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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만나다(3)

이어지는 러쉘의 축하에 루시온은 얼이 빠졌다.

"…진심이십니까?"

[난 이런 걸로 장난 안 쳐.]

"제가 진짜 빛… 의 내성을 얻었다고요?"

[그래. 굳이 따지자면 20단계 중 1단계라고 봐도 무방하지. 하지만 뭐 어때? 얻은 게 중요한 거지.]

러쉘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루시온을 보았다.

"제가 어떻게 얻은 겁니까?"

루시온은 도리어 의문에 빠졌다.

"설마 라트초를 복용한 상태에서… 빛을 쐬었기 때문입니까?"

루시온의 눈빛이 잠깐 반짝거렸다.

[루시온. 너… 눈이 좀 이상한데?]

러쉘은 루시온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집념을 본 터라 저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씀해주십시오, 스승님."

[…맞아.]

'빠졌던 정보가 하나 더 있었어.'

루시온은 그제야 빛의 내성을 기르려는 방법을 완벽히 알았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최종 보스가 싸우면 싸울수록 빛이 통하지 않았던 거고!'

그런 최종 보스를 죽였던 주인공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루시온…?]

러쉘은 넋이 나간 루시온을 불러보았다.

'좋아.'

루시온은 원하던 것들이 차차 손에 들어오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조직도 흄도 그리고 비록 1단계의 위치라고 해도 빛의 내성 역시 얻었다.'

차차 기초 공사를 다져가는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모든 걸 자신이 손에 넣었다.

루시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행복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얻을 수 없었던 것들.

그래서 행복했다.

'이 행복을 절대로 뺏기지 말자.'

루시온은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무언가를 꾹 참아냈다.

연회 전까지 아직 할 일이 있었다.

흑마법사인 루시온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스승님."

[너 좀 수상하게 웃는다?]

러쉘은 루시온의 수상함을 눈치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잠이나 자.]

"유령 몇 놈만 더 지배할까 생각 중입니다."

잠도 잘 잤고, 몸도 괜찮고, 훈련도 없으니 유령 지배 마법을 사용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뭐?]

러쉘은 기가 막힌 듯이 반응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듯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 * *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던 유령은 갑자기 벽처럼 치솟는 어둠에 놀라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루시온이 서 있었다.

갖고 놀기에 좋았던 루시온.

가슴 깊이 쌓인 원한을 풀기에 제격이었던 그 루시온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유령은 겁에 질린 상태로 루시온에게 빌고, 또 빌었다.

루시온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 이미 한 차례 공격한 그 부위를 잡았다.

자신의 어둠을 유령에게 불어넣으며 말했다.

"내게 복종해라."

[끄어억!]

유령은 비명을 터트리며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보, 복종하겠습니다! 루시온 님께 복종하겠으니....]

"넌 7번이다."

루시온은 유령의 손등에 난 검은 별을 보며 말했다.

"2번."

[예, 루시온 님.]

유령 2번은 루시온의 부름에 헐레벌떡 벽 너머에서 안으로 들어오며 대답했다.

"7번. 너는 2번을 도와서 이 저택에 숨은 벌레를 찾아. 보고는 2번에게 하면 된다."

이 넓은 저택에서 벌레가 베라 한 명뿐이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유령 CCTV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지시를 내린 루시온은 잠깐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그쪽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복종시킨 유령과 달랐다.

"스승님. 혹시 저쪽에도 유령이 있는 게 맞습니까?"

[맞아. 이제 슬슬 유령이 느껴지나 보네.]

"예. 다 스승님 덕입니다."

[하지만 저놈들은 아직 안 돼.]

"제 어둠이 부족합니까?"

[그런 셈이지. 유령 지배가 효율이 좋지만, 실패하면 네 정신에 직접적인 충격을 받아. 심각하면 진짜 미쳐버릴 수도 있으니 차분히 순서를 밟자고.]

말을 마친 러쉘은 루시온의 방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딱 여기까지만 눈감아 줄 테니까, 그만하고 들어가 쉬어.]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좀 지치네요."

루시온은 한 걸음 떼다 말고 쫑알거리는 라타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라타가 '보고해줘'라고 말하면 놀라지 말고 보고해주면 돼. 알았지?

유령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라타를 보니 루시온은 기가 찼다.

"이리 와, 라타."

―응!

라타는 루시온을 향해 힘차게 뛰었다.

―라타가 이것저것 가르쳐 줬어.

칭찬을 바라는 눈빛에 루시온은 내키진 않지만, 말을 꺼냈다.

"그래, 잘했어."

―러쉘은?

[…어, 잘했어.]

러쉘은 마지 못해 입을 움직였다.

―이히히.

만족스러운지 라타의 꼬리가 빠르게 흔들렸다.

* * *

이틀 뒤.

루시온은 이틀간 꼼짝 말고 누워 있어야 했다.

멋대로 흄과 노비오를 만나러 간 일 때문에 자신의 방문 앞에는 기사가 배치됐다.

'…출발은 오후 2시니까.'

루시온은 아침 8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5시쯤에 방문 앞에 있던 기사가 물러갔다는 사실을 러쉘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잠깐 도시로 가서 크라언에게 시킬 일이 있었다.

'흄도 내 이중생활을 알고 있어야 하고.'

흄은 안토니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었는데 특히 글과 집사로서 행동을 중점으로 익혔다.

이따금 안토니가 루시온의 방으로 와 흄의 상황을 보고할 때마다 귀가 따가웠다.

아직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단어 몇 개를 적을 수 있을 만큼 빠르다며 입 아프게 자랑하기에 반쯤은 흘려들었다.

[어디 가려고?]

러쉘은 라타의 꼬리를 잡다 말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루시온을 쳐다봤다.

"제 회사, 아니, 제가 만든 단체에 갑니다."

―라타도 갈래. 라타도!

라타의 눈이 반짝거렸다.

[연회 준비로 바쁠 시간이잖아? 시녀들도 들떴다고. 네가 처음으로 연회에 모습을 드러낸다면서.]

"처음이라뇨?"

[이전 일은 없던 셈 치려는 거겠지. 그렇게 속닥거리던데?]

"옷 몇 개 걸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유난인지."

[…설마 평소 꼴로 갈 건 아니지?]

"저도 눈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전처럼 대충 후드나 걸칠 생각은 없습니다."

루시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라타와 함께 밖으로 나와 새로 배정받은 흄의 방으로 갔다.

루시온이 문을 열자 흄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예, 루시온 님, 아니, 막내 도련님."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 * *

루시온은 흄과 함께 크라언이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도시로 들어가기 전에 루시온은 흄에게 여성으로 모습을 바꾸라고 지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잘 들어, 흄."

루시온은 가면을 쓰며 말했다.

"듣고 있습니다."

"내가 이 가면을 쓰면 내 이름은 하멜이야."

"이름을 두 개나 가지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흄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며 부러운 시선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라타는 이름을 하나밖에 가질 수 없는데. 부럽다.

루시온은 둘의 반응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숨기기 위한 가짜 이름일 뿐이야."

"아. 이걸, 음, 이중생활이라고 하죠?"

"그래. 너 역시 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써야 할 거야. 적당한 이름으로 생각해."

"알겠습니다."

똑똑.

루시온은 유령 1번으로부터 세 명이 남은 돈으로 방을 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여관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아무래도 유령 8번을 구해봐야 할 듯했다.

"누구...."

슈트라는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

"여, 여긴 어떻게 알았어?"

"그거야 들었지."

수상하지 짝이 없는 루시온의 말에 슈트라는 괜스레 주변을 살피다 흄하고 눈이 마주쳤다.

"이… 사람은 누군데?"

"내 호위."

"반갑습니다, 렌탈이라고 합니다."

흄이 활짝 웃자 슈트라는 반쯤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아, 반가워요. 저는 슈트라예요."

"뭐야. 기본 예의는 알고 있었잖아?"

루시온은 대놓고 빈정거리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막 방을 구한 참이기에 안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헬론은 밖에 나간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 그게 무슨...."

"대장은?"

슈트라의 말을 뚝 자르며 루시온은 크라언을 찾았다.

[저 방에 있네.]

러쉘이 방 하나를 가리키자 루시온은 거침없이 발을 놀렸다.

막 밖으로 나오려던 크라언과 마주쳤다.

"이쪽은 제 호위, 렌탈입니다."

루시온은 깜짝 놀란 크라언을 보면서 자연스레 흄을 소개했다.

"바, 반갑습니다. 크라언입니다."

"문 닫아."

루시온의 지시에 흄은 문을 닫았다.

"소개는 했으니 오늘 찾아온 용건만 간단히 말하지."

"잠시만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아직 그 여관에 쪽지도 남기질 않았는데요?"

"들었어."

크라언은 차마 누구에게 들었는지 묻질 못했다.

오싹하기도 했고, 괜히 정보를 캐내는 일이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조직이 크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루시온이 화두를 던지자마자 크라언의 눈빛이 달라졌다.

집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조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었고.

"사람도 필요할 테고."

두 번째로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귀족 루시온이 갑자기 큰돈을 벌면 누가 봐도 이상했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귀족 루시온이 얻어야 하는 건 같은 귀족들의 호의였다.

[네가 돈과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당장 러쉘부터 루시온을 의심했다.

"받아 쓸 게 있으면 가지고 와봐."

루시온은 우선 크라언에게 지시했다.

그가 물건을 찾으러 방 밖으로 나가자 루시온은 말을 꺼냈다.

"저라고 연회 때 그냥 있었던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정보 때문이었다.

서로 정보를 나누는 대화의 장이 연회였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이것저것 주워들었습니다. 맨땅에 머리를 박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자신을 가리켰다.

"스승님. 제가 누구인지를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잊을 리가 있나? 변경백의 막내아들이잖아.]

"여기 가져왔습니다."

크라언은 문을 열며 숨 가쁘게 말했다.

루시온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

"예. 불러주십시오."

크라언이 책상에 뛰어가 대답했다.

루시온은 의심을 피하고자 실제로 연회에서 얻었던 정보와 소설 시작점인 2년 후를 비교해서 현재 어느 정도 성공 궤도 오른 곳을 중점으로 잡았다.

"이걸 가지고 골고루 투자해."

루시온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자신이 크라언에게 알려준 곳은 총 5곳.

각자 5천 델 씩, 총 2만 5천 델을 넘겼다.

"이게...."

크라언이 말을 꺼내다 멈췄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액수였다.

저 돈뭉치는 대체 어디에서 계속 나오는 건지.

"사람이 더 늘어날 테니,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 장소는 내가 알아보지."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라언에게 1만 델을 추가로 넘겼다.

"이건 어디에 쓰면 됩니까?"

"혹시나 내가 사고 치면 혈압 오르지 말라고 주는 돈이야."

[사고라니?]

"사고…라뇨?"

러쉘과 크라언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조만간 사고 칠 것 같기도 하고."

루시온은 말을 돌리며 크라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떠올렸다.

"슈트라와 헬론이 루테온 은행을 턴 일을 알고 있어."

"...!"

크라언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 놀란 눈으로 물었다.

"묻는 건 나야.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루시온은 크라언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누가 시켰는데?"

25화. 그리고 마주치다

"저희도 모릅...."

"그럼, 아는 것만 말해."

"저희가… 노예였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크라언은 자신이 목에 찼던 검은 링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래."

"저희를 샀던 놈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벌써 무슨 짓을 하든 죽이러 갔을 겁니다."

크라언의 목소리에 짙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돈을 갚으면 풀어주되, 정체를 숨겨 후환이 없도록 하다니.

'꽤 치밀한 놈인데?'

루시온은 크라언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걸 눈치채며 물었다.

"그래서 어떤 지시를 받았는데?"

"루테온 은행에서 금속 상자를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쓰려는 건지, 정확히 어떤 상자인지는 모르고?"

"예. 모릅니다. 그저 이만한 크기의 상자를 전부 들고 오라는 지시뿐이었습니다."

크라언은 직접 상자 크기를 알려주었다.

루시온은 주머니에 넣어둔 자신의 귀걸이를 생각했다.

'상자가 왜 필요한 거지?'

은행 지점장을 통해 금속 상자가 백 개가 넘어간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텔라에게 부탁해야겠는데?'

루시온은 크라언에게 적당히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한창 결계를 만들고 있는지 슈트라는 붓처럼 생긴 물건으로 영문 모를 문자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루시온.]

러쉘은 불안한 시선으로 루시온을 불렀다.

[아까 왜 사고 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루시온은 자신의 정보를 판 놈을 찾으면 누가 되었든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러쉘에게 어떻게 말해야 혼이 덜 날까 하고 조금 고민했다.

"음...."

"...!"

슈트라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붓처럼 생긴 물건을 떨어트렸다.

"까, 깜짝이야."

러쉘이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자 루시온은 별수 없이 붓처럼 생긴 물건을 가리켰다.

"이게 결계 술사가 쓰는 아이템인가?"

"저도 궁금합니다."

흄도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떨어진 물건을 다시 주운 슈트라는 먼지를 털며 말했다.

"내 마나로 만든 붓이야."

"결계 술사는 다 이런 걸 사용해?"

"아니. 사람마다 마나가 다르듯 도구 역시 다른 모습을 띠어. 이건...."

슈트라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난 널 신뢰하지 않아."

"거의 다 말해놓고?"

루시온은 어이가 없었다.

"그, 그러니까, 렌탈 씨가 궁금하다길래 설명한 것뿐이라고!"

슈트라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다급히 크라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 이걸, 운명의 첫 만남이라고 표현하는 겁니까?"

흄의 난데없는 물음에 루시온은 급히 솟구치는 화를 참아냈다.

"그걸 개소리라고 하는 거다. 기억해."

"기억했습니다."

흄이 활짝 웃었다.

루시온은 밖으로 나오면서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유령을 향해 어둠을 쏘아냈다.

크라언이 구한 방은 도시 외곽에서도 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는 걸 사전에 확인했다.

[…억!]

유령은 어둠을 맞고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루시온은 유령에게 다가가 검은 상처가 난 곳을 붙잡으며 어둠을 불어넣었다.

"내게 복종해라."

유령이 다시 비명을 질렀고, 그 어떤 유령들보다 빨리 입을 열었다.

[보, 복종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해주세요!]

"넌 8번이다. 이 집의 사람들을 감시하는 게 당분간 네가 할 일이니 잘 기억하도록."

자신이 다른 거처를 찾을 때까지 유령 8번은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꼭… 해야 합니까?]

유령의 물음에 루시온은 손을 들었다.

[해요! 합니다! 그냥 물어봤을 뿐입니다!]

"돌아간다."

루시온은 유령의 대답을 듣고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 * *

―우와아아.

라타는 제대로 꾸민 루시온 보며 그 주변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루시온이 루시온이 아니야!

[꾸미니 한결 낫네.]

러쉘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은 여러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루시온이 시끄러운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얌전히 입을 닫고 있었다.

'…지쳤다.'

루시온은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신들이 더 들뜬 시녀들.

연회에 간다고 새 옷을 수십 벌이나 준비한 노비오.

아직 연회는 하루가 남아 있었다.

왜 벌써 이러는 건지.

'치수는 또 언제 잰 거야?'

루시온은 문득 안토니를 떠올렸다.

그라면 눈대중으로라도 치수를 잴 수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온이 대답했다.

목소리에도 벌써 지친 기색이 드러났다.

"들어오게."

"도련님. 오! 이제야 도련님께서 가시진 빛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영애들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으실 만큼 훌륭하십니다."

안토니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아주 환하게 웃었다.

정말로 루시온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로 신수가 환해졌다.

"빈말은 됐네."

루시온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

안토니는 자연스럽게 이번 공을 세운 시녀들에게도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맞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제가 보았던 그 어떤 공자들보다 보석 같으신 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련님께서 가지고 계신, 늑대를 떠올리게 하는 회색과 바다를 닮은 푸른색의 조합은 정말이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조잘거리는 시녀들의 칭찬에 루시온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들었다.

'그간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참았나 모르겠네.'

루시온은 힐끔 안토니를 보았지만, 그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맞장구를 치며 좋아라 했다.

―이히히. 라타도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라타마저 기뻐하며 콩콩 뛰어다녔다.

[뭘 뻣뻣하게 굳어 있어? 네가 달라지고 나서 시종들이 평소에도 네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야.]

잘 보니 러쉘도 한껏 들떠 있었다.

"안토니. 정도껏 하게. 자네들도 이제 조용히 하고."

더는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루시온은 그들을 멈췄다.

[왜 말려? 딱 듣기 좋았는데?]

러쉘은 루시온을 더 칭찬하라고 시녀들을 재촉하고 싶을 정도였다.

―라타도 계속 듣고 싶은데.

신나게 뛰던 라타의 발걸음도 멈췄다.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제야 안토니가 부랴부랴 시계를 보았다.

그는 곧 긴 한숨을 내쉬며 루시온에게 사과했다.

"이것 참.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더냐?"

카슨의 등장에 그 방에 있던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루시온과 카슨, 그리고 무언가를 잇는 푸른 실이 등장했다.

갑자기 나타난 푸른 실의 등장에 루시온은 괜스레 긴장했다.

"형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루시온이 묻자 카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연회에 참석자 겸 호위로 내가 간다는 걸 아버지께 듣지 못했더냐?"

[뭐?]

러쉘이 깜짝 놀랐다.

―이번 연회에....

루시온은 순간 팽팽해진 푸른 실을 보다 며칠 전에 노비오가 머뭇거리던 일을 떠올렸다.

평소의 노비오답지 않은 일이라 마음에 걸렸었는데.

루시온은 팽팽하게 변한 푸른 실을 의식했다.

마치 이번 연회 때 카슨이 따라와야 한다고 실이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카슨이 따라오면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온은 입을 열었다.

"제르노는 지금 임무를 맡고 있습니까?"

"아니다."

"형님께서는 바쁜 분이 아니십니까? 지금이라도 제르노와 동행하겠습니다."

"요즈음 네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카슨이 조용히 입을 뗐다.

"내가 변경에 일이 있어 며칠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전보다 더 많이 변했더구나."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루시온은 괜스레 마음이 불안했다.

"오늘 아침에 네가 외출을 했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다."

"짧은 외출이었을 뿐입니다."

"그래.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제르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를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번 연회에 내가 가는 것이니 그리 알거라."

"그렇다면 형님. 이 자리에서 제 자유를 보장해주신다고 확실히 말씀해주십시오."

이번 일은 자신과 상의 없이 노비오와 카슨이 벌인 일이었기에 루시온은 단순히 '알겠다'라고 대답하며 따를 마음이 없었다.

"그 약속이 없다면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루시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연회가 열리는 장소로 향하면서 마법 은행에 들러 러쉘이 가진 가면을 얻어야 했다.

그밖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면 이건 엄연히 감시였다.

순간 팽팽해진 분위기에 안토니와 시녀들은 루시온과 카슨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카슨이 웃었다.

"내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너의 자유를 보장하마."

루시온은 카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너의 안전은 자유보다 우선시 된다는 걸 알고 있거라."

"예.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안전하다는 전제하에 자유가 보장되고, 천재 기사인 카슨이 호위로 따라온다는 데 뭘 더 말할 게 어디 있는가.

루시온 역시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 * *

연회는 수도가 있는 중부에서 열렸다.

크로니아 가문이 있는 위치는 서쪽 변경으로, 게이트를 이용해 단숨에 중앙으로 이동할 셈이었다.

"…크로니아 가문 문장을 보고도 달려드는 놈들이 있다니."

카슨은 무겁던 입을 열었다.

정말 액운이 꼈나 싶을 정도로 가다 말고 마차가 습격받기 일쑤였다.

"연회가 끝나는 날에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산적 놈들을 싹 정리해야겠다."

루시온은 이 이상한 상황이 왜 벌어지는 알고 있었다.

푸른 실이 자신과 카슨, 그리고 습격하러 오는 산적들에게 연결이 되었다.

호위로 따라온 기사들이 산적들을 물리쳐도 푸른 실은 잘리지 않았다.

잠깐 사라졌다가 잠시 뒤, 어디선가 나타난 산적이 새로운 푸른 실을 달고 나타날 뿐이었다.

'불쾌한데.'

루시온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푸른 실이 잘리는 걸 저지하는 듯 억지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는가.

'산적들이 크로니아 가문의 문장을 모를 리가 없을 테고.'

"갔다 오마."

카슨은 기어코 참지 못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왜 그래?]

러쉘은 카슨이 나가자마자 물었다.

루시온이 조금 전부터 내내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산적들이 저렇게 멍청한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멍청하니까 죽여달라고 습격을 하겠지. 덜 멍청했다면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마차를 습격하겠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었지만, 루시온은 여전히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서걱.

마차 너머로 무언가 갈아 엎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지긋지긋하던 푸른 실이 잘려나갔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다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토록 질긴 푸른 실은 처음이었고, 이번만큼은 푸른 실이 왜 등장한 건지.

왜 산적들을 물리쳐서야 사라진 건지.

무엇 하나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이제 더는 나타나지 않을 거다. 확실하게 힘의 차이를 보여주었으니."

카슨은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모습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니 저런 놈에게 신경 쓰지 말거라, 루시온."

"자주 있던 일입니까?"

"자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드물게 있던 일이다. 어차피 저놈들은 사회의 악이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회의 악…?'

루시온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혹시나 자신이 악역이기에 자꾸만 악당과 얽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바꾼 일들이 나비 효과가 되어 달라질 텐데....'

루시온은 찝찝한 얼굴로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루시온."

카슨이 루시온을 조용히 불렀다.

"생각해 보니 너는 그저 앉아만 가면 되는 게 아니더냐."

"예…?"

카슨은 안쪽 주머니를 뒤지더니 모래주머니를 의자 옆에 두었다.

쿵!

꽤 묵직한 소리가 들리자 라타는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보였고, 루시온은 등골부터 올라오는 싸한 느낌과 마주해야 했다.

"차거라."

카슨이 모래주머니를 내밀었다.

26화. 그리고 마주치다(2)

* * *

마차 두 대가 멈췄다.

흄은 안토니에게 배운 대로 마차에서 재빠르게 내려서 루시온과 카슨이 탄 마차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딸깍.

'인사를 한 뒤에.'

흄은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

다음 일을 생각하던 흄은 마차 안에서 벌어진 일에 눈을 깜박거렸다.

루시온이 양팔과 양다리에 묵직해 보이는 이상한 걸 달고 엄청 힘든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바닥을 적실 정도의 땀은 또 무엇이며.

자세를 지적하는 카슨의 말은 또 무엇일까.

이런 상황은 안토니가 알려준 적이 없었다.

[이상한 눈으로 볼 거 없어. 훈련이니까.]

러쉘이 피시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흄은 문득 '그렇습니까'라고 대답할 뻔했지만, 밖에서는 러쉘의 말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루시온의 당부를 떠올렸다.

"혀, 형님.... 끄윽."

루시온은 마차가 멈췄음에도 '그만'이라는 소리를 잊은 카슨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만."

30초쯤 더 지난 후에야 카슨이 입을 뗐다.

루시온은 어깨로 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먼저 가마."

카슨이 마차에서 내렸다.

"막내를 부탁하지."

카슨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흄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예, 도련님."

흄은 대답한 뒤에 쓰러지다시피 한 루시온에게 말을 건넸다.

"마실 걸 챙겨오겠습니다."

'…미, 미친놈.'

루시온은 의자에 깊게 기대 숨을 거세게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게이트가 세워진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훈련을 시킬 줄은 몰랐다.

[좋은 형을 뒀어.]

러쉘은 루시온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흄이 건넨 물을 먹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물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오자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허겁지겁 루시온의 머리 위로 올라온 라타 역시 감탄하기 바빴다.

―우오오오!

수많은 색으로 이뤄진 빛이 한순간 하늘을 찌르며 올라갔다.

파도처럼 요동치는 모습이 꼭 바다 같았고, 색의 화려함은 조용하게 퍼져가는 불꽃놀이를 닮아 있었다.

[게이트가 작동 중인가 보네.]

이 세계에서 오직 테슬라 제국밖에 없다는 게이트.

그 명성에 걸맞게 무척 아름다우면서 웅장했다.

이제 곧 자신도 저 게이트를 타고 중앙에 있는 수도로 갈 예정이었다.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 * *

"마법 은행 이름이 무엇입니까?"

루시온은 게이트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러쉘을 닦달했다.

가면을 맡긴 마법 은행은 여기에 있었다.

[아주 강제로 뺏을 기세네.]

러쉘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어디에 있다는 말은 했어도 준다는 말은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저는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가 아닙니까?"

[그래. 이럴 때만 제자 스승을 언급하지?]

"평소에도 늘 존경하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말이 입에 발린 말이라는 걸 알아도 기분이 좋다니.'

러쉘은 스스로가 이렇게 멍청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루시온이 말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유일한 제자였다.

어쩌면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고.

자신이라고 귀가 없던 건 아니었다.

'제자한테 뒤통수 맞는 흑마법사도 많이 봤으면서....'

사람 마음은 함부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루시온과 계약이라는 형태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러쉘은 부디 자신의 의심이 틀렸길 바랄 뿐이었다.

"스승님…?"

루시온은 몇 번이고 불렀음에도 대답 없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러쉘을 보았다.

루시온 옆에 나란히 걷던 라타도, 그의 뒤를 따르던 흄도 덩달아 멈췄다.

"혹시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겁니까? 그렇다면 못 들은 걸로 하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잠깐 일그러진 러쉘의 표정에 뒷덜미를 살짝 긁적였다.

가면이 있으면 좋지만, 억지로 뺏을 마음은 없었다.

[아니. 어느 은행인지 생각했어. 물건을 여러 군데에 맡겨놨거든.]

"여기는 확실합니까?"

[직진.]

러쉘이 손가락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 * *

짤그락.

루시온은 루테온 은행처럼 대리인임을 증명하는 동의서를 쓰는 대신 돈을 내밀었다.

주변을 눈치를 보더니 직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흠."

직원은 헛기침하고 나서 자신이 내밀었던 동의서를 내리고, 루시온이 내민 돈을 슬쩍 가졌다.

"예. 확인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직원은 물건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니엘라 은행이라고 했나?'

루시온은 은행 이름을 생각하다 곧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여긴 절대로 맡기면 안 될 곳이네.'

[여긴 최악이네. 이것만 맡겨두길 잘했어.]

러쉘도 루시온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인상을 구겼다.

잠시 뒤, 직원이 나무 상자를 가지고 왔다.

"찾으시던 물건입니다."

"고맙네."

루시온은 나무 상자를 가지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루시온. 어서 열어줘. 라타는 너무 궁금해.

라타는 허겁지겁 루시온의 어깨에 올라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라타. 루시온 님의 어깨에 올라타는 건 실례입니다."

흄이 따끔하게 말했지만, 라타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실례가 뭔데?

"예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라타는 착해!

"착한 것과 예의가 있는 건 별개입니다."

루시온은 라타와 흄이 떠드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상자를 열었다.

―라타는… 우오오!

라타는 말을 하는 도중에 환호에 가까울 만큼 소리를 질렀다.

루시온의 눈 역시 덩달아 커졌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까만 가면으로 눈, 코, 입 모두가 막혀 있었다.

번들거리는 광택 덕에 로봇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깔끔한 모습이 딱 마음에 들었다.

"구멍이 막혀서 숨을… 쉴 수 있겠습니까?"

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충분히 쉴 수 있어.]

러쉘이 대답했다.

루시온은 가면을 쥐어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라타는 더 보고 싶은데.

"나중에."

―응.

라타는 루시온의 말에 더는 떼를 쓰지 않고 얌전히 땅으로 내려왔다.

[저 가면은 그냥 가면이 아니라 아이템이야. 네가 쓸 때 어떤 마법이 달려 있는지 말해줄게.]

"예, 감사합니다. 정말 잘 쓰겠습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면을 얻은 것만으로도 목표의 반은 도달했다.

루시온은 카슨이 기다리고 있는 지점으로 향하려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흄에게 넘겼다.

"무엇을 사 오면 되겠습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 눈치 보지 말고 사 먹으라고. 옆에서 하고 싶은 거 꾹 참는 게 더 꼴 보기 싫거든."

게이트가 다시 가동되기 전까지 아직 2시간 넘게 남아 있었다.

잠깐 이 마을을 구경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언제 또 올지도 모르고.'

루시온은 자신이 쓴 후드를 다시 당겨 쓰고는 앞으로 걸었다.

[괜찮겠어?]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 때는 더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후드 없이.

'적응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하자.'

루시온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후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모인 시장 쪽으로 걸었다.

그때, 루시온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힘들 것 같으면 바보같이 버티지 말고 카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러쉘은 잠깐 일그러지는 루시온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붉은 실이.'

루시온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붉은 실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누구지?'

루시온은 남자의 뒤통수만 보았기에 알 수 없었다.

"루시온 님?"

흄이 루시온은 가볍게 불렀다.

'뭐지?'

루시온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남자와 붉은 실을 뒤로 하며 흥건히 젖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설마 신관인가?'

루시온이 눈동자를 굴려 러쉘을 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신관은 아니란 소리였다.

[이것 봐. 돌아가자. 구경은 다음에 또 하면 되니까.]

"맞습니다. 꼭 죽을 사람처럼 안색이 나빠 보이십니다."

루시온은 손을 들어 흄을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잠깐 현기증이 왔을 뿐입니다."

몸 상태는 정말 나쁘지 않았기에 루시온은 러쉘이 안심할 수 있게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러쉘은 시선을 돌려 라타를 보았다.

신수가 독립적인 존재지만, 루시온과 라타는 이어져 있어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다.

라타는 멀쩡했다.

'역시… 신관이 아니야.'

[억지 부리지 말고 몸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돌아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루시온은 멈췄던 걸음을 재촉하며 앞으로 걸었다.

시장을 천천히 거닐다, 루시온은 입을 뗐다.

"셴은 어땠지?"

베라가 자신의 정보를 쪽지에 적었고 그 쪽지를 가져간 기사가 셴이라는 사실을 흄에게도 알렸다.

"큰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건?"

흄은 잠깐 생각하다 양념이 고루고루 발린 닭꼬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나 주십시오."

―라타도!

라타가 흄의 다리에 매달렸다.

"두 개 주십시오."

흄은 주문을 정정했다.

곧 그는 루시온을 보며 대답했다.

"특별한 건 보지 못했습니다. 아, 하나 드시겠습니까?"

루시온은 그 물음에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걸 떠나 방금 흄이 한 행동은 시종으로서 해서는 안 될,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다.

[푸하핫! 너 진짜 마음에 든다, 흄!]

러쉘은 배꼽이 떠나갈 정도로 웃었다.

'가르쳐줘야겠네....'

루시온은 기회를 엿봤다.

* * *

대략 1시간 30분 정도 시장을 돌다 루시온 일행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얌얌.

두 손에 닭꼬치를 든 흄은 하나는 자신이 먹고 다른 하나는 어깨 위에 올라탄 라타에게 주었다.

두 존재는 정말 쉬지 않고 먹었다.

"넌 안 먹어도 된다며?"

루시온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흄에게 물었다.

"예. 저는 불안정하기에 루시온 님의 어둠을 공급받아야 저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닭꼬치를 손에 넣은 흄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이 행위는 제게 있어 하나의 유희로써 유희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라타는 쑥쑥 크려고 먹는 건데.

라타는 오물거리며 말했다.

두 존재가 방금 먹은 값만 해도 30만 원어치에 해당했다.

"흄."

루시온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예, 루시온 님."

"그거 잠깐 내려놔. 라타 너도 잠깐 내려오고."

루시온이 가리킨 건 닭꼬치였다.

흄이 닭꼬치를 땅을 향해 내리고, 라타가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자마자 루시온은 흄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홉.

라타가 깜짝 놀랐다.

흄은 고개가 돌아간 그대로 눈을 깜박거렸고, 러쉘은 팔짱을 꼈다.

[이번엔 넘어가는 게 어때? 몰랐잖아.]

"모르니까 알려주는 겁니다."

만약 지금 같은 일이 카슨 앞에서 벌어졌다면 뺨이 아니라 목이 잘려나갔을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루시온이 조용히 흄을 불렀다.

"흄."

그 목소리에 살기가 어린 듯 제법 매서웠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흄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루시온의 감정에 반응해 자신의 속에 있던 어둠이 제멋대로 날뛰어 괴로웠다.

"조금 전 네가 내 말을 끊고 닭꼬치에 정신이 팔린 행동은 어느 귀족에게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말이 끝나기 전까지 기다려. 넌 내 집사이니, 그 위치를 기억해야 할 거다."

"예. 루시온 님. 이와 같은 실수는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흄의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루시온은 이만하면 됐다 생각하며 평소처럼 목소리를 냈다.

"가자."

라타는 흙이 묻은 닭꼬치를 보았다.

―…라타의 닭꼬치가.

흄이 땅에 떨어진 닭꼬치를 주우려다 말고 갑자기 날아오는 무언가에 반응해 잡았다.

"집사는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어서도 안 돼."

루시온의 말에 흄은 흠칫 놀랐다.

"열어."

이어지는 목소리에 흄은 돌돌 쌓인 종이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닭꼬치가 모습을 드러내자 라타가 활짝 웃었다.

―고기다!

* * *

루시온은 게이트를 타기 위해 줄지어진 마차를 쳐다보다 옆쪽에 의자에 앉아 있는 카슨을 찾았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루시온이 의문을 느끼던 사이 게이트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콰앙!

'저건....'

루시온은 순식간에 하늘을 채운 익숙한 형상을 보았다.

여기저기 휘날리는 어둠.

[흑마법사다…!]

러쉘의 다급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어둠을 내뿜고 있는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흑마법사가… 나타났다고?'

놀라는 것도 잠시, 마치 긴급 퀘스트를 주듯 저 흑마법사하고 자신을 연결한 푸른 실이 나타났다.

27화. 그리고 마주치다(3)

'망할....'

루시온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 상황에서 무얼 해야 저 실을 자를 수 있는지 뻔하지 않은가.

'저놈이 죽어야 한다.'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부르며 옷을 잡아당겼다.

게이트 쪽에서 흩어진 잔해가 루시온을 덮치기 전에 흄이 주먹을 쥐며 내질렀다.

서걱!

하지만 흄의 주먹이 잔해에 닿기 전에 반으로 쪼개졌고, 카슨이 날아오듯 루시온의 앞에 사뿐히 섰다.

"정신 차리거라, 루시온."

팡!

흄이 다른 잔해들을 주먹으로 후려치자 가루가 되어 바닥에 뿌려졌다.

"흄. 네 주인을 지키거라."

카슨은 흄을 곁눈질로 살펴본 뒤에 흑마법사를 향해 달렸다.

게이트가 재가동할 때까지 기사들에게 자유 시간을 준 게 화근이 될 줄이야.

'…하지만 처리 못 할 것도 없지.'

카슨은 이 사태를 빨리 끝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를 죽이는 일이었다.

"이쪽입니다."

흄은 루시온을 서둘러 안내했다.

[뭐 해? 움직이지 않고?]

러쉘도 루시온을 재촉하자 그는 마지 못해 발을 떼었다.

'엮인다. 무조건 엮이게 되어있어.'

루시온은 사라지지도, 팽팽해지지도 않는 푸른 실을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주위에 퍼진 어둠 때문의 영향인지 어둠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떽! 가만히 있어.

보다 못해 라타가 루시온의 어둠을 달랬다.

[루시온.]

러쉘이 무거운 목소리로 루시온을 불렀다.

[네 어둠이 반응하는 건 저 흑마법사가 타락한 흑마법사이기 때문이야.]

타락이라는 말에 루시온은 달리면서 잠깐 뒤를 돌았다.

하늘에 퍼진 저 어둠은 정말로 '악'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도 까맣고, 까맸다.

[타락한 흑마법사를 없애는 건, 흑마법사의 본능이거든.]

러쉘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도망치는 데 집중해. 땅이 울리고 있으니까.]

"땅이 울리다뇨?"

루시온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했다.

옆에서 같이 뛰던 라타가 폴짝 뛰어 루시온에게 매달렸다.

―오, 온다. 타락한 어둠이 와!

싸아아아.

한순간 거센 바람이 퍼져나갔다.

'바람이 아니야.'

루시온은 형체도 없이 허공에 둥둥 뜬 어둠을 보았다.

처음으로 어둠을 받아들였을 때처럼 몸이 덜덜 떨렸다.

'저건… 불길하다.'

본능적으로 저 어둠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루시온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겼다.

[루시온! 정신 차려! 여긴 밖이라고!]

순간,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어둠을 움직일 뻔했다.

―괜찮아, 루시온. 라타가 도와줄 테니까.

러쉘은 아무렇지도 않은 라타를 쳐다보았다.

[라타.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저 어둠은 뭔가 싫지만, 라타는 괜찮아.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신수라서 영향이 없는 건가?'

러쉘은 생각을 하다 말고 곧 눈을 크게 떴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다.

허공에 퍼졌던 타락한 어둠이 땅으로 기어들어 갔다.

[조심해, 곧 망령이 되살아난다!]

러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땅이 요란하게 울렸다.

쿠쿠쿵!

알 수 없는 진동에 루시온은 잠깐 휘청거렸다.

"크흑...."

흄이 갑자기 신음을 내뱉었다.

타락한 어둠이 땅에서 그의 발로 덩굴처럼 올라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검은 핏대가 솟구쳤다.

촥.

루시온은 망토를 한순간 펼쳐서는 흄을 감쌌다.

그리고 망설일 틈도 없이 타락한 어둠을 향해 자신의 어둠을 불어넣었다.

[루시온…! 너!]

러쉘은 깜짝 놀라다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혼비백산에 가까운 상황이라 다행히도 루시온을 보는 이는 없었다.

[널 보는 놈은 없어. 있어도 내가 막으마.]

"허락합니다."

루시온은 러쉘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어둠을 쓸 수 있게 허락했다.

이어 라타를 불렀다.

"라타."

―응! 루시온은 아무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머지는 라타가 알아서 해.

치칙!

루시온의 어둠이 스며들자 자신의 몸에 스파크가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곤소곤.

타락한 어둠이 무언가 속삭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루시온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파지직.

타락한 어둠은 이내 딱딱한 결정이 되더니 이내 부스러졌다.

"…죄송합니다. 제 몸이 어둠에 약할 줄은 몰랐습니다."

흄은 거센 숨을 내쉬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네가 약한 게 아니야.]

러쉘은 주변으로 시선을 두며 손을 뻗어오는 타락한 어둠을 순식간에 없앴다.

타락한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은 흄뿐만이 아니었다.

저마다 괴로움을 토하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자들이 생겨났다.

쿵!

쿵!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저 타락한 어둠의 성질이 거지 같을 뿐이야.]

러쉘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북소리에 장단을 맞추듯 땅에서 검은 물이 샘솟았다.

검은 물은 형상을 이뤘고, 점점 사람의 모습이 되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까만 옷을 입었고, 까만 천으로 눈을 가렸다.

"케켁."

그들이 입을 열자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저게...."

루시온은 말을 꺼내다 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놈들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 보였다.

듣고 싶지 않아도 살려달라고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저게 죽은 자의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는 마법, 강령술 중 하나야. 원래 강령술은 저 모습이랑 다르지만.]

러쉘은 그들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루시온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지배라는 말이 이토록 무섭게 들릴 줄은 몰랐다.

딱딱.

시체가 입을 움직였다.

그들은 타락한 어둠에 붙잡힌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반사적으로 돌렸다.

[시체는 영혼이 없기에 영혼에 굶주려 있지. 아직 그래도 움직이질 않은 걸 보면 고삐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루시온은 러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흄이 다급히 루시온을 잡아당겼다.

콰콰쾅!

"...?"

루시온은 놀란 눈으로 흙먼지를 뚫고 자신의 앞에 선 타락한 흑마법사를 보았다.

여기저기 베이고 잘린 꼴이 참혹했다.

"너… 는...."

타락한 흑마법사는 손을 조심스레 뻗어왔다.

'뭐야?'

콰앙!

소리는 한 번 더 들렸다.

―히끅!

깜짝 놀란 라타가 딸꾹질을 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카슨이 보였다.

그는 흑마법사의 복부를 꿰뚫은 검을 빼며 몸을 폈다.

"눈이 아주 좋구나."

카슨은 흄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카슨이 있어서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늦었네.]

러쉘은 하나씩 사라지는 망령들을 쳐다보았다.

착.

뒤에서 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땀이 흥건한 상태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괜찮다."

카슨은 그 말 이외에 더는 하지 않았고 기사들을 살폈다.

다만, 셴이 보이질 않았다.

그를 감시하도록 붙인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친 곳은 없느냐, 루시온?"

'아니야. 아직 안 죽었어.'

루시온은 아직 끊어지질 않은 푸른 실을 보았다.

죽었다고 생각한 흑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드릴처럼 나선을 그린 타락한 어둠이 만들어졌다.

"형님!"

루시온이 소리쳤다.

짜악!

그때, 경쾌한 박수 소리를 이어 빛이 퍼져나갔다.

[빌어먹을 이 빛은 어디에서 온 거야!]

러쉘이 소리쳤다.

흑마법사가 쓰러지고 푸른 실이 끊어졌다.

"…허억."

루시온은 마치 차가 자신을 들이받는 느낌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루시온, 괜찮아?]

고개를 아주 살짝 가로젓는 루시온을 보다 러쉘은 빛이 나온 쪽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분명 빛의 힘이었다.

하지만 신관이나 성기사가 가진 빛과 달라 눈치채질 못했다.

"네놈…!"

카슨은 비틀거리는 루시온을 부축하며 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무섭게 노려봐?"

남자는 다가오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곧 실실 웃으며 카슨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내가 네 목숨을 살렸다. 알고 있지, 카슨?"

'붉은 실.'

루시온은 입을 가리며 남자와 연결된 붉은 실을 보았다.

조금 전 시장에서 봤던 그 남자인 듯했다.

'왜 붉은 실이지?'

루시온은 불안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카슨. 저 사람 얼굴이 엄청 창백한데? …보자. 내가 이런 증상을 많이 봤거든."

남자는 태연하게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신력 알레르기!"

힘차게 외치던 남자는 곧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루시온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신력 알레르기가 있으셨다면 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카슨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야 나도 연회에 참여하게 됐으니까."

"중부에 사는 네놈이 일부러 서부로 왔다고?"

"개인적인 볼일이… 아, 내가 부축할게. 신관이 아니라서 그, 특유의 넘실거리는 기운도 안 난다는 거 알잖아?"

남자는 루시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의 힘이 있는데 신관이 되지 않았다고? 특이한 경우네.'

러쉘은 남자를 빤히 보았다.

이상하게 익숙했다.

'…어디에서 봤나?'

"저리 가라."

카슨이 손을 흔들며 남자를 쫓아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잠깐 쉬면 됩니다."

루시온은 겨우 말을 꺼냈다.

"흄."

축 늘어진 라타를 손에 들고 있던 흄은 루시온의 말에 머뭇거리다 다가왔다.

"저기에 있겠습니다."

루시온은 멀쩡한 의자를 가리켰다.

"그래. 잠깐 저기에 앉아 있거라. 곧 해결하고 오마."

카슨이 흄에게 루시온을 넘기며 게이트 쪽으로 걸어갔다.

[흄. 천천히 가. 지금 루시온의 어둠이 크게 흔들리고 있으니까.]

"'천천히'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흄은 걸음을 멈춰서는 곤란함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흄이 조심스레 걸었다.

[그건 너무 늦잖아. 개미가 너보다 더 빠르겠네.]

"그럼 이 정도는 어떻습니까?"

루시온은 흄과 러쉘이 걸음을 가지고 웃기지도 않을 말을 나누는 사이, 자신의 어둠을 확인했다.

'확실히 빛의 내성이 있고 없고가 차이가 나네.'

똑같이 빛을 맞았음에도 저번과 달리 빛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

"…콜록."

가다 말고 루시온은 삐져나오는 피를 쓱 닦았다.

그렇다고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래도 라트초를 먹었으니까. 빛의 내성이 더 늘어날 수 있겠지?'

루시온은 당장 아픔보다 곧 커질 빛의 내성을 생각하며 고통을 참아냈다.

어떻게 본다면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었다.

빛의 힘을 또 언제 받아보겠는가.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을 의자에 앉힌 후에 금세 물을 생각했다.

조금 뒤에 그늘이 지자 루시온이 물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저, …괜찮습니까?"

이름 모를 남자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위로 올렸다.

'엄청 불편한데?'

붉은 실.

그걸 알고도 이렇게 불편한 적은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을 물어봐야겠는데....'

남자는 서둘러 자신의 손을 내보였다.

"저는 빛의 힘을 지녔지만, 신관들과 다릅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신관들이 왔다.]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등줄기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어둠이 진정됐을 뿐, 아직 상태는 좋지 않았다.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회색과 검은 옷을 신관 무리를 쳐다보았다.

"제가 신관님과 잘 이야기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말했다.

"카슨 형님을 아십니까…?"

"…음, 일단은 친우입니다."

루시온의 물음에 남자는 껄끄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쨌든,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헤인트 트리아. 이후에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루시온은 헤인트의 뒷말이 귀에 닿질 않았다.

붉은 실.

그리고 헤인트 트리아라는 이름.

'이런… 미친!'

루시온은 일그러진 얼굴을 막지 못했다.

소설 '어둠의 손아귀'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28화. 조짐이 보인다

[루시온?]

"괜찮습니까?"

러쉘과 헤인트가 동시에 물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현기증이 왔을 뿐입니다."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다.

붉은 실로 엮여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헤인트가 형님하고 아는 사이라니.'

루시온은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헤인트는 내가 흑마법사라는 걸 몰라.'

헤인트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자신을 공격해 마음의 빚이 있는 상태였다.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소설 속 헤인트와 루시온이 엮이는 이유는 루시온이 타락했기 때문인데. 타락하지 않은 내가 왜 주인공하고 엮이는 거지?'

루시온은 이 기묘한 만남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선,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첫인상은 좋게.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루시온은 최대한 지을 수 있는 만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러쉘이 오만상을 찌푸리니 제대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카슨의 동생분이셨습니까?"

헤인트의 눈이 커졌다.

제법 많이 봤던 반응이라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좋지 않은 쪽으로 유명하니 어쩌겠나.

"예.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온은 지금 자신이 소문과 다르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 가죽을 움직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헤인트는 갑자기 재차 사과했다.

"아닙니다. 조금 쉬면 나아지니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카슨에게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녀석이 무뚝뚝해도 루시온 님의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의외의 말에 루시온의 고개가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헤인트는 신관들에게 다가가 말을 나눴다.

거리가 멀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루시온은 잠깐 한시름을 놓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

"상황이 좀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라타를 쓰다듬었다.

기운이 없는지 축 늘어져서는 코를 벌름거리는 게 전부였다.

[네가 어둠을 움직이지 않으면 들키지 않아. 그러니 등받이에 좀 기대고 있어.]

러쉘은 의자 등받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등받이에 기댄 루시온은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루시온은 게이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타락한 흑마법사가 설치던 시각은 많이 줘봤자 고작 10분.

그사이에 게이트까지 향하던 길도, 지붕도 전부 무너져버렸다.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흑마법사의 시체마저 어느새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타락한 흑마법사의 최후는 저렇게 비참했다.

살았던 그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마저.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않을 테다.'

루시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

게이트는 수백 명이 한 번에 탈 수 있었다.

'가동'이라는 직원의 말과 함께 일순간 눈앞이 새하얀 빛에 휘감겼다.

마차 창문 너머 보이던 사람들은 온데간데 보이질 않았고 마치 혼자만 우주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곧 온몸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느낌이 이어져 루시온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숨 쉬어, 루시온.]

"…허억."

무언가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숨일 줄이야.

러쉘이 아니었다면 게이트를 타다 질식할 뻔했다.

[게이트의 그 기분 좋은 느낌에 매료가 돼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람들이 아주 가끔 있긴 했는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네?]

러쉘은 이때다 싶어 루시온을 놀렸다.

루시온이 재차 숨을 쉬었을 때는 자신을 감쌌던 모든 느낌이 사라졌다.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귀가 '웅웅'거리고 아주 잠깐 어지럽기까지 했다.

―재밌다! 라타는 한 번 더 타고 싶어!

라타가 언제 늘어졌냐는 듯이 꺄르르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괜찮느냐."

카슨이 입을 열었다.

루시온은 먹먹한 귀 때문에 침을 꼴깍 삼킨 뒤에 대답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처음이라 그럴 뿐이다."

"제법 재미있네요."

루시온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카슨은 잠깐 입꼬리를 올렸다.

"그 녀석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하거라. 백작가의 자제이니 뜯어갈 수 있는 게 꽤 많다."

"원래부터 아시던 사이셨습니까?"

"몇 년 전, 기사단 임명식에서 만났다."

카슨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형님께서는 제가 헤인트 님에게 무얼 요구하면 좋겠습니까?"

헤인트를 잘 아는 사람은 카슨이었다.

기왕 가질 거 좋은 걸 가져야지.

"녀석에게 '님'자는 필요 없다."

팔짱을 낀 카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쨌든, 검을 요구하거라. 기사 가문이기에 좋은 검들을 가지고 있지. 너도 곧 필요할 테니."

자신이 반드시 검을 잡을 수 있다는, 카슨의 말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루시온은 씨익 웃었다.

"그럼 형님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시겠습니까?"

"몇 개를 가지고 싶더냐?"

"좋은 검 하나면 충분합니다."

"두 개 더 챙겨주마."

아무래도 헤인트와 카슨의 관계는 악우인지 뜯어가겠다는 사실만으로 카슨은 살짝 미소를 그렸다.

* * *

"네놈을 초대한 기억은 없다."

카슨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의 별장에 온 불청객을 향해 말했다.

'더 강하게 말씀하십시오, 형님!'

루시온은 속으로 카슨을 응원했다.

자신과 카슨은 중부에 있는 별장에 머물게 되었다.

저택과 비슷한 분위기에 루시온이 시선을 빼앗기던 차 헤인트가 찾아왔다.

'대체 왜 여길 찾아온 건데?'

루시온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소설 시작은 가출한 헤인트가 중부로 돌아오면서 시작했다.

""기사단에서 잘려서 이곳저곳 돌다 보니 벌써 2년이 지나 있더라고. …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 변하실 줄 알았어. 하지만 변한 건 나뿐이었어.""

소설을 떠올린 루시온은 콧바람을 내쉬었다.

'지금쯤에 기사단에서 잘리고 집을 뛰쳐나와 방랑해야 하는 시기잖아.'

루시온은 붉은 실을 쳐다보았다.

어떤 반응도 없이 그저 연결되어 있었다.

"친우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헤인트는 실실 웃으며 안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꺼져라."

카슨은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 힘은 신관과 다르다니까."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지?"

헤인트는 카슨의 물음에 잠깐 주변을 살피다 카슨을 향해 소곤거렸다.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루시온의 시선이 자동으로 러쉘에게 향했다.

[뒤늦게 왔던 크로니아 기사들이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다는데?]

'…아. 아까 기사들이 모일 때 셴 놈하고 그를 감시하던 기사들이 없었지?'

타락한 흑마법사의 등장에 셴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카슨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헤인트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래, 그래. 유령인 내가 들어줘야지.]

루시온의 시선에 러쉘은 벽 너머로 움직였다.

"네가 그들을 봤다고?"

카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인 걸 봤어."

헤인트는 목소리를 살짝 줄였다.

카슨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자 헤인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연회가 끝날 때까지 머물게 해줘."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거짓말은 아니야. 그냥, 집에 사고를 좀 쳤거든."

카슨은 그 말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 너도 알다시피 집에선 내가 신관이 되길 원하잖아? 그런데 나는 기사가 됐고."

"또 잘렸나?"

"어. 아버지께서 또 기사단을 압박했어. 결과는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잘렸고."

헤인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홧김에 난리를 좀 피웠어."

"저택을 부수기라도 했나?"

"미친놈! 멀쩡한 저택을 왜 부숴?"

"그럼?"

"아버지께서 아끼시던 검을 훔쳤거든."

헤인트는 슬쩍 허리춤에 찬 검을 빼내었다.

날에 새겨진 문양을 보자 카슨의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단순히 아끼는 검이 아니라 트리아 가문의 가주에게 주어지는 검이었다.

"미친 새끼."

오랜 경험상 카슨이 허락했다는 걸 알아차린 헤인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시장을 구경하다가 너희 집 기사가 혼자 다니길래 너무 이상해서 뒤쫓았지."

기사는 2인 1조로 움직이는 게 기본이었다.

"마차로 올라타서 누군가를 만나더라고. 마차에는 문양이 없어서 어떤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냄새가 났어."

"진짜 냄새를 말하는 건가?"

"맞아. 영애들이 주로 쓰는 향수 같았는데. 음, 상큼 달달? 정확히는 모르겠어."

"정확한 향을 알아내면 허락하겠다."

카슨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자, 잠깐만 카슨!"

문이 열리는 소리에 루시온은 표정을 다잡았다.

러쉘을 통해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모두 들었다.

'상큼 달달한 향? 텔라는 이 냄새가 뭔지 알고 있으려나.'

루시온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연회가 열리면 슈트라와 헬론이 훔치려고 했던 금속 상자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물어볼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오늘 텔라를 만나기로 했다.

슬슬 그녀와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

"이 녀석은 신경 쓰지 말고 쉬거라, 루시온."

카슨은 아직도 현관 근처에 서 있던 루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 형님도, 헤인트 님도 푹 쉬십시오."

카슨을 쫓아가던 헤인트는 루시온의 말에 멈췄다.

형제가 어쩜 저렇게 다른지.

"감사합니다. 루시온 님도 푹 쉬셨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헤인트가 살짝 민망해하다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도련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럼,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사태가 진정이 되자 별장을 관리하던 집사가 루시온에게 말을 걸었다.

실제로 루시온을 보는 건 처음이라 긴장한 모습이 빤히 보였다.

"나는 약속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오겠네. 형님도 이미 알고 있으니 안내는 나중에 받겠네."

직접 걸어서 온 것도 아니고, 편하게 마차와 게이트를 통해 중부에 왔기에 루시온은 그다지 피곤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까먹었나 싶어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러쉘은 실실 웃으며 슬쩍 루시온을 팔꿈치로 건드렸다.

[역시 기억하고 있었네.]

"시끄럽습니다."

루시온은 문을 열며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텔라가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흄이 조용히 물었다.

루시온은 목소리를 내려다 그만뒀다.

텔라하고 자신은 그저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가.

[루시온의 하나밖에 없는 친우지.]

이때다 싶어 러쉘이 루시온 대신 대답했다.

[직접 봐봐. 아, 루시온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해서 너무 놀라지 말고.]

러쉘은 팔짱을 낀 상태로 낄낄 웃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영애."

텔라에게 인사하는 루시온의 밝은 미소에 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봐봐. 놀랄 거라고 했지, 흄?]

러쉘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듯이 루시온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루시온은 주변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고 웃는 얼굴을 사수했다.

"오랜만이에요, 공자. 그간 잘 지내셨나요?"

텔라 역시 활짝 웃었다.

"예. 잘 지냈습니다."

"중부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공자께서 조용한 곳을 좋아하실 것 같아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혹시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아닙니다. 조용하니 마음에 듭니다."

루시온은 진심이었다.

가게를 통째로 빌렸는지 입구에서부터 사람이 없어 딱 좋았다.

"공자 덕에 제가 이전에 관리하던 은행을 다시 경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텔라가 편지에 썼던 잃어버린 기회가 경영권 회복이었음을 알자 루시온은 웃음을 꾹 눌렀다.

살짝 얹은 숟가락 하나의 크기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꽤 컸다.

'꽤 짭짭할 거래였네.'

루시온은 텔라와 했던 거래를 생각하며 만족했다.

"공자께서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경영권 회복이 아닙니까?"

"단순히 경영권 회복이 아니에요. 공자 덕에 가주의 자리에 도전할 기회를 다시 손에 넣었답니다."

"...!"

루시온은 입이 벌어졌다.

경영권과 가주의 자리는 차원이 달랐다.

더는 숟가락 하나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공자.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돕겠습니다."

텔라는 감사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은 그제야 자신을 향한 텔라의 호의를 이해했다.

자신은 그녀에게 있어 구원의 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 바로 영애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루시온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9화. 조짐이 보인다(2)

"아, 일단 맛있는 것부터 시킬까요?"

루시온은 곧 이곳이 디저트를 파는 가게라는 걸 떠올렸다.

일단 뭐라도 시켜놓아야 대화가 부드럽게 흘러갈 터.

"좋아요!"

텔라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저보다 디저트가 목적이신 걸로 보입니다."

루시온은 반짝거리는 텔라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어? 저 여우는 공자의 여우인가요?"

텔라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자 루시온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온 거야?'

라타가 신이 난 채로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라타는 고기도 좋고, 디저트도 좋아!

[방금 나왔어. 그러니까, 텔라가 '맛있는 걸 시킬까'라고 물어봤을 때 말이야.]

러쉘이 키득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루시온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꾹 참아가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 여우입니다."

"검은 여우는 처음 봤어요. 엄청 귀여워요!"

―이히히. 라타는 귀여워.

텔라의 칭찬에 라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꼬리를 흔들었다.

"제가 데려가겠...."

흄은 물러날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 라타의 등장에 좋은 구실을 하나 찾았다.

"아니. 내버려 두고 넌 밑에서 대기하고 있어."

루시온은 손을 들어 흄을 제지한 뒤에 그를 보냈다.

"영애."

라타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텔라는 루시온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예, 예?"

"저는 디저트를 잘 모르니 영애께서 시켜주셨으면 합니다."

"그럴까요?"

텔라는 거절하지 않고 종업원을 불러 무서운 기세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이거 하고, 이거. 아! 검은 입술의 유혹하고 그리고...."

'이 정도는… 식사가 아닐까?'

[디저트라며?]

루시온과 러쉘은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텔라의 손가락에 살짝 놀랐다.

얼추 들린 것만 해도 8개가 넘었다.

텔라가 주문을 마치길 기다렸다 루시온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영애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두 개가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텔라의 목소리가 밝았다.

아무래도 디저트의 효과인듯했다.

"하나는 저번 루테온 은행에서 벌어진 일과 관련되어 도움받을 게 있습니다."

"혹시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텔라는 이전 사건이 나오자마자 흥분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입니다."

루시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제 물건이 강도들에게 뺏길 뻔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고 있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당시 루테온 은행에서 보관 중이던 금속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어.... 아! 그거라면 당장 보여드릴 수 있어요."

"예…?"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잖아요. 은행 용병인 바르의 움직임을 분 단위로 파악하고, 결계 술사까지 이용할 정도로 치밀했어요.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사를 열심히 했답니다."

텔라는 들고 왔던 가방을 뒤졌다.

곧 자료를 루시온에게 넘기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자료를 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은행의 신뢰와 관련된 문제라 여기서만 보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임에도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루시온은 고마움을 담아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러쉘이 황급히 양팔을 문질렀다.

아무래도 소름이 돋는 모양이었다.

[…하.]

루시온은 러쉘이 그러든 말든 그가 잘 볼 수 있게 자료를 천천히 넘겼다.

러쉘의 좋은 기억력을 빌릴 차례였다.

'노예 상인은 뭘 찾으려고 했을까?'

루시온은 자료를 살피며 생각했다.

슈트라와 헬론에게 금속 상자를 가져오라고 시킨 건 정체 모를 노예 상인이었다.

자신이 착용한 귀걸이.

이 귀걸이는 러쉘이 만들었기에 세상에서 유일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흑마법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귀걸이를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흑마법사뿐이니까. 만약 신전 쪽에 넘어갔다면....'

루시온은 끔찍한 상상에 몸이 절로 떨렸다.

"바람이 센가요?"

텔라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잠깐 자료를 내려놓고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시온은 다시 자료를 살피다 무언가를 보고는 손을 멈췄다.

'이 물건이… 여기에 왜 있어?'

루시온의 눈동자가 한 팔찌에 멈춰 있었다.

'라르비스의 눈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팔찌는 신의 물건이라 불리는 '성물'보다 못하지만, 빛의 힘을 가진 물건이었다.

주인공인 헤인트가 나중에 얻게 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방랑하던 도중에 얻게 되는 물건이 왜 여기에?'

루시온이 팔찌를 빤히 보자 러쉘도 덩달아 지그시 쳐다보았다.

[팔찌가 생긴 게 괜찮네.]

태연한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잠깐 주춤거리다 곧 소유자를 살폈다.

'소유자가… 응?'

루시온은 소유자 옆에 새겨진 X 표시를 보자 텔라에게 물었다.

"옆에 이 표시는 무얼 뜻하는 겁니까?"

"아, 그건 이제 물건의 소유자가 은행이라는 뜻이에요. 보통 소유자가 사망했을 때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요."

텔라는 유창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는 마법 아이템을 통해서 물건 등록 시, 소유자가 지닌 마나를 등록해 생사를 확인하거든요."

'그런 기능도 있었어?'

루시온은 신기함에 눈이 동그래졌다.

"어쨌든, 저희는 소유자 사망 시, 처음 기재하셨던 주소로 물건을 찾아가시라는 편지를 보내요. 5번의 편지가 갔음에도 물건을 찾아가지 않으면 저희 소유가 된답니다."

텔라는 다시 팔찌를 보는 루시온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원하신다면 그 팔찌는 선물로 드릴게요."

"그래도… 됩니까?"

루시온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팔찌만 있다면 신관에게 굳이 빛을 맞지 않아도 빛의 내성을 확실하게 올릴 수 있었다.

"물론이죠. 저도 공자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좋은데요.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께서 공자께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시더라고요."

"선물이라뇨.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루시온은 마치 물욕이 없는 듯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어.]

혀를 차는 러쉘의 목소리에 뒤에서 들려왔다.

"아니에요. 이 물건은 제가 책임지고 연회가 끝나는 날 바로 별장에 올 수 있도록 처리할게요."

텔라는 찜을 해두었다는 듯 '라르비스의 눈물'을 중얼거렸다.

"잘 봤습니다."

루시온은 자료를 더 뒤적거리다 텔라에게 내밀었다.

금속 상자에 든 물건은 가지각색이었고, 그것만으로 무얼 찾고자 했는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팔찌라도 얻어서 다행이네.'

[네가 액세서리를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루시온은 순간 흘릴 뻔한 웃음을 참았다.

러쉘이 저 팔찌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아마 깜짝 놀라다 못해 기겁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머지 하나가 또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텔라는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탁.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디저트다! 디저트! 라타가 좋아하는 디저트!

"일단 먹고 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라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텔라 역시 만족했다.

* * *

킁킁.

텔라는 손목에 뿌린 향수를 비비더니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도르르 움직이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이게 맞아요. 이거."

텔라는 분홍색 하트 모양을 띤 향수를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이게 그… 상큼 달달한 향입니까?"

살짝 부담스러운 향수 용기에 루시온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네. 향수의 이름은 '그대를 보며'이지만요. 요새 이런 향으로 나온 향수는 이것뿐이에요. 맡아보시겠어요?"

[향기가… 음, 내 취향은 아니야.]

러쉘은 향을 맡자마자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라타는 이 냄새가 좋아. …아! 아까 먹은 아이스크림 냄새도 나.

라타는 연신 코를 벌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런 냄새인가?'

라타 말대로 루시온은 아이스크림과 비슷한 냄새도 살짝 맡았다.

오렌지 향도 코끝에 살짝 감도는 게 참 알 수 없는 냄새라 생각했다.

어쨌든 냄새를 모르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게 훨씬 나았다.

셴이 만났던 그놈.

그놈이 자신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라도 연회 때 일부러 접근할 테니까.

* * *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루시온은 텔라가 타고 온 마차로 가서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오늘, 여러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어요. 이제 좀 친해진 기분이 드는걸요."

텔라는 미소를 내보이며 마차에 올랐다.

"그럼, 내일 연회 때 뵐게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루시온은 마차가 움직이자 더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도련님. 이제 공격해도 되겠습니까?"

흄이 옆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장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러쉘이 알려주었다.

적은 4명.

'이번에는 진짜 호레이온 자작가 놈이 보낸 암살자들이고.'

루시온은 러쉘을 통해 적의 정체를 알았다.

아무래도 이번 연회 참석 명단에서 '루시온 크로니아'라는 이름을 보고 계획을 한 것 같았다.

'이 계획을 주도한 건 호레이온의 장남이겠지.'

호레이온의 가주가 아무리 아들 때문에 열이 받았다고 해도 이 정도로 일을 엉성하게 벌일 리가 없었다.

'놈은 이곳 도시에 있을 테고.'

루시온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피해, 적들이 우위라고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도시 밖으로 향했다.

"흄."

어느 정도 도시와 떨어졌다 생각할 때쯤,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예, 도련님."

"사람을 죽일 줄 아나?"

"예. 압니다."

"그래. 저놈들은 오늘 여기에서 죽는다."

루시온은 걸음을 멈춰 놈들을 보았다.

해가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는 시각.

루시온은 적이 움직이기 전에 단숨에 그들을 어둠으로 감아 움직임을 빼앗았다.

"죽여."

루시온의 명령에 흄이 움직였다.

* * *

"늦었구나."

카슨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카슨이 자신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덩달아 길을 안내하던 집사도 놀랐다.

―이히히. 라타는 놀라지 않았는데.

라타만 재미있다는 듯 활짝 웃었다.

집사는 카슨의 모습에 조용히 물러났다.

"야시장을 둘러보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사실이었다.

루시온은 몸에 묻은 피 냄새를 지워버리려고 일부러 야시장을 들렀다.

"내 도움이 필요하더냐?"

카슨의 물음에 루시온은 흠칫 놀랐다.

[카슨 앞에서는 네 잔머리가 통하질 않네.]

러쉘이 빈정거렸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설마 귀신같이 피 냄새를 맡을 줄이야.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어설프지만, 크로니아입니다."

"그래. 얼른 자거라."

카슨은 그대로 돌아서 복도를 걸었다.

루시온 역시 방으로 들어갔다.

대충 옷을 벗어 던지던 차 러쉘이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그, 음....]

"스승님."

[그래.]

"전 크로니아입니다. 변경에서 자랐지요. 제가 검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전쟁을 보고 자랐습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익숙합니다."

루시온은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그나저나 내일, 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4명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호레이온 자작가의 장남이 머무는 여관을 알려주었다.

"아쉽습니다. 원래는 검을 배워 꺾으려고 했는데 인연이 닿질 않네요."

[죽일 셈이야?]

러쉘이 조용히 물었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루시온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를 재촉했을 테지.

"아뇨. 죽이지 않을 겁니다."

루시온은 태연한 말과 함께 라타를 쓰다듬었다.

"죽는 건 본인이 선택해야 할 겁니다."

* * *

신수 탄생 축하 연회이기에 밤이 아닌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루시온은 닭이 울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시녀들에게 몸을 맡겼다.

주린 배를 감싸며 옷을 몇 벌이나 갈아입었는지, 수백 개가 넘는 장식품을 옷에 맞춰야 하기에 마네킹처럼 서 있어야 했고, 두피가 끊어질 정도로 머리를 빗었으며 신발을 또 몇 켤레나 갈아 신었는지.

루시온은 겨우 마차를 타서야 한숨을 돌렸다.

신수를 보기 위해 길거리에는 벌써 사람들로 복작거렸고, 4차선만 한 크기의 길 한쪽에는 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고위 귀족이라 다르긴 달라.]

러쉘은 줄지어 선 마차와 싱싱 잘도 달리는 크로니아의 마차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마부의 소리와 함께 루시온은 잠에서 깨어났다.

드디어 연회였다.

루시온은 마차 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맡으며 땅으로 내려왔다.

30화. 조짐이 보인다(3)

'더럽게 크네.'

연회의 장소는 수도에 있는 대신전이었다.

황궁을 노릴 만큼 커다랗고 새하얀 신전의 모습에 절로 다리가 아픈 기분이 들었다.

―우우. 라타는 여기가 싫어.

루시온의 그림자 속에 있는 라타는 축 늘어진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빛의 내성을 얻었기에 라타 역시 빛의 내성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라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문제였다.

'속도 울렁거리고 몸도 무겁다.'

루시온은 천천히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빛의 내성이 있다 한들, 아직 빛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오래 있을 장소가 아니니까 적당히 치고 빠져.]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아침에 라트초를 두 개나 더 먹었으니까 내성이 얼마나 늘어나려나.'

자신의 소문을 바꾸고, 내성도 늘리고, 겸사겸사 귀족들이 흘리는 정보도 얻고.

연회는 3일이나 진행되기에 그사이 뽑아 먹을 것들이 많았다.

'오래 있어야지. 오래.'

[그나저나 대신전인데… 빛이 좀 약하네. 연회 때문인가?]

러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전에 감싸진 빛이 적구나."

카슨 역시 마차에서 내리며 러쉘과 같은 말을 꺼냈다.

"빛이 적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대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적구나. 그렇다고 너에게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 루시온?"

연회에 오기 전에 카슨이 자신의 자유를 보장해주되, 안전이 자유보다 우선시 된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예. 잊지 않았습니다. 제 안전이 먼저죠."

"그럼, 저번처럼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뛰지 말고 내 뒤만 따라오거라."

"…생각보다 꽁하십니다."

"뭐?"

"어쨌든, 명심하겠습니다."

루시온은 피식거리며 카슨의 뒤를 따랐다.

루시온과 카슨 뒤로 셴을 포함한 기사들과 시종들이 뒤따랐다.

기사와 시종의 숫자는 곧 귀족이 가진 힘을 뜻했고, 기사가 많을수록, 시종이 많을수록 고위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카슨 앞에서는 뒤따라오는 기사와 시종은 몇 명이든 상관없었다.

노비오를 이어 변경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카슨 크로니아.

그의 얼굴을 모르는 귀족은 몇 없었다.

"카슨 크로니아 공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카슨의 위용에 시선을 빼앗긴 귀족 청년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변경이 강해지면 골치가 아픈 건 자연스레 황실이었다.

좀처럼 중부로 오지 않는 크로니아가 이 연회에 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카슨의 뒤를 따르는 낯선 소년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잠시 말을 멈춘 귀족 청년들은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크로니아의 둘째 자제분이신 루시온 크로니아가 아닐까 합니다."

그때, 마른 귀족 청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곧 남자를 비웃듯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 대낮부터 술에 취하셨습니까? 저게 어딜 봐서 루시온입니까? 다시 봐보세요. 그놈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닌단 말입니다."

"애초에 그놈이 미쳐서 날뛰면 어쩌려고 여기에 보내겠습니까?"

귀족들의 대화에 마른 귀족 청년이 언짢다는 듯이 물었다.

"크로니아의 둘째 자제분께서 여기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귀족의 수치가 아닙니까."

"흑마법사에게 사술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괜히 떠도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방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여기까지 올 용기라도 있겠습니까?"

귀족 청년들은 낄낄 웃으며 재미있는 구경을 한 듯이 마른 귀족 청년을 바라보았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그놈을 감싸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괜히 싫은 소리 듣기 싫으면 말입니다."

귀족 청년들은 마른 귀족 청년에게 경고하며 카슨의 뒤를 쫓았다.

"병신 같은 놈들."

마른 귀족 청년 역시 그들을 비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잘들 논다.'

루시온은 새어 나오는 코웃음을 막지 않았다.

가만히 걷기만 해도 자신이 누구냐는 듯,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온은 무의식중에 손을 올리다 잠깐 멈칫거렸다.

오늘은 늘 뒤집어쓰던 후드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러쉘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정작 제일 신경 쓰는 건 스승님이면서.'

루시온은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대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8차선 도로 크기만 한 길 하나가 전부였다.

하늘은 맑았고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대신전의 모습과 그 웅장한 크기에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노렸네.'

길 양쪽 옆에는 정원과 천사의 형상을 한 석상이 넓은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 고요한 대신전의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

정원에는 잘 정돈된 라트초가 가득 피어 있자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여기서 하나 더 뜯어먹어도 되겠는데?'

[루시온.]

속마음을 읽은 건지 러쉘이 귀신같이 자신을 불렀다.

루시온이 카슨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벌써 소규모 모임을 시작한 귀족들이 보였다.

"카슨."

헤인트의 목소리에 카슨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덩달아 루시온이 살짝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오지 않겠다며."

카슨이 헤인트를 보며 말했다.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한테 기회잖아? 이번에는 아버지의 입김이 닿지 않는 기사단으로 잡아봐야지. 가령, 크로니아...."

"넌 안 된다."

카슨은 단칼에 거절했다.

헤인트는 빛의 힘을 사용했다.

실력을 떠나 노비오가 그를 허락하지 않겠지.

"나도 알아. 그냥 던져봤어."

헤인트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곧 루시온을 향해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시온 님."

"예. 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셔도 괜찮은 겁니까?"

헤인트는 루시온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인정머리 없는 카슨 녀석이 억지로 데려왔다면 슬쩍 신호를 주십시오. 제가 해결하죠."

"형님께서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오겠다고 했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우습게도, 이곳에 오는 게 더 안전합니다. 더 가만히 있다가는 뭣도 모르는 이들에게 제 살점이 뜯겨나갈지도 모를 판이었거든요.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와....'

헤인트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의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묵직했다.

'카슨 녀석이 걱정할 만하네.'

저런 소리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왠지 뒤가 없어 보이는 게 영 불안했다.

"그래도...."

"잡담은 거기까지."

카슨이 헤인트의 말을 잘라냈다.

이 이상 지껄이지 말라는 카슨의 경고에 헤인트는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루시온은 헤인트를 따라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헤인트 님."

루시온은 막 자리를 떠나려던 헤인트를 불렀다.

헤인트와 연결된 붉은 실.

저 실을 어떻게 잘라내야 하나 어젯밤 잠들기 전에도, 아침을 먹으면서도 고민했다.

하지만 조금 전 결론을 냈다.

'소설 속 헤인트와 루시온의 관계는 악연.'

루시온이 만든 저주가 중부를 휩쓸었고, 그중 헤인트의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헤인트의 관계가 악연이 아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겠어?'

루시온은 확인을 위해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헤인트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팅!

정답이라고 알려주는 듯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예상이 맞았다…!'

루시온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

헤인트는 놀란 표정을 급하게 숨겨보지만, 티가 너무 났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다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야 영광입니다. 형님들뿐이라 늘 동생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됐다.'

루시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붉은 실이 잘리지 않아 아쉬웠지만, 상대는 주인공이었다.

그와 악연이 깊은 만큼 붉은 실을 자르는 것 역시 장기전이 될 거라 예상하던 차였다.

"감사합니다, 헤인트 형님."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카슨을 보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형님?"

"가자."

카슨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앞으로 걸었다.

[네가 헤인트랑 그렇게 친해지고 싶은 줄 몰랐는데?]

'무슨 소리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에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루시온."

카슨이 입을 열었다.

"예, 형님."

"헤인트 저놈이 가끔가다가 열 받을 만한 짓을 하긴 해도 그렇게 못난 놈은 아니다. 네가 사람을 보는 눈은 있구나."

"...?"

느닷없는 이야기에 루시온은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헤인트가 자신에게 실수한 건 없었다.

"내 나중에 아버지와 말을 나눠보마."

"예…?"

카슨은 그대로 말을 아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건데?'

루시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슨의 뒤를 쫓았다.

* * *

대신전 안에 있는 대강당은 수백 명을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벌써 문 너머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

루시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대신전 안까지 들어왔을 때는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대강당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잠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빛의 힘이 무겁고 강해졌다.

라타는 대신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나마 쫑알거리던 입도 아예 다물었다.

[루시온. 돌아가자. 기회는 다음번에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해.]

러쉘은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루시온의 어둠이 죽는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괜찮겠느냐?"

카슨 역시 입을 열었다.

밖과 안의 빛이 달랐다.

루시온에게 굉장히 버거울 터.

루시온은 제자리에서 숨을 몇 번이나 쉬었다.

연회 시작 15분 전.

아침에 먹었던 라트초가 지금 대강당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반응해서 얼른 내성을 올려줬으면 했다.

루시온은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버틸 만합니다."

러쉘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똥고집.]

'이런 좋은 기회를 코앞에서 놓칠 수 없지.'

루시온은 카슨에게 얼른 가라고 재촉하며 흄을 보았다.

"흄."

"예, 도련님."

"넌 나하고 간다."

연회인 만큼 작위 없는 자가 대강당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노비오가 미리 대신전 쪽에 말해 흄만은 예외로 허락했다.

'권력이 좋긴 좋아.'

루시온은 슬쩍 웃었다.

말이 부탁이지 노비오가 대신전에 강한 압박을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문 앞에는 시종 대신 회색 옷을 입은 신관들이 서 있었다.

카슨은 더도 말고 크로니아의 가문 문장이 박힌 목걸이를 내보였다.

탁.

문이 열렸고, 신관들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크로니아 가문의 기사이신 카슨 크로니아 공과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서 입장하십니다."

신관들은 모든 귀족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그 외침은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였다.

떠들썩하던 대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카슨에게 잠깐 머물다가 곧 루시온에게로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카슨 뒤를 따르는 소년의 정체에 대해 말을 나누던 참이었다.

그런데 루시온이라니.

그 루시온 크로니아라니.

[푸하핫!]

러쉘은 입을 다무는 귀족들의 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입 벌어진 거봐라.'

루시온은 얼이 빠진 귀족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마치 소문을 믿던 귀족들을 병신이라며 비웃듯.

31화. 신수 탄생 연회?

"루시온."

카슨은 안으로 들어가다 갑자기 루시온을 불렀다.

고요한 대강당에서 카슨의 목소리는 제법 크게 울렸다.

얼이 빠진 귀족들을 향해 카슨이 다시금 자신이 루시온 크로니아라는 걸 똑똑히 알려주고자 일부러 불렀다는 걸 눈치챘다.

"예, 형님."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옷이 구겨졌구나."

카슨이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키며 뒷말을 잇자 루시온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아, 감사합니다. 대신전의 웅장함을 구경하다가 옷이 구겨졌는지도 몰랐습니다."

카슨과 자신이 나눈 말은 평범했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는 아니었다.

카슨이 먼저 루시온에게 말을 걸어 루시온과 말을 섞으면 저주가 걸린다는 소문을 뒤집었고, 이를 루시온이 태연하게 맞장구치면서 미쳤다는 소문 역시 싹 덮어버렸다.

그간 크로니아에서 루시온의 소문을 막지 않은 건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귀족들은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렸다.

"그나저나 형님."

루시온이 옷을 펴며 입을 열었다.

"말하거라."

"연회임에도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는 이렇게 조용한 겁니까?"

루시온의 태연한 물음에 귀족 중 일부만이 얼굴을 구겼다.

마치 소문에 휘둘리더니 꼴좋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신나게 루시온을 깎아내리던 귀족들은 입도 벙긋하지 않고 그의 시선마저 피했다.

"나도 그 이유가 알고 싶구나."

카슨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분위기가 험악해질까, 신관의 지시로 멈췄던 음악이 다시 시작됐다.

굳었던 피가 풀리듯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돌아왔다.

"보았더냐?"

카슨은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았습니다."

"얄팍하고 비겁하고 또 무척 얇다."

카슨의 말에는 '저들은'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

"이번 연회가 지나면 네가 생각한 대로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 거다."

"예. 제가 바라던 겁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카슨을 내버려 두고 제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서 텔라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슬슬 힘드네.'

루시온은 식은땀을 닦아내며 울렁거림을 참았다.

루시온 크로니아는 소문과 달리 멀쩡하다.

이게 자신의 목표였기에 연회 첫째 날은 성공했다.

벌써 자신을 보는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매번 후드만 뒤집어쓴 모습에서 멀쩡히 꾸민 그 자체로도 호감을 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하지만 러쉘은 실망했다.

루시온은 흄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바닥은 원래 그런 겁니다. 얇고 넓죠."

[거지 같네.]

러쉘은 루시온을 걱정스레 보았다.

얼마나 허무할까.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지만, 밀려드는 허탈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정말로 이렇게 간단한 일을.

[어쨌든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이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네가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놈들도 많잖아.]

"안색이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흄은 주변에 쏠리는 시선을 의식해 일부러 러쉘의 말을 빌렸다.

'상식은 부족하지만, 눈치는 있네.'

루시온의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직 연회가 시작되지 않았는데 자리를 비울 순 없지. 괴롭지만, 조금 참아봐야지."

루시온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하이에나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한 방 크게 당했으니 어떻게든 물어뜯으려 안달이 나 있을 테지.

"…신력 알레르기가 있으셨어요?"

루시온에게 다가오던 텔라가 멈칫거렸다.

"아, 영애. 좋은 아침입니다."

"제, 제가 무슨 실수를.... 정말 죄송해요. 저는...."

텔라가 울상을 짓자 루시온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이쿠. 울렸네. 울렸어.]

러쉘은 실실 웃는 얼굴로 당황한 루시온을 놀렸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런 좋은 연회에 초대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루시온은 오늘 자신이 이렇게 빨리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다.

텔라는 코를 훔치다 들고 온 음료수를 시종에게 맡겼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이럴 게 아니라 증상이 더 심해지기 전에 저랑 나가요."

"아직 연회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음악이 멈췄다.

루시온은 흄에게 물었다.

"몇 시지?"

"10시가 되기 5분 전입니다."

탁.

문이 열렸고, 까만 옷을 입은 신관들이 천천히 들어왔다.

"앉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영애?"

루시온은 싱긋 웃으며 텔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더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신관들은 암막 커튼을 쳐 빛을 차단하고 불을 끄며 신수를 지닌 신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10시입니다."

흄이 시간을 알려주었다.

정확히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매 끝이 검은, 새하얀 옷에 입은 신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 회색 옷을 입은 신관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루시온은 신관들의 존재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복부를 세게 맞은 느낌인데…?'

"방금 새하얀 옷에 소매 끝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보셨죠?"

언제 우물쭈물했냐는 듯 텔라가 속닥거렸다.

"보입니다."

"신수를 가진 신관만이 입을 수 있는 복장이래요."

"그렇습니까?"

"신성 국가 네바스트말고 여기 제국에서 신수를 가진 신관이 무려 20년 만에 나타났대요. 아, 이건 특급 정보인데요."

텔라는 더 목소리를 낮췄다.

"황실에서도 사람이 와요."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황실에서 사람이 온다고?'

솔직히 소설에서 황실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누가 차기 황세자가 되는지는 알고 있었다.

[…와. 이러다 황자하고도 마주치는 거 아니야?]

러쉘은 김칫국부터 마셨다.

"놀랐죠? 그럴 줄 알았어요."

텔라는 루시온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렇지만 누가 오시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은행 일을 하다 보면 시시콜콜한 정보를 다 듣게 되거든요. 이 정보도 거기에서 얻었답니다."

루시온은 텔라의 말이 중반부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친.'

이번 연회의 주인공인, 신수를 지닌 신관을 뒤따르던 회색 옷을 입은 신관 중 하나가 들어오자마자 붉은 실이 보였다.

'미친!'

자신과 그 신관, 그리고 대강당에 있는 모두에게 뻗어나는 붉은 실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돌았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루시온은 생각해야 했다.

전환점이면서 대강당에 있는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건.

단순하게 생각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테러다!'

"공자…?"

텔라는 대답이 없는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뒤쪽에서 헤인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슬아슬했네."

"...!"

텔라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막 커튼을 쳐놔 의지할 빛은 신관들이 들고 있는 촛불이 전부라 대강당은 무척 어두웠다.

"아, 죄송합니다. 연회 시작 시각을 착각해서 몰래 슬쩍 들어왔는데… 루시온?"

헤인트는 민망하다는 듯이 말하다 루시온을 보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아시는 분이세요?"

텔라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물었다.

"예. 제 동생입니다. 물론, 친동생은 아니고요."

"바, 반갑습니다. 저는 루시온의 친우인 텔라 루테온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 저는 헤인트 트리아라고 합니다."

"형님."

루시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차분히 헤인트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무거워 헤인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만약 여기에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면… 보통 어떤 식으로 일어납니까?"

헤인트는 기사였다.

당연히 이런 쪽에 경험이 많을 터.

"보통 결계 술사가 그 장소를 결계로 집어삼키는 경우가 많아. 하지만 대신전이라는 장소를 고려했을 때, 빛의 힘 때문에 결계를 세우는 건 힘들어. 그러니 폭발이 제일 효율적이야."

헤인트는 이유는 묻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폭발이라....'

루시온은 잠깐 생각했다.

만약 폭발이 정답이라는 가정하에 그 신관이 등장했을 때, 붉은 실이 나타난 걸 보면 폭탄 스위치를 그 신관이 가진 게 틀림없었다.

[네가 의미 없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고. 뭔가 이상한 점을 찾으라는 거지?]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끄덕이듯 고개를 숙였다.

"두 분 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루시온은 당장 텔라와 헤인트에게 사과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한 수준의 발언이었다.

"카슨 형님께서 대신전의 빛이 약하다고 말씀하신 게 괜히 마음에 걸려서 물어보았습니다. 변경에는 여러 일이 일어나 저도 모르게 예민해진 것 같습니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진짜 이상하네."

헤인트는 팔짱을 꼈다.

"아무리 오늘 연회가 열리더라도 이 정도로 빛의 힘이 떨어지는 건 흑마법사들에게 그냥 먹이를 던져주는 셈인데."

"먹이라뇨? 어떤 먹이를 말씀하시는 건데요?"

텔라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어둠은 빛에 닿으면 소멸합니다. 반면 빛은 어둠에 닿으면 타락하죠."

[정확히 타락한다는 사실은 최악의 상황이고 보통은 빛의 힘을 잃을 뿐이야.]

러쉘은 한 명씩 둘러보며 말을 덧붙였다.

"신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흑마법사가 신수를 타락시킨 기록이 있습니다."

러쉘은 또 헤인트의 말에 주석을 붙이듯 설명했다.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못 써. 신수의 주인이 힘을 잃어버리면 덩달아 신수가 사라지거든. 그래도 그 며칠간은 꽤 쓸 만하지.]

"정말요?"

텔라가 놀라며 물었다.

"예. 사실입니다. 흑마법사가 대신전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관들이 내뿜은 특유의 빛의 힘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빛이 약해진다는 건...."

헤인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루시온이 그 사실을 꼬집지 않았어도 별 의심 없이 넘어갔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긴 일개 신전이 아닌 대신전이 아닌가.

아무래도 알아봐야 할 듯했다.

"잠깐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여기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사람은 카슨이었다.

헤인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온은 라타가 숨어든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계속 말이 없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라타는 괜찮아. 부족한 어둠을 너한테 보충받으니까. 문제는 너지. 빨리 나가든가 해야 할 텐데.]

루시온의 시선을 읽은 러쉘이 주변을 뒤지다 말고 말을 꺼냈다.

"흠...."

흄 역시 제자리에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귀족들이 쓰는 화장품과 향수의 냄새가 뒤섞여 조금 괴로웠다.

이 중에서 저번 향수 가게에 맡았던 상큼 달달한 향도 섞여 있었다.

[안타깝게도 특별한 건 없어.]

러쉘이 팔짱을 끼며 결론을 내렸다.

[너도 알다시피 만약 여기에 흑마법사가 숨어 있어도 어둠을 쓰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어. 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스승님마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건가.'

루시온은 차분히 앞을 바라보았다.

신수를 지닌 신관이 대강당에 만들어진 단상에 올랐다.

그를 뒤따르던 신관들이 의식을 치르기 위해 하나씩 자리를 잡는 과정은 일사불란했다.

[미치겠네. 또 신관이 와?]

러쉘은 문을 힐끔 쳐다보다 루시온의 상태를 살폈다.

"저기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쓴 신관님은 보통 상위 신관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대신관 바로 아래의 위치죠."

텔라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오는 신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백의 옷을 입은 그녀는 머리에 검은 관을 쓰고 있었다.

그녀 역시 붉은 실에 엮여있었다.

탁.

드디어 열렸던 문이 닫혔다.

'자. 생각해 보자.'

루시온은 식은땀을 닦으며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테슬라 제국에서 20년 만에 등장한 신수였다.

'2년 후에는 신전과 신성 국가의 위치가 지금보다 더 높아지는 시점이야.'

당연했다.

소설 속 내용의 악역은 '흑마법사'였으니 자연스레 신전과 신성 국가의 위치가 올라갈 수밖에.

'분명히 이 사건이 소설 속에서 언급이 됐을 거야.'

루시온은 소설 내용을 차분히 떠올려보았다.

"'여기도 여전하네.'

헤인트는 그립다는 듯이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그때, 반 쪼가리가 났다고 들었는데.'

2년 전 대신전에서 큰 폭파 사건이 벌어졌다.

자신은 그 당시 없었으니까 정확히 무슨 사건인지 알지 못했다."

헤인트가 2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리움을 내비친 장면이 있었다.

루시온은 감았던 눈을 뜨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 폭파 사건이 이 연회인가?'

흑마법사가 벌인 일이라 결론이 났기에 흑마법사를 향한 탄압이 더 심해졌고, 신전의 힘은 자연스럽게 커졌다고 알려진 그 사건이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없어야 할 헤인트가 연회에 참석했다.

'원래는 오지 않았을 내가 여기에 왔고.'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바꿀 수 있다.'

대신전이 반 쪼가리가 날 만큼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걸 알았으니 뭘 망설이겠는가.

"공자? 의자는 갑자기 왜…?"

텔라는 루시온을 따라 시선이 올라갔다.

[잠깐만, 루시온. 너 뭐 하려는 거야? 그거 설마 던지려는 건 아니겠지?]

러쉘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시온은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창문을 향해 의자를 던졌다.

쨍그랑.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네.'

식은땀이 바람에 씻겨 내려가자 루시온은 그제야 살 것만 같았다.

불이 급하게 켜졌고, 모든 사람이 루시온을 보고 있었다.

"아,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루시온은 태연하게 웃었다.

32화. 신수 탄생 연회?(2)

[....]

러쉘은 안타까움에 저절로 튀어나올 뻔한 소리를 참아냈다.

오늘을 위해서 정말 피를 토하며 내성을 기르지 않았던가.

'미쳤다'라는 소문을 잡기 위해서 지금까지 고통을 참고 앉아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결국, 루시온은 소문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왜....'

러쉘은 너무도 속상했다.

이건 제 살을 파먹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루시온 너....]

러쉘이 말을 꾹 참는 모습에도 루시온은 입을 벙긋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입술을 움직인다면 정말로 '미쳤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늦었을 수도.'

루시온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사태를 알고도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쨍그랑!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카슨이었다.

'형님…?'

루시온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자신이라면 몰라도 카슨까지 이런 행동을 할 줄이야.

"에이!"

텔라마저 의자를 들었다.

"공자께서 이러는 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자, 잠깐만요."

루시온이 말렸지만, 이미 의자는 그녀의 손을 떠났다.

쨍그랑!

"친우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죠. 물론 어머니께 혼이 좀 나겠지만요."

텔라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흄도 슬쩍 의자를 잡았지만, 루시온의 시선에 손을 놓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상위 신관이 소리쳤다.

유리창이 순식간에 3개나 깨져버렸다.

이대로는 연회를 진행할 수 없었다.

"루시온."

카슨이 입을 열었다.

루시온은 생각이 없는 동생이 아니었다.

창문을 깨부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카슨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루시온을 위해 제르노 대신 연회에 따라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뭐든 내가 책임진다."

"감사합니다, 형님."

루시온은 창문을 깬 범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는 곧 여러 귀족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신관님들, 그리고 여러 귀족분께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귀족답게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부서진 유리와 이로 인해 일어날 피해는 크로니아의 이름을 걸고 배상하겠습니다."

고개를 올린 루시온은 상위 신관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꽤 매서웠다.

"하지만 신전 쪽 역시 저처럼 책임지셔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책임이라고 했습니까?"

상위 신관은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신전 쪽에서는 당연히 서부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을 겁니다."

루시온의 발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발 빠른 자들은 이미 소식을 접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아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일 테지.

"서부 게이트에서 흑마법사가 출현했습니다."

무엇이 되었던 장소가 신전인 이상 흑마법사보다 더 확실한 존재는 없었다.

러쉘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무슨 생각으로 의자를 내던졌는지를 알자 오히려 기특하기까지 했다.

[이 똑똑한 놈.]

러쉘은 루시온을 보며 씩 웃었다.

지금으로서 루시온이 벌인 돌발 행동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행동은 없었다.

특히 '미쳤다'라는 소문이 아직 남아 있는 루시온만이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에는 귀띔은 주고 행동해라. 진짜 놀랐잖아.]

루시온은 잠깐 피식거렸다.

러쉘마저 놀랐다면 자신의 행동은 성공한 셈이었다.

"불과 어제 벌어진 일이죠."

루시온은 웅성거림이 멎자 핵심을 짚었다.

어제 흑마법사가 서부 게이트에서 출현했다.

이 사실이 모두의 귀에 꽂혔을 무렵, 루시온은 본격적으로 허를 찔렀다.

"한데, 어째서 평소보다 빛의 힘을 약화하신 겁니까?"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귀족들도 있었다.

이 무슨 미친 소리인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귀족들의 항의가 시작됐다.

루시온은 거기에서 멈추질 않았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20년 만에 신수가 탄생된 날입니다. 흑마법사가 신수를 노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전의 미흡한 준비는 대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귀족들이 루시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상위 신관에게 다가갔다.

"다들 진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상위 신관은 귀족들의 항의에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이곳 대신전은 테슬라 제국에 있는 모든 신전의 모범을 보이는 곳으로 언제나 어둠을 따르는 존재들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루시온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공께서는 헛된 말로 혼란을 주지 마셨으면 합니다. 지금 대신전은 평소보다 더 많은 빛을 유지해 어둠을 따르는 존재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았습니다, 대신관님."

그때, 카슨이 목소리를 냈다.

"건물 내부와 밖의 빛이 따로 놀더군요."

다름 아닌 카슨의 발언이었기에 상위 신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로 느꼈습니다."

헤인트가 이어 손을 들며 발언했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죠, 상위 신관님?"

빛의 힘을 지녔음에도 신관의 길을 포기하고 검을 잡은 헤인트는 꽤 유명했다.

헤인트까지 나서자 상위 신관은 기세를 낮췄다.

애초에 빛의 힘을 가진 헤인트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법.

이쯤 되면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내부 귀빈 여러분들께서는 잠시만 여기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상위 신관은 확인차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몇 분 뒤, 상위 신관이 다시 대강당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딱 보아도 무언가 잘못된 표정이었다.

그녀는 루시온에게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크로니아 공.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순순히 사과하는 그녀의 목소리엔 진심이 가득했다.

'상위 신관은 몰랐던 일인가?'

루시온은 지그시 상위 신관을 바라보았다.

"또한, 대신전은 크로니아 공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상위 신관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저들 말대로 내부와 외부에 씌워진 빛의 힘이 달랐다.

'…분명히 확인했을 텐데.'

만약 저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토록 신성한 날,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받을 뻔하지 않았던가.

최악의 경우 신수를 빼앗기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고개를 올린 상위 신관은 귀족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빈 여러분들께 정말 죄송스러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조금 전 벌어진 사태로 대신관께서 연회의 시작을 2시간 뒤로 미루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한들, 대신전 쪽에서는 연회 날짜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위 신관은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2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담백한 사과를 한 상위 신관은 신수를 지닌 신관과 함께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귀족들은 불만스러운 표정과 항의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신관들이 나가버린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직이다.'

루시온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붉은 실을 보았다.

상황은 바뀌어도 운명 자체를 바꾸기엔 아직 뭐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커헉."

루시온은 발걸음을 떼다 말고 피를 토했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흄이 재빨리 루시온을 붙잡았고 텔라가 기겁하며 그를 불렀다.

"공자!"

[내 이럴 줄 알았다! 뭐 해, 흄? 빨리 데리고 나가야지.]

흄은 러쉘의 재촉에 루시온을 부축한 상태로 대강당을 나갔다.

'타이밍 하나… 기가 차네.'

루시온은 근처 벤치에 앉아 흄이 건넨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았다.

피를 처음 본 건지, 텔라가 벌벌 떨고 있자 루시온은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영애. 거부 반응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쉬면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들려오는 발소리에 곧 고개를 돌렸다.

카슨과 헤인트였다.

"별장으로 돌아가거라, 루시온."

카슨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형님께서는 이번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치고 들어오는 루시온의 반발에 카슨은 텔라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영애,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텔라는 떨리는 손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적당한 장소로 안내해."

헤인트를 보는 카슨의 시선은 매우 살벌했다.

* * *

"…그러니까 루시온 네 말은 적이 폭탄을 설치했다는 말이더냐?"

카슨이 물었다.

헤인트가 안내한 곳은 대신전 뒤뜰에 있는 작은 쉼터였다.

여기에서 뭔가가 벌어져도 모를 만큼 동떨어진 곳이었다.

"제 가설일 뿐이니 마음에 담지 마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헤인트 형님께서도 대신전을 공격한다면 폭탄을 사용하실 거라 말씀해주셨습니다."

루시온의 시선이 자연스레 헤인트에게 향했다.

"맞아. 그렇게 말했어."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들이 내뿜는 기운은 일종의 보호막이라고 보면 돼. 살아 있는 보호막이 하나씩 이루어져 만들어진 게 대신전 전체를 보호하는 빛의 힘이지."

[신관 놈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이유이기도 하고.]

러쉘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주 거지 같지.]

"그래서?"

카슨이 헤인트를 재촉했다.

"그리고 그 빛은 일종의 신호기가 되기도 해. 가령 저쪽 끝에 있는 동상 보이지?"

헤인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대신전으로 향하는 길 양쪽에 세워진 천사 동상이었다.

동상이 엄지만큼 보일 정도로 멀었다.

"저기에서 마법을 사용하잖아? 그럼 저쪽에서 퍼진 빛이 아까 말했듯이 신호기가 되어서 다른 신관들에게 전달이 돼."

"네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신호 때문에 신전에서는 마법에 대응할 시간을 번다는 건가?"

카슨이 묻자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마법을 사용해도 사실상 별 타격이 없으니 습격은 효율이 떨어지지."

"그럼, 가령 신전 가까이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면요?"

곰곰이 듣고 있던 루시온은 문득 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쪽은 신관들이 더 많아서 힘들어. 농담 아니라 5초 안에 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걸?"

헤인트는 사실이라는 듯이 진저리가 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해 보셨습니까?"

마치 경험담인 것처럼 이야기하기에 루시온은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헤인트는 조심스레 말했다.

"어릴 적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데...."

[진짜 해 봤네.]

러쉘이 낄낄 웃었다.

'소설 속 헤인트는 차분하고 냉철한 인물이었는데.'

루시온은 헤인트를 빤히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2년 전이라서 그런가?'

"만약 진짜 폭탄이 있다면 마법을 빌리지 않고 찾을 수 있다."

카슨은 깊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마법을 빌리지 않고 어떻게?"

헤인트가 기겁하며 물었다.

"이런 도구라면 들키지 않지."

카슨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헤인트에게 넘겼다.

물건은 자동차 키같이 생겼다.

"폭탄 탐색 도구다."

변경에서 폭탄은 흔했다.

루시온이 아무리 몰라도 폭탄 제거반이 따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금속 탐지기 같은 건가?'

루시온은 헤인트가 손에 쥔 물건을 유심히 보았다.

"루시온 넌 여기에 얌전히 있거라. 찾는 건 우리가 하마."

카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얌전히 있겠습니다."

어떤 반발도 없이 루시온이 순순히 대답하자 카슨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른 갔다 오십시오."

오히려 루시온이 카슨을 재촉했다.

카슨은 괜스레 불안함을 느꼈다.

꼭 사고를 치기 전 모습 같달까.

[왜 그래, 루시온?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그래?]

그 불안함을 느낀 건 러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동생을 좀 믿어. 두 번이나 사고를 치겠어?"

헤인트는 먼저 걸어가다 꼼짝도 하지 않은 카슨을 재촉했다.

카슨은 마지 못해 등을 돌리며 쉼터를 떠났다.

그들이 멀리 떠난 후에 루시온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라타를 꺼냈다.

라타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흄."

"예, 도련님."

"아까 별장에서 가져온 고기 있지?"

"있습니다."

흄도 정식 집사이니 그에게 마법 가방이 주어졌다.

킁킁.

코를 벌름거리던 라타는 그릇에 잘 담긴 고기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고기다!

"스승님."

루시온은 신나게 고기를 뜯어 먹는 라타를 보며 씩 웃었다.

"산책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33화. 신수 탄생 연회?(3)

[산책...?]

러쉘은 곧바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 아까 피 토한 거 잊진 않았겠지?]

러쉘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뭐 합니까? 지금도 속이 울렁거립니다."

[별장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제가 언제 또 여길 오겠습니까?"

[네가 오지 못할 이유가 왜 있어?]

"아버지가 어제, 오늘 있었던 일을 듣고도 제가 또 여기에 오는 걸 허락하시겠습니까?"

러쉘은 이어지는 루시온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루시온과 노비오 사이에 거래가 성립되었고 소문을 잠재워야 한다는 둘의 목적마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폭탄만 발견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루시온은 누가 폭탄 스위치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폭탄 스위치가 왜 신관에게 있는지.

루시온은 그 사실이 너무도 이상했다.

* * *

―라타는 지금 기분이 엄청 좋아!

루시온의 그림자에서 라타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를 먹고 기운이 난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폭탄 스위치를 가진 신관과 연결된 붉은 실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그가 외곽 쪽으로 갔는지, 실을 따라갈수록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루시온은 눈동자를 굴리다 흄을 불렀다.

"흄."

"예, 도련님."

"혹시 훔치는 것도 잘해?"

"…그러니까, 남의 것을 가져가는 행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빨리 말이야."

[루시온…?]

러쉘은 반사적으로 루시온을 불렀다.

흄과 나누는 이야기가 너무도 이상하질 않은가.

"그냥 해 본 말이니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조금 전 말과 달리 루시온은 흄을 재촉했다.

"그래서 대답은?"

"모릅니다.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르쳐주신다면 지금 바로 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 훔치겠습니다."

흄은 의욕을 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어설픈 건 별로야. 그럼, 냄새는 잘 맡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계속 작은 방에 늘 갇혀 있었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육체의 통솔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임에도 흄은 무덤덤하게 털어놓았다.

흄은 잠깐 고민하더니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토니 집사님은 제가 똑똑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훔치는 것도 잘하고 냄새도 잘 맡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 두 개는 머리와 달라. 기술이지."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흄이 몬스터였기에 신체 능력이 사람보다 더 발달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일 수 있지만, 불안정한 요소를 집어넣기에는 지금 상황이 좋진 않았다.

'실패하면 대신전 반이 날아간다.'

―라타는 할 수 있어. 라타는 냄새를 잘 맡아.

"음식 한정이지 않을까 싶은데."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야. 라타는 진짜 구별할 수 있어.

[루시온.]

러쉘의 부름에 루시온은 살짝 그의 눈치를 보았다.

[너도 폭탄을 찾으려는 거야?]

"뭐, 비슷합니다."

[뭘 하고 싶은 건데?]

"폭탄 스위치를 찾고 싶습니다."

러쉘의 눈을 속일 순 없었기에 루시온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루시온은 이미 범인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접근해 스위치를 빼낼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있어.]

러쉘은 껄끄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말 있습니까?"

의외의 대답에 루시온은 놀란 눈으로 러쉘을 보았다.

[넌 흑마법사다.]

"하지만 여기는...."

[그리고 난 비운의 천재 흑마법사지.]

러쉘이 자신을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장소가 좋지 못한 건 알고 있어.]

러쉘은 발로 땅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는 테슬라 제국 내에서 신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신전이었다.

[하지만 정말 네 말대로 폭탄이 있었고,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못했다면.]

"싫습니다."

루시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같잖은 정의감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고, 이 빌어먹을 운명을 끊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 내 제자가 이렇게 나올 걸 아는데 스승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러쉘은 한없이 진지한 루시온의 눈빛에 미소를 지었다.

스승은 제자의 등을 떠미는 존재였다.

제자가 달리겠다는데, 밀어줘야지.

[이건 지금의 네가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야. 어떤 의미로 또 위험하고. 그러니 이번만은 내가 도와주마.]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의 어둠을 쓰겠다는 말이었다.

여기가 대신전임에도 흑마법을 쓰겠다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루시온은 주저 없이 말했다.

"허락하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루시온은 움직이는 어둠을 느꼈다.

자신의 몸이 아니었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말 얇고, 얇은 어둠 하나가 바닥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스며들었다.

루시온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헤인트가 말했던 것처럼 신관이 달려오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시온은 목소리를 죽이며 다급히 물었다.

[놀랄 일이 아니야. 어둠은 인간이 가진 힘 중에서 가장 조용하니까.]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지금 러쉘은 어둠이 지닌 힘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크다며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흑마법사의 생명은 속도라고?]

자신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이 정도 속도로 어둠을 움직이면 웬만한 놈들은 눈치채지도 못해. 대신, 지금처럼 어둠의 형태를 붙잡아 둘 수 있어야 하겠지만.]

쿠웅!

루시온은 발밑에서 밀려오는 떨림을 느꼈다.

―홉!

덩달아 라타가 있는 루시온의 그림자가 떨렸다.

[숨 참아.]

루시온은 러쉘이 시킨 대로 숨을 참았다.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물이 자신을 휩쓸었다.

물살에 몸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차가움이 밀어닥쳤다.

몸이 저절로 바짝 긴장됐다.

[진짜 물속이 아니니까, 저항하지 말고 천천히 숨을 내쉬어.]

루시온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보글보글.

정말로 물속에 있는 것처럼 루시온의 입에서 거품이 올라왔다.

'여기는....'

까만 물속에 동그란 존재들이 형광을 내며 둥둥 떠 있었다.

[모든 존재가 죽으면 땅으로 사라지지.]

러쉘은 땅을 가리켰다.

[그래서 땅은 모든 죽음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지.]

―라타는 여길 알아! 라타가 있었던 곳이야!

라타가 소리치며 서둘러 루시온의 어깨에 올라탔다.

[여긴 죽음과 삶의 경계. 산 자는 오면 안 되는 곳이지.]

'여기가… 죽음과 삶의 경계라고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생각이 진짜 목소리처럼 울렸다.

[죽음과 소통할 수 있는 흑마법사만이 초대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해. 하지만 오래 있을 곳이 아니니 서두르자고.]

러쉘이 근처에 있는 동그란 존재들을 가리켰다.

―어둠아 안녕. 라타도 어둠이야.

라타가 반갑다는 듯이 앞발을 흔들었다.

'저게 어둠… 이란 말입니까? 빛을 내고 있질 않습니까?'

[저건 빛이 아니야. 원래는 죽음보다 더 짙은 어둠은 볼 수가 없지만, 넌 흑마법사야.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라는 걸 잊었어?]

러쉘은 동그란 존재들을 가지고 와서 루시온에게 내밀었다.

[어둠은 어디에서도 존재하고, 모든 걸 다 보고 있지. 잡아. 어둠은 흑마법사인 너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테니까.]

루시온이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마치 괜찮다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온은 숨을 가다듬고 어둠을 잡았다.

순식간에 대신전에 폭탄이 설치된 위치, 폭탄 스위치를 위치가 사진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럴 수가....'

[이제 됐다.]

끝을 알리는 러쉘의 말과 함께 이곳과 자신의 어둠이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보글보글.

루시온은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물거품 소리를 그대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갑자기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도련님?"

흄은 재빨리 루시온을 잡았고, 당황하며 물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러니까, …현기증이 나신 겁니까?"

"…얼마나 지났어?"

"예?"

"내가 여기에 얼마나 서 있었어?"

"5초? 8초?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서 있으시다가 지금 이렇게 쓰러지신 겁니다."

흄의 대답에 루시온은 러쉘을 쳐다보았다.

[맞아. 그 정도 갔다 왔어.]

'겨우 그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체감상 몇 분을 흘렀다.

[어쨌든, 그 마법의 이름은 '죽음의 바다'로 내가 만든 마법 중 하나지.]

러쉘은 으쓱하며 웃었다.

"…진짜 천재셨습니까?"

루시온은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온 모든 건 진짜였다.

정말로 죽음과 삶의 그 경계에 갔다 왔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했겠어?]

러쉘은 루시온에게 손을 뻗었다.

[이건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고.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뭐 해? 움직이지 않고?]

루시온은 그 말에 자신이 보았던 폭탄 개수를 떠올렸다.

132개.

위력이 얼만큼인지는 몰라도 정말로 대신전의 반쪽을 폭파할 수 있는 양이었다.

루시온은 붉은 실을 따라 다시 빠르게 걸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어둠을 통해 신관이 가진 폭탄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았다.

그가 옆구리에 허리띠 장식처럼 달고 있는 장식품.

그게 폭탄 스위치였다.

"흄."

"예, 도련님."

"허리띠에 달린 장식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빼낼 수 있겠나?"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지금 해 봐."

루시온은 자신이 차고 있는 허리띠 장식을 가리켰다.

"장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에 있...."

루시온은 갑자기 사라진 장식품의 행방에 주변을 살폈다.

라타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장식품을 물고 있었다.

―짠! 라타가 해냈다!

[라타가 제격이네.]

러쉘이 라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네요."

루시온은 배시시 웃는 라타를 바라보았다.

* * *

"신관님."

루시온은 회색 옷을 입은 신관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의 주변에 지나가는 이들 모두 붉은 실에 엮이는 상황을 보며 루시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구잡이로 끌어들이네.'

신관은 루시온의 부름에 움찔거리다 무언가를 떨어트렸다.

'종이?'

루시온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신관은 다급히 종이를 주워서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당혹감이 얼굴에 가득 보였다.

"비, 빛의 아들이시여.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어?'

루시온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신관이라기에는 거북함이 훨씬 덜했다.

마치 빛의 힘이 거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루시온은 일단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지.'

루시온은 신관을 두고 다섯 발자국에서 여섯 발자국 정도의 위치에 걸음을 멈췄다.

"바쁘신 와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루시온은 일단 용건을 말하기 전에 신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시간을 끄는 행동이었다.

"아닙니다. 제게 어떤 하실 말씀이 있는지...."

신관은 잠깐 말을 멈췄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루시온이 아닌가.

신관은 갑자기 발걸음을 뒤로 뺐다.

무언가를 들키기 싫어하는 것처럼.

"왜 그러십니까?"

루시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시야 안으로 검은 꼬리가 살짝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루시온의 표정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닙니다. 그, 그러니까 제가 바빠서 이만."

신관은 갑자기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루시온은 입꼬리를 올렸다.

팅!

신관과 이어진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라타가 해냈다!

루시온은 잠깐 무언가를 줍는 척하며 라타에게 장식품을 건네받았다.

"잘했어."

―이히히. 라타는 장해!

장식품으로 위장된 폭파 스위치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크기로 뒤에 전류를 대신할 마나석이 박혀 있었다.

안전을 위해 곧바로 마나석을 빼내서는 흄에게 넘겼다.

"산산조각 내버려."

"예. 박살 내는 건 제가 잘합니다."

흄은 마나석을 손에 쥐었다 펼쳤다.

강도가 강철 못지않음에도 가루가 되어버렸다.

흄은 손에 꼭 쥐어선 장소를 옮겨 가루를 뿌렸다.

서걱.

붉은 실이 잘려나가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오자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폭발을 막았다.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일로 어떤 흐름이 찾아온다고 해도 루시온은 폭발을 막았다는 사실에 후회는 없었다.

루시온은 대신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네가 한 일이야, 루시온. 물론, 내가 조금 보태긴 했지만.]

러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너도 느꼈지?]

"신관 말입니까?"

[그래. 그 신관.]

러쉘의 눈빛이 살짝 사나워졌다.

"신관이 흘린 쪽지에 '어둠'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흄이 말을 꺼냈다.

34화. 보상은 달콤하다

"어둠이라고 적힌 걸 봤다고?"

루시온이 묻자 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배운 단어 중 하나라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 흄이 제대로 봤어. 저 신관은 어둠에 물든 신관. 그러니까, 신전 쪽에서 말하는 '타락한 신관'이지.]

'그래서 불쾌함이 덜 한 거였어?'

루시온은 그제야 그 신관에게 느꼈던 이상한 감각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 사실을 신전 쪽이 몰랐단 말입니까?"

이유를 떠나서 루시온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신관이 워낙 많으니 진짜 몰랐을 수도 있고, 알았다고 해도 누군가 숨겼을 가능성도 있지. 아니면 흑마법사가 신관을 어둠에 물들인 후에 포섭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이 꽤 다양하네요."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설에서는 이번 일이 흑마법사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번에도 그럴까?'

루시온은 생각을 접고 흄과 라타를 향해 말했다.

"둘 다, 고생했다."

―에헴. 라타는 만능이야. 라타는 다 잘해.

루시온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모두 도련님의 힘으로 이루신 겁니다."

흄은 라타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흄."

"예, 도련님."

"가자."

루시온은 이제 슬슬 걱정이 들었다.

'형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는데?'

자신이 움직인 거리는 꽤 멀었다.

지금쯤, 카슨과 헤인트가 폭탄을 찾은 뒤에 그 쉼터로 돌아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참 무서웠다.

* * *

"루시...."

"죄송합니다."

루시온은 카슨의 표정을 보자마자 바로 머리를 숙였다.

이깟 머리 얼마나 한다고.

카슨이 기사를 시켜 자신을 강제로 별장에 데려가게 하는 것보다 나았다.

[연회에 꿀이라도 발라놨어?]

러쉘은 좀처럼 대신전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루시온의 행동에 이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연회에 많은 이득이 따라온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루시온의 안전과 건강이었다.

"...."

카슨은 입을 다물고 화를 가라앉혔다.

저 아이가 이만큼 멀리, 그것도 이런 큰 장소에 온 적이 없었다.

호기심이 들 만했다.

오히려 루시온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난 자신의 책임이 컸다.

"됐다."

카슨은 헤인트 앞에서 루시온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에 화를 참았다.

"…네가 화를 참아?"

헤인트는 깜짝 놀라 말을 꺼내다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카슨의 시선이 너무도 살벌해 견디기가 조금 버거웠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더냐?"

카슨은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산책할 겸 돌아다녔습니다. 제가 대신전을 또 언제 올 수 있겠습니까?"

루시온은 변명하지 않고 사실 중 일부를 털어놓았다.

카슨은 잠깐 말을 아꼈다.

신력 알레르기는 안타깝지만, 치료제가 없는 병이었다.

그중 루시온은 심한 편에 속했다.

'아버지가 크로니아에 있는 신전을 도시 멀리 세우신 것도, 신전이라면 치를 떠시는 것도 다 너를 위해 하신 일이었는데....'

루시온이 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몰라도 그의 말이 참 안쓰럽게 들렸다.

"다시 또 올 수 있을 테니 이제부터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거라."

카슨은 루시온을 조용히 타일렀다.

"예. 이번에는 정말로 얌전히 형님 뒤만 따르겠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구나."

"말이라도 잘해야 혼이 덜 날 게 아닙니까."

루시온의 순박한 미소에 카슨은 졌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이유를 떠나 루시온이 많이 밝아져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루시온은 다 알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있었어."

헤인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대답했다.

물건을 보자 루시온은 금세 의문을 품었다.

어딜 보아도 돌이었다.

"이건 돌이잖습니까?"

루시온이 묻자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돌이야. 정확히 돌로 위장한 폭탄이지. 여기 밑에 보여?"

헤인트가 돌을 들자 바닥 쪽에 동그란 물체가 접착제로 붙여져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폭탄의 개수는 132개.

러쉘은 범인이 폭탄을 돌에 하나하나 붙였을 걸 생각하니, 그 집념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저 동그란 게 폭탄입니까?"

동그란 물체를 가리키는 루시온의 손가락에 헤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문제는 이 폭탄이 몇 개인지 모른다는 거지만."

카슨은 숨을 길게 내쉬다 루시온을 보았다.

"네 예상이 맞았다, 루시온. 대강당에서 빛이 약했던 것 역시 단순한 실수가 아닌 듯하구나."

"제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

루시온은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곧 무언가 생각이 난 것처럼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형님. 제가 돌아다니다가 신관님께서 떨어트리는 물건을 주웠습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쫓아가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이리 줘보거라."

카슨은 루시온이 넘긴 폭탄 스위치를 살폈다.

카슨의 미간이 급히 구겨지더니 황급히 뒤쪽을 살폈다.

"여기에 있는 마나석은 보지 못했더냐?"

"왠지 위험해 보여서 마나석은 제가 뺐습니다."

"잘했다."

카슨은 안도하며 말했다.

겉모습은 장식품이나, 이건 폭탄 스위치였다.

"루시온. 혹시, 그 신관의 모습은 보았더냐?"

"예. 봤습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말해 보거라."

"누구한테 이 사실을 알리실 셈입니까?"

루시온의 날카로운 질문에 카슨은 멈칫거렸다.

여기는 대신전이었고, 범인은 신관이었다.

누구에게 밝혀도 신관들은 결국 제 식구를 챙기려 들 테지.

그렇다고 신전과 척을 질 수 없는 노릇.

사실을 알리는 것 역시 무척 조심스러웠다.

카슨의 시선이 저절로 헤인트에게 향했다.

빛의 힘을 가진 헤인트야말로 이 중에서 가장 신관들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음...."

헤인트는 시선을 받자마자 누가 적당할지를 고민했다.

"아."

그때, 루시온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이곳에 황실 사람이 왔다고 텔라 영애가 알려줬습니다. 삼자대면이 어떻겠습니까?"

황실과 변경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고, 황실과 신전 역시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였다.

변경과 신전 역시 사이가 좋다라고 볼 순 없기에 서로 견제하는 대상끼리 만난다면 꽤 볼만하지 않겠는가.

"좋은 생각이다, 루시온."

카슨은 찬성했다.

서로 견제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터.

이번 일로 황실, 변경, 신관 중 유일하게 이득을 볼 수 있는 세력은 변경이었다.

"문제는… 제가 황실에서 보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루시온은 살짝 머뭇거렸다.

이 넓은 곳에서 황실 사람을 어떻게 찾겠는가?

"그거라면 내게 맡겨."

헤인트가 실실 웃었다.

"조금 전에 저하를 만나 뵙고 오는 길이거든."

"저하라뇨?"

루시온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연회니까, 기사들도 많이 올 거 아니야? 아버지의 입김이 닿지 않는 그런 적당한 곳이 없나 생각하며 걷다가 어디서 익숙한 얼굴을 봤거든."

헤인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저하시더라고."

"…설마,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씀드린 건 아니겠지?"

카슨의 물음에 헤인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맞는데? 이런 기회를 왜 놓치겠어?"

"이 미친놈...."

카슨은 얼굴을 구겼다.

황실 기사단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물론, 헤인트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기사와 황실 기사가 되는 과정이 처음부터 달랐다.

"저하께서 나보고 재미있으시다며 특별한 조건을 거셨어."

헤인트는 미소와 함께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재앙에 가까운 커다란 위기를 극복한다면 날 황실 기사로 받아주시기로 하셨거든. 물론, 거절의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 정도는 알아."

'…이런 미친 운빨.'

루시온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사건이 바뀌었건만, 주인공이 가진 미친 운빨만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운을 타고났네.]

러쉘마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진짜 이루어졌어."

헤인트는 차분히 말하며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 네 덕이야, 루시온.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이야기 왜 그렇게 흘러가?'

갑자기 입 안이 바짝 마른 느낌이었다.

황자와 왜 내기를 해서는.

루시온은 지금 당장 황자의 입술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고두고 갚아야지."

카슨이 확실히 못을 박았다.

"내가 증인이니까."

'형님. 안 됩니다.'

루시온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친구 동생에서 은인으로 승격이 되었음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헤인트가 '동료'로서 인식하면 어쩌나 너무 불안했다.

'…그나저나 이래도 안 잘려?'

루시온은 아직도 연결된 붉은 실을 쳐다보았다.

'뭐가 부족한 거지?'

루시온은 이유를 다 떠나서 갑자기 별장에 가고 싶어졌다.

'…망할.'

* * *

헤인트가 향한 곳은 대신전의 정원이었다.

연회가 2시간 뒤로 미뤄지는 바람에 정원에는 어느덧 사람들이 꽤 붐볐다.

헤인트는 그들을 제치고, 벤치에 기대 곤히 자는, 마른 귀족 청년을 가리켰다.

"이분이셔."

카슨이 주변을 살폈다.

혼자처럼 보이나, 꽤 많은 자가 황자를 지키고 있었다.

[살다, 살다 진짜 황자를 볼 줄은 몰랐는데?]

러쉘은 신기해하며 황자 주변을 떠돌아다녔다.

"저하."

카슨의 목소리에 황자는 눈을 떴다.

"사람이 곤히 자는데 깨우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네."

황자의 시선이 헤인트, 카슨, 그리고 루시온을 살폈다.

'몇 번째 황자인지 모르겠네.'

루시온은 일단 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1년에 1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아주 불편한 만남임은 분명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몰라도 나름 미행했으니 자리를 옮기겠네."

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스치듯 헤인트를 지나갔다.

"자네의 입이 그렇게 값쌀 줄은 몰랐네."

황자가 속삭이는 말과 함께 실망이 가득한 눈빛이 헤인트에게 쏟아졌다.

* * *

루시온 일행과 황자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는 사이 카슨은 루시온에게 슬쩍 손가락 5개를 펼쳐 보였다.

'…5황자라고?'

소설 속에서 황세자가 되는 사람은 4황자였다.

그에 대한 소문이 소설 속에서 제법 많았다.

주로 좋지 못한 쪽의 소문이었다.

실제로 4황자가 황세자가 되면서 테슬라 제국이 휘청거리게 되는 건 사실이었다.

'5황자라.'

루시온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4황자가 왕위에 오르면서 죽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크로니아 가문의 첫째인 카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막내인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카슨을 따라 루시온 역시 황족에게 예법대로 정중히 인사했다.

"반갑네. 나는 테슬라 제국의 5황자 세틸 테슬라라고 하네."

세틸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특히 루시온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인적으로 루시온 공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룹세."

세틸은 헤인트를 보았다.

"이제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이야기해주겠나?"

헤인트는 차분히 지금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점점 세틸의 얼굴이 굳었고 그는 헤인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여긴 신전이지만, 이곳은 테슬라 제국일세. 자네들이 큰일을 했네. 당연히 황실에서 나서야 하고말고. 이런 큰일을 신전에게만 맡길 수 없네."

세틸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세."

그 말이 이토록 든든하게 느껴질 줄이야.

루시온은 세틸의 뒤를 따르며 황실의 개입으로 신전에서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 내 이 말을 잊었네."

세틸은 걸음을 멈추고 루시온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고맙네, 루시온 크로니아 공. 황실은 그대의 현명함을 잊지 않을 걸세."

35화. 보상은 달콤하다(2)

"영광입니다, 저하."

루시온은 고개를 숙였다.

세틸이 자신에게 직접 고마움을 표시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테슬라 제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건 귀족들이며 황실의 힘은 황실 자체를 포함 황실파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만약 이번 사건을 막지 못했다면 고위 귀족들은 물론 귀족 대부분이 죽을 뻔한, 대공황이 벌어졌을 터.

이를 막았으니 자신이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황실에서는 이번 공으로 너한테 뭘 주려나?]

러쉘은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루시온은 사건이 점점 커진 만큼 돌아올 보상 역시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 무엇을 주든, 빚을 지게 한 것만으로도 꽤 컸다.

상대는 황실이지 않은가.

* * *

똑똑.

회색 옷을 입은 신관이 대신관 집무실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지금은 바쁘니 용건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대신관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작게 흘러나왔다.

"대신관님. 5황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신관의 급한 목소리에 바쁜 발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새하얀 옷에 새하얀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은 문을 열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빛의 종이 5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할 말이 있어 찾아왔는데, 혹시 시간 괜찮은가?"

"물론입니다, 저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신관은 집무실로 세틸을 안내하려다 그가 가만히 서 있자 눈동자를 굴렸다.

"잠깐 빛의 힘을 잠재울 수 있겠나? 내 일행 중에 신력 알레르기를 가진 이가 있네."

대신관은 잠깐 뒤쪽 문을 보다 세틸의 말에 대답했다.

"예. 가능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신관은 근처 신관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빛을 잠재우라는 신호였다.

대신관 본인도 빛을 잠재우고 나서야 세틸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됐습니다, 저하. 오래 기다리게 하여 죄송합니다."

"다들 들어오게."

세틸은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오는 루시온 일행을 보며 대신관은 멈칫거렸다.

카슨을 보자 저들이 상위 신관에게 이번 일을 알려준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

대신관은 곧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하마터면 어둠을 따르는 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카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겸손함을 드러냈다.

"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개는 간단히 하도록 하지. 왼쪽부터 카슨 크로니아 공, 루시온 크로니아 공, 헤인트 트리아 경일세."

세틸은 모두가 자리에 앉자마자 간단히 루시온 일행을 소개했다.

"황자 저하께서 이렇게 오신다는 걸 알았...."

대신관이 입을 열자 세틸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대신관의 말을 멈췄다.

입에 발린 말을 듣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연회를 한 번 미룬 상황이었다.

두 번이나 미루게 된다면 이는 곧 취소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연회는 대신전의 일이기도 하지만, 20년 만에 나타난 신수의 존재를 공개하는 일이기에 테슬라 제국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달린 일이기도 했다.

"대신전에 폭탄이 심어졌네."

세틸은 본론을 꺼냈다.

"...."

대신관은 눈을 깜빡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보여주게."

세틸의 지시에 카슨이 폭탄과 폭발 스위치를 내밀었다.

"저들이 신전에서 발견했네."

"…이, 이게 정말입니까?"

대신관은 그제야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연회를 연기하게 된 빛의 힘 문제 역시 단순히 신전 쪽의 실수가 아니지 않은가?"

세틸의 눈초리가 살짝 매서워졌다.

"저하. 그 일은...."

"루시온 크로니아 공이 폭탄 스위치를 가진 신관을 보았다고 했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신전 내부의 일이라고 둘러댈 셈인가?"

변명하려는 듯한 대신관의 말에 세틸은 단숨에 말을 끊어냈다.

대신관은 잠깐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마냥 온순하진 않았다.

"저들이 폭탄 스위치를 손에 넣어 최악의 상황은 일단 막았네. 하지만 백성들이 죽을 뻔한 일이네."

세틸은 대신관을 강하게 압박할 각오를 했는지 입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뾰족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계속 몰아붙여야지. 다른 생각도 하지 못하게.'

루시온은 5황자의 시원한 말과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황실의 일원으로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네. 물론, 대신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리라 믿네. 그렇지 않은가?"

세틸이 짓는 미소마저 묘하게 날카로웠다.

"물론입니다, 저하. 대신전에서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하나,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신관은 고개를 숙였고, 머리를 든 후에 다시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 말입니다."

'이렇게 나온다?'

루시온은 코웃음을 참아냈다.

[황자는 건드릴 수 없으니 좀 만만한 널 건드리네?]

러쉘은 이를 갈았다.

'뭐, 예상하긴 했지.'

루시온은 차분히 손깍지를 낀 손을 배에 올렸다.

지금 신전에서 폭탄이 나왔고, 황실까지 이 사건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황자에게 알린 크로니아 가문과 헤인트가 얼마나 꼴 보기 싫겠나.

'때마침 내가 목격자이고, 나를 공격하며 어떻게든 도망갈 구실이라도 만들어보겠다는 거지?'

루시온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대신관을 쳐다보았다.

"허락하겠네."

세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신관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저하께서 공이 '폭탄 스위치를 가진 신관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까?"

"예.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신관님이 흘린 장식품을 보았습니다."

"그 장식품이 폭탄 스위치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카슨 형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아, 카슨 크로니아 공께서 알려주시기 전까지 그게 폭탄 스위치인지 모르고 계셨다는 뜻입니까?"

무언가 하나를 잡았다는 듯이 대신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찌 보면 황실과 변경이 손을 잡고 대신전의 힘을 누르려는 수작처럼 보이기도 하겠지. 그래서 이렇게 반응한다는 걸 알지만.]

러쉘은 대신관을 역겨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래도 자기보다 한참을 어린아이한테 이러고 싶나?]

루시온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러쉘이 꺼내자 피식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았다.

그만큼 대신관의 대처가 우스웠다.

"그렇습니다."

"공께서는 왜 그 신관에게 장식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아니, 애초에 정말 신관이 흘린 장식품은 맞습니까?"

꼬투리를 잡은 대신관은 신이 난 상태로 요점을 흐렸다.

정말로 루시온이 주장하는, 신관이 흘렸는지 아닌지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 불명확성이 증명만 된다면 신전 쪽에서는 이번 일을 꼬리 자르기 정도로 그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온은 대신관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대신관님께서는 지금 크로니아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모, 모욕이라뇨?"

"제가 그 장식품이 탐이 나 돌려주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대신관이 요점을 흐린 것처럼 루시온 역시 요점을 흐려버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대신관님. 전 크로니아입니다. 이까짓 장식품은 수천, 아니 수만 개는 사들일 수 있지요. 지금 이 발언은 절, 아니 크로니아를 모욕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루시온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방금 모욕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십시오."

루시온의 발언에 러쉘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와. 속이 후련하네.]

대신관은 세틸의 눈치를 보더니 별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절대로 크로니아를 모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부디, 오해 없길 바라겠습니다."

"이 사과와 별개로 대신관님께서는 정말로 사건을 해결하고 싶으신지, 아니면 단순히 제 말의 꼬투리를 잡아 어떻게든 도망가시려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루시온의 발언에 대신관이 매우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귀족답지 않게 이토록 직설적인 말이라니.

소년이라 만만히 봤다가 오히려 얻어터지고 있었다.

"오, 오, 오해이십니다. 이번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질문을 드린 것뿐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제가 오해하지 않게 제대로 된 질문을 하셔서 순수하게 신전을 도우려는 제 마음을 짓밟지 마셨으면 합니다."

대신관은 잠깐 멍하니 루시온을 바라보다 어깨에 힘을 뺐다.

책임을 피하려다 오히려 더 큰 책임을 질 뻔했다.

"…공께서는 그 신관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이제야 대신관은 제대로 된 질문을 꺼냈다.

"예. 똑똑히 기억합니다. 막 길을 물으려고 신관을 부르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도망을… 쳤다고 했나?"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틸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예, 저하. 제 얼굴을 보더니 도망쳤습니다."

루시온의 말에 대신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세틸은 곧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신력 알레르기가 있는 루시온을 피해 도망쳤다는 건 딱 한 경우밖에 없지 않은가.

타락한 신관.

세틸이 목소리를 냈다.

"대신관."

"…예, 저하."

대신관은 모든 일을 받아들였다는 듯이 초연하게 대답했다.

"이번 일은 폐하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 대신전에서는 제대로 된 조사를 해야 할 걸세."

"물론입니다. 저는 이번 일에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대신전에서 타락한 신관이 나왔다는 건 이를 더는 정치적인 문제로 볼 수 없었다.

빛을 따르는 자로서 어둠을 처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을 행할 셈이었다.

"루시온 크로니아 공."

대신관은 미소를 지었다.

"이 못난 빛의 종의 머리를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오래 있다 보니 책임을 피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대신관의 시선이 루시온뿐만 아니라 카슨, 헤인트에게도 향했다.

"대신전은 물론, 테슬라에 있는 모든 신전은 세 분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대신관이 대신관다워 보이자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황실 역시 그대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세틸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곧 그의 시선이 헤인트를 향했다.

"그대와 했던 내기는 그대가 이겼네.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그리 알게."

세틸은 헤인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헤인트는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잡으며 세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하."

* * *

카슨과 헤인트는 신관들과 함께 폭탄을 찾으러 떠났고, 루시온은 범인인 신관을 지목했다.

그 신관은 정말로 타락한 신관이었으며 조사를 위해 연행됐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그가 입을 열어야 알 수 있을 터.

세틸은 그제야 보고를 위해 대신전을 떠났고, 미뤄졌던 연회는 시작되었다.

아직 다 찾지 못한 폭탄 때문에 연회는 야외에서 진행되어 루시온은 적당한 장소에 앉아 신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려던 참이었다.

"신수를 가진 신관의 손에서 빛이 납니다. 이제 신수를 꺼내려는 듯합니다."

흄이 흥미진진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보여?"

루시온도 제자리에 섰지만, 사람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도 보이는 흄의 시력에 대단하다 싶었다.

―라타도 보고 싶은데.

루시온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오. 이제 나온다.]

러쉘은 평소보다 더 높이 떠서는 흄처럼 신이 나 있었다.

지금만큼 러쉘이 부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 안타깝다.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널 공중에 띄워주겠는데.]

러쉘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키득거렸다.

"…허."

루시온은 순간 숨을 멈췄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오자 숨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무래도 신수가 등장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루시온은 러쉘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있길 잘했네요."

[너도 느꼈겠지만, 지금 신수가 나타나… 흠. 뭐지? 신수가 오는 방향이 조금 이상하네?]

"도련님 쪽으로 오는 듯합니다."

흄이 러쉘의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루시온은 속이 울렁거려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맞아. 네 쪽으로 정확히 오는데?]

허공에서 신수를 지그시 바라보던 러쉘이 다시 입을 움직였다.

더 짙어지는 빛의 느낌에 루시온은 털이 바짝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바다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갑자기 물러섰다.

'…미친!'

루시온은 눈을 크게 떴다.

36화. 보상은 달콤하다(3)

백호처럼 생긴 신수가 사람들이 비켜준 그 사이로 왕처럼 늠름하게 걸어왔다.

신관은 당황하며 뒤따라 오지만, 신수를 말리지 못했다.

"스승님…?"

루시온 역시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러쉘을 쳐다보았건만, 그는 마치 학자와도 같은 얼굴을 해서는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저 신수는 지금 널 위해 빛을 줄이고 있어. 네가 다치지 않을 만큼. …그나저나 저 신수는 왜 너한테 오는 거지? 라타 때문인가?]

―맞아. 라타한테 오고 있어.

라타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진짜라고?]

루시온과 러쉘은 동시에 놀랐다.

곧 루시온은 사람들을 의식해 다급히 입을 가렸다.

―신기하게도 저건 빛인데 라타는 하나도 안 아파.

[신수와 신수끼리는 통한다는 건가?]

루시온은 라타와 러쉘의 말이 귀에 제대로 닿지 않았다.

그저 점점 가까워지는 신수의 모습에 초조할 뿐이었다.

"라타. 저 신수가 너한테 뭐라고 말을 걸어? 아니. 혹시 저 신관도 내 정체를 알고 있어?"

―몰라. 라타가 저 빛을 알아본 것처럼 저 빛도 라타를 알아봤을 뿐이야. 걱정하지 마. 라타가 저 빛에게 단단히 말해줄게.

라타는 목을 가다듬었다.

신수가 기어코 루시온 앞으로 다가왔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보다 루시온은 자신의 정체가 들키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둠을 따르는 자여. 안심하게. 나는 어둠과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신수는 상당히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온은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만히 있어, 루시온. 라타처럼 네 머릿속에 울리는 거니까.]

러쉘이 자신의 몸 지분 20%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 역시 신수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연히 그대의 정체를 내 주인에게도 알릴 생각은 없네. 내가 보러 온 건 그대와 그대에게 탄생한 존재일세.

신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께서 신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했지?'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떠올리며 숨을 조금씩 내쉬었다.

―반갑네, 어둠에서 탄생한 자여. 나는 저들이 신수라고 부르는, 빛의 존재일세.

신수의 고개가 루시온의 그림자를 향했다.

―안녕. 난 라타야.

같은 신수를 봤기 때문이지 라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밝았다.

―반갑네, 라타. 이제 맥이 끊어버린 줄 알았던 어둠의 존재가 수천 년 만에 탄생했으니 기쁜 날이도다.

'예전에도 흑마법사가 신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루시온은 주변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 신수에게 어떤 말도 걸 수 없었다.

―라타가 태어난 게 기뻐?

―당연한 소리가 아닌가.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는 법.

신수는 그림자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라타. 너의 탄생으로 죽어가던 빛이 살아났다.

―라타가?

―빛을 따르는 인간들의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 바로 어둠을 없애버리는 짓거리지. 안타깝도다. 그 행동이 점점 빛을 죽이는 행동임을 모르고.

신수의 구슬픈 소리에 러쉘은 마치 숙제를 푼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럴 줄 알았어! 내 생각이 맞았다고! 빛과 어둠의 관계는 상호보완이었어!]

―어둠을 따르는 아이야.

신수의 시선이 루시온으로 향했다.

―빛을 따르는 저 멍청한 존재들은 귀를 닫았다. 이제 내 말도 들리지 않지.

신수는 조금 더 루시온에게 다가와 머리를 맞댔다.

순간, 땅과 이어진 붉은 실이 나타났다.

'또… 전환점이?'

루시온은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 연회로 벌써 전환점이 두 번이나 발생했다.

―죽지 말거라. 타락한 것들에게 마음을 뺏기지 말거라. 내 너를 위해, 어리석은 빛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치지 않게 축복을 내리 마.

화아아아.

신수와 맞댔던 부분에서 빛이 감돌았다.

'자, 잠깐만.'

루시온은 당황했다.

다 떠나서 자신은 흑마법사였다.

이렇게 빛의 축복을 내리면 공격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커헉!"

루시온은 온몸에 퍼져나가는 빛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쏟아냈다.

오늘만 몇 번의 피를 쏟아내는지.

―....

신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로 멈췄다.

'이… 바보 같은 신수가.'

루시온은 아득해진 정신을 잡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서걱.

붉은 실이 잘리는 소리가 루시온의 귓가에 맴돌았다.

탁.

흄이 쓰러지는 루시온을 받았다.

흄은 신수를 향해 거세게 분노를 드러냈다.

[흄. 멈춰.]

러쉘은 그를 진정시켰고, 루시온을 보았다.

[빛의 충격 때문에 쓰러진 거야. 몸은 괜찮아.]

주변 분위기가 싸해졌다.

누가 보아도 신수가 루시온을 공격한 셈이었다.

신수의 주인인 신관은 해명을 바라는 사람들의 눈빛에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 어."

"제 주인께선 신력 알레르기가 있으십니다."

흄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나오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안토니가 집사의 진짜 덕목은 주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라고 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흄은 차분히 신관에게 해결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