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13화 미궁 리바린토스 (7)

콰아앙!

검과 도끼.

두 개의 흉기가 격돌했다.

불꽃이 일어나며 눈부신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크르르르…!"

미노타우르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에 부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인간 따위.

단검과 함께 토막 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와 무기가 맞닿는 순간.

카가가각!

상대는 무게중심을 교묘하게 틀어 버리며 공격을 흘려버렸다.

패링.

그것도 고이다 못해 썩어 버린 수준이었다.

***

"이럴...수가."

지켜보던 박하나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일방적으로 끝날 거라 의심치 않았다.

무려 레벨 10이 넘는 스킬을 발동한 보스급 몬스터.

설령, 검은 까마귀 길드의 전원이 다 오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틈을 봐서 도망칠 생각만 했었다.

이곳에서 함께 죽을 순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그 괴물을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쾅! 콰아앙!

작은 칼날이 육중한 쇳덩이를 압도하는 모순.

눈으로 식별하기 힘들 정도의 공방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인간이 저렇게... 움직일 수도 있구나.'

박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꼬옥 쥐었다.

게다가.

'웃고 있어.'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진혁은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혁이 미노타우르스의 뿔을 잡고 몸을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가볍게 머리 위에 착지했을 땐. 이미 손에서 단검이 사라진 뒤였다.

콰득!

어느새 세로로 세워진 단검이 미노타우르스의 입천장을 파고들었다.

"...!"

입을 다물 수 없다.

단검이 버팀목처럼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5분, 다 지났네."

진혁이 싸늘한 시선으로 미노타우르스를 내려다 봤다.

동시에.

화르륵!

발현된 '불의 원소'를 녀석의 아가리로 향했다.

목구멍 너머 선홍빛 속살이 보였다.

아무리 외피가 단단해도 속은 연약할 수밖에.

콰콰콰콰콰콰!

화염이 식도를 타고 내장까지 모조리 태워 버렸다.

"크오오오오!"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고유 능력 '광폭화'의 사용 시간이 끝났습니다.]

[미궁의 가디언이 24시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집니다!]

미노타우르스가 선 채로 굳어 버렸다.

'이 정도면 깔끔하게 끝냈어.'

진혁은 입 속에 박혀 있는 단검을 회수했다.

광폭화를 발현한 상태라 위험부담은 높았지만.

덕분에 포인트 하나는 확실하게 긁어모았다.

[지금까지 획득한 간극 스탯 포인트: 57]

무려 57포인트!

레벨로 따지면 19레벨의 격차를 좁혀 줄 수 있는 수치였다.

'목표인 100포인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남은 시간은 20일.

이 페이스면 충분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진혁의 시선이 힐끗 뒤쪽으로 향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박하나가 보였다.

격을 확실히 보여 준 이상, 검은 까마귀 길드 전체가 와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진혁이 박하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뭐해?"

"네?

"안 와?"

"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박하나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하아. 하아. 부르...셨어요?"

"지금부터 고인물 컴퍼니의 인턴 사원을 모집할 거야."

"이, 인턴이요?"

"별로 의욕적이지가 않네. 왜? 관심 없어?"

관심이 없다면, 글쎄.... 살아서 햇빛을 보기 어려울 텐데?

진혁이 가볍게 단검을 두어 바퀴 돌렸다.

핏빛을 머금은 칼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과, 관심 있어요! 제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예전부터 꼭 이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습니다!"

박하나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도록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세가 마음에 든다.

아주 열정적인 지원자야.

"그럼, 질문. 앞으로 본인이 회사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어필해 봐."

갑작스러운 질문에 박하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저는?"

"친화력! 네! 제 고유 능력이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거예요. 적보다 친구를 만들 수 있죠."

교감 능력.

확실히 나쁜 능력은 아니지만.

이미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리고... 절대, 배신하지 않을게요."

그건 싫어도 그렇게 될 거다.

낙인을 새기면, 배신하고 싶어도 배신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게 끝이야? 뭔가 더 없어?"

저벅.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 끝으로 단검을 어루만지면서.

"아뇨. 그게.... 으으.... 자, 잠깐만요. 생각할 시간을 좀!"

박하나가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뭐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뭔가 쓸모 있는.

상대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제안을 해야 한다.

"발표하겠습니다. 제1회 고인물 컴퍼니 인턴 합격자는 없는 걸로...."

진혁이 단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브라함의 반지!"

박하나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

진혁이 멈칫했다.

브라함의 반지라면 설마?

"그걸 얻었다고? 검은 까마귀 길드 쪽에서?"

"아직은 아니지만, 곧 구할 거예요."

"인간 불신은 아니지만, 어째 믿기 힘든데."

브라함의 반지는 1층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이템 중 하나였다.

이동속도 증가와 마법저항력 게다가 몬스터의 마력을 억제시켜주는 능력까지.

쓸 만한 옵션이 세 개나 붙어있으니까.

문제는 그 아이템을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던전으로 가는 열쇠는 한국 측 스타팅 포인트 지점에서 구할 수 있었고.

브라함의 반지가 있는 던전은 중국 측 스타팅 포인트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탑이 막 생겨난 극 초반부.

그것도 경쟁 관계에 있는 두 나라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찍어 누르고 빼앗으면 몰라도.

박하나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빠가 중국... 측과 거래한다고 했어요. 저희 측에선 '고려인삼'을 제공 하는 대신 반지를 받기로요."

체력과 마력 회복에 탁월하다고 알려진 식용 아이템, '고려인삼'.

호오. 이렇다면 말이 달라지지.

설마, 박하진이 중국과도 연이 닿아 있을 줄이야.

"고려인삼도 좋긴 하지만, 브라함의 반지를 포기할 정도는 아닐 텐데? 뭔가, 뒷거래가 더 있는 건가."

"그 이상 자세한 계약 내용은 저도 잘 몰라요. 아! 진, 진짜로요! 시청자들이 알려준 거라서...."

[Lv1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박하나의 말은 '진실'입니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거나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 듯싶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됐다.

어쩌면, 브라함의 반지뿐 아니라 고려인삼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진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

'결국, 녀석들과는 이번에도 적대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건가.'

중국은 한국만큼이나 많은 고인물들이 있었다.

실제로 중국 쪽 고인물들이 만든 거대 길드 '중화(中華)'는 세계 최대 길드 중 하나였으니까.

'이미 길드를 만들어 체계화까지 끝냈다고 봐야겠지.'

최소한 한 달은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게임과 다르게 현실에서는 훨씬 더 많은 변수가 존재했기에. 적게 잡아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릴 거라고.

하지만 놈들은 그 모든 과정을 극단적으로 압축해 버렸다.

평화로운 합의를 통해서?

아니지.

그런 이상주의로 이런 게 가능할 리 없다.

분명, 강력한 리더십과 카리스마에 의해서 찍어 누른 결과리라.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게 누군지 짐작은 간다.

'...남궁천.'

본래 무가의 자식으로, 영재 교육을 받은 천재.

[시련의 탑]에서도 온갖 비급과 영약을 독식했던 랭커.

그래, 녀석이 틀림없다.

박하나가 상념에 빠져 있던 진혁을 부른 건 바로 그때였다.

"저기...."

아. 지금은 여기부터 신경 써야지.

박하나는 지금 합격 결과를 기다리고 있느라 아주 똥줄이 타고 있을 터였다.

"축하드립니다."

진혁이 활짝 웃었다.

"방금 고인물 컴퍼니의 인턴에 합격하셨습니다! 와! 박수!"

"...."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박하나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인턴. 박수."

진혁이 낮게 읊조렸다.

어디서 사장이 박수를 치는데 인턴이.

"와아아아아아!"

짝! 짝! 짝! 짝! 짝!

박하나가 열과 성을 다해서 물개 박수를 쳤다.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지만, 상관없었다.

BJ 하면서 이미 지겹도록 경험해 봤던 일이었으니까.

"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진혁이 말을 이었다.

"자, 우리 회사는 인턴한테 월급을 주지 않습니다. 생활비는 따로 알바를 하시든지 해서 충당하시고요. 또 가장 중요한 점. 언제 어디서든 제가 부르면 튀어 와야 합니다. 새벽 3시든, 제주도에 있든. 제 알 바 아니니 명심하세요."

당연히 지각하거나 무단 불참일 경우 퇴사다.

여기서 퇴사란 몸은 두고 영혼만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알겠어요."

박하나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계약서 같은 것도 써야 하나요?"

"당연히 써야죠."

계약했다는 증거가 필요했으니.

단지.

평범한 계약과는 조금 다르다.

우우우웅!

진혁이 융합으로 얻은 새로운 스킬을 발동했다.

검지가 푸른빛을 내며 타올랐다.

"그게 계약…서 라고요?"

"예. 설마, 종이쪼가리에 도장이라도 찍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딴 건 탑 밖에서나 통하는 거지.

여기서는 아니었다.

뭐랄까?

조금 더 확실하고 화끈한 방법이 진혁의 스타일이었다.

진혁이 검지를 박하나의 오른쪽 어깨에 갖다 댔다.

[박하나에게 Lv1 '염혼의 낙인'을 새깁니다!]

치이이익!

"흡...."

박하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사실 별로 아프지도 않을 거다.

배신을 할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미노타우르스와의 전투를 통해 '간극' 스탯을 올리고 그 외엔 휴식을 취하는 단순한 일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이었지만, 진혁은 따분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강해지고 있어.'

매일매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지루하거나 따분할 틈 따위는 없을 수밖에.

콰아아앙!

미노타우르스의 주먹이 진혁의 안면을 노렸다.

그러나 주먹은 닿지 않았다.

얼굴로부터 몇 센티미터 떨어진 거리.

그곳에서.

진혁이 한 손으로 상대의 주먹을 붙잡았다.

"어째, 너는 갈수록 약해지는 것 같냐?"

이죽이며 도발하는 건 덤이다.

"크아아아!"

미노타우르스의 팔 근육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럼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스탯을 너무 올린 나머지 이제는 간격이 좁혀지다 못해 역전되어 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퍽! 퍼어억!

오히려 진혁의 주먹이 옆구리에 꽂히자.

거대한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켁! 케에엑!"

입에서 게거품을 물며 정신을 잃는 데까진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것도 벌써 100번은 넘게 했네.'

한 달 내내 싸우다보니 이제는 미노타우르스의 얼굴만 봐도 친근감이 느껴질 정도다.

기절한 모습을 보는 건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 되어 버렸고.

'이런 일상이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도 살 만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고하셨어요. 대표님!"

박하나가 접시 위에 이끼와 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가져왔다.

아....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취소다.

이 음식. 이건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얼큰한 김치찌개.

바삭바삭한 치킨에 살얼음 낀 맥주.

지글지글 구운 삼겹살에 소주.

이를 닦지 않아도 닦은 것 같은 베라의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이런 게 먹고 싶다.

...미치도록.

"...가자. 밖으로."

진혁이 이를 악 물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

[간극이 0.015포인트만큼 상승했습니다.]

공격을 피하는 즉시.

진혁의 돌려차기가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미노타우르스의 목이 90도가량 돌아갔다.

이젠 녀석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스탯을 얻는 순간, 기절행이었으니.

그리고 마침내.

[현재 보유한 간극 스탯: 100]

100스탯....

시간 대비 산출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다.

울컥.

무언가 속에서부터 쌓였던 무언가가 치솟아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저, 저기 빛이 보여요!"

미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길고 길었던 여정의 종착점에.

14화 탑의 고인물들 (1)

[이름: 리바린토스(클리어)

종류: 미궁

난이도: B

내용: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크레타의 미궁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미로와 다양한 종류의 함정들이 있는 게 특징입니다.]

[최초로 1층에 있는 미궁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이 일은 내일 하루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플레이어 강진혁, 플레이어 박하나에게 각각 5,000코인이 지급됩니다!]

눈이 부실 정도의 태양빛과.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한 공기.

"후우우...."

진혁은 눈을 감은 채 그 맛과 감촉을 음미했다.

"사, 살았다. 살았어요! 우리!"

박하나의 두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얼마나 지옥 같았던 한 달이었던가.

하루 종일 미노타우르스에게 쫓기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구역질나는 이끼와 버섯으로 끼니를 연명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래,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기쁨을 누릴 시간도 잠시.

옆에 있던 진혁이 어깨를 꾹꾹 찔렀다.

"네?"

"코인."

"코, 코인이라면?"

박하나가 슬슬 눈치를 봤다.

'모르는 척하는 것 봐라?'

하긴, 토해내고 싶지 않은 양이긴 했다.

5,000코인이면 D급 수준의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었으니까.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진혁이 손바닥을 쫙 폈다.

계약상 공동 작업으로 인한 수익은 모두 사장의 몫이다.

"...주면 되잖아요."

박하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코인을 넘겼다.

'좋아.'

이걸로 1만 코인이 넘었다.

한결 두둑해진 잔고에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최초 보상 혜택이 확실히 쏠쏠하긴 하네.'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모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나보다 많은 코인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는 없었으니까.

"브라함의 반지는 3일 안에 구해서 가져와."

"그런! 3일은 너무 짧은...!"

"2일 줄게."

한 번만 더 입을 뻥끗하면 하루가 된다.

그 이상이면 지금 당장 가져와야 하고.

"...어떻게든 구해 볼게요."

박하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궁에서 탈출해 새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완전히 썩어 있었다.

몬스터에게서 벗어났지만, 노예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특히나 진혁처럼 살벌한 상사와 함께라면 앞날은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울 게 뻔했다.

"너무 죽을 것 같은 표정 짓지 마. 명예의 전당엔 너 혼자 올라가도록 해 줄 테니까."

진혁의 말에 박하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가능해요?"

"2인 이상의 경우엔 대표 플레이어만 업로드가 가능해."

"...."

박하나가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직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미궁.

그것을 홀로 돌파한 게 알려진다면 엄청난 관심을 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동료를 잃은 것도.

한 달 동안 레벨업을 못한 것도.

이거라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디 그뿐이랴?

매스컴과 인터넷에선 유망주가 나타났다며 난리가 날 것이다.

관심 받는 걸 광적으로 좋아하는 박하나로선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보상이었다.

진혁 입장에선 귀찮은 관심과 견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고.

"대표님에 대해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요?"

"왜? 그 녀석들이 마음에 걸려?"

"혹시 모르잖아요."

놈들의 마지막 채팅을 보면, 몸이 성하지 않을 확률이 꽤 높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박하나 말대로 '혹시'라는 게 있으니.

"그럼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그 말은 설마...?"

"키보드 워리어 몇 명 없어진다고 해서 경찰이 관심을 가질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어디까지나 사견일 뿐이지만."

당장 탑과 관련해서 온 신경을 쏟기에도 인력이 부족할 터.

살인도 아닌 실종이라면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뒤로 밀릴 것이다.

"방법이야 알아서 생각하고."

그런 것까진 일일이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그쪽 방면은 박하나의 전문 분야였으니까.

***

박하나와 헤어진 진혁은 곧장 스타팅 포인트로 향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보였다.

아.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네.

게이트 바로 앞에 거대한 전광판이 생겼으니까.

[아, 혹시 들으셨나요? 일주일 뒤, 3층 보스 몬스터 공략에는 한국을 대표로 '단군' 길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오! 단군이라면, 한국 1위 길드 말씀이군요.]

[예. 아무래도 미국에 이어 유럽과 일본까지 실패한 터라, 한국에 대한 기대가 쏠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 쪽에서도 같이 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쪽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게,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보니 협력보단 각 나라별로 움직이는 실정이니까요.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나라의 도움을 기대하기보단 저희 힘만으로 돌파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단군 길드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광판에선 탑에 관한 일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3층 보스몬스터를 공략한다라....

한 달 사이 많이도 올랐다.

'와. 벌써 3층의 보스만을 남겨뒀다고? 인류는 역시!' 이런 좋은 의미가 아니다.

조건은 90일 안에 다음 층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지금 시점에서 3층은커녕 2층도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벌써 4층으로 가려고 하고 있지.'

탑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원들이 탐나기에.

레벨을 올리고 차근차근 성장하기 보단 빠른 등반을 택한 것이다.

'것 참.... 실력도 없으면서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럴까?'

지금이야 빠른 등반이 가능하지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간이 촉박해질 터였다.

기초는 부실한데 난이도는 올라간다?

90일이란 압박이 점점 더 거세게 다가올 것이다.

이건 게임처럼 재도전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최초 클리어는 모조리 내가 차지하게 될 테니. 속도 조절이야 내 입맛에 맞게 하면 되겠지.'

진혁의 시선이 다시 전광판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저기에 온통 박하나에게 관한 이야기로 도배될 터.

명예의 전당을 양보한 건 이것 때문이었다.

과도한 관심.

이건 양날의 검이다.

인정을 받아 자리를 확고히 한다면, 건드리는 놈은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초반 성장에 걸림돌이 될 확률이 높았다.

인류를 위해.

나라를 위해.

타인을 위해.

공익이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노력이 퇴색된다면.

그거야말로 다수의 횡포이자 역겨운 가식이다.

허영심 가득한 호구들이나 영웅 놀이에 환장한 머저리들은 낚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일단, 한 달 동안 일어난 정보를 좀 모아 볼까.'

인터넷을 통해서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카더라와 거짓 정보가 넘쳐나는 곳에서 양질의 정보를 얻으려면....

글쎄.

시간과 노력이 몇 배나 들 거다.

그것보단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진혁이 [시련의 탑] 커뮤니티로 접속했다.

수많은 카테고리와 글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중에서 한 명을 찾아야 한다.

미궁에 있었을 때부터 눈여겨본 플레이어 한 명을.

'어딨냐?'

진혁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찾는 건, '월리를 찾아라'와 비슷한 난이도였다.

하지만, 진혁은 가능성이 높은 곳 위주로 선별해 효율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투데이 인기글], [명예의 전당], [꿀팁 게시판]....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인간대머리남 / 가입일자: 2007. 8. 13 / 세부정보: 비공개]

커뮤니티에 가입한 일자를 보면 그 사람이 틀림없다.

인간대머리남.

역시나 있었구나.

진혁은 [시련의 탑]을 플레이할 당시 사용했던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티모대령'.

2007 7. 1에 가입한 아이디였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반가웠다.

반갑긴 한데....

'젠장, 대체 11년 전엔 왜 아이디를 이렇게 지었지?

멋진 것도 많잖아?'

청초(淸楚), 검황(劍皇) 무신(武神) 등등.

어디 가서 말하기도 떳떳한 것들이.

하지만 왜일까?

저때는 복슬복슬하고 상대의 속을 박박 긁어 대는 티모에게 꽂혀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으나.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인간대머리남.

저 녀석보다는 낫다는 게.

-티모대령: 안녕하세요, 인대남 님. 혹시 저 기억하세요?

'과연, 답변이 오려나?'

한때 같이 다녔지만, 어쨌든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지금은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다.

아예 까먹었을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인간대머리남: 앜ㅋㅋㅋ 충!성! 캡틴 티모대령 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생각보다 빠르게 답변이 왔다.

'기억하고 있나 보네.'

마지막을 본 게 7년도 지난 일인데....

진혁은 왠지 가슴 한쪽이 뭉클했다.

-인간대머리남: 와아. 근데 지금까지 왜 귓속말도 쪽지도 답장 안 해 주셨어요? 티모 님 찾으려고 시작의 날 이후로 계속 보냈었는데.

-티모대령: 아, 제가 한 달 동안 좀 바빴어요.

-인간대머리남: ㅋㅋㅋ,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인도에라도 있으셨던 건가?

-티모대령: 뭐, 비슷한 데 있었죠.

미궁이라고.

한 달 동안 죽어라 고생하다 왔다.

당연히 정보의 공백이 생길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었다.

최신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인간대머리남이라면 그동안 시련의 탑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을 터.

자세한 건 전부 이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티모대령: 계속 귓속말로만 대화하기도 그렇고. 직접 만나 뵙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인간대머리남: 아 물론이죠! 근데, 저 불광동핵주먹 님하고도 만나기로 했는데, 셋이서 같이 봐도 되나요?

이건 또 의외의 닉네임이 튀어 나왔다.

불광동핵주먹.

그 사람도 만나기로 했다니.

'완전히 [시련의 탑] 첫 정모 하는 느낌이겠는데?'

궁금하긴 하다.

게임 속에서만 봤던 고인물들과 실제로 만난다는 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티모대령: 시련의 탑 입구 쪽으로 와 주세요. 적당히 카페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진혁이 짧게 답했다.

***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개인 카페.

진혁은 그중에서도 가장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차가운 초코라떼를 홀짝이며 시간을 보낸 지 30분 정도 흘렀을까?

덜컹.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녀가 들어왔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들이 인간대머리남과 불광동핵주먹이라는 사실을.

상대도 자신을 알아봤는지,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인간대머리남입니다!"

170cm를 갓 넘는 키.

곱슬거리는 파마머리에 흰 피부를 갖고 있는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꽤나 귀엽게 생겼다. 전형적인 호감상이랄까?

게임에선 대머리 흑인에 호피무늬 팬티와 꿀벌 꼬리 그리고 나비 날개로 룩을 맞췄으면서 진짜....

'하. 이 녀석이 벌레 미궁에 불 지른 다음에 세스코 왔다고 뛰뛰빵빵 외치던 그놈 맞지?'

[혈압이 상승하셨습니다.]

[상태 이상의 위험이 있습니다.]

동의한다.

진짜로 볼이 얼얼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때, 반대편에 있던 여자도 자기소개를 했다.

"불광동핵주먹이에요."

167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건강미가 느껴지는 가무잡잡한 피부.

긴 생머리에 운동복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은 분명....

살집이 푸짐한 백인이 허리와 주먹에 각각 꽃무늬 튜브와 권투 글러브를 끼고 있었는데.

틀림없다.

아직까지 '내 주먹에 자비란 없소'를 외치던 불광동핵주먹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당연히 나이 좀 많고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을 만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정상인들이라고? 아니. 다른 의미에서 둘 다 너무 눈에 띄잖아?'

진혁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티...모대령입니다."

깜빡 잊고 있었다.

게임 내에서 미쳐 버린 고인물일수록 현실에선 지극히 멀쩡하다는 사실을.

15화 탑의 고인물들 (2)

커피 속 얼음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소개가 이어졌다.

인간대머리남의 본명은 이태민.

한국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아니, 뭐야 그럼. 고딩 때 그렇게 게임을 해 놓곤 한국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남들은 하루에 10시간씩 공부만 해도 들어가기 힘든 곳을?

이 녀석도 참 대단하다.

여러 의미에서.

'어디, 머리 좋은 공돌이께선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 한번 볼까?'

혀를 차던 진혁이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

이름: 이태민

성별: 남

나이: 23세

레벨: 11

힘 13 민첩 15 체력 16 마력 21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2,50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기계군주(機械君主)

스킬: Lv2 '모래상자모드', Lv2 '통솔', Lv2 '해킹'

——————————————————

'역시, 이걸 얻었군.'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계군주.

대인(對人)보다는 대군(對軍)에 특화된 고유 능력이다.

과거 시련의 탑에서도 인간대머리남 아니, 이태민은 이걸 사용해 광역 몰이사냥을 즐겨했었다.

공수가 모두 탄탄한 밸런스형.

마력 소모가 크다는 걸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는 능력이다.

그럼 다음은....

진혁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불광동핵주먹으로 활동했던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본명, 유연화.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몰랐었다.

유연화가 어느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하지만, 소개가 이어지자 비로소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유천영.

완벽하게 실전화시킨 태권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무도계의 살아 있는 전설.

유연화는 바로 그 기인의 손녀딸이었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손녀지.'

시련의 탑에서도 7m가 넘는 거인들을 맨손으로 때려잡곤 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혈관엔 유천영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진혁이 다시 한번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

이름: 유연화

성별: 여

나이: 25세

레벨: 12

힘 25 민첩 22 체력 17 마력 5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4,775

직업: 없음

고유 능력: 극진태권도(劇震跆拳道)

스킬: Lv3 '태청화랑심법(太淸花郞心法)', Lv2 '임전무퇴(臨戰無退)', Lv2 '마력강화'

——————————————————

'이쪽도 꽤 흥미롭네.'

초근접형 탱커 겸 딜러.

불광동핵주먹이란 닉값을 제대로 하는 고유 능력과 스킬 구성이다.

레벨도 비슷하게 올린 걸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사냥을 해 왔을 터였다.

하긴, 예전에도 둘이서 합이 잘 맞았으니까.

[복사 조건: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함께해 온 동료입니다. 세 사람이 탑의 20층에 도달했을 때, 플레이어 이태민과 유연화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복사조건을 읽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인물 중에 고인물들의 능력인 만큼 쉽게 복사할 수 없다는 건가.

'당분간은 힘들겠군.'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 있는 셋은 어떤 방식으로든 20층에 도달할 테니까.

그때였다.

"형. 뭐 해요? 형 차례예요."

앞자리에 있던 이태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실의 눈'의 존재를 몰랐기에, 허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7살이고 파프리카TV BJ를 했었어요."

"오! 형 BJ였어요? 파프리카면 저도 가끔 보긴 했는데! 게임? 먹방? 아, 형은 잘생겼으니 남캠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태민이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아무리 게임 상에서 같이 활동했다곤 하나, 실제로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경계심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 지금은 관뒀지만요."

"에이. 말 편하게 하세요, 형. 겜에서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맞아. 그 편이 우리도 더 편해."

유연화도 한 술 거들었다.

둘 다 친화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도 BJ 생활 하느라 친화력은 어디 가서 안 밀린다고 생각했건만.'

아니, 어쩌면 그동안 계속 뒤통수만 치려는 놈들하고만 어울려서 더 벽을 세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득을 저울질하고.

필요 여하에 따라 가차 없이 목에 칼을 꽂았던 한 달.

그걸 당연히 여겼기에, 이런 친근감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동료라....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네.'

피식 웃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말 편하게 할게."

***

어색함이 가시자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이건 진혁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결과였다.

향긋한 커피도 나쁘진 않지만....

뭐랄까?

그것보다는 먹고 싶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찾은 곳은 삼겹살과 된장찌개로 유명한 맛집.

노릇노릇하게 익은 두툼한 고기와 두부를 가득 넣은 찌개를 보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끼와 버섯하고는 아예 차원이 다르구나.'

소설에서.

흔히 수백 년 혹은 수천 년간 이계에 있다가 돌아온 귀환자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한 달만 산골에 박아 놓고 풀만 먹이면, 초코파이 하나로 영혼까지 파는 게 사람의 본능이었으니까.

문득, 훈련소 때 생각이 났다.

초코파이냐 몽쉘이냐에 따라서 종교가 바뀌었던 일요일의 추억이.

아! 그러고 보니....

또 먹고 싶은 게 하나 떠올랐다.

"요 아래 베라 있던데,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사 오는 거 어때?"

"아이스크림 콜!"

"형이랑 누나는 여기 있어요. 제가 사 올게요. 근데, 어떤 맛으로요?"

이태민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민트초코."

진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얼굴을 찌푸렸다.

"윽, 그 치약맛 아이스크림을요?"

"오빠, 그거 호불호 엄청 갈리던데. 먹으면서 양치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이 자식들이....

상큼한 민트와 달달한 초콜릿의 조합을 몰라보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흘려 넘길 수 없다.

"다시는 민트초코를 욕하지 마."

그 어느 맛보다 단단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갖고 있는 게 민초였으니까.

***

식사를 하며, 진혁은 두 사람으로부터 한 달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들었다.

각종 길드의 탄생과 탑의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

각 나라의 정책과 코인에 관한 동향 등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형도 아시겠지만,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을 당시 길드들이 대부분 다시 결집했어요."

이태민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우우우웅!

[이태민이 Lv2 '모래상자모드'를 발동합니다.]

허공에 7개의 문양이 나타났다.

모두 본 적 있는 것들이다.

미국의 '타이탄', 유럽의 '올림포스', 중국의 '중화' 그리고 일본의 '사무라이'와 인도의 '간다라'.

마지막으로 한국의 '단군'과 '싸울아비'까지.

세계를 대표했던 길드들의 심벌이었다.

유연화도 문양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고 있는 거겠지. 기존 멤버들끼리 정보를 독식하는 게 유리하다는 걸."

그렇겠지. 최소한 저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함부로 추가 멤버를 받지도, 알고 있는 고급 정보를 풀지도 않을 것이다.

"BJ들 쪽은 어때? 프리로 활동하면서 코인을 긁어모으는 놈들도 있을 텐데?"

진혁의 질문에 이태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네. 주로 기존에 활동했던 유명인들이 네임드 앞세워서 시청자들한테 조회수 뜯어내고 있어요.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한데, 저희 때 했던 코인 공장 가동하려는 놈도 있는 것 같고요. '마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라던데. 요즘 뉴스에서도 한창 난리에요. "

"...제정신이 아니군."

"그렇죠. 걸렸다간 무기징역감이니까요."

코인 공장.

한 마디로 조회수를 뽑기 위해 강제로 특정인의 동영상을 시청하게 만드는 작업실이다.

과거, 게임에선 NPC가 그 역할을 대신했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람들을 공장 같은 데 가둬 놓고 매달 코인만 뽑아냈다간 정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허나 진혁은 이태민의 말이 마냥 헛소문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은 바뀌었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들은 무너졌다.

결코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고를 해 줘야겠군.

그 녀석에 대해서, 두 사람도 알고 있어야 한다.

"둘이서 같이 다닌다면 당할 확률은 적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해 둘게."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에 칼잡이 녀석 만났다."

"헉!?"

"그 거머리를?"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거, 살살 좀 말해라.

식당 안에 있는 손님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어디, 어디서요?"

"오빠. 그 사람, 현실에서도 다짜고짜 칼부터 꺼내?"

검성(劍成).

지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붓는 검술에 결계까지 쓰는 랭커다.

[시련의 탑]을 할 때도 종종 만나곤 했었는데.

대화 따위는 일절 없이 공격부터 하고 보는 막가파였다.

물론, 그때마다 찍어눌러 줬다. 다시는 덤비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백번은 넘게 죽였던가?

보통 사람이면 포기할 법도 한데.

문제는 이 녀석이 목표 의식인지 라이벌 의식인지....

별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죽어라고 우리의 뒤만 밟았다.

'정확히는 내 뒤를.'

농담이 아니라, 밥 먹거나 잠잘 때는 물론, 화장실 갈 때도 노렸으니, 당연히 치가 떨릴 수밖에.

"얼굴을 맞댄 건 아니고. 내가 갔을 땐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건륭(乾隆)이 새겨진 철기검'을 가지고 사라진 뒤였어."

"그 녀석도 레플리카를 노렸던 거군요... 아니, 잠깐. 그럼 형도 그곳에 갔었어요? 거기 완전 지옥이었다던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오빤 진짜 강심장이네. 어떻게 거길 갈 생각을 다 한 거야?"

"나도 챙길 게 있어서 갔었어. 아무튼 너희들도 조심해. 생김새만으론 너희인지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고유 능력이나 스킬을 보면 바로 알아볼 테니."

과거에 썼던 능력을 그대로 가져오는 게 이래서 양날의 검이다.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동시에 그 플레이어를 나타내는 지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후우. 조심해야지. 오빠는 몰라도 우리 둘은 솔직히 좀 무서워서...."

이태민과 유연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정보 교환은 대충 다 된 것 같고,

"오늘은 이만하고 슬슬 일어날까?"

진혁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

먹고 마시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리라.

"어? 벌써요?"

"벌써가 아니라 지금 9시야."

내일부터는 다시 탑을 올라야 한다.

게다가 한 달 만에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하고 제대로 된 침대에서 푹 자고 싶었다.

두 사람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근데. 한 달이나 어디 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럼, 테스트도 안 받은 거 아니에요?"

"테...스트?"

뭔 테스트?

진혁의 반응에 두 사람이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2층부터는 사망자 수가 급증해서, 각성자 협회에서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만 위로 올라갈 수 있거든요."

"인증코드를 주는 방식인데..., 이런 식이야."

유연화가 손목을 보여 줬다.

아주 희미하게 바코드 비슷한 문신이 박혀 있다.

호오. 이것 봐라?

그러니까,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들어오는 건 막겠다. 뭐, 이런 취지라는 거잖아?

겉으로 그런 명분을 걸어 두면 확실히 테스트를 치르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긴 할 거다.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니.

이보다 더 고귀한 목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위에서 바라는 진짜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테스트를 치르는 이유는 단 하나.

숨어 있는 실력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확히는 그 실력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겠지.'

문득, 시련의 탑이 처음 나타났던 날이 기억났다.

'한상진이었나? 자신을 각성자 협회 회장이라고 소개하던 남자의 이름이?'

TV를 통해 각성한 플레이어들을 모으려 하던 그 얄팍한 수작질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테스트 보는 곳. 거기 어디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각성자 협회가 만든 이 시스템.

이용해 먹을 방법이 있었다.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16화 각성 테스트 (1)

다음 날, 세 사람은 각성자 협회가 위치한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150층짜리 초고층 빌딩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건물의 끝이 구름에 닿아 있는 게 보였다.

"이게 건축계열 고유 능력으로 시공했다는 그건가?"

말로 듣긴 했지만, 진짜 엄청나네. 이걸 한 달 만에 완공했다 이거잖아?

"각성자 협회가 있는 본사예요. 테스트도 주관하고 시련의 탑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이곳에서 처리하고 있죠."

"와.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3주나 됐네. 나도 시험 치를 때 엄청 심장 떨렸는데."

"에에, 농담이겠지? 킹콩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거면서 무슨. 그 왜. 시험관도 누나 보고 쫄았었잖아?"

"어머나. 그거 나한테 한 말이니 태민아?"

유연화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 있는데 입 꼬리는 그대로다.

그 순간.

오싹하고.

진혁과 이태민의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건....

미노타우르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다.

아마 착각이겠지.

...아마도.

"...."

이태민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형도 이번에 등급 나오면 저희 셋이 같은 길드에 들어가는 게 어때요?"

"길드?"

갑자기 웬 길드?

"'단군'이나 '싸울아비'가 신입들 잘 안 받기는 하는데, 형이나 저희 정도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거예요. 솔직히 15층부터는 힐러나 버프, 디버프 계열 없으면 공략이 불가능하기도 하고...."

아, 그런 의미였나.

하긴, 예전에도 소수로 미궁이나 유적을 들어갔다 전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위로 갈수록 숫자상의 한계에 부딪힐 터.

두 사람은 강한 조력자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쯧쯧.'

진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탑을 오르는 데 실패한 거 아니야.'

경험치. 아이템. 히든 피스.

솔플로 다 해먹기도 바쁜데, 동료들과 함께한다면 그걸 다 나눠먹어야 하잖아?

굳이 함께한다면 이용하다가 버려도 되는 타인들이면 족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어느 길드에 소속될 생각이 없어."

얽매이는 것 따윈 딱 질색이다.

특히나 상위 길드에서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경우라면 더욱더.

"그럼. 형이랑 저랑 연화 누나, 이렇게 셋이서 가는 건가요?"

"아니, 그렇게 해도 효율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야."

셋이서 나누는 것도 아깝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 따로 움직이는 걸 원칙으로 하되, 특정 구간에서만 함께 하자. 너희 둘이야 호흡 맞춰 온 게 있을 테니 그것까지 말리진 않겠지만, 나는 혼자가 더 편해."

그래, 이게 베스트다.

"세, 셋도 힘든데, 그마저도 따로 간다고?"

"형.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태민과 유연화는 시련의 탑을 20층까지 올라가 본 고인물들이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저층이라도 솔플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걸.

하지만 그런 두 사람조차 모르는 게 있었다.

고인물 사이에서도 급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두가 떠나 버린 망겜을 홀로 떠돌다, 결국엔 끝을 봐 버린 플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일단 테스트부터 치르자. 사람 더 많아지기 전에 슬슬 가봐야지."

진혁은 피식 웃으며 건물로 향했다.

"어...? 어어."

"그...래야죠."

그 뒤를 벙 찐 표정의 두 사람이 따라왔다.

***

"자자, 오신 분들은 번호표 뽑고 차례를 기다려 주세요!"

"D-09 그룹 테스트가 곧 있을 예정이오니 해당하시는 분들은 시험장으로 이동해 주십쇼!"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테스트를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과연, 탑이 지닌 유혹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걸 보면 말이다.

"제발, 제발 좋은 등급 좀 떠라. D급 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E급이라도 제발."

"10위권 길드만 들어갈 수 있어도 인생이 피는 건데...."

"난 각성자 협회랑 직계약 맺고 싶어. 좋잖아? 공무원증 딱 목에 달고 당당하게."

F급 이하의 판정을 받으면, 상위 길드의 눈도장은커녕 2층으로 갈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그렇기에 모두들 로또 당첨을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은.

자신만은 남들과 다르기를.

물론.

그들을 바라보는 진혁의 시선은 싸늘했다.

'저런 놈들은 탑에 들어가도 한 달도 살아남지 못하겠지.'

기껏해야 현실과 타협한 채 그 층에 머무는 낙오자가 될 게 뻔했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분수를 깨닫고 얌전히 있으면 다행이다.

괜히 어설프게 나서다가 발목이나 잡으면 그게 더 골치 아팠으니까.

시선을 돌린 진혁이 번호표를 뽑았다.

[E-01 그룹]

'일찍 온 보람이 있군.'

현재 D그룹이 절반 정도 진행됐으니.

대충 한 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거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인가? 기자들이 평소보다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이태민이 주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림잡아도 수십 명에 이르는 기자들이 카메라를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온몸을 달싹거리는 모습이 뭐 마려운 강아지들 같았다.

"그러게. 좀 이상하긴 하네."

유연화도 긍정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기껏해야 네다섯 명이면 모를까.

대형 길드의 유망주가 오지 않은 한 이 정도 규모의 기자단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뭔가 알려지지 않은 이벤트라도 있는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웅성웅성!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박하나다! 검은 까마귀 길드의 박하나야!"

박하나.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명예의 전당을 통해 매스컴과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화제의 루키를.

"와. 저 여자가 박하나야? 첫날에 미궁 들어가서 살아 나온?"

"...지린다. 뷰튜브 연속으로 돌려 봤는데, 설마 오늘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그 옆엔 박하진이야. 얼마 전에 중국 쪽하고도 거래를 했다던데."

하나같이 쟁쟁한 안면들.

게다가 박하나와 박하진 외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세상에나, 싸울아비 길드의 김기태도 있어!"

촤촤촤촤촤촤!

카메라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세계 7대 길드 중 하나이자 국내 2위 길드인 싸울아비.

그리고 그곳의 간부급인 랭커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마!"

"정면 샷으로. 세 사람 같이 있는 구도로 찍어!"

기자들이 열광할 만했다.

아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특종은 1면을 장식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

"후우."

190cm에 육박하는 거대한 덩치.

김기태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뭐 이리 사람들이 이렇게 바글바글해? 이젠 개나 소나 다 테스트를 받는 거야 뭐야?"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 왜, 요즘 세상에선 탑이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기회라고 믿는 놈들이 부쩍 늘었지 않습니까?"

박하진이 즉각 대답했다.

"하여간 벌레들이 꿀은 또 빨아 보고 싶어가지고. 백날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다는 걸 모르나?"

하긴, 알았으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겠지.

분수를 알고 찌그러져 살 것이다.

"그나저나 오늘 잘해라. 일부러 여기까지 와 준 것도 다 너희 남매 때문인데, 실수했다간... 알지?"

"무,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잘할게요."

박하진과 박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잡은 황금 동아줄이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흥행에 성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미 계획은 완벽하게 세워 둔 상태였다.

"시간 없으니까 줄 서 있는 사람들 대충 치워. 기자들도 기다리고 있는데 몇 시간이나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지."

박하진이 옆에 있는 덩치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길 좀 틉시다."

"어이, 사람 지나가는 거 안 보여? 좌우로 밀착해. 좌우로!"

"빨리빨리 움직여라. 뭉그적거리다가 얻어터지지 말고."

검은 까마귀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줄을 헤집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길이 갈라졌다.

거기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큼!"

"인적 사항 정리해 둔 서류를 어디에 뒀더라...."

심지어 각성자 협회 관계자들조차도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외면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상위 길드의 간판이 법이나 규칙보다 위에 있다는.

그런데.

덩치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세 사람이 비키지 않고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확히는 만류하는 두 사람과 버티고 있는 한 사람이.

특히나 버티고 있는 놈은 느긋하게 생수병에 든 얼음물을 꼴깍이고 있었다.

"넌 뭐야? 비키라는 말 못 들었어?"

"비키라고? 내가 왜?"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진심으로.

번호표 뽑아서 순서 기다리고 있는데, 왜 비키라는 걸까?

방금 왔으면 F그룹에 배정 받았을 텐데?

'아, 설마....'

무언가 생각난 듯 진혁이 번호표를 덩치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게 미국에서 쓰는 알파벳이라고 하는 거야... A로 시작해서 B, C, D. 다음엔 E야. 그다음엔 F고. 모르면 이참에 외워 둬."

그래, 순서를 모를 수도 있지.

보통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데.

가슴이 뭉클해진다.

'안쓰럽네.'

힘겨운 가정사라도 있는 건가?

"누,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덩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풉!"

"이건 뭐, 눈높이 교육인가."

여지없는 농락에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켜보던 김기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서진 않았다.

마치 이 정도 일쯤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처럼.

결국.

"쳇, 병신 같은 새끼들. 저리 비켜!"

뒤에 있던 박하진이 직접 나섰다.

"뭐 하는 놈인진 모르겠다만, 지금 실수하는 거야.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얌전히 꺼져라. 아주 갈아 마셔 버리기 전에."

협박 한번 살벌하게 한다.

'이게 박하나가 말했던 그 오빠란 놈이란 말이지?'

눈빛을 보니 실제로 사람 하나 죽이는 데 망설임도 없을 것 같고.

재밌네.

어떻게 된 게 남매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건 어쩜 그리 똑같을까.

"다 좋은데 조금 떨어져서 말하면 안 될까? 입 냄새 때문에 눈이 다 따갑거든."

진혁이 손으로 코를 잡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혀, 형?"

이태민이 깜짝 놀라 진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빠! 왜 그래?"

놀란 건 유연화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지? 지금 저 사람. 박하진한테...."

"죽으려고 작정을 했네. 제정신인가?"

지켜보던 사람들조차도 입을 쩍 벌렸다.

물론.

가장 기가 막힌 건 당사자인 박하진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박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목 위에 달린 건 머리가 아니라 만두냐?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오염되는 것 같으니까, 이빨을 위아래로 꼬옥 포개 달란 뜻이야."

진혁이 생긋 웃으며 했던 말을 조금 더 예쁘게 포장했다.

똥 위에 리본까지 달아 준 건 덤이다.

"이 새끼가. 야. 이거 감당할 수 있어? 지금 보는 눈이 많다고 손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면...."

"에이, 설마. 싸울아비 길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뭐가 무서워서?"

"싸, 싸울아비 길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맞잖아? 한국에서 잘 나가는 게 싸울아비지. 너희들이냐? 그리고."

어깨를 으쓱한 진혁이 말을 이었다.

"이름이 검은 까마귀가 뭐냐? 검은 까마귀가?"

흰 까마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어디 모자란 거냐?"

아니면 시인이나 문학소년 같은 건가?

거기선 중의적 표현 같은 거 허용하던데.

뭐가 됐든, 작명 센스 한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이 벌레 같은 새끼가!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박하진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검으로 뻗었다.

분명....

"니가 먼저 시작했다?"

순간, 공기가 급변했다.

전신에 소름이 끼치도록 차갑게.

17화 각성 테스트 (2)

——————————————————

이름: 박하진

성별: 남

나이: 26세

레벨: 8

힘 16 민첩 15 체력 16 마력 12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1,58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치명적 암습

스킬: Lv3 '가속(加速)', Lv2 '은신(隱身)', Lv2 '얕은 호흡'

——————————————————

이미 '진실의 눈'을 통해 박하진의 상태창을 확인해 뒀다.

일대일에서 강한 평가를 받은 암살계열.

특히나 '얕은 호흡'은 꽤나 탐나는 능력이었다.

'장기전을 보완할 수 있는 패시브형 스킬이니까.'

확실히 쓸 만하다.

그렇기에 도발했다.

[복사 조건: 대상과의 우호도를 최대치로 올릴 경우 '고유 능력'을 복사할 수 있으며, 대상과의 적대감을 최대치로 올릴 경우 '원하는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적대감 올리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반대로 그 모습을 보던 박하진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스릉!

그러나 검이 뽑히려는 찰나.

진혁이 반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들고 있던 생수병을 앞으로 뻗었다.

촤아아악!

뿜어진 물이 박하진의 안면을 뒤덮었다.

"큭?"

박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고작 1초도 안 되는 시간.

하지만 전투에 있어 그 짧은 시간은 치명적이었다.

뒤늦게 뽑힌 검이 허공을 갈랐다.

물론, 피를 뿜고 비명을 지르고 있어야 할 대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욱씬!

박하진의 허벅지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휘청하고.

"끄아아악!"

몸이 무너져 내렸다.

박하진이 허벅지를 부여잡고 맨 땅 위를 뒹굴었다.

워낙 빠르고 정확하게 타점을 노린 일격.

당분간은 싸우기는커녕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도 힘들 것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혼자 공격하고 혼자 넘어졌는데?"

"스탭이 꼬인 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

뜻밖의 행운.

모르는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였다.

수백 명의 인파 중 조금 전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한 건 단 세 명.

진혁을 따라왔던 이태민과 유연화.

그리고 싸울아비 길드의 김기태뿐이었다.

'형이 우리보다 고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미쳤는데?'

이태민이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기습으로 허를 치르는 타이밍도.

그 틈을 이용해 사각으로 파고드는 타이밍도 완벽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틀림없다.

박하진의 다리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걸.

물론, 본인은 부상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조차 모르고 있을 테지만.

"으으...."

유연화의 입에서도 안쓰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농락당하는 모습이 과거, 할아버지와 대련을 하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지.'

그때는 수련이라는 목적이라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당하는 입장에서 배울 점 따위는 하나도 없다.

그저 일방적으로 찍어 누를 뿐이었으니까.

***

'뭐, 뭐지?'

박하진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 바닥에 뒹굴고 있어야 할 사람은 저 녀석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뺨에서 대리석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단 말인가?

"빌어먹을!"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김기태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아무리 방심했다곤 하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이 새끼가 진짜 뒈질라고."

박하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강한 압박감이 목을 짓눌렀다.

우득!

"컥?"

"목 부러진다. 그대로 엎어져 있어."

진혁이 위에서 박하진을 내려다봤다.

"켁! 케엑! 발... 발! 안 치워?"

박하진이 몸을 버둥댔다.

당장이라도 뿌리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상대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 오빠!"

박하나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소란을 듣고 앞쪽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

박하나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혈육을 공격한 이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 대상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덜덜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인물.

감히 쳐다보기조차 힘들었던 악마가 눈앞에 있다.

"이야. 설마 이렇게 빠르게 보게 될 줄 몰랐네. 인턴."

진혁이 생긋 웃었다.

"여,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왜긴, 테스트 보러 왔지. 새치기하고 오히려 큰소리 내는 놈 때문에 기분은 잡쳤지만."

진혁이 발에 체중을 조금 더 실었다.

"끄으으!"

꿈틀대던 박하진이 얌전해졌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네.

'그나저나 복사 조건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건가?'

이 정도면 충분히 적대감을 최고치까지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시스템이 원하는 조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쯤 해라."

진혁의 어깨에 묵직한 압박이 느껴졌다.

김기태였다.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레벨 차이가 일정 수준을 넘었기 때문에 스킬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눈으로 상태창을 볼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은.

'최소한 레벨이 20은 넘었다는 뜻이군.'

사냥터의 독식과 몰아주는 사냥이 가능하다는 장점.

이것이 바로 너도 나도 대형 길드에 가려는 이유였다.

진혁이 어깨를 붙잡은 손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몰랐는데."

"뭐를 몰랐단 거냐?"

"이 녀석에게 보모가 딸려 있을 줄은 몰랐다고."

도발성 짙은 발언이었지만, 김기태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손이 많이 가는 놈이지만, 하는 수 없지. 이 녀석이 나름대로 쓸모 있는 구석도 있거든."

"쓸 만한 구석이라...."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건, 중국에 '고려인삼'을 공급할 루트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뭐?"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김기태의 기색이 눈에 띠게 바뀌었다.

지진이 일어나는 동공.

게다가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까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질문이 좀 잘못됐네. 그걸 어떻게 아는지 물어볼 게 아니라."

그 정도 정보를 알고 있으면.

그 정도 정보를 알고 있는 놈이라면.

혹시.

"고려인삼이 갖고 있는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진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우우웅!

[김기태가 Lv3 '암막결계(暗幕結界)'를 발동합니다!]

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박하진과 박하나,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외부와는 단절된 세상 속, 김기태는 진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너... 대체 뭐야? 뭔데 그런 걸 다 알고 있어?"

처음엔 흥미로웠다.

이제 막 테스트를 받는 뉴비가 박하진을 가지고 놀았으니까.

심지어 낭비 없는 움직임엔 살짝 감탄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진혁의 발언이 이어짐에 따라 흥미는 곧 불편한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결국엔 강한 적개심으로 변질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자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이번에도 질문이 잘못된 것 같은데."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뭘 어떻게 아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뭐와 교환할 수 있는지를 물었어야지."

여긴 청문회가 아니다.

오직 결과가 중요할 뿐.

동기나 과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교환을 하고 싶다고?

"그래. 어차피 너희 쪽에서도 그 부작용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 아니야?"

정곡을 찔렸는지 김기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마치 이 거래를 미리 준비했었다는 듯한 말투로군."

즉흥적...이라고 보기엔 걸리는 점이 너무 많다.

사전에 대상을 알고 준비해 둔 무대.

그렇게 생각해야만 앞뒤가 맞다.

진혁이 긍정의 뜻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맞아. 사실 당신이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거든."

어제 이태민에게 테스트란 말을 듣자마자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자리.

명예의 전당에 올라 주가를 높인 박하나가 이걸 놓칠 일은 없다.

당연히 날이 밝자마자 오겠지.

물론, 길드의 성장에 안달이 나 있는 박하진과 함께.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연줄을 원하는 박하진이 과연 혼자서 올까?

그럴 리가.

어떻게 해서든 위쪽에 있는 놈들을 끌어들이고 싶었을 거다.

물론, 상대측에서도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진 않을 테고.

이해관계의 합치.

그렇기에 확신했다.

단군이나 싸울아비.

최소한 둘 중에 한 곳에서 간부급이 올 거라고.

'확률이야 2위 자리에서 1위를 노리는 싸울아비 쪽이 높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고. 증거는 있나? 입만 터는 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어."

증거?

물론 있지.

"고려인삼을 생으로 복용하면 마력 중독 증상이 일어날 거야. 물론, 복용량을 조절하거나 2층에 있는 '정화수'를 이용하면 증상을 누그러뜨릴 순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

"그래서?"

"필요한 아이템은 총 셋."

진혁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카라시안의 즙. 월광석. 만드라고라의 뿌리다. 앞에 두 개야 탑의 2층과 3층에서 구할 수 있을 테니 상관없지만 문제는, 마지막 만드라고라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거 아냐?"

...일치한다.

현재 싸울아비 길드에 소속된 연구팀과 탐험가들이 얻은 조합서와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세 가지 재료 중 두 가지는 손쉽게 얻었으나.

딱 하나.

만드라고라의 뿌리만큼은 도무지 구할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탑의 몇 층에 있는지조차 파악이 되질 않았으니까.

'조합서와 재료의 종류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저 말은 진짜다.'

거래를 하는 데 최소한의 요건은 갖췄다는 뜻.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다. 네 말에 넘어가 주지. 다만."

그 순간, 김기태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폭사되었다.

스릉!

박하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다.

진혁의 코앞까지 뻗은 검 끝이 예기를 발했다.

"어설픈 수작을 부리는 거면 각오해라."

"수작을 부린 거면 각오하라고?"

"그래. 그때는 이런 말빨로는 넘어갈 수 없을 거다."

이것... 참.

아무래도 살짝 오해가 있었나 보다.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동시에 느릿하게 움직인 손이 칼날을 움켜쥐었다.

"벨 생각은 없으니 손으로 잡지 않아도 된다."

김기태가 피식 웃었다.

바로 그때.

화르륵!

[Lv2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대상과의 레벨 차이로 인해, 스탯 '간극'이 활성화됩니다!]

불꽃이 일렁이며.

칼날이 붉게 달아올랐다.

피부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

공기 중에 수분마저 급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무슨?"

김기태가 다급히 검을 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카칵!

어느새 진혁의 반대편 손엔 붉은빛을 머금은 단검이 쥐여 있었다.

횡으로 그어진 궤적.

김기태의 칼날에 가느다란 금이 그려졌다.

균열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약한.

허나,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선이다.

그 순간.

툭!

반으로 쪼개진 칼날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 강화까지 한 무기를 베어 버렸다고?'

일격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김기태가 멍한 표정으로 칼날과 검의 손잡이를 번갈아봤다.

분명, 상대는 한 자리 레벨밖에 되지 않을 플레이어다.

한데 뭐란 말인가?

전신을 옥죄어 오는 이 흉흉한 가세는.

마치, 레벨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본능이 최고조의 경고를 보내 왔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착각하지 마. 제안을 하는 것도 나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야."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귀찮은 짓거리를 하는 건 네놈들이랑 줄다리기할 시간조차 아깝기 때문이고."

당장, 1층에 있는 '유적'으로 가야 한다.

그걸 위해 미궁에서 1달이란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주제 파악을 못 하는 놈이 짖어 댈 경우, 잠깐 시간을 내줄 생각은 있다.

"당신이야 말로 명심해."

바로 여기서.

"만약 어설픈 수작을 부렸다간...."

선을 긋는다.

"싸울아비 길드 전체가 박살날 수도 있다는 걸."

경고는 한 번뿐이라고.

18화 각성 테스트 (3)

진혁의 말에, 김기태가 움찔했다.

"혼자서.... 길드 전체를 상대하겠다고?"

만용이자 오만이다.

애초에 길드는 단일 개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었으니까.

하물며 싸울아비는 국내 2위에 위치한 초대형 길드 아닌가?

"이제 와서 테스트를 보러 온 거면, 레벨도 낮을 텐데...."

"낮지. 아직 1레벨이니까."

"어이가 없군. 그런데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싸울아비 길드 상위권의 평균 레벨은 20 이상.

심지어 김기태보다 강한 플레이어도 열 명이 넘는다.

하지만.

"단순히 레벨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려 한다면, 너는 시련의 탑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야."

진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진심이었나.'

김기태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허언이 아니다.

자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여유였다.

물론, 실제로 수백 명에 이르는 싸울아비 길드를 이길 순 없겠지만.

최소한.

'나보다는 강해.'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기태가 말문을 열었다.

"교환 조건은...."

"응?"

"교환 조건은 어떻게 되는 거지?"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거래를 하는 쪽으로.

"간단해. 만드라고라를 찾을 수 있는 위치를 말해 줄 테니, 싸울아비에서 보유하고 있는 독점 던전 중에서 10개를 넘겨."

독점 던전.

누구나 입장이 가능한 일반 던전들과 달리, 각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소유권을 갖고 있는 던전을 일컫는다.

위험도가 낮은 데 비해 보상은 짭짤한 노른자위.

때문에 각 길드들은 이 독점 던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10개나 내놓으라니.

싸울아비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전체 독점 던전 중 30%에 해당하는 양이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군."

"마력 중독 증세를 해결해 주는 대가야. 당연히 비싸야 정상 아닐까?"

당장의 가격만 보고 툴툴대지 말고.

상대적으로 비교해.

던전 10개와 중국과의 관계.

둘 중에 어느 게 더 싸울아비에 중요한지를.

"...."

김기태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감정을 걷어내고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이득과 손실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독점 던전 10개.

아깝긴 했지만, 만드라고라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상대의 존재.

'고작 1레벨로도 이토록 강하다면....'

레벨이 올랐을 경우 대체 얼마나 강해진다는 걸까?

두렵다.

성장 속도와 잠재력,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까지.

전부.

하지만, 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건 김기태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고작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길드 간부들에게 말해 보겠다. 네가 말한 조건들에 대해 상의해 보고 대답해 주지."

"현명한 결정이야."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걸로 둘 사이의 대화는 끝났다.

[Lv3 '암막결계(暗幕結界)'가 해체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

"나, 나왔다!"

"오오오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셨던 거죠?"

두 사람이 나타나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거기, 카메라 내리세요. 어이. 안 들려? 카메라 치우라고!"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곡소리 나기 싫으면 찍은 거 반납하세요. 각성자 특례법 개정된 거 다들 알 거라고 믿습니다."

검은 까마귀 길드와 싸울아비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기자단을 막았다.

'호오. 이건 꽤 편리하네.'

덕분에 귀찮은 일에 말려들 염려는 덜었다.

그렇게 조용히 끝나나 싶었는데.

콰아아앙!

"끄아아악!"

굉음과 함께 덩치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우거한테 정통으로 맞기라도 한 건가?

콧대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더럽게 아프겠네.'

진혁이 힐끗 덩치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엔 관절을 꺾고 있는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보였다.

"비켜. 전부. 죽기 싫으면."

불광동핵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플레이어.

유연화였다.

그리고 그 뒤엔 이태민의 모습도 보였다.

"오빠! 괜찮아? 그쪽에서 뭐라고 한 거면 말만 해. 아주 싹 다 엎어 버릴 테니까."

"김기태 씨. 실망입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결계까지 펼치고 뭐 하는 거죠?"

두 사람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처음에 다른 길드랑 시비 붙는 걸 극도로 꺼렸으면서....

막상 상황이 닥치자 앞뒤 재지 않고 나섰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나를 위해서. 내 편에 서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

'유연화에 이태민까지....'

김기태의 얼굴이 한 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히 친분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이 바닥에서 꽤 유명인사인 두 사람이 함부로 인맥을 맺을 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나설 줄이야.

이 정도면 서로 안면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건드린다면....

전면전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냥 대화를 좀 했을 뿐. 너희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 말, 사실인가요?"

"맞아.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더라고."

이번엔 진혁이 대답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일단, 알겠습니다."

그제야 유연화와 이태민이 끌어올렸던 마력을 풀었다.

팽팽했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몸을 돌리려던 김기태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유연화를 바라봤다.

"아, 참. 깜빡할 뻔했군. 유천영 어르신 몸은 괜찮으신 거냐?"

"할아버지야 훨훨 날아다니시니 그쪽이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흐음. 뭐, 알겠다. 내부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김기태가 가던 길을 재촉했다.

반면, 유연화는 분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안달이 난 이는 박하진이었다.

"자. 잠깐만요! 설마, 저놈들을 저대로 보내는 겁니까?"

개망신을 당할 대로 당한 터라 복수할 기회만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김빠진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박하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박살내야 체증이 가실 것 같았다.

"내버려둬라.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김기태가 선을 그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단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고 싶어서...."

"기회? 그래, 기회를 줬지. 네놈 머리통이 목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주제도 모르고 저 괴물에게 덤볐다가 죽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을 말이다."

"...."

"또 다시 내 말에 토를 달면 그땐, 후회하게 될 줄 알아. 명심해. 우리랑 손잡고 싶어 하는 놈들은 쌔고 쌨다는 걸."

"알...겠습니다."

박하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진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덤이었다.

그 순간.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얕은 호흡(D)'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얕은 호흡(패시브)]

입수 난이도: D

내용: 호흡량과 심박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레벨에 따라 한계치가 달라집니다.)

적개심이 최대치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가장 잘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 버림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허나, 그건 저 녀석 사정이고.

'이건 잘 쓰도록 하지.'

진혁이 새로 얻은 패시브 스킬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테스트가 재개되었다.

물론, 응시자는 확 줄었다.

워낙 살벌하게 실내를 휘저어 놨기에, 수험생들의 기가 꺾여 버린 탓이었다.

상당수가 눈치를 보거나 시험을 포기해 버린 탓에 기존의 차례가 뒤죽박죽되어 버렸고.

결국, 선착순으로 테스트를 받고 싶은 사람들만 진행하게 되었다.

[1위 박하나. 측정치: 1755. 등급 A]

[2위 한민희. 측정치: 989. 등급 B]

[3위 오정훈. 측정치: 845. 등급 B-]

[....]

'호오.'

전광판을 확인한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박하나가 1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수치로.

'산삼이라도 먹고 들어간 건가?'

룸에서 시험관과 단둘이 진행되는 테스트의 특성상 그 방법까진 알 수 없었으나.

꽤나 재미난 장난질을 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때마침.

"다음 분 들어오세요."

진혁의 차례가 됐다.

덜컹!

문을 열자 제법 넓은 방이 나타났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마정석.

그 옆에는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각성자 협회 시험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진혁을 본 시험관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마,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 때문일 거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이제 그만 굳어 있고 테스트 설명이나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아, 네. 테스트는 앞에 보이는 마정석을 가격하시기만 하면 돼요. 고유 능력을 사용하셔도 좋고. 아이템을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본질은 마정석에 타격을 가했을 때 나타나는 잠재력의 크기니까요."

한 마디로 '있는 힘껏 마정석을 쥐어 패라.' 이런 거잖아?

'그거야 간단하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진혁이 마정석 앞에 섰다.

그리고 강화한 단검을 꺼냈다.

"단검이군요. 고유 능력은 사용하지 않고 무기로만 하실 건가요?"

"예. 이거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시험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우우웅!

검신을 따라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칼끝이 떨렸다.

피처럼 새빨간 빛을 머금은 채.

바로 그 순간.

카가가각!

번개처럼 가로지른 검이 마정석의 표면을 긁었다.

마정석 표면에 가늘고 긴 흠집이 생겼다.

속도와 힘이 적절하게 배합된 일격이다.

그런데.

[589위 강진혁. 측정치: 91. 등급 F]

스크린에 표시된 측정치는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F...등급 나오셨어요."

시험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치를 읽었다.

반면.

진혁은 같은 결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놀랄 것도 없다.

그 왜.

소설 같은데서 흔히 있는 클리셰 있잖아.

재능 넘치는 주인공이 처음 각성 테스트를 봤지만, F등급이 떠 버리는 진부하디 진부한 클리셰가.

시스템 오류, 마정석 불량 등등 갖다 붙일 수 있는 이유야 트럭에 치일 정도로 많다.

"예전부터 궁금했어."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왜 이상한 결과를 받고도 그냥 수긍하면서 넘어가는지 말이야."

만약 제대로 된 등급을 받았다면.

소설 속 수많은 주인공들은 훨씬 더 빨리, 순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F급이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과 던전, 정보 등을 모두 알 수 있었겠지.

처음부터 꼬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현실에선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저기, 시험관 선생님?"

"저, 절 부르신 겁니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시험관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아직까지 진혁이 박하진을 가지고 놀았던 광경이 두 눈에 생생했다.

고작 테스트에서 숫자 체크나 하던 말단 공무원으로선 공포심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여기 당신 말고 또 다른 시험관이 있나요?"

"예! 옙! 없죠. 안타깝지만, 저 하나뿐이네요. 그럼,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마정석, 이상한 것 같은데, 바꾸는 게 어때요? 하급 말고 최소한 중급 이상짜리로."

"마정석을요? 갑자기 멀쩡한 마정석은 왜...."

답답하네.

"여기 마정석에 금 간 것 보이죠?"

진혁이 마정석 표면을 가리켰다.

희미하지만, 그곳엔 분명 한 줄기 검상이 남아 있었다.

"보...입니다."

"마정석은 어지간한 공격으론 꿈쩍도 안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상처를 입혔는데 F급?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다들 눈은 장식품으로 달고 사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나저나.

"아직도 여기 있네요?"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1분. 아니, 30초만 주십쇼."

시험관이 꽁지가 빠져라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19화 각성 테스트 (4)

잠시 뒤, 새로운 마정석이 준비됐다.

푸른빛을 띤 거대한 중급 마정석이다.

"여, 여기... 하아, 하아. 다 됐어요."

시험관이 숨을 헐떡였다.

정말로 1분도 안 돼서 준비를 끝내다니.

어지간히 무섭긴 했나 보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진혁이 단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우우우웅!

마력이 주입되자 다시 한번 검이 붉게 물들었다.

'힘 조절은 할 필요 없겠지.'

아까는 적당히 손속에 사정을 뒀다.

최하급 마정석 따위론 전력을 다하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스탯 '간극'이 최대치로 활성화됩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짙은 마력.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 바로 이거지.

'강강약강(强强弱强)'.

강자에게도 강하고 약자에게도 강한 사기적인 스탯.

지금부터 한 달간 고생했던 결과가 어느 정도인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시간이다.

파츠츠츠!

여러 줄기의 스파크가 일어나며, 칼날이 마정석의 측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

"이...럴 수가."

시험관의 턱이 덜덜 떨렸다.

시련의 탑이 나타나고 한 달.

그동안 수많은 각성자들이 이곳에 와서 테스트를 치렀다.

대부분은 마정석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마력조차 보유하지 못했다.

F급 아래.

다시 말해 자격 미달 판정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 선택받은 소수는 랭크를 부여받았고.

당당히 탑을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S급을 받았던 랭커들조차도.

마정석을 통째로 베어 버린 이는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쿠쿠쿠쿠!

반으로 잘린 마정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절단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속도와 힘 그리고 마력, 모든 게 완벽했다는 방증이다.

[1위 강진혁. 측정치: 20,895. 등급 S]

새로운 S급의 탄생.

아니, 마력 측정치 10,000 이상을 모두 S급으로 포함했기에, 실제 랭크는 훨씬 높았다.

무려 2배 이상.

...괴물이다.

"어...어어. S급, 추, 축하드립니다. 위, 위에 보고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번호, 번호가 뭐...였더라."

시험관이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한국이 문제가 아니야.'

세계 랭킹을 새로 짜야 할 초대형 신인의 등장이었다.

최소한 부장급.... 아니지. 이 정도 사건이면 협회장에게 바로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만요."

진혁이 시험관의 팔을 붙잡았다.

"예?"

"지금 위에 보고하려는 건가요?"

"네, 그, 그렇습니다."

"그거 한 일주일 정도만 미뤄 주세요."

"미뤄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시험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일주일 뒤엔 협회에 알리든 인터넷에 뿌리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하, 하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정보를 조작하다니.

만약 걸렸다간. 무슨 처벌을 받게 될지 몰랐다.

하위 랭크를 바꿔도 중범죄로 취급되는데, 하물며 이건 S급을 숨기라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일주일이나.

"안 됩니다! 진짜로, 죽어도 안 돼요!"

연신 도리질을 치며 완강히 거부했다.

역시 이런 반응이군.

진혁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S급으로 여러 혜택을 받고 싶지만, 일 하나를 끝내기 전까진 등급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 시험관의 입부터 단속해야겠지.

"제가 살면서 배운 게 몇 개 있습니다."

"배, 배운 거라뇨?"

저벅.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손에 쥔 단검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첫 째는 '사람 일이란 장담할 게 없다'는 겁니다."

'진짜로, 죽어도' 이런 부사가 붙는 가정법에 신빙성은 없다.

없을 수밖에 없다.

세상일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었으니까.

"둘째로 '멀리 있는 법보단, 가까이 있는 주먹이 무섭다'는 겁니다."

'협회장은 빌딩의 최상층에 있고 나는 지금 네 눈앞에 있다.'

그러니 선택을 잘하는 게 좋을 거야. 험한 꼴 당하기 싫다면 말이지.

스윽.

진혁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단검을 가지고 놀았다.

그 협박이 통한 걸까?

시험관의 안색이 눈에 띠게 창백해졌다.

상대는 S급.

감히,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없는 초인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터.

"일주일! 일주일이면 되는 건가요?"

시험관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진혁이 걸음을 멈췄다.

"예. 충분합니다. 그 이후엔, 마음대로 하세요."

오히려 그때가 되면 적극적으로 홍보해 줬으면 좋겠다.

어그로가 확실히 끌리도록.

그래야 생각하고 있는, 이후의 계획들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강진혁 님의 랭크는 정확히 일주일 뒤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시험관이 결정을 내렸다.

"설마, 말을 바꾸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죠?"

"그, 그럴 리가요.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제가 말뿐인 약속을 안 믿어서요."

세상에서 가장 믿어서는 안 되는 게 구두 약속이다.

말로는 무덤까지 간다면서도 술 한 잔에 흘려버리는 게 약속 아닌가?

그런 것보단 글쎄....

조금 더 확실한 증표가 필요했다.

어겼다간 죽을 수 있는 그런 증표가.

진혁의 손가락에 불꽃이 맺혔다.

[Lv1 '염혼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박하나에게도 새겨 놓은 바로 그 표식이었다.

"아픈 거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요."

치이이익!

영혼에 낙인을 새겼다.

시험관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잠시뿐이었다.

이걸로 일주일이란 시간을 벌었다.

"그동안은 처음 나왔던 측정치로 부탁드립니다."

"F등급 말씀이시죠?"

"예."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험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럼, 2차 테스트는 어떻게 진행하면 될까요?"

마력을 측정해 랭크를 분류하는 1차 테스트.

그리고 그곳에서 통과한 선별 인원들은 2차 테스트를 치른다.

내용은 간단하다.

시련의 탑에 있는 던전 중 하나를 클리어하기만 하면 되는 것.

난이도의 제약이 없기에, 대부분 고블린이나 오크들이 있는 던전을 선택했다.

그게 보편적이고 또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1층, 유적을 공략할 겁니다."

진혁은 이미 갈 곳을 정해 뒀다.

처음 시련의 탑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1층에 있는 유적이라면 설마...!"

시험관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1층에 존재하는 유적은 단 한 개.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

[시련의 탑]이 처음 출시됐던 11년 전에도.

그리고 시련의 탑이 현실로 나타난 지금까지도.

아직까지 그 누구도 공략하지 못 했다고 알려진 금역(禁域)이었다.

***

테스트가 끝났다.

받은 등급은 F.

진혁은 손목에 새겨진 희미한 문신을 두 사람에게 보여 줬다.

"형이 F등급이라고요?"

"아니 어떻게... 당연히 우리보다 높을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이태민과 유연화가 동시에 외쳤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다.

특히나 시련의 탑에서 진혁의 실력을 봐 왔던 두 사람으로선 F라는 등급이 믿기지가 않았다.

"임시 등급이야. 일주일 뒤에 재측정을 하기로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

진실에 양념을 쳤다.

여기서 S등급이란 걸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

"그런 거라면야 뭐."

임시 등급이란 말에 두 사람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오빠. 2차 테스트는 어떻게 하실 거야?"

"바로 수배해 봐야지."

"1층에 있는 하급 던전이라면, 우리 쪽에서도 보유한 게 좀 있는데. 어떻게. 알아봐줄까?"

"아니. 지금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해."

이 앞으로는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이태민과 유연화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현 시점에서 1층 유적에 들어가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플레이어는 나를 포함해 전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말이다.

'그러니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야지.'

정석보단 편법.

시련의 탑은 원래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두 사람은 계속 탑을 올라."

이미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그러니 그때까지는.

각자의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

두 사람과 헤어진 진혁은 곧바로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구인... 게시판에서 찾으면 되려나?'

보통 랭크가 높은 건 주로 길드 차원에서 공격대를 모집했고.

D랭크 이하는 개인 플레이어들끼리 숫자를 맞춰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유적 정도면 최소 수백 명에 이르는 인원이 필요했다.

[1층 '타락한 자들의 회랑' 유적 가실 플레이어분들 모집합니다. (000명)]

찾았다.

워낙 난이도가 높아 도전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진혁이 곧바로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우우우....

통화음이 울리기 무섭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커뮤니티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유적 레이드. 저도 참여하고 싶어서요. 아직 인원이 다 찬 건 아니죠?

-아 물론입니다. 자리 있고말고요!

남자가 황급히 대답했다.

어지간히 인원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저곳에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저... 근데, 등급은 어떻게 되시죠?

-F등급입니다.

-아... F. 으음. 그러셨군요.

-혹시 등급이 문제가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등급이 낮아도 운반팀이나 채굴팀으로 가실 수 있으니까요. 단지, 이쪽으로 오시게 되면 유적 안에서 얻는 아이템에 대한 배분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짐꾼과 채굴꾼은 일당제거든요.

위험도가 낮은 대신 보상도 많이 줄 수 없다는 뜻.

상관없다.

어차피 유적에 가는 목적은 보상의 분배 따위가 아니었으니.

-일당으로 주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시련의 탑 입구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짐꾼으로 가실 분들 다 모여 계시는데, 자세한 조건은 그때 말씀드리죠.

-20분 안에 가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됐다.

진혁은 콜택시를 부른 뒤, 곧장 약속 장소로 갔다.

약 20분쯤 달렸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구 쪽...이면 이쯤인데.'

진혁이 인파를 헤치며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덩치가 좋은 걸 보니....

'아까 말했던 짐꾼들이 이 사람들인가?'

진혁이 다가가자 양복 차림의, 안경을 쓴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혹시, 아까 전에 통화하셨던?"

"예.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매칭 매니지먼트의 오승환 대리입니다."

오승환이 진혁을 반갑게 맞아 줬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온다던 그 사람이요?"

"거, 다 모였으면 빨리 시작하지."

"그래. 우린 벌써 1시간째 기다렸다고."

"하하, 알겠습니다. 우선 공격대 가입 승인부터 해 주세요. 예. 맞아요. 거기 그 승인 버튼 눌러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오승환이 짐꾼으로 지원한 사람들에게 30cm크기의 상태창을 하나씩 보여 줬다.

"자. 진혁 씨도요."

마지막으로 진혁한테도 오승환이 상태창을 보여줬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그저 '공격대에 일원으로 참여하시겠습니까?'라는 문장 하나뿐.

여기에 동의하면 그때부턴 정식으로 공격대에 소속된다.

진혁이 승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공격대에 정식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2차 업데이트가 적용됩니다.]

[전세계 103개국의 언어 패치가 적용됩니다.]

[공격대 전용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오. 떴어. 떴다고."

"나도요. 와 이거 신기하네. 공격대 전용 퀘스트라니."

"후후. 드디어!"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1 유적 최초 공략]

난이도: S

내용: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고 유적 최심부에 있는 왕좌를 탈환하십시오.

보상: 성유물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됩니다.(단, 보스 몬스터를 죽이지 못할 경우, 성유물의 선택이 제한됩니다.)

진혁 앞에도 여러 개의 상태창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보스 몬스터.

왕좌의 탈환.

그리고 성유물의 선택까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건... 뭐지?'

진혁의 눈앞엔 남들과는 다른.

['최초로 탑을 정복한 자'를 위한 특전이 도착했습니다.]

또 하나의 상태창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화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 (1)

두근! 두근! 두근!

점멸하는 상태창을 보며,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특전이라 적힌 한 줄의 문장.

그래.

계속해서 궁금했었다.

최초로 탑의 정상을 봤었지만, 정작 그에 따른 보상은 없었다는 사실이.

여태껏 시스템이 침묵했던 이유.

그 모든 게.

'리부트 업데이트와 함께 주려는 생각에서였나.'

진혁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건 됐고. 그래서 일당은 얼마나 주는 거요?"

"난 현금보단 코인으로 줘."

"뭐야. 박 씨. 코인은 받아서 뭐 하려고? 탑이라도 오르게?"

"우리 같은 짐꾼들은 현금 받는 게 남는 거여. 밖에선 쓰지도 못할 코인 썩힐 바엔 빳빳한 현금이 낫지."

다들 일당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건....

오직 나한테만 주어진 보상이 맞다는 뜻이겠지.

"확인하겠어."

진혁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첫 번째 특전이 열립니다.]

[패시브 '독식(獨食)'이 활성화됩니다.]

[독식(獨食)]

내용: 최종 보상을 나누지 않고 혼자서만 취할 경우, 얻을 수 있는 보상 중 가장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행운 스탯이 영구적으로 +10만큼 증가합니다.]

[적응형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냉혹한 심장이 발동됩니다.]

[냉혹한 심장: 긴박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단, 인간적인 마음이 옅어질 수 있습니다.]

'이럴 수가!'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독식을 하면 보상 중 가장 좋은 걸 주겠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튀어 나왔다.

미쳤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그야 그럴 수밖에.

시련의 탑에는 선택형 보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말이 좋아 선택이지 가챠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

심지어 수천 개 중에 단 한 개만 대박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확률을 죄다 무시해 버린다는 말 아닌가?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다 먹어치운다는 조건만 지킨다면!

'하하.'

지금까지 수많은 경험을 쌓아 온 덕에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어금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까?

'행운 스탯... 설마, 이것까지 줄 줄이야.'

간극만큼은 아니지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시련의 탑에선, 행운이란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막말로 개연성조차 씹어 먹으며, 불가능한 상황을 뒤집는 것도 모두 이 행운 스탯에 달려 있었으니까.

'적응형 능력치는 처음 보는 건데....'

무언가에 적응한다는 뜻으로 추측만 가능할 뿐.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능력이었다.

일단 마지막 건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2개의 특전이 사기에 가까웠다.

게다가 첫 번째 특전이라는 말은 최소한 두 번째도 있다는 뜻.

'더 이상 상태창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일단은 여기서 끝이라는 거겠군.'

다시 한번 보상을 꼼꼼히 확인한 진혁이 상태창을 닫았다.

때마침 일당에 관한 이야기도 끝났다.

"하루에 300이면 나쁘진 않구만."

"나쁘지 않긴. 목숨을 걸고 하는 건데. 우리 목숨 값이 300이란 뜻이여."

"젠장.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게다가 여기 오 대리 말 들어 보니, 이번엔 빵빵한 길드에서 참여한다던데?"

짐꾼들의 시선이 오승환에게 향했다.

"예. 이번 레이드는 연합전으로. 10위권 대형 길드와 중견급 길드 둘이 참여하거든요."

대형 길드.

그것도 10위권이면 엄청나게 높은 순위다.

전 세계 길드의 수는 1만 개가 훌쩍 넘었으니까.

"게다가 솔로 랭커들도 다수가 참여하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려?"

"푸하하. 우린 뒤에서 안전하게 숨어 있다가 짐이나 날라 주면 되겠네."

"삼주 정도는 걸릴 테니 경비 빼더라도 두당 5000씩은 떨어지겠군."

오승환의 말에 다들 환호성을 터뜨렸다.

"자자. 대충 끝났으면 여기서 끝내자고."

"박 씨랑 김 씨랑 해서 소주나 한잔 어때? 삼겹살에다가. 응?"

"크으. 소주 좋지. 안 그래도 술 생각났는데."

"저기 내가 아는 가게 있으니까 나만 따라와. 삼겹에 껍데기도 아주 죽이게 하는 데 있어."

어느새 분위기가 술자리로 바뀌었다.

"거기 형씨는 안 올 거요? 내일 힘들게 일하려면 소주 한잔 똑딱! 해야지?"

"전 괜찮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푹 쉬면서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려도 부족한 판국에 술이라니.

다들 몰라도 너무 모른다.

1층 유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겨우 10위권대 길드 따위가 간다고 공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난센스지.'

이미 공격대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치명타.

둘 중 하나이리라.

그리고.

진혁의 목표는 그 정해진 결말 속에서 고인물만이 할 수 있는 틈을 찾는 것이다.

***

콰아아앙!

거대한 책상이 박살나며,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우. 후우!"

분을 삭이지 못한 듯. 남자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이게...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이야!"

검은 까마귀 길드의 마스터.

신건수.

그는 조금 전 들어온 소식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일생에 있어 단 한 번뿐인 기회.

새로 바뀐 세상에서 위로 갈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린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고 있던 놈의 실수로 인해서.

"싸울아비 길드를 끌어들이려고 투자한 코인과 아이템이... 대체 얼마인 줄이나 알아?"

"죄송합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박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 죄송하다고? 죄송한 줄 아는 놈이 그딴 삽질을 해?"

신건수가 골프채를 집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박하진을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퍼어억!

"커억! 끄어어억!"

"니 여동생한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고려인삼 중 가장 정제가 잘된 걸 먹였어."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행운.

유일하게 50%가 넘는 정제율을 보인 고려인삼을 박하나에게 복용시켰다.

"넌 그냥 따라가서 박하나가 A랭크 받을 때 나팔이나 불어 주면 됐고."

폭력에 감정이 실렸다.

퍽! 콰득!

등과 어깨 머리.

손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무자비할 정도의 구타가 이어졌다.

"근데, 그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해? 응? 그게 그렇게 어려웠냐고?"

부우우웅!

콰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골프채가 박하진의 머리를 강타했다.

붉은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끄으으으...."

결국 박하진의 몸이 무너졌다.

그제야 신건수가 타격을 멈추고 골프채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 방해했다는 놈. 누구야? 뭐 하는 놈인지 읊어."

"그, 그게 강진혁이라는 놈...입니다."

강진혁?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랭크는?"

"...."

박하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안 들려? 랭크가 뭐냐니까?"

신건수가 다시 골프채를 붙잡으려고 하자 비로소 기어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F입니다."

"F. F라고?"

순간, 신건수는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하하, 이거 어이가 없네. 그러니까. F판정 받은 초짜한테 처발렸다 이거잖아?"

...대가리야.

이쯤 되면 화를 내고 싶어도 맥이 풀린다.

"됐고. 그 자식 조만간 2차 테스트 치를 거 아니야? 애들 데리고 가서 깔끔하게 처리하고 와. 어차피 던전 안이라면 증거도 안 남는다."

추살령(追殺令).

신건수가 길드 차원에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박하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에는 방심했기에 당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신건수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B급 플레이어로 구성된 집단이 움직일 테니까.

'내가 당했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최대한 길게 가지고 놀다가 죽여 주마.'

박하진의 머릿속은 온통 울고 불며 생명을 구걸하는 진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

다음 날 새벽 4시 30분.

진혁은 약속 장소인 시련의 탑으로 향했다.

"왔구먼. 강 씨 맞지?"

"여기여! 이쪽으로 와."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었지만, 짐꾼들과 채굴꾼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오롯이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줘야 했기에, 그만큼 비전투 계열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오승환 대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 사람은 중개해 주는 매니저였으니까.'

대신 어제 만난 짐꾼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약 10분 정도 흐르자 누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크흠! 식량을 맡고 있는 김경열 반장이요. 편하게 김반장이라고 불러 주면 됩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우리가 할 일은 공격대 300명이 일주일 먹을 식량과 그 외 물자를 나르는 겁니다. 무게로 치면 한 사람당 70~80kg 될 거요. 쉽진 않겠지만, 일정이 빡빡하니까 다들 힘내자고. 이럴 때 아니면 어딜 가서 일당을 300씩이나 받겠어?"

김 반장이 일당을 들먹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더럽게 무겁겠네."

"허리 다 나가겠어. 저걸 종일 날라야 된다는 거 아냐?"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무게는 줄어들 테니 뭐...."

"잡소리 말고. 트럭 앞에 가서 차례대로 물건이나 받아. 점심때까진 도착해야 한다잖아."

여러 목소리가 오갔다.

툴툴댔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했으니까.

곧이어 짐꾼들이 트럭에서 묵직해 보이는 배낭을 배급받았다.

"씨... 씨부레."

"크읍!"

세상의 모든 걸 짊어진 듯 얼굴을 구기는 사람들.

"자, 받아. F급이라고 예외 없으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김 반장이 진혁에게 배낭을 건넸다.

하지만.

'음?'

배낭을 짊어진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볍다.

지나칠 정도로.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미궁에서부터 지금까지 레벨은 똑같았다.

맹그로브의 목단 이후. 근력 스탯을 추가적으로 올린 적이 없으니 당연히 70kg이 넘는 배낭이 가볍게 느껴질 리 없을 터.

설마.

진혁의 머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진혁이 곧바로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 시켰다.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

힘 8 민첩 8 체력 8 마력 11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1274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스킬: Lv2 '불의 원소', Lv2 '진실의 눈', Lv1 '교감', Lv2 '염혼의 낙인', Lv1 '독식', Lv1 '얕은 호흡'

——————————————————

딱 하나.

바뀐 게 있다.

2차 업데이트가 되었다는 말과 함께 주어진 3가지 특전.

그리고 그 중에서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마지막 스탯.

[적응형 능력치 +10]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짐꾼으로 활동하니 거기에 적응해 무게가 가볍게 느껴진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앞뒤가 맞았다.

게다가 전투를 할 때도 혹은, 다른 상황에서도 지금과 같은 효과를 받을 수 있다면....

간극이나 행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탯이다.

그때였다.

잠깐.

잠깐만.

'이거, 탑의 정상을 본 사람한테만 주어지는 스탯이잖아?'

극악의 확률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다른 스탯들은 누군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적응형 능력치는 예외다.

'아예... 입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단 한 명.

나를 제외하고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래도 일생일대의 기연을 얻은 것 같다.

21화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 (2)

유적까지 가는 동안, 진혁은 김 반장과 함께 가게 되었다.

진혁이 처음 짐꾼으로 레이드에 참여한 데다, 하필이면 그 레이드의 난이도가 극악의 생존율을 자랑하는 터라. 김 반장으로선 나름대로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서툴러도 그 의도는 전해졌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무사히 돌아갔으면 하는 따뜻한 마음이.

"강 씨도 이곳에 돈 벌러 왔나?"

"예. 생활하려면 목돈이 많이 들어가서요."

"하긴, 다들 똑같지. 나도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여기 왔어."

김반장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배경화면에 인상 좋은 중년 여성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매가 있었다.

단란해 보이는 가정이다.

단지.

'보통 이런 거 보면 사망 플래그던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런 걸 보여 주는 걸까.

진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시는 거군요."

"그렇지. 만약 내가 죽어도 보상금이 두둑이 나올 테니. 별 여한은 없을 거여."

자신은 죽어도 가족은 살리겠다...라.

전형적인, 바보 같고 우직한 가장의 모습이었다.

답답하긴 하지만.

싫어하진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걱정 마세요. 적어도 여기 계신 분들은 무사히 살아서 집에 갈 수 있을 겁니다."

"뭐? 푸하하하! 그려, 그려. 말이라도 고맙구만. 강 씨가 아주 강단이 넘치는 친구였어."

김 반장은 만족한 듯 폭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얼마나 걸었을까?

식량으로 가득 찬 배낭을 짊어지고 7시간 넘게 이동한 끝에, 짐꾼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드, 드디어...."

"왔다. 여기야."

"죽는 줄 알았네."

쌓일 대로 쌓인 피로.

휴식도 없는 강행군으로 인해 모두의 체력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모두들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들 고생 많았어. 공격대 오기 전까지 좀 쉬고들 있으라고."

김 반장이 얼음 생수와 초코바를 건네며 고생한 짐꾼들을 독려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진혁도 감회에 찬 표정으로 앞을 내다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과 절벽이 펼쳐져 있는 곳.

저 앞에 보이는 게이트가 바로 시련의 탑에서도 손에 꼽히는 난이도를 자랑하는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이다.

저릿! 저릿!

아직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과연....

이런 느낌이었지.

묘한 흥분감과 기대심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옆쪽에 있는 공터에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이건?"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바로 그 순간.

갈대가 좌우로 흔들리며.

콰콰콰콰콰콰!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바로, 공간 이동 마법이 사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어으, 머리야. 이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되네."

"인원 파악은?"

"무사히 다 왔어. 50명 전부."

"아무렴. 누가 사용한 마법인데, 실수가 있을까 봐?"

연기와 함께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배낭이가 곡괭이가 아닌, 무기와 갑주로 무장한.

이번 레이드의 핵심인 '발해' 길드의 메인 공격대였다.

"저 남자가 공대장이야?"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들 말아. 각성 테스트에서도 AA등급 받았고, 이전에 시련의 탑도 9층까지 올라가 본 고인물이여."

모두의 시선이 공격대 가장 앞에 있는 남자에게 쏠렸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방패.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눈에 띄었다.

최전방에서 모든 어그로를 담당하는 공격대의 핵심이자 기둥, 탱커다.

'이 남자가 발해 길드의 공대장....'

진혁이 재빨리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

이름: 송천화

성별: 남

나이: 29세

레벨: 14

힘 30 민첩 18 체력 19 마력 5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3,85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아이템 경량화(輕量化)

스킬: Lv3 '아이언 실드', Lv2 '밀집 대형', Lv2 '끈질긴 생명력', Lv1 '투석'

——————————————————

고유 능력이나 스킬들이 나쁘진 않지만....

[복사 조건: 레이드 기간 안에, 송천화의 신의를 얻으십시오.]

복사 조건을 확인한 진혁은 곧 송천화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차라리 적대심을 얻는 게 쉽지.

신의라는 건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특히, 하나뿐인 성유물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건 그렇고....

송천화를 보던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0위권 길드의 공대장이 겨우 이 정도 수준이었나?'

레벨에 비해 스탯과 스킬 레벨이 너무 낮다.

사선을 넘나드는 실전보다는 단순히 경험치만 올리는 데 급급했다는 뜻.

게다가 시련의 탑을 올랐던 것도 9층이 끝 아닌가?

'나머지 공대원들의 수준은 송천화보다 훨씬 낮고.'

물론, 이 상황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현재 정상급 길드들은 모두 시련의 탑 3층에 있는 보스 공략에 매진하고 있는 상태.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래층에 투자할 인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 모든 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전력이 빈약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

"자자, 다들 그만 쳐다보고. 공격대분들도 왔으니 일어들 나자고. 우리도 할 일 해야지."

김 반장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마정석을 채굴하고 몬스터의 사체로부터 부산물을 캐는 채굴팀이야 나중에 들어가지만,

필요한 보급품을 운반하는 짐꾼들은 훨씬 더 이른 타이밍에 진입했다.

전투가 막 끝난 바로 직후에 말이다.

'오히려 잘됐어.'

진혁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드 단위의 집단 레이드는 어떻게 하는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

공격대가 들어간 지 1시간 정도가 흐르자, 짐꾼들의 차례가 왔다.

[이름: 타락한 자들의 회랑]

종류: 유적

난이도: 측정불가

내용: 태초의 선혈이 봉인되어 있는 곳. 이 유적의 끝에는 가장 순수한 무기와 가장 지독한 죽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르륵!

선두에 있던 마법계열 플레이어가 큼직한 불꽃을 소환했다.

시야가 밝아지며 유적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들 제 뒤 잘 따라오세요. 한 눈 팔다가 다른 쪽으로 새 버리면 구해 줄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나...."

"...엄청나구먼."

"이게 바로 그 유적인가."

고대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하는 외관.

돌과 이끼로 뒤덮인 외벽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저벅.

길을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왔다. 이쪽입니다!"

"천화 형! 여기 짐꾼들 도착했어."

이미 한차례 격렬한 전투가 있었는지 앞쪽은 온통 몬스터들의 사체로 가득했다.

구울 그리고 스켈레톤를 비롯한 언데드 계열.

수는 어림잡아도 100마리가 넘었다.

반면 플레이어들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데....'

아무리 고위급 언데드 몬스터가 없다곤 하나, 이 많은 놈들을 상대하면서 피해가 없다고?

유적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발해 길드의 전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뭐 혀?"

김 반장이 진혁의 어깨를 붙잡은 건 바로 그때였다.

"예?"

"멀뚱히 서서 뭐 하냐고. 빨리 물이랑 얼음이랑 해서 나눠드려."

뭘 당연할 걸 묻느냐는 표정.

김 반장은 진혁 옆에 있던 서너 명을 불러 모았다.

"이쪽은 우리가 할 테니까, 저기. 외국인들 있는 데 보이지?"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엔 이국적인 외모의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메인인 발해 길드 외에도 중견급이 붙었다고 하더니.

그 중에 하나인가.

눈동자를 굴리던 진혁이 멈칫했다.

'어딘가 했더니....'

과거 시련의 탑에서 봤던 문양이다.

'시온' 길드.

유럽에 거점을 둔 길드로 인원은 소수지만, 꽤 탄탄하다고 들었다.

"넷이서 저기 있는 분들한테 갔다 와."

"알겠습니다."

진혁이 큰 통에 물과 얼음을 담은 뒤, 시온 길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

순서대로 물과 얼음을 건넸다.

짧은 감사 인사가 있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차례에 도착했다.

2m에 이르는 덩치들과 다르게 마지막 사람은 매우 왜소한 체형이었다.

160cm를 갓 넘는 정도랄까?

남자인 것 같지는 않고....

여자인 건가?

철제 투구와 갑주로 전신을 감싼 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여기, 물 드세요."

"아...!"

짧은 탄성과 함께.

철컹!

투구가 벗겨졌다.

머리 위로 말려 있던 금발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헉!?"

"세상에나..."

짐꾼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람이 맞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금발이 그녀가 입고 있는 갑주와 어울려 숨 막힐 듯한 광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모두가 이토록 놀란 건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연의 실력과 쌓아 온 업적.

그리고 가문의 핏줄까지.

세 개의 기둥이 그녀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스테르담의 성녀....'

테레사 드 로렌시아.

모를 수가 없지.

현재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 중 하나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실제 귀족 칭호를 갖고 있는 로렌시아 가문의 막내딸이면서,

동시에 아웃 브레이크 때문에 쑥대밭이 될 뻔한 암스테르담을 구원한 영웅.

그것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왜 발해 길드에서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이 여자라면 언데드를 상대로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신성력을 다루며, 공격과 방어는 물론 보조 힐링 스킬까지 겸비한 만능형 플레이어.

시련의 탑 2층을 돌파한 것도 모두 테레사 덕분이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3층 보스 공략 대신 여기를 선택했다고?'

아무리 유적에서 나오는 성유물이 귀하다고 해도.... 신성계열 성유물이 아닌 이상 다음 층으로 가는 것이 메리트가 훨씬 클 텐데?

무엇보다 시온 길드에서 저런 랭커를 섭외할 능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수로 끌어들인 걸까.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이내 머리를 저었다.

지금 우선순위는 시온 길드의 자금력을 예상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테레사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을 복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게 중요한 거다.

'이건 다시없을 기회야.'

곧바로 '진실의 눈'이 발동됐다.

하지만.

[레벨 차이로 인해 스킬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붉은색 상태창이 진혁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젠장. 레벨 차이라니.'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걸로 아는데, 벌써 20레벨을 넘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행운 스탯과 적응형 스탯이 레벨 차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어봅니다.]

파츠츠....

붉은 상태창이 무너지며, 테레사의 개인정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있었지.'

행운 스탯과 적응형 스탯을 얻자마자 도움이 됐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때에.

——————————————————

이름: 테레사 드 로렌시아

성별: 여

나이: 22세

레벨: 29

힘 42 민첩 31 체력 25 마력 30

보유한 스탯 포인트: 8

보유한 코인: 10,850

직업: 없음(현재 직업 퀘스트가 진행 중입니다.)

고유 능력: 별의 가호

스킬: Lv5 '신성 강화(神性强化)', Lv5 '은밀 기동', Lv4 '축복받은 손길', Lv4 '성호(聖號)', Lv4 '허상 결계'

——————————————————

[복사 조건: 테레사는 세계 100위권에 해당하는 랭커입니다. 그런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면, 원하는 고유 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수치다.

'과연,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할 만하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완전히 고급 호텔 뷔페다.

게다가 상태창을 열람한 덕분에 상대가 이곳에 온 동기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직업 퀘스트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 거였군.'

그래서 보스 공략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던 거였나.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

어쩌면 이 카드를 꽤나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Lv1 '교감'이 발동됩니다.]

[대상이 당신에게 미미한 호감을 느낍니다.]

따스한 기운이 일렁였다.

테레사가 진혁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마치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청록색 눈동자다.

"고마워요.... 물 잘 마실게요."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별의 가호'.

성기사 직업을 선택하는 이에게 있어 가장 좋다고 평가받는 고유 능력.

이걸 얻을 기회를 줬으니까.

문제는....

이 여자가 위험에 빠질 만한 상황을 연출하고.

또 거기서 목숨을 구해 줘야 한다는 건데.

'확실히 조건이 쉽지는 않군.'

진혁이 아랫입술을 혀로 적셨다.

고민할 때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처, 천화 형! 이쪽으로 좀 와 봐요! 지금 당장!"

이어지는 다급한 비명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22화 내부의 적

"이럴 수가."

송천화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고함이 난 곳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 뒤였다.

"...늦었어요."

바닥에 쓰러진 네 사람을 살피던 힐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두부에 나 있는 깔끔한 상흔.

후방에서 기습을 당해 즉사한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네 사람의 죽음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바로 그들이 지키던 것이었다.

우우우웅!

유적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떠 있는 검은색 구체.

누군가....

...가디언을 깨웠다.

['유적의 가디언'이 침입자들을 바라봅니다.]

[남은 시간: 09 : 59]

유적의 입구를 지키는 존재 '가디언'.

이들은 상위 던전의 보스급에 해당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으나, 자극을 받아야만 깨어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슬리핑 밤(Sleeping Bomb)'.z

가만히만 내버려 두면 위험할 일 없는 폭탄이란 뜻이다.

"대체 어떤 병신이 이걸 건든 거야!"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미 깨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래. 이미 늦었다.

남은 시간은 단 10분.

그 안에 유적에서 나가지 않으면....

가디언이 완전히 깨어나게 된다.

"혀, 형!"

"알아. 나도 안다고!"

송천화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가디언과 싸울 수는 없다.

그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절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죽을지도 몰라.'

사실상 레이드는 포기해야 하는 셈이다.

전력의 반을 잃고 보스한테까지 가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제대로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끝낸다고?'

그것도 가디언을 깨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경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아예 길드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내가 공대장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꾸욱.

어금니가 입술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절대로.

송천화가 결심한 듯 명령을 내렸다.

"가디언이 깨어나도록 내버려 둬. 우린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속행한다는 결정에,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렸다.

"형. 진심이야?"

"잘 생각해야 해. 아니, 진짜로. 자칫 잘못하다간 다 죽을 수도 있다고."

짐꾼 한 팀이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3개 팀은 밖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후발대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는 길드 하나도 아직 유적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

계속하겠다는 건 전체 전력의 20% 이상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잔말 말고 따라. 책임을 져도 내가 질 테니까."

송천화가 반론을 단칼에 일축했다.

"그리고... 후발대가 없어도 테레사만 있다면, 승산은 충분히 있어."

그래.

믿는 구석이 바로 이거다.

송천화의 시선이 힐끗 옆으로 향했다.

금발의 성녀.

언데드 계열 몬스터들을 상대로 하는 한, 테레사는 세계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여자와 함께라면....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

짐꾼들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진 건 그로부터 몇십 분이 흐른 뒤였다.

"이, 이거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가디언이 깨어났는데 유적 밖으로 못 나간다니요?"

"뭔 소리여 이게! 그럼, 우리 보고 공격대랑 같이 다니라는 소리여?"

"빌어먹을. 이렇게 위험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다고!"

짐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다.

"누군가 가디언을 지키던 이들을 암살했고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가디언이 깨어난 뒤였습니다."

암살이라....

잠자코 있던 진혁이 귀를 쫑긋 세웠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건데....'

지금 세상에선 살인이 그리 큰 사건도 아니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동기이다.

무언가 이득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고.

유적 안에 사람들을 가둬서 못 나가게 하다니.

재밌네.

대충 녀석이 노리는 게 뭔지 예상이 간다.

그리고 그 정체까지도.

어쩌면 가디언이 깨어난 덕분에 상황을 더 유연하게 주무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진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 발 늦게.

"측면에서 몬스터입니다! 중형급... 많아요!"

척후 조에 있던 플레이어가 고함을 질렀다.

"저, 전투 준비해!"

송천화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직 정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의 기습이었기에 대응이 느렸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풀숲이 좌우로 흔들렸다.

온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탱커들 앞으로!"

"짐꾼들은 빨리 뒤로 빠져! 방해하지 말고 빠지라고!"

콰아아앙!

나무가 쓰러졌다.

풀숲이 갈라지며 모습을 드러낸 건....

"크오오오오!"

"크아아아!"

2.5m가 넘는 듀라한들이었다.

전부 해서 열둘.

하나같이 철퇴와 도끼 따위로 무장한 상태였다.

"으으으."

"듀, 듀라한이라니!"

유적 초입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총 13종류.

듀라한은 그 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전신에 솜털이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구울이나 스켈레톤 따위와는 근본부터 다른 상위 포식자.

질긴 피부는 물론, 속도와 완력까지 겸비했기에, 듀라한은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다.

"탱커들한테 보조 계열은 버프 몰아주고, 딜러들은 마력 최대한 모으면서 타이밍 재!"

송천화가 공격대를 통솔했다.

[송천화가 Lv3 '아이언 쉴드'를 발동합니다!]

[고윤덕이 Lv2 '쐐기 대형'을 발동합니다!]

[이윤미가 Lv2 '전사의 노래'를 발동합니다!]

우우우웅!

각종 스킬과 버프가 중첩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아아아!"

콰아아앙!

듀라한의 철퇴가 방패 위로 낙하했다.

***

진혁은 조금 떨어진 후방에서 전투를 직관했다.

'확실히, 길드 단위로 구성된 방진이 탄탄하긴 하네.'

호흡을 많이 맞춰 본 게 티가 났다.

듀라한을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솔로 플레이어들이다.

주로 혼자 다녔기에, 이런 식의 집단전은 익숙하지 않았고.

결국,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콰득!

뼈가 박살나고 살이 으깨지는 섬뜩한 파육음.

"끄아아아악!"

어깨가 아작 난 남자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놈들 말도 안 되게 빨라!"

"히, 힐러! 힐러 어디 없어?"

"우리 쪽에도 탱커를 좀 보내 줘요. 도저히 버틸 수가.... 이대로라면 다 죽는다고요!"

그야말로 아비규환.

급조된 조직력으론 듀라한을 상대할 수 없었다.

적어도 솔로 플레이어들의 현실은 그랬다.

하지만 간곡한 도움 요청에도 불구하고, 송천화는 도움을 구하는 이들을 외면했다.

희생자는 나온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편이 좋았다.

송천화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려면 떨거지들의 희생은 필수지.'

사실, 이번 레이드에는 유적 클리어 외에도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바로 고정 구독자의 확보.

구독자 한 사람당 하루에 1회만 조회수가 카운팅된다는 규칙 때문에, 현재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구독자 쟁탈전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다.

어지간한 영상으론 10,000 조회수 올리는 것도 만만찮다는 뜻이다.

'결국에 구독자들을 열광시키려면 말초적인 자극을 줘야지.'

잔혹성과 선정성.

거기에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 최고의 영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적당히 희생자가 나왔으니 슬슬 움직여 볼까.'

송천화가 옆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동영아!"

"예, 형!"

캐스팅을 하고 있던 남자가 즉각 마법을 발동했다.

파츠츠츠!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손바닥에 만들어진 새하얀 구체.

빙계 마법 '아이스 오브'였다.

극한까지 응축된 얼음덩어리에서 마력이 뿜어졌다.

바로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

듀라한들 사이로 한 줄기 폭풍이 몰아쳤다.

"크아아아!"

"크으으...."

듀라한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무기를 든 팔에 성에가 달라붙었고.

빠르게 움직이던 다리도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지금이다! 다들 산개해!"

쿠웅! 쿠웅! 쿠웅!

송천화를 비롯한 탱커들이 일제히 좌우로 간격을 넓혔다.

훤히 드러난 중앙.

탓!

타악!

대기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지면을 박찼다.

검과 창을 쓰는, 발해 길드 제1 공격대의 메인 딜러들이었다.

서걱! 콰득!

날붙이가 급소를 노렸다.

난전에 특화된 딜러에게, 느려진 듀라한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쿠웅! 쿠우웅!

듀라한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영상 잘 나왔어요, 형. 이거 최소 조회수 300만은 나올 것 같아요.

발해 길드의 영상 편집 능력자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300만...!'

송천화의 입 꼬리가 승천했다.

이 연출을 위해 피 나게 준비한 보람이 느껴졌다.

하긴, 보는 입장에서 침이 질질 흐를 거다.

뽕맛을 제대로 넣었으니까.

'솔로로 온 놈들은 거의 다 전멸했겠군.'

8마리는 길드들에서 막아 줬지만, 나머지 4마리는 탱커를 지나쳐 뒤쪽으로 갔다.

결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뻔하다.

맞서 싸운 놈들은 이미 시체로 변했을 테고.

그나마 발 빠른 놈들만 살아남았겠지.

***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25살, 정보계열 능력자인 김소미는 다가오는 도끼를 보며 삶을 포기했다.

이젠 더는 도망갈 힘도.

손끝 하나 움직여 방어할 마력도 없었다.

'그냥... 내 수준에 맞게 살걸.'

일확천금을 노리고 들어온 많고 많은 이들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원하는 결말은 이게 아니었지만.

두 눈을 꼭 감고 최후를 기다렸다.

최대한 빨리 끝나길 바라면서.

그런데.

"...?"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분명,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힐끔 눈을 뜨자.

"헉!?"

그곳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그그그극!

도끼가 멈춰 있었다.

듀라한의 양팔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해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를 넘어서진 못했다.

'...견디고 있어?'

아니, 너무나 가볍게 막고 있다.

고작 단검 한 자루로.

무장 상태를 보면 근접 딜러가 틀림없는데....

어째서 방패를 든 탱커보다 더욱 거대해 보이는 걸까?

그저 놀라웠다.

놀랍고 경이로웠다.

그러나 이어지는 광경에 놀라운 감정은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다.

화르륵!

남자의 왼손에 화염에 일어났다.

작은 불꽃 따위가 아닌, 눈이 따가울 정도의 겁화다.

"마... 마, 마법까지 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소수만 존재하는 만능형 플레이어.

그런 그들도 능력 간에 편차는 있다.

어디 하나는 약점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허나, 이처럼 모든 능력치가 강한 경우는 들어본 적 없었다.

레벨이 얼마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콰콰콰콰콰콰!

화염이 듀라한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썩은 고기를 굽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아아아아!"

쿠우웅!

숯덩이로 변한 듀라한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으로 네 마리.

진혁이 쓰러진 듀라한을 잠시 바라봤다.

1레벨을 유지해야 했기에, 숨통을 완전히 끊진 않았지만.

사실상 거의 시체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마무리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진혁이 손에 묻은 숯가루를 털어 냈다.

그리고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뭐랄까.

아직 몸도 풀지 못 했는데, 경기가 끝나 버린 기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듀라한의 수준이 예상보다 너무 낮았다.

까다로운 공격보다 그저 본능에 따르는 단순한 패턴.

조금 빠르고 완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실제로 네 마리를 처리하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어째 예전에 했을 때보다 훨씬 쉬운 것 같은데?'

그때는 듀라한 4마리를 잡는 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걸 7분이나 단축했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황당할 수밖에.

이거, 아무래도 11년간 고여도 너무 고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당신, 대체 어떻게...."

뒤쪽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23화 암스테르담의 성녀

목소리의 주인은 백색 갑주를 입은 성녀.

테레사였다.

숨을 헐떡이는 걸 보니, 앞쪽에 있는 듀라한들을 정리하고 뒤쪽을 돕기 위해 온 모양이다.

진혁이 살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테레사를 바라봤다.

'길드에 소속된 놈들은 자기들끼리만 살겠다고 난리던데....'

의외네.

성녀라는 이명을 거저 얻은 건 아닌 듯싶다.

"이분과 잠시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테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소미에게 물었다.

"예? 예, 예! 물론이죠."

김소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쪼르르 바위 뒤로 사라졌다.

단 둘이 남자,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듀라한을 전부 처리한 건가요?"

경계심이 묻어나는 말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짐꾼으로 참여한 플레이어의 평균 랭크는 E~F.

당연히 전투와는 동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B급 전투계열도 상대하기 힘든 듀라한을 단신으로 쓰러뜨렸다고?

우연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단, 듀라한을 처리한 건 제가 맞습니다."

"정체를 숨긴 건가요? 왜죠?"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저도 그렇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끊어졌던 문장이 완성되었다.

"당신도 그렇고."

"...그게 무슨."

테레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떨림이었다.

'그래.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생긋 웃은 진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당신 정도 되는 랭커가 왜 보스 공략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는지. 제 상식선에선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막대한 보상과 명예가 보장된 탑 상층 공략.

테레사는 그 황금 같은 기회를 저버린 채 유적을 선택했다.

이유?

하나밖에 더 있겠나?

당연히 3층에 있는 보스몬스터를 공략했을 때 얻는 것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더욱 크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진혁은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을 선택한 건 직업 퀘스트를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

이번에는 테레사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뺨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당혹감으로 얼룩졌다.

'유적이 성기사의 전직 퀘스트를 위한 장소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정상적인 루트라면 성기사의 전직 퀘스트는 6층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남들보다 앞서나가고 싶었기에.

테레사는 시련의 탑을 10층 이상 올라간 이들로만 운영되는 '암시장'에서 정보를 구입했다.

순간, 테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설마....'

이 남자도 암시장에 소속된 회원 중 하나란 건가?

확인해 봐야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의 편린만으로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지를.

"맞아요.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이유는, 사도 요한의 서약서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테레사가 목적과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진혁의 눈앞엔 조금 다른 내용의 상태창이 떠 있었지만.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테레사의 발언은 '거짓'입니다.]

귀엽네.

'나를 떠보려는 생각인 건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요한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서약서겠죠.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일 테고요."

서약서가 있는 곳쯤이야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찾아 뒀을 터.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건 서약서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기 때문이리라.

수천 종류의 함정들은 특정한 규칙이 있기보단 혼돈에 가까웠다.

게다가 천여 마리가 넘는 언데드 군단이 있는 건 덤이었고.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였군요."

마침내 테레사가 인정했다.

좋아.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

"사실, 저도 그 서약서가 있는 곳에 볼 일이 있습니다. 아, 물론 저는 서약서가 아닌 다른 걸 노리고 있지만요."

"같이 가달라는 건가요?"

"같이 가주겠다는 겁니다."

진혁이 선을 그었다.

"저는 함정의 위치도, 그 공략법도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뭐, 그쪽이 기존의 계획대로 시온에서 온 플레이어들과 가도 상관없지만, 글쎄요. 아무리 운이 좋아 봤자 당신 빼곤 다 죽을 걸요?"

근데, 그럴 수는 없잖아?

명색이 성녀라는 고귀한 영웅이.

동료를 전부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고 하면 이름에 먹칠을 하는 셈이니까.

설령 전직에 성공했다고 한들, 대중의 반응은 냉랭할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얼마든지요."

하루 종일 고민해 봐라.

어차피 결론은 하나일 테니.

'서약서 하나 던져 주고 나머지는 내가 몽땅 챙겨 주지.'

성기사 전직용인 베드로의 서약서야 관심 밖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또 다른 아이템들은 꽤나 탐났다.

'얼어붙은 눈물'과 '마혼단'

그래. 이 두개를 얻는 게 베스트다.

오히려 성유물보다 이쪽이 더 탐이 날 정도였으니까.

특히 '얼어붙은 눈물'은 마력의 정수라 불리는 결정체로, 흡수할 경우 마력의 절대치를 대폭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마력 상승은 내게 있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중 하나다.'

지금이야 자주 사용하는 스킬들의 마력 소모량이 크진 않지만.

스킬 레벨이 오르고 또 상위 스킬들을 융합할수록 마력의 총량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원래 냉기의 저주를 풀 방법이 없어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테레사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작전 변경이다.

신성계열을 다룰 줄 아는 테레사라면, 얼어붙은 눈물의 냉기를 완화시키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정하기에 앞서 딱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고민하던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말해 보세요."

"아까 전, 보초들을 죽이고 가디언을 깨운 사람이... 당신인가요?"

호오.

이게 이렇게 이어지나.

'하긴, 테레사 입장에선 현재 공격대 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일 수밖에 없겠지.'

숨기는 것도 많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뭐,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순 있었지만.

그건 취향이 아니다.

무엇보다 귀찮기도 했고.

진혁은 그것보다는 좀 더 간편하고 직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정황상 의심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말만으로 믿으라는 건가요?"

"예.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요."

"증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만약, 제가 보초들을 죽이고 가디언을 깨운 범인이라면...."

잘 생각해 봐라.

"이런 귀찮은 대화 따윈 하지 않고 당신을 죽였겠죠."

세상엔 그럴듯한 변명보다 훨씬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는 걸.

***

테레사의 단독 행동은 역시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공대장인 송천화가 기겁을 하며 반대했던 탓이다.

"절대 안 됩니다! 이제 전력을 수습하고 앞으로 가야 하는데, 단독 행동이라뇨!"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공격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테레사만큼은 안 된다.

하지만 테레사도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유적 20km 지점까지 지도가 있잖아요. 다들 공략법도 숙지하고 있고. 제가 없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요."

과거 시련의 탑이 게임이었을 때부터 현실이 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도 끝에 플레이어들은 유적에 관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입구에서부터 20km 지점까지는 큰 위험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무엇보다 저희 계약, 보스와의 전투 전까진 각 길드의 공대장끼리 서로 동일한 권한을 유지하는 것 아니었나요?"

"그, 그거야...."

조목조목 따지자, 송천화가 말을 더듬었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긴 한숨을 쉰 송천화가 테레사의 단독 행동을 허락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 가기 전까진 복귀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전까지는 다시 합류하도록 할게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짐꾼으로 도와줄 사람을 한 명만 데리고 가도 될까요?"

"그 정도야 뭐, 마음대로 하십쇼."

설전으로 인해 기력이 빠졌는지 송천화가 대충 손을 휘저었다.

사소한 거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기력한 얼굴로.

테레사의 시선을 받은 짐꾼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랭커와의 동행.

이건 행운이나 기연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1등석 티켓이지.

-보나마나 더럽게 위험한 곳에 끌고 가려는 걸 텐데, 젠장. 우리 같은 놈들은 절대 못 돌아와.

-제발, 제발 나는 안 돼.

-눈 마주치지 말자. 눈 마주치면 아주 좆되는 거여.

-집구석에 먹여 살려야 할 마누라랑 처자식이 있다고.

다들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자신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바로 그때.

테레사의 손끝이 짐꾼들 사이를 가리켰다.

***

지목을 당한 건 진혁이었다.

그리고 진혁은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50줄 가까이 산 경험자로서 말해 주자면, 사랑? 좋지. 근데 목숨보다 중한 건 아니여."

"그래. 김 반장 말 들어."

"아무리 성녀가 예뻐도 그렇지. 후우. 젊음이 문제야, 젊음이. 사람 정신을 홱 돌게 만들거든."

짐꾼들이 진혁을 뜯어말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애 같은 거 할 시간에 탑을 한 층을 더 오르고 말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닙...."

반박을 하던 진혁이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잠깐, 잠깐만.

어중간하게 둘러댔다간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못 가게 할 분위기였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사실, 저와 테레사 양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입니다."

장르를 설정한다.

보자.

멜로에 유년기적 추억 팔이 좀 섞어 주고.

"유적에는 유럽에 있는 테레사의 가족들을 치료할 아이템이 있습니다. 처음엔 혼자서 가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눈물까지 첨가한다.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안타깝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감정이 너무 메말랐나.

"설령 제 실력이 부족하고, 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저는 끝까지 그녀를 지킬 겁니다."

사랑, 비극, 영웅담.

이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폭풍의 언덕' 등 세기에 걸쳐 흥행 코드로 인정받아 온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짐꾼들이 멍하니 진혁을 바라봤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강진혁이 자네...."

"상남자구만. 젠장. 완전히 고구려 시대 상남자여."

"그래. 가라고. 남자가 소꿉친구 하나 못 지켜서야 되겠나."

"젊음이 좋은 거야. 젊음이."

다들 진혁의 등을 한 대씩 쳤다.

***

간단하게 짐을 챙긴 진혁과 테레사는 곧장 얽히고설킨 길을 따라 유적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게 5시간 정도 흘렀을까?

공격대로부터 떨어진 두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방비가 잘 되어 있군.'

진혁이 천천히 몬스터들의 진형을 살폈다.

구덩이 안에 있는 건 구울과 스켈레톤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군데군데 고위급 언데드들도 섞여 있었다.

듀라한... 게다가 마법을 다루는 리치까지.

느껴지는 마력이 강하지 않은 걸 봐선, 서클이 높진 않을 테지만.

리치는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특히 디버프나 저주 계열에 적중한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인물이라도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높았다.

테레사가 손가락으로 진혁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저기! 서약서는 저 한가운데 있어요."

"저도 확인했습니다."

원의 중심.

저곳에 '베드로의 서약서'를 비롯해 '얼어붙은 눈물'과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까지 놓여 있을 거다.

몬스터를 죽이면 레벨업을 하게 될 테니....

그건 테레사에게 맡겨야겠군.

"준비하세요."

진혁이 움직일 채비를 했다.

품안에 넣어 뒀던 단검이 붉은빛을 쏟아냈다.

"알겠어요."

테레사도 검과 방패를 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띠링!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24화 얼어붙은 눈물

['타락한 회랑의 주인'이 당신들을 바라봅니다.]

이건!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다.

보스 몬스터의 간접 메시지다.

"봐, 봤어요, 이거? 지금 상태창에...."

테레사도 깜짝 놀라 외쳤다.

"예.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당장 공격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능형 보스 몬스터의 간접 메시지는 그저 심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일 뿐.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이 플레이어한테 관심을 보인 적은 없을 텐데…?'

회랑의 주인은 언제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입자가 들어올 경우엔 당연히 처리했지만, 그 외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끊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이런 식으로 관심을 표하다니.

...흥미롭다.

그 이유와 의도가.

"보스 몬스터 같은데, 바라봤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좋게 말하면 재미있는 적으로 보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절대 살려서 내보내지 않겠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될 겁니다."

"우리들을 인정했다는 건가요?"

"저를 인정했다는 뜻이죠. 당신 말고요."

어디서 은근슬쩍 한 묶음으로 넘기려 하냐.

딱 봐도 나 때문에 간접 메시지 띄운 건데.

"...."

테레사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진혁을 쳐다봤다.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랭커와 짐꾼으로 참여한 플레이어.

100명에게 묻는다면 100명 전부 테레사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데도.

대체 이 남자의 자신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쯤 되면 여러 의미에서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테레사는 체념한 듯 이내 살포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저한테 말했을 때, 함정을 전부 알고 있다고 하셨죠?"

"네. 좀 오래 되긴 했는데, 몸이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1층에 온 건 간만이긴 하지.

특히나 유적을 마지막으로 들어간 건 6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도 문제될 건 없다.

폼은 떨어져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언데드 몬스터들 시선만 끌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역할을 분담하면 레벨업도 하지 않고 원하는 아이템도 모두 얻을 수 있다.

진혁이 단검을 역수로 쥔 채 구덩이 아래로 내려갈 자세를 잡았다.

"준비됐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테레사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우우우우웅!

[테레사가 Lv5 '전투의 노래'를 발동합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따스한 기운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10분간 모든 스탯이 +3만큼 상승합니다!]

광역 버프형 스킬.

그것도 모든 스탯에 관여하는 효과를 지닌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호오. 이건 꽤 쓸 만하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망 시 부활할 수 있는 테레사의 고유 능력 '별의 가호'만 아니었다면 이 스킬을 복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쿠웅!

그사이 테레사가 언데드 몬스터들 한복판에 도약했다.

"크르르...."

"키에에에!"

구울과 스켈레톤들이 즉각 반응했다.

시독(屍毒)을 내뿜고 조악한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카카카칵!

저런 무기로는 테레사의 갑주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다.

그야 그럴 수밖에.

100인의 플레이어.

그중에서도 테레사는 가장 공수가 안정적이라 평가받는 랭커다.

게다가 레플리카 버전이긴 하나, '잔 다르크의 갑주'까지 갖추고 있는 상태.

양산형 몬스터는 아무리 많아 봤자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켁!"

"케에엑!"

방패가 자로 잰 듯 움직였다.

쾅! 콰아앙!

구울들의 머리가 일격에 으깨졌다.

저 정도면 거의 공성용 해머에 육박하는 위력이다.

서걱!

검이 호선을 그릴 때마다 스켈레톤의 몸이 반으로 토막 났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

겹겹이 둘러싸인 벽이 허물어진다.

길이 열린다.

...지금이다!

탓!

진혁이 지면을 박찼다.

가볍게.

동시에 빠르게.

스피드를 유지한 채 최소한의 동작으로 몬스터 사이를 가로질렀다.

대부분의 어그로는 테레사가 끌린 상태였으나, 워낙 수가 많았기에 진혁을 노리는 놈이 나왔다.

구울이 손톱을 세운 채 진혁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에!"

일일이 상대했다간 끝이 없다.

푹!

관절을 노리는 것으로 무게 중심을 어긋나게 한다.

"켁?"

구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들으니 그럴 수밖에.

진혁은 동일한 방법으로 구울과 스켈레톤들을 처리하며,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안개가 조금 더 짙어진 순간.

파츠츠츠.

검은색 스파크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

위험하다.

진혁이 본능적으로 방향을 꺾었다.

퍼어어엉!

1초 전까지만 해도 발을 딛고 있던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과연.

간담이 서늘해 지는 파괴력이다.

'이 정도도 안 되면 유적이 아니지.'

진혁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왼쪽.

정확히는 왼쪽에 있는 바위 사이.

그곳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리치가 보였다.

살점 하나 없는 백골의 마법사.

허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안광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이곳은 인간 따위가 올 곳이 아니다."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여간 멘트 하고는.

그럼, 시체들이 밤 마실 나오기엔 적절한 곳이라는 소리냐?

진혁은 온갖 가정으로 얼룩진 리치의 협박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호위로 붙어 있는 듀라한이 다섯이라....'

가능하면 정면 싸움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다.

전부 처리하는 수밖에.

구울이나 스켈레톤들처럼 무시하고 넘겼다간 뒤를 잡힐 위험이 있었다.

"돌아가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오면 아예 잿더미로 만들어 줄 터이니."

리치가 손바닥 위에 검은색 번개를 만들었다.

최소 5서클은 넘어 보이는 마법이다.

슬쩍.

진혁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어이쿠. 실수."

"기어이...."

리치가 듀라한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오오오!"

"크아아아!"

다섯 마리의 듀라한들이 거칠게 포효했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듀라한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지능이 낮은 놈들답지 않게 포위망까지 갖추면서.

동시에.

리치의 손에 있던 번개가 사라졌다.

"후회하며 죽어라, 인간!"

빠르다.

그러나 직선으로 뻗은 검은 줄기가 진혁의 심장에 닿는 순간.

화르르륵!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번개가 화막(火膜)에 막혀 산산이 부서졌다.

"이, 인간 따위가 어떻게!"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저토록 가볍게 막다니.

마법만큼은 그 어느 인간에게도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리치였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완전히 박살났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쿠쿠쿠쿠쿠!

수천 개의 파편으로 흐드러진 불꽃.

그 속에서.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낼게."

짧게 고한 진혁이 가장 앞쪽에 있는 듀라한을 노렸다.

툭.

허벅지를 밟고.

투욱!

그 다음엔 어깨까지 밟은 뒤 높게 뛰었다.

지상에서 5m 가까이 치솟았을까?

진혁이 어깨를 크게 뒤로 젖혔다.

"내 거는 번개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하나는 장담하지.

"니 쉴드로는 절대 못 막아."

마력을 실은 10강짜리 단검에, 간극 스탯과 적응형 능력치까지 중첩된 상태.

5서클로는 어림도 없다.

최소한 두 단계는 높은 쉴드면 모를까.

이번엔 진혁의 손에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붉은 섬광.

직선으로 쏘아진 한 줄기 빛이 리치를 향했다.

"...크읍!?"

[5서클 '에너지 실드'가 발동됩니다!]

반사적으로 끌어올린 마력.

쉴드가 펼쳐지며, 투명한 막이 리치의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콰득!

쉴드는 유리벽처럼 박살났다.

당연히 그 뒤에 있던 리치 역시 몸에 바람구멍이 생겼다.

"커...어억...."

리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상처와 진혁을 번갈아봤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시퍼렇게 타오르던 안광이 서서히 빛을 잃었다.

워낙에 큰 타격을 받은 탓에 모아 뒀던 마력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물론,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이상 소멸하지는 않는다.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뿐.

'이걸로 대충 정리는 끝났군.'

진혁이 바닥에 박혀 있는 단검을 회수했다.

"크르르...."

"크으."

리치의 지휘를 받던 듀라한들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 전의를 상실해 버린 탓이겠지.

진혁은 녀석들을 쫓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레벨업이 아닌, 아이템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는 조금 긴장해야 한다.

엄청난 수의 함정을 통과해야 했으니까.

***

"무, 무슨 짐꾼이 저래?"

테레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몰려있던 언데드를 정리하고 합류했을 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상대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로 강하다고.

하지만 진혁의 전투를 본 순간, 한껏 올라갔던 어깨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정말이었구나.'

혼자서 듀라한 넷을 처리했다는 말.

반신반의했었는데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훨씬 상위급인 리치조차 완전히 가지고 놀았으니까.

'자신감이 넘칠 만하네.'

저렇게 강하니 여유가 있을 수밖에.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랩 존에 들어간 순간.

테레사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

작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

투쾅!

진혁이 바닥에서 솟구친 가시를 피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정면에서 화살 열다섯 개가 날아왔다.

위협적이지만, 이건 페이크다.

진짜는 투명하게 코팅된 와이어였으니까.

'안개가 끼어 있으니 더욱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카카카카캉!

진혁이 단검으로 화살을 쳐내면서, 발 디딜 곳을 연신 확인했다.

그러자.

[시각이 왜곡됩니다.]

불편한 가시감이 망막을 두드렸다.

'이제부턴 간격이 32cm 정도 차이 나겠군.'

어떤 공격이 오든 체감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뜻.

이 함정 구간을 까다롭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외워 둔 타이밍을 한 단계 수정했다.

...가자.

진혁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스스슥.

무언가 지면을 스치는 소리.

이번엔 뒤다.

뱀처럼 생긴 밧줄이 발목을 낚아채려는 순간.

진혁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철컥! 철컥!

움직일 때마다 함정이 연이어 발동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에선 모든 게 함정을 발동시키는 트리거다.

'여기서 세 걸음....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 걸음.'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길을 택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건 물리계열의 함정.

까다로운 건 정신계열 쪽에 작용하는 함정이었다.

후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했다.

그쪽은 발동되는 즉시 사망이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목표까지는 100m 정도 남았다.

[청각이 무뎌집니다.]

[촉각이 마비됩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오감의 기능이 둔화됐다.

반사 신경이 뛰어나단 장점마저 무색케 하는 환경.

규칙을 연구하는 것도.

패턴을 파악하려 하는 것도 소용없다.

그렇기에.

이 앞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구간이다.

그저 수천, 수만 번 죽으며 모든 순서를 통째로 습득하는 것만이 이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뿐.

콰아아앙!

진혁이 단검으로 단창(短槍)의 궤도를 틀었다.

오감이 제멋대로 날뛰었지만,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진 않았다.

쾅!

쳐내고.

콰아앙!

다시 한번.

쾅! 쾅! 콰아앙!

또 한 번 더.

'이게... 끝이다!'

부우우우웅!

진혁이 심장을 향해 쇄도하는 단창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모든 감각이 되돌아옵니다.]

[구덩이에 깔려 있는 안개가 걷힙니다.]

[언데드들이 안식에 들어갑니다.]

쏟아지는 상태창을 보며, 진혁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것도 간만에 하려니 근육이 쑤시네."

아니 진짜로.

오른쪽 손목이랑 어깨가 뻐근하다. 세 달만 젊었어도 거뜬했을 텐데 참.

'그것도 이걸 보니 싹 나은 것 같지만....'

진혁이 바위 위에 놓인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긴 양피지에 적힌 고대 라틴어.

테레사가 원하던 '베드로의 서약서'였다.

그리고.

'그래. 나도 다시 보니 반갑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빛을 뿜어내는 결정체.

'얼어붙은 눈물'.

드디어 이걸 손에 넣게 됐다.

'일단,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와 마혼단부터 챙기고 얼어붙은 눈물은 테레사를 불러서 독과 냉기를 중화시켜야겠어.'

맨손으로 만졌다간 손에 심각한 동상을 입는다.

하지만 테레사를 부르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거... 내려놔라. 천천히."

진혁의 뒤에서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렸다.

25화 검성(劍成) 천유성 (1)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굉장히 낡아 보이는 검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알고 있는 검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레플리카 버전의 성유물.

바로 '건륭(乾隆)이 새겨진 철기검'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녀석이 시련의 탑에서 내내 도전하던 찰거머리라는 뜻이겠군.

진혁의 상대의 위아래를 훑었다.

날카로운 인상.

185cm가 넘는 탄탄한 체구.

마치 잘 벼려 둔 한 자루의 검 같다.

'게임 내에선 워낙 사이코패스 같아서 몰랐는데, 이 녀석도 현실에선 멀쩡하게 생겼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모델 저리 가라다. 완벽한 비율의 몸에 조각처럼 생긴 얼굴은 TV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얼굴값이 아깝다. 얼굴값이.

"너는 진짜 질리지도 않냐?"

진혁이 혀를 찼다.

게임 내에서 그렇게 쫓아다닌 걸로도 모자란 건가.

이제는 하다하다 유적까지 쫓아오네.

진심으로, 만약 내가 지옥으로 간다면 거기까지 쫓아올 놈이다.

"그 귀찮다는 얼굴.... 네놈은 나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 것이냐."

남자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동시에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아, 맞다.

이 녀석 무시 받는 거에 아주 한이 맺혀 있었지.

상대하는 입장으로선 귀찮기만 해서 그만 깜빡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봐.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여기까지 쫓아와? 그리고 그렇게 졌으면 이제 인정이라는 걸 좀 해라. 제발 좀."

"이번에는 다를 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이상 내가 네놈에게 밀릴 리 없어."

말이 안 통한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안 통했다.

작게 한숨을 쉰 진혁이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레벨 차이로 인해 스킬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당연히 레벨 차이가 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기존의 행운 스탯과 적응 스탯에 '전투의 노래' 효과로 인해 추가 스탯까지 얻은 상태였으니까.

[스탯 효과가 레벨 차이를 무력화시켰습니다.]

[대상의 상태창을 꿰뚫어봅니다.]

——————————————————

이름: 천유성

성별: 남

나이: 28세

레벨: 29

힘 35 민첩 31 체력 18 마력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0

직업: 검사(劍士)

고유 능력: 검의 노래

스킬: Lv6 '추혼검기(追魂劍氣)', Lv5 '선인의 눈', Lv5 '일기토(一騎討)', Lv5 '호신강기', Lv5 '전장 선택', Lv4 '추혼검무(追魂劍舞)', Lv4 '암막 결계', Lv3 '인내', Lv3 '집념'....

——————————————————

[복사 조건: 천유성은 검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검'으로 그를 찍어 누르십시오.]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 긴 스탯창이 나타났다.

[선인의 눈]을 통해 날 알아본 건가. 게다가 지겹도록 스토킹을 하면서 나에 대해 꿰뚫어보고 있으니 이곳까지 쫓아온 것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됐다.

'천유성이라....'

이런 이름이었군.

시련의 탑.

그곳에 있던 고인물.

천유성은 진혁이 알고 있는 플레이어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축에 속했다.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실제로 녀석과 검을 나눴던 사람들은 천유성을 검성(劍成)이라 칭하며 경외시하기도 했고. 검귀(劍鬼)라 부르며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이 정도였나.'

진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태창을 읽었다.

레벨, 스킬, 고유 능력, 스탯.

다른 사람들이 봤으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테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물론, 천유성이 예전보다 강해졌다는 건 인정한다.

검성이 되기 위한 빌드업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으니까.

허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격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벌어졌지.

"굳이 싸우겠다면 말리진 않겠는데, 괜찮겠어? 여기엔 나 혼자만 온 게 아닌데?"

천유성의 살기에 반응한 테레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해야 2, 3분.

그 뒤엔 일 대 일이 아니라 이 대 일 상황이 된다.

"성녀라... 쓸데없는 동료를 만들었군."

음….

"두 가지 정정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첫 째로 테레사는 동료가 아니야."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어 잠시 함께하는 거다.

그리고 둘째로.

"난 쓸데없는 건 데리고 다니지 않아."

진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웅!

은빛 방패가 날아왔다.

표면에 은은하게 일어나는 기운.

신성력을 머금은 흉기다.

"큭!?"

천유성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가까스로 쳐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충격이 컸는지 미간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니까.

"재가 오기 전에 슬슬 도망치는 게 어때?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 대결에 방해꾼이 끼어들게 내버려두진 않겠다."

[천유성이 Lv5 '전장 선택'을 발동합니다!]

천유성의 몸을 주위로 투명한 막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진혁의 입 꼬리 또한 위로 올라갔다.

역시.

살살 긁어 주니 바로 반응한다.

본인이 원하는 전장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고유 결계, '전장 선택.'

천유성이 갖고 있는 결계 중에서 가장 강력한 종류의 위력을 지닌 결계였다.

우우우웅!

약 50m 넓이의 공간이 새롭게 구성됐다.

군데군데 박살난 대리석과 먹다 남은 벽곡단이 널브러져 있는 수련장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 다운 장소네.'

이 정도로 캐릭터성이 일관되는 것도 참...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천유성이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이제 외부로부터 도움 따위는 받을 수 없다."

결계로 인해 단절된 세상.

천유성은 곧바로 다음 스킬을 사용했다.

[천유성이 Lv5 '일기토(一騎討)'를 발동합니다!]

[천유성의 모든 스탯이 10%만큼 상승합니다!]

[테레사로부터 받은 '전장의 노래' 효과가 사라집니다.]

[모든 스탯이 10%만큼 하락합니다.]

연거푸 나타나는 상태 메시지들.

'전장 선택'과 '일기토'로 인해 강제 너프를 받은 결과였다.

바로 이 두 가지 스킬 때문에 천유성은 자신 있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고.

바로 이 두 가지 스킬 때문에 진혁은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걸렸다.'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융합'에 붙어 있는 특수 조건.

-본래 복사해야 하는 조건보다 상황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질 경우 복사 조건이 그에 맞게 수정됩니다.

그리고 이 경우엔....

[복사 조건이 수정되었습니다.]

[선(先) 복사, 후(後) 조건 달성이 인정됩니다.]

[제한시간 10분 안에 조건을 달성하십시오.]

조건이 변했다.

먼저 능력을 복사하고 이후에 조건을 달성하는 것으로.

"천유성의 고유 능력을 복사하겠다."

[고유 능력 '검의 노래(S)'를 복사합니다.]

['검의 노래': 도검류에 대한 이해도가 200%만큼 증가합니다. 몸은 자연스럽게 효율적인 검로를 찾으며, 전신의 감각 또한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검성(劍成)의 칭호를 받기 위한 필수 능력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경험과 반사 신경에 의존한 싸움이었다면.

이 능력을 얻은 순간부터는 검을 이해하고 검과 하나가 되는 싸움이 가능케 된다.

스윽.

진혁이 오른손에 쥔 단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왼쪽 검지론 천유성을 향해 까딱거렸다.

"여유... 있는 척하지 마라!"

천유성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동시에.

콰앙!

지면을 박차고 진혁에게 돌진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빠르다.

하지만.

카아앙!

진혁이 옆구리를 노린 공격을 흘려 넘겼다.

그러자 곧바로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카앙! 카아앙!

1초도 안 되는 시간동안 몇 차례가 되는 검격이 오갔다.

하나같이 급소만을 노리는 절초였다.

바로 그때.

천유성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수작이냐?"

"응? 뭐가?"

"모른 척하지 마라! 네놈의 주특기는 근접이 아닌, 중거리일 터. 어째서 그깟 단검 하나로 맞서느냔 말이다!"

지긋지긋하게 싸워 왔기에, 천유성 또한 진혁의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근접보단 거리를 두는 싸움을 즐긴다는 사실을.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할 것 같거든."

검으로 찍어 눌러줘야 하는 이상 다른 걸 쓸 순 없다.

무엇보다 검의 노래를 얻었기에, 단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진혁 입장에서의 이야기일 뿐이고.

당사자인 천유성 입장에선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죽여 버리겠다!"

격노한 천유성이 검을 휘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