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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준비는 됐어, 크라언?"

루시온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물었다.

드디어 내일, 남부로 출발한다.

루시온은 침대에 기대 창문 너머로 달을 바라보았다.

사흘간 원인 모를 열병에 시달렸더니 그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배의 상처가 3일 만에 완전히 낫는 기적은 없었지만, 걸을 때 약간 아프고 거슬리는 정도로 회복이 되긴 했다.

<예. 라인트 용병단도 움직일 만큼 회복이 되었고, 세르티오 경매장에서 준 초대장도 흘리지 않게 품에 잘 넣어두었습니다.>

"초네스트 가에 만든다던 결계는 완성됐어?"

슈트라하고 헬론이 지금 초네스트 가에 가 있었다.

초네스트 가를 보호할 결계와 더불어 체프란 가를 연결하는 결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제 슈트라가 살려달라며 연락을 왔다.

혼자서 많은 결계를 담당하려 하니 죽을 맛이겠지.

<아뇨. 아직… 그, 아무래도 결계 술사가 슈트라 혼자이다 보니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크라언이 살짝 곤란한 목소리를 말하다 곧 못을 박았다.

<아. 하멜 님께 결계 술사를 구해달라는 말씀을 드린 건 절대 아닙니다.>

'일단 생각은 해 봐야겠네.'

만약에 조직이 소유한 장소가 더 늘어난다면 슈트라 혼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결계를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초네스트가 가진 땅들과 광산도 꽤 있어 체프란 사업장을 다시 가동하는 시간이 더 빨라질 듯합니다.>

크라언은 이어 루시온에게 보고했다.

사업장이 가동한다는 말은 곧 조직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자, 루시온 자신의 일방적 지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드디어.

"피터는?"

<아, 피터가 하멜 님께 전해 달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뭔데?"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 뭐든 하나는 건져올 줄 알았어.'

루시온이 만족스러웠다.

"알았으니까 개인 행동은 자제하라고 해."

루시온은 '죽기 싫으면'이라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나중에 피터를 만나서 직접 전달해야지.

<예. 다시금 전달하겠습니다.>

"남부에서 보자."

<....>

연락용 아이템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 잠시만요, 하멜 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경매장에는 가지 않아. 그런데 남부에 볼일이 있거든. 얘들 잘 데리고 와."

뚝.

루시온은 뒷말은 듣지 않고 연락용 아이템을 끊었다.

히히.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기다린 라타가 배시시 웃었다.

―이제 라타한테 줘. 라타가 가져다 놓을게.

"내가 가도 되는데? 손만 뻗으면 금방이야."

―아, 안 돼! 의사가 루시온이 막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

"이건 막 움직이는 게 아니야, 라타."

―라타가 할게. 라타가 할 수 있어!

라타는 간절하게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성장한 뒤로 라타는 또 달라졌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려고, 무언가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래."

루시온의 대답이 떨어지자 라타는 손잡이를 입으로 물고 빼냈다.

"라타."

―응. 말해봐.

"억지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라타는 할 수 있어서 말하는 거야.

라타가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래. 그럼 됐어."

루시온은 편안하게 누워 어둠으로 움직여 불을 껐다.

러쉘이 없어도 이제 누워서 불 끄는 건 금방이었다.

* * *

[…와아. 루시온 공.]

베델이 루시온을 이리저리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래도 반짝이던 얼굴이었지만,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꾸미니 사람이 달라져 보였다.

―그렇지? 루시온이 막 반짝거리지?

히히, 라타가 방긋 웃었다.

러쉘이 코를 오뚝하게 세우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제자의 칭찬은 곧 스승의 칭찬이나 마찬가지였다.

"…도련님."

시녀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울먹거리듯 목소리를 냈다.

"왜?"

루시온은 피곤한 얼굴로 자신을 부른 시녀를 바라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정말 완벽하신 도화지를 지니고 계십니다. 오늘 안색이 창백하신 게 분통할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마치 아가씨께서 떠나신 자리를 채워주는 듯해 저희는 너무 기쁩니다."

옆에 있던 시녀도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누님이 왜?"

루시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모습에 시녀들이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조금씩 흘렸다.

아무리 온순해졌어도 막내 도련님이 아닌가.

시녀들은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꾹 삼켰다.

"도련님."

"말하게."

"조금 더 다듬어도 되겠습니까?"

"다 했다며. 끝이라고 하지 않았나?"

루시온이 기겁하며 말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부터 준비했다. 이제 겨우 끝이 났나 싶더니 다시 또 시작한다니.

끔찍했다.

"조금 더 다듬으신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완벽해지실 겁니다."

자신을 보는 시녀의 시선 못지않게 베델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렇지. 시녀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응! 라타도 루시온이 더 반짝거렸으면 좋겠어.

"됐어."

루시온은 줄줄이 이어지는 말을 칼같이 끊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들이 아쉽다는 듯 루시온을 바라보았지만, 노크 소리가 나자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똑똑.

"루시온."

조심스레 열린 문틈 사이로 헤인트가 반가운 표정으로 루시온을 불렀다.

전혀 반갑지 않았지만, 루시온은 별수 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헤인트가 곧 시녀들을 의식해서는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폐하의 명령으로 루시온 크로니아 공을 호위하게 된 제8 기사단의 대장 헤인트 트리아입니다."

123화. 남부로 출발(2)

공적인 자리인 만큼 헤인트의 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빨리도 왔네.'

루시온은 구겨지려는 미간을 꽉 잡았다.

예상 여행 기간은 3주였다.

물론 변수가 있기에 4주 정도 여유를 두긴 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동안 헤인트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한숨이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예.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루시온은 헤인트를 보며 활짝 웃었다.

"부상은 괜찮아? 안색이… 좋지 않은데?"

헤인트가 한 발자국 다가가서는 작게 속삭였다.

화장으로 가렸어도 루시온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게 티가 났다.

"예. 괜찮습니다. 어제까지 치솟은 열 때문입니다."

루시온은 배에 두껍게 둘린 붕대를 의식하며 말했다.

실밥이 터질 만큼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

"주의하면서 호위할게."

헤인트는 뒤로 물러나 표정을 다잡고는 다시금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먼저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먼저 돌아가는 헤인트를 보며 제자리에 앉았다.

"새벽부터 고생했네."

시녀들을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그녀들이 자신의 방에서 물러가길 기다리다 풀어지는 긴장감과 함께 묵직하게 짓누르는 눈꺼풀에 꾸벅꾸벅 졸았다.

삑!

라타의 공 소리에 루시온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시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서는 발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나간 걸 확인해서야 루시온이 길게 하품을 하며 물었다.

"…스승님. 브로슨은 아직도 없습니까?"

[요새 코빼기도 안 보여. 또 흑마법사가 나타났거나 날 피해 다니는 거겠지.]

러쉘은 가볍게 혀를 찼다.

[루시온 공이 원한다면 내가 잡아 오겠다. 공의 어둠이 늘어난 만큼 나 역시 강해졌으니.]

손이 간지럽다는 듯 베델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니야. 다음에도 물어볼 수 있으니까. 지금은 내버려 둬."

브로슨 역시 검은 구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구슬을 지금 자신이 가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자리를 피한다면 어쩔 수 없지.

루시온은 구불구불 감기는 눈동자를 이겨보려 했지만, 다시금 감겨버렸다.

* * *

"…루시온."

카슨이 무거운 표정으로 마차를 타러 온 루시온을 불렀다.

거의 사흘 만에 카슨을 보았다.

방금 변경의 끝에서 돌아왔는지, 옷차림새가 카슨답지 않게 지저분해져 있었다.

"방금 돌아오신 겁니까?"

"배웅해야 하니 급히 왔다."

카슨의 시선이 잠깐 헤인트에게 향했다.

못 미덥다는 시선에도 헤인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친 곳은 어떻더냐? 지팡이라도 하나 짚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격렬하게만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건 또 모르지.]

러쉘이 슬쩍 말을 끼어들었다.

남부에 들리는 루시온의 공식적인 일정은 경매장 하나뿐이었지만, 비공식 일정은 가득했다.

"너에게… 또 변경의 끝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카슨은 바짝 마른 입술 너머로 목소리를 냈다.

자신이 어떻게든 그 흑마법사를 죽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흑마법사가 펼친 흑마법이 루시온에게 가질 않았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

루시온의 눈이 휘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다시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도… 말이더냐?"

카슨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다음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새롭게 들리는지.

"예. 혹시 가면 안 됩니까?"

"그럴 리가 있겠더냐. 네가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아니, 조금 위험한 날은 빼고 오렴."

푸핫.

루시온은 웃음을 흘렸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위험한 날만 빼고 가겠습니다."

카슨의 입꼬리가 그제야 천천히 올라갔다.

"고맙구나, 루시온."

루시온은 강해졌다.

그리고 과거를 이겨내고 있었다.

동생이 저렇게 힘을 내는데, 형으로서 루시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카슨은 헤인트를 살짝 사납게 바라보았다.

"내 동생 루시온을 제대로 지켜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그래. 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카슨이 헤인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강조했다.

"알았다니까. 한 번만 말해도 알아먹으니 적당히 해."

헤인트 역시 카슨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서는 짜증을 드러냈다.

하지만 카슨과 헤인트는 웃으며 자연스럽고, 사이좋게 악수를 하고 있어 가까이에 있는 루시온이 아니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다.

라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져서는 루시온의 바짓자락을 꼭 쥐었다.

―싸우는 거야?

[아니. 친해서 그러는 거니까, 놀랄 필요 없어.]

베델이 눈웃음을 지으며 라타를 쓰다듬었다.

"가주님."

기사들이 노비오를 보며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은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이 손을 떼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비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바로 루시온에게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루시온이 눈치챘을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자신을 안았다.

꽉 끌어안고 싶었지만, 혹여 상처가 터질까 노비오는 조심 또 조심하며 루시온을 토닥였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거라."

"예. 잘 갔다 오겠습니다."

"언제든 내가 네 방패가 되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루시온은 저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들과 그들을 고용한 귀족들, 그리고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징검다리까지 다 노비오가 박살을 내지 않았던가.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지은 채로 뒤로 물러나 노비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이 마차에 올랐고, 헤인트와 흄이 같이 올라탔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했다.

크로니아 저택이 멀어질 때쯤 헤인트가 말을 붙였다.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가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잠깐 눈을 붙여도 돼. 흄 너도."

"저는 괜찮습니다."

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뭐… 잘 지냈다고 보기에는...."

헤인트는 갑자기 새어 나온 한숨을 막지 못했다.

황실 기사단이자 어쩌면 흑마법사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는, 가르티오 뭰을 쫓기 위해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던 상황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얼마 만에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는지 모를 정도였다.

"요새 어떻습니까?"

루시온은 라타의 턱 밑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표정과 말투는 상냥했지만, 묘한 압박에 베델은 검을 닦던 손을 멈춰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뭘 말하는 거야?"

헤인트가 당황하며 물었다.

"아무도 제게 돌아가는 상황을 말씀해주지 않으십니다. 얼마 전 흑마법사에게 공격을 당한 후에야 뉴브라 왕국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고 절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소연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헤인트는 이상하게 입이 바짝 말랐다.

"형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못을 박는 말에 헤인트는 순간, 뱀에게 칭칭 감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뭘 하려고 슬슬 준비하는 거지?]

러쉘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응? 루시온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

기분 좋게 루시온의 손길을 받던 라타가 러쉘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그, 카슨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헤인트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그럼 형님께서 황실 기사로서 저와 관련된 일 중에 하고 계신 걸 알려주십시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루시온은 저택에 있는 유령으로부터 카슨과 통화 중 헤인트가 어떤 놈을 쫓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헤인트가 쫓는 게 공허의 손인지 아니면 다른 악역인지 알고 있어야 자신이 대비할 수 있기에 들어야 했다.

"…으음."

헤인트는 진지한 루시온의 시선에 말꼬리를 길게 늘이기 바빴다.

루시온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정작 루시온과 얽힌 일임에도 그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상황이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요새 쫓고 있는 놈이 있어."

그래서 헤인트는 두리뭉실하게나마 말을 꺼냈다.

"아직 덮치기 전이라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은 상태고."

헤인트는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루미노스 이외에 루시온을 쫓는 집단이 더 있고, 어쩌면 다른 집단까지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어떻게 루시온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루시온 네가 걱정할 만큼 큰 문제가 터진 것도 아니야."

헤인트는 좋게좋게 말을 흘리며 상황을 수습했다.

적이 정확하다면 헤인트도 루시온에게 알려줬겠지만, 불명확한 상황에 괜히 그가 사실을 알아 공황에 빠지지 않길 바랐다.

"잘됐습니다."

헤인트가 누굴 쫓는지 기어코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다소 아쉬웠지만, 루시온은 미소를 흘렸다.

"잘됐다니?"

"아버지께서도, 형님께서도 말씀을 해주지 않으셔서 큰 문제가 터졌으리라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이렇게 확실히 이야기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루시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와. 루시온 너....]

러쉘은 이제야 루시온이 뭘 하고자 했는지 눈치챘다.

헤인트가 내뱉은 말을 통째로 이용할 셈이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

"신수 탄생 연회에 참석하러 중부에 들린 게 제 첫 여행입니다."

루시온이 목소리를 내자 헤인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힘겹게 숨겼다.

첫 여행이라니.

"이렇게 두 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한편으로 불안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호위에 둘러싸여 저만의 시간도 갖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 형님 덕에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루시온은 행복함이 절절 흐르는 목소리로, 고마움이 깊게 자리 잡은 표정으로.

그리고 헤인트가 내뱉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루시온 자신이 제일 걱정했던 건 카슨과 다른, 헤인트의 밀착 호위였다.

이전에 변경으로 오면서 한 번 느끼지 않았던가.

하지만 헤인트가 직접 괜찮다고 하니 루시온은 그 말을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내가 도와주겠다, 루시온 공. 공이 이토록 여행을 기대하는 줄 몰랐어.]

베델은 안쓰러움을 숨기려 등 뒤로 숨긴 손을 꽉 쥐었다.

"제가 더 잘 모시겠습니다."

흄이 무겁던 입술을 떼어내 의지가 깊게 담긴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라타도 도와줄게!

러쉘만이 간지러운 입을 손으로 가리다 아예 얼굴만 마차 밖으로 내밀었다.

푸하하하.

하지만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하....'

헤인트는 정말 괜찮다면 자신의 시간을 달라는 루시온의 간접적인 요구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꼭 자신이 제 무덤을 판 것 같지 않은가.

'사실이긴 한데, 기분이 이상하네.'

마법사 집단이었던 루미노스 이외에 집단이 등장했을 뿐, 아직 루시온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 경계 단계가 생각보다 높진 않았다.

―루시온은 감이 좋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쓸데없는 감시를 붙여봤자 바로 들킬 테니 차라리 앞에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문득 카슨이 어제 연락용 아이템을 통해 꺼낸 말이 떠올랐다.

"루시온."

"말씀하십시오."

"만약에 조용히 움직여도 흄을 대동할 거지?"

헤인트는 일단 말을 던져두었다.

하지만 루시온에게 그렇게 들리진 않았다.

촘촘하게 짜인 헤인트의 호위에 구멍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성공했네.]

러쉘이 씩 웃었고, 루시온은 즐거움을 느끼며 입술을 떼었다.

"예. 물론입니다. 중부에서도 흄을 떼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흄이 목에 힘을 주며 루시온의 말에 힘을 실었다.

"좋아. 그럼 흄을 대동한다는 조건으로, 내가 있는 반경 30분 위치 정도까지는 참아볼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왜 30분입니까?"

"내가 움직이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렇게 빨리?'

빛이 마나와 어둠 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사실은 러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5분? 아무리 빛의 축복을 받은 이라도 그렇지 너무 빠르지 않은가?]

베델의 반응에 루시온은 알아차렸다.

헤인트의 저 발언은 사기에 가깝다는 걸.

루시온은 억울하다가 곧 헤인트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성물에 가까운, 빛이 깃든 물건을 얻지 못했을 텐데도 이 정도라니.

"솔직히 20분 거리 정도로 하려다 참았어. 그러니 더는 요구해도 미안하지만, 들어줄 수는 없어."

헤인트가 명확한 선을 그었고 루시온 역시 더 이상 요구할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이 정도만 얻어도 큰 수확이었다.

일단 헤인트를 떨쳐내고 움직일 시간을 얻은 셈이니.

씰룩거리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여유롭게 라타를 쓰다듬었다.

124화. 남부로 출발(3)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 없어. 일단 이거 받아."

헤인트가 피식 웃다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소형이었다.

[보자.]

러쉘이 바로 연락용 아이템을 확인했다.

[마법은 안 걸려 있어.]

그 말에 안심하며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챙겼다.

'위치 추적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줄 알았네.'

"혹시 혼자 움직일 때 나한테 미리 말해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로 연락만 해. 바로 달려갈게."

헤인트가 손가락으로 연락용 아이템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시온은 대답한 뒤, 혹시 몰라 마지막 안전띠까지 챙겼다.

"아,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될까요?"

"조심스러워하지 말고 뭐든 말해. 3주 동안 네가 불편하면 안 되니까."

"제가 잠자리가 좀 예민합니다."

"그건 카슨한테 들었어. 그 점도 고려해서 밤에는 네 주변으로 호위를 좀 물릴게."

'됐다!'

루시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로써 안전띠까지 확실해졌다.

남부에 도착하자마자 움직여야 하는데 시간도 절약되니 입꼬리가 당장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하지만 루시온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헤인트는 카슨과 다른 루시온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미소를 보였다.

꼬박꼬박 고맙다는 말도 할 줄 알고.

아무리 봐도 카슨과 닮은 건 얼굴뿐이었다.

"이제 눈 좀 붙여. 잠이 턱밑으로 내려왔네."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좀 힘이 듭니다."

"그래. 도착하면 깨워줄게."

헤인트는 눈을 감은 루시온을 보며 주변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직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헤인트의 눈동자가 곧 흄에게 향했다.

"너도 좀 쉬어."

"쉬고 있습니다."

말과 달리 흄은 루시온이 편히 잘 수 있게 당장 담요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모습에 헤인트는 피식하고 따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저 정도로 주인을 모시는 집사를 보지 못했기에 흄이 참 탐이 난다 싶었다.

* * *

남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있는 마을은 중부로 향하는 게이트가 있는 마을과 달랐다.

마차가 그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헤인트는 먼저 내려 일부 기사들을 데리고 마을을 둘러본다는 말을 남겼다.

―저기 봐, 루시온! 라타 눈에 게이트가 보여! 히히!

창문에 매달린 라타의 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라타는 있지, 또 게이트를 타고 싶었다? 어제 게이트를 타는 꿈을 꿨는데 이렇게 이뤄지다니! 믿을 수가 없어!

루시온 역시 새로운 마을에 호기심을 느꼈고, 헤인트까지 마차에 없어 무척 마음이 포근했다.

화르륵.

마차가 마을에 가까워질 무렵, 흄의 오른쪽 눈에 어둠의 불꽃이 일었다.

검은 구슬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였다.

흄이 깜짝 놀라고, 루시온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 흄?"

"예?"

"네가 꿈을 꿨다며. 손가락이 나와서 '남부'를 가리켰다고."

"예. 그랬습니다."

"검은 구슬을 가리키는 거였어."

인도자로서 딱 알맞은 꿈이 아니겠나.

검은 구슬이 총 몇 개가 있는지는 몰라도 루시온은 검은 형체가 지껄이던 말이 무척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자신을 부서진 그릇이라 불렀다.

그래서 검은 형체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며.

'다시 생각해도 기분 나쁘네.'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한 도구였다.

이 정도까지 들었으면 자신은 무언가를 위한 그릇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소설에 없는 내용.

아니, 완전히 새로운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에서 태어났으며 어둠을 따르는 종이 되었다.

검은 형체가 자신에게 흘렸던 그 말.

'그들이 누구야? 흑마법사인가?'

루시온은 '그들'이라는 말을 유추해보려고 해도 정보가 너무 없었다.

[검은 구슬이 뭔지 몰라도 이렇게 흔한 거였어?]

러쉘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처에 있는 줄 알았다면 나도 하나 가져볼 걸 그랬다. 진짜 아쉽네.]

[대가 없는 힘은 없어. 나는 개인적으로 찝찝해. 루시온 공은 괜찮은가? 정말 아무 대가 없이 검은 구슬이 공의 어둠을 늘려준다고 생각하는가?]

베델은 다시 등장한 검은 구슬의 등장에 꺼림칙한 반응을 했다.

"대가가 없진 않았지. 사흘간 앓아누웠잖아?"

네바스트 대신관이었던 에올이 자신의 몸에 빛을 넣어 흑마법사 여부를 확인하고 난 뒤에 앓았을 때보다 더 아팠다.

―맞아! 라타는 눈물을 꾹 참느라 힘들었어. 라타는 루시온이 아픈 게 싫어!

라타의 귀가 뒤로 접혔다.

[뭐, 검은 구슬 때문인지 배의 상처 때문이지 확실하진 않지만,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지.]

팔짱을 낀 러쉘 역시 부정적인 뉘앙스를 팍팍 드러냈다.

지금으로서 검은 구슬의 정보를 유추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브로슨이 가졌다던 검은 구슬이 온전했다는 사실로 봤을 때, 검은 구슬은 루시온에게만 반응했다는 점.

또 다른 하나는 어둠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는 점.

하지만 베델 말대로 부작용이 없는 힘은 없을 테니 검은 구슬 역시 그럴지도 몰랐다.

'다 검은 구슬을 싫어하네.'

루시온은 러쉘과 베델을 번갈아 바라보며 라타를 쓰다듬었다.

'뭐,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을 생각이 없었기에 루시온은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고 흄을 바라보았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의 시선에 바짝 긴장해서는 입술을 떼었다.

검은 구슬이 좋다, 좋지 않다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위험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흄은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루시온은 흄의 눈을 가리켰다.

"지금은 검은 구슬보다 흄의 눈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 눈에도 저렇게 보이는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 어둠의 불꽃은 흄이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니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러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생각해봤거든? 아무래도 현혹처럼 머리에 깃든 어둠이 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아니야. 그렇다는 건 외부에서 보인다는 뜻이겠지.]

"제가 가리겠습니다. 안대도 미리 준비했습니다."

흄이 품을 뒤적였다.

―라타가 해줄게. 라타가 할 수 있어.

웅크려 있던 라타가 다리를 쭉 뻗으며 제자리에 섰다.

"예. 저는 상관없습니다."

흄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라타가 하는 거 봐봐. 다들 잘 보고 있어야 해!

라타가 흄에게 뛰어 엉덩이를 흔들며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후.

마치 촛불을 끄듯 라타가 숨을 내뱉었다.

탓.

흄의 눈에 깃든 어둠의 불꽃이 사라졌다.

"…어?"

흄이 눈을 깜박거리고 베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루시온도, 러쉘도, 베델도 라타가 하는 거 봤지? 그렇지?

라타가 흄을 꽉 안으며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들었다.

"...?"

루시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는 몰라도 라타가 발동 중인 어둠을 취소시켜버렸다.

[와....]

러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과 함께 내뱉었다.

[발동 중인 어둠을 이렇게 막 쉽게 멈춘다고…?]

곧이어 허탈한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발동 중인 어둠을 멈추기 위해서는 상대의 어둠을 제압해야만 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루시온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라타가 발동 중인 어둠을 취소시켜버렸다.

비록 자신의 어둠이 1/5 정도 빠졌으나, 흑마법사에게 있어 아주 무서운 능력이 아닌가.

―이히히. 잘했지? 라타가 아침에 눈을 뜨니까 새로운 힘이 생긴 걸 알았다? 막 자랑하고 싶었는데 루시온이 아파서 라타가 꾹 참았어.

라타는 다시 루시온에게 뛰어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궁둥이를 깔고 앉았다.

어서 칭찬해달라는 바람이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어 루시온이 피식 웃었다.

"잘했어, 라타. 참느라 힘들었겠네."

루시온의 손길에 라타가 배시시 웃으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응! 라타가 해냈어!

목소리에 행복이 가득 묻어 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가까이 붙어야만 할 수 있는 거지? 설마 멀리서도 할 수 있다는 건 아니겠지?]

러쉘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엄. 라타가 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 라타가 해 보고 알려줄게.

"흄. 그럼, 이제 선은 안 보이는 거야?"

"아닙니다. 희미하나, 살짝 보입니다."

흄은 신기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모든 걸 빤히 지켜보던 베델이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라타. 혹시 다시 돌려놓을 수도 있나?]

―응! 라타가 할 수 있어.

라타는 '어흥' 울며 두 눈에 의지를 태웠다.

'어흥…?'

루시온은 뭔가 이상한 울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여우는 어떻게 우냐는 말이 많았지만, 어흥은 선을 넘은 것 같지 않은가.

'밖에서 그렇게 울면 안 된다고 말해줘야겠네.'

루시온의 고민이 살짝 깊어질 때쯤, 라타는 자세를 딱 잡고 혀를 살짝 내밀고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흄 주변으로 어둠이 모여들었다.

마치 철 가루가 자석에 붙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루시온은 자신의 어둠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어둠을 취소시키는 것보다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데 더 많은 어둠이 빠져나갔다.

화르륵.

흄의 눈에 다시금 어둠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짠! 라타가 해냈어!

라타가 베델을 보며 '에헴' 하고 소리를 내었다.

루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하는 러쉘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성장이 라타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 * *

마차가 멈췄다.

[주변이 소란스럽네.]

러쉘이 루시온을 슬쩍 살피며 말했다.

[미론스트 왕국의 문양을 한 마차가 있었어. 주변이 소란스러운 그 이유 때문일 거야.]

주변을 살피고 온 베델이 돌아오며 말했다.

미론스트 왕국은 테슬라 제국과 뉴브라 왕국, 그리고 바위지대 사이에 낀 왕국으로 규모는 제법 있으나, 위치 때문에 제국에게 도움을 받는 약소국이었다.

'미론스트 왕국이 무슨 일로 온 거지?'

루시온은 미론스트 왕국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그 외에 루시온 공의 조직원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다른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어.]

[우연치고 제법 신기하네.]

이어지는 베델의 말에 러쉘이 감탄하며 말했다.

'우연일 리가 있나.'

루시온은 이 만남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잠시 뒤에 푸른 실이든, 붉은 실이든 나타날 분위기였다.

똑똑.

헤인트가 마차 문을 두드리고 문을 살짝 열었다.

갑자기 붉은 실이 루시온을 휘감았다.

"혹시 문제가 생겼습니까?"

루시온이 물었다.

"문제는 아니고 미론스트 왕국의 사절단이 이 마을에 들린 모양이야."

'이럴 줄 알았다.'

루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생길 것만 같다고 예상하자마자 실이라니.

"그래. 내가 이 말을 꺼냈을 때, 예상했겠지만, 사절단의 대표가 널 보자고 하네. 부담스러운 건 아는데, 사절단의 대표가 일단 왕자거든."

"왕자요?"

"어떡할래? 만나기 싫으면 내가 잘 말해볼 테니 무리할 필요 없어."

"형님께서 곤란하잖습니까."

"곤란해봤자 시말서 몇 장 끄적이는 게 전부지."

헤인트가 키득거렸다.

"아버지 때문에 많이 적어봐서 1시간이면 다 적어."

"아닙니다. 형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짧게나마 허락하신다면 만나겠습니다."

약소국이긴 하나, 엄연한 왕국이었다.

또, 공허의 손에게 희생되는 왕국이기도 했다.

팅!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이참에 얼굴도장 찍어둬도 나쁘지 않겠고.

'신비주의로 가기로 했으니 만남은 짧아야지. 말도 아끼고.'

헤인트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게이트 작동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원치 않아도 만남이 짧을 수밖에 없겠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시온은 헤인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흄을 바라보았다.

"적당한 후드 하나만 줘봐, 흄."

"알겠습니다."

―라타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있을래.

루시온은 흄이 건넨 후드를 걸치고 먼저 헤인트의 도움을 받아 땅으로 내려왔다.

아직은 주목받을 시기가 아니기에 마차에 문양을 지웠고, 기사단이 워낙 흔히 다니는 터라 다행히도 주목은 받질 않았다.

루시온은 헤인트의 안내를 받아 그를 따라갔다.

[조직원들이야.]

베델의 말과 손짓에 루시온이 고개를 돌렸고, 아주 잠깐 크라언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크라언은 지나가는 사람1을 바라보듯, 아니 조금 더 루시온을 바라보다 미엘라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루시온 역시 크라언을 스치듯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미엘라와 퀘이트, 조직원들 그리고 라인트 용병단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경매장에서도 이렇게 해야 하기에 루시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 마차야."

헤인트가 멈추고 루시온이 마차로 걸어갈 때쯤, 흄이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도련님."

"왜?"

"옷이 구겨졌습니다."

루시온은 순간, 예전 대신전 때 썼던 암호임을 기억했다.

'…검은 구슬을 미론스트 왕국의 왕자가 가지고 있다고?'

125화. 손 좀 풀어보자

루시온은 흄의 손길을 받으며 감정을 급하게 다잡았다.

'이거 괜찮은 건가?'

자신이 흡수했던 검은 구슬은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허공에 떠올랐다.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싶어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했다.

'…일단 노랫소리는 안 들리는데.'

[검은 구슬을 왕자가 가지고 있고, 그 왕자 주변에는 죽음의 기사가 돌아다니고 있다니.]

러쉘이 기가 찬 듯이 웃었다.

'죽음의 기사가…?'

러쉘 덕에 못 본다는 걸 알아도 루시온의 시선이 자꾸만 러쉘의 시선 쪽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분명 모습을 감출 수 있음에도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는 걸 보니 참 이상하다. 마치 흑마법사에게 제 위치를 알리려는 것 같지 않은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베델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쁜 죽음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저 죽음의 기사는 못 꼬셔.]

러쉘은 루시온의 흔들리는 눈빛에 딱 잘라 말했다.

죽음의 기사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타락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제 모습을 가리지 않는 건 대개 죽음의 기사가 된, 목적 외에 어떠한 미련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눈치가 너무 빠르시네.'

못 꼬신다니.

루시온은 아쉬움을 느끼며 헤인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반갑습니다, 저하. 변경백의 막내아들인 루시온 크로니아라고 합니다."

루시온의 인사는 간단했다.

왕자라고 하나 약소국.

루시온은 귀족이나, 제국의 후작 위치에 선 변경백의 막내아들이었다.

제국의 황자마저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예. 반갑습니다, 성자. 내 부탁을 들어주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미론스트의 첫째인 브라키온 미론스트라고 합니다."

'첫째가 왔어?'

루시온은 놀란 감정을 속으로 숨겼다.

왕국이 무조건 세습을 하는 건 아니지만, 미론스트는 세습제였다.

다음 차기 왕이 제국을 방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검은 구슬이 있는 거 맞아? 튀어 오를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네?]

흄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기에 러쉘은 마차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번처럼 어둠이 말을 거는 일도 없어 더욱 의아했다.

[검은 구슬을 흡수한 뒤에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

베델 역시 검은 구슬이 나오면 어쩌나 경계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구슬은 여기에 있어. 라타는 알아. 라타가 가져올까?

라타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지만, 러쉘이 라타를 말렸다.

이 좁은 마차에서 라타가 튀어나온다면 분명 들킬 게 뻔했다.

[아니, 라타. 분명히 마법 주머니 속에 있을 테니 가져오는 건 힘들 거야.]

'어쨌든 저 왕자가 검은 구슬을 가진 건 분명하고. 베델이 말한 것처럼 검은 구슬을 흡수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도 그럴듯해.'

루시온은 생각하며 브라키온이 먼저 말을 걸길 기다렸다.

"갑작스러운 내 부탁에 부담스럽지는 않으셨습니까?"

브라키온은 긴장해서는 바짝 마른 입술을 떼어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저하."

"게이트 시간이 다 되어 가니 공을 오래 붙잡진 않겠습니다."

"예."

"이렇게… 공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브라키온은 머뭇거리다 기어코 입을 다물어버렸다.

굉장히 답답했으나, 루시온은 신비주의 컨셉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입을 다무는 데 신경 썼다.

"공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푸하하핫!]

루시온은 당황스러움에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고, 러쉘이 웃음을 터트렸다.

[흑마법사한테서 축복이라니. 저런 신기한 소리는 내 평생 처음이네!]

루시온이 말을 하지 않자 브라키온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내, 공에게 부담스러운 부탁을 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예. 알고 계시니 참 다행입니다."

루시온이 싱긋 웃었다.

이 세계에서 축복이라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정말로 마음을 다해야 하며, 어떤 효과라도 나타나야만 하는 강제성이 있는 말이라 신관들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뻔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혹시 축복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신관이 아닙니다."

루시온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공은 성자이질 않습니까?"

"신수께서 절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신수께서 공을 축복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발, 성자께서 축복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몇 마디 나눠보니 벌써 각이 나왔다.

저 미론스트 첫째 왕자는 거머리였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절대로 놔줄 기세가 아니기에 루시온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불쌍한 놈. 나는 흑마법사인데.'

자신의 축복에 어떤 힘이 없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벌써 훤했다.

"알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미론스트 왕국은 절대로 성자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누구를 축복하면 되겠습니까?"

방금까지 그렇게 좋아 날뛰던 브라키온이 갑자기 주저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자로서 축복의 일을 입 밖으로 발설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루시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브라키온이 무얼 요구할지 알고 있었다.

미론스트 왕국의 왕은 독살로 죽었다.

이 시작이 미론스트 왕국을 패망하게 한 지름길이자, 공허의 손이 미론스트 왕국을 장악하게 된 시작점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축복해줬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예상한 말이 브라키온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미론스트의 왕이 독살당한 경로는 '술'.

그는 술꾼이었지만, 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고 독술사의 마법이 섞여 독을 검사해도 나타나지 않았다.

루시온이 손을 들자 브라키온은 두 손을 꼭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루시온은 그대로 브라키온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루, 루시온 공? 그래도 되는가? 상대는 왕자야!]

베델이 당황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왕자의 머리에 손을 올려보겠어?'

루시온은 즐거웠다.

[에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왕자의 머리에 손을 올려보겠어?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

속을 훤히 뚫고 있는 듯 러쉘의 이어진 말에 루시온은 순간 뜨끔했지만, 엄숙한 표정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픔도, 근심도 모두 사라지고, 미론스트의 지배자이신 전하의 모든 것들이 행복해지길 축복합니다."

축복의 말이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브라키온은 이상하게 울컥했는지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루시온은 연거푸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난 뒤에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형님. 잠깐 시장을 좀 들려도 되겠습니까? 맛있는 걸 사주고 싶거든요."

루시온이 흄과 라타를 바라보며 씩 웃자 흄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헤인트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살폈다.

"그 정도는 괜찮아."

"혼자 가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루시온은 약속대로 흄을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베델."

루시온이 소리를 죽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듣고 있어.]

"죽음의 기사가 뭘 바라는지 듣고 와줘. 그 대가로 미론스트에 무슨 일이 있는지 들어야겠어."

[금방 다녀오지.]

베델이 자리를 이탈하자마자 러쉘이 물었다.

[뭘 하려고 그래?]

"얼마나 절박하면 저러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돕고, 그 대가로 검은 구슬을 받을 겁니다."

[하멜로서?]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온일 때와 하멜로서 접근하는 것 중 어디가 이득일까 잠깐 생각하다 후자가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귀족 루시온은 이미 위에 올라선 상태지만, 조직원인 하멜은 아니었다.

절박함.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감정이 아닌가.

'미론스트 왕이 죽으면 안 되고.'

미론스트 왕국에서 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뉴트라 왕국 때문에 보호 요청을 위해서였다.

제국의 입장에서 미론스트 왕국은 손을 뻗쳐오는 뉴트라 왕국을 막기 위한 방파제 역할이니 오랫동안 살아 있어야 했다.

루시온 역시 미론스트 왕국이 사라지질 않길 바랐고.

"스승님. 적당한 장소를 알아봐 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은 시장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러쉘에게 부탁했다.

* * *

"…하."

브라키온은 마른세수를 하며 루시온이 앉았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성자를 만나서 무슨 추한 말을 건넨 건지.

하지만 아버지가 무너진다면 미론스트 왕국이 무너지는 건 뻔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고민이 깊어 보입니다."

계속 그곳에 앉아 있던 것처럼 가면을 쓴 남자가 차분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브라키온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검은 무언가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었으니.

순간, 브라키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흑마법사였다.

"절박하다고 들었습니다."

흑마법사가 속삭였다.

대체 누구한테.

"아,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하를 해칠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브라키온은 손을 들어 귀를 막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 대화 자체가 흑마법사가 자신을 홀리려고 흑마법을 쓰는 중일지도 몰랐다.

"미론스트 전하께서 아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니, 이미 흑마법사에게 홀렸는지도 몰랐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브라키온은 손을 내렸다.

이상하게 귀에 쏙쏙 박히는 목소리였다.

"제가 흑마법사라서, 절 믿을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흑마법사가 신뢰와 믿음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웃기네요."

흑마법사가 피식 웃은 소리가 들렸다.

브라키온은 잠깐 생각하다 어둠을 가리켰다.

만약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진작 죽이지 않았을까.

루시온은 그제야 어둠을 거뒀다.

"…뭘 도와준다는 말인가?"

브라키온이 언짢은 목소리를 내었다.

"전 뉴브라 왕국을 증오합니다. 하여, 미론스트 왕국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

브라키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뉴브라 왕국에 홀린 멍청한 이들이 미론스트 왕국에 가득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픈 것도, 이 사실 역시 어떻게 알고 있는지.

"독입니다."

루시온은 이미 알고 있지만, 베델이 죽음의 기사를 통해 말해줬던 대로 미론스트 왕이 죽어가는 사실을 알려줬다.

다행히도 죽음의 기사가 원하는 건 브라키온을 도와달라는, 생각보다 간단한 부탁이었다.

"독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는가! 이미 수십 번이나 검사했다!"

브라키온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독을 왜 의심해보지 않았겠는가.

요리에서 쓰이는 물, 씻는데 사용되는 물, 마시는 물까지 죄다 조사했지만, 독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독이 맞습니다. 독술사의 독이죠. 하여, 술을 끊으십시오. 물이 아니라 술에 독이 있습니다."

"…술이라고 하였나?"

브라키온은 순간 우수수 올라오는 소름에 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닌가.

만약 이게 진짜라면 범인이 누구인지 바로 좁혀지는 셈이었다.

"이전처럼 술을 가져오되, 마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루시온은 브라키온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차피 지금 자신을 믿어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론스트 왕이 건강해진다면 말이 달라지겠지.

"전 하멜입니다. 그리고 조직 에일의 조직원이죠."

루시온은 조직을 언급했다.

다음에 검은 구슬을 찾아갈 때, 손쉽게 브라키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럼."

루시온은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사라져버렸다.

브라키온은 그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대는 흑마법사였다.

자신이 이미 홀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술을 끊어라'라는 말은 홀렸다기에 별 볼 일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무언가를 거창하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함정일까.'

브라키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

* * *

"…안 받으시네."

크라언이 연락용 아이템을 빤히 보자 미엘라는 푸짐하게 들린 음식들을 양손에 쥔 채로 물었다.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연락을 받지 않은 적이 없어서 걱정되네요."

"일단, 그것 좀 그만 내려놓고, 이거 받아줘요. 다 먹자고 하는 건데 잘 먹어야죠. 퀘이트 씨도요."

미엘라가 내미는 음식들을 크라언도, 퀘이트도 나눠 가졌다.

―어! 진짜 크라언하고, 미엘라하고, 퀘이트하고, 엄, 라인트다!

솜사탕을 먹고 신나게 붕붕 뛰다시피 걷던 라타가 조직원들을 보자 루시온에게 총총 뛰어왔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라고 해도 왜 이렇게 자주 만나?'

루시온은 징징 울리던 연락용 아이템을 구석에서 받으려고 하다 베델이 말려 하지 않았다.

"흄."

"예, 도련님."

흄이 입에 있던 음식을 꼴깍 삼킨 뒤에 대답했다.

"돌아가자."

구태여 조직원들과 만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나중에 경매장에서 만날 텐데.

[헤인트가 오는데?]

루시온이 등을 돌리기 전에 러쉘이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 터졌나? 되게 다급해 보이네.]

126화. 손 좀 풀어보자(2)

루시온은 모르는 척하며 헤인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루시온은 뒤를 바라보았다.

"루시온."

헤인트가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루시온…?'

요새 루시온이라는 이름은 너무도 유명하기에 퀘이트는 그 작은 소리에도 반응했다.

게다가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고.

퀘이트는 '루시온'이라고 불린 남자가 기사로 보이는 이를 따라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크라언이 가만히 서 있는 퀘이트를 살짝 건들며 물었다.

"루시온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루시온이라면, 그 성자 루시온을 말하는 거예요?"

미엘라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했습니다."

"익숙하다뇨?"

"글쎄요. 그저 느낌일 뿐이라 저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퀘이트는 멋쩍은 표정을 지어서는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만약에 퀘이트 씨가 들었던 루시온이라는 분이 성자라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연이라도 좋으니 한 번쯤 만나고 싶었거든요."

크라언이 설레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도 그래요. 성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면 얼마나 특별할까요? 꼭 만나서 하멜 님한테 자랑하고 싶어요."

미엘라 역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가볍게 쿡쿡 웃었다.

방금 자신이 봤던 사람도 만만찮다고 말하려다 퀘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만약 아니라면 어쩔 텐가.

괜히 기대를 망가트리고 싶진 않았다.

* * *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루시온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헤인트가 무척 신경 쓰였다.

[헤인트가 심각하게 굴 일은 없었어.]

방금 베델이 자신이 타고 온 마차 쪽을 살피고는 돌아왔다.

'그런데 왜 그래?'

루시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홉! 혹시 라타하고 흄하고 루시온 하고만 맛있는 걸 먹어서 그런 거 아니야?

옆에서 따라오던 라타가 움찔거렸다.

―이, 이럴 줄 알았으면 라타가 조금 덜 먹을 걸 그랬어.

이미 확정 지어버린 듯 라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러쉘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 게이트 작동 시간이 다 돼서 찾으러 왔어."

헤인트가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행동하더니,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표정을 바꾸었다.

"루시온."

"듣고 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닌데,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나타난 것 같아."

"...?"

루시온의 시선이 잠깐 러쉘에게 향했다.

[흑마법사가 숨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너 빼고 설치는 흑마법사는 못 봤어.]

러쉘은 베델을 바라보았다.

그녀야말로 흑마법사 탐지기에 가깝지 않은가.

[두 놈 정도 냄새가 났다. 하지만 루시온 공이 있는 위치와 멀었어. 헤인트가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지.]

베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쯤 되면 헤인트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흑마법사라고는 루시온 자신뿐이지 않은가.

"정확하지 않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루시온이 차분히 물었다.

"순전히 내 느낌이라서 그래. 내 내부에서 뭔가 반짝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

"반짝이라뇨?"

루시온은 태연하게 물었지만, 속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벌써 어둠을 추격하는 빛을 알아버린 건 아닐까.

"아. 그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쨌든, 네가 시장에 간 뒤에 얼마 가지 않아서 내 빛이 아주 잠깐 반응했어."

제 꼬리를 잡으려 빙글빙글 돌던 라타가 순간 움찔거렸다.

라타는 다시 조심스레 자신의 꼬리를 잡으며 루시온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동시에 러쉘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방향은 미론스트 왕자 저하께서 계신 마차 안이었고."

'…빌어먹을.'

이어지는 헤인트의 말에 루시온은 안쪽 볼을 세게 씹었다.

중후반 가야 익히는 그 기술이 슬금슬금 새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빛이 깃든 물건을 저하께서 지니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형님께서 제가 지닌 그 팔찌도 알아맞혔잖습니까."

루시온은 자연스레 대화를 유도했다.

네가 착각한 거라고.

"…흠. 내가 예민했나?"

헤인트는 루시온의 말을 마냥 흘려듣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온에게도 자신의 빛이 계속 반응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확실히 어둠과 빛의 반응이 비슷한 편이라 헷갈리는 건 사실이야. 딱 종이 한 장 차이거든. 내가 신관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렵네."

'그래. 그렇게 헷갈려라. 아직은 익히지 말라고.'

루시온은 몇 번이고 빌었다.

"미안하… 루시온."

"예?"

"혹시 빛이 깃든 물건이 하나 더 늘어났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시온이 눈을 깜박거렸다.

"이전보다 내 빛이 더 강하게 반응하고 있거든."

헤인트의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선물을… 또 받았거든요."

"사전에 검사했을 텐데?"

헤인트는 곧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아꼈다.

루시온의 친우라면 텔라 영애를 말하는 것일 텐데, 괜한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헤인트는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형님. 그만큼 제 호위를 열심히 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너한테 고마운 게 많으니까. 그리고 내 일이기도 하고."

헤인트는 그제야 굳어진 얼굴을 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위이이잉!

게이트가 가동되는 소리와 함께 멈췄던 마차가 출발했다.

* * *

"…하."

루시온은 침대에 누웠다.

무슨 냄새인지 몰라도 제법 괜찮은 향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당장 눈을 감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루시온.]

루시온이 몸을 일으킬 때쯤, 러쉘이 목소리를 꺼냈다.

"예."

[헤인트를 더 조심해야겠는데? 이전보다 더 예민해졌어.]

"그렇지 않아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형님이 실수로 그 말을 꺼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검은 구슬로 어둠이 더 늘어난 상태죠."

[어둠이 늘어났다고 네가 성장한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늘어난 건 네 어둠이지.]

러쉘이 사실을 꼬집자 루시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 제가 더 어둠을 잘 다뤄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루시온!

방을 구경한다던 라타가 헐레벌떡 뛰어와 얼굴을 바닥에 묻었다.

"왜 그래, 라타?"

―아까는 라타가 실수했어!

"실수라니?"

―그게, 음, 루시온의 어둠이 좀 달라져서. 그래서 라타가 당황해서 실수했어.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러쉘은 그제야 퀴즈의 답을 안듯이 속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라타가 더 빨리 말했어야 했는데. 라타가 너무 깜짝 놀라서, 루시온한테 혼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라타가 입을 다물었어.

라타는 고개를 파묻은 상태로 훌쩍였다.

베델은 그 모습에 손으로 입가를 가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내려 고개까지 돌려버렸다.

너무 귀엽지 않은가.

'…어둠이 달라졌다고?'

루시온은 라타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했다.

슬쩍 어둠을 내보이자 여전히 검은빛을 내었다.

뭐가 달라졌다는 거지?

"라타."

루시온이 부르자 라타가 슬쩍 고개를 들어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눈꼬리와 귀가 축 처져서는 근처에 있던 공을 물어 '삑삑' 소리를 내며 힘없이 루시온 앞에 놓았다.

―라타가 아끼는 거 줄게. …미안해.

"공 안 줘도 돼. 화도 안 났고."

루시온이 손가락을 들어 라타를 살짝 찔러보지만, 움찔거릴 뿐 반응이 없었다.

별수 없이 루시온은 라타를 간질거렸다.

―라타는 지금, 히히, 반성 중이야.

"반성 그만해도 돼. 화도 안 났다니까."

루시온이 손을 떼자 라타는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닥에 받고는 훌쩍였다.

―아니야. 라타가 나빴어. 루시온이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걸 알아. 라타는 반성해, 히히, 그만해, 루시온.

루시온은 사탕을 꺼냈다.

빛의 내성을 키우기 위해 빛을 사용하면 그 부작용으로 피를 토했다.

입가심 겸용으로 사탕을 들고 다녔기에 다양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홉.

어쩌다 꺼낸 게 라타가 제일 좋아하는 레몬 사탕이자 라타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바로 달려들지 않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반성도 적당히 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라타?

루시온의 물음에 라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내일 이어서 할게.

[푸하하핫! 반성을 내일 이어서 한다고?]

기어코 러쉘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라타 눈에는 레몬 사탕밖에 보이질 않았다.

"라타. 내 어둠이 달라졌다는 게 무슨 말이야?"

―으응. 어둠이 무거워졌어. 라타하고, 루시온하고 차별하는 것 같아.

사탕을 받은 라타는 오물거리며 말했다.

금세 별을 박은 듯 라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차별이라고?"

루시온은 순간, 억울하다는 듯 요동치는 자신의 어둠에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

자신의 말에 어둠이 얌전해졌다.

확실히 뭔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루시온은 어둠을 꺼내 지그시 바라보자 마치 자신에게 안기듯 다가왔다.

"…얘, 왜 이러는 겁니까? 검은 구슬 때문입니까?"

어둠이 말을 잘 듣기는 했지만, 막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루시온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런 것 같은데? 이렇게까지 널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뭐, 어쨌든 좋은 현상이네.]

"어둠을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어둠이 통제를 잘 따른다는 건 제어가 더 잘된다는 소리이니, 결국 흑마법의 질도 따라서 높아지겠지.]

말과 달리 러쉘은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검은 구슬이라는 정체 모를 물건이 찝찝했다.

만약 저게 루시온에게 해를 끼친다면 어떡할 텐가.

가뜩이나 루시온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내가 섣불렀나.'

러쉘은 요새 수없이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걱정과 후회에 시달렸다.

"베델."

루시온은 그새 공을 가지고 노는 라타를 바라보며 베델을 불렀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루시온의 표정이 환했기에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 루시온 공.]

"3번 보고 지점으로 가줘."

크로니아에 스파이를 심어 루시온 자신의 정보를 캐내어 이를 보고하는 지점이 총 4개가 있었다.

그중 2번 보고 지점까지는 박살 냈으니 나머지도 겸사겸사 부숴버릴 셈이었다.

[지금 간다는 말인가? 지금?]

베델의 시선이 잠깐 루시온의 배 쪽으로 향했다.

부상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여행이 아무리 짧았어도 평소보다 몸에 무리가 갈 테고.

[잠깐 실례.]

베델은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열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공이 검은 구슬을 얻은 뒤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굳이 오늘 가야 하는가?]

베델이 꺼낸 말대로 루시온은 자신의 몸이 이전하고 다름을 느꼈다.

무거웠다.

아마도 검은 구슬의 힘을 아직 덜 흡수한 게 아닐까 싶었다.

"오늘 가야 해. 몸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까 싶은 것도 있고. 뉴브라에서 보낸 놈들이 날 어떻게 요리해볼까 즐거워하면서 방심하고 있을 테니 뒤통수는 내가 먼저 때리려고."

루시온은 즐거워하며 연락용 아이템을 내보였다.

아마 조직원들도 지금쯤이면 남부에 도착했을 테지.

"아, 갈 때가 하나 더 있어."

[또 간다고?]

러쉘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예. 남부에 있는 지부 하나를 손에 넣어야죠. 여기는 조직원들과 함께 움직일 겁니다."

루시온의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밤은 길었다.

꼴 보기도 싫은 것들을 다 치우고 정말 여행 온 기분을 즐기고 싶었다.

러쉘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말대로 뒤통수를 때릴 좋은 기회이긴 한데, 그렇게 쫓기는 기분으로 하지 않아도 되잖아?]

"쫓기는 기분으로 임하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델. 부탁할게."

재차 이어진 루시온의 부탁에 베델은 차마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그를 위해 해주고 싶었다.

[알겠다. 금방 신호를 보내지.]

베델은 머뭇거리다 자리를 떠났다.

"아, 스승님께서는 유령 한 명만 잡아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러쉘을 보는 루시온의 눈빛은 한없이 맑았다.

127화. 손 좀 풀어보자(3)

[이제 나를 시키는 게 아주 자연스럽네.]

러쉘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루시온의 미소가 길어졌다.

"기분 탓입니다. 베델이 자리를 비웠으니 부탁드릴 사람이 스승님밖에 없잖습니까."

[말이라도 잘해서 다행이네.]

"예. 말이라도 잘한다니 다행입니다."

러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감시용이야? 아니면 돌아올 때를 위해서야?]

"둘 다입니다."

루시온은 대답 후에 품에서 가면을 꺼내 썼다.

라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이제 움직이는 거야? 라타는 준비하고 있으면 돼?

"아니, 아직 더 놀고 있어. 크라언에게 준비해놓으라고 연락은 줘야지."

―그럼 라타가 흄한테 가서 알려줄게! 그래도 괜찮지?

"그래. 문 열어줄까?"

루시온이 어둠을 꺼내려 하자 라타는 앞발 하나를 들어서는 루시온이 볼 수 있게 흔들어 보였다.

―아니. 라타가 할 수 있어. 라타는 성장했으니까!

루시온은 순간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타는 문으로 가 성큼 뛰어올라 손잡이에 매달렸다.

동시에 몸을 흔들자 문이 열렸다.

―짠! 라타가 금방 갔다 올게!

라타는 꼬리를 동력 삼아 신나게 달렸다.

―아. 닫는 걸 잊으면 안 돼. 라타야, 정신 차려.

탁.

마무리까지 완벽하자 루시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가면을 썼다.

[루시온.]

"예."

막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하려던 루시온이 손을 멈췄다.

'기억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려나?'

일부러 티를 내지 않아도 러쉘이 기억을 잃은 사실이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검은 구슬을 얻고 혹시 환청이든 환상이든 뭔가 보지 않았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브로슨이 검은 구슬을 가지고 있다며?]

"예. 맞습니다."

[미론스트 왕국의 왕자도 검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이제 구슬이 너한테만 반응한다는 건 거의 확실해진 셈이잖아?]

러쉘은 모든 걸 떠나서 그 사실 하나가 몹시 이상했다.

왜 루시온에게만 반응하는 건지.

루시온은 가면을 벗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검은 구슬이 절 성장시킨 것과 별개로 저도 그게 알고 싶습니다."

소설 속에 없는 부분.

자신에게만 반응하는 검은 구슬.

자신을 부서진 그릇이라 말하는 이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꺼내 볼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 루시온은 이 모든 사실을 다시 깊게 묻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러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전이 없으십니까?"

[어. 죽을 맛이다.]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가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크라언."

루시온은 연락용 아이템을 사용하며 목소리를 냈다.

<예! 하멜 님!>

크라언이 몹시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1시간 뒤에 지부에 갈 테니 준비해."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저, 하멜 님.>

"왜?"

<아까 연락을 받지 않으셨는데 혹시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아. 잠깐 볼일이 있어서."

<....>

갑자기 크라언이 말이 없어졌다.

"왜 그래?"

<힘드셨지 않으십니까?>

"나중에 보자."

뚝.

루시온은 또 이상한 말을 시작하는 크라언의 행동에 연락용 아이템을 끊어버렸다.

가면을 벗은 루시온은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연락용 아이템을 바라보았지만, 곧 러쉘이 잡아 온 유령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단숨에 유령의 머리를 쥐어서는 어둠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내게 복종하겠느냐."

* * *

* * *

샤아아.

어느 집 거실 한복판에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보다 휘날리는 어둠이 줄었지만, 티가 나는 건 여전했다.

―라타는 이번에 더 힘냈어. 어둠도 이번에는 라타 말을 잘 들어줬고. 어땠어?

[훨씬 좋네.]

-후후. 라타는 성장했어!

루시온은 라타와 러쉘의 말을 들으며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어둠을 보내 집 안을 에워쌌다.

[오! 훈련의 성과가 보이네. 이전과 비교하면 0.5초 더 빨라졌어.]

러쉘은 집 안을 매운 루시온의 어둠을 보며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한 사람은 없다는 걸 확인했다.]

베델이 루시온의 옆으로 다가와 상황을 알려주었다.

'딱 좋네.'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2번 보고 지점 박살 후 1주일 넘게 지났음에도 3번 보고 지점에 여전히 사람이 바글거리는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다.

"흑, 흑마법사다!"

뒤늦게 소리치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흑마법사야."

이곳에 알고 싶은 것과 알아야 하는 건 더는 없었다.

콰앙!

흄이 내지르는 주먹에 정확히 사람이 날아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만약 루시온 자신이 둘린 어둠이 없었다면 벽에 꽂혔겠지.

루시온은 흄의 뒤에서 하품하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주워갈 게 있을 수도 있었다.

[루시온 공.]

베델이 가장 뒤쪽에 서 있는 한 남자 뒤에 서서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놈이 서류를 들고 있다.]

루시온의 시선이 놈에게 향했다.

탁탁.

급하게 무언가를 태우려는 듯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온은 어둠을 뻗어 사람들 사이로 이동시키며 놈의 손에 들린 마법 아이템과 종이를 갈취하듯 빼앗았다.

"당장 빼앗아!"

종이를 빼앗긴 남자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루시온은 차분히 글을 읽어나갔다.

―루시온 크로니아가 곧 남부에 도착할 예정이다. 지원은 지부에 마련되어 있으니 속히 팀을 꾸려 미행하도록.

'어제저녁이든, 오늘 아침이든 최근에 받은 편지네.'

루시온은 베델을 바라보며 밝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마워. 덕분에 좋은 증거 하나를 찾았어."

자신에게는 흄이 있었다.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어제오늘 자신의 근처에 있을 수 있는 이들은 뻔했다.

크로니아의 기사들과 시종들.

그리고 황실 기사단.

이미 스파이들을 다 처리했던 크로니아를 제외하면 누가 남겠는가.

'…황실 기사단에도 문제가 많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베델이 눈웃음을 짓다 소리가 멈춘 걸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정리가 됐네.]

"끝났습니다, 도련님."

흄은 신발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에 루시온에게 다가갔다.

―후후. 이제 라타가 움직일 차례야.

라타가 그림자 밖으로 나와 배시시 웃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라타가 시체에서 유령을 불러낼 때쯤, 흄이 루시온의 가면을 벗겨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역시 열이 있으십니다. 해열제 하나를 드시겠습니까?"

"그래."

루시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으십니까? …요새 내내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흄이 걱정을 담아 물었다.

"힘을 얻는데 어떻게 대가가 없을 수가 있겠어?"

루시온은 태연한 목소리로 흄이 내미는 해열제를 먹고 다시 가면을 썼다.

"여기에 베인 냄새를 기억해줘."

루시온이 종이를 내밀자마자 흄이 멈칫거리더니 망설이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황실 기사단 중 이 냄새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범인이 황실 기사단이라는 걸 파악하자 루시온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제는 황실 기사단이라고? 아주 골고루 해 먹네.]

러쉘은 기가 찬 목소리를 내뱉으며 몇 번이고 헛웃음을 쏟아냈다.

"냄새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어?"

"예. 도련님께 도움이 될까, 냄새를 죄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황스러움이 섞인 루시온의 목소리에 흄은 자랑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순박한 미소였다.

"기왕이면 필체도 같았으면 하는데."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 * *

"오셨습니까?"

퀘이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시온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의 몸에 둘린 검은 연기가 사라졌다.

"예. 늦진 않았겠지요?"

"예상보다 더 빨리 오셨습니다."

남부에 있는, 뉴브라가 만든 지부는 총 6개. 그중 하나에 도착했다.

루시온은 무기점으로 위장한 지부를 바라보았다.

"안은 어떻습니까?"

퀘이트를 따라가며 물었다.

"지하에 있다던 장소의 위치까지 확인했습니다."

"예. 거기까지는 이미 헤로안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헤로안이 알아낸 건 그들을 협박할 수 있는 것과 내부 안에 어떤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였다.

내부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알아보는 건 퀘이트가 할 일이었다.

"그리고요?"

루시온이 퀘이트를 떠보듯 물었다.

묘한 압박감에 퀘이트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그냥 물어본 거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시온은 자신의 목소리가 사나웠음을 알아채고는 가볍게 웃었다.

"그 이상은… 시간이 되질 않아 알아보질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지하 장소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뒤따라가겠습니다."

루시온은 퀘이트를 먼저 보냈다.

정보를 얻지 못한 건 퀘이트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대로 시간이 촉박했다.

[한 놈 잡아 오면 되지?]

러쉘의 물음에 루시온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방금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서 다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럼 나는 지하를 둘러보고 올게.]

"가볍게 보고 와. 자세한 건 이 주변이 사는 유령들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루시온은 착착 움직이는 러쉘과 베델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지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6개의 지부는 조직과 상관없는, 오로지 자신과 피터의 일이었지만, 조직원들을 끌어들였다.

개인적인 일을 떠나 이번 일이 조직의 성장에 반드시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한 나라에 뿌리를 박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직은 서둘러 커야 하며 동시에 튼튼하기까지 해야 했기에 이미 뿌리를 잡은 이들을 거둬들이는 방법뿐이었다.

그 조건을 만족하는 건 지금으로서 6개의 지부뿐이었다.

지금까지 제국이 눈치채지 못했고, 더불어 뉴브라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장소가 아닌가.

당연히 손에 넣어야지.

'…그리고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하고.'

루시온은 숨을 골랐다.

열 때문에 숨이 뜨거웠다.

―루시온?

루시온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라타가 그림자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아파?

"아니. 괜찮아."

열 때문에 몸이 무거운 것과 별개로 정신은 또렷했다.

[잡아 왔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러쉘의 손아귀에 유령이 붙잡혀 있었다.

루시온은 곧바로 유령의 머리를 쥐었다.

떨림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게 복종하겠느냐."

―내게 복종하겠느냐!

유령에게 어둠을 불어넣자 신이 난 라타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 * *

"오셨습니까, 하멜 씨."

크라언이 씩 웃었고, 피터는 루시온을 보자마자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안절부절못했다.

루시온은 피터에게 시선을 돌리자 당혹감에 몸이 살짝 뻣뻣해졌다.

그의 목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돌돌 감겨 있었다.

[추격용 흑마법이네. 저 흑마법이 발동된다는 말은 근처에 흑마법사가 복종시킨 유령이 있나 본데? 아. 저기에 있네.]

러쉘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피터 근처에 유령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시온은 가면을 쓰고 있기에 자연스레 유령을 보았다.

흑마법사에게 복종하였음을 알리는 표식이 얼굴에 찍혀 있었다.

"예. 제가 늦었네요. 아, 반갑습니다, 라인트 씨."

루시온은 당혹감을 누르며 크라언에 이어 주변을 호위처럼 지키고 있는 라인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번 제 무례함을 다시금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라인트는 루시온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괜찮습니다. 그때는 상황상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몸은 어떠십니까?"

앞으로 조직의 주력이 될 사람이라 생각하니 루시온은 라인트가 참 마음에 들었다.

"몸은 크라언 님께서 신관님께 부탁드려 이제 괜찮습니다."

"적응하기 힘들지 않으십니까?"

루시온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 일단, 적응하고 있습니다. 분명 조직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느낌이 들더군요."

"헤로안 씨는 이해해주십시오. 원래 그렇습니다."

루시온은 누가 제일 라인트를 괴롭힐지 생각하니 단번에 헤로안이 떠올랐다.

라인트가 착용한 안대가 묘하게 눈에 띄었으니.

풉.

분명 퀘이트의 목소리거늘, 그의 표정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퀘이트가 웃었어. 오오오.

라타가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라인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피해자가 많아서요. 아마 가장 힘든 분은 퀘이트 씨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시온은 퀘이트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래도 제대로 적응할 겁니다. 그분하고 잘 어울릴 거고요."

라인트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물론, 오늘 일도 제대로 해낼 겁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요."

마치 열정과 의지가 라인트의 눈동자에 새겨져 있는 듯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말이 루시온 입 안에만 남았다.

"예. 힘내십시오."

루시온은 내내 자신을 의식하던 피터에게 다가갔다.

"따라와."

적당한 장소로 가서는 루시온은 일단 피터에게 연락용 아이템부터 넘겼다.

"받아."

피터는 말없이 연락용 아이템을 주머니에 넣었다.

"할 말이 있다며? 잠깐 시간 있으니까, 해 봐."

루시온이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피터 주변에 있는 유령은 그다음에 처리해야 할 놈이었다.

128화. 거절하기엔 너무 많았다

"죄송합니다."

피터는 머리부터 숙였다.

"제가 조직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복수심만 불태웠습니다."

"그렇지. 말 하나는 잘하네."

루시온은 빈정거렸다.

"아니면 일단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나?"

"추격자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조직에 폐가 될까, 또 동생이 저주에 걸릴까 봐, 그래서 더는 저를 추격하지 못하게 저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소용없는 짓을 했네."

"…예?"

"왜 다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살벌한 루시온의 목소리에 피터는 괜스레 마른 침을 삼켰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뭐가 끝입니까?"

"간단히 말해주지. 네 계획은 실패야, 피터. 나에게 말했으면 내가 도와줬을 텐데."

추격자 한 명을 쫓겠다고, 역으로 추격자를 더 붙인 꼴이 되었다.

피터 목에 추격용 흑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가.

"일단,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부터 해 봐."

루시온은 피터를 재촉했다.

"부엉이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물음에 루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부엉이는 뉴브라 왕국이 만든, 가장 중심인 개미굴을 포함해 6개 지부를 모두 관리하는 자가 아닌가.

손등에 십자 흉터.

검은 새끼손톱.

그게 부엉이를 가리키는 힌트였다.

"동부에 열리는 큰 연회에 부엉이가 참석할 거라고 합니다."

"동부에 열리는 큰 연회…?"

루시온은 초대장을 기억했다.

동부에 열리는 큰 연회 중 자신에게 온 초대장은 3장.

자신 때문에 동부 귀족들이 급히 모여 만든 전형적인 귀족 연회 2개.

그리고 신전과 일부 동부 귀족들이 함께 개최한, 죽음의 바다 정화 기원 축제.

그 이외에 다른 연회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초대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곳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연회인지는 모르고?"

"제가 얻은 정보로는, 중요한 연회에 부엉이가 참여할 테니 준비하라는 통보식의 쪽지가 고작입니다."

"그 쪽지, 아직도 가지고 있어?"

"아뇨. 마법이 깃든 종이라 타버렸습니다."

'아쉽네.'

만약 가지고 있다면 흄이 그 냄새를 기억했을 텐데.

루시온은 시선을 옮겨 피터의 근처에 있는 유령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걸 처리해볼까.'

루시온은 어둠을 꺼내자마자 유령의 얼굴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팟!

동시에 러쉘의 눈이 커졌다.

루시온이 갑자기 유령을 왜 기절시키겠는가.

[잠깐만 루시온…! 지금 역추적을 쓴다고?]

러쉘이 기겁했지만, 루시온은 어둠을 날카롭게 만들어 가슴에 찔러넣은 후였다.

러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중에 좀 더 괜찮은 추격 흑마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험성이 큰 역추적을 또 이용하다니.

유령이 보일 리가 없는 피터는 눈을 크게 뜬 상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라타가 유지하고 있으니까, 루시온은 진짜 어둠을 찾는 데 집중해!

루시온은 갑자기 문득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전에 역추적을 사용했을 때, 피터의 마법에 처맞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피터를 위해 다시 역추적을 사용하고 있다니.

루시온은 이전과 달리 유령 속에 숨은 진짜 어둠을 손쉽게 찾아냈다.

어둠을 손에 쥐자 눈앞에 영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테슬라 제국 내, 동부였다.

루시온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장소의 정보에 깜짝 놀랐다.

'…마탑이라고?'

순간, 누군가와 눈을 마주했다.

노란 안경을 쓰고 새하얀 수염을 가진 자.

푸른 실이 루시온을 휘감았다.

'…미친. 무슨 역추적만 쓰면 푸른 실이 감겨버리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푸른 실이라니.

[루시온! 또, 방어 마법이다!]

러쉘은 루시온 주변으로 그려지는 알 수 없는 글자에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글자는 이전처럼 형상을 이루고 루시온을 향해 혀를 내미는 목이 여러 개가 달린 뱀이 되었다.

흄이 루시온 앞에 서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제가 막습니다."

"아니, 두 분 다 물러나십시오."

피터가 검지와 엄지를 펼쳐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푸른색에 휘감긴 글자가 흄 앞에 나타나더니 스르르 막이 펼쳐졌다.

파아아앙!

"무, 무슨 일입니까!"

크라언이 소리에 놀라며 뛰어왔다.

하지만 제일 먼저 도착한 건 퀘이트였다.

그가 주변을 살폈고, 라인트는 냄새를 맡듯 코를 킁킁거렸다.

"방어 마법끼리 충돌했습니다."

연기가 가시자 방어막 안에 노랗게 물든 루시온의 가면이 보였다.

'캬. 좋다. 아주 든든하네.'

피터의 방어 마법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적의 방어 마법이 머리가 여러 개 달린 뱀이 되었을지라도 피터의 마법 앞에서 소용없었다.

피터를 살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멜…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크라언이 재차 묻자 루시온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별거 아니었습니다. 피터 뒤에 뭐가 붙어 있어서 떼줬을 뿐입니다."

뒤에 뭐가 붙었다는 건가.

갑자기 주변이 싸해지자 퀘이트가 조금씩 몸을 떨었다.

"…추격이 붙은 겁니까?"

그제야 피터가 놀라며 물었다.

"그래. 이제 떼어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다음부터."

피터가 마른 침을 삼켰다.

"다음부터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야. 네 목숨은 하나니까."

루시온은 바로 지부 쪽으로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다고 해도 소란이 일어났으니 움직임이 있을 테지.

"일단 다시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루시온의 제안에 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단… 제가 그림을 못 그리는 편입니다."

루시온은 퀘이트가 내민 커다란 종이를 보자 부담감에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미리 실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 그랬어?]

뭘 하나 잡았다는 듯 러쉘이 실실 웃었다.

―괜찮아! 흄이 읽어준 책에서 다 못해도 돈이 많으면 괜찮대. 루시온은 돈이 어엄처엉 많잖아? 그러니 괜찮아!

'…흄. 대체 라타한테 무슨 책을 읽어주는 거야?'

이상했지만, 어쨌든 라타의 위로에도 루시온은 살짝 자존심이 뭉개지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귀족 자제라고 해서 모든 걸 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제가 그리겠습니다."

흄이 손을 내밀며 루시온에게 펜을 요구했다.

"…그릴 줄 알아?"

"하멜 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 공부했습니다."

'설마, 안 잘 때 공부를 하는 거야…?'

쉬어야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흄이 아닌가.

루시온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조금 전에 지배한 23번 유령을 보았다.

"지하는 총 4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루시온이 말을 하면 흄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핵심은 3층에 있습니다. 지부장 역시 그곳에 있고요."

흄이 3층에 별을 그렸다.

"대개 제일 밑층에 중요한 게 있지만, 이곳에는 자폭을 위해 마법 폭탄이 심겨 있습니다."

루시온은 라인트를 보았다.

"알다시피 조직 내 마법사는 라인트 씨와 용병단원뿐입니다. 마법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겠고요."

루시온의 시선이 피터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피터는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모르니 라인트 용병단과 함께 움직여, 피터."

"저는 하멜 님을 지켜드리...."

"피터. 어디가 더 위험한지 모르겠어?"

"아닙니다. 라인트 용병단과 합류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억지로 등에 떠밀리듯 피터는 라인트를 보며 인사했다.

"설마하니 마방사이실 줄이야.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든든하네요."

라인트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피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하멜 씨 역시 마법사가 아닙니까?"

크라언이 문득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쩍 목소리를 냈다.

"저는 흑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는 이름이 들어가긴 하지만, 사용하는 힘이 다릅니다."

"맞습니다. 저는 마나를, 하멜 님은 어둠을 사용하죠."

라인트가 덧붙였다.

"실례했습니다."

크라언이 놀라며 고개를 숙이려다 애써 힘겹게 참아냈다.

"아닙니다. 흑마법사의 정보가 워낙 적고 이름에 마법사가 들어가니 어쩔 수 없죠."

루시온의 말에 순간, 라인트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반짝였다.

'갑자기 왜 저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거야?'

루시온은 지그시 자신을 보는 라인트의 눈빛에 문득 샤엘라를 떠올렸다.

딱 마법을 사용한 뒤에 어땠냐고 묻기 전, 그녀가 짓는 눈빛과 닮아 있었다.

[큰일이네. 마법사라는 족속이 신기한 건 못 참지. 흑마법사도 나름 신기한 존재이니, 오죽하겠어? 지금도 계속 죽을 듯이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을지도 몰라.]

러쉘이 이제 큰일 났다는 듯 호들갑을 떨다 곧 키득거렸다.

"그래서 괜찮겠습니까, 라인트 씨?"

루시온은 떨떠름함을 숨기며 라인트에게 물었다.

"예. 하겠습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라인트는 눈동자에 불꽃을 피어 올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희 용병단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여러분들께서 파악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길은 조직원들이 뚫도록 하겠습니다. 라인트 씨가 조직 에일에 들어왔음을 후회하지 않도록 확인시켜드리겠습니다."

크라언 역시 확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어떤 지령도 내려지지 않자 퀘이트는 크라언과 루시온을 쳐다보았다.

"실력자 위주로 처리해주십시오. 저항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되도록 기절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말했다.

이는 지부를 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렇다고 조직원들을 무작정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니 죽이는 것도 허용했다.

"맞습니다. 어디까지나 지부를 손에 넣기 위함이지, 학살하고자 찾아온 게 아닙니다."

크라언이 재빨리 루시온의 말을 긍정하며 덧붙였다.

이미 루시온과 말을 나눈 부분이었고, 조직이 '빠르고 튼튼하게' 커야 한다는 루시온의 의견에 동의했다.

"희생이 최소한이 돼야 지부를 손에 넣을 때 그 반발이 덜할 겁니다."

크라언은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천천히 이 계획의 핵심을 언급했다.

"그럼, 다음은...."

루시온은 배치 구조와 마법 감지기 등 그들이 알아둬야 할 부분을 언급했다.

"…하멜 씨는 무슨 임무를 담당하십니까?"

퀘이트가 물었다.

이제 아무런 임무가 없는 건 하멜뿐이었다.

힘을 가진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조직의 손해였다.

"전 지부장의 머리를 가지러 가겠습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자, 잠시만요, 하멜 씨."

크라언이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분명 지부장을 회유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일단은 회유해보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루시온은 가볍게 웃었다.

어디까지 목적은 지부 장악이었지, 호의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말도 듣지 않은 지부장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었다.

싫으면 죽어야지.

크로니아의 정보를 캐내고, 뉴브라 왕국과 손을 잡은 이가 뭐가 좋다고 봐주겠는가.

"호위는...?"

"렌탈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크라언의 물음에 루시온은 렌탈을 가리켰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베델이 보내는 신호는 작전 회의를 하기 전에 이미 확인했다.

루시온은 그대로 흄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크라언 님."

라인트가 루시온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네. 말씀해 보세요."

"혹시 흑마법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하멜 님께서 싫어하시겠습니까?"

라인트는 조직에 들어온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조직 내에 흑마법사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거늘, 심지어 그 흑마법사가 자신을 구해줬던 하멜이기까지 했다.

고마움과 호기심은 별개였다.

"안 됩니다!"

크라언이 칼같이 반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크라언이었기에 라인트는 진심으로 놀랐다.

"저도 그 부분은 반대합니다."

퀘이트마저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왜 안 되는 겁니까?"

질문을 던진 라인트는 자신의 말에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금 고쳤다.

"아, 절대로 따지는 게 아닙니다. 혹여 제가 같은 실수를 할까 걱정되어 묻는 겁니다."

"끼니를 챙기지 못하고 밤잠을 새실 정도로, 조직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신관에게도 쫓기고 있는 상태고요."

크라언이 먼저 말을 꺼냈고, 퀘이트가 바로 뒤이어 말했다.

그 말에 피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던 하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멋대로 조직을 뛰쳐나간 건 단지 민폐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묻고 싶으셔도 방금 언급한 일들 때문에 하멜 씨는 아지트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다."

"…아."

라인트는 이어진 크라언의 말에 금세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진짜 실수할 뻔했습니다. 지금 몸 상태도 좋지 않은 듯했는데."

"…예?"

크라언이 놀라며 물었다.

분명 자신이 보기에 하멜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는데.

"아까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열감이 느껴졌습니다."

화르륵.

라인트의 손아귀에서 불이 만들어졌다.

"제가 불 마법도 쓸 줄 알아서 온도에 살짝 예민한 편입니다."

크라언은 밀려오는 감정에 기어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멜 님!'

129화. 거절하기엔 너무 많았다(2)

* * *

"…아, 렌탈."

"예."

"혹시 밤새도록 계속 공부하는 거야?"

"예. 저는 공부가 참 좋습니다. 제가 내내 있던 그 좁은 세상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 같아 기쁘거든요."

흄은 의식이 있을 때, 한 평 남짓한 공간에 내내 생활했다고 했다.

"그래도 무리하는 거 아니야?"

"저는 괜찮습니다. 쓰러지지도 않고요. 제 몸뚱어리가 생각보다 튼튼합니다. 혹시 공부… 하면 안 되는 겁니까?"

흄은 잠깐 망설이다 슬픈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좋다는 걸 말릴 수도 없고.

루시온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쉬엄쉬엄해."

"알겠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흄이 환하게 웃었다.

[…저, 루시온 공?]

베델이 기가 막힌 얼굴로 루시온을 불렀다.

분위기가 참 따스했으나, 이곳은 3층, 지부장의 방이었다.

"아. 맞다."

루시온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흄에게 목을 붙잡힌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지루해서 네가 있는 줄도 몰랐잖아."

편안하게 소파에 기댄 상태로 루시온은 손가락을 매만졌다.

마침 배가 당긴 참이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부장을 호위하던 이들의 사체가 루시온의 시선에 슬쩍 보였다.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루시온은 적들의 유령들부터 하늘로 보냈다.

그 후, 곧바로 지부장실로 와서는 꼴에 검을 쓸 줄 안다고 호기롭게 덤비는 지부장의 검을 흄이 박살 냈고, 호위를 죽였다.

그 결과 지부장은 흄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 오늘만큼 느긋해져도 괜찮잖아? 루시온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조직원들도 있으니까.]

러쉘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이미 위아래를 다 살펴본 결과 루시온이 살짝 긴장을 풀어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건 맞는 말이나, 혹여 루시온 공이 작은 일에도 방심을 할까 걱정이라서 그래.]

베델은 주변으로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다.

[루시온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 내가 장담하지.]

러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가끔은 몰라도 루시온은 꽤 신중한 편이었다.

제 죽을 짓은, 아주 가끔은 몰라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조직원들이 움직이고 있어, 루시온.]

러쉘은 루시온에게 현재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나저나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루시온은 매만지던 손가락을 멈추고는 물었다.

"뉴브라와 손을 떼라는 말씀까지 언급하셨습니다."

"그래. 거기까지 했지. 그래서 대답은? 이 정도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줬을 텐데?"

지부장은 입을 꾹 다물며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렀다.

"아. 유령을 찾고 있나?"

루시온은 피식 웃었다.

"내가 이미 다 보내버리고 들어왔는데?"

지부의 CCTV 역할을 하는 유령을 왜 가만히 두겠는가.

지부장은 그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내가 뉴브라 왕국에게서 널 해방해주겠다는데 싫어?"

"저, 저는 뉴브라 왕국에 무조건 충성합니다!"

지부장은 덜덜 떨며 말했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충성을...."

"아니. 난 놈들이 아니라니까."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뉴브라가 붙잡아 둔 네 가족은 내가 책임지고 해방해줄게."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6개 지부를 모두 손에 넣은 다음에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일단 지부장의 경계를 풀게 하는 게 먼저였다.

"...."

지부장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기대를 품은, 그런 눈빛이었다.

'강제로 붙잡힌 상태인 건 확실하네.'

루시온은 지부장에게서 독기를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좀 더 온순하게 밀고 가도 괜찮았다.

"나는 하멜, 에일의 조직원이지."

루시온은 자신을 소개했다.

"에일… 이요?"

"그래. 평화와 자유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야."

[평화와 자유? …어후.]

러쉘은 열 손가락에 힘을 가득 주었다.

뻣뻣해지는 손가락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이지 않은가?]

말을 의미하듯 베델의 입꼬리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자유를 말입니까?"

지부장은 순간 울컥해서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가 뉴브라 왕국에 해방되길 바라고 있는 게 절절하게 느껴졌다.

"지부가 총 6개가 있는 걸 알아. 전부 해방할 생각이고."

"...!"

지부장은 그제야 루시온이 가볍게 찾아온 게 아님을 알았다.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묻고 싶은 건 간단해."

루시온이 말을 꺼내자 지부장은 무엇이든 대답할 준비가 된 것처럼 루시온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뉴브라에서 이곳을 어떻게 감시하지?"

하지만 지부장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널 감시하는 놈들은 없어.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정… 말이십니까?"

지부장은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흄의 손짓에도 먹먹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루시온은 다시금 지부장을 재촉했다.

"놈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통해, 그리고 지부에 숨겨놓은 뉴브라에 충성하는 이들을 통해 저희를 감시합니다."

"이중 보안이라 이거네?"

루시온은 조금 전까지 순순히 말을 따르는 지부장의 태도에 조직원을 의미 없는 전투에 밀어 넣은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방금 지부장의 말로 걱정은 싹 사라졌고,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인 사람이 찾아오는 점검은 한 달에 한 번. 편지로 주고받는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입니다."

'생각보다 널널하잖아?'

루시온은 손깍지를 끼며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댔다.

[유령을 믿기에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 것인가?]

베델이 러쉘에게 물었다.

왕국도 아니라 제국에 이 정도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게 아닌가.

그것치고는 관리는 루시온의 조직보다 못하지 않은가.

[당연하지. 유령은 잠을 잘 필요도 없고, 먹지 않아도 되고, 또, 흑마법으로 복종시키면 거짓말도 못 하니 감시자로 세워두기에 딱 좋지.]

러쉘의 시선이 슬쩍 루시온에게로 향했다.

유령의 특성을 파악해 가장 잘 써먹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온이었다.

[하지만 웃긴 게 다른 흑마법사는 루시온과 달라.]

[다르다니?]

[일정 반경 거리와 날씨, 복종한 유령의 움직임 등 고려해야 할 상황이 많아. 그래서 흑마법사가 유령을 복종시켰다고 해서 보고를 무조건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훌륭한 감시자라는 건 분명해.]

'…그러니까 안테나가 좋지 않거나, 아예 없단 말이지?'

루시온은 그 말에 흡족했다.

자신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보고를 들을 수 있게끔, 어둠의 신수인 라타가 있었다.

루시온은 얌전한 자신의 그림자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사람이 찾아와서 한 점검이 언제였지?"

"일주일 전입니다."

뉴브라에서 사람을 보내 확인하는 작업은 못해도 3주 후란 소리에 루시온은 기어코 웃음을 흘렸다.

6개 지부를 다 돌고, 장악할 만큼 충분히 시간이 있었다.

"마음에 드네."

루시온의 가면이 푸르게 물들었다.

"이제 남부 지부는 에일의 것이야. 동의하지?"

목줄을 쥐겠다는 소리에 지부장의 눈썹 끝이 내리막길을 탔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까지 희망에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가 메말라버렸다.

다시 또 이렇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제 이곳은 조직의 아지트가 될 거야. 조직이 원하는 조건은 이전과 비슷해. 제국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기본으로 하지."

제국은 이름에 걸맞게 크고 강했다.

하지만 몸집이 큰 만큼 작은 것들에 눈길이 가기 어려울 테지.

뉴브라가 왜 지부를 6개로 쪼갰겠는가.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아지트인 척하는 더미가 될 거야."

루시온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곳은 뉴브라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바보도 아니고 이곳 자체를 쓸 생각은 없었다.

루시온은 흄에게 손을 휘저으며 놓아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흄이 손을 놓았고, 갑자기 자유가 되자 지부장은 당황한 눈으로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러쉘은 혹여 루시온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까,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빛을 하며 미리 입을 가렸다.

"내가 필요한 건 이 지부가 아니라, 제국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너와 네 부하야."

내내 이용만 당했던 사람에게 무슨 말이 가장 필요하겠는가.

인정이었다.

존재 자체의 인정.

그 말에 죽어가던 지부장의 눈에 다시 빛이 감돌았다.

새로운 남부 지부.

그리고 기존 남부 지부가 가졌던 정보.

'이 정보가 있으면 혹여 제국과 대치에서도 죽지 않을 수 있어.'

루시온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제국이 에일을 딱 쓰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 만큼 공유할 셈이었다.

"따라서 지부장은 네가 맡을 거니까, 뭐가 필요해?"

"…예?"

지부장이 놀라며 물었다.

"필요한 게 뭐냐고. 다 지원해주지."

루시온은 싱긋 웃었다.

"아. 협박 속에 살았으니 제대로 된 돈이라도 받았겠어? 돈을 받은 건 뉴브라의 개새끼뿐이었겠지."

루시온은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자 흄이 얼른 달려와 돈주머니를 받았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아니, 세 개가 튀어나왔다.

"오늘은 거지 같은 놈들에게서 벗어난 해방일이니 마음 놓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사고 싶었던 것도 사고 그래."

루시온의 말과 함께 흄이 돈주머니 3개를 들고 지부장 앞에 내놓았다.

홀린 듯이 돈주머니 하나를 열어보던 지부장이 그대로 굳어져서는 조용히 고개만 들어 루시온을 보았다.

너무 많았다.

평생을 손에 넣으려고 해도 쥐지 못할 금액이 아닌가.

"솔직히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진 않겠지. 나도 너희가 뭘 당했는지 모르고. 그러니 어설프게 위로할 마음은 없어."

무심한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울리자 지부장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걸 할 수는 있을 거야."

정말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에 지부장은 돈을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였다.

"족쇄에 풀려난 걸 축하한다."

여전히 목소리가 딱딱했지만, 울음을 참는 소리가 지부장에게서 들렸다.

그는 코를 먹은 뒤에 다급히 소리쳤다.

"…지하 4층에 폭탄이, 폭탄이 있습니다!"

"알아."

"적이 쳐들어오면 그곳부터 터트릴 겁니다!"

"이제 너도 조직원이니. 같은 조직원을 믿어봐."

[온다, 루시온 공.]

루시온은 베델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콰앙!

문을 부수며 여러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지부장에게 바로 온 두 번째 이유가 드디어 등장했다.

만약 지부에 문제가 생기면 뉴브라 왕국에서 심어둔 놈들이 무슨 짓을 하겠는가.

마법 폭탄을 터트리고.

'…지부장을 죽이러 오겠지.'

[루시온. 가만히 있어. 거기 앉아서 흑마법을 쓸 수 있잖아?]

러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루시온의 어깨를 눌렀다.

"맞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흄 역시 루시온을 말렸다.

움직이다 배에 꿰맨 상처라도 터지면 어쩌겠는가.

―응! 라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 루시온은 가만히 누워서도 어둠을 잘 다루잖아?

[아쉽지만, 나도 동감이야.]

라타에 이어 베델까지.

루시온은 괜히 버스에 올라탄 기분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선택해서 한 일이니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다.

'…뭐어, 아쉽지만, 이렇게 말리니 어쩌겠어.'

루시온은 각 잡고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고급스러운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 제 엉덩이가 기겁할 만큼 저급한 소파였으나, 몸이 피곤하니 이것도 썩 괜찮았다.

"겁먹을 필요 없어."

돈주머니를 꼭 쥐며 발발 떠는 지부장의 모습에 루시온은 손가락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그간 널 지옥으로 몬 놈들이니.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잘 봐."

딱 봐도 자신이 마법사임을 알리듯 벌써 주변에 동동 띄운 얼음이 보였다.

탁.

"이쪽으로 서둘러 오십시오! 저희가 구해드리겠습니다!"

마법사가 지부장에게 다급히 손을 뻗으며 그를 재촉했다.

[흄. 마법사 오른편에 선 저자가 검을 들고 있다.]

루시온이 손에 넣은 지부장이 혹여 흔들리지 않게 베델은 서둘러 흄에게 알려주었다.

그 말에 루시온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저딴 말에 속는 건 아니겠지?"

휘익.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흄이 다가와 그대로 몸을 비틀어 마법사 옆에 있던 놈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목이 꺾이다 못해 뽑혀서는 한쪽 벽에 맞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탁!

동시에 놈이 등에 숨겼던 검도 같이 떨어졌다.

"봤지?"

루시온이 우쭐거리며 마법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30화. 거절하기엔 너무 많았다(3)

"네가 필요할 땐 열심히 써먹더니, 이제 비밀을 위해 널 죽이려고 하네?"

"아, 아닙니다! 저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마법사가 루시온의 말에 반박하며 소리쳐봤자, 이미 기세가 기울었다.

지부장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기어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저놈을 당장 죽여주십시오! 그러면 당신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빠드득.

지부장은 이마저 갈았다.

쓰고, 또 쓰고.

마지막까지 인간이 아니라 마석이 바닥난 마법 기계 취급하는 그 모습에 속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와 달랐다.

하멜이 자신을 해방해주었다.

영원히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족쇄를 풀어주지 않았던가.

"결코, 현혹되지 마십...."

"닥쳐!"

지부장은 마법사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동시에 마법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렇지. 그래야지.'

루시온은 지부장의 행동에 만족스러웠다.

이제 앞으로 같이 일을 하려면 지부장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과거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했다.

쉬익.

고드름처럼 얼음 덩어리가 루시온을 향해 쏘아졌다.

'이제 날도 더워지니, 얼음 마법사가 필요한데.'

루시온은 어둠을 꺼내 얼음 덩어리를 붙잡았다.

[오!]

―오! 잡았다!

러쉘이 감탄했고, 라타가 기뻐했다.

얼음 주변으로 흐르는 냉기는 일반 얼음보다 훨씬 더 시원했다.

'마법 얼음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게 됐으니 아주 좋네?'

콰직.

어둠이 두부를 으깨듯 얼음을 쥐어서는 박살 냈다.

"…흑마법사?"

마법사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여기서 흑마법사가 왜 나오는 것인가.

마법사가 덜덜 떨었다.

혼자서는 결코,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상대했다간 잡아먹힐 뿐.

죽음마저도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천천히 마법사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자 러쉘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봤지?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거? 흑마법사는 강하다니까.]

루시온은 얼음을 깬 어둠 말고 다른 어둠을 이미 마법사와 적들 뒤로 보내놓은 상태였다.

"그래. 흑마법사지."

오만한 목소리와 함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어둠이 그들을 덮치며 땅으로 짓눌렀다.

쿠웅!

"…컥!"

바위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에 그들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붙어버렸다.

"밟아."

루시온은 흄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려움에 찬 그들의 눈빛에 루시온은 몹시 만족스러웠다.

일부러 이 상황을 연출했다.

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릴 상황이 무서울 테고, 지부장은 마치 이들 위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테니.

콰직!

흄은 주저 없이 가서는 발로 머리를 으깼다.

한 명.

두 명.

처음에는 눈을 질끈 감던 지부장은 이제는 눈을 뜨고서는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꽉 쥔 그의 주먹마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마법사 차례가 다가왔다.

흄이 다가오자 마법사는 기겁하며 빌었다.

"사, 사, 살려주십시오!"

"왜?"

루시온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는 걸 다 말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네가 뭘 아는지 어떻게 알고?"

"지, 지부에 오셨다는 건 이곳을 누가 관리하는지 알고 싶어서 오신 게 아닙니까?"

마법사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버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티가 났기에 루시온은 조금은 흥미를 느끼고 물어보았다.

"부엉이가 누구인데?"

"...!"

느닷없는 질문에 마법사는 당황했다.

루시온의 가면이 노랗게 물들었다.

"모르네?"

"자, 자, 잠깐만...."

콰직.

흄이 얼굴을 짓밟아버렸다.

루시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조직원을 보호합니다. 당신이 배신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조금 전과 달리 지부장을 존중하는 말투가 루시온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뒷말을 꺼낼 때만큼은 무척 사나워 지부장은 당장 루시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하멜 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보잘것없지만,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서걱.

6개 지부와 연결됐던 푸른 실 하나가 잘려나갔다.

루시온은 싱긋 웃으며 흄을 보았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상황을 알려줘야 하니까."

정말로 루시온을 따라가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쉭!

그림자 이동을 사용하자마자 바람을 가로지르는 소리에 루시온의 어둠이 꿈틀거렸다.

―루, 루시온!

라타가 깜짝 놀랐다.

"괜찮아."

루시온은 거센 물을 튀기듯 어둠을 앞으로 뻗어 다가오는 검들을 죄다 막아냈다.

콰콰콰콰.

거친 소리와 함께 루시온은 속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진짜 싫네, 이 느낌.'

빛은 속을 난도질하고, 마나는 속을 뒤흔들었다.

어느 쪽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다.

순간, 루시온이 휘청이자 베델과 러쉘이 루시온을 붙잡았다.

[괜찮은가, 루시온 공?]

걱정이 섞인 목소리와 달리 베델의 눈빛은 사나웠다.

탁.

힘없이 떨어진 검들이 알갱이가 되어 쪼개져 사라지자 루시온은 의문을 느꼈다.

'저게 뭐지…? 검 주변에 마법이 싸여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검이 아니라 마법이야.]

러쉘이 루시온의 속마음을 읽듯 바로 대답했다.

[라인트의 마법이지.]

어느새 검을 쥔 베델은 라인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라인트가 알 수 없는 살기에 몸을 떨다 루시온을 보고는 당황했다.

"…하, 하멜 님!"

라인트가 가까이 다가올 동안 루시온은 눈동자를 굴리며 무언가에 베이고, 꿰뚫린 시체들이 보았다.

죄다 마법의 흔적일까.

'무슨 흔적이든 처리해야 할 게 많네.'

유령을 하늘로 보내줘야 뉴브라 왕국이든, 공허의 손이든 여기서 일어난 일들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루시온은 숨을 내쉬었다.

숨이 다시 뜨거워졌다.

가까워진 발소리에 반응해 루시온은 뒤늦은 대답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라인트 씨."

"저, 정말이십니까? 다친 곳이 없으십니까?"

"예.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크라언은 현재 퀘이트와 함께 지하 1, 2층 중 어딘가 있을 테지.

라인트 용병단이 아래로 내려가도록 도운 후에도 처리해야 할 놈들이 있을 테니.

"…원하신다면 분이 풀리실 때까지 절 두들겨 패셔도 됩니다! 제가 마법사라고 해도 엄청 튼튼합니다."

라인트는 갑자기 소매를 걷었다.

―안 돼, 루시온. 아무 죄도 없는데 때리는 건 나쁜 거라고 했어.

라타가 따끔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 말에 루시온은 웃음을 삼키며 라인트에게 말했다.

"마음에 빚을 졌다 생각하시면 그만큼 조직에 충성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갑자기 라인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주워 담지 않습니다. 초네스트 가에서 했던 맹세는 제가 죽을 때까지 가져갈 테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럼 빚으로 달아두십시오.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예.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언제가 됐든, 편하게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라인트는 그제야 미소를 내보였다.

주변을 살피던 루시온은 다시 똑같은 질문을 꺼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 마법 폭탄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혹시 몰라 3층에서 4층으로 내려오는 구간을 막아둔 상태입니다."

"지부장의 회유는 이미 성공했으니 천천히 처리하고 지하 3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럼, 크라언 님한테 전해주러...."

"저, 하멜 님."

라인트가 루시온을 붙잡았다.

"혹시 추가적인 상황이 있습니까?"

지부장을 손에 넣은 터라 루시온은 심적으로 아주 편안해 느긋했다.

"언제가 됐든 잠깐, 정말 잠깐이라도 괜찮으니 흑마법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철저하게 하멜 님의 시간을 따르겠습니다."

라인트는 손에 땀이 나는지 옷에 문질렀다.

말하지 않으려도 했는데 이 망할 입이 멋대로 움직여버렸다.

"원하신다면야 제가 시간을 따로 빼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루시온은 싱긋 웃었다.

앞으로 조직 에일의 주춧돌이 될 사람이니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 잠깐만."

라인트가 재차 루시온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어둠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해열제를 드리려고 했는데.'

라인트는 한발 늦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멜 주변으로 느껴지는 열감이 조금 전보다 높았다.

"대장."

마법 폭탄을 해제하고 있던 용병 중 한 명 라인트에게 다가왔다.

라인트 용병단의 부대장이었다.

"왜?"

"이렇게 농땡이 피울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하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나중에 전해 드리면 되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한발 늦은 게 좀 그래서 그렇지."

"그나저나 대장."

"또 왜? 잔소리는 하루에 한 번으로도 족하다고 했지, 첸?"

"꾹꾹 눌렀다가 꺼내는 말이니 좀 들어주십쇼."

"그럼, 해 봐."

"대장답지 않게 좋은 곳에 들어간 사실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맨날 허탕만 치시던 분이 웬일이랍니까?"

"허탕이라니. 내 눈은 언제나 곧아."

그 대답에 첸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렇다고 하죠. 어쨌든, 아까 4층으로 내려올 때까지 말입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대장도 느끼지 않았습니까?"

첸은 조금 전 일을 떠올리듯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조직에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조직 에일의 소속이었던 이들하고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임무가 시작되자마자 그런 감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뒤바뀐 모습에 깜짝 놀랐다.

"조직의 대장이신 크라언 씨도, 암살자의 우두머리였던 퀘이트 씨도, 조직원들도 죄다 우리를 호위하며 마법 폭탄을 꼭 해체해달라고 했는데. 그때 느꼈던 그 기분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첸은 그 낯섦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기대를 받는 게 이러한 걸까.

"그래. 나도 느끼고 있어."

라인트 역시 씩 웃었다.

용병단은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철저하게 떠돌이였다.

어딘가에 소속되는 게 막연하게 싫을 거라 생각했는데, 달랐다.

소속감.

그 강한 따스함에 마음이 이끌렸다.

"아. 하멜 씨 역시 의외였습니다."

첸은 조금 전 상황을 봤기에 잠깐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나도 그래."

라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를 두고 들려오는 소문은 죄다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착실하고, 올곧지 않은가.

'게다가 내 무례도 넘어가 주셨고.'

"사실 어느 곳이든 대가리가 있는 곳이 보안이 제일 철저하지 않습니까? 그런 곳을 렌탈 씨하고만 움직이시다니. 전 솔직히 걱정스러웠습니다."

첸 마저 하멜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라서 혼자 겉도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라도 잘하자고. 이제 앞으로 우리도 에일의 조직원이니까."

라인트는 첸의 등을 때렸다.

짜악!

"이제 일하자고."

"아픕니다, 대장!"

"농땡이 쳤으니까."

라인트는 첸을 보며 낄낄 웃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 * *

"…에일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부장은 지하 2층에 모인 지부의 사람들을 보며 크라언과 체결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에일의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죄인이 된 듯한 모습이 안타까웠으나,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다시금 싸움이 벌어지면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지금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연하게도 지부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은 반발했다.

갑자기 지부에 쳐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동료까지 죽였던 놈들이었다.

복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도 모자랄 판에 저놈들 밑에 들어간다니.

"절대 안 됩니다! 제 가족들이 놈들에게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습니까!"

그중 한 남자가 간절함을 드러내며 외쳤다.

"안다. 다 알고 있어."

지부장이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직업 소개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비록 가족들하고 떨어져 이곳에 숙식해야 한다고 해도 돈도 많이 주니, 쑥쑥 자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훤해 기뻤다.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지부에 들어오기 전에 썼던 여러 정보가 자신의 족쇄가 되었고, 제국인임에도 제국을 배신하는 행동을 해야만 했으며 제국과 관련된 아주 작은 정보를 위해 누군가를 배신하고, 뒤통수치는 행동이 당연하게 됐다.

그렇게 모은 정보들은 뉴브라를 위해서 쓰였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하나씩 뜯겨나가고 겨우 사람으로서 유지할 만한 양만 남았을 때 자신은 지부장이 되어있었다.

"나는… 죄인이다!"

지부장은 그간 하고 싶었던 소리를 내뱉었다.

"제국인임에도 제국을 배신했다!"

부끄러워서, 이것마저 인정하면 정말로 자아를 유지할 마지막 기둥마저 무너질까 꺼내지 못했던 그 말을 힘차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놈들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자유! 그래, 나는 자유를 원했어!"

해방을 언급하는 말에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분들이 우리를 해방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촤르륵.

지부장은 루시온에게 받았던 돈주머니를 풀어 바닥에 흘렸다.

돈주머니 하나.

돈주머니 두 개.

돈주머니 세 개.

점점 말도 안 되게 불어나는 돈의 존재에 지부 소속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루시온은 그 말에 흡족했다.

자신이 보아도 거절하기에 많은 돈이 아닌가.

"이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돈이며, 자유를 위한 돈이다!"

지부장은 돈을 가리키며 외쳤다.

개같이 일했지만, 한 푼도 손에 쥐지 못했던 돈이었다.

하멜이 말했던 것처럼 그 어떤 말로도 이 심정을 위로하지 못하겠지만, 돈은 미래를 위해 쓸 수 있었다.

미래를 위해서.

"해방이다!"

지부장이 울부짖으며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131화. 경매장으로

* * *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멜 님."

크라언은 루시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나머지 수습은 잘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조직원들 일부를 배치하고, 시체를 치우고, 뭐 그런 자잘한 일은 하멜 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처리 후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루시온은 살짝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시각 새벽 3시쯤이었다.

잠이 쏟아졌고, 아직 23번 유령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헤인트가 슬슬 맘에 걸리던 참이었다.

'경매장이 오후에 열려서 참 다행이네.'

루시온은 시녀들이 또 얼마나 자신을 인형처럼 이리저리 꾸밀지 상상하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크라언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열이 있다던, 라인트의 말이 가뜩이나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아, 괜찮아."

루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수습하고 나서 경매장에 참가하려면 빠듯하겠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루시온.]

러쉘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뜩이나 상처도 잘 낫지 않으면 잠이라도 잘 자야 할 텐데.

헤인트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고, 이중생활로 하루를 쪼개서 움직이니 크라언보다 더 바빴다.

만약 이런 이유가 없었다면 필사적으로 루시온을 뜯어말렸을 테지.

"아닙니다.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크라언은 고개를 가로젓다 조심스레 루시온을 불렀다.

"하멜 님."

"왜?"

"정말 경매장에 오지 않으시는 거 맞습니까?"

"그래."

하멜로서 경매장에 가지 않을 생각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예. 경매장에 오시면 안 됩니다. 미엘라 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부디 푹 쉬셨으면 합니다. 이 정도도 처리하지 못해서야 가짜라고 해도 우두머리 역할을 맡을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또 시작되는 크라언의 걱정에 루시온은 자신의 꼴을 잠깐 바라보았다.

분명 새 옷으로 싹 바꿨을 텐데, 조금 전 전투로 살짝 더러워져 있었다.

"하멜 님. 에일의 기둥은 누가 무어라 하든 하멜 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시고, 몸을 아끼셨으면 합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절절하게 꺼내는 진심과 걱정에 루시온은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심한데…?'

[이러다 울겠다.]

러쉘도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 라인트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크라언이 무언가를 떠올리다 품에서 약을 건넸다.

"이건 약… 이잖아?"

약을 싫어하는 루시온이기에 목소리가 그다지 좋게 나오지 않았다.

"해열제입니다."

"…눈치챘어?"

"라인트가 눈치챘습니다."

들켰으니, 어쩌겠는가.

'이래서 오늘따라 심했네.'

루시온의 가면이 푸르게 물들며 약을 건네받았다.

"그래. 라인트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쾌차 바라겠습니다, 하멜 님."

크라언은 루시온에게 고개를 숙인 뒤, 흄을 바라보았다.

"하멜 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누구보다 하멜 님을 잘 모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흄은 자랑스럽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은 루시온의 집사였으니.

* * *

"…도련님?"

흄의 목소리에도 루시온은 묵직하게 누르는 눈을 좀처럼 뜰 수가 없었다.

"으...."

루시온은 앓는 소리부터 냈다.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밤에 열이 갑자기 올라 잠을 설친 탓일지도 몰랐다.

라타가 자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곧 눈을 반 정도 뜨고는 물었다.

―루시온, 아파?

[내가 무리할 때부터 알아봤다!]

러쉘은 당장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서 열감이 전해지진 않았다.

이게 미열인지 아닌지 유령의 손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그 사실이 참 슬프게 다가왔다.

"아니. 이게 아픈 게 아니라...."

[흄. 정확하게 확인해봐.]

러쉘은 루시온의 말을 자르며 흄에게 부탁했다.

"예. 당장 확인하겠습니다."

흄이 루시온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인간이 아닌 흄 자신의 손은 온도를 거의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아직 미열만 있을 뿐입니다."

흄의 대답에 러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검은 구슬이… 이게 대체 뭐길래.'

분명 검은 구슬이 루시온에게 도움이 된 건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왜 계속 루시온의 몸에 이상 증상을 일으키는 건지 러쉘은 계속 생각했고, 생각했다.

'검은 구슬을 얻어서 일어난 부작용은 확실히 아니야.'

만약 부작용이었다면 지금쯤 루시온의 장기나, 신체 일부가 하나쯤은 고장이 났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루시온이 검은 구슬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밖에 답을 낼 수가 없어.'

이건 부작용처럼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러쉘은 루시온이 신경 쓸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저 루시온이 이겨내길 기다리는 수밖에.

루시온은 점점 굳어지는 러쉘의 표정을 살피다 입술을 떼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그저 잠을 못 자서 그렇습니다. 제가 좀 뭐든 예민합니다."

아예 거짓말도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가.

루시온은 자신을 빤히 보는 라타의 얼굴을 쓸어내리다 곧 토닥거렸다.

"다시 자도 돼, 라타."

라타는 구불구불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루시온에게 얼굴을 비볐다.

―라타는, 우함, 버틸 수 있어.

"그나저나 베델은 어디로 갔습니까?"

러쉘은 루시온이 말을 돌린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

지금 루시온에게 뭐라고 말한들 아픈 게 낫는 것도 아니고, 아픈 제자에게 더는 뭐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러쉘은 한숨을 내쉰 후에야 대답했다.

[루시온 네가 일어나기 전에 지부와 경매장에 잠깐 다녀온다고 했어.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가 봐.]

"경매장이 말입니까?"

[당연하지. 주제가 빛이잖아. 그 초대장에 널 배려했다고 적어놨어도 실제로는 모르지. 또 주변에 흑마법사가 얼쩡거릴 수도 있으니까.]

"그럼, 오늘도 부지런히 빛의 내성을 키워야겠습니다."

씩 웃는 루시온의 모습에 러쉘은 숨을 삼키며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루시온. 너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해?]

"아깝잖습니까. 혹시 빛에 지속해서 노출될 수도 있으니 라트초도 조금 더 먹을 생각입니다."

[루시온. 대체 얼마나 빛의 내성을 늘리려고 그러는 건데?]

"저한테 아예 닿을 수 없을 만큼 얻고 싶습니다."

헤인트와 붉은 실이 끊어지질 않았다.

아직 언제고 그에게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헤인트뿐만 아니라 신관들 역시 위험했다.

아니, 빛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존재였다.

[지금 속도로만 가도 적어도 2년 이내에 빛이 너한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야. 그러니 좀 천천히 가자.]

러쉘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제가 성질이 급해서 그럽니다. 스승님께서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루시온이 미소를 내보였다.

머리로는 알지만, 저 미소에 러쉘은 마음이 또 약해졌다.

위험하다는 걸 루시온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큼 흄이 루시온을 부축했다.

"지금 몇 시지, 흄?"

"오전 8시입니다."

"혹시 헤인트 형님께서 날 불렀어?"

"아닙니다. 오늘 경매장 호위를 위해 새벽부터 경매장으로 가서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그래?"

루시온은 좋은 소식에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이 나른하고 묵직한 느낌에 얼굴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진통제 하나만 줘봐."

오늘 해야 할 일이 많기에 루시온은 별수 없이 약발을 받아보고자 했다.

머리로는 알아도 약이 싫어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아침 식사 후에 드셔야 합니다."

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다가 지금은 별로 좋지 못한 선택입니다. 라트초를 드실 시간이 아닙니까?"

"아."

루시온은 머리를 붙잡고 자신이 놓친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피식 웃었다.

"이제야 진짜 집사 같네."

늘 거절하지 못하던 흄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거절을 하고 있었다.

"감… 사합니다."

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기에 기뻤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맘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 감정을 얼떨떨함이라고 하는군요."

흄은 조금씩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루시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방금 내가 한 말이 손을 떨 만큼의 말까지는 아니었는데....'

[루시온, 흄이 얼마나 칭찬이 고팠으면 이러겠어.]

이때다 싶어 빈정거리는 러쉘의 목소리에도 루시온은 머뭇거렸다.

자신이 그토록 칭찬에 인색했나 싶어 입을 다물고 잠깐 생각했다.

[…루시온?]

이런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러쉘은 진지해진 루시온의 표정에 눈을 크게 떴다.

"아닙니다, 도련님. 제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라서, 그래서 정말 기뻐서 그런 겁니다. 도련님께서는 절 살아 있게 해주시고, 괴물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존재로서 대우해주신...."

"…거기까지 해."

루시온은 괜스레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아부는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키득키득.

러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승님께서는 하루라도 절 놀리지 않으시면 입에 가시가 돋습니까?"

[그렇지. 이제야 알아주니 엄청 기쁘네.]

루시온은 어이없다는 듯이 러쉘을 바라보았다.

"도련님께서 라트초를 드실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흄이 방에 딸린 욕실로 안내했다.

루시온은 러쉘을 곁눈질로 살피다 흄을 따라 걸었다.

이제 흄이 손에 쥘 무기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마드가 얼른 연락해야 할 텐데.'

루시온은 매번 빈손으로 싸우는 흄에게 미안했다.

자마드 근처에 떠도는, 지배한 유령의 보고로는 대검이 거의 완성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령의 시선이지 자마드는 아닐 테지.

루시온은 욕실로 들어가 흄이 건넨 라트초 4개를 씹어 삼켰다.

"...?"

입 안에 감돌던 풀 맛이 사라지고 슬슬 단맛이 올라올 때쯤, 루시온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라?'

루시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 우물거렸다.

'몸이 조금 가벼워졌는데…?'

[왜 그래?]

러쉘이 루시온의 표정을 보고는 간지러운 입을 참지 못했다.

"몸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아무래도 진짜 검은 구슬의 힘이 흡수가 덜 됐나 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몸이 가벼워질 리가 있겠습니까?"

빛은 어둠을 죽였다.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게 검은 구슬의 힘이라면 빛에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나보고 부서진 그릇이라더니....'

검은 구슬의 힘은 그릇에 머무르려고 하는데 그릇이 부서졌으니 아무래도 오갈 곳 없는 검은 구슬의 힘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모양이었다.

몸에 이상 증상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었고.

"…하. 아무래도 힘이 온전히 흡수되기 전까지 다음 구슬을 흡수할 수 없고, 제 몸도 이 상태겠네요."

루시온은 한숨을 내쉬며 흄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입을 가렸다.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

비밀로 하려고 했거늘.

러쉘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보여....]

러쉘이 잠깐 말을 멈췄다.

[흄. 헤인트가 경매장에 갔다며?]

"예. 새벽에 나가는 걸 봤습니다."

[이쪽으로 오는데…?]

러쉘은 당장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팔찌를 꺼내 빛을 쐬고 있던 루시온이 손을 멈췄다.

'헤인트가 하필 지금 왜…?'

루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흄. 당장… 커헉!"

빛을 쐰 반동이 곧바로 일어났다.

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이 상황을 보면 난리가 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루시온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찔했다.

"제가 나가서 막겠습니다."

흄은 당장 욕실로 나가려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러쉘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니야! 문을 막아!]

하지만 흄이 손에 힘을 주기 전에 문이 밖에서 열렸다.

'저 망할 빛이. 더럽게도 빠르네.'

러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헤인트가 빛의 힘으로 쾌속으로 질주해 금세 욕실 앞까지 도착하고 만 것이다.

"루시온! 갑자기 빛이...."

헤인트는 일그러트린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다가 말고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에 당황하며 구부린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쉬익!

쿠웅!

팔에 빛을 둘렀음에도 충격이 컸다.

마치 질주하는 마차를 막는 기분이질 않은가.

"흄! 나야!"

헤인트는 흄을 진정시키다 말고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루시온?"

루시온이 손에 쥔 수건이 붉게 물들었고, 바닥에 떨어진 건 피가 아닌가.

팅!

동시에 루시온의 눈이 커졌다.

영영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던, 헤인트와 연결된 붉은 실이 팽팽해져 버렸다.

132화. 경매장으로(2)

'…붉은 실이 왜?'

얼떨떨한 것도 잠시, 루시온은 헤인트의 빛 때문에 다시금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아냈다.

"퉷."

헤인트는 놀라다 말고 루시온의 팔에 반짝거리는 물체를 보더니 단번에 얼굴을 구겼다.

"루시온 너…!"

자신이 느꼈던 빛은 루시온이 사용한 빛이었다.

신력의 알레르기가 있는 루시온이 기어코 빛이 깃든 그 팔찌를 사용하고 말았다.

"너, 미쳤어?"

아무리 말을 곱게 하려고 해도 헤인트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오.]

자신이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이라 러쉘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쩍 루시온의 표정을 살폈다.

화가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도 빛을 사용했으면서....'

루시온은 팽팽해진 붉은 실을 보며 가까스로 화를 참아냈다.

"…흄. 물러나."

일단 흄을 물렸다.

그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아."

헤인트 역시 화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어찌 되었건 자신도 빛을 썼고, 그 여파로 루시온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

뭐가 먼저인지는 뻔했다.

"여기서 말고, 일단 앉아. 의사부터 불러올 테니까. 이야기는 그 후에 듣도록 할게."

루시온은 욕조 밖으로 나가려는 헤인트를 보며 생각했다.

붉은 실이 팽팽해졌다.

그 조건이 대체 무엇일까.

'마냥 헤인트와 친해지는 거로는 답이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어. 뭐가 더 있어야 할까?'

루시온은 긴가민가하며 헤인트를 달려가 붙잡아 보았다.

루시온의 입을 가렸던 수건이 떨어지자 입가에 피를 쏟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형님...."

원치 않았지만, 갑자기 달리니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기분에 쓰러지지 않으려 헤인트를 더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흄이 루시온의 등을 받치자 헤인트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온! 위험했잖아! 갑자기 뛰면 어떡해?"

붉은 실은 여전히 팽팽했다.

'…헤인트 눈에 비치는 나는 약자여야 하는 건가? 그런 걸까.'

루시온은 다급히 생각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반인이라면 만약 어떤 사건에 얽혀도 과연 범인이라고 의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붉은 실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미치겠네.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지?'

루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슨까지 붉은 실에 얽혀 있는 상황이라 칼이 목구멍까지 맞닿아 있는 기분이었다.

"안 돼, 루시온. 나는 네 호위야. 이것까지 숨길 수는 없어."

일그러진 루시온의 표정에 헤인트는 마음이 흔들렸다.

―제가 빛을 가까이하면 언젠가 저도 빛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전에 루시온이 했던 말이 괜스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간절하다는 건 그때 느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형님."

루시온은 헤인트를 다시 진중하게 불렀다.

방금 헤인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이 카슨이나 노비오의 귀에 닿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 하지 않겠는가.

"저는 괜찮습니다."

루시온은 헤인트를 달랬다.

"그저 경매장을 대비해 혹시나 해 확인해본 겁니다."

확실히 루시온 말대로 헤인트 자신이 느꼈던 빛의 규모는 그렇게 크진 않았다.

정말로 확인용이 아니었을까.

헤인트가 흔들리자 루시온은 다음 말로 못을 박았다.

"괜히 이만한 일로 아버지와 형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일이 텔라 영애에게도 영향이 갈 테고요."

자신이 피를 토한 건 큰일이나, 사건 자체만 놓고 본다면 헤인트가 비밀로 해주기로 한 팔찌와 얽혀 있었다.

이미 팔찌의 존재를 비밀로 해주겠다던 말을 뒤엎어야만 했고, 그렇게 된다면 텔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일단 앉자. 앉아서 이야기해."

헤인트는 문을 열고 기다렸다.

루시온의 말이 진짜든 가짜든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루시온이 소파에 앉고 나서야 헤인트가 말을 꺼냈다.

"진짜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

"아시잖습니까. 이 알레르기에는 약이 없습니다. 하물며 의사가 온다 한들 고작 처방하는 건 진통제뿐이잖습니까."

헤인트는 루시온의 대답에 숨을 한 번 내쉬다 민망해하며 목소리를 냈다.

"…루시온. 그, 멋대로 소리쳐서 미안해."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형님을 놀라게 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루시온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럼, 저는 마실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흄은 루시온에게 손수건을 건넨 뒤에 방을 나섰다.

"형님. 오늘 일은...."

"알아. 하지만 루시온. 다시는 그러지 마. 알레르기 때문에 죽어간 사람을 내가 몇이나 본 줄 알아?"

"형님. 저는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아주 오래오래 말입니다."

너한테 죽지 않고.

루시온은 뒷말을 삼키며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나갔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경매장을 확인하고 오던 길이었어.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흄에게라도 미리 알려주려고 네 방 근처까지 갔다가 빛의 힘을 느껴서 이렇게 됐지."

헤인트는 다시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경매장은 어땠습니까? 일단 초대장에는 빛을 막아주겠다고 적혀 있지만, 내심 찝찝하던 참이었습니다."

[웃기고 있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잖아.]

러쉘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루시온. 빛을 막을 수 있는 건 빛뿐이야. 한데 마법만 덕지덕지 발라져 있더라고."

헤인트의 눈꼬리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봤지, 루시온?]

덩달아 러쉘마저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루시온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서 루시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경매장을 꼭 가야 하는지 말입니까?"

"그래. 어떻게 보면 악질이잖아. 네가 신력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빛을 주제로 초대장을 보냈잖아?"

"그게 화제성이 아니겠습니까?"

루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헤인트에게만큼은 순진하고, 착하게 보였으면 했다.

"얼떨결에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제 마냥 제 방에만 틀어박힐 수 없지 않습니까? 저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은 루시온의 눈빛과 목소리에 헤인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루시온은 표정을 계속 유지하며 괜히 망설이는 척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저도 이쪽에서 절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아니잖습니까? 신전에 더는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와.]

러쉘이 양팔을 붙잡아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름이었다.

자신이 봐도 루시온에게서 진심이 뚝뚝 떨어져 보였다.

"그래. 신전의 힘이 이보다 더 자라면 곤란해져. 가만히 내버려 둬도 점점 성장하고 있으니까."

헤인트의 표정이 한껏 더 진지해졌다.

이때다 싶어 루시온은 한 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기에 저는 어떤 정치적인 상황과 상관없는 곳을 일부러 선택했습니다."

"알겠어. 네 의견을 존중해."

헤인트는 그제야 어깨에 힘을 풀었다.

'...?'

루시온은 다시 힘없이 늘어져 버린 붉은 실을 보고 주먹에 힘을 주었다.

'저거 오류가 난 거 아니야? 왜 자꾸 오락가락이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상황이 되니, 짜증이 일었다.

똑같은 붉은 실처럼 보이나, 똑같은 게 아닌 걸까.

"경매장에서 빛은 나한테 맡겨. 죄다 막아줄 테니까."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그 외에 네가 신경 쓸 일은 없었어. 식사 준비하라고 일러둘 테니까 그때까지 쉬어."

헤인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한 걸음 걷다 말고 루시온을 바라보았다.

"식사 후에는 방금 일과 별개로 진찰을 받아야 하는 거 알지? 여기 아직 덜 나았잖아?"

헤인트는 자신의 배를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렸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쉬고 있어."

살짝 찝찝한 표정을 했으나, 헤인트는 밖으로 나갔다.

[이제 됐어.]

러쉘이 말해주기 전까지 루시온은 그대로 뻣뻣하게 앉아 있다 그제야 숨을 내쉬며 소파에 기댔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속았을까요?"

[속은 눈치던데?]

"속았다니 다행입니다."

"연기… 셨습니까?"

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루시온이 키득거리다 러쉘을 쳐다보았다.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었다.

"스승님께서 헤인트 형님을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아니면 엄청 빨랐던 겁니까?"

[굳이 따지자면 엄청 빨랐던 쪽이지.]

'…다행이네.'

루시온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헤인트가 저택으로 돌아온 건 이미 알았어. 네가 빛을 쐬고 있길래 거리도 적당해서 내버려 뒀더니, 순식간에 네 방문 앞으로 도착한 거야. 나도 깜짝 놀랐다고.]

러쉘의 미간 사이가 좁혀졌고, 루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오갔다.

기어코 러쉘이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 내 실수다. 실수!]

그제야 루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흄. 나중에 깨워줘."

루시온은 길게 하품을 하며 곤히 잠든 라타를 피해 조심스레 몸을 누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