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라온은 광아검 수련을 마치고 별관의 방으로 돌아왔다. 훈련은 끝났지만 달아오른 육체와 정신의 열기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대단한 검술이야.'
-그런 짐승 같은 검술이 뭐가 좋다는 게냐.
라스는 잡스러운 검술이라고 툴툴거렸다.
'단순한 짐승이 아니야. 날카로운 발톱을 지니고, 머리를 쓸 줄 아는 우두머리 호랑이지.'
감각검은 전투의 후각을 키워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검술. 대부분 극단적인 공격형 검술이라 허초에 말려들거나 반격을 당하는 경우가 흔했다.
'광아검은 다르지.'
광아검은 그런 평범한 감각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상대의 허초에 속지 않고, 없는 빈틈을 만들어내는 검술이다. 성취가 높아진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방어를 뚫고 검을 박아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감각 하니까. 생각나는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타고난 감각으로 마족들을 쓰러뜨리는 강한 꼬마가 나타났다. 하지만 본왕이 누구인가. 마계의 왕이자, 분노의 군주. 가볍게 냉기를 뿜어내서 그 마족을 굴복….
'아흠.'
라온이 입을 떡 벌리며 하품했다. 라스의 수다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들어라.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다!
'내 피와 살은 아니니까.'
손을 흔들며 무시할 때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노크만큼이나 낮은 음성으로 대꾸하자 문이 열리고 주디엘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녀가 침대 아래에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떠나기 전에 정리할 일이 있어서 불렀어."
"말씀하십시오."
라온은 무표정한 주디엘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첫날 네게 먹였던 레이지 웜은 가짜다."
주디엘의 목이 살짝 떨렸다. 놀란 반응이라기 보다는 역시라는 느낌이다.
"알고 있었나?"
"확신하진 않았고 의심 정도였습니다."
"의심?"
"예. 사실 도련님의 진짜 얼굴을 처음 보았던 날은 공포에 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거짓이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그녀가 턱을 들어 올렸다. 가라 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 그저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지만, 별관의 사람들의 따스함에 조금씩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상한 요구를 할 거라 생각했던 도련님도 저를 인간적으로 대해주셨고, 중무전에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을 마련해 주셨죠."
주디엘의 굳은 입매가 치즈처럼 느슨해졌다.
"그래도 도련님에 대한 경계는 풀지 않았습니다. 마님이나 헬렌님에게 보여주시는 조금 어른스러운 아이다운 모습이 다 연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몇 가지 일을 겪으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흠."
"실비아 님에게 보여준 얼굴도, 저를 협박했던 눈빛도 모두 진짜였습니다. 당신은 그저 이 별관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라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엘의 말대로다. 그녀를 협박했던 것도, 겁에 질리게 만든 것도, 이중첩자로 만든 것도 모두 별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도련님이 레이지 웜을 쓸 정도로 사악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틀렸다. 데루스 로베르트 때문에 레이지 웜은 평생 쓸 생각이 없지만, 별관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건 의심일 뿐. 이렇게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확신은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 말씀하신 겁니까?"
주디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변했으니까."
"예?"
"네가 날 지켜봤듯이 나도 널 지켜봤다."
라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별관의 특별함 덕분인지. 가면을 쓴 채 연기하던 네 얼굴에 진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건…."
"넌 이미 나한테 정체를 들켜서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내 한마디면 쫓겨나거나 죽으니까. 그런 네가 엄마와 헬렌을 몸으로 감싸려 들었지. 그때의 넌 연기가 아니었어."
주디엘의 몸이 움찔했다.
"네가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듯이 나도 진실을 밝혔을 뿐이다."
"...."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라온은 가만히 앉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팔려 왔을 때 헤어져서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만나게 해준다는 말에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기에 젖은 주디엘의 목소리가 가슴에 와닿았다.
'비슷하군.'
동생이 있고, 납치가 아니라 팔려 온 거였지만, 주디엘의 사연은 전생의 자신과 비슷했다. 왜 그녀의 눈빛이 익숙했는지 이해가 갔다.
"구해주지."
"예?"
주디엘이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들었다.
"봐서 알겠지만, 난 맞고만 있는 성격이 아니야. 카룬 역시 나와 별관을 노리는 걸 포기할 생각이 없을 테니, 언젠가는 부딪친다."
카룬은 단순히 정보를 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전 훈련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려고 마법사까지 매수했었다. 그런 그가 쉽게 물러날 리 없다.
"카룬과 결착을 맺고 나면 네 동생을 찾아주마.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가족을 잃어버린 적은 없지만,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니까.
"네가 믿건 믿지 않건 상관없다."
전생의 나와 너무도 닮은 삶을 사는 그녀를 구제해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한 번 실패했기에 더더욱.
주디엘은 팔로 땅을 짚은 채 한참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매는 여우처럼 가늘어졌고, 빨간 입술이 축 내려갔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 이전에 본 그녀의 진짜 표정이다.
"한 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제가 카룬 지그하르트에게 도련님에 대한 정보를 전하면 어쩌시려고 레이지 웜에 대한 사실을 밝히신 겁니까."
"안 그럴 거 같아서."
네 눈빛이 나와 똑같았으니까.
"어이가 없는 대답이군요."
"그래서 할 건가?"
"…따르겠습니다."
주디엘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소의 다정함이 조금 느껴지지 않는 마른 낙엽처럼 건조한 목소리였다.
-끝났군.
'그래.'
첩자가 진짜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건 진심으로 복종을 했다는 뜻이다. 라스의 말대로 주디엘은 진짜 내 사람이 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주디엘은 가주에게 하듯 정중한 예를 차렸다. 죽어 있던 눈빛에 하얀 선이 빛났다.
"내가 없는 동안 별관을 부탁한다."
"예."
그녀는 다시 고개를 꾸벅이고 방을 나갔다.
"후…."
라온은 침대에 드러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다르군.'
주디엘과는 비슷한 삶을 살았지만, 원하는 건 달랐다. 자신이 자유를 원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동생을 구하길 원했다. 어떻게 보면 더 힘들지도 모른다.
"할 일이 많네."
실비아를 직계의 위에 올려야 하고, 데루스의 목을 베어야 하며, 시리아에게서 루난을 떼어놓아야 하고, 주디엘의 동생도 구해야 한다.
"방법은 하나로군."
-그게 무엇이냐.
"내가 강해져야지."
몸을 일으키고, 벽에 놓아둔 수련검을 허리에 찼다.
-뭐하는 거냐. 설마….
"그래. 수련하러 가야지."
라온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수련에 미친놈이로다! 마계에도 네놈 같은 별종은 없다! 잠 좀 자자! 잠 좀!
* * *
2주가 지나고 생존 시험을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라온은 오랜만에 진검을 허리에 차고, 낡은 코트를 걸쳤다. 복장만 보면 검사라기보다 용병이나 모험가 같았다.
마지막으로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을 매고 방을 쭉 둘러 본 뒤 나갔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피식 웃으며 현관을 열었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입구 앞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도, 도련님. 이제 가시는 거죠. 안 가시면 안 되죠…."
헬렌이 훌쩍이며 도시락과 육포를 비롯한 식량을 챙겨주었다.
"도련님. 조심하셔야 해요."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힘들면 도망치시구요."
시녀들은 말 한 마디와 준비해 둔 여행 물품들을 건네주었다. 미리 다 챙겼지만 전부 받아 배낭에 넣었다.
"고마워."
"잘 다녀오시길."
주디엘도 인사를 하며 무언가를 담은 보자기를 주었다.
라온은 시녀들의 인사를 모두 받고서 가장 끝에 선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라온. 잘 다녀와. 엄마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그녀는 기다린다고 말하며 웃었다. 시녀들 모두가 눈물을 글썽였지만 홀로 미소 지었다.
"응."
실비아가 어떤 마음으로 웃는지 알고 있었기에 라온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그럼 다녀올게."
라온은 떨리기 시작하는 실비아의 눈가를 문질러주고 몸을 돌렸다.
"도련님! 조심하세요!"
"건강하게 돌아오셔야해요!"
"밥 굶지 마시구요!"
뒤에서 들려오는 시녀들의 목소리에 손을 흔들어 화답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고작 1년 가지고, 뭘 그리 걱정이 많은 건지 모르겠군.
'위험한 곳이니까.'
주디엘을 제외한 모든 시녀들은 자신이 태어났을 때부터 저 별관에 있었다. 아들 같이 생각하던 아이가 위험한 곳에 간다고 하니,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본왕은 수천 년의 삶을 살며 지독하고도 지독한 위험과 싸워왔다. 인간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그렇군요.'
-제발 좀 들어다오. 이건 정말 중요한….
'예. 예.'
라스를 놀리며 연무장 문을 열였다. 수련생들과 교관 모두가 중앙에 모여 있었다.
"늦어!"
단상에 걸터앉아 있던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짓했다.
"전부 왔으니, 다시 한번 너희들의 졸업 시험을 발표한다. 기간은 1년. 각자 정해진 장소에서 살아남아라. 간단하지?"
"그, 그 장소가 정상이 아니잖아요!"
라온과 함께 하분 성에 가는 도리안이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쉬우면 시험이 아니지."
"으으윽!"
"진짜 얄미워…."
"추가로 너희들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한다. 성을 버리고 이름만 사용하도록. 직업은 용병이나, 수련 검사 정도로 정하면 될 거다."
리메르는 한번 고생해보라고 말하며 허공에 발장구를 쳤다. 인상을 찌푸리는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며 시원한 미소를 흘렸다.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말해주마. 너희들의 실력은 이미 신입 검사와 큰 차이 없다. 이 시련을 이겨낸다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진중해진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다."
리메르가 단상 앞에 있는 사자의 머리가 그려진 상자를 가리켰다. 교관이 뚜껑을 여니, 회색 장갑이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오웬 왕국을 이겼을 때 받기로 했던 기사 장갑이다. 늦지 않게 와서 다행이야."
그가 장갑을 만지며 씩 웃었다.
"가벼운데다가 손과 손목의 보호 효과도 있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니, 고맙게 받도록."
리메르는 직접 장갑을 챙겨서 수련생들에게 하나하나 나누어주었다.
"음."
장갑을 손에 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딱 맞아서 검을 쓰는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다. 수공업으로 이름 높은 오웬의 물건다웠다.
"몸 건강히 다시 보기를 바란다. 이상."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간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정렬."
라온의 지시에 수련생들이 단상 앞에 줄을 맞춰 섰다.
"교관님께 경례."
"감사했습니다!"
수련생들이 교관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진심이 담긴 외침에 연무장이 들썩였다.
"성장해서 돌아와라.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리메르와 실비아와 같은 말을 하며 연무장을 떠났다. 교관들도 한 마디씩 격려하며 그 뒤를 따랐다.
라온이 몸을 돌려 수련생들을 보았다. 각자의 의지가 다져진 눈빛들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특별히 할 말 없다."
"엥?"
"야! 오늘까지 그럴 거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수석이면 한마디는 해야지!"
"평소에는 말 잘하면서!"
많은 것을 함께 하며 가까워진 수련생들은 화난 원숭이처럼 발을 굴러댔다.
"그럼 한마디만."
라온이 손을 올리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교관의 말을 듣듯 빳빳하게 목을 들었다.
"첫 실전에서 살아남은 무인들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연이었지만 우린 진짜 실전을 겪었다."
수련생들의 눈빛이 1년 전 광혈귀와 마주했던 때로 돌아갔다. 공포를 느끼는 이도, 호승심을 느끼는 이도, 아쉬움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모두 살아남고, 임무를 완수했지. 대륙의 속설처럼 너희는 죽지 않는다. 5연무장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강해져서 돌아와라."
"으아아아아!"
"이겨서 살아남자!"
"가즈아!"
수련생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함성을 터트렸다.
라온은 뜨거워진 수련생들을 보며 옆으로 물러섰다. 이제 각자의 시간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 1년. 죽을힘을 다해서 성장할 거다. 돌아오자마자 네게 대련을 신청할 테니, 날 실망시키지 마라."
"또 도망치려고?"
"그, 그건! 네놈이 날 죽이려고 드니까. 그런 거고!"
당당했던 목소리가 배고픈 아이처럼 줄어들었다.
"그런 적 없어. 그냥 검술 수련을 했을 뿐이지."
"어쨌든! 먼저 간다. 무조건 강해져라! 내가 네놈을 따라잡고 만족할 수 있게!"
그는 어딜 가든 지그하르트 검사답게 살라고 외치며 떠나갔다. 그와 함께 가는 크레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야."
이번에는 마르타가 다가왔다. 콧등을 잔뜩 좁힌 상태였다.
"난 빚도 원수도 잊지 않아. 너한테는 둘 다 있으니 까먹을 수가 없지."
"그래."
"둘 다 갚아야 하니까 가서 뒈지지마라. 뒈지면 찾아가서 죽여버릴 테니까.".
"아, 그리고 엄마가 고기 고맙다고 하신다. 다음에 별관으로 오래."
"이럴 때 그런 말을…."
"잘 다녀와라. 죽지 말고."
"큽."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너도 죽지 마. 절대!"
마르타는 손가락을 겨눈 채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홀로 연무장을 나갔다.
흥흥.
이젠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콧소리. 뒤를 돌아보니 예상대로 루난이 서 있었다.
"자."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상자를 내밀었다.
-아이스크림 소녀여! 너는 본왕이 세계를 지배할 때도 특별히 챙겨주도록 하겠노라.
라스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에 입맛을 길게 다셨다. 그는 매번 아이스크림을 주는 루난에게는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먹으라는 것 같아서 뚜껑을 열려고 할 때 루난이 상자를 통째로 내밀었다.
"다 가져가라고?"
"응."
-오오! 아이스크림 소녀여! 본왕이 너를 첫 번째 하녀로 임명하겠다. 너는 모르겠지만….
'좀 가라.'
라스는 주접을 떠는 라스를 팔찌에 밀어넣었다.
"이거 다 줘도 돼? 넌?"
"여기."
루난이 가방에서 아이스크림 박스를 꺼낸다. 하나, 둘, 셋, 넷. 네 개였다. 네 상자를 보여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떠냐는 표정이다.
"대단하네."
라온은 피식 웃으며 가방에서 수제 육포를 꺼내 루난의 상자 위에 올려주었다.
"직접 만든 거라 맛있을 거야. 가다가 심심할 때 먹어."
루난은 육포 주머니를 맹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도 고맙다."
"응."
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잘 다녀와."
루난은 풍선을 흔들듯이 손을 돌리고 연무장을 떠났다.
그렇게 수련생들은 하나둘씩 떠나갔고, 연무장엔 라온과 도리안만이 남았다.
"으으, 가기 싫어. 진짜 싫어."
벌써 겁에 질린 도리안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곳 좀 들릴까."
라온이 도리안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녀석은 눈물을 흘리기 직전의 상태였다.
"에? 예? 어딜요?"
"상업도시 카멜룬."
남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싸우기 전에 장비 좀 든든하게 맞추고 가자."
105화
첨탑처럼 높은 건물들을 회색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성벽은 낮지만 두꺼워 단단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그 위에 치솟은 건물들은 세련된 느낌을 뿜어냈다.
묵직함과 화려함이 어우러진 이 성이 바로 도시 국가 카멜룬이었었다.
카멜룬 성벽 중앙에 열린 거대한 성문 앞에 두 명의 청년이 말을 탄 채 서 있었다.
"아오, 말 타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도리안이 입매를 비틀었다.
"허리고, 다리고 목이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요."
"처음은 원래 힘든 법이지. 이제 적응됐으니 괜찮을 거다."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 정도면 적응이 빨라.'
도리안은 처음 말을 탄 것 치고는 굉장히 빨리 적응을 끝냈다. 덕분에 3주는 걸릴 거라 생각했던 경로를 2주 만에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대체 언제 말을 배우신 겁니까? 별관에도 말은 없었는데."
"예전에."
말이라면 전생에 수없이 타보아서 안장에 몸을 적응시키는 것 빼고는 어려운 점이 없었다.
"진짜 못 하시는 게 없네요."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바로 싸우러 가지 않기 때문인지 녀석의 떨림은 멈춰 있었다.
"오늘은 편하게 들어가겠네요. 경계 등급이 낮아요."
"그렇군."
라온이 성문 앞에 있는 두 명의 경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룬은 상황에 따라 도시 경계 등급이 다른데. 지금은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라온과 도리안은 리메르가 주었던 용병패를 이용해서 어렵지 않게 카멜룬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로와 길목마다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관광을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물품의 판매자와 구매자로 보였다.
라온은 오랜만에 온 카멜룬 시장과 상가를 쭉 돌아보았다. 특별한 것을 찾아보려 했지만, 대부분이 생필품과 식량이라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역시 거길 가야겠네.'
전생에서도 이 양지에서 무언가를 산적은 거의 없었다.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아래로 가실 겁니까?"
그 생각을 알아차린 것처럼 도리안이 물어왔다.
"아래? 너 암시장에 대해 알고 있었어?"
상업 도시 카멜룬의 지하에는 양지에서 팔기 어려운 물건이나, 비싼 물건들을 판매하는 암시장이 있다.
엄청난 비밀은 아니지만, 도리안이 암시장에 대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이죠."
"어떻게?"
"제가 이리 보여도 상가의 후예 아닙니까. 이런 정보는 밝죠."
도리안이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상가 출신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괜히 돌아다녔군.'
대충 구경하는 척하다가 도리안을 숙소에 놓고 갈 생각이었는데, 암시장에 대해 알고 있다면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럼 가자."
"어? 도련님 아시는 통로도 있어요?"
"그래. 들었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시 우측에 있는 육류 시장으로 향했다.
피비린내가 풀풀 풍기는 가판대를 가로질러 시장의 끝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시장과 반대로 입맛을 돋우게 만드는 막 구운 고기의 기름진 냄새가 진동했다.
"돼지 통구이. 껍질은 바삭하게 튀기고, 소스를 부어서 육질은 부드럽게. 흑맥주는 시원하게 식혀서 2잔씩."
입구에 서 있는 점원에게 평소에는 시키지 않을 음식을 주문했다.
"…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탁 쳤다.
"이쪽으로 오세요."
점원이 옅게 웃으며 안쪽의 룸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다섯 명이 앉아도 모자라지 않는 둥근 테이블이 있었다.
그녀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벽의 한 부분을 살짝 눌렀다.
바닥이 아주 살짝 진동하며 중앙의 테이블이 들리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다.
"저희 할머니 때 암호를 사용하셔서 깜짝 놀랐네요. 한참 전에 은퇴하신 분에게 암호를 들으신 건가요?"
"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암호는 전생에 사용했던 암호 중 하나였다. 아무리 암시장이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10년 동안 같은 암호를 사용할 리가 없었다.
다만 그 당시 암호를 말한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10년이 지났기 때문일까. 점원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렇군요."
그 할머니라는 사람은 전생의 자신을 볼 때마다 눈이 죽어 있다고 말하며 먹을 것을 하나씩 주었던 암시장의 안내인이었다.
지금의 날 보면 어떤 말을 하지 궁금해서 왔는데, 아쉽게 되었다. 입맛이 썼다.
'평온히 갔기를.'
라온은 잠시 눈을 감고,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암시장의 암호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2년마다 바꾸고 있어요. 제가 예전 암호를 외우고 있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얄짤없었어요."
점원은 옛 암호 몇 가지를 말하고서 웃었다.
"잘생겨서 봐드리는 거라구요."
"얼굴을 가렸는데."
라온이 푹 눌러쓴 후드를 가리켰다.
"잘생긴 사람은 숨겨도 태가 나는 법이죠."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도리안을 향했다.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어쨌든 지금의 암호는 고추와 양파를 뺀 다른 닭볶음이랑 잘 익은 키튼 포도주 3잔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쇼핑 되시길."
"고마워요."
점원은 암호를 잘 기억하라고 말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이래서 잘생기고 봐야한다니까."
도리안이 볼을 쓱쓱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여긴 누구한테 들으신 겁니까?"
"리메르 교관."
"아, 그럴 만하네요."
리메르의 이름을 파니,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자."
"예."
라온이 먼저 계단을 밟았다. 어둠을 등불 삼아 2분 정도 천천히 내려갔을 때 계단이 끝나고 회색 커튼 같은 것이 나타났다.
펄럭!
커튼을 걷어내자, 암시장의 전경이 드러났다.
"적응이 안 되네요. 위보다 훨씬 깔끔해."
"확실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시장은 양자에 있는 시장보다 훨씬 깔끔하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흡사 귀부인들이 자주 간다는 귀금속 전문 상가 같은 느낌이다.
가운데 도자기 같은 세련된 형태의 건물이 하나 있고, 그 주변을 화려한 빛을 뿜어내는 상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저 가운데 있는 게 경매장과 도박장이고, 주변의 상점들이 암시장에서 판매 허가를 받은 암상인들이었다.
"어디부터 가실 겁니까?"
"일단 경매 물품부터."
아직 경매를 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먼저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라온은 카탈로그를 구매해서 오늘 경매장에 어떤 물건이 나올지를 쭉 살폈다. 목록을 살피던 그의 눈이 중앙에서 우뚝 멈췄다.
'있다.'
블랙 버터플라이라는 경매물품을 보고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혹시나 해서 한 번 들러 보았는데, 다행히도 찾던 녀석이 딱 있었다.
'이틀 뒤로군.'
블랙 버터플라이가 경매에 나오는 건 내일모레였다.
'가격은…금화 10개에서 20개.'
싼 가격은 아니지만, 암시장 경매품치고는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돈이 좀 모자르네.'
두 임무에 큰 공적을 세워 돈을 받았지만, 블랙 버터플라이를 낙찰받기에는 상당히 모자랐다.
-돈이 모자르다? 본왕의 빙의체가 거지라니, 통탄스럽도다.
하품을 하며 일어난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시끄러.'
라온이 경매장 옆에 있는 카지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저기서 돈을 좀 벌어와야 할 것 같다.
"엑? 도련님 카지노 가시게요? 안 되요!"
카탈로그를 보며 침을 흘리던 도리안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왜?"
"저긴 도박의 프로들만 있는 곳이라구요! 왕국에서 주름잡는 도박꾼들도 먼지만 남도록 털털 털려서 쫓겨나기로 유명해요! 저기 갔다간 저희 밥 먹을 돈도 없이 다 잃을 거예요!"
"아, 나도 알아. 근데 괜찮아."
라온이 앞을 막은 도리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전생에서 내 돈줄이었거든.'
피식 웃으며 라스가 들어 있는 꽃팔찌를 빙글 흔들었다.
이번에는 비밀 무기도 하나 있고.
* * *
전생에서 암살자 라온으로 살아갈 때 목표물을 죽였다고 돌아오는 보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며칠의 휴식 기간이 주어지거나, 심할 때는 휴식 없이 바로 다음 암살을 나가기도 했다.
로베르트 가문 놈들은 암살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임무에 나갈 때도 딱 필요할 정도의 돈만 제공했다. 죽어도 손해가 적어지도록.
세뇌에 걸려 있을 땐 그게 이상한 건지 몰랐지만, 풀린 이후에 로베르트 놈들이 지독한 개새끼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돈을 모아두었지.'
도망칠 기회를 잡기 위해서 휴가가 주어질 때마다 도박장에 가서 돈을 번 뒤 안가에 숨겨두었다. 지금은 거리가 있어서 힘들지만, 기회가 될 때 가서 찾아올 생각이다.
'그러면.'
라온은 겁에 질린 도리안을 데리고 도박장을 쭉 둘러보았다. 익숙한 도박이 보여서 우측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젊은 여성과 깔끔한 정복을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뒤에는 호위로 보이는 남자들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괜찮겠네.'
라온은 도박이 돌아가는 걸 10번 동안 구경한 뒤 판에 앉았다. 지금 진행 중인 건 철제 컵 안에서 흔드는 주사위의 눈을 맞추는 도박이었다.
"아, 이래서 아래로 갔어야 했는데, 요즘엔 카지노 물관리 안 하나 봐?"
검은 드레스를 입고 여우 가면을 착용한 여인이 이쪽을 힐끗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도박에는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왕도, 거지도 없지. 환영하네."
반대로 노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목을 살짝 까딱였다.
라온은 노신사에게만 마주 인사를 하고서 판을 보았다. 쯧하고 여자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음…."
다만 딜러는 여성의 반응에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저 여우 가면 여자는 꽤 잘나가는 집안 출신인 것 같았다.
"어욱, 분위기가…."
도리안은 테이블에서 피어나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고, 목젖을 떨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딜러가 철제 컵과 주사위를 세 사람에게 보여준 뒤 컵 안에 주사위를 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손이 빠르다, 손목과 어깨가 동시에 움직여서 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는 검무를 추듯 우아하게 컵을 돌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배팅을 하라는 듯 손을 뗐다.
"2."
"난 4로 하지."
여자와 노인이 컵을 살피고 앞에 둔 칩을 밀어넣었다.
"…3."
라온은 3이라는 숫자를 부르며 가지고 있던 칩의 절반을 배팅했다.
"전 5로 하겠습니다."
딜러는 모두의 숫자를 확인한 뒤 천천히 컵을 열었다.
"눈의 숫자는 3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딜러가 빙긋 웃으며 투자했던 칩의 2배를 돌려주었다.
"쯧, 운은 좋네."
여성이 혀를 차며 눈을 흘겼다.
"난 오늘 금화 20개를 잃었는데, 자네는 첫 끗발이 좋구만."
노신사는 축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딜러가 다시 컵에 주사위를 넣고, 흔들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경쾌하게 돌린 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딱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3."
"이번엔 5가 좋겠어."
"1."
라온이 1을 부른 순간 딜러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전 4로 하겠습니다."
딜러가 천천히 컵을 들었다. 하늘을 보고 있는 주사위의 눈은 하나였다.
"1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딜러가 배팅한 칩의 두 배를 돌려주었다.
"뭐야."
"오, 자네 진짜 좀 하는구만!"
여자가 이제 고개를 돌려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노신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왁! 2연승?"
도리안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고 옆으로 다가왔다.
"도련님. 도망가야 해요. 이거 100% 초보라 봐준 겁니다. 저것들 꾼이에요. 꾼! 조금 더 했다간 속옷까지 다 털려요!"
"그래. 알아. 그래도 조금만 더 해볼게."
라온이 빙긋 웃고서 땄던 칩을 모조리 배팅했다.
"아이고."
도리안이 눈을 탁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흥. 멍청하긴."
"흐음."
드레스 여성은 코웃음을 쳤고, 노신사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세 사람 모두 딜러가 라온을 봐주고 있었고, 이제 본 실력을 드러낼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번째 판, 네 번째 판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이 지나고 라온의 앞에 그의 가슴에 닿을 정도의 칩이 모여 있었다.
"뭐,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 이게 어떻게…."
드레스 여성과 노신사가 라온의 칩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도, 도련님! 크르륵."
도리안은 입에 거품을 문 채 빨리 도망가자고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운빨이 좋네."
라온은 칩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빙긋 웃었다.
-어, 어떻게 하는 것이냐! 방법이 무엇이야!
'소리.'
-소리?
'주사위의 꼭짓점마다 닳은 정도가 달라서 컵에 부딪힐 때의 소리도 제각각 달라. 그 차이를 파악해서 주사위 눈을 예측하는 거다.'
청각을 극대화한 다음 주사위와 컵의 충돌 소리를 이용해서 주사위의 눈을 파악하는 도박 기술이다.
물론 대부분은 알고도 사용하지 못하지만, 감각을 발달시킨 자신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런 미친 짓으로 주사위 눈을 알았다고?
라스가 헛바람을 흘렸다. 소리의 차이를 파악하고, 그 소리를 기억한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아, 그러면 네놈이 이 도박을 계속 구경만 했던 게….
'그래. 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지.'
-역시 네놈은 사기꾼이었어! 본왕이 매번 속은 이유가 있었구나!
'사기꾼은 아니지. 실력으로 따는 거니까.'
라온은 피식 웃으며 칩을 챙겼다.
"전 여기까지. 수고하세요."
노신사와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일어섰다.
-벌써?
'한 자리에서 계속 이기면 시비가 걸려올 수 있어서.'
도박 테이블을 쭉 둘러보다가 포커를 하는 곳에 앉았다.
-포커? 여기에서도 사기를 칠 거냐?
'아니. 난 사기 안 쳐.'
라온이 돌아가는 패를 보며 두 눈읖 빛냈다.
-뭐?
'이번에는 네 차례야. 가서 사람들 패 좀 보고 와.'
-이런 정신 나간 놈이!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냈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이니라! 감히 인간 따위가 명령하겠다는 거냐! 그것도 도박패를 보고 오라니!
'아니.'
라온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냉기에서도 평온했다.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래다.'
-거래?
'그래. 네가 도와주면 이곳에서 네가 원하는 음식을 모두 먹겠어.'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본왕이 명성 있는 미식가라고 하지만 그딴 제안을 받아들일….
'아까 구슬 아이스크림 판매점이 있던데. 신제품도 나왔고.'
라스가 잠깐 멈칫했다.
-소용없다! 구슬 아이스크림 따위야 먹지 않아도 그만….
'2개.'
-다, 닥치거라! 마계의 군주인 이 몸이 그딴….
'3개.'
-….
'4개에 네가 먹고 싶은 음식 추가.'
라스의 말이 없어졌다. 라온은 이제 끝을 맺을 때라는 걸 느꼈다.
-어딜 보면 되냐?
구슬 아이스크림 4개에 음식 하나.
마계의 군주를 이용하기란 참으로 쉬웠다.
106화
포커.
딜러가 임의로 보내는 카드로 족보를 맞추고, 칩을 건 뒤에 패를 열어 가장 높은 족보를 가진 사람이 모든 판돈을 먹어 치우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다.
족보만 외운다면 딱히 룰을 배울 필요도 없기 때문에 포커는 카지노에서 가장 인기 많은 도박 중 하나였다.
암시장 카지노에서도 그 인기대로 포커 테이블이 20개가 넘었는데, 신기하게도 구경꾼들은 가장 끝자리에 있는 테이블에만 모여 있었다.
"지, 지금 몇 연승이지? 4? 5?"
"내가 봤을 때 6연승이었는데."
"멍청이들아. 지금 연승이 중요한 게 아니야. 상대 패를 전부 아는 것처럼 게임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저렇게 잘하냐?"
구경꾼들은 테이블 중앙에 앉은 검은 로브의 남자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연승만이 아니라, 승률도 미쳤어. 10판에서 7판 넘게 이겼을걸?"
"끗발 장난 아니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지랄. 넌 항상 빈털터리였잖아!"
"와, 칩 봐라. 아주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럽구만."
그 말대로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의 앞에는 칩이 언덕처럼 솟구쳐 있었다.
"후!"
"음…."
"젠장."
그걸 지켜보는 같은 테이블의 도박꾼들은 식은땀을 흘리거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꾼 아니야? 타짜라고 하던가?"
"멍청아! 암시장 카지노 내부는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서 마나를 못 써. 그리고 타짜였으면 이미 저 딜러가 잡았겠지! 저 딜러도 경력이 20년이 넘는데!"
"아, 그러고 보니 딜러도 바뀌었지."
저 로브의 남자가 연속으로 따다 보니, 다른 손님의 항의에 딜러가 한 번 교체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남자는 돈을 잃지 않았지만.
"그럼 진짜 운이라는 거네?"
"와, 나한테 저런 끗발 좀 섰으면…."
"뭐 운이야 당연한 거고. 판단력도 좋아 보여. 눈빛이 장난이 아니야."
"끄으윽…."
구경꾼들의 말을 듣던 도리안이 손톱을 물어뜯다가 검은 로브의 남자. 라온에게 다가갔다.
"도, 도련님. 이제 그만하죠. 초심자의 행운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지금이 기회라구요! 다들 운이라고 하잖아요!"
"초심자의 행운이 대체 언제까지 가는 건데."
라온은 도리안의 불안한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만둘 때가 되긴 했지.'
산더미처럼 쌓인 칩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 버터플라이의 경매가는 금화 10개에서 20개. 지금 번 돈이 금화 35개니 그만할 때도 되었다.
'더 했다간 시비가 걸릴 수도 있고.'
시간이 없어서 연승을 했지만, 실제로는 며칠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따는 게 정석이다. 이 이상 땄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금화로 바꿔주세요."
라온이 딜러에게 침을 밀어주며 일어섰다.
"잠깐! 그냥 간다고?"
주사위 게임에서 포커판까지 따라온 여우 가면의 여자가 따라 일어섰다.
"뭐, 벌 만큼 벌어서."
"따기만 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
"여기 따려고 오는 곳인데?"
"한 판만 더 해. 난 한 번도 못 이겼어!"
"시간이 별로 없거든."
"이익!"
여우 가면의 여자가 살벌한 눈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사위부터 포커까지 내리 20판을 지다 보니, 화가 폭발한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따라오래?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와서 덤볐다가 져놓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음…."
"커험."
"다, 다른 데로 가야겠네."
신기하게도 여자가 일어서서 화를 내니, 구경꾼들이 눈동자를 홱 돌렸다. 꼭 두려워하는 것처럼.
예상했던 대로 저 여자는 이름난 가문 출신인 것 같았다.
"아직 돈 많네.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다가."
"도박 좀 한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깝치지 말고 거기 서!"
"아, 그래."
라온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어차피 떠날 거라 그녀의 지위가 높든 말든 상관없었다. 뒤에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출구로 향했다.
"가자."
"아, 예!"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도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따라붙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본왕과의 거래는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잊었다면 죽이려고 했었는데 다행이로구나. 가자. 거래를 끝내러.
묵직하고도 차가운 목소리. 다만 그 거래 대상이 아이스크림과 음식이라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알겠다. 가자.'
라온은 피식 웃으며 카지노를 떠났다.
* * *
여우 가면의 여인이 샛노란 눈동자로 카지노를 나가는 라온의 등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세타르."
"예."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부복했다.
"저 자식 뭐 하는 놈인지, 뭘 노리는지 알아서 와. 전부."
"왕…아니, 제이나 아가씨. 괜한 문제는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지하 도박장 안 간 걸로 네 부탁은 들어줬을 텐데?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지?"
카지노는 이곳만 있는 게 아니다. 판돈에 제한이 없어 도박에 목숨을 건 사람들만 가는 진짜가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 근신이 아직…."
"닥치고 가. 저 새끼 분명히 사기 쳤어. 확률상 저렇게 이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내가 직접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거야!"
"후, 알겠습니다."
세타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흥."
제이나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도박장을 나가려고 할 때 딜러가 다가왔다.
"치, 칩을 놓고 가셨습니다."
"필요 없어. 당신이나 가져."
그녀는 금화 10개가 넘는 칩들을 보지도 않고 딜러에게 넘겼다.
"예? 아…."
딜러는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제이나는 이미 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제이나가 차게 웃었다. 돈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다.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승패. 고귀한 피로 태어난 이상 저런 평범한 인간에게 지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뭐가 되었든 네 앞길을 막아주지.'
* * *
-흐흠.
라스는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바짝 올라간 상태로 미소를 흘렸다.
-본왕은 저것이 끌리노라.
그는 푸른 냉기로 손가락을 만들어 한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저거?'
라온이 그 아이스크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초록색인지, 파란색인지 뭔지 모를 바탕에 초콜릿칩이 사이사이에 낀 요상한 형태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거 루난이 예전에 보여준 것 같은데.'
-맞다. 네놈이 먹지 않았던 그 아이스크림이다. 본왕의 꿈에서도 나왔었지.
라스는 아이스크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일단 이거 하나 주세요."
라온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라스가 선택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오, 손님. 민트초코를 고르시다니, 아이스크림 좀 드실 줄 아시는 분이군요."
점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활짝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민트초코?"
"억!"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도리안이 펄쩍 뛰며 다가왔다.
"도, 도련님. 지금 민트초코를 시키신 거예요?"
"그렇다는데?"
"허, 이런…."
"왜?"
"도련님 박하 아시죠? 그 톡 쏘는 거."
"알고 있어."
"이 아이스크림. 그 박하로 만든 겁니다. 입안이 화해진다구요! 맛대가리 없어요!"
도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겁먹은 모습은 많이 보았지만 저렇게 안타까워하는 표정은 처음이다.
"저 손님은 맛을 잘 모르시는군요. 달달한 초콜릿 맛으로 시작해서 텁텁함 없이 상큼하게 끝나는 민트초코의 즐거움을 모르시다니."
점주는 반대로 도리안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여기 민트초코 나왔습니다."
그는 직접 카운터 밖으로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전해주었다. 원뿔 형태의 과자에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었다.
-빨리, 빨리 먹어 보거라. 본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노라!
라스의 냉기가 퍼지고 퍼져 아이스크림 가게 전체를 뒤덮었다.
'알겠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녹색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점주와 도리안이 반응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뭐가 뭔지.'
참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싸운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음."
처음에는 다른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혀를 휘감았다. 그렇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톡 쏘는 듯한 박하 향이 입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뭐랄까.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굉장히 어중간한 느낌이다.
-오옥! 맛있도다! 달달함과 깔끔함이 조화되는 이 맛은 마계에도 없어. 이건 혁명이다!
라스는 마음에 들었는지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슨 춤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뻐 보였다.
"어떤가요?"
"도련님. 괜찮으세요?"
도리안과 점원이 동시에 다가와 맛을 물었다.
"난 좀 별로네."
"으윽!"
"역시 도련님은 맛을 좀 아시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 혀에 문제가 있다니까."
점주이 인상을 찌푸렸고, 도리안이 활짝 웃었다.
-무얼 하는 게냐! 더, 더 먹어라! 어서!
'에휴.'
약속은 약속이었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남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은 전부 먹어 치웠다.
"헉! 도련님! 그걸 또 왜 드십니까!"
도리안이 레몬이라도 한 입 씹은 표정으로 팔을 흔들었다.
"크하하하! 입은 속여도, 가슴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지! 별로인 것 같다가도 계속 끌리는 게 바로 민초의 매력입니다!"
점주가 민트초코를 하나 더 펐다. 그리고는 공짜라며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매력은 무슨! 그냥 맛이 어중간하고, 요상한 거죠!"
"민초의 훌륭함을 모르는 손님이 불쌍해."
라온은 자기들끼리 싸우는 도리안과 점원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어떤 천재가 만든 것이냐! 당장 물어보거라! 본왕의 부하로 삼겠노라!
"이 아이스크림은 누가 만든 겁니까?"
"아, 이젠 역사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점주는 역시 민초는 위대해라고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남쪽 지방의 한 영주가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민초단도 있죠?"
"민초단? 도적단인가요?"
"그럴 리가요! 민트초코를 사랑하는 모임입니다!"
"그런 걸 좋아하다니, 도적단이랑 다를 게 없네."
도리안이 점주를 보며 혀를 찼다.
"손님 그 말 취소하시죠!"
점주가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것처럼 손을 떨었다.
"하아…."
라온이 두 사람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들은 있네.'
-라온 지그하르트! 민트초코 하나 더 주문해라! 본왕의 마음에 쏙 드는 디저트니라! 마계에 민트초코 가게를 내겠노라!
물론 제일 이상한 건 요놈이지만.
* * *
다음날.
라온은 경매가 시작되기 1시간 전에 다시 암시장으로 내려갔다.
'아직도 입이 좀 화하네.'
-본왕은 만족하느니라. 훗날 마계의 바다를 민초로 바꾸겠노라.
라스는 어제 민트초코에 단단히 빠져 아이스크림 네 개 중 네 개를 전부 민트초코로 골랐다. 본인의 절대 미각을 만족시킨다나 뭐라나.
어쨌든 별로라고 해놓고, 민트초코만 네 개를 먹는 미친 짓을 해서 도리안은 고개를 내저었고, 점원 아저씨는 흡족하다며 몇 가지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주었다.
"오늘은 민트초코 안 드십니까?"
"그거 별로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고 4개를 내리 드셨잖아요. 다시 먹어봤지만, 정말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도리안은 어제처럼 레몬을 문 표정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어."
거래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민트초코의 맛을 모르다니, 한심한 놈이로다!
라스는 도리안을 보며 겁 많은 놈이 입맛도 별로라고 혀를 찼다.
"음, 아직 경매 시작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경 좀 하자. 어젠 돌아보지도 못했으니까."
"알겠습니다."
블랙 버터플라이를 사고도 돈은 꽤 남기 때문에 암시장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이곳엔 특별한 물건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싼값에 보물을 구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상점에 들어갔다. 반지와 팔찌, 목걸이, 귀걸이 같은 귀금속이 걸려 있었다. 액세서리를 파는 곳인 것 같다.
상인은 관심이 없는지 테이블에 턱을 괴고, 꾸벅이고 있었다. 훔쳐 가도 신경 쓰지 않을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훔쳤다간 난리가 나지.'
물건에도, 가판대에도 마나석과 마나를 이용한 감시 및 보안 체계들이 설치되어 있다. 못 모르고 훔쳤다간 바로 제압당해 암시장 지하로 끌려가게 될 거다.
"뭣 좀 보이십니까?"
"별거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좋아 보이지만, 평범하다. 자신이 찾는 건 진짜 능력이 드러나지 않은 보물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상점에 들어갔다. 여기도 액세서리를 걸어놓았는데, 방금 본 곳보다는 조금 더 물건들이 낡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여기도 없군.'
물건들을 쭉 살펴보았지만, 끌리거나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고 나가려고 할 때 입구에 놓여 있는 녹슨 반지에 시선이 갔다.
'뭐지?'
저 반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 기억이 아니다.
머릿속에 박힌 만화공의 지식. 그 안에 저 반지가 새겨져 있었다.
"허!"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녹슨 반지를 쥐었다.
'이 반지가 여기에 있었다니.'
107화
길가에 굴러다녀도 줍지 않을 듯한 녹슨 쇠반지. 다만 이건 이 반지의 본모습이 아니다.
어떠한 조건과 재료가 갖추어지면 금화를 쏟아부어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반지로 변하게 될 거다.
-흐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구나. 봉인이라도 되어 있는 건가? 네놈의 눈썰미도 제법이로군.
라스는 반지 안에 있는 기운을 느꼈는지 라온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엑? 그걸 사시게요? 녹이 아주 잔뜩 꼈는데. 이거 고물상에 팔아도 은화 1개 아니, 동화 1개도 안 나올 거 같아요."
반명 도리안은 반지를 보고 눈매를 찡그렸다. 상인 가문 출신이라도 이걸 알아볼 눈썰미는 없는 것 같다.
"아닐걸."
라온이 손가락을 흔들고서 점주에게 반지를 가져갔다.
"이거 얼맙니까?"
"좋은 걸 고르셨네. 근력 상승효과와 정신 정화 효과가 있는 마법 장비니까…. 5개만 주쇼."
5개라는 건 금화 5개라는 뜻. 마법 장비지만, 능력과 외형이 구린 걸 생각해보면 바가지 중에 상 바가지였다.
"도리안. 가자."
라온이 반지를 카운터에 놓고 등을 돌렸다.
"잘 생각하셨어요! 저런 싸구려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잠깐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셔야지!"
점주가 카운터를 뛰쳐나와 앞을 막아섰다.
"그물 한 번 던져본 건데 그렇게 가면 쓰나!"
점주가 헤헤 웃으며 손가락을 접었다가 펴며 가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4개! 금화 4개면 딱 좋은 가격…."
"시간 낭비했네."
"아, 잠깐!"
혀를 차고, 나가려 할 때 점주가 팔을 쫙 펴서 길을 막았다.
"3개 반! 아니 3개!"
그는 금화 3개 반이라고 불렀다가 라온의 표정을 보고 다시 금화 3개로 가격을 내렸다. 하지만 라온은 반응하지 않고, 상인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으윽! 두, 두 개 반."
"...."
"이게 진짜요. 나도 좀 먹고 살아야지!"
"….…"
"아, 알겠어! 알겠다고! 두 개!"
"뭐, 그 정도면…."
"에이! 아니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도리안이 바람처럼 파고 들어왔다.
"아저씨!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해요! 이거 딱 봐도 은화로 떼어 왔구만!"
"엑?"
"자, 봅시다. 이 반지에서 효과가 있는 건 근력이랑 정신력인데, 정신력이 정말 효과가 좋았으면 이런 곳에 안 있지. 그렇다고 근력이 오거 건틀릿이나 오거 링처럼 강해지는 것도 아닐 테고."
"어어…."
"그럼 뽀대가 나느냐? 그것도 아니야. 저기다 버려놔도 아무도 안 주워 갈 걸요? 그러니까 우리 합의를 다시 봅시다. 에, 그니까…."
도리안이 반쯤 정신이 나간 상인의 어깨를 붙잡고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딱 됐네! 금화 하나!"
"으어어…."
도리안의 말빨과 말수에 질렸는지 점주의 고개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그, 금화 하나 주쇼."
고개를 돌리자, 도리안이 어떠냐는 듯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수고했다."
라온은 피식 웃었으며 카운터에 금화 하나를 내려놓았다.
'실제로는 그보다 싸겠지만.'
이 반지는 아마 은화 10개에서 20개 사이로 떼어왔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금화를 주는 건 이 반지의 가치가 금화 100개로도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우, 손님들 여기 좀 와보셨수? 어려 보이는데 장난이 아니네."
점주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입김을 불었다.
"제가 상인 가문 출신이거든요! 이런 건 빠삭하죠."
"어쩐지 셈이 빠르더만. 잘 가시게!"
점주는 손을 흔들고서 카운터 앞에 주저앉았다.
"제가 보기엔 별로지만, 도련님이 좋다면 좋은 거겠죠."
"네가 상인 가문 출신이 맞긴 한 거 같은데, 눈썰미는 영 별로네."
라온이 반지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갈 때 상점 앞에 여우 가면을 착용한 여자와 그녀의 가드들이 서 있었다. 옷은 달라졌지만, 어제 도박판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잠시만요."
그녀의 시선이 오른손에 든 반지로 향했다.
"그 반지 여기서 산 건가요?"
어제와 달리 말투가 정중해졌다. 물론 그 안에 담긴 거만함은 그대로였다.
"그런데요."
존댓말을 하기에 똑같이 말을 높여주었다.
"그거 저한테 파세죠. 얼마에 사셨든 10배로 드리겠습니다."
"에엑!"
뒤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상인의 비명이었다.
"도, 도련님. 파시죠. 그 싸구려를 10배로 사준다잖아요!"
도리안이 게걸음으로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이 여자….'
여우 가면 여자의 노란 눈빛이 번들거린다. 어제의 승부욕과는 다른 감정. 탐욕이다. 이 반지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싫습니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계산을… 뭐요?"
당연히 팔 거라고 생각했는지 여자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안 판다고요."
손을 저으며 상점을 나가려 할 때 여자 옆에 서 있던 가드가 길을 막았다.
"그럼 20배 아니 30배를 드리죠."
"일 없어요."
거절해도 가드는 길을 비키지 않았다.
"금화 50개."
"아, 싫다니까."
점점 귀찮아져서 손을 저었다.
"이, 이봐. 치, 친구."
점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빠, 빨리 팔라고! 은화 10개짜리가 금화 50개가 됐잖아. 500배라고! 빨리 팔고 나한테도 뽀찌 좀…."
원래 반지 가격이 은화 10개였군.
점주는 반지를 금화 하나에 판 걸 잊었는지, 은화 10개라고 중얼거렸다.
"난 내 물건 함부로 안 파는 체질이라서."
라온이 픽 웃으며 손으로 반월을 그렸다.
"윽?"
앞을 막고 있던 가드가 본인도 모르게 옆으로 밀려났다. 손짓 한 번에 튕겨 나갈 줄은 몰랐는지 그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뭐."
가드가 다시 길을 막으려 할 때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쿵 소리와 함께 땅이 출렁였다.
"당신들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암시장에서 문제 일으키면 고달플 텐데?"
"가만히 있어."
"죄, 죄송합니다."
여자의 말에 가드가 움직이려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이에요. 금화 100개 드리죠."
"거절합니다."
라온은 바로 고개를 젓고서 경매장으로 향했다.
'최소 금화 100개라는 거네.'
그녀가 금화 100개를 부른 것 자체가 이 반지의 가치가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자신에겐 그 이상으로 필요한 물건인데 팔 리가 있겠는가.
"꺼어억!"
"으어헉!"
거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반지를 판 점주와 도리안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거렁뱅이가 도박 좀 한다고, 눈에 뵈는 게 없으신가 보네요."
여우 가면 여자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내 물건을 안 판다고 그런 소리까지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만."
"당신은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왜 사람들이 숙이고 사는지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 객사하기 싫으면."
그럴 리가 있나. 세상이 무서운 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자신이 아니라, 성질대로 행동하는 이 여자였다.
"할 말 다했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우 가면 여자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경매장으로 향했다.
* * *
[다테의 목걸이가 금화 70개에 낙찰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장은 이곳 말고, 아래층에도 하나 있다. 시작 금액이 보통 금화 20개에서 50개고 경매품들의 가치도 몇 배로 높아 진짜들만 가는 곳이다.
오늘 라온이 구하려는 블랙 버터플라이는 그리 비싼 물품이 아니기에 이곳 1층에서 경매를 진행했다.
1층 경매답게 유일급 물건은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이 마법과 희귀 등급의 물건들이었다.
라온이 눈에 불을 켜고, 괜찮은 물건을 찾아보았지만, 딱히 살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뭐 상관없나.'
오늘은 블랙 버터플라이를 사러 왔을 뿐이다. 반지를 구한 것만으로도 대박이니 이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자, 다음 물건은 마나석을 먹는 고고한 흑색의 나비. 블랙 버터플라이입니다!]
사회자의 들뜬 목소리와 함께 단상 위로 새장이 올라왔다. 새장 안에는 은은한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나비가 마나석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새장을 통해 나갈 수 있지만, 나비는 마나석 주변을 맴돌고 도망치지 않았다.
[은은한 빛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인기 있는 물건입니다. 물론 오래 살지는 못하고, 마나석이 많이 들어가지만, 아릅답기로는 이만한 게 없죠.]
장점을 말할 때와 달리 단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난번 블랙 버터플라이가 금화 12개에 팔렸으니, 금화 1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네. 15번 금화 2개.]
[21번 금화 3개.]
….
경매가 진행되며 여기저기서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가격이 올랐을 때 라온도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77번 금화 13개. 금화 13개! 더 없으십니까?]
사회자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손을 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3개면 충분하지.'
사실 13개도 많이 쳐준 것이다. 저들은 나비를 그저 관상용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없으시면 금화 13개에 낙찰하겠습니다.]
라온이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사회자가 망치를 치려 할 때였다. 중앙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15개! 80번 금화 15개를 불렀습니다!]
"음?"
며칠 살지도 못하는 관상용 나비에 누가 금화 15개를 태우는지 보았다.
'저 여자….'
어제 도박장과 오늘 상점에서 마주쳤던 여우 가면을 쓴 여자였다.
'방해하는 건가?'
이쪽을 보고 쓱 웃는다. 반지 때와 달랐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방해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저 여자 대놓고 시비를 거는데요?"
도리안도 알아차렸는지 귀찮아질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받아줘야지."
라온이 다시 손을 올렸다.
[오오! 77번 금화 17개! 17개가 나왔… 20개?]
17개로 가격을 올리자마자, 여자가 20개를 불렀다.
[22, 24, 26, 30! 금화 30개까지 나왔습니다! 저희 경매장에서 팔린 블랙 버터플라이 중 최고 기록입니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가장 비싸게 팔렸던 게 금화 20개였는데, 30까지 올라갔다. 전부 다 저 여자 때문이었다.
"후…."
다시 손가락을 올렸다.
[33개! 77번 금화 33개가 나왔습니다. 어! 80번 37개! 또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가 또 손을 올렸다.
[으아아! 40개! 77번 금화 40개입니다! 이게 꿈은 아니겠죠?]
라온이 무지성으로 금액을 올렸다. 당장 수중에 그만한 금화는 없지만, 가져온 물건 중 몇 가지를 팔면 가능했다.
[40개! 이제 더 없으십니까? 어? 바로요? 80번 금화 50개입니다! 이야아아아!]
[50개! 50개! 금화 50개! 더 없으십니까? 없겠죠! 있을 리가 없죠. 블랙 버터플라이가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금화 50개에 낙찰되었습니다!]
사회자가 망치를 세 번 두드리고, 블랙 버터플라이가 낙찰되었다고 우렁차게 외쳤다.
"와…."
"이, 이게 뭐야?"
"관상용 나비에 금화 50개를 태운다고?"
"블랙 버터플라이 소유주만 대박 터졌네."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블랙 버터플라이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다음 물건은 희귀 등급 은빛 마나석으로 수속성 기운을 품고 있습니다. 어 바로 20개! 아니, 30개!]
라온은 사회자가 다음 물건을 소개하자마자 금화 20개 불렀다. 기다렸다는 듯 여우 가면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80번 금화 41개에 낙찰!]
수속성 마나석까지 낙찰받은 여자가 자신을 보며 씩 웃었다. 네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표정이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경매에 참여했지만, 저 여자가 끼어들어 모든 물건을 낙찰받았다. 노골적으로 이쪽의 일을 방해했다.
'액수의 차이가 너무 커.'
카지노에서도 실력이 아니라, 돈으로 도박을 하던 여자다. 지금 가진 자금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기분이 좋아서 참으려고 했다만, 안 되겠다. 저년의 가면을 벗기고 눈알을 뽑아라. 죽여라! 본왕에게 싸움을 걸고 있잖느냐!
라스는 승리의 눈웃음을 흘리는 여유 가면의 여자를 보고 분노의 화신이 되어 튀어나왔다. 몸집이 커져서 경매장 전체를 뒤덮었다.
'그러게 손 좀 봐줘야겠어.'
-그렇다! 본왕에게 시비를 거는 저 눈을 뽑고, 입을 꽁꽁 열려서…어? 네, 네놈 방금 뭐라고 했느냐?
라스는 의외의 대답에 깜짝 놀랐는지 입을 떡 벌렸다.
'여긴 지그하르트가 아니야. 날 말릴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도리안."
"도, 도련님. 일단 진정하시고요. 저런 나비는 금방 구할 수…."
도리안은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냉정한 상태였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나가서 야행복 좀 구해와라."
"야행복이요?"
"그래. 위아래에 신발, 복면까지 시꺼먼 걸로."
"살 필요 없어요. 있거든요."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야행복 세트를 보여주었다. 이젠 저 주머니에 뭐가 없는지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건 왜요?"
"뭘 물어. 저 여자가 산 나비 훔쳐야지."
"에엑? 거, 걱정하지 말라면서요!"
"응. 걱정할 필요 없어."
"아주 대형 사고를 칠 생각이구만! 여기 암시장이에요!"
도리안의 눈동자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괜찮아."
라온의 눈빛에 뻘건 불꽃이 일었다.
"안 들키면 돼."
108화
"미, 미쳤어. 진짜 미쳤다고…."
도리안은 경매장 화장실에서 망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암시장을 털 생각을 하다니, 간땡이가 대륙만 한가?'
어떻게 저런 미친 생각을 하는 건지, 라온의 머리를 뜯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 가진 않겠지?'
아무리 라온이라고 해도 진짜 암시장을 털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근데 이 사람은 한다면 하잖아.
라온은 본인이 했던 말을 어긴 적이 없었다. 녹전귀를 죽이고, 광혈귀에게서 살아남았으며, 레이든을 후려 패지 않았던가.
"후우…."
담배를 피우듯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을 때 문이 열리고, 전신에 검은색 야행복을 두른 라온이 나왔다.
'어흑! 진짜 입었어.'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머리에 푹 뒤집어썼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네. 안 들키겠어."
"아니, 도, 도련님. 제발…음?"
도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최근 라온의 키가 커져서 요즘엔 그와 눈높이가 맞았는데, 지금 그의 키가 한참 줄어든 것 같았다. 대충 160 중반 정도로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줄어들었다.
"저, 저 도련님? 키가…."
"좀 줄였어. 들키면 안 되니까."
"아, 그렇군요. 예?"
그렇군요는 개뿔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나, 마스터들도 자기들 마음대로 키를 줄이거나, 늘리지는 못한다. 가문에 있을 때와 사람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
"그, 그런 걸 누구한테 배우신 겁니까?"
"리메르 교관."
"아…."
리메르가 워낙에 특이한 엘프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감시망을 살펴봤는데, 할만할 것 같아."
라온은 기지개를 피며 씩 웃었다. 꼭 악마의 미소처럼 등골이 서늘했다.
"저, 저기 도련님. 그 나비요. 드물긴 하지만 또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던데, 나중에 구하시는 게…."
"아쉽게도 우리한텐 시간이 별로 없잖아. 여기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라온이 부드럽게 웃었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올라오고 있었다.
"거기다 노골적으로 무시와 조롱을 당했는데, 그걸 참을 필요는 없지."
"어우…."
도리안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 말도 맞다. 그 여자는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고, 경매까지 방해했으니까.
"그 여우 가면 누군지는 알았어?"
"예. 그래서 더 말리고 싶습니다. 솔직히 도련님의 팔다리를 묶어놓고 싶다구요!"
"누군데?"
"발카르 왕국의 제이나 왕녀랍니다. 마법 재능도 뛰어나지만, 장비를 보는 눈이 탁월해서 현 국왕이 아끼는 딸이라더군요."
"발카르였구나."
발카르의 왕녀라는 말에 라온의 미소가 짙어졌다. 흡사 먹이를 노리는 짐승 같았다.
"그럼 그 왕녀가 산 물건들은 VIP실로 가겠네?"
"예? 아마도 그렇겠죠?"
경매장은 돈을 많이 쓰는 VIP에게 고급 객실을 내주고, 낙찰된 경매 물품을 방으로 배송해준다. 발카르의 왕녀라면 당연히 전용 객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암시장을 터는 것도 아니네. 그 왕녀 걸 터는 거지. 물건이 객실에 들어가면 소유권이 넘어가니까."
"예? 그,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고민 좀 했는데, 가도 되겠다. 기다리고 있어."
"에엑? 도련님!"
라온은 부드럽게 웃은 뒤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눈앞에서 보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사라졌다.
"아, 암시장보다 왕녀가 더 위험하지 않나? 내가 미친 건가?"
도리안은 텅 빈 화장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최고의 암살자들의 보법에는 각자마다 특징이 있다.
동쪽의 암살자 카잔은 빠르고, 서쪽의 암살자 도루마는 부드러우며, 북쪽의 암살자 파투는 날카롭다.
그리고 남쪽의 암살자였던 라온은 은밀했다.
그가 익힌 무영보의 특성으로 달이 뜨지 않은 밤의 그림자처럼 존재감과 기척을 최대한으로 줄여 고수들도 그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라온은 오랜만에 무영보를 전력으로 운용하여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VIP실이 있는 경매장 4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무영보가 최고지.'
무영보는 바람도, 그림자도 따르지 못하는 은밀한 보법. 속도는 느리지만 기척과 모습을 감추는 데는 이만한 보법이 없었다.
본 컨트롤로 키와 덩치까지 줄이니, 경매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도, VIP층을 지키는 가드들도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이상하군. 평소의 네놈의 성격이라면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 터. 집을 떠나니 정말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이냐.
라스의 말대로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고, 무시를 당하고, 경매를 방해받았다고 왕녀의 물건을 훔치러 가는 건 미친 짓이다. 평소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다만 라온은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해의 빙하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상태.
그런 냉정한 정신을 가지고, 무리하듯 움직이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가봤으니까.'
전생에 이곳에 와서 VIP실에 있는 고위 귀족을 암살한 적 있었다. 물론 자연사로 위장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섰다는 건 들키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있기에 성공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이 딱 일을 벌이기 좋은 때이기도 하고.'
곧 그 여자가 낙찰받은 물건이 올라올 거다. 그 물건과 함께 VIP룸에 들어간다면 누워서 떡 먹는 수준으로 블랙 버터플라이를 훔칠 수 있다.
후우우.
호흡을 조절하면서 로비의 끝에 섰다.
'사실 이것도 여기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암시장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경매 물품과 경비, 경계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솔직히 지하 2층이었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위이잉.
잠시 후 경매장 직원이 카트를 밀고 4층에 올라왔다. 카트는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새장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이거네.'
왕녀의 경매 물품이 확실했다.
카트를 밀고 움직이는 직원을 따라가려 할 때 마법 경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다람쥐 울음소리처럼 가늘게 들려왔다.
소리로 위치를 파악한 뒤 거미줄처럼 퍼진 경계를 조심스럽게 뚫었다.
'사실 위협적인 건 이런 게 아니지.'
정말 위험한 건 마나 실로 만든 경계 따위가 아니라, 마나를 감지하는 트랩과 센서다.
상급 마나석으로 만들어진 트랩과 센서는 등록되지 않은 인간의 마나를 감지한다.
인간이 아무리 마나를 잘 쌓아도 상급 마나석에 있는 마나 수준의 정심함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
'물론 나는 아니지만.'
만화공으로 쌓고, 불의 고리로 정화한 자신의 오러는 자연의 마나까지는 아니어도 상급 마나석보다는 순수하다.
고오오오!
만화공을 아주 얇게 끌어 올린 채로 마나석으로 이루어진 트랩과 센서를 통과했다.
예상대로 센서와 트랩은 자신을 자연의 마나 덩어리라 생각하고 작동되지 않았다.
라온은 트랩, 센서를 모조리 돌파하여 경매 직원의 바로 뒤를 따라갔다.
그는 404호 실에서 멈춰서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왕녀 옆에 서 있던 가드 하나가 튀어나왔다.
"VIP께서 구입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음."
가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카트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직원과 가드의 시선이 안쪽으로 향했을 때 라온은 무영보를 극성으로 운용하여 방으로 파고들었다.
안에는 그 말고도 다른 가드 2명이 더 있었지만, 자신을 눈치챈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낙찰된 물건은 총 12개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직원이 서류를 내밀고, 카트에 담겨 있던 물건들을 차례로 꺼냈다.
블랙 버터플라이를 포함한 물건 12개가 바닥에 깔렸고, 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됐네.'
이제 저 물건의 소유주는 암시장이 아니라, 그 왕녀다. 이제 훔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딴 걸 금화 50개를 주고 사다니."
가드는 블랙 버터플라이를 보고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마음에 들면 끝까지 지르잖냐. 뭐, 이번에는 복수였지만."
"하긴 전에는 물건 선점 좀 했다고, 한 가문을 망하게도 했지. 지독하다니까."
"아까 그 녀석도 반지 안 넘기면 곧 얼굴이 바위에 갈려서 죽을걸?"
"그건 내가 할게. 빨래처럼 비벼주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가드들이 낄낄 웃었다.
'똑같은 놈들이네.'
블랙 버터플라이를 훔친 뒤 가드들이 고초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주 살짝 망설였지만, 별다를 게 없는 놈들이다. 양심의 가책이 사라졌다.
"카드나 계속하자. 내가 이기고 있었지?"
"어제 그놈 진짜 잘하던데. 납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비법 좀 물어볼까?"
"그러자. 파묻은 채 물어보면 잘 대답해주겠네."
가드들은 테이블 옆에 경매 물품을 쌓아 놓고 낄낄 웃으며 포커를 치기 시작했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너무 가까이에 있는데.'
저렇게 붙어 있으면 다른 물건들을 꺼내오기 힘들다.
싸우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4층에 대기 중인 암시장의 가드들에게 잡힐 위험이 있었다.
'어쩔 수 없네. 블랙 버터플라이만 데리고 가야겠어.'
라온이 개구리처럼 자세를 낮추고, 블랙 버터플라이가 들어 있는 새장을 보았다.
블랙 버터플라이는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빠르게 죽기 때문에 저런 새장에 보관한다.
그럼 쉽게 탈출할 수 있는 새장에 있음에도 블랙 버터플라이가 마나석에만 붙어 있는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하다. 마나석에 붙은 순도 높은 마나를 먹기 위해서다.
즉, 마나석의 마나보다 더 질 좋은 마나를 느끼게 해주면 저 나비는 스스로 새장을 뚫고 날아온다.
고오오오.
라온은 무영보를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오러를 정화 시켰다. 정심한 오러를 실처럼 얇게 저며 블랙 버터플라이에게 흘렸다.
마나석에 달라붙어서 마나를 빨아먹던 검은 나비가 움찔 놀라더니, 날개를 펄럭이며 새장을 벗어나 하강했다.
'예상대로.'
자세를 낮추길 잘했다. 만약 선 채로 불렀다면 가드들이 블랙 버터플라이의 날갯짓을 눈치챘을 것이다.
후우우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블랙 버터플라이가 새장을 벗어났지만,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다. 녀석이 가드들의 다리가 있는 테이블 아래를 지나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블랙 버터플라이의 날개가 가드들의 다리를 스치면 다 끝난다.
라온은 오러를 갓난아이 대하듯 부드럽게 통제하여 블랙 버터플라이를 유혹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아래에서 위로. 블랙 버터플라이의 날갯짓이 가드들의 옷조차 흔들지 못하게 이끌었다.
후웅.
풀잎처럼 휘날리던 블랙 버터플라이는 짧지만 긴 여행을 떠나 라온의 손에 내려앉았다.
'잘 왔다.'
블랙 버터플라이를 안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일어섰다. 가드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카드에 빠져 있었다.
"아, 또 졌네!"
"너 이걸로 6연패다. 이번 달 월급은 다 나한테 보내."
"아오, 제기랄! 되는 일이…어?"
카드를 던지던 가드가 블랙 버터플라이가 있던 새장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시, 시발! 없어! 없다고!"
"뭐?"
"나비가 없어졌어!"
가드는 새장을 이리저리 보다가 턱을 덜덜 떨었다.
"뒤, 뒤져! 다 뒤지라고! 이거 없어지면 진짜 망한다!"
가드들은 경매품들만이 아니라, 침대, 의자, 모든 가구를 뒤집어엎다가 창문을 열고, 결국 방문까지 열었다.
그 순간 벽에 바짝 붙어 있던 라온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움직여도 되겠네.'
그는 난장판이 된 바닥에서 경매 물품 다섯 개를 더 챙긴 뒤 열린 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미쳤도다. 네놈은 사기꾼이 아니라, 도둑놈이었구나! 본왕이 오기 전에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이냐!
'더럽게.'
라온이 차갑게 그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아주 더럽게 살았지.'
* * *
라온은 다시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몸을 원래 크기로 돌린 뒤에 경매장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경매가 진행되고 있어서인지 사회자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컸다.
"으으, 시, 심장이 간지러워…."
도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심장과 어깨를 긁고 있었다.
"그니까 평소에 간식 먹는 것 좀 줄여."
라온이 쯧쯧 혀를 찼다.
"하…."
도리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저기 도련님."
녀석은 한숨을 내쉬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옆으로 붙었다.
"정말 안 들킨 거 맞죠?"
"그래."
"후, 그나마 다행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셔서, 사실 암시장의 물건을 훔친다는 건 미친 짓…."
"포기 안 했는데?"
"예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너무 빨리 돌아와서 블랙 버터플라이를 포기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서, 설마…."
"여기 있어."
"끄어어억!"
안주머니를 톡톡 가리키자, 도리안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사람의 눈동자가 저렇게 움직이는 건 오랜만에 보았다.
"으어…."
도리안이 뒤로 넘어가려고 할 때 뒤쪽에 그림자가 졌다. 돌아보니, 여우 가면을 쓴 여자가 서 있었다.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녀의 음성에는 짙은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입이 아니라 주둥이라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러니까 상대를 잘 봐야죠. 푼돈도 없는 버러지가 자존심만 있어서 어쩌시려고."
가면을 쓰고 있어도 표정이 예상되는 목소리였다.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아요. 주제 파악을 잘해야 오래 살 수 있죠."
상황도 모른 채 어설픈 협박을 하고 있으니, 코웃음만 나왔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을 테니, 아까 그 반지 넘겨요. 협박은 아니지만, 거절하면 인생이 힘들어질 거예요. 전 노린 물건을 놓친 적이 없거든요."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네 주제에 안 줄 수 있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협박이 아니라, 협박이 맞잖아. 그리고 귀가 먹었어? 싫다니까."
라온이 파리를 쫓듯 손을 저었다.
"뭐, 뭐? 너 방금 뭐라고."
"귀 뚫고 다니라고."
"너, 너!"
"귀찮게 굴지 말고 가라."
"이익!"
가면이 바르르 흔들렸다. 왕녀는 화를 참지 못했는지, 마나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니까 들어먹질 않네. 네가 노린 물건은 그 나비였지? 경매든 상점이든 나오는 족족 사서 보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까?"
상관없었다. 이미 구했으니까.
"아니면 아예 내일 뜨는 해를 못 보게 해줘? 너 같은 버러지 용병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도 지워버릴 수 있어. 내가 누구인지…."
여자가 코웃음을 치며 가면을 벗으려 할 때였다.
"저, 저기 아가씨!"
VIP룸에서 보았던 가드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금…."
"뭐? 그,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가드의 귓속말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살벌할 정도로 굳어졌다.
"곤란한 일이 있나 보네?"
라온은 안 주머니에 있는 블랙 버터플라이의 기척을 느끼며 씩 웃었다.
109화
발카르 왕국.
신비로운 마법과 독보적인 아티펙트 제작 능력을 가진 왕국으로 지그하르트와 함께 육황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막강한 세력이다.
제이나 루인 발카르는 그 발카르의 왕녀였다.
발카르의 왕녀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어린 나이에 뛰어난 마법 재능과 특별한 능력까지 갖춰 어딜 가든 주목을 받았고, 누구에게나 존중을 받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누구나 알아보는, 대륙에 몇 없는 진짜 왕족이었다.
그녀는 발카르의 왕녀답게 지는 걸 견디지 못했다.
싸움에서 졌으면 수백 골드가 넘는 스크롤을 찢어서라도 이겨야 했고, 도박에 졌으면 수십 배의 돈을 걸어서라도 승리해야 했다.
제이나는 어제 도박판에서 자신을 이겼던 용병이 상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고, 그가 가진 반지를 보게 되었다.
'황금빛?'
장비의 수준을 보여주는 그녀의 능력 스티르가 자동으로 발동하며 남자가 들고 있는 녹슨 반지의 실제 등급이 유일 급임을 알려주었다.
'저런 물건이 왜 여기에 있지?'
이런 시궁창이 아니라, 지하 2층에서나 거래되어야 할 물건이 남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반지는 녹슬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유일 등급이라면 금괴를 가져가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으니까.
제이나는 남자에게 반지를 10배의 가격으로 사겠다고 말했다.
솔직히 10배가 아니라, 그냥 바치리라 생각했다. 이제 저 무지렁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50배의 가격을 불러도 그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제이나는 거절당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날 모르는 놈이네.'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무지렁이가 나중에 자신의 정체를 알고 벌벌 기는 모습이 기대되어 일단 그를 보내주었다.
남자는 조롱을 듣고도 별 반응 없이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계속 경매만 구경하던 그는 블랙 버터플라이라는 나비에 관심이 있는지 처음으로 입찰했다.
'저걸 노린 건가.'
제이나가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가격을 올릴 때마다 추가로 입찰해서 돈을 올렸다.
어느새 금화 30개가 넘었고, 남자의 손이 아주 느릿하게 올라갔다. 금화 40개.
'고작 40개인가.'
반지를 가져간 남자의 보유 금액은 금화 35개에서 40개에 정도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푼돈. 비웃음을 흘리며 50개를 불렀다.
"끙…."
남자는 신음을 흘리며 손을 내렸고, 그 손이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제이나는 그 후에도 남자가 입찰하는 물건을 모조리 2배에 가까운 금액을 주고 낙찰받았다.
자신에게 반항한 남자의 표정은 물을 주지 않은 꽃잎처럼 바싹 말라 갔다. 누구를 건드린 건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저 표정이지.'
돈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벌 수 있는 푼돈이니까. 진짜 보고 싶은 건 인간이 절망하고 당황하는 저 표정이었다.
"후우!"
남자는 짐을 놔둔 채 경매장 밖으로 나갔다.
제이나가 들뜬 미소를 지었다.
'다 보이네.'
저 남자가 이제 자신의 정체를 듣고, 경악할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돌아오겠지. 그다음엔 더 뻔하고.
남자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반지를 바치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서 발카르에 밉보이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제이나는 그 모습을 기대하며 긴 다리를 꼬고, 얼마 남지 않은 경매를 즐겼다.
잠시 후 경매가 끝나 갈 때쯤 남자가 돌아왔다.
'역시.'
물기 가득한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경악한 게 분명했다.
"후후."
제이나는 거만한 미소를 입에 건 채 남자의 뒤에 섰다.
"곤란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빙긋 웃으며 조롱의 말을 건넸다. 이제 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예상과 180도 달랐다.
남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귀가 먹혔냐고 말하며 손을 저었다. 흡사 파리를 쫓는 것처럼.
'이 미친놈이?'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 저런 건방진 짓을 할 리 없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보네."
가면을 벗으려고 할 때 룸에 보내놓았던 가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 아가씨. 객실에 있던 경매품들이 사, 사라졌습니다."
"뭐?"
"나비랑 몇몇 경매품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가드는 누구도 침입하지 않았는데, 경매품들이 없어졌다고 벌벌 떨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
"곤란한 일이 있나 보네?"
따지려 할 때 남자가 조금 전 자신이 할 말을 그대로 읊으며 웃었다. 비웃음. 항상 자신이 남에게 보이던 그 미소였다.
'이놈이다!'
거의 틀리지 않는 감이 속삭였다. 이 거렁뱅이가 물건을 훔친 범인이라고.
"너지."
제이나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뭐가?"
"네가 훔쳤잖아!"
"뭘 훔쳤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옆에 있는 어벙하게 생긴 놈만 덜덜 떨었다.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제이나가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여우 가면을 벗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얼굴.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뚱했다.
"뭐하냐?"
"나 몰라?"
"모르는데?"
"하!"
진짜 모르는 표정이라는 게 더 열받았다.
"나 제이나야. 발카르 왕국의 국왕 로스타스 디루아 발카르의 막내딸이라고!"
"발카르의 공주?"
자존심을 구기고 스스로를 밝혔다. 남자의 머리를 덮은 후드가 크게 흔들렸다. 놈은 이제야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래. 넌 발카르를 건드렸…."
"그래서 어쩌라고?"
헉 소리를 내며 경악하던 남자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진짜! 저거 잡아!"
"아가씨?"
"저놈이 경매품을 훔친 게 분명해! 꿇려서 뒤져!"
제이나가 악을 질렀다. 진짜 훔쳤거나 아니거나 상관없다. 저놈의 구겨진 표정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실례 좀 하겠소."
예의 바른 말과 달리 가드의 손은 험악했다. 단숨에 뻗어가 남자의 어깨를 부수려고 할 때, 남자의 손이 반원을 그렸다.
터엉!
가드는 팔이 꺾인 채 바닥에 짓눌렸고, 남자는 가드의 머리에 다리를 올려놓고 코웃음을 쳤다.
"생각 없이 공격부터 하네. 너희들 자신 있어?"
남자가 밑에 깔린 가드를 짓밟으며 탁한 음성을 흘렸다. 그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카르에 밉보이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직접 네놈이 도둑이라는 걸…."
"라온? 라온이 아닌가!"
마법을 쓰려고 할 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화려한 예복을 입은 금발의 사내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어?"
제이나가 눈을 부릅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았던 오웬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반가운 표정으로 거렁뱅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맞군! 목소리가 똑같아서 자네일 줄 알았네!"
"오랜만입니다."
남자는 그리어와 안면이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어 아는 사람이야?"
"알다마다!"
그리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남자를 가리켰다.
"내가 예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었지. 지그하르트에 진짜배기 검술의 천재가 있다고. 바로 이 친구야. 라온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제이나가 남자의 이름을 듣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지, 지그하르트라고?"
"북방의 패자!"
"그, 그럼 지금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게 시비를 건 거야?"
"와, 이거…."
옆에서 모른 척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육황인 발카르와 지그하르트의 부딪침에 무서움보다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쯧."
라온이라 불린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선명한 금발과 붉은 눈동자. 현 지그하르트의 가주인 글렌과 같은 머리색과 눈빛이었다.
'직계!'
직계가 아니고서야 저런 눈빛과 머리색이 나올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잘못 건드렸다.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주제를 모른다고도 했고, 도둑놈이라고도 했지. 그런데 이번엔 먼저 공격까지 하네."
라온의 눈동자가 빨갛게 번쩍였다. 그의 발밑에서 타오른 이글거리는 기세가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사나운 기파였다.
"난 참을 만큼 참은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그, 그건…."
제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지렁이 용병을 대하는 것과 지그하르트의 직계를 대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이거 발카르가 지그하르트에 시비를 건다고 봐도 되는 건가?"
"나, 난 네가 누구인지 몰랐어."
"모르는 사람을 모욕하고, 건드리는 게 더 미친 짓 아닌가? 성격이 특이하군."
라온은 자신을 비꼬듯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 새끼가 진짜….'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먼저 건드렸다고 해도 역으로 조롱을 당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하, 그래서 어쩌자고, 네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놈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을 거다.
"할 수 있는데."
"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물러설 거라 생각했던 그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여기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으로 네게 싸움을 걸 수 있는데, 넌 할 수 있나?"
"개, 개소리!"
제이나가 턱을 떨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분명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라온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고,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를 피워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리어가 저 라온이라는 놈의 재능과 검술이 뛰어나 언젠가 지그하르트의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거기다 저렇게 돌아다닌다는 건 검사가 되었다는 건데.'
어려 보이는 외모. 저 나이에 검사가 되었다면 상당한 인망이 있다는 뜻이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를 힘으로 제압하려 하고 도둑으로 몰았다는 건 네 생각보다 파급이 큰 일이다."
"으윽…."
제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지. 사과해라. 이 자리에서 용서를 빈다면 넘어가 주지. 거절한다면 발카르에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
라온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폐가 우그러드는 감각. 정말 그리어보다 어린 놈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의 기세였다.
"자, 잠깐만 생각 좀…."
"5초 주지. 5, 4."
놈은 시간도 끌 수 없게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기세, 눈빛, 상황 장악 모두 범상치 않았다. 이런 놈이 거짓을 말할 리가 없었다.
'젠장….'
주변을 돌아보았다. 경매 직원들도, 손님들도 다 이곳을 보고 있었다. 괜히 가면을 벗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휩쓸었다.
"3, 2, 1."
"미, 미안해."
라온이 1이라고 말한 순간 허겁지겁 사과의 말을 뱉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누가 용서를 빌 때 반말을 하지?"
"…미, 미안해요."
제이나가 이를 악물고 사과의 말을 건넸다.
"누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인사를 하지?"
"당신 진짜…."
"해라."
라온의 명령 같은 말에 제이나가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뭘?"
"흐으…."
당장 일어나서 라온에게 마법을 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겨, 경매장이랑 카지노에서 시비를 걸고, 도둑으로 의심해서 정말 죄. 죄송…합니다."
답이 없었다. 제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북해를 마주한 듯한 차가운 눈빛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나도 일을 크게 벌일 필요 없으니. 여기까지 하지."
"아…."
"왕국을 망신시키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언행에 조심하도록."
그가 한심하다는 듯한 손짓을 하며 카지노를 나갔다. 그리어는 자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라온을 따라나섰다.
"...."
제이나의 침묵에 경매장에 있는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지배인."
"에, 예에!"
계단 아래에 있던 경매장 지배인이 꼬리에 불붙은 개 마냥 뛰어왔다.
"오늘 VIP층 경계 센서 작동한 적 없어?"
"어, 없습니다."
"통제실은 어디 있어."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배인은 허리를 반으로 굽힌 채 제이나를 통제실로 안내했다.
"마나석 센서 출입 목록이랑, 경계 내역 전부 가져와!"
제이나가 통제실 안의 테이블을 부수며 악을 내질렀다.
'분명히 있어.'
어쩔 수 없이 당했지만, 놈이 도둑질했다는 확증만 찾으면 역전할 수 있다.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서 몇 배로 갚아줄 것이다.
"개미 한 마리까지 전부 확인해! 하나도 놓치지 마!"
하지만 그녀의 가드들과 경매장 직원들이 눈 빠지듯 뒤져도 라온의 모습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만 등록되었을 뿐이다.
"말도 안 돼…."
제이나가 턱을 떨며 주저앉았다. 자신의 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 라온을 도둑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자그마한 증거도 나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불온한 느낌, 놈의 부하의 반응, 경매가 딱 끝났을 때 나타난 상황을 보면 라온이 경매품을 훔친 건 확실하다.
하지만 확증이 없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또 의심했다간 정말 역풍이 불어닥칠 거다.
으득.
제이나가 이를 갈며 발을 굴렀다.
"그 새끼 도대체 뭐야!"
110화
라온과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는 암시장 밖에 있는 한적한 골목의 찻집에 들어갔다.
"음, 내가 좋지 않은 때 온 건가?"
그리어 드 오웬이 찻잔을 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잘 와주셨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딱 맞게 왔지.'
시험 때문에 스스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리어가 와준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정체를 밝히지 말라고 했지 남이 밝히는 건 아무 말도 없었으니까 시험 평가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깜빡 속아 넘어갔지.'
그리어가 방계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검술 천재라는 말만 해주어서 제이나는 자신을 직계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후드를 벗었을 때 확실히 넘어간 표정이었다.
'뭐, 오지 않아도 방법은 있었지만.'
그리어가 오지 않았어도 그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은 많았다. 물론 지금이 깔끔한 방법인 건 두말할 필요 없었지만.
-본왕이 잘못 보지 않았구나. 네놈은 역시 사악하기 그지없는 놈이다. 인간보다 악마가 더 어울려.
'그럴지도 모르지.'
리온이 피식 웃었다. 자신은 착한 인간이 아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라스 이상의 악마가 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먼 곳까진 어쩐 일인가."
그리어가 차를 한잔 마시고 입을 열었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장비를 구입하려고 들렸습니다."
"시험?"
"검사가 되기 위한 시험입니다."
"아, 졸업 시험이군. 그럼 내가 한발 빠른 건가?"
"예?"
"후후."
그리어가 빙긋 웃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들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살짝 뽑은 검에 사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오! 기사의 표식!"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도리안이 벌떡 일어섰다.
"뭐, 왕자다 보니 기사라고 하긴 뭐하지만, 일단 실력은 인정받았지."
"축하드립니다."
"하하, 고맙소."
그리어는 사자의 문양을 소중하게 쓰다듬은 뒤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근데 참 별일을 다 겪는군. 지그하르트의 천재 검사가 도둑으로 의심받다니."
그는 말 같지도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저 아둔한 놈! 그거 사실이다. 이 정신 나간 놈은 정말 훔쳤단 말이다!
"으윽!"
라스가 말하지 못하는 게 화가 난 듯 냉기를 뿜어냈고, 도리안이 신음을 흘렸다.
"제이나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워낙에 귀하게 자라서 버릇이 없지. 내가 잘 타이르겠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장비라면 어떤 걸 구하려고 하는 거지?"
"일단 검을 좀 보려고 합니다. 저희는 정식 검사가 아닌 이상 개인의 검을 가질 수 없어서."
라온이 가지고 있던 검을 툭 쳤다.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은 검도 아니라, 전투 전에 새로 구하고 싶었다.
"흐음, 그럼 좋은 곳을 하나 소개해주지. 서쪽 끝에 공방 거리가 있는데, 그 구석에…."
그리어는 여러 번의 손짓을 해서 한 공방을 알려주었다.
"작고, 지저분하지만 실력은 확실하지. 직접 소개해주고 싶지만, 할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한지라…."
"아닙니다. 소개만으로 충분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소개만이 아니라, 오늘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다시 붙어보고 싶었는데, 영 아쉽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사의 자격을 얻은 그리어의 기도는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자신처럼 임무와 수련을 반복하며 벽을 넘은 것 같았다.
"나중에 꼭 오웬으로 찾아오게. 다 떼놓고 제대로 한 판 붙어보고 싶으니."
그는 지그하르트에서 마지막에 보았던 것처럼 웃는 얼굴로 사라졌다. 방향을 보니, 다시 암시장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와, 진짜 겨우 살았네요."
도리안이 실타래처럼 긴 한숨을 뱉어냈다.
"도련님이 이렇게 막 나가실 줄은 몰랐어요. 어우…."
"다 계획이 있었어."
라온이 빙긋 웃었다. 도리안은 불안했겠지만, 자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은 손바닥 안에 있었다.
"믿기진 않지만, 도련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일단 공방부터 갈까요?"
"아니."
안주머니에 있는 나비의 작은 꿈틀거림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먼저 할 일이 있어."
* * *
라온은 숙소를 잡은 뒤 안 주머니에 넣어둔 블랙 버터플라이를 꺼냈다.
은은한 흑광을 휘감은 나비가 팔랑이며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이었지만, 이건 이 나비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고 저런 쓸모없는 나비를 훔쳐 온 것이냐.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더라고. 각자 다 필요한 곳이 있어."
-헛소리! 세상에 불필요한 쓰레기는 널리고 널렸노라.
"이걸 보면 그런 생각 못 할걸."
라온이 배낭에서 반은 빨갛고, 반은 푸른 꽃봉오리를 꺼냈다. 예전에 설호채주에게 얻었던 투톤 플라워다.
"네게 선물을 주마."
투톤 플라워를 꺼내서 흔들자, 왼손에 앉아 있던 블랙 버터플라이가 아직 피지 않은 꽃잎 위로 내려앉았다.
꾸웅.
블랙 버터플라이가 투톤 플라워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꽃잎들의 색이 물감을 칠한 듯 진해진다. 반대로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 날개는 색을 빼앗기듯 백색으로 물들었다.
화아아아!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빛이 사그라들고, 투톤 플라워의 꽃잎이 찬란한 빛을 뿜어낸다.
두 영물 사이에서 피어난 빛이 방 전체로 번졌다.
명멸하던 푸른 빛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 블랙 버터플라이의 검은 날개는 설원이 되었고, 투톤 플라워의 봉오리 진 꽃잎은 개화하여 청아한 향기를 피워냈다.
-이, 이건 무엇이냐! 마나만 빨아 먹는 아귀 같은 나비가 꽃을 피워내다니!
'말했잖아. 쓸모없는 건 없다고.'
라온의 웃음과 동시에 투톤 플라워를 활짝 피워낸 블랙 버터플라이가 날아올랐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힘찬 날갯짓이다.
"더 예뻐졌네."
손을 올리자, 블랙 버터플라이가 허공을 선회하여 손등에 내려앉았다.
"저주가 풀린 걸 축하한다."
블랙 버터플라이와 투톤 플라워는 각자 다른 저주를 지녔다.
블랙 버터플라이는 마나를 먹기만 하고 소화를 못 하는 저주 그리고 투톤 플라워는 마나를 모으지 못하는 저주.
두 가지 저주 때문에 두 영물의 등급은 희귀에서도 하급이었다.
하지만.
'그 둘이 모이면 달라지지.'
마나를 가득 먹은 블랙 버터플라이가 마나를 응집시키지 못하는 투톤 플라워에게 마나를 넘겨주게 되면 그 둘의 저주가 풀리게 된다.
마나를 넘겨준 채 자유롭게 떠나는 블랙 버터플라이와 찬란한 꽃을 피운 투톤 플라워는 함께여야 완성되는 공생관계였다.
'이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라온 역시 만화공에 적혀 있던 지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거다
우우웅.
라온이 투톤 플라워의 선명한 빛을 보고 있을 때 블랙 버터플라이가 손등을 간지럽혔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에 손을 내밀어 블랙 버터플라이가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우웅.
블랙 버터플라이가 경쾌한 날갯짓을 하며 천천히 떠올랐다. 건물 주변을 휘돌던 녀석은 다시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인사를 하듯 날개를 한 번 접고서 드넓은 창공으로 떠나갔다.
"잘 살아라."
라온은 손을 흔들어주고서, 창을 닫았다. 바닥에 앉아 활짝 핀 투톤 플라워를 보았다.
네 장의 꽃잎 중 두 장은 붉은색으로 남은 두 장은 푸른색으로 반짝인다. 이대로 장식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이게 진짜지.'
소량의 화속성 마나와 수속성 마나가 깃들어 있던 투톤 플라워가 블랙 버터플라이에 의해 피어나 많은 마나를 끌어모은 이 상태가 투톤 플라워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제 먹어도 되겠어.'
꽃이 핀 걸 확인했으니, 이제 저 꽃잎에 담긴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차례였다.
영약이란 자연의 기운이 모인 것이지만, 응집될 때 불순물이 쌓여 자연의 마나보다 순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투톤 플라워는 다르다.
홀로 개화한 게 아니라, 다른 영물의 힘을 빌리며 한 차례 정제되었고, 두 속성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두 마나에 관해서는 날것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게 딱 맞는 영약이지.'
라온은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고,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의 오러를 가지고 있다. 투톤 플라워의 기운을 흡수하기에는 누구보다 적합했다.
'그럼.'
투톤 플라워를 알약 먹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씹을 필요도 없었다. 투톤 플라워는 달콤한 꽃향기를 입안에 펼치기도 전에 설탕처럼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크으….'
뱃속이 뜨거웠다가 차가워졌다가를 반복했다. 불과 얼음을 번갈아 대는 듯한 감각. 배를 찢을 듯 난리 치는 걸 보니, 투톤 플라워의 기운은 진짜였다.
라온은 가는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앉고는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단전에서 치솟은 정심한 기운이 전신을 휘돌자, 배를 후려치던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뜨거운 오러가 마나회로를 타고 올라 투톤 플라워의 기운을 이끌기 시작했다. 어깨가 뜨겁고, 심장은 차가워졌으며, 팔뚝은 시원했고, 허벅지는 묵직했다.
만화공의 흐름을 따르는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정말 순수하네.'
투톤 플라워에 담겨 있던 두 속성의 기운은 막 내린 눈처럼 깨끗했다. 만화공을 휘돌리기만 해도 자석처럼 척척 달라붙었다.
고오오오오!
라온의 전신이 바르르 흔들렸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전신에 퍼져 있던 투톤 플라워의 기운이 단전에 차곡차곡 쌓이는 희열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입가에는 들뜬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투웅!
만화공을 반복해서 운용할 때마다 단전과 육체가 진동하여 마나회로에 녹처럼 끼어 있던 노폐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후우우욱!
라온은 육체와 오러의 결이 한 단계 진화하는 것을 느끼며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라온이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에서 검회색 벼락이 번쩍였다.
[혹한의 저주 한 가닥이 사라집니다.]
[단전과 마나회로의 내구성이 상승합니다.]
[기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정신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메시지를 볼 필요도 없었다. 단전에 차오른 순도 높은 기운과 더 넓어진 마나회로 그리고 가뿐한 몸 상태만으로도 현재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 이상인데.'
아무리 투톤 플라워라고 해도 전부 흡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큰 오해였다.
투톤 플라워의 순도는 십지초 이상이었다. 낭비 없이 대부분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꺾이지 않는 자>.
상태 : 혹한의 저주(네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5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암습(1성), 불굴의 의지(1성).
근력 : 72.
민첩성 : 73.
체력 : 66.
기력 : 70.
감각 : 79.
분노 : 10.
모든 능력치가 전부 상승했지만, 가장 크게 올라간 건 기력이다. 기력 수치가 10이 넘게 오르며 70을 찍었다.
'이 정도라면 반나절은 싸울 수 있을지도.'
단전에 차오른 만화공의 오러와 혹한의 냉기의 크기도 기력 수치만큼 커졌다. 단기결전이 아니라, 장기로 싸워도 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상태라면 소드 익스퍼트 상급도 어렵지 않게 이기겠는데.'
단순히 오러가 늘어서 강해졌다는 게 아니다.
오러가 적어서 쓸 수 없었던 만화공의 다른 검술도 추가로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전보다 2배 이상 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아직 쓸 수 없는 검술이 더 많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만화공의 검술은 막대한 오러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불의 고리로 오러를 정화했다고 해도 양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더 빨리 성장해야 해.'
할 일이 많으니까.
실비아를 직계에 올려야 하고, 루난과 주디엘의 동생을 구해야 하며,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강해져야 한다. 오러만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 모두.
"후."
라온이 일어서서 창가를 보았다. 오후부터 밤새 연공을 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뜰 것 같았다.
'시험 좀 해볼까.'
연공으로 밤을 보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변한 육체와 내공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아무도 없는 공터를 찾아갔다.
가볍게 몸을 풀고, 진각을 밟았다.
쿠웅!
내리 찍힌 바닥에 발자국이 새겨지고, 모래가 비산한다. 이전과 같은 진각이지만 내공의 질이 달라 공터 전체에 소리가 울렸다.
퍼어엉!
발을 구른 힘을 허리에 연결해 검을 내리그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종잇장처럼 갈라졌다.
우우우웅!
라온의 내뻗은 칼날에 진한 붉은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봉오리 져 있던 만화공의 검술이 자유롭게 풀려났다.
펑! 퍼어엉!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같은 검격이 뿜어져 나왔다. 자격을 얻은 검사라고 해도 막지 못할 아찔한 검술의 연계였다.
쿠구구구!
화염의 칼날에서 뿜어지는 폭발적인 열풍에 라온의 주변은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초토화되어 있었다.
"후우…."
연성검술과 광아검, 만화공의 검술을 차례로 펼친 라온이 들뜬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좋은데.'
라온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노폐물이 빠져나오면서 육체와 혈도가 한층 개선되었다. 내공도 움직임도 반응이 빨라졌다.
역시 몸을 움직여봐야 한다니까.
메시지를 보는 것과 직접 몸을 움직이는 건 천지 차이다. 이렇게 직접 몸을 써봐야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자, 그럼."
라온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검을 툭 쳤다.
"검을 구하러 가볼까."
111화
도리안은 나무 뒤에서 라온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와…."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서려던 거였는데, 그런 건 한참 전에 까먹었고, 그저 감탄만 흘러나왔다.
'또 강해지신 건가?'
공기를 가르는 검날의 예리함, 대지를 짓누르는 보법의 정심함. 그 둘의 자연스러운 조화까지. 연무장에서 보던 라온의 무력이 한층 진일보한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라온이 이곳에 와서 한 일이라곤 도박해서 신나게 따고, 민트초코를 신나게 먹고, 남의 물건을 신나게 훔친 것뿐이다.
걱정과 긴장은 이쪽이 다했는데, 왜 저 사람의 검술 실력만 늘었는지 모르겠다.
'어? 오러까지?'
제대로 검을 휘두르려는지 라온이 오러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색 기운. 흡사 태양 빛이 어린 듯했다.
"으헉."
도리안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배 주머니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글칩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후우우웅!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연성검술을 펼쳐냈다. 전부 아는 초식이지만, 단 하나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찌이이잉!
갑작스레 붉은빛 칼날의 궤도가 사납게 변했다. 광아검. 5 연무장 수련생들의 몸과 마음을 찢어버렸던 흉악한 검술이었다.
화아아아아!
검의 회전이 또 한 번 달라진다. 검신 위로 새빨간 화염의 꽃이 피어나고, 가을의 한때처럼 꽃잎이 휘날린다. 공간을 잠식해가는 불꽃의 폭풍에 머리가 쭈뼛 섰다.
'저건 못 막아.'
라온의 등을 보고 노력해왔지만, 저 꽃잎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확실했다. 라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하아…."
도리안이 심호흡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도와달라고 하고 싶네.'
저 사람이 가문에 와서 힘을 빌려준다면 '그 일'도 이뤄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말을 꺼내긴 조심스러웠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그런 걸 바라고 저 사람을 따른 게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흥미였지.'
방계나, 직계가 조롱해도 당당했고, 포기라는 단어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끈기에 흥미를 가져 라온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는 진짜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활약과 대범함을 보여 직계, 방계, 봉신가, 추천생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5 연무장의 수련생 42명 모두는 라온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도리안이 두 번째 동글 칩을 꺼내 입에 넣을 때 라온이 뒤를 돌았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거냐."
"어? 알고 계셨습니까?"
"거기서 과자를 먹고 있는데 모르길 바란 거야?"
라온이 자신이 먹고 있던 동글 칩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윽!"
도리안이 남은 동글 칩을 입에 넣고, 공터로 달려갔다.
"너도 해."
"예?"
"제대로 검을 휘두른 지 한참 지났으니까. 몸 좀 풀라고."
"아, 저는 괜찮…."
"해."
"옙!"
도리안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았다. 라온이 보여주었듯이 연성검법을 펼쳤다.
"팔꿈치는 조금 더 피고, 무릎은 굽혀라. 호흡은 반의반 정도 느리게."
"예엡!"
그의 조언대로 어긋난 자세를 바로 했다.
후우웅!
제 자세를 잡은 것만으로 검에서 이는 바람이 달라졌다.
'이 사람하고 있으면 어딜 가도 괜찮겠어.'
다시 확신이 들었다. 라온과 함께 한다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아, 하분성은 빼고.'
거긴 솔직히 좀 무섭다.
아니, 좀 많이….
* * *
라온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카멜룬의 동쪽 끝에 있는 공방 거리로 향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대장간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에 거리가 후끈 달아 올라있었다.
'예전 생각이 나네.'
땀이 흐를 정도의 열기에 발칸의 숯가마에서 연공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참 힘들었는데.'
안에서 차오르는 냉기와 외부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견디느라 정말 죽을 뻔했었다.
-쯧, 본왕이 더 힘들었다. 열기는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느니라.
라스는 다가오는 열기를 밀어낼 것처럼 입김을 훅훅 불어댔다.
"흐음."
검, 도, 창 등 각종 무기를 진열해놓은 공방들을 쭉 둘러보았다.
'괜찮은데.'
검의 강도, 예기, 균형이 잘 맞춰져 있다. 실력 있는 장인이 열과 땀을 다해 만든 작품들이었다.
-괜찮다? 네놈의 눈은 옹이구멍인가? 본왕의 손톱을 다듬다가도 깨질 것들이다. 무기라 부르기도 아깝도다.
'손톱이 무슨 다이아몬드야?'
라온이 피식 웃으며 다음 대장간으로 향했다. 괜찮다고 했지, 산다고는 하지 않았다. 저 물건들이 나쁘지 않은 건 맞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검이 더 나았다. 원하는 건 이런 검이 아니다.
"도련님."
공방 거리를 전부 둘러보고 온 도리안이 과자를 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왕자님이 말씀해주신 공방은 보이지 않는데요?"
"이런 곳에는 없을 거야."
그리어는 어제 이 중앙 거리가 아니라, 골목 사이에 간판 없이 운영하는 곳이 있다고 말했었다.
'저쪽인가?'
오른쪽 라인에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다닐 법한 골목이 하나 있었다. 열기가 피어나는 걸 보면 저곳이 그리어가 말했던 공방인 것 같았다.
쩡! 쩌엉!
골목 안에서 걸어가자, 산을 쪼갤듯한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 흘러나오던 열기도 강해졌다.
'제대로 찾았군.'
쇠의 중심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외부에 있던 공방의 대장장이들과는 격이 다른 망치질이다.
대장간 앞에 놓아둔 무기들을 보았다.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닌지 정리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고 너저분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검을 하나 들어보았다.
'이건….'
화려함도, 세련됨도 없다. 하지만 양날의 균형이 완벽했고, 단단했다. 어떤 싸움에서도 버틸 것 같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흐음, 여긴 그나마 봐줄 만하구나. 물론 본왕의 발톱을 다듬다가 부러지겠지만.
라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다른 검들을 보았다. 검, 도, 창에 단검까지 전부 다른 곳과는 수준이 다른 완성도였다.
쩡! 쩡! 쩌엉!
대장간 안을 보았다. 백발의 노인이 항아리 같은 근육을 부풀리며 쇠를 내리치고 있었다. 손님이 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장인들은 다 저러나.'
숯가마에서 만났던 발칸도 그러고 이 사람도 그렇고 실력 있는 장인들은 옆에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확실히 괜찮아.'
밖에서 보았던 검들보다 이곳의 검이 월등히 뛰어났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다.
"저기요?"
도리안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대장장이를 불렀다.
"손님 왔는데요?"
"도리안."
말리기 전에 일정하게 울리던 망치 소리가 멈췄다.
"크험!"
허리를 굽히고 있던 대장장이가 일어섰다.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키와 우람한 근육. 오크를 보는 것 같았다.
"손님은 안 받는다."
뒤를 돌아 갈색 눈동자를 부라린다. 이제 보니, 오크가 아니라 오우거의 기세다.
"히익!"
대장장이 노인과 눈이 마주친 도리안이 원숭이 같은 소리를 내며 다리를 떨었다.
"돌아가라."
그는 돈도, 손님도 관심 없다는 듯 솥뚜껑만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추천을 받고 왔습니다."
"추천?"
그제야 대장장이 노인이 라온을 보았다.
"그리어 님이 이곳이 괜찮다고 추천하더군요."
"그리어? 그리어…. 설마 삼왕자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그 검에 미친 녀석이 이곳을 추천해줬다고? 그럴 리가 없을…어?"
대장장이 노인이 라온의 몸과 팔을 쭉 살피고서 턱을 갸웃거렸다.
"너, 너 뭐냐?"
"예?"
"몇 살이지?"
"15입니다."
"그리어보다도 어리잖아!"
노인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15살에 그런 검기라니!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네 몸에 검이 어려 있다. 아직 완벽하게 단련되진 않았지만, 크고, 날카로우며 단단한 검이."
"아."
라온은 파도가 치는 듯한 노인의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단련해온 검의 경지를 보고 있었다.
그리어가 소개해준 장인답게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검기를 단련할 수 있는 것이냐."
"그저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열심히 수련해서 그 경지면 세상천지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겠지. 허, 진짜 모를 일이군. 차기 오웬제일검이라도 되는 게냐?"
"아뇨. 그쪽이랑은 관련 없습니다."
"흐음, 확실히 오웬의 검은 아니야. 이 기세는… 지그하르트인가?"
"헉!"
대답은 라온이 아니라, 도리안에게 들려왔다. 녀석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장인이란 저런 것이다. 검사를 보고 그 출신조차 알아맞히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저런 장인이 있었다. 본왕의 검을….
"예."
도리안 때문에 이미 다 들킨 마당이다. 라스의 마계 썰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그하르트였나."
그가 클클 웃고서 뒤로 물러섰다.
"북방의 패자가 괴물을 키우고 있었군. 수많은 검사를 봐왔지만 너 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라온이라고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무력을 파악하는 남자다. 예의를 차리는 게 맞았다. 제대로 이름을 밝히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쿠베러드다. 죽지 못해 망치만 치는 노인이지."
"아!"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쿠베러드 제이튼. 발칸과 함께 대륙 장인에 이름을 올린 남자로 오웬과 발카르 사이에서 수많은 명품을 만들어낸 괴물 대장장이였다.
"당신이 왜 여기에…."
대장인이 이런 골목 구석에 있다니, 은퇴한 발칸이 10년 넘게 숯을 만드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룰 것을 이뤘으니, 홀로 취미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저, 저기 저는요? 저는 어떤가요?"
도리안이 옆으로 슬쩍 다가와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무얼 말하는 게냐?"
"저도 검기인지 뭔지 좀 보이나요?"
"흠,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빵빵한 볼. 너 겁쟁이로군."
"어억!"
정곡을 찔린 도리안이 휘청였다.
-저 노인네. 개코에 점쟁이인가?
'그러게.'
자신의 검기를 느낀 건 그렇다 치고 도리안이 겁이 많은 것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본왕의 성안을 보여주고 싶구나. 보자마자 바짝 엎드려서 경배를 할 터.
'웃기고 있네.'
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라스의 허여멀건 얼굴을 보자마자 성격파탄자라는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이놈! 본왕의 진짜 얼굴은 이 얼음덩어리가 아니다. 꽃! 그야말로 꽃이니라! 마계 제일의 꽃미남인 본왕이….
'아, 그래.'
라스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무시하고 쿠베러드를 보았다.
"그래서 날 왜 찾아온 게냐."
"검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검?"
"꽤 험한 전투를 할 거 같아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흠, 검을 만들어 달라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제가 아직 검사가 되지 못했고, 제 첫 번째 검을 만들어주신다는 분이 계셔서."
"어?"
쿠베러드가 우뚝 멈춰 섰다.
"저, 정식 검사가 아니라고?"
"예."
"너 대체 무얼 하고 살아온 거냐. 아직 수련생 신분에 어찌 그런 무력을…."
그는 어이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나무 상자 위에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배기 괴물이군. 어? 잠깐 그럼 검을 만들어준다는 사람이 혹시 발칸인가?"
"…."
"맞군! 그 녀석 은퇴했다더니! 돌아왔어! 크하하하!"
대답하지 않은 걸 긍정이라 받아들인 쿠베러드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심이 담긴 웃음. 발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암, 발칸이 점 찍은 검사를 가로챌 수는 없지."
그는 수염이 올라갈 정도로 활짝 웃은 뒤에 손을 펼쳤다.
"네 마음에 드는 걸 가져가라. 대충 만든 건 없으니, 무얼 가져가도 쓸 만할 거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훗날 대륙 제일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이 쓴다는데 내 검이 더 영광이지."
쿠베러드는 손을 쫙 펼친 뒤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을 그대로 들이켰다.
"저, 저도 골라도 됩니까?"
"그래. 기분이다! 겁쟁이 너도 골라보거라!"
"윽…."
도리안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만 싫다는 소리는 않고 눈을 빨갛게 물들인 채 검을 살폈다.
"음…."
라온은 어지럽게 깔린 검을 차례로 살폈다.
'격이 다르군.'
대충 만든 것 같아도 전부 희귀 등급을 가볍게 넘어갈 물건들이다. 무얼 골라도 만족하며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뭘…음?'
조금 긴 검을 살피고 있을 때 왼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꼭 무언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
지이잉!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검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어?"
검과 검 사이. 검집도, 검병도 붉은색인 기묘한 단검이 홀로 검명을 터트리고 있었다.
112화
"흐음."
쿠베러드는 검을 살피는 라온의 등을 보며 시원한 미소를 그렸다.
'세상은 멈춰있질 않는군.'
대장장이로 살며 셀 수 없이 많은 무인을 만나보았다. 어린 나이에 천재라 불리는 무인부터 일가를 이뤄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절대자들까지.
하나하나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준 무인들이었지만, 저 앞에 있는 녀석은 달랐다.
'강함의 문제가 아니야.'
15살의 나이에 저 무력. 대단한 건 분명하지만, 넓은 대륙을 뒤지다 보면 몇 명쯤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닌 그릇이 다르다.
대장장이가 둔탁한 쇳덩이를 두드려 검을 만들듯이 저 아이는 마음을 다듬어 검을 세우고 있었다.
가까이는 신검합일. 멀리는 마음의 검까지 이뤄낼 수 있는 상서로운 기질이었다.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인데….'
라온의 무력은 대충 익스퍼트. 수많은 벽을 뚫고 어떻게 정신만 저 경지에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지그하르트가 다시 한번 세상을 울리겠군."
쿠베러드는 그 재밌는 세상을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재밌는 손님이 오니 싸구려 술도 달달했다.
우우웅.
갑작스레 들린 진동 소리에 술병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탁자 위에 있던 붉은색 단검이 울부짖었고, 라온이 그 검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자, 잠깐."
저걸 만져서는 안 된다. 구석에 빼둔 검이 왜 저기 있는 건지 모르겠다.
"멈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붉은 단검은 이미 라온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었다.
"이런 젠장!"
"어억!"
쿠베러드가 벌떡 일어나서 어벙하게 서 있던 도리안을 데리고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이러십니까. 두 개를 고르려던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만 고르려고…."
"저기 보이느냐?"
"어? 저 단검 뭡니까? 뭔데 저런 기운이…."
도리안이 마른침을 삼켰다. 라온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기묘한 붉은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요검(妖劍)이다."
"요, 요검이요?"
요검이란 괴이하며 요망한 검.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검을 쥔 사람을 조종하려 드는 사이한 물건이었다.
"젠장."
쿠베러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정신이 단단히 여물지 않은 아이가 요검을 들었으니, 검의 요기에 더 쉽게 물들게 뻔했다.
"요기가 머리에 닿기 전에 멈춰야 한다! 겁쟁이. 검을 뽑아라!"
"어…."
옆에 있는 망치를 들고 도리안을 재촉했다. 하지만 녀석은 검을 뽑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무얼 하는 게냐! 지금 멈추지 않으면 위험할…."
"아니, 멈출 필요가 없는 게. 도련님은 평소랑 같은데요?"
"뭐? 저렇게 요기를 줄줄 흘리는…엉?"
쿠베러드가 입을 떡 벌렸다. 요기가 넘치는 건 맞다. 아주 활활 피어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요기가 검 주변에서만 퍼질 뿐 라온에겐 접근조차 못 했다.
끼이이잉!
요검이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이전처럼 괴이한 검명이 아니라, 목줄 잡힌 개가 지르는 비명 같았다.
"괘, 괜찮으냐?"
그 말에 단검을 보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정기가 어린 붉은 눈. 요기에 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맑은 눈빛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단검 평범한 물건이 아니군요."
"허…."
쿠베러드가 헛바람을 흘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너, 너 진짜 뭐 하는 놈이냐?"
* * *
-감히.
라스의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하등한 벌레 주제에 본왕의 빙의체를 노리다니.
그는 진심 어린 분노를 일으켰다. 이글거리며 피어나는 푸른 냉기가 단검에서 치솟은 요기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끼이이이잉!
단검이 라스의 냉기에 짓눌려 비명을 터트렸다.
-아예 박살을 내버리겠노라!
라스는 창칼처럼 얇게 저민 냉기를 단검에 밀어 넣었다. 검 자체를 죽이려는 것 같았다.
'그만.'
-뭐?
'거기까지 해.'
-왜냐! 본왕의 먹이를 뺏으려는 놈이니라! 본왕이 없었다면 네놈은 단검의 요기에 먹혔을 것이야!
'난 네 먹이도 아니고, 네가 없어도 이런 검에는 먹히지 않아.'
-요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이놈이 본왕의 발가락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에게는….
'너도 날 못 뚫었는데, 이런 거에 뚫릴까.'
-억….
라스의 분노가 단숨에 멈췄다. 할 말이 없는지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맞지? 그니까 그냥 놔둬.'
-차, 참 아프게도 말하는구나. 네놈은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본왕이 수천 년에 걸쳐 씹어먹고, 뜯어먹고….
"이 단검은 뭡니까?"
-좀 들어!
라온은 떠들기 시작하는 라스를 무시하고 쿠베러드에게 다가갔다.
"그, 그건…."
쿠베러드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자신과 단검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만든 실패작이다. 아까 말했던 대로 요검이지."
"요검. 확실히 요기가 느껴지더군요."
"뿜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네 몸을 집어삼키려 들었을 텐데."
"견딜 만했습니다."
"허…."
사실을 말했지만, 쿠베러드는 이해할 수 없는지 허탈해 보이는 신음을 흘렸다.
"요검은 요기가 깃든 검이다. 단순히 말해서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이 검에 깃든 것이지. 그 검 안에는…."
쿠베러드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원한이 어려 있다. 그것도 지독하리만큼 끈적한 원한이."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앉거라."
쿠베러드가 테이블 앞에 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저, 저도 들어도 되죠?"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폭신한 의자를 꺼내 몸을 기댔다.
"남부에 시렌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 있다. 오셀룬이라는 나무를 신성시하던 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지."
아는 마을이다. 로베르트 가문의 세력권에 살짝 벗어나 있는 작은 마을로 사람들이 선하고, 의심이 적어 도주로로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 마을에 백혈교의 교도들이 들이닥쳤다."
"백혈교…."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하필 그놈들이라니.'
백혈교는 에덴, 남북맹과 함께 오마에 속해 있는 거대 종교 단체다.
대륙을 하얀 피로 물들인다는 제 1교리를 바탕으로 세상 모든 것을 습격하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놈들의 집단이다.
"그럼 시렌 마을은…."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반은 그 자리에서 죽고, 반은 납치당해 어딘가로 끌려갔다더군. 마을의 정령이라던 오셀로 나무까지 베어갔다. 남은 건 하얀 피뿐이었지."
백혈교의 습격이 일어난 곳은 붉은 피가 아니라, 하얀 피가 대지를 적신다. 놈들의 주술 중 하나였다.
"이 검은 내가 가지고 있던 운석 조각과 그 자리에 남아있던 오셀룬의 가지를 가지고 만든 검이다.
쿠베러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라온의 손에 잡힌 단검을 보았다.
"검을 말입니까?"
"그래. 내 딴에는 위령비 대신 이 검으로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려 했지. 하지만…."
그때 생각이 났는지 쿠베러드가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완성되자마자 하얀 검신과 검병이 붉게 물들었다. 내 생각과 반대로 시렌 마을 사람들의 원한이 그 검 안에 담겼지. 그것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원한이."
"확실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검에는 어마어마한 요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요기에 홀려 칼을 휘둘렀을 것이다.
"원래 착한 사람들이 화나면 무섭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자라 불린 사람들도 그 요기를 견디지 못해서 내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걸 잡을 수 있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구나."
"음…."
단검을 검집에서 뽑아보았다. 검집과 검병만이 아니라 검날까지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의 원한을 기억하겠다는 것처럼.
우우우웅!
붉은 검신이 진동하며 요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검집에 담겨 있을 때보다 더 지독하고 사이한 기운이 손등 위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치이이잉!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심장을 휘도는 다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존재의 격을 끌어 올렸다.
끼이잉!
단검의 요기는 라스에게 밀려난 것처럼 자신의 격에 짓눌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허! 정말이지."
쿠베러드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양파 같은 놈이로다.'
이만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검사 자격도 얻지 못하고,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라고는 생각되질 않았다.
"영혼을 위로하고자 만든 검은 복수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위령비로도 쓰지 못하지. 봉인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까 반 정도는 납치되었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백혈교는 원래 반은 그 자리에서 죽이고, 반은 납치를 해간다. 그 자리에도 시체는 원래 마을 사람에서 절반밖에 없었어."
라온이 억울하다는 듯 울어 재끼는 단검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전생의 어린 시절. 자신도 로베르트의 인간들에게 납치를 당했었다.
이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모두 죽기까지 했으니, 자신보다 더한 원한을 가졌을 것이다.
우우웅.
흐느끼는 듯한 단검의 울음소리를 듣자 까칠한 사포로 가슴을 긁는 듯했다.
"나는."
라온이 다시 눈을 뜨고, 단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일을 이루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네 복수를 도와주기는 힘들다. 다만 혹시라도 백혈교와 부딪치게 된다면 네가 바라는 일을 해주마."
단검의 울음소리가 고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가겠나?"
단검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생각을 하는 듯 검날을 떨었다.
우우우웅!
단검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요기가 흘러나왔지만, 이전처럼 해가 되는 기운이 아니다.
찌이잉!
회전하는 불의 고리와 공명하는 소리. 청아한 검명이었다.
"거, 검명?"
쿠베러드는 시원한 검명을 터트린 단검과 라온을 보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갔다.
"전 이걸로 고르겠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단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그걸 가져가겠다는 거냐?"
"안 됩니까?"
"하, 전설급 무기를 당당하게 가져가겠다는 놈은 처음이로군."
어처구니없다는 말과 달리 쿠베러드의 표정은 시원하고 만족스럽게 보였다.
-뭣이 어째? 그 요망한 놈을 고르겠다고?
'그래.'
-그놈은 기생충이다! 본왕의 것을 노리는 기생충을 몸에 두다니! 정신이 나간 것이냐!
'기생충이라….'
라온이 뚱한 눈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이냐! 본왕을 왜 그런 무엄한 눈으로 보는 것이야!
'기생충이 하나나, 둘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아서.'
-기, 기생충 둘? 기생…. 설마! 지금 본왕을 말한 것이냐?
'맞잖아. 너도 이 검처럼 내 몸을 노렸으면서.'
-이런 정신 나간! 본왕은 분노의 군주로서 마계의 북방을 통째로….
'아니. 군주고, 지랄이고. 내 몸을 노리다가 실패해서 달라붙어 있는 건 사실이잖아.'
-다, 달라붙어? 본왕이? 으으으윽! 라온 지그하르트! 다 뱉으라고 입에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다! 본왕이 태어난 이후 이런 모욕은 처음이니라!
'달렸으니 말을 하지.'
라온은 폭주하는 라스를 놔두고, 쿠베러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위령비로 세우려 만든 검이니, 이름은 짓지 않았다."
"그럼 제가 지어도 되겠습니까?"
"생각난 게 있나?"
"장인께서 그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진혼. 진혼검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요기를 흘리는 진혼검이라. 오묘하군."
그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가져가라. 다만 네가 아까 했던 말을 지키거라."
"물론입니다. 제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오마와는 계속 부딪칠 테니까요."
"와, 요검. 요검을 얻다니…."
도리안은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듯 요상한 안경을 낀 채로 과자를 씹어먹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진혼검을 허리 뒤편에 착용한 뒤 쿠베러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뭘 하느냐?"
"예?"
"검을 골라야지."
"아니…."
"난 네게 검을 준다고 했지. 단검을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
그는 자신에게 검도 한 자루 주려는 것 같았다.
"정말 검도 주시려는 겁니까?"
"지지만 않으면 된다. 장인이 검사에게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쿠베러드는 아까 자신이 유심히 보고 있던 검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발칸 녀석을 보러 지그하르트에 놀러 갈 테니, 박대하지 말고."
"물론입니다. 저희 집이 요리 하나는 잘합니다. 꼭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지."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무슨."
두 사람은 골목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라온이 고개를 숙인 뒤 대장간을 나갔다.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안쪽에서 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나 안 골랐어요!"
113화
"진짜 너무하십니다!"
도리안이 콧김을 길게 내뿜었다.
"절 아예 잊어버리시다니요!"
"미안. 딱 멋지게 헤어지는 분위기였잖아. 네가 있다는 걸 잊었어."
"끄윽, 내 존재감이 그 정도였다니…."
도리안이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좋은 검 얻었잖아. 그거면 된 거지."
라온은 도리안의 허리춤에 걸린 두 번째 검을 가리켰다. 그는 결국 쿠베러드가 제작한 검을 받아서 공방을 나올 수 있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너나 나나 검을 주렁주렁 메고 있으니, 좀 없어 보이는데."
현재 자신은 지그하르트에서 보급받은 검과 쿠베러드의 검 그리고 진혼검을 착용하고 있고, 도리안도 검을 두 개 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겉멋이 들었다고 혀를 찰 모습이었다.
-흥. 잘 알고 있구나. 약한 놈들의 특징이 바로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다는 것이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그저 두 손으로 한 지역을 정복하고….
라스는 아까 기생충 발언에 화가 났는지 아직도 냉기를 풀풀 뿌리고 있었다. 어쨌든 말이 길어져서 무시했다.
"뭐, 어때요. 쌍검술을 쓰는 것 같아서 멋있는데. 어?"
"음?"
카멜룬 정문으로 나가려고 할 때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단과 마주쳤다. 가슴에 사자 문양이 그려진 갑옷. 오웬의 기사단이었다.
"오! 자주 만나는군."
기사단의 앞에 있던 금발의 남자가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었다.
"그러네요."
라온은 그리어가 방긋 웃으며 내미는 손을 마주 잡았다.
"덕분에 좋은 검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도리안이 이번에 구한 검이 더 잘 보이도록 허리를 틀었다.
"괜찮은 검을 구한 모양이군."
왕자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 마음에 드는 검을 얻었습니다. 그런 분이 이곳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오. 바지를 붙잡고 말려도 끝내 나가서 저곳에 자리를 잡으셨지."
그는 자신의 허리에 걸린 검을 보며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역시 예상한 대로구려."
"예?"
"그분은 내가 추천을 했다고 검을 주는 분이 아니오. 당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검을 내어 준 걸 테지. 장인들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걸 아시지 않소."
그리어는 역시 대단하다느니, 내가 인정한 검사라느니 말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싸워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시오?"
"일단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함께 가시겠소? 우리도 하루는 북쪽으로 가야 하니까."
그가 뒤에 있는 기사들을 가리켰다. 전에 버렌과 무승부를 냈던 세툰 빼고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죠."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상관없을 것 같았고, 그리어 덕분에 진혼검을 얻었으니, 어느 정도의 사연은 말해주고 싶었다.
"잘 생각했소!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겠어!"
"왕자님."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적발의 기사가 그리어의 옆으로 다가갔다.
"저희는 임무 수행 중입니다. 함부로 동행을 늘려서는…."
"이 친구가 바로 라온이오. 라온 지그하르트! 도움이 되면 됐지. 문제가 생길 일은 없소."
"음?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말에 기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파충류가 먹잇감을 살펴보듯 전신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라온은 담담하게 그의 눈빛을 받았다. 기사들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무력을 살피지 못한다. 끽해야 소드 유저 최상급 수준으로 볼 거다.
반면 자신은 저들 모두의 실력을 한눈에 파악했다. 그리어는 소드 유저 최상급. 나머지 기사들은 익스퍼트 중하급 수준이었다.
기사의 눈빛에 옅은 실망이 스치는 게 보였다.
'예상대로네.'
기사들은 자신의 진짜 무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듣던 것보다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표정도 감추지 못하다니, 기사라는 이름이 아깝도다.
'아직 젊잖아. 경험을 더 쌓으면 달라지겠지.'
-네놈은 젊다 못해 어리지 않나.
'난 좀 다르고.'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특별하다는 건 본왕 같은 존재를 말함이다. 절대자로 태어나 절대자로 살아간 고귀하고 우아한….
'하아.'
어떻게 해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 자랑을 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듣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그럼 갑시다. 그분께 어떻게 검을 받았는지도 좀 말해주시오. 보내놓고도 궁금하여 계속 생각이 났소."
그리어가 빨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라온은 피식 웃고 도리안의 어깨를 쳤다.
"가자."
* * *
고위 귀족이나 왕족 혹은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명사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암시장 지하 4층의 귀빈실.
은은한 조명 아래 검은 드레스를 입은 고고해 보이는 외모의 여성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발카르의 왕녀 제이나였다.
그녀가 지루한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보랏빛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 내려오는 가는 눈매의 여성이 들어왔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흑운의 실세인 오리엔 님을 보는데 이 정도는 상관없죠."
흑운은 대륙 전체에 가지를 뻗은 정보 단체다. 이들이 모르는 정보는 신조차 모른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세라니, 전혀 아니에요."
오리엔이라 불린 여성이 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살짝 턱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요청하신 정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접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서면으로…."
"여기서 말씀해주시죠."
"알겠습니다."
오리엔이라 불린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폈다.
"말씀해주신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직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제이나가 깜짝 놀라 본인도 모르게 반말을 뱉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그하르트 직계에 라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예?"
"정보 정확한 거 맞아요?"
너무 당황하여 왕녀로서 지켜야할 말투조차 잊어버렸다.
"맞습니다."
오리엔은 당황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음, 지그하르트가 워낙에 폐쇄적인 집단인지라 많은 정보는 없지만, 직계와 상위 방계, 봉신가의 이름과 얼굴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그하르트에 라온이라는 이름의 직계는 없어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 안 된다고!"
제이나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치며 일어섰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라온은 지그하르트의 직계답게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냈고, 오웬의 삼왕자인 그리어와의 친분도 보여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리어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라온을 만나기 전에도 그가 지그하르트의 신성이니, 검술 천재니, 훗날 가주가 될 거니 떠들어댔으니까.
'그럼 직계가 확실하잖아. 놈도 분명 직계라고… 어?"
제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없어. 그러고 보니 둘 다 직계라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분위기를 그렇게 끌고 간 거지 실제 직계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망할! 놈은 방계였어!'
이 기묘한 상황을 설명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
방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했다는 생각에 숨이 가빠왔다. 당장 놈을 잡아 무릎 꿇리고 싶었다.
으득.
제이나가 이를 갈며 앞에 앉은 오리엔을 노려보았다,
흑운의 단점이 이거다. 그들은 묻는 질문 외에는 답을 해주지 않는다. 분명 라온이 방계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하나만 더 묻죠."
"가격이 추가되는데요?"
"상관없어요."
오리엔이 말하라는 듯 손을 펼쳤다.
"지그하르트에 속한 라온이라는 방계의 정보."
"나이는 15세. 말씀대로 방계 출신으로 현재 지그하르트 5 연무장의 수련생 대표를 맡고 있어요.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과 대련에서 승리했고, 남북맹에 투신하려던 설호채라는 산적들을 토벌한 적이 있죠. 그리고…."
그녀는 자잘한 정보들을 더 말해주었지만, 그 입에서 에덴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후욱…."
제이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품에서 꺼낸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에 던지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장사 참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오리엔은 비꼬는 말을 칭찬처럼 받아들이며 빙긋 웃었다.
"흥."
제이나는 방을 나간 뒤 쿵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씨이이이발!"
멀리서 분노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카르의 금지옥엽을 가지고 논 지그하르트의 방계라…. 재밌는데?"
오리엔이 손가락을 튕기자, 조명 아래의 검은 그림자가 물결쳤다.
"라온 지그하르트에 대한 정보를 모아와."
그녀의 붉은 입술이 초승달처럼 고운 선을 그렸다.
"이 사람 오랜만에 보는 진짜 같거든."
* * *
카멜룬에서 하루거리에 떨어져 있는 낮은 언덕.
쌀쌀한 밤공기를 녹여주는 모닥불 앞에 라온과 그리어, 도리안이 앉아 있었다.
라온은 기사들이 정찰을 떠난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리어에게 요검을 얻었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첫 마디만 뗐고, 나머지는 전부 도리안이 떠들어댔다.
"진짜 제 눈으로 보고도 못 믿었다니까요. 검에서 붉은색 요기가 문어 다리처럼 펼쳐지는데…."
"오오, 엄청났겠구려."
"그걸 직접 보셨어야 해요. 저도, 장인님도 깜짝 놀라서 뒤로 자빠졌거든요, 말로만 들었지 요검은 처음이었으니까."
"하…."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자를 먹고 있었으면서 뭘 놀랐다는 건지.
"마지막에 도련님이 '나와 함께 가자!' 하니까 검이 찌잉! 하고 검명을 터트린 건 정말 그림 속 한 장면이었다니까요"
"우오오!"
그리어가 눈빛을 빛내며 탄성을 흘렸다. 역시 저 남자는 왕자보다 기사나 영웅이 어울렸다.
"대단한 경험을 했군. 부럽다는 생각이 드오."
그리어는 허리 뒤편에 걸어놓은 진혼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다만 함부로 보여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슬픈 이야기기도 하구려. 백혈교의 사악함이 대륙 전체로 뻗어가고 있으니."
"맞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단체의 특성상 전파가 빨라서 놈들의 신도가 없는 장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임무도 백혈교와 관련이 있소."
그리어가 사자의 문양이 그려진 검을 툭툭 두드렸다.
"예?"
"백혈교 지부에 있던 물건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일이오. 그래서 기사들을 저리…."
"잠깐만."
라온이 그리어의 말을 막고 일어섰다.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수십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 무슨 일이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 기사들 아니에요?"
벌써 겁을 먹은 도리안의 눈동자가 진자처럼 흔들렸다.
"숫자가 달라. 그리고 기사들도 그 기척을 느끼고 돌아오고 있어. 왕자님. 일단 무장을 갖추시죠."
"알겠소."
그리어는 자신을 믿는 듯 바로 투구를 착용하고, 일어섰다.
"왕자님!"
"큰일 났습니다! 백혈교 무리가…음?"
잠시 후 도착한 기사들은 전투 준비를 끝낸 라온과 왕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습격이 온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라온 검사가 알려주었소. 백혈교가 오는 것이오?"
"아, 예."
기사들은 벙찐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교도의 숫자만 50명이 넘고, 사제가 다섯, 주교도 하나 있습니다!"
"음…."
그리어는 숲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스산한 소리를 들으며 검병에 손을 올렸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기사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왕자를 지키듯 앞을 막았다.
"미안하게 되었소.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리어가 뒤를 돌아 라온과 도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놈들이 설마 카멜룬과 오웬의 영향권 안에서 들이닥칠 줄은 몰랐소,"
"괜찮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젓고, 기사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
'물건을 노리고 왔나 보군.'
왕자는 백혈교의 어떤 물건을 운송 중이라고 말했다. 저놈들은 그 물건을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
드스스스.
기괴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숲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려오는 시꺼먼 코트를 입은 백혈교도들이 튀어나왔다.
검은 코트에 각각 한 줄과 두 줄의 백선이 그려진 자들도 있었다. 사제와 주교다. 평범한 교도들보다 훨씬 뛰어난 무력이 느껴졌다.
"끄아아악! 지, 진짜야!"
백혈교의 등장에 도리안이 비명을 터트렸다. 이빨을 달달 떨었지만, 용케 물러서진 않았다.
"후…."
라온이 가는 숨을 뱉으며 새로 얻은 검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빨리 약속을 지키게 될 줄은 몰랐군.'
세상일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검을 뽑으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웅!
허리 뒤편에 매단 진혼검이 언덕 전체를 울릴 정도의 검명을 터트렸다.
'뽑으라는 거냐?'
그 말이 맞다는 듯 진동이 더 심해졌다.
'복수는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다는 건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데루스 로베르트에 대한 복수를 남에게 미룰 생각이 없었다. 잘 통한다고 생각하며 진혼검을 뽑았다.
쿠구구구!
피로 적신 듯한 뻘건 칼날 위로 원망의 요기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114화
전생의 삶에서 오마 중 넷과 만나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세력을 꼽으라면 백혈교가 무조건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남북맹은 통행료로 넘어가거나 말이라도 통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백혈교에게는 언어라는 게 먹히질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료의 배를 뚫고, 목을 잘라서라도 전진하는 그야말로 미친놈들의 모임이었다.
"모두 죽여라."
두 개의 백색 줄이 그어진 코트를 입은 주교가 새하얀 손을 뻗자, 백혈교도들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 그럼….'
라온은 진혼검을 역수로 쥐고 만화공의 기운을 운용했다.
'네 원한을 한 번 풀어보자.'
거세게 진각을 밟으며 백혈교도를 향해 뛰어들었다.
치이잉!
가장 앞에 있던 백혈교도가 초승달을 갈아 놓은 듯한 곡도를 꺼냈다. 백혈교도의 주무기 시미터였다.
놈은 그 흔한 기합성조차 없이 라온의 목을 향해 시미터를 내리쳤다.
'이럴 줄 알았지.'
백혈교도는 일격에 죽이는 걸 자비라 생각하여 목이나 심장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지독할 정도로 살기 짙은 공격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피하기 쉬웠다.
라온이 부드럽게 무릎을 굽혔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시미터를 피한 뒤 진혼검을 그었다.
푸칵!
그림을 그리는 듯한 가벼운 손놀림에 백혈교도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허."
라온이 진혼검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뭐지?'
가볍게, 그냥 부드럽게 그었을 뿐인데 상대의 목이 잘려나갔다. 말이 안 되는 예리함이었다.
'들고만 있어도 베일 것 같아.'
천년 묵은 나무의 뿌리처럼 퍼져나가는 요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계속 가보자.'
진혼검이 대답을 하듯이 검명을 울렸다.
터엉!
라온이 땅을 박찼다. 기사들에게 달려드는 백혈교도의 품으로 파고들어 진혼검을 내리쳤다.
촤아아악!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절삭음과 함께 백혈교도 다섯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우우우웅!
아직 피가 모자란 건지 진혼검의 울림이 한층 강해졌고, 요기의 파동도 짙어졌다.
라온이 붉은 눈을 빛냈다. 요기에 몸을 맡기듯 전장에 뛰어들어 백혈교도를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검은 양떼 속을 노니는 붉은 늑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멈춰라."
홀로 20명이 넘는 백혈교도를 베었을 때 흑색 코트에 검은색 줄이 그어진 놈이 앞을 막아섰다. 교도의 위에 있는 사제였다.
우우웅.
사제의 손에 들린 시미터가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죽어."
사제의 시미터가 목을 노리고 쇄도해왔다.
'뻔하군.'
이놈 역시 교도와 다를 바 없는 공격을 해왔다.
라온은 왼발을 뒤로 뻗었다. 시미터가 땅을 후려친 순간 진혼검을 내질렀다.
퍼엉!
그저 앞을 향해 뻗어냈을 뿐인데 사제의 왼쪽 가슴이 터져버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위력이었다.
'미쳤군.'
진혼검은 계속해서 복수를 원했다. 사제의 피를 마셔도 목마른지 계속해서 건조한 울음을 터트렸다.
"흠."
라온은 바닥을 적시는 사제의 핏물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피의 색이 이상하구나. 물을 섞은 듯 연해 보인다.
라스의 말대로다. 사제의 혈흔은 연한 홍색. 빨간 물감에 하얀 물감을 조금 섞으면 나올 듯한 빛이었다.
'이게 백혈교의 특징이야.'
백혈교도는 피의 향연이라는 연공법을 통해 심장에 혈기라는 기운을 모으고, 인간의 피를 마셔 그 힘을 강화한다.
흡혈을 많이 할수록, 연공을 많이 할수록 놈들의 심장과 피는 하얗게 물들어간다.
즉, 피와 심장이 하얀색에 가까울수록 백혈교도는 더 강한 지위와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미친놈들이로구나.
'그래.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놈들이지.'
라온은 기사들을 몰아붙이는 백혈교도를 보고 땅을 박찼다. 적발 기사의 목에 시미터를 날리는 사제의 좌측으로 짓쳐 들었다.
"음!"
사제가 빠르게 반응하고,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퍼억!
진혼검의 예리한 검격에 사제의 팔이 통째로 날아갔다.
"끄어억! 네, 네놈!"
라온은 사제가 당황하여 뒷걸음질 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따라붙어서 목을 베어버렸다.
"허억…."
넘어갈 듯한 숨소리에 옆을 보니, 간신히 목숨을 구한 적발 기사가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라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진혼검을 그을 때마다 백혈교도가 하나에서 둘씩 사라졌다. 붉은 칼날에서 무시무시할 정도의 살기가 끝없이 휘몰아쳤다.
"안 되겠군."
왕자와 기사 둘을 홀로 압도하던 주교가 몸을 돌렸다. 그림자가 이동하는 듯한 기괴한 보법을 사용하여 라온의 앞에 이르렀다.
"네놈부터 죽여야겠어."
"할 수 있겠어?"
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녹전귀나 레이든보다 강한 무력이 느껴졌지만,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보여주지."
피로 물든 시미터가 반원을 그리며 목을 노려왔다.
후웅!
여유롭게 허리를 젖혔다. 시미터의 칼날에 베인 금빛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렸다.
'이놈도 같군.'
목과 심장을 노리는 백혈교의 방식은 주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찌이잉!
몸을 세울 때 주교가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폈다. 검지손가락에서 눈송이처럼 새하얀 기운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손가락의 마나 회로에서 오러를 쏘아내는 혈지탄이라 불리는 무학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라온이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사나운 요기에 반으로 갈라진 혈지탄이 뒤에 있던 바위를 부쉈다.
주교가 팔을 뒤로 뺄 때 놈의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내리치는 시미터를 향해 진혼검을 휘둘렀다.
캬아앙!
주술이 섞인 시미터와 요기가 어린 진혼검의 격돌에 언덕 위에 악마의 비명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찌지지직!
진혼검의 요기가 서광처럼 짙어진다. 적색 빛살이 되어 주교의 시미터를 튕겨냈다.
"으음!"
작은 단검에 밀린 게 화가 난 건지 주교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놈 어디서 온 누구냐!"
"미안하지만, 내 입으로 정체를 밝힐 수는 없어서."
"네놈의 피는 내가 마셔주지."
주교가 쫙 펼친 왼손을 허리에 두고, 시미터를 위로 들었다. 강한 압력이 쏘아지는 기수식. 극공의 기세였다.
'받아주지.'
라온이 무릎을 굽힌 채 눈빛을 좁혔다. 비전의 단검술을 사용하려 할 때 진혼검이 요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울음소리와 함께 퍼져나간 요기가 허공에 곡선의 궤적을 그렸다. 춤사위 같기도 했고, 나비의 날갯짓 같기도 했다.
'저걸 따라 하라는 거냐?'
그렇다는 듯 진혼검이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불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다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요기로 만들어진 길이 눈에 선명하게 어렸다.
'저건….'
요기가 깎아낸 길이 보인다. 저건 검무. 시렌 마을 사람들이 신목 오셀룬에 바치는 풍요의 검무였다.
세상의 안정을 기원하는 풍요의 검무가 원수의 목을 갈라낼 복수와 원망의 검무로 변해 있었다.
"죽어라."
주교의 손과 검에서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칼날로 가득한 벽이 밀어닥치는 듯한 모습. 주교의 비기 백혼벽이다.
"좋다."
라온이 진혼검을 고쳐 잡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진각을 밟았다. 하체에서부터 솟구치는 열화와 같은 기운에 허리의 회전력을 담았다.
만화공의 오러와 진혼검의 요기가 하나의 기운처럼 어우러지며 허공에 그려진 검무의 궤적을 질주했다.
치이이잉!
진혼검이 나아갈 때마다 검날에 담기는 기운이 폭주하듯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검을 내지른 순간 벼락 소리와 함께 진혼검의 칼날에서 무시무시한 검격이 뻗어 나왔다.
콰아아아!
오러와 요기가 조화된 기운은 백혼벽을 단숨에 찢어발기고, 그 뒤에 있던 주교와 백혈교도들을 휩쓸어 버렸다.
"으음."
라온의 다리가 잠시 휘청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오러를 소모했는지 머리가 멍했다.
"후우…."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그라드는 모래 먼지 아래 남은 건 오직 핏물뿐이었다. 백혈교도도, 사제도, 주교도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졌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리며 진혼검을 보았다. 붉은 칼날은 백혈교도가 죽으며 남긴 혈기를 빨아들이며 더 짙은 적색 빛을 뿜어냈다.
'네 원한이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구나.'
풍요의 춤을 복수의 춤으로 바꿀 만큼이나.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어억…."
"아…."
그리어와 기사들은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자빠져 있었다. 너무 놀라서 말조차 잊었는지 입만 뻐끔거렸다.
"도, 도, 도련님."
도리안이 오한이 든 사람처럼 사지를 떨며 기어 왔다.
"방금 그거 뭡니까? 위, 위력이 무슨 마법이던데?"
"글쎄."
라온은 진혼검의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무시무시한 위력보다 더한 슬픔이 담긴 검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 * *
꿀꺽!
기사 로레일은 당당하게 서 있는 금발의 소년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게 뭐지?'
한 번의 검격으로 백혈교를 몰살시키다니, 익스퍼트 상급. 아니, 최상급이나 가능한 무력이다.
'그걸 저, 저 아이가 했다니….'
땅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풀렸다. 허술하고 미숙해 보였던 그의 눈동자가 사신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분명 익스퍼트도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카멜룬에서 본 라온 지그하르트의 무력은 자신에 한참 미치지 못했고, 왕자보다도 아래였다.
그런 주제에 검을 주렁주렁 매단 걸 보고, 겁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생각했다.
천성이 착한 왕자가 사람을 좋게만 보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어.'
하룻강아지는 자신이었다.
라온은 자신의 눈을 감쪽같이 속일 정도의 고수였다. 단검 하나로 저 정도인데 검을 뽑으면 어떤 실력을 발휘할지 상상조차 안 됐다.
"멍청한 놈….'
로레일이 본인의 한심함을 자책할 때 왕자가 일어섰다.
"허,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군."
삼왕자는 헛웃음을 터트리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나도 누군가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련을 해왔는데, 아예 쫓아갈 수 없는 차이가 벌어진 것 같소."
왕자는 시원한 성격답게 라온의 무력을 인정했다.
"정말 고맙소.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
그는 신분을 잊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다만 그 모습을 말릴 수 없었다. 정말 라온이 없었다면 크게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로레일이 벌떡 일어나서 라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기사들도 주춤거리며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라온는 언덕 뒤쪽의 푸른 산을 올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었어도 해결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 * *
라온은 기사들과 함께 싸움이 끝난 전장을 정리한 뒤 다른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전과 달리 기사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이전처럼 은근한 무시가 아니라 경외가 어린 눈빛이었다.
'드러내야 대우를 해주는군.'
-당연하다. 인간만큼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동물이 없느니라.
꽃팔찌에서 튀어나온 라스는 마족보다도 더하다고 중얼거렸다.
'뭐, 그건 그렇고 이 검 생각보다 사납고 위험하네.'
붉게 번쩍이는 진혼검의 칼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혈교를 만났을 때만 그렇긴 하지만 검에 어린 원한은 깊고도 짙었다.
-흥. 그래 봐야 저급한 물건일 뿐이니라. 본왕이 네게 힘을 주었다면 이 지역이 통째로 얼어붙었을 것이야.
'근데 못하잖아.'
-윽….
'못하는 건 말하지 말자.'
-모,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니라. 본왕이 원하는 것은 네놈의 육체와 영혼이니까!
'하여튼 핑계는.'
-핑계라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수많은 마족이 찾아와 힘을 내려달라고 애원했었다. 그중 한 명에게 힘을 주고….
'조용히 좀 해봐.'
라스가 지루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진혼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붉은 칼날에 어려 있던 기운이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기생충이 본왕의 몸을 훔치려 들지 않느냐!
'일단 이건 네 몸이 아니라, 내 몸이고. 이 녀석에게 해를 끼칠 의도는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진혼검이 뿜어내는 기운은 요기가 아니라, 정심한 기운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올라왔다.
[진혼검이 당신에게 정화한 혈기를 바칩니다.]
115화
라온은 메시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화한 혈기라….'
그냥 혈기가 아니라, 정화한 혈기. 진혼검은 혈기에 어려 있던 사이한 기운을 본인이 먹어치우고, 남은 정심한 기운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 같았다.
'확실히 순수한 기운이야.'
실제로 진혼검이 바친 기운은 마나석에 담긴 마나 이상으로 높은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전혀 해가 되지 않는 상서로운 기운이었다.
'받아들인다.'
막고 있던 오러의 벽을 내리자, 진혼검이 바친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기운이 마나 회로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정화한 혈기가 육체와 정신을 강화시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올랐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정심한 기운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희열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특성 <요기 적응>이 생성되었습니다.]
특성이 생겨났다며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요기 적응(1성)>
본인의 육체나 무구로 요기를 사용할 때 더 적은 오러와 정신력으로 더 많은 요기를 운용할 수 있다.
라온은 요기 적응의 내용을 보고 눈을 빛냈다.
'괜찮은데?'
요기가 깃든 검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정신력과 오러 소모가 심했다. 저 특성이 있다면 진혼검을 들고 싸울 때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잠깐.
라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 라스가 눈앞으로 치솟았다. 푸른 냉기에 잠긴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었다.
-왜 특성이 생긴 것이냐.
'네가 전에 말했잖아. 시스템은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진혼검을 쓰는 날 위해서 저 특성을 만들었겠지.'
-그 특성이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 같으냐. 본왕이다! 본왕의 본체에서 힘을 빼 온 게 뻔하지 않느냐!
'그렇겠지. 뭘 당연한 걸 물어.'
-끄으으윽!
라스가 이를 갈았다. 푸른 불꽃 위로 분노가 잔뜩 어린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하다니까.'
라온이 확인한 메시지를 닫고 있을 때 진혼검이 가는 진동을 일으켰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거냐?'
우우웅!
그 말이 맞다는 듯 진혼검이 선명한 울음을 흘렸다.
'넌 기생충 1호와 달리 확실히 도움이 되네. 기생충 2호라는 말은 취소하마. 나도 잘 부탁한다.'
우웅!
고맙다는 듯 진혼검이 몸을 떨었다.
-보, 본왕이 기생충 1호? 기생충은 네놈이다! 본왕의 능력을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는 등골 브레이커이니라!
'그렇구나.'
-끄아아아악!
능글맞게 대답하자, 라스가 악을 내지르며 분노와 냉기를 일으켰다. 화산처럼 폭발한 푸른 냉기 위로 분노의 감정이 뒤덮여 밀어닥쳤다.
고오오오!
이전에 받아들였던 라스의 분노가 잔불처럼 타올라 정신을 짓눌렀다.
"후욱…."
수천 개의 바늘로 모공을 찌르는 듯한 지독한 고통. 자신이 성장하듯 라스도 힘을 회복하고 있다. 그에 맞서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했다.
영혼의 격이 오르고, 전신에 열기가 휘몰아치자 라스의 분노와 냉기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확실히 상성이야.'
불의 고리와 만화공은 냉기와 분노의 칼을 휘두르는 라스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본왕에게 그 몸과 영혼을 바쳐라!
'그렇게는 못 하지.'
살이 파이는 듯한 고통에 머리털이 쭈뼛 섰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후우우.
식은땀을 흘리며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와 냉기를 버틴 대가로 오르는 능력치였다.
-이런 빌어먹을! 본왕의 능력치가 넘어갔도다! 또!
라스가 펄쩍 뛰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넌 안 돼.'
라온이 머리를 쓸어 올리는 척하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역시 방심할 수 없어.
여유로운 말과 달리 등은 땀을 젖어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라스라지만, 그 본체는 마계의 군주다.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처음엔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무엇이 말이냐.
'너보다 진혼검이 훨씬 착해.'
라온은 라스에게는 코웃음을 치고, 진혼검의 검날을 깔끔하게 닦아주었다.
-착하긴 무엇이 착하단 말이냐. 네놈의 육체를 조종하려 들었던 미물이니라!
'마음을 고쳐먹었잖아. 어떻게든 날 집어삼키려는 너랑은 달라.'
-저놈도 똑같다. 본왕만큼 강했다면 포기하지 않고 네놈을 노렸을 것이다.
우우웅!
아니라는 듯 진혼검이 검날을 진동시켰다.
'똑같이 보지 말라는데?'
-조만간 네놈만이 아니라, 저 요검도 박살을 내주겠노라.
라스는 흉악한 냉기를 뿜어내며 진혼검을 굽어보았다.
'능력치를 올려주면 나야 고맙지.'
-끄응, 네놈은 본왕이 아니라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어딜 가든 적을 만드는 유형의 인간이니라.
'내 적은 너뿐이야.'
무조건 죽여야 하는 진짜 적이 있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검사 라온."
진혼검을 다 닦은 뒤 검집에 넣으려 할 때 그리어가 검은 보자기를 들고 다가왔다.
"덕분에 살았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그는 여전히 왕자답지 않았다.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저도 나름 놈들과 관계가 있어서요."
"확실히 그렇구려."
진혼검을 보여주자,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조그마한 요기를 뿜어낸다고 생각했는데, 상식을 초월했더군. 그런 검은 처음 보았소."
"저도 그렇습니다. 제 생각보다 원한이 강한 것 같더군요."
"괜찮겠소? 요검은 제 주인도 문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절 완전히 주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긴 그만한 힘이 있으니, 받아들였을 테지. 감탄이 나오는 무력이야."
그는 앞으로 더 노력해서 따라잡겠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역시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젠 동지가 되었으니 보여줘도 되겠군."
그리어가 가지고 온 검은 보자기에서 아이 머리통만 한 하얀 구슬을 꺼냈다.
"이건…."
"우리가 가지고 가던 백혈교 지부의 물건이오. 아시다시피 백혈교는 습격한 마을 사람의 반은 그 자리에서 흡혈하고, 반은 납치해가지. 우리는 놈들이 이 구슬로 납치한 사람들을 백혈교 본단으로 이동시킨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는 기대감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그리어의 말을 들은 진혼검이 진동을 일으켰다. 복수를 원하는 마음과 혹여나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구하길 바라는 마음 같았다.
'음.'
라온이 감탄한 눈으로 진혼검을 보았다.
'대단하네.'
요검이 되었어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하다니, 시렌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따스한 심성을 가졌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도련님."
검명을 흘리는 진혼검을 멍하니 보고 있던 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단검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쓰시는 걸 처음 봤는데, 장난이 아니던데요?"
"음, 확실히."
"체계화된 단검술이었지."
그 말에 그리어와 기사들도 시선을 돌렸다. 어떤 검술인지,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리메르 교관에게 배웠어."
"아!
"어쩐지."
"그 사람이면 그럴 만하지."
도리안도, 왕자도, 기사들도 리메르라면 단검술도 익혔을 것 같다고 말하며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이쪽도 쓸만한데.'
리메르라는 핑계는 어디에도 통하고 있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진혼검을 허리 뒤편에 착용했다.
* * *
다음날 정오.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입매는 단단히 여물어 있었다. 흡사 소나무가 사람으로 화한 듯했다.
한 자루 검처럼 고고한 기세를 피워내는 이 남자가 바로 오웬 왕국 은기사단의 3번 조장이자,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보리니 키튼이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갈림길에 도착한 라온과 그리어가 잡혔다.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흐음."
보리니의 시선은 보호해야 할 삼왕자가 아니라 라온의 등을 쫓았다.
'확실히 날 파악했었지.'
어제 백혈교도가 삼왕자 일행을 습격했을 때 잠시 기운이 흐트러졌었는데, 라온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아차렸다.
'대단한 녀석이야.'
그는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뒤 백혈교를 처리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많은 실전을 겪은 베테랑 기사를 보는 듯한 판단력과 집중력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단검술이었고.'
왕자에게 라온 지그하르트가 검의 천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단검술까지 익혔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어설프게 익힌 단검술이 아니라, 수천, 수만 번을 그어본 것처럼 능숙한 검로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이 걸작이었지.'
요기와 오러를 응집시켜서 그어내는 검격. 그 위력과 범위는 익스퍼트 최상급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웠어.
저곳에 있던 왕자와 기사들은 몰랐겠지만, 먼 곳에서 지켜본 보리니는 확실하게 느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펼쳐낸 검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검무劍舞. 검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이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 춤에 담긴 원한에 잠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라…."
삼왕자가 진정한 천재라고 말했을 때 별로 믿지 않았지만, 그 말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왕국 제일. 아니,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은기사단에 들어가 여러 재능을 지닌 사람들을 보았지만, 저런 아이는 처음이었다.
"훗."
보리니 키튼은 멀어지는 라온의 등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몇 년 안에 지그하르트에 또 하나의 신성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 * *
라온과 도리안은 차원문을 탄 이후에 2주 동안 이동해서 하분 성 근처에 있는 주디안 숲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 정도만 더 이동하면 북방의 지옥 중 하나라는 하분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으으…."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간이침대에 누운 채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모닥불의 열기와 두꺼운 이불이 있음에도 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주, 죽을 거야. 진짜 죽을 거라구요!"
"안 죽어."
라온은 진혼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배운 대로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야."
리메르는 못 할 일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보냈다는 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시험이라는 뜻이다. 물론 광혈귀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렇지?"
우웅!
진혼검은 맞다는 듯 선명한 검명을 울렸다. 2주라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은 물론 도리안과도 약간의 친분이 쌓인 상태였다.
"그건 알지만, 무섭다고! 무서운 걸 어떻게 해!"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야광등을 머리맡에 놓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노숙에서 침대와 야광등이라니 엄청난 사치였다. 물론 그 덕분에 자신도 편하게 잘 수는 있었지만.
"다 됐다."
라온은 진혼검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다시 검집에 넣었다.
-으흠!
라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팔찌에서 튀어나왔다.
-요즘 그 미물에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냐?
'잘해준다고?'
-그렇다. 매일 한 번씩 닦아주고, 주기적으로 말도 걸어주지 않느냐.
'뭐, 도움이 되니까.'
필요 없다고 말해도 진혼검은 요기를 이용해서 사슴 같은 사냥감을 찾아주기도 하고, 산적들을 먼저 찾아내 경고도 해주었다.
-그, 그 정도는 네놈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도 날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게 고맙잖아.'
자신의 기감이 더 뛰어난 건 맞지만, 저런 일을 알아서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마웠다.
'요기의 사용법도 알려주고 있고.'
진혼검은 요기를 더 잘 사용하는 방법과 요기에 적응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예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자주 닦아주고, 말도 걸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요기 같은 하찮은 힘을 사용해봤자 급만 떨어진다.
'급이 떨어지더라도 난 강해져야 하거든.'
라온은 가늘게 웃으며 입을 삐죽이는 라스를 밀어냈다.
딱히 소외시키는 것도 아닌데, 진혼검과 많은 대화를 하고 친해질수록 라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우우웅!
냉기를 뿜어내는 라스를 놀리듯이 진혼검이 검명을 터트렸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감히!
'하지 마.'
라스가 냉기를 뿜어내서 진혼검을 짓누르려고 할 때 라온이 만화공을 이용하여 라스의 기운을 막아주었다.
-왜 막는 것이냐!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본왕은 마계의 군주이니라! 요검 따위가 반항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나 잘 거니까. 조용히 해.'
-끄윽!
라온은 라스를 억지로 팔찌에 밀어 넣고 간이침대 위에 누웠다. 푹신함을 느끼며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듯이 천천히 숨을 고를 때 팔찌에서 라스가 다시 튀어나왔다. 조금 전과 달리 살짝 기가 죽은 기세였다.
-자는 거냐?
'아직.'
-그럼….
라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보, 본왕이 냉기의 사용법을 조금 가르쳐줄까?
라온은 등을 돌린 채로 옅게 웃었다.
마계의 군주가 2주 만에 낚싯바늘을 덥석 물었다.
116화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제대로 걸렸군.'
진혼검을 얻은 이후 요기를 사용하는 방법이 오러를 운용할 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혼검이 길을 보여주기에 요기를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제대로 쓰지 못하는 힘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혹한의 냉기.
만화공의 검술로 화속성 오러는 그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었지만, 혹한의 냉기는 아직까지는 오러뿐 그를 다룰 만한 능력을 익히지 못했다.
광혈귀와 싸울 때도 느꼈지만, 자신은 혹한의 냉기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했다. 만화공의 검술, 연성검술 혹은 루난을 따라 해봐도 어색함만 느껴졌다.
'냉기를 다룰 방법이 필요해.'
세상에서 냉기를 가장 잘 다루는 존재는 자신의 팔뚝에 세를 놓고 사는 분노의 군주다.
다만 라스가 냉기 사용법을 좋게 알려줄 리가 없다.
분노를 받으라고 하던가, 무릎을 꿇고 빌라던가, 민트초코로 욕조를 채우라는 등 이상한 요구를 할 게 뻔했다.
'그래서 사전 작업이 필요했지.'
진혼검과 친해지고, 더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에 대해 공감을 하자, 라스는 그사이에 끼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2주가 흐르며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낀 녀석은 결국 먼저 다가와 덥석 미끼를 물었다.
본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인 냉기 사용법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라온의 반응은 덤덤했다.
'지금은 낚싯대를 들어 올릴 때가 아니니까.'
라스는 호구지만, 바보는 아니다. 여기서 즉답을 하고 관심을 보인다면 상황을 의심하고, 냉기를 가르쳐준다는 말을 번복할 게 뻔했다.
'조금 더 뜸을 들여야지.'
힘 좋은 고기를 잡을 때도 바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간 대가 부러지거나, 낚싯줄이 끊어진다.
지금은 양쪽으로 스윙을 하면서 고기의 힘을 뺄 때였다.
'냉기의 사용법?'
라온은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 그렇다. 본왕이 볼 때 네놈은 냉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흠….'
-네놈 정도의 능력이면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확실히 만화공의 오러를 운용할 때보다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긴 해.'
-맞다! 본왕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네놈은 그 어떤 인간보다 뛰어난 냉기를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니라. 냉기의 사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니까!
라스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고, 말이 빨라졌다.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너 냉기를 잘 쓸 수 있긴 해? 내가 본 건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면서 냉기를 뿜어내는 것뿐인데?'
-그, 그건 본왕에게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만 있었다면 더 세밀한 운용을 보여주었을 것이야!
'뭐, 나쁘진 않은데….'
라온이 살짝 목을 돌렸다. 라스가 솜사탕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아라. 언제까지 냉기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결국에는 모두에게 그 정보가 드러나게 될 테니, 제대로 쓸 방법을 익혀두는 게 네놈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 말도 맞긴 하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수많은 마족이 찾아와 냉기의 운용법을 알려달라고 빌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네놈에게는 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니….
'말 길어지니까. 또 졸려오네.'
라온인 쓱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목까지 올렸다.
-끄으으윽!
'일단 잘 테니까. 나중에 얘기하자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은 지금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본왕의 냉기 운용은 천금을 주고도, 목숨을 걸어서도 배울 수 없는 기예이니라! 지금이 아니라면….
'아흠. 잔다.'
끝없이 떠드는 라스를 밀어내고, 옅게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배울 수 있겠네.'
라스가 저렇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는 증거.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심을 다 해서 냉기 운용법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라온은 지금까지 잘했다는 뜻으로 진혼검을 살짝 두드려주었고, 진혼검은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살짝 몸을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