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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

으함.

루시온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하품했다.

경매도 후반쯤으로 접어들었지만, 루시온은 몸을 핑계 삼아 먼저 일어났다.

더는 볼 게 없으니 돌아가 쉬는 편이 나았다.

미엘라는 일어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미엘라 영애."

이미 미엘라에게 너튼을 통해 물건을 찾아가라고 일러뒀으니 더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안녕, 미엘라!

들릴 리가 없겠지만, 라타도 인사했다.

경매가 끝났다.

루시온 자신이 처음 생각한 것처럼 다른 귀족들이 자신을 노릴 그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다.

'이거 어쩌나. 경매가 끝나고 나하고 대화할 생각에 들떴을 텐데. 그 꿈이 완전히 깨져버렸네?'

루시온은 귀족들을 향해 씩 웃어주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경매가 끝나지 않았으니 자리를 이탈할 수도 없겠지.

[눈빛 봐라. 눈에서 눈물이 나오겠다.]

러쉘도 키득거리기 바빴다.

성자가 저렇게 가까이 있는데 말도 붙이지 못하고, 얼마나 애달플까.

아예 보지 못했다면 몰라도 같은 장소에 그것도 가까이 있었기에 이들은 더 루시온을 갈망하겠지.

"어땠어?"

헤인트가 복도를 거닐다 황실 기사단에게 둘러싸인 루시온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음....'

좋게 말하면 횡재의 연속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힘들었다.

어쨌든 목표였던 미엘라의 역작을 손에 넣었기에 루시온은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럽네요. 괜찮았습니다."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카슨이 정말 걱정 많이 하더라고. 오늘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고민이 많았는데."

"저한테 바꿔주시면 되잖습니까."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렸다.

"요새 카슨이 바빠서 새벽에만 시간이 나서 그래. 그렇다고 잘 자는 널 깨울 수는 없잖아."

헤인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새 망할 카슨 때문에 새벽에 강제적으로 눈을 뜰 수밖에 없다고 어떻게 루시온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친우라고, 헤인트는 사실을 숨기며 앞으로 걸었다.

너튼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그가 루시온을 반갑게 맞이했다.

"성자님. 미리 팔찌를 준비해놨습니다."

흄을 시켜 경매장 후반쯤에 돌아가겠다고 미리 너튼에게 알렸다.

너튼이 흄에게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를 향해 재빨리 움직이는 걸 보긴 했는데, 여기에 있을 줄이야.

[쟤는 진짜야. 처음에 긴가민가했는데, 진짜가 맞네. 이러다 널 숭배까지 하겠다.]

러쉘이 너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커다란 경매장의 사장인데 이렇게까지 나올 리가 있겠는가.

"팔찌는 어땠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저도 처음에는 무척 우려했으나, 신관을 통해서 성자께서 가져가셔도 괜찮을 만큼 빛이 옅게 뿜어져 나올 걸 확인했습니다."

너튼은 자기 일인 것처럼 기쁨에 환히 웃었다.

'역시나.'

루시온은 신관이 확인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기에 웃음도 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성물이어야 하는데.]

너튼의 대답에 러쉘은 의문을 가졌다.

라타의 말과 그토록 순수한 빛은 분명 성물 외엔 설명할 수 없었다.

루시온은 러쉘의 고민이 깊어지자 괜스레 웃음이 났지만, 꾹 참았다.

웬만한 걸 다 알고 있는 러쉘이 가끔 헤매는 모습도 봐야 재미있지.

"아, 너튼 님."

루시온은 혹시 몰라 너튼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죽였다.

"제 부탁, 잊지 않으셨죠?"

목걸이를 미엘라 체프란에게 달라는 부탁.

너튼은 처음 그 부탁을 들었을 때, 소름을 느껴야 했다.

목걸이의 원주인은 미엘라 체프란이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말했는지 몰라도 공짜로 물건을 가져갈 기회를 남한테 양보하지 않았는가.

경매금을 보육원에 기부하겠다는 것도 순전히 루시온을 보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시온은 진심이었다.

상냥하신 분.

굳이 자신을 통해 체프란가에게 물건을 돌려달라 부탁함으로써 영원한 비밀은 없으며 물건은 물건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당연한 사실까지 깨닫게 해주지 않았던가.

"예. 물론입니다!"

너튼은 고마움을 담아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물건을 성자께서 확인하신 후에 돌려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따뜻하게 자신을 보는 너튼의 눈빛에 의문을 가지며 그를 따라갔다.

황실 기사단 전원이 방으로 올 수 없었기에 헤인트와 흄만이 동행했다.

"가져오게."

너튼의 말에 시종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테이블에 놓았다.

―오… 어라?

라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으흠....]

러쉘도 말꼬리를 늘이자 루시온은 선물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흠.'

루시온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빛 특유의 거북함이 없었다.

"열어봐도 괜찮겠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예. 열어보셔도 됩니다."

"루시온 공."

헤인트가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 자신도 이상함을 느꼈으니, 헤인트가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예."

"제가 열어보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루시온의 물음에 헤인트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빛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물건이 바뀐 거 아니야?]

러쉘이 상자를 만졌다.

[…씹!]

어떤 반응도 없자 러쉘의 입에서 바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내용물이 분명히 바뀌었다.

―홉! 루시온의 팔찌가!

라타가 발을 동동 굴리는 게 느껴졌다.

'너튼은 아니야.'

루시온은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너튼의 표정에 그를 제외했다.

'신관이다....'

팔찌를 만졌던 사람이 너튼과 신관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신관이네!]

러쉘도 마침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벽으로 달려갔다.

[내가 갈게. 넌 입 좀 털고 있어.]

하지만 흄이 갑자기 러쉘을 붙잡았다.

마치 허공에 무언가를 잡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흄은 자연스레 머리카락을 넘기는 척 꾸몄다.

[왜 그래, 흄?]

러쉘은 흄이 이유 없이 자신을 붙잡았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서둘러야 했기에 루시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헤인트를 재촉했다.

"예.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헤인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에 선물 상자를 열었다.

자신이 보았던 팔찌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두께가 달랐다.

팔찌가 합쳐지기 전 모습이 아닌가.

"가짜입니다!"

헤인트가 다급히 말했다.

"가짜요…?"

루시온이 놀란 척하고, 너튼은 촛농이 흘러내리듯 입꼬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곧 너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가, 가, 가짜라뇨! 그게 무슨...."

헤인트가 든 팔찌를 확인한 순간, 너튼은 당장 숨을 멈췄다.

너튼의 얼굴이 붉어질 때쯤에 그가 숨과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 신관입니다! 팔찌를 확인한 사람은 신관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헤인트가 묻자 너튼은 바로 움직였다.

"따라오십시오!"

"루시온 공. 공은 여기 꼼짝 말고 계십시오."

헤인트는 방을 벗어나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문 닫고, 누구라도 이곳에 들이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도둑질당한 물건은 보통 물건이 아니었고, 다름 아닌 루시온의 물건이었다.

자칫하다가 황실 기사단의 무능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헤인트는 소수만 데리고 너튼을 따라갔다.

문이 닫히고 주변이 잠잠해지자 루시온은 흄에게 물었다.

러쉘을 붙잡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쟤야?"

루시온은 시종을 가리켰다.

방을 나서려는 러쉘을 말린 걸 보면 범인은 내부에 있었고.

자신과 흄을 제외하면 시종뿐이었다.

그 순간부터 시종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예. 저 사람의 몸에서 도련님의 향수 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흄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다 시종의 손에 멈췄다.

"손으로 직접 팔찌를 만졌는지 냄새가 제법 짙습니다."

"아, 그래?"

루시온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 자, 잘못했습...."

흄이 눈치껏 시종의 입을 막았다.

밖에서 기사들이 들어오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헤인트는 신경 쓰지 마. 멀리 갔으니까.]

러쉘은 꿈틀거리는 루시온의 손가락을 보자마자 자유로울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비록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검은 구슬을 흡수한 뒤로 루시온은 굳이 손바닥이 아니더라도 어둠을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오오. 루시온이 현혹을 사용하려고 해. 에헴. 라타는 언제든지 준비가 됐어.

루시온은 발에서 그림자처럼 어둠을 흘려보내고, 시종의 몸을 조용히 타고 올렸다.

당장 어둠의 끝부분을 날카롭게 만든 뒤 시종의 머리를 꿰뚫었다.

찌릿.

루시온의 손이 파르르 떨렸지만, 참을 만했다.

아니, 참아야 했다.

화르륵.

어둠이 시종의 머리에 침투하자 두 눈에 어둠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미리 종이와 펜을 꺼낸 흄이 시종에게 넘겼다.

"내 팔찌를 바꿔치기하라고 널 꼬드긴 놈. 그놈에 대해 아는 거 다 적어."

루시온이 명령했다.

체감상 5분쯤 지났을까, 시종이 손을 멈췄다.

흄이 종이를 가져가 루시온에게 넘겼다.

―돈을 많이 준다고 했음. 계약금 절반을 받았음. 중년 남자. 돈이 많음. 나머지 반은 장소로 찾아오면 준다고 함. 장소는....

'이거 병신이네.'

루시온은 종이를 읽을수록 헛웃음이 튀어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시종을 꼬드긴 중년 남자가 알려준 장소는 증거인멸을 위해 시종을 죽이고자 한 장소가 틀림없었다.

[저 말을… 믿었다고? 아니지. 하긴 돈에 눈이 멀었으니 뭐든 안 믿었겠어?]

"예. 그렇죠. 뭐든 하나에 눈이 멀어버리면 귀도 닫히는 법이니까요. 저야 다행이잖습니까?"

루시온은 시종의 눈에서 꺼져가는 어둠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제 물건을 노리는 간 큰 놈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러니… 라타. 헤인트가 온다. 어둠을 꺼트려.]

―아, 알았어! 라타만 믿어. 라타가 할 수 있어!

러쉘이 라타를 재촉하자 라타는 허둥지둥거리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

바람 소리와 함께 어둠의 불꽃이 꺼지자 시종은 순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조금 전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흄을 보다 말고 루시온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성자께서 부디, 제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탁!

문이 거칠게 열리며 헤인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빠르네. 그새 확인한 거야? 아니면 도중에 돌아온 거야?'

루시온이 당황하자 러쉘이 알려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중에 돌아온 거야. 신관은 너튼에게 맡기고.]

"무슨… 일이야?"

루시온에게 무릎 꿇은 시종을 보자마자 헤인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껏 팽팽해진 붉은 실이 다시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흄의 말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시종이 범인입니다."

루시온은 무언가 안도하는 듯한 헤인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시종이 싹싹 빌고 있었고, 무릎까지 꿇은 상태였다.

여타 다른 귀족들에게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아.'

루시온은 그제야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헤인트는 신분과 작위에 얽매이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서, 마치 현대식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헤인트에게 악역으로 보이지 않게 친근하게 굴려고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도.

헤인트가 황실 기사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을 때도.

'그래서 붉은 실이 팽팽해진 거야.'

헤인트의 작위는 자신보다 아래.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황실 기사단 역시 자신보다 아래였고, 현재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즉, 황실 기사단이 죽어가든 말든 자신이 나설 이유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빛을 사용함으로 당연했던 사실을 뒤엎어버리지 않았던가.

귀족답지 않은 행동.

이게 헤인트와 붉은 실을 끊어내는 조건 중 하나였다.

142화. 감히 내 물건을 노려?(3)

'…에이씨.'

이제 겨우 조건 1일뿐이라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루시온은 짜증이 일었다.

쓸데없이 까다로웠다.

무엇이 귀족다운지 아닌지, 어릴 적부터 방에 틀어박힌 자신으로서는 거의 겉핥기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귀족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귀족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귀족은 베풀어야 한다.

기타 등등.

잠깐만 봐도 책에서 배운 것과 영 다르지 않은가.

'…아니지.'

루시온은 뒤늦게 문을 닫는 헤인트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현실 귀족과 반대일 뿐이지, 헤인트는 책에서 나오는 귀족을 바라는 게 아닐까?'

"범인이라니…?"

헤인트가 그제야 물었다.

'만약 조건이 맞는다고 해도 순전히 헤인트의 기준이라....'

루시온은 아랫입술을 살짝 잡았다.

당장 한숨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예. 도련님의 물건에 손을 댄 범인 중 한 명입니다."

흄은 루시온을 대신해 대답했다.

이유는 몰라도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뭐, 일단 대충이나마 조건 하나를 파악했으니 그걸로 됐어.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자.'

루시온은 일단 생각을 미뤄뒀다.

자신이 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공허의 손, 그 우두머리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루시온?"

헤인트가 얼떨떨한 목소리를 내자 루시온이 얼른 대답했다.

"흄이 냄새를 잘 맡습니다."

"냄새라니…?"

"제가 좀 특이한 향수를 쓰거든요."

헤인트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코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형님께서는 왜 도중에 돌아오셨습니까?"

루시온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지금 헤인트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제야 헤인트는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어… 그게, 가짜라도 팔찌를 가져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돌아왔거든."

헤인트의 눈동자가 시종에게 향했다.

"그런데 루시온 네가 범인을 바로 잡을 줄은 몰랐네."

"범인을 잡은 건 제가 아니라 흄입니다."

루시온은 공을 명확히 구분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나, 조건 하나를 알았으니 잘 써먹어야지.

"잘했다, 흄."

헤인트는 미소를 지으며 흄을 바라보았다.

흄이 다행히도 최악의 사태를 막아주지 않았던가.

"데쉬아 경에게 저놈을 데려가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잠깐 앉아 있어, 루시온."

헤인트는 의자를 가리켰다.

너튼에게 시종을 데려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혹시 모르니 신관도 조사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루시온을 먼저 집에 보내고 싶었지만, 흑마법사가 나타났기에 기다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루시온은 조금 힘이 들던 참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헤인트는 루시온이 자리에 앉자 시종을 끌고 방을 벗어났다.

"흄."

루시온이 의자에 기대며 흄을 불렀다.

"예, 도련님."

"헤인트 형님을 쫓아가."

"...."

흄이 멈칫거렸다.

"정말 시종 혼자서 팔찌를 빼돌릴 수가 있다고 생각해?"

자신이 현혹을 사용해 시종에게 받은 정보는 어디까지나 시종을 시켜 팔찌를 빼돌린 놈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불가능하지.]

러쉘이 딱 잘라 말했다.

"저 시종은 직원이라서 일단 제약이 많아.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아마도 네가 맡은 그 냄새는 물건을 바꿔치기하는 사이에 묻었을 거야."

경매장의 직원이기에 경매장에서는 당연히 시종의 개인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시종의 집을 수색할 수도 있고.

"물론, 여기 적힌 대로 물건을 진짜 범인에게 운반하는 역할도 맡았어. 그럼 누군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는 건데, 누구일 것 같아?"

"…신관입니다."

흄이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 말에 루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맞아. 아마 지금쯤 도망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경매장 밖을 나간 사람은 없었어.]

갑작스러운 베델의 목소리에 루시온이 깜짝 놀랐다.

―홉!

라타도 놀라 소리치다 말고 다급히 제 입을 앞발로 붙잡았다.

―라타는 놀란 적 없어!

베델이 러쉘과 같이 키득거리다 루시온의 눈빛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베델. 정말 경매장 밖을 나간 사람이 없다고?"

루시온이 물었다.

[맞아. 없었어.]

베델의 대답에 루시온은 만족했다.

일단 팔찌를 되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루시온의 시선에 흄은 굳센 의지를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신관 중에서 공범자를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대답하며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루시온 공.]

베델은 흄이 나간 뒤에 입을 열었다.

테펠로우를 본 뒤에 일렁거리던 분노가 아직도 꺼지지 않았는지 마냥 얼굴이 밝진 않았다.

"듣고 있어, 베델."

루시온은 그 분노를 보지 못한 척 물었다.

[나가줄까?]

베델의 표정에 러쉘이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그렇게 심각한 말도 아니니까.]

베델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내게 물어보지 않는 것인가?]

테펠로우 셀가 후작.

그 이름이 튀어나오면서 자신이 죽었던 그 장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곳이 공허의 손이 저주를 실험하기 위해 썼던 곳이라는 걸 알았다.

당연히 제 주인이었던 놈과 공허의 손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을 수도 있었다.

베델은 루시온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네 주인이었던 놈 말이야?"

[그래. 그놈과 루시온 공을 죽이려고 하는 공허의 손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글쎄. 난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루시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

베델의 눈동자가 순간 일렁거렸다.

당장 울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루시온은 살짝 당황해 러쉘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슬쩍 시선을 흘렸다.

[흠흠.]

―홉! 루시온이 베델을 울렸어!

놀라는 라타의 말에 루시온은 덩달아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베델. 내가 아예 모른다는 게 아니라. 그…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잖아? 그래서 나는...."

[알아, 루시온 공. 날 위해 기다려주는 거잖아?]

베델이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지만, 루시온의 배려가 너무나도 따스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루시온이 민망한 듯 고개까지 돌리며 대답했다.

[고마워. 기다려줘서.]

"아니. 별거 아닌데."

살짝 투박함이 섞인 목소리에 베델은 가슴마저 먹먹해졌다.

다정한 사람.

몇 번을 생각해도 루시온과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너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복수와 분노만이 남은 자신을 어둠 속에서 꺼내주질 않았는가.

'…루시온 공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자신이 너무도 행복하듯.

베델은 루시온을 바라보며 조용히 빌어보았다.

* * *

<…그래서 결국, 성자의 도움을 받아 미엘라 씨의 물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크라언이 살짝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도움을 받은 게 뭐가 어때서?'

침대에 누워 있던 루시온은 하마터면 콧방귀를 낄 뻔했다.

―성자가 루시온인데! 라타는 알고 있는데.

라타가 꺄르르 웃으며 공을 물었다.

삐익!

"성자라면 루시온 크로니아 말이야?"

크흡.

옆에서 러쉘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루시온 자신도 자신이 아닌 척하느라 지금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는데.

루시온이 가면을 벗어 살짝 찡그린 채로 러쉘을 바라보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냈다.

[왜 그래, 루시온?]

[러쉘. 적당히 안 하면 저번에 공의 부친과 대화를 나눌 때처럼 그대를 못 들어오게 할 텐데.]

투구를 닦고 있던 베델이 넌지시 러쉘을 압박하자 그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냥 웃기만 했다니까.]

<맞습니다. 루시온 크로니아. 성자가 경매장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줬고?"

<예. 저는 솔직히 아직도 믿어지질 않습니다. 한 푼 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육십만 델을 써서 얻은 그 아이템을 그냥 주다뇨.>

'한 푼도 안 들였는데.'

루시온은 간지러운 입을 참아냈다.

"성자라며."

<아무리 성자라도 그렇게 하는 겁니까?>

"난 보질 못해서 할 말은 없네."

<정말,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크라언답지 않게 흥분했다.

"성자도 사람이야."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느낌이었습니다. 정말로 '성자'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서, 아, 이걸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크흡."

루시온은 기어코 속에서 솟구치는 오글거림을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겨우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냈다.

'와. 진짜… 낯간지러워 죽겠네.'

시녀들의 손길에 성자 루시온이 탄생되었을 뿐,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기분에 죽을 맛이었다.

<하… 멜 님?>

막 설명하던 크라언이 잠깐 멈칫거렸다.

"아. 별거 아니야. 계속해."

―오옹? 루시온 어디 아파? 왜 그렇게 주먹을 떨어?

공을 물고 침대에서 빙그르르 돌던 라타가 멈춰서는 루시온을 빤히 보았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내버려 둬.]

―왜 부끄러운 거야? 루시온은 부끄러울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러쉘의 말에 라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실제 모습과 꾸며진 모습이 한 번에 만나면 수치심과 후회 등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오지. 그걸 견디기가 어려워서 부끄러운 거야.]

―라타는 러쉘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흔들리던 라타의 꼬리가 멈추더니 목을 움츠렸다.

[알아듣지 말라고 일부러 그렇게 설명한 거야.]

러쉘은 루시온을 보며 키득거렸다.

<…하. 옆자리였는데 말을 걸어볼 걸 그랬습니다.>

성자에 관해 설명하던 크라언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미엘라는 어때?"

루시온은 그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아.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서 마법 아이템을 완성시키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미엘라는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퀘이트를 시켜서 중부 쪽 지부부터 알아봐."

이미 손에 넣은 남부 지부장이 말하길, 중부에 있는 3개의 지부는 각각 북부, 남부, 동부를 맡아 자신들이 모아온 정보를 전달받고 확인하는 작업을 위주로 일을 한다고 했다.

뉴브라 왕국에서 사람을 보내 지부를 확인하기까지 3주.

중부 지부에서 남부 지부가 모은 정보를 전달받는 과정은 1주일에 1번.

'이제 3일 후에 정보를 중부 지부에 전달해야 한다고 했지?'

시간이 촉박한 것과 별개로 6개의 지부를 관리하는 부엉이 대신, 중부에 있는 3개의 지부에는 지부를 지키는 개가 있다고 했다.

루시온은 이미 피터를 통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가르티오 뭰.

놈이 개들의 우두머리였다.

<아직 남부 지부 쪽이 정리되질 않았습니다.>

"알아. 어차피 정리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는 없어."

<그렇긴… 합니다.>

루시온이 강하게 나오자 크라언은 망설였다.

"남부 지부를 습격할 때 내부에 실력자들은 없었어."

<예. 아무래도 사람을 지배하려면 실력자가 없는 편이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도 그렇다고 볼 수는 없으니 퀘이트를 보내 지부 3개를 조사해. 이틀이면 되겠지?"

<아마도 퀘이트의 실력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그럼 조사 후에 보고해. 아, 헤로안이 제국에 폭탄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헤로안이 6개 지부를 모두 조사했지만, 어떻게 마냥 놀리고만 있겠는가.

지부와 관련 있던 이들을 모두 조사하라고 일러뒀다.

<하멜 님을 욕하고 있더군요.>

"잘하고 있네."

<몸은… 괜찮으십니까? 열이 떨어졌는지....>

"그냥 열감기니까 신경 쓰지 마."

잠깐 크라언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제가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너는 뛰지 말고 관리에 신경 써. 그러라고 거기에 앉혀 놓았으니까. 그럼."

루시온은 크라언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연락을 끊었다.

가면을 벗고 창밖을 바라보자 깊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관은 도망가지 못했고, 팔찌는 흄 덕분에 되찾았다.

팔찌를 훔친 신관과 팔찌를 바꿔치기한 시종 모두 붙잡혀 지금 자신이 머무는 저택에 구금된 상태였다.

'황실 기사단 내에 배신자가 있으니 유령보고 잘 지켜보라고 했고....'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이전처럼 필적을 속여 황실 기사단 내에 배신자가 있음을 알렸다.

긴가민가하겠지만, 아마도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붙잡아온 놈들 근처에 꼼짝도 못 하고 감시하고 있겠지.

"자, 그럼 저도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네요."

상체를 일으킨 루시온의 미소가 길어졌다.

감히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댔으니 그만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아직 약속 시각까지 2시간 정도 남았어. 잠깐 눈이라도 붙여.]

러쉘은 루시온의 미간을 눌러서는 억지로 눕혔다.

―그럼 라타도 잘래. 라타는 이제 지쳤어.

으함.

라타의 입이 쩍 벌어지게 하품해서는 루시온이 슬쩍 내린 팔을 타고 침대로 올라왔다.

[그래. 루시온 공. 내가 미리 가서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게.]

베델이 루시온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러쉘과 베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그럴까요?"

[흄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예. 그럼 깨워주세요."

루시온은 신이 난 채로 웃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도 좋지만, 긴 새벽을 버티려면 잠깐 잠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노곤함에 루시온의 숨소리가 금세 길어졌다.

143화. 조용한 가면을 벗기다

* * *

―또 편지를 쓰오. 그대가 데리고 있는 황실 기사단 내에 배신자가 있소.

헤인트는 경매장에서 체포한 시종과 신관을 감시하다 잠깐 옆방으로 건너왔다.

편지는 이미 구겨졌고, 헤인트는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미치겠네.'

마법사 단체, 루미노스를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 힌트를 제공했던 바로 그 편지였다.

경매장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에 끼워져 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이걸 또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편지에는 친절하게도 배신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추신으로 어쩌면 배신자가 또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이런 친절은 필요 없는데.

'세틸 황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로베리오 백작이 심어둔 자인가?'

황실에 이미 죽은, 흑마법사와 결탁한 로베리오의 세력이 숨어 있다고 했다.

설마하니 성자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진 제8 기사단까지 손을 뻗어왔을 줄이야.

당연히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부하의 배신에 헤인트는 머릿속은 이미 새하얬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여길 들어왔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헤인트는 답이 없다는 걸 알기에 애써 찝찝함에서 벗어나려 창문을 살짝 열었다.

마냥 차갑던 바람이 이제 여름이 되어 미적지근했지만, 그래도 머리를 식히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부에 볼일은 끝났어.'

헤인트는 아예 창문 근처로 가 살짝 기댔다.

가르티오 뭰.

발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놈을 쫓아다닌 결과 중부에 있는 특정 세 곳을 위주로 출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루시온은 하루에서 이틀 정도 휴식한 후에 남부를 떠나 북부에 마련되어 있는 '순례길'로 향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북부로 가려면 도중에 중부를 들려야 했기에 헤인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르티오 뭰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루 정도 중부에서 쉬는 게 어떻겠냐고 루시온한테 물어봐야겠네.'

헤인트는 다시금 편지를 구겼다.

'그나저나 순례길이라니.'

과거 누군지는 몰라도 위대한 왕이 거닐었다던 곳이라 알려진 장소였다.

그 왕이 사실 '빛의 신'이라고 알려졌기에 신관들은 물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 빛의 신을 믿는 자들 등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모두가 갈 수는 없었다.

순례길을 관리하는 일족이 있으며 그들의 초대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이는 엄연히 제국의 법 아래에 보호되고 있었다.

'내가 또 그곳에 갈 줄이야.'

자신도 몇 년 전에 초대를 받아 그곳을 이미 걸어본 적 있었기에 그리움이 몰려왔다.

그곳은 '빛의 신'이 생각나는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둠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아차.'

헤인트는 자신이 옆방으로 온 이유를 떠올리고는 보고를 위해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세틸 저하."

5황자가 없음에도 헤인트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 * *

어둑한 밤에 어둠은 보호색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시온이 그림자 이동으로 약속 장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베델에게 이동했다.

어둠이 가라앉자 베델과 함께 나루터가 보였다.

적막함이 내려앉은 나루터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고 누군가를 찾는지 고개가 두리번거렸다.

"저놈이야?"

루시온이 조용히 묻자 베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남자 주변에 호위가 3명 있는데 지금 숨어 있어.]

"위치를 알려줘."

일단 대화를 하려면 적의 호위부터 없애야 했다.

빙의를 이용하면 빠르다는 걸 알지만, 배의 상처가 터질까 베델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말렸기에 사용할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베델의 대답과 함께 렌탈이 된 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은 어둠부터 풀어냈다.

[디버프를 배우면 엄청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대놓고 아쉬움을 표현하는 러쉘을 보며 루시온은 가볍게 웃었다.

"저도 엄청 아쉽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북부로 가면 시간이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루시온이 순례길로 간다고 했지?

오랜만에 흙을 밟아서 그런지 신이 난 채로 루시온 주변을 빙그르르 돌아다니던 라타가 잠깐 멈춰서는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뚱여우가 되었기에 루시온은 웃음을 흘렸다.

"맞아. 똑똑하네, 라타."

―응! 라타는 똑똑해. 완전 똑똑해!

라타는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위대한 왕이 거닐었다던 곳.

루시온은 정치적인 중립을 위해 그곳에 가길 선택했다.

[하여튼 너도 참, 특이하다. 흑마법사로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하네?]

러쉘은 루시온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둠의 신수를 탄생시키고, 빛의 신수에게 축복도 받고.

게다가 순례길의 관리자에게 초대까지 받질 않았던가.

이번 경매장 일과 순례길에 초대된 사실이 맞물리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올지, 러쉘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베델이 가리키는 쪽으로 어둠을 보내며 말했다.

'소문이 부디 좋은 쪽으로 나야 할 텐데.'

루시온에게 불리한 소문이 날 구멍은 없었다.

하지만 이전의 일 때문에 러쉘은 루시온이 바라는 대로 흘러갔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이놈이다.]

베델은 가만히 서서는 루시온의 어둠이 적에게 다가오길 기다렸다.

세 놈 모두 포착한 루시온은 흄을 바라보았다.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흄의 말과 함께 루시온은 세 놈에게 보낸 어둠으로 적들의 발목을 휘감고 거침없이 당겨서는 흄 앞까지 질질 끌고 왔다.

카슨만큼 실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바로 반응하기 어려울 테지.

"무, 무슨 일이냐!"

중년 남자는 주변에서 내지르는 비명에 덩달아 당황해서는 허둥지둥거리기 바빴다.

어둠은 적의 눈은 물론 아군의 눈까지 가리기 쉬웠다.

하지만 루시온 자신은 달랐다.

흑마법사이기에 자신 대신 눈이 되어줄 자들이 많았고, 밤눈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중년 남자가 도망치자마자 루시온의 어둠이 그까지 덮쳤다.

팍!

―라타가 다 붙잡고 있어.

라타의 꼬리가 바짝 섰다.

콰직.

루시온은 흄의 발에 짓밟혀 머리가 터져버린 호위를 보며 중년 남자를 질질 끌고 왔다.

"으아아...."

시끄러워서 도중에 어둠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도련님."

흄이 사체를 빤히 보다 피로 떡칠이 된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목에 이런 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손가락 4개를 합친 것만큼 두꺼운 검은 목걸이.

루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크라언이 차고 있던 거네.]

러쉘은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마나로 금세 알아차렸다.

분명 같은 목걸이였다.

그 말에 중년 남자를 보던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내가 먼저 단서를 발견했네, 크라언.'

크라언은 자신들을 붙잡았던 노예 상인을 찾고 있었고, 정체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크라언이 착용하고 있었던 검은 목걸이와 같은 목걸이가 여기에서 나오다니.

[크라언이 이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고? 이건… 불법 노예가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살았을 적에 불법 노예 상인을 근절하러 다닌 적이 있었기에 베델은 목걸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맞아. 크라언하고 헬론, 슈트라는 루시온이 해방해주기 전까지 불법 노예였어.]

[...!]

베델은 놀란 표정 그대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왜 크라언이 루시온을 그렇게 따르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그녀는 루시온이 끌고 온 중년 남자를 노려보았다.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만들다니.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저주를 걸고 싶은데. 어떤 저주가 좋을까?"

루시온이 언급한 '저주'라는 말에 남자는 금세 몸을 벌벌 떨었다.

현혹은 짧고 굵게 정보를 캐낼 때가 딱 좋았다.

하지만 길게 유지할 수 없으니 자발적으로 어떤 정보라도 토해내고 싶게끔 저주를 거는 편이 수월했다.

헤로안도 자신의 저주로 꽤 고생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묻고 싶은 게 많으면 저주가 꽤 유용해. 보자, 돈과 관련된 저주를 걸어도 나쁘지 않겠네.]

러쉘은 잠깐 남자를 빤히 보다 입술을 열었다.

목걸이도 그렇고, 반지도 그렇고, 하고 다니는 게 마치 졸부 같았다.

모름지기 저주는 상대가 가장 아끼는 걸 걸고넘어지는 게 최고였다.

"읍읍!"

뭐라고 내지르는 말에 루시온은 놈의 입을 막았던 어둠을 풀었다.

"하, 항복입니다! 무조건 항복입니다!"

남자는 마치 흑마법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몸을 사렸고, '항복'이라는 말에 푸른 실이 자신과 남자를 휘감았다.

'푸른 실이다. …왜?'

루시온은 깜짝 놀랐다.

혹시 저 남자가 자신이 알고 있던 악역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바로 질문했다.

"이름."

"체, 체이톤입니다."

'체이톤…?'

루시온은 소설 내용을 기억하는 능력을 통해 잠깐 생각해봤지만, '체이톤'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악역도 아니야?'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한 놈에게 푸른 실은 과했다.

하지만 푸른 실이 등장했다는 건 뭔가 일어나든, 저놈과 뭔가가 이어지든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경매장에서 빼돌린 팔찌를 찾으러 왔겠지?"

루시온은 생각을 멈추고 질문부터 했다.

일부러 성자는 언급하지 않았다.

바꿔치기한 가짜 팔찌를 보면 처음부터 경매장에 나올 팔찌를노렸고, 팔찌 두 개가 하나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질문이 제대로 먹혔는지 체이톤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매우 놀랐다.

"...!"

"누가 시켰지?"

"제, 주, 주인님이 시키셨습니다."

푸른 실에 반응이 없었다.

거짓말이거나, 푸른 실을 끊을 방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누가 시켰지?"

루시온은 한 번 더 물었다.

"제 주인님이 시키셨습니다!"

"그래. 거짓말을 하는 건 네 자유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푸른 실이 나온 이상 루시온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확실히 해야지.

"돈을 좋아하는구나?"

루시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자, 잠깐만요!"

루시온은 기겁하는 체이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발에서 어둠을 흘러냈다.

자신에게 매달리려고 다가온 체이톤을 향해 흄이 정확히 경고했다.

콰앙!

흄이 발을 굴리자 땅이 파이며 흙이 체이톤의 얼굴에 튀었다.

금세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자, 루시온은 그 틈에 체이톤의 머리에 어둠을 보내고 어둠의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그의 정신력을 뚫었다.

찌릿!

체이톤이 가진 정신력이 제법 강한지 통증이 거셌다.

'그렇다고 뚫지 못할 건 없지.'

루시온은 한 번 더 어둠을 밀어 넣어서는 힘으로 정신력을 뚫어버렸다.

화르륵.

체이톤의 눈에 어둠의 불꽃이 타올랐다.

"저는 어둠께서 굽어살피는 하나의 종입니다."

아닌데.

저주를 위해 필요한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어둠이 속삭였다.

'아니라니?'

순간 루시온은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였다.

"부디 미천한 저의 자그마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옵고, 어둠께서 지니신 힘을 이용할 수 있게...."

아니야, 사랑스러운 아이야. 이제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은 자신의 어깨에 닿는 손길에 잠깐 움찔거렸다.

분명 따뜻하지 않음에도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루시온이 도중에 주문을 멈춘 것도 모자라 놀란 표정을 하자 러쉘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루시온?]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쫑긋 귀를 세우던 라타가 러쉘의 시선에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라, 라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

원하는 걸 말해봐. 이전보다 조금은 더 들어줄 수 있어.

그래. 말해봐. 뭘 하고 싶어?

"…도와주십시오. 당신께 이것을 바치나이다."

하지만 루시온은 기어코 주문을 다 외웠다.

두렵기보다는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추위에 벌벌 떨었지만, 지금은 온몸을 스치고 가는 정도라 살짝 추울 정도였다.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그 순간, 어둠이 자신을 꽉 끌어안는 듯한 느낌임 들었다.

안 돼, 루시온. 그건 흑마법이 아니야.

어둠이 딱 잘라 말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물으면 안 돼. 알겠지?

루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감싸던 느낌이 사라졌다.

왜 물어서는 안 되는지 몰라도 루시온은 지금에 집중하고자 했다.

'저자가 돈이든 보석이든 가치가 있는 것들은 죄다 근처 사람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응. 들어줄게. 얼마든지.

치이익.

체이톤 놈의 머릿속에 박힌 어둠이 이전처럼 글자가 되었다.

모든 가치가 있는 것들은 갖지 못하며, 가진 것마저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게 된다.

루시온이 원했던 것보다 더 자세한 저주가 만들어졌다.

144화. 조용한 가면을 벗기다(2)

'…대가가 충분한 건가?'

루시온은 찝찝함을 느끼며 글자가 낙인이 되고, 낙인이 저주가 되어 체이톤 왼쪽 눈 밑에 검은 별이 찍힐 때까지 바라보았다.

도중에 루시온이 저주를 사용하는 주문을 멈춰 걱정하고 있던 러쉘도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저주가 시작되자 체이톤은 갑자기 손에 끼고 있던 반지와 목걸이를 벗어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흄에게 넘겼다.

"...!"

체이톤은 멋대로 움직이는 제 몸에 경악했다.

아무리 억지로 움직이려고 해도 흄이 받기 전까지 결코 손을 내릴 수 없다는 듯 팔이 강제로 뻗어 있었다.

―홉! 가까이서 보니까 더 반짝여!

언제 왔는지 라타는 체이톤이 무릎을 꿇고 흄에게 내민 액세서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라타의 눈동자는 액세서리 못지않게 너무도 반짝거렸다.

"너한테 주겠다는데. 받아서 맛있는 거나 사 먹어."

루시온이 웃으며 흄에게 말했다.

"이,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왜긴. 저주에 걸렸으니까 그러지."

당황하며 묻는 체이톤에게 루시온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못한 게 정말 아쉬웠다.

"진짜 받아도 됩니까?"

흄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래. 받아. 돈이 얼마나 많은지 나도 궁금하던 참이니까."

루시온의 재촉에 흄은 체이톤이 내민 반지와 목걸이를 받았다.

체이톤은 허전해진 자신의 손을 보다 말고 팔찌까지 다급히 벗어 흄에게 내밀었다.

"자. 다시 시작해보자, 체이톤."

루시온은 체이톤을 보았다.

체이톤은 벌써 겁에 질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니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뻔하지 않은가.

"성자의 팔찌를 누가 가져오라고 시켰지?"

"고, 공허의 손이십니까?"

체이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공허의 손이 왜 튀어나와?]

놀란 러쉘의 목소리와 함께 루시온은 위로 치솟아 오르는 자신의 입꼬리를 느꼈다.

'그렇지. 푸른 실이 괜히 이어져 있을 리가 없지.'

"저희는 절대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성자를 노린 게 절대로 아닙니다! 노린 건 팔찌뿐이었습니다!"

이어지는 고백에 이미 찌푸려져 있던 베델이 더욱 얼굴을 구겼다.

[또… 다른 세력인가? 루시온 공을 노리러 오는 세력이 아니었으면 하는데.]

이미 사라진 마법사 집단, 루미노스.

빛의 축복을 받은 자들과 신관들.

변경을 노리려는 뉴브라 왕국.

그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흑마법사 단체인 공허의 손.

그리고 제국의 귀족 중 일부.

이미 상대해야 할 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여기서 더 늘어난다니.

베델은 루시온이 안쓰러워 너무 화가 났다.

"팔찌를 왜?"

루시온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물었다.

문득 텔라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라르비스의 눈물을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공자께 드린 팔찌요.

'저놈인가. 저놈하고 이어진 사건인가?'

[루시온. 혹시 텔라가 너한테 가장 최근에 보낸 편지 기억해?]

러쉘도 그 사실을 기억했는지 루시온에게 말했다.

[누가 네 팔찌를 물어봤다고 했잖아. 저놈과 관련이 있겠네.]

루시온은 긍정하며 흄에게 말했다.

"팔찌도 받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지."

"알겠습니다."

처음과 달리 흄은 기쁜 듯이 팔찌를 받았다.

손이 또 비어버리자 체이톤은 제 주머니를 뒤지며 돌돌 말린 증서를 꺼냈다.

체이톤의 눈이 커졌다.

"아. 보석이 아닌데 왜 증서를 꺼내냐고?"

루시온은 체이톤의 눈빛을 읽었다.

예상이 빗나간, 절망이 슬금슬금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네가 걸린 저주는 '모든 가치가 있는 것들은 갖지 못하며,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게 된다.'라는 내용이거든."

루시온은 체이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흄이 아닌 루시온이 돌돌 말린 종이를 가졌다.

또 다른 가치 있는 걸 베풀기 위해 제 품을 뒤지는 사이 내용을 확인한 루시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건 광산 소유 증명서인데?'

그냥 소유 증명서가 아니었다.

몸값 대신 지급한다는 다른 계약서까지 같이 있었다.

계약서에 적힌 이름은 광산을 포기한 자와 체이톤.

어떤 반전도 없이 저놈이 진짜 노예 상인이란 말이었다.

'정말…?'

루시온은 이렇게 쉽게 상황이 흘러가자 살짝 당황스러웠다.

[크라언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놈을 단번에 찾았다고? 진짜?]

서류를 빤히 보고 있던 러쉘이 미심쩍은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서류에 적힌 이름은 분명 '체이톤'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살짝 거슬리네요."

루시온은 일단 서류를 제 품에 넣었다.

지금 중요한 건 체이톤이었다.

"팔찌가 왜 필요했어?"

루시온이 물었다.

조금 전과 다를 것 없는 질문이었으나, 체이톤은 또 가치 있는 걸 손바닥에 올려놓은 뒤라 두려움에 떨었다.

"이번에는 열쇠네? 어디 열쇠일까? 네 아지트? 아니면 보물 창고? 어디든 값어치가 상당한 모양이야."

루시온은 기쁜 듯이 목소리를 냈다.

진심이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고, 체이톤이 흄에게 넘겼던 액세서리는 하나같이 고급스러웠으니까.

"저주를 풀고 싶지 않아?"

그때, 루시온이 속닥거렸다.

완전히 절망을 줄 순 없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도록 유도했다.

"서, 성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 그 팔찌가 성물이었어?"

"...!"

체이톤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대답하는 루시온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원래 첫 발걸음이 어려운 법이지.'

루시온은 일부러 체이톤이 진흙탕에 발을 디뎠음을 알려주었다.

[거봐. 성물 맞네.]

그제야 속이 후련한지 러쉘이 크게 웃었다.

―그럼, 성물은 트리에야? 트리에 빛은 라타가 맞아도 따뜻하고 너무 좋던데. 라타가 성물의 빛을 쐐도 돼?

[안 돼! 라타, 너는 절대 안 돼. 차라리 루시온이 맞는 게 낫지.]

마침 루시온이 소리치고 싶었던 말을 러쉘이 꺼냈다.

뒷말이 미묘했지만.

―라, 라타도 알아! 라타도 트리에의 빛만 좋아할 거야.

귀가 접힌 채로 흄의 다리 뒤로 도도도 뛰어간 라타는 러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아줘, 흄. 라타는 지금 시무룩해.

라타가 흄의 다리를 박박 긁었다.

"왜?"

루시온은 겨우 웃음을 삼키며 체이톤에게 물었다.

아무리 숨겨도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자 체이톤은 두려움과 자책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모릅니다. 정말요. 저는 그저 하수인에 불과하니까요!"

"네 뒤에 누가 있어?"

"...."

체이톤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루시온이 그의 손바닥에 있는 열쇠를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시, 시, 신전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루시온은 당황할 사이도 없이 조금 더 강하게 물었다.

"어디 신전? 제국의 대신전? 아니면 네바스트?"

"네바스트… 입니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요!"

체이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 정말 거기까지밖에 모릅니다! 그저 네바스트라고 들었을 뿐입니다. 확실한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제발, 이 저주를 풀어주십시오!"

체이톤이 절절하게 빌었지만, 침묵은 계속됐다.

러쉘은 말도 꺼내지 못했고, 베델은 뒤통수 맞은 기분에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

겨우 헛웃음을 내뱉은 루시온은 속에 들끓는 감정에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바스트가,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을 알고 있었다.

빛의 신을 따르는 이들이.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역병 취급하며 몰아세웠던 이들이.

[이 개새끼들이…!]

러쉘이 분노를 터트렸다.

흑마법사가 세계의 적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신전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 지금 흑마법사 집단을 알고도 외면하다니.

[미친 새끼들이!]

하지만 러쉘은 루시온을 보며 정말 간신히 참았다.

자신까지 이성을 잃으면 루시온은 어떻겠는가.

[…루시온.]

마치 러쉘의 목소리가 기폭제가 된 것처럼 루시온은 당장 체이톤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체이톤이 손에 쥐고 있던 열쇠가 아래로 떨어졌다.

루시온은 정말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눌러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정에 잡아먹혀도 이 분노만큼은 터트려야 했다.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을 알고 있었다고? 알면서도 침묵했고, 사이좋게 영역을 지켜주고 있었어?"

점점 루시온의 언성이 올라갔고, 이미 주먹이 체이톤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루, 루시온! 그러면 안 돼! 팔이 아파!

라타가 다급히 루시온의 바짓자락을 물었지만, 루시온의 주먹은 멈추질 않았다.

"이 개 같은 새끼들!"

퍽!

"쓰레기보다 못한 새끼들…!"

퍼억!

자신이 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조직을 만들었겠는가.

소설 속 러쉘을 죽인 게 누구였는가.

왜 자신이 타락하게 됐는가.

'소설 속의 루시온이 타락하게 된 모든 시작은 그 개 같은 네바스트의 신관 때문이었어!'

그 신관이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걸 공개적으로 밝혀버리면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모든 게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거기까지 하셔야 합니다."

또다시 팔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흄이 미안한 얼굴로 루시온을 붙잡았다.

"아직 팔이 낫지 않으셨습니다. 손등에 상처가 나셨고요. 더는 휘두르시면 안 됩니다."

루시온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뒤늦게 손등에 찝찝함과 아픔이 느껴졌다.

누구의 피인지 몰랐다.

흄이 손수건을 꺼내 루시온의 손등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도련님께서 하지 못하시는 일과 궂은일은 제가 다 감당하겠다고 말입니다."

흄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제게 명령하십시오. 도련님께서 이렇게 다치실 필요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꺼내는 흄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되는데.'

무서웠다.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 부정이 늘어버릴까 봐.

늘어난 부정으로 타락해버릴까 봐.

탁.

루시온의 손에 힘이 빠지자 체이톤이 중심을 잃고 땅으로 나뒹굴었다.

루시온은 자신의 바짓자락을 입으로 필사적으로 당기는 라타와 자신을 말리고 싶다는 얼굴로 꾹 참고 있는 러쉘과 베델을 보았다.

"미안...."

루시온은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에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합니다."

참았던 온갖 감정들이 이성으로 누리기 어려울 만큼 커져 버렸다.

어둠의 축복을 받은 이들을 악이라 지칭하며 나누고, 쪼개고, 갈라지게 했던 이들이 사실 진짜 악을 보고도 외면하고 있었다니.

"미안… 합니다."

이럴 거였으면 왜.

왜 빛의 축복을 받은 저들은 무조건 '선'이어야 하고, 어둠의 축복을 받은 자신들은 '악'이어야만 하는가.

루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입술을 느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루시온.]

[맞아. 공이 미안해할 일은 없다. 당연한 분노니까.]

러쉘이 굳은 얼굴을 펴며 피식 웃었고 베델은 루시온의 손을 잡아주었다.

"…하."

루시온은 깊게 깊게 숨을 토했다.

―루시온, 많이 아파? 루시온이 아프면 라타도 싫어.

"아니. 별로 아프지 않아. 미안해, 라타."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타는 괜찮아. 봐. 라타 이빨은 엄청 날카롭고, 튼튼해.

라타가 이빨을 내보이자 루시온은 잠깐 가볍게 웃고는 체이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피떡이 되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푸른 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체이톤을 때리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체이톤이 네바스트의 하수인이라면 그를 때리는 것만으로도 푸른 실이 팽팽해졌어야 했다.

루시온은 체이톤을 보았다.

두려움.

그 감정이 가장 많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럼 누구일까.

'생각하자, 루시온.'

저놈이 엄청 중요한 놈이었다면 푸른 실이 아니라 붉은 실이었을 테지.

그렇다고 푸른 실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붉은 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운명이지 그것마저도 자신에게는 절박했다.

'지금까지 어떤 실에 얽히든 누군가를 박살 내면 실에 반응이 있었어. 그럼, 체이톤은 뭐가 다른 거지?'

루시온이 물끄러미 체이톤을 바라보았다.

'설마 본인이… 아닌 건가?'

145화. 조용한 가면을 벗기다(3)

푸른 실에 엮인 이들은 죄다 직간접으로 사건과 얽힌 본인이었다.

자신이 저놈을 노예 상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계약서에 적힌 '체이톤'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정말 만약에 저놈이 가짜라면.

이름만 같은 이를 대역으로 세워둔 거라면.

자신의 방법은 틀린 게 당연했다.

가짜를 박살 내봤자 운명이 바뀌지 않을 테니.

"하수인이라며."

루시온이 물었다.

"너, 네바스트의 하수인이 맞긴 해?"

팅!

그제야 자신의 질문에 푸른 실이 팽팽하게 반응했다.

체이톤이 두 팔로 간신히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저놈은 진짜 체이톤이 아니었다.

루시온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둠을 이용해 다시 체이톤에게 현혹을 사용했다.

"종이랑 펜 던져."

루시온이 체이톤을 가리키며 흄에게 명령했다.

[그래. 대충 윤곽이 나왔으니 확실한 정보는 현혹을 통해 얻는 게 낫지.]

러쉘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를 가져가려고 한 건 신성 국가 네바스트였다.

어쩌면 저 팔찌가 '성물'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네가 속해 있는 아지트의 위치를 적어. 진짜 주인이 어디 있는지까지."

이제 거짓말쟁이는 필요 없었다.

자신에게는 진실만이 필요했다.

"흄."

어차피 죽을 목숨.

루시온은 체이톤 앞에서 가짜 역할을 그만뒀다.

"예, 도련님."

"놈의 냄새를 기억해. 아마 이놈의 진짜 주인은 아지트에서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고 있을 테고, 저놈의 냄새가 묻을 수밖에 없어."

노예 상인은 적이 많았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이유겠지.

그 이유가 아니면 구태여 '가짜'를 앞에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미 기억했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체이톤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서는 등을 살짝 돌렸다.

콰드득.

흄이 체이톤의 목을 쥐어 완전히 으깨버렸다.

―라타가 유령을 불러올게.

라타가 체이톤에게 손을 댔다.

루시온의 어둠이 줄어들면서 체이톤의 유령이 몸에 튀어나왔다.

체이톤은 조금 전 죽음을 기억했는지 덜덜 떨다 말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잘 기억해. 누가 죽든 빛의 신은 마중 오지 않아."

루시온의 어둠이 체이톤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도."

[끄아아아악!]

루시온은 천천히 체이톤을 무릎 꿇렸다.

괴로울 만큼만.

하늘로 바로 가지 않을 만큼만.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 * *

가짜 체이톤이 하늘로 보내지고 난 뒤, 푸른 실이 잘려나가고 붉은 실이 새로이 휘감겼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몰랐기에 우선 가짜 체이톤이 머물렀다던 아지트로 향했다.

가짜 체이톤이 말한 아지트는 총 두 개였다.

하나는 살아 있을 적에 가짜 체이톤이 적은, 놈이 현재 머무르던 곳.

다른 하나는 유령이 된 가짜 체이톤이 토해낸, 진짜 노예 상인이 있는 곳.

첫 번째 장소는 보자마자 눈을 의심해야 했다.

지금 루시온 자신이 머무는 저택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리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어차피 가짜 장소이기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소는 미론스트 왕국으로, 첫째 왕자한테서 검은 구슬을 받아오려면 들려야 하는 곳이라 동선을 줄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흄은 저택을 지키고 있던 이들을 싹 정리하고는 가짜 체이톤에게서 얻은 열쇠로 저택 문을 열었다.

'유령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복종된 유령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네바스트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걸 나타내지 않겠는가.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와 저택 안이 드러났다.

멀쩡해 보이던 외형과 달리 내부는 삭막하며 사람이 사는 집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낡았다.

삐거덕.

루시온이 발을 내디디자마자 소리가 울렸다.

순간, 루시온은 흠칫 놀랐다.

'이거 부서지는 거 아니야…?'

꺄르르.

라타가 즐거워하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라타는 처음 듣는 소리야! 엄청 재미있는 소리야!

"뛰지 마, 라타. 무너질 것 같다고."

루시온의 언성이 올라가도 라타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야후후.

"이렇게 저택을 허술하게 관리하다니. 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흄이 오만상을 구겼다. 집사로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청소를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토록 불쾌감을 드러내는 흄의 모습에 루시온이 놀랐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라타마저 행동을 멈추고 흄을 바라보았다.

―흄도 뛰어봐. 삐거덕거리는 게 라타는 너무 재미있어!

"안 됩니다, 라타. 도련님 말씀대로 정말로 바닥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야. 라타는 가벼워. 라타는 깃털이야!

"아니. 요새 몸도 커졌고, 무거워졌어."

루시온은 딱 잘라 말했다.

같이 잠을 잘 때 라타가 가슴팍에 올라오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지이? 라타가 성장했지? 라타가 자랐지? 이히히!

대체 말을 어떻게 알아듣는 건지 몰라도 라타는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살랑거렸다.

―라타는 이제 더 쑥쑥 자랄 거....

우지끈.

라타가 신나게 제자리에서 뛰다 말고 바닥이 무너져내려 앞발 하나가 빠져버렸다.

―루시오온!

당황하는 라타의 목소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루시온은 이미 어둠을 보냈다.

흄보다 더 빨리 라타를 감싸서는 자신의 근처에 내려놓았다.

―라타는, 라타는 엄청 무서웠는데 조금 재미있었다?

라타가 루시온의 다리에 붙으면서 훌쩍였다.

뭐 어쩌자는 건지.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아. 흄이 이럴 때 인사하는 거라고 했어. 고마워, 루시온!

라타가 루시온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라타."

흄이 라타를 부르자 라타는 움찔거리며 귀마저 축 처졌다.

"낡은 바닥에 뛰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죠?"

―웅. 라타가 잘못했어. 미안해.

바짓자락을 잡는 라타의 손길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지하에 사람이 갇혀 있다.]

먼저 저택을 둘러보고 온다던 베델과 러쉘이 땅에서 올라왔다.

―히익!

라타가 다시금 루시온의 다리를 꽉 잡았다.

―라, 라타는 안 놀랐어!

"노예로 끌려온 이들입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맞아. 갇힌 사람들이 좀 많아. 다 크라언이 매고 있었던 그 목걸이를 착용했더라고. 현재 상태도 나쁘고.]

러쉘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 공.]

베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가 가장 저들에게 마음이 쓰이겠지.

"그래."

[가짜 체이톤이 공허의 손이 아니라 네바스트의 하수인이었다는 건 알지만, 내가 실험체로 끌려갔을 때와 비슷한 흔적을 발견했다.]

베델은 자신의 손목을 가리켰다.

[손목에 상태가 적힌 팔찌. 얼굴에 들어온 날짜 표시. 물론, 형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괜히 신경이 쓰여.]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것만으로도 큰 사실이거늘, 거기서 실험이라니.

으레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는 족속들은 딱 두 놈뿐이었다.

흑마법사와 마법사.

"흑마법의 흔적이 있었습니까?"

루시온은 러쉘을 보며 물었다.

[아니. 아직 흑마법에 당한 흔적은 없었어.]

러쉘의 대답에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아직 네바스트가 저들을 가지고 뭘 하려는지 몰랐다.

하지만 흑마법사든 마법사든 실험체를 그냥 고르는 법이 없었다.

모름지기 오래 살고, 병도 없고, 튼튼한 이들을 고르기 마련.

[크라언을 부르려고?]

"예. 조직의 목표를 잊으셨습니까? 겉치레긴 해도 평화와 자유가 아닙니까? 저들을 자유롭게 해줘야죠."

순간, 러쉘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루시온의 '스승'이라는 소리도 익숙해지기까지 일주일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저 말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필요할 듯했다.

[저들을 구해줘서 조직원으로 포섭할 생각이지?]

"맞습니다.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신은 충성스러운 조직원을 포섭해서 좋고, 저들은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어 좋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루시온 공. 공이 하는 행동은 결코 쉬운 행동이 아니니까.]

베델은 루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들을 조직원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이유를 댔지만, 결국, 위험한 행동이었다.

네바스트의 추격과 위협을 각오한 행동이 아닌가.

루시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베델은 따스한 미소를 그렸다.

"크라언."

다소 투박한 목소리가 루시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 하멜 님.>

크라언은 금방 연락을 받았다.

"자고 있었다면 미안해."

<아닙니다. 하멜 님의 연락이라면 언제든 기다리고 있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자기 전인지 크라언의 목소리는 생생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 노예 상인 하나를 만났거든."

<노, 노예 상인을 말입니까?>

크라언은 당황해하며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어떻게 생긴 놈입니까. 아니, 정말 죄송하지만, 놈이 가진 목걸이를 혹시 가져와 줄 수 있습니까?>

"불법 노예들이 있어."

<....>

숨을 들이켜는 크라언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신원이 불명하거나, 버려졌겠지. 갈 곳이 없는 이들이야. 내가 구할 거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어디입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루시온은 차분히 이곳의 주소를 말했다.

"남부 지부장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아마 지금 저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금방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하멜 님....>

"말해."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됐어."

이번에는 크라언이 먼저 연락을 끊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목소리에서 전해졌다.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집어넣으며 흄에게 물었다.

"흄. 지금 몇 시...."

팍!

라타를 안고 주변을 돌아다니던 흄이 갑자기 바닥을 깨부쉈다.

"흄…?"

[흄이 냄새를 정말 잘 맡네.]

러쉘이 갑자기 낄낄 웃었다.

"예?"

루시온만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흄이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단 말인가.

[이 밑에 보물 창고가 있다.]

친절하게 알려주는 베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눈이 번뜩 떠지는 기분이었다.

보물 창고가 있다면 무조건 얻어가야지.

"흄."

루시온이 조금 전보다 강하게 말하자 흄은 그제야 행동을 멈췄다.

"아. 죄송합니다, 도련님."

"네가 보물 때문에 이러진 않을 테고. 혹시 몬스터의 뼈가 섞인 뭔가가 느껴지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 외침이 제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강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이끌려서 이런 짓을… 벌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흄은 자신이 벌인 일을 보고 당혹감에 안절부절못했다.

멀쩡한 바닥을 명령도 없이 부수려 했다니.

"아니. 좋은 거라면 가져야지. 계속해."

루시온은 흄을 재촉했다.

어차피 이곳을 남김없이 싹 털어가려고 했기에 뭘 망설이겠는가.

'그나저나 흄이 쳤는데도 부서지지 않았다고?'

루시온은 라타가 신나게 뛰다 무너진 바닥과 흄이 쳤음에도 움푹 들어간 게 고작인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같은 곳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니.

"일반 바닥이 아니죠?"

러쉘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뭔가 관찰을 하려고 했는지 러쉘이 깜짝 놀랐다.

"마법으로 된 바닥입니까? 아니면 방어 마법이 작동 중입니까?"

[방어 마법이 작동 중이야. 공격 형태가 없이 순수하게 방어로만 작동하고 있어.]

"…그런데 저렇게 패였습니까? 마법은 맨발로도 부술 수 있는 거였습니까?"

[아니. 흄이 예외일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베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콰앙!

두어 번 더 발로 콩콩 밟는 흄의 힘에 이기지 못하고 방어 마법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바닥이 부서져 내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드러났다.

―오오. 라타가 좋아하는 비밀 통로야! 라타가 먼저 가도 돼?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흄을 바라보았다.

'빛도 통하지 않고, 유령을 보는 것도 모자라 잡을 수 있고, 마법도 물리적인 힘으로 부수고, 몬스터의 힘도 흡수할 수 있고, 본인도 몬스터고.'

게다가 검은 구슬로 안내하는 인도자였다.

'대체 흄은… 뭐지? 흄을 정말로 '몬스터'라고 지칭해도 되는 건가?'

어딜 봐서 몬스터인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흄이 루시온의 시선을 느꼈는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었다.

흄을 만든 그 흑마법사는 죽었는지.

그 흑마법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하지만 루시온은 묻질 않았다.

누울 공간도 없는 작디작은 방이 흄의 전부라고 했다.

지금 자신의 방은 별을 볼 수 있어 좋고, 바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흄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 더 늦고 본인에게 둔할 뿐이었다.

그런 흄이 지금까지 딱 한 번,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흑마법사를 언급했을 뿐이었으니.

"아니야."

루시온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내려가자."

146화. 흄은 흄이다

"어둠을 사용해서 내려가시겠습니까?"

흄이 물었다.

"그래야지."

"그럼 라타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흄은 고개를 살짝 숙인 뒤에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우오오오오오!

즐거워하는 라타의 소리가 꽤 깊게 들렸다.

베델이 피식 웃으며 라타의 뒤를 쫓았다.

[먼저 가겠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남부 지부장과 연락해서 앞서 사정을 설명하고 저들이 있을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연락을 끊고 난 뒤에 루시온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구멍 속 어둠을 보자 러쉘의 아지트에 떨어졌던 그 기억이 떠올라 선뜻 망설여졌다.

[보물 창고랑 사람들을 가둬놓은 곳이 비슷한 높이에 있어. 안은 좁지 않고 제법 넓은 편이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러쉘이 루시온의 걱정을 덜고자 말을 꺼냈다.

[배의 상처가 걱정되겠지만, 어둠으로....]

"스승님."

루시온이 가면을 벗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덩달아 러쉘도 웃음기를 지웠다.

[그래.]

"네바스트가 신성 국가이기에 성물을 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의도로 모으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성물이 워낙 정보가 없어. 왜 흩어져 있는 건지, 성물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오죽하면 성물을 다 모으면 빛의 신이 강림한다는 개소리까지 있겠어?]

루시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렵습니다. …정말로."

[그래, 루시온. 몰랐으면 몰랐지, 알아버렸는데 이걸 어떻게 외면해? 그래도 루시온.]

루시온은 러쉘을 보았다.

[넌 잘하고 있어.]

러쉘이 루시온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루시온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에 그저 얼떨떨했다.

[그래. 넌 잘하고 있어.]

다시금 러쉘이 꺼내는 말에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또 밀려오는 낯선 느낌에 루시온은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흄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이 낯설어 루시온은 괜히 말을 돌렸다.

[그래.]

러쉘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정말 '몬스터'가 맞을까요?"

[적어도 흄은 괴물이 아니야. 하지만 사람과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 건 분명하지. 그래도 흄은 흄이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흄은 흄입니다."

루시온은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몸에 어둠을 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루시온!

땅에 착지하자마자 라타가 꼬리를 흔들며 루시온에게 뛰어왔다.

루시온은 자신을 중심으로 빙그르르 도는 라타를 보다 말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출구는 따로 있는지 계단이 보였다.

"이쪽입니다."

흄이 루시온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더니 안쪽으로 안내했다.

"도련님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입구를 부서트렸습니다."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흄은 말했다.

루시온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왼쪽에 인기척이 들렸다.

[저쪽이 맞아. 저쪽으로 쭉 가서 아래로 내려가면 사람들이… 갇혀 있어.]

베델이 루시온의 시선을 따라가다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얼른 구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눈빛에 흘러넘쳤다.

안타깝지만, 조직원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기에 루시온은 잠깐 그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 혼자서는 저들을 구할 수 없었고, 괜한 혼란만 불어올 뿐이었다.

[아, 공을 재촉하는 게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았으면 해.]

베델은 뒤늦게 자신의 말이 루시온에게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다급히 입술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베델.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아."

[알고 있어.]

베델이 슬쩍 웃음을 흘렸다.

[루시온 공.]

"말해."

[위로 올라가서 공의 조직원들이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있어도 괜찮겠는가?]

베델은 괜찮은 척했지만, 불안해 보였다.

"내 눈치 보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베델."

[고맙다, 루시온 공.]

베델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바로 위로 올라갔다.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셈이니 버거울 테지.

차라리 조직원을 기다리고 있는 편이 심적으로 나을지도 몰랐다.

―루시온, 있지.

라타는 루시온의 옆에서 걸어가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안에 반짝거리는 게 많았다? 라타가 한번 뒹굴고 싶었는데 흄이 먼지가 많아서 안 된대. 루시온도 그렇게 생각해?

먼지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굴러보는 거야 괜찮지."

―이히히. 루시온이 최고야! 라타는 루시온이 제일 좋아!

라타의 꼬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흔들렸다.

'꼬리로 날겠네.'

루시온은 딱 보아도 흄이 부쉈다고 보이는 곳 앞에 섰다.

철판이 양쪽으로 쪼개져 족히 네 사람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구멍이 있었다.

"도련님."

루시온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흄이 그를 불렀다.

"그래."

"먼지가 많습니다. 보물들도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요."

'비자금인가?….'

묵혀놓은 돈이라면 관리가 되어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루시온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걷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가면도 잠깐 벗으려고 했는데 망설임 없이 포기했다.

"라타."

―응!

"아까 했던 말은 취소야. 저런 더러운 곳에 널 뒹굴게 할 순 없지."

조금씩 뛰듯 걷던 라타가 그대로 굳어졌다.

―라타는. 라타는....

라타가 조금씩 울먹거렸지만, 루시온이 안 된다고 말하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고집을 피우진 않았다.

그저 축 늘어진 꼬리를 빗자루 삼아 질질 끌며 걸었다.

'이곳을 곧 처분하려고 한 건가?'

루시온은 라타를 힐끔 쳐다본 뒤, 창고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보물 창고라지만, 보석들과 돈들이 자루들 속에 반쯤 처박혀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뿌려지듯 흘려있었고.

'유령이 없으니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네.'

루시온은 유령의 부재에 아쉬움을 느끼며 종이들을 찾아다녔다.

모름지기 보물 창고 안에 중요한 서류나 증서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진짜 이럴 때마다 느낀 거지만, 나도 수상한 곳 좀 둘러볼 걸 그랬다. 어찌 된 게 루시온 네가 가는 곳마다 금은보화들이 쏟아져?]

러쉘이 투덜거리자 루시온은 내내 궁금해하던 사실을 꺼냈다.

"저번에 스승님의 아지트 창고에서, 값어치 있는 것들이 한두 개 보였습니다. 이렇게 투덜거리실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본 건 겨우 창고 하나였지만, 규모를 생각하면 러쉘도 풍족하게 지냈을 확률이 높았다.

[뭐? 값어치 있는 물건이었어? 다 골동품들이 아니었다니....]

"스승님께서는… 자급자족하며 사셨습니까?"

에이, 설마.

[당연하지. 그 아지트도 내가 어둠을 사용해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거야. 내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습성이 있어서 아지트도 쓸데없이 늘어난 거고.]

러쉘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감정이라도 받아보는 건데.]

장난기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자 루시온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면 러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나 싶었다.

이상하게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뭔가가 자신의 궁금증을 억누르는 듯했다.

루시온은 의문을 느끼는 것도 잠시 흄에게 말을 걸었다.

"흄. 자루를 살펴봐 줘. 종이들이 있으면...."

―앗! 여기 있어! 라타가 제일 먼저 발견했어!

라타의 목소리가 좀 멀게 들리자 루시온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자루에 반쯤 들어가 뒷다리와 꼬리를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언제 또 저기로 간 거야?'

[살금살금 가던데?]

러쉘이 키득거렸다.

"제가 뽑겠습니다."

흄은 자신을 이리로 부른 그 물건을 찾다 말고 라타에게 다가갔다.

뽁.

파묻힌 라타를 뽑자마자 자루가 무너져 내리면서 온갖 서류들을 토해냈다.

―봐봐. 여기에 종이들이 엄청 많다? 라타가 찾았어! 라타가!

라타가 으쓱거렸다.

흄이 라타를 안고 서류 중 하나를 주우려던 그때,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거기 뭐가 있어?"

배가 당겨 몸을 숙이기 불편했던 루시온은 고개만 아래로 숙이며 물었다.

"…저기 서류 중에 정말 옅지만, 크라언 씨의 냄새가 났습니다."

[크라언이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서류가 남아 있다고?]

서류가 있다는 말은 곧 크라언이 저놈들에게 있어 나름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닌가.

"어디에서?"

루시온이 재촉했지만, 흄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서류가 쏟아져 나올 때. 그때, 찰나에 난 터라 지금은 냄새가 뒤섞여 모르겠습니다."

"흄."

"예, 도련님."

"고개 들고, 널 이곳으로 이끌었던 그 물건부터 찾아."

흄이 성장할 길은 '몬스터'라 추정되는 뼈를 섞어 만든 물건을 흡수하는 일이었다.

[좋은 생각이네. 흄의 성장은 곧 흄이 가진 능력을 키워주니까.]

"그럼, 당장 찾겠습니다."

흄의 눈동자에 깊은 기대가 어렸다.

―루시온. 루시온은 이거 보고 있어. 라타는 루시온이 글자를 좋아하는 거 알고 있어!

라타가 종이를 입에 물어서는 루시온 앞에 내려놓았다.

앉을 만한 자리도 없었기에 루시온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잠깐 생각에 빠졌다.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

루시온은 어둠을 의자 삼아 만들어 자리에 앉았다.

'...?'

생각보다 편했다.

5점 만점의 3점.

[오호.]

러쉘은 루시온의 응용력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어둠을 의자 삼아 앉을 줄이야.

역시 내 제자.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에 루시온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어둠으로 종이를 가져왔다.

팅.

가짜 체이톤을 죽이고 나타난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이게 왜...?'

루시온은 당장 종이를 살폈다. 종이 끝에 불에 그슬린 흔적이 보였다.

태우다 날아간 건지, 누가 실수로 꺼내 이곳에 넣었는지 몰라도 누군가와 나눈 편지였다.

"가짜 체이톤의 냄새가 납니다."

불쑥 귀에 들어온 흄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이 편지에서 가짜 체이톤의 냄새가 난다고?"

루시온은 고개를 돌려 흄을 보았다.

보석과 돈으로 가득 찬 쪽을 뒤지고 있었다.

루시온의 시선을 느낀 건지 흄은 행동을 멈추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예. 냄새로 봤을 때, 한 달 좀 넘는 듯합니다."

"그게 구별이 돼?"

"예. 그래도 검을 몇 개 흡수했잖습니까."

'…뭐지? 역시 개과 몬스터가 맞는 건가?'

루시온은 의아함을 느끼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 달 좀 넘는 시간이라면 생각보다 얼마 안 됐네.]

"그러니까요. 시간상으로… 제가 크라언과 처음 만났을 때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루시온은 가볍게 웃으며 편지를 읽어나갔다.

―이걸 읽고 난 후 반드시 태울 것.

첫 문장부터 경고로 시작했다.

―네가 그간 넘겼던 보고는 잘 봤다. 크라언이 정말로 10만 델을 가져왔다는 게 믿기질 않는군.

'진짜 그때잖아?'

루시온은 자신의 예상대로 들어맞자 깜짝 놀랐다.

―이제 감시는 됐다. 10만 델을 받고 풀어줘. 10년이라는 시간은 길지. 그간 지켜본 결과 저놈은 제 왕국을 다시 세울 능력도, 진실을 밝힐 능력도 없는, 그야말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이지.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종이를 구길 뻔했다.

크라언이 왕자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일부러 10년간 잡아놓았다니.

대체 뭘 위해서?

'크라언이… 이걸 보면 피눈물을 흘리겠는데.'

루시온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놈을 죽이지 마. 그냥 풀어줘. 놈의 죽음은 기껏 흩어진 케오르티아 왕국의 백성을 하나로 뭉치게 할 테고, 케오르티아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를 캐내려 할 테니까. 위에서도 원하는 일이고.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 태워.

편지는 다시금 태우란 말로 끝이 났다.

루시온은 마지막까지 읽었음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멸망한 이유라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여기서 '위'라고 하는 곳이 만약 네바스트라면 아주 큰 문제였다.

중립을 유지해야 할 신성 국가 네바스트가 중립을 깨고 검을 휘둘렀다는 뜻이 아닌가.

네바스트가 공허의 손이라는 걸 아는 이상, 자연스럽게 뉴트라 왕국이 공허의 손 뒤에 있다는 것도 알 테고.

'그렇다는 건… 뉴트라 왕국까지 묵인하고 있다는 말인데.'

설마.

루시온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소설 속보다 적의 규모가 더 커지지 않았는가.

[…크라언이 보면 난리가 나겠는데?]

몇 번이나 입술만 움직이던 러쉘이 안쓰러움을 담아 말했다.

불법 노예로서 살아왔던 삶이 다 계획된 일이었다니.

사아아아.

갑자기 몰려온 추위에 루시온은 편지를 쥔 상태로 덜덜 떨었다.

-아! 라타가 책에서 봤어! 겨울이다!

루시온이 고개를 돌리자 흄에게서, 정확히 흄이 쥐고 있는 물건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147화. 흄은 흄이다(2)

"...!"

흄은 깜짝 놀란 상태로 굳어버렸다.

보석들과 돈들 속에 묻힌 물건을 발견하고 꺼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검이 아니었다.

작은 보석함이었다.

흄은 덜덜 떠는 루시온을 보며 당장 물건을 놓아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탁.

땅에 떨어진 소리와 함께 보석함에서 새어 나오던 냉기가 멈췄다.

"많이 추우십니까?"

흄은 다급히 제 주머니에서 담요를 꺼내 루시온을 덮었다.

가뜩이나 검은 구슬 때문에 몸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거 마법이 아닌데…?]

보석함을 빤히 보던 러쉘이 살짝 넋을 놓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시온이 담요에 돌돌 감기며 물었다.

[저 보석함에서 그 어떤 마나도 느껴지질 않아. 빛도, 하물며 어둠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지?]

마냥 예쁜 보석함으로 보였지만, 방금 흄이 쥐면서 어떤 힘이 있다는 게 밝혀지질 않았던가.

루시온에게 꼭 붙어 있던 라타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다가가 앞발로 툭 하고 건드려보았다.

―오옹?

라타의 눈이 커졌다.

"흄에게만 나오는 거니까 아무리 두드려봤자 나오지 않아."

루시온은 보석함을 살펴보려 어둠을 보내 잡았다.

사아아아.

흄처럼 냉기가 뿜어져 나오자 루시온은 그대로 멈췄다.

"...?"

루시온은 화들짝 놀라듯 보석함을 잡은 어둠을 떼어냈다.

그 냉기가 흄에 비해 턱없이 적었지만, 나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루시온? 흄은 몰라도 너는, 너는 왜 냉기가 나오는 건데?]

러쉘이 황당해하며 묻자 루시온은 말을 더듬거렸다.

지금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저도 묻고 싶습니다. 제가, 제가 왜...."

"도련님께서도… 몬스터였습니까?"

흄은 너무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아니."

루시온도 잠깐 흔들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는 딱 잘랐다.

―아? 아니야, 루시온. 라타도 나왔어. 이것 봐봐!

라타는 방금 보석함이 있었던 장소에 손톱만 한 크기의 웅덩이를 가리켰다.

"라타 너도 나왔다고?"

루시온이 되묻자 라타가 조금 전처럼 앞발로 보석함을 건드렸다.

[…세상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러쉘이 이마를 쓸어내렸다.

정말 아주 적은 양이나, 틀림없이 냉기가 나왔다.

러쉘의 반응에 루시온은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정말로 나왔습니까?"

[그래.]

"이거 왜 그런 겁니까…?"

작동 오류, 뭐 그런 걸까.

[잠깐만.]

러쉘은 흄은 물론 루시온, 라타까지 반응한 이 상황에 해결법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도 확인했다.

러쉘이 입술을 움직이며 어떤 말을 중얼거리자 주변에 있던 어둠이 그의 손에 몰려왔다.

―러쉘이 어둠한테 이리오라고 말했어. 라타가 들었어.

라타가 루시온에게 달려가 작게 속삭였다.

굳이 달려오지 않아도 머릿속에 울리기에 다 들릴 텐데.

루시온은 배를 감싸며 잠깐 무릎을 꿇고 라타를 쓰다듬어주었다.

러쉘의 손가락 끝에 어둠이 모여들었고, 그는 어둠을 시켜 보석함을 만지도록 했다.

라타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냉기가 어렸다.

어둠을 물린 러쉘은 자신이 알아낸 확실한 한 가지를 언급했다.

[지금 이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너야, 루시온.]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루시온은 자연스레 상황을 부정했다.

하지만 말을 끝낸 순간, 잠깐 멈칫거렸다. 손가락을 매만지며 '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님도, 라타도, 흄도 다 저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 나랑 너는 계약으로, 라타는 네 어둠에서 탄생됐고, 흄은 네 어둠을 밥처럼 받고 있지.]

"검은… 구슬 때문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네가 검은 구슬을 얻기 전에 이렇게 확인한 적이 없으니까.]

"하긴 그렇네요. 경우의 수가 몇 없으니 확신하기도 어렵습니다."

루시온은 짧게 숨을 내쉬다 흄을 재촉했다.

"흄. 별일 아니니까, 어서 흡수해."

"알겠습니다. 추우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흡수하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이 덮은 담요를 확인하고는 보석함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는 눈동자를 닮은 보석이 있었다.

아니, 정말로 눈동자라고 생각할 만큼 너무도 흡사했다.

잠깐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흄은 알지 못했다.

흄이 보석을 쥐자 보석이 조각조각 깨져서는 그대로 흄에게 스며들었다.

―모두가 우리를 잊어도 부디, 우리의 피를 이은 누군가는 우리를 기억해주길. 어둠을 따랐던 그 긍지를. 우리의 진짜 이름을!

"...?"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시선이 높아질 무렵 흄은 자신에게 깃드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사념일까.

흄은 그 목소리에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가슴에 닿아 아팠다.

슬픔, 안타까움, 괴로움, 절망, 그리고 희망을.

멋대로 눈앞이 눈물로 흐릿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하.

숨을 내쉬자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냉기가 숨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어둠을 따르는 이들.

그들은 자신들을 '라비엔'이라고 불렀다.

"…라비엔."

흄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라비엔?'

평소라면 듣지 못했을 그 작은 소리를 루시온은 오늘 이상하게도 그냥 흘려지질 않았다.

―울지마, 흄. 힘을 흡수하는 게 아팠어? 라타가 호 해줄까?

라타가 흄에게 뛰어가 다리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아닙니다. 아프진 않습니다."

흄은 라타를 품에 안아 쓰다듬었다.

"다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습니다. 이걸 사념이라고 하는 거겠죠?"

흄은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맞아. 물건 속에 기억을 주입하는 마법들을 보통 그렇게 부르지. 다만, 성공하기가 엄청 힘들지]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러쉘 자신도 수첩에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어떤 흑마법을 사용했고, 기억을 잃은 건 흑마법의 부작용 때문이었고, 결과적으로 그 흑마법으로 '까망이'를 살렸다고 했다.

"제 머릿속에 들어온 자가 말하길, 자신들은 어둠을 따랐으며 자신들을, 라비엔을 기억해달라고 말했습니다."

흄은 잠깐 입술을 꽉 깨물다 겨우 뒷말을 이었다.

"…'우리'라고 지칭하면서요."

우리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컸다.

흄은 저 보석함에 담긴 보석뿐만 아니라 몬스터라고 알려진 뼈가 섞인 검도 흡수했다.

자신이 몬스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저 목소리가 모든 걸 부정했다.

저들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라비엔'이라고 불렀다.

긍지를 언급하며.

"저는… 몬스터가 아닌 걸까요?"

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을 만들었던 흑마법사가 원하던 게 아니었기에.

달랐기에 자신은 창문도 없는 아주 작은 세계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제가 불량품이라서,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 작디작은 방에 갇혀 있었을까요? 제가...."

"너는 흄이야."

루시온은 흄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주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로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을 거라 예상했기에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몬스터든, 라비엔이든 넌 흄이야. 내 집사인 흄."

다른 건 몰라도 이름만큼 자아를 확실히 붙잡아둘 요소는 없었다.

―맞아. 흄은 흄이야.

라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넌 흄이지.]

러쉘도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뭐라고 말했어, 흄? 네가 몬스터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했지?"

루시온은 가면을 벗고 흄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그 눈빛에 흄은 입술을 꽉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은 어디라고?"

"크로니아입니다."

"네 이름은?"

"…흄. 도련님께서 제게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그제야 흄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지금 방은 마음에 들어?"

루시온이 웃으며 물었다.

"…예."

흄의 목소리가 먹먹했다.

"별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습니다. 저는 달빛이 그토록 환한 줄 몰랐습니다. 밤하늘이, 늘 보던 어둠이 이토록 따스할 줄은 몰랐습니다."

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지만, 고개가 천천히 숙어졌다.

"다들 매일같이 제게 흄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면서 웃어줍니다. 도련님도, 가주님도, 안토니 님도 전부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십니다."

목소리가 깊게 물에 젖어갔다.

바닥으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렸다.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게 얼마나 기쁜지 알아버렸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 조금씩 다른, 그 재미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아버렸다.

"저는… 흄이고."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그 공간에서 버틸 수 있었다.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그렇게 입 밖으로 내뱉어버리면 버려졌다는,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셈이 되어 너무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차라리 몸의 통제를 잃어버리고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나았다.

결국, 통제를 잃어버린 제 몸이 아무도 없는 공간임을 알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했던, 멍청한 자신을 그 공간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렇게 멋대로 뛰쳐나와 이렇게 루시온과 만날 수 있었으니.

"도련님의 집사입니다."

흄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어떤 말도 지금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수 없었다.

루시온의 집사.

지금 자신의 긍지였다.

* * *

[루시온 공.]

베델이 내려왔다.

아무래도 조직원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흄을 바라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

라타의 꼬리에 묻은 먼지를 닦던 흄이 어색한 미소로 루시온을 보았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도련님을 괜히 신경 쓰이게 했습니다."

"아니.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그 일로 다시는 사과하지 마. 다시는 말이야."

루시온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지만, 흄은 오히려 웃었다.

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이제 이 일로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내가 나중에 말해줄게.]

러쉘이 베델에게 다가가 작게 속닥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직감한 베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흄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제가 도련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뭘?"

―라타도 궁금해!

흄의 손에 라타의 꼬리가 잡혀 꼬리 끝만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루시온은 흄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흄이 울음을 그치고 진정한 후에 보물을 죄다 마법 주머니에 속에 넣는 걸 보며 루시온은 내내 생각했다.

―제 머릿속에 들어온 자가 말하길, 자신들은 어둠을 따랐으며 자신들을, 라비엔을 기억해달라고 말했습니다.

흄이 했던 말과.

―그들은 어둠에서 태어났으며 어둠을 따르는 종이 되었다.

검은 구슬을 얻고 난 뒤에 검은 형체가 멋대로 꺼낸 이야기.

'어둠을 따랐다'라는 부분이 묘하게 겹쳤다.

'우연… 일까?'

루시온은 열심히 생각했지만, 어떤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정보가 부족했고, 어설프게 확신을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아니라면 어쩔 텐가.

'다음 검은 구슬을 얻어 그 뒤 내용을 알고 싶네.'

갑자기 감칠맛이 확 올라왔다.

만약에 다음 이야기를 구매할 수 있다면 당장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검은 구슬의 행방은 미론스트 왕자와 브로슨뿐인가.'

루시온이 접었던 손가락을 펼치며 흄을 보자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보석을 흡수해서 제가 능력을 얻었습니다."

"무슨 능력인데?"

흄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흄은 여성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 하루, 아니 이제 삼일 정도는 기억을 그대로 머릿속에 저장해 재생할 수 능력, 어마어마한 힘, 냄새를 기억하고 추적하는 능력이 있었다.

'근접과 관련된 능력이 아닐까?'

루시온은 잠깐 생각했다.

신나는 표정과 함께 흄이 손을 펼치자 그녀의 손에서 얼음이 만들어졌다.

"...?"

루시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흄에게 마나가 없었다. 마나 없이는 마법을 쓸 수 없었고.

하지만 저 얼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148화. 흄은 흄이다(3)

[와.... 마나도 없이 마법을 썼다고? 미치겠네. 루시온 널 만나면서 내 상식이 깨지는 기분을, 이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러쉘은 제 이마를 세게 쳤다.

루시온은 어둠의 신수를 탄생시켰다.

라타는 어둠의 신수로서 죽은 자의 영혼을 바로 뽑아내는 건 물론, 사용 중인 흑마법을 언제든지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흄은 마나 없이 마법을 사용했고.

"마법이 아닙니다. 제가 도련님께 받은 어둠을 소비해서 사용한 능력입니다."

흄이 활짝 웃었다.

―흄도 라타처럼 그런 거야? 라타랑 똑같은 거야?

라타가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저는 라타가 어떻게 어둠을 사용하는지 느껴보질 못해서 같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흄이 쭈그려 앉아서는 라타를 쓰다듬었다.

―라타가 막 '슝'을 쓰면 힘이 쭉 빠져. '아, 라타는 이제 기운이 없어'라고 생각할 때 루시온의 어둠이 라타의 어둠을 바로 채워줘. 그럼, 라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만약 흄이 라타처럼 힘이 빠지면 어떡해?

흄이 자신과 다른 걸 알자 라타는 걱정을 담아 그녀를 보았다.

"제가 잘 조절해야겠죠. 제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루시온이 어둠을 꺼내 흄에게 불어넣었다.

"아니. 내가 쓰러지기 전에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라타 데리고 나가자."

"예. 알겠습니다!"

비록 가면에 가렸지만, 흄은 루시온이 기뻐한다는 걸 눈치챘다.

덩달아 흄도 기뻤다.

* * *

루시온은 흄이 뚫어놓은 구멍으로 걸어갔다.

"위에 있지?"

베델에게 물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래. 이 구멍은 깊으니 안전하게 내려올 방법을 찾고 있어.]

베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과 흄은 소수지만, 크라언이 데려온 이들은 다수였다.

이 구멍으로 떨어지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흄. 계단으로 올라가서 입구를 뚫어줘."

"알겠습니다. 금방 움직이겠습니다."

흄이 라타를 내려놓자 라타는 눈치껏 루시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루시온은 천장 구멍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제 어둠이 닿긴 합니까?"

내려올 때는 몰랐지만, 다시 올라가려니 까마득했다.

[당연히 닿지. 해 봐.]

러쉘은 뭘 망설이냐는 듯 천장 구멍을 가리켰다.

"예. 그럼 해 보겠습니다."

루시온이 양손에서 어둠을 꺼냈다.

'자. 천장에 달라붙는 거다. 튼튼하게.'

어둠을 거미줄처럼 길고 가느다랗게 만들며 천장으로 뻗어 나갔다.

―오오오!

루시온의 그림자에서 빼꼼히 나온 라타가 어둠을 바라보며 신기함을 금치 못했다.

호기심을 보이던 베델마저 눈을 깜박거리며 색다른 모습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건 거미줄이… 아닌가?]

"맞아. 진짜처럼 되진 않았지만."

비록 진짜 거미줄처럼 가늘진 않았지만, 어둠은 쭉쭉 뻗어 천장 구멍 근처에 우수수 달라붙었다.

'오. 생각보다 튼튼한데?'

루시온이 어둠을 한번 당겨보자 점착력이 제법 괜찮았다.

―오오오! 새총이 당겨지는 모습 같다! 라타는 있지.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라타. 새총처럼 그렇게 타려는 건 아니야."

어둠이 빛처럼 빠르지는 못해도 새총처럼 탄력을 받으면 빨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라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라타의 귀가 쫑긋 섰고 눈이 커졌다.

"하지만 꽤 괜찮은 생각이야."

키득키득 웃고 있던 러쉘이 루시온의 말에 웃음을 뚝 멈추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진짜 사용하려는 건… 아니지?]

"간다."

루시온은 러쉘의 말을 흘리며 양손에서 나온 어둠을 빨아들이며 속도를 붙여나갔다.

쉬이이이잉.

―호옵! 우오오오!

처음에 깜짝 놀라던 라타는 점점 루시온과 함께 속도를 즐겼고, 빠르게 구멍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꺄르르' 웃기 바빴다.

[오…! 좋은 응용력이었어, 루시온.]

러쉘은 바로 루시온을 칭찬했다.

몸속에 있는 어둠을 빼내어 쓰는 법만 가르쳤지, 다시 집어넣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자신의 제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은 응용법이었다.

루시온이 구멍에서 튀어나오자 크라언은 물론 피터와 라인트 용병단까지 깜짝 놀랐다.

저 구멍에서 나올 줄이야.

"곧 입구가 만들어질 겁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장본인 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콰앙!

금세 거친 소리가 들렸고, 흄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보셨죠?"

루시온은 흄을 가리켰다.

"구해야 할 대상은 저 아래에 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멜 님."

라인트가 존경의 의미를 담아 하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움직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러니 몸에 탈이 날 만했다.

이제야 왜 크라언은 물론 조직원 중에서도 하멜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은지를 알았다.

저렇게 혼자 발로 뛰는데 걱정이 될 수밖에.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늦은 새벽에 불러서 정말 죄송할 뿐입니다."

루시온은 미안한 목소리로 사과하자 라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겸손한 건 물론, 이렇게 바른말까지 하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올바른 사람.

라인트는 하멜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깊게 들었다.

"크라언 님. 저 혼자 독단적으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루시온은 조금 늦었지만, 크라언에게 사과했다.

어쨌든 자신은 조직원이었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으니 크라언에게 사과하는 편이 맞았다.

"아닙니다. 조직의 목표는 평화와 자유가 아닙니까. 이렇게 바로 실천할 수 있게 되어 고마울 뿐입니다."

"그럼, 크라언 님. 저희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구출 임무라면 제법 해봤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인트는 두 사람의 말을 끊고서 크라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 곧 따라가겠습니다."

크라언의 허락이 떨어지자 라인트 용병단이 움직였다.

"피터."

마지막으로 출발하던 라인트가 가만히 서 있는 피터를 불렀다.

피터는 싫은 내색을 하며 하멜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하멜과 몇 마디 나누고 싶었다.

저번에 멋대로 움직인 일도 다시금 사과하고 싶었고, 성자를 만났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는데.

"알았어. 간다, 가."

'역시 술이 최고네.'

루시온은 유령을 통해 피터와 라인트가 술에 취해 대판 싸웠고, 그 후로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싸우면서 친해지는 게 아니겠나.

"아! 하멜 님."

라인트가 가다 말고 뒤돌아봤다.

"저, 성자를 봤습니다."

라인트는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 어떤 감탄사로도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기에 엄지로 모든 감정을 때려 부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에는 꼭, 하멜 님께서도 성자를 보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성자께서는 도무지 사람이라고...."

피터는 크라언과 비슷한 감탄을 흘리며 라인트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갔다.

[와! 좋겠네, 루시온? 여기저기서 널 칭찬한다고 바쁘네? 역시 내 제자야!]

러쉘은 일부러 루시온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를 치켜세웠다.

기쁘기도 기뻤고, 이럴 때 놀려 먹어야 제일 즐거웠다.

―응응! 역시 라타의 루시온이야!

라타가 러쉘이 줄줄 흘린 말을 날름 받아먹고는 행복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흡.]

베델마저 실소하며 고개를 돌리고 필사적으로 입가를 막았다.

러쉘이 일부러 루시온을 놀리려는 건지도 모르고 라타가 해맑아 웃음을 참기란 너무 힘들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흄이 간지러운 입을 겨우 참아냈다.

'미치겠네. 다들 왜 이래…?'

루시온은 속이 가려워 죽을 지경이었다.

성자 루시온은 시녀들의 손에 탄생됐을 뿐이었다.

곱게 자라서 귀티는 숨길 수 없었지만, 그전까지 음침하다며 손가락질받기 일쑤였다.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한들 믿으면 바보가 아닌가.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크라언은 용병단과 조직원들이 물러간 뒤에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아니. 제때 찾아왔어. 렌탈. 그거 줘봐."

루시온은 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흄은 부서진 검은 목걸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검은 목걸이를 보자마자 크라언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환희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크라언."

루시온의 부름에 크라언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무겁게 대답했다.

"…예, 하멜 님."

"나중에 들을게."

루시온은 크라언이 부담감을 가지지 않도록 이번 일을 뒤로 미루며 흄에게 고갯짓으로 크라언을 가리켰다.

흄이 검은 목걸이를 내밀자 크라언은 십수 년 만에 발견한 단서에 목이 메어왔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멜 님."

"그리고 이거 받아. 기다리는 동안 찾아낸 자료야."

루시온은 추가로 크라언에게 자료를 넘겼다.

이와 같은 장소가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걸 확인했다.

물론 전부 표시가 된 건 아니겠지만, 분명 크라언에게 도움이 될 테지.

그리고 크라언이 정보를 얻은 후라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신성 국가 네바스트를 언급할 수 있을 테고.

지금은 크라언에게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먼저 갈게."

"곧."

크라언은 추가로 들어온 정보에 기어코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하멜은 모를 테지.

아니, 몰라도 상관없었다.

너무 고마웠다.

드디어 십여 년을 돌고 돌아 손에 넣었다.

몇 년이 걸리든, 몇십 년이 걸리는 자신의 조국 케오르티아가 사라진 이유를 밝혀낼 거라 맹세했다.

이 일은 자신의 평생 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금방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라언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숙원과 별개로 루시온을 따르기로 했다. 더는 그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느긋하게 생각하고 대답해도 돼."

이미 알고 있으니까.

루시온은 뒷말을 삼키며 크라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신이 찾았던 그 편지를 크라언에게 넘길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넘기질 못했다.

진실이 잔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크라언이 무너질까 봐 걱정됐다.

지금 크라언이 무너질 때가 아니었고, 바지사장이든 뭐든 그가 조직 에일의 핵심 인물임은 변하지 않았다.

"…하멜 님."

"왜?"

"앞으로도 쭉 따르겠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힘이 살짝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가 어쨌든, 진실을 숨겼다는 사실 하나가 괜스레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크라언은 루시온이 사라질 때까지 그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 * *

"…믿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누군가 애처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왜 외면하십니까? 왜 고개를 돌리고 계십니까?"

아니.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제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어코 …를 버리실 겁니까?"

누굴 버린다는 건지.

찌잉, 하고 귓가가 울리는 듯했다.

"저를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발…,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점점 울부짖는 소리로 변하며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망토가 당겨지는 기분이 들면서 자신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안 돼.

뒤를 돌아보면.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누구지.

알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딱딱.

손가락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주변 풍경이 일그러졌다.

자.

잠에서 깰 시간이야, 루시온.

* * *

[…루시온?]

루시온이 눈을 뜨자마자 러쉘이 보여 깜짝 놀랐다.

덩달아 러쉘도 움찔거렸다.

[무슨 꿈을 그렇게 사납게 꿔? 잠깐 물이라도 마셔.]

"…제가, 꿈을 꿨습니까?"

루시온은 기억이 희미했다.

[꿈이니까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

러쉘은 루시온의 이마를 가리켰다.

[땀부터 닦아.]

천천히 숨을 내쉬며 루시온은 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닦았다.

루시온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기분상 새벽이었지만, 햇살이 방으로 들어왔다.

"아침… 입니까?"

[그래. 아직 더 자도 괜찮아. 오늘은 어떤 일정도 없으니까.]

루시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러쉘이 하나씩 알려주었다.

[베델은 아무래도 갇혀 있던 그 사람들이 걱정되는지 말을 전해달라며 떠났고, 라타는 흄 따라 식당으로 갔을 거야.]

"그렇습니까…? 다들 바쁘네요."

루시온은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꿈을 꿨는지 몰라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제 다시 자. 식사 오면 깨워줄게.]

"아닙니다. 오늘 일정이 하나 있어서 더 자고 싶지 않습니다."

[일정은 없다니까. 그냥 자. 꿈까지 사납게 꾸는 걸 보면 몸이 좋지 않은 신호 같은데.]

"어쩌다 손에 넣은 광산 말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부에서 자마드와 미엘라, 그리고 앞으로 합류할 생산직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광산 하나는 손에 넣으려고 했다.

때마침 잘됐지 않은가.

149화. 쫓는 자가 같다

게다가 공짜로 손에 넣으니 기쁨은 더 컸다.

실실 웃음이 튀어나왔다.

[루시온.]

러쉘이 한숨을 내쉬며 루시온을 불렀다. 루시온은 눈동자를 스르르 흘렸다.

"조금 졸리긴 하지만, 버틸 수 있습니다."

[그거 말고.]

"조금 아플 뿐입니다. 이것도 버틸 만합니다."

루시온이 조심스레 배를 감쌌다.

상처가 늦게 낫는 걸 어쩌겠는가.

러쉘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는지.

러쉘이 나가면 안 된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되받아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널 가르쳐야 하는 사실과 네가 걱정되는 사실이 충돌하는데 이걸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

"…스승님? 조금 전 말과 다르지 않습니까?"

자신을 걱정하는 줄 알았더니 흑마법 이야기였다.

이 스승님이?

[에이, 걱정하지. 걱정하는데 나중에 베델이 오면 광산으로 가달라고 부탁할 거잖아?]

"예...."

루시온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뒤에 밖으로 나가서 적당한 장소에서 바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서 광으로 갈 거잖아? 그렇지?]

"예."

[그럼 디버프를 배울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지는 셈인데 이걸 포기해야 하나 싶어서.]

"포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이 나면 당연히 배워야죠. 빛의 축복을 받은 자를 잡으려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무조건 배워야 해. 헤인트 봤지? 아, 물론 빛의 축복을 받은 모두가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야.]

'제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바로 그, 모두가 할 수 없는 걸 하는 헤인트 형님입니다.'

루시온은 하고 싶은 말을 참느라 볼 안쪽을 꽉 깨물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도 계속 준비를 해야만 했다.

[아마 너도 편할걸? 어둠으로 막 붙잡고, 당기고 하는 것보다 디버프를 사용해서 멈추게 하고, 느리게 하는 게 좋지.]

러쉘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가르쳐주고, 저것도 가르쳐주고. 뒷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루시온은 행복에 젖은 러쉘을 바라보았다.

"그럼 일찍 출발해야겠네요. 흄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일어났다고요."

[그래.]

러쉘은 벽으로 움직이다 말고 잠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러면 또 이상하잖아? 난 분명 너한테 쉬라고 말했는데… 억지로 떠민 것만 같잖아.]

"원래 배움에는 끝이 없잖습니까. 모처럼 시간도 나고, 공간도 마련됐으니 배울 수밖에요."

[....]

러쉘은 키득거리는 루시온의 웃음에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움직였다.

'말이 나오질 않네.'

벽 너머로 사라진 러쉘을 보며 루시온은 목을 붙잡고 소리 냈다.

"아아."

분명 잘 나오는데.

'이상하네.'

조금 전 러쉘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것도 검은 구슬 때문인가?'

루시온은 흄이 찾아올 때까지 천장만 바라보며 이불의 포근함에 몸을 맡겼다.

가끔이라도 오래오래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싶었다.

"…하. 더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시온은 덮었던 이불을 차내며 붉어진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 * *

"…어딜 간다고?"

헤인트의 눈 밑이 퀭했다.

아무래도 루시온 자신이 넘긴 편지 때문인 듯했다.

고민이 많아지고, 의심이 이어져 정신적으로도 지친 탓이겠지.

"잠깐 놀러 가겠습니다."

루시온은 다시 말해주었다.

"집에서 좀 쉬는 게 어때? 피곤해 보이는데?"

"제가 형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 나는 며칠 밤을 새워도 괜찮아. 얼굴에 나타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헤인트는 실실 웃었다.

"며칠 밤을 새우실 일이 생겼나 봅니다."

루시온은 슬쩍 헤인트를 찔러보았다.

헤인트는 금세 반응해서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아, 아니. 없어."

[호위 중일 때는 모르겠던데 은근히 얼굴에 감정이 티가 나네?]

러쉘은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저와 관련된 일이라면 숨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터놓고 이야기를 하자 헤인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아니. 정말… 없어."

당황하는 모습에 루시온은 속이 후련했다.

이렇게라도 일부러 건들지 않으면 팽팽해진 붉은 실이 거슬려서 신경질이 날지도 몰랐다.

"근처에서 놀 생각이니 형님께서는 따라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붙잡아 놓은 놈들이 신경 쓰이지 않겠습니까?"

"...."

헤인트는 평소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기사단 내부에 배신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만약 자신이 루시온을 따라간다면 붙잡아둔 저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

저들은 신전의 세력을 억누를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절대로 죽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건 루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매장에서 흑마법사가 나오지 않았던가. 혹시나 루시온이 움직일 때 흑마법사가 나온다면.

[혹시 이러려고 헤인트에게 편지를 보낸 거야?]

러쉘이 루시온에게 묻자 그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신자를 족치라고 보냈지, 갈등을 일으키려고 보낸 건 결코 아니었다.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루시온은 조용히 헤인트를 설득했다.

"형님께서 뭘 걱정하시는 줄 압니다."

"안다고…?"

"흑마법사 때문이 아닙니까?"

"아. …그래, 그렇지."

"애초에 흑마법사가 제가 있는 곳을 알게 된 이유는 경매장 내부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알게 모르게 다 퍼졌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부에 문제도 없고, 형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조용히 나갔다 돌아올 수 있습니다."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헤인트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내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전보다 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네가 나간 것 자체를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맞습니다. 형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루시온은 헤인트가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쥐고 흔들었다.

밤새 고민에 시달렸을 테니, 정신적으로 약해진 상태에 가뜩이나 자신이라는 새로운 고민이 나오지 않았던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을 테지.

"흄을 데리고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몇 번이고 강조한 조용함.

이제는 헤인트의 머릿속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부로 출발하기 전에 형님께서 저하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30분 이내의 거리에서만큼은 제 자유를 보장해주시기로 말입니다."

헤인트가 여행 전에 약속했던 일도 꺼내며 루시온은 천천히 덫을 쳤다.

"2시간 이내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다지 긴 시간도 아니었기에 루시온의 여러 제안은 헤인트에게 참 달콤하게 들려왔다.

애초에 이건 루시온의 두 번째 여행이질 않은가.

"형님께서 주신 연락용 아이템도 가지고 있습니다."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받은 연락용 아이템을 흔들었다.

헤인트의 고민이 길어졌고, 루시온은 마카롱을 날름 집어 먹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루시온이 크로니아의 기사단도 데려갈 테니까.'

헤인트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한쪽으로 치중되었다.

루시온이 신중한 사람이 아닌가.

흠.

헤인트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넌 어차피 허락할 수밖에 없어.'

루시온은 마카롱 하나를 더 먹으며 차도 맛있게 마셨다.

비록 헤인트가 자신의 호위였지만, 그는 황실 기사단이었다.

황실 기사 중에 배신자 있는 사실을 그냥 흘릴 수는 없을 테지.

게다가 호위는 황실 기사단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고민이 겹치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면 어설픈 추측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내가 크로니아의 기사단을 데려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

도망이라면 도가 튼 터라 크로니아의 기사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루시온은 차를 마시며 웃음을 삼켰다.

* * *

촤르륵.

루시온은 유령을 지배해 광산을 빼앗긴 사람을 찾고, 직접 찾아가 돈부터 풀었다.

"광산 소유 포기 각서를 썼다는 걸 압니다. 그 광산이 제게 들어왔거든요. 다시 여기에 이름만 써주시면 됩니다. 아, 이건 소소한 위로금입니다."

"...."

돈을 보자 그들은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루시온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제 광산은 진짜 내 거다.'

루시온은 올라간 입꼬리를 느꼈다.

가짜 체이톤이 노렸던 광산이었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결코, 쓸모없는 곳이 아니란 소리였다.

루시온은 새롭게 체결된 계약서를 주머니에 넣고는 저들의 눈을 가린 돈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간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라타가 사용하는 그림자 이동을 통해 비로소 광산으로 돌아왔다.

루시온은 바로 러쉘을 찾았다.

자신이 광석에 대해 뭘 알겠는가.

검에 관심이 있고, 자연스레 광석도 알고 있던 러쉘에게 저 광산이 얼마나 괜찮은 곳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러쉘은 아직 광산을 살펴보는 중인 듯했다.

'만약 좋은 곳이 아니더라도 일단 얻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자.'

―이제 내려가 봐도 돼? 라타는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라타는 루시온을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비밀 장소 같다며 조금 전까지 무척 좋아했다.

"글쎄. 흄이 오면 물어보자."

―응! 라타는 기다릴 수 있어.

라타는 꼬리를 흔들며 광산 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라타가 눈을 크게 떴다.

―흄이다!

"길을 뚫다 그만, 제가 늦었습니다."

흄은 광산 안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먼지투성이가 됐지만, 그녀는 싱긋 웃었다.

'길을 뚫어…? 진짜 무식하게 손으로 팠다는 건 아니겠지?'

루시온은 설마 하며 '어떻게 길을 뚫었냐'는 물음을 삼켰다.

루시온은 흄을 지나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위치는 괜찮고. 주변에 이용할 땅들도 좋고.'

광산은 낮은 산지에 있었다. 산의 높이도 높이였지만, 광산이 있는 부근이 평평해 근처에 건물 몇 개를 세워도 괜찮다 싶었다.

"도련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물론 라타도 안 됩니다."

루시온이 광산 안으로 향하려고 하자 흄이 슬쩍 다가와 앞길을 막았다.

"왜?"

―왜? 라타는 들어가고 싶어.

"저야 변신하면 그뿐이지만, 도련님께서 먼지를 뒤집어쓰시면 목욕하고 들어가셔야 할 텐데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둠으로 가리지 뭐."

―라타는 그림자에 들어가 있을 거야.

흄은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길이 좁습니다. 물론, 길을 따라가다 광석을 채굴하는 장소는 길보다 넓지만, 전반적으로 좁은 편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시온 공.]

베델이 광산에서 올라오며 말했다.

광산을 가지고 싶다고 루시온이 자주 언급한 걸 알기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좁으면 어쩔 수 없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루시온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제 사람들이 엄청 많지만 않으면 괜찮지만, 좁은 곳은 아직 힘겹다는 걸 알고 있었다.

루시온이 라타를 바라보자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라타는 참을 수 있어! 라타는 컸으니까!

"거긴 어땠어, 베델?"

광산과 원래 광산 소유자를 만나러 이동하다 보니 베델의 보고를 듣지 못했다.

베델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

[무사히 구출됐다. 조금이라도 밥을 먹은 후에 잠에 빠진 것도 확인했고. 그… 기억을 버릴 수는 없겠지만, 나는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베델의 눈동자에 기쁨과 부러움이 공존했다.

아마 베델은 자신 때, 그렇게 구출이 됐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잘됐네, 베델."

[다 루시온 공 덕이야. 공이 그들을 살렸어.]

"내가 아니라 조직원들이 한 거야."

[고마워.]

베델은 루시온이 수줍어한다는 걸 알기에 더는 몰아붙이지 않고 고마움만 표현했다.

[여기에 다 모여있네.]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괜찮습니까?"

제법 일정을 넉넉하게 짰다고 생각했거늘, 생각보다 빡빡했다.

여기가 별로면 하루 만에 광산을 얻으러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령이 되어서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모릅니다."

루시온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파지 않아도 바위 속이든 땅속이든 다 볼 수 있다는 거야.]

[맞다. 그건 꽤 재미있는 경험이지.]

베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러쉘의 말에 동조했다.

[횡재했네, 루시온.]

러쉘이 씩 웃었다.

"저, 정말입니까…?"

[뭐 하러 거짓말을 해? 원래 광산 소유자가 팠던 부분 말고 그 아래가 진짜였어. 엄청난 규모의 광석이 매장되어 있고, 그 근처에는 심지어 마석까지 있어.]

"마석까지 말입니까?"

쓸모없는 곳은 아니란 생각은 했었는데, 설마하니 마석까지 있을 줄이야.

마석은 마법 아이템의 에너지원이었다.

마법 아이템은 살아가는 데 무조건 필요한 물건이었고.

이건 횡재 이상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루시온은 저절로 쥐어지는 주먹에 기쁨을 감추질 못했다.

광산까지 손에 넣었으니 조직은 더 커지는 건 뻔한 결과였다.

[루시온.]

"예."

루시온의 목소리가 밝았다.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디버프를 배워봐야지.]

150화. 쫓는 자가 같다(2)

이 순간만 기다려온 것처럼 러쉘은 좀처럼 기쁨을 감추질 못했다.

'그렇지. 흑마법도 있었지.'

루시온 역시 가슴이 들떴다.

어쩌다 손에 넣은 광산이 복덩어리일 줄이야.

"예. 물론입니다. 디버프를 배워봐야죠."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버프는 흑마법을 처음 배울 때도 러쉘이 언급했던 흑마법 중 하나였다.

[과정이 어땠든 간에, 아마 너는 지금 훨씬 쉽게 배울 수 있을 거야.]

"스승님."

[왜?]

"제가 똑똑한 겁니까?"

[...?]

러쉘이 순식간에 오만상을 쓰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그걸 이제 알았다고? 진짜 몰랐던 거야?'

그렇다면야.

러쉘은 계속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만심만큼 무서운 존재는 없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잘못 짚었나 싶어 루시온은 바로 사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러쉘이 '어렵다', '배우기 힘들다'라고 말한 것치고 그렇게 어려운 건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타 덕분인가? 하긴. 라타의 도움이 엄청 크지.'

[루시온.]

러쉘의 표정은 여전히 엄했고, 베델은 슬쩍 웃는 얼굴로 다급히 투구 덮개를 내렸다.

[자만심은 널 갉아먹을 뿐이야. 넌 아직 햇병아리라고.]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다."

루시온은 연거푸 사과했다.

러쉘은 잠깐 웃음을 참으려 숨을 길게 내쉬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디버프랑 현혹은 사용법이 비슷한 편이야. 보통은 조금 더 간단한 디버프 쪽을 익혀서 현혹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법으로도 사용하곤 하거든.]

"혹시 어둠을 파고들게 하는 겁니까?"

[맞아. 그래도 현혹보다 훨씬 간단해. 저번에 헤인트하고 흑마법사가 싸우는 거 봤지?]

"봤습니다. 다리가 어둠에 휘감기자 허공에 낙인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디버프야. 보통 심화하면 어둠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게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어둠을 묻히거든? 하지만 너는 그런 과정을 배울 필요 없어.]

"왜 필요가 없습니까?"

[넌 다르니까.]

러쉘이 미소를 지었다.

"다르다뇨?"

[네가 오늘 배울 건 기본을 포함해서 너에게만 맞춘 디버프지. 자, 허락해봐.]

러쉘이 손을 뻗으며 루시온을 재촉했다.

"허락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세 러쉘의 손가락에서 어둠이 튀어나왔다.

[흄. 너는 표적이 될 테니까, 가만히 있어 봐. 놀라지 말고.]

"알겠습니다. 놀라지 않겠습니다."

[루시온.]

"예."

[너한테는 뭐가 있지?]

"예…?"

[라타가 있잖아.]

―맞아. 루시온한테는 라타가 있어!

라타가 눈웃음을 그렸다.

[그리고 라타한테는 '그림자 이동'이라는 이동기가 있어.]

"설마.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제 어둠만 이동시켜보자는 말씀을 하실 셈입니까?"

[맞아! 그래서 네가 다르다고 한 거야. 네가 훨씬 더 좋은 걸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남들처럼 해?]

러쉘은 싱긋 웃었다.

루시온 자신도 러쉘처럼 어둠을 이동시킨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려면 라타가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라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어둠의 존재로 라타의 눈을 대신해왔고요. 제가 유령을 지배하는 이유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적이 가만히 있습니까? 적이 움직이는 만큼 표식이 되는 유령도 움직여야 하는데, 만약 상대가 빛의 축복을 받은 자나 흑마법사라면 이건 불가능합니다."

빛이라면 유령을 죽일 테고, 흑마법사라면 유령의 존재를 눈치챌 테니.

[표식이라면 있어.]

"설마 스승님께서 표식이 되어 주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그림자.]

순간, 루시온은 움찔거렸다.

[라타가 가진 힘이 '그림자'를 포함한다는 걸 잊었어?]

"라타가 그림자를 인지한단 말입니까?"

루시온의 시선이 바로 라타를 향했다. 라타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어둠을 말하는 거야.]

"그게 가능합니까…?"

[라타가 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지 않았기에 몰랐을 거야.]

―엄....

시선이 라타에게 쏠리자 라타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림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오, 맞아! 러쉘 말이 맞아. 그림자 속에 숨은 어둠이 라타 눈에는 다 보여!

라타가 흄에게 도도 달려갔다.

―라타 봐봐.

"잠깐만, 라타."

루시온은 주변을 살피다 가면을 벗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더워 죽겠네.'

루시온은 땀을 닦아냈다.

머리카락 색도 변하고, 목소리도 변하고, 가면 색도 바뀌는 게 다 좋은데 날씨가 여름에 발을 디디자 가면 안쪽이 서서히 찜통이 되고 있었다.

[뭐? 안에 온도 조절 마법 기능이 있는데?]

러쉘이 루시온에게 다가가 가면을 이리저리 살폈다.

샤아아아.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에 루시온은 숨을 내쉬다 말고 드문드문 섞인 눈꽃에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시원하십니까?"

흄이 미소를 지으며 냉기를 보내고 있었다.

"얼음물도 돼?"

"…해 보겠습니다."

흄이 루시온 옆에 냉기를 가득 뿌려 얼음을 탑처럼 쌓고는 멈췄다.

한결 좋아진 루시온의 표정을 확인하고서 흄이 엄지와 검지를 말고 '후' 하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나름 동그란 얼음이 흄의 손가락 사이에서 만들어졌다.

―오오! 라타가 이거 책에서 봤어. 엄. 엄.

땡그랑.

얼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미리 꺼내 놓은 컵으로 담아서는 물을 부었다.

"드십시오."

흄은 루시온에게 얼음물을 건네고,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다시피 라타에도 얼음 하나를 건넸다.

꿀꺽꿀꺽.

'그래. 이거지. 내가 얼음 마법사를 구하려고 했던 이유.'

루시온은 식도를 타고 흐르는 시원함에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거렸다.

이번 여름은 흄 덕에 훨씬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딱 좋아."

―얼음이야! 그래! 야후후.

라타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흄. 여기에 냉기 좀 보내볼래?]

러쉘은 가면을 가리켰다.

"얼려버리면 됩니까?"

[아니. 얼리면 안 돼. 루시온한테 냉기를 보냈을 때처럼 살살 보내야 해. 조절할 수 있어?]

"예. 조금 전처럼 보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보내고 있어. 마석에 채워 넣었던 냉기가 고갈됐거든.]

"알겠습니다."

흄이 대답했다.

이전에 안토니에게서 루시온이 '더위도 많이 타고, 추위도 많이 탄다'라고 들었다.

아직 그렇게 덥지 않음에도 벌써 붉어진 루시온의 얼굴에 흄은 더욱 신경 썼다.

[루시온 공.]

주변으로 시선을 떼지 않는 루시온의 눈동자에 보다못해 베델이 그를 불렀다.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내가 계속 살피고 있고.]

저 가면은 그냥 가면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걸 알고 있기에 베델은 루시온을 계속 다독거렸다.

[그러니 러쉘의 수업에 마음 놓고 집중해도 괜찮아.]

"고마워, 베델."

그제야 루시온은 긴장감을 풀고 라타를 보았다.

"라타, 아까 하려던 걸 해 봐."

―진짜? 라타 이제 한다? 라타 이제 움직일 거야.

"그래."

라타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흄에게 다가가 그림자에서 무언가를 움켜쥔 듯한 형상을 했다.

―잡았다!

루시온에게 세 발로 절뚝이며 다가가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 펼쳤다.

―짠!

어둠이 몽실하게 움직이며 깜짝 놀라는 소리를 냈다.

안 되는데. 잡혀버렸어!

―봤지, 루시온? 라타가 하는 거 봤지? 그림자에 어둠이 있어. 라타는 알아. 라타는 똑똑하니까!

라타는 배시시 웃었다.

"어둠이 느껴져?"

―라타는 계속 어둠을 느꼈는데? 여기도, 여기도 어둠이 있어.

라타는 흄의 그림자 말고 광산 쪽으로 뛰어가 그림자를 앞발로 짚었다.

―그런데 루시온의 그림자에는 어둠이 없다? 라타 때문인가 봐.

"왜?"

―몰라. 라타보고 막 어둠의 신수라고 좋아하는데 라타가 다가가면 막 물러나. 라타를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르겠어. 라타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라타의 고개가 이리저리 갸우뚱거려졌다.

[어둠이 라타 널 어둠의 신수라고 불렀다고?]

러쉘의 물음에 라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라타는 똑똑히 들었어. 라타는 루시온도, 러쉘도, 흄도, 베델도 제일 좋아하니까 말해주는 거야.

[어둠까지 인정했으면 진짜네. 진짜야.]

러쉘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속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라타. 그림자에 있는 어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지?"

―응. 러쉘 말대로 라타는 할 수 있었어.

"스승님. 그럼, 디버프부터 알려주십시오."

[그럴 생각이었어. 기초는 짚고 넘어가야 하니까.]

러쉘은 흄을 가리켰다.

[표적은 흄이야. 어둠을 흄의 다리에 휘감아.]

러쉘의 말을 따라 루시온은 어둠을 보내 흄의 다리를 감쌌다.

이제 이 정도는 쉬웠다.

[여기서 낙인을 찍어야 해. 이 낙인을 찍으려면 해당 영역을 지배해야 하고. '현혹'을 사용할 때처럼 파고들기가 필요해. 해봤으니까 잘 알겠지?]

"현혹처럼 저항이 있습니까?"

[없어. 거긴 머리가 아니니까, 굳이 날카롭게 만들지 않아도 그냥 뚫려. 아. 현혹 때처럼 공격성을 띄우면 안 되는 거 알지?]

"예. 확실히 머릿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어둠도 빛처럼 공격성을 껐다가 켤 수 있었다.

빛이 공격성을 끄면 재생력만 남듯, 어둠도 공격성을 끄면 마나처럼 내부로 침투할 수 있었다.

루시온은 어둠으로 할퀴듯 흄의 다리를 쓸며 내부로 침투했다.

―홉. 아파, 흄?

"아뇨. 오히려 힘이 납니다."

흄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흄한테는 내 어둠이 밥이니까.'

루시온은 흄의 반응에 키득거렸다.

[원래는 이렇지 않아. 빛의 축복을 받은 이들은 네가 빛을 쐰 것처럼 죽을 맛일 테고, 마나를 가진 이들은 뻣뻣하게 굳어지니까.]

"그럼, 이제 여기에서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짧은 주문과 함께 명령이 동반되면 돼. 주문은 '낙'이야. 그러니까, '낙, 발을 묶어라.' 뭐,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설마, '낙'이 낙인에서 온 말입니까?"

루시온이 오만상을 쓰며 물었다.

[기원이 그렇다고 하더라.]

"진짜 별로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누가 이따위 말을 했는지 몰라도 쓸 때마다 짜증 났어.]

러쉘도 얼굴을 구겼다.

[참. 디버프는 애초에 행동에 제약을 거는 흑마법이야. 비틀어라, 부서져라, 뭐 이렇게 직접 피해를 줄 수는 없어. 자, 이제 해 봐.]

하.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고 주문과 명령을 같이 내뱉었다.

'낙, 발을 묶어라.'

띵.

어둠이 지배하고 있던 흄의 오른쪽 다리에 검은 별이 떠올랐다.

―오! 별이 나타났어!

라타가 귀를 쫑긋 세웠다.

흄이 슬그머니 걸으려고 했지만, 오른쪽 다리가 슬쩍 들리고 말 뿐이었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봐? 더 효과가 좋지? 그럼, 굳이 디버프가 왜 필요하냐? 어둠의 지배력이 사라질 때까지 거기서 또 명령해도 되거든. 계속해 봐.]

'낙, 발의 속도를 빠르게 바꿔.'

탁!

마침 다리를 올리려던 흄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리가 하늘로 높이 뻗어갔다.

순식간에 흄의 자세가 무너져 내리자 깜짝 놀란 루시온이 어둠으로 흄을 잡아주려고 뻗었다.

하지만 흄은 그대로 허리를 뒤로 꺾으며 한 바퀴 돌아 중심을 잡았다.

마치 서커스를 보는 듯해 루시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흄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중심을 잘 잡습니다. 하지만 방금 일은 저도 조금 놀랐네요."

흄의 손에는 루시온의 가면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에도 냉기를 불어넣는 걸 멈추질 않았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준비됐어, 라타?]

러쉘이 물었다.

―응! 라타는 준비됐어.

[좋아. 루시온 너는 어둠을 내보내고, 라타 너는 흄의 그림자로 이동시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러쉘은 또 라타를 바라보았다.

―응! 라타는 할 수 있어! 라타는 똑똑해!

"훌륭한데?"

루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바로 어둠을 내보냈다.

라타가 얼마나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홉!

깜짝 놀라는 라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슉!

루시온의 손끝에서 나온 어둠은 그가 눈을 깜박거리니 사라진 상태였다.

루시온은 바로 흄의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흄의 그림자에서 자신의 어둠이 퍼지고 있었다.

'…진짜 해냈잖아?'

―우와! 라타가 해냈어!

"잘했어, 라타."

루시온은 놀란 표정을 다잡으며 무릎을 꿇고 라타를 쓰다듬었다.

―이히히! 라타는 뭐든 할 수 있어!

흄도, 베델도 라타를 칭찬하자 라타의 시선이 자연스레 러쉘에게 향했다.

[멋지다, 라타!]

러쉘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이제 조금 더 빨리 움직여서 흄의 다리를 휘감는 것까지 해 볼까?]

러쉘의 마음속에 열정이 화르륵 타오른 건지 그는 정말 행복해하며 루시온과 라타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것처럼.

루시온의 얼굴이 구겨졌다.

151화. 쫓는 자가 같다(3)

"스승님. 저 부상자입니다."

루시온은 배를 살짝 움켜쥐었다.

[적은 네 부상을 배려해주지 않아. 마침 잘됐어. 부상 중에 네가 얼마나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 파악할 기회니까.]

'…아, 맞다.'

루시온은 새삼 러쉘이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몸이 멀쩡할 때도 어둠을 단 몇 방울 정도만 남기고 싹 비우게 하지 않았던가.

죽지 않을 정도만 굴린다.

러쉘의 목표인 듯했다.

루시온은 슬쩍 베델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러쉘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지금은 부상 때문에 잠깐 멈췄을 뿐이지, 베델의 재활 훈련도 만만치 않았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시간이 약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했다.

[그리고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아. 자, 자리에 앉아서 해 보자.]

러쉘이 싱긋 웃으며 이빨까지 내보였다.

"…하."

루시온은 깊게 숨을 내쉬며 라타를 딱하게 바라보았다.

라타는 무슨 죄람.

"예. 갑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괜히 나왔겠나 싶어 루시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어둠을 내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