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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라온은 점박이 강아지처럼 핏자국으로 가득한 낡고, 누런 성벽을 올려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시체를 태운 냄새와 피비린내, 짐승의 노린내가 가득하다.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구역질이 나올법한 환경이었다.

"끄으으윽!"

도리안이 새까맣게 탄 벽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라온은 녀석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시 성벽을 올려보았다.

"이곳이 하분 성인가…."

전투의 흔적으로 가득한 성벽과 채 꺼지지 않은 전장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여긴 말 그대로 끝이 없는 전투의 지옥이었다.

-흐아아아! 본왕이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전장의 공기로다!

라스는 혈향과 시체의 썩은 내가 마음에 드는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 엄마.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저, 저는 가문을…."

"정신 좀 차려."

반쯤 죽어가는 도리안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섰을 때 성벽 위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의 머리가 불쑥 올라왔다. 짧게 친 보라색 머리칼과 차가운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누구냐."

"지원 나온 용병입니다."

라온은 리메르에게 받았던 용병패를 보여주었다.

"이름은?"

"라온과 도리안입니다."

그 이름을 들은 남자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자신과 도리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지위가 있는 건지 남자의 지시에 하분 성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체 타는 냄새는 줄었지만, 피비린내는 더 심해졌다. 성 내부에서도 많은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라온과 도리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측을 보았다.

조금 전 성벽 위에 있던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단단했고, 허리에는 두꺼운 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었군."

예상대로 그는 자신이 지그하르트에서 온 수련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괜찮은 건가?"

남자는 다리 잡은 개구리처럼 축 처진 도리안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늘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온은 도리안을 슬쩍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안이다. 앞으로 부사령관이라고 부르도록."

"예."

"따라와라."

"알겠습니다."

"끄윽…."

다리가 풀린 도리안의 목덜미를 잡고 테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성 중앙에 세워진 5층 건물에 들어가자, 기사와 검사,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빛이 다르군.'

무력 자체는 지그하르트 검사들에 비해 모자랐지만, 이쪽을 보는 눈동자에 탄탄한 힘이 어려 있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거센 전사들의 기세. 저들을 보니, 지금 이곳이 전장의 한복판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쪽이다."

테리안을 따라 노후 된 계단을 올라갔다. 5층에 도착하자 흑목으로 만든 두꺼운 문이 보였다.

"그곳의 용병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테리안이 노크를 하고 목적을 말하자, 안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끼이익!

경첩이 뒤틀린 듯한 거친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렸다.

방은 넓었지만, 내부는 텅 비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출했다. 하분 성 주변 지도와 서적이 가득한 책장을 빼면 사령관실이 아니라, 평범한 병사들의 방에 들어온 기분이다.

고오오오!

누렇게 변색이 일어난 책상에서 회색 머리칼의 노인이 일어섰다. 키는 작았지만, 눈빛에 담긴 힘과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거인과 마주한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에 손끝이 떨려왔다.

'이 남자가 밀랜드 브라이던.'

북쪽의 거인이라 불리며 이 낡고 헤진 성을 20년 넘게 사수해온 하분 성의 수호자가 바로 이 작은 노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장수의 눈빛이로구나.

'너도 느꼈어?'

-그렇다. 수십 년 동안 한 우물을 판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저런 충실한 부하들이 산더미처럼….

'그래.'

-좀 들어! 본왕을 무시하지 말라!

라스의 말이 길어져서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맞나?"

밀랜드의 음성은 목이 갈라졌다고 생각될 정도로 허스키했다. 원래 그렇다기보다 목을 다친 것 같았다.

"예."

"마, 맞습니다."

라온은 담담하게, 도리안은 질겁하며 대답했다.

"이 성에서 너희들의 신분을 아는 건 나와 부성주뿐이다."

밀랜드가 고갯짓으로 왼쪽에 서 있는 테리안을 가리켰다. 부성주는 밀랜드의 아들인 것 같았다.

"리메르가 왜 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알고 있다. 많은 경험을 쌓고 돌아오길 바랐겠지. 하지만 이곳에 훈련이나 교육 따위는 없다."

밀랜드의 목소리에 단단하게 세운 신념이 어렸다. 이 성을 평생 지켜온 거인의 기파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친절할 교관도, 따뜻한 밥과 잠자리도 없다. 있는 거라곤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 바람과 끝없는 싸움뿐이지. 편안한 생활을 바란다면 당장 돌아가도록."

"지, 진짜 돌아가도 되… 읍!"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강해지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어떤 전장과 상황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온은 바로 포기하려는 도리안의 입을 막고, 앞으로 나왔다.

"눈빛은 마음에 드는구나."

말과 달리 밀랜드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 눈이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마. 지금부터 너희들의 신분은 병사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라. 찰스!"

밀랜드가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지르자,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두 놈. 3번 정찰대로 보내도록."

"용병을 정찰대에 넣다니 별일이군요."

"일단 이것저것 시켜볼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와라."

라온은 기절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던 도리안을 들고서 찰스라는 남자를 따라 나갔다.

쿠웅!

무게감 있는 문이 닫히고 사령관실에는 밀랜드와 테리안만 남았다.

"한심하더군요."

테리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이 말이냐."

"보셨지 않습니까. 라온이라는 놈은 놀러 온 것처럼 여유로웠고, 도리안은 겁에 질려 몸에 힘이 풀렸습니다. 도움은커녕 문제만 일으킬 녀석들입니다."

"음…."

"둘 다 겉멋만 들어서 주렁주렁 검만 매달고 있고, 라온은 손목에는 꽃팔찌까지 찼더군요. 전사의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돌려보내시지요. 저들을 봐주다가 병사들만 다칠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밀랜드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테리안을 보고 옅게 웃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이 성을 우습게 본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밀랜드의 눈빛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사람을 겉보기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둘은 어렵기로 소문난 지그하르트의 훈련을 통과했고, 지금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다. 보이는 것처럼 어리숙한 녀석들이 아니야."

"그건 그렇겠죠."

테리안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삐죽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은 두 사람을 지켜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선입견부터 가질 필요는 없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밀랜드는 입맛을 다시며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하나 꺼냈다.

"두 녀석의 정보를 2주마다 알려달라는 이유를 모르겠군."

"귀하게 키운 지그하르트의 전력이 걱정되니 그렇겠죠."

"그럴 수 있지. 다만 이건 리메르나, 5 연무장에서 온 게 아니야."

"예?"

"지그하르트 가주전에서 보낸 편지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전부 알려달라더군."

"가주전이라면 부, 북패왕께서?"

"그래. 그분께서 이런 요구를 한 적은 처음이라 이유를 모르겠다. 그것도 자세히 서술하라고 되어 있으니, 쯧."

"허! 정말 무슨 일인지…."

두 사람이 글렌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3번 정찰대장 라딘. 사령관님의 부름에 밥을 먹다 말고 달려왔습니다!"

설원처럼 하얀 겉옷을 두른 30대 남자가 들어와 경례했다.

"그렇게 어필해도 줄 건 없다."

"하하."

스스로를 라딘이라 말한 남자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3번 정찰대에 신병 두 명을 보냈다."

"오, 손이 부족한 건 또 어떻게 아시고."

"그렇게 좋아할 필요 없다. 금방 다른 곳으로 보낼지도 모르니까."

"그 말씀은 결국 보낸다는 말이군요. 아, 좋다 말았네."

"어차피 우리의 전력이 될 병사들이다. 죽지 않게 확실하게 교육해."

"그럼 바로 정찰을 뛰어야죠. 실전이 가장 확실한 교육이니까요."

라딘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몬스터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영역을 벗어나는 경우도 많으니, 주의하도록."

"저 3번 정찰대장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는 다시 이마 위에 손을 올리고, 방을 나갔다.

"바로 출동이라니, 괜찮겠습니까?"

"괜찮을 거다. 그 도리안이라는 겁쟁이는 모르겠다만, 라온이라는 녀석은…."

밀랜드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픽 웃었다.

"보통이 아니었거든."

* * *

라온과 도리안은 찰스라는 검사의 안내를 받아 정찰대의 숙소에 도착했다. 방이 많은지 도리안과 둘이서 지낼 수 있는 2인실이었다.

"으으!"

도리안은 아직도 피비린내에 적응하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여, 여기 생각 이상을 위험한 거 같은데요? 무슨 시체로 산을 쌓아!"

"마음 좀 가라앉혀봐."

"도련님도 보셨잖아요. 아까 그 피 냄새와 시체 냄새. 몬스터만이 아니라, 주, 죽은 사람도 많았다구요!"

"항상 말하잖아. 불안하고, 힘들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너 그러다간 안 죽을 상황에서도 위험해."

"으읍!"

도리안이 헙 입을 막고, 코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일단 짐부터 풀어. 한동안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예…."

녀석은 찔끔 나온 눈물을 닦고, 침대의 매트를 내려놓았다.

배 주머니에서 폭신한 매트와 따스한 이불을 꺼내 침대에 놓고, 옆에는 하늘색 천을 걸어놓았다.

"장식까지 해?"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잖아요. 꼭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근데 뭘 해도 기분이 별로네."

그는 천을 이리저리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 안에 황금색 천도 있냐?"

"당연하죠."

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금빛 천을 꺼냈다.

"녹색."

쓱.

"파란색."

척.

"분홍색."

착.

색을 말하면 바로 그에 맞는 천을 꺼냈다. 준비성이 경악스러운 녀석이다.

"도련님도 이거 깔고 주무세요. 그런 침대에서 주무시면 허리 나가요."

도리안은 훌쩍이면서 자신에게도 매트와 이불을 꺼내주었다.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를 정리하려 할 때 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신병들. 정리는 끝냈나?"

새하얀 옷을 입은 30대 초중반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며 씩 웃었다.

"너희들이 속한 3번 정찰대의 대장 라빈이다."

"라온이라고 합니다."

"도, 도리안이에요…."

라온은 담담하게, 도리안은 입술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얼굴들이 좋네. 그, 근데 저 매트랑 이불은 어디 있었냐?"

"제, 제가 가져왔는데요?"

"허…."

도리안이 손을 들자, 라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 인간은 처음이라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정리는 나중에 하고 일단 겉옷을 걸쳐라."

"예?"

"출동 명령이 떨어졌거든."

라딘이 씩 웃으며 가지고 온 하얀색 설상복을 던져주었다.

"오늘은 너희가 앞으로 정찰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 정찰 능력과 판단력 그리고 감각을 볼 것이다."

그는 겁을 주듯이 셋 중 하나라도 모자르면 금방 죽을 거라고 떠들어댔다.

"히익!"

도리안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지만 라온은 달랐다. 옅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정찰 능력과 감각을 보신다고 하신 겁니까?"

그건 이 하분 성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일이었다.

117화

지그하르트 알현실.

글렌은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단상 아래에선 리메르를 굽어보았다.

"오늘은 또 왜 왔느냐."

"푸흡!"

리메르는 글렌을 지그시 올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입을 틀어막는 척했지만, 저 모습 자체가 연기였다.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이었다.

"너…."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제가 가주님을 잘못 보고 있었네요."

"뭐?"

"라온 때문에 비밀리에 비연회를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정도로 손자를 아끼실 줄이야."

비연회는 가주 직속의 정보 단체. 특별한 상황에서만 움직이는 최고의 기관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글렌은 드물게도 목소리를 가늘게 떨었다.

"에이, 짬밥이 있는데, 저도 나름 정보통이 있습니다."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지만, 어디서 정보가 빠져나갔는지는 뻔했다.

"하아, 로엔…."

글렌이 한숨을 내쉬며 왼쪽에 서 있는 로엔을 보았다. 로엔은 잘 모른다는 듯 손을 흔들었지만, 초승달처럼 올라간 입매를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도박장에서 돈을 따서 경매에 참여할 생각은 어떻게 했대? 누굴 보고 배운 거야?"

누굴 보고 배웠는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앞에서 설치는 붉은 머리 엘프였다.

"거기다 경매에서 졌다고, 물건을 훔치고, 발카르의 왕녀를 역으로 조롱하다니, 진짜 재미있는 녀석입니다."

리메르는 제자 한번 잘 키웠다고 말하며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훔친 건 아직 확실하지 않다."

"에이, 비연회가 90% 확신하는 거면 정답이나 다름없죠."

"별걸 다 알고 있군."

글렌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로엔이 리메르에게 대부분의 정보를 말해준 것 같다. 최근 둘이서 붙어 다니더니, 예전보다 더 친해진 모양이다.

"다만 비연회조차 라온이 어떻게 블랙 버터플라이를 훔쳤는지는 모르더군요. 난 놈은 난 놈입니다."

"제자가 도둑질한 게 그리 좋으냐."

"발카르의 왕녀가 선빵을 날렸지 않습니까. 그것도 계속해서! 그걸 참으면 오히려 지그하르트 답지않은 겁니다. 라온은 지극히 당연한 복수를 한 거죠!"

"그건 그렇지."

글렌도 그 말은 맞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오는 시비를 참기만 했다면 오히려 화가 났을 것이다.

"본인 입으로 지그하르트임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시험에 감점 요소도 없구요. 능력도 출중하지만, 운까지 따르는 녀석입니다."

리메르는 역시 내 제자야 하고 손뼉을 쳤다.

"커흠, 뭐, 확실히 그 아이가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글렌은 피어나는 웃음을 참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쿠베러드의 요검을 얻고, 오웬의 삼왕자를 구한 것도 대단한 일이죠. 나중에 오웬과 거래를 할 때 크게 이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예전부터 라온이 좀 특별한 면이 있긴 했다. 처음 날 봤을 때도 울지 않았고, 오러를 넣어서 몸을 살피는데 웃음을…음!"

글렌은 히죽거리는 리메르를 보고, 말을 멈춘 후 올라가던 입매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아쉽네요. 오랜만에 웃는 것 좀 보나 했더니."

"시끄럽다."

"어쨌든 여기에 있을 때보다 훨씬 적극적입니다. 앞으로 녀석의 활약을 듣는 재미가 있겠어요,"

"미안하다만 그럴 일은 없다. 비연회는 이미 철수시켰으니까."

"예? 왜요?"

"비연회는 카룬이나 발데르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라온이 하분 성에 도착했으니, 그 이상은 필요 없다."

글렌이 눈을 내리감으며 턱을 괴었다. 손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냉정한 기세였다.

"아, 그럼 하분 성에서 보고를 해달라고 하셨구나."

리메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로엔!"

"이, 이번에는 정말 아닙니다!"

글렌의 살벌한 눈빛에 로엔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에이, 뻔하잖아요. 손주 사랑이 지극한 가주님이 무얼 하셨겠습니까. 하분 성주에게 연락해서 2주 정도마다 정기적으로 보고를 해달라고 부탁했겠죠."

"으음…."

글렌은 티가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귀신 같은 놈.'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일까. 리메르는 자신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아, 저도 라온을 좋아하긴 하는데, 가주님은 못 따라가겠습니다.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라더니, 진짜 대단하십니다."

"...."

"그러니까! 라온이 시험을 끝내고 돌아오면 거기서 무게만 잡지 마시고, 딱 불러다가 '사랑하는 손자야. 수고 많았다. 네 소식을 들으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할애비가 한 번 안아보자꾸나.' 하시면 오해도 풀리고, 가주님도 좋고, 보는 저도 좋고, 실비아도 좋은 평화로운 세계가… 흡!"

리메르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알현실의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나 약속 있었지. 가야겠…."

문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다리가 땅에 닿질 않았다. 글렌의 무형지기가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가, 가주님? 장난이 심하신…."

"후우우욱."

글렌이 깊은숨을 뱉으며 일어섰다. 손가락을 까딱이자 허공에 뜬 리메르가 실 달린 바늘처럼 끌려왔다.

"지난번의 교육이 모자랐던 모양이구나."

그의 붉은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오늘은 그 몸에 확실하게 새겨주마."

"으아아아악!"

* * *

라온은 라딘의 뒤를 따라 하분 성을 나선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빛 하늘 아래 흰색 물감으로 색을 칠한 듯한 고고한 기세의 산이 보인다.

'저 산이 스터린이군.'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구친 저 산이 바로 몬스터들이 끝도 없이 나타난다는 스터린 산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굽이치는 검은 바다. 장벽 같은 파도가 멈추지 않는 북해가 눈에 들어왔다.

스터린 산과 북해의 몬스터가 동시에 출몰하는 이 말도 안 되는 환경 때문에 이곳 하분 성을 인세의 지옥이라 부르고 있었다.

"멋있지?"

"그러네요."

라딘의 말대로 날 것의 자연은 웅장한 맛이 있었다.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가슴을 울렸다.

"얼마 안 가서 지겨워질 거야. 아니, 깨부수고 싶어지지. 이쪽으로 와라."

그는 씩 웃으며 앞장섰다. 북해 쪽이 아니라, 스터린 산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뭐가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항상 긴장해."

"으으, 추워서 몸이 떨리는지, 겁이 나서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어디든 위험해 보이는데…."

도리안은 자신의 옆에 딱 붙어서 몸을 떨고 있었다. 하도 떨어대서 열이 날 정도였다.

"일단은 느껴지는 건 없어."

"저, 정말이요?"

"그래."

"아, 그럼 안심이죠."

정찰대보다도 자신의 말을 믿는지 떨리던 도리안의 손이 멈췄다.

"어이, 신입들! 이쪽으로 와라!"

라딘의 부름에 라온과 도리안이 앞으로 달려갔다.

"이게 뭐 같지?"

라딘과 정찰병들은 산길 아래에 찍힌 큼지막한 발자국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의 팔 정도로 긴 거대한 발자국이었다.

"헉! 이, 이거 트롤 아닌가요? 엄청 큰데요?"

도리안은 발자국을 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넌 어떻지?"

라딘이 라온을 보았다.

"일단 트롤은 아닙니다."

라온은 담담한 눈동자로 발자국을 내려다보았다.

'트롤일 리가 없지.'

트롤의 발자국은 더 크고, 깊게 박힌다. 그리고 이 발자국은 이족보행이 아니라, 사족보행을 하는 동물의 발자국이었다.

'여기에 있는 사족보행의 몬스터나 짐승이라면….'

주디엘이 주었던 책자의 내용을 되새기자, 이 발자국의 주인이 생각났다.

"카리 산양이네요."

"어?"

"헉!"

"바, 방금 뭐라고…."

라딘과 정찰병들이 부릅뜬 눈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웃음기 있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카리 산양이라고 했습니다. 발이 크고, 뿔이 세 개 달린 검은색 산양 있지 않습니까."

"어…."

단번에 정답이 나올 줄은 생각 몰랐던지, 정찰병들은 모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 그러면 이게 언제 찍힌 발자국인지도 알 수 있나?"

라딘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발자국을 가리켰다.

"좀 보죠."

라온은 무릎을 꿇고, 발자국을 확인했다. 눈이 눌린 정도와 주변의 눈을 확인하자 대략적인 시간이 잡혔다.

"밟힌 곳이 그리 딱딱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 12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잡을 수 있겠네요.

"어, 음…."

"허!"

정찰병들은 동그랗게 입을 오므렸고, 라딘은 헛웃음을 흘리며 라온에게 다가갔다.

"너 용병 출신이라고 했지?"

"예."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배웠네."

그는 조금 더 보자고 말하며 산 주변을 돌았다. 자세를 낮추고,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지만, 속도는 빨랐다.

"조, 조금 더 천천히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괜찮다. 사흘 전에 사령관님이 직접 움직여서 이곳에 있던 몬스터들을 밀어버렸거든."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정찰병들의 눈은 쉴새 없이 움직였다.

"여기 있군."

라딘이 눈 속에 파묻힌 각진 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중간 부근에 반쯤 뜯겨나간 살벌한 흔적을 가리키며 뒤를 돌았다.

"이건 뭐 같아?"

"트, 트롤! 트롤이 분명합니다!"

도리안의 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계속 트롤만 찾았다.

"베어울프의 흔적이네요."

반면에 라온은 흔적을 보는 즉시 답했다.

"어?"

"왜, 왜 그렇지?"

"베어울프는 두껍고, 강인한 손톱으로 바위나, 나무에 흔적을 남겨서 본인의 영역을 알립니다. 다만…."

라온은 나무의 흔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놈은 이미 죽었겠네요."

"그, 그건 어떻게 알지?"

"놈들은 주기적으로 같은 곳에 혼적을 남깁니다. 흔적이 오래된 것으로 보아 이미 죽었을 겁니다."

라딘도, 정찰병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며 턱을 바르르 떨었다.

"정찰 능력을 시험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라온은 빙긋 웃으며 손을 펼쳤다.

"제대로 된 문제를 내셔도 됩니다."

* * *

꿀꺽.

라딘이 라온의 뒷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요 물건은 대체 뭐지?'

하분 성 정찰대에 들어온 병사들에겐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다.

신고식이라고 주먹을 휘두르거나, 윽박지르는 게 아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고, 책으로만 본 지식이 실전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려주는 조금 자극적인 조언이 곧 정찰대의 신고식이었다.

'무조건 통하지.'

병사만이 아니라, 기사나 검사들까지. 첫 신고식에서 본인의 무력함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라딘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몬스터의 흔적에 대해 대답하는 라온을 보았다.

'이놈은 달라.'

몬스터에 대한 질문, 흔적의 방향과 위치와 날짜, 언제 전투가 있었는지까지. 물어보는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하분 성에 처음 온 애송이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이곳에서 성장한 정찰대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5년 동안 있던 놈들도 흔적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는데….'

아무리 용병이라고 해도 이 녀석은 어리다. 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경험을 쌓았는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워.'

아무리 실전 경험을 많이 했다고 해도 이곳은 북방의 지옥이라 불리는 하분 성이다.

베테랑조차 도망친다는 이 땅의 소문을 모를 리가 없건만 라온의 눈빛은 너무도 잠잠했다.

저런 눈을 가진 놈은 딱 두 가지다.

미친놈이거나, 자신이 있는 놈이거나.

"신병."

라딘은 두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왔다.

"그럼 이건 뭘 거 같지?"

바닥을 송곳으로 찌른 것처럼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흔적을 가리켰다.

'이건 절대 모르지.'

대부분은 바람구멍이 뚫린 흔적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아니다. 이건 발바닥의 중심에 단검 같은 발톱이 박혀 있는 설원 사자의 흔적이다.

하분 성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헷갈려 하는 흔적이기 때문에 신병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설원 사자의 흔적이네요."

라온은 자신의 생각을 비웃듯 바로 정답을 내놓았다.

"어? 그, 그렇게 확답할 수 있어? 이거 그냥 바람구멍일 수도 있는데?"

"확실합니다."

녀석은 직접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바람구멍이면 내부가 둥글게 파이지만, 설원 사자가 남긴 흔적은 안이 뾰족하게 들어가 있죠.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허…."

"흔적을 보니, 지나간 지 하루 정도 지났겠네요. 방향은 북쪽입니다."

라딘이 넋이 나간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정답이다. 그것도 완벽한 정답.

'이 새끼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놈이야!'

* * *

라온은 눈을 감고 기감을 열었다. 설화의 감각까지 이용하여 주변 전체를 살폈다.

설원 사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자, 라딘은 '너, 넌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을 놔두고 도리안만 몰아붙였다.

덕분에 도리안은 울상을 한 채로 정찰병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듯 애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우우웅!

진혼검은 요기로 정찰을 하겠다며 뒤쪽과 서쪽으로 종이처럼 얇게 편 요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덕분에 자신은 앞과 동쪽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진짜 도움 되네. 고맙다.'

우웅!

진혼검은 별거 아니라는 듯 검날을 흔들었다.

-어, 어흠!

설원의 찬 내음을 즐기던 라스가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정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뭐?'

-가, 감각도 그렇게 여는 거 아닌데.

녀석은 자신과 진혼검이 주변의 기척을 파악하는 것을 보며 퉁명스럽게 입을 뗐다.

'괜찮아.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본왕도 이곳처럼 눈 덮인 산과 혹한의 바다가 교차하는 곳에서 살았다. 이렇게 눈이 가득한 장소에서는 감각을 여는 방법이 따로 있느니라.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실 때 진혼검이 더 열심히 하겠다는 듯 검명을 울렸다.

'진혼검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데?'

-끄응, 보, 본왕은 저런 미물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본왕이 가르쳐주기만 하면 네놈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을 맛볼 수 있을 것이야!

라스는 가르쳐주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 푸른 냉기를 스멀스멀 피워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고기가 낚싯바늘을 문 지 이틀 만에 낚싯대를 들어 올릴 타이밍이 찾아왔다.

'뭐, 시험 정도는 해봐도 괜찮겠지.'

라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라스를 돌아보았다.

-잘 생각했다! 일단 깨달으면 저 미물의 요기 따위는 눈에도 차지 않을 것이야!

라스는 히죽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닥파닥 월척이다.

118화

라온은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약간의 호기심만 가진 듯한 눈빛으로 라스를 보았다.

'오래 걸리는 거 아니야?'

-평범한 인간이라면 오래 걸리는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하지만 순도 높은 냉기를 가진 네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라스는 엣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이 능력의 이름은 글래시아. 본왕에게 직접 교육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해라.

'네. 네. 알겠으니까. 시작하시죠.'

-네놈에게 미약한 재능이 있음은 인정하지만,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할 터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이건 본왕이 직접 만든 비법으로서….

'나 안 배워. 그냥 진혼검이랑 정찰이나 할란다.'

-자, 잠깐! 알겠노라! 바로 시작하겠다!

고개를 홱 돌리자, 라스가 다급하게 따라왔다.

-일단 정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혀라.

'알겠어.'

라온이 눈을 감았다.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자 머릿속이 도화지처럼 하얗게 칠해졌다.

-이제 연결이다.

'연결?'

-그렇다. 네가 가진 냉기와 이 땅 전체에 깔린 냉기를 연결하는 것이지. 눈을 떠보아라.

눈을 뜨자, 라스가 시퍼런 냉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본왕의 냉기를 잘 보아라.

라스의 불꽃에서 퍼져나간 냉기가 눈으로 가득 찬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흡사 눈과 냉기가 조화롭게 뒤섞이는 듯했다.

-보았나?

'너의 냉기와 눈이 어우러지는 것 같았어.'

-음, 그건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눈과 냉기가 아니라, 냉기와 냉기를 연결하는 것이지. 네 육체를 내놓는다면 제대로 알려줄 수….

'안 배울란다.'

-아, 알겠다! 알겠으니 다시 보아라. 그런 말 하지 않으마!

라스는 침을 꼴깍 삼키고 뒤로 물러섰다. 속과 달리 겉에서 아쉬운 사람은 라스였다.

-크흠, 네놈이 가진 냉기를 이 땅에 어려있는 냉기와 조화를 시키는 게 핵심이다. 그리되면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도 네 피부에 닿는 것처럼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이 주변에 깔린 눈과 얼음이 전부 네 눈과 귀 그리고 피부가 될 것이니라.

'아,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외로 설명이 거창하지 않고, 직접적이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렵겠는데?

냉기와 냉기의 연결은 생각도 못 한 일이다. 듣고 이해한 것과 달리 직접 행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제대로 익힌다면 들인 시간 이상의 결과가 돌아올 것이니라.

'음….'

정찰병들은 도리안을 가르치느라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눈이 섞인 바람도 불고 있으니, 지금 해봐도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지금 해보자.'

-그럼 주문을 알려주지.

'주문? 나 마법 못 쓰는데?'

-주문이라고 다 마법이 아니다. 너희 인간들이 오러 연공을 사용할 때 중얼거리는 구결과 같은 느낌이니라.

'알겠어.'

-그럼 시작하마. 서리꽃이 피어나는 얼음의 호수에 잠긴 신은….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집중력과 정신력을 키워 라스가 불러준 주문을 모조리 외웠다.

-못 외웠을 테니, 다시 한번 불러주….

'외웠어.'

-끄응, 괴물 같은 놈….

라스는 인간 맞냐고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그럼 시작할게.'

라온이 눈을 감고 혹한의 냉기를 운용했다. 몸에서 퍼져나간 냉기가 바닥으로 가라앉아 눈 위로 흩날렸다.

후우우웅!

손이 굳어질 정도로 혹한의 냉기를 흘려보냈지만, 주변의 눈덩이들이 굳어지기만 할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연결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연결이라고 진짜 눈과 너를 연결하라는 게 아니다. 이것 또한 이미지니라.

'다시 해볼게.'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호흡을 골랐다. 주문을 외우며 천천히 냉기를 내보냈다.

'조화롭게.'

냉기와 냉기가 뒤섞이도록.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끊임없이 냉기를 뿜어냈다.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했지.'

어떤 이미지가 뒤섞이는데, 가장 좋을지를 생각해보았다.

'뒤섞여서 하나가 되는 이미지라면….'

조화와 뒤섞임을 생각하자 조금 전에 보았던 북해가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물이 모여드는 끝이 없는 바다.

그 바다라면 냉기와 냉기의 뒤섞임도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바다가 북해는 아니야.'

자신이 생각하는 바다는 파도가 일지 않는 잔잔한 대해이다.

호수처럼 여린 바다를 그리며 냉기를 이어내고, 주문을 읊조렸다.

손끝에서 퍼져나간 혹한의 냉기가 얇아진다. 머리카락보다도 가늘게 퍼져 이 공간 전체에 깔렸다.

투웅!

세상이 느려진다.

아니, 느려지는 건 자신이다.

진흙 속에 파묻힌 것처럼 온 팔과 다리가 무거웠다.

반대로 감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민감해졌다.

작은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다. 라온은 지금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아니,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촤악!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났다.

좌측이다.

정찰병과 도리안이 움직이고 있다. 라딘이 도리안에게 바닥에 생겨난 흔적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흔적은 한참 전에 사라진 아이스 트롤의 발자국이었다.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거대한 자와 탁본 세트를 꺼내 발자국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우측에서 작은 물결이 흘러갔다. 베어울프 한 마리가 바람에 실린 인간의 냄새를 맡고 경계하듯 숨어 있었다. 놈의 손에는 오크로 보이는 먹이가 들려있었다.

허….

헛웃음이 흘렀다.

이 능력은 그저 누가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후우우우…."

라온이 긴 숨을 뱉어내며 눈을 떴다.

'됐어.'

처음이라 거리가 짧고, 오래 유지할 수 없었지만, 감은 잡았다. 조금만 더 연습한다면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아쉬워하지 말거라. 글래시아는 본왕이 직접 만들어낸 감각 특성. 쉽게 익힐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이곳에 있는 1년간 열심히 익히면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라스는 당연히 감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원래 오래 걸린다고 말해주었다.

'1년은 너무 긴데?'

-그것도 본왕이 옆에 있어서 짧게 잡은 것이다.

'음, 그러면 내기할까?'

-내기?

'6개월 안에 내가 글래시아를 익히나, 못 익히느냐로.'

-으음, 6개월….

라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지금까지 계속 졌으니, 혹시나 하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5개월.'

-콜이니라!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내기를 받아들였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5개월 안에 글래시아를 습득하기.

성공 시 : 모든 능력치 +4, 특성 중 하나의 등급 상승.

실패 시 :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받아들인다."

-내기는 성립되었다.

라온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기야 어쨌든 글래시아가 대단한 능력은 맞는 것 같아.''

-당연하다. 본왕이 직접 만든 것이니까!

라스는 칭찬을 듣자마자 활짝 펴진 얼굴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대우받기를 참 좋아하는 녀석이다.

'그럼 다른 냉기의 운용법도 있는 건가?'

-물론이다! 냉기를 뿜어내는 건 기초 중에서도 기초일 뿐. 좋다. 오늘 본왕이 냉기의 사용 방식에 대해 확실히 교육을 해주마!

라온은 냉기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라스를 보며 옅게 웃었다.

참으로 뜯어먹을 게 많은 물고기였다.

* * *

"신병!"

라스가 냉기의 사용법 교육을 시작하려 할 때 라딘이 앞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 주변에서 묵는다."

라딘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가지만 남은 나무를 가리켰다.

"당연히 불을 피울 수는 없다. 짐승은 불을 보고 도망가지만, 몬스터는 오히려 달려드니까. 그럼 이 추위를 어떻게 버텨야 할까?"

"두꺼운 매트를 깔고, 오리털 이불을 덮고 잡니다!"

도리안이 냉큼 손을 들어 올렸다.

"...."

라딘과 정찰병들은 순간 말을 잃고 도리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지금 그런 게 어디 있어!"

"저한테 있는…."

"너! 네가 말해봐!"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매트를 꺼내려고 할 때 라딘이 얼른 라온을 가리켰다.

"땅을 파고 들어가야겠죠."

"그래. 정답이다."

라딘이 극과 극이라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떤 땅을 파야 하지? 이 지랄맞은 추위 때문에 이곳의 땅은 돌덩이처럼 얼어 있잖아."

"찾아보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낮췄다. 손으로 눈을 쓸며 땅을 확인했다.

'그 흙을 찾으면 되겠지.'

이렇게 추운 지역의 땅은 대부분 바위처럼 단단하지만, 중간중간 빈틈이 있는 곳이 있다.

그런 곳을 공토라고 하는데 아래가 비고, 흙이 부드러워 땅을 쉽게 팔 수 있었다.

'찾았다.'

나무의 좌측 부분에 흙이 살짝 올라와 있었고, 색이 약간 연했다. 이 아래는 중간중간이 비어 있고, 흙이 부드러워서 어렵지 않게 굴을 팔 수 있을 것이다.

"여깁니다."

"쯥…."

라온이 공토를 두드리자, 라딘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여길 파야 하지?"

"색이 연하고, 구릉처럼 약간 올라온 형태를 보면 전형적인 공토…."

"너 진짜 잘났다."

"예?"

"잘났으니까. 먹고 싶은 것도 많겠어!"

"어…."

"아주 모르는 게 없으셔!"

라딘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눈빛으로 콧등을 구기며 불만을 토해냈다.

"맞으면 일단 땅을 팔까요?"

그가 손을 부르르 떨 때 도리안이 큼지막한 삽 2개와 포대를 어깨에 걸치고 다가왔다.

"그 삽이랑 포대는 또 어디서 났냐?"

"가져왔죠."

녀석이 본인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너희들 대체 뭐야!"

라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 놈은 모르는 게 없고, 한 놈은 만물상이고! 진짜 뭐 하는 놈들이냐고!"

"에이, 그 정도는 아니구요."

도리안은 칭찬이라고 생각했는지 헤죽 웃었다.

"끄으윽, 위가 아파…."

"대장님. 혼은 나중에 나겠습니다. 이곳에서 묵을 거면 더 늦기 전에 자리를 잡죠. 말씀대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라온이 도리안이 든 삽 하나를 들었다.

"됐어! 우리가 정찰 올 때마다 이용하는 곳이 있으니까!"

라딘은 징그러운 놈들이라고 말하고서 눈으로 장식한 듯한 하얀 숲으로 들어갔다.

"신경 쓰지 마. 칭찬이니까."

"가르칠 게 없어서 심통이 난 거야."

"정말이지 애 같다니까."

"가끔은 모르는 척 좀 해줘. 불쌍하잖아."

정찰병들은 낄낄 웃으며 라딘을 따라 움직였다.

"특이한 사람이네요."

도리안은 삽을 도로 배 주머니에 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제일 특이해….

* * *

정찰병들을 따라 숲 외곽으로 움직이니, 눈처럼 하얀 천막을 깔아 놓은 땅이 보였다.

천막을 걷어내고 땅굴로 들어가자, 열두 명 모두가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라온과 정찰병들은 짐을 정리한 뒤 도리안이 가져온 부드러운 빵으로 배를 채웠다.

딱딱한 육포 대신 빵을 먹은 덕분에 정찰병들에게 도리안의 이미지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솟구쳤다.

-본왕의 입맛에도 나쁘지 않은 빵이니 당연하겠지.

라스는 한동안 거지발싸개 같은 것만 먹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제 불침번을 정해야 하는데…."

라딘이 조금 남은 빵조각을 입에 넣고 일어섰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라온이 손을 들어 올렸다.

"짬도 안 되는 녀석이 어딜 초번초에 설려고! 10년은 일러. 인마!"

라딘이 잘 걸렸다는 듯 검지를 흔들었다.

"초번초와 말번초는 짬 순으로 끊는 거야! 넌 딱 중간이니까. 나서지 말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여유롭게 웃지도 말고! 내가 네 하급자 같잖아."

"네."

"끄응…."

가볍게 미소 짓자,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물러섰다.

"지금부터 불침번을 정한다. 초번초는…."

라딘은 직접 불침번을 정해주었다. 다만 짬 순으로 끊는다는 말과 달리 그는 초번이나, 말번이 아니라, 라온과 함께 세 번째에 일어나게 되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로군.'

지금까지 그의 언행을 보면 후배에게 알려주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자신이 다 알고 있으니, 알려줄 게 없어서 폭발했던 것 같다.

"저 도련님."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도리안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저 사람 진짜 특이해요. 저희 밉보이지 말죠."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네놈이 제일 특이하다.

이번에는 라스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굴 밖에서 불침번을 서던 라딘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름 말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녀석은 어두운 숲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 * *

'특이한 놈이야.'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실전에서 적응시키는 능력도 뛰어났다. 처음 보는 타입이라 어떤 놈이지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았다.

"으흠."

라딘이 굴에서 나와 라온의 옆으로 다가갔다. 말이나 붙여보려고 했는데, 녀석은 눈을 감고 있었다.

'어? 요놈 잘 걸렸다!'

이 괴물 같은 놈도 불침번을 서다가 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라온을 깨우려 할 때였다.

번쩍!

라온이 눈을 떴다. 열화처럼 타오르는 빨간 눈동자를 보자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

"대장님."

녀석은 서늘한 목소리를 흘리며 일어섰다.

"어, 어!"

"지금 이곳으로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 몬스터?"

"예. 확실합니다."

라온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북해에서 올라온 수속성 몬스터가 땅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땅속에서 움직이는 수속성 몬스터…."

라딘이 마른침을 삼켰다. 상어의 머리통에 두더지의 발톱을 가진 수속성 몬스터 샤크몰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놈들은 여기 안 오는데….'

놈들이 땅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맞지만, 스터린 산이 지척인 이 숲까지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음…."

혹시나 해서 땅에 귀를 대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라온은 꿈과 현실을 착각한 것 같았다.

'역시나.'

여유로운 척했지만, 신병이 긴장하지 않을 리 없었다. 허술한 모습을 보니, 이제야 사람처럼 보였다.

"샤크몰을 말하는 거지?"

"예."

"이 숲은 스터린 산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의 영역이라 샤크몰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아. 꿈 깨 인마."

라딘이 가는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어깨를 쳤다. 하지만 나무껍질처럼 굳은 녀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진짜입니다."

"나도 진짜야."

고개를 저으며 땅을 가리켰다.

"사크몰이 움직일 때는 땅이 흔들리지만, 지금은 미동도 없잖냐."

"곧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하아, 첫날이니, 불침번에서 좀 졸았다고 뭐라고 할 생각 없…."

라딘이 마른침을 삼키고 벌떡 일어섰다. 얼어붙은 땅에 흔들림이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진짜였다고?"

샤크몰이 다가올 때의 진동과 소리가 분명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마, 말도 안 돼…."

"일단 사람들부터 깨우세요. 곧 도착할 겁니다."

"너, 너는!"

"여기서 시간을 끌겠습니다."

"크으. 네, 네가…."

"빨리 가세요."

"알겠다! 절대 무리하지 마!"

라딘이 굴로 내려갔다.

"일어나! 샤크몰이 오고 있다!"

"예? 누구요?"

"샤, 샤크몰? 샤크몰이 왜 여길 와!"

"나도 모르겠으니까. 일단 일어나라고!"

정찰병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로 일어나서 전투 준비를 갖췄다.

"지, 진짜 몬스터가 온 거예요?"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건 도리안뿐이었다.

"빨리 준비해서 나와!"

라딘이 쇠뇌와 칼을 들고 굴 밖으로 나왔다. 라온과 샤크몰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할 때 전방의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거대한 괴수가 튀어나왔다.

"샤, 샤크몰!"

상어의 머리통에 두더지의 발톱, 인간의 몸뚱이를 가진 북해의 몬스터 샤크몰이었다.

"크헉!"

물러서서 쇠뇌를 쏘려고 할 때 굴 입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끼아아아!"

샤크몰은 기괴한 비명을 터트리고 수십 개의 발톱이 돋아난 손을 내리치려 했다.

'빌어먹을! 일단 팔을 주고…어?'

팔 하나를 미끼로 삼아 물러서려 할 때 샤크몰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푸카아악!

샤크몰의 머리통이 생선 대가리처럼 잘려 나갔다.

이빨을 떨며 고개를 들자, 새까만 하늘 위로 두 개의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아…."

달이 아니다. 라온의 붉은 눈동자였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너, 넌 대체…."

"제 말을 믿지 않으셨으니…."

라온은 더운 피가 흘러내리는 검을 든 채 등을 돌렸다.

"제 검은 믿어주시죠."

119화

"너, 넌 대체…."

라온은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라딘을 뒤로 하고 몸을 돌렸다.

쿠와아아앙!

기다렸다는 듯 샤크몰 다섯 마리가 땅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끼아아악!"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샤크몰이 자신을 한입에 삼키려는 듯 아가리를 쩍 벌려 그대로 찍어 내렸다.

"단순하네."

샤크몰의 공격은 단순한 만큼 빠르고 강력했지만, 감각을 크게 연 자신에겐 느리게만 보였다.

라온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샤크몰의 머리통이 허공에 멈춰선 순간 검으로 반월을 그렸다.

푸카악!

샤크몰이 붉은 피를 토하며 사선으로 갈라졌다.

"끄르륵…."

"끼이익!"

남은 네 마리의 샤크몰은 앞에서 죽은 놈을 보고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손톱을 세웠다.

"방어라…."

라온은 얼어붙은 땅을 즈려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검을 휘돌리며 살기를 일으켰다.

"의미 없을 텐데."

땅을 박차고 샤크몰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손톱을 내리쳤다.

'이럴 줄 알았지.'

방어를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본능대로 움직이는 몬스터. 참지 못하고 먼저 움직일 거라 예상했었다.

라온은 어깨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 샤크몰의 공격을 회피한 뒤 검을 내질렀다.

촤아악!

시뻘겋게 달아오른 검날이 우측에 있던 샤크몰의 몸통을 반으로 찢었다.

"시아아악!"

위기를 느낀 샤크몰들이 동시에 세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이빨을 들이밀고, 손톱을 내질렀다.

후웅!

라온은 발목의 방향을 세 번 전환하는 것만으로 샤크몰의 공격을 물길처럼 흘려보냈다.

'뭐지?'

피부의 범위가 늘어난 것처럼 감각이 민감해졌다. 샤크몰의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놈들의 손톱이 어디를 향하는지, 턱에 실린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이게 글래시아의 진짜 힘인가.'

피부가 이 공간 자체가 된 듯한 감각. 정찰만이 아니라, 전투에서 감각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게 글래시아의 진짜 사용법 같았다.

"시아아아!"

"끼아아아!"

라온은 물밀듯이 쇄도해오는 샤크몰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검을 내질렀다. 검날에 피어난 빨간 꽃송이가 샤크몰의 숨통을 갈라버렸다.

퍼어억!

황소처럼 돌진해온 네 번째 샤크몰의 심장을 뚫어버렸을 때 마지막 남은 놈이 등을 돌리고, 나왔던 구멍으로 도로 들어갔다.

쿠구구구!

놈은 지느러미를 세운 채 북해가 있는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가려고."

라온이 검을 내려놓고, 허리에 차고 있던 진혼검을 뽑아 들었다. 엄지와 검지로 검날을 쥐고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눈을 감고 다시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샤크몰의 숨소리가 귀를 울린다.

겁에 질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놈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방향과 거리를 예측한 뒤 전생에 배웠던 비검술 영전을 날렸다.

퍼어억!

뻘건 요기의 선을 그리며 날아간 진혼검이 대지를 가르고, 샤크몰의 머리를 뚫어버렸다.

진혼검이 만들어낸 구멍 속에서 새빨간 핏물이 치솟았다.

'끝났군.'

라온은 마지막 샤크몰이 죽은 곳으로 걸어가 진혼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우웅!

진혼검은 잘했냐는 듯 검명을 울렸다.

'그래. 잘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잘하기는 무슨. 그런 것도 못 하면 단검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느니라.

라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웅!

진혼검은 라스를 보며 피식 웃는 듯한 흔들림을 보였다.

-무엇이라! 본왕은 못한다고? 하찮은 미물 주제에 감히!

진혼검의 말을 해석한 라스가 분노를 끌어올렸다.

'아니. 아니야.'

라온이 진동하는 진혼검과 냉기를 뿜어내는 라스를 진정시켰다.

'마지막 샤크몰을 죽일 때는 네 도움도 컸어.'

-음?

'네가 알려준 글래시아. 그걸로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 다음에 샤크몰의 위치를 측정했거든. 덕분에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지.'

-오….

라스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진혼검을 굽어보았다.

-들었느냐. 하등한 네놈은 그저 본왕의 화살이 되었을 뿐이니라.

녀석은 진혼검을 비웃으며 동그란 냉기를 피워냈다.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좀 어렵기도 해. 거리가 조금 더 멀었으면 잡지 못했을 거야.'

-아니니라! 오늘 배운 걸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본왕이 계속 알려주겠노라.

우우웅!

진혼검도 다시 한번 검명을 터트렸다. 요기의 사용법을 더 자세히 가르쳐줄 테니, 라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처럼.

-어허! 미물은 저기 빠져 있어라. 본왕이 직접 글래시아의 진수를 가르쳐줄 터이니, 넌 걱정할 필요 없다! 요기 따위는 사술이니라.

라스는 글래시아 말고도 다른 전투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하며 진혼검의 말을 듣지 말라고 떠들어댔다.

'내기는 까맣게 잊었군.'

진혼검과의 경쟁에서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주자, 라스는 내기를 했다는 걸 잊고 글래시아의 진수를 가르쳐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젠 호구를 넘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

"와…."

"이, 이거 꿈인가?"

"혼자서 샤, 샤크몰 여섯을 죽였다고?"

무장을 갖추고 나온 정찰병들은 쇠뇌의 화살이 바닥에 떨어진 줄도 모른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휴우, 안 싸우고 끝나서 다행이네."

도리안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라딘은 해가 뜨자마자 정찰을 중지시켰다. 원래라면 이틀 정도 더 돌아다녀야 했지만, 샤크몰이 영역을 벗어나 스터린 산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해야 한다며 복귀를 지시했다.

"너 정체가 대체 뭐냐? 아니, 뭡니까?"

"샤크몰하고 싸워본 적 있는 거야? 공격을 전부 피하던데?"

"난 오러도 안 익힌 줄 알았어!"

"검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이 네 오러지?"

정찰병들은 라온의 옆에 딱 붙어서 쉴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들은 새로운 강자가 하분 성에 온 것만으로도 기뻐하고 있었다.

"에헴. 물러서세요! 무인에게 능력을 물어보다니, 실례입니다. 실례!"

도리안은 언제 꺼냈는지 모를 두꺼운 안경을 올려 쓰고 고개를 저었다.

"개인정보는 말하지 못하지만, 저희의 이름이 라온과 도리안이고, 같은 3 정찰대 소속인 건 확실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와 씨. 나 방금 감동 먹었다."

"같은 3 정찰대 소속이라고 하니까 가슴이 울렁였어."

"나도!"

정찰대들은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을 하며 히죽 웃었다.

"어이 대장! 대장도 한마디 해야지!"

"그래. 우리 전부 목숨을 빚졌잖아."

"아, 저 인간 또 삐졌나?"

정찰병들이 떠들어대도 라딘은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하분 성을 향해 걸어만 갔다.

라온은 등을 곧게 세운 채 걸어가는 라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없겠지.'

신병이 했던 말을 믿지 않아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으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곳에서 처음 있는 일이 일어났고, 그걸 말하는 건 신병이었다. 자신이 라딘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라, 마음 한켠에선 그가 이해되었다.

턱.

끝없이 걷던 라딘의 걸음은 하분 성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췄다. 그가 뒤를 돌아 고요한 눈으로 라온의 앞에 섰다.

"어이, 대장! 뭘 하려고!"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정찰병들이 말리려 할 때 라딘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라딘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경험이나, 처음이라는 핑계는 대지 않겠어.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그는 그 말을 모두 마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와 어깨의 떨림으로 진심이 담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저리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로다.

'그러게.'

고참이 신병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라딘이 괜히 정찰병들에게 신뢰를 받는 게 아니었다.

"거기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라딘을 일으켜 세웠다.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정말이냐?"

"처음 온 신병이 주워섬기는 말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죠. 저도 의심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허…."

라딘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한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너 이상한 놈이 아니었구나."

"예?"

"천사! 우릴 구원하러 온 천사였어!"

그는 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천사를 만나서 살아온 기념으로 오늘은 내가 쏜다! 전부 서리의 가지로 모여!"

"오오!"

"진짜야?"

"저 자린고비가 웬일이래?"

"오늘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자!"

정찰병들은 하분 성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와…."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사람들 진짜 좀 이상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손에는 남부지방에서만 나는 노란 사과가 들려 있었다.

"도련님도 좀 드세요."

녀석은 낮에 먹는 과일이 몸에 좋다고 말하며 사과를 건네주었다.

라온은 사과를 받으며 한숨을 뱉었다.

'네가 제일 이상하다고….'

* * *

라온은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숨을 돌린 후 정찰병들이 만나자고 했던 서리의 가지라는 주점으로 향했다.

-대륙 끝에 있는 술집이라니, 낭만적이로다. 어떤 음식이 본왕을 기다릴지 기대가 되는구나.

'여건이 별로니까. 맛은 기대하지는 마.'

이곳에 있는 주점은 말 그대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맛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이다.

-또 모르는 일이다. 민트초코처럼 새로운 자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아, 그건 좀…음?'

인상을 찌푸리며 주점으로 갈 때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녀석인가? 샤크몰 여섯을 홀로 죽였다는 신병이?"

"느껴지는 기세는 그리 강하지 않은데?"

"눈빛도 평범해."

"그래도 한번 붙어보고 싶군."

"무슨 검술을 쓰는 거지?"

놀라움과 신기함, 이쪽을 파악해보려는 듯한 눈빛들이 자신의 등을 쫓았다. 뒤에 이어지는 속삭임을 들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소문이 퍼졌군.'

정찰병들이 샤크몰 여섯을 홀로 잡은 신병이 있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닌 게 분명했다.

"어딜 가시든 이름 하나는 빨리 퍼지시네요."

"그러게 말이다."

피식 웃었다. 주변의 눈빛과 상황을 보니 조만간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여기인가 봐요."

도리안이 하분 성 입구 근처에 있는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반쯤 떨어진 간판에 서리의 가지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찰대의 병사들이 중앙의 테이블에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존나 멋있었다고! 내 검을 믿어달라고 한 다음에 뒤를 돌아서 샤크몰을 일검에 베는데, 붉은색 칼날이 밤하늘을 가르는 것 같았다니까."

정찰병은 목이 타는 듯 맥주를 입에 붙고 말을 이었다.

"마지막엔 단검을 날려서 도망치던 샤크몰의 머리까지 깨부쉈지. 나도 단검술을 배웠지만, 그런 위력과 정확성은 처음 봤어. 거기다… 어? 왔다!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신병이 왔다고!"

그가 입구에 서 있던 라온을 가리키자, 주점에 있던 시선이 모조리 자신을 향했다.

"저렇게 어린데?"

"진짜 맞아?"

"저 아이가 샤크몰 여섯을?"

"허…."

"확실하다고! 저렇게 보여도 존나 쎄다니까!"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중앙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우리 후배의 어마어마한 활약을 소문내고 있었지."

"원래 임무에서 살아 돌아오면 그 썰을 풀어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거든."

앉아 있던 정찰병이 씩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앉아. 앉아."

그가 바로 옆의 자리를 가리켰다.

"네가 곧 떠날 건 뻔하잖냐. 가기 전에 후배 자랑 좀 한 거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마."

"맞아. 곧 다른 부대로 발령이 날걸."

"우리도 잘난 후배 자랑 한번 해보자고."

정찰병들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라온과 도리안을 보았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먹자. 대장도 곧 올 거야."

"예."

"주인장! 주문한 음식들 다 가져다주쇼!"

미리 주문을 끝내놓았는지 음식들이 바로 나오기 시작했다. 따끈따끈한 스튜와 통돼지 구이, 피자와 닭튀김이 테이블 위로 깔렸다.

'이상하게 먹음직스럽네.'

-장소가 주는 맛이 있는 법이지. 빨리 먹어 보거라. 본왕은 일단 저 피자가 끌리느니라.

'그래.'

라온이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스튜를 먹으려 할 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주점 문이 열리고, 회색 늑대가 그려진 가죽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빈자리는 쳐다도 보지 않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당신이 라온인가?"

머리를 위로 세운 덩치 큰 검사가 라온의 앞에 멈춰 섰다.

"맞습니다."

"홀로 샤크몰 여섯을 베었다고 들었소. 당신의 검을 견식해보고 싶군."

노란 눈동자에 선명한 투지가 어려 있었다. 소년 검사를 대견하게 보는 눈빛이 아니라, 적수를 마주한 듯한 기세였다.

'전장에는 이런 자들이 있지.'

돈도, 명예도, 신념도 필요 없이 싸움만을 찾아다니는 전장의 아귀들. 맛이 간 눈빛을 보니 확실했다. 이들은 싸우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다.

"무슨 짓이야! 지금 막 돌아온 신병에게!"

"물러나! 여긴 너희가 낄 자리가…."

"괜찮습니다."

말리려던 정찰병 선배들에게 고개를 젓고 일어섰다.

-밥 먹을 때는 케르베로스도 건드리지 않거늘.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좋은 기회야.'

광아검을 완성 시키기 위해선 많은 전투를 겪어야 한다.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 덤벼주면 고마울 뿐이다.

라온이 서늘하게 웃으며 검집을 툭 두드렸다.

"내 검이 조금 사나운데 괜찮겠소?"

"사나울수록 환영이오."

붉은 눈과 노란 눈이 마주 선 허공에서 푸른 불꽃이 악을 질렀다.

-일단 피자 한 입만 먹고 가라. 제발….

120화

주점 밖 공터.

라온은 노란 눈의 검사와 마주 보고 섰다.

주점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문을 들고 온 병사들까지 몰려 공터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도박판까지 벌어졌다.

"저 녀석은 울브스 용병단의 투르카야!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늑대처럼 물고 놓질 않는다고!"

"그래. 섣불리 시비에 응할 필요 없어! 그만두자."

정찰병 선배들이 걱정을 해줬지만, 고개를 저었다. 광아검의 성취를 높여줄 제물이 알아서 찾아와줬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라온이 자신감 있게 웃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빌어먹을! 먹고 죽은 마족이 때깔이 좋다는 말도 있다. 음식 다 식느니라!

'다시 시켜줄게.'

-험, 뭐, 그러면야.

라스는 똑같은 걸로, 특히 피자는 무조건 시키라고 말하며 물러났다. 무게감이 깃털처럼 가벼운 마왕이었다.

"울브스 용병단 4번 조장 투르카요."

"라온입니다."

투르카는 한참 어린 라온에게도 예의를 갖췄다. 다만 눈빛 속에 약간의 경시하는 마음은 감추지 못했다. 샤크몰 여섯을 홀로 베었다는 말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샤크몰을 일검에 베었다는 검술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보겠소."

그 말과 함께 투르카가 땅을 박차고 도를 뽑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세운 도를 그대로 내리쳐온다. 두껍고 무거운 도의 장점을 제대로 살린 공격이었다.

다만 위력, 속도, 투로 모두 예상했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라온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도를 향해 광아검을 올려 쳤다.

쩌어어엉!

오러가 깃든 검과 도가 맞부딪친 충격에 얼어붙은 공터 바닥에 실금이 돋아났다.

"막았다고?"

검을 맞대고 있는 투르카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었다.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막을 줄은 생각도 못 한 것 같다.

"말했잖소."

라온이 가는 검으로 무거운 도를 밀어내며 서늘하게 웃었다.

"내 검은 사나울 거라고."

"크윽!"

맹수가 이를 세운 듯한 흉폭한 검격에 투르카의 도가 우측으로 튕겨 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왼 주먹을 뻗었다.

뻐어억!

바람을 뭉개며 내지른 주먹이 투르카의 우측 허리를 강타했다.

"끄헉!"

투르카는 새우처럼 허리를 구부린 채 땅바닥에 처박혔다.

"어어…."

"투, 투르카가 저리 쉽게 당했다고?

"저 녀석 울브스 용병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텐데?"

"무슨 놈의 주먹에서 바위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냐?"

"저 얇은 검으로 어떻게 도를 튕겨냈지? 그것부터 이상하잖아."

용병단들도, 구경꾼들도 깜짝 놀라서 벙찐 얼굴로 라온과 투르카를 번갈아 보았다.

"일부러 살살 쳤는데?"

라온이 여유롭게 어깨에 검을 걸쳤다.

"끄응…."

투르카가 도로 바닥을 찍고 일어섰다. 노란 눈동자는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검을 보여달라고 했잖소.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으아아아!"

네 손가락을 까닥이자, 투르카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많은 전투를 겪은 용병답게 당황한 와중에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횡으로 그어오는 도를 향해 광아검을 후려쳤다.

쩌어엉!

쇳덩이가 뭉개지는 듯한 굉음이 터지고, 투르카의 도가 밀려났다. 파탄을 드러낸 것 같았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허공에서 허리를 돌려 그대로 도를 내리쳐왔다.

"그래야지."

라온이 무릎을 살짝 굽힌 뒤 제비가 날 듯 낮게 검을 그었다.

쩌어엉!

도를 쥔 투르카의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꺾였다. 상대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광아검의 효용이었다.

"끄으윽!"

투르카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설 때 라온은 질풍처럼 나아갔다.

뻐어억!

투르카의 공간으로 파고들어 왼쪽 어깨로 가슴을 찍어버렸다.

"끄으윽…."

투르카가 눈을 까뒤집은 채 뒤로 넘어갔다. 입에서는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라온은 가볍게 손을 털고 뒤를 보았다.

경악하는 시선들 속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울브스 용병단 중 한 사람을 가리켰다.

"다음은 당신이 좋겠어."

라온이 흥이 올라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이대로 끝낼 건 아니지?"

* * *

라딘은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바로 사령관실을 찾아갔다.

회의 준비 중이었는지 사령관 밀랜드는 아들이자 부사령관인 테리안과 지도를 보고 있었다.

"복귀 예정일은 내일모레였을 텐데?"

밀랜드가 지도 위에 붉은색 깃발 모형을 꽂고 고개를 들었다.

"복귀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라딘의 진중한 목소리에 밀랜드가 모형 깃발을 내려놓고, 테리안이 팔짱을 풀었다.

"말해봐라."

"샤크몰이 5번 땅굴 앞까지 올라왔습니다."

"5번? 5번 땅굴이면 숲 외곽이잖아!"

말도 안 된다는 듯 테리안이 책상을 내리쳤다.

"예. 저도 샤크몰이 스터린 산 부근으로 올라온 건 처음 보았습니다."

"몇 마리나 올라왔지?"

"여섯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왔습니다."

라딘이 샤크몰의 지느러미가 담긴 보자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어!"

"그 정도로 영역을 벗어났다는 건가…."

밀랜드와 테리안 둘 다 깜짝 놀랐는지 지느러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깐만! 샤크몰 여섯 마리가 기습했는데, 왜 그렇게 멀쩡해? 사상자는! 몇 명이나 죽었어!"

"사상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어?"

"뭐?"

두 사람은 샤크몰이 나타났다고 할 때보다 더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너희들만으로는 샤크몰을 잡을 수 없었을 텐데."

"이번엔 제가 묻고 싶습니다."

라딘이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온. 그 녀석 대체 뭡니까."

오늘 새벽으로 돌아간 듯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비쳤다.

"제가 아니. 저희가 살아 있는 이유는 라온 때문입니다. 샤크몰이 다가오고 있다고 먼저 경고도 해주었고, 나타난 샤크몰 여섯을 홀로 베어버렸죠. 제가 나설 틈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샤크몰 여섯을 상대했다고?"

테리안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예. 그야말로 압도했습니다. 일검에 한 마리씩 샤크몰 다섯을 순식간에 베어버렸고, 마지막 남은 놈이 지하로 도망을 칠 때는 단검을 날려 땅을 깨부숴버렸죠."

라딘의 눈빛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땅에서 살며 많은 전사와 영웅을 보았지만, 저리 어린 나이에 저런 무력을 가진 녀석은 처음입니다. 대체 저희에게 어떤 괴물을 보내신 겁니까."

"...."

밀랜드는 대답하지 않고 지그시 지도만 내려보았다.

"정찰 쪽은 어떠했느냐."

"열 받았습니다."

"뭐?"

질문과는 상관없는 답변에 밀랜드가 눈매를 좁혔다.

"지형지물 파악, 몬스터의 흔적 파악, 시간과 날씨, 독도법과 방향까지. 여기에서 몇 년은 산 정찰병처럼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땅속이 비어 있는 공토까지 알더군요."

라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너무 잘나서 제가 짜증을 좀 부렸는데, 위험한 순간에 오히려 절 안심시켜주었습니다."

"인성도 좋다는 말이지?"

밀랜드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까맣게 탄 손가락으로 낡은 책상을 두드렸다.

"예. 본인이 한 일을 내세우지 않고, 아는 게 많다고 잘난 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틀뿐이지만 정찰병들하고도 잘 지냈구요. 검술을 보지 못했다면 어려서부터 고생한 용병이나,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녀석은 어떠냐."

"도리안이요? 솔직히 말하면 그 녀석이 더 특이합니다."

라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더 특이하다?"

"예. 별의별 물건을 다 가지고 다닙니다. 제가 살다 살다 정찰을 나가서 매트에서 자고, 뜨듯한 차를 마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아이의 성격은 어떠하냐."

"착합니다. 겁이 좀 많긴 한데, 주변을 잘 보고, 필요한 걸 챙겨줍니다. 만난 기간이 짧아 확답은 못 하지만 둘 다 선한 녀석들 같습니다."

라딘은 라온과 도리안을 지켜보고 느꼈던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니까 대답 좀 해주세요! 그 이상한 괴물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명가 맞죠? 얼굴에서 넘쳐흐르는 귀티를 보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 아이들은…."

밀랜드가 대답을 해주려고 할 때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님!"

부관 중 하나인 찰스가 빨개진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 그 왜…."

"좀 진정하고 말해."

"이틀 전에 들어온 신병 있지 않습니까."

신병이라는 말에 사령관실에 있던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그 신병 중 하나가 울브스 용병단의 투르카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서리의 가지 앞에서 진검으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뭐? 왜?"

"그야 뻔하죠. 혼자 샤크몰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 투르카가 싸움을 걸었을 겁니다."

테리안이 그 상황을 눈으로 보고 있던 것처럼 대답했다.

"울브스…."

밀랜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울브스 용병단은 용기와 투지가 강해서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만, 싸움을 너무 좋아한다.

외부에서 전투가 없으면 안에서 만드는 집단이라 여러모로 골치 아팠다.

"싸움이 거칠어져서 누군가 크게 다치기 전에 말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라온이 그곳 출신이고, 샤크몰을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고 해도 실전으로 다져진 투르카를 이기진 못할 겁니다."

"하아, 귀찮게 하는군."

밀랜드는 혀를 차고, 테리안을 보았다.

"네가 가서 싸움을 말리고, 라온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테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사령관실을 나섰다. 라딘은 함께 가겠다고 말하며 그 옆에 붙었다.

"흐음…."

밀랜드는 바닥에 놓여 있는 샤크몰의 지느러미를 보고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변화가 오고 있는 건가."

평생 이곳을 사수해온 노병은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 늙은 몸으로 그 변화를 감당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울브스 놈들 진짜 사고만 치고 다니네!"

라딘이 서리의 가지로 달려가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뇌까지 근육이 찬 놈들이니까. 받지 말자고!"

"그들이 앞뒤를 가리지 않는 건 맞지만,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백병전에는 그만한 인재들이 없어."

테리안이 담담한 눈빛으로 사실을 말했다.

"쩝, 그건 그렇죠."

라딘이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새끼들이 우리 신입 건드렸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이상한 괴물이라며."

"괴물이든, 귀신이든 일단 3 정찰대에 들어왔으면 다 제 부하입니다! 자기 발로 나가기 전까진 보호해줘야지요. 거기다 라온에겐 목숨까지 빚졌으니까."

"훗."

테리안이 씩 웃었다. 라딘은 겉과 달리 속정이 끈끈한 전형적인 북방의 남자였다.

'그건 그렇고.'

많이 다치지 않아야 하는데.

라온이 지그하르트 출신이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실전에서 무력을 쌓은 투르카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

우와아아아!

조금 더 속도를 올리자, 서리의 가지 간판이 보이고, 함성이 들려왔다.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서 들어갈 곳도 보이지 않았다.

"흡!"

테리안이 땅을 박차고 구경꾼들로 만들어진 벽을 뛰어넘었다.

"어…?"

둥글게 만들어진 임시 대련장의 끝에 착지한 그는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왜 저들이….'

몬스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용맹한 용병 다섯이 파랗게 질린 채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뻐어억!

바위가 깨지는 듯한 강렬한 소리와 함께 또 하나의 용병이 말뚝처럼 땅에 처박혔다.

"우와아아아아!"

"또 이겼다!"

"6연승이야! 저 꼬마가 울브스 용병 여섯 명을 홀로 깨부쉈다고!"

"미쳤어! 소문이 구라가 아니었잖아!"

"검귀다. 검귀!"

구경꾼들은 홀로 울브스 용병 여섯을 꺾은 라온을 찬양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허…."

테리안이 턱을 떨며 우측을 보았다.

서슬 퍼런 예기를 발하는 금발의 검사가 울브스 용병단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흥이 떨어지니, 한 번에 덤비시오."

붉은 눈에서 뿜어지는 기백에 테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121화

라온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으며 대자로 뻗은 용병들을 보았다.

'역시 사람이랑 싸워야 한다니까.'

실전에서 경험을 쌓은 용병들과 검을 나누자, 광아검의 성취가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식사 대신 대련을 선택한 게 정답이었다.

'다만….'

약간 감정적으로 된달까.

광아검의 광기에 물들어 흥분하게 되는 건 완벽하게 고쳐지지 않았다. 검술 성취가 조금 더 올라야 상대의 빈틈을 냉정하게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안 오는 겁니까?"

라온이 휘돌린 검으로 울브스 용병단을 가리켰다.

"전 아직 몸도 안 풀렸습니다.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여기까지면 실망인데요."

"이이익!"

"좋다! 덤벼!"

"너로는 안 돼. 내가 간다."

도발을 하자 용병들이 서로 다투며 앞으로 나왔다.

"다섯이면 딱 좋군요. 한 번에 오세요."

"미친…."

"진짜 다섯과 싸우겠다고?"

라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가자! 다굴로 조져버려!"

"거기까지."

용병들이 달려들려고 할 때 힘이 축 빠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앙에 서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팔다리가 길쭉한 녹색 머리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마치 사마귀가 생각나는 외모였다.

"어?"

"부, 부단장님!"

용병들은 그 남자를 보고 부단장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 뭐 하냐?"

날카로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거북이가 기어가듯 느릿했다.

"어…."

"그, 그게…."

"대충 알겠네."

그는 자신과 구석에 쓰러진 용병들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하아, 전 울브스의 부단장 클리프라고 합니다. 애들이 버릇이 좀 없어요."

클리프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머리를 들어 올리는 클리프와 눈을 마주쳤다.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우리 애들 다섯과 싸우자고 하시던데, 대신 제가 싸워드려도 될까요?"

정중한 말과 달리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한 투지로 가득했다.

-다른 줄 알았거늘. 똑같은 놈이로다.

'그러게.'

-끄응, 이제야 피자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또 시작이겠어.

'금방 끝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라온이 가볍게 웃으며 클리프와 마주 섰다. 그의 가는 눈을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감사하죠. 아직 몸이 덜 풀려서요."

"잘 되었군요. 저도 싸우면서 몸을 푸는 걸 좋아해서."

클리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젠 피어나오는 투지를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익스퍼트에 오른 검사의 기세가 어깨를 짓눌러왔다.

스르르릉.

그가 등에 메고 있던 창처럼 긴 장검을 뽑았다.

"나잇값은 해야 하니, 먼저 오시지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라온이 검을 고쳐 잡고, 땅을 박찼다. 앞으로 내달리려 할 때 눈앞으로 시퍼런 칼날이 튀어나왔다.

'빠르군.'

긴 팔과 장검의 리치를 이용한 쾌속의 검격이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칼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었어.

클리프의 팔과 장검을 보았을 때부터 이런 공격이 올 거라 예상했다.

쩌엉!

라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쇄도해 온 장검을 쳐냈다.

장검이 밀려난 틈을 노리고 땅을 박찼다. 공간을 파고들려고 할 때 클리프가 뒤로 물러서며 궤도가 어긋난 장검을 회수한 뒤 다시 내질렀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 이런 상황을 대비한 듯 조금의 당황도 보이지 않았다.

'재밌군.'

라온이 씩 웃었다.

'이런 싸움을 원했어.'

가볍게 이기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광아검의 효용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지금 같은 전투를 바랐었다.

"여유가 넘치는군요."

클리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내질러왔다. 매의 발톱처럼 꺾여오는 칼날을 향해 검을 후려쳤다.

쩌엉!

강한 힘을 담았지만, 장검의 흔들림은 크지 않았다. 클리프는 장검을 빠르게 끌어당겨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준비했다.

'그랬군. 이제 알겠어.'

라온이 입술을 핥았다. 세 번의 격돌을 통해 어떻게 클리프의 빈틈을 만들어야 할지 감이 왔다.

쿠웅!

진각을 밟고 전방으로 돌진했다.

촤아악!

클리프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찔러왔다. 지금까지보다 1.5배는 더 빨라진 속도. 그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더 많이 숨기고 있었지.

라온은 어깨를 틀어 찔러오는 장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뒤 검을 내리쳤다.

쩌어엉!

소리는 컸지만, 이번에도 장검은 많이 밀려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연검이었으니까.'

보기에는 길이만 긴 장검처럼 보였지만, 저 검은 채찍처럼 휘어지는 연검이다. 자신이 공격할 때 일부분만 강도를 풀어 충격을 흡수시킨 것이다.

'잘하네.'

레이든 지그하르트의 검술이 더 강하고 화려하지만, 세밀한 사용법은 이쪽이 한 수 위였다.

후우웅!

클리프가 뒤로 젖힌 팔을 벼락처럼 내질렀다.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뛰어난 무인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정도.

하지만.

라온의 눈에는 그 궤적이 선명하게 어렸다.

단전에서 끌어 올린 만화공의 괴력으로 검을 쏘아냈다.

클리프가 장검의 중심에서 힘을 빼려는 순간 손목을 틀었다. 광아검의 번뜩임이 이끄는 대로 장검의 끝부분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미쳐 힘을 빼지 못한 클리프의 장검이 반으로 꺾여 실금이 생겨났던 대지에 처박혔다.

"이, 이 무슨!"

당황한 클리프가 손을 휘저었지만, 검은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쿠웅!

라온은 장검이 아예 빠지지 않도록 땅을 뭉개버린 뒤 클리프를 향해 돌진했다. 검면으로 가슴팍을 후려치려고 할 때 클리프의 눈이 시퍼렇게 번들거렸다.

"미안하지만, 사마귀의 낫은 두 개다!"

그가 왼손을 들어 등에 메고 있던 두 번째 검을 뽑았다. 검집의 끝에 달려 있던 소검이었다.

"알아."

라온은 왼손으로 뽑은 진혼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아아악!

클리프의 소검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진심으로 당황한 그가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까…."

"싸움에 잠깐이 어디 있어."

코웃음을 치며 진혼검을 쥔 왼쪽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꺼어어억!"

등장은 달랐지만, 클리프도 다른 용병들과 똑같이 거품을 뿜어내며 뒤로 자빠졌다.

"후…."

라온이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하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역시 실전이 최고로군.'

광아검의 성취를 올리는 것에는 실전만 한 수련법이 없었다. 지금 얻은 깨달음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았다.

"끄어어억!"

"이, 이거 뭐냐?"

"저 사마귀 귀신이 지다니! 그것도 저런 어린 애한테!"

"아니, 이게 말이 돼? 클리프가 저렇게 깨진다고?"

"시, 신성이다. 미래의 신성이야!"

검사와 기사, 병사들까지 싸움을 구경하던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아!"

"최고다!"

"다음에는 나랑도 한 번 붙어보자!"

"어이! 어디 출신이야!"

멋진 싸움을 보여주었다면서 환호를 지르는 병사와 검사들도 많았다.

"라, 라온 님. 수고하셨어요!"

도리안이 수건과 사과 주스를 꺼내주었다. 녀석은 믿고 있었다고 말하며 따로 포도 주스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라온."

피식 웃으며 땀을 닦을 때 부사령관 테리안이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덤덤했다.

"따라와라. 사령관님이 부르신다."

그가 뒤를 돌아 걸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서갔지만, 흔들리는 손끝은 숨기지 못했다.

* * *

라온은 이틀 만에 다시 사령관 밀랜드의 앞에 섰다. 그는 탐색의 눈빛으로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지. 정찰병들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밀랜드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저도 정찰병 소속이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싸울 때와 다르게 재미없는 말을 하는군."

"보셨습니까?"

"보지는 못했다만 느껴졌다."

그가 뒤편에 있는 창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뭐랄까. 무력도, 성격도 여기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더구나. 용병들의 시비에 응할 줄은 몰랐어."

"본래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검사로서 좋은 마음가짐이다. 왜 그 나이에 그런 무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

밀랜드의 굳은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사령관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역시 검사. 당당한 말과 자세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넌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왔지?"

"예?"

"가문의 지시가 있다고 해도 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나?"

"있습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일었다.

"전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최대한 많은 싸움에 참여하고, 많은 전장에 서고 싶습니다."

광아검을 완성하고, 만화공을 키우며 무력이 강해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감정도 알고 싶었다.

"저, 전 반대입니다! 전 뒤에서 보급병을 하…."

헛소리하는 도리안의 입을 막았다.

"많은 싸움과 많은 경험이라…."

밀랜드가 검게 탄 듯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너희들은 가장 위험한 병과가 어디라고 생각하지?"

"보병 아닐까요?"

도리안이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정찰병입니다."

"잘 아는구나."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다. 가장 위험한 병과는 정찰병이지. 그들은 성안보다 성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전투가 벌어졌다고 쉬거나 빠지지도 않는다. 정찰할 때는 밖에서, 안에 있을 때는 성벽 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지."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임무 중 사망 비율이 가장 높기 때문에 정찰병은 항상 부족하다."

그러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병사로 들어온 주제에 도리안과 2인 숙소를 쓰지 않았던가.

"처음에는 전투 단체에 보내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어. 너희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주마."

"제, 제 목표는 보급병이라고 말씀드렸…."

"너희 둘을 정찰대의 특별 가드로 임명한다. 네가 원하는 실전을 원 없이 치르고, 최대한 많은 정찰병의 목숨을 구해주길 바란다."

밀랜드는 부탁한다고 말하며 기광이 어린 눈빛을 빛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정찰병들과 함께 움직이면 싸움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전 실전에 서고 싶다는 말을 안 했다니까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라온과 밀랜드는 바로 옆에 있는 도리안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다.

"조만간 제대로 인사발령을 내리지. 정찰 임무 수고했다. 쉬도록."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전 최후방에서 보급병으로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도리안을 잡아끌고, 사령관실을 나왔다.

"으윽, 끝났다. 끝났어. 내 인생은 망했다고!"

도리안은 좀비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 망했으니까. 헛소리 말고 가서 쉬어."

"예? 라온 님은요?"

녀석은 언제 꺼냈는지 둥그런 과자를 입에 물고 있었다.

"수련 좀 하고 갈게."

"으, 알겠습니다."

도리안은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잠깐.

라온이 병사들의 수련장을 찾아가려 할 때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이 다르다.

꽃팔찌에서 솟구친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

-그렇다. 대련이 끝나면 피자를 먹겠다고 말했잖느냐.

'아, 그거.'

라온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었다.

'수련하고 저녁에 먹자.'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그렇게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니라!

'이번엔 진짜야. 피자도 네가 원하는 걸로 먹을게.'

-저, 정말이냐?

'그렇다니까. 깨달은 걸 먼저 정리하고 싶어서 그래.'

라온이 다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웅!

진혼검도 믿어보라고 말하는 듯 검명을 울렸다.

-조, 좋다. 그럼 마음 넓은 본왕이 이해해주겠노라. 대신 본왕이 원하는 피자를 고르는 건 무조건이니라.

'그래. 그래.'

라온은 애를 달래듯이 웃고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서산에서 떠오른 달이 손가락 세 마디 정도 움직인 후에야 수련장을 나왔다. 검집을 툭 두드리는 그의 표정은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광아검의 성취가 많이 올랐어.'

대련을 통해 깨달은 점을 정신과 육체에 확실하게 새겼다.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껍질을 한 겹은 깬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서 잘까.'

-라온 지그하르트!

숙소로 가려 할 때 앵무새처럼 팔목에 매달려 있던 라스가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냈다.

-본왕과의 약속을 또 잊었다는 말이냐!

'아, 농담이야. 농담.'

라온이 피식 웃었다. 그런 어이없는 약속을 잊었을 리가 있겠는가. 장난 한 번 쳐 봤을 뿐이다.

수련하는 동안 라스가 조용하게 기다려줘서 원하는 대로 피자를 시켜줄 생각이었다.

우우웅!

진혼검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고 검명을 터트렸다.

-무엇이? 본왕이 속이 좁아? 좁은 건 네놈 주인의 머리통이니라!

우우웅!

-미물 주제에 본왕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 본왕은 그저 미식가로서의 호기심에….

라온은 시끄럽게 떠드는 마왕과 요검을 무시하고, 정찰병들과 갔던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그런데….

"어라?"

주점의 불이 꺼져 있었고,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일찍 문을 닫은 것 같았다.

-문 닫은 것이냐?

'그런 거 같은데.'

-....

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푸른 불꽃을 바르르 떨었다. 가늘게 피어나던 냉기가 해일처럼 파도치기 시작했다.

-본왕이 아까 가자고 하지 않았더냐!

'나도 이렇게 일찍 닫을 줄은 몰랐지.'

-닥치거라. 이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느니라!

'진짜 이럴 생각은….

-본왕의 피자를 내놓아라!

녀석에게서 뿜어진 냉기가 발목과 손목을 휘감아왔다.

'이, 이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육체를 뺏고, 본왕의 손과 입으로 직접 피자를 먹겠노라!

라스의 냉기가 푸른 벼락처럼 명멸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거대한 분노와 냉기가 자신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날.

라온의 능력치가 2포인트 올라갔다.

122화

라온과 정찰병들이 하룻밤을 묵었던 5번 땅굴.

샤크몰의 피가 얼어붙은 그 혹한의 땅에 검은색 로브와 푸른색 로브를 두른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흐음…."

몬스터에게도 밀리지 않는 키와 덩치를 가진 검은 로브의 사내는 땅굴 주변에 퍼진 핏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빠르고 단순한 살검이다. 시체와 땅의 흔적만으로는 어떤 검술을 익혔는지 모르겠군."

그는 라온이 진혼검을 날려서 만들어낸 구멍을 보고 턱을 긁적였다.

"이 구멍은 어떻게 만든 거지? 검 같지는 않고, 창인가? 아니, 이건…."

"뭘 그런 걸 알려고 해."

정찰병들이 묻어놓았던 샤크몰의 시체를 발로 툭툭 차던 푸른 로브의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다 뒈질 놈들인데."

"네놈 때문이다. 죽이려면 확실하게 죽이던가. 아니면 정보라도 모으던가. 어설프게 이쪽의 정보만 주지 않았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뒤를 돌았다. 로브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입매를 찡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일부러 그랬냐? 통제가 풀린 걸 어떻게 해."

"헛소리하지 마라."

"하아, 왜 그리 걱정이 많아. 준비한 대로만 움직이면 어려울 게 없다고."

"저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우스워."

푸른 로브의 사내는 하분 성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히죽 미소 지었다. 상어처럼 날카롭게 돋아난 수십 개의 이빨이 번들거렸다.

"어차피 계획대로만 하면 꼼짝도 못 할 놈들이잖아. 그걸 위해서 지금 땀나도록 준비하는 거고."

"그러니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네놈이 움직일수록 계획이 어긋나니까. 점점 머리까지 생선이 되는 것 같군."

"짐승 같은 놈이 말은."

"...."

"에휴, 알겠다. 알겠어.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마."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푸른 로브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건데?"

"하분 성의 지휘관은 바보가 아니다. 샤크몰이 스터린 산 부근으로 올라온 일을 확인하고, 결집하는 트롤을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겠지."

"그놈들을 치면 되는 건가? 그건 내가 하지!"

"아직 넌 나설 때가 아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너나 내가 움직이는 순간 육황에서 지원을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우리는 마지막에 칼을 들어야 한다."

"그럼?"

"준비한 놈들이 있다."

그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깃털처럼 가늘고, 긴 하얀색 털이 전신을 덮었고, 귀는 엘프처럼 뾰족했으며, 팔은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졌다. 아이스 트롤. 이 북동의 땅에 가장 큰 악명을 울리는 몬스터 두 마리가 검은 로브 남자의 뒤에 섰다.

"오, 평범한 놈들이 아니네."

푸른 로브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히죽 웃었다. 그의 말대로 두 아이스 트롤은 범상치 않았다. 일반 아이스 트롤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각기 붉은색 몽둥이와 푸른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워리어와 샤먼이라면 실험을 하기에도 적합하겠는데? 나도 괜찮은 놈들 좀 찾아봐야겠어."

그는 낄낄 웃으며 북해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고, 검은 로브의 남자는 말 없이 스터린 산으로 걸어갔다.

쿠구구구.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은 잘 훈련된 개처럼 검은 로브 남자의 뒤를 따랐다.

* * *

다음날.

라온은 정오가 되기 전에 숙소를 나와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먼저 주점에 가자고 하시다니, 별일이네요."

도리안이 하품을 쩍 하고 눈을 비볐다.

"어제 못 먹은 음식이 생각나서."

"아, 하긴 음식들이 좀 먹음직스럽긴 했죠."

사실 배가 고프거나, 음식이 당기지는 않았지만, 피자도 먹지 못한 채 능력치만 빼앗긴 라스가 아주 조금 안쓰러워 시간을 쓰기로 했다.

-본왕을 생각하는 척하지 마라. 약속은 원래 어제였으니까.

여름철 매미처럼 팔목에 매달려 있던 라스가 툴툴거렸다. 많은 힘을 소모한 녀석은 어제보다 상당히 작아져 있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갈 때 주변에서 관찰의 시선이 쏘아져 왔다.

"저 녀석이다. 홀로 샤크몰 여섯을 베고, 울브스 용병들과 부단장 클리프까지 쓰러뜨린 검귀가."

"정말 맞아?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

"느껴지는 기세가 미약한데…."

"어제 반대로만 걸었다가 월급 다 날렸는데, 그걸 잊을 리가 있겠냐!"

"저리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지독한 사마귀를 꺾을 무력을 쌓았지?"

검사와 기사들은 지나가는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이, 검귀! 어제 멋있었다!"

"우리 용병단이 그렇게 깨진 건 오랜만이야!"

"까불던 투르가를 패줘서 고맙다."

"난 부단장이 얻어맞을 때 그렇게 시원하더라구!"

탐색의 시선을 보내는 검사들과 달리 울브스 용병단은 환호를 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미친놈들이로다.

'저들은 그냥 싸우는 게 좋고, 강자가 좋은 거야.'

지금도 눈동자에 싯누런 광기가 비친다. 싸움을 찾아다니는 전장의 아귀다운 태도였다.

-뭐가 되었든 상관없으니, 빨리 가거라.

'그래. 그래.'

라온은 피식 웃고서 주점의 문을 열었다. 밥을 먹기 애매한 시간이라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앉자, 주방에서 어제는 듣지 못한 발랄한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장밋빛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십대 초반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식사하시는 거죠? 어?"

테이블에 메뉴판을 내려놓은 소녀가 라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울브스 아저씨들이랑 싸운 검사님 맞으시죠?"

"그래."

"와아, 언니들이 검술보다 얼굴에 더 눈이 간다더니, 진짜였네요!"

점원 소녀는 헤헤 웃으며 라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엇 하느냐. 감질나게 하지 말고, 메뉴판을 열어라. 본왕이 전부 시킬 것이니라.

'에휴….'

-일단 피자이니라. 어제 보았던 피자가 꿈에서도 떠올랐다.

메뉴판에서 피자가 있는 곳을 보았다. 다섯 종류가 있어서 뭘 시킬까 고민할 때 소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제가 추천해드릴까요? 일단은 이 소고기 피자랑 치킨 피자가 제일 잘나가구요. 별미로는 이 매운 고추 피자도 괜찮아요. 그리고…."

점원 소녀는 그 외에도 구이류와 치킨 그리고 스튜까지 추천해주었다. 잘 생겼다고 다가와 매상을 올리는 제대로 된 장사꾼이었다.

-일단은 치킨 피자와 저기 가장 아래에 있는 파인애플 피자를 시켜라.

'파인애플 피자는 어제 없던 건데. 어제 있던 피자는 소고기….'

-상관없다. 본왕은 저 파인애플 피자가 먹고 싶으니라.

'음, 파인애플은 좀….'

파인애플은 남부 지방에서 나오는 열대 과일이다. 달면서 시큼한 맛이라, 치즈가 올라간 피자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너 미식가가 아니라 괴식가냐?'

-시끄럽다. 오늘은 본왕에게 맞춰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약속을 지켜라.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는 고작 피자를 주문하는 걸로 맹세라도 하는 듯한 근엄한 음성을 흘렸다. 보면 볼수록 없어 보이는 마왕이다.

"일단 치킨 피자랑 파인애플 피자를 주고, 소고기 스튜를 하나…."

"아, 죄송해요. 파인애플은 지금 재료가 없어요."

점원 소녀가 재료 때문에 안 되는 메뉴가 몇 가지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끄으윽. 그게 제일 먹고 싶었거늘….

'후우, 다행이야.'

"파인애플?"

파인애플 피자를 먹지 않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멍하니 메뉴판을 보고 있던 도리안이 벌떡 일어섰다.

"자, 잠깐…."

기분 나쁜 예감에 멈추려 했지만, 도리안의 손은 번개처럼 빨랐다. 순식간에 배 주머니에서 파인애플 하나를 꺼내놓았다.

"여기 있어."

"어?"

점원 소녀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이, 이걸 어떻게…."

"파인애플을 가지고 다니는 정도야 흔하잖아."

도리안은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안 흔해! 그게 왜 있냐고!'

라온은 도리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오오! 역시 본왕의 첫 번째 부하이니라!

라스는 부하로 두길 잘했다고 중얼거리며 냉기로 도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 파인애플은 저희가 구매해서 사용하는 걸로 할게요."

"괜찮아. 또 있거든."

도리안은 두 번째 파인애플을 꺼내며 히죽 웃었다.

"도련님 잘됐네요. 드시고 싶은 파인애플 피자를 드실 수 있어서."

"그래. 잘됐네."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잘 됐어.

"흐으."

라온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추천받은 다른 음식들까지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만들어서 가져올게요!"

점원 소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파인애플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얄밉게 보이는 도리안과 잡담을 하고 있자, 주방에서 점원 소녀와 인상이 매서운 은발의 노인이 음식을 들고 함께 나왔다.

방금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들이 테이블에 주르륵 깔렸다.

"이건 재료로 사용하고 남은 파인애플입니다."

노인은 반 정도 남은 파인애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 몇 죽였을 것 같은 인상과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헤에…."

점원 소녀는 잘라낸 파인애플에서 올라오는 단 향기에 혀를 반쯤 내놓고 있었다.

"도리안."

"예?"

"이거 이 아이한테 줘도 돼?"

"아, 그럼요!"

도리안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서 먹어."

"가, 감사합니다!"

점원 소녀는 머리 색과 같은 홍조를 볼에 띄우고 고개를 꾸벅였다.

"고맙습니다."

노인도 작게 고개를 숙인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인상과 달리 태도도 선한 사람이었다.

-착한 척하지 말고, 먹어라! 따끈따끈할 때 빨리!

'보채지 좀 마.'

라온은 옅은 한숨을 뱉고서 파인애플 피자를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서 피자를 크게 한입 물었다.

"흐음…."

생각보다 신맛은 없었다. 다만 단맛이 혀를 자극할 정도로 진해졌다. 짠맛과 단맛이 조화롭지 않게 혀를 찌르는 느낌이랄까.

못 먹을 정도는 아닌데, 굳이 과일을 데워서 먹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으, 이거 그리 좋지 않네요."

파인애플 피자를 먹은 도리안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반면에.

-허어, 이런 맛이 있었다니, 본왕은 세계를 몰라도 너무 몰랐도다!

파인애플 피자에 감동한 마왕이 하나 있었다.

-단맛과 짠맛이 황금의 비율을 이뤄 본왕의 혀를 실크처럼 부드럽게 휘감고 있노라. 이것이 미식이고, 이것이 행복이니라!

마계의 군주는 파인애플 피자 한 조각에 극락을 느끼며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속 먹어라! 멈추지 마라!

"끄응…."

라온은 눈매를 찡그리면서도 계속 파인애플 피자를 먹었다. 확실히 맛이 없진 않았지만, 역시나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차게 식힌 파인애플을 따로 먹고 싶었다.

-오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로다. 앞으로 본왕은 이 피자를 단짠 피자라 명하겠노라.

라스는 완전히 빠져서 파인애플 피자만 먹으라고 떠들어댔다.

"도련님은 식성이 참 특이하시네요."

도리안이 네 번째 파인애플 피자를 드는 자신을 보며 콧등을 좁혔다.

"…그게 아니야."

"아니긴요. 본래 혀는 못 속이는 법입니다. 민초단에 파인애플 피자라니,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독특하십니다."

"아니라고."

다시 한번 녀석의 머리를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만족스럽도다. 훗날 마계에 파인애플의 숲을 조성하겠노라.

이쪽은 최고의 기분인 모양이네.

라온은 지금이 계획을 실행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파인애플 피자를 한 조각 더 먹으며 라스를 보았다.

'라스.'

-무엇이냐.

목소리가 밝다. 어제 폭주를 일으켰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음성.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느낀 건데 이걸 쓰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지?'

-호오, 네놈이 그걸 깨달았다는 것이냐. 맞느니라.

라스가 흡족한 고갯짓을 했다.

-말하자면 너희 인간들이 사용하는 연공법과도 비슷하지. 글래시아는 냉기를 최적의 효율과 최고의 위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용법이다.

'그럼 공격이나 방어도 되는 건가?'

-당연하다.

'그런 뛰어난 탐색 능력에 공격과 방어도 할 수 있다니, 엄청나네.'

-그렇지! 네 하찮은 기질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능력이니라.

라스의 음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입에서 도는 파인애플 피자의 단맛과 자신의 노골적인 아부에 오랜만에 경배받는 마왕의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사용하는데? 혹시 냉기를 냉기로 막을 수도 있나?'

-한심한 놈이로다. 본왕이 무엇이라고 했느냐. 이미지다. 이미지! 이미지를 그리면 안 될 게 없느니라.

'그럼 내가 냉기를 막는 이미지를 그리면 외부와 내부의 냉기를 전부 막을 수 있겠네?'

-물론이다. 본왕이 만든 능력에 사각은 없느니라. 본왕이 알려준 주문을 외우며 네게 필요한 이미지를 그려라. 공격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라스는 내기를 했다는 것도, 본인의 공격수단이 냉기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라온에게 이미지에 관한 조언을 읊어주었다.

'그렇군.'

라온이 마지막 남은 파인애플 피자를 입에 넣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분노의 군주에게 바치는 감사의 인사였다.

고맙다.

* * *

파인애플 피자는 미묘했고, 오묘했지만 다른 음식은 확실히 맛깔났다. 입맛이 까다로운 라스도 만족스러워하며 전속 요리사니, 뭐니 중얼거렸으니까.

"여기 끝내주는데요? 북방에 이런 식당이 있을 줄이야."

도리안이 언덕처럼 솟구친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게."

라온이 빙긋 웃으며 일어섰다. 계산하려고 주방으로 가자, 점원 소녀가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이거 가져가세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잘 익은 갈색 쿠키였다. 중앙에는 아까 가져간 파인애플이 박혀 있었다.

"파인애플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만들어봤어요."

"어…."

오해다. 완벽한 오해.

-이런 곳에 또 본왕의 찬양자가 생겼군. 오늘부터 저 소녀를 본왕의 파인애플 소녀로 인정하겠노라.

냉기를 줄기줄기 퍼뜨리는 라스를 밀어버리고, 쿠키를 받았다.

"고마워. 그러니까…."

"유아에요!"

"그래. 유아. 고맙다."

라온이 웃으며 쿠키를 받았다. 주방 안에 있던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마주 인사를 하고 계산을 마쳤다.

"잘 가시고, 또 오세요!"

유아는 자신과 도리안이 가게의 밖으로 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건 또 나름 괜찮네요."

도리안은 파인애플 쿠키를 먹으며 피자와는 다르다고 중얼거렸다.

"어디…."

라온이 입맛을 다시고 쿠키를 한 입 먹었다. 바삭한 쿠키 안에 꾸덕한 파인애플 알갱이가 씹히는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호오, 꾸덕하군. 이것 또한 묘한 맛이다. 본왕의 파인애플 소녀는 재주도 많구나. 오늘은 얻는 게 참 많아.

'그러게.'

얻은 건 내가 더 많을걸.

라온이 남은 쿠키를 입에 넣으며 씩 웃었다.

"라온! 도리안!"

어떤 이미지를 그릴까 생각할 때 멀리서 라딘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후욱, 급한 일이 있어서."

라딘은 손으로 무릎을 잡은 채 숨을 고른 뒤 일어섰다.

"3번 정찰대에 임무가 내려왔다."

긴장감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너희들의 첫 출정이다!"

123화

어젯밤. 하분 성 사령부.

밀랜드와 테리안, 전략 장교들이 원형 테이블 앞에 모여 있었다.

"2번 정찰대가 4번 땅굴 근처에서 아이스 트롤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숫자는 열셋. 더 모여들기 전에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사령관 테리안이 지도에서 스터린 산 아래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4번 땅굴이면 5번과 그리 멀지 않군."

"예. 트롤을 제거하는 김에 스터린 산 부근에 다른 해양 몬스터가 올라왔는지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흠, 트롤도 트롤이지만, 샤크몰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지."

지도를 보고 있던 밀랜드의 시선이 라딘이 놓고 갔던 샤크몰의 지느러미로 향했다.

"범상치 않은 일이니, 부사령관이 직접 움직이는 게 좋겠군."

"명을 받들겠습니다."

테리안은 예상하던 것처럼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격대와 울브스 용병단을 데리고 가라. 트롤을 제거하고, 북해 주변까지 조사하고 돌아오도록. 그리고 정찰대는…."

"2번과 3번을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3번?"

"예!"

밀랜드가 살짝 의문을 표했지만, 테리안은 바꿀 생각이 없는지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좋다. 출정은 이틀 뒤 새벽이다. 그렇게 알고 모두 준비하도록."

"예!"

전략 장교들은 상세 계획을 짜겠다며 떠났고, 지휘관 실에는 두 부자만이 남았다.

"2번대는 트롤을 목격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3번대를 왜 골랐지? 4번과 5번은 아예 나가지도 않았는데?"

"라온의 대련을 보았을 때 느낀 게 있습니다."

"느낀 것?"

"예. 라온의 무력이 경악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육황과 오마의 어린 재능들을 뒤지다 보면 비슷한 수준이 없진 않을 겁니다."

동의하는지 밀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아이에겐 무력 이상의 기백이 있습니다. 상대를 꺾어버리겠다는 사나운 기파에 제가 압도될 정도였습니다. 그 거친 울브스 용병단도 패배를 인정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군요."

"결국 그 기백이 진짜인지를 보고 싶다는 거로군."

"뭐, 그렇게 되겠죠."

"좋다. 본인도 싸움을 원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밀랜드가 지도를 툭툭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도록 해라."

"예!"

"다만…."

지도를 접고 일어서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조심하거라. 변화가 일어날 때가 가장 위험한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테리안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 * *

라온은 짐을 챙기라는 라딘의 지시를 듣고 숙소로 돌아왔다.

"도, 도련님. 이거 좀 빠르지 않아요?"

도리안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발발 떨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긴 하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확실히 빨라.'

정찰에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정찰대를 바로 출정에 내보내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아마 나 때문이겠지.'

샤크몰을 홀로 처리하고, 울브스 용병단을 털어버린 실력을 제대로 보여달라는 의미와 이곳의 실전을 겪어보라는 두 가지 의미 같았다.

"망했어, 진짜 위험해…."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꺼낸 사람 크기만 한 쿠션을 껴안고 매트 위를 뒹굴었다. 참 별걸 다 가지고 다닌다.

"이 정도면 되겠지."

라온은 출정에 필요한 짐을 배낭에 넣은 뒤 침대 아래에 두었다.

"도련님. 아이스 트롤한테는 칼도 안 들어간다는데 진짜일까요?"

"진짜야."

아이스 트롤은 추운 지방에서 사는 몬스터답게 가죽이 질기고, 두껍다. 날카로운 검에 오러를 가득 둘러야만 간신히 벨 수 있다.

"그렇다고 재생력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까다롭지."

트롤 특유의 재생력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근력이나 민첩성에 지능까지 뛰어나기 때문에 아이스 트롤을 상대하는 건 숙련된 검사와 기사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넌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예? 제가요?"

도리안이 껴안고 있던 전신 쿠션을 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네 장점인 발을 사용해서 빈틈을 노리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배운 대로만 해."

"도련님이 그러시니까 용기가 나…지 않네요."

녀석은 무섭다고 중얼거리며 두더지처럼 매트 밑으로 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럼 방법이 하나 있다."

"방법?"

"그래. 네가 아이스 트롤 앞에 서도 조금도 무섭지 않을 방법이."

"알려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도리안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라온을 마주 보았다.

"광아검을 사용하는 나와 대련하면 아이스 트롤은 그깟 몬스터가 될 거야. 가자."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다.

"아…."

도리안의 눈동자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탁 풀렸다. 이마 위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도리안?"

"어우, 잠깐 상상 좀 했더니, 괜찮아졌습니다! 갑자기 트롤이 좁밥으로 보이는데요?"

녀석은 신기하다며 하하하 웃더니, 그대로 침대에 푹 쓰러졌다.

-미친놈이로고.

라스는 저런 놈은 마계에도 없다며 혀를 쯧쯧 찼다.

라온은 피식 웃고서 침대 위에 앉았다. 시끄러운 녀석이 조용해졌으니, 수련할 시간이었다.

눈을 감고, 외부와 조화를 시켰던 혹한의 냉기를 끌어 올렸다.

'이미지라고 했지.'

라스는 이미지만 있다면 글래시아를 어떤 방법으로도 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부 비슷하네.'

리메르가 만화공의 습득을 도와줄 때도, 글렌이 태화보를 보여줄 때도 매번 이미지를 중요시했다. 아무래도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심상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 같다.

후우우우.

폐가 조여들 정도로 천천히 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상하는 건 옷. 내부와 외부의 냉기를 모조리 막아낼 수 있는 서리의 옷을 그려보았다.

무겁지만 완벽한 방어를 할 수 있는 철제 갑옷, 가볍지만 든든한 가죽 갑옷, 바람와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로브까지. 많은 옷을 생각해 보았지만, 모든 냉기를 막는다는 이미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완벽한, 그리고 절대적인….'

그 생각을 하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글렌 지그하르트.

글렌이 입고 다니는 검붉은색의 코트는 그의 위엄을 두른 듯 그 어떤 칼날과 냉기에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무적자의 갑옷이 바로 그와 같았다.

고오오오!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냉기의 실로 한 땀 한 땀 옷을 꿰매는 상상을 하며 깊은 심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도리안과 함께 성문 앞에 나와 있었다. 함께 출발하는 설격대와 울브스 용병단은 진중한 표정으로 각자의 무기를 손보고 있었다.

"괜찮아?"

"예. 뭐가 되었든 도련님하고 대련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더라구요. 하하!"

대련을 말한 이후 도리안은 미친 검귀에 비하면 아이스 트롤은 밥이지 라고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안녕하세요."

요상한 방법으로 자신감을 채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을 때 은색 방한복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흑발흑안에 피부는 하얗다. 평범한 키에 인상이 부드러워 큰 특징은 없어 보였다.

"울브스 용병단의 단장 베토라고 합니다. 어제 저희 아이들이 실례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부단장 클리프와 달리 싸움을 걸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았던 울브스 용병단의 기질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즐겼으니까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소속은 정찰병이십니까?"

"예."

"최강의 정찰병이시겠네요.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인사를 끝낸 베토는 준비 상태를 확인한다며 울브스 용병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눈을 뽑아라.

'또 왜.'

-눈빛에 뱀이 어려 있다. 저런 놈은 믿는 게 아니야.

'관상도 볼 줄 알아?'

-경험이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저런 눈빛과 얼굴을 한 놈 수없이 마주쳤지. 십중팔구는 배신자가 될 놈이다.

'여전히 부정적이네.'

다만 라온도 저 베토라는 남자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꽤 여러 가지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특히 눈.'

라스의 말처럼 뱀의 기운은 느끼지 못했지만, 어둠을 담은 듯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기이한 힘이 어려 있었다.

"아저씨들!"

안쪽에서 들린 초롱초롱한 목소리에 모두가 뒤를 돌았다. 서리의 가지에 있어야 할 유아가 여러 개의 주머니를 들고 달려왔다.

-오, 파인애플 소녀가 아닌가!

"조금 늦었죠. 다 준비됐어요."

유아는 가지고 온 주머니를 검사와 용병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미리 주문했던 간식들을 주는 것 같았다.

"와, 유아는 어떻게 점점 귀여워지냐."

"요리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고."

"하분 성의 자랑이지. 자랑!"

정찰병들은 유아를 본인들의 아이처럼 웃으며 귀여워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 하분 성의 마스코트 같은 아이인 모양이다.

"하나 남네."

유아는 주머니를 모두 나누어준 뒤 남은 하나를 가지고 라온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랑 제가 만든 수제 육포에요. 햇볕 좋을 때 말려서 맛있으니, 가져가세요."

"이걸 왜 나한테…."

"첫 출정이잖아요. 꼭 돌아오셔서 다음엔 사드세요."

유아가 히히 웃으며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고맙다."

"고마우면 돌아오셔서 매상 올려주세요!"

유아는 모두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하고서 주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도리안은 텅 빈 손을 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눠 먹으라는 거잖아. 네가 가지고 있어."

"아, 옙!"

녀석은 씩 웃으며 육포 주머니를 배 주머니에 넣었다.

"모두 정렬! 지금부터 마지막 점검을 한다."

출발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을 때 부사령관 테리안이 정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물자와 인원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때기 놈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러게.'

출발 직전에 찾아오거나, 대충 확인하는 리메르와는 성격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테리안이 정문 앞 단상 위에 서서 병사들을 굽어보았다. 거센 존재감에 시선이 저절로 고정되었다.

"출정의 목표는 두 가지다. 모여들고 있는 아이스 트롤의 제거와 스터린 산 초입부터 북해까지 정찰.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끝까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예!"

이미 작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검사와 병사 그리고 용병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20분 뒤에 출발한다. 모두 마지막 점검을 하고 마음을 다잡도록!"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사령관님의 지시대로 혹시 빠뜨린 물건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해."

"예!"

"어이."

라딘의 말대로 마지막 확인을 하려고 할 때 함께 출발하는 설격대 검사들이 다가왔다.

"이것 좀 들어."

"조금만 더러워져도 너희들이 어떻게 될지 알지?"

"조심해서 다뤄."

"하나라도 없어졌다간 혼난다."

"네 애인처럼 생각하라고. 없겠지만."

그들은 천막이나, 텐트, 식량 같은 무거운 물건들을 정찰대 앞에 던져놓고 낄낄 웃으며 돌아갔다.

"이게 뭡니까?"

"뭐긴 뭐야. 제 놈들 짐을 들어달라는 거지."

"이걸 왜 정찰대가 드는 거죠?"

라온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 싸울지 모르니, 힘을 아껴야 한다더군. 저놈들이 여기에 배정받고 난 이후에는 매번 이래."

라딘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찰병들은 익숙한 것처럼 검사들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있냐. 지위도, 힘도 약한데, 까라면 까야지."

"음…."

라온이 설격대 검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격대주라고 했던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 또한 이 꼴을 모두 보았음에도 당연하다는 듯 별말을 하지 않았다.

'지랄맞군.'

저들이 싸움을 준비한다면 이들은 정찰을 준비해야 한다. 더 힘든 일을 하는 동료에게 짐을 떠넘기다니,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인간들은 갑질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느니라.

라스는 인간들은 뻔하다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 더럽네! 다 놔두세요!"

도리안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왔다. 녀석은 멍하니 선 정찰병들 사이에 껴서 검사들이 두고 간 짐을 모조리 배 주머니에 넣었다.

"선배님들! 제가 다 들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저만 믿으십쇼!"

"오오!"

"진짜야?"

"안 무겁냐?"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도리안은 팔근육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하고 콧김을 흥하고 불었다.

"시, 신입! 너 특이한 놈이라고 한 거 사과한다!"

"이야! 너 이거 먹어!"

"옙!"

정찰병들은 모든 짐을 챙긴 도리안에게 박수를 보내고, 간식을 챙겨주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녀석은 성격이 워낙에 좋아서 윗사람이나, 동료들에게 사랑을 받을 타입이었다.

20분이 지나고, 방한복을 입은 테리안이 돌아왔다. 모든 병력이 그 앞에 정렬했다.

"출발한다. 2번, 3번 정찰대 앞으로!"

"앞으로!"

라온과 도리안은 3번 정찰대장 라딘을 따라 일행의 선두로 갔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

정찰을 나갈 때 사용했던 쪽문이 아니라, 성 중앙의 정문이 열리며 천지를 뒤덮은 새하얀 설경이 드러났다.

"전진!"

* * *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한다. 모두 텐트를 치고, 야영을 준비하도록."

"예!"

테리안의 지시에 병사들이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직접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했지만, 설격대 검사들은 달랐다.

"아까 준 재료들 있지? 그걸로 가벼운 스튜라도 만들어. 대주님이랑 부대주님도 드셔야 하니까. 맛대가리 없게 만들면 각오하고."

"너희 넷은 이쪽으로 와. 텐트 치는 것 좀 도와라."

설격대 검사들이 정찰대가 있는 곳에 와서 음식을 만들라고 명령하고, 몇 명은 잡일을 시키려고 데려갔다.

"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도리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맞는 거예요?"

"맞지 않으면 어쩌냐. 힘이 없는걸."

라딘이 냄비를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사령관님이나 사령관님은 아무 말 안 하시나요?"

"모르시지. 지금도 부사령관님 없을 때 찾아온 거잖냐."

그는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테리안이 없을 때만 찾아온다고 말했다.

"사령관님이나, 부사령관님이 성 밖에 나오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직접 부딪치는 건 우리라서 대들면 결국 우리 손해야."

라딘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불을 피웠다.

"아, 빡쳐!"

도리안은 배 주머니에서 식사 재료들을 꺼내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음…."

라온은 불 위에 냄비를 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전 이렇게 전투가 많은 곳은 단합이 잘 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군요."

"대부분 그렇긴 한데, 설격대는 아니야. 대주부터가 얌생이라, 약자는 기가 막히게 고르고 이용하거든."

"그렇군요."

라온은 일은 안 하고 잡담을 주절거리는 설격대를 보며 붉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럼 저것들만 휘어잡으면 되겠네.

* * *

진군은 빨랐다.

눈 위를 걷는 일에 자신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그런지 다수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4번 땅굴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예상과 달리 2번 정찰대가 관측했다는 트롤 무리는 보이지 않았고, 놈들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죄송합니다."

테리안이 2번 정찰대장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축 처진 어깨뿐이었다.

"제대로 본 건 맞나?"

"화, 확실합니다. 숲 외곽에 트롤 열세 마리가 모여 있었습니다!"

"이래서 정찰대만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소 검사 하나씩은 정찰대에 넣어야 합니다."

설격대주는 테리안의 옆에 붙어서 정찰대가 여러모로 부족한 집단이라고 말했다. 꼴을 보니, 다른 이들을 깔아뭉개서라도 본인의 영향력을 더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지금은 녀석들의 흔적을 찾아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니까."

테리안이 다시 고개를 숙여 눈 덮인 땅을 훑어보았다.

"아이스 트롤이 눈 위에서 짐승처럼 움직인다고 해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트롤이 남긴 잔재를 찾아라! 여기서 놈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피해로 돌아올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정찰대, 검사,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각자 구역을 나눴다.

"하여튼 트롤 놈들은 그냥 잡히는 법이 없다니까."

라딘은 쌓인 눈을 걷어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스 트롤의 흔적이 사라졌단다. 일단 수색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으니, 준비해!"

"예!"

정찰병들은 다리가 짧은 개처럼 바닥에 딱 달라붙어서 트롤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용병이나, 설격대의 검사들도 트롤의 이동 방향이나, 기척을 느끼려고 기감을 풀어냈다.

'알아서 찾겠지.'

라온은 흔적을 뒤지지 않고, 경계 자세를 취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산 정찰병의 수색 능력이라면 금방 찾을 게 분명했고, 자신의 역할은 수색이 아니라, 보호였기 때문에 경계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 시간이 다 지나도록 트롤은 나타나지 않았고, 흔적도 딱 하나만 발견할 수 있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아이스 트롤이 흔적을 많이 남기는 몬스터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못 찾을 리가 없다.

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니, 직접 움직여봐야 할 것 같았다.

"젠장!"

테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이, 일단 스터린 산 쪽으로 간 건 호, 확실한데요…."

2번 정찰대장이 유일하게 하나 남은 트롤의 발자국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 산에는 아이스 트롤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괴물들이 있다. 그 흔적 하나만 보고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어."

"끄응…."

"북쪽의 낮은 짧아. 더 늦으면 밤이 된다. 일단은…."

"저도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라온이 앞으로 나와 테리안의 발밑에 있는 마지막 흔적을 보았다.

"자네가?"

"예. 조금만 보겠습니다."

"너는 이제 막 정찰대에 들어가지 않았나? 그리고 새로 얻은 직책은 정찰대의 호위일 텐데?"

테리안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설격대주 에드퀼이 콧등을 찡그렸다.

"괜히 나서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들어가라. 해가 지고 있어서 시간이 없다."

"그만."

테리안이 주절거리는 설격대주의 입을 막았다.

"일단 방향은 스터린 산이군요."

라온은 바닥에 나 있는 유일한 흔적을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가 다 아는 이야기고. 그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설격대주는 정찰대 소속인 자신이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짜증을 부렸다.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죠."

"하! 어디에서 온 도련님인가? 들었던 실력에 비해 철이 너무 없는데? 지금 네가 우리 모두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저 버러지 콧수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려서 용암에 튀겨버리고 싶도다. 입을 주절거리는 게 밉상 그 자체이니라.

'조금 잔인하지만 동감이야.'

라온은 계속 입을 놀리는 설격대주의 말을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이것 또한 성장을 위한 계기이니, 정신을 집중했다.

고오오오!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이미지로 만든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이제 꽤 넓어져서 샘물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바다를 얇게 퍼뜨렸지만, 트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대로 일어섰겠지만, 여러모로 아니꼬운 설격대주와 설격대 검사들 때문에 확실하게 그 위치를 잡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이 또한 이미지다.

갇혀 있는 바다를 열면 조금 더 먼 곳에도 글래시아의 감각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라온은 호수처럼 막혀 있는 바다의 뚝을 열었다.

콰아아아아!

들리지 않아야 할 물소리가 뇌리를 울리며 감각의 바다에 차 있던 흑색의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트롤의 발자국이 향했던 방향으로 올려보냈다. 이 땅의 냉기와 어우러진 감각의 바다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스터린 산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감각의 물길을 조종해 예상되는 방향을 뒤졌지만, 다수의 몬스터만 느껴질 뿐 모여 있는 트롤의 기척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 혹시.'

방향을 바꿨다. 아이스 트롤이 좋아하는 눈 쌓인 숲이 아니라, 산기슭이나 계곡으로 감각의 물길을 쏟아냈다.

설화의 감각까지 열고 집중하자, 산골짜기 부근에서 시야가 확 밝아지듯이 야생의 기척이 잡혔다.

듣던 것보다 숫자는 더 많았지만, 털에 냉기를 휘감고 있는 아이스 트롤이 분명했다.

"후우…."

탁한 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정찰대는 기대감이 어린 시선으로, 설격대주와 설격대 검사들은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 보니 뻔하군. 괜히 시간만 낭비했어. 부사령관님 일단 이곳에서 야영 준비를…."

"찾았는데?

"뭐?"

"찾았다고."

라온은 코웃음을 치던 설격대주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24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설격대주 에드퀼이 라온을 보며 갈색 눈을 부라렸다.

"쭈그려서 발자국을 본 걸로 어떻게 트롤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거냐!"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호통을 치며 라온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관심이 고프면 돌아가서 허접한 대련이나 해! 여기서 나대지 말고!"

"그럼 내기라도 할까?"

라온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내기?"

"그래. 내 말이 맞는지, 여기서 주절거리기만 한 당신의 말이 맞는지. 내기를 하자고."

"정신 빠진 놈! 누가 네 말을 믿고 따라가 준다고 내기를 한다는 거냐!"

"쫄려?"

"끅!"

피식 웃으며 입매를 말아 올리자, 에드퀼이 이를 바득 갈았다.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무지렁이 따위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그리고 왜 아까부터 반말하는 거냐!"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난 네 부하가 아니야."

"부하가 아니더라도 내 지위는 너보다…."

"난 사령관님이 직접 정찰대의 호위로 임명해주셨다. 소속을 따지자면 사령관 직속이니, 너한테 굽힐 이유는 없어."

위치 상 에드퀼이 높은 건 맞지만, 사령관에게 직접 지위를 내려받으니, 놈에게 머리를 숙일 필요는 없는 건 사실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지위로 안 되니까. 나이인가? 추잡하군."

"그만!"

테리안이 묵직한 걸음으로 라온과 에드퀼 사이를 막아섰다.

"둘 다 자제해라. 언제 몬스터가 움직일지 모르는데 뭐 하는 짓이야!"

그는 둘을 번갈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에드퀼. 오늘 왜 이리 감정적이지?"

"이 꼬마가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습니까!"

"그는 아직 헛소리를 한 적이 없다. 트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았는지 말하지 않았으니까."

테리안이 고개를 돌려 라온을 보았다.

"찾은 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정찰대가 예측한 방향에서 25도 정도 우측에 있는 얼어붙은 계곡 부근에 모여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지?"

라온의 자신감 있고 확실한 대답에 테리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숲과 산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에게 적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감을 배웠습니다."

"감? 지금 감이라고 한 거야?"

에드퀼이 손가락을 겨누며 비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감이랍니다! 저 미친놈의 말을 믿진 않으시겠죠?"

"감이라."

테리안은 에드퀼과 설격대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덤덤한 라온을 보았다.

'감을 믿을 수는 없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경험으로 만들어진 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감만으로 단체를 움직일 수는 없기에 가만히 있는 거다.

'그렇지만 저 아이는….'

지그하르트 소속이라는 걸 떠나서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간다. 특히 저 붉은 눈. 세상 모든 것을 뚫어보는 듯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그의 말을 믿고 싶어졌다.

'거기다 숲과 산이라고 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라온의 교관이라는 지그하르트의 광검 리메르. 아마도 그에게 수색의 감각을 배운 것 같았다.

"후, 그렇다고 해도…."

"부사령관님."

3번 정찰대장 라딘이 앞으로 나왔다.

"얼마 전에 보고드린 적 있었죠. 라온의 말을 무시했다가 전부 죽을 뻔했다고."

"그래."

테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샤크몰이 다가온다는 라온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전멸할 뻔했다는 말을 바로 며칠 전에 들었었다.

"이 친구 그때도 지금 같은 눈빛을 했습니다. 한 번 믿어보시죠."

"샤크몰을 감지하는 것 따위는 대단한 일이 아니야! 고작 감으로 무슨 결정을 내린단 말이냐! 정찰대는 전부 대가리에 구멍이라도 뚫린 거야? 앙?"

에드퀼이 손가락을 들어 라딘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딴 거 할 시간 있으면 저 머저리나 똑바로 교육해!"

"에드퀼. 거기까지 하도록."

"흥!"

테리안의 제지에 에드퀼이 팔짱을 끼고 몸을 돌렸다.

"흐음, 저도 조금 관심이 생기네요."

울브스 용병단의 단장 베토도 앞으로 나왔다.

"라온 검사님?"

"예."

"그 위치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그냥 가면 30분. 뒤를 잡으려면 그보다 10분 정도 더 걸릴 겁니다."

"뒤요? 기습을 할 곳도 파악하신 겁니까?"

"예."

"허…."

그는 헛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부사령관님. 30분이면 스터린 산의 중턱에도 못 미칩니다. 늦기 전에 돌아올 수 있으니,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베토? 당신까지 왜 이래! 다들 저 또라이에게 돈이라도 받은 거야?"

베토까지 라온의 편을 들자, 에드퀼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네요. 우리 사고뭉치들을 꺾어서 그런가?"

"후우."

테리안이 한숨을 내쉬고서 뒤를 돌았다.

"전부 준비해라. 스터린 산을 오른다."

"부, 부사령관님! 진짜 가신다는 겁니까?"

"그래. 밤이 되어서 트롤들이 습격해오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제거할 수 있다면 빠르게 제거하는 게 나아."

"이 정신 나간 놈의 뭘 믿고 움직이신다는 겁니까!"

"반대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으윽!"

에드퀼이 더 입을 열려고 했지만, 테리안이 확실하게 못을 박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가는 건 결정됐고."

라온은 차갑게 웃으며 에드퀼 옆으로 다가갔다.

"내기는 계속해야지."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냐!"

"내가 트롤을 찾으면 앞으로 정찰대에 존댓말을 사용하고, 너희들이 넘긴 짐만이 아니라, 정찰대의 짐도 들고, 잡일도 맡아."

"아니라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지."

"좋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는 그 주둥이를 놀릴 수 없을 테니까."

에드퀼은 죽일 듯이 인상을 쓰고 설격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멍청한 놈이로다. 이놈에겐 항상 술수가 있거늘. 말에 넘어가지 말고, 조심 하고 또 조심해야 하지.

'그러게.'

라온은 에드퀼에게 한심하다고 말하는 라스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속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 * *

"음?"

스터린 산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보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신음을 흘렸다.

'뭐지?'

그는 스터린 산으로 올라오는 하분 성의 병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올라오는 거지?"

흔적 하나만 보고 이 산을 오르다니,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하분 성 지휘관들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계획이 꼬이는데….'

본래 하분 성 병력이 캠프를 치고, 잠을 잘 때 아이스 트롤들을 보내서 습격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일이 어긋나게 된다.

'일단은 물러서야겠군.'

검은 로브의 사내는 혹시나 하는 사태에 대비하여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데리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다른 아이스 트롤들은 얼어붙은 계곡에 숨겨놨으니, 들킬 일 없었다. 실제로도 하분 성의 병력들은 계곡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흐음, 일단은 볼까.'

검은 로브의 사내는 올라오는 병력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저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전부 죽여서는 안 된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이 나타났다는 걸 하분 성에 전해야만 자신의 계획이 완성되기에 소수의 인원은 살려 보내야 한다.

'그만 내려가라. 너희들은 트롤들을 찾지 못… 어?'

하분 성의 병력을 무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뭐야! 저놈들 어디 가는 거야!"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던 하분 성 병력은 뒤를 돌아서 산골짜기를 향하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저렇게 움직인다는 건 처음부터 계곡에 트롤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 방향으로 이동할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평생을 이곳에서 산 정찰병이라고 해도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스터린 산에서 트롤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 저들이 어떻게 트롤들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트롤을 빼기엔 늦었는데 어찌… 아!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좋은 생각이 났다.

"아니지."

입술을 씹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뒤에 서 있는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보며 짙은 미소를 그렸다.

"오히려 이게 더 나을 수도 있겠어."

* * *

라온은 기척을 죽인 채 모두를 이끌고 산 하부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경사가 급하지만, 얼음이 얼어있지 않아 무리 없이 내려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언덕의 끝에 엎드려서 아래를 보았다. 얼어붙은 계곡에 열다섯 마리의 트롤이 있었다.

열한 마리는 오크와 베어울프의 시체와 피로 기이한 문양을 그렸고, 나머지 넷은 팔을 늘어뜨린 채 사위를 경계했다. 어떠한 주술이나 의식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트, 트롤이다. 진짜 트롤이야."

"열다섯?"

"저희가 보았던 것보다 숫자가 늘었지만, 놈들이 확실합니다."

트롤 무리를 확인한 2번 정찰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저 아래에서 여기에 있는 트롤을 알아차린 거지?"

"가, 감이 진짜였다니…."

"사람 맞아? 개 아니야?"

정찰대, 울브스 용병단 그리고 설격대까지 모두가 혼이 반쯤 빠져나간 눈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어떻게 거기서 이놈들을 찾냐고!"

설격대주 에드퀼은 믿을 수가 없다며 메기처럼 난 수염을 바르르 떨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고. 약속한 건 기억하고 있겠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전투가 끝난 후부터 정찰대의 짐이랑 잡일은 전부 설격대의 담당이다. 그래도 한 단체의 수장인데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 아, 반말도 하지 말고."

"끄으윽…."

"하나 더. 내 짐은 당신이 직접 들었으면 좋겠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을 텐데?"

"난 굉장히 재밌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이 자식이 끝까지…."

에드퀼이 라온을 노려보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네. 저 친구에게서 뭔가 느껴졌다니까."

베토는 에드퀼의 화를 돋우듯 감탄을 터트렸다.

"싸움만 잘하는 게 아니었군."

"그러게, 이런 탐색 능력은 처음 봐."

"어떻게 우리 용병단에 끌어들일 수 없나?"

용병단원들도 트롤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끄윽!"

"뭐, 저런 놈이…."

"젠장!"

이곳에서 똥씹은 표정을 짓는 건 라온을 조롱했던 설격대주와 설격대 검사들뿐이었다.

"라온. 저, 정말 감으로 알아차린 건가?"

테리안이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왔다.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감이 좀 좋다고."

"으음…."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언덕의 끝으로 다가갔다.

"전원 전투 준비."

정찰병들은 쇠뇌를 들었고, 용병들과 설격대는 검을 뽑았다. 베테랑답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미약한 살기를 느꼈는지 경계를 서던 트롤들이 약속한 것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다.

"크라라락!"

"캬라락!"

우측에 있던 트롤들이 언덕 위에 있던 설격대 검사들을 보고 귀가 따가운 괴성을 터트렸다.

"쏴!"

나무가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언덕 아래로 은색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퍼버버벅!

아이스 트롤의 몸에 각기 다섯 발 이상의 화살이 명중했지만, 질긴 가죽 탓에 몸을 파고든 화살은 그리 많지 않았다.

"크라라락!"

"크아아아아!"

트롤들은 몸에 박힌 화살을 쥐어뜯으며 뻘건 주둥이로 분노 어린 포효를 터트렸다.

"돌진!"

"이야아아아!"

테리안이 오러가 깃든 검을 세운 채 준마처럼 달려갔고, 설격대와 용병단이 그 뒤를 따랐다.

"크으! 우리도 간다!"

정찰병들도 한쪽 손에는 쇠뇌를 반대편 손에는 방패를 들고 아래로 뛰었다.

"으으윽!"

도리안은 겁이 나는지 입술을 떨었지만,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검을 뽑아 들고 정찰대 옆에 딱 달라붙었다.

'나도 가야겠지.'

라온은 3번 정찰대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고, 설격대와 울브스 용병단이 트롤을 몰아치고 있었다.

"살을 바르고, 찢어 죽여!"

울브스 용병단의 단장 베토는 예의 있는 모습을 보였던 것과 달리 눈에 광기를 두른 채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그의 검날에 담긴 시퍼런 기운이 아이스 트롤의 상체를 거칠게 베어냈다.

"사위(四圍)를 잡고 공격해라! 목과 심장을 노려!"

설격대도 더러운 성격과 다르게 실력 하나는 출중했다. 검진을 짜서 다수의 검사가 소수의 몬스터를 잡는 최적의 사냥법으로 트롤을 압박했다.

"쏴!"

정찰병들은 전장을 돌며 검사들과 싸우는 트롤들을 향해 쇠뇌를 날렸다.

가까이서 쏘아대니 이전보다 가죽을 뚫는 비율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다. 다만 트롤의 시선을 분산시켜 검사나 용병들이 더 쉽게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었다.

트롤 한 마리당 10명에 가까운 검사와 정찰병이 붙었으니, 난전 같았지만 인간에게 더 유리한 막싸움이었다.

"크헉! 도련님."

정찰병에게 달려들려고 하던 아이스 트롤을 밀어버리고 돌아온 도리안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하십니까? 평소라면 이미 튀어 나가셨을 때 아닌가요?"

"우리 임무는 정찰병의 보호잖아. 그리고 내 상대는 따로 있어."

누구도 느끼지 못했지만, 트롤의 두목 격으로 보이는 두 마리의 괴물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의 왔군.'

라온이 서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 먹이가.'

* * *

"절대 접근하지 마! 우리의 목적은 시선 분산이다!"

라딘이 정찰병들을 보며 외쳤다.

"트롤의 시선을 끌었다면 바로 물러서! 직접 상대할 필요 없다!"

그는 빠르게 달려 나가 설격대 검사를 움켜쥐려던 트롤의 어깨를 향해 쇠뇌를 당겼다.

파앙!

화살은 아이스 트롤의 어깨에 살짝 박혔을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 틈에 검사가 몸을 빼고 트롤에게 역습을 가했으니까.

"체력이 달리면 뒤로 빠져!"

라딘이 화살을 걸었다. 장전이 느린 쇠뇌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속도.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단련한 티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람쥐처럼 전장을 휘돌며 위기에 빠진 검사와 용병을 돕고, 지친 정찰병들을 격려했다.

"하아, 하아!"

라딘이 내려온 언덕 앞에 멈춰서서 호흡을 골랐다.

'최고의 상황이야.'

기습 덕분에 가져간 우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상자는 좀 있지만, 사망자는 없고 트롤도 열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하분 성의 과격한 싸움에서 이렇게 쉽게 축이 기울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모두 라온 덕분이었다.

'돌아가면 거하게 사야겠… 어?'

머리털을 쭈뼛 세우는 흉악한 살기에 라딘의 생각이 툭 끊어졌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 아이스 트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트롤 두 마리가 몽둥이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워, 워리어와 샤먼…."

"크르르륵!"

두 괴물의 눈에서 뿜어지는 진한 살기에 벌거벗은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콰아아앙!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언덕을 뭉개고 자신과 정찰병들을 향해 뛰어내렸다. 피로 물든 몽둥이에서 상상할 수 없는 거력이 느껴졌다.

"끄윽!"

호흡이 멈춰진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오직 죽음.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다른 정찰병들도 삶의 끝을 느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점점 커져 가는 몽둥이를 보며 입술을 깨물 때였다. 모두가 멈춰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한 검사가 움직였다.

터엉!

그는 라딘과 정찰병들을 무형의 힘으로 밀어버리고, 아이스 트롤 워리워의 앞에 홀로 섰다.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트롤의 몽둥이를 향해 얇은 검을 내질렀다. 검날의 끝에 피어난 붉은 꽃이 단아하게 휘날렸다.

콰아아아앙!

무시무시한 충격에 만빙의 계곡이 바스러지고, 골짜기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검사의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천년 묵은 거목의 뿌리처럼 굳건하게 다리를 세우고, 인간의 몸통만 한 몽둥이를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아…."

죽음을 각오했던 정찰병들은 그 전율적인 광경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물러나 계세요."

라온이 고개를 반쯤 돌렸다. 입가에 걸린 건 분명한 웃음이었다.

"금방 끝날 테니까."

125화

라온이 진각을 밟았다. 발목에서부터 끌어 올린 정심한 기운을 손아귀에 휘감아 검을 밀어붙였다.

쿠과과광!

아이스 트롤 워리어는 그 거대한 육체와 몽둥이가 무색하게도 얇은 검에 밀려 벽에 처박혔다.

"크아아아아!"

분노한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괴성을 지르며 뻘건 투기가 어린 몽둥이를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막대한 풍압이 얼굴을 스쳤다.

피부가 찢어져 나갈 것만 같았지만 바람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만화공을 전력으로 운용하여 투기가 실린 몽둥이를 정면에서 후려쳤다.

콰아아앙!

오러가 휘감긴 검과 투기가 녹아내린 몽둥이가 맞부딪치며 발생한 파동에 주변의 눈과 얼음이 모조리 쓸려나갔다.

"키아아아!"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몸은 생각 이상으로 튼튼했다. 막대한 충격파를 맨몸으로 견디며 몽둥이를 내리찍었다.

'재생 능력은 확실히 미쳤군.'

충격파로 인해 찢어진 육체가 벌써 재생을 시작한다. 근력과 민첩성만이 아니라, 재생력도 일반적인 아이스 트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흐읍!"

라온이 무릎을 굽혔다.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는 붉은 투기를 향해 검을 그어 올렸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투기는 막강했지만, 만화공의 불길은 그 투기조차 녹여버릴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콰아아아!

강철조차 지져버릴 듯한 붉은 불길이 해일처럼 쏟아지는 투기를 가르고 올라간다. 흡사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끄륵!"

갈라지는 투기를 본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신음을 흘렸다. 얕잡아보던 누런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바로 끝내주지.'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투기에 이어 목까지 베어버리려고 할 때였다.

코아아아!

우측에서 날아온 냉기의 덩어리가 검의 궤도를 틀어버렸다.

쩌어어어억!

칼날은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목이 아니라, 가슴을 갈랐다. 놈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도 펄쩍 뛰어서 뒤로 물러섰다.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언덕 위에 있는 아이스 트롤 샤먼이 지팡이를 흔들고 있었다. 조금 전 놈이 날렸던 서리의 방울이 검을 비틀어낸 것이다.

"저런 치사한 자식! 일대일 대결을 왜 방해해!"

도리안이 아이스 트롤 샤먼을 향해 삿대질하며 발을 굴렀다. 물론 직접 나서주지는 않았다.

"샤먼은 내가 처리하겠다!"

설격대주 에드퀼이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트롤 워리어를 죽일 때까지 못 잡으면 샤먼도 내가 죽인다."

"그럴 일은 없어!"

에드퀼은 인상을 찡그리고 언덕을 도로 올라갔다. 그 뒤를 설격대가 부리나케 쫓았다.

"끄르륵!"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음에 앞을 보았다. 어느새 상처를 회복한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몽둥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싸움은 끝이다."

라온이 검을 내리며 차게 웃었다. 불의 고리와 광아검을 운용하면서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했다. 남은 건 일검에 숨통을 가르는 것뿐이다.

"크아아아!"

아이스 트롤 워리어가 땅을 부수며 쇄도해왔다. 시야 전체가 놈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라온이 검을 고쳐잡았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만화공 십화.

해빙염.

은빛 칼날 위로 봄이 찾아온 듯 빨간 꽃이 피어난다. 태양을 닮은 꽃잎이 차디찬 겨울의 끝을 고하듯 사위로 퍼져나갔다.

쩌어어억!

춤을 추던 적화가 가라앉고, 얼어붙은 땅이 녹아내린다. 그 위로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목과 몽둥이가 떨어져 내렸다.

"후우우우…."

라온이 검을 내리고 지친 숨을 뱉어냈다. 만화공의 검술은 확실히 강하고 화려하지만 오러와 정신력의 소모가 심했다. 잠시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다만 아이스 트롤 워리어를 일격에 베어버린 위력과 예리함은 만족스러웠다.

숨을 고르며 언덕 위를 보았다. 트롤 샤먼이 트롤을 부리고, 주술을 뿌리며 설격대와 싸우고 있었다.

'아직 안 끝났군.'

라온이 꺼져가는 칼날의 불길에 오러라는 장작을 넣으며 검을 세웠다.

'그러면 저건 내 거지.'

투기를 쓸 정도로 강한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능력치와 격이 오른다. 저런 맛 좋은 음식을 남에게. 그것도 저런 놈들에게 넘길 이유가 없었다.

언덕을 오르려고 할 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테리안과 용병, 정찰병까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이스 트롤 샤먼까지 잡으면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리드도 아니고, 욕심 한번 많구나.

'네 먹성만 하겠어?'

-끄응, 본왕은 많이 먹는 게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좋아할 뿐이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직접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하는….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들어!

제발 들어달라고 외치는 라스를 무시하고 언덕을 올라갔다. 걸음마다 기척을 죽이고, 존재감을 지웠다.

* * *

"쳐!"

"샤먼부터 노려!"

"이런 시발! 뭔 놈의 눈보라가 이렇게 불어!"

"빨리 때려잡고 대주를 도와!"

설격대는 아이스 트롤 샤먼이 만들어낸 눈 폭풍 속에서 아이스 트롤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흐아압!"

에드퀼은 대주답게 홀로 중앙을 파고들어 샤먼을 향해 검을 날렸다.

쩌어엉!

트롤 샤먼을 향해 검을 내리쳤지만, 중간에 벽이 있는 것처럼 막혔다. 샤먼이 만들어낸 방어 주술이었다.

"흐아압!"

강렬한 오러를 두른 칼날을 끊임없이 휘둘렀지만, 주술의 막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기끄르카르티!

트롤 샤먼이 괴이한 주문을 외우자, 허공을 흩날리던 눈 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는 날 막을 수 없다!"

에드퀼이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쳤다. 하얀 폭풍이 갈라지고, 샤먼의 모습이 드러났다.

'무조건. 무조건 잡아야 해!'

샤먼을 홀로 잡는 공을 세운다면 저 망할 꼬마 놈과의 내기를 취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버러지 같은 정찰병들의 짐 따위를 들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괴물들을 잡고 내기를 무효로 해야 한다.

"이야아아!"

땅을 박차고 샤먼을 향해 검기를 내뿌렸다. 주술의 벽이 곧 무너질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얼마 안 남았어!'

더 많은 기운을 끌어올려 단번에 끝을 내려 할 때였다.

퍼어억!

샤먼의 몸이 크게 출렁이더니, 놈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서 붉은 기류가 피어 나왔다.

"이, 이게 뭐…."

무슨 상황인지 몰라 멈춰 섰을 때 콰앙 소리와 함께 트롤 샤먼의 상체가 갈기갈기 터져나갔다.

후우욱!

흩날리는 붉은 연기 뒤에서 가장 꼴 보기 싫었던 금발의 꼬마가 사이한 기운을 뿌리는 단검을 꼬나쥐고 있었다.

"네, 네놈!"

에드퀼이 턱을 떨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말했잖아. 내가 트롤 워리어를 잡을 때까지 샤먼을 못 죽이면 이놈도 내가 끝낸다고."

"닥쳐라! 뒤에서 기습이나 한 주제에! 네놈이 오지 않았어도 나 혼자 끝낼 수 있었다!"

"주제고 뭐고. 이 시체나 챙겨."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샤먼의 시체를 가리켰다. 욕을 박아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우리 정찰대의 짐꾼이니까."

* * *

꿀꺽.

검은 로브의 사내는 계곡에 쌓인 아이스 트롤의 시체들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예상했던 장면은 이딴 게 아니다.

아이스 트롤을 몰아붙이던 하분 성의 병력들이 기습적으로 뛰어든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에게 밀려서 반 이상 죽고, 나머지는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는 그림이 나왔어야 했다.

위험한 몬스터들의 등장에 사령관 밀랜드가 병력을 이끌고 나오는 것까지가 자신의 계획이었는데 전부 어긋나버렸다.

그것도 단 한 놈 때문에.

뿌득.

검은 로브의 사내가 이를 바득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언덕 위에 있는 금발의 검사에게 향했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기습을 알아차린 것도 저놈이고, 트롤 워리어의 목을 벤 것도 저놈이며, 주술을 준비하던 트롤 샤먼도 저놈에게 심장이 터져 죽었다.

강함을 떠나, 저 어린놈은 어떻게 해야 생명의 선을 끊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손에 쥔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아이스 트롤을 형상화한 듯 푸른색이었고, 귀는 길었으며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후우욱!"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된다. 지금이라도 저들을 죽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계획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다만 그 모든 걸 떠나서….'

저놈. 워리어와 샤먼을 홀로 죽인 저 어린놈에게서 손등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불길한 기파가 느껴졌다. 이 가면을 통해 이어받은 위험 감지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위험한 놈이라는 뜻이로군."

어떻게 보면 하분 성주보다도 더.

검은 로브의 사내가 뒤를 돌았다. 그는 산 위로 올라가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결국 그걸 꺼내야 하는 건가."

* * *

라온이 마지막 남은 트롤을 베었을 때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민첩성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온이 메시지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을 잡은 대가가 능력치로 돌아왔다.

'이것만이 아니지.'

홀로 투기를 사용하는 몬스터를 죽인 것으로 영혼의 격도 상승했을 것이다. 샤먼은 혼자 잡은 게 아니지만, 결국 끝은 자신이 냈으니 문제는 없었다.

'싸울 때마다 성장하다니, 정말이지 사기 능력이라니까.'

-본왕이 만든 시스템이니, 당연한 일이니라.

그 대단한 능력을 빼앗긴 마왕이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라온!"

라딘과 정찰병들이 입술을 떨며 달려왔다.

"너 이 자식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아이스 트롤 워리어를 일검에 벨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 샤먼도 죽였잖아! 이 녀석은 진짜야! 진짜 물건이라고!"

정찰병들은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탄성을 터트렸다.

"크흠!"

라딘이 헛기침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것들아. 그렇게 난리를 치기 전에 할 말이 있잖냐."

"아, 뭐."

"그렇죠."

정찰병들이 웃음을 뚝 그치고 허리를 폈다. 그대로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구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호위 역할을 한 것뿐이니,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라온이 손을 저었다. 겸손이 아니다. 임무를 받았으면 그에 합당한 실적을 내는 건 당연한 일. 이런 인사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 몽둥이가 떨어져 내릴 때 아 좆됐네. 나 뒤지는구나라고 생각했어."

"맞아. 아무 생각도 안 들었지."

"난 주마등까지 봤다."

정찰병들이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앞으로 나와 아이스 트롤 워리어의 몽둥이를 막아주었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찰병으로 십 년 넘게 살고 있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라딘의 눈가에는 눈물이 마른 자국이 보였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정말 죽음을 각오했던 모양이다.

"너는 네 역할을 한 게 다가 아니라, 우리 전부를 살린 거다. 고맙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야."

"맞는 말이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 테리안이 있었다.

"자신의 역할에서 도망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임무 때문이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든 홀로 그 몽둥이 앞에 선 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야."

테리안이 머리를 꾸벅이며 웃음에 생기를 더했다.

"우리 병사들을 살려줘서 고맙다."

"…예."

라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가슴이 간지럽네.'

전생에서 암살이나 싸움이 끝나면 도망치기 바빴다. 인사 따위는 없었고 바로 다음 임무를 준비했기 때문에 싸움 이후 이런 식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는 건 어색했다.

다만 싫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천으로 심장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뛰어난 검술과 강력한 오러에 알맞은 타이밍이 섞이니, 그 위력이 상상을 뛰어넘는군요."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가진 무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다니,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분이시네요."

그의 눈빛은 마음에 드는 상품을 본 사람처럼 반짝였다.

"캐보고 싶긴 한데, 덕분에 저희 애들이 하나도 죽지 않아서 양심상 여기서 멈추는 게 맞겠죠? 안 그러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빙긋 웃었다.

"아. 당연하지! 뒤를 안 캐는 건 용병들의 불문율인데!"

"근데 검귀라는 별명 진짜 잘 지었다! 아주 검이 미쳐 날뛰어!"

"난 저렇게 신명나게 칼을 휘두르는 녀석은 처음 봤다."

"아니, 트롤 워리어를 힘으로 밀어버리는 건 뭐냐고. 무슨 오우거야?"

"뭘 먹어야 저 나이에 저렇게 강해지는 거지?"

용병들은 조금의 사심도 없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강함과 싸움을 숭상하는 무인다운 모습이었다.

"흠."

라온은 정찰대와 용병들의 환호를 들으며 시체처럼 서 있는 설격대에게 다가갔다.

"끄윽…."

턱을 부르르 떠는 에드퀼의 앞에 서서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말했지. 내 물건은 네가 들어야 한다고. 들어."

"네, 네놈 진심이냐?"

에드퀼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손을 까딱였다.

"약속했잖아. 여기 있는 모두가 들었는데, 그냥 넘어가려고?"

"고작 정찰병들 때문에 나와 적이 되겠다고?"

그는 진짜 짐을 넘길 줄은 몰랐는지 찢어질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마, 맞아! 우리가 그렇게 심하게 대한 것도 아니잖아!"

"짐을 좀 넘기고, 식사 준비만 시켰을 뿐이라고!"

"가, 가끔 좀 놀리거나 건드리긴 했지만, 다 장난이었어!"

설격대도 사과는커녕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라고 주절거렸다.

'예상대로네. 이놈들은 이 정도로 안 돼.'

'장난이었다.' '그리 심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들의 주둥이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이놈들은 생각 자체가 글러 먹었다.

"하긴 뭐 나도 함께 싸운 동료에게 심한 짓을 하고 싶진 않거든."

라온이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내기를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 그게 뭐냐."

에드퀼과 설격대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표정이었다.

-쯧, 전 재산을 잃고, 빨가벗은 채 쫓겨날 놈의 눈이로다.

라스가 에드퀼의 눈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내기 위에 다른 내기를 얹는 거지. 네가 이기면 짐꾼이 되는 걸 지워주고, 내가 이기면 새로운 대가를 추가하는 거야."

라온이 빙긋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밤을 집어삼킨 듯 탁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할래?"

126화

"무슨 내기지?"

에드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짐꾼 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에 조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기는 당연히 이거지."

라온이 검집을 툭 두드렸다.

"대련인가?"

"그래. 어차피 검으로 사는 인생 대화도, 내기도 이거면 충분하잖아?"

"어린놈답게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에드퀼의 입매가 비에 젖은 나뭇가지처럼 휘어졌다.

"나를 저깟 몬스터나, 용병 따위와 같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기를 받아들이면 돼."

"...."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질겅 씹으며 뜸을 들였다.

"조건이 있다."

"조건? 네가 그런 걸 처지가 아닐 텐데?"

시작부터 내리누르는 말. 라온은 지금 우위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개인의 무력만으로 승부를 보자."

"그게 무슨 말이지?"

"특별한 무구의 힘이 아니라, 너와 내가 가진 검술과 오러만으로 싸우자는 뜻이다."

"흐음…."

라온이 허리 뒤편에 찬 진혼검을 슬쩍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제대로 걸렸군.'

일부러 진혼검으로 아이스 트롤 샤먼을 잡는 모습을 보여준 보람이 있다.

예상했던 대로 에드퀼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진혼검의 특별함으로 샤먼을 일격에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지."

라온은 번지려는 미소를 감춘 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새로 추가할 대가는 뭐냐."

"간단해. 너희가 정찰병이 되는 거다."

"어? 뭐?"

"검사 때려치우고 말단 정찰병이 되어 보라고. 한 3개월 정도만."

에드퀼과 설격대처럼 자기중심적이고, 거만한 놈들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봐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하분 성에서 쫓아내더라도 놈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알려주고 내쫓고 싶었다.

"너 정말 제정신이냐?"

에드퀼이 라딘과 정찰병들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오러도 쓰지 못하는 떨거지들이다! 대체 왜 저런 놈들을 신경 쓰는 거냐! 거기다 사령관님이 이딴 조건을 허락하실 리가 없다!"

"끄으…."

"으윽…."

정찰병들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에드퀼이 뿜어내는 살벌한 기세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가."

라온의 눈빛이 북해의 빙하보다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너란 놈은…."

"에드퀼."

라온이 속에서 끌어 올린 말을 뱉으려고 할 때 테리안이 다가왔다.

"적당히 할 줄 알았는데, 정도를 모르는군."

그는 썩은 나무껍질처럼 인상을 구기고, 에드퀼 앞에 섰다.

"부, 부사령관님."

"너희가 같이 싸운 전우를 버러지나, 떨거지라고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입 닫아라. 에드퀼. 당장 네놈의 목을 베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테리안은 에드퀼을 물러서게 한 뒤 뒤를 돌아 라온을 보았다.

"허가한다. 내가 너희 둘의 대결의 공증인이 되겠다."

"부, 부사령관님!"

"약한 건 상관없다. 강하게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등을 맡겨야 할 동료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쓰레기를 그냥 놔둘 생각은 없다."

"저희 모두가 정찰병이 된다면 하분 성에도 여러 문제가 생길 겁니다! 성이 무너질 수도 있다구요!"

"너희 따위가 없어서 무너질 성이면 진즉에 무너졌다. 너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마라. 에드퀼."

"으윽…."

에드퀼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다만 너희 둘의 대결 때문에 여기에 있는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테리안이 눈매를 좁히며 산 아래를 가리켰다.

"대련은 안전한 곳에 도착한 뒤에 시작하겠다."

* * *

하분 성 병력들은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스 트롤 워리어와 샤먼의 머리를 챙겨서 스터린 산을 벗어났다.

라온과 에드퀼은 안전한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을 한 듯 짐을 내려놓고 각자 몸을 풀었다.

정찰대와 설격대 역시 두 사람이 대련을 할 수 있게 주변을 정리했다. 그렇게 임시로 대련장이 만들어졌고, 라온과 에드퀼이 마주 섰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에드퀼이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이를 드러냈다.

"지금 물러선다면 나도 그만둘 생각이 있다."

"그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는 거지."

"이 자식!"

"물러서라.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확인하겠다."

둘 사이에 선 테리안이 먼저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승리하면 설격대 전체는 3개월 동안 정찰병 신입이 된다. 맞나?"

"그것도 있고, 북해를 확인하고 복귀할 때까지 정찰병의 짐과 잡일을 모두 떠맡아야 합니다."

"좋아. 그럼 에드퀼."

테리안의 시선이 이번엔 에드퀼을 향했다.

"예."

"네가 이긴다면 이전에 걸었던 대가인 짐꾼의 역할이 사라진다. 맞나?"

"맞지만, 제가 너무 불리합니다."

"뭐?"

"하나 더 걸게 해주십시오!"

"뭘 원하는데?"

라온이 턱을 모로 틀며 미소를 지었다.

"그 단검. 내가 이긴다면 그 단검을 내게 넘겨라."

진혼검을 주시하는 에드퀼의 시선이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물건에 욕심을 내다니, 지독하다면 지독한 인간이었다.

"좋다."

진혼검이 울었지만, 검집을 쓰다듬어 안심시켰다.

'안심해. 지고 싶어도 질 수 없으니까.'

트롤과 싸우는 모습을 통해 에드퀼이 사용하는 검술의 흐름을 파악해 두었다. 강한 건 확실하지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기의 상품으로 걸리다니, 미물 따위에게 딱 맞는 일이니라.

라스는 진혼검을 놀리며 낄낄 웃었지만, 본인의 꽃팔찌는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난 말이다. 한 번도 본래의 힘을 내어본 적이 없어."

에드퀼의 어깨 위로 붉은 기운이 줄기줄기 타올랐다. 제힘을 써본 적이 없다는 게 정말인지 트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강한 기운이 이글거리며 치솟았다.

"하, 자랑이다."

라온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죽이는 건 금지다. 그럼 대련 시작!"

테리안이 대련의 시작을 알리며 뒤로 물러섰다.

"크아아아아!"

에드퀼이 트롤과 비슷할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막대한 오러를 담은 검을 그대로 내리쳐왔다.

콰앙!

정확하게 막았는데도 검날이 휘청였다. 얍실한 성격과는 달리 제대로 갈고닦은 강검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바닥을 기게 해주마!"

놈은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렬한 압박을 쏘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지독할 정도의 풍압과 충격파에 방한복과 갑옷이 찢겨 나갈 정도였다.

"정찰병을 구해? 정찰병이 되라고? 저런 재능 없는 놈들은 어딜 가든 널려 있다. 저것들이 뭐라고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냐!"

에드퀼의 검날에 어린 기운이 점점 더 짙어진다. 검기의 가닥이 모여 굵은 선을 이루었다. 검기의 상위 경지, 검사였다.

쾅!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충격이 뼛속까지 전해져 온다. 위력적인 검격이었지만, 그걸 막는 라온의 눈동자는 점점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난 하분 성으로 오면서 두 가지를 기대했다."

라온이 쏟아지는 검격을 견디며 입매를 비틀었다.

"첫 번째는 지독한 전장을 겪으며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고, 두 번째는 신뢰였다."

"신뢰?"

신뢰라는 단어에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어렸다.

"외부의 강한 적에게 맞서기 위해서 내부의 인간들이 신뢰와 믿음으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건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것이니까. 5연무장이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도달할 것 같은 미래를 그리며 이곳에 왔다.

"하지만 아니었어. 너희는 지위를 따지고, 힘을 논하고, 격을 나눴다. 임시로 와 있는 용병들조차도 사람 그 자체를 보았지만, 너희는 전우를 하인으로 여겼다."

라온의 검이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검명을 터트렸다.

"아까 왜 정찰병에게 신경을 쓰냐고 물어봤지? 난 정찰병을 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생각했을 뿐이다."

광아검의 목줄이 풀리고, 흉악한 기세가 공간을 뒤덮었다.

"내 기대를 무너뜨린 대가는 클 거야."

* * *

"대가는 지랄!"

에드퀼이 이를 바득 갈았다. 뭔 미친놈이 하나 붙어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미 시작된 싸움. 무조건 이겨야 한다.

'꺾을 수 있어!'

예상했던 대로 요기를 흘리는 단검을 내려놓자, 라온의 무력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평생을 익혀온 카토르 검술이라면 저 단단한 방어를 뚫고 놈을 무릎 꿇릴 수 있다.

"크아아압!"

에드퀼이 카토르 검술의 후반부 다섯 초식을 연거푸 펼쳐냈다. 은빛 칼날이 찬 공기를 찢어발기며 라온을 몰아쳤다.

쾅! 콰앙!

라온은 막강한 검격을 받으면서도 앞으로 다가왔다.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하려는 듯 검을 고쳐잡았다.

"이제 내 차례다."

라온의 검이 거칠게 솟구치며 놈의 눈이 드러났다. 하늘에 뜬 달처럼 붉은 눈.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섬뜩한 빛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익!"

에드퀼이 꽉 말아쥔 검을 사선으로 내리쳤다. 상대의 검을 부수는 힘이 담긴 여섯 번째 초식이었다.

쿠구구구!

칼날에 담긴 무시무시한 힘이 공간을 집어삼키려고 할 때 라온의 손목이 회전했다. 놈의 검이 빛살처럼 번뜩이며 자신의 검면을 후려쳤다.

쩌어엉!

검날이 휘어질 것처럼 출렁이며 에드퀼이 우측으로 밀려 나갔다. 전력을 담았던 오러는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끄윽, 네놈! 방금 뭘!"

에드퀼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궤적을 비트는 강검."

라온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굽어보았다.

"네 검술은 전부 파악했다."

"지랄!"

에드퀼이 악을 지르며 돌진했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카토르 검술 7번, 8번, 9번을 숨조차 쉬지 않고 내뻗었다.

공기가 진동할 정도의 검격으로 라온의 목을 노릴 때 라온의 손이 거칠게 질주했다.

쩌어엉!

톱니처럼 회전하던 검격이 또 한 번 튕겨 나갔다.

"어, 어떻게…."

에드퀼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오러가 더 강했고, 더 빨랐는데 밀렸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말이 안 돼! 말이 안 된다고!"

발을 구르고 라온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가슴을 노리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올려 그었다. 가장 쾌속한 10번 초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검격은 라온의 몸에 닿기도 전에 꺾여나갔다. 그리고.

뻐어억!

공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리에서 아찔한 통증이 일었다.

"끄어어억!"

에드퀼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뭐, 뭐야!"

"내 차례라고 했잖아."

라온이 옅게 웃으며 검을 휘돌렸다.

"지금부터 잘 막아봐."

놈이 땅을 박차고 늑대처럼 뛰어 들어왔다.

"으합!"

정면으로 다가오는 라온을 향해 카토르 검술 11번을 내리찍었다. 바위조차 가루로 만드는 강검이 대기를 휩쓸었다.

쩌엉!

놈은 처음 보는 검식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나아갔다. 틀조차 없이 날것처럼 휘두른 검에 자신의 검이 사정없이 밀려 나갔다.

쩡! 쩌정!

놈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수처럼 사나운 검격을 쏘아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붉은 오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크읍!"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버티려고 했지만, 놈의 검격은 약한 곳만을 노려왔다. 귀신 같은 놈이었다.

쩌어엉!

결국 칼이 밀려 나갔고, 라온이 다가와 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뻐어억!

에드퀼의 몸이 직각으로 꺾였다, 그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끄으윽!"

"아직 안 끝났어."

라온이 아직 자세를 잡지 않은 에드퀼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흐읍!"

에드퀼이 다급하게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라온의 검은 어설픈 방어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쾅! 콰앙! 콰아앙!

종잇장처럼 휘날린 에드퀼이 바닥을 뒹굴었다.

"네, 네가 정… 헉!"

간신히 일어섰지만, 조금 전보다 더 과격해진 검술이 쇄도해왔다. 홀로 모래폭풍에 갇힌 기분이었다.

"끄아아악!"

에드퀄의 입에서 참고 참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자식 진짜 뭐야!'

검술을 파악했다는 게 정말이었는지 카토르 검술의 모든 초식이 파훼 되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티익!

잠깐 생각에 빠진 순간 검이 비틀어졌고, 그 틈을 라온의 검이 뱀처럼 파고들어 왔다.

빠아악!

왼쪽 허벅지에서 정신이 나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뼈가 부러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통증이 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어억…."

에드퀼이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끌며 물러섰다. 하지만 라온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검을 찍어 내렸다.

쩌어억!

놈과 검이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꽉 조여든다. 고통 이상의 공포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걸린 것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으아아아아!"

에드퀼이 오러를 폭발시키고,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가진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려 하늘을 찌른 검을 내리그었다. 카토르 검술의 마지막 초식 달 부수기였다.

우우웅!

라온의 칼날 위로 붉은 선이 그려진다.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꼬여가던 선이 일순간에 펼쳐지며 노을과 같은 적색 빛을 뿜어냈다.

쩌저적!

그 강렬한 빛과 마주한 순간 달 부수기가 가라앉고, 검날이 깨져나갔다.

"끄윽!"

손아귀가 찢어지며 날아간 검이 얼어붙은 땅에 처박혔다.

"아…."

에드퀼이 턱을 떨며 앞을 보았다.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라온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내가 졌… 흡!"

패배를 말하려고 할 때 라온이 입을 막았다.

"남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알 방법이 없지.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 말을 입에서 꺼낸 순간부터는 책임을 져야 해.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동료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건 신입인 내가 봐도 아니었다."

"잠깐! 내가 졌… 커헉!"

라온이 말아쥔 주먹으로 에드퀼이 얼굴을 후려쳤다.

돌멩이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에드퀼의 이빨이 옥수수처럼 튀어나왔다. 그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고개를 돌리다가 뒤로 넘어갔다.

라온은 시린 빛을 발하는 검을 들고 설격대 앞으로 갔다.

"혹시라도 불만이 있다면 받아주마. 지금 나오도록."

어깨 위로 얼음이 지나가는 듯한 오싹한 말에 설격대는 몸을 떨었다.

그들의 시선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에드퀼에게 고정되었고, 당연히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왕이 보았던 미래와 같도다.

라스는 정신을 놓은 에드퀼을 보고 피식 웃었다.

* * *

라온이 에드퀼을 깨웠다. 그는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고통과 공포에 짓눌려 자신이 있는 곳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광아검으로 강검을 깨부수고, 만화공의 검술로 칼과 오러를 베어버린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령관님."

덜덜 떠는 에드퀼을 뒤로 한 채 테리안에게 다가갔다.

"아, 그래."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길 줄은 몰랐는지 고개를 돌리는 테리안의 눈동자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기는 내기. 당연히 지켜야지. 저런 식으로 내부 분위기를 망치는 자들이 있으면 군기만 가라앉는 법이야. 설격대가 정찰병을 한다고 하분 성이 망할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들어라."

테리안이 임시 연무장 위로 올라가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대련은 라온의 승리로 끝났다. 약속대로 지금부터 설격대를 정찰대 신병의 위치로 강등한다. 모두 동의한 사항이니 불만은 없겠지?"

설격대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라온이 눈을 부라리자 찔끔하며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럼 저희 후배네요! 맞죠?"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일어섰다. 우울함에 덮인 듯한 설격대에게 다가가 배 주머니에서 저들이 넘겼던 짐과 정찰병들의 짐을 모두 꺼내 내밀었다.

"앞으로 너희들이 들어야 할 짐이다. 후배들."

"으으…."

"젠장!"

설격대는 앞에 쌓인 짐을 보고 이를 바득 갈았다.

"아, 하나 더."

도리안은 키득거리며 배 주머니에서 길쭉한 통나무 4개를 꺼냈다.

"이, 이게 뭐야?"

"통나무?"

"토, 통나무가 왜 저기서 나와?"

설격대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통나무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통나무 정도는 뗏목이나, 집짓기 용으로 누구나 들고 다니는 거잖아요."

도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안 들고 다녀.'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자, 어쨌든."

도리안의 눈동자가 드물게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후배들 잘 들고 와. 내 나무에 기스 나면 죽을 각오하고."

녀석은 설격대가 정찰병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상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시원하다!"

"좋아 보이네."

"좋긴요. 이것도 참은 거예요. 원래 바위를 꺼내려고 했으니까요."

도리안은 내가 봐줬다라고 중얼거리며 콧방귀를 끼었다.

'바위가 있어?'

-바위도 있어?

127화

"자, 이게 뭐라고?"

도리안이 바닥에 찍힌 사람 팔뚝만 한 발자국을 가리켰다.

"오, 오크."

"오크 발자국…."

설격대 검사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뗐다.

"오오오크? 오오오오오크?"

"끄윽, 오크입니다!"

"그렇지."

그는 존댓말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그럼 이건 뭐야."

이번에는 나무에 새겨진 손톱자국을 가리켰다.

"이, 이건 베어울…."

"모르지? 이건 베어울프가 영역표시를 한 흔적이야. 어? 이런 걸 다 알고 있어야 훌륭한 정찰병이 될 수 있다고!"

도리안은 정답을 말하려던 설격대 검사들의 입을 막고, 강의하듯 떠들어댔다. 얼마 전에 배웠던 정보들을 그대로 써먹고 있었다.

"끄윽…."

"으익!"

"제, 젠…."

설격대 검사들은 하늘을 올려보거나, 주먹을 말아쥐거나, 입술을 씹으면서 분노를 참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그중에는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한 설격대주 에드퀼도 끼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라온의 시선을 느끼고,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살다 살다 저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테리안은 통나무를 든 채 도리안을 졸졸 따라다니는 설격대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사령관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온이 테리안에게 미안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자네 말대로 전우를 짐꾼 취급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저 녀석들도 알아야 해. 정찰병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3개월 정도면 저놈들도 그걸 배울 수 있을 테니, 오히려 좋은 생각이었다고 칭찬을 하고 싶군."

테리안은 진심이라는 듯 손을 보이며 빙긋 웃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자네. 그 단검으로 덫을 만든 건가?"

그의 눈빛이 허리에 찬 진혼검으로 향했다. 저렇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상황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걸 숨길 필요는 없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

테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군.'

예상했던 대로 라온의 강한 무력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이 어린 검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자네는 크게 될 인간이야."

"저도 동감합니다."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옆으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제가 이렇게 보여도 나름 나이가 있거든요."

그는 젊어 보이는 얼굴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라온 님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뭐랄까? 무력이 강하고, 생각도 깊은데, 감정은 옅다고 해야 하나?"

"옅다?"

"아, 칭찬입니다. 순수한 면이 있다는 거니까."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감춰야 하나? 아니야.'

너무 드러냈나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니다. 암살자가 아닌, 검사 라온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이 정도는 드러내도 상관없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자네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것 같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테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라온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하하, 저도 좀."

두 사람의 손 위로 베토의 길쭉한 손이 올라왔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희 용병단에도 들려주세요."

아직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이쪽에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손님으로든 혹은 영입대상으로든.

"벌써 영업인가?"

"이런 인재는 보자마자 점을 찍어놔야 하거든요. 솔직히 바로 끌어들이고 싶지만, 그건 무리일 거 같고. 나름 전우이니, 생판 남보다는 낫겠죠."

"나 참."

베토가 씩 웃었고, 테리안이 비슷한 미소를 그렸다.

"뭐? 트로오오올?"

라온은 도리안의 호통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건 카리 산양의 발자국이잖아! 이것도 몰라? 너희 진짜 안 되겠다. 통나무 하나 추가!"

녀석은 콧등을 좁히며 배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정도를 모르는 놈이로다. 본왕의 1호 부하다운 놈이야.

라스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어딜 가든 평범한 놈이 없어.'

라온은 정말 통나무 하나를 더 꺼내는 도리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