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은 주디엘이 주었던 레이든에 관한 정보를 모두 외운 뒤 태워버렸다.
실제로 레이든의 연검술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내용이 상세해 마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이대로 수련하면 되겠어.'
평범한 검술과 보법인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으로 레이든을 압살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이런 정보가 있으면 훨씬 편하게 대련을 준비할 수 있다.
주디엘의 정보를 바탕으로 보법과 검술의 흐름을 조금 바꾸어 수련을 시작했다.
적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검을 휘두르고, 보법을 운용하니 움직임이 훨씬 체계화되었다.
후우우!
한창 수련에 빠져 있을 때 얼음꽃 팔찌에서 가느다란 냉기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애잔하구나.
라스가 끌끌 혀를 차며 비웃음을 흘렸다.
-쓰레기 따위를 상대하는 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하다니, 불쌍할 정도이니라. 본왕이라면 입김 하나로 뼛속까지 얼려버렸을 터인데.
"지금 당장 싸워도 놈을 이기는 건 간단해."
라온이 호 하고 입김을 뿜어내는 라스를 밀어냈다.
"중요한 건 놈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거지. 놈의 검이 내 몸에 닿지도 않을 정도로."
-이해를 못 하겠군. 이기면 그만 아닌가?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대련이라면 어떻게 이기든 상관없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내가 레이든을 건드리게 되면서 나와 별관이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목표가 되었어. 이번 검투에서 승리해서 진무전의 위험을 벗어난다고 해도 다른 놈들이 노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어떤 가문이라도 직계와 방계 사이에는 높고 두꺼운 벽이 있다. 지그하르트 정도의 명가라면 그 벽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두껍다.
그런 가문의 직계와 추종자들은 방계들이 자신의 위치에 도달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게 한때 직계였던 자들이라고 해도.
'그렇기에 보여줘야 하지.'
글렌에게 내가 직계 이상의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고대부터 인간들은 조상의 피를. 그것도 더 진한 피를 따져댔지. 똑같은 빨간색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제 놈들이 흡혈귀 놈들도 아니고. 추레하고, 지저분한 전통이다.
"처음으로 네놈과 의견이 일치하는군."
매 순간 화만 터트리는 이 악마 놈과 생각이 같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해라. 어차피 네놈의 모든 것은 본왕의 것이 될 테니까.
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팔찌로 들어갔다.
"이야. 한마디 만에 다시 정떨어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야."
라온이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다시 수련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주디엘은 아닌데.'
실비아나 헬렌도 아니었지만, 기척이 굉장히 친숙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때 작은 인형이 나타났다.
"어?"
맹한 눈동자, 나풀거리는 은발과 새하얀 피부. 공터로 다가오는 사람은 루난이었다.
"루난?"
"응."
루난은 무언가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껴안고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왔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나무 옆에 폴싹 주저앉았다.
"네가 왜 여기에…."
"싸움."
루난도 라온이 레이든과 싸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단순한 싸움은 아니고, 검투였지만.
"그래서 왔어."
그녀는 작은 손은 꼼지락거리며 가지고 온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음…."
루난을 보고 있던 라온은 많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벽과 바위, 나무 뒤에서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튼 저 사람들은.'
좀 진지해졌나 했더니, 금세 풀어졌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들이다.
"됐다."
루난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잘 감싼 보자기 안에는 그녀가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던 아이스크림 상자가 있었다.
탁.
루난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이전에 본 것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구슬 아이스크림 다섯 개가 허연 냉기를 피워냈다.
"먹어."
루난은 뚜껑을 연 상자를 그대로 내밀었다. 맹하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이스크림과 똑같이 반짝였다.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으라는 뜻 같았다.
"음."
라온은 손을 대지 않고 잠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먹어."
가만히 있자, 루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 눈을 보니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루난이 좋아하는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골라야 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먹거라!
조금 전에 팔찌에 들어갔던 라스가 두더지처럼 튀어나왔다.
-본왕은 저기 초록색이 끌리노라! 초록색에 초콜릿이 박힌 저걸 먹어라! 어서!
라스는 라온이 손을 대지 않자 본인이 더 불안해져서 미친 듯이 냉기를 뿌려댔다.
'시끄럽네.'
인상을 찌푸렸다. 라스가 원한 초록색 아이스크림은 보지도 않았다. 뭘 고를까 입맛을 다실 때 루난의 손이 자신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뭐지?'
그녀의 손을 피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살기도 적의도 없었다. 전신의 근육을 풀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했다.
톡톡.
그 긴장감이 무색하게 루난의 손은 자신의 머리를 정말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루난?"
라온이 입을 벌리며 시선을 올렸다. 루난은 간신히 티가 날 정도로 입매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다시 머리를 만졌다.
"괜찮아."
잔잔하게 빛나는 은빛 눈동자와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저릿했다.
'이 녀석….'
이제야 루난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예전에 오크와 대련할 때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걸 되돌려주기 위해서 별관 온 것이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꼬맹이에게 또 걱정을 받다니, 어이가 없다.
다만 그게 또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둥글게 만든 느낌이다.
"왜 웃어?"
"아니야."
고개를 젓고서 상자에 있던 검은색 구슬 아이스크림을 꺼내 입에 넣었다. 지금의 감정처럼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이 입안을 휘감았다.
-오! 초콜릿! 초콜릿에 설탕과 커피를 넣은 뒤 오랜 기간 숙성을 시킨 것 같구나.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커피를… 뭐, 뭐 하는 거냐!
'시끄러.'
긴 수다를 시작한 라스를 팔찌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맛있어?"
"맛있네. 고마워."
"더 먹어."
"아니 충분해."
정말 충분했다. 배가 찼다기보다는 마음이 찬 느낌. 더 이상은 필요없었다.
"그래."
루난은 우측에 있던 빨간 구슬 아이스크림을 꼴딱 삼키고 일어섰다.
"갈게."
그리고 그대로 떠났다. 할 일은 마쳤으니, 수련 방해하지 않고 간다는 것 같았다.
"나 참."
라온은 올 때보다 경쾌해진 루난의 걸음을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저 녀석의 뒤통수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라온."
루난이 떠나자마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실비아가 다가왔다.
"엄마 생각에는 친구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 보이는데? 저거 평범한 아이스크림이 아니야. 아주 비싼 간식이라고."
"저도 궁금하네요. 대충 보니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은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온. 엄마는 저 아이랑 얘기 한 번…."
"둘 다 그 이상 말 하지마."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축 쳐져 있는 것도 별로지만, 저렇게 장난기 담긴 눈빛은 더 싫었다.
"제발…."
* * *
다음날.
별관에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흠…."
라온은 툴툴거리는 느낌으로 걸어오는 손님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솔직히 말하면 루난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훈련 방식을 따라하거나, 배우고 싶어 하니까.
다만 저 녀석은 정말 의외였다.
"버렌."
라온은 귀족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버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녀석이 이곳에 온 이유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든과 검투를 한다고 들었다."
버렌이 입을 삐죽 내밀며 멈춰섰다.
"너도 알게 됐나."
"가문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다. 건방진 네놈이 대형 사고를 쳤다고."
"대형 사고라…."
"방계 주제에 직계에게 검을 날리고, 검사의 자격도 없으면서 검투를 요청했으니,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지."
버렌은 앉아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놀리러 왔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녀석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만 난 네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든다."
"뭐?"
버렌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벙쪄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레이든은 직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만 하는 쓰레기다. 강하기만 할 뿐 놈에게는 명예도, 신념도 없어."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오른 듯 뜨거웠다.
"너와 레이든이 문제가 생겼다고 듣자마자, 그 망할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였어."
"음…."
저 말은 버렌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녀석은 오늘따라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
버렌은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뭔데."
"부상에 바르는 약이다. 난 쓰지도 않는 싸구려지만, 너한테는 어울릴 거 같아서 가져왔다."
"어…."
"받아라. 빨랑!"
버렌은 자신의 손에 억지로 약을 쥐어주고서 등을 돌렸다.
"넌 5 연무장의 수석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절대 지지 마라."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웃기게도 걸음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귓불이 빨간 걸 보니 이번에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흐음."
라온은 손에 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화악하고 청아한 약 향이 풍겨 나왔다.
약을 살짝 덜어서 부상을 입었던 손목에 발랐다. 뜨끈한 기운과 함께 손목의 통증이 사라졌다.
'이게 싸구려라고?'
청아한 향과 약의 색을 볼 때 절대 싸구려가 아니다. 뚜껑 뒤쪽을 보니, 사이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이만은 약효 높은 약을 만들기로 유명한 길드. 이 약은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뭐가 뭔지."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라온. 너 언제 버렌이랑도 사이가…."
"도련님. 친구분이 또…."
버렌이 사라지자, 또 구경을 하고 있던 실비아와 헬렌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좀 오지마!"
* * *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수련하는 라온 덕분에 분주한 별관과 달리 진무전은 조용했다.
승리를 확신하는, 라온과의 검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분위기였다.
레이든 역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훈련 따윈 하지 않고,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저 도련님."
집사 메르킨이 레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왜?"
적발의 시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레이든이 고개를 틀었다.
"이제 수련을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검투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수련?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레이든이 큭큭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딴 놈을 상대하는데 웬 수련? 당시의 내가 연검을 썼으면 그 새끼는 이미 생선 조각이 되어 땅에 묻혔을 거다."
"하, 하지만 그놈의 움직임은 보통이 아닙니다. 검은 예상하고 막았지만, 주먹은 뻗어오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메르킨이 라온에게 얻어맞은 곳을 매만졌다.
"내가 너랑 똑같냐? 앙!"
레이든이 테이블에 있던 술이 담긴 잔을 던졌다. 포도주가 들어 있던 잔이 깨지며 바닥에 피처럼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 새끼가 쓰는 건 뻔해! 나도 다 아는 연성검법에 가람보법이다. 연검만 사용하면 그따위 놈은 눈 감고도 찢어버릴 수 있어!"
"음…."
"수련은 너나 해. 중요한 순간에 눈 까뒤집고 기절한 새끼가."
"죄송합니다."
"꺼져!"
레이든이 악을 지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메르킨은 고개를 숙인 뒤 레이든의 방을 나갔다.
'글렀군.'
메르킨이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레이든의 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라온에게 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에 아예 수련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련 따위 하지 않아도 그를 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존심을 챙기는 게 분명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반면 별관에 있는 라온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놈 진짜 보통이 아닌데.'
라온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암살자처럼 기척이나, 움직임을 읽기 힘들었다.
"에휴…."
메르킨이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번 검투의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 * *
마르타는 별관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북망산 초입의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쯧."
그녀는 볼을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가늘게 혀를 찼다.
"인기 더럽게 많네. 뭐 저렇게 찾아오는 인간이 많아."
마르타의 시선은 공터에 앉아 5연무장의 수련생들과 대화하는 라온을 향해 있었다. 이곳에서 보고 있는 동안 벌써 7명의 수련생이 라온에게 다녀갔다.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검투에서 이기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
"흥, 언제부터 친했다고."
연무장에서 소 닭 보듯 하다가 지난 임무를 통해 조금 가까워졌다고 친한 척하는 수련생들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모조리 한심한…."
"너도 가보지 그래?"
"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마르타가 비명을 내지르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어우, 넌 놀리는 맛이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리메르가 허공에 발장구를 치며 킥킥 웃고 있었다.
"라온은 이런 거 해도 놀라질 않아서 재미없는데."
"이 망할 엘프…."
마르타가 이빨을 갈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려 할 때 리메르가 손을 붕붕 저었다.
"그래도 돼? 다 들켰는데?"
그의 턱짓을 따라 뒤를 돌았다. 공터에 있던 라온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으으, 일부러 이런 거죠…."
"찾아왔으면 얼굴도 보고, 응원도 해주면 좋잖아."
"응원해주려고 찾아온 거 아니에요!"
"어? 그럼 그 주머니에 있는 것들은 뭔데? 나 주려고?"
"이, 임무에서 구해준 거 때문에…."
마르타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콧등을 찡그렸다.
"응원해줘. 분명 힘이 될 테니까."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공터쪽을 가리켰다. 라온은 지금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마르타는 입술을 꽉 깨물다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
"흐흥!"
리메르는 마르타가 떨어진 나뭇가지에 드러누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리숙하네. 뭐, 그게 아이들의 특권이지만."
* * *
라온은 북망산에서 내려오는 마르타는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녀가 저 위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려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리메르가 장난을 친 모양이다.
"야."
마르타가 작은 유리병과 보자기에 싼 네모난 상자를 던져주었다.
"어?"
라온은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상자와 유리병을 잡았다.
"그때의 보답이다. 검투 시작하기 전에 먹어."
"음…."
"독 아니야. 체력이나, 정신력을 깨끗하게 회복시켜주는 청심수니까. 먹든 버리든 알아서 해."
유리병을 쳐다보고 있자, 마르타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맙다."
라온은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원숭이 새끼 자꾸 앵기길래 언젠가 밟아주려고 했는데, 네가 선수 쳤네. 싸울 거면 확실하게 죽여놔. 다시는 네 엄마에게 개기지 못하도록."
"그래."
"그딴 원숭이 새끼한테 지면 너와 한 약속도 취소할 거야."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마르타가 이제 어깨 아래까지 내려간 검은 머리칼을 홱 돌렸다.
"간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이건 왜 이야기 안 해줬지?"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르타가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소고기?"
안에는 소고기가 들어 있었는데, 평소 별관에서 먹던 고기보다 훨씬 질이 좋아 보였다.
'이 녀석이었군.'
실비아가 가끔 별관 앞에 좋은 등급의 소고기가 놓여 있다고 했었는데, 마르타의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저 검은 눈깔이 그 맛 좋은 소고기를 놓고 갔다는 게냐?
'그래.'
-음, 좋다. 본왕은 군주답게 이해심이 넓지. 오늘부터 검은 눈깔을 소고기 소녀라 칭하겠노라.
'....'
라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소고기를 챙길 때 수풀 속에서 실비아와 헬렌이 땅 위로 올라온 두더지처럼 솟구쳤다.
"소고기에 청심수라, 라온 생각으로 가득하네."
"그럼요. 고기도 고기지만, 청심수 같은 비싼 물건을 주신 것만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죠."
"라온. 나중에 마르타를 식사에 초대…."
"아, 제발 좀 가요!"
라온이 머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귀신처럼 다시 수풀 속으로 들어간 뒤 별관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며칠 전에는 너무 축 처져서 걱정됐는데, 지금은 너무 가벼워져서 감당이 안 된다.
'뭐, 지금이 낫지만.'
실비아와 헬렌은 자신이 이기리라 믿고,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저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가 저렇게 밝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 해를 끼치는 것들은 그림자조차 닿지 못하게 해야 한다.
라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일어나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고, 그렇게 어느덧 검투 날 아침이 밝았다.
93화
지그하르트의 대연무장은 직계나 대주급 혹은 가주에게 허가를 받은 인원만이 들어와 훈련을 할 수 있다.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검투다.
검사와 검사가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그 대련만큼은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모두가 대연무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검투 시작까지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았지만, 워낙에 유명한 인물들의 대결이다 보니, 대연무장의 좌석은 이미 꽉 들어찼다.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연무장 외곽에서라도 좋은 자리를 잡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대연무장은 시장 바닥을 방불케 했지만, 그들 모두의 이야기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특이한 검투야. 오늘 대결을 놓치는 놈은 평생 후회할걸."
"그래. 다시 오지 않을 싸움이겠지."
"하긴 직계의 검사와 방계의 수련생이니까."
"그것도 요즘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오는 애들이잖아."
직계 검사와 방계 수련생의 대결. 그리고 최근에 가문에서 큰 공을 세운 두 명의 검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라온과 레이든 도련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비슷해야 재밌을 텐데."
"음, 검투가 특이한 거지 결과는 이미 나와 있잖아."
"라온이 아무리 나이에 비해 강하다고 해도 절대 못 이겨."
"하지만 녹전귀를 베었다고…."
"그걸 라온 혼자 한 게 아니잖아.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함께 싸운 거지."
"반면에 레이든 도련님은 혼자서 백혈교의 지부를 무너뜨렸지. 아무리 작은 지부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검사들 대부분은 라온의 소문이 부풀려졌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레이든이 검투에서 승리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에이, 라온도 마스터인 광혈귀를 상대로 버텼잖아. 싸움은 해봐야 아는 거야."
"그거 리메르가 헛소리 한 거라니까. 그냥 구라라고!"
"버티긴 했겠지. 몇 초 정도?"
"나도 레이든 도련님이 마음에 안 들고, 이번 일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분은 이미 익스퍼트 중급이야. 라온과는 너무 큰 벽이 있다고."
"역시."
"하긴…."
이미 분위기가 형성되었는지 라온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다.
대연무장에 있는 검사들의 머릿속엔 이미 라온의 패배가 그려져 있었다.
"난 라온이 적당히 버텨만 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잘 싸우면 가주님이 내기 내용을 바꿔주실지도…."
"아주 뚫린 구멍이라고 개소리가 왈왈 잘도 나오네."
"누가… 억!"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검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고운 이마를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헛소리? 구라?"
마르타가 앞으로 몸을 내밀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진짜 구라였으면 나나 버렌이 가만히 있었겠냐. 니들 대가리 장식으로 달린 거 아니잖아. 생각 좀 해라. 앙?"
단아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상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으음…."
"그게…."
검사들은 마르타에게 따지긴커녕 신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다. 정식 검사라고 해도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애정을 받는 딸을 건드릴 배짱은 없었으니까.
"그 동태눈깔로 봐 둬."
마르타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희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테니까."
* * *
"데니어가 딸년을 잘못 키웠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발데르가 다리를 꼬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아니, 잘못 키운 게 아니라, 잘못 주워온 건가."
그는 저런 옹이구멍 같은 눈을 가진 놈이 무슨 재능이 있냐고 중얼거렸다.
다만 그도 마르타가 검사들을 함부로 대한 것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이 세계는 직계와 방계 혹은 그 아래와의 차이가 컸다.
"이미 끝난 싸움이거늘. 검투 따윈 빨리 끝내고, 그 건방진 놈의 비명이나 듣고 싶군."
오늘 대결의 결과는 이미 뻔했다. 라온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연검을 겪어보지 않고선 레이든을 상대할 수 없다.
검투 이후 단전이 부숴지고, 마나 회로가 찢어져 비명을 지르는 라온을 볼 생각에 벌써 흥겨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 오랜만이네요."
"음?"
진중한 분위기의 단상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음성에 발데르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리메르?"
붉은 머리 엘프가 히죽이는 미소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아,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들렸습니다."
"그럼 그대로 지나가라."
"아하하. 농담도."
사라지라는 말에도 리메르는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발데르의 옆에 붙었다.
"너랑 내가 농담 따위를 할 사이인가?"
"재밌는 소리를 하셔서요."
"뭐?"
"이미 끝난 싸움이라니, 누가 이겼다는 말이죠?"
"네놈의 망가진 눈깔로도 보일 텐데, 레이든의 기세와 네놈이 키운 떨거지의 기세가."
"흐음, 확실히 차이가 나긴 하네."
리메르가 대연무장의 양쪽에 서 있는 라온과 레이든을 차례로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근데 싸움이라는 게 꼭 기세와 무력으로 결정되는 건 아닌데."
"흥, 그거야 버러지들의 싸움에서나 그렇지. 익스퍼트 급이 되면 경지의 차이를 넘기 힘들다. 거기다 레이든은 연검사다. 네놈의 제자는 살과 뼈가 발려서 뜯겨나갈 거다."
"그럼 저랑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기 하나 하자구요."
리메르는 빙긋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광혈귀와 싸웠다는 헛소문처럼 또 무슨 술수를 부리려는 거냐."
"오늘은 가주님도 보러오시는데 제 술수가 통하기나 하겠습니까."
"음…."
발데르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리메르를 함부로 대하기 힘든 게 바로 이점이다. 놈은 아직도 가주인 아버지와 한 번씩 만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니, 서로 뭣 좀 걸어봅시다. 혹시 쫄리면 빠져도…."
"닥쳐라!"
발데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발을 올리고 있던 발판이 우그러졌다.
"아하하, 농담입니다."
"네놈은 뭘 걸 거지?"
"전 이겁니다."
리메르의 품에서 잎사귀 모양의 단검이 나왔다. 태양 빛을 받자 진짜 풀잎처럼 청아한 향과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이건…."
"뭔지 아시죠?"
"정말 이 물건을 내기에 걸겠다는 건가?"
"물론이죠. 내기는 한 방 아닙니까! 한 방!"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내 용견검이라도 원하는 건가?"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히죽 웃었다. 버렌을 골리고, 라온을 놀릴 때의 표정이었다.
"저는…."
* * *
라온은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처음으로 온 대연무장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약효가 좋은데.'
마르타가 준 청심수를 미리 먹고 온 덕분일까. 머리는 맑고, 심장은 평소처럼 느리면서 침착하게 뛰었다.
버렌에게 받은 약도 잘 받아, 이제 육체의 부상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공터나, 5 연무장에서 훈련할 때처럼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이 반대편에 서 있는 레이든을 보았다. 그는 검투를 앞두고서도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거겠지.'
레이든이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과 그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저런 연출을 하는 중이다.
'다만….'
저런 연출은 압도적인 차이가 나거나, 확실한 승리할 수 있을 때나 하는 행동.
라온이 시녀의 안마를 즐기는 레이든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는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지그하르트의 하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경의를 취해주십시오!"
어깨를 풀고 있을 때 연무장 정문 앞에 서 있던 검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쿠구구구!
거대한 문이 반으로 갈라지고, 글렌과 천검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사람은 많지만 보이는 건 오직 글렌 뿐이다. 그의 전율적인 기세에 연무장의 공기가 피부를 찌를 듯 날카로워졌다.
무력이 강해질수록 그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알게 되어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올랐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연무장에 있는 모두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볼 때마다 무릎을 꿇고, 인사라니, 인간이란 것들은 참으로 귀찮도다.
라스가 짜증을 부리며 혀를 찼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부러움이 느껴졌다.
마계의 군주인지 뭔지에서 이제 자신의 팔찌에 사는 초라한 임차인이 되었으니, 모두에게 존경과 공포를 주는 글렌을 질투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속이 좁다니까.'
-뭐라 했느냐.
'아니야.'
라온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일어나라."
그 사이에 단상의 중심에 있던 옥좌에 앉은 글렌이 입을 뗐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귓속에 똑똑히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일어섰다.
"좋군."
글렌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연무장의 서쪽에 있는 라온과 동쪽에 있는 레이든을 차례로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검투를 시작하라."
"예!"
당상 아래에 있던 사회자가 글렌에게 크게 허리를 굽히고 뒤를 돌았다.
후우우웅!
그가 손을 올리자, 대연무장의 외곽에 서 있던 기수들이 화검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흔들었다.
동시에 깃발이 펄럭이자 연무장 전체가 불길이 출렁이는 장관이 연출 되었다.
"검투사들은 앞으로!"
"드디어."
레이든이 히죽 웃으며 손을 뻗자, 뒤에 있던 시녀가 검집을 가져왔다. 창보다 더 긴 검집에서 흐물거리는 검을 뽑았다.
피이잉.
길고 얇은 연검은 살아 있는 뱀처럼 휘적이며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라온은 살기 등등한 눈빛을 흘리는 레이든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러질 정도로 난간을 세게 부여잡은 채 입술을 깨문 실비아가 보였다. 그녀에게 눈으로 말을 전했다. 괜찮으니, 마음 놓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실비아 옆에는 두 손을 꼭 끌어모은 헬렌과 시녀들이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듯 어깨를 떨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레이든과의 싸움이 아니라, 저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후…."
라온은 숨을 뱉는 걸로 머리를 비우고 걸어가 레이든과 마주 섰다.
* * *
"흐아!"
레이든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일주일이 일 년보다 더 길었다.
'이제야 갚을 수 있겠군.'
별관에서의 굴욕. 자신을 볼 때마다 비웃음을 참는 듯한 검사들의 눈깔을 바꿔줄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흥분을 참으며 연검을 고쳐잡았다.
'자, 와라. 당장에…저 새끼가.'
레이든이 이를 갈았다. 라온은 자신이 아니라, 뒤에 있는 실비아와 시녀들을 보고 있었다.
전투 직전에 보인 무관심에 속이 뒤집어질 듯이 울렁였다.
'아예 사지를 잘라주지.'
검투에서 라온의 팔다리를 자르고, 검투 결과로 단전과 마나 회로까지 끊어버렸을 때의 라온과 시녀들의 얼굴을 상상하자, 등골 사이로 희열이 올라왔다.
"준비하십시오."
사회자의 준비 신호에 레이든이 손목을 돌렸다. 그저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을 뿐인데 연검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전 준비되었습니다."
라온은 검을 뽑지조차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너처럼 건방진 놈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레이든이 얼굴을 들이밀며 콧등을 찡그렸다.
"그날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알려주지."
"운?"
라온은 검집을 매만지며 픽 웃었다.
"이 새끼가 정말…."
"물러나십시오."
사회자가 레이든을 억지로 밀어냈다.
"팔이 잘려도, 단전이 찢어져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그럼 평생 볼 일 없겠네."
라온은 미소를 유지한 채 검병을 쥐었다.
빠득.
레이든은 부서질 듯 이빨을 갈고 뒤로 물러섰다. 저놈과 말싸움을 하기보다 빨리 검투를 시작하는 게 맞았다.
사회자는 눈빛으로 준비가 되었냐를 물었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레이든과 라온 사이를 가로막았던 손을 올리고 뒤로 물러섰다.
"크하하하!"
레이든이 광소를 흘리며 연검을 내리쳤다. 파르륵 소리와 함께 검이 리본처럼 빙빙 꼬이며 라온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피이잉!
라온은 나풀거리는 꽃잎처럼 몸을 비틀어 연검을 피해냈다.
"피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손목을 올려 치자, 연검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라온을 뒤쫓았다.
"큭…."
라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람보법을 밟아 연검을 피하려 했지만, 그 흐름은 이미 레이든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말했지. 그때와 다르다고! 계속 도망쳐봐라!"
레이든이 히죽이며 결정연검의 세 번째 형 마결귀를 펼쳤다. 연검의 날이 지그재그로 휘어지며 라온의 다리를 노렸다.
치이잉!
라온이 검을 뽑아 아래로 내렸다. 마결귀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검으로 막으려는 것 같았다.
"크흐!"
레이든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멍청한 놈!'
연검술은 공격 방향의 전환이 너무 빨라 수비하기 굉장히 어렵다. 눈에 보이는 곳을 수비했다간 다른 곳을 베이기 마련이다.
지금의 라온 역시 마찬가지다. 놈은 다리를 노린다는 생각에 하체에 검을 가져갔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피이이익!
레이든이 손목을 휘돌리자, 라온의 종아리를 향하던 연검이 덩굴을 탄 뱀처럼 위로 솟구쳤다.
'경고한 대로 네놈의 팔을 가져가마!'
예리하게 쏘이진 검날이 라온의 팔을 가르고 놈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
레이든이 마른침을 삼켰다. 연검이 팔을 찢기 전에 눈앞에 있던 라온이 사라졌다.
"어, 어디…헉!"
레이든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쥔 손을 떨었다. 목젖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돌려보니, 사라진 라온이 자신의 목에 검을 대고 있었다.
"뭐, 뭐가 어찌 된…."
"첫 번째다."
"처, 첫 번째? 뭐가 첫 번째라는 거냐!"
"넌 오늘 여덟 번 죽게 될 거다."
그 말을 마친 라온의 주먹이 레이든의 얼굴에 작렬했다.
뻐억!
94화
"끄어억!"
레이든이 얼굴을 부여잡고 물러섰다. 동여맨 머리가 풀려 미친놈처럼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으으윽…."
극악의 통증에 신음이 나온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놈이 어떻게 목에 검을 대고 있었는지, 왜 얼굴이 아픈 건지.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레이든이 바드득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라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단해. 네 검을 피하고, 네 얼굴을 쳤다."
그는 밥을 먹는 것처럼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 그걸 어떻게 했냐는…."
"방금으로 한 번이다."
라온은 질문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하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뭐?"
"오늘 여덟 번을 죽을 거라고 말했지. 지금 건 보내지도 않고 서신을 주었다는 거짓말에 대한 대가다."
"이, 이 새끼가…."
레이든이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당장에 라온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여덟 번? 개소리 작작해! 넌 방금 검투를 끝내지 않은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레이든은 악을 내지르며 연검을 내리쳤다.
콰과과과!
오러가 실린 연검이 태풍처럼 몰아쳐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결정연검의 광휘풍이었다.
쿠구구구!
연검이 크라켄의 촉수처럼 요동쳤지만, 라온은 가람보법을 연속으로 밟아 쏟아지는 검기를 회피했다.
'어딜!'
레이든이 주먹을 꽉 쥐며 연검을 휘돌렸다. 연검에 맺힌 검기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라온의 앞길을 막기 시작했다.
'한 번에 잡는 걸 노려선 안 돼.'
아직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방안에 들어온 벌레를 몰아서 잡듯이 놈을 압박해야 한다.
손목만이 아니라, 팔꿈치와 어깨까지 써가며 연검의 긴 날을 끝까지 사용했다.
라온의 시야에서는 눈앞에 연검과 검기로 이루어진 벽을 보는 것처럼 느낄 거다.
"그대로 회를 쳐주마!"
레이든이 결정연검의 열 번째 형 적훼벽을 운용했다. 장미 덩굴처럼 꼬인 연검의 벽이 라온을 향해 쇄도했다.
"음…."
가람보법을 밟으며 연검을 흘려내던 라온이 몸을 돌렸다. 적훼벽을 피해 뒤로 물러선다.
"걸렸어!"
뒤로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적훼벽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터엉!
쭉 뒤로 물러서던 라온이 허공에서 몸을 돌린 후 땅을 박찼다.
'이놈 무슨!'
검기의 벽에 그대로 달려들다니, 미친놈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헉!"
레이든이 헛바람을 흘렸다. 적훼벽이 끝까지 밀려간 순간 놈이 촛불처럼 훅 꺼졌다.
"이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전처럼 라온이 오른쪽에서 나타나리라 생각하고 연검을 끌어왔다.
'없어?'
하지만 우측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이다."
그 말이 귀에 닿기도 전에 함께 왼쪽 얼굴에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끄아아악!"
레이든은 왼쪽 광대뼈에 밀려온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으으으윽…."
고통이 가시질 않는다. 광대뼈가 주저앉은 게 분명했다.
"으아아아악!"
레이든이 괴성을 질렀다. 연검에 오러를 주입해 세운 날을 땅에 박으며 일어섰다.
"바, 방금 뭘 한 거야…. 분명 앞에 있었는데!"
"이건 어머니가 키운 꽃에 침을 뱉은 대가다."
"이 미친놈이!"
턱이 덜덜 떨렸다. 라온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 또라이 새끼는 아까 말한 대로 여덟 개의 빚을 갚아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레이든이 뒤로 물러서며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다. 검투고 지랄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고오오오!
끌어올린 오러를 마나 회로 전체에 내보내며 연검을 세웠다. 줄기줄기 뻗어나간 오러에 바람 없이도 옷깃이 펄럭거렸다.
"뼈까지 발라서 죽여주마!"
레이든이 빳빳하게 세운 연검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섬전 같은 속도.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라온의 미간 앞에 도달했다.
후우웅.
라온이 방어를 위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레이든이 오른팔 전체를 진동시켰다.
콰아아아아!
그 격한 떨림이 연검 전체에 전해지며 쫙 펴졌던 검날의 궤도가 똬리를 튼 뱀처럼 구부러졌다.
여덟 개의 촉수를 가진 크라켄이 바다를 짓이기는 것처럼 적의 전신을 찢어발기는 결정연검의 절기 연폭검이었다.
공기조차 갈라버리는 예리함 속에서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눈을 빛내며 자세를 낮췄다.
'저 새끼 또!'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놈은 아까도 저런 눈빛을 보인 뒤 사라져서 오른쪽과 왼쪽에서 나타났었다. 이번에도 놓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
전력으로 끌어 올린 오러를 이용하여 연폭검을 내질렀다. 풍선처럼 부푼 검기의 응집체가 라온을 휘몰아쳤다.
'방심해선 안 돼.'
멍청이처럼 세 번이나 당할 수는 없었다. 라온이 연검의 벽을 뚫고 나올지도 모르니 감각을 극한으로 다듬었다.
콰콰콰광!
연폭검의 강력한 검기에 바닥이 종잇장처럼 깎여나갔다. 하지만 살을 가르는 손맛은 없었다. 놈은 또 사라졌다.
"어디냐!"
레이든이 기감을 펼쳐내며 당겨온 연검으로 주변을 막아냈다. 좌, 우 혹은 뒤에서 와도 막을 수 있도록 대비했다.
"앞이다."
하지만 라온의 목소리는 왼쪽도, 오른쪽도, 뒤쪽도 아닌 앞에서 들려왔다. 긴급히 대비하려 했지만,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뻐어어억!
빛살이 되어 솟구친 라온의 주먹이 레이든의 턱을 깨부쉈다.
"끄아아악!"
레이든이 턱을 부여잡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아프다. 뺨을 맞았을 때보다, 광대뼈가 주저앉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으으…."
턱뼈가 조각나고, 피부가 찢어졌는지 피가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다.
"세 번째는 어머니가 키운 꽃을 밟은 대가다."
라온이 레이든의 앞으로 다가오며 검을 털어냈다.
"네 검은 전부 파악했다. 이젠 피할 필요도 없겠어."
"개소리…."
레이든이 벌떡 일어나며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냈다. 머릿속에서 놈을 죽여야겠다는 분노가 폭발했지만, 볼을 씹어 가라앉혔다.
'도발이다. 도발.'
손가락이 떨린다. 이 이상 저놈에게 얻어맞으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진다면 모든 걸 잃게 된다. 절대 질 수 없었다.
"후우우욱!"
단전 전체를 진동시켜 전신에 오러를 퍼뜨렸다.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콰아아아아!
폭주하는 듯한 기운과 달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차분히 결정연검을 펼쳐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예리하며 화려한 검기가 공간을 휘몰아쳤다.
'이건 못 피해.'
지금까지 펼친 것 중 가장 정확한 검기가 라온을 향했다.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으며 검기의 파도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의 결정연검은 라온이 상대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놈은 그 자만심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죽어라.'
휘어진 연검의 검극으로 라온의 심장을 찌르려 할 때 라온의 검이 사선으로 올라갔다.
캬아아앙!
라온의 부딪친 연검에서 팔이 휘청일 정도의 충격이 밀려왔다.
"뭐, 뭐야!"
분명 라온의 검을 흘려내고 놈의 심장을 노렸는데, 검술이 도중에 끊겨버렸다.
"이익!"
레이든이 걸정연검의 네 번째 형을 펼치며 라온을 압박했다.
하지만.
캬아앙!
라온이 검을 내리치자, 연검은 끊어진 고무줄처럼 축 늘어져 튕겨 나왔다.
"흐아압!"
기압을 지르며 다시 결정연검을 쏘아냈다. 하지만 라온이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초식이 가닥가닥 끊어져 검술이 이어지질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간신히 만들어놓은 안정된 정신이 깨져나갔다. 놈은 정말로 자신의 결정연검을 전부 파악한 것처럼 검술을 파훼했다.
"말했잖아. 네 검술은 전부 알았다고."
라온이 연검을 길게 쳐내고 쇄도해왔다.
"꺼, 꺼져!"
레이든이 왼쪽 주먹을 내질렀지만, 라온은 가볍게 피해낸 뒤 검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검면으로 이마를 얻어맞은 레이든이 발로 찬 공처럼 뒤로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고통이 심한지 레이든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이, 이건 아니야!
극심한 통증에 기절할 것 같았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일어섰다. 지금은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말이 안 된다고!"
이 짧은 시간에 결정연검을 파악했다니,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어야 했다.
"네 번째는 헬렌을 때린 대가다."
라온은 레이든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걸어왔다.
'이럴 수는 없어!'
레이든이 부러지도록 검병을 꽉 쥐고, 연검을 들어 올렸다.
"흐아아아!"
더 빠르고 예리하게 결정연검의 초식을 펼쳐냈다.
치이이잉!
강렬한 의지를 담은 연검이 화려한 궤적을 만들어내며 라온을 향해 짓쳐 들었다. 속도, 예리함, 위력. 모두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온의 걸음은 그대로였다. 산책을 나온 듯 가볍게 걸으며 연검의 폭풍으로 들어갔다.
캬앙!
라온이 검을 그었다. 파리를 쫓는듯한 가벼운 검에 연검이 크게 휘청였다.
지금까지 만들어낸 변화와 흐름이 그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이익!"
레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흐물해진 연검을 휘돌려 다시 한번 결정연검의 절기를 펼쳐냈다.
콰아아아!
연검에 맺힌 검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라온은 검기의 비를 향해 연성검법을 이어 그었다.
쩡!
뭐라 말할 수 없는 가벼운 올려치기였지만, 결정연검의 절기가 끊어지고, 연검이 거칠게 튕겨 나왔다.
"뭐, 뭐야! 뭐냐고!"
레이든이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절기가 끊기다니, 직접 겪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잘못된 거야. 이럴 리 없다고!"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연검을 내리쳤다. 결정연검의 두 번째 절기 폭아참이 펼쳐졌다.
캬아아아!
짐승의 송곳니같이 날카롭고 사나운 검격이 라온의 심장과 목을 노렸다.
라온이 멈춰 섰다. 당황의 눈빛은 없었다. 그저 올린 검을 내렸다.
우우웅!
대가가 그리는 그림처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내려간 검격에 폭아참이 녹아내린다.
검기가 사그라지고, 초식이 짓눌린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에.
"아…."
레이든이 헛바람을 흘렸다. 폭아참을 지우며 다가오는 라온을 보자, 심장이 꽉 우그러들었다.
연성검법에 가람보법.
대륙의 검사라면 누구나 알 법한 검술과 보법을 밟는데, 놈을 뚫을 수가 없다.
분명 알고 있는 초식이건만 막을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헉, 허억!"
호흡이 가빠온다. 라온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듯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재차 연검을 그어봤지만, 라온의 검에 튕겨 나가 땅에 박혀버렸다.
빠아아악!
모든 검기를 지우고, 다가온 라온이 검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큽!"
더 강해진 통증에 순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끅끄으!"
레이든은 비명조차 아닌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터져나간 뺨을 부여잡았다.
"일어나라."
라온의 눈동자에서 타오른 분노의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아직 다섯 번째니까."
* * *
검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온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레이든은 도발에 넘어가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않은 결정연검을 펼쳤고, 라온은 익숙해지다 못해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는 연성검법을 사용했다.
완숙되지 않은 뛰어난 검법을 익힌 검사와 누구나 아는 검법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대부분은 뛰어난 검법을 익힌 검사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아니다.
완성되지 않은 고급 검술을 익힌 검사는 강하고, 화려한 검격을 발휘할지언정 상황에 적절한 검술을 펼칠 수 없다.
반면 기본적인 검술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는 단순한 검로일지언정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검초를 펼쳐낼 수 있다.
처음엔 강한 검술을 익힌 검사가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이가 벌어져 기본 검술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가 점점 승기를 잡게 될 거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검술이 아니라, 누가 검술을 사용하느냐이다.
기본 검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불의 고리를 익히고, 주디엘의 정보를 받은 라온이니, 그가 레이든을 일방적으로 후려 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온은 피를 질질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레이든을 바라보았다.
"아,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저, 절대 질 수 없어…."
눈동자에 담긴 건 지독한 살기. 무슨 짓을 해도 죽여버리겠다는 악의였다.
"크아아아!"
레이든의 오러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놈의 주변이 녹빛으로 물들고, 바닥에 진동이 일어났다.
"후."
라온은 피부를 찢을 듯 살벌한 살기와 검기를 느끼면서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을 들었다.
중단세. 검을 복부 앞에 두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적의 강렬한 기세 앞에서도 그의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뒈져!"
레이든이 폭발시킨 기운을 연검에 담아 내리쳤다. 하나의 칼날이 찰나의 순간 수십 개로 변해 라온의 전신 급소를 향해 쏘아졌다.
레이든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결정연검의 마지막 초식 대풍우였다.
단 하나의 칼날만 맞아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검기의 다발 속에서 라온이 검을 들어 올렸다.
빛살처럼 뻗어나가는 연검과 달리 지루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 하지만 검도, 라온의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우웅!
모든 것을 찢어발긴 검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라온이 검을 내리쳤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안에는 검술의 본의가 담겼다.
연성검법. 별을 이어붙인다는 의미대로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검술이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라온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대풍아가 연성검법의 거대한 흐름 앞에 갈라진다.
"아아…."
찢어지는 검기의 파도 속에서 핏발이 선 레이든의 눈동자가 보인다. 당황을 넘어 경악이 어린 얼굴이었다.
"이게 전부인가?"
"나, 난…."
"벌써 포기하면 곤란해."
라온이 검을 털어내며 레이든을 향해 다가갔다.
"넌 세 번 더 죽어야 하거든."
95화
"마님. 저, 전 못 보겠어요."
헬렌은 검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을 뜨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들처럼 대해온 라온이 살벌하기로 이름 높은 레이든과 검투를 한다는 것에 긴장되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봐야 해."
실비아는 헬렌과 달리 눈을 부릅뜨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니까."
헬렌이 슬쩍 눈을 떴다. 라온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에 조금 긴장이 해소되었다.
"하아, 그래도 떨리네요. 마님은 어떻게…."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보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난간이 흔들릴 정도로 손을 떨고 있었다.
"마님…."
헬렌은 눈물이 꾹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실비아는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떨리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녀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언제쯤 행복해지실런지….'
실비아도, 라온도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능력만 있었다면 두 사람을 이곳에서 떠나게 하고 싶었다.
"괜찮을 겁니다."
주디엘이 차분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도련님은 밤낮없이 레이든의 연검술에 대비하셨습니다. 분명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경악할 모습을 보여주실 겁니다."
"그, 그렇게 되면야 바랄 게 없지만…."
"맞아. 헬렌. 그렇게 생각하자. 고마워."
실비아는 주디엘에게 고맙다며 눈인사를 보냈다.
"자, 손잡아. 손."
"네?"
"손잡고, 라온이 이기길 기도하자고."
실비아가 먼저 헬렌의 손을 잡았다. 헬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던 주디엘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별관 시녀들 모두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음…."
주디엘은 땀에 젖고, 떨리는 헬렌과 다른 시녀의 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데.'
라온은 괴물이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수많은 강자에 비하면 무력은 분명 약하다. 하지만 기질 자체가 다르다.
그날 밤 본 라온의 두 눈동자는 평생이 가도 잊을 수 없다. 공간을 지배했던 공포와 살기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오른다.
그는 진짜다.
저런 흉폭하기만 한 가짜에게 지고 싶어도 질 사람이 아니었다.
주디엘이 라온의 진면목을 보았던 그 날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사회자가 검투의 시작을 알렸다.
"흡!"
옆에 앉은 실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콰아아!
레이든은 시작하자마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연검술을 선보였다. 그 예리함과 다채로운 변화는 멀리 있는 이곳까지 전해져왔다.
라온은 그 화려함과는 반대로 정직하기 그지없는 연성검법을 사용하고, 가람보법을 밟았다.
그의 모습은 폭풍 속을 떠도는 꽃잎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음…."
"아아…."
실비아와 헬렌의 손이 덜덜 떨린다.
'전부 잘못 알고 있어.'
주디엘이 입술을 핥았다. 라온의 눈빛은 자신을 짓눌렀던 그때와 같았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상태였다.
콰아아아!
레이든이 자랑을 하듯 화려한 검초를 선보였다. 장미 덩굴처럼 꼬인 검기가 라온을 덮치려는 찰나 그가 가람보법을 밟았다.
자신조차 알 법한 기본적인 보법이건만 그는 그 예리하고 다채로운 검술을 피해 레이든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레이든은 그걸 느끼지도 못한 듯 앞을 보고 있다가 그대로 목을 내주었다.
"이, 이겼어! 이겼어요! 마님!"
"꺄아아아악!"
헬렌과 시녀들은 레이든의 목젖 앞에 검을 둔 라온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우…."
실비아는 난간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긴 것보다 라온이 다치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
주디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길 건 알았지만, 저리 간단하게 저렇게 쉽게 승리할 줄은 몰랐다.
'정말 대단… 어?'
감탄하고 있을 때 라온이 검을 내리고 레이든의 입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레이든이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튕겨 나갔지만, 전력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화만 돋은 듯 레이든의 오러가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대, 대체 왜!"
실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압도적으로 끝난 승부건만 풀어준 이유를 모르겠다.
레이든이 손목을 휘돌렸다. 연검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라온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으며 물러섰지만, 레이든의 연검은 추적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끝까지 라온을 쫓았다.
레이든의 검이 라온의 심장을 노리고 꿈틀거렸지만, 라온의 표정은 담담했다. 물에 뜬 연꽃처럼 흘러가 레이든의 왼쪽에 이르렀다.
처억!
라온은 이번에도 레이든의 목에 검을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두 번째다. 라온은 이길 수 있음에도 레이든을 두 번째 풀어주었다.
이제 레이든은 분노에 가득 찬 한 마리 괴수가 된 듯한 눈빛을 발하며 연검을 휘둘렀다. 라온은 여전했다. 평온한 표정으로 검을 피해 앞에서 레이든을 제압했다.
뻐어억!
라온은 관중석까지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레이든의 얼굴을 걷어찼다.
헬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라온이 왜 레이든을 놓아준 건지 알았다.
'복수를 해주는 거였어.'
라온은 레이든이 별관에 와서 부렸던 행패들을 차례로 갚아주고 있었다.
처음에 입을 때린 건 서신을 보냈다는 거짓말 때문이었고, 두 번째에 얼굴을 친 건 가래침을 뱉은 것, 방금은 꽃을 짓밟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아…."
참을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곳 지그하르트에서 피란 곧 힘. 직계는커녕 방계조차 되지 않는 자신들을 제대로 대우해준 사람은 실비아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난 이후 그 냉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 차가운 대지에서 시녀들을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건 그녀뿐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한 명이 늘었다. 실비아의 아들이자,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라온.
그는 우리를 위해 직계와 싸우고, 직계를 박살 내고 있었다.
라온의 마음이 전해져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흐읍…."
헬린은 울음을 참는 듯한 신음에 고개를 돌렸다. 다른 시녀들도 라온의 뜻을 알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부 같은 감정을. 처음으로 자신들을 위해주는 사람에 감격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입을 꽉 다문 채 자랑스러운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오러와 검술을 잃기 전의 그녀의 모습을 보는 듯 당당한 얼굴이었다.
다만 헬렌의 생각 이상으로 실비아는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아무도 스스로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 주눅이 든 채로 살았다. 직계이면서도 없는 사람처럼 냉대를 받았다.
아버지에게, 형제에게, 가문에게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건 이탈이었다. 그녀는 가문을 벗어나 자유를 택했다.
'하지만.'
정답은 그게 아니었다. 이곳에서, 이 지독한 땅에서 힘으로 극복을 했어야 했다.
그걸 지금 자신의 아들인 라온이 말해준다.
누구보다 약한 채 태어나 지금 누구보다 강한 마음을 품은 아이가 등으로 보여주었다. 상대가 누구든 넘볼 수 없게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라온…."
실비아는 끓어오르는 격동을 느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뿌드득!
발데르가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검투의 승패는 레이든의 승리로 이미 결정이 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연무장의 9할 이상이 모두 레이든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레이든은 라온에게. 그것도 하급 검술과 하급 보법을 사용하는 라온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만약 라온이 마음만 먹었다면 첫 격돌에서 전투가 끝났을 거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나고 있었다.
후우우웅!
라온은 방금도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을 그대로 사용하며 레이든이 펼친 결정연검의 마지막 초식을 갈라버렸다.
"저 미친…."
발데르는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흘렸다.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연성검법의 진의를 검에 담고 있었다.
검술의 진의란 이미 검에 나름의 의지를 담는다는 뜻.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저놈은….'
그걸 익스퍼트를 갓 입문한 놈이, 그것도 15살짜리가 이뤄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것도 끔찍한 악몽을.
이미 이성이 반쯤 나간 레이든은 절대 라온의 검을 뚫지 못했다. 이 검투는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예상과 아예 반대로.
'천재. 아니, 그런 수준을 넘었어.'
대륙은 넓고 천재는 흔하다.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작은 무력 단체에도 천재라 불리는 사람은 꼭 한 명씩 있다.
지금의 라온은 그런 단어로 설명이 될 놈이 아니다. 천재를 잡아먹고 크는 괴물. 대륙의 정상에서 검을 휘두를 아귀 같은 놈이었다.
'방계 따위가!'
실비아의 아들이라고 해도, 씨는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하등한 놈이 자신의 아들을 이긴다는 생각에 분노가 넘쳐흘렀다.
"저 새끼…."
"우와아아아! 대박 터졌다!"
기세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 옆에서 가볍다 못해 촌스러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리메르였다.
"인.생.역.전!"
그는 양손에 든 종이를 마구 흔들며 환호를 질렀다.
"좀 닥쳐!"
"어? 아이구, 미안합니다."
리메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숙였다. 다만 눈빛은 싸움을 앞둔 전사처럼 살벌하게 빛났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습니까. 라온이 이길 거라고."
그는 발데르의 옆으로 다가가며 씩 웃었다.
"내기 보상을 준비하려면 돈이고 시간이고 꽤 써야겠어요. 뭐, 그게 아니라도 한턱 단단히 벌었지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손에 든 종이들을 가리켰다. 여기저기서 내기를 건 증표들이었다.
"내가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발데르의 분위기가 깎은 칼날처럼 예리하게 변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결과가 나왔다는 건 아실 테니, 하나만 말하고 사라지죠."
리메르는 발데르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오늘 이 시점으로 라온을 지켜보는 눈이 많아질 겁니다. 그 많은 눈을 피할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라온이나 별관을 건드리지 마십쇼."
"너 이 새끼 감히…."
발데르가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리메르의 눈은 그가 광검이라 불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새끼를 건드린 아비 늑대를 보는 듯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나 말고, 가주님을 겁내라고요. 약속 안 지키는 거 정말 싫어하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는 서늘했던 기세를 단번에 꺼뜨리고, 낄낄 웃는 한량이 되어 떠나갔다.
'저놈의 말이 맞아.'
오늘 라온을 확실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저놈도 별관도 건드리기 정말 힘들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들과 다른 직계 조카들은 라온의 그림자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저놈은 그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레이든!
발데르가 은밀하게 오러를 쏘아내 레이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변화와 예리함은 집어치워라! 힘으로! 힘으로 깨부숴라! 네가 유리한 점으로 싸워!
라온을 이길 수 있는 힌트를 전했다. 나중에 분명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기는 게 우선이다.
'꺾어라! 뒤는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 * *
'음?'
라온이 살짝 눈매를 좁혔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레이든이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오러를 퍼뜨리지 않고, 평범한 검을 쓰듯 검 전체에 휘감았다.
'그랬군.'
조금 전 불의 고리가 관객석에서 흘러나온 미약한 오러를 포착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발데드가 레이든에게 자신을 이길 방법을 알려준 것 같았다.
'그 아들에 그 아비인가.'
라온이 뒤를 돌아 시치미를 떼고 있는 발데르를 보았다.
검투란 두 검사의 자존심과 무력을 겨루는 대결.
그 숭고한 대결을 방해한 주제에 부끄러운 표정은 없다. 내가 직계이고, 글렌의 아들인데 뭐 어쩔 거냐는 눈빛이다.
"크으…."
레이든은 멀리 보이는 발데르와 같은 눈빛을 발했다. 조언받은 대로 단전에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검에 응집시켰다.
고오오오!
결정연검이 아닌 일반적인 베기의 기수식을 취한 채 자신을 노려보았다. 꼴을 보니, 발데르의 추잡한 끼어들기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어."
레이든이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고 이를 드러냈다. 그의 연검이 빳빳하게 솟구치고, 강렬한 검기를 불태웠다.
"내가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네놈을 조졌어야 했다고!"
그 말은 사실이다. 레이든이 가진 오러의 크기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했으니까.
'다만.'
강한 검술이 전부가 아니듯, 오러의 양이 승부를 결정하진 않는다.
"힘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네놈이 빈약한 오러 따위는 찢어주마!"
레이든이 땅을 박차고 연검을 내리쳤다. 대지를 반으로 가를 듯한 강렬한 검격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꾸욱.
라온이 검을 다잡았다. 검신의 끝에서 피어난 작은 불꽃이 다발이 되어 타올랐다.
쩌어어어엉!
대기를 녹이는 불꽃의 칼날과 녹색 오러를 휘감은 연검이 맞부딪쳤다.
"허억!"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충격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불꽃이 좀 늘어났다고 이런 위력이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너, 어떻게…."
"아직이다."
라온의 눈동자가 그의 검처럼 시뻘겋게 타올랐다.
만화공 십화.
연신섬.
칼날을 타고 질주하는 붉은 꽃의 춤사위가 레이든의 오러를 불태우고, 연검을 꿰뚫었다.
캬아아앙!
연검이 모래처럼 바스러지고, 레이든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었다.
"아, 안 돼!"
"어딜 가려고."
레이든이 도망치듯 뒤로 물러섰지만, 라온이 더 빨랐다.
"자, 잠깐! 내가 졌…."
"아직 두 번 남았다."
라온은 검을 쥔 주먹을 레이든의 입속에 박아넣었다.
"끄으으…."
레이든의 이빨이 옥수수 알처럼 튀어나오고, 그는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나머지는 이걸로 퉁쳐주지."
라온은 검을 털었다. 그의 검에서 불꽃이 꺼지는 것처럼 연무장 전체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96화
레이든이 이빨이 뽑힌 채 쓰러지고, 허공을 수놓던 불길이 잦아들고서도 연무장은 고요했다.
"와아아아아!"
"라온! 라오오온!"
"도련님!"
"이겼어요! 라온 도련님이 이겼다구요!"
그 침묵을 처음으로 깬 사람들은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이었다. 누구보다 마음고생을 했던 그녀들은 눈물을 터트리며 관객석에서 연무장으로 뛰쳐나올 기세였다.
"라온!"
"라온!"
"꺄아아아!"
직계나 방계들이 노려보아도 신경 쓰지 않고 비명이 섞인 환호성을 질렀다.
그 울림은 지금까지 그녀들이 받아온 억압을 깨부수는 듯 시원했고, 자유로웠다.
"라오오오온!"
"우와아아아아아!"
그 뒤를 잇는 함성은 연무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온과 함께 수련해온 수련생들의 목소리였다.
"라온 님!"
"라온!"
"이야아아아!"
직계, 방계, 봉신 가문 그리고 외부에서 온 추천생들까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그의 이름을 외쳤다.
"흐흠! 저, 저 정도는 해줘야지. 괜히 수석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버렌이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처음부터 저놈이 이기리라 생각했어."
"음, 그런 것치고는 소리를 꽤 많이 지르셨지 않습니까."
버렌의 집사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 '라온. 여기서 지면 가만히 안 둘 거다. 넌 나한테 져야 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방금은 '싸워, 깨부숴! 저 새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라고 하셨고, 레이든 도련님이 쓰러졌을 때는 '우아아아아!'하고 함성도 터트리셨습니다."
"그, 그만!"
버렌이 붉어진 얼굴을 팍 구겼다.
'기,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흥분했었는지 그런 말을 했던 게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꺾고 5연무장의 수석이 되었다면 저런 직계 같지 않은 놈팽이 따위는 쓰러뜨려야 옳다.
"나,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수련생 전부 라온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데…."
"흥. 자기 감정도 주체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니, 아직 젖먹이네."
아래에 앉아 있던 마르타가 위를 힐끔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니까. 앞으로는 쪽쪽이나 빨고 다녀. 어디가서 아는 척 하지말고."
"끅,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 아가씨."
버렌의 집사가 마르타 앞의 난간을 가리켰다. 동그랗던 난간은 주먹으로 쥐어 찌그러져 있었다.
"그거 주먹으로 쥐신 거 아닌가요? 아가씨도 꽤 흥분하신 거 같던데요."
"아, 아닌데? 무슨 개소리지?"
마르타는 고개를 맹렬하게 저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욕을 내뱉었다.
"이런 수준 낮은 검투 따위를 보는데 흥분? 하, 무슨 코흘리개도 아니고."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머리를 튕겼다.
"마르타. 이제 와서 아닌 척 해봤자다. 나도 네가 욕을 내지르는 걸 들었으니까."
"아닌 척은 네가 하고 있었겠지. 꼬우면 맞짱 뜨던가!"
"라온."
싸울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버렌과 마르타는 아래쪽에서 들린 가는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라온."
루난 슬리온이 양손으로 입 주변을 감싼채 계속 라온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라온."
아무리 손을 모았어도 너무 작아 들릴리도 없건만 루난은 계속해서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하…."
"음…."
힘 빠진 듯하지만 확실하고 솔직하게 응원하는 루난을 보고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내렸다.
"쯧, 볼 필요도 없는 검투였어. 수준 낮기는."
마르타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어이 동태눈깔들!"
그녀는 앞에 앉아있던 검사들의 의자에 발을 걸쳤다.
"아까 말했지? 재밌는 결과가 나올거라고."
"아…."
"그, 그게…."
검사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며 어깨를 좁혔다.
"실력이 구리면, 눈치라도 빨라야지. 너희처럼 썩은 눈알로 살아남으려면 수련이라도 열심히 해야 할 거다."
그녀는 검사들을 비웃고서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성질 하고는."
버렌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일어섰다. 저 여자는 라온한테만 얌전할 뿐 다른 사람들 앞에선 이전보다 더 흉폭해진 상태였다.
"후…."
고개를 돌려 연무장의 중심에 선 라온을 보았다.
당당하게 등을 편 채 연무장 전체를 돌아보는 녀석을 보니, 홀로 광혈귀의 앞을 막았던 그때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건 잊지 못하지. 평생을 두고도 갚아야 할 빚이다. 다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버렌이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라온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꼭 따라잡겠다."
* * *
"음!"
글렌이 의자의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눈동자는 평소보다 컸고, 눈썹이 아래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감정과 표정의 변화가 옅은 글렌 치고는 굉장한 반응이었다.
"가, 가주님."
로엔이 턱을 떨며 글렌을 돌아보았다.
"처음에 도련님이 가람보법에 섞어서 사용한 그거 태화보가 아닙니까?"
"…맞다."
"허억!"
항상 미소를 유지하던 로엔의 거짓된 얼굴이 깨졌다. 그는 라온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으음…."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오늘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건 라온이 레이든을 압도적으로 꺾은 점이 아니다.
라온이 고작 2주일 전에 알려준 태화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태화보는 그가 마를 벗어나 초월에 단계에 오르고 나서 만들어낸 보법. 평범한 무인은 평생이 가도 익히기 힘들 고등의 무학을 이용했다.
'하지만….'
라온은 익혔다. 그것도 2주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그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글렌이 감탄하고 당황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최소 반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글렌이 당당하게 선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빨라도 반 년은 지나야 라온이 태화보를 사용할 거라 예상했다.
'2주라니.'
초월의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판단이 어긋났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뭐랄까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검술까지….'
라온은 마지막에 연성검법의 진의마저 끌어냈다. 이제 15살짜리가, 자격도 얻지 못한 수련생이 검술의 진의를 꺼내다니, 놀라지 않으려 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 대단합니다. 태화보에, 연성검법 그리고 마지막 불꽃까지…."
로엔은 아예 경악하여 제대로 말을 잇질 못했다.
"큼, 그 정도는 아니다. 태화보는 고작 1성. 그것도 초반에 입문했을 뿐이다. 연성검법도 아직 부족해. 레이든이 다른 연검술을 사용했다면 저리 쉽게 밀리진 않았을 거다."
글렌은 놀란 표정을 감추고,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니라뇨. 가주님 표정이…흐."
로엔이 능글맞은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가렸다.
"아니라니까."
글렌은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요즘 리메르와 같이 다니니, 로엔의 성격도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거, 검투는 라온 지그하르트의 승리입니다!]
본인의 역할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던 사회자가 라온의 승리를 외치자 이곳저곳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우와아아아!"
"라온!"
"라오오온!"
아직 여물지 못한 목소리. 아이들이었다.
"저 아이들은…."
라온과 함께 수련하는 수련생들은 직계, 방계, 봉신가문 그리고 외부의 추천생까지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같은 함성을 질렀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아니, 모두가 방계를 응원하는 건 처음 아닐까요."
"음…."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방계도 공을 세운 적이나, 대련에서 이긴 적은 많지만, 직계, 방계, 봉신가문, 추천생 모두의 환호를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신기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되게 되는 날이었다.
"다른 이들도 저렇게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에 머리가 물들었을 무렵 이곳을 독재했던 자신에게 그런 건 무리였다.
무력 그리고 피로 나눠놓은 시대가 너무 길었고, 그걸 바꾸기에 자신은 너무 늙었다.
하지만 저기에 빛이 있었다.
라온이라면, 직계로 태어나, 방계의 부당함을 아는 저 녀석이라면 언젠가 이 가문을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가주님. 검투가 끝났습니다!"
사회자가 단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 전체의 시선이 글렌을 향했다.
"음!"
글렌이 몸을 일으켰다. 검투의 승자를 칭송해줘야 할 시간이었다. 물론 이 숭고한 전투를 방해한 협잡꾼을 처리하고 나서.
고오오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서쪽에 아래에 앉아 있는 발데르를 향했다.
* * *
라온은 기절한 레이든을 안은 사회자와 함께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살벌하군.'
글렌은 평소보다 더 표정이 없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주변에 냉혹한 기운이 맴돌았다.
'내가 이겼기 때문인가. 아니면….'
글렌이 평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신상필벌만큼은 확신한 사람이다.
자신이 승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저렇게 대놓고 서늘한 기운을 품을 만큼 좀생이는 아니었다.
쿠구구구!
글렌이 일어서서 단상 앞에 서자, 연무장의 공기가 지독할 정도로 건조해졌다. 도서관이 된 듯 숨소리 하나 크게 들려오지 않았다.
"오늘 검투의 승자는 라온 지그하르트다."
"우와아아아아!"
글렌의 선언에 수련생들에게서 이전보다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물론 연무장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직계와 방계는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이번 검투에 걸었던 조건을 밝히겠다."
검투에서 각자의 검사들이 건 조건은 검투가 끝난 이후에 드러난다. 조건에 대한 궁금증에 사람들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별관에서 문제를 일으킨 레이든이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에게 무릎꿇고 사과하고, 진무전이 별관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
"음…."
사람들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한 채 라온을 바라보았다.
"저게 조건이었다고?"
"사과가?"
"허, 그것도 시녀들한테라니…."
보통 검투에 거는 조건은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이다.
자존심을 건 전투이니, 상대의 재산 혹은 가장 좋은 무기 아니면 팔이나 단전을 부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런데 라온이 원한 건 고작 사과다. 그것도 라온 본인에 대한 사과가 아닌 그의 어미 그리고 보잘 것없는 시녀들에 대한 사과.
사람들은 그런 조건을 처음으로 보고 충격을 느꼈는지 멍하니 라온을 바라보았다.
"검투에서 사과? 멍청한 놈이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실비아의 아들 답네요."
직계와 힘이 있는 방계는 그를 비웃었고.
"...."
봉신가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며.
"라온 지그하르트라…."
중앙에서 밀려난 힘 없는 방계와 시작부터 미약했던 외부의 검사들은 라온의 이름을 뇌리에 깊게 새겨넣었다.
"검투가 끝났으니, 그 조건은 바로 이루어져야겠지."
"꺼헉!"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대자로 뻗어 있던 레이든이 피를 토하고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야. 어흑! 나, 난 여기에 왜…."
이빨이 나간 레이든의 발음은 구멍난 항아리처럼 줄줄 새고 있었다.
"실비아 지그하르트와 별관의 시녀들은 앞으로 나오라."
글렌의 명령에 실비아와 헬렌, 별관의 시녀들은 척추를 곧게 세운 채 벌떡 일어섰다. 그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았다.
"연무장으로 내려와라."
"아, 예!"
실비아가 고개를 꾸벅였다. 시녀들을 이끌어 연무장 아래로 내려왔다.
"아…."
"이, 이게 무슨 일이래."
"마님. 떨려서 못 걷겠어요."
시선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그녀들은 쭈뼛쭈뼛 과할 정도로 눈치를 보며 단상 앞으로 걸어갔다.
라온은 뒤를 돌아 실비아, 헬렌, 시녀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쳤다. 괜찮으니, 눈치 볼 것 없이 오라고 눈으로 말했다.
"음…."
"모두 침착해. 우리가 잘못한 건 없어."
"예. 마님."
그 시선이 통했는지 실비아와 시녀들의 걸음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들은 라온의 옆에 서서 글렌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부르셨습니까."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이든을 굽어보았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에? 아, 예!"
"검투는 네 패배로 끝났다."
"아, 아아…."
그제야 본인의 패배를 깨달은 레이든이 턱을 덜덜 떨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검투를 시작할 때의 조건대로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라."
"하, 할아버지!"
레이든이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무릎을 꿇었다. 실비아가 아닌 글렌을 향해.
"저, 전 검사 자격을 얻은 직계입니다. 방계도 아닌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으라니요!"
"약속은 내가 아니라 네가 했다. 검투에서 패했으니, 약속을 지켜라."
"할아버지. 저, 저는…."
"공적인 자리다. 가주라 불러라."
"가, 가주님!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다음에는 이길 수…."
"네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로서 스스로 한 말을 지켜라. 레이든 지그하르트."
글렌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거칠었던 공기가 더 삭막해졌다. 폭풍이 불어닥치기 전처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으으…."
레이든은 그 기세에 짓눌려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버지인 발데르를 보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제, 젠장! 젠장!'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라온 때문이다. 저 개새끼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다.
'죽인다. 무조건!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죽인… 억!'
일어서며 라온을 본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요동을 쳐 놈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끄윽…."
라온에게 얻어맞은 전신에서 통증이 일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폐가 우그러들었고, 겁이 나서 놈의 눈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고, 공포? 내가 저놈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것밖에 없었다.
"이익!"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라온과 눈을 마주친 순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든이 지금까지 익힌 모든 무학이 꺾이고, 힘으로마저 밀려 수없이 얻어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라. 가서 무릎을 꿇어라."
"으…."
글렌보다 가깝고 섬뜩한 시선에 레이든은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실비아의 앞에 걸어가 멈춰 섰다.
'어떻게 해서든 전부 죽일 거야.'
레이든은 라온의 눈을 쳐다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그들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품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 미안하다. 사과하겠다."
그는 이를 악문 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
"아…."
실비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마주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라온이 만화공의 오러로 시녀들을 휘감았다. 겁을 먹었던 시녀들의 창백한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아…."
"라온."
"라, 라온 님."
"오늘은 사과를 받는 날이니까."
라온이 실비아와 시녀들은 안정시키고 레이든에게 다가갔다.
"다시 해라. 레이든 지그하르트."
"뭐, 뭐?"
"조건은 분명 무릎을 꿇고 사과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너 이 새끼 정말 보이는 게 없는 거냐. 이 일이 끝나고…."
"다시 해."
"끅!"
라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레이든의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몸에 새겨진 라온에 대한 공포였다.
"으…."
레이든이 주변을 돌아봤지만, 그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는 빨리 끝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아…."
레이든은 몇 개 없는 이로 입술을 짓씹은 채 무릎을 꿇었다.
"미, 미안하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밝혀라. 전부 알려주었을 텐데."
맞다. 놈은 주먹과 검으로 때릴 때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밝혔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하나하나 모두 생각났다.
"나, 나는 거짓된 서신을 보내고, 키우던 꽃을 짓밟고, 손에 침을 뱉었고, 시녀들의 뺨을 차고, 발로 걷어차, 찼다. 이, 일방적으로 별관에 시비를 걸었다. 죄, 죄송했… 끄윽."
레이든은 육체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포에 짓눌리고, 자존심이 상해 다시 정신을 잃었다.
"괜찮아."
라온은 걱정으로 얼굴이 파래진 시녀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누구도 별관을 건드릴 수 없게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흐윽…."
"흑!"
그제야 시녀들이 글썽이던 눈물을 쏟아냈다.
"라온…."
실비아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라온의 손을 잡았다.
"가주님. 제 조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걸 직접 확인해주십시오."
"물론이다. 다만 그 전에…."
글렌의 섬뜩한 눈동자가 발데르를 향해 쏘아졌다.
"숭고한 검투를 방해한 놈부터 처리해야겠지."
97화
"발데르 지그하르트."
"크으…."
글렌의 부름에 발데르가 입술을 깨문 채 일어섰다. 짜증이 난 표정이지만,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알고 있었군.'
라온은 탁한 숨을 내뱉는 발데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발데르의 기척을 읽었는데, 글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대답해라. 발데르 지그하르트."
"예…."
"검투는 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지그하르트의 전통이자, 명예다. 그 검투를 네놈의 알량한 수법으로 더럽히다니, 나를 무시하는 게냐."
글렌의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그의 기세는 폭발하듯 솟구쳤다.
쿠구구구!
지진이 일어난 듯 연무장 전체가 뒤흔들리고,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끄으윽…."
글렌의 막대한 기운을 버티지 못했는지 발데르의 무릎이 휘청였다. 그는 간신히 몸을 다잡았지만, 어깨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발데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글렌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힘을 내라는 응원이었을 뿐입니다. 승패에 방해가 될 만한 말은…."
"발데르 지그하르트."
글렌의 눈동자가 폭발한 용암처럼 시뻘겋게 타올랐다.
"죽고 싶나."
순간적으로 뿜어진 무시무시한 살기.
"허억…."
라온은 뒤로 주저앉았다. 자신에게 향한 살기가 아님에도 소름이 돋고,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다.
"넌 레이든에게 힘으로 대응하라고 전했다. 변화와 예기를 죽이고, 힘으로 돌파하라고 했지. 내가 그런 허술한 오러 메시지를 놓칠 거라 생각한 건가?"
"으으…."
발데르의 몸이 점점 굽어진다. 스스로 굽히는 게 아니다. 글렌이 뿜어내는 무형의 기세에 억지로 눌리는 것이다.
꿀꺽.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의 글렌이 뿜어낸 기세도 전율적이었지만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오러 메시지를 읽었다고?'
오러 메시지는 단전이나, 심장의 오러를 이용해서 상대에게 말을 전하는 기예다.
즉, 비밀 보장만큼은 확실한 능력인데, 지금 말을 들어보면 글렌은 아예 그 내용을 읽었다는 것 같았다.
'미쳤어.'
자신처럼 상황으로 유추한 게 아니라 오러 메시지의 내용을 읽다니, 이 공간 자체가 글렌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헛바람이 내쉬어졌다.
"들키더라도 검투가 끝난 뒤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넌 내 아들이고, 진무전의 주인이며, 연검대의 대주이니, 그냥 넘어갈 거라 여겼겠지."
"으으…."
글렌의 말이 길어질수록 발데르의 떨림이 심해졌다. 지금은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떨었다.
"하지만 이번엔 선을 넘었다. 검투를 더럽혔고, 내게 거짓까지 고했어."
"죄, 죄송합니다! 아, 아버지. 저는…."
"지그하르트의 가주로서 명한다."
글렌은 굼벵이처럼 몸을 만 발데르를 굽어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
쿠우웅!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자, 연무장 전체가 들썩였다.
"진무전주 발데르 지그하르트를 일 년 동안 진무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신형에 처한다. 진무전과 연검대의 일 년 예산을 몰수하고, 그들 역시 일 년 동안 활동을 중지시킨다."
"명을 받듭니다!"
모든 검사들이 같은 말을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살이 떨릴 정도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아, 아버지! 1년이라니요! 너무 과합니다! 거기다 저만이 아니라, 진무전과 연검대까지 벌을 받는 건 심한 처사입니다!"
"심하다?"
글렌의 눈에 새빨간 벼락이 튀었다.
"넌 내 얼굴에 먹칠했고, 이 지그하르트의 역사를 무시했다. 일 년간의 근신이라면 네가 한 행동과 비교해 깃털처럼 가벼운 벌이다."
"전 진무전의 전주입니다. 맡고 있는 임무와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제가 없으면…."
"우습구나. 네가 유일하다고 생각하나? 네가 해온 일 정도는 다른 어떤 전이나 대에 맡겨도 문제없다."
"아, 아버지?"
극심한 출혈이 일어난 듯 발데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럼 근신 대신 네 아들이 검투에 걸었듯 단전이라도 깨부숴주면 되겠나?"
"그, 그건…."
"네게 선택할 기회를 주마. 일 년간의 근신인가 아니면 네 단전이냐."
글렌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는 듯 냉혹한 기세를 펼쳐냈다.
"…그, 근신하겠습니다."
발데르는 절을 하듯 몸을 만 채 대답했다. 글렌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후…."
라온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진이 빠진다.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대부분의 가문에서는 직계가 잘못하면 그 죄를 묻지 않는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렁슬렁 지나가 버린다.
그건 육황의 한 축인 로베르트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그하르트는 달랐다.
지그하르트 가문의 가주는 넷째 아들이자, 가문의 간부인 발데르에게도 죄를 물었다. 그것도 꽤 큰 죄를.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남자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냉정한 사람이었다.
"하나 더."
글렌이 몸을 돌려 발데르가 아니라, 연무장 전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오늘 검투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발데르나 진무전, 연검대의 사주를 받고, 별관에 해를 끼친다면 내가 직접 죄를 묻겠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만 움직이도록."
"예!"
신하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연무장이 떠나가라 대답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검투는 이걸로 끝이다. 모두 돌아가도록."
글렌은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연무장을 떠났다.
"흐윽…."
끝까지 울음을 참고 있던 헬렌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어엉!"
헬렌은 옆에 있던 실비아의 손을 잡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번 일의 당사자였던 그녀는 여러 가지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게 해소되며 참던 감정이 폭발한 것 같았다.
"괜찮아."
실비아 또한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헬렌의 등을 두드렸다.
"어우…."
"흑!"
"마님! 시녀장님!"
다른 시녀들도 헬렌과 실비아를 따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주인 글렌이 별관을 건드리지 말라고 공헌을 했으니, 걱정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린 것이다.
"하아…."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자, 그동안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가셨다.
"내가 말했잖아. 괜찮을 거라고."
라온은 긴장한 티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울고 웃는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 * *
관객들이 떠나 고요해진 연무장.
서쪽 통로 앞엔 아직 여섯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왼쪽 가슴에는 지그하르트의 화검 문양이 새겨졌고, 그 밑에 각기 다른 문양이 추가로 그려져 있었다.
지그하르트의 문양 위에 스스로의 의지를 건 대주들이라는 의미였다.
"오랜만에 대단한 걸 봤네."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에게서 살아남았다고 하길래 리메르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는데, 소문이 진짜였군."
"진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하급 검술이라고 해도 그 진의를 발휘하다니, 재능이라는 단어로 평할 단계를 넘었어."
"우리 대에 오면 바로 전력이 될 수준이더군."
"...."
대주들은 라온을 보고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도 검술이지만, 가람보법 중간의 무언가를 섞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학의 수준이 익스퍼트급이 아니야."
"그런 천재성이라니, 역시 우리 흑호대에 가장 잘 맞는…."
"지랄하네."
"…?"
양쪽 끝에 서 있던 두 명의 여성 대주가 중앙에 서 있던 남자의 말을 끊어버렸다.
"흠흠, 어쨌든 우리가 예전에 기대했던 수준 이상으로 성장한 건 확실하네."
중앙의 대주는 말이 끊긴 게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나약한 천재인 줄 알았건만 강건한 괴물이었다. 저대로 성장한다면 다른 직계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겠지. 아주 재밌겠어."
굵직한 목소리의 대주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제 졸업도 곧이니까, 우리 흑호대에서 키우면 되겠다. 성격도 마음에 들고. 진짜 잘 키울 자신…."
"넌 좀 닥쳐."
"...."
"흑호. 죽고 싶나?"
"윽."
네 명 중 세 명이 노려보자, 중앙의 대주가 찔끔 어깨를 좁혔다.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이제 5연무장 수련생들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사실이지. 졸업시험만 끝내면 바로 검사가 되고, 대와 단을 선택하게 되니까."
굵직한 목소리의 대주가 난간을 잡으며 픽 웃었다.
"5연무장에는 라온만 있는 게 아니다. 버렌, 루난, 마르타 셋 모두 어디에 내놓아도 정상을 차지할 정도의 무력과 재능을 갖췄어. 다음 선택식은 꽤 볼만하겠군."
"...."
대주들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다짐을 했다. 다음 선택식에서 넷 중 하나는 무조건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그래도 난 라온!"
"오늘 흑호 잡을 사람?"
"나."
"나도 참여하지."
"…!"
* * *
라온은 실비아 헬렌, 시녀들과 함께 별관으로 돌아왔다.
"아아…."
헬렌이 별관의 전경을 쭉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실비아가 헬렌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다 함께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헬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오늘 벌어질 일에 대해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상상을 해왔다.
혹시라도 라온이 진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용서를 빌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사과를 받고, 모두 함께 별관에 돌아오다니,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저도요."
시녀들이 한 명씩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한 듯 눈을 마주치고서 옅게 웃는다.
"이제 마음 놓아도 돼. 아버지는 하신 말씀은 분명히 지키는 사람이니까. 우릴 건드릴 겁 없는 사람은 없어."
실비아는 뒤를 돌아 시녀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라온을 보고 방긋 웃었다.
"자, 오늘은 가진 재료를 전부 써서라도 파티를 열자!"
"예!"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스튜도 잔뜩 만들죠!"
"당연하지!"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은 경쾌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관으로 들어갔다.
"후우."
라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작게 숨을 뱉었다. 저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의 불편함이 완전히 가셨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저들은 생각보다 더 큰 의미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라온이 별관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시녀 중 하나가 걸음을 늦춰 그의 걸음에 따라잡혔다. 주디엘이었다.
"도련님."
주디엘이 라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혹시 처음부터 여기까지 생각하신 겁니까?"
"어느정도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에게 검을 날린 순간부터 검투를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예상대로 검투에서 승리했고, 사과를 받았다. 다만 진무전과 강량대, 발데르까지 근신을 받을 거라는 건 생각지 못했다.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주디엘이 창백해진 낯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다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가 다정하다고?"
라온이 눈을 치켜떴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는 레이든의 공격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그때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주디엘이 귓불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옅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많이 봐왔지만, 전부 거짓된 미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듯 수줍음이 담겨 있었다.
"가시죠."
뒤를 돌아 별관으로 걸어가는 주디엘의 등을 보며 라온이 손가락을 풀었다.
'이제 사실을 밝혀도 될 거 같군.'
* * *
"흐으윽!"
발데르 지그하르트가 거친 숨을 뱉어냈다. 깔끔하고, 화려했던 진무전은 모조리 부서졌고, 벽도 조각조각 갈라져 있었다.
진무전의 검사들도 기절한 채 바닥 이곳저곳에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적의 침입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무장에서 돌아온 발데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진무전을 직접 때려 부쉈고, 그걸 말리던 검사들마저 후려 패버린 것이다.
"으…."
"이, 이거 어떻게 하냐?"
남은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무너진 벽쪽에서 경쾌한 바람 소리가 불었다.
"안녕하세요?"
바람이 들어온 구멍에서 길쭉한 손가락이 흔들리고, 리메르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리메르…."
발데르가 핏줄 선 눈으로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와, 이렇게 보니 깔끔하네. 평소에도 창문 좀 열어놓고 살아요."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무너진 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여긴 왜 온 거냐. 뒈지고 싶은 건가?"
"가주님의 근신 지시는 집행유예나 다를 바 없는데 또 사고 치려고요?"
"으윽…."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발데르가 이를 입술을 깨물었다. 리메르의 말대로 지금 사고를 쳤다간 감당할 수 없는 벌이 내려질 것이다. 또 글렌에게 불려 갈 수는 없었다.
"꺼져라! 네놈과 할 말은 없다."
"나랑은 할 말이 없어도 여기엔 있어야죠."
리메르가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흔들었다.
"그, 그건…."
팔랑이는 종이를 본 발데르가 눈을 부릅떴다.
"알죠? 진주전주인 당신과 보잘 것 없는 내가 건 내기의 확인증."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말투, 목소리, 행동 언제봐도 얄밉기 그지 없는 놈이다. 어떻게 저런 놈이 엘프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신에 들어가면 만나기 힘들테니, 지금 주시죠."
"끄윽, 어, 없다."
발데르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걸 줄 수는 없어.'
리메르와 내기에 건 물건은 한두 개가 아니다. 활동도 정지된 마당에 그 물건들을 내어주었다간 진무전의 성장에 큰 문제가 생긴다.
"어허,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리메르가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무전에 영약이 대량으로 들어온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 충격이 커서 벌써 치매가 오신겁니까?"
"너. 정말 죽고 싶은 거냐!"
발데르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어어! 이러지 마십쇼!"
리메르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저놈의 흔들리는 귓때기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꺼져라! 네놈에게 줄 것 따윈 없어!"
"정말 그래도 됩니까?"
물러나던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을 털었다.
"검투에서 가주의 얼굴에 먹칠을 한 당신이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면 가주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그가 손가락 하나를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근신과 활동 중지 기간이 2년이 될 수도 있고, 아예 재산을 몰수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런…."
발데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의 아버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저 얄미운 놈을 박살내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는 게 죽을 만큼 아쉬웠다.
"주시죠. 당신말고도 받으러 가야 할 사람 많으니까."
리메르가 용돈을 달라는 아이처럼 양손을 펼치며 웃었다.
"제에엔장!"
진무전에 발데르의 비명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98화
휴식이자, 회복 기간이 끝나고 다시 5 연무장이 열렸다.
라온은 훈련을 위해 오랜만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음?'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전이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듯했다면 오늘은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중간중간 호감이나, 적의가 깃든 시선도 있었다.
-그게 인간들의 특징이니라.
팔찌에 박혀 있던 라스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약하면 무시하고, 강하면 동경한다. 짐승만큼이나 힘에 좌지우지되는 게 인간이지.
'요즘은 너랑 통하는 게 많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저들이 저런 시선을 보내는 건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시선만 있는 건 아니다. 질투나, 질시 혹은 그 이상의 원색적인 살의도 있었다.
'마계는 어때? 더 심할 거 같은데?'
-궁금한가? 궁금하면 말해주도록 하지. 인간들의 상상과는 다른 곳이다. 물론 약하다면 가축 취급도 못 받는 곳인 건 같지만.
라스는 힘이 없는 자가 대접을 받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중얼거렸다.
-이번에 잘했다. 분노의 감정을 끌어모아 그 못생긴 놈을 완벽하게 깨부쉈지. 그놈의 아비까지 제압했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행동이었다.
'그래?'
-그렇다. 딱 하나. 그놈을 죽이지 못한 게 조금 아쉽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건드리는 놈은 모조리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크게 흡족해합니다.]
[감각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만족하며 능력치가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웬 떡?'
라온이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기대도 안 한 보상에 새벽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망할 놈의 시스템! 왜 이럴 때만 본왕을 주인으로 여기는 거냐!
라스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를 노려보며 분노를 끌어 올렸다.
'고맙다. 네 덕분에 성장이 더 빨라지네.'
-입 닫아라. 네놈이 기뻐하는 모습만 보면 화가 솟구치니까.
라스는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 나온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분노를 터트리기 직전이 되었다. 성격파탄자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 난 좋은데?"
-이놈이 점점!
라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라스가 욕을 내질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음?"
연무장에 들어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단상 위에 여기에 없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리메르?'
평소 새벽 훈련 시간엔 오지도 않고, 오전 훈련에도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는 게으른 엘프가 단상에 앉아 있었다.
"오! 우리 복덩이! 라온 수련생 왔어?"
리메르가 양손을 펼치며 히죽 웃었다. 그의 긴 손가락에는 가지각색 보석이 반짝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팔목이나 목에도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가 걸린 상태였다.
'뭐지?'
저 엘프가 저런 귀금속들을 걸친 건 처음 보았다. 딱히 능력이 있는 아티팩트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비싼 보석일 뿐이었다.
'거기다 복덩이?'
갑작스레 복덩이라 불린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검계현신을 쓴 대가로 맛이 갔다고 생각할 때 뒤에서 버렌이 다가왔다.
"도박이다."
"뭐?"
"저 인간. 너와 레이든의 검투에서 대놓고 도박판을 벌였다고 하더군. 네 배율이 높아서 엄청나게 땄다는 소문이 있다."
버렌은 말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는 듯 인상을 팍 구겼다. 그는 리메르를 멋있게 보았던 자신의 눈을 뽑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또 저질렀군.'
라온이 피식 웃었다. 왜 저런 보석을 끼고 있나 했더니, 도박으로 딴 물건인 것 같았다.
도박에, 술에, 게으름까지. 평소 알고 있던 엘프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대단한 인간이다.
-저 건방진 귀때기 놈.
라스가 리메르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넌 또 왜?'
-저 녀석만 보면 화가 난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네놈의 육체는 본왕의 것이었을 텐데….
'아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혈귀에게 죽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나타난 리메르 덕분에 라스에게 몸을 넘기지 않을 수 있었다.
라스는 원래 리메르를 건방지다고 싫어했지만, 이젠 혐오를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라온은 라스와 달리 리메르의 진심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놀고먹는 한량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수련생 한명 한명을 살피고 적절한 수련을 지시한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자신을 이용해서 내기를 한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수 있었다.
"한심해."
마르타는 양손의 반지를 자랑하는 리메르를 보고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흥흥.
뒤에서 들린 콧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루난이 맹한 눈으로 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라온이 연무장에 온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들이 연무장에서 응원하고 환호해준 것도 생각났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한 겨울 난로 앞에 앉은 것처럼 가슴이 따스하게 달아올랐었다.
별관만이 아니라, 5 연무장의 사람들도 나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자, 다 모였나?"
단상 위에서 졸부처럼 보석 자랑을 하던 리메르가 손뼉을 쳤다.
평소처럼 시선을 모으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있던 교관들이 철제 상자를 가지고 왔다.
쿵!
연무장에 상자를 내려놓자 쿵 하고 모래가 튀었다.
"이게 뭘 거 같나?"
"도박으로 딴 겁니까?"
"오, 정답!"
버렌의 대꾸에 리메르가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구경할 만큼 했으니, 자랑 그만하시고, 훈련 시작하시죠."
"아, 이건 너희 거야."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상자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예? 저희 거라뇨?"
"그 상자가요?"
"그게 무슨 소리…."
수련생들은 리메르와 상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도박왕께서 내기를 두 개 걸었거든. 첫 번째는 이 돈! 이 엄청난 돈! 보석! 크하하하!"
리메르는 스스로를 도박왕이라 칭하며 손에 낀 반지들을 또 한 번 자랑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낄낄 웃으며 상자를 열자, 마음이 안정되는 청아한 약 향이 피어 나왔다.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상자를 보았다. 큰 상자 안에 작은 나무 상자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영약인가?'
나무 상자의 고급스러운 생김새와 새어 나오는 씁쓸한 향을 보니, 영약이 분명했다.
"영약이다."
리메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련생들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주었다.
"여, 영약이라구요?"
"이게 전부?"
"한 40개는 넘어 보이는데…."
수련생들은 영약이 들었다는 상자들을 살피며 입을 떡 벌렸다.
"그래. 그것도 십지초가 들어간 영약이지."
"십지초!"
"그게 이렇게 많이?"
"우와아아…."
십지초는 잎이 열 갈래로 갈라진 약초로 어느 한 속성에 치우치지 않아 육체와 단전, 마나회로를 모두 정화 시킬 수 있는 귀한 영약이다.
십지초로 만든 영약은 균형이 좋아 가격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데 그게 40개가 넘게 있으니, 다들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너희들 거다."
리메르가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뿌듯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딱 43개니까. 하나씩 가져가라."
"엑?"
"지, 진짜요? 진짜 우리 거예요?"
"어?"
"음?"
수련생들은 당연하고, 버렌과 마르타조차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루난은 멍하니 서서 강아지처럼 영약의 냄새만 킁킁거렸다.
"아, 이것들이 속고만 살았나."
리메르가 혀를 차고서 맨 위에 있던 영약 상자를 라온에게 던졌다.
탁.
라온이 얼떨결에 받은 영약 상자를 열었다. 성인 엄지 손가락만한 녹색 구슬이 들어 있었다.
"십운단이다. 많은 마나가 들어있지는 않지만, 날 것처럼 순수해. 너희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다."
리메르는 십운단에 대해 설명하며 수련생들에게 영약을 던져주었다.
"이거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버렌이 십운단을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영약은 돈이 있다고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다. 42개의 십운단을 어디서 구했는지 전혀 상상이 안 갔다.
"땄다니까."
"지, 진짜 이걸 도박으로 따셨다는 겁니까?"
"도박은 아니고 내기지. 내기."
리메르가 손가락을 빙글 돌려 텅 비어버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대체 누구와 내기를 했길래…."
"진무전주랑."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어?"
"지, 진무전주라면…."
"발데르 지그하르트!"
"어어억!"
진무전주의 이름이 나오자 수련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황하여 영약을 바닥에 떨어뜨린 수련생들도 있었다.
"아아, 괜찮아. 지금은 그쪽은 여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 아마 내가 다 팔아먹을 거라 생각할 테니, 너희들에게 해코지가 가진 않을 거다."
리메르는 안심하고, 오늘은 돌아가서 영약을 먹고 오러 연공을 하라 지시했다.
'하….'
라온이 헛바람을 흘렸다. 글렌의 아들이자, 진무전주인 발데르에게 대놓고 내기를 걸어 영약 43개를 따오다니, 저 엘프는 자신만큼이나 정상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 라온은 고맙다고 말하며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교관님."
"감사히 받겠습니다."
수련생들은 들뜬 표정으로 라온을 따라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응. 그래. 그래."
리메르는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고마워요."
버렌은 평소의 뚱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고, 마르타 역시 영약을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내렸다.
저렇게 자기 색이 확실한 녀석들이 같은 반응을 하다니, 영약의 힘이란 참 대단했다.
"자, 그럼 모두 돌아가. 내가 숙취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고, 영약은 바로 먹어야 좋거든."
리메르가 가슴을 부여잡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자랑을 끝내니 숙취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한심한 모습을 보이지만, 리메르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만큼은 리메르가 수련생들의 영웅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넌 남아."
라온도 그들을 따라가려고 할 때 얼굴이 퍼렇게 변한 리메르가 어깨를 잡았다.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어으, 어제 좀 달렸거든."
그러고 보니 리메르만이 아니라, 교관들의 표정도 퍼렇다. 저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신 것 같았다.
"그거 돌려줘."
리메르가 라온의 손에 든 영약 상자를 가리켰다.
"네 건 이거니까."
그는 품에서 새로운 영약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씁쓸한 향이 십운단보다 더 진하게 풍겨 나왔다.
"이건…."
"십지초를 두 개 넣은 단이다. 원래는 레이든이 먹어야 할 물건인데, 네가 가져가다니 세상은 참 신기하다니까."
"저를 주셔도 되는 겁니까?"
"너 때문에 내가 부자가 됐으니까. 아무래도 난 도박에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야."
리메르가 다시 한번 양손을 털었다. 반지와 팔찌들이 부딪치며 부티나는 소리가 울렸다.
'얼마 못 가겠군.'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리메르가 곧 도박으로 저 재산들을 다시 날리리라 확신했다.
"십운단은 효율이 좋은 영약이다. 가진 마나의 50%는 흡수할 수 있지. 하지만 영약 자체의 마나가 적어. 너처럼 두 속성의 오러를 모두 가진 녀석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거다."
리메르는 두 속성이라는 말을 할 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건 다른 십운단에 비해 두 배가량 마나가 많으니, 냉기와 화기 전부 키울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그냥 영약을 주어도 될 텐데, 그 안에서 또 다른 배려를 해주니,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가라. 내일 보자."
리메르가 손을 흔들었다.
"교관님. 너무 과음하지 마십시오."
"오, 내 걱정해주는 거야? 아직 10년은 일러 인마!"
그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고 수석 교관실로 걸어갔다.
"음…."
라온은 리메르의 등을 보며 십운단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게 스승인가….'
전생에서 자신을 키운 건 교관이다. 그와의 관계는 사육사와 개 혹은 조련사와 늑대였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자신은 그를 죽이겠다는 악의만을 가슴에 새겼다.
'여기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그하르트는 대륙에서도 악명이 높은 가문. 수련생들을 개처럼 육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간답게.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성을 유지 시키며 키워냈다.
예전 수련생 시험에서 떨어진 아이들 역시 버림받지 않고 6 연무장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지그하르트는 너무도 인간적인 곳이었다.
특히 리메르는 교관이라기보다 스승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을 이뤘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라온은 멀어지는 리메르에게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연무장을 떠났다.
* * *
리메르는 교관실에서 낮잠을 세 시간 때린 뒤 점심시간 무렵 가주전으로 찾아갔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로엔이 활짝 웃으며 알현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리메르는 씩 웃으며 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로엔은 관심이 없다는 듯 옅게 웃으며 알현실로 들어갔다.
"흠…."
이 빛나는 보석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로엔이 실망스러워 입이 튀어나왔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글렌은 평소와 같았다. 스스로 세운 옥좌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리메르는 열 손가락에 손목까지 들어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너는 나이를 먹을수록 한심한 짓만 하는구나."
"허…."
리메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매를 찡그리며 일어섰다.
"아니, 부하가 돈 좀 땄으면 칭찬 좀 해주시죠. 오랜만에 호구 좀 털었는데."
"그 호구가 내 아들인데 칭찬을 하라는 건가?"
"저한테 털려야 나중에 진짜 사기꾼에게 안 당합니다."
"말은 잘하는군."
글렌이 서늘한 눈빛으로 턱을 틀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아이들에게 십운단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그런 영약을 정말 쉽게 넘기는군."
"뭐라고 해야 할까. 애들이 생각 이상으로 성장해주니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더라구요. 이게 부모 마음인가."
리메르가 낄낄 웃었고, 글렌은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일단 제 가르침이 어마어마한 것도 있지만, 수련생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다른 어떤 세대의 아이들보다도 강해졌습니다. "
글렌도 동의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 수련은 전부 네게 일임했을 텐데?"
"수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난기 가득했던 리메르의 목소리에 진한 열기가 치솟았다.
"수련생들의 졸업 시험 내용을 바꾸도록 허락해주십시오."
99화
"시험을 바꾼다?"
글렌이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들었다.
"예."
리메르가 부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혈귀와의 전투 이후 처음으로 그의 눈빛에 정광이 어렸다.
"지금 졸업 시험은 교관의 인정 혹은 수련생들끼리의 대련이었나?"
"맞습니다."
수련생들의 졸업 시험은 교관이 만들어낸 시험 코스를 통과하거나, 수련생들끼리 일대일의 대련을 통해 인정을 받은 자만이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럼 시험 내용을 무엇으로 바꾸겠다는 거지?"
"생존입니다."
리메르가 기다렸다는 듯 즉답했다.
"수련생들을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뗀 채 외부에 내보내고 싶습니다."
"외부에 내보낸다?"
흥미가 동했는지 글렌의 상체가 조금 앞으로 나왔다.
"예. 5 연무장의 아이들은 기세의 시험을 통과했고,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과 명예를 건 결투에서 이겼습니다. 둘 모두 졸업시험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죠."
"네 녀석이 여러모로 수를 썼지."
"맞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을 벗어난 일들도 있었죠. 수련생들은 두 번째 임무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고, 살인이라는 큰 산까지 넘었습니다."
리메르가 미소를 지었다. 우연이 겹쳐 늦게 움직였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은 육체적, 정신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전 시험을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닌, 아이들을 성장시킬 기회로 만들고 싶습니다. 검사가 되는 시기가 조금 늦어지더라도 더 높이 올라갈 토대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언제 검사가 되느냐보다 어떻게 검사가 되느냐가 중요하지."
글렌도 공감했는지 눈을 내리감았다.
"이해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지금의 아이들에겐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시련이 필요합니다."
리메르가 길쭉한 검지를 들어 올렸다.
"가문의 힘도, 교관의 도움도, 잘난 지그하르트의 이름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일은 아이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변했구나."
글렌은 무릎 꿇은 채 당당한 눈빛을 발하는 리메르를 보며 살짝 입매를 올렸다.
"예?"
"아이들을 키워보겠다고 했지만, 그 일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준비도 대충대충이었지."
"어, 음…."
찔리는지 리메르가 눈을 홱 돌렸다.
"아이들을 만난 이후 너는 그 아이들과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너와 지금의 네 표정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넌 알지 못할 거다."
"으, 창피하게…."
"저도 동의합니다."
기둥 옆에 서서 흐뭇하게 웃던 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 님. 표정이 정말 좋아지셨습니다."
"내가 검 말고도, 애들 키우는 데 재능이 좀 있더라구요."
리메르는 민망한 표정을 숨기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곧 있으면 가주님 다음의 왕을 제 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른바 킹메이커가 되는 거죠."
"그게 라온이냐?"
"그거야 모르죠. 버렌이 될 수도 있고, 마르타나 루난이 올라갈 수도 있는 거고."
"그런가."
글렌이 드물게도 확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때 가장 가까이에 서서 검을 휘둘렀던 리메르의 새로운 즐거움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로 아이들을 어디로 보내고, 어떻게 성장시킬지 보고서를 작성해서 와라. 못 하면 없는 일로 하겠다."
"그야 물론."
리메르가 자신감 있는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 있던 서류철을 꺼냈다.
"이미 준비해서 왔습니다."
* * *
라온은 십운단을 가지고 별관이나 숙소가 아닌, 북망산에 올랐다. 시원하다 못해 찬 바람을 맞으며 숯가마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여기가 편하다니까.'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를 처음 익힌 곳이었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연공을 하면 마음이 편하고, 마나도 더 잘 느껴졌다.
이젠 터만 남은 숯가마 앞에 앉았다. 나무와 수풀이 바람에 스치는 선선한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기감을 쭉 펼쳐서 주변을 살폈다. 역시 근처에는 사람도, 동물도 없었다. 발칸이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은 것 같다.
"후…."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몸의 기운을 끌어 올린 뒤 눈을 떴다. 연공을 하기에 바람도, 시간도 딱 좋았다.
탁.
리메르에게 받은 목갑을 열자,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청아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50%인가.'
십운단은 50%의 영약이라 불린다.
다른 영약들이 가진 기운의 30%정도를 흡수한다면 십운단은 들어 있는 마나의 50%가량을 흡수할 수 있다.
뛰어난 흡수 효과와 순도 높은 기운 덕분에 십운단은 성장해나가는 무인에게 가장 좋은 영약 중 하나였다.
-그러면 뭣 하느냐. 안에 든 내용물이 티끌조차 되지 않는데.
라스는 영약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물론 양은 적지.'
모든 것이 좋기만 할 수는 없는 법. 십운단은 다른 영약에 비해 가진 마나의 양이 적었다.
다만 리메르가 전해 준 이 십운단은 십지초 두 개를 넣어 마나가 적다는 단점을 상쇄시켰다.
웬만한 중급 영약과 비슷한 수준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제대로 흡수한다면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다.
"그럼…."
라온이 영약을 손가락으로 쥐었다. 산에 부는 찬 바람과 반대되는 온기를 느끼며 신운단을 입 안에 넣었다.
영약은 혀에 닿자마자, 물처럼 녹아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자연의 마나를 뚝 떼다가 뱃속에 집어넣은 듯 배꼽 위에서 따스하고 순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만화공을 운용하여 끓어오르기 시작한 십운단의 기운을 휘돌렸다.
고오오오!
십운단의 기운은 어느 한 속성에 치우치지 않은 영약답게 마나 회로를 부드럽게 내달렸다.
영약의 기운이 파도처럼 솟아오르자, 마나 회로의 냉기가 녹아내리고, 그간의 전투에 남아 있던 탁한 기운들이 외부로 배출되었다.
'밀도가 높아.'
십지초 두 개가 들어 있는 영약이라고 해도 마나의 양은 적었다. 하지만 그 안의 마나는 자연 그 자체처럼 순수했고,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만화공의 화기와 혹한의 냉기가 단전을 공유하는 불안전한 자신의 육체에는 딱 맞는 영약이었다.
라온은 화기와 냉기를 번갈아 끌어 올리며 십운단의 순수한 기운을 단전에 쌓아갔다.
모래성을 쌓듯 기운이 조금씩 모였지만, 마나 농도는 그 어떤 영약을 먹었을 때보다 정심했다.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다는 선인호처럼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기운이 마나 회로를 달리는 희열을 즐기며 더 깊은 연공으로 빠져들었다.
* * *
북망산의 밤을 알리는 가느다란 새소리에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그의 눈동자가 화로의 불꽃처럼 황금빛 광채를 터트렸다.
'전부 얻었어.'
일반적으로 영약을 먹을 때 그 기운의 40%만 받아들여도 대박이라 칭한다.
하지만 방금 자신은 십운단의 60% 이상을 단전에 쌓았다. 대박 수준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욱…."
라온이 눈을 감은 채 불의 고리와 만화공 그리고 혹한의 냉기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새로운 불의 고리가 연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5성에 올랐습니다.]
[육체의 격이 상승합니다.]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근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크게 상승합니다.]
[체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육체 능력치가 증가하자 손끝부터 시작된 기분 좋은 떨림이 어깨까지 이어졌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정신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감각이 크게 상승합니다.]
[기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기쁨을 즐기기 전에 두 번째 메시지가 올라왔다.
넓어진 단전과 마나회로를 정심한 오러가 흘러간다. 새로운 고리가 생겼기 때문인지 1.5배는 커진 것 같았다.
"후우우!"
라온이 들뜬 숨을 뱉어내며 일어섰다. 주먹을 움켜쥐고, 만화공을 끌어 올렸다.
'굉장해.'
육체의 반응과 오러의 반응이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지금이라면 광혈귀를 꺾지는 못해도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농락당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연공하는 동안 힘을 빼앗길까 봐 조용히 있던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또 영혼의 격이 상승하다니! 네놈 대체 뭘 익히고 있는 거냐! 불의 고리가 대체 무엇이냐!
"글쎄?"
-본왕이 오기 전에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이냐!
라스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어찌 이런 일이….'
영혼의 격은 강자를 꺾거나, 위기를 이겨내거나 혹은 어떠한 업적을 쌓은 자만이 상승시킬 수 있다.
물론 단련으로도 상승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시간이라 표현할 수 없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이런 꼬마 놈이 연공으로 격을 상승시키는 건 마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알려주겠냐?"
라온이 벌레를 쫓듯 휙휙 손을 저었다.
뿌드득!
라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러면 놈을 먹어 치우기 더 힘들어지는데….'
라온은 뛰어난 정신력과 무언지 알 수 없는 연공법 그리고 수속성 저항력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빙의를 막아냈다.
놈이 가진 영혼의 격이 상승했다면 분노를 받아들이기 전과 비슷할 정도로 놈을 제압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크으, 거만 떨지 마라! 어떤 노력을 하고 무엇을 얻는다고 해도 네놈의 영육은 결국 본왕의 것이 될 테니까!
"울지 말고 말해."
-누가 울었단 말이냐! 본왕은 마계의….
"그래. 분노의 군주시지. 알겠다. 알겠어."
-끄으으윽!
라온은 코웃음을 치며 먼지 붙은 옷을 털어냈다. 복장을 정리한 뒤 별관으로 돌아가려 할 때 바닥에 떨어진 상자가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영약 상자를 주우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이지…."
누군가는 자신을 씹어 삼키기 위해 난리를 치고, 누군가는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다.
그중 누구를 보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날 집어삼키는 일은 아예 안 올지도 모르겠다."
라온은 이를 가는 라스를 무시하고 북망산을 내려갔다.
* * *
다음날.
버렌은 가슴을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제 연공이 정말 잘 되어 십운단의 기운 중 절반 이상을 흡수했다.
단전이 꽉 차오르니, 하루 만에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라온을 이기긴 힘들어도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흠흠."
버렌은 허리를 당당하게 편 채로 라온이 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감탄하는 눈빛을 보고 싶었다.
끼이익!
연무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던 라온이 아니라, 마르타였다.
'저 녀석도 많이 흡수했군.'
마르타에게서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 역시 상당한 양의 기운을 흡수한 것 같았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뭘 꼬라봐."
"...."
버렌은 기분 좋은 감정을 진흙에 처박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성질은 더럽지만, 실력은 확실해.'
마르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어제와 다르다. 자신만은 못하지만, 꽤 많은 기운을 흡수한 것 같았다.
끼이익!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걷는 듯한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라온과 루난이 확실했다.
"어디…."
버렌이 자신감이 차오른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유리장처럼 깨져나갔다.
'저, 저놈 뭐야….'
라온의 주변을 맴도는 기운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고수들에게서나 보일 법한 매끄러움에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오러의 양, 육체 그걸 이루는 균형까지. 모든 게 어제와 달랐다.
이쪽이 5가 변했다면 저 녀석은 10의 변화를 이루고 돌아왔다.
'괴물 같은 놈….'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놈에게 감탄을 느끼게 해주려 했는데 역으로 경악을 해버렸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으…."
인상을 찌푸리며 라온을 노려봤지만, 녀석은 왜 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놈의 노력도, 재능도 인정했지만,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보면 열받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라온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든, 얼마나 강해지던 놈을 뒤쫓는 것을 멈출 생각은 없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끝까지 달리는 게 자신이 생각한 지그하르트 검사의 모습이니까.
"자!"
앞에서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신경을 썼기 때문일까. 그가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들 달라졌네."
리메르는 단상 위에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고 씩 미소 지었다. 강해진 수련생들의 성취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거리낌 없이 시작해도 되겠어."
"시작이요?"
"뭘 시작하신다는…."
"이제 이 생활도 끝을 내야 하니까."
그는 손가락을 내려 연무장을 가리켰다.
"네?"
"끝이요?"
"그, 그게 무슨 말씀…."
수련생들은 갑작스럽게 들린 끝이라는 소리에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졸업 시험 쳐야지. 아무리 내가 좋아도 계속 수련생으로 살 수는 없잖냐."
"어?"
"아하!"
"졸업 시험!"
시험이라는 것을 듣자, 수련생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이제 진짜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의 눈빛이 태양을 본 해바라기처럼 변했다.
"그리 좋아하긴 일러."
리메르가 칫칫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수련생들을 보며 심술 맞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치러야 할 시험은 지금까지의 졸업 시험과는 전혀 다르니까."
100화
"다른 시험?"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그하르트 수련생의 졸업 시험은 보통 수련생들간의 대련이나, 교관이 만든 코스를 통과하는 간단한 방식이다.
리메르의 능글맞은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보통의 시험이 아닌 것 같았다.
"너희들은 다른 수련생보다 훨씬 경험이 많잖냐."
리메르가 칫칫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명예를 건 대련, 목숨을 건 전투, 격을 이용해서 싸우는 방법까지. 정식 검사들이나 할 법한 경험을 모두 치렀어."
그 말은 맞았다.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은 전생의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로베르트 가문이나 다른 연무장 수련생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평범한 시험을 내어봤자, 전부 어렵지 않게 통과할 거다.
"시험이라는 건 평소보다 성장을 가속화 할 수 있는 기회다. 어설픈 시험은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 시험 내용을 바꾸었다."
"음…."
"확실히."
리메르의 설명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의 활약을 지켜보고, 함께한 수련생들은 평범한 검사가 되는 것보다 더 높은 곳을 오르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치러야 할 시험은 어떤 겁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생존."
리메르의 표정이 급변했다. 농담 따먹던 동네 아저씨는 사라졌다.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등에 비쳤다.
"생존이다. 너희는 지그하르트의 수련생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이름과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외부에 나가 살아가게 될 거다."
"새, 생존…."
"억!"
"이름과 칼만 가지고 나가라고?"
생존이라니,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시험이었기 때문에 수련생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당황하는 것도 이해해. 너희가 예상했던 졸업 시험과는 결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이건 분명 필요한 시련이다."
리메르가 단상에 걸터앉으며 수련생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지금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다.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를 꺾었고, 에덴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았으며, 영약을 먹어 오러와 육체까지 성장했지. 자잘하게는 6 연무장과의 전투도 있었고. 뭐, 누군가의 힘이 크긴 했지만."
그가 슬쩍 눈을 돌려 라온을 살폈다.
"그렇게 자신감이 차오른 너희들의 눈으로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확인하고 와라."
"음…."
수련생들은 당황하여 말을 하지 못했지만, 라온은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리메르의 말대로 육체와 정신 모두 강해진 수련생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실전이다.
가문의 힘과 상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는 실전은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다만 거절도 받아들인다."
리메르가 눈썹을 올리며 빙긋 웃었다.
"가문이 차려준 밥을 먹고, 가문이 설치해 준 침대에서 잠을 자던 너희들이 외부에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이번에는 나나 교관도 따라가지 않아.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겁나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졸업시험도 생각해놓으마. 혹시라도 거절할 사람은 잘 생각해본 뒤 내일 말하도록."
"음…."
"어, 다른 시험?"
"그딴 건 필요 없어."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는 수련생들과 달리 마르타는 머리카락을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나서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였다.
"생존? 그딴 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해왔어. 얼마든지 해봐."
마르타는 무슨 시험을 내도 상관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도 괜찮습니다."
버렌이 담담한 목소리를 흘리며 앞으로 나왔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생존이라는 테마의 졸업시험. 교관님의 말씀대로 분명 한 단계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전 받아들이겠습니다."
"벌써 두 명인가?"
리메르는 씩 웃으며 두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
"제 이름도 넣어주십시오!"
버렌과 마르타가 참여하자 수련생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손을 들고 참여하겠다고 외쳤다.
"좋네. 좋아."
리메르는 수련생들이 참여하겠다고 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미소 지었다.
"루난."
라온은 뒤를 돌아 멍하니 서 있는 루난을 불렀다. 그녀는 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리메르의 박수를 발 구름으로 리듬을 맞췄다.
"너는 어떻게 할래?"
"라온은?"
"해야지."
"그럼 나도 할래."
그녀는 앞으로 나가서 수련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수련생 42명 모두가 손을 들었고, 라온 홀로 남았다.
"라온. 넌 어때?"
"당연히 갑니다."
"흐음, 수석인 너까지 그렇게 무지성으로 대답해도 될까? 내가 너희들을 어디에 보낼 줄 알고?"
리메르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입을 툭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은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분명 죽을 만큼 힘들겠지만, 교관님은 저희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내주시진 않으니까요."
"너…."
확신을 가지고 한 말에 리메르의 표정이 급변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살짝 당황한 눈빛이었다.
리메르는 수련생 한 명 한 명의 장단점과 특징을 모두 파악하고 있고, 그에 따른 교육을 해왔다.
얼마 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가 움직이는 일의 대부분은 수련생을 위한 것들이었다.
행동도, 어조도 가볍지만, 생각은 무거운 리메르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렌이 라온의 옆에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으르고, 시간 약속을 못 지키고, 술과 도박에 빠져 있지만, 교육만큼은 확실하니까요."
"흥."
마르타는 고개를 돌렸지만, 딱히 별말은 하지 않았다. 버렌과 라온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내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니, 가슴에 찡하고 와닿네."
리메르는 입으로 훌쩍훌쩍 소리를 내며 우는 척을 했다. 장난으로 넘기려는 것 같았지만, 입매가 초승달처럼 변한 걸 보면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봐주는 일은 없다. 준비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가 뒤로 손을 내밀자, 교관이 서류를 건네주었다.
"원래라면 일주일 뒤에 알려줘야겠지만, 모두 동의했으니, 너희들이 어디로 갈지 바로 알려주마."
"저희 전부 같은 곳에 가는 겁니까?"
버렌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럴 리가."
리메르가 손가락을 저었다.
"너희들은 아닌척하지만 한 녀석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해."
그의 시선이 라온을 향했고, 수련생들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음…."
"그, 그렇죠…."
"확실히 좀 그렇긴 한데."
리메르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는지 수련생들이 입맛을 다셨다.
처음에는 라온을 질투하고 미워했지만, 함께 수련을 하고, 실전을 겪고, 위기를 넘기며 수련생들은 라온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너희들의 관계가 좋아진 건 고무적인 일이지만, 일방적인 의지는 좋지 않아."
리메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번 시험을 치르며 너희 스스로가 남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검사가 되어라."
"예!"
"알겠습니다!"
교관인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수련생들은 연무장이 떠나가라 목청을 높였다.
"자, 그럼…."
리메르가 교관에게 받은 책자를 펼쳤다.
"버렌 지그하르트."
"예!"
"넌 서쪽 레뷘 사막이다."
"알겠습니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넌 동쪽 사이안 협곡. 그리고…."
리메르는 수련생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들이 가야 할 곳을 주르륵 불러주었다.
"…루난 슬리온. 넌 서북쪽에 있는 카탐 정글이다."
"네."
"이제 마지막이네. 라온 지그하르트."
모든 수련생들의 이름이 불렸고, 이제 라온 혼자만 남았다.
"예."
"너는 북동쪽. 하분 성이다."
"하분 성…."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징한 곳으로 보내는군.'
하분 성은 지그하르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성으로 북해와 스터린 산에서 나오는 몬스터들과 1년 365일을 싸우는 전쟁터 중 하나였다.
'분명 도움은 되겠어.'
아무리 불의 고리가 있고, 만화공을 익혔어도 아직 전생의 감각을 모두 되찾지는 못했다.
그 전쟁터에 몸을 맡기게 된다면 전생 이상의 살기와 감각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너희가 가야 할 곳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어떻게 대비할지, 무엇을 준비할지도 직접 생각하고 결정해라. 이 모든 게 전부 시험이다."
리메르가 책자를 덮으며 턱을 들어올렸다.
"예!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수련생들의 눈빛에는 성장에 대한 기대감과 미지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렇지만 넌 고생 좀 할 거다."
리메르가 라온의 앞에 내려와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거긴 칼을 집어넣을 틈이 없어서 전투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곳이니까."
"히이이익!"
함께 하분 성에 걸린 도리안이 기겁하며 다리를 떨었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지옥이라면 괜찮네요."
"어?"
"지옥을 이겨내고 온다면 얼마나 강해지겠습니까. 그리고…."
라온이 기대감으로 넘치는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지옥도 겪어보았으니까.'
* * *
"그, 그거 진짜 해야 하나요?"
졸업시험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별관으로 돌아가자 헬렌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하분 성은 지그하르트의 장벽 중 하나라, 강한 몬스터들이 끝없이 쏟아진다고 들었어요. 다른 시험도 준비해준다는데 꼭 그곳에 갈 필요가 있는지…."
"이건 나를…."
"가야지."
라온이 말을 하기 전에 실비아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거긴 엄청 위험한 곳인데…."
"그래도 가야지."
실비아는 헬렌에게 고개를 젓고서 라온을 보았다.
"라온이 성장할 기회니까."
그녀는 레이든과의 대련 이후로 라온을 더 이상 어린아이로 보지 않았다. 검사. 자격을 갖춘 검사처럼 여겨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실비아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 말이 맞아."
라온은 실비아, 헬렌 그리고 시녀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교관님의 말대로 이건 시험이라기보다 성장할 기회야.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지."
"그래. 잘 생각했어."
헬렌과 시녀들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무인의 삶을 살았던 실비아는 달랐다. 이제 자신을 확실하게 인정해주고 있었다.
'편하네.'
시녀장인 헬렌의 발언권도 강하지만, 실비아는 이기지 못한다. 그녀의 동의를 얻었으니, 앞으로 수련을 할 때 훨씬 편해질 것 같았다.
"그럼 난 수련하러 가볼게."
라온은 다 먹은 접시를 옆으로 치운 뒤 일어섰다.
"라온."
그가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실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할 거면 준비 단단히 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비할 수 있도록."
"응."
라온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마님. 정말 괜찮으세요?"
"하아, 괜찮을 리가 있겠어?"
실비아가 물잔을 움켜쥔 두 손을 바르르 떨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위험한 곳에 간다는데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
'다만….'
헬렌과 달리 무인이 어떤 사람인지, 검사가 무엇에 미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도 라온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막아도 라온은 간다. 시원하게 보내주는 게 저 아이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었다.
"그래도 전 걱정이 되네요. 너무 위험한 곳이다 보니…."
"걱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이 있어."
"할 일이요?"
"그래. 라온이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쉴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지금을 유지해야지."
그녀는 시녀들을 쭉 둘러본 후 방긋 웃었다. 어머니이자, 별관의 주인으로서 보일 수 있는 불안함을 감춘 미소였다.
"마님…."
시녀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엘은 실비아와 헬렌을 보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한 달 뒤에 전쟁터라 불리는 곳으로 떠난다는 걸 알아도 라온의 생활은 그대로였다.
평소처럼 새벽 훈련을 하고, 5연무장에 가서 리메르와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고, 저녁에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수련을 이어갔다.
다만 그 강도는 이전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격해졌다.
지켜보던 버렌과 마르타가 질릴 정도였고, 루난이 지쳐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후우…."
라온은 그 강한 정신력이 깎일 정도로 힘든 수련을 일주일 내내 진행한 뒤 별관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이라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음…."
방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고, 옷과 침구에선 부드러운 향이 솔솔 풍겼다.
'이럴 필요 없는데.'
속마음과 달리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 돌아와도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해준 실비아와 시녀들이 고마웠다.
"하아…."
라온은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최근 수련은 그에게도 힘들었기 때문에 잠이 솔솔 쏟아졌다.
그대로 누우려고 할 때 침대에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불을 들추자, 작은 책자가 보였다.
"이건…."
책자를 읽는 라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책자에는 그가 가야 할 하분 성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지리적인 정보, 나오는 몬스터들의 정보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인물들에 관한 정보까지. 이걸 누가 주었는지는 확연했다.
'주디엘.'
자신이 하분 성에 간다는 걸 안 그녀가 준비한 정보였다.
"쯥."
라온은 혀끝을 적시는 씁쓸함에 입맛을 다셨다.
"떠나기 전에 맺음을 확실하게 해야겠네."
101화
라온은 주디엘이 준비해 준 책자의 내용을 전부 머리에 집어넣은 뒤 태워버렸다.
책자를 남겨두었다가 별관 외의 사람에게 들키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없애버리는 게 나았다.
"흠…."
불꽃에 휩싸여 허공에서 녹아내리는 책자를 보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새로운 검술을 익혀야 하나."
주디엘의 책자에 의하면 하분 성에 나오는 몬스터들은 검으로도 베기 힘들 정도로 가죽이 질기고, 체구도 크다고 적혀 있었다.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은 공격과 방어가 5:5인 균형 잡힌 검법. 우르르 몰려들거나, 가죽이 두꺼운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만화공의 검술이 있지만, 그건 하나하나가 필살의 검술이라 오러 소모가 너무 심했다.
평소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위주의 검술이 필요했다.
'하긴 기본 검술은 익힐 만큼 익혔으니까.'
지금까지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만을 사용하고 수련해왔다. 토대는 충분히 닦았으니 그 위에 층을 쌓을 때가 됐다.
"흐음…."
라온이 가장 아래에 있는 책상 서랍을 열고, 은빛으로 번쩍이는 패를 꺼냈다. 패의 중앙엔 검날이 불꽃에 타오르는 화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두 번째 임무에서 녹전귀를 베고, 모두를 구한 대가로 받은 은패였다.
달그락.
은패를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언젠가 실비아를 직계의 위치에 돌려놓을 때 쓰려고 남겨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방계인 실비아가 직계로 돌아가려면 은패가 아니라, 금패가 필요하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많은 수의 금패가.
지금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해서 강해질 때다. 즉, 모을 때가 아니라 투자를 할 상황이다.
"가야겠군."
라온은 은패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방을 나가 로비로 가는 길에 주디엘과 마주쳤다.
"일어나셨습니까."
주디엘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아닙니다."
인사를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주디엘이 옅게 웃던 모습은 역시 그녀의 진짜 얼굴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 가십니까?"
"이것 좀 쓰려고."
라온이 주머니 속에서도 반짝이는 은패를 보여주었다.
"뽑아 먹을 건 확실하게 뽑아먹어야지."
* * *
라온은 그 길로 바로 가주전으로 향했다. 문지기가 길을 막았지만, 은패를 보여주자 알현실 앞까지 안내해주었다.
'이래서 성공해야 하는군.'
방계라고 길을 막아놓고, 패가 있다는 거 하나로 이리 대접이 달라진다. 억울해서라도 공을 세우고, 성공을 해야 할 것 같다.
"흠…."
라온은 알현실로 걸어가며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가주전 내부의 검사들 그리고 사무원들 모두가 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무시하듯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저렇게 시선을 보내는 걸 보면 약간이나마 인식이 바뀌긴 한 것 같다.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문지기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알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알현실 앞의 문지기에게 사정을 말하자 안쪽에 기별을 보냈고, 곧 답이 왔다.
"들어가십시오."
문지기가 문에 손을 대자, 천장까지 솟구친 거대한 철문이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뿜어지는 글렌의 막대한 기파. 이건 몇 번을 와도 적응되지 않았다.
라온은 바닥의 황금색 카펫을 걸어 알현실 중앙에 섰다. 글렌은 평소와 같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되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려 할 때 글렌이 손을 저었다. 엉거주춤 섰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본론이나 말해라."
-저 건방지고도 반복되는 모습을 보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가 생각나는군. 수많은 귀족들이 본왕의 압도적인 기운에 질려….
"알겠습니다."
라온은 옆에서 떠드는 놈을 무시하고 가지고 온 은패를 꺼내놓았다.
"이전에 받은 은패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은패를 사용하는 건 네 마음이다만, 그것으로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글렌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나왔다. 알현실 내부의 공기가 차게 가라앉았다.
"맞습니다. 어머니를 다시 직계에 위치에 올리기 위해 패를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걸 쓰겠다는 건가?"
"이번에 큰 임무를 치르고, 직계와 결투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라온이 덤덤한 눈빛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깨달았다?"
"예. 나름 감탄할 만한 성과를 보였어도 직계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가주님이 힘든 일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났습니다."
글렌의 말대로 직계가 되는 일은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동패나 은패를 받는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큰 영향도 주지 않을 은패를 모을 바에는 은패를 사용해서 강해진 다음 금패를 모으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투자를 할 때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흠."
글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도, 분위기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은패로 무엇을 받아 갈 생각이지?"
"검술입니다. 제가 졸업시험으로 갈 곳은 하분성.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를 벨 수 있게 공격 위주의 검술이 필요합니다."
"공격형 검술이라…."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옥좌에서 일어섰다. 옆에 있는 책자들을 쭉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중간에 있는 검은색 책에서 뚝 멈췄다.
"이게 좋겠군."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책이 구름처럼 둥실 떠올라 라온에게 날아갔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이전처럼 그 원형의 서고를 열어줄 줄 알았는데, 글렌은 직접 책을 골라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머리가 쭈뼛 섰다.
'광아검.'
검은색 책의 표지에는 광아검이라는 글자가 살벌한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들어보지 못한 검술이다.
"가져가겠나? 아니면 네가 직접 고를 거냐."
"...."
라온은 오른손을 펴서 검술서를 쓰다듬었다. 거친 표지가 이름대로 짐승의 이빨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이런 건 확실했지.'
글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 확실하지만 거대 가문의 가주답게 보상만큼은 확실하게 챙겨준다. 그가 잘못되거나 허접한 검술서를 주진 않았을 것 같았다.
"받겠습니다."
검술서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겠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잘 맞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라온이 허리를 굽힌 후 돌아가려 할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 가지만 묻지."
"예."
"졸업시험 장소가 하분 성이라는 걸 듣고 겁이 나진 않았던 거냐."
글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온다. 기세를 품어내지 않았어도 거인이 내려보는 듯 압박감이 흘러나왔다.
"검술서를 얻기 위해 온 걸 보면 하분 성이 어떤 곳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거절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건가?"
"하지 않았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겁을 먹거나, 거절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련이 없다면 강해질 수 없지.'
전생에서 가장 빨리 강해졌을 때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나서였다.
현생에서도 녹전귀와 싸우고, 광혈귀에게 살아남은 이후 가장 큰 성장을 이루지 않았던가.
평범한 속도로 강해진다면 훈련장에서 남들과 맞춰서 수련하면 된다. 남들보다 빨리 더 높이 가야 한다면 위기를 기회로 이용해야 한다.
"에덴과 부딪치고 알게 된 게 있습니다."
"알게 된 것?"
"예. 그 짧은 순간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연무장에서 1년 동안 수련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저를 성장시켰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경험을 얻게 된다면 고마울 뿐이죠."
라온은 솔직한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리고 리메르 교관은 제가 이겨내지 못할 시련을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힘들고, 고생하겠지만 나중에는 가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글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지만, 알현실 공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알겠다. 가보거라."
"예."
라온은 아까 못한 인사를 정식으로 한 뒤 일어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문을 열고 돌아가려고 할 때 글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검술을 사용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다. 생각의 범위를 늘려라."
"…알겠습니다."
조언 같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이제 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꾸벅인 뒤 알현실을 나섰다.
* * *
"흠흠흠."
글렌이 앉아 있는 옥좌 바로 옆 기둥 뒤에서 히죽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좋으냐."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알아주는데 당연히 좋죠."
리메르가 입가에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로 기둥 뒤에서 나타났다.
"제 의도를 전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역시 착하고 똑똑한 아이라니까. 잔소리쟁이 버렌이나 욕쟁이 마르타랑은 달라요. 챙겨주지 않을 수가 없어."
"뒤에서 제자 욕을 하고 다니는 너랑도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군."
글렌은 활짝 웃는 리메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코웃음을 쳤다.
"욕은 무슨 욕입니까. 다 귀여운 녀석들이니 장난치는 거죠. 전 수련생 모두를 똑같이 아낍니다."
리메르가 낄낄 웃었다.
"어쨌든 라온도 알았네요. 목숨을 건 사투가 성장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그걸 아는 사람은 많다. 알고도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드물 뿐이지."
글렌은 조금 전까지 라온이 서 있던 알현실 중앙을 내려보았다.
'두려움이 없었지.'
라온에 눈동자에 공포는 보이지 않았다. 말과 달리 공명심도 없었다. 그저 냉정함. 상황을 파악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침착함만이 어려 있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는 건지.'
저 어린 나이에 저런 마음가짐이라니, 긴 세월을 살면서도 보지 못한 재능이다. 특히 그 아이가 자신의 손자라는 게 기꺼웠다.
"가주님도 라온이 마음에 차셨나 보네요. 입꼬리가 씰룩이시는데요?"
기분 좋게 라온을 생각하고 있을 때 리메르의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좀 닥치거라."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엘프 녀석은 분위기를 모른다.
"그건 그렇고 광아검을 주셨네요."
리메르가 안쪽에 있는 서고를 보고 빙긋 웃었다.
"있지도 않던 서고까지 만들어서 금패 수준의 검술서를 챙겨주다니, 손주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넌 입이 참 가볍군."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좀 줄었는데요."
"후…."
글렌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광아검은 뛰어난 검술서지만, 굉장히 흉폭하죠. 라온이 잘 제어할 수 있을까요?"
"검술서를 주었으면 그만이다. 제어하든, 익히지 못해 버려지든 그건 저 녀석의 손에 달려 있지."
"오…."
리메르가 감탄을 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 치고는 확실한 조언을 해주셨던데 역시 손주 사랑은 할아버지…."
"안 되겠군."
글렌이 혀를 차고서 손을 들었다.
"어억!"
히죽이던 리메르가 실이 달린 것처럼 글렌에게 끌려오기 시작했다.
"환자라 봐주었더니 끝이 없구나."
"자, 잠깐만요! 가주님!"
"몸이 좀 나았으니, 타작을 해도 되겠지."
리메르가 버둥거렸지만 끌려가는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로엔 님! 그 영감님 어디 갔어! 나 좀 살려…끄헉!"
알현실에서 근 30년 만에 리메르가 얻어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라온은 검술서를 챙긴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리지도 않은 채 바로 뒤편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
검술서를 펼치자, 저자로 보이는 자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검을 잡아먹는 검사가 되어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글렌이 해주었던 조언과 비슷한 느낌이다.
뭔지 모를 내용을 계속 읽어봐야 시간 낭비다. 바로 다음 장을 넘겼다. 글과 그림으로 검술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읽어볼까.'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검술서를 읽었다. 그렇게 다섯 시간이 지난 후 고개를 든 그의 눈빛에는 감탄이 어려 있었다.
'이런 검술을 주다니….'
102화
검술서를 덮은 라온의 눈에 희열의 불길이 타올랐다.
'감각검이었어.'
감각검은 검술의 한 종류로 검술의 초식을 반복해서 단련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전을 치르며 검술의 경지를 높이는 방식이다.
예전 6연무장의 수련생들이 버렌을 꺾을 뻔했던 검술이 바로 감각검이다.
검술을 익히자마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고, 성취 속도가 빨라서 뛰어난 수준의 감각검은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이건 감각검 중에서도 상급이야.'
전생에서 감각검을 익혀봤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광아검은 감각검 중에서도 상급이라 불릴 법한 높은 수준의 검술이었다.
'다만 사나워.'
천금을 주고도 못 구할 물건이지만 상당히 흉폭했다.
광아. 미친 이빨이라는 이름 그대로 상대의 모가지에 검을 박아넣으려는 기세가 강했다.
'조심해야겠어.'
감각검을 잘못 익히면 상대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에 검이 박힐 수도 있다. 주의하면서 익혀야 할 것 같다.
라온은 다시 검술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이상한데.'
검술서를 읽을 때마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이 광아검이라는 검술은 감각검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그림과 글씨 모든 걸 세세하게 보았지만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좋은 걸 얻었어."
하분 성에 가게 되면 숨을 쉬듯이 검을 휘둘러야 한다. 그곳에서 싸우게 된다면 이 광아검을 완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단 자세부터.'
라온은 검술서를 바닥에 놓고 일어섰다. 검을 쥐고, 책에서 본 광아검의 기본자세를 하나씩 연습해보았다.
어떤 검술이든 가장 중요한 건 기본이다. 기본자세가 완성되어야 응용을 할 수 있다. 형태가 단순한 감각검일수록 기본이 중요했다.
라온은 검술서를 보며 완벽한 자세를 잡을 때까지 연습하고 검을 집어넣었다.
자세를 잡았다면 이제 실전을 치를 차례다. 감각검을 홀로 익혀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실전이라….'
라온이 허리춤에 찬 검을 툭툭 치며 웃었다.
"오랜만에 녀석들과 대련을 하는 것도 괜찮겠는데."
* * *
다음날.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낸 뒤 5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어제 익혔던 광아검의 자세와 구결을 풀어내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버렌이 들어왔다.
"내가 제일 빨리 온 줄 알았는데…."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훈련이 자율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라온이 광아검의 기본자세를 확실하게 다듬고 버렌을 보았다. 못 보던 검술을 수련하고 있는 걸 보니, 그도 새로운 검술을 배운 모양이다.
버렌의 수련을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광아검의 연습을 시작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훈련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메르가 뒷짐을 진 채로 걸어왔다.
"너희는 여전하구나."
하품하며 팔자걸음을 걷는 걸 보면 영락없는 백수의 모습이다. 다만 왼쪽 눈 쪽이 살짝 어두웠다. 멍이 든 것 같았다.
도박장에서 얻어맞았나?
"나는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그가 수석 교관실로 걸어갈 때 라온이 그 앞을 막아섰다.
"대련 좀 봐주시겠습니까?"
"대련? 누구랑?"
리메르가 고개를 돌리며 그 상대를 찾았다. 하지만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버렌이랑 하겠습니다."
"엉? 나?"
당황한 버렌이 보름달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싫어?"
"아, 아니! 아니다!"
버렌이 재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할게! 아니, 하겠다!"
놓칠 수 없어.
예전 임시 수련생 시험에서 얻어터진 이후 라온과는 한 번도 싸운 적 없었다. 그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꼭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흠, 귀찮은데."
리메르는 볼을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교관님."
"에휴, 알겠어. 준비해라."
"예!"
버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연무장 중앙으로 달려갔다.
"넌 안 가냐?"
"교관님. 혹시라도 제가 버렌을 다치게 할 것 같으면 막아주세요."
"막아달라고?"
"예."
리메르가 올 때까지 버렌에게 대련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감각검은 제어하기 어려운 검술. 자칫 잘못하면 버렌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아, 진짜 귀찮은데…."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고 임시로 만든 대련장으로 향했다. 저렇게 말해도 리메르는 확실하게 막아줄 사람이다.
라온은 날을 세우지 않은 수련검을 들고, 버렌과 마주 섰다. 훈련하던 수련생들이 모두 물러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에휴, 대련을, 후우, 시작한다."
리메르는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손을 들었다.
"심한 살수는 쓰지 말고, 발전을 위해 검을 휘두르도록."
"예!"
"예."
"서로에게 할 말은?"
그는 빨리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새로운 검술을 사용할 거다.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해라."
"난 익혔던 걸 사용하지. 오늘은 그때와 다를 거야."
라온은 새로운 검술을 말했고, 버렌은 익히고 있던 검술을 사용하겠노라 말했다.
"됐지? 그럼 시작!"
그 말과 함께 리메르가 손을 내렸고, 버렌과 라온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 *
으득!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기회야.'
라온에게 패한 이후 매일 같이 그와의 대련을 꿈꿨다.
녀석의 성장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자신도 끝없이 노력해왔다. 이전처럼 허무하게 지진 않을 것이다.
"흐아아아!"
버렌은 새로 배운 검술이 아니라, 직계 수련에서 배웠던 키린 검술을 사용했다.
후우웅!
승리의 의지가 담긴 검에 속도가 붙는다. 검날이 순식간에 라온의 미간에 이르렀다.
'어?'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검이 라온에게 닿기 전에 놈의 검이 벼락처럼 치솟았다.
쩌어엉!
격렬한 충격이 일어나며 두 검의 궤도가 동시에 틀어졌다.
"윽…."
버렌이 재빠르게 물러서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녀석이 먼저 나온다고?'
라온은 항상 상대의 파악한 뒤 움직이는 방식의 전투를 해왔다. 먼저 공격하다니, 생각 못 한 일이다.
"좋다! 받아주마!"
버렌이 밀려 나간 검을 다잡았을 때 라온이 발을 구르고 돌진해왔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라온의 검을 향해 키린 검술의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쩌어엉!
라온의 검에 담긴 거력에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버렌을 당황시키는 건 검의 위력이 아니다.
라온의 흉폭한 기세. 지금까지의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사나움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쩡! 쩌저정!
버렌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라온의 검격을 막아내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 지려고 지금까지 수련한 게 아니야!'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하체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을 손에 쥔 검까지 이어 그대로 내질렀다.
키린 검술. 절착살.
회전력이 담긴 검격이 라온을 향해 쏘아졌다.
"후욱…."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더 사나운 기세를 두른 채 절착살을 향해 돌진했다.
쩡! 쩌정!
그는 검을 연속으로 내리쳐 절착살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흡사 맹수가 어금니로 물어뜯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라온의 검은 절착살이라는 먹이를 먹고도 배를 채우지 못했다. 더 큰 먹이를 씹기 위해 버렌을 향해 질주했다.
"이익!"
버렌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하체 중심을 내리고, 바람의 예리함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쿠구구구!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최강의 검격을 쏘아냈지만, 라온의 검은 그보다 더한 흉폭함을 두르고 그어졌다.
쩌저저적!
라온의 검에 담긴 지독한 기세에 버렌의 마지막 검격이 너무도 손쉽게 찢어졌다.
'저, 저 검은 뭐야!'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라온의 검은 자신의 검술의 빈틈만 찾는 독사 같았다. 빠르고, 집요하며, 강해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이익!"
버렌이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라온의 검이 빨랐다.
눈앞에서 검광이 번쩍인다. 녀석의 검이 코앞까지 쇄도해왔다.
'아직이다!'
예전이라면 눈을 감았겠지만, 지금의 버렌은 다르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물러섰다. 하지만 라온의 검은 예상했다는 듯 바로 쫓아왔다. 꼭 살아 있는 짐승처럼.
쩌엉!
라온의 검은 기습적으로 내지른 초식을 뚫어버리고, 목을 향해 질주해왔다.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기세가 줄질 않았다.
'미, 미친! 이건 대련이라고!'
버렌이 속으로 비명을 지를 때 푸른 바람이 일었다.
캬아아앙!
거친 쇳소리와 함께 라온이 멀리 튕겨 나갔다.
"에이…."
버렌의 앞엔 귀찮은 표정의 리메르가 서 있었다.
"후, 감사합니다."
라온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이 자식! 날 죽일 셈이었냐!"
버렌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라온을 가리켰다.
"말했잖아. 아직 검에 익숙하지 않으니 조심하라고."
"그건 보통 인사말이잖아!"
"난 진짜였어."
라온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런 미친놈…."
버렌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평소 가장 싫어하는 상스러운 말투를 쓰고 있었다.
"자, 됐지?"
리메르는 검을 집어넣고 하품을 했다.
"난 그럼 자러…."
"아직입니다."
라온이 리메르의 앞을 막아서고 고개를 저었다.
"엥? 이제 대련 상대도 없잖아. 버렌은 안 해줄 거 같은데?"
"저기 있잖아요."
그가 뒤를 돌아 구경을 하던 수련생들을 가리켰다.
"우, 우리?"
"우리가 왜?"
갑자기 지목을 당한 수련생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명색이 수석 수련생인데, 너희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실력을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아니, 나는…."
"어? 어어?"
"자, 잠시만! 나 숙소에 일이…."
"거절을 거절한다. 크레인 너부터 시작하지."
라온은 거절을 거절하고, 가장 만만한 크레인을 끌고 왔다.
"자, 잠깐만 진짜야?"
크레인이 입술을 떨었다. 방금 그 흉폭한 검술을 보여주고 싸워보자니, 미친 것 같았다.
"누, 누가 좀! 버렌 님!"
"으음…."
크레인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버렌은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교관님?"
"뭐, 내가 좀 귀찮기는 한데, 이런 검술과 마주하면 분명 실력은 늘 거야."
리메르도 할 거면 빨리하라며 크레인의 등을 떠밀었다.
"걱정하지 마. 위험할 때는 교관님이 멈춰주시니까."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간다."
"으아아악!"
그날 5 연무장에선 수련생들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 퍼졌다.
* * *
"쯧."
라온이 연무장에 걸터앉아 혀를 찼다. 넓은 연무장은 텅 비어 오직 그 혼자만 쓸쓸하게 있었다.
"이제 대련하기도 힘드네."
2주일 동안 연무장에 출근하며 수련생들과 계속해서 대련을 해왔다.
수련생들의 실력도 올리고, 광아검의 성취도 높이는 1석2조의 계책이라 생각했는데, 자신만의 생각이었나보다.
2주가 지난 지금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다.
버렌은 일곱의 대련 이후에 연무장에 나오지 않았고, 마르타는 10번을 패배한 이후 '씨이이이발!'이라고 외치고 사라졌다.
그리고 루난은 연무장의 문틈에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대련 안 해?"
저 아이가 저렇게 묻는 걸 보니,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안 해."
고개를 끄덕이자, 루난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자신의 옆에 앉았다.
"후…."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수련생들과 하는 것도 무리군.'
저들이 무서워하는 것도 있지만, 실력 차이가 너무 벌어져 이제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알게 된 건 있으니.'
수련생들과 대련을 하며 광아검의 성질을 알았다.
'흉폭한 늑대.'
광아검은 상대의 검술 중 흐름이 어긋나거나, 부족한 부분을 파고들이 집요하게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검술이었다.
수련생들은 광아검의 흉폭함 이상으로 약점을 찾는 그 본능을 무서워했다.
물론 버렌이나, 마르타는 잊을 만하면 와서 다시 덤비고 도망갔지만.
'그런데….'
라온이 옆에 앉은 루난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버렌이나 마르타와 달리 한 번의 대련 이후 다시 싸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과 싸우는 것 자체를 거북해하는 것 같았다.
"루난."
"응?"
"대려…."
대련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난이 스르륵 멀어졌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보법을 사용하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안 해. 안 할게."
안 한다고 하자 루난이 다시 옆에 붙었다.
'시리아 때문이겠지.'
시리아 슬리온. 그 미친놈 때문에 루난은 친한 사람과는 대련이라도 싸우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다.
-본왕이라면 밤새도록 상대해 줄 수 있다. 물론 네놈은 본왕의 새끼손가락에 짓눌려 죽게 되겠지만.
'상대해 줄 수 있다고?'
-그래. 몸을 넘겨라. 본왕이 정신세계를 만들어서 너를.
'기각.'
-이, 이놈! 본왕은 진심으로….
손부채를 흔들어 라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바람에 흘러간 녀석이 욕을 뱉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곧 돌아오니까.
"후…."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제 수련해야 하나.'
광아검의 성취를 어떻게 높여야 하나 고민할 때 연무장의 문이 쾅 열렸다.
"야, 한숨 소리가 내 방까지 들린다!"
리메르였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와 라온의 앞에 섰다.
"대련 상대 없지?"
"예. 다 도망갔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나랑 붙자."
103화
라온은 연무장 중앙에서 리메르와 마주 서서 검집을 만졌다.
"무슨 바람이 부셨습니까? 귀찮아서 관전도 안 하시던 분이."
"가끔은 몸 좀 풀어줘야 관절에 녹이 안 슬거든. 그리고…."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검을 뽑았다.
"대련 상대가 다 도망가서 어깨가 축 처진 제자를 보는 것도 마음이 쓰려."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검을 뽑았다.
'역시 순수한 사람이군.'
리메르가 귀차니스트인 건 분명하지만, 그 이상으로 제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그는 어떤 의도 없이 순수하게 도와주러 이곳에 온 것 같았다.
'광아검의 성취를 단번에 올릴 기회야.'
리메르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서 있는 검사다. 그와 대련을 하게 되면 광아검의 성취만이 아니라, 실력 자체가 상승하게 될 거다.
"관전자가 한 명인 건 조금 아쉽지만, 시작할까?"
"좋습니다."
두 사람은 중앙에 서 있는 루난을 바라보았다.
"시작."
그 시선을 받은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올렸던 손을 내렸다.
"흐읍!"
라온이 이를 꽉 깨물고, 발을 굴렀다. 만화공의 기운을 휘돌린 육체에 광아검의 구결을 운용하여 검을 내리쳤다.
나무를 가르는 톱니처럼 대기가 깎여나갔다.
"이야, 많이 늘었어."
리메르가 감탄하며 검을 그었다. 둥글게 펼쳐진 녹색 기운이 허공을 수놓았다.
치이이잉!
광아검의 흉폭한 검격과 리메르가 펼친 부드러운 기운이 맞부딪쳤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리메르는 광아검의 검격을 흘리지도, 막아내지도 않고, 검세에 담긴 힘을 가라앉혔다.
광아검 같은 사나운 기세의 검격의 힘을 줄이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다.
"신기하냐?"
리메르가 진녹색으로 빛나는 검을 휘돌리며 빙긋 웃었다.
"얇게 편 검기를 다발로 퍼뜨려 상대의 검격을 제어하는 검술이다. 검이 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다양해. 자신의 검만이 아니라, 상대의 검을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 하지."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광아검의 구결이 어린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아 쏘아냈다.
뒤를 이어 바로 다음 검술을 준비했다. 광아검의 다섯 번째 형 운형참이었다.
막강한 기세를 품은 검격이 연속으로 뿜어져 나왔다.
쾅! 콰아앙!
리메르는 자세를 낮춘 채 검을 사선으로 세워 수비에 힘을 쏟았다.
'그럼 이쪽이 좋지.'
라온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광아검은 상대가 수세로 나올수록 빛을 발하는 검술. 승세를 잡았다고 봐도 된다.
쩌어어엉!
리메르의 방어를 뚫어내기 위해 광아검의 모든 초식을 사용했다.
거대한 늑대가 먹이를 물어뜯듯 강렬한 검격이 폭발했지만, 리메르의 방어는 철벽처럼 깨지지 않았다.
"칫!"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광아검의 모든 초식을 쏟아냈지만, 틈이 보이질 않았다.
"조금씩 답답하지?"
리메르가 검을 맞댄 틈 사이로 씩 웃었다.
"네가 익힌 감각검의 위력은 대단해. 아직 성취가 낮음에도 다른 검술들을 손쉽게 부술 정도지. 하지만 너무 편향적이다!"
"큽!"
리메르가 손목을 비틀었다. 강력한 반탄력에 라온이 뒤로 튕겨 나갔다.
"음…."
라온이 검에 휘감긴 리메르의 기운을 풀어낸 뒤 자세를 다잡았다.
"감각검은 이름 그대로 감각에 의지하는 검술이지만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특히 네가 익힌 건 더더욱 생각하며 검을 휘둘러야 하지. 왜 그 이름인지를 생각해봐라."
"이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정도 알려줬으면 됐지. 아예 밑천까지 달라는 건 좀 아니잖아?"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후…."
라온이 탁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지.'
스승에게만 의존하면 결국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린다. 저런 힌트를 받았다면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름. 이름….'
최근 광아검을 사용하면 할수록 위력은 확실히 강해졌지만, 생각이 단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이는 틈에 검을 박아 버린다는 열망만 가득했다.
'방금도 그랬어.'
리메르가 만들어내는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넣다가 대련이 끝났다. 이런 방식으로 성장할 수 없다.
"조금 더 해봐야겠습니다."
"그래. 와라."
리메르가 웃으면서 모은 네 손가락은 까딱였다.
"흡!"
숨을 깊게 들이켜고 땅을 박찼다. 여전히 방어 자세를 하는 리메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진한 쇳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촤아악!
라온이 살짝 밀려 나간 검을 뒤집어 그대로 내리그었다. 리메르의 검이 우측으로 돌아간다. 완벽한 방어. 이전처럼 뚫을 수밖에 없는 수비였다.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검술은 여전히 사납지만,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 순간 공격만 생각하던 시야에 리메르의 좌측 허리가 들어왔다. 빈틈은 아니다. 단단하게 방어를 갖춘 곳이다.
'다만.'
빈틈을 만들 수 있다는 예감이 뇌리를 관통했다.
후우웅!
라온이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폭포처럼 격하게 떨어지는 검격에 리메르가 어깨를 부드럽게 세웠다.
쩌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친 반탄력에 손목이 밀려 나간 순간 리메르의 왼쪽 허리에 빈틈이 생겨났다.
라온은 곧바로 발목을 틀어 검의 궤도를 바꿨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회전력을 담아 검을 내질렀다.
"헉!"
리메르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의 빛이 돋아났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재빠르게 휘돌렸다.
쩌저정!
그는 라온의 검에 담긴 격렬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바, 방금 뭐냐? 왜 갑자기 검로를…."
"보였습니다."
"보여?"
"네."
광아검의 공격에 매몰되어 있던 머리를 여유롭게 풀어주니, 상대의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틈이 아니라, 틈을 만들 방법이 보였다. 즉, 수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그걸 전부 알려드릴 수는 없죠."
리메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웃었다.
"말까지 가르칠 생각은 없었는데?"
"원래 애들은 보는 대로 배우는 법입니다."
라온은 발로 땅을 툭툭 두드린 후 아직 자세를 다 잡지 못한 리메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 * *
휘익.
리메르는 달려오는 라온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그대로 검을 올려 쳐왔다.
"아직 멀었어."
검을 눕혀 완벽한 방어 자세를 잡았을 때 라온의 움직임이 변했다. 허리를 올려 치던 검을 틀어 좌측 손목을 노려왔다.
'이런!'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검 끝에 오러를 만들어 방어하고, 역공을 노렸다.
치이잉!
하지만 라온의 검은 다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본능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상대의 빈틈을 찾는 조련된 야수의 움직임 같았다.
'이 녀석은 진짜….'
자그마한 힌트를 주었을 뿐인데, 벌써 광아검의 진짜 모습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놀랍다 못해 머리가 쭈뼛 설 지경이다.
후우웅!
리메르가 검을 세차게 그었다. 검날에 맺힌 녹색 기운이 펼쳐지며 전방의 모든 방위를 막았다. 딱 하나 눈에 보이지 않을 틈을 제외하고.
라온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번쩍였다. 광폭하게 휘두르던 검을 돌려 유일한 틈을 노려왔다.
'확실해!'
헛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이 짧은 대련을 통해 진짜 광아검을 깨달았다.
'그럼 그 길을 더 빨리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스승의 역할이겠지.'
처음 맡은 교관이지만 라온 그리고 다른 수련생들 덕분에 매 순간이 즐거웠다.
"좋다. 계속 덤벼봐!"
리메르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고수가 아닌 이상 찾을 수 없는 딱 하나의 틈을 만들었다.
라온은 그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그 작은 틈에 살벌한 칼날을 찔러왔다.
'미쳤군.'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검로는 세밀한데 검격은 사납다. 저 검이 완성된다면 보통의 무인으론 견디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리메르가 빈틈을 지웠다. 지금의 라온으로는 뚫어내지 못한 검술을 펼치며 그를 압박해나갔다.
검의 위력도, 검로의 명확함도 전부 자신이 위였지만, 라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섬뜩한 눈빛으로 검을 휘두르며 빈틈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 상대는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야 한다. 광아검을 그 틈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검술이었다.
콰앙! 콰아앙!
리메르는 라온과 근접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끝없이 검을 휘둘렀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검세가 강해지고, 흐름에 빈틈이 없다. 녀석의 성취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흐아압!"
라온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내리쳤다. 방어 태세를 갖추자마자, 그 방어를 비틀어버릴 공격을 해온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변화다.
'뭐 이런 놈이….'
방어를 계속 뚫고 오니, 봐주고 있음에도 등줄기가 섬뜩했다.
하지만 아직 녀석에게 승리를 줄 수는 없었다.
"밥 더 먹고 와라!"
리메르가 검에 폭풍 같은 바람을 휘감았다. 검날에 응집된 오러를 그대로 쏘아냈다. 절기 풍혼참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방금 펼친 검은 아직은 라온이 이겨내기 버거운 위력이다.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후웅!
라온이 검을 뒤로 젖힌 채 달려온다. 풍혼참의 바람에 옷이 갈려져도 상관없이 검을 내리쳤다.
쿠웅!
풍혼참은 강렬한 검격을 맞고도 베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라온도 멈추지 않는다. 보법을 밟아 물러서며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조금씩 갈라지던 풍혼참이 결국 파탄을 드러내고. 틈이 만들어졌다.
콰아아!
라온이 긴 숨을 뱉어내며 검을 그었다. 작열하는 태양 같은 붉은빛이 번쩍이고 풍혼참이 허공에서 녹아내렸다.
"허!"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저놈 방금 뭘 한 거야?'
풍혼참을 보고, 광아검을 발전시키라고 한 건데 아예 깨버렸다. 뭐 저런 미친놈이 있나 싶었다.
후우욱!
라온은 거센 먼지가 피어오르는 연무장의 중심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야. 너…."
"안 돼."
라온에게 다가가려 할 때 루난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응?"
"지금은 안 돼."
그 말에 앞을 보았다. 라온의 동공이 풀려 있었다.
'무아지경?'
녀석은 풍혼참과 싸우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뭐 이런….'
남들은 평생에 한두 번 오는 깨달음이 저 녀석에겐 왜 이렇게 많이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루난은 리메르의 손을 놓고,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다가올 사람들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라온이 무아지경에 빠진 건 자신도 몰랐다. 더 멀리 있던 루난이 어떻게 본 건지 의문이었다.
"복 많은 녀석이라니까."
리메르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쩔 수 없이 라온을 지켜줘야 할 것 같다.
"빨리 끝내고, 술 마시러 가려고 했는데."
그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 * *
후우우우.
라온은 깊게 가라앉은 숨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두웠다. 하늘에 떠 있던 해가 달로 바뀌었지만 놀라진 않았다.
'무아지경에 들었으니까.'
마지막 너무도 강했던 리메르의 검을 상대하며 순간적인 깨달음이 일어났다.
더 앞으로 나아갈지 이미 얻은 깨달음을 지켜야 할지. 두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 택했고,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좋아 보인다?"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들고 있던 검을 집어넣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리 여유롭게 있어도 리메르의 기운은 이 주변을 덮고 있었다. 계속 자신을 지켜준 게 분명했다.
"저쪽에도 말해."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연무장 문에서 은빛 머리칼이 팔랑였다.
"끝났어?"
문을 열고 루난이 들어왔다.
"저 녀석이 네 무아지경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루난의 앞에 섰다.
"고마워."
"강해졌어?"
"그래."
"이제 대련 안 해도 돼?"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루난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강해졌다고 자신하는 걸 보니, 확실하게 깨달음은 얻었나 보네."
리메르가 일어서서 옷에 묻은 먼지와 흙을 툭툭 털었다.
"네. 광아검은 미친 맹수의 이빨도 되지만, 순간적인 번뜩임도 됩니다. 차가운 이성을 지닌 맹수가 바로 광아검이더군요."
광아검은 단순히 사납고 흉폭한 감각검이 아니다. 감만이 아니라, 경험과 정신을 이용해서 상대의 틈을 비틀어 낼 수 있는 특별한 검술이었다.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진짜 광아검에 첫발을 내디딘 것 같다.
"시간을 쓴 보람이 있네. 오늘은 술맛 좀 있겠어."
리메르는 씩 웃고서 연무장 출구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다시 인사를 하자, 손을 흔들고 그대로 연무장을 나갔다.
"라온 수련하자."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 검을 뽑았다. 대련이 아닌 검술을 수련하자는 의미였다.
"알겠어."
루난에게 또 빚을 졌다. 수련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라온은 루난의 검술을 쭉 살펴보았다. 광아검을 익힌 덕분인지 뭐가 모자른지 한눈에 보였다.
"두 번째 초식을 펼칠 때 발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내밀고, 무릎을 조금 더 펴."
"응."
루난의 검술이 더 세밀하고, 예리해졌다. 조언 하나로 바뀌는 걸 보면 역시 그녀의 재능은 대륙에 닿을 정도였다.
라온은 루난에게 몇 가지 조언을 더 해준 뒤 고개를 들었다. 큼지막한 달이 연무장을 비추는 걸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떠날 준비는 거의 끝났군.'
딱 하나만 빼고.
1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