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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

경매장 앞에는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고위 귀족들을 위한 경매장이기에 그 어떤 곳보다 철저한 보안을 위한 확인 작업이 다른 곳보다 배는 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급이 나누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 문양도 없는 마차가 건물로 들어섰다.

마차 자체는 고급스러웠고,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 역시 예사롭지 않았으나, 문양도 없는 마차였기에 아무도 관심도 가져주질 않았다.

하지만 그 마차를 위해 원래부터 벽이라 생각했던 곳이 스르르 열려버리자 상황은 달라졌다.

마차에 타 있던 귀족들은 당장 문양 없는 마차를 보았고, 곧바로 시종을 시켜 상황을 파악했다.

금세 시종들이 문 앞에 우르르 몰리자 조용했던 경매장 입구가 시끌벅적하게 바뀌었다.

"아니. 말씀을 해주십시오. 왜 저 마차만 저쪽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겁니까?"

"애초에 열 수 있는 문을 왜 열지 않은 겁니까? 이는 귀족을 향한 도전이 아닙니까!"

"저희 주인은 후작이십니다! 저분은 공작이라도 되신단 말입니까?"

자신들이 어떤 가문이며,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으며, 작위가 얼마나 높은지 따져보나, 연신 묵묵부답인 관리자 때문에 시종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사이 마차가 통과했고, 문이 닫혀버렸다.

여전히 대답 없는 관리자의 모습에 시종의 보고를 들은 귀족들이 더는 참지 않고 마차에 내려왔다.

누구는 바보라서 줄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이 경매장의 규칙이기에 귀족으로서 품위를 위해 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 마차가 그 규칙을 어겼으니, 이 바보 같은 짓을 참을 인내심은 없었다.

"저분은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님이십니다."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낸 그때, 관리자가 무겁게 짓눌려 있던 입을 열었다.

사아아.

활활 타오르던 불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분노는 금세 기쁨으로 손바닥을 뒤집듯 빠르게 바뀌었다.

그 마차의 주인이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일 줄이야.

그가 잠적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그가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서 경매장에 들어갔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이제 전쟁이었다.

어떻게 성자의 마음을 얻을지.

내내 짜내던 궁리를 실현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겠는가.

* * *

[…루시온 공 말대로 관리자가 공을 언급한 뒤로 얌전해졌다.]

베델은 경매장 입구를 지켜보고 난 뒤 루시온에게 돌아가 보고했다.

"그럴 줄 알았어. 고마워, 베델."

루시온은 흄이 건네는 마카롱을 먹으며 피식 웃었다.

베델이 경매장을 살피고 왔기에 헤인트에게 듣지 못했던, 보안을 위해 폐쇄됐다는 문 하나를 알게 되었다.

루시온은 일부러 신력 알레르기를 핑계 대 사전에 그 문을 쓰게 해달라 부탁했고, 경매장 입구에 줄이 늘어질 시각을 노렸다.

자신이 더 특별해 보이도록.

'이제 내가 경매장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어떻게든 나랑 친해져 보려고 난리가 날 거야.'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미엘라 말고 나랑 말 한 번 섞지 못할 텐데.'

몸값을 올리는 방법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일단 유명해진 상태에서 감히 자신과 말조차 붙이지 못하게 만들면 그뿐이었다.

침묵은 곧 사람들의 상상력을 크게 만들 뿐이니.

133화. 경매장으로(3)

'그리고 미엘라, 아니, 체프란 가는 조직을 위해서라도 성장할 필요가 있지.'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미엘라에게 말을 걸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작 자작가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겠지.

미엘라를 향한 관심은 곧 그녀가 가진 마법 아이템 제작 능력과 뒤섞여 어떤 특별함이 있다고 착각해 환심으로 변하고, 그 환심 때문에 귀족들이 체프란을 주목할 테지.

하지만 체프란 가가 크로니아의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조절할 셈이었다.

'그래서 나한테는 신비주의가 딱이지.'

루시온은 마카롱을 우물거리며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던 라타에게도 마카롱을 넣어주었다.

[루시온 네가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은데, 적당히 치고 빠져야 하는 거 알지?]

러쉘은 루시온의 수상쩍은 미소를 보자마자 감을 잡았다.

고위 귀족들이 몰리는 경매장이니 뭘 써먹겠는가.

고위 귀족들과 미엘라, 이 둘을 어떻게든 써먹지 않겠는가.

루시온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러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지.

"알고 있습니다. 적당히 치고 빠져야죠."

[그런데 루시온. 귀족들을 써먹으려는 건 알겠는데, 상대는 고위 귀족이잖아. 어떻게 하려고?]

"귀족은 특별합니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희귀한 무언가를 좋아하죠. 바로 제가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신수의 축복을 받은 자.

이 얼마나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말인가.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는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순간, 루시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런 칭찬을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는데.

―오! 맞아! 라타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까지 봤던 루시온 중에 제일 반짝거려! 반짝반짝.

오늘따라 루시온을 보는 라타의 눈빛은 혜성을 보며 소원을 빌기 전 아이처럼 맑았다.

베델은 기어코 웃음을 흘렸다.

흄하고 라타가 정말 루시온을 좋아하는 게 느껴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루시온 혼자 불편한 기색으로 마카롱을 먹다 분위기가 정리될 때쯤에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조금 전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음, 저는 계속 특별한 존재로 있어야 하니, 자리 배치를 좀 바꾸려고요."

자신의 자리는 맨 앞줄 중 혼자만 튀어보는 자리라고 베델이 알려주었다.

그 자리가 새로 만들어진 건지, 원래부터 있었는지는 몰라도 경매장 쪽에서 자신을 이용하려는 게 눈에 보였기에 그대로 당해줄 마음은 없었다.

'미엘라가 뒤쪽에 위치한다고 했으니 나도 뒤쪽에 자리를 잡아야지.'

루시온은 흄이 붙잡고 있는 마카롱이 담긴 용기에 손을 내밀다 말고 베델을 바라보았다.

"베델."

[그래, 루시온 공.]

"흑마법사가 있다고 했지?"

순간, 루시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맞아. 헤인트가 물러간 뒤에 놈들이 움직였으니 아마 헤인트도 모르고 있을 테지.]

베델의 대답을 들으며 루시온은 빨간 마카롱을 손에 쥐었다.

암암리에 자신이 경매장에 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테니 흑마법사가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특히나 제국에 지부를 심어둔 뉴브라 왕국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나.

[아, 루시온 공이 사용하던 현혹과 비슷한 흑마법을 쓰며 경매장 내부로 들어왔다. 일단 내가 본 흑마법사는 4명이야.]

"경매장에 빛이 깃든 물건은 없던 거야?"

[아니. 내부자가 있어. 빛이 깃든 물건을 잠깐 빼돌렸다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걸 봤다.]

[일단, 베델 네 존재를 눈치챌 흑마법사는 없다는 소리네?]

러쉘이 묻자 베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없었어.]

"베델이 본 흑마법사는 공허의 손일 겁니다."

상황 설명을 들은 루시온은 엄지로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며 말했다.

"가뜩이나 제가 변경 밖에서 벌인 일로 뉴브라 왕국의 입지가 난처해진 상황이고요."

[그렇지. 이런 상황을 뒤엎을 수 있는 일은 몇 없어.]

러쉘이 대답하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흑마법사를 죽이겠다고 선언하는 건 우습잖아? 원래부터 흑마법사는 세계의 적이니까.]

"그렇죠. 하지만 성자가 죽어 복수를 위해 흑마법사를 죽이겠다고 한다면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나, 입장 차이가 완전히 바뀌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루시온 공이 말한 목적이라면 사람들이 동요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분노에 휩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에 베델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맞아. 상황도 뒤엎고, 나도 죽이고. 얼마나 좋겠어?"

루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뜬 라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루시온은 죽으면 안 돼! 라타가 싫어!

"나도 싫어, 라타."

루시온은 자신의 손을 꼭 잡는 라타를 보며 키득거렸다.

뉴브라 왕국의 목적은 제국을 손에 넣는 일이었다.

왜 돈을 들여서 개미굴과 6개의 지부를 만들었겠는가.

왜 그렇게 정보에 집착하겠는가.

'제국을 무력으로 없앤다? …웃기고 있네.'

뉴브라 왕국은 천천히, 깊숙이 제국이라는 그 커다란 몸뚱어리를 흡수하고자 하는 게 분명했다.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모르면 몰랐지, 이미 알아버린 이상 루시온은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싹둑, 잘라버려야지.'

러쉘이 살짝 가느다래진 루시온의 눈을 보며 그를 불렀다.

[루시온. 흑마법사를 어떻게 처리하게? 공개적으로 넌 일반인일 텐데.]

"아, 제법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너무나도 해맑은 미소가 루시온의 입가에 맴돌자 러쉘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엄청 수상하지 않은가.

그 생각이 뭐냐고 막 물어보려던 차 마차가 멈춰버렸다.

'…불안한데.'

루시온이 또 예측 밖의 행동을 할 것만 같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승님."

안심하라는 듯 내뱉는 말마저 러쉘의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저는 도련님을 믿습니다."

[그래, 러쉘. 그대도 루시온 공을 믿어 봐.]

흄과 베델이 러쉘을 닦달함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했다.

'루시온이 헤인트를 이용할 거라는 건 알고 있어도 대외적으로 일반인이라고 알려진 루시온이 어떻게 흑마법사를 쫓아낸다는 거지?'

―홉!

마차가 멈추자 라타는 다급히 루시온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흄이 문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헤인트가 말을 높이자 루시온은 온화한 미소를 장착하며 먼저 내린 흄의 도움을 받아 땅으로 내려왔다.

'하. 이런 환영은 또 처음이네.'

루시온은 붉은 카펫처럼 입구부터 길게 깔린 하얀 천을 보며 살짝 당황했다.

―우오오. 바닥에 깔린 게 엄청 부드러워 보여. 라타도 밟아봤으면 좋았겠다.

[이렇게 비싼 천을…?]

놀라면서도 아쉬워하는 라타와 천을 보고 깜짝 놀라는 베델이 대비됐다.

[저 천에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마음대로 밟아도 돼.]

러쉘의 말에 루시온은 앞을 바라보았다.

천이 비싸든, 싸든 루시온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저 천을 따라 자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직원들의 모습에 속이 아주 조금 거북해졌다.

"반갑습니다, 서, 성자이시여. 제가 경매장의 주인인 너튼 데쉬아입니다. 제 초청에 응해주셔서 더할 나위 없이 영광입니다.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너튼은 살짝 다급한 음성으로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자 탄생 연회 때, 멀리서 지켜본 게 고작이었는데, 이토록 가까이 볼 줄은 몰랐다.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베델.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루시온을 되게 존경하는 것처럼 보는데?]

너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러쉘은 눈을 깜박였다.

마침 긴장을 푼 베델이 실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을 하고 있던 내가 바보 같아지던 참이었다. 러쉘 그대 말대로 너튼이라는 자는 루시온 공을 동경하는 모양이야.]

직접 너튼을 본 루시온 역시 너튼의 눈에 깃든 기쁨과 어쩔 줄 몰라 덜덜 떨리는 손 등 그의 반응에 주목했다.

'이 모습만 보면 내 열렬한 팬 같은데....'

하지만 루시온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저 모습이 연기일 수 있으니.

성자가 다녀왔다.

이미 이 사실 하나로 경매장은 큰 이득을 얻은 상태였다.

"반갑습니다.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루시온은 간단히 자신을 소개하며 손을 내밀었다.

너튼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저, 정말 아, 악수해도 되겠습니까?"

"원치 않으시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거절이라뇨…!"

너튼은 다급히 작은 주머니에 넣어둔 수건으로 손바닥을 닦고 난 뒤에 루시온의 손을 잡았다.

금세 전기가 오른 듯 잠깐 파르르 떨던 너튼은 급하게 놀란 표정을 다잡았다.

[아무리 봐도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러쉘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팔짱을 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헤인트가 목소리를 냈다.

"성자의 호위를 맡게 된 제8 황실 기사단의 대장 헤인트 트리아입니다."

자연스럽게 너튼과 루시온 사이에 들어오며 헤인트는 너튼에게 인사했다.

황실 기사단이라는 소리에 너튼은 물론 천을 따라 줄지어 서 있던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황실 기사단이 움직였다는 건 이는 곧 황제의 명이 아닌가.

"성자의 호위를 위해 조금 떨어져 주셨으면 합니다."

누구든 적이 될 수 있기에 헤인트는 경계를 단단히 했다.

"무, 물론입니다."

너튼은 얼른 멀어지다 내심 아쉬운 표정을 드러냈다.

"저, 대화는 괜찮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헤인트가 칼같이 짧고 굵게 대답하자 너튼의 시선이 자연스레 흄에게 향했다.

대놓고 부럽다는 눈빛에 흄은 당황해서는 눈을 깜박거렸다.

[무시해, 흄. 그냥 너를 쳐다볼 뿐이니까.]

러쉘은 혹시 몰라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야 흄은 루시온의 옷차림새를 바로 하며 루시온을 향하는 여러 시선을 슬쩍 가려주었다.

"괜찮으십니까?"

흄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

루시온은 짧게 대답했다.

흄이 자리를 비키자 루시온은 옅은 미소로 경매장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천에 발이 닿는 순간, 푸른 실 여러 개가 자신의 몸을 휘감았다.

'그렇지. 공허의 손이 나타났는데 실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있나.'

―루시오온! 다 루시온을 바라보고 있어! 오오!

라타는 한껏 들뜬 목소리를 냈다.

그림자 속에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라타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 테지.

"…성자를 위해서 이번 주제를 잡았는데, 성자께서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말았습니다. 그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절대로 성자를 음해하려고 주제를 빛으로 삼은 게 아닙니다."

너튼이 주저리 꺼내는 말에 루시온은 한 귀로 흘리며 푸른 실의 개수를 세었다.

'8개.'

베델이 말한 것보다 2배 더 많았다.

흑마법사가 8명이 모였다는 건 국립 박물관급 크기의 경매장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난리가 났네. 경매장 내부에 숨어든 내부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겠는데.'

루시온은 베델을 쳐다보았다.

베델이 눈을 깜박거리자 러쉘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내부자가 누구인지 보면 알려달라고 하네.]

'과연 스승님이야.'

루시온은 만족스러웠다.

[…그게 정말인가?]

놀란 베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루시온 공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러쉘 그대는 어떻게 알아챈 건가?]

[내가 루시온의 스승이니까. 루시온의 눈빛만 봐도 딱 감이 오지. 노력해야겠네, 베델?]

러쉘이 우쭐거리며 크게 웃었다.

[더… 노력하겠다.]

미묘한 경쟁심을 부추기자 베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루시온은 그들을 슬쩍 바라보다 경매장 내부로 들어섰다.

* * *

"…성자다."

경매장의 직원 중 누군가 루시온을 보며 속삭였다.

굳이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처음에는 그의 외모에.

두 번째는 그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자애로움에.

세 번째는 우아한 발걸음에.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들의 사장인 너튼의 표정에 단번에 눈치채고 말았다.

직원들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나, 좀처럼 루시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너튼이 자리를 안내하려고 하자 루시온은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제가 앞에 앉으면 경매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잘난 자신 때문에 경매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너튼에게는 경매를 걱정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제가 직접 정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말에서부터 느껴지는 온화함에 너튼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입니다. 성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134화.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

루시온이 잠깐 멈칫거렸다.

'이렇게 쉽게?'

[루시온 공. 미엘라의 자리는 이쪽이다.]

베델은 미리 이동해 손가락으로 미엘라의 자리를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너튼을 향해 싱긋 웃어 준 뒤, 천천히 주변을 살피는 척하며 베델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라타는, 라타는 여기에서 달리고 싶어! 재미난 게 많아!

아쉽다는 목소리와 함께 라타가 있는 자신의 그림자가 잠깐 흔들렸다.

경매장은 반원 형식으로 되어있었고, 미엘라의 자리는 구석 끝, 바로 옆쪽이었다.

미엘라가 경매장에 나올 물건의 주인이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느낌이 풀풀 풍겼다.

'좋은 자리네.'

루시온은 미엘라 옆자리, 제일 구석 끝으로 걸어갔다.

그가 구석과 가까워질 때마다 너튼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기어코 말을 내뱉었다.

"저… 성자께서...."

"이곳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루시온은 너튼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레 구석 끝을 가리켰다.

"너튼 님의 의도를 위해서도 이곳이 제일 적합한 자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루시온이 경매장까지 오면서 너튼이 줄줄이 꺼내던 말을 모두 흘려들은 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서 너튼은 경매장의 주제를 빛으로 택했는데, 뒤늦게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할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너튼은 고민 끝에 오늘 나오는 물건 중 하나를 선물로 넘겨주겠다며 사죄했다.

이유야 어쨌건, 루시온은 너튼이 보육원에 기부하겠다고 재차 언급한 사실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저는 부디, 경매의 물건이 좋은 가격에 팔려 아이들을 위해 쓰였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어후.]

러쉘은 더는 보지 못하겠는지 아예 얼굴을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왜 그러는가, 러쉘?]

베델은 러쉘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루시온을 놀릴 때가 아니었기에 러쉘은 간지러운 입을 꾹 눌러 담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튼은 감격에 차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간신히 숨을 삼켰다.

자신의 말을 기억해주다니.

곧 너튼은 자신이 루시온의 자리로 지정했던 곳을 바라보았다.

경매장의 목적은 경매였다.

자신이 지정한 그 자리는 누구라도 루시온에게 시선을 빼앗길 자리였기에 잠깐 목적을 잃었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럼 의자 정도는 바꿔도 괜찮겠습니까?"

너튼은 루시온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예.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럼 얼른 준비...."

"너튼 님."

루시온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너튼을 불러세웠다.

"예. 말씀하십시오."

너튼은 뭐든 준비가 됐다는 듯이 눈에 힘을 주었다.

"혹시 자리가 지정되어 있다면 부디 바꾸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누군가 자리를 사려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쫓아내겠습니다."

조금 과격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경매장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별함.

그 사실이 경매장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이곳에서 쫓겨났다는 건 고위 귀족이건 간에 그 특별함을 잃었다는 걸 의미했다.

설령 보복한다고 해도 이 특별함을 위해 경매장을 찾는 귀족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루시온의 인사에 너튼은 넙죽 고개를 숙인 뒤 더 서둘렀다.

"잠깐, 이쪽에 앉아 계십시오."

흄은 의자를 빼 가리켰다.

"그래. 아직 시작되려면 40분 정도 더 남았으니까 잠깐 눈도 붙여도 되고."

헤인트 역시 동의하며 말했다.

루시온이 자리에 앉을 때쯤, 베델이 그를 불렀다.

[루시온 공.]

루시온의 눈동자가 베델에게 향했다.

[저놈이 내부자다.]

베델이 한 남자 뒤에 서서는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베델이 가리킨 그 남자는 너튼 옆에 서서는 무언가를 적는 시늉을 했다.

너튼은 뭔가 화가 난 얼굴로 그에게 따졌고.

'비서인가?'

[뭔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올게.]

러쉘이 금세 쪼르르 날아갔다.

루시온은 그들에게 잠깐 눈길을 주다 곧 경매장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는 푸른 실에 주목했다.

경매장 크기가 큰 만큼 목적에 따라 내부에 장소가 나뉘어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푸른 실이 여러 장소에 흩어져 있었는데.

'저 비서가 들어오고 나서 흑마법사가 이곳으로 같이 들어온 걸 보니 베델의 말이 확실하네.'

루시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고자 하품하는 척하며 입가를 슬쩍 가렸다.

경매장 내의 빛이 깃든 물건을 건드릴 정도라면 누구인가 싶었는데, 내부자가 너튼의 비서라니.

[…아! 내가 찾은 흑마법사 놈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베델이 직원으로 위장한 흑마법사를 보며 당장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 흑마법사가 들어왔다고?]

너튼과 비서의 대화를 엿들으러 갔던 러쉘이 놀라며 묻자 베델은 서둘러 움직여 흑마법사 4명을 짚었다.

[이놈들이다.]

흄의 눈동자가 순간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야. 8명이야! 라타가 알아!

라타의 목소리에 흄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더 있단 말인가.]

탄식하는 말과 함께 베델은 나머지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루시온. 너도 느꼈겠지만, 지금 잠깐 빛이 사라진 상태가 맞아."

루시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헤인트가 슬쩍 말했다.

"괜찮은 겁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네가 경매장에 들어오려면 어쩔 수 없었잖아. 아직 주변에 느껴지는 것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헤인트의 대답에 루시온은 그가 아직 어둠을 쫓는 빛을 각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도 이거 나름대로 다행이네.'

루시온은 다시 시선을 돌려 비서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던 러쉘이 숨을 잠깐 내쉬다 루시온에게 날아왔다.

라타가 성장하면서 또 하나를 배운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갑자기 라타가 루시온의 그림자에서 나올 수도 없고.

[라타가 나올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 이 상태로 흑마법사를 구분하는 건 어려워. 그렇지 라타?]

―응. 맞아. 라타가 흑마법사가 8명인 건 아는데, 누구인지는 가까이 봐야 알 것 같아.

시무룩한 라타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발을 가볍게 굴렸다.

―괜찮아, 루시온! 라타는 이런 걸로 시무룩하지 않아!

이미 시무룩했으면서.

러쉘은 그 말에 키득거리며 너튼과 비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비서가 늦게 왔나 봐. 너튼이 그걸 꾸짖고.]

'저 흑마법사들을 내부로 끌어들이느라고 늦었겠지.'

[그 후에 원래 네가 앉으려던 의자를 두고 의견을 나눴어. 의자 주변에 마법 방어를 친 상태라서 옮기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한가 봐. 지금 경매장 입구를 잠깐 막아두려고 하고 있고.]

루시온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챘다.

'…와. 생각보다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라타를 쓰다듬으면 머리가 더 잘 돌아갈 것 같지만, 괜히 아쉬워 의자 손잡이나 붙잡았다.

너튼의 비서와 흑마법사는 미리 경매장 내부로 침입해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을 나누든 기회를 엿보던 중인 듯했다.

마침 자신이 제일 일찍 경매장에 도착한 상황이었으니.

'게다가 내가 의자 위치를 바꾸면서 덜미를 내어주고 말았네?'

의자를 바꾸기 위해 잠깐 문 봉쇄가 일어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좋다고 덤비겠지.'

흑마법사가 무려 8명.

이곳에서 빛의 힘을 가진 자는 헤인트뿐.

덤으로 황실 기사단 중 배신자가 있는 상황이었다.

기습하기에 딱 좋은 요건이 충족되어버렸다.

'덕분에 내 계획도 앞당길 수 있겠네. 아니,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겠어.'

루시온도 동시에 즐거웠다.

한 마리씩 잡는 것보다 한꺼번에 잡는 게 효율적이고, 미엘라의 역작을 손에 넣으려면 방해자가 없는 편이 좋았으니.

"즐거워 보이십니다."

흄이 말을 걸었다.

"그렇네. 경매장이 처음이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

경매장은 극장을 닮아 있었고, 조금 있다가 정말로 재미있는 연극도 볼 수 있지 않겠나.

"성자님. 잠깐, 그러니까, 한 10분간 주변이 어수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비서와 이야기를 끝마친 너튼은 당장 뛰어오다시피 해 목소리 사이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괜찮습니다."

"너그러운 마음, 정말 감사드립니다."

너튼은 넙죽 인사하고 다시 비서에게 걸어가며 손짓했다.

그 손짓에 직원인 척하는 흑마법사들은 재빨리 움직여 문을 봉쇄했다.

'문이 닫혔네?'

루시온은 행동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루시온…? 뭘 기다리는 거야?]

그 모습을 또 러쉘이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더니 순간, 크게 흔들렸다.

[아니지…?]

러쉘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루시온은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러쉘?]

베델이 의아한 듯이 묻자 러쉘은 여전히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루시온이… 아니야. 내 착각이겠지.]

러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잠깐 눈을 감고 루시온은 직원으로 위장한 흑마법사들이 의자를 가져오길 기다렸다.

주변의 소리가 조용해지는 와중에 작게 속삭이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와.

널 해치러 놈들이 오고 있어. 눈을 떠.

정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너무나도 희미한 소리였다.

루시온은 어둠이 속삭이는 말에 눈을 떴다.

라타도 그렇고 자신도 검은 구슬을 얻고 난 효과가 하나씩 보였다.

원래 의자가 있던 지점과 자신이 있는 그 중간 지점쯤에 흑마법사가 의자와 여러 장치를 들고 오고 있었다.

"형님."

루시온이 헤인트를 불렀다.

멀뚱히 서 있던 그가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고 있어?"

"빛으로 빛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루시온의 질문에 러쉘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건전한 방법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설마, 루시온이 빛을 사용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루시온은 흑마법사인데, 에이 설마.'

"아. 아까 내가 경매장에 잠깐 들렸다고 했잖아? 그때, 미리 바닥에 내 빛을,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감지기를 설치했어."

헤인트의 대답에 러쉘은 눈을 크게 떴다.

[…허. 저기에다 왜 빛이 뿌려져 있나 싶었는데, 감지기 역할을 하는 거였어?]

[어쩐지 이곳을 지나다닐 때 기분이 나쁘더라니.]

루시온은 베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을 슬쩍 바라보았다.

[헤인트가 심은 빛은 여기에 있다. 반짝이는 게 보이네.]

그 위치가 마침 직원으로 위장한 흑마법사들이 지나고 있는 지점 근처였다.

루시온은 다시 자연스럽게 헤인트를 보며 물었다.

"그럼, 형님의 빛이 다른 빛을 알아차려서 자동으로 차단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자동은 안 돼. 내가 조종해야 하거든."

헤인트가 살짝 민망해하며 말했다.

"그럼, 결국 저한테 피해가 있는 거 아닙니까?"

루시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럴 리가. 중반쯤에 설치했는데?"

그 정도 거리라면 루시온에게 빛이 닿지 않을 만큼, 헤인트 자신이 빛을 쳐낼 만큼 거리가 나왔다.

혹시나 해 새벽에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슬쩍 실험도 해 보지 않았던가.

"아침에 보셨잖습니까. 제가 빛에 엄청 민감하다는 걸요. 나중에 난리가 나는 것보다 지금 잠깐 확인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온의 제안에 헤인트는 잠깐 생각했다.

이전에도 루시온의 발언에 재정비한 뒤 루미노스의 습격을 막아내지 않았던가.

그런 걸 보면 루시온은 꽤 신중한 편이었다.

"좋아. 혹시 모르니까 잠깐 뒤로 떨어져 봐."

헤인트는 동의하며 루시온을 뒤로 물렸다.

만약 자신이 빛을 차단하기 위해 펼친 빛 때문에 루시온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테니.

빛은 기본적으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공격성만 빼면 아무런 문제가 없긴 하나, 헤인트는 혹시 몰라 먼저 자신들 쪽으로 도착한 너튼을 불렀다.

"너튼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만 빛을 사용해봐도 되겠습니까?"

"저...."

너튼의 시선이 루시온에게 향했다.

"아. 이미 성자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나중에 경매 물건 중에서 과하게 새어 나오는 빛을 막는 방법이니 부디 동의해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동의했다면야.

너튼은 헤인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그럼 괜찮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헤인트는 직원이 놀라지 않게 잠깐 기다린 다음 자신이 설치한 빛의 장벽을 펼쳐 보였다.

'와우. 진짜 밝네.'

루시온은 불꽃놀이처럼 환해진 경매장 내부를 감상했다.

"루시...."

루시온에게 몸은 괜찮냐고 물으려던 차 헤인트가 단번에 시선을 돌려 직원으로 위장한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흑마법사가 빛을 갑자기 쐬면 어떻게 되겠어?'

루시온은 놀란 눈을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흑… 마법사!"

헤인트가 이를 악물었다.

'어둠이 놀라서 화들짝 튀어나올 뿐이지.'

손으로 가려진 루시온의 입꼬리가 높게 올라갔다.

135화.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2)

어둠이 튀어나온 흑마법사도, 빛을 사용했던 헤인트도 죄다 당황스러운 이 사태에 루시온은 소리 높여 웃고 싶을 정도였다.

어둠이 유일하게 자아가 있기에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루시온 자신도 러쉘과 라타 덕에 튀어나오지는 않아도 많이 겪어본 일이지 않은가.

[루시온 공…? 설마 이걸 노렸는가?]

베델이 멈칫거리며 물었다.

[그것만 노렸겠어?]

러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분명 하나 더 있을 테지.

"…흐, 흑, 흑마법사라고요?"

너튼이 너무도 놀라 하며 그대로 굳어버리려는 듯하다 다급히 소리쳤다.

"비, 빛을 켜라! 빛을 켜!"

흑마법사를 이길 방법은 빛뿐이었다.

"서, 성자님."

곧이어 너튼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루시온을 보았다.

스겅.

"모두!"

헤인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그 소리에 기사들이 그를 주목했다.

"보호 진영으로!"

헤인트의 선명한 목소리에 기사들은 침착하게 훈련한 대로 루시온을 에워쌌다.

"루시온 공, 걱정하지 마십시오."

헤인트는 기사들 틈에 살짝 보이는 루시온을 향해 웃어 보이며 흑마법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걱정하지 말라고…?'

루시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웃기고 있네!'

헤인트가 서 있던 곳은 이미 잔상으로 남아 그는 한 흑마법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

러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숨을 내쉬었다.

[이 속도가… 정말인가!]

베델마저 눈을 크게 떴다.

빛이 한껏 어린 헤인트의 검이 흑마법사의 가슴팍에 꽂혔다.

"…커헉!"

흑마법사가 고통을 호소했고, 주변 흑마법사들은 어둠을 내뿜었다.

다가오는 어둠에 맞춰 헤인트는 모든 어둠을 정화하려는 듯 주변으로 빛을 터트리며 가슴팍에 박아둔 검을 빼내었다.

파앗!

―우오오!

라타는 반짝이는 모습에 신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신날 때가 아니야, 라타.'

루시온은 저절로 손에 맺힌 땀방울에 옷자락을 만졌다.

퍼지는 빛을 막고자 흄이 루시온 앞에 섰지만, 빛은 루시온에게 닿지 않았다.

퍼지던 빛마저 다시금 헤인트의 손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미친.'

루시온은 이를 악물었다.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빛을 제 손과 발처럼 움직이는 것도 모자라 벌써 흑마법사 하나가 죽어버렸다.

빛에 둘린 상태로 피를 쏟아내는 흑마법사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너한테 죽지 않을 거다.'

루시온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가까스로 내쉬었다.

서걱.

푸른 실 하나가 끊어져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절대로.'

헤인트는 흑마법사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지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을 구르고, 빛으로 감싸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나갔다.

주변 풍경에 빠르게 바뀌고, 코앞에 흑마법사가 보이자마자 헤인트는 검을 휘둘렀다.

까앙!

하지만 흑마법사의 어둠에 가로막혔다.

흑마법사를 보호하고자 하는 어둠의 몸부림이었다.

속이 흔들리자 헤인트는 영 기분 나빴다.

휘리릭!

다리를 붙잡는 섬뜩한 감각에 헤인트의 눈동자가 다급히 아래를 향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어둠들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상태였다.

'…아뿔싸!'

뒤늦게 헤인트가 빛을 내뿜어보나, 이미 두 다리 위에 검은 낙인이 둥둥 떠 있었다.

루시온은 처음 보는 흑마법에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뭐지?'

[저게 디버프야.]

러쉘이 입꼬리를 올리며 알려주었다.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알려진, 마나와 어둠 중 가장 속도가 빠른 빛을 붙잡아 처절하게 짓밟을 기회를 주는 흑마법.

저 마법을 배우지 않고서야 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미 루시온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배움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배우고 싶지? 그렇지?]

돌고 돌아 드디어 루시온에게 디버프를 알려줄 기회가 찾아와 러쉘은 무척 기뻤다.

"대장!"

헤인트가 흑마법에 당하자 기사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헤인트는 당황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흑마법사의 목적은 성자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존재 역시 성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안타깝지만, 저건 금방 못 지워. 아마, 헤인트도 난감할 거다. 발을 봉인당했으니.]

[어째서인가, 러쉘? 헤인트가 가진 빛으로 지워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베델은 전투에 집중하다 말고 밀려드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빛이 어둠을 죽이는 것처럼 어둠도 빛을 죽여버려.]

[그건 알고 있다.]

[가뜩이나 어둠이 빛을 죽이고 있고, 어, 현혹 알지? 그것처럼 어둠이 다리에 파고들었다고 생각하면 편해. 저 어둠을 죽이려면 많은 빛이 필요한데 빛은 마나와 어둠 중에 가장 회복 속도가 느려.]

[여러 가지가 겹쳤다는 말인가?]

[그래. 아주 거지 같을 거다.]

러쉘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응원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헤인트가 죽어서도 안 되니 난감했다.

"죽여라!"

헤인트의 발을 묶은 흑마법사들은 단숨에 그를 없애기 위해 어둠의 형태를 뾰족하게 바꾸었다.

헤인트가 흑마법사를 까다로워하는 것처럼 흑마법사 역시 헤인트가 까다로웠다.

긴 창이 된 어둠이 거의 동시에 헤인트를 향해 찔렀다.

콰아아앙!

빛과 어둠이 부딪혀 나는 큰 소리와 함께 빛의 장막에 둘러싸인 헤인트가 신음을 흘렀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등 뒤를 향했다.

또 어둠이 몰래 자신을 습격하려고 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아, 이 개 같은 어둠!'

헤인트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장막에 둘린 빛을 이용해 어둠을 죽이려던 순간, 그의 눈동자가 루시온 쪽으로 향했다.

'속임수라고…?'

헤인트는 어둠으로 커다란 대검을 만든 흑마법사를 보았다.

자신이 빛의 축복을 받은 자였기에 어둠과 맞설 수 있었으나, 마나를 쓰는 기사들에게 있어 무척 버거운 존재였다.

헤인트가 빛의 장막을 거두고 달렸다.

하지만 흑마법으로 다리가 묶인 상태였기에 돌 수십 개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렸다.

'목표는 루시온이다.'

헤인트는 찰나에 흑마법사에게 공격받아서 입을 피해와 자신이 빛을 내뿜어 루시온이 받을 피해를 생각해야 했다.

'목표는…!'

그리고 헤인트는 후자를 결정했다.

자신의 발을 묶던 흑마법사마저 방향을 틀어 루시온에게 향했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3명까지는 몰라도 7명 전원을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헤인트가 뒤를 쫓자 제일 마지막에 달리는 흑마법사는 도중에 걸음을 멈춰 헤인트를 보았다.

쉬이익!

헤인트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어둠을 내보내나,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손아귀에 둘린 빛으로 어둠을 붙잡아 소멸시켰다.

"어림없다!"

헤인트는 기회가 얼마 없다는 걸 눈치채고는 자신의 남은 빛을 모두 뿜어내기 위해 몸속에 돌고 있는 빛을 짜내었다.

하지만 엉뚱한 방향에서 뿜어져 나왔다.

'...?'

헤인트가 너무도 놀라 그대로 멈춰버렸다.

빛이 왜 갑자기 루시온에게서 뿜어나오는가.

발현?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루시온은 신력 알레르기가 있지 않은가.

'설마.'

헤인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설마!'

빛에 휩싸여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흑마법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루시온의 손에 팔찌가 들려 있었다.

빛이 깃든 그 팔찌가.

루시온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루시온 공!]

"도, 도련님!"

베델과 흄이 루시온을 붙잡았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루시온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괜찮은가? 버, 버틸 수 있는가?]

루시온과 계약을 했기에 베델 역시 죽어버린 루시온의 어둠을 느꼈다.

너무도 많이 죽지 않았는가.

―루시온은 괜찮아. 라타가 알아! 라타가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라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괜찮다는 걸 알고 있는 것과 루시온이 아픈 건 별개였다.

루시온은 귀가 '삐이' 하고 울려서 베델과 라타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와아. 일타몇피야?'

천장이 점점 보이는 와중에도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서걱.

나머지 7개가 모두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죽었네. 잘됐다!'

공허의 손이 자신을 노렸다.

이토록 목표가 뻔하다면 공격의 기회 역시 뻔했다.

흑마법사의 천적이 무엇인가.

바로 빛이었다.

'…그렇지.'

붉은 실 하나가 자신의 눈앞에 보였다.

'푸른 실을 7개나 잘랐는데 붉은 실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되지.'

어떤 것과 연결됐을까.

[이…! 이 미친놈아!]

러쉘은 지금까지 참아왔던 둑이 기어코 터져버렸다.

흑마법사가 빛을 사용해 같은 흑마법사를 죽이다니.

[네가 신관이야? 네가 빛의 축복을 받은 자냐고! 빛을 사용해? 흑마법사가 빛을? 이 망할 놈! 아주 죽으려고 환장했지?]

도무지 좋은 소리가 튀어나올 수가 없었다.

소중한 제자이기에.

편한 길만 가길 바랐기에 러쉘의 목에, 눈가에 핏대가 서버렸다.

저 망할 제자 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련님?"

흄은 잠깐 의식을 놓아버린 듯 루시온의 동공에 변화가 없자 그를 살짝 흔들다 말고 그의 고개를 살짝 돌려주었다.

"…쿨럭!"

루시온은 핏덩이를 토한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닦아내는 흄의 손길에 루시온은 자신의 감각이 멀쩡하다는 걸 알고는 몸에 힘을 풀었다.

'빛의 내성이 좋긴 좋네.'

흑마법사 7명 전부를 죽여버릴 만큼 빛을 강하게 내뿜었으나, 자신에게 온 충격은, 많이 아프지만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팔찌의 빛 방향을 제대로 조절한 것도 한몫했고.'

루시온은 무엇보다 빛의 내성이 7단계로 접어들면서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루시온!"

헤인트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상체를 일으키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지탱했다.

"죄송...."

"아니, 아니. 누워 있어."

헤인트는 루시온을 꾸짖지 않았다.

침착하려 애를 쓰며 공황에 빠져버린 너튼의 팔을 세게 쥐었다.

"의사를 불러주십시오. 당장 말입니다."

"…아, 아, 알겠습니다!"

너튼은 아픔에 정신을 차려서는 대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의자 뒤에 숨어 있던 비서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저 망할 놈이 어딜 가려고.'

루시온은 꼬리가 도망치는 모습에 당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싹 다 처리해야지.

"…형님."

"말하지 마. 빛을 너무 크게 쐤어. 너, 지금 위험해. 위험하다고."

헤인트는 기사들과 함께 루시온의 몸을 주물렀다.

신력 알레르기가 있는 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기에 몸이 뻣뻣해지기 전에 서둘러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흑마법사가… 이곳을 어떻게, …하,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괜찮은 것과 별개로 빛이 어둠을 죽여 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시온. 입 좀 다물라고!"

"형님. 집중하십시오. 만약에 꼬리가… 적의 꼬리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게 누구인 것 같습니까?"

루시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고, 범인을 찾아 달라 하소연하는 눈빛에 헤인트는 이를 악물었다.

고집은 카슨과 너무도 닮았다.

도무지 꺾을 수 없었던 그 망할 고집!

헤인트는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어깨에 힘을 빼고는 물었다.

"누군데. 그놈이 누구냐고. 죽여줄 테니까."

"…너튼의 비서입니다."

헤인트가 벌떡 일어났다.

"아뇨. 제가 죽입니다."

흄이 헤인트를 붙잡고는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인트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흄의 손길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흄은 루시온을 바라보다 땅을 박차고 뛰었다.

"...!"

헤인트와 황실 기사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흄의 발걸음이 가벼웠으나, 헤인트가 빛을 두른 것처럼 빠르지 않은가.

흄은 흑마법사의 눈에 깃든 분노를 보았기에 그들이 루시온에게 다가옴을 알았다.

자신은 어둠을 붙잡을 수 있었고, 놈들을 죽이려 기다렸다.

―가만히 있어.

하지만 루시온이 나지막하게 꺼내는 명령을 따라 그가 빛을 사용하고, 쓰러지는 상황을 막연하게 바라만 봐야 했다.

흄은 단 몇 걸음 만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비서의 목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땅으로 처박아버렸다.

모든 분노를 쏟아버리듯.

헤인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힘이 센 것도, 그가 엄청난 재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마냥 닭꼬치 하나에 그토록 좋아하던 흄의 모습이 진짜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흄은 조용히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흄 답지 않게 차가운 눈빛을 했다.

이제 속이 후련하십니까.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해 루시온은 미안했다.

'스승님도 그렇고, 흄도 화가 났나 보네. 사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루시온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분명 반대하고자 할 게 뻔하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빛을 사용한 건, 빛의 내성을 확인해보는 것과 별개로 미래를 위해 무조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36화.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3)

"이, 이쪽입니다!"

너튼의 요란한 목소리에 루시온은 헤인트를 보았다.

"…자리를 옮기고 싶습니다."

일단 다 떠나서 단 1분이라도 좋으니 편안하게 눕고 싶었다.

빛의 내성과 별개로 빛 때문에 어둠이 죽어 진짜 아팠다.

루시온이 흄에게 손을 내밀자 조금 전 차갑던 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 사과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루시온을 일으켰다.

"도련님. 저...."

루시온은 손바닥을 들어 흄의 말을 잘랐다.

사과를 들을 일이 아니었다.

흄은 집사로서 옳은 일을 했을 뿐이니.

"성자님. 오늘 일정을 취소해도 괜찮으니 마음 놓고 치료를 받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다 책임...."

"아뇨. 오늘 일정을 취소하지 마십시오."

루시온은 너튼의 말을 잘랐다.

취소라니.

미엘라의 역작을 손에 넣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취소라니.

[…하.]

러쉘이 숨을 삼키고, 헤인트가 제정신이냐는 듯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루시온…?"

"대신, 경매 시간을 조금만 뒤로…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잠깐 쉬면 나아지니까요."

루시온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매일 빛을 쐬고 있고, 오늘은 조금, 아니, 많이, 세게 쐬었을 뿐이었다.

어둠이 다시 회복되면 괜찮아지니 결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내일로 미뤄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재차 물어보는 너튼의 말에 루시온은 미소로 답변했다.

너튼은 잠깐 망설이다 흑마법사의 처리를 직원들에게 맡기고 루시온을 안내했다.

"그… 럼, 절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루시온 공. 안심하고 쉬고 있어. 이놈들이 깨어나면 내가 없애버릴 테니까.]

베델이 루시온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루시온은 안심하고는 너튼을 따라갔다.

헤인트는 탐탁지 않았으나, 루시온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걸 보며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익!"

갑자기 너튼이 비명을 질렀다.

입구 근처에서 들어올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머리가 갈리듯이 바닥에 깊숙이 처박힌 시체가 있지 않은가.

곧 익숙한 복장에 손가락을 벌벌 떨며 물었다.

"저 사체… 설마 제 비서입니까?"

* * *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을 말씀드려도 정말 아깝지가 않네요."

너튼은 고마움과 분노가 섞인 미묘한 표정으로 루시온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자신의 비서가 흑마법사와 내통하고 있었다니.

"자세한 증거는 비서의 방이나 비서가 잘 다니던 곳을 뒤지면 아마 나올 겁니다."

루시온은 진통제를 먹은 뒤, 너튼과 잠깐 대화를 나누기 위해 소파에 앉은 상태였다.

"예. 이 너튼 데쉬아, 성자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루시온을 보는 너튼은 마치 자신의 신을 보는 듯 경건했다.

만약 루시온이 제 비서를 죽이지 않았다면 경매장이 통째로 사라진 것도 모자라 고위 귀족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아니, 죽는 것도 죽는 거지만, 데쉬아 가문이 어떻게 될지 너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는 수습을 위해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성자께서 부디 편안하게 쉬고 계셨으면 합니다."

너튼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루시온."

너튼이 완전히 물러간 뒤에 헤인트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평소와 다르게 날이 서 있었다.

"위험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루시온이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하자 헤인트는 살짝 흔들렸다.

가뜩이나 루시온의 입가와 옷에 미처 지우지 못한 핏자국에 마음도 좋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방심하고, 흑마법사를 놓친 게 화근이 아닌가.

만약 거기에서 루시온이 빛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니야, 루시온. 내가 호위로서 부족해서야."

헤인트는 내쉬는 숨과 함께 어깨에 힘을 뺐다.

뭘 잘했다고 루시온에게 훈계를 하겠는가.

"루시온. 오늘은 정말 신이 도왔다고밖에 말할 수 없어서 네 몸이 괜찮지만, 다음에는 부디 그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해."

부탁에 가까운 말에 루시온은 헤인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했는지 알았다.

"예. 다음에는 조심하겠습니다. 형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헤인트의 입술이 세게 깨물리다 천천히 열렸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야 하는 건지.

"루시온."

헤인트는 창백한 낯빛을 한 루시온에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루시온의 행동은 용감했으며, 가히 성자라고 할 만큼 희생적이었다.

"제8 황실 기사단의 대장으로 루시온 공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헤인트는 존경이 섞인 목소리로, 기사의 예를 다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네 덕에 내 부하들이 무사할 수 있었어."

헤인트 자신이 흑마법사를 놓친 순간, 부하들의 전멸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루시온이 제 몸을 희생해 이를 막았다.

어떻게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팅!

'붉은 실이… 또 팽팽해졌다.'

루시온은 이번만큼은 부디 이 팽팽함이 유지 되길 빌었다.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헤인트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벗어났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루시온은 흄의 도움을 받아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약한 상태로, 헤인트의 존경을 받아, 아니, 아니. 진짜 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루시온.]

러쉘이 루시온을 부르자 루시온은 올 게 왔다고 생각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스승님을 놀라게 해드린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나, 다신 안 하겠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마 러쉘이라면 지금쯤 자신이 뭘 노렸는지 눈치챘겠지.

[루시온 네가 노리는 게 이런 식의 무용담이었어?]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이 가져온 정답을 부정하지 않았다.

흄의 얼굴이 덩달아 일그러졌다.

"말뿐인 성자보다 어떤 활약이라도 한 성자가 훨씬 많은 힘을 가져갈 게 뻔하잖습니까."

[이건 도박이었어, 루시온!]

러쉘이 소리치자 라타가 그림자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겁을 먹은 눈동자로 러쉘과 루시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시온이 라타를 보며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예. 맞습니다. 도박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제가 가진 빛의 내성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됐어. 무용담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루시온. 대체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건데?]

가슴을 뚫고 오는 러쉘의 예리한 질문에 루시온은 표정을 숨기느라 힘겨웠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루시온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겸 숨을 들이마셨다.

'아니, 저를 막아야 합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도, 스승님도, 가문도, 사람들도 정말 많이 죽어버렸습니다.'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재앙이 되었을 자신의 존재를 막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이 악물고 달리고 있다고.

그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스승님?"

루시온은 애써 웃었다.

[루시온. 간혹 네가,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너무 절박해 보여.]

루시온의 입꼬리가 잠깐 흔들렸다.

꼭,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떠안은 아이처럼 불안해 보여 러쉘은 더는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타락.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러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락에 대한 루시온의 두려움은 더 깊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건, 라트초를 먹는 게 아니라 귀걸이를 통해 보이는 부정 수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바라보고.

안도했다, 또 바라보고.

마치 절대로 타락하면 안 되는 강박관념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러쉘은 하고 싶은 말을 죄다 던져버리고 꼭 해야 할 말을 꺼냈다.

[루시온. 제발, 제발, 일을 저지르기 전에 나랑 상의 좀 하자.]

"…스승님께서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루시온. 나는 그렇게 꽉 막히지 않았어. 물론, 네가 걱정되니 잔소리를 했겠지. 하지 말라고 말릴 테고.]

러쉘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힘이 살짝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내 감정을 다 집어치우고 본다면 루시온 네 선택은 옳았어. 그 상황에서 흑마법사 루시온이 아니라, 귀족 루시온으로 남으려면 쓸 수 있는 수단은 몇 안 돼. 그중 너는 최고의 카드를 뽑은 거고.]

주먹을 꽉 쥐었던 루시온의 손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러쉘은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해주고 있었다.

무작정 러쉘이 반대할 거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 루시온 네가 노렸던 그 일이 성자라는 칭호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겠지. 신력 알레르기가 있는 네가 제정신이고서야 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테니까.]

러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구보다 소문에 휘둘렸던 너니까 소문의 힘이 얼마나 큰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당연히 써먹어야지.]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자신과 러쉘이 체결한 계약에 속마음을 읽는 것도 포함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 생각을 줄줄이 읽어나갔다.

[루시온.]

러쉘은 부드럽게 루시온을 불렀다.

아무리 잘났지만, 루시온은 아직 서툴렀다.

"…예."

루시온은 괜히 자신 앞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라타를 바라보았다.

[부탁할 때만 나를 써먹지 말고, 이럴 때도 나를 써먹어. 나는 스승으로서 너를 안전하고, 바르게 성장시킬 의무가 있어.]

참 따스한 말이나, 루시온은 왜 이렇게 슬프게 들려왔다.

몇 번이고 생각하지만, 러쉘을 잃은 소설 속 루시온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기댈 곳 없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러쉘이 사라지고 바로 타락해 버렸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지금도 이렇게 러쉘이 사라질까, 가슴이 멋대로 떨리고 두려운데.

"…고맙습니다, 스승님."

루시온의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러쉘은 루시온의 팔을 토닥거렸다.

[그래. 다 알고 있으니까, 지금도 정말 잘하고 있으니까, 제발 무리하지 마라, 루시온.]

"예.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루시온은 러쉘을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밀려드는 피곤함에 눈이 구불구불 감겼다.

"흄."

"예. 나중에 깨워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잠깐 주무십시오."

루시온은 그 부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못해도 2시간 이상은 미뤄질 테지.

귀족들이 불만을 터트리겠지만, 자신과 한자리에 있을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너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사과할 생각이 없으니까. 다만, 다음에는 놀라지 마."

"…다음에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디 자신의 목숨을 아낀다고 했습니다."

"나도 내 목숨을 아껴. 하지만 생각해 봐, 흄. 흑마법사에게 가장 취약한 게 뭐야?"

"빛입니다. 그건 도련님께서도 마찬가지잖습니까."

―맞아!

루시온의 손길에 마냥 좋아하던 라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타도, 베델도, 러쉘도, 흄도 다 놀랐어! 루시온이 나빴어.

라타는 루시온의 손가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깨물고는 또 조심스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라타의 벌이야.

라타는 말과 함께 재빨리 입을 열어 루시온의 손가락을 할짝거렸다.

루시온은 괜찮다는 듯 라타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얻을 게 있었거든."

"얻을 거라뇨?"

"아까 스승님께서 다 말씀해주셨잖아."

"무용담… 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루시온은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성자야. 이제 슬슬 사람들의 눈에 꼈던 콩깍지가 벗겨지고 성자가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할 때지."

"성자로서 이미 도련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잘 들어, 흄. 특별함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그중 내가 얻은 특별함이란,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볼 때의 그 특별함이야. 나는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 않고,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도구가 되고 싶지도 않고."

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도련님께서 빛을 사용하신 겁니까?"

"그래. 고귀한 희생은 아주 잘 먹히는 이야기거든. 그리고 흑마법사를 무려 7명이 죽였던 빛인데 나는 살아 있어."

자신이 빛의 내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빛의 내성'이라는 자체를 모르는 이상 자신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기적일 테지.

온갖 미사여구를 붙일 수 있을 만큼 환상적일 테지.

"흄. 너는 어떤 이야기가 더 잘 팔릴 것 같아?"

루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137화. 그것참 탐나네

"그게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특별함'입니까?"

흄이 물었다.

"맞아.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지. 이를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해."

[그렇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지.]

러쉘은 루시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사람들은 빛의 신이 있다고 믿어. 그래서 죽으면 빛의 신이 자신을 데려올 거라고 생각하고."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정말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습니까?"

흄은 잠깐 곁다리로 빠졌다.

책에서도 많이 봤기에 내내 궁금해하던 사실이기도 했다.

"글쎄. 나도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사람들은 빛의 신이 내려준 기적이라며 나를 칭송할 거야. 그 칭송이 곧 내 힘이 될 테지."

루시온은 슬쩍 웃고는 흄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해가 됐어, 흄?"

"…예.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제 의문은 별개입니다. 왜 보이지 않는 걸 따르는 걸까요?"

"그거야 자기 마음이겠지. 어쨌든, 흄. 나는 또 빛을 사용할 거야. 적어도 죽는 것보다 낫잖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부디 제가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빛을 맞아도 괜찮습니다."

"그래. 그럴게."

루시온의 시선이 잠깐 러쉘을 향했다.

[사용해. 루시온 네 말대로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 하지만 정말 긴급할 때만. 그때만 썼으면 해.]

"예. 감사합니다."

솔직히 조금 전 흑마법사들이 자신에게 달려온 상황은 루시온 자신이 보아도 갑작스러웠다.

예상한 것과 실제로 일이 일어나는 게 달랐으니.

흄 말대로 다음번에 그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흄은 체온이 떨어진 루시온이 춥지 않게 이불을 하나 더 꺼내 덮어주었다.

라타가 이불 속에 꼬물꼬물하다 얼굴을 빼내서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제 눈 감아, 루시온. 어둠이 아파하는 소리가 라타한테 들려.

"그래. 잠깐 눈 좀 붙일게."

루시온은 다 떠나서 잠깐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하."

미엘라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진 상태였고, 걸음걸이 역시 거칠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아요. 갑작스럽게 연기되는 게 어디 있어요? 몇 시간이나 기다린 줄 알아요?"

"흑마법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크라언은 나지막하게 말을 꺼내며 잠깐 경매장 내부를 조사했던 퀘이트를 슬쩍 보았다.

"맞습니다. 성자가 빛을 이용해 흑마법사를 무찔렀다고 하더군요. 딱히 비밀도 아닌지, 직원들이 떠들던 소리가 몹시 컸습니다. 아마 조만간 제대로 발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빛이요? 성자께서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거짓말이었을까요?"

미엘라가 놀라며 입을 살짝 가렸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이를 크라언이 부정하자 미엘라가 실실 웃었다.

"우리 크라언 님은 어떻게 성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 크흠, 관심이 있어서 잠깐 조사를 했습니다."

크라언은 애써 말을 돌렸다.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자신의 조국인 케오르티아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축복과 명복을 빌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아쉬움에 한 번씩 성자와 관련된 정보를 뒤적거리다 알게 됐을 뿐이었다.

"아가씨."

라인트가 앞을 가리키며 미엘라를 불렀다.

그 말에 크라언과 미엘라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쪽입니다, 아가씨."

경매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크라언은 표정을 싹 바꾸고 미엘라를 안내했다.

"그래."

이는 미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아도 귀족의 여식처럼 귀티가 가득 흐르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었다.

호위가 마냥 낯선 퀘이트와 피터가 불편한 기색을 띠었고, 라인트는 호위가 익숙했기에 한껏 여유로웠다.

크라언은 자리마다 적힌 번호를 따라가다 말고 얼굴을 구겼다.

초대장을 얻은 것까지 좋았지만, 맨 뒤쪽에 그것도 허름한 자리라니.

어쩔 수 없이 줬다는 낌새가 절절하게 흘렀다.

훗.

지나가던 귀족들이 마치 미엘라를 비웃는 듯했다.

'…저년이. 콱 구두 굽으로 머리를 찍어버릴라.'

미엘라는 치솟는 화를 잠재우며 크라언에게 걸어갔다.

또각또각.

미엘라의 점점 걸음이 바빠졌다.

"자리가 뒤쪽인 것도 모자라 이토록 허름한 자리라고?"

미엘라는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크라언에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잠깐."

미엘라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아무리 자신이 자작가이나, 대접이 개차반인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자리는 누구지?"

분명 다른 자리와 비교하면 자신의 자리도 나름 평범했으나, 유독 한 자리만 눈에 띄었다.

왕이 앉는 자리같이 크고, 웅장한 게 자신의 자리를 더 초라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상하게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창고에서 꺼낸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모르겠습니다."

크라언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 역시 당황한 게 보이자 미엘라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아가씨. 즉시 자리를 바꾸도록 요청하겠습니다."

"됐어."

미엘라는 짜증이 살짝 섞인 언성으로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어차피 목적은 자신의 아이템이었지, 지금 자리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저 옆자리가 무척 신경 쓰였다.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를 차지했지만, 미엘라의 옆자리는 물론 맨 뒷자리와 그 앞자리조차 아무도 앉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없으니까 정말 좋네요. 사실 귀족 여식 흉내 내는 게 좀 힘들었거든요. 발도 아프고, 옷도 불편하고."

미엘라는 슬쩍 다리를 길게 내뻗었다.

"저도 차라리 이곳이 낫습니다."

피터가 동의하며 대답했다.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가지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차라리 후드를 하나 덮어씌는 편이 좋았다.

"아! 만들다 만 게 있는데 얼른 집에 돌아가서 만들고 싶어요.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정말 힘들어요."

미엘라가 구두를 벗으려고 하자 라인트가 당황했고, 크라언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안 됩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곳의 암묵적인 규칙 중 하나가 '체통'을 지키는 거라고 했습니다."

"진짜 깐깐하네요. 내가 이래서 귀족귀족스러운 곳이 싫어요."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미엘라는 다시 바른 자세를 잡았다.

"사람이 이쪽으로 옵니다."

퀘이트의 발언에 미엘라는 금세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자리일까요?"

미엘라가 작게 속닥거리자 크라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일단 방향은 맞습니다."

퀘이트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고, 라인트는 슬쩍 곁눈질로 옆쪽을 쳐다보다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허."

"왜? 왜 그래요?"

미엘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라인트를 재촉했다.

연회같이 움직일 수 있는 장소라면 몰라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건 예법에 어긋났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무조건 저 의자의 주인입니다. 아니, …저분이 성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인트는 살짝 흥분해서는 애써 목소리를 죽였다.

저 사람이 성자가 아니라면 누가 성자라는 말인가.

또각.

걸음걸이에서부터 고귀함이 흘러넘쳤다.

퀘이트의 말에 갈등하던 크라언은 기어코 고개를 슬쩍 돌렸다.

눈이 딱 마주쳤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익숙함과 함께 성자라고 생각하는 이가 짓는 미소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저토록 자애로운 미소는 대체 무엇인가.

'…성자다.'

단번에 머릿속을 꿰뚫었다.

루시온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서는 미엘라를 향해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제야 미엘라와 퀘이트가 루시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퀘이트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 남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있는 마을에서 봤던 이가 정말로 성자일 줄이야.

"...!"

미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라인트가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분위기에서 압도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느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성자였다.

'…설마 미엘라가 날 알아본 게 아니겠지?'

자신을 빤히 보는 미엘라의 시선에 루시온도 당황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준비할 때 조직원들을 의식했기에 조금 더 신경 쓰지 않았던가.

―후후. 루시온이 너무 반짝거려서 놀랐나 봐. 라타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라타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긴장 풀어도 돼, 루시온 공. 공이 하멜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게 아니니까.]

베델이 가볍게 웃었다.

저 반응은 라타 말대로였다.

시녀에게도, 너튼에게도 보지 않았던가.

'…흠.'

베델이 괜찮다고 해도 루시온은 무척 신경 쓰였다.

미엘라가 뒤늦게 자신이 너무 빤히 봤다고 생각해 사과하려는 그때, 너튼이 단상 위에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이 경매장을 관리하는 너튼 데쉬아입니다."

너튼은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경매장 일정을 불가피하게 미루게 되어 무척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더도 말고 딱 간단명료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사과에 귀족들의 시선이 마냥 사납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연기 이유를 듣지 못했기에 분위기는 냉랭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경매장에 흑마법사가 나타났습니다."

웅성웅성.

흑마법사라는 사실에 귀족들 전체가 동요했다.

딱!

너튼이 손가락을 튕기자 갑자기 루시온을 향해 은은한 빛이 내려왔다.

"...?"

루시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너튼이 앞서 일어난 일을 귀족들에게 말해도 되겠냐고 했을 때, 당연히 허락했다.

하지만 이런 연출은 말한 적이 없지 않은가.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자 루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당황하지 말고 너튼만 봐.]

러쉘이 루시온의 시선에 맞춰 내려와서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루시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러쉘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제8 황실 기사단과 대장이신 헤인트 트리아 공과."

황실 기사단이라는 소리에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공."

너튼의 말에 그제야 조명 밑에 있는 존재가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엘라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역시 진짜 성자였다.

성자가 바로 자신의 옆에 있었다.

대박이지 않은가.

'진짜 성자다.'

정말 성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크라언의 눈에 비치는 루시온은 후광까지 달고 있었다.

저토록 깊은 고귀함에 정말 사람이 맞을까 싶었다.

"이분들의 힘으로 흑마법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되살리려는 듯 너튼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성자께서 신력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흑마법사 7명을 빛으로 정화했습니다. 그때 입은 부상으로 불가피하게 경매를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정화.

간단히 말해 흑마법사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대체 어떻게?

의문을 느끼는 귀족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신력 알레르기를 가진 자가 빛을 쐬면 그 반동으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빛에 죽을 정도라면 루시온 역시 죽어야 하지 않을까.

왜 루시온을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일까.

귀족들의 시선에 묘한 불신이 솟아났다.

"이는 제 모든 명예와 이곳 경매장, 그리고 데쉬아라는 이름을 걸고 사실임을 맹세합니다!"

너튼이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거의 모든 걸 걸었다시피 한 그 외침에 귀족들은 그제야 흔들렸다.

만약 저 사실이 거짓이라면 이곳에 앉아 있는 수많은 귀족과 싸워야 할 테니까.

"이는 사실입니다!"

헤인트가 입술을 열었다.

"저 헤인트 트리아가 황실 기사단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헤인트에 이어 루시온에게 도움을 받은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비슷한 말을 꺼냈다.

황실 기사단까지 이어진 맹세 귀족들은 정말로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기적인가?"

한 귀족이 낮게 중얼거렸다.

기적.

그 외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온 그 단어는 이내 빠르게 퍼져갔다.

애초에 루시온이 누구였는가.

성자였다.

신수의 축복을 받은 한 명의 존재.

그 존재 자체부터 이미 기적이질 않은가.

'그렇지. 그렇지.'

루시온은 파르르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한 명씩 변해가는 귀족들의 눈빛을 확인했다.

마냥 탐욕이 깊은 눈이 아닌, 정말로 기적을 목격한 것처럼 어떠한 믿음이 섞여 있었다.

'나를 찬양하고 칭송해. 오늘 일어난 이 일이, 저 귀족들을 통해 퍼진 그 모든 소문이, 다시 내게 돌아와 힘이 되어줄 테니까.'

루시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귀족들을 향해 마치 사죄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을 감싸는 은은한 조명과 침묵, 그리고 흑마법사 전원은 죽었지만, 루시온만 살아 있는, 가히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로 신비로움까지 겹쳐지며 사죄마저 신성했다.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마냥 아름다운 그림 같았던 그를 귀족들이 정말로 성자로서 보기 시작했다.

138화. 그것참 탐나네(2)

'…됐다.'

루시온은 점점 바뀌는 귀족들의 시선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딱 원하던 상황이 펼쳐졌다.

너튼은 잠깐 기다린 후에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흑마법사 일과 별개로 오늘 이 자리를 빛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오신 성자 루시온 크로니아 공께 깊은 박수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짝짝.

귀족들이 손뼉을 쳤다.

한 번 시작된 박수가 점점 커져 나갔다.

―이히히! 라타는 아주 아주 이전부터 루시온이 위대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

소리가 좀처럼 멈추질 않자 라타는 '에헴' 소리를 내며 으쓱거렸다.

박수는 이 정도로 충분했기에 루시온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박수가 멈췄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게 루시온이 원하던 그림이라면 너무도 그가 자랑스럽지 않은가.

사람들을 한 번에 뒤바꿔 놓았다.

루시온을 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이제 탐욕이 거의 느껴지질 않을 정도였다.

[루시온 공이 의도한 대로 굴러가서 정말 다행이야. 고생했어.]

베델은 루시온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루시온이 러쉘에게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는지 라타가 말해줬기에 자신까지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입이 가려웠다.

그 빛은 자신에게도 따가울 정도로 강했으니 루시온은 오죽했겠는가.

[그렇지. 루시온이 의도한 대로 굴러가서 참 다행이지.]

러쉘의 목소리는 아직도 뼈가 있었다.

루시온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너튼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의 마음을 흔든 뒤에 바로 단상으로 내려가 경매를 시작했다.

귀족들이 경매에 집중할 수 있게 해달라.

이는 루시온이 원했던 일이었다.

더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던 귀족들은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가장 궁금했던 사실 하나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성자 옆에 앉은 영애는 누구인가?

처음에는 겨우 얻은 초대권으로 경매장에 들어온 덜떨어진 귀족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낡디낡은 그 자리가 너무도 부럽지 않은가.

[슬슬 반응이 오네.]

러쉘이 말했다.

'당연히 반응이 와야죠.'

루시온의 눈가가 잠깐 가늘어졌다.

한창 자신의 주가가 상승했을 때는 몰랐던 사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올 테니까.

"반갑습니다, 영애.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루시온은 이때다 싶어 미엘라에게 말을 걸었다.

"미, 미엘라 체프란입니다."

미엘라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횡재했다 싶었는데, 성자라는 그 사실이 점점 부담스러워 미엘라는 루시온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성자 이전에 루시온은 크로니아이질 않은가.

서부의 지배자.

변경의 지배자.

말을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미엘라는 다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온 근처에 서 있는 헤인트라던 황실 기사도 무척 신경 쓰였고.

생김새와 달리 눈빛이 아주 사나웠다.

[귀족들의 표정이… 탐욕에 찌들어가고 있다.]

잠깐 주변 귀족들의 표정을 살피던 베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좋은 건수를 문 표정이네. 하긴 루시온 옆에 있는 미엘라가 왜 저기에 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겠지.]

러쉘도 호기심에 덩달아 살펴보다 키득거렸다.

―라타도. 라타도 보고 싶은데.

당장 그림자 밖으로 나오고 싶은지 라타가 그림자 속에서 빙그르르 뛰어다니는 게 느껴졌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닌, 머릿속에 장면이 떠올랐다.

루시온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쩍 웃다 말고 놀랐다.

지금까지, 아니, 조금 전까지 그림자 속에 있던 라타가 뭘 어떻게 하는지 몰랐는데.

'…검은 구슬이 계속 흡수되고 있다는 건가? 그래서 라타가 뭘 하는지 내가 알게 된 거고?'

루시온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크라언, 라인트, 미엘라와 시선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이 하멜이라는 것도 모르니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라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건 퀘이트와 피터뿐이네.'

"죄송합니다."

미엘라가 대신 사과했다.

얼굴을 빤히 보는 행동 자체가 실례이질 않은가.

하지만 보지 않으려고 해도 어떻게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되도록 말을 아낄 생각이라 싱긋 웃고 말았다.

주변 조명이 약해지자 경매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 시작하려는 가봐. 라타는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해.

그림자 속의 라타가 거의 그림자 끝에 매달려 빤히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드르륵.

카트를 끄는 소리가 크게 들릴 무렵, 단상 위 조명이 무척 밝아졌다.

덩달아 헤인트는 경계했다.

이곳 조명이 어두워진 틈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미 헤인트의 손짓에 루시온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각 양쪽을 지키며 섰다.

이 모습을 퀘이트가 힐끔 바라보았다.

직업병인지라 이곳에서 성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대충 눈대중으로 파악했지만, 좀처럼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특히 황실 기사단 대장에게서 걸렸다.

저 벽은 뚫기가 꽤 어려울 것 같았다.

"어때 보입니까?"

퀘이트가 슬쩍 피터에게 물었다.

"가능합니다."

피터는 황실 기사단의 공격을 막을 수 있노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오."

라인트가 슬쩍 웃으며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피터를 바라보았다.

마방사는 쉽게 볼 수 없었기에 자신의 공격도 통할지 알고 싶어졌다.

"집중하십시오."

하지만 크라언의 한마디에 세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미엘라가 쿡쿡 웃자 루시온은 기껏 참았던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 힘겨웠다.

'…와. 미치겠네. 웃음이 자꾸만 나올 것 같아.'

아는 사람을 모르는 척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걸 오늘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때, 이번 경매를 진행할 경매사가 자신을 소개하며 행사의 취지를 언급하자 그제야 루시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일단 가볍게 시작하겠습니다. 자, 첫 번째로 소개할 물건은 도자기입니다."

경매사의 말과 함께 천에 가려졌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확대 마법을 이용해 물건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순백의 도자기였으나, 일반 도자기와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오."

귀족 중 일부가 감탄했다.

'진짜 빛이네. 망할 빛.'

루시온은 도자기의 특별함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괜찮습니까?"

헤인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도자기에 빛이 깃들었어도 루시온에게 향할 정도로 센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첫 물건 치고 생각 외로 빛이 강한 편이라 이다음에는 얼마나 점점 빛이 강해질지.

헤인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시작가 백 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는 가볍게 입을 놀렸다.

'백 델이라면… 100만 원에 해당하는 가치잖아?'

루시온은 시작 단위에 살짝 놀랐다.

'나중에 금액이 얼마나 커지려는 거지?'

자신의 돈은 충분했다.

다만, 크라언이 정확히 얼마를 들고 왔는지 모르니 조직원이 살짝 걱정스러웠다.

[고위 귀족들만 모였더니 시작 금액부터 다르네. 대체 얼마까지 가려는 거야?]

앞으로 더 커질 돈을 생각하니 러쉘은 오만상을 썼다.

새삼스럽지만, 귀족이라는 지위가 불공평하다 싶었다.

[아마 몇만 델까지 가겠지.]

베델의 말에 러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만 델까지 간다고…? 하. 금전 감각이 전혀 다르니 헷갈리네. 루시온도 저렇게까지 쓰진 않았는데.]

[루시온 공이 잘 쓰지 않는 편이라서 그래.]

베델이 가볍게 웃었다.

"네. 오백 델, 칠백 델, 천, 천오백...."

경매사의 금액이 쉴 새 없이 올라가자 러쉘과 크라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이, 이렇게 막 올라가도 되는 겁니까?"

미엘라가 피식 웃었다.

"원래 이래. 아니, 솔직히 여긴 조금 더 심한 편이지만."

누군가에게 몇만 델이 정말 큰돈이나, 귀족들에게 있어 품위유지비로 쓰일 정도였다.

"삼천 델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경매사는 눈을 빠르게 돌리며 추가 금액이 없는지 살폈다.

"삼천오백 델입니다. 삼천오백 델. 더 없으십니까?"

주변 분위기를 한 번 살피다 그녀는 나무망치를 내리칠 듯 손에 쥐어서는 눈동자를 굴렀다.

짧은 시간에 침묵이 흘렀다.

탕, 탕, 탕.

경매가 낙찰됐다는 뜻으로 망치가 3번 울렸다.

"낙찰을 축하합니다."

경매사는 미소를 지으며 경매 낙찰에 성공한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여러 가지 물건이 나왔다.

하지만 루시온의 시선을 끌 만한 것들은 없었고 초롱초롱하던 라타도 지쳐 그림자 속에 발라당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라타가 좋아하는 게 없어. 빛이 있는데도 반짝이질 않아. 라타는 반짝거리는 게 좋은데. 그래서 라타는 집에 있는 금고가 제일 좋아!

'…금고에 또 들어갔어?'

루시온은 조직원들을 의식해 헛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어떻게 금고에 들어간 걸까.

"다음 물건은...."

―오오오! 팔찌다!

물건을 가린 천이 벗겨지자마자 라타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꼬리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저 팔찌, 어디서 많이 봤는데?]

러쉘이 팔찌를 보더니 턱을 매만졌다.

[루시온 공이 아침마다 사용하던 그 팔찌가 아닌가.]

―오! 맞아, 베델. 라타가 막 그 말을 하려고 했어. 텔라한테 받은 팔찌랑 비슷하게 생겼어.

흄마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눈이 좋았지만, 루시온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확대 마법을 써주기 전까지는 팔찌 문양이 어떤지 어떤 모양인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흠. 망원경이라도 들고 왔어야 했나.'

옆에 마법사가 확대 마법을 쓰자마자 루시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짜 비슷하게 생겼는데? 아니, 똑같은가?'

라르비스의 눈물이 2개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루시온은 관심이 생겼다.

헤인트를 슬쩍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헤인트가 물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팔찌와 비슷해 보여 잠깐 확인하겠습니다."

"확인만 하셔야 합니다."

헤인트가 당부하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찌를 마법 주머니 속에서 꺼냈다.

"...!"

그 순간, 루시온은 자신에게 오는 강렬한 빛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어둠을 짓눌렀다.

딱!

러쉘이 손가락을 튕겼다.

―라, 라타도 붙잡았어!

헤인트가 다급히 빛의 장막을 발동하며 다가오는 빛을 붙잡았다.

쉬이이이이.

마치 불에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탁.

무언가 땅으로 떨어졌다.

헤인트가 그쪽으로 뛰어갈 동안 베델이 루시온을 살피며 물었다.

[괜찮은가, 루시온 공?]

―응. 루시온은 괜찮아. 어둠이 살짝 흔들렸을 뿐이야.

라타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피터가 방어 마법을 거두자 미엘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방금 빛이 날아오지 않았던가.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대답했다.

그사이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살짝 부담스럽던 탓에 미엘라가 말을 걸어줘서 다행이다 싶었다.

[…날아온 게 빛이 아니라 팔찌 그 자체인데?]

러쉘은 헤인트가 주운 물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팔찌가 어떻게 혼자 날아올 수 있는가.

"…팔찌?"

헤인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방금 경매 물건으로 나온 팔찌가 아닌가.

조금 전과 달리 은은하게 빛이 나오면서 팔찌가 덜덜 떨리다 허공에 떴다.

그 방향이 루시온이 있는 곳이라 헤인트는 조심스레 한 발자국 내디뎠다.

떨림이 더 심해졌다.

마치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 헤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거 왜 이래?'

놀란 건 루시온도 마찬가지였다.

팔찌가 멋대로 뜨더니 헤인트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루시온 공의 팔찌도, 헤인트가 가진 팔찌도 비슷하게 움직이는데?]

[그러게. 이거 왜 이러는 거지?]

베델과 러쉘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서, 성자님. 괜찮...."

조금 전 일에 헐레벌떡 뛰어오던 너튼이 이상 현상에 말을 더듬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이 팔찌 왜 이러는 겁니까? 분명 확인했을 때 이러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헤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아직 경매 전이기에 물건의 주인은 너튼이었다.

너튼은 소란스러워진 경매장 내부를 살피며 땀을 삐질 흘렸다.

"예.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저는 잠깐 상황을 진정시키고 오겠습니다."

너튼보다 헤인트가 먼저 움직였다.

루시온에게 다가갈수록 팔찌의 떨림이 심해지자 비로소 확인했다.

'이 팔찌가… 루시온이 가진 팔찌와 공명하고 있어.'

139화. 그것참 탐나네(3)

루시온 역시 헤인트와 가까워지자 확신했다.

저 팔찌가 자신이 가진 라르비스의 눈물에 반응한다는 걸.

'설마… 라르비스의 눈물이 미완성이었다고? 저 팔찌까지 합쳐져야 하나가 되는 건가?'

그렇다면 뭘 망설이겠는가.

루시온은 손을 부르르 떨리는 척하다 슬슬 손에 힘이 빠졌다.

'어이쿠. 손이.'

루시온이 놓친 팔찌는 당연하게도 헤인트에게 날아갔다.

딸깍.

팔찌가 서로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빛이 뿜어져 나왔음에도 루시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헤인트가 있지 않은가.

'헤인트가 빛을 거둬주겠지. 나는 편하게 저 팔찌만 받으면 그뿐이니까.'

루시온은 자신의 예상대로 다급히 빛으로 팔찌의 빛을 가둬 버리는 헤인트를 보았다.

헤인트는 빛에 집중하면서도 루시온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루시온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빛이 가까이 있다 보니 영향이 없을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헤인트는 지금 자리를 옮길 수가 없었다.

팔찌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꽤 컸다.

저 빛이 루시온에게 향한다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흄이 혹시 몰라 루시온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아."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을 전부 헤인트가 잡아주어 살짝 울렁거리는 정도였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사아아아아.

잠시 뒤, 샘솟던 빛이 가라앉자 헤인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자신의 빛을 거두자 하나의 팔찌만이 보였다.

이전보다 더 두꺼워졌지만, 은색에서 순백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에 흐르던 빛은 오히려 더 사라진 상태였고.

헤인트는 이유 모를 끌림을 느꼈지만, 팔찌에서 시선을 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쩌지?'

루시온에게 향해 걷다 말고 헤인트는 잠깐 망설였다.

하나는 루시온의 것이었고, 하나는 너튼의 것이었다.

이 팔찌를 누구한테 줘야 하는가.

[저 팔찌… 좀 이상한데?]

러쉘은 헤인트에게 다가가다 말고 팔찌 주변에 감도는 빛의 깊이에 깜짝 놀랐다.

[베델. 저 팔찌에 나오는 빛 말이야. 너도 이상하지?]

[그래. 보이는 건 옅지만, 빛의 질이 달라. 깊다. 그리고....]

베델이 헤인트에게 다가가자마자 팔찌에 휘감긴 빛이 이전보다 거세졌다.

[마치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 같지 않은가.]

베델은 멈추지 않고 더 다가갔지만, 팔찌가 반응하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맞아. 그래서 이상해. 어둠의 존재들을 볼 수 있는 건 오직 어둠의 축복을 받은 이들뿐이라는 그 사실을 조금이지만 깨고 있잖아?]

불쾌함이 섞인 러쉘의 목소리에 루시온은 입가를 핥았다.

'위험한데?'

루시온은 잠깐 너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나오는 물건 중 하나를 성자께 사죄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 기회를 지금 쓸 필요는 없었다.

"흄."

루시온이 흄을 불렀다.

"알겠습니다."

루시온이 일어날 기세라 흄이 의자를 뒤로 당겨 뺐다.

흄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다가갔다.

"제게 주십시오, 헤인트 경. 저건 제 팔찌입니다."

"나머지 반쪽은 데쉬아 경의 겁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제게 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직접 데쉬아 경에게 가서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루시온은 손을 내밀었지만, 헤인트가 망설였다.

"이 팔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할 듯합니다."

"아, 마침 오는군요."

루시온은 또 헐레벌떡 뛰어오는 너튼을 가리켰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뛰는지, 그가 무척 지쳐 보였다.

그가 숨을 몰아쉬길 기다린 후에야 루시온은 헤인트가 손에 쥐고 있는 팔찌를 가리켰다.

"너튼 님도 보았겠지만, 우연히 제 팔찌와 합쳐졌습니다."

"…예. 저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너튼은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값을 치르겠습니다."

루시온은 팔찌를 포기할 수 없음을 명확히 말했다.

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는 걸 너튼이 더 잘 알고 있을 테지.

너튼은 잠깐 고민하다 말고 흔쾌히 말을 꺼냈다.

"아뇨. 성자께서 가져가셔도 됩니다."

만약 저 팔찌가 사전에 사람들에게 공개됐던 물건이라면 골치가 아팠겠지만, 다행히도 저 팔찌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한 3초 정도 공개가 되지 않았던가.

그 잠깐 사이에 마음을 뺏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3초라면 너무도 짧은 시간일 테니.

"감사합니다, 너튼 님. 값을 치르겠습니다."

루시온이 환하게 웃자 너튼도 기뻤다.

마치 루시온에게 선물하는 기분이라 너무 신이 났다.

"아닙니다. 이 물건이 성자와 인연이 닿은 물건이니 괜찮습니다."

너튼은 주변을 슬쩍 살피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안정성 문제도 있으니 잠깐 가져가서 확인만 해봐도 되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

루시온이 흔쾌히 허락하자 너튼의 얼굴이 밝아졌다.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했으나, 차마 자리에서 일어날 적당한 구실이 없었다.

그저 품위를 생각해 참으며 관심 없는 척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시온은 귀족들을 향해 잠깐 고개를 숙인 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시온 있잖아.

라타가 속닥거렸다.

머릿속에 울리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귓가가 가려웠다.

―저 팔찌에서 나는 빛이 트리에한테서 나는 빛이랑 비슷했다? 라타는 트리에의 빛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어.

[신수한테서 나는 빛을 느꼈다고?]

러쉘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응! 라타는 똑똑해서 기억하고 있어.

[그럴 리가. 빛의 신수는 누구에게 탄생됐든 그 빛은 똑같아. 그게 신수의 특징일 텐데. 그런데 트리에의 빛을 느꼈다고?]

―응! 라타가 느꼈어! 라타는 똑똑해!

이어지는 라타의 대답에 러쉘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이상하네? 저 팔찌가 아까 우리를 인지하는 것도 그렇고.]

러쉘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자 루시온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트리에의 빛과 똑같고, 어둠의 존재를 눈치채는 빛이라고? …설마.'

루시온은 신수만큼 특별한 물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로 소설 '어둠의 손아귀'에 등장하는, 빛이 깃든 물건의 정점인 '성물'이었다.

헤인트는 실제로 그 물건들을 손에 넣어 최종 보스를 물리치지 않았던가.

'정말 이 팔찌가… 성물이라고?'

괜스레 루시온은 입 안이 바짝 마른 기분을 느꼈다.

라르비스의 눈물은 적어도 헤인트가 얻었던 성물이 아니었다.

[흠.]

러쉘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것뿐이네.]

[그게 뭔가?]

[성물.]

러쉘의 답에 루시온은 순간 움찔거리다 자꾸만 자신을 빤히 보는 크라언을 의식해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대, 지금 뭐라고 했는가…?]

베델은 당황하며 물었다.

[성물.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없어.]

러쉘이 재차 답을 언급하자 베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물이라니.

[그게 정말이라면 루시온 공에게 큰일이 아닌가.]

베델 자신이 아무리 몰라도 빛이 깃든 물건과 성물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아주 큰일이지. 빛이 깃든 물건은 없앨 수라도 있는데, 성물은 일반적인 공격으로 파괴할 수 없을뿐더러 가장 순수한 빛이… 저저, 입꼬리 올라가는 거 봐라!]

러쉘이 말하다 말고 루시온이 웃자 기겁했다.

[루시온. 이 와중에도 빛의 내성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어? 성물의 빛은 순수한 빛이라니까. 이건 진짜 차원이 달라.]

흄이 러쉘과 루시온을 보다 슬쩍 미엘라 쪽을 가리며 물을 건네는 시늉을 했다.

"물, 마시겠습니까?"

"아니. 괜찮아."

루시온의 대답에도 러쉘은 미심쩍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 그게 아니라 성물을 써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다 이거지?]

그 물음에 루시온은 정답이라는 듯 입꼬리를 다시금 올렸다.

신성 국가 네바스트에서는 성물을 가지고 있지만, 테슬라 제국 내에는 없었다.

그만큼 성물은 귀중한 물건이었다.

[아까 팔찌를 확인하러 들고 가지 않았던가. 들켜도 괜찮은가…?]

걱정이 섞인 베델의 물음에 러쉘은 미간을 찌푸리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글쎄. 애초에 성물 자체가 정보도 없고, 엄청 희귀해서 나도 거기까지는 몰라.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 이번 주제가 빛이니 경매장 쪽에서 신관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아뇨. 경매장에 아무리 신관이 있더라도 이건 모를 겁니다.'

루시온은 간지러운 입을 참아내며 경매를 흥미롭게 보는 척 꾸몄다.

당장 헤인트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던가.

성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빛의 신수를 지닌 신관뿐이라고 소설에서 등장했다.

'지금 신수를 지닌 신관이 경매장에 있을 리가 있겠어?'

루시온은 스스로 제 손에 굴러온 귀중한 성물의 존재에 신이 났다.

지금 자신이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가.

루시온은 느긋하고,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어 다음 경매 물건을 기다렸다.

'뭐가 또 튀어나오려나?'

하나를 운 좋게 얻은 터라 이다음에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됐다.

[이제 경매가 즐거운 모양이네?]

러쉘이 키득거리자 루시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엄청 즐겁습....'

드르륵.

카트 소리와 함께 붉은 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붉은 실이 나온다고?'

루시온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천이 벗겨지자 미엘라가 '헙' 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의 말에 루시온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 목걸이가 미엘라의 역작이야?'

곧이어 의문이 밀어닥쳤다.

'왜… 저 물건과 붉은 실이 연결된 거지?'

소설 속에서 악역이었던 미엘라는 자신의 역작을 완성하기 전에 헤인트 손에 죽어버렸다.

동시에 역작도 부서져 영영 사라졌고.

'이번에는 다를 텐데.'

루시온은 슬쩍 헤인트를 보았다.

"혹시 아까 팔찌에서 새어 나오던 빛 때문에 몸이 좋지 않습니까?"

헤인트가 루시온의 시선에 금세 반응해 물어보았다.

'…뭐가 저렇게 빨라?'

그저 헤인트의 낌새를 파악하려다 도리어 자신의 낌새를 파악 당하게 생겼다.

루시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계속 서 계시면 다리가 아프질 않으십니까?"

"맨날 서는 게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인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루시온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미엘라가 저게 맞대. 라타가 분명히 들었어.

그림자 속에서 라타가 귀를 쫑긋 세우며 미엘라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도 들었다. 저 마법 아이템이 이번에 루시온 공이 경매장에 온 이유가 아닌가.]

베델은 고개를 끄덕이다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팔찌 사건 때문에 아마도 몸을 사리는 귀족들이 많을 테지. 딱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렇지. 지금이 딱 좋은 기회지.'

루시온 역시 베델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다음 물건은 '페트란의 기적'이라는 이름을 가진 목걸이입니다."

경매사가 자연스럽게 미엘라의 역작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페, 페트란? 아직 이름도 붙이지 않은 내 귀여운 물건에 어디서 그 더러운 이름을 붙여?"

하지만 미엘라가 곧바로 반박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 들리는데.'

루시온은 미엘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성이 난 상태였다.

"이 목걸이는 빛을 흡수해 여기 중앙에 있는 보석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경매사가 말하면.

"그건 보석이 아니라 마석이라고. 마석."

미엘라가 곧바로 반박하고.

"빛을 이렇게 흡수하게 되면 보석에 은은한 빛이 감돌아 더욱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경매사가 또 말하면.

"아니야. 빛이 들어왔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기능일 뿐이라고. …하. 미치겠네."

미엘라는 억울함을 호소하듯 중얼거리길 반복했다.

"아가씨…?"

보다못해 크라언이 미엘라를 말렸다.

"알아. 아는데 내 역작에 말도 안 되는 설명을 갖다 붙이잖아. 저걸 어떻게 참아?"

"그래도...."

크라언이 눈으로 루시온을 가리켰다.

그제야 미엘라가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루시온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전처럼 평온한 모습에 미엘라는 안도했다.

아무래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빛을 흡수할 수 있는 목걸이. 최저가 오백 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전쟁을 알리는 경매사의 말에 미엘라가 근질거리던 손가락을 풀기 시작했다.

140화. 감히 내 물건을 노려?

[미엘라가 기합을 단단히 넣었는데?]

베델의 말에 루시온 역시 슬슬 준비할 참이었다.

"천 델."

"...?"

미엘라가 아닌, 누군가 바로 시작가의 2배를 불러버렸다.

'어느 놈이야?'

루시온은 흄에게 손을 뻗었다.

"물 좀 줘봐."

"알겠습니다."

흄이 건넨 물을 손에 쥐며 루시온은 놈을 찾으려 눈동자를 돌렸다.

이미 러쉘이 그놈에게 다가간 상태라 확인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나름 연회에 많이 갔던 루시온은 그놈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덩달아 연회에 강제로 참석했던 러쉘마저 알쏭달쏭한 표정을 하자 베델이 날아가 그를 보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아는 사람이야?]

러쉘의 물음에 베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사의 맹세를 한 주인에게 배신당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 아마 루시온 공은 나와 계약을 통해 흘러들어온 기억을 봤을 테고.]

베델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러쉘을 이어 루시온까지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말했지.]

담담한 목소리로 러쉘이 대답했다.

루시온도 베델의 기억 속에 보았던 그녀의 처절한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놈의 수족 중 하나다. 테펠로우 셀가 후작.]

베델은 투구 덮개를 내리며 표정을 숨겼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참함에 그녀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서… 미안하다, 루시온 공.]

지금 루시온이 집중해야 할 순간일 텐데, 자기 일로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했다.

[에이. 그 정도는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루시온은 웬만한 일에는 휩쓸리지도 않으니까.]

러쉘이 가볍게 웃으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로잡고자 했다.

루시온도 베델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베델은 기사로서 믿었던 주인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공허의 손이 벌이던 저주의 실험체가 되어 죽었다.

저 정도의 반응은 당연했다.

[루시온 공.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올게. 미안.]

베델은 말을 남긴 뒤에 경매장을 벗어났다.

'…기억해야겠네.'

루시온은 베델이 말했던 테펠로우 셀가 후작을 기억하며 경매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 델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조금 전 팔찌 영향 때문인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이전처럼 치열하지 않았다.

미엘라가 가격을 부르려 준비하던 순간, 테펠로우가 다시금 가격을 불렀다.

"삼천 델."

'…갑자기 가격을 더 올린다고?'

루시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따라붙는 사람도 없을 텐데 굳이 가격만 올려봤자 손해가 나기 쉬웠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러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진짜 물건이 필요한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자 가격만 미친 듯이 올리고 빠지는 놈을 한 번씩 보곤 했다.

그런 부류가 아닐까.

"삼천 델 나왔습니다."

경매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삼천 백 델."

억울하지만, 미엘라가 경매에 참여했다.

저 물건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팅!

그때,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그렇지. 미엘라가 저 물건을 가져가면 소설과 다른 흐름이 되니 붉은 실이 저렇게 되는 건 당연해. 미엘라의 역작도 나한테 돌아올 테고.'

자신이 살아날 확률을 높여주는 셈이니 붉은 실이 팽팽해지는 건 당연했다.

루시온의 시선이 테펠로우를 향했다.

하지만 테펠로우는 예외였다.

'테펠로우 셀가 후작이라.... 이건 베델 일과 별개로 기억할 수밖에 없겠는데?'

미엘라가 소설 속과 달리 자신의 역작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 테펠로우 셀가 후작에게 미엘라의 역작이 넘어가지 않아서인지 모르는 이상 가능성은 남겨둬야 했다.

"삼천 이백, 삼천 삼백, 삼천 오백...."

슬슬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도 한 명씩 참여하면서 다시 가격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미엘라가 다소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사천 델을 부르려던 순간, 테펠로우가 먼저 선수 쳤다.

"칠천 델."

미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의 물건이 이토록 값어치 있다는 사실에 내심 흡족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크라언은 미엘라의 표정에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다.

지금 기뻐할 때가 아니질 않은가.

'아, 맞다.'

미엘라는 곧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자신의 물건을 높이 평가해준 저 남자의 행동에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가격이 오르면 힘들어지는 건 자신들 쪽이 아닌가.

게다가 하멜에게도 면목이 없고.

"팔천 델."

테펠로우가 또 가격을 올렸다.

'그만 올… 아니, 적당히 불러, 미친 새끼야!'

미엘라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매섭게 테펠로우는 쳐다보았다.

'저거 왜 저래? 왜 미친 짓을 하는 거냐고?'

미엘라는 기쁨과 곤란함 그 중간에 어정쩡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떼었다.

"팔천백 델."

"예. 팔천백 델이 나왔습니다."

경매사가 미엘라의 말을 받았다.

"구천...."

"만 델."

테펠로우의 말을 가로채며 루시온이 가격을 만 델로 올려버렸다.

처음 경매에 참여한 루시온의 행동에 경매장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빛을 흡수한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우나, 어디까지나 목걸이였다.

흄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귀족들이 흥미를 갖자 루시온은 눈길도 주지 말라며 거기서 한 번 더 올렸다.

"이만 델."

지금까지 최고가는 십만 델이었다.

경매장에서 사전에 알려준 물건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에 당연했다.

흄은 루시온을 걱정스레 보았다.

이만 델이면 닭꼬치를 몇 개나 사 먹을 수 있는 돈인가.

"삼만 델."

루시온은 나머지 귀족들이 경매에 참여할 마음이 싹 사라지도록 또 가격을 올렸다.

테펠로우가 돈으로 찍어 누르며 '저건 내 거야'라고 찜을 한 행동을 루시온도 따라 했다.

"사, 삼만 델?"

미엘라가 숨을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하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고, 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성자인 루시온이 나설 줄은 몰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미 루시온의 등장만으로 괜히 크로니아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포기하는 귀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좋아. 역시 돈이 최고네.'

루시온은 즐거웠다.

집에 있으면 노비오가 옷도 사줘, 밥도 줘, 필요한 건 죄다 줘.

온전히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일이 어디 있는가.

금융치료.

이게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주기적으로 쑤시던 배의 상처도, 빛 때문에 온몸에 일어난 통증도 차차 가라앉아가는 기분이었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흄이 다급히 루시온에게 속닥이자 그는 황당한 눈길로 흄을 보았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내가 너한테 맞춰준 옷값만 오천 델은 될 텐데. 아니, 조직을 위해 쓴 돈만 몇십만 델인데.'

옆에서 빤히 보지 않았던가.

'…아. 가격은 모르는구나.'

루시온은 그제야 흄의 걱정을 눈치챘다.

옷을 살 때도, 조직에 돈을 줄 때도 죄다 돈주머니에 넣어줬으니 흄이 어떻게 알겠는가.

[괜찮아, 괜찮아. 루시온은 돈이 많아.]

러쉘이 키득거리며 대답하자 그제야 흄이 안도했다.

―맞아. 루시온은 돈이 많아! 라타가 루테온 은행에 따라갔다가 루시온의 금고를 봤어! 보석하고 동전이 너무 반짝거려서 한 번 갔다가 뒹굴고 왔거든!

'거긴 또 어떻게 들어간 거야?'

라타의 천진난만한 말에 루시온은 새어 나올 뻔한 한숨을 꾹 참아냈다.

분명히 그림자 이동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저번 신전 폭파 사건 때, 폭탄 스위치를 라타가 신관 몰래 가져간 것처럼 너무도 조용해 눈치를 채지 못했나 싶어 루시온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오…! 테펠로우인가 뭔가 하는 놈도 루시온 네가 나서니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네.]

―라타도, 라타도 보고 싶은데.

라타가 그림자 속에 앞발을 동동 굴렸다.

"삼만 델이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잠깐 침묵이 오가자 경매사가 귀족들을 재촉했다.

그녀의 손에 다시 망치가 쥐어졌고, 눈치를 살폈다.

루시온의 참여에 그 파급력이 너무 강했다.

입을 벙긋거리려던 귀족들의 입술이 무거워지자 경매사 역시 깔끔하게 망치를 두드리려고 했다.

"삼만오천 델."

테펠로우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사만 델."

루시온이 가볍게 받았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사만오천 델."

테펠로우가 받고.

"오만 델."

루시온이 또 받고.

"오만오천 델."

테펠로우가 다시금 멀어지려고 하면.

"육만 델."

루시온은 빠르게 따라붙었다.

점점 구겨지는 테펠로우와 달리 루시온은 여유로웠다.

'자. 이제 주변에서 압박이 올 거다. 이래도 계속한다고?'

이곳에서 가장 힘이 센 자가 누구냐고 한다면 귀족들 전원이 자신을 가리킬 테지.

어떤 세계든 힘이 강한 자들을 따르는 건 당연했다.

후작이라는 지위에 육만 델은 턱없이 적은 돈이나, 루시온에게 잘 보이고자 귀족들의 시선이 테펠로우를 옥죄어 왔다.

이제 그만하라고.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저놈을 압박하고 있는데?]

러쉘이 재미있다는 듯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나이만 먹었지, 하는 짓은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며칠 전에 아버지께서 백작가, 자작가, 남작가를 차례대로 사라지게 했으니 슬슬 걱정될 테지, 테펠로우.'

루시온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다.

바로 저 물건을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엿보이도록.

"육만오천 델."

그럼에도 테펠로우는 한 번 더 목소리를 냈다.

'안 되겠네.'

루시온은 테펠로우가 말을 할 때마다 팽팽해진 붉은 실이 다시 힘을 잃는 모습을 연거푸 확인했다.

원래는 자신이 등장해 일단 크로니아라는 이름에 겁먹은 귀족들을 떨어트리고, 그 후에 계속 가격을 높이며 자신은 물론, 이미 포기한 귀족들의 압박에 그 누구도 저 물건에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래야 자신의 물건을 가지려는 미엘라만이 포기하지 않을 테니 나름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손에 넣어 그녀도, 조직도 무척 기쁘지 않겠는가.

"칠만 델!"

그때, 미엘라가 끼어들었다.

"십오만 델."

루시온이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미엘라에게 미안하지만, 자신에게는 어차피 너튼의 선물권이 있었다.

가격을 얼마나 크게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저건 무조건 내 손에 들어오게 되어있어.'

루시온은 계획을 대거 수정했다.

'이참에 크로니아의 재정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려주는 기회로 삼지 뭐.'

"시, 십오만 델이 나왔습니다."

경매사마저 살짝 당황했다.

미엘라는 아예 울먹거릴 정도였다.

갑자기 가격이 미친 듯이 올라버렸다.

"십오만...."

"삼십만 델."

루시온은 테펠로우가 말하기 전에 가로챘다.

딱 두 배.

그 가격에 크라언마저 구겨지는 얼굴을 막지 못했다.

하멜이 주었던 돈에 꽤 근접한 상태였다.

[루, 루시온…? 너튼이 준 선물권 믿고 하는 거 맞지?]

말을 더듬으며 러쉘이 물었다.

'당연하지요.'

루시온이 씩 웃자 그제야 러쉘은 안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삼십만 델은 너무 큰 돈이 아닌가.

"…루시온?"

내내 가만히 있던 헤인트까지 루시온을 말릴 기세였다.

"육십만 델."

하지만 루시온은 신난 목소리로 한 번 더 불렀다.

테펠로우가 감히 언급도 못 하도록.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쓸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노비오에게 부탁하면 얼마든지 사용하라고 할 테지.

경매장이 조용해졌다.

물건 하나에 높은 금액이 매겨졌다.

탕.

경매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탕.

붉은 실이 더욱 팽팽해졌고.

탕!

마지막 망치질과 함께 붉은 실이 잘려나갔다.

서걱.

'아. 개운하네.'

루시온이 환하디환한 미소를 지었다.

'백만 델 정도는 부를 걸 그랬네.'

어차피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라면 조금 더 통 크게 해도 되지 않았을까, 괜스레 아쉬웠다.

[음…? 저놈, 분해하는 게 아니라 공포에 떨고 있어. 되게 수상한데?]

러쉘이 테펠로우에게 의문을 가지자 그렇지 않아도 테펠로우가 신경 쓰였던 루시온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붉은 실과 공포라. …그리고 베델까지.'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라 생각했다.

―루시온?

라타의 귀가 접힌 게 느껴졌다.

―미엘라가 엄청 화가 났나 봐. 금방 울 것만 같아.

'…아차.'

루시온은 라타의 말에 그제야 조직원을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곁눈질로 보자 처음 분위기와 달리 너무도 무거웠다.

임무에 실패한 탓이겠지.

"흄. 종이 좀 줘봐."

"알겠습니다."

흄이 내민 종이에 루시온은 가볍게 적고는 흄에게 내밀었다.

흄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빠르게 쪽지를 미엘라에게 넘겼다.

"...?"

하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미안한 마음에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던 미엘라가 쪽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물건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성스레 쓴 글씨에 미엘라가 흠칫 놀라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쉿.

루시온이 슬쩍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141화. 감히 내 물건을 노려?(2)

아무 일도 아니라는 반응에 미엘라는 마치 신을 만난 듯이 루시온을 보았다.

정말 성자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짜 받아도 되는지.

미엘라가 망설이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러고 보니 묘하게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하멜 님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랬는데.'

미엘라는 루시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옆에 있어서인지, 아닌지 몰라도 부담감이 사라지자 이상하게도 루시온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몰려왔다.

"저...."

"예, 영애."

"진짜 제가… 그래도 될까요?"

미엘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모르게 대화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런 사정이 있다면 당연히 주인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금액이 너무 크잖아요."

두 사람의 대화에 헤인트의 눈이 커졌다.

루시온이 언급한 주인이라는 말에 뭔가 사정이 보이나, 육십만 델을 주고 산 물건이 아닌가.

그걸 처음 본 영애에게 넘긴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

헤인트가 뒤늦게 너튼이 언급했던 '선물권'을 생각했다.

피식.

당돌한 루시온의 모습에 헤인트는 그만 실소를 내뱉었다.

루시온을 보면 볼수록 깊게 우려낸 차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첫 모습과 다른 맛을 뽐내며 입 안 전체를 감돌아 다시 맛보고 싶은 차처럼.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말이죠… 아. 다음 경매가 시작되네요."

루시온은 눈웃음을 지으며 앞을 가리켰다.

설명할 수 없을 때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말 돌리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