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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375

365화 누가 누굴 괴롭혀? (2)

로드리크 후작은 계속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에게는 이번 일도 심심하던 일상에 우연히 생긴 유희거리에 불과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상대에게 공포를 주는 것.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행위다.

"요새 참 무료하긴 했지."

최근에는 저렇게 뻣뻣한 놈이 거의 없었다. 있어 봤자 잔챙이들뿐이었다.

로드리크 후작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부를 호령해 온 맹주였기 때문이다.

힘이 쌓이면 폭발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오랫동안 서부를 지배하며 힘을 길러 온 그는 자꾸 밖으로 그 힘을 내보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공작가에서 통제하는 탓에 억지로 그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화장품 상단이 오는 때가 언제지?"

"다음 달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어이쿠, 빨리 준비해야겠구먼. 테넌트."

"네."

"일단 그거부터 털어라. 살짝 간만 보는 정도로. 펜리스의 애송이와 브랜포드 후작을 자극해 보자고."

"얼마나 보낼까요?"

"적당히 보내, 한... 천 명 정도?"

천 명이면 소규모 영지와 영지전도 벌일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에게는 그저 적당히 상단 하나 털어 보는데 쓸 만한 숫자에 불과했다.

테넌트도 천 명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이름을 확실하게 인지시키고 상품들도 함께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놈들이 항의할 생각을 하니 벌써 짜릿해지는구먼.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더 재미있어지겠어."

로드리크 후작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몸을 떨었다. 드레이크 용병단한테 죽은 자식놈에게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준비되는 대로 모든 귀족에게 우리가 정당한 명분이 있다는 걸 알려라. 그래야 대놓고 펜리스의 애송이를 괴롭힐 수 있으니까."

그렇게 로드리크 후작가는 지셀의 화장품 상단을 털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 * *

로잘린에게 화장품 판매와 지점 확장을 맡겼지만, 펜리스에서 무조건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각 지점까지 화장품을 보내는 건 펜리스가 할 일이었다.

원래는 수도에만 보냈지만 화장품 사업의 세가 점점 확장될수록 펜리스가 할 일도 많아진 것이다.

덜컹, 덜컹, 덜컹.

서부에 있는 지점으로도 상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 대의 수레에 잔뜩 짐이 실려 있고, 행렬을 호위하는 인원만 무려 400여 명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한 기사가 말했다.

"뭐야? 복장이 다들 왜 저래? 원래 저렇게 거지같이 하고 다니나?"

기사는 혀를 찼다. 다시 확인해 봐도 저 상단은 펜리스의 화장품 상단이 맞았다. 펜리스의 깃발과 브랜포드 후작가의 깃발이 늘어져 있으니 확실하다.

그런데 상단의 호위 병력과 인부들까지 전부 짙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무슨 암살 집단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기사는 상단의 행렬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런데 호위 수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데?"

확인된 정보에 따르면, 서부로 오는 화장품 상단의 호위 인원은 보통 200여 명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친왕파의 지역이 아니다 보니 유독 호위를 많이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두 배가 왔다.

"저놈들도 무섭긴 무서운가 보네."

기사는 로드리크 후작가에서 상단을 습격하라고 보낸 병력의 지휘관이었다.

'후작가의 요청을 자신만만하게 거절했다더니, 나름대로 대비는 한 모양이지.'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병력을 살펴보았다.

그가 데리고 온 병력은 모두 800여 명. 200여 명은 현재 다른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질 거 같지는 않지만, 인원이 듣던 거보다 더 많아. 안전하게 몰아가는 게 낫겠군. 뭐, 덤비면 그냥 싸우는 수밖에."

상대가 맞서지 않고 도망갈 거라고 가정하고 작전을 짰다. 상단에 호위로 붙은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고 금방 눈치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 정도 인원이라면 죽어라 맞붙어 올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멍청하게 우왕좌왕하면 좋겠군. 그래야 더 쉽게 칠 수 있을 텐데...."

기사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손을 들었다.

펄럭!

곧바로 병사들의 머리 위에 로드리크 후작가의 깃발이 올라왔다.

기사는 산적 행세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가 그들을 건드렸는지 확실히 알려 주고 싸움을 키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가자!"

두두두두두두!

후작가의 병력이 상단을 향해 움직였다. 갑자기 대규모 병력이 다가오자 상단을 호위하던 인물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들은 다가오는 병력의 깃발을 확인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도끼가 가운데 있는 탑을 교차하는 문장.

왕국에서 유명한 로드리크 후작가의 문장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하하하! 저놈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는구나! 아주 잘 됐어!"

병력을 지휘하던 후작가의 기사가 크게 웃었다.

상대도 만약에 대비해 상단의 호위 병력을 증원한 거 같지만, 그 두 배나 되는 인원이 달려오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더 잘된 일이었다. 아마 저놈들은 도망가는 쪽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너무 빨리 쫓지 말아라! 약속된 장소까지 몰고 가야 하니까!"

자신들은 전원이 기마병이다. 그에 비해 저쪽은 똑같이 말을 타고 있어도 수레들을 잔뜩 끌고 가고 있다.

두두두두두!

당장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지만, 기사는 상대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적당히 속도를 조절했다.

과연 따라잡힐 듯 말 듯 한 상태가 이어지자 펜리스 상단은 후작가의 병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은 상단이 드나드는 길 말고는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없다. 기사는 그걸 알고 일부러 이곳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던 것이다.

"거의 다 와 가는군."

저 멀리 낮은 협곡이 보였다. 펜리스 상단은 바짝 뒤쫓아오는 후작가의 병력을 피해 결국 협곡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뒤따르던 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놈들. 이 지역은 다 우리 손바닥 안에 있다고. 생각보다 쉽게 처리할 수 있겠어."

기사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4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을 전멸시키면 큰 공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건 넓게 보면 펜리스의 전력을 약화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두두두두두!

꼬리가 빠지게 달아나던 펜리스 상단은 결국 협곡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반대편에 일단의 병력이 목책을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에게 몰려 꼼짝없이 함정에 당한 셈이었다.

후작가의 기사는 손을 들어 자신을 뒤따르는 병력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 펜리스의 애송이들아! 나는 로드리크 후작가의 기사, 브라이언이다."

브라이언이 기사답지 않게 건들거리며 외치자 펜리스 상단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후작가에서 왜 우리를 쫓는 것이오?"

"이유도 모르고 도망간 거야? 사실 잘 알고 있잖아. 후작님의 요청을 거절하고 여기서 무사히 장사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비아냥거리는 브라이언의 대답에 로브를 쓴 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브랜포드 후작님이 관여하는 사업에 손을 댈 생각이오? 이미 로드리크 후작님과 계약을 체결한 일이지 않소."

파벌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모른 척하고 사는 건 아니다. 어쨌건 다 같은 왕국의 귀족들이고 정치적 방향성만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서로 도울 건 돕고 쳐 낼 건 쳐 내면서 지냈다. 지셀의 전생에도 공작가가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뒤에야 문제가 되었었다.

아무리 로드리크 후작이라도 서부의 많은 귀족이 원하는 화장품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었다.

후작가의 사람들도 많이 쓰고 있다. 그 정도로 효과가 좋은 걸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로드리크 후작이 전쟁을 원하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비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 계약은 이제 파기다. 우리는 펜리스를 칠 정당한 명분이 있으니까. 아니, 친다는 말도 사실 어울리지 않는군.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계속 펜리스를 괴롭힐 생각이야."

그 말에 로브를 입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그걸 먼저 브랜포드 후작에게 통보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소."

"너희들부터 먼저 죽이고 할 거야. 어쩌면 지금쯤 브랜포드 후작에게 전령이 도착했을 수도 있겠지. 확실한 건...."

브라이언은 검을 빼 들고 로브를 쓴 자를 겨누었다.

"너희들은 모두 여기서 죽고 저 화장품들은 우리가 다 가져갈 거란 뜻이지. 그러니 항복할 필요도 없다. 안 받아 줄 거니까."

로브를 입은 자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후드를 뒤로 넘겼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로 단단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길리언이었다.

길리언은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짐을 내려라."

쿠웅! 쿠웅! 쿠웅!

호위 병력들이 수레에 실린 긴 나무 상자를 모두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브라이언이 한껏 웃었다.

"아니, 지금 항복하는 거야? 그거 바치면 살려 줄 거 같아서? 그냥 다 죽이고 가져갈 거라니까. 북부 촌놈들이라 그런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길리언은 브라이언의 말을 무시하고 부하들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열어라."

철컹, 철컹, 철컹.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화장품이 아니라, 날카롭고 긴 창들과 거대한 대검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뭐야? 화장품이 아니었어? 너희 뭐야?"

브라이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레에서 내린 상자들은 죄다 무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길리언은 여전히 브라이언의 말을 무시하고 가운데 있는 마차에 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수작은 없는 거 같습니다."

덜컥.

마차의 문이 열리고, 지셀이 천천히 내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무슨 수작인지 좀 보려고 했는데 고작 이게 전부야? 그냥 단순하게 포위한 거잖아. 차라리 대놓고 싸우자고 했으면 싸웠을 텐데 뭐 이렇게 번거롭게 병력을 나눠 놨어."

그러자 마차 옆에 있던 남자가 로브의 후드를 벗어젖히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내가 그냥 싸우자고 했잖아요!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불평을 내뱉은 자는 카오르였다. 그는 영지로 돌아오자마자 이곳에 끌려온 상태였다.

지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차피 한 번에 처리하려면 이게 낫잖아? 얘네들 하는 짓이야 뻔하거든."

"그럼 이제 죽입시다. 요새 또 몸이 근질근질하다고요. 그리고 뭐? 누가 누굴 괴롭혀? 내가 어이가 없어서. 누가 더 잘 괴롭히는지 보여 줍시다."

카오르가 보기에 누군가를 괴롭히는 건 지셀이 세계 최고였다. 자신이 두 번째고.

두 사람의 잔망스러운 대화에 브라이언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뭐냐? 네가 상단주냐?"

그러자 지셀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내 얼굴도 몰라? 아직 내 초상화 못 받아 봤어? 나 아직 안 유명해?"

"...."

브라이언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자신이 인기인인 것처럼 말하는 게 조금 재수 없었다.

그리고 저 여유가 뭔지 모르게 무척이나 거슬렸다.

"누구냐고 물었다."

"펜리스 백작이다."

"...!"

지셀의 대답에 후작가의 병사들이 순간 숨을 들이 삼켰다.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급이라는 소문이 난 자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기 있는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가의 병사들 사이에는 다른 소문도 돌고 있었다. 지셀이 활약했다고 알려진 것들이 사실은 모두 수하들의 활약이라는 것이었다.

후작가의 상급 기사인 테넌트가 직접 펜리스 백작을 보고 내린 평가였다.

물론 그 소문 뒤에도 다른 능력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이 붙어 있긴 했다.

브라이언은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네가... 진짜 펜리스 백작이라고?"

"그래, 내가 펜리스 백작이다."

저 자신감을 보면 진짜 같지만 단지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브라이언의 옆에 한 기사가 다가와 속삭였다. 테넌트를 따라 펜리스에 가 본 적이 있던 기사였다.

"펜리스 백작이 맞습니다. 그때 테넌트 님과 본 적이 있습니다."

'잡는다!'

브라이언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는 세상의 소문보다 펜리스 백작을 직접 보고 온 테넌트의 말을 더 믿었다.

만약 북부의 신성이자 대영주인 펜리스 백작을 여기서 사로잡는다면?

앞으로의 출셋길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단을 내린 그가 크게 외쳤다.

"쳐라! 펜리스 백작을 제외하고 모두 죽여라! 여의찮으면 펜리스 백작도 죽여도 된다! 목만 멀쩡히 가져오면 된다!"

두두두두두!

후작가의 기마병들이 말에 박차를 가해 단숨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후작가의 병력을 보며 지셀이 말했다.

"준비해라. 이렇게 한 번에 다 모인 건 오랜만인 거 같네."

지셀이 이끌고 온 400명은 펜리스의 기사들이었다. 확실하게 난장을 피우려고 기사들을 죄다 끌고 온 것이다.

철컹, 철컹.

기사들이 상자에서 모두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셀이 양팔을 벌리고 말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이제 서부에 우리에 대한 공포를 심어 줄 시간이다."

구오오오오!

상자 안에 남아 있던 수백 개의 창이 서서히 허공에 떠올랐다.

366화 누가 누굴 괴롭혀? (3)

"뭐, 뭐야?"

거침없이 달려가던 로드리크군은 허공에 떠오르는 수백 개의 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그들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역시 마법사였나!"

브라이언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마법사라면 소문으로 퍼졌던 활약상이 이해가 갔다.

'돌이키기는 늦었어. 차라리 더 빨리 들어가야 한다.'

이미 직선으로 돌격하는 중이었다. 날아오는 저 창들을 정면으로 맞으면 피해가 클 것이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뒤쪽에서도 대기하던 병력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충분해. 버틸 수 있다.'

무려 천 명이나 되는 기마병이다. 포위까지 한 이상 보병들로 전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초반의 피해만 감수하면 된다.

"더 빨리 달려라! 그냥 밀어 버려!"

두두두두두!

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시전자와 가까울수록 피해가 적어진다.

그걸 아는 로드리크군은 이를 악물고 말을 달렸다.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지셀이 가볍게 양쪽으로 손을 털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처럼 시전 시간이 길지 않다.

쐐애애애액!

창들이 엄청난 속도로 로드리크군을 향해 날아갔다.

"버텨라! 돌파해야 한다!"

브라이언의 외침과 함께 기마병들이 모두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다크를 얻은 지셀의 공격은 그 정도로 막을 수 없었다.

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악!"

날아오는 창을 가까스로 쳐 낸 브라이언은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기마병들이 마치 꼬치가 꿰이듯 창에 찔려 날아가 버렸다. 지셀이 가볍게 휘두른 한 수에 병력이 절반 가까이 죽어 버렸다.

전생에서도 유명했던 용병왕의 기술이었다. 지셀을 대륙 7강의 말석이라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기술 덕분에 지셀의 전쟁 수행 능력만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고작 천 명의 병력으로 막기는 불가능했다.

히이이이잉!

"도, 도망가!"

"진짜 마스터급이라고!"

"이 숫자로는 절대 못 이겨!"

로드리크군은 단번에 전의를 잃어버렸다. 몇 명은 도망가려고 말고삐를 바짝 당겨 방향을 틀었다.

브라이언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도, 돌격해라! 이 멍청이들아! 도망가면 죽는다!"

브라이언의 경고도 소용이 없었다. 평화로운 서부에서 어깨에 힘만 주고 살았던 이들은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했다.

대열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돌격 중에 갑자기 멈추고 방향을 틀어 버리니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서부 대영주의 군대가 저 모양이라니."

전에 마르틴과 싸울 때도 느낀 거지만 확실히 기강이 개판이었다.

저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군림했기에 주변에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다들 나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볼 만한 적은 아니다.

"돈과 자원이 많기는 하지."

때로는 물량이 그 어떤 기술과 힘보다 강할 수도 있다. 데스몬드 백작의 힘이 북부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정예병들이었다면, 로드리크 후작의 힘은 그 부유함에서 비롯된 끝 모를 인원이었다.

이미 지셀 자신도 전생에서 왕국과 싸울 때 물량 공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느끼지 않았던가.

그러니 제대로 힘을 약화할 때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

"마저 쓸어라."

지셀의 명령에 대검을 든 기사들이 양쪽으로 튀어 나갔다.

콰아앙!

"크아아악!"

이미 대열이 엉망이 되고 전의까지 상실한 로드리크군이다. 400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브라이언은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 간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시, 실수다. 너무 적들을 우습게 봤어. 괜히 북부 최강이라고 소문난 게 아니었는데.'

후회하기에도 늦었다. 자신들의 힘과 세력을 너무 맹신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로드리크군은 항상 자신들보다 약한 놈들만 괴롭혔지 제대로 된 적과 싸워 본 적이 없었다.

하긴, 그게 당연했다. 어느 누가 대영지인 로드리크를 치겠는가.

'도, 도망가야 해!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브라이언이 말고삐를 강하게 잡았다.

사실은 그들이 전멸한 것만 알려져도 펜리스 영지의 힘을 대충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살고 싶어 대는 핑계였다.

하지만 브라이언이 도망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길리언은 자신과 말을 나눴던 브라이언에게 바로 도끼를 휘둘렀다.

"히, 히익!"

브라이언이 전의를 상실한 채 제대로 대응도 못 했다.

하지만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뭐 하는 거지?"

길리언이 바로 인상을 쓰고 옆을 돌아보았다. 카오르가 길리언을 몸으로 밀치고 검을 뻗고 있었다.

푸욱!

"커억...."

카오르의 검에 목이 뚫린 브라이언은 피거품을 내뱉으며 절명했다.

"으하하하! 봤지! 내가 적 지휘관을 잡았다! 영감보다 내가 더 빠르고 강하다!"

카오르의 외침에 길리언은 그냥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이놈은 상대하지 않는 게 이득이다.

"영감!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카오르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길리언은 계속 무시하고 옆에 있는 병사들만 처죽였다.

지휘관까지 죽고 제대로 도망도 못 간 로드리크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멸하고 말았다.

지셀은 별 힘도 안 썼는데 조용해진 전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한 건가?"

로드리크 후작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난 자다. 상대방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걸로도 유명했다.

절대 한 번에 끝내지 않는다. 상대의 기반을 하나씩 천천히 파괴하며 오랫동안 괴롭힌 후, 궁지에 몰아간 채 죽이는 걸 좋아한다.

그렇기에 지셀은 로드리크 후작이 가장 먼저 상단을 칠 거라고 진작에 예상했다.

'전생에도 그런 짓 많이 했던 놈이지.'

왕국을 치기 위해 모든 귀족의 정보를 캐냈던 지셀이다. 로드리크 후작의 습성 따위는 잘 알고 있었다.

지셀은 입꼬리에 비웃음을 달고 말했다.

"자, 다음 작전을 시작하자. 남들 괴롭히기만 하면서 살던 놈, 이번에는 우리가 괴롭혀 보자고."

* * *

"뭐...? 펜리스 백작이 진홍의 마탑주를 죽였다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브랜포드 후작도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실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귀족이 입을 벌리고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국군 총사령관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 그 오리 새끼가 그러면 정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거야? 그게 정말이야? 7서클 마법사를 그놈이 단신으로 죽인 게 정말이냐고,"

소식을 전하러 온 기사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이미 적염의 마탑이 보증했습니다. 그 대결을 지켜본 마법사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진홍의 마탑은 펜리스 백작이 멸망시켰습니다."

"...."

귀족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세한 얘기를 들어 보니 마탑 교류회에서 대결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대결 중에 일어난 사건이야 그렇다 쳐도 나머지까지 다 없애 버린 건 지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또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델무드가 적염의 마탑을 쓸어버리고 펜리스 백작도 죽이겠다고 말한 걸 들은 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펜리스 측에서 조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약 델무드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라면 명분은 확실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지셀이 델무드를 죽일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이다.

귀족들의 애매한 반응에 머뭇대던 기사는 곧 서신을 하나 꺼내 브랜포드 후작에게 건넸다.

"적염의 마탑주가 보낸 서신입니다. 진홍의 마탑은 공작가의 끄나풀이었고 그들의 명령을 받아 자신들을 멸망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뭐?"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을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런 정보는 전혀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서신을 읽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는 충분하군."

그는 서신을 다른 이들에게도 돌려 모두 읽을 수 있게 했다.

"허어! 공작가가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자칫 잘못했으면 뒤통수를 크게 맞을 뻔했습니다."

"7서클 마법사가 전장에서 기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는군요."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만약에 펜리스 백작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미리 막지 못했다면 정말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게다가 무려 7서클 마법사를 죽였다. 공작가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왕파가 델무드를 막아 준 데 대한 보답으로 자신들도 내전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아주 큰 도움이 되겠어. 가뜩이나 마법사들이 부족했는데."

적염의 마탑이 곧 제자들을 보내 주기로 했다. 마법 전력이 크게 상승할 건 당연한 일이다.

다른 귀족들도 그 사실에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어쨌든 자신들이 강해질수록 내전에서 승리할 확률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고, 지셀이 마스터라는 사실은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귀족들은 떠듬거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한 마디씩 내뱉었다.

"펜리스 백작이 정말 마스터라니.... 가뜩이나 통제도 안 되는 놈인데...."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춘 거지?"

"발자크 백작도 그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어."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야."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리스가 크게 화를 냈다.

"당연히 그런 놈은 천 년에 한 번만 나와야지!"

확실히 그렇다. 그런 꼴통이 여러 명 태어나면 안 된다.

귀족들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브랜포드 후작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군.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라니."

모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뭐가 좋다는 거야? 이제 그놈은 우리 손에서 벗어났어. 원래도 통제가 안 되던 놈인데 그 실력이면 아예 말을 안 들을 거라고. 그 오리 새끼가 마스터라니, 흑마법을 쓴 게 분명해."

모리스는 지셀이 흑마법사라는 가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 실제로 다크의 기운을 보면 잡아 죽이라고 날뛸 수도 있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에게는 지셀이 흑마법사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게. 마스터는 전술 병기이자 전쟁 억제기에 가까워. 왕실에도 마스터가 있기에 발자크 백작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 그렇지? 마스터라면 암살을 하든 전쟁에 참여하든 어마어마한 피해를 줄 수 있으니까."

"그런 패가 우리한테 한 장이 더 생긴 걸세. 물론 제대로 말을 듣지는 않지만 어쨌든 공통의 적을 두고 있지 않은가."

"오...."

"마스터의 수는 같다 해도 마법사 전력은 공작가가 위였지 않은가. 그쪽은 7서클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으니까."

"그래, 이제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되겠군. 부족한 마법사는 적염의 마탑이 보충해 주기로 했고 말이야."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화색을 띠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엄청난 일이었다. 친왕파에 마스터가 한 명 더 들어온 셈이니까.

이건 적염의 마탑이 참전한 것보다 훨씬 파장이 큰 일이었다. 마스터 한 명의 위용은 7서클 마법사와 맞먹는 정도다.

그간 지셀이 워낙 통제되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서 싫어하긴 했지만, 내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는 말이 달라진다.

귀족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떠들었다.

"아주 좋은 일이군요. 우리 쪽의 전략적 선택지가 더 많아졌습니다."

"북부는 그러면 다 정리가 된 셈이군요."

"이 정도면 정말 해볼 만한 거 같습니다."

귀족들이 하나둘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는 공작가랑 한번 해볼 수 있겠다는 분위기가 퍼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펜리스가 북부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마스터까지 한 명이 더 추가됐다. 어쩌면 쉽게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그때, 또 다른 기사가 급히 들어와 브랜포드 후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로드리크 후작이 펜리스를 치겠다고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파벌 싸움이 아닌, 적합한 명분에 의한 영지전이라고 천명했습니다."

"뭐?"

기분 좋은 소식에 기뻐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골치 아픈 소식이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로드리크 후작이 왜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이야!"

기사는 정보를 취합한 보고서와 로드리크 후작가에서 온 서신을 바로 브랜포드 후작에게 건넸다.

사나운 눈빛으로 서신과 보고서를 읽은 브랜포드 후작이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모리스가 재촉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로드리크 후작이 왜 갑자기 펜리스랑 싸우겠다는 거야?"

브랜포드 후작은 아무 말 없이 서신을 넘겼다. 그걸 읽은 모리스가 서신을 왈칵 구기며 외쳤다.

"이 오리 새끼! 그깟 용병단이 뭐라고 감싸고 돌아! 그 새끼 용병단 하겠다고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잠깐 분위기 좋았던 친왕파의 회의장은 다시 아수라장이 됐다.

로드리크 후작은 서부의 대영주였다. 아무리 펜리스가 강해졌다 해도 객관적인 전력을 따지면 로드리크에는 못 미친다.

그걸 떠나서 대영주인 둘이 지금 붙으면 좋을 게 없었다. 전쟁은 신중하고 정교한, 전략적 판단에 따라 돌아가야 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급히 집사에게 말했다.

"로드리크 후작이 화장품 상단의 계약도 취소한다고 하니 일단 판매를 중지해라. 상단들도 서부 근처에는 얼씬하지 말라고 하고, 펜리스 백작에게도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바로 모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중재를 해야겠소."

"중재? 뭐 어떻게 할 건데? 로드리크 후작은 그렇지 않아도 욕심 많은 놈이잖아. 명분이 생긴 이상 어떻게든 서부 밖으로 진출하려고 할 텐데?"

"그래도 해야지. 내전이 일어날 것이 정해져 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시작할 수는 없어. 우리 모두 그쪽에 끌려다니게 될 테니까."

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친왕파는 전쟁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 하는 쪽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에게 단단히 일렀다.

"절대 펜리스 백작에게 함부로 싸우지 말라고 일러라. 이쪽에서 중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신신당부한 브랜포드 후작은 친왕파 귀족들을 이끌고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아직 서로 붙지는 않은 상태다. 적당하게 회유하고, 안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싸움을 늦춰야 한다.

그렇게 여러 가지 방안을 짜내며 회의에 몰두한 지 이틀째,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다.

"로, 로드리크 후작이 서부로 가는 화장품 상단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뭐? 그러면 일부러 공격하는 때에 맞춰서 전령을 보냈다는 것이냐?"

"그, 그런 거 같습니다."

"이놈이...."

브랜포드 후작이 이를 갈았다. 로드리크 후작은 일부러 공격 타이밍에 맞춰서 이쪽에 알려 온 것이었다.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걸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일단 이쪽에서 수습할 테니 펜리스 백작에게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다시 전해라."

"그, 그게... 그런데...."

기사가 우물쭈물하자 브랜포드 후작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빨리 고해라."

"습격을 한 로드리크군이 전멸을 했다고 합니다."

"뭐?"

"그, 그곳에 펜리스 백작이 있었다고."

브랜포드 후작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걔가 왜 거기에 있어?"

"모,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로드리크군은 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브랜포드 후작의 얼굴에 살짝 불안감이 어렸다. 뭔가 무척이나 안 좋은 소식이 나올 거 같았다.

"그러니까...."

성격 급한 모리스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뭔데! 빨리 말해! 그 오리 새끼가 또 뭘 어쨌는데!"

기사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로드리크 후작의 봉신 영지들을 신나게 약탈하고 있다고 합니다!"

"...."

그 소식에는 다들 할 말을 잃고 입만 벌렸다. 아니, 다 같은 생각을 하긴 했다.

이 꼴통 새끼.

367화 누가 누굴 괴롭혀? (4)

브랜포드 후작은 이마를 짚었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수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기습을 하려고 수작을 부렸지만 되레 당했다.

"이 멍청한...."

그 탐욕스러운 놈이 결국 사고를 쳤다. 그리고 지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싸움을 받아 주었다.

'하긴... 지셀 그놈도 탐욕스럽기는 마찬가지지.'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모두 얻어 가는 점에선 로드리크 후작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게 또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서는 아니다. 가만 보면 그렇게 얻은 이익을 모두 영지를 위해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펜리스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했다.

결이 다른 탐욕. 그래서 브랜포드 후작은 여전히 지셀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친왕파의 귀족들에게 말했다.

"언제든지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병력을 대기시키시오."

다들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로드리크 후작이 총소집령을 내리면 어마어마한 대군이 모인다. 그렇게 되면 펜리스 백작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좋든 싫든 두 사람이 내전을 가속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갑자기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응하려면 지금부터 미리 출정 준비를 해 놔야 했다.

"일단은 전면전까지는 가지 않게 내가 막아 보겠소. 하지만 공작가는 현재 진홍의 마탑도 잃었으니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오. 기습에 대비는 해야 하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가 됐다고 좋아한 게 얼마 전이었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전쟁을 하게 생겼다.

좋게 좋게 풀어 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도대체 왜 이런 상황까지 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현재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건 친왕파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진짜 지셀 그놈이 마스터라고? 그리고 지금 로드리크 후작하고 시비가 붙어서 싸우고 있다고?"

아멜리아도 소식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둘이 싸우라고 진홍의 마탑을 없애긴 했지만, 들어 보니 지셀이 이미 델무드를 죽였단다. 싸움을 붙이려고 했는데 알아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절반은 성공했으니 다행이지만, 자꾸 자신의 의도에서 묘하게 벗어나는 게 거슬렸다.

"하... 그놈이 정말 마스터였을 줄이야."

아멜리아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지셀의 과거를 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처럼 그가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약혼자일 때 그의 본모습을 너무나도 진절머리 나게 봤기 때문이다.

'절대 힘을 숨긴 게 아니야.'

자신만 보면 얼굴을 붉히고 몸을 배배 꼬던 게 아직도 기억났다. 힘을 숨겼다기에는 너무나도 지질했다.

자신이 그를 경멸하고 무시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같은 모습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역시 그놈 배후에 누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놈이 이렇게 갑자기 마스터가 될 수 있게 키워 주고 정보를 알려 준 놈이 말이다.

사람이 아니라면 그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 보물을 얻었을 것이다.

'그걸 반드시 찾아야 해.'

아멜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망나니였던 놈을 몇 년 만에 마스터로 만들고 신비한 지식을 불어넣었다.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정체를 알아내 손에 넣는다면 자신의 야망을 더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지셀의 실력과는 별개로 로드리크 후작과 싸우기 시작한 것도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진짜 싸움에 미친 놈이야. 쉬지도 않고 여기저기 들이박고 다닌다니....'

로드리크 후작은 데스몬드 백작보다 훨씬 더 강한 대영주다. 거기에 공작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고위 귀족이다.

그런 자와 시비가 붙었다고 직접 서부까지 가서 난리를 피우다니. 역시 정상이 아닌 놈이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엄청난 충동이 일어났다.

'지금 지셀을 친다면....'

펜리스가 강하긴 하지만 그 중심인 지셀이 지금 자리에 없다.

모든 전력을 이끌고 폭풍처럼 몰아친다면 단숨에 펜리스를 점령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아니야. 지금은 참아야 해.'

지셀이 아멜리아를 변수로 보듯이, 그녀에게도 지셀은 가장 큰 변수였다.

자신이 펜리스를 점령하면 친왕파는 북부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면 더 쉽게 내전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녀가 공작가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겠지만, 아멜리아에게는 공작가 또한 미래의 적. 남 좋을 일을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공작파와 친왕파는 사이좋게 서로의 힘을 깎아 먹다가 공멸해야 한다.

그녀에게 지셀은 혼을 내 줘야 하는 놈이지 목표가 아니다. 대업을 위해서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 두어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다스린 그녀가 콘라드에게 말했다.

"후... 서부로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계속 확인해. 상단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알겠습니다."

"이곳으로 온다는 대리인은?"

"울칸이 처리하고 전부 묻었다는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좋아. 병력과 식량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언제든 출정할 수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만족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전이 일어나면 바로 움직일 루트를 알려주겠다. 그에 맞춰서 이동 계획을 잡도록.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멜리아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지셀과 로드리크 후작이 붙은 이상 내전이 일어나는 시기는 더 빨리 올 것이다.

친왕파에 지셀이 있다면 공작파에는 자신이 있다. 그리고 둘 다 다른 사람 말을 안 듣기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전쟁은 네놈들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야.'

모두 자신의 뜻대로 이뤄질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 * *

로드리크 후작은 가신이 올리는 보고를 듣고 눈만 끔뻑거렸다.

"상단 습격이... 실패했다고? 천 명이나 갔는데 화장품 상단 하나를 못 없앴다고?"

"네, 모두 전멸했습니다. 펜리스 백작이 직접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놈이... 겁도 없이 고작 몇백 명만 이끌고 이 서부로 왔다고? 감히 이 나를 어떻게 보고...."

로드리크 후작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애꿎은 가신을 노려보았다.

펜리스 백작의 실력에 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전멸한 걸로 보아 확실히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마법사라는 소문도 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럴 수 있다. 위명이 자자한 인물이니 천 명 정도로는 못 막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뒤에 벌어지는 일들이 문제였다.

"그리고 지금 나를 따르는 봉신들의 영토가 그놈한테 공격당하고 있다고?"

"네, 현재 세 곳이 공격당했고 전부 약탈당했습니다. 또한 갑자기 여기저기서 용병들이 나타나 약탈한 재화를 펜리스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 또 한 곳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으, 으으으... 으아아아아!"

콰앙!

로드리크 후작이 소리를 지르며 의자의 팔걸이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감히! 감히 그 애송이 새끼가! 나를!"

굴욕적이었다. 자식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시비를 걸었는데 되레 얻어맞다니.

그 와중에 각지에서 그놈에게 약탈당하고 있다고 도움을 요청해 왔다.

"으으... 그놈이 감히 겁도 없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줄이야."

로드리크 후작령은 무척이나 넓고, 서부는 그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러나 그 땅을 지켜야 할 병력은 로드리크 후작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부의 영주 중 상당수는 로드리크 후작가를 따르는 봉신들이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병력은 보통 500명에서 1천 명 정도였다. 많아 봤자 3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건 로드리크 후작가가 대대로 취해 온 전략이었다.

영토를 잘게 쪼개 많은 봉신에게 나눠주어서 누구 하나가 강대해지지 못하게 한다. 대신 병력이 필요하면 후작가에서 지원해 준다.

그런 방식을 통해 로드리크 후작가는 서부의 맹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 전략이 약점이 되었다. 지셀을 잡기엔 봉신들의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군대를 모아라! 그 애송이 놈을 추적해서 잡아 죽여! 더 이상 봉신들을 치지 못하게 하란 말이다! 주변 영지들도 모두 움직여서 그놈을 포위하라고 전해라!"

내부를 통제하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너무 많이 쪼갰기에 외부의 침략에는 이렇게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감히 누가 이곳을 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후작가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으니까.

어쨌든 봉신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봉신 하나가 없어질 때마다 후작가의 힘이 약해지는 셈이었으니까.

하나하나는 약해도 이들이 모두 모이면 수만에 이르는 군대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서부의, 서부를 지배하는 맹주의 진정한 힘이었다.

길길이 날뛰는 로드리크 후작을 향해 가신들이 입을 열었다.

"소문의 펜리스 백작이 직접 왔으니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금방 잡을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무슨 방법?"

로드리크 후작가에는 명문가답게 뛰어난 가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대응책을 강구해서 가져온 상태였다.

"펜리스에서 제대로 군대를 꾸려 침공한 게 아닙니다. 어차피 전면전으로 저희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펜리스 백작도 점령이 아니라 약탈을 하는 것입니다. 그를 한곳으로 몰아 포위한 뒤 치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로드리크 후작이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말해 보아라."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테넌트가 지도를 펼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참모진들과 회의한 결과, 펜리스 백작이 약탈을 계속 자행한다면 결국 이곳을 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봉신 중에서도 제법 큰 병력을 가진 데이커 남작령이었다.

기사는 별로 없지만 무려 3천의 병력을 가진 곳이다. 나름대로 요충지로 꼽히는 위치라 다른 영지보다 병력이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을 뚫어야 다른 봉신들에게 가는 길이 열리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우회하거나 후작령에 접근해야 합니다."

데이커 남작령은 서부의 요새 역할도 같이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서부를 공격하려면 이곳을 뚫거나, 그게 싫으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

"각 영지에 이미 공문을 보냈습니다. 영주들이 병력을 모아 데이커 남작령 주변에 방어선을 펼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놈을 잡아 죽여야 할 거 아냐?"

"데이커 남작에게도 전령을 보냈습니다. 식량을 최소한으로만 남기고 버티라고요."

"호오...."

로드리크 후작은 작전을 조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거기 들어가면 굶어 죽겠구먼?"

"그렇습니다. 식량이 없으면 점령에 성공한다 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포위한 뒤에 굶어서 힘이 빠질 즈음 다시 쳐서 죽이면 됩니다."

"기간은?"

"만약 펜리스 백작이 점령에 성공한다면 일주일 정도만 포위한 채로 기다리면 충분할 거라 생각됩니다. 불안하면 한 달을 기다리면 됩니다. 어차피 그쪽에서 못 버티고 튀어나올 겁니다."

일주일 정도는 굶어도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굶으면 힘이 빠져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병력은 얼마나 필요하지?"

"펜리스 백작의 위명을 생각하면 1만은 필요할 거 같습니다."

"혹시 데이커 남작의 병력만으로 막을 수는 없나?"

"기사가 거의 없기에 힘들 거 같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펜리스 백작은 공성 병기도 안 가져왔다고 했다. 대신 야밤에 몰래 성벽을 넘어 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재화를 옮기기 위해 용병들이 그 뒤를 따라온다는 정보였다.

후작가의 가신들이 추측하기로는 펜리스 백작이 기사들을 상당수 데리고 온 거 같았다.

아무리 봉신들의 병력이 적어도, 기사들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몰래 성벽을 넘어 학살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쪽은 기사들이 몇 명 정도 온 거지?"

"적어도 50명은 되는 거 같습니다. 나머지도 상당한 정예병들 같습니다. 작정하고 약탈하려고 실력이 좋은 자들만 골라 데리고 왔을 겁니다."

사실 지셀은 병사 없이 400명 전부 기사로만 데리고 왔지만, 그렇게 많은 기사를 데리고 왔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50명도 일부러 넉넉히 잡은 수였다.

펜리스 영지에 제법 기사가 많다고 소문이 나긴 했지만 죄다 초급 수준이라는 소문도 같이 돌았다.

애초에 영주들 대부분은 기사가 많다는 소문도 그리 믿지 않았다.

로드리크 후작은 다른 걸 물었다.

"데이커 남작을 도와서 싸우는 건 어떤가? 식량을 모두 빼면 그들도 버티기 힘들 텐데?"

"우리 쪽 병력을 보면 도망갈 게 분명합니다. 데이커 남작을 버리게 되더라도 놈들을 안에 가둬야 합니다. 성이 점령되는 대로 바로 포위할 생각입니다."

테넌트는 태연하게 같은 편을 미끼로 삼자고 말하고 있었다. 모두 죽을 게 뻔한데도 말이다.

그런데 로드리크 후작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정말 그 주인에 그 수하라 할 수 있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로드리크 후작은 흔쾌히 그 작전을 허락했다.

"5천을 내어주겠다. 주변 봉신들의 영지에서 병력을 소집해 나머지 5천을 채워라. 이번에는 확실히 잡아 죽이도록."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누구로 할 거지? 자네가 직접 가는 건 곤란해."

테넌트는 후작가의 중요 인물이다. 그런 잡스러운 전쟁에 직접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마스터라고 소문난 펜리스 백작과 싸워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 손해였다.

"상급 기사인 하워드를 보내겠습니다. 검술뿐만 아니라 군사 능력도 출중한 친구니 믿을 만합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로드리크 후작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강해도 소수 병력만 가지고 전세를 뒤집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일주일이나 굶은 상태로 1만의 대군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설령 정말 마스터에 올랐다 해도, 혼자서 기사들까지 포함된 1만을 죽이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냥 죽일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숨통을 조여 가며 괴롭히려고 했는데 그놈들이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

그런 놈을 죽이기만 하는 건 너무나 가벼운 형벌이었다.

"펜리스 백작은 가능하다면 살려서 데리고 와라. 마나를 못 쓰게 코어를 파괴하든 사지를 끊어 버리든 해서 말이야."

로드리크 후작은 분노가 섞인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덤벼든 그 북부의 애송이 놈을 가만히 둘 생각은 절대 없었다.

잡아 놓고 죽지도 못하게 두고두고 괴롭히리라 결심했다.

368화 다들 버틸 수 있지? (1)

"영주님, 후작가의 병력이 움직인 거 같습니다."

"이곳을 포위하듯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상하신 대로 이곳에서 결판을 보려고 하는 거 같습니다."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하는 보고를 듣고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무려 일곱 군데의 영지를 털었는데도 상대는 제대로 추격하기는커녕 방어선조차 펼치지 않았다.

후작가가 아무리 나태하다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런 수준이면 애초에 서부를 제패하지도 못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확실하게 자신을 잡으려고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현재까지 파악한 수는?"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지셀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북쪽에서 오는 군대의 수는 약 4천 정도입니다. 전원 보병입니다."

"서쪽에서 오는 군대의 수는 약 3천 정도입니다. 절반은 기병, 절반은 보병입니다."

"남쪽에서 오는 군대의 수도 약 3천 정도입니다. 공성 병기와 궁병, 보병 위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셀과 그간 함께한 기사들은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평소엔 여전히 용병일 때, 백수일 때처럼 껄렁거리지만 전투에 임할 때는 그런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수가 꽤 많군. 속도는?"

그 말에는 길리언이 답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미 도착했을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춰 천천히 오는 듯합니다. 그리고 정찰병을 계속 운용하며 이곳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지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영지를 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천천히 오면 안 된다. 최대한 빨리 달려와서 성의 병력과 협공하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천천히 온다는 건.

"우리를 고립시키려는 모양이군."

상대가 뭘 노리는지 예상이 됐다. 미끼를 내어주고 확실하게 포위한 뒤, 성안에 가둬 힘을 빼려는 속셈이다.

지셀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

"흠, 이번에는 좀 많네."

안력을 집중해서 보니 성벽마다 병사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이미 그들에 관해서는 소문이 다 난 상태다. 그러니 경계 태세가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책자 하나를 꺼내더니 휙휙 넘기며 말했다.

"어디 보자, 데이커 남작령... 대충 3천 정도인가? 기사는 거의 없네."

지셀이 보는 건 로드리크 후작령과 그 주변 영지에 관한 정보들이 적힌 책이었다.

영지 내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정보도 있지만 역시 드레이크 용병단의 도미닉이 건네준 정보의 비중이 가장 컸다.

본래 서부가 근거지였던 자들이기도 하고, 후작가의 밑에서 더러운 짓을 많이 하다 보니 그만큼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책을 품에 넣은 뒤 말을 이었다.

"기사는 별로 없지만 병사들이 많으니 오늘은 다들 힘 좀 써야겠다. 뒤통수가 안전하려면 여기를 밟아 놔야 하니까. 밤이 되면 바로 친다. 알겠어?"

고든이 성과 지셀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우리 잡으러 지금 오는 적들은요? 포위하려는 거 같은데. 싸우는 중에 몰려오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다른 기사들도 조금은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싸우는 중에 1만의 적이 포위하면 아무리 영주가 마스터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찌어찌 이겨도 기사들은 대부분 힘이 빠져 죽거나 크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어차피 여기는 미끼로 던지는 곳이다. 여기에 우리를 가두려고 하는 작전이지. 우리가 도망갈까 봐 싸우는 중에는 안 칠 거다. 그러면 조금 어울려 주고 이득을 봐야지."

"오...."

기사들도 지셀과 오래 함께해서인지 그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과연, 영주님을 확실히 잡으려면 가둬 놓고 패는 게 제일 좋겠죠."

"그러면 제대로 성안에 들어갔을 때 포위하는 게 가장 확실하겠네."

"하긴, 고작 약탈자 400명 잡으려고 저렇게까지 올 리가 없지. 역시 영주님이 목표인가?"

이들은 예전과 다르게 전쟁에서만큼은 멍청하지 않게 되었다.

군사학은 배우지 않았지만, 지셀과 함께하며 경험에 기반한 통찰력과 직관이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그것은 앞으로의 전쟁에서 큰 힘이 될 터였다. 위험한 순간에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떤 선택지가 가장 적절한지 구별하는 판단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뭔가 부실했지만, 지셀이 관심 있는 건 오직 전쟁 수행 능력뿐이었다.

그는 기사들의 성장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가 아니라 나를 잡으려는 거야. 이 몸을 잡으려면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최소한 저 정도의 미끼는 던져 주는 거지. 하, 인기인이 이래서 피곤해요."

"...."

기사들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의식 과잉 뭐야....'

'그런데 반박할 말이 없다....'

'유명인은 좋겠다.... 나도 유명해지고 싶다....'

"뭐야? 표정들이 왜 그래? 아무튼 이번에는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자고.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기사들은 곧 걱정을 거두고 힘차게 대답했다. 영주가 저렇게 자신 있게 얘기한다는 건 확실히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전투와 약탈에만 집중하면 된다.

"오늘도 확실하게 털어 보죠."

"맛있는 거 먹을 때가 제일 기분 좋다니까."

"여기는 더 크니까 털 것도 더 많을 거야."

다들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들썩였다.

영지에서도 약탈 연기는 여러 번 해 봤지만 진짜 약탈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다들 약탈이 적성에 딱 맞았다.

작은 영지들이다 보니 기사나 병사도 거의 없었다. 쉽기까지 하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다 같이 즐겁게 공격하면 되겠다고 기사들이 희희낙락하던 그때, 지셀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간다. 돌격대가 가서 성문을 열어. 50명 차출이다."

그 말에 카오르가 깜짝 놀랐다.

"아니, 왜요! 지금까지는 같이 쳤잖아요! 저기는 3천 명이나 되는데?"

"우리가 다 가서 점령하면 금방 적들이 포위할 텐데, 그러면 말들을 뺏기잖아? 돌격대가 문 열면 말 타고 갈 거야."

"말이야 뺏기면 어때! 안에 또 있을 텐데! 그리고 점령하자마자 다시 가지고 와도 되잖아!"

"안 돼. 콩이를 두고 갈 수는 없다."

그 말에 흑왕이 푸르륵 웃으며 갈기를 멋있게 옆으로 휙 넘겼다.

"...."

잠시 흑왕을 바라보던 카오르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말들 때문에 내가 50명만 데리고 가서 성문을 열어라?"

"그래, 훈련도 겸하는 거야. 돌격대가 하는 일이 그런 거지. 싫어? 싫으면 길리언이 가고."

길리언이 바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들어가서 바로 열겠습니다."

그러자 카오르가 허겁지겁 말을 바꿨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갈게! 저런 거 금방 연다고! 야! 너희 할 수 있지?"

그 말에 전 광견단원 및 돌격대에 차출된 50명의 기사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냥 영감 보내지.'

'오늘 진짜 피곤하겠네.'

'재수 없으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겠는데?'

이들이 아무리 강해도 3천의 병사와 싸우는 건 쉽지 않다. 초반에 최대한 많은 적을 죽이고 문을 열어야 한다.

안 그러면 힘 빠져서 쓰러진 뒤 잘근잘근 짓밟힐 테니까.

사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말을 데리고 올 몇 명만 남기고 다 같이 가도 된다. 하지만 지셀은 일부러 소수 인원을 돌아가면서 내보내 조금 더 힘을 쓰게 훈련을 시켰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휴식을 취하던 지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해 떨어졌다. 빨리 가서 열어라."

그러자 기사들이 전부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지셀은 애초부터 야밤에 기습하고 약탈할 생각으로 복장까지 일부러 맞춰 온 것이었다.

스스스슥....

카오르의 돌격대는 무척이나 조용하게 성으로 접근했다.

기사들은 모두 벨린다에게 기척을 숨기는 방법과 조용히 이동하는 방법을 배운 상태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배워 둔 덕분에, 암살자 정도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인들 정도는 속일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카오르는 배울 때마다 벨린다에게 정강이를 까인 탓에 언젠가는 갚아 주리라 이를 갈고 있었다.

성 가까이 다가간 카오르가 중얼거렸다.

"으... 이번에는 진짜 걸리겠는걸?"

이미 그들이 쓰는 수법이 발각된 상태라 경계 태세가 무척이나 삼엄했다.

병사들이 성벽을 두르듯이 빠짐없이 망을 서고 있었고 성 앞에도 시야를 밝힐 수 있게 횃불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 같은 실력자는 횃불 아래의 그림자에 숨어 이동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그렇게 못 한다.

결국 성벽에 서 있던 병사들 중 눈 좋은 자들이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뭐, 뭐가 있습니다! 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도 바짝 긴장했다. 다들 창을 세워 들고, 적들이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다양한 수성용 병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걸 써 보기도 전에 갈고리 하나가 먼저 성벽에 걸쳐졌다.

턱.

"어? 어?"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멍청아! 치워야지!"

옆에 있는 고참 병사가 잽싸게 갈고리 쪽으로 다가갔지만 늦었다. 카오르는 줄을 잡고 단숨에 성벽 위로 올라섰다.

그가 대검을 앞으로 내세우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이 몸, 등장."

"적이 올라왔다!"

씨익 웃는 카오르를 보고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바로 창을 내질렀다.

콰아앙!

카오르는 창을 피하며 바로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으아악!"

앞을 막던 병사들이 단번에 죽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카오르가 다시 웃었다.

"역시 약한 놈들 잡는 데는 큰 무기가 최고라니까."

그가 낄낄거리는 동안 사방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잡아라!"

"적은 하나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모두 카오르가 올라온 곳으로 몰려들었다.

3천의 병력이 몰려오는 모습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카오르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턱! 턱! 턱!

성벽에 수십 개의 갈고리가 걸쳐졌다. 가볍게 성벽을 넘기는 아직 힘든 기사들이 밧줄을 타고 재빠르게 올라왔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얼마 없다! 막을 수 있다!"

데이커 남작령의 병사들은 숫자를 믿고 밀어붙였다. 얼핏 봐도 오십여 명 정도였다. 이곳에 있는 수천의 병사가 막지 못할 리가 없었다.

카오르도 몰려오는 병사들의 수를 보고 조금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바로 내려가자! 빨리 움직여!"

일단 내려가려면 앞에 있는 병사들부터 치워야 한다. 카오르와 기사들이 바로 움직였다.

콰앙! 콰앙! 콰앙!

펜리스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적을 쳐 죽였다. 하지만 나아간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카오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 넓은 성벽이 아니라 바로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숫자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성벽이 넓지 않아 병사들이 채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카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씨.... 어쩌지?"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도 계속 성벽으로 올라왔지만 앞줄이 가득 차서 카오르 일행에게는 접근하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병사들이 빽빽하게 모여 오고 있었다.

'생각해라. 생각해.'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에 돌격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더 머리를 굴려 봐도 빨리 내려갈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하기가 귀찮아진 카오르는 다른 걸 떠올렸다.

'그냥 3천 명 다 죽여 볼까?'

그러면 진짜 멋있을 거 같지만, 그건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불가능할 거 같았다.

물론 50명의 기사들과 함께 모든 힘을 다 쓰면 2천 가까이는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뒤에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무식하게 싸우다 죽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앞을 막고 있는 놈들을 뚫는 게 낫다.

"야! 양옆을 막아! 나머지는 나랑 같이 뚫고 내려간다!"

전투에 한해서는 훈련이 제법 잘된 펜리스 기사들이다. 바로 절반의 기사가 자리를 잡고 좌우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막기 시작했다.

카오르가 앞쪽을 향해 대검을 집어 던졌다.

콰아앙!

"으아아아악!"

한 번에 여러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카오르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정말 제대로 싸울 수밖에 없나."

사실 그간 너무 편하게 싸우긴 했다. 지셀이 왜 이런 상황에 자신들을 내모는지도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기를 위해서는 가끔 이런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그도 동의했다.

카오르는 허리춤에 달고 있던 두 개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지셀은 펜리스 기사에게 모든 무기를 쓸 수 있도록 훈련하라고 명령했다. 카오르는 그중 쌍검술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지셀의 추천 덕분이었다.

― 너 어차피 방패 잘 안 쓰잖아. 검 두 개를 쓰는 수련도 같이해.

― 검 두 개요? 나 왼손 잘 못쓰는데.

― 그러니까 더 연습해야지. 싸우다가 오른손 날아가면 그냥 죽을래?

― ....

― 그리고 검 두 개를 쓰면 공격력도 두 배가 되는 거야. 어때?

― 오....

당시에 그 말을 들은 카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무척이나 그럴듯했다.

생각해보니 길리언도 약한 놈들을 잡을 때는 도끼를 두 개 들고 설치지 않던가.

그러니 자신도 쌍검술에 익숙해져야 길리언에게 꿀리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런 이유로 수련에 꽤 진지하게 임한 덕분에 카오르는 이제 제법 쌍검술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병사들이 빈 공간을 채우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카오르가 양손에 든 검을 살짝 돌리며 웃었다.

"공격력 두 배, 간다."

스각! 스각!

카오르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이고 두 개의 검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369화 다들 버틸 수 있지? (2)

지셀이 예전에 준 검술서에는 쌍검을 사용하는 검술도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건 카오르의 적성에 제법 잘 맞았다.

"역시 손맛은 조금 떨어져도 움직임 자체는 이쪽이 편하다니까."

어차피 방어는 도외시하고 상대의 급소를 날카롭게 노리는 게 카오르의 전투 방식이다.

그러니 그에게 쌍검술은 공격 루트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좋은 기술이었다. 왜 진작 이런 걸 모르고 살았는지 인생 손해 본 느낌이었다.

카오르는 누구보다 빠르게 두 개의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죽여 나갔다.

스각! 스각! 스각! 스각!

"이놈 뭐야!"

"왜 이렇게 빨라!"

"이놈이 펜리스 백작이다!"

일반 병사들로서는 도무지 카오르의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셀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두운 밤, 허공에 푸른 선이 빛나며 순식간에 적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과도한 마나 운용 때문에 카오르의 눈에서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마치 어두운 밤에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뾰족한 송곳처럼 적들의 대열을 뚫은 카오르 덕분에 순간적으로 길이 생겼다.

"야! 빨리 뛰어내려! 이제 힘 전부 다 써라!"

카오르는 바로 내려가지 않고 성벽의 끝에 머물며 마구 검을 휘둘렀다. 그의 몸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잉―!

기사들의 갑옷이 동시에 활성화되었다. 로브로 가려져 있지만 틈을 통해 빛이 마구 새어 나왔다.

기사들의 움직임이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졌다.

콰앙! 콰아앙!

"으아아아악!"

갑자기 강해진 기사들의 활약에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앞을 막은 병사들을 잽싸게 치운 그들은 바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쿵! 쿠웅! 쿵!

'한쪽 팔만 부서지고 살아남기' 낙법을 펼치며 마나까지 몸에 두른 기사들은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착지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적 지휘관이 그들을 보고 외쳤다.

"막아라! 성문을 열지 못하게 해라!"

성벽으로 올라가던 병사들이 바로 몸을 돌려 달려왔다. 빽빽하게 몰려 있던 성벽의 병사들도 다급하게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카오르도 성벽 아래로 착지한 뒤 외쳤다.

"막아! 몇 명만 나랑 같이 열자!"

그러자 모든 기사가 전부 성문을 열려고 카오르를 따라갔다. 아무도 앞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야이! 미친놈들아! 너랑 너만 따라와! 빨리 막아! 막으라고! 쟤들 오잖아!"

카오르가 깜짝 놀라 직접 인원을 지정했다. 그제야 기사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달려오자 기사들도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성벽 위에서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공간도 넓고 병사들이 포위하기도 더 쉽다.

콰아아앙!

양측이 부딪치자 비명과 함께 피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병사 몇 명은 숫자의 이점을 이용해 기사들을 지나쳐 성문으로 향했다.

기사들은 자신들을 지나치는 병사를 금세 따라가 죽였지만,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있어도 저 많은 병사를 모두 저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이 잠깐 병사들을 막는 사이 카오르와 그를 따르던 기사들은 빠르게 성문에 도착했다. 그들은 내리닫이 창살 문의 크랭크를 잽싸게 돌렸다.

끼기기기긱....

창살 문이 열렸다. 그 사이 기사들을 피해 온 병사들이 다가왔다.

카오르는 바로 튀어 나가 병사들을 죽이며 외쳤다.

"빨리 성문 열어!"

스각! 스각! 스각!

그의 검이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하게 움직였다. 몬스터와 수도 없이 싸우다 보니 그는 어느새 난전에 강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카오르가 앞을 막는 사이, 남은 기사들이 드디어 성문을 열었다.

쿠우우웅!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다들 실력이 많이 늘었어. 가자."

히이잉!

지셀이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흑왕이 길게 울음을 내뱉었다.

그 울음소리는 데이커 남작령의 패배를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흑왕은 어둠과 동화된 듯 빠르게 달렸다. 그 뒤를 따라 펜리스의 기사들이 움직였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그러나 펜리스 돌격대에 시선이 팔린 데이커군은 지셀과 기사들이 접근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상황을 깨달은 데이커군 지휘관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다, 닫아라! 어서 성문을 닫으란 말이다!"

성벽에 있던 지휘관이 연신 외쳤지만 병사들은 아직도 돌격대에 가로막혀 있었다.

기껏 성문까지 간 자들도 성문을 닫지 못했다. 앞을 막고 있는 붉은 머리 놈을 뚫어야 하는데 도무지 죽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지치게 하면 될 거 같은데 그전에 적들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어, 어떻게 하지?"

"저놈을 죽여야 하는데."

"빠, 빨리 치자."

병사들은 서로 중얼거리면서 미루기만 할 뿐 감히 먼저 나서지 못했다.

피 칠갑을 한 채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는 저놈이 너무 무서웠다.

검 두 자루를 양손에 들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를 피해서 성문을 닫는 것도 불가능했다. 눈앞에 있는 놈이 그걸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가장 앞에서 달리던 지셀이 손을 쭈욱 뻗었다.

화르르륵!

검붉은 마나의 창들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곧 수십 개의 창이 성문을 넘어 적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파파파파파팍!

"크아아악!"

성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싸우던 병사들은 그대로 창에 뚫려 절명했다.

"마법사다! 마법사가 왔다!"

앞에서 당한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같은 마법사가 막아 줘야 하는데 아군 마법사는 며칠 전부터 보이지도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다른 병사들도 성문 너머로 적들이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수도 적은 상대를 아직도 압도하지 못했는데 성문까지 열린 상태다.

결국 싸우던 병사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적들이 몰려온다!"

"도망가! 역시 못 이겨!"

"여기는 끝났어!"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병사들이 몸을 뒤로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더 빨리 달리려고 무기까지 버렸다.

하지만 이미 성문 앞까지 다가온 펜리스의 기사들이 더 빨랐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병사들은 전부 보병이었다. 당연히 말을 탄 기사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었다.

350여 명의 기사들이 그대로 밀고 가자 순식간에 수백의 병사들이 짓밟혔다.

약탈자들은 항복해도 살려 주지 않는다는 소문이 돈 지 오래였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펜리스의 기사들이 적들을 쓸어버리는 걸 본 카오르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오! 힘들어! 꼭 이렇게 해야 했냐!"

혼잣말이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두가 알았다. 작전에 참여한 기사들도 다들 바닥에 쓰러져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와, 오늘 진짜 빡세네. 훈련 미쳤다."

"오랜만에 상처도 입었어."

"진짜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나 오늘 죽었다."

그들은 누워서 욕도 내뱉고 낄낄거리기도 했다. 힘을 많이 쓰긴 했지만 어쨌든 살았다.

애초에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진짜 위험하면 영주가 직접 참여했을 것이다.

영주가 훈련이라고 한 이상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렇게 힘들게 밀어붙이는 게 영주의 훈련 방식이니까.

이미 전의를 잃은 병사들을 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급격하게 성으로 난입한 펜리스의 기사들은 빠르게 적들을 정리했다.

병사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도망에 성공한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오늘도 약탈이다!"

다들 함성을 지르며 웃었다. 돌격대로 뽑히지 않았던 기사들은 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다들 웃고 떠들고 있을 때, 지셀이 성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문을 닫아라."

자신들을 추격하는 적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잽싸게 성문을 닫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과연 조금 기다리자 멀리서 수많은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군대가 보였다.

바로 로드리크 후작가와 주변 영주들이 보낸 군대였다.

이렇게 바로 나타나는 걸 보니 계속 전투 상황을 확인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진짜 우리를 가둬 죽이려고 하나 보네."

"정확히는 영주님 도망 못 가게 하려는 거지."

"드디어 저놈들도 다 모였구나. 만만치 않겠는걸?"

세 방향에서 군대가 다가왔다. 저 군대에는 지금까지 상대한 군대와는 다르게 많은 기사가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저들은 성을 포위만 한 채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막사를 세우고 대기만 할 뿐이었다.

지셀은 자신이 예상했던 그대로 진행되자 웃음을 지었다.

"역시 굶겨서 힘을 빼려고 하는 건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성 하나와 3천의 군사를 미끼로 주는 대범함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역시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대영주다운 결정이었다.

"일단 성의 식량을 점검하고 남은 관리들이 있는지 수색해 봐라."

당장 전투가 일어날 거 같지 않자 지셀은 일단 정비에 들어갔다.

기사들이 흩어져 성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돌아다니던 기사들은 사람 몇 명을 끌고 왔다.

"아이고, 살려 주십시오!"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

"영주님과 측근들은 이미 다 도망갔습니다!"

울부짖는 관리들을 보며 지셀이 물었다.

"언제 도망갔지?"

"이, 이미 사흘 전에 재물을 다 긁어서 도망간 상태입니다."

"병사들은 다 버리고?"

"네, 네. 그렇습니다. 기사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왜 다들 남아서 싸운 거지?"

그러자 관리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병사들은 영주님이 도망간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었으니까요."

"너희들은?"

"저, 저희는 남아서... 끝까지 있으려고...."

"솔직하게 말해."

무표정한 지셀의 표정을 본 관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워, 원래는 내일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식량도 다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지셀이 길리언을 바라보자 길리언이 바로 대답했다.

"식량 창고가 비어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이미 병사들에게 내일 치 식량까지 배급한 상태였습니다. 아마 이틀만 지났어도 다들 도망갔을 겁니다. 성 밖을 공격할 수 있는 병기 또한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지셀이 다시 관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 내 사람들의 식량은?"

"거의 다 징발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성에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영주를 따라갔습니다."

"그런 놈을 왜 따라가?"

관리는 지셀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 약탈왕이 오면 다 죽는다고 소문을 내서...."

"약탈왕?"

"네, 그렇게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말에 지셀이 헛웃음을 지었다. 영지에서 약탈왕 연기를 하긴 했지만, 서부에 와서 진짜 약탈왕이라 불릴 줄은 몰랐다.

다른 기사들도 어처구니없어하며 피식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지셀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소문에 따라가나?"

"말을 안 들으면 강제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중에 다시 성을 찾으면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으니...."

도망가는 와중에도 미래를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다니, 어찌 보면 대단한 놈들이긴 했다.

물론 자신들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그런 짓을 했겠지만.

"그걸 병사들이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고?"

"다들 전투에 대비해 식량을 징발한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안전하게 대피시킨 줄로 알고 있고요."

참으로 지독한 놈들이었다. 사지로 밀어 넣는 셈인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든 미끼로 쓰려고 아군 병사들마저 속였다.

남은 관리들도 최대한 병사들을 달래고 버티게 하다가 도망가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로드리크 후작이 데이커 남작을 버린 것처럼, 데이커 남작도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이들을 버린 것이다.

궁금한 게 풀린 지셀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관리들을 끌고 갔다.

"어? 어? 살려 주십시오!"

욕심 많은 놈들이 눈치는 참 빠르다. 지셀은 그냥 무시하고 성 밖을 바라보았다.

"흐음, 전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긴 한데.... 얼마나 있다가 치려나."

카오르가 천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어차피 싸울 거죠? 이럴 줄 알고 있었잖습니까."

"그래, 적들을 더 약화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니까. 명분을 걱정하지 않고 한 번에 저만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거든."

"그러면 그냥 조금 쉬었다가 날이 밝는 대로 치죠? 여기 식량도 없잖아?"

카오르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이 칠 때까지 기다린다."

"아니, 또 왜!"

"그래야 용병들이 재물들을 안전하게 옮길 테니까."

"아하!"

현재 지셀은 무려 일곱 군데의 영지를 털었다. 여덟 번째인 이곳에는 가져갈 게 거의 없다지만, 이전에 턴 재물들을 전부 옮기려면 상당한 인원과 시간이 필요했다.

각지에 퍼져 있던 용병들이 부랴부랴 와서 옮기고 있지만 아직 반도 옮기지 못했다.

지셀이 밖에 주둔한 군대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띠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많이 털어 가려면 이번 기회를 이용해야지. 저놈들 신경이 온통 여기에 쏠려 있을 때."

로드리크 후작가는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셀이 다른 영지를 약탈할 때도 움직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든 지셀 일행이 이곳까지 오게 해야 하니까.

그 덕분에 지셀은 추격도 당하지 않고 편하게 약탈했고 용병들도 편하게 재물을 옮길 수 있었다.

용병들도 나름대로 주변을 정찰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지셀은 그들에게 군대가 나타나면 모두 도망가라는 명령을 내려 둔 상태였다.

하지만 적들의 신경이 이곳에 쏠려 있으니 당분간은 안전하게 털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지셀이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자자, 이제 당분간 편히 쉬자고. 식량 없어도 괜찮잖아? 다들 배고파도 버틸 수 있지?"

해맑게 말하는 지셀의 모습에 기사들의 표정이 우중충해졌다.

370화 다들 버틸 수 있지? (3)

성밖에 진을 치고 있던 군대의 총사령관, 하워드는 닫히는 성문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놈들, 드디어 걸렸구나."

상대가 방심하도록 펜리스 백작이 다른 곳을 칠 때도 일부러 건들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게 하려고 위협을 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오직 군대를 모은 채 펜리스 백작이 이곳으로 오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후작가 가신들이 세운 작전대로, 저놈들은 겁도 없이 여기까지 와 성을 점령했다.

"그나저나 대단하긴 하군. 고작 400여 명 정도라고 들었는데 3천이 지키는 성을 점령하다니."

혹시나 데이커군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 기사도 없는 데이커군이 그들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멍청한 놈들치고는 무력이 대단했다. 섣불리 붙으면 병사 1만 명으로도 위험할 거 같았다.

물론 1만 명 중에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 데이커군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의 무위가 문제였다.

"확실히 이 정도면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소문이 맞는 거 같아. 최상급 기사 수준이다."

자칫 잘못하면 백작을 잡더라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볼 수 있다. 하워드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1만의 병력을 가지고도 겨우 400명밖에 안 되는 자들에게 큰 피해를 보면 지휘관으로서 대망신이다.

아무리 펜리스 백작이 뛰어나다 해도 변명거리는 못 되었다. 그가 왕국에서 초인으로 인정받기에는 아직 명성이 부족했다.

"일주일 정도 굶기려 했는데 그걸로는 불안하군. 최소 한 달은 포위 상태를 유지하라."

그는 제법 신중한 지휘관이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이기기 위해 더 시간을 끌기로 했다.

아무리 마스터에 근접한 인간이라도 한 달이나 굶으면 다소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스터쯤 되면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겠지만,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수하들은 틀림없이 힘이 빠져 싸우지 못할 것이다.

조금 더 고민하던 하워드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주변 영지에서 투석기를 더 징발해 와라."

이미 투석기가 있긴 하지만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 펜리스 백작 일행을 끌어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제대로 두들길 생각이었다.

아니면 그들이 성에서 튀어나올 때 집중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

그는 힘이 빠진 맹수를 잡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확실히 후작가에서 인정받은 지휘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뒤 한동안 양측은 전투 하나 없이 대치 상태만 이어 갔다.

일 주가 지나고, 이 주가 지나고, 삼 주째 지날 즈음에 하워드는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아무 반응이 없다니, 겁을 먹은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성을 뒤져서 식량을 확보하려 하겠지."

상대는 도망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오면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이 전부 몰릴 것을 알 테니까.

혹시나 몰래 빠져날까 봐 주변 경계도 확실히 서는 중이었다.

"펜리스 백작이 홀로 도망갈 수도 있다. 철저하게 주변을 감시하고 모든 병사에게 그놈의 얼굴을 숙지시켜라."

하워드는 정말 꼼꼼하게 포위 상태를 유지하며 병사들의 긴장감을 높였다.

한 달째가 됐을 때,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성을 바라보며 하워드는 드디어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한 놈들, 싸울 거면 첫날에 나왔어야지. 지금쯤 쥐새끼들이나 잡아먹고 있겠군."

이 정도로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식량을 찾다가 다들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펜리스 백작이 아무리 강해도 홀로 나올 엄두는 내지 못할 게 뻔했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하워드는 전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투석기가 움직이고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북부의 신성이자 대영주인 펜리스 백작이 이곳에서 허무하게 쓰러지는구나."

하워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전투를 통해 자신의 명성이 왕국에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펜리스 백작이 북부에서 명성을 날렸다지만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촌구석인 북부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한 서부에 오니 한계를 보이지 않았는가.

그냥 무식하게 싸울 줄이나 아는 놈들이니 이런 고차원적인 전략을 알아챌 리도 없었다.

"전군, 이제 성을 공격.... 음?"

하워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깃발을 휘날리는 새로운 병력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명령을 멈추고 기다렸다. 곧 기사 하나가 빠르게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테넌트 님의 명령을 받고 지원을 왔습니다."

"지원? 몇 명이나?"

"1만입니다."

과연 대충 훑어만 봐도 이곳에 있는 군대 못지않게 많아 보였다. 왜 갑자기 지원을 보냈나 싶어 하워드가 물었다.

"이미 성에서 한 달이나 굶은 놈들이다. 병력도 400명밖에 없는데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정보?"

기사는 긴장한 표정으로 하워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이 이곳에 오기 전 7서클 마법사인 진홍의 마탑주를 홀로 죽였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하워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왕국에서 단 둘뿐인, 초인이라 불리는 7서클 마법사를 죽였다고?

마스터급에 이르렀다는 것과 확실한 마스터라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만약 7서클 마법사인 델무드와 그 제자들이 저 성에 있었다면, 자신은 감히 1만으로도 그들을 도모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초인의 위명은 대단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미친 하워드가 급히 성을 바라보았다.

"왜 첫날에 안 나온 거지?"

만약에 나와서 싸웠다면 자신들이 질 수도 있었다. 예측하기로는 상대 병력에 기사만 50명이 넘는 것이 확실했으니까.

나머지 병사들도 최정예 수준은 될 거라고 판단되었다.

그들이 한 사람당 10명의 병사만 죽여도 무려 4천을 상대할 수 있다. 그리고 펜리스 백작이 정말 마스터라면 홀로 몇천의 병사도 죽일 수 있을 터.

'굶기 전에 그렇게 싸우는 게 최선이었을 텐데....'

왜 첫날에 나오지 않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군대를 끌고 온 기사가 생각에 빠진 하워드에게 물었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와서 다행입니다. 지금 치실 거면 바로 전투 준비를 명하겠습니다."

잠시 고민을 한 하워드가 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정말 7서클 마법사를 홀로 이길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직 부족하다. 며칠 더 굶기겠다."

이미 한 달을 굶긴 이상 400명은 그저 보너스에 불과하니 한 명과 2만 명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마스터라도 이 정도 인원으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가 얼마나 나오는지는 다른 얘기였다. 재수 없으면 2만 명 중 절반 가까이 죽을 수도 있었다.

신중한 그는 성안에 가둔 쥐새끼들을 더 굶기기로 했다.

* * *

"이야, 확실히 바보들은 아니야."

성 밖을 살펴보던 지셀이 배로 늘어난 후작가의 군세를 보고 혀를 찼다.

그 사이에 1만이나 되는 병력을 더 보내다니. 역시 서부 최강의 대영주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

데스몬드 백작이 봉신들의 군대까지 모두 끌어모아 만든 게 3만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였는데 이 동네에서는 그냥 1만씩 훅훅 늘어난다.

확실히 척박한 북부와 다르게 돈도 많고 인구도 넘치니 병력을 충원하는 게 수월하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힘이 여타 왕국과 맞먹는 수준이라는 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다.

길리언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2만이면 무사히 이기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이것도 최대한 돌려 말한 거였다. 1만이면 마스터에 이른 지셀이 있으니 어찌어찌 힘들어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2만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기더라도 지셀 혼자 겨우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이쪽이 먼저 지쳐서 전멸할 수도 있었다.

싸우는 동안 힘과 체력이 전혀 소모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사람인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쪽도 사람이니까 계속 머리를 굴리면서 이기려고 하겠지. 군대가 더 늘어난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얘기를 들은 모양이군."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내가 델무드를 죽였다는 정보 말이야. 아마 듣자마자 부랴부랴 군대를 더 보냈을 거야. 그러니 지금 도착할 수 있었겠지."

"그렇군요. 1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겁니다."

길리언은 지셀이 델무드와 싸우는 걸 직접 봤다.

이제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졌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강해질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셀은 확실히 초인이라 불리는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 왕국에 그 정도 수준에 오른 이는 지셀을 포함해서 단 4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로드리크 후작은 어떻게든 이번 전투에서 지셀을 잡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추가로 군대를 더 모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모이기 전에 쳐야 합니다."

"그래, 1만 정도만 더 있으면 확실하게 저쪽이 승리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도 지금 나가서 좋을 건 없어. 2만도 우습게 볼 수 있는 수가 아니니까."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걱정 어린 길리언의 물음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우리도 아군을 불러야지."

"아군...이요?"

길리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지셀은 처음부터 약탈할 생각으로 기사들만 데리고 와서 이곳저곳 들쑤시는 중이었다.

당연히 보급로조차도 없다. 북부에서 지원을 나오기에는 이미 늦었다.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답했다.

"가까운 곳에 우리 용병들 대기하고 있잖아?"

"아!"

용병들이 모여서 주변 영지의 재화들을 옮기고 있었다. 지금은 이들을 제지할 군대도 없는 상황이었다.

동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도미닉도 현재 드레이크 용병단을 이끌고 서부로 다시 와 있었다.

이 지역을 가장 잘 아는 건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부와 동부에서 영입한 용병 중 다수가 드레이크 용병단을 따라 서부에 와 있었다.

"아마 지금쯤 더 늘어났을 거야. 갈수록 옮겨야 하는 재화가 많아질 테니, 의뢰가 마무리된 자들은 계속 합류하라고 했으니까. 아마... 최소 3천에서 4천은 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현재 펜리스 용병단은 무려 1만에 가까운 수를 자랑한다. 그동안 꾸준하게 각 지역의 용병들을 영입한 결과였다.

처음 약탈을 시작할 때는 500여 명 정도만 움직였지만 터는 영지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지원을 더 요청했다.

만약 그 용병들이 이곳에 온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후작가 병력의 뒤를 쳐도 좋고, 적들의 전력만 분산시킬 수 있게 방어진만 취해 줘도 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온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런데 다들 흩어져 있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오게 하려면 한곳에 모아야 할 텐데,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이번에 공격한 영지들은 서부에서도 작은 축에 들지만, 한 영지를 전부 털어먹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용병들은 수백 명씩 나뉘어 열심히 재화를 옮기고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로 통합해서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포위가 생각보다 촘촘했다. 누구 하나만 나가도 저 대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이 왔을 테니 그쪽에 연락해서 모으라고 하면 돼.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모아서 올 거야."

"도대체 어떻게...."

지셀은 더 말하지 않고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스르르륵....

갑자기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이더니 한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길리언과 구경하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나로 뭉쳐진 검은 연기는 이내 까마귀와 같은 모양을 갖추었다.

"크크큭.... 주인, 역시 내 힘을 빌리려는 건가?"

까마귀가 말을 하자 구경하던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지셀이 이제 마법 같은 걸 쓰는 건 알았지만 저런 생명체까지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평소 과묵하던 길리언도 놀라서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 영주님! 그게 무엇입니까?"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정령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저, 정령이요? 영주님이 정령도 사용할 수 있으시다는 말입니까?"

"어... 그냥 마법이랑 비슷한 거야."

정체도 알 수 없는 걸 몸에 품고 있다고 말하기는 좀 뭐했다. 아렐은 그 과정을 전부 지켜봤지만 이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조금씩 보여 주면서 차근차근 이해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충 둘러댔는데 오히려 까마귀가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다크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 볼 때마다 경배하도록 해라."

그 말에 카오르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말했다.

"뭐야? 이 클포이처럼 건방진 놈은?"

클포이는 클로드와 알포이의 합성어다. 영지에서 건방진 놈을 부를 때 쓰는 혐오 표현으로 자리를 잡았다. 카오르가 무심코 그 말을 내뱉을 정도로 까마귀는 건방져 보였다.

물론 다크는 지셀의 몸에 살게 된 뒤로 다른 이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내 저주를 받아서 영혼조차 파멸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라. 네놈이 카오르지? 난 이미 널 알고 있었다."

지셀의 의식 속에 살고 기억까지 훔쳐봤으니 당연히 다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고 있다는 말에 카오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날 알고 있다고? 어떻게?"

"넌 유명하니까."

"내가 유명하다고?"

카오르가 은근히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유명하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자 다크가 똑같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넌 유명한 병신이야."

"이 새끼가!"

카오르가 바로 검을 날리려 했지만 지셀의 제지로 막혔다.

다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어때? 난 주인이 보호해 주는 불멸의 존재로서... 케에에엑!"

지셀이 손바닥을 꽉 쥐자 다크는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자신을 짓누르는 거 같았다.

"주인! 죄송하다!"

다크가 바로 반성의 사과를 올렸다. 오랜만에 나오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까불었다.

지셀이 혀를 차고 말했다.

"지금 장난칠 시간 아니다. 도미닉한테 가서 용병들을 모아 당장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 확실히 전할 수 있겠지?"

"그, 그래. 그런데 그놈이 내 말을 믿을까? 웬 미친 까마귀 새끼야! 이럴 수도 있잖아? 아니, 말하는 까마귀라 신기해하려나?"

"내가 봤던 추종자 물품들을 얘기해. 알아서 달려올 거야."

"좋아, 그러면 금방 갔다 올게. 다들 기다리고 있으라고."

작은 까마귀지만 마나는 지셀에게 충분히 받았다. 다크는 바로 인근 영지에 있는 도미닉에게 소식을 전하러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하워드는 드디어 공격할 결심을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군."

2만의 군대가 빽빽하게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정도 굶었으면 펜리스 백작 외에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자신들은 충분히 잘 먹고 휴식도 취했다. 숫자도 훨씬 더 많다. 덕분에 사기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전군, 준비하라."

하워드가 공격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끼이이익....

성문이 먼저 열리기 시작했다.

371화 조만간 다시 보자고. (1)

열린 성문으로 한 사람이 검은 말을 탄 채 창을 늘어뜨리고 나왔다.

그의 뒤로 400명의 인물이 따라 나왔다. 그들은 등에 모두 나무 상자를 하나씩 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워드가 비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버티지 못하고 나왔구나. 이 정도만 해도 오래 버틴 거지. 잡아먹을 수 있는 건 다 잡아먹은...."

하워드는 말을 하다가 곧 이상함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아직 말들이 남았다고?"

식량이 없는 요새에 들어가 있는 적들을 무려 두 달 가까이 포위한 뒤였다. 당연히 말들도 진작 잡아먹었어야 했다.

아무리 아껴 먹는다 해도 4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먹어야 하니 보름 정도면 말도 동이 났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을 타고 있다. 말을 안 먹고 도대체 무엇을 먹으면서 버텼다는 말인가?

"뭐지? 왜 다들 멀쩡해 보이는 거지?"

풍기는 기세와 분위기가 한참 굶은 사람들 같지 않았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적들의 외양 정도는 하워드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말들도 상태가 좋았다. 다소 마른 듯 보이긴 하지만 연신 투레질을 하는 게 아직도 힘이 넘쳐 보였다.

하워드가 본 대로 펜리스의 기사들은 별로 지치지 않았다.

신경이 무척이나 날카로워졌을 뿐이었다.

"아... 그 망할 가루만 먹느라 근손실이 왔어."

살이 좀 빠져 다시 날씬해진 고든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는 루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저 새끼들한테 풀자고. 아무튼 나 기분 안 좋아졌어."

이미 클로드와 지셀이 내기할 때 전투 식량을 실컷 먹어 봤던 고든과 루카스가 투덜거렸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두 달 동안 지셀이 만든 전투 식량을 먹으면서 버텼다. 각자 가루 몇 통씩은 항상 챙겨 다녔으니 이 정도 버티는 건 문제가 없었다.

단지 그 시간이 너무나 지겹고 짜증이 났을 뿐.

힘이 딱히 떨어지진 않았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중독된 것처럼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셀이 그런 기사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오늘 저놈들 밀어 버리고 쟤들이 가져온 식량 뺏어서 배불리 먹자고."

그 말에 기사들이 입맛을 다셨다. 그간 성들을 털면서 맛있는 걸 참 많이 먹었는데 그때 생각이 난 것이다.

아무리 작은 영지라도 돈 많은 서부의 영지다. 저 정도 인원을 먹일 식량이라면 고기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지셀이 천천히 말을 몰고 나가며 말했다.

"자, 저쪽이 아직 정신 못 차렸을 때 얼른 시작하자. 내가 신호하면 돌격해라."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우렁차게 외치며 나무 상자를 모두 바닥에 집어 던졌다.

상자가 부서지며 창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구오오오....

지셀이 그 사이로 천천히 말을 몰고 나가자 창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흑왕이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어느새 창들은 수백 개가 떠올라 마치 군대처럼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하워드를 비롯한 로드리크군은 그 모습에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저건!"

"창이 날아서 따라오잖아!"

"진짜 마법사였던 거야?"

창을 움직이는 주체가 펜리스 백작이란 건 정황상 알 수 있다. 펜리스 백작을 죽이기 전에는 저 창들을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스터라고 소문이 난 자. 쉽게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워드는 다가오는 지셀을 보며 크게 외쳤다.

"겁먹지 마라! 아무리 마스터라도 두 달 가까이 굶었으니 힘이 빠졌을 거다! 진형을 갖추고 상대하라!"

전열의 보병들이 창을 내밀며 자세를 잡았다. 양옆의 기마병들도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게 천천히 말을 움직였다.

그리고 궁병들이 지셀이 다가오는 방향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1 대 2만의 상황.

왕국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광경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은 긴장을 놓지 못했다.

"쏴라!"

파아아아앗!

거리를 가늠하던 지휘관들이 외치자 수천의 화살 비가 지셀을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지셀이 고삐를 한번 흔들자.

두두두두두두두!

흑왕이 더 빠르게 속도를 내며 화살이 떨어지는 공간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그 모습을 본 하워드가 굳은 표정으로 외쳤다.

"막아라!"

"와아아아아!"

전열의 보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마주 달려 나갔다. 양옆의 기마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지셀의 머리 위에서 뒤따르던 창들이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파파파파파팍!

"으아아아악!"

수백 개의 창은 다가오는 병사들을 그대로 뚫으며 지나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차, 창이 움직인다!"

마치 유령처럼 창이 스스로 움직이며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셀의 마나가 많아질수록 움직일 수 있는 창들은 더 많아졌고 그 유지 시간도 길어졌다.

지금 지셀은 창병 수백 명을 데리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도 마나가 허락하는 한 전혀 상처 입지 않는 불멸의 병사들을 말이다.

파악! 파악! 파악!

"으아악! 이거 어떻게 좀 해 봐!"

창과 맞서 싸우는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반격하려 해도 공격할 대상이 없기에 겨우 막아 내거나 피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이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은 창들을 쳐내거나 부쉈지만 대부분 병사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전열이 혼란에 빠진 사이.

흑왕이 그들의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날뛰어 보자."

히이이이잉!

지셀이 붉은 눈을 빛내며 웃자 흑왕이 길게 화답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뛰어오른 흑왕이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병사들 사이로 뛰어든 흑왕 위에서 지셀이 사방으로 창을 휘둘렀다.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이 달아났다.

퍼억! 퍼억! 퍼퍼퍼퍼퍽!

지셀의 창이 갈수록 빨라졌다. 병사들은 그걸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셀에게 다가오는 병사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다들 뒤로 피하기에 바빴다.

숫자만 많을 뿐, 실전 경험도 없고 훈련도 나태하게 받은 로드리크군은 그저 무기를 든 민간인과 다를 게 없었다.

하워드는 지셀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분명, 분명 오래 굶었을 텐데...."

그리 오래 굶었음에도 저런 경이로운 실력을 보이다니,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초인의 힘이란 말인가?

사실 펜리스 기사들이 굶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하워드로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황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피하지 마라! 피할수록 더 피해가 커진다! 기사들은 어서 창부터 치워 버려라!"

병사들은 저 날아다니는 창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단순한 찌르기만 반복하는 창들이지만 일반 병사들로서는 유령과 싸우는 느낌일 것이다.

하워드의 외침에 따라 기사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창들을 우선 공격했다.

병사들도 이를 악물고 다시 지셀을 포위했지만, 모이기가 무섭게 죽어 나갔다.

콰앙! 콰아앙!

검붉은 마나를 머금은 창에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때로는 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목이 베여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마스터라는 이름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괴, 괴물이다!"

"도무지 다가갈 수가 없어!"

"기사들이 와야 해!"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주춤댔다. 눈을 붉게 빛내며 아군의 목을 날리고 있는 저자가 너무나 무서웠다.

몇몇 병사들이 바짝 엎드려 말이라도 쓰러뜨리려 했지만 그것조차 통하지 않았다.

퍼억! 퍼억!

"으어억!"

히이이잉!

말도 보통 말이 아니었다. 미친 것처럼 날뛰니 도무지 제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공격이 성공해 봤자 겨우 스치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는 저 단단한 근육에 제대로 상처를 입힐 수 없었다.

오히려 말에게 가까이 다가간 병사들이 가장 먼저 죽어 나갔다.

"이, 이게 북부 최강... 펜리스 백작...."

누군가가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공포는 전염이 되는 법이다. 기사들이 수백 개의 창에 붙잡혀 있는 동안 병사들은 지셀에게 완전히 압도당해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워드는 그 모습을 보고 머리를 쥐어 잡으며 외쳤다.

"쳐라! 이 멍청이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서부 최강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느냐!"

단 한 사람 때문에 2만의 병사가 압도당해 물러나다니.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지셀과 가까이 있던 병사들이 다급하게 물러나자 뒤에 있던 병사들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계속 덤벼라! 계속 덤벼서 힘을 빼면 이길 수 있단 말이다!"

마스터라고 무적이 아니다. 이 정도 인원이 전부 다 덤벼서 싸운다면 지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덤벼들며 힘을 빼야 한다. 하지만 병사들에게는 그럴만한 각오와 의지가 없었다.

애초에 대부분이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사명감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앞에서 지휘하고 사기를 북돋아 줄 인물도 없었다.

"으으으.... 중보병 위주로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차라리 중보병들을 이용해 방패로 에워싸고 천천히 힘을 뺐어야 했다.

중보병들이야말로 강한 적을 상대하는 전투에 적합하다. 그들은 병종 특성상 막는 것에 특화돼 있고, 꾸준히 훈련을 받아 정신력도 일반 보병들에 비해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급하게 군대를 꾸려 오느라 제대로 된 중보병들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

"기사들은 전원 펜리스 백작을 쳐라!"

하워드가 이를 갈며 외쳤다. 다행히 기사들은 창 대부분을 반으로 갈라 떨군 뒤였다. 그들이 다급하게 지셀을 향해 달려갔다.

부웅!

기사들이 다가오자 지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조금 더 힘을 써 볼까?"

적군이 2만 명이나 되다 보니 힘을 최대한 아껴 가면서 싸우고 있었다. 싸우다가 쓰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을 상대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셀이 웃으면서 마나를 조금 더 끌어 올렸다. 서부 기사들의 실력을 볼 참이었다.

카가강!

"오호, 제법?"

몇몇은 바로 목이 달아났지만 몇 명은 지셀의 창을 막아 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역시 잘 먹고 많은 지원을 받은 기사들은 실력이 남달랐다.

"돈 많은 게 정말 좋다니까."

누구는 전생의 경험까지 끌어와서 지옥 훈련을 시키는데 누구는 돈으로 쉽게 해결한다. 이렇게 불공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지셀은 그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차피 서부의 그 많은 돈들도 결국 자신이 차지하게 될 테니까.

퍼억! 퍼억! 퍼억!

"으억! 뭐야!"

지셀에게 달라붙었던 기사들은 깜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분명 반으로 갈라 떨어뜨렸던 창들의 잔해가 다시 떠올라 사방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지셀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착각한 것이었다.

창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냥 지셀이 마나로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반으로 자른다 한들 길이만 달라졌을 뿐, 마나만 충분하다면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창들의 잔해가 또 사방을 휩쓸었다. 살상력은 대폭 떨어졌지만 적들이 지셀에게 제대로 집중할 수 없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퍼억! 퍼억! 퍼억!

지셀은 이런 식으로 주변을 난전으로 유도했다. 그렇게 해야 전투의 흐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워드는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꽉 물었다.

"정말 괴물이구나."

그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인물은 처음 보았다. 마스터가 대단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 왔지만 직접 보니 몸놀림도, 힘도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저 이상한 기술 때문에 병사도 기사도 제대로 집중을 못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인군단이 아닌가."

저런 자를 막기 위해 기사가 있는 것이다. 강자는 강자로 상대해야 한다.

결국 이 군대의 지휘관이자 최고 실력자인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길을 열어라!"

하워드가 호위 기사들과 함께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지셀에게 다가간 그가 크게 외치며 창을 강하게 휘둘렀다.

"펜리스 백작!"

카아앙!

마나와 마나가 부딪치며 강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지셀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네가 총지휘관인가?"

"그렇다. 내가 네놈을...."

파악!

하워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그의 창을 단숨에 쳐 냈다. 그러고는 바로 그의 머리를 향해 자신의 창을 내려찍었다.

첫 공격으로 순간 자세가 흐트러진 하워드는 두 번째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다행히 양옆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잽싸게 할버드를 내밀었다. 두 자루의 할버드가 교차하며 지셀의 창을 막아 냈다.

파아아아악!

할버드는 바로 박살이 났지만 기사들은 잽싸게 말 안장에 달아 두었던 예비 창을 꺼냈다.

그 틈을 이용해 다른 기사들이 이번에는 흑왕의 다리를 노렸다.

"제법인데?"

지셀은 어쩔 수 없이 흑왕의 말고삐를 잡고 뒤로 물러났다.

하워드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질렀다.

"기사들은 말을 노려라! 호위 기사들은 나와 펜리스 백작을 친다!"

전장에 있는 모든 기사가 지셀과 흑왕에게 달려들었다.

흑왕이 아무리 뛰어난 말이라 해도 기사들의 협공을 막을 수는 없었다.

빙긋 웃은 지셀이 기사들의 공격을 쳐 내며 조금씩 물러났다. 병사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하기에 바빴다.

물러나는 와중에 지셀이 흑왕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콩이야, 너도 나중에 마나 연공법 같은 것 좀 익혀야겠다."

푸르륵.

흑왕은 지셀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못 알아듣고 콧김만 내뿜었다. 전장에서 뛰면서 흥분한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지셀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쳐라!"

천둥 같은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372화 조만간 다시 보자고. (2)

로드리크군은 지셀의 기세에 눌려 성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펜리스군을 잊고 있었다.

이미 로브를 벗어 던진 그들이 말을 박차며 창을 들어 올렸다.

두두두두두두!

지셀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하워드는 그제야 그들을 보고 황급히 외쳤다.

"기병 돌격이다! 병사들이 막아라!"

400명의 기병이 진형을 갖춰 돌격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하워드도 그걸 알기에 다급하게 외친 것이다.

지셀과 기사들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포위만 하고 있던 병사들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지셀의 공격 때문에 대열이 망가진 지 오래였다. 창의 잔해들도 여전히 주변을 돌고 있어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지잉―!

펜리스 기사들의 갑옷에서 빛이 나며 그들이 든 창에 푸른 마나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로드리크군이 제대로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단번에 병사들이 갈려 나가며 길이 생겼다.

펜리스 기사들은 마나를 전혀 아끼지 않았다.

상대의 수가 많지 않았다면 힘을 분배하며 장기전을 노렸을 테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수의 적과 싸우려면 초반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죽여 놔야 했다.

드드드드드드!

적진을 절반이나 파고들어서야 돌격이 멈췄다. 그 즉시 펜리스 기사들은 원형을 이루어 자신들을 포위한 병사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로드리크군의 병사들도 이를 악물고 공격을 시도했다.

카앙! 카앙! 카앙!

지셀과 싸울 때와는 달랐다. 기사들도 분명 강하긴 하지만 갑옷에 무기가 닿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공격이 통한다!"

"빨리 모여! 찔러라!"

"포위해! 더 촘촘하게 가둬라!"

지휘관들이 소리칠수록 병사들이 더 몰려들었다.

펜리스 기사들도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병사를 죽였다. 하지만 빈자리가 생기기 무섭게 병사들이 자리를 채웠다.

"와, 진짜 많긴 많네."

"요 며칠 재미있게 싸우나 했더니만."

"헛소리들 말고 빨리 집중하자고."

끝없이 몰려오는 병사들을 상대하며 펜리스 기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이대로 계속 싸우다가는 지쳐서 쓰러질 게 뻔했다.

점점 압박이 심해지자, 길리언이 등에 멘 거대한 전투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도끼질 한 번에 수 명의 병사가 단번에 쪼개졌다. 길리언 또한 마나를 아끼지 않고 최대한 넓은 범위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쳇, 질 수 없지."

카오르도 쌍검을 꺼낸 뒤 말에서 뛰어내렸다.

스각! 스각!

날카롭게 급소만 노리는 그의 공격에 병사들이 빠르게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길리언보다 속도가 느린 거 같았다.

'나도 큰 거 들고 올걸.'

카오르는 대검을 두고 온 걸 조금 후회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도 길리언과 카오르의 활약 덕분에 기사들에게 오는 공격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지셀에게 꾸준히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이다. 목숨을 건 실전은 수도 없이 치렀다.

그들의 실력은 이제 상급 기사에 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펜리스의 기사들이 적진 중앙에서 싸우는 모습을 확인한 지셀이 다시 흑왕의 말고삐를 강하게 잡았다.

"좋아, 꽤 버틸 수 있겠네. 가자!"

콰아아앙!

지셀의 창에서 검붉은 마나가 더욱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와 싸우고 있던 기사 한 명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옆에서 동료를 도우려고 무기를 휘둘렀지만 지셀은 쉽게 피하고 막았다.

하워드는 지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제대로 포위하란 말이다!"

기사들도 이를 악물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포위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펜리스 백작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 검은 말의 움직임이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들은 말고삐를 한 손으로 잡고 방향을 조절해야 한다. 그러니 조금씩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미친 말은 그렇지 않았다. 주인이 발로 배만 눌러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아는 것만 같았다.

콰앙! 콰아앙!

지셀은 흑왕과 함께 전장을 종횡무진 움직였다. 기사들의 공격을 피하고 막으며 주변에 방해가 되는 병사들까지 날려 버렸다.

피잉! 피잉! 피잉!

로드리크의 기사들은 지셀을 쫓으면서도 중간중간 날아오는 창대의 잔해들과도 싸워야만 했다.

지셀은 그런 식으로 상대의 목을 차근차근 베어 나갔다.

그 뒤를 쫓던 하워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이 개자식아! 정정당당하게 붙자! 들어오라는 말이다! 네놈이 그러고도 북부제일검이라 할 수 있느냐!"

지셀은 그들이 방향을 돌리느라 느려질 때마다 바로 공격해 왔다. 하워드가 그 틈을 타 잡으려고 쫓아가면 그는 언제 공격했냐는 듯 도망쳤다.

한참을 쫓다가 겨우 잡았다 싶을 때마다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아와 공격 타이밍을 끊었다.

너무나 치사한 공격에 정말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전쟁에 정정당당이 어디 있어?"

이죽거린 지셀이 미처 방향을 제대로 틀지 못한 기사의 목을 다시 날렸다.

지셀을 포위하려고 다가오던 병사들도 이제 그가 움직이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단 한 사람에게 이 많은 병사가 유린당하고 있었다. 하워드는 갈수록 마음이 다급해졌다.

"더 몰아붙이란 말이다!"

자신과 기사들이 전부 펜리스 백작에게 붙어있었다. 그 덕에 병사들의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를 뺀 나머지 펜리스군과 싸우는 병사들이었다.

"으아아악!"

"이놈들 왜 이렇게 강해!"

"물러서지 마라! 계속 붙으란 말이다!"

병사들의 비명과 지휘관들의 고함이 사방에서 울렸다.

돌격 한 번으로 수백을 죽인 펜리스 기사들이다. 지금도 뛰어난 실력으로 병사들을 마구 죽이고 있었다.

하워드는 펜리스 기사들과 펜리스 백작을 연신 번갈아 보았다.

"저, 저놈을 빨리 잡아야 하는데...."

병사들의 피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싸우다 보면 결국 적들도 지치겠지만 이쪽의 피해가 커지면 의미가 없다.

차라리 펜리스 백작을 무시하고 다른 자들부터 칠까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마스터를 내버려 두면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저쪽을 막는 의미가 없었다.

하워드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 건 펜리스 백작의 목이다. 희생이 좀 커지더라도 저 목만 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

"으아아아! 저놈을 빨리 죽여!"

하워드가 눈이 벌게져서는 고함을 질렀다.

현재 이곳에는 로드리크의 기사들이 무려 100명 가까이 와 있었다. 후작가에서 지원을 보내면서 주변 영지에서도 기사들을 박박 긁어 왔다.

그 정도로 마스터라는 이름의 무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아무리 마스터라도 혼자 이 많은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단 말이다! 계속 몰아붙여!"

하워드의 말은 정론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가 바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퍼억! 퍼억! 퍼억! 콰아앙!

지셀은 기사들의 공격을 그냥 받아주지 않았다. 영리하게 도망치다 기회가 나면 하나씩 죽이고 다시 물러난다. 물러나는 길을 병사가 막으면 단번에 쳐 죽이고 공간을 만들었다.

치이이익!

어느새 피범벅이 된 지셀의 몸에서 붉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괴물.'

하워드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뿐이었다.

저렇게 싸우면서도 펜리스 백작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싸움을 즐기는 듯했다.

'이, 이게 마스터의 위력이란 말인가....'

펜리스 백작은 혼자서 전장을 자신이 원하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로드리크군은 수적으로 훨씬 더 유리한데도 상대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승부를 내고 싶어도 제대로 상대해 주지를 않았다.

한 사람씩 죽어 갈 때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모두의 마음속에 공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왜 마스터는 마스터로 막아야 하는지 알겠구나.'

마스터를 잡아 둘 실력자가 필요하다. 그래야 나머지 군대를 전략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하워드의 착각이었다. 만약 이 군대가 데스몬드 백작의 군대였다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셀은 아직 마스터급의 힘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콰아앙!

"으아아악!"

전장에는 로드리크군의 비명만이 가득 찼다. 펜리스의 기사들은 묵묵하게 적들을 죽여 넘길 뿐이었다.

물론 그들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슬슬 힘에 부치는 중이었다. 상대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크륵."

몇몇 기사는 목 뒤에서 넘어오는 쓴물과 피를 억지로 삼켰다.

처음부터 모든 마나를 개방해서 싸우니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순 있었지만 그만큼 지속 시간이 짧아졌다.

'아직인가?'

펜리스 기사들은 기다리는 소식이 오지 않아 초조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펜리스 기사들의 속사정을 모르는 하워드는 부담감에 결단을 내렸다.

"모두 퍼져라! 공간을 만들어라! 기사들은 내 옆으로 와 대열을 갖춰라!"

촤아아악!

가뜩이나 지셀과 싸우기 싫었던 병사들이 잘됐다는 듯 거리를 더 크게 벌렸다.

로드리크의 기사들 또한 하워드 옆으로 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가라! 너희들이 포위해서 잡아라!"

짧은 시간 동안 지셀이 죽인 기사가 무려 스무 명이 넘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기사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도 이제 보통 방법으로는 절대 상대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였다.

두두두두두!

로드리크 기사들이 마나를 힘껏 내뿜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어떻게든 제대로 포위해서 잡을 생각이었다.

지셀도 웃으면서 창을 돌리며 마주 나갔다. 이제 조금 더 힘을 써야 할 시간이다.

콰아앙!

첫 번째 격돌에서 두 명의 기사가 갑옷과 함께 몸이 통째로 갈리며 죽었다.

동시에 다른 기사들의 창이 지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카카카캉!

지셀은 모든 공격을 쳐 냈다. 하지만 공격을 시도했던 기사들은 그대로 지셀을 지나쳐 갔고 그 뒤에 따라오던 기사들이 공격을 이었다.

카카카캉!

지셀이 다시 공격을 막아 냈다. 그는 순간의 틈을 이용해 마지막 기사의 목을 잘라 냈다. 그사이 뒤따라온 다른 기사들이 또다시 창을 내질렀다.

카카카캉!

이들은 이런 식으로 지셀을 지나치며 공격을 시도했다.

기마술이 지셀보다 현저하게 떨어지니 말을 움직이며 싸우기보다는 가장 기본적인 공격 방식을 취한 것이다.

"제법인데?"

지셀이 이번에도 웃었다. 역시 나태한 군대라도 기사들은 기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주변을 돌며 포위함과 동시에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강한 적을 다수로 상대할 때 쓰는 전법이었다.

카앙! 카앙! 카앙!

지셀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쉴 새 없이 창을 휘두르며 공격을 막고 하나씩 죽여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하워드가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그래! 계속 그렇게 해라! 결국 지쳐서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스터도 사람이다!"

급히 차출해 왔지만 역시 기사는 기사였다. 기사들의 합이 오늘따라 더 잘 맞는 거 같았다.

이런 초인을 상대할 때 병사들은 힘을 빼는 역할 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진작 뺐어야 했다.

그렇게 로드리크의 기사들이 지셀의 주변을 빙빙 돌며 공격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하워드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펜리스 백작과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뭐, 뭐야! 저 군대는!"

펜리스의 깃발을 든 군대가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페, 펜리스군은 소수의 약탈군만 왔을 텐데...."

얼핏 봐도 수천은 되어 보였다. 저 정도 숫자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다.

하워드는 펜리스 지원군의 복장을 자세히 살폈다. 똑같이 말을 타긴 했지만 다들 복장도 제각각이고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정규군이 절대 아니었다.

"설마...."

용병 수백 명이 곳곳의 영지에서 재화를 옮기기 위해 펜리스 백작을 따라다닌다는 정보는 진작에 들었다. 하지만 펜리스 백작을 잡는 것이 우선이라 용병들에게는 신경을 안 썼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저 용병들이 움직였을 경로에는 지금 그들을 막을 병력이 하나도 없었다.

"요, 용병들이 다 모인 건가? 저렇게 많이 왔었다고? 어떻게 여기까지...."

그간 지셀에게 털린 영지를 버려 뒀으니 정보가 제대로 수집되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로드리크 후작가와 서부 영주들의 오만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지만 하워드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용병들을 이끄는 도미닉이 크게 소리쳤다.

"가자! 단장님을 구해라!"

"와아아아아!"

용병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말을 박찼다. 펜리스 용병단에 합류한 이들에게 지셀은 영주가 아니라 단장이었다.

용병들의 함성을 들은 펜리스 기사들이 웃었다.

"드디어 왔구나."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은 적을 상대하느라 점점 지쳐가는 중이었다.

흑왕과 함께 로드리크 기사들과 싸우던 지셀도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써 볼까?"

파직!

달려오던 기사의 공격을 막은 지셀의 눈이 번뜩 빛났다.

구오오오오!

그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이 실처럼 유형화되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망토처럼 지셀을 휘감은 마력은 곧 흑왕마저 감쌌다.

"뭐, 뭐야...."

본능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에 하워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주변을 장악한 기운 때문에 숨조차도 쉬기 힘든 거 같았다.

펜리스 백작과 말은 넘실거리는 검붉은 기운에 감싸여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오직 둘의 눈에서만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로드리크의 기사들도 순간 공격을 멈췄다.

하워드는 조금 전 했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저건 괴물 정도가 아니었다.

'악마....'

펜리스 백작은 전장에 나타난 악마 그 자체였다.

그 악마가 마치 죽음을 선고하듯이 모두에게 말했다.

"시작하지."

콰아아아앙!

373화 조만간 다시 보자고. (3)

로드리크군은 자신들이 포위된 걸 알고 당황했다.

"우, 우리가 포위됐다고?"

"막아라! 어서 막아!"

"대열을 제대로 갖추란 말이다!"

지휘관들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포위됐다는 공포에 휩싸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 쪽이 훨씬 더 수가 많은데도 자신들이 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고작 400명의 적을 잡지 못해 고생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포위까지 되었으니 사고가 마비될 만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용병들이 단숨에 로드리크군을 파고들었다. 기사들의 돌격만큼 파괴력이 강하진 않지만 기세와 사기는 그에 못지않았다.

도미닉은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우리 형제들의 복수를 할 시간이다!"

다른 지역에서 합류한 용병들은 몰라도, 드레이크 용병단에 소속된 자들의 마음은 도미닉의 마음과 별다를 게 없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도미닉은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빨리 로드리크군과 싸울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가족까지 죽이면서 자신들을 핍박했던 원한을 갚을 기회였다.

'영주님에게 그런 능력도 있을 줄이야.'

사실 도미닉과 용병들은 이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지셀이 시킨 대로 각자 맡은 영역에서 재화를 옮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 괴상한 까마귀가 나타나서 갑자기 말을 걸었다.

― 어이, 도미닉.

― 와씨! 깜짝이야! 뭐야! 이거 뭐야!

― 당장 용병들을 전부 소집해서 데이커 성으로 와라. 전투가 벌어질 거다. 내 주인 펜리스 백작의 명령이다.

― 까마귀가... 말을 해?

처음에는 깜짝 놀라서 검으로 베어 버릴 뻔했다. 까마귀도 깜짝 놀라며 외쳤다.

― 영주 대하듯이 예를 갖춰 나를 대하란 말이다! 이 무례한 자식!

― ...너 뭔데?

― 내 이름은 다크다. 그냥 주인이 보낸 정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잔말 말고 서부에 온 병력을 모두 모아서 데이커 성으로 와라. 지금 로드리크군이 2만이나 모여서 성을 포위하고 있다.

― 널... 어떻게 믿지?

영주가 현재 데이커 성을 공략하러 간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체불명인 생명체의 말을 믿기는 어려웠다.

까마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 네가 모은 X 같은 물건들을 여기서 공개적으로 읊어 볼까? 먼저 영주의 속....

― 워워워, 왜 그래!

자신의 애장품들을 공개적으로 밝히려고 하다니. 도미닉은 진심으로 까마귀를 벨 뻔했다.

드레이크 용병단의 측근들이야 단장의 기행을 이미 알고 있지만, 이곳에는 다른 지역의 용병들도 있었다.

도미닉은 카리스마와 거친 기세로 용병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절대 사생활이 공개되면 안 된다.

까마귀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비웃었다. 무척이나 시건방진 까마귀였다.

― 주인이 세운 작전을 얘기해 주겠다. 병력을 나눠서 삼면을 포위해라. 펜리스 기사들이 돌격하고 나면 난전에 빠질 거다. 그때 협공해라. 알겠나?

― 아, 알겠다.... 그러면 일단 재화들을 옮기는 건 미루고....

― 그래, 언제 적들이 공격을 시도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 그건 나중에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갈 테니까.

까마귀의 말을 아예 안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믿을 수도 없었다.

경험이 많은 도미닉은 용병들을 결집함과 동시에 빠르게 데이커 성 인근으로 정찰병을 보냈다.

― 사실입니다. 로드리크군이 데이커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 젠장! 빨리 움직여라!

반신반의했는데 까마귀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언제 공성을 시작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용병 짓을 하며 병력을 모으고 이동하는 데는 이골이 난 그다. 도미닉이 힘쓴 덕분에 용병들은 금세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용병들이 가까이 온 걸 다크가 확인하고 지셀에게 말해 주었기에 지셀도 안심하고 공격을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 잘했다, 다크. 이거 써 보니 생각보다 편하네.

지셀은 다크를 활용하여 전장의 상황과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적정 거리의 아군과 바로바로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다.

한 마디로 전장을 살펴보는 새로운 눈과 통신 수단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도미닉과 드레이크 용병단은 그간 로드리크 후작가에 당한 원한을 불태우면서 전투에 임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후작가의 힘을 깎아 낼 기회다!"

"몸을 사리지 마라! 먼저 간 친구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

로드리크군은 그런 용병들의 기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으아아악!"

로드리크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하나둘씩 허무하게 쓰러졌다.

공포에 휩싸이면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로드리크군은 적어도 자신들과 비슷한 수의 병력에 포위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라! 반격을 해!"

"우리가 수가 더 많다!"

"포위당했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몇몇 지휘관들이 외쳤지만 병사들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총지휘관인 하워드조차 지셀에게 묶여 있으니 로드리크군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워낙 수가 많다 보니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펜리스 쪽의 피해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셀이 자신의 힘을 전부 개방한 것이었다.

콰아아앙!

검붉은 기운에 둘러싸인 지셀이 창을 휘두르자 덤벼들던 기사들의 몸이 무기와 함께 박살 났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위력.

연달아 공격하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 말을 세울 정도였다.

"안 와? 그럼 내가 가지."

흑왕이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 나가자 기사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크헉!"

하지만 무기를 채 들기도 전에 지셀이 휘두른 창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화르르륵!

지셀의 주변으로 검붉은 기운의 창들이 수십 개나 만들어졌다. 그는 이제 마나를 아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파아앙!

마나의 창들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기사들은 그대로 몸이 뚫려 버렸다.

조금 떨어져 있던 기사들은 감히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했다. 몇몇 기사들이 창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아군을 한번 뚫고 와 힘이 빠진 것이라 가능했을 뿐이었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역시 내가 약한 게 아니야."

실전에서 이 기술을 처음 썼을 때는 델무드가 상대였다. 그는 수십 개의 창 정도는 손짓 한 번으로 막아 내었다.

솔직히 그것 때문에 이 기술이 별로 안 좋은 건 아닌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놈이 강한 거지, 일반 기사들에게는 얼마든지 통하는 기술이었다.

― 주인! 이건 마나가 너무 빨리 소모된다고! 또 기절한다!

다크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크로서는 시간만 들이면 결국 이길 텐데 지셀이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다크의 만류에도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

그의 창이 다시 사방을 갈랐다. 창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기사들은 몇 명씩 목이 달아났다.

"그 전에 끝내면 된다고."

콰아아앙!

지셀이 모든 힘을 폭발시켜 움직이니 로드리크의 기사들은 그를 전혀 막지 못했다.

파앙! 파앙! 파앙!

지셀의 뒤를 따라다니는 마나의 창들도 주변을 아예 헤집어 놨다.

몇몇 기사들이 이를 악물며 지셀에게 달라붙어 흑왕을 공격했다. 말이라도 죽여 지셀을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퍼어억!

"미친...."

흑왕을 공격한 기사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욕을 내뱉었다. 마치 둔탁한 솜을 때린 것처럼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당연히 기사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을 빼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 버렸다.

콰앙! 콰아앙!

지셀에게로 달려드는 기사들이 족족 죽어 나갔다. 하워드는 이번에도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이게 진짜 마스터의 힘...."

그전에도 경이로웠다. 백 명에 이르는 기사들을 홀로 상대하기에 그 정도가 마스터의 수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단단한 착각이었다. 지금 모인 기사들로는 안 된다. 더 높은 등급의 기사들이 모여도 겨우 막을 수 있을까 말까였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로드리크의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하워드는 붉은 눈의 악마가 자신에게 곧바로 달려오는 걸 보았다.

'마, 막아야 해....'

머리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급 기사나 되는 하워드가 다른 기사들보다 더 넋이 나가 있었다.

오히려 그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지셀이 오른 경지를 엿볼 수 있고, 그 무력을 보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만한 사람은 하워드뿐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래도 상급 기사답게 하워드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지셀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창을 던진 하워드 자신도 공격이 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공포에 사로잡힌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지셀이 나직하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는 공격은 절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없다."

"아...."

퍼어억!

하워드는 머리가 깨지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당연하고도 당연한 말이었다. 이미 전의를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내민 공격에 그 어떤 적이 당해 주겠는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공격을 했어야 했다.

이것은 의지의 차이였다.

그 차이 때문에 하워드는 실력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쓰러졌다.

쿠웅.

주변에 살아남은 기사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하, 하워드 님이 죽었다."

"저렇게 쉽게 상급 기사를...."

"막을 수 없어...."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는 지휘관의 생사 여부였다. 그리고 이곳에 온 로드리크군의 총지휘관이 방금 죽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전부 힘을 합쳐도 상대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간 지셀이 힘을 아끼며 싸웠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여전히 검붉은 연기에 둘러싸인 지셀이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적의 총사령관이 죽었다!"

"와아아아아아!"

그에 호응하듯 펜리스군 쪽에서 크나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일부러 적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더욱더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스윽.

지셀이 창날로 남은 기사들을 가리켰다. 로드리크의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과 함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도 같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야지?"

콰아앙!

지셀이 다시 앞으로 뛰어들며 가까이 있던 기사들의 몸을 갈라 버렸다.

"도망쳐!"

한 기사가 크게 외치고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기사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다른 기사들도 도망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기사님들이 도망간다!"

"우, 우리도 도망가자!"

"피해! 끝났어!"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던 로드리크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셀이 빠르게 전장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군대 주제에 수는 아직도 더 많았다. 다 죽여도 되겠지만 이쪽이 싸우다가 지칠 수도 있다. 그리고 후작가를 더 골치 아프게 할 방법은 많았다.

지셀은 다시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들은 살려 주겠다!"

전쟁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펜리스군도 지셀의 말을 따라 크게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자들은 살려 주겠다!"

같은 말이 몇 번이나 전장에 크게 울렸다. 로드리크의 병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소리를 들었다.

"으아아아!"

"도망가!"

"항복입니다! 항복!"

군대가 한번 무너지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의미가 없다. 로드리크군은 무기를 버리고 마치 개미 떼가 퍼지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들은 이제 후작령으로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병력이 넘쳐나는 서부에서 저들을 굳이 살려 둘 리가 없다.

이번에 징벌을 내려야 다음 전투에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울 테니까.

무려 1만이 넘는 피해를 본 로드리크군은 그렇게 와해되었다.

지셀은 사방으로 퍼지는 로드리크의 병사들을 보며 웃었다.

"화끈한 산적과 도적 떼가 되라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먹고 살려면 저들도 이제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차피 원래도 영주들에게 충성심도 없는 집단이었다.

"약한 영주들은 다 털리겠네."

후작가의 봉신 영주들도 그리 평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정책적으로 무척이나 적은 수의 병사들만 운용한다는 점이다.

아마 사방으로 흩어진 저 약탈자들을 막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셀은 힘들이지 않고 서부에 내분을 일으킨 셈이었다.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지셀이 창을 들고 크게 외쳤다.

"우리가 승리했다!"

짧고 담백한 말.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와아아아아아!"

"이겼다!"

"로드리크군도 별거 아니잖아!"

도미닉과 드레이크 용병단은 로드리크군에게 약간이나마 복수를 한 기쁨으로 누구보다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따라온 다른 지역의 용병들은 지셀의 무력에 크게 감탄했다.

용병들을 이끄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다. 하지만 부하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리더는 역시 강한 리더였다.

그리고 지셀은 용병들을 매료시킬 만한 강함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우리 단장 최고다!"

용병들이 모두 환호하며 지셀의 이름을 외쳤다. 이번 전투로 인해 그들은 지셀을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널리 퍼져 다른 용병들에게도 알려질 것이다.

지셀은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역시 실력을 증명하는 것만큼 용병들을 하나로 묶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조금씩 모두를 하나로 만들면 된다.

"자, 이제 전리품들을 수거하고 돌아가자! 이번에는 적당히 챙기자고!"

이곳에 죽은 병사들의 무기와 갑옷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아마 다 들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 아직 재화를 전부 옮기지 못한 영지들도 있었으니까.

이제 이 군대를 이끌고 빠르게 남은 것들을 챙겨 돌아가면 된다.

기사들과 용병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 지셀은 로드리크 후작가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로드리크 후작. 그때는 확실히 결판을 내 줄 테니까.'

로드리크 후작가와의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374화 없으니까 이제 만들어야지. (1)

"으아아아아!"

콰앙! 콰앙! 콰앙!

로드리크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의자를 마구 내리쳤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가신들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2만! 무려 2만의 군사를 보냈는데도! 그 애송이 새끼를 못 잡았다는 말이냐!"

가신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페,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에 이르렀다는 게 사실로 밝혀진 이상 더 수준 높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당장 저놈을 죽여라!"

"후, 후작님! 그게 아니라...."

촤악!

가신이 채 변명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기사 한 명이 그의 목을 베었다. 가신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대전이 더 큰 공포로 물들었다.

로드리크 후작이 잔인하기는 하지만 대영주다운 여유는 있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대전에서 대놓고 가신을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후우.... 후우...."

대전에는 로드리크 후작의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그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가신 하나를 죽이고도 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조금 안정이 된 로드리크 후작이 말했다.

"그래, 포위에는 성공했는데 약탈을 하던 용병들이 모두 모여서 뒤를 쳤다고?"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야 한다. 다른 가신이 애써 용기를 내서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펜리스 백작을 잡는 것을 우선으로 했기에 그쪽은 내버려두었습니다만, 그 바람에...."

"그런데 그 애송이 놈은 어떻게 연락해서 모두 모이게 한 거지? 전투에 맞춰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몰래 빠져나가 연락을 취한 자가 있는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로드리크 후작의 숨이 다시 거칠어졌다.

"포위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군대라니! 테넌트! 어떻게 된 일인가!"

테넌트도 할 말이 없었다. 총지휘관인 하워드는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로드리크 후작은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후작가 최고의 기사를 이런 일로 죽일 수는 없었다.

"도망간 병사들은?"

"처벌이 두려워 모두 도망간 상태입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 패를 결성한 병사들도 있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도망간 병사들도 있는 거 같습니다."

"으으...."

데이커 성에서의 전투 이후로 서부 각지에서 도적 떼가 창궐했다. 전부 패잔병들이 모여서 마을을 털고 다니는 것이었다.

적게는 백 명부터 시작해, 무려 천 명이나 모인 집단도 있었다. 1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흩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소규모 영지들이 그들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주들이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영지의 병력만으로는 도적 떼들을 막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끄으으으...."

후작가에서는 영주들이 힘을 기르지 못하도록 정책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병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후작가에서 대신 파병해 주는 조건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봉신을 지켜 주는 건 군주로서의 당연한 의무였다.

후작가는 펜리스군을 쫓기는커녕 토벌대부터 만들어 각 영지로 파견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

로드리크 후작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애송이한테 완전히 당했구나."

여러 곳의 영지가 초토화됐고 이제는 수습하기에 바쁘다.

전투 한번 진 것치고는 너무나도 대가가 컸다. 2만이나 되는 병사를 잃은 건 아무리 후작가라도 우습게 볼 수 없을 만큼 큰 피해였다.

전력이 약화된 것도 약화된 것이지만. 후작가의 명예가 떨어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북부의 애송이 새끼 때문에 내가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대영주로서 이런 굴욕은 처음 겪어 봤다. 친왕파마저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이다.

어쨌든 급선무는 내부를 안정시키고 봉신들을 달래는 것이었다. 후작가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흔들리지 않는다.

"테넌트, 토벌대를 꾸려 도적들부터 확실히 쓸어버려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군의 출정을 준비해라. 펜리스를 칠 것이다."

"...."

가신들은 반대하고 싶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반대하면 로드리크 후작의 분노를 정면으로 맞게 될 것이 뻔했다.

내전이 코앞이었다. 공작가와 연계해서 작전을 진행해야 했다. 로드리크 후작가의 임무는 서부 전선의 왕국군을 뚫고 빠르게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수도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도 하지만, 왕국군의 주력이 공작가를 막기 위해 남부에 펼쳐져 있어 서부 쪽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북부에 있는 펜리스와 싸운다면? 공작가가 짜 놓은 작전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가신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자 결국 테넌트가 나서서 말했다.

"저희가 먼저 움직이면 공작가가 짜 놓은 전략이 모두 망가질 겁니다. 북부로 진군하면 친왕파도 움직일 게 뻔합니다."

"그러면 그 애송이를 가만히 놔두자고?"

"먼저 카르데니아를 점령한 뒤에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출정 준비를 하되 원래의 전략대로...."

"늦어!"

로드리크 후작은 다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까지 왕국의 귀족들이 전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다! 그깟 북부의 애송이한테 2만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입니다. 곧 소문이 다 날 테니...."

"고작 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는데도 못 잡았다! 마스터라는 핑계로 넘어갈 거 같은가!"

"...."

그 말에는 테넌트로 할 말이 없었다. 마스터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2만이나 되는 병력으로 못 잡는 건 말이 안 된다.

용병들이 합류했다고 해도 양쪽 다 괴멸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 사실 그 용병들이 서부를 헤집게 놔둔 것도 문제였다.

로드리크 후작이 테넌트에게 말했다.

"우리 군이 수만 많지 나태하고 싸울 줄 모른다는 평이 있는 걸 모르는가?"

물론 그만큼 강력하기에 전쟁을 할 일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의 결과는 그 소문에 근거를 더해 줄 것이다.

후작가를 헐뜯고 싶어 하는 다른 지역의 귀족들은 소문을 더욱더 부풀릴 게 뻔했다.

서부의 대영주로서 자부심이 하늘만큼 높은 로드리크 후작이다. 그는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공작가에 연락해라. 군대를 두 개로 나누겠다. 하나는 수도로, 하나는 북부로 갈 테니 어서 빨리 계획을 시작하라고. 우리는 무조건 출정을 준비할 것이다."

테넌트는 눈을 감았다.

로드리크 후작가가 아무리 강대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브랜포드 후작과 왕국군이다. 절반의 병력으로 쉽게 뚫을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의 왕은 로드리크 후작이었다. 그가 하라면 해야 한다.

승리할 방법을 빠르게, 최선을 다해 찾아야 했다.

테넌트는 고개를 숙였다.

"공작가에 후작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좋다, 모든 영주들에게 총소집령을 내려라. 최대한 빨리 준비를 끝내도록."

"알겠습니다."

가신들도 입을 모아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을 지울 수는 없지만 승산은 있었다.

친왕파는 아직 후작가의 진정한 힘을 모른다. 병력을 절반으로 나눈다 해도 충분히 왕국군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한 로드리크 후작의 명에 의해 그렇게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다.

* * *

"와아아아!"

"영주님이 또 승리하셨다!"

"불패의 정복자!"

지셀이 영지로 돌아오자 영지민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환호를 내질렀다.

이미 전령을 통해 수많은 승리 소식을 영지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이제 영지민들은 지셀이 출정을 나갔다 오면 축제를 준비한다.

"역시 이번에도 이길 줄 알았어."

"당연하지. 우리 영주님이 북부 최강인데. 마스터래, 마스터."

"마스터가 뭔데?"

"최고로 사람을 잘 팬다는 별명 같은 거야. 사람 패는 데 마스터라는 뜻이지."

"아하, 그래서 항상 승리하는구나."

이렇듯 지셀은 영지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먹고 살기도 갈수록 편해지고 있고 데스몬드를 차지한 뒤에는 생필품이 부족한 문제도 점점 해결되어 가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온 영주는 언제나 엄청난 전리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과연 당당하게 영지로 돌아오는 행렬 끝에는 정말 수백 대의 수레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우와, 저게 다 전리품이라고?"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거 같은데."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영지민들이 기뻐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지셀은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영지민들에게 술과 고기 등을 아끼지 않고 나눠주었다.

그렇게 해서 영지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언제나 승리한다는 자신감을 준다.

그것은 지셀이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방식 중의 하나였다.

영지민들의 충성심이 높으면 생산력이 달라진다. 총동원령을 내릴 때는 이들 모두가 영지를 지키기 위한 훌륭한 병사가 될 것이다.

영지민들의 기대대로 지셀은 활짝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 모든 게 영지를 위해 힘을 쓰는 너희들 덕분이다! 조만간 술과 고기를 나눠주고 적절한 보상을 줄 테니 기대하도록!"

"와아아아아!"

"역시 돈 쓰는 건 우리 영주님이 최고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럴 때마다 클로드는 돈 없다고 난리를 쳤지만, 최근에는 조금 달라졌다.

클로드는 귀환 행렬을 보자마자 엄청난 양의 재화를 확인하고 몸을 배배 꼬며 좋아했다.

"우와왕! 계속 영지로 약탈품이 들어오긴 했는데 이번에는 엄청난데요?"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다 같이 확실하게 쓸어 왔거든."

"아니, 이렇게 다 쓸어 오는데 로드리크 후작가가 가만히 있었어요? 안 쫓아왔어요?"

"걔네 지금 바쁘다. 탈주병들 잡아야 하거든. 주변 병력이 다 털려서 말이야."

"으하하하! 역시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전후 사정을 들은 클로드가 배를 잡고 웃었다. 테넌트라는 놈이 전에 와서 시건방지게 굴더니 아주 쌤통이었다.

"이번에도 영지민들한테 술과 고기랑 필요한 것들을 좀 나눠 줘. 다들 더 힘내라고."

"끄응, 그렇게 하죠."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반대하며 난리를 치지는 않았다.

무려 일곱 개의 영지에서 털어온 재화다. 다들 작은 영지라고는 하지만 모아 놓으니 그 양이 적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수의 숲에서 얻은 자원들 덕분에 수입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거기에 페르디움의 식량 생산량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마수의 숲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제 식량은 넘쳐서 정말 버려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룬스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적염의 마탑에 계속 그 시세로 팔 겁니까?"

"그래,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줘."

"뭐, 아직 많이 남기는 했지만... 진홍의 마탑도 끝장이 났는데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이제 아낄 때가 아니야. 쓸 수 있는 건 전부 쓰고 베풀어야 할 때지."

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적들의 힘을 약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군의 힘을 키워 주는 것도 중요했다.

적염의 마탑은 마법 전력이 부족한 친왕파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많이 지원해서 그들을 키워야 한다.

지원해야 하는 건 친왕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펜리스는 식량으로 볼 수 있는 이득은 다 봤다.

친왕파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펜리스에 넘치는 자원을 그들에게 제공해 줄 생각이었다.

클로드도 지셀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껴서 똥 만들 필요는 없죠. 이제 우리가 친왕파를 키워 줄 차례군요."

"그렇지. 친왕파가 잘 버텨 줘야 우리가 움직이기 편해지거든. 공작가와 로드리크 후작이 가진 자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니까."

"그러면 그 부분도 빨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소에는 까불까불해도 필요한 일 하나는 야무지게 처리하는 클로드다. 그 부분은 알아서 잘 준비할 것이다.

"전쟁 준비도 잊지 말고."

"그거야 당연하죠."

로드리크 후작을 건드린 이상 후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계획이 꼬인 공작가도 결국 최대한 빨리 내전을 일으키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펜리스는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병사들을 날카롭게 다듬어야 했다.

돌아오자마자 영지의 현황을 파악한 지셀은 바로 갈바릭을 찾아갔다.

갈바릭과 드워프들은 언제나처럼 퀭한 눈으로 지셀을 맞이했다.

"으... 영주, 이제 왔구려."

"그래, 내가 말한 건 준비가 다 됐나?"

지셀은 서부로 약탈을 떠나기 전 갈바릭에게 새로운 제품을 만들라고 명해 둔 상태였다.

갈바릭이 퀭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지만 표정만큼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소. 이미 시제품은 완성되었고, 본격적으로 생산할 준비만 하면 되오."

"좋아,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빠르게 생산량을 더 올려 보자고,"

지셀이 만족스러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목표한 수량만 준비가 된다면, 이 신제품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375화 없으니까 이제 만들어야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