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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 전쟁의 시작(2) >

혁준은 커다란 천막 앞에 멈춰 섰다.

[6사단 각성자 지부]

천막 앞 팻말에는 그가 원하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단 본부 바로 옆에 있는 천막이었다. 웬일인지 천막 안은 한산해 보였다.

어차피 각성자 등록을 위해서 온 것뿐이었으니, 한산한 것은 상관없었다.

그는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은 연대 본부나 사령부 천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천막 벽에 붙어 있는 각종 표와 지도, 그림과 글이 가득 덮여있는 화이트 보드. 그리고 회의를 위한 긴 탁자와 의자들.

다른 점이 있다면 통신기 대신 자리한 이상한 전자장비와 그 앞에 앉아 그를 바라보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여성은 군인이 아니라 사무직 여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 소년과 같이 싸웠었던 그였다. 늙은이든 여자든 다 같은 각성자일 뿐이었다.

"여긴 각성자 전용 막사예요. 일반 군인이 무슨 일로 온 건가요?"

그녀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병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소대에 소속된 각성자와의 트러블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골치 아픈 일뿐. 그녀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혁준이 입을 열자 그녀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각성자 등록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네? 정말요?"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것 같았다.

"와, 전투 전에도 각성하는 사람이 나오네요. 축하드려요!"

순수한 축하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 맞다. 우선 확인을 해봐야 하거든요. 벌써 이걸 쓸 줄 몰랐네요."

그녀는 뒤쪽에 밀어둔 전자장비를 질질 끌고 왔다. 병원에 있는 측정기처럼 보이는 장비였다.

"확인을 위해서 검사기에 잠시 손을 올려봐 주시겠어요?"

"이게 마나 측정기입니까?"

"네, 현재 등급하고 특성을 측정하는 검사기에요."

그는 앞에 놓인 장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커도 너무 컸다.

몸 주인의 기억으로는 이쪽 세상도 마나 과학이 상당히 발전한 것 같았는데, 저런 크기의 측정기라니.

휴대폰 형태의 측정기를 기억하는 그로서는 뒤떨어진 측정기의 모습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여성이 말한 위치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가 서류를 하나 꺼내더니 혁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구영철이고.... 어느 부대 시죠?"

그는 여성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이름은 혁준이었지만, 이제 혁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의 기억이 남아 있지만, 그 기억이 환상인지, 꿈인지, 전생이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군, 이제 난 구영철인건가."

머릿속에는 두 기억이 다 들어있었다. 자신은 분명 혁준이라는 자각이 있었지만, 이제는 구영철로 살아야 했다.

그는 중대와 소대를 알려주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비를 가동했다.

"시계 정도로 작게 만든 것도 있는 모양이던데, 아직 현장에는 보급이 되지 않고 있어요. 뭐, 솔직히 그렇게 작게 만들 이유도 없고요."

혁준, 아니 영철은 여성의 말에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럼, 측정을 시작할게요.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요."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왕 검사하는데 좋은 결과를 받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그는 측정값을 올리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등급 자체는 넘어설 수 없었지만, 그 안에서는 충분히 값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몸속의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의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예상대로 F급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은 놀란 표정 지었다.

"와. 처음 등록한 사람치고 대단한 수치인데요? 다음 등급까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요."

그녀는 감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감탄은 전에도 많이 받아봤었다.

오히려 예상보다 여성의 감탄이 크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데, 특성은 알 수 없다고 나오네요. 특수한 특성인가 봐요. 혹시 무슨 특성인지 모르시나요?"

여성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 몸의 특성은 빙의일 가능성이 컸다. 그도 들어본 적이 없는 특성이었다. 정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좀 뒤에 알아차리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럼, 서류작업을 시작할게요."

여성은 이리저리 서류를 꺼내서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제가 담당자가 아니라서 조금 시간이 걸릴 거에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제가 남는다고 했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과 달리 여성은 빠르게 서류를 작성해 나갔다. 그리고, 바로 사단 본부에 연락했다.

"병사 중에 각성자가 나왔습니다. 구영철 상병이고요. 부대는…."

전화 한 통으로 해결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여성의 위치가 낮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각성자의 위치가 생각보다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전화를 끊고 그녀가 서류를 확인하면서 혁준, 아니 영철에게 말했다.

"현재 군인이라서 제대 때까지는 국가 소속 각성자 신분을 유지해야 할거에요. 지금, 일반인 각성자들도 징집이 되는 상황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그도 상황은 알고 있었다. 대규모 웨이브가 벌어졌으니 징집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우선, 후방으로 가서 각성자 교육을 한 달 정도 받으셔야 해요."

"잠시만요."

그는 손을 들어 설명을 막았다.

"전, 교육을 안 받아도 됩니다."

"네?"

"바로 싸우고 싶습니다."

하루빨리 등급을 올려야 했다. 괜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규정이 있어서…."

"전 그런 교육이 없어도 충분히 싸울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테스트를 받아도 됩니다. 결정을 내릴 위치가 아니라면 책임자를 부르셔도 됩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여성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결정을 내릴 수도 있긴 한데…."

역시, 예상보다 위치가 높은 여성이었다.

"당신 말만 믿고 결정하기는 어렵겠네요. 사람을 부를게요. 잠시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철이 기다려보았지만, 그녀는 움직일 생각도,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연락 안 합니까?"

결국, 참지 못한 영철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는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좀 전에 연락했어요. 거의 다 왔어요."

영철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특성이었다.

"설마…."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천막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병사 중에 각성한 사람이 있다고?"

방탄복 일체를 차려입은 덩치가 큰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몸 주인도 알고 있는 남자였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남자 각성자이자 각성자 협회장. 박진혁이었다.

갑작스러운 유명인사의 난입에 영철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급하게 여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설마, 성함이…."

"아, 제 이름을 말씀 안 드렸네요. 설연이라고 해요."

"협회 이사인 텔레파시 각성자...."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협회 이사 중에 강력한 텔레파시 능력자가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영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웅.

그는 급하게 머리에 마나를 둘렀다.

텔레파시 능력자일 줄이야. 지금까지 떠올렸던 생각들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세요. 평상시에는 감각을 차단해 놓고 있어요. 영철 씨의 생각을 전 알지 못해요.

방어가 소용없었다.

머리에 마나를 둘렀지만, 머릿속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각성자였다. 자신이 있던 세상에서도 이 정도 텔레파시 능력자는 보기 힘들었다.

"지금은 어떻게…."

"표정으로 알아차린 거예요. 제 정체를 알면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설연의 말에도 그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지도 몰랐다.

"그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교육을 안 받겠다니."

진혁 협회장은 이미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모두 들은 상황이었다.

"본인이 교육 없이도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하는데, 전 전투 각성자가 아니라서 확인이 어려워요."

설연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찌릿.

몸에서 저릿한 느낌이 흘렀다.

역시 협회장이라서 그런지 강한 각성자였다. 적어도 두 등급 이상 차이가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자신의 실력이라면 인정을 받기는 충분했다.

"테스트가 필요하다면 하셔도 됩니다."

영철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양손을 털었다.

"아시겠지만, 각성자 협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테스트 삼아 한번 공격해 볼 테니 막아보십시오."

영철은 씩 웃었다. 기대하던 바였다.

그는 양손을 들어 올리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나 연공법에 따라 마나를 순환시켰다.

자신이 있던 세상에서 수많은 싸움 끝에 정리한 마나 연공법이었다. 가지고 있는 마나를 몸속에서 움직여 몇 배나 강한 속도와 힘을 만드는 다시 없을 마나 활용법이었다.

세상이 점점 느려졌다. 근육에 힘이 붙고 솜털이 일어났다. 상대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것 같았다.

등급이 낮아져서 아쉬움이 컸지만, 이곳에서도 마나 연공법은 똑같이 효과적이었다.

그는 마나의 흐름대로 발을 내밀고, 손을 펼쳤다. 마나 체술의 기본자세였다.

등급 차이가 꽤 나서 막아내기는 무리였지만, 마나 연공법과 마나 체술만 가지고도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는 충분했다.

예상대로 상대는 무척이나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협회장은 그와 비슷한 자세를 잡았다.

'따라 해본다고 되는 게 아니야.'

그는 똑같이 따라 하는 협회장을 내심 비웃었지만, 말없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갑니다!"

쿵!

협회장은 크게 발을 내디뎠다. 발에서 먼지가 일고, 협회장이 쑥 그에게 다가왔다.

한걸음에 다가온 협회장을 보고 영철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발경?"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나 연공법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협회장이 그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평범한 내지르기였다.

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인이 알아차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큭!'

영철도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영철은 필사적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주먹이었다. 가만히 서서 완벽하게 흘려내기는 불가능했다.

영철은 필사적으로 양손을 휘둘러 다가오는 주먹을 밀어냈다.

동시에 그는 함께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다가오던 주먹은 막아서는 그의 손을 타고 넘어 도망치는 그를 쫓아왔다.

주먹이 눈을 가득 메웠다.

콰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찌익!

이어서 천막이 찢어지며 영철이 천막 밖으로 튕겨 나갔다.

"아차! 실수."

진혁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고,

"협회장님! 이제 막 각성한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아니, 자세를 잡고 마나를 운용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경훈 형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어서..."

"비교할 게 따로 있죠!"

"마지막에 주먹을 멈춰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정말 제대로 배웠던데?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천막 속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영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에 주먹 자국이 떡하니 나 있었지만, 그는 그걸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된 세상이야."

이제 시작이었건만,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야 세계 최고의 각성자가 되는 것도 세상을 지키는 것도 쉬울 리가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야겠어."

분명 자신과 이몸의 주인이 모르는 게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하늘을 지나가는 헬기들이 보였다.

저쪽 세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첨단 헬기들이었다. 헬기 옆에는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몸의 주인도 알고 있는 움직이는 문양. 바로 EV의 마크였다.

217화. < 세계 대전(1) >

영철이 각성자 협회 막사를 나섰다.

영철의 뜻대로 후방으로 가지 않고 바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 때 맨손이었던 그는 문양이 새겨진 검을 들고 있었다.

각성자에게 지급되는 아이템 중에 그가 고른 장비였다.

협회장인 진혁은 창을 권했지만, 과거 검을 사용했었던 그는 검이 더 편했다.

배속받은 새로운 부대로 향하는 영철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얼굴에 난 멍은 얻어 마신 포션 덕분에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지만, 아직 대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각성자 협회 막사에서는 진혁과 설연이 점점 멀어지는 영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이상한 마나 활용은 특성일까? 그런 것 치고는 체계적으로 배운 솜씨였어."

"전에 다른 곳에서 배운 걸까? 일반인에게 마나 연공이나 마나 체술을 가르쳐주는 교습소나 길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진혁이 영철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의심되면 차라리 교육 핑계로 잡아두시지 그러셨어요?

설연이 텔레파시로 진혁에게 물었다.

텔레파시로 연결된 상대에게는 텔레파시로 이야기하는 게 그녀에게는 훨씬 편했다.

"의심 정도로 쓸만한 인력을 뒤로 돌릴 수는 없지. 그보다 어땠어?"

협회장의 말에 설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요?

-살펴봤을 거잖아.

겉으로 말하기 난감한 말이었다. 진혁도 머리속으로 떠올렸다.

"안 봤어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연이 화를 버럭 냈다.

텔레파시 특성 때문에 고생했었던 그녀에게는 남의 생각을 본다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었다.

스스로 감각을 차단할 수 있게 된 이후로 그녀는 계속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지 않았었다.

"아, 미안."

-됐어요.

진혁이 급하게 사과를 했지만, 설연은 고개를 돌려 외면할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가 마음이 풀린 것인지 설연이 메세지를 보냈다.

-흘러나온 약간의 감정만 느꼈을 뿐이에요. 처음에는 자신감과 우월감.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비하가 느껴졌어요. 각성자가 된 사람한테 많이 흘러나오는 감성인데 저 사람은 훨씬 더 강했어요.

고의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알아낸 것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협회장님과 싸우면서 혼란과 분노. 그리고 의문이 느껴졌어요.

진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과하긴 했지만, 설연이 말해준 것은 다른 각성자에게서도 느껴질 수 있는 감정이었다.

이 정도로는 뭔가 조사하기 어려웠다.

-아, 맞다. 정말 마나운용이 대단했어요. 머리에 마나를 둘러서 제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니까요. 전이었으면 말을 전하지도 못했을 뻔했어요.

설연의 메세지에 진혁이 눈썹을 찡그렸다.

"마나 운용으로 텔레파시를 막으려 했다고?"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나로 설연의 텔레파시를 막으려 했다니. 이런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도 몇 없었다.

그것도 경훈에게서 직접 배운 사람들뿐이었다.

"역시 사람을 붙여야겠어."

진혁의 말에 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말 안 해도 될까요?

"내가 형 비서에게 메일을 남겨 놓을 생각이야."

-그럼 되겠네요.

이브라 불리는 케이 비서의 일 처리는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정평이 나 있었다.

-갔던 일은 잘되었어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다들 어려워. 우리야 후방에 가까우니 이 정도지. 러시아나 만주 독립국은 막아내기 벅찰 정도야.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라시아 연합국도 각성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지금 하늘로 날아가는 EV 헬기들도 각성자 지원을 받아 전방으로 향하는 헬기들이었다.

-피해가 크겠네요.

"피해가 문제가 아니야. 막아낼 수 있느냐가 문제지."

말을 멈춘 진혁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설연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위이이이잉!

그 순간. 숙영지 전체 경보가 울려 퍼졌다.

싸울 시간이 된 것이었다. 드디어 이곳 만주 지역에도 괴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

괴물들에게 대륙 자체를 빼앗긴 아프리카 대륙과 달리 유럽 대륙은 지난 2년간 힘든 가운데에서도 나름 잘 버터왔다.

유라시아 연합국처럼 마나 혁명을 기반으로 성장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유럽 연합을 기반으로 똘똘 뭉쳐서 최악의 상황은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새로운 웨이브는 유럽 대륙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추운 북쪽 땅에서 다시 밀고 내려오는 괴물들은 북유럽 국가들을 혼비백산하게 했고, 알프스와 각 산맥에서 쏟아지는 괴물들은 중부 유럽 각국을 혼란에 휩싸이게 했다.

하지만, 주변에 나타난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엄청난 숫자의 괴물 군단이었다.

아프리카 괴물 군단은 유럽을 향해 두 갈래로 진군했다.

서쪽으로는 아랍의 사막을 관통해서 터키를 쑥밭으로 만들고 동유럽을 향해 진군했고, 동쪽으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상륙해 북상해 나갔다.

괴물들이 지중해를 건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럽 각국은 갑자기 스페인에 등장한 괴물들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스페인군과 각성자들이 괴물들을 막아섰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물밑 듯이 들어오는 괴물들을 막아내기는 무리였다.

스페인군은 붕괴하고 각성자들은 쓰러졌다. 괴물들은 스페인과 그 옆에 맞닿은 포르투갈을 빠르게 점령해나갔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불타고, 포르투갈은 리스본을 비롯한 모든 국토가 괴물에게 점령당했다.

사람들은 북쪽으로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대서양과 맞닿은 프랑스 최남단.

국경도시 엉데.

스페인과 프랑스를 잇는 작은 다리 위에는 차가 가득 차 있었다. 모두 북쪽으로 향하는 차들이었다.

너무 많은 차 때문에 차들은 다리 위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멈춰선 차들 옆으로 수많은 사람이 짐을 지고 걷고 있었다.

인도는 물론, 차도도 가득 메운 인파였다.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출발한 피난민들이었다.

프랑스 쪽 다리 끝에는 군인과 각성자들이 모여 걱정스러운 눈으로 스페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렬이 줄지를 않습니다. 이미 폭파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부하의 말에 프랑스군 장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프랑스로 괴물들이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면 이곳 다리를 무너뜨려야 했다.

하지만, 그냥 무너뜨리기에는 밀려오는 피난민이 너무 많았다.

장교는 고개를 돌려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유럽 각국에서 지원을 온 각성자들이었다.

그 각성자들을 대표해서 영국에서 온 각성자가 그의 시선에 대답했다.

"좀 더 기다리죠. 만약 괴물이 나타난다면 저희가 막겠습니다. 그때 폭파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강변을 따라 전차와 대포도 방열해 놓고 있었지만, 피난민이 가득한 지금은 사용하기가 불가능했다.

각성자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 장교는 각성자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이라도 더 받아들여야 했다.

이 자리에 모인 각성자들의 대표이자,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막내 왕자 루이는 강 건너 스페인 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겨우 2년 더 버틴 것뿐인가…."

그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여성이 말했다.

"왕자님도 영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왕이 된 아버지 웨일즈를 모시던 잉그리드였다.

웨일즈가 왕이 되자, 잉그리드는 아버지에 이어 루이를 모시기로 했고, 2년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어차피 곧 가게 될 거야. 그동안 최대한 속도를 늦춰봐야지. 그래야 많은 사람이 살 거고."

이곳 다리를 끊어봤자, 잠시 시간을 벌 뿐이었다. 몰려오는 괴물들을 막기에는 유럽의 각성자와 군대가 너무 부족했다.

EV가 2년 내내 전력을 강화하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유럽 각국은 전력 강화는커녕 현상 유지도 벅차했다.

"역시 EV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러시아와 한국, 그리고 중국 일부가 함께한 유라시아 연합은 2년 동안 엄청나게 전력을 키워왔었다.

그동안 세계 각국은 우려에 섞인 눈으로 연합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 결과를 보자면 그들의 준비가 옳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영국으로 피난시켜야 했다.

"바다는 막혔지만, 아직 채널 터널이 있어. 오래 버틸수록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지금도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 터널로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이 대피하고 있었다.

왕자의 말에 잉그리드는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영국으로 피할 수 있는 피난민은 많지 않습니다. 지금도 검열이 심하고, 데모도 극심합니다."

당연히 영국 입장으로는 피난민을 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더구나 과거에도 난민으로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영국이었던 만큼 국민적인 감정은 더욱 안 좋은 상황이었다.

왕자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가 이곳에 있는 것도 영국인을 대신한 사죄일지도 몰랐다.

잠시 뒤,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더니, 잉그리드에게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당장, 대피해."

"네?"

"괴물들이 오고 있어. 약속했지? 위험하게 되면 우선 몸을 피하기로 했잖아."

그것은 비각성자인 그녀가 왕자의 곁에 있기 위한 약속이었다.

왕자의 말에 잉그리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동안 괴물과 싸우면서 그녀에게 피하라고 한 적이 없었던 왕자였다.

"다리를 무너뜨리면 시간을 벌 수 있..."

"소용없어. 숫자가 너무 많아."

왕자 옆에 있던 다른 각성자들도 하나둘 무기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 비명과 피 냄새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빠앙! 빵!

꺄아아악!

멀리서부터 피난 행렬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리면서 엉기고 쓰러졌고, 멈춰선 차들이 도망치기 위해 앞차를 들이박았다.

피난 행렬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멀리 건물 너머로 붉은 피를 가득 뒤집어쓴 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셀 수 없는 숫자의 괴물들이었다.

루이 왕자는 각성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긴장이 가득했지만, 무서워하는 얼굴은 없었다.

왕자는 마지막으로 잉그리드를 바라보았다.

"수고했어. 바로 출발해. 살아남게 되면 나도 영국으로 돌아갈게."

"같이 가시면 안 되나요?"

잉그리드가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왕실의 일원으로 내 책임을 다해야지."

2년 전에는 스스로의 힘이 아닌 왕실의 특혜를 이용해 겨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할 때였다.

"갑시다."

왕자와 각성자들은 다리 난간과 자동차를 밟고 피난민들을 거슬러 달리기 시작했다.

쾅!

쿠에엑!

크아악!

다리를 넘은 뒤, 피난민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피 냄새와 비명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그와 각성자들은 지옥을 보게 되었다.

피난민으로 가득해야 할 길이 피에 덮여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괴물들이 피난민들의 뒤를 따르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터져나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멈춰!"

루이가 고함을 지르며 괴물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각성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빨리 달아나요! 다리가 앞이에요!"

각성자들은 괴물을 막아서며 사람들에게 외쳤지만, 곧 그 말은 힘을 잃고 말았다.

콰아아앙!

뒤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온 것이다.

프랑스 공병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다리를 폭파한 것이었다.

"제길!"

"프랑스 군대, 이 게으른 개구리들이!"

각성자들이 괴물들을 막아서면서 다리를 폭파한 군인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해도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V가 건내 준 장비들이 괴물들의 방어막을 뚫었다.

마나가 담긴 총알이 전갈을 닮은 괴물의 머리를 터트렸고, 검이 표범을 닮은 괴물의 다리를 잘라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각성자들도 죽어 나갔다.

과거 여러 각성자가 모여 괴물을 사냥할 때와는 달랐다.

사각에서 치고 들어오는 괴물들에 의해 각성자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머리가 씹히고, 몸이 잘려나갔다.

각성자들이 괴물들의 진격을 막은 것은 겨우 몇 분이었다.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죽으면서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다리가 무너져서 피하지 못한 피난민들이 그들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죽고, 결국 루이만이 남게 되었다.

이미, 한쪽 팔이 잘리고, 눈도 한쪽밖에 보이지 않았다.

피난민들이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괴물들은 마지막 남은 그를 품평회를 하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는 고개를 돌려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뛰어난 각성자의 눈 덕분에 강 너머에 있는 잉그리드가 한눈에 보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쥐고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역시 청혼을 할 걸 그랬나?"

그녀가 자신 곁에 남은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 덕분에 좋은 기회를 날린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남은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케이가 선물로 준 마나석이 달린 검이었다.

덕분에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결국 이곳이 끝인 것 같았다.

그는 검을 쥐고 괴물들에게 소리쳤다.

"와라!"

하지만, 괴물들은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그도 손으로 눈을 비벼야 했다.

그와 괴물들 사이에 이상한 것이 보인 것이다.

바로 은색으로 빛나는 구멍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좌표가 영 이상한데. 괴물들이 다 튀어나와서 마나가 헝클어졌나? 예상 위치하고 좀 달라."

구멍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왕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케이?"

왕자의 말에 경훈이 품에서 포션을 꺼내 던져 주었다.

"잉그리드가 비상 연락해서 오게 되었어요. 울며불며 애원해서 급하게 왔는데 다행히 늦지 않은 것 같네요."

경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들며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피하세요. 저도 오래 있지는 못할 겁니다."

경훈 혼자 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는 무리였다. 지금도 다행히 짬이 나서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스페인에 남겨졌던 피난민들은 모두 프랑스로 피할 수 있었고, 괴물들은 강 아래에서 4시간 이상 저지당했다.

그곳에 있던 피난민들은 모두 왕자의 헌신을 세상에 이야기했고, 혼자서 4시간 동안 괴물들을 막아선 한 사람에 대해 떠들어댔다.

218화. < 세계 대전 (2) >

창은 없지만, 공기도 깨끗하고 안락해 보이는 방 중앙에 이사벨이 앉아 있었다.

분홍색조로 이쁘게 꾸며진 소녀의 방이었다.

이브가 열심히 꾸며준 방이었지만, 그런 방안에는 인형이나 사진들 대신에 검과 장비, 낡은 책과 시디들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이사벨은 책상다리를 한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왕.

이사벨 앞에는 베일리가 하품을 쩍쩍 내뱉으며 방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척이나 심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벨은 심심해하는 강아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몸속을 계속 바라보았다.

2년 동안 키워오고 이번에 또다시 한 단계 올라간 마나가 몸속에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직 경훈 아저씨의 발밑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브 언니는 빠른 성장이라고 여러 번 칭찬했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이브 언니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휴우우우.

이사벨은 크게 숨을 내쉬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는 특성을 깨웠다.

이사벨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닌, 새로 진화한 특성을 조금씩 깨워 나갔다.

원래부터 차원의 틈을 다닐 수 있었던 그녀였다.

그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차원의 틈이 아닌 벽의 너머로.

지직,

손을 펼친 그녀 앞 허공에 검은 연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목 뒤로 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엉망이긴 해도 괴물을 죽일 때 한번 만들어낸 특성이었다.

연기가 점점 모여들었다.

우우우웅.

연기는 그녀의 손 앞에서 원형을 그리며 몸집을 키웠다.

이제 더 이상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 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구멍이 만들어졌다.

베일리가 슬슬 뒤로 물러났다. 저 구멍을 볼 때마다 누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니 꽤나 좋은 인간이었지만,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작은 구멍이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구멍이 허공에 만들어졌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이사벨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차원 회랑을 보고도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휴우…. 겨우 이 정도네."

그녀가 말을 하는 순간, 구멍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사벨은 더욱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열심히 노력했건만 이제야 겨우 차원문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었다.

차원문이라고 했지만, 겨우 팔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었다. 더구나, 집중을 놓치면 바로 사라지는 구멍이었다.

"이런 데 이브 언니의 말을 어떻게 믿어."

경훈 아저씨는 처음 특성을 얻었을 때 바로 성공했다는 차원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특성은 다른 것이었지만, 새로 특성을 개화했는데 이렇게 깨닫기 어렵다니....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각성자가 들으면 황당해할 말이었다.

차원문을 만들기 시작하다니, 경훈이 보면 깜짝 놀랄만한 성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이 부족하다고 믿고 있었다.

"거기다 다른 세상의 좌표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단 말이야. 역시 난 바보야 바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이사벨을 보며 베일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몸을 일으켰다.

위로가 필요한 친구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베일리는 친구를 위로하는 일은 지겹지 않았다.

강아지가 소녀 발치에 앉아 그녀의 발에 머리를 기댔고, 소녀는 강아지를 들어 품에 안았다.

"응, 힘낼게. 셰인 아저씨도 힘을 냈는데 나도 투정 부릴 수는 없어."

그녀는 강아지를 꼭 안은 뒤, 다시 묵상을 시작했다.

멍.

바닥에 내려선 베일리는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한참 동안은 움직이는 쇳덩어리들과 놀아야 할 모양이었다.

***

만주 북쪽. 다싱안링산맥 외곽.

슈우우웅. 쾅! 콰앙!

뒤쪽에서 날아온 포탄들이 계속 숲속에 떨어졌다. 나무가 불타고, 땅이 뒤집혔다.

다싱안링산맥과 연결된 숲이 불타고 있었다.

영철은 검을 든 채로 멍하니 숲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숲과 괴물의 괴성.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낙동강과 가까운 평야의 숲이었고, 지금은 높은 산맥과 이어진 숲이었지만, 숲이 불타는 모습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악몽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젠장! 젠장!"

그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영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의 모습은 그때와 달랐다.

그의 주변은 절망이 가득 찬 병사들밖에 없었지만, 지금 병사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어디에도 포기하고 좌절한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와 같이 배치된 각성자도 그날의 소년과 달랐다.

처음 만날 때부터 계속 투덜거리는 뭔가 가벼워 보이는 남자였다.

"아니, 군대를 두 번 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경호 일로 그동안 꿀 좀 빨았기로 이렇게 전방에 배치한다는 게 말이 되난 말이지. 내가 착하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뒷배를 불러서 도망쳤을 거라니까."

정규라는 이름을 가진 땅 계열 각성자였다.

무척이나 시끄럽고 가벼워 보였지만, 그는 병사들과 금방 친해졌다.

아직도 병사들과 말 한마디 안 하는 중인 그와는 전혀 다른 친화력이었다.

한 개 소대에 각성자 두 명.

전투부대에 있지 않았던 그는 익숙하지 않은 편재였지만, 다른 전투 소대들도 자신들과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끄러운 각성자는 검을 든 그와 달리 창을 들고 있었다.

이것도 전생의 세상과 달랐다.

전생의 각성자들은 무척이나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검과 창, 해머와 총. 낫이나 단도를 든 각성자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강제로 징집되어 처음 무기를 잡게 된 각성자는 부대에서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무기를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력이 있는 각성자들은 모두 자신에 맞는 아이템을 지니고 있었다.

이 부대의 각성자는 달랐다.

다른 무기들도 지닌 각성자도 있었지만, 각성자들은 모두 창을 기본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옆에서 떠드는 각성자도 땅 속성의 각성자면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뭐라 말하지 않기로 했다. 협회장에게 한 대 맞은 뒤로는 우선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직 힘이 부족했다. 무언가 말하려면 우선 힘을 키워야 했다.

"저 검을 봐요. 이 아저씨는 혼자 날뛰는 타입이 분명해요! 여러분들은 나를 도와야 한다니까요."

옆에서 각성자가 병사들과 신나게 떠드는 동안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혼란스러운 마음은 늦지 않게 잠들었다.

포격이 멈추고, 숲에서 괴물들이 뛰어나올 때, 그는 뛰쳐나가지 않고, 검을 들고 기다릴 수 있었다.

철컥. 철컥.

전생에 보던 전차 대신에 거미를 닮은 로봇이 소대 옆으로 걸어 나왔다.

저쪽 세상에서 보았던 테스트 로봇과 무척 닮은 로봇이었다.

처음에는 오해했지만, 분명 마나 과학은 이쪽 세상이 훨씬 발전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발전을 이루다니.

괴물이 늦게 나타난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영철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투다다다다다.

로봇 상체에 달린 두 정의 벌컨포가 달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쏟아졌다.

불곰을 닮은 괴물, 늑대를 닮은 괴물, 가슴에 반달 모양의 흰 털을 단 거대한 곰.

2년 전, 분열되기 전 중국과 북한이 경험했던 괴물들이었다.

전보다 더 크고, 더 많은 숫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탄환 하나하나가 총알보다 유탄에 가까운 벌컨포 탄이 달려오는 괴물들을 헤집었다.

괴물들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크아아악!

반 이상의 괴물들이 방어막으로 벌컨포를 막아냈지만, 막아내지 못한 괴물들도 많았다.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전차 포로 확실히 괴물 한 마리는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급이 낮은 괴물 다수를 쓰러뜨리는 것은 로봇에 달린 벌컨포가 훨씬 좋았다.

벌컨포가 잡지 못한 괴물들이 총알을 뚫고 소대 앞으로 점점 다가왔다.

"대기! 아직 쏘지 마!"

소대장이 소대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럼, 밥벌이해볼까?"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각성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창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며 발을 굴렀다.

쿵.

땅이 출렁거렸다.

출렁거리는 땅이 앞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파도가 앞으로 몰려나가는 것 같았다.

콰과과과과.

달려오는 괴물들에게 몰려간 땅의 파도가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이지는 못했다.

쿠엑. 꿱.

단지, 괴물들을 바닥에 구르게 했을 뿐이었다.

"좋아!"

하지만, 영철은 만족했다. 입은 마음에 들지 않은 각성자였지만,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전생을 기준으로도 훌륭한 각성자였다.

아직도 창을 들고 다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 각성자와 함께 싸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영철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몬스터들이 쓰러진 지금이 기회였다.

그는 한걸음에 달려가 쓰러진 늑대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키키킥.

방어막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그는 얼마 되지 않은 마나를 긁어모아 검에 밀어 넣었다.

찌이이익.

검이 결국 방어막을 찢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늑대 몬스터의 목도 반쯤 베어냈다.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몬스터가 날뛰었다. 그는 급하게 몸을 피했다.

"헉, 헉. 젠장, 겨우 한 마리인데."

그는 뒤로 물러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겨우 몬스터 한 마리를 잡는 데 지쳐버리다니. 이래서야 이번 전투 중에 등급을 올리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헉. 헉. 아니 그거보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신했다. 이래서야 몬스터들에게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자신에게 덤벼드는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후방에서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자신 쪽으로 날아드는 총알은 없었다.

탕! 타탕! 타타타!

총알은 모두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땅 특성 각성자. 정규가 있는 곳이었다.

영철은 그가 있는 곳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정규는 벌써 두 번째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첫 번째 몬스터는 창이 박힌 채로 쓰러져있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몬스터에도 창이 박혀 들고 있었다.

푹.

영철은 눈을 의심했다.

분명, 창이 박혀 드는 순간 방어막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몬스터에게 쏟아지는 총알들.

방어막이 사라진 몬스터였다. 총알들은 피부를 뚫고 몬스터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쿠아아악!

반달곰을 닮은 몬스터가 쓰러졌다.

영철은 놀라 멀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른 곳도 같았다.

콰직.

타타타탕.

각성자가 창으로 몬스터의 방어막을 부수고, 병사들이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있었다.

"말도 안돼."

전생에는 본 적이 없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위험해!"

경고가 그의 귀에 내려꽂혔다.

그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크앙!

거대한 붉은 곰이 그를 향해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적어도 엘리트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전생이면 모를까, 지금은 미리 알아차렸어도 막을 수 없을 몬스터였다.

영철은 창백한 얼굴로 검을 치켜들었다.

쨍그랑.

하지만, 검은 발톱에 바로 깨져나갔다.

영철의 얼굴이 검게 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타타타타타타타!

갑자기 기관총 소리가 벌판을 울렸다.

쏟아지는 총알이 영철 옆을 지나갔다.

총알들은 신기하게도 영철을 피해 곰의 몸에 쏟아졌다.

퍼퍼퍽!

방어막이 뚫리고 곰의 몸에 피가 솟았다.

벌컨포에도 끄떡없던 방어막이었다.

단지 기관총에 뚫리다니.

쿵.

황당하게도 불곰을 닮은 고등급 몬스터는 기관총을 맞고 뒤로 넘어가 버렸다.

영철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기관총을 든 검은 헬멧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헬멧 맨?"

문득 드는 생각에 말을 꺼냈지만, 어느새 다가온 정규가 그의 말을 부인했다.

"엥? 아닌데?"

영철은 정신이 없었다. 정규가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 의심하지도 못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헬멧 안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멧을 써서 그런지 목소리가 윙윙 울렸다.

"괜, 괜찮습니다."

영철이 겨우 대답을 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영철을 대신해서 정규가 물었다.

"EV에서 지원을 나왔습니다."

헬멧을 쓴 남자가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그는 EV 특수팀 특유의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EV 특유의 움직이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EV에서 온 사람이었다.

정규가 헬멧을 쓴 사람의 손을 가리켰다.

"오히려 그쪽이 다친 것 아닙니까?"

남자는 양손이 붕대에 감겨 있었다. 더구나 목에도, 발목에도 붕대가 보였다.

"아, 흉터 때문입니다."

남자는 붕대를 감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방금 전 사격 때문인지, 붕대가 슬쩍 흘러내렸다.

남자는 급하게 다시 붕대를 감았다.

붕대를 감은 남자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전 다른 부대를 지원해야 해서…."

그의 말대로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된 참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헬멧을 쓴 남자는 인사법도 무척 특이했다.

그는 헬멧 위로 손을 올렸다 내렸다. 마치 쓰지도 않은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것 같았다.

그는 급하게 다른 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멀어져가는 헬멧 남자를 보며 정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흉터가 아니라 의수였나?"

붕대가 풀린 손은 흉터 대신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 손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219화. < 두번째 집행자(1) >

하루 전.

기절에서 깨어난 이사벨은 그날부터 차원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검은 연기를 끌어모으고, 그 연기를 차원문으로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이어갔다.

실패가 계속되고, 마나가 고갈되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한번 잡은 끈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헉. 헉.

그날도 땀에 절어 숨을 몰아쉬는 이사벨을 베일리가 핥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셰인이 지켜보았다. 단지 지켜보는 것뿐,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셰인은 쓰고 있던 모자를 손에 들고 빙빙 돌렸다.

잠시 뒤, 회전하던 모자가 멈췄다.

"꼬맹이에게 질 수는 없겠지."

셰인은 다시 모자를 쓰지 않고,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날 밤. 경훈이 짬을 내서 이쪽 세상에 넘어왔다.

저쪽 세상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경훈이 넘어오는 때는 많지 않았다.

경훈은 오늘도 무척이나 서두르고 있었다. 시간이 되면 바로 돌아가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사벨을 확인하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정말 열심이군요. 재능도 뛰어나고 저렇게 노력하니, 금방 차원문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경훈은 이사벨을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옆에 서서 같이 이사벨을 지켜보던 셰인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번에 넘어갈 때는 나도 같이 가지."

셰인의 말에 경훈이 눈을 끔벅였다.

"잠실 아지트 말인가요? 오늘은 그곳을 안 들릴 생각인데요?"

-거기를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경훈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저쪽 차원으로 가신다는 말인가요?"

"맞아. 차원 이동을 하려면 뭔가 준비해야 하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경훈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로봇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카메라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정도면 쓸모 있을 텐데?"

경훈이 황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쓸모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두 손 들고 환영이죠. 전에 거절하시지만 않았다면, 매일 도와달라고 노래를 불렀을 겁니다."

지금, 경훈의 세상은 싸울 수 있는 각성자가 너무 적었다.

2년간 준비했지만, 언제나처럼 준비는 부족했다.

셰인이 도와준다면 대환영이었다.

셰인이라면 제대로 된 각성자 이상이었다.

아니, 그의 실력과 경험이라면 저쪽 세상의 그 어떤 각성자보다 뛰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봇이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아직도 저쪽 세계는 제대로 된 AI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셰인이 직접 꺼낸 말이었고, 지금도 그리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셰인은 명상에 잠겨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린 티가 많이 사라진 소녀였다.

그녀는 지금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홀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이곳에서 지금 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경훈과 이브도 지금은 이쪽 세상에 신경 쓰기 힘든 상황이었다.

저쪽 세상에 지구 레벨의 웨이브가 벌어졌는데, 이곳에 집중하기는 힘들었다.

이사벨이 차원문을 완성하면 경훈과 이브를 돕기 위해 그녀도 저쪽 세상으로 넘어갈 게 분명했다.

"나 혼자 남게 될 텐데, 뉴욕 앞바다는 침몰한 배들 때문에 낚시하기는 무리야."

셰인의 말에 경훈이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경훈은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마도 이브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경훈은 휴대폰이 들어있는 가슴을 툭툭 두드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할 때 같이 가죠."

경훈이 보급품을 풀어놓기 위해 창고로 향했고, 셰인은 고개를 돌려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명상을 마친 모양이었다.

이사벨과 베일리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셰인이 이사벨 옆으로 다가갔다.

"들었니."

"네."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계속 거기 있을 거예요?"

"아니, 경훈이 오면 같이 와야지."

"그럼, 뭐 잠깐이잖아요."

이사벨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벌써 예전에 같이 가고 싶었는데, 저 때문에 계속 이곳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건…."

셰인이 뭐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좀 있으면 차원문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셰인이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제 그의 보호가 필요 없어졌다. 경훈을 돕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때였다.

멍! 멍!

옆에서 베일리가 큰 소리로 짖어댔다.

"그래, 베일리 네가 있으니 안심이다."

셰인은 베일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일리 네가 아침에 잘 깨워주고, 식사시간도 잊지 않게 해."

멍! 멍!

셰인의 말에 베일리가 대답했다.

그 뒤로, 소녀와 혼자 지낼 수 있게 준비를 마친 뒤, 경훈과 셰인은 차원 이동을 했다.

화아아악.

환한 빛이 사라지고, 셰인의 눈에는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는 바다와 방파제. 부두. 그리고, 뒤쪽으로 보이는 바위산과 나무들.

하지만, 부두와 건물에는 사람 사는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어디지? 해안가 항구인가?"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섬입니다."

"섬?"

"네, 2년 전에 무인도가 된 울릉도입니다. 지금은 저 혼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 아지트입니다."

셰인이 도착한 곳은 한국에서 9번째로 큰 섬이자 사람이 사는 가장 먼 섬. 울릉도였다.

"울릉도가 무인도?"

"2년 전에 바다에 괴물들이 나타났을 때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본토로 철수했습니다.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종교 문제로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곳에 놓아둘 수는 없었습니다."

괴물들이 바다를 뒤덮어 섬이 고립되기 전에 사람들을 철수시켜야 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제주도나 본토와 가깝고 다리가 있는 섬들은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섬들은 더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더구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울릉도는 절대로 사람을 남겨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비워졌던 울릉도는 얼마 뒤 경훈의 거점이 되었다.

"EV가 가지고 있는 섬도 있고, 한국에 친한 사람들과 지내는 곳도 있지만,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저 혼자만의 아지트가 필요했습니다."

그전에는 빌딩 지하에 비밀 창고를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그곳은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경훈은 항구에 있는 해군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만든 지 얼마 안 되는 최신식 건물이었지만, 건물은 비어있고, 부두도 텅 비어있었다.

건물 안도 마찬가지였다.

무척 급하게 빠져나갔는지, 건물 안은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하지만, 어수선한 건물 안에 비상구 불이 들어와 있었다.

경훈은 비상구 불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1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있어?"

-위가 아니면 아래로 가는 거예요.

경훈이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로봇과 인간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에 숨겨둔 해군 기지를 개조해서 창고와 전시관 등으로 쓰고 있습니다. 저쪽 세상에서 가져온 물건들도 이곳에 모아놓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금괴와 마나석, 그리고 문화재와 유물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있었다.

"그건 나중에 보여드리고, 우선 포탈이 있는 곳으로 가죠."

띵.

경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문이 열렸고, 셰인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넓은 광장, 아니 작지 않은 부두가 지하에 펼쳐져 있었다.

콘크리트 부두와 깊은 바다. 그리고 각종 항구 시설과 수리 장비들.

암반이 드러난 높은 천장 아래 그 모든 것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커다란 부두가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암벽에 막혀 밖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부두 옆에는 잠수함 한 척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이곳은 원래부터 있던 지하 동굴을 개조해서 해군이 사용 중이던 잠수함 비밀 도크입니다.

-울릉도에서 해군이 철수할 때 이곳도 폐쇄되었습니다.

-저기 있는 잠수함은 수중 몬스터들의 공격에 피해를 입어 이곳에 대피했던 것 같습니다.

경훈과 셰인이 걸어가는 사이, 이브가 이곳에 관해 설명했다.

-잠수함은 제가 수리를 마쳐놓긴 했지만, 바다가 저러니 아쉽게도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쿵. 쿵. 쿵.

광장을 지나가는 두 사람 옆으로 골렘들이 지나갔다.

2년 전과 다른 섬세하고 세련된 건설 로봇들이었다.

모두 이브의 명령을 따르는 로봇들이었다.

광장 중앙. 부두 가운데 커다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에 둥근 기계가 박혀 있는 커다란 문양.

포탈이었다.

"이 포탈을 통하면 서울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만주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요."

경훈은 셰인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그냥 본 모습을 보여주긴 어려울 것 같은데…. 이곳에서 인공 피부 같은 것을 만들 때까지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은 자아를 가진 AI를 설명하고 이해시킬 시간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경훈도 우선 이곳으로 셰인을 데려온 것이었다.

셰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에 인간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군용 구급낭과 탄띠와 수통. 그리고, 헬멧과 판초 우의.

셰인이 구급낭을 열어 붕대를 꺼냈다.

"뉴욕에서 가져간 방탄복 있지?"

"EV 특수팀용으로 개조한 것 가지고 있습니다."

경훈이 아공간에서 방탄복을 꺼냈다.

셰인이 방탄복을 입고, 드러난 손과 발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굴러다니던 헬멧을 머리에 썼다.

셰인이 양팔을 벌렸다.

"헬멧 맨하고 비슷하지 않아? 이러면 로봇이라는 걸 알지 못할 거 같은데."

EV의 특수팀의 복장을 하고, 드러난 손과 발목과 목에는 붕대를 두르고, 머리에 헬멧까지 쓴 셰인은 절대 로봇으로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우울한 표정으로 셰인을 바라보았다.

"네, 로봇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됐군. 출발하지. 바쁠 것 아냐."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우울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경훈과 셰인은 포탈 위에 올라갔다.

-포탈을 가동하겠습니다.

이브의 말을 들으며 경훈이 입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헬멧을 벗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본 모습을 보고도 누구도 비웃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헬멧을 쓴 남자가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는 경훈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기대하고 있을게."

-이동합니다.

밝아 보이는 이브의 목소리와 함께 둘은 포탈 위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두 번째 헬멧 맨을 만나게 되었다.

손과 발에 붕대를 감은, 기관총을 들고 다니는 새로운 EV의 집행자.

사람들은 헬멧 맨과 구별하기 위해 그에게 새로운 별명을 지어주었다.

유쾌한 말투와 특이한 인사. 그리고, 호쾌한 사격 덕분에 그의 별명은 쉽게 만들어졌다.

'카우보이.'

새로운 집행자의 별명이었다.

220화. < 두번째 집행자(2) >

지구 전역에서 벌어진 웨이브는 2년간의 그나마 평안한 시간을 비웃듯이 전 세계에 절망을 선사했다.

그동안 잘 버텨온 강국과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관문인 이집트는 제일 먼저 무너져 내렸고, 아랍의 강국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그리고 이스라엘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동남아시아의 섬들은 차례로 연락이 끊어졌다.

아랍을 거쳐 터키를 무너뜨린 괴물들은 동유럽으로 퍼져나갔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멸망시킨 괴물들은 프랑스를 점령해나가고 있었다.

이번 웨이브는 그 규모도 그렇지만, 괴물들의 움직임이 그전에 있었던 웨이브와는 전혀 달랐다.

지성 없는 괴물들이라고 무시했던 괴물들의 행동이 달려져 있었다. 괴물들은 난동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들의 땅을 차례로 점령해나가고 있었다.

*

바다에 맞닿은 해변에 번쩍이는 도시가 있었다.

두바이.

황금의 도시라고 불리던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태양 빛에 반짝이는 도시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깨진 유리, 피투성이의 도로. 널려진 시체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괴물들.

도시는 황금이 아니라 피에 젖어 있었다.

대격변 이후 계속 자금이 막히고 경기가 안 좋아져서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도시였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괴물들의 도시가 되어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쏟아져나온 괴물들과 사막에서 뛰쳐나온 괴물들이 두바이를 점령한 것이다.

많지 않은 군대는 전멸하고,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은 괴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아직 수많은 건물 안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높은 건물과 돈을 처바른 강력한 방어문들이 괴물의 침입을 막아낸 것이다.

두바이의 심장이자 제일 높은 건물인 부르즈 할리파 꼭대기의 스위트 룸에도 아직 무사한 일가족이 있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중년 부부와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들은 무장한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거실에 모여있었다.

"구출팀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 거죠?"

"곧 올 거다. 왕가의 체면은 생각지도 않느냐?! 호들갑 떨지 말고 더 참을성 있게 기다려라!"

젊은 아들의 말에 중년인이 꾸짖었다.

하지만, 외국물을 먹고 온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입을 삐쭉였다.

"왕가는 무슨, 나라가 망해버렸는데요."

왕자의 말에 왕이 주먹을 꾹 쥐었다.

벌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왕자도 그것을 알고 저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최악의 경제 상황을 버텨내며 두바이를 지켜온 왕이었지만, 괴물들의 공격은 그가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된 아들의 교육은 도시를 탈출한 뒤에 충분히 내려줄 생각이었다.

이들은 두바이 왕궁에서 탈출해서 이곳 부르즈 할리파에서 발이 묶여버린 두바이 왕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탈출하는 중에 다른 왕족들과 신하들은 목숨을 잃었고, 이들만 겨우 이 스위트 룸에 숨게 된 것이다.

왕자의 말 이후, 방안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딸들은 다시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지만, 왕도 아들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호원들이 기관총을 문에 겨누었지만, 왕이 먼저 손을 들었다.

"괴물들이 문을 두드리지는 않을 테니. 열어주도록. 강도들이라면 확실히 혼내주면 될 테고."

건물에 갇힌 뒤, 이 방에도 식량을 빌리거나 훔치려는 사람들이 온 적이 있었다. 스위트 룸이라 물자는 충분했지만, 왕은 도둑들에게 물건을 나누어줄 생각이 없었다.

경호원이 문을 열자, 텅 빈 복도가 보였다.

그리고, 문 옆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몸에 먼지와 피가 가득한 병사들이었다.

경호원들이 방아쇠에 손을 올리는 순간, 장교 한 명이 손을 들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토에서 나왔습니다. 찰스 에이머스 중령입니다."

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피를 뒤집어쓴 군인들은 그들을 유럽까지 탈출시키기 위해 유럽 연합군이 보낸 특공대였다.

찰스 중령은 방 안에 있는 왕족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콩고에서 철수한 뒤에 바로 전역을 해야 했어.'

콩고에 있을 때 은퇴하기에 충분한 돈도 벌었었고, EV에 끈도 만들어 놓았었다.

그때 전역을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는데, 군인의 양심이 뭐라고, 여태 군에 남아 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번 작전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네. 부탁하네."

에이머스 중령은 출발할 때 들었던 나토군 사령관의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직급상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콩고에서의 경험 덕분에 나토군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던 그였다.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사령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분명, 엄청난 돈을 약속받았겠지.'

그렇지 않으면 사령관이 그렇게 저자세로 부탁할 리가 없었다.

사령관이 나중에 충분한 보상을 주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는 이번 작전을 끝으로 진짜 제대할 생각이었다.

꼴을 보니, 유럽은 물론 영국도 위험했다. 가족과 함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라시아 연합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도시 밖에 탈출용 차량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해안가로 이동해서 하사브에서 헬기를 타고 이란으로 넘어갈 겁니다."

괴물들을 뚫고 200km를 차로 이동하고, 헬기로 지중해를 가로질러야 했다.

물론, 구출팀이 왔던 경로를 되돌아가는 것이고, 지중해에서 제일 짧은 100km 구간을 건너는 것뿐이었지만, 엄청나게 위험한 여행이었다.

왕실 가족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찰스 중령은 그런 가족들을 보고 속으로 비웃어주었다.

이 왕족들은 행복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왕이 도망친 도시에서 이미 죽어있거나, 죽어갈 게 분명했다.

"가지."

왕이 단호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행은 모두 옷을 갈아입고, 무장했다. 여성들도 머리를 가린 전통 복장 위에 방탄복을 입었다.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 왕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차마 방탄복을 벗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모두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왕족 하나가 딴짓을 하고 있었다.

아까 아버지의 말에 시비를 걸던 막내 왕자였다.

왕자는 거실 한 면을 가득 채운 창에 붙어서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왕이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저게 뭐죠?"

왕자가 왕보다 먼저 창밖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모두 그가 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건물들 너머로 모래언덕이 끝없이 이어진 사막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사막 위로 모래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찰스와 대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왕과 경호원들은 창밖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형태의 모래 폭풍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왕의 말에 찰스가 급히 망원경으로 사막을 살펴보았다.

콰과과과과.

사막을 메우며 다가오는 모래 폭풍 뒤에, 거대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거대한 실루엣이었다. 분명 괴물이 저 폭풍 속에 들어있었다.

"말도 안 돼...."

정말 거대한 실루엣이었다. 웬만한 고층 건물만 한 실루엣.

찰스가 급하게 소리쳤다.

"당장 탈출한다! 서둘러!"

그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밖으로 달려나갔고, 그도 거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건물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부르즈 할리파는 너무 높았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고, 일행은 맨 꼭대기 스위트룸에서 1층까지 걸어 내려가야 했다.

일행이 서로를 부축하며 건물을 반 정도 내려왔을 때였다.

콰과과과과.

그 사이, 모래 폭풍이 두바이시를 덮쳤다.

끼이이익.

건물들이 바람에 휘청거렸고, 사람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카아아악!

그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찰스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래바람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례로 무너지는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쇼핑몰, 체육관, 각종 관광 건물들. 두바이가 자랑하는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 거대한 괴물이 건물들을 부수며 다가오고 있었다.

찰스는 자신이 들고 있는 총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는 턱도 없지."

다른 사람들은 밖의 광경을 보고 울며불며 아래로 달려갔지만, 그는 그들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단지 그는 휴대폰을 꺼내 창밖에 보이는 괴물을 찍을 뿐이었다.

이 건물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괴수였다. 괴수가 도착할 때까지 건물을 벗어나기는 불가능했다.

처음 보는 거대한 괴수였다.

그는 달아나는 대신,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빠르게 사진을 찍은 그는 위성 전화의 연락처로 사진을 전송했다.

유럽 나토 사령부,

그리고, 콩고에서 연락처를 받은 EV의 집행자에게로.

그가 송신 버튼을 누르고, 잠시 뒤, 괴수는 부르즈 할리파 앞에 도착했다.

"역시, 제대가 너무 늦었어."

중령은 거대한 괴물을 보며 나지막이 혀를 찼다.

모래 폭풍이 부르즈 할리파를 덮었다.

콰과과과광.

세계 최고층 건물은 모래 폭풍 속에서 무너져내렸다.

그날, 두바이 시는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 속에서 죽어갔고, 건물 밖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던 괴물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날 이후 살아서 도시를 빠져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도시라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한 군인의 연락으로 괴물의 등장이 알려졌다.

유럽도, 유라시아 연합도 발칵 뒤집혔다.

이토록 거대한 괴수의 등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쏟아지는 괴물들을 막기도 벅찬 유럽은 괴수의 등장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속 이어온 것처럼 유라시아 연합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

몇 시간 뒤,

러시아 크렘린 궁. 화상 회의실.

비코프 대통령은 화면에 떠오른 각국 수장의 얼굴을 향해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그의 인사를 북한의 주석, 한국의 대통령, 만주 독립국의 수장까지 모두 받아주었다.

지금, 이 자리는 유라시아 연합의 대표 회의였다.

비행기가 막힌 탓에 이제 얼굴을 맞대는 방법은 화상통화밖에 없었다.

"잘못된 정보 아닙니까? 진짜 저런 괴수가 나온 겁니까?"

화면에서 다크 서클이 가득한 한국 대통령이 눈을 비비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 각국 수장은 모두 유럽에서 보내온 영상을 보았었다.

한국 대통령의 말에 모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라시아 연합이 다른 나라에 비해 괴물들을 잘 막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모든 힘을 퍼부어 겨우 버텨내는 것에 불과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저런 괴물을 감당할 여력은 거의 남지 않았다.

모두 고개를 젓는 동안, 북한 주석이 입을 열었다.

"핵을 쓰면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장군의 말에 이번에 새로 주석이 된 만주 독립국 수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핵폭탄에는 안 좋은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억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비코프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필요하다면 써야죠. 우선 저 괴수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알아내야 합니다. 모래 폭풍의 방향을 확인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 위성이 지금 열심히 궤도를 바꾸는 중이었다.

"그럼, 러시아에서 확인한 뒤에 핵을 쏠지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건가요?"

"글쎄요."

비코프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에 다른 수장들도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들이 모두 모여 뭔가 결정할 때면 이런 표정이 되곤 했다.

"EV는 새로 나타난 괴수를 군주급 괴물로 명명하겠습니다."

그때, 꺼져 있던 화면이 켜지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 케이가 등장한 것이다.

케이가 나타나자 각국 수상은 다양한 표정이 드러났다.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뢰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화면에 나온 모든 사람은 케이를 알고 있었다.

케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두바이로 저희 팀이 출발했습니다. 그 괴물은 저희 EV가 담당합니다."

각국의 수장 앞에서 경훈이 선언했다.

221화. < 두번째 집행자(3) >

CIA.

아메리카 전쟁 이후 가장 바쁘고 강력해진 정부 기관.

하지만, 이 기관의 최고 책임자는 아직도 다른 관료들에게 아부꾼으로 놀림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런 비웃음은 조직 안에서는 의미 없었다.

CIA 안에서는 그는 스톤 페이스. 돌 얼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CIA 국장실에서 오늘도 버드 국장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스톤 페이스 말고도 일 중독자로도 유명했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모두 확인했다.

남미에서 들어오는 정보들과 세계 각국의 동향들. 그 모든 정보가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서 정리되어서 백악관에 전달되고 있었다.

한참 서류에 사인하던 그가 펜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인터폰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석국에서 유럽 담당 요원이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게."

허락이 떨어지자, 요원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버드 국장은 들어온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콜 요원은 버드 국장의 차가운 눈길에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가 국장이 된 뒤로 구축된 직보 체계가 아니라면 분석국의 상관 아무에게나 보고를 넘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시에 직장에서 잘릴 수는 없었다. 그는 보고를 시작했다.

"유럽의 정식 채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요원은 인화한 사진들을 국장 앞에 펼쳐놓았다. EV의 등장 이후 다시 전자시대 이전으로 퇴화해버린 CIA였다.

사진에는 모래가 휘몰아치는 배경 아래로 높이 솟은 빌딩들이 보였고, 그 뒤로 커다란 괴수의 실루엣이 보였다.

다른 사진에는 실루엣으로 보이던 괴수가 제대로 찍힌 사진도 있었다.

"두바이에서 찍은 괴물의 사진입니다. 두바이에 파견을 나갔던 대원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유럽은 유라시아 연합과 미국 정부에 똑같이 정보를 보내준 것이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괴물들과 전혀 다른 형태의 괴물입니다. 크기도 다르고, 형태도 생명체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크기와 특성으로만 봐도 기존에 나왔던 그 어떤 괴물보다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같이 사진을 검토한 코디 요원도 그와 같은 의견이었다.

거대한 크기는 물론이고, 엄청난 모래 폭풍을 데리고 다니는 괴물이었다.

분석국에 있으면서 여러 괴물을 보아왔던 콜 요원과 코디 요원도 처음 보는 거대 괴수였다.

그가 걱정스럽게 떠들어댔지만, 국장은 특유의 표정으로 말없이 사진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사진을 확인한 국장은 사진을 서류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보고할 내용이군."

국장의 말에 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 괴물이 더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성을 써서라도 뒤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콜의 말에 국장이 콜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 끝을 끌어올렸다.

씨익.

기괴한 미소가 국장의 얼굴에 그려졌다.

콜은 목 뒤로 식은땀이 솟아올랐다. 분명 국장은 미소를 지은 것뿐이었지만, 그는 등 뒤로 뱀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로 국장이 입을 열었다.

"함부로 노출되면 안 될 정보군. 정보 통제가 필요할 것 같아. 이 정보를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지?"

"아, 저와 코디 요원이 같이 검토했습니다. 그 뒤에 국장님께 직보하러 온 것입니다."

"그럼, 현재 둘만 아는 거군."

"네,"

"우선, 백악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정보 통제를 해야겠어. 코디에게도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다른 보고 라인에게는 전달하지 않겠습니다."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콜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는 복도에서 콜과 헤어지며 그에게 칭찬을 남겼다.

"수고했네. 일을 잘 처리했어. 보상이 있을 거야. 그동안 공적을 확인한 뒤에 결과를 알려주지."

국장의 말에 콜 요원의 눈이 커졌다. 국장의 말은 그가 진급 대상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위험한 괴물이 등장했다고 생각해서 바로 달려오긴 했지만, 그는 이 정도 보상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는 환한 얼굴로 동료에게 달려갔고, 버드 국장은 차를 타고 CIA 본부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국장이 탄 차는 백악관으로 향하지 않았다.

랭글리 외각에 잠시 멈추었던 국장의 차는 얼마 뒤 다시 CIA 본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차가 멈추었던 동안 국장은 라이터 불로 서류 하나를 태우고, 전화 한 통을 걸었을 따름이었다.

다음 날, 국장의 말대로 콜 요원과 코디 요원의 승진이 결정되었다.

두 사람은 아쉽게도 본사가 아닌 지사로 발령이 났다. 그것도 콜롬비아에 있는 남미 작전국으로.

동료들은 농담 삼아서 좌천이 아니냐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기대를 품고 콜롬비아로 향하는 헬기에 올라탔다.

하지만, 헬기는 남미 작전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헬기는 남미 작전국에 도착하기 전, 정부군 게릴라가 쏜 휴대용 미사일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다.

생존자는 없었다.

두 사람을 끝으로, 그동안 묻혀왔던 다른 수많은 정보처럼 새로 등장한 괴수의 정보도 불꽃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

이란의 수도 테헤란.

오후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아잔 소리가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괴물들이 나타난 이후 삶이 몇 배나 궁핍해졌지만, 테헤란의 시민들은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잠시 뒤, 기도 시간이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힘든 생업으로 돌아갔다.

외국인이 임대한 거대한 창고 안에도 다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는 일반인과 각성자들이 섞여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탈 가동해! 다들 기다리고 있어!"

"마법진 다시 한번 확인해. 뭔가 올라가 있으면 큰일 나!"

우우우웅.

책임자의 지시가 이어졌고, 잠시 뒤, 창고 중앙에 펼쳐져 있던 문양이 조금씩 빛을 발했다.

포탈이 가동된 것이다.

"온다! 모두 준비해!"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색 고글을 걸치고 포탈을 바라보았다.

화아아악.

건물 안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문양 위로 사람들과 커다란 헬기가 나타났다.

나타난 헬기 옆에는 EV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전송 완료. 이상 없습니다."

"마나석, 완전히 방전되었습니다."

이어진 보고에 책임자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무리하게 헬기를 이동시켰기 때문일까? 이동 한 번에 마나석 하나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중요한 작전 때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포탈 이동 한 번에 중급 마나석을 소모해 버리다니. EV 아랍 지부장으로서 무척이나 속이 쓰린 일이었다.

헬기와 함께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검은 방탄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아랍 지부장과 이곳에 있는 지부 사람들은 나타난 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2년간 세계 각지에서 활약을 해오고, 지금도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EV 특수 작전팀이었다.

지부장이 반가운 얼굴로 나타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바실리에다가 로잘리아 영애까지 같이 오다니. 설마 2, 3팀이 같이 움직일 줄 몰랐는데?"

그는 러시아의 젊은 남녀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물론 인사는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했다.

크르르릉.

로잘리아 뒤에 있는 커다란 은빛 늑대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나석이 방전된 건 헬기가 아니라 저 괴물 때문일지도 몰라.'

러시아의 마스코트이자 로잘리아의 펫으로 이름 높은 은빛 늑대였지만, 그는 저 괴물과 친해지기 어려웠다.

로잘리아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포탈로 넘어온 각성자들은 모두 EV에서도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2, 3팀 최정예가 온 모양이군. 그럼 지금 팀장은 누구지?"

방어막 각성자 바실리가 팀장으로 있는 2팀.

테이머 각성자이자 러시아 대통령의 딸이 팀장으로 있는 3팀.

두 팀은 젊은 팀장들이라는 점에서 EV 내에서도 꽤 이슈가 되었다.

1팀 팀장이자 EV 섬의 책임자인 마르셀로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력자이자 실력자였지만, 두 젊은 팀장은 나이나 경력 면에서 여러모로 말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지난 2년간의 활약은 그런 말을 쑥 들어가게 했다.

각자의 팀 내에서도 전투 각성자들 중에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당연히 둘 중 한 사람이 이 혼합팀의 팀장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엥? 케이는 안 보이는데?"

혹시나 다시 살펴보았지만, 집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낯선 헬멧이 한쪽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헬멧 맨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근래 들어온 이름이 있었다.

"설마, 카우보이...."

"네, 이번 작전의 팀장이세요."

헬멧을 쓴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셰인입니다."

헬멧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부장이 황당한 얼굴로 헬멧을 바라보았다.

"설마, 카우보이 영화에 나오는 그 셰인입니까?"

"네, 맞습니다."

지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명에 맞춰서 가명을 만들다니, 새로 나타난 집행자는 케이보다 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다른 각성자들도 새로운 팀장에 그리 불만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바쁘니까 우선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작전팀 각성자들과 포탈 문양을 벗어나며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부원들이 우르르 나와 헬기를 창고 밖으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작전팀 각성자들의 뒤를 따라 은빛 늑대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늑대는 셰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집행자와 나란히 걸었다.

셰인은 붕대를 감은 손으로 허리 위까지 올라오는 은빛 늑대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크르릉.

늑대가 기분이 좋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작전 1팀 팀원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기해하는 것은 로잘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신기해요. 코니는 저 말고는 아무도 따르지 않았었는데, 케이도 무서워하기만 했었어요."

하지만, 지부장은 그런 것보다 지금 작전이 더 궁금했다.

"괴물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의 물음에 로잘리아가 대답했다.

"위성으로 확인했어요. 두바이를 박살 낸 괴수가 호르무즈 해협을 건너 북상 중에요."

위성으로 확인한 바로는 테헤란이 괴수의 목적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괴수가 진행하는 길목에 테헤란이 걸쳐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대 건물 크기의 괴물이라니. 정말 세상이 망하려는 것인지."

그는 입속으로 기도문을 외우더니, 셰인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바실리가 대답했다.

"그걸 알아보려고 온 겁니다. 저희가 괴물의 약점을 찾아낼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바실리는 전과 다르게 믿음직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헬멧을 쓴 남자는 바실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주급이 따로 약점을 가지고 있기는 어려운데…."

불길한 말에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얼굴로 헬멧을 쳐다보았다.

셰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먼저 정찰을 하기 위해 왔으니 약점을 찾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꺼내진 헬기에 올라탔다.

떠오르는 헬기에서 셰인은 헬멧에 두 손가락을 대고 지부장에게 인사를 했고, 지부장도 얼떨결에 그의 인사를 따라 했다.

지부장은 그가 카우보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전팀과 늑대 괴물을 태운 헬기가 남쪽을 향해 출발했다.

같은 시각.

괴수는 이란 중부에 있는 루트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쿵. 쿵. 쿵.

사막 위로 모래 폭풍이 휘몰아쳤고, 폭풍 사이로 거대한 바위가 나왔다가 사라졌다.

바위뿐이 아니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이루어진 건물 일부분도, 모래가 뭉쳐져서 굳어진 사암도 모래 폭풍 밖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모래 폭풍 속에는 바위와 건물과 모래로 이루어진 거대한 거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신화에 나오는 진정한 골렘이 사막을 걷고 있었다.

222화. < 무리 군주(1) >

모래 폭풍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루트 사막에 있던 괴물들도 허둥지둥 사방으로 달아나다가 모래 폭풍에 휘말려 버렸다.

폭풍 속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그 피는 다시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모래 폭풍에서 10km 떨어진 모래 언덕 뒤.

헬기 하나가 모래 위에 내려앉아 있었고, 언덕 위에는 일단의 사람들이 망원경으로 다가오는 모래 폭풍을 관찰하고 있었다.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얼마 전 테헤란에서 출발한 EV 특수 작전팀이었다.

아쉽게도 망원경으로는 몰아치는 모래 폭풍 안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일행 중 한 명은 조금이나마 안을 뚫어볼 수 있었다.

"모래 폭풍 범위 3km 이상, 모래 폭풍 안으로 언 듯 보이는 괴물의 크기는 200m를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일행에게 설명하고 있는 여성은 특이하게도 망원경 대신 맨눈으로 모래 폭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망원경 이상의 뛰어난 시력은 그녀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 크기도 믿기 어렵지만, 형태도 이상합니다. 모래 폭풍 때문에 제대로 확인할수 없지만, 몸이 바위와 모래, 건물의 잔해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망원경으로 모래 폭풍을 살펴보던 팀원들이 작게 속삭였다.

"저런 괴물도 있을 수 있는 거야?"

"괴물은 전부 동물이 변해서 되는 거잖아? 저건 원본 동물이 있을 수가 없을 텐데?"

"EV 홈페이지에 우리가 모르는 형태의 괴물도 등장할 수 있다고 나왔잖아."

"그거야 이론적인 이야기 아니었어?"

"언제, EV 홈페이지에 나온 게 이론만으로 끝난 적 있어? 나도 믿지 않았지만, 저걸 보니 이론이 아닌가 보네."

"젠장, 사람 모습을 흉내 내는 괴물도 사실이라는 이야기잖아."

"어, 나도 안 믿었는데. 그것도 사실이라는 거잖아?"

사람 모습을 흉내 내는 괴물. 얼마 전, 위험도 최상의 괴물로 EV 대원들에게만 뿌려진 도플갱어라고 이름 붙여진 괴물이었다.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EV 내에서만 정보를 공유했지만, EV 안에서도 그 정보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태 동물이 변한 괴물만 보던 사람들이 도플갱어라는 괴물의 존재를 믿기는 쉽지 않았다.

"도플갱어도 실제로 있고, 돌연변이 괴물들과 다른 괴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헬멧을 쓴 남자. 셰인이 입을 열었다.

물론, 이쪽 세상에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저 군주급 몬스터를 보니, 다른 괴물들도 금방 나타날 게 분명했다.

확신 어린 셰인의 말에 모두 속삭이던 말을 멈추었다.

"더 자세한 정보는 확인이 어렵습니까?"

이어진 셰인의 물음에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모래 폭풍 때문에 파악이 어렵습니다. 모래 폭풍 안에 들어가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헬기로 접근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여성은 머리에 쓴 비행 헬멧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껏 말한 여성, 할리마는 이 작전팀의 헬기 조종사였다.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로 활약했던 여성으로 괴물들에게 나라가 무너진 뒤, EV에 소속이 된 용병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 재연수를 받는 중에 그녀는 각성자가 되었고, 조종술이라는 신기한 특성을 얻고 특수 작전팀의 수송 담당이 된 것이다.

할리마의 뛰어난 시력도 조종술 특성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특성에 포함되는 능력이었다.

그녀의 말에 바실리가 손을 들었다.

"저 모래 폭풍이 문제라면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그의 방어막은 헬기 정도는 충분히 감쌀 수 있었다.

미리 팀원들의 특성을 들었던 셰인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실리 대원과 나까지 같이 가면 되겠군."

그때 불쑥 로잘리아가 손을 들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저하고 코니도 같이 갈게요."

러시아 대통령의 딸이자 러시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각성자였지만, 그녀는 어떤 위험에서도 물러선 적이 없었다.

그리고, 케이를 비롯한 EV 작전팀에서도 그녀를 특별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셰인도 당연히 특별 취급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로잘리아와 은빛 늑대가 같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사람들을 싣고 헬기가 날아올랐고, 남은 사람들은 원거리 특성 사용자를 제외하고 총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모래 폭풍을 피해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떠오른 헬기는 모래 폭풍을 향해 돌진했다.

잠시 뒤, 모래 폭풍에 접근한 헬기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바실리가 만든 방어막이었다.

"돌입합니다!"

할리마의 외침과 함께 헬기가 모래 폭풍 안으로 뛰어들었다.

콰과과과!

수많은 모래가 헬기를 때려댔지만, 다행히 방어막에 막혀 옆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모래와 함께 휘몰아치는 기류는 헬기를 마구 흔들어댔다.

모래 폭풍 속에서 헬기가 춤을 췄지만, 신기하게도 추락하지 않았다.

모두, 각성자 할리마의 특성인 조종실력 덕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시력과 반사신경. 그리고 조종하는 헬기를 자신의 몸처럼 느끼는 신비한 능력으로 태풍 속에서도 헬기를 계속 전진시켰다.

콰과과과!

모래 폭풍이 방어막을 때리는 소리와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일행의 귀를 계속 때렸다.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일행은 모두 창문에 붙어 괴수를 관찰했다.

할리마의 말대로였다.

태풍 안에 바위와 건물 조각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있었다.

"사진하고 모습이 다르군."

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본 사진에는 바위만으로 이루어진 괴수가 찍혀 있었다. 괴물의 모습에서 부서진 건물 파편들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저런 괴물이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아무리 봐도 저건 그냥 바위하고 건물들인데…."

로잘리아가 괴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헬기를 조종하고 있던 할리마가 소리쳤다.

"몸을 이루는 바위와 잡동사니들 위로 모래가 흐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는 괴물의 몸 위를 흐르는 모래를 볼 수 있었다.

조금 붉어 보이는 모래였다.

모래가 핏줄처럼 바위 위를 흐르고 있었고, 바위와 바위가 맞닿는 관절 위도 메우고 있었다.

할리마의 설명에 일행은 다시 괴수의 몸을 살폈다.

헬기가 괴수 옆에 다가간 덕분에 일행도 괴수의 몸 위로 흐르는 붉은 모래를 볼 수 있었다.

"저건 뭐죠? 모래가 아닌가요?"

"뭔지 모르겠지만, 저게 본체군."

바실리의 말에 셰인이 대답했다.

그와 경훈이 싸운 몬스터들 중에는 연기로 이루어진 놈, 액체로 이루어진 놈도 있었다.

모래처럼 보이는 몬스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저게 본체라면 어딘가 핵이 있을 텐데…."

셰인이 고민에 잠기자, 로잘리아가 눈을 빛냈다.

"어쨌거나 이것도 괴물이겠죠?"

로잘리아가 헬기를 조종하는 할리마에게 소리쳤다.

"좀 더 바짝 붙여주실 수 있겠어요?"

"가능할 것 같아요."

다행히 괴물은 헬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쿵, 쿵.

묵묵히 앞으로 향하는 괴물 옆으로 헬기가 바짝 다가갔다.

차르르륵.

헬기가 괴물의 어깨 옆에 다가가자, 로잘리아가 헬기 옆문을 열어 재꼈다.

콰과과과.

폭풍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고, 헬기 안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로잘리아가 괴물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리고 특성을 사용했다.

화아아악.

'넌 누구?'

로잘리아의 감각이 걸어가는 괴수에게 뻗어갔다.

거대한 크기의 괴수였지만, 그녀의 특성인 테이밍은 크기와는 관련이 없었다.

물론, 이 정도 고등급의 괴물을 테이밍해서 펫으로 만들기는 불가능했지만, 정보를 뽑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녀의 감각이 괴물 어깨를 넘어 중심을 향해 뻗어갔다.

'넌 어디에 있어? 넌.... 맙소사! 혼자가 아니잖아?'

퍽!

"꺅!"

로잘리아가 충격을 받고 헬기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셰인이 그녀를 잡아 주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모두 깜짝 놀랐다.

다행히 로잘리아는 조금 창백해졌을 뿐, 어디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테이밍을 하다가 튕겨 나왔어요. 테이밍에 실패했어요."

그녀가 비명을 지른 것은 테이밍 실패의 여파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패할 것은 미리 각오했기에 그녀가 놀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어요. 저 모래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어요. 수억, 수십억의 괴물들이에요, 마치 개미 집단 같은...."

몸 위로 흐르는 저 모래처럼 보이는 게 모두 살아있는 괴물들이라니.

그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라 버렸지만, 셰인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뉴욕에서 비슷한 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핵이 있을 텐데."

"아, 괴물들에 명령을 내리는 여왕 개미같은 게 있긴 했어요. 괴물의 가슴에서 느껴졌는데…. 더 접근하지 못하고 튕겨 나왔어요."

그녀가 괴물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바위들과 폐자재로 뭉쳐있는 가슴이었다.

가슴 위로 모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볼 때였다.

쿵.

갑자기 괴수가 걸음을 멈추었다.

쿠구구구궁.

바위 괴수가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헬기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와 동시에 한쪽 팔이 헬기를 향해 뻗어오기 시작했다.

"아! 죄송해요! 괴물이 테이밍을 알아차린 모양이에요!"

로잘리아의 말에 할리마가 조종간을 확 밀었다.

"젠장! 이탈하겠습니다!"

헬기가 추락하듯이 아래로 내려꽂혔다.

콰과과과.

동시에 덩치에 걸맞지 않게 바위 괴수의 팔이 헬기 위로 스쳐 지나갔다.

드드득.

헬기가 마구 흔들렸다. 사람들은 헬기 벽을 붙잡은 채로 버터냈고, 할리마가 필사적으로 헬기를 안정시켰다.

다행히 헬기는 괴수의 팔을 벗어났다.

"크윽. 움직여!"

그녀는 다시 조종간을 움직여 헬기의 방향을 바꾸었다.

마나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헬기의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렸다.

두두두둑.

떨어져 내리던 헬기가 다시 방향을 바꿔 괴수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쏴아아아아!

갑자기 괴물의 팔에 흐르던 모래가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놀란 할리마가 모래를 피해 헬기를 움직여 댔지만, 쏟아지는 모래 줄기는 마치 촉수처럼 수십, 수백 가닥으로 변해 도망치는 헬기를 에워쌌다.

모래가 헬기를 휘감았다. 모래에 덮여 밖이 보이지 않았다.

콰지직!

바실리의 방어막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크으윽! 이건 못 버텨요!"

헬기 벽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던 바실리가 비명을 질렀다.

우드드득.

동시에 헬기 벽에서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펠러가 멈추고, 유리가 금이 갔다.

타타타!

셰인이 열린 문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보았지만, 총알은 모래 일부만 터트릴 뿐이었다.

결국, 방어막 일부가 깨져나가고, 모래가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빨리 모여요! 탈출할게요!"

그때, 로잘리아가 은빛 늑대를 붙잡고 모두에게 외쳤다.

할리마가 안전띠를 뜯어버리고, 뒤쪽으로 달려왔고, 바실리도 그녀에게로 몸을 날렸다.

모두, 은빛 늑대 코니의 몸을 붙잡았다.

"셰인 뭐해요!"

로잘리아가 아직 오지 않는 셰인을 향해 소리쳤다.

셰인은 문 앞에 서서 다른 일행을 향해 나아가는 모래들을 보고 있었다.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모래들은 셰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모래들은 셰인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잘리아의 외침에 셰인도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모래가 일행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바실리가 필사적으로 다시 방어막을 만들었고, 로잘리아가 코니를 향해 외쳤다.

"코니! 점프해!"

아우우우!

그녀의 외침에 은빛 늑대가 하늘을 향해 크게 외쳤다. 은빛 털이 하늘로 치솟으며 빛을 뿌렸다.

화아아악!

일행의 모습이 헬기에서 사라졌다.

콰드드득.

그와 동시에 헬기가 모래 속에서 박살이 났다.

모래 줄기들은 헬기를 점점 우그러뜨렸다.

잠시 뒤, 헬기는 공처럼 우그러졌고, 모래 줄기에 끌려 올라갔다.

고철 더미가 된 헬기는 괴물의 어깨에 들러붙었다.

쿵. 쿵.

헬기를 몸에 붙인 바위 괴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수가 앞으로 나아갔다.

괴수 뒤쪽, 모래 폭풍 속에서 희미한 반투명 막이 나타났다.

코니와 함께 순간 이동을 한 셰인과 각성자들이었다.

헥헥헥.

은빛 늑대는 숨을 헐떡였다.

너무 많은 인원이었고, 너무 먼 거리였다.

혼자만의 짧은 텔레포트는 이제 몇 번이나 가능했지만, 등급이 오른 지금도 이런 이동은 쉬운 게 아니었다.

웅웅웅.

바실리도 창백해진 얼굴로 겨우 방어막을 유지 시키고 있었다.

테이밍 실패의 충격에 로잘리아도 지쳐있었고, 할리마도 넋 나간 얼굴로 점점 멀어져가는 고철이 된 헬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셰인은 묵묵히 등 뒤에서 뭔가 꺼내고 있었다.

마치, 기계의 부품 같았다. 몸에서 나올수 없는 양이었지만, 모두 지쳐서 셰인이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셰인은 꺼낸 물건들을 조립했다.

그가 조립한 물건은 중앙에 작은 기계가 있는, 문양이 새겨진 작은 평판.

바로 이동식 포탈이었다.

셰인은 포탈에 스위치를 올렸다.

우우우우웅.

포탈에 은빛 구멍이 만들어졌고, 구멍 안에서 한사람이 빠져나왔다.

"모두 수고했어요."

완전 무장을 한 경훈이었다.

223화. < 무리 군주(2) >

"이제부터는 셰인과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에게 셰인이 다가갔다.

"바빴나 보네."

"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경훈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들과 같이 오지 못할 정도로 경훈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러 국가를 조율해야 했고, 전투 지원, 후방 병참과 EV 협력 기업들과도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물론, EV가 많은 일을 처리해 주었지만, 경훈이 직접 얼굴을 보여야 하는 일도 많았다.

둘은 나머지 사람들을 남겨 두고, 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저 두 사람만으로 되려나?"

"글쎄. 케이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겠어요?"

로잘리아의 말에 바실리가 대답했다.

로잘리아는 숨을 가라앉히는 늑대에 기댔다. 그녀는 그 상태로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지는 두 집행자를 계속 바라보았다.

*

휘이이잉.

모래 폭풍이 사람을 날려버릴 정도로 휘몰아쳤지만, 경훈도 셰인도 어려움 없이 계속 괴수를 쫓아 달려나갔다.

셰인의 무게는 인간보다 몇 배나 무거웠고, 경훈도 천근추로 몸을 바닥에 붙였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이 모래 폭풍 속에서는 드론을 띄우기는 무리였다.

달려가면서 셰인이 조금 전까지 확인한 내용을 경훈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늑대 덕분에 모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지."

-결국, 모래를 닮은 군체 몬스터가 저 몬스터의 본체라는 거네요.

이브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래도 총을 쏴서는 그리 효과가 없었어. 아무래도 핵을 찾아서 파괴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

"대충 핵이 있는 위치를 알아낸 것 같으니, 레일건으로 시험을 해보죠."

괴수에 2km 정도까지 다가가자, 경훈이 아공간에서 레일건을 꺼냈다.

경훈은 꺼낸 레일건에 마나석을 장착했다.

그 모습을 보고 셰인이 고개를 저었다.

"사격 한 번에 중급 마나석 하나라니. 전에는 몰랐는데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닌 무기군."

마나석이 풍족했던 저쪽 세상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포탈 이동에 마나석 하나를 다 소모해 버렸다고 낙심한 아랍 지부장을 보니, 이 무기가 얼마나 낭비가 심한 무기인지 알 수 있었다.

"200만 달러 정도니까. 토마호크 미사일 셋 정도 가격입니다. 개인용 무기로 친다면 비싸지만, 화력을 생각하면 그리 가성비가 나쁘지 않아요."

-몇 년 전을 생각해보세요. 비싼 것 맞습니다.

구시렁거리는 이브의 목소리를 들으며 경훈이 레일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경훈이 레일건으로 바위 괴수의 등을 겨눈 뒤, 방아쇠를 당겼다.

차아아앙!

마나석이 발사되었다.

콰과과과.

모래 폭풍이 갈라지면서 긴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위 괴수의 등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콰직.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가 깨져나갔다. 괴수의 몸에 있던 방어막이었다.

콰아앙!

이어, 폭발이 괴수의 등 전체를 뒤덮었다. 피처럼 붉은 모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쿠구구구구.

바위와 폐자재들이 아래로 쏟아졌다.

하지만, 경훈은 눈살을 찌푸렸고, 셰인도 고개를 저었다.

-예상과 달리 몸에 붙은 바위에도 방어막을 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자체 수복형 괴물입니다. 귀찮아질 것 같습니다.

깨진 방어막이 다시 복구되고 있었고, 괴수의 푹 패인 등이 메꿔지고 있었다.

아래로 쏟아졌던 바위들은 붉은 모래 줄기들이 다시 끌어 올렸고, 모자라는 부분은 사막의 모래들이 퍼 올려져 붉은 모래와 섞여 돌처럼 굳어졌다.

"접근해서 드잡이질이라도 해야 하나...."

마나석이 비싼 것은 둘째 치더라도 레일건을 다시 사용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저렇게 상처를 메워버리면 레일건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

쿵. 쿵.

바위 괴수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공격해 올 것 같습니다.

"그런 공격을 당했는데 그냥 갈 리가 없겠지."

경훈은 아공간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그때 바위 괴수를 노려보던 셰인이 입을 열었다.

"시선을 좀 끌어줘. 내가 해보지."

그는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올렸다.

위이이잉.

기계 손이 드릴처럼 회전했다. 손에 감긴 붕대를 뜯어져 나갔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몬스터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전 헬기 안으로 들어온 붉은 모래들은 셰인을 무시했었다.

과거에도 꽤 많은 몬스터들이 기계인 셰인을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공격을 당하면 반격하기도 했지만, 그전까지는 평범한 사물로 인식한 몬스터도 상당수였다.

"어쨌거나 지금 저 몬스터한테 찍힌 건 내가 아니니까."

셰인의 말대로였다.

부우우우웅.

커다란 바위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괴물이 허공에 대고 휘두른 팔에서 튀어나온 바위였다.

셰인은 바위 괴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경훈은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바위에 맞아 모래 언덕이 터져나갔다. 평범한 바위가 부딪친 것치고, 충격이 심했다.

하지만, 날아온 바위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둘 다 평범하게 날아온 바위에 맞을 각성자나 로봇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모래를 뚫고 경훈이 옆으로 튀어나왔다.

"좋아. 거리는 멀지만, 저 정도 크기라면 가능할 거야!"

경훈이 옆으로 달리면서 대검을 들어 바위 괴물을 가리켰다.

SS급 능력자의 마나가 대검에 밀려들었다.

쩌저적.

대검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대검 위로 균열이 퍼져나갔다.

대검이 경훈의 마나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쾅!

대검은 터져나갔다. 경훈은 검이 터져나가는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검 전체에 뿌려진 마나를 제어했다.

부서진 파편이 마나를 실은 채로 모두 한쪽으로 날아갔다. 바위 괴수가 있는 방향이었다.

슈아아악!

빛나는 파편들이 하늘을 갈랐다.

모래 폭풍을 뚫고 달리던 셰인은 머리 위를 지나가는 파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콰콰콰쾅!

파편 대부분이 괴물의 몸에 부딪혔다. 작은 폭발들이 계속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방어막도 깨뜨리기 쉽지 않았다.

레일건으로 쏜 마나석과 달리, 대검 파편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좋았어."

하지만, 셰인은 만족했다. 시선을 끌기는 충분했다.

바위 괴수는 경훈을 향해 걸으며 몸에 붙은 바위와 자재를 마구 뿌려대고 있었다.

괴수는 몸에 붙어 있는 바위와 건물 파편들이 줄어들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덕분에, 셰인은 무사히 괴물의 발밑에 도착했다.

쿵.

거대한 바위 발이 그의 옆을 내딛는 순간, 그는 위쪽으로 와이어가 달린 손을 발사했다.

슈우우우욱!

기계 손이 불꽃을 내뿜으며 치솟아 올랐다.

이브가 새로 개조한 와이어는 두 배의 인장력과 두 배의 길이를 자랑했고, 기계 손에도 로켓 추진기를 달아서 200m까지 위로 솟구칠 수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애들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케트 주먹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셰인은 만족했고, 경훈은 부러워했다.

위로 치솟은 기계 손은 괴물 몸을 이루고 있는 바위에 박혔다.

방어막이 막아서려고 했지만, 때마침 날아온 대검 파편들이 방어막에 구멍을 냈다.

촤르르륵.

와이어가 감기자, 셰인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쿵. 쿵.

걸어가는 바위 괴수의 몸 아래로 셰인을 매단 와이어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흔들리는 와중에도 와이어는 계속 감겼고, 셰인은 괴수의 몸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철컥.

기계 손이 다시 팔에 결합하였다.

셰인이 고개를 들었다.

바위와 모래, 폐자재들이 엉켜있는 괴수의 몸이 휘청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암벽 등반인가."

그것도 움직이는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로프도 없고 피켈도 없지만, 셰인에게는 두 손이 있었다.

셰인은 손을 박아넣은 채로 헬멧을 벗어 던졌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시야를 가리는 헬멧을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콰직.

기계 손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

몸에 붙어서인지 방어막이 막아서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벽에 차례로 박아넣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위와 바위를 지나가고, 움직이는 붉은 모래의 선을 지나갔다.

예상대로 괴수는 물론, 붉은 모래들도 그를 인식하지 못했다.

괴수가 격렬하게 움직이는 덕분에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지만, 그는 결국, 로잘리아가 가리키던 괴수의 가슴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푸욱.

그는 왼손을 암벽에 박아넣은 채로 다른 손을 붉은 모래와 평범한 모래가 섞여 굳어진 사암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는 박아넣은 오른손을 회전시켰다.

위이이이잉!

기계 손은 드릴이 되어 사암을 계속 파고들었다.

'핵이 어디냐!'

그는 괴수의 가슴에 매달린 채로 센서를 최대한으로 펼쳐놓았다.

센서가, 그의 몸에 흐르는 마나가 괴수의 몸을 뚫고 들어간 그의 손을 통해 괴수의 핵을 찾기 시작했다.

*

-셰인이 핵을 탐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경훈의 귀에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그의 주변에는 바위와 콘크리트, 철근과 아스팔트가 내려꽂히는 중이었다.

주위에 처박히는 것들은 모두 저 바위 괴수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었다.

평범한 바위나 건물 파편이라면 이렇게 열심히 피할 필요도 없었지만, 지금 날아오는 것들은 은은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날아오는 것들은 전부 마나가 담겨있었다.

괴수는 몸에 붙어 있는 것만 마나를 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날아가는 검에 마나를 실을 수 있는 게 주인님만의 능력이 아니었군요.

"놀리는 거냐!"

-아닙니다. 정보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주인님만의 특징이 아니라면 군주급 몬스터 이상에서는 이런 공격을 할 수 있는 몬스터가 더 나올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말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말이었다.

지금 경훈이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렇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날아오는 바위와 콘크리트 더미가 마나를 싣고 있었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경훈의 마나 감지 능력이면 등 뒤에서도 날아오는 바위의 위치를 알 수 있었고, SS급에 달하는 신체는 날아오는 바위보다 빨리 몸을 피할수 있었다.

물론, 괴수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건 경훈이 원하던 바였다.

지금은 당장은 경훈도 괴수를 파괴할 수 없었고, 괴수도 경훈을 죽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경훈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찾았습니다!

뚝!

이브의 말과 함께 날아오던 바위들이 뚝 끊어졌다.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군주가 사막 가운데 우뚝 멈춰서 있었다.

*

콰과과과.

드릴이 된 손이 계속 파고들고 있었다. 핵은 겨우 5m 안쪽에 있었다.

괴수도 방금 멈춰 섰다.

괴수의 몸 위로 흐르던 붉은 모래들은 지금 길을 잃고 정신없이 몸 위를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지만, 셰인은 계속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핵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4m, 3m, 2m..

"잡았...!"

기계손이 핵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콰직.

기계 손과 팔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져 버렸다. 아니, 기계 손과 와이어가 모두 박살이 나버렸다.

길게 늘어뜨렸던 와이어가 점점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 와이어를 갉아 먹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놀란 그가 와이어를 끊고 박힌 팔을 빼냈다.

콰르르르륵.

팔을 빼낸 구멍 안에서 피처럼 붉은 모래가 와이어를 갉아 먹으며 차오르고 있었다.

다른 붉은 모래들과 달랐다. 분명 저 모래는 그를 인식하고 있었고, 그를 적대하고 있었다.

강화된 기계 팔도, 엄청난 강도의 와이어도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모래였다.

'저게 핵을 지키는 군체의 우두머리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에도 모래는 구멍을 채우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빨랐다. 몸을 벗어나도 촉수처럼 변하는 저 모래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였다.

-탈출하세요! 주인님이 공격할 거예요!

이브의 외침이 안테나를 통해 들려왔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셰인은 박아넣은 손을 빼내고, 발을 들어 바위를 박찼다.

퍽!

셰인이 바닥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그리고, 구멍에서 튀어나온 시뻘건 모래가 촉수처럼 변해 떨어지는 그를 추격했다.

셰인은 뒤따라오는 모래 촉수를 보지 않았다. 그는 멀리 모래 언덕을 바라보았다.

모래 폭풍 너머로 레일건을 겨누는 경훈의 모습이 보였다.

번쩍!

레일건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퍽!

마하 7로 날아온 마나석이 셰인이 만든 구멍을 정확하게 뚫고 들어갔다.

약해진 방어막은 마하 7의 탄환을 막지 못했고, 붉은 모래도 마나석을 멈추지 못했다.

마나석 총알은 구멍 깊숙이 뚫고 들어가, 괴물의 핵 앞에 도착했다.

핵을 감싸고 있던 피처럼 붉은 모래들이 마나석 총알과 핵을 모두 미친 듯이 감싸 안았지만,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마나석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카아아아아악!

모래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나석이 폭발했다.

쿵!

묵직한 진동이 사막을 울렸다.

다음 순간,

콰아아앙!

바위 괴수의 상체가 폭발했다.

돌과 모래와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예상보다 큰 폭발이었다. 파편들이 수백 미터 수 킬로미터를 날아갔다.

"괜찮겠지?"

경훈이 식은땀을 흘리며 폭발을 바라보았다.

-큰일 날 뻔했어요! 화력을 더 줄였어야죠!

"안 뚫릴까 봐 그랬지. 셰인 괜찮겠지?"

-잘 모르겠어요. 통신도 안 되고 센서에 잡히지도 않아요!

경훈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동시에 모래 폭풍이 멈추었다.

휘날리던 모래가 가라앉기 시작했고, 괴수가 터져나간 장소에 번쩍이며 뭔가 나타났다.

"로잘리아?"

은빛 늑대를 타고 있는 로잘리아였다.

늑대가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잠시 뒤, 모래 아래에서 붕대에 감긴 팔이 나타났다.

로잘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이 보이지 않았다.

늑대는 아랑곳 앉고 계속 모래를 팠다.

잠시 뒤, 몸 전체가 드러났다.

로잘리아의 표정이 점점 괴상해졌다.

그녀의 펫이 찾아낸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로봇이 카메라를 들어 로잘리아를 바라보았다.

"벌써 들켜버렸군."

로봇은 등에서 기계 손을 꺼내더니 팔에 끼워 넣었다.

그는 카우보이 모자를 꺼내 머리에 쓰고, 손을 총 모양으로 만든 뒤 로잘리아를 겨누었다.

"자, 죽기 싫으면 지금 본 것을 잊는다."

그의 말에 은빛 늑대가 다가와 카메라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침이 카메라를 뒤덮었다.

로잘리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늑대에게 시달리는 로봇을 바라보았다.

224화. < 위성 (1) >

사막 위에 바위와 건물 파편, 철골 등이 흩어져 있었다.

괴수의 파편이 가득한 사막 한곳에 주먹만 한 보석 하나가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반쯤 탁하게 변한 보석이었다.

보석이 박혀 있는 곳은 평범한 모래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붉은 모래가 조금씩 보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뿌리가 길어지듯, 촉수가 늘어나듯, 조금씩 다가오는 모래 줄기였다.

겨우, 겨우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피처럼 붉은 모래는 포기할 수 없어 보였다.

조금씩 가까이 다가간 붉은 모래는 결국 보석, 아니 마나석 옆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붉은 모래로 이루어진 촉수가 모두 꿀렁거렸다.

아직 희망이 남아있었다.

모두가 모아준 한 가닥 남은 숨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마나석과 다시 연결되면 일족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

겨우 이쪽 세상에 넘어와서 힘을 회복했는데, 시작도 못 하고 끝날 수는 없었다.

이제 바로 옆이었다. 모래 줄기가 마지막으로 힘을 냈다. 붉은 모래가 보석을 향해 몸을 뻗었다.

탁.

모래가 마나석을 뒤덮기 직전, 손 하나가 내려와 마나석을 낚아챘다.

모래 줄기가 마나석을 따라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힘껏 짓밟는 발에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아, 아, 안돼....'

마지막 이미지를 끝으로 붉은 모래는 생명을 잃었다.

툭. 툭.

경훈은 신발에 묻은 붉은 모래를 털어냈다.

"마나석이 뽑혀나갔는데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무리형 몬스터라 체내의 마나를 소모해서 버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잠깐인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처럼 경훈의 발에 밟힌 붉은 모래는 힘을 잃고 흩어지고 있었다.

다른 모래들은 이미 붉은 빛을 잃고 다른 모래와 섞이고 있었다.

경훈이 흩어지고 있는 붉은 모래를 주워들었다.

"결국, 이게 뭐지? 보기에는 그냥 모래처럼 보이는데."

-저도 처음 보는 것입니다. 수거해서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경훈의 머리 위로 드론들이 날아다니고, 작은 거미 로봇들이 움직이며 붉은 모래를 채취하고 있었다.

경훈이 집어 들었던 모래를 흩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와 바위와 폐건물 자재 등. 괴물의 잔해들이 사막에 가득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게 맞아? 아무리 봐도 전부 사막에서 나온 것들뿐인데...."

물론, 아프리카에도 사막이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아프리카에서 온 느낌은 안 들었다.

-현장 검사일 뿐이지만, 아프리카 지역에서 나온 것 같은 물질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 지역을 제외하면 전부 아라비아반도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경훈은 열심히 모래를 담아 넣는 조그만 거미 로봇을 지켜보았다.

"부서진 군주가 아랍의 사막에서 나온 놈이라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확률로 따지면 80% 이상입니다.

경훈은 이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어서 반쯤 소모된 마나석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것보다 군주급이 넘어오는 게 가능한가? 이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대격변이 일어난 지 겨우 2년이었다.

저쪽 세상을 멸망시킨 지구 규모의 웨이브가 벌써 일어난 것도 황당한 일이었는데, 군주급 괴물이 등장하다니.

군주들이 만든 차원 포탈들을 막아온 경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군주급 몬스터는 특이 케이스로 보입니다. 무리로 이루어진 몬스터라 작은 차원문도 통과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대로였다. 붉은 모래로 이루어진 괴물은 자신의 무리를 나누어 차원문을 넘은 것이었다.

꽤나 그럴듯한 이브의 말에 경훈은 그 추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차원 포탈 분석은 가능할 것 같아?"

-상당히 어렵습니다. 기존의 문양과 형태가 다릅니다. 마치 번역하기 전 원판을 보는 느낌입니다. 표본이 좀 많으면 모를까 차원 포탈만으로는 복제나 개조는 불가능합니다.

"역시 그런가…."

개조해서 괴물들 대신, 인간이 이동할 수 있게 된다면 이사벨을 당장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개조는커녕 재현 자체도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경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럼, 이 군주급 괴물에 대한 문제는 계속 연구해 보기로 하고…. 이제 남은 문제는 셰인인가?"

경훈은 로잘리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로봇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은빛 늑대가 로봇의 옆에 붙어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괜찮을까 모르겠네."

-로잘리아 양은 무척 지적인 여성입니다.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로봇이라고요? AI요? 마술 같은 것 아니에요? 카메라 모습의 뚜껑을 쓰고 있다던가, 어디서 마이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던가...."

막 청년이 된 지적인 여성인 로잘리아는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로봇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이야기를 비밀로 해주면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케이의 실수나 이브의 한숨 같은 거."

자신의 펫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유치한 말을 해대는 게 사람이 아니라니. 헬멧을 쓰고 붕대를 손에 감고 있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카메라 모습을 한 머리와 방금 붙인 기계 팔이 너무도 잘 보이고 있었다.

"로잘리아는 그냥, 집행자 셰인으로 알고 있으면 돼요. 마나 공학으로 탄생한 AI지만, EV에서는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 않고 있어요."

어느새 다가온 경훈의 말에 로잘리아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헬멧을 쓰셨던 거군요. 알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바실리한테도, 아빠한테도.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킬게요."

"그 정도까지 할 건 없는데…."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로자 라고 불러주세요."

"....고마워요. 로자."

셰인이 코니를 쓰다듬으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신기하군. 페로몬이라도 뿌리고 다니는 건가? 저런 맹목적인 믿음이라니.

이어폰으로 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고, 그녀를 걷게 해주었어요. 신뢰하지 않을 리가 없죠.

-아, 그런 식이었군. 그렇다면 뭐.

이브의 설명에 셰인이 바로 이해했다.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훈은 둘의 대화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셰인에게 말했다.

"슬슬 다른 팀원들이 올 겁니다. 위장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쩝, 불편한데.... 어쩔 수 없지."

셰인이 아쉬운 표정으로 모자를 벗고, 등뒤에서 헬멧을 꺼내 카메라에 씌웠다.

그는 모자를 등 뒤에 넣고, 손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로잘리아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셰인 맞네요. 하지만, 헬멧만 써도 전혀 다르게 안 보여요. 와, 신기하다."

로잘리아의 모습을 보고 경훈이 중얼거렸다.

"지적인 여성이라...."

-감성도 풍부한 소녀죠.

경훈의 말에 이브가 살짝 변명했다.

로잘리아는 흥분했는지 평상시와 달리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마나 공학으로 만들었다면 그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에고 소드 같은 방식인가요? 검에 영혼이 있는 것 같이…"

"영혼이라."

로잘리아의 말에 셰인이 붕대를 감는 것을 멈추었고, 이브도 흥미를 보였다.

-영혼이라, 흥미로운 학설이군요.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둘 다 관심이 많아 보였다.

'마나 공학으로 만든 AI라....'

과학이나 마나 공학 같은 것은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훈이었지만, 그도 이제부터라도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물어봐도 되나?"

셰인의 허락에 로잘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셰인같은 로봇이 더 있나요? 케이는 사람 맞는 것 같은데…, 다음에 등장하는 집행자도 로봇이라던가…."

경훈은 로잘리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접근 중입니다.]

그때 이브가 마이크를 통해 사람들의 접근을 알려주었다.

멀리서 헬기에서 탈출한 인원들과 뒤에 남아있던 인원들이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셰인은 다시 붕대를 감았고, 로잘리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브 오랜만이에요. 케이를 서포트하시는 중이신가 봐요."

로잘리아를 비롯한 EV 특수 작전팀은 모두 경훈의 서포터이자 EV의 행정관인 이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경훈과 함께 작전할 때도, 드론이나 다른 로봇의 도움을 받을 때도 이브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아왔었다.

[네, 반가워요.]

이브가 로잘리아의 인사에 대답해주었다. 이브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질문에 답을 하자면 현재 EV에 스스로 생각하는 로봇은 셰인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브의 대답에 로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브의 대답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로봇은 없지만, AI는 하나 더 있답니다.]

이브의 대답에 로잘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경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바실리와 다른 팀원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모두 펼쳐진 광경에 놀라워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괴수를 처치했는지 로잘리아에게 물었지만, 로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못 봤어요."

그녀는 보았다고 해도 절대로 말을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경훈과 셰인을 쳐다보았고, 셰인이 입을 열었다.

"우선 야영 준비를 해야할 것 같은데? 헬기가 부서졌으니, 최악의 경우 테헤란까지 걸어가야 할지도 몰라."

셰인의 말에 조종사 할리마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고, 사람들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테헤란과 연락되었습니다. 헬기를 곧 보내기로 했습니다.

마나석이 또 날아가게 되어 지부장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브는 그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섬에서 연락입니다. 로켓 발사 준비가 끝났답니다.

"드디어 완성인가."

이브가 전해온 소식에 경훈은 눈을 빛냈다. 2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경훈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들은 야영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건물 파편에서 나무를 뜯어내고, 바위와 콘크리트 더미를 들고 와서 방풍 벽을 쌓았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열심히 뛰어다니는 작전 팀원들의 표정은 무척 밝아 보였다.

셰인도 가지고 있는 물품을 꺼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야영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경훈이 이브에게 지시를 내렸다.

"헬기는 천천히 보내라고 해."

-네? 아, 알겠습니다. 몇 시간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이브도 이제는 경훈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열심히 야영지를 만드는 팀원들의 표정은 놀러 나온 아이들 같았다. 그동안 계속되는 작전으로 힘들었던 팀원들이었다. 몇 시간 정도는 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확실히 셰인이 잘해."

계속 몰아치는 그와 달리 셰인은 팀원들의 사정을 잘 헤아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브의 말은 달랐다.

-제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사막에서 야영을 해보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습니다만….

셰인이 등에서 맥주 박스와 기타까지 꺼내는 것을 보니, 이브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경훈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자신은 로켓을 쏠 때였다.

경훈의 앞에 은빛 구멍이 만들어졌고, 그가 그안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석양이 피어오르는 저녁, 사막에는 모닥불과 함께 사람들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발사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225화. < 위성(2) >

중앙아메리카 쿠바 동쪽. 버진 아일랜드.

괴물들에 의해 섬들이 고립되기 시작된 이후 섬들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지나가는 배도 없었고, 섬에 살던 사람들도 쿠바로 탈출했다.

대륙에서 잊힌 섬들이 되었지만, 그 섬 중 한 곳은 아직 많은 이들이 살고 있었다.

영국 황실에 EV가 조차를 받은 섬.

더 세틀런드. 지금은 EV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이었다.

EV의 훈련소로 각종 공장으로 활용하고 있던 섬은 지금 긴장에 잠겨 있었다.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휴식터로 사용하던 중앙 광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광장 중앙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다.

로켓 지하 발사대의 해치가 열린 것이다.

구멍 아래. 발사대 위에는 흰색의 2단 로켓이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옆에는 움직이는 EV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로켓 이름이 적혀 있었다.

Electron Volt.

전자볼트. EV를 이용한 연구원들의 말장난이 로켓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로켓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로켓 발사에 맞춰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 것이다.

연구원들과 기술자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발사대 외각에 준비된 로비에서 방탄유리를 통해 로켓이 발사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발사 관제실에는 십여 명의 관제사가 콘솔 앞에 앉아 발사 과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 발사 10분 전 ]

카운트다운을 하는 관제사의 음성이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부 마나석 발전기를 가동합니다.]

로켓이 부르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경훈도 혜린 박사도 관제실 뒤쪽에 서서 로켓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출발이네요."

혜린 박사가 감상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제가 뭐 수고했나요. 전 생물학자일 뿐인걸요. 이 우주선은 이브와 EV 과학자들, 그리고 SG전자의 기술자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거예요."

그녀는 경훈의 말에 손을 내저었지만, 경훈은 그녀가 얼마나 이 일에 힘을 쏟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브가 기술적인 부분을 과학자, 기술자들과 함께 해결했다면, 혜린 박사, 아니 혜린 대표가 재정, 관리, 인사 등, 로켓 개발에 대한 나머지 모든 일을 처리했다.

마르셀로가 섬의 책임자라면 혜린은 SG전자의 대표인 동시에 로켓 개발의 책임자였다.

2년간의 시간 덕분인지, 그녀의 표정도 여유롭게 변해 있었다.

경훈을 대하는 것도 전보다 담담하게 변해서 경훈도 훨씬 편해졌다.

[대기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온도 24도, 습도 80%, 마나 구름은 현재 서쪽 50km 지점까지 진출해 있습니다. 기상 여건. 양호합니다.]

경훈은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비행 괴물들이 숨어 있는 마나 구름이 기상조건 중 하나가 되어버리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무사히 로켓을 발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마르셀로씨도 같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혜린 박사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르셀로는 지금 아메리카 지역의 EV 각성자들과 함께 남미에 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남미 각성자와 군대가 미군을 막는 동안, 각지에서 날뛰는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EV는 전 세계 각성자들의 조직이었다. 계속 탄압을 받아왔지만, 아직은 드러내놓고 미국을 적대시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남미에 가 있는 EV 각성자들은 비공식적으로는 미군과 싸움에 참여하고 있었다.

경훈도 EV도 몰래 그들을 돕고 있었다.

솔직히 드러내놓고 미국과 싸우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미국에게 이빨을 드러내려면 유라시아 연합 주변의 괴물들만이라도 정리해야 했다.

[발사 5분 전. 비행 코스 시스템 완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발사 1분 전, 발사준비 완료. 외부 교란 장치의 출력을 최대로 올립니다.]

바다와 하늘이 조금 희미해진 것 같았다. 시야 교란 장치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방탄유리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2년간의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발사 20초 전, 일렉트론볼트 엔진 가동.]

드디어 엔진에 불이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취소가 불가능했다.

혜린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고, 경훈이 이브에게 물었다.

"괜찮겠지?"

-네. 모든 시스템이 정상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훈의 물음에 이브가 작게 속삭였다.

경훈은 긴장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발사 15초 전. 최종 카운트다운 대기]

잠시 뒤,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발사 10초 전, 9, 8….]

관제실의 사람들은 물론, 로비에 있는 연구원과 기술자들, 그리고 섬의 모든 사람들이 방송에서 나오는 카운트다운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섬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 지하에서 만드는 로켓이 무슨 용도인지 알고 있었다.

마나 탐지 위성. 이 위성으로 그동안 공격만 당해온 인간들이 드디어 적의 위치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

섬 사람들의 기대도 로켓과 위성을 만들었던 연구원들의 기대와 다르지 않았다.

경훈과 혜린, 그리고 섬에 있는 사람 모두가 힘껏 소리쳤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모두가 함께하는 마지막 외침이 끝나기도 전. 엄청난 소리가 섬을 가득 울렸다.

콰과과과과과!

지하 발사대에 가득 연기가 메워졌다.

콰과과과.

로켓이 연기를 뚫고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모두 멍하니 하늘을 올려 다보았다.

[발사체 초음속 돌입 ]

[주 엔진 정지]

[2단 로켓 추진체 연소 시작합니다.]

방송이 이어지는 동안, 로켓은 계속 위로 솟구쳤다.

잠시 뒤, 모두의 시야에서 로켓이 사라졌고, 관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나 탐지 위성 분리 완료. 발사 성공했습니다.]

와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섬을 들썩였다.

관제실에서, 로비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환호했다.

혜린도 환하게 웃음 지었지만, 경훈은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그도 무척 기뻤지만, 지금은 위성이 보내올 결과가 더 궁금했다.

구구구궁.

잠시 뒤, 지하 발사대의 해치가 다시 닫히고, 섬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쏘아 올린 로켓에 관해 대화를 나누면서 공장으로, 사무실로, 훈련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하 관제소는 아직 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위성이 궤도에 올라, 관제소에 통신을 보내오기를 계속 기다렸다.

4시간 뒤.

"볼트에서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위성으로 첫 통신이 들어왔다.

경훈은 책상에 엎드려 잠든 혜린에게 겉옷을 덮어주고 관제실 중앙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마나 탐지 위성 볼트의 모든 시스템은 정상입니다. 초기 스캔 완료했습니다. 정확도 20%"

계속해서 보고가 이어졌다.

궤도에 올라서기 위해 위성이 지구를 도는 동안, 마나 탐지 위성은 자신의 할 일을 시작했다. 지구에 퍼져 있는 마나를 확인한 것이다.

"화면에 띄우세요."

"정확도가 많이 떨어질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위성의 상황을 보여주던 메인 모니터가 지구전도로 바뀌었다.

싸인 곡선을 그리는 위성의 궤도가 표시되었고, 이어, 지도에 색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정확도가 떨어져서인지 저쪽 세상의 위성처럼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노란 점들이 지도 곳곳에 번져 있었다.

대장급 괴물이었다.

저쪽 세상의 위성 화면에서 본 숫자의 사 분의 일도 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언제 저렇게 많아진 거지?"

다행히 붉은 점. 대군주급 괴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홍색 점은 지도에 찍혀 있었다.

군주급 괴물이 더 있었다.

분홍색 점이 아프리카 서북쪽 끝, 스페인과 거의 맞닿아 있는 모로코에 찍혀 있었다.

-저 분홍색 점이 아프리카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군주급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도 동의했다.

저 모로코에 있는 군주급 괴물이 아프리카 괴물들을 이끄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괴물은 당장은 건들기 어려워 보였다.

분홍색 점 주변에 노란 점이 가득 찍혀 있었다.

저 군주급 괴물은 군단급의 괴물들을 이끌고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분홍색 점은 더 있었다.

분홍색 점 하나는 연락이 끊어진 인도네시아 땅에 찍혀 있었고, 또 하나는 인도 북쪽 히말라아 산맥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점 하나는 만주와 러시아 사이. 다싱안링 산맥 위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경훈이 화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저놈이군."

-네, 찾은 것 같습니다.

화면이 확대되었다. 분홍색 점 주변에 노란색 점들도 보였다.

이곳에 있는 군주급 괴물도 많은 괴물을 데리고 있었다.

EV 특수 작전팀과 경훈만으로 처리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모로코에 있는 괴물과는 상황이 달랐다. 코앞에 있는 적이었다. 경훈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각국 정부에 알리고, 모두 준비시켜. 우리끼리 무리라면 연합의 힘으로 부숴야지."

그러기 위해 준비한 유라시아 연합이었고, 각성자 협회였다.

-알겠습니다.

경훈의 지시에 이브가 힘차게 대답했다.

경훈은 관제실에 있는 관제사들에게 좀 더 수고해달라는 말을 남긴 뒤, 잠든 혜린을 안아 들고 관제실을 빠져나갔다.

경훈이 나가자 관제사들은 서로 손을 마주치며 위성 발사 성공을 기뻐했다.

관제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화면에 표시되는 정확도는 계속 올라갔다.

21.01%, 21,02%....

정확도가 오르는 사이, 지도에 칠해지는 색들이 점점 정교해졌다.

산과 호수와 바다에 점들이 나타나고, 도시들에도 점이 생겨났다.

그리고, 모스크바에도, 워싱턴에도 잠시 노란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다음날, 만주 치치하얼시 동쪽 20km 지점.

한국군 6사단은 또 한 번의 싸움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로봇들이 돌아다니며 죽은 괴물들을 확인하고 있었고, 병사들이 트럭에 죽은 괴물을 싣고 있었다.

영철은 썩어가는 나뭇등걸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실려 간 괴물들은 후방에서 마나석을 채취하고 따로 시체도 가공해서 쓸만한 것을 뽑아내는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뜬 세상은 전생과 너무도 달랐다.

전생 때에는 주먹구구로 처리해 길드나 상인에게 뒷거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와중에 사고도 자주 일어났었다.

시체를 먹고 오염이 되는 군인도 나오고, 마나석을 빼돌리다가 살인도 많이 벌어졌었다.

'여긴 달라.'

이 세상은 너무도 잘 처리되고 있었다.

지금도 분명 지구 전체에서 벌어진 웨이브가 분명했다. 전생에서는 이 웨이브 한 번에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가 멸망해 버렸는 데, 이쪽 세상은 너무도 잘 버티고 있었다.

시체를 트럭에 실은 병사들이 그를 피해 멀찌감치 돌아갔다.

같은 소대에 있던 병사들은 아직도 그를 피하고 있었다. 아직도 친해지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영철은 친해질 생각이 없었다.

그를 보는 병사들의 표정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병사들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E등급으로 변한 뒤부터 바뀐 변화였다.

'결국, 이쪽 세상도 다를 바가 없는 거지.'

병사들의 표정을 보고 영철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와 함께 배속되어 싸워온 땅 각성자, 정규는 그가 실력을 보여도, 등급이 올라도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고, 좀 쉬면 안 되나."

지금도, 정규가 다가오며 한껏 투덜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병사들을 무시할 때와 달리, 영철은 정규에게 정중히 물어보았다.

유용한 각성자였다. 친해져서 나쁠 것이 없었다.

"아, 글쎄. EV와 함께 작전을 해야 한다고 또 이동하래. 도대체 언제 쉬게 해주는 거야."

정규의 말에 영철이 눈썹을 찡그렸다.

"부대 전체가 이동하는 겁니까?"

"아니, 일부만 움직이나 봐, 이 소대에서는 나만 불렀어. 정말 부려먹는데 도가 텄다니까."

'일부만?'

영철이 급하게 몸을 내밀었다.

"저도 참여할 수 없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정규가 조금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좋아할걸? 실력 있는 각성자가 많이 필요한 모양이야."

"그럼,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데려가 주십시오."

"그, 그러지 뭐."

영철의 말에 정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철은 검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앞장서서 사단 본부로 걸음을 옮겼다.

"어이, 같이 가."

뒤에서 정규가 그를 불렀지만, 영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EV와의 작전이라.

드디어 저 알 수 없는 조직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정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던진 떡밥을 감시 대상이 바로 물어버렸다. 역시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같이 가자니까!"

정규도 영철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226화. < 진격(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