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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365

355화 드디어 왔군. (1)

마탑 교류회.

마탑 사이에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큰 행사였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여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실력을 선보이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무척이나 품위 있고 격조 높은' 행사다.

여러 학파의 마법사들이 모이는 만큼 서로 얻어가는 것도 많았다.

폐쇄적인 마법사들은 다른 분야에 관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흔치 않았다. 마법사들 특유의 고집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알려주기를 무척 꺼리고 남의 지식만 얻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선인들이 깊은 뜻으로 교류회를 시작했던 것이지만, 그 고집 때문에 교류회도 서서히 뜸해졌다.

특히 같은 학파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언제 어떤 놈이 치고 올라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학파인데 사이까지 나쁘다? 그러면 그들은 평생 볼 일이 없다.

적염의 마탑과 진홍의 마탑이 딱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 델무드는 굳이 사이 나쁜 학파를 불러다 교류회를 하자고 언급한 것이다.

장로인 글렌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들이... 그런 걸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게 해야지. 거절하면 그놈들이 하는 일을 계속 방해해서라도 말이야."

델무드가 교류회를 밀어붙이려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교류회 중에는 필연적으로 마탑 제자들이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물론 탑주들이나 장로들은 대결에 참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지면 마탑의 위상과 체면에 큰 피해를 보기 때문에 빠지는 게 관례다.

하지만 관례는 관례일 뿐, 규칙은 아니었다. 델무드는 그 점을 노려 대결에 직접 참여한 뒤 기회를 봐서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교류회를 열어라. 이대로 가다가는 내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가 밀릴 것이다."

마탑의 위상은 탑주의 서클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사업 역량과 세력 범위를 재는 기준은 조금 다르다.

적염의 마탑은 전통적인 강자답게 아티팩트나 포션 제작 기술도 더 뛰어나고, 제자들도 많았다.

5서클에 이른 장로들의 수도 진홍의 마탑보다 적염의 마탑이 더 많다.

"이제 자금력도 우리가 우위라 할 수 없어."

델무드가 7서클에 이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데스몬드 백작의 자금력으로 북부 룬스톤의 유통을 쥐어 잡았기에 지금껏 적염의 마탑을 밀어붙일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북부 최고의 부호인 펜리스 백작이 적염의 마탑을 밀어주고 있다. 이쪽도 공작가의 지원을 받고는 있지만 거리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 생각에 이르자 델무드는 다른 쪽이 괘씸해 이를 갈았다.

"도대체 레이폴드 백작은 무얼 하는 건가."

데스몬드 백작이 망했으니, 그를 대신해서 레이폴드의 영주가 된 아멜리아가 자신들을 지원해야 한다.

척박한 북부 영지라고는 하나 레이폴드는 대영지다. 자신들을 지원할 여력이 충분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레이폴드는 금화 하나조차 제대로 보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도 공작가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글렌도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멍청한 계집이 운 좋게 영주가 되니 영지를 수습하기도 바쁜 모양입니다. 대국을 볼 줄 모르니 그러는 게지요.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쯧쯧쯧."

"다른 연락도 없는가?"

"없습니다. 몇 번 만나 봤지만, 반란 때문에 사정이 안 좋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글렌은 아멜리아를 이미 몇 번이나 만나고 왔다. 데스몬드 백작을 대신해서 진홍의 마탑을 지원해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계속 지원을 미루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델무드 또한 속에서 화가 끓어올라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황이 전부 꼬여 자신들이 맡은 임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작가의 라울은 자신들에게 적염의 마탑을 빨리 정리하라고 재촉하기만 했다.

"펜리스 백작 때문에 되는 일이 없군."

아멜리아도 아니꼽지만 역시 가장 짜증 나는 건 펜리스 백작이었다. 데스몬드 백작이 놈에게 패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일이 다 망가졌다.

지원이 줄었다고 공작가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받은 게 너무 많았고, 자신이 7서클에 오른 것도 공작가 덕분이었으니까.

결국 한숨을 쉰 델무드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방법을 선택했다.

"교류회를 거절하면 적염의 마탑이 상대하는 모든 거래처와 판매처에 시비를 걸어라. 마법사 몇 명 정도는 죽어도 상관없다. 무조건 받아들이게 해."

그 말에 장로들은 모두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염의 마탑을 힘으로 치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펜리스 백작뿐만 아니라 그와 연결된 친왕파까지 자신들을 수상하게 볼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적염의 마탑을 치워 버려야 한다.

상황이 계속 꼬이면 힘으로 해결하기로 했으니, 적염의 마탑을 없앤 뒤의 일도 고민해야 했다.

"힘으로 적염의 마탑을 없애면 분명 친왕파에서 압박해 올 것이다. 내전 때까지 버틸 수 있게 아멜리아를 다시 만나 어떻게든 지원을 받아 내라."

마탑의 외교를 담당하는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왕파에서 지랄하든 말든 내전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 뒤에는 공작파 귀족들과 함께 힘으로 다 쓸어버리면 되니까.

그들은 그렇게 적염의 마탑과 싸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 * *

지셀이 영지로 돌아오자 다들 무덤덤하게 맞이했다. 이제는 어디 나갔다 와도 별로 걱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지민들만 영주가 돌아왔다고 신나 했다.

그래도 클로드는 다른 가신들과 조금 달랐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주세요."

"뭘?"

"나갔다 왔으니까 누구한테 또 뭐 뜯어 왔을 거 아니에요."

"...."

이제는 사람을 완전히 강도 취급을 하고 있다. 강도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억울하다. 지셀은 단 한 번도 그냥 막 뺏은 적은 없었다.

입술을 몇 번 실룩거리던 지셀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없어."

"없다고요?"

"어."

"진짜 뭐 가져온 게 없다고요? 돈도 안 뜯어 왔다고요?"

"그렇다니까. 아, 나한테 돈 맡겼어?"

첩자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영지가 커졌다. 그러니 다크를 얻어온 건 아직 공개할 수 없었다.

나중에 공개하더라도 능력을 조금씩만 보여 줄 생각이었다.

특히 정신과 관련된 능력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 그래야 일로이스가 마법을 펼쳤을 때 역으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테니까.

나중에 쓸 군사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내전이 시작되면 측근들에게만 살짝 알릴 생각이었다.

아렐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 상태였다.

하지만 지셀의 깊은 뜻을 모르는 클로드는 무척이나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럼 뭐 하러 나간 거야...."

지셀이 나가면 무조건 뭘 얻어 와야 한다. 그게 진리였다. 그런데 못 얻어왔다? 그러면 실패한 거다.

클로드가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영주님이 나가서 그냥 들어올 때도 있네. 실패한 건 처음 보는데 그걸로 내기를 걸걸. 에이, 영주님도 이제 한물갔네. 끝났네, 끝났어. 강도질도 못 하면 이제 무슨 쓸모람?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 새끼가?'

중얼거리는데 묘하게 잘 들린다. 자꾸 신경을 긁는 클로드의 말에 지셀이 슬슬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아렐에게 소개 문구를 써 준 것 때문에 다시 교육을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이 그 기회다.

"얻어 온 게 있기는 하지."

"오? 그래요? 뭔데요? 빨리 보여 줘요."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진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어 왔다."

"...?"

퍼억!

"꺄아아아아악!"

지셀이 주먹을 날리자 클로드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갔다. 웬디는 바로 옆으로 피했다.

물론 클로드가 지셀을 피해 도망갈 수는 없다. 바로 뒷덜미를 잡힌 클로드는 그 자리에서 비 오는 날 먼지가 날 정도로 맞기 시작했다.

"야, 너는 왜 애한테 그딴 걸 가르쳐 줘! 소개 문구가 그게 뭐야! 뭐? 광기?"

"아, 좀! 내가 틀린 말 했나! 당신 이 동네 소문난 미친놈.... 악! 그만! 잘못했어요!"

전보다 강도를 높였는데도 주둥이가 살아 있다. 지셀은 때리면서도 생각했다.

'이 새끼.... 묘하게 맷집이 좋아진다?'

역시 알면 알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알포이와 더불어 영지에서 최약체로 꼽히는 주제에 자신의 '교육'을 점점 더 잘 버티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지금 기사들 교육할 때 쓰던 강도인데?'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세게 때리자 그제야 클로드가 항복했다.

"그만! 그만 때려!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후... 뭔가 속이 좀 시원한데?"

눈을 비비며 훌쩍이는 클로드를 보며 지셀이 만족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손맛이 찰지기로 따지면 다른 놈이 낫지만 속풀이에는 역시 이놈이 최고였다. 클로드가 가장 속을 긁기도 했고.

이번 정신 교육은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한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불러 봐. 영지 상황을 파악하게."

"훌쩍, 그럽시다."

지셀의 명령에 따라 금방 가신들이 소집됐다. 그런데 몇몇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라? 알포이는 어디 갔어? 다른 몇 명도 안 보이는데?"

지셀의 물음에 다들 난감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클로드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 친구가 요새 좀 바빠서요. 조금 이따가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걔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그러자 다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알포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는 있기 때문이다.

지셀은 사람들의 묘한 반응에 고개를 기울이다 일단 영지의 상황부터 보고받기 시작했다.

전과 다를 게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무지막지한 속도로 쌓이고 있는 포션이었다.

"오... 생각보다 빠른데?"

마법 연구소 인근에는 이미 포션 제조 시설이 수없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펜리스 영지는 이제 공사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영지였다.

마법사와 드워프, 숙련된 인부들이 힘을 합하니 포션 제조소 수십 개가 순식간에 세워졌다.

"이야, 마법사도 더 늘어났네?"

마법 연구소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은 이제 70여 명에 가까웠다. 클로드가 끊임없이 홍보하고 마법사가 펜리스 영지에 오는 족족 낚아챘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마법사가 찾아와도 모르는 척하고 막지 않았다.

솔직히 일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작은 마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법사가 많아졌다. 자원도 풍부하니 포션 제조는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만간 병사들에게 전부 하나씩은 지급할 수 있겠네. 두 개씩 주기로 한 목표도 금세 달성할 수 있겠어."

진도가 빠른 건 좋은 일이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진 지셀이 바로 시찰을 나갔다.

"알포이가 정말 일을 열심히 하나 봐? 포션도 이렇게 많이 만들고 회의도 참석 못 할 정도면 말이야."

"뭐... 그렇죠. 열심히 하긴 하죠."

"이야, 그놈이 웬일이래? 이제 사람 됐네. 걔 그런 애 아니었는데."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이번에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마법 연구소와 포션 제조소에 들르자 과연 마법사들이 죽을상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어으으... 죽을 거 같아."

"이 미친 영지... 감히 마법사를 이딴 식으로 대우하다니...."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어...."

다들 피곤에 절어서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마법사들을 어떻게 다루길래 저렇게 열심히 일해?"

가뜩이나 개인주의가 강한 마법사들이다. 아무리 보상을 많이 준다 해도 저렇게 열심히 일할 자들이 아니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저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상태로는 효율이 높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도 마법사들은 처음부터 두들겨 패서 노예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렇게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놈들이, 자신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바네사가 저렇게 만든 건가?'

지셀은 잠깐 떠오른 가설을 금방 폐기했다. 바네사는 훌륭한 학자지, 훌륭한 관리자는 아니다.

그녀가 마법을 가르쳐 주는 대가로 일하는 중이라 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지셀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문 앞이 시끄러워지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야이, 새끼야! 누가 도망가래! 어? 아주 죽고 싶어서 그래? 너 오늘 내로 수량 다 못 끝내면 연구소장님한테 말해서 바로 마나 흡수 형벌을 내린다. 알겠어? 나머지도 빨리빨리 수량 맞춰! 오늘 2교대로 바짝 돌린다! 수량 못 맞추면 다 죽는 거야! 알았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자는 바로 알포이였다. 그의 손에는 마법사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왼팔에는 완장을 하나 차고 있었다.

노예 낙인에 밧줄이 묶여 있는, 뭔가 무시무시한 그림이 그려진 완장이었다.

지셀은 처음 보는 완장에 눈을 껌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알포이...?"

"어? 영주 오셨슴까?"

알포이가 건들거리며 답했다. 그의 분위기는 못 본 사이에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인상은 묘하게 험악해졌고 온몸에서 거친 기세가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뒤에 똑같이 완장을 찬 5명의 마법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지셀이 적염의 마탑에서 처음 데리고 와 노예로 만들었던 마법사들이었다.

알포이의 완장 색은 주황색, 나머지 마법사들의 완장은 푸른색이었다.

이놈들.... 그간 못 본 사이에 자기들끼리 완장 차고 비공식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356화 드디어 왔군. (2)

머리가 띵해진 지셀이 황당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무슨 상황이긴요. 도망간 노예 놈들 잡아 온 거지. 요새 도망가는 놈들이 많아졌거든요. 이 새끼들아, 내 손을 피할 수 있을 거 같아?"

알포이가 바닥에 침을 퉤엣 뱉으며 말했다. 동네 건달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저놈 처음에는 좀 마법사다웠던 거 같은데....'

얼빠진 놈이긴 하지만 분명 처음엔 오만하면서도 고고한 마법사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이제 그런 건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지셀이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알포이가 자신의 완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제가 마법사들 관리자입니다. 관리자. 연구소장님 마음이 약해서 이런 거 잘 못 하시더라고. 그래서 제가 하고 있는 거죠."

지셀이 클로드를 바라보자 클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가 하겠다던데요? 뭐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긴 하죠. 영주님이 매번 잡아 와서 팰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관장이나 집사장이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허락했습니다."

"그러면 알포이랑 쟤네는 일 안 해?"

그러자 알포이가 열을 내며 말했다.

"나까지 공사하고 일을 하면 누가 얘네 잡아 오고 관리를 합니까! 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요새 마법사들 늘어나서 도망가는 놈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요새 얼마나 힘든데!"

알포이의 박력에 지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누군가는 관리자 역할을 제대로 하긴 해야 한다.

알포이는 완장질 하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든 거 같았다. 일도 안 하고, 도망가는 놈들 잡아 패면서 이것저것 시키고 굴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이 적성에 딱 맞더라고! 앞으로 영주가 직접 팰 필요 없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쪽은 나한테 맡겨 두라고!"

공사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다. 지셀에게 정말 나쁜 것만 골라 배운 알포이와 친구들이었다.

지셀의 의식 안에서 바깥을 훔쳐보던 다크가 생각했다.

'여기는 미친놈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세상에 마법사가 노예처럼 구르다니. 이런 영지는 단연코 왕국에서, 아니 대륙에서 오직 이곳뿐일 것이다.

지셀이 살짝 고민하는 걸 본 알포이가 변명을 더 내뱉었다.

"얘네들은 떠돌이 마법사라 우리랑 달라. 그냥 도망가면 그만이라고.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니까요?"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적염의 마탑 지부를 세운다는 핑계로 들어온 마법사들과 새로 모집한 마법사들은 상황이 다르다.

새로 들어온 이들은 계약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서 몰래 숨어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다른 왕국으로 튀어 버리거나.

어쨌든 이 정도면 인정해 줘야 했다. 계약서를 만든 건 지셀이고 마법사들이 거기에 사인하게 꼬신 건 클로드지만, 그 계약이 훌륭하게 이행되도록 한 사람은 알포이였던 것이다.

확실히 같은 마법사라 그런지 마법사 괴롭히는 방법은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았다.

알포이가 마법사들을 제대로 관리한다면 자신은 알포이만 관리해도 되는 일이니 가장 이상적인 피라미드 형태가 할 수 있었다.

지셀은 알포이를 보며 확인차 물었다.

"그래도 같은 마법사인데 괜찮겠어? 마법사들 사이에서 평판이 안 좋아질 텐데."

그러자 알포이가 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며 피식 웃었다.

"훗, 악역은... 이제 익숙하니까."

"...그래."

악역이 아니라 그냥 악당 아닌가? 완장질 하고 싶다는 티가 너무 나는데?

지셀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말했다.

"좋아, 앞으로 이쪽 관리는 알포이에게 일임하지. 잘해 보도록 해."

그 말에 마법사들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알포이와 친구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알포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지셀이 다시 공사판으로 돌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알포이와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급한 일이 있을 때는 투입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는 있어."

"아, 그럼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죠."

알포이가 실실 웃으면서 답했다. 그도 이곳에 와서 산전수전 다 겪은 탓에 이제는 제법 여유가 생긴 모양새였다.

지셀은 시찰을 마치고 클로드에게 물었다.

"적염의 마탑은 요새 어때?"

"아휴, 말도 마십쇼. 룬스톤을 잔뜩 얻어가더니 아주 신이 났더라고요.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적염의 마탑은 그전에도 지셀이 수련에 쓸 분량 이상으로 룬스톤을 보내 준 덕분에 이것저것 상품을 만들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룬스톤이 대량으로 들어왔으니 더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법사들도 많이 모집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쪽에도 지부가 있는데 신경 안 쓰나?"

"이미 우리 쪽에 줬다고 생각하고 잊은 거 같습니다. 애초부터 실력이 좀 떨어지거나 한계에 부딪힌 저서클 마법사들 위주로 보냈었으니까요."

그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마력 운용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그쪽에서는 절대 모를 것이다.

저 알포이와 친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고작 3서클 마스터인데 4서클 마법사가 도망가도 쥐어 패서 잡아 올 정도였다.

서클이 절대적이라는 마법사들의 상식이 이곳에서 깨지고 있었다. 괜히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조금 더 룬스톤을 몰아줘."

"네? 왜요? 진짜 왜 그렇게 하는 건데요?"

"적염의 마탑이 더 커져야 시비 거는 놈들이 생길 테니까."

지셀이 음흉하게 웃자 클로드가 혀를 찼다. 역시 무슨 짓을 꾸미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룬스톤이야 이제 남아돈다. 저번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뒤 며칠간 밀려 있던 영지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던 지셀에게 클로드가 새로운 소식을 들고 왔다.

"적염의 마탑주님이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왔군."

지셀이 예상대로 돌아가는 상황에 미소를 지었다.

* * *

요새 한창 돈벌이가 잘 되어 가는 덕분에 적염의 마탑은 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룬스톤의 수량이 많아지니 제자들의 실력도 빠르게 늘어나고, 새로운 마법사들도 많이 영입할 수 있었다.

7서클 마법사를 배출한 진홍의 마탑에 밀려 잠깐 주춤거리긴 했지만, 전통의 강자답게 역시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캬,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북부 제일 아니야? 내가 다시 그 자리를 찾은 거 아니냐고."

휴베르트는 수많은 보석이 박힌 의자에 앉아 싱글벙글 웃으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돈이 생기니 또 사치를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아휴, 진짜 왜 저러나 몰라.'

'저런 놈이 탑주라니.'

'그냥 운이 좀 좋았던 것뿐이구먼.'

장로들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휴베르트의 사치 성향이야 워낙 예전부터 유명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가 운이 좋은 자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펜리스 백작이 아니었으면 진작 망했을 텐데.'

'왜 룬스톤을 갑자기 싸게 지원해 주는 거지? 우리한테 식량도 많이 팔더니.'

'그놈이 아무 이유 없이 퍼 줄 놈이 아닌데?'

장로들이 느끼는 의문은 휴베르트도 똑같이 품고 있었다. 그는 속 좁고 사치스러운 사람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왜 그 애송이가 갑자기 우리한테 잘해 주는 걸까?"

"그, 글쎄요?"

"공짜로 뭐 줄 놈은 절대 아니잖아. 오히려 더 뜯어가면 뜯어갈 놈이지."

"그렇죠."

"하, 이유 없이 받으니 찝찝하긴 하네."

식량과 룬스톤,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걸 전부 펜리스에서 넘치도록 지원받고 있으니 마탑이 승승장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주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휴베르트는 받으면서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장로들도 찝찝하긴 했으나 어차피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받으시죠."

"펜리스 백작 없으면 우리 망합니다."

"예전처럼 돌아가긴 싫잖아요?"

그 말에 휴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싫었다.

"그때 그 애송이가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휴베르트가 아련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뭔가 실컷 뺏기고 당한 거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펜리스 백작 덕분에 살았다. 심지어 지금은 다시 북부 제일을 노릴 정도로 세가 커졌다.

아주 살짝 펜리스 백작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장로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렇게 된 거 이번에는 선물 거하게 들고 인사 한번 가시죠?"

"맞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받았으면 경우가 있어야죠."

휴베르트는 입을 삐죽이며 손을 휘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갈게. 지금 나 기분 좋으니까 건들지 마."

가서 인사해야 하는 건 맞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지셀은 이제 백작의 작위를 받은 대영주라 예전처럼 웃어른 포지션으로 갈 수가 없었다.

고개를 바짝 숙여야 하는데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장로들의 따가운 눈빛을 본 휴베르트가 급히 말을 돌렸다.

"아, 맞다. 진홍의 마탑에서 교류회를 하자고 했다며?"

휴베르트의 물음에 장로들이 피식 웃었다.

"그놈들이 똥줄이 타나 봅니다."

"우리가 그걸 왜 합니까? 뭐 좋은 사이라고."

"수작 부리는 게 분명합니다."

장로들의 말에 휴베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들 지금 우리 망신 주려고 그러는 거 같은데...."

교류회에는 필연적으로 제자들의 대결이 동반된다. 그걸 통해 자신들의 우위를 뽐내고 이쪽에 망신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혹시나 지기라도 하면 체면을 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단이나 귀족들과의 거래도 줄어들지 모른다.

"그냥 계속 무시해. 자기가 7서클이면 다야? 이 상태로 계속 우리가 주도권을 잡으면 이번에는 그쪽이 말라 버릴 거라고."

휴베르트가 이를 갈며 말했다.

장로들도 모두 동의했다. 굳이 교류회 따위를 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이기면 분명 득이 되겠지만 졌을 때의 손해가 너무 컸다.

그들도 이제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지셀의 언질을 받고 알아보니 진홍의 마탑이 룬스톤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자, 그놈들은 그냥 무시하고 이렇게만 쭉 가자고. 그리고 펜리스 백작은... 끄응, 고맙긴 한데 나중에 볼래."

그렇게 휴베르트가 뻔뻔하게 버티고 있을 때, 안 좋은 소식이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견 나갔던 마법사들이 습격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스테빌 상단이 계약을 철회했습니다!"

"상점의 마법 도구들도 전부 털렸습니다!"

마탑의 사업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마탑이 세력을 확장하며 낸 상점이 털리고 마탑과 계약한 상단들은 줄줄이 거래를 끊고 있었다.

가장 뼈아픈 손실은 여기저기 파견 나가 있던 마법사들이 습격을 당해 죽었다는 것이다.

"이 개자식들이!"

보고를 받은 휴베르트가 분노해 소리를 마구 질러 댔다. 이제 겨우 성세를 회복하는 중이었는데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졌다.

안 봐도 뻔했다. 진홍의 마탑이 하는 짓이 분명했다.

장로들도 분개하며 외쳤다.

"그놈들 미친 겁니다!"

"갑자기 이런 행보라니! 정말 끝을 보자는 거 같습니다!"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마법사들이 죽었다는 건 큰일이다. 문제는 이 일을 적염의 마탑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마탑의 일은 마탑끼리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족과 유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탑이 영지의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불문율이었다.

뒤에서 몰래 후원해 줄 수는 있지만, 귀족이 직접 끼어들 수 있는 건 영지민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거나 영지 운영에 큰 방해가 될 때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 명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놈들이 미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교류회를 거절했다고 이렇게까지...."

휴베르트는 매끈한 이마를 짚으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마탑끼리의 싸움에 귀족이 끼어들지 않는다 해도 한계라는 게 있다.

너무 싸움이 과열되거나 피해가 클 거 같으면 중재가 들어온다.

영주들과 척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마탑들도 적당한 선에서 싸움을 멈춘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싸우는 경우도 거의 없다.

심지어 요즘 같은 시기에는 함부로 힘을 썼다가 친왕파나 공작파에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재수 없으면 괘씸죄에 걸려 여러 가지 제약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휴베르트로서는 진홍의 마탑이 갑자기 막 나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으으... 도대체 그놈들이 왜 그러지? 정말 그렇게까지 교류회를 하고 싶다는 건가? 그렇게 우리를 망신시키고 싶다는 거야?"

"탑주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장로들의 성화에도 휴베르트는 쉬이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상대가 다른 마탑이었다면 아예 제자들을 죄다 이끌고 가서 초토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홍의 마탑주는 7서클에 이른 마법사다. 자신을 포함해 장로들이 모두 덤벼야 겨우 동수를 이룰까 말까 할 차이다.

설령 그렇게 마탑주를 막는다 쳐도, 그쪽 장로들을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제자들 수는 이쪽이 훨씬 많긴 하지만 정면으로 붙으면 패배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 정도로 초인의 힘은 강력하다. 그러니 휴베르트도 섣불리 전면전을 하자는 말을 못 하는 것이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휴베르트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교류회를 받아들여라."

"예? 그게 무슨... 설마?"

"그래, 기어코 우리를 망신 주고 싶은 모양인데 대결이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그... 교류회의 대결에는 탑주와 장로들이 빠지는 게 관례입니다. 우리 제자들이 델무드의 제자를 이기기는 좀...."

인원은 이쪽이 더 많지만 제자들 실력은 분명 이쪽보다 높을 것이다. 스승이 7서클이니까. 이미 그렇게 소문도 나 있었다.

하지만 휴베르트는 걱정하는 기색 없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펜리스 백작 만나러 가자."

"네?"

뜬금없는 말에 장로들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휴베르트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네사 좀 빌려 달라고 하면 돼."

아쉬울 때는 역시 지셀을 찾아가는 게 정답이었다.

357화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1)

휴베르트의 말에 장로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네사...요?"

"그래, 바네사. 6서클에 올랐다는 그 바네사 말이야."

그 말에 모두가 축 처진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바네사를 언급한 휴베르트 본인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네사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들었다. 클로드가 마법사 낚시를 위해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있으니 듣지 않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름까지 대놓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예 비밀도 아니었다. 명목상이긴 해도 펜리스 영지에 지부가 있는 적염의 마탑에서는 쉽게 6서클 마법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에휴... 걘 그냥 하녀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6서클 마법사가 된 거지?"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휴베르트의 말에 장로들도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펜리스 백작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요?"

"분명 마나도 못 느끼던 아이였는데."

"그것도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요. 평생을 노력해도 오를까 말까 한 경지인데."

바네사가 지셀을 따라간 지 시간이 꽤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 내에 6서클에 오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몇 번이나 확인해 봐도 6서클에 이르렀다고 하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데스몬드 백작과의 전쟁에서 바네사가 활약하는 걸 본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천재를 그냥 내주었으니, 적염의 마탑은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이 암암리에 돌 정도였다.

장로들이 한숨을 내쉬다가 다른 걸 물었다.

"그러면 바네사만 빌려 달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자 휴베르트가 인상을 팍 썼다.

"알포이 그 새끼는 아직도 3서클이라며?"

"네. 이거 완전 망신입니다."

지금은 반쯤 버린 상태지만 어쨌든 알포이는 마탑에서 촉망받던 기재였다. 그런데 마탑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놈이 아직도 3서클 그대로란다.

온종일 공사만 한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탑의 후계자가 하녀 출신보다 못하다니.

적염의 마탑은 보는 눈이 없다고 대놓고 들어도 반박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놈은 어차피 거기서 평생 살 놈이니까 후계자 자격은 조만간 박탈하자고."

그 말에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거기에 가 있는 놈들은 이제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이 지부지, 지셀과 관계를 유지하려고 대충 집어 던진 놈들이 아닌가.

"바네사 하나 정도면 충분해. 그러면 대결을 해도 우리가 전패는 당하지 않을 거 아냐? 적당히 망신당하는 수준에서 끝을 내자고."

진홍의 마탑에서는 이쪽에 단단히 망신을 주려고 작정한 모양이니 분명 수준 높은 제자들만 데리고 올 것이다.

이쪽에서 괜히 진지하게 맞서 줄 필요는 없었다. 재수 없으면 제자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쪽 제자 중에서 바네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마지막쯤에 내세워서 1승이라고 챙기면 되지 않겠어? 우리 제자들은 아끼고 말이야."

진홍의 마탑 때문에 한동안 고생한 뒤로 휴베르트는 제법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장로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는 적염의 마탑 소속이 아니지만, 마탑의 대결에는 객원 마법사도 참가할 수 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런 인맥도 실력으로 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잠시 마탑에 머물고 있는 떠돌이 마법사들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참가할 수가 있었다.

애초에 교류회는 여러 마법사와 관계를 맺기 위해 시작된 행사다. 대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바네사는 본래 적염의 마탑 출신이니 모양새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른 지역 마법사를 초빙하기에는 조금 늦지?"

"네. 언제 설득하고 데리고 오겠습니까? 그때까지 진홍의 마탑 그 새끼들이 계속 시비를 걸고 방해를 할 텐데요."

"아오... 개자식들. 진짜 두고 보자."

휴베르트가 이를 박박 갈았다. 이번에는 이쪽이 적당히 져 주겠지만 다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망신을 각오한 것도 그로서는 큰 결심을 한 셈이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랄까?

나중에 대놓고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모를까, 당장은 그렇게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마탑을 성장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잠깐의 굴욕만 참으면 더 강해진 세력으로 진홍의 마탑을 압박할 수 있으리라.

지셀이 지원해 주는 식량과 룬스톤이 있으니 언젠가는 진홍의 마탑을 말려 죽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지셀을 찾아갔다.

* * *

"흠, 교류회라... 그래서 '우리' 바네사를 객원 마법사로 빌려 달라, 이 말씀이시죠?"

"그, 그렇습니다. 백작님께서 조금 신경만 써주시면 저희가 체면도 좀 살릴 수 있고...."

휴베르트는 이마에 반짝이는 땀을 연신 닦으며 말했다.

말이라도 낮추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마탑주의 신분으로도 맞먹기가 힘들었다.

보통 영주였다면 모르겠지만 무려 북부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대영주다. 그리고 친왕파에서 가장 밀어주는 귀족이다.

아무리 마탑주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그런 휴베르트의 모습을 보며 다리를 꼬고 말했다.

"에이, 우리 사이에 왜 이렇게 긴장하십니까?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아, 그게 참... 예예, 오랜만에 봬서 그런 거 같습니다."

'젠장! 내가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용병들 끌고 다니는 애송이일 때부터 봤는데 이제는 격차가 너무 벌어졌다. 속 좁은 휴베르트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그래도 부탁을 하러 왔는데 기분 나쁜 티를 낼 수는 없다. 그는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아무튼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지 않으실는지요?"

"에이, 제가 식량도 팔고 룬스톤도 싸게 팔아 드리는데 공짜로 그냥 빌려 달라고요?"

그러자 휴베르트가 품에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제가 약소하지만 선물을 하나 챙겨 왔습니다. 이게 제법 가격이 나가는 물건입니다."

휴베르트가 꺼낸 건 무척이나 화려한 보석 상자였다. 보석이 바깥에 잔뜩 박혀 있어서 보석을 안에 보관하려는 건지 바깥에 보관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이런 거 모으십니까?"

"아니, 이런 게 예쁘지 않습니까."

지셀이 별로 좋아하지 않자 휴베르트는 당황했다. 이렇게 비싸고 예쁜 걸 왜 안 좋아한다는 말인가? 그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지셀은 냉큼 보석 상자를 챙기며 말을 이었다.

"뭐,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 무엇입니까?"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놈이 내거는 조건은 항상 평범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저도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참관이요?"

"네, 저도 마법사들의 대결을 한번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으음...."

휴베르트가 머리를 긁적였다.

교류회는 마법사들만의 행사였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극히 드물긴 해도 귀족이 교류회에 참가한 역사도 있긴 있었다.

장로들이 눈치를 주자 휴베르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백작님도 참가해서 한번 보시지요. 대신 너무 티 내시면 안 됩니다. 살짝, 아시죠?"

"그럼요. 저도 말로만 듣던 마탑 교류회가 참 궁금했거든요."

휴베르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좋은 결과였다. 저 무지막지한 놈이 딱히 큰 대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심 좋아하고 있을 때 지셀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홍의 마탑주가 그냥 순순히 대결만 하고 물러날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는 7서클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미친 척하고 그냥 거기 있는 사람 다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휴베르트가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아니, 백작님은 겁 없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어째 저보다 걱정이 많으십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왜요?"

"아무리 마탑끼리의 대결이라도 선은 있는 법입니다. 대결을 빙자해서 제자 몇 명은... 죽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휴베르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영주들이 마탑 사이의 분쟁엔 안 끼어든다고 해도 그런 큰 사고를 그냥 넘길 리는 없습니다. 저희 마탑은 브리반트 백작이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브리반트 백작은 친왕파지요."

"흐음...."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반트 백작은 친왕파가 지셀을 지원해 주기 전에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던 영주다.

자신이 중간에서 날름 가로채긴 했지만 어쨌든 친왕파에서 그나마 믿고 있던 영주라는 뜻이다.

브리반트 영지는 마탑의 세금에 크게 기대어 사는 영지다. 그런 마탑을 갑자기 진홍의 마탑이 없애 버린다면?

심지어 두 곳 모두 작은 마탑도 아니라 거대 마탑이라 소문난 곳이다. 그냥 '마탑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하나가 망했다더라'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친왕파에서 진홍의 마탑을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압박하고, 진상 조사에 들어갈 것이다.

북부에서 장사를 아예 접을 게 아니라면 진홍의 마탑이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왕국에 있는 모든 마법사에게 지탄을 받을 것입니다. 모두가 진홍의 마탑을 경계하거나 적대하게 되겠죠. 저쪽에도 절대 좋을 게 없습니다."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미친 짓을 하면요?"

지셀의 물음에 휴베르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교류회는 저희 쪽에서 할 겁니다. 델무드가 아무리 강해도 저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서클에 따른 실력 차이는 절대적이지만, 숫자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적염의 마탑에는 6서클 마법사와 5서클 마법사가 5명이나 있고, 제자도 수백 명이나 있었다.

피해는 크겠지만 본진에서 싸우면 이길 자신은 있었다.

물론 정말로 싸운다면 결국은 둘 다 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휴베르트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관전하시면 델무드도 행동을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지금 잘나가는 저희 기세를 꺾고 망신을 주려고 저러는 겁니다."

"그렇군요."

지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휴베르트는 아무것도 몰랐다. 어차피 내전이 일어날 건데 친왕파에 정치적 압박을 받든, 마법사들에게 지탄과 경계를 받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금 공작가는 말 안 듣는 놈들은 다 쓸어버릴 계획을 하고 있는데.

진홍의 마탑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공작가가 이제 본격적으로 내전 준비에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휴베르트는 그걸 모르니 그저 보통 때의 상식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지셀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 갈 건데 굳이 여기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네사를 객원 마법사로 참가시키도록 하지요. 아, 그런데... 알포이는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알포이요? 걔는 없어도 되는데. 아직도 3서클 따리인 재능도 없는 놈을 뭐에 쓰겠어요?"

"...."

알포이를 이제 완전히 버린 마법사 취급하는 휴베르트의 말에 지셀이 입맛을 다셨다. 얄미운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많은 활약을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인식을 조금 바꿔 줘야 할 거 같았다.

"조건을 하나 더 추가하겠습니다."

"뭔데요?"

"알포이도 대결에 참가시키지요. 그래도 마탑의 후계자인데 그런 경험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후계자 자격을 언제 박탈시킬지 고민하고 있는데 후계자 자격으로 참가시키라니. 휴베르트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누가 나가든 상관은 없으니까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말 뛰어난 제자들은 참가시키지 않을 예정이었다. 알포이가 끼어들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빼려던 건 아직은 마탑의 후계자라는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에이, 그놈 질 게 뻔한데 온 동네에 망신살이 뻗치겠네.'

어차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으니 지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다른 제자도 아니고 후계자가 패배했다는 건 명성에 꽤 타격이 올 것이다.

하지만 바네사가 있으니 됐다. 1승이라도 챙기면 그게 어디인가?

지셀의 허락을 받자마자 휴베르트는 바로 돌아가 교류회를 받아들였다. 그러자마자 진홍의 마탑은 적염의 마탑에 시비를 걸던 짓을 딱 멈췄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디 두고 보자. 이번에만 내가 져 준다."

휴베르트가 열을 내며 교류회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준비는 일반적인 교류회와 달랐다.

어차피 저쪽에서도 이쪽을 망신시키려고 한판 붙자는 거니 다른 자잘한 건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널찍한 장소에 바로 맞붙을 준비만 하면 그만이었다.

마침내 약속한 날짜가 되고,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이 적염의 마탑에 찾아왔다.

델무드는 두 명의 장로, 그리고 무려 오십여 명에 가까운 제자들을 이끌고 왔다.

휴베르트는 그 모습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것 봐라. 저렇게 많이 데리고 왔다고?'

진홍의 마탑에 있는 제자들은 백 명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그 절반을 데려왔으니, 대결만 한다기에는 너무 과한 수였다.

물론 이쪽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슷한 인원을 준비했지만 말이다.

'진짜 끝까지 가 보자는 건 아니겠지?'

생각보다 많이 데리고 왔기에 휴베르트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가 곧 인상을 풀었다.

'펜리스 백작도 와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저쪽도 펜리스 백작이 있는 걸 알면 몸조심하겠지.'

여전히 머리가 꽃밭인 휴베르트였다. 하지만 이곳에 찾아온 델무드는 달랐다.

'오늘 적염의 마탑은 멸망한다.'

그는 오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휴베르트에게 말했다.

"오랜만이군. 휴베르트."

"그래, 오랜만이다. 델무드."

두 사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두 사람은 젊었을 적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라이벌 마탑이라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 잘나가던 마탑의 후계자였던 휴베르트는 아예 델무드를 무시했다.

그런데 지금은 델무드가 더 강해졌다. 그러니 휴베르트의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다른 준비는 필요 없잖아? 바로 싸울 수 있게 준비했다."

"눈치는 빠르군."

살짝 비웃음을 지은 델무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 있는 자가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델무드가 싸늘한 눈빛으로 휴베르트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지?"

그 물음에 휴베르트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아, 처음 보는 건가? 소개하도록 하지. 저분이 바로 요새 북부에서 가장 잘나가는 펜리스 백작님이다. 관전 손님으로 모셔왔지."

"펜리스 백작?"

델무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을 본 휴베르트가 속으로 웃었다.

'크흐흐, 놀랐지? 어때?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왔건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물론 델무드가 놀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휴베르트의 예상과 다르게 그는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오늘! 펜리스 백작도 죽인다!'

그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358화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2)

델무드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런 기회가 오다니!'

공작가에서도 펜리스 백작은 골칫덩어리였다. 애송이였던 그가 어느새 성장해 데스몬드 백작을 꺾고 이제 북부의 강자로 부상했다.

덕분에 북부에서 진행하던 일이 모두 망가졌고 친왕파는 기세등등해졌다. 공작파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인식까지 퍼지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펜리스 백작을 죽인다면? 전세는 단숨에 역전된다.

'아멜리아만 제대로 해 주면 북부를 단숨에 집어삼킬 수 있다.'

예전처럼 레이폴드와 데스몬드가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도 아니다. 펜리스 백작만 사라지면 레이폴드를 막을 곳은 없어진다.

물론 펜리스 백작을 죽이면 친왕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명분도 없이 대영주를 공격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진홍의 마탑이 멸망하기 전에 공작가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여 줄 테니까.

북부만 차지한다면 동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공작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는 셈이다.

델무드는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마법사는 언제나 냉철해야 한다.

'얼마나 온 거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대영주의 행차치고는 규모가 꽤 초라했다. 호위 기사 20여 명과 병사들 100여 명 정도가 전부다.

'펜리스 백작의 무력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 정도면 자신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펜리스 백작과 같이 온 자들이었다. 펜리스군은 강군이라 소문났다. 데리고 온 자들의 수는 적지만 분명 정예들일 것이다.

거기에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까지 있다.

'그리고 저자....'

펜리스 백작의 옆에 철탑처럼 서 있는 하얀 머리 남자. 분명 데스몬드 공방전에서 활약한 길리언이란 자일 것이다.

'쉽지는 않겠군.'

당장 치고 싶지만 조금 더 기회를 엿봐야 했다. 우선 목표는 적염의 마탑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펜리스 백작도 같이 죽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 되면 교류회가 끝나고 습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델무드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입술을 핥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살기가 은은하게 일렁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홍의 마탑의 탑주인 델무드입니다. 북부에서 유명하신 펜리스 백작님을 이렇게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지셀도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마주 답했다.

"이 북부에서 유일하게 7서클에 오른 초인이시라 들었습니다. 그런 대단한 분을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저 또한 영광입니다."

그 말에 휴베르트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유일하게 7서클에 이른 초인이란 말은, 어쨌든 델무드가 북부 최강의 마법사란 뜻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인사를 마쳤다. 시간을 끄는 예의는 둘 다 집어치웠다.

델무드만큼이나 지셀도 언제 상대방을 칠지 기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저놈이 대결에 나오는 거겠지.'

탑주와 장로들은 대결에 나오지 않는 게 관례지만 오늘은 어떨지 모른다.

델무드가 정말 적염의 마탑을 힘으로 밀어 버릴 생각이라면 관례 따위 무시하고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걸 보고 바로 대응할 계획이었다.

"인사는 다 끝났나? 바로 시작하지."

휴베르트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두 마탑은 서로 간의 예의는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후후후... 그래...."

휴베르트와 델무드는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결은 총 5번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각자 첫 번째로 꼽은 제자들이 나섰다.

진홍의 마탑에서 나온 제자는 4서클 마법사였다. 하지만 적염의 마탑은 고작 2서클 제자다.

휴베르트는 이딴 일로 유망주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서클이 낮은 제자를 내세운 것이다. 그렇다고 마탑의 제자가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대충 손 한 번 섞고 항복해라. 괜찮으니까 체면 차릴 생각하지 마. 알았어?"

"네, 네. 알겠습니다."

휴베르트의 격려 아닌 격려를 받은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지잉―!

두 마법사가 나서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마력장 결계가 생성되었다.

군대가 정렬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공간에 쳐진 결계다. 이 정도 크기로 하기 위해서 룬스톤도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원래 이런 교류회에서 대결할 때 드는 비용은 참여한 마탑들이 공동으로 부담한다.

'개자식, 돈도 안 내고 말이야.'

하지만 진홍의 마탑은 정말 금화 하나도 내지 않고 교류회를 하자고 억지를 부렸다.

휴베르트로서는 제 돈을 엄청나게 써 가면서 망신을 당하게 된 꼴이니 이가 갈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시작하라!"

심판을 맡은 장로의 신호와 동시에 마법사들이 움직였다.

파앗!

적염의 마탑 마법사는 바로 파이어볼을 뿜어 냈다. 들어가자마자 항복하기는 뭐하니 정말 적당한 공격이나 한두 번 하고 바로 항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홍의 마탑 마법사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윈드 커터."

스각!

4서클 마법사가 뿜어낸 바람의 칼날은 파이어볼을 가르고 그대로 상대 마법사의 목을 갈랐다.

쿠웅!

마법사의 머리가 떨어지자 사위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특히 적염의 마탑 제자들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죽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저런 각오가 없었다. 상대의 기세에 눌려 버리자 앞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휴베르트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야이, 개자식아! 시작부터 살인이냐!"

화를 내는 그를 보며 델무드가 비웃었다.

"대결 중에 사상자가 나올 수 있다는 건 당연한 상식 아닌가?"

"이이익!"

휴베르트는 델무드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악의를 품은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너무 막 나간다.

그는 슬쩍 지셀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 거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지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지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미친 척하고 그냥 거기 있는 사람 다 죽일 수도 있습니다.

휴베르트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친왕파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설사 그럴 생각으로 왔다고 해도, 펜리스 백작이 있는 곳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어.'

펜리스 백작까지 죽이면 진홍의 마탑도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 휴베르트는 델무드가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다.

휴베르트는 숨을 몇 번이나 고른 뒤 다음에 출전하는 제자에게 말했다.

"그냥 시작하자마자 항복해라. 싸우려고 하지 마."

"아, 알겠습니다."

제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차피 저 무서운 놈들하고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없었다.

마법사는 떨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으으... 하필이면 왜 내가 선택돼서....'

자신보다 더 서클이 높은 제자들도 마탑에 많다. 그런데도 자신을 내보내는 이유를 사실은 알고 있다.

실력 있는 제자들을 보호해 주려는 조치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싶었다.

마법사는 오만함과 자존심으로 사는 족속들이 아닌가.

그런데 한때 북부 제일이라 불렸던 적염의 마탑이 처음부터 질 생각을 하고 싸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법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제자가 자신의 뒤에 서 있다. 하지만 자신보다 서클이 높은 제자들도,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화를 내기보다는 혹시나 불려 나갈까 봐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마탑은 끝났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돈을 벌고 세력이 강해지면 무엇 하는가.

탑주를 비롯해 장로들과 모든 제자가 온순한 양처럼 되어 버렸는데.

꿀꺽.

눈앞에 서 있는 진홍의 마탑 마법사를 본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저들은 자신들과 달랐다. 풍기는 기세부터가 비교가 안 되었다. 마치 굶주린 맹수 같았다.

이번 대결을 이렇게 넘어간다 해도 결국 진홍의 마탑에 먹혀 버릴 거란 예감이 들었다.

'대결이 끝나면 떠나야겠다.'

자신도 다를 건 없었다. 지금 목숨을 건진다 해도 여기 있다가는 언젠가 죽을 거 같았다.

"시작하라!"

장로의 외침과 함께 다시 마력장 결계가 펼쳐졌다.

적염의 마탑 마법사는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손을 들고 외쳤다.

"항복하겠습니다!"

그 말에 진홍의 마탑 마법사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한심한 놈."

대놓고 모욕을 주는데도 적염의 마탑 마법사는 얼굴만 벌게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동시에 진홍의 마탑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놈들도 마법사랍시고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다니겠지?"

"북부 제일이었다는 명성도 그냥 억지로 만들어 낸 거 아닐까?"

"약해빠진 걸 떠나서 자존심도 없는 놈들이군."

그들은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을 향해 대놓고 조롱을 건넸다. 그럼에도 적염의 마탑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휴베르트가 미리 언질을 주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몇은 분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서도 그들은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과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었다.

상대방의 거친 기세에 완전히 눌린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평화에 너무 찌들었군.'

한때 북부 제일이라 불렸던 마탑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진홍의 마탑과 달리 적염의 마탑은 그저 현재에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때로는 참고 인내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결국 뒤처지게 될 뿐이다.

목표가 있냐 없냐의 차이로 마법사들의 마음가짐조차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실력 차이도 크고 말이야.'

만약에 델무드가 6서클 마법사였다면 이렇게까지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7서클 마법사의 위명은 강대했다.

정면으로 붙으면 피해도 크고 이길 자신도 없으니 저렇게 꾹꾹 참을 수밖에.

지셀이 혀를 차는 동안 세 번째 대결도 끝이 나버렸다. 그 마법사도 결계가 켜지자마자 항복을 외쳤기 때문이다.

"아휴, 병신들."

"이럴 거면 뭐 하러 대결을 받아들였냐?"

"그냥 이 기회에 다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진홍의 마탑 쪽에서 천박한 욕설과 조롱이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체면 때문에라도 이렇게까지 심하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델무드와 장로들이 허락했는지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의 조롱 수위는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으으으...."

휴베르트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주먹만 쥐고 부들거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저놈들의 면상에 불을 질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전면전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참아야 한다. 싸워 봐야 얻을 게 전혀 없었다.

장로들도 휴베르트와 마찬가지로, 분한 표정을 지으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심호흡을 하던 휴베르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그만하지. 세 번이나 이겼으면 그쪽의 승리 아닌가? 이 정도면 망신 주려는 목적은 충분히 이뤘을 텐데?"

대결은 총 다섯 번이다. 하지만 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휴베르트가 중지를 요청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델무드가 비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저었다.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딱히 승부를 가리기 위해 하는 대결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제자들의 성취를 보기 위한 교류회니까."

"이 개자식...."

델무드의 거절에 휴베르트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았다.

네 번째 대결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번 차례가 마탑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킨 휴베르트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알포이에게 말했다.

"너... 너도 들어가자마자 항복해라."

마탑의 후계자긴 하지만 몇 년이나 3서클에서 제자리걸음 하던 놈이다. 어차피 나가 봤자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후계자가 지면 그 망신이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이미 당할 대로 당했다.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알포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저 새끼들이 저렇게 비웃고 있는데 참아요? 우리 북부 제일 아니었어요?"

그러자 휴베르트도 짜증을 내며 답했다.

"철 좀 들어라. 공사만 하고 지냈다면서 아직도 그 오만한 성정을 못 고친 거냐? 네가 나가면 이길 수 있어? 상대는 최소 4서클 이상만 내보낼 텐데?"

"그거야 뭐 싸워 봐야 아는 거 아닌가?"

알포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지셀과 함께하면서 고생은 죽어라 했지만 배운 게 하나 있다. 뭐든 해 보고 싸워 봐야 아는 거다. 그런 자신감으로 펜리스 영지가 성공한 게 아닌가.

하지만 휴베르트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멍청아! 서클이 낮은데 어떻게 이겨!"

그의 성화에 알포이가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도 이길 자신은 없었다.

영지에서 도망가려는 4서클 마법사를 잡아 온 적은 몇 번 있다. 하지만 그건 동료들과 함께 했던 일이다. 일대일로 싸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저놈들은 연신 험악한 기세를 풍기는 게 조금 무서워 보이긴 했다.

"에휴, 알겠어요."

알포이가 비척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해 화가 났는데 막상 싸우려니 긴장도 되고 무섭기도 했다.

그도 자신의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괜히 개죽음당하고 싶진 않았다.

알포이가 나서자 진홍의 마탑 쪽에서도 반응했다.

"저놈은 적염의 마탑 후계자가 아닌가? 그러면 어울리는 상대를 보내야겠지."

델무드가 웃으며 말하자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알포이의 앞에 서자마자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브로디. 탑주님의 첫 번째 제자이자 진홍의 마탑 후계자다. 만나서 반갑군."

알포이는 잠시 눈을 껌뻑였다. 뭔가 이렇게 통성명을 하는 게 무척이나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어, 그래.... 나는...."

알포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브로디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최근 4서클 마스터에 올랐다. 항복하고 싶으면 그냥 빨리해라. 너희처럼 허접한 놈들하고는 말을 섞는 것조차 수치스러우니까. 설마 같은 후계자라고 너와 내가 같은 급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척이나 모욕적인 언사였다. 그런데 막상 알포이는 저런 말을 듣고도 생각보다 화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변화에 곰곰이 이유를 생각하던 알포이가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관전석에 앉아 웃고 있는 지셀이 보였다.

'아, 그렇지.'

영지에서 하도 무시당하면서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취급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알포이가 이마를 잡고 킥킥거렸다.

브로디는 혼자서 웃기 시작한 알포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가 웃기지?"

"아니, 아니야.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말이야. 천하의 알포이가 이렇게 변하다니."

알포이가 손을 휘휘 젓고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래, 내 이름은 알포이다. 적염의 마탑 후계자이자 펜리스 지부의 지부장이지. 그리고...."

그는 허리를 쭉 펴고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신을 이긴 남자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359화 나도 마법사거든. (1)

"뭐, 뭐?"

브로디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겨우 3서클 마법사 주제에 뭐 저리 오만한 소리를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상대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좀 돌아 버린 놈 같았다.

"푸하하핫!"

알포이의 자기소개를 듣고 관전석에 앉아 있던 지셀이 배를 잡고 웃었다. 길리언도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게 이를 꽉 물고 웃음을 참는 게 분명했다.

펜리스의 다른 기사들과 병사들도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험악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져 버렸다. 진홍의 마탑 쪽은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델무드가 알포이를 노려보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브로디, 저놈을 반드시 죽여라."

항복 따위는 받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웃기는 분위기가 되면 안 된다. 저놈들은 계속 겁먹고 기세가 약해져야 한다. 그래야 더 죽이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알포이란 놈을 반드시 죽여서 분위기를 다시 돌려야 했다.

브로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들었냐? 네놈의 항복 따위는 받지 않겠다."

그러자 휴베르트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끝까지 가 보자는 거야? 알포이 나와라! 교류회는 여기서 끝내겠다."

그 말에 델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누구 마음대로 끝낸다는 말이냐! 이제부터 대결에 항복 따위는 없다! 만약 거부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쩌엉!

7서클 마법사의 마력이 퍼져 나가자 순식간에 모두의 몸이 굳어졌다.

휴베르트를 비롯한 적염의 마탑 장로들은 순간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제자들의 얼굴에도 공포가 서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정말 끝장을 보려는 거 같았다.

결국 휴베르트는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페, 펜리스 백작님. 아무래도 백작님이 중재를...."

지셀이 휴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아직 알포이가 어떻게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 저놈이 뭘 어떻게...."

그러자 알포이가 여전히 오만한 표정으로 휴베르트에게 말했다.

"전 항복 안 할 겁니다."

"뭐?"

"한번 해보려고요."

"이 미친놈아! 상대는 4서클 마스터다! 시작하자마자 죽을 거라고!"

지금은 내놓은 지 오래지만 한때는 마탑에서 촉망받는 기재였다.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건방지다는 게 단점이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키운 정이 있다.

그런 제자를 허무하게 죽게 놔둘 수가 없었다.

"나와라! 대결은 무효다!"

휴베르트의 발악에 알포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다들 너무 쫄아 있는 거 같았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싸우기 전에는 자신도 조금 겁먹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앞에 서니 별로 무섭지 않았다.

하긴, 그간 영지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뭐 하나 범상치 않은 일이 없었다.

첫 전쟁에서는 바네사에게 마력을 빨려 죽을 뻔했고 카오르와 함께 열기구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북부 최강이라는 데스몬드군과도 싸워 봤고 마수의 숲에서는 퀸 그렉스를 유인하며 수십만의 그렉스들과 싸웠다.

그런 목숨 건 실전을 몇 번이나 경험하고 나니 눈앞에 있는 4서클 마법사는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게다가 델무드의 협박도 별로 겁나지 않았다.

'7서클 마법사가 대수인가? 여기에 지금 영주가 있는데. 여차하면 또 주먹질하겠지.'

영주가 7서클 마법사를 이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7서클은 소드마스터와 동급이라 인정받는 초인이니까.

하지만 저 괴물 같은 영주가 그냥 당하고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죽더라도 저놈과 같이 죽을 것이다.

별별 경험을 다 겪다 보니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붓고 정신도 살짝 맛이 간 상태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알포이는 정상 범주를 벗어난 지셀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휴베르트에게 대충 손을 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그냥 싸워 볼게요."

"이놈! 당장 나오지 못할까!"

휴베르트가 직접 알포이를 끌어내려 할 때, 지셀이 말했다.

"그냥 한번 믿고 맡겨 보시죠."

"아니! 서클 차이가 난다니까요!"

"서클 차이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사한테는 서클이 전부지!"

"그냥 맡겨 보세요."

휴베르트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번에는 지셀마저 요지부동이었다.

"에잉! 멋대로 해라! 이 망할 놈들!"

휴베르트가 씩씩대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손에는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알포이가 위험하면 어떻게든 마력장을 뚫고서라도 구해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력의 흐름을 느낀 델무드가 장로들에게 고갯짓했다.

"다른 자가 끼어들면 무조건 죽여라."

그 말에 휴베르트는 이를 갈면서도 마력을 풀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 여기서 대놓고 싸움이 벌어질 수 있었다.

어떻게든 참고 참아야만 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알포이는 다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은 그런 알포이를 향해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피식 웃은 그는 지셀의 옆으로 눈을 돌렸다. 바네사가 양손을 모으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포이는 머리를 멋지게 쓸어올리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보고 있으라고. 이 몸의 실력을."

동시에 장로가 큰소리로 외쳤다.

"시작하라!"

대결이 시작되자 브로디는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겁이 없는 놈이구나. 넌 그냥 죽이지 않겠다. 갈기갈기 찢어서 죽어서도 후회하게 해 주지."

알포이가 여전히 건방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시든가. 그 전에 내가 하나 보여 줄 게 있어."

"뭘 보여 준다는 거냐?"

알포이가 손을 펴서 브로디에게 보여 줬다. 그의 손바닥에는 단단해 보이는 짱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돌멩이가 어쨌다는 거냐?"

"내가 이걸로 신기한 거 보여 주려고."

"...?"

"잠깐만 봐 봐."

알포이는 성큼성큼 걸어가 브로디와의 거리를 좁혔다.

"봐 봐, 이게 없어지는 걸."

스윽.

홀짝 마법을 시전하자 돌멩이가 알포이의 소매로 쏙 들어갔다. 브로디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마법이지? 이딴 걸 왜 보여 주는 거냐."

"들어가면 나올 수도 있는 법이지."

"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포이의 소매에서 돌멩이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왔다.

빠악!

"커헉!"

갑자기 튀어나온 돌멩이에 코를 얻어맞은 브로디가 코피를 뿜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4서클 마스터답게 바로 손을 뻗어 마법을 시전했다.

파아아앗!

그의 손에서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급히 시전하느라 마력이 충분히 실리지는 않았지만 제법 위력적이었다.

"헤이스트."

하지만 알포이는 이미 제 몸에 속도를 올리는 마법을 걸어 자리를 피한 상태였다. 동시에 다른 마법이 시전되었다.

"그리스."

바닥의 마찰력이 없어지는 마법이다. 다중 영창은 아니지만 마치 다중 영창을 한 것처럼 빠른 속도였다.

알포이는 그 마법을 자신의 주변에 시전했다. 그러고는 바로 브로디를 향해 몸을 날려 태클을 시도했다.

"엇?"

브로디가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알포이는 그 틈을 타 브로디에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콰앙!

브로디는 어찌할 틈도 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다른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몸 한번 제대로 안 써 본 브로디는 공사장에서 단련된 알포이의 움직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무슨!"

우아한 마법사가 체술 따위를 쓰다니, 이 무슨 흉한 꼴이란 말인가!

하지만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알포이는 바로 브로디의 몸에 올라타 주먹을 들었다.

"파이어 피스트."

화아악!

알포이의 주먹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숨 쉴 틈도 없을 만큼 빠른 마력 운용 속도였다.

브로디가 뭔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알포이의 주먹이 먼저 날아왔다.

"이게 불 주먹이다. 이 새끼야."

퍼억!

"크아아악!"

불길을 머금은 주먹이 안면에 꽂히자 브로디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알포이는 단호할 정도로 무섭게 주먹을 내리꽂았다.

퍼퍼퍼퍼퍼퍼퍽!

양 주먹이 미친 듯이 브로디의 얼굴을 작살냈다.

알포이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마법사지만 마법 대결로 가면 자신이 불리하다. 기세를 잡았을 때 몰아붙여야 한다.

퍼퍼퍼퍼퍼퍼퍽!

"끄아아아악!"

브로디는 고통 때문에 어떠한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상하게 살아온 그는 자신이 이런 싸움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알포이가 체력이 저질이라고 하지만 그건 펜리스 영지의 기준에서다.

그도 몇 년 동안 공사판에서 뛰어다녔으니 어지간한 마법사들보다 체력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커억, 그, 그만...."

브로디의 애원에도 알포이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했다.

"입에 파이어볼 들어간다."

순간 알포이의 손바닥이 펴지고, 브로디의 벌어진 입에 정말 작은 파이어볼 하나가 들어갔다.

퍼어억!

"카아아악!"

브로디의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불길에 휘감긴 알포이의 주먹이 다시 날아왔기 때문이다.

퍼어어억!

알포이는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그 잔망스러운 입을 멈추지 않았다.

"아프냐? 아프지? 너 이 새끼야,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어? 어? 내가 누구인지 알고!"

"꺼어어억...."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머릿속이 하얘진 브로디는, 죽을 때까지 그냥 그렇게 마법 한번 제대로 못 쓰고 얻어맞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불길을 머금은 주먹에 화상까지 입었기 때문이다.

"후우...."

알포이는 브로디가 죽은 걸 확인하자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원래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힘을 조절하면서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보다 서클이 높았기 때문이다.

브로디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알포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법은 서클이 아니라 실전이야. 존만아."

마법사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지만, 펜리스에서는 딱히 틀리지도 않은 말이었다.

"와아아아아!"

알포이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적염의 마탑 측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지셀은 웃으며 박수를 쳤고 바네사도 방방 뛰며 기뻐했다.

길리언도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알포이를 바라보았고 기사들과 병사들도 눈을 빛내며 환호했다.

반면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 저 새끼... 도대체 그간 어떻게 살아온 거야? 어디서 뭘 배워 온 거야? 저게 마법이야? 어? 저딴 게 마법이냐고?"

휴베르트의 말에 장로들도 떠듬거리며 말했다.

"고, 공사를 하면 강해지는 건가?"

"마력 운용이 왜 저렇게 좋아졌지?"

"다중 영창을 하는 줄 알았어."

마탑에 있을 때와 서클은 같은데 전투력은 몇 배나 올라간 듯했다.

하지만 무척이나 천박하다는 감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저 새끼 저거 분명 펜리스 백작한테 배운 게 분명해.'

펜리스 놈들이 좀 거칠게 싸운다는 소문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게 마법사에게도 적용되는 일이었을 줄이야.

알포이가 확실히 강해지긴 했지만, 저렇게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환호하는 적염의 마탑 제자들을 보며 알포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한심한 새끼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북부 제일 마탑 제자들이냐! 이런 새끼들한테 쫄아서 덤비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 말에 모두의 웃음이 뚝 멈췄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알포이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감을 가져, 자신감을. 이 새끼들도 싸우면 별거 아니야. 알았어?"

알포이의 훈수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쥐었다.

3서클짜리가 4서클 마법사를 이겼다. 그것도 진홍의 마탑주 델무드의 직계 제자를. 정말로 진홍의 마탑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걸지도 몰랐다.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알포이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휴, 이겨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일침도 못 놓을 뻔했잖아.'

원래 싸우기 전에 저런 말을 했으면 더 멋졌을 것이다. 하지만 은근히 소심한 그는 혹시나 질까 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이겼으면 된 거지.'

그는 사람들의 환호를 다시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자, 잘했다. 알포이."

휴베르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알포이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흥."

알포이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열 받았다.

'내가 공사장에서 구르고 있는데 구하러 오지도 않고 이런 대결에나 내보내고 말이야.'

그래서 조금 차갑게 대했다. 그러자 휴베르트는 오히려 더 쩔쩔매기 시작했다.

알포이가 이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간 알포이에게 너무 무심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커험, 내가 요새 연락도 뜸했고 그랬지? 그래서 서운했지?"

"흥."

뜸하기는커녕 펜리스에 지부를 세운 뒤로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것도 생각하니 또 열 받는다.

"아니, 내가 바빠서 그랬어. 나 바쁜 거 알잖아?"

"모르겠는데요."

"아이참, 그러지 말고."

"아, 저 싸워서 피곤해요."

오랜만에 만난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조금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알포이의 승리에 진홍의 마탑 측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저놈이 감히...."

델무드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첫째 제자를, 그것도 스승의 눈앞에서 살해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숨 막히는 압박감에 몸을 피했다.

휴베르트는 분노하는 델무드를 보며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후계자가 네놈 후계자를 이겼다!'

이제 이쪽이 더 많이 패배한 건 중요하지 않다. 후계자끼리의 대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단단히 내 줄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직 이 자리에서 델무드를 자극할 정도로 간이 붓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바네사에게 말했다.

"바네사,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같은 6서클에 올랐지만 바네사는 여전히 휴베르트에게 존대했다. 본래 겸손한 성격이기도 하고, 어쨌든 그녀도 적염의 마탑 출신이니 휴베르트에게 함부로 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마지막 주자로 바네사가 나서자 휴베르트는 안심해 표정이 풀어졌다.

'휴, 진홍의 마탑 제자들 중에 바네사보다 서클이 높은 놈은 없지. 이번에도 승리다. 승리한 횟수는 더 적지만 알포이 덕분에 체면을 구기진 않겠어.'

장로들과 다른 제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안심했다. 하지만 곧 앞으로 나서는 사람을 보고 그들 모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마지막은 내가 나서겠다."

델무드가 살기를 내뿜으며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지셀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360화 나도 마법사거든. (2)

휴베르트는 앞으로 나온 델무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뭐, 뭐야! 네가 왜 나와!"

"왜? 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나?"

싸늘한 델무드의 말에 휴베르트는 입을 닫았다. 할 말이 없었다.

탑주들과 장로들은 관례상, 체면상 나오지 않는 것일 뿐이지 아주 예전에는 장로들끼리도 대결하곤 했었다.

델무드가 나오자 다시 분위기가 반전됐다.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누가 나올 거냐?"

델무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적염의 마탑 쪽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자들은 다들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했다.

탑주가 나왔으니 이쪽에서도 탑주가 나가야 한다. 하지만 휴베르트는 그럴 만한 담력이 없었다.

결국 바네사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나섰다. 어차피 마지막은 그녀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안 돼, 가지 마."

알포이가 바네사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포이 님."

"아무리 너라도... 아니, 연구소장님이라도 절대 못 이겨. 나가면 개죽음이야."

해 봐야 아는 것도 적정선이 있는 법이다. 알포이는 누구보다 바네사의 실력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쌓아 온 지식, 타고난 재능으로는 그녀가 델무드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그녀가 서클도 더 낮고 마력도 현저하게 부족하다.

바네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현재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그래도... 나갈 사람이 없어요."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나가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그 한심한 모습에 알포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말했다.

"그냥 안 나간다고 해. 우리가 진 걸로 하자고."

"저 사람은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그냥 싸워야지. 다 같이 싸우는 게 더 살 확률이 높을 거야."

알포이는 성난 표정으로 뒤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외쳤다.

"싯팔!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저 새끼들이 우리 다 죽이려고 하잖아! 저 새끼들 이미 작정하고 온 거라고!"

휴베르트가 떨리는 눈빛으로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알포이...."

"정신 차리라고! 어차피 안 싸우면 다 죽어! 빨리 앞으로 다 나와! 이 멍청한 새끼들아!"

기세등등한 알포이의 박력에 모두가 흠칫했다. 휴베르트는 떨리는 눈빛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뒤로 가?"

알포이는 표정만 비장할 뿐 바네사를 붙잡고 슬금슬금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

알포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여전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눈치를 보다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들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델무드가 살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빨리 아무나 나와라."

휴베르트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누가 나가도 죽은 목숨이다. 저자를 막을 자가 이곳에는 없었다.

아니, 한 사람이 있긴 하다.

언제인지 지셀이 관전석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온 상태였다.

"페, 펜리스 백작님. 대결을 마쳐야겠습니다. 어서 중재를 해 주십시오."

이제 믿을 사람은 지셀밖에 없었다. 전면전은 정말 최악의 결과다. 자신의 대에서 마탑이 끝장나게 둘 수는 없었다.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델무드에게 말했다.

"이쪽에서 그만하자는군요. 탑주님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불가하외다. 나는 끝낼 생각이 없소. 또한 마법사들 간의 일에 귀족이 끼어들어 멈추는 건 월권행위라는 걸 명심하셨으면 하오."

파아아악!

델무드의 몸에서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첫째 제자의 죽음으로 열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어차피 당장 펜리스 백작이 끼어드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마법사들 간의 일이라는 핑계로 적염의 마탑을 쓸어버린 뒤, 그다음에 펜리스 백작을 칠 생각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려면 그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지셀은 이번에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베르트에게 말했다.

"진홍의 마탑주 말씀에 틀린 건 없습니다. 관례상 제가 끼어드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너 그런 거 안 지키는 놈이잖아!'

세상에서 관례를 제일 무시하는 놈이 관례 운운하니 휴베르트는 현기증이 일었다.

펜리스 백작이 막아 주지 않으면 정말 싸워야 하는데, 상대는 7서클 마법사다.

나가면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제자들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외부인인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장로들을 바라보자 다들 기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진짜 우리 마탑은 내 대에서 끝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이 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야 오래 버틸 수 있겠지만, 델무드는 틀림없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이놈이 진짜 우리 마탑을 없애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다면 펜리스 백작까지 있는데 이렇게 막 나갈 리가 없었다. 정치적 압박이 들어와도 어떻게든 해소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이대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누구 하나 죽으라고 내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죽고 싶지도 않았다. 설령 누구 하나가 희생한다 해도, 이제는 그걸로 대결이 끝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결국 다 같이 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두 마탑 중 하나가 없어져야 끝이 날 것이다.

휴베르트가 우울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작님은 이제 멀리 빠지십시오. 아무래도 오늘 끝장을 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자 지셀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자신 없으시면 객원 마법사를 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네? 바네사는 6서클입니다. 못 이겨요. 그래도 내보내 주시겠다면...."

"아니, 아니요. 다른 마법사요."

"누구...?"

지셀이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예?"

휴베르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셀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적염의 마탑 객원 마법사로서 이번 대결에 참여하겠습니다."

그 말에 델무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백작, 장난치지 마시오. 지금 그런 식으로 대결을 중지할 수 있다고 보시오?"

"장난이 아니라 진짜 내가 대결을 하겠다는 겁니다."

"이 대결은 마법사들의 대결이오. 백작은 마법사가 아니지 않소?"

"누가 그럽니까?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뭐라?"

순간 지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나도 마법사거든."

그 말에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 저 미친놈 또 시작이네.'

나서 준 건 고마운데 또 억지를 쓴다. 사기를 쳐도 좀 그럴듯하게 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천천히 양팔을 벌렸다.

파아아악!

갑자기 지셀의 뒤에서 이글거리는 검붉은 창 여러 개가 생성되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이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뭐, 뭐야? 저건 도대체 무슨 마법이지?"

"마, 마력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펜리스 백작이 정말 마법사라고?"

다크의 힘은 마력과 정령력이 혼재된 힘이다. 거기에 지셀의 마나를 기반으로 활용된다.

그러니 마법사들은 그가 쓰는 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런 건 보통 마법사만이 보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델무드도 지셀이 보여 준 힘에 조금 놀랐다.

'저놈이 마법을 쓴다고?'

데스몬드 백작과 공작가에서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다. 전쟁에 관한 소문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뛰어난 기사라고 했지, 저런 능력은 보여 준 적이 없는데?'

얼핏 보기만 해도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 하루 이틀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힘을 숨겼던 건가?'

정보를 들을 때마다 신기한 놈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보니까 더 경이로웠다. 지금까지 저런 힘을 숨기고 싸워 왔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전쟁터를 제 맘대로 누비고 데스몬드 백작을 꺾다니.

델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의 뒤에 떠 있는 마력의 창들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마력의 힘이 아니야. 도대체 저게 무슨 힘이지?'

혼탁한 기운이 혼재된 느낌이었다. 7서클 마법사인 그는 저 힘의 근원이 무척이나 불길하다는 걸 느꼈다.

'어디서 흑마법 쪼가리라도 익힌 건가? 뭐, 상관없겠지.'

델무드는 잔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왕국에서 단 둘뿐인 7서클 마법사다.

펜리스 백작이 힘을 숨겼든 말든, 자신의 상대는 될 수 없다.

'어차피 죽이려고 했는데 잘됐군.'

순서만 뒤바뀌었을 뿐이다. 게다가 대결을 자처했으니 다른 이가 끼어들 수도 없었다.

가장 먼저 펜리스 백작을 죽이면 오히려 다른 놈들을 죽이기가 더 쉬워질 것이다.

'대결에 직접 참여했으니 친왕파의 압박에서 벗어날 명분도 된다. 더 좋은 기회야.'

델무드는 명분을 확실히 쌓기 위해 짐짓 마음에 들지 않는 척 입을 열었다.

"백작, 당신을 마법사로 인정한다 해도 귀족이 마탑의 대결에 참여하는 건...."

"어이, 공작가의 개."

"...?"

"너 어차피 여기 사람들 다 죽이려고 왔잖아. 왜 자꾸 안 어울리게 잔머리를 굴려? 그냥 여기서 우리 둘이 승부를 보자고."

지셀이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델무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델무드는 몸을 들썩이며 광소를 터뜨렸다.

"큭, 크하하하하!"

쩌엉―!

사람들은 그의 웃음에 실린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귀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과연 7서클 마법사의 힘은 대단했다. 웃음소리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니.

델무드는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이딴 연기 지겨웠다. 어차피 결국 힘으로 해결할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나도 몰랐거든."

그 또한 데스몬드 백작과 공작가의 뜻 때문에 힘을 억눌렀을 뿐이다.

지금까지 파괴적인 심성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다. 7서클에 이른 자신의 힘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었다.

힘을 가지면 뽐내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는 어서 빨리 왕국을 피로 물들이고 싶어 인내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어차피 펜리스 백작과 적염의 마탑은 없어져야 한다.

"오늘 네놈들은 모두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구우우웅!

델무드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휴베르트는 그 모습을 보며 외쳤다.

"마, 마력장! 마력장 결계를 쳐!"

지잉―!

마력장이 펼쳐졌지만 소용이 없을 것은 다들 알았다.

7서클 마법사의 힘은 이깟 마력장으로 막을 수 없다. 분명 쉽게 뚫릴 게 뻔했다.

"물러나라! 어서 물러나!"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외치자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은 멀찍이 떨어졌다.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이미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영주님!"

바네사가 도와주려고 알포이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곧 길리언에게 막히고 말았다.

"길리언 님! 영주님이!"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지셀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그는 누구도 대결에 끼어들게 할 생각이 없었다.

"영주님을 믿어라."

"하지만...."

바네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왜 7서클 마법사부터 초인으로 불리는지 마법사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7서클부터는 그 힘이 이전 경지의 힘과는 궤를 달리한다.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7서클 마법사다.

지금까지 지셀이 상대했던 적 중 가장 강한 자라고 할 수 있었다.

델무드는 하늘에 뜬 채 오만한 표정으로 지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 때문에 북부의 일이 다 망가졌다. 오늘 내가 너를 단죄하겠다."

지셀은 그런 델무드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결국 힘으로 해결할 거였다고 했지?"

"그래, 어차피 다 죽여 버릴 건데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널 죽이면 아멜리아가 북부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면 동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 내전도 손쉽게 끝날 테지."

"그거 듣던 중 아주 반가운 소리군."

"뭐?"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어."

"그게 뭐냐."

순간 지셀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나도 힘으로 해결하는 걸 제일 좋아해."

파앙!

지셀의 뒤에 떠 있던 수십 개의 창이 델무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광경을 본 델무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건방진 놈."

그가 손을 뻗자 순식간에 엄청난 마력이 몰려들어 공간을 장악했다.

"파이어 스톰."

델무드의 주변으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 불길들은 서로 엮이고 꼬이며 곧 거대한 폭풍이 되었다.

파아아아악!

화염의 폭풍은 하늘로 치솟던 마력의 창을 모두 잡아먹고는 지셀의 몸까지 덮어 버렸다.

"영주님!"

바네사가 결국 앞을 막고 있던 길리언을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뒤로 더 물러났다. 저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당장이라도 마력장을 뚫어 버릴 듯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이게 7서클 마법...."

주변을 장악한 화염은 단순히 마법으로 칭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자연재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끄, 끝났어."

"절대 못 이겨...."

"지금이라도 도망을...."

휴베르트도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마법사가 덤벼도 절대 델무드를 이길 수가 없다.

서클이 높아질수록 서클 간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체감했다.

도망가야 한다. 살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모, 모두 몸을 빼라! 당장 브리반트 백작에게 병력을 요청...."

"우와아아아아!"

휴베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자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파앗!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 갈라지며 지셀이 튀어나왔다.

361화 나도 마법사거든. (3)

델무드는 불길을 찢고 나온 지셀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저놈이...."

실력이 뛰어나다면 그럴 수 있다. 파이어 스톰은 광역 공격 마법이니 한 곳에 집중되는 힘은 약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려 7서클 마법이다. 어지간한 기사는 그냥 녹아 버릴 정도의 힘을 어디 하나 그을린 구석조차 없이 버텨 내다니.

상대의 마나 양이 생각보다 엄청난 모양이었다. 델무드는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지셀은 붉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델무드의 주변으로 다시 엄청난 마력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느려."

콰앙!

바닥이 부서지며 지셀의 몸이 쏜살같이 델무드를 향해 날아갔다.

어느 순간 그의 검에는 검붉은 오러 블레이드가 쭉 뻗어 있었다.

"헛!"

델무드가 마법을 완성하기도 전에 오러 블레이드가 그를 향해 휘둘러져 왔다.

화르르륵!

델무드는 순식간에 캐스팅을 취소하고 전면에 불의 방패를 생성했다.

쩌엉!

"크아아악!"

급히 만든 불의 방패는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에 허무하게 갈라졌다. 동시에 델무드의 가슴이 길게 베이며 피가 솟구쳐 올랐다.

"쳇."

지셀이 아쉬운 듯 혀를 차고 땅으로 내려왔다.

다른 놈이었으면 진작에 몸이 반으로 갈렸을 텐데, 그 순간에 오러 블레이드의 힘을 감소시키다니. 괜히 7서클 마법사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해볼 만했다.

"아직 완숙한 경지에 오르지는 않은 거 같군."

델무드는 7서클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력 운용 속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고상하게 살았던 마법사답게 전투 경험도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이런 상대를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한다.

화르륵!

지셀의 주변에 다시 검붉게 타오르는 창들이 만들어졌다.

파앙! 파앙! 파앙!

수십여 개의 창들이 마치 화살이 쏘아져 나가듯이 델무드를 향해 날아갔다.

"이놈!"

물론 이 정도에 당할 델무드가 아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불길이 일며 다가오던 창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문제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지잉―!

"블링크!"

델무드의 몸이 흔들리듯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서 나타났다.

그 비어 버린 공간을 어느 순간 나타난 지셀의 오러 블레이드가 갈라 버렸다.

델무드는 그 틈을 타 강력한 마법을 써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쐐애애애애액!

허공에서 순식간에 검은 기운이 뭉쳐서 빛살처럼 날아왔다. 델무드는 어쩔 수 없이 빠르게 마법을 써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지잉―! 지잉―! 지잉―!

사방에서 검붉은 연기가 뭉쳐져 뾰족하게 변한다. 이제는 제대로 창의 형체도 갖추지 않은 꼬챙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수십 개씩 생성되어 날아오니 델무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서클의 강력한 마법을 쓸 만큼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는 비교적 빠르게 시전이 가능한 마법으로 대응했다.

"나를 지켜라!"

파아아악!

허공에서 무언가 타오르며 불길이 반짝였다. 그 불길은 곧 그의 손바닥으로 모여들었다.

곧 불길은 무리 지어 구체 모양을 이루며 델무드의 몸을 휘감았다. 불덩이들은 루비와도 같은 화려한 붉은빛을 흘리며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퍼엉! 퍼엉! 퍼엉!

델무드를 향해 날아오던 창은 그의 주변을 맴돌던 불덩이와 부딪쳐 폭발했다.

시간을 들여 집중해야 하는 마법을 쓰기가 힘든 것뿐, 그걸 못 쓴다고 7서클 마법사의 힘이 어디 가진 않는다.

델무드는 넘치는 마력과 의지력으로 빠르게 마법을 펼쳐 냈다.

"파이어 필드."

파아아아악!

그의 발밑으로 뻗어 나간 마력이 순식간에 대지를 불태우며 퍼져 나갔다.

화염의 대지는 어느 순간 마력장의 결계를 벗어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일렁거렸다.

화염 학파의 최고 마법사답게 델무드는 단 하나의 마법으로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피, 피해라!"

휴베르트의 외침에 모두가 기겁하며 거리를 더 벌렸다.

그때 바네사가 알포이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알포이는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자꾸 그렇게 갑자기 잡지 말라니꺄아아악!"

알포이의 마력을 빨아들인 바네사는 넘실넘실 다가오는 화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쿠아 필드."

드드드드!

공기 중에 녹아 있던, 대지에 스며들어 있던 수분이 그녀의 마력에 끌려 움직였다.

그렇게 모인 수분은 곧 거대한 띠를 만들어 다가오는 화염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수증기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뿌옇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걸로도 7서클 마법사의 화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이익!"

바네사가 이를 악물며 마력을 더 모으려 하던 그때, 주변에서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시동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스 셰이프!"

"아이스 월!"

"워터 스트라이크!"

사방에서 각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다가오는 화염들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마법사 수십 명이 힘을 합하니 뻗어 나오던 화염이 주춤거리다 곧 멈췄다.

그러나 델무드는 그런 상황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불바다 속에서도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공격을 시도하는 지셀뿐이었다.

"버닝 파이어."

화르르르륵!

그의 손에서 거대한 불줄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지셀을 쫓았다.

"흐읍!"

콰아앙!

지셀이 발에 마나를 모아 땅을 찍었다. 그러자 불길이 옆으로 밀려 나가며 순식간에 꺼졌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자세를 단단하게 고정한 그는 오러 블레이드를 길게 뽑아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파아아아악!

끊임없이 그에게 쏟아지던 불줄기가 반으로 갈라졌다.

단순히 갈라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오러 블레이드에서 날카롭게 뿜어져 나간 마나는 델무드가 쏟아 내는 화염을 가르며 계속 뻗어 나갔다.

"큿!"

델무드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틀었다.

스각!

그의 로브 앞섬이 무형의 힘에 갈라졌다. 간혹 날아오는 이런 공격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파아악!

델무드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다시 사방에서 검붉은 창들이 날아왔다.

"이런!"

델무드는 급히 불덩이들을 몸 주변에 생성해 창들을 막아 냈다.

퍼어어엉!

쐐애애애액!

잠깐의 틈을 이용해 다시 또 창이 날아온다. 델무드가 공간을 이동해 피했지만 거기에도 창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델무드는 무심코 외쳤다. 마치 자신이 어디로 피할지 알고 미리 덫을 쳐 놓은 느낌이었다.

퍼퍼퍼퍼펑!

7서클 마법사답게 겨우 막아 내긴 했지만 결국 몇 개의 창에 적중당해 상처를 입고 말았다.

충격을 다스리기도 전에 또다시 창이 날아왔다. 그걸 피하자 어느 순간 지셀이 사납게 웃으며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스걱!

"크으읏...."

델무드는 이번에도 공간을 이동해 가까스로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다시 신체 일부가 베이고 말았다.

지잉―! 지잉―! 지잉―!

"큭...."

잠깐도 쉴 틈이 없다. 이렇게 가다가는 계속 밀리다가 야금야금 마력을 다 소모할 것이다.

상대하면 할수록 당해 내기 힘든 전투 방식이었다. 도대체 저 젊은 놈이 어찌 이렇게 잘 싸우는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밥 먹듯이 싸움을 하는 놈이라 듣기는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이 건방진 놈!"

그는 지셀의 실력을 인정했다. 저놈은 마법사와의 싸움에도 무척이나 익숙하다.

그만한 힘도 있었고 전투 센스도 자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결국 델무드는 전투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방법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분노에 찬 그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쏟아 내었다.

구오오오오오오!

퍼엉! 퍼엉! 퍼엉!

지셀이 쏘아 보낸 마력의 창들은 델무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폭발하고 말았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공간을 장악하며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지셀이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

7서클 마법사의 마력 양은 보통 마법사들과 차원이 다르다. 자신이 아무리 밀어붙여도 델무드는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온종일 싸워도 결판을 내기가 쉽지 않다. 자신은 마력을 폭발시킬수록 유지 시간이 짧아지니까.

하지만 델무드는 자신의 전투 방식에 말려들어 모든 마력을 폭발시켰다. 이제 힘과 힘으로 부딪쳐 결판을 낼 때였다.

과연 델무드는 단번에 끝내려는지 마법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마력을 쏟아부었다.

"파이어 필라."

콰아아앙!

지셀이 있던 곳에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불기둥은 하나가 아니었다. 지셀이 움직이는 곳마다 땅이 터지며 불이 솟구쳤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지셀은 땅에 마력이 모이는 걸 느끼자마자 바로 몸을 피했다.

실로 놀라운 감각이었다. 마법이 발현되기도 전에 그걸 느낀 것이다.

멀리 떨어져 구경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불기둥에 지셀이 먹힌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이 지셀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셀은 피하는 와중에도 델무드가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계속 마력의 창을 집어 던졌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그렇게 둘은 다른 이들의 눈에 제대로 담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싸웠다.

갑자기 마력을 빨려 쭈글쭈글해진 알포이가 바네사의 품에 안긴 채 중얼거렸다.

"영주 싸움 실력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지셀이 싸움을 잘하는 건 알포이도 알고 있다. 혼자서 수십, 수백 명을 때려죽이는 것도 봤다.

하지만 7서클 마법사 정도의 실력자와 저렇게 당당하게 맞서는 건 단연코 처음 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은 지셀이 싸우는 걸 처음 봤다.

그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며 벌벌 떨었다.

"펜리스 백작이 정말 마스터였단 말인가?"

"거기에 마법까지 쓸 줄이야...."

"저 정도면 도대체 몇 서클에 이르렀다는 거지?"

소문으로만 듣던 마스터인 것도 놀라운데 괴상한 마법까지 쓰고 있었다. 무슨 학파의 마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마법은 마법이었다.

보조로 사용한다 해도 그 파괴력과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지셀의 마법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저 마력 덩어리를 난사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적염의 마탑 사람들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하나만 해도 경지에 이르기 힘들거늘...."

"저 나이에 어떻게 검술과 마법을 저 정도까지 갈고닦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불가능해, 불가능한 일이야."

그들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셀의 실력이 뛰어나도 너무나 뛰어났다.

처음에는 당연히 자신들의 탑주가 쉽게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전황을 보니 오히려 정신없이 밀리고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7서클이 왜 초인이라 불리는가. 홀로 하나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기에 초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초인과 저렇게까지 싸울 수가 있다니!

델무드가 탑주에 오를 때 지셀은 북부에서도 무시당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런 자가 고작 몇 년 만에 대영주에 오르더니 이제는 초인에 필적하는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진한 패배감과 열등감이 마구 솟아올랐다.

콰앙! 콰아앙! 콰앙!

여전히 두 사람은 주변을 초토화하며 싸우고 있었다.

델무드는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마법에 자신의 마력을 아낌없이 집어넣어 위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렸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주변이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세상을 집어삼킨 불길 속에서 지셀은 한없이 작은 존재 같았다.

하지만 그저 사방이 불길에 잠겨 있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콰아앙!

지셀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꽃이 터져 나왔다가 사그라들었다.

두두두두두두두!

마력의 창은 끊임없이 생성되어 델무드에게 날아갔다. 수없이 불꽃에 막히고 터져 나가지만 쏘아지는 창은 끝이 없었다.

어찌나 많이 쏘아져 나갔는지 델무드는 마법을 시전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점점 뒤로 밀려 났다.

싸움의 양상은 점점 힘과 힘의 대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지셀과 함께하는 다크는 지셀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다 살짝 놀랐다.

'와, 주인 진짜 잘 싸우네.'

저런 괴물 같은 자와 이 정도로 대등하게 싸울 줄이야. 원래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싸우는 건 처음 봤다.

'아니, 그 미친 기억하고 비교해 보면 그때가 더 강했지.'

지금 보여 주는 이 경이로운 강함도 그때 본 기억에 비하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단순히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놈은 진짜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말도 안 되지만, 그게 아니면 지금 현상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꼭 물어봐야지.'

전투가 무사히 끝나려면 이 몸이 살아야 한다. 이 몸이 죽으면 다크도 끝이다. 여기서는 아무리 봐도 들어갈 만한 놈이 보이지 않았다.

지셀의 머릿속에서 다크의 음성이 울렸다.

― 주인, 마나가 슬슬 부족할 거 같다.

다크의 능력 덕분에 마나가 크게 증폭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힘을 쓰다 보니 마나가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후, 그래.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어차피 힘과 힘의 대결로 들어간 상태다. 이제 잔재주는 버리고 단번에 결판을 내야 했다.

드드드드드!

지셀이 3단계 코어를 활성화하자 어마어마한 마나가 몸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 주, 주인아! 이러면 안 돼!

다크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현재 지셀은 3단계 코어를 활성화하지 않아도 전보다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2단계 코어만 활성화를 해도 다크의 능력으로 마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3단계는 2단계보다 다시 몇 배로 더 늘어나는 힘이다. 거기에 다크의 능력이 합쳐지면 기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된다.

문제는 지셀의 육체가 아직 그 정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코어와 육체가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 몸이 터져 버릴 거라고!

그러자 지셀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전에 죽이면 돼."

콰아아아아아!

지셀의 몸에서 검붉은 마나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362화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1)

스르르륵....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나가 지셀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곧 지셀의 몸은 일렁이는 검붉은 마나로 감싸였다. 오직 그의 두 눈만이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와 같은 형상이었다.

"이놈이 지금 무슨 짓을...."

그 섬찟한 모습에 순간 델무드도 움찔거렸다. 저런 현상은 마법사인 자신도 처음 봤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상대가 모든 마력을 개방한 자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른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델무드는 이를 악물었다.

"네놈 따위가 마스터라니!"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급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과장된 소문이라 여겼다.

직접 겨뤄 보니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자신과 이 정도로 싸운다는 건 정말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걸 인정한다면 자신과 데스몬드 백작, 공작가가 전부 멍청한 짓을 한 게 된다.

북부를 뒤집든 내전을 준비하든, 가장 먼저 저놈부터 죽였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지셀에게 붙어 다니는 별명은 하나뿐이었다.

'북부의 망나니....'

속았다. 세상 모두가 저놈에게 속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었다.

"그래, 여기서 끝장을 내면 되는 일이지."

델무드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이제 조금의 마력이라도 아껴야 한다.

더 강해진 저놈을 확실하게 죽여야 하니까.

지셀은 델무드가 지상에 내려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도 델무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차피 잔기술로 싸워 봤자 시간만 끄는 결과가 나올 테니까.

델무드가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지셀의 몸이 잠깐 흔들리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앙!

검은 악마가 빛살처럼 날아온다. 그 모습을 본 델무드가 한 손을 쭉 뻗었다.

"플레어!"

지이잉―!

그의 손에서 불의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정확하게 지셀이 날아오는 방향이었다.

강대한 힘과 힘이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델무드를 향하던 지셀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광선은 끝도 없이 이어지며 계속 지셀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검붉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지셀은 검을 앞으로 내세워 그것을 가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광선이 갈라지며 양옆으로 퍼져 갔다. 그러고는 부딪치는 모든 것을 불태우며 파괴했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바빴다.

지셀은 그 강력한 힘에 맞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델무드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크으읏...."

델무드는 이 정도로 지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더 강력한 마법이 필요하다.

'단번에 죽여야 한다.'

그는 한 손으로 지셀을 견제하며 다른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

델무드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7개의 고리가 밝게 빛나며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돌아갔다.

하나의 고리가 돌아가며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린다. 두 번째 고리가 돌아가며 그 힘을 두 배로 증폭했다.

고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움직이는 마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치 펌프질을 하듯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리던 고리는 드디어 일곱 번째에 이르렀다. 하지만 몸에 더 이상 짜낼 마나가 없자 주변의 마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말이다.

주르륵....

델무드의 코와 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지 오래였다.

그 또한 목숨을 걸고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콰직! 콰지지직!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나가 델무드에게 빨려 들어가며 균형이 흐트러진 결과였다.

구오오오오!

델무드의 비어 있던 쪽 손에 초고온의 화염이 뭉쳐지기 시작한다. 7서클 최강의 파괴 마법, 인페르노였다.

'아직, 아직 부족해.'

더 마력을 모아야 한다.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저 악마 같은 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다.

쿠구구구구궁!

델무드가 마력을 모으는 중에도 지셀은 끊임없이 광선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만큼 델무드의 마법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이런 공격을 하면서도 따로 마법을 준비하다니, 역시 7서클 마법사다운 실력이었다.

7서클 마스터인 공작가의 일로이스도 이 정도의 공격은 하지 못할 것이다.

파괴력만으로 따지면 화염 학파의 마법이야말로 최고였으니까.

지셀 또한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마나를 뽑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조금 부족하다.

― 주인! 마나 소모가 너무 빨라!

다크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지셀은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힘을 더 증폭시켜라."

― 주인, 그러다가 진짜 죽는다고!

"어서!"

― 이, 이익.... 뒈져도 난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으면 안 된다. 그러면 갈 곳 없는 자신도 소멸한다. 차라리 조금 더 힘을 보태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지셀이 품은 감정의 편린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기억 한 편에서 꺼내 온 감정에 불이 붙었다.

분노.

살면서 지셀이 가장 많이 느낀 그 감정.

그 폭발하는 듯한 감정은 지셀의 몸과 영혼을 재료로 태우며 더 커져만 갔다.

콰앙!

지셀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그의 발에 밟힌 땅이 갈라졌다. 그의 걸음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 주인! 그, 근육이 찢어지고 있어!

― 뼈가 뒤틀리고 갈라지고 있다고!

― 젠장! 어떻게 걷고 있는 거야!

지셀의 근육과 뼈는 넘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죽인다.'

델무드를 죽여야 한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래야 전쟁이 수월해진다.

이건 그에게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의 이유였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지셀의 머릿속은 그저 눈앞에 있는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렵지 않다. 전생에도 저놈을 죽였다.

정수리부터 몸을 반으로 갈라서 말이다.

분노는 끝없이 그를 재촉했다. 어서 빨리 저놈을 그때처럼 죽이라고.

콰아아앙!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이미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감각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오러 블레이드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길이도 점점 더 길어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셀을 보고 델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펜리스 백작과 더 가까워지면 위험했다.

지금까지 모은 마력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살면서 이 정도로 마력을 모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또한 한계 이상으로 무리를 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도 아마 몇 달은 누워만 있어야 할 것이다.

"끝이다! 이 애송이!"

델무드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광선을 내뿜던 손을 거두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이 초고온의 화염은 상대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릴....

스각!

인페르노가 발동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무슨...."

델무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지셀의 모습이었다.

그 검에서 이어진, 곧게 뻗은 검붉은 마나는 몇 미터나 길어져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반으로 가른 것이다.

피이이이잉!

델무드가 모았던 엄청난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수리부터 몸이 반으로 갈라진 델무드의 시체는 순식간에 주변의 화염에 잡아 먹혀 재가 되었다.

동시에 지셀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어둠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지셀과 델무드, 두 사람의 감각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델무드가 마법을 썼고 지셀이 그걸 뚫고 가서 베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그 정도였다.

초인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으로, 전혀 다른 시간에서 싸우는 것이다.

휴베르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지, 진짜... 마스터라니...."

7서클 마법사를 홀로 죽였다. 방법이야 어쨌든, 마스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지셀이 마스터라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이 자리에서 증명한 것이다.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타, 탑주님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펜리스 백작에게...."

"이건 꿈이야...."

그들에게 델무드는 북부의 진정한 최강자였다. 펜리스 백작이 북부제일검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들어도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이 왕국에서 단 둘뿐인 7서클 마법사다. 마스터라 불리는 자도 왕국에 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델무드가 최강자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 북부의 망나니라 불렸던 자에게 죽고 말았다.

진홍의 마탑 제자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지셀이 그들을 검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길리언!"

"예! 영주님!"

"모두 죽여라."

"받들겠습니다!"

차앙!

길리언이 두 자루의 도끼를 손에 쥐고 달려 나갔다. 펜리스의 기사와 병사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지잉―!

기사들은 달리면서 바로 갑옷의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적들이 모두 마법사이기에 디스펠 주문을 가동한 것이다.

"어? 어?"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들이 이곳을 쓸어버릴 생각만 했지, 역으로 공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황하기는 적염의 마탑도 마찬가지였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지셀에게 휴베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만... 이게 무슨 일...."

"으아아아악!"

지셀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홍의 마탑 측에도 5서클인 장로가 둘이나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공격해 오는 길리언과 기사들을 막지 못했다.

갈바니움 마법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에게는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은 탑주가 죽었다는 충격으로 혼란스러워하며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들은 공격당하는 순간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길리언이 5서클 마법사 두 명을 상대하는 동안 기사들과 병사들은 착실하게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을 학살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처참하게 죽어 가는 마법사들을 보며 휴베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페, 펜리스 백작.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휴베르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막 나가는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학살을 벌일 줄이야.

델무드를 죽인 건 대결이라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마법사들까지 죽이는 건 명분이 없었다.

분명 진홍의 마탑이 있는 영지와 다른 지역의 마법사들이 적염의 마탑 쪽에 항의해 올 것이다. 그들에게 경계를 사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쿨럭! 나중에... 얘기합시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몸 내부가 완전히 망가졌다. 이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영주님!"

바네사가 알포이를 집어 던지고 지셀에게 달려왔다. 바짝 쪼그라든 알포이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녀는 지셀을 붙잡고 외쳤다.

"어서 치료를 해야 해요!"

휴베르트가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그, 그래! 일단 치료부터!"

대결에서 부상자가 나올 때를 대비해 준비한 포션이 전부 지셀에게 쓰였다.

바네사는 지셀의 입을 벌려 포션을 들이부었고, 마법사들이 모두 그에게 달라붙어 어설픈 치료 마법까지 써 댔다.

하지만 지셀은 내부의 장기부터 뼈와 근육이 전부 망가진 상태라 쉬이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잘못하면 죽겠군.'

마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자가 회복을 시도할 텐데 지금은 그럴 마나조차 없었다. 억지로 증폭시킨 힘을 모조리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7서클 마법사와의 싸움은 그 정도로 힘들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어.'

죽지는 않더라도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지셀은 바네사의 손목을 잡고 힘겹게 말했다.

"계속 나한테 말을 걸어. 잠들지 않게.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바네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영주가 계속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

'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무언가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을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다.

'아! 방법이 있어!'

그녀는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을 그대로 지셀에게 말했다.

"영주님! 제 말을 듣고 계속 생각하세요! 절대로 정신을 잃으시면 안 돼요! 아셨죠?"

"그래...."

"닭이 오리보다 4배 더 많고 오리는 돼지보다 9마리 적고 오리와 돼지를 합쳐 67마리면 동물의 다리는 모두 몇 개죠?"

"...."

지셀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지셀은 그냥 눈을 감고 기절해 버렸다.

"꺄아아악! 영주님!"

놀란 바네사의 비명이 뾰족하게 울려 퍼졌다.

* * *

"탑주님이... 브리반트 영지로 갔다고요?"

아멜리아의 물음에 진홍의 마탑 장로인 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아멜리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레이폴드 영지로 와 있는 상태였다.

"예, 적염의 마탑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지요."

"브리반트 백작과 친왕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글렌이 피식 웃었다.

"물론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며 압박하겠지만 당장은 힘으로 저희를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먼저 진상 조사를 하려고 하겠죠. 저희는 계속 시간만 끌고 있으면 됩니다."

"아하, 어차피 내전이 벌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자금과 식량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거래가 정지될 테니까요."

"흐음... 그러니까 그걸 제가 구해 드려야 하는 거고요?"

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이곳을 차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조에 따라 데스몬드 백작을 대신해 저희를 지원해 주셔야지요."

레이폴드의 백작이자 영주가 된 아멜리아다. 하지만 글렌은 여전히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건 그가 여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멜리아는 그런 호칭에는 개의치 않는 듯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꼭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나요? 괜히 적들에게 경각심만 줄 텐데요."

"내전 전까지 적염의 마탑을 마무리하라는 공작가의 명령을 잊으셨습니까? 적염의 마탑에는 마법사들이 많습니다. 친왕파 영주들에게 붙으면 무척 거슬릴 겁니다."

아멜리아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다른 걸 물었다.

"그나저나 탑주님은 지금 어디쯤 계실까요? 도착하셨을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브리반트 영지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확실해요?"

"네, 모든 시간을 계산하고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잡았으니까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최대한 빨리 저희에게 지원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희도 시작해야겠네요."

"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지원을 당장 해 주시겠다는 겁니까?"

글렌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아멜리아가 그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매일같이 나에게 돈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거지새끼들을 좀 치워 버리겠다는 뜻이야."

그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362화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1)

스르르륵....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마나가 지셀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곧 지셀의 몸은 일렁이는 검붉은 마나로 감싸였다. 오직 그의 두 눈만이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와 같은 형상이었다.

"이놈이 지금 무슨 짓을...."

그 섬찟한 모습에 순간 델무드도 움찔거렸다. 저런 현상은 마법사인 자신도 처음 봤다.

단지 알 수 있는 건, 상대가 모든 마력을 개방한 자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할지도 모른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델무드는 이를 악물었다.

"네놈 따위가 마스터라니!"

펜리스 백작이 마스터급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과장된 소문이라 여겼다.

직접 겨뤄 보니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자신과 이 정도로 싸운다는 건 정말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걸 인정한다면 자신과 데스몬드 백작, 공작가가 전부 멍청한 짓을 한 게 된다.

북부를 뒤집든 내전을 준비하든, 가장 먼저 저놈부터 죽였어야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누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지셀에게 붙어 다니는 별명은 하나뿐이었다.

'북부의 망나니....'

속았다. 세상 모두가 저놈에게 속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있었다.

"그래, 여기서 끝장을 내면 되는 일이지."

델무드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이제 조금의 마력이라도 아껴야 한다.

더 강해진 저놈을 확실하게 죽여야 하니까.

지셀은 델무드가 지상에 내려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도 델무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차피 잔기술로 싸워 봤자 시간만 끄는 결과가 나올 테니까.

델무드가 지상에 착지하자마자 지셀의 몸이 잠깐 흔들리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앙!

검은 악마가 빛살처럼 날아온다. 그 모습을 본 델무드가 한 손을 쭉 뻗었다.

"플레어!"

지이잉―!

그의 손에서 불의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정확하게 지셀이 날아오는 방향이었다.

강대한 힘과 힘이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아앙!

델무드를 향하던 지셀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광선은 끝도 없이 이어지며 계속 지셀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검붉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지셀은 검을 앞으로 내세워 그것을 가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광선이 갈라지며 양옆으로 퍼져 갔다. 그러고는 부딪치는 모든 것을 불태우며 파괴했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나기 바빴다.

지셀은 그 강력한 힘에 맞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드드드드드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델무드와의 거리가 좁혀진다.

"크으읏...."

델무드는 이 정도로 지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더 강력한 마법이 필요하다.

'단번에 죽여야 한다.'

그는 한 손으로 지셀을 견제하며 다른 손에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오오오오오!

델무드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7개의 고리가 밝게 빛나며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돌아갔다.

하나의 고리가 돌아가며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린다. 두 번째 고리가 돌아가며 그 힘을 두 배로 증폭했다.

고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움직이는 마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치 펌프질을 하듯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리던 고리는 드디어 일곱 번째에 이르렀다. 하지만 몸에 더 이상 짜낼 마나가 없자 주변의 마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말이다.

주르륵....

델무드의 코와 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지 오래였다.

그 또한 목숨을 걸고 한계 이상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콰직! 콰지지직!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나가 델무드에게 빨려 들어가며 균형이 흐트러진 결과였다.

구오오오오!

델무드의 비어 있던 쪽 손에 초고온의 화염이 뭉쳐지기 시작한다. 7서클 최강의 파괴 마법, 인페르노였다.

'아직, 아직 부족해.'

더 마력을 모아야 한다.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저 악마 같은 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다.

쿠구구구구궁!

델무드가 마력을 모으는 중에도 지셀은 끊임없이 광선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더.'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만큼 델무드의 마법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이런 공격을 하면서도 따로 마법을 준비하다니, 역시 7서클 마법사다운 실력이었다.

7서클 마스터인 공작가의 일로이스도 이 정도의 공격은 하지 못할 것이다.

파괴력만으로 따지면 화염 학파의 마법이야말로 최고였으니까.

지셀 또한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마나를 뽑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조금 부족하다.

― 주인! 마나 소모가 너무 빨라!

다크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지셀은 오히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 힘을 더 증폭시켜라."

― 주인, 그러다가 진짜 죽는다고!

"어서!"

― 이, 이익.... 뒈져도 난 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죽으면 안 된다. 그러면 갈 곳 없는 자신도 소멸한다. 차라리 조금 더 힘을 보태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다크는 어쩔 수 없이 지셀이 품은 감정의 편린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기억 한 편에서 꺼내 온 감정에 불이 붙었다.

분노.

살면서 지셀이 가장 많이 느낀 그 감정.

그 폭발하는 듯한 감정은 지셀의 몸과 영혼을 재료로 태우며 더 커져만 갔다.

콰앙!

지셀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자 그의 발에 밟힌 땅이 갈라졌다. 그의 걸음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 주인! 그, 근육이 찢어지고 있어!

― 뼈가 뒤틀리고 갈라지고 있다고!

― 젠장! 어떻게 걷고 있는 거야!

지셀의 근육과 뼈는 넘치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죽인다.'

델무드를 죽여야 한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래야 전쟁이 수월해진다.

이건 그에게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의 이유였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 지셀의 머릿속은 그저 눈앞에 있는 적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렵지 않다. 전생에도 저놈을 죽였다.

정수리부터 몸을 반으로 갈라서 말이다.

분노는 끝없이 그를 재촉했다. 어서 빨리 저놈을 그때처럼 죽이라고.

콰아아앙!

다시 한 걸음 나아간다. 이미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감각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오러 블레이드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길이도 점점 더 길어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셀을 보고 델무드가 눈을 크게 떴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펜리스 백작과 더 가까워지면 위험했다.

지금까지 모은 마력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살면서 이 정도로 마력을 모아 본 적이 없었다.

그 또한 한계 이상으로 무리를 한 상태였다. 이 전투에서 이기고 나서도 아마 몇 달은 누워만 있어야 할 것이다.

"끝이다! 이 애송이!"

델무드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광선을 내뿜던 손을 거두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이 초고온의 화염은 상대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릴....

스각!

인페르노가 발동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무슨...."

델무드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지셀의 모습이었다.

그 검에서 이어진, 곧게 뻗은 검붉은 마나는 몇 미터나 길어져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반으로 가른 것이다.

피이이이잉!

델무드가 모았던 엄청난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수리부터 몸이 반으로 갈라진 델무드의 시체는 순식간에 주변의 화염에 잡아 먹혀 재가 되었다.

동시에 지셀을 감싸고 있던 검붉은 어둠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지셀과 델무드, 두 사람의 감각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델무드가 마법을 썼고 지셀이 그걸 뚫고 가서 베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그 정도였다.

초인의 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감각으로, 전혀 다른 시간에서 싸우는 것이다.

휴베르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지, 진짜... 마스터라니...."

7서클 마법사를 홀로 죽였다. 방법이야 어쨌든, 마스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지셀이 마스터라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이 자리에서 증명한 것이다.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타, 탑주님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펜리스 백작에게...."

"이건 꿈이야...."

그들에게 델무드는 북부의 진정한 최강자였다. 펜리스 백작이 북부제일검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들어도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이 왕국에서 단 둘뿐인 7서클 마법사다. 마스터라 불리는 자도 왕국에 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델무드가 최강자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스승이, 북부의 망나니라 불렸던 자에게 죽고 말았다.

진홍의 마탑 제자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지셀이 그들을 검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길리언!"

"예! 영주님!"

"모두 죽여라."

"받들겠습니다!"

차앙!

길리언이 두 자루의 도끼를 손에 쥐고 달려 나갔다. 펜리스의 기사와 병사들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지잉―!

기사들은 달리면서 바로 갑옷의 마법진을 활성화했다. 적들이 모두 마법사이기에 디스펠 주문을 가동한 것이다.

"어? 어?"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들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들이 이곳을 쓸어버릴 생각만 했지, 역으로 공격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황하기는 적염의 마탑도 마찬가지였다.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지셀에게 휴베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만... 이게 무슨 일...."

"으아아아악!"

지셀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홍의 마탑 측에도 5서클인 장로가 둘이나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공격해 오는 길리언과 기사들을 막지 못했다.

갈바니움 마법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에게는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은 탑주가 죽었다는 충격으로 혼란스러워하며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들은 공격당하는 순간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길리언이 5서클 마법사 두 명을 상대하는 동안 기사들과 병사들은 착실하게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을 학살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처참하게 죽어 가는 마법사들을 보며 휴베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페, 펜리스 백작.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휴베르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막 나가는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학살을 벌일 줄이야.

델무드를 죽인 건 대결이라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나머지 마법사들까지 죽이는 건 명분이 없었다.

분명 진홍의 마탑이 있는 영지와 다른 지역의 마법사들이 적염의 마탑 쪽에 항의해 올 것이다. 그들에게 경계를 사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쿨럭! 나중에... 얘기합시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몸 내부가 완전히 망가졌다. 이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영주님!"

바네사가 알포이를 집어 던지고 지셀에게 달려왔다. 바짝 쪼그라든 알포이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녀는 지셀을 붙잡고 외쳤다.

"어서 치료를 해야 해요!"

휴베르트가 고개를 급하게 끄덕였다.

"그, 그래! 일단 치료부터!"

대결에서 부상자가 나올 때를 대비해 준비한 포션이 전부 지셀에게 쓰였다.

바네사는 지셀의 입을 벌려 포션을 들이부었고, 마법사들이 모두 그에게 달라붙어 어설픈 치료 마법까지 써 댔다.

하지만 지셀은 내부의 장기부터 뼈와 근육이 전부 망가진 상태라 쉬이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잘못하면 죽겠군.'

마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자가 회복을 시도할 텐데 지금은 그럴 마나조차 없었다. 억지로 증폭시킨 힘을 모조리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7서클 마법사와의 싸움은 그 정도로 힘들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어.'

죽지는 않더라도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지셀은 바네사의 손목을 잡고 힘겹게 말했다.

"계속 나한테 말을 걸어. 잠들지 않게. 정신을 잃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바네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영주가 계속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

'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무언가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을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다.

'아! 방법이 있어!'

그녀는 머릿속에 번뜩인 생각을 그대로 지셀에게 말했다.

"영주님! 제 말을 듣고 계속 생각하세요! 절대로 정신을 잃으시면 안 돼요! 아셨죠?"

"그래...."

"닭이 오리보다 4배 더 많고 오리는 돼지보다 9마리 적고 오리와 돼지를 합쳐 67마리면 동물의 다리는 모두 몇 개죠?"

"...."

지셀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지셀은 그냥 눈을 감고 기절해 버렸다.

"꺄아아악! 영주님!"

놀란 바네사의 비명이 뾰족하게 울려 퍼졌다.

* * *

"탑주님이... 브리반트 영지로 갔다고요?"

아멜리아의 물음에 진홍의 마탑 장로인 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재 아멜리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레이폴드 영지로 와 있는 상태였다.

"예, 적염의 마탑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지요."

"브리반트 백작과 친왕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그러자 글렌이 피식 웃었다.

"물론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며 압박하겠지만 당장은 힘으로 저희를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먼저 진상 조사를 하려고 하겠죠. 저희는 계속 시간만 끌고 있으면 됩니다."

"아하, 어차피 내전이 벌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자금과 식량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거래가 정지될 테니까요."

"흐음... 그러니까 그걸 제가 구해 드려야 하는 거고요?"

글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이곳을 차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약조에 따라 데스몬드 백작을 대신해 저희를 지원해 주셔야지요."

레이폴드의 백작이자 영주가 된 아멜리아다. 하지만 글렌은 여전히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건 그가 여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멜리아는 그런 호칭에는 개의치 않는 듯 살며시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꼭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나요? 괜히 적들에게 경각심만 줄 텐데요."

"내전 전까지 적염의 마탑을 마무리하라는 공작가의 명령을 잊으셨습니까? 적염의 마탑에는 마법사들이 많습니다. 친왕파 영주들에게 붙으면 무척 거슬릴 겁니다."

아멜리아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다른 걸 물었다.

"그나저나 탑주님은 지금 어디쯤 계실까요? 도착하셨을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브리반트 영지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확실해요?"

"네, 모든 시간을 계산하고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잡았으니까요.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최대한 빨리 저희에게 지원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희도 시작해야겠네요."

"네?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지원을 당장 해 주시겠다는 겁니까?"

글렌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아멜리아가 그를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매일같이 나에게 돈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거지새끼들을 좀 치워 버리겠다는 뜻이야."

그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363화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2)

글렌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거지라니? 여기 어디에 거지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멜리아가 자신들을 거지새끼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걸 깨달았다.

"거지라니, 지금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야. 공작가에서 돈을 받고 데스몬드 백작에게도 돈을 받고서도 아직도 적염의 마탑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나에게도 돈을 달라고? 네놈들이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지?"

"무, 무슨...."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계속 돈만 달라는 놈들이 거지새끼들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내가 신전에서 봉사하러 나온 사람처럼 보여?"

"이, 이...."

모욕적인 아멜리아의 말에 글렌은 당황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공작가와 데스몬드 백작에게 돈을 어마어마하게 받기는 했다.

하지만 솔직히 억울한 면이 있었다. 그 돈은 다 적염의 마탑을 말려 죽이려고 썼던 것이다.

성공만 한다면 지금껏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설사 자신들이 실패했더라도 아멜리아 따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그대의 임무는 데스몬드 백작을 대신해 우리를 지원하는 것이오!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소!"

그러자 아멜리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용납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내 당장 탑주님에게 가 이 일을 고하겠소! 공작가도 절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아니, 넌 돌아가지 못해."

"감히!"

아멜리아의 의도를 눈치챈 글렌이 급히 마력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다.

푸욱!

"커헉!"

글렌은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톱날 형태의 검날을 내려다보았다.

기습적으로 글렌의 배를 찌른 자는 바로 살쾡이 밀매단의 단주, 칼레브였다.

"네, 네년이 감히 배신을...."

글렌이 피를 토하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갑자기 아멜리아가 이런 짓을 벌이는지 그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그저 아멜리아가 배신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스걱!

어느새 검을 거둔 칼레브가 아무 말 없이 글렌의 목을 베었다.

글렌은 그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아멜리아는 대전을 구르는 그의 목을 바라보며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건방진 놈."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콘라드."

악티움 상단의 상단주 콘라드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예, 영주님."

"칼레브와 함께 위장 상단을 이끌고 가서 진홍의 마탑을 쓸어버려라. 델무드가 교류회를 마치기 전에 끝내야 하니 서둘러."

"누구 짓으로 남길까요?"

"펜리스."

"알겠습니다."

콘라드는 아멜리아의 뜻을 이해했다. 진홍의 마탑은 공작가의 숨겨진 칼이다. 지금 진홍의 마탑이 없어져도 공작가는 대놓고 나설 수 없다.

공작가의 힘을 약화하려는 아멜리아에게는 무척이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자신의 탑이 망가져서 분노한 델무드는 어떻게든 지셀과 싸우려 할 것이다.

아멜리아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델무드가 7서클 마법사라 해도 펜리스를 홀로 감당할 수는 없겠지."

분노에 미쳐 날뛰다가 죽든지, 기반을 모두 잃었으니 몸을 피하든지 둘 중 하나. 만약 싸운다면 펜리스도 상당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아멜리아에게는 이득이었다. 자꾸 공작가를 앞세워 돈을 달라고 달라붙는 거지새끼들도 치워 버릴 좋은 기회였다.

옆에서 멍하니 듣고 있던 산적 출신 울칸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저요! 저도 갈래요! 제가 사람 죽이는 일을 제일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요새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잘되었다며 울칸은 방방 뛰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너무 티가 나서 안 돼."

진홍의 마탑은 대도시 안에 있다. 울칸 같은 놈이 날뛰면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 말에 울칸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대신 다른 임무를 줄게."

"오오! 무엇입니까?"

촤악.

아멜리아가 지도를 펼치고 한 곳을 짚었다.

"내전 전에 처리할 건 다 처리해야지. 공작가에서 보낸 대리인이 오고 있을 거야. 애들 데리고 가서 격살해. 위장하는 거 잊지 말고."

울칸은 북부의 산적 대부분을 이끌고 있다. 산적으로 위장해서 누구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아멜리아가 짚어 준 곳은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어지간한 인원은 흔적도 없이 죽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울칸이 신이 나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갔다.

아멜리아는 나머지 가신들에게도 병력을 정비하고 식량 보유 상황을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자신들도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공작가가 이기든 친왕파가 이기든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모든 걸 부수고 새로 쌓아 올릴 생각이었으니까.

공작가와 친왕파가 싸우는 동안 기회를 보며 양측의 힘을 약화하는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아멜리아가 지금 원하는 건, 오직 혼란뿐이었다.

* * *

'다리가... 몇 개인 거지?'

바네사가 낸 동물의 다리 문제를 고민하던 지셀이 눈을 번쩍 떴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서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영주님!"

그가 눈을 뜨자 바네사가 기쁜 표정으로 외쳤다. 옆에 있던 길리언과 기사들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셀은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

"다리는 몇 개.... 아니, 얼마나 지났지?"

길리언이 바로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 지났습니다."

"오래도 누워 있었군."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습니다."

"그래, 7서클 마법사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지셀이 피식 웃었다. 블러드 퓌톤이랑 싸울 때도 정신을 잃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몸 안의 남은 힘을 남김없이 짜내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끄응...."

겨우 상체를 든 지셀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전히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마나는 한 방울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 정도면 너무 일찍 깨어난 거 같은데?'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지셀 정도의 강자도 족히 한 달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오래 잔 거 같지만 몸 상태에 비하면 너무 일찍 일어난 것이다.

의아해하고 있자 머릿속에서 지친 음성이 들려왔다.

― 으으... 드디어 일어났네.

'으음?'

― 젠장! 주인 죽을 뻔한 거 알아? 나 아니었으면 죽었다고!

'오, 어떻게 한 거지?'

― 어떻게 하긴! 꺼져 가는 생명력을 내가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있었지! 그리고 주인의 감정을 계속 건드렸어.

'감정?'

― 그래! 그 망할 놈의 분노 말이야! 그냥은 '다시' 못 죽겠다는 것처럼 엄청나게 타오르더라고. 계속 그걸 자극하니 죽을 듯하면서도 안 죽더라.

지셀은 쿡쿡 웃었다. 다크에게 이런 능력도 있을 줄이야.

다크도 죽기 싫으니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야 했을 것이다.

그 노력이 보여 괜히 웃음이 나왔다.

―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 항상 그렇게 무모하게 싸우나? 오늘만 살아? 내일 없어?

'내 전생을 봤으면 알 텐데.'

― ....

충분히 알고 있다. 전생에 지셀은 아예 목숨을 내놓은 수준으로 싸워 댔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모든 전투마다 각오가 남달랐다는 뜻이다.

다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주인... 정말 과거로 돌아온 거야?

'그래.'

지셀은 편하게 얘기했다. 어차피 다크는 전생의 기억을 일부 훔쳐봤다. 그러니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다.

다크는 대답을 듣고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전생에 그럼 어땠어? 그렇지! 그래서 날 찾아와서 잡을 수 있었구나! 진짜야? 진짜 과거로 돌아온 거 맞아?

다크가 호들갑을 떨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안 믿을 수도 없기에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천천히 물어봐라. 지금은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다크의 입을 다물게 한 지셀이 길리언에게 물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나?"

그러자 길리언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진홍의 마탑이 멸망했습니다."

"내가 델무드를 죽였잖아? 나머지도 죽였고. 그러니 당연히 멸망하겠지."

"그게 아니라... 마탑이 공격당해 남은 제자들도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아예 잿더미가 된 수준이라고 합니다."

지셀이 살짝 놀랐다. 델무드가 죽었으니 마탑이 망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북부 제일을 다투던 진홍의 마탑이다. 남은 제자들도 꽤 많고 실력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아예 잿더미가 됐다니.

"누구한테 공격당한 거지?"

길리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그게... 우리가 그랬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실제로 우리 군의 복장을 하고 신분증을 지닌 시체가 몇 구 발견됐습니다."

지셀이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클로드야?"

이런 미친 짓을 대범하게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이 북부에 별로 없다. 그래서 미친놈 하나부터 먼저 집어서 물어봤다.

"아닙니다. 총관은 오히려 경계 태세를 올렸습니다. 괜한 누명을 쓴 상태니까요. 아직은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흐음...."

지셀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한 사람을 떠올리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아멜리아군.'

그녀라면 그럴 만한 실력도, 실행력도 충분했다. 왜 그랬는지도 그림이 그려졌다.

'먼저 공작가의 힘부터 깎아 내겠다는 거겠지. 아직은 친왕파가 열세니까.'

만약 자신이 이곳에 와 델무드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귀찮아졌을 뻔했다.

적염의 마탑은 멸망했을 것이고 남은 진홍의 마탑 마법사들은 펜리스와 싸울 게 분명하다.

일대일 대결로 처치해서 다행이지, 7서클 마법사가 수십 명의 마법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타나면 지옥이 펼쳐진다.

그렇게 되어도 결국 이기긴 했겠지만 펜리스도 상당한 피해를 봤을 것이다.

아멜리아는 공작가의 숨겨진 힘도 하나 날려 버리고 동시에 펜리스의 전력도 깎으려고 한 것이다.

'기회만 나면 어떻게든 이용하는군.'

지셀은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판을 깔아 놓긴 했지만, 아멜리아도 뭐 하나 놓치지 않았다. 참으로 집요했다.

물론 진홍의 마탑은 어차피 자신이 멸망시키려 했다. 나머지는 아멜리아가 처리해 줬으니 일이 더 편해지긴 했다.

아멜리아 입장에서는 절반의 성공일 테고.

"됐어.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델무드를 죽인 건 내가 맞으니까. 욕 좀 얻어먹고 말지, 뭐."

이제 누가 나머지를 쓸어버렸든 상관없다. 델무드를 죽인 이상 결국 사건의 원흉은 지셀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작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진홍의 마탑 배후에 그들이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당장은 이만 갈며 분통만 터뜨릴 게 뻔했다.

"슬슬 떠날 채비를 하자. 영지로 돌아가서 준비할 게 많다."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백작님!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북부 최강! 소드마스터!"

휴베르트는 호들갑을 떨며 지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은 반짝이다 못해 꿀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휴베르트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기뻐 날뛰었다.

자신들과 세력을 다투던 진홍의 마탑이 폭삭 망해 버렸다. 드디어 다시 북부 제일 마탑이라는 명성을 되찾은 것이다.

지셀이 다 해 주긴 했지만 누가 한 일인지는 상관없었다. 이 북부에서 적염의 마탑이 제일 강하면 된다.

그래야 돈도 많이 벌고 계속 사치를 부릴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진홍의 마탑을 완전히 다 쓸어버렸다면서요? 아휴, 진작에 저한테 말씀을 좀 해 주시지. 그러면 우리도 한 손 보탰을 텐데."

휴베르트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실제로 그러자고 했으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이제 그렇게 빠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 그렇지요? 결과는 좋긴 하다만 이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진홍의 마탑은 공작가가 키운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적염의 마탑을 없애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 말에 휴베르트와 장로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공작가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니.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 왜 공작가가 진홍의 마탑을 이용해서 우리를 치려고 한 겁니까?"

지셀은 그간 있었던 일들과 공작가가 곧 내전을 일으킬 거란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 그럴 수가.... 그러면 공작가는 내전을 일으키기 전에 방해가 될 만한 요소를 다 제거하는 중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적염의 마탑을 없애는 것도 그 일환이죠. 이미 다른 지역의 마탑 몇 개가 망했다는 건 들었을 겁니다."

휴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이유로 몇 군데의 마탑이 사라지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 공작가의 짓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지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법사들의 불문율도 소용이 없다. 내전이 일어나면 이미 공작가의 소속이 아닌 마탑들은 죄다 없어진 상태일 테니까.

그러면 공작가가 거머쥔 마탑들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걸 이미 몇 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지셀은 휴베르트에게 경고했다.

"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가 공작가에게 죽든지, 아니면 함께 싸우든지 말입니다."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싸우기 싫다.

휴베르트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우, 우리가 공작가에 붙으면?"

그러자 지셀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한테 먼저 죽겠죠? 우리가 더 가까운데. 아니, 그냥 지금 할까요? 길리언."

길리언이 도끼를 꺼내 들고 고개를 숙였다.

"명만 내려 주십시오."

지셀이 하는 짓을 보고 있던 휴베르트와 장로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예전에는 룬스톤 가격을 멋대로 올리더니, 이제는 죽이겠다고 대놓고 협박을 한다.

그런데 막을 방법이 없다. 이제 이놈은 북부 최강이었으니까.

'역시 이런 막 나가는 놈하고 인연을 맺으면 안 됐는데!'

휴베르트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한 방울 맺혔다.

364화 누가 누굴 괴롭혀? (1)

휴베르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펜리스 백작은 마스터에 오른 게 확실했다. 그 말고도 다른 제자들도 그의 힘을 똑똑히 보았다.

들불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명실공히 북부 최강은 이제 펜리스 백작이다. 이런 자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었다.

휴베르트는 잽싸게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했다.

"아하하하, 백작님 당황하셨구나? 아휴, 우리 사이에 그럴 일은 없죠."

"그렇죠? 우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요? 룬스톤하고 식량 지원도 끊기기 싫으면 같이 싸워야죠."

"다, 당연한 말씀을...."

당황한 휴베르트가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이제 빠져나가기는 정말 글렀다. 펜리스 백작이 주는 룬스톤과 식량이 없으면 마탑이 휘청거릴 상황이었다.

너무 남에게 의존한 결과가 이제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틈을 봐서 적당히 발만 걸칠까 고민하는데 지셀의 말이 이어졌다.

"마탑을 지킬 소수의 마법사만 제외하고 전부 브랜포드 후작에게 보내십시오. 후작님이 알아서 마법사가 부족한 영지에 보내 줄 겁니다."

"끄응... 지금요?"

"네, 당장."

정말 꼼짝없이 내전에 끼게 생겼다. 휴베르트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짜는 없다니까....'

괜히 룬스톤과 식량을 그렇게 많이 주고, 진홍의 마탑을 박살 내 준 게 아니다.

대접을 거하게 받았으니 이제 먹은 값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전쟁 때 봅시다."

지셀이 웃으며 말하자 휴베르트는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과의 일을 정리한 지셀은 길리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어서 빨리 영지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탑 밖으로 나온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뭐야?"

적염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처음 룬스톤을 팔러 왔을 때는 문지기마저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달리, 마법사들이 모두 나와 정중하게 배웅을 해 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셀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마탑 도시의 사람들까지 나와 환호를 보냈다.

"와아아아! 펜리스 백작이다!"

"북부의 소드마스터!"

"여기 좀 봐 주세요!"

일주일 사이에 소문이 어찌나 퍼졌는지 거리마다 군중들이 꽉 들어찼다.

북부에서 마스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신기해하고 기뻐했다. 비록 다른 영지 사람이라지만 같은 북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스터가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지셀은 자신들의 숙원을 풀어 준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홍의 마탑을 지셀이 밟아 버렸으니까.

다들 적염의 마탑에 기대어 사는 처지인지라, 당연히 북부 제일 마탑의 자리를 뺏어간 진홍의 마탑이 너무 싫을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턱을 치켜들며 손을 흔들어 주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꺄아아아악! 펜리스 백작님!"

"오늘부터 전 백작님의 추종자예요!"

"저도 펜리스로 갈 겁니다!"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아무래도 도미닉 같은 추종자가 더 많아질 모양이었다.

지셀은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야."

확실히 전생보다 인기가 많아졌다. 다시 생각해도 전생에서는 조금 이상한 놈들만 자신을 좋아했다.

'상처가 너무 많아서 무서워서 그랬나? 아니면 직업이 문제였나?'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지금 잘되었으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영지로 돌아왔지만 지셀은 쉬지 못했다.

클로드는 지셀을 보자마자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달려왔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영주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손님?"

"로드리크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오...."

생각보다 빨리 왔다. 벌써 마르틴이 사망했다는 걸 알아낸 모양이었다.

여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한 지셀은 천천히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앉아서 기다리자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신을 기사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남의 영지에 와서도 별로 긴장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건방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가장 앞에 선 자가 지셀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북부의 신성이신 펜리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저는 로드리크 후작가에서 온 테넌트라고 합니다. 백작님의 영지에 여신의 축복이...."

"그래, 긴 예는 필요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하라."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끊는 지셀을 테넌트가 힐끗 바라보았다.

'북부의 망나니라더니.'

젊은데 성질도 급해 보였다. 예의는 내팽개친 놈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테넌트는 바로 허리를 펴고 말을 이었다.

"후작님의 명령을 받아 백작님에게 작은 부탁을 하나 청하러 왔습니다."

"뭐지?"

"드레이크 용병단을 저희에게 넘겨주시길 바랍니다."

테넌트의 표정에는 지셀이 당연히 요청을 들어줄 거라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그는 상대가 후작가의 요청을 거절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지셀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이유는?"

"그들이 마르틴 공자를 살해하고 도망갔다는 단서를 입수했습니다."

역시 로드리크 후작가다. 이들은 정말 확신하고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 해도 드레이크 용병단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이미 그 일은 자신이 책임을 지기로 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절대 피하지 않는 남자다. 지셀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거절한다. 드레이크 용병단은 이미 펜리스 용병단에 흡수된 상태다."

"후작님은 큰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후작한테 받을 건 별로 없어 보이는군."

"후작가와 원한을 맺으실 생각입니까?"

"못 할 것도 없지."

"...."

테넌트는 잠시 지셀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북부 최강이라 불리는 펜리스 백작이라 하더라도 로드리크 후작가에 비할 바는 안 된다. 서부는 북부와는 경제 기반부터가 달랐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가.'

북부 최강자라는 칭호를 얻으니 왕국에서 자신이 제일 강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테넌트는 요청이 거절되었음에도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지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슬쩍 살필 뿐이었다.

'마스터급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군. 얼굴도 창백하고 병약해 보인다. 기세도 약해 보여.'

사신으로 온 테넌트는 후작가가 믿고 보낼 정도로 강한 기사이자 기사단장이기도 했다.

원래 이런 일에 직접 나설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왕국에서 유명한 펜리스 백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무위를 판단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소문이 과장된 모양이군. 오히려 옆에 있는 저 하얀 머리가 더 강해 보인다. 저자가 하얀 사자라 불리는 길리언인가?'

데스몬드군에 맞서 싸운 길리언의 위명은 이제 왕국 전체로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카오르가 들으면 분통 터져 했을 테지만.

지셀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힐끗 살펴본 테넌트는 내심 비웃음을 흘렸다.

'수하들의 활약이 백작의 공으로 포장된 모양이군. 흔한 일이지.'

테넌트는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고 말았다.

현재 지셀은 마나가 바닥이 나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가 바로 며칠 전에 7서클 마법사인 델무드와 싸웠다는 걸 모르는 테넌트는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께서 이 북부에서 가장 강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드리크 후작가와 적대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습니다. 드레이크 용병단을 저희에게 넘길 의향이 없으십니까?"

"없다."

간단명료한 지셀의 대답에 테넌트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 또한 서부 최강이라는 후작가의 가신으로서 자부심이 컸다.

당연히 상대와 협상하기 위해 매달리는 짓 따위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 이제 로드리크와 펜리스는 적이 될 것입니다."

"마음대로 해라."

"다음에는 전장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테넌트는 고개를 숙인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 다시 펜리스 가신들의 표정을 살폈다.

'뭐지? 이놈들은?'

무려 서부 최강의 로드리크 후작가가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상 전면전은 벌이지 않더라도 펜리스 영지 정도는 괴롭히고 망하게 할 힘이 충분한 후작가다.

그런데 얼굴에 긴장감이 보이는 놈이 하나도 없다. 다들 뭔가 그냥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듯 뚱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그 부분은 테넌트가 정확하게 봤다. 펜리스의 가신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격하든 말든.'

'어차피 싸울 놈들인데 뭐.'

'하도 협박을 많이 듣고 살아서 안 무섭네.'

지금까지 지셀과 싸운 놈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펜리스는 언젠가 공작가와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로드리크 후작가와 싸우게 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겁먹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간의 경험으로 다들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상태였으니까.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테넌트는 대전 밖을 나서며 결국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친놈들."

아무래도 힘을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릴 놈들 같았다. 미친놈들한테는 매가 약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테넌트만 한 게 아니었다.

클로드는 떠나가는 테넌트의 등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여튼 맞아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 많아요."

웬디는 힐끔 클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 * *

"그 애송이가 거절했다고?"

"네,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쿠쿠쿡...."

테넌트의 보고를 받고 로드리크 후작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무척이나 크고 화려했다. 그 주인의 몸이 남들보다 몇 배는 비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로드리크 후작의 외형을 두고 비웃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은 서부 전체를 거느리는 대영주이자, 잔인하기로는 왕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으니까.

턱살을 출렁이며 한참을 웃은 로드리크 후작이 말했다.

"그래, 그 애송이를 직접 본 감상은 어떻던가?"

"소문에 과장이 조금 있었던 거 같습니다."

"과장이라?"

"마나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였고 몸에도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만...."

"다만?"

"곁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뛰어나 보였습니다."

"그 애송이가 북부에서 활약했다는 건 사실이라 하지 않았나? 마스터에 근접했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야. 왕국의 모든 정보부가 확인한 일이야. 그놈이 싸우는 걸 직접 본 사람도 많고."

"그래서 더 의아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분명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로드리크 후작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테넌트는 상급 기사로 후작가에서도 강하기로 손에 꼽히는 자다. 그런 사람이 직접 보고 왔으니 소문보다 더 정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만큼 의심도 엄청나게 많았다.

"괜히 그런 소문이 날 리가 없다. 마법이든 뭐든, 분명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을 거야. 그 애송이를 북부제일검이라 생각하고 작전을 짜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까. 테넌트는 자신이 직접 보고 온 내용이 무시당했음에도 반박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마음속에 스며든 멸시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테넌트가 보고한 내용을 두고 조금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참모에게 물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서 그냥 쓸어버리는 건 어떤가?"

"어차피 내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냥 공작가와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습니까?"

"쯔쯔쯧.... 그놈이 지금 내 요청을 거절했잖아. 그걸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그리고 내전이 일어나면 우리는 수도부터 점령해야 하는데 언제 북부로 가겠느냐."

로드리크 후작은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지셀이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것에 대해 더 화가 나 있었다.

그의 목적은 드레이크 용병단을 다시 회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죄를 내려야 한다.

자식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다. 감히 로드리크 후작가를 건드린 자는 죗값을 치른다고 모두에게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지금 놈들을 잡아야 한다. 내전이 일어난 뒤에 잡아 죽이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

참모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공작가의 전략은 북부를 봉쇄하고 빠르게 수도와 동부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싸움을 걸면 영지전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게 어때서?"

"네?"

"용병단 하나도 제대로 못 거느리는 못난 자식놈이 영지전의 명분을 만들어 줬는데 우리가 왜 피해야 하지?"

"그, 그게 그러니까...."

"물론 거리가 있으니까 그놈이 북부에만 처박혀 있으면 조금 힘들긴 하겠지. 일단 적당히 나오도록 자극을 좀 할 생각이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 애송이 놈의 화장품이 왕국 전역으로 잘 팔리고 있지?"

"예, 그렇습니다. 서부의 귀족들도 많이 구매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선 그것부터 좀 건드려라. 서부로 오는 가장 큰 화장품 상단부터 쳐."

그러자 참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브랜포드 후작가가 함께 하는 사업입니다. 건드리면 브랜포드 후작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나보다 강한가?"

"...."

참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드리크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껏해야 왕실을 볼모로 붙잡아 권력을 휘두르는 놈 아닌가. 정말 내가 더 약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로드리크 후작가는 서부 최대의 귀족이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영주이기도 했다.

물론 브랜포드 후작도 왕국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자다. 하지만 로드리크 후작은 자신 혼자서 반란을 일으켜도 왕국을 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강대한 귀족이었다. 단지 공작가가 더 강하기에 그 야망을 접고 손을 잡았을 뿐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끼어들어도 상관없다. 여차하면 내 손으로 직접 내전을 일으켜도 되니까."

로드리크 후작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365화 누가 누굴 괴롭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