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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 요새 (3) >

무너진 건물 안. 뿔 달린 들개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뿔 들개는 이 일대를 영역으로 삼고 있는 몬스터였다.

얼마 전까지 건물 밖을 돌아다니며 영역을 자랑했던 몬스터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건물 안만 쫄래쫄래 돌아다니고 있었다.

요 며칠, 주변이 너무 시끄럽고 번잡했다.

옆 도시의 군주 부하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떼죽음을 당해 버리고, 근처 지역을 장악하던 놈들이 하나둘 사라져 버렸다.

지능이 높지 않은 괴물이었지만, 이럴 때는 몸을 사리는 것이 좋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뜨내기 상위 족의 침입인가? 아니면 다른 군주가 옆 도시 군주와 영역 싸움을 벌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든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크르릉.

역시 건물 안으로 숨어든 것 만으로 위험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었다.

복도 앞, 거대한 네발 짐승이 괴물을 막아서고 있었다.

긴 갈기, 등에 접힌 날개. 그리고, 번쩍거리는 눈. 딱 봐도 자신보다 상위 종이었다.

끄으으응.

뿔 들개는 슬쩍 머리를 조아려 보았다. 일정 급이 되는 종들은 먹이를 고른다는데, 혹시 그런 종이면 살려 줄지도 몰랐다.

정말 그런 종이었나? 새로 등장한 괴물이 덤벼들지 않고 있었다. 뿔 들개의 작전이 먹힌 것 같았다.

이럴 때 냉큼 도망쳐야 했다.

뿔 들개는 슬쩍 뒤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반대쪽 복도에 처음 보는 고철이 서 있었다.

고철이 기관총을 장전했다.

철컥.

셰인이라고 불리는 로봇이었지만, 뿔 들개는 로봇을 본 적이 없었다.

쇳덩이가 움직이는 게 신기했지만, 어쨌거나 이 고철덩이는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왜 맨날 내 쪽으로만 달려들려고 하는 거지? 나도 뭔가 화려한 마크 같은 것을 칠해 봐야 하나?"

뿔 들개가 슬금슬금 접근하자 셰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타타탕!

셰인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들이 뿔 들개 주변을 박살 냈다. 로봇에게 달려들려던 괴물이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공격은 마나가 섞여 있었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 적이었는데 예상이 틀린 모양이었다.

그 순간,

뿔 들개의 머리 위쪽 천장이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그리고, 천장에서 창을 든 소녀 한 명이 떨어져 내렸다.

뿔 들개는 머리 위에서 강렬한 마나향을 느낄 수 있었다.

괴물은 급하게 머리를 틀었고,

푸욱.

창 하나가 머리 위에서부터 뿔 들개의 옆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아!"

목덜미를 노린 암습이었는데, 아쉽게도 실패해 버렸다.

쨍그랑.

하지만, 뿔 들개의 방어막은 전부 깨져나갔고, 괴물의 옆에 내려선 소녀는 다시 창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괴물 쪽이 더 빨랐다. 괴물의 머리가 창을 향해 휘둘러졌다. 괴물의 뿔이 빛나고 있었다.

깡!

창이 튕겨 나가고, 괴물은 창을 튕겨낸 빛나는 뿔을 소녀의 몸에 박아넣었다.

푹.

하지만, 뿔은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어느새 날아온 사자 괴물이 소녀의 옷깃을 물고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타타타탕!

동시에 기관총이 뿔 들개의 몸을 헤집어 놓았다. 방어막이 있었어도 막기 힘든 마나 총알이었다. 맨몸인 지금 상태로는 몇 발을 버티기 어려웠다.

뿔 들개는 박살이 났고, 마나가 흘러나와 이사벨의 몸에 흡수가 되었다.

잠시 나른한 표정을 짓던 이사벨이 곧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것이다.

셰인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첫 공격은 좋았어. 공격이 한 번에 먹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 정도면 훌륭한 편이야."

그는 이사벨을 칭찬했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셰인이 카메라를 긁적였다.

그는 인간 소녀를 가르쳐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누굴 가르쳐본 적이 없었다.

실수한 것을 혼내야 할 것 같은데, 그가 본 영화에서는 나쁜 어른이 아이들에게 화낼 때나 나왔었다.

결국, 그는 훈계하는 것을 포기했다.

"적이 아직 반격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물러서도록 해. 마나 활용법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 육체나 마나 등급이 저 정도 괴물을 맞상대하기는 무리니까."

로봇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눈 옆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혼나지 않는 건가요?"

생존자 그룹의 삶은 어린이의 실수도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고 삭막했었다.

그녀도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을 도와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부모 외에는 그녀의 실수를 감싸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 홀로 지내는 동안은 더 실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실수는 곧 부상과 죽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은 이브 쪽이 잘할 것 같은데.... 아무튼, 난 무리야."

로봇은 자기도 모르게 소녀의 머릿속에 이브에 대한 오해를 심어놓게 되었다.

"나랑 베일리가 최대한 보호해 줄 테니 실수를 줄여 나가봐. 마나 운용도, 몸 움직이는 것도 재능이 있으니 실수도 금방 없어질 거야."

멍! 멍!

소녀 머리 위에 올라간 강아지가 로봇의 말에 맞춰서 짖어댔다.

소녀는 눈을 쓱쓱 닦더니, 로봇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셰인이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한 뒤로 매번 하는 인사였다. 스승에 대한 인사라던가.

셰인 일행이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들은 뒤로 그녀는 옛날에 봤던 동양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셰인은 그녀의 인사에 고개를 졌더니, 슬쩍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낡은 외벽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깨에 기관총을 걸치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럼, 다음 사냥을 하러 가자. 근처에 있는 놈들은 전부 잡았으니, 좀 멀리 가야 할 거야."

"네!"

그녀는 셰인의 말에 힘차게 대답했다. 부모 말고 처음으로 혼내지 않는 어른이었다.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셰인이 바라보았던 외벽 너머의 반대편 건물 옥상.

그 옥상에는 경훈이 앉아 셰인 일행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잠깐 보고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잘하고 있는데 뭐."

셰인도 두 사람이 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훈의 신호에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그냥 떠난 것이다.

"이제 슬슬 등급 업 할 때가 되었지?"

-네. 이 속도면 며칠 뒤에는 새로운 등급으로 올라갈 것 같습니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였다. 셰인과 베일리의 도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성장은 대단한 면이 있었다.

"그럼, 요새 쪽 일을 마무리한 뒤에 슬슬 뉴욕 쪽을 확인해 봐야겠어."

"요새 쪽 일 때문이라도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그녀의 말에 경훈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피부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독은 전부 태워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여파가 남아 버렸다.

솔직히 이사벨과 셰인을 만나지 않은 이유도 이 변한 피부 때문이었다.

"넌 괜찮아? 전원이 나갈 뻔했잖아."

-전원이 나가더라도 잠시 멈출 뿐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아예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AI와 육체가 없는 몬스터가 만났기 때문일까?

녹색의 안개 속에서 마나를 빼앗기는 동안 그녀는 잠시 녹색의 마나석과 연동이 되었었다.

그녀는 그 짧은 순간 마나석이 가진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동족을 먹어치우며 점점 미쳐가는 장면. 그리고 마나석을 빨아들이며 점점 육체를 잃어가는 장면.

그리고, 군주의 왕에게 귀속 당해 인간의 군대에 독을 뿌리는 모습.

안개가 된 몬스터는 자신이 가진 기억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브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 생명체가 아니었습니다. 안개가 되기 전에 살던 곳도 이 세상과 너무 다른 곳이었습니다.

"뭐, 그동안 본 괴물들 모습으로 예상했던 일이지."

경훈은 이 별의 생명체와는 너무도 다른 괴물들을 이미 보아 왔었다.

컴퓨터를 장악한 액체 괴물, 대구에서 만난 촉수 푸딩 괴물, 거기다 미쳐버린 지룡까지. 모두 이 세상 생명체가 변해서 될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과 확신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넘어오게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어?"

-네. 작은 이미지의 파편들뿐이었습니다.

육체와 함께 뇌를 잃어버리면서 남아 있던 이미지들이 안개에 섞여 버린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이브가 정보를 얻게 되었지만, 남아 있는 이미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그런 작전은 절대 승인하지 않을 거야. 너무 위험해."

-....

경훈의 말에 이브는 대답하지 못했다.

좋은 작전이었고, 결과도 좋았지만, 경훈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도 소멸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다시 특성을 활성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경훈은 요새에서 바로 워싱턴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잠실 요새나 백악관 지하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요새에 있을 때는 어디로 갈지 정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마지막 공간이동 좌표로 날아온 것이었다.

"좋아, 가볼까. 한 번에 끝내는 거야."

경훈은 아공간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이사벨은 실수해도 도와줄 사람이 있었지만, 경훈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네. 성공 확률 50% 이상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경훈은 바닥에 은빛 구멍을 만들었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

지하 요새 자체 발전실.

녹색의 마나석이 발전실 중앙에 떠올라 있었다.

녹색 마나석 아래에는 발전기 세 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발전기 중앙에 삽입된 마나석은 한껏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발전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나석의 마나가 다른 곳으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녹색의 마나석, 아니 육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안개 괴물이 한껏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미, 괴물은 좀 전에 사라진 맛있는 마나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있었다.

격을 잃어 진화의 가능성도 사라지고, 지혜도 사라져 이제 괴물에게 남은 욕망은 마나에 대한 허기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부우웅.

한참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는 괴물의 바로 아래.

세 발전기 중앙에 은빛 구멍이 만들어졌다.

녹색 안개도 움직이지 않았고, 녹색 마나석도 마나를 빨아들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푸악!

구멍에서 창을 든 경훈이 튀어나왔다. 경훈은 마치 수직으로 쏘아진 포탄처럼 녹색 마나석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가는 경훈의 손에는 이사벨이 들고 있던 창과 같은 창이 들려있었다.

파파파팍.

경훈의 온몸에는 녹색 불꽃이 튀어 올랐고, 안개가 출렁이고, 녹색 마나석이 마나 흡수를 멈추었다.

하지만, 피하기는 너무 늦었다.

푸악.

경훈이 든 창이 마나석을 꿰뚫었다.

파아아악.

창에 꿰뚫린 마나석이 흩어졌다.

녹색의 연기처럼. 아니 녹색의 연기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개의 괴물은 죽지 않았다.

괴물은 육체가 없었다. 안개로 이루어진 몸처럼 핵도 고체인 마나석이 아니었다.

단지, 육체를 이루고 있을 때의 습관 때문에 마나석의 이미지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개가 공중에 떠오른 경훈을 휘감았고, 경훈의 온몸이 녹색의 불꽃에 휩싸였다.

경훈을 감싼 방어막이 껌벅이고, 피부가 더욱 푸르게 변해갔다.

하지만, 경훈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허공을 향해 뻗은 창에 계속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는 이브를 믿었다.

이브가 이미 녹색의 마나석이 고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방어막을 깨는 창이 괴물의 약점이라는 것도.

파지지직!

창을 뻗은 허공에 반투명한 막이 떠올랐다.

가날픈 네 개의 팔, 그리고 긴 목. 두꺼운 다리.

나타난 방어막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상한 괴물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쩌쩌쩍.

다음 순간, 허공에 나타난 방어막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깨져나가는 방어막 사이로 푸른 연기가 흘러나왔다.

꿀렁.

푸른 연기가 다시 모여들었다. 뭉치고 회전하고, 마나석 모양으로 되었다가 다시 퍼졌다.

연기는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핵이 형태를 유지할 방어막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연기는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끼이이이이익!

괴물은 결국 비명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휘이이익.

경훈을 휘감던 안개도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발전실을 가득 메운 안개도 사라져갔고, 요새를 가득 메운 안개도 바닥에 점점 가라앉았다.

우우우우웅.

발전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새가 다시 가동된 것이다.

하지만, 경훈은 발전기가 움직인 것을 알지 못했다.

마나가 폭포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엄청난 양이었다. 군주급을 괴물을 잡을 때 보다 더 클지도 몰랐다.

[마나 양이 대폭 증가했습니다. 다음 등급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경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등급이 있는 거였어?"

-S급 이상의 각성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인님 마나량은 등급이 오르기 직전의 상황과 일치합니다.

말을 마치자 이브의 말투가 다시 바뀌었다. 시스템 메시지였다.

[등급 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 등급명을 정해주시기 바랍니다.]

189화. < 무기를 가져왔습니다. >

새로운 등급 명을 정한 뒤 경훈은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마나를 흡수한 덕분인지 경훈의 몸은 바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등급이 올라가지 않았지만, 특성도 어느 정도 강화된 것 같았다.

"한 30t 정도 가능하려나?"

몸속의 마나를 움직이며 경훈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몇 배나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브는 바로 그에게 현실을 인식시켰다.

-M1 전차가 65t입니다. 전차 한 대도 한 번에 옮기기 어려워 보입니다.

경훈은 광장에 늘어서 있는 군용 장비들을 떠올렸다. 전부 엄청 무거웠다.

경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다 옮기기는 무리였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철판 위로 녹색 얼룩이 남아 있었다.

"정보가 필요해."

이쪽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 저쪽에도 똑같이 벌어진다면, 괴물로 변하는 짐승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쯤 다른 세상의 괴물들이 넘어오는지, 어디로, 어떤 식으로 넘어오는지 알아야 했다.

EV의 힘을 이용해서 체온 측정을 강화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직 시간이 있을 겁니다. 대격변 이후 몇 년은 무사했었으니까요.

"그것도 이상해. 아무래도 변화 속도가 다른 것 같아."

그동안 자료를 확인한 바에 따르면 경훈의 세상이 배 이상 빨리 변화하고 있었다.

경훈과 EV의 노력으로 상당수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큰 피해를 보게 된 것은 바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충분한 준비를 하기 전에 괴물들의 대공습이 시작된다면 막아내기가 불가능했다.

"우선, 멈췄던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겠지."

그는 다시 위성 통제소로 향했다.

이브가 다시 통제소의 해킹을 시작했다. 더이상 방해는 없었다.

-내부 확인을 마쳤습니다. 요새는 안전합니다. 위성 통제권을 가져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하 창고 구경을 하고 오셔도 됩니다.

금괴와 유물, 그리고 병기가 가득 쌓여 있는 창고.

하지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일이 끝나면 같이 가자고."

경훈은 이브를 홀로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이번에는 이브도 말대답하지 않았다.

통제소는 조용해졌고, 조금은 편안한 느낌이 실내에 퍼져나갔다.

시간이 지났다.

-통제권 장악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브가 입을 열었다.

-정찰 위성 24기 작동 중. GPS 항법 위성 40기, 기타 위성 12기 작동 중입니다. 아쉽게도 마지막 가동 때 작동하던 위성의 사분의 일 만 통신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선, 미국 군사기지를 확인해 봐. 쓸만한 장비가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미국 상공을 지나가는 정찰 위성 5대를 우선 가동하겠습니다.

세계지도가 떠 있는 커다란 화면에는 지도를 지나가는 수많은 파형 중에 다섯 개의 파형만 남게 되었다.

-펜타곤과 백악관에서 확인한 정보와 저쪽 세상의 미군 기지 정보를 조합해서 가능성이 큰 곳부터 확인하겠습니다.

-포트 맨퍼슨 기지, 샌 안토니오 합동기지, 스캇 공군기지, 노포크 해군 기지...

이브의 말과 함께 화면에 위성 사진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부서진 전차, 구덩이가 생긴 활주로, 바다에 수장된 전함들.

사진 어디에도 멀쩡한 군사 기지가 보이지 않았다.

경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괴물들은 확실하게 미국군을 전멸시킨듯했다.

'LA City에 왔었던 함대는 바다 위에 있어서 살아남았던 건가?'

하지만, 그 함대도 지금은 뉴욕 앞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잘못하면 이 기지에 있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는데.'

독을 사용해서 사람들만 죽인 것을 보고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독을 사용한 곳은 다른 괴물들이 공격할 수 없었던 백악관 지하, 로키 산맥 지하 요새 같은 곳뿐이었다.

실망스러운 사진이 계속 지나가고, 경훈의 실망이 점점 커질 때였다.

빠르게 지나가던 화면이 딱 멈추었다.

넓은 벌판, 수많은 비행기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AMARG. 퇴역 군용기 보관소입니다. 약 4000대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괴물들의 흔적이 보이지만 항공기들은 무사한 것 같습니다. 인간들의 기지도 아니었고, 당장 쓸 수 있는 무기도 아니었다. 괴물들이 파괴할 이유가 없었다.

실전에 바로 투입될 수 없는 시대가 지난 퇴역한 항공기를 모아놓은 곳일 뿐이었다.

"이건 대박인데?"

하지만, 경훈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F-15 200대 이상, F-16 400대 이상, F-18, 치누크 헬기, C-140 수송기 상당수 있습니다.

미국의 퇴역 비행기는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없어서 못 쓰는 최신예 비행기들이었다.

더구나 현역 군용기가 신형 군용기에 밀려서 이곳에 보내진 예도 있었다.

F-22는 찾지 못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어차피 F-22를 찾아도 운용은 어렵습니다.

퇴역 군용기 보관소를 훑은 뒤, 위성은 다른 기지들을 계속 확인해 나갔다.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아직 멀쩡한 곳도 있었다.

사람 손이 타지 않는 병기창이나 군수공장 같은 경우였다. 잘하면 쓸만한 무기들을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았어. 우선 쓸만한 비행기부터 옮기자고. 설마 전투기가 30t을 넘는 것은 아니겠지?"

-수송기가 아니라면 그보다 가볍습니다.

"그럼, 이제 지하 창고를 확인해 볼까?"

경훈이 휴대폰을 다시 회수하려고 할 때였다.

-잠시, 확인해 봐 주시겠습니까?

이브가 경훈을 말렸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위성 사진들이 사라지고 다시 세계지도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곽선만 있던 지도가 아니었다. 울긋불긋 색이 칠해진 지도였다.

색이 칠해진 지도 위로 수많은 노란색 점들이 흩어져 있었고, 분홍색 점들이 사이사이 끼어 있었다.

지도의 몇 군데는 시뻘건 점들이 찍혀 있었다.

지도를 보다 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 있는 점 중에 몇 개는 회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서울, 대구, 부산 등. 전부 경훈이 지나온 경로에 있는 점들이었다.

-기지가 가동을 멈추기 직전 쏘아 올린 위성의 자료입니다. 이 위성은 지상의 마나량을 측정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미국이었다. 위성에서 마나량을 파악하려고 하다니. 다른 나라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마나량이 높으면 진한 색으로 표시되고 적으면 옅은 색으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이브의 말을 들으며 경훈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술적으로는 뭔가 대단해 보였지만, 당장 유용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대신, 그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저 회색 점들은 뭐야?"

-일정 기간 마나량이 급격하게 줄어든 지점을 표시한 것입니다.

서울, 대구, 부산 등. 전부 군주급 괴물들이 죽은 장소들이었다.

경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화면에 뜬 점들을 노려보았다.

지도를 가득 메운 노란 점들과 가끔 보이는 분홍 점들.

"설마, 대장급과 군주급 몬스터 위치를 표시하는 거야?"

-따로 설명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경훈은 지도에 가득한 점을 보고 혀를 찼다.

반쯤 미쳐버린 군주급 괴물도 어부지리를 이용해서 겨우겨우 잡을 수 있었다.

그런 괴물이 전부 저 분홍색 점들이라니.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백두산 천지와 대륙 곳곳에 박혀 있는 붉은 점.

분홍색이 군주급 괴물이라면 이 붉은 색은 무슨 괴물일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산 넘어 산이냐..."

미국에도 붉은색 점이 하나 박혀 있었다. 붉은 점은 관광지로 이름 높은 옐로스톤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위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당한 거지? 붉은 점이 있는 곳에 핵미사일 샤워라도 때리면 되지 않나?"

경훈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위성 정보를 내려받기 전에 기지가 전멸했습니다. 위성의 가동은 오래되었지만, 마나 정보를 내려받은 것은 저희가 처음입니다.

"운이 안 좋은 걸까? 아니면 일부러 시간을 맞춘 걸까?"

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알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시기가 적절했다.

경훈의 머릿속에 컴퓨터를 장악했던 괴물과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도플갱어가 떠올랐다.

"적어도 인간의 정보를 전부 얻어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어."

이 세계를 멸망시킨 괴물들은 소설과 영화에서 나오던 바보같은 외계인이 아니었다.

경훈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족한 마나에 기뻐했던 좀전의 기억은 머리 뒤쪽으로 밀어두었다.

예상보다 적은 강했다.

"우선, 무기를 옮기자."

할 일이 많이 있었지만, 우선 집을 안전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시간이 되자 바닥에 은빛 구멍을 만들었다. 그랜드 캐니언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공간이동문이었다.

투손에 있는 노후 전투기 보관소와 가장 가까운 공간이동 좌표였다.

그는 그랜드 캐니언에서 투손까지 바로 내달릴 생각이었다.

대장급과 군주급 위치는 위성으로 어느 정도 파악된 상황이었다. 그 외의 몬스터는 쳐부수며 달려가도 충분했다.

경훈이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고, 벽에 걸려 있는 화면은 홀로 세계지도를 계속 보여주었다.

두근.

백두산에 있는 붉은 빛이 깜빡였다. 붉은빛이 조금씩 더 밝아지는 것 같았다.

***

며칠 뒤,

은혜는 입을 삐쭉 내민 채로 부두에 서 있었다.

전에 벌어진 테러는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다행히 빼앗겼던 금괴도 다시 돌아왔고, 그 일로 그녀는 위로금도 가득 받아낼 수 있었다.

덕분에 가족의 생활은 전혀 걱정 없게 되었지만, 이번 일은 아무리 봐도 그녀가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제가 함부로 대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보디가드로 따라온 정규도 굳은 얼굴로 이런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은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두에 군인들이 가득했다. 그녀 옆에는 별을 단 장군들이 늘어서 있었고, 한쪽에는 장갑차도 서 있었다.

전에 벌어졌던 테러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과한 경비였다.

'도대체 뭘 가져 온다는 거야?'

군대에 도움이 될 무기를 가져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런 경비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잠시 뒤,

부우웅!

부두 밖에서 거대한 수송선 하나가 들어왔다. 해경의 호위를 받는 수송선이었다.

수송선 옆에는 EV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휘익. EV는 언제 또 저런 배를 구한 거야?"

옆에서 정규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에게 묻는 것 같았지만, 은혜도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배가 부두에 접안을 했고, 후방 하역 램프가 열렸다.

사람들이 열린 램프를 쳐다보았지만, 그곳에서는 군용차 대신 선글라스를 쓴 사람만 걸어 나올 뿐이었다.

"경…. 케이!"

은혜가 이름을 부르려다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선글라스를 쓴 경훈이 그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경훈은 그녀 옆에 서 있는 장군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별을 두 개 달고 있는 공군 장군을 보며 말했다.

"공군 군수 사령관이시죠? EV의 물건을 전하러 왔습니다. 1차분 F-15D 다섯 대와 알람 미사일 200발입니다."

하역 램프로 그물망을 뒤집어쓴 항공기가 인도 차에 끌려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장군들의 눈이 커졌다. 이곳에 오면서도 반신반의했던 장군들이었다.

"그, 그럼 전차도 구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혹시, 대함 미사일은 구할 수 없습니까?"

뒤로 물러나 있던 육군과 해군 장성들이 앞다투어 달려 나왔다.

"순서를 지킵시다. 2차분도 공군이 우선입니다. 지금 공군이 제일 급합니다."

공군 군수 사령관이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리고, 그는 경훈을 향해 활짝 웃었다.

"정말 EV는 한국의 큰 우방일세."

경훈도 마주 웃었다.

"대금만 확실하게 지급하시면 차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가져오지 못한 무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필요한 만큼 한국에 넘기고, 나머지는 그와 EV가 쓸 무기들이었다.

무기가 준비되었고, 돈도 충분했다. 이제 땅과 병사들이 필요했다.

원래부터 무기 거래는 현금만으로 하는 법이 아니었다.

190화. < 왜란(1) >

일본의 전쟁 위협을 이제는 국민들도 체감하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하나같이 일본을 성토하고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일본과 한국 네티즌 간에 연일 설전이 벌어졌다.

괴물들 때문에 물류도 줄어들고 경제도 가라앉고 있는데 일본과의 전쟁이라니.

국민들은 이 황당한 사태에 어이가 없었지만, 문제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나라에 비하면 엄청난 선방을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나 군사력이 약한 나라들은 괴물들에 의해 정부가 기능을 잃은 곳도 많았고, 괴물을 잘 막아내던 나라들도 경제가 추락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이미 세계 경제는 10년 이상 후퇴해 있었다. 성장량 제로로 버티고 있는 한국은 누가 봐도 최고로 잘 견디고 있는 나라였다.

슈아앙.

활주로 위로 F-15K 전투기들이 날아올랐다.

건물 안에서 망원경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통령이 옆에 있던 장군에게 물었다.

"항공유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해적들 때문에 상선 운항도 어렵다던데."

"부족하진 않습니다. 철도로 러시아 항공유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을 관통하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갈수록 생명줄로 변하고 있었다.

의외로 북한 쪽도 시비를 안 걸고, 러시아도 호의적으로 나와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 나라가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이제는 왜 그런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EV라는 집단 때문이라는 것을.

"EV에서 보내준 비행기들은 쓸만합니까?"

"네, 90퍼센트 이상 호환이 가능했습니다. 좀 구형이라 다운그레이드를 한다면 전부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럼, 그 비행기를 그냥 쓰는 것도 가능하다는 겁니까?"

"아쉽게도 그건 무리였습니다. 전부 장기 보존 처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전부 전투용 물자가 아니라, 비축용 물자였습니다. 퇴역 처리된 미국 장비를 가져온 것 같았습니다만…."

장군의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 남아 있는 정보망을 통해 알아보았지만, 어디에서 미국 전투기들이 따로 팔려나갔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구형 암람 미사일 같은 것들이야 무기상들을 통해 구할 수 있겠지만, F-15는 아직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전략 전투기였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전투기 숫자도 뻔했다.

도대체 EV는 어디서 저 전투기들을 가져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전쟁 준비는 문제없는 겁니까?"

이곳 제11 전투비행단을 방문한 것도 바로 일본과의 전쟁 준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하면서도 대통령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는 대통령을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얼마 전까지 자신이 일본과의 전쟁 준비를 하게 될지는 꿈도 꾸지 않았다.

"네, 미국의 지원이 있을 때보다야 어렵지만, 계속 지원을 받는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결국, EV와 주변국의 지원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일개 조직에 휘둘리는 국가라니.

다른 나라 상황을 봐도 일개 조직이라고 부르기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통령도 EV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날 밤 침실에서 보았던 헬멧을 쓴 남자가 생각나곤 했다.

모든 경비를 뚫고 대통령의 침실을 몰래 들어와 대화를 나누고 사라지는 각성자.

그런 각성자를 가진 조직을 함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흔들던 대통령은 훈련을 마치고 건물 앞을 지나가는 조종사들을 보게 되었다.

F-15를 모는 대한민국 최고의 조종사들과 외국인들로 보이는 조종사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고 있었다.

"저들입니까?"

"네, EV가 교육을 부탁한 조종사들입니다."

"어디 출신들인지는 확인되었습니까?"

"여러 나라 출신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번 대격변 이후 내전 중이거나 연락이 끊어진 나라 출신들이었습니다."

전쟁 물자 지원에 대한 지불 방법의 하나로 EV가 요청한 조종사 교육이 항공대별로 이뤄지고 있었다.

"전부 실력 있는 조종사들입니다. F-15를 몰아본 경험들은 없었지만, 실전 경험까지 있는 조종사들도 있어서 교육은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용병들인가요? 용병들이면 우리가 끌어들여도 되지 않을까요?"

전쟁이 벌어지면 군용 항공기 이상으로 조종사도 부족할 게 분명했다. 짧은 교육으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조종사라면 한국도 꼭 필요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장군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용병들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종사들과 가족들을 EV가 구해준 모양입니다. 지금도 가족들 모두를 EV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모두 EV에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솔직히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국가도 아닌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EV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대통령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각성자를 보호한다' 라는 구호로 등장한 조직.

그리고, EV는 그 명분에 맡는 행동을 계속 이어왔다.

"각성자들의 나라를 만드는 것도 아닐 테고, 알 수가 없군."

어차피 구름을 몰고 다니는 괴물들은 전투기로도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증명된 상태였다.

지금도 항로들은 막혀 있었고, 전투기들도 괴물 구름을 피해 도망치느라 바빴다.

다시 고민해봤지만, 대통령은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어차피 정책 연구소 같은 곳에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눈앞의 전쟁에 집중할 때였다.

쉬이이잉!

건물 위로 전투기들이 꼬리를 물고 날아갔다.

***

경훈은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특성 활성화 시간이 될 때마다 최대한도의 중량을 들고 차원 이동을 해야 했다.

F-15와 F-16. 나중에는 잠실 아지트에 있던 골렘들까지 가져와서 주요 부품만을 떼어내 다른 세계로 운반했다.

항공기만 운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미사일까지 날라야 했다. 지하 요새에 있는 유물과 금괴는 손도 못 댈 정도였다.

그래도, 이사벨의 승급 장면은 놓치지 않았다.

*

워싱턴 근교.

수풀이 울창한 벌판에 이사벨과 뿔이 달린 들개 한 마리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얼마 전, 이사벨이 암습으로 죽이려다가 실수한 뿔 들개와 같은 종족이었다.

그때와 달리 이사벨은 도움을 받지도 숨어있지도 않고 있었다.

이번 사냥은 그동안의 훈련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

이사벨은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숙였다.

크르르릉.

뿔 들개도 몸을 낮췄다. 흔들리는 수풀에 괴물의 몸이 반쯤 가려졌다. 오히려 괴물 쪽이 몸을 숨기는 데 유리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는 로봇과 인간, 그리고 강아지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낑. 낑.

강아지는 이사벨 옆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베일리는 계속 소녀를 보며 낑낑거렸지만, 경훈의 손에 목덜미를 잡힌 채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경훈이 그런 베일리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변신도 안하고 조용하네요. 베일리에 대해 정말 잘 아시나 봅니다."

경훈이 베일리의 목덜미를 잡아 든 것은 셰인의 요청 때문이었다.

경훈은 그런 것으로 변신하는 강아지를 말릴 수 있을까 했지만, 신기하게도 경훈이 목덜미를 잡아들자 강아지는 변신을 포기하고 불쌍한 울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경훈의 말에 셰인은 카메라를 긁적였다.

베일리가 조용한 것은 셰인이 강아지를 잘 알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베일리가 경훈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흠, 이런 식으로 데리고 다니면 좀 친해지려나?"

경훈의 말에 셰인도 이브도 절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낑낑.

베일리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계속 낑낑거렸다. 아무래도 낑낑거리는 이유도 소녀에게 가고 싶어서가 아닌 것 같았다.

멀리서 베일리가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이사벨은 그 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앞에 있는 몬스터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후욱. 후욱.

그녀는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이사벨은 이렇게 앞에 나서서 싸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숨어있다가 뒤치기를 하고 달아났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여태 살아남은 것이었지만, 그만큼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셰인과 같이 다니면서는 여러 번 실전을 겪었지만, 홀로 몬스터를 상대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그녀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심장이 떨리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분명 도와주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은 멀리서 그를 지켜봐 주는 일행이 있었다.

셰인과 베일리, 그리고 소리만 들리는 언니.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강한 아저씨.

그들이 떠오르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몬스터가 또렷이 보였다. 들개의 어깨 근육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상대방을 계속 주시해. 특히 마나의 흐름과 근육을. 난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지만, 등급이 높은 인간은 마나의 흐름으로 공격을 예상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셰인의 가르침대로였다.

아직, 그녀도 몬스터의 몸에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근육이 움직이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있었다.

'온다!'

그녀가 옆으로 몸을 날렸고, 몬스터가 앞으로 쏘아졌다. 수풀이 갈라지고 들개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제로가 되었다.

들개의 뿔이 빛나고 들개는 그녀가 있던 자리를 뚫고 지나갔다.

하지만, 뿔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푹!

대신 옆구리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창이 박힌 것이다.

놀란 몬스터가 뿔을 옆으로 휘저었다. 창이 이사벨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뿔은 반투명한 그녀의 몸을 지나갔을 뿐이었다.

또다시 걸리는 것이 없자, 몬스터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창이 빠져나가고, 이사벨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창을 들고 이사벨이 환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성공했다. 반 차원으로 이동하는 특성을 전투에 사용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길 수 있었다!

이사벨은 창을 들고 몬스터를 향해 걸어갔다. 뿔 들개가 옆구리에 피를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끝났군."

로봇이 총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경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에 정말 잘 가르치셨네요. 교관으로도 소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셰인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매뉴얼대로 했을 뿐이야. 금방 실력이 늘더라고. 원래 저렇게 습득이 빠른 건가?"

셰인의 말에 경훈은 이사벨의 모습을 다시 살폈다.

이사벨은 이제 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덩치 차이만 해도 엄청났고, 힘 차이도 대단했지만, 싸움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괴물의 방어막은 이미 깨져 있었고, 창은 아직도 마나가 맺혀있었다.

그녀는 마나 활용이 능수능란해 졌다.

그녀는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괴물의 공격을 피했다. 마치 곡예를 부리는 것 같았다. 전투 센스도 대단했다. 그리고 피하기 힘들 때는 특성을 사용해서 반차원으로 몸을 피했다. 이제는 특성도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마나가 부족해서 자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은 등급이 오르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리고, 그 등급은 이제 막 오를 참이었다.

캬아아악!

괴물이 단말마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사벨이 창을 뽑고 눈을 감았다.

괴물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이사벨의 몸에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이사벨의 마나가 일렁거렸다.

드디어 다음 등급으로 올라간 것이다.

들뜨던 마나가 가라앉고 이사벨이 눈을 떴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와 함께 뉴욕을 다녀올 수 있겠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뉴욕에 있는 분홍 점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우선 저쪽 세상일을 정리해야지."

"오래 걸리나?"

경훈의 말에 셰인이 물었다.

경훈이 씩 웃었다.

"그리 오래 안 걸릴 겁니다."

그날, 일행은 축하 파티를 벌였고, 경훈은 다시 차원을 넘었다.

*

다음날. 일본 해경이 독도를 공격했다.

평범한 순시선 한 척이 경고 방송을 무시하고는 독도에 접안을 하려고 했다.

독도 경비대는 경고 사격했고, 순시선에서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경비대는 반격했고, 일본 해경을 격퇴할 수 있었다.

연기를 뿜으며 순시선은 물러났지만, 경비대의 표정은 어두웠다.

잠시 뒤.

분노에 찬 일본 총리의 담화가 일본 방송을 가득 메웠고, 일본 함대가 한국을 향해 출발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191화. < 왜란(2) >

독도 남동쪽 바다.

츄아아악.

이지스 구축함들이 바다를 가르며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일본 3 호위 대군의 군함들이었다. 군함들은 모두 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2 호위 대군도 쓰시마 섬 방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두 함대는 모두 울릉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태평양 쪽을 담당하고 있는 1, 4 호위 대군은 아직 일본 남쪽을 항해하고 있었다.

아직 동해에 있는 것은 2, 3 호위 대군뿐이었다. 하지만, 이 함대들만으로도 자위대 해군 전력의 반을 훌쩍 뛰어넘었다.

3 호위 대군 기함 아타고의 브리지.

함대의 사령인 나카토 소장은 출발 전 통합 막료장이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1차 목표는 한국 해군, 공군의 격멸과 항구 봉쇄다."

총리와 일본 정부는 한반도 상륙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위대에서는 상륙은 무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류를 마비시키고, 공포를 주어서 문을 열도록 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최종 목표다. 이 점을 명심하고 작전을 수행하도록."

막료장은 작전 전에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강조했다.

문을 열어도 북한과 러시아가 남아 있고, 수년이 걸리는 해저 터널 공사 문제도 있었지만, 지금 일본은 그 뒤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대륙에서 고립되고 있다는 공포심으로 일본 정부의 이성은 반쯤 마비되어 있었다.

"현재 한국 제 7 기동 전단이 울릉도 남서쪽 30해리 지점에서 동진 중입니다. 한반도 상공에 전투기들이 떠오르고 있고, 아군 전투기들도 발진을 시작했습니다."

참모가 상황을 보고했 다.

나가토 소장은 한국 함대의 위치를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각개 격파를 해보겠다는 건가?"

"함정 수가 부족한 만큼 한국군으로서는 다른 대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최근 열심히 일본을 따라온 한국 해군이었지만, 아직 함정 수나 총 톤수에서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쪽 7기동전단은 한국 해군의 거의 모든 주력함이 모여있으니, 저희 3 호위 대군과 비교를 하면 승산은 있어 보일 겁니다." 일본 자위대 해군의 삼 분의 일과 한국 해군 전부의 싸움이었다. 그 정도면 한국 해군으로서는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의견을 내는 참모도 한국군을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현대 해상전은 2차 대전 이전의 함포전이 아니었다.

일본에게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2 호위대군이 있었다.

거기다, 공군이 이미 날아오고 있었고, 일본은 한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는 지대함 미사일도 있었다.

질 싸움이 아니었다.

"조금 속도를 늦출까요? 이대로라면 저희 함대가 적의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참모가 의견을 제시했지만, 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차피 각오한 일이다."

어느 적을 끌어들일 미끼가 있어야 했다.

자신의 함대가 적 미사일을 뒤집어쓰고 2 호위 대군이 과실을 줍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본의 승리를 위해서는 참아낼 필요가 있었다.

한국군은 함대가 분할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본군도 제 7 기동 전단을 한꺼번에 잡을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적 주력 함대는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했다.

저 7기동전단이 멀리 도망 다니기 시작하면 잡는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물론 그동안 한국 해안 도시를 쑥밭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동안 적 함대는 계속 신경을 긁어올 게 분명했다.

더구나 함대가 러시아나 만주 독립국 근해로 넘어가면 일은 더 복잡했졌다.

한국군이 겁도 없이 나선 지금 끝장을 봐야 했다.

"피해가 크겠습니다."

이번 전투로 제 3 호위 대군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다, 해군력의 차이는 컸지만, 한국의 미사일 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배를 타격할 대함 미사일은 부족했지만, 본토의 피해는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소장과 참모들은 굳은 표정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는 없었다.

*

포항 근처의 해안가.

슈아아앙!

김 병장은 놀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청난 숫자의 비행기가 바다로 날아가고 있었다.

"백 대가 훨씬 넘겠는데? 정말 전쟁이 난 거잖아?"

"아니 그럼, 지금 준비하는 게 그냥 훈련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옆에서 염 상병이 스위치를 조작하면서 한마디 했다. 염 상병의 말에 김 병장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젠장, 훈련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일본하고 전쟁이라니.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초능력자들이 뛰어다니는 시대에 구닥다리 전쟁이라니. 그것도 하필 내가 제대하기도 전에!"

투덜거리면서도 김 병장은 열심히 발사 준비를 했다.

"더구나, 이 미사일은 도대체 뭐야. 다른 부대는 러시아 미사일을 지원받았다며. 이건 원 듣도 보도 못한 미사일이잖아. 실험용 아냐?"

한국 정부는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산 신형 대함 미사일을 급하게 들여왔다.

사거리 300km의 바스티안 시스템. 이 미사일들은 한국 영해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까지 사정거리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김 병장의 부대가 준비하는 미사일은 전혀 다른 미사일이었다.

"그래도 미국제잖습니까. 몰래 들여왔겠죠."

"달랑 설명서만 왔잖아. 이런 경우는 들은 적도 없다고. 더구나 생긴 것도 이상해. 이거 날아가기는 하는 거야?"

6개의 원통이 실린 적재함이 위로 세워지고 있었다. 김 병장이 처음 보는 미사일이 들어있는 발사구들이었다.

다행히 기존 지대함 하픈 체계와 호환이 되었지만, 하픈과 사정거리가 같다면 겨우 울릉도까지밖에 못 날아갈 미사일이었다.

하지만, 군대는 위에서 시키면 해야 했다. 한참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발사 준비를 마쳤다.

전투기 뒤에 EV가 지원한 미사일.

경훈이 로키 산맥 지하 요새에서 가져온 신형 미사일들이 발사 대기에 돌입했다.

*

잠시 뒤, 울릉도 남쪽 20해리 지점.

이지스함 세 척, 그리고 구축함 6척이 동진을 하고 있었다. 한국 해군의 핵심인 7 기동 전단의 군함들이었다.

함대의 기함인 세종대왕함의 전투 지휘실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가득했다.

"120마일 전방 적기 접근 중. 비행속도 160NM. 총 153대입니다."

"3 호위 대군 90마일까지 접근 중. 하픈 사정거리에 돌입했습니다! 2 호위 대군은 현재 남쪽 110마일 지점에서 3노트의 속도로 북상중입니다!"

전탐병들의 보고에 최 전단장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역시 무리였나."

운이 좋으면 한쪽 함대를 상대하고 다른 쪽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동시에 상대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저쪽도 바보가 아닐 테니."

2차 세계 대전 때의 일본군들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이번 상대는 그런 멍청이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호위 대군 둘을 상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작전 참모의 말에 최 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중 급유기 덕분에 항공 전력은 그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함대 전력의 차이는 메꿔지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한국군도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비밀 무기는 몰랐을 때 유용한 것이었다. 적이 모를 때 최대한 효과를 봐야 했다.

"EV에서 보내준 각성자들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반만 성공해도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EV에서 보내준 각성자들이 함대에 배치되었다. 인종도 다르고 나이와 성별도 각양각색인 각성자들이었다.

이 기함에도 동양인 남자 한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난 잘 모르겠군. 각성자가 정말 도움이 될지…."

작전 참모와 다르게 전단장은 조금 부정적이었다.

괴물이나 상대하는 각성자들이었다. 그런 각성자들이 전쟁에 도움이 된다니. 그는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 함대를 믿었다.

그때였다.

전탐병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 본토에서 다수의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목표는 우리 함대입니다! 지대함 미사일로 보입니다!"

그 순간. 전투 지휘실이 얼어붙었다. 드디어 함대를 향해 미사일이 발사된 것이었다.

"결국, 시작된 건가…."

전단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동안, 통신병과 전탐병들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군 사령부로부터 공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동해안 일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적 2 호위대와 3 호위대를 향하는 대함 미사일과 일본 본토를 향하는 미사일들입니다!"

"아군 전폭기들이 접근 중. 곧 사정거리에 진입합니다!"

아군도 반격을 시작했다.

"그나마 러시아에서 미사일을 보내주어 다행이군."

전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공군과 함대의 미사일로만 싸웠어야 했을 것이었다.

서로의 땅에서 발사한 미사일들이 바다 위를 지나 양쪽 함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보고가 이어졌지만, 전단장과 참모들은 계속 레이더를 노려보았다.

아직, 기다려야 했다.

피 말리는 시간. 아쉽게도 적들이 먼저 기회를 잡았다.

"미사일들이 일본 함대 위를 지나쳤습니다. 아! 적 함대에서 미사일들이 발사되고 있습니다!"

"적 항공기들도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미사일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현재 120기를 돌파했습니다!"

이지스 함대의 방어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다수의 미사일을 때려 박는 게 제일 좋았다.

그것을 위해 일본 함대도 본토에서 쏜 미사일들이 함대를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것은 전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쒸이잉!

머리 위로 미사일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토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막 함대를 통과했습니다!"

전단장이 소리쳤다.

"미사일 발사! 쏟아부어!"

콰콰콰콰!

하푼과 해성 대함 미사일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함대 상공을 나는 아군기들에게서도 미사일들이 발사되었다.

한국군도 백발이 넘는 대함 미사일이 적 함대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공격력은 동급, 방어력은 우리 쪽이 나은 편인데…."

3호위 대군과 7 기동 전단만 비교하면 7 기동 전단의 대공 방어가 더 뛰어났다.

하지만, 다가오는 함대는 더 있었다.

"2 호위 대군에서 다수의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전탐병의 보고에 전단장이 화들짝 놀랐다.

"뭐? 거긴 하픈 사정거리에 들어서지 않았잖아!"

"하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형 미사일입니다!"

"몇 발이야!"

"현재 총 40발 이상! 계속 늘어납니다!"

쾅!

전단장이 벽을 내려쳤다.

"젠장! 숨겨놓은 수가 이거였나?"

일본에서 사거리가 긴 새로운 대함 미사일의 개발이 끝났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가 준비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

"젠장, 너무 많아."

이지스 시스템이 철벽같은 방어 능력을 자랑한다지만, 공격해오는 미사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휘실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

위이이이이이잉!

함대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공습경보였다.

갑판에 나와 있던 경훈도 사이렌 소리에 선글라스를 들어 올렸다.

"안 보이는데."

-지평선 너머에서 날아오고 있습니다. 아직 보일 때가 아닙니다.

이브는 한참 이지스 레이다의 정보를 훔쳐보는 중이었다. 누구보다 미사일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보다 주인님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습니다. 주인님의 적성과도 잘 맞지 않는 일입니다.

"별수 없잖아. 각성자 숫자가 부족한데. 배마다 한 명씩은 배치해야 하니 내가 나설 수밖에."

-얼마 전에 전부 군대에 맡겨놓고 뒤에서 구경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 없이 이기기는 무리더라고. 잘못하다가 금괴 창고가 터지거나 진샤웨이 회사 건물이라도 부서져 버리면 곤란하잖아."

-제가 서포트를 한다고 해도 미사일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바로 공간이동으로 도망칠게. 걱정하지 마."

경훈도 이 배와 같이 침몰할 생각은 없었다.

경훈은 나란히 바다 위를 달리고 있는 율곡이이함 갑판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러시아의 어린 청년. 바실리가 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배에도 각각 각성자가 갑판에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잘들 해줘야 할 텐데."

-주인님이 제일 걱정입니다. 어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어깨에 멘 저격총을 고쳐 잡았다.

저격총은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평범한 망원 조준경이 달려있던 곳에는 특이하게 생긴 도트 사이트가 달려있었다.

이브와 연동되도록 만든 도트 사이트였다.

-미사일의 위치와 속도 방향은 도트 사이트에 표시되도록 했습니다. 나머지는 주인님의 실력에 달려있습니다.

"오케이."

삼정검을 갑판에 꽂아 넣은 경훈은 그 위에 총열을 걸치고 도트 사이트에 눈을 댔다.

수평선 아래로 미사일들의 위치가 표시되고 있었다.

마나를 사용하면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길어지지만, 어쨌거나 각성자들은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적을 상대할 첫 번째 선수는 역시 미사일이었다.

콰과과과!

경훈의 뒤쪽에서 대공 미사일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192화. < 왜란(3) >

전투 지휘실은 계속되는 보고로 정신없었다.

"전 대함대 대공 미사일 발사 중입니다!"

"서쪽에서 접근 중인 대함 미사일 총 135발! 남쪽에서 다가오는 대함 미사일은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총 67발입니다!"

따로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이지스 함들의 슈퍼컴퓨터가 함대의 모든 무기를 통솔했다.

VLS, 함의 수직 발사대에서 SM-2 대공 미사일들이 계속 솟구쳤다.

콰과과과과.

이지스함 세척을 포함한 9척의 구축함에서 대공 미사일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많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 연기는 바로 동쪽으로 줄지어 날아갔다.

대공 미사일들의 목표는 서쪽에서 다가오는 135발의 대함 미사일이었다.

대함 미사일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서 흩어진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어시스템에 혼란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공 미사일들도 목표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젠장, 역시 미사일이 부족해."

뒤에서 레이더를 지켜보던 전단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지스 시스템은 목표당 2기의 미사일을 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슈퍼 컴퓨터는 부족한 미사일 때문에 미사일 당 한 개의 대공 미사일만 배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사일들은 금방 가까워졌고, 다음 순간, 미사일들이 교차했다.

쾅쾅쾅쾅!

바다 위와 하늘에서 폭발이 이어졌다.

대함 미사일에 직격해버린 대공 미사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폭발은 근접신관의 작동으로 공중에서 자폭한 대공 미사일들이었다. 많은 대함 미사일들이 SM-2 대공 미사일의 폭발에 휘말려버렸다.

동체가 꺾이고, 방향을 잃고 자폭하는 가하면, 수면으로 추락하는 미사일도 있었다.

하지만, 날아오는 총알을 맞추는 난이도라는 미사일 방어였다.

대함 미사일 당 SM-2 하나라는 최하의 배정은 성공확률을 더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슈우우욱!

폭발 사이로 대함 미사일들이 뛰쳐나왔다.

"율곡 이이로 향하는 미사일 두 기를 놓쳤습니다. CIWS 가동됩니다!"

근접 방어무기 체계가 가동되었다.

RAM 대공 미사일이 다가오는 미사일을 향해 쏘아졌고, 골키퍼가 기관포를 퍼부었다.

콰아앙!

운이 좋게도 미사일 한 기는 RAM 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하지만, 다른 미사일은 골키퍼의 탄막마저 뚫고 율곡이이함에 내리꽂혔다.

함교에 있던 함장과 병사들은 갑판에 떨어지는 미사일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쾅!

폭음이 배를 흔들었다.

"타격 지점은 어디인가! 어디가 당한거야!"

함장의 외침에 눈을 감았던 병사들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갑판은 멀쩡했다.

미사일은 허공에서 폭파된 것이었다.

병사들은 눈을 끔벅였다.

화염이 흩어지고, 갑판 위쪽에 반투명한 막이 펼쳐진 것이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반투명 막 아래쪽에는 러시아 소년이 팔을 쳐들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미사일을 막았어. 와. 이게 정말 막을 수 있는 거였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막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바실리의 가슴속에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

"율곡이이함 피격! 아, 무사합니다! 각성자가 미사일을 방어해냈습니다!"

와아!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냈다.

전단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가능한 거였군요."

옆에서 참모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만 성공해도 충분하다고 말한 참모였지만, 그도 그리 믿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좋았어!"

전단장은 주먹을 굳게 쥐었다. 어쨌거나 먹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만 성공하건 그 아래건 먹힌다는 게 중요했다.

"대조영 함으로 미사일 한 기, 강감찬함으로 두 기 접근 중. 그리고…."

아직, 미사일의 파도는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대공 미사일을 돌파하는 미사일들이 계속 늘어났다.

RAM 미사일이 계속 발사되고, 골키퍼가 기관포를 퍼부어댔지만, 다가오는 미사일을 반도 처리하지 못했다.

"어, 대조영 함으로 접근 중인 미사일 함 근처에서 추진력을 잃고 바다에 빠졌습니다. 강감찬 함을 향하던 미사일 공중에서 자폭했습니다."

위험한 순간이 이어졌지만, 그만큼 기쁜 소식이 계속 들어왔다.

쾅!

"왕건함 피격! 후방 갑판에 화재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미사일은 기함인 세종대왕함에도 날아왔다.

"본 함에 미사일 세 기 접근 중!"

CIWS로 막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전투 지휘실의 모든 사람은 함정에 타고 있다는 각성자를 떠올렸다.

*

"휴우우우."

각성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미사일의 포연이 아직 남아 있고, 골키퍼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경훈은 도트 사이트에 표시된 정보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쾅!

-미사일 한 기 격파되었습니다. 남은 미사일은 두 기. 11시 방향과 2시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방에서 화염이 일었지만, 경훈은 집중을 잃지 않았다.

그는 먼저 11시 방향으로 총구를 돌렸다. 도트 사이트 중앙에 붉은 점이 표시되었다.

그리고, 이브가 계산한 풍향, 미사일까지의 거리, 습도, 중력, 배의 흔들거림까지 모두 도트 사이트에 표시되었다. 경훈은 몸속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흔들리던 몸이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총이 안정되었고, 총의 마나석을 통해 경훈의 마나가 총알에 주입되었다.

콰과과과!

거리 4km 미사일이 최종단계에 진입했다.

경훈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은 마하를 넘는 속도로 미사일을 향해 날아갔다.

퍽!

그리고, 미사일 탄두에 정확하게 충돌했다.

일반 총알로는 뚫리지 않는 단단한 외부의 미사일이었지만, 마나가 실린 철갑탄은 미사일의 외벽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콰아아앙!

배의 전면에 큰 폭발이 일어났다.

-다음 미사일. 거리 3km!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경훈은 바로 총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앙!

다시금 폭발이 일어났다.

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폭발에 배가 출렁이고, 파편이 경훈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아슬아슬했습니다.

경훈도 식겁한 표정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막아내지 못할 뻔했다.

-역시, 저격총으로 미사일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나도 이번만 하고 다시 안 할 거야."

이브의 말에 경훈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쨌거나 첫 번째 공격은 막아낸 거지?"

-네, 하지만 아직, 남쪽에서 오는 미사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우리 쪽에서 쏜 미사일들은?"

-지금, 적 대공 미사일 사정거리에 진입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둥근 지구에서 수평선 아래 있는 배들이 보일 리가 없었다.

"열심히 가져왔는데 잘 되겠지. 우리는 다음 미사일을 막을 준비를 하자고."

경훈은 검을 뽑아 들고, 배의 측면으로 향했다.

*

같은 시각. 자위대 제 3 호위대군.

기함 아타고의 전투 지휘실은 한국군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현재 본 함대로 접근하는 미사일은 총 67발입니다."

레이더병의 보고에 나카토 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보다 숫자가 적은데."

"항공기와 한반도에서 날아온 미사일 일부가 제 2 호위대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레이더병의 말에 나카도 소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미사일을 나누었다고?"

이해가 안 되는 전술이었다. 한 곳으로 몰아도 함대의 방어망을 뚫을지 알 수 없는데 그걸 반으로 나누다니.

"이러면 결사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3 호위 대군을 희생해서라도 적 함대를 끝장낼 생각이었는데, 적은 현대전의 기본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들하고 붙었는데 상처를 입을 수야 없겠지."

나카토 소장이 크게 소리쳤다.

"함대 방어를 시작해라! 한발도 맞지 마라!"

"알겠습니다!"

병사와 장교들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대공 미사일 발사합니다! 적 미사일 한 기당 두 기가 세팅됩니다!"

미사일 발사를 보고하는 통제관의 목소리도 무척이나 밝았다.

콰과과과과!

요란한 발사음이 지휘 통제실을 가득 메웠고, 제 3 호위대군의 SM-2와 SM-6 대공 미사일들이 날아오는 미사일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좀 전에 한국 함대에서 벌어졌던 장면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미사일이 미사일을 쫓고, 폭발이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한국 때와 다르게 대함 미사일을 두 기의 미사일이 노리고 있었다.

일본 함대의 화망은 한국 미사일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쾅! 쾅! 쾅! 콰쾅!

날아오던 미사일들이 차례로 격추되었다.

그렇게 한참 미사일이 터져 나갈 때.

후방에서 다른 미사일과 다른 모습의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었다.

동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미사일 탄두에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마법진처럼 보이는 문양. 문양은 열기를 받는 듯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콰과과과!

날아오는 미사일을 향해 SM-2 대공 미사일 두 기가 차례로 달라붙었다.

첫발은 운이 좋게도 문양이 새겨진 미사일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쉽게도 두 번째 미사일은 바로 옆에서 근접 신관이 가동되었다.

쾅!

SM-2가 폭발을 일으켰고, 파편이 주위를 휩쓸었다.

문양이 새겨진 미사일도 화염과 파편을 뒤집어썼다. 어떤 미사일도 살아남지 못할 폭발이었다.

하지만, 화염 속에서 미사일이 튀어나왔다.

미사일은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있었다. 대신 미사일 표면에는 흐린 반투명 막이 펼쳐져 있었다.

저쪽 세상의 미국 국방성이 개발한 차세대 미사일의 방어막이었다.

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없는 일회용 방어막이었지만, 미사일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기능이었다.

"미사일 한 기가 스즈나미에 접근 중입니다. 스즈나미. 근접 방위 체계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나카토 소장이 표정을 굳혔다. 벌써 구멍이 뚫리다니. CIWS가 막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드르르르륵.

팰렁스가 분당 3000발의 탄환을 쏘아냈지만, 아쉽게도 미사일을 맞추지 못했다.

미사일은 그대로 스즈나미의 함교에 처박혔다.

쿠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배를 휩쓸었다.

함교가 박살 나고, 마스트가 꺾였다. 레이다가 튕겨 나가 연골을 때렸다.

화염이 치솟고, 배가 한순간에 움직임이 멈추었다.

"스즈나미 침묵! 함교에 직격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지휘실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보고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묘코에 두 기! 마키나미에 한 기! 휴유즈키에 두 기가 접근 중입니다! 계속 뚫리고 있습니다!"

대공 미사일을 뚫어낸 미사일들은 대부분 경훈이 가져온 미사일들이었지만, 그 와중에 러시아의 최신 미사일도 섞여 있었다.

러시아 미사일도 얕잡아볼 게 아니었다.

콰과과과광!

함대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

"묘고 대파!"

"마키나미 중파입니다!"

"휴유즈키 침몰 중! 휴유즈키 침몰 중입니다!"

"유타치는 방어 성공했습니다."

"세토기리 엔진실 피격. 항해 불가능입니다!"

미사일 세례가 지나간 뒤, 절망적인 보고가 계속 들어왔다.

나카토 소장이 넋이 나가버렸다.

몇 분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말도 안돼. 어째서..."

이럴 리가 없었다. 이 정도 미사일에 함대 방어망이 뚫리다니.

"2 호위 대군은?"

넋을 놓고 있던 그는 번뜩 다른 함대가 생각났다.

"2 호위대군은 극심한 피해를 당하고 후퇴 중입니다. 기함 아시가라 침몰. 기리시마가 기함을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나카토 소장은 휘청거리다 겨우 벽을 집었다.

"그. 그럼 한국 함대는 어떻게 되었지?"

"아직 건재합니다! 2 호위 대군의 미사일이 지금 막 적 함대에 돌입 중입니다."

으득.

나카토는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 놈들은 버티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된 이상 이번 미사일로 적 함대를 쓰러뜨려야 했다.

"가라! 조센징에게 죽음을 안겨줘라!"

나카토 소장은 피를 토하듯 서쪽 바다를 향해 외쳤다.

그 시각 경훈은 검을 들고 날아오는 미사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193화. < 왜란(4) >

나카토 소장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쪽에서 날아온 자위대의 대함 미사일들은 7 기동전단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하고 파괴되고 말았다.

67발이라는 작지 않은 양이었지만, 이미 두 배나 되는 미사일을 막아낸 함대였다.

더구나 한국 배들은 말도 안 되는 양의 미사일을 싣고 다니는 속칭, 미사일 구축함들이었다.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미사일 양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본 함으로 미사일 두 기가 접근 중입니다.

"이게 마지막이지?"

경훈이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네. 다른 미사일들은 모두 격추되었습니다.

주변에는 화염과 연기가 가득했다.

"좋았어. 그럼 끝내자."

경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날아오는 미사일을 바라보았다.

미사일 두 기가 조금 떨어진 상태로 함의 측면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미사일을 향해 골키퍼가 기관포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 700미터! 더 가까우면 배에 피해가 올지도 모릅니다! 마나 주입 최대입니다!

휴대폰에서 마나가 밀려 나와 검에 마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훈은 다가오는 미사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검에 담긴 마나가 쏟아져 나갔다.

쫘아아악!

파도가 갈라지고, 공기가 울었다.

마나 폭풍에 휘말린 미사일들이 공중에서 터져나갔다.

콰앙! 쾅!

마지막 폭발이 바다위에 펼쳐졌다.

배가 출렁거렸다.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타실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함장과 눈이 마주쳤다.

함장이 경훈을 향해 경례했다. 감사의 표시였다.

경훈도 손이 올라가려다가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습관은 무서웠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당장 미사일이 날아올 곳은 더 없었다.

-최영함 중파, 왕건함 후방 갑판 파손, 나머지는 작은 고장과 화재 정도입니다.

피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 함대는 괴멸당한 채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대승이었다.

쾅! 쾅! 쾅! 쾅!

경훈이 고개를 들었다.

바다에서의 싸움은 끝났지만, 하늘에서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를 않고 있었다.

슈우우웅!

쾅!

미사일이 날아가고, 전투기가 바다로 추락했다.

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국의 전투기들이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함 미사일을 모두 토해낸 전투기들이 상대방 전투기들에게 공대공 미사일을 퍼붓고 있었다.

태극 마크가 그려진 F-16이 바다에 추락하고, 일본의 F-2기가 미사일에 맞아 그 자리에서 터져버렸다.

-일본군이 조금 우세합니다.

기체 전체 숫자도 많고, F-35 같은 스텔스 기의 수도 조금 더 많았다.

한국 공군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수밖에 없었다.

콰과과과과과!

제 7 기동전단의 모든 배에서 대공 미사일이 날아올랐다.

적의 대함 미사일을 모두 제거한 지금, 미사일의 먹잇감은 하늘을 날고 있는 적의 전투기밖에 남지 않았다.

미사일들이 날아올라 교전을 벌이는 일본 전투기들에게 달려들었다.

콰과광!

추가 기울다 못해 무너져버렸다.

미사일 세례 한 번에 수십 대의 전투기가 산산이 부서졌고, 일본 전투기들은 꼬리를 말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전투기들을 향해 한국군 전투기들이 마지막 미사일을 발사했다.

콰과광!

동해 하늘에 마지막 화염이 피어올랐다.

일본 전투기들은 태반의 전투기를 잃고 본토로 후퇴를 했고, 연료가 부족한 한국 전투기들도 본국으로 기수를 돌렸다.

양국 전투기들의 귀환을 끝으로 전투가 끝났다.

일본의 대패였다.

2, 3 호위함대는 함대의 태반을 잃는 큰 피해를 보았다.

거기다, 일본 공군은 한번 싸움으로 주력 전투기를 반 이상 잃고 말았다.

한국 공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지만, 제7 기동전단을 거의 온전히 유지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대승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1, 4 호위함대가 남아 있고, 일본 공군도 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 싸움으로 이 전쟁은 어느 정도 결론이 난 것일지도 몰랐다.

와아아아아!

함정 전체에 함성이 일었다.

전투 지휘실의 병사나 장교도 모두 기쁜 얼굴이었다.

이런 대승이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전단장은 웃는 병사들을 보며 조금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각성자라…. 생각해보면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수백억을 들인 방어 시스템보다 각성자 한 명이 더 효과가 있었다.

방어에 써도 이 정도인데, 암살이나 공격으로 쓴다면.... 그는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전단장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기뻐할 때였다.

그리고, 일본 함대와 전투기들은 도망치고 있었지만, 한국은 아직 싸움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전탐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국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가리키는 레이다에 흰점이 가득 떠올라있었다.

"전부 쏟아부을 생각일까요?"

"이지스들을 작살 낸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 거겠지."

작전 참모의 질문에 전단장이 대답했다.

동시에 본국의 작전 사령부에서도 명령이 떨어졌다.

전단장이 소리쳤다.

"각 함정에 전달해라. 준비되는 함정부터 순항 미사일을 발사해라. 목표는 일본 본토!"

전단장의 명령은 전술 통제관을 거쳐 각 함정에 전달되었다.

잠시 뒤,

콰과과과과!

함대의 수직 발사대에서 다시 미사일들이 날아올랐다.

이번에는 대공 미사일도, 대함 미사일도 아니었다.

바로 적의 대지를 짓밟을 현무 3 순항 미사일들이었다.

미사일은 계속 쏘아졌다.

7 기동전단에서도, 본토의 미사일 발사대에서도, 추가로 떠오른 전폭기들에서도,

총 2,000여 기의 미사일이 일본 본토로 쏟아져 내렸다.

*

쾅! 쾅! 콰광!

일본의 수도 도쿄에 수십 년 만에 불비가 쏟아졌다.

민간인 시설을 타격하지는 않았지만, 정부 시설과 기차역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미사일에 박살이 났다.

콰앙!

콰아아앙!

위이이이이잉!

화염이 치솟고,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지하실과 방공호에 피해 있던 시민들은 공포에 질린 채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쿵!

수상관저 지하. 위기관리 센터에서도 폭발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2, 3 호위대군, 공군 전투기들이 귀환 중입니다.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말을 마친 통합 막료장이 고개를 숙였다.

총리가 고개를 숙인 막료장을 보며 이를 갈았다.

"실패라니. 그게 일본군 수장이 할 말이요?"

막료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최악의 보고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한국 미사일에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신칸센 역을 포함한 상당수 역이 파괴되었고, 화학 공장 단지와 정유 공장이 불타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일본에 도착한 탄도 미사일들은 레이다 기지들을 노렸다.

요격 미사일들이 최선을 다해 탄도 미사일을 요격해보았지만, 이지스함 태반을 잃은 지금, 마하 7의 속도로 낙하하는 탄도 미사일을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탄도 미사일들은 레이다 기지와 미사일 포대를 무력화 해버렸고, 그 뒤로는 1000기가 넘는 탄도 미사일과 순항 미사일이 일본 각지를 두들겨댔다.

국토 교통 대신의 말에 총리는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칙쇼! 조센징 놈들이! 당장 반격해! 우리도 미사일을 퍼부어주라고!"

총리의 고함에 방위 대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게…. 평화 헌법은 수정했지만, 아직 탄도 미사일이나 장거리 순항 미사일은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준비 기간에 함대지 미사일을 미친 듯이 뽑아내긴 했지만, 미사일을 지닌 함대는 조금 전 태반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은 미사일로 반격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의 방어망에 걸려 허무하게 사라질 뿐이었다.

총리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동해에서 벌어진 함대전에 그토록 기대를 걸었고, 함대의 패배에 분노를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해안을 돌고 있는 1, 4 함대로 반격을 하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이틀이면 한국 남해에 들어설 겁니다."

"그럼 반격은 이틀 뒤입니까?"

총리가 이를 갈면서 물어보았다.

총리의 말에 막료장과 방위 대신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잠시 뒤, 방위 대신이 크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반격은 무리입니다."

"뭐요?"

"정찰 위성의 사진으로는 한국 함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희 함대의 방공망을 뚫은 방법도 알지 못하는 지금으로서는 반격은 무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다른 함대를 들이대봤자 또다시 패전만 이어질 뿐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1, 4 함대를 후퇴시켜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한국을 항복시키겠다는 말이요! 설마, 이런 식으로 몇 년을 싸우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방위 대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힘을 보여주었으니, 잠시 휴전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군과 해군의 피해를 복구하기 전에는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이번 승리를 가져온 한국군의 비밀을 제외하더라도, 이미 해군과 공군의 전력은 기울어져 버렸다.

지금, 미사일이 군대와 기간시설을 부수고 있었고, 육군은 처음부터 한국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군의 일본 상륙을 막을 수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총리는 방위 대신을 미친 사람 보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일본제국이 싸움 한 번에 꼬리를 만다는 말인가! 우리 일본군이 이렇게 약했다고? 그런데 전쟁을 하자고 했다는 건가?"

전쟁을 벌이자고 한 것은 총리를 비롯한 매파 정치인들이었지만, 군의 책임자로서 막료장과 방위 대신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휴전 이야기를 꺼내면 전부 할복할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위기관리 센터에 모여있는 각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할복이라니, 2차 대전 때의 망령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맞다. 우리 잠수함들은 뭐하는 거지? 잠수함으로도 조센징 해군 따위는 충분히 다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잠수함들은 매복 중입니다. 기회를 노리는 중일 겁니다."

"좋아,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빨리 복구 계획을 세우고 다음 작전을 가져오시오!"

"하이!"

총리의 말에 모두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총리는 겨우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쿵!

그때, 다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또, 어디가 당한 거지?"

가까이서 들려온 진동이었다. 총리는 혹시 천황궁에 미사일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국토 교통성 대신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위쪽에서 오는 진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쿠쿠쿠쿵!

진동이 점점 커졌다. 포탄이 떨어지는 진동과 전혀 다른 진동이었다.

교통성 대신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뭔가 떠올린 것 같았다.

대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설…. 설마…. 괴물이 아직 아래에 있었던 건가?"

"괴물이라니?"

총리가 질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콰과과과광!

진동이 내부를 휩쓸었고, 거대한 입이 회의실 바닥을 뚫고 치솟아 올랐다.

톱니바퀴처럼 생긴 이가 수천 개가 박힌 괴물의 입이었다.

얼마 전, 후지산에서 튀어나와 도쿄를 휘젓고 사라졌던 그 지렁이 괴물의 입.

진화를 위해 도쿄 지하에 잠들었던 괴물이 쏟아지는 미사일의 충격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총리는 그제야 대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갸갸갸갸갸갹!

괴물은 회의실에 있던 사람 모두를 회의실 벽과 함께 씹어 삼켰다.

괴물은 그대로 지상까지 솟구쳤다.

쿠아아아아앙!

700억엔을 들여 만들어진 총리관저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 관저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쿠아아아앙!

다른 곳에서도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주택가 한가운데에도, 도쿄 천황궁에도,

전보다 훨씬 커진 괴물들이 미사일이 쏟아지는 도쿄를 휩쓸기 시작했다.

194화. < 왜란(5) >

울릉도 서쪽 수심 700m.

소류급 잠수함 한 척이 깊은 바닷속에서 조용히 떠 있었다.

잠수함은 엔진도 가동을 멈춘 채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 정보실(CIC)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고 음탐 장비가 내는 경고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핑. 핑. 핑. 핑.

바로 머리 위에서 지나가는 한국 함대의 능동 소나의 신호를 알려주는 경고음이었다.

다행히 점점 가까워졌던 신호음이 다시금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잠수함이 발각되지 않은 것이다.

선원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도 꽤 있었고, 온도가 바뀌는 수온약층 아래에서 엔진까지 끈 채로 숨어 있었지만, 백 퍼센트 안 걸린다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제 복수를 할 때가 되었다."

잠망경을 붙잡고 서 있던 히시오 함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수함이 숨어 있던 곳과 전장이 너무 멀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바다 위의 상황은 모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폭발과 배가 가라앉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었다. 그리고, 후퇴하는 함대에서 저주파로 공격명령이 내려졌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물 위를 지나가는 한국 함대를 보고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국 함대의 위치를 추적 중입니다."

"좋아, 어뢰 발사 준비."

"어뢰 발사 준비!"

함장의 명령에 부관들은 바로 어뢰실로 지시를 내렸다.

아직 숨어 있는 다른 잠수함들은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배가 제일 한반도 안쪽까지 들어온 잠수함이라,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함장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잠수함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어뢰관에 있는 모든 어뢰를 발사한 뒤에 바로 하푼 미사일로 전환한다. 그 뒤에 수면으로 올라가 하푼 미사일을 발사한다."

"알겠습니다!"

어뢰를 발사하면 한국 함대에 바로 들킬 게 분명했다. 어뢰를 쏜 뒤에 열심히 도망하는 게 정답이었지만, 함장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함대가 대패한 상황이었다. 한국 함대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함이 파괴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척이라도 더 끝장을 낼 생각이었다.

선원들도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작전에 임했다.

"발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작전관의 말에 함장이 입을 열었다.

"전 어뢰 발...

쿠구구궁.

하지만, 그의 명령이 끝나기 전에 잠수함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출렁거렸다.

모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끼이이익, 콰지지지직.

소리가 멈추지를 않았다. 잠수함 격벽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함장의 외침에 계기판을 지켜보던 조타병이 소리쳤다.

"외벽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함이 버티지 못합니다!"

콰지직, 푸아아악!

격벽이 우그러지며 물이 뿜어져 나왔다.

위이이이잉!

비상벨이 마구 울려대고, 붉은 등이 번쩍였다.

"물 위로 부상해! 부상!"

"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함장이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어뢰실 침수! 승무원실 침수...!"

모든 곳이 침수되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그리고, 배가 기울었다.

으아아악!

사람들은 복도로 굴러가고, 기둥과 장비를 잡고 매달렸다.

"맙소사..."

소나병은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잠수함에 있는 사람 중 그 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보는 화면에는 컴퓨터가 소리를 분석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것이 잠수함을 휘감고 있었다.

"설마, 바닷속에도 괴물이 사는 건가?"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콰지지직.

선체 외벽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물이 쏟아지고, 쏟아지는 물 사이로 언 듯 반투명한 빨판 같은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콰직.

잠수함이 반으로 갈라졌다.

쿵! 쿵!

수압으로 잠수함 곳곳이 터져나갔다. 함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순간 모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어뢰실에 있던 어뢰들과 하픈들이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함을 휘감고 있던 반투명한 촉수들이 깜짝 놀라 함을 놓아버렸다.

쿠르르르릉.

반으로 갈라진 잠수함이 부유물을 뿜으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촉수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촉수 위로 반투명한 거대한 삿갓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수함을 박살낸 것은 말도 안 되게 거대한 해파리였다.

해파리는 가라앉는 배를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한참을 올라왔는데, 뭔가 가져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해파리는 가라앉는 잠수함을 촉수로 휘감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동료들이 사는 둥지로.

***

제 7 기동전단은 무사히 동해 해군 기지로 돌아왔다.

일본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까 봐 걱정했던 함대였지만, 귀환하는 동안 잠수함의 공격은 없었다.

대신, 바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함대는 급하게 미사일을 보급하고, 레이다를 가동해 적의 반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일본의 반격은 없었다.

남해로 다가오던 2, 3 호위 대군은 선수를 동쪽으로 돌렸고, 전투기들도 한국을 향해 날아오지 않았다.

적 잠수함의 기습 공격도 없었다.

그날, 언론은 토픽을 때리고, 국민은 환호했다. 세계 여러 나라가 뜻밖의 결과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국군 사령부는 갑작스러운 정전(停戰)에 어리둥절했다.

아직 전쟁이 끝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괴물들의 난동을 들을 수 있었다.

쾅!

육군참모총장이 책상을 내려치며 열변을 토했다.

"당장, 일본에 상륙해야 합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 리 없습니다. 기계화 사단 몇 개만 풀어놓으면 일본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에서는 한창 난상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일본이 공격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는 무리입니다. 국제적으로도 호응을 받기 어렵고, 더구나 상륙 준비도, 물자를 운반할 배도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 상륙하자는 장군도, 반대하는 장관도 모두 밝은 얼굴이었다.

"끙, 민간 선박을 징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회는 놓칠 수가 없는데…."

육군참모총장은 몸이 달아있었다.

해군은 대승을 거두고, 공군도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동안 육군은 땅 위에서 전투를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육군은 일본이 상대가 안 되었다. 일본 땅 위에만 올라가면 전부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은 상륙할 가능성이 없어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방어작전만 열심히 구상했는데, 떡하니 대승을 거둬버린 것이다.

"상륙 작전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장군은 작전 계획부터 만들어 오세요. 그 뒤에 이야기합시다."

장군도 대통령의 말에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보다, 이번에도 EV의 도움이 컸다면서요."

"네, 해군의 말에 따르면 각성자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끙, 고맙긴 한데, 일이 더 복잡하겠군요."

이 소문이 퍼져나가면 어떻게 될지 도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 미사일도 효과가 엄청났습니다. 구입은 불가능할까요?"

복제가 가능하다면 한국의 미사일도 몇 단계는 올라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만 쓰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EV와의 약속을 어길 용기가 없었다.

그때였다.

상황실로 비보가 들어왔다.

"장보고급 잠수함 4척, 손원일급 잠수함 3척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잠수함들은 급하게 항구로 귀환 중입니다."

한참 밝았던 상황실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설마 일본 잠수함들이 공격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나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물음에 해군 참모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 밑에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두 알 것 같았다. 이제 일본 침공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다 밑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

한국 국민이 환호하는 그 시각.

일본 도쿄는 괴물에 의해 쑥대밭이 되고 있었다.

전에도 한번 등장했던 지렁이를 닮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괴물은 그때 괴물보다 몇 배는 커져 있었다.

괴물이 몸을 휘두르면 작은 건물들은 그대로 무너져내렸고, 고층 건물들도 자신의 몸을 휘감아 무너뜨렸다.

건물들의 피해는 괴물이 땅속을 지나갈 때 더 심했다. 괴물이 땅으로 파고 지나가는 지역의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대피소에 피해 있던 사람들은 인터넷과 방송에서 상황을 전해 듣고, 모두 도쿄 밖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도로는 막히고, 약탈이 벌어졌다.

수많은 메뉴얼이 준비되어 있고, 위기 상황에서도 메뉴얼대로 침착하게 움직이는 일본인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의 메뉴얼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질서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이끌 수상과 정부 관리들은 모두 수상관저에서 괴물에게 먹혀 버렸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폭도와 야쿠자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어갈 뿐이었다.

도쿄는 혼란만 가득할 뿐이었다.

다이고 관장은 긴 창을 들고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치솟는 연기가 관장의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비명이 들려오고, 자식들을 데리고 달아나는 가족도 보였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박물관 건물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언제 폭도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곳 도쿄 국립 박물관은 텅 비어 있었다.

직원들은 이미 대피하고 있었고, 가족들도 모두 도쿄를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박물관을 떠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이 박물관 관장을 지켜온 그였다.

일종의 좌천으로 박물관 관장이 되었지만, 오랜 시간 관장을 지켜오면서 그는 진심으로 이 박물관과 유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직원들을 모두 대피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킬 사람은 하나 있어야 했다.

"그냥, 죽을 자리를 이곳으로 잡은 걸지도 모르겠네."

어차피 중늙은이가 저 난장판 피난길에 끼어들기는 무리였다.

폭도들이 들이닥치면 적어도 이 센코쿠 시대의 유물 창으로 마지막 저항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박물관을 쳐들어온 것은 폭도나 야쿠자들이 아니었다.

쿠구구궁.

멀리서부터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 건너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카아아아아!

무너진 땅 아래에서 거대한 지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다이고 관장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이 찾아오다니.

평범한 늙은이인 관장은 공포에 질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출렁.

지렁이가 곧추세운 몸을 바닥에 떨궜다.

쿵!

도로가 깨져나가고, 주저앉은 관장이 충격에 튕겨 나갔다.

퍽!

몇 미터나 날아간 관장은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피가 쏟아졌다.

그 덕분일까.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픔도 느끼질 못했다.

박물관을 지켜야 했다. 야쿠자나 폭도라면 전지된 유물을 조금 빼앗기고 말 문제였다.

하지만, 괴물은 달랐다. 일본 역사가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괴물이 도로 위를 꿈틀거리며 기기 시작했다. 괴물은 관장을 향해, 박물관으로 다가왔다.

"멈. 멈춰."

박물관장은 겨우 창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수천 개의 톱니바퀴 이빨 하나만도 못한 창이었다.

드르르르륵.

지렁이 괴물의 이빨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은 박물관 건물을 통째로 갈아먹을 모양이었다.

괴물이 몸을 들어 올리고, 다시 아래로 내렸다.

쾅!

관장은 갑작스러운 충격파에 창을 놓쳤다.

지렁이 괴물도 옆으로 튕겨 나가 있었다.

쿠르르르.

빠르게 움직이던 이빨이 움직임을 멈추고,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지렁이 괴물의 머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관장은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남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주먹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늦을 뻔했네. 여기는 건들면 안 돼."

남자는 어이없게도 도로 위에 널브러진 지렁이 괴물을 꾸짖었다.

남자, 경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박물관에는 저쪽 세상에서도 구할 수 없는 한국 유물이 가득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유물들을 부수게 놔둘 수는 없었다.

195화. < 뉴욕 (1) >

관장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울컥, 피가 흘러나왔다.

"각, 각성자인가?"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든 일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상처가 심각합니다. 포션으로도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이브의 말대로였다.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각성자라도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교통부에서 나왔나? 이제야 겨우 유물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건가?"

-상처가 심해서 확신은 어렵습니다만, 다이고 도쿄 국립 박물관장으로 보입니다. 일치율 87%입니다.

관장의 옆에는 오래된 창이 떨어져 있었다. 이 창을 들고 박물관을 지키려 한 건가?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가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여 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훈은 진실을 이야기했다.

"아뇨. 한국 각성자입니다. 본국의 유물을 가져가려고 왔습니다."

감겨가던 관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경훈을 보고 괴물을 보았다. 그리고, 신음을 토해냈다.

"일본이 또 진 건가? 역사가 반복되는 것인가."

관장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직 일본이 항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뇌부가 전멸한 상황이었다. 항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장은 흐린 눈으로 도쿄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른 괴물의 괴성도 들려왔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쿄는 이미 끝나있었다.

약탈이 문제가 아니었다. 괴물이 움직이기만 해도 박물관의 유물은 모두 끝장이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박물관장은 책임을 완수하고 싶었다.

"한, 한국 유물을 가져갈 때, 우리 것도 가져가 주게. 이대로 괴물과 폭도에게 문화재를 잃을 수는 없어."

"한국에 가져가면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문화재가 그랬던 것처럼."

"괜, 괜찮아, 일본은 돌려받을 수 있을걸세. 부탁하네."

뜻밖의 부탁에 경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가져갈 수 있으면 다 가져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저장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의 책임자인 박물관장의 공식적인 부탁입니다. 이제 문화재들을 옮기는 데 걸릴 것이 없습니다. 이브는 한 술 더 떴다.

이 기회에 법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놓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툭.

그 말을 끝으로 관장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멈췄습니다. 사망했습니다.

경훈은 죽은 관장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드르르륵.

그가 고개를 숙이는 사이, 괴물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경훈이 눈을 떴고, 아공간에서 삼정검을 꺼내 들었다.

삼정검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나를 주입합니다.

이브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크르르륵.

괴물이 스르르 뒤로 물러섰다.

괴물은 저런 무시무시한 상대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지렁이 괴물은 자신이 나온 땅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싸울 준비를 하던 경훈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부우우웅.

드론 한 대가 괴물이 나온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이브가 보낸 드론이었다.

-멀어지고 있습니다. 추격하시겠습니까?

경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다른 괴물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한 마리만 잡아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을 벌인 이상, 도와줄 생각은 버렸다.

"아니, 문화재나 옮기자."

박물관장의 부탁을 받았으니, 확실하게 옮길 생각이었다.

경훈은 텅 빈 박물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한국과 일본의 전쟁은 외신들이 하루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

한일전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큰 이슈가 되었다.

한국이 종전을 선언한 다음 날 쓰여진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이 그 이슈들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 나는, 우리는 놀랐다. 한국과 일본의 전쟁에, 그리고, 한국의 승리에.

여러 나라가 떠들어댔지만, 두 동맹국 사이에 미국이 중립을 지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결과를 보면 그 중립이 옳았던 것인지는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이 전쟁은 너무 많은 뜻밖의 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가장 뜻밖의 사건은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버린 동해(일본해)의 교전이었다.

물론, 두 나라는 서로 자신의 나라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물론 대부분의 군사 전문가들은 육군을 제외한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동해(일본해)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런 예상을 모두 비웃어 주었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한국군의 각성자 활용과 신무기가 일본 함대를 무너뜨린 것이다.(아마도 이제 각성자에 대한 또 다른 토론이 시작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대한 강력한 한국의 미사일 폭격과 그에 따른 후지산 괴물들의 도쿄 등장.

일본으로서는 너무나도 비극적인 불운이었다.

한국이 종전을 선언한 지금도 일본 정부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도쿄 재해로 수상과 일본 관료들이 실종되고, 일본은 지금도 무정부 상태 그대로다.

다른 때였으면 전쟁이 끝난 지금 세계 각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출발했겠지만, 그 어떤 나라도 일본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세계는 지금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아직 다른 상선이 공격 받았다는 보고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잠수함들이 괴물에게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 언제 다른 배들이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제 과거의 전쟁은 사라졌다.

각성자와 새로운 무기, 그리고 괴물들에 의해 전쟁은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전쟁을 걱정할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언제 바닷길이 끊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세계가 또 다른 고민에 잠겨 있을 때, 한국은 전쟁의 승리에 한창 취해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 수백만이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고, 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차량은 경적을 울려댔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ㄴ대한민국 만세! 만세!

ㄴ만세! 만세!

ㄴ...

모든 기사의 게시글과 게시판에는 환호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ㄴ젠장, 괴물들만 아니었으면 일본 침공할 수 있었는데….

ㄴ일본놈들 빨리 정부 만들어서 항복해라!

ㄴ만세!

ㄴ근데, 각성자들이 정말 전쟁에 도움이 되는 거야? 괴물한테만 효과 있는 거 아니었어?

ㄴ괴물한테 효과 있으면 사람한테도 효과 있는 거지 뭐.

ㄴ하지만, 내가 아는 각성자는 총도 못 막던데….

ㄴ각성자가 다 똑같냐? 너 같은 놈 10명이 몰려가도 권투 선수 하나도 못 이기잖아.

ㄴ팩폭 금지. 애 울겠다.

ㄴ만세! 만세!

ㄴ그런데, 그 신무기가 뭘까? 우리나라가 그런 것도 만들어낼 수 있나?

ㄴ될 리가 없지. 수입한 걸 껄? 러시아에서 사 온 거 아냐?

환호 속에 벌어진 싸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ㄴ그래도 군인들 많이 죽었다며. 군인들께 감사드립시다.

ㄴ잠수함에 있던 군인들이 제일 안타깝지.

ㄴ정말, 이제 바다에도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걸까?

ㄴ아직, 배들은 무사하잖아.

ㄴ대한민국 만세!

ㄴ배는 놔두었으면 좋겠다. 배까지 못 다니면 이제는 북한을 통하는 길밖에 없어.

ㄴ그나마 우리는 북한 길이라도 뚫어서 다행이지, 섬나라들은 난리 날걸?

ㄴ영국이나 일본 말이지....

ㄴ...

ㄴ만세! 만세!

군인들에 대한 위로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기쁨을 나누는 것은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호텔 컨벤션 센터의 대형 홀에서는 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진샤웨이가 회장으로 있는 [JK POTION] 사가 마련한 위로 만찬이었다.

참석자는 이번 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각성자들과 각성자 협회의 이사들, 그리고, [JK POTION]이 초대한 각성자들이었다.

"근데, 난 왜 초청된 것인지 모르겠네요."

정규의 인사에 은혜가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어색한 정장을 입고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홀에는 각성자들이 가득했다.

안내하고, 서빙을 하는 직원들은 일반인들이었지만, 손님 중에서 각성자가 아닌 사람은 그녀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건, 은혜양이 케이씨 일을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난감한 말에 정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케이? 케이하고 아는 분인가요?"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러시아 청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러시아어는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영어에 은혜는 진땀을 흘렸다.

다행히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정은혜. 한국에서 케이의 일을 돕는 분이야."

기름칠한 듯한 영어가 옆에서 들려왔다.

멋진 중년의 라틴 남자가 그녀를 러시아 청년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녀석은 바실리입니다. 케이가 목숨을 구해줘서인지, 케이 이름만 나오면 바로 달려오죠."

그리고, 한국말로 러시아 청년을 은혜에게 소개했다.

은혜도 옆에 선 라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전에 경훈이 소개해줬던 각성자였다.

"마르셀로씨 반가워요!"

은혜가 그를 보고 기뻐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오긴 했지만, 아는 각성자도 없던 그녀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였던 것이다.

마르셀로가 힐끗 안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가워하는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전, 바실리와 할 말이 있어서요. 좀 있다 오도록 하죠. 마담."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바실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은혜는 울상이 되어 정규를 돌아보았다.

"정규 씨는 어디 볼일 있는 거 아니죠?"

"아, 그게 협회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정규가 난감한 얼굴로 슬슬 뒤로 물러섰다.

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잘못 온 모양이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두고 정장을 차려입고 왔건만, 같이 있겠다는 사람도 없다니.

"쳇! 이렇게 되었으니, 신나게 먹어주고 돌아가겠어."

은혜가 팔을 걷어붙이고 쌓여있는 음식을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이었다.

한 여성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왜 여기 있어요."

은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한테 하신 말인가요?"

"그럼요."

하지만, 은혜는 믿을 수 없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성은 너무도 유명한 여성이었다.

이 파티의 주체자인 [JK POTION] 의 회장. 진샤웨이였다.

"하지만, 제 자리가 여기라고."

그녀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어서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진샤웨이가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전투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각성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은혜는 진샤웨이의 힘에 질질 끌려갔다.

"아, 죄송합니 다. 아직 안 오신 줄 알았습니다."

그녀가 다가가자, 테이블 주위에 있던 사람 한명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사과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 경훈을 찾아갔던 [World Gold]의 대표인 류이링이었다.

"아니, 사과하실 건 없는데…."

그 뒤로 몇 번 더 보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저런 과한 인사 때문에 은혜는 그녀 보기가 어색했다.

"류이링은 알고 있죠? 케이, 아니 경훈씨가 허락했으니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줄게요."

테이블 주위에는 류이링 외에 다른 사람들도 앉아 있었다.

어려 보이는 아랍 소년과 다른 중국 여자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반가워요. 혜린이라고해요."

혜린이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은혜는 SG 전자 회장의 인사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으앙! 경훈씨는 어디 있는 거야!'

*

파티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간, 경훈은 다른 세계에 가 있었다.

그는 무장을 갖춘 채로 뉴욕 외곽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로봇. 그리고, 창을 든 소녀가 서 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일행은 오늘 뉴욕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베일리가 마천루를 보고 크게 짖었다.

멍!

196화. < 뉴욕(2) >

워싱턴에서 뉴욕까지는 가는 길은 경훈은 참여하지 못했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를 거쳐 뉴욕 외곽까지, 이사벨과 셰인, 베일리만 움직인 것이다.

일행은 이사벨이 뉴욕을 떠나 지나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그녀가 워싱턴까지 올 때는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셰인과 베일리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 같은 길이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 앞에 도착하니, 그녀는 다시 두려움이 솟아올랐다.

수많은 괴물, 그리고 도시를 지배하는 렛맨들의 군주.

오랜 시간 어떻게 이 도시에서 버터냈는지 지금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사벨은 긴장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셰인이 어깨에 베일리를 올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일리가 이사벨을 보고, 혀를 내밀었다.

헥, 헥,

베일리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은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고, 이상한 카우보이 흉내를 내는 로봇 아저씨. 그는 지금도 머리 위에 카우보이모자를 얹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 엄마 외에는 어렸을 때 보았던 어떤 어른보다 좋은 아저씨이자 스승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위이이잉.

드론이라고 했었나? 날아다니는 로봇이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이브 언니의 목소리였다.

셰인과 비슷한 로봇이라고 하던데, 그녀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사벨이 보기에는 이브는 먼 곳에서 마이크로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베일리와 셰인을 보면서 긴장이 가라앉았다.

"네.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힐끔 셰인 너머를 훔쳐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좀 무서운 아저씨가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만에 만난 살아있는 인간이자 각성자였다. 하지만, 자주 보지 못해서 아직은 좀 서먹하고 무서웠다.

매번, 저 아저씨는 다른 세상에 볼일이 있다면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자주 볼 수 없어서 아쉽기는 했지만, 돌아올 때마다 엄청난 물건들을 가득 가져오는 산타클로스 같은 아저씨였다.

이번에도 멋진 선물을 가져 왔다.

이사벨은 소음기가 달린 기관단총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쓰기 편하게 총구도 짧고, 크기도 작았다. 더구나 마나석이 박혀 있어서 웬만한 몬스터들은 이 총만으로도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창을 더 많이 사용하겠지만, 이번 선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정말, 다들 이 모양이니, 제대로 된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도 좋아서 바로바로 흡수하는데 가르치는 것은 모두 괴물 죽이는 방법뿐이라니....]

이래서야 기껏 저쪽 세상에 넘어가게 되어도, 엄청나게 고생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브가 따로 가르칠 시간도 없었다. 경훈과 같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브는 그녀에게 타블렛과 엄청난 용량의 이동 하드를 건네주었다.

[제가 준 타블렛은 잘 보고 있죠?]

"네. 셰인하고 자기 전에 한 번씩 보고 있어요."

[셰인하고요?]

이브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동 하드에는 여러 가지 기초 상식들과 어린이 교육 동영상, 그리고 저쪽 세상에 흥미를 느낄만한 드라마와 영화, 만화들을 넣어두었다.

예상보다 셰인은 좋은 선생님인 것 같았다.

"네, 못 봤던 서부영화가 많다고 무척 좋아했어요. 밤마다 영화 많이 봤어요."

[.....이 바보 로봇이!]

삐이익!

갑자기 셰인이 안테나를 잡고 쩔쩔맸다.

베일리가 로봇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멍! 멍!

이사벨이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털이 보슬거렸다.

모두 재미있고 좋은 분들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저 뉴욕이 무섭지 않았다.

*

-이사벨의 표정이 다시 좋아졌네요.

"수고했어."

-바보 카우보이 덕분입니다.

경훈은 슬쩍 웃었다.

솔직히 이번 뉴욕행은 이사벨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떠났던 도시를 다시 찾는 것이었고, 오래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하겠다고 했으니, 경훈은 위험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였고, 성장을 해야할 동료였다.

"가볼까?"

"네!"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테나를 만지던 셰인도 슬쩍 이사벨을 돌아보았다.

일행은 뉴욕시 안으로 진입했다.

뉴욕은 큰 도시였다.

맨해튼을 포함한 다섯 개의 자치구도 무척 컸지만,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뉴욕 대도시권은 한국의 수도권과 크기도 인구도 비슷했다.

인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지만….

일행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드론들이 소리 없이 날아다니며 사방을 감시했고, 일행은 모두 은신 망토를 두르고, 괴물이 없는 곳을 찾아 이동했다.

드론의 감시와 경훈의 마나 감지, 그리고 베일리의 감각이 합쳐지자 대단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다.

뉴욕 외곽에서부터 허드슨강 변까지 오는 동안 괴물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강변에 도착한 일행은 강변에 세워진 낡은 요트 위에 숨었다.

이사벨은 놀란 눈으로 강 건너 맨해튼 마천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몬스터와 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이곳까지 오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의 지하도시가 저기 맨해튼에 있었다는 거지?"

경훈의 물음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 빌딩 지하실, 주차장 등과 지하철을 연계해서 지하도시를 구축하는 것은 꽤나 괜찮았던 생각 같습니다.

맨해튼 요새 도시 City는 다른 City와 달리 땅 위에 있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는 이유였다. 그 생각은 적중에서 미국에 있는 모든 City가 멸망한 뒤에도 최후까지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결국 망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이사벨이 신기한 얼굴로 귀를 두드리고 있었다. 무선 이어폰으로 들리는 이브의 목소리가 신기한 것이었다.

경훈은 마지막으로 이사벨을 확인했다. 굳어있는 얼굴이었지만,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이 강을 건너는 문제만 남았는데…."

철썩!

역시, 허드슨 강도 한강과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괴물 물고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강에서 본 것과 좀 다른 모습이었다.

"몰래 지나가기는 무리죠?"

"낙동강에 있는 놈하고 비슷한 놈이면 물 위에 뭐가 지나가기만 해도 확인할 거야."

경훈은 셰인의 대답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잡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조용히 잡기는 무리고."

셰인과 경훈의 대화에 이사벨이 눈을 끔벅였다. 이해가 안 되는 대화였다.

"저, 혹시 강을 건널 생각인가요?"

"맨해튼을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하니까. 아, 맞다. 어떻게 강을 건넜어? 특성으로 건너기에는 강이 너무 길지 않아?"

이사벨은 황당한 표정으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특성으로 강을 건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말, 이들은 저 강에 있는 괴물을 잡고 강을 건널 생각인 모양이었다.

"강을 건너는 지하 도로가 있어요. 그리로 지나다녔어요."

그녀가 있었던 벙커는 맨해튼 밖에 있었고, 일행은 이미 그 벙커를 지나왔다.

이미 물에 잠겨서 쓸모없게 된 벙커였다. 이사벨도 자신이 살았던 벙커에 미련이 없었다.

그녀는 혼자 지내는 동안 최대한 맨해튼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식량을 구하려면 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잡을 수 있는 작은 동물들은 그나마 맨해튼 벙커에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안 잠겼어?"

-링컨 터널이 무사했군요. 괜한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될듯합니다.

일행은 바로 해저 터널의 입구로 향했다.

큰 운동장 아래로 세 개의 터널이 보였다. 2차선 도로가 각기 연결된 터널들이었다.

"가운데 통로는 낡아서 물에 잠겼어요. 북쪽하고 남쪽 통로만 무사한데 전 주로 남쪽 통로로 다녀요."

이사벨이 일행을 안내하며 말했다.

말이 많은 소녀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자기가 나서게 되니 필요한 말은 제대로 했다.

터널 앞까지 버려진 녹이 슨 차들이 즐비했고, 어두운 터널 안은 크게 휘어져 강으로 향해 있었다.

이끼가 낀 터널은 굴러다니는 차들처럼 버려진 흔적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브는 일행을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우선 드론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위이이잉.

검은 드론들이 터널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500m 거리마다 드론을 배치하겠습니다.

통신의 연결을 위해, 그리고 비상시에 남은 드론의 탈출을 위해서였다.

검은 드론들이 소리 없이 터널을 지나갔다.

드론의 적외선 카메라가 터널 안을 살폈다.

터널 안도 밖과 다르지 않았다. 차들이 군데군데 버려져 있었고, 벽과 차들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중간에 쥐 인간들이 지키는 곳이 있어요. 전 특성으로 그곳만 피해 다녔어요."

이사벨은 밖에서 그동안 자신이 다녔던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브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해저 터널 중앙에 렛맨들이 모여 있었다.

"항상 둘 셋 정도가 이상한 구멍 주변에 서 있었어요."

"구멍이라면 설마, 그 물 빨아 먹는 지렁이 괴물 아냐?"

"물 빨아 먹는 괴물이라뇨?"

경훈은 한강을 지나올 때의 경험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경훈은 해저 지하철 터널을 지나다가 물을 흡수하는 지렁이 입으로 빨려 들어가 엉덩이로 뿜어져 나왔었다.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브도 그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에 흐르는 작은 실개천이 꿈틀거리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역시, 이 터널도 무사한 이유가 있었다.

"물고기 괴물을 잡고 강을 건너자."

이브의 말을 들은 경훈은 질겁한 얼굴로 다시 강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여 있는 렛맨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열 마리가 넘는 일반 렛맨과 몇 배는 덩치가 큰 엘리트급 렛맨이 구멍을 둘러싸고 있었다.

거기다 엘리트급 렛맨은 구멍을 향해 거대한 해머를 치켜들고 있었다.

누군가 신호를 하면 바로 구멍을 내려칠 기세였다.

괴물들은 누군가 터널을 지나가면 구멍을 터트릴 모양이었다.

이브의 말을 듣고 경훈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자살 특공대냐."

옛날에 본 영화에서도 이 해저 터널이 물에 잠겼었다. 그때 대머리 배우가 그 터널에서 탈출했었는데….

"아니, 잠깐, 그게 왜 함정이 되지?"

경훈이 반지에 마나를 주입했다.

그의 손위로 아공간이 펼쳐졌고, 그는 그 안에서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부력 조절기, 호흡기 세트, 다이빙 의류, 후드등, 잠수 장비 일체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그날 이후로 절대 안 잊어먹고 챙겨 넣었었는데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써. 이사벨이 쓸 것도 있어. 아, 셰인은 방수되죠?"

경훈의 말에 일행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 베일리가 문제군. 넌 어떻게 할래. 호흡기 세트 끼고 따라올래. 강을 날아서 건널래?"

멍?

경훈의 말에 강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뒤, 다른 드론들은 모두 터널을 빠져나왔고, 홀로 남은 드론이 소리 없이 괴물들을 당해 달려들었다.

마나석이 장착된 드론이었다. 그리고, 이 드론은 셰인의 마나 활용을 보고 이브가 개조한 드론이었다.

드론 아래에는 마나 폭약이 장착되어 있었다.

케엑?

갑자기 달려드는 드론에 괴물들이 모두 놀라버렸지만, 드론은 괴물들을 지나쳐서 그래도 구멍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구멍 속에서 마나 폭약을 터트렸다.

쾅!

폭음이 울고,

쿠에에엑!

물을 뽑아내던 괴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구멍에서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물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크아아악!

괴물들이 놀라 달아났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물이 더 빨랐다.

강물이 터널을 휩쓸었다.

197화. < 뉴욕(3) >

맨해튼.

링컨 터널의 출구에 렛맨들이 모여 있었다.

얼마 전, 군주의 지시로 이곳에 배치된 렛맨들이었다.

이 괴물들은 터널을 통해 들어오는 자들을 잡아내기 위한 병력들이었다.

렛맨들은 남쪽과 북쪽 터널에서 터널 내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해를 싫어하는 렛맨들이었다. 괴물들이 터널 밖으로 나와 있을 리가 없었다.

괴물들은 해가 비치지 않는 곳까지 들어가 어두운 터널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남쪽 터널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지금 입구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터널 내부에 있던 동족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 물이 찼으면 모두 죽었을 게 분명했다.

중앙 터널은 전부터 물에 잠겨 있었고, 이제 남은 터널은 북쪽 터널뿐이었다.

괴물들 대부분은 조금 떨어진 북쪽 터널로 이동했다. 몇몇 괴물들만이 남쪽 터널에 남아 차오르는 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부글부글.

차오르는 물 위로 물방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무기를 움켜쥐었다.

푸학!

물 위로 무언가 치솟아 올랐다.

부우웅!

커다란 해머가 아래로 떨어졌다. 엘리트급 괴물이 내려친 해머였다.

콰앙!

물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살점과 피가 흩날렸다.

하지만, 해머를 내려친 렛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금 떡을 만든 것은 침입자가 아니라, 물에 떠밀려온 렛맨이었기 때문이었다.

캬악.

괴물이 눈살을 찌푸리며 동족들에게 치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지시를 따르는 렛맨은 없었다.

괴물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 모여 있던 동족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동족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녹색의 해조를 뒤집어쓴 로봇과 잠수복을 입은 작은 인간이 서 있었다.

로봇이 검을 흔들어 피를 뿌렸고, 잠수복을 입은 소녀가 괴물을 향해 창을 치켜들었다.

소녀가 엘리트 렛맨을 향해 달려들었다.

푹!

*

잠시 뒤, 남쪽 터널을 빠져나온 셰인과 이사벨은 한 블록 떨어진 북쪽 터널 출구로 향했다.

둘이 북쪽 터널 앞에 도착하자, 터널 안에서 잠수복을 입은 경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훈은 셰인과 이사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하셨나 보네요."

"뒤에서 기습이었으니까. 이제 이사벨도 싸우는 데 능숙해졌고."

셰인이 몸에 들러붙은 해조류를 때며 대답했다.

"그쪽도 문제는 없었나 보군?"

"네, 예상보다 숫자가 많았지만, 그래도 어렵진 않았습니다."

경훈이 말하는 사이에 이사벨이 북쪽 터널을 확인해 보았다.

"와아…."

그녀는 어두운 터널 안을 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수십 마리의 렛맨들이 터널에 널브러져 있었다.

엘리트급 렛맨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 많은 몬스터를 처리하는 동안, 밖에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경훈의 실력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중앙 터널로 넘어온 덕분입니다.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남쪽 터널을 잠기게 했지만, 꼭 남쪽 터널로 넘어올 이유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잠겨 있던 중앙 터널로 넘어오는 게 기습하기는 훨씬 좋았다.

-그런데 중앙 터널을 지나올 거면 남쪽 터널은 터트릴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씩 웃었다.

"일을 줄이기 위해서였어."

그는 아공간에서 저격용 총을 꺼내 소음기를 연결했다.

그리고, 어두운 북쪽 터널 안을 겨냥했다.

크아아앙!

터널 안에서 괴물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바로 북쪽 터널 내부에서 배수펌프 지렁이를 지키던 괴물들이었다.

푹! 푹! 푹!

작은 총소리와 함께 괴물들의 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리고, 8번의 사격이 끝나자 터널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괴물이 양쪽 터널에서 튀어나오면 곤란하잖아."

저격총을 아공간에 다시 집어넣으며 경훈이 말했다.

-아, 네 ....

의심이 들었지만, 이브는 주인의 말을 수긍해주었다.

어쨌거나, 일행은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사벨과 경훈은 잠수복을 벗어 아공간에 집어넣었고, 그 사이 베일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강아지는 일행과 함께 터널을 잠수하는 대신에 강 위를 날아서 넘었던 것이다.

멍! 멍!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온 강아지는 셰인의 어깨에 앉으려다 질겁한 얼굴로 이사벨에게 날아갔다.

이사벨의 품에 안긴 베일리는 계속 앞발로 코를 문질러댔다.

-터널 속에 오래 갇힌 물은 냄새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보다, 베일리는 강을 건너는 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야."

경훈이 고개를 돌려 마천루를 바라보았다. 낡은 맨해튼 고층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에서 보는 시선들이 없었으면 베일리가 변신해서 차를 들고 날아 넘어도 되었을지도 몰랐다.

-맨해튼을 떠날 때는 베일리의 도움을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움직여야 하지 않아? 언제 괴물들이 더 몰려올지 모르는데."

다른 때와 달리 셰인이 먼저 서둘렀다.

"남쪽으로 가면 City로 향하는 지하철 역이 있어요."

이사벨의 말에 일행은 바로 출발했다.

해가 떠 있는 맨해튼은 무척이나 을씨년스러웠다.

건물 밖은 버려진 자동차와 깨진 타일들, 그리고 부서진 아스팔트 사이로 자라는 식물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속지 않았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쥐 몬스터들이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요. 이제는 지하에서 살지도 않는데 아직도 해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이사벨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경훈은 건물들 안에 넘실거리는 괴물들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수가 아닌데?"

"밤이 되면 돌아다니는 쥐 몬스터들로 엄청 시끄러워져요. 멀리 있던 제집에서도 들렸어요."

이사벨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나마 낮에는 돌아다니는 몬스터가 없어서 몰래 다닐 수는 있었어요..."

이사벨은 시무룩해졌다. 자신의 힘만으로 다녔던 것인지 이제는 확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도 감시할 수도 있다는 걸까?"

은신 망토를 입고, 그늘진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숨었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지하철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방해하는 괴물은 없었다.

34번가 스트리트 펜 스테이션.

이사벨이 안내한 곳은 뉴욕에서 가장 복잡했던 지하철역 중의 하나이자, 다른 세상에서는 지금도 복잡한 역인 지하철 역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역은 폐허의 흔적만 가득했다.

일행은 이사벨을 따라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

계단을 내려가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눅눅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지하철역에 가득했다.

"이 아래는 쥐 몬스터들이 내려오지 않아요."

일행은 긴장을 조금 풀었다.

"여기는 박쥐 같은 건 안 살아?"

경훈의 질문에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박쥐는 없어요. 방황하는 지하 괴물들과 괴물로 변하지 않은 쥐들은 많이 있지만…."

아쉽게도 이 지하철에서는 구아노를 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잠실 주변의 지하철 역에서 열심히 캐내는 중이었지만, 마나 폭탄 수요를 감당하기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매번 행운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입맛을 다셨다.

멍! 멍!

그때, 베일리가 넓은 지하 광장을 보며 짖어댔다.

크르르르릉.

어둠 속에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이 없는 들개와 흰 눈이 세 개 박혀 있는 고양이, 그리고,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까지.

-수가 많네요. 이걸 어떻게 다 피해 다녔어요?

"혼자 다닐 때는 정말 조심, 조심 다녀서 잘 안 들켰어요."

이렇게 괴물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온 것을 본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들키면 특성을 써서 피했고요."

바닥을 뚫고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으니,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방법으로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이유도 없고.

경훈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경훈의 몸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베일리가 재빨리 이사벨의 품에 뛰어들었다.

낑.

다가오던 괴물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하 광장은 텅 비었다.

괴물들이 모두 몸을 피한 것이다.

이사벨이 경훈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녀도 경훈이 뿜어내는 마나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 이상으로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괴물들을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게 하다니. 그녀가 바로 꿈꾸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힘내자! 이사벨 너도 할 수 있어."

그녀는 베일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전 일로 이사벨에게 점수를 딴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이사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괴물들이 있던 광장을 지나, 일행은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철 승강장이 있는 곳이었다.

승강장은 예상했던 모습과 달랐다.

계단 입구에 철창이 처져 있었고, 그 뒤로 철판과 모래주머니로 만들어진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는 낡은 시설들이 가득했다. 마치 오래된 군대 하역장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하역장은 부서져 있었다.

철창은 휘어져 있었고, 참호는 망가져 있었다. 상자들은 바스러져 있었고, 장비들은 녹슨 채 굴러다녔다.

"전에는 이 역도 무척이나 활기찼어요."

이사벨이 슬픈 눈으로 부서진 승장강을 바라보았다.

이 역은 지하철역들과 빌딩 지하층을 이어 만든 뉴욕 City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외부와 차단하지 않은 몇 개 안 되는 역이었다.

City가 아직 유지되었을 때 이 역을 통해 사냥팀들이 외부로 나가 사냥을 했고, 그들이 가져온 사냥물로 City의 부족한 식량을 충당했었다.

그녀 가족과 로스앤젤레스 City 생존자들도 이 역을 통해 지하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역이 쥐 몬스터들이 처음으로 공격한 곳이기도 했어요."

바닥과 벽에는 검게 변한 피들이 가득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때 벌어진 일들을 일행에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렛맨 괴물들은 이 역에서부터 시작해 지하도시를 한 구역씩 점령해 나갔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역의 소식이 하나둘 끊어졌다.

괴물들을 막아내던 어른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먹을 것이 줄어들고, 공포에 질린 어른들은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결국 싸우던 몬스터들을 먹고 괴물이 되었다.

미쳐 날뛰는 오염된 어른들과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소리.

그녀를 향해 소리치던 엄마, 아빠.

그리고,

-정신 차려요!

멍! 멍!

갑작스러운 소리에 그녀는 과거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사벨은 양손에 창을 쥔 채로 승강장 가운데 서서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뉴욕 City. 인류의 마지막 희망!]

낡은 벽에는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자유의 여신상 그래비티와 문구가 남아 있었다.

멍.

베일리가 그녀 발아래서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셰인 아저씨도 경훈 아저씨도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돌아갈까?"

그녀를 지켜보던 경훈이 입을 열었다.

이사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한 어른들과 있는 바람에 긴장이 풀어져 버렸다.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신 차렸어요."

경훈은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셰인은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베일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 옆을 뛰어다녔지만, 이사벨은 굳은 얼굴로 승강장 아래로 내려갔다.

철도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사벨이 남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다섯 정거장을 가면 월드 트레이드 센터 구역이 있어요. 뉴욕 City의 중심지이자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이에요."

그리고, 도망친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어두운 터널을 노려보았다.

198화. < 뉴욕(4) >

덜컹덜컹.

가족을 태운 궤도차가 철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바퀴 위에 좌석만 달은 궤도차였지만, 마나석 엔진을 달아서 철도 위를 빠르게 달려갔다.

"너무 깜깜해. 이제 우리 여기서 살아?"

엄마는 칭얼거리는 딸을 품에 안았다. 인형도 강아지도 버리고 온 딸이었다.

더 좋은 것을 못 해줄망정 이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게 만들다니, 엄마로서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는 안전할 거란다. 먹을 것도 많고, 친구도 많이 만들 수 있을 거야."

"친구는 베일리만 있어도 되는데…."

딸은 작게 중얼거렸다. 남아메리카를 도는 먼 여행을 했는데도 딸은 아직도 강아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여기 보렴. 조금 전에 지나간 역은 밀하고 채소를 키우는 역이라고 했지? 이제 지나가는 역은 돼지하고 양을 키우는 역이란다."

우울해지려는 아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아빠가 빠르게 지나가는 역을 가리켰다.

복잡한 승강장 위에 돼지들과 양, 그리고 닭들이 들어있는 철 케이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불쌍해..."

아이는 철 케이지에 갇혀 있는 가축들을 보며 더 안 좋은 표정이 되었다. 역효과였다.

아이 엄마는 아빠를 노려보았고, 아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너도 힘을 가지게 되었잖니. 네가 힘을 키워서 모두를 구해주면 되는 거야. 여기 갇힌 동물도 밖에 풀어주고, 사람들도 지상에 나가 살게 하고, 베일리도 다시 만나러 가면 되잖아."

엄마의 말에 꼬마 이사벨이 힘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할 수 있어."

그녀의 말에 엄마는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꼭 안았다.

*

이사벨은 베일리를 꼭 안았다. 강아지는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조금 전, 그녀는 처음 이 철도를 지나갔던 일이 떠올랐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었지만, 바로 어제처럼 기억났다.

부모와 함께 마나석 궤도차를 타고 갔던 그때와 달리, 그녀는 베일리를 안고 새로운 동료와 함께 철도 위를 걷고 있었다.

일행 앞에 새로운 역이 다가왔다.

[카날 스트리트]

빛이 없는 승강장이었지만, 그녀는 무슨 역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농작물을 키웠던 역이에요. 괴물들에게 이 역을 빼앗긴 뒤에는 빵이 나오지 않게 되었어요."

그녀는 아빠가 들려준 설명을 일행에게 다시 해주었다.

승강장 주변에는 전투 흔적이 가득했다.

부서진 벽과 참호, 말라 죽은 식물들과 흩어진 흙. 흙 사이로 커다란 쥐들이 빠르게 달아났다.

이사벨이 쥐들을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사냥하던 습관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여기도 사체가 없군."

"네. 몬스터들과 뮤턴트들은 인간의 시체를 좋아하니까요."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녀는 일행을 향해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동물들을 키우던 다음 역부터는 조심해야 해요. 그 역부터는 뮤턴트들의 영토에요."

이사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렛맨 괴물들이 지하도시를 궤멸시키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간 뒤, 이 지하도시는 렛맨들에 밀려 내려온 다른 괴물들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 괴물들도 뉴욕 City 제일 심부에 자리한 역으로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곳은 인간을 저버린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몬스터 고기를 먹고 동료들을 죽인 뮤턴트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사벨의 말대로 다음 역인 풀른 스트리트 역 승강장은 뮤턴트들이 지키고 있었다.

아직,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뮤턴트들도 있었지만, 아예 옷을 벗고 네발로 뛰어다니는 뮤턴트들도 많았다.

옷을 입지 않은 뮤턴트들은 이제 생김새도 더는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의 부리같이 날카로운 부리가 있는 뮤턴트도 있었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 뮤턴트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습도 움직임도 더는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느슨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 구역은 맨해튼 군주가 인정한 그들의 땅이었다.

가끔 숨어드는 좀도둑만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들의 왕국을 침범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퍽, 퍽, 퍽….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뮤턴트들은 뒤에서부터 하나둘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퍽, 퍽!

역 주변에 있던 뮤턴트들이 알아차린 것은 기둥 뒤에 있던 뮤턴트들만 남았을 때였다.

끼이익!

놀란 뮤턴트가 비명을 질렀고, 뮤턴트 하나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고 했다.

퍽!

하지만, 그 뮤턴트도 기둥을 벗어나자마자 머리가 터져버렸다.

전부, 경훈의 저격이었다.

놀란 뮤턴트들이 기둥 뒤에 숨어 능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가시가 난 뮤턴트는 가시가 더 길어지고, 몸에 점막이 가득한 뮤턴트는 벽을 타고 올라가려고 했다.

크르릉.

하지만, 그들은 반대편 어둠에서 등장한 날개 달린 사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날개가 펄럭였고, 사자의 앞발이 휘둘러졌다.

뮤턴트들이 특성을 발휘할 새도 없었다.

베일리가 다시 강아지로 돌아오자, 어둠 속에 숨어있던 셰인과 이사벨이 은신 망토를 내렸다.

둘은 승강장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여차하면 도와주려고 했었지만, 경훈과 베일리 선에서 일이 끝나버렸다.

셰인이 승장장 위로 뛰어올라,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저 계단만 막으면 되는 거겠지?"

"네, 다른 계단은 마지막 침공 때 무너졌어요."

이사벨이 셰인 뒤를 따라오며 대답했다.

그녀 말대로 승강장 반대편에 있던 다른 계단은 돌무더기에 덮여 있었다.

셰인이 계단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타타타타.

멀리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셰인이 카메라를 갸웃거렸다. 계단도 계단 위로 보이는 지하 광장도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이 지하철역이 지하도시 사람들을 먹일만한 가축들을 키울 만큼 컸나?"

"역도 작지 않지만, 근처 다른 건물 지하하고 연결해서 큰 구역을 형성했어요."

"지금 뮤턴트들은 왜 여기 있지? 설마 이놈들도 가축을 키우나?"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놀랍게도 이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잡은 몬스터도 키우고, 쥐도 키우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키워요. 자신들이 낳은 뮤턴트도 키우고..."

마지막 말에 셰인의 카메라가 이사벨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셰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내일 밤부터라도 카우보이 영화 대신 다른 교육 방송을 같이 보기로 다짐했다.

키이익!

발소리와 함께 뮤턴트 특유의 기성도 들려왔다.

조용히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들킨 것 같았다.

셰인은 아공간 가방에서 마나 폭탄을 한 움큼 꺼냈다.

그는 폭탄 묶음을 계단 위로 던지고, 하나 남은 막대 폭탄에 불을 붙였다.

"아디오스."

그는 마지막 인사를 날리며 계단 위로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이사벨을 안고,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쾅!

키이이익!

비명이 들리고, 계단이 터져나갔다. 돌무더기가 쏟아지고, 천정이 주저앉았다.

계단이 막혔다.

셰인이 안았던 이사벨을 놓아주고, 모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경훈이 셰인에게 말했다. 그는 무너진 계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승강장을 틀어막았으니, 이제 뒤가 막힐 염려는 없겠지?"

-이 역부터 뮤턴트들의 영역이라면 뒤가 막힐 염려는 없습니다. 다만, 다음 역을 지난 역에서 오는 적들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씩 웃었다. 뒤를 막을 수 있는데, 앞을 막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 역의 소란이 다음 역에서도 들렸을 수도 있었다. 일행은 빠르게 다음 역까지 달려갔다.

다음 역에도 경비를 서는 괴물들이 있었지만, 일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승강장 밖까지 소리가 전해지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괴물들을 지나 경훈은 역 반대편 터널로 들어섰다.

"이브 부탁해."

-좌표를 지정해드리겠습니다. 10미터 전방 천장, 그리고....

이브가 지정한 곳에 경훈이 아공간에서 꺼낸 TNT를 설치했다.

터널을 박살 내는데 아깝게 마나 폭탄을 쓸 수는 없었다.

설치가 끝나고 일행은 바로 승강장 계단을 올라갔다.

모두 다음 층으로 올라간 뒤, 경훈은 무선 격발기를 눌렀다.

콰아아앙!

큰 폭발음과 함께 역사 전체가 흔들거렸다.

폭탄이 터지자, 승강장 너머의 터널 벽과 천장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돌과 흙이 쏟아져 터널이 막혀버렸다.

이 역으로 오는 반대쪽 길도 막혀 버렸다.

이제, 이 역을 중심으로 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구역의 적들만 상대하면 될 것이다.

곳곳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전부 처리할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습격해 오는 적들만 처리해도 충분합니다.

이브의 말에 일행이 모두 동의했다.

아공간에서 드론들이 빠져나왔고, 작은 로봇 거미들이 벽에 달라붙어 움직였다.

일행 대신 내부를 확인할 감시병들이었다.

"그럼, 우리는 이사벨 부모님을 만나러 가볼까?"

경훈의 말에 이사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뉴욕 City의 핵심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 구역.

정치 시설과, 군 시설 등의 핵심 시설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거주했던 곳이었다.

이사벨의 부모님도 그 전문직 종사자 중에 하나였다. 그녀의 엄마는 의사였고, 아빠는 마나석 엔지니어였다.

그 덕분에 그녀도 이곳 월드 트레이드 센터 구역에서 지낼 수 있었지만, 엄마의 바람과 달리 외지인인 그녀는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넓었던 지하철 광장은 철판과 각종 칸막이로 쪼개져 있었다.

거래소와 창고, 도축장과 사무실, 무기고 등. 칸막이로 나누어진 지하 광장은 복잡한 미로로 이루어진 지하도시 같았다.

하지만, 그 칸막이와 철판들은 전부 깨지고, 뜯겨 나가 있었다.

벽이어야 할 곳이 통로가 되어 있었고, 통로가 있어야 할 곳이 쓰레기로 막혀 있었다.

드론 하나가 천장에 붙어 미로가 된 광장을 훑었다.

뮤턴트들이 지하 승차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 통로에서 왼쪽, 그리고, 직진 후 잠시 정지입니다.

이브가 일행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런 미로에서 뮤턴트들과 드잡이할 이유는 없었다.

일행은 이사벨이 알려준 곳으로 이브의 길 안내를 받으며 빠르게 나아갔다.

일행은 얼마 뒤, 지하철역을 빠져나갔고, 알 수 없는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계단과 주차장 입구는 돌무더기로 굳게 막혀 있었다.

버려진 차들도 곳곳에 보였고, 곳곳에 판자와 철판으로 만든 칸막이 집들도 보였다.

이사벨은 그중 한 칸막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낡은 천으로 막아놓은 입구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뛰었다.

이 천 뒤에는 엄마, 아빠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휴우. 휴우.

하지만, 심호흡과 함께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사벨은 천을 걷어 올렸다.

"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낡은 책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헝클어진 침대들과 쏟아진 식기들이 그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툭.

발에 걸린 만년필이 앞으로 굴러갔다.

굴러가던 만년필은 앞에 놓은 보석 머리핀에 부딪혀 멈추었다.

이사벨은 발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아빠...."

그녀는 조심스럽게 머리핀과 만년필을 주워들었다.

머리핀과 만년필에는 검은 피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날 엄마가 머리에 꽂고 있었던 머리핀과 아빠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만년필이었다.

이사벨의 아빠, 엄마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부모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머리핀과 만년필을 품에 안고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기로 했다. 울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끼잉.

베일리가 그녀 옆에 주저앉아 발에 머리를 얹었다.

셰인은 조용히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경훈은 몸을 돌렸다.

"이사벨을 지켜 주십시오."

그는 아공간에서 검을 뽑았다.

"파악한 뮤턴트 위치를 모두 불러. 그리고, 두목이 어디 있는지 찾아."

-알겠습니다.

고아인 경훈은 부모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경훈은 분노했다. 검이 붉게 달아올랐다.

199화. < 뉴욕(5) >

끼익! 끼익!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들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터널이 무너진 소리에 달려왔는데, 터널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동족들도 누군가에 공격을 받아 쓰러져 있었다.

카악!

멀쩡히 옷을 입고 있는 뮤턴트 하나가 괴성을 지르자 다리가 빠른 뮤턴트가 막히지 않은 터널로 달려갔다.

상황을 다른 곳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직 뮤턴트들은 다른 역도 막혀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터널이 그냥 무너진 것도 아니었고, 적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낡은 양복을 걸친 뮤턴트가 다른 뮤턴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캬아악.

구역 전체를 수색하라는 지시였다.

지시를 받은 뮤턴트들이 승강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뮤턴트들이 계단 너머로 사라졌고,

콰앙!

다시 계단 아래로 튕겨 나왔다.

철갑 같은 피부를 두른 뮤턴트의 몸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칼날 같은 긴 손톱을 지닌 뮤턴트는 그 손톱이 우그러져 있었다.

계단 아래로 처박힌 뮤턴트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저벅, 저벅.

계단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아 있던 뮤턴트들이 자신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불덩이가 떠오르고, 승강장에 마나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계단에서 검을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렁이던 마나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벅, 저벅.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지금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자는 분명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

더구나 각성자였다. 무시무시한 마나를 뿜어내고 있는.

쩌억.

마나만이 아니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뮤턴트들은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간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스스스.

얼마나 강력한지 바닥에 있던 먼지가 그를 중심으로 딸려 올라가고 있었다. 형체를 가지지 못한 마나가 현실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대장급 도플갱어? 아니면 각성자?"

양복을 입은 뮤턴트가 인간의 언어를 토해냈다.

경훈이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곳에도 대화가 가능한 괴물이 있었다.

어쩌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 경훈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계단을 내려온 경훈이 슬쩍 발을 굴렀다.

쿵.

경훈의 모습이 계단 앞에서 사라졌다. 아니 너무 빨라서 뮤턴트들의 눈에도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쾅!

멍하니 있던 뮤턴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한참 떨어져 있던 다른 뮤턴트의 허리가 잘려나갔다.

서걱!

상체가 위로 떠올랐고, 또 다른 뮤턴트가 벽에 처박혔다.

승강장이 정리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내, 내가 안내해주겠다. 나, 나를 살려주면 정보를 주겠다. 둥, 둥지에 데려가 주겠다!"

양복을 입은 뮤턴트가 두 손을 번쩍 들고, 겨우 떠오르는 말로 열심히 떠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떠드는 소리라 꽤나 기묘하게 보였지만, 뮤턴트는 나름 절실했다.

부르르르.

검이 뮤턴트 눈앞에 멈춰서 있었다.

검은 피부에 닿지도 않고 있었지만, 잘게 떨리는 검에서 피어난 마나에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신기하네요. 항복하는 몬스터라니. 인간 같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정말 항복하는 걸까요?

이브의 말을 들으며 경훈은 검을 거두었다.

"안내해."

"잘, 잘 생각했다. 내가 안내하겠다."

뮤턴트가 피를 흘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괴물은 자신이 피를 흘리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양복을 입은 뮤턴트는 침입자를 안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투 뮤턴트 열 이상이 당해버렸다. 보통 강한 적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잭 브란든이다. 넌 이름이 뭔가?"

계단을 올라가며 뮤턴트가 경훈에게 질문했다.

경훈이 피식 웃었다. 인간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높낮이도, 말하는 속도도 일정했다. 기계가 글을 읽어주는 것 같았다.

경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뮤턴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맞나? 아직 인간이 남은 곳이 있나? 어디서 왔나?"

-말하는 방식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도플갱어가 말하는 것과 또 다르군요.

"밖은 덮지? 이 아래는 무척 선선하다. 다른 동료는 없나?"

경훈도 이브와 같은 생각이었다.

앞에서 떠드는 괴물은 인간의 기억과 말을 하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른 존재였다.

미로가 된 지하 광장을 앞장서서 걸어가며 괴물은 경훈을 향해 계속 떠들어댔다.

앞뒤도 안 맞는 질문들로 가득 찬 의미 없는 말들이었다.

괴물이 떠드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이브가 경훈의 귀에 속삭였다.

-사방에서 뮤턴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모두 저희가 가는 방향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슈슈슉.

뮤턴트들은 모두 조용히 움직였지만, 이브가 깔아놓은 드론과 거미 로봇에 걸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경훈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앞에서 걷고 있는 뮤턴트는 항복한 게 아니었다.

전투력이 적어 보이는 괴물이 다른 괴물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텔레파시 계열의 특성일까요?

어떤 식이든 상관없었다.

놈은 경훈이 원하는 데로 뮤턴트들을 모아주고 있었다.

뮤턴트가 안내하는 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점점 인간의 흔적이 줄어들었다.

벽은 검붉은 피가 범벅이었고, 바닥 구석에는 침대 대신 천과 지푸라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식당으로 보이는 곳은 그릇 대신 수북이 쌓인 뼈들이 가득했고, 책장에는 책 대신 두개골들이 올려져 있었다.

잠시 뒤, 안내하던 뮤턴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꽤나 묘한 곳이었다.

커다란 원형 방이었다.

벽에는 오래된 구형 서버 장비들이 세워져 있었고, 안쪽에는 은행 지하에서 보던 원형 금고문이 보였다.

-확인했습니다. 저 문은 뉴욕 연방 준비은행 지하 금고문입니다.

세계 무역 센타 구역이라고 하더니, 뉴욕 연방 준비은행도 같은 곳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경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이 모여 있던 장소라니.

하지만, 그 금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오래전에 로키산맥 지하 요새로 옮겨져 있었고, 지금은 경훈의 품에 들어와 있었다.

"텅 빈 금고일려나?"

-글쎄요. 확인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하려면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 말한 대로 둥지에 왔다. 내 질문에 대답해주기 바란다."

내부가 나름 깨끗했고, 컴퓨터 서버들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마나석 발전기가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원형 방 중앙에는 뼈들이 쌓여 있었고, 그 뒤에는 뼈로 만들어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뮤턴트의 말대로 괴물의 둥지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둥지라면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둥지의 주인은 어디 있지? 설마 네가 주인인가?"

뮤턴트는 경훈의 말에 대답했다.

"그것이 원하는 정보인가? 난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이곳에 없다."

양복을 입은 뮤턴트가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곳은 네가 죽을 곳이다. 머리를 남겨서 주인님께 칭찬을 받도록 하지."

우르르르르르.

뒤쪽에서 뮤턴트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명령이 있었던지, 뮤턴트들이 침묵을 깨고 괴성을 질러댔다.

끼이이이익!

경훈이 몸을 돌렸다.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방은 다른 출구가 없는 막다른 방이었다.

경훈이 들어온 방향만 막으면 빠져나갈 곳이 없었다.

경훈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한 방향의 적들하고만 싸우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판자로 막혀서 넓지 않은 길에 뮤턴트들이 가득 보였다.

캬야야약!

늙고, 젊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는 이상한 무리였다.

반은 인간을 벗어났고, 태반은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70, 79, 103---. 계속 몰려들고 있습니다.

경훈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삼정검이 붉게 타올랐다.

골목길이 괴물로 가득 찼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뛰어다니는 좀비 무리 같았다.

인간을 닮지 않은 뮤턴트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가시가 길어지고, 피부가 두꺼워지고, 발톱이 날카로워지고, 머리카락이 철사처럼 변했다.

뒤따라오는 뮤턴트들의 주변에는 각종 기운이 일렁거렸다. 모두 특성을 활성화하고 있었다.

뮤턴트들은 둥지가 파괴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경훈은 피하지 않았다.

-서포트 하겠습니다. 마나를 주입하겠습니다. 오버 차지 공격에 일대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공간이동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한 공격이 가능했지만, 위력을 제어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이브가 조언했지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서포트 하지 마. 이번에는 나 혼자 한다."

-기술 사용 후 탈진할 수 있습니다. 위험.... 아, 알겠습니다.

붉은빛이 가득한 검을 보고 이브가 조언을 멈추었다.

우우우웅.

검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검에 마나가 가득 채워졌다.

괴물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불꽃이 경훈을 향해 쏟아졌고, 가시가 쏘아지고, 머리카락이 경훈을 향해 뻗어왔다.

경훈은 검을 휘두르기 전, 자신이 왜 이리 화가 났는지 잠깐 의문이 들었다.

이사벨의 처지가 딱하긴 했지만, 이렇게 화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경훈은 지금까지 슬프고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검을 휘두르는 순간 사라졌다.

그는 분노를, 슬픔을 마나에 가득 담았다. 붉은빛이 더욱 강해졌다.

검에 담긴 마나의 모습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사방으로 날뛰던 마나가 하나로 뭉쳐 들었다.

경훈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에 담긴 마나를 밖으로 뿜어냈다. 검날에서 새로운 칼날이 뻗어 나갔다.

슈아아아악!

마나로 만들어진 칼날이었다.

하지만, 이 칼날은 전처럼 수백 개의 칼날로 변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칼날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하나가 넓게 펼쳐져서 점점 뻗어 나갔다.

마나로 만들어진 칼날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벽을 베어버리고, 철사같은 머리카락들을 자르고, 날아오는 가시들을 베어냈다. 달려오는 뮤턴트를 베어버리고, 불꽃을 날리는 괴물을 잘라냈다.

서걱.

붉은 선이 세상을 반으로 갈랐다.

뒤에서 지켜보던 양복쟁이 뮤턴트도, 경훈을 향해 달려오던 뮤턴트들도 잠깐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달리던 뮤턴트들의 다리들은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 뮤턴트들의 상체는 다리를 쫓지 못했다.

괴물들이 모두 반으로 갈라져 나갔다. 피가 치솟았다.

츄아아악!

예외는 없었다. 맨 선두의 뮤턴트도 맨 뒤에 있던 뮤턴트도 모두 반으로 갈라졌다.

쿵!

미로를 만들었던 벽도 반으로 갈라져 넘어갔다.

굳은 피로 검게 물들었던 벽에 붉은 피가 가득 칠해졌다.

경훈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에 붉은 피가 가득 뒤덮였다.

경훈이 몸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는 양복쟁이 뮤턴트가 보였다.

뮤턴트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인간이 맞나? 설마, S급 각성자?"

그의 말에 경훈이 씩 웃었다.

"조금 전까지는."

화아아아아아악!

뿜어져 나오던 붉은 피가 경훈을 향해 몰려들었다.

마나가 가득 몰려들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

벽이 흔들리고, 피가 춤을 추었다.

모든 마나가 노래를 불렀다.

뮤턴트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뮤턴트가 중얼거렸다.

"인간이 군주라니..."

200화. < 군주 (1) >

휘이이이익.

시간이 지나고 소용돌이치던 피와 마나가 가라앉았다.

경훈의 모습은 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등급이 올랐습니다. 전에 지정하신 SS급으로 설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딱딱한 이브 목소리가 등급이 올랐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너무 무난한 이름이라고 이브가 전에 뭐라고 했지만, 경훈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성장이 여기서 멈추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 좋은 이름은 뒤를 위해 남겨놓을 생각이었다.

경훈이 쥐고 있던 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보았다.

우우웅.

마나가 검에 달린 마나석을 지나 검날을 타고 내려갔다.

검날 끝에 작은 빛이 불쑥 치솟았다.

"마나를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는 거였군."

조금 더 이 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것 같았다.

조금 전 같은 기세도,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홀로 남은 뮤턴트는 차마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를 갈무리한 경훈이 뮤턴트에게 물었다.

"더 말해줄 게 있어?"

이제 경훈은 뮤턴트 내부를 흐르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마나와 다른 탁한 마나가 뮤턴트 내부를 돌고 있었다.

"군, 군주시여. 전 좀 더 쓸데가 있을 겁니다. 다른 뮤턴트들이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둥지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관심이 없었지만, 둥지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는 경훈도 궁금했다.

"어딘데. 위치를 말해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뮤턴트는 조금에 했던 것처럼, 핀트가 맞지 않는 대답을 했다.

뮤턴트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리고, 경훈이 팔을 휘둘렀다.

슉!

삼정검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퍽!

검은 뮤턴트 얼굴에 박혔다.

뮤턴트를 둘러싼 방어막이 검을 막으려 했지만, 검에 실린 마나가 방어막을 찢어발겼다.

이제는 마나석의 도움 없이도 물건이 마나를 남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검은 뮤턴트 머리를 꿰뚫고 그를 한쪽 벽에 박아 넣었다.

-갑자기 왜 그러신 거죠?

"저놈 머리에서 마나 한 가닥이 빠져나와 위로 솟구쳤어. 외부에 연락하려던 것 같아."

특성을 이용한 연락이 분명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연락 방법이었지만, 경훈은 이제 그런 마나도 유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뭐가 있는지 알아볼까?"

이제 덤벼올 뮤턴트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보상을 챙길 시간이었다.

뮤턴트들이 망가뜨리지 않고 남아 있는 컴퓨터 서버 장비들과 잠겨 있는 금고.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서버 쪽은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금고를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새로운 군주님?

이브의 말을 들으며, 경훈이 금고로 걸음을 옮겼다. 삼정검의 검날에 붉은빛이 피어올랐다.

***

고층 빌딩 꼭대기의 커다란 홀 안.

무릎을 꿇고 있던 긴 흰머리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허리에 매달려있는 검이 출렁거렸다.

끼익.

앞에서 몬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더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방금, 지하 둥지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적이 침입한 듯합니다."

끼익.

렛맨의 괴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남자의 머릿속으로 의문 어린 이미지가 들어왔다.

[적?]

군주가 보낸 이미지였다.

"죄송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듣기 전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끼이이익.

[적이 남아 있었나? 네 둥지는 네가 없으면 적을 막지도 못하는 건가?]

그를 비웃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가득 떠올랐다.

그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어차피 도시의 군주에 항복한 덕분에 뮤턴트들은 살아남았다. 이런 수모는 수모도 아니었다.

끽, 끽, 끽.

[전사들을 붙여주겠다. 미끼를 찾아온 놈들일지도 모른다.]

불쾌한 마나가 그를 감쌌다.

군주는 화가 나 있었다.

미끼를 잡으라고 보낸 전사들에게서 연락이 끊어져 있었다.

다른 일이 있어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재미있는 유흥거리가 하나 사라져 버렸다.

"알겠습니다. 전부 죽여도 되겠습니까?"

끼이익!

이미지를 따로 접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군주는 이제 놀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휘이이익.

홀을 가득 메우던 마나가 사라졌다.

군주가 떠난 것이다.

흰머리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까지 오는 긴 흰 머리를 쓸어넘겼다.

뮤턴트가 되는 순간 육체는 다시 젊어졌지만, 머리 색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무척이나 아쉬워했겠지만, 그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남자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있는 낡은 무전기. 처음부터 열려있는 창문.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

그리고, 멍청하게 서 있는 렛맨 하나.

군주가 떠난 껍데기였다.

영악한 쥐들의 군주답게 그 오랜 시간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군주는 항상 다른 렛맨의 몸을 빌려 그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렛맨에서 엘리트 렛맨, 그리고, 렛맨 기사까지. 어떨 때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래서야, 배반할 방법을 찾기도 어려웠다.

오염된 마나를 지닌 덕분에 수하로 들어간 뒤에도 군주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군주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겨우 지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군주가 부를 때마다 찾아와야 했다.

그는 다시 홀 한쪽을 바라보았다.

구석에 있는 낡은 무전기.

오랜 시간 동안, 그와 뉴욕의 군주가 인간 소녀의 방송을 엿들은 물건이었다.

군주는 소녀를 비웃고, 소녀의 방송을 듣고 찾아오는 인간을 기다렸다.

물론, 실제로 찾아오는 인간은 초반 몇 명밖에는 없었지만, 군주의 여흥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뮤턴트들도 뉴욕 지하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도 인간의 언어를 잊지 않았고.

"손님이었으면 좋겠군."

그도 인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의 오염은 무서웠다. 몬스터를 먹고 뮤턴트가 된 자 중에 지능이 유지된 자는 많지 않았다.

강력한 각성자이자 실력자였던 그도 지능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일부 각성자들만 예전의 기억을 유지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완전히 몬스터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그 때문에, 생존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컴퓨터 속의 정보와 금고 속의 물건을 꺼낼 수도 없게 되었다.

마지막 남은 인간 소녀를 납치해서 방법을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군주가 장난감으로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것도 어려웠다.

"인간 남녀라면 더 좋겠고. 아니면 미끼와 남자라던가."

미끼에 관한 관심이 멀어졌으니 자신들의 둥지에서 새끼를 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붉은 눈을 반짝이며 홀을 빠져나갔다. 렛맨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많은 렛맨이 그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빌딩 밖을 나서자, 그를 따르는 렛맨은 수백에 이르렀다.

일반 렛맨들과, 덩치 큰 엘리트 렛맨, 그리고,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급 렛맨까지.

오래전 생존자들을 전멸시킨 그 병력들이 다시 움직인 것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빠져나온 렛맨들은 남자를 따라 도로를 걸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렛맨들은 계속 움직였다. 도로가 렛맨들로 뒤덮였다.

멀리, 지하철역이 보였다.

34번가 스트리트 펜 스테이션.

경훈 일행이 들어간 지하철역이었다.

검은 방탄복을 입은 젊은 동양인이 렛맨들을 데리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역 안으로 들어서자 품에서 검은 장갑을 꺼냈다.

그는 손에 장갑을 끼고 검을 꺼내 들었다. 장갑에 박혀 있는 마나석이 불길하게 번쩍였다.

***

경훈은 금고 안에 들어와 있었다.

금고문은 반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새로운 기술을 얻기 전에도 금고를 잘라냈던 경험이 있었던 경훈이었다.

다른 금고들과 차원이 다른 세계 최고의 금고였지만, 잘라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예상대로 금은 이곳에 없었고, 눈에 띄는 문화재나 귀금속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백악관에서 보지 못했던 각종 서류가 가득했다.

한쪽에 쌓여 있는 미국의 자산 문서들.

"인간이라서 그런가. 마지막까지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나 보네."

미국 정부가 가지고 있던 각종 채권과 지분, 그리고 각국과의 계약들.

하지만, 대부분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이건, 이브에게 분석해보라고 해야겠다."

경훈은 자산 문서들 옆에 쌓여 있는 연구 자료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복잡해서 경훈은 알기 어려운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기 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모아온 연구 자료였으니 이브가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문서.

그 문서들은 경훈을 놀라게 했다.

아폴로계획 관련 비밀 문건.

51구역 연구 목록.

유대인 조직 연혁.

나치 생존자 추적 기록....

미국이 숨기고자 했던 기록들이 이곳에 남겨져 있었다.

"이걸 터트리면 난리 나겠는데."

하지만, 이쪽 세상은 터트릴 대상도 없었고, 저쪽 세상도 이제는 크게 이슈가 안될 가능성이 컸다.

"EV 홈페이지에 재미로 올려볼까?"

경훈은 나중에 한가해지면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는 서류를 확인하고 금고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안쪽에는 박스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방탄복 세트]

박스 겉에는 평범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경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탄복을 이런 금고에 넣어두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철컥.

그는 박스 하나를 강제로 열어보았다.

하지만, 안에는 방탄복과 장갑 등 보호장비 일체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의외로 투박한 모습을 한 검은 방탄복이었다.

"흠. 이거 괴물 가죽인데?"

경훈은 방탄복을 집어 들었다. 역시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방탄복을 좀 더 살펴보았다. 그리고, 왜 이 안에 처박혀 있는지 알게 되었다.

"마나석이 없어. 이래서 못써 먹은 건가?"

장갑에도, 방탄복에도 마나석이 박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마나석 수급이 어려웠거나, 아니면 각성자 숫자가 부족했을 겁니다.

귀에 꽂혀있는 무선 이어폰으로 이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확인해 보기는 어렵겠지?"

-어떤 마나석을 장착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마르가 확인하는 편이 빠를 것 같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 확인은 끝난 거야?"

-네. 방금 끝났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이 금고를 빠져 나갔다.

컴퓨터 서버들 옆 책상에 서버와 연결된 휴대폰이 올려져 있었다.

경훈은 단자를 빼고, 휴대폰을 품 안에 넣었다.

"안에 뭐 있어?"

-네. 정말 이사벨 아버지의 도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이사벨 아버지?"

-네, 이 서버를 관리한 사람이 이사벨의 아버지였습니다. 암호를 이사벨로 해서 해킹하기가 쉬웠습니다.

-컴퓨터 안에 그가 모아놓은 미국이 연구한 마나 프로젝트 대부분이 들어있습니다. 마나 미사일. AI, 대형 로봇 프로젝트 등. 저에게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브의 말대로라면 이사벨에게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그리고…. 아! 전 역에 배치한 거미 로봇의 감시망에 적이 감지되었습니다. 렛맨들입니다. 수백 개체 이상입니다. 그리고, 흰머리의 뮤턴트가…. 이런,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

콰직.

흰머리 각성자는 검에 박힌 거미를 내려다보았다.

찢긴 거미 몸 사이로 작은 기계 부품들이 보였다.

"로봇?"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거미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서 기계 부품이 튀어나올지는 생각도 못 했다.

"재미있군."

로봇이라니. 인간이 맞았다. 그것도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인간 때의 습관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필사즉생 생득필사]

삼정검에 새겨진 문구가 붉게 빛을 뿌렸다.

201화. < 군주(2) >

경훈과 다른 일행은 지하철 승강장에서 만났다.

이브가 드론과 거미 로봇의 중계로 적이 온다는 소식을 일행에게 전해 준 것이다. 눈이 벌겋게 변한 이사벨이었지만, 오히려 전보다 침착해 보였다.

경훈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철컥.

경훈의 말에 셰인이 총을 장전했다.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이사벨도 총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고, 베일리는 경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일행과 달리, 베일리는 경훈이 변한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건 이사벨 거야."

경훈이 이사벨에게 작은 메모리카드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요?"

"너희 아버지가 남겨주신 데이터야. 백업한 내용을 거기 넣었어."

이브의 메모리 속에도 데이터가 들어있었지만, 이사벨을 위해 따로 만들어온 것이었다.

이사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경훈을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남겨놓은 자료 덕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 따로 정산하겠지만, 우선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듯해."

이사벨은 경훈의 말뜻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준 메모리카드를 손에 꼭 쥐었다.

아빠가 남긴 물건이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아무래도 조금 잘못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경훈은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정산을 하실 생각인가요?

"이사벨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면 될 것 같은데. 컴퓨터 안의 물건들을 그 회사 이름으로 만들어 팔고, 거기서 난 이익을 이사벨이 가지면 되지 않겠어?"

"그 재산으로 이곳으로 가져오는 물건들도 사들이고. 나중에 차원을 넘게 되면 회사도 이사벨이 관리하면 되잖아."

-차원을 넘게 되면 이사벨은 엄청난 부자가 되겠군요.

그냥 경훈이 쓴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경훈은 이미 이런 푼돈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뭐, 유통만 EV가 잡고 있으면 상관없는 거니까."

-역시, 손해는 안 볼 생각이시군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경훈도 이제 기업과 권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돈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 팔지를 경훈이 결정할 수 있다면 수익을 누가 가져가는지는 상관없었다.

-적이 가까이 왔습니다.

이브가 다시 주의를 주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괴물들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이사벨은 메모리카드를 안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고, 일행은 지하철 철도에 내려섰다.

북쪽에서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수백이 넘는 괴물들의 발소리였다.

경훈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행의 몸에서 피어나는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사벨의 몸속에는 전보다 성장한 마나가 그녀의 몸과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셰인의 가슴에서 출발한 마나가 문양을 타고 흐르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베일리의 몸을 타고 흐르는 특이한 마나.

하지만, 모두 경훈 자신에 비하면 무척이나 약한 마나였다.

등급이 오르기 전에도 일행과 차이가 났었지만, 지금은 한층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이제는 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훈은 일행과 함께 싸울 생각이었다.

이사벨의 성장 때문도 있었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없었다.

이브가 없었다면 경훈은 여기까지 올 수가 없었다.

툭, 툭.

경훈은 가슴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요?

이브가 물었다.

"저기 괴물들 앞에 오는 인간. 한국인 아냐?"

통로를 달려오고 있는 렛맨들 선두에 인간이 있었다.

흰머리와 젊은 얼굴이라는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얼굴은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었다.

-한국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삼정검이 맞습니다.

경훈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국인이라면 물어볼 게 있었다.

셰인과 이사벨이 총구를 내렸다.

카아아아악!

괴물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왔다.

경훈이 손을 든 것을 보았을까?

카아악!

남자도 뒤를 보며 괴성을 질렀다. 괴물들의 목소리와 같은 괴성이었다.

-한국인이든 아니든 몬스터는 확실합니다.

크르르릉

렛맨들은 마구 으르렁거렸지만, 점차 속도를 줄였다.

일행과 100m 떨어진 곳에서 괴물들은 발을 멈추었다.

빛이 거의 없는 지하철 승강장이었지만, 모두 서로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흰 머리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경훈이 걸어오는 남자를 살펴볼 동안, 남자는 경훈 일행을 확인했다.

그는 경훈 옆에 서 있는 이사벨을 보고 눈을 빛냈고, 경훈과 셰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경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인간이 확실하군. 대구 연구소의 로봇까지 데려오다니. 설마 한국인이었나?"

그의 입에서 능숙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경훈이 바로 반문했다.

"너는 미국인이었나?"

남자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 음.... 실…. 실수 계속 영어만 쓰고 있어서 습관적으로 나왔군."

그는 다시금 한국어로 대답했다.

크르릉.

묘한 상황이었다.

한쪽에서는 수백의 렛맨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다른 쪽은 로봇과 소녀, 그리고 강아지가 긴장한 얼굴로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한국인 난민 출신 각성자일세. 자넨 한국인인가?"

-역시, 조금 전에 죽은 뮤턴트와 대화 패턴이 비슷합니다. 원하는 상황이나 대답을 얻을 때까지 대화를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 맞아."

경훈이 검을 들어 상대의 검을 가리켰다.

"다른 한국인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날 모두 죽은 건가?"

남자는 경훈의 검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삼정검? 그걸 어떻게 가지고…."

뭔가 물어보려던 남자는 바로 표정을 지웠다.

자신은 호기심이 많은 군주도, 몬스터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나타난 인간이 삼정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금고와 컴퓨터를 열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그는 우선 인간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로스앤젤레스 City에서도 죽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도 많이 죽고 떠났지, 이곳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그날 나와 다른 뮤턴트들이 전부 죽였어."

참혹한 이야기였지만, 경훈은 그가 한 말 중에 한 가지 특이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중에 떠나?"

경훈이 다시 물었지만, 남자는 경훈의 질문을 무시했다.

"옆에 있는 로봇은 네가 다시 움직이게 한 건가? 아니면 다른 인간이 더 있나?"

경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뮤턴트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뮤턴트 몸속을 흐르는 탁한 마나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질문하는 순간, 뮤턴트가 지닌 마나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싸우기 위한 준비 상태.

방금 질문이 뮤턴트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경훈이 입을 열었다.

"내 질문에 대답해 주면 말해주지."

경훈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답을 해주었다.

"남아메리카를 도는 뱃길이었으니, 버티지 못하고 함대에서 내린 사람도 꽤 있었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 로봇은 누가 움직이게 했지?"

무덤덤하게 대답을 한 뒤에 그는 같은 질문을 다시 꺼냈다.

아무래도 질문을 더 하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남자의 검은 부르르 떨기 시작했고, 렛맨들은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경훈은 옆을 돌아보았다.

"누가 셰인을 다시 가동했냐고 물어보는데요?"

그동안 조용히 서 있던 셰인이 카메라에 걸쳐진 모자를 손끝으로 올렸다.

"난 가동을 멈춘 적이 없었는데?"

-수리는 엄청 많이 받았지만요.

남자는 로봇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쓸모없는 대화였군. 그냥 널 잡아서 물어보는게 편하겠군."

말을 마치는 순간, 흰머리 남자는 경훈을 향해 쏘아졌다.

카아아악!

그리고, 뒤쪽에 있던 렛맨들도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무리였다. 덩치 큰 엘리트 렛맨이 반이 넘고, 군데군데 갑옷을 입힌 기사급 몬스터도 보였다.

일행도 싸울 준비를 했다.

셰인과 이사벨의 기관총이 전방을 향하고, 베일리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흰머리 남자가 경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핏빛이 섞인 푸른 검이 앞으로 나아갔다. 핏빛이 섞여 있었지만, 무척이나 정제된 마나였고, 검술이었다.

경훈은 꽤나 놀랐다.

이 정도로 마나 활용을 잘하는 존재를 본 적도 없었고, 검술이 좋은 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검은 한국 각성자 사단의 마지막 사단장이 휘두른 검이었다.

그는 모두를 지켜달라는 대통령의 부탁을 마지막까지 들어주지 못하고, 살기 위해 인간을 저버린 A급 각성자였다.

뮤턴트로 변하면서 마나가 탁해지고, 인간적인 지혜는 사라졌지만, 그의 힘은 A급을 넘어 S급에 다가서고 있었다.

뮤턴트가 된 뒤에, 그는 인간에게 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궤적이 경훈 앞에 도착했다.

경훈도 다가오는 검을 향해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아쉽게도 경훈의 검은 상대의 검보다 투박하게 움직였다.

많은 연습이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부족했다. 훨씬 단순한 궤적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우웅!

더구나, 검 전체에 마나가 맺혀있는 상대와 달리, 경훈의 마나는 검날에만 언뜻 비쳐 보였다.

두 검이 맞부딪쳤다.

충격에 대비해 남자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충격은 없었다.

서걱!

빛나는 검이 반으로 갈라졌다.

마나가 거의 보이지 않던 검에 그의 검이 잘려나간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시야가 빙그르르 돌았다.

잘려나간 자신의 하체가 보였고, 자신의 몸을 자른 검에서 긴 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검이 다시 움직이고, 빛의 선이 통로를 반으로 갈랐다.

과거 사단장이었던 뮤턴트는 그 광경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나를 활용하는 검술을 배우면서 들었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꿈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성을 잃어버린 그는 단지 아름답게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툭.

뮤턴트의 상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쩌적!

그와 동시에 경훈의 손에 들린 삼정검이 깨져나갔다.

-주인님의 마나를 버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경훈은 손잡이만 남은 삼정검을 보며 혀를 찼다.

기껏 다음 등급으로 올라섰는데 이제는 아이템이 받쳐주지를 못했다.

하기야, 오버차지 기술도 반복해서 쓰면 버티지 못했는데, 이런 마나 집중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삼정검이 무리면, 다른 검은 쓰지도 못하겠군."

-삼정검도 살살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크르르릉.

피바다가 된 통로에서 괴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게도 모두 잘라내기 전에 검이 부서진 것이다.

반 이상 죽어 나갔고, 팔, 다리가 잘려나간 괴물도 상당수 보였지만, 멀쩡한 놈들도 남아 있었다.

방금 벌어진 광경에 괴물들은 하얗게 표정이 변해버렸지만, 다들 도망치지는 않았다.

괴물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이 모두 경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일리는 황당하게도 변신한 모습으로 이사벨 뒤에 숨어있었다.

"뭐해요? 적이 오는데."

경훈의 말에 그제야 모두 정신을 차렸다.

타타타!

셰인이 기관총을 갈기기 시작했고, 이사벨도 총 대신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렛맨을 향해 달려갔다.

베일리도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경훈은 지원을 위해 저격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경훈은 총을 쏘기 전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우우우우우웅.

마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 모든 드론과 거미를 우리가 들어온 지하철 역 쪽으로 보내."

-알겠습니다.

이브가 묻지도 않고 경훈의 지시를 따랐다.

위이잉!

뒤쪽에 있던 드론들이 싸우는 일행 위로 날아갔다.

느낌이 안 좋았다.

경훈도 저 격총을 다시 넣어두고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의 양 주먹이 렛맨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

해가 지고 있었다.

건물에 있던 렛맨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건물 밖으로 나오는 렛맨의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수백, 수천의 렛맨이 건물 밖으로 쏟아졌다.

멘해튼에 있던 모든 렛맨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렛맨은 모두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도시로 향하는 역이 있는 방향이었다.

202화. < 군주(3) >

피바다가 된 통로에서 싸움이 이어졌다. 렛맨들이 주먹에 맞아 사방으로 날아갔고, 날개 달린 사자가 렛맨들을 찢어버렸다.

그 와중에 소녀는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렛맨에게 달려들었다.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는 렛맨 기사는 달려오는 작은 인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웅.

기사급 몬스터가 휘두른 검이었다. 검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전방을 휩쓸었다.

검은 소녀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렛맨은 소녀의 몸에서 피가 솟구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검은 허공을 가른 듯 소녀의 몸을 지나갈 뿐이었다.

검이 지나가는 동안 소녀의 몸이 조금 희미해진 것 같았지만, 이 난리통에 그것까지 알아차리기는 무리였다.

검이 휘둘러지고, 소녀는 한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창이 렛맨을 향해 뻗어나왔다.

콰직!

창은 갑옷이 보호하고 있지 않은 어깨에 박혔다.

공격이 먹히지 않아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기사급 렛맨이었다. 창은 렛맨의 피부만 겨우 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겨우 박힌 창을 계속 밀어 넣었다. 마치 힘을 주면 팔을 꽤뚫을 것 같이.

렛맨은 어이없는 얼굴로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소녀의 머리를 쥐어 박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팔을 내밀면서도 렛맨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겨우 피부를 뚫은 창이었다. 그만큼 격의 차이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방어막이 뚫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소녀를 향해 나아가는 렛맨의 팔에는 방어막이 보이지 않았다.

투다다다다!

렛맨 기사를 향해 총알이 쏟아졌다.

기사급 방어막이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나 총알이었다. 하지만, 방어막이 없는 지금, 총알은 렛맨의 몸을 박살낼 뿐이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흩뿌려졌다. 이사벨의 몸에도 살점과 피가 튀었다. 이사벨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무너지는 쥐인간의 몸에 박힌 창을 뽑았다.

-방금도 위험했어! 무리하면 안돼!

"조심할께요."

이어폰에서 셰인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거리가 더 벌어져 있었다. 등급이 올라 기뻐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경훈 아저씨는 너무 강했다. 검을 휘둘러 수백의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힘이라니. 그녀가 생각했던 힘과 차원이 달랐다.

아직 부족했다.

맛있는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그리고 훈련과 보살핌. 이런 모든 것을 받고도 따라갈 수 없다면 경훈 아저씨와 셰인 아저씨를 실망시키게 될 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했다. 어떻게 맞은 희망이자 기회인데. 매일 꾸는 악몽처럼 또다시 혼자 남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지하철 통로는 조용했다. 멀쩡히 서있는 몬스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셰인과 함께 겨우 기사급 렛맨 둘을 잡는 동안에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사벨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크르릉.

경훈 앞에 몬스터 한 마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다리 한쪽이 날아간 평범한 렛맨이었다.

렛맨은 경훈을 노려보고 있었고, 경훈도 평범한 렛맨을 죽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 렛맨은 경훈이 일부러 살려둔 몬스터였다.

-왜 살려두신건가요?

"이놈은 몸 속 마나의 움직임이 다른 놈들하고 달라. 뭔가 외부와 연결된 것 같아."

키릭.

경훈의 말에 렛맨이 바람소리를 냈다. 그리고, 렛맨의 눈이 검게 변했다.

[신기하다. 마나가 보이는 특성? 정말 대단. 군주 급에 가까운 인간이 나오다니. 이런 먹이. 있는데 다른 신경 쓸 수는 없다. 그동안 노력. 보상 받았어.]

모두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박혀들었다.

형태와 기하학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언어였지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크르릉!

변신한 베일리가 렛맨을 향해 으르렁거렸고, 이사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딱 한번 비슷한 이미지를 느껴본 적이 있었다. 뉴욕 City가 멸망한 그날. 모두에게 좌절을 안겨준 이미지였다.

하지만 경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렛맨의 주변을 살펴볼 뿐이었다.

"이게 본체는 아니군. 빙의한건가? 아니면 다른 방식인가?"

[나, 우리가, 너를 찾아가는 중이다. 기다려라.]

잘려나간 다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렛맨은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경훈이 주먹을 휘둘렀다.

퍽!

렛맨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머리가 터져나가자, 머릿속에서 마나가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그 마나는 천장 너머로 사라졌다.

"이런 식이군. 대충 어떤 식으로 된 놈인지 알 것 같아."

경훈이 천정을 바라보며 얼굴을 정그렸다. 귀찮은 형태의 적이었다. 미국에서 처음 맞는 군주는 한국과 전혀 다른 형태의 군주였다.

그때, 이브가 입을 열었다.

-드론 부대가 34번가 역에서 몬스터들과 접촉했습니다.

쾅! 쾅!

34번가 스트리트 펜 스테이션 계단.

계단을 날아 올라가던 드론들이 하나둘 떨어졌다.

-xxx역 광장까지 몬스터들이 진입했습니다. 드론들 격추되고 있습니다.

렛맨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드론들이 열심히 방향을 바꾸었지만, 좁은 공간을 꽉 채운 렛맨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드론이 부서지고, 드론 하나만 남아 역 입구를 빠져나왔다.

위이이잉.

드론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캬아악.

렛맨들이 무기를 던져댔지만, 드론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날아오는 칼과 창을 피해냈다.

높이 솟구친 드론은 카메라로 지상을 훑었다.

거리는 온통 렛맨들로 가득했다. 많은 렛맨들이 지하철 역으로 들어선 뒤였지만, 거리에는 아직 렛맨들이 가득했다. 렛맨들은 지하철 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파악된 개체수 현재 4233, 4345, 4481..,..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반 렛맨 약 70%, 엘리트 렛맨 20% 나머지는 기사급으로 보이는 렛맨들입니다.

-기사급 렛맨 일부는 거대한 쥐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쥐처럼 보이는 몬스터들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캬아악!

날개를 펼친 쥐 몬스터가 드론을 향해 날아왔다.

드론이 빠르게 방향을 바꾸었지만, 몬스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콰직.

드론은 몬스터의 발톱에 박살났다.

-마지막 드론이 파괴되었습니다. 살아남은 거미 로봇으로 감시 중입니다. 현재, 몬스터의 선두는 34번가 역 승강장까지 내려왔습니다.

거미 로봇이 벽에 붙어 철도로 내려서서 통로로 쏟아지는 렛맨들을 감시했다.

마치 거대한 쥐들의 물결이 하수구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달려가던 몬스터들 사이에 몇 렛맨이 거미 로봇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쾅!

거미 로봇이 박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