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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잠깐만!(3)

루시온은 잠깐 말을 아꼈다.

수첩을 태울 수 없는 상황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은가.

"수첩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태우러 가겠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둘 순 없었다.

러쉘의 지식이 담긴 수첩이기에 남들 손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태워야 했다.

같은 스승을 모신다면 몰라도 생판 모르던 사람이 그 수첩을 손에 넣어 자신과 똑같은 마법을 배운다는 건 무척 불쾌했다.

[지금 네가 가는 게 좀 힘들 텐데?]

"부상 때문입니까?"

[아니. 내가 있던 곳이 좀 척박해서.]

러쉘이 지하를 가리켰다.

[내가 어두운 곳을 좋아해서 지하에 땅을 파고 살았거든.]

"지하라뇨?"

[빛이 닿지 않고, 시원하고, 무엇보다 내 맘대로 실험도 할 수 있으니 이만큼 좋은 곳이 없지.]

러쉘은 그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있던 장소가 어디냐면, 신성 국가 네바스트하고, 테슬라 제국, 그리고 미론스트 왕국 사이에 존재하는 바위 지대 밑이야. 워낙 척박하기로 유명해서 사람들도 오지 않아서 딱 좋았지.]

'…잠깐만.'

루시온은 장소를 듣자마자 헤인트의 동료였던 흑마법사가 번뜩 생각이 났다.

""내 고향은 바위 지대야. 나는 거기서 다시 태어났거든.""

'웃기고 있네. 바위 지대가 고향이라고?'

바위 지대는 그 척박함 때문에 사람들이 살지 않은 곳이었다.

자신이 이하람일 때는 그 흑마법사의 고향이 바위 지대든, 바다든 아무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위 지대가 어떤 곳인지 알기에 그곳이 고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친....'

루시온은 그제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 흑마법사가 바위 지대를 지나가다 우연히 스승님이 머물던 곳으로 떨어져서 수첩을 주운 거였어?'

어떻게 우연히 거기까지 닿는지.

그제야 그 흑마법사가 어떻게 어둠을 오러로 둔갑할 수 있는지 알았다.

[좀 찝찝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둬도 거긴 아무도 몰라.]

"아닙니다."

루시온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흑마법사가 정확히 언제 수첩이 있는 장소로 떨어지는지 몰라도 자신이 불태워야 했다.

'만약 그놈이 이미 수첩을 가진 상태라면....'

루시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처치해야지.'

그놈은 흑마법사를 죽이는 흑마법사였다.

타락하지 않은 흑마법사를 죽이고, 타락한 흑마법사를 원래대로 돌리는 방법을 도중에 깨우쳤음에도 이유를 불문하고 죽였다.

그런 놈이 자신과 같은 마법을 배웠다면 당연히 자신이 먼저 손을 봐야 했다.

"제가 불태우겠습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누군가 스승님의 수첩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하면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없겠지. 네가 내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말이야.]

러쉘은 결국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럼 제대로 알려주십시오. 지금처럼 반발력이 일어나지 않게."

[일단 단계부터 차근히 밟자고. 한, 4일 뒤에?]

"제 몸과 어둠은 별개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부족한 걸 깨달았으니 얌전히 누워서 어둠이나 돌릴 생각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훈련은 계속되어야 했다.

* * *

이틀 후.

"…예, 아버지."

카슨은 연락용 아이템을 손에 쥔 상태로 노비오와 연락하고 있었다.

<네가 보내준 그 정보를 확인했다. 이게 터졌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상황이 급해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아버지께 드린 정보는 제가 알아낸 정보가 아닙니다."

이틀 전, 집사가 한 꼬마에게 받아온 자료에는 엄청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제국의 역사만큼 긴 크로니아가 흔들릴 수 있을 정도의 정보였다.

<네가 얻은 정보가 아니라고 했더냐?>

노비오의 놀란 목소리에 카슨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제가 아닙니다."

<누구인지 확인했느냐?>

"확인은 했지만, 성별이 여자라는 사실 이외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가 죄송해야 할 일이 아니니 그런 말은 말거라. 다만....>

노비오는 말을 흐렸다.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는 듯하지만, 목적을 모르는 이상 방심할 순 없구나.>

"예. 저 역시 그 점이 무척 마음에 걸립니다. 저번에 벌어진 두 사건 역시 어떤 여성과 엮여있지 않았습니까?"

카슨은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과 셴, 데비아가 엮인 사건을 언급했다.

<어쩌면 네 말대로 그 여자가 같은 인물일 수 있다. 혹은 내부인일 수도 있지. 그 사람이 또 언제 접근할지 모르니 일단 주변을 더 살피거라.>

"예, 아버지. 더 철저하게 살피겠습니다."

<루시온은.>

노비오는 말을 던지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은 괜찮더냐?>

노비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카슨은 오히려 루시온이 얌전히 있는 게 너무 이상하다는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루시온에게는 아무 말 말거라. 가뜩이나 제 머리도 어지러울 테니.>

"알고 있습니다. 며칠 후에 대신전에서 열리는...."

카슨은 잠깐 말을 멈췄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헤인트가 왔나 봅니다."

헤인트라는 말에 노비오는 침음을 꺼냈다.

빛의 힘을 가진 헤인트를 생각하면 당장 별장에서 쫓아내라고 하고 싶지만, 루시온이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래. 나는 갈 수 없으니. 카슨 너라도 내 몫까지 루시온을 축하해주거라.>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말씀에 루시온이 많이 기뻐했습니다. 정말 많이 말입니다."

<그렇더냐....>

노비오가 씁쓸한 목소리를 냈다.

<더 일찍, 더 빨리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을.>

"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카슨은 연락을 끊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헤인트의 발걸음이 그의 방이 아닌 루시온의 방으로 향해 있었다.

'황궁에 갔다 왔는데 왜 루시온에게 가는 거지?'

* * *

루시온은 무척 찝찝했다.

흄이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러 가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 그 여관으로 가서 정보를 얻은 후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라타는 너무도 행복하게 흄을 맞이하기 바빴다.

어제는 온종일 방에만 있었기에 라타와 함께 어둠을 유지시키는 훈련을 이어나갔다.

'찝찝하네.'

늦봄이라 이미 진 꽃잎들이 땅에 가득한 게 보였다.

[점심밥 맛있게 먹어놓고는 땅 꺼지게 왜 그래?]

루시온이 갑자기 깊게 한숨을 내쉬자 러쉘은 무척 신경이 쓰였다.

"대신전에 소식이 없습니다."

[대신전이 근처 가게도 아니고. 조금 더 기다려봐.]

"제가 신수의 축복을 받기 전이라면 일주일이 걸리더라도 소식을 기다렸겠지요. 하지만 지금 대신전의 상황은 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맞는데...."

소식이 없었다.

그 공백이 이상해 루시온은 찝찝하고 불안했다.

'설마 황실하고 대신전이 손을 잡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루시온은 제 생각에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도도하던 대신전이 황실에게 머리를 숙이다니.

'그럴 리가 있나. 이번 일은 대신전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루시온은 대신전에서 연이어. 일어난, 폭파 사건이나 타락한 신관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았다.

"스승님."

[그래.]

"혹시나 이번 일로 황실과 대신전이 손을 잡았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겠죠?"

―손을 잡으면 왜 안 돼?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내가 너무 유명해지거든."

[…허.]

러쉘은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라타는 루시온이 유명해지면 좋아!

라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어제 흄이 동화책을 읽어 줬는데 착한 일 하면 엄청 유명해진대. 라타가 루시온이 착한 일을 한 걸 알고 있으니까, 엄청 유명해질 거야.

"바로 그게 문제야."

[네가 원했던 일이잖아. 아무도 널 흑마법사로 의심하지 않는 일.]

"사건이 너무 커졌습니다."

루시온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원했지, 거기에 대신전이든 황실이든 끼어있길 바랐던 건 아니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이만한 일 말고 너를 흑마법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게 할 만큼 완벽한 일은 없어.]

루시온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저 말이 맞는 말이라 무어라 반박하기도 곤란했다.

그때, 축 늘어져 있던 붉은 실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헤인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분명 황궁에 간다고 했는데.'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헤인트의 등장에 괜스레 부러진 팔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지금은 네 몸이나 신경....]

러쉘은 말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았다.

[헤인트가 다급히 오는데?]

"제 쪽으로 말입니까?"

루시온은 자신을 가리켰다.

[어.]

러쉘의 대답과 함께 라타가 침대 아래로 껑충 뛰었다.

―헤인트다! 헤인트!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발소리를 이어 문을 두드리는 금방 들렸다.

"루시온? 안에 있어?"

헤인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시온은 정말 말하기 싫은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기사 제복을 입은 헤인트가 보였다.

[루시온, 네 표정 좀 어떻게 해 봐라. 싫은 티가 줄줄 흐르잖아.]

평소에 표정 관리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던 루시온은 대놓고 굳은 표정으로 헤인트를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의사를 불러올까?"

하지만 헤인트는 붕대로 고정해 놓은 루시온의 팔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아닙니다. 조금 전에 진통제를 먹어서 아직 약 효과가 덜 돌았을 뿐입니다."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헤인트가 말렸다.

"아니야, 아니야. 일어날 필요 없어."

"그나저나 지금 형님께서는 황실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오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일어날 생각이 없었던 루시온은 앉은 상태로 물었다.

"잠깐만."

헤인트는 루시온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덩달아 그를 따라가 무엇인지 확인한 러쉘은 입을 꽉 다문 채로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왜? 뭔데? 라타도 볼래!

러쉘의 표정을 확인한 라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꼬리를 흔들며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검이다! 상자에 검이 되게 많아!

'검이라고?'

루시온은 카슨이 헤인트에게 대놓고 좋은 검을 달라고 요구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헤인트는 검 중에 두 개를 골라서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하얀 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은 검이었다.

"겨우 검으로 너에게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이거라도 우선은 받았으면 좋겠어."

[확실히 저 상자에 담긴 검도 좋지만, 그중에서 제일 좋아. '이거'라고 표현하기에 안타까울 만큼 말이야.]

러쉘은 검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검이 살짝 흔들릴 때 소리를 들어보면 예사롭지가 않아. 하나는 그 단단하다는 흑석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는 뼛조각을 섞어서 만든 것 같은데. 보자....]

검을 보자마자 러쉘이 줄줄이 꺼내는 말에 루시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지?'

[이건 무슨 뼈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기사 가문이 괜히 기사 가문이 아니었어. 이만한 검을 가지고 있다니. 이걸 돈으로 사면 몇만 델인지 모르겠네.]

루시온이 놀라자 헤인트는 멋쩍은 듯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놀랄 건 아니야. 크로니아에서 원한다면 구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헤인트는 숨을 고르고 고마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루시온을 보았다.

"루시온. 네 덕에 아버지께서 드디어 나를 인정해주셨었어. 이 소식을 너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왔어."

"예…?"

느닷없는 소리에 루시온의 시선이 오갈 곳을 잃어버렸다.

뭔가 이상했다.

"다 네 덕이야, 루시온."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루시온이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기껏 팽팽하던 붉은 실이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49화. 오늘은 내가 주인공인데?

루시온은 속이 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뭘 했다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헤인트가 황실 기사가 되어 멀어지는가 싶었는데, 가족과 화해라니.

'네 운빨이라고! 네 운으로 거기까지 간 거라니까!'

루시온은 내지르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저 망할 놈의 실!'

더불어 힘이 빠진 채 늘어진 붉은 실도 째려보았다.

"형님. 전 진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루시온은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헤인트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놀렸다.

"고마워, 루시온."

헤인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공손히 내밀었다.

빛의 축복을 받았기에 무조건 신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버지가 자신을 강제로 신전에 보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원해서 빛의 힘을 타고난 게 아니었다.

자신은 검이 좋았고, 기사로서 죽고 싶었다.

신전을 멋대로 나와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스승의 도움으로 그렇게 기사가 되었다.

이제 아버지가 자신을 인정해주리라 생각했지만, 기사단에 쫓겨나고 말았다.

들어가고.

쫓겨나고.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온 줄다리기에서 자신이 이겼고, 아버지는 자신의 고집을 인정했다.

황실 기사단이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힘과 손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서야 고집을 인정한 아버지의 어리석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로소 자신은 자유로워졌다.

드디어 헤인트 트리아로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황실 기사로서 내 충성과 목숨은 황실을 위해 있지만, 너에게 입은 은혜는 별개야."

루시온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을 줄도 알아야지.

귀를 막고 있는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는 꼴이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갚을게."

더 무서운 말이 헤인트의 입 밖으로 나오자 루시온은 입 안이 빠짝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루시온. 거절도 그쯤 하면 됐어. 이제 슬슬 받아줘야지?]

러쉘은 흐뭇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루시온 근처에 좋은 사람들이 한두 명씩 늘어나니 참 마음이 놓였다.

'빌어먹을...!'

루시온은 분위기상 헤인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죽을 맛이었다.

헤인트와 사이가 틀어져 버리는 게 최악의 상황이었고, 그것보다 한 단계 낮은 게 지금처럼 헤인트가 주변 사람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었다.

둘 다 싫지만, 최악보다 차악이 나았다.

루시온은 이상하게 자신과 엮이는 헤인트가 불편했고, 다른 한편으로 불안하기도 했다.

'실의 힘인가?'

지금은 아직 소설이 시작하지 않은, 2년 전이었다.

'그런데도 주인공과 만났다고 엮이는 일이 계속 발생하니.'

루시온은 러쉘을 보았다.

얼른 선물을 받으라고 자신을 재촉하는 태평한 모습에도 그가 정말로 소멸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지 문득 무서워졌다.

'소설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붉은 실을 없애야 한다.'

루시온은 허둥대는 걸 그만두고 미소를 지으며 검에 손만 얹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잘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검은 언젠가 자신이 사용할 물건이었다.

큰 의미 없이 미리 검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헤인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슨한테 네가 검을 배운다는 말을 들었어. 나중에 진검을 사용할 때, 많이 필요할 테니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헤인트는 검을 탁자에 올려뒀다.

"그나저나 루시온. 널 쳤다던 마차가 누구의 소유인지 모른다며?"

헤인트는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날카로워 보였다.

'형님한테 피이자트 가문이 엮였다는 말까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사단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제일 많이 본 게 뭔지 알아?"

"…사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름 진지하게 대답한 루시온의 말에 헤인트는 순간 당황했다.

"어.... 그렇지. 사람이지."

러쉘이 낄낄 웃자 루시온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답인데 왜 저러시지?'

어느 직업이든 대부분 가장 많이 보는 건 사람이었다.

"음."

헤인트는 쉽게 말을 잊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이어나가려던 게 아닌 듯했다.

―아. 라타가 맞춰볼게!

라타는 코를 벌름거렸다.

―정답은 빛이야! 에헴.

"그, 음, 호위 임무가 제법 많아서 본의 아니게 마차를 많이 봤거든."

으쓱거리던 라타는 뒤이은 헤인트의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루시온은 라타를 쳐다보다 헤인트를 불렀다.

"형님."

"그래. 말해봐."

자신이 대충 얼버무려도 범인을 찾겠다는 헤인트의 투지가 강했다.

루시온은 이참에 확실히 하기로 했다.

"사실 제일 화가 나는 건 저입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구경하다가 한눈을 팔았으니까요.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더는 제가 부끄럽지 않게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헤인트는 루시온의 부탁에 다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저번 대신전 폭파 사건 때도 그렇고, 루시온은 보면 볼수록 참 진국이라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을 저렇게 할 수 있는지.

"형님께서 주신 검은 검을 모르는 제가 봐도 무척 좋아 보입니다. 정말 저한테 주셔도 되는 겁니까?"

루시온은 순간 헤인트의 눈빛에서 영문 모를 대견함을 보았기에 다급히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걱정하지 마. 아, 까만 검은 흑석으로 만들어진 거고, 하얀 검은 몬스터의 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솔직히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어."

[봐봐. 뼛조각이 섞여 있다고 했지?]

금세 러쉘은 우쭐거리며 말했다.

'…몬스터의 뼈라니. 흄이 오면 물어봐야겠네.'

루시온이 검을 빤히 쳐다볼 사이 헤인트는 루시온을 보러온 진짜 용건을 말하러 품에 고이 간직했던 편지를 내밀었다.

"받아, 루시온."

"이게 뭡니까…?"

편지 봉투부터 황금 장식이 박혀 있자 루시온은 설마 하며 물었다.

"세틸 저하께서 보내신 편이야."

"저, 저하께서 제게 왜?"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황실하고 대신전하고 손을 잡은 게 아니겠지?]

러쉘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명령을 받아서 거기까지는 알지 못해. 이만 갈 테니까, 천천히 살펴봐."

헤인트는 엄청난 걸 던진 후에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루시온은 손에 편지를 쥐고 몇 번이나 한숨을 토했다.

대신전에서 답변이 오지 않았고, 5황자인 세틸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건 아무리 부정해도 이제 뻔하지 않은가.

'황실과 대신전이 손을 잡았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루시온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폭파 사건이 좀 크긴 했지. 황실이 묻어주지 않았다면 귀족들의 원성을 다 감당할 수 없었을 테니.]

러쉘은 말과 다르게 손은 어서 열어보라며 재촉했다.

"스승님."

처음 흑마법을 알려달라는 그때의 눈빛처럼 루시온은 진지하게 러쉘을 바라보았다.

러쉘은 흔들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래.]

"전 이제 유명인이 될 겁니다."

[그렇지.]

"그만큼 적도 늘어날 겁니다."

루시온은 편지를 잠깐 내려놓았다.

"크로니아는 적이 많습니다. 변경의 숙명이겠지요."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그래왔듯 변경의 약점은 자신이었다.

루시온은 자신을 조심히 바라보는 라타의 귀를 툭 하고 건드렸다.

"변경으로 돌아가면 제 세력을 더 열심히 키워야겠습니다. 그래서 적들의 손이 제 옷자락에 닿지 않게 처음부터 짓밟아버리겠습니다."

루시온의 올라간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자신이 직접 나설 수 없으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조직을 만들었다.

이제 그 조직을 사용할 때가 더 빨리 찾아왔을 뿐이었다.

[조직을 얼마나 키우려고?]

러쉘이 물었다.

"글쎄요."

크라언을 끌어들였으니 아마 과거처럼 커지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건 크라언을 붙잡을 수 있는, 그가 찾는 왕국이 멸망한 이유를 더 빨리 찾는 것이었다.

똑똑.

일정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루시온은 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도련님. 지금 막...."

흄은 간식을 든 상태로 멈췄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검 앞으로 다가갔다.

검 역시 공명하며 갑자기 '웅웅'하고 소리를 냈다.

"도련님."

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검이 저의 힘이 되고 싶다고 자신을 잡으라며 말을 걸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 하면 되겠네."

루시온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러쉘은 학자의 눈을 하며 흄을 바라보았다.

흄이 하얀 검을 잡자마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검이 흄에게 깃들었다.

잠깐 잠잠하나 싶던 순간, 흄의 머리카락이 길어졌고, 키가 자라났다.

루시온과 러쉘, 그리고 라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흄이 싱글벙글 웃었다.

"…와. 저도 성장을 하네요."

* * *

루시온은 부러진 팔을 가리기 위해 평소에 입지 않은 망토를 왼쪽으로 길게 내려 걸쳤다.

"…도련님."

시녀들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바라보며 두 손을 꼭 모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가만히만 있어도 범상찮은 아우라가 루시온에게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오늘의 주인공다우십니다."

시녀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고생했다."

루시온은 지친 목소리를 내며 시녀들을 칭찬했다.

앞머리도 살짝 올리고, 장식도 요란하게 달려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날이었기에 연회 때와 달리 아주 조금 의욕을 내며 옷도 골랐다.

―루시온이 반짝거려. 꼭 별님 같아.

라타는 루시온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어딜 보아도 루시온이 반짝거려 라타는 함박웃음을 내뱉었다.

루시온은 지그시 러쉘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보아도 꽤 봐줄 만했다.

나날이 시녀의 솜씨가 좋아진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항상 우쭐거리던 러쉘에게 이번만큼은 자신이 생글거려보았다.

하지만 반응은 우습게도 시녀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완벽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만 웃으신다면 모두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도련님. 이번만큼은 환하게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녀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한 명씩 흐뭇하게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볼게."

루시온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시녀 말대로 억지라도 웃어야 했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날이었으니.

루시온은 다시 러쉘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을 꺼내길 바라는 루시온의 눈빛에 러쉘은 못 이기는 척 입을 움직였다.

[그래. 오늘은 네가 주인공답다.]

최고의 칭찬에 루시온은 가려운 입을 참아냈다.

빈정거리기에는 시녀들이 너무 많았다.

루시온은 마지막으로 장신구나 옷 배치, 머리카락 등 여러 가지를 확인한 뒤에 밖으로 나섰다.

또각.

요 며칠 고민했다.

황실과 대신전이 손을 잡아 자신이 유명해지는 최악의 상황을.

누군가에게는 큰 행운이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자신은 크로니아의 유일한 약점이었고, 모두가 증오하는, 흑마법사였다.

어릴 때 벌어진 일과 유령 때문에 아직도 불안증 등 여러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들을 다 떠안고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그 자리가 사실 너무도 두려웠다.

일이 원하지 않게 너무 커져 버렸고,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지도 고민됐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일단 부딪혀보자.'

한 발자국이라도 좋으니 일단 가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운명으로부터,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계단을 내려가자 루시온을 맞이하기 위해서 시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문을 나서자 마차까지 이어진 길목 양쪽에 기사들이 보였다.

순간, 루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러쉘과 라타의 목소리.

그리고 뒤따라 오는 흄의 발소리에 과거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별거 아니네.'

루시온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훌륭하구나."

카슨은 마차 앞에서 루시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먼저 타거라."

"그럼 먼저 타겠습니다."

루시온은 마차에 올랐다.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좋았다.

어떻게 보면 혼자만 슬픈 잔치에 초대된 느낌이었지만, 그냥 즐기기로 했다.

자신이 또 언제 이런 자리에 올 수 있겠는가.

조금은 느긋하게.

루시온은 마차 등받이에 기댔고, 마차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50화. 오늘은 내가 주인공인데?(2)

* * *

"크로니아는 요새 어떻습니까? 형님께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잖습니까."

마차가 별장에서 조금 멀어지자 루시온은 입을 열었다.

흄을 시켜 '크로니아의 거래처'가 가졌던 문제들을 보냈으니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계시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카슨에게서 루시온이 원하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나 본데?]

러쉘은 루시온의 표정을 잠깐 살폈다.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예상한 모양이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버지가 계시는데 걱정이라니."

루시온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노비오는 강했다.

괜히 변경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형님."

"말하거라."

"황실과 대신전이 손을 잡은 상황이 변경에도 영향이 있을까, 저는 조금 걱정됩니다."

"변경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이 불쾌하구나."

"불쾌하다뇨?"

"너를 이용했지 않았더냐."

'…아. 그렇게도 보이겠네.'

루시온은 대답하지 않고 카슨의 말을 기다렸다.

"대신전은 이번 일을 덮는 대가로 너를 팔았고, 황실은 대신전이 황실 밑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너를 황궁으로 끌어들였지."

카슨은 주먹을 쥐었다.

"너만 힘들어졌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후 제 위치는 절대 가볍지 않을 테니까요."

순순히 이용당해주지 않는다는, 루시온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카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너라면 잘하리라 믿는다."

* * *

인도를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로 마차 하나가 지나갔다.

여우가 그려진 문양.

그 문양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크로니아와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를 부르며 환호했고, 길을 지나가던 마차는 오늘의 주인공을 위해 옆으로 비켜주었다.

―우와아. 사람이 엄청 많아! 신기해!

그림자에 있는 라타가 어떻게 밖을 볼 수 있는지 몰라도 정작 루시온은 밖을 쳐다보지 못했다.

이미 환호 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루시온은 가슴을 조여오는 느낌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손에 자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루시온은 눈을 꽉 감으며 아침에 보았던 자료를 떠올렸다.

로베리오 백작 밑에서 일하던 흑마법사의 방에서 가져온 자료로서 로베리오 백작이 내렸던 지시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지시가 담긴 자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료에 그게 있었어.'

까마귀 문양.

루시온은 순간 돋아난 소름에 움찔거렸다.

'공허의 손!'

소설 '어둠의 손아귀'의 최종 보스가 만들었던 조직의 문양이었다.

'팔 하나 부러진 값치고 꽤 비싼 정보를 얻었네.'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로베리오의 부하였던 그 흑마법사에게 푸른 실이 왜 연결됐나 싶었는데 놈은 사실 '공허의 손'에 소속된 흑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흑마법사가 이중 첩자인 건지, 공허의 손이 이미 로베리오와 손을 잡은 후인 건지 확실히 모르겠어.'

어느 쪽이든 루시온은 불쾌했다.

'아직 2년 전인데....'

중요한 건 벌써 공허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움직임이 단순히 2년 후를 위한 밑거름이라면 좋겠지만, 자신이 이미 소설 흐름을 뒤틀어버렸다.

대신전 폭파 사건을 막지 않았던가.

'나비효과인가?'

"이제 곧 도착하니 눈을 떠도 된다."

카슨의 말에 루시온은 눈을 떴다.

그새 주변이 잠잠해지자 눈동자를 창문 밖으로 움직였다.

슬슬 마차 창문 밖에 건물들도 사람들도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궁으로 향하는 다리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아직도 긴장되느냐?"

"예. 긴장됩니다. 손이 떨리고, 가슴도 울렁거립니다."

루시온은 카슨의 물음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연회 때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신수를 가진 벨로스였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이 주인공인 날.

이하람일 때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긴장과 불안으로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실수해도 괜찮다."

카슨이 루시온을 다독였다.

"정말 참지 못하겠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라."

"그러면 안 되잖습니까."

루시온이 기겁했다.

그 말을 누구도 아닌 카슨이 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황실에서는 이미 네 상태를 알 테지. 그런데도 너를 황궁으로 부르지 않았더냐."

[역시 뒤가 없는 건, 집안 내력이야.]

러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네가 이렇게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왔고, 지금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탄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견스럽단다."

카슨은 두 손을 꽉 쥐었고 천천히 루시온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까지 너에게 크로니아가…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지 못했지만, 이제는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믿어줬으면 하는구나."

미안함으로 가득 찬 카슨의 눈동자를 보자 루시온은 조용히 그를 불렀다.

"형님."

"그래."

"저는 고기가 좋습니다."

자신은 아직 성장기였다.

많이 크려면 고기만 한 게 또 없었다.

―고기?

라타가 금세 반응했다.

"준비하마."

카슨의 눈이 흔들렸지만, 겨우 대답했다.

"마카롱도 좋아합니다."

"그 또한 준비하마."

루시온은 이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전부 하나씩 말했다.

그때마다 카슨은 준비하겠다며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아마 힘들 테니, 내일 제가 말한 음식들로 식탁을 꽉 채워주십시오. 지쳤을 땐 역시 맛있는 걸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시온…?"

"도망가려면 진작 도망갔을 겁니다. 형님이 걱정하신 만큼 저도 저 자신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피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루시온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형님."

"…그래."

"절 위해 그리 애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루시온은 카슨의 걱정이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적국에 납치되었을 때, 이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저는 아버지와 형님을 더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카슨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자신도 과거를 떨쳐내려고 하는데, 카슨도 이제 놓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구나...."

카슨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카슨이 혼잣말을 하듯 말을 꺼내다 곧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 *

"별일 아닙니다."

루시온은 황실에서 내어준 방으로 들어와서야 입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려 방에 들어오기까지 러쉘은 눈으로 계속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었다.

[아니. 그냥 나 혼자만 궁금할 뿐이니까, 꼭 말하지 않아도 돼.]

"이제는 별일이 아니게 됐습니다."

루시온은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마차에 내리자마자 납치되듯 황실 기사들에 둘러싸였다.

아무리 안전을 위한 거라지만, 카슨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그때가 몇 살인지 몰라도 하여튼 좀 어릴 때 적국에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적국…?]

러쉘은 시작부터 나오는 말에 자신이 잘못 건드렸음을 직감했다.

"정확히는 배신당해서 끌려갔죠. 어쨌든, 거기서 구타를 당했는지, 고문을 당했는지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도 흉터가 제법 있습니다. 그래도 사지가 멀쩡하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

얌전히 있던 러쉘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휘날릴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분노했다.

루시온은 멋쩍은 얼굴로 러쉘을 달랬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 일입니다."

[왜 너였는데?]

"검에 재능이 있던 카슨 형님하고 마법에 재능이 있던 샤엘라 누님과 다르게 저만 평범했거든요. 두 사람은 노리고 싶어도 노릴 수가 없었던 거죠."

러쉘은 그제야 루시온이 자주 꺼내던 '크로니아의 약점'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들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말이었다.

―씨이! 라타가 혼내줄게!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림자 밖으로 나온 라타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됐어. 이미 아버지께서 혼내셨어."

루시온은 라타의 이마를 꾹 눌렀다.

노비오가 변경의 지배자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아마 그때쯤인 듯했다.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십시오, 스승님. 그 덕에 제가 어둠의 축복을 받았고, 이렇게 스승님도, 라타도, 흄도 만났으니까요. 지금은 꽤 행복합니다."

루시온이 활짝 웃어도 러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니. 전보다 더 일그러졌다.

[뒤늦게 어둠의 축복을 받았다고?]

"예. 그때, 어둠이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땐 어둠인지 몰랐지만요."

어둠과 빛은 보통 태어나면서 축복을 받고, 마나는 5살 때, 선택을 받아 나타나는데, 이를 '발현'이라고 불렸다.

'어둠과 빛은 발현이 거의 없는데.'

어둠과 빛의 발현 조건은 마나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그나마 알려진 건 '간절함' 때문에 발현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러쉘은 어디 성한 곳이 없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시장에서 군것질하는 것도, 그냥 길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 여기는 그 모습이 마냥 안쓰럽고 측은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약속하마.]

러쉘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말을 들었는데 스승인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네가 다시는 힘에 억눌리는 일이 없도록.]

루시온이 힘을 가지지 못했기에 벌어졌던 일이었다.

언젠가 다시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강해지도록 스승으로서 너를 이끌어주마.]

진심이 가득 담긴 그 말에 루시온은 비소로 러쉘과 자신이 진짜로 사제관계가 된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러쉘은 단지 자신에게 흑마법을 배우면 된다고 말했었다.

지금까지 강해지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었다.

"더 열심히 해서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루시온은 고마움을 담아 목소리를 내었다.

―이히히. 그럼, 라타도 고마워할래. 라타는 루시온 덕분에 탄생 됐으니까.

라타는 루시온의 무릎으로 올라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리인데, 훈련 강도를 얼마나 올리면....]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흄입니다."

'좋은 타이밍이다.'

루시온은 그 어떤 순간보다 흄을 반겼다.

"들어와."

흄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루시온에게 종이를 넘기며 선언식 때 루시온이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가장 밑에 적힌 건 도련님께서 기억하셔야 할 순서입니다."

"나를 배려한 건 아닌 것 같고. 어쨌든 괜찮네."

루시온은 황실에서 열리는 선언식치고 몇 없는 절차에 만족스러워했다.

"날짜를 급하게 잡은 만큼 절차가 짧아졌다고 들었습니다."

흄이 품에서 시계를 꺼내 확인했다.

"지금 30분 정도 남았고, 시작 15분 전에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잠깐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헤인트가 줬던 하얀 검을 흡수한 뒤로 흄은 성장했고, 성장한 만큼 늠름해지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루시온은 본론을 꺼냈다.

"오늘 네가 찾아야 할 놈들을 알고 있지, 흄?"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다 찾아낼 테니, 도련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흄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냈다.

여관 밑 장소에서 정보를 모조리 베껴 적으며 그 정보를 적었던 이들의 냄새까지 기억했다.

오늘을 위해서.

'흄이 놈들을 찾을 테고, 내일은 놈들이 정보를 수거하는 날이니...."

루시온은 날짜와 함께 흄이 알려준 사실을 기억했다.

흄이 말하길, 유령들이 떠드는 말 중에 정보를 수거하는 날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보를 수거하는 사람들도 계속 바뀌고, 여관 밑 지하 장소가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이상 뒤쫓는 행동은 괜히 덜미를 내어주는 일이라 흄에게 지시하지 않았다.

"흄."

대신 루시온은 흄에게 중요한 일을 하나 시켰다.

"조작된 서류는 잘 넣고 왔어?"

내일은 놈들이 정보를 수거하는 날이었다.

놈들이 잘못된 정보를 알도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정보를 조작했다.

51화. 오늘은 내가 주인공인데?(3)

"예. 물론입니다. 지배된 유령을 피해서 자연스럽게 넣었습니다."

흄은 대답한 후에 다시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도련님."

"말해."

"조작된 정보 중 도련님과 관련된 정보는 조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했습니다."

조작한 정보 중 하나는 방금 흄이 말한 대로 자신과 관련된 정보였다.

셴과 데비아가 자신의 하루를 시간마다 보고한 정보가 있었다.

일부러 외출시간이라는 걸 따로 만들어 밖으로 나가는 시간을 고정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과에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다는 등 가짜로 병 하나를 만들어 적들이 언제든 간접적으로 자신을 노리도록 길을 열어 두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정보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건 나도 조금 의아하긴 했지.]

러쉘이 흄의 말에 공감했다.

조작한 다른 정보는 '공허의 손'과 관련되어있을 거라 생각한 정보들이었다.

[왜 흑마법사와 관련 있을 법한 정보들을 건드린 건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시온은 놀란 듯 물었다.

[그야 뻔하지. 누군가 갑자기 죽었다, 정신이 나간 행동을 한다 이러면 90%는 흑마법사 짓이니까.]

러쉘 말이 맞았다.

자신도 그런 상황과 관련된 정보를 뽑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조작했다.

[내가 아무리 흑마법사라고 해도 걔들이 하는 행동은… 하.]

러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과격하게 행동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저도 스승님과 비슷한 생각으로 정보를 조작했습니다. 어차피 흑마법사가 세계의 악이라도 해도 왠지 덮어주고 싶었거든요."

루시온은 자연스레 거짓말을 했다.

그 여관을 누가 소유했는지 몰라도 적어도 공허의 손은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정보들을 모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 정보를 모았다는 건 뻔하지.'

여관을 소유하고 있는 자와 공허의 손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나 없나 확인할 겸 감시라는 목적을 숨기고 흑마법사와 관련한 정보를 보고하게 시켰을 터.

여기에서 공허의 손이 저질렀던 일이 보고되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의심이 서로를 겨누는 칼날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제법 볼만하겠는데?'

루시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어쨌든, 첫 번째 정보를 조작한 건 잘했어. 가짜 정보를 이용해 앞으로 너한테 어떻게 접근할지 볼만하겠네.]

"내일 이후로 많은 게 달라졌으면 합니다."

[넌 곧 달라질 텐데?]

러쉘의 묵직한 말에 루시온은 순간 숨을 멈췄다.

'…아. 잠깐 잊고 있었네.'

루시온은 오늘따라 더 치렁치렁한 자신의 옷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지 참.'

―그럼 라타는 언제 달라질 수 있어? 언제 신수 아저씨처럼 커져?

라타는 앞발로 루시온의 옷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그 신수처럼 되려면 좀 많이 커야겠는데?]

"라타 넌 천천히 커도 되니까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루시온은 라타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루시온은 라타처럼 천천히 클 거야?

"난 안 돼. 크는 시기가 있거든."

루시온은 딱 잘라 말했다.

가뜩이나 예전에 잘 먹지 않아서 키가 덜 클까 봐 걱정이었다.

―그, 그럼 흄은?

"전 그 검만 여러 개가 있다면 한 번에 쭉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흄의 대답에 라타는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작은 몸을 바라보았다.

똑똑.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에 루시온은 라타의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넣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흄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면서 상황을 알렸다.

"이제 곧 식이 시작되니 나갈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

루시온은 카슨이 미리 주었던 우황청심환 같은 약을 삼켰다.

* * *

루시온이 황궁을 처음 보았을 때, '황금으로 세공된 무늬임에도 화려하지 않고 차분하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어 황궁으로 들어가자마자 곧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이 거지 같은 빛은 어디에서나 있네.

빛을 향한 탄식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황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벽 무늬, 곳곳에 세워진 동상, 장식품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우아함이 넘쳤다.

하지만 모든 걸 한꺼번에 보았을 때 조용했다.

삭막했고, 낯설었고, 자신이 타인이라고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낯섦은 똑같았다.

[…하. 대신전도 아니고 참 여기저기 잘도 깔아뒀다. 입구에만 깔렸는지 알았더니 황궁 여기저기에 잘도 뿌려뒀네.]

러쉘은 눈동자를 굴리며 곳곳에 깔린 빛의 힘이 깃든 물건을 노려보았다.

'황궁이라도 흑마법사를 대비하지 않을 순 없겠지.'

루시온은 빛이 내는 거북함을 참아냈지만, 속이 울렁거리는 건 참기 어려웠다.

[이럴 거면 너를 왜 초대했는데?]

루시온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러쉘이 기어코 분통을 터트렸다.

'뭐 어쩌겠습니까?'

루시온은 내뱉고 싶은 말을 참았다.

황궁은 대신전과 달랐다.

자신이 제아무리 신수의 축복을 받았어도 그들의 관점에서 자신은 고작 신하, 백성 그 이상도 아니었다.

자신을 배려할 이유도 없기에 당연히 빛의 힘이 깃든 물건들을 치우지 않았을 테지.

앞서 길을 안내해주던 황실 집사는 홀로 들어서는 커다란 문을 가리키며 물러났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아. 배려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네.'

흄은 작위를 받지 못한 평민이기에 원래는 황궁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넘치는 자애로움으로 흄이 황궁과 선언식에 출입할 수 있게 해줬지 참.'

루시온은 몸을 짓누르는 빛의 불쾌함 때문에 빈정거리고 싶어 입이 가려웠다.

'조금 전 그 방에 계속 있고 싶다.'

그나마 빛이 덜해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루시온은 찡그린 얼굴로 문 앞에 섰다.

시녀들이 열심히 꾸며줬거늘, 이대로라면 머리카락이 땀에 젖을 기세였다.

[안은 더 심할 거다. 신관들이 있으니까.]

러쉘이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황실과 대신전이 손을 잡고 벌인 일이니 이미 올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루시온은 문 옆에 선 기사들을 애써 쳐다보지 않은 채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더 많은 빛이 새어 나왔다.

신관들이 내뿜는 빛과 골고루 섞여 있자, 루시온은 순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도련님. 제가...."

루시온은 흄에게 손을 들어 말렸다.

나름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던 연회와 달랐다.

선언식은 철저하게 귀족의 품행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즉, 곧 죽어도 품위는 유지하고 죽어야 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서 입장하십니다."

크게 내지르는 시종의 말에도 귀족들은 황제를 향하는 고개를 그대로 유지했다.

'뒤를 쳐다보고 싶어서 죽을 텐데 잘도 참네.'

덕분에 다행이다 싶었다.

루시온은 앞만 바라보았고, 본의 아니게 황제 옆에 서 있는 6남매로 된 황자와 황녀와 눈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무료함과 따분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이들 중 세틸만이 루시온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네놈이 황제하고 머리를 맞대서 이 자리를 만들었겠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이 자리에 발을 딛는 순간, 루시온은 분위기를 느낄 새도 없이 진땀을 삼키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영원한 태양께 고개를 숙이나이다."

"고개를 들라."

황제는 루시온의 인사를 기분 좋게 받으며 신관들을 쳐다보았다.

황제의 시선에 신관들은 넙죽 고개를 숙이며 빛을 거둬들였다.

[지금 장난하나. 이제 와서 빛을 거둬들인다고?]

러쉘은 황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대놓고 노려보았다.

아마 황제를 보고도 저렇게 태평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존재는 유령뿐일 테지.

"이리 가까이 오게나."

황제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루시온을 재촉했다.

빛이 거둬져서 속은 한결 편했지만, 황제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루시온은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흄을 향해 눈짓을 줬다.

흄이 오른쪽으로 빠지는 모습을 본 뒤에 루시온은 발을 움직였다.

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짧았던 그 거리가 저택과 도시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었고, 질퍽한 진흙 속을 걷는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느렸다.

'괜히 황제가 아니네. 압박감이 장난 아닌데?'

[저 양반, 저거 진짜 황제 맞아?]

러쉘이 꺼내는 말에 루시온은 잠깐 움찔거렸다.

황제가 러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괜히 긴장됐다.

[너를 향해서만 일부러 기세를 드러냈어. 지금 네가 느끼는 건 황제가 내는 기세 때문이라고.]

그 말에 루시온은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례하게 무슨 짓거리인지.

[내가 보기에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은데?]

'확인…?'

루시온은 황당함을 애써 감췄다.

설마 자신과 관련한 사실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조금 전 황제가 신관을 봄으로써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은 통과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정말로 자신이 일반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차례였고.

'망할 새끼…! 어쩐지 압박감이 느껴지더니.'

루시온은 그제야 황제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기품이 보이는 걸 빼면 나름 평범한 중년 아저씨에 불과했다.

"짐이 그대를 배려하지 못했도다."

아무래도 나머지도 통과했는지 황제가 기세를 거뒀다.

"…하."

루시온은 순식간에 편해지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멀었던 거리가 이제는 원래대로 보였다.

루시온은 전보다 더 빨리 황제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늘 그대는 짐에게 무릎을 꿇지 말라."

황제의 말에 루시온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개 훈련 시키듯 이것저것 시도한 놈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던 참이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꼭 망자들 같네. '일어나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저렇게 함께 일어나주거든.]

러쉘은 그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망자라고 하다니.

순간 루시온은 손으로 입을 가려 피식 웃으려다 다급히 웃음을 삼켰다.

갑자기 황제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순서는 종이에 없었는데?'

자신이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으면 그가 적당히 나불거리다 벨로스가 자신의 이마에 찍힌 신수의 축복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고, 또 대신관과 자신까지 미리 준비된 대본은 읽는 걸로 홀에서 진행되는 선언식은 끝이었다.

그 뒤에 벨로스와 자신이 백성들이 모인 광장으로 가 활짝 웃으며 손 몇 번 흔들어주고 연회를 끝으로 선언식이 끝나게 된다.

황제는 이처럼 정해진 순서를 무시하고 루시온의 코앞까지 다가와 웃었다.

"짐이 과했노라."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면 들릴 리가 없을 만큼 희미한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폐하."

"본의 아니게 그대를 시험했으니, 그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헤인트 트리아 경에게 말해놓게."

'헤인트가… 왜 언급이 되는 거지?'

루시온은 황제에게 빚 하나를 받았다는 생각에 좋아하다 말고 팍 식어버렸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황제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대는 테슬라 제국의 자랑이네!"

황제는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다.

흐뭇한 얼굴로 루시온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에서 가식을 찾아볼 수 없었다.

[봤지?]

러쉘이 못마땅한 얼굴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무궁한 영광입니다, 폐하."

황제는 본격적으로 선언식을 진행하려 다시 황좌로 돌아가려 등을 돌리다 말고 뒤를 쳐다보았다.

쿠웅!

홀을 향해 갑자기 거대한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미친....]

러쉘이 기겁했다.

황제가 있음에도 겁도 없이 빛을 뿜는 놈이 있다니.

"…허억."

루시온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정신을 놓아버릴 뻔했다.

―안 돼. 어둠아 날뛰면 안 돼. 쉿, 쉿. 가만히 있어.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어둠을 달랬다.

러쉘이 빠르게 놈을 찾았다.

[저 새끼다…!]

그의 시선이 홀로 들어서는 문으로 향했다.

문밖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단순히 신관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

신관들이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내보이는 잔인할 만큼 날을 세운 빛이었다.

러쉘의 눈동자가 놀란 눈을 한 제국의 대신관을 향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인 듯했다.

'제국의 신관이 아니라면 답은 뻔하지.'

신성 국가, 네바스트.

그 나라의 신관들이 이번 선언식을 찾아왔다.

52화. 이 환호성은 나만을 위한 소리다

'저놈 중에 어둠의 힘을 누군가 감지했다.'

러쉘이 홀 전체를 감싸는 빛을 보고 달리 생각했다.

'완전히 감지한 건 아니야. 누가 내뿜었는지도 모르고.'

만약 루시온에게서 새어 나온 어둠을 알았다면 그 빛은 온전히 루시온을 향했을 테니까.

쿵!

문이 거침없이 열렸고, 황제는 굳은 얼굴로 홀로 들어오는 무리를 보았다.

'…썩을.'

루시온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마지막에 도착한, 불쾌한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입은 새하얀 복장을 보아하니 신관들이었다.

'…저 개새끼들. 왜 다짜고짜 빛을 뿜고 지랄이야?'

루시온은 자신을 억누를 빛 때문에 다리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아 필사적으로 버텼다.

"폐하.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하고 늦어버린 소신들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들 중 한 남자의 말과 함께 당당하게 붉은 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그 힘을 거두지 못하겠는가!"

황제가 매섭게 입을 열었다.

빛이 순식간에 '뚝'하고 끊어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카슨이 당장 루시온을 부축했다.

"루시온! 숨을 쉬거라."

루시온은 사라진 빛 덕에 가까스로 제대로 숨을 토해냈다.

'…숨이 막혀서 죽을 뻔했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황제는 분노를 터트리며 신관들을 노려보았다.

"폐하. 저희는 어둠을 처단하는, 신관의 의무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도무지 황제를 앞에 뒀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당당했다.

"누가 이 황궁에서 멋대로 빛을 뿜어내라 명령했더냐?"

황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저희가 무지하여 그만 본능적으로 빛을 내뿜었습니다."

남자는 루시온을 힐끔 바라보았다.

'…일부러 한 거다.'

그 시선에 루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빛을 퍼트린 놈이 바로 저놈이야. 네 어둠을 감지했거든. 하지만 완벽히 알아낸 건 아니라서 지금 빛을 뿜어 찾고 있는 거야.]

러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어둠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리 대신관일지라도 흑마법사를 찾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가능하냐고 묻고 싶겠지.]

러쉘은 루시온의 표정을 읽었다.

[너처럼 드물지만, 예외 되는 사람이 있어. 지금 제국의 대신관은 가만히 있잖아? 저놈이 유독 어둠에 민감한 신관일 거야. 아마 네가 황제 때문에 감정이 조금 격해졌을 때, 그때 느꼈겠지.]

어둠은 부정적인 감정에 금방 영향을 받았다.

'제기랄....'

루시온은 치솟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뒤늦게 붉은 실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날카로운 검처럼 보였다.

러쉘은 바짝 굳은 루시온의 표정을 보자 입을 열었다.

[루시온. 긴장할 필요 없어. 아까 말했듯이 어둠을 완벽하게 감지한 건 아니야.]

루시온은 신관 때문에 긴장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타난 붉은 실 때문이었다.

소설 속 루시온이 타락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지금과 비슷했다.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신관에게 흑마법사라고 내몰리게 되는 사건.

'아니야. 소설과 지금의 나는 달라.'

루시온은 부정했다.

자신이 이하람이라는 기억을 가졌기에 러쉘로부터 흑마법을 제대로 배웠다.

아마 그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면 유령인 러쉘을 의심하고, 의심해서 흑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겠지.

"자네들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었는가."

황제가 입술을 뗐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오늘은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를 알리고 축복하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황제의 손가락이 루시온을 향했다.

"그걸 잘 아는 자네들이 오늘 주인공을 공격했단 말이더냐? 당장 사과하게."

남자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오늘 신성한 날의 주인공이 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그럼 내가 헛소리라도 하는 걸로 보이나?"

"폐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짐은 사과부터 하라고 말했노라."

"폐하!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신력을 거부하는 몸을 가졌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도 당황했기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짐은."

덩달아 황제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짐의 백성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노라."

황제가 강조하는 '짐의 백성'이라는 말에 루시온은 지금 제국과 네바스트의 힘겨루기가 벌써 시작되었다는 걸 알았다.

'황제가 왜 처음부터 그따위 테스트를 했는지 알겠네.'

신수는 신관들의 상징이자 곧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상징이기도 했다.

만약 신수의 축복을 받은 이가 신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에, 어떤 힘도 없는 일반인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빛을 찬양하는 이 세계에서 빛은 특별하고, 선택된 자만이 누릴 수 있다는, 신성한 의미가 다소 희미해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황제는 이를 노렸다.

자꾸만 치솟는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힘을 억누르고자 자신이 평범한지 아닌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네바스트에게 있어 자신은 앞으로 인정은 해야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될 테니 황제가 생각하는 의도에 딱 맞는 사람이기도 했다.

[황제가 왜 직접 나서서 널 보호하나 했더니, 네바스트 놈한테 한 방 먹이려고 그랬네.]

러쉘은 낄낄 웃었다.

황제와 네바스트의 신관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꼭 꼬집어 누가 더 싫냐고 한다면 루시온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남자는 연신 당황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의 고개는 기어코 루시온을 향해 숙어졌다.

"빛의 아들이시여. 저는 네바스트의 대신관 중 한 명인 에올입니다. 가엾은 당신께 자비로움을 베풀지 못한 저의 어리석음에 깊이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 내용이 다소 삐딱했으나, 화려한 등장치고 초라한 결말을 맞은 꼴이었다.

루시온은 혹시 몰라 준비했던 손수건으로 입가에 삐져나온 피를 닦았다.

"아닙니다. 빛의 자비를 받지 못한 제 탓이 큽니다. 그럼에도 신수께서 절 선택하셨기에 대신관님께서 착각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루시온은 애써 미소를 보였다.

누가 보아도 이곳에서 악역은 에올이었다.

"괜찮느냐?"

황제가 딱 좋은 순간에 루시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식에 늦은 것도 모자라 남의 나라에 당당하게 빛을 내뿜던 에올과 대비될 만큼 자애로운 황제의 모습에 여기저기 탄성이 흘러나왔다.

"폐하께서 소신을 걱정해주시니 이토록 큰 영광은 없을 겁니다."

루시온도 이 촌극에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폐하."

그때, 에올이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짐은 그대에게 입을 열라고 말한 적이 없도다."

황제가 차갑게 에올을 쳐다보았다.

에올은 당장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깨물며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된 듯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고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폐하. 제 무례함을 용서해주시고, 말씀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황제는 에올의 말을 흘려들으며 루시온만 신경 썼다.

"그대의 몸이 좋지 않다면 식을 조금 미뤄도 되니 편하게 말하게나."

[황제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러면 좋지 않은데....]

러쉘은 에올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대신관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에올은 루시온이 가진 어둠의 힘을 느끼지 않았던가.

"어둠을 따르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에올은 기어코 상황을 뒤바꿀 만한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싸아아.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

러쉘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흑마법사를 언급했는가?"

황제는 이번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다른 말과 달랐다.

대신전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보안을 자랑하는 황실에서 흑마법사가 기어 들어왔다니.

"자리가 자리인 만큼 짐은 자네의 말을 조금과 달리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도다."

황제의 눈이 매서워졌다.

"자네의 그 혀가 짐이 생각한 것보다 더 무거웠으면 하네."

"저 에올은 폐하께는 물론, 빛의 신께 맹세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음을 맹세하겠습니다."

저 맹세는 강제성이 없는 맹세였다.

하지만 신관이 빛의 신을 언급한 이상 대신관이든 누구든 파면을 각오한 말이었기에 황제는 물었다.

"하여 자네는 찾아냈는가?"

상황을 떠나 방금 에올은 빛을 사용했다.

흑마법사가 이 안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을 터.

"한 번만 더 확인할 수 있게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카슨이 에올의 말에 입을 열었다.

"제 동생만큼은 잠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루시온은 이미 한 번 빛을 맞은 상태였다.

두 번은 허락할 수 없었다.

"폐하. 지금 여기에서 누구도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신력을 거부하는 이들 속에 신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둠을 따르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에올이 이를 거부했다.

제국의 신관들은 그 오만함에 입이 가려웠으나, 황제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에올 대신관. 나는 자네의 막말을 더는 봐줄 수가 없네."

카슨은 존칭을 집어넣었다.

네바스트에서 대신관이라는 자리가 높겠지만, 여기는 제국이었다.

귀족도 아닌 자에게 존칭해줄 자비는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형님."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확인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차피 나중에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습니까?"

선언식 순서상 어차피 흑마법사 여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상대가 제국의 대신관에서 네바스트의 대신관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러쉘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네가 아니지.]

하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루시온이 쌓은 빛의 내성은 20단계 중 4단계.

3단계에서 이미 한 칸 더 뛴 상태였다.

"하나 그대는 지금 이미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가."

황제는 루시온의 허락에 잠깐 놀랐다.

절차상 흑마법사 여부를 확인한다 한들, 대충 넘어가라고 이미 대신관에게 말해둔 상태였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를 공포하는 날에 그 주인공이 사라지면 곤란했지 않는가.

"폐하."

루시온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말하거라."

황제는 루시온이 발언할 수 있게 기회를 주었다.

"바라옵건대, 모두가 보는 이 자리에서 절 향한 의심이 나오지 않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에올 대신관님께서 절 확인해주신다면 다른 나라들 역시 이를 책잡지 않을 겁니다."

루시온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아무리 제국의 대신관이 자신을 검사한들 분명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야 확실히 에올에게 검사받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루시온은 에올에게 거대한 엿 하나를 먹이고 싶었다.

'에올 네놈은 네가 꺼낸 말을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야 할 거다.'

루시온은 평생 사라지질 않을 에올의 꼬리표를 기대하며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타,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해. 말하면 안 돼.]

러쉘은 루시온의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신관이 말하는 검사는 지금까지 루시온이 맞았던, 한 번에 들어오던 빛과 달랐다.

조금씩 천천히 흘려보내 일부러 어둠이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게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이 방법을 몰랐다.

제자가 모르면 알려주고 도와주는 게 스승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저 재수 없는 신관에게 빛이 들어오거든, 어둠이 움직이지 않게 라타 네가 통제해. 지금 루시온이 어둠을 움직이면 바로 들킬 테니까 라타 네가 해야 해.]

직접 루시온이 어둠을 통제하는 것보다 라타가 어둠을 통제하는 게 안전했다.

[빛이 조금씩 좀 오래 들어올 거고, 나도 같이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러쉘은 그림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허락합니다'라고 루시온이 혼잣말을 하자 카슨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으면 저런 말을 하는지.

"에올 대신관."

황제는 대답보다 에올을 불렀다.

"예, 폐하."

"짐은 이미 자네들의 등장에 기분이 매우 언짢아졌네. 에올 자네가 하는 일이 명예롭지 않았다면 당장 쫓아냈을 테지."

조용히 울음소리를 내는 호랑이같이 황제의 말 한마디가 무거웠다.

"그러니 자네는 책임지고 이 선언식이 무사히 진행되도록 해야 할 걸세. 나는 이미 자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었으니."

황제는 에올에게 경고하고는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

"예, 폐하."

"허락하겠노라."

"폐하의 넓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루시온은 카슨의 부축을 받고 에올에게 다가갔다.

황제의 발언 때문인지 에올은 조금과 달리 긴장이 얼굴에 묻어났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이 먼저 싱긋 웃으며 에올에게 말을 걸었다.

순간, 에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내가 처음부터 의심스러웠다 이거지?'

에올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얼 바랐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빛의 내성.

라타와 러쉘.

'해 볼 테면 해라.'

루시온은 자신 있었다.

53화. 이 환호성은 나만을 위한 소리다(2)

"그럼 팔을 내어주시지요."

에올의 요구에 루시온이 당당하게 팔을 내밀었다.

그 당당함에 에올은 입술을 핥았다.

선언식을 망치지 않게 검사하라는 황제의 압박과 흑마법사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공존했기에 에올의 손끝이 떨렸다.

"빛의 아들이시여. 아프시겠지만, 빛을 저항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에올은 부담감을 떨쳐내려 숨을 몇 번 고르다 목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루시온은 일단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에올이 숨을 가다듬은 후에 루시온의 손목에 손을 올렸다.

아직 손만 올렸음에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귀족과 신관들의 이목이 쏠렸다.

황제는 가까이 있기에 대놓고 바라보았고, 황자와 황녀는 체면상 보지 않는 척하며 힐끔 살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때, 에올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와.'

루시온은 살짝 놀랐다.

황제가 적당히 하라고 말했고, 러쉘이 빛이 적게 들어온다고 해서 기껏해야 라트초를 먹을 때 느껴지는 근육통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거북이가 기어가듯 욱신거림이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아프겠지만, 억지로 저항하려고 하지 마, 루시온.]

루시온은 러쉘 말대로 몸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그러나 욱신거림이 손톱으로 피부를 꽉 누르는 것처럼 점점 더 깊게 이어지자 터져 나오는 신음은 막지 못했다.

이미 빛이 지나간 자리는 불에 덴 듯 화끈거리기까지 해 다리마저 저절로 덜덜 떨렸다.

"언제까지 하는 건가?"

카슨이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에올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빛의 균형이 무너질 터.

흑마법사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빛을 이용해 몸 전체를 다 살펴봐야 했다.

간사한 흑마법사들이 신관들의 검사를 피하고자 몸 구석으로 어둠을 모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에올은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가장 신중히, 그리고 빠르게 빛을 움직였다.

'깨끗하다.'

에올은 루시온의 몸을 살피면 살필수록 어둠도 빛도, 심지어 마나도 발현되지 않는 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나가 있다면 빛에 닿는 순간, 파도처럼 흔들릴 테고, 어둠이 있다면 괴로움에 요동치다 곧 빛을 공격하기 마련이었다.

'…내가 틀렸다.'

에올은 고통에 괴로워하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아니다.'

에올은 빛을 거둘 때쯤, 잠깐 멈췄다.

'…뭐지?'

처음 출발했던 빛의 양과 달랐다.

마치 빛을 저항한 것처럼.

하지만 더는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루시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손에 일어나는 떨림도 심상찮았다.

에올은 다급히 손을 뗐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과연 에올이 무엇을 말할까, 모두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빛의 아들이시여."

에올은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증명했다.

루시온은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장내가 떠들썩해졌다.

신력 알레르기가 있는 루시온이 정말로 신수의 축복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셈이 아닌가.

"정말이었다고. 정말 신수께서 축복을 내리셨어."

"신수께서 우리 제국을 선택하신 거야."

하지만 정작 루시온은 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에올과 이어졌던 붉은 실이 끊어졌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대신관인 에올의 발언에 루시온은 대외적으로 완벽한 일반인이 되었다.

[고생했다, 루시온.]

러쉘 역시 담담하게 말했다.

빛 때문에 속이 갈리는 고통을 참아내고 얻은 결과였다.

아니, 지금까지 내성을 기르고자 매일 무던히 괴로움을 참아낸 루시온의 승리이기도 했다.

"토하고 싶으면 토하거라."

카슨이 내미는 손수건을 받아서야 루시온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빛의 내성이 통했다.'

그간 빛을 크게 한 방 얻어맞는 일이 많아 몰랐지만, 비로소 내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체감되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라타.'

이어 라타가 있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빛에 닿은 어둠이 타들어 갈 때마다 러쉘과 라타가 어둠을 억지로 붙잡아 주는 게 느껴졌다.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잠시 뒤, 선언식을 거행하겠노라."

황제는 방긋 웃으며 힘찬 목소리를 냈다.

* * *

황제가 일부러 긴말을 꺼내고, 제국의 대신관이 나와 교장 선생님처럼 말을 하는 사이 루시온은 끙끙 앓으며 죽을 듯이 앉아 있었다.

[저놈이 네 몸 구석구석으로 빛을 보냈으니 며칠 앓을 거다.]

루시온이 그림자를 보자 러쉘은 다시 말을 했다.

[라타는 괜찮으니, 네 몸이나 신경 써. 빛의 힘은 진통제를 써도 통하지 않으니까.]

루시온이 힘겹게 고개를 돌리다 흄과 시선을 마주했다.

에올 때문에 목적이 살짝 바뀌었지만, 자신의 진짜 목적은 여관 밑 지하 장소에서 얻었던, 크로니아와 관련한 정보를 쓴 놈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은 이리 나오게."

대신관이 물러난 뒤, 황제가 루시온을 불렀다.

대신관이 있던 자리에 어느새 벨로스가 서 있었다.

긴장해 바짝 굳어 있는 모습이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수를 불러내거라."

하지만 황제의 명령에 언제 긴장했냐는 듯 자연스럽게 신수를 불러냈다.

―모든 이야기는 들었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어둠을 따르는 아이여.

신수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

신수가 고개를 숙이다니.

이미 한 번 그 모습을 보았던 대신관과 벨로스만이 차분했다.

"시, 신수께서...."

에올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떼었다.

그의 시선은 루시온에게 향했다.

[저놈 처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웃고 있네.]

러쉘이 에올을 보며 키득거렸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판 행위라는 걸 모를 테지.

에올은 루시온에게 있어 소중한 카드 중 하나였다.

그가 직접 루시온이 흑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기에 언제든 루시온의 정체가 들켰을 때 쓸 수 있는 방어막 같은 카드.

키득거리는 러쉘의 웃음소리에 루시온 역시 에올을 보며 대놓고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신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신수를 뵙습니다."

―반갑구나, 라타.

신수의 반가움에 라타는 참았던 입을 열었다.

―신수 아저… 홉! 라타 지금 말해도 돼?

[그래. 지금은 말해도 돼. 이미 루시온의 검증도 끝났고, 에올 녀석은 지금 다른 녀석들을 헤집느라 바쁘니까.]

―신수 아저씨. 라타 봐라. 라타가 자랐어. 이대로 쑥쑥 커서 신수 아저씨처럼 될 거다.

―그래, 라타. 많이 먹고, 잠도 잘 잔 모양이구나.

―이히히. 맞아. 라타는 잠도 잘 자고, 고기도 많이 먹고, 또 고기도 많이 먹었어!

'새삼 신기하네.'

루시온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수 두 마리가 이토록 사소하게 나누는 대화를 자신과 러쉘밖에 듣지 못한다니.

단지 신수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 하나에 감탄하기 바쁜 사람들이 바보 같아 보일 정도였다.

"신수님."

벨로스가 신수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신수 아저씨는 왜 아직도 신수 아저씨야? 루시온은 라타한테 바로 '라타'라는 이름을 붙여줬는데.

라타가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벨로스 저 아이는 참 착하지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구나.

신수의 시선이 벨로스에게 향했다.

―저 아이뿐만 아니라 빛의 힘을 가진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단다.

신수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전에도 신수는 비슷한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빛의 힘을 가진 이들이 신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왜 듣지 못하는 거야? 이상하네. 루시온하고 러쉘하고 흄은 라타 말을 잘 들어주는데?

라타의 순진한 물음에 신수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꼭 황무지가 된 고향을 바라보는 어느 노인과 같았다.

"신수님. 크로니아 공께 신수님의 축복이 진실됨을 증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벨로스의 조곤조곤한 말에 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을 따르는 아이여.

―루시온이야. 루시온 크로니아.

라타가 루시온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래, 루시온.

신수는 라타가 있는 그림자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순간, 루시온은 뒷걸음을 칠뻔했다.

신수에게 축복을 받았던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내게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나.

루시온은 신수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신수의 목소리에는 깊고 깊은 고마움이 묻어났다.

"트로에."

루시온이 혼잣말을 하듯 입을 뗐다.

아직 신수라는 존재를 다 이해할 수 없으나, 저 신수는 몇 번이고 신관을 통해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진 듯 보였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이름이 아닌 '신수'로서 불렸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공허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 감정을 알아.'

마치 유령에게 이름이 아닌 '병신새끼'같이 욕으로 불렸을 때와 비슷하겠지.

이름의 뜻도 중요해야겠지만, 지금 신수에게는 필요한 건 그저 이름이었다.

루시온은 신수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며 떠오른 이름을 다시 꺼냈다.

"트로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같은 말을 꺼내자 신수는 다가오던 걸음을 멈췄다.

―트로에.

한 번, 두 번.

입에 담을 때마다 신수의 표정이 꼭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저것 봐. 신수께서 웃으신다."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로 트로에의 행복한 모습을 손으로 가리켰다.

―좋은 이름이구나.

신수가 멈췄던 걸음을 재촉해 루시온에게 이마를 맞댔다.

―정말로 좋은 이름이야.

―맞아. 정말로 예쁜 이름이다!

라타까지 배시시 웃었다.

―루시온.

신수가 따뜻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자리는 너에게 있어 아주 큰 방패가 되겠지. 나 또한 그러길 바래 너에게 축복을 내렸고.

루시온의 이마에서 서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 방패는 모든 걸 막아주지 못한단다.

빛의 상징인 태양 문양이 루시온 머리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부디, 이 방패가 비를 가려주는 우산이 되어주길 바라마.

트로에의 눈이 포근하게 감겼다.

"빛의 상징이…, 빛의 상징이 나타났다!"

누군가 소리쳤다.

"제국과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빛의 신께 축복을!"

"성자가 탄생하신 기쁨을!"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루시온의 머리에서 떠오른 태양 문양이 천장을 통과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황궁 밖에서 백성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황궁까지 닿을 정도였다.

[오싹하네.]

러쉘은 이 미묘한 상황에 팔을 문질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루시온은 정말로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되어버렸다.

"오늘!"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탄생했도다! 짐은 루시온 크로니아 공에게 '성자'라는 이름을 내리겠노라."

성자.

신관들도 받은 자가 몇 없다는 칭호가 아닌가.

"성자 만세!"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소리쳤다.

'…장난 아니네.'

루시온은 저절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황제는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대 역시 이 칭호를 허락하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오히려 크나큰 영광이옵니다."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고 허리를 들자마자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저희 대신전에서는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 '명예 대신관' 자리를 드리겠나이다."

'잠깐만.'

루시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명예 신관 자리를 준다며.'

대신관은 마치 황실과 경쟁이라도 하듯 은근슬쩍 신관에서 '대'라는 이름이 붙어버렸다.

54화. 이 환호성은 나만을 위한 소리다(3)

황실과 대신전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들이 루시온 자신에게 퍼부어준 것들은 분명 엄청난 특권임은 분명했다.

현재 빛의 신수에게 축복을 받은 자는 자신이 유일했으니.

'너희가 준 이 힘은 잘 써주마.'

세상에 유일하다는 것만큼 특별한 건 없었다.

"성자 만세!"

"빛의 신이시여 제국에게 축복을!"

점점 커지는 환호 소리에 루시온은 더는 기쁨을 즐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용케 버텼지만, 이제는 한계였다.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루시온은 억지로 미소를 내보여야 했다.

마치 이제 자신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걸 알리듯 땅에서 솟구친 붉은 실 4개가 자신을 휘감았다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 *

"…하."

루시온은 의자에 기대 연신 숨만 내쉬었다.

홀에서 시작된 선언식은 이제 퍼레이드를 앞두고 있었다.

벌써 산 하나를 정복하고 돌아온 것처럼 엄청 지쳐버렸다.

[에올 녀석. 용케도 빠져나갔네.]

러쉘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에올은 기어코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흑마법사에 매료된 시종이었지만, 목을 부지하는 데 성공했다.

루시온은 흄이 내민 물을 마신 후에야 목소리를 냈다.

"결과적으로 잘됐습니다. 놈은 제 방패막이니 아직 죽으면 안 됩니다."

황제는 에올에게 5만 델이라는 배상금을 물리고 제국에서 추방했다.

엄연히 네바스트 신관들의 잘못이기에 그들은 조용히 물러갔다.

'목숨값치고는 싼 편이지만, 그 배상금이 고스란히 내 주머니로 오니 불만은 없지.'

루시온은 자신이 받을 배상금을 생각하며 기분 좋게 흄에게 컵을 내밀었다.

5만 델이라면 5억에 가까운 돈이었으니.

"놈들은 찾아냈어?"

흄을 홀에 들여보낸 건 자신의 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예. 전부 찾아냈습니다. 다음 행사인 퍼레이드 이후, 연회에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흄은 컵을 받으며 루시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고생은 무슨. 빛만 쐰 게 전부인데 뭐."

[그러니까 고생이지.]

러쉘이 탐탁지 않게 목소리를 냈다.

[망할 황제는 널 시험하고, 망할 신관은 네 몸을 빛으로 갈아버렸고. 이게 무슨....]

러쉘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러쉘 님."

흄이 간지러운 입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도련님처럼 검사를 받고도 무사히 넘기는 일이 가능한 겁니까?"

루시온이 러쉘에게 훈련을 받았을 때 흄도 그 자리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있었기에 의문을 드러냈다.

[아니. 당연히 불가능하지.]

러쉘이 루시온을 가리켰다.

[루시온처럼 빛의 내성이 있어야 가능한데. …만약 방법을 알고 있어도 루시온만큼 독하지 않은 이상 또 불가능하지.]

독하다는 소리에 루시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스승님이 라트초를 드셔봐야 압니다. 처음에 풀 맛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꽤 달콤합니다."

[저것 봐봐. 저런 소리를 하니까 내가 독하다고 하는 거지. 저러다 나중에 독도 펼쳐 놓고 품평회를 하겠네.]

러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살짝 눈을 찡그렸다.

흄은 루시온이 무언가를 살짝 고민하자 슬쩍 사탕을 넘겼고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에게 무얼 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고기 한 점 줘. 얌전히 잘 있었으니까."

루시온이 입안에 사탕을 굴리며 말했다.

―홉.

라타가 기쁨에 발을 동동 굴리던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하. 또 시작인가.'

루시온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푸른 실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뜩이나 붉은 실 4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게 찝찝한데.'

지금까지 붉은 실이 나타났다 사라진 적이 없었다.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으니.

'…어? 도망친다고?'

느긋하게 흄이 문을 열길 기다리던 루시온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서둘러!"

푸른 실이 갑자기 멀어지고 있었다.

[왜 그래?]

러쉘이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다 덩달아 소리쳤다.

[저놈 도망친다!]

팍!

당장 문을 연 흄은 러쉘이 가리키는 놈의 뒷덜미를 잡았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어디로 간 거야?]

'때마침 기사들이 없다?'

러쉘이 투덜거리는 소리에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이 기묘한 일이 우연히 발생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 방은 카슨조차 출입하지 못할 만큼 보안이 철저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실수가 생긴다고?

흄이 놈을 끌고 와 루시온 앞에 꿇렸다.

"도, 도련님. 사, 살려주십시오!"

놈은 황실 시종으로 보였다.

사색이 된 표정을 보아하니 들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누구 짓인가?"

루시온은 흄이 내미는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이, 이 미천한 놈은 그저 돈을 주기에 했을 뿐입니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네놈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교대시간을 알려줬습니다!"

'내부자가 있다는 건 당연한 거고.'

루시온은 더는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어나갔다.

―공께서는 억울하지 않습니까? 신수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공께 미소를 짓는 자들이 역겹지 않습니까? 저들은 공을 비난하고 손가락질까지 한 이들입니다. 저는 공께서 지금까지 어떤 취급을 당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첫마디를 읽자마자 편지를 덮어버릴 뻔했다.

'삼류 악역이 꺼내는 말 같네. 끔찍하다.'

"도련님."

흄이 입을 열었다.

"말해."

"저 편지에서 로베리오 백작의 냄새가 납니다."

서걱.

비교적 손쉽게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젠장....'

루시온은 피곤한 얼굴로 편지를 구겼다.

로베리오 백작이 이렇게 자신에게 접근하다니.

[이따위 글을 쓴 게 로베리오 백작이라고…? 백작가 이름이 아깝네.]

러쉘이 질색했다.

루시온은 상황을 정리하고자 일단 저 시종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저놈은 헤인트 형님께 넘겨. 아까 근처에 있는 거 봤지?"

"예. 위치가 어디인지 압니다."

흄은 그대로 시종을 붙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루시온은 의자 뒤에 살짝 숨은 라타를 데려와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헤인트가 황실 기사단이 되겠지만, 아직 정식으로 황실 기사 임명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헤인트가 내 주변을 맴돈단 말이지.'

루시온은 얼굴을 구기며 라타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로베리오 백작이 나를 악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편지까지 보내고.'

소설 속 루시온이 로베리오를 데리고 오는 상황과 반대가 되어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루시온은 나머지 편지 내용도 읽다 말고 찢어버렸다.

첫마디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이 원망스러우니, 자신이 복수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 같은 개소리가 담겨 있었다.

[어, 잠깐만. 아직 다 못 읽었는데.]

러쉘이 눈을 크게 떴다.

"읽을 필요 없습니다. 내용이 하나같이 낡고 보잘것없으니까요."

[생각보다 재미있었는데. 어쨌든, 저놈을 만나러 나갈 생각은 아니겠지?]

"거의 다 읽으셨네요."

편지 마지막에 로베리오가 자신을 초대한 장소가 적혀 있었다.

[아니, 뭐. 내가 눈이 좋아서.]

"갈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제가 거길 왜 갑니까?"

악역이 되는 걸 누구보다 피하고 싶은 자신이었다.

이미 자신은 흑마법사를 죽이고 가져온 자료에서 로베리오가 저지른 일들의 증거를 손에 넣은 상태였고.

[다행이네. 지금 네가 아니라, 몇 주 전의 너라면 '그래. 이런 세상 엿이나 먹어라'라고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갔을 것 같아서.]

러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러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 * *

퍼레이드는 루시온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카슨의 간곡한 부탁과 이를 확인한 황제의 명으로 절차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루시온은 한숨을 돌렸다.

독감에 걸린 듯 갑자기 열이 차올라 며칠 끙끙 앓을 거라던 러쉘의 말이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

"루시온."

카슨이 루시온을 불렀다.

마차로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사이 깜박 졸았는지 루시온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예, 형님."

"마차에 내리기 전에 귀마개를 끼거라. 아마 없는 것보다 나을 거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루시온은 애써 웃었다.

열 때문에 이미 귀가 먹먹했지만, 중앙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카슨 말대로 없는 것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벌써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신관이면서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벨로스가 입을 열었다.

아픈 환자를 두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기분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지금은 그나마 괜찮은 편입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마 내일은 더 앓을 거다.]

끔찍한 소리가 러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루시온은 계속 아파야 해?

라타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어둠이 완전히 회복하면 괜찮을 거야. 원래는 지금 이 상태보다 훨씬 심각해야 하지만, 빛의 내성 덕분에 이 정도에 그친 거고.]

서서히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내가 지금 걱정되는 건.]

러쉘은 손가락으로 마차 밖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루시온이 이만큼 많은 사람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부디 쓰러지지 않기만을 빌었다.

잠시 뒤, 마차가 중앙 광장에서 멈췄다.

벌써 들려오는 환호성에 루시온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슴팍을 세게 쥐었다.

'순식간에 확 오네.'

아찔한 그 감각이 마차가 멈추자마자 가슴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후."

루시온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괜찮느냐?"

카슨이 물었다.

"아뇨. 미치도록 힘듭니다."

루시온은 손바닥을 펼쳤다.

파르르 떨리는 게 바로 확인될 정도였다.

"그런데 저보다 더 긴장하는 분이 계시니 한결 낫습니다."

루시온은 조금 전부터 다리까지 파르르 떠는 벨로스를 쳐다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들이 시선이 낯설고 거북해서."

"괜찮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사람들의 시선에 당당했던 노비오와 카슨만 보고 자란 터라 벨로스의 모습은 새삼 새롭다 싶었다.

자신만 이런 게 아니구나.

문득 루시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조금 전보다 마음이 편해졌다.

루시온은 귀마개를 착용하고 마차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마차 문이 열리자 귀마개 틈으로 사람들의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카슨이 먼저 내렸고, 벨로스, 그리고 자신이 내릴 차례가 되었다.

[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루시온이 나가기 전에 러쉘이 말했다.

초조한 그 모습에 루시온은 힘껏 대답하며 땅으로 발을 디뎠다.

"예."

쿵!

루시온은 내리다 말고 주춤거렸다.

마차 안과 마차 밖이 다른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중앙 광장을 꽉 메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의 형체에 벌써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힌다.'

루시온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파도가 되어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욕지거리와 비난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루시온. 사람들 좀 봐!

라타가 밝게 말했다.

―다들 루시온을 보며 방긋 웃어. 그래서 라타도 저절로 웃음이 나와!

'날 보고 웃는다고?'

루시온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래, 루시온. 나도 웬만큼은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고개를 들고 딱 한 번만 봐봐.]

러쉘까지 이어진 말에 루시온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지만 고개가 너무 무거웠다.

어느새 맺힌 땀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로니아 공."

벨로스가 루시온을 조용히 불렀다.

"제 직업상 사람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마다 떨리고, 두렵기도 하지요. 하지만 크로니아 공께서 고개 숙일 일은 없습니다. 제가 빛의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루시온은 귀마개 때문에 벨로스가 무어라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라타와 러쉘이 하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루시온은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였다.

사람들의 다리.

배.

목.

거기서 루시온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그 위로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두려움이 밀려와 참을 수가 없었다.

"…허억."

루시온의 숨이 순식간에 가빠지자 벨로스가 얼른 신수를 내보여 사람들의 시선을 잠깐 가렸다.

"우와아아아!"

"신수께서 나타나셨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수의 등장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새하얗고, 용맹한 그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당당했다.

"루시온. 괜찮느냐?"

카슨이 얼른 루시온을 부축했다.

홀에서 열린 선언식을 루시온이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만하면 됐다.

카슨도 러쉘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저… 정말로 다들 웃고 있습니까?"

그때, 루시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왜 물러서야 하는가.

―맞아! 라타는 거짓말 못 해.

라타가 대답했다.

[그래. 정말로 환하게 웃고 있어.]

러쉘이 대답했다.

그 말에 루시온은 용기를 얻었다.

―루시온.

트로에가 부드럽게 루시온을 불렀다.

―저 함성은 너만을 위한 거란다.

'나만을...?'

루시온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자 트로에가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점점 루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웃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로 웃고 있다.'

루시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귀마개를 빼내었다.

'그래. 오늘은 나를 위한 날이다.'

"루시온! 루시온!"

파도가 밀어닥치듯, 코앞으로 쏟아지는 환호는 정말로 자신만을 위한 소리였다.

쿵.

쿵.

루시온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떨림을 느끼며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55화. 죽음의 기사가 따라온다

* * *

"…도련님?"

흄이 멍한 표정을 한 루시온을 조심스레 불렀다.

중앙 광장까지는 따라갈 수 없어 흄은 중앙 광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돌아온 루시온은 내내 바보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많이 아프십니까? 그럼 제가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엄청 충격이었겠지. 전혀 다른 세상을 봤으니까.]

러쉘이 키득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흄은 눈을 깜박거렸다.

―사람들이 엄청 많았어! 다 같이 방긋 웃으며 루시온을 엄청 좋아해 줬거든. 이히히. 라타도 엄청 기분이 좋았어!

"당연한 말씀입니다. 도련님은 무척 훌륭하신 분이시니까요."

그제야 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러쉘 말대로 조금 전 일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성자'라는 칭호가 공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칭호와 자신의 이름을 힘차게 외쳐주었다.

환호했고, 기뻐했고,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을 반겨주었다.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지?]

"아뇨."

루시온의 차가운 대답에 러쉘은 당황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널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았잖아?]

"아뇨. 단지 저 모습만 보고 그걸 판단할 순 없습니다."

―아, 아닌데. 다들 루시온을 좋아했어!

라타마저 당황했다.

자신이 그 광장에서 느꼈던 감정은 대부분 기쁨이었다.

"솔직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라 생각하니 놀라웠고요."

루시온은 손을 쥐었다 폈다.

아직 그 떨림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좋았냐고 물으면…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그냥 낯설었습니다."

루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별장에 가고 싶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네요."

[그래 뭐. 원래 그런 경험은 천천히 밀려오는 법이니까. 적어도 내가 봤을 때 너는 기뻐하고 있었어.]

―맞아! 라타도 그렇게 봤어!

"흄."

루시온은 순간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잠재우며 흄을 불렀다.

"예. 저는 준비됐습니다."

흄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베리오 백작 놈이 누군지는 반드시 알려."

"알겠습니다."

흄은 대답하며 루시온에게 처음 홀로 들어서기 전에 루시온이 먹었던 진정제를 내밀었다.

약은 끔찍이도 싫었지만, 지금은 약의 힘을 빌어야 할 때였다.

루시온은 진정제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일이 하나였다.

루시온은 밖을 나서며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참 알차게 지나갔다 싶었다.

* * *

연회가 시작되었다.

아득할 만큼 높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조명과 귀를 호강시키는 음악, 보기만 해도 배가 고파오는 음식들.

무엇보다 마치 개개인이 하나의 조명이라도 된 듯 다들 눈이 부시도록 차려입은 옷가지에 루시온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오늘 자리가 자신을 위한 자리인 만큼 루시온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고 빠져야지.'

루시온은 각오를 다지며 연회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귀족들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낮에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은 늠름하기 그지없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화는 짧게.

"루시온 크로니아 공. 반갑습니다. 저는...."

"예. 저도 반갑습니다."

인사도 짧게.

"루시온 크로니아 공과 마주하니 저는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슴이 뛰지 않으면 죽습니다."

아부는 흘리고.

"성자가 탄생하셨으니, 부디 성자께서 이 제국을 굽어살피셨으면 합니다."

"제국은 폐하께서 이미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으니 그 말은 조심하시지요. 순식간에 목이 날아갈 테니까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말도 태연하게.

"왼쪽쯤에 수염이 짧고, 눈이 작으며 요란스러울 정도로 황금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자입니다."

그사이 흄이 조용히 꺼내는 목소리에 루시온은 귀를 쫑긋 세웠다.

드디어 크로니아의 정보를 팔아넘긴 놈이 누구인지 그 면상을 볼 수 있었다.

[이놈은 테렘 메일 자작이라고 하네.]

러쉘이 그놈 머리 위로 움직여서는 대놓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루시온은 놈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중앙에 빨간 드레스를 입고, 목에 굵은 보라색 사파이어가 박힌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입니다."

[저놈은 오리온 지트란 후작.]

"왼쪽과 중앙 사이에 배가 나왔고, 엄지만 한 목걸이를 착용한 사람입니다."

[…보자. 저놈은 도르토르 소프란 백작가네.]

루시온은 계속 철벽같이 귀족들의 말을 받아치며 그 흔한 음료수 하나 입에 대지 못한 상태로 흄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3명입니다."

하지만 마무리를 짓는 흄의 말에 루시온은 빠르게 걸어 연회 외각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 장소로 빠졌다.

"겨우 3명이라고?"

루시온은 흄이 건네는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흄이 살짝 굳어진 루시온의 표정에 반응해 곧바로 목소리를 냈다.

"일단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사람만 추렸습니다. 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더 말씀드릴까요?"

"아니. 생각보다 숫자가 적어서 놀랐지, 굳이 꼬리까지 잡을 이유는 없어. 내가 잡아야 하는 건 머리니까."

루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닌 그들이 가진 힘이었다.

'저놈들이 이만한 일을 저지를 만큼 세력이 크다는 건가?'

뭔가 미심쩍었다.

아무래도 조사를 해 봐야 할 듯했다.

"그건 그렇고 로베리오 백작은 여기에 없어?"

"아닙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그 3명이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흄의 대답에 루시온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로베리오 백작까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면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그 뒤에 한 명씩 처리해나가면 되겠네.'

이름과 얼굴만 안다면 놈들이 어디에 사는지 아는 건 아주 쉬웠기에 지금 이 자리가 몹시 중요했다.

"일단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마실 걸 들고 오겠습니다."

흄은 이참에 루시온이 숨을 한 번 돌렸으면 했다.

"그러자."

루시온은 그제야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발바닥이 뜨겁다고 탭댄스라도 추는 듯했다.

[잠깐만. 지금 스프리카도 후작이 네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러쉘은 루시온에게 걸어오는 스프리카도를 보자마자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네가 혼자있게 되길 노렸나 보네.]

'로베리오 백작이 어떻게 생긴 놈이진 봐야 하는데.'

루시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로베리오 백작이 공허의 손과 어떤 관계인지 제대로 알아야 자신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때, 커튼이 흔들렸다.

흄이 어떻게 할까, 눈으로 묻자 루시온은 가만히 있으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쉬어갈까 하는데, 혹시 안에 누가 계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트웰로 스프리카도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별수 없이 대답했다.

"안에 사람 있습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트웰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이거 루시온 크로니아 공이 아니십니까. 제가 쉬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이것 참 실례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트웰로의 행동에 루시온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딱히 소유권이 있는 건 아니나, 먼저 온 사람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오는 게 기본 예의였다.

하지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루시온은 일단 트웰로의 무례를 넘어갔다.

"아닙니다.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 엉덩이를 떼자 트웰로가 그를 말렸다.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크로니아 공께서 계신 걸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트웰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말 이대로 나간다고? 날 만나러 온 게 아니었나?'

루시온은 순순히 밖으로 나가려는 트웰로의 모습에 의심이 깊게 솟구쳤다.

[에이. 설마 저대로 나가겠어? 그럼 애초에 여길 오지 않았겠지.]

러쉘 역시 트로웰의 행동을 믿지 않았다.

"제가 반가움에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트웰로는 등을 돌리기 전에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은 망설임 없이 밖으로 걸어가는 트웰로의 모습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짜로 간다고?'

"아,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혹시 누가 들어오는 게 싫으시다면 커튼에 손수건을 달아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자신의 말을 끝낸 트웰로는 정말로 나가버렸다.

[…뭐야 저놈?]

러쉘이 얼굴을 찌푸리며 트웰로가 나간 자리를 빤히 보았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저놈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들어볼 테니까.]

러쉘은 가만히 있으려다 이전 카슨이 트웰로에게 내보였던 태도가 신경 쓰여 트웰로의 뒤를 밟았다.

"그럼 전 빨리 손수건을 달고 오겠습니다."

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원래 손수건을… 달아야 했던가? 아니면 암묵적인 규칙인가?'

루시온은 생각했다.

연회에 갔어도 자신은 사고만 쳤지, 암묵적 규칙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잠깐, 흄."

루시온은 흄을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버려 둬."

이미 커튼을 쳤다는 것 자체가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나지 않는가.

구태여 흄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없었다.

뭔가 기분도 묘했고.

"알겠… 도련님."

흄은 대답하다 말고 목소리를 낮추며 루시온을 불렀다.

"그놈입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댔던 루시온이 살짝 허리를 뗐다.

흄의 얼굴 묘사를 들으며 루시온은 커튼 틈 사이로 시선을 줬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루시온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푸른 실을 덕에 단번에 로베리오 백작을 찾아냈다.

놈은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이 있는 장소를 지나쳐갔다.

'…만약 흄이 방금 손수건을 달았다면 놈이 내가 있는 위치를 알았겠지.'

묘한 우연인지 몰라도 루시온은 살짝 찝찝했다.

멀어졌던 푸른 실이 다시 짧아질 무렵, 카슨이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이렇게 오셔도 되는 겁니까?"

루시온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분명 황자들에게 불려가지 않았던가.

"대화는 이미 마쳤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카슨은 잠깐 말을 멈추고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커튼을 살짝 걷고 사납게 말했다.

"자네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으니 물러가게."

그중 로베리오 백작도 있는지 푸른 실이 다시 멀어졌다.

카슨은 주변에 얼쩡거리는 놈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 다시 목소리를 냈다.

"스프리카도 후작이 너에게 무슨 말을 했더냐."

"누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싫으면 손수건을 커튼에 걸라는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겠구나."

카슨은 살짝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 대체 스프리카도 후작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러십니까?"

[별거 없던데?]

러쉘이 돌아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원래 오지랖이 넓은 성격인가 봐. 주변에 관심이 많네.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데?]

루시온의 눈동자가 잠깐 러쉘을 향했다.

"아직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직이라뇨…?"

루시온의 물음에 카슨은 몇 번이나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스프리카도 후작령이 동부 끝에 있음에도 저자의 부하를 변경에서 붙잡은 적이 있었다."

크로니아 가문이 있는 변경은 서쪽 끝이었다.

"단순히 부하의 배신이라 결론이 나긴 했으나, 나는 여전히 의심스럽구나."

카슨의 눈썹이 미간으로 몰렸다.

[그런 일이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우연이 아니지.]

러쉘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온은 역시 동감하며 카슨의 말을 계속 들었다.

"속을 알 수 없고, 보면 볼수록 불쾌한 자다. 네가 저자를 신경 쓰는 일이 없길 바랐기에 그간 말하지 않은 거니 괜한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구나."

루시온도 조금 전 일로 반쯤은 공감했다.

트웰로는 뭔가 수상쩍었다.

"오해한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됐다. 일단 나오거라.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으니."

카슨은 먼저 앞장섰다.

"루시온."

"예, 형님."

"몸은 어떻더냐?"

"좀 별로입니다."

"연회는 이제 곧 끝날 테니, 금방 별장에 갈 수 있을 거다."

카슨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아, 네가 곧 받을 그 사업장 말이다."

'문제가 생겼구나.'

루시온은 솟구치는 입꼬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역시 문제가 있을 줄 알았다.

뭐가 나올지 기대하며 루시온은 얌전히 기다렸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꽤 크더구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그랬다면 내가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그럼...."

"불법 사기업에 손을 댔더구나."

카슨의 담담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다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터졌다!'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이 고구마처럼 줄줄이 엮일 거라는 건 뻔했다.

루시온은 어떤 놈이 머리를 드러낼지 벌써 기대됐다.

[그런데 생각보다 뭐가 없는데? 마약 제조라든지, 독극물 제조 같은 일들이 터질 줄 알았는데.]

살짝 아쉽다는 듯 러쉘은 입맛을 다셨다.

"자세한 이야기는 별장에 돌아가서 꺼내마."

카슨은 그대로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헤인트다!

라타의 말에 루시온은 홀의 중앙을 보았다.

정말로 황제 옆에 헤인트가 서 있었다.

이상했다.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고 하지 않았던가.

"…형님."

루시온은 갑자기 목이 메는 기분을 느꼈다.

"헤인트 형님이 왜 저기에 계시는 겁니까?"

"직접 보거라."

카슨은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인데, 대체?'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56화. 죽음의 기사가 따라온다(2)

'설마 아니겠지?'

루시온은 황제에게 가까워질수록 떠오른 생각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자신이 이번 선언식 때 '성자'라는 칭호와 함께 '명예 대신관'의 자리에 올랐다.

결국, 대신전만 좋은 행동이질 않은가.

그렇다면 황실에서도 뭘 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황실이 가장 돋보일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황실 기사단은 황실만을 위해서 존재하잖아?'

루시온은 헤인트와 이어진 붉은 실이 미동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내 목이 간당간당한 느낌이네.'

헤인트와 눈을 마주했지만, 그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안색이 좋아 보이질 않네, 크로니아 공."

황제가 새하얗게 질린 루시온의 안색을 보며 살짝 걱정했다.

루시온은 이제 제국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디서 다쳤는지 몰라도 부러진 팔이 뒤늦게 눈에 보였고, 다소 왜소한 모습에 영 마음에 쓰였다.

황제는 좋은 약이라도 해서 크로니아에 보낼 생각이었다.

"괜찮습니다, 폐하."

루시온은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니 현기증이 확 돌았지만, 루시온은 태연하게 허리를 들었다.

"짐이 그대를 위해 어서 끝내도록 하마."

황제는 장난기가 엿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지만 황제는 귀족들을 보자마자 군주로서 엄숙한 얼굴로 뒤바뀌었다.

"검을 가져오너라."

황제는 미리 검을 들고 있던 기사에게 손짓했다.

기사는 황제에게 공손히 검을 내밀었다.

"헤인트 트리아 경은 무릎을 꿇어라."

"예, 폐하."

순간, 헤인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황실 기사로서 임명할 생각인 모양인데?]

흥미진진한 얼굴이 된 러쉘이 황제 바로 옆으로 다가가 제일 좋은 자리에서 감상했다.

황제는 검을 쥔 상태로 헤인트의 왼쪽 어깨에 검을 올렸다.

"짐은 이 자리에서 그대를 황실 기사로 임명하는 바이다."

짧지만, 묵직한 말이었다.

그리고 루시온에게 있어 불안함을 확신으로 바꾸는 말이기도 했다.

'…젠장.'

황실이라는 이름은 절대적이었다.

누가 되었든, 어떤 상황이 되었든 '황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황실에서는 절대로 황실에 속하지 않은 이에게 어떤 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 그 상황을 깨려 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헤인트를 왜 황실 기사로서 임명했겠는가.

"그대들은 듣거라."

황제가 목소리를 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짐은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공을 제국에서 보호해야 할 인물로서 받아들여 황실 기사를 붙일 생각이도다."

그 말에 루시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응은 달랐다.

황제가 루시온을 위해 불문율을 깨었다.

곧 장내가 소란스러워지며 루시온을 보는 시선이 다시금 달라졌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자들마저 보석을 탐내는 도둑처럼 욕망을 내보였다.

[확실히 헤인트라면 나쁘지 않겠네. 너도 헤인트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황당하기 그지없는 소리에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 그런 소리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위가 붙으면 네 활동에 지장이 있겠는데?]

막연히 기뻐하던 러쉘은 곧 혀를 살짝 굴리며 턱을 만졌다.

루시온의 행동에 제약이 있으면 곤란한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인트가 빛의 힘을 가졌기에 흑마법을 제대로 가르쳐줄 수 없었다.

"하나."

그때, 말을 뒤엎는 소리가 황제에게서 흘러나왔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은 변경백인 크로니아 가문이기에 루시온 크로니아 공이 변경에서 중부로 넘어올 때와 변경으로 돌아갈 때로 제한을 두겠네."

무턱댄 보호는 변경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기에 황제는 그 점을 피하면서 동시에 불문율을 깨트리면서까지 루시온을 보호한다는 자비로움을 챙겼다.

루시온은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폈다.

'하마터면 헤인트하고 쭉 붙어 있을 뻔했네.'

[다행이다.]

러쉘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훈련 강도를 높일 텐데, 시작하기도 전에 못 할 뻔했네.]

루시온은 러쉘의 끔찍한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거기서 더 강도를 높인다고?'

신수 탄생 기념 연회를 오기 전까지 훈련이라는 목적으로 하루마다 어둠을 강제로 고갈해 매일 기절하다시피 했다.

다시 달리기도 시작할 텐데.

루시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자신을 빤히 보는 황제의 시선에 움찔거렸다.

왠지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나도 하나 요구해야지.'

루시온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황실은 이번 일로 대신전의 항복과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탄생했다는, 제국의 큰 경사를.

반면 대신전은 황실에 항복했지만, 그 일로 폭발 사건을 무마하고 신수와 더불어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나타났기에 대신전 자체의 힘이 강해졌다.

결국, 둘 다 자신 덕에 엄청난 이득을 손에 넣었다.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건 자신뿐이었다.

'황제가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 했으니 내가 가질 건 뻔하지.'

자신은 단지 상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었다.

우선, 병사를 움직일 권리를 손에 넣어야 했다.

병사는 곧 힘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병사를 움직일 권리를 요구할 수 없기에 귀족답게 목소리를 냈다.

"폐하. 소신이 폐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루시온은 귀족들이 흥에 겨워 소리칠 사이에 조용히 황제를 불렀다.

"말하거라."

황제는 부들부들 떠는 루시온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소신이 언제든 소신을 보호할 수 있게 힘을 하나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그대가 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언제든 제가 저를 보호할 힘을 원합니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병사를 움직일 힘을 달라는 소리였다.

"좋다."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루시온은 어떤 관직도 없으며 가진 거라고는 변경백의 막내아들이라는 사회적인 힘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별했다.

특별했기에 이는 당연한 수준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짐에게 한 부탁치고 너무 작고 작으니 다른 것도 생각하거라."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는데…?'

루시온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차피 부탁은 또 할 셈이었기에 루시온은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폐하의 하늘과도 같은 마음씨에 소신은 감동했습니다."

"내 친우의 아들에게 그것조차 못 해주겠느냐."

황제가 슬쩍 말을 내뱉었다.

"…예?"

루시온이 깜짝 놀라며 되묻자 황제는 미안한 얼굴로 작게 목소리를 냈다.

"사과가 늦었지만, 네 아버지의 친우로서 너를 시험하고 이용해서 미안하구나."

황제는 아주 잠깐 황제가 아닌,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다시 황제가 되어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허.]

러쉘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변경백과 친우인 황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