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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탑의 정상

프롤로그

트라이 횟수 79회.

전멸한 각종 길드의 공격대 297팀.

사망자 315,850명.

이 모든 숫자가 가리키는 것이 '시련의 탑' 48층에 등반하려다 실패한 결과물이다.

[제한시간: 0h : 58m : 33s]

빛이 바란 상태창이 깜빡였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하아.... 이젠 더 이상 도전자도 없네.

-아모른직다: 대형 길드들도 다 포기했으니까. 솔직히 너무 많이 죽긴 했어.

-나의 라임 개쩌는 오렌지나무: 이제 1시간 뒤면 세계 멸망임. 뉴스에서도 카운트다운 들어감. ㅅㄱㅇ.

-후후 느끼고 있군: 마지막 날 여기서 뭐하고 있냐? 지금 홍대에서 파티 열리는 중인데. 불금 안 보내?

-형궁서체다: ㅋㅋㅋ방구석 찐따가 신났누. 평생 여자하고 말도 못 붙여 봤으면서 불금은 개뿔.

[현재 접속 인원수: 87]

한때 수백만이 접속해 있던 채팅창은 이제 100명도 채 남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수많은 실패 탓에 각종 길드들은 이미 무너졌고.

개별적으로 도전하던 이들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인류는 영원히 다음 층을 정복하지 못한 채 이대로 끝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너무나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졌던 이곳에 푸른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이 일어나는 건 단 하나.

[48층 '레드 드래곤 데스티아'의 영역에 도전자가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도전자가 들어왔을 때뿐이다.

던전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안면 왜곡 마법을 쓴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손에는 30cm 길이의 단검이 쥐여 있었다.

틀림없이 플레이어다.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오오오!

-클라이머123: 아직, 도전하는 사람이 있어!

-형궁서체다: 와. 실화냐? 이 시국에 도전자라고?

-앞비전뒷점멸: 이시국 씨 등판하셨네. 키보드 1시간 압수.

갑작스러운 이변에 채팅창이 활발해졌다.

대체 얼마 만에 나타난 새로운 도전자란 말인가?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남아있던 시청자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현재 접속 중인 시청자: 7,588]

순식간에 커뮤니티와 SNS를 타고 소식이 퍼졌다.

죽을 때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혹시나 하며 들어왔고.

곧, 모든 관심이 도전자에게 쏠렸다.

-생갈치1호의 행방불명: 근데 누구지? 랭커는 아닌 것 같은데?

-나의 라임 개쩌는 오렌지나무: 정보 다 비공개로 해 놔서 상태창 안 보임.

-클라이머123: 설마, 마지막이라고 뉴비가 늅늅 하면서 들어간 거 아님?

-고인물감별소: ㅁㅊ. 다 닥치고 저 단검 봐.

-나의 라임 개쩌는 오렌지나무: 야자열매 따기 좋게 생겼네. 초보자 때나 쓰던 템을 뭘 보란 거임?

-고인물감별소: 색깔을 보라고! 색깔을!

한 시청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단검으로 향했다.

흑요석처럼 까맣게 물든 검신.

그리고 손잡이 끝 부분이....

'보라색'이다.

빨주노초파남보. 7개의 색깔.

그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으며, 여태껏 누구도 손에 넣지 못 했던 최상급 성유물.

두근!두근!두근!

지켜보던 이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왔다.

고이다 못해 썩어 버린 화석이!

***

"크르르르...."

침입자의 등장에 둥지에 있던 레드 드래곤이 낮게 포효했다.

30m에 이르는 거대한 몸체.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솜털이 쭈뼛쭈뼛 일어났다.

"너희 인간들은 포기란 걸 모르는구나. 그렇게 많은 수를 잃고도 또다시 온 것이냐?"

데스티아가 침입자를 내려다봤다.

오만한 눈빛이다.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는 것처럼.

물론, 그 오만함엔 압도적인 무력이라는 근거가 뒷받침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마뱀구이를 만들려면 준비해야 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늦지 않게 왔어."

남자는 태연하게 그 시선을 받아 냈다.

건방진 대답에, 데스티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인간, 똑같이 죽더라도 훨씬 더 고통스럽게 죽는 수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글쎄.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말로만 하지 말고."

"좋다. 어차피 미물과의 대화 따위 의미가 없는 것을."

데스티아가 발톱으로 허공을 그었다.

"...!"

그러자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고위 속박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시시한 결말이구나."

치켜든 앞발이 남자의 머리 위로 향했다.

몸이 그림자에 삼켜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앞발이 아래로 낙하했다.

콰아아앙!

지면에 금이 쩍 하고 갈라졌다.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튀어 올랐다.

그런데.

"흠?"

당연히 느껴져야 할 감각이 없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짓뭉개지는 그 느낌이.

"속박 이후에 육탄 공격이라.... 너무 뻔한 패턴 아니야?"

데스티아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말도 안 되는.

"스킬이 발동하기 전에... 파훼했다고?"

그 짧은 순간에?

"뭐, 손동작만 봐도 대충 뭘 하려는 건지 알고 있으니까."

"개소리 하지 마라!"

데스티아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동굴 천장에 닿을 듯이 솟구쳤다.

"이제 우연 따위는 없을 것이다."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

대기에 있는 모든 수분이 말라붙었다.

적을 잿더미로 만들기 위한 최강의 힘.

오직 드래곤만이 갖고 있는 권능.

"역시, 브레스인가."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공격대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저 불줄기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쿠쿠쿠쿠!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

잠시 뒤, 극한까지 응축되는 마력이 방출된다면....

인간의 육체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 하리라.

"피할 곳 따윈 없다."

이 던전 전체가 브레스의 영역 아래 있었으니까.

그리고 물론.

"피할 이유도 없어."

도망가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죽으려고 온 건 더더욱 아니고.

이기기 위해 왔다.

살아남아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서.

['세계의 기억'을 읽습니다.]

남자의 등 뒤로 찬란한 운무가 쏟아졌다.

모든 스킬들이 기록된 무한의 서고.

세상의 진리를 담은 대도서관.

이것이 바로 남자가 지닌 능력이다.

"'헬파이어'와 '검은 눈물'을 불러오겠다."

짧은 말과 함께.

화르륵!

왼손에 지름 1m가량의 불덩이가 나타났다.

또옥! 또옥!

오른손에 쥐고 있는 단검 끝에선 검은색 액체가 떨어졌다.

-하울의 무빙 오지는 성: 헬파이어잖아? 유럽 랭커, 마리아의 전매특허인!

-고인물감별소: 검에서 떨어지는 액체. 저건 15층 '통곡의 마녀'가 갖고 있던 스킬임.

-클라이머123: 세상에나.... 복사 스킬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있었다니.

-형궁서체다: 그럼 뭐 해? S급 스킬 백날 난사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데?

-앞비전뒷점멸: 혹시나 했는데. 역시는 역시 역시구만.

-군필여고생: 아오 내 아까운 시간.

채널에 접속해 있던 시청자들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그야 그럴 수밖에.

헬파이어든 마녀의 저주이든.

어떤 걸로도 드래곤의 브레스를 뛰어넘을 순 없다.

이미 수도 없는 도전과 실패 끝에 증명된 사실이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고작 그 정도 스킬을 믿고서 큰소리를 쳤던 것이냐?"

데스티아가 혀를 찼다.

그래.

이 정도 수준으론 어림도 없겠지.

그러니.

만들어 주면 된다.

'왼손에 발현한 스킬과.'

브레스를 파훼하고....

'오른손에 발현한 스킬을 융합해.'

드래곤 스케일마저 가를 수 있는 한 차원 더 높은 스킬을!

남자가 헬파이어 위로 검은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스킬 '헬파이어(S)'와 스킬 '검은 눈물(S)'이 융합합니다.]

이질적인 두 개의 스킬이 하나로 합쳐지며, 검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공허룡(空虛龍) 에테리온의 브레스(SSS)'를 획득하셨습니다!]

콰콰콰콰콰콰!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와는 격이 다른 흑염이 타올랐다.

마력의 질도.

불꽃의 온도도 다르다.

"그, 그건!"

데스티아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고대종(古代種) 중 하나인 에테리온.

그리고 그 고룡이 사용하던 최강의 브레스를.

"네…놈! 어떻게 인간 따위가 그 능력을...!"

데스티아가 말을 더듬거렸다.

호기심을 넘어선 두려움.

그렇기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대체 누구냐! 네놈은!"

데스티아의 질문에,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진혁."

나는 고인물이다.

닳고 닳아 결국엔 마모되어 버린.

"그리고 내가 너를 죽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동시에, 나는 이 탑의 정상을 올랐던 유일한 플레이어다.

1화 탑의 정상

망겜.

흔히 재미가 없거나 캐릭터 간에 밸런스가 무너졌거나.

아니면 운영이 개판인 게임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또 다른 경우가 있다.

바로 터무니없는 난이도를 가진 경우.

가상현실 게임 [시련의 탑]은 바로 거기에 해당했다.

출시 후 1년 동안, 제작자를 농락하는 게 취미인 한국의 고인물들이 이 게임을 정복하기 위해 달라붙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포기한 채 1년, 365일 계속.

하지만, 3년이 지났을 무렵.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 게임은 클리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예를 들어 볼까?

10층을 지키는 게이트 가디언이 무적이다.

무적.

100명이서 스킬을 난사하고 온갖 무기로 두드려 패도 소용없단 뜻이다.

아니, 인간적으로 최소한 1이라도 달게 해 줘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7층은 1시간 만에 얼어 죽는 영하 60도의 극지방이었고.

8층은 10,000km가 훌쩍 넘는 미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고문용이었다.

혹은 한국의 고인물들을 엿 먹이려는 수작이거나.

때문에 게임은 망해 버렸다.

정확히는 '거의' 망해 버렸다.

아직, 이 빌어먹을 헬 난이도에 도전하는 극소수의 고인물들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중엔....

대한민국의 청년. 강진혁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

[50층을 정복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시련의 탑을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실...화냐 이거?"

시련의 탑 50층.

진혁은 온갖 감정이 담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저 재밌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참신한 방법으로 탑을 공략하고.

모든 것을 다 외워 버릴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한 끝에 얻는 성취감이.

하지만, 결국 마지막 층까지 클리어해 버릴 줄이야.

17살, 처음 가상현실 게임을 접했을 때 시작해 성인이 된 27살까지.

무려, 11년이란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하. 방송이라도 킬 걸 그랬나.'

시청자 20~30따리 BJ이긴 하지만, 어쨌든 BJ는 BJ다.

그러나 진혁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방송을 켜봤자 아무도 안 봤겠지.

세 달 동안 똑같은 걸 반복하는 모습에 고정 시청자마저 떠나갔으니까.

이제는 '보스 공략'이니 '50층'이니 하는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어도 시련의 탑을 플레이한다고 하면 아무도 보질 않았다.

'그래도 뷰튜브에 올리면 조회수는 꽤 나오지 않으려나?'

결과만 10분 내로 편집하면, 꽤 쏠쏠하게 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띠링!

[지금까지 저희 게임을 이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리부트 업데이트는 12시간 뒤에 이루어질 예정이오니 부디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관리자 전용 메시지였다.

11년 동안 소통도 안 하고 관리도 안 해서 아예 포기한 줄 알았는데.

'의외네. 게다가 리부트 업데이트라니. 어디 사막에서 유전이라도 발견한 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게임에 수익성이라곤 아예 없을 텐데....

'...됐다. 뭔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리부트 업데이트고 뭐고 간에 더 이 게임을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직업으로 해 오던 방송 역시 오늘을 마지막으로 접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부양해야 할 식구가 없다지만 이제 나이도 27살인데.

언제까지 한 달에 50만 원씩 벌면서 살 순 없었기 때문이다.

'관장님한테 운동도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해야겠어.'

한 때 격투기 프로를 노려야 한다는 말도 듣긴 했으나, 지금은 운동보다도 돈이 더 중요했다.

-jjy77: 진하! 진하! 진혁이 하이라는 뜻!

-수리부엉이: 오, 웬일? 오늘은 일찍 켰네?

방송을 켜자 고정 시청자 20명이 금방 들어왔다.

책상 위에 치킨과 피자, 크림새우와 양장피 그리고 맥주와 소주를 각 2병씩 준비해 뒀다.

-25년째다이어트중: 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거 보소.

-먹방은쯔양: 역시, 형은 먹방이 딱이야. 겜방말고.

-진혁은굴러야제맛: BJ진혁 하면 뭐다?

-관짝송: 소 먹고 외양간도 먹는다!

-방구석트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먹는다!

-1인2닭: 자라 먹고 놀랐으니 솥뚜껑도 먹즈아!

그래도 소수의 시청자들 덕분에 지금까지 방송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함께 웃고 떠들며 소주와 각종 안주를 먹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다가왔다.

'접는다는 건 내일 공지로 말해야겠네.'

지금 당장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말하는 건 내일이다.

하지만....

진혁 본인조차 몰랐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2화 서막

욱씬!

지독한 두통과 함께 숙취가 몰려왔다.

"어우야...."

진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타는 듯한 갈증에, 냉장고에 넣어 둔 얼음물 1L를 들이켰다.

목구멍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 꿀꺽꿀꺽 넘어가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

해장용 라면이 몹시 당겼지만, 그보다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누구한테 뺏기기 전에 어제 최초 클리어 한 영상부터 편집하고 올려야겠어.'

20층 부근부턴 다른 플레이어의 그림자도 못 봤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법이었으니까.

우우웅!

진혁이 재빨리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뷰튜브에서 작업할 때 어울리는 음악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어?"

자주 보는 채널의 뷰튜버가 생방송 중이었다.

'시련의 탑이 진짜로 나타남. ㅇㄱㄹㅇ임.'이라는 제목을 단 채.

이 업계에서 제목 어그로야 흔한 일이었지만, 생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가 30만을 넘을 때는 예외다.

뭔가 있다.

진혁이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고동쳤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이걸 클릭하는 순간, 모든 게 바뀔 것만 같았다.

딸칵!

방송에 입장했다.

-와! 형님들. 저거! 저거! 보이세요? 다들 보고 계시는 거 맞죠?

화면에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는 뷰튜버와....

거대한 탑이 보였다.

정말이다.

서울 한복판에 거대한 탑이 나타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메론맛수박 형님이 제보해 주셔서 알았는데, 이거 11년 전에 출시한 [시련의 탑]이라는 게임에 나오는 거랍니다. 믿어져요? 어? 잠깐만요.

뷰튜버는 뭔가 느꼈는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바로 그 때.

영상 속 화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석양은 아니었다.

오전 10시에 해가 지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이럴 수가....'

진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뭔지는 알고 있다.

[시련의 탑]을 처음 플레이했을 때 나타났던 전조.

['시련의 탑' 리부트 버전 1차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려졌다.

화면 속 뷰튜버의 눈앞에도.

그리고 현실 속 자신의 눈앞에도 푸른색 상태창이 점멸했다.

시작되었다.

[모든 플레이어는 90일 안에 탑의 다음 층계를 정복해 주십시오.]

모두가 알았던 세상이 무너지고....

[실패할 경우 인류는 멸망합니다.]

그렇게.

게임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

로딩이 덜 된 컴퓨터마냥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진혁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후우. 후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한다.

정말로 [시련의 탑]이 현실이 된 거라면, 지금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야 해.'

진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덜컹이다 넘어졌다.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울 여유 따윈 없었다.

가야 한다.

밖으로.

정확히는 '그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현관문을 박차고 나온 진혁은 곧장 도로를 따라 전력질주를 했다.

도로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왜 왜일까.

흥분과 기대감으로 인해 조금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저 하루만 바라보며 견디던 삶.

그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몇 분을 달렸을까?

도착한 센트럴 시티는 이미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부, 부산 가는 제일 빠른 거 몇 시야?"

"젠장. 부산이고 나발이고 한국에 있으면 안 돼. 외국. 그래. 외국으로 가야 살 수 있어."

"지금 외국에도 전부 저 빌어먹을 탑이 나타났는데 뭔 놈의 외국?"

"그럼 어디로 가라는 거야?"

"뭐가 됐든, 서울만 아니면 돼. 영화 보면 몰라? 괜히 멍청하게 남아 있다간 죽는다고!"

대부분은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었다.

'불안하겠지.'

원래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게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었으니까.

하지만, 위기 속에 기회가 있는 법.

지금은 도망가야 할 때가 아니라 나아가야 할 때다.

'한국 서버에선 여기가 [탑 외 지역] 중 하나로 선정되었지.'

전국을 다 합치면 서른 개 정도.

그중에서 이곳을 고른 이유는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지하를 내려다보던 진혁이 이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벤트 지역에 입장합니다.]

지하상가는 조용했다.

갑자기 탑이 나타나고 하늘이 붉게 물들며 인류의 멸망이니 뭐니 하는데, 속 편하게 장사나 하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햄버거를 사 먹고 있을 손님은 더더욱 없었고.

물론.

"...."

"...."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역시....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몇십 명의 사람들이 분수대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시련의 탑] 초반부를 플레이해 봤던 이들이다.

대화라곤 없는 침묵 속,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야 그럴 수밖에.

곧 이곳에 나타날 아이템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

운이 좋아야 5개 정도일 터.

반면, 사람들의 수는 20명이 넘었다.

공급은 적은데 수요는 많다.

누군가는 아이템을 얻지 못 한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너... 강진혁 맞지?"

진혁의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린데...?'

진혁이 고개를 돌리자 180cm의 건장한 체구에, 머리칼을 노랗게 염색한 남자가 보였다.

이종수.

이 자식을 여기서 보다니.

"하하, 맞네. 강진혁! 이야. 너도 여기 왔구나. 하긴, 방구석에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으니까."

이종수가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파프리카TV 파트너 BJ.

뷰튜브에서 50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인스타 팔로워도 상당수를 거느린.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인기인이다.

'동시에, 내가 소속되어 있는 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했고.'

"지금 한창 방송하고 있을 때 아니었습니까?"

진혁이 입을 열었다.

"에이. 지금 상황이 이 모양인데, 뭔 방송이야?"

이종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상황이 뭔데요?"

"모른 척하지 마. 네가 이 게임 꽤 열심히 했다는 거 알고 있어. 그보다 말해 봐. 대체 몇 층까지 갔던 거야? 같은 업계 동료끼리 숨기지 말고 같이 꿀 좀 빨자고."

동료?

동료...라고?

진혁은 순간,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직까지 이 쓰레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놈이 세운 컴퍼니에서 불공정 계약으로 BJ들을 속였었지.'

편집자 월급과 각종 콘텐츠 비용을 제공해 준다고 했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전체 수익의 60%를 뜯어갔기에, 방송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항의를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법무법인을 등에 업고 있었으니까.

억울하면 법대로 해라.

계약서는 서로의 동의하에 작성된 거니.

결국, 노예처럼 활동하던 BJ들은 울면서 방송을 접었다.

친했던 동료들이.

밑바닥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이 업계를 떠났다.

"너 게임도 잘하고. 먹방도 맛깔나게 하는 거 알고 있어. 내가 특별히 계약 조건 조금 더 좋게 해 줄 테니까. 응?"

이종수가 진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역겹다. 이 녀석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조차도.

"...이종수."

"야. 야. 사석이라도 대표님이라고 불러. 쯧."

아. 맞다. 대표님... 이었지.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나쁜 놈은 계속해서 잘 나가고 잘 산다는 것.

또.

그놈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더 악랄하고 잔혹해져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다.

"대표면 대표답게 행동해. 그래야 대표라고 불러 주지."

"뭐?"

이종수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진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기억 안 나? 너 여자 BJ한테 명함 건네면서 집적대다가 차이고 울고불고 난리쳤었잖아?"

본 사람이 나밖에 없어 아쉬울 뿐이다.

영상이라도 남겨 뒀어야 했는데.

"그것뿐이냐? 절대 포기 못 한다고, 그 여자 BJ 집 주소 알아내서 스토킹하고. 그러다 신고당해서 경찰서도 가고. 하, 진짜 남자새끼가. 나였으면 혀 깨물고 죽었다. 죽었어."

"너, 너! 미, 미쳤어? 앞으로 영영 방송 못 하게 아예 묻어 버리는 수가 있어!"

이종수가 진혁의 멱살을 붙잡았다.

"미안하지만, 어제부로 방송 때려쳤다."

그리고.

"말 함부로 놓지 마, 새꺄. 내가 너보다 나이 많으니까."

콰앙!

진혁의 머리가 이종수의 안면으로 파고들었다.

"끄아악!"

이종수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부러진 치아와 피가 바닥에 후두둑 쏟아졌다.

'속이 다 시원하네.'

10년 동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크으으...."

진혁은 얼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는 이종수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쿠쿠!

분수대 쪽에서 격한 물방울이 일어났다.

잔잔했던 수면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퍼어어엉!

4m 높이의 나무가 솟구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오오오!"

"맹그로브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탄성을 질렀다.

['탐욕의 맹그로브 나무'가 자라납니다.]

[1인당 섭취할 수 있는 열매는 1개입니다.]

시련의 탑에 들어가기 전에 얻을 수 있는 기연 중 하나.

진혁은 맹그로브 나무에 달려 있는 형형색색의 열매를 바라봤다.

먹임직스럽게 익어 있는 저 열매들은 각각 힘, 민첩, 체력과 마력 스탯을 올려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좋은 아이템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문제는.

그 수다.

'전부 해서 4알이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24명이니 경쟁률은 5:1인 셈이었다.

진혁이 혀로 아랫입술을 적셨다.

'꽤 치열하겠군.'

초반 구간에서 스탯을 올릴 수 있다는 메리트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요소였으니까.

"내, 내꺼다!"

"웃기지 마라. 내가 먼저야!"

"꺄아아악!"

열매를 먹기 위해 모두가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간에.

남들보다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곧, 센트럴 시티 지하상가는 나무를 오르는 사람과 밀치는 사람으로 인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비, 빌어먹을! 이래서야 열매는 틀렸어. 늦었다고!"

이종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의 말대로 지금 와서 분수대로 가긴 늦었다.

우적!

"돼, 됐어!"

이미 첫 번째 열매를 따서 입에 넣은 사람이 나타났고.

머지않아 나머지 열매들도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차라리 나랑 손잡고 열매를 반씩 나눴으면 서로 윈윈이었잖아!"

이종수가 계속 고함을 질렀지만, 진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이쪽이 노리는 건 저 네 종류의 열매가 아니었으니까.

'아직.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일반인은 나무 열매가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었다.

몇 번 플레이를 해 봤던 이들은 열매를 먹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을 테고.

그리고 고인물은....

그것보다는 더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과정을 즐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편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침내 나무에 열린 열매들이 모두 사라졌다.

바로 그때.

끼이이이이!

나무가 울부짖었다.

열매를 모두 빼앗겼기에, 분노에 찬 본체가 날뛰기 시작하려는 것이다.

"마, 맞다. 이거 열매 다 처먹으면 겁나 위험해졌지."

"빌어먹을. 하도 오래 전에 했던 거라 까먹고 있었어."

"으, 으아아! 당장 튀어! 나 여기서 50번은 죽었었다고!"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당장 도망가야 한다.

무기도 없는 레벨 1짜리 플레이어가 이 나무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없었다.

"으으...."

이종수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기하려고?"

진혁이 입을 열었다.

"다, 당연하지! 이런 곳에서 개죽음 당하는 건 사양이다."

"그래? 그거 아쉽게 됐네. 이 이벤트의 진짜 보상은 열매가 다 따먹혔을 때 얻을 수 있는 건데."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몸을 돌리던 이종수가 멈칫했다.

"그 말, 진짜냐?"

"가짜면 내가 여기 왜 남아 있겠어?"

"...."

이종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왜 열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나 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더 큰 보상이 있다고 가정하면 앞뒤가 맞았다.

'저 게임만 하던 놈이 한 말이니 거짓말일 리는 없겠지.'

다른 건 몰라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기는 건 확실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 치고.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파고들어야지."

진혁이 손가락으로 나무의 안쪽을 가리켰다.

"한 명씩 움직이면 타겟팅 당하기도 쉬워. 그러니 반드시 양쪽에서 접근해야 해."

"시선을 교란하자는 말이군."

"그런 말이다."

사람들은 전부 위로 올라갔다.

이 지하에 남은 건 진혁과 이종수 단 두 명뿐.

"명심해. 둘 중에 하나라도 머뭇거린다면 최악의 상황이 나온다는 걸."

진혁이 자세를 낮춘 채 천천히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이 게임 하루 이틀 한 건 아니라고."

이종수는 왼쪽으로 움직였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지금이다!"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순식간에 나무줄기들이 진혁을 향해 뻗어 왔다.

그런데.

이종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제자리에 선 채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병신 새끼. 누가 네놈 말 따위를 듣냐? 가서 미끼나 돼라. 나는 그동안 보물이라는 걸 노릴 테니."

타악!

그리고 나무의 중앙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교차하는 시선 속.

진혁은 생각했다.

...다행이다. 그 성격 변하지 않아서.

'혹시라도 그동안 개과천선이라도 한 거였으면 미안해질 뻔했잖아?'

굉음과 함께.

콰아앙!

갑자기 분수대 밑에 숨어 있던 나무줄기가 튀어 올랐다.

3화 탐욕의 맹그로브 나무

"사, 살려 줘. 제발!"

이종수가 목숨을 구걸했으나, 진혁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아니꼬우면 그 잘난 법무법인 통해서 고소라도 하든가?

"자, 잠까아... 끄아아악! 끄아아아아!"

콰드득!

콰득!

나무줄기가 엄청난 압력으로 이종수를 으깨 버렸다.

죽을 짓을 한 놈이 죽었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 같은 쓰레기도 이럴 땐 도움이 되네.'

어중간한 놈들은 다들 위로 도망쳤고.

'이제 슬슬 움직이면 되겠군.'

타악!

진혁은 나무의 본체를 향해 도약했다.

대부분의 나무줄기들이 영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물론.

쐐애애애액!

모든 나무줄기들이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람 소리와 함께 2개의 넝쿨이 진혁을 노렸다.

잡히면 당연히 이종수와 같은 꼴이 난다.

으깨진 뒤, 체액을 모조리 빨려 버리겠지.

진혁이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피하는 거야 어렵지 않아.'

허공을 가른 나무줄기가 맞부딪쳤다.

퍼걱!

산산이 부서지는 나무 파편들.

우측 35도.

좌측 22도.

각도와 방향까지.

역시나, 게임에서 경험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완벽하게 맞춘 타이밍에. 진혁을 공격하던 나무줄기가 오히려 맹그로브의 본체에 파고들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이렇게 정확한 궤도를 알아내,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쯤은 돼야 어려운 축에 속하지.'

"그오오오오오!"

탐욕의 맹그로브가 묵직한 신음을 토했다.

통각도 거의 느끼지 못하면서 뭘 그리 고통스러워 하냐?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누가 보면 석유 붓고 불이라도 지르는 줄 알겠네.

진혁이 바닥에 떨어진 나무 파편을 움켜쥐었다.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얌전히 '목단(木丹)'을 넘기는 게 어때?"

이 녀석은 이벤트성이라 경험치도 안 준다.

기껏해야 '명예의 전당'에 하루 오르는 게 끝.

괜히 힘 빼면서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보단, 원하는 것만 얻는 편이 좋으리라.

"크오오오!"

맹그로브가 거칠게 포효했다.

잘은 몰라도 저건 싫다는 뜻일 거다.

하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쓰러뜨릴 수밖에.

진혁이 나무파편의 날카로운 부분을 앞으로 향했다.

[탐욕의 맹그로브 나무가 스킬 '흡혈 넝쿨'을 사용합니다!]

부우웅!

부웅!

수십 개의 나무줄기들이 일제히 뿜어졌다.

아무리 내가 고였다고 해도 저걸 다 피하는 건 무리다.

그러나 궤도를 조금씩 바꾸는 것쯤은....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진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날아오는 나무줄기의 타이밍에 맞춰 손에 쥔 나무파편을 움직였다.

카가가가각!

볼을 스치고 지나간 나무줄기가 반대편 지면에 꽂혔다.

그걸 시작으로.

퍼퍼퍽!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손에 쥔 30cm 길이의 파편을 역수로 쥔 채.

저벅.

진혁이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콰콰콰콰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격의 체감 속도도 올라갔다.

퍼퍼퍽!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진혁은 모든 공격을 상쇄하거나 받아쳤다.

'리듬…을 타야 해.'

특유의 호흡을 찾아서 거기에 맞춰야 한다.

겁먹을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이미 숱하게 반복해 왔던 거였으니까.

어느새 거리가 1m까지 좁혀졌다.

이제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녀석의 안쪽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나무의 고동이 느껴졌다.

옹이구멍 사이로 사람의 심장과 비슷한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약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부우우웅!

나뭇가지 사이에서 무언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나비였다.

푸른빛을 띤 수천 마리의 나비들.

반짝이는 가루를 흩뿌리며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이 그림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흡!"

진혁이 호흡을 멈췄다.

'수면 나비.'

수면 성분의 분진을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놈들이다.

호흡기를 통해 빠르게 효과가 나타나기에, 처음 상대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호흡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진혁이 순식간에 나무의 본체로 파고들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 나무파편이....

푸욱!

그대로 맹그로브의 심장을 관통했다.

"캬아아아아!"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나뭇가지가 좌우로 흔들렸다.

진혁은 더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푸욱! 푸우욱!

잠시 뒤, 비명이 멎었다.

나무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이 녀석을 쓰러뜨린 것이다.

"후우우우!"

진혁이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 냈다.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

그리고 미칠 듯이 뛰는 심장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들었다.

하하.

'지긋지긋하게 반복했던 패턴 공략과 타이밍 연구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새삼스럽게 그동안 했던 모든 것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최초로 '탐욕의 맹그로브 나무'를 쓰러뜨렸습니다.]

축하의 메시지를 담은 상태창이 나타났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내가 전 세계 최초였겠네.'

그렇다는 이야기는....

[내일부터 하루 동안 '명예의 전당'에 당신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플레이어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역시나 이게 뒤따라온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기 위해서 개인정보를 요구해 오는 거지같은 시스템이.

"이름 따위 없어. 전부 비공개로 할게."

진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개인 정보가 알려지는 거야말로 결단코 사양이다.

지금 고인물이었다는 게 들통 났다간 온갖 관심을 받을 테니까.

[네임 언노운(Unknown),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고 목소리가 변조됩니다.]

시스템 상 완전한 비공개는 안 된다.

'내가 누구인지 숨겨 주는 걸로 타협하라는 뜻이겠지.'

물론, 나중에 되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초반 구간에선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낫네.'

한창 중2병이 정점에 달했을 땐 바바리코트에 시가를 입에 문 룩으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었다.

'석양이 진다....'라고 중얼거린 건 덤이다.

망겜이여서 다행이었지.

만약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게임이었다면 영원히 박제당한 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빌어먹을. 얼른 잊자.'

생각만 해도, 이불킥을 12번은 더 하고 싶었으니까.

"마음대로 해."

혀를 찬 진혁이 검게 죽어 버린 나무 틈을 뒤졌다.

손가락에 무언가 걸렸다.

1cm 크기의 초록색 단약이.

[나무의 정수 '목단(木丹)'을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각각의 나무열매가 힘, 민첩, 체력, 마력 중 하나를 +3만큼 올려 준다면.

'목단'은 아예 12개의 보너스 스탯을 준다.

1레벨당 주어지는 포인트가 3인 걸 생각하면 무려 4레벨이 올라간 셈이다.

'미쳤지.'

솔직히 말해 이것만큼 가성비 좋은 아이템은 없었다.

50층 전체를 통틀어 봐도 말이다.

꿀꺽!

진혁이 손바닥에 있던 목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복부에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어디, 제대로 흡수됐는지 확인해 볼까?'

진혁이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

힘 5 민첩 6 체력 7 마력 5

보유한 스탯 포인트: 12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없음

스킬: 없음

——————————————————

레벨은 1.

하지만 보유한 스탯은 12다.

'최강 1레벨이군.'

그것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시련의 탑]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탐욕의 맹그로브 나무'를 처치했다는 메시지가 올라갔다.

관련 영상은 10분 뒤에 업데이트된다는 말과 함께.

인적이 끊긴 지 오래였던 한국 서버 커뮤니티 게시판은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4딸라!: ㅁㅊ. 그걸 쓰러뜨린 놈이 있다고?

-적토마pc방: 말도 안 돼. 저 나무, 초반에 죽일 수 있긴 한 거였음? 예전에 이 악물고 이 겜 했을 때 100번인가 죽고 포기했었는데.

-바밤바: 대체 얼마나 고였으면 저걸 죽인 거지?

-왕위계승중: 남들 1년 안에 다 접은 ㅈ망겜, 혼자서 11년 내내 죽어라고 했나 봄.

-토끼공듀: 운이거나 그랬겠지. 형이 고인물 중 하난데, 정상적인 방법으론 절대! NEVER!  죽어도 못 잡는다.

-fekk91: 맞말추!

-Lovepack7: 222222

-하이젠버그: 333333

댓글들이 폭주했다.

초반 몇몇 댓글을 제외하면 대부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편법을 썼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며.

그러나 잠시 뒤.

[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영상이 올라가자마자, 반신반의하던 반응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직접 두 눈으로 모든 과정을 봤으니까.

-kdc123: 와….

-하이젠버그: 허허.

-fekk91: 진짜 할 말이 없다.

-왕위계승중: 솔직히 핵 쓴 거 아니냐 저 정도면? ㄹㅇ로 저게 사람의 움직임임?

-바밤바: 나무 조각 가지고 궤도 트는 거 보소. 캡틴아메리카 한국 출장 온 줄.

-토끼공듀: 그냥 감탄밖에 안 나온다. 미쳤네. 미쳤어. 나도 7층까지 찍었었는데, 저거 보니 걍 쭈그려 있어야 할 듯. 100번을 죽었다가 깨도 저 고인물 발끝도 못 따라가겠는데?

약간의 고저가 있을 뿐, 영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킹스맨: 저 오성반도체 이사 박호식이라고 합니다. 계약금으로 10억. 그리고 매월 1억 원을 지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재드래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이 댓글 보시면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지금 팀을 모으고 있는데....

심지어 함께해 달라며 애걸하는 댓글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진혁은 커뮤니티에 있는 글들을 읽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물론, 탐욕의 맹그로브를 1레벨 때 잡는 게 쉽진 않지만.

체감상으로는 글쎄....

'이 정도로 놀랄 것도 아닌데.'

아! 하긴.

다른 사람들은 탑의 중후반을 플레이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자꾸 까먹는다니까.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10억이라....'

현실감 없는 액수를 보자, 과거가 떠올랐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삶이었다.

방세마저 밀리기 일쑤였고.

먹방에 쓸 음식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씩 굶은 적도 있었다.

하루 전에만 이 돈을 제시했다면 두말하지도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10억을 주든. 100억을 주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 줄 생각은 없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다.

진혁이 핸드폰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을 검색했다.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한 대형 박물관.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 시련의 탑이 나타난 여파로 인해 흘러넘친 마력이 서울 전역으로 뻗어나갔었다.

대부분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딱 하나 크게 변한 게 있었다.

바로 탑 밖에 있던 유물들이 성유물로 변해 버린 것.

물론 진짜는 아니다.

신화 속 능력을 간직한 성유물들은 탑 내부에 있었으니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레플리카.

다시 말해 복제 버전이다.

'가장 많은 레플리카를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여기지.'

수많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

국립 중앙 박물관은 일종의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걸 노리는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에서만 7군데 나타난 맹그로브 나무와 다르게 국립 중앙 박물관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분명 각지에서 유물을 노리는 놈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중에는 고인물들도 있을 테고.

"슬슬 준비를 해야겠어."

진혁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움직이는 건 관람객이 모두 사라진 밤이다.

***

진혁은 용산역에 위치한 이마트에 들렀다.

해가 지기 전까지 쇼핑해야 할 물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종이로 쓸 한지(韓紙)는 구했고.'

30cm 길이의 과도도 5개 정도 카트에 담았다.

'이 정도면 됐나?'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과도라는 점이 조금 아쉽긴 했으나 어차피 그건 남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기껏해야 식칼이나 망치 따위가 구할 수 있는 전부겠지.

진혁이 카트를 밀고 계산대로 향했다.

때마침, 진열되어 있는 TV에선 시련에 탑에 관한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정부는 지금 이 사태에 대해 적극 조사에 나서고 있으며....

-대통령은 오늘 오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각료들을 모두 소집하였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하지만, 백날 대책을 세우려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논리와 이성을 대입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진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 게 보였다.

낮이 끝나고.

밤이 오고 있었다.

4화 국립중앙박물관 (1)

서걱!

진혁이 과도로 손가락 끝을 살짝 그었다.

금세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루 전이었다면 이건 '몸속에 흐르는 붉은색 액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력이 깃들어 있는 피는 다양한 주술과 마법을 현실화하는 매개체였으니까.

'공간을 왜곡하는 결계는 꽤 오랜만에 해 보네.'

탑 내에서 쓸 수 있는 정식 결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발동하는 게 그리 쉬운 편은 아니었다.

진혁이 한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스윽!

dētórquĕo.

피로 쓴 라틴어가 은은한 빛을 냈다.

'좋아. 여긴 됐고.'

다음은 동쪽 입구였다.

진혁은 국립 중앙 박물관의 4개 방위에 결계를 만들기 위한 시동어를 작성했다.

마지막 북쪽 입구까지 끝나자.

우우우웅!

투명한 막이 박물관 전체를 뒤덮었다.

[결계 '미숙한 차원 단절'이 발동됩니다!]

[시야가 왜곡됩니다.]

[소음이 70%만큼 감소합니다.]

재료가 더 좋았으면 '미숙한'이라는 형용사를 뺄 수 있었을 텐데. 마트에서 구입한 재료와 마력의 농도가 옅은 피로는 이게 한계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나쁘진 않아.'

시야를 왜곡한 뒤, 소음까지 줄여 놨으니.

최소한 경찰들이 오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과 발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생각나네.'

처음 박물관에 왔을 땐 결계도 치지 않아서 난리가 났었다.

경찰차 수십 대에 헬기까지 뜨고 삼주 동안 현상금 이벤트까지 걸렸던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때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글쎄.

과연 실제로 어떨지는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이벤트 지역에 입장했습니다.]

내부로 들어오자마자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역시....'

예상은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사람들도 바뀔 거라고.

하지만.

예상과 현실의 격차는 생각했던 그 이상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경비원이 보였다.

흘린 피를 보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네.'

혼자가 아니었다.

시체에 있는 상처는 최소한 3종류 이상의 흉기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건.

중근세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유물일 거다.

정확히는 이곳에 침입한 모든 사람들이 노리는 거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 간행한 지도다.

물론, 침입자들이 대한민국 8도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건 아니다.

마력이 주입된 고지도는 시련의 탑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모두가 이 지도를 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디에 무슨 미궁과 유적이 있고.

어떤 아이템과 몬스터들이 있는지 낱낱이 적혀 있다면, 그 누가 탐내지 않을까?

비록 10층까지의 정보밖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눈에 불을 켜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

다들 그것만을 탐낼 거다.

'진짜로 중요한 성유물들은 진흙 속에 감춰져 있다는 걸 모를 테니.'

***

퍽! 퍼억!

우드득!

"끄아아악!"

"이 개놈의 호로자식들!"

"놔! 이건 내 거다. 내 거라고!"

비명과 고함이 뒤섞였다.

깨진 진열장 밖으로, 오랜 세월을 영위한 유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그때.

"동작 그만. 동작 그마아안!"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30대 초반의, 스포츠머리를 한 근육질의 남자였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은 나한테 다 죽는다."

교과서적인 협박이 이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랄하고 있네."

"여기 그딴 말에 쫄 놈 하나도 없어."

"너야말로 발가락 하나라도 꼼지락거렸다간 내가 골통을 부숴 주지."

주위 사람들이 각자 흉기를 매만졌다.

성유물을 위해서라면 살인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듯이.

"...나. 용두파 오형석이다."

한국에서 조직폭력배가 거의 사라졌다지만, 용두파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푸하하! 조폭이란다 조폭. 어이구 무서워라. 그랬어요?"

"조폭이면 배때지에 칼 안 들어간다냐?"

비아냥거리는 반응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먹히는군."

오형석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그극!

양팔에 균열이 일어났다.

신체를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고유 능력.

'암석화'였다.

그때서야 이죽이던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버, 벌써 고유 능력을 손에 넣었다고?"

"젠장, 저건 위험한데...."

다들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특별한 기연을 통해야만 개화할 수 있는 게 바로 고유 능력이다.

당연히 날붙이 따위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터.

분위기가 순식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도는 내 꺼다."

오형석이 주위를 훑어봤다.

마치 소유권을 못 박는 것처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허허. 그 말엔 동의하긴 힘들구만."

뒤쪽에 있던 늙수그레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오형석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어이, 영감. 방금 못 봤어?"

"영감이 아니라 민정우라고 하네. 정과 우애로 살아가라 뭐, 이런 뜻이지."

"누가 통성명이나 하재? 분위기 파악하고 빠져 있어. 그 말라비틀어진 목, 닭 모가지 비틀듯 꺾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이거, 젊은 친구가 입이 참 험해. 혀에 칼이 달렸어. 쯧쯧."

민정우가 씁쓸한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어진 말에는 씁쓸함 대신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으니까.

"한데, 자네가 내 목을 꺾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자네를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게 빠를까?"

화르륵!

민정우의 손바닥 위로 주먹만 한 불덩이가 이글거렸다.

불의 원소를 다루는 고유능력.

"마...법?"

그렇다. 바로 마법이다.

오형석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피할 새도 없이.

민정우의 손을 떠난 불덩이가 순식간에 오형석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콰콰콰콰콰!

"끄아아아악!"

오형석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사,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두 팔이 암석으로 뒤덮였다고 한들. 나머지 부분은 연약한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암석화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끄으으으...."

비명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 했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검게 탄 숯덩이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야. 화염계열 마법이 진짜 화끈하긴 화끈하네. 역시 손을 잡길 잘했어."

민정우 옆에 있던 단발머리 여자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유리 양. 그럼, 뒤를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 방해하는 놈 있으면 내가 다 처리할 테니까."

이유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검은색 석상을 바닥에 놓았다.

쿠쿠쿠쿵!

석상이 점점 거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칼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형상.

이집트 특별 전시관에 있던 '아누비스의 화신'이었다.

"크르르...."

아누비스의 화신이 긴 창을 앞으로 뻗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할게. 알지? 머리통부터 아작아작 씹어 먹게 할 거야."

이유리가 생긋 웃었다.

2m가 훌쩍 넘는 몬스터의 등장에,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조차 못 했다.

게다가 각성자가 하나가 아닌 둘이다.

마법사와 소환사.

까다로운 놈들로만.

"제기럴."

"무슨 놈의 고인물들이 이렇게 많아. 죄다 각성했네."

"지도고 나발이고 포기할 테니. 다 가져가라. 가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움직인다는 건 곧 죽여 달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저벅.

누군가 보란 듯이, 굳어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카득. 카드득.

유리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거기. 겁대가리 상실한 오빠. 내가 지금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이유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크르르!"

땅을 딛고 있는 자칼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주인이 명령하면 즉시 뛰쳐나갈 수 있도록.

그러나 남자는 이유리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했다.

"으이그. 완전히 개판을 만들어 놨구만. 이 사람들은 고 미술품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나?"

진혁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림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먼지와 유리조각을 툭툭 털어 냈다.

"그래도 찢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네."

손상이 심했다면 사용할 수 없었을 거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움직이면... 죽인다는 말. 안 들리냐고!"

이유리가 고함을 지른 건 바로 그때였다.

동시에.

부우우웅!

몸을 뒤로 젖힌 아누비스의 화신이 창을 집어 던졌다.

투창(投槍)이다.

바람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포물선이 아닌 직선 궤도.

그렇기에 체감 속도는 몇 배나 더 빠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창이 목표물을 꿰뚫기 바로 직전.

콰아앙!

진혁이 주먹으로 날아오는 창의 측면을 쳐냈다.

창이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다가 바닥에 꽂혔다.

"미친!"

"바, 방금 저 사람 뭐 한 거냐?"

"창을 쳐냈어. 아니, 저게 말이 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강철로 만든 쇳덩이를 던진 건데.... 주먹이 다 으스러져야 정상 아니냐?"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내 스탯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맹그로브의 나무 열매를 먹은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고작해야 3스탯을 올린 게 전부였다.

반면 이쪽은 무려 12개의 스탯을 분배해 뒀다.

"어떻게 하냐? 네 강아지, 하나뿐인 무기가 사라져 버렸네?"

진혁이 이유리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그래...? 내가 갖고 있는 석상이 하나였다고?"

이유리가 손가방에서 석상 4개를 더 꺼냈다.

이 녀석. 대체 이집트 전시관에서 얼마나 훔쳐 온 거냐?

남의 나라에서 잠시 전시하라고 빌려준 유물들을 제 것인 마냥 쓰고 있네.

"너, 파라오한테 혼난다. 그러다가."

"이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나 할 때야?"

농담 아닌데.

진짜로 이집트 신화 쪽 유물 막 쓰고 그러면 나중에 저주 비슷한 거 받는다.

푸는 데 지독하게 고생해야 되는, 그런 종류의.

[성유물 '아누비스의 화신(레플리카)'이 일어납니다!]

쿠쿠쿠쿠쿠!

"크르르...."

"크아아!"

"크릉!"

"컹! 컹! 컹! 컹!"

'아누비스의 화신' 4마리가 더 나타났다.

칼과 방패, 창, 헬버드와 철퇴 등으로 무장한 채 굵은 이빨을 드러냈다.

"어때? 이래도 웃을 수 있겠어?"

이유리가 좌우로 도열한 소환수들을 기세등등하게 바라봤다.

"제법이야. 솔직히 약간 놀랐어."

적은 마력으로도 다섯 마리를 동시에 유지시킬 수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그저 그런 수준은 아니다.

아까 전에 마법을 다루는 노인도 그렇고.

의외로 병아리 티를 벗어난 고인물들이 많구나.

"...약간 놀랐다고?"

이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정확히는 '약간'과 '아주 약간' 사이 정도?"

"허세부리지 마. 도망칠 궁리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그래 보여?"

하긴, 말만 해서야 그렇게 보이겠지.

그렇다면.

보여주면 된다.

허세인지 아닌지.

진혁이 종이를 펼쳤다.

[성유물 '소나무와 호랑이(레플리카)'에 마력이 주입됩니다.]

[산(山)의 지배자가 현현합니다!]

시대: 조선

신원: 미상

알려진 거라곤, 그저 한 시대의 가장 두려웠던 존재를 그려 넣었다는 것뿐.

"크오오오오오!"

종이에서 나타난 호랑이가 거칠게 포효했다.

대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쿠웅!

3m에 이르는 체구와 꿈틀거리는 근육.

샛노랗게 빛나는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유리가 입을 뻐끔거렸다.

단순히 실체화시키는 게 아니라 원류(源流)를 현현(顯顯)시킬 수 있다니.

지금까지 성유물에 관한 다양한 사용법이 공개되었지만, 이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건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이 마력.

저릿저릿!

따갑게 피부를 찌를 정도로 농도가 짙었다.

그저 거대화시켰을 뿐인 석상과는 다르다.

저 그림에는 과거 태산을 지배했던 영물의 힘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숫자는 5대 1이지만.

'승산이... 없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사막의 자칼 따위가 산군(山君)에게 덤비면 안 되지."

진혁이 호랑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5화 국립중앙박물관 (2)

툭! 툭!

"먹어치워."

진혁이 호랑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크아아아아!"

거대한 덩치를 가진 맹수가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퍼퍽! 퍼퍼벅!

자칼들의 몸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이다.

"깨갱!"

"깽!"

마치 공룡에게 덤비는 개미들처럼, 이집트를 수호하는 5마리의 화신은 변변찮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

덜덜덜!

이유리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내 소환수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최강의 패라고 확신했다.

박물관에서 대동여지도를 얻는 것쯤은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째서?

이유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였다는 사실뿐이었다.

"당신. 대체 탑을 몇 층까지 올라간 거야?"

"글쎄. 몇 층까지 가 봤으려나."

"서, 설마. 20층을 넘어간 건 아니겠지?"

"...."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21층. 22층.... 그것도 아니면 설마 2, 23층이야? 23층?"

이유리가 계속해서 물었다.

1층씩 올리는 게 귀엽네.

겨우 20층대를 말하는 거로도 숨이 넘어가려 하는데.

50층까지 올라갔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입에 거품 물고 실신이라도 하려나?'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로 넘겨야겠다.

"내가 몇 층까지 올라갔는지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진혁이 이유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이유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주, 죽이려고?"

"잔뜩 겁먹은 뉴비를 죽이는 취미는 없어."

양학이나 하면서 낄낄대는 건 오래전에 졸업했다.

"누, 누구보고 뉴비라는 건데! 나도 나름대로...!"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이집트 전시관에서 얻은 유물 중에 '투탕카멘의 가면'이나 내놔."

진혁의 말에 이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한국에선 별 쓸모도 없는 건데, 어디다 쓰려고?"

"그것까진 네가 알 거 없고. 오늘 밤 호랑이 배 속에서 캠핑하고 싶지 않으면 어서 내놓기나 해."

진혁이 옆에 있는 호랑이를 힐끗 바라봤다.

"크르르...."

이미 자칼들을 씹어 삼킨 뒤라 입가에 피가 흥건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주, 주면 되잖아. 주면!"

이유리가 마지못해 가방에 넣어 뒀던 가면을 꺼냈다.

황금으로 만든 파라오의 가면.

[성유물(레플리카) '투탕카멘의 가면'을 획득하셨습니다.]

'좋아.'

이곳에 오기 전에 1층에서 얻은 첫 번째 성유물에 이어, 이걸로 두 번째 성유물까지 확보했다.

"당신도 대동여지도를 노리고 있는 거야?"

"지도?"

맞다. 그런 게 있었지.

관심에도 두지 않던 거라,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10층까지의 정보가 적혀 있다나 뭐라나.

"뭐, 그렇다고 해 둘게."

피식 웃은 진혁이 마지막으로 호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기 잘 지키고 있어. 아무도 뒤따라오지 못하게."

"크아앙!"

호랑이가 다음 층으로 가는 층계의 입구를 지켰다.

그럼.

'가 볼까.'

진혁은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

"이건 정말.... 의외로군."

위로 올라가자 민정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놀란 듯한 눈치다.

이유리가 뚫릴 줄은 상상하도 하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있는 겁니까?"

목적이야 대동여지도였을 터.

이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싶었네만 누군가 이 앞에 결계를 쳐 놨네."

민정우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웅!

손이 튕겨 나갔다.

"물리적인 공격이든, 마법이든 모두 소용없어. 이런 종류의 결계는 처음 봐."

그렇겠지.

"1성급 결계니까요."

"호오. 이거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대충은...."

박물관 주위에 설치해 둔 결계와 다르게 이건 '진짜' 결계다.

스킬을 통해 만든 결계라는 뜻이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와 있었군.'

이 능력을 자주 쓰는 플레이어를 하나 알고 있다.

게임 내에서도 지겹도록 많났던.

잠시 상념에 빠졌던 진혁이 입을 열었다.

"파훼하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단."

"단?"

"영감님께서 화염마법을 계속 사용해 주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계를 약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언제까지 말인가?"

"제가 가서 필요한 성유물들을 모두 챙기고 다시 나올 때까지요."

"허허. 그러니까. 자네가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결계 밖에서 마법이나 써라?"

이야. 이해력이 빠르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 주고 싶다.

"못 믿는 건 이해하지만, 이 방법뿐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날이 밝을 텐데, 우리 모두 빈손으로 나갈 순 없잖아요?"

개고생을 했는데 소득은 없다.

그거야 말로 최악의 결과리라.

"물론, 지도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전 그것보다는 다른 게 더 필요하거든요."

"...."

민정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걸 선택하는 게 이득인지.

어느 걸 선택해야만 하는 건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야 결론은 하나뿐이다.

믿는 수밖에 없겠지.

민정우 입장에선 찝찝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유일한 길인 걸.

"지도는 확실히 넘겨주는 건가?"

"물론이죠. 저도 마법계열의 고유 능력자와 적대관계로 남고 싶진 않습니다."

"알...겠네. 믿어 보지."

결국 민정우가 결정을 내렸다.

"쉬지 말고 계속 부탁드려요. 아니면 제가 저 안에 갇힙니다."

"최대한 해 보겠네."

진혁이 결계 앞에 섰다.

그리고 결계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았다.

마력의 흐름이 어긋나는 곳.

'여기다.'

...carpo.

피로 쓴 라틴어가 빛났다.

"지금입니다!"

화르르륵!

진혁의 말에, 민정우가 불줄기를 뿜어냈다.

뜨거운 화염이 결계의 표면을 빠르게 달궜다.

바로 그 순간.

파츠츠츠!

결계 한가운데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됐다.'

진혁이 재빨리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서, 서두르게."

민정우가 식은땀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노력은 할 생각이다.

'내 나름대로 말이지.'

***

아래층과는 다르게 이 층의 전시관은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딱 하나 달라진 게 있었다.

'이미 볼 일을 마치고 떠갔군.'

진혁이 텅 비어 있는 진열장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건륭(乾隆)이 새겨진 철기검'이 보관되어 있던 진열장이었다.

다른 곳에서 사람들이 싸우든 말든.

원하는 것만 확보한 뒤 떠난 게 틀림없었다.

'과연, 작은 위험부담도 무릅쓰려 하지 않는 건 여전하네.'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만 쏙 빼먹어 버린다, 이거잖아?

하지만 그런 녀석조차도 모르고 있을 거다.

지금 이 박물관에서 가져간 게 2등짜리에 불과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이쯤에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진혁은 진열관 사이를 거닐었다.

그러다 한 곳에서 멈췄다.

녹슨 철로 만든 둥근 원형의 유물.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 인조 때 만들어 후기까지 사용되었던 화폐다.

물론, 지금은 단순히 통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드디어 찾았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고유 능력.

그리고 그걸 위해 필요한 마지막 퍼즐 조각.

마침내 모든 것이 손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지, 지금 뭐 하는 겐가!?"

결계 밖에 있던 민정우가 고함을 질렀다.

"뭘 하다뇨?"

"바로 대동여지도부터 확보하지 않고, 왜 엉뚱한 거에 멈춰 서 있냔 말일세."

"좀 기다려 보세요. 지도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제 것부터 해결한 다음에 예쁘게 포장까지 해서 드리겠습니다."

한창 중요한 시간에 방해하기는.

진혁이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구한 성유물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투탕카멘의 가면(B)'.

여기서 필요한 건 '오른쪽 눈'에 해당하는 부위다.

우드득!

과도로 눈이 있는 부위를 파낸 뒤, '페르시아의 의식용 거푸집(E)'에 담았다.

[두 개의 성유물이 반응합니다.]

짧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알맞은 성유물들이 만났을 때만 나타나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더 진행하고 싶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후두둑!

진혁이 손에 쥐고 있는 '상평통보(D)' 15개를 거푸집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우우우웅!

거푸집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3개의 성유물이 반응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셨습니다!]

[성유물 '진실의 눈(SS)'을 획득하셨습니다!]

[진실의 눈]

입수 난이도: SS

내용: 타인의 상태창을 열람할 수 있으며. 대상이 한 말의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하루 3회).

'성공이다!'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고동쳤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5개의 '눈'.

그중에서 '진실의 눈'은 가장 좋은 눈으로 평가받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 눈엔 하루에 3번, 타인이 한 말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특수 효과가 붙어 있었다.

가히 사기적이라 할 수 있는 효과다.

하지만, 이토록 흥분되는 건 단순히 '진실의 눈'을 획득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뒤에 더욱 거대한 보상이 따라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극악의 확률을 뚫고 융합에 성공하셨습니다.]

[기연을 달성했습니다.]

[고유 능력 '융합(오버랭크)'을 획득하셨습니다!]

B급 이하의 레플리카 3개를 융합해 S급 이상의 아이템을 만들어라.

이것이 고유 능력 '융합'을 얻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성유물들과 아이템들 중 이 조합이 가능한 경우는 단 한 가지.

바로 저 3개를 융합하는 경우뿐이다.

[고유 능력 '융합']

입수 난이도: 측정 불가(오버랭크)

내용: 특정 퀘스트를 달성해 타인의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세계의 기억'에 저장할 수 있으며, 거기에 저장된 스킬들을 융합해 고차원의 능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단, 복사되는 조건의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할 경우. 조건이 일정부분이 수정될 수 있습니다.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능력을 복사해 저장하고.

저장된 능력을 융합해 더욱 강력한 스킬을 만든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곳에 온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후우."

진혁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 두 가지를 얻으려고 저녁 내내 준비했었는데 일이 수월하게 잘 풀렸다.

그 때.

"이봐!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끝났으면 빨리.... 더 이상은 힘드네!"

민정우가 이를 꽉 깨문 채 외쳤다.

이젠 얼굴이 아예 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력 고갈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어디. 저 노인의 능력을 복사하려면 어떤 걸 해야 하는지 볼까?'

[복사 조건: 민정우는 언제나 가면을 쓴 채 감정을 숨겼습니다. 그의 본심이 드러나게 만드십시오.]

'한 마디로 말해, 빡치게 만들라 이거지?'

물론, 쉬운 일이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더.

진혁이 대동여지도를 꺼낸 뒤 민정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스킬. 이제 그만 사용하셔도 돼요."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사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거든요."

결계를 약화하는 데 다른 것도 아니고 공격 마법을 계속 써야 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는가?

애초에 서로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데.

그냥 마력의 흐름이 어긋나는 부분에 라틴어로 된 파훼 주문을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결계를 펼친 놈 역시 아직은 레벨 1에 불과했으니까.

"그, 그럼 왜 나보고 스킬을 쓰라고 한 거...지?"

왜긴.

"그래야 영감님의 마력이 모두 고갈될 테니까요."

바로 이것 때문이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마법을 쓰는 모습, 아주 잘 봤다.

이젠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을 거다.

만약.

눈앞에서 지도를 불태워 버려도 말이다.

화르륵!

진혁이 라이터를 이용해 대동여지도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불길이 종이 전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대체 그걸 왜 태워! 대체 왜...?"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이게 필요 없거든요."

이미 탑에 관해선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지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근데. 이게 또, 다른 사람 주긴 아깝단 말이지.'

지도가 있으면 누군가는 10층까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내가 갖고 있는 이점이 사라질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가능성을 없애 버리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 이 개자식이! 죽여 버리겠어! 아주 갈아 마셔 버리겠단 말이다. 쌍놈의 새끼야!"

민정우가 이성을 잃어버렸다.

'와. 저 영감님도 화나면 아주 걸쭉하게 내뱉는 스타일이었구나.'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때마침.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불의 원소(B)'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불의 원소]

입수 난이도: B

내용: 불꽃을 다루고 불에 대한 친화력을 올려 줍니다.

복사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불의 원소라....'

첫 복사치고 나쁘지 않은 스타트다.

6화 국립중앙박물관 (3)

"후회하게 될…거다! 이 일은 반드시 기억하겠어!"

민정우가 진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뭐랄까.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말이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해 못 한 것 같은데. 제가 왜 지도를 태웠는지 모르겠어요?"

10층까지의 정보가 필요 없다, 이 말은.

곧 10층까지의 정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설마...."

그제야 민정우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사히 탑 10층까지 오르고 싶으면 까불지 말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좌로 밀착이라고 하면 좌로 붙고. 우로 밀착이라고 하면 우로 붙으란 소리다.

혹시 아나?

말을 정말 잘 들으면 떡이라도 하나 줄지?

"지도까지 태운 걸 보면 아무래도.... '정보 탐색'에 관련된 고유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군. 자신감을 부릴 만해."

민정우가 멋대로 가정했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그딴 말을 왜 들어야 하지? 자네를 불로 지져 버린 다음에 원하는 정보만 빼내면 될 텐데?"

지금이야 마력이 바닥난 상태지만.

마력만 회복된다면, 사람 하나 태워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고문과 협박.

확실히 효율적인 수단이지.

만약에.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야...."

진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동시에 양손에서 붉은 불꽃이 일어났다.

[Lv1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 저건 설마?"

민정우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민정우는 순간,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

"어떻게... 나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니...."

아니.

같은 능력이 아니다.

더 강하고 뜨거운 불꽃.

틀림없다.

최소한 한두 단계는 높은 수준의 화염 마법이다. 보유한 스탯과 스킬에 대한 이해도가 달랐기에 벌어진 격차였다.

꿀꺽.

민정우의 목을 따라 마른침이 넘어갔다.

설령 마력이 온전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민정우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하겠지.'

작은 불꽃으로 더 큰 불꽃을 집어삼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유리가 돌파당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녀가 갖고 있던 석상으론 턱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앞뒤가 맞지 않는 게 있었다.

"그런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숨기고 있던 거지? 처음부터 힘을 보였으면 나 따위는 간단하게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이유?"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결계를 뚫고 민정우 앞에 섰다.

"그걸 일일이 당신에게 설명해야 되나요?"

"그, 그건...."

"질문하는 것도 명령하는 것도 제가 하는 거니, 영감님은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눈을 마주친 민정우가 흠칫 몸을 떨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대답은?"

"알...겠네."

역시나.

완전히 꼬리를 말았다.

진혁이 불꽃을 거둬들였다.

"나중에 제 쪽에서 연락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래층에 있는 여자애 데리고 레벨업이나 열심히 하세요."

써먹으려고 해도 너무 약하면 오히려 짐만 되기 마련이었다.

'적어도 쓸모가 있을 정도까진 알아서 성장 좀 해 놔라.'

진혁이 등을 훤히 드러낸 채 계단을 따라 아래로 이동했다.

저벅.

기습을 당하면 그대로 허용할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

하지만, 민정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협박하면 오히려 반격할 기회를 노리지.'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다.

발끈하면 복수하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그러니 뼛속에 각인시켜 놔야 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히 덤벼선 안 된다고 생각하도록.

그래야 비로소 완전히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장기 말이 탄생하는 것이다.

***

진혁이 박물관을 벗어나 살고 있는 동네로 돌아온 건 아침 해가 뜰 무렵이었다.

정말로 긴 하루였다.

마치 몇 개월을 압축해서 하루에 쑤셔 넣은 것처럼.

"으으으!"

진혁이 기지개를 켰다.

팔과 다리를 천천히 풀어 주자 뻐근했던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시련의 탑이 개방되는 건 저녁이니 그때까지 밥 좀 먹고 눈도 좀 붙이도록 할까.'

푹 쉬고 잘 먹는 것도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무엇보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쉬기 전에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다.

"상태창."

진혁이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자.

띠링!

——————————————————

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

힘 8 민첩 8 체력 8 마력 11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스킬: Lv1 '불의 원소', Lv1 '진실의 눈'

——————————————————

상태창이 바뀌었다.

비어 있던 고유 능력과 스킬창에 새로운 글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크...."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가장 사기적이라고 평가받는 고유 능력을 손에 넣었으니 그럴 수밖에.

이제 막 출발선을 벗어난 단계긴 했지만, 기대감에 전신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침착하자.'

진혁이 떨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건 가능한 많은 고유 능력과 스킬들을 손에 넣는 거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능력들의 종류는 5만개 이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뜻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가장 필요한 능력들부터 모아야겠어.'

민정우로부터 '불의 원소'를 얻을 때는 복사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레벨 1짜리여서 그렇고.

랭크가 높고 레벨이 높을수록 복사하는 조건도 더욱 까다로워질 게 틀림없었다.

물론, 서둘러선 안 된다.

너무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일이 꼬여 버린다.

역사적으로 봐도 서두르다 망해 버린 케이스가 쌔고 쌨으니까.

반면교사(反面敎師).

'나는 그들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절대로.'

...라고, 대부분의 고인물들이 생각하고 있겠지.

실제로 국립 중앙 박물관에 나타난 고인물들의 수는 진혁을 포함해 4명뿐이었다.

이해는 한다.

리스크를 줄이고 싶다는 그 마음.

하지만,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행동하면서 남들보다 앞서나가길 바란다고?

그동안 남들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 주기로 약속이라도 받았나?

세상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자들을 위해 웃어 주는 법이다.

안전한 길만 찾는 겁쟁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해라.

'그동안 나는 앞으로 나아갈 테니.'

몸이 하나인 터라 모든 기연을 독식할 순 없겠지만....

대신, 가장 맛있고 중요한 건 오롯이 혼자서만 독식하겠다.

'너희는 나머지 부스러기들이나 나눠 가지라고.'

진혁이 피식 웃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한계네.'

생각이 정리되자 이번엔 참고 있었던 욕구가 솟구쳤다.

꼬르륵!

배에서 격한 진동이 느껴졌다.

밤새 움직이느라 위가 텅 비어 있던 탓이다.

'이럴 땐 역시 국밥이지.'

뜨겁고 뽀얀 국물. 듬뿍 들어간 고기. 새콤달콤한 깍두기까지.

7천원으로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메뉴로는 이것만 한 게 없다.

'이 돈으로 다른 거 사먹을 바엔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사먹고 말지'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디, 하나 정도는 열었을 텐데....'

찾았다.

간판부터 3대는 족히 해 왔을 법한 포스가 느껴지는 국밥집을.

진혁이 곧장 24시간 순대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덜컹! 따르―릉!

문이 열리며, 요란한 종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식당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세상에나...."

"이게 진짜였다니."

수십 명이 넘는 손님도 종업원도 그리고 사장님도.

모두 뉴스에서 나오는 긴급 속보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정부는 '시련의 탑'이라 명명된 정체불명의 건축물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공무원들을 위주로 '각성자 협회'라는 특수 부서를 신설하게 되었습니다.

"호오."

진혁도 흥미롭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각성자 협회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정부의 대응이 빨랐다.

게다가 고유 능력을 각성한 이들로 부서를 구성했다는 걸 보면, 이번 일을 꽤나 유연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게 틀림없었다.

'이건 의외로군.'

적어도 몇 주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부의 이토록 빠른 대처는 역시나 오늘 새벽에 있던 일 때문이겠죠?

-예. 그렇습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최소 23명이 사망하고 5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부상이 심각한 사람들이 있어 사망자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입니다.

-저런.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무래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들을 노렸던 것 같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각지에서도 같은 사건이 발생한 상황이고요.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

'역시나.'

다른 나라의 플레이어들도 움직였다.

레플리카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탑에 오를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우선, 내부 CCTV 영상을 한번 보시죠.

화면이 바뀌었다.

나타난 것은 두 명의 남녀가 전투를 펼치는 장면이었다.

아누비스 석상을 거대화시킨 여자도 놀라웠지만.

콰아앙!

날아오는 창을 맨손으로 쳐내고.

콰콰콰콰!

그림에서 호랑이를 불러내는 부분은 경악 그 자체였다.

호랑이가 다섯 개의 석상을 찢어발겼을 때는 아나운서마저도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버린 일이었으니까.

-...미, 믿기 힘드시겠지만, 과장 없는 현실입니다.

몇 초 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아나운서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식당 안이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말도 안 돼.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세상에나."

"대체 누구지?"

비교적 나이가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반면.

"저, 저거. 얼마 전에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떴던 그 사람이잖아!"

"아. 맹그로브 나무를 나무 파편으로 처리했던 영상?"

"맞네. 저 반사 신경, 움직임! 그 고인물이다!"

젊은 층들은 대번에 알아봤다.

현재 모든 포털 사이트와 커뮤니티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진짜 궁금하다. 정체가 뭘까."

"정부에서 비밀리에 개발 중이었던 최종병기일 수도."

"유명 BJ란 이야기도 있어."

추측성 발언이 난무했다

옆에 있던 진혁이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대놓고 저런 말들을 듣자니 귓가가 간질거렸다.

바로 그때.

TV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40대 초중반의, 날카로운 인상을 갖고 있는 남자였다.

-...각성자 협회를 맡게 된 한상진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검상과 차가운 눈동자가 돋보이는 남자다.

'한상진이라....'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협회장을 맡을 정도면 꽤 좋은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려나.

아니면.

시련의 탑을 오랫동안 플레이해 봤기 때문이려나.

가능하면 전자였으면 좋겠다.

그래야 언젠가 만났을 때 능력을 복사할 수 있을 테니까.

진혁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한상진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각성하신 분들을 모집하기 위해서입니다.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을 테지만, 최저 연봉 6천에 7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파격적이다 못해 눈이 돌아갈 만한 대우였다.

나름대로 각성자들을 모으려고 하는 것 같긴 하다만, 글쎄....

기회의 땅을 내버려 두고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물론, 방송에 나오셨던 분은 예외입니다. 제가 협회장의 이름을 걸고 제안 드리죠. 저희와 함께하시면 원하는 게 그 무엇이든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드리겠다고.

왜 이렇게 요란하게 난리를 치나 했더니.

'목적은 나였나.'

그저 그런 플레이어 100명보다는 숙련된 한 명이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상진도 그걸 알고 있기에, 백지 수표를 들고서 회유에 나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나를 호구로 보네.'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고 해도 어디에 소속될 생각은 없었다.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할 생각도 없었고.

진혁이 힐끗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12시간 남았다.

정확히 저녁 7시.

시침이 새로운 시간을 가리킬 때.

시련의 탑이 개방될 것이다.

7화 미궁 리바린토스 (1)

진혁이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섰다.

기존의 상식과 법칙을 무너뜨린 불가사의.

인류의 미래가 걸린 관문.

시련의 탑.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 될 장소가 바로 여기다.

아직 내부로 들어가는 게이트가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꽤 많이들 모였네.'

탑 주위엔 이미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층 '고블린 동굴'부터 가야 해. 거기서 자리 잡고 사냥하는 게 최고야."

"알고 있어. 무조건 레벨업부터 빨리 해야지."

"이번엔 반드시 탑을 끝까지 올라 보자고."

팀을 이뤘거나.

아니면 솔플이거나.

다들 남들보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19:00]

['시련의 탑'이 개방됩니다.]

전 세계에 나타난 탑들이 동시에 개방됐다.

"열렸다!"

"빠, 빨리 들어가!"

"서둘러!"

기다리던 사람들이 물밀 듯이 게이트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진혁도 움직일 채비를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빛 속으로 걸어갔다.

***

우우우웅!

탑의 내부로 들어가자,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가 펼쳐졌다.

드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

그리고 지평선 너머로 맞닿아 있는 푸른 숲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시련의 탑 1층이자, 한국에서 온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스타팅 포인트다.

"오오오!"

"드디어 왔다!"

"예전에 했던 거랑 완전히 똑같아!"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흥분과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뭐랄까.

마치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뉴비들 같았다.

물론, 그 심정 충분히 이해된다.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감회가 새롭긴 하네.'

진혁이 손끝으로 허리까지 자라 있는 풀을 쓰다듬었다.

향긋한 풀내음과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

햇볕의 따스함까지.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게임하곤 다르다.

이건 현실이었으니까.

'죽으면.... 그걸로 끝이겠지.'

다시 부활해서 시작하는 것 따윈 없다.

진혁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띠링!

[시련의 탑에 입장하신 걸 환영합니다.]

눈앞에 푸른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시작되는군.'

진혁이 이어질 내용을 기다렸다.

[탑 입장 기념으로 100코인이 지급되었습니다.]

[코인은 탑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화폐입니다.]

[플레이어분들은 자신의 업적을 영상으로 남겨 업로드할 수 있으며, 10,000 조회수당 100코인이 지급됩니다.]

[단, 수수료는 플레이어의 등급에 따라 차등화됩니다.]

[탑 외 거주자 분들이 본 영상은 최초 1회만 조회수로 카운팅 되오니. 영상을 시청하시기 전에 신중한 선택 부탁드립니다.]

[생방송은 오직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한 보스몬스터를 상대할 때만 켜실 수 있습니다.]

[조회수 조작이나 기타 부정행위 등이 적발될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탑을 오르는 자들과 탑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이어 주는 연결다리가.

플레이어는 최대한 다양하고 참신한 영상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시청자들은 탑의 끝을 볼 가능성이 높은 플레이들의 영상을 보며, 조회수를 올려준다.

시련의 탑 설정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게 바로 이 시스템이었다.

'유명 BJ가 될수록 코인을 독식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앞으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다양한 콘셉트의 영상을 업로드할 것이다.

그러나 진혁은 당분간 동영상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코인 따위보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공개되는 게 훨씬 더 손해야.'

나중에 다 쓰고 단물이 빠진 정보들 위주만 편집해 올려도 반응은 폭발적일 터.

벌써부터 방송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시청자들에게 질질 끌려 다닐 수 있는 생방송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슬슬 가 볼까.'

진혁이 숲의 한쪽을 바라봤다.

가정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 뒀다.

남들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길을.

***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사냥터는 세 가지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던전, 미궁 그리고 유적으로.

던전은 보스몬스터와 양산형으로 구성된 소형 사냥터다.

가장 무난하고 가장 많이 퍼져 있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곳을 주로 애용했다.

반면, 미궁은 굉장히 넓은 크기를 자랑하며 몬스터의 강함보다는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한 달 이상.

심지어 상위층에 있는 미궁은 6개월 이상 공략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적은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난이도가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드래곤, 거인, 정령수나 영물 등 최상위종이 주로 보스를 맡고 있는데다, 까다로운 함정들과 결계들까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진혁이 찾은 곳은 1층 정중앙에 위치한 미궁 '리바린토스'였다.

[이름: 리바린토스

종류: 미궁

난이도: B

내용: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크레타의 미궁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미로와 다양한 종류의 함정들이 있는 게 특징입니다.]

평범한 고블린 던전이 F급인 걸 감안하면, B급 미궁은 지옥 그 자체였다.

이제 막 시련의 탑에 들어온 초보가 미궁으로 들어간다?

그냥 자살하고 싶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진혁이 이곳을 고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6년 전이었던가.

탑의 30층 초반을 공략하고 있었을 당시, 진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미친 듯이 해결책을 찾았다.

아래층을 뒤져 숨겨진 히든 피스를 모으기도 하고, 지나온 길을 일일이 되새김질하기도 했다.

허나 모두 소용없었다.

소용없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기초부터 부실했었으니까.

문제점을 알았을 땐 패닉에 빠졌었다.

눈물을 머금고 키운 계정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했을 땐, 접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고.

그러나 이를 악문 채 계속했기에, 결국 10층의 한 유적에서 고서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탑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1층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관해 적혀 있는.

-1층 유적 '타락한 자들의 회랑'을 공략하는 방법은 처음 탑에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유적의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처음 왔을 때 그대로.

다시 말해, 1레벨인 상태로 보스한테까지 가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진혁의 눈앞에 있는 미궁은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한 수련 장소...라고 할까?

음....

단순히 수련이라고 하기엔 약간 어폐가 있다.

이 미궁 안을 배회하는 괴물에게 '살살해 준다'라는 선택지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설마, 내가 이걸 다시 하게 될 줄이야.'

진혁이 미궁을 보며, 쓰게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다시 오지 않겠다고 가래침 뱉으며 나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왜, 군 생활 하면서 '그래도 한 번은 해 볼 만했지'라고 생각하며 제대했는데 다음 날 눈 떠 보니 신병 교육대인 기분.

그게 딱 지금 심정이었다.

그래도.

'혼자서 들어가는 건 아니니 심심하진 않겠지.'

진혁의 시선이 힐끗 뒤쪽으로 향했다.

처음 시련의 탑에 입장했을 때부터 따라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름대로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완벽하게 미행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어설프다.

전형적인 뉴비들답게.

'귀엽네.'

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쎄.... 그게 마음처럼 되려나?'

***

멀찍이서 진혁의 뒤를 밟던 대여섯 명의 남녀가 혀를 찼다.

"뭔가 있는 것 같아서 따라왔더니. 미궁이었잖아?"

"흐음. 이런 데 미궁이 있는 줄 몰랐는데."

"빌어먹을.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고블린 사냥이나 하면서 광렙이나 하자고!"

"내가 일부러 그랬냐? 고인물 포스를 풀풀 풍겨서 히든 피스라도 먹으러 온 건가 했지."

"싸우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 지금이라면 아직 자리가 비어 있는 곳이 있을 거야."

여러 개의 목소리가 오갔다.

대부분은 시간낭비였다는 내용이었지만.

그때.

"쉿! 기다려 봐. 저 인간 하는 것 좀 보고."

가장 앞쪽에 있던 여자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왜?"

"잘 봐. 저 남자, 미궁 입구에 문자를 그려 넣고 있어."

여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진짜다.

처음 보는 문자가 푸른색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쿠쿠쿠쿠쿠!

이내 땅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미궁이 개방되고 있는 것이다.

"미친!"

"실화냐 이거?"

"열쇠도 없이 미궁을 열었다고?"

지켜보던 이들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미궁에 입장하려면 열쇠나 재료 따위가 필요할 터.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입구를 열 줄이야.

상식이 완전히 깨져 버린 상황 속에서 모두들 입을 쩍 벌린 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자. 저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도 가야 돼."

침묵을 깬 건 가장 앞쪽에 있던 여자였다.

"뭐?"

"들어가자고? 무슨 종류인지, 얼마나 큰지도 모르는데?"

"박하나. 너, 지금 제정신이야?"

"조용히 하고 생각해 봐."

박하나라 불린 여자가 답답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도 시련의 탑에서 초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 아냐?"

"그거야...."

"알고는 있지."

난이도가 극악일수록, 초반의 성장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특히나 [시련의 탑]을 한 번이라도 플레이해 봤던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박하나가 말을 이었다.

"열쇠도 구하지 않았는데, 미궁이 열렸어. 이런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아?"

경험치, 아이템 등등.

얻을 수 있는 건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1레벨짜리가 들어갈 정도면 난이도도 그리 높지는 않을 거야."

믿는 게 바로 이거다.

그 흔한 아이템 하나 없는 플레이어가 홀로 미궁에 들어간다?

미궁의 난이도가 높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하긴, 1층에 있는 미궁이니...."

"혼자서 가려는 걸 보면 확실히 네 말이 맞긴 하겠네."

모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지막 남은 문제는 하나.

"그런데 저 녀석이 아이템을 순순히 나누려고 할까?"

바로 미궁에서 얻는 보상들에 대한 분배 문제다.

"물론, 나누려고 하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나눌 생각은 이쪽도 없었으니까.

"미궁을 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영원히 미궁 속에서 머물게 해 주자고."

박하나가 품속에서 예리하게 생긴 철침을 꺼냈다.

'자이언트 애호박벌의 침'.

1mg이라도 주입되면 1분 이내 사망하는 맹독을 지닌 아이템이다.

"그, 그게 아까 말했던...."

"맞아. 우리 오빠가 어제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구해 온 아이템이야."

박하나의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 완전히 피바다였다는데...."

"끝내준다. 그 지옥에서 당당히 아이템을 가져왔다는 거잖아?"

"하나 오빠가 이 게임 꽤 오랫동안 했다고 하더니, 고인물이었나 보네. 진짜로."

박하나의 친오빠인 박하진은 [시련의 탑]을 플레이할 당시 '검은 까마귀' 길드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나름 이름이 알려진 중견 길드 중 하나로 그때의 길드원들이 고스란히 모여 현재도 이곳 1층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희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박하나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미궁 앞에 있는 진혁을 바라봤다.

바뀌어 버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살인조차 정당화해야만 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게 자연의 법칙이었으니까.

박하나는 이미 그 법칙에 순응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

부스럭!

풀숲 사이로 여섯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나오는 건가.'

기척을 숨기는 게 너무 어설퍼 하품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모른 척 하는 게 예의겠지.

"당신들은 누굽니까?"

진혁이 경계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안 하던 걸 하려니 안면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우, 턱이야.

"아! 저희 나쁜 사람들 아니에요."

앞쪽에 있던 박하나가 재빨리 양손을 들어올렸다.

해칠 의도가 없다는 걸 어필하듯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저희는.... 음. 적당한 사냥터를 찾으려고 이 숲에 왔어요. 그러다 우연히 그쪽 분을 발견하게 됐죠."

우연 같은 소리하고 있네.

입에 침이나 좀 바르고 말해라.

뭣보다 첫 소개가 나쁜 사람들 아니라는 건 또 뭐냐? 80년대 나오는 뇌가 텅텅 빈 악당들도 그런 말은 안 하겠다.

[Lv1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박하나의 말은 '거짓'입니다.]

이미 진혁의 눈엔 참과 거짓의 경계가 보였다.

그럼에도 이 뻔한 연극에 어울려 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박하나라....'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 여자. 꽤 재미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복사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고유 능력을.

8화 미궁 리바린토스 (2)

진혁이 '진실의 눈'을 통해 박하나의 상태창을 엿봤다.

——————————————————

이름: 박하나

성별: 여

나이: 22세

레벨: 1

힘 4 민첩 5 체력 5 마력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10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교감(交感)

스킬: Lv1 '빠른 걸음', Lv1 '미약한 치유'

——————————————————

교감능력(交感能力).

처음 만난 대상이라도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고.

위화감 또한 지워 버릴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경계심을 허물고 능력을 복사해야 하는 진혁으로선 그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이었다.

게다가.

'이후에 [그 녀석]을 길들이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어.'

처음에는 함께 다니면서 미궁에 있는 함정들이나 제거하는 용으로 쓰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놓쳐선 안 되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진혁이 박하나의 복사 조건을 확인했다.

[복사 조건: 최소 240시간 동안 박하나와 함께 행동하십시오. 단, 240시간이 지나는 시점에서 박하나와 당신 외에 다른 인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240시간.

다시 말해, 열흘 동안 함께 있어야 복사 조건이 충족된다.

'그 외 나머지 5명은 필요 없다라....'

굳이 죽여야 한다는 말은 없다.

'내가 피에 굶주린 살인귀도 아니고.'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적당히 이용만 한 뒤,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

하지만.

만약 선을 넘는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로 다짐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다시 한번 조건을 꼼꼼하게 읽은 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냥터로 가지 않고 저한테 다가온 이유가 뭡니까?"

"그 질문에 대답해 드리기 전에, 먼저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물어보세요."

"지금, 들어가시려는 데가 미궁 맞죠?"

"맞습니다."

"역시...."

박하나가 예상이 적중했다는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저희도 함께 가고 싶어요."

"함께...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위험부담은 나눌수록 좋다는 말도 있으니."

생긋 웃으면서도 손이 옆구리로 향하는 게 보였다.

말이 좋아 권유지.

지금 손은 허리춤에 있는 암기로 가 있었다.

'저건. 박물관 곤충 전시실에 있던 애호박벌의 침 같은데.'

나머지 사람들도 움찔 하고 손이 무기로 뻗었다.

재밌네.

그러니까.

'미궁 속에서, 그것도 나를 상대로 수작을 부리겠다 이거잖아?'

진혁이 미궁 입구를 향해 손바닥을 슬쩍 뻗었다.

"편하실 대로 하세요."

미궁에 들어오고 싶다고?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라.

대신, 들어올 땐 마음대로라도 나갈 땐 아닐 거다.

***

[미궁 '리바린토스'에 입장했습니다.]

[도전 인원은 7명입니다.]

미궁으로 들어오자, 습하고 찐득찐득한 공기가 피부에 눌어붙었다.

이 냄새.

이 감각.

이제야 실감이 났다.

탑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진혁이 재빨리 미궁 벽을 살폈다.

어두운 내부를 밝혀 주는 밝은 빛들.

수백 마리에 이르는 '야광 나방'이었다.

보통 지하 던전이나 미궁에서 시야를 밝혀 주는 용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예외다.

진혁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천천히 접고.... 다시 빠르게 폈다.

마치 날갯짓을 흉내 내듯이 말이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그러자.

사뿐 하고.

나방 한 마리가 진혁의 손에 앉았다.

분진으로 인해 손이 금세 밝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진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 했네요."

박하나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진혁이 조심스럽게 나방을 벽에 놓아 준 뒤 대답했다.

"아. 워낙 정신없긴 했죠."

미궁의 입구가 완전히 닫히기 전에 전부 들어와야 했으니까.

일일이 인사나 나누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온 지금,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박하나라고 해요. 22살이고 예전에 시련의 탑 2층까지 가 봤어요."

박하나가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냈다.

"장철식입니다. 시련의 탑은 1층에서 조금 하다 접었습니다."

"이혜민이예요. 저도 1층까지만 해 봤어요."

"장미나. 탑은 3층까지...."

"천민국이라고 불러 주쇼. 시련의 탑인지 뭔지는 아예 해 본 적 없어."

"도광우입니다. 저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모두들 열심히 이름을 외치고 있었지만....

진혁의 귀엔 조금 다르게 들렸다.

"함정에서 죽을 엑스트라1입니다!"

"저는 도망가다 위급해지면 미끼로 사용될 예정이죠!"

"하하. 밤마다 불침번도 열심히 서고 식사도 맛깔나게 대령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이다.

어차피 마지막 순간, 보상을 나누기 싫어 뒤통수 칠 게 뻔한데.

일일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진혁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하는 레이드 파티라....'

아무래도 심심할 겨를은 없을 것 같다.

"강진혁입니다."

"진혁 씨...였군요. 그래서, 진혁 씨는 예전에 이 미궁에 왔던 적이 있던 건가요?"

이름까지 주고받자 박하나가 더욱 치근덕대며 달라붙었다.

[박하나가 고유 능력 '교감(交感)'을 발동합니다.]

순간, 간질거리는 기운이 전신을 노곤고곤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식으로 작용되는 거구나.'

만약, 능력을 몰랐다면 상대에 대해 친근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상성이 좋거나.

혹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흔히 말하는 '첫 느낌이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

"운이 좋게 예전에 발견했던 미궁입니다."

"와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분이셨네요. 같이 가게 돼서 영광이에요."

박하나가 슬며시 눈을 반짝였다.

적당히 치켜세우면서 경계심을 허물겠다 이거군.

누구 앞에서 그런 얄팍한 수를 쓰려는 건지 모르겠다.

피식 웃은 진혁이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잘 알고 있죠. 아마 이 미궁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아니, 진짜로요.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도 제 발끝도 못 쫓아 올 걸요? 공략 팁 한 번 들으려고 삼고초려 할 사람이 일렬종대로 운동장 12바퀴는 될 겁니다. 하하."

"...."

박하나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세도 정도껏이지.

이래서야 칭찬해 주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 그럼, 미궁 안에 어떤 종류의 몬스터가 있는지, 무슨 특징을 갖고 있는지 알려 주세요. 가능하죠?"

"그거야 어렵지 않죠."

어디 보자.

뭐가 있으려나?

"일단, 이 미궁은 일정 시간마다 위치가 바뀝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궁 변화'라고 하는 건데요. 아. 마침 시간 다 됐네요."

진혁이 제 자리에 우뚝 멈췄다.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쿠쿠!

미궁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천장에 쌓여 있던 먼지가 쏟아지면서, 바닥과 벽에 금이 벌어졌다.

"으아아아!"

"이, 이게 뭐야?"

"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면이 치솟거나 아래로 꺼지고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이 전후좌우로 이동해 대니 그럴 수밖에.

"피, 피해! 서로 붙지 말고 떨어지라고!"

"젠장. 깔렸다간 즉사야!"

"온다! 오른쪽! 오른쪽 봐!"

쾅!

콰아앙!

고속으로 움직이는 바위들은 테트리스처럼 빠르고 복잡한 패턴을 구사했다.

콰아아앙!

모두들 바위에 짓이겨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몸을 날렸다.

무릎이 까져서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런 자잘한 상처는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그그그....

진동이 멈춘 건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난 후였다.

아까와는 완전히 바뀌어 버린 길.

그나마 일행이 흩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허억! 허억!"

가슴이 들썩였다.

"이, 이런 미궁이 1층에 있다니."

"말도 안 돼. 1층에서 유적 빼고는 다 고만고만했던 거 아니었어?"

모두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진혁은 느긋하게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지형이 바뀌는 미궁 정도는 다들 한 번씩은 경험해 보지 않았나요?"

"그, 그런 걸 누가 경험해 봐요!"

박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아님 말고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야광 나방들을 불러 분진을 모으기 시작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덤이었다.

그 태평한 모습에 박하나는 목구멍까지 욕설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혜민아. 출구 찾을 수 있겠어?"

"그게.... 방금 미궁이 바뀌면서 능력 발동이 취소됐어."

이혜민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유 능력 '나침반'.

던전이나 미궁에서 가장 안전한 루트를 표시해 주는 능력이다.

박하나가 낯선 곳에 자신만만하게 들어온 것도 모두 이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능력은 소용없게 됐다.

미궁이 새롭게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바뀔 테니까.

"그, 그럼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는 거야?"

"이 안에... 갇혔다고?"

***

'자신만만하게 미궁에 들어온 이유가 뭔가 했더니.'

고작 믿은 게 내비게이션 능력이었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진혁이 웃음을 삼켰다.

누가 뉴비 아니랄까 봐. 미궁 알기를 동네 슈퍼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보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제 슬슬 놈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진혁이 손에 묻은 나방의 분진을 슬쩍 바라봤다.

체취와 분진이 섞이면 특수한 물질이 분비된다.

아주 특별한 향을 지닌.

때마침.

쿠—웅. 쿠—웅.

아주 멀리서부터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다들 목청을 높이고 있느라 눈치 채지 못 했지만.

진혁은 확실하게 느꼈다.

이 미궁을 배회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

"미궁이 변한다니! 대체 왜 그 중요한 걸 미리 말해 주지 않은 거죠?"

박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살살 좀 말해라. 귀 아프다.

그리고.

"내가 따라오라고 했어요?"

"...네?"

"아니 그쪽에서 오겠다면서요? 제가 강제로 끌고 온 것도 아니고."

니들이 오고 싶다며?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큰 소리야?

"그, 그거야 그렇지만...."

박하나가 말을 더듬었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말이 없던 탓이다.

"이 자식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가뜩이나 이런 곳에 갇혀서 기분도 거지같은데 한 번만 더 주둥아리 놀리면 아예 죽여 버리겠어!"

옆에 있던 천민국이 고함을 질렀다.

음. 박하나는 필요하니 넘어간다지만.

너는 아닌데...?

진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천민국 앞에 섰다.

"돼지처럼 꿀꿀대는 거야 자유지만, 조금 목소리를 낮추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아! 사람 말로 해서 못 알아들으셨구나. 꿀꿀, 꿀꿀꿀. 꾸울! 꾸르르꿀꿀. 이해하셨어요? 대충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해 본 건데."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천민국이 주먹을 휘둘렀다.

턱을 노리고 날아온 공격을.

스윽.

진혁이 고개를 살짝 돌려 피했다.

동시에 발을 건드려 상대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렸다.

"어? ...어어?"

허우적거리던 천민국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득!

진혁이 발로 천민국의 손목을 짓밟았다.

무게를 싣자, 뼈가 어긋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악!"

"쉿! 조용히 하세요. '미궁 내에선 소리 지르지 말라'라는 말도 몰라요?"

"으으으.... 이 미친놈아. 조용히 하라면서 왜 손목을 부러뜨리는 건데?"

"이렇게 말해줬는데도 아직 정신 못 차리셨네."

"뭐?"

"그 입. 험하다고요."

진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위에서.

아래로.

퍼어억!

다리가 천민국의 안면으로 파고들었다.

무게를 제대로 실었기에,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꾸에에엑!"

앞니가 모조리 박살나며, 피분수가 뿜어졌다.

"너,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고작 주먹 한 번 휘두른 것 가지고."

"그, 그래. 세상에 무슨 사람이...."

"저렇게 잔혹할 수가."

박하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적잖게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물론, 웃기는 일이었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놈을 박살내는 게 너무하다고?

무슨 '강해져서 돌아와라'도 아니고.

한 번 이빨을 드러낸 적을 왜 봐줘?

'나는 그 정도로 의인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인간성이니 뭐니를 따지는 도덕시간도 아니고.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진 않을 겁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힐끗.

진혁이 통로에 잠긴 어둠속을 바라봤다.

'이 소란과 피 냄새를 맡고 놈이 올 차례거든.'

쿠웅! 쿠웅! 쿠웅!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발소리가.

9화 미궁 리바린토스 (3)

부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퍼억!

"커…억?"

거대한 도끼가 천민국의 머리에 박혔다.

족히 2m는 될 법한 쇳덩이였으니... 확인할 것도 없었다.

즉사다.

'드디어 오는 건가.'

진혁이 자세를 잡았다.

"모, 몬스터다! 중형급 이상이야!"

"젠장할. 하필이면 이럴 때에!"

나머지 사람들도 한 발 늦게 반응했다.

몇몇은 조잡해 보이는 무기를 꺼냈다.

처음 받은 100코인으로 상점에서 구매한 싸구려 아이템들이었다.

물론.

이런 걸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다.

성유물 중에서도 특별한 몇몇 보구들만이 녀석의 피부를 꿰뚫을 수 있었으니까.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신에 있는 신경이 곤두섰다.

동시에.

쿵! 쿵! 쿵! 쿵!

어둠에 잠긴 통로 끝에서 무언가 다가왔다.

온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크오오오!"

잠시 뒤, 모습을 드러낸 건 2m에 이르는 몬스터였다.

소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 영물(靈物).

미노타우르스.

이 녀석이 이 미궁을 배회하는 유일한 몬스터다.

"우, 우와아아악!"

"뭐야 저게!"

"대체 어떻게 돼 먹은 미궁이야, 여기! 1층이잖아. 1층!"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상황 속.

부우우웅!

미노타우르스가 손에 쥔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앙!

일격에 바위에 거대한 상흔이 생겼다.

벽이 무너지며,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스치기라도 하면 연약한 인간의 살 따위는 걸레짝이 될 게 틀림없다.

그런데 바로 그때.

타악!

진혁이 질주했다.

앞으로.

정확히 미노타우르스의 정면으로.

"크오오!"

맨손으로 덤비는 미물이 신경을 거스른 걸까?

미노타우스르가 양손으로 도끼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높게 치켜들었다.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공격을....

진혁이 방향을 살짝 틀어 피했다.

콰아아앙!

애꿎은 지면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순간.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스탯 '간극'이 0.05만큼 상승했습니다.]

진혁의 앞에 두 줄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좋았어!'

진혁이 속으로 환호성을 삼켰다.

-미노타우르스의 공격을 회피하면 히든 스탯 '간극(間隙)'을 획득할 수 있다. 단, 이 보상은 탑에 입장한 후, 첫 사냥터로 미궁을 고를 경우로 한정한다.

'간극(間隙)'.

레벨 차이가 극심한 강자와의 전투에서 차이를 좁혀 주며, 반대로 약자와의 전투에선 더더욱 격차를 벌려 주는 스탯이다.

띠링!

[세부 설명]

자신보다 강한 적과 싸울 경우 3포인트당 1레벨 격차를 좁혀 줍니다.

자신보다 약한 적과 싸울 경우 2포인트당 1레벨 격차를 벌려 줍니다.

1레벨인 상태로 성장하기 위한 길.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시작은 고작 0.05지만....

'서두를 필요 없어.'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진혁이 요리조리 도끼를 피했다.

부우웅!

콰앙!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도끼가 벽을 갈아 버렸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번의 작은 실수라도 죽음으로 직결되는 위험한 줄다리기였으나.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실수할 일은 없다.

'나는 고인물이니까.'

'나는 이것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즐겼으니까.

쾅! 콰앙! 콰아앙!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괴, 괴물이다."

"세상에나...."

"우, 우리가 저런 놈을 건드리려고 했던 거야?"

진혁에겐 익숙한 패턴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엔 그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뿐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단순히 반사 신경으로 보기엔 터무니없는 몸놀림이다.

지독하게 반복된 암기를 통해 뼛속까지 학습된 결과물.

그렇기에 예측이라기 보단 예지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내가 완전히 미쳤었구나.'

박하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인물을 죽이고 보상을 빼앗을 생각을 했었다니.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꼴 아닌가.

***

"크오오오!"

약이 바짝 오른 미노타우르스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콰아앙!

콰앙!

도끼가 진혁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명적인 공격을 매우 아슬아슬하게 회피했습니다!]

[스탯 '간극'이 1만큼 상승했습니다.]

위험한 공격을 피하면 더 많은 스탯을 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뜻이다.

진혁이 목덜미에 맺힌 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역시 이 정도는 해야 최대치 스탯을 얻을 수 있군.'

일부러 타이밍을 극한까지 맞췄다.

피부 한 꺼풀을 건네주고 대신 스탯 1포인트를 얻는다면, 그리 나쁜 교환은 아니다.

자주 써먹었다간 과다출혈로 위험해질 테지만.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후우. 헉. 헉."

진혁의 호흡이 가팔라지고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근육에 피로도 또한 쌓이기 시작했다.

'슬슬 첫 번째 교전을 마무리 지어야겠네.'

스탯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야 널리고 널렸다.

미궁을 탈출하기까지 1달간, 100스탯은 뽑아낼 생각이었으니.

진혁이 힐끗 뒤쪽을 쳐다봤다.

미노타우르스와 상대하는 사이, 슬금슬금 도망가려 하는 일행이 보였다.

'이것 봐라? 조연들이 멋대로 퇴장하려 하네?'

그건 허락할 수 없지.

너희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죽는지 결정하는 건 나다.

'뭣보다 출구도 모르는 것들이 어딜 도망가려고?'

진혁이 은근슬쩍 미노타우스르와의 거리를 벌리며, 일행 쪽으로 몸을 날렸다.

"여러분도 스탯을 얻고 싶으시면 저랑 같이 해 보세요."

"...네?"

박하나가 토끼눈을 떴다.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 히든 스탯을 주거든요. 보기보다 진짜 쉬운데. 한번 해 봐요."

원래 좋은 건 나눠 갖는 게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착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딱 한 번만 예외를 둬야지.

"...."

그 말에, 박하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미친놈아. 그게 어딜 봐서 쉽냐?'라고 외치는 듯싶었다.

"에이. 빼지 마시고. 딱 한 번만. 일단 시도라도 해 봐요.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진혁이 생긋 웃었다.

동시에 박하나의 옆에 서있던 도광우를 앞으로 밀었다.

"어... 어어어?"

도광우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인가 앞으로 걸어갔다.

단지 몇 걸음.

그러나 그 몇 걸음이 생과 사를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으아아아아!"

피할 새도.

목숨을 애걸할 새도 없었다.

서걱!

도광우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반으로 나뉘었다.

잔뜩 약이 올라서 화가 난 터라 미노타우르스의 손속엔 사정이 없었다.

"아이쿠!"

진혁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아니, 그걸 가만히 서 계시면 어떡해요. 빨리 숙이든가 거리를 벌려야지."

진짜로. 고구마 100만개를 먹은 기분이다.

거기서 멍하니 있으면 어떡해?

뭐라도 해라 좀.

다음엔 좀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

다음이... 없구나.

***

미궁이 또 변화했다.

쿠쿠쿠쿠쿵!

벽과 지면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또다시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몸을 날려야 했으나.

덕분에 미노타우르스로부터 떨어질 수 있게 됐다.

"하아. 하아. 하아."

"다, 다행이다."

"죽을 뻔...했어."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2명의 동료를 잃었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에 슬퍼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나 자기 목숨이 제일 소중한 법이었다.

"이제 따돌린 건가요? 더 이상 안 쫓아오겠죠?"

박하나가 벽 너머를 보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당장이라도 벽을 뚫고 미노타우르스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계속 쫓아올 겁니다."

진혁이 손에 쥔 작은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 도광우가 갖고 있던 무기였다.

이제는 유품이 되어 버렸지만.

"어, 어떻게 계속 쫓아와요? 길이 바뀌었는데!"

"이것 때문에요."

진혁이 푸른빛으로 물든 손바닥을 폈다.

야광 나방의 분진을 피부에 잔뜩 묻혀 뒀으니, 미노타우르스는 앞으로도 추적해 올 것이다.

미궁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말도... 안 돼.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대체 왜?"

왜긴.

"스탯을 올려야 하니까요. 미궁이 변화할 때만 조금씩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고 나머지 시간은 송아지랑 놀아줘야죠."

"얼마나...요?"

"미궁을 빠져나갈 때까지요."

"그러니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리냐고요!"

"음. 대충 한 달?"

정확히는 빨리 가면 한 달이고. 니들이 자꾸 까불면 두 달이 될 수도 있고.

어차피 골수까지 뽑아먹을 거지만, 말을 험하게 하면 그 과정이 더욱 괴로워질 거다.

"...."

박하나가 풀썩 자리에서 무너졌다.

한 달이라니.

한 달은커녕 당장 오늘 하루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저, 저희는 따로 갈게요. 당신하고 같이 가지 않으면, 그 괴물의 추격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요."

이번엔, 이혜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죠."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순위 타겟은 분진을 묻힌 나겠지.'

하지만 말이다.

"어느 쪽으로 가려고요?"

니들 출구 모르잖아.

무턱대고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탈출하기를 기도라도 하려고?

글쎄. 그건 영 좋지 않은 선택지 같은데.

"당신은 출구를 알고 있다는 건가요?"

"말했다시피 전 이 미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출구도 알고 있죠."

"알겠어요. 그럼 저희도 같이... 후우. 갈게요. 그 방법밖엔 없겠네요."

"뭐, 같이 가는 거야 상관없습니다만."

진혁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이혜민이 불안한 듯 되물었다.

"다만...?"

선수끼리 왜 이러실까.

"맨입으론 안 되죠."

"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최소한 가지고 있는 코인을 전부 토해내면 모를까."

간단히 정리해 주자면,

만렙 버스 타고 싶으면 갖고 있는 거 다 내놓으라는 뜻이다.

***

[보유한 코인: 500]

스타팅 포인트에서 얻은 코인과 네 사람에게서 받은 코인을 합치니 500코인이 되었다.

쓸 만한 무기나 방어구를 사기엔 한참 부족했지만.

상관없다.

이 정도면 원하는 아이템은 구매할 수 있었으니까.

"장승처럼 서 있지 말고. 다들 할 일들 하세요. 이끼도 뜯어 와서 잠자리도 만들어야 하고. 불을 피울 장작거리도 구해 와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알겠어요."

"가면 되잖습니까. 가면."

"후우."

깊은 한숨이 들렸다.

대박을 꿈꾸고 이곳에 왔다가 모든 걸 홀랑 털린 데다.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게 됐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녀석들은 알고 있을까?

이렇게 해도 어차피 자신들의 운명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진혁은 거래소를 활성화했다.

[코인 거래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거대한 상태창이 나타났다.

수십만 개의 아이템을 사고 팔 수 있는 장소.

진흙 속 보석과 허울뿐인 황금이 가득 차 있는 기회의 땅.

여기가 바로 '코인 거래소'다.

진혁이 슬쩍 목록을 훑었다.

['고대종 데고시안의 이빨(SS)'- 395,250,700코인]

['환수 주작의 깃털(S)'- 188,187,000코인]

['성유물 단군왕검의 신기(S)'- 159,155,300코인]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한 아이템들부터.

['마모된 작은 돌멩이(F)'- 1코인]

사실상 쓰레기나 다름없는 아이템들까지.

그야 말로 가지각색의 아이템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백날 봐 봤자 아무 소용없어.'

당장 사지도 못할 거, 아이쇼핑만 해 봐야 시간낭비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카테고리 가장 스크롤을 내렸다.

아래로.

더 아래로.

원하는 건 가장 아래에 모여 있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도.'

진혁은 빠른 속도로 원하는 아이템들을 구매했다.

['주술이 걸린 타로카드(F)'- 70코인]

['낡고 닳은 청동 열쇠 파편(F)'- 80코인]

['나무로 만든 수레바퀴 파편(E)'- 300코인]

['로또 강화서(F)'×10장- 1장당 1코인]

전부 해서 4종류.

모두 쓰레기나 다름없었지만, 진혁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개별 아이템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지.

"3가지 아이템을 합성하겠다."

[잘못된 조합일 경우 모든 아이템이 파괴됩니다.]

"알았으니까 진행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3가지 아이템을 합성합니다.]

[합성에 성공하셨습니다!]

성공을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눈부신 운무가 뿜어져 나왔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성공이다.'

눈앞에 나타난 아이템을 보며, 진혁은 확신했다.

그동안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던 모든 시간들이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10화 미궁 리바린토스 (4)

진혁이 떨리는 손으로 눈앞에 나타난 아이템을 확인했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휠 오브 포춘(불완전)]

입수 난이도: S

내용: 10분 동안 행운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줍니다(1회용). 단,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됩니다.]

로마 신화 속 행운의 여신.

그리고 그 여신이 소유하고 있던 행운의 바퀴가 바로 이것이다.

F등급짜리 싸구려 아이템들을 합성한 터라 1회용짜리인데다 불완전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적어도 5층 이하에선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걸 만들 수 있었으니까.

'어디....'

진혁이 수레바퀴의 손잡이 부분을 잡았다.

화끈하고.

뜨거운 마력이 손끝을 따라 퍼져나갔다.

'그래도 성유물은 성유물이라 이건가.'

은근히 매콤한 맛이 있었다.

'그래, 이래야 매력적이지.'

피식 웃은 진혁이 손잡이를 360도 돌렸다.

드르륵!

[성유물 '휠 오브 포춘'이 발동됩니다!]

[10분간 행운이 최대치로 올라갑니다!]

천운(天運).

정확한 수치는 몰랐지만, 지금 보유하고 있는 행운은 터무니없는 수준일 것이다.

복권을 긁으면 모조리 당첨이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낮잠을 자도 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여기엔 조건이 붙는다.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된다는 조건이.

이 말이 참 무서운 게....

이상한 데다 행운을 사용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껏 얻은 행운이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었으니, 당연히 사용이 까다로울 수밖에.

그러나.

그건 어설픈 놈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진혁은 그 경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비싼 수업료를 내며 터득한 정보들이지.'

당시에는 수천 번 욕을 했었지만.

덕분에 더 이상 실수할 일은 없다.

슬슬 시작해 볼까.

진혁이 '로또 강화서' 10장을 꺼냈다.

강화 성공 확률 0.000012%.

814만 분의 1.

말 그대로 로또 맞을 확률과 동일한 강화서다.

이걸 단검에 사용한다면....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낡은 단검(+1)을 획득하였습니다!]

희미하게 붉은빛을 띤 단검.

역시나!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극악의 확률을 자랑하는 강화서지만, 행운이 만렙이 된 지금은 성공 확률 100%짜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계속 같은 걸 반복하면 된다.

구매한 10장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진혁이 2번째 강화서를 사용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낡은 단검(+2)을 획득하였습니다!]

[....]

강화에 성공할수록 단검의 색깔이 조금씩 변했다.

점점 더 붉게 물드는 검신.

그리고 마침내.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낡은 단검(+10)을 획득하였습니다!]

[최대치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강화가 불가능합니다.]

[한국 서버 최초로 +10강 아이템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업적은 내일 하루 '명예의 전당'에 오릅니다!]

10강.

F랭크 아이템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 강화치에 도달했다.

더불어 보상을 통한 코인까지 손에 넣었다.

부웅!

진혁이 가볍게 단검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부드러운 곡선이 허공을 갈랐다.

가볍고 깔끔한 손맛이다.

'마음에 드네.'

[낡은 단검(+10강)]

입수 난이도: F(→A)

공격력: 280

내구도: 110/110

효과: 출혈 데미지 3%, 경량화 50%

공격력도 준수하고.

출혈 데미지에 경량화 마법까지 걸려 있다.

'이제야 쓸 만한 걸 손에 넣었군.'

당분간 무기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

시련의 탑이 개방되고 하루가 흘렀다.

첫 날.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탑을 탐험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아 업로드 했다.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함을 살려서 어떻게든 구독자들을 확보하려 애썼다.

그리고 탑 외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은....

그런 플레이어들의 영상을 시청했다.

이유는 단 하나.

가장 뛰어나고 가능성 높은 플레이어들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90일 안에 탑의 다음 층을 공략하고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바로 그 때, [시련의 탑] 커뮤니티를 훑어보던 진혁이 멈칫했다.

재밌는 걸 발견했다.

[#플레이어 해모수 #한국 서버 #씹고인물 #시련의 탑 1층, 고블린 던전 최단 기간 클리어 영상!]

'꼭 이런 걸로 나대는 놈들이 있더라.'

고블린 던전을 15시간 만에 클리어했다는 말에 조회수가 100만이 넘었다.

10,000 대 100 비율로 환산하면 약 1만 코인.

거기에 수수료 명목으로 90%를 제외하면 1천 코인을 번 셈이다.

'해모수라면 한 때, 저층 구간에서 꽤 이름을 날렸던 놈 같은데....'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진 루키.

분명, 해모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던 플레이어였다.

'15시간 클리어라....'

진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영상을 클릭했다.

근접계 딜러가 고블린들을 몰이 사냥하는 방식.

뭐, 나쁘지 않는 속도다.

평범한 수준에선.

물론, 3시간 40분 만에 클리어한 진혁의 입장에선 귀여울 뿐이지만.

그러나 동영상에 달린 댓글들의 반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호모나색상에: 진짜 지린다. 솔플로 15시간 컷 실화냐?

-태정태세비욘세: ㄹㅇ. 팬티 갈아입고 왔음.

-칼퇴요정: 와아. 구독하고 앞으로 이분이 올리는 영상만 봐야겠네.

-몰티즈 협회회장: 22222222

-3대500침: 3333333

댓글창이 감탄과 탄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이 플레이어만이 탑을 오르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서.

그런데 그때였다.

-인간대머리남: 15시간이면 아주 빠른 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5시간 안쪽으로 클리어한 분도 계셨어요.

누군가 댓글 하나를 남겼다.

축제에 재를 뿌리는 그런 댓글을.

당연히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태정태세비욘세: 노인증은 뭐다? 뇌피셜로 싸지르는 거 레알 역겹네.

-갓끈 푼 선비: 말투부터 극혐이네. 인터넷에서 존댓말 쓰게 되어 있냐?

-곱창소주: 뉘예뉘예. 나는 50층까지 1분 컷 했음. 물론 인증은 없음. 무조건 믿으셈.

욕설과 비꼬는 댓글들이 순식간에 수백 개가 달렸다.

키보드 워리어가 방구석에서 입만 나불대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면서.

하지만 모두가 비웃는 와중에도.

진혁은 웃지 않았다.

인간대머리남....

'이 사람도 탑에 와 있었구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탑의 20층까지 종종 함께 플레이했던 녀석을.

20층 이후부터는 볼 수 없었지만, 겉만 번드르르한 해모수 따위와는 다르다.

아예 근본부터 다르지.

'뱁새들 노는 곳에 황새가 끼어 있군.'

인간대머리남은 진혁이 몇 안 되게 인정했던 '진짜 고인물' 중 하나였다.

***

"푸하하하! 됐어! 됐다고!"

커뮤니티를 보던 남자가 쾌재를 불렀다.

이 남자가 해모수.

아니, 해모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이명환이었다.

"봐 봐. 이거 먹힌다니까."

"크으. 댓글 달리는 거 봐라."

"게시판에도 온통 니 이야기다. 고블린이랑 피터지게 싸운 보람이 있네. 캬!"

이명환 주위에 있던 남녀도 하이파이브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 같이 고생한 덕분이지. 고맙다, 얘들아."

이명환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크크. 사람들은 너 혼자 다 한 줄 알고 있을 거 아냐?"

"편집도 잘했고. 우리가 워낙 교묘하게 지원했으니 절대 눈치 못 챌걸?"

"맞아. 이것 봐. 낚인 호구들이 후원하겠다고 한 트럭 모여 있어."

솔플이라고 올린 영상은 사실....

조작된 거다.

이명환 외에도 네 명이 더 도왔으니까.

당연히 전면적으로 나서서 도왔다는 말은 아니다.

한 걸음 뒤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곳에서, 버프와 디버프를 중첩하는 방식으로 이명환을 도왔다.

더욱 강하고 화려하게 꾸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붙잡을 수 있도록.

'후후.'

이명환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조회수: 1,235,095회]

올린 지 6시간 만에 달성한 조회수다.

이런 식으로 시청자들을 모은다면 나중에는 많은 수의 코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90% 수수료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고.'

세상 사는 건 원래 뛰어난 선구자들이 독식하는 거니까.

이명환이 꿈에 젖어 킬킬대고 있을 때였다.

띠링!

[명예의 전당에 새로운 동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갑자기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

그것도 최상단에.

"뭐, 뭐야 이게?"

이명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워낙 놀란 탓에 혀까지 깨물 뻔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나...보다 높은 명예 점수를 받은 놈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다.

첫날에 이것보다 더 높은 업적을 할 게 없을 텐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이상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며, 명환아...."

"당장 띄워 봐. 보게."

"아마, 누군가 사기를 친 걸 거야. 이럴 수는 없어... 절대로."

"입 닥치고 당장 띄우라고!"

이명환이 고함을 쳤다.

"아, 알겠어."

결국, 영상이 재생됐다.

이명환이 올린 것과 다르게 5분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다.

그것도 편집조차 되지 않은.

하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상상 그 이상의 것이었다.

"미... 미친."

이명환의 턱이 빠질 듯이 벌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세계 최초로 +10강 아이템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0강짜리 아이템의 등장.

더 이상의 설명은 무의미했다.

확률을 계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

"조, 조회수는.... 아니, 그보다 댓글은 어때? 지금 상황이 시발 어떤지 당장 말 좀 하라고!"

이명환이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떨렸다.

간절함이 담긴 가냘픈 질문은....

"올린 지 15분 만에 100만 넘겼어. 입소문이 빠르게 타고 있나 봐."

이어지는 대답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태정태세비욘세: 세상에 10강이라고? ㄹㅇ로 10강?

-호모나색상에: 미쳤다. 저게 가능하긴 한 거였음? 예전에 5강까지는 봤는데.

-칼퇴요정: 확률이 대체 얼마지, 10강이면? 보니까 최하급 강화서로 올린 거더만.

-스피드왜건: 등판함. 814만 분의 1을 10번 곱하면 됩니다.

-칼퇴요정: 그러니까 그게 얼마냐고?

-스피드왜건: 니가 찾으세요. 손이 없음 발이 없음?

-칼퇴요정: 야 이 개시키야!

-갓끈 푼 선비: 근데, 고정 구독자 확보하려면 정보 공개해야지 왜 죄다 비공개임?

-곱창소주: 그러게.

-고인물감별소: 누구겠냐, 상식적으로? 맹그로브나무랑 싸우던 그 플레이어밖에 더 있어?

-갓끈 푼 선비: 설마, 허. 진짜네. 그 사람밖엔 없을 듯.

-곱창소주: 와 ㅇㅈ. 그 씹고인물이라면 가능할지도.

-칼퇴요정: 나 방금 전신에 소름 돋음. 앞으로 그 사람 방송만 본다.

-하버드5학년3반: 전 빤스까지 벗어서 기부할 생각임.

댓글의 열기가 달아오르다 못해 뜨거울 정도였다.

고블린 던전을 클리어했던 일은 순식간에 묻혔고.

인터넷은 새롭게 떠오른 고인물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어... 어어?"

이명환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껏해야 탑의 6층까지밖에 가 보지 못했기에. 사실상 이 초반에 시청자를 긁어모으는 거로 승부를 보려 했는데.

'망했다.'

완전히.

"어떤 개자식이야! 우와아아아악!"

이명환의 고함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11화 미궁 리바린토스 (5)

미궁에 들어온 지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함정들과.

끊임없이 추적해 오는 미노타우르스.

게다가 굶주림과 수면 부족까지.

사람이 생존하기에 하나같이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7명으로 시작했던 레이드는 어느새 3명으로 줄어 있었다.

진혁과 박하나, 장철식.

이렇게 셋으로.

"이대로 가면 다 죽어."

장철식이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 악마 같은 놈한테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버려질 거야."

박하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을 피하기 위한 장기 말로 쓰이든가.

미노타우르스의 시선을 끄는 버림패로 쓰이든가.

둘 중 하나겠지.

이혜민과 장미나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

진혁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결국엔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익명1: 그냥 포기하고 얌전히 있지 그래? 딱 봐도 너희들론 안 될 것 같은데?

-익명6: 내가 볼 때 10층은 가 본 놈 같음. 걍 까불지 말자.

-익명3: ㅇㅈ. 뉴비 두 명이면 고인물한테 바반그릇 뚝딱 수준.

-익명4: 게다가 성격도 싸패잖어. 지 죽이려는 거 알면서도 계속 존댓말 쓰면서 같이 델고 다님. 소오오름.

-익명9: 내 옆자리의 살인마가 상냥해. 엉엉ㅠㅠ

박하나의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검은 까마귀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만, 탑을 오르지는 않는 이들.

한 마디로 탑 외에 있는 서포팅 그룹이었다.

"저 인간에 대한 정보는 뭘 좀 찾았어요?"

-익명5: [시련의 탑] 관련된 과거 영상들 전부 락 걸려서 알 수가 없음.

-익명3: 아예 싹 다 막아 놨더라. 뷰튜브나 개인 블로그. 심지어 폰에 저장해 둔 것까지 해킹당함.

-익명2: 얼굴이라도 알면 hoxy 모르겠는데.

-익명1: ㅇㅇ. 근데 저 가면 24시간 내내 쓰고 있으니 답이 없네.

-익명6: ㄹㅇ 오페라의 유령인줄.

-익명4: 궁금해서 그러는데 똥 쌀 때도 저거 씀?

-익명7: 검색해 보니 방송 채널도 안 만들었더만?

-익명3: 구독자 모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완전히 솔플각 세게 잡은 듯.

불길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형태의 가면.

미궁에 들어온 첫날까지는.... 저 가면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패닉에 빠진 박하나가 방송을 켰을 때는 이미 진혁이 코인 거래소에서 검은색 가면을 구매한 뒤였다.

그 이후로는 완전히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익명3: 젠장.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전에 미친 듯이 할 걸. 갑자기 겁나 부럽네.

-익명4: 공략법이나 성유물 위치 죄다 알고 있으면 진짜 개꿀이잖어.

-익명7: ㅆㅇㅈ. 대뇌 전두엽까지 전기가 찌릿찌릿 올라올 듯.

-익명1: 와 근데, 그 때 오래 했던 놈들 하나같이 다 잠수네. 팁 좀 풀지. 우리도 먹고 살게.

-익명2: 니 같으면 알려주겠냐?

-익명3: ㅋㅋ. 사실 나였어도 나 혼자 독식할 듯.

'이런 머저리들을 탑 외에서 서포팅하라고 뽑아 놨다니....'

박하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낄낄대고만 있지, 정작 영양가 있는 정보는 하나도 건져오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답답할 수밖에.

"닥치고. 오빠한테 이쪽 상황 전했어요?"

-익명1: ㅗㅜㅑ. 우리 하나 까칠하누.

-익명5: ㅇㅇ. 전했음.

-익명9: 근데, 졸라 깊이 있어서 찾기 어렵다드라.

-익명3: 무리데스. 킹시국이지만, 절대로 무리데스.

-익명4: 베어그릴스 등판해도 조난각임.

-익명2: 킹병만 형 오다가 유턴함.

-익명6: 애초에 이 미궁,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 너 있는 곳까지 따라잡으려면 최소 삼주는 더 필요함.

삼주....

열흘 만에 두 명 빼고 전멸했는데.

앞으로 삼주를 더 견뎌야 한다고?

'불가능해.'

박하나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쿨쿨 자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성공하진 못 했던 괴물 같은 놈!

그래.

이건 살인이 아니라 미수다.

왜. 법에도 있잖아.

미수범의 형량이 훨씬 낮은 그런 법이.

그런데 고작 시도를 한 것 가지고 우리 전부를 죽이려 하다니.

너무했다.

정말로 너무했다.

'여섯 명의 목숨이 당연히 한 명의 목숨보다 귀한 거 아냐?'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이쪽은 두 명이다.

그러니 죽어 줘야 한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어떻게, 지금 칠까? 자고 있을 때가 기회인 것 같은데?"

장철식이 바닥에 있는 바위를 집어 들었다.

투박하긴 했으나, 살상력 하나만큼은 고대부터 증명된 무기다.

쿨쿨 잠들어 있을 때 콰직!

머리가 으깨진다면 생명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니."

박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인간, 반응 속도가 완전히 괴물이야. 정면 승부를 하든 기습을 하든.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어."

꼭 어설프게 암살을 시도하는 놈들이 있다.

상대방의 실력은 감안하지 않은 채, 일단 저지르고 보자면서.

그런 감정적인 시도는 대개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한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이대로 순순히 당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누가 당하고만 있겠대?"

싸늘하게 내뱉은 박하나가 품에서 날카로운 침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맺혀 있는.

자이언트 애호박벌의 독침이었다.

"그건...."

"아무리 괴물이라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식사 준비를 하는 건 박하나와 장철식, 두 사람의 몫이다.

미궁 내부에 있는 이끼와 버섯을 채취하는 것도.

그걸 불로 조리해 그릇에 담는 것도.

전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준비해 주자고. 놈이 먹을 최후의 만찬을!"

박하나는 진혁이 지독한 신경독을 씹어 먹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상을 해 보았다.

후후.

지금까지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

툭! 툭! 툭!

무언가 진혁의 어깨를 찔렀다.

"저기.... 일어나세요."

곧바로, 박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뭡니까?"

진혁이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식사 다 됐어요. 와서 드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아. 이번에도 이끼 버섯볶음인가요?"

"여기 먹을 게 그것 밖에 더 있어요? 박쥐나 나방이라도 잡아먹든가."

박하나가 톡 쏘아붙였다.

'까칠하긴.'

진혁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볍다.

일주일 간 올린 '간극' 스탯은 모두 21.

거기에 강력한 보스 몬스터와의 실전을 통해 전투 감각 또한 극도로 끌어올렸다.

수치상 레벨은 1이지만.

결코 1이 아니다.

'절대 아니지.'

최강 1레벨.

그렇기에 기대되었다.

이 미궁이 끝나고 밖으로 나갔을 때, 그 날이!

진혁이 박하나와 장철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외양부터 끔찍하게 생긴 혼합물.

이끼와 버섯으로 만든 요리는 정말로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완전히 생존물 찍는 기분이네.'

미각을 완전히 포기한 채 욱여넣어야만 했으니까.

그나마 영양분을 고루 갖추고 있으니....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거기 박하나 씨. 뒤에서 물 좀 주시겠어요?

"...물 말이죠?"

"장철식 씨는 버섯이랑 이끼 조금만 더 퍼 주시고요."

"이 맛없는 걸 더 먹겠다니. 실컷 드쇼."

가벼운 대화와 함께 밑 준비가 끝나고.

진혁이 박쥐 뼈로 갈아 만든 젓가락과 식기를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식기를 들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음식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흐흐."

"훗. 먹었네요."

두 사람이 동시에 실소를 흘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차가운 공기.

기분 나쁘게 가라앉은 분위기.

이건....

"...독을 썼군."

진혁이 천천히 식기를 내려놨다.

"맞아. 혈관을 통해 퍼지는 극독이니까. 발악해 봤자 소용없어."

-익명1: ㅋㅋㅋㅋ. 목구멍으로 꿀꺽했누!

-익명3: 이것이 [밥도둑]이라는 거시다.

-익명7: 식도가 따~땃하재?

-익명2: 예림이, 그 패 까 봐. 사쿠라여? 손모가지여?

어느새 공용 채팅창까지 활성화됐다.

기다렸다는 듯이 낄낄대는 걸 보면 모두들 죽음을 확신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치사성 맹독을 해독하는 아이템은 가격이 매우 비쌌으니.

지금 보유하고 있는 코인으론 어림도 없다.

그렇기에 필살(必殺).

독이 퍼지면 심장은 멎는다.

만약.

"내가 독을 먹었다면 말이야."

진혁의 말에 장철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독이란 걸... 알고 있었나?"

"너희들이 이런 시도를 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을 것 같냐?"

이토록 살얼음판 같은 곳에서 남을 믿을 리가.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바꿔치는 노력 정도는....

언제나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하나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누가 음식물에 독을 넣었다고 했지?"

상대방의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음식물이 아닌, 젓가락에 독을 발랐다.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도록.

"컥? 커헉! 케에엑! 케엑!"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졌다.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혈관과 핏줄이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연출했다.

하지만.

"어, 어째서?"

입에 피거품을 문 건 진혁이 아니었다.

"끄르르륵.... 끄윽 컥!커억!"

정철식이 온몸을 비틀었다.

손톱으로 목을 마구 긁어 대는 모습이 처절해 보였다.

물론, 그 고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퍼진 독이 심장을 멈춰 버렸으니까.

"이것...까지 눈치 챘다고? 대체, 대체! 어떻게?"

"평소와는 달랐으니까."

미궁에 들어온 후 박하나는 결코 먼저 식사를 하자고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장철식이나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도맡아 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먼저 밥을 다 차려 놓는다고?

마치 생명보험 만기가 되는 날 가까운 바다에 드라이브가자는 것과 뭐가 달라?

"단지,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그런 사소한 게 중요한 거야."

내가 시련의 탑을 끝까지 돌파할 수 있었던 이유.

반사 신경이 뛰어나서?

집념이나 끈기가 남달라서?

물론, 그런 것도 있다.

중요한 요소인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내가 고인물이 될 수 있던 건....

남들과는 다른 눈썰미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정보들이라도 놓치지 않고 수집하고 분석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그렇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탑을 오를 수 있었다.

-익명1: ㅁㅊ.

-익명4: 저 한 마디로 그런 것까지 다 생각했다고? 말이 됨?

-익명2: 이열. 시청자들도 박하나의 시야랑 동일하다는 점을 이용한 건가.

-익명5: 음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젓가락까지 바꿔 버린 건 씹소름인데.

-익명7: 코난 씨 김전일 씨 등판 좀요.

-익명3: 오바들 하지 마. 솔까 이 정도는 초등학교 나왔으면 다들 예측 가능. ㅇㅈ?

-익명2: ㅇㅈ. 사실 나도 눈치 챘었음.

-익명6: 222222

-익명8: 333333

"그리고 너희들...."

진혁이 공용 채팅창에서 낄낄 대던 놈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한 것뿐이지만.

-익명3: 엌ㅋㅋㅋ 이번엔 우리임?

-익명2: 무섭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익명6: 이거 현피 신청 각 날카롭게 섰누?

-익명8: 형 삼대 몇 침? 내가 도봉초 일짱 출신인데.

-익명3: 이 몸의 냥냥펀치로 옥수수 다 털리기 싫으면 눈 까셈.

"아직까지 주둥이가 살아 있네. 하긴. 모니터 너머에 있으니 뭐가 무섭겠어?"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머리에 견과류가 아닌 뇌가 있다면, 내가 왜 너희들의 존재를 묵인하고 있었는지 생각들 좀 해 봐."

방송을 못 하게 막았으면 귀찮게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하루 종일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됐고.

하지만 모든 수고스러움을 감수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박하나가 어느 쪽과 선이 닿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놈들이 편법을 썼다는 증거를 잡아내기 위해서.

"밖에 있느라 잘 모르나 본데, 생방송이 가능한 경우는 딱 하나뿐이야."

시련의 탑에는 규칙이 있다.

-생방송은 오직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한 보스몬스터를 상대할 때만 켜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어겼을 경우에는....

-조회수 조작이나 기타 부정행위 등이 적발될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그에 따른 처벌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처벌은... 글쎄.

온화한 것과는 거리가 많이 멀 것이다.

[익명이 해체되었습니다.]

-'까마귀는 까악까악' 님이 채팅창에서 나가셨습니다.

-마님은돌쇠에게: 뭐. 뭐야?

-잭빠우어: 갑자기 왜 나감?

-'마님은돌쇠에게' 님이 채팅창에서 나가셨습니다.

-tyg123: 자, 잠깐만.

-조옌: 기다려 봐!

-'잭빠우어' 님이 채팅창에서 나가셨습니다.

-노트20: ㅅㅂ. 방금 누가 우리집 현관문 부심.

-다람이S2: 뭔데 이거? 뭐냐고?

공용채널에 있던 놈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현재 접속 중인 시청자: 0]

"마, 말도 안 돼."

혼자 남은 박하나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12화 미궁 리바린토스 (6)

[부정행위로 10명의 시청자가 적발되었습니다.]

[해당 시청자들은 앞으로 한 달 동안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없게 됩니다.]

[패널티로 인해 신체의 일부에 심각한 데미지가 주어집니다.]

[2회 적발 시, 해당 시청자는 영구히 퇴출됩니다.]

사지가 마비될 수도 있고. 시각이나 미각을 잃을 수도 있다.

재수 없으면 더 중요한 부위가 영영 기능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른다.

규칙을 어긴 패널티는 그만큼 가혹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박하나가 말을 더듬거렸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관찰하고 계획은 세웠던 건 자신인 줄 알았다.

아니, 오롯이 자신 하나여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동안 준비한 회심의 카드들이 모조리 읽히고 있단 말인가.

"당신, 정체가 뭐야?"

"그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 그거야! 모든 게 말도 안 되니까! 이건 마치...."

이건 마치 마음을 읽고 있거나.

'모든 걸 경험해 본 사람 같잖아.'

박하나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상식들이 무너질 것 같았기에.

그리고 물론.

진혁은 그 질문에 답해 줄 생각도 없었다.

"말해 줘 봤자 알지 못할 거다."

[시련의 탑]에서 활동했던 닉네임을 말하든.

그곳에서 했던 업적을 말하든.

기억해 주는 사람 따위는 없다.

오래 전 망해 버린 게임의 고인물.

모두가 떠나 버린 세계를 부유하던 최후의 플레이어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때였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교감(C)'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교감

입수 난이도: C

다른 생명체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만난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단, 능력의 레벨이 낮을 경우 효과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눈앞에 복사가 완료되었다는 상태창이 나타났다.

박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진 덕분이었다.

'좋아. 결국 손에 넣었군.'

진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형 고유 능력.

지금 당장은 C등급이지만,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B... A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말이다.

게다가.

이 능력을 손에 넣으려고 한 건 단순히 교감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특별했던 이유.'

'내가 탑의 마지막 층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단순히 스킬을 복사하는 것만이 아닌.

복사한 스킬들로 고차원의 새로운 스킬을 융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기억'에 있는 능력을 불러오겠다."

진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러올 능력은....

'불의 원소'와 '교감'.

이렇게 두 가지다.

화르륵!

왼손에 여러 줄기의 불꽃이 치솟았다.

우우우웅!

그리고 오른손엔 황금색 빛이 일렁였다.

'교감'은 수속성 계열의 능력과 융합할 경우 교감의 효과를 2배 가까이 증폭시킬 수 있다.

'나쁘진 않지.'

채찍보단 당근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험악한 분위를 조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반면.

'교감'을 화염계열의 능력과 융합할 경우 '낙인'을 만들 수 있다.

정신적으로 무너진 대상에 한하여 완전한 굴종을 강요케 하는 낙인을.

파츠츠츠!

왼손과 오른손이 맞닿자 눈부신 스파크가 일어났다.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스킬 '염혼의 낙인(A)'을 획득하셨습니다!]

[염혼의 낙인

입수 난이도: A

내용: 대상에게 '낙인'을 새깁니다. 낙인이 새겨진 대상은 시전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시전자에게 해를 끼치는 어떠한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어길 경우 끔찍한 고통과 함께 전신이 발화합니다.]

영혼에 낙인을 새길 수 있는 저주받은 불꽃.

두근!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새로운 스킬들을 모을 때마다 차오르는 고양감.

'그래. 바로 이거지!'

이 만족감과 흥분 때문에 '융합'이란 고유 능력을 선택했다.

모두가 하나뿐인 능력에 의존할 때.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능력들을 아우를 수 있었으니까.

'이제 겨우 시작이야.'

탑의 정상까지 오르려면 아직도 모아야 할 능력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진혁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곧바로.

쿵!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크오오오!"

익숙한 짐승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맞다. 저 녀석이 있었지?'

너무 익숙해져서 그만 잊고 있었다.

이 미궁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해서.

***

"또, 또! 저 괴물 녀석이 오다니."

박하나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심.

박하나에게 있어 미노타우르스란 재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망가야 한다.

지금 당장.

하지만... 어디로?

유일하게 미궁을 빠져나갈 길을 알고 있는 진혁은 허공을 보며 실실 웃고만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 거야 대체!'

욕설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지금 당장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싸우실 거면 전 빠져 있을 테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진혁은 지금까지 전투 중에 일행들이 말려들지 않도록 가야 하는 방향을 미리 알려주곤 했었다.

이유는 모른다.

아마 걸리적거리는 게 싫었던 거겠지.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냐니...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너한테서 필요한 게 있어서 지켜줬던 것뿐이고."

이제는 아니다.

복사 조건이 충족 돼 이미 목적을 이뤘으니까.

미궁 속을 헤매다 굶어 죽든.

함정에 당하든.

도와줘야 하는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뜻이다.

"나, 날 버리겠다는 건가요? 여기서?"

"실연당한 것처럼 그런 표정 짓지 마. 우리 사이야 처음부터 죽고 죽이려던 관계 아니었어?"

누가 보면 동고동락한 동료인 줄 알겠네. 틈만 보이면 암습이나 가했던 주제에.

진혁이 냉정하게 선을 긋자 박하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 잠깐만요! 후회할 거예요. 제, 오빠가 이 사실을 알면...!"

"오빠라...."

왜 그 이야기가 안 나오나 했다.

박하진이 있는 검은 까마귀 길드에서 보복할 거라는 협박이.

스릉!

진혁이 단검을 꺼내들었다.

츠츠츠.

마력이 실리자 눈이 시릴 정도의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짜 우습게 보이긴 했나 보네."

지금까지는 간극 스탯을 올리느라 피하는 것 위주로 상대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정면승부가 안 되니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도망만 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그러니....

"거기서 똑똑히 지켜봐. 그 멍청한 길드와 나. 둘 중에 어느 쪽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게 무슨?"

박하나가 되물었지만, 진혁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타악!

나타난 곳은 질주하는 미노타우르스의 머리 위였다.

위에서.

아래로!

단검이 거대한 황소의 후두부로 향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

성유물 이하로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곤 하나, 그렇다고 통증까지 없는 건 아니다.

10강짜리 무기에, 정확한 타점을 노린다면....

상대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동안 간극을 올린 보람이 있군.'

처음 만났을 때는 꽤나 아슬아슬했다.

미노타우르스가 워낙 빠른 데다 공격 범위도 넓었고.

이쪽은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다.

기껏해야 20여분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지.

그러나.

열흘 동안 무수히 많은 실전 경험과 스탯을 올려 둔 덕분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우우웅!

진혁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는 것으로 도끼를 피했다.

동시에.

[Lv1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3갈래로 나뉜 불줄기가 미노타우르스의 안면에 작렬했다.

퍼퍼펑!

고막을 찌르는 폭발음과 탄내가 어우러졌다.

직격이다.

"크오오!"

비틀 하고.

미노타우르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신을 차리지 못 하게 계속해서 몰아쳐야 해.'

어차피 죽일 순 없다.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주면 될 뿐.

카카각!

카카카카칵!

단검이 관절 부위를 좌우로 그었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철저하게 몸을 지지하는 버팀목을 노렸다.

"크아아아아!"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에 미노타우르스가 양 팔을 마구 휘저었다.

물론, 그런 눈먼 공격에 맞아 줄 진혁이 아니었다.

단검을 회수한 뒤, 곧장 거리를 벌렸다.

부웅!

다시 한 번,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너무 격하게 날뛰지 마. 근육 붙으면 육질 질겨진다."

소고기 투플은 마블링이 생명인 거 몰라?

진혁이 이죽거렸다.

"크오오! 크오오오오!"

미노타우르스가 발을 구르며 화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적중해도 숨통을 끊을 수 있는데.

어찌 된 일이지 그 한 번이 미친 듯이 어려웠다.

콧김을 뿜는 미노타우르스를 보며,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되겠는데?'

거의 다 왔다.

저 녀석이 마지막 카드를 사용할 그 순간이.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계속되는 도발에 한계점을 넘은 미노타우르스가 고유 능력을 발동했다.

[미궁의 가디언이 Lv10 '광폭화(狂暴化)'를 발동합니다!]

[지금부터 5분 동안 미노타우르스의 공격력과 공격 속도, 이동 속도가 30%만큼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지능이 상승합니다.]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드득!

우득!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하고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족히 3배 가까이 커진 덩치.

거대한 도끼가 손도끼처럼 작게 보일 정도였으니....

그 위압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이, 이걸 어떻게 이겨."

박하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탓이다.

'저 남자도 이번만큼은 안 돼. 아예, 승산이 없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발악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

저릿! 저릿!

진혁 또한 피부에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압도적인 마력이다.

하긴.

본래라면 탑의 5층 이상에서나 만나야 할 몬스터였으니까.

그런 놈이 전력을 다하는 이상 1레벨짜리 플레이어에게 승산 따위는 없다.

만약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의 수가 수백 명이라 할지라도.

혹은 수십 명의 고인물들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인간! 아주 갈기갈기 찢어서 미궁의 입구에 흩뿌려 놓도록 하겠다. 다시는 네놈처럼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미노타우르스가 으르렁거렸다.

철컹!

도끼가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유형화된 마력이 미궁 안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흙이 타들어가고 공기 중의 수분이 메말랐다.

하지만.

"흐음. 나쁘지 않네. 마력 운용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아진 느낌이야. 그래도 전격 쪽 보다는 토속성을 쓰는 게 더 좋지 않아? 효율적인 측면에서 그 편이 더 나을 텐데?"

진혁은 그 압박감조차 즐겼다.

아무리 강력하고 빠른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진혁에겐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경험이 있었다.

"그건 자신감이 아니다. 인간. 만용이자 오만이지."

만용...에 오만이라고?

송아지 주제에 어려운 단어를 다 쓴다.

호주산인가.

"글쎄. 내가 볼 때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네 녀석 같은데?"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광폭화. 그거 사용하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녀석이 이 능력을 아껴 뒀던 건 다 이유가 있다.

5분간은 엄청난 힘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이후에 24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게 되는 패널티.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미노타우르스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허나 그 시간동안 네놈이 도망 다닐 수 있을 것 같으냐?"

5분은 긴 시간이다.

특히나 이런 좁은 통로에서라면 더욱더.

"누가 그래? 내가 도망만 다닐 거라고?"

검신을 따라 불꽃이 흐드러졌다.

일렁이는 화염.

그 끝에서.

화르르륵!

진혁이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13화 미궁 리바린토스 (7)

콰아앙!

검과 도끼.

두 개의 흉기가 격돌했다.

불꽃이 일어나며 눈부신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크르르르…!"

미노타우르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힘에 부쳤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인간 따위.

단검과 함께 토막 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와 무기가 맞닿는 순간.

카가가각!

상대는 무게중심을 교묘하게 틀어 버리며 공격을 흘려버렸다.

패링.

그것도 고이다 못해 썩어 버린 수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