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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 진격(1) >

뉴욕 지하에 있는 이사벨과 일행의 숙소는 창문은 없지만, 안락한 가정집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각자의 방과 화목난로를 흉내 낸 전기난로가 자리한 아늑한 거실. 그리고 식당.

물론, 거실을 벗어나면 삭막한 지하 기지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브는 이사벨이 지내는 이 숙소만이라도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게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일행은 이 숙소를 좋아했다.

이사벨과 베일리. 그리고 셰인도.

오늘은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이사벨이 무릎에 베일리를 올려놓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타닥타닥.

전기난로 쪽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소리였다.

그 소리와 함께 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늑대가 모래를 파내버려서 결국 들켜버렸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경훈의 팬이더라고. 비밀을 지켜주겠데. 그리고, 사막에서 별이 뜰때까지 캠프파이어를 했지."

그는 이사벨에게 저쪽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셰인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고기가 없어서 라면하고 맥주로 때웠지만, 모두 즐거워했지. 내가 치는 기타도 마음에 좋아했어."

-거짓말일 거예요. 몇십 년도 더 된 컨트리송을 좋아했을 리가 없어요.

그의 말에 이브가 딴지를 걸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이야기가 더욱 즐거워졌다.

로봇은 하루하루 정말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홀로 남겨졌을 때도 낚시를 하며 삶을 즐겼고, 경훈을 돕기 위해 나선 지금도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서 사막의 석양을 지켜보았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인생이었다. 그는 인생이 끝날 때까지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생각이었다.

셰인의 이야기를 듣던 이사벨이 옆을 바라보았다.

쇼파 위. 바쁘게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이 옷을 입은 채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경훈이었다.

잠든 경훈의 몸 위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런 담요가 필요 없는 경훈이었지만, 이사벨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경훈도 같이 있었어요?"

이사벨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저었다.

"로켓을 발사해야 한다면서 몬스터를 잡은 뒤에 바로 지구 반대편으로 가버렸지."

-위성은 잘 발사되었습니다. 지금도 위성은 열심히 마나 탐지를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가깝게 잠을 못 잤으니까요. 강력한 각성자라도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훈은 셰인과 함께 이쪽 세상에 넘어온 뒤에 보급품을 펼쳐놓고 바로 잠이 든 것이다.

그는 차원 이동이 가능해질 쿨타임을 수면시간으로 쓰고 있었다.

"이브 언니가 쉬게 해줬어야죠."

-그래서 이렇게 겸사겸사 넘어온 거예요.

이사벨이 조금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전 도움이 안 되네요."

-무슨 소리예요. 정말 열심히 노력했으면서.

끼잉.

그녀가 우울해하자 베일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냐. 괜찮아."

그녀가 베일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보자."

옆에서 경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워있던 경훈이 쇼파에 앉아 있었다.

"좀 더 자도 될 텐데…."

이사벨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잤어. 특성 시간도 돌아와서 이제 슬슬 가봐야 해."

잠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경훈은 꽤나 개운해 보였다.

"그럼, 나도 준비를 해볼까."

셰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공간 백을 채우기 위해 창고로 향했다.

이사벨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일리가 옆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고, 경훈도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사벨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나가 흘러나오고, 그녀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손과 떨어져 있던 공간에 검은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공간이, 차원이 갈라지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사벨이 갈라져 나가는 공간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검은 선들이 점점 모여들며 섞여 갔다. 금이 가던 차원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그 중앙에 검은 구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해. 나랑 다르게 억지로 만드는 것에 가까워."

경훈이 구멍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작게 감탄을 토해냈다.

이사벨이 추가로 얻은 특성은 차원문이 아니었다. 차원을 잘라내는 일종의 공격 기술이었다.

그녀는 그런 특성을 억지로 차원 통로로 바꿔가고 있었다.

-이사벨은 천재입니다.

"천재도 천재지만, 엄청난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주인님도 노력은 지지 않습니다.

이브의 위로에 경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브와 경훈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사벨은 차원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크지 않은 검은 구멍이 그녀 앞에 만들어졌다.

이사벨이 집중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구멍에 점점 다가갔다.

들어 올린 팔이 구멍에 점점 다가갔다. 손가락이 구멍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사라지고, 손과 팔까지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이사벨의 뒷머리에서 몽글몽글 땀이 솟아났다.

부르르.

검은 구멍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구멍 안으로 팔뚝까지 들어가 있었다.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경훈이 보고 있었다.

이사벨은 좀 더 욕심을 내보려고 했다. 그녀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파지직.

구멍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놀란 이사벨이 마나를 불어넣어 구멍을 안정화하려는 순간, 이사벨의 몸이 뒤로 쭉 딸려 나왔다. 경훈이 그녀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퍽!

손이 빠져나오는 순간, 구멍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아...."

이사벨이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 앞이라 흥분한 것 같습니다. 조금 무리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브의 말이 들려왔지만, 경훈은 이사벨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경훈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없을 때 차원 회랑 안에 몸을 넣지 마!"

다른 때와 달리, 그의 목소리는 무척 엄했다.

이사벨이 놀란 얼굴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이 그녀를 이렇게 꾸짖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훈이 그녀의 팔목을 가리켰다.

"네 특성은 나하고 달라. 네가 만든 차원 회랑은 너를 해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이번에도 팔이 잘려나갈 뻔했어."

옷소매 끝이 날카롭게 잘려나가 있었다. 닫혀가는 차원 문에 잘려나간 것이다.

"네 발전속도라면 내일이라도 차원문을 안정화하는 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가 없을 때 절대 차원 문에 몸을 넣지 마. 차원 문도 위험하지만, 차원 회랑을 지나갈 때도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어."

경훈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네, 조심할게요."

이사벨은 경훈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너무 빠른 대답에 오히려 안심이 안 되었지만, 경훈은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경훈은 옆에 있는 베일리를 노려보았다.

'잘 감시해.'

왈!

그의 눈짓에 베일리가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짓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강아지는 바로 이사벨 뒤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경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셰인이나 이사벨의 눈짓은 금방 알아차리더니, 그가 하는 눈짓은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조용해진 거실에 무장을 마친 셰인이 거실로 돌아왔다.

셰인은 손과 발에 새로운 붕대를 감고 반짝이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

"쿡쿡."

이사벨은 이상한 셰인의 모습에 조금 웃고 말았다.

잠시 뒤, 경훈과 셰인은 다시 차원을 넘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싱안링 지구, 타허 현 동쪽에 있는 유라시아 연합군 EV 지휘관 막사였다.

막사 앞에는 은빛 늑대 괴물이 배를 깔고 누워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막사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셰인이 막사 밖을 나서니 누워있던 코니가 벌떡 일어났다.

은빛 늑대는 셰인 옆에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었다.

-신기하네요. 개나 늑대 계열의 괴물들은 전부 셰인을 따르는 걸까요?

이브의 말에 셰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샘플이 더 나오면 알 수 있겠죠.

이브와 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경훈은 로잘리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잘 지켜줘서 고마워요."

경훈의 말에 로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저와 코니 밖에 못 하는 일인걸요."

경훈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셰인의 본모습을 들킨 김에 로잘리아와 코니에게 막사 지키는 역할을 맡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셰인은 로잘리아와 코니와 함께 EV 특수 작전팀이 있는 막사로 향했고, 경훈은 사령부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막사와 병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많은 병력이 모여들었다.

러시아에서 차출된 병력, 만주 독립국의 병력, 그리고 한국군 병력까지, 수만의 정예 병력이 다싱안링 산맥이 보이는 이 벌판에 모여 있었다.

유라시아 연합의 각성자들도 많이 보였다.

러시아 각성자, 중국 각성자, 그리고, 한국 각성자.

지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각성자도 그가 아는 각성자였다.

그는 땅 특성 각성자, 정규였다.

"케이!"

경훈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정규씨도 참여할 줄 몰랐습니다."

"젠장, 나도 당했습니다. 그 인간이 이렇게까지 굴릴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분명, 그 인간이라는 것은 진혁이 분명했다. 협회장이 정규에게 무언가 일을 맡긴 모양이었다.

저렇게 투덜거리니 나중에 시간이 되면 진혁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서로 너무 큰 소리로 떠든 모양이었다. 정규 옆에 있던 남자가 경훈을 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검을 쓰는 각성자인가?'

그 각성자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군인들과의 협동을 위해 군대에서는 각성자들이 대부분 창을 사용하고 있었다.

저렇게 검을 자연스럽게 차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무래도 검술 실력이 좋거나 그쪽에 특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경훈은 그 각성자에게도 슬쩍 머리를 숙여 보이고, 사령부 막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훈은 걸어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마나 연공이 너무 능숙해. 아무래도 보통 각성자가 아닌 것 같아."

경훈은 괴물이나 각성자 몸속을 흐르는 마나를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지나간 검을 찬 각성자의 마나는 각성자의 등급보다 훨씬 더 완성되어 있었다.

혹시 정규가 맡은 일이 그 옆에 서 있는 각성자에 대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이번 작전이 끝나고 바로 물어봐야겠어."

-저도 협회 자료를 검색해 보겠습니다.

군대에서 각성한 것이 아니라면 협회에 자료가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

경훈이 멀어지자, 정규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네. 여기서 케이를 만나다니."

정규는 은혜의 보디가드를 하면서 수많은 물자와 금, 그리고 돈이 흘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케이는 바로 그 은혜의 상관이었다. 미리미리 눈도장을 찍어놓는 게 좋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옆에서 영철이 물어왔다.

"아, 몇 번 사냥을 같이 다녔었어. 실력이 정말 좋아."

대충 감춘 정규의 말에 영철은 다시 눈을 찌푸렸다.

그는 경훈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쳐다보았다.

실력이 좋다는 것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몸의 움직임도, 여유로움도 실력이 나쁜 각성자가 절대로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눈살을 찌푸린 게 아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방금 지나간 남자는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227화. < 진격(2) >

유라시아 연합 사령부.

튼튼하게 만들어진 막사 안에서 러시아, 북한, 만주 독립국, 한국. 네 나라의 장군들이 모여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었다.

"화력은 우리 러시아군이 제일 강할 테니, 우리가 주력을 담당하면 될 것 같군요."

"화력이라면 우리 한국군도 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괴물들이 가득한 산맥 안으로 밀고 들어가는 겁네다. 화력보다 각성자의 실력이 더 중요할 것 같습네다."

"어차피 우리 만주 땅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다른 부대들은 제대로 지형지물을 파악하지도 못할 겁니다."

네 나라의 장군들이 통역을 통해 서로에게 자국의 장점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척 유치해 보이는 광경이었고, 장군들 모두 자신들의 모습을 한심스럽게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괴물들과 싸우기 위해 네 나라가 뭉쳤지만, 서로 경쟁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생 국가인 만주 독립국도, 아직 과거 독재국가의 여파가 남아있는 북한도, 그리고,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서고 있는 한국과 과거의 힘을 되찾고 있는 러시아도,

계속된 방어 이후로 처음으로 이루어진 공세였다.

이번 작전으로 자국군의 힘을 보여주어야 했다.

자국민들에게, 다른 나라에게, 그리고, EV에게.

이곳에는 유라시아 연합 각국의 정예부대가 모여 있었다.

물론, 급하게 모였기 때문에 경장비 위주로 모이긴 했지만, 모인 부대의 질로는 모두 자신이 있었다.

이런 부대를 가지고 있는데 뒤로 밀릴 수는 없었다.

거기다 시간이 없었다.

EV에서 파견된 각성자가 오기 전에 최대한 결론을 지어 놓아야 했다.

그전에 결론을 지어 놓아야 EV에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EV 각성자가 오기 전에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EV에서 왔습니다."

고함을 지르듯이 떠들어대던 장군들은 막사 밖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버렸다.

결국, EV에 휘둘리게 될 모양이었다.

펄럭.

천막을 걷어 올리며 한 남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EV 마크가 새겨진 검은 방탄복을 입은 남자였다.

뭔가, 스산한 기운이 막사를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어수선했던 막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임종무 장군은 막사로 들어온 젊은 남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각성자답게 뭔가 특이한 기세 같은 것을 내뿜은 것 같았지만, 그도 최근 몇 년간 최전선에서 굴렀던 장군이었다. 그런 것에 휘둘릴 그가 아니었다.

EV에서 파견된 각성자는 예상보다 더 젊었다.

물론 젊은이라고 무시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EV의 말을 최대한 따르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졌다.

기갑여단과 2개의 포병대대, 특전여단과 아파치 헬기 대대, 거기다 각성자 협회에서 차출한 각성자들까지.

그가 지휘하게 된 임시 사단은 한국 최강의 부대들을 모아놓은 사단이었다.

이런 사단을 지휘하면서 저런 젊은이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니.

솔직히 각성자 따위가 부대 전술과 운영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장군은 다른 장군들의 표정을 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른 장군들의 표정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벌떡!

북한군 장성이 경훈을 보자 벌떡 일어서서 경례했다.

"리광조 상장입네다. 직접 오실 줄 몰랐습네다. 어서 오시지요."

인사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송알송알 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아, 주석궁에 있던 분이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뒤에 압록강에서도 뵙…. 아, 아닙니다."

장군은 급하게 말을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그 앞에 있는 괴물이 평양과 압록강에서 날뛴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케이씨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러시아 장군은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고,

"그때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저와 부대원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주 독립국의 장군은 생명을 구해준 사람을 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케이? 집행자?"

임종무 장군은 러시아 장군의 말에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케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EV의 집행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경훈은 자신을 보고 놀란 한국군 장군을 보며 눈가를 실룩였다.

임종무 장군. 그도 잘 아는 군인이었다.

군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었던 장군이었지만, 지금은 아는 척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모두 반갑습니다. EV의 케이입니다."

그는 장군들이 모여앉은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았다.

중년 이상의 나이든 장군들만 자리에 앉아 있었고, 영관급 참모들은 전부 서 있었지만, 경훈이 장군과 같이 앉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바쁜 관계로 우선 EV가 그동안 확인한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경훈이 막사 한쪽에 세워놓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장비를 담당하던 병사가 달려 나왔지만, 그보다 먼저 슬립 모드였던 영사기가 켜졌다. 화면에 지도가 펼쳐졌다.

분명 잠가놓았는데? 무선 통신 암호도 있는데? 병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영사기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장군들도 놀란 눈으로 자신 앞에 놓인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노트북에도 같은 화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다싱안링 산맥을 중심으로 등급이 높은 괴물들의 위치를 표시한 위성사진입니다.]

이어서 시원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은 영어로 설명을 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장군도 있었지만, 이해를 못 하는 장군은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은 노트북에서 자국 문자로 자막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은 스크린에 펼쳐진 위성사진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혼자서 위성을 쏘아 올리고, 괴물들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는 EV의 능력에 놀란 것이다.

장군들이 놀라건 말건, 이브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푸른 점은 기사급, 노란색으로 보이는 것은 속칭 대장급으로 불리는 괴물들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 장군들의 신음은 더욱 깊어졌다.

화면에 점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산맥 밖으로 몰려나온 괴물들을 잘 잡아낸 유라시아 연합의 군대들이었다.

그동안의 결과로 군대는 자신들의 힘에 자신감이 가득했었다.

장군들은 산맥 안이 울창한 숲이 아니었으면 바로 밀고 들어가도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산맥 안에 남아있는 괴물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저 많은 괴물과 싸우기는 무리야."

뒤에 서 있던 참모 중 하나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막사였기에 그의 목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반대하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전선에서 괴물들과 싸워왔던 군인들이었다.

산맥 안에 있는 괴물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위력을 가졌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숫자가 다 쏟아져 나온다면 이곳에 모인 부대가 아니라, 산맥 주변에 있는 모든 부대가 막아선다고 해도 방어가 불가능했다.

이브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저 괴물들과 다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녹음된 음성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화면 중앙을 확대하겠습니다. 분홍색 점이 보일 겁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위성사진이 확대되었다.

울창한 산맥 한가운데가 계속 확대되자, 그 중앙. 숲 한가운데에 분홍색 점이 찍힌 버려진 유적같은 곳이 보였다.

[저희 EV는 저 분홍색 점이 이 산맥에 있는 괴물들을 지배하고 있는 괴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두바이에 나타나 도시를 파괴한 괴수와 동급의 괴수입니다.]

이브의 말에 장군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들도 두바이에 나타난 괴수를 알고 있었다.

[저희들의 목표는 저 분홍색 점으로 표현되고 있는 괴물입니다. 저 괴물을 제거하면 지금 인간을 공격하고 있는 산맥의 괴물들은 그저 단순한 짐승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2년 동안 준비한 유라시아 연합이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는 것도, 모두 전과 다른 괴물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단순히 먹이를 찾아 날뛰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전략을 짜서 공격해 오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 전보다 몇 배나 힘든 일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임종무 장군이 입을 열었다.

"확실한 것이겠죠?"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도, 참모들도 모두가 확답을 받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붉은 점이 보이는 화면에는 노란색 점과 푸른색 점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거기다 목표까지 가는 길에도 많은 점이 보였었다.

그 점들은 모두 높은 등급의 괴물들이었다.

제대로 된 장교라면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괴물이 가득한 깊은 산맥 속으로 부대 전체를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임종무 장군의 말에 경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장군다웠다.

"확실합니다. EV가 약속하겠습니다."

경훈의 말에 장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V 집행자, 케이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EV 전체의 약속이었지만, 집행자의 약속만으로도 장군들은 믿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작전을 설명하겠습니다.]

"말도 안돼. EV가 작전까지?"

이어진 이브의 말에 참모들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금방 잠잠해졌다.

[현재 부대 편성과 각 부대원, 각성자, 병기들로 괴물들의 위치와 등급을 비교해서 총 30만 번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입니다.]

[각국의 군사 전문가들에게 메일로 검토를 받는 중이고, 각국의 워게임으로 확인을 마쳤습니다. 참모와 장군들께서도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검토 과정 가운데 해킹같은 불법적인 일도 많았지만, 그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참모들과 장군들은 화면에 펼쳐지는 실시간 현황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복잡하고 자세한 작전이었지만, 그래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작전 자체는 간단했다. 화력을 쏟아붓고 일점 돌파로 목표까지 달려간다는 작전이었다.

잠시 뒤, 화면을 지켜보던 러시아 장군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죠. 몇 배 더 복잡하고 자세하지만, 참모들과 일차로 만들었던 작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러시아 장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 말대로입니다. 솔직히 꽤 다른 작전인데.... 비슷하게 포장하니까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 심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하군요.

이브의 말을 들으며 경훈은 장군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악수하는 도중에, 임종무 장군이 경훈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경훈은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

*

이틀 뒤, 집결을 끝낸 연합군이 다싱안링 산맥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후방에 집결해 있던 포병대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쾅! 콰아앙! 콰과과과광! 슈아아악!

4개국이 자랑하는 포들이 불을 뿜었고, 미사일이 하늘을 날았다.

엄청난 포격이었다. 마치 산맥 전체를 불태울 것 같았다.

폭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산맥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괴수도 들을 수 있었다.

깊은 유적 속에서 거대한 뱀이 눈을 떴다.

스르르.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훈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브라질에서 본 괴물과 같은 종류의 괴물이었다.

요르문간드.

동족을 잡아먹고도 오염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거대 뱀.

그 뱀의 일족이 이곳 다싱안링 산맥에서 군주급 괴물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228화. < 진격(3) >

멀리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인간끼리의 전쟁이라면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는 소리였지만, 지금은 병사들에게 위안을 주는 소리였다.

어제까지도 울창했던 숲은 가지만 앙상한 반쯤 타버린 숲으로 변해 있었다.

반쯤 탄 나무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고, 불길이 잠든 숲은 아직도 열기가 느껴졌다.

슈욱. 철컥. 슈육. 철컥.

거미를 닮은 로봇이 불탄 숲 사이로 지나가며 주위를 살피고,

위이이잉.

머리 위로는 드론과 무인 정찰기가 낮게 날아다니며 정찰을 이어갔다.

그 뒤를 수백 명의 각성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한국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선발대였다.

중화기로 무장한 일반 병사들도 일부 보였지만, 대부분은 각성자들이었다.

선발대 뒤에는 본대가 따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한국군 선발대가 불탄 숲을 지나가는 동안,

타타타타! 크앙!

북쪽 산 너머에서 총소리와 괴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치직. 여긴 북한군 선발대. 엘리트급 괴물과 전투 중.

이어서 북한군 선발대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북한군 선발대가 살아남은 괴물들과 마주친 것이다.

연합군은 네 개의 부대로 나뉘어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북쪽에서부터 러시아군, 북한군, 한국군, 만주 독립국군까지.

네 부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다른 부대가 위험에 빠지면 몇 시간 안에 도우러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주력 공격 부대가 어디인지 적이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거리였다.

[네 개의 화살.]

바로 이브가 계획을 짜고, 사령부가 승인한 작전이었다.

원래 야전 사령부가 준비한 단일 돌파와는 꽤나 다른 작전이었다.

적을 단순한 괴물이 아닌, 전략 전술이 가능한 지성체로 상정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세밀하게 준비하고, 네 개의 부대가 유기적으로 협력을 해야 했다.

참모들이 실제로 가능할지 의문을 표할만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산맥 안으로 40km 이상 진격한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크아아앙!

마지막 비명을 끝으로 산 너머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사라졌다.

-여긴 북한군 선발대. 괴물 섬멸 완료. 계속 전진하겠습네다.

네 부대의 진격 경로는 이브에 의해 수시로 조정되었다.

괴물들이 몰려있는 곳은 후방에서 지원되는 화력으로 쓸어버리고, 각 부대는 필요에 따라 적을 회피하거나, 처리했다.

훌륭한 지시 덕분에 산맥 깊숙한 곳까지 진격하는 동안, 네 부대는 심한 저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편한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이미 러시아와 중국 자주포의 최대 사정거리를 벗어났습니다. 곧 한국 K-9 자주포의 최대 사정거리도 벗어납니다. 화력 지원이 부족해질 예정이니 적의 공격에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대 전체에 이브가 통신을 보냈다.

쿵...! 쿵!

포탄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시작이군!"

무료해 보이던 각성자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영철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휴유."

그는 조금씩 마나를 돌리기 시작했다. 전투가 있기 전에 몸을 데워야 했다.

"으이구. 결국, 최전방에 걸릴 줄 알았다니까. 고지식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정규가 입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투덜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영철이 정규에게 물어보았다.

"협회 사람들을 잘 아시나 봅니다."

정규의 질문에 영철은 눈으로 선발대 선두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영철이 얼마 전에 만난 각성자 협회장과 협회 이사들이 다른 각성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부대에 합류했을 때, 영철은 협회 이사들과 정규가 서로 아는 척하는 것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영철은 그때부터 가진 의문을 지금에서야 물어본 것이다.

"당연히 잘 알지. 나도 협회 초기 맴버잖아."

의문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풀려버렸다. 비밀이 아니었던 것일까?

'하기야 정규 정도 실력의 각성자가 무명일 리는 없겠지. 그런데 왜 협회 사람들과 같이 있지 않은 거지?'

하나의 의문이 풀리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것도 금방 풀려버렸다.

"저 인간들처럼 괴물과 싸워대는 게 싫어서 계속 밖으로 돌았었는데, 이번에 강제 징집을 당해 버렸잖아. 다들 무척이나 고소해 할 거야."

정규가 선두에 있는 이사들을 향해 다시 투덜거렸다.

말을 하는 정규의 표정에는 한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말하는 내용 중에 거짓은 없었다.

의심을 푼 영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선두에 있는 협회장과 각성자들을 바라보았다.

"예상보다 실력이 좋아 보이네요."

"저래 봬도 공식적으로는 한국 최고의 각성자들이니까. 당연히 실력이 좋을 수밖에."

물론, 영철이 전생에 같이 싸워왔던 각성자들보다는 약해 보였다.

하지만, 대격변이 끝난 지 겨우 2년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예상보다 훨씬 실력이 좋았다.

정규와 대화를 하면서 영철이 몸을 어느 정도 달귀놓았을 때였다.

다시 진혁의 헤드셋에 무전이 들어왔다.

-한국군 선발대 정면에 기사급 괴물과 엘리트급 괴물들 접근 중. 선발대는 적을 빠르게 제거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하나의 부대가 하나의 화살 역할을 한다면 선발대는 화살촉 역할이었다.

전방을 막아서는 적을 최대한 빨리 부수고 나가는 화살촉.

이 선발대에서 그 화살촉을 지휘하는 것은 각성자 협회장인 진혁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각성 전부터 각성 후까지 군대와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러온 진혁이었다.

그보다 한국군 선발대를 지휘하기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진혁은 헤드셋에서 들려온 통신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전방에 돌연변이 괴물! 최대한 빨리 제거한다."

그의 말에 각성자들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각성자 협회 소속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진혁에게 훈련을 받거나 같이 괴물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진혁의 지시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빠르게 자리를 잡는 각성자들을 보고는 영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전생의 각성자들은 이들과 달랐다.

대격변에서도, 마지막 웨이브에서도 강제로 징집된 각성자들은 군인처럼 싸우지 못했다.

사냥꾼이었던 각성자들도 일개 개인으로 싸웠을 뿐이었고, 합을 맞춘다고 해도 그동안 같이 사냥을 하던 동료와 함께 싸운 게 다였다.

하지만, 이 세상의 각성자들은 달랐다.

창이라는 아이템으로 군인들과 함께 몬스터를 잡는 것도 대단했지만, 수십, 수백의 각성자들이 진형을 갖추고 괴물을 상대하는 것도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이것도 EV 때문은 아니겠지?"

그가 다시 한번 중얼거릴 때였다.

언덕 너머에서 괴물들이 등장했다.

수십 마리의 들개들이었다.

거대해진 덩치의 들개들 사이에, 두 발로 서 있는 들개가 끼어 있었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설마 늑대 인간 같은 건 아니겠지?"

정규가 황당한 표정으로 들개 인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새로운 괴물을 보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정규가 땅에 손을 대고 특성을 사용했다. 땅이 출렁거렸다.

영철도 검을 움켜쥐었다.

두 발로 선 들개.

분명 전생에 보았던 변형 몬스터와 닮아 있었다.

인간처럼 두 발로 걷는 몬스터. 그 몬스터들은 모두 강했다. 두 발로 선 몬스터들은 대부분 기사급 몬스터들이었다.

기사급 몬스터는 웬만한 등급의 각성자는 상대하기 힘들었다.

'경고를 해줘야 하나?'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영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의심받을 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경고는 필요 없었다.

출렁거리는 땅 때문에 괴물들의 진형이 흩어지자, 협회장과 그의 동료들이 들개 인간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들이 들개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 동안, 다른 각성자들은 바로 주변의 들개 괴물들을 공격했다.

제대로 준비된 분업이었다.

영철도 땅에 발목이 빠진 늑대 괴물에게 달려들면서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죽어!"

협회장과 말수가 없는 덩치 큰 남자, 그리고 여러 타입의 전투 각성자가 3m가 넘는 들개 인간에게 덤벼들었다.

들개도 흉성을 터트렸다.

아우우우.

두 발로 선 들개는 늑대처럼 하울링을 한 뒤, 달려드는 각성자들을 향해 늘어난 손톱을 휘둘러댔다.

쾅! 콰광!

하지만, 그 공격은 덩치가 들고 있는 돌 방패에 막혀버렸다. 들개 인간이 방패와 함께 남자를 날려버렸지만, 그사이 뛰어든 인간들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다.

창들이 그의 방어막을 부수고는 피부에 상처를 남겼다.

괴물은 창을 찌른 인간들을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사람들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엄청나게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역시 텔레파시 특성 때문인가."

엘리트급으로 보이는 들개의 머리를 잘라낸 뒤, 영철은 뒤를 바라보았다.

아직 전투에 휩쓸리지 않는 선발대 후미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들개 인간과 싸우고 있는 각성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영철이 각성자 막사를 방문했을 때, 그를 반겨주던 여자였다.

텔레파시 특성을 가진 협회 이사. 설연이었다.

쾅!

그가 잠깐 눈을 파는 사이에, 들개 인간이 있는 곳에서 폭음이 일어났다.

협회장이 빛나는 주먹으로 들개 인간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이미 방어막이 날아간 들개 인간이 협회장의 주먹을 막을 수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들개 인간이 땅을 굴렀고, 다른 각성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철과 다른 각성자들이 남은 들개들을 모두 정리하기 전, 들개 인간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사체에서 마나가 퍼져 나왔고, 싸우던 사람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늑대들도 바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선발대는 승리를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상당한 숫자입니다. 포위될 위험이 있습니다. 괴물들은 본대에 넘기고, 선발대는 고속 기동을 시작하겠습니다.

더는 포격으로 막지 못한다는 것을 괴물들이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에 몰려들다니. 목표인 군주급 괴물은 무척이나 전략 전술에 밝은 것 같았다.

협회장이 선발대 전체를 향해 소리쳤다.

"전속 전진! 비각성자는 본대로 귀환! 이제부터 단시간에 죽일 수 없는 괴물들은 뒤로 흘린다!"

선발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광란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각성자로만 이루어진 4개의 화살촉이 재차 쏘아진 것이다.

앞을 막아서는 괴물을 뚫어버리고, 옆에서 달라붙는 괴물들은 상처만 낸 뒤 뒤쪽에서 따라오는 본대에 넘겨버렸다.

덕분에 본대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적진을 돌파 중인 선발대는 본대 걱정을 할 겨를이 없었다.

네 선발대는 거침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선발대들은 목표와 점점 가까워졌다.

이브의 예상대로 괴물들은 네 개의 화살촉을 동시에 막을 수 없었다. 적은 화살촉 중에서 독약이 발라진 촉을 골라내야 했다.

괴물들은 먼저 양쪽 날개를 부수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일 아래쪽에서 달려가던 만주 독립국이 첫번째 타겟이었다.

첫 번째로 모여든 괴물 무리가 만주 독립국 선발대를 막아섰다.

만주 독립국은 아직, 화력과 각성자가 부족했던 신생 국가였다. 적의 공격에 선발대는 바로 전진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본대와 합류할 생각이었다.

화살촉 하나가 꺾였다.

다음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답게 이번에는 격렬한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만주 독립국과 달리 러시아는 결국 괴물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발은 한참 동안 묶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과 북한군은 한참 앞을 달려가고 있었고, 멈춰선 러시아군을 향해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브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군은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만주 독립국과 합류해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제 아직 날아가고 있는 화살촉은 둘만 남았다.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군은 더 전진하기 어려워졌다. 새로 몰려든 괴물들이 북한군을 막아선 것이다.

러시아 선발대에 덤벼든 괴물들 이상의 숫자였다. 각성자가 부족한 북한군 선발대가 감당할 숫자가 아니었다.

-천천히 후퇴해 본대와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이브의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북한군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덤벼오는 괴물들은 우리가 묶어두겠습네다."

그들은 물러나는 대신,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북한군은 전진하는 한국군의 시간을 벌어줄 생각이었다.

싸움은 격렬했다.

북한군 선발대는 최선을 다했고, 훌륭한 결과를 만들었다.

덤벼들던 괴물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말았다.

선발대 각성자의 삼 분의 일이 죽었고, 살아있는 사람 중에도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싸움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한국군 선발대는 말없이 계속 달려갔다.

영철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전생에는 대격변 때 멸망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와 같은 편이 되어 싸우다니. 그는 갈수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달려갈 때였다.

화악!

뒤쪽, 북한군이 있는 방향에서 환한 빛이 솟구쳤다.

무척이나 성스럽고 따뜻한 빛이었다.

영철도 알고 있는 빛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특성은 이렇게 크고 강대한 힘이 아니었다.

그때, 정규가 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광역 회복인가.... 다희 녀석. 몸에 부하가 많이 간다면서 또 써버리냐."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정규의 음성은 무척 따뜻하게 느껴졌다.

북한의 여신. 성녀 다희.

영철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영철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세상을 덮을 정도로 부풀었던 자신감이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북한군 선발대의 활약 덕분에 한국군 선발대는 목적지 앞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선발대 앞에 오래된 유적이 펼쳐져 있었다. 무척이나 큰 유적이었다.

숲 안에 묻힌 무척이나 오래된 유적이었지만, 선발대는 누구도 유적을 감상하지 못했다.

유적 바로 앞에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관문인가?"

진혁이 늘어선 괴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엘리트급 아래는 보이지도 않았고, 기사급으로 보이는 괴물도 여럿이었다. 더구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 커다란 괴물도 있었다.

"여기는 우리 힘으로 못 뚫을 것 같습니다만."

진혁의 통신에 여성이 대답을 해주었다.

-지원하겠습니다.

두두두두.

동시에 뒤쪽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숨겨왔던 아파치 헬기 대대였다. 10여대의 전투 헬기가 날아와 전방을 향해 헬파이어를 뿌려댔다.

우우우웅.

날아가는 헬파이어 미사일 전면에는 빛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콰과과과광!

마나 폭탄이 괴물들을 휩쓸었고, 뒤이어 또 다른 헬기가 등장했다.

움직이는 EV 문양이 새겨진 두 대의 검은 헬기. 바로 EV 특수 작전팀의 헬기들이었다.

229화. < 진격(4) >

먼지가 가득한 낡은 돌벽.

녹과 먼지가 뒤덮인 청동 조각들과 무덤. 재단에 놓인 철재 재기들.

다싱안링 산맥 중앙에 있는 유적의 지하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지하 광장과 무덤이 숨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자랑하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더 크고 웅장해 보이는 지하 무덤이었다.

무덤 중앙 벽에 붙어 있는 재단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몇 년은 빨지 않은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석고대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재단 앞에 엎드려있었지만, 그의 머리가 향해 있는 곳은 재단 쪽이 아니라 그 반대편이었다.

광장 중앙. 그곳에는 대격변 전에 있던 관 대신에 거대한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엄청난 지하 광장을 거의 메울 정도로 거대한 구렁이었다.

스르르.

똬리 안에서 날카로운 뿔로 덮인 머리가 위로 올라왔다.

뿔 사이로 붉은 눈이 빛났고,

스르르르.

구렁이의 머리가 똬리를 넘어 엎드린 남자 앞으로 다가왔다.

구렁이가 입을 벌렸다.

카아아악.

긴 혀가 남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강대한 이미지가 지하 석실을 울렸다.

[네가. 한 조언은. 모두. 쓸데. 없었어.]

문양과 색, 형태와 감각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는 모두 엎드려있는 남자를 공격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버티기 어려운 이미지의 폭거였다.

남자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불만도 많았고, 억울한 것도 많았지만, 남자는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족의. 둥지를. 침입한. 것을. 살려두었는데 이렇게. 쓸모없을. 줄이야.]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제대로 된 작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회?]

비웃는 이미지가 그에게 쏟아지더니, 이어서 이미지가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둥지의 주인이자 군주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머리 위. 유적 서쪽에서 벌어진 전투가 눈앞에 펼쳐졌다.

화르르르.

헬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에 숲과 동료들을 불태웠다.

이상한 불이었다. 인간의 무기는 방어막을 깨기 어려워야 했는데, 이 불은 기사급의 방어막도 흔들 정도였다.

동료들은 불에서 벗어나 인간들을 공격했지만, 인간들의 방어는 단단했다.

동료들끼리 연합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간을 공격하고 있었지만, 쓰러지는 것은 동료들이 더 많았다.

이래서는 곧 방어가 뚫릴 것 같았다.

[보았나. 네놈이. 말한. 전술과. 전략의. 결과다.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복제일뿐.]

남자는 멍하니 영상을 지켜보았다.

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산맥 주변에 계속된 전투.

갑작스러운 적의 공격에 동료를 모아 진격로를 하나씩 박살 내는 모습.

그리고, 전투 중에 다른 동료와 협력을 하고 필요하다면 물러서는 모습까지.

분명, 그가 조언한 전술과 작전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조언한 작전들은 화면 속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지금 그에게 화를 내는 저 구렁이 군주가 지시한 것이었다.

그가 한 것은 조언일 뿐이었다.

군주에 종속된 오염된 인간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게 억울한 일이었지만, 종속된 괴물답게 그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잠깐 오염되기 전이 생각났다.

중국 땅에 핵이 떨어지고,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달려갔던 시간.

그리고, 집단 정치 파벌의 수장이 되어 만주 독립국을 세웠던 때.

마지막으로 리쉬치엔이라는 각성자 놈에게 패해 이 산맥에 감추어 있다는 보물을 찾아 달려왔던 순간.

인간 저우젠런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결국, 보물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그 인간 모습의 괴물에 속은 게 신기해.'

표정도 딱딱하고, 말도 인간답지 않았던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었다.

그 결정 때문에 부하들과 이 산맥 안으로 들어와 모두 죽고, 그는 억지로 마나석을 먹게 되어 이렇게 오염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별로 억울하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기억은 단지 기억일 뿐이었다. 주인의 분노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도 인간이 다시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아직 다른 작전도 많습니다. 제가 직접 나가서 동료들과 함께 적을 막겠습니다. 현장에서 지휘하면 제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군주를 향해 열변을 토해냈다. 인간이 아니게 된 지금도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인간을 버린 지금, 오히려 새로운 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자신은 쓸모가 있었다. 잠깐 밀렸을 뿐이었다. 다른 적들을 상대로는 충분히 실력을 보일 자신이 있었다.

츠즈즈즈즈.

구렁이, 아니 요르문간드는 그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넌. 고마워야. 한다. 내가. 일족만. 잡아. 먹는. 것을. 네가. 일족이었으면. 이 순간.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군주의 말에 그는 다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인간이 용서를 비는 모습이었지만, 그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요르문간드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 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구렁이가 입을 벌렸다.

[편한. 죽음을. 얻게. 된 것을.]

구렁이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침은 오염된 인간의 등을 적셔나갔다.

"크아아아악!"

낡은 옷이 타오르고, 등이 녹아내렸다. 뼈가 드러나고 다리가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를 뿐 움직이지도 못했다. 주인에게 종속된 자의 숙명이었다.

툭.

결국, 오염된 인간은 머리만 남아, 석실 위를 굴러갔다.

독액을 흘려보낸 뱀이 입을 닫았다. 요르문간드는 몸을 돌렸다.

이제 잔재주는 끝이었다. 직접 나가서 인간들을 죽일 때였다.

어차피 일족은 다 먹어치웠다. 이제 격을 올리려면 인간의 마나 밖에 없었다.

뱀은 부하들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앙!

멀리서 괴성이 들려왔다. 즐거운 소리였다.

뱀은 몸을 움직였다.

스르르르르릉.

일족 최초로 군주로 올라선 요르문간드가 무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각성자들과 싸우던 괴물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마나 불 속에서도 수많은 공격을 받으면서도 진형을 지키던 괴물들이었다.

그런 괴물들이 진형을 무시하고 각성자들에게 달려든 것이다.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괴물들이 이상합니다!"

"이게 원래 모습 아냐? 조금 전까지가 이상했던 거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빨리 막아! 갑자기 날뛰니까 막기가 어려워!"

각성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인간처럼 진영을 갖춘 괴물들과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안전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분노에 휩싸여 날뛰는 괴물들은 약점도 많았지만, 많이 위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각성자들은 대부분 전투 각성자들이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들은 그동안 많이 상대해 봤었다.

괴물들이 바뀐 것처럼 각성자들은 군인에서 사냥꾼으로 바뀌었다.

"육체 특성자 없어? 몸빵 좀 해!"

"옆 팀과 동선 겹치게 하지 마!"

"어이, 조심해 저 놈 가죽 꽤 비싸게 팔려!"

"정신 차려! 어차피 군대가 가져가잖아!"

"니미! 그냥 조져버려!"

순식간에 만들어진 팀들이 괴물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영철은 급조된 팀들 속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쪽 세계의 각성자들과 함께 사냥해본 적이 없는 영철이었다. 전생과 신호도 달랐고, 호흡도 달랐다.

괜히 껴서 서로 피곤해질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 정규와 함께 움직이면 좋았겠지만, 정규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괴물들의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싸움 중에도 정규의 활약은 눈에 확 띄었다.

어쩔 수 없이 영철은 혼자 커다란 살쾡이와 싸우고 있었다.

캉! 캉!

검이 살쾡이의 발톱에 계속 튕겨 나왔다.

괴물과 서로 진형을 갖추고 싸울 때와는 달랐다.

옆에서 돕지도 않고, 괴물도 물러서지 않으니, 금방 체력이 고갈되었다.

그의 몸은 전생보다 훨씬 약해 빠졌다.

살쾡이의 발톱이 옷을 가르고, 피부에 선을 그었다. 그는 점점 위기에 몰렸다.

"헉! 헉! 개 같은 몸뚱이 같으니라고!"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약해빠진 자신의 몸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욕을 듣고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각성자들은 전부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뜬금없이 날아와 미사일을 날린 헬기들은 기관포까지 모두 소모하고 퇴각했고, 같이 왔던 로봇들은 전부 부서졌다.

그리고, 헬기를 타고 나타난 EV 각성자들은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한국 각성자 협회의 실세들을 보고 놀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검은 방탄복을 입은 각성자들은 전생에 함께 싸웠던 각성자들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다.

과연 세계 최강의 각성자들 다웠다.

특히 헬멧을 쓴 각성자의 기관총은 말도 안 되는 화력을 보여주었다.

마치 방어막을 깨는 아이템 창을 연발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쳇!"

그런 모습을 보니 영철은 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가 되어 세상을 구할 것으로 믿었는데, 이래서야 자신은 좀 잘난 각성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휘둘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검 끝이 휘청였고, 팔에 피가 튀어 올랐다.

'실수다!'

상처가 컸다. 그는 급하게 물러섰지만, 괴물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살쾡이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걱!

그리고, 반으로 잘려나갔다.

푸학!

잘린 몸에서 피가 피어올랐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자괴감이 더욱 심해졌다.

영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다친 팔을 잡고 괴물을 잘라버린 사람을 찾았다.

괴물의 시체 뒤에 대검을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체도, 영철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유적 중앙에 있는 커다란 계단형 피라미드를 보고 있었다.

그도 움직이는 EV 마크가 새겨진 검은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EV 각성자!'

그동안 찾아왔던 EV 각성자였다. 영철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고, 고맙습니다. 전 혁준, 아니 구영철 각성자입니다."

그의 말에 EV 각성자가 고개를 돌렸다.

영철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저번에 스치면서 본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본 얼굴.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군."

경훈은 숨을 몰아쉬는 각성자를 살펴보았다.

역시,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쓰고 있는 검술도 등급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능숙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이 생긴 각성자를 살펴 볼 때가 아니었다.

피라미드 안에서 마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올라오는군."

-고생하셨습니다.

경훈은 막아놓았던 마나를 조금 풀어놓았다.

우우웅.

대검이 부르르 흔들렸다.

조금만 틈을 만들었을 뿐인데 아이템 검이 힘겨워했다.

"인제 와서 숨지는 않겠지."

인간 이상으로 전략과 전술을 잘 사용하는 군주급 괴물이었다. 혹시, 이 괴물이 경훈처럼 외부의 마나를 인식할 수 있는 괴물일지도 몰랐다.

그런 괴물이라면 경훈이 마나를 드러내놓고 접근했다가 숨거나 도망칠 수도 있었다.

만의 하나였다. 이브의 조언에 경훈이 지금까지 마나를 잠가놓았던 것이었다.

"연결해줘."

-네. 진혁 협회장과 EV 작전팀에 연결했습니다.

"이제 놈을 잡을 시간이야."

경훈의 말에 진혁이 그를 돌아보았고, EV 각성자들이 싸움을 멈췄다.

"여기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진혁이 먼저 대답했다.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EV 특수 작전팀 진입한다."

"네!"

이어폰에서 들리는 대답과 함께 검은 방탄복을 입은 각성자들이 잔불이 남은 숲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경훈은 마지막으로 영철을 힐끗 바라본 뒤, 유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영철은 멍한 얼굴로 달려가는 각성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방금, 살짝 느껴진 기운은 이해가 안 되는 힘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영철은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입에 물고는 유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30화. < 진격(5) >

오래된 유적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계단식 피라미드.

십여 년 전 중국 탐사대가 발견한 뒤에 조용히 숨겨놓은, 고고학자들은 고구려 유적의 발견이라고 기뻐할 오래된 왕의 무덤이었다.

EV 특수 작전팀은 유적들 사이를 지나 피라미드에 도착했다.

그사이, 경훈도 일행에 합류해 있었다.

"진입합니까?"

바실리의 물음에 경훈이 주변의 마나를 훑었다.

지하에서 강대한 마나가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 지상까지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멈추지 않고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훈은 조금 기분이 안좋아졌다.

올라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이브, 주변 상황 좀 알려줘."

-유적 동쪽 지역에서 몬스터들과 한국 각성자들이 전투 중입니다. 각성자 선발대가 더 유리한 상황입니다.

-한국군 본대와 다른 부대들도 접근 중입니다. 도착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는 탐지 위성이 괴물들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었다.

마나 탐지 위성은 수명을 몇 년 깎으면서까지 만주 상공으로 궤도를 바꾸었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차례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2차, 3차…. 멀리에 있는 몬스터까지 다 몰려오고 있습니다. 20분 뒤면 첫 웨이브가 도착할 것 같습니다.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여러 겹의 동심원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30분."

경훈은 입술 끝을 비죽 올렸다.

포위한 괴물들이 도착하는 시간과 군주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시간이 같다라.

아무리 봐도 노린 게 분명했다.

적이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가 없었다.

경훈이 명령을 내렸다.

"괴물들이 접근 중이다. 바로 진입한다."

피라미드 입구는 뻥 뚫려 있었다.

입구 앞에 깨진 돌판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막혀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잡초가 깨진 돌판을 뒤덮고 있었다. 막힌 문이 깨진 지 꽤 지난 것 같았다.

EV 특수 작전 2, 3팀은 입구에 경계조를 세워놓고 피라미드 안으로 진입했다.

경훈도 힐끗 서쪽을 보고는 작전팀과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조심스럽게 EV 각성자들의 뒤를 따라오던 영철은 사람들이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자 난감했다.

모두 들어가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각성자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지키고 있는 각성자들을 쓰러뜨려야 할 텐데, 그랬다가는 EV와 완전히 틀어질지도 몰랐다.

"젠장, 이기는 것도 무리지."

솔직히 지금 능력으로는 저 각성자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전생의 실력이었으면, 한번 해볼 만도 했지만, 예전 실력을 되찾으려면 아직 멀고 멀었다.

"기사급이나 대장급 몬스터 사냥에 끼어들 수 있으면 좀 더 빨리 등급을 올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전쟁 중에는 싸울 몬스터를 고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정도 성장도 감지덕지했다.

아무래도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지막이 혀를 찬 영철은 벽 뒤에 숨어 있었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제사를 준비하던 건물 같았다. 건물 안에는 낡은 토기와 청동기 칼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부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무너진 것일까. 건물 구석에 사람 하나가 지나갈 구멍이 보였다.

깊게 뚫려 있는 구멍이었다. 방향도 피라미드 방향으로 나 있는 구멍.

중간에 휘어져 있어서 끝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 구멍이 피라미드 지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들어간 사람들이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이 유적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지만....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냥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영철은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그는 더 기다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젠장! 죽기밖에 더하겠냐."

그는 믿지 않는 신을 향해 버럭 소리를 치고는 구멍 안으로 뛰어내렸다.

*

진형을 갖춘 각성자들이 조심스럽게 돌로 이루어진 통로를 걸어갔다.

오래된 유적답지 않게 튼튼하고 커다란 통로였다.

영화와 달리, 함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통로가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경훈이 아니었다면 각성자들은 길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스스스.

돌벽 사이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스스한데…."

한 각성자의 중얼거림에 다른 각성자가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각성자가 되었다고 본능적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온몸의 솜털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바람 소리인가요? 아니면 환청일까요? 꽤나 기분 나쁜 소리네요."

로잘리아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바람 소리도, 환청도 아니었다.

-두 번째 갈림길 왼쪽 통로로 진입했던 거미 로봇. 파괴되었습니다. 적은 스네이크 타입입니다.

경훈이 귀에 손을 올린 채 입을 열었다.

"들으셨죠?"

이어폰으로 전달된 말에 일행 맨 뒤에 있던 헬멧을 쓴 각성자가 대답했다.

"수신 완료."

그는 옆에서 걸어가는 바실리에게 말했다.

"방어막 준비해."

"네?"

"뒤에서 적이 올 거야."

경훈은 셰인과 바실리를 일행의 맨 뒤로 보냈었다. 그가 일행을 안내하는 동안 후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후방에서 적 접근. 전투 준비."

바실리가 방어막을 준비하는 사이, 앞에서 경훈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무기를 들고 몸을 돌렸다. 긴장된 열기가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갈림길의 다른 통로에서 붉은빛이 쏟아졌다.

화르르르.

화염이었다.

뜨거운 불이 쏟아져나와 양쪽 통로로 번져갔다.

부우우웅.

하지만, 불은 한쪽 통로로만 번지고 말았다. 일행 쪽으로는 반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불이 아니에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마나가 섞인 불이었다. 일반 불과 달리 방어막으로 막기가 쉽지 않았다.

헬멧을 쓴 로봇. 셰인이 기관총을 겨누었다.

개량된 적외선 카메라는 불꽃의 시작점을 잘 보여주었다.

곧 갈라진 통로에서 열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다다다다!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캬아아악!

불꽃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불꽃이 조금 줄어들었다.

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뱀 머리처럼 보이는 것을 꿰뚫었다. 피도 튀었는데, 놈은 죽지 않고 아직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타타타타!

계속 총을 쏘아대고, 괴물의 머리가 박살이 날정도였지만, 아직 불꽃은 줄어들지 않았다.

"크윽."

바실리의 신음이 들려왔다. 슬슬 한계인것 같았다.

다른 각성자들은 불꽃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형이 안 좋았다. 통로가 넓다고 하지만, 불꽃을 피해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선두에 있는 경훈을 벌써 불러들일수는 없었다.

셰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다른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아공간 배낭을 빠져나오는 그의 손에는 둥근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그는 막대기를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방어막에 막힌 화염이 대기를 달구고 있었다.

그는 막대기를 방어막에 반쯤 밀어 넣었다.

화르르르.

막대기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끝이 달아오른 막대기를 머리를 내밀고 있는 괴물을 향해 던졌다.

아니, 뱀이 빠져나오려는 통로 안쪽을 향해 던졌다.

마나 불꽃으로 점화된 마나 폭탄이 갈라진 통로를 향해 날아갔다.

타타타타!

그 와중에도 사격은 멈추지 않아, 괴물은 마나 폭탄이 날아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콰아아앙!

폭탄이 뱀 머리 뒤에서 터졌다. 놀란 뱀머리가 쑥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서 통로가 무너져 내렸다.

튼튼한 돌로 만들어진 통로였지만, 마나 폭탄의 화력을 버틸 수는 없었다.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딱, 괴물이 나타난 통로만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세상에 들어온 통로도 무너졌으면 어떻게 하려고. 변수도 다 파악하지 않고 마나 폭탄을 던지다니! 지금 안 무너진 건 반쯤 우연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곧 이브의 화난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경훈은 멀리서 쩔쩔매는 셰인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경훈도 괴물이 죽지 않는 것을 마나의 흐름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나게 긴 몸을 가지고 있던 뱀이었다.

죽지 않는 괴물과 쓸데없이 계속 싸울 수는 없었다. 셰인이 괴물이 나온 통로를 무너뜨린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솔직히 경훈이 달려가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그가 매번 싸워줄 수는 없었다.

큰 위험이 아니라면 군주와 싸우기 전에는 웬만해서는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경훈은 뒤에서 헉헉거리는 바실리와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로잘리아.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괜찮아 보였다. 다행히 모두 잘 싸우고 있었다.

더 많은 각성자를 키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과 있을 때는 더욱 나설 수 없었다.

"출발! 앞으로는 주 통로 외에는 모두 파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경훈의 말대로 일행은 다른 통로들은 모두 무너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통로에서도 작은 마나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통로가 막힌 덕분에 일행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잠시 뒤, 일행은 거대한 마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일행이 피라미드에 진입한 지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몬스터 1파 도착했습니다! 전투 중인 몬스터들과 합류합니다!

*

쾅!

괴물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괴물이 무너져 내리고, 진혁이 빛나는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쓰러진 괴물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갑자기 등장한 괴물들의 등장에 전세가 역전돼 버린 것이다.

"젠장, 이 인간은 어디 간 거야? 죽은 건 아니겠지?"

멀리서 정규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감시 대상자를 놓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나중에도 그를 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런 상황에서 감시하기는 무리였다.

다른 각성자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다행히 진형은 무너지지 않았다.

괴물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뒤에 각성자들도 사냥꾼이 되어버렸었지만, 괴물들이 더 밀려들자, 사람들은 금방 훈련한 대로 진형을 갖추었다.

그 덕분에 아직까지 버텨내고 있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포션 덕분에 사망자는 많지 않았지만, 포션을 먹은 것으로는 죽었을 부상자가 싸우기는 무리였다.

진형이 점점 흔들렸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물러나야 하나?'

작전대로라면 바로 물러나야 하지만, 유적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북한 각성자들도 이런 생각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버렸다.

이대로라면 전멸이었다. 북한 각성자들처럼 할 수는 없었다. 모두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후퇴를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지원 왔습니다!

머릿속으로 설연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진혁은 표정을 굳혔다.

분명, 설연은 안전을 위해 병사들과 함께 뒤에 남겨놓았었다.

여기서 그녀의 텔레파시가 들려서는 안 되었다.

진혁은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곧 멍한 얼굴이 되었다.

설연이 달려오고 있었다.

수많은 각성자들과 함께.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다. 북한 각성자들과 함께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달려오는 각성자가 더 있었다.

조금 창백한 얼굴의 다희가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는 소리쳤다.

"한 번 쓸게요. 저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지켜주세요!"

"다희양은 그 누구도 손 못 델거요. 걱정 말기요."

다희의 말에 달려오던 북한 각성자들의 표정에는 시퍼런 각오가 떠올랐다.

북한 각성자 전부를 죽이기 전에는 다희에게 손을 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화아아악!

다희의 몸에서 빛이 솟구쳤다. 빛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빛에 닿은 괴물들은 질색한 표정으로 몸을 피했고, 다친 사람들의 상처가 점점 아물었다.

과연 여신. 포션과는 비교도 안 될 회복 능력이었다.

쓰러졌던 각성자들이 몸을 일으켰고, 북한 각성자들이 합류했다.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설연이 기절하듯 잠든 다희를 안고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주먹을 쥐었다.

"공격! 다 쓸어버려!"

평상시와 다른 협회장의 외침에 모두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각성자들이 달려들었다.

*

모든 괴물이 전투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괴물은 본능을 이겨내고, 군주의 부름에 따랐다. 피라미드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입구를 지키던 각성자들이 열심히 막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경훈 일행이 피라미드 안에서 군주를 만난 그 순간, 괴물들이 피라미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231화. < 만남(1) >

산맥 안의 유적은 크게 세 개로 나뉘어 있었다.

지상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주변 건물. 그리고 가장 아래에 유적 주인이 잠든 무덤.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세를 과시하는 각종 부장물을 배치한 중간 광장.

광장에는 무덤 주인의 보물들. 순장으로 같이 묻힌 노예와 부인들의 미이라.

수천 구의 토기 인형. 병마용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병마용 사이에는 뱀의 뼈처럼 보이는 긴 뼈들과 알껍데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안에 괴물들이 들어온 뒤에 크고 작은 수난을 겪었던 병마용들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거대한 뱀이 병마용들을 뭉개며 자리를 잡은 것이다.

수백 개의 토기 병사들이 흙으로 돌아가 버렸고, 오랜 세월 살아남은 보물들이 흙에 덮여 버렸다.

지하 무덤에서 올라온 거대한 구렁이는 광장에 자리를 잡고 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원래 군주는 달려온 종족들과 함께 밖에서 인간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둥지에 침입한 인간들 덕분에 깨져버렸다.

둥지 안으로 진입하는 인간들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인간들이 길을 무너뜨린 탓에 실패하고 말았다.

조언하던 인간이 살아있으면 뭔가 다른 방법도 말해 주었을 텐데. 군주는 오염된 인간을 죽여버린 것이 조금 아쉬워졌다.

군주는 결국 이곳에서 인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굴에서 인간과 맞닥뜨려 싸우다가 둥지가 무너지면 곤란했다.

이 지하 광장이라면 격렬한 움직임에도 무너질 걱정은 없었다.

바닥에 자잘한 게 많이 있긴 했지만, 움직임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콰지직.

군주가 슬쩍 몸을 뒤척이자 수십 구의 토기 병사가 부서져 나갔다. 고고학자들이 알면 난리 날 일이었지만, 이곳에서 군주를 말릴 존재는 없었다.

잠시 뒤, 큰 굴에서 인간들이 나타났다.

*

지하 광장으로 들어선 각성자들은 광장 중앙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구렁이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괴수영화에서나 보던 거대한 뱀이 있었다.

"설마, 조각 아닐까?"

"혀를 날름거리는데? 움직이는 조각도 있어?"

"일본에는 로봇 전시물도 있었잖아. 그거 변형도 되었다는데…."

"잘도, 이런 곳에 그런 게 있겠다."

몇몇 각성자는 현실 도피를 해버렸고,

"아니, 또 괴수냐. 생각보다 더 하드코어한 직장생활이었어."

"사표 쓰려고?"

"그럴 리가. 다른 데라고 안 위험한가. 장비 빵빵하고 등급도 잘 오르는 곳이 최고지 뭐."

각성자 일부는 현실적인 말을 꺼내놓았다.

하지만, 나머지 각성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지하 광장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뱀을 바라보았다.

다른 각성자들과 달리 경훈은 지하 광장의 벽과 천장을 살피고 있었다.

"어때 보여?"

-레일건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레일건 사용 시 유적이 무너질 확률이 70% 이상입니다.

-대검 파괴 공격도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브의 대답에 경훈은 혀를 찼다. 역시 지형이 안 좋았다.

몰려오는 적만 아니었으면 지상에서 싸우는 편이 훨씬 좋았다.

결국, 유적이 무너질까 봐 주력 무기를 봉인해야 한다니. 싸움이 어려워질 것 같았다.

맨 끝으로 광장에 들어선 셰인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뱀들은 어디 있지?"

작은 것은 사람 허리둘레에서 큰 것은 아름드리나무보다 두꺼운 뱀들이 경훈 일행을 공격했었다.

더구나, 꼬리는 볼 수도 없었던, 무척이나 길이가 긴 뱀들이었다.

처음 공격 이후로는 다른 통로를 미리 터트려서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지만, 일행 중에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훈도 왜 뱀들이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는 이곳에 오면 저 거대한 구렁이 말고도 뱀 때가 일행을 반길 것으로 생각했었다.

거대 뱀과 일행이 서로를 살피는 사이, 이브가 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생김새는 좀 다르지만, 군주급 요르문간드가 맞습니다. 결국, 이쪽 세상에도 군주급 거대 뱀이 나타났군요.

-거대 뱀 계열 돌연변이로 동족을 잡아먹으며 성장하는 몬스터입니다. 등급은 기사급에서 군주급.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는 명백하게 군주급으로 보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브가 도감의 내용을 읽었다.

경훈도 기억하고 있었다. 브라질에서 싸운 적이 있는 괴물이었다.

그때는 경훈도 등급이 낮았고, 괴물도 기사급에 불과했었다.

"약점이 뭐라고 했었지?"

-땅 위보다 물에서 더 빠르다는 특징이….

정말 쓸데없는 특징이었다.

"군주급은 알려진 것 없어? 기사급하고 똑같을 리는 없을 거잖아."

캬아아악.

그때, 거대한 구렁이가 일행을 향해 입을 벌렸다.

녹색 침이 떨어져 바닥을 녹였고, 지독한 냄새가 일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반인이었으면 냄새만으로 쓰러졌을 것 같았다.

-혹시…

"나도 알겠어. 추가된 특성은 독이었나?"

이어 경훈이 셰인에게 말했다.

"팀원들을 부탁합니다."

셰인이 다른 일행 앞에 서며 대답했다.

"지원하지."

[이곳은. 내. 둥지다. 먹이도. 되지....]

셰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경훈과 일행을 향해 이미지가 쏟아졌다.

"크윽!"

"이게 무슨!"

처음 겪는 정신 공격에 일행은 비명을 질렀다.

타타타탕!

그 순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셰인이 나선 것이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이미지가 주춤했다.

"바실리! 방어막!"

그 순간, 경훈이 소리쳤다.

"네, 넵!"

부우우웅.

뒤쪽에서 방어막이 펼쳐지는 소리를 들으며 경훈이 몸을 날렸다.

*

[죽음을. 각오. 해야....]

다시 이미지 폭풍이 몰아쳤지만, 이번에는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바실리의 방어막이 이미지를 어느 정도 막아준 것이었다.

하지만, 정신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막이 아니었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타타탕! 화아악!

달려가는 경훈 위로 총알과 화염이 날아갔다.

방어막 안에서 셰인과 각성자들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각성자들의 공격은 군주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셰인이 쏜 기관 총알만이 방어막을 뚫고 피부에 불꽃을 피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순식간에 요르문간드가 가까워졌다. 전에 보았던 거대 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지룡 정도는 아니었지만, 옛날에 영화에서 보았던 고층 건물을 휘감은 뱀 정도 크기는 되어 보였다.

경훈은 화염에 휩싸인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마나석이 머리에 있었지?"

-소뇌 뒤쪽에 있었습니다.

경훈은 브라질에서 요르문간드의 마나석을 파낸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칙, 칙.

화염을 뚫고 괴물의 녹색 침이 날아왔다. 독액이었다.

이제는 의식적으로 마나를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이는 순간, 몸을 순환하던 마나가 발바닥 아래로 뿜어져 나왔다.

땅을 박찬 것도 아닌데, 몸이 위로 치솟았다.

독액이 발아래를 지나갔고,

크르르륵.

바닥에 떨어진 독액은 석판을 녹였다.

치익, 치익.

이어서 계속 독액이 날아왔지 만, 독액은 모두 경훈의 발밑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경훈은 점점 위로 솟구쳤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나가 뿜어져 나왔고, 몸이 위로 치솟은 것이다.

-경공이 더 올라간 것 같은데요? 어기충소라고 부를까요? 허공답보?

아무도 해내지 못한 마나 활용이었다. 이브가 무협지에서 본 기술명을 떠들었지만, 경훈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나를 뿜는 반작용을 이용해 몸을 띄운 것뿐이었다.

가시가 가득한 뱀 머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가 요르문간드의 머리까지 솟구친 것이다.

경훈은 대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는 대검을 머리에 박아 넣은 뒤 터트릴 생각이었다.

운이 나쁘면 마나석도 박살 나겠지만, 지금 마나석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우우웅.

대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놈의 머리를 뒤덮은 가시가 꽤나 거치적거렸다. 가시를 피해 검을 꽂아 넣기가 쉽지 않았다.

경훈은 다시 한번 발을 박찼으며 앞으로 쏘아졌다.

목표는 괴물의 눈이었다.

경훈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고, 괴물의 길쭉한 눈동자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 순간, 뒷머리가 삐죽 섰다.

저 눈동자는 위협을 감지한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함정에 빠져든 벌레를 보는 눈이었다.

"젠장!"

아직 검을 박아넣지 못했지만, 경훈은 바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순간, 얼굴을 뒤덮은 가시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마치 날카로운 촉수 같았다. 그리고 그 촉수 끝에는 뱀 머리가 생겨나 있었다.

가시처럼 보였지만, 가시가 아니었다. 머리를 덮은 가시는 모두 작은 뱀의 머리 부분이었다.

요르문간드의 머리에서 자라난 뱀들은 모두 경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고 작은 수십, 수백의 뱀이 입을 벌린 채 쏘아졌다.

불을 쏘아내려는 뱀도 있었고, 독액을 뿜으려 하는 뱀도 있었다.

하지만, 화염도 독액도 밖으로 뿜어져 나오지 못했다.

먼저 경훈이 들고 있던 검이 터져버린 것이다.

콰아아앙!

폭발과 함께 대검의 파편이 괴물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퍼퍼퍽!

화염을 머금은 뱀 머리가 잘려나가고, 독액을 흘리던 뱀이 뭉개졌다.

덤벼들던 뱀들 대부분이 폭발에 쓸려나갔다.

경훈도 뒤로 퉁겨졌다.

방어막으로 폭발을 막아내긴 했지만, 너무 적과 가까웠다.

충격이 작지 않았다. 경훈도 한참 날아가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석판이 박살 나고 토기 병사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경훈이 다시 아공간에서 대검을 빼냈다.

크르르릉.

괴물 머리에서 자라났던 뱀들이 산산이 조각나있었다.

겨우 몸뚱이만 남아 머리 위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몸뚱이는 바로 머릿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원래의 가시로 돌아갔다.

아니, 가시가 아니었다. 수많은 뱀 머리가 요르문간드 머리 위로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순식간에 모두 회복된 것이었다.

"설마, 통로에서 덤벼든 게 저놈들은 아니겠지?"

-맞는 것 같습니다. 생김새도 같습니다.

"훨씬 컸잖아. 그리고, 그렇게 길게 뽑아냈다고? 고무줄도 아니고."

-하나만 길게 뽑아내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한 마리씩 공격해온 것을 보면 이브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길이 말고 크기도 변할 수 있다는 거군."

이렇게 되면 독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마다 다 특성을 쓰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이잖아."

-아무래도 처음 원본 괴물이 잡아먹은 동족을 몸에서 발현시키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 뱀들이 전부 저놈이 잡아먹은 동족이라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큽니다.

스스스.

경훈이 이브와 이야기하는 동안, 요르문간드도 경훈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요르문간드는 저렇게 강한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저렇게 강한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몸을 사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수 없었다.

요르문간드는 다시 자신의 동족들을 발현시켰다.

머리를 덮은 가시가 인간들을 향해 쏘아졌다.

수많은 뱀 머리가 강한 인간과 다른 인간들을 향해 자라났다.

화염이 쏘아지고, 부서진 석판과 토기 병사들이 뱀을 향해 날아갔다.

"젠장! 징그러워!"

"방어막! 방어막!"

화염을 뿜어내고, 염력으로 물건을 날리며 각성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심약한 각성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투다다다다!

셰인도 다가오는 뱀 머리를 향해 총을 갈겨댔지만, 부서지는 뱀 머리 뒤로 다른 뱀 머리가 계속 자라났다.

하지만, 셰인 일행을 공격하는 뱀 머리는 일부에 불과했다.

쾅!

대검이 터져나가고, 수백의 뱀 머리가 갈려 나갔다.

하지만, 다시 뱀들이 자라나 경훈을 향해 쏘아졌다.

경훈은 날듯이 몸을 피했고, 검을 들어 뱀을 잘라내고, 위험하면 대검을 터트렸다.

지하 광장이 엉망이 되었다.

수많은 뱀이 터져나갔지만, 요르문간드의 머리에서 자라나는 뱀들은 끝이 없었다.

많은 대검을 가져왔지만, 이래서는 답이 없었다.

경훈은 점점 수세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그때, 경훈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똬리를 튼 요르문간드 몸 옆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유적까지 몰래 일행의 뒤를 따르던 각성자.

영철이었다.

232화. < 만남(2) >

텅 빈 유적 건물에서 시작된 작은 동굴은 다른 갈림길이 없이 쭉 이어져 있었다.

'잘 못 들어온 건가?'

영철은 기울어진 동굴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반쯤 허물어진 굴을 억지로 지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쿵!

하지만, 그는 곧 벽을 울리는 폭발음을 듣게 되었다.

분명, 크지 않은 폭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점점 가까워졌다.

잘 못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동굴도 사람 손길이 닿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빨리, 따라잡아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미끄러진 그는 얼마 뒤에 뚜껑이 덮인 관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닥에 큰 구멍이 나 있는 관이었다.

원래는 왕과 함께 순장되어 있던 시체가 있을 터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쾅!

캬아아악!

땅이 울리고, 위에서 폭음과 기관총 소리, 그리고 괴수의 괴성이 들려왔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싸움터 한 가운데인 것 같은데."

소리만 들어도 만만찮은 싸움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운이 좋은 거겠지?"

그는 자신이 지나온 동굴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원래, 이 동굴은 왕의 무덩에 순장된 여인의 시체를 빼내기 위한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실이었지만,

영철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떠올린 생각을 지워버리고, 구멍 뚫린 관 바닥에 매달려 뚜껑을 열어보았다.

다행히 관 뚜껑은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이익.

낡은 청동 뚜껑이 관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살짝 열린 뚜껑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폭음과 빛, 꿈틀거리는 촉수들과 쏟아지는 파편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쾅! 두두두두두!

광장 한쪽. 커다란 입구 앞에 각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반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채로 촉수, 아니 뱀처럼 보이는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젠장! 부셔도 부셔도 계속 자라나잖아! 물러나야 하는 것 아냐?"

"큭.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 한계는 우리가 먼저 올 것 같아! 바실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반투명 막을 물어뜯던 뱀 머리들은 총알과 검, 그리고 각종 능력에 의해 박살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물어뜯는 뱀 머리는 줄지 않고 있었다.

"우는 소리는 그만해요! 케이는 혼자서 대부분을 상대하고 있잖아요!"

금발 청년의 말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콰아아아앙!

영철은 그제야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억지로 외면했던 광경이 허공에 펼쳐지고 있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괴수 구렁이가 광장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수 구렁이는 허공을 뛰어다니는 한 남자와 싸우고 있었다.

괴수 구렁이 머리에서 뿜어져 나온 촉수 형태의 뱀 머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각성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각성자는 혼자서도 수백의 뱀 머리와 잘 싸우고 있었다.

"맙소사...."

영철은 창백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난 뒤에 많은 것에 놀랐지만, 지금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분명, 허공에서 혼자 싸우는 남자는 그가 쫓아왔던 각성자였다.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그를 구해주고 무시무시한 기세를 흘리던 각성자.

물론 실력이 대단할 것을 생각했지만, 이런 장면을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저 거대한 구렁이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 방송과 신문 기사에서 본 몬스터였다.

"요르문간드…."

마지막 웨이브 몇 년 전에 등장해서 도시 하나를 멸망시킨 군주급 몬스터였다.

최고의 각성자들과 사단급 병력을 갈아 넣어서 겨우 잡는 데 성공한 괴수.

그런 괴수와 단독으로 싸우는 각성자가 있다니. 영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강해질 수도 있는 건가?"

물론, 도시를 멸망시킨 군주급치고는 피해가 크지를 않았다.

뱀 머리에서 불꽃과 전기같은 특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주변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

각성자도 마찬가지였다. 군주급과 싸우는 것 치고는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있었다.

"아직 군주급은 아닌가…."

크기로는 방송에서 본 그 몬스터와 같은 급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래 단계의 몬스터일지도 몰랐다.

실제로는 경훈과 요르문간드는 유적, 둥지가 무너질까 봐 큰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황을 알지 못하는 영철로서는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

군주급이 아니라 대장급이라도 대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서 놀랄 광경으로 변한 정도일까?

영철은 검을 움켜쥐었다. 군주가 아니라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그의 눈에 기회가 보였다.

꽈리를 튼 구렁이의 몸 아래쪽에 반짝이는 보석이 얼핏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나석!'

분명 마나석이었다. 말도 안 되는 행운이었다. 몸 밖으로 마나석이 드러나 있는 몬스터는 전생에도 몇 없었다.

군주급치고는 작아 보이는 마나석이었지만, 대장급 몬스터라면 충분히 가능한 크기였다.

요르문간드, 저 괴수의 본체는 꽈리를 튼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위로 치켜 들은 머리와 그 머리에서 자라난 뱀들은 다른 각성자들을 상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것만 뽑아낸다면…. 아니 부술 수 있다면.'

전투 각성자의 성장은 몬스터를 잡는 것으로 성장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러 명이 몬스터를 잡았을 때는 기여도에 따라 각성자에게 마나가 차등으로 배분되었다.

만약, 그가 혼자 요르문간드의 마나석을 부숴버린다면, 분명 엄청난 마나가 그에게 쏟아질 것이었다.

대장급이라도 충분했다. 적어도 등급을 하나, 아니 지금 상황이라면 두 등급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C등급이었다.

전생보다 겨우 한 단계 낮은 등급이었다. 이쪽 세상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한 등급이 분명했다.

저 무시무시한 각성자를 빼면 어디서도 꿀리지 않을 수 있는 등급이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알 수 없었다.

쾅.

그는 반쯤 열린 관뚜껑을 밀어버렸다.

그는 검을 쥐고 요르문간드를 향해 소리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C등급이 코앞에 있었다.

*

뱀 머리들과 드잡이를 벌이던 경훈은 구렁이의 몸에 다가가는 각성자를 보고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왜 달려드는 거야? 미친 건가?"

분명 입구도 막고 있었고, 유적 안에서 뒤를 따르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 문제였다.

막 다음 등급으로 오르기 직전이었지만, 겨우 E등급이었다.

그런 등급의 각성자가 군주급 괴물에게 덤벼들다니.

잘 정련된 마나 때문에 관심을 가졌지만, 미친놈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찰용 거미 로봇을 뿌려둔 이브는 경훈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몬스터의 허리 부분에 마나석이 드러나 있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분명 마나석입니다! 각성자는 마나석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왈칵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정신마저 흐트러졌는지, 그는 뱀에 휘감길뻔했다.

"이익!"

그는 다시 허공을 박찼다. 뱀이 그의 발아래를 휘감았다. 겨우 몸을 뺀 그는 이브에게 소리쳤다.

"머리에 있는 것 아니었어? 여태 삽질한 거야?"

자리를 잡은 거미 로봇들이 요르문간드 전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 마나석이 하나가 아닙니다. 목 부근에 하나, 꼬리에도 하나가 보입니다. 아마 안 보이는 곳에도 더 있을 것 같습니다.

"마나석이 하나가 아니라고?"

설상가상이었다.

-아마, 먹어치운 동족의 마나석을 모두 합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재생 능력을 지닌 괴물이었다. 마나석이 여러 개라면 마나석 하나만 부신다고 끝날 리가 없었다.

"젠장! 이러면 정말 삽질한 거잖아!"

마나석이 여러 개라니.

틈을 보아 머리에 검을 박아넣어 터트리려던 계획은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저 각성자가 하려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마나석을 부수는 것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 각성자는 살아남지 못할 게 분명했다.

"도와주려는 것 같은데, 죽게 놓아둘 수는 없지."

경훈은 이브에게 지시했다.

"로잘리아에게 말해!"

-알겠습니다!

로잘리아는 한참 은빛 늑대와 함께 뱀 머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그녀가 헤드셋에서 들려온 이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구렁이 옆에 도착한 영철을 보고 놀란 눈이 되었고, 바로 자신의 펫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녀는 영철을 구하러 가지 못했다.

-괴물들이 지하 광장으로 진입 중입니다!

일행이 나온 통로로 다른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앙!

은빛 늑대는 영철이 있는 곳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대신, 괴물들이 달려오는 통로로 달려갔다.

*

주변의 상황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영철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요르문간드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벽처럼 거대한 몸통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몸통은 단단해 보이는 비늘로 덮여 있었다.

지금 등급으로는 흠집도 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비늘이었다.

아니, 비늘이 문제가 아니었다.

쏟아지는 파편과 각성자들이 날리는 공격으로 괴수의 몸 위로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요르문간드의 방어막이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로서는 절대 뚫지 못할 방어막이었다.

그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마나석이 드러나 있으니 불가능한 게 아니야."

비늘 사이에 마나석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검을 들어 마나석을 향해 찔러넣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반투명한 막이 그의 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퍽,

막은 바로 깨지고 말았다.

마나석 때문이었다.

마나석이 몸속에 있다면 소용없는 일이었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마나석은 방어막을 오히려 약화시켰다.

푸우우욱.

검이 마나석 안으로 깊게 밀고 들어갔다.

쩌저저적.

구멍이 뚫린 마나석이 갈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괴물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철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예상대로 되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틀리지 않았다.

마나석이 부서졌으니, 이제 괴물의 마나 대부분은 자신의 것이었다.

"으싸, 괜히 죽어가는 놈한테 당할 수는 없지."

그는 마나석에 박아넣은 검을 놓고는 뒤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많은 뱀이 그를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마나석은 박살 나 있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죽지 않았다.

거대한 구렁이가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구렁이의 머리가 영철을 바라보았다.

"말, 말도 안 돼…."

창백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더 황당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화아악!

빛과 함께 그의 옆에 괴물들이 등장한 것이다.

꼬리가 여러 개인 여우, 그리고, 거대한 곰.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등장한 괴물들을 보고 영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세계는 정말 그를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그를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광경은 황당한 것을 넘어버렸다.

크아아앙!

나타난 괴물들이 다가오는 뱀 머리들과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영철의 귀에 러시아 어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요!"

그는 무슨 소리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 그의 어깨에 이빨의 감촉이 느껴졌다.

놀란 그가 옆을 돌아보니, 은빛 털을 가진 늑대가 그의 어깨를 물고 있었다.

'죽는 건가?'

하지만, 어깨에서 피도 나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돌아가자!"

다시 그의 귀에 러시아 어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어디서 들려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늑대를 타고 있는 여자가 한 말이었다.

화악!

말과 함께, 영철은 빛에 휩싸여 공간이동을 했다.

그는 로잘리아의 펫인 코니의 공간이동으로 함께 이동한 것이다.

그는 다른 일행이 있는 곳에 나타났고, 각성자들은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이들을 공격하는 뱀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영철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좀 도와줘요!"

통로 앞에는 바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방어막을 펼쳐 입구를 빠져나오는 괴물들을 막고 있었다.

로잘리아가 선두의 두 괴물을 테이밍해 공간이동을 한 뒤, 나머지 괴물들을 그가 막고 있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앙!

로잘리아가 테이밍을 한 괴물들은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쏟아지는 뱀머리들을 버틸 수 없었다.

분노에 찬 요르문간드의 공격을 받고 두 괴물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공격을 퍼부었던 요르문간드는 문득 입안이 껄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벌린 입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급하게 입을 다물려고 했지만, 닫히지 않았다.

크아악!

대신 고통만 느껴졌다.

대검 한 자루가 입안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대검 옆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레일건을 든 경훈이었다.

철컥.

"한눈을 팔면 안 되지."

경훈이 목젖 너머로 레일건을 겨눈 채 중얼거렸다.

우우우웅.

레일건에 삽입된 마나석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아앙!

임계점에 다다른 마나석이 요르문간드의 입안으로 쏘아졌다.

233화. < 만남(3) >

퍽!

거대한 구렁이의 몸이 터져나갔다. 똬리를 튼 몸통이 산산이 흩어졌다.

살점과 피비가 쏟아져 내렸다. 토기 병사들이 붉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각성자들과 영철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쏟아지는 살점 사이에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뱀 머리를 달고 있는 촉수의 잔해들이었다.

놀란 각성자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기관총 소리가 울렸다.

타타타타!

꿈틀거리던 뱀들이 차례로 터져나갔다.

모든 뱀이 멈춘 후에도 총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타타타타!

셰인의 기관총은 다음 목표를 공격하고 있었다. 기관총의 총구는 일행이 들어온 지하 통로로 향해 있었다.

"으악!"

방어막을 펼치고 있던 바실리가 비명을 질렀다. 총알이 그의 몸 주위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퍼퍼퍽!

바실리를 스쳐 지나간 총알들은 방어막을 두드리는 괴물들을 박살 냈다.

깨지기 직전이던 방어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쓰러진 괴물들 뒤로 다른 괴물들이 밀려들었다.

"모두 도와요!"

로잘리아가 모두에게 외치고는 그녀의 펫과 함께 통로로 달려갔다.

정신을 차린 각성자들은 통로를 향해 달려갔고, 셰인도 그들의 뒤를 따라 통로로 다가갔다.

혼자 남은 영철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켰다.

"도와야 하나?"

하지만, 그가 끼어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뒤에서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돕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영철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온몸에 피에 절은 살점을 붙이고 있는 남자였다.

몸에 피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분명 저 남자의 피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작지 않은 마나석이 들려있었다.

영철이 부셨던 마나석과 같은 형태의 마나석이었다.

"그건...."

"아, 마나석 맞습니다. 폭발에 파괴되지 않고 남은 건 이거 하나입니다."

"설마,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영철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네, 마나석이 여러 개였습니다. 처음 보는 놈이라 싸우기가 어려웠죠."

"그래서였군요."

영철은 그제야 마나석을 부셨는데도 죽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어서 다른 사실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설마 군주급이라는...."

"네, 맞습니다. 군주급입니다."

경훈의 말에 영철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을 딱 벌리고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푸아아아악!

시체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등급이 오르겠군요."

지하 광장을 가득 메운 마나가 사람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통로로 들어오는 괴물들을 막는 각성자에게도, 경훈에게도, 그리고, 경훈을 제외하고 제일 많은 마나가 영철에게 쏟아졌다.

"크윽!"

영철이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이 재구성되고 있었다. 등급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고통과 기쁨과 흥분이 가득했다.

경훈은 몸을 떠는 영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도 안되나 보네요.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아직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군주급으로는 무리인듯했다.

"야! 정신 놓으면 어떻게 해! 등급 오르는 건 축하할 일이지만 정신 차려!"

"크하하! 다 죽었어!"

"병신아! 정신 차려! 등급 하나 오른 것 같고 뽕 차서 난리 치면 어떻게 해!"

각성자들 사이에서도 등급이 오른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료들은 기뻐하는 그에게 축하를 빙자한 욕설을 퍼부었다.

분위기가 확 바뀐 덕분인지, 밀려오던 괴물들은 금방 정리되었다.

-지상도 싸움이 끝난 것 같습니다. 2파 3파로 몰려오던 몬스터들은 전부 흩어져버렸습니다. 다른 부대도 한국군 선발대에 계속 합류하고 있습니다.

군주의 지배가 풀려 괴물들이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간 듯했다.

경훈이 이어폰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셰인. 뒷정리를 부탁합니다."

헬멧을 쓴 로봇이 경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셰인의 대답을 들은 경훈은 팔짱을 끼고, 영철이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물어볼 것이 많았다.

***

다른 세상. 뉴욕 허드슨 강변.

무너진 맨해튼 마천루를 배경으로 이사벨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강둑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앞에 맑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뉴욕시를 관통하는 허드슨강이었다.

그 강 위로 유유히 움직이는 커다란 물고기, 아니 괴물이 있었다.

등 일부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물고기 괴물,

맨해튼 군주의 자폭으로 화상을 입었던 허드슨강의 괴물이었다.

그녀는 창을 들어 올렸다. 창끝으로 물고기 괴물을 겨누었다.

거리는 50여 미터. 강화된 그녀의 특성이라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다.

물고기 괴물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벨이 갈등어린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멍.

가만히 있던 베일리가 짖었다.

그녀가 창을 내리고 돌아보니, 베일리가 심통 어린 표정으로 바닥을 두들기고 있었다.

강아지는 그녀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미안."

이사벨이 베일리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집에서는 더는 특성이 강화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어."

그녀의 말에 베일리가 다시 짖었다.

멍.

"나도 혼자서 시도하면 위험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오신다는 날짜가 지났잖아. 저쪽 세상이 엄청 바쁘고 힘든 걸지도 몰라. 계속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베일리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것 때문이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두 분이 오시기 전에 내가 해낸 걸 보여드리고 싶어."

"두 분이 자랑스러워할 이사벨이 되고 싶어."

그녀의 말에 강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일리는 이사벨의 신발을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옆으로 걸어가 몸에 힘을 주었다.

콰아아아.

베일리의 몸이 커졌다. 날개가 자라났다.

크앙!

작은 강아지가 날개 달린 사자로 변했다.

변신을 끝낸 베일리가 편한 자세로 강둑에 앉았다.

베일리는 허락했다.

만약을 대비해 변신한 베일리는 이사벨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베일리의 모습에 이사벨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훔치고, 다시 창을 들었다.

저번에 경훈에게 보여준 작은 차원문 이상으로 문이 커지지 않았다. 분명 다음에 올 때는 같이 넘어가자고 했는데, 이래서야 경훈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처음 새로운 특성을 찾았을 때처럼 전투로 특성을 강화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작은 괴물들에게는 소용없었다.

한국에서 싸웠던 괴물처럼 강한 대장급 괴물이 필요했다.

이 주변은 다 정리되어, 이제 남은 것은 저 물고기 괴물뿐이었다.

이사벨이 특성을 움직였다. 새로 발견한 특성이 아닌, 원래 가지고 있던 특성. 하지만, 2년의 시간 동안 그 특성도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그녀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해갔다.

반차원으로 진입한 것이다. 반차원으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는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마치, 엷은 막 너머로 세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차원 안에서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 물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원래의 차원에서 분리된 그녀는 원래 차원의 물리법칙에 구애되지 않았다.

온도도, 오염도, 에너지도,

그리고 중력도.

단지 구애받는 것은 이 반차원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시간은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잠시 뒤, 그녀가 반차원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발이 강물이 아닌 물고기 괴물의 등을 밟고 있었다.

푸아아악!

그녀가 다시 원래의 차원에 진입하자, 물고기 괴물이 알아차렸다. 하긴 인간이 등을 밟고 서 있으면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물고기 괴물은 몸을 회 치며 아래로 가라앉으려고 했다.

저번에 대폭발 때문에 겁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창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새로 얻은 특성을 창끝에 발현시켰다.

우우우웅.

검은 연기가 선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공간이 갈라지고, 괴물의 몸이 잘려나갔다.

캬아아아아아!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이야!"

차원이 갈라지고, 특성이 폭주해 나갔지만, 이사벨은 특성을 그대로 놔두었다.

더, 더 키워야 했다.

촤앙! 창!

차원 균열은 괴물뿐만 아니라 강마저 가르기 시작했다.

팟!

그녀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올랐다. 균열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의 팔이 떨리는 것이었다.

위험해 보였다. 강둑에 앉아 있던 베일리가 벌떡 일어나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베일리는 날아오지 않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사방으로 뻗어가던 균열이 변하기 시작했다.

츄아아악!

균열이 말리고, 강물이 치솟았다. 괴물이 산산이 잘려나갔다.

균열이 점점 모여들었다. 옷깃이 잘리고, 상처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이사벨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균열은 더는 선으로 보이지 않았다.

핏물과 고기덩이가 퍼져나가는 강 위로 검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웅.

차원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문.

큰 고깃덩이를 밟고 있던 이사벨이 조심스럽게 차원문에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차원문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집중이 필요 없었다.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이다.

구멍은 작지 않았다. 구멍 주위로 날카로운 균열이 회전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잘릴 염려는 없었다.

검은 구멍 위로 손바닥이 겹쳐졌다. 이사벨은 조심스럽게 손을 밀어 넣었다.

팔이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 들어갔다. 거칠 게 없었다.

손목에서 팔목으로, 그리고 어깨까지, 팔이 잠겨 들었다.

놀란 이사벨이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슈우우욱!

오히려 구멍이 그녀를 빨아들였다.

화악!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별빛이 가득한 우주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별빛도 우주 공간도 아니었다.

한국으로 넘어갈 때 본 적이 있었다. 이건 차원 사이의 공간이었다.

공간과 차원을 이어주는 숨겨진 세계.

저 별들은 모두 다른 세계와 공간으로 나가는 문들이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감동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지금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어떻게 문으로 가는 거야!'

경훈에게 설명을 들었었다.

가고자 하는 문을 향해 선을 긋고서 그 선을 타고 움직이면 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을 만들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많은 별빛이 어떤 문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나온 문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문은 뒤에 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마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연 차원문도 닫힐 게 분명했다.

'설마, 이대로 떠도는 거야? 안돼!'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안돼! 안돼! 돌아가야 해! 움직여!'

시간이 점점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나가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포가 점점 그녀의 마음을 뒤덮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턱.

팔 하나가 그녀의 목을 감쌌다.

그녀 옆으로 얼굴이 보였다.

검은 머리의 아저씨. 경훈의 얼굴이었다.

이사벨은 입을 벌린 채로 빤히 경훈을 바라보았다.

경훈은 꾸짖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를 잡고 뒤로 움직였다.

슈우욱.

그토록 안 움직이던 몸이 경훈이 끄는 대로 부드럽게 밀려 나갔다.

별빛이 밀려 나가고, 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차원문을 빠져나왔다.

풍덩!

차원문 밖은 강이었다. 두 사람은 강물에 빠져버렸다.

두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본 베일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왔다.

주변은 들어갈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안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시간이 거의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빠져나오자 차원 문이 사라졌다.

베일리가 두 사람을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234화. < 만남(4) >

총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다행히 아군은 잘 후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상당히 위험했다. 마르셀로는 벽에 기대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박살 난 손이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다.

옷은 이미 누더기로 변해있었다.

온몸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마르셀로는 원래대로 돌아온 손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소총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동료의 총이었다.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평범한 소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적은 돌연변이 괴물이 아니었다.

투타타타타.

마르셀로는 반쯤 부서진 창틀 위로 소총을 갈겨댔다.

접근하던 병사들이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친! 저 괴물 아직도 안 죽었어?"

"유탄 발사기를 쏟아부었잖아! 방어막도 부서지고, 박살 나는 거 봤는데!"

"내가 이래서 각성자가 싫다니까! 저건 사람도 아냐!"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어로 떠드는 적의 목소리. 미군들이 외치는 소리였다.

마르셀로는 미군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쓰게 웃었다.

각성자들을 왜 저렇게 싫어하는지.

오히려 각성자들을 노예처럼 써먹는 것은 미군들이었다.

하지만, 적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 마르셀로가 싸우고 있는 곳은 브라질 제2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벌써 이곳까지 미군이 밀고 들어와 있었다.

전쟁 초반에 미군이 지나간 중미 여러 나라는 물론, 남미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까지 미군이 점령해버렸다.

지금, 미군은 서쪽으로는 페루를 공격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브라질 서부 해안을 차례로 점령 중이었다.

물론, 미군도 거대한 아마존 지역은 손도 못 대고 있었지만, 그곳은 예전부터 괴물의 땅이었다.

미군들은 숨은 채로 총부리만 내놓고 총을 쏘고 있었다.

'허세가 좀 먹혔나?'

다행히 접근하던 미군들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회복된 손이 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바퀴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회복력이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마나가 떨어지면 그도 회복력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더기가 된 바지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냈다. 다행히 전화는 무사했다.

SG전자에서 만든 각성자용 위성 전화라고 하던데, 이번 전쟁 중에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투투.

그는 다시 총을 한번 훑어준 뒤에, 전화를 걸었다.

-살아있었군요! 어디에요!

전화에서 삐쭉한 고함이 들려왔다. 소냐의 목소리였다.

"나, 마라카낭 경기장 근처."

-뭐라고요? 아직 리우를 안 빠져 나왔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잘못하다가는 적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그는 볼륨을 조금 줄인 뒤 그녀에게 물었다.

"다들 철수했어?"

-다들 빠져나오고 있어요! 빨리 다른 사람들과 탈출해요!

화가 난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생존자는 나 혼자야."

-아....

뒤에 남아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특공 부대. 그 부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회복 특성을 가진 마르셀로뿐이었다.

그리고, 그 혼자 살아남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계속된 후퇴 속에서 적을 저지하기 위해 남은 부대에는 그가 꼭 같이 있었고, 부대가 전멸한 뒤에도 그는 살아 돌아왔었다.

그리고, 홀로 돌아온 마르셀로에게 아군 병사들은 별명을 지어주었다.

동료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자.

'사신'

이라는 별명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몸은 괜찮죠?

"내 특성이 뭔지 알잖아. 몸이야 멀쩡하지."

마르셀로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치면 아픈 건 똑같잖아요. 거기다 포위되면 그 몸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빨리 빠져나와요!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이게 그녀에게 어울렸다.

그리고, 회복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지금도 난리인데, 그것까지 알았으면 소냐가 직접 이곳으로 달려왔을지도 몰랐다.

"알았어. 상파울루로 가면 되지?"

-네… 아직은, 상파울루가 집결지에요. 중간에 바뀌게 되면 알려드릴게요.

소냐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지금은 상파울로가 집결지였지만, 상파울로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파울로까지 잃으면 브라질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륙에 수도인 브라질리아가 남아있었고,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그리고 유격전을 벌이는 반군과 마약상들이 남아있지만, 상파울로까지 잃으면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세뇌를 당한 뒤, 군대로 끌려가게 될 각성자들은 항복할 수 없겠지만, 브라질까지 넘어가면 다른 나라들은 항복밖에는 답이 없었다.

"조금만 참아. 유라시아 쪽 싸움이 끝나면 EV, 아니 케이가 도와주러 올 거야."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상파울로에는 그녀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상파울로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와서 끊어야겠어요. 바로 출발해요!

"아, 급한 사람 붙잡았네. 수고해."

-제발, 무사히만 돌아와요....

"알았어."

어차피 통화를 끝낼 시간이었다. 적이 공격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했다.

이럴 때면 움직여야 했다.

전화를 집어넣은 마르셀로는 고개를 돌려 산 위에서 세워진 예수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희생해서 인간을 구원했다는 신의 아들이 전쟁에 휩싸인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도와줄 수는 없겠습니까?"

하지만, 조각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가지고 있던 연막탄을 밖으로 던졌다.

퓨우우우욱.

연기가 창밖을 뒤덮자, 그는 바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쉽게도 연기가 그를 다 가려주지 못했다.

"놈이야!"

"쏴! 죽여!"

"젠장! 항공 요청까지 했는데!"

"놓치면 안 돼!"

타타타타!

그를 향해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피가 튀고 몸에 구멍이 뚫렸다. 골수부터 고통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여태껏 계속 겪어왔던 고통일 뿐이었다.

그는 계속 달려나갔다.

슈우우우우!

달려가는 그의 귀에 미사일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공 지원이란 말이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콰아아아앙!

그가 있던 건물에 미사일이 처박혔다. 폭음과 함께 건물이 박살 났다.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잠시 뒤, 병사들이 주변을 수색했지만, 남은 흔적은 쏟아진 피 밖에 없었다.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마르셀로가 한참 리우데자네이루를 탈출하는 그 시간.

다른 세상에 있던 경훈은 잠든 이사벨을 보고 있었다.

이사벨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뉴욕 시티. 일행의 집으로 삼고 있는 지하 벙커였다.

잠든 이사벨의 배 위에는 베일리가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감수성이 부족한 경훈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잠든 이사벨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잠들기 전에도 많이 울었었는데, 아직 눈물이 남아있었나 보다.

경훈이 따로 혼을 낸 것도 아니었다.

이사벨은 혼자 울고, 자책하고 미안해했다. 너무 심한 자책에 더 뭐라 충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좀 위로를 해주었어야죠.

옆에서 이브가 뭐라고 했지만, 위로를 할 생각은 없었다.

분명 이사벨은 잘못했다.

그녀가 살아남은 것은 정말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경훈이 먼저 차원을 넘어오지 않았으면, 빈 숙소를 보고 급하게 그녀를 찾지 않았으면, 이사벨이 만든 차원문을 경훈이 통과하지 못했으면,

그녀는 차원 회랑 안에서 영원히 떠돌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경훈이 혼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배려였다.

하지만, 경훈의 대응에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런 무덤덤한 남자가 왜 인기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렇게 한참을 울며 자책하던 이사벨은 결국, 지쳐서 잠이 들었다. 마나 고갈로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탁. 탁. 타닥.

나무가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기 난로의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이브가 물었다.

-차원문은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실패한 건가요?

차원 각성자가 아니면 차원 회랑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알 수 없었다. 이브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경훈이 이사벨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니. 실패한 건 아냐. 성공이긴 해."

경훈의 말에 이브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럼, 이사벨도 이제 차원 이동이 가능한 건가요?"

이브의 물음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성공이긴 한데…. 아쉽게도 혼자서는 무리야. 차원 문을 만들 수는 있지만, 원하는 차원 문을 찾는 것도, 그곳으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해."

새로 얻은 그녀의 특성은 차원을 무작위로 찢어 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 특성을 하나로 모아 차원문을 만든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만,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실패한 게…."

"하지만, 나와 함께 움직이면 가능해."

경훈의 차원문은 그 외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터보트도, 오토바이도, 차도, 로봇도 같이 이동할 수 있었지만, 살아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같던 곳이라면, 다른 차원도 다른 공간도 어디든 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사벨은 지금 차원문을 만드는 게 다였지만, 그 차원문은 그녀 말고도 경훈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면, 차원을 넘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사벨의 마나가 회복되면 같이 넘어갈 수 있겠군요.

"내 차원 이동의 시간하고 이사벨의 시간도 돌아와야겠지."

어쨌거나 모든 게 충족되면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남은 문제는 한가지인데...."

경훈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베일리가 크게 하품을 했다.

-그렇네요. 베일리도 같이 차원 이동이 가능할까요?

해보기 전에는 경훈도 알 수 없었다.

-그럼, 어쨌거나 두 번째 차원 이동자가 나온 거군요.

이어진 이브의 말에 경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저쪽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대화한 각성자가 생각났다.

그는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는 각성자였고, 이해하긴 힘든 능수능란한 마나 운용과 활용 기술을 가지고 있는 각성자였다.

"이름이 영철이라고 했지?"

-구 영철 각성자 말인가요?

"맞아. 부대에서 각성했다고 했지?"

-네. 대단한 성장 속도였습니다. 군주 사냥에 끼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사벨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각성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히 그는 도플갱어도 아니었고, 오염된 인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

"설연 씨에게 연락했지?"

-네. 영철 각성자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놓았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경훈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차원 이동 전에 영철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평범한 인사와 대화. 이어진 탐색과 날카로운 신경전.

하지만, 서로에 대해 뭔가 알아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영철은 경훈과 비교하면 힘도, 지위도, 정보도 부족했고, 경훈은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경훈은 그와의 대화 속에서 들리지 않아야 할 단어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몬스터.

그는 돌연변이 괴물. 영어로 비스트 불리는 괴물을 몬스터라고 불렀다. 이쪽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괴물의 명칭이었다.

잠든 이사벨을 보며 경훈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사벨이 두 번째 차원 이동자가 아닐지도 몰라."

235화. < 소녀 문을 넘다. >

뉴욕 맨해튼의 한 지하철역.

전철이 다니지 않는 철로 위에 이사벨과 경훈이 서 있었다.

이사벨이 잠에서 깬 뒤에 가까운 승강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이었다.

이사벨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베일리가 쪼르르 다가왔다.

이사벨이 다가온 베일리에게 말했다.

"혼자 남을 수도 있어. 혼자 남게 되도 잘 지낼 수 있지? 금방 다녀올게."

베일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앞발로 땅을 콩콩 내리쳤다.

왈! 왈!

베일리의 대답에 이사벨은 미소를 지었다.

"저건 알겠다는 거지?"

뒤에서 경훈이 중얼거렸다.

셰인과 이사벨처럼 베일리와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지켜본 덕분에 경훈도 강아지의 행동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베일리의 대답을 들은 이사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베일리를 보며 자신의 목 뒤를 가리켰다.

강아지 등에서 날개가 쑥 튀어나왔다. 강아지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

펄럭.

베일리는 이사벨의 목 뒤로 돌아가 후드 속으로 쏙 들어갔다.

단발머리를 질끈 묶은 건강한 소녀와 그녀의 후드에 들어가 있는 새끼 골든 리트리버.

누가 봐도 미소를 지을 훈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녀와 강아지가 있는 장소도, 소녀와 강아지의 정체도 절대 훈훈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도 그리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 아니었다.

경훈이 입을 열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할까?"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갈되었던 마나가 회복되고, 처음 시도하는 차원 이동이었다.

마지막 시도에서 죽을 뻔했었던 이사벨이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들면 다음에 해도 돼요.]

창백한 이사벨을 보고 이브가 말을 꺼냈지만,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경훈이 보고 있었다. 잘못된 이유도 알았는데 무섭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후우우욱.

길게 뻗은 지하철 통로를 보며 이사벨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경훈이 이사벨 바로 뒤에 섰다.

목 뒤로 베일리의 호흡이 느껴졌다. 목이 살짝 간지러웠다.

마나를 바닥까지 쓴 덕분일까? 몸속의 마나는 전보다 더 가득 차 있었다.

이사벨이 길게 뻗은 통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마지막 만들었던 차원문의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특성을 가득 풀어놓았다.

파지지직.

지하철 통로 위로 균열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쩍.

철로가 잘려나가고, 벽이 어긋났다. 차원과 함께 공간과 사물이 잘려나갔다.

다행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지하철 승강장은 이 정도 균열에는 무너지지 않았다.

콰과과.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균열은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말려들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균열을 계속 모아갔다.

저번보다 빠른 속도였다.

아직 주변에 피해를 주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지만, 차원문을 만드는 법은 확실히 알아낸 것이다.

부우우우웅.

잠시 뒤, 그녀가 뻗은 손 앞에 검은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녀가 만든 구멍은 경훈이 만든 차원문과 조금 달랐다. 검은 구멍 주변에는 일그러진 균열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사벨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따라 들어갈게. 걱정 마."

"네!"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대답했다.

이사벨이 후드에서 베일리를 꺼내 품에 안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베일리를 안지 않은 손을 구멍에 가져갔다.

검은 구멍 속으로 그녀의 손이 들어갔다. 팔이 들어갔고, 어깨가 사라졌다.

이어 그녀와 품에 안긴 베일리가 검은 구멍에 다가갔다.

베일리는 발버둥을 치지 않았다. 강아지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검은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우우우우욱.

이번에도 구멍은 그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저항하지 않았다.

베일리가 검은 구멍에 맞닿았다. 다행히 구멍은 베일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강아지와 그녀가 같이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에 보았던 우주가 똑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처럼 움직일 수도,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다.

품에 안긴 베일리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시간이 느려진 것이다.

광활한 어두운 공간. 그리고 빛나는 별들.

다시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탁.

얼마나 기다렸을까. 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다.

그리고, 손에 밀려 그녀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별이 보였다.

그녀와 베일리는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별을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

경기도 외곽의 작은 도시.

몇 년 전까지는 작은 제약 회사와 그에 딸린 작은 읍내만이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이 도시에는 수십 개의 고층 빌딩이 솟아 있었다.

괴물들이 나타난 뒤로 세계 최초의 포션 제조 회사가 여러 동의 건물을 지어 올렸고, 그 뒤로 SG전자의 마나 연구소들이 그 옆에 세워졌다.

아직도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는 이 작은 도시는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는 새로운 시대의 혁신 도시였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혁신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회사가 하나 입주해 있었다.

월드 골드 사. 뜬금없는 귀금속 회사였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지만, 귀금속 회사는 주변 회사들과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었다.

월드 골드 본사 건물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운전석이 열리고, 젊은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나른한 분위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차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던 경비는 차에서 내린 여성을 보고 바로 경례를 붙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 회사의 대표는 아니었지만, 대표와 다른 임원과도 친분이 있는 여성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월드 골드 사와 달리 차세대 제약 회사로 이름 높은 포션 제작 회사 [JK POTION]의 대표였다.

대표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녀가 오늘처럼 알리지도 않고 회사에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대기업의 대표답지 않게 비서나 운전사도 없이 혼자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내리자 차는 운전하는 사람도 없이 조용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역시, SG 전자의 최고급 자율주행차 다운 모습이었다.

또각, 또각.

그녀가 로비로 들어서자, 프런트 데스크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들은 모두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회사 대표와도 친했지만, JK포션의 대표인 진샤웨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대표님이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바로 비서실에 연락 올리겠습니다."

선임 직원의 말에 진샤웨이가 손을 저었다.

"류이링을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여기 오너가 불러서 온 거예요."

"아...."

뜻밖의 말에 직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어찌할 줄 모르는 직원을 놔두고 그녀는 로비를 가로질러 열려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지금 회장님이 회사에 계신 건가요? 올라가시는 것 못 봤는데."

"뭐, 회장님 신출귀몰한 거 한두 번인가,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셨겠지."

"그런가요? 오늘은 대표실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조심스러운 후임의 말에 선임 직원이 눈을 흘겼다.

"어차피 본사 오시는 날도 거의 없잖아. 모른척해."

"아…. 네."

아직도 회사 꼭대기 층 전체를 회장 전용층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류이링 대표에게 대표직을 맡기고 물러선 뒤 경훈은 회사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설과 와병설이 격돌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는 다른 일들이 너무 바빴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 진샤웨이 회장을 불러낼 수 있는 분이었어?"

진샤웨이.

그녀는 세계 제일의 포션 제작 회사의 대표이자, 그녀 자신도 강력한 포션 제작 각성자였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 중 하나인 그녀는 그 위치만큼 콧대가 높기로도 유명했다.

피부만이 아니라 진정한 회춘의 포션이 있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달려든 권력가도, 그녀의 재산과 지위를 노리던 다른 재벌도, 포션 제작자로서의 그녀를 노리던 각성자들도,

모두 그녀의 구둣발에 걷어차였을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전 SG그룹 후계자의 실종과 SG그룹의 해체가 그녀 때문이라는 소문까지도 돌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까지 불러내다니. 사람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진샤웨이는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점점 불안해졌다.

그녀는 경훈의 연락을 받고 바로 월드 골드사로 달려온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피해가 갈까 봐 업무시간에는 잘 연락도 안 하는 경훈이었다. 그런 그가 당장 찾아오라는 연락을 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 그녀는 직원들과 함께 TV를 보며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TV에서 나오는 소식은 모두 만주에서 들려온 승전보였다.

지금 한국과 유라시아 연합 시민들은 괴물들을 물리쳤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었다.

괴물들을 통솔하던 군주급 괴수를 죽이고, 괴물들을 만주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웨이브 이후 암울하던 국내 분위기를 한 번에 뒤집어 버렸다.

사람들은 경적을 울리고, 대낮부터 축하주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일을 해낸 당사자가 현장에 있지 않고, 사무실에서 그녀를 부른 것이다.

꽤나 날카로운 그녀의 촉이 이번에도 경고를 보내주고 있었다.

더구나 전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뭔가 결심한 것처럼 들려왔다.

'별일 아니기를.'

만약을 대비해서 아공간 가방 가득 포션을 가져온 진샤웨이였다.

엘리베이터는 곧 맨 꼭대기 층에 멈춰 섰고, 진샤웨이는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와 바로 회장실로 향했다.

회장실이 있는 로얄 층은 텅 비어 있었다.

비서도, 관리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청소하는 로봇들만 지나다닐 뿐이었다.

보안도 좋지만, 너무 삭막했다.

경훈에게 사람을 좀 써보자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진샤웨이는 직접 회장실의 문을 두드린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과 달리 회장실 안에는 경훈만 있지 않았다.

10대로 보이는 백인 소녀가 창문에 붙어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진샤웨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는 사이, 강화된 그녀의 귀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사.람.이 너무 많아."

소녀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린 말이었다.

시골에서 온 아이인가? 하지만, 마치 소녀의 말은 사람을 보지 못한 곳에서 온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그때, 직접 커피를 내리고 있던 경훈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훈의 말에 소녀가 얼굴을 돌렸다.

소녀의 기초화장도 하지 않았지만, 피부는 깨끗했고,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역시 각성자네.'

화장 없이 저런 피부를 유지하려면 각성자 이외에 답이 없었다.

'전투 각성자인가?'

소녀다운 얼굴 안에는 신기하게도 전투 각성자 특유의 기세가 배여 있었다. 그것도 마르셀로나 진혁같은 관록 있는 각성자가 흘리는 기세였다.

그녀의 눈도 의지가 가득해 보였지만, 그런 기세와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묘한 아이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진샤웨이가 소녀를 관찰한 끝에 그런 결론을 내리는 동안, 이사벨도 진샤웨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사벨은 셰인과 같이 본 서부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서 진샤웨이의 첫인상과 비슷한 캐릭터를 찾아냈다.

'주인공을 도와주는 술집 여주인.'

이브는 한숨을 쉬고, 진샤웨이 알았으면 화를 냈었을지도 몰랐겠지만, 이사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비교방법이었다.

짧은 시선 교환 뒤, 진샤웨이가 경훈에게 물었다.

"이 멋진 소녀는 누구신가요?"

"이름은 이사벨이고 B급 각성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전부 다른 나라 사람이었지만, 모두 한국어로 이루어진 대화였다.

이사벨이 인사를 했지만, 진샤웨이는 이사벨의 인사에 대답하지 못했다.

"B급요? 정말?"

회춘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가 분명했다.

그런 소녀가 B등급 각성자라니.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는 골드 리트리버 상태인 베일리."

경훈의 소개와 함께 이사벨의 목 뒤에서 작은 강아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멍!

강아지가 진샤웨이를 향해 짖었고, 그녀의 놀란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와, 귀여워라."

풀린 얼굴로 강아지를 보던 진샤웨이가 곧 정신을 차렸다.

"설마, 이사벨 양이 다음번 집행자인가요?"

그녀도 경훈 이후에 셰인이라는 새로운 집행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 집행자가 나왔으면 세 번째 집행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EV에서 강한 각성자가 계속 나와주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는 단지, 어디서 이런 사람들이 튀어나오는지 조금 궁금할 뿐이었다.

진샤웨이의 표정을 지켜보던 경훈이 과거의 약속을 다시 꺼냈다.

"전에 말한 적 있었죠? 언젠가 모두 말해 주겠다고…."

진샤웨이는 그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 그녀는 경훈이 말해 주기를 계속 기다려왔다.

경훈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말해 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36화. < 소녀 문을 넘다.(2) >

경훈의 설명을 들은 진샤웨이는 그녀답지 않게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원 이동. 멸망한 비슷한 세상을 왕복하는 특성이라니.

그녀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설명으로 신기해했던 많은 일이 이해가 되었다.

처음 보는 아이템들이 등장하고, 그녀가 모르는 포션이 나타나고.

생각을 이어가다가 진샤웨이는 또 다른 의혹을 떠올릴 수 있었다.

"EV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을 전부 경훈씨가 가져온 거라면.... 그동안 알고 있었던 EV 수뇌는 뭐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경훈은 자리에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특성과 이사벨에 관해 설명한 뒤에 휭하니 자리를 뜬 것이었다.

이사벨을 잠시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더구나,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소녀와 귀여운 강아지는 조금은 경계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샤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가지 가정이 생각났지만, 그 가정을 확인해 볼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경훈이 떠맡긴 소녀를 어떻게 해야 했다.

'이 아이를 맡기려고 날 급하게 부른 거였네.'

거대 기업의 대표인 그녀를 애 보는 일로 불렀다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황당해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샤웨이는 그런 점에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은 그녀나 경훈이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떠오른 생각이 맞는다면, 대기업 대표 따위는 경훈에게 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새로 온 사람들이 그녀에게 떠맡겨지고 있었다.

오마르도 그랬고, 류이링과 동료들도 그랬다.

시리아, 중국, 이제는 다른 세상의 미국인까지….

경훈에게 있어, 그녀의 역할은 새로운 동료의 도우미일지도 몰랐다.

진샤웨이는 떠오른 한심한 생각을 던져버리고,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서류조작을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인가."

유라시아 연합이 결정된 이후, EV 각성자는 유라시아 연합의 각 나라에서 따로 신분증 검사를 받지 않게 되었다.

EV의 움직이는 문양이 신분증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 뭐부터 해야 하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을 도와준 적이 없어서 난감하네."

딱 봐도 손대야 할 곳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손을 대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바쁘시면 일 보셔도 돼요. 전 여기 있겠습니다. 이브 언니가 셰인에게 알렸다고 했어요. 셰인이 금방 올 거예요."

"세상에, 셰인 집행자도 그쪽 세상 사람이었어?"

"어…. 셰인도 같은 곳에서 오긴 했어요."

이사벨은 떠듬거리며 얼버무렸다.

무척 어색했지만, 진샤웨이는 다른 것에 놀라는 바람에 알아채지 못했다.

"경훈은 인간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말하던데, 그래도 꽤 살아남았나 봐?"

"아뇨. 다른 사람은 없었는데요."

진샤웨이가 멍하니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진샤웨이는 이사벨에게 바짝 다가가 그녀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전부 말해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건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진샤웨이를 보고 이사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경훈이 믿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길지 않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부모와 사람들이 죽고, 혼자 살아가다가, 경훈과 셰인, 베일리를 만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진샤웨이는 이글이글한 눈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당장 나하고 가자. 카우보이는 기다리라고 해!"

그녀는 이사벨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갔다.

이사벨은 진샤웨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쉽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뿌리치면 안 될 것 같았다.

후드에 앉아 있는 베일리는 뭔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강아지는 그녀의 목 뒤에서 헥헥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스케줄 전부 취소시켜요! 국무총리 면담이요? 아프다고 해요!"

"가까운 곳의 의류 매장 하나 잡아주세요. 내가 볼 거 아니에요. 청소년, 아니 젊은 여성 위주로 잡아놓아요. 시간요? 바로 당장!"

"오마르 너 어디야? 잘됐네. 그럼 같이 밥 먹자. 주소 보낼게."

"아, 레스토랑도 하나 잡아줘요. 네, 그렇게 해요. 사람들 시선 피해야 하니까."

복도를 걸어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진샤웨이는 폭풍처럼 전화했다.

전화마다 바뀌는 그녀의 대응을 이사벨이 감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진샤웨이와 이사벨이 1층 로비에 나서자,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은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진샤웨이는 프런트에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외국인 여성의 손을 잡고 빠르게 로비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오히려 뒤따라오던 여성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헉!"

직원 중 하나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주변에서 눈짓을 주는 사이에 두 여성은 건물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건물 앞에 서자 바로 차가 와서 멈추었다. 경비원이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출발했다.

"같이 가던 외국인은 누구죠?"

"키는 크지만, 꽤 어려 보이던데."

"정말, 누굴까요?"

회장실에서 진샤웨이 대표가 데리고 나온 외국인 여성. 데스크 직원들은 그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상상은 한 직원의 질문으로 끝나버렸다.

"그런데, 그냥 가시게 해도 되나요?"

"그럼, 막아서게?"

선임 직원이 심통 어린 목소리로 반문했지만, 그 직원의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대표님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이런!"

선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샤웨이가 회장실로 올라간 뒤에 직원들은 바로 류이링 대표에게 연락했다.

회장님이 계시다고?

연락을 받은 류이링은 바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회장님 일이라면 사람이 변해 버리는 류이링이었다. 잘못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회장님 아직 계시지 않을까요? 아직 안 내려오셨잖아요."

"그럴까? 그렇겠지?"

하지만, 말을 하는 직원도 대답하는 선임도 자신들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근데, 넌 아까 왜 소리를 지른 거야. 깜짝 놀랐잖아."

"아니, 귀여운 강아지가 있어서...."

"강아지?"

"엄청 귀여웠어요! 후드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니까요."

걱정하는 직원들과 강아지 이야기를 하는 직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직원까지. 프런트 데스크는 혼란에 빠져버렸다.

혼란에 빠진 프런트를 향해 류이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승용차가 달리는 동안, 이사벨과 베일리는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보고 있었다.

대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밝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높은 건물. 화려한 광고판.

분명 영상으로 본 장면들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멍. 멍.

베일리가 창에 코를 대고 짖어댔고, 이사벨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이렇게 살고 있군요."

세상이 멀쩡했을 때는 그녀가 너무 어렸었다.

그녀는 괴물이 나타나기 전, 멀쩡한 세상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괴물과 싸우지 않는 사회는 무척이나 낯설게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이사벨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중 아닌가요?"

이사벨의 물음에 진샤웨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한국은 제일 후방이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제일 평화로운 나라일걸?"

모든 싸움이 한국에서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경훈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평화롭지 않으면 곤란했다.

"뭐, 그래도 며칠 전까지는 우울한 분위기가 가득했었어. 세상이 멸망할 것 같았지."

괴물들이 세상을 점령해나가고, 미국이 미쳐서 남미 나라들을 집어 삼기는 모습을 방송과 인터넷으로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분위기는 만주에서 보내온 승전보 덕분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두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진샤웨이의 설명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이 싸우려고 온 거예요."

이사벨이 창문을 매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광고판을 매만졌다.

"역시 직접 보니 다르네요. 왜, 경훈 아저씨와 셰인 아저씨가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운전하던 진샤웨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자율주행차가 아니었으면 바로 사고가 났을지도 몰랐다.

"아니 잠깐, 넌 아직 어려. 괴물과 싸우려면 실력 있는 각성자가.... 아, B등급 전투 각성자라고 했지? 그럼 그건 아니고, 아니, 아니, 그게 아니지. 아직 싸우기는 어려. 내가 네 나이 때는.... 아, 이것도 아니군."

진샤웨이가 그녀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잠시 뒤,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휴우, 이런 시대라 어쩔 수 없겠지."

진샤웨이는 이사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 아니 내일, 모래도 안돼. 적어도 제대로 경험한 뒤에 싸우러 가. 뭘 지키는 건지는 제대로 알고 싸워야 해."

진샤웨이는 전화를 걸어 스케줄을 더 빼버렸다.

진샤웨이는 이사벨을 데리고 옷가게로 향했다.

JK포션 비서실은 꽤나 유능했다.

매니저 외에는 명품 매장이 싹 비워져 있었다.

진샤웨이는 그녀의 안목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사벨의 옷을 코디해 주었다.

진샤웨이는 이사벨을 위해 매장 전체를 사들일 것처럼 보였다.

"저는 움직이기 편한 옷 한두 벌만 있으면 되는데요."

뒤에 쌓이는 옷을 보고 이사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진샤웨이를 화나게 했다.

"도대체 그동안 뭘 가르친 거야. 시커먼 남정네들은 그렇다 쳐도 이브 씨가 그러면 안 되잖아!"

아무래도 이번에는 이브가 욕을 먹을 차례인듯했다.

그렇게 산더미 같은 쇼핑을 한 뒤에 이번에는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떠나는 차를 향해 매니저는 구십 도로 인사를 했다.

다행히 새로 입은 이사벨의 옷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복이었다.

"옷이 편해요."

물론,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엄청난 가격의 옷이었지만, 이사벨은 그 가격을 알지 못했다.

레스토랑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안내된 자리에는 이제 막 어른이 된 듯한 아랍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식당을 다 빌리고."

오마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샤웨이를 바라보았다.

원래, 진샤웨이는 이런 식으로 부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마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가족이 와서 소개해주려고.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도 많고 해서."

"가족이요?"

오마르가 진샤웨이 뒤에 서 있는 소녀를 보고 놀란 눈이 되었다.

"경훈씨가 데려왔어."

하지만, 이어진 진샤웨이의 말에 오마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 가족 이름은 뭔가요?"

"이사벨. 오마르 너한테는 말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식사하면서 말해 줄게."

"네."

당연히 받아들이는 오마르의 행동에 이사벨이 어찌할 줄 몰랐다.

갑자기 가족이라니.

이쪽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겨우 자리에 앉았고, 베일리가 바닥에 내려섰다.

오마르가 신기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바라보았지만, 강아지는 쪼르르 문 쪽으로 달려갈 뿐이었다.

멍! 멍!

베일리가 문을 보고 짖었다.

레스토랑 안으로 헬멧을 쓴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배달부 같은 모습이었지만, 검은 방탄복의 어깨에 새겨진 EV 문양.

EV 특수 작전팀의 모습이었다.

직원들은 그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행히 안에서 나온 진샤웨이가 그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여길 알고 온 거죠?"

[이브에게 들었습니다.]

"쩝, 역시 모르는 게 없네. 들어와요."

내실로 들어서자, 이사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셰인!"

달려온 그녀를 안아주고는 셰인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문은 닫혔고, 방 안에는 이사벨과 베일리. 오마르와 진샤웨이가 그를 보고 있었다.

[잘 됐군. 두 사람한테는 알려도 된다고 했으니.]

셰인이 헬멧을 벗었고, 진샤웨이는 헬멧 안에서 나타난 로봇 머리를 보고 머리를 짚었다.

"하아. 내가 어디서 포션을 잘못 먹었었나.... 오늘 왜 이러지."

그녀는 자리에 있지 않은 경훈을 욕할 수 밖에 없었다.

"다 나한테 던져놓고, 경훈씨는 도대체 어디 간 거야."

***

경훈은 그때, 포탈을 통해 브라질 상파울루에 와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시, 상파울루는 미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237화. < EV 선포하다(1) >

인구 천만의 도시.

상파울루는 종일 비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린 비도 도시 곳곳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막지 못했다.

전날 이루어진 공습의 흔적이었다.

다행히 각성자들과 군인들의 헌신적인 방어로 전날 미군의 진격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시간만 벌어주었을 뿐이었다.

이미, 미군은 상파울루를 지나 브라질 남부로 진격하고 있었고, 수도인 브라질리아는 물론 다른 도시와 연결이 끊어졌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뇌부만이라도 탈출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소냐는 마지막까지 기다려보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기다려왔던 사람이 포탈을 통해 상파울루에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단 한 사람.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실망했다. 하지만, 소냐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전에도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지옥 같은 도시에 혼자 나타났던 남자였다.

"케이가 와주었군요."

하지만, 소냐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왔어요."

포탈에서 나타난 경훈의 표정도 무척이나 험악했다.

화아악!

경훈의 옷이 펄럭였다. 마나에 담긴 기세가 절로 퍼져나갔다.

"어떻게 된 건지 당장 설명해요!"

경훈이 뿜어내는 기세에 협회 지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모두 하얗게 질려버렸다. 전부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사고가 났을지도 몰랐다.

-주인님. 안정을….

이브의 말에 겨우 경훈이 기세를 낮출 수 있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설명해 드릴게요."

소냐는 경훈의 기세에 떨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기에는 슬픔이 너무 컸다.

그녀는 경훈을 데리고 각성자 협회 건물을 빠져나갔다.

브라질 각성자 협회의 위상을 보여주듯, 협회는 상파울루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과 다르게 널찍하게 떨어진 고층 건물들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깨진 유리창과, 그을린 벽. 군데군데 매달린 흰색의 항복 깃발과 성조기.

그 모습은 건물마다 바리케이드와 장갑차, 병사들이 배치되어 전투에 대비하는 것과 절로 비교되었다.

도시에는 패배감이 가득했다.

각성자 협회 건물 정문에는 다른 건물보다 몇 배나 많은 차량과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배치된 군인들의 표정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냐는 병사들의 경례를 무시하고 정문에 배치된 전술 차량 중 하나를 잡아탔다.

그녀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지만, 뭐라 하는 군인은 없었다.

경훈도 그녀 옆자리에 올라탔고, 전술 차량은 시 외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끔 바다로 향하는 피난민도 보였지만, 주민 대부분은 건물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길 위를 지나가는 차는 모두 군용차나 군에서 징발한 차였다. 차 위와 안에는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상파울루 외곽을 흐르는 핀헤이루스 강은 전과 달리 맑은 물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

붉게 물든 고인 물 위로 시체가 떠 있었고, 전차들이 처박혀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의 남미 연합군이 강변에 늘어선 건물 뒤에 숨어 강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끼익.

소냐가 그나마 멀쩡한 건물 뒤에 차를 세우고, 건물 위로 향했다.

옥상에도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소냐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난간 앞에 서서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 강 너머는 이틀부터 미군의 점령지역이 되어 버렸어요."

강변에서부터 먼 곳까지, 거의 모든 건물에 흰 깃발과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피난도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에요. 저렇게나마 살아남아야죠."

"도시의 20% 이상이 점령당했어요. 솔직히 어제 전투에서 전선이 뚫렸으면 도시가 전부 점령당했을 거예요."

항공기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지금. 핀헤이루스 강을 이용한 방어 라인은 큰 도움이 되었다.

도시가 포위당할 동안 도시의 80%나 지킨 것도 강 덕분이었고, 어제의 공격을 막아낸 것도 반은 핀헤이루스 강 때문이었다.

"그것보다 어제 어떻게 된 건지 말해봐요. 마르셀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평상시였으면 그녀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을 경훈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소냐가 손을 들어 강을 가리켰다. 끊어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는 저 다리가 멀쩡했어요. 핀헤이루스 강에서 멀쩡했던 마지막 다리였죠."

다리를 보던 소냐의 눈이 흐려졌다.

*

전날 저녁.

"빨리 퇴각해! 멈추지 마!"

이제 해가 져서 어두워진 밤. 일단의 사람들이 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쾅! 쾅! 쾅!

달리는 그들의 뒤에는 엄청난 폭발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와! 성공이에요!"

달리던 각성자 하나가 뒤를 보고 환호했지만,

슈우웅, 퍽!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머리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헉!

뒤를 따르던 각성자가 놀라 걸음을 멈추려 하자 마르셀로가 소리쳤다.

"절대, 멈추지 마! 모두 고개도 돌리지 마! 말도 하지 마!"

맨 뒤에서 달리던 그가 소리치자, 이번에는 그에게 총알이 날아왔다.

슈우우웅! 텅!

다행히 총알은 방어막을 완전히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방금 죽은 각성자는 방어막으로 총알도 막을 수 없는 낮은 등급의 각성자였지만, 그는 마나만 충분하면 기관총 아래서도 살아나갈 수 있는 각성자였다.

저격병들이 그를 노려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노리는 것은 저격병만이 아니었다.

드드득.

뒤쪽 멀리서 전차와 장갑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슈우우웅. 콰앙!

달리는 일행의 옆 건물 상부가 터져나갔다. 전차의 포격에 날아간 것이다.

쏟아지는 파편은 다행히 방어막에 튕겨 나갔고, 거리를 뒤덮은 먼지는 저격병의 시야도 가려주었지만, 달리는 각성자들의 공포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조용히 달리던 각성자들 사이에서 울음과 욕이 터져 나왔다.

"흑, 흑, 엄마."

"시벌, 시벌. 죽고 싶지 않아."

"으아아악!"

공포가 정신을 뒤덮는 바람에 마르셀로의 명령은 소용없어졌다.

그나마 발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으니, 마르셀로는 먼지가 빨리 안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오늘, 이 각성자들을 데리고 작전에 성공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작전에 참여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 낮은 등급의 각성자들일 뿐이었다.

수많은 각성자들이 죽고, 이제 전투 각성자는 이런 각성자들 밖에 남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이번 작전에 협회장인 소냐가 참가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을까.

물론, 모두 막는 바람에 그녀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현재 브라질 협회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모든 각성자들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남미의 다른 나라 각성자들과 EV의 지원팀은 모두 파라과이로 철수해 있었다.

브라질이 위험했지만, 아직 뒤에도 남아있는 나라들이 있었다. 브라질만을 위해 모두 희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소냐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을 떠날 수 없었다.

여기는 그의 나라였다. 이곳에 가족과 아내, 동료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도 소냐와 함께 이 도시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런 각성자들을 데리고, 적군 한복판에 뛰어들어 화약고를 터트리고, 사령부에 불을 지르다니.

성공도 이런 성공이 없었다.

이번 작전의 성공으로 적어도 며칠은 진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때마침, 만주에서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올 게 분명했다.

시간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앞에 다리가 보였다. 피난민 철수를 위해 마지막까지 남겨 놓았던 다리였다.

미군도 진격을 위해 다리를 부수지 않았고, 이 다리는 홀로 강 위에 남아있었다.

"살았다!"

병사들은 다리를 보고 얼굴이 환해졌지만, 마르셀로는 인상이 펴질 줄을 몰랐다.

팔과 다리에서 벌컥벌컥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 저번 전투에서 망가진 모양이야.'

리우데자네이루를 빠져나오다가 대규모 폭격을 받은 덕분에 마나도, 특성도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폭탄에 휩쓸려 사람 꼴이 아닌 상태로 도망쳐 왔으니 금방 멀쩡해질 리가 없기도 했다.

총알 몇 개를 겨우 막아내고 방어막이 부서지고, 파편에 맞은 몸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자들이 다리 위로 올라섰다.

타타타타!

그 순간, 강 건너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다리를 건너는 각성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지원 사격이었다.

뒤따라오던 장갑차도 더는 다가오지 못했고, 전차도 멈춰 섰다.

전차는 다리가 부서질까 봐 포를 쏘지 못했지만, 장갑차와 전차의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슈우우욱.

하지만, 강 건너에서는 대전차 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 개인용 대전차포가 날아가 장갑차를 박살 냈다.

펑! 펑! 드르르륵.

전차가 연막탄을 피우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각성자들은 다리를 거의 다 건너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셀로는 다리 중앙에 멈춰서 있었다.

따르르르릉.

전화기가 마구 울렸다. 마르셀로가 전화를 받았다.

-왜 멈춰선 거에요? 당장 넘어와요!

마르셀로가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전차포가 날아온 건물 옥상 난간 너머로 소냐의 모습이 보였다.

오지 말라고 했건만, 결국 마중하러 나온 것이다.

마르셀로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내보다 먼저 봤으면 그녀에게 프러포즈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욕이나 먹었겠지."

그러고 보니, 근래, 참 멋진 인생을 살았던 것 같았다.

전 세계를 다니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구하고.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던 남자에게는 정말 과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다리만 겨우 남아있었다. 남은 다리도 뼈가 드러나 있었다.

등도 뚫리고, 팔 한쪽도 덜렁거렸다.

전차와 장갑차의 마지막 사격에 당한 흔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아니,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 몸이었다.

그는 다리 난간에 기댄 채로 말을 이었다.

"더 움직이기 곤란해졌어."

-네?

전화기 너머에서 경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끼기기기긱.

뒤에서 다시 전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연막탄 사이로 전차 여러 대가 모습을 보였다. 아예 전차 대대가 몰려나온 모양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다리를 건너 시내를 헤집을 수도 있는 양이었다.

"부상이 심해. 당장 다리를 폭파해. 잘못하다가는 방어선이 뚫리겠어."

-회복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릴게요!

그녀는 그가 재생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회복할 수 없어. 재생 능력이 사라졌어."

-그럴 리가.... 기다려요. 내가 구하러 갈게요.

이어서 수화기 너머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지 말아요!

-안 됩니다. 전차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벌써 다리 가까이 전차들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일을 시키는구먼."

마르셀로가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난간 너머에 설치된 폭약 선을 찾았다.

이 다리에 폭약을 설치한 것도 그였다.

원격으로 터트리지 않는다면 직접 터트리면 그만이었다.

그는 뇌관에 이어진 선들을 잘라냈다. 이제 이 두 선을 이으면 끝이었다.

두두두두.

전차 선두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마르셀로는 목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를 열자 사진 두 개가 보였다.

한쪽에는 죽은 아내와 옛 동료들이 집에 모여서 찍은 사진,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한국에서 찍은 각성자 동료들의 사진.

"좋은 인생이었어."

마르셀로는 사진을 보고 미소를 지었고, 선두에 선 전차가 마르셀로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타타타타타!

기관총 소리가 강을 울렸고,

이어,

콰아아아아아앙!

마르셀로가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구궁.

화염이 치솟고, 다리가 무너졌다.

전차들이 미친듯이 후진했지만,

다리 위로 올라선 전차들은 차례로 강으로 추락했다.

잠시 뒤, 다리가 사라지고, 부서진 다리 파편과 강에 반쯤 잠긴 전차들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뿌리치고 달려 나온 소냐가 무너진 다리를 보며 울부짖었다.

*

"바로 어젯밤 저 다리에서 마르셀로가 죽었어요."

소냐의 설명이 끝났다.

옆에서 덩달아 듣고 있던 병사들도 숙연한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그들도 어제 그 광경을 지켜봤었다.

소냐의 말이 끝난 뒤에도 경훈은 조용히 강을 바라보았다.

휙.

경훈이 어느 순간 난간을 뛰어넘었다. 그는 건물 아래까지 바로 뛰어내렸다.

"어디 가세요?"

놀란 소냐가 그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 막으려 했지만, 각성자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경훈과 달리 한 번에 뛰어내릴 수 없었던 그녀는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건물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경훈은 벌써 강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무언가를 주어 올렸다.

"헉헉, 무슨 일이에요. 여긴 위험해요!"

급하게 달려온 소냐가 경훈에게 물었지만, 경훈은 방금 주어 올린 물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불에 그슬린 지저분한 낡은 펜던트였다.

"아…. 설마…."

안쪽에는 불타버려서 내용을 알 수 없는 사진 하나와, 아직은 멀쩡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오마르, 진샤웨이, 그리고, EV 각성자들.

그리고, 경훈.

경훈은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경훈은 오래 사진을 볼 수 없었다.

두두두두.

강 너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건물 위로 수십 대의 전투 헬기가 모습을 보였고, 멀리 도로 위로 전차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적, 미군의 공격이었다.

"말도 안 돼. 사령부도 화약고도 부쉈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공격을…."

놀란 소냐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경훈은 말없이 아공간을 열 뿐이었다.

"케이, 우선 물러나야 해요! 여기서는 상대할 수 없어요!"

소냐가 경훈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경훈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공간에서 레일건을 꺼내 들었다. 그가 소냐에게 말했다.

"소냐는 물러나 있어요. 그리고, 전 케이가 아니라 경훈입니다. EV의 주인이자, 미국의 적."

그는 레일건에 마나석을 장착한 뒤에 날아오는 헬기를 겨누었다.

"오늘 EV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미국 편을 드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도 모두 우리의 적이다."

-알겠습니다. 전 세계에 지금 공표하겠습니다.

이브의 대답과 함께 경훈은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헬기부대와 전차부대를 집어삼켰다.

238화. < EV 선포하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