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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이브가 경훈에게 보고했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론은 물론 거미 로봇까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주억였다.

"군주급이라면 그렇겠지."

경훈은 이브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리지?"

-진군 속도로 계산하면 약 30분 정도면 이곳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경훈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아쉽지만, 달아나야할 것 같았다.

SS급으로 올라선 지금은 군주와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번 상대는 전에 만났던 거대 괴수가 아니었다.

수천이 넘는 군대가 적이었다.

탈출도 문제였다.

경훈의 차원문은 경훈 외에는 아직 살아있는 생명체를 통과시키지 않고 있었다. 포탈도 아직 그 외에는 이동해 본 사람도 없었고... 경훈과 셰인은 공간이동으로 빠져 나갈 수 있었지만, 이사벨과 베일리가 문제였다.

-지상과 가까운 곳으로 올라가 주인님이 오버차지로 구멍을 뚫고, 베일리가 이사벨을 데리고 날아서 맨해튼을 빠져나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늘을 나는 놈들이 있었다며."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위험해 보이는 방법이었다.

"저기, 지금 탈출하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경훈과 이브의 말을 듣고 있던 이사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이사벨은 어렸을 때 어떻게 여기를 빠져나갔어요? 저 지하철 역으로 나간 것은 아닐거 아니에요.

"이곳 지하철 역 벽과 가까운 하수관이 있어요. 벽을 통과해서 하수관으로 들어가 강으로 빠져나갔어요. 수영은 자신 있었는데 강물에 휘말려 죽을 뻔했어요."

이사벨의 말에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탈출 방법이라니.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시 할 수 있겠어?"

"네, 자신 있어요."

"그럼, 베일리만 남은 건가?"

멍?

다시 작아진 강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근데 그거라면 베일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사벨이 다시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에요?

"이번에 등급이 오르면서 특성이 조금 바뀌었어요. 그전에는 저 혼자만 가능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과 같이 넘어갈 수 있게 되었어요."

-베일리같이 살아있는 동물도요?

"네."

경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러면 계획을 바꿔도 될 것 같았다.

경훈이 셰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수영가능하신가요?"

셰인이 고개를 저었다. 수영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멍! 멍!

베일리가 신나게 짖어댔다.

셰인이 카메라를 긁적이며 말했다.

"베일리가 수영을 잘 한다는데...날 데리고 가 주겠데."

경훈이 황당한 얼굴로 로봇과 강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알아듣는 겁니까? 그리고, 베일리는 사람 말 알아듣는 거 아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동료들이었다.

베일리가 변신해서 둘을 업고 헤엄을 쳐준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없었다.

경훈이 이사벨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야. 이사벨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 새로운 특성이라니, 대단해. 그럼 셰인과 베일리를 부탁할게."

"네!!"

이사벨이 힘차게 대답했다.,

강아지와 로봇, 그리고 소녀가 승강장을 떠나갔다.

동료들이 계단 위로 사라지자 경훈이 입을 열었다.

"잘 말한 거야?"

-좀 버벅이긴 했지만 잘 하셨습니다.

"셰인이나 이브가 말해주면 되잖아. 내가 하면 영 어색해서.."

-이사벨이 좋아하는 것을 보십시오. 주인님이 하셔야 했습니다.

"그건 그런데..."

-그것보다, 주인님도 등급이 오르셨으니 특성이 진화하셨을 텐데요.

"음...역시 등급이 높으니 쉽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

-아, 네. 알겠습니다.

시쿤둥한 대답에 경훈이 발끈했다.

"기다려봐. 금방 찾을테니."

아무래도 이브가 경훈을 조련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 같았다.

쿠르르르르르르.

20여분 뒤, 멀리 터널 안에서 엄청난 소음과 함께 진동이 전해졌다.

드디어 렛맨 군단이 도착한 것이다.

경훈은 홀로 승강장 아래에 서서 터널 안을 바라보았다.

"이거 좋은데?"

그의 옷이 달라져 있었다.

모두 죽은 뮤턴트가 입고 있던 방탄 장비였다.

검은 방탄복과 검은 장갑, 그리고, 보호대. 셋트로 맞춰진 보호 장구에는 모두 마나석이 박혀 있었다.

모두 죽은 뮤턴트가 입고 있던 방탄 장비였다.

마나를 흘리자, 장갑 위로 투명한 방패가 나타났고, 몸 색이 주변과 비슷해지기도 하고, 몸이 몇 배나 가벼워졌다.

"아무래도 그냥 버리긴 아깝네. 금고는 괜찮겠지?"

-네. 진도 8 이상도 견디는 튼튼한 금고입니다. 맨해튼 건물과 지하가 모두 무너져도 금고는 무사할 겁니다.

"좋아."

경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양손에 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하나는 새로 꺼낸 삼정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으로 부러진 삼정검이었다.

반으로 부러진 삼정검은 조금 전까지 뮤턴트가 썼던 검이었다.

전이었으면 더 이상 쓸수 없었던 아이템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잘라진 검날에서 빛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 다 모일때까지 날뛰어볼까?"

경훈은 구석마다 붙어 있는 마나 폭탄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203화. < 군주(4) >

어두운 승강장에 몬스터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승강장은 어두웠다. 빛이라고는 경훈이 들고 있는 검에서 나는 빛뿐이었다.

한쪽은 검날을 타고 흐르는 가날픈 빛이었지만, 다른 손에 들린 반검은 환한 빛이 길게 자라있었다.

렛맨들이 빛을 향해 뛰어들었고, 빛이 괴물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스팟!

긴 선이 그어지고, 괴물들이 잘려나갔다.

괴물들의 선두가 쓸려 나갔다.

쩌적.

경훈이 검을 보고 혀를 찼다.

"힘을 줄였는데도 이모양이야."

반검은 물론, 새로 꺼낸 검까지 검날 표면에 균열이 가 있었다.

-새로운 무기를 구해야 할것 같습니다.

경훈은 이브의 말을 들으며 뒤로 물러섰다.

크아아아앙!

수 십마리의 렛맨들이 한 번에 전멸했지만, 죽은 괴물들 위로 괴물들이 밀려들었다.

"이게 정말 웨이브같은데."

좀비가 쏟아져 들어오는 영화보다 훨씬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모든 괴물이 달려드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렛맨이 벽으로 움직였다. 마나 폭탄을 붙여놓은 곳이었다.

-마나 폭탄이 발견되었습니다. 자폭합니다.

쾅!

폭탄이 터지면서 근처의 괴물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역시, 마나를 감지하고 있었어."

서걱!

검을 휘두르며 경훈이 말했다.

-마나 폭탄을 함정으로 쓰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거미 로봇 들킨것으로 예상했던 일이야."

어차피 마나폭탄은 시간 끌기와 한가지 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산산 조각나는 괴물들 일부에서 마나가 빠져나와 다른 괴물들에게 들어가는 것이 경훈의 눈에 보였다.

"역시 죽이기는 불가능 한걸까?"

밀려오는 괴물들 사이에 다른 마나를 지닌 괴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지닌 마나는 모두 동일했고, 그들의 지닌 마나는 하나인 것처럼 움직였다.

경훈의 눈에는 저 마나가 들어간 렛맨들이 군주 자체로 보였다.

저 마나가 들어간 렛맨들이 군주였고, 마나가 옮겨다닐 수있는 모든 렛맨들이 군주가 살기위한 토양이었다.

-그럼, 결국 모든 렛맨들을 죽여야 군주를 죽일수 있다는 거군요.

"워싱턴에 온 놈들 중에는 군주는 없었던 것 같아. 거리 제한은 있는 모양이야."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정보입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경훈과 이브가 대화를 나누었다.

승강장에는 벌써 괴물들로 가득 덮혀 있었고, 경훈의 뒤를 따라 렛맨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쾅! 쾅!

승강장에 설치된 마나 폭탄들이 계속 터져나갔다. 이브가 발각된 마나폭탄을 터트린 것이다.

"군주급인데 그냥 마나만 공유하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군주급 중에서는 생존력은 발군이지만, 군주가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겠죠.

"좋아. 도망칠때 도망치더라도,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경훈에게는 걸리적 거릴게 없었다.

미로처럼 변해 있는 지하 광장은 적을 암습하기 딱 좋았다.

경훈은 미로를 넘나들며 괴물들을 베어나갔다. 특히 군주 마나를 지닌 렛맨들을 집중적으로 처리했다.

괴물들이 죽고, 마나들이 다시 육체를 찾아 사방으로 넘나드는 동안, 미로처럼 되어 있던 지하 광장도 괴물들이 점점 가득차게 되었다.

경훈은 점점 한 곳으로 밀리게 되었다.

지하 광장과 연결된 건물의 지하 주차장. 바로 이사벨이 살던 곳이었다.

주차장 중앙에 선 경훈이 들고 있던 반검을 바닥에 던졌다.

퍽.

바닥에 떨어지자, 검은 산산히 부서졌다.

경훈의 마나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다른 검도 검날 전체가 갈라져 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오버차지를 쓴 것만큼도 적을 죽이지 못했지만, 경훈은 그리 아쉽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서는 렛맨 대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공격은 적을 유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착은 끝났지?"

-네.

로봇 팔이 달린 드론들이 경훈 주위로 모여들었다.

경훈이 정찰을 보냈던 날렵한 드론들과 다른 드론들이었다. 전부 시설과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만든 건설용 드론들이었다.

경훈은 드론들을 이 주차장에 먼저 보내서 폭탄을 설치하게 한 것이었다.

"마나 폭탄은 알아차렸겠지만, 과연 군용 C4 폭탄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주차장의 기둥마다 엄청난 양의 C4 폭약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훈은 삼정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는 아직 검에 마나를 넣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검이 부서질지도 몰랐다.

-삼정검이 이 정도면, 저격총도 문제겠군요.

경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훈은 주차장 중앙에 서서 괴물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괴물들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왜 안오는 거지?"

경훈이 의아해 하는 사이, 멀리서 괴물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전처럼 무질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박자를 맞춘 듯한 규칙적인 발소리였다.

잠시 뒤, 지하철과 연결된 통로에서 괴물들의 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저건…, 기사 군단이군요.

갑옷을 차려입은 렛맨들이 앞에 방패를 들고 열을 맞춰 들어오고 있었다.

가죽 갑옷이었지만, 투구까지 맞춰 입고 나타난 수백의 기사급 렛맨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렛맨 기사들이 통로에 나와 나란히 늘어섰다.

-일반 렛맨들로는 상대할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기사급만 보낸 걸까요?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야."

이브는 알수 없었지만, 경훈의 눈에는 괴물들의 마나가 보였다.

괴물들에게서 피어오르는 마나가 하나로 이어져있었다. 괴물들이 구호도 없이 똑같이 움직일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저들은 하나였다. 모두가 군주였다.

쿵!

기사들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후욱.

마나가 기세가 되어 밀어닥쳤다. 바람이 불었다.

본능, 미련, 죽음. 괴로움,

동시에 온갖 이미지가 경훈의 머리에 쏟아졌다. 지룡을 처음 보았을때 느꼈던 이미지와 다르지 않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더 집요하고 더 본성을 건드리는 이미지들이었다.

죽고 싶지 않지? 살기 원하지? 왜 남을 위해 희생해야해? 어떻게하던지 살면 되지 않아?

이미지들은 계속 이런 의문을 쏟아냈다.

경훈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식으로 사람들을 타락시킨 거냐?"

왜 마지막 생존자와 각성자들이 동료를 버리고 괴물이 되었는지 이제 알것 같았다.

괴물들과 싸우던 각성자와 생존자들은 계속 이런 이미지에 노출된 것이었다. 지친 그들은 군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쿵!

경훈도 발을 굴렀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마나가 솟구쳤다.

후욱!

경훈 앞에서 바람이 맞부딪쳤다.

전에도 통하지 않는 이미지였다. 지금은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이미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받은 게 있으니 보답을 해야겠지."

경훈이 환하게 빛나는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빛의 선이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검이 휘둘러지는 방향으로 선이 그어졌다.

기사들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콰과과과과광!

마나의 선이 그어졌지만, 전처럼 절삭음이 들리지 않았다.

폭음과 함께 바닥에 쌓인 먼지가 치솟았다.

먼지는 바로 사라졌다.

괴물들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괴물들 앞에 푸른 방어막이 펼쳐져 있었다. 선 하나가 방어막 중앙에 그어져 있었지만, 곧 그 선은 사라졌다.

경훈의 공격이 막힌 것이다.

파직.

오히려 경훈이 들고 있는 검이 깨져나갔다.

경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면에 방어막을 중복시켰어. 몸이 여러개니 저런 식으로 할수도 있군."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기사들 사이로 다른 렛맨들이 튀어나왔다. 기사들 뒤에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렛맨들이 쏟아져나왔다.

착.

거기다 이번에는 기사 모두가 허리에 꼽혀있는 검을 잡았다. 검에 마나가 몰려들었다.

-비슷한 공격으로 보입니다!

튀어난 전술이자, 군대를 한 몸처럼 움직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위기였다. 검도 박살났고, 다른 삼정검도 먹히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지만,

적도 C4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더 두고 볼 시간 없어! 터트려!"

-네!

대답과 동시에 기둥에 달려있던 폭탄이 터져나갔다.

쾅! 콰앙!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폭파에 놀란 렛맨 기사들이 방패를 들어올렸다.

날아오는 파편이 방어막에 막혀 기사들은 무사했지만, 다른 렛맨들은 군주의 보호막 속에 있지 못했다.

퍼억!

폭탄에 휘말린 일반 렛맨들은 방어막이 뚫려 피투성이가 되었고, 엘리트들은 폭풍에 휘말려 튕겨나갔다. 방어막 덕분에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진영은 한순간에 붕괴되었다.

폭발을 막아낸 기사들이 마나를 뿜어내어 먼지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은빛 먼지가 흩어지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는 괴물은 없었다.

괴물들은, 군주는 분노했다. 인간이 사라졌다. 기껏 일을 중단하면서 달려왔는데 놓치고 말았다.

[찾아!]

군주는 일족 모두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하 광장과 지하철에 모여 있던 렛맨들이 다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쿠궁.

묵직한 진동이 사방에서 울렸다.

렛맨들이 휘청거렸다.

쩌저저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이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천정이 갈라지고 있었다. 기둥이 있던 자리에서 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군주는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주차장은 국제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쿠구구궁.

천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00층이 넘는 건물의 지하 기둥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 무게를 벽체가 견딜리가 없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테러로 무너진 저쪽 세상과 달리 이쪽 세상의 쌍둥이 빌딩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테러를 일으키기 전에 테러 조직이 몬스터에 의해 괴멸되었던 것이다.

두 빌딩이 남아 있었기에 이 구역 이름도 국제 무역 센터 구역으로 지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버텨온 두 건물이 이제 무너져내렸다.

콰과과과광!

엄청난 먼지를 뿜으며 건물들이 가라앉았다.

콰지지직.

방어막으로 막아내려고 했지만, 기사 각각의 힘으로는 100층 건물의 무게를 버텨내기 어려웠다.

방어막이 점점 깨져나갔다.

이미, 다른 렛맨들은 벌써 건물에 깔려 압사했다. 지하철역도 무너져서 미로 형태의 지하광장과 승강장도 묻혀버렸다.

주변에 다른 렛맨이 없었다. 여기서 묻혀버리면 몸을 옮길데가 없었다.

결국 뉴욕의 군주는 기사들을 잃기 전에 결정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서로 달라붙었다. 압력에 몸들이 찌그러졌다.

팔다리가 뭉개지고 서로 섞였다. 피부가 늘어붙고, 얼굴이 파물혔다.

*

쿠우우우웅!

건물이 모두 무너지자 먼지가 하늘까지 솟구쳤다.

물에 젖은 몸으로 강변에 올라가 있던 일행은 강건너의 광경에 넋이 나가버렸다.

"설마, 남아서 한다는게 저거였나?"

"네? 저게 경훈 아저씨가 한거라고요?"

변신을 풀고, 늘어져 있던 베일리도 이사벨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경훈이 할법한 일이긴 한데…."

그동안 보아온 경훈이라면 충분히 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베일리와 이사벨은 놀랄수 밖에 없었다.

"직접 물어봐. 온 것 같으니까."

치지지직.

강변에 도착하자마자 펼쳐놓은 이동식 포탈에 은빛 구멍이 만들어졌다.

경훈이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경훈의 몸에는 먼지와 그을음이 가득했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딱 봐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수 있었다.

차원문을 나서자마자 경훈은 먼지가 가득한 맨해튼을 노려보았다.

"저걸로 잡긴 무리겠지?"

-모두 죽어도 다른 렛맨에게 옮겨갈겁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앙!

그때, 맨해튼의 먼지속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거대한 괴수가 지르는 괴성이었다.

쿵!

그리고, 먼지속에서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났다.

쌓인 건물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나가고, 거대한 덩어리가 몸을 일으켰다.

5층 이상 되어보이는 거대한 덩어리 괴물이었다. 수많은 팔과 다리가 덩어리 표면에 튀어나와 있었고, 수백 수천의 쥐 얼굴이 괴물 표면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땅속에서 하나로 합쳐진 괴물이었다.

"세상에…."

이사벨이 놀라 입을 막았고, 셰인이 총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경훈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거 분명 놈들이 하나로 합쳐진거지?"

-외형으로 보면 합쳐진 괴물일 확률이 80% 이상입니다.

"마나도 그놈꺼야. 저거 뉴욕 군주야! 하나로 합쳐진 이상 해볼만해!"

경훈은 신이나서 베일리 앞으로 달려갔다.

"베일리 일어나! 날 데리고 저기까지 날아가줘!"

베일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

물에 젖어 무척이나 귀엽고 불쌍하게 보였지만, 경훈은 속지 않았다.

녀석은 분명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다.

경훈이 베일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무척이나 험상굳은 미소였다. 경훈 주변에 마나와 살기가 넘실거렸다.

왕.

강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변신을 시작했다.

204화. < 군주 (5) >

크아아아앙!

괴수가 몸을 꿀렁거리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캬아악.

하늘을 날던 괴물들이 날개를 접고 괴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퍽, 퍽.

괴물들은 괴수의 몸에 처박혔고, 바로 몸속으로 사라졌다. 군주에게 흡수된 것이다.

괴수의 몸 위로 날개와 박쥐 얼굴이 튀어나왔다.

하늘을 나는 괴물만이 아니었다. 지하로 들어가지 못한 렛맨들이 전부 괴수, 아니 뉴욕 군주를 향해 달려왔다.

렛맨들이 괴수의 몸에 빨려 들어갔다.

렛맨들이 빨려 들어갈수록, 괴수의 몸이 점점 커졌다.

괴수는 튀어나온 손과 발등으로 몸을 굴렸다.

차가 걸리면 살덩이로 감싸 우그러뜨렸고, 건물을 만나면, 들이받아서 부숴버렸다.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군주는 분노를 사방에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

베일리가 다시 날개 달린 사자로 변신을 마쳤다.

경훈이 베일리 등에 올라탔다.

푸훅.

사자 모습을 한 베일리는 코로 바람을 푹 내뱉었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떨어뜨릴지도 모르겠는데요.

"설마, 그러려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경훈이 대답했다.

이사벨은 경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따라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행과 달리, 체력이 바닥이었다. 더구나 저런 괴수를 상대로 그녀가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경훈이 이사벨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기계 손이 이사벨의 어깨를 두들겼다.

"지원이 필요하겠지?"

셰인이 경훈을 보며 물었다. 경훈은 셰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훈이 아공간에서 저격총을 꺼냈다.

그는 이사벨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엄호를 부탁할게."

어차피 등급이 오른 덕분에 저격총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공간 속에 처박아 두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

이사벨이 놀란 눈으로 저격총을 받았다.

"셰인 총은 사정거리가 괜찮은가요?"

"이 기관총은 저격용으로도 쓰던 물건이야. 사정거리는 충분해."

"그럼, 부탁합니다."

셰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사벨이 베일리에게 소리쳤다.

"베일리! 경훈 아저씨를 부탁해!"

사자 모습을 한 베일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날개를 폈다.

긴 날개가 펄럭이자, 날개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사방으로 바람이 퍼져나가며 베일리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날개 달린 사자가 인간을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헤엄치던 거대한 물고기 괴수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뿜었다.

조금 전 맨해튼을 탈출하던 이사벨 일행을 간발에 차이로 놓쳤던 물고기 괴물이었다.

베일리가 조금만 늦게 날아올랐어도 일행은 이 물고기 괴물과 싸워야 할뻔했었다.

이번에 베일리는 높게 날아 강을 건넜고, 물고기 괴물은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일리가 경훈을 태우고 맨해튼으로 날아가자, 셰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격하기 좋은 곳이 있을 텐데..."

"그건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사벨이 저격총을 품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셰인은 카메라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쫓아 달렸다.

그들 앞에는 반쯤 완공된 40층짜리 건물이 맨해튼을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었다.

*

살덩이 괴수. 뉴욕의 군주는 처음 지하에서 튀어나왔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지금은 지름이 30m가 넘는 7층 높이의 괴물이 되었다.

괴수는 사방으로 굴러다니며 건물들을 부수었다.

100층에 가까운 거대한 고층건물은 무리였지만, 10층 내외의 건물들은 괴수에 짓눌려 무너져내렸다.

돌덩이와 커다란 건물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지만, 방어막에 막혀 괴수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괴수와 제일 가까운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건물 옥상에 경훈이 내려섰다.

베일리는 경훈을 내려놓고, 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쿵! 쿵!

건물 아래에서 먼지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는 건물 주위를 괴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잡으실 생각인가요?

이브의 물음에 경훈은 아공간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삼정검도 버티지 못했는데 평범한 아이템이 버텨줄까요?

경훈이 씩 웃었다.

그는 대검을 하나 더 꺼내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살덩이 괴물이 건물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경훈은 아래로 뛰어내렸다.

양손에 쥔 대검이 빛나기 시작했다.

쩌저적.

동시에 검이 갈라져 나갔다.

상당한 높이였지만, 괴물 위까지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린 경훈은 금이 간 대검들을 아래에 찔러넣었다.

콰직!

방어막이 버티지 못하고, 뚫려버렸다.

검도 균열이 더 커져서 더 버티기 어려워보였다.

경훈은 방어막을 뚫고, 괴물의 몸 깊이 금이 간 검들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제어하고 있던 마나를 풀어놓았다. 아니, 갈라진 검 안에 마나를 가득 쏟아부었다.

퍼억! 퍼억!

검이 박힌 곳에서 살덩이들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피가 솟구치고, 큰 구멍이 만들어졌다.

쿠에에에엑!

군주가 비명을 질렀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구멍이 훨씬 깊었다.

박살 난 검 파편들이 만들어낸 구멍이었다.

등급이 오른 뒤, 경훈은 손을 떠난 무기에도 마나를 실을 수 있게 되었다.

파괴된 문양 검 조각에 마나를 싣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대검의 파편 하나하나가 엄청난 마나를 머금고 괴수 내부를 박살 낸 것이다.

삼정검의 마나 칼날들보다 파편 수는 적었지만, 쓸 수 있는 무기는 훨씬 많았다.

경훈은 아공간에서 다시 대검들을 꺼내 들었다.

대검들이 빛났고, 그는 괴수의 몸 위를 달려가며 다시 검을 꽂았다.

쾅! 쾅!

살점이 날아가고, 괴수의 몸이 출렁거렸다.

비명과 이미지가 맨해튼을 가득 메웠지만, 경훈은 개의치 않았다.

괴물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피부 위로 흔들거리던 손과 발이 길게 자라나 경훈에게 달려들었고, 평범했던 피부가 쥐 얼굴들로 변해서 경훈의 발을 씹으려고 했다.

하지만, 쥐 얼굴로 변한 몸은 다시 검이 박혀 터져버렸고, 촉수처럼 변해 달려들던 손과 발은 멀리서 날아온 총알에 박살이 났다.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휴우.

이사벨이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실력이 좋아. 그렇게 계속 사격해."

탕! 탕! 탕!

옆에서 기관총을 단발로 갈기며 셰인이 이사벨을 칭찬했다.

"네!"

이사벨이 크게 대답하고 다시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강 건너 맨해튼이 바로 앞처럼 보였다.

그 덕분에 경훈 아저씨가 싸우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물론, 너무 빨리 움직여서 검을 꼽을 때나 겨우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혼자서 뉴욕 City를 멸망시킨 괴수와 싸우고 있었다.

아니, 경훈은 저 거대한 괴수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사벨은 경훈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지만, 그녀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숨을 멈추었다.

조준경의 십자선이 경훈을 향해 달려드는 기다란 손을 가리켰다.

이사벨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경훈에게 다가가던 손이 터져나갔다.

-이번 사격은 이사벨입니다. 실력이 대단합니다. 셰인에게 배웠다지만 저격총까지 이렇게 잘 쓸지는 몰랐습니다.

이브의 칭찬을 들으며 경훈은 계속 괴수의 몸에 검을 박아넣었다.

탕! 탕! 탕! 탕!

멀리서 지원해준 덕분에 훨씬 싸우기가 편했다.

벌써, 괴수의 몸은 삼분의 일 이상이 깎여나갔다.

피가 쏟아져 내를 이루고 있었고, 살점이 거리에 가득했다.

"지룡 때보다 훨씬 싸우기가 쉽군."

원래 이런 몸이 아니어서 그런지, 뉴욕 괴수는 지룡보다 움직임도 느리고, 공격력도 약했다.

-이런 무식한 공격이 계속되면 지룡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지룡 때도 오버차지 공격 두 번으로 큰 타격을 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10번 이상 검을 터트려댔다.

군주급이라고 해도 제정신을 찾기 어려울 게 분명했다.

몸이 망가질수록 뉴욕 군주도 필사적으로 경훈을 공격했다.

갑자기 몸속에서 방패들이 튀어나와 방어막을 펼치기도 하고, 검을 쥔 손들이 자라나 경훈에게 검기를 쏘아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셰인과 이사벨의 지원과 경훈의 공격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괴수는 마지막으로 건물을 들이박아 경훈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힘이 다한 괴수는 건물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괴수는 움직임을 멈추었고, 다시 이미지를 쏘아 올렸다.

전과 다른 이미지였다.

아쉬움, 억울함, 분노가 가득한 이미지였다.

괴수가 마지막 괴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경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쏟아지는 이미지 안에 이상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 그리고, 버려진 시베리아의 한 마을.

하지만, 살짝 보이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에 섞여 사라져버렸다.

모든 이미지가 분노로 가득 찼다.

분노. 분노. 분노. 분노.

드드드드드.

붉은 피를 뒤집어쓴 살덩어리가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분위기가 안 좋은데."

대검을 찔러넣던 경훈이 질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고, 촉수가 된 팔, 다리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쥐 얼굴이 튀어나와 다른 쥐 얼굴을 뜯어먹고, 해머를 든 손이 살덩이를 내려쳤다.

경훈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발아래가 따뜻해진 것 같았다.

-군주 괴수 내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중입니다. 현재 심부 온도 800, 900, 1000도. 이미 생명체로서의 유지는 불가능합니다!

"설마..."

-자폭일 확률이 90% 이상입니다!

경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괴물이 자폭이라니.

물론, 마나석을 폭주시키면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생명체가 자폭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괴수의 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폭발 범위 1km 이상! 폭파 10초 전입니다. 빨리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젠장!"

경훈이 괴물의 몸을 박찼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폭발 범위를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군주급으로 강화되어 경훈의 방어막도 엄청나게 강해졌지만, 지금 폭주를 일으킨 것은 군주급 마나석이었다.

경훈의 방어막도 버티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크아아앙!

하늘에서 사자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활짝 편 날개가 경훈을 뒤덮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경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베일리가 힘껏 날개를 펼쳤다.

날개에서 마나가 한껏 뿜어져 나오며 베일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경훈이 놀란 눈으로 베일리를 바라보았지만, 날개 달린 사자는 자랑할 시간도 부족했다. 지금은 폭발을 벗어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베일리가 경훈을 붙잡고 막 강으로 나설 때였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살덩이가 한순간에 모두 녹아내렸다.

그리고, 살덩어리 중앙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맨해튼 전체를 가득 메우는 빛이었다.

그리고, 충격파와 함께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충격파는 괴물이 부딪쳐도 버텨왔던 고층건물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렸고, 바닥에 깔린 잔해를 날려버렸다.

그리고, 마나가 실린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바닥에 흩어진 살덩이들과 피들이 모두 증발했고, 차들이 녹아내리고, 건물이 불타올랐다.

맨해튼 남부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버렸다.

허드슨강도 이글이글 타올랐다.

머리 위를 지나가는 베일리를 잡기 위해 몸을 내밀었던 물고기 괴물도 방어막이 깨져나가고, 몸이 불탔다.

쿠에에엑!

물고기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맨해튼 하늘에 버섯구름이 피어났다.

강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이사벨과 셰인이 멍하니 버섯구름을 바라보았다.

쿵!

그리고, 그들 뒤로 베일리가 내려앉았다.

경훈도 베일리도 무사했다. 베일리의 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베일리는 바로 변신을 풀었다.

그리고, 경훈 앞에 서서 고개를 쳐들었다.

왈! 왈!

딱 봐도 자신을 칭찬하라는 이야기였다.

경훈은 강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멍! 멍!

베일리가 신이 나서 이사벨에게 달려갔다.

경훈도 황당한 얼굴로 맨해튼을 바라보았다.

맨해튼은 작은 핵폭탄이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모두 멍하니 맨해튼을 바라보는 사이, 사방에 퍼져나가던 마나들이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훈에게로 모여든 것이다.

"역시,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는 거였어."

모여드는 마나를 느끼며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 이 등급이 끝이 아니었다.

마나는 경훈에게만 몰려들지 않았다.

이사벨에게도 작지 않은 마나가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사벨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을 마나가 휘감았다.

-아무래도 등급이 또 오를 것 같습니다.

경훈은 이사벨을 보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204화. < 군주 (5) >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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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 주워왔습니다. <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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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화. < 준비하는 사람들 (1) >

진혁은 창문 앞에 서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서울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2년 전 중국이 여러 개로 조각난 뒤로 서울의 하늘은 계속 푸르렀다.

세계는 아직도 시름에 잠겨 있었지만, 최상층 아파트에서 보는 서울은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아침이었지만, 서울은 무척이나 활기차 있었다. 거리는 차로 가득했고, 새로운 건물들도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2년 전에 느껴지던 우울함은 이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적응한 것일지도 모르지."

정장을 차려입고 중얼거리는 진혁의 모습은 2년 전과 많이 달라 보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일까? 젊고 건장한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얼굴에서 위엄과 관록이 느껴지고 있었다.

위이이잉.

탁자 위에 놓은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협회장님, 1시간 뒤에 협회 본부에서 정기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잊지 않으셨겠지만,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알겠습니다."

겉모습과 분위기는 달라졌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위해 노력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 준비를 마친 그는 바로 집을 나섰다.

청담동의 가장 비싼 아파트답게 지하 주차장에는 수많은 고급 승용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눈에 띄는 자동차들이 있었다. 눈에 띄는 차 중에는 그의 애마도 끼어있었다.

중후하고 아름답지만 뭔가 느낌이 다른 차.

그의 차는 흡기구도 없고, 배기관도 필요 없는 전기차였다. 하지만, 차에는 코드를 꼽을 수 있는 충전 단자도 보이지 않았다.

배터리 대신 들어있는 마나석 발전기가 전기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는 1년 전 차를 산 뒤에 충전은커녕, 마나석도 바꾼 적이 없었다.

삑.

키를 누르자 차 문이 스르르 열렸다.

1년 전 SG 전자와 백산 자동차는 합작으로 마나석 자동차를 출시했다. 그가 탄 자동차는 그중에 가장 최상위 트림이었다.

웬만한 스포츠카 가격 이상이었지만, 그는 한국 각성자 협회장은 물론,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 각성자였다.

슈우우욱.

차가 조용히 앞으로 나갔다.

주차장 밖을 나서자, 아파트 정문에서 경비들이 절도있게 경례를 붙였다.

물론, 다른 아파트 주민들에게도 하는 인사였지만, 그에게 하는 인사는 꽤 진심이 담겨있었다.

차가 거리에 진입하자, 그는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서는 시사 대담이 진행 중이었다. 전 같았으면 음악 채널로 돌렸겠지만, 이제는 그도 이런 방송을 더 듣게 되었다.

[....작년 한국 경제 성장률이 10%가 넘었습니다. 작년 한국의 성장은 정말 괄목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경제 쪽 토론인듯했다. 찬반 양쪽의 패널이 서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솔직히 한국 경제의 힘이라고 보기는 어렵죠. SG전자와 각성자 관련 기업의 엄청난 성장 덕분이잖습니까. 지금도 그런 기업들을 빼면 마이너스 성장을 한 기업이 더 많아요.]

[신생 기업을 빼도 한국은 현상 유지 중입니다. 지금 다른 나라 꼴을 보면 한국은 기적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일본은 전쟁 이후로 이제야 겨우 수습을 하기 시작했고, 유럽은 10년 이상 뒷걸음질 쳤습니다. 다른 나라는 더 심합니다. 아프리카는 끝장났고, 남아시아와 아랍도 빈민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대단한 미국도 지금 얼마나 허덕이는지 모르십니까?]

줄줄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반대편 패널이 화를 버럭 냈다.

[그걸 누구 모른다고 했습니까! 부가 한쪽으로 몰린다는 겁니다! 지금 일반인들의 불만이 무엇인데요. 고수익을 올리는 각성자의 낮은 세율 아닙니까!]

[세금은 조금씩 올리고 있잖습니까. 오히려 각성자들이 불만이 늘고 있던데요.]

세상은 바뀌었고, 그의 위치도 달라졌지만, 사람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강북으로 들어서자 차선을 하나 차지하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성자를 군대로!]

[대한민국이 나서면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정부는 각성하라! ]

[각성자 협회와 기업, 길드는 탐욕을 버려라!]

지금 상황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의 시위였다.

부상으로 전역한 군인과 가족. 괴물들에 의해 농사를 망친 농부들, 사업의 변화로 취업 자리를 잃은 젊은이들, 그리고, 각성자가 부러운 사람들까지.

다양한 이유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시위였다. 각성자들의 주목을 받고, 그들이 돈을 벌수록 시위가 늘어나고 있었다.

"곤란하군. 각성자들을 다독이기도 쉽지 않은데…."

진혁은 시위대 옆을 지나가며 혀를 찼다.

각성자들도 불만이 점점 늘고 있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이상으로 괴물과의 전투는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었다.

각성자들의 실력 상승과 EV와 포션, SG전자에서 내놓는 장비 덕분에 생존율은 전보다 늘어났지만, 괴물의 등급도 더 올라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도 올리고, 시위도 늘어나고 있으니,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귀화자들을 군대로! 각성자를 군대로!]

고성을 지르는 시위대가 지나가는 옆 건물 전광판에서는 한창 유명한 연예인이 새로 나온 포션 광고를 하고 있었다.

[남자만 젊어지라는 법 있나요? 이제 여러분도 젊음을 되찾으세요.]

2년 전 발모제 이후로 다시 한번 대 히트 중인 피부 주름 회복제였다.

2년 사이에 진샤웨이의 포션 회사는 유라시아 최고의 제약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광고판에는 각종 마나석 아이템 광고가 걸려있었다.

광고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위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위이이이이이잉!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

[민방위 본부입니다. 현재 광화문 일대에 돌연변이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경보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차들이 길옆으로 정차했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가까운 대피소로 움직였다. 길을 걷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평도 없었다. 마치 하나의 일상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는 텅 비어버렸다.

라디오 방송도 긴급 방송으로 전환되었다.

[서울 광화문 일대에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괴물로 보입니다. 이미 대기 중이던 각성자 타격팀이 출동했습니다 ....]

빠른 대응에 협회장인 진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노력한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

진혁은 대시보드의 화면 한쪽을 눌렀다. 차 위쪽에 비상등이 번쩍였다.

진혁의 차는 비상시에도 이동이 가능한 긴급 이동 차였다. 이것도 각성자 협회장의 특권 중 하나였다.

진혁의 차가 다시 출발했다.

긴급 방송도 금방 끝이 났다. 라디오는 다시 원래 대담으로 돌아가 있었다.

[미국은, 아메라카 대륙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사이에 대담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있었다.

사회자의 질문에 대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헛기침했다.

[곤란한 질문이군요. 바닷길이 완전히 끊어진 지도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아직 위성과 인터넷 선이 남아있어서 정보는 들어오지만, 이제는 그 대륙과의 교류는 끊어졌지요.]

[남미의 혼란이야 어제오늘이 아니지만, 미국은 참.... 뭐라 말하기 그렇군요.]

[그렇죠. 참 어려운 문제예요.]

국내 이야기를 할 때는 신나게 싸우던 사람들이 미국 이야기가 나오니까 모두 난감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변화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 지부의 마지막 철수가 오늘이었나? 오늘 회의에서 귀화 각성자 문제도 이야기해봐야겠군."

진혁은 다시 한번 일정을 확인했다. 그가 운전대를 놓고 있어도 차는 자율 주행으로 계속 움직였다.

슈아아아.

진혁의 자동차가 모두가 멈춘 거리를 홀로 나아갔다.

***

제임스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는 뉴욕 시내는 무척이나 음산하게 보였다.

거리는 쓰레기와 찢어진 신문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노숙자들은 모포를 뒤집어쓴 채로 추위에 떨고 있었다.

경제 위기 때도, 그가 쫓겨났던 대격변 때도 그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거리에 군인들이 서 있었다. 무장 경찰이 아니었다.

중무장한 군인들과 장갑차가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해외에서 돌아온 군인들이었다.

미국 정부는 돌아온 군인들을 제대시키지도, 괴물과의 전투에 투입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을 치안 유지 명목으로 도시와 거리에 배치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경찰이 하던 치안 유지와 다를 바 없었지만, 한가지 더 일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 일은 바로 각성자 체포였다.

미국의 모든 각성자는 군인으로 강제 징집되어서 괴물을 잡는 데 투입되었다.

자유의 나라인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 2년 전 벌어진 CIA 각성자 내란 탈주 사건 때문이었다.

그 뒤에 미국 정부는 각성자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실행했고, 반발은 일반인 병사들이 진압했다.

더구나, 남미에서 커다란 세력을 일군 탈주 각성자들 때문에 개개인의 반발은 일반 시민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광기가 미국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떠날 시간입니다."

제임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임스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마지막 철수입니다. 끝까지 확인해야지요."

제임스는 경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를 만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퇴직자에서 잘나가는 투자사 대표로, 신비 조직 EV의 대변인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뛰어다닌 몇 년이었다.

마지막 1년은 미국 정부의 손에서 EV 조직과 각성자들을 지키기 위한 실패한 몸부림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제임스는 경훈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남겠다는 사람들도 꽤 많죠?"

제임스의 말에 경훈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EV 소속의 각성자는 물론, 연관된 기업의 종업원과 가족까지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미국에 남기로 했다.

두 사람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제임스가 지하층 버튼을 아주 길게 눌렀다. 레이저가 그의 지문을 훑고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철수가 끝나면 남은 사람들을 돕기 어렵습니다. 제임스 대표가 한 번 더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 투자회사가 미국에 남은 마지막 EV 비밀 지부였다.

공식적인 EV 지사는 이미 1년 전에 모두 문을 닫았고, 비밀 지부와 지분을 가지고 있던 회사들도 이미 모두 철수했다.

철컹.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지하 10층.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층이었다.

커다란 지하 광장 바닥에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둥근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브가 재설계하고 SG전자가 만든 포탈이었다. 경훈만 이용이 가능했던 초기 포탈과 달리, 이 포탈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다.

포탈 위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서 있었고, 그만큼의 사람이 포탈 밖에서 포탈 안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훈이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제임스는 포탈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경훈이 걸음을 멈추고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가 사람들 앞에 서서 경훈을 바라보았다.

"저도 남을 생각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경훈이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반쯤 예상했던 일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언제 돌아온다고 말씀드릴 수도 없습니다."

저쪽 세상에서 벌어진 멸망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바다 너머 미국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희망의 불꽃은 남겨놓아야겠죠."

"설마, 그 불꽃이 되실 생각입니까? 정말 위험할 겁니다."

"제 특성이 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절 잡을 수는 없습니다."

제임스는 슬쩍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마구 모습을 바꾸었다.

-정말 고집쟁이가 많네요.

이브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무사 하십시오."

경훈의 말에 제임스가 미소를 지었다.

"나 대신 케이가 EV를 지켜주십시오. 언제나처럼."

-제임스도 주인님의 위치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을 같이 보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에게 약속했다.

잠시 뒤, 포탈이 가동되었다. 포탈 위에 사람들은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은 바쁘게 지하 광장을 벗어났다.

잠적 할 시간이었다.

제임스가 벽에 설치된 자폭장치의 타이머를 맞추었다.

잠시 뒤, 그도 떠나고, 폭탄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맨해튼의 대형 건물 하나가 폭발로 주저앉았다.

미국 정부는 각성자의 테러로 성명을 내고, 검문을 강화했지만, 잡힌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불법 라디오 방송이 미국 전역에 송출되기 시작했다.

[ 자유를 위하여 ! ]

제임스가 진행하는 레지스탕스 방송이었다.

206화. < 준비하는 사람들(2) >

조용하던 뉴욕의 폐허에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한두 군데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찍찍.

근래 불어났던 쥐들이 다시 땅속으로 몸을 피했다.

철컥, 철컥.

폐허 사이에서 검은 로봇들이 나타났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 로봇들이었다. 로봇의 상체에는 기관총과 유탄 발사기가 달려있었다.

로봇들은 예전에 서울 공항에 있던 로봇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소형차 크기의 거미 로봇들은 머리에 달린 적외선 카메라로 사방을 훑었다.

부우우웅.

거미 로봇 위로 드론들이 지나갔다.

검은색 일색의 드론들과 거미 로봇들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인간을 찾는 악당 로봇들 같았다.

하지만, 로봇들이 찾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거리를 수색하던 로봇들이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반쯤 파괴된 5층 건물이었다.

로봇들이 건물 입구를 겨누었다.

캬악!

로봇들이 무기를 발사하기 전, 건물 안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무너진 건물 속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모두 네 다리로 달리는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낡은 옷가지를 걸치고 있는 괴물들도 있었다.

[뮤턴트 확인. 사격 개시]

로봇에서 단조로운 음성이 들려온 뒤,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타타타타!

문으로 달려 나오던 괴물들이 기관총에 맞아 나뒹굴었다.

계속된 사격에 방어막들이 깨져나가고, 괴물들이 피를 터트리며 죽어갔다.

캬아악!

문 만이 아니었다. 깨진 창문들에서도 뮤턴트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거미 로봇들의 기관총들이 방향을 바꾸었다.

타타타!

기관총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대부분 뮤턴트는 총알을 뒤집어쓰고 추락했지만, 무사한 뮤턴트도 있었다.

철문처럼 보이는 두꺼운 철판을 들고 뛰어내린 뮤턴트도 있었고, 몸을 갑옷처럼 만든 뮤턴트도 있었다.

강력한 화력을 뿜어내는 기관총이었지만, 마나 총알이 아닌 이상 방어막을 가진 괴물들을 상대하기는 부족했다.

콰직.

거미 로봇 하나가 뮤턴트의 손에 뜯겨나갔다. 뮤턴트는 다른 로봇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기관총 소음 사이로 조금 다른 소음이 들려왔다.

투투투투!

오히려 조금 가벼운듯한 기관총 소리였다.

하지만, 기관총 세례를 버텨내던 뮤턴트들은 새로운 총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뒤쪽에서 다른 로봇이 등장했다. 낡은 카우보이모자를 쓴 인간형 로봇이었다.

셰인이었다.

셰인의 몸은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투박한 고철 같은 몸이 세련된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2년 동안 이브와 SG전자의 개발자들이 그의 몸을 개선한 부품들로 계속 교체한 것이다.

하지만,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흠집이 가득한 몸은 겉으로 보기에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특별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등에 붙어있는 강철 백팩이었다.

언뜻 보기에 배터리 배낭처럼 보였지만, 마나석으로 움직이는 로봇이 배터리를 지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건물 밖으로 달려 나왔던 뮤턴트들이 모두 쓰러지자 사격이 멈추었다.

철컹.

셰인의 등에 달린 백팩의 뚜껑이 열렸다. 셰인이 기관총을 백팩에 쑥 집어넣었다.

길이가 1.5m나 되는 무지막지한 길이의 기관총이 쇠 배낭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평범한 배낭이 아니었다. 드디어 오마르가 새로 만들어낸 아공간 배낭이었다.

셰인이 배낭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이사벨, 어디야."

-거의 다 잡았어요!

무전기로 들려오는 소녀의 음성에 로봇이 카메라를 흔들었다.

"이거 갈수록 감당이 안 되는데…."

쿵! 쿠웅!

그때, 로봇들이 서 있는 지면 아래에서 진동이 울렸다.

뭔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미 로봇들이 급하게 옆으로 피했다. 셰인도 자리를 벗어났다.

콰아아앙!

로봇들이 있던 땅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붉은 지네가 튀어나왔다.

몸 두께가 버스만 한 크기의 지네였다.

거미 로봇들이 괴물을 향해 총을 쏘려고 했지만, 셰인이 먼저 공격을 중지시켰다.

튀어나온 지네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괴물은 붉은 피부의 지네 몬스터가 아니었다. 온몸을 뒤덮은 자신의 피 덕분에 붉게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지네의 몸에는 여러 개의 창이 박혀 있었다.

이사벨이 가지고 다니던 창들이었다.

지네 괴물의 몸이 땅 밖으로 모두 빠져 나왔다.

괴물의 다리도 수십 개가 잘려나가 있었다.

머리에 있는 더듬이는 물론이고, 얼굴 양쪽에 있던 독 발톱도 보이지 않았다.

괴물은 방향을 잃고, 몸을 마구 비틀었다.

지네 괴물이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괴물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몸에 꽂힌 창이나 잘린 다리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괴물은 마치 복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결국, 또 해버렸군."

셰인이 난감한 듯 카메라를 긁적였다.

건물 벽을 부수고, 땅을 뒤엎던 괴물이 결국 움직임을 멈추었다.

쿵.

괴물이 바닥에 늘어지고, 괴물의 입이 벌어졌다.

"셰인! 좀 꺼내줘요!"

그리고, 입안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봇이 괴물의 입을 벌렸다.

안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다. 몸이 점액으로 가득 뒤덮인 소녀였다.

셰인이 백팩에서 큰 물통과 수건을 꺼냈다.

그는 소녀에게 물을 부었다.

콸콸.

물통의 물을 다 쓰자, 겨우 점액질이 다 쓸려 내려갔다.

푸하!

소녀가 물에 젖은 머리를 흔들었다. 질끈 묶은 머리가 흔들리며 사방으로 물을 뿌렸다.

"수건이야."

셰인이 수건을 소녀의 머리 위에 얹었다.

"흐음, 셰인 아저씨 화났어요?"

수건을 쓴 소녀가 로봇을 보고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글쎄…. 걱정이 되는 쪽이겠지? 베일리가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그 아래에서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기도 어려워."

키도 커지고, 어린 티가 많이 사라진 이사벨을 보며 셰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사벨은 이제 청소년이라고 불릴 나이가 되었다. 속칭 사춘기라고 불리는 질풍노도의 시기.

양쪽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바쁜 경훈과 이브 대신에 덜컥 이사벨을 맡게 된 셰인이었다.

그는 이 말 안 듣는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계획대로 잘 되었잖아요. 이 지네 닮은 몬스터를 들쑤신 덕분에 땅속에 숨어있던 뮤턴트들을 땅 밖으로 전부 올려보냈고, 이렇게 지네 몬스터도 잡을 수 있었고요."

문제는 그녀의 계획이 전부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지네 몬스터도 뮤턴트들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고, 괜히 지네 몬스터를 건드린 덕분에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날뛰게 만들어 버렸다.

지네 몬스터는 근처에 있던 뮤턴트 벙커까지 엉망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뮤턴트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지만, 이건 제대로 된 계획이라고 볼 수 없었다.

셰인이 지그시 바라보자, 이사벨도 무안한지 수건으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다른 건 넘어가도, 괴물 몸속으로 들어가 마나석을 뽑아오다니. 위험했어."

셰인의 말이 끝나자 이사벨이 손에 쥔 마나석을 뒤로 감추었다.

특성을 사용해서 거대 괴물의 내장 속으로 뛰어들다니. 잘못하다가는 괴물의 몸속에 동화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녀도 이게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하게만 움직여서는 경훈 아저씨를 따라잡지도, 같이 싸울 수도 없었다.

2년이나 지났지만, 이제 겨우 B급이었다. 경훈 아저씨에 비하면 한참 느린 성장이었다.

물론, 저쪽 세상에 있는 다른 각성자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빠른 성장이었지만, 그녀에게 비교 대상은 경훈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인 이사벨을 보던 셰인이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도 잘했어. 임기응변은 나쁘지 않았어. 이 정도 몬스터를 혼자 잡은 것도 훌륭했고."

셰인의 말에 이사벨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셰인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사춘기의 인간 여성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셰인에게 다가왔다.

"괜찮았죠? 경훈 아저씨도 잘했다고 하겠죠?"

평상시의 이사벨은 어렸을 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계속된 이브의 교육과 동료들 덕분에 평상시의 그녀는 이제 제 나이 때의 소녀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싸울 때가 되면 그녀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잠시 이사벨을 바라보던 셰인이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베일리도 슬슬 깰 것 같으니까."

"네!"

얼마 전부터 베일리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셰인과 이사벨은 베일리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단계로 진화하기 위한 준비였다.

경훈은 잠시 일행과 떨어져서 움직이게 되었고, 셰인과 이사벨은 그동안 워싱턴과 뉴욕 근방을 정리해 나갔다.

이사벨의 안전을 위해서 결정한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경훈 아저씨도 금방 오겠죠?"

"뭐, 평범한 군주급 사냥이니까. 너랑 달리 제대로 준비하고 갔으니 어렵진 않을 거야."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경훈 아저씨니까요."

자신을 비꼬는 이야기에도 이사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평범한 소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이사벨도 셰인도 다른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거미 로봇들과 드론과 함께 맨해튼으로 향했다.

뉴욕 군주가 사라진 뒤, 폐허가 된 맨해튼의 지하는 다시 복구되고 있었다.

잠실의 아지트에 이어 뉴욕의 지하 도시가 경훈의 새로운 거점으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

셰인의 생각대로, 경훈의 사냥은 어렵지 않게 끝나 있었다.

한 달을 준비하고 2주에 걸쳐 진행한 사냥이었다.

로키 산맥 중턱.

용이 살 것 같은 거대한 동굴 앞에 동산만 한 거인이 누워있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외눈박이 거인이었다.

쓰러진 거인의 두 입에서는 거품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발과 다리에는 꺾여진 수십 개의 창이 박혀 있었다.

독약 포션이 가득 뿌려진 짐승 사체들을 먹고, 2주 동안 수많은 함정에 빠졌던 군주였다.

쓰러진 거인의 가슴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경훈의 대검들이 터져나가며 만든 구멍들이었다.

-준비했던 것에 비하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괴물 앞에 서 있는 경훈의 귀에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훈은 옷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방탄복이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 2주 동안 뛰어다닌 결과가 옷에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몇 잡았지?"

-뉴욕 이후에 7개체를 잡았습니다.

"정말 군주급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걸까?"

2년간 열심히 군주급을 사냥했지만, 등급이 SS급에서 올라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도전할 때가 아닙니다.

경훈은 멀리 동쪽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옐로스톤이 있었다.

대군주급이라고 이름 붙인 다음 단계의 괴물이 있는 곳이었다.

1년 전 어떤 존재인지 간을 보려다가 바로 죽을뻔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알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경훈은 주먹만 한 마나석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뒤쪽에 있는 거대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용이 살것같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모두 밖에 죽어있는 거인이 만든 동굴이었다.

뼈들이 쌓여 있었고, 인간의 물건들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경훈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동굴의 구석으로 향했다.

커다란 문양이 새겨진 곳이었다.

동굴 전체에 비하면 작은 문양이었지만, 그래도 수십 미터 크기의 문양이었다.

문양은 포탈의 문양과 비슷해 보였다.

문양 위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 쪽으로 마나가 빨려 나가고 있었다.

"뉴욕을 포함하면 네 번째인가...."

경훈이 검은 안개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특성을 일으켰다.

가고자 하는 위치도 지정하지 않았지만, 검은 구멍이 활짝 열렸다.

경훈은 이 구멍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수 있었다.

이 구멍은 저쪽 세상에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와 연결되어 있었다.

207화. < 준비하는 사람들(3) >

현실 세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황무지.

캥거루나 유대류가 살거나, 외부에서 들여온 길고양이와 토끼들이 살아야 할 황무지에는 이상한 두발짐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몽둥이와 돌창을 들고 다니는 털북숭이 두발짐승이었다.

오래전에 있었다는 유인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침팬지나 오랑우탄이 진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아니었다. 짐승의 얼굴에는 커다란 눈이 하나만 달려있었다.

그리고, 짐승의 크기도 인간과 달리 거대했다. 2, 3m 크기의 잡목들 위에 머리가 올라올 정도였다.

그들은 지구 어디에서 볼 수 없었던 괴물들이었다.

외눈박이 거인들은 황야 한곳을 지키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허공에 출렁이는 벌판.

우우웅.

그곳에서는 엄청난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점점 형태를 바꾸어갔다.

거인들이 모두 뒤로 물러섰다.

연기는 검은 구멍으로 변했다.

잠시 뒤, 그 구명 안에서 인간이 튀어나왔다.

휙.

예상치 않은 작은 인간의 등장에 거인들은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곧 들고 있는 무기를 치켜들었다.

캬아아악!

하지만, 구멍에서 튀어나온 인간 쪽이 더 빨랐다.

거대한 검이 손 위에서 튀어나오고, 인간은 검 손잡이를 잡고 몸을 날렸다.

검이 휘둘러지고,

쾅!

괴물들은 마치 해머로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대검에 맞는 순간 방어막이 깨져나갔다.

마나 충돌로 방어막이 깨진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물리력. 힘으로 부숴버린 것이었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거인들의 몸은 잘려나가고 부서져 있었다.

방어막을 힘으로 깨버리는 공격을 몸이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철썩, 철퍼덕.

하늘을 날던 거인들은 곧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순식간이었다. 열에 가까운 거인들이 한순간에 정리되었다.

경훈이 아공간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인들이 쓰러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황무지였다.

-GPS를 확인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중부입니다.

"버려진 지역이지?"

-네. 비공식적으로 호주 정부가 포기한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버려진 지역.

아예 정부가 붕괴하여 괴물의 땅이 된 곳이 아닌, 아직 온전한 국가의 땅이었지만, 괴물에게 빼앗겨서 접근하지 못하는 지역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도쿄를 포함한 일본 중부,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로키산맥 일대, 시베리아의 많은 지역등. 비공식적으로 많은 국가가 그런 지역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버려진 지역이 80%가 넘었다. 호주 정부는 겨우 대륙의 동쪽 끝 해안가만 지켜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그래도 초기인가?"

죽은 거인들 외에는 황무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그동안 발견했던 문양들을 떠올렸다.

처음, 박살 나버린 맨해튼의 잔해에서 망가진 문양을 찾아낸 뒤, 군주급 괴물들을 잡아내면서 벌써 여러 번 문양을 발견했다.

이브와 경훈은 문양을 분석하고 차원을 넘어 다니며 계속 정보를 모았다.

결국, 알아낸 것은, 이 문양은 경훈의 특성과 비슷한 일종의 차원 포탈이었다.

차원 간에 구멍을 뚫어 다른 차원에 마나를 밀어 넣고, 그 사이 문양을 충전, 차원 문을 열어 괴물이 넘어가게 하기 위한 문양이었다.

군주 중 일부는 이 문양으로 경훈이 사는 차원에 마나를 밀어 넣고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동족 일부를 차원 이동시키고 있었다.

물론, 군주급은 물론 대장급도 넘어가기 어려운 포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문양을 만든 존재를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경훈과 이브는 군주들을 사냥하면서 문양을 만든 괴물을 찾아다녔다.

강력한 군주급 괴물이라고 해도, 지혜와 지식이 그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분명 문양을 만든 괴물이 따로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우리 세상에 마나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놈들이겠지."

경훈은 아직 남아 있는 연기처럼 보이는 검은 얼룩을 바라보았다.

일렁거리는 검은 얼룩에서는 계속 마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경훈이 얼룩에 손을 올렸다.

그는 특성을 깨웠다.

아직 차원 문을 만들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경훈도 2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차원문을 시간제한 없이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남아 있는 차원 문의 흔적을 부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콰직.

경훈이 손을 쥐자, 얼룩이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던 마나도 멈추었다.

경훈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손을 펼쳤다. 펼친 손 아래에 아공간 입구가 크게 만들어졌다.

경훈은 드론 이미지를 떠올렸고, 손에 낀 반지가 아공간에서 드론들을 골라내 입구로 떨구었다.

퉁, 퉁, 퉁.

드론들이 아공간 입구에서 떨어져 내렸다.

위이이이이잉!

바닥에 부딪히기 전, 드론들이 가동되었고,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열대에 가까운 드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드론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빨리 완성이 되어야 할 텐데. 역시 드론만 가지고는 무리야."

한국 땅의 열 배가 훨씬 넘는 지역이었다. 드론들을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 혼자서 확인하기는 무리였다.

-최대한 서두르는 중입니다.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발을 박찼다.

몸을 흐르던 마나가 발아래로 뿜어져 나왔다.

전처럼 몸이 빨라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경훈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한 30분 정도 달렸을까. 이브가 말을 걸었다.

-북쪽으로 움직이던 3번 드론이 파괴되었습니다. 파괴되기 전 몬스터 다수를 발견했습니다.

끼익.

경훈이 발을 멈추었다.

-서쪽 방향. 5번 드론이 파괴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몬스터 다수 발견.

-6번 7번 드론도 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경훈이 앞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경훈의 눈에도 괴물들이 보였다.

방금 죽였던 돌창과 나무 방망이를 쥔 거인들이었다.

들판을 거인들이 달리고 있었다. 거인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떠오르는 타조를 닮은 괴물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거인들 뒤로 구멍들이 보였다. 평지에 펼쳐진 커다란 구멍들.

마치, 거대한 개미굴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 많은 구멍으로 거인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저 구멍들은 거인들의 집, 아니 둥지가 분명했다.

"다른 곳도 이정도야?"

-사냥하는 거인들이 있는 곳도 있었지만, 구멍들 위로 지나가다가 파괴된 드론도 있습니다.

경훈은 구멍들을 노려보았다.

"미국은 알고 있었을까?"

-죄송합니다. 지금은 미국 네트워크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러시아 위성이 좀 더 성능이 좋았다면 미리 알 수 있었을 텐데."

괴물들을 찾기 위해 러시아 스파이 위성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갈수록 지상 촬영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물론, 전 세계를 다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괴물들이 끌고 다니는 구름 때문도 그렇고, 지상을 덮은 마나가 이상하게도 우주 공간에서의 촬영을 어렵게 만들었다. 지상에서 찍은 영상과 달리, 우주 공간에서 찍은 지상의 모습은 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저쪽 세상이 그렇게 쉽게 당했는지 궁금했는데, 역시 이유가 있었어."

마나가 짙어질수록, 문제가 하나둘씩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이라도 열심히 괴물들이 만든 포탈을 닫고 있었지만, 마나 증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훈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꺼내 들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 차원을 넘어온 괴물들을 밴 횟수였다.

한두 마리의 최하급 괴물에서부터, 지금처럼 많은 숫자의 일족까지. 경훈은 발견하는 즉시 사냥을 해오고 있었다.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차원을 넘어온 괴물들은 전부 버려진 지역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경훈 외에는 이런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버려진 지역에 들어오기는커녕, 경계를 지키기 급급한 상황입니다.

이브 말대로였다. 지금 살아남은 인류는 괴물들의 지역이 넓어지지 않게 하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열심히 마나 혁명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몇몇 국가의 부흥만 이끌었을 뿐, 인류 전체로 봐서는 대격변 이후 계속 괴물들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오늘 안에 처리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얼마나 많은 거인족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보았는데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경훈은 구멍이 가득한 황무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쾅!

황무지에 폭음이 울리고, 먼지가 치솟았다.

***

아이들이 뛰어노는 고급 빌라 앞에서 마르셀로가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숙소는 괜찮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예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다들 만족해하고요."

남자는 얼마 전에 도착한 EV 미국 지사의 사원이었다.

"다행입니다. 휴가라고 생각하시고, 며칠 더 푹 쉬십시오. 외딴 섬이긴 하지만, 시설은 웬만한 대도시 이상일 겁니다. 그 뒤에 여러분이 맡아 주실 일을 이야기하죠."

"배려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야 뭐, 케이 일을 대신하는 것뿐인데요."

"미국 바로 아래에 이런 섬이 있다니, 들키지 않은 게 정말 신기하네요."

남자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섬은 과거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로 불렸던 섬 중의 하나이자, EV가 영국 황실에 40년 동안 조차한 EV의 전략거점이었다.

2년 전에도 군사기지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섬 주위로 높은 콘크리트 방호벽이 둘러쳐 있었고, 섬 내부에는 5층짜리 건물들이 가득 늘어서 있었다.

훈련소와 공장, 창고와 아파트. 지금의 섬은 작지 않은 군산 복합 도시처럼 보였다.

하지만, 섬은 밖에서 볼 때 전혀 달라 보였다.

"전부 EV가 만든 교란 시스템 덕분이죠."

마르셀로가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2년 전 개발한 최신 전자 장비가 섬 모습을 속이고 있었다.

위성과 섬 밖에서 볼 때는 이 섬은 평범한 무인도로 보일 뿐이었다.

남자와 헤어진 뒤, 마르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런 자리는 그에게 잘 맞지 않았다. 괴물들과 싸우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맡겨진 이상 제대로 해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EV가 다 철수하고 남미는 인간들 간의 전쟁과 괴물들 간의 싸움으로 엉망이 된 지금.

아메리카 대륙 중간에 자리 잡은 이 섬만이 모두의 희망이었다.

다른 아메리카 각성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셀로도 이 섬을 지켜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 일정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도시급으로 커진 섬의 책임자에게 할 일은 끝이 없었다.

그가 다음 일정을 위해 중앙 건물 지하로 내려갔을 때였다.

한 남자가 먼저 와 있었다.

무척이나 지쳐 보이는 남자였다. 옷은 누더기였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남자는 마르셀로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하지만 마르셀로는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이자, EV의 핵심이 저런 몰골로 서 있다니.

"또 케이 혼자 사냥을 다녔군요. 따라 다닐 수 있는 각성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케이도 몸조심을 해야죠."

경훈은 마르셀로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말 힘이 들었다. 저쪽 세상에서 넘어온 괴물들은 하나같이 협동과 전술을 사용했다.

다행히 모두 처리했지만, 이번에도 몰이 사냥을 당할뻔했다.

-남은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넓은 대륙을 뒤지고 다닐 수는 없었다.

"이게 완성되면 찾아다닐 필요도 없겠지."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훈과 마르셀로가 있는 곳은 섬의 지하 공장이었다.

거대한 원통형 공간에 수많은 작업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크고 긴 로켓이 서 있었다.

EV가 만들고 있는 로켓이었다.

로켓 옆에는 인공위성이 제작되고 있었다.

저쪽 세상의 미국이 마지막으로 만든 위성과 같은 기능을 가진 인공위성.

지상의 마나를 추적할 수 있는 인공위성이었다.

208화. < 준비 하는 사람들(4) >

언제나처럼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는 국가 안보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황실의 모습은 2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벽을 둘러싼 몇 미터 두께의 강철 벽에서부터 내부를 두른 수십 가지의 감시 장비까지.

과거에도 엄청난 보안이 적용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모두 2년 전 벌어진 CIA 국장 탈출 사건 때문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그 당시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CIA 국장과 몇몇 각료가 바뀌었지만, 대통령과 국무부 장관, 비서실장 등은 전과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지하 방송은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아니라 마치 군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FBI 국장이 차려자세로 진땀을 흘리며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었고, 다른 각료들도 모두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전 벌어진 사건 이후 미국은 다시 매카시즘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과거 공산주의 색출의 열풍에 이어 이제는 각성자 색출의 열풍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과거 무난하다고 여겨졌던 대통령은 권력에 취한 것인지 휘몰아치는 광풍을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데 사용했고, 그것은 무척이나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중에도 대통령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남미로 도망친 각성자들과 전 CIA 국장. 그리고 남미의 반미국가들. 이제는 손길이 닿지 않는 바다 건너 나라들.

마지막으로 EV라 불리는 각성자 집단.

그동안 차근차근 정리한 덕분에 결국 모두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지하 방송이라니.

대통령에게는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빨리 잡는 게 좋을 거요. 그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알,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다음 사람을 쳐다보았다.

다음은 국방 장관이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보고를 했다.

"멕시코 해방을 위한 준비는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멕시코만 해방한다면 지금이라도 출병할 수 있습니다."

국방장관의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멕시코에서 멈추려고 시간을 들인 게 아니오. 괴물들에게 고통받고 내전으로 시달리고 있는 모든 남아메리카인을 구해야 하오. 모든 각료는 이점을 유념해야 할거요."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국방장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멈추기 위해 말을 꺼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년 전까지는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대통령의 변화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국방장관은 더 나서지 않았다. 그는 전임 국방장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처럼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2년 전에 CIA 국장이 된 남자가 대통령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나섰다.

"콜롬비아 정부군, 볼리비아, 그리고, 나머지 국가의 반군과도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작전이 시작되면 내부에서 호응이 시작될 겁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단지 손가락에 낀 반지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EV가 있다는 섬은 찾은 건가?"

대통령의 말에 국장은 얼굴이 굳었다.

"죄, 죄송합니다. 위성과 각종 정보를 확인해보아도 섬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잘못된 정보이거나, 이미 다른 곳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깍지를 끼고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대, 대신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헬멧 맨 이라고 불리는 EV 집행자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급하게 떠드는 소리에 대통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동아시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미, 그 정도 정보는 이미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발견된 위치로 계산한 좌표와 남미에서 잡아들인 전 CIA 반역자들에게 얻은 정보로 교차 확인했습니다. 슈퍼컴퓨터로 90%이상 정확도를 보증받았습니다."

국장이 자신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국 서울 남쪽의 한 제약 회사에서 있습니다."

대통령의 눈이 불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어진 대통령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다른 모든 작전을 뒤로 미뤄.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놈을 잡는다."

다른 사람들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국방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아시아, 특히 한국에는 군대를 보내기는 무리입니다."

바닷길이 막히고, 육로도 중간에 러시아와 북한이 가로막고 있었다.

"특수부대를 파견해야 하는데, 저희가 보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대통령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우리를 괴롭혀오던 EV의 핵심 집행자의 위치를 알아냈어. 작전 중에 EV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도 본때를 보여줘야 해."

대통령의 말에 많은 각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론은 소용이 없었다. 국방부 장관은 뒤로 물러섰다.

"들켜도 좋아. 잡아 와, 아니 잡지 못하면 그 헬맷 맨과 연관된 모두를 사살해. 아니면 일대를 날려버려도 돼."

대통령은 가능하다면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을 뒤덮은 광기가 회의실 안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최고의 팀을 보내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육군 참모총장과 CIA 국장이 대통령의 말에 대답했다.

대통령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의 보석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

서울의 새로운 관문이 된 용산역.

용산역과 주변 일대는 몰라보게 달라지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었다.

북쪽과 연결된 철도에서 각양각색의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한국인과 수많은 외국인이 역을 드나들고 있었다.

칙칙칙.

용산역에 새로운 고속철이 들어서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시베리아 특급 열차였다.

열차는 승강장에 멈춰 섰다.

열차가 멈추자 승강장에서는 한국어와 영어, 러시아와 중국어로 연이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내국인과 유라시아 연합의 시민들은 자동 출입국 심사대로 이동해주시고, 외국인들은 유인 입국 심사대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와 배가 특별한 일 외에는 운행이 멈춘 지금, 외국과의 왕래는 기차와 자동차로만 가능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실크로드이자,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1년 전부터 달리기 시작한 이 시베리아 특급 초고속 열차는 외국을 여행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비싼 여행 방법이었다.

열차가 멈춰서자 승강장에서 기다리던 직원이 선두 객차로 달려가 문 앞에서 섰다. 그는 공손한 자세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가 서 있는 선두 객차는 이 열차의 특실 차였다.

웬만한 부자도 사용하기 어렵다는 특실 차 문에서 사람들이 내려섰다.

문을 나서는 사람들은 편하지만 세련된 옷을 차려입은 중국 여성과 어린 티를 벗어나는 아랍 소년, 그리고, 입을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 한국 여성이었다.

"각성자는 좋겠다. 난 자도 자도 피곤해요. 기차가 아무리 빨라도 너무 오래 걸려요."

멀쩡한 오마르와 진샤웨이를 바라보며 은혜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진샤웨이가 은혜를 보며 웃었다.

"은혜는 더 멀리서 왔잖아요. 피곤할 만하죠."

진샤웨이와 오마르, 은혜는 모스크바에서 만나 같이 돌아왔다.

진샤웨이와 오마르는 러시아에 있는 지사와 공장들을 돌아본 것이었고, 은혜는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럽이라면 비행기로도 하루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초고속 열차라지만 비행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정말, 못됐어요. 일거리만 잔뜩 안겨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도대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건지. 원."

은혜는 과거 아는 오빠였다가 자신의 상사가 된 남자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리로 오시죠."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승강장을 벗어났다.

세 사람 뒤로 양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따라 내렸다. 그들을 수행하는 비서들과 경호원들이었다.

이어 다른 객차의 문이 열렸다. 한국인과 각양각색의 외국인들이 객차에서 쏟아져 나왔다.

[내국인과 유라시아 연합의 시민들은 자동 출입국 심사대로 이동해주시고, 외국인들은....]

이어지는 방송과 안내판에 따라 사람들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VIP 출구로 움직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심사대 앞에 줄을 섰다.

따로 VIP 출구에 서 있었지만, 은혜도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이제 그녀도 이런 자리가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검사가 있겠습니다."

VIP 출구에서 심사를 따로 받았지만, 이 검사는 빠질 수가 없었다.

오마르가 먼저 검사를 받았다. 적외선 측정기를 든 공무원이 오마르의 몸을 훑었다.

뒤에 서 있던 은혜가 진샤웨이의 귀에 속삭였다.

"이거 도움 되는 거 맞아요? 그냥 독감 발열 검사하고 다른 게 없잖아요."

기계의 성능이 올라가고 더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지만, 과거 공항에 설치되었던 발열 검사를 위한 적외선 카메라하고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글쎄요. EV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거라잖아요. 뭔가 이유가 있겠죠."

부드럽게 받아넘기는 진샤웨이의 모습에 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EV가 너무 무리하게 제약을 건다고 불만이 늘고 있어요. 나중에는 다 필요한 일이 되긴 하지만, 미리 이유를 알려주면 불만들이 줄어들 텐데…."

"그건, 오래지 않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 경훈 오빠에게 뭔가 들으셨나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고개를 젓는 진샤웨이의 모습에 은혜는 반대로 눈을 빛냈다.

"그럼, 금방 들을 수 있겠네요."

진샤웨이의 느낌은 꽤나 당첨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오마르에 이어 두 사람도 검사를 끝내고 출국 심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은혜가 출국 심사대를 나오던 순간이었다.

"난 이집트 대사관 직원이다! 외교관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면책 특권으로 거부하겠다!"

외국인 심사대에서 조금은 어눌한 한국어로 떠드는 사람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중년의 이집트 인이었다.

그 앞에는 적외선 측정기를 든 공무원이 난감한 얼굴로 심사대를 보고 있었다.

"외교관이라는데, 그냥 통과시켜야 하나요?"

"얼마 나왔는데?"

"얼마 전에 강화된 경계 수치예요."

공무원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각성자인 진샤웨이의 귀에 들려왔다.

진샤웨이가 멈춰서서 외국인 심사대를 바라보자, VIP 심사대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쪽을 바라보았다.

"젠장, FM대로 해. 저쪽에 진샤웨이 회장이 있어. FM대로 했다고 트집잡히지는 않겠지."

공무원들이 VIP 심사대를 힐끔 바라보았다.

"네."

검사를 했던 공무원이 다시 친절한 얼굴로 이집트 외교관에게 말을 건넸다.

"독감이나 다른 유행성 질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쪽에서 좀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안내를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거절한다! 대사관에 연락을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난 면책 특권이 있다. 귀 나라를 믿을 수 없다. 못 들여보내겠다면 난 돌아가겠다."

그는 화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FM대로 진행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위이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경고등이 번쩍였다.

삐이익!

창밖으로 공항 경비대가 완전 무장을 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자리를 지켜주세요. 검역 규정대로 진행합니다. 괜히 움직여서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공무원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집트 남자는 굳은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진샤웨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머리를 좌우로 꺾었다.

진샤웨이가 입을 열었다.

"적입니다! 무기를 꺼내요!"

경호원들이 반사적으로 품에서 권총을 꺼냈다.

꺄아악!

상황을 지켜보던 승객들이 바닥에 엎드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남자도 비명을 질렀다.

키이이이악!

남자가 진샤웨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인간의 도약력이 아니었다. 각성자급, 혹은 각성자 이상의 도약력이었다.

그는 심사대를 뛰어넘어 바로 진샤웨이 일행이 있는 곳까지 날아들었다.

탕! 탕! 탕! 탕!

경호원들이 날아오는 남자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팅! 팅! 팅! 퍽!

대부분 총알이 튕겨 나가고, 일부만 남자의 몸에 박혔다.

남자를 감싼 방어막이 총알을 튕겨낸 것이다.

피가 튀었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서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남자의 눈이 붉게 빛났다.

"피하십시오! 각성자입니다!"

경호원들이 외쳤지만, 진샤웨이는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꺼낸 긴 창이 들려있었다.

"각성자가 아닐 거예요."

그녀는 다른 손에 든 포션을 날아오는 남자를 향해 던지고, 창을 앞으로 뻗었다.

휘익.

빠른 속도였고, 멋진 자세였다.

퍽!

포션병이 방어막에 부딪혀 깨져나가고, 포션병에 들은 액체가 방어막을 뒤덮었다. 그리고, 창이 그 뒤를 따랐다.

켁!

방어막이 뚫리고, 창이 남자의 목에 박혔다.

길게 자란 손톱이 그녀의 얼굴 앞에 까닥였지만, 아쉽게도 손톱은 더 자라나지 못했다.

진샤웨이는 목에 창이 박힌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성자가 아닌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목에 창이 꽂힌 남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샤웨이도 너무 안심을 한 모양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양손으로 창을 잡고, 창대를 당겼다.

창이 목을 뚫어버렸고, 남자가 앞으로 쏘아졌다.

진샤웨이의 눈이 커졌다.

콰아앙!

그리고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쏟아지는 타일 사이로 인영 하나가 추락했다.

떨어지던 그는 창과 함께 남자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콰직!

창이 부러지고, 남자의 머리가 박살 났다.

"세상에, 경훈 오빠잖아?"

은혜가 떨어진 남자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진샤웨이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경훈은 둘의 시선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이 밟고 있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도플갱어 맞지?"

-확실합니다.

이브의 대답에 경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도플갱어까지 등장한 건가…. 근데 어떻게 안 들키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감시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이곳도 뚫렸을 게 분명했다.

공항 바닥에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린 괴물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209화. < 준비하는 사람들(5) >

푸, 푸,

아늑한 방에서 강아지가 새근거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2년이 지났건만 베일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베일리가 자는 이곳은 맨해튼의 지하 도시였다.

맨해튼 남부 지하 도시는 지상의 건물들과 함께 무너졌지만, 다른 곳은 아직 무사했었다.

2년간 경훈과 이사벨 일행은 맨해튼 전체를 정리했고, 이곳을 다시 요새화시켰다.

잠들어 있는 강아지 옆에 이사벨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베일리의 털을 쓰다듬으며 타블렛을 보고 있었다.

타블렛에는 경훈 아저씨가 온 세상에서 인기 있다는 예능 프로가 나오고 있었다.

잘생기고 예쁜 각성자와 연예인들, 그리고 웃긴 개그맨들이 나와서 웃고 떠드는 프로였다.

각성자들은 앞에 나와서 마술같은 능력을 보여주고, 연예인들과 개그맨들이 과한 감탄을 하는 그런 프로.

경훈 아저씨한테 듣기로는 일종의 각성자 홍보용으로 시작한 프로였다는데 지금은 국민 방송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사벨의 표정은 지루함이 역력했다.

저쪽 세상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기대감을 키우려고 일부러 이브가 고른 프로였다. 하지만 이사벨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좀 자.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셰인이 방에 들어오며 말했지만,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피곤해요."

"그런가."

셰인이 들고 있던 컵을 이사벨에게 건네주었다. 컵에서 밀크티 향이 흘러나왔다.

"고맙습니다."

이사벨이 타블렛을 내려놓고 컵을 받았다.

셰인이 타블렛 화면을 보았다.

"이건 재미있어?"

"아뇨. 이브 언니가 보라고 해서 보고는 있는데, 별로 재미가 없어요. 잘 이해도 안 가고요."

어렸을때부터 평생 괴물과 싸워왔던 이사벨이었다. 더구나 오랜 시간을 혼자 지내왔고, 2년전 만나게 된 동료들도 평범하지를 않았다.

이사벨이 평범하게 자리기는 예전에 틀린 일이었다.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브 언니가 실제로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라고 하던데. 실제로 보더라도 좋아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더구나, 그녀는 의외로 저쪽 세상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경험했던 이사벨이었다. 괴물의 능력으로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미워하고 죽이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었다.

그녀가 동료 외에 다른 인간들을 신뢰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브가 교육을 위해 건네준 기사와 정보들도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다.

"이브가 곤란해할 만하네."

별생각 없는 셰인과 경훈과 다르게 이브는 이사벨이 제대로 된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저쪽 세상의 여러 즐길 거리에 무관심한 이사벨의 모습에 이브는 답답해하고 있었다.

"이런 건 별로 재미없긴 하지만, 저도 빨리 저쪽 세상으로 가보고 싶어요. 경훈 아저씨하고 이브 언니를 돕고 싶어요."

"그런 이유인가…."

"그쪽 세상도 괴물 때문에 힘들다고 하니까요. 베일리하고 셰인 아저씨랑 같이 가서 도와주면 좋지 않을까요?"

이사벨의 말에 셰인이 손을 들어 가슴을 쓰다듬었다. 마나석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몸 전체에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셰인은 자신이 로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로봇은 약속을 잊지 않는 법이었다.

이사벨도 저렇게 받은 것을 갚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무 자신 생각만 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도 결정을 내릴 때가 다가온 것일지도 몰랐다.

이사벨은 호호 불며 밀크티를 마시고, 셰인은 고민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방 안 중앙에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차원문이었다.

경훈이 차원 문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안 일어났습니까?"

"어서 오세요. 아직 안 일어났어요."

이사벨의 대답과 동시에 셰인도 고개를 저었다. 경훈이 알려준 시간이 맞지 않은 듯했다.

"마나가 많이 안정되어 있었는데.... 괴물의 진화는 뭔가 더 필요한 건가?"

경훈도 실제로 괴물이 성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잘못 안 모양이었다.

"응?"

난감한 표정으로 베일리를 바라보던 경훈이 어느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 그냥 자는 거 아냐?"

경훈의 말에 셰인과 이사벨이 덩달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원래 진화 때문에 자고 있었잖아."

경훈이 베일리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진화는 끝난 것 같아서요."

경훈이 베일리 앞에 주저앉아 슬쩍 마나를 끌어 올려 보았다.

우웅.

경훈의 몸에서 마나가 솟구쳤다.

그리고, 베일리가 바로 눈을 떴다.

왕!

베일리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훈, 이사벨, 셰인.

잠들었을 때 보던 인원과 달라지지 않았다.

안심한 강아지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이사벨에게 걸어가더니 그녀 무릎 위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다시 잘 모양이었다.

경훈과 이사벨도 황당한 표정이 되었고, 셰인도 카메라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시 잘 것으로 보이자, 경훈이 강아지를 잡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왈!

베일리가 경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강아지 모습으로는 귀여울 뿐이었다.

그리고, 경훈을 노려보는 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경훈이 빤히 바라보자 베일리는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낑.

"얼마나 바뀌었나 보자. 한번 변신해봐."

다행히 이번에는 못 들은 척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슬쩍 이사벨과 셰인을 바라보았다. 둘 다 궁금한 눈과 카메라로 강아지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보여줘야 할 모양이었다. 강아지가 몸에 힘을 주었다.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두꺼워지고,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날개도 자라났다.

잠시 뒤, 방안에는 강아지 대신, 날개 달린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가 컸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방이 좁을 뻔했다.

하지만, 일행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을 뿐이었다.

"뭔가 달라졌나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사벨이 베일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셰인도 카메라를 긁적였다.

"조금 커졌으려나?"

자세히 보면 살짝 커진 것도 같았지만, 솔직히 알기 어려웠다.

"뭔가 날개 이후로 다른 게 생겨날 줄 알았는데…. 힘이라도 더 커진 걸까?"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이사벨이 베일리 앞으로 가서 갈기를 쓰다듬어주었다.

베일리가 잠든 뒤, 경훈과 이브는 베일리의 새로운 변신 모습을 추측해보았었다.

지느러미가 나오거나, 다리가 늘어난다든가 하는 예상에 이사벨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었다.

그녀는 지금의 베일리가 제일 좋았다.

-등급이 오른다고 매번 특성이 진화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주인님을 봐도 알 수 있죠.

이브는 이사벨에게 위로하는 동시에 경훈에게 심각한 데미지를 안겨주었다.

별다를 게 없자, 이사벨을 제외하고는 다들 관심이 식어버렸다.

"잘 잤어?"

하지만, 이사벨은 베일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베일리도 이사벨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그리고, 아까 못다 한 하품을 했다.

크아아앙!

사자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베일리의 벌린 입에서 불길이 훅 치솟았다.

화르르르.

크지 않은 불길이었지만, 이사벨은 바로 앞에 있었다.

이사벨의 얼굴이 불길에 휩싸였다.

놀란 로봇과 각성자가 달려오려고 했다.

다행히 방어막은 무사했다.

불길이 사라지자, 멀쩡한 이사벨이 보였다. 옷도 괜찮았고,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단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말려버렸을 뿐이었다.

오히려 베일리가 놀란 것 같았다. 사자가 입을 딱 벌린 채 멈춰버렸다.

-화염 특성일까요? 특성이 진화하는 대신 새로운 특성이 개화한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품 정도 하는 것으로 저 정도 화력이 뿜어져 나왔다. 제대로 뿜으면 얼마나 강력할지 궁금했다.

그때였다. 이브가 입을 열었다.

-잠실 아지트에서 경고입니다. 몬스터들의 습격입니다. 방어 시스템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정말 포기해야 하나? 한번 들키니 습격이 멈추질 않네."

-귀찮더라도 아직은 유지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냥 한 말이야."

경훈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어울려 장난치는 소녀와 강아지, 그리고, 뭔가 생각에 잠긴 로봇.

"마침 잘 되었네. 이 기회에 포탈 테스트도 하고, 베일리의 실력도 확인해보자고."

경훈이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한국에 한번 가볼 생각 없습니까?"

"네!"

경훈의 말에 제일 먼저 이사벨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셰인과 경훈의 나라인 한국이 어떤 곳인지 항상 궁금했었다.

셰인이 경훈에게 물었다.

"저번에 설치한 포탈을 써보려고?"

"네. 저쪽 세상에서 여러 번 테스트를 끝냈으니, 이제는 사용해봐도 될 것 같습니다."

미국 지사 인원의 탈출용으로 실사용도 이미 마쳤다. 더 테스트해볼 것도 없었다.

일행은 방을 나섰다.

포탈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지하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쿵, 쿵,

일행이 지나가는 복도에는 각종 로봇이 지나가고 있었다.

골렘으로 불리는 건설용 로봇부터, 정찰용 거미 로봇까지.

지하 도시의 복구는 이브와 이들 로봇이 모두 담당했다.

잠시 뒤, 일행은 포탈이 설치된 주차장에 도착했다.

중앙에 둥근 기계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위에 신비로운 문양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다.

설명은 이미 여러 번 한 뒤였다. 일행은 기계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셰인은 과거 포탈하고 차이가 있는지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준비되셨으면 포탈을 가동하겠습니다.]

셰인과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리는 이사벨의 품에 안긴 채로 아직도 하품하는 중이었고, 이사벨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사벨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이 위에 올라서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사벨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떨리던 느낌은 금방 가라앉았다.

[심박 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포탈을 가동하겠습니다.]

화아아악

바닥에 그려진 문양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일행이 모두 사라졌다.

우우우웅.,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 전체에 별이 가득 떠올랐다.

이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셰인에게서는 듣지 못한 광경이었다.

셰인은 환한 빛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 도착해 있었다고 말했었다.

'설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너무도 친근했다.

그녀는 자신이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구경하던 이사벨은 자신의 몸이 움직이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품에 안겨 있는 베일리는 잠이 든 것 같았다. 셰인도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경훈은 그녀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경훈이 별 하나를 가리켰다. 일행이 움직이는 방향에 있는 별이었다.

'저리로 가는 건가요?'

이사벨은 물어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말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훈은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빠르게 우주를 나아갔다.

그 사이 경훈은 반대편에 있는 별들도 손가락을 가리켰다.

멀리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었다. 무언가 낯설고도 친근한 느낌이 드는 별들이었다.

'저게 내 세상'

이사벨은 경훈의 입 모양을 보고 저 별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그녀가 이용하는 반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지금 그녀는 경훈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일행은 계속 빠르게 나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경훈이 어떻게 목적지를 알고 있는지 이사벨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곧, 경훈이 가리킨 별 앞에 일행이 도착했다.

그리고, 이사벨은 별이라고 생각한 것이 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허공에 뚫린 빛나는 구 속에 세상이 보였다.

다른 곳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일행은 구멍 속으로 빨려들었다.

화아아악!

환한 빛이 세상을 감쌌고, 이사벨은 눈을 깜빡였다.

빛이 걷혔다.

똑같은 문양이 그려진 광장이었지만, 지하가 아니었다.

창문에서 햇살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곳은 높은 천장이 있는 지상의 건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낯선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멍!

베일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짖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잠든 게 아니었다.

셰인도 좀 전과 달리 평상시처럼 움직였다.

"도착했군. 전하고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아. 제대로 만들었어. 시간도 전혀 지나지 않았고, 빛이 사라지니 바로 도착했군."

"네? 시간이 안 지났어요?"

놀란 이사벨이 셰인에게 물었다.

-네. 원래 포탈 이동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이사벨이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이 씩 웃었다.

"드디어 나하고 같은 것을 보는 각성자가 나타났네. 차원 이동자의 세계로 온걸 환영해."

이사벨은 멍하니 경훈을 바라보았다.

몸속의 마나가 계속 꿈틀거렸다. 뭔가 그녀에게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타타타탕!

그때, 머리 위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아악!

몬스터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210화. < 소녀. 문을 두드리다(1) >

과거 한국 제일의 실내 유원지로 이름 높은 잠실 월드 건물을 향해 괴물들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강남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족제비를 닮은 괴물들이었다.

사람보다 큰 검고 흰 족제비 괴물들이 서쪽에서 달려왔다.

캬아아악!

괴성이 잠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족제비들이 낡은 차량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고, 건물 벽을 타고 오르고, 지붕 사이를 날듯이 넘어갔다.

괴물들이 향하는 옛 유원지 건물 주변은 2년 전과 달라져 있었다.

주변에 있던 건물들은 포탄과 기관총 세례에 반쯤 무너져 있었고, 피가 굳어 있는 도로는 이미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아지트 주변은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 펼쳐져 있었다.

위이이잉!

크지 않은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옥상과 벽에 설치된 벌컨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년 전에는 보지 못하던 방어 시설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사용했는지, 낡은 흔적이 역력했다.

투타타타타!

달려오는 괴물들을 향해 벌컨포가 퍼부어졌다. 차들이 박살 나고, 남은 건물 벽이 터져나갔다.

멋모르고 몸을 드러낸 채 달려오던 족제비 괴물들이 벌컨포들에 의해 쓸려나갔다.

케에엑!

총격이 시작되자, 괴물들은 건물 뒤와 자동차 아래로 사라졌다.

족제비가 변한 괴물들답게 금방 총에 적응한 것이다.

벌컨포가 사격을 멈추었다.

*

경훈을 따라 달려가던 이사벨이 갑작스러운 정적에 고개를 들었다.

-적이 방해물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2파가 올 때까지 대기합니다.

전과 다른 딱딱한 이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목소리가 들려올 때는 이브 언니가 아닌 것 같았다.

앞에서 달려가던 경훈 아저씨의 속도가 늦어졌다.

이사벨은 이제야 자신이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엄청나게 큰 건물 내부였다.

맨해튼 지하 도시가 이 건물 안 보다 훨씬 컸지만, 그건 전체 구역을 다 합쳤을 때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렇게 큰 공간을 본 적이 없었다.

밖에는 한창 전투 중이었는데, 이 안은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납작한 원통 로봇이 자신의 몸 위에 짐을 싣고 움직이고 있었고, 골렘들이 움직이며 뭔가 만들었다.

천장에는 크레인들이 움직이며 쇠뭉치들을 나르고 있었고, 높은 벽에 튀어나와 있는 사무실 안에서는 컴퓨터로 보이는 기계가 불을 반짝였다.

"공장 같네."

주변을 둘러보던 이사벨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곳의 모습은 사람만 없을 뿐 태블릿에서 보던 큰 공장과 많이 닮아 있었다.

-공장이 맞아요. 제가 관리하고 있는 자동화 공장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하는 장비를 만드는 곳이죠. 제 기지예요.

이브가 이어폰을 통해 이사벨에게 말했다.

그녀 말대로 이곳은 이브의 무인 공장이었다.

SG전자와 다른 EV 사람들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아이템과 장비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테스트되고 있었다.

-뉴욕 지하 도시에 두 번째 시설을 만드는 중이긴 하지만, 완성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 때문에 괴물들에게 발각되었는데도 이곳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답니다.

이브의 말을 들으며 이사벨은 건물 벽에 붙어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다른 일행도 모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거기다 베일리는 편안한 자세로 셰인 모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 엘리베이터는 옥상으로 바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였다. 일행이 모두 타자, 엘리베이터가 위로 치솟았다.

옥상까지는 금방이었다.

쉬이익.

옥상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사벨의 눈앞에 서울의 모습이 펼쳐졌다.

"와..."

이사벨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서울은 맨해튼 이상으로 멀쩡한 건물이 가득했다.

물론, 영상으로 보던 다른 세계의 도시처럼 살아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이곳도 낡고 움직임이 없는 죽은 도시였지만, 끝없이 펼쳐진 아파트가 도시의 웅장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사벨이 감탄을 터트리는 사이, 경훈과 셰인이 옥상 난간으로 다가갔다.

셰인은 전매특허인 자신의 기관총을 꺼냈지만, 경훈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리를 훑어볼 뿐이었다.

경훈의 눈에는 숨어있는 괴물들의 마나가 보였다.

"서쪽 400m 대형 버스 뒤에 두 마리. 340동 아파트와 341동 일 층 위로 가로지르는 10여 마리. 그리고...."

투다다다다다!

경훈이 숨어있는 괴물의 위치를 불러주자, 벌컨포들이 다시 불을 뿜었다.

버스 뒤에 숨어있던 괴물들이 버스와 함께 갈가리 찢어졌고,

슈우우웅.

유탄 발사기에서 유탄이 날아가 경훈이 말한 아파트 벽을 부숴버렸다.

벽에 구멍이 뚫리고, 다시 묵직한 탄환이 노출된 괴물들에게 쏟아졌다.

케에엑!

숨어있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괴물들이 다시 뛰쳐나왔다.

거리에 다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숨어서 많이 전진한 모양이었다. 아까보다 괴물들과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다.

다시 발컨포가 쏟아지고, 셰인이 기관총을 긁어댔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발컨포와 유탄 발사기로는 화력이 부족합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경훈 혼자였다면 모든 지원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다른 동료들이 있었다.

경훈이 난간에 올라선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베일리는 준비가 끝나 있는 것 같았다.

"가봐. 한번 실력을 보여봐."

경훈의 말에 베일리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날개가 펄럭이고, 베일리가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베일리의 몸이 점점 켜졌다.

타타타타!

탕! 탕!

쏟아지는 기관포 소리를 뚫고 단발 총성이 계속 들려왔다.

방어막 덕분에 족제비 괴물들은 기관포 열 발 이상을 쏟아부어야 쓰러졌다.

그 때문에 벌컨포를 쏟아부어도 화력이 부족했다.

탕! 탕!

하지만, 총알 한 방에 쓰러지는 괴물도 있었다.

지붕 위에서 날아간 총알은 방어막을 깨고 달려오는 족제비 괴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퍽!

단 한방에 괴물이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쓰러지는 괴물이 계속 늘어갔다.

경훈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후임 저격병을 바라보았다.

경훈이 물려준 마나석 저격총은 이제는 경훈보다 이사벨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사벨이 난간에 총을 걸치고 차례로 괴물을 저격하는 모습에 원래 저격총의 주인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도 경훈이 저 저격총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사벨이 쓰는 것을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주인님이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것뿐이잖습니까.

이브가 분위기에 초를 쳤지만, 경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시했다.

크아아아앙!

달려오는 족제비 괴물 위로 커다란 날개가 지나갔다. 하늘을 나는 사자의 날개였다.

괴물들 위에 도착하자 사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아까는 실수했지만, 베일리는 이제 새로운 특성을 사용하는 법을 모두 터득했다.

베일리가 마나를 끌어 올리자, 마나가 들이마신 공기에 섞였다.

가슴이 뜨듯했다.

푸아아아악!

베일리가 뜨거운 공기를 밖으로 뿜어냈다.

마나가 섞인 공기가 베일리의 입을 벗어나자 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거대한 화염이 사자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과과과과!

화염이 지상을 휩쓸었다.

캬아아악!

발컨포를 열 발 이상 버티는 족제비 괴물들의 방어막이 불타올랐다.

방어막은 마나가 실린 화염을 버티지 못했다. 차례로 방어막이 깨져나가고, 괴물들은 불길에 휩싸여버렸다.

괴물들은 비명을 지르며 땅 위를 뒹굴었다.

타타탁.

살이 익는 소리가 일행이 있는 옥상까지 들려왔다.

-광역 공격용으로는 최고인 것 같습니다.

"완전 양민 학살 용이네."

순식간에 괴물들 선두가 쓸려나간 모습에 경훈은 감탄했다.

-계속 사용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충전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괴물들의 선두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뒤, 베일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돌아오고 있었다.

이브 말대로 연속 공격은 힘든 모양이었다.

"이 정도도 아주 훌륭해. 덕분에 선발대는 주저앉힌 것 같으니까."

아직 반은 남아 있었지만, 방금 공격으로 기세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네, 베일리 덕분에 적의 주력이 단독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대장급 몬스터가 도착했습니다. 서쪽 아파트 단지 뒤. 괴물이 모습을 보입니다."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뒤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두 발로 걷는 거대한 파충류. 공룡을 닮은 괴물이었다.

"드디어 저놈들이 나섰군."

경훈은 새로 나타난 괴물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서울 거리에서 본 괴물이었다.

경훈은 저놈들을 피해 건물 속에서 숨을 죽여야 했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이 세계 놈이 아니겠지? 아직 남아 있는 공룡이 있을 리도 없고."

-...도감에는 들어있지 않은 몬스터입니다.

이브의 말에 조금 웃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경훈도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도감이었다.

경훈이 손을 펼친 뒤, 손가락에 낀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손바닥 위에 아공간이 펼쳐졌다.

경훈이 아공간에서 긴 총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상하게 생긴 총이었다.

이 총도 손잡이에 커다란 마나석이 박혀있는 아이템 총이었지만, 보통 총과는 생긴 게 너무 달랐다.

넓적한 총신이 위아래로 갈라져 있었다. 마치 총신이 위아래 두 개가 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위아래로 긴 홈이 그려져 있을 뿐, 갈라진 두 개의 막대기에는 구멍이 없었다.

그리고, 총신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경훈이 아공간에서 다른 물건을 꺼냈다. 이번에는 커다란 총알이었다.

총알의 모습도 이상했다. 총알 중앙에 그 비싼 마나석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경훈이 총알을 총신의 갈라진 틈에 밀어넣었다.

경훈이 방아쇠에 손을 올리자, 손잡이의 마나석과 총신의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고, 총알에 박혀있는 마나석도 붉게 변해갔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비싼 총과 총알을 사용해 볼까?"

일반적인 총기를 쓰지 못하게 된 경훈을 위해 이브와 오마르가 2년간 만든 무기였다.

이번에 오마르의 문양이 완성되어 가져온 것이다.

이 총은 마나석 발전기가 장착된 세계 최초의 레일건이었다.

거기다 총알도 마나석이 박힌 총알을 사용했다.

연구비를 빼고 총과 총알 가격만 놓고 봐도 웬만한 전차 가격을 넘어섰다.

경훈이 새로 나타난 5층 높이의 공룡 괴물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때, 사격을 멈춘 이사벨이 경훈을 향해 말했다.

"제가 잡으면 안 될까요?"

경훈이 총을 내렸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좀 전에 공간 이동을 한 뒤로 기분이 이상해요. 지금도 누가 싸우라고 하는 것 같아요."

말을 하는 이사벨의 표정이 묘했다.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경훈이 이사벨의 몸을 살펴보았다.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나가 몸을 휘젓고 머리를 두들기는 중이었다.

경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좋아. 그렇게 해."

경훈의 말에 이사벨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총을 내려놓고, 작은 배낭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다.

"베일리! 부탁해!"

그리고, 그대로 난간 밖으로 몸을 던졌다.

크아아앙!

사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옥상 아래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위로 올라온 사자의 등에는 창을 든 소녀가 올라타 있었다.

사자와 소녀는 다가오는 공룡 괴물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나는 사자 등에 올라탄 창을 든 여전사. 마치 신화 속의 여신 같은데요?

이브가 꿈꾸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망인데요."

"나도 부럽군."

경훈과 셰인도 날아가는 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부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둘은 이사벨을 지원할 준비를 했다.

공룡이 점점 다가왔다.

이사벨은 점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크아아앙!

공룡을 닮은 괴물이 날아오는 사자를 보며 크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두렵지 않았다.

베일리가 다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화염을 내뿜었다.

베일리가 괴물의 위로 날아올랐다.

괴물이 화염에 휩싸였다. 아쉽게도 방어막은 깨지지 않았다.

이사벨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로 아래에 화염에 휩싸인 괴물의 머리가 보였다.

탁.

그녀는 잡고 있던 베일리의 갈기를 놓았다.

그녀는 베일리의 등을 떠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휘이익.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의 머리가 가까워졌다. 괴물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괴물의 입이 벌어졌지만, 그녀는 아직도 조금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화아악.

이사벨이 특성을 활성화했다.

211화. < 소녀 문을 두드리다(2) >

떨어지는 이사벨의 눈에 크게 벌린 공룡 괴물의 입이 보였다.

괴물의 입에 침이 가득했다. 입에 고인 액체는 언뜻 보기에도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이사벨은 두렵지 않았다.

마나가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마나가 새로운 특성을 깨우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감각에 몸을 맡기고 마나가 알려주는 방법으로 특성을 일으킬 뿐이었다.

푸아아아악!

괴물의 입에서 침이 쏟아져 나왔다. 강력한 산성 액체였다.

공룡 괴물이 옆에 있던 아파트의 옥상과 벽에도 침이 튀었다.

치이이익.

벽이 녹고, 옥상에 구멍이 뚫렸다.

사방으로 퉁겨진 산성 침 때문에 아파트와 거리는 또다시 흉물스럽게 변해갔다.

하지만, 떨어진 침은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 침은 위로 치솟았다.

모두 떨어져 내리는 이사벨과 불을 뿜고 달아나는 베일리를 목표로 쏘아진 것이다.

다행히 베일리는 미리 달아난 덕분에 산성침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떨어지고 있는 이사벨은 달랐다.

허공에 산성침이 가득 뒤덮였다. 다가오는 산성 침에서 지독한 냄새가 밀려왔다.

-피…해...요...

늘어진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이사벨도 당장 원래의 특성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끌어올린 특성을 멈추지 못했다. 아니 멈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멈추면 안돼!'

마나가 알려주었다. 지금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깨어날지 알 수 없었다.

화악!

그녀는 산성침 안으로 뛰어들었다.

화아아악.

침이 그녀를 뒤덮었다.

그 순간이었다.

빠르게 뒤덮이던 액체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녀가 떨어지던 속도도 느려졌다.

아니, 세상이 느려졌다.

세상 전체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꾹.

세상이 느려진 그 순간, 창끝에 산성 침이 닿았다.

원래대로라면 창끝부터 녹아내려야 하겠지만,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혀 달랐다.

창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쏟아부었던 마나가 창을 감싼 것이다.

원래 이 창은 몬스터의 방어막을 부수는 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마나가, 그녀의 특성이, 창을 바꾸었다.

퍽!

창과 맞닿은 산성 침이 산산이 깨져나갔다. 정지한 것 같은 시간 속에 침은 유리가 깨진 것같이 쪼개져 나갔다.

허공에 깨진 액체들이 흩어져나갔다. 그리고, 깨져나간 침 사이로 이사벨은 계속 추락했다.

아래에 크게 입을 벌린 공룡 괴물이 보였다. 괴물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떨어진다면 괴물의 입속으로 뛰어들게 될 것 같았다.

느려진 시간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느려진 게 아니었다.

그녀의 사고가 빨라진 것이었다.

그녀의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이 정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고와 같이 빨라진 것은 마나가 사라지는 속도밖에 없었다.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팍! 팍!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산성 침은 계속 깨져나갔다.

그녀는 결국 벌어진 괴물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팟!

다시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사벨!"

셰인이 고함을 지르며 옥상 밖으로 몸을 날렸다. 보호장치도 없이 이 높이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하지만, 경훈은 놀란 눈으로 괴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사벨 아직 무사해요! 빨리 이사벨을 구해야 해요!

이브가 경훈에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셰인이면 충분해. 이미 다 끝났어."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지만, 경훈은 볼 수 있었다.

조금 전, 느려진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사벨의 창이 방어막 대신 다른 것을 깨부수는 것을 보았다.

허공을 메운 산성 침을.

입을 벌리고 있는 공룡 괴물의 몸을.

흩어진 산성침이 비가 되어 쏟아졌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서 있던 괴물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푸아아악!

갈라진 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금이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금을 경계로 괴물의 몸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괴물의 몸이 조각조각 난 채로 허물어졌다.

쿵!

괴물이 고기 조각이 되어 흩어진 곳에는 바닥에 창을 꽂은 채로 주저앉은 이사벨이 있었다.

-아, 다행이네요.

이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저런 괴물을 산산 조각내다니, 굉장한 공격 특성이네요. 이사벨도 베일리처럼 새로운 특성을 깨달은 것일까요?

"아니, 특성이 진화한 거야."

경훈은 공룡 괴물이 있던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산성액도 다 쏟아져 내리고, 괴물도 산산조각이 났지만, 허공에는 아직 흔적이 남아 있었다.

휘이이익.

검은 선들이 연기로 변하고 있었다.

사라지는 검은 선들 안에 언 듯 별들이 보인 것 같았다.

"괴물을 조각낸 게 아니야. 공간을 조각낸 거야. 차원을 잘라버린 거야."

제어가 안 돼서 마구잡이로 차원과 공간을 잘라내고 깨트린 것이었다.

산성 침이 깨지고, 괴물의 몸이 잘려나간 것은 그 여파였을 뿐이었다.

-그럼....

"형태는 다르지만, 이사벨은 차원문을 만들었어."

드디어, 한 걸음을 뗐다. 이제 차원을 넘어가는 것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경훈은 기절한 소녀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한 아이였다.

마나를 전부 소모한 이사벨은 기절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척.

베일리가 이사벨 옆에 내려앉았고, 어느새 도착한 셰인이 그녀를 살폈다.

"그럼, 나도 할 일을 할까?"

경훈이 총을 들어 올렸고, 그에 대답하듯 또 다른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크아앙!

아파트 뒤쪽에서 다른 공룡 형태의 괴물이 또 등장했다.

조금 더 컸지만, 비슷한 형태의 괴물이었다.

괴물은 바닥에 흩어진 사체를 보고는 마구 괴성을 질렀다.

쾅! 쾅!

꼬리를 휘두르자, 아파트 한쪽이 박살이 나고, 발을 구르니, 아스팔트가 부서져 나갔다.

콰아아앙!

괴물이 입을 벌리고,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베일리가 앞을 막아서고, 셰인이 이사벨을 품에 안았지만,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철컥.

매우 급하게 일이 진행되었지만, 경훈은 오히려 더 침착했다.

경훈은 달려오는 괴물 머리에 총을 조준했다.

기이이이잉.

초소형 마나석 발전기가 레일건의 전압을 끌어올렸다.

-전압 최대입니다. 마나석 폭주 시작합니다.

두 총열 사이에 떠 있던 마나석 총알이 부르르 떨렸다. 총알에 그려진 문양이 빛을 뿌리고, 총알에 박혀있던 마나석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마나석은 바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경훈에게서 출발한 마나가 총알을 감싸 안았다.

경훈의 마나가 총알을 감싸자, 마나석이 폭주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었다.

일행의 앞에 도착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산성액을 쏘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경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촤아아앙!

총에서 화약이 터지는 소리와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두 총열 사이에 장전되었던 마나석 총알은 소리가 들린 순간 발사되었다.

최대속도 마하 7이라는 엄청난 속도였다.

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이어서 마나석 총알은 괴물의 방어막을 뚫어버렸다.

웬만한 기관포나 폭탄도 막는 방어막이었지만, 마하 7의 속도로 날아오는 마나 총알을 막기는 불가능했다.

퍽!

방어막을 뚫은 총알은 이어 괴물의 머리에 구멍을 뚫었다.

자그마한 총알이었다.

6층 건물 크기의 괴물은 총알이 머리를 뚫고 들어온 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총알이 괴물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는 순간. 마나석 폭주를 막고 있었던 경훈의 마나가 끊어졌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괴물의 상반신이 터져나갔다. 화염이 주변을 강타했다.

바닥에 흩어졌던 사체가 사방으로 쓸려나가고, 옆에 있던 아파트가 무너져내렸다.

괴물을 막아섰던 베일리는 이번에는 날개를 펴고 화염에서 일행을 지켜야 했다.

쿵.

상반신을 잃은 괴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경훈이 총을 내려놓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위력 조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날개 가득 검댕을 묻힌 베일리를 보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훈은 아쉬운 표정으로 레일건을 내려다보았다.

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열을 식히기 위해 냉각 장치가 가동되는 중이었다.

"연발로 쏠 수 없는 것도 아쉽지만, 나밖에 쓸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것 이상이야."

만들기도 힘들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만, 각성자들에 이 총으로 무장시킬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다른 각성자들도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성자가 쓰면 평범한 레일건일 뿐입니다.

폭주하는 마나석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경훈뿐이었다.

경훈도 SS급이 된 이후에 겨우 터득한 마나 제어였다.

괜히 다른 각성자에게 마나석 총알을 주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자폭하게 될 뿐이었다.

그래도 2년 동안 겨우 만들어낸 경훈 전용 무기였다.

이 레일건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적의 공격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경훈은 하늘에 떠 있는 드론을 올려다보았다.

기구나 비행기를 띄운다면 더 오래, 더 멀리 감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시로 닥치는 구름과 구름 속의 괴물들 때문에 그런 생각은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에 있는 괴물은 반응 없지?"

-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브는 마나를 측정하는 위성의 기록을 확인하다가, 백두산에 있는 대군주급 몬스터가 잠시 움직인 기록을 발견했다.

경훈이 부산에서 지룡과 싸울 때 일이었다.

다행히 백두산을 다 내려오기 전에 다시 돌아갔지만, 분명 부산 전투와 관련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 아지트를 포기할 생각을 하는 것도 바로 백두산에 있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아지트가 들킨 결과로 계속 습격이 이어졌지만, 이브가 만든 방어 시설로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여차하면 경훈이 서울에 있는 군주를 다 때려잡을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괴물을 깨울까 봐 제대로 싸우기도 어려웠다.

"어쩔 수 없겠어. 뉴욕 아지트가 완성되면 이곳은 버리는 수밖에."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브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고생해서 만든 아지트이자 공장이었지만, 이브는 별로 아쉽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경훈은 가슴에 넣어둔 휴대폰을 툭툭 두드렸다.

평범한 AI였다면 아쉬울 리가 없겠지만, 그녀는 평범한 인공지능이 아니었다.

아쉽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경훈의 무뚝뚝한 위로를 끝으로 잠시 둘은 말이 없었다.

잠든 이사벨을 등에 얹은 베일리가 건물 옥상에 내려앉았다.

셰인도 와이어를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왔다.

일행은 잠든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을 지켜보던 셰인이 입을 열었다.

"이사벨이 너희 세상으로 넘어갈 때, 나도 같이 가지. 이사벨의 경호 로봇인 것처럼 하면 될거야."

경훈이 로봇을 바라보았다.

로봇이 쓰고 있던 카우보이 모자를 벗었다.

*

이사벨이 잠든 그 시각.

두두두두.

다른 세계의 바다 위에는 여러 대의 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다른 나라는 알지 못하는 미국의 최신예 스텔스 헬기였다.

이 헬기들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특수부대를 태우고 미국에서 출발한 헬기들이었다.

괴물이 있는 구름 때문에 항공기를 사용할 수도 없었고, 배나 잠수함은 바다에 사는 괴물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결국 헬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스텔스 헬기들은 열을 내뿜는 배기구도 보이지 않았다.

이 헬기는 항공유가 아닌 마나석 발전기로 만들어진 전기로 날고 있었다.

2년간의 노력 끝에 미국도 마나석 발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항공유를 사용하는 헬기로는 태평양을 건너긴 무리였지만, 마나석 발전기로는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멀리 섬이 보였다. 쓰시마 섬이었다.

헬기들은 일본 해안을 타고 올라와 지금 쓰시마 섬을 앞에 두고 있었다.

잠시 뒤, 헬기들이 쓰시마 섬 구석의 으슥한 창고 뒤에 차례로 착륙했다.

헬기가 내려서는 주차장 한쪽에는 일본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한쪽 팔이 없는 늙은이가 서 있었다.

노인은 2년 전 전쟁통에 팔을 잃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회사도 이제는 망하다시피 했고, 실권도 사라졌지만, 아직 복수심만은 남아 있었다.

오래전, 마나석 발전기 설계도를 훔쳤던 미쯔비 그룹의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212화. < 전조(1) >

"어서 오십시오."

회장은 내려선 군인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남은 한쪽 팔로 지팡이를 짚고 선 그였지만, 고개를 숙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헬기에서 내린 미군들은 인사를 외면했다.

모두, 그를 지나갈 뿐이었다.

단지, 장교 한 명이 그 앞에 멈춰 섰다.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까?"

회장은 다시 몸을 세웠다. 회장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한국에 잠입해 있는 동료와 협력자들이 보내준 정보입니다. 말씀하신 제약회사는 몇 년 전에 한 투자회사에게 팔린 뒤, 보수와 개조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장교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 제약회사는 다시 가동되지 않았고, 출입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양의 CCTV가 설치되어 있고, 경비원들이 돌아다녀서 주변에서도 의아하게 생각 중인 모양입니다."

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에는 건물을 멀리서 찍은 사진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사진 속 건물은 텅 빈 것처럼 보였지만, 건물 주변에는 군용 CCTV가 가득 설치되어 있었다.

장교는 서류를 덮었다.

"숙식할 장소는 어디입니까?"

"저쪽 건물에 마련했습니다."

공터 한쪽에 세워진 임시 건물이었다.

남자의 말에 장교는 부하들을 데리고 건물로 향했다.

건물로 들어가는 미군들을 회장이 바라보았다.

옆에서 비서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회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각성자들도 꽤 있었지?"

"네. 상당수가 각성자로 보였습니다."

"미국도 많이 변했군."

그도 자유를 그렇게 부르짖던 미국이 강제로 각성자를 징병시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좋은 이야기였다.

"성공했으면 좋겠지만,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어. 그걸로 두 나라 관계가 더 엉망이 되길 바랄 뿐이야."

멀리 떨어진 나라들이라 서로 전면전은 불가능하겠지만, 아직도 미사일이라는 훌륭한 무기가 남아 있었다.

"뭐, 전쟁까지 가지 않아도, 혼란만 일어나줘도 충분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직 대륙에서는 미국의 힘을 과신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선동해 저 유라시아 연합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틈만 만들면 돼. 각 나라가 멀어지든 EV와 국가들이 갈라지든, 계기만 있으면 일본은 부활할 수 있어."

"...."

회장의 말에 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서가 생각하기로는 이제 일본은 회복이 불가능했다.

도쿄와 후지산 일대가 전부 괴물들의 놀이터가 되어 접근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군대도 이제 반의반 쪽도 남지 않았다.

치안도 엉망이고 경제도 바닥이었다. 야쿠자나 군벌이 장악해서 정부가 손을 놓은 지역도 있었고, 토호들끼리 내전에 가까운 싸움을 벌이는 곳도 있었다.

일본은 마치 형식적인 왕을 섬기던 다이묘 시대로 돌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노인처럼 옛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로 정부를 복구한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하고 있었다.

회장을 바라보는 비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모시던 회장도 이제는 주위를 둘러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서가 입을 열었다.

"바람이 찹니다. 저들을 보았으니, 이제 본토로 돌아가시지요."

"....그렇게 하지."

회장은 잠시 멈춰선 헬기와 미군들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날, 회장이 탄 헬기는 본토로 향했고, 다음날, 휴식을 취한 미군들은 스텔스 헬기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아직, 한국의 레이더망은 스텔스 기체를 찾기에 부족했다.

헬기들은 해안선을 타고 강원도로 올라가, 저녁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경기도에 도착했다.

*

창문 밖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마르와 루이링들이 모여 있는 응접실은 따뜻한 등이 비추고 있었다.

오마르는 이제 어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배고픔으로 왜소했던 체격이 2년 사이에 복구된 것이다.

키도 훌쩍 컸다.

아직 170cm는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디 가서도 어리다고 놀림을 받지는 않았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오마르가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조각을 하고 있었다.

루이링을 포함한 중국인 여성들은 조각을 하는 오마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들은 심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뭐야? 사람도 아닌 것 같고."

결국, 참지 못한 여성이 오마르에게 물었다.

오마르가 조각을 이어가며 대답했다.

"아, 로봇이에요."

오마르는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벽을 치고 있었지만, 가족과 동료에게는 평범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로봇?"

"네, 전에 본 설계도대로 만들어보고 있는 거예요."

"EV가 로봇도 만들고 있었어?"

질문을 한 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이링이 혀를 찼다.

"로봇이야, SG 전자에서도 만들고 있잖아."

"아니, 저거 보세요. 저건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로봇인데요?"

류이링은 오마르가 만드는 조각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녀 말대로였다. 조각은 류이링이 보았던 로봇과 전혀 달랐다.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던데요? 전 개조 부품에 문양을 다시 그렸을 뿐이에요."

오마르의 말에 류이링도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EV와 경훈이 하는 일은 몇 년이 지났건만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근데, 왜 그런 로봇을 조각하고 있는 거야? 우리 말고 조각은 안 했잖아."

다른 여성의 물음에 오마르가 자신이 만들던 조각을 눈앞에 들어 올렸다.

그녀 말대로였다. 오마르는 가족과 동료로 생각하는 사람 외에는 조각한 적이 없었다.

"따로 조각할 때 그런 기준은 둔 적이 없었어요. 그냥 내키는 대로 한 거지."

오마르도 말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훈의 총을 완성한 뒤에 아무 생각 없이 만들기 시작한 조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자신도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케이도 조각한 걸 봤거든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럼, 뭐 문제없겠지."

오마르의 말에 류이링이 담담히 대답했다.

우우.

그녀의 대답은 다른 여성들의 야유를 불러왔다.

"류이링은 경훈 씨 이야기만 나오면 생각하기를 그만둔단 말이야."

"평상시에는 한도 끝도 없이 날카로우면서 왜 경훈 씨 이야기만 나오면 무사통과인지…."

"하지만, 경훈씨에게는 그 비서가 있잖아. 솔직히 경훈씨 앞에서 머리 굴릴 이유가 없긴 하지."

"하지만, 류이링은 너무 심해요."

중국에서 온 여성들도 그동안의 고통을 많이 극복했다. 이제, 자신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 놀릴 수 있게 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경훈과 EV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여성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헬기 소리인가?"

류이링의 말에 다른 여성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다른데요?"

"거기다 엄청 소리가 작아. 우리도 겨우 들릴 정도인데? 오마르도 안 들리는 모양이잖아."

오마르는 그녀들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 별일 아니겠지.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응, 아무튼 류이링은 너무해."

친구들의 공세에 류이링은 피식 웃고 말았다.

*

어두운 밤.

투투투투.

헬기들이 목표와 조금 떨어진 상공에 멈춰 섰다.

구름이 가득 낀 밤이었다.

검게 칠한 헬리콥터들은 전혀 불빛을 흘리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레이다에 들키지 않는 것은 물론,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지상에서 보더라도 헬기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기는 무리였다.

로프가 아래로 떨어지고, 군인들이 로프를 타고 내려왔다.

방독면과 스코프가 달린 전술 헬맷, 그리고 각종 첨단 장비를 착용한 특수부대원들이었다.

더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각성자들이었다. 숫자도 적지 않았다. 총 20여 명.

부대원들이 모두 내려서자 선두의 있던 장교가 수신호를 했다. 적외선 스코프로 지켜보던 부대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부우우웅.

헬기에서 검은 드론들이 빠져나와 대원들 위를 날아갔다.

헬기도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피할 이유가 없었다.

선두에 선 장교. 콜린 중령은 적외선 스코프로 전방을 확인했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낮은 건물들이 보였다. 사진으로 확인한 제약회사가 맞았다.

밤이라서 그런지, 경비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설치된 수많은 감시 카메라가 적외선 스코프에 잡혔다.

더구나, 이중 철조망 안쪽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평범한 제약회사가 설치할 방범 장비들이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부하들이 빠르게 나아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가는 부하들을 보며 콜린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방금 지나간 부하들은 전부 각성자들이었다.

뒤를 따르는 일반인 부하들보다 훨씬 명령을 잘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같은 각성자인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부하들은 군대에 있는 다른 각성자들처럼 사고도 치지 않고, 명령도 잘 따랐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군인보다 훌륭한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개성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모두, 군대에 들어오면서 거친 작은 뇌수술 때문이었다.

자신같이 원래 군대에 있었던 각성자들은 수술을 받지 않았지만, 강제 징집된 각성자들은 모두 뇌수술을 거쳤다.

강제 징집된 그들의 적응을 돕겠다는 명목이었다.

그리고, 그 수술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일반인이었던 각성자들이 괴물 앞에 나서서 훌륭하게 싸운 것은 바로 그 수술 덕분이었다.

상부에서는 복무를 마치면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믿지 않고 있었다.

훌륭한 무기가 된 각성자들을 정부가 놓아줄 리가 없었다.

콜린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딴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번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다.

이 머나먼 한국 땅에 와서 헬멧 맨과 동료를 납치하거나 사살을 하라니....

솔직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미국의 군인이었다.

그는 손을 흔들어 작전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부하들이 모두 감시 카메라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퓩. 퓩. 퓩. 퓩.

작은 총소리와 함께 감시 카메라들과 가로등이 모두 깨져 나갔다.

*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오마르 일행의 귀에 방송이 들려왔다.

[주변을 감시하던 감시 카메라가 파괴되었습니다. 주변을 감시하던 감시 카메라가 파괴되었습니다....]

반복되는 방송에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제실이었죠?"

"가자."

오마르의 물음에 일행은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응접실 밖은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는 잠금장치가 달린 철문이 있었다.

통제실이었다.

일행은 빠르게 걸어갔다. 오마르는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회사의 가로등 몇 개가 불이 나가 있었다.

파직.

이번에는 불 꺼진 가로등 옆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오마르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이 도착하자 철문은 바로 열렸다.

철문 뒤에는 작지 않은 방이 있었고, 방 안에는 수많은 모니터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적외선 카메라와 일반 카메라로 한 건물을 곳곳에서 잡은 화면이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 멀쩡했지만, 모니터 몇 개는 검은 화면만 보이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 차례로 장비를 둘러싼 군인들이 보이고, 그 화면이 바로 검게 변했다.

그렇게 계속 화면이 꺼지고, 결국, 군인들이 한 방에 들어선 것이 보였다.

바닥에 문양이 그려진 텅 빈 방. 군인들은 꽤나 허둥거렸다.

"트랩?"

화면에서 군인이 소리치는 말에 의자에 앉아 화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함정 맞아."

일행이 대답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훈이었다.

"함정이다! 탈출해!"

화면 속의 군인들은 급하게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경훈이 이어폰을 통해 명령을 내렸다.

"진압 시작."

-EV 특수 작전 팀. 작전을 시작합니다.

건물 밖을 비추는 다른 화면에서 검은 방탄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미군과 똑같이 첨단 장비를 걸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인종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러시아인과 유럽인, 한국인과 중국인.

다른 세상 뉴욕 지하에서 찾은 방탄복과 아이템으로 무장한 EV의 특수부대였다.

213화. < 전조(2) >

타타탕!

미군들이 건물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적이다!"

들킨 이상, 수신호도 필요 없었다. 콜린 중령의 고함에 모두 벽 뒤로 엄폐했다.

미군은 창과 문을 통해 총을 갈겼다. 소음기를 빠져나간 총알이 건물 밖으로 쏟아졌다.

퍼퍼퍽,

총알이 땅에 박히는 소리와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팅, 팅, 팅,

총알이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콜린이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검은 방탄복을 입은 병사들이 낮은 자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부하들이 쏜 총알 대부분은 병사들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었지만, 운 좋게 맞은 몇몇 총알은 방탄복과 헬멧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방탄복이 좋은 건가? 아니면, 총알도 막아내는 강력한 각성자?'

둘 다 였지만, 콜린은 알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의 복장은 정규군 복장이 아니었다. 특이하게 생긴 방탄복에, 들고 있는 무기들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총과 칼, 그리고 창. 모두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적어도 적은 모두 각성자였다.

'젠장, 역시 함정이었어.'

빈 건물을 보고 알아차리긴 했지만,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타타타!

컥!

다시 총소리와 함께 벽 뒤에 숨어있던 병사 하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병사가 숨어있던 벽에 방금 생긴 구멍이 보였다.

적 총알은 벽도 뚫고 들어왔다.

적은 총알을 몸으로 막으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아군은 적의 총알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방법이 있었다.

콜린은 헤드셋 마이크를 잡고, 헬기를 불렀다.

"여기는 마우스. 부엉이 응답하라. 함정이었다. 건물 밖에서 적이 공격 중이다. 지원을 부탁한다.!"

-수신 완료. 하지만, 적외선 카메라에 적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잠시만 기다려라. 드론으로 확인하겠다.

부우우웅.

건물 위로 드론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음.

콜린은 창밖으로 스파크와 화염을 뿜으며 추락하는 드론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화염 뒤로 지나가는 다른 드론들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검은색 드론이었다.

아래쪽에 총처럼 보이는 무기가 달린 드론들이 추락하는 아군 드론을 지나 건물 위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존재도 알지 못하던 드론들이었다. 더구나 지금도 드론이 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딱 봐도 아군 드론들보다 훨씬 뛰어나 보이는 드론들이었다.

-드론들이 격추되었다! 공격을 가한 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지상에서 적의 좌표를 지정해 주길 바란다.

적외선 스코프에 달린 레이저 측정기라면 충분히 좌표를 보내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이 지역을 벗어나라! 아군기를 파괴한 것은 적의 드론들이다! 부엉이들이 위치한 곳으로 가고 있다!"

-드론? 레이더에는 비행물체는 잡히지 않고 있다.

"당장 떠나라니까!"

콜린이 악을 쓰니, 그제야 헬기들이 그의 말을 들었다.

-수신 완료. 우선 현 위치를 이탈하겠다. 산 뒤로 넘어가 대기하겠다. 좌표를 보내주면 바로 지원을 시작.... 저게 뭐지?

콰아아앙! 콰아아앙!

통신이 끊어지면서, 커다란 폭음이 연이어서 들려왔다.

콜린은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작전이 노출된 거지?"

함정에 빠졌으면 누군가 작전을 노출했을 게 분명했다. 아니면 원래부터 잘못된 작전이었을 지도 몰랐다.

타타탕! 탕! 쾅!

그가 통신하는 와중에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병사들은 차례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때, 마크 상사가 급하게 옆으로 다가왔다.

"적이 아직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탈출해야 합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나갈 길이 막혔잖아!"

"각성자들을 방패로 세우면 됩니다! 탈출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콜린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상사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남은 병사들이 벽에 붙어 다가오는 적에게 총알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벽에서 물러서 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일반인 병사들. 그들은 지금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마크 상사는 일반 병사의 대표로 그에게 말한 것이었다.

"항명인가! 그리고, 나도 각성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나!"

중령은 상사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령님은 저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저들은 인간이 아니라 전투 기계일 뿐입니다."

부대원은 모두 작전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부하는 일반 병사들밖에 없었다.

상사의 말대로 각성자들은 명령에 따라 적을 막을 뿐이었다.

각성자 중에도 총을 맞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벽과 방탄복과 방어막이 총알을 어느 정도 막아준 것이다.

솔직히 미군은 저 각성자들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죽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일반인 병사들의 총이 슬금슬금 그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그까지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콜린은 근래 여러 전방 부대가 반란으로 엉망이 된 이유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상부는 각성자들의 난동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일반 병사들이 벌인 일이었다.

콜린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이런 황당한 군대가 되어 버리다니.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콜린은 가담한 병사들을 확인했다. 살아남은 일반인 병사 전원이었다.

솔직히 제압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럴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제압한다고 해도 적에게 당할 뿐이었다.

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이크를 손으로 막은 뒤, 일반 병사들에게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날 따라오도록."

콜린의 말에 일반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이크를 막은 손을 떼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모두 죽음으로 현 위치를 사수한다!"

"넵!"

"넵!"

각성자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콜린 중령이 각성자들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건물 안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각성자들은 남겨졌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싸웠다.

퍽! 퍽!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각성자 병사들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잠시 뒤, 외부에서 검은 방탄복을 입은 EV 각성자들이 뛰어들었다.

그들은 한손에 마나석이 박힌 검과 창을 들고, 다른 손에는 반투명한 방패를 들고 있었다. 마나석 반지 아이템이 만든 마나 방패였다.

등급도 차이나고, 장비도 차이가 났다.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하지만, EV 각성자들은 질린 얼굴로 쓰러진 미군을 바라보았다.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는걸. 항복도 안 하고, 팔다리가 잘려도 덤벼들다니."

다른 각성자의 말에 바실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방어막을 만들어서 적을 바닥에 눌러놓았더니, 적은 팔다리뼈가 부러지도록 그가 만든 방어막을 두들겨댔다.

겨우 기절시켜놓았지만, 아무리 봐도 적은 이미 폐인이 되어 버렸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저항해서 목숨을 잃었고, 몇몇 살아남은 적은 겨우 기절시켜서 잡아 놓았다.

이래서야 중화기를 쓰지 않고 공격한 보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투입된 작전이었는데, 결과를 보고하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사망자 11명. 각성자 셋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대부분 중상입니다. 포션으로 치료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건물 안으로 후퇴했습니다. 바로 추격하겠습니다."

-상황이 조금 이상합니다. 우선 포로와 함께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드론과 항공기들이 감시 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V의 오퍼레이터. 이브의 목소리에 바실리는 혀를 찼다.

역시 케이의 말대로 작전은 제대로 될 때가 드문 것 같았다.

"명령이 왔습니다. 포로를 데리고 철수합니다!"

EV 특수팀 2조 팀장인 바실리는 일행과 함께 바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

같은 시각.

본토로 돌아간 노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서는 한참 작전이 벌어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일본 부흥의 첫걸음이 될지도 모르는 작전이었다.

"이왕이면 성공했으면 좋겠군."

"성공할 겁니다."

운전을 하고 있던 비서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미쯔비 그룹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자신의 혼잣말에 끼어들다니.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똘똘한 녀석을 비서로 쓰고 있었지만, 비서는 갈수록 마음에 안 들었다.

바다 반대쪽에 보이는 모습도 마음에 안 들었다.

고도 나고야가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는 텅비어 있었고, 공장에서도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아직도 괴물이 날뛰는 도쿄 대신에 임시 수도가 된 나고야였지만, 이곳도 과거의 활기는 보이지 않았다.

회장은 지금 타고 있는 차도 마음에 안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준비한 평범한 중형차였다.

운전석과 뒷자석 사이에 벽도 없었고, 승차감도 불편했다.

비밀 모임이 아니었으면 절대 탈 리가 없는 차였다.

차는 나고야 항구의 한 창고 앞에서 멈추었다.

근처에 다른 차들이 서 있었다. 먼저들 온 모양이었다.

회장은 차에서 내리며 혀를 찼다.

기껏, 정부를 재건하는 중인데 파벌 싸움이라니.

군부와 자민당 위원들. 그리고 전 내각 찌꺼기들과 기업가들이 두 개 파벌로 나뉘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한쪽 파벌의 수장 격인 그가 떠올릴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그는 모든 문제에서 자신은 제외했다.

"기다리겠습니다."

비서의 인사에 대답도 없이, 그는 지팡이를 집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낡고 외진 창고였다.

비서가 새로 잡은 회담 장소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살짝 열린 창고 문 사이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는 노인들과 장년인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들어서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회장은 인사를 받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2년간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앉지. 할 이야기가 많아."

텅빈 창고 중앙에 책상과 의자가 둥글게 자리하고 있었다. 의자는 모두 채워져 있었고, 제일 상석. 한 자리만 남아 있었다.

회장의 자리였다. 노인은 천천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어제 쓰시마를 다녀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힘들게 직접 가시다니. 저에게 시키셔도 되었을 텐데."

회장이 앉자 사방에서 아부가 이어졌다.

"이런 곳을 고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바닥 얼룩이 마치 마법진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실패한 아부도 끼어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말을 꺼낸 중년인은 어찌할 줄을 몰라 했고, 회장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먼지가 쌓인 창고 바닥에 희미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나 발전기와 아이템에 그려진 문양을 바닥에 그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 생긴 얼룩일 게 분명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서 끝내고. 회의를 시작하지."

회장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문양이 가득 그려진 방에 콜린 중령과 병사들이 들어섰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방이었다.

바로 목표인 헬멧 맨이 있다는 방. 하지만, 이 방은 텅 비어 있었을 뿐이었다.

"왜 여길 다시 온 겁니까?"

병사들을 대표해서 마크 상사가 다시 물었다.

탈출하겠다는 콜린 중령을 따라왔는데, 도착한 곳은 막다른 방이었다.

총을 잡은 병사들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콜린 중령은 부하들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미합중국 군인으로서 모범을 보일수 없나?"

중령의 말에 부하들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중령은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배낭이었다.

"언제부터 미합중국 군인이 작전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나."

그는 배낭을 열고, 안에 든 장비의 스위치를 조작했다.

"설마, 다른 명령을 받은 겁니까?"

상사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상사가 든 총은 이미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령이 피식 웃었다.

"목표를 납치하거나, 납치할 수 없을 때는 사살."

여기까지는 모두 브리핑때 들은 이야기였다.

중령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을 때는 폭탄으로 일대를 날려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지."

시한장치의 세팅을 마친 그가 몸을 일으켰다.

뚜, 뚜, 뚜.

시간이 흘러가는 작은 소리가 각성자들의 귀에 들려왔다.

"당장 꺼! 당신도 살고 싶을 거잖아!"

상사의 고함에 중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군인이야. 군인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존재고. 그렇지 않으면 군인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

철컥, 철컥.

모든 총이 그를 가리켰다.

"이 미친 새끼가! 너도 밖에서 뒤진 전쟁 기계들하고 다를 바가 없는 놈이야!"

상사의 말에 중령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타타타!

분노한 병사들이 총을 쏘았다. 방어막이 점점 깨져나가고, 몸에서 피가 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숨겨진 감시 카메라로 그 광경을 지켜본 경훈이 이브에게 지시를 내렸다.

"작동시켜 당장!"

-네.

[포탈이 가동됩니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주십시요.]

총을 쏘던 사람들도,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던 중령도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그 순간, 바닥에 펼쳐진 문양이 빛을 발했다.

화악!

*

회장은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감았다.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전송 중입니다.....]

뭔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눈앞의 빛때문에 제대로 듣기도 힘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회장이 억지로 눈을 떴다.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창고 가운데 군인들이 서 있었다. 전부 아는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어제 한국으로 떠났던 미군들이었다.

"이게 무슨...."

회장이 놀라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뚜, 뚜. 뚜!

시한 폭탄이 터질 시간이 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환한 빛이 회장을 감싸고, 창고를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항구를 뒤덮었다.

창고 하나만 터진 게 아니었다. 수백 미터가 일순간에 터져나가는 폭발이었다.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위.

"결국, 터트리는 쪽이었나?"

비서가 질린 얼굴로 항구를 바라보았다.

항구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국으로 데려가던가, 폭발로 끝을 낸다고 했는데, 결국 후자로 결론을 지은 모양이었다.

비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EV의 손을 빌려 자국인을 죽인 꼴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쓰레기 같은 노인들을 쓸어 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시대가 바뀐 것도 모르고 아직도 미국 편을 들다니. 살아남으려면 한국과 EV에게 빌어도 모자랄 판에."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긴 잘 마무리됐어. 바로 진행해. 오늘 일본은 새 시대를 여는 거야!"

그는 동료에게 쿠데타를 진행하라는 연락을 보냈다.

이제 일본은 다시 부흥하게 될 것이다.

대륙과의 교류도 다시 시작하고, 망가진 경제도 복귀될 것이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EV가 도쿄에서 설치고 있는 괴물들을 잡아줄 것이었다.

다시 일본의 수도가 회복되는 것이다.

214화. < 전조(3) >

백악관 집무실.

미국 대통령 폴 리퍼드는 굳은 얼굴로 CIA 국장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했습니다."

1년 전 새롭게 CIA 국장이 된 버드는 고개를 땅에 처박을 듯이 숙인 채로 대통령에게 작전 실패를 고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미국 CIA 국장이 아니라, 할복 직전의 사무라이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부꾼 버드라고 불릴만한 모습이었다.

리퍼드 대통령은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를 쓰다듬으며 작전 보고서를 노려보았다.

"작전팀은 전멸했고, 스텔스 헬기는 모두 파괴되었다라...."

대통령의 말에 버드 국장의 머리가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거기다, 작전 실패한 날에 일본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CIA에서는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단 말이지."

버드 국장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국방부 장관과 다른 각료들은 아부꾼 버드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결국, 변수를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나…."

다행히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것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다른 각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야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막기 위한 태평양 방어선이었지, 바다가 막힌 지금은 전략적으로 쓸모없는 섬나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전의 실패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아직 남미에는 EV의 눈과 무력이 남아 있었다.

개인적인 징벌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잠시라도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랐는데, 아쉽게 되었다.

대통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시 뒤, 눈을 뜬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대륙 해방 작전을 시작합시다."

덜컥.

모두의 머릿속에 무언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알겠습니다."

장관과 각료들이 바로 대답했다.

대답하는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2차 대전 이후로 가장 큰 전쟁이 이제 시작될 참이었다.

사람들은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CIA 국장도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대통령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봐주는 것도 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도망쳐 버린 전임 국장을 기억하십시오."

우뚝.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국장이 고개를 까닥이고 다시 걸어 나갔다.

모두가 나가자, 대통령은 지친 얼굴로 반지를 쓰다듬었다.

미국의 승리를 위해 욕을 먹어가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지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마나석 반지가 없었더라면 나가떨어져도 벌써 나가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

철컥.

마지막으로 집무실을 나선 버드 국장이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던 그였다.

문을 닫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다른 각료들은 벌써 흩어진 뒤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외틀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다.

아니,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버드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표정 만들기는 언제나 어려웠다.

웃는 거나, 오버스러운 표정과 연기는 그나마 하기 쉬웠지만, 좌절하거나 욕먹을 때의 묘한 표정은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동안 해결해왔지만, 언제고 들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손을 내리니, 무표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각료들이 말하는 아부꾼 버드의 얼굴이 아니라, CIA에서 불리는 스톤 페이스 버드 국장의 얼굴이었다.

그는 백악관을 빠져나와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랭글리로."

그는 부하에게 CIA 본부로 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부우웅.

차가 출발했다.

그는 차에 비치된 보안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알겠다.

"대통령과 주요 각료들의 각성자 혐오는 잘 진행되었다. 최선은 아니지만 일을 진행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알겠다.

"작전 때문에 지금은 그쪽 대륙 공격에 도움을 주기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대화가 멈추고, 전하가 끊어졌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시간에 맞추긴 했지만, 자칫하면 늦을 뻔했다.

대통령의 몸을 복사한다는 최선의 방법이 반지 때문에 막힌 탓이었다.

흔해 빠진 각성자 테러로 덮긴 했지만, 덕분에 몇 안 되는 동족도 하나 잃어버리고, 혼자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벌레에서 1년 만에 인간까지 성장해, 이렇게 주요 자리를 차지한 동족은 몇 없었다.

더구나 한국에 들어가려던 동족은 기차역에서 사라져버렸고, 남은 동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몸을 사릴 때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도플갱어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이제 CIA 국장의 일로 돌아갈 때였다.

[일본 쿠데타 보고서]

그는 뜬금없이 벌어진 사건을 다시 살펴보았다.

***

그날 일본에서 벌어진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대일본 부흥단]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조금 촌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젊은 각료들과 군인들. 그리고 각성자들이 모여 만든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일은 가볍게 볼 게 아니었다.

일본 정부를 장악한 두 파벌 중 한쪽 파벌 대부분이 테러에 휘말려 폭사해 버린 순간, 그들은 테러를 빌미로 정부와 군부대에 밀어닥쳤다.

파벌 하나가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남은 파벌은 쿠데타를 막을 힘이 없었다.

말단 공무원에게 장관이 체포되고, 부하에게 장군이 사살되었다.

이들은 촌스러운 이름과 달리, 체계적으로 일본 정부를 장악해 나갔다.

쿠데타가 성공할 때까지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국민들은 새로운 쿠데타 세력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믿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지배자에 저항하기에는 일본 국민은 너무 지쳐있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달랐다.

일본 국민은 반발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지배자들은 하루빨리 국민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지금 일단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걸고, 이곳 버려진 도쿄 항구에 와 있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번 쿠데타 세력의 일원이자 새로운 정부의 요직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괴물들이 접근하지 않는 해안가를 이용해 항구까지 온 것이었지만, 멀리 보이는 괴물들의 모습에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억지로라도 담대한 척을 해야 했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다나카 신고입니다."

대표로 나선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까지 미쯔비 회장의 비서였다가, 지금은 구국 위원회의 외무 차관이 된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받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신고는 긴장한 얼굴로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손을 잡았다.

EV의 손을 잡은 덕분에, 신고는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다.

현재까지 홀로 드러난 EV의 수뇌부이자, 세계 최강의 각성자로 유명한 남자. 바로 헬멧맨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를 잡기 위해 미국의 특수부대가 한국까지 왔었다.

물론, 그 특수부대는 소식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대신 헬맷맨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몰래 올 수 있었지? EV도 스텔스 헬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잠시 궁금한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미 신 정부는 미국을 버리고, 유라시아 연합, 아니 EV에게 고개를 숙이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EV의 핵심 인사에게 함부로 묻기는 곤란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혹시 같이 오신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감사 인사를 드렸으면 합니다."

경훈이 손을 놓고 계속 고개를 숙이는 30대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남자가 얼마 전 자신이 모시던 자와 정부의 반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인종별로 성향이 다르다곤 하지만, 이 사람은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경훈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울타리 안에 둘 생각이 없는 사람이자 나라였다. 단지 필요 때문에 사용했을 뿐이었다.

"저 혼자 왔습니다."

경훈의 대답에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 그런, 위험합니다. 땅 위라면 모를까 필요하다면 땅속으로 도망치는 괴물들입니다. 수백의 각성자와 군인들이 땅속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경훈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길게 이야기를 나눌 이유도 없었다. 약속한 것만 후딱 처리하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땅속을 돌아다니는 지렁이 놈들만 처리할 겁니다. 나머지 괴물들은 당신들이 처리하십시오."

담담한 경훈의 말에 신고는 말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셈이었다. 어차피 약속 확인을 위해 나온 사람들일 뿐이었다.

경훈은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다시 일본인이 소리쳤지만, 경훈은 속도를 점점 올릴 뿐이었다.

"지하 지도는 완성되었지?"

-네. 거미 로봇과 드론으로 확인이 끝났습니다. 현재 지렁이 몬스터들의 위치도 실시간으로 파악 중입니다.

이제 그동안 찜찜했던 괴물들을 잡을 시간이었다.

잠시 뒤, 경훈은 항구에서 제일 가까운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얼마 뒤,

쿠구구구궁.

항구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일본인들은 땅이 울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진?"

"아니, 괴물들이 움직이는 거야."

지진의 나라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답게 금방 진동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괴물들이 움직인다고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을 텐데요."

일행 중에는 도쿄 출신도 있었다. 그가 알기론 괴물들이 날뛸 때도 이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었다.

진동은 꽤 오래 이어졌다.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그리고 진원지의 위치도 계속 바뀌었다.

건물 몇 개가 다시 무너지고, 두 시간 정도 지난 뒤, 도시가 조용해졌다.

얼마 뒤, 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경훈이 다시 일행 앞에 나타났다.

"모두 제거했습니다. 더는 도쿄 지하에는 괴물이 없습니다."

경훈의 말에 신고는 확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의 지진과 혼자 나타난 헬맷 맨을 보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헬멧 맨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말을 꺼내기는커녕, 고개를 숙이는 게 고작이었다.

"약속을 지켰으니, 전 가보겠습니다."

살기를 가득 내뿜고 있는 경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경훈의 귀로 이브가 계속 보고했다.

-미군이 멕시코 국경에 진입하기 직전입니다. 곧 남미를 향한 공격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미국이 벌이려는 전쟁은 경훈과 이브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전쟁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단지 운이 좋은 것일 뿐일까?"

-정보가 부족합니다. 최악의 경우 미국 정부에 도플갱어가 잠입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서둘러. 늦어버리면 최악의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어."

-걱정 마십시오. 2년간 준비해 왔습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브의 위로를 들으며 경훈은 포탈로 달려갔다.

그 사이 EV의 정보망에 계속 급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괴물의 생태를 감시하는 정찰병과 각성자들. 그리고 협력 중인 국가들에서 보내온 급보였다.

괴물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2년 만에 웨이브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2년 전에 벌어졌던 웨이브와 달랐다.

한 국가, 한 지역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특정 방향을 향해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괴물들은 인간이 닿지 않게 된 곳에서 출발해 인간의 나라로 움직였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아마존에서 남미 전체로.

시베리아와 몽고에서 유라시아 연합을 향해.

수만, 수십만의 괴물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들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215화. < 전쟁의 시작(1) >

쿠쿠쿠쿵.

검문소가 무너지고, 기나긴 장벽이 차례로 쓰려졌다.

북쪽으로 밀려드는 난민과 밀입국자를 막기 위해 세워놓은 검문소와 장벽이었다.

하지만, 장벽은 남쪽으로 향하는 군대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드르르륵.

전차들이 무너진 장벽을 넘어 남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많은 헬기와 수직 이착륙기들이 병력을 싣고 쓰러진 장벽 위를 지나갔다.

다행히 근방에 마나 구름이 지나가고 있어 전투기와 수송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문소와 국경을 지키던 멕시코군은 총 한번 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상비군이 30만에 가까웠지만, 전차도 없고 장갑차가 주력인 군대였다.

멕시코 군의 주된 적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자국의 마약 조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약한 군대였다.

세계 최강의 군대가 밀고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멕시코 군은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군이 나타나면 부대가 항복하고, 사단이 총을 버렸다.

놀란 멕시코 정부가 미국 정부에 필사적으로 연락했지만, 미국 정부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미군은 저항하는 자들을 박살 내며 남쪽으로 진군할 뿐이었다.

마약밀매 조직이 걸리적거리면 조직이 점령한 지역 전체를 박살 내고, 돌연변이 괴물들이 덤비면 막강한 화력으로 쓸어버렸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미군이 진격하는 경로로는 괴물들의 활동이 심하지 않았다.

미군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했다.

미군의 홍보도 제대로 먹혀들었다.

차량에 실린 확성기와 헬기에서 뿌리는 전단지는 도시를 뒤덮을 정도였다.

[미국은 괴물들과 갱단, 부패한 정부와 각성자들에게 고통받는 시민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하시면 됩니다. 이제 미군이 여러분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괴물과 마약 조직에 당해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미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 덕분이었을까.

멕시코 주민들은 미군의 등장을 오히려 기뻐했다.

미군은 순식간에 멕시코를 점령하고 과테말라와 온두라스를 향해 나아갔다.

남미 국가들은 발칵 뒤집혔다.

갑자기 괴물들이 날뛰기 시작한 가운데 벌어진 미국의 공격이었다.

멕시코에서 멈출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남미 국가들은 겁에 질린 채로 미국과 연락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릴 뿐이었다.

"볼리비아에도 연락을 해보고, 칠레도 아르헨티나에도 연락을 해보았지만, 힘을 합쳐서 미국과 싸우겠다는 나라가 없어요."

소냐가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소냐 사를리치. 브라질 각성자 협회 협회장이 마르셀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EV에 들어갈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지금 아무 생각 없이 괴물들과 싸울 수 있었을 텐데."

2년 전 EV의 권유를 받았던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다시 브라질로 돌아갔다.

마르셀로와 같이 싸우고 싶었지만, 고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 다시 돌아와서 아무것도 못 하고 화만 내고 있었을걸?"

"뭐, 지금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요."

브라질 각성자 협회장이라는 직함과 남미에서 제일 유명한 각성자라는 이름값도 미국과의 전쟁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부들은 전부 공포에 질려서 자기 자리 지키면서 항복할 방법이 없을까 찾아대고 있고, 일반인 태반은 오히려 미국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소냐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국과 싸우려는 자들은 우리 빼고는 반군과 마약밀매 조직들밖에 없을 정도예요."

그녀의 말에 마르셀로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도, EV도 있어."

마르셀로의 말에 쇼냐는 풀썩 웃고 말았다.

"그래서 아직 포기를 못 하고 있어요."

마르셀로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짐을 그녀에게 안긴 것 같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섬에서 할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할게."

마르셀로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장비는 더 주셔도 소용없어요. 이제는 돼지 목에 진주일 뿐이에요."

EV는 엄청난 양의 마나 장비를 남미의 각성자 협회에 쏟아붓고 있었다. 모든 각성자들 다 무장시킬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각성자가 모두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성의 모두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장비가 아무리 많아도 쓸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보다 EV 정예들이 지원해주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죠."

소냐의 말에 마르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지원은 막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른 곳들도 바빠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대규모 웨이브에 EV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더구나 EV의 주력은 동아시아에 있었다. 동아시아 방어가 EV에게는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케이라도 지원해주면 좋겠지만, 케이야 괴물 막는 일을 더 잘하니까..."

쇼냐의 말에 마르셀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냐는 모르지만, 경훈은 사람을 상대할 때도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도 이곳을 신경 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EV가 제대로 정보를 전해 주어서 각성자들 단합은 잘되고 있어요. EV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에요."

일반인 중에는 미군의 진격을 반가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각성자들 중에서는 미국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미군 안에서 각성자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가 EV를 통해 모두에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수술로 사람을 세뇌하다니.

각성자 중에 그런 꼴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기다리는 손님이었다.

소냐가 일어나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마르셀로 그녀의 뒤에 섰다.

브라질 각성자 협회에 EV가 힘을 실어준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비서가 문에서 비켜섰고, 두 남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중년의 남자가 앞장서 들어왔고, 뒤따라 들어온 여성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들은 바로 미국에서 탈출한 루이스 전 CIA 국장과 코드명 안네. 각성자 엘카니였다.

소냐가 루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이스가 슬쩍 마르셀로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남미 전체에서 활약하던 각성자 협회의 회장과 각국의 반군과 마약 조직을 통합해서 국가 이상의 힘을 키운 마피아 두목.

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무기를 휘둘렀었던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큰 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

쾅! 쾅! 쾅!

벌판에 늘어선 K-1 전차가 숲을 향해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숲이 불타올랐지만, 전차들은 멈추지 않았다.

멀리 후방에서 포병대가 쏘아 올린 포탄들도 계속 숲을 쑥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차들도, 전차와 장갑차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꿀꺽.

혁준도 침을 삼켰다. 그는 강력한 각성자였지만, 두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막아낼 수 있을까요?"

옆에서 아직 어린 소년이 겁에 질린 채로 물었다.

얼마 남지 않은 각성자를 박박 긁어모은 덕분에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까지 전선에 나오게 되어 버렸다.

전 같았으면 뭔가 위로의 말을 해주었겠지만, 그는 예전에 지쳐버렸다.

"무리야. 지금 정부 윗대가리 놈들은 다른 데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근데 부산에서 더 어디로 도망칠 곳이라도 있나?"

그는 소년의 말에 대답하며 낄낄거렸다.

질문했던 소년은 더욱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등장할 때도, 웨이브가 밀려올 때도 세상이 망한다고 난리가 났었지만, 인간은 모두 이겨내긴 했었다.

"그 덕분에 각성자가 되어 떵떵거리면 살기도 했었지."

지난 몇 년간의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몇 년은 이미 지나갔고, 이번 난리는 아무리 봐도 이겨낼 수 없어 보였다.

미소가 사라지고, 그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각성자들은 예전에 다 사라져버렸으니, 멸망하는 게 당연할지도."

그 몇 년의 기쁨은 이미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죽지 못해서 버틸 뿐이었다.

쿵.

포격이 멈추었다.

그리고, 불타는 숲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온다!"

"전투 준비!"

고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장교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후퇴는 없다! 이곳이 밀리면 부산도 울산도 한국도 사라진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이곳에서 목숨을 버린다!"

어떤 장교는 이 급박한 시간에 한바탕 연설을 하기도 했다.

"낄낄, 모두 자신이 죽을 방법을 찾는 건가?"

혁준이 고함을 들으며 다시 모두를 비웃었다.

뒤에 가족이 있는 군인이면 모를까, 이들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서 싸우는 것뿐이었다.

콰과과과.

숲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들개들, 방패를 든 악어 기사. 수만 마리의 쥐 떼.

불타는 숲을 뚫고 몬스터들이 밀려 나왔다.

"젠장, 또 저 지랄이네."

숲을 빠져나온 몬스터들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형을 갖춰서 빠르게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모습은 방어하는 인간들의 진형보다 더 훌륭해 보였다.

"측면 확인해! 우회 공격을 조심해!"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대비해!"

"하늘은 이상 없어!"

퇴각하면서 당한 기습공격에 노이로제가 걸린 장교와 병사들은 눈앞에서 다가오는 적들보다 갑자기 튀어나올 적을 더 경계했다.

하지만, 혁준은 그런 병사들을 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몬스터들은 기습공격이나 우회 공격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할 필요도 없었다.

숲에서 끝도 없이 몬스터가 밀려 나왔다.

만, 이만, 삼만... 숫자를 셀 수도 없었다.

이미, 낙동강 남쪽을 제외하고 전 국토를 장악한 몬스터들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편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몬스터들은 단지 물량만으로 인간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쾅! 쾅! 쾅!

다시 전차의 포격이 시작되었지만, 직격을 하지 않는 이상 몬스터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폭발 사이로 몬스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병사들도 총을 쏘았고, 혁준도 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죽을 거, 검이라도 한번 더 휘둘러 볼 생각이었다.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소년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어차피 개죽음할 바에야 하나라도 더 죽여. 꼴을 보니 뒤에 가족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의 말에 소년이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소년은 문양이 새겨진 총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가며 쏘기 시작했다.

혁준은 소년을 보며 고개를 흔들고는 자신도 앞으로 달려나갔다.

옆으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고, 몬스터들이 그에게 덤벼들었다.

검을 휘둘렀다.

개의 목을 베고, 고양이의 다리를 잘랐다. 갑옷 기사와 검을 나누고, 땅에서 솟구친 전갈의 집게를 잘라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또각!

검이 버티질 못했다.

물론, 그의 몸도 멀쩡하지 않았다.

한쪽 팔은 잘려나갔고, 배에서는 내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차의 포격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었다.

그의 앞에 시체가 보였다. 조금 전 총을 들고 달려갔던 소년의 시체였다.

"웃기는 세상이고, 웃기는 인생이었어."

그는 검을 들고 다가오는 악어 기사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악어 기사가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다. 좀 더 즐길 수도 있었고, 좀 더 성공할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혁준이 검에 반으로 잘리며 떠올린 생각은 그런 아쉬움이었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

"일어나! 기상!"

갑작스러운 소리에 그는 번쩍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안 죽은 건가?"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아프지 않았다.

놀란 그는 이리저리 몸을 만져 보았다.

"상처가 없어. 어, 이게 내 몸인가?"

잘렸던 팔도 멀쩡했고, 내장이 쏟아져나온 배도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각성자의 강력했던 몸은 엄청나게 부실해져 있었다.

거기다 입고 있는 군복이 전하고 달라져 있었다.

그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천막, 늘어선 침구. 이곳은 군대의 임시 막사처럼 보였다.

막사 안에는 그 혼자밖에 없었다.

"아프다고 열외를 시켜줬더니 퍼 자고 있어? 빨리 나와!"

하사 하나가 막사 앞에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했고, 하사는 바로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는 천막을 나섰다.

밖에는 수많은 천막이 늘어서 있었다. 멀리서 전차가 지나가고 있었고, 하늘에는 헬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한국이고 국군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철컥, 철컥.

그때, 그 앞에 거미처럼 보이는 로봇과 창을 든 각성자가 지나갔다.

그리고, 머릿속에 낯선 기억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 속에 다른 사람의 삶이 펼쳐졌다.

평범하게 살다가 대학생 때 괴물들이 등장해서 취직도 못 하고 빈둥빈둥 살아간 남자.

그리고, 결국 1년 전에 군대로 끌려와 이렇게 전방으로 내몰린 남자.

"맙소사. 이게 내 몸이 아니었어?"

그는 바닥에 고인물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다른 꾀죄죄한 남자가 물에 비쳐 보였다.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딘지도 기억이 났다.

여기는 백두산 너머. 만주 땅이었다.

갑작스러운 괴물들의 난동을 막기 위해 출발한 국군의 숙영지.

"설마,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건가?"

이 몸의 주인은 이 부대의 병사이었다. 억지로 군대 생활을 버티는 평범한 보통 군인.

하지만, 그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몸속에 마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직, F급 밖에 안되는 것 마나였지만, 전과 달리 이 몸은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

"각성하면서 다른 세상의 기억을 얻는 특성을 가지게 된 건가?"

아니면 다른 세상에서 죽으면서 정신이 각성한 이 몸에 빙의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다시 살아났고, 각성했다.

더구나 이 세계는 아직 무사했고, 엄청나게 잘 버티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었다.

이제는 더 잘할 수 있었다. 더 즐길수 있고, 더 부자가 될수 있고, 자신이 세계를 지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나밖에 할수 없을 거야."

그는 어깨에 무거운 짐을 느끼며 힘차게 걸어 나갔다.

먼저 각성자 등록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