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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 바리케이드를 치다. >

얼마 전까지 크지 않은 제약 회사가 있던 곳은 이제 수십 층짜리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빌딩들에는 탈모 치료제로 유명한 세계 최초의 포션 제조회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회사는 생각 이상으로 삼엄한 감시를 펴고 있었다. 수많은 CCTV가 내외를 감시하고 있었고, 경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방문자를 확인했다.

얼마나 철저한지 경비 중에는 각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리고, 빌딩군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지하 5층까지의 주차장 밑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지하층들이 더 있었다.

바로, 경훈 개인을 위한 지하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주차장 아래층인 지하 6층은 거대한 창고, 아니 전시관처럼 보였다.

기이이이잉.

창고 로봇들이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인 지게차들이 물건이 실린 팔레트를 옮기고, 로봇팔이 달린 물류 로봇들이 물건을 분류하고 전시했다.

피카소 그림이 한쪽에 걸리고, 생각하는 사람 조각이 그 옆에 세워졌다.

"이제야 구색이 맞네."

경훈이 새로 전시되는 작품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창고에는 공항에서 가져온 한국 유물만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대단한 물건들이었지만, 이렇게 서양 작품들이 있으니 왠지 동, 서양 균형이 맞는 것 같았다.

"시간이 있었으면 다른 나라 그것도 가져오면 좋을 텐데…."

-어차피 혼자 밖에 못 보는 것이잖습니까.

금괴나 보석과 달리, 유물이나 예술품들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내보이는 순간 같은 작품이 두 개가 되는 것이었다. 둘 다 진품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는 전시관을 세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쉽지만 그때까지는 이렇게 홀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석은 따로 정리해 두었다. 오랜 사냥이 있어서인지, 이쪽 세상의 마나석보다 등급이 높았다.

그냥 발전소용으로 쓰기는 아까웠다. 경훈은 가져온 마나석을 오마르가 만드는 아이템과 액세서리에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게 있었지.'

경훈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손목에는 마나석이 박힌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경훈은 손바닥을 위로한 채로 팔찌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손바닥 위로 공기가 일렁였다.

경훈이 다른 손을 편 손바닥에 집어넣었다.

펼친 왼손으로 반대편 손이 쑥 들어갔다.

실제로는 손위에 펼쳐진 아공간에 다른 손이 들어간 것이었다.

경훈이 집어넣었던 손을 꺼냈다.

손바닥에서 긴 검이 딸려 올라왔다. 삼정검이었다.

"솔직히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금은보화와 예술품도 나쁘지 않았지만, 배낭이 오늘내일하는 지금, 새로운 아공간 아이템은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방이 아니면 다른 사람 앞에서 물건을 꺼내기 어렵지 않나요?

"뭐, 가방에 손을 넣고 흔들어도 되니까."

경훈이 손을 뒤집어서 흔들자, 권총 하나가 손바닥에서 툭 떨어졌다. 경훈은 총을 낚아챘다.

"입구 폭이 꽤 넓게 조절돼서 배낭보다 좋아."

배낭은 입구 크기가 최대였지만, 이 팔찌는 아공간 입구를 지름 1m까지 늘일 수 있었다.

용량도 배낭보다 훨씬 컸다. 역시 마지막까지 버틴 나라다웠다.

"일본은 어떻게 되었지?"

-예상과 달리 아직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브의 대답에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 준비라니…."

-웨이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경훈과 이브는 저쪽 세상의 경험 덕분에 괴물들이 인간들처럼 진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쟁 준비를 하는 나라를 도와줄 생각도 없었다

"러시아와 북한, 한국 정부에 EV 이름으로 경고를 보내. 일본 전쟁 준비 상황도 알리고."

-알겠습니다.

인간끼리의 전쟁이라면, EV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일본 하나라면 다른 나라들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경훈만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왜 조용한지 모르겠군. 쇄국 정책으로 혼자 살아남겠다는 걸까?"

세계 각국에 파견되었던 부대도 모두 철수했고, 대양을 누비던 함대도 모두 미국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분쟁이 심해지고, 바닷길도 더 엉망으로 변해버렸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있었다.

-미국도 정국이 혼란한 것 같습니다. EV 미주 지부도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항로가 끊어진 뒤로 세계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갔다. 아직 무역은 계속 이어졌지만, 기업은 해외 지사를 철수하고, 정부는 공관을 닫았다.

이미, 관광 산업은 종말을 맞이했다.

이브와 공간 이동이 가능한 경훈 덕분에 세계에 흩어져 있는 EV 자산들은 아직 잘 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산들도 언제 각국 정부에 빼앗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방어선 구축에 열을 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북쪽 방어선인 러시아. 그리고, 2차 방어선인 북한, 안방인 한국. 그리고 서쪽.

"준비는 끝났지?"

-네. 곧 테스트 시작입니다.

"좋아. 만주로 가보자고."

경훈은 만주에 만들어진 새로운 나라를 서쪽 방어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닥에 은빛 구멍이 만들어지고, 경훈이 뛰어들었다.

사람이 사라진 전시관은 자율 로봇들이 계속 움직이며 정리를 이어갔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 지하 창고 겸 전시관은 이미 세계에서 손꼽는 유물과 작품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

자국 내 핵무기 사용과 방사능 낙진 덕분에 중국은 여러 개로 나뉘어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기존 중국 정부와 군구 별로 나누어진 지역 군벌들. 이들은 서로 새로운 국경선을 만들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은 의외로 심하지 않았다.

분열된 군벌들은 모두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이 심해지기라도 한다면 핵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다만,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한 북구전구는 아직도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적은 다른 군벌이 아니었다. 그들은 몽고에서 쏟아져나온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다.

핵폭발 이후, 죽지 않은 괴물들은 방향을 틀어 만주로 향했다.

그것이 수도 베이징을 지키기 위한 중국 공산당의 작전이었고,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300km 떨어진 차오양시.

독립 선언 이후 만주국 소속이 된 도시였지만, 만주국은 이 도시를 계속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립하기도 전에 이 도시는 괴물들에게 점령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화력을 쏟아부어 도시 전체를 박살 낸다면 괴물을 모두 죽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남는 게 없었다.

거기다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놈들처럼 도시에 포탄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 포위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진입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도시에 있는 괴물들은 총도 안 먹힌다는데…."

도시를 향해 걷던 사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사관에게 물었다.

하사가 급하게 입에 손가락을 올렸다.

쉿!

그는 앞쪽을 훔쳐보았다. 다행히 각성자는 병사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말을 낮춰! 각성자는 귀가 좋단 말이야!"

하사는 작은 목소리로 병사를 혼냈다.

말을 꺼낸 병사는 놀란 얼굴로 입을 막았다. 하사는 작게 말을 이었다.

"다른 부대면 상관없지만, 우리는 리쉬치엔 중교님과 같이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왜 전쟁 영웅이 우리 소대(排)와 같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네요."

다른 병사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리쉬치엔 중교. 그는 핵폭발에서 수많은 병사를 구한 각성자이자, 망가진 부대들을 모아 80 집단군을 살린 전쟁 영웅이었다.

그 뒤로 그는 여러 차례 진급 끝에 군 각성자의 대표가 되어 사령부에 들어갔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일선 부대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소대에는 외국인 각성자가 지원을 나온 모양입니다. EV인가 하는 곳에서 왔다던데요."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 작전인지 모르겠네요. 각성자와 일반 병사들의 협력 작전이라니."

말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병사들은 서로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두, 이번 작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총알이 통하는 괴물은 병사들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총이 먹히지 않는 괴물에게는 총 든 병사들은 괴물의 먹이에 불과했다.

차오양시에 있는 괴물들은 대부분 총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었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일까? 각성자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급하게 입을 닫았다.

각성자 리쉬치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군인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귀가 밝았다. 덕분에 그는 부대원들이 속삭이던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반신반의 중인데…. 일반 병사들이 믿을 리가 없지.'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손에 든 창을 바라보았다.

창 손잡이에 박혀 있는 마나석이 신비로운 녹색 빛을 뿌리고 있었고, 합금으로 만들어진 창대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척 멋진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아이템은 창이었다.

중세 시대에 사용하던 창. 거기다 이 창은 던지지도 못했다.

도움을 직접 받았던 그는 억지로라도 EV를 믿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수뇌부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도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뭐,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지도부 안에서 좀 더 세력을 넓힐 수 있겠지.'

EV를 등에 업고 정국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떠올린 그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불합리한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 독립했지만, 아직도 정치의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래서야 북경놈들과 다르지 않겠어.'

그가 직접 현장에 나온 것도 그런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진입합니다."

뒤쪽에서 하사관이 작게 속삭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부대는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다.

도시는 전쟁에 휩싸인 다른 도시와 달랐다.

유리창이 깨지고 피가 사방에 튀어 있었지만, 건물들은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거리를 가로지르는 군인들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크르르릉.

건물이 멀쩡하다고 괴물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쥐가 건물 정문을 어슬렁거리며 빠져나왔다.

"미친, 쥐가 뭐 이리 커."

쥐는 웬만한 자동차보다 커 보였다.

"작전대로 해!"

장교가 부대원들에게 소리쳤다.

군인들이 총을 들어 올렸다. 딱 봐도 총이 안 먹힐 것 같은 괴물이었지만, 명령이 우선이었다.

"사격 개시!"

타타타탕!

괴물을 향해 총알이 쏟아졌다.

티티티팅!

예상대로 총알은 괴물의 몸에 닿지도 않았다. 방어막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괴물이 귀찮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간지럽지도 않았다. 괴물은 먹이의 앙탈이 귀여울 뿐이었다.

그때였다.

푹!

창 하나가 괴물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왔다.

괴물이 눈을 돌린 사이, 달려온 리쉬치엔이 내지른 창이었다.

괴물의 껍질이 두꺼웠기 때문일까? 아쉽게도 창은 방어막을 뚫고 겨우 껍질을 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리쉬치엔은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쨍그랑!

창이 방어막을 뚫는 순간, 괴물을 둘러싼 방어막이 전부 깨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퍼퍼퍽!

튕겨 나가던 총알이 괴물의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계속 쏴!"

장교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방어막이 없어도 튼튼하고 커다란 괴물이었지만, 병사들이 쏜 총알도 방탄복을 뚫기 위해 만든 철갑탄이었다.

모여서 쏘아대면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 화력이었다. 방어막이 없다면 괴물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쿵!

결국, 괴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와!

병사들이 환호했다. 각성자가 도와주었지만, 어쨌거나 총으로 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을 잡은 것이었다.

환호는 다른 곳에서도 들려왔다. 도시로 진입한 다른 부대에서 지른 함성이었다.

리쉬치엔은 괴물의 몸에서 창을 뽑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이건 보통 아이템이 아니었다. 그동안 있었던 괴물과의 싸움방법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확실히 EV는 달랐다.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EV는 괴물을 상대할 방법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금 두렵기도 했다.

"EV는 도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 거지?"

이 싸움의 끝은 어디일지, EV가 멈추지 않고, 이런 무기까지 준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도시를 되찾고, 만주국에서 괴물을 몰아내야 했다.

그 뒤에, 정권을 잡아 EV와 연계를 굳건히 해야 했다.

그는 창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부대원들이 밝은 얼굴로 뒤를 따랐고, 차오양시는 다시 인간의 도시가 될 수 있었다.

괴물에게 점령된 도시들이 차례로 해방되었다. 괴물들은 만주국 밖으로 밀려 나갔다.

얼마 뒤, 만주국은 EV와 협정을 조인했다.

만주국의 새로운 주석이 된 리쉬치엔이 선글라스를 쓴 EV의 대표와 악수했다. 리쉬치엔은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환영합니다."

경훈이 미소를 지었다.

만주국은 러시아와 북한에 이은 EV의 동맹국이 된 것이다.

178화. < 길을 나섰습니다 (1) >

만주 독립국과 EV가 협정을 조인하기 전.

경훈은 콜로라도강 상류에서 셰인과 베일리를 다시 만났다.

둘은 무사히 강의 수원지에 도착했지만, 배도 로봇과 강아지도 모두 몰골이 엉망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낑.

경훈의 말에 강아지는 혀를 내놓고 땅에 드러누웠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지루하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어느 때는 온종일 한가로운 항해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낯선 괴물들이 협곡 위에서 돌을 날리기도 하고, 이상한 물고기 괴물들이 물속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배가 뒤집히고, 물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배가 마른 협곡에 도착했을 때는 더는 이동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상류로 올라오는 길이라 급이 높은 괴물들이 보이지 않더군. 큰 위험은 없었어."

덜거덕거리는 관절을 움직이며 셰인이 말했다.

끼잉.

하지만, 강아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습니까?"

경훈의 물음에 셰인은 고개를 저었다.

"전부 쓸려나갔더라고. LA City 때처럼 방어벽을 세웠던 마을도 있었는데,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더라고."

"웨이브일까요?"

"글쎄. 방어벽을 칠 정도면 꽤 오래 막아냈다는 건데. 왜 망한 건지 알 수가 없군."

경훈의 물음에 로봇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 지금에서야 알아볼 방법이 별로 없었다.

일행은 바로 협곡을 올라갔다.

경훈은 마나석이 들어있는 엔진만 챙기고, 넝마가 된 배는 그 자리에 버렸다. 아쉽지만 물에 빠졌던 무전기도 더는 쓸 수가 없었다.

국립공원인 그랜드 캐니언에 쓰레기를 버린 꼴이었지만, 뭐라고 할 사람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꽤나 험난한 협곡이었지만, 위로 올라가는데 힘들어하는 동료는 없었다.

평평한 협곡 위에는 경훈이 새로 가져온 반짝거리는 지프가 놓여 있었다.

차 뒷좌석에는 새로 가져온 무전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푹신한 강아지 방석이 놓여 있었다.

베일리가 제일 먼저 차에 뛰어올라 방석 위에 자리 잡았다.

-정비원들이 밤새워서 수리한 차인데....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네요.

이브가 경훈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는 이브마저 차가 멀쩡할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곳은 황량한 그랜드 캐니언 서쪽 경계. 인간도 동물도 괴물도 보이지 않았다.

경훈이 차 보닛에 지도를 펴놓고 이동 경로를 설명했다.

"나바호 자치국을 지나 콜로라도를 지나면 동부까지는 거의 평지로 이어져 있습니다. 괴물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리 오래지 않아 동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미주 대륙을 관통하는 먼 길이었지만, 너른 평지가 쭉 이어져 있고, 괴물의 밀도도 낮아 이동하기는 훨씬 쉬웠다.

더구나 베일리가 예상보다 훌륭하게 괴물 레이다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너른 평야 지대라면 대부분의 괴물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가 없다면 2주 정도면 도착하겠군."

괴물이 없고 멀쩡했던 때라면 도로를 따라 4일이면 횡단할 수 있었지만, 도로가 망가진 지금이라면 2주도 빨랐다.

더구나, 괴물에게 걸리지 않는 가정으로 잡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경훈은 셰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뱃길도 그렇고, 앞으로의 여행도 무리한 여행인 것은 확실했다.

조용한 마나석 전기차로 움직이고 있다지만, 걸어가는 것보다 안전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경훈과 이브가 빠진 여행은 더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위험해지더라도 빨리 달려가야 했다.

셰인과 경훈이 지도를 확인하는 사이,

멍, 멍.

베일리가 차에서 짖었다. 동시에 이브가 말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경훈이 시간을 확인했다. 통신 시간이었다.

강아지 베일리도 통신 시간이 된 것을 알려준 것 같았다.

"신기하네. 어떻게 시간을 이토록 정확하게 맞추지?"

경훈이 신기한 얼굴로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셰인과 이브는 별로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AI가 시간이 틀릴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훈은 뭔가 외톨이가 된 기분을 느끼며 차로 걸어갔다.

새로 가져온 무전기였지만, 셰인은 능숙하게 무전기를 세팅했다.

치지직.

주파수가 맞춰지고, 셰인이 먼저 방송을 시작했다.

"CQ, CQ 여기는 베일리 모바일. 베일리 모바일. 현재 저희 그랜드 케니언에 도착했습니다..."

강아지 이름으로 된 콜사인이라니.

고유 코드도 아닌 규칙도 없는 콜사인이었지만, 둘밖에 없는 무선 통신이니 거릴 낄 게 없었다.

멍! 멍!

베일리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콜사인을 듣고 신이 나서 짖어댔다.

"...응답을 기다립니다. Standing By."

거기까지 말한 셰인은 무전기의 버튼을 땠다.

일행은 모두 무전기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방송이 들려오겠지만, 그 사이 사이로 생존자의 모스 부호가 들려올 것이다.

[치지지직....]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셰인이 다시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

"노이즈가 심합니다. 다시 조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Standing By."

[치지지지직.....]

노이즈가 심한 게 아니었다. 뉴욕 방송이 멈춘 것이었다.

경훈은 심각한 얼굴로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셰인은 마이크를 든 채로 멈춰있었다. 이브도 말이 없었다.

베일리도 심각한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다리에 머리를 묻고 눈치를 살폈다.

일행은 계속 통신을 해보았다.

하지만, 1시간, 2시간이 지나가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지붕에 있던 안테나가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건물에서 단 하나 멀쩡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무전기와 연결되었던 안테나였다.

안테나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안테나는 그동안 바람도 태풍도 한파도 견디어냈었다. 이렇게 부러질 리가 없었다.

소녀는 망가진 안테나를 살펴보았다.

잘려나간 면이 매끈했다. 자연적으로 망가진 게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알고 있었어.'

겁먹은 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괴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폈다.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문제없어.'

그녀는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 들어가자 그녀는 급하게 지하로 달려 내려갔다.

이 건물 지하에는 그녀의 벙커가 있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갑자기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인간들과 베일리 생각에 전과 달리 하루하루가 기쁘고 보람차 있었다.

하지만, 즐거운 기분은 통신이 먹통이 된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안테나가 잘려나간 것을 안 순간, 그녀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보지는 못했지만, 뉴욕에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를 포함한 생존자들과 군인들이 죽은 것도 그 몬스터가 이끄는 군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통신을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벙커 안에 들어와 잡음만 들리는 무전기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있는 곳도, 통신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모스 부호를 보내게 되자 통신을 끊을 리가 없었다.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몬스터들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동안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뮤턴트들이 망가뜨린 덫, 그리고 어려워진 사냥.

생각이 모이니, 뜻밖의 결론이 나와버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양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여태 내가 산 것도, 실력이나 특성 때문이 아닌 거야?"

물질계와 비 물질계를 넘나들 수 있는 특성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어린 소녀가 홀로 몬스터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강하고, 더 뛰어난 각성자들도 다 죽었어. 나만 살 수 있을 리가 없었어."

많은 각성자들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죽었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아니, 기적이 아니었다.

"함정이었어. 난 미끼였던 거야."

그녀를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잡아먹기 위한 미끼.

미끼가 이곳의 상황을 알려주게 되니, 사냥꾼은 미끼를 거둬들이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태 속아온 자신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바보! 멍청이! 몬스터 같은 년!"

방금 떠올린 추리도 어린 소녀가 단번에 떠올릴 생각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책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쾅! 쾅! 쾅!

머리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벙커에 혼자 지내게 된 이후에 처음 들은 소리였다.

몬스터들이 벙커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언제 이 벙커가 들켰는지 알 수가 없었다. 1년 전인지, 5년 전인지, 처음부터인지.

열었던 적도 없고, 열리지 않게 되어 있는 문이었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치지직....]

무전기는 잡음만 내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켜던 무전기였고, 희망을 주었던 아이템이었다.

그렇기에 몬스터들에게 넘길 수 없었다. 이제는 작별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근처에 놓인 쇠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무전기를 내려쳤다.

퍽! 퍽!

기계가 박살 나고, 안에 들어있던 테이프가 부서져 나갔다.

아빠의 목소리가 부서지고 있었다.

매일같이 들어서 지겹기까지 했던 음성이었지만, 그녀는 풀려 나가는 테이프를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무전기가 부서지자, 방을 뛰쳐나갔다.

시간이 부족했다. 놈들이 들어오기 전에 물건을 챙겨야 했다.

식량과 옷, 그리고, 사냥 도구들.

금방 돌아온 그녀 등에는 작은 가방이 메어 있었다.

아공간 가방이었다.

그녀는 부서진 무전기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른 가방처럼 가방이 컸으면 무전기도 들어갔을 텐데....

하지만, 아쉬워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놓인 사진액자를 가방에 넣었다.

그녀는 부모가 남긴 말을 잊지 않았다.

'달아나. 멈추면 안 돼. 넌 살아야 해. 살아남기만 하면, 다른 생존자와 만날 수 있을 거야!'

많은 추억과 물건이 벙커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쾅!

철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몇 층이나 차이가 있는데 이곳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가 온 모양이었다.

위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쾅!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비트랩이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몬스터들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괴물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가방을 메고, 복도로 나섰다.

크지 않은 벙커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그녀가 살았던 집이었다.

그녀는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출입구는 방금 부서진 그 문밖에 없었지만, 원래 그녀는 그 문으로 다니지 않았다.

벽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출입구는 이 벽 뒤에 있었다.

이 벽 뒤, 십여 미터 떨어진 땅속에는 하수도가 흐르고 있었다.

하수도 안은 조용했다.

그녀는 특성을 활성화했다.

우웅.

벽이 출렁거렸고, 반투명하게 변한 소녀가 벽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179화. < 길을 나섰습니다(2) >

통신이 안되자, 셰인은 바로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경훈과 이브가 셰인을 말렸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셰인의 몸을 수리해야 했다.

경훈은 셰인을 잠실 아지트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브도 잠실에 남았다. 셰인의 수리를 위해서였다.

세 시간 뒤, 미국에는 경훈 혼자 돌아왔다.

베일리가 경훈 주위를 뛰어다녔지만, 셰인은 보이지 않았다.

"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시간이 없으니까 우리 둘이 가보는 거야."

경훈이 친절하게 말했지만, 베일리는 대답도 없이 자신의 방석에 올라가 눈을 감아버렸다.

친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덤불이 뒹굴고, 괴물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황야.

나바호 인디언을 보호하기(가둬두기) 위해 만든 나바호 자치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척이나 황량한 곳이었다.

부우우웅.

지프 차가 황야를 질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등장한 인간이 탄 자동차. 경훈과 베일리가 탄 차였다.

덤불을 쑤시고 있던 들개가 고개를 들었다.

킁. 킁.

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달콤한 향기.

먹이였다. 들개의 어금니가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고, 털이 솟구쳤다.

괴물이 차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펑!

괴물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어금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탕!

거의 동시에 차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총소리였다.

탕! 탕!

총소리는 몇 번 더 이어졌다.

차를 향해 달리던 다른 들개 괴물들이 바닥에 처박혔다. 쓰러진 괴물들의 머리는 모두 박살 나 있었다.

철컥.

경훈은 저격용 총을 옆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예상보다 훨씬 시선을 끄는데…."

셰인이 차를 몰 때는 이 정도로 시선을 끌지 않았다. 역시 사람에게는 괴물들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경훈이 뒤를 보며 말했다.

"괴물들 없는 곳으로 잘 알려주고 있는 거지?"

...멍.

시원찮은 대답이었다. 경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말을 알아듣는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차가 가는 길에 괴물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은 갈수록 험난해졌다. 도로는 망가진 지 오래였고, 바위와 단층들이 길을 막기 시작했다.

경훈이 혀를 차며 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강아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 멍! 멍!

베일리가 앞을 보며 급하게 짖어댔다.

거대한 마나가 전면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 앞쪽에서 먼지가 가득 일어났다.

촤르르르르르.

그리고, 먼지 속에서 시끄러운 방울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경훈이 차를 급하게 멈추었다. 내리막길이라 차를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촤르르르르.

방울 소리는 더욱 커졌고, 먼지는 조금씩 가라앉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그곳에는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이 나타났다.

길이가 100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뱀이었다. 뱀이 꼬리를 흔들자, 다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방울뱀이냐..."

똬리 중앙에서 뱀 머리가 솟구쳤다. 뱀 괴물이 입을 벌렸다.

뚝. 뚝.

어금니에서 뚝뚝 액체가 떨어졌다.

그리고, 액체가 떨어진 땅이 자글거리며 녹아내렸다. 독이었다.

멍!

강아지가 차에서 뛰어내렸다.

크르르릉.

베일리는 날개를 뽑아내고 몸을 부풀렸다.

경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외통수인가."

차 옆에는 바위들이 교묘하게 쌓여 있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바위 군처럼 보였지만, 꽉 막혀서 빠져나갈 수 없어 보였다.

뒤쪽은 오르막길이었다. 물러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이 길은 저 괴물이 만든 일종의 개미지옥이었다.

크르릉.

이제 베일리는 완전히 날개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자는 뱀을 향해 으르렁거렸고, 거대한 뱀은 갑자기 등장한 적 때문에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곧 한바탕 괴수 대전이 벌어질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

변신한 베일리를 향해 손을 저은 경훈이 조수석에 놓여 있는 삼정검을 꺼내 들었다.

이브가 없어서 필살기를 함부로 쓸 수 없었다.

하지만, 한방이 없다고 S급 각성자의 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경훈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날개 달린 사자를 보던 뱀 괴물의 눈이 옆으로 돌아갔다.

베일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훈의 마나가 일대를 장악했다.

팟!

경훈이 괴물 뱀 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괴물 뱀도 경훈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괴물 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땅 위로 올라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커다랗게 변한 뱀 눈 안에 경훈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서걱.

거대한 뱀 머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푸아아악!

잘린 목에서 피가 치솟았다.

쿠웅.

곧추세운 목이 허물어졌다.

단 일 합이었다. 이 일대를 호령하던 괴물이 한순간에 쓰러져 버렸다.

경훈은 괴물 위에 서서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그는 솟구치는 살기를 가라앉혔다.

베일리는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실수했다. 독이 튀었어."

경훈은 방탄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훈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베일리는 그런 경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낑.

어느새 강아지로 돌아온 베일리는 차 속에 들어가 방석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괴물의 몸에서 마나석을 뽑은 뒤, 차로 돌아온 경훈은 강아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 뒤로도 가끔 괴물이 덤벼들었지만, 차가 멈춰서는 일은 없었다.

베일리가 길을 잘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뒤로 베일리는 경훈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았다.

나름 친해진 것 같아 경훈은 만족스러웠다.

***

뉴욕시 외곽.

타닥, 타닥.

버려진 고급 주택 거실 벽난로가 오랜만에 다시 불을 피우고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벽 덕분에 벽난로에 피운 모닥불은 그리 따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이 정도도 충분히 만족했다.

도시를 빠져나가게 되면 불을 피우기도 쉽지 않았다. 괴물들의 눈에 걸릴 게 분명했다.

피하는데 특화된 특성도 있고, 그동안의 경험도 있었지만, 그 경험들은 대부분 도시 안에서의 경험이었다.

괴물들이 가득한 도시였지만, 도시는 그녀에게는 익숙한 숨바꼭질 장소였다.

이제, 내일이면 그동안 살아온 도시를 벗어나게 될 것이었다.

걱정이 모닥불처럼 피어올랐다.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녀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모닥불 위에 걸어놓은 반합에서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프가 다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쇠꼬챙이로 반합을 꺼내왔다.

고기 몇 점이 겨우 보이는 멀건 스프였다. 하지만,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고기가 부족해서 걱정했는데, 이동하다가 쥐 몇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피를 빼내고, 가방에 집어넣었고, 일부는 이렇게 식사로 쓸 수 있었다.

식사는 금방 끝났다. 그녀는 아쉬운 얼굴로 빈 그릇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스프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괜히 식탐을 키웠다가는 몬스터가 된 어른들처럼 변할 수 있었다.

배고픔을 못 참아서 몬스터 고기를 먹고 자신들도 몬스터가 된 어른들.

그녀는 배고파 죽더라도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삐이익!

그리고, 피리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삐이이익!

이번에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추적자들이었다.

소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벽난로의 불을 뒤집었다. 불이 꺼졌다.

저 몬스터들이 몰려다니며 다른 동물이나 몬스터들을 잡는 것을 보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목표였다.

그녀는 어두워지는 거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소녀는 가방에서 망토를 꺼내 몸을 덮었다. 인간 냄새를 숨겨주는 아이템이었다.

몬스터 가죽이라 냄새는 많이 났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따뜻했다.

불도 끄고, 인간 냄새도 숨겼으니 이 밤에는 괴물들이 찾지 못할 것이었다.

준비를 마치자, 또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냥, 숨어버릴까?"

깊은 동굴 속에 숨어버리면 괴물들도 찾지 못할 텐데.

그녀를 따라오는 괴물들이 있었다. 괴물들을 데리고 가면 베일리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숨을 수는 없었다.

"베일리가 보고 싶은걸."

소녀는 망토에 얼굴을 묻었다.

해가 지고, 소녀는 잠들었다.

삐이이익!

어두운 뉴욕시 위로 피리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콜롬비아주에 들어설 무렵, 셰인의 수리가 끝이 났다.

경훈은 로키산맥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잠실의 아지트로 공간 이동을 했다.

베일리는 기다리라는 경훈의 명령을 잘 지켜주었다.

강아지는 경훈과 셰인이 돌아올 때까지 차 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우웅.

은빛 구멍이 차 옆에 만들어지고, 구멍 안에서 셰인과 경훈이 빠져나왔다.

셰인은 다시 말끔해져 있었다.

[남은 부품이 많지 않아요. 제발 좀 조심해 줘요.]

이브가 투덜거렸지만, 셰인은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베일리!"

셰인은 차로 걸어가며 강아지를 불렀고,

멍! 멍! 멍!

강아지가 셰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멍멍멍!

베일리는 셰인에게 매달려 로봇의 몸을 마구 핥았다.

카메라가 강아지 침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아니, 물을 뺐더니 이번에는 강아지 침인가요?]

다시 이브가 투덜거렸지만, 셰인은 강아지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좀 이상한데?"

경훈이 다가오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요? 괜찮던데. 둘만 있는 동안 아주 친해졌어요. 이제는 베일리도 내 말 잘 들어요."

경훈이 베일리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치?"

부르르르.

경훈이 웃자 강아지가 몸을 떨었다.

베일리는 셰인의 가슴에 머리를 처박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겁먹은 것 같은데?"

놀란 셰인이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무서워하는 거 맞는데요. 도대체 둘이 있는 동안 뭘 한 거죠? 설마 말 안 듣는다고 강아지를 패기라도 한 건가요?]

"내가? 베일리를?"

경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작은 소란이 지나고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차는 로키 산맥을 넘고, 콜로라도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달려갔다.

그동안 경훈은 차원 이동으로 만주를 다녀왔고, 결국 한국을 지키는 방어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러 험난한 일들이 있었지만, 일행은 결국 낡은 표지판 앞에 설 수 있었다.

[워싱턴 DC까지 50km]

드디어, 대륙 동쪽에 있는 미국의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

소녀는 지친 얼굴로 하얀 건물을 쳐다보았다.

겨우 이곳까지 도착한 그녀였다.

뉴욕 밖은 그녀 생각보다 더 힘들고 위험했다. 겨우 도시 두 개를 건너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뉴욕을 빠져나올 때보다 많이 여위어 있었다. 팔에는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었고, 옷은 낡고 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삐이이익.

멀리서 피리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얀 건물, 예전에는 백악관이라고 불리었던 건물이 떠나는 그녀를 홀로 배웅했다.

180화. < 길을 나섰습니다(3) >

펜타콘.

911테러 때에도 튼튼함을 자랑하던 세계 최강국의 국방부 건물은 폭격에 맞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오각형 건물의 반은 형체도 남지 않았고, 나머지 반도 폐허로 변해 있었다.

경훈은 부서진 건물을 보며 혀를 찼다.

혹시,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들렸는데, 이래서야 시간만 낭비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밤을 지내야 하니,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자고."

셰인이 총을 어깨에 메고 반파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셰인의 배려에 경훈은 속으로 감사했다.

셰인도 하루빨리 뉴욕으로 가고 싶을 텐데, 워싱턴에 들르는 것을 동의한 것이다.

경훈도 셰인의 뒤를 따랐다.

"뭐라도 나와야 할 텐데..."

-몬스터들이 공격을 시작한 곳,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쪽 세상은 대격변 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을 잘 지내왔었다.

그런 세상이 어느 순간 괴물들의 공격에 멸망해 버린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알아낸다면, 저쪽 세상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들은 조용히 부서진 건물을 수색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크고 넓은 건물이었지만, 벽이라도 남은 곳은 많지 않았다.

발견한 것도 많지 않았다.

"낡은 필름들하고, 엉망이 된 서류 뭉치. 버려진 자기 테이프 몇 개 정도인가."

모아온 쓰레기 더미를 보며 경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 쓰레기더미에서 뭔가 찾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것은 경훈이 아니었다.

경훈은 손을 쓰레기 더미 위에 올렸다. 손바닥 아래 공간이 일렁거렸다. 쓰레기들이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밤이 깊었다.

"가지고 돌아갈 건가?"

셰인의 물음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는 넘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넘어갈 이유도, 넘어갈 생각도 없었다.

만주 독립국과 협정도 마무리 지었다. 일본이 남아있었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일이 벌어질 리도 없었다.

그리고, 뉴욕을 코앞에 둔 지금, 다른 곳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셰인이 무너진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총을 벽에 세워놓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무사하겠지?"

강아지가 셰인 옆에 자리를 잡았고, 경훈도 반대편 벽에 주저앉았다.

"무사할 겁니다."

하지만, 셰인도 경훈도, 그리고 이브까지도 생존자가 무사할 가능성을 크게 보지는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사히 방송을 이어온 생존자였다.

방송이 멈춘 지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살아 있다면 다시 방송을 시작했을 게 분명했다.

"어떤 사람일까요?"

"글쎄, 자신에 대해 최대한 숨기는 것 같던데…."

모스 부호로 대화를 여러 번 진행했지만, 생존자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겠죠. 저희도 셰인과 이브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거기다, 같이 가는 강아지가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상대의 대응을 살펴보면 남성보다 여성일 확률이 더 높아 보입니다. 나이도 많은 쪽이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베일리를 아는 것 같았어."

단순한 모스 부호였지만, 강아지의 이름을 묻고 듣는 순간, 셰인은 상대의 감정을 느낀 것 같았다.

실제로는 감정을 느낀 게 아니라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분석한 것이겠지만.

'상관없지.'

셰인은 감정을 느낀 쪽으로 이해할 생각이었다.

"역시, LA City의 생존자일까요?"

"글쎄..."

순간, 일행은 대화를 멈추었다.

삐이이익.

멀리서 피리를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생명체의 발성 기관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괴물이 지른 소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도감에는 같은 소리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평범한 괴물은 아니라는 거겠지?"

워싱턴에 들어와서는 예상과 달리 괴물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드디어 나타난 것 같았다.

"흠, 어떻게 할까요?"

"무시하기는 어렵겠지?"

소리가 한 곳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들리는 곳의 숫자가 늘어나고, 위치도 바뀌었다. 피리 소리는 마치 도시를 수색하는 수색 꾼 같았다.

베일리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은신 망토를 쓰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잠자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이브와 셰인은 잠을 자지 않았지만, 경훈과 베일리는 잠을 자는 편이 좋았다.

"뉴욕을 앞에 두고 한바탕하기는 그렇겠죠?"

경훈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실력이라면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지만, 목적지를 앞에 두고 소란을 벌일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워싱턴 수색은 여기서 마쳐야겠습니다. 저 소리가 가까이 오기 전에 빨리 도시를 벗어나죠."

경훈과 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이 일어나자, 베일리도 몸을 일으켰다.

삐이이익.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그르르릉.

베일리가 짜증이 나는지, 몸에서 날개를 뽑아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입을 벌렸다.

멍! 멍! 멍!

갑작스러운 울음에 경훈이 이마를 잡았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급하게 되었다. 일행은 차로 달려갔다.

스르르르.

그리고, 일행이 탄 차는 바로 펜타곤을 빠져나갔다.

*

소녀는 번쩍 눈을 떴다.

"베일리?"

강아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녀는 망토가 내려가지 않게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밖은 어두웠고,

삐이이익. 삐이이익.

괴물의 신호만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꿈?"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꿈을 꾼 모양이었다.

몸이 너무 약해진 모양이었다. 안 꾸던 꿈까지 꾸다니.

그녀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지금 있는 곳은 층계가 부서진 건물의 10층 로비였다. 기껏 쉴만한 곳을 발견했는데,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 순간,

멍! 멍! 멍!

강아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망토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망토를 추스를 생각도 못 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소리가 들린 창문으로 달려갔다. 10층 높이의 창문이라 밖이 잘 보였다.

밖은 어둠이 가득했지만, 각성자인 그녀는 의미가 없는 어둠이었다.

훤하니 뚫린 창문 너머로 넓은 숲이 보였다.

원래는 알링턴 국립묘지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이상하게 생긴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건물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이 펜타곤이라고 불렀던 건물이었다.

아쉽게도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이쪽에서 들려왔었다.

"가야해."

그녀는 가방에 물건들을 쑤셔 넣고,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추적자들이 기승을 부리는 위험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을 빠져나온 소녀는 숲을 가로질렀다.

삐이이익! 삐이익!

피리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촤아악.

유공자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판들 사이에서 자라난 어린나무들이 그녀의 앞을 계속 막아섰다.

달리면서 숲을 계속 살폈지만, 강아지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베일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숲을 빠져나왔다. 넓은 도로 너머에 반파된 오각형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건물로 달려갔다.

도로를 건너고, 소녀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폐허가 되어 안이 훤히 보이는 건물. 그 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려진 차들이 남아있는 주차장과 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서 있는 곳 옆에는 새로 만들어진 바퀴 자국이 도로로 쭉 이어져 있었다.

좀 전에 떠난 전기차가 만든 바퀴 자국이었다.

얼마 전에 만들어진 자국이었지만, 그녀는 바퀴 자국을 구별할 줄 몰랐다.

"베일리!"

큰소리로 외쳐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뚝. 뚝.

바닥에 눈물이 떨어졌다.

베일리는 없었다.

잘못 들은 걸까? 또 꿈을 꾼 걸까?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힘들었다. 몸이 무거웠다. 지쳐버렸다.

어른들 말이 맞았다.

'기대하면 안돼. 실망이 너를 잡아먹을 거야.'

'희망은 없어. 희망을 품게 된 순간, 절망이 널 비웃을 테지.'

엄마, 아빠의 말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지만, 이번만은 틀린 것 같았다.

삐이익! 삐이익!

그녀의 귀에 다시금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피리 소리가 가까웠다.

"아, 안돼."

소녀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

추적자들이 우글거리는 밤에 이 먼 거리를 질주하고, 거기다 강아지의 이름을 외쳤다.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망쳐야 해."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닥이 휘청거렸고, 몸이 뜨거웠다. 붕대를 감은 팔이 타는 듯이 아파졌다.

각성자가 일반인보다 훨씬 몸이 튼튼했지만,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벌벌 떨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삐이이익! 삐이익!

피리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포위당한 것이다.

그녀는 반파된 건물로 향했다. 무너진 건물 안에 숨을 공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벽에 손을 올렸다. 내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비어 있어.'

아파서인지,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1층은 비어 있었다.

벽이 출렁거리고, 그녀는 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

펜타곤 북쪽 건물 1층.

벽에서 튀어나온 소녀는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가누었다.

아직은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빨리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지하, 지하는 안전할 거야.'

그녀는 바닥에 손을 올렸다.

"아..."

하지만, 소녀는 바닥에 손을 댄 채로 몸을 굳히고 말았다.

보이지 않았다. 안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몸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마나가 떨어진 것이다.

몸이 안 좋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리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철걱, 철걱.

대신, 발소리가 들려왔다.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다.

쾅!

문이 부서졌다. 놈들이 들어왔다.

렛맨.

녹슨 창과 몬스터의 가죽을 두른 쥐 인간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찌찍.

쥐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성인과 같은 키와 곧게 두 발로 선 모습은 오히려 사람과 닮아 보였다.

소녀는 멍하니 렛맨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쿵. 쿵. 쿵.

먼저 들어온 쥐들 뒤로, 거대한 덩치가 따라 들어왔다.

이번에는 두 배 이상 커다란 쥐 인간이었다. 3m가 넘는 천장이었지만, 머리가 부딪칠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렛맨은 손에 무거운 철퇴를 들고 있었다.

삐이이익.

큰 렛맨이 소녀를 보고 피리 소리를 냈다.

렛맨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렛맨은 웃고 있었다.

'제발, 제발 움직여!'

소녀는 렛맨들이 그녀를 포위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나가 비어도, 특성이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아파도, 낙담하고 실망해도,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냥 포기했을 거였으면, 엄마 아빠가 죽은 그날, 홀로 벽 뒤에 숨어 살아남았을 리가 없었다.

이 오랜 시간 홀로 버텨왔을 리도 없었다.

'움직여! 움직여!'

하지만, 오늘은 마나가 그녀를 외면한 것 같았다.

몬스터가 철퇴를 들고 다가와도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철퇴가 위로 올라갔다.

'정말 마지막이야?'

그녀는 떨어지는 철퇴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베일리를 보고 싶었는데..."

쾅!

땅이 울렸다.

푸아아악!

피가 튀어 올랐다.

먼지가 치솟았다.

콰르르르르.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렛맨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위이이이잉.

그리고, 먼지 사이로 붉은 눈이 달린 검은 기계가 날아다녔다.

서걱! 타타탕!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앙!

괴물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먼지 사이로, 큰 렛맨이 뒤로 넘어가는 게 보였다.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소녀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아직 죽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천국은 이렇게 시끄러운 곳이 아니었다.

쓰러진 렛맨이 있던 자리에 다른 괴물이 서 있었다.

큰 날개를 가진 거대한 사자였다.

소녀는 멍하니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도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베일리?"

사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날개가 사라지고, 털이 짧아졌다.

멍! 멍!

강아지가 주인의 품에 뛰어들었다.

위이이잉.

드론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체온 정상. 눈 색 정상. 인간입니다.]

이브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181화. < 이사벨(1) >

크아아아앙!

크악!

멀리서 몬스터의 괴성과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소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꽉.

떠는 그녀에게 아빠가 가방을 건네주었다. 작은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큰 가방이었다.

"이 가방을 들고, 네 숨바꼭질 장소에 숨는 거야. 그동안 아빠 엄마가 말해준 거 기억하지?"

매일같이 해준 이야기였다. 당연히 그녀는 기억했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그녀를 껴안았다.

"이사벨, 우리 이쁜 아가. 언제나 우리가 지켜보고 있을 거야. 사랑해."

엄마는 팔을 풀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서둘러야 해."

아빠가 소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울며 바닥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부모는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를 배웅했다.

특성이 발휘되고, 세상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낑.

뒤척이는 강아지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아침 햇살이 눈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정신이 돌아왔다.

"꿈이구나."

엄마, 아빠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때의 슬픈 꿈. 그래도 꿈속에서나마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꿈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우선 주위를 살폈다. 자기 전과 달라진 게 있는지 살펴야 했다.

창에서 흘러들어오는 따스한 햇볕, 평안한 공기,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로봇 인형.

배 위에 누워 자는 강아지, 베일리.

소녀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아직 꿈속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을 끔벅여도, 입술을 깨물어보아도 꿈에서 깨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놀란 소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떼구르르.

강아지가 아래로 굴러갔고, 로봇 인형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어난 건가?"

소녀는 입을 헤 벌린 채로 로봇을 바라보았다.

로봇 인형이 움직이고 말을 했다.

아니, 어렸을 때 두고 온 로봇 인형이 아니었다.

진짜 로봇이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멍! 멍!

그때, 잠에서 깬 강아지가 그녀 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아..."

강아지를 본 순간, 소녀는 전부 기억이 났다.

날개 달린 사자가 강아지로 변한 것도, 강아지를 품에 안고 기절한 것도 전부 떠올랐다.

펄펄 끓는 열과 치료하지 못해 덧나기 시작한 팔. 그리고, 고갈된 마나.

하지만,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열은 내렸고, 마나도 가득했다. 그리고, 팔에 감긴 붕대도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사라졌다.

소녀는 강아지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 손을 핥았다.

베일리였다. 그녀의 강아지, 베일리가 맞았다.

소녀는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방, 방송을 한 사람이 로봇인가요?"

말을 하는 로봇을 향해 처음으로 꺼낸 말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말을 잊지 않으려고 혼잣말은 계속했지만, 다른 사람과 말을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셰인이라고 부르면 돼. 이쪽 방송 대부분은 내가 한 것이 맞고, 로봇도 맞아."

그녀도 방송에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봇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소녀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는 로봇이었다.

더구나 그가 본 몬스터 중에는 로봇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럼, 방송에서 나온 음성은 전부 로봇인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셰인이 카메라를 긁적였다.

인원 구성을 이야기하려니, 조금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사람은 한 명 있지."

부우우웅.

셰인의 말과 함께 바닥에 검은 구멍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구멍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소녀의 눈이 다시 커졌다.

"일어났구나."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는 소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오염된 인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하려던 경훈은 상대의 반응에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이쪽 세상에서 자신은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경훈은 잠에서 깬 소녀를 살펴보았다.

무척이나 야윈 소녀였다. 거친 머릿결에 상처가 가득한 피부,

-예상보다 더 어린 것 같습니다.

먹지 못해서 많이 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앳된 얼굴만 봐도 10대 중반은 넘지 않았다.

[일어났으니, 치료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브가 모두가 듣도록 스피커로 말했다. 이쪽 세계에서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소녀는 갑작스러운 음성에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분은 어디 있는 거죠?"

주변을 감지하는 능력은 그녀가 자신하는 능력이었다.

일정 거리 안이라면 중간에 무엇이 가로막더라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목소리의 주인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유령인가요?"

소녀는 겁먹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로봇 인형이 로봇이 되어 말을 하고, 베일리가 날개 달린 사자가 되고, 사람이 검은 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마법사 일행이라면 유령하고 같이 다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경훈과 셰인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설명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소녀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경훈은 우선 그녀에게 아침 식사를 건네주었다.

그는 아공간에서 보온병과 아직 식지 않은 도시락을 꺼냈다. 이 도시락이 열심히 저쪽 세상에 다녀온 이유 중 하나였다.

보온병에는 따뜻한 스프가 들어있었고, 도시락통에는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담겨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본 제대로 된 음식에 소녀는 다시 놀라고 말았다.

잠시 주저했지만, 소녀는 조심스럽게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멍! 멍!

눈치 없게 강아지가 자기도 달라고 꼬리를 흔들어댔다.

"응, 기다려."

정신없이 샌드위치를 먹던 소녀였지만, 옛날처럼 강아지에게 자신이 먹던 샌드위치를 떼주었다.

베일리는 샌드위치 조각을 맛있게 먹었고, 소녀는 울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베일리가 난입했지만, 다행히 양은 부족하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소녀는 일행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착한 아이 같아요.

경훈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 약은 식후 30분 이내니까."

경훈은 배낭에서 포션을 꺼냈다.

상처 치료 포션이었다.

급한 팔 상처에만 포션을 부어 치료했지만, 원래 포션은 먹는 거였다.

더구나, 다른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고, 팔 상처도 다 치료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포션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도 포션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도.

"성능이 조금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마셔두는 게 좋을 거야."

경훈은 그녀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소녀는 경훈의 강권에 포션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훈은 포션을 마시는 소녀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어요."

포션을 마신 소녀가 입맛을 다시며 병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맛있을 리가 없는데…."

치약 맛 포션을 좋아하다니. 제대로 된 음식을 오랫동안 못 먹어서였을까?

-민트 맛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주인님과 취향이 다를 뿐입니다.

이브가 뭐라 했지만, 경훈은 기필코 저 포션 맛을 바꿀 생각이었다.

소녀는 신기한 표정으로 포션 병을 들여다보았다.

포션 병에는 이쁜 상표가 붙어 있었다.

[JK POTION]

전에 본 상표와 달랐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제조연월일과 제조국이 적혀 있었다.

202X년. KOREA.

소녀는 놀란 눈으로 포션 병을 가리켰다.

"한국은 괜찮은 거예요?"

뭔가 오해가 깊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나레이션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브 부탁해."

-어디까지 설명할까요?

이 세상에서는 숨길 것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전부."

[우선 주인님부터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강경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차원 이동 각성자입니다. 원래 이쪽 세상 사람이….]

소녀는 입을 딱 벌리고, 자신이 인공지능이라고 말하는 유령의 설명을 들었다.

믿기 힘든, 놀라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두 세계의 이야기와 경훈과 셰인의 여행. 그리고, 몬스터가 된 베일리의 이야기까지,

소녀는 정신없이 이브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

소녀는 한참 뒤에야 겨우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한국 친구가 준 인형의 모델과 베일리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겠어?]

이브의 말에 소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길게 말해본 경험이 없어서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자신의 이름부터 이야기하는 거란다.'

엄마가 한 말을 떠올리며 소녀는 입을 열었다.

"저는 이사벨 덩컨입니다. 나이는 음…. 열셋 일 거에요. 저는 LA City 출신이에요. 아빠 엄마와 함께 배를 타고 뉴욕으로 왔어요."

예상대로 소녀는 강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 속의 아이가 맞았다. 그녀를 본 순간 일행은 모두 사진 속의 아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소녀, 이사벨은 그동안의 일을 일행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중간중간, 말을 멈추기도 하고, 단어를 몰라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많은 내용을 전해 주었다.

뉴욕은 미국인들의 마지막 요새였다.

시티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모은 함대는 뉴욕까지의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바다에 가라앉았다.

뉴욕에 모인 생존자들은 뉴욕 시티를 확장하고 괴물과 싸우며 생존을 이어갔다.

하지만, 삶은 점점 어려워졌다. 부족한 식량. 괴물들의 습격. 문명의 퇴보로 생활 수준의 급격한 저하.

어른들은 서로 싸우고, 점점 삶을 포기했다.

자살하고, 몬스터를 먹어 뮤턴트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요새 내로 몬스터를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마지막 시티가 무너지고, 그녀는 혼자 남게 되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홀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소녀에게 하찮은 위로나 감탄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셰인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방송을 멈춘 거지? 모두 걱정을 많이 했어."

셰인의 질문에 이사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빨리 피해야 해요! 추적자들이 또 올 거예요! 낮에는 움직임이 적으니 해가 지기 전에 움직여야 해요."

그녀는 뉴욕을 떠나온 이유를 급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경훈이 턱을 쓰다듬었다.

"사람을 유인하는 괴물이라.... 군주급 괴물로 상정하는 편이 좋겠지?"

-뮤턴트나 도플갱어라면 등급이 낮을 가능성도 있지만, 군주급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볼 생각인가?"

"네, 배들도 있고, 생존자도 많이 남아있었다니, 필요한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경훈의 말에 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이 놀란 눈으로 셰인과 경훈을 번갈아 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사벨을 데려가지는 않을 거예요.]

이브가 이사벨을 안심시켰지만, 이사벨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안전이 아니었다.

셰인이 소녀를 보며 말했다.

"정말, 저쪽 세상에 데려갈 방법이 없을까?"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이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여러 차례 실험해 보았다.

미생물이나 박테리아같은 것은 같이 이동하는 것 같았지만, 일정 지능을 가진 살아 있는 생명체는 경훈과 같이 차원을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등급이 더 올라가면, 특성 활용방법을 더 터득하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우선은 안전한 아지트를 찾아야겠죠."

이곳은 펜타곤에서 조금 떨어진 빌딩 안이었다. 밤이라 멀리 움직이지 못해 급하게 찾아온 곳이었다.

이사벨 말대로 추적자가 있다면 싸우기 전에 안전한 아지트를 찾아놓아야 했다.

그리고, 경훈이 알기로는 쓸만한 곳이 이 근방에 있었다.

"백악관 지하에 튼튼한 벙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죠."

혹시나 남은 자료가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182화. < 이사벨(2) >

백악관은 다른 건물들과 달리 피해가 크지 않았다.

대신, 말라붙은 나무도, 풀도, 유골도 색이 변해 있었다.

"독인가."

경훈은 죽은 나무를 만져 보았다. 아직도 찌릿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백악관 주변과 건물 안에는 다른 곳과 달리 유골이 많이 남아있었다.

독 때문에 괴물들이 먹지 못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난 덕분에, 남은 독은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경훈은 일행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렇다고 싸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괴물과 미이라가 된 시체가 남아있었다. 독에 버틴 각성자와 괴물이 싸운 흔적이었다.

하지만, 미이라가 된 각성자와 괴물도 색이 변해 있었다. 각성자라고 완전히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입구도 무너진 건가?"

백악관 서쪽 건물, 웨스트 윙 층계를 보며 경훈이 혀를 찼다.

누가 무너뜨렸는지 모르겠지만, 계단이 무너져 있었다. 그것도 한층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데 함부로 터트릴 수도 없고, 난감하네."

지하 벙커가 웨스트 윙 지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경훈으로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경훈과 셰인이 무너진 층계를 보며 아쉬워할 때, 이사벨은 강아지와 함께 폐허가 된 건물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이사벨은 식사와 포션만으로 빠르게 기력을 회복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이런 폐허는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었지만, 이사벨에게는 흔한 옆집 건물일 뿐이었다.

더구나, 조심을 시켜야 할 어른들은 그래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색이 변한 뼈 먹으면 안돼. 알았지?"

멍! 멍!

평범하지만 이상한 대화를 나누며 소녀와 강아지는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이사벨은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다니, 더구나, 말하는 로봇과 베일리까지 같이 있었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장면 같았다.

"그래도 난 도로시는 아니니까."

그녀는 자리에 앉아 바닥에 손을 짚었다.

우우웅.

그녀는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바닥에 가득 풀어 넣었다.

지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찾은 것 같은데…."

이사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베일리에게 부탁했다.

"셰인하고 그 아저씨 저쪽 방으로 데려와 줄래?"

이사벨이 복도 끝 방을 가리켰다.

멍! 멍!

베일리가 꼬리를 흔들더니, 경훈과 셰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사벨이 자신이 가리킨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방이었다. 다른 방과 다르게 원형으로 만들어진 방.

미합중국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잠시 뒤, 경훈과 셰인도 베일리를 쫓아 집무실에 들어섰다.

"이사벨은 어디 있어?"

멍! 멍!

경훈이 물어보았지만, 베일리는 방 안을 뛰어다니며 짖을 뿐이었다.

경훈이 셰인을 돌아보았다. 셰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라고 다 알아듣는 건 아냐."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궁.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 아래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셰인과 경훈이 급하게 카펫을 치웠다.

카페트 아래 바닥에 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금은 점점 벌어져 기울인 통로가 되었다.

셰인과 경훈이 통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통로 끝에서 이사벨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여기 입구가 있어요!"

경훈과 셰인이 놀라 쳐다보는 동안, 강아지가 먼저 통로에 뛰어들었다.

멍! 멍!

강아지는 통로를 미끄러져 내려가 이사벨의 품에 안겼다.

경훈과 셰인도 통로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짧은 미끄럼 끝에 둘은 통로를 빠져나왔다.

붉은 등이 남아있는 실내에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등 뒤에는 무너진 층계가 보였고, 짧은 복도에는 몇 개의 방문이 보였다.

복도 끝 문에는 [상황실]이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백악관 상황실. 백악관 지하 벙커가 확실했다.

붉은 등 옆에 버튼이 보였다. 집무실 통로를 여는 버튼인 것 같았다.

저 버튼을 눌러 통로를 연 모양이었다.

"이게 네 특성이야?"

땅속에 있는 벙커를 찾고, 통로도 없는데 이 아래에 내려와 버튼을 누른 능력.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특성은 어제 얼핏 듣기는 했었지만, 아직 실제로 보진 못했다.

그녀는 손을 벽에다 대고 특성을 살짝 활성화했다. 벽이 일렁거렸고, 벽에 댄 그녀의 손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그녀의 팔이 쑥 벽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이게 제 특성이에요."

"음. 땅에 묻혀 있어도 어느 정도 거리 안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있고.... 이렇게 딱딱한 물건을 뚫고 지나갈 수 있어요. 근데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해요."

그녀는 금방 말이 늘었다. 확실히 머리가 좋은듯했다.

[신기한 능력이네요. 물질을 투과하는 능력인가 보군요. 엄청나게 유용한 특성이네요.]

그녀의 특성을 보고 이브가 감탄했다.

"아니, 그런 능력이 아냐."

하지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경훈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브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설마....]

"맞아. 저건 일종의 차원 이동 능력이야. 반쯤 차원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지. 어느 차원에 걸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숫한 특성을 가진 내가 보증할 수 있어."

경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사벨은 슬쩍 셰인 뒤에 숨었다.

경훈이 이사벨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각성을 두 번 한 거지?"

"네? 네…."

이사벨은 경훈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초기 각성은 대부분 E에서 F등급에서 시작이었다.

"그럼, 지금은 D등급에서 E등급 정도이려나?"

[확인해 볼까요?]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등급은 나중에 확인해도 되었다.

"나이도 어리고, 전투 계열도 아니니, 오래 살아왔어도 등급이 오르기는 어려웠겠지."

셰인은 경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등급을 더 올리면 자네처럼 차원 이동을 가질 거로 생각하는 건가?"

"특성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주인님처럼 등급이 올라도 새로운 능력을 못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경훈은 입맛을 다셨다.

이브 말대로 S등급에 오른 지 꽤 되었는데 경훈은 아직 특성의 강화나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S등급에 오른 각성자들이 전부 새로운 특성을 개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훈과 이브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셰인이 고개를 돌려 자신 뒤에 숨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앳된 소녀.

홀로 이 세계에서 버텨온 아이를 마음대로 싸움터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이 아이가 결정하도록 해야겠지."

"네, 당연하죠.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거고요."

셰인의 말에 경훈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내부부터 확인해 볼까?"

어차피 당장 결정할 것도 아니었다. 경훈은 [상황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으로 걸어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벌컥.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더 심하게 흘러나왔다.

"시체가 썩은 냄새였나?"

상황실 안을 살펴본 경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실 안에 시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뼈만 남은 유골들과 옷가지들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모두, 색이 변한 유골들. 유골에는 독에 당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상황실에는 그날, 마지막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문을 향해 기어가다가 죽은 것 같은 유골에서 의자와 책상 위에 흩어진 유골까지. 모두 같은 순간에 죽은 것 같았다.

"여기는 각성자는 없었나 보네."

상황실 안에는 유골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보아온 바로는 각성자는 죽은 뒤에도 미이라로 남아있었다. 몸에 남은 마나 때문이었다.

"이쪽 세상의 미국 수뇌부에는 각성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건가?"

층계도 무너지고 비상 통로로 나간 흔적도 없었다.

각성자가 포함되지 않았다니, 영웅을 좋아하는 미국답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을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의 속성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경훈과 셰인은 바로 상황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 같았지만, 정보에 주린 경훈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게도 많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단지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이 마지막 미국 대통령과 핵심 각료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통령 뒤쪽 유골에서 아직 멀쩡한 가방 하나를 찾을 수 있었고, 특이한 정보가 적힌 서류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연방 준비은행 금괴가 뉴욕에 없군요."

뉴욕 연방준비은행 지하에 있던 금괴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로키 산맥, 사이엔 산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지하 요새.

북미 방공우주사령부와 북부사령부 지휘통제소가 있는 요새에 금괴가 옮겨져 있었다.

요새에는 금괴 말고도 괴물들의 공격에 대비해 각종 미국 자산들이 옮겨져 있었다.

각종 문화재와 유물, 그리고, 아이템들과 각종 중요 문서들까지.

미국 정부는 이 요새를 일종의 방주로 쓸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곳으로 철수하기 전에 대대적인 공격을 당한 거였군."

철수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이 지하에서 죽어 있었다.

"가봐야겠군요."

"그래야겠지. 금괴나 다른 물건을 찾아가야지."

셰인도 이제 익숙해져 있었다.

"금괴 때문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방공우주사령부가 있습니다."

경훈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아직 살아 있는 위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온 초기부터 경훈은 내비게이션을 잘 사용하고 있었다. 적어도 GPS 위성들은 살아 있었다.

"우주 사령부가 있다는 것은 인공위성을 제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위성을 연결하면 분명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경훈이 공간이동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지구는 너무 넓었다. 경훈이 모두 다녀볼 수는 없었다.

당장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없는 이상, 있는 위성으로 세상을 살펴봐야 했다.

"이브가 있으니,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해 보입니다.]

경훈의 말에 이브가 동의했다.

"거기다, 남겨진 미군 무기들이 있는 위치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쪽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괴물들을 상대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경훈과 EV가 상대하는 적은 괴물만이 아니었다.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각성자와 아이템보다 훨씬 도움이 될지 몰랐다.

"그리고, 그 무기 중에는 이것도 있습니다."

경훈이 묵직한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 구석에서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이 지하 벙커에 있는 마나석 발전기처럼 가방 안에도 마나석으로 움직이는 전자장비가 있는 모양이었다.

신기하게도 수갑이 가방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가방이었다. 아마 죽기 전에는 수갑을 찬 채로 가방을 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설마, 대통령 보좌관이 들고 다닌다는 그 가방인가?"

이사벨과 베일리는 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녀와 강아지는 가방의 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핵 가방입니다. 이 안에는 핵무기 사용 승인 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셰인도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의 불이 계속 깜빡였다.

183화. < 이사벨(3) >

백악관 지하 벙커는 생각보다 더 쓸만했다.

외부의 침입도 없었고, 출입구가 외부에 노출되는 일도 없었다.

일행 중에는 출입구가 필요 없는 인간이 둘이나 있었다.

물론, 출입구 필요한 로봇과 강아지도 있었지만, 이들도 충분히 다닐 수 있도록 이브가 입구 스위치를 개조하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커다란 산업용 로봇. 골렘이 비상 출입구 버튼에 용접하고 있었다.

이사벨과 강아지는 뒤쪽에 앉아 신기한 눈으로 로봇이 용접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벨은 전보다 훨씬 깔끔해져 있었다. 머리카락도 잘 다듬어져 있었고, 지저분했던 몸도 깨끗해졌다. 옷도 깔끔한 새 옷과 방탄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상 통로 개패 스위치를 무선으로 개조 중입니다. 셰인과 베일리가 밖에서도 문을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셰인은 기존 무선 통신 모듈에 추가하면 될 거고, 베일리도 음성 통신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변신에 대비해서 신축성이 뛰어난 목걸이를 만들어야겠지만, 위치 확인을 위해서도 목걸이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벙커가 외부와 통신이 차단되어 있어서 아이템을 이용했어요.]

이브의 음성은 작업하는 골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골렘을 움직이는 동시에 이사벨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있었다.

경훈이 듬뿍 가져와 한쪽에 쌓아둔 식량과 캔들을 요리하는 법에서부터, 무기 사용법과 무전기 다루는 법까지.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많이 위험할 거예요. 원하지 않으면 이 아지트에서 지내면서 방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도 돼요.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갈 수도 있고요.]

이브의 말에 이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할거예요."

얼마 전, 경훈은 이사벨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괴물과 싸울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았었다.

이사벨은 경훈의 물음에 별 고민도 없이 승낙했다.

경훈의 말처럼 다른 세상을 가기 위한 특성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싸움을 좋아해서도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단순한 그 사실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강해지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버텨온 이사벨이었다. 강해지는 것을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이에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예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도망치는 것은 나 혼자밖에 할 수 없어요. 베일리를 지키려면 강해져야 해요."

이사벨은 강아지를 꼭 안으며 말했다.

지금은 베일리가 이사벨을 지켜야 할 상황이긴 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사벨의 결정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일행은 소녀의 생각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요. 그래도….]

멍!

그때, 이사벨 손등을 핥던 베일리가 귀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브도 말을 멈추었다.

[몬스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사벨을 추격하던 몬스터들로 보입니다.]

백악관 지붕에 내려앉아 있던 드론이 뉴욕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이브에게 전해주는 중이었다.

삐이이익.

어두운 밤. 피리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사벨이 주먹을 꽉 쥐었다.

덜컹.

상황실에서 경훈이 나왔고, 창고에서 셰인이 걸어 나왔다.

둘 다 이브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로봇이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었고, 경훈은 기름 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백악관 지하 벙커는 복도로 이어진 네 개의 상황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행은 그 상황실을 각각 창고와 침실, 그리고 무기고와 거실등으로 개조하는 중이었다.

"2차 추적자 부대이겠죠?"

"꽤 빠르군."

전 추적자 부대가 전멸한 지 이제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아지트에 접근하기 전에 정리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들킬 것 같지는 않지만, 머리 위에 적을 둘 이유가 없죠."

경훈의 말에 셰인이 카메라를 끄덕였다. 셰인은 바로 기관총을 거치해 놓은 무기고 상황실로 걸어갔다.

경훈이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 꽉 쥐어진 손. 아무래도 지금 싸우기는 무리였다.

"우선 쉬고 있어. 좀 안정된 뒤에 나서도 돼."

'아뇨. 나도 갈 거예요!'

그녀는 같이 가고 싶었지만, 생각과 달리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상보다 그때 공포가 더 크게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옷, 안전한 벙커. 내 강아지가 함께 있으니,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멍!

베일리가 안쓰러웠는지, 그녀의 볼을 핥았다.

"휴우."

베일리가 볼을 핥은 덕분일까?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그녀는 창고를 걸어가는 경훈을 향해 외쳤다.

"저도 갈래요! 갈 수 있어요!"

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혈색이 돌아오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훈이 씩 웃었다.

"좋아, 준비해. 실력을 보자고."

이사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셰인이 들어간 무기고로 달려갔다. 강아지도 꼬리를 흔들며 그녀를 따라갔다.

열심히 달려가는 소녀의 뒤를 경훈이 따라갔다. 역시 경훈도 노가다보다는 싸움이 성격에 맞았다.

***

한편, 다른 세계의 백악관 상황실은 일본 문제로 심각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각료들은 모두 전방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는 영상들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모두 CIA 일본 스파이들이 찍은 영상들이었다.

"도쿄와 후지산 일대에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일본은 전쟁 준비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쪽에 앉은 CIA 국장이 각료에게 일본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한국도 이미 알아차렸습니다. 일본 정부에 계속 경고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일본 정부는 꿈쩍도 안 하고 있습니다."

말을 멈춘 CIA 국장은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예상외로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왜지?'

하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방국인 한국과 일본이 전쟁할 판입니다. 늦지 않게 일본을 말려야 합니다."

대니 루이스 CIA 국장. 그는 얼마 전에 전 국장을 밀어내고 각성자 최초로 국장급에 올라간 남자였다.

EV 세력이 동북아시아에 있는 게 확실한 이상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방관할 수가 없었다.

'EV는 나를 위해서 계속 유지되어야 해.'

EV가 있어야 각성자인 그의 가치가 이 각료들 사이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EV가 없다면 그도 다른 각성자들과 마찬가지로 괴물과 싸우기 위한 단순한 무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국무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에서 중재 요청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로서는 당연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국무부 장관의 대답은 루이스 국장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계속 대답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는 방관할 것이라는 제스쳐를 넌지시 흘리고 있습니다."

국무부 장관의 말에 다른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 국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작전이 진행 중입니까?"

그의 질문에 대통령이 대답했다.

"맞네. 국장이 모르는 작전이 진행 중이야."

루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목을 쓰다듬었다.

"CIA 국장을 빼놓고 하는 작전이라니.... 제가 몰라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대통령이 깍지를 끼고 그를 바라보았다.

"CIA 국장이 대통령인 나에게 정보를 차단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조치지."

"그게 무슨…."

"EV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 한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숨겼잖은가."

루이스의 목덜미에 땀이 송알송알 맺혔다. 하지만, 그는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EV 거점은 쿠바 아래, 버진 아일랜드에 있는 섬이 아닙니까? 보고도 확실히 했습니다."

각성자들의 훈련과 파견을 보내는 EV의 섬은 그동안 항공 촬영과 위성 촬영까지 샅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허세는 통하지 않아. 거기다 각성자들로 사조직을 꾸며서 CIA를 개인 조직화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루이스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보 차단 만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전부 알고 있었다.

"자네는 우리를 너무 쉽게 보았어. 이 위는 초능력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설칠 수 있는 곳이 아닐세."

국무장관이 대통령의 말을 이었다.

"각료 중 각성자가 하나 있으면 보기도 좋고, 각성자 통합에도 좋을 것 같았는데, 자네는 욕심이 너무 많았어."

그제야 루이스 국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더 이상 버티기는 무리였다.

"어떻게 안 겁니까? 입은 전부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초능력만으로 될 리가 있나. 그리고 초능력자는 세상에 참 많다네."

알려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루이스 국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경호원들이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경호원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고, 각성자로 보이는 경호원도 있었다. 싸우기는 무리였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죠? 바로 총살은 아니겠죠?"

"미합중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야. 재판 없이는 처벌하지는 않아. 자네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연금이네. 이곳은 외부와 통신이 안되니, 우선 이곳에서 좀 쉬도록 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CIA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했는데, 저런 소리라니. 혹시 CIA를 정리하는 데 필요할지 몰라 저런 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정말, EV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전쟁을 방관할 생각인 겁니까?"

루이스는 이미 들킨 이상,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대통령은 흔쾌히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미국의 힘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네. 파병 부대도 철수했고, 함대들도 돌아오고 있네. 그런데, 아직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각성자 조직이 있다니.... 그런 조직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지."

이제 미국이 세계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력이 통제하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국내에 있는 각성자들도 신봉하는 EV와 직접 싸울 수도 없고. 일본이 나서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야."

EV가 약해져서 아메리카 대륙의 EV 조직을 흡수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이 정도 설명이면 되겠지? 자 그럼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하니까, 자리를 피해주게나."

경호원들이 루이스 국장 뒤로 다가왔다. 루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매만지며 경호원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 경호원은 아이템인 시계를 알아보지 못했다. 방금까지의 대화는 엘카니. 아니 안네 요원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기댈 때였다.

***

삐이이익.

검은 밤. 폐허가 된 워싱턴을 쥐 인간들이 지나갔다.

전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렛맨도 몇 마리나 보였다.

그리고, 그 렛맨들은 상공에서 감시하는 드론에 의해 모두 위치가 파악되고 있었다.

렛맨 하나가 낡은 건물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폐허가 된 평범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경훈 일행이 숨어 있었다.

경훈이 이사벨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일대일은 가능하다고 했지? 우리가 지켜줄 테니, 네 사냥법을 보여줘."

고개를 끄덕인 이사벨이 건물 벽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벽을 통해 사라졌다.

셰인과 경훈은 긴장한 모습으로 귀를 기울였다. 여차하면 벽을 부수고 달려나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괴물의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그녀는 벽을 통해 괴물의 뒤를 공격한 것이었다.

-센스가 좋습니다.

드론으로 지켜본 이브가 작게 속삭였다.

경훈과 셰인이 건물을 나섰다.

쓰러진 쥐인간 옆에 소녀가 피 묻은 창을 쥔 채로 서 있었다.

이제 경훈과 셰인이 움직일 때였다.

타타타탕.

셰인이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삐이이익.

피리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쩔이라고 하나요?

이브가 인터넷에서 들은 말을 속삭였다.

"맞아, 버스를 탈 시간이야."

경훈이 렛맨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184화. < 안네 (1) >

이사벨은 처음으로 일행의 전투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

일행과 처음 만났을때는 뭐가 어떻게 된것인지 알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폭음과 먼지, 그리고 날개달린 사자가 된 베일리 뿐이었다.

물론 그녀를 구한 것을 보면 약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싸우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예상과 너무도 달랐다.

정말 대단했다.

타타타타타!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빼애애액!

몬스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원래 로봇 인형은 그녀가 어렸을 때 베일리만큼 좋아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지금 그 로봇 인형의 원래 모델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달려오는 렛맨들에게 총알을 쏟아붙고 있었다.

총알도 잘 막아내는 렛맨들의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그 튼튼한 방어막이 셰인이 쏜 총알에 뻥뻥 뚫렸다.

렛맨들도 죽기전에 반격을 했다.

로봇의 몸에 침이 꽂혔다. 강철을 뚫다니 신기한 침들이었다. 독에 물들어 색이 변한 침들이었지만, 로봇에게는 의미없는 짓이었다. 렛맨들의 무의미한 반격을 마지막으로 일반 렛맨들은 로봇이 쏜 기관총에 전멸하고 말았다.

로봇의 강력한 화력에도 놀라긴 했지만, 이사벨이 정말 놀란것은 정말 인간쪽이었다.

쾅!

해머를 든 거대한 렛맨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인간이 대검 옆면으로 후려친것이었다.

또 다른 자이언트 렛맨은 팔다리가 잘린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저렇게 당할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정찰병인 다른 렛맨들과 달리 저들 자이언트 렛맨들은 기사급 몬스터들이었다. 저 렛맨 하나가 수십명의 어른들을 죽이고, 벙커 하나를 쑥밭으로 만들었었다.

뮤턴트들이 지상에 나오지 못하는 것도, 다른 몬스터들이 뉴욕에서 기를 못피는 것도 뉴욕 군주의 실질적인 힘인 자이언트 렛맨 때문이었다.

쿠엑!

그런 자이언트 렛맨들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엄청난 재생력 덕분에 더욱 위험한 몬스터였지만, 지금은 그런 재생력이 오히려 몬스터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쏟아져도 자이언트 렛맨은 살아 있었다.

[엄청난 재생력이네요. 벌써 재생하고 있는데요.]

죽기는 커녕 잘린 팔다리가 재생되고 갈라진 배가 소리없이 봉합되었다.

하지만, 경훈과 이브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어느정도 회복되는 순간 다시 잘려 나갈 뿐이었다.

결국, 몬스터들은 모두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일반 렛맨들은 기관총에 쓸려나가 죽어버렸고, 자이언트 렛맨 세 마리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꿈들거릴 뿐이었다.

검은 머리 남자는 꿈틀거리는 자이언트 렛맨들 앞에 서서 무심히 검을 집어넣었다.

이사벨은 왜 베일리가 경훈을 무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저 아저씨는 너무 강했다.

그에게는 자이언트 렛맨 따위는 사냥감도 되지 않았다. 그녀도 무심한 표정의 경훈이 조금 무서워졌지만, 그 이상으로 기뻤다.

저런 강한 사람이 있다니, 어른들이 있을때도 저렇게 강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강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가 이사벨에게 손짓을 했다.

"이쪽으로."

아직 몬스터들이 살아 있었지만, 그녀는 경훈에게로 달려갔다.

경훈은 피묻은 소녀의 창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은 몬스터의 방어막을 부시는 창을 들고 있었다. 어차피 LA CITY 각성자가 알려준 아이템이었다.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지니고 있는 마나가 작아 약한 몬스터 방어막만 파괴할수 있지만, 전투용 각성자가 아닌 그녀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유용한 창이었다.

"이제 네가 전부 마무리 해봐."

경훈의 말에 소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왜 그런 일을 시키는지 알고 있었다.

이사벨은 꿈틀거리는 괴물의 목덜미에 창을 힘껏 찔러넣었다.

푸욱.

방어막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창은 목 깊숙히 박혀 들어갔다.

쿠럭. 쿠럭.

역시 한번에 죽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창을 찔러넣었다.

한 열번을 찔렀을까? 결국 괴물은 숨이 끊어졌다.

죽은 괴물 몸에서 마나가 솟구쳤다. 공기를 가득 채우는 마나에 이사벨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나가 그녀의 몸에 쏟아져 들어왔다. 엄청난 양이었다. 일반 렛맨을 아무리 잡아도 느끼지 못하는 양이었다.

소녀는 쏟아져 들어오는 마나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경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막타만으로는 무리였나?"

-피해를 많이 준 상대에게 마나가 몰려가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네요. 마치 에너지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벨이 감격한 마나의 양은 경훈에게 들어온 것에 비하면 얼마 안되는 양이었다.

-그래도 혼자 렛맨 하나를 잡을때보다는 훨씬 마나를 많이 흡수했습니다. 전보다는 훨씬 빨라질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훈이 느끼기에는 너무 느린 성장이었다.

고민하는 경훈에게 셰인이 말했다.

"그럼 마나를 흡수하지 않는 동료가 있으면 되겠군."

로봇은 마나를 흡수하지 않았다. 물론 로봇과 전투를 벌인다고 마나를 모두 흡수할수 있을리가 없겠지만, 경훈과 같이 있을때보다는 도움이 될게 분명했다.

"어차피 저쪽 세상 일도 있을테니, 큰 싸움 이외에는 내가 훈련을 시키도록 하지."

셰인의 말에 경훈도 동의할수 밖에 없었다.

셰인은 훌륭한 교관이었다.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이사벨의 성장을 위해서는 그편이 좋았다.

경훈은 다른 자이언트 렛맨들도 이사벨이 마무리하게 했다.

괴물들이 죽고, 이사벨은 계속 늘어나는 마나에 전율했다. 이런 속도라면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등급이 오를것 같았다.

"그럼, 뉴욕 정찰은 이사벨이 등급을 올린 뒤에 하죠."

이곳까지 왔는데 생존자들의 마지막 정착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정찰은 워싱턴 벙커를 완성하고 이사벨이 자기 몸을 지킬수 있게 된 뒤에 할 생각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최대한 빨리 올려놓지."

경훈의 말에 셰인이 확답을 했다.

-백악관 벙커를 최고의 시설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이번에는 이브도 열의에 불타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나에 취해 몸을 떨고 있던 소녀는 쏟아지는 시선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베일리는 일행이 더 친해진것 같아 기뻐 짖어댔다.

멍! 멍!

***

멸망한 세상의 소녀는 이제 겨우 힘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다른 쪽 세상의 소녀는 실제로 힘을 쓰는 중이었다.

콰아아앙!

천장이 통채로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아직 어려보이는 소녀가 아래로 뛰어 내렸다.

"막아!"

"습격이다!"

탕! 탕!

경비원들의 외침과 총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바닥에 내려선 소녀는 상처도 입지 않았다.

총알은 그녀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고, 경비원들은 번개같이 움직이는 그녀에 의해 빠르게 정리되었다.

피묻은 손을 턴 그녀는 먼지를 뒤집어 쓴채 앉아 있는 CIA 전국장에게 말했다.

"구하러 왔습니다."

며칠전에 직장에서 짤린 루이스는 자신을 구하러 온 여성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려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20살이 넘은 어른이었다.

암호명 안네. 엘카니라는 이름을 가진 요원. 시리아에서 잘못 데려온 각성자였다.

"너무 화려하게 한것 아냐?"

루이스는 먼지를 털며 말했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괜히 얕잡아 보여서 바로 추적 당하면 곤란합니다."

루이스가 감금 되어 있었던 곳은 백악관 지하 벙커였다. 어떻게 되었건간에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 테러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왕 벌어진 테러라면 화려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대통령과 각료들은 워싱턴에 없습니다. 육로로 돌아올려면 시간이 걸릴겁니다."

루이스가 만든 조직을 무너뜨리고 정부 각성자들을 회유하느라 대통령과 각료들은 무척이나 바빴다. 더구나 여객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루이스는 사라진 뒤가 될게 분명했다.

역시, 힘만 강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제대로 끌어들인 보람이 있었다.

"고맙게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군."

"저들에게 붙어봤자 저는 배반한 각성자 취급만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야 가족을 보호받기는 어렵습니다."

점점 인종 탄압이 심해지는 미국이었다. 그들이 시리아 이민자 가족을 보호해줄리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소중한 친우를 버린 그녀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미국의 배반자가 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뭐, 일부러 놔주는 걸지도 모르지. 내가 이나라에 있으면 괜히 분위기만 안좋아 질테니, 다 데리고 꺼져주는 것을 바랄지도."

그는 무너진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역시 무식한 힘이었다. 저정도면 헬멧맨도 이기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탈출 준비는 끝났지?"

"네, 역시 목적지는 콜롬비아입니까?"

"멕시코는 미국하고 너무 가깝고, 콜롬비아 쪽 반군들하고는 마약 문제로 여러번 거래를 했으니까. 그쪽에 자리 잡고 슬슬 중남미 전체를 장악해야지."

그를 따르기로 한 각성자 부대와 다른 전력만으로도 남미의 왠만한 나라는 정복할수 있었다. 더구나 이미 끈도 만들어 두었으니, 더욱 어려울게 없었다.

"흠. 마약왕이라고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루이스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 끝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물러나지만 기필코 다시 미국땅에 돌아올 것이었다. 각성자들이 미국을 장악하고, 자신이 백악관 대통령 의자에 앉게 되는 날이 기필코 오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떠나기전 엘카니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잘 챙겼지?"

"네. 선발대와 함께 콜롬비아로 출발했습니다."

엘카니는 바로 대답했다. 그녀가 루이스를 계속 따르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그녀를 묶어놓기 위한 족쇄가 분명했지만, 그녀는 알면서도 그를 따를수 밖에 없었다.

"그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문안인사는 하고 가자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추적이 있을 겁니다."

"뭐, 오해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알겠습니다."

엘카니와 루이스는 바로 부서진 지하 벙커를 빠져나왔다.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루이스도 각성자였다. 엘카니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백악관을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상 경호원들도 그를 따르는 각성자들에 의해 정리되었다.

백악관 주변건물에는 사단 인원에 가까운 전투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루이스는 아직 남아있는 CIA 정보망을 이용해서 그들의 출동을 막을 수 있었다.

미국은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이 없긴 했지만, 백악관에서 테러가 벌어진 것이다.

군대가 출동하고, 각 정보기관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정부 각성자들과 CIA 요원들이 남쪽 국경을 넘은 것을 알게 되었다.

루이스 전 CIA 국장이 수하 세력을 이끌고 미국을 벗어난 것이었다.

모두 황당해 하는 사이, 루이스는 뜻밖의 장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엘카니와 함께 뉴욕에 있는 한 투자 회사에 방문한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EV 대변인이라고 부르는게 좋을 까요? 아니면 제임스 대표라고 하는 편이 좋을까요?"

루이스는 쇼파에 앉아 제임스 대표를 보고 싱글거리고 있었다.

제임스는 표정을 굳혔다. 미국 정부와 만날때마다 계속 얼굴을 숨겨왔는데 들키고 만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만 알고 있는 정보입니다. 아, 지금은 옆에 있는 우리 요원도 알게 되었네요."

갑자기 커진 투자회사, 마나석 발전기에 대한 투자, 그리고 한국 SG그룹을 먹어치우는 것까지. 그동안 정보를 하나로 모으니 한가지 결론이 나올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지금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임스가 모른척했지만, 루이스는 관심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부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저는 미국의 배반자가 되었고, 한가지 EV에게 협력을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루이스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우선 정보 한가지.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국 공격을 방관할 생각입니다. EV의 힘을 줄일 목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EV가 저와 동맹하기를 원합니다. EV라면 제 세력의 힘을 알수 있을 겁니다. 이건 EV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임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들을 말이 아니군요."

"부인해도 상관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전 그쪽 담당이 아닙니다."

루이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런 문제는 제가 담당입니다."

루이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카니가 번개같이 옆으로 피했다. 강적이 등장했다. 그녀는 말소리가 들릴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템 버클을 낀 양손을 들어올렸지만, 상대를 보고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오랜만이군요. 안네."

문 앞에는 시리아에서 헤어진 EV 각성자가 서 있었다.

"케이라고 합니다. 이쪽 일은 제가 담당합니다."

경훈이 루이스와 엘카니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185화. < 안네(2) >

엘카니는 선글라스를 쓴 각성자를 노려보았다.

선글라스 뒤로 보이는 얼굴은 시리아를 떠났던 그날 보았던 얼굴과 비슷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엘카니는 알 수 있었다.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각성자는 또 있을리가 없었다.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마나석 장비 때문일게 분명했다.

엘카니의 머리속에 시리아때 기억이 떠올랐다. 버려둔 친우와 폭파된 자신의 집.

오마르는 그녀의 꿈속에서 불덩이가 되어 계속 그녀를 원망해왔었다. 겨우 기억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지워질수 있는 기억이 아니었다.

엘카니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루이스가 바로 입을 열었다.

"저희 요원을 알고 있었나 보군요?"

"시리아에서 봤었죠."

루이스는 엘카니의 표정이 어두워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리아 작전때 EV에도 각성자를 보냈다는 보고를 받긴 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다시 만날줄은 몰랐다.

루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보디가드겸 실력행사를 위해 그녀를 데려왔는데 이래서야 상처만 만든 꼴이었다.

"시리아 때 엘카니가 실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엘카니에게 당한 것은 미국 정부와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걸 밝힐 이유는 없었다.

경훈은 루이스의 말에 웃고 말았다.

미국 정부는 오마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오마르에 대한 것은 엘카니 혼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날 폭발에 오마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럼, 저쪽의 장단에 맞춰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EV는 각성자 본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제임스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훈은 제임스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제임스는 경훈에게 인사를 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루이스는 그 모습을 보고 둘의 서열을 알 수 있었다. 서로 영역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쨋거나 새로 등장한 각성자가 더 높은 직위를 가진게 분명했다.

'대변인보다 더 높은 위치의 각성자라. 수뇌급이라는 이야기군.'

루이스로서는 더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꺼낸 말은 그리 좋게 들리지 않았다.

"여태 한 이야기는 모두 들었습니다. 일본을 방치하겠다는 미국 정부 이야기도 들었고, 제임스 대표에 대한 협박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망자들의 동맹 요청까지."

루이스가 얼굴을 굳혔다.

상대방의 말에는 정치적인 내용이 전혀 들어가있지 않았다. 압력은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경고는 무시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까지.

시리아에 갔다면 전투 각성자일게 분명했다. 전투 각성자라 말을 돌리지 못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하다니. 이래서야 이야기가 될리가 없었다.

"협박으로 받아들이다니 곤란하군요. 정말 EV 미국 지부는 포기할 생각입니까?"

루이스는 제임스 대표가 자리에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잘하면 이간질이 가능할수도 있었을 텐데.

루이스의 말에 경훈이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포기한다고 했습니까?"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미 반쯤 틀어져 버린 대화였다. 루이스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찔러보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사실을 알게 되면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저희 도.망.자.들처럼 탈출할 수도 없을 텐데요."

"왜 못한다고 생각하죠?"

경훈은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경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EV는 당한채로 가만히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그게 여러분이던지, 일본이던지, 미국이던지 상관없습니다. 저희를 공격하려면 그 누가 되었던 자신이 박살날 각오를 하고 와야할겁니다."

훅!

갑자기 방안에 바람이 일었다. 경훈쪽에서 부는 바람이었다.

'무슨 공격같은 건가?'

갑작스러운 현상에 루이스가 엘카니를 돌아보았다.

엘카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마나라니…'

루이스는 알지 못했지만, 엘카니는 불어오는 바람이 무엇인지 알수 있었다.

마나가, 살기가 유형화된 바람이었다. 비물질인 마나 자체를 느낄수 있게 만들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마나량이자 컨트롤 능력이었다.

엘카니는 미국에 온 뒤로 두 번이나 각성을 했다. 그 뒤로 그녀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자가 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은 우물속의 개구리였을 뿐이었다.

엘카니는 헬멧맨이 누구인지 알것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수는 없었다.

"약속시간입니다.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겨우 약속된 말을 꺼낼수 있었다. 루이스는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한 말은 '그를 잠시도 보호하기 불가능한 상황일때' 꺼내기로 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EV의 실력을 잘못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쉽군요. 저희가 자리를 잡으면 다시 이야기를 해보죠. 그리고, 제임스 대표와 이 투자회사에 대한 것은 선물로 묻어두겠습니다."

그는 생색을 내듯이 말을 꺼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경훈의 인사같지 않은 인사에 쓰게 웃고는 바로 방을 빠져 나갔다.

엘카니도 그를 따라가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경훈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떠난 뒤에 우리 집에 가보셨나요?"

그녀가 떠난 뒤 폭파된 시리아의 집 이야기였다.

물론 가보았고, 폭발 속에서 겨우 살아나오기도 했었다.

"혹시, 뭔가 있지는 않았…."

그녀는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이제와서 뭘 알고 싶은 건지. 그녀는 자신이 왜 말을 꺼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일까요?

이브가 그럴듯한 이유를 꺼냈지만, 경훈은 이유를 알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녀에게 줄 게 있었다. 경훈은 반지를 낀 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손바닥을 편채로 마나 반지를 활성화했다.

툭.

안주머니에 묵직한 물건이 하나 떨어졌다.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조각상이었다.

집을 빠져나오면서 오마르가 가져나온 단 하나의 물건. 그녀와 가족이 떠나는 순간 외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품에 지니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조각상.

엘카니 가족의 조각상이었다.

오마르는 새로운 가족의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할 때에 이 조각상을 경훈에게 건내주었다.

'혹시 엘카니를 만나면 전해주세요.'

그때 말한 부탁을 들어줄때가 되었다.

경훈이 조각상을 건내주었다.

엘카니는 손바닥위에 놓인 조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나 잘아는 조각상이었다. 엘카니와 그녀의 가족이 작은 조각 안에 모두 표현되어 있었다.

이 조각상 안에는 한사람 만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걸 어, 어떻게…."

하지만, 경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물어보려고 할때였다.

"안네 요원!"

문 밖에서 루이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제야 엘카니는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각상을 쥔 채로 경훈을 쳐다보았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오마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불탄 집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할수도 있고. 어쨋거나 오마르가 원하던 거였으니까."

이제 그런 것 하나하나 걱정하며 지낼때는 지났다.

-오마르는 무슨 생각으로 전해달라고 한 걸까요? 복수일까요? 연민일까요? 단절의 의미였을까요?

이브가 오랜만에 인간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이건 경훈도 대답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글쎄. 본인도 잘 모를껄?"

-그렇습니까…. 무슨 뜻인지 알것 같습니다.

경훈은 이브의 대답에 슬쩍 웃었다. 이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포탈 설치 테스트를 하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겹치네."

-포탈이 가동되면, 미국 지부 인원의 철수는 문제없습니다.

경훈이 루이스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경훈은 미국 지부의 인원 모두를 탈출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보다, 미국이 이렇게 외면을 하면 한국 정부는 진땀을 흘리겠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도와주실 겁니까?

"그래야겠지? 방문 순서를 바꿔야겠어."

이사벨의 훈련이 마치기를 기다려 뉴욕을 가려고 했는데, 다른 곳을 먼저 들려야 할 것 같았다.

***

경훈의 예상대로 청와대는 미국 정부의 외면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청와대 지하 상황실에서 벌어진 국가 안전 보장 회의에서 외교부 차관이 바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따로 알아본 바로는 미국은 한일 양국의 분쟁에 중립을 지키려는 것 같습니다."

"양국에 더 이상 무기도 팔지 않고,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차관의 말에 참모총장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보전에서 밀리는 거는 그렇다고 하지만, 무기 수입이 막히면 전쟁을 치룰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무기 체계가 어느 국가 기준인지 모릅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물자를 다써버리면 비행기가 떠봤자 미사일 한발 쏘지 못할 겁니다!"

새로 비서실장이 된 국회의원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일본도 같은 상황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저었다.

"일본은 미리 수입을 해놓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나라와 무기의 국산화율이 다릅니다. 국산화율을 높이는 바람에 비싼 무기를 쓴다고 놀려왔는데 일이 이렇게 될줄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는 이제 아프지 않았지만, 도무지 고생은 끝나지를 않고 있었다.

"대체가 불가능합니까?"

대통령의 물음에도 좋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해서 어느정도 대체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F23 같은 첨단 무기의 핵심 부품은 우리가 수리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호크도 그렇고…. 전쟁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치명적입니다."

단기전에 쏟아부을 양은 충분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이미 전쟁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본은 임진왜란때처럼 대륙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달라는 말로 연일 성토를 하고 있었고, 이번 웨이브의 피해를 오히려 한국에 뒤집어 씌워 정부로 향하는 불만을 잠재우고 있었다.

이제 일본 정부도 뒤로 물러설수 없게 되었다.

한 장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냈다.

"혹시, 한일 해저 터널을 파겠다고 협상을 하면 안되겠습니까. 완공이 되려면 몇년혹은 몇십년이 걸릴지 모르잖습니까. 시간을 벌수 있을 것 같은데…."

"이미 늦었습니다. 땅속을 움직이는 괴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해저 터널의 안정성이 문제시 되고 있습니다. 뭐, 앞뒤 말이 안맞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이제는 정론은 의미없는 시대니까요."

외교부 장관의 대답에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름에 잠겨버렸다.

미국이 저렇게 훼방을 놓아도 주변국의 도움을 받으면 질것 같지는 않은 전쟁이었지만, 전쟁 중에 벌어질 피해를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올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지원해줄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대통령의 지친 목소리에 새로운 안기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V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긴 했습니다만…"

"국가간의 전쟁입니다. 각성자 무기같은 거로 뭘 도움이 된다고."

참모총장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쨋거나 EV의 제안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게, 전쟁용 무기라고 하던데…"

"네?"

사람들이 모두 안기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

경훈이 거대한 철문으로 막힌 요새 입구를 바라보았다.

록키 산맥 중턱에 자리잡은 미국 최후의 요새. 군사 위성 통제소 이자, 전략 방위 사령부가 경훈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 그럼, 미국의 전략 자산들을 구경하러 가볼까?"

경훈은 굳게 닫힌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한쪽 손에는 삼정검이 들려있었고, 다른 손에는 백악관 지하에서 가져온 핵 가방이 들려있었다.

186화. < 요새 (1) >

'동족을 공격하다니! 동족의 마나를 흡수하면 격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동족이 죽어가면서 분노에 찬 메세지를 퍼부었다. 하지만, 괴물은 메세지를 이해할 지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괴물은 게걸스럽게 죽은 동족의 마나석에서 마나를 뽑아 먹을 뿐이었다.

하나, 둘, 셋, 동족의 시체가 늘어났고, 괴물의 모습은 점점 변해갔다.

괴물은 격이 떨어질수록 육체가 변하고 단순해졌다.

'나락으로 떨어진 종족이 결국 모두를 멸망시키는 구나!'

마지막 동족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진 순간, 괴물은 육체라고 불리울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멸망한 일족의 대지는 녹색 안개만 가득했다.

쿵!

안개가 출렁거렸다. 멀리 위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쿵!

다시 소리가 들렸다.

괴물은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오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이 되기 전의 꿈. 하지만, 괴물은 꿈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그런 지능은 남지 않았다.

잠에서 깬 괴물은 지독한 허기를 느낄 뿐이었다.

괴물은 감각을 깨웠다. 멀리서 맛있는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다행히 괴물이 지켜야할 지역 안에서 느껴지는 마나였다.

마지막 마나를 먹어 치운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허기진 괴물은 마나가 있다면 어떤것이라도 먹어치울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지금 느껴지는 마나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강렬한 기운을 품고 있는 마나였다.

스르르르르.

괴물이 자신의 촉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먹이가 걸려들었다. 사냥의 시간이다.

어두운 아이템 창고 안. 녹색 안개가 슬금슬금 밖으로 뻗어나갔다.

*

쿵!

커다랗게 잘려나간 천장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오랬동안 쌓인 먼지가 가득 일어났다.

턱.

바닥에 내려선 경훈이 손을 흔들어 가득찬 먼지를 날려버렸다.

그가 내려선 곳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통로였다. 통로 한쪽은 지하로 향해 있었고, 반대쪽은 거대한 철문이 막아서고 있었다.

그는 철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곳에 약점이 있다니…."

요새의 문은 경훈의 검으로도 뚫기 어려운 수 미터 이상의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문 주위의 외벽은 콘크리트로 덮혀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콘크리트 벽도 왠만한 폭탄은 뚫기 힘든 두께를 자랑했지만, 경훈에게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일 뿐이었다.

경훈은 철문 위쪽 땅을 좀 파고, 검으로 콘크리트를 뚫고 내려온 것이다.

-약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반 장비로 뚫기에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각성자와 괴물이 등장하기 전에 만들어진 요새였을 뿐이었다. 그당시에는 강력한 요새였겠지만, 지금에서는 안전하지 않은 지하 요새일 뿐이었다.

"어두워. 여기는 마나석 발전기가 없었나?"

-단순히 전기가 나간 것일수도 있습니다.

어쨋거나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요새 내부의 전자 장비들이 살아 있어야 했다. 전자 장비들이 망가져 있으면 위성도 핵가방도 쓸모없는 물건들일 뿐이었다.

경훈은 검을 고쳐잡고, 터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철로와 도로가 나있는 터널의 크기로 짐작했지만, 산을 뚫어 만든 요새는 정말로 거대했다.

어느정도 터널을 따라 내려가니, 커다란 광장이 경훈을 맞이했다.

광장 안에는 수많은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각종 군사 장비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채로 놓여 있었다.

드론들이 광장을 날아다니고, 경훈이 장비를 보고는 인상을 썼다.

"비축 장비가 아닌것 같은데…"

광장에 늘어선 장비들은 먼지가 쌓여 있지 않다면 바로 움직일수 있을 것 같았다.

드론들이 장갑차와 전차를 확인했다.

-장비 주변과 장갑차와 전차에 유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전투 대기 상태로 전멸한 것 같습니다.

경훈도 바닥에 흩어진 유골을 보았다. 뼈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도 독에 당한 건가?"

-백악관 폐허에서 본 독과 같은 계열의 독인것 같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옷과 소총들을 보면 거의 같은 시간에 당한 게 분명했다.

"동시에 당했다면 역시 공기로 전파되었을려나? 하지만 이정도 요새라면 공기 정화도 되어 있었을 텐데..."

-주인님이 말씀하신대로 인간 기준의 정화 장치였을 겁니다. 마나를 막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 공기중의 독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죽은 병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필요한 무기들이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미국 주력 전차인 에이브리엄 전차와 브래들리 장갑차. 그리고 아파치 헬기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세대 정도 구형이긴 하지만 부품 호환은 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조금 정비하면 그냥 쓸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이것도 좋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비행기 쪽이야. 위성하고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다른 곳도 이곳처럼 기습을 당했다면 비행장들에 멀쩡한 군용기들이 남아있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훈 혼자 미국 전역에 흩어진 비행장을 전부 찾아 다닐수는 없었다.

그 일을 인공 위성이 대신 해줘야했다. 군사 위성을 움직일 수 있다면 멀쩡한 비행기들을 찾아낼 가능성이 충분했다.

수색을 더 해봐야했다. 경훈은 무기의 무덤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 층은 병사들의 숙소와 식당. 그리고, 전략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밑의 층들은 창고 구역입니다.

백악관에서 발견한 서류가 맞다면 창고에는 미국이 보관한 인류의 유산들이 가득 잠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이걸 움직여야 해"

경훈이 들어선 곳은 먼지에 쌓인 거대한 통제실이었다.

전략 사령부 산하의 위성 통제 센터. 경훈이 찾던 곳이었다.

-가동될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위성들이 살아있어야 하고, 통신 안테나들도 멀쩡해야 했다. 버려진 장비들도 무사해야 했고, 마지막으로 전원이 나간 이유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경훈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우선 전원쪽을 확인해 봐야할까?"

다행히 발전 시설은 이 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훈은 발전기가 있는 기계실로 향했다. 기계실로 가는 경로에는 전략 사령부의 다른 시설도 자리하고 있었다.

우주 미사일 방어 사령부.

함대 전략 사령부.

그리고, 대량 살상 관리 센타. 바로 핵무기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경훈은 굳게 닫힌 철문을 힐끗 쳐다보고 기계실로 들어갔다.

-마나석 발전기입니다.

기계실 중앙에는 마나석 발전기들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이 요새의 전력은 마나석 발전기로 충당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멈춘거지? 고장났나?"

경훈이 발전기로 다가갔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브가 드론을 움직여 발전기를 살피기 시작했지만, 그녀가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발전기 위쪽을 본 순간 경훈은 발전기가 멈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발전기 위쪽 중앙. 그곳에는 다른 발전기들처럼 문양으로 둘러쌓인 마나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나석은 조금도 반짝이지 않았다. 마나석은 빛을 잃고 탁한 구슬로 변해 있었다.

"설마 수명이 다 된건가?"

-전력 누수가 있었던 걸까요? 요새가 거대해서 많은 전력이 소모되었기는 했겠지만, 너무 빨리 마나석이 소모되었습니다.

이브도 마나석이 빛을 잃은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경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운이 좋은데? 마나석만 바꾸면 되는거잖아!"

-등급에 맞는 마나석으로 바꿔야 하지만…. 네, 바꾸기만 하면 될것 같습니다.

경훈이 마나 반지의 아공간 속에서 마나석을 꺼냈다.

발전기는 거대한 요새의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답게 기사 등급 이상의 마나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경훈은 그보다 높은 등급의 마나석도 상당량 가지고 있었다.

경훈은 이브의 지시에 따라 발전기의 마나석을 하나씩 바꾸어나갔다.

잠시 뒤, 경훈은 발전기 세 대의 마나석을 모두 바꾸고, 스위치를 올렸다.

따닥.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상등이 들어왔다.

빛이 기계실을 가득 메웠다.

-발전기는 무사합니다. 전력망이 무사하다면 요새 전체에 전력이 공급되고 있을 겁니다.

"좋았어! 이제 위성하고 통신만 되면 되는 거겠지?"

-아직 난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잘될거야."

경훈은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위성 통제 센터로 향했다.

몇몇 깨진 등도 있었지만, 복도도 환했고, 전력이 끊어져서 잠겨있던 문들도 녹색등이 들어와 있었다.

"다행이네. 문을 부수지 않아도 되겠어."

-보안이 걸려있어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문들입니다.

하지만, 경훈은 걱정없었다. 유골들 옆에 보안카드도 있었고, 그에게는 해킹 전문가인 이브가 있었다.

경훈은 다시 위성 통제 센터로 들어섰다.

우우우웅.

통제 센터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딩, 딩, 딩,

제어판의 불들이 차례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다란 브라운관 화면들도 차례로 켜졌다.

세계 지도의 대륙들이 화면에 떠올랐고, 잠시 뒤 여러개의 파형들이 화면을 수놓았다.

-인공 위성들의 궤도입니다. 다행히 위성들과 통신이 된것 같습니다.

경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기대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론들이 제어판 위를 지나가며 확인을 했다. 잠시 뒤 이브가 말했다.

-이제 제가 활약할 시간이군요. 휴대폰을 중앙 제어판 단자에 연결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경훈이 휴대폰을 꺼내 이브가 말한 단자에 연결했다.

-구조 확인후에 제어권을 탈취하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겁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씩 웃었다.

"많이 걸려도 돼."

어차피 급할 이유가 없었다. 전력 문제도 해결했고, 위성도 움직일 수 있으니, 핵무기만 확인하고 유물을 보러가면 그만이었다.

이브가 통제 센터의 컴퓨터를 해킹하는 동안 경훈은 제어실을 살펴보았다.

제어실에도 유골들이 흩어져 있었다. 제어판 위에 쓰러진 유골과 바닥에 흩어진 유골. 그리고 문을 향해 팔을 뻗은 유골까지.

유골의 모습들은 그날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녹색의 독이라…"

여기 있는 유골들도 모두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응? 유골만이 아닌가?"

경훈은 눈을 깜빡였다.

뼈만 녹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도 기계도 녹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바닥과 기계가 녹색으로 변한 게 아니었다. 공기의 색이 바뀌어 있었다. 공기가 녹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설마?'

경훈은 바로 마나를 일으켰다. 몸 전체에 마나가 퍼져나갔고, 갑자기 피부 위로 방어막이 펼쳐졌다.

파파파팍!

방어막에 녹색의 불꽃이 튀었다.

경훈의 몸 속에서도 불길이 일고 있었다. 경훈의 마나가 몸속에 침입한 독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침입한 독을 다 태우고 방어막이 외부의 독을 막고 있었지만, 경훈의 표정은 심각했다.

방어막이 독을 전부 막지 못하고 있었다. 내부에 침입한 독도 마나로 태우고 있었지만, 마나의 소모가 너무 컸다. 지금은 막을 수 있지만, 더 독이 강해진다면 막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경훈이 휴대폰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독이야! 작업을 멈춰!"

-아.., 알겠습니다!

경훈은 휴대폰을 낚아채고 통제실 밖으로 튀어 나갔다.

경훈의 방어막 위로 계속 불꽃이 일었다.

"독이 어디서 오는거지?"

-아래쪽 농도가 더 높습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브의 말대로 독 안개는 지하 창고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독안개는 일반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괴물은 사냥감이 도망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냥감도 다른 사냥감처럼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었다.

이미, 이 지하는 괴물의 마나가 가득차 있었다.

괴물은 자신의 촉수를 움직였다. 짙은 녹색 안개가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출구를 막고, 광장을 촉수로 가득 채웠다.

이제 먹이가 달아날 곳은 없었다.

괴물이 몸을 일으켰다.

녹색 안개에 에워쌓인 마나석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안개에 쌓인 녹색 마나석은 빛을 잃은 마나석만 남은 아이템 창고를 떠나 먹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87화. < 요새 (2) >

경훈이 통제실을 빠져나와 계단을 타고 위로 오르자, 더 이상 녹색 기류는 보이지 않았다. 독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

하지만, 계단을 올라와 군 장비들이 늘어서 있는 광장에 올라온 경훈은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경훈이 올라선 층계의 반대편,

지하 광장 일대는 녹색 안개가 출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보았던 옅은 색 기류가 아니었다. 안이 안보일 정도로 짙은 안개가 광장의 반 이상을 헤집고 있었다.

"아래부터 깔리는 안개라고 하지 않았어?"

-공기순환시설을 타고 올라온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평범한 독 안개는 아닌것 같습니다.

"안개가 맞긴 해?"

광장을 점령해 나가는 안개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안개가 아니었다. 안개가 흐르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문어나 해파리 괴물이 자신의 촉수를 펼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독 성분이 듬뿍 들어있는 기체가 맞습니다. 다만, 알수없는 기체 성분이 포함되어 있고, 바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움직임도 자연적이지를 않습니다. 누군가 조종하는 마나 안개로 보여집니다.

우우우웅.

드론들이 광장을 날아다니며 안개의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안개 전체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드론도 있었고, 안개 가까이 접근해서 날개 바람으로 안개를 흩어보려는 드론도 있었다. 어떤 드론은 안개속에 뛰어들어 성분을 분석하기도 했다.

푸드드득.

어느순간, 안개 속에 들어갔던 드론이 휘청이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3번 드론 출력 저하. 전력양이 극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발전기의 효율이 급감합니다.

그 사이, 안개가 불쑥 튀어나와 가까이 접근했던 다른 드론도 안개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 드론도 프로펠러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2번 드론의 출력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소형 마나석 발전기가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드론들을 뒤로 물려."

위이이잉.

안개에 가까이 접근했던 드론들이 뒤로 쑥 물러났다. 촉수처럼 드론들을 향해 뻗어나오던 안개들은 다시 평범한 형태로 변해 스멀스멀 광장을 점령해 나갔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이래서야 지상으로 나갈 방법이 없어보였다.

점점 다가오는 안개를 보며 경훈이 물었다.

"드론 발전기가 독에 당한건가?"

-기계에 영향을 주는 독은 아닙니다. 발전기도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마나석에서 뽑혀 나오는 마나량이 줄어들었습니다.

마나석이 고갈되지 않는한 마나량이 바뀔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나를 뺏기는 건가?"

경훈은 발전기와 포탈 장비에서 새어나오는 마나를 조금씩 훔쳐먹는 괴물도 본적이 있었다.

기계가 가동을 멈출 정도로 마나를 빼았고, 안개를 사용해서 마나를 빼았는 괴물은 처음 보았지만, 그런 괴물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경훈은 마나석이 탁하게 변한 요새 발전기가 생각났다.

"요새 발전기의 마나석도 저 안개가 빨아먹은 건가?"

-그렇게 강하게 흡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 흡수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수록 더 성가신 놈이네. 어쨌거나 저걸 뚫고 지상으로 나가긴 어려워보이지?"

-마나 흡수가 확실하다면 주인님의 방어막이 독을 제대로 막아내기 어려울 겁니다. 무사히 돌파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공간이동이나 차원이동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경훈과 이브가 이렇게 여유있게 다가오는 안개를 바라보는 것도 아직 마지막 수단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을 쳐버리면 이 요새를 활용하기는 무리였다. 폭탄이나 삼정검의 능력으로 요새를 차근차근 무너뜨릴수는 있겠지만, 그래서야 땅속에 파묻힌 요새만 남을 뿐이었다.

"괴물이라면 적어도 본체나 핵이라도 있을텐데…."

특성으로 만든 안개라면 어딘가 본체가 있을게 분명했다. 전에 중앙 제어장치를 오염시켰던 젤리같은 괴물도 그 안에 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놈도 괴물이라면 그냥 안개만으로 이루어졌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었다. 저 안개 속을 헤집고 찾아다닐수도 없고, 마나석이 장착된 드론으로 수색할수도 없었다.

"포기해야 하나."

경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을때, 이브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작업을 채 마치지 못해서 위성 제어권은 얻어오지 못했지만, 요새의 제어권 일부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군사 요새라서 그런지 구형 장비이긴 하지만, 요새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요새 발전기로 가동되는 카메라니 가동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광장은 전과 다르게 천장에 달린 등에서 나오는 빛으로 밝아져 있었다. 안개에 휩싸이지 않은 곳은 물론, 안개가 덮힌 곳도 등은 무사했다.

이브 말대로 요새 발전기가 무사한 이상 전력은 이상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요새 발전기도 안개에 휩싸이면 마나를 빼앗기지 않을까?"

-드론과는 출력량이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예상과 달리 가동이 멈출수도 있으니, 주인님이 눈을 돌려주셨으면 합니다.

경훈이 안개의 시선을 끌어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일은 그동안의 경험 덕분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경훈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감시 카메라를 확인한다는 것은 네가 요새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이브가 경훈과 떨어진채로 요새의 단말기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너도 마나석을 쓰는 데 위험하지 않아?"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독에 당하지도 않고, 마나를 빼앗겨도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구동되고 있는 마나석 등급을 생각하면 마나를 아무리 빼앗겨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이브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음..."

하지만, 경훈은 바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브가 위험한게 마음에 안들었던 것이다.

-위험해질것 같으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바로 달려와서 구해주시면 됩니다.

이브가 다시 한번 말했다. 합리적인 이야기였고, 나쁘지 않은 조언이었다. 고민하던 경훈은 결국 이브의 작전을 승낙했다.

경훈은 그 대신 이브의 작전에 한가지 더 보안을 했다. 이브가 들어있는 핸드폰을 드론의 하부에 연결한 것이었다.

"안개가 접근하면 연결을 끊고 날아와."

경훈이 아래 층 복도 구석에 있는 단말기에 휴대폰을 연결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동할수 있겠는데요. 자주 사용해야겠습니다.

"안돼. 이번만이야. 나하고 같이 움직이는게 제일 안전해."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괜찮은 작업용 맨트였습니다.

이브의 말에 경훈은 휴대폰을 툭 쳤다.

"조심하고."

-걱정마십시요. 시작하겠습니다.

경훈이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한바탕 날뛸 시간이었다. 절대 이브와 발전기가 있는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경훈은 다시 광장으로 올라갔고, 이브는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광장으로 올라가는 층계 카메라에 경훈의 모습이 슬쩍 지나갔고, 복도 카메라에 휴대폰과 드론의 모습이 잡혔다.

요새 발전기들은 아직 잘 움직이고 있었고, 엄청나게 쌓여 있는 금괴와 각종 유물들. 그리고 아이템이 전시된 창고도 보였다. 아이템에 달린 마나석들은 모두 탁하게 변해 있었다. 전부 고갈된 것이다.

'어디지?'

감시 카메라에 핵이나 본체가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지하 창고와 광장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위층인 광장과 아래층인 창고, 설마, 공기 순환 시스템 안에 있는건가?'

환풍구 안은 감시카메라의 시선이 닿지 않았다. 철망으로 막혀 있어서 침입이 불가능한 곳이었지만…

'정말 안개가 몸이고 안개 안에 핵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남은 곳은 한곳 밖에 없었다. 이브는 감시 카메라를 전부 환풍기를 향해 돌려놓았다.

*

경훈은 광장의 독안개 근처에서 날뛰고 있었고,

이름도 잃어버린 괴물은 날뛰는 먹이 때문에 조금 귀찮아 하고 있었다. 계속 자신의 몸 주변을 맴돌며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차피 몸을 키워가다보면 지하는 모두 자신의 몸속에 들어가게 되겠지만, 잡힐듯 잡히지 않는 먹이는 무척이나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다른 곳에서도 그 먹이보다는 덜했지만, 맛있는 마나들이 더 느껴지고 있었다.

전에 먹어치웠던 큼지막한 마나석이 있던 곳에서 다시 마나가 느껴졌고, 다른 곳에도 굉장한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괴물은 자신의 몸이 커지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배가 고픈게 문제였다. 괴물은 우선 허기를 채워야 할것 같았다.

그럼 당연히 제일 맛있는 마나가 있는 곳으로 가야했다.

환풍구 중간에 떠 있던 녹색의 마나석이 안개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 2층 복도에 있는 마나석을 향해.

*

'움직였어!'

수십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살펴보던 이브는 어느순간, 안개가 뿜어져나오는 화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존에 안개가 있던 곳이 아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녹색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하 2층 복도의 환풍구 구멍. 바로 이브가 있는 복도 환풍구였다.

우우웅.

바로 핸드폰을 매단 드론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경훈의 지시대로 이브가 드론을 움직인 것이다.

휴대폰이 따라 올라가고, 케이블이 제어판 단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멈춰! 아직 위험하지 않아! 확인해 봐야해!'

이브는 반사적인 움직임에 저항했다. 움직이려던 드론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이브는 '위험에서 달아나라'는 경훈의 지시를 보류시켰다.

언제나 그녀에게는 경훈의 지시가 우선이었지만, 전과 달라진 그녀는 경훈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의 지시를 보류하는게 가능했다.

그녀의 선택이 항상 그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런 고민과 선택이 주인과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복도를 매웠다. 안개가 드론과 휴대폰을 뒤덮었다.

푸르르륵.

프로렐러가 멈추고 드론이 바닥을 굴렀다. 휴대폰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행히 아직 케이블은 연결되어 있었다.

'빨리 나와라.'

예상보다 마나 흡수가 빨랐다. 드론은 바로 멈춰버렸고, 휴대폰의 에너지도 급감했다. 마나석의 출력은 충분했지만, 문제는 휴대폰의 문양과 배선이 너무 낡아 있었다. 휴대폰의 에너지 효율이 엉망이었다.

아직은 괜찮았지만,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을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르르르.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 보람은 있었다.

환풍구 출구를 찍던 카메라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짙은 안개가 화면을 가렸지만, 안개 중앙에 반짝이는 녹색 마나석이 언듯 보였다. 그리고, 녹색 마나석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휴대폰의 에너지가 바닥을 찍어버렸다. 휴대폰의 전원이 끊어지려고 했다.

에너지 흡수량이 차원이 달랐다.

-주인님!

이브가 소리쳤다.

휴대폰 화면이 꺼지고, 공중에 떠 있던 녹색 마나석이 점점 휴대폰에게 다가왔다.

녹색 안개가 휴대폰을 휘감아 공중에 띄웠다. 마치 안개로 이루어진 혀가 휴대폰을 휘감는 것 같았다.

녹색 마나석이 더욱 음침하게 빛을 발했다.

움찔.

다가가던 마나석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급하게 후퇴해서 환풍구 속으로 들어갔다.

파지지직!

그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녹색 불꽃에 휩싸인 경훈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속에 들어온 독과 싸우며 이브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경훈은 휴대폰을 낚아채고, 바로 차원문을 만들려고 했다.

-발. 발전기가 있는 곳에. 차. 차원문을 만들어 주세요.

그때 경훈의 귀에 이브의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멈춘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경훈이 이를 악물고 발전기가 있는 기계실로 달려갔다.

안개가 그의 마나를 빼았고, 독이 그의 몸을 중독 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결국 기계실에 도착해서 은빛 구멍을 만들어낼수 있었다.

세 발전기 중앙. 은빛 구멍 속으로 그가 뛰어들었다.

*

먹이가 도망쳤다.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먹이가 다른 마나까지 가지고 도망쳐 버렸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런 먹이가 또 언제 올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맛있는 마나가 남아 있었다.

녹색 마나석이 환풍구를 통해 기계실 중앙에 나타났다. 다시 가동된 발전기 중앙에 마나석이 멈춰섰다.

그리고, 괴물이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나가 하염없이 빨려들었다.

전기가 나가고 다시 요새가 어두워졌다.

188화. < 요새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