광장이 있고, 그걸 건물이 빙 둘러싸는 형태로 말입니다. 물론 저는 이 둥근 토루와는 다르게 사각형 도넛 모양으로 아파트를 만들 계획이긴 합니다만."

"이건... 마치 성채 같구나."

"예. 모든 창문이 안쪽 광장을 향해서만 뚫려 있습니다. 덕분에 아파트 외벽은 통짜로 꽉 막힌 구조로 성벽의 역할을 합니다. 외부에서 광장으로 드나드는 출입구는 여기, 한쪽이 유일하고요. 이 메인 출입문만 닫아걸면 아파트 한 동 건물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신하는 거죠."

"그럼 아파트 중심에 만들어진 광장은 어디에 쓰이는 것이더냐?"

"공동생활입니다."

로이드가 자신 있게 말했다.

"모든 세대엔 간소화된 침실과 거실만 둘 생각입니다. 그 외에 음식을 만들고, 먹고, 설거지나 빨래를 하고, 씻고, 용변을 보는 등의 모든 행위는 저 광장에 만들어진 시설에서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물, 식당, 공중목욕탕, 공중화장실 등등의 공용 시설에서 말입니다."

"...."

"이래야 최대한 많은 인원을 빵빵하게 채워 넣고 재울 수 있거든요. 벌집처럼 말입니다."

"...."

"게다가 지금까지 열거해드린 장점, 때마침 전부 우리 영지에 적용하기 딱 좋은 상황이기도 하고요."

"...."

남작은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로이드가 약간은 뻔뻔한 낯빛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이걸 지으려면 제법 시일이 걸릴 겁니다. 부지 선정부터 측량에 설계에, 공사에 들어갈 자재도 마련해야 할 테고요. 현실적으로는 올해가 아닌 내년 겨울 전까지 완공하고 입주를 완료하는 게 목표가 되겠지요. 그러니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까지 피난민들이 머물 임시 거처부터 짓는 일도 시급할 테지요."

"그래, 그렇구나."

"음,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후우,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아들 하나는 참 잘 두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

"허허, 이 아비의 말이 그렇게 부담스럽더냐?"

"으음, 부담스럽다기보다는, 으으음, 네, 좀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얼굴 맞대고 들으니까 약간 오글거리기도 하고."

로이드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나름 입을 털어서 일을 추진하게 만들긴 했는데.

면전에서 듣는 저런 칭찬은 여전히 낯뜨겁긴 하다.

그걸 솔직하게 밝혔는데도 저렇듯 든든하게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마저도 약간은 부담스럽긴 하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속 어딘가엔 아직도 고시원 골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김수호가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이드는 그만 쑥스럽게 웃어 버렸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로이드는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구조는 최대한 단순하게. 빠르게 지을 수 있게.'

가로와 세로 20미터, 깊이 50센티의 정사각형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 크기에 맞추어 거푸집을 만들었다.

한데 거푸집 속에 지그재그로 파인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단면이 사각형인 통로의 너비는 약 20센티. 그런 통로가 바닥면 전체를 지그재그로 구석구석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반대편 끝은 굴뚝으로 연결을 시켰다.

바로 난방을 위한 시멘트 온돌이었다.

'전에 처음 온돌방을 만들 때는 방울이도, 화산폭발 스킬도 없었으니까.'

당시엔 시멘트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전보다 더욱 편리하게, 안전하게 온돌 바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이 설계 스킬 덕분이기도 하고.'

아예 설계 스킬과 시뮬레이션 옵션으로 열기의 흐름과 배출을 테스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열전달이 효율적인 온돌 구조를 설계하게 되었다.

그리고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었다.

"부어!"

"둘, 셋! 으럇차!"

"으랴랏차, 꾸익!"

인간 공병대와 오크 광부들이 합심했다.

방울이의 화산재를 베이스로 만든 시멘트를 개고, 거푸집에 부었다.

그렇게 시멘트가 양생되어 말라붙으니, 온돌 구조를 지닌 400㎡ 면적의 반듯한 바닥이 만들어졌다.

"자, 그럼 목재 패널 깔고!"

"옙!"

반듯한 시멘트 바닥 위를 얇은 목재로 마감했다.

그리고 사방에 장대를 세웠다.

한쪽 면은 높이 3미터.

다른 쪽은 2미터 높이로.

그 위에 두꺼운 천을 덮었다.

그렇게, 지붕 한쪽이 기울여져 겨울철 폭설에도 대비된 대형 온돌 천막이 완성되었다.

"자, 하나 지어 보니 요령은 알겠지? 이제부터는 모두 이것과 똑같이. 거푸집 설계와 규격도 전부 동일하게. 할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바이에른 경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공병대 지휘에 잔뼈가 굵은 이 사내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건설현장 소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머지 겨울용 임시 천막 건설을 바이에른 경에게 맡겼다.

덕분에 로이드는 아파트 건설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야.'

설계를 준비하는 내내 로이드는 종종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문제는 돈이었다.

'사채꾼들에게 졌던 빚을 갚느라 자금을 거의 다 썼으니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서 빚을 갚았다.

남은 자금이 얼마 없었다.

물론 매달 라코나 자작에게서 뜯어내는 수도세가 있긴 하다.

언젠가 판매하려고 쌓아 뒀지만 판매처를 찾지 못한, 방울이의 강철 끙까도 제법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당장 쓸 수 있는 목돈이 아니었다.

'다행히 자재비는 많이 들진 않아. 건설에 들어갈 철근과 시멘트 모두 방울이가 공짜로 제공해 주니까. 인건비도 싸. 영지 소속의 공병대를 굴리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가 있는 건 아냐. 사실 석공이나 대장장이들한테 지급할 인건비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참 모자라.'

특히 피난민이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 때문에 짓는 임시 천막.

거기에 들어가는 천을 사들이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피난민들이 소비하는 각종 식료품과 약재, 의복 등등의 생필품을 대기에도 턱없이 빠듯했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아파트까지 지으려니, 절로 돈줄이 턱 막히는 게 당연했다.

'어디선가 돈을 끌어와야 할 텐데.'

사실 염두에 둔 방법이 있긴 했다.

크레모의 백작에게 손을 벌려볼까 싶었다.

최근 사채를 해결하며 새로 얻은 찬사, <프론테라의 장남> 덕분이었다.

'크레모나 지방 한정으로 최상급의 경제적 신용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당신은 언제나 가장 낮은 금리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투자금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투자받은 금액에 대한 어떠한 채무 독촉도 받지 않게 됩니다...였지, 아마.'

그게 찬사에 붙은 옵션의 내용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투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은 망설여졌다.

'기껏 빚을 해결했는데 또 빚을 지게 된다니.'

물론 독촉받을 일이 없는 빚이긴 하다.

하나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로이드는 며칠 동안 결정을 미루고 고민했다.

한데 해답은 뜻밖의 방향에서 날아왔다.

"이거 큰일이로구나. 방금 왕도에서 이게 날아왔단다."

고민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오후, 프론테라 남작이 그를 호출했다.

집무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서신 한 장을 내밀어 왔다.

"이게 뭡니까?"

"칙서란다."

남작의 말대로 서신 봉투에 왕가의 마법 인장이 찍혀 있었다.

"조금 전에 전서구가 날아오더구나. 열어 봤더니 이게 있었단다. 아마 며칠 뒤면 같은 왕명을 지닌 칙사도 도착할 듯하고 말이다."

"...."

칙서를 받아들었다.

무슨 왕명일까.

펼쳐보았다.

[예부터 왕실은 왕국의 귀족, 시민, 그 외 만백성의 평온과 안락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나 근자에 들어 동부 산맥 일대에 크나큰 환란이 생겼나니, 이에 짐은 근심을 금할 길이 없노라.]

칙서에는 최근 동부 산맥에서 발생한 몬스터 도미노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로이드의 시선이 계속 칙서를 읽어 내려갔다.

[동부 산맥에 인접한 다수의 영지가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어쩌고저쩌고... 수많은 백성이 집과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이러쿵저러쿵... 갈 곳 잃은 그들 또한 짐이 아껴야 할 백성이니... 미주알고주알... 각지의 영주들은 짐이 통치를 맡긴 터전에서 피난민을 적극 수용하고 보호하도록 하라.]

'흐음.'

로이드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겼다.

[지령. 동부 크레모나 지방 일대의 모든 영지는 피난민의 수용과 보호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을 것을 국왕의 이름으로 명함. 공용력 617년 11월, 왕도 마젠타에서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공표함.]

"후우. 참으로 앞이 막막하구나."

칙령을 다 읽자마자 옆에서 남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보니 남작의 얼굴이 아예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내놓는 넋두리도 막막함에 젖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당연히 피난민을 수용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설마 이렇게 왕명까지 내리실 줄은 몰랐구나. 이러면 대체 어찌해야 할지. 자금도, 식량도 여유가 없는 이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더 해야 할는지를 말이다."

남작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피난민을 받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능력과 여건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였다.

피난민이 정말로 너무나 많았다.

한데 여기는 자그마한 일개 남작령에 불과했다.

하다못해 남쪽에 붙어 있는 라코나 자작령으로 피난민이 좀 분산되어 주면 좋으련만. 피난민들은 하나같이 여기, 남작령으로만 물밀 듯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가 인근에 퍼진 로이드의 명성 때문이었다.

크레모를 수호하고.

국왕을 지켜내고.

몬스터 침공을 두 차례나 저지한 남작령의 장남.

그러니 프론테라 영지로 가면 안전해질 수 있을 거야.

그러한 희망이 피난민들에게 등불이 되어 버린 까닭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몰려드는 피난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용을 거부할 길조차도 막히게 되었구나. 이렇게 왕명이 내려와 버렸으니 말이다. 하아, 이제는 정말로 어찌해야 할지."

남작은 앞이 막막해졌다.

몰려드는 피난민과 함께 자금난에 허덕이다 영지가 망하는 미래가 눈앞에 절로 그려졌다.

한데 그때였다.

"뭐, 잘된 일입니다."

"...뭐라고?"

아들이 갑자기 헛소리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씨익 웃기까지 했다.

"로이드야. 설마,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것이더냐?"

"예."

"어째서?"

"기쁘니까요."

"...."

자신의 똘똘한 아들이 드디어 부담감에 미쳐 버린 걸까.

남작이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기쁘다니. 도대체 왜?"

"답장을 쓸 겁니다. 그래서 기쁜 겁니다."

"답장?"

"예."

"누구에게?"

"당연히 이 칙령을 보내신 분, 국왕 전하께요."

"전하께? 답장을 보내겠다고?"

"예."

로이드가 기쁨 가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말로 잘됐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잖아도 요즘 자금난 때문에 고민이 많던 참이거든요."

"그래서?"

"국왕 전하께 답장을 보내는 김에 자금난을 해결할 치명적인 비장의 무기를 사용해 볼까 합니다."

"자금난을 해결할? 비장의 무기를?"

"예. 마침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절묘한 명분을 국왕 전하께서 안겨 주셨거든요. 방금, 이 칙령을 통해서 말입니다."

"..."

남작은 어쩐지 두근두근하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아들의 그릇이 자신과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같은 칙령을 받으면서도 나는 그저 막막해하며 절망만 곱씹었는데, 내 아들은 여기서 무언가 상황을 호전시킬 가능성을 엿본 것이로구나.'

장했다.

대견했다.

그러한 기쁨을 머금으며 남작이 물었다.

"비장의 무기라니.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대단한 방법이 있는 듯하구나. 그래, 네가 말한 그 비장의 무기가 무엇이더냐?"

남작이 설렘을 담고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로이드가 한 떨기 티타늄 철판꽃처럼 뻔뻔하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양 떨면서 떼쓰고 징징거리기입니다."

123화. 투자금 뜯어내기 (3)

"발사 준비."

끼리릭, 철컥! 철크걱!

이곳은 수도 마젠타의 왕궁 안뜰.

그곳의 대연무장에 장교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음성에 따라 50인의 석궁병이 장전용 윈들라스(Windlass)를 돌렸다.

살상용 볼트를 시위에 걸었다.

날카로운 볼트 머리가 서늘하게 빛을 머금었다.

그 순간, 장교의 엄숙한 명령이 떨어졌다.

"발사!"

투파팍! 파팍!

50발의 살상용 볼트가 일제히 쏘아졌다.

각각 1,250파운드에 달하는 장력을 싣고 목표를 향해 쇄도했다.

그곳에 국왕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가 있었다.

"...."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사방에서 자신을 포위한 50인의 석궁병들.

그들이 점한 위치는 자신보다 높았다.

따라서 모든 볼트가 위에서부터 이쪽으로 비스듬하게 쏘아져 왔다.

그녀는 그 볼트 50발의 모든 궤적을 순식간에 피부로 느끼고, 소리로 들으며, 감각에 새겼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철걱, 스칵!

그녀의 검이 뽑혀 나온다 싶은 순간.

은빛 오러가 줄기줄기 송곳니를 드러냈다.

스컥! 츠걱!

눈꺼풀 한 번을 깜빡이는 사이에 열두 번의 검격이 쏟아졌다.

베고, 후렸다가, 올려치고, 걷어내고, 뿌리는가 하면, 비틀어 잘라내고, 치고, 찍은 후에, 사선으로 갈랐다.

열두 줄기의 오러가 포효했다.

그녀의 주위로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언제 불었냐는 듯, 산들바람으로 변했다.

투두둑....

정확히 두 쪽으로 잘린 50발의 볼트가 그녀의 발치로 떨어졌다.

그냥 잘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길이 비율로.

똑같은 각도로 잘렸다.

단 한 발의 예외도 없었다.

그러나 국왕 알리시아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정도는 몸풀기일 뿐이다.

"다시. 이번에는 무작위 순차 사격으로."

그녀의 명이 건조하게 떨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던 장교가 석궁병들을 돌아보았다.

"발사 준비, 장전하라!"

끼리릭, 철컥!

다시 50인의 석궁병이 분주해졌다.

그렇듯 장전을 하느라 열심히 움직이는 석궁병들.

그들의 곁에는 각각 수백 발의 볼트가 쌓여 있었다.

중갑옷마저 단숨에 관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살상용 볼트였다.

하지만 그러한 살벌한 현장 속에서도 국왕 알리시아는 태연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기엔 살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겠지만, 그녀에겐 평범하고 일상적인 훈련에 불과한 상황이니까.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해.'

더 강해져야 한다.

더욱 검을 연마해야 한다.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하여 안주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지난날과 같은 치욕을 다시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런 꼴은 두 번 다시 겪기 싫으니까.'

그날이 떠올랐다.

왕도의 현수교가 완공되었던 날.

연회가 열리고, 독배를 마시고, 체르니 경의 습격을 받았던 날.

지금 떠올려도 수치스럽고 분함이 치미는 바로 그날.

'많은 도움을 받아 버렸어.'

무명 기사에 불과했던 하비엘이 소드마스터였던 체르니 경을 제압했다.

게다가 그저 평범한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던 로이드는 어떠했던가.

듣도 보도 못한 기법을 선보였다.

주위의 마나를 무차별로 흡수했다.

일격으로 연회홀 지붕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 버렸다.

단지 식사용 나이프 한 자루만으로 말이다.

'한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부끄러웠다.

소드마스터라고.

안주하고 있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중독의 후유증에서 회복된 후로 그녀는 지금과 같은 훈련에 매진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안건 때문에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체르니 경에게서는 아무런 자백도 받지 못했다.

소드마스터 특유의 강력한 심리적 장벽.

그것을 깨기 위해 갖가지 약물과 자백 마법을 동원했다.

그건 마치 수십 겹의 강철 벽을 스푼으로 파내는 작업과 흡사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한 달 가까이 매달렸다.

마침내 체르니 경의 심리적 장벽을 모두 해제했다.

한데 그렇게 드러난 체르니 경의 본심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체르니 경은... 텅텅 비어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지.'

정확히 말하자면 강력한 세뇌에 의해 기억 일부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국왕 시해를 시도한 동기.

그 일을 사주한 배후.

모두를 잊은 채였다.

남은 것이라곤 오로지 '국왕 알리시아를 그분의 뜻에 따라 죽인다'라고 강력하게 새겨진 목적밖에 없었다.

'분명 뭔가 있어.'

소드마스터인 체르니 경에게 그러한 세뇌를 걸어놓은 이는 누구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을 시해하려 든 것일까.

알 수 없었다.

수없이 조사를 거듭했음에도 그러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동부의 정황도 어지러워졌다.

'로이드 프론테라. 그자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어.'

동쪽 술탄국이 일으킨 몬스터 도미노.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피해 또한 막심했다.

동부 산맥 일대의 17개 영지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투파팍! 파파팟!

생각에 잠긴 사이에 쏟아진 50발의 볼트.

무작위 사격의 폭풍 속에서도 그녀는 생각을 이어갔다.

'그자의 간언을 들을 때만 해도 그저 발생 가능성이 있는 재난 정도로 여겼지. 설령 발생한다 해도 각 영지가 어느 정도는 대응하며 막아낼 수 있을 수준이리라 생각했어. 설마하니 이만큼 대규모의 참상이 벌어질 줄은.... 이건 명백한 나의 실책이야.'

사태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

스칵! 스카칵!

이렇게 손쉽게 베어지는 볼트처럼.

이번 사태도 쉽게 헤쳐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였다.

"국왕 전하, 동부의 프론테라 남작령에서 칙령에 대한 답신이 왔사옵니다."

연무장 한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보니 궁내부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국왕 알리시아는 검을 늘어뜨리고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답신이?"

"그러하옵니다, 전하. 방금 전서구를 통하여 당도하였사옵니다."

"가져와 보라."

"예, 전하."

궁내부원이 내미는 답신을 받았다.

펼쳐보았다.

[국왕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 로이드 프론테라가 충심으로 고하옵니다.]

약간은 갈겨쓴 듯한 로이드의 필체가 보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충심으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런 마음을 먹을 인간이 절대 아니다.

그녀는 경계심을 단단히 다지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금일, 국왕 전하께서 내리신 칙령을 엄숙히 펼쳤사옵니다. 그 뜻을 성심껏 받들기로 굳게 맹세하였나이다. 하오나 그러기엔 돈이 없사옵니다.]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그녀의 눈동자가 계속 움직였다.

[몰려드는 피난민의 행색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사옵니다. 아이들은 굶주려 뼈와 가죽만 남았고, 노인은 쓰러져 자식의 부축에만 간신히 의존하고 있사옵니다. 저는 전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입히고 싶사옵니다. 하오나 그러기엔 돈이 없사옵니다.]

"쯧."

이제 슬슬 의도가 보인다.

그녀의 눈이 답신을 마저 훑었다.

[진심으로 이 재난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싶사옵니다. 하오나 그러자니 돈이 없사옵니다. 전하의 뜻을 충성으로 받들고 싶사옵니다. 하온데 그러자니 돈이 없사옵니다. 식량도 없사옵니다. 옷가지도 없사옵고, 생필품도 없사옵니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전하를 향한 이 애달프고 애끓는 충성심밖에 없사오니, 그저 눈앞이 막막할 따름이옵고 밤낮으로 전하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를 따름이옵니다.]

"...."

그런 거, 부르지 마.

진심으로 말리고 싶었다.

그냥 이쯤에서 답신을 덮고 싶었다.

하지만 로이드가 답신에 알차게 새긴 마성의 징징거림이 그녀의 눈길을 끝끝내 놓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는 이 서글픈 재난을 다 함께 이겨내고자 전하의 옥안을 커다란 화폭에 새겨 한쪽 벽에 걸어 두었사옵니다. 어젯밤에도 굶주린 피난민들과 더불어 화폭 속 전하의 옥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사옵니다. 그랬더니 글쎄, 피난민들이 애끓는 충성심으로 배고픔마저 잊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

[피난의 아픔 또한 마찬가지였사옵니다. 오늘 아침에는 피난민들과 더불어 전하의 함자를 딴 '킹갓시아'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사옵니다. 예, 전하를 향한 충성과 애정으로 피난의 아픔을 잊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모임, 즉, 팬클럽이옵니다.]

"...."

잠깐. 뭐라고?

지금 제정신이야?

[배고픔이 느껴질 때면 화폭 속 전하의 옥안을 바라보고, 아픔이 몰려오면 전하를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추위가 몰려오면 아침저녁으로 전하의 올해 생신이 며칠 남았는지를 손꼽아 헤아리옵니다. 그러면 배고픔과 아픔, 추위도 모두 잊을 수 있노라 다들 행복하게 웃사옵니다.]

"...."

그거, 소름 돋도록 지겨울 거 같은데?

[물론 전혀 지겹지 않사옵니다. 매 순간 재미있사옵니다. 할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옵니다. 이렇게 고하여 드리고 보니, 돈이 없다는 사실이 피난민과 영지민 모두에게 이렇게 행복하고 뜻깊은 경험을 선사할 줄은 실로 몰랐사옵니다. 돈이 없고 배가 고파 행복하옵니다. 돈이 없고 아파서 즐겁사옵니다. 돈이 없고 추워서 짜릿하옵니다.]

"...."

그만해, 미친놈아.

[돈이 없으면 뭐 어떻겠사옵니까. 저희는 오직 전하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 끌어안고서 이 굶주림과 아픔, 추위를 이겨내겠사옵니다. 그리하여 머나먼 훗날 아름답게 꽃 피는 봄이 오면 저희가 남길 해골 이마에 전하의 아름다운 함자를 정성껏 새겨 두겠사옵니다. 아아, 전하. 아아아, 즈어어언하!]

"...."

이젠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체념(?) 담긴 눈길로 답신 가장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추신 - 어차피 크레모나 지방에 저희 빼고 남아난 영지가 얼마 없는 상태임은 전하께서도 익히 아시고, 저 또한 잘 알고 있는 바이옵니다. 하오니 전하를 업어 드리던 저! 로이드 프론테라의 헌신적인 등짝 온기를 아직도 일부나마 기억하신다면 제발 돈 좀... 더불어 왕실 대장간 장인 코기두스 어르신도 저희 영지로 좀... 간곡히 청하는 바이옵니다.]

"하, 하하."

답신을 다 읽은 국왕 알리시아는 그만 헛웃음을 흘려내고 말았다.

기도 차지 않았다.

'내가 또 실수를 하였구나.'

차라리 다른 곳으로는 몰라도 프론테라 남작령에만은 칙령, 내리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한데 보내고 말았다.

로이드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떳떳하게 징징거릴 명분을 말이다.

'쯧. 칙령이라도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징징거림,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을 것을.'

설마 칙령을 받자마자 이렇게 대놓고 징징거릴 줄은 몰랐다. 바짓단 붙잡고 매달리듯 떼를 쓸 줄도 몰랐다.

'원래 염두에 두고 있던 것보다 지원 규모를 한층 늘려 줘야겠군.'

안 그랬다간 또 징징거릴 것 같았다.

아니, 이번보다 더 징징거릴 게 뻔했다.

그런 답신을 보며 눈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어차피 해주기로 마음먹고 있던 지원.

해 주는 김에 더 크게 해 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예 이참에 프론테라 남작령을 크레모나 지방 재건의 중심지로 삼아 보는 것은 어떨까.'

그녀는 첩보를 통해 들은 프론테라 남작령의 소식을 떠올렸다.

두 차례의 대규모 몬스터 습격.

그걸 다 막아 냈노라 하였다.

거기에 동부 산맥의 거대한 몬스터를 수하로 부리게 되었노라 들었다.

황야의 오크 부족을 산맥으로 이주시켰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몬스터 도미노 사태로부터 가장 안전한 곳이 프론테라 남작령이 되었을 터. 그러한 여건에 로이드 그자의 능력과 넉넉한 지원이 보태진다면 재건 사업, 충분히 추진해볼 만할 테지.'

재건 사업을 넘어서.

아예 크레모나 지방 제2의 도시로까지.

그렇게 프론테라 남작령이 성장하도록 지원을 한다면?

'로이드 프론테라, 그를 나의 동쪽 방패로 삼을 수 있을 터.'

이미 몰려든 피난민으로 인구가 폭증한 상태일 터다.

그 인구를 안정적으로 수용하고 정착시킨다면?

프론테라 남작령은 단숨에 규모를 키울 수 있게 된다.

바야흐로 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나와 왕실에도 결코 손해가 아닐 테지.'

확실한 이득만 있다면.

그 이득이 유지만 된다면.

변하지 않을 충성을 바칠 자가 로이드였다.

그런 자가 힘을 키우는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왕권도 강화될 것이다.

더불어 동부에서 숙적 술탄국을 견제할 방패 역할도 도맡아주리라.

여러모로 손해 볼 곳이 별로 없는 투자라 할 수 있었다.

계산을 마친 국왕 알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짐이 고하노라. 궁내부 장관은 즉시 입궁하여 프론테라 남작령에 대한 백작령 특별시 승격 심사위원회를 개최하라 이르라."

그녀의 엄숙한 명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이거 명령은 아니고 부탁인데 말이야."

한편, 햇살 쨍쨍한 겨울의 초입.

왕궁에서 머나먼 동쪽, 프론테라 남작령의 어느 공터에서 로이드가 말했다.

"너어, 쳇바퀴 돌려 본 적 있어?"

"뽀동?"

그의 손바닥 위에서 뽀동이가 동글동글한 머리를 뽀잇 갸웃거렸다.

로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없는 거구나?"

"뽀동!"

"역시. 그럼 내가 이참에 하나 만들어 줄까?"

"뽀도동?"

"쳇바퀴 지름은 대략 20미터로. 완전 신나게 돌릴 수 있도록. 어때?"

"뽀동!"

놀이용 쳇바퀴라니.

그런 깜짝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뽀동이의 통통한 볼따구에 기쁨이 번졌다.

빵실빵실한 궁디가 절로 으쓱으쓱 씰룩거려졌다.

그런 뽀동이를 바라보는 로이드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뽀동이에게 쳇바퀴를 선물하는 게 기뻐서?

물론 아니었다.

'후후후. 이걸로 아파트 건설용 장비도 오케이.'

뽀동이가 신이 나서 쳇바퀴를 굴려 주면.

거기에 연결된 장비도 신나게 돌아가리라.

'그래야 시멘트가 굳지 않을 테니까!'

그렇듯 햇살 쨍쨍한 겨울 초입의 프론테라 남작령.

그곳에서 로라시아 대륙 역사 최초의 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한 특수 장비인 믹서, 일명 레미콘(Ready Mixed Concrete)을 위한 기구가 발명되고 있었다.

그 정체는 거대 햄스터가 힘차게 돌릴 직경 20미터짜리 쳇바퀴였다.

124화. 아파트 건설 (1)

"어르신,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호위 기사의 부름.

그 소리에 왕실 드워프 명장, 웰스 코기두스는 주름투성이 눈을 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풍경이 보였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인 프론테라 남작령이었다.

'완전 시골이로구만.'

변변한 건물도 별로 없다.

그저 곳곳에 밭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코기두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간만에 숨이 탁 트이기도 하고.'

자신이 왕도에서 장인으로 일한 것이 벌써 40년째던가.

그 세월 동안 왕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 마지막으로 왕도 밖에 나가본 것이 무려 15년 전이었고.'

덕분에 왕도의 빽빽하게 들어선 높은 건물에 익숙해졌다.

어딜 가든 북적이는 인파에 적응해 버렸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곳과 같은 한산한 자연의 풍경이 새삼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뭐, 물론 여기까지 휴양이나 즐기러 온 것은 아니지만.'

장인 코기두스는 문득,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슥한 밤이었다.

국왕이 자신을 궁으로 불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신은 무려 세 번째 국왕을 모신 명장이었고, 그런 자신에게 젊은 국왕은 평소 예의와 격식을 충분히 지켜 주었더랬다.

예를 들자면, 자정을 넘긴 시간에 갑자기 자신을 호출하는 따위의 일은 절대로 벌이지 않았다.

그래서 입궁하면서도 생각했다.

필시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리라고.

'그 예상이 맞았지.'

알현을 하자마자 국왕은 대뜸 뜻밖의 소리부터 꺼냈다.

"그대가 지금까지 만들어 본 가장 큰 물건이 무엇이었지?"

"여름에 건설하였던 현수교였사옵니다."

"혹시 그것보다 더 큰 물건을 만들어 볼 생각은 없는가?"

"현수교보다 더 큰 물건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이를테면 도시, 같은 것 말이야."

"...."

도시를 만들어 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리고 이어진 국왕의 설명은....

'로이드 프론테라. 그 똘똘하고 시건방진데 재주는 빼어나던 놈. 그놈을 도와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껏 만들어 보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잔뜩 만들 기회일 테니까.

그렇게 여장을 꾸렸다.

왕실 대장간의 드워프 장인 20명을 선발했다.

그들과 함께 보름의 바쁜 여정 끝에 여기까지 왔다.

"후우. 이거 원, 허리가 이렇게 아파서야."

코기두스가 투덜거렸다.

마차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드워프 장인이 싱긋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르신. 이렇게 쉼 없는 강행군을 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그렇지? 종일 마차에 앉아서 덜컹대는 것도 만만찮은 중노동이구만."

온몸이 쑤셨다.

관절이 온통 삐그덕거렸다.

상자에 담겨 몇 날 며칠 배달되는 물건의 심정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코기두스는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마차에서 내리고서도 좀처럼 해방감을 만끽하지 못했다.

"오셨군요. 오매불망 기다렸습니다."

해방감을 느끼기도 전에 날아오는 인사말.

코기두스는 덥수룩한 눈썹을 씰룩거리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상대를 확인하고서는 대뜸 역정부터 냈다.

"기다리긴 개뿔. 네놈이 하는 말은 안 믿는다, 이놈아."

"아, 그러십니까?"

"당연하지."

마중을 나온 듯 싱긋 웃는 로이드.

그런 로이드를 향해 드워프 명장이 콧김을 풍 뿜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다는 놈이 혼자 덜렁 마중을 나와? 솔직히 말해 봐라, 이놈아. 너, 그냥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우릴 본 게지?"

"어, 독심술은 언제 익히신 겁니까?"

"독심술은 무슨. 딱 봐도 티가 나는구만."

"하하. 이러실 줄 알았으면 영지 입구에 현수막이라도 걸어 둘 것을 그랬습니다. 꽃다발도 좀 준비해 두고 말입니다."

"아서라, 이놈아. 누굴 간지럼 태워서 죽이려고."

"그래서 준비하지 않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휴머니즘에 입각한 아름다운 배려지요, 배려."

"개뿔. 퍽이나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는구만."

"그러게요. 저도 어르신을 뵙게 돼서 눈물이 다 나옵니다."

"진짜로?"

"예. 진심 진짜로 많이 기다렸거든요. 그래서-"

로이드가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슥 내밀었다.

코기두스의 눈빛에 의심이 떠올랐다.

"이건 뭐냐?"

"보시면 아십니다."

"...."

둘둘 말린 스무 장 남짓한 종이 뭉치.

받았다. 펼쳐 들었다.

귓가로는 로이드의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오매불망 어르신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으로 다듬으며 그린 도면입니다. 사실 뭐, 현수막이니 꽃다발이니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봐도 이쪽이 어르신 취향이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만."

"이게? 내 취향이라고?"

"예."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이는 게냐?"

"방금 도면 펼치실 때 콧구멍 벌렁거리시던데요."

"...."

"에이. 사실은 좋으시면서."

"...."

"설계도로 환영해 드리는 거, 솔직히 기쁘신 거 아닙니까?"

더욱 은근해지는 로이드의 목소리.

결국, 코기두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좋다, 이놈아. 나 이거 보러 왔다. 됐냐?"

"예. 그러니 마음껏 보시죠."

"허허. 그런데 이놈아. 내가 이걸 실컷 보기만 하고 그냥 휭하니 가 버리면 어쩌려고? 네놈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나 방자한 게냐?"

"으음, 그런 도면, 태어나서 처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뭐?"

"그런 거, 구경만 하고 그냥 가셨다간 오늘부터 잠 못 주무실 텐데요."

"내가? 어째서?"

코기두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로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만들고 싶어지실 테니까요."

"...뭐어?"

"엄청나게 만들고 싶어지실 겁니다. 눈만 감으면 도면이 새록새록 떠오르실 겁니다. 아아, 만들고 싶어. 쇠를 두드리고, 불꽃을 튀겨대며, 만들어서 다듬고 싶어. 저게 실제로 만들어져서 작동하는 걸 보고 싶어. 뭐, 이런 자그마한 소망 같은 것들 말입니다."

"지금 무슨 씻나락 까먹는 헛소리를...."

"그래서 매일 밤 후회를 머금고서 이불을 걷어차게 되시겠지요. 그때 그 도면을 만들었어야 했어,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라고 말입니다. 아, 어르신 댁 이불은 참 힘들겠습니다. 멍든 자리 풀릴 틈도 없이 매일 밤마다 얻어터지겠네."

"내가 이불을 왜...."

"그래서, 안 만드실 겁니까?"

"...."

"만들면 참 재미있으실 텐데. 인생의 보람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걸 느끼실 텐데. 나중에 자랑도 많이 하실 수 있으실 텐데. 안 그렇겠습니까?"

"쯧. 재미와 보람에 자랑은 개뿔. 만들면 그냥 만드는 거지, 무슨 잡설이 이리도 많은지."

"그럼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로이드가 반색했다.

코기두스가 투덜거렸다.

"만들려고 해도 이게 어디에 쓰일 물건인지 설명은 들어야지, 이놈아."

팟팟.

드워프 장인이 도면을 휙휙 넘기며 말했다.

"자아, 그러니까 설명 좀 해 보거라. 한쪽이 뚫린 이 원통이며, 거기서 이어지는 커다란 통은 또 뭐냐. 이건 대체 어디에 쓰려고 설계한 거냔 말이다."

"아, 그거 믹서입니다."

"믹서?"

"예. 시멘트용 믹서 수레요."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사 현장에서 레미콘 시멘트를 섞어 주고 운반하는 트럭.

누구나 한 번쯤은 길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트럭인데 뒤에 동그란 드럼통 같은 게 달렸다.

한데 그 드럼통이 천천히 뱅글뱅글 돌아간다.

바로 믹서 트럭이었다.

그 장비는 가히 건설 현장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작은 주택부터 커다란 구조물까지.

레미콘이 쓰이지 않는 현장이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한데 말이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익숙한 물건으로만 보인다만?"

"익숙하다니요?"

"이거, 크기만 키운 쳇바퀴 아니냐?"

"예, 맞습니다."

"맞아?"

"예. 뽀동이가 굴리는 동력으로 움직일 거라서요."

"...."

코기두스가 할 말을 잃었다.

로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여기 쳇바퀴를 뽀동이가 굴릴 겁니다. 그러면 이곳의 축을 따라 동력이 전달됩니다. 믹서 본체를 함께 돌리게 되는 거지요."

"한데 믹서 본체? 이 안쪽의 나선 모양 구조물은 뭐냐?"

"시멘트를 섞어 주고 유지하는 겁니다."

그렇게 돌면서 시멘트가 굳는 걸 방지해 준다.

빗물 등의 이물질이 들어가서 섞이는 걸 막아 준다.

그 외에도 시멘트의 질을 균등하게 유지해 주기도 한다.

"브라질 땅콩 효과라고. 그걸 방지하는 게 핵심입니다."

"브라질... 땅콩?"

코기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소리다.

로이드가 싱긋 웃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큰 알갱이와 작은 알갱이가 무작위로 섞여 있으면 작은 알갱이가 밑으로 가라앉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겁니다."

"흐음, 작은 알갱이가 가라앉는다고?"

"예."

"하긴. 일리가 있구만. 그런 거 숯과 모래를 다루면서 제법 보기도 했고."

"그렇지요?"

실제로도 그렇다.

브라질 땅콩 현상.

엄연히 과학적으로 증명된 현상이었다.

굵직한 콩과 자잘한 쌀을 섞어서 페트병에 담고 흔들어 보면 안다.

여러 크기의 레고 블럭을 상자에 담아서 흔들어도 된다.

대부분이 예상하는 것처럼 큰 입자가 아래로 깔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위로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뭐, 조건에 따라서는 역 브라질 땅콩 현상도 생겨나긴 하지만.'

어쨌건 시멘트를 혼합하고 타설할 때도 브라질 땅콩 현상을 경계해야 했다.

섞은 이후로도 계속 관리를 해 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시멘트 내의 큰 입자가 위로 떠오른다.

작은 입자는 모조리 아래로 깔리게 된다.

그 상태에서 시멘트를 부어서 건물을 지으면 난리가 일어난다.

'시멘트의 질이 균등하지 않은 상태로 말라붙게 되는 셈이니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금이 가서 갈라지고, 부스러지고, 난리부르스가 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거지, 뭐.'

그런 일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게다가 이번 시공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아파트는 크레모에서 지은 해상구조물 기초랑 다르니까. 왕도에 지은 현수탑 기초와도 다르니까. 그때처럼 시멘트를 만들자마자 마구잡이로 때려 부을 수는 없는 시공이니까.'

지금껏 시멘트를 사용한 공사가 떠올랐다.

크레모에서 만든 해상 인공지반.

왕도에서 세운 현수교 탑의 기초.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구조가 거대하고 단순했다.

그저 뻥 뚫린 거대한 틀 속에 시멘트를 때려 부으면 됐다.

그래서 만들자마자 시멘트를 붓고, 또 붓고, 계속 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건이 달라.'

이제부터 지을 아파트는 그렇게 구조가 단순하지 않을 터였다.

내부의 바닥과 벽, 천장, 계단.

그런 오밀조밀한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당연히 그 틀이 될 거푸집도 작고 오밀조밀할 터.

예전처럼 무식하게 시멘트를 왕창 때려 부을 수 없었다.

'그랬다간 구석구석 시멘트가 제대로 들어가질 않을 거야. 분명 시멘트가 덜 채워진 공간이나 기포가 남겠지. 그러면 곤란해져.'

실제 현장에서도 그랬다.

건물에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인 타설.

그 타설을 할 때면 가장 숙련된 일꾼이 콘트리트 호스를 잡았다.

능숙한 자의 손길이 필요한, 세밀한 작업인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제법 오래 걸리지. 한데 그 시간 내내 시멘트가 믹서 없이 방치되면? 타설하기도 전에 굳어 버리거나 성분이 나뉘게 될 거야. 그래서 믹서가 필요한 거고.'

그렇듯 시멘트를 잘 섞고 유지해 줄 믹서.

이번 아파트 시공에 반드시 필요한 장비였다.

"아, 그리고 이건 시멘트를 부을 때 필요한 펌프입니다."

"펌프?"

"예."

로이드가 다른 설계도를 가리켰다.

"믹서에 연결되어서 시멘트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해 주는 거지요. 이번에 지을 건물은 높을 거니까, 그 위쪽까지 말입니다."

"흐음. 혹시 이건 수차에 쓰이는 스크루식 펌프를 응용한 건가?"

"예. 정확하게 알아보시네요. 인력을 쓰는 수동으로 제작해 보려 합니다."

"딱 좋구만.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그럼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허. 네놈은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게냐?"

"물론 아니지요. 제가 어찌 감히."

로이드가 능글맞게 웃었다.

코기두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쯧."

이놈과 대면하면 항상 이런 식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또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렸다.

"이래서야 원, 참. 이제 보니 네놈, 아예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설계도를 다 그려 둔 게로구만. 이거 어째 나만 항상 손해를 보는 듯해. 어린 녀석이 머릿속에 능구렁이만 잔뜩 키워 놔가지고."

"칭찬 감사합니다."

"뻔뻔하기까지."

"그래서 제작 일정은 얼마나 걸리실 것 같은지요?"

"쯧, 그건 만들어 보고 기별 주마. 우선 작업할 곳부터 보여 주거라."

"당연하신 말씀을."

로이드가 잽싸게 앞장을 섰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과연 왕실 장인들은 실력이 달랐다.

거기에 최고의 명장 코기두스가 지휘를 맡았다.

평소 꾸준히 비축해 둔 방울이표 강철 끙까가 재료로 쓰였다.

그러자 이상적인 결과가 나왔다.

무려 직경이 20미터에 달하는 쳇바퀴였다.

거기에 연결되는 축과 믹서 본체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영지의 대장장이들이 제작할 엄두도 못 내던 대형 구조물이었다.

한데 코기두스와 장인들은?

불과 열흘 만에 완성해 버렸다.

심지어 작동마저 쌩쌩하게 잘 됐다.

"뽀동!"

쿠구구구....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은 뽀동이가 쳇바퀴에 탑승했다.

직경 20미터짜리 쳇바퀴가 육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뽀동?"

뽀동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태어나서 처음 돌려보는 쳇바퀴였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덕분에 뽀동이의 질주가 점점 빨라졌다.

쳇바퀴의 회전도 더욱 거세졌다.

콰콰콰콰콰콰-!

무려 1뽀동력으로 회전하는 20미터 사이즈의 쳇바퀴.

그 맹렬한 회전력이 축으로, 믹서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쿠와아아아-!

믹서가 묵직하게 회전했다.

그 안에 담긴 시멘트가 출렁출렁 춤을 추었다.

동시에 로이드의 희망도 쿵더덕쿵덕 부풀어 갔다.

'대박. 완전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어.'

왕실에서 파견해 준 드워프 장인들.

그들 덕분에 핵심 시공 장비까지 완성되었다.

이제는, 본격적인 아파트 단지 건설에 뛰어들 때였다.

125화. 아파트 건설 (2)

아파트.

빌라와 더불어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하는 형태의 주택.

하지만 이곳 로라시아 대륙에서는 생소하다 못해, 아예 역사상 최초로 건설되는 새로운 형식의 건물.

그 아파트의 본격 시공이 시작되었다.

"시공의 시작은 언제나 그러했듯 기초 공사지."

로이드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빈터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남작령의 북쪽에 자리한 땅이었다.

영지 전체를 시계 방향으로 감싸며 지나가는 프로나 강의 건너편.

일찌감치 아파트 단지 건설을 떠올리던 때부터 내심 이곳을 부지로 염두에 두었더랬다.

'여긴 영지의 중심가에서 거리도 제법 있고, 밭으로 쓰기에도 토질이 매우 좋지 않았으니까.'

거의 쓰이지 않던 땅이었다.

그래서 이번 건설에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토지 보상이니 뭐니 하는 절차를 생략해도 무방한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기초부터 파자. 하비엘?"

"예. 부르셨는지."

"당연히 불렀지. 여기 너랑 나 말고 누가 또 있다고."

"...."

"음? 왜 그래? 표정이 꼭 똥 씹은 강아지 같다?"

"이유를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어. 되는데."

"싫습니다."

"뭐?"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느새 이쪽을 돌아보는 하비엘.

녀석의 눈빛이 오랜만에 고슴도치 같은 까칠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부터 제게 어떤 일을 시키실지 다 알고 있습니다. 또 검으로 발파를 쓰라고 하시겠지요. 붉은 물감 잔뜩 묻힌 붓으로 바닥에 쿡, 쿡, 표시를 내고선 거길 수직으로 찔러 구멍을 뚫으라고 하시겠지요."

"음음, 그래서?"

"그래서 제가 수십 개의 구멍을 뚫으면 그곳으로 시멘트를 부으실 겁니다."

"음음, 그래서?"

"로이드 님은 그 시멘트 덩어리를 건물의 기초가 될 말뚝으로 삼으시겠지요."

"음음, 정답이야. 너 참 똑똑하다?"

"감사합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서 싫습니다."

"구멍 뚫는 작업을 하기가 싫다고?"

"예."

"어째서?"

"로이드 님께서 저를 편리한 도구로만 여기고 계시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하비엘의 목소리가 훅 쌀쌀해졌다.

"요즘 로이드 님께서 잊고 계시는 듯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드리자면, 저는 어디까지나 주군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응응. 그래서?"

"한데 로이드 님께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부리고 계십니다. 제 원래 본분인 영지의 수호가 아닌, 이런 잡다한 공사에 동원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응응. 그래도 할 거지?"

"...."

"역시. 싫긴 한데, 하긴 하겠다는 거지? 영지의 발전을 위한 일이니까."

"그래도 이 말씀만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하. 우리 하비엘, 이 형한테 투정부리고 싶었구나?"

"...."

"그런 거 내가 알 게 뭐야."

"...."

"자, 일하자. 일."

로이드가 피식 웃으며 항아리를 들었다.

역시나 항아리 속에는 발파 표식을 새기기 위한 붉은 염료가 잔뜩 담겨 있었다.

그는 커다란 붓으로 바닥에 쿡쿡, 표시를 새겼다.

입으로는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 그리고 여기. 또 여기. 깊이는 12미터로. 지름은 50센티. 보시다시피 간격은 3미터야."

"그게 제 과제인 겁니까?"

"어. 점심 전까지 다 해낼 수 있지?"

"그러려면 몸을 혹사시켜야 할 듯합니다만."

"그러니까 과제지."

"예?"

과중한 업무를 떠맡으며 투덜거리는 하비엘.

그런 하비엘을 로이드가 딱하게 쳐다보았다.

"방금 네 입으로 그랬잖아. 과제인 거냐며."

"그랬지요."

"과제가 뭐의 줄임말인지 몰라?"

"모릅니다."

"그럼 과제로 2행시 지어 줄게. 이야, 2행시 오랜만이다. 운 좀 띄워 볼래?"

"지금 무슨...."

"얼른."

"...과."

"과로사로."

"...제."

"제가 먼저 갑니다."

"...."

"쯧. 몰랐구나. 세상 다 그런 거야."

"...."

하비엘의 표정이 썩어갔다.

로이드의 미소가 상큼해졌다.

"그럼 힘내라. 난 시멘트 준비하러 간다?"

쌔앵.

뭐라 반박할 틈도 없었다.

제 할 말만 끝낸 로이드가 저쪽으로 쌩하니 걸어가 버렸다.

"...."

우와 저 사후세계로 편도 관광 보내 드리고 싶은 도련님 같으니라고.

"쯧."

일이나 하자.

체념한 하비엘은 검을 뽑았다.

그렇게, 역사적인 아파트 시공의 기초 공사가 개시되고 있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공사는 내내 순조로웠다.

기념적인 첫 아파트 건물.

101동은 가로와 세로 각각 150미터, 총 22,500㎡의 면적 위에 기초가 놓였다.

물론 그 면적 전체를 건물이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101동의 모양은 속이 빈 커다란 정사각형, 'ㅁ' 꼴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중앙의 정사각형 광장을 둘러싸고서 기초 공사가 진행되었다.

투확! 투콰학!

지름 50센티, 깊이는 12미터의 구멍이 3미터 간격으로 빼곡히 뚫렸다.

그러면 방금 갓 비벼 낸 신선한(?) 시멘트가 구멍으로 부어졌다.

그렇게 약 10,000㎡ 남짓한 면적을 따라 3천 개가 넘는 기초용 시멘트 기둥이 땅속으로 세워졌다.

그다음은 토대 작업이었다.

3천 개의 기둥 위로 60센티미터 높이의 거푸집이 만들어졌다.

"물론 시멘트만 붓는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거지요."

거푸집이 거의 다 만들어질 때쯤.

로이드는 120명의 오크 광부들을 소집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은 우리 모두 신나는 철근 접기 놀이를 배워 보겠어요."

"꾸이익? 철근 접기, 꾸익?"

"그렇습니다. 여기, 이거 보이십니까?"

"보인다, 꾸익."

로이드가 방울이표 철근을 들어 보였다.

오크 광부 대표 아로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걸 접고 논다고, 꾸익?'

그러면 뭐가 좋다는 걸까.

어떤 점이 신이 난다는 걸까.

아로쉬는 궁금해졌다.

그 사이, 로이드의 시범이 이어졌다.

"이걸 이렇게, 이렇게, 끄으응, 요렇게! 접으면서 노는 겁니다."

까드드득! 끄그그극! 끄드득!

로이드가 마나 써클을 전력으로 회전시켰다.

증폭된 마나의 힘을 손아귀에 잔뜩 실었다.

손가락 굵기의 철근이 엿가락처럼 90도로 휘었다. 다시 휘고, 또 반대편으로 휘었다가, 서로 엮였다.

마침내 현장에서의 기본적인 철근 체결 방식을 완성해서 모두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자아, 다들 잘 보셨습니까?"

"잘 봤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 꾸익!"

"아로쉬? 그래, 어떤 게 궁금해?"

"철근 접기 놀이를 하면 뭐가 좋아지는 건가, 꾸익!"

"아하."

로이드의 입가에 간사한 웃음이 흐뭇하게 맺혔다.

그가 꺼내는 답은 명확했다.

"근육이 생기지."

"그, 근육, 꾸익?"

"응. 특히 악력이랑 손목, 전완근 단련에 짱이야. 그냥 아주 최고야."

"저, 전완근, 꾸익!"

"그렇지. 전완근. 팔뚝. 막 힘만 주면 지금보다 훨씬 울퉁불퉁해지는 거야. 손가락만 꼬집, 했는데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지렁이 같은 힘줄이 쫘악 솟아나고... 오우야. 어때?"

"히, 힘줄, 꾸이익!"

"짜릿하지? 그러니까 이 놀이를 열심히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어."

"정말인가? 리스트 컬보다? 리버스 컬보다 더, 꾸익?"

"에이, 그런 것들은 이거에 비하면 그냥 준비운동 수준인 거고."

"조, 좋다! 배운다! 우리는! 철근 접기 놀이, 꾸익!"

"꾸이이익!"

120인의 오크 광부들이 모조리 흥분해서 콧김을 풍풍 뿜어냈다.

그렇게 도구조차 필요 없는 원초적 철근공들이 확보되었다.

심지어 교육도 간단했다.

어차피 넘쳐나는 게 힘인 오크들이었다.

몇 번 요령을 알려주자 금방 기술을 익혀나갔다.

어지간한 전문 도구보다 훨씬 편하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천연의 도구, 손가락을 넘치는 근력으로 마음껏 활용하는 덕분이었다.

그렇게 기초부터 1층을 아우르는 철근 조립이 광속으로 진행되었다.

동시에 거푸집 또한 점점 범위를 늘려 갔다.

모두 로이드의 설계를 바탕으로.

1센티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첫 시멘트 타설이 이루어졌다.

"뽀동아! 돌려!"

"뽀동!"

쿠과과와아아아-!

20미터 쳇바퀴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쳇바퀴에 연결된 대형 믹서가 힘차게 돌아갔다.

믹서 속에 적정 비율로 투입된 각종 재료가 순식간에 섞였다.

그냥 마구잡이로 섞는 것이 아니었다.

배합 비율까지도 아파트 시공을 위한 로이드의 철저한 계산을 따랐다.

설계기준강도.

배합강도.

슬럼프 및 AE 공기량.

거기에 물과 결합재의 비율.

잔골재율과 압축강도의 비율까지 고려했다.

그렇게 모든 요소를 계산하여 배합한 최적의 시멘트가 1뽀동력의 힘으로 찰지게 비벼졌다.

그리고 드워프 장인표 스크루식 수동 펌프로 힘차게 뽑아 올려졌다.

"하나, 둘, 눌러!"

"흐아아압!"

철걱! 철걱! 철걱!

무려 20명의 백색창기병 대원이 수동식 펌프 손잡이에 달라붙었다.

근육질 사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손잡이를 누르고, 당기고, 또 눌렀다.

그때마다 펌프가 힘차게 돌아갔다.

믹서에서 잘 섞인 시멘트를 뽑아냈다.

뽑힌 시멘트가 기다란 붐대를 따라 연결된 가죽 호스를 타고 흘러나왔다.

호스 끝을 잡은 로이드가 직접 현장 타설을 도맡았다.

"계속! 흐름 끊어지지 않게!"

울컥! 울커컥!

힘판 펌프질과 함께 호스로 시멘트가 죽죽 뽑혀 나왔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푸집 속을 알차게 꽉꽉 채워 갔다.

그동안 로이드는 측량 스킬을 발동하며 거푸집 내부를 실시간으로 관찰했다.

측량 스킬의 전용 옵션, 지하 스캐닝 덕분이었다.

'좋아, 잘 채워지고 있어.'

시멘트가 구석구석 스며드는 게 보였다.

자칫 급하게 타설할 때 공기가 남기 쉬운 거푸집 모서리, 철근 체결 부위에도 빈틈없이 시멘트가 들어차고 있었다.

'시멘트 배합이 성공적이야.'

너무 뻑뻑하지도, 너무 묽지도 않았다.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딱 좋았다.

펌프의 성능도 대만족이었다.

덕분에 첫 타설 작업이 너무나 완벽하게 끝났다.

"좋아. 이제 사흘 동안 양생이다."

"양생이라 하심은, 시멘트를 말려서 굳힌다는 말씀이지요?"

"이야. 우리 하비엘, 이제 이런 것도 다 아네?"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겁니다. 로이드 님 때문에. 어쨌건-"

공사장 흙을 볼에 묻힌 채 하비엘이 두 눈을 번득 빛냈다.

"그럼 이제 양생을 하는 사흘 동안 쉴 수 있는 겁니까?"

"아니."

"...."

"쉬어서 뭐 하게. 일해야지."

"하지만 방금 사흘 동안 양생을 해야 한다고...."

"그동안 102동 기초 공사를 하면 되잖아?"

"...."

"설마 진짜로 탱자탱자 뒹굴뒹굴 놀려고 그랬어? 정말로?"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저기 임시 천막에서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피난민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아?"

"...."

"하아. 실망이다. 난 밤을 꼬박 지새워서라도 빨리 지어 주고 싶은데, 아파트. 그래야 저들의 고통이 하루라도 더 줄어들 수 있을 텐데."

"...."

"하아. 안타깝다. 난 진짜 저녁밥을 걸러서라도 빨리 집을 마련해 주고 싶은데. 그래야 저들이 하루라도 더 빨리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텐데."

"...."

아 진짜 이 도련님이 정말.

하비엘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전과 똑같이 발파로 바닥을 뚫으면 되는 겁니까."

"어. 지금 당장 갈까?"

"...예."

체념한 하비엘은 또 검을 뽑아야 했다.

그렇게, 역사적인 아파트 시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비슷한 시공이 반복되며 이어졌다.

"철근! 접는다, 꾸익!"

"철근! 구부린다, 꾸익!"

"도시락! 먹는다, 꾸익!"

"...여기 밥도둑이 있다, 꾸이익!"

오크들이 활기차게 철근을 구부리고, 체결했다.

그런가 하면 목수들은 열심히 거푸집을 만들었다.

모든 과정이 1층에서와 거의 같았다.

말 그대로 Ctrl+c / Ctrl+v를 방불케 했다.

'이게 바로 아파트 건설의 장점이니까!'

모든 층의 구조가 같다.

정말로 복붙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1층을 만들고 나면 일이 훨씬 편해지고 빨라진다.

1층을 만들 때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현장 인부들의 숙련도도 쑥쑥 올라가고.'

같을 일을 반복하는 덕분에 작업 효율이 하루가 다르게 쑴펑쑴펑 상승했다.

101동 2층에 시멘트를 타설하고.

그걸 굳히는 동안 102동 현장에 매달리고.

102동 1층에 시멘트를 타설하고.

그걸 굳히는 동안 101동 3층 거푸집과 철근을 꼼꼼히 만들고.

모든 과정이 제대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착착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중간엔 호재도 있었다.

국왕이 보내준 지원 물자가 마침내 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전하께서 이르시되, 당분간 지원은 매달 한 번씩 이루어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지원 물자를 수송해 온 장교의 말이었다.

덕분에 피난민들의 식량 사정에도 한층 숨통이 트였다.

그러는 사이, 아파트 101동과 102동 현장도 착착 높아졌다.

이 시점에서 로이드는 미리 염두에 두었던 또 다른 지원군을 불렀다.

"자아, 비벙아! 올려!"

"비벙-!"

특수 용병(?)으로 카푸아 호수의 지배자, 비벙이도 불러왔다.

비벙이는 특유의 거대한 몸집과 막강한 힘을 활용했다. 각종 자재를 지상에서 높은 층까지 올려 주는 일을 도맡았다.

즉, 현대적 시공 현장에서의 타워 크레인 역할을 해 주는 셈이었다.

덕분에 시공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5층에 시멘트를 붓고.

6층의 철근과 거푸집을 짜고.

또 붓고, 짜고, 붓고, 두드리고, 다듬고.

그렇게 불과 1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101동 건물이 8층으로 우뚝 섰다.

"아직 끝났다고들 생각하지 마! 시공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다?"

"마무리와 디테일!"

로이드가 척 하고 물으니 공병대가 착 하고 답했다.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첫눈 사이로, 프론테라 영지를 극적으로 발전시킬 기념비적 건설물, 꿀벌 아파트 단지가 역사상 첫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126화. 단열재를 얻어낼 방법 (1)

뚱딱! 뚝땅!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더불어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그러한 눈발과 칼바람도 건설 현장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이들의 의욕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우왓! 눈 온다!"

"어? 진짜네?"

"크하하핫! 이게 무슨 횡재람!"

첫눈을 알리는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병대 병사들이 환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악천후 수당 당첨이다!"

공병대는 영지의 사병이었다.

말 그대로 영주에게 고용된 병사들인 셈이었다.

따라서 공사에 참여한다 해도 약간의 추가 수당과 보너스를 받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몇 가지 예외가 있었다.

일몰 시각 후의 야간작업.

혹은 심야 시간의 철야 작업.

기상 조건이 열악한 날의 악천후 작업.

그 외 위험수당이 붙는 작업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두둑한 추가 수당을 받았다.

로이드의 철두철미한 현장 관리 덕분이었다.

'로이드 님은 은근, 아니, 대놓고 짠돌이 기질이 있으시지. 동전 한 닢 손해 보는 것조차 엄청 싫어하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꾼들한테 주는 수당 하나만은 정말 꼼꼼하게 챙겨주신단 말이지.'

다들 의아해하는 부분이었다.

평소의 로이드는 그렇게 짠돌이일 수가 없었다.

동전 한 닢, 땅콩 한 알 손해라도 보면 밤새도록 이불을 걷어찰 것만 같은 인간이었다. 오죽하면 저 인간, 아예 소금밭에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다들 그가 타고난 악덕업주 꿈나무일 거라고 생각할 터다.

처음엔 공병대 병사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걱정했었다.

한데 계속 보니까?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우릴 엄청나게 잘 챙겨주셨지.'

다른 건 몰라도 특별수당과 보너스만은 한 푼도 틀리지 않게 챙겨줬다.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는 일도 없었다. 언제나 약속된 날짜에 칼같이 따박따박 지급해주었다.

심지어 로이드는 작업자들에게 휴일마저 챙겨줬다.

7일에 하루는 반드시 쉬게 했다.

현장의 정리정돈을 항상 강조하기도 했다.

정돈되지 않은 현장에서 안전사고가 쉽게 발생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덕분에 공병대 병사들은 항상 생각했다.

로이드 님이 자신들을 소모품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아끼며 대해 준다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야, 막내야! 눈 오기 시작한 시간 표시해 둬라!"

"어째서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냐? 눈 오는 날에는 한 시간 일하고 20분 동안 불 앞에서 몸 녹이는 게 원칙이니까 그렇지."

"아, 로이드 님이 세우신 현장 수칙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지!"

뚱따당, 뚝딱!

약속된 악천후 수당과 적절한 휴식.

그걸 믿으며 공병대 병사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궁금한 게 있지 말입니다."

"음? 궁금한 게 뭐냐, 막내야?"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중앙 난방실 말입니다."

"어."

"어째서 오늘 이렇게 작업을 하는 겁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얼핏 듣기로는 피난민들, 내년 가을에야 이 아파트에 입주하게 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인데... 굳이 이렇게 눈이 오는 날에까지 작업을 할 정도로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오호라. 로이드 님 입장에서 쓸데없는 악천후 수당까지 줘가며 우리를 일 시키는 게 낭비일 수도 있을 거란 뜻인 거냐?"

"예. 로이드 님이 우릴 잘 챙겨주긴 해도 쓸데없는 낭비는 절대로 안 하시는 편인데, 그래서 오늘 작업을 강행하는 게 조금 이해가 안 돼서요."

"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

"...예?"

공병대 십부장이 혀를 찼다.

"지금 우리가 만드는 게 뭐냐."

"난방시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럼 지금 계절이 어느 때냐."

"겨울이지요."

"그럼 지금 난방 시설을 서둘러 공사해야 겨울이 가기 전에 설비가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

"하지만 입주는 내년 가을이라고...."

"그러니까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난방 시설을 완비하고 시험을 해봐야지."

"...아."

"그래야 내년 가을에 입주하기 전까지 난방에 이상이 없는지, 실제 겨울 날씨에 어느 정도까지 실내를 따뜻하게 데울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미리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니겠냐. 응?"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거로군요."

"그렇지. 바로 그거지. 로이드 님이 좀 꼼꼼하신가. 자, 그러니까 일하자, 일."

"옙!"

반드시 나오게 될 악천후 수당.

병사들은 그 믿음 하나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난방 설비 작업이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우선 101동 광장 한쪽에 중앙 난방실이 지어졌다.

드워프 장인의 손길을 거친 특수 증기 가마가 설치되었다.

가마에서 나올 증기를 옮겨 줄 대나무 배관도 마련되었다.

밀짚과 왕겨, 석회를 버무린 단열재로 배관 겉면을 감쌌다. 그렇게 수많은 배관을 아파트의 각 세대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놓았다.

그 끝에는 현대식 라디에이터를 닮은 증기 그릴이 있었다.

'물론 바닥 자체를 데우는 온돌방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파트니까 구조상 단독주택보다 열 손실이 훨씬 적다. 즉, 더 적은 난방으로도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

게다가 이 꿀벌 주택은 각 세대의 면적이 보통의 집보다 훨씬 좁았다.

'주방도, 식당도 없거든.'

심지어 욕실과 화장실 등도 모두 공용 시설로 중앙광장에 놓았다.

그래서 각 세대에는 작은 거실과 잠을 자는 방만 존재했다.

피난민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면서 난방의 부담도 줄이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라는 거지만, 제대로 난방이 되어야 할 텐데.'

동별 중앙 증기식 난방.

처음 해 보는 시도였다.

설계 스킬의 시뮬레이션 옵션을 돌려보기도 했다.

일단 시뮬레이션 상으로는 큰 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난방 공사가 진행되는 내내 로이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설비의 설치 상태를 매일 확인했다.

그 밖에도 실내의 단열 공사도 직접 지휘했다.

모든 세대의 벽면과 바닥, 천장에 밀짚과 왕겨, 석회를 섞은 단열재를 꼼꼼히 발랐다. 단열재가 충분히 건조되면 얇은 나무 패널로 그 위를 덮어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한 해의 끝자락 무렵.

마침내 101동의 난방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로이드는 곧바로 난방 성능을 테스트했다.

'제발! 따끈따끈해져라!'

푸화학!

101동 난방실의 특수 증기 가마가 석탄의 열기로 데워졌다.

물이 끓고, 배관을 따라 뜨거운 증기가 공급되었다.

'좋아. 일단 여기까지는 잘 되고 있어.'

다행히 증기가 새는 곳이 없었다.

로이드는 배관을 따라 걸었다.

아파트 1층으로 들어갔다.

각 세대의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매만졌다.

"읏뜨!"

하마터면 손을 델 뻔했다.

덕분에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왔다.

'좋아. 그럼 2층으로 가볼까.'

1층의 전 세대를 모두 둘러본 다음에 위로 올라갔다.

2층의 난방 상태도 1층과 마찬가지로 후끈후끈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졌다.

'...으음? 이거. 좀.'

4층의 난방 상태를 점검하는 로이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조금씩이지만 위로 올라올수록 식고 있어.'

1층은 뜨거웠다.

2층은 후끈했다.

3층은 따끈했다.

그런데 4층으로 올라오니?

'살짝 미지근해졌다. 확실히 그래.'

불안감이 싹을 틔웠다.

5층은 아래보다 더 미지근했다.

6층과 7층은 아예 찹찹했다.

8층으로 올라오자 그냥 추웠다.

'후아. 이거 실화냐. 이러면 나가린데.'

쑴펑쑴펑 치솟는 실망감 속에서 로이드는 원인을 분석했다.

사실 원인은 간단했다.

'배관의 실제 단열 성능이 시뮬레이션으로 돌렸던 것보다 떨어져. 그래서 배관을 따라 증기가 흘러오는 사이에 점점 열을 빼앗겨서 식어 버리는 거야.'

그 증거로 중앙 난방실에서 가까운 저층일수록 실내가 따뜻했다.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확연히 식어 버렸다.

"아무래도 배관이 너무 기니까. 열 손실을 막으려고 각각의 라인별로 배관을 독립시켰다고는 해도 지상층에 있는 중앙 난방실에서 고층까지의 거리 자체가 너무 머니까. 아무리 단열재로 도배를 해도 한계가 있어. 그게 근본적인 원인이야."

턱턱.

로이드가 서늘하게 식어 있는 8층 배관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하비엘이 한쪽 눈썹을 살포시 구겼다.

"배관 길이를 줄이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물론 있지."

로이드가 피식 웃었다.

"사실은 간단해. 각각의 층마다 난방실을 추가로 두면 돼."

"한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건지."

"그 이유도 간단해. 위험하거든."

"위험하다니요?"

"화재 때문에."

로이드가 못을 박듯 말했다.

"여기 101동에만 수백 세대의 피난민이 들어와서 살 거야. 그런데 만약 실내에, 층별로 난방실을 두면? 그랬다가 그중 어느 한 곳에서 화재가 일어나면? 말로 표현하기도 끔찍할 일이 벌어질걸."

"...사상자가 엄청나겠군요."

"바로 그거지. 편의성보다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꽉꽉 채워넣으려고 만든 건물이야. 설계도 그런 방향으로 했고. 심지어 실내는 전부 목재로 마감을 했어. 그런데 만약 불이 번지면 후우, 최소 절반 가까운 인원은 대피도 못 하고 다 죽을 거야."

진짜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다.

화재가 났다 하면 대형 재난이 될 것이다.

최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직접 설계를 한 로이드가 확언할 수 있었다.

'현대적인 피난 시설, 화재 진압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니까.'

소화기도 없다.

실내의 연기를 배출할 환풍기도 없다.

옥상으로 대피할 사람들을 구해줄 헬리콥터도 없다.

"그나마 가능한 방법을 찾자면, 하망이가 엄청난 물을 한꺼번에 뿜어주는 게 제일 좋은 대응법이겠지. 하지만 하망이가 없으면? 자리를 비운 상태라면? 답이 없어지는 거야. 운 나쁘면 진짜로 수습도 안 되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거지. 게다가 하망이가 물을 뿜어봤자 실내의 화재까지 한 번에 끄긴 어려울 거야. 그런 이유로 불을 사용하는 난방실, 취사장을 전부 실외인 안마당으로 빼놓은 거고."

"그래서 실내의 조명도 등불 벌레로 대체하시려던 거였습니까?"

"어. 당연하지. 동부산맥에 흔하고 안전하니까."

"안전을 위해서라. 흐음, 그러면 결론은 지금 이대로 난방실을 안마당에 놓되, 배관의 단열 성능을 개선해야 한다는 거로군요."

"바로 그거지. 하비엘 너어, 요즘 많이 똑똑해졌다?"

"똑똑해졌다니요. 오해이십니다."

"오해?"

"예."

"어째서?"

"원래부터 똑똑했으니까요."

"...."

"흠흠, 진담입니다."

"보통 이럴 땐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리는 거 아닌가."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실을 말하는 건데."

"이야. 이젠 대놓고 진실이래."

"저는 기사니까 말입니다."

"기사니까?"

"예. 기사의 입은 언제나 진실만을 담아야 하는 법이라고 배웠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하비엘 아스라한은 똑똑하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잘생겼다. 하비엘 아스라한은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 같은 사실들 말입니다."

"...."

"그 외에도 이런 사실들도 있겠지요. 가령 예를 들자면, 로이드 프론테라는 솔로다. 그래서 쪼잔하고 파렴치하며 밴댕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비엘 아스라한의 재능과 잘생김, 품성을 시기한다... 같은 불편한 진실들 말입니다."

"어이."

"예."

"즐거웠냐."

"모처럼 상쾌했습니다."

"쯧."

"어쨌건, 배관의 단열 성능을 더 끌어올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쎄다. 나도 그게 좀 고민인데."

로이드는 뒷덜미를 북북 긁었다.

진짜로 고민이었다.

"실은 이번에 단열재로 쓴 밀짚과 왕겨, 석회를 섞은 반죽이 지금까지의 최선이었거든."

사실이었다.

밀짚과 왕겨, 석회.

주위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었다.

그만큼 대량으로 물량을 확보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저렴했다.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당연하지. 앞으로도 아파트 단지의 건물 전부를 단열 마감해야 하니까. 그런데 재료가 너무 구하기 어려우면? 그래서 비싸면?'

답이 안 나온다.

치솟는 자재비는 둘째로 치더라도, 물량 자체가 딸리면 공사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싸고,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밀짚과 왕겨, 석회를 주재료로 삼았다. 수많은 실험을 했다. 가장 최선의 배합을 뽑아냈다. 그렇게 단열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도 단열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니.'

뭘 더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단열을 보강해야 배관이 덜 식을까.

'배관 설계도 노출을 최소로 잡았어. 설계로는 더 이상은 무리야. 그럼 결국엔 재료 보강이 필요하다는 소리인데.'

기존의 재료보다 단열 성능이 뛰어날 것.

값이 저렴하면서 대량으로 구할 수 있을 것.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재료가 과연 있을까.

로이드는 사흘 밤낮을 고민에 잠겼다.

잠시나마 그동안 모인 CP를 사용해볼까도 싶었다.

오랜만에 특수 스킬인 '엔딩 스포일러'를 사용해서 이번 고민의 해결책을 찾아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지금보다 더 절박할 때, 정말로 그게 아니면 답이 안 보일 때 쓰기 위해 아껴두자.'

CP는 호감도에 기반을 둔 RP보다 모으기가 훨씬 어려웠다.

잠깐의 고민이 생겼다고 함부로 쓰기엔 아까웠다.

그렇게 그는 다시 이틀을 더 고민했다.

기억과 기록을 열심히 뒤적이기도 했다.

'이럴 땐 이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로이드는 침실 서랍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부터 꾸준히 작성한 메모.

바로, 소설 철혈의 기사와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건 완전하지 않으니까.'

자신 또한 물론 그렇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열심히 기록했다.

소설 철혈의 기사가 흘러가던 스토리.

주요 캐릭터와 사건, 설정, 그 외의 자잘한 것들.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사소한 것들이라도 최대한 꼼꼼히 써두었다.

'뭔가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 어? 잠깐.'

자신이 남겨온 빼곡한 기록을 뒤적이길 한참.

로이드의 눈길이 한 곳에서 멎었다.

'찾았어. 이거다.'

마침내 그가 찾아낸 기록.

그곳에는 '엘프의 숲', '하비엘 썸', '따끈따끈 드래곤 브레스'라는 단어들이 쓰여 있었다.

127화. 단열재를 얻어낼 방법 (2)

많다.

사람들.

어딜 보든 북적북적.

그 모두가 헐벗었다.

"...."

전보다 한층 이르게 저무는 노을.

그 속에서 하비엘은 언덕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예전에는 휑했던 언덕 아래 공터가 지금은 온통 북적이고 있었다.

빼곡하게 놓인 수많은 천막.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최근 프론테라 영지로 유입된 피난민들이었다.

"아스라한 경, 식사 배급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

돌아보니 경비대 상급 병사가 있었다.

하비엘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병사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곳곳에 걸린 커다란 솥 수십 개.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 냄새.

그 앞에 기다란 줄을 이루고 있는 피난민들.

그들의 눈동자는 굶주렸고, 그만큼 간절했다.

"배급을 시작하도록."

"예."

피난민들의 배급 그릇이 차례로 채워졌다.

그릇이 채워지는 만큼 기다랗던 줄이 짧아졌다.

그렇게 한 사람, 또 한 사람.

피난민들이 음식을 받아갈 때마다 하비엘은 빠짐없이 물었다.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대부분은 괜찮노라 했다.

간혹 환자가 있으면 꼼꼼히 체크했다.

환자의 이름과 증상, 거주하는 임시 텐트 번호 등을 기록했다.

"알겠습니다. 오늘 저녁 중으로 의사가 찾아가 상태를 봐 드릴 겁니다. 그때까지 음식 거르지 말고 푹 쉬고 계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찌 이리도 반듯한 기사분께서 이런 늙은이까지 챙겨주시는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환자를 파악하고, 배급을 감독했다.

저녁 내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아스라한 경께서는 식사 안 하십니까."

"이따가."

배급 후에는 정리 작업도 남아 있었다.

병사들이 이젠 신경 안 쓰셔도 된다 말했지만, 하비엘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병사들과 함께 일했다.

배급 감독을 맡은 자신의 책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렇게 저녁 배급을 정리하던 도중이었다.

"...."

줄지어 늘어선 피난민 텐트.

그 사이를 서성대는 꼬마가 보였다.

나이는 겨우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한데 그 서성이는 모양새와 몸짓이 조금 이상했다.

식판을 들고 있었다.

이 텐트 저 텐트를 기웃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고개를 사방으로 도리도리.

갈피 없는 시선을 초조하게 던지며 바쁘게 걸었다.

'어느 텐트로 돌아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대형 텐트 수십 개가 줄 맞춰서 세워진 곳이다.

텐트 출입구에 쓰인 번호만 뺀다면 모든 텐트가 똑같이 생겼다.

어른들도 충분히 헷갈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꼬마야."

아이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비엘은 따뜻하게 보일 미소를 머금으려 힘껏 애썼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니?"

"...."

아이가 이미 눈물범벅인 눈망울로 고개만 끄덕끄덕.

하비엘은 조심스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같이 텐트, 찾아보지 않을래?"

"...."

또 끄덕.

하비엘이 물었다.

"그런데 받은 음식은 왜 안 먹었어? 다 식을 텐데. 배고프진 않아?"

"배... 고파요."

그제야 말문이 트인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따라나온다.

"배고픈데 안 먹을래."

"왜?"

"엄마가 배 더 고파요."

"엄마가?"

"웅."

"...."

엄마가 있는데 왜 이렇게 어린아이가 배급을 받으러 나온 걸까.

뭔가 있겠구나 싶었다.

하비엘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식판 대신 들어줄게."

"...."

"안 쏟을게. 약속."

"...우웅."

식판을 받았다.

한 손은 아이를 감쌌다.

정리 작업 중이던 병사 몇을 불렀다.

피난민 텐트촌에서 영향력을 지닌 대표격의 피난민 몇도 불렀다.

다행히 수소문 끝에 아이가 머무르던 텐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 아이가 혼자 배급을 받으러 나왔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알렌?"

텐트로 들어서자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

하비엘은 텐트 속 수많은 피난민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목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알렌이라고 불린 꼬마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엄마!"

아이가 쪼르르 달려갔다.

제 어미의 품에 폭 안겼다.

한데 여인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아이를 보는 초점이 안 맞는다. 앞을 못 보는 거로군.'

장님이다.

그런데 자신의 불편함에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손짓 하나, 사소한 몸동작 하나에도 모두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보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천적인 장님이 아니야. 최근에 시력을 잃은 거야.'

하비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배어났다.

아마도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피신하는 통에 시력을 잃은 것이리라. 그 와중에도 아이를 끝끝내 지켜내며 여기까지 힘겹게 당도한 것이리라.

저 꼬마는 그런 엄마를 보살피고자 고사리손으로 식판을 들고 나와 배급을 받았던 거였겠지. 제 배고픔보다 기다리고 있을 엄마부터 먼저 챙기려 했던 거겠지.

그는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식은 음식 담긴 식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여기."

이쪽의 목소리와 기척에 흠칫 놀라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경비대를 인솔 중인 하비엘 아스라한입니다. 아이가 길을 잃은 듯해서 동행했습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예. 여기 저녁 식사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런 은혜를...."

"괜찮습니다. 도와드리지요. 자, 천천히."

스푼을 들었다.

동정심이 솟아나서?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혹은 여인의 앞섶이 말라붙은 죽으로 범벅이 된 모습을 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불현듯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버려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입 벌리세요."

"제가 감히 그래도 될는지...."

"괜찮습니다. 음식은 충분합니다. 아이 것도요."

"아...."

아이 것도 있다는 말에야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물드는 어머니의 얼굴.

그런 그녀에게 천천히 음식을 떠먹였다.

한 숟갈에 음식을 떠서.

두 숟갈에 기억을 담아.

그렇게 음식을 다 먹이곤 아이를 향해 말했다.

"꼬마야? 여기, 텐트 입구의 이 표시가 보이지?"

"우웅, 보여요."

"이건 A-3이라고 읽는 거야."

"A-3...."

"이걸 기억해둬. 내일 아침부턴 이게 쓰인 텐트로 돌아오면 돼. 할 수 있겠어?"

"웅! 할 수 있어요."

"그래, 착하지."

하비엘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현실적으로는 여기까지가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

그러니 로이드가 고민 중인 아파트 배관 단열 문제의 해결법이 빨리 찾아지면 좋겠다고. 그러면 이 아이와 장님 어미도, 다른 피난민들 모두가 조금은 더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고.

어쩌면 그렇듯 감상에 빠진 상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그는 배관 단열 문제의 해결법을 찾았으니 도움이 필요하다는 로이드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