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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좋은 아침, 루시온."

헤인트는 계단을 내려오는 루시온을 향해 말했다.

"눈이 조금 부은…?"

"하시는 일을 잘되고 있습니까?"

루시온은 헤인트의 말을 자연스럽게 잘라냈다.

"아. 잘되고 있지. 어제 아버지를 찾아갔거든. …혹시 카슨한테 들었어?"

루시온이 대답하지 않자 헤인트는 땀을 닦으며 씩 웃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훈련한 모양이었다.

"아니야. 알아도 괜찮아. 나야 기사단에서 수없이 많이 쫓겨나서 꽤 유명하거든."

"이번 일은 정말 잘 풀리셔서 다행입니다."

루시온은 진심을 꾹꾹 담아 말했다.

이번에 황실 기사단이 되었으니 헤인트가 쫓겨날 이유도 없고 황실 기사단이 변경으로 올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저 붉은 실은 대체 왜 아직도 잘려나가질 않는 건지.

거슬렸다.

"신수의 축복을 받았다며? 늦었지만, 축하해."

헤인트는 손뼉을 가볍게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축하를 받을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시온은 신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지만, 주위에서 호들갑이 떠는 게 영 이상했다.

애초에 소설에서 신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 자세히는 몰랐다.

[뭐야. 너 모르고 있었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실인지 몰랐어?"

러쉘과 헤인트는 비슷하게 말을 꺼냈다.

"모르면 안 됩니까?"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날이 섰다.

신력 알레르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신전과 담을 쌓고 살았다.

기본적인 정보는 알아도 자세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지. 넌 모를 수 있지. 모르는 게 정상이지.]

러쉘은 슬쩍 태세 전환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모를 수 있어. 어, 그러니까. 어쨌든 신전 입장에서는 엄청 중요해."

헤인트 역시 루시온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이유가 뭡니까?"

"신수는 축복을 내리지 않거든."

"…예?"

루시온은 황당한 소리에 팔을 문질렀다.

신수가 축복을 내리지 누가 내리는가.

신수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는 소설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신수는 재생의 힘으로 일단 목만 붙어 있으면 어떤 중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었다.

경상 정도는 수백, 아니 수천의 사람들을 동시에 치료해 가히 기적이라 불리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치료의 힘이 곧 공격이라 혼자서도 수천의 군사를 상대할 수 있지만, 빛의 힘이 강한 만큼 어둠에 빨리 물이 들어 흑마법사의 단골 맛집이기도 했다.

"흔히 신수가 사용하는 빛을 축복이라 여기는데 그건 축복이 아니야. 그냥 빛이야."

헤인트는 루시온의 이마를 가리켰다.

"아마 신수에게 축복을 받은 자는 네가 처음일 수도 있어."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전혀 기쁘질 않았다.

오히려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소설에서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나오지 않은 게 애초에 신수가 축복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었어?'

자신이 안일했다.

갑자기 성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버리자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 정도로 주목받고 싶진 않았는데. …이 망할, 신수!'

어제 신수를 봤을 때, 용서가 아니라 그 털을 뽑아버렸어야 했다.

어쩐지 자신을 볼 때 너무나도 흐뭇하게 웃는다 싶었다.

"루시온?"

헤인트는 갑자기 안색이 나빠진 그를 걱정스레 보았다.

"의사를 불러올까?"

"아닙니다. 이만 볼일이 있어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인사를 한 뒤에 정문으로 향했다.

"도련님에게는 좋은 일이 아닙니까?"

흄이 물었다.

루시온이 제일 걱정하던 사실은 흑마법사를 들키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지. 하지만 내가 그런 상황이 질색이라."

루시온은 때마침 지나가던 집사를 불렀다.

"예,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대신전에 사람을 보내게. 내가 보냈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걸세."

"어떤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떠들썩한 건 질색이니 되도록 비공개로 진행되길 바라며 이건 부탁이 아니라 내가 참석하는 조건이라고 전해주게."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를 알리는 자리에서 자신이 빠지면 대신전은 난리가 나겠지.

대신전에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 비공개까진 아니더라도 자신과 부단히 조율해 소수의 사람만 초대될 터.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해.'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대신전에 사람을 보내 도련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집사의 대답에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갔다 올 테니, 그리 알게."

"예.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 * *

데비아에게서 받은 열쇠가 쓰이는 장소는 중부에 있는 한 여관이었다.

위치상 자신의 별장에서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에 루시온과 흄은 변장한 채로 가볍게 달려서 이동했다.

―라타는 '슝' 타고 가고 싶기도 한데 이렇게 뛰는 게 제일 좋아!

뚱뚱한 여우가 된 라타는 루시온 옆을 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그림자 이동이 정말 꿀 같은 기술이나, 어둠 소비가 아주 컸다.

기술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사용량도 아직 정확하지 않았고.

데비아를 잡을 때는 그 기술이 어느 정도 효율을 보이는지 알고 싶어 사용했다가 피를 봤다.

"집에 가서."

루시온이 대답했다.

밖에서 사용하기에는 아직 위험도가 컸다.

―만세! 만세! 라타가 집에서 '슝'을 사용한다!

라타의 발걸음이 금방 가벼워졌다.

며칠 만에 달리기라 루시온 역시 차츰차츰 뻐근했던 몸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일부터 다시 달려야겠네.'

연회는 끝이 났다.

변경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잠시 멈췄던 훈련을 다시 이어나갈 때였다.

러쉘에게 새로운 마법을 배울 차례가 되었고.

[어둠도 같이 움직여야지.]

러쉘이 재촉하자 루시온은 속도를 줄이고 어둠을 조금씩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도련님."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분명히 같이 달렸는데 그녀의 숨소리는 자신과 달리 평온했다.

'너무하네.'

루시온은 표정을 다잡으며 말했다.

"말해."

"첫째 도련님께서 제게 훈련을 권하셨습니다."

"형님이?"

루시온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흄이 원래 가진 힘이 세지만, 이를 단련하면 더 강해질 터.

"배우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에게도 힘이 필요합니다."

루시온은 흄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힘을 갈망하는 건 무언가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흄은 하지 않았던 행동이라는 듯 푸른 실이 나타나 자신과 그녀를 연결했다.

좋은 흐름이 불어왔다.

자신이 변했듯 흄 역시 변하고 있었다.

43화. 누구야?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루시온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흄이 선택한 결과를 존중해주었다.

"저번에 도련님께서 제가 하고 싶은 걸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흄 역시 걸음을 멈춰 조금 멀리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랬지."

"지금은 도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호위와 집사. 이 두 가지를 다 해내고 싶습니다."

흄은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흉내 내며 짓는 미소가 아니라 환하디환한 진짜 미소였다.

* * *

"어서 오세요."

여관 안으로 들어가니 종업원이 루시온과 흄을 반겼다.

흄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던 그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꺼리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짜 여관 같네.'

루시온은 종업원의 시선은 무시하며 사람들을 보았다.

수다를 떠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진짜 손님이 섞여 있으니 새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밑에 장소가 더 있어.]

러쉘은 바닥을 발로 가리켰다.

[잠깐 보고 올게.]

팔짱을 낀 모습 그대로 러쉘은 서서히 바닥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놈들은 어때?]

유령이 속삭이는 말이 들리자 루시온은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흄 역시 루시온을 따라 모르는 척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9번 다음이 10번이니까 저 유령은 10번이야! 그리고 저 유령은 음....

하지만 라타는 유령을 보자마자 바로 숫자를 붙여나갔다.

혹시 몰라 라타를 일단 그림자로 들어오게 했다.

"11번입니다."

흄은 보다못해 라타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 맞아 11번이야! 흄은 엄청 똑똑해! 그럼 저건 12번, 13번....

'저놈들을 지배할 생각은 없는데.'

루시온은 벌써 마음이 들떠있는 라타의 말에 피식 소리를 냈다.

[난 밑으로 간다에 한 표.]

[난 여기서 밥 먹는다에 한 표.]

[그럼 난 둘이 방을 잡는다에 한 표.]

유령들은 자신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시시한 말을 나눴다.

루시온은 러쉘이 올라오기 전까지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어 일단 자리를 잡았다.

[봤지? 이번에는 내가 이겼어. 여관에 와서 뭘 하겠어? 밥이나 처먹고 가는 거지.]

[아직 밥 안 먹었으니까 무효. 아… 저번에 봤던 예쁜 누나는 안 오나?]

[누나라니. 너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지.]

'도움이 될까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네.'

루시온은 당장 귀를 막고 싶었다.

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도 있을 텐데.

[…하. 여길 개박살 내주는 놈은 없나? 거지 같은 흑마법사 때문에 무서워서 내려가지도 못하고.]

[그러게. 참 재미없다. 내가 이딴 놈들 밥이나 처먹는 걸 보고 있자니 확 하늘로 가고 싶을 정도라니까.]

'흑마법사…?'

루시온은 예상 밖의 단어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늘로 가고 싶으면 내려가면 되겠네? 덕분에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 하겠다?]

[시끄러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저놈들 망하는 꼴 보기 전에는 못 떠나.]

바닥을 내려다보는 유령의 눈빛엔 깊은 증오가 담겨 있었다.

딱.

[루시온.]

러쉘이 손가락을 튕기며 바닥에서 올라왔다.

자신들끼리 낄낄 떠들던 유령이 보이지 않게 되자 루시온은 편안함을 느끼며 라타를 쓰다듬었다.

털이 가득 올라왔기에 말랑한 방석을 만지는 듯했다.

[지하에 꽤 커다란 장소가 있어. 어쩌면 너한테 조금 거북한 곳일지도 몰라.]

러쉘은 손가락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어쨌든, 지하로 통하는 문으로 가려면 2층으로 가야 해.]

루시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흄이 루시온을 보며 러쉘에게 물었다.

[전혀.]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진짜 위험했다면 스승님께서는 목에 핏대가 설만큼 가지 말라고 소리치실 분이니까.'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207호로 가.]

러쉘의 지시에 루시온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열었다.

방 안에 있던 남자는 루시온을 보고도 놀란 반응 없이 그저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열쇠를 달라는 것 같은데. 이건 데비아가 가졌던 열쇠인데. 이걸 내밀어도 괜찮을까?'

[괜찮아. 보니까 다 똑같은 열쇠를 가졌더라고.]

그 말에 루시온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데비아에게 받은 열쇠를 내밀었다.

남자는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피지 않고 근처 거울에 갖다 댔다.

파아아.

열쇠가 거울에 닿자 거울에서 빛이 났다.

―홉!

라타가 깜짝 놀라다 곧 환호성을 질렀다.

―우오오오!

거울의 빛이 꺼지자 조금 전까지 없던 벽 쪽에 바닥이 생겨났다.

크로니아 저택에서도 비밀 문 정도는 있기에 루시온은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뭘 숨겼길래 이렇게도 요란해?'

루시온은 남자에게 다시 열쇠를 받고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밑에 경비가 4명이 있긴 한데 별다른 확인은 하지 않아.]

러쉘은 루시온 주변을 맴돌며 말했다.

경비가 고작 4명이라니.

"생각보다 허술합니다."

루시온의 목소리는 밋밋했다.

있던 기대감마저 싹 사라질 정도였다.

"저는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묘하게 설레는 흄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라며 뒤를 쳐다보았다.

"고… 향이라니?"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자라왔던 곳이 이런 곳과 비슷했습니다."

흄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굉장히 설렙니다."

루시온은 자신의 얼굴을 가릴 가면이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안도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슬쩍 러쉘을 보자 그는 태연하게 흄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이 뭐지?]

"흄입니다."

[그 이름은 누가 지어줬어?]

"도련님이십니다. 무척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그럼 네 고향은 이런 비슷한 곳이 아니라 크로니아야. 그렇지, 루시온?]

"그렇습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가면을 살짝 벗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까?"

흄이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그래. 이름을 새로 받았으니 다시 태어난 셈이지."

―그럼 라타 고향도 크로니아야?

"맞아. 네 고향도 크로니아야."

루시온은 가면을 다시 쓰며 말했다.

흄과 라타의 기분 좋은 웃음을 들으며 루시온은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 * *

러쉘 말대로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 4명은 루시온과 흄을 제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관심도 없어 보였다.

'꿀알바네.'

루시온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받아갈 수 있다니.

직업으로서 저토록 완벽한 일은 없었다.

[저놈들이 한심하게 보일 테지만, 이유가 있어. 여기에서 흑마법사가 지배한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거든.]

이미 유령에게 들었기에 루시온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가 신경 쓰였다.

"흑...."

[흑마법사는 여기에 없어. 네가 유령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러쉘은 자신을 가리키며 우쭐거렸다.

[내가 누구야?]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

라타가 신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그놈들은 너를 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러쉘은 문을 가리켰다.

문들이 마치 고시원같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넌 그 열쇠로 저 문을 열고 정보를 얻으면 돼.]

'정보...?'

루시온은 걸음을 재촉해 문을 살폈다.

문패에 지명이 적혀 있었다.

[크로니아는 여기에 있어.]

러쉘이 앞서 나갔다.

루시온은 그의 뒤를 따르며 문패에 적힌 지명을 죄다 살폈다.

다는 몰라도 대부분 테슬라 제국 내에 존재하는 지역들이었다.

'여기는 뭐지? 적국이 운영하는 장소인가…?'

루시온은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불쾌해졌다.

여긴 일반 장소가 아니었다.

정확한 사실은 크로니아라는 문패가 걸린 방을 살펴봐야 할 듯했다.

루시온은 러쉘이 멈춘 방 앞에 가서 열쇠로 문고리에 꽂으려 내밀었다.

하지만 열쇠로 문을 열기도 전에 딸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진짜 중요한 열쇠였네?'

루시온은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에는 책장이 빼곡히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루시온 크로니아.

노비오 크로니아.

카슨 크로니아.

샤엘라 크로니아.

크로니아의 거래처.

크로니아의 기사들.

크로니아와 관련된 것들이 책장마다 이름을 차지하고 붙어 있었다.

'…미친 새끼들!'

루시온은 당장 밖으로 나와 옆 방으로 들어갔다.

확인하고, 나오고.

또 확인하고 나올 때마다 루시온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크로니아 방은 다른 방보다 배는 더 크고, 더 많은 양의 자료가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끔찍했다.

자신의 정보를 팔아넘긴, 배신자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 정보를 팔아넘긴 놈들이 다… 여기와 관련 있던 건 아니겠지?'

[…루시온.]

러쉘은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온이 저런 반응을 내보일 거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더 마음이 좋질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보고도 어떻게 모르는 척 루시온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루시온은 방구석에서 겨우 헛구역질을 멈추고 다시 크로니아 문패가 걸린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장소는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이곳은 정보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정보를 작성하는 종이가 방 안에 따로 만들어져 있자 루시온은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승님."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번 연회 때 폭탄을 찾은 것처럼...."

[안 돼.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어.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다시 사용하는 데 시간이 걸려.]

루시온은 러쉘의 대답에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차가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여길 부서트려도 내가 모르는 다른 곳에서 똑같이 생겨날 뿐이야. 진짜 내가 쳐야 하는 건 이 장소를 만든 놈이야.'

루시온은 침착하게 칸마다 쌓여 있는 종이를 빠르게 살폈다.

각 칸이라도 종이가 쌓인 양이 달랐다.

위 칸으로 갈수록 양이 적어졌다.

루시온은 아래 칸부터 자신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살피고 종이의 양이 다른 이유를 알아냈다.

'…칸이 위로 갈수록 신뢰할 수 있는 정보라는 말이지?'

맨 아래에 있는 칸은 주로 소문을 흘려들은 얼토당토않은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맨 위에는 셴과 데비아가 작성한 자료인지 자신이 언제 밖으로 나갔고, 저택 내부에서 누구와 만났는지가 분 단위, 시간 단위별로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이니셜은 S.D.J.'

딱 봐도 셴과 데비아 제븐을 합친 이니셜이었다.

루시온은 가족들도 제일 위 칸에 놓인 종이를 살폈다.

노비오와 카슨 역시 S.D.J라는 이니셜이 박혀 있었지만, 자신보다 널널한 편이었다.

'누님은.... D.T.'

마법을 실험하다 건물 몇 개를 부쉈다는 소식에 슬쩍 종이를 덮었다.

'잘 계시네.'

루시온은 칸을 옮겨 크로니아의 거래처를 살폈다.

크로니아가 변방에 있는 만큼 웬만하면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는 편이나, 크로니아에 늘 부족한 광석이나 직물 같은 물자는 반드시 거래를 통해 해결해야 했다.

'크로니아가 압박을 느낄 수 있는 거래처들을 중심으로 조사했어. 게다가 지금 거래처마다 한두 개 정도 문제를 떠안은 상황인데.'

자료를 잡은 루시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문제들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거지?'

만약 이 문제가 한 번에 터진다면 크로니아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오래 준비한 거지?'

루시온은 종이를 빤히 보았다.

지금 저 종이 역시 몰래 챙겨갈 수 없었다.

되도록 적이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에서 은밀히 행동해야만 했다.

'방법을 찾아보자. 그것만 찾으면 여기만큼 정보가....'

"도련님."

그때, 흄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제가 집사로서 활약할 차례입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걱.

그 미소에 화답하듯 흄과 루시온을 이었던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44화. 누구야?(2)

루시온은 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활약이라니…?"

"아, 그 단어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집사로서 도련님을 도와드릴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흄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어떻게?"

루시온이 물었다.

"전 불안정하나, 몬스터입니다."

흄은 자신을 가리켰다.

"쓸모없는 능력이라 말씀드리지 않았던 게 있었습니다."

"무슨 능력을 말하는 거지?"

"힘과 변신 능력 이외에 기억 관련 능력과 연회 때 알게 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그 외에 더 있어?"

"아뇨, 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절 만든 흑마법사는 제가 진화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진화를 하면 제가 가진 능력이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화?'

루시온은 새삼 그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하지만 지금 그걸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네가 말하지 않은 능력이 뭔데?"

"제가 오늘 보았던 기억을 꺼내 되살펴 볼 수 있습니다."

완전기억능력과 비슷한 능력인 듯했다.

안토니가 흄의 배움이 빠르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 때문일 줄이야.

"연회 때 상큼 달달 향을 찾으려고 한 이후로 냄새를 맡으면서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건 기억 능력과 달리 조금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지금 여기 종이에 A, B, C 냄새가 묻어 있다면 A만 추적할 수 있습니다. 아직 동시 추적은 불가능합니다."

"네 눈에 냄새가 보인단 말이야?"

"아닙니다. 각각 냄새가 다르게 맡아집니다. 연습하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겁니다."

흄은 내심 칭찬을 바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흄은… 개과 종류의 몬스터인가?'

루시온은 가면을 만지작거리다 차분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유를 다 떠나서 흄의 능력이 현재 상황에서 도움이 된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었다.

"좋은 판단이었어, 흄."

"감사합니다!"

[개과 종류의 몬스터였어?]

러쉘이 간지러운 입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이것저것 섞어 넣었다고 했습니다."

흄은 행복이 가득 담긴 미소로 대답했다.

"흄."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오늘 보았던 기억을 꺼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흄의 대답에 자신이 보았던 문의 개수를 잠깐 떠올려보았다.

'오늘 안에 다 옮겨 적을 수 있는 양이 아니야.'

일단 아쉬운 대로 가장 중요한 것들부터 건드려봐야 할 듯했다.

루시온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네놈들이 악착같이 모아온 정보들을 내가 어떻게 이용하나 보라고.'

여기는 정보의 노다지였다.

"시작하자."

루시온은 흄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가 오늘 봐야 할 것들을 알려주지."

"예.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전 잠이 필요 없으니까요."

이제 곧 죽어 나갈 사람치고 흄의 표정이 너무도 기뻐 보였다.

덕분에 루시온 역시 기뻤다.

'유능한 일꾼은 언제든 좋네.'

루시온은 우선 흄에게 크로니아와 제븐 가문을 살피고 둘의 정보를 작성한 냄새를 기억하라고 알려주었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정보 전체를 봐야 했다.

'그리고서 정보에 슬쩍슬쩍 손을 대야지.'

루시온은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자신은 지금 무척 행복했다.

평범하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평범하게 가게에 들러 물건도 살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 수 있지만, 십여 년 만의 찾아온 평화는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행복이었다.

하여 크로니아를 건드리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으려는 놈들은 그 누구든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흄이 크로니아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보는 사이 루시온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또 뭘 알려달라고?]

순진한 흄을 딱하게 보던 러쉘이 루시온의 간절한 시선에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지배된 유령의 어둠을 역추적할 수 있습니까?"

루시온 역시 유령을 지배했기에 알고 있었다.

지배된 유령 속에 흑마법사의 어둠이 존재한다는 걸.

그 어둠은 흑마법사가 가진 고유의 어둠이었다.

[유령을 지배한 흑마법사를 찾고 싶다는 거지?]

"예. 맞습니다."

만약 지배된 유령을 제가 다시 지배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 방법은 루시온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러쉘은 깊게 고민했다.

루시온 본연이 가진 정신력과 라타 덕에 남들보다 배는 빨리 성장했지만, 흑마법사가 된 지 이제 고작 3주 정도 흘렀을 뿐이었다.

"스승님?"

루시온이 재촉하자 러쉘은 루시온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라타가 뭐든 도와줄 수 있어. 그러니까 러쉘은 루시온한테 뭐든 알려줘도 돼.

라타마저 러쉘을 재촉했다.

[역추적이 가능하긴 한데....]

러쉘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흑마법사를 고용한 그놈이야말로 이곳과 관련된 중요한 놈일 테니까요."

루시온은 바로 대장을 붙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치밀한 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법.

하지만 한 놈씩 잡다 보면 결국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있었다.

자신은 한 놈씩 후려 팰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네가 배우기에는 가지고 있는 어둠의 양이 아슬아슬해.]

"어둠이 많이 필요합니까?"

[당연하지. 역추적이라는 이름에 맞게 네 어둠을 사용해서 흑마법사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그동안에 어둠이 계속 일정량만큼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고.]

"신수의 축복으로 제 어둠의 양이 배는 늘어났습니다."

[그래. 신수의 축복 덕에 어둠의 양이 늘어났지.]

"그럼...."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넌 아직 걸음마 하는 아이 수준이고 역추적의 실패는 네 위치가 발각되는 것만으로 끝나질 않아. 속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까지 이어져.]

러쉘은 평소와 달리 역추적 마법을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이 마법은 안정성 문제가 꽤 컸다.

[나중에는 더 안전하게 추적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흄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다리자고.]

"스승님의 말씀을 들어보자면 지금의 저로선 이 추척 마법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니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배우겠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의 경고에도 편안하게 목소리를 냈다.

[경험이라고…?]

러쉘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실패하면 진짜 고통스럽....]

러쉘은 언성을 높이려다 말았다.

애초에 루시온은 라트초를 먹고 피를 토하면서 아침을 시작했고, 자신의 발로 대신전에도 가는데, 이 상황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하.]

러쉘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독한 놈. 이러다 독도 내성을 가지려고 하겠다?]

"독 역시 내성을 기를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죠."

독과 관련된 상황은 루시온 역시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귀족들이 죽는 이유 5가지 안에 꼭 독살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악랄함 때문에 배척받고 있기는 하나, 실제로 독 마법이 존재했다.

'소설 속 루시온의 부하 중에 독 마법사가 한 놈 있었는데.'

루시온은 연회에서 이제 곧 악역으로 편승할 귀족 무리를 확인했고, 앞으로 나올 악역들도 알고 있었다.

'악역들이 악역이 되기 전에 막으면 좋을 텐데.'

루시온은 일단 생각을 접고 러쉘을 향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스승님.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이런 상황은 속도전입니다. 단숨에 적의 목을 움켜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부탁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말이 나올 법한데, 죽어도 그런 말은 하질 않네.'

루시온의 고집에 러쉘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일단 다른 방으로 가자.]

만약 역추적이 실패해도 루시온이 있던 장소가 크로니아 문패가 걸린 방이라는 건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흄. 내가 오기 전까지 여기에 있어."

루시온은 흄에게 대기 명령을 내린 뒤에 적당한 방에 들어갔다.

[지배된 유령이나, 밖으로 새어 나갈 네 어둠은 내가 다 막을 테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러쉘은 루시온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잡다한 건 다 막기로 했다.

라타가 그림자 밖으로 나와 한껏 진지하게 러쉘을 바라보았다.

[유지시간 알고 있지, 라타?]

―응! 알아. 지금은 예전보다 더 가능해.

[아마도 30초 정도일 거다.]

러쉘은 루시온을 보았다.

[그 시간 안에 해결을 봐야 한다는 의미야.]

"기회는 한 번이겠네요."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맞아. 어느 의미든 기회는 한 번이야.]

러쉘은 입가를 핥았다.

[내가 곧 지배된 유령을 보이게 할 거야. 그럼 그때부터 진짜 시작인 거지. 네가 뭘 해야 할지 알려주마.]

* * *

[수상한 놈을 찾아야 해. 수상한 놈을. 그렇지 않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말 거라고.]

딱딱.

지배된 유령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변을 알짱거렸다.

러쉘이 루시온을 유령으로부터 숨겼던 힘을 풀었기 때문이었다.

―지배된 유령을 지배할 순 있지만, 보통 그런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아. 흑마법사에게 바로 경고가 가거든. 그러니까 너는....

루시온은 러쉘이 했던 말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어둠을 풀어 채찍처럼 땅에 흘려놓았다.

―어둠으로 후려쳐. 다른 어둠이 밀고 들어오는 그 충격 때문에 지배된 유령은 보통 기절하곤 하거든.

찰싹!

지배된 유령이 방 안까지 오자 루시온은 채찍을 휘둘러 유령을 기절시켰다.

러쉘은 '잘했다'라는 말을 속으로 감췄다.

지금부터 정신력 싸움이었다.

해롱해롱하는 유령을 보며 루시온은 러쉘이 했던 말을 재차 떠올렸다.

―여기에서 어떻게든 어둠의 형태를 붙잡아. 라타가 평소처럼 널 보좌해줄 테니까, 어떤 모양이든 형태만 유지해서 유령의 가슴에 찔러넣어.

루시온은 대나무 죽창을 생각하며 어둠을 동그랗게 말아 원통을 유지했다.

새로운 형태에 꺄르르 웃던 어둠이 금세 지루하다며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루시온은 퍼져나간 어둠을 억지로 원통에 쑤셔 넣고는 이를 악물었다.

형태 유지가 생각한 것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머리에 열이 나는지 가면 안이 뜨겁다 못해 김이 새어 나갈 지경이었다.

루시온은 여기에서 모양이 더 흩어지기 전에 어둠으로 만든 죽창을 유령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푸욱!

―지배된 유령의 가슴 부근을 찌르는 건 네 어둠과 다른 흑마법사의 어둠을 억지로 연결하기 위해서야.

'연결됐다....'

루시온은 손끝부터 시작해 온몸이 저 유령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연결됐다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어둠을 찾아. 감각에 의존해.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루시온은 마치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은 방에 갇힌 기분을 느꼈다.

―5초 지났어!

라타가 말을 걸어왔다.

25초 남았다.

루시온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곧 눈을 감고 감각에 의지해 어둠을 찾아다녔다.

자신이 찔러 넣은 죽창은 어느덧 지팡이가 된 듯 멋대로 '탁탁' 소리를 냈다.

탁.

왼쪽에는 없었다.

탁.

중앙도 아니었다.

탁탁탁.

오른쪽을 보자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찾아. 감각을 끌어 올려.'

루시온은 순간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27초!

3초가 남은 시간에 멋대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28초!

루시온이 찌릿한 느낌이 드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29초!

손끝에 무언가 만져졌다.

―30초!

라타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루시온은 손끝을 통해 자신의 어둠을 재차 밀어 넣었다.

슉!

영상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눈앞에 화면이 지나갔다.

'여기는....'

지역 이름이 멋대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휙휙 지나가던 화면은 검은 로브와 붉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보이자 멈췄다.

'푸른 실이...?'

갑자기 나타난 푸른 실은 두 사람과 자신을 연결했다.

루시온은 눈동자를 마저 굴렸다.

흑마법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루시온의 시선이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의 머리 위에 멈췄다.

어둠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저놈이다!'

루시온은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이 유령을 지배한 흑마법사라는 걸 알아챘다.

'그 옆에 놈은....'

붉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후드를 젖힐 때, 흑마법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자신과 두 눈이 맞은 것만 같았다.

똑.

때마침 지배된 유령과 연결되었던 어둠이 끊어졌다.

방금 일어난 일이 마치 꿈인 것처럼 시각이 한 번에 돌아왔다.

'방금 나하고 눈이 맞은 거 맞나…?'

루시온은 얼떨떨함을 느끼며 보고를 위해 러쉘을 보았다.

찌르르.

그때, 뒤쪽에서 섬뜩한 느낌이 몰려왔다.

허공에서 알 수 없는 글자가 나타나더니 곧 푸른 물결로 변해 루시온을 덮쳤다.

45화. 누구야?(3)

[뒤!]

러쉘이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이미 루시온의 어둠이 루시온을 보호하고자 모습을 드러낸 뒤였다.

팡!

어둠으로 푸른 물결을 막았지만, 충격까지는 막지 못했다.

루시온은 서랍까지 밀렸고, 몸 전체 느껴지는 거센 충격에 다급히 가면을 반쯤 벗었다.

"…커헉!"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루시온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방어 마법이다!]

러쉘은 우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유령으로부터 루시온을 감췄다.

―호옵....

라타의 귀가 접혔고, 발발 떨었다.

[루시온! 괜찮아? 정신이 들어?]

러쉘은 루시온의 몸속을 헤집는 마나를 확인했다.

여기서 방어 마법이라니.

미리 루시온에게 허락을 받아 어둠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방어 마법 중에서도 꽤 까다로워 보이는 마법이었다.

루시온이 막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러쉘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루시온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한 번 더 피를 토했다.

'…그 옆에 있던 놈이 마법사다.'

루시온은 붉은 로브를 입은 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뒤졌다, 네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루시온은 익숙하게 천 조각을 꺼냈다.

라트초 때문에 혹시 몰라 여러 개를 가지고 다녔다.

루시온은 천으로 입가를 닦고는 바닥에 자신이 흘린 피 위로 내던졌다.

"…이게 방어 마법입니까?"

루시온의 목소리는 당장 끊어질 듯 가느다랬다.

[가만히 있어, 루시온. 지금 마나 때문에 어둠이 크게 흔들리고 있으니까.]

"마나라는 게 이렇게… 거지 같습니까?"

루시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마법에 당해보았다.

속은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인데, 머리는 혼자서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제일 거지 같은 건 빛이지. 빛은 어둠을 죽이지만, 마나는 어둠을 죽일 순 없어. 속을 뒤집어놓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방어… 콜록, 콜록!"

루시온은 잔기침을 내뱉었다.

목소리만 꺼내도 속이 뒤흔들렸다.

[방어 마법은 마법을 건 시전자의 마나, 마법에 걸린 사람이 가진 힘 이외에는 다 배척하는 마법이라서 움직이는 결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러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리가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어도 마법이 발동됐다는 건 일반적인 방어 마법이 아니라 마방사의 마법이네.]

마방사는 방어 마법만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사를 말했다.

이름에 걸맞게 방어 마법 분야에서 우수하나, 상대적으로 공격 마법 분야에 취약해 보기 드문 마법사이기도 했다.

'마방사의 방어 마법을 사용할 정도라면 저 흑마법사 놈이 엄청 중요하다는 뜻이잖아.'

루시온은 숨을 몰아쉬며 어둠을 다독거렸다.

―괜찮아? 라타가 어둠을 더 단단히 만들 수 있었는데, 못했어. 라타가 너무 느렸어. 라타가 더 잘해야 했는데.

라타가 울먹이자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신관에게 빛을 맞았어도, 신수에게 축복이라는 이름의 공격을 받았을 때로 이렇게 울먹이진 않았는데.

'라타가 성장했기 때문인가?'

사람도 성장할수록 '공포'와 '두려움'을 점점 알게 되곤 했다.

라타도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게 아닐까.

루시온은 계속 라타를 쓰다듬으며 러쉘을 보았다.

"놈이 어디 있는지 찾았습니다."

[찾았어도, 방어 마법 때문에 역추적했다는 사실을 들켰을 가능성이 커. 어떻게 본다면 반쯤인 성공이지.]

러쉘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어 마법만 없었더라면 낮은 확률을 뚫고 깔끔하게 성공했을 텐데.

지금 루시온의 상태는 자신이 걱정한 것보다 더 나빴다.

방어 마법이 강했다.

차라리 역추적에 실패한 결과가 나을 정도였다.

"스승님 말씀대로 반밖에 되지 않은 성공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루시온은 아직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 흑마법사가 러쉘 말대로 역추적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당연히 가장 중요한 장소를 살피게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무얼 통해서 확인하겠는가?

"스승님께서 유령으로부터 절 숨기셨으니 아직 들키지 않았습니다."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적이 건 방어 마법이 작동했다.

하지만 적은 자신의 생사를 알지 못했고, 자신이 사용한 마법이 역추적이라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적은 제 상태도 위치도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거든요."

루시온은 서로 혼란스러운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 * *

역추적을 통해서 본 흑마법사의 위치는 언제든 여관 밑 비밀장소에 출동할 수 있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루시온은 자신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그 어떤 순간보다 차분했고,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건물 주변부터 돌아다니는 유령들을 보니 벌써 흑마법사가 있다는 티가 풀풀 나고 있었다.

루시온은 러쉘에게 정찰을 부탁했다.

역추적처럼 이번 일 역시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마법사가 없어.]

정찰에서 돌아온 러쉘은 상황을 보고했다.

"마법사가 없다뇨?"

[아마도 방어 마법이 어디에서 작동한 건지 확인하러 간 모양인데.]

러쉘이 슬쩍 건물을 가리켰다.

겉보기에는 근처에 붙어 있는 건물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간단한 방어 마법 몇 개랑 하급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들, 저렇게 돌아다니는 유령이 전부야.]

"말리지 않으십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그 물음에 러쉘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널 말렸다면 이 건물에 도달하기 전이겠지.]

러쉘은 루시온이 건물 근처에 다다를 때 이미 상황을 파악했다.

숫자는 적들이 많지만, 상황은 루시온에게 유리했다.

으레 그렇듯 흑마법사는 고립된 존재였다.

[흑마법사는 지금 혼자 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루시온.]

러쉘은 머뭇거리다 루시온을 불렀다.

[너는 흑마법사와 싸워본 적이 없을 거다.]

"그렇습니다."

[상대는 타락한 흑마법사가 아니야.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지.]

"압니다."

[내가 말했지? 흑마법사는 강해.]

"제가 더 강하면 됩니다."

루시온은 자신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흑마법사였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 없었다.

절대 빈손으로 오지 않았으니까.

[전투가 시작되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거의 없어. 전투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거니까.]

러쉘은 흄을 보았다.

부족한 공격은 흄이 보충해줄 터.

실전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그래도 조금 전처럼 당할 수 없으니 일단 허락해 놔.]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이 자신의 어둠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했다.

러쉘은 다시 건물로 돌아갔고, 루시온은 그 모습을 보며 라타를 불렀다.

"라타."

―응!

"네가 좋아하는 걸 사용할 시간이야."

―정말?

라타는 아까 언제 눈물을 흘렸느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제자리에 날뛰었다.

"그럼 전 이전처럼 쥐어패면 되겠습니까?"

흄은 평소와 달리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있어도 루시온이 당했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흄은 새삼 자신이 이런 분노라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였다.

"그래. 개새끼에게는 주먹만큼 좋은 수단은 없지."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타."

―응!

"스승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느껴지지?"

―응. 라타는 느껴져.

"스승님이 멈추면 그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면 돼."

―홉!

라타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가득 찼다.

라타는 곧 크게 대답했다.

―알았어! 이번에는 라타가 더더 집중할 거야.

잠시 뒤, 라타는 과감하게 앞발을 들어 올렸다.

―간다!

탁!

라타가 바닥을 내리침과 동시에 그림자가 루시온, 흄을 삼켰다.

장소가 바뀌자마자 흄은 두서없이 돌진해 흑마법사의 복부에 주먹부터 박아넣었다.

빠악!

촤르륵.

그사이 루시온은 차분히 어둠을 주변으로 뿌렸다.

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지.

러쉘은 숨을 죽이며 루시온을 보았다.

'지금이라면 그걸 사용할 수 있겠지.'

루시온은 집중했다.

소설 속 헤인트에게 흑마법사인 동료가 있었다.

그는 어둠을 오러처럼 만들어서 기사처럼 행동했고, 흑마법사를 증오해 그 누구보다 흑마법사를 쳐부수고 다니던 인물이었다.

'저 흑마법사는 나처럼 초보가 아니야.'

그렇다는 건 웬만한 힘으로 제 주인을 보호하는 어둠을 뚫긴 어렵다는 말이었다.

지금 흄이 가진 힘으로도 벅차 보였다.

'하나 정도는 따라 써도 되겠지.'

루시온은 뿌렸던 어둠을 회전시켰다.

휘이이잉.

어둠을 회전하는 데 굳이 형태는 필요 없었다.

이미 훈련을 통해 어둠을 수없이 돌려봤기에 생각한 것보다 어둠이 빠르게 돌았다.

루시온은 회전하는 어둠의 범위를 점점 좁혔고, 덩달아 라타도 바빠졌다.

―라타가 도울 거야!

범위가 좁혀지자 어둠은 마치 루시온의 왼팔에만 벌레떼가 모여든 듯 보였다.

"비켜!"

흄을 향해 루시온이 소리쳤다.

지금 루시온은 흄이 휩쓸리더라도 신경 쓸 수 없었다.

팔에 감긴 어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다.

루시온은 흑마법사를 향해 단번에 어둠을 토해냈다.

요란한 겉모습과 달리 어둠은 조용하게 흑마법사의 몸 전체에 퍼졌다.

'충격은 뒤늦게....'

루시온은 욱신거리는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쿠웅!

흑마법사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넋을 놓아버렸다.

뒤이어 테이저건을 맞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다시피 했다.

"크어...."

흑마법사가 크게 비명을 터트리자 흄이 재빨리 놈의 입을 막았다.

'…뭐야? 이 마법을 루시온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상황을 지켜보던 러쉘이 기겁했다.

흑마법사가 가진 어둠은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강한 이유 동시에 타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루시온이 사용한 마법은 어둠을 한 점에 모아 이용해 흑마법사를 보호하는 어둠을 찢어버리고 덩달아 놈이 가진 어둠에게 큰 충격을 주는 마법이었다.

이렇게 충격에 빠지면 어둠이 패닉에 빠져 일순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이 가진 자아 때문에 흑마법사들이 다른 사람보다 충격에 약하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조금 전 방어 마법 덕에 그 점을 깨달은 건가…? 겨우 그 일만으로?'

러쉘은 혼란스러웠다.

루시온은 흑마법사를 보호할 어둠이 사라지자 유령을 지배하는 것처럼 놈에게 어둠을 불어넣으며 명령했다.

'공격해!'

놈이 방어체계를 잃어버린 지금, 흑마법사는 제 몸속을 찢어버리는 자신의 어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은 건 고통에 괴로워하는 일뿐이었다.

흑마법사는 고통에 바둥거리다 못해 온몸에 핏줄이 곤두섰다.

루시온은 잠깐 손을 멈추고 흄에게 고갯짓했다.

흄이 손을 떼자 루시온이 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지?"

"빌어먹...."

흄은 후려치듯 놈의 입을 막았다.

찰싹!

루시온은 다시 어둠을 흘려보냈다.

"네 주인이 누구야?"

"내가 그걸… 으아악!"

자신이 묻고, 흑마법사가 대답하지 않으면 상황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놈은 자신의 어둠이 회복되길 기다린 듯싶었지만, 자신에게는 천재 흑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다.

[슬슬 약발 떨어진다.]

러쉘의 지적에 루시온은 욱신거리는 팔의 고통을 이겨내며 조금 전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쿠웅!

두 번이나 당했으니 고통은 상상 이상일 터.

루시온은 어둠을 불어넣기 전에 다시 물었다.

"네 주인이 누구지?"

흑마법사가 입을 다물자 루시온은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어둠을 손바닥에 최대한 꺼내 보였다.

화르르륵.

어둠이 순식간에 퍼져나가 방의 절반을 가득 채워나갔다.

―어! 안 되는데? 루시온. 더 꺼내면 안 돼.

라타가 기겁하며 말했다.

"네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 이걸로 확인되겠지?"

루시온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에 입술이 찢어지고, 눈이 새빨갛게 변하다 못해 침까지 흘리고 있던 흑마법사는 루시온의 어둠을 보더니 기어코 무겁던 입을 열었다.

"로, 로베리오! 로베리오 백작!"

이름을 듣자마자 루시온은 멈칫거렸다.

'로베리오 백작이라면....'

루시온은 일단 어둠을 거두며 생각했다.

"어둠을 따르는 이여. 당신께 보, 복종하겠나...."

흑마법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루시온의 지시에 흄의 손이 놈의 목을 거침없이 움켜쥐었다.

"커헉…!"

콰직!

목이 꺾이는 소리와 함께 푸른 실 중 하나가 잘려나갔다.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흄에게 지시를 내렸다.

"방 안에 있는 거 전부 챙겨."

로베리오 백작.

중간 보스였던 루시온 크로니아가 거뒀던 악역 중 한 명이었다.

46화. 잠깐만!

루시온은 흄이 마법 주머니를 이용해 방에 있던 서류 대부분을 챙긴 걸 확인한 후에 라타를 불렀다.

"라타."

아직 한 놈 더 있었다.

그 마법사.

―으음.

라타가 앓는 소리를 냈다.

―라타가 보기에 루시온은 지금 슝을 쓰면 안 돼. 어둠이 너무 적어.

"아니. 지금 빠져나가야 해."

루시온은 라타를 재촉했다.

자료를 챙기느라 생각보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라타의 시선이 러쉘을 향했다.

[라타.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사용해야 합니다, 라타. 지금 여러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러쉘에 이어 흄까지 말을 잇자 라타는 시무룩한 얼굴을 드러냈다.

―라타는 루시온이 너무 걱정되지만, 어쩔 수 없지.

라타가 바닥을 있는 힘껏 때렸다.

―간다!

찰싹!

* * *

루시온은 건물로 이동하기 전의 장소로 돌아오자마자 가면을 반쯤 벗었다.

코피가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눈이 억지로 감겨오자 루시온은 억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세상이 빙그르르 돌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휘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루시온을 부축했다.

"…괜찮아."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쉘은 괜찮냐는 물음보다 루시온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 루시온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마법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그림자 이동까지 해버려 어둠이 거의 고갈되었다.

왼팔은 아무래도 부러졌는지 미동이 거의 없었다.

'팔이 부러질 만하지. 어둠의 형태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에서 회전하는 어둠을 무식하게 팔에 둘렀으니.'

자신이 루시온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마법의 이름은 '검은 파동'으로, 어둠이 가진 특성을 이용해 자신이 만든 마법이었다.

회전 원리.

어둠을 한쪽 팔에만 안착하는 방식.

무엇보다 충격을 주공격으로 삼은 공격방식.

이 모든 게 너무도 흡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러쉘은 일단 생각을 접고 다시 루시온을 살폈다.

'여기서 루시온이 어둠을 더 사용하면 진짜 위험하다.'

러쉘은 억지로 의식을 붙잡는 루시온의 모습에 차라리 기절을 시키려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행동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마법사가 다시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루시온. 마법사가 돌아온다.]

러쉘이 다급히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은 흐려지는 의식을 다시 잡으며 팽팽해진 푸른 실을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을 때부터 저 실이 팽팽해지는 걸 확인하고 여기로 돌아왔다.

'벌써 로베리오 백작이라는 이름을 들을 줄이야.'

로베리오 백작은 소설 속 루시온이 퍼트린 저주 때문에 망한 헤인트의 가문을 인수하며 이를 계기로 자잘한 가문들을 집어삼키며 세력을 어마하게 키워나갔다.

그의 욕망에 소설 속 루시온이 놈을 발탁해 진짜 악당의 길을 걷게 되지만, 트리아 가문을 돌려달라는 헤인트와 다투는 와중에 그의 비리가 밝히게 되면서 몰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쨌든, 흑마법사의 주인이 로베리오 백작이라면 저 마법사가 누구인지 뻔하지.'

루시온은 숨을 여러 번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정신을 다시 잡았다.

저 마법사의 이름은 '피터'로 방금 죽어버린 흑마법사가 동생에게 저주를 걸어 원치 않게 로베리오 백작에게 묶여 있는 인물이었다.

피터는 러쉘이 말한 대로 방어를 전문적으로 하는 마법사인 마방사였다.

'게다가 아직 폭주하기 전이다.'

피터의 죽음은 폭주였다.

헤인트와 편을 먹고 로베리오 백작을 죽이러 갔을 때, 로베리오 백작이 저주 때문에 이미 동생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피터가 폭주하면서 진짜 악역이 되어버렸다.

'즉, 아직 악역이 되기 전이라는 말이지.'

자신의 조직이 커질수록 당연하게도 적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반드시 세력을 키워야 했고, 마방사인 그가 있으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죽지 않았다면 최고의 마방사가 됐을 인물이기도 했고.

―루시온. 왜 갑자기 웃는 거야?

라타가 물었다.

"그냥."

루시온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고 피터에게 걸어갔다.

[루시온…?]

루시온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러쉘은 당장 그를 말렸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상태로 못 싸워.]

"안 싸웁니다."

[안 싸운다고? 네가?]

러쉘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루시온의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지만,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만 같았다.

"부족하겠지만, 제가 대신 싸우겠습니다."

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전투를 거듭할수록 자신의 행동에 불필요한 동작이 많다는 걸 인지했다.

조금 전 흑마법사와 싸웠을 때도 고작 움직임을 막는 게 전부였다.

"안 싸운다니까."

"그럼 왜… 저 사람에게 가시려는 겁니까?"

흄 역시 루시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언제나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던 그였기에 바짝 긴장했다.

루시온이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대체 왜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건지.

"역추적 때 뭘 좀 봤거든. 그래서 저 녀석이 필요해졌어."

[…뭘 봤다고?]

러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흑마법사가 저 마법사를 협박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어쩌면 저 마법사와 싸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뭘 하려는 건데?]

"꼬드기려고 합니다."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러쉘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도 루시온이 악동과 같은 표정을 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흄.]

러쉘이 흄을 조용히 불렀다.

"예, 러쉘 님."

[루시온에게 눈 떼지 마.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금방 쓰러질지도 모르니까, 언제든 들고 나를 준비하고 있어.]

흄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납치하란 말씀입니까?"

[비슷하지만, 어쨌든 맞아.]

"알겠습니다. 제대로 해 보이겠습니다."

대놓고 속닥이는 말에 루시온은 웃음을 흘렸다.

자신을 들고 날라준다는데 뒤는 이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루시온은 피터를 향해 다가갔다.

―라타도 얼른 크고 싶어.

"그래."

―라타도 신수 아저씨처럼 커질 수 있을까?

"어."

―응! 라타는 이제 더 많이 먹을 거야!

루시온은 슬슬 자신을 의식하는 피터를 보았다.

피터가 머무는 건물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흑막의 차림새를 한 자신이 너무도 수상하겠지.

루시온은 거리낌 없이 피터에게 화제를 던졌다.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나?"

피터는 순간 저주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든 말든 루시온은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나도 잘은 몰라."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러쉘에게 배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지."

루시온은 자신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경계하는 피터에게 손가락 하나를 올려 보였다.

"저주를 건 놈을 죽이면 저주는 풀려."

"대체...."

"내가 그놈을 죽였으니 저주는 풀렸을 거야. 서둘러 가봐야지 않겠어?"

"넌 대체 누구야…? 어디까지 알고 있지?"

피터가 얼굴을 구겼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불쾌하다 못해 소름이 돋는 상황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난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마침 내가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거든."

루시온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피터가 황당하리라는 건 알지만, 원래 첫 만남은 신비로워야 했다.

"정 은혜를 갚고 싶다면 크로니아 페르렌 도시에 외곽에 있는 노란 꽃 덤불이 가득한 집을 찾아가. 거기에서 내 이름 '하멜'을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루시온은 숨을 골랐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상황에서 말을 빨리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월급은 꼬박꼬박 줄 거고, 원한다면 휴가도 줄 수 있어. 아, 식비도 주지. 그 외에 자잘한 복지도 생각 중이야."

루시온은 피터에게 손짓했다.

'힘들어도 마지막까지 할 건 해야지.'

피터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꼼짝도 하질 않았다.

별수 없이 루시온이 다가갔다.

"의심스러운 건 이해해. 하지만 내 말을 믿는 게 좋을 거야."

루시온은 온 힘을 다해 피터의 얼굴에 주먹을 박았다.

안타깝게도 주먹에 대한 대비가 덜 되어있는 듯했다.

하긴 마방사가 주먹으로 얻어맞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루시온!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황당해하던 러쉘이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여기에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면 어쩌자는 건지.

"내가 네놈 방어 마법에 아주 완벽하게 당했거든."

루시온은 맥없이 쓰러진 피터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너도 훈련이 필요하겠어. 방어 마법도 느리고, 주먹 대비 방어 마법도 없어서야 내가 위험하잖아."

피터 자신이 당연히 저자가 말한 곳으로 오리라 확신하는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보다 완벽한 신비로운 첫 만남은 없을 터.

루시온은 흐뭇해하며 흄을 재촉했다.

"가자."

당당하게 걷던 루시온은 갑자기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홉!

라타가 깜짝 놀랐고, 루시온을 지그시 보고 있던 흄이 그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몸을 날려 잡았다.

[…내 저럴 줄 알았다.]

러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납치하겠습니다."

흄이 비장한 목소리를 냈다.

* * *

루시온은 거의 놀란 듯이 눈을 떴다.

―루시온!

카슨의 무릎에 웅크려 있던 라타가 다급히 뛰어 내려왔다.

루시온은 카슨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루시온."

카슨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형님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직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기에 루시온은 지금 상황이 꽤 무서웠다.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지고. 그 후에....'

루시온은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발 상황을 알려달라고 러쉘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잠깐 심부름을 간 사이 네가 마차에 치였다고 흄이 말했어.]

러쉘이 두 박자 늦게 알려주었다.

결과적으로 좋게 끝이 났지만, 어쨌든 루시온이 위험할 뻔했다.

걱정과 괘씸함은 별개였다.

'그 말을 형님이 믿었다고?'

루시온은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낼뻔했다.

―거짓말은 나쁜 거야. 떽!

라타가 손가락 하나만 이용해 아주 살짝 루시온의 다리를 건드리고는 바로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아니야, 라타. 흄이 제법 잘 둘러댔어. 루시온의 꼴이 딱 마차에 치였는데 운 좋게 팔만 부러지고 살아난 모습이랑 다를 게 없었거든.]

"부러졌습니까…?"

루시온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왼팔이 불편하다 싶었는데 부러졌을 줄이야.

[부러지기만 했겠어?]

러쉘은 군데군데 감긴 붕대를 가리켰다.

카슨이 흄의 말을 괜히 믿는 게 아니었다.

"누구더냐."

당장 누군가의 목을 벨 것처럼 카슨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흄은 몰라도 넌 알 터."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진짜 모릅니다."

카슨의 눈동자가 반쯤 감겼다.

흄은 초행길이었기에 어디에서 사고가 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사들을 풀어 탐문에 들어갔지만, 마차 사고가 꽤 빈번했기에 범위를 좁힐 수가 없었다.

'셴과 데비아는 치웠을 텐데. 누가 또 있는 거지?'

곧 카슨은 피이자트 가문을 떠올렸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보복 공격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야. 확증은 없다.'

단순한 사고일지 누군가의 공격일지 알 수 없었다.

카슨은 분노를 꾹 삼키며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

"예, 형님."

카슨은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까지 꺼내다 그대로 삼켜버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기사들을 붙이겠다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당분간 밖에 나갈 생각 말고 얌전히 있거라."

카슨은 다른 말을 꺼냈다.

'형님께서 내게 기사들을 붙이려는 줄 알았네.'

루시온은 덩달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사 한두 명이라면 몰라도 여러 명은 아직 좀 버거웠다.

"아, 피이자트 가문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루시온은 굳어진 카슨의 표정에 화제를 돌렸다.

지금 카슨이 무얼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납치당했던 그때를 또 떠올리고 계시네.'

카슨은 세 박자 정도 늦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쓰러진 후에 피이자트 가문의 가주가 찾아왔다."

"그놈의 목은 붙어 있습니까?"

"감히 내 앞에서 뻔뻔하게 제안이라는 말을 꺼내기에 그 입을 찢어버리려다 참았다. 네가 원하던 결말은 그게 아닐 테니까."

"맞습니다. 기왕 본보기가 된 김에 제대로 망해야 다시는 크로니아를 무시하는 일이 없을 테지요."

"걱정하지 말거라. 준비는 다 되어있다. 다만, 좋은 날 전에 때가 묻으면 안 되지 않더냐."

카슨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

그때, 루시온이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냈다.

"형님. 제가 받기로 한 사업장 말입니다."

"그래."

―데비아 제븐을 기억하십니까? 제븐 가문은 빚을 지고 있었고, 그 빚을 요구한 가문이 피이자트 가문입니다.

루시온은 역추적한 흑마법사를 쫓으러 가던 도중 흄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제븐 가문과 피이자트 가문은 둘 다 자작이었다.

가진 재산의 차이는 날 수 있어도 제븐 가문이 졌던 빚은 영토 두어 개의 값이었다.

고작 자작가 가문에서 그만한 빚이 생기는 것도 이상했고, 그 빚을 똑같은 자작가가 요구했다는 것 역시 우스웠다.

냄새가 났다.

아주 수상쩍은 냄새가.

'외출 금지도 당했겠다. 가만히 있으면 뭐 하겠어?'

피이자트 가문을 밟아버리고 한 이상, 수상한 사실도 나왔겠다 더 털어봐야지.

루시온은 카슨이 더 빨리 움직이도록 지금부터 밑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47화. 잠깐만(2)

"연회 때, 놈들의 사업장이 잘 나간다는 말을 들었기에 형님께 요구했습니다."

"그 말은 나도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 이상했습니다. 자작가가 그렇게 잘 나가는 사업장을 소유할 수 있는 겁니까?"

"보통은 드문 일이지."

"형님. 제가 흄의 입을 막고 형님께 전달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야단치실 겁니까?"

"야단이라니?"

카슨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혹시 또 루시온이 무슨 사고라도 친 건지.

"사업장을 가진 게 처음이라 어제 그쪽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들떠있기도 했고,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도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카슨은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려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 무어라 말했더냐?"

"하지만 형님. 이는 단순히...."

"알겠다."

카슨은 루시온의 말을 끊어버렸다.

[캬아.]

러쉘이 감탄했다.

[이렇게 엮어버린다고?]

"형님."

루시온이 다시 카슨을 불렀다.

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얌전히 있거라."

카슨이 칼을 뽑아 들었다는 게 느껴질 만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어마했다.

밑 작업이 생각한 것보다 잘 다져졌다.

'아무래도 형님께서 이미 피이자트 가문을 의심하고 계셨나 보네.'

자신이 기름을 부어버렸으니 피이자트 가문이 어떻게 털릴지 뻔했다.

"형님. 죄송하지만, 흄을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래. 불러주마."

카슨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에 기대어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

흄이 루시온을 데려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변경에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벌써 정신머리가 빠지다니.'

호위 기사의 배신으로 루시온이 적국에 납치당한 일이 벌어졌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온몸이 피로 물들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루시온의 모습을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빌어먹을.'

이럴 때마다 루시온의 호위를 늘려야 하는 걸 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일 이후로 루시온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기사라는 존재를 보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기어코 방 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더는 루시온을 자극할 수 없어.'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루시온의 상태는 예전보다 훨씬 좋아져 호위를 한두 명 정도는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도련님께서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까?"

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걱정을 담아 물었다.

"루시온이 널 부르니 들어가 보거라."

"예. 알겠습니다."

"…흄."

막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흄이 카슨의 부름에 그를 보았다.

"혹 루시온이 너를 무서워하더냐?"

"도련님께서 저를 왜 무서워하십니까?"

흄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럼 넌 루시온이 무섭더냐?"

"도련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십니다."

카슨은 그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아보았다.

흄은 루시온이 선택했고, 데려왔다.

"너만큼은 루시온을 배신하지 말거라."

카슨은 흄에게 읊조리듯 말을 하곤 복도를 거닐었다.

흄의 고개가 살짝 기우뚱해졌다.

'첫째 도련님도, 막내 도련님도 배신에 예민하시네.'

흄은 그 사실이 참 이상했다.

자신은 절대로 루시온을 배신할 생각이 없는데.

'아차.'

흄은 문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자신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똑똑.

뒤늦게 문을 두드린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흄!

라타가 침대에서 내려와 흄을 향해 뛰어갔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자 흄은 개를 떠올렸다.

흄은 라타를 쓰다듬으려다 문득 카슨의 말이 생각이 났다.

"전 도련님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뜬금없는 흄의 말에 루시온은 미간을 찌푸리다 말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흄."

"예, 도련님."

"정보는 다 옮겨적었어?"

"예. 제가 기억한 정보는 전부 다 적었습니다. 단어 공부를 하는 것 같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흄이 활짝 웃는 만큼 러쉘은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하면 루시온이 일을 더 시킬 게 뻔했다.

역시나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저는 앞으로 여관 밑 장소에서 모든 정보를 기억한 뒤에 빠르게 옮겨적으면 되겠습니까?"

"맞아."

알아서 자기 일을 찾아가는 흄의 모습에 루시온은 더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도련님의 호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 호위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돌아다니지도 못하니까. 방금 형님께서 외출 금지 명령을 내리셨거든."

루시온은 자신의 부러진 팔을 흔들었다.

"손이 이 모양이니 당분간은 하멜로서도 돌아다닐 수 없고."

러쉘이 단번에 루시온을 째려보았다.

저 꼴이 되고도 돌아다니려고 하다니.

"봤지?"

루시온이 태연하게 러쉘을 가리켰고, 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다친 손 때문에 의심받을 수 있고 러쉘 님의 눈치가 보인다는 말씀이시죠?"

[눈치? 쟤가 내 눈치를 본다고?]

러쉘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예. 눈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고?]

러쉘의 손가락이 루시온의 부러진 팔을 가리키자 루시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마법을 제대로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어쨌든, 흄."

"예."

"네가 적었던 정보 중에 한 번 더 베껴 적어야 할 게 있어. 지금 당장 가서...."

[이미 내가 크로니아의 거래처 부분을 한 번 더 베껴 적으라고 시켰어.]

"감사합니다, 스승님."

루시온은 러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러쉘 덕분에 시간을 줄였다.

크로니아의 거래처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이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반드시 그 정보가 카슨한테 전달되어야 했다.

"흄. 이번에도 저번처럼 사람을 시켜서 여기로 정보를 전달해."

"예. 근처 아이에게 돈을 쥐여주고 시키겠습니다."

"그래. 어제는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다음에는 더 도움 되는 집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흄이 살짝 웃으며 루시온이 깨어나기 전에 도착했던 선물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텔라 영애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드디어 왔다.

라르비스의 눈물이.

[그래?]

내내 얼굴을 구기고 있던 러쉘이 크게 반응했다.

"제 선물입니다."

루시온의 말에 러쉘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뭐래?]

러쉘은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됐고. 빨리 열어봐.]

"스승님."

[왜?]

"제 선물이라는 거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안다니까.]

루시온은 확답을 받고서야 박스를 열었다.

하얀 포장지에 앙증맞은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이 보이자 루시온은 흄에게 내밀었다.

"열어."

[조심해서 열어, 흄.]

"힘 조절은 자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배웠으니까요."

흄은 걱정하지 말라며 보다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포장지 안에는 또 박스가 있었고, 박스를 열자 작은 케이스가 보였다.

'이 정도로 꼼꼼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됐는데.'

루시온은 살짝 지루한 듯 하품을 내뱉었다.

―우오오오. 상자 안에 또 상자가 있어!

하지만 라타는 그 순간마저 누구보다 즐겼다.

[빨리, 빨리 열어봐.]

'라타랑 똑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네.'

루시온은 피식 웃으며 흄이 케이스를 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탁.

케이스가 열렸다.

―어?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러쉘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이거, 성물… 이라고 하기에는 약하지만, 빛이 담긴 물건이잖아?]

하필 고른 게 이거라니.

러쉘은 당장 버리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쨌든 선물이지 않은가.

"좋네요."

루시온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라르비스의 눈물.

성물보다는 못하나, 이 안에 엄청난 빛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사단에서 쫓긴 헤인트가 방랑하면서 손에 넣었어야 할 물건이지만, 그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간 이상 어차피 소설 대로 흘러가지 않을 터.

게다가 원래 소유자도 죽은 상태였다.

[좋다고…?]

러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예. 좋습니다."

루시온은 정말로 기뻐하며 웃고 있었다.

빛이 담긴 물건을 받고도 저렇게 기뻐하는 흑마법사는 아마 루시온밖에 없을 테지.

"이 팔찌 덕에 억지로 신관에게 찾아가거나 빛을 맞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처음부터 빛의 내성을 기르고자 루시온은 저 팔찌를 일부러 선택했다.

러쉘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반응을 몇 번이나 봤다고 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설마 계속 차고 다닐 건 아니지?]

"지금 그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헤인트는 저 팔찌를 마나 포션처럼 사용했다.

'그러고 보니....'

루시온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스승님."

[왜?]

러쉘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혹시 어둠이 담긴 성물 같은 것도 있습니까?"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어둠의 신수인 라타도 있으니.]

러쉘의 시선을 받자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로 있으면 좋겠네요."

헤인트가 그랬듯 자신도 부족한 어둠을 성물로 채울 텐데.

'라르비스의 눈물과 같은 빛이 담긴 물건이 어디 있는지는 아는데.'

참 아쉬웠다.

[루시온.]

러쉘의 부름에 루시온은 팔찌에 손을 내밀다 말고 그를 보았다.

[분명 널 멈추는 건 내가 한다고 했지?]

"예. 그랬습니다."

[그럼 1주일 정도는 저 팔찌에 손도 대지 마.]

루시온은 눈동자를 굴려 팔찌를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확인하고 싶은데....'

다시 러쉘을 쳐다본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너무 깁니다. 한… 4일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그래. 4일.]

러쉘이 덥석 물자 루시온은 어리둥절했다.

여기서 더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훌륭하십니다."

그때, 흄이 손뼉을 마주쳤다.

'속았다...!'

루시온이 입도 벙긋거리지 못하자 러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의사가 4일 정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거든.]

―홉. 루시온이 진짜 속았다.

매우 흥미롭다는 듯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정말로 러쉘 님이 도련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흄은 마치 강의 한 편을 본 것처럼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말에 감정을 섞으면 설득력이 굉장히 좋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자, 이제 다 해결됐으니 루시온 너는 다시 잠이나 자.]

"그럼 저는 잠깐 여기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흄은 구석으로 갔다.

"괜히 신경 쓰이니까 그냥 적당한 자리에 앉아 있어."

루시온은 굳은 목소리를 냈다.

설마하니 흄도 자신을 속였을 줄이야.

[아 참. 루시온.]

"예."

루시온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네 팔을 부쉈던 그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어?]

"어떻게 알다뇨?"

[그거 내가 만든 마법이야.]

"예…?"

[어제오늘 고민한 결과 내가 만든 마법이라는 걸 확신했어.]

'아닌데? 이건 헤인트의 동료인 그 흑마법사가 만든 마법인데?'

루시온은 이상함에 고개가 저절로 살짝 기울었다.

"스승님. 혹시 제자가 한 명 더 있습니까?"

[아니. 내 제자는 너 한 명뿐이야.]

"그럼 의절했다든지, 중도 포기자도 없단 말입니까?"

[없어. 내 첫 제자는 너고, 아마 마지막 제자겠지.]

'그럴 리가.'

루시온은 점점 더 깊은 의문을 가졌다.

그럼 그 흑마법사는 이 마법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갑자기 왜 그래? 첫 제자라는 이름이 뺏기기 싫다는, 그런 생각은 아닌 듯하고.]

"문득 궁금해져서 그랬습니다. 스승님이라면 제자를 여럿 두셨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루시온은 뒤틀린 속과 달리 태연하게 목소리를 냈다.

러쉘은 눈을 반쯤 감으며 그를 빤히 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그 마법을 알고 있는....]

말을 잇던 러쉘은 크게 경악했다.

"왜 그러십니까?"

[수첩을… 안 태웠어.]

"수첩이라뇨?"

[내 모든 지식이 담긴 수첩. 그걸 태우는 걸 깜빡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