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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루시온이 신수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과 별개로 신수의 움직임을 통제하지 못한 신전 쪽에서는 무조건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사납게 쏘아지는 카슨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루시온. 깨어나자마자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카슨 좀 말려라. 저러다 또 신관의 목이 베일까 싶네.]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다급히 상태를 일으켰다.

"형님…?"

"괜찮느냐?"

카슨의 목소리에도 화가 느껴질 정도였다.

러쉘이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루시온은 무릎을 꿇은 신관과 카슨을 뜯어말리는 헤인트와 대신관을 보았다.

[네가 신수에게 공격당했다는 소식에 카슨이 대신전 문을 부수고 와서 지금 저 신관의 목을 베니 마니 하면서 대치하고 있어.]

러쉘이 상황을 설명해주자 루시온은 어쩐지 휑하게 느껴진 장소를 보았다.

저기가 문이 있던 곳이라니.

"저들이 신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지 않더냐, 루시온?"

카슨의 목소리가 금세 커졌다.

루시온은 말을 아끼며 대신관과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곤란한 얼굴로, 제발 말 좀 제대로 해달라며 루시온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신전 쪽에서는 엄청 곤란하겠지. 지금 폭탄 건도 모자라서 신수가 사고를 쳤고, 하필 그 사람이 너라니.]

루시온은 러쉘이 하는 말을 들으며 잠깐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변경백의 막내아들이고, 이번 일의 공로자면서 신력 알레르기까지 있잖아? 벌집을 쑤셔도 제대로 쑤셨지.]

러쉘은 은근히 루시온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그가 어떤 식으로 대처할 건지.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좀 놀라긴 했습니다. 신수가 갑자기 제게 올 줄은 몰랐으니까요."

루시온이 입을 열자 대신관이 다급히 물었다.

"루, 루시온 크로니아 공. 몸은 어떠신지요?"

루시온은 카슨을 쳐다보았다.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만, 이러면 대화가 되질 않았다.

"형님. 일단 진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겠다."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그제야 대신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꿀꺽.

대신관과 신관은 거의 동시에 마른 침을 삼켰다.

"피를 토해서인지 좀 어지럽습니다."

"카슨, 카슨! 아직 루시온의 말이 다 안 끝났어."

헤인트는 필사적으로 카슨을 말렸다.

덩달아 신수를 지닌 신관이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그 점만 빼면 괜찮습니다."

이어지는 루시온의 말에 대신관은 십년감수했다는 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공께서 의식이 없으실 때, 의사를 불러 몸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대신전에 의사가 들어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루시온은 진심으로 놀랐다.

"일단 괜찮으시지만,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저희 쪽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무조건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카슨이 대신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신관이라는 위치는 어디까지 빛의 신을 믿는 자들을 관리하는 직업의 이름일 뿐이었다.

그들의 위치는 귀족들이 중립을 맹세한 신관을 믿고 인정했기에 만들어진 자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카슨의 압박은 대신관 입장에서는 결코, 단순한 압박이 아니었다.

변경을 지키는 크로니아는 황실조차도 크게 경계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축복이라는 게 무슨 말입니까? 형님께서 하시던 말씀을 들었습니다."

루시온은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신수께서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 빛의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대신관은 넙죽 루시온의 말을 받아먹었다.

"어떤 축복입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대신관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신관을 바라보았다.

"베로스."

그 부름에 베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루시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공께서 받으신 축복은 저는 모릅니다. 다만, 공께서는 확실히 증표를 받으셨습니다."

"증표가 어디에 있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러쉘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낄낄거렸다.

[아마 신수에게 축복받은 최초의 흑마법사가 아닐까 싶은데.]

베로스는 미리 준비했던 거울을 꺼내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거울을 받은 루시온은 설마 하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마 한가운데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태양 무늬가 박혀 있었다.

'이런 미친....'

루시온은 당장 신수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얌전히 축복이나 할 것이니 이런 자국은 왜 남긴 건지.

"더불어 공께서 받으신 축복으로 인해 '명예 신관'이라는 위치와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영광스러운 고유의 칭호가 수여될 겁니다."

'…그러니까, 자국을 조금 더 크게 남겼어야지.'

루시온은 이어지는 베로스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붉은 실이 나타났고, 잘렸는지 역시 알아챘다.

흑마법사인 자신이 웃기게도 앞으로 신전에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보다 더 큰 전환점은 없을 것이며, 이보다 더 큰 보상 역시 없을 터.

귀족 루시온 크로니아는 흑마법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그림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목숨 하나는 공짜로 얻었고.'

루시온은 뒤따라 오는 보상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내가 미쳤다는 소문은 앞으로 무조건 잠재워지겠네.'

연회 첫날은 너무도 환상적인 날이 아닐 수가 없었다.

* * *

"…도련님."

흄은 마차로 향하는 루시온의 뒤를 따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해."

"그 향 말입니다."

―아! 라타는 알겠다. 루시온이 찾는 상큼 달달 향을 말하는 거지?

라타가 목소리를 내자 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

루시온이 카슨과 헤인트를 의식하며 물었다.

"그 냄새를 대강당에 있을 때부터 맡았습니다."

"향수의 냄새는 겹칠 수 있어. 아무래도 내 주위까지 맴돌았나 보네?"

"예. 그렇습니다. 그 향도 나고 도련님 주변을 맴돌았던 사람이 지금 무척 가까이에 있습니다."

흄이 슬쩍 왼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루시온은 역시 왼쪽을 보았다.

[아. 저기에 텔라가 있네.]

러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자 정말로 텔라가 보였다.

"형님들."

루시온이 목소리를 냈다.

카슨과 헤인트가 루시온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텔라 영애에게 잠깐 인사를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아까 그렇게 보낸 게 마음에 걸립니다."

카슨의 시선이 루시온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해맑게 웃고 있는 텔라가 보였다.

"그래. 잠깐 이야기하고 오거라. 마차에서 기다리지."

카슨 역시 텔라를 그렇게 보냈던 게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누가 뭐라든 루시온의 친우가 아닌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루시온은 바로 등을 돌렸다.

"그놈이 가까이에 있으면 날 불러. 옷이 구겨졌다고 말하고."

"알겠습니다."

흄은 냄새를 쫓아 나아갔다.

텔라와 가까워질 무렵, 흄이 루시온을 불렀다.

"도련님."

루시온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왼쪽에 서 있던 흄이 자리를 옮겨 오른쪽으로 섰다.

저절로 루시온의 눈동자가 오른쪽을 향했다.

여러 영애가 보였다.

흄은 한 영애가 자신을 스쳐 지나갈 때 다시 입을 열었다.

"옷이 구겨졌습니다."

'저… 영애다.'

루시온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37화. 상큼 달달 향!

보랏빛을 띠는 곱슬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영애였다.

하지만 얼굴만으로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때, 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비아 영애. 이쪽이에요."

"아, 텔라 영애."

루시온이 목표로 하는 그 영애가 텔라에게 걸어갔다.

이미 텔라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짜 발이 넓네.'

루시온은 텔라의 인맥에 입을 살짝 벌렸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어. 이제 시작이잖아.]

갑작스러운 러쉘의 위로에 루시온은 주춤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천천히 시작해. 사람들이 널 쳐다볼 때마다 식은땀 흘리고, 손 떨리는 거 다 봤어.]

"…눈도 참 좋으십니다."

루시온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차츰차츰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져야 했다.

"잘했다, 흄."

루시온은 흄을 칭찬했다.

곧 얼굴에 미소를 달고 텔라를 향해 걸어갔다.

"텔라 영애."

루시온의 목소리에 텔라는 손에 쥐고 있던 접시를 근처에 내려놓으며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몸은 괜찮으세요? 쓰러지셨다고 들었어요."

"괜찮습니다. 아까 그렇게 보내드린 게 마음에 걸려서 이렇게 인사하러 왔습니다."

"정말요?"

텔라는 환하게 웃다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작게 속삭였다.

"혹시 공자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분들에게 공자를 소개해도 될까요? 물론, 조용히 할게요."

어서 빨리 친우를 소개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루시온이 원하던 바였다.

루시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텔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루시온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분은 제 친우 루시온 크로니아 공자입니다."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는지,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하지만 눈빛에 깃든 자랑스러움은 단번에 보였다.

텔라는 다시 루시온에게 걸어가 사람들을 가리키며 한 명, 한 명 소개해주었다.

루시온은 텔라가 소개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차분히 귀에 넣고 있었다.

언젠가는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사소한 기회 역시 놓치기엔 아까웠다.

"…그리고 이분은 제븐 자작가의 데비아 제븐 영애예요."

텔라가 데비아를 가리키자마자 마치 정답이라는 듯 푸른 실이 그녀와 연결되었다.

아마도 나머지 하나는 셴일 테지.

"텔라 영애."

"예, 공자."

"아쉽지만, 저는 이만 가봐야 할 듯합니다."

루시온은 이미 상큼 달달 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카슨을 생각하며 루시온은 물러났다.

아직 밤은 끝나질 않았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루시온은 카슨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형님, 접니다."

"들어오거라."

루시온이 문을 열자 카슨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루시온을 보고 있었다.

"왜 아직도 외출복인지 모르겠구나."

"잠깐 산책 좀 다녀오겠습니다."

카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일 하거라."

[그래. 이게 정상이지. 오늘, 네 상태를 생각하면 얌전히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푹 자야 맞는 거라니까.]

러쉘은 카슨의 현명한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루시온이 나가야 한다는 말을 꺼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예전에는 아예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는데 지금은 나간다고 말리는 상황이 퍽 우습긴 했다.

"오늘 해야 합니다. 아니, 오늘도 조금 늦긴 합니다."

루시온은 카슨을 설득했다.

"이유가 무엇이더냐?"

"절 건드린 그놈이 지금쯤 도망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제 그 일이더냐?"

텔라 루테온과 약속이 있어 나갔던 그 날, 루시온은 몸에 피 냄새를 묻히고 왔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로 큰일은 아닙니다."

그날, 루시온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카슨은 신경이 쓰였다.

"기사는 몇 명이 필요하겠느냐?"

그러나 카슨은 루시온을 말리지 않았다.

건드렸다는데 당연히 갚아줘야 하지 않겠나.

"필요 없습니다."

"그럼, 뒷수습이 필요하면 말하거라."

"예. 제가 감당할 수 없다면 형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숙인 뒤에 물러났다.

'사람을… 붙여야 하나?'

카슨은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적부터 감이 좋던 아이였다.

실력이 있는 자들을 몇 번 붙였지만, 그때마다 루시온은 노비오나 자신에게 와 감시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곤 했다.

'지금도 들킬 테니, 루시온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루시온이 데리고 온 흄이라는 소년의 힘은 첫날 확인했다.

바닥을 부술 정도로 강한 힘이라면 웬만한 놈들을 처바를 수 있었다.

'연회가 끝나면 루시온하고 같이 훈련을 시켜야겠어.'

저대로 두기엔 아까웠다.

* * *

[감시는 없어.]

루시온이 별장 밖을 나오자마자 러쉘이 알려주었다.

루시온은 근처 가게 뒤편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러쉘에게 받은 가면을 썼다.

[드디어 이놈이 활약할 차례네.]

러쉘은 간지러웠던 입을 풀어냈다.

[일단 이놈은....]

―루시온의 머리카락 색이 달라졌어!

라타가 후드 사이로 보이던 루시온의 머리카락 색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맞아. 머리카락 색은 물론 목소리도 다르게 들리게 해줘. 가면이 매번 까만 건 재미 없으니까, 색도 바꿀 수 있지. 아, 그밖에도 자잘한 기능이 있는데 네 표정을 보니 기대도 하질 않네.]

"너무 티가 났… 아아."

루시온은 빈정거리며 대답하려다 낯선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가 이상해. 루시온이 루시온이 아니야.

라타가 앞발을 동동 굴리며 말했다.

"확실히 목소리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 같으십니다. 아무래도 적응이 필요할 듯합니다."

흄의 말에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흄은 어느덧 소년에서 소녀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가장 달라진 건 흄이었다.

루시온은 자신이 루시온이라는 사실을 들킬 수 있는 것들을 죄다 빼서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가자."

일단 족칠 놈은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이었다.

자신답지 않게 오래도 참았다 싶었다.

* * *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이 루시온 자신을 죽이려고 별 볼 일 없는 암살자들을 보냈다.

그들의 소식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자기 혼자서 확인하러 갈 수도 없고.

'하루 정도 여관에 더 머물렀을 거다.'

장남 놈이 연회에 가지 않았겠지만, 연회에 참석한 지인에게 부탁해 자신의 소식을 들었을 테지.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루시온은 여관에서 나와 부랴부랴 도망치는 장남의 뒤를 밟았다.

놈의 지인이 그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주려면 연회가 끝나가는 저녁 무렵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타이밍이 좋아.'

루시온은 자꾸만 뒤를 확인하는 놈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태연한 걸음으로 놈이 도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 사람들 속에 섞여 따라갔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도시 밖으로 나온 놈은 도중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달렸다.

덩달아 루시온과 흄 역시 달려 놈을 쫓았다.

[오른쪽으로 갔다.]

러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흄은 주저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더 속도를 냈다.

'…이런 미친.'

루시온은 뛰다 말고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나란히 달리고 있다고 느꼈지만, 사실 흄이 자신의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이, 이거 놔!"

러쉘이 가리켰던 오른쪽 지점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놈이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겠는가.

흄은 놈의 옷자락을 잡아 번쩍 들어 올린 상태로 루시온에게 걸어왔다.

[푸하하핫!]

러쉘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을 한 놈을 비웃어주었다.

"던져."

루시온의 지시에 흄이 놈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놈이 바닥에 닿기 전에 굵직한 나뭇가지가 놈의 몸을 후려쳤다.

빠악!

루시온은 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패기 좋은 나뭇가지 하나를 구해놓았다.

죽이지는 않지만, 죽을 만큼 팰 생각이었다.

"끄어억!"

금세 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루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놈을 때리고, 또 때렸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는 소문과 달랐다.

원래 몸이 약하시던 분이셨고, 자신을 낳은 후에 약했던 몸이 더 악화가 됐다고 했다.

빠악!

자신이 유령을 봤을 때도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늘 따듯하게 대해주셨던 기억이 있었다.

한때, 자신의 유일한 보금자리였으며 자신을 이해해주던 사람이었다.

빠악!

빠악!

나뭇가지가 부서지며 동시에 놈에게서 피가 튀었다.

'그런 어머니를…!'

루시온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거기까지야, 루시온.]

러쉘은 이성을 잃다시피 한 루시온을 말렸다.

루시온은 부서진 나뭇가지를 버리고 장갑을 낀 손으로 가면에 튄 피를 닦았다.

[진정해.]

가면에 가려 루시온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흥분을 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시온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왜...."

놈은 몸을 발발 떨며 겨우 말을 토해냈다.

"렌탈."

루시온이 입을 열었다.

"예."

"두 다리를 골고루 부서트려."

빠각!

루시온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흄은 주저 없이 밟아버렸다.

"끄아아악!"

놈은 다시 비명을 터트렸다.

루시온은 기절하지 않은 놈의 정신을 찬양하며 미리 사뒀던 단검을 놈의 옆에 꽂았다.

"내가 왜 널 공격하냐고 묻고 싶지?"

루시온은 쪼그려 앉아서 놈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놈은 흙과 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그 위로 눈물과 콧물까지 같이 흘러내리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와 똑같았다.

"그냥. 왠지 거슬려서."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왜? 그런 날 있잖아. 갑자기 이유 없이 너무나도 불쾌하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가 차오르는 날."

놈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루시온을 괴물 보듯 쳐다보았다.

저놈은 난생처음 만나보는, 알 수 없는 생물체 같았다.

"그게 너였을 뿐이야."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저 생물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섭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다리가 박살이 난 게 느껴지지?"

루시온은 단검을 가리켰다.

그의 행동 하나에도 놈이 흠칫거렸다.

"이제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죽을지, 살지. 뭘 선택해도 네 목숨은 네 거니까 존중할게."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만나자."

다음을 기약하는 말.

그 말이 이토록 두려울 줄은 몰랐다.

놈은 비명을 지르다 기어코 정신을 잃었다.

"…정말 그렇습니까?"

흄이 조용히 물었다.

"뭐가?"

"갑자기 이유 없이 불쾌하고, 막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당연히 거짓말이지."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내가 그런 짓을 할 미친놈으로 보여?"

[뭐어, 그럴 때도 있었지?]

러쉘이 슬쩍 입을 열자 루시온은 금세 말을 정정했다.

"연기야."

"…아. 연기였습니까?"

흄은 몰랐다는 듯이 반응했다.

"반쯤?"

"그럼 돌아가서 죽일까요?"

"이제 저놈은 끝났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흄은 루시온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의문을 드러냈다.

"좀 어렵습니다."

"뭐가?"

"저번에는 죽였잖습니까. 왜 이번에는 죽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밖에도 도련님께 함부로 하는 자라도 참아야 하는 상황이 있고 아닌 상황이 있잖습니까. 저는 그 상황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흄은 곧 인상을 썼다.

"저는 아무래도 도련님의 지시대로...."

"아니. 네가 판단해. 나한테 또 혼이 나더라도 네가 판단해야 해."

"말을 잘 듣는 개가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개도 생각해. 머리가 있고.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날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뿐이야."

"…알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습니다. 저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흄은 시무룩한 얼굴 그대로 루시온의 뒤를 따랐다.

자신을 만들었던 사람은 생각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잠도 필요 없고, 먹지 않아도 되는 이 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제일 먼저 깨달았기에 흄은 안토니가 알려준 대로 행동하려 했다.

적어도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다 뒤를 돌아보았다.

"뭘 고민해? 생각은 사람이 아니라도 가지고 있는 건데. 기껏 몸을 되찾았으니 네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제가 하고 싶은 거… 말입니까?"

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건 차차 생각하고 한군데 더 갈 데가 있어."

신수의 축복으로 라타가 새로운 능력을 하나 얻었으니.

상큼 달달 향의 주인이자 자신의 정보를 팔아넘긴 데비아 제븐.

그녀를 잡을 시간이었다.

38화. 상큼 달달 향!(2)

루시온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다 말고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계속 흐뭇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러쉘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러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기특하다는 소리를 꺼내면 루시온은 분명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꾸물대면 카슨한테 혼날 텐데? 어서 가서 라타가 새로 얻은 능력을 써봐야지.]

신수로부터 축복을 받은 건 루시온 뿐만이 아니라 라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라타를 축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도 겸사겸사 축복해줬다는 느낌이 강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은 빛의 친화력, 즉, 내성을 올려주는 힘으로 단번에 1단계에서 3단계 정도로 껑충 뛰었다고 러쉘이 알려줬다.

'신수의 축복 덕에 칭호와 명예 신관 자리도 얻었고.'

루시온은 어느새 그림자 밖으로 나와 꼬리를 흔드는 라타를 바라보았다.

―에헴.

라타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라타가 나설 차례네!

라타가 자신의 그림자로 들어갈 수 있을 때부터 라타가 가진 힘이 그림자와 관련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실이었다.

신수에게 받은 축복으로 라타가 가진 힘이 성장해 그림자와 관련된 능력 하나를 얻었다.

동시에 라타가 조금은 자랐고, 자신의 어둠 역시 커진 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은 아니야, 라타."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라타가 배운 '슝'을 이용하면 되잖아.

"안 돼. 아직 그렇게 멀리는 불가능해."

라타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피피. 라타는 착하니까, 착한 아이는 말을 잘 듣는 거라고 했어.

"도련님."

흄은 눈을 깜박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라타가 말하는 '슝'이 뭡니까?"

"나중에 보면 알아."

[아마 놀라 까무러칠 거다.]

러쉘은 기대하라는 듯이 흄에게 말했다.

* * *

[데비아 제븐. 데비아라.]

유령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루시온이 내미는 어둠을 보고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기억났습니다! 기억났으니 제발 그 무서운 것 좀 치워주십쇼.]

막 9번이 된 유령은 기겁하며 말했다.

"만약 입을 잘못 놀린다면 네놈을 하늘로 보내주마."

루시온의 목소리는 사나웠다.

[지, 지금 저는 흑마법사 님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누구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놈은 어디에 있는데?"

[몽쉐르, 몽쉐르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에 가는 걸 봤습니다.]

"확실해?"

[예, 예. 물론이고 말고요. 제가 거길 워낙 좋아해서… 얼굴을 익혔지 뭡니까.]

유령은 언제 공포에 떨었느냐는 듯 실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어흠.]

러쉘이 갑자기 기침을 내뱉었다.

[아직 성인이 아닌 네가 가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 싶은데.]

"저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가는 게 아닙니다."

[누가 뭐래? 그냥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다. 딱 그렇게 말한 것뿐이지.]

러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불순한 게 뭔데?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러쉘은 더 크게 기침 소리를 냈다.

"안내해."

루시온은 저 이야기에 더는 이끌려가고 싶지 않아 서둘러 유령을 재촉했다.

[예. 제일 빠른 길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유령이 앞장섰고, 그 뒤를 루시온 일행이 따라갔다.

[이제는 좀 익숙해진 티가 나네.]

러쉘이 씩 웃으며 말했다.

"유령 지배 말씀입니까?"

루시온이 되물었다.

[맞아. 신수의 축복 덕에 어둠도 늘어났겠다. 연회가 끝나면 더 배워야지.]

"예. 언제든 환영입니다. 배운다는 게 참 재미있네요."

루시온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비록 흑마법이 수많은 사람에게 배척당하는 마법이나, 루시온은 그 마법으로 하나씩 자신과 자신의 주변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입니다.]

유령은 어느 가게 앞에서 멈췄다.

몽쉐르.

루시온은 간판에 적힌 글자를 확인한 뒤 유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먼저 안에 들어가서 놈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

유령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온은 가면을 흄에게 넘겼다.

"너도 써."

"저는 왜 써야 합니까?"

"생각해 보니 나만 쓰면 이상하겠더라고."

가게에서 자신과 연결된 푸른 실은 두 개였다.

저 안에 셴도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계속 써야 합니까?"

흄이 미적거리며 물었다.

"아니. 이번만이야."

"다행입니다. 전 얼굴에 뭘 뒤집어쓰는 게 제일 싫습니다."

흄은 웃으며 가면을 받았다.

―에헴. 이제 라타가 나설 차례야. 그렇지?

그림자에서 나온 라타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루시온을 보았다.

"라타."

―응.

"그 능력을 쓰고 바로 내 그림자로 들어와. 알겠어?"

―응! 걱정하지 마. 라타는 무진장 빠르다고.

라타는 금방이라도 뛰어갈 것처럼 앞발을 굴렸다.

루시온은 해맑은 라타의 미소에 잠깐 고민했다.

'라타를 이럴 때마다 계속 그림자 속에 머물라고 할 수도 없고.'

라타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진 않았지만, 저 검은 여우가 자신의 여우라는 걸 아는 사람이 한두 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검은 여우를 키우는 사람이 귀족 중에도 몇 명이 될까.

'라타한테도 모자를 씌우면....'

―왜? 라타한테 할 말이 있어?

라타의 눈동자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림자 안에만 있는 거 답답하지?"

―라타는 발로 걷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루시온이 원하면 계속 있어도 돼.

루시온은 배시시 웃는 라타의 미소에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라타의 모습을 정할 때, 고양이로 할 걸 그랬네.'

검은 고양이라면 흔했으니까.

루시온은 시선을 돌려 러쉘을 보았다.

"혹시 가지고 계신 아이템은 없으십니까?"

[그게 있겠어?]

러쉘은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흑마법사를 멀리하기에 고양이 발바닥 한 번 만져본 적이 없었다.

―아!

라타는 루시온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곧 으쓱거리며 '에헴'이라는 소리를 내었다.

―라타 봐봐.

라타는 곧 힘을 주더니 털이 부풀어 올랐다.

―짠. 라타는 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

털이 한껏 부풀어 오른 라타는 마치 뚱뚱한 여우가 된 것처럼 보였다.

루시온은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정도만 돼도 문제는 없겠네.]

러쉘은 라타의 털을 건드려보았다.

방패처럼 튼튼하기까지 했다.

그때,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9번한테서 데비아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어.

"거기서 대기하라고 해."

루시온은 손가락을 엄지로 문질렀다.

라타가 새로 손에 넣은 능력은 그림자 이동으로, 말 그대로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루시온이 연회에서 별장으로 돌아와 막 쉬려던 차 라타가 침대 그림자에서 연어처럼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알아챘다.

"라타."

루시온은 라타의 능력을 몇 번 실험해 보았다.

라타는 시선이 닿는 장소는 정확하게 이동했지만, 그 외의 장소는 방향을 잃거나 이동조차 하지 못했다.

―응! 라타는 9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래서 루시온이 선택한 방법은 어둠을 이용한 방법이었다.

라타의 등을 돌리게 하고 루시온이 어둠을 보내 장소를 지정하니 라타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한 이동을 자랑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생겨버렸다.

자신이 어둠을 먼저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 어둠의 유지시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고민하던 차 루시온은 러쉘을 보았다.

알아서 이동하고, 품속에 어둠도 오래 품을 수 있는 존재.

그건 바로 유령이었다.

"흄."

"예. 도련님의 지시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간다!

라타는 앞발을 크게 들어 신나게 그림자를 때렸다.

찰싹!

그림자가 입을 벌리듯 루시온과 흄, 그리고 라타를 덮치고 순식간에 그림자 속으로 끌어내렸다.

* * *

"...."

데비아와 셴은 갑자기 나타난 루시온과 흄을 보며 올 게 왔다는 듯 태연하게 반응했다.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루시온은 그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당황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셴이 입을 연 순간, 흄은 다짜고짜 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루시온이 흄에게 지시한 건 셴부터 때리 눕히라는 '선빵필승' 작전이었다.

셴은 기사였기에 정정당당이라는 작전으로는 공략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빠악!

셴은 기사답게 흄의 공격에 반응해 손으로 막아보나, 상대는 흄이었다.

검을 들어도 모자랄 판에 맨손으로 흄과 부딪히는 건 쇠를 맨몸으로 막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흄의 공격을 막은 셴이 비명을 터트렸다.

"…어헉!"

아찔한 통증에 셴이 주춤거릴 사이 흄은 놀고 있는 다른 손으로 셴의 얼굴에 주먹을 먹이는 데 성공했다.

뻐억!

셴의 고개가 돌아갔다.

하지만 셴은 맷집으로 버티며 허리춤에 있는 검을 쥐었다.

'저걸 버텨…?'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흄의 주먹은 바닥을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쉬익!

셴이 검을 뽑자마자 휘둘러 보나, 머리 충격 탓에 거리 조절에 실패해 옆에 있던 애꿎은 소파만 반 쪼가리가 났다.

셴의 자세도 동시에 무너져 흄의 주먹이 놈의 복부에 깊게 박혔다.

빠악!

"어… 억!"

셴은 몸을 부르르 떨다 맥없이 뒤로 쓰러졌다.

혹시 기절한 척하는가 싶어 흄이 주먹을 들자 러쉘이 막았다.

[기절했으니 거기까지 해. 거기서 한 방 더 먹이면....]

"거기까지! 제발, 거기까지 해주세요! 이 사람은 잘못이 없잖습니까!"

데비아가 쓰러진 셴에게 다가가 온몸으로 그를 감쌌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데비아의 예상 밖의 행동에 루시온은 흄을 멈추는 척하며 데비아를 보았다.

[아무래도 너하고 다른 놈하고 착각한 듯한데? 복장이 비슷했나 봐.]

러쉘이 손가락으로 루시온의 옷을 가리켰다.

우연하게도 딱 전형적인 흑막의 복장이었다.

"저는 고작 자작가의 여식일 뿐입니다. 어떻게 변경백의 아들에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일이잖습니까."

데비아는 억울함을 호소하듯 말을 토해냈다.

하지만 루시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비아는 셴을 감싼 손에 힘을 주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로 불렀습니다. 더는 이 사람도 저도 이용할 생각 하지 마십시오. 빚은… 마음대로 하시고요."

'빚을 졌다?'

루시온은 데비아의 말을 흘려듣질 않았다.

방금 이 이야기로 루시온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데비아는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했고, 데비아와 셴의 관계가 어쩌면 연인일 수 있을 만큼 깊다는 걸.

'적이 노렸던 건 데비아가 아니라 애초부터 셴이었네.'

당연하게도 데비아보다 크로니아의 기사인 셴이 자신에게 접근하기가 더 쉬웠다.

'누군진 몰라도 크로니아를 꽤 오래 조사했나 봐?'

[너하고 다른 놈을 착각했다고 해도 이렇게 이동해 왔다는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라면 마법사밖에 없지. …그것도 상당히 강한 마법사 말이야.]

'마법사라....'

루시온은 짐작할 수 없는 사실을 뒤로 넘긴 채 데비아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데비아가 그놈하고 인연을 끊든 말든 아무 상관없었다.

기왕 자신을 그놈을 착각했으니 이참에 정보나 더 뽑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데비아는 무덤덤한 말에 순간 움찔거렸지만, 여전히 루시온을 보는 시선이 사나웠다.

'목소리가 다를 텐데도 의심을 안 하네?'

루시온은 금세 의문을 느꼈다.

"그래서라뇨? 그렇게 당신의 주인께 전달하라는 말입니다. 더는 못 해 먹겠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그렇게 전하라고요!"

'아.... 데비아를 이용한 그놈이 진짜 여기에 오는 건 아닌가 봐.'

의문을 해결하자마자 루시온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동시에 마치 흄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처럼 셴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흄.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당장 주먹을 쥐던 흄은 러쉘의 말에 주먹을 풀고 걸어갔다.

"대체 여기서 뭘 더 원하시는 겁니까! 크로니아에 몸을 바쳤던 셴을 배신하게 했고, 루시온 크로니아의 정보를 드렸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잖아요!"

데비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루시온을 붙잡지 못한 건 당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잖아요. 전… 당신들이 뭘 하려는지 관심 없어요. 그냥, 제발, 그냥 저희를 놔주세요."

"계속 지껄여봐."

루시온은 아예 의자에 앉아서 데비아를 재촉했다.

혼자서 나불나불 잘도 떠드는데 뭐 하러 입을 막겠는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한들 자신의 정보를 다른 놈에게 판 건 사실이라 데비아를 동정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루시온의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일 뿐이었다.

39화. 상큼 달달 향!(3)

데비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이 이만큼 비참해질 수 있을까.

자신의 모든 걸 빼앗은 놈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어차피… 저희는 죽은 목숨이에요. 늦든 빠르든 크로니아에서 저희를 죽일 겁니다."

"여기까지 해놓고?"

"그러니까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비록 더럽혀진 손이나, 죽을 때만큼은 더러운 손으로 죽고 싶질 않다고요!"

"개소리를 참 재미있게 하네."

데비아는 빈정거리는 루시온의 말에 목에 핏대가 섰다.

"당신의 주인이 직접 하면 되잖아요! 직접 나서서 루시온을 붙잡아 크로니아를 쳐부수든, 뭘 하든 하면 되잖습니까! 나서기 두려운 거죠? 크로니아에게 짓밟힐까 봐 무서운 게 맞죠?"

부들부들 떨면서도 마지막 품위만큼은 지키고자 하는 데비아의 모습에 루시온은 마음을 접었다.

'…진짜 더는 모르나 보네.'

루시온은 안타까웠다.

데비아는 중간에 거쳐 가는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데비아가 빚을 졌다면 그 빚을 갚아준 사람이 있을 터.

"내놔."

루시온은 손을 내밀었다.

그것과 별개로 으레 켕기는 게 있는 놈들은 무엇이든 하나씩 쥐고 있는 법.

"가져가세요! 이딴 거 필요 없으니까!"

데비아는 당장 귀걸이를 빼 루시온에게 던졌다.

탁.

흄이 귀걸이를 쥐었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열쇠 모양의 귀걸이인데? 진짜 열쇠는 아니겠지?]

러쉘이 흄이 쥔 귀걸이를 빤히 보았다.

"이제 그만 나가요. 제발!"

데비아가 내지르는 소리에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걱.

셴과 데비아와 연결됐던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열쇠가 확실해.'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데비아에게 얻을 건 없었다.

여기에서 자신이 처리할 순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카슨과 헤인트는 중간 다리를 잃어버리는 셈이었다.

셴과 데비아의 목은 크로니아라는 이름으로 잘려나가야 했다.

"나가."

루시온은 오히려 데비아를 쫓아냈다.

그녀가 여기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거꾸로 말하자면 이곳에 곧 진짜 놈들이 온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 기회를 놓칠 수야 있나.'

루시온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데비아가 사람을 불러 셴을 데리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장소는 이제 곧 올 놈들에게 물어보면 되겠네.]

러쉘이 씩 웃었다.

"예. 그렇지 않아도 그럴 셈입니다."

루시온은 흄에게서 열쇠를 받으며 그녀를 불렀다.

"렌탈."

"예, 도련님."

"오는 놈들은 순서대로 차근차근 알지?"

"압니다."

루시온은 거미줄을 만들어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가 된 기분으로 놈들을 기다렸다.

* * *

똑똑.

루시온은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가게를 찾아온 놈들을 박살 냈지만, 놈들은 독했다.

데비아가 준 열쇠의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게 고작이었다.

어제 별장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으으."

루시온은 앓는 소리를 냈다.

라타가 사용한 '그림자 이동'은 무척 좋은 기술이었으나, 문제는 어마어마한 양의 어둠을 빨아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라타가 기술을 사용해서 소모한 어둠이 다시 자신의 어둠으로 보충되니 결국, 자신이 사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앓을 만하지. 대신전에도 갔고, 신관들이 내뿜는 빛에다 신수에게 빛의 축복을 받은, 약하디약한 상태로 어둠을 거의 다 써버렸으니까.]

러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잔소리를 내뱉었다.

[게다가 피도 얼마나 토했어? 이런 상황에서 안 아프면 사람도 아니지.]

―슝을 쓴 라타는 괜찮은데.

라타가 침대로 기어올라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루시온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익어 있었다.

[신수는 아플 수가 없어. 오히려 아프면 큰일이지. 소멸에 가까워졌다는 거니까.]

러쉘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흄이니까, 일어날 필요 없어.]

"들어와."

루시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흄의 두 손에 쟁반이 들려 있었다.

"도련님. 몸은 어떠십니까?"

"지금 몇 시야?"

"오후 3시쯤입니다."

"…그렇게 오래 잤어?"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연회 둘째 날은 자동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아깝다.'

[아깝다고 생각하지 마.]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러쉘이 딱 맞추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첫째 도련님께서 도련님을 깨우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흄은 들고 온 쟁반을 내리며 입을 뗐다.

수프의 향긋한 냄새가 루시온의 코를 간질였다.

"그래?"

루시온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흄에게 손을 내밀어 숟가락을 요구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도련님."

흄의 목소리가 떨리자 루시온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두려움이 살짝 섞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해."

"제 판단이 옳았을까요?"

"무슨 판단?"

"처음에는 이런 큰 연회가 또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를 빼먹는 일이 도련님께 얼마나 큰 타격이 될지를 생각해 깨우려고 했습니다."

루시온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어쩌면 흄이 생각을 하고 내린 첫 결정일지도 몰랐다.

흄은 무척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집사라는 자리는 도련님을 보필하기 위한 직업으로 집사가 우선시해야 하는 건 도련님의 목숨이라고 배웠습니다."

"맞아. 무엇이 됐든 내 목숨이 먼저야. 그런 점에서 훌륭했다, 흄."

루시온은 태연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받았다.

흄은 여전히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첫째 도련님께서 명령을 내리신 새벽부터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결정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번 결정을 내리시는 도련님 역시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로 루시온은 흄이 어떤 상태인지를 확실히 이해했다.

그는 갓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오리였다.

지금까지 쭉 어미만 쫓아다녔듯 흄 역시 시키는 대로만 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자신이 변했듯, 흄 역시 달라져야 했다.

―잘했어, 잘했어.

침대로 내려온 라타는 배시시 웃으며 흄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무래도 라타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막 수프를 한 입 먹던 루시온은 뒤통수에 싸한 느낌이 들자 고개를 돌렸다.

'이럴 줄 알았지.'

마치 처음으로 걸음마를 한 아기를 보는 듯 흐뭇하게 바라보는 러쉘의 시선은 정말 부담스러웠다.

"스승님."

루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그래.]

"왜 자꾸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부담스럽습니다."

[내 제자가 사람이 되었는데 자랑스럽지. 암, 엄청 자랑스럽지. 마음 같아서는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을 정도라니까.]

루시온은 자신의 과거 언급이 될 때마다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는 반사적인 행동에 짜증이 났다.

"도련님도 사람이 아니셨습니까?"

흄이 기대하며 물었다.

[사람은 사람인데. 네가 아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 루시온이 나한테 퍼부었던 욕이 아직도 기억이 나네. 첫 만남에 다짜고짜 쌍욕을 했거든. 그… 뭐랬더라?]

루시온은 자신을 살살 건드리는 러쉘의 말에도 신경질적으로 수프를 떠먹을 수밖에 없었다.

'망할....'

[천천히 먹어. 체할라.]

러쉘은 아무 말도 못 하는 루시온을 보며 키득거렸다.

* * *

루시온은 수프로 굶주린 배를 허겁지겁 채운 후에 해열제를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깼어? 타이밍이 좋네. 카슨이 네 방에 와 있던 참이거든.]

비몽사몽 하던 루시온은 그 말에 단번에 잠이 깼다.

진짜로 책을 읽고 있는 카슨이 보이자 루시온은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의 무릎에 얌전히 웅크려 있는 라타는 또 뭐고.

―안녕 루시온!

라타가 루시온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또 어딜 가려고 했더냐?"

카슨이 물었다.

[현명한 질문이네.]

러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제가 맨날 돌아다닌 줄 알겠습니다."

"요즈음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지 않았더냐. 안심하거라. 아버지께는 적당히 보고 드릴 테니."

루시온은 그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건 그렇고 형님께서는 왜 이렇게 빨리 오셨습니까? 아직 연회가 끝날 시각이 아니잖습니까."

"시간 낭비에 귀찮고, 억지로 웃는 게 싫어서 왔다."

카슨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참 카슨답다 싶었다.

"그래도 시간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시간 낭비는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겐 시간 낭비일 수밖에 없다."

크로니아는 변경을 지키는 가문이었다.

둘째 누님은 변경이 싫어 가출하듯 가문을 나가버렸고, 자신은 유령에게 시달려 정신마저 놓아버릴 정도로 피폐해 있던 차였다.

자연스레 카슨이 검을 쥐었고, 기사가 되었고, 변경을 지키러 크로니아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음 변경백은 누가 뭐라고 해도 카슨이었다.

그가 중앙으로 진출한다면 얼마나 많은 귀족이 들고일어날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후회하십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카슨은 책을 덮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다.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니 괜한 생각하지 말거라."

"예. 그러겠습니다."

"몸은 괜찮더냐? 열이 떨어진 건 의사를 통해 확인했다."

"이제 돌아다녀도 될 만큼 괜찮습니다."

"오늘은 안 된다."

카슨은 슬쩍 움직이려는 루시온에게 어떤 틈도 주지 않았다.

"네 자유는 안전 아래에 존재한다는 약속을 기억하거라. 기사를 붙이기 전에 얌전하게 있으리라 생각한다."

뒤이은 카슨의 경고에 루시온은 불만투성이인 얼굴로 이불을 꽉 쥐었지만, 할 말은 없었다.

솔직히 어제 일을 생각하면 당장 별장으로 끌려가도 할 말은 없었다.

카슨이 그만큼 참고 봐줬으니 어차피 연회에도 참석하지 못할 거, 뭐 하러 그의 신경을 건드리겠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 형님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고 말투가 곱게 나갈 리는 없었다.

루시온이 삐딱하게 물었다.

"잡았다."

카슨이 대답했다.

자신이 흘렸던 정보를 통해 셴과 데비아를 잡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모른 척하며 물었다.

"뭘 말입니까?"

"네 정보를 팔아넘긴 것들을 말이다."

"정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찾으셨고, 잡으셨습니까?"

"찾은 건 어제다. 오늘 새벽에 도망친 셴의 뒤를 쫓았고 그대로 붙잡았지."

'어제 알았다고…? 나한테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루시온은 묘한 배신감에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카슨은 일그러진 루시온의 표정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아버지께서 심문하고 계실 테니 곧 범인이 밝혀질 거다."

"그나저나 데비아 제븐은 누구입니까?"

[와....]

연이은 루시온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러쉘은 감탄했다.

[귀족은 뭐 표정 연기도 배우나?]

루시온은 러쉘의 물음에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허어.... 진짜 배운다고?]

"별 볼 일 없는 쓰레기일 뿐이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카슨은 라타를 쓰다듬었다.

제븐 자작가는 이르면 오늘, 늦어도 일주일 안에 사라질 테니 몰라도 되는 곳이었다.

카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땅으로 내려와 기지개를 켰다.

"내일은 널 말리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형님."

"쉬거라."

용건이 끝났기에 카슨은 루시온 방을 벗어났다.

'…범인이 누굴까?'

카슨은 차분히 걸어나갔다.

셴과 데비아를 붙잡았을 때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 정보를 넘겼던 놈이 저지른 건가?'

특히 셴의 얼굴이 엉망이었는데 그는 웬 여성에게 얻어터졌다는 말을 꺼냈다.

기사를 이 정도로 몰아붙일 수 있는 실력자라니.

'그리고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이 어제 습격을 당한 상태로 발견됐고.'

오늘 연회에서 귀족들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이 드문드문 퍼져나갔다.

누군가 두 다리를 부숴 걷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는데 그 수법이 꽤 악질이라고 했다.

'어제 루시온이 자리를 비웠지.'

무슨 볼일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무엇보다 루시온은 그놈에게 원한도 있어 동기까지 확실했다.

하지만 루시온이 두 사건의 거리를 봤을 때, 일반인인 그가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제 루시온이 외출한 사실은 입단속을 시켰으니 괜찮겠지.'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 몰라도 카슨은 두 사건에 루시온이 엮이질 않길 바랐다.

이미 소문이라면 지긋할 테니까.

* * *

[갔으니까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있을 필요 없어.]

러쉘이 숨죽여 있는 루시온을 보며 말했다.

"혹시 형님이 눈치챈 것 같습니까?"

루시온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아니. 그런 낌새는 안 보여.]

러쉘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형님이 눈치채지 못한 거라면 일단 괜찮아.'

자신이 생각해도 타이밍이 절묘하긴 했다.

일부러 노렸다지만, 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타."

―응.

라타가 침대로 껑충 뛰어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유령 8번에게 연락해."

아직 자신의 조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지만, 조직 확장을 위해 크라언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40화. 변했다

―알았어! 라타가 금방 연락할게.

라타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신나게 입을 놀렸다.

―아아, 8번. 8번. 여기는 라타야.

라타의 눈동자가 굴러가다 멈췄다.

―연락됐어. 뭐든 물어봐. 라타가 다 말해줄게.

"현재 조직 상황은?"

―크라언이 루시온이 말한 5곳 전부 투자하는 데 성공했대.

'벌써?'

루시온은 살짝 놀랐다.

원래 크라언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 이틀 안에 다 해낼 줄이야.

투자가 장난도 아니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괜찮은데?'

[내 주변에 저런 조수만 있었어도 천재라는 이름 앞에 비운이 붙지 않았을 텐데.]

러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루시온이 서둘러 재촉했다.

―사람이 늘어났고, 음, 슈트라는 맨날 집을 지키고, 헬론은 다른 곳에 취직했다는데, …취직이 뭐야?

라타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 받고 일하는 거야."

―아! 흄이다. 흄.

라타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몰라도 루시온은 느닷없는 헬론의 취직에 의문을 느꼈다.

"헬론이 왜 갑자기 취직했는데?"

―정보를 빼내러 갔대.

'정보라고?'

루시온은 헬론의 행동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크라언에게 투자해야 할 곳, 영입해야 할 사람들을 다 적어주었다.

돈과 인력.

제일 중요한 두 가지를 주었음에도 굳이 따로 나서서 얻어야 할 정보라는 게 뭘까.

혹시나 크라언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나 싶어 루시온은 다시 물었다.

"어떤 정보를 말하는 건데?"

―응. 크라언이 사실 몰락한 왕국의 왕자고, 헬론이랑 슈트라는 가신이었는데, 가신은 또 뭐....

"자, 잠깐만."

루시온은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크라언이 왕자라니.

몰락한 왕국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루시온 너… 보는 눈이 대단한데? 고르는 사람마다 범상치 않네?]

러쉘은 흄을 슬쩍 바라보았다.

"제가 의도한 건 아닙니다."

당황한 루시온은 옷자락을 잡았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크라언을 선택하지 않았겠지.

그런 중대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테니.

라타가 다시 신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찾고 다닌다고 하는데?

'최근에 망한 왕국이 있었나?'

루시온은 곰곰이 생각했다.

[하나 있잖아? 10년 전에 멸망한 왕국, 케오르티아.]

"전 그때 어렸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아마...."

[하긴. 제국이 조그마한 나라의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지.]

루시온은 자신의 말을 끊는 러쉘을 보며 씩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이를 왜 따지십니까?"

[유령도 나이에… 크흠. 어쨌든, 네가 한 나라의 왕자를 부려먹고 있었잖아?]

"전 아무것도 못 들었고, 크라언은 크라언일 뿐입니다."

크라언이 몰락한 왕국의 왕자라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제 보니, 세력을 그렇게 키웠던 것도 다 자신의 왕국 때문이었나?'

루시온은 잘됐다 싶었다.

성장해야 할 동기가 확실한 만큼 조직에 대한 애착도 따라 커질 테니.

'크라언을 다루려면 내가 먼저 걔들이 찾는 정보를 알아야겠는데?'

자신에게는 지치지도 않고 24시간 깨어 있는 유령이 있었다.

'계속 준비해야지. 계속.'

루시온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타락하지 않게, 자신을 지킬 모든 것들을 키우고, 얻을 셈이었다.

2년 후에 시작될 폭풍우에 휩쓸리지 않게.

'내일, 연회에서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려면 내일 바쁠 테니까....'

[루시온.]

러쉘이 갑자기 루시온을 불렀다.

"예, 스승님."

[머리 굴릴 생각도 하지 말고, 어디 나갈 생각도 하지 말고 오늘 하루는 얌전히 있어.]

"그냥 생각만 한 겁니다. 오늘은 얌전히 있으려고 했습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내보였다.

'쳇.'

* * *

연회 3일째.

루시온은 새벽부터 기껏 준비했던 옷들을 다 입어 보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시녀들의 말과 함께 또 수십 벌에 가까운 옷을 입어봐야 했다.

"어쩜, 도련님은 죄다 잘 어울리시는지."

"맞아요. 고르는 게 너무 힘들 정도예요. 이쯤 되면 도련님께서 여러 명이면 좋겠어요."

"아.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시녀들의 해맑은 소리가 길게 이어진 만큼 루시온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또 뭘 입게 하려고.

―루시온이 여러 명?

공을 가지고 놀던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완전 좋겠다! 라타는 루시온이 좋아! 1번 루시온이 바쁘면 2번 루시온한테 맨날 놀아달라고 해야지.

"대충해."

루시온은 귀찮은 말투로 손을 휘젓다 시녀들의 강한 의지가 담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안 됩니다!"

"맞아요. 절대 안 됩니다!"

너무도 단호한 말에 루시온은 눈을 크게 뜬 상태로 깜빡거렸다.

―맞아. 안 돼! 루시온은 꾸민 게 더 멋져!

라타마저 같이 소리쳤다.

'…뭐야. 요 며칠 뭘 했다고 나랑 거리감이 이렇게 사라진 거야?'

[네가 신수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지금 얼마나 떠돌고 있는데? 시녀들도 덩달아 들뜬 거지. 게다가 요새 네가 맨날 치던 두꺼운 벽이 무너졌긴 하지.]

러쉘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고 내렸다.

[맨날 이렇게 있던 네가 이제는 좀 웃고 다니니 굉장히 밝아 보이지 않겠어?]

뒷말을 꺼낼 때 러쉘은 손가락도 함께 떼며 미소도 살짝 지었다.

루시온은 슬쩍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네 인상이 달라졌으니 시녀들도 가까이할 만하지. 원래부터 네가 생긴 게....]

러쉘이 갑자기 입술을 깨물었다.

뒷말은 죽어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루시온이 말이 없자 시녀들은 곧 자신들이 주제넘었음을 깨닫고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마음대로 해."

루시온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런 큰 연회가 또 언제 있겠는가.

마음이 들뜨는 건 어쩔 수 없기에 루시온은 오늘만은 넘어가기로 했다.

"도련님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시녀들은 그제야 다시 재잘거리며 열심히 옷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루시온은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저들의 웃음과 말을 믿지 않았다.

언제 또 자신의 뒤통수를 칠지 몰랐으니까.

* * *

루시온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시선은 난생처음 받아보는 종류였다.

호의.

부러움.

시기.

'불쾌한데....'

루시온은 당장 꺼지라며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로 말해볼까?'

[루시온.]

러쉘이 다급히 루시온을 불렀다.

꿍꿍이가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자 순식간에 불안해졌다.

[네가 뭘 생각하든 그건 안 된다.]

루시온의 입술이 살짝 뒤틀리자 러쉘은 루시온이 단념했음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은 카슨을 위해 길을 비켰다.

카슨이 마차에 내리자마자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어제보다 더 시끄럽구나."

"형님께서는 오지 않으셔도 되는 거 아닙니까?"

"소문이 흉흉하니 어쩔 수 있겠느냐."

카슨은 호레이온 자작가 일을 입에 담았다.

"개인적으로 속이 후련합니다. 아쉽기도 하고요."

"무엇이 아쉽더냐?"

"기사가 아닌 제가 기사를 꺾으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 같았거든요."

"그건 기사가 아니니 네 명예만 더러워질 뿐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헤인트 형님은 오늘 안 오십니까?"

"그걸 왜… 아니, 기사단 문제로 바쁜 모양이다."

카슨은 순간 루시온이 헤인트와 친해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말을 바꿨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카슨은 루시온에게 먼저 가길 권유했다.

첫날과 달랐다.

오늘은 루시온이 주목받아도 되는 날이었다.

루시온은 카슨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후 앞장서서 걸었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

명예 신관.

이 두 가지를 손에 넣었지만, 아직 신전에서 공식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수가 루시온을 기절시킨 날 이후로 그가 신수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루시온이 지나갈 때마다 '빛의 아이'라며 저마다 입에 올리기 바빴다.

'내 이전 소문은 확실히 사라졌어.'

루시온은 중간중간 있는 호칭 말고 다른 소리를 하는 귀족들의 말이 거슬렸지만, 이 정도 호의라면 적당한 정보를 빼먹기에 딱 좋아 보였다.

'뷔페네, 정보 뷔페.'

쏙쏙 골라 먹는 재미가 있을 듯했다.

[…흑마법사를 보고 빛의 아이라고 하다니. 참, 살다 보니 별소리도 다 듣네.]

말과 달리 러쉘의 입꼬리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제자의 칭찬은 뭐가 됐든 기뻤다.

* * *

"여기에요, 공자."

텔라가 루시온을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3일째 연회는 대강당에서 열렸다.

자신을 배려했는지 대강당을 지키는 신관의 수는 2배 이상 늘어났지만, 대강당 내부의 빛의 힘은 전보다 약해져 있어 숨쉬기가 한결 편했다.

그렇다고 괜찮은 건 아니었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고, 불쾌했다.

루시온은 텔라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영애."

카슨 역시 텔라에게 인사한 뒤, 뒤로 빠졌다.

"몸은 괜찮으세요, 공자? 오늘도 쉬셔야 할 텐데 이렇게 나와도 괜찮나요?"

"영애에게 매번 그 소리만 듣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튿날 나오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아니에요. 연회는 앞으로도 많은걸요. 그러니까...."

텔라는 말을 하다 멈췄다.

그녀도 살짝 벅찰 만큼의 시선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지금 루시온 크로니아는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저… 괜찮으세요? 공자께서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옮길까요?"

텔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강당 내부는 시원했지만, 루시온의 얼굴에 땀이 맺혀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첫 만남 때도, 두 번째 만남 때도, 그리고 연회에서도 그는 늘 이랬다.

긴장하며, 무언가 잠식된 느낌이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텔라는 그 의미를 눈치챘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하질 않았다.

크로니아 가문 정도라면 자신이 초대하지 않아도 대신전에서 초대장을 보낸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사람을 어려워하는 그에게 연회에 오라고 강요한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공자."

"말씀하십시오."

"제가...."

"제가 더위를 많이 탑니다."

루시온의 말에 텔라는 잠깐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 사람인가.

텔라는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확실히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겠네요. 제 귀가 꽤 밝은 편이거든요."

"진심으로 기대 하겠습니다."

루시온은 눈웃음을 지었다.

연회만큼 정보 교환이 자유로운 시간은 없었다.

그 속에 분명히 거짓과 교란이 뒤섞여 있겠지만, 정보의 질은 확실히 높았다.

알아서 정보를 골라준다는 데 거절을 왜 하겠는가.

* * *

"틀렸어요. 저 광산 소유자가 우리 은행 고객이라서 알아요. 투자할 가치가 없어요. 빚이 얼마나 많은데요?"

"…흠. 저 정보는 반 정도만 믿는 게 좋아요. 빚이나, 자금도 괜찮지만, 아직 정확한 제품이 나오진 않았거든요."

"아! 여긴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꽤 관심을 가진 곳이에요."

텔라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귀족들에게 얻은 정보 중 믿을 만한 정보를 걸러주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름과 대화를 나눌 기본적인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무기는 정말로 정보와 사람이었다.

텔라는 잠깐 자리를 비웠고 루시온은 흄이 내민 음료수를 마시며 구석에서 숨을 골랐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온종일 돌아다녔더니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꽤 많은 정보를 건졌어.'

고작 하루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가 오갔다.

그중 소설에 한 번이라도 등장했던 인물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 게 무척 큰 수확이었다.

'그 정보는 꼭 필요했는데.'

[루시온.]

러쉘이 조금은 굳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고개를 왼쪽으로 움직였다.

'웬일로 조용히 지나가나 했네.'

루시온은 자신에게 오는 무리를 보았다.

거리는 꽤 멀었지만, 술에 취했는지 하나같이 얼굴이 붉어 눈에 띄었다.

'그래. 저런 놈도 나타나야 진짜 연회지.'

루시온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반가워했다.

텔라가 알려줬던 정보를 지금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놈이 섞여 있었다.

'저놈이 가진 사업장 중 하나가 그렇게 잘된다고 했나?'

루시온은 중앙에 꽁지 머리를 한 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41화. 변했다(2)

"제가 나서겠습니다."

흄이 말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루시온은 흄을 말렸다.

"형님도 가만히 계시잖아?"

카슨은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려는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앞으로 카슨이 연회마다 자신을 따라다닐 수는 없었고, 당연히 이런 자잘한 일은 자신이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저놈들이 시비를 걸면 나야 좋지."

[중앙에 있는 놈 때문이지?]

"예. 맞습니다. 놈이 가진 사업장이 진짜 잘 나가는지 아닌지 궁금하거든요."

루시온은 곧 입을 다물고 그들보다 먼저 자신에게 온 텔라를 보았다.

"힘드시죠?"

텔라가 음료수를 내밀자 흄은 재빨리 루시온이 먹던 컵을 뒤로 숨겼다.

"감사합니다, 영애."

루시온은 싱긋 웃으며 음료수를 받았다.

"엄청 피곤하실 거예요. 연회 좀 다녀본 저도 지금 입꼬리에 경련이 나고 있거든요."

텔라는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입꼬리를 가리켰다.

"그래도 이렇게 친우가 있으니 좋네요."

음료수를 꼭 쥐며 텔라는 배시시 웃었다.

"영애는 친우가 많질 않습니까?"

"…으음."

텔라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알려드린 정보 중에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을 거예요. 아직 알려드리지 못한 정보는 제대로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곧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뼉을 마주치는 텔라의 행동에 루시온은 더는 묻질 않았다.

"영애께서 이렇게 발도 넓으시고 아는 정보도 많다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텔라는 민망한 얼굴로 치맛자락을 잡았다.

"아니에요, 공자. 저도 연회를 떠돌다 주운 정보인걸요. 그렇게 띄워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람만큼 중요한 건 없지.'

돈도, 정보도 결국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셈이었다.

"공자."

텔라는 루시온을 불렀다.

"오늘은 제가 먼저 가봐야 할 듯해요. 오랜만에 정말 즐거웠어요."

그녀의 눈꼬리가 휘었다.

"다음에는 제가 크로니아로 찾아가도 될까요?"

"예.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저어,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텔라는 쭈뼛거리다 가방에서 손바닥 크기의 선물 상자를 꺼냈다.

"선물은 이미 받았습니다."

루시온은 그녀의 선물을 거절했다.

"이건 제 선물이 아니라,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어머니께서 공자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텔라는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연락용 아이템이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비싼걸?]

러쉘은 텔라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연락용 아이템은 기본적으로 2개가 1세트로 마나와 마나를 연결해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해 기본으로도 상당히 비쌌다.

가장 흔한 건 사람 얼굴만 한 수정 구슬로 연락용 아이템의 크기가 작을수록 값은 더 치솟았다.

손바닥 크기 정도의 선물 상자를 봤을 때, 연락용 아이템 중에서도 고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슬슬 연락용 아이템이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루시온은 유령과 별개로 슬슬 크라언과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선물을 직접 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텔라는 살짝 곤란한 듯이 말했다.

"…으음. 지금 은행에 문제가… 좀 큰 문제가 터졌거든요."

은행에 무슨 일이 생겼는진 몰라도 텔라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닙니다. 저를 생각해주신 마음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루테온 가주께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선물을 받자 텔라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꼭 전할게요. 아. 제 선물도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예요."

텔라는 천연덕스럽게 말한 뒤에 자리를 벗어났다.

[그 팔찌? 맞지?]

"맞습니다."

[무슨 팔찌인지 궁금했는데 잘됐네.]

"전 지금 팔찌보다."

루시온은 아무런 반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무리를 쳐다보았다.

"저놈들이 무얼 할지 무척 기대됩니다."

텔라가 저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먼저 가서 다행이다 싶었다.

'새삼 새롭네.'

루시온은 컵을 살짝 흔들었다.

노비오가 억지로 작은 연회에 보내면 꼭 이런 놈들이 여러 명 나타나곤 했었다.

그때는 크로니아에서 자신을 내버려 둔다는 소문이 깔렸었기에 겁도 없이 자신을 건드려봤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뀐 상태였다.

"용건이 뭔가?"

루시온이 먼저 그들에게 물었다.

어차피 이 연회에서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꿀릴 게 없다는 소리였다.

그들은 당황했다.

자신이 다짜고짜 말을 놓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할 말이 없으면 비켜주겠나? 자네들이 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말이야."

루시온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크로니아 공께서 그러셨습니까?"

느닷없는 말에 루시온은 음료수를 홀짝이며 쳐다보았다.

[뭐라는 거야?]

러쉘은 언짢게 반응했고, 흄 역시 표정이 굳어버렸다.

―루시온은 아무것도 안 했어, 이 바보야!

신전의 빛 때문에 축 늘어져 있던 라타도 목소리를 높였다.

"뭘 말하는 건가?"

루시온이 차분히 물었다.

'또 이상한 소문이 돌았나?'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 말입니다."

꽁지 머리를 한 놈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순간, 루시온은 김이 팍 식는 느낌을 받았다.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묻는가?"

"최근에 그 녀석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건 크로니아 공밖에 없질 않습니까?"

"그래서?"

"공께서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까."

'아. 호레이온 놈의 친구랬지? 이름이 뭐더라. …도멘이라고 했나?'

루시온은 음료수를 계속 홀짝거리며 남의 일을 구경하듯 쳐다보았다.

"녀석은 크로니아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녀석은 공께 사과해야 한다며 이곳까지 왔습니다!"

루시온이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자 도멘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슬슬 목소리가 높아질 줄 알았다.]

러쉘은 뻔하디뻔한 연극을 보듯 바라보았다.

"녀석이 그렇게 무참히 당한 날, 저는 마지막으로 녀석과 함께 있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특히, 공의 이야기를 듣던 녀석은 마치 무서운 걸 본 것처럼 발발 떨었습니다."

도멘의 주먹에 힘이 들었다.

"제가 그때! 그때… 녀석이 절 재촉해도 저택으로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 이 녀석이야?'

호레이온 놈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놈일 줄이야.

"녀석이 잘못한 건 맞지만, 대체 왜 그런 꼴로 만드신 겁니까?"

도돌이표도 아니고.

반복되는 말에 루시온은 놈을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루시온. 안 된다. 너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 알잖아?]

러쉘은 슬슬 시동을 거는 루시온을 미리 말렸다.

아무리 앞서 좋은 일들이 터져도 마무리가 좋지 않으면 다 틀어져 버릴 수 있었다.

오늘은 연회 마지막 날이 아닌가.

"술에 취했으면 적당히 하고 돌아가게."

굳이 러쉘이 언급하지 않아도 루시온 역시 그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친우를 위해 변경백의 막내아들에게 달려들었다.

미담을 좋아하는 귀족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싸구려 이야기였다.

하지만 명예를 높이기에는 싸구려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상태였다.

'도멘 녀석이 데려온 사람들도 시선을 주목시킬 용도일 뿐이고.'

녀석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의기양양한 꼴이 눈에 보였다.

"내 경고를 무시하지 말게. 이건 내가 자네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아량일 테니."

그렇기에 루시온은 그들을 도발하며 벌레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그래. 주먹이 전부가 아니지. 딱 필요할 때 써야 주먹도 제값을 하는 법이라고.]

러쉘은 아직도 얌전히 앉아 있는 루시온을 보며 안도했다.

"아니요! 갈 수 없습니다! 저는 녀석의 친우로서 공께 정식으로 해명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도멘은 잠깐 주춤거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다시 용기를 얻어 루시온을 압박했다.

때마침 연회에 호레이온 자작가 일이 떠돌았기에 시기도 좋았다.

"자네 이름이 뭔가?"

루시온은 음료수를 홀짝이며 물었다.

"도멘 피이자트라고 합니다."

"피이자트가 어디 있는 가문인가? 내가 들어보질 못해서 말이야."

"…북부에 있는 자작가 가문입니다."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루시온의 말에 도멘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네의 같잖은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

루시온은 가엽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멘은 루시온의 표정에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애초에 유도했던 흐름은 이게 아니었다.

독종 새끼라 불리던 루시온이 짐승처럼 달려들길 원했다.

이유를 떠나 발끈했다는 행동 자체가 제 죄를 인정하는 셈이니 친우의 복수는 곧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때, 루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도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이틀 전부터 개새끼처럼 날 향해 짖는 놈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네."

루시온은 연회 첫날을 콕 집었다.

그리고 딱 좋은 순간에 다가오는 카슨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천박하고, 역겨운 입 덕에 조만간 피이자트 가문은 사라질 테니 그리 알게."

귀족의 세계에서는 주먹은 무기가 아니었다.

진짜 무기는 가문의 이름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자신은 변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그 말에 도멘은 덜덜 떨며 뒤를 쳐다보았다.

카슨이 그에게 살기를 내뱉고 있었다.

"물론이다."

"제, 제가 술 때문에 실언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도멘은 살기 때문에 순식간에 술이 깨고 말았다.

술에 빌린 용기가 사라지니 남은 건 초라한 몸뚱어리뿐이었다.

"자네는 사적인 자리가 아닌 공적인 자리에서 날 비난했으니 이건 명백한 공격일세. 또한, 자네는 내가 베풀었던 자비 역시 무참히 짓밟아버렸지."

"제, 제가 술에 취해 어떻게 됐나 봅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술? 자네는 지금 술에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를 바랐던가? 애초에 술은 누가 마셨는가? 자네의 선택이었고, 이 역시 자네가 저지른 짓이야."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역겨웠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술을 마신 듯했지만.

"용서는 없네. 내 앞에서 혀를 잘못 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뒤에서 나를 조롱하고 깔보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겠지."

루시온은 이 기세를 몰아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똑똑히 말하겠습니다. 이 시각 이후에 나에 대한 어떠한 헛소문을 퍼트리는 자가 있다면 그 즉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루시온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무엇이든 본보기가 있어야 했다.

대체 도멘이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의 앞에 나서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인 건지 몰라도 좋은 기회였다.

다시는 귀족들이 자신을 곱씹지 못하게 힘으로 눌러줄 셈이었다.

"나 트웰로 스프리카도는 루시온 크로니아 공의 선언을 지지합니다."

사람들이 뭉쳐 있던 곳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스프리카도 후작이었지…?'

이미 안면이 있던 상황이었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루시온은 의심했다.

[아까도 너한테 호의가 있는 것 같던데.]

하지만 러쉘 역시 살짝 의심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목적 없는 호의를 보인 건 텔라뿐이었다.

[도와주려면 처음부터 도와주든지. 저런 놈들이 꼭 나중에 뒤통수를 친단 말이지.]

'도와준 건 사실이긴 해.'

루시온은 일단 트웰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자신이 가진 '명예 신관'이라는 점을 노리고 접근한 이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프리카도 공."

트웰로는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와드린 게 아닙니다. 주제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워낙 어처구니가 없어서 살짝 끼어들었을 뿐입니다."

트웰로는 도멘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자작가 주제에 변경백에게 달려들다니. 자네의 부친께서는 위아래도 가르치지 않은 모양일세. 그리고 자네들 역시 마찬가지네. 크로니아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카슨이 트웰로의 말을 딱 잘랐다.

트웰로를 보는 카슨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사나웠다.

"하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질서가 어지럽혀질까 싶어 슬쩍 끼어들었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그럼."

트웰로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물러났다.

'뭐지...?'

루시온은 둘의 묘한 기 싸움에 의문을 가졌다.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

"볼일은 다 봤더냐, 루시온?"

카슨은 루시온을 재촉했다.

"아닙니다. 아직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루시온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뻐억!

귀족의 세계에서는 주먹은 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개새끼에게 주먹은 여전히 효과 좋은 수단이라는 건 분명했다.

42화. 변했다(3)

[....]

러쉘은 곧바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명 마무리가 잘되지 않았던가.

"병신 같은 새끼."

루시온은 자신이 먹던 음료수를 쓰러진 도멘에게 쏟아부었다.

자신이 이미지를 좀 바꿔보려고 계속 웃으니 단체로 자신을 호구로 보는 모양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별장으로 돌아갑시다."

루시온은 속이 후련해 밝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에겐 사람으로.

개새끼에겐 개새끼처럼.

진작 이렇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어깨 위에 걸친 건 떨어트리지 않아도 되겠느냐?"

카슨은 도멘의 머리를 빤히 보며 말했다.

"예. 이런 좋은 날 피를 뿌릴 수 없잖습니까."

루시온은 자신을 같잖게 보았던 귀족들을 쓱 쳐다보고는 발을 움직였다.

경고는 확실히 했다.

이제 남은 건 진짜로 피이자트 가문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이게 다… 집안 내력이었네.]

러쉘은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카슨은 말릴 줄 알았더니.

"루시온."

카슨이 입을 열었다.

러쉘은 괜스레 입술을 핥았다.

"잘했다."

[저것 봐.]

카슨의 칭찬에 러쉘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변경이 요 몇 년간 잠잠했다. 겁도 모르는 쓰레기 새끼들이 날뛰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지. 이렇게 잘 해결하리라 믿고 있었다, 루시온."

"피이자트 가문에 지금 잘 나가는 사업장이 있다고 합니다."

루시온은 바로 카슨에게 보상을 요구했다.

입 좀 몇 번 털고 공짜로 사업장 하나를 얻으니 굉장한 이득이 아닌가.

"그래. 그건 널 주마.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실 거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뇨?"

"그게 크로니아가 가진 이름이다."

카슨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자랑스러움이 담긴 표정에 루시온 역시 괜스레 가슴이 뛰는 듯했다.

그들은 마차에 올라탔다.

"스프리카도 후작하고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카슨은 루시온의 말을 잘랐다.

'저렇게 나오니 더 궁금해지네.'

루시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몰락해버린 크로니아를 대신해 스프리카도 후작가가 변경을 보호하게 됐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

카슨은 짧은 침묵을 깨고 물었다.

"대신전에서 네가 신수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더냐?"

"예. 벨로스에게 들었습니다."

연회 도중 잠깐 벨로스에게 불려가 소식을 들었다.

덤으로 신수의 사과도 받아냈다.

"며칠 더 머물게 됐다고 아버지께 연락드렸다."

"벌써 말씀드렸습니까?"

"아버지께서 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카슨이 싱긋 웃었다.

"루시온. 네가 너무 자랑스럽구나."

루시온은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몇 초간 눈조차 깜빡거리지 못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입꼬리가 뒤늦게 멋대로 올라갔다.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은 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손끝부터 파르르 떨려왔다.

자신의 변화가 드디어 실감이 된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말을 잊었구나."

카슨은 루시온과 시선을 마주했다.

너무나도 대견한 눈빛과 함께 카슨의 목소리는 그 어떤 순간보다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잘 버텼다. 정말로 잘 버텼어, 루시온."

버텼다.

그 말이 뭐라고.

루시온은 입술조차 떼지 못하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 *

"…그래서 대신전은 황실과 함께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를 공포하길 바란다는 부탁이 담긴 편지를 보냈습니다."

세틸의 보고에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나왔다.

이번 일은 대신전에게 있어 무척 성스럽고 중요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런 일을 공동 발표하자는 것 자체가 이미 대신전은 황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도 오만하던 신전에서 내게 고개를 숙이고 기어 오다니. 참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

"대신전에서 그 사건을 묻어달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넌 어찌 생각하느냐, 세틸."

황제가 물었다.

그 물음이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꺼낸 질문이었다.

"이번 기회에 대신전을 확실히 황실의 발밑에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신성 국가 네바스트의 힘이 점점 강해집니다. 제국에 있는 신관들 대부분이 제국인이나, 네바스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네 말은 이번 기회에 대신전에 뻗어 있는 네바스트 놈의 손을 자르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대신전도, 신관도 제국에 있는 한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세틸은 고개를 숙인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신수에게 축복을 받은 루시안 크로니아 공은 이제 대신전, 네바스트. 이 둘에게 몹시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애초에 신수는 축복을 내리질 않으니, 세계의 역사를 보아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구나."

신수 자체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 특별한 존재에게 축복을 받은 이는 얼마나 특별할까.

"폐하. 하여 백성들에게 대신전 위에 황실이 있음을 보여줄 좋은 기회입니다."

"…하필 크로니아 가문이라니. 내 크로니아 가문의 충성심을 모르는 건 아니나, 여러 가지가 걸리는구나."

황제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변경과 황실은 설령 사이가 좋다 한들, 귀족들의 세력 유지를 위해 서로를 견제해야 했다.

하지만 대신전을 누를,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세틸."

"예, 폐하."

"짐은 대신전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결정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