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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몇몇 성좌들이 반응합니다.]

별천도를 들어 올리자마자 저쪽에서 먼저 반응이 왔다.

성좌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힘을 가진 나에게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관심을 여기서 이용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궁금하지 않냐. 내가 얼마나 강한지."

지금껏 이런 스테이터스에 도달한 참가자는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의 틀에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보여 주기를 기대하는 그들에게 나는 신선한 자극 그 자체다.

성좌들은 언제나 뒤에서 참가자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린다.

크라운 로드는 그들에게 일종에 유희였으니까.

시간이 지나 자신들 만큼 강해진 참가자들이 성좌에게 간섭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들에게 참가자들은 언제나 유흥거리인 것이다.

"이 층, 어차피 개인 층이잖아? 간섭한다 해도 나만 영향을 받을 거고, 그렇다는 건 크라운 로드의 법칙을 크게 뒤흔들지 않는다는 거지."

개인 층은 간혹 참가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난이도를 설정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개인 층은 언제든지 난이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65화

[몇몇 성좌들이 흥미로운 눈빛을 취합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재미있는 제안이라며 좋아합니다.]

['가려지지 않는 태양'이 성좌를 이용하려 든다며 당신을 비난합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맹렬히 고개를 젓습니다.]

여러 가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자 머리까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별천도를 통해 얼마나 많은 녀석들이 날 지켜보고 있기에 이 정도로 메시지가 쏟아져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성좌들이 당신의 의견에 대해 투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의견은 제대로 수용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옆에 있는 연지는 나를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미친놈 취급하는 듯싶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별천도가 마치 메일이 왔다는 양 한차례 우웅 하고 울렸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울상을 짓습니다. ]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깔깔거리며 무릎을 칩니다.]

뜻대로 된 모양이군.

성좌들이 이제 막 나에게 관심을 가졌기에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흥미를 느낀 위쪽 녀석들에 의해 막무가내로 밀어 붙여진 거겠지.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30층의 난이도를 올립니다. 현재 난이도인 중에서 최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30층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의 난이도가 변경되었습니다.]

[ 30층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의 난이도가 변경됨에 따라 개연성 유지를 위해 이야기가 일부 수정됩니다.]

[지난 4년간 세계는 새로운 혁명을 맞이했습니다. 4년 전 나타난 세계의 귀환자가 초월자의 정기를 품은 나무를 세계의 중심에 심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오러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대 오러 시대. 본래 오러를 다루는 사람들은 더더욱 강해졌고, 그 뒤를 쫓아 오러를 가지게 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성장하고 있습니다. 어서 오러의 개혁 시대를 뒤쫓도록 합시다.]

확인을 완료한 나는 시장의 음식에 관심을 보이는 연지를 돌아보았다.

"꼬맹이."

"왜?"

"네가 4년 동안 몬스터 소굴에 처박혀 있을 때, 바깥세상은 얼마나 변했는지 가르쳐 주마."

그리 말한 나는 연지가 보고 있던 음식 가게의 주인 앞으로 향했다.

가게 주인이 '어서 옵쇼.'하고 태평히 말하자, 나는 그 즉시 오러를 피어 올렸다.

내 오러가 주위를 장악하듯 퍼진 순간, 지나가던 모든 사람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들도 대항하듯 동시에 오러를 피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연지가 흠칫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 뭐가...."

당황한 연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도 그럴 게 지나가던 모든 주민이 오러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저 정도가 아니라 엑스퍼트 급의 오러를.

"세상 사람 모두가 오러를 쓰게 되면 어떻게 될 거 같냐?"

나는 가벼운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오러를 거두자 주변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듯 내 쪽을 보더니, 이내 하나둘 떠나갔으나 연지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오러조차 못쓰던 녀석투성이였던 세계에서 갑자기 모두가 오러를 쓰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년간 세계는 변했어. 모두가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이전에 존재하던 강자들은 더더욱 강해졌지. 이래도 널 이길 사람이 없을 것 같냐?"

이것이 50층 이후의 세계.

엠페러 급의 실력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어서 싸우라는 양 재촉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지금 당장 학살을 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합니다.]

시끄럽군.

"별천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메시지만 보여 줘. 안 그러면 버리고 갈 거니까."

['별천도'가 화들짝 놀라며 메시지를 어떻게든 정리합니다.]

성좌들에게 휘둘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애초에 이 녀석들은 내가 노골적으로 이용하겠다고 나오면 더 좋아하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당장은 저렇게 내버려 둬도 상관없겠지.

"어이, 기왕 이렇게 된 거 강자들이 어디 있는지도 가르쳐 줘봐."

느긋이 감상하여 맛을 들이는 성좌가 있는 반면에 성깔이 급한 녀석들도 있다.

앞다투어 메시지를 보내는 녀석들은 대부분 그런 녀석들이기에 내가 지시를 하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당신의 눈에 누군가 '강자를 수소문하는 눈동자, 육망성의 각인'을 새겨 넣고자 합니다.]

썩을 자식이.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무언가 생기려고 하자, 즉시 나는 오러를 발동했다.

[당신의 힘으로 인해 간섭이 저지되었습니다.]

[당신의 힘에 소수의 성좌들이 놀란 반응을 보입니다.]

강자를 수소문하는 눈동자, 육망성의 각인은 말 그대로 강자를 가늠할 수 있는 눈동자다.

하지만 그것에는 끔찍한 저주 하나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시력을 잃고 오로지 오러로만 세상을 보게 한다는 점이다.

역시 이 머저리들이랑은 말이 안 통한다며 혀를 찬 나는 몸을 돌렸다.

"됐다. 그냥 내 식대로 하고 말지."

그리 말한 나는 여전히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의 연지와 함께 길을 나섰다.

"어떻게 하려고?"

옆을 졸졸 따라오는 연지의 물음에 나는 일전에 구했던 지도를 폈다.

숨은 강자까지는 찾을 수 없겠지만 나는 이날을 위해서 나름대로 준비해 왔다.

"드래곤의 알을 부여받은 녀석들을 찾아갈 거야. 대강 체크는 해 뒀어."

"그래? 근데 왜 수도 드라고니스는 X 표시가 되어 있는 거야?"

내가 지도를 펴고 있자, 내 팔 옆에 고개를 쏙 하니 넣은 연지가 지도를 살피며 물었다.

연지의 말대로 이 세계의 수도 드라고니스는 커다랗게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정보를 캐러 드라고니스를 몇 번 뒤집으니까 수배자로 낙인찍혔어."

덤덤하게 내가 말하자 연지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천성, 용족들은 로드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드라고니스의 중심에 있는 용성탑을 올라야 한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래."

"그런데 드라고니스에 수배자로 낙인찍히다니 무슨 생각이야? 몬스터 소굴에서 살아온 탓에 세상살이는 잘 몰라도 드라고니스에서 수배당한 거라면 용족 전체에게도 범죄자로 알려졌다는 거잖아! 그럼 지금 용족 모두에게 쫓기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래' 한마디로 퉁 쳐질 거 같아?!"

시끄럽군.

성좌의 메시지처럼 연지의 입도 막을 수 없나.

"무엇보다 나... 로드가 되려면 드라고니스로 가야 하는데."

"왜? 거기까지 내가 따라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냐. 이제 슬슬 아빠 품을 좀 벗어나지?"

"네 품은 태어났을 때 이미 벗어났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기다랗게 한숨을 내쉰 연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용족들보다 내가 더 강하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애초에 내가 수도를 X 표시해 놓은 이유는 다른 이유다.

"...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제일 처음은 이 녀석."

연지의 물음에 나는 지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적혀 있는 녀석은 검으로 유명한 무인으로 화천당문의 가주였다.

지금은 제자를 키우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간판을 걸고 싸우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일단 검부터 시험 해봐야 하지 않겠냐?"

"그건 맞지."

동의하는 연지를 보고 나는 발에 오러를 피어 올렸다.

"예전에 수도까지 뛰어서 갔던 거 기억하지."

어느 정도 수준에 다다른 이제는 말을 타는 것보다 직접 달리는 게 훨씬 빠르다.

그 사실을 아는 연지의 눈에 한 차례 불꽃이 타올랐다.

"...이번에는 안 져."

화천당문까지는 말로 가면 세 달 이상 걸릴 거리다.

연지의 수준도 확인할 겸 나는 녀석에게 먼저 출발하라는 양 고갯짓을 했다.

"후회할 거야."

그러자 코웃음을 친 연지가 발아래 오러를 응축시켰다.

그러곤 폭탄이라도 터진 양 커다란 소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어나고, 그 자리에 있던 연지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양 크레이터 자국이 남은 들판뿐이었다.

"멀었네."

아무래도 몬스터 소굴에서 구르다 보니 폭발적으로 오러를 사용하는 법은 알지만, 갈무리하는 법은 제대로 익히지 못한 듯싶었다.

하긴, 몬스터를 상대로는 오러의 정밀도를 올리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연지를 사람과 직접 대련하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 생각한 나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바닥에 조금의 흠도 남기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뛰기 시작한 내 앞에 전력으로 오러를 전개한 채 달리고 있는 연지가 있었고, 그녀가 발을 뻗을 때마다 풍압으로 인해 주변의 나무들이 쓰러지듯 흔들렸다.

그런 녀석을 뒤에서 지켜보며 한참을 달렸을 즈음, 연지 녀석도 슬슬 지치기 시작한 건지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몇 시간 째 오러를 풀 전개하며 뛰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꼴에 체력은 많이 늘었다.

그 후 2시간가량을 더 뛰어간 연지는 더 이상은 못 달리겠다는 양 멈춰 섰다.

그러곤 내게 고개를 획 하며 돌리더니 나를 보곤 이를 까득 깨물었다.

연지의 전신에서 진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나는 산책이라도 나온 양 편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왜 안 앞질러!"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면 뭔가 더 뛰게 되지 않냐?"

"오히려 거슬리거든!"

그런 것치곤 내가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더욱 악착같이 달린 주제에.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연지를 보고 나는 지도를 살폈다.

꽤 달렸지만, 아직 멀었군.

'이렇게 뛰면 오러 연습은 되지만, 그래도 공간 마법 클래스가 있으면 편한데.'

내가 과거 회차에서 얻었던 공간 마법 클래스는 37층에 있었다.

문제는 그 클래스는 성좌 변동이 있기 전에 일인지라, 현재 공간 마법 클래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단거리 공간 이동보다는 내가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지만, 먼 거리를 움직일 때는 당연히 클래스가 훨씬 좋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나는 물끄러미 별천도를 내려 보았다.

막무가내로 살고 있는 나지만, 그래도 꽤 힘 조절은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스테이터스는 마음먹으면 한 층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처음 힘을 손에 쥐고 그것에 한껏 취했던 나는 처음 도달한 11층을 한 번 멸망시킨 적 있다.

그때는 골치 아팠다.

도를 넘어선 스텟으로 인해 층이 개박살이 나버린 터라 성좌가 복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쩔쩔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이후로는 내 나름대로 힘을 조절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잘못하여 멸망시켜 버린다면 층의 이야기는 전개되지 않는다.

그 뜻은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성좌가 허락해 주지 않는다는 것.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나는 마음먹으면 공간도 찢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의 오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일성의 클래스가 더 이해가 안 돼.'

하일성의 그 일격.

그 일격은 분명 나조차도 따라갈 수 없는 공격이었다.

클래스의 강제성, 그것도 반드시 이루어지는 운명 급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강제성이라면 무조건 S급 클래스다.

66화

'난 클래스 운은 더럽게 없으니까.'

나는 5회차나 살아왔음에도 지금까지 S급 클래스는 단 한 번도 얻어 본 적 없다.

사실 S급 클래스는 최전선에 살던 녀석들만의 특권이긴 했다.

성좌들이 주목하는 건 언제나 그들이었으니까.

나도 최전선에서 뛰었긴 하나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적은 없다.

활약상을 가진 최정예 녀석들이 좋은 클래스들을 다 선점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그래서 이번 회차에서는 층을 더 빨리 오르려고 한 건데.'

내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독점 할 속셈이었으니까.

층 보상, 권능, S급 클래스.

모든 걸 독점해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것이 내 목표.

하지만 그걸 향해 오로지 달리기만 했던 때가 우스울 정도로 나를 추월한 녀석들이 있다.

게다가 독주를 선언했음에도 나는 몇 번이나 검왕 일행의 힘을 빌린 적도 있었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최전선에 선 녀석들이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크라운 로드의 참가자는 대부분 3회차 때까지가 한계점이라고.

그 시점부터 반복 회차로 인해 우울증이 심해지고, 정신이 망가져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녀석들이 드물어진다.

'5회차.'

사람이 미치기 시작한다는 3회차를 지나 벌써 5회차째.

층을 달려온 시간만 따진다면 20년밖에 안 될 테지만, 현재 층과 같이 이 세계는 제각기 다른 선상의 시간을 달리는 곳이 많다.

실제로 내가 겪어 온 시간은 몇 년일까.

아주 오래전에는 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걸 잊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고집스러운 성격 덕분에 정신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걸까.

「그래서 힘든 거야. 맨 앞에 선 자는. 공략법을 모르니,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런 노력과 별개로 결국 층의 결말을 보는 순간, 그때까지 자기가 이뤄 놓은 모든 게 다 사라진다는 것을 아니까.」

문뜩 검왕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러기에 모두와 함께 층을 올라. 곁에 누군가 있으면 그 세계에서보다 빨리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성좌는 언제나 자신의 세계에서 참가자가 빠져나가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가 참가자마저 홀릴 만큼 완벽하다는 거니까.

그렇기에 성좌들은 필사적으로 매력 있는 세계와 등장인물을 만들어 참가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뭐 해? 나 아직 안 지쳤거든. 다시 갈 거야."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숨이 차 보이는 연지가 보였다.

"그래, 가야지."

이번 층이 워낙 길기 때문일까. 최근 들어 잡생각이 많아진 걸 느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3일 뒤.

우리는 화천당문이 있는 산 백운천봉에 도착해 있었다.

말을 타고도 3달이 걸리는 거리를 3일 만에 주파.

이론상 하루당 말이 한 달 동안 달리는 거리를 주파한 셈이다.

덕분에 오러로 탈진한 연지의 뒷덜미를 질질 끌며 산을 오른 나는 백운천봉의 중심에 있는 화천당문 입구에 도착했다.

낡아 보이는 입구 너머에서는 사람들의 기합 소리가 울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마 화천당문의 제자일 듯싶었다.

쿵쿵.

도착하자마자 연지를 옆에 던져 둔 나는 두어 차례 문을 두드렸다.

하나 기합 소리에 묻힌 듯 문을 여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오러를 일으켰다.

그러자 내 오러가 화천당문을 한차례 뒤덮었다.

곧이어 안쪽에서 각기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고, 이윽고 벽 위로 수십 명이 뛰어오르더니 내 앞에 착지했다.

그들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제각기 검을 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이곳 화천당문의 제자로서, 전원이 소드 마스터의 영역에 있는 자들이었다.

성좌로 인한 난이도 상승이 성과를 이룬 것이다.

"누구냐?"

제일 처음 내게 검을 겨누었던 자가 으르릉거리듯 물었다.

"가주 나오라 해. 도장 깨기다."

"화천당문의 가주님이 고작 너 따위 불한당을 만나 줄 것 같으냐!"

느낌상 이 녀석이 제자들을 이끄는 대사형 정도 되는 모양인데.

나는 귀찮은 건 싫다.

검을 겨눈 녀석의 바로 앞에 순식간에 다가가자, 내 움직임을 미처 쫓지 못한 그가 뒤늦게 검을 휘두르려 했다.

나는 그 검을 오러가 담긴 주먹으로 아무렇지 않게 부서트려 버렸다.

"대사형?!"

일격에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오러가 담긴 검이 부서져 내리자 흠칫한 주위 제자들이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대사형이라 불린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대사형이 당했다! 복수해야 해!"

자신들이 따르는 대사형이 일격에 날아가 버리자, 당황하여 사고가 단순해진 제자들이 나에게 검을 휘둘러 왔다.

"그쯤 해라."

내가 이놈들을 다 쓸어버리면 나오려나 라고 생각하던 중 벽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화천당문의 가주 당소찬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60대라고 느껴지지 않을 절정의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오러는 분명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영역이었다.

'아쉽게도 엠페러는 아닌가.'

그것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경지에 입맛을 다신 나는 벽을 넘어 그의 앞에 내려왔다.

"가문을 제패하러 왔다고 들었다."

"그래."

"자네가 할 건가?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굳이 이런 걸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보는 눈은 있나.

하긴, 저자가 직접 키운 대사형을 날릴 때 나는 오러를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내 경지가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 정도야 눈치챘겠지.

"내가 안 할 거야. 나도 제자가 한 명 있거든. 그 녀석이 도장 깨기를 할 거야."

그리 말한 나는 이제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연지를 돌아보았다.

오러로 인한 탈진으로 아직까지 상태가 영 엉망이었지만, 두 발로 설 수 있을 정도는 된 모양이었다.

그런 연지를 보고 헛웃음을 흘린 당소찬은 산 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우리 화천당문이 지치면 몸을 푸는 온천이 있네. 우선 그곳부터 갔다 오는 게 어떻겠는가?"

연지를 쉬게 하고 다시 오라 이건가.

"그 사이에 네가 도망갈 수도 있잖아."

"자네와 같은 사람이라면 나도 꼬리 말고 도망갈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저 처자라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네. 오히려 오랜만의 상대에 기대감이 부풀 정도일세."

그리 말한 당소찬은 빙그레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도장 깨기 같은 건 옛말이지. 저 처자에게 내가 깨지면 나는 제자들을 볼 낯이 없네. 그렇다고 승리를 한다 한들 득이 있는 것도 아니지. 어떤가? 내기라도 하는 건."

"내기라면?"

"내가 저 처자를 이길 시 유명한 수배자, 하천성을 내가 잡아 드라고니스의 감옥에 넣는 조건."

이 녀석 날 알고 있었나.

이번 층에서 내가 어지간히 유명해지긴 했는지, 일개 문파마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음대로. 어차피 네가 가둔 거로 해 봤자. 나는 부수고 나올 거거든."

"충분하네. 이참에 이름값 좀 올린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용족들이 자네를 목 빠지게 찾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어디인가?"

꽤나 자신만만한 말이다.

"쉽지 않을걸."

"자네 딸도 용족이지. 당신 정도의 강자에게서 자란 용족이라면 당연히 강할 테지만, 그건 완전히 다 여물었을 때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걸 위해 널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다만.

"그럼 내 쪽도 한 가지 더 제안하지."

"도장 깨기에 어울려 주는 것만으로 제안은 충분하지 않나?"

"이건 내 개인적인 제안이야."

그리 말한 나는 그에게 내가 보고 있던 지도를 던져 주었다.

그 지도를 받은 그는 한 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그걸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곧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무도 대회를 열겠다. 네가 그 무도 대회의 홍보 대사 좀 해줘. 1등 보상은 용족의 보물이다. 어차피 네가 날 잡으려는 이유도 그거잖아?"

"...제정신인가? 용족들은 지금도 자네를 어떻게든 잡으려고 난리일세. 그런데 당신이 훔친 용성탑의 열쇠를 보상으로 내걸면, 용족들도 몰려들 것을 자네도 알 텐데?"

드라고니스에서 내가 수배자가 된 이유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빼 왔기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용족들의 수배자가 된 진짜 이유는 다른 것, 그것은 용성탑의 문을 여는 열쇠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 열쇠가 없어지면 아무리 용족들이라도 용성탑을 오를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그것을 찾아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용족들의 진정한 고향 지룡천에 가지 못한다.

그 말인즉슨 용족들이 드래곤 로드에 도전할 수 없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열쇠를 훔친 1년간 어떠한 용족도 용성탑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쫓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내가 노린 건 그거지만.'

용족은 이 세계에서 최강의 생물이다.

1년간 오르지 못한 만큼 많은 용족들이 지상에 남아 있을 것이고, 그건 곧 연지의 상대로 적절한 놈들이 잔뜩 있다는 소리다.

"상관없어. 오라고 해. 오히려 나는 오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용성탑의 열쇠는 어디까지나 연지한테 좋은 상대를 만들어 주기 위함.

용족들이 몇이나 오던 내 입장에서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도와. 이건 강제야. 안 도우면 화천당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나는 무표정하게 오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 그랜드 소드 마스터, 소드 엠페러, 그리고 그러한 영역을 넘어선 오러가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당소찬마저도 흠칫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곤 숨이 막힌 양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나는 오러를 거뒀다.

연지랑 싸우기 전에 겁 먹어 버리면 그것도 문제다.

"...알겠네. 애초에 내가 돕지 않는다 한들 다른 사람을 이용할 속셈 아닌가?"

그 말대로 지도에 체크 된 녀석들은 전부 이 세계에서 한가락 하는 녀석들이다.

당소찬이 거절하면 그 차례가 다음 녀석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하지만 저 용족 처자를 내가 쓰러트리면 앞에서 해 준 약속은 지켜줘야 할걸세."

나는 수긍하듯 어깨를 으쓱거리곤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주변을 보고 있는 연지에게 돌아섰다.

"꼬맹이, 따라와. 쉴 시간이다."

"뭐야, 뭔데?"

나는 오러 고갈로 반쯤 눈이 풀린 연지를 칠칠치 못하다고 생각하며, 녀석을 끌고 당소찬이 가르쳐 준 온천으로 향했다.

아직까지도 서 있는 게 고작인 연지는 비틀거리며 내 뒤를 겨우 따라왔다.

곧 온천이 보이자 눈을 번뜩였다.

3일 동안 오러를 풀 전개하며 거의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만큼 연지의 피로는 극으로 달해 있었기에, 온천을 보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14살쯤 되면 부모한테 씻는 모습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텐데 연지는 그런 것도 없었다.

'아니, 사고가 제대로 안 돌아가서 저러는 거구만.'

저 녀석 머릿속이 피로에 찌들어 이성적인 사고가 멈춘 거다.

"으아아아아아…."

온천에 풍덩 들어가자마자 묘한 소리를 내뱉으며 서서히 눈을 감는 연지를 보고 나는 포션 하나를 꺼내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내게서 포션을 받은 연지는 마치 피로를 해소하는 영양제인 듯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나 회복을 돕는 포션이니, 몸이 조금은 풀리리라.

"하천성."

"왜."

"아까 그 녀석한테 내가 지면 넌 드라고니스에 잡혀가는 거지?"

"말로만 한 약속을 내가 지킬 것 같냐."

이미 수배자로 악명이 퍼진 마당이다.

연지가 진다 한들 당소찬과의 약속을 내가 지킬 리가 없다.

"그리고 네가 질 일은 없어."

퉁명스럽게 내가 말하자 포션 병을 할짝거리고 있던 연지가 키득거렸다.

"내 대련 전적은 너 때문에 엉망인데? 나 사람을 상대로 이긴 적이 거의 없어."

"난 아직도 꼬맹이 네가 날 이길 생각한다는 게 웃기는데."

슬슬 수준 차이를 깨달을 때도 되었건만.

"...자식은 언젠가 부모를 넘어서야 하는 법이라 하잖아."

중얼거리는 연지의 말에 나는 딱히 별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도 대회를 연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인데."

"머리가 엉망이라 잘못 들은 것 같긴 한데. 네가 용성탑의 열쇠를 훔쳤다는 헛소리가 들렸어."

"잘 들었네."

"미쳤지? 진짜! 대체 1년 사이에 넌 뭘 하고 온 거야?!"

물살을 헤치며 연지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가르친 기술 중에는 사자후는 없었는데.

67화

"너 말이야. 진심으로 내가 용족한테 쫓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냐?"

"나, 다른 용족은 내 나이 또래 밖에 만나 본 적 없어."

또래 이상의 용족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연지의 말에 나는 '그렇군.' 하고 납득했다.

하긴, 아무리 강해진다 한들 미지라는 존재는 언제나 두려운 법이지.

"6번이다."

"으응?"

"용족이 날 뒤쫓아 올 때마다, 드라고니스를 6번 뒤집어엎었다고."

나는 드라고니스에 당당히 들어가서 용성탑을 지키는 용족들을 전부 때려눕히고, 눈앞에서 열쇠를 빼앗아 왔다.

분노한 용족들은 이후 1년간 내 뒤를 계속해서 뒤쫓았고, 나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드라고니스에 돌아가서 용족들을 때려 눕혔다.

한 6번쯤 반복했을까, 그때쯤 되니 용족들은 날 쫓는 걸 포기했다.

자기들로는 나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최강자인 용족이 고작 인간인 나한테 몇 번씩이나 깨져 버린 걸 세간에 밝힐 수는 없었기에, 그 사실은 비밀에 부치고 나를 수배자로만 지정해 둔 것이다.

마치 내가 숨어 버린 탓에 용족들이 용성탑의 열쇠를 되찾아 오지 못했다는 듯이.

"하, 하지만 용족들 중에는 지룡천에 갔다 온 자들도 있지 않아?"

"그놈들도 때려눕혔어."

용성탑은 올라가는 데는 열쇠가 필요하지만, 내려오는 건 상관없다.

그렇기에 보다 못한 지룡천에서 직접 파견한 용족들이 나를 뒤쫓았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지금 전부 드라고니스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하며 깔깔거립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 가 만족한 양 고개를 끄덕입니다.]

별천도에게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지시해 뒀는데 두 성좌는 그 지시도 뚫고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녀석들 꽤 높은 수준에 성좌인가.

5회차나 반복하며 여러 성좌를 만나 보긴 했지만, 두 녀석의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도 최상위라.

"너, 정체가 뭐야?"

"네 아빠."

메시지를 지우던 내가 뭐긴 뭐냐는 듯 연지를 돌아보자 그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되었든 무도 대회는 열 거다.

용성탑의 열쇠를 보상으로 건다면 용족들은 싫어도 모여들 것이다.

나를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그들에게는 유일한 기회일 테니까.

이후 온천에서 한참 쉰 연지는 겨우 몸을 회복했다.

아무래도 이 온천은 피로를 푸는 건 물론 오러를 회복시키는 효능도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됐냐?"

"응, 충분해."

그리고 우리는 다시 화천당문을 찾았다.

이미 문이 열린 화천당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동양식 건물 앞에 당소찬의 제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굳건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나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연지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간 복도를 따라 걸었을까. 이윽고 도장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서자, 거기에는 무도복으로 갈아입은 당소찬이 보였다.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우리가 왔음을 알아차리고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는 옆에 놓아 둔 검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화천당문의 가주 당소찬일세."

그의 말에 앞으로 나서려던 연지는 멈칫하곤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가문 이름 같은 게 있어?"

"하 가문."

"...그건 그냥 이름 앞에 붙은 성이잖아."

"성은 원래 가문을 대표하는 거거든? 잔말 말고 싸우기나 해."

투덜거리는 연지에게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냐고 노려보자 연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허리춤에 찬 검 한 자루를 뽑은 채 당소찬을 향해 겨누었다.

"나는 하 가문의 차기 가주 하연지다."

얼씨구, 멋대로 차기 가주 자리를 꿰찼군.

둘의 통성명이 끝난 순간 두 사람의 몸에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격을 알아보듯 흘러나온 오러가 맞부딪치며 대기가 옅게 울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검이 동시에 뽑아졌다.

하연지 일식(一式)

뇌명발검(雷鳴俗劍)

화천당문

구천패도(九天敗刀)

한쪽은 최속을 담은 번개의 힘을 검에 담았고.

다른 쪽은 아홉 개의 하늘을 깨트릴 힘을 검에 담았다.

둘 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른 자들.

둘의 검이 부딪친 순간, 일순 주변이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두면 화천당문의 건물이 무너질 것 같았기에, 오러로 적당히 그 여파를 막아 내자 두 사람이 맹렬히 부딪쳤다.

나는 끝없이 부딪쳐 나가는 검 사이로 연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처음은 당소찬의 힘이 앞서고 있었다.

비록 연지에 비해 오러는 밀리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60년 동안 쌓아온 검술이 있었다.

자신의 대에 화천당문이라는 검의 명가를 세운 그의 실력은 세상에 내로라하는 용족에게 마저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검술의 정밀도는 무시할 것이 못 되었고, 연지 또한 자신의 짧은 견식을 바탕으로 한 검법이 그에게 밀린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연지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야생 그 자체인 몬스터 소굴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 그녀의 몸에는 무슨 상황이 생기든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고스란히 배여 있었다.

그러한 적응력은 그녀에게는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발판이었고, 그것은 당소찬과의 검담 속에서도 빛을 발휘했다.

적응력이란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상대를 잡아먹을 수 있는 무기가 된다.

내가 5회차나 크라운 로드에 살아오면서 배운 그 적응력을 짧게나마 연지는 4년이라는 기간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 서서히 당소찬의 검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적응력을 터득한 연지를 이길 방법은 하나다.

녀석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압도하는 것.

그러나 그것을 못 하는 이상.

"큭!"

당소찬의 입에서 한탄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점 자신의 검술이 연지에게 파훼 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연지가 맹렬하게 당소찬을 몰아붙였다.

몬스터 소굴에서 배운 검술은 완성도는 낮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변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품고 있었다.

화천당문

구매섬멸(九魅殲滅)

아홉 마리의 도깨비 현상이 그의 모습을 뒤덮었다.

오러는 일정 이상에 오르면 환상을 현실화하여 그것을 현현한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도깨비들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품은 채 연지를 덮쳐왔다.

그러나 연지의 눈은 도깨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본 것은 오로지 당소찬.

도깨비에 둘러싸인 채 연지가 검에 오리를 불어 넣었고, 그것은 곧 한 줄기의 빛이 되었다.

하연지 이식(二式)

뇌염성뢰(雷炎聲雷)

최속의 찌르기가 그녀의 검에 담겼다.

불꽃을 휘감아 올린 전격이 아홉 마리의 도깨비를 모조리 꿰뚫고 당소찬의 가슴팍을 지났다.

그의 가슴 바로 앞에 닿은 검이 파직파직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오러를 토해 내었다.

연지의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상을 입은 듯 입가에 피를 쏟은 당소찬의 두 눈이 흔들렸다.

"용인화도 안 한 상태에서 이 정도인가?"

용족의 진짜 힘은 용인화, 드래곤의 모습에 가까워졌을 때 나온다.

하지만 지금의 연지는 당소찬을 상대로 용인화를 꺼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안 당소찬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연지가 그걸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은 자신은 그녀의 전력을 상대할 수준이 아님을 뜻했기 때문이다.

"괴물을 키워 냈군."

당소찬도 용족의 아이를 키운 적이 있다.

그 용족의 아이는 몇 년이 지나 지룡천에 올라갔고, 이후로 그는 자신의 아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자신이 키운 아이와 대조되는 실력을 지닌 연지를 보고 그는 입가에 핏물을 닦아 내었다.

"졌네."

그가 깔끔히 패배를 인정하자 연지가 검을 거두어들였다.

이내 연지가 내 쪽을 힐끔 돌아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당소찬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한 대로 해 줘."

"알겠네. 무도 대회를 열 곳은 정했는가?"

"드라고니스."

이 세계의 수도, 용족들의 세계 입구 앞에서 무도 대회를 열겠다는 말에 그는 잠깐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용족들이 쫓아도 못 잡을만하군. 그런 대담함이 이런 딸을 태어나게 한 건가? 알겠네. 그렇게 하지. 대신 아무리 약속이라도 우리 가문이 직접적으로 피해 입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네."

"내 이름으로 알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고."

용족들의 세계에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나 같은 녀석밖에 없다.

그렇기에 내 이름을 팔아도 상관없다고 하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소찬의 대답을 듣고 나는 연지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검을 휘둘렀던 연지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고, 그런 녀석을 보던 나는 별천도를 뽑았다.

"꼬맹이."

내가 녀석을 부르자 연지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모자라지?"

처음에는 밀렸던 것에 비해, 마지막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이겨 버렸다.

끓어오르던 투쟁심에 비하면 결과가 너무 미미했으니, 연지의 마음속에 갈 곳 잃은 투쟁심들이 뒤숭숭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당소찬은 홀홀거리며 웃었다.

마치 오랜만에 좋은 것을 볼 수 있겠다는 양.

"덤벼. 네가 모자란 점이 뭔지 똑똑히 알려 주마."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연지가 바닥을 박찼다.

그녀의 전신에 일순 용인화가 발동되었고, 곧 투쟁심을 미친 듯이 토해 내었다.

용인화가 되자, 연지의 몸놀림은 이전보다 두 배 가까이 빨라졌다.

비록 두 배가 빨라져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엠페러라는 영역이었지만, 몸놀림만큼은 그 정도 수준은 되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별천도에서 오러가 피어올랐다.

[A클래스 검의 길이 발동 중입니다.]

"오러를 폭발적으로 쓰려 하지마라. 넌 남을 위협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어. 약한 상대는 네게 위축하지만, 너보다 강한 상대한테는 오히려 네 움직임을 쉽게 눈치채도록 돕는 꼴이 된다."

그리 말한 나는 연지의 검을 일격에 끊어 내었다.

내 힘과 직접적으로 부딪치자 연지의 몸이 순간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렸고, 녀석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검을 다잡고 휘둘러왔다.

그래도 내가 말한 것에 귀를 기울였는지 그녀는 자신의 오러를 숨겼다.

아직 어설프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도 흡수력이 빨랐던 녀석이다.

4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해 온 만큼 배움의 빠르기도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연지는 필사적으로 내 검을 좇고 있었다.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기에 상대의 검을 좇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눈대중으로 배운 방법으론 아직 멀었다.

나는 연지의 눈으로 좇지 못하는 검을 연이어 녀석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은 막는 것조차도 제대로 못 했고, 곧 내 검에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신체의 오감에 오러를 더 주입해라. 마음의 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녀석들은 그저 어설프게 오러를 전개하는 머저리들이다. 오러를 담은 네 신체를 믿어라. 강인한 신체의 오감은 마음의 눈 따위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

그리 외친 순간 연지의 검이 내 검을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겨우 내 검에 대응한 연지의 눈에 희비가 감돌자, 나는 그대로 녀석의 검을 짓눌렀다.

"오러와 육체를 합일 화하는 거다. 엠페러의 영역은 너 자신이 오러가 되었을 때 오르는 경지다. 전신에 오러를 주입해. 오러의 격을 최대치로 계속 끌어 올리는 거다."

화천당문에 오는 3일간 나는 일부러 연지에게 오러를 풀 전개하라고 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풀 전개 된 오러를 전신에 상시 두르는 법을 배우게 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이제야 눈치챈 연지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오러를 전신에 전개했다.

전개된 오러는 연지와 오러를 구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을 뒤덮었다. 그러자 파직하고 울린 천둥소리가 주변에 퍼져 들었다.

그 찰나에 순간 연지의 눈에 새로운 감각이 휘감겼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치까지 끌어 올린 오러는 연지의 의식을 일순간 날려 버렸고, 녀석은 그대로 바닥의 고꾸라졌다.

'한참 더 걸리겠군.'

68화

엠페러의 영역에 도달하기에는 역시 아직 모자라다.

고개를 돌리자 당소찬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환희와 같은 여러 감정이 깃들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압도적인 수준의 격차에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네가 강한 줄은 알았네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군. 그러한 영역이 있다는 걸 생전에 보게 될 줄이야. 자네는 인간이 맞는가? 사실 용족이 아닌가?"

의문을 품는 그에게 나는 연지를 들어 올리곤 별천도를 허리에 찼다.

"내 부탁을 들어준 대가로 보여준 거다. 배울 수 있는 건 네가 알아서 찾아 익히든지 말든지."

그리 말한 나는 기절한 연지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상상 이상의 능력에 관심을 보입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호승심을 보입니다.]

역시 이 두 녀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성좌인 모양이다.

내가 보인 오러의 격을 보고도 오히려 호승심을 보일 줄이야.

'최상위 성좌들은 황제와 함께 90층에 도달할 때까지도 눈앞에서 직접 본 적이 없었지.'

메시지를 전할 뿐 그들이 크라운 로드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마 이 두 놈을 제외하곤 지금쯤 성좌 녀석들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던 녀석들이 내 능력이 여기까지임은 몰랐을 테니까.

'스테이터스와 레벨은 절대적.'

그것은 성좌들에게도 적용된다.

우습게도 크라운 로드의 층을 담당하는 그들이 일개 참가자들에게 쓰러질 때도 있었으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성좌와 참가자들에게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장이 멈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비록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몇몇 참가자들은 성좌를 쓰러트릴 수 있는 영역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

나는 하늘을 힐끔 보았다.

클래스, 레벨, 스테이터스.

모두 참가자들을 성장시켜 주는 요소.

이러한 요소를 만들어 낸 것이 누구인가.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

결국 이것들은 전부 그 썩을 놈이 만들어 낸 것이다.

누군가 성좌를 쓰러트릴 수 있을 그 요소를 창조한 장본인에게도 이것이 통할까 묻는다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 중 나는 단연코 최강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하일성이나 야신과 같은 생각지 못한 인물들도 있지만, 지금의 내 힘은 성좌 또한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힘조차도 크라운 로드의 창시자 천상 녀석이 만들어 낸 시스템일 뿐이다.

시스템이 성좌를 이긴다는 것은 결국 성좌 또한 그 시스템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망할 새끼.'

성좌 녀석들도 질 나쁘지만, 가장 악독한 놈은 역시 천상. 이놈이다.

성좌들보다도 위에 선 채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놈이니까.

'이러니 평소에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있냐고.'

내 목적은 결국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해서 지구로 돌아가는 거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 이전에 내 인생이 천상의 아래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은 역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 일어났어."

괜스레 바닥의 침을 퉤 하고 뱉자 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고개를 돌리니 연지는 피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냐? 잠깐 본 엠페러의 영역은."

"엄청 멀어 보여."

당연한 거다.

연지의 스텟은 엠페러가 되기에는 충분했지만, 아직은 나와 같이 스텟으로 찍어 누를 정도는 아니다.

여기서 레벨과 스텟이 두 배 가까이 더 늘어나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깨우침에 기대야 할 거다.

이래서 내가 앞서 말한 거다.

레벨과 스텟이 올리는 것보다 한 번의 깨달음이 더 빠르다고.

"그래도 이제 길은 보여. 하천성이 도움 될 때가 있기도 하네."

"네 입은 역시 꿰매 버려야 할 모양이다."

그리 말하자 직접 자기 다리로 일어선 연지가 내게 물었다.

"무도 대회는 언제야?"

"얼마 안 걸릴걸? 내 이름을 팔면 용족 녀석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 테니까. 한 달도 안 걸릴 거다."

"한 달. 충분하네."

그리 말한 연지가 다시 검을 빼 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연지의 입가에 히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천성, 옛날 기억하지? 매일 같이 대련하던 거."

"그런데?"

"나 방금 깨달았어. 아무리 강자들이랑 붙어도 결국 너랑 싸우는 것만 못 해. 물론 무도 대회는 나갈 거야. 경험이 중요하단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연지의 몸에서 또다시 오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그 경험을 쌓기 전에 더 강해질래."

그 기운은 연지의 전신에 합일이 되듯 깃들었다.

"한 달 안에 엠페러가 되겠어."

참, 급하기 그지없구만.

하지만 저쪽이 그럴 마음이라면 응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해 봐. 내 딸로 태어났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 * *

한 달 뒤.

드라고니스에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전방에는 원한이 섞이다 못해 폭발하고 있는 용족들이 있었으며, 그런 그들과 달리 이 기회에 용족의 보상을 얻어 보려는 속셈인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희대의 범죄자, 사형에 처해야 하는 자, 용살탑을 무너트린 자, 용족의 원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나에 의해 주최된 무도 대회가 주목을 받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결국 명성을 얻은 나이기에 드라고니스로 이 사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이다.

"하천성이다!"

"수배자."

"용족이 무섭지도 않은가?"

거리에 내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두려운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또 다른 자들은 신기하다는 양 쳐다보기도 했다.

"용족의 수배자가 무도 대회를 여는 게 가능하긴 해?"

"사실 용족들도 못 잡을 정도로 강하다는 소문이 있다더라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천당문을 통해 용족들이 나를 못 잡는 이유에 대해 슬쩍 소문내었더니 잘 퍼진 모양이다.

"썩을 자식! 드디어 나타났구나!"

그러던 중 내 앞에 용인화를 한 용족 한 놈이 쿠웅 하고 내려왔다.

용인화 덕에 3m나 되는 체구를 가진 그는 주변에 오러를 마구 흩뿌리며 이를 드러내었다.

벌써 3번째다.

이런 멍청이들이.

"용족의 원수!"

그리고 나는 녀석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땅에 처박아 주었다.

끽소리도 못하고 바닥의 박힌 채 부들거리는 용족을 보고 나는 한 차례 손을 털었다.

"꼬우면 무도 대회에서 1등해라. 그것도 못 할 거면 나한테 덤비지 마라."

그리 말한 나는 그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용족을 일격에 제압한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중앙 거리를 지나, 나는 콜로세움 형태의 경기장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지만, 내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유유히 안으로 들어섰다.

이 경기장은 며칠 전 드라고니스에 쳐들어가 용족을 협박하여 뜯어내었다.

너희 열쇠를 되찾고 싶으면 경기장을 빌려달라는 내 협박에 녀석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빌려주었고, 그렇게 나는 손쉽게 무도 대회의 경기장을 얻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의 단순무식함에 감탄을 보입니다. ]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당신의 뇌 뺀 행위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이 두 녀석은 아직도 달라붙어 있나.

'그나저나 시간 맞춰 왔군.'

성좌들에게 신경을 끄고 시간을 확인한 나는 복도를 지나 홀로 걸어 나왔다.

일반 관객들의 입장을 무료로 해 둔 만큼 대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경기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내가 홀로 모습을 드러내자, 나를 발견한 관객들이 하나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상당히 많은 주목을 받은 채로 경기장 위에 섰다.

그러곤 미리 준비해 온 마이크를 쥔 나는 소리를 한 차례 테스트하곤 입을 열었다.

"내가 용살탑의 열쇠를 훔친 자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마디를 내뱉자마자 거친 환호성이 경기장을 꽉 메웠다.

본래라면 야유가 나올 법한 상황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트리자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미친놈이다! 미친놈!"

"희대의 또라이!"

"용족에게 물 먹인 놈!"

이 녀석들 용족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대부분은 그저 이 상황을 유흥거리로 보고 있는 거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왠지 용족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자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인 같은 걸 한 적도 없기에 사람에게는 어찌 보면 단신으로 최강의 종족인 용족에게 도전한 셈이니, 나는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거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당신이 똥을 싸더라도 사람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 앤디 워홀이 하지도 않은 가짜 명언이 생각나는데.'

어느 세계든 다 똑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거렸다.

"룰은 간단. 1등 하면 용살탑의 열쇠를 그 1등한테 주겠다. 당연히 1등이 용살탑의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내가 뒤를 보장해 주마. 그게 불만인 녀석들은 지금 덤벼. 날 이길 수 있으면 열쇠를 지금 당장 넘겨주지."

그렇게 내뱉은 나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오러를 전신에서 일으켰다.

그 오러는 순식간에 경기장 전체를 뒤덮었고 내 기운을 직접 체감한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 세계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오러를 사용한다.

그러니 확실한 수준의 격차를 느꼈을 거다.

내 오러를 직접 체감한 자들은 한 차례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이내 더 큰 환호성을 토해 내었다.

이를 통해 내 말에 조금도 거짓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실제로 경기장까지 오면서 나는 내게 덤벼들던 용족들을 단 일격에 해치웠다.

그 용족중에서는 유명한 녀석도 있는 모양이었는지, 그 결과 나는 확고한 강자로 그들의 머릿속에 심어졌다.

"그럼 무도 대회의 예선전부터 시작하겠다. 현재 참가자는 1,000명. 32강까지는 빠르게 뽑고 싶으니까. 32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전부 죽어라 싸워 줘야겠다."

그리 말한 나는 고갯짓을 한 번 슥 했다.

그러자 천장 위에서 여러 개의 화면이 나타났고, 그 화면에는 어느 숲속에 놓인 1,000명의 참가자들이 비치고 있었다.

용족 중 마법을 잘 쓴다는 놈을 잡아 포탈을 만들어 인근 숲에 미리 참가자 녀석들을 보내 놓은 것이었다.

"1등으로 열쇠를 쟁취한 녀석은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지켜 주지. 용족 녀석들은 그 녀석에게 빌빌 길면서 열쇠를 받아 내봐. 너희가 가지고 있던 보물이든 돈이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말이야. 물론 여기서 1등 한 놈은 굳이 내가 지켜 줄 필요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환호 속에서 나는 가볍게 룰을 이야기해 주었다.

"방식은 간단하다. 본인이 오러를 못 일으킬 정도가 되면 즉시 탈락. 죽어도 당연히 책임은 안 진다. 그래도 머저리들을 위해 의사들은 불러 놨다. 살기만 하면 의사들이 어련히 알아서 치료해 줄 테니 살 수 있으면 살아 봐라."

그리고 참가자들이 모인 곳에서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성대하게 터져 나왔다.

폭죽 소리에 참가자들의 눈이 번뜩였고, 그들은 곧 각자 무장한 무기를 들고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곳에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용족이었다.

이 세계에는 용족이 최강자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용살탑의 열쇠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와 각종 마법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관객들은 경기 화면에 집중하였고, 나 또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남은 건 연지 녀석이 얼마나 할 수 있을지다.

69화

하천성, 어느 날 내 아빠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사람.

그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그냥 짜증 나는 사람이었다.

하천성은 사사건건 자꾸 나에게 시비를 걸고, 나는 그때 마다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덤벼들어도 그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하천성은 너무 강했다.

그것도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이래저래 함정도 파 보고 잘 때 공격해 보고 여러 가지로 다 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나는 그에게 패배하여야 했다.

그것이 열불 나 나는 더더욱 강해지고자 했다.

은근슬쩍 나를 가르치려 드는 하천성의 태도에 짜증이 나긴 했지만, 녀석이 알려주는 모든 걸 흡수해서라도 나중에 꼭 복수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그 다짐을 처음 했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나는 벌써 14살이 되어 있었고, 나는 처음 보다 월등히 강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랐다.

그렇게 단련한 내 검은 아직까지도 하천성에게 조금도 닿지 못하고 있었다.

'모자라.'

눈앞의 상대를 검압으로 짓눌러 버리며 나는 도리질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하천성에게 닿으려면 이런 실력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더 강한 상대가 필요했다.

그 녀석에게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자를 상대하고 싶었다.

'나는 왜 그 녀석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걸까?'

나 자신도 의문이 들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는 아니더라도 하천성과는 꽤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워낙 성격이 개차반인 인간이라 아빠보다는 친구라는 느낌이 더 강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내 아빠였다.

'자식이 부모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하기에는.'

왠지 짜증이 났다.

내 나이는 벌써 14살.

젖먹이도 아니고 아빠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그런다니.

'아니, 뭔 소리야. 그냥 난 그 녀석 콧대를 눌러 주고 싶을 뿐이야.'

그 잘난 콧대를 내 손으로 뭉개고 싶었을 뿐, 나는 인정받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더 강한 놈 없어? 약해 빠져서는!"

그러는 동안 100명 가까이 때려눕혔을까. 나는 짜증스레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오러가 담긴 내 외침에 흠칫하며 몸을 떠는 녀석들은 무시한 채 오히려 내게 적의를 보이는 상대만을 골라잡아 달려들었다.

용인화를 쓸 것도 없었다.

간혹 화천당문의 가주 정도 되는 녀석들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은 그 이하였다.

'소드 엠페러.'

하천성과 무던히 수련했지만, 끝끝내 그 영역에는 닿지 못했다.

하천성 녀석은 그보다도 위다.

'그 녀석은.'

몇 년이나 같이 지내 와서 안다.

그리고 하천성은 얼마 안 가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나를 두고, 분명 다시는 보지 못할 곳으로.

'그렇다면 그 전에.'

그 자식을 반드시 한번 쓰러트리고 싶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대체 언제쯤 소드 엠페러가 될지 괜스레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것조차 되지 못하면, 하천성에게 조금도 닿지 못할 테니까.

'같은 드래곤들마저도 모자라. 내게 이런 대회는 의미 없었을지도....'

아쉬움이 섞인 생각이 흘러들어 오던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기다란 검 한 자루를 늘어트린 남성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를 보자 내 몸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저 남자랑은 싸우면 안 된다고.

몬스터 소굴에서 반평생을 굴러 왔기 때문에, 감각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나는 발에 힘을 주고 멈춰 섰다.

'도주? 지금 장난해?'

곧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하천성과 그렇게 맞붙었던 게 엊그제인데 도주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다고 평하며, 나는 검 위에 오러를 서서히 둘렀다.

상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제압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사람들 사이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너, 하천성 딸이지?"

하지만 상대는 이미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게다가 하천성의 이름까지 언급한 그는 그늘진 얼굴 사이로 히죽 미소를 그렸고, 그 순간 인영이 사라졌다.

"커흑."

배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지자마자 몇 번이나 바닥을 나뒹군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고개를 들자 검을 빼 든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목가에는 천천히 비늘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와 같은 용족이다.

울컥.

그 순간 입가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배를 내려다보자 내 배에서는 뚝뚝 핏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그가 내 오러를 뚫고 배를 꿰뚫은 것이다.

오러로 상처를 짓누르며 억지로 출혈을 막은 나는 입가를 닦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방금 내 배를 찌른 검을 쥔 채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다이그란트, 상위 십룡 중 하나다."

상위 십룡이라는 말에 내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나도 용족인 이상 자주 들어 왔다.

드래곤 로드가 직속으로 두고 있는 상위 십룡.

지룡천에 오르는 용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그들은 태생이 전투민족인 용족을 관리하는 최강의 전사들이었다.

본래라면 상위 십룡은 지룡천에서 거의 내려올 일이 없다.

그런 그가 여기 있다는 것에 내가 의문을 보이자, 그는 열이 받은 얼굴을 한 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네 녀석의 아비 탓에 내가 하계에 내려온 지 벌써 몇 달째다."

내 의문을 눈치챈 듯 그가 말하자, 나는 한차례 눈을 깜빡이었다.

그러곤 곧 어이없는 실소를 내뱉기 시작했고, 그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기지?"

"그 상위 십룡조차도 하천성 한 명을 못 이긴다고 생각하니 웃기지."

확실하다.

그는 필시 드래곤 로드에게 명을 받아 용살탑의 열쇠를 훔친 하천성을 잡으러 온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잡기 위해 나섰다가 분명 얻어터지고 하계에 눌러앉게 된 거겠지.

"내가 하천성을 못 이긴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 대회에 참가 할 이유가 없잖아."

하천성이 두렵지 않으면 드라고니스에 나타난 그를 바로 덮쳤으면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오래전 전설로 칭해질 정도로 유명한 상위 십룡이 내가 아는 하천성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있다니, 실소가 새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아비에 그 딸이라더니."

채엥!

말을 끝마치자마자 다이그란트의 검이 내게 솟구쳤다.

마치 이무기가 이빨을 들이대는 양 날아든 검을 받아친 나는 놀란 그에게 검무를 펼쳤다.

하연지 오식(五式)

섬뢰화선(殲雷火渲)

화염과 번개가 서로를 이으며 폭풍 같은 검이 그를 몰아쳤다.

내 검무를 급히 막던 다이그란트는 이를 아득 깨물곤 바닥을 쿠웅 찍었다.

그 순간 그에게 일어난 오러 탓에 나는 검무를 멈추고 잠시 물러서야 했다.

"이것밖에 안 돼?"

내 기세가 이전과는 달라져서일까, 다이그란트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상위 십룡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멈칫했던 나지만, 결국 이 녀석도 나와 다를 바 없다.

기껏해야 하천성에게 못 이기는 머저리.

나보다도 높은 경지의 오러에 짓눌렸던 몸이 겨우 풀렸다.

"네가 말했지, 그 아비에 그 딸이라고."

그리 말한 내 검에서 전격이 폭발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아비도 못 이기는 녀석이 딸이라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몰아친 오러가 하늘을 향해 뻗어졌다.

그 순간 새까맣게 물든 하늘이 주위를 집어삼키고 내 전신에서 스파크가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하천성이 딱 한 번 보여줬던 검술.

세계가 이렇게 멸망하는 게 아닐까 하고 느꼈던 그 검술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귓가에 물방울 하나가 고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내 식대로 만들었던 하연지식 검술이지만, 이것만큼은 바꿀 수 없었다.

완벽한 것에 손을 대 봤자 불안전해질 뿐이었기에.

하연지 구식(九式)

낙뢰(落雷)

세상이 빛에 삼켜졌다.

그 사이로 은은하게 비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고, 내 눈에는 이전에 낙뢰를 사용했던 하천성의 뒷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그 녀석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낙뢰.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검술이었기에 내가 사용한 낙뢰에 의해 주위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과도한 오러를 소모한 나머지 탈진 상태에 가까워지자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니, 참가자들 대다수가 바닥에 뻗어 있었다.

나는 전신에서 아직도 튀고 있는 스파크를 무시한 채 검을 어깨 위에 턱 하니 올리곤 입을 열었다.

"새까맣게 탄 게 보기 좋네."

"썩을 년이."

까드득.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신이 용인화가 된 다이그란트는 기다랗게 늘어난 검은색 꼬리를 쿠웅 하고 땅에서 뽑아 올렸다.

낙뢰를 당하기 직전 바닥에 꼬리를 꽂아 넣어 땅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식으로 상쇄시킨 것이었다.

비록 전신이 새까맣게 타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새까맣게 변해 버린 검을 내던진 그의 팔이 마치 검의 날 형태로 변했다.

'나도 참 멀었네.'

하천성의 낙뢰였다면 이 녀석을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 버렸을 텐데.

파직파직.

귓가에 아직까지도 스치는 스파크 소리. 어깨 위에 올린 검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낙뢰는 오러를 전력으로 담아 사용하는 검술이다.

오러를 그렇게나 쏟아부었던 만큼 그 반발력으로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고 있던 것이다.

"네년, 그 기술은 일회용이군."

그리고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챈 다이그란트의 입가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런 허세는 나보다 약한 상대에게나 통하지, 강한 상대에게는 먹히지 않는 수였다.

그 순간 다이그란트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 날이 생긴 팔을 휘둘러 왔다.

이대로라면 당한다고 생각한 나는 혀를 차며 후들거리는 팔에 억지로 짜낸 오러를 담아 그의 검에 맞서려 했다.

[경기 종료]

하지만 그의 검날과 내 검이 맞닿기 직전 주변 경치가 뒤바뀌었다.

어느새 처음에 안내받았던 대기 장소에 온 나는 잠깐 멍청히 눈을 깜빡이다가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이전에도 꽤나 많은 사람이 탈락한 상태에서 내 낙뢰가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었다.

32명이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인원수가 줄어 경기가 종료되었겠지.

'지치네.'

몇 번인가 사용해 본 낙뢰이지만 쓸 때마다 오러를 전부 빨리는 느낌은 적응할 수 없었다. 거의 탈진한 나는 의자로 가 털썩 앉았다.

과연 상위 십룡이라 이건가.

내 낙뢰를 정면으로 맞고도 버틸 거라곤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차츰 대회에 대한 기대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32강에서부터 계속 이겨 올라간다면, 분명 그놈이랑 다시 붙게 되겠지.

그것도 나보다도 강한 놈이랑.

'태생이 전투민족이라 그런 건가.'

하지만 그 기대감 속에서 나는 웃고 있었다.

잠시 후 배에서 터져 나온 핏물 탓에 의사를 찾기 전까지는.

70화

착착 진행되는 대회 속에서 나는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연지 녀석이 사용한 낙뢰는 나의 기술을 모방한 것인데, 그 정도가 꽤 준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위력의 낙뢰를 견딘 녀석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본래는 32명을 뽑을 생각이었지만 연지의 낙뢰로 인해 추려진 인원은 연지를 포함하여 8명.

그러니까 7명은 전부 연지의 낙뢰를 견딘 녀석인 셈이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은 시커먼 놈 한 명.'

아마 저 녀석이 이번 대회에서는 손에 꼽을 녀석이 아닌가 싶다.

확실하다.

저 녀석은 소드 엠페러 급이다.

연지는 아직까지도 소드 엠페러에는 아슬아슬하게 도달 못 한 상태.

방금은 단체 경기라서 그렇게 끝났다지만, 일대일로 정면 승부를 펼쳤을 시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저놈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전에 나한테 한번 덤볐던 녀석 중 한 명이었다.

그때는 이 세계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으니 그랜드 마스터급이었는데, 나로 인해 층의 난이도가 상승하여 엠페러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상위 십룡이다! 상위 십룡이 있어!"

"상위 십룡이 대체 왜 여기에? 그리고 왜 대회에 참가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순간 관객 쪽에서 커다랗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객들은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상위 십룡이란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이전에 들었던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드래곤 로드를 보필하는 열 마리의 드래곤들이라고 했었나.

'그렇담 저놈 세계관 최강 바로 아래라는 거네.'

내 눈에는 안 차지만, 연지에게는 상당히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것 같았다.

'그것보다 내가 연지 녀석한테 낙뢰의 다른 사용 방법을 보여 준 적 있던가.'

하긴, 낙뢰를 보여 준 것도 연지가 기절 직전일 때 몬스터 녀석들이 너무 많이 모여든 탓에 일일이 처리하기 귀찮아서 한 번 쓴 게 전부다.

그때 보고 모방한 것 같다마는 낙뢰는 저것 말고도 다른 사용법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냐. 못 알아차리냐가 이번 대회의 판도를 가를 것 같은데.'

팔짱을 낀 채 의자에 앉은 나는 남은 8명들이 치료받는 걸 느긋이 기다렸다.

한참 후 8명의 치료가 끝나고 하나둘 경기장 입구 앞 대기석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경기장에 설치된 전광판을 켰다.

"추려진 건 8명. 본래대로라면 32명으로 치를 생각이었는데 어떤 머저리가 모조리 날려 버린 덕분에 이렇게 됐다. 뭐, 탈락한 놈들은 어떻게 되든 떨어졌겠지. 그럼 대진표다."

저 멀리서 누가 꽥꽥 소리를 질러 댔지만, 무시한 나는 엄지와 중지를 이용해 가볍게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전광판에 사다리 타기가 생겨났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순간, 하나씩 각자의 이름표가 드러났고 사다리 타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다리 타기의 결과가 다 나온 순간 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정해졌다. 바로 8강전 시작이다."

참가자들의 눈이 불타올랐고, 나는 참가자들을 경기장 위로 올렸다.

그리고 예선보다 빠르게 8강전이 끝났다.

경기가 끝나자 남은 참가자는 절반인 4명으로 추려져 있었고, 탈락한 놈들은 의사한테 보내졌다.

'어차피 남을 놈만 남는 거지.'

남은 4명은 예상대로 하연지, 상위 십룡 다이그란트, 가이란, 세렌.

'인간은 한 명도 없구만.'

용족들이 득세하는 세계에서 당연한 거긴 하지마는.

그런 순간 나는 세렌이라는 이름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긴가민가한데 이 이름 어디서 들어 보지 않았나.

그러는 동안 내 시선에 연지가 들어왔다.

녀석은 세렌이라고 한 여자 쪽을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곧 나는 한참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전 대회 결승전에서 최종적으로는 연지가 졌던 그 녀석이다.

진작 지룡천에 올라갔겠거니 했는데, 아직까지 하계에 남아 있었나.

'게다가.'

세렌을 보며 나는 호오 하며 가벼운 소리를 내뱉었다.

다이그란트 녀석만큼은 아니어도 저 녀석, 아슬아슬하게 소드 엠페러의 발을 걸치고 있다.

성좌가 난이도를 올리긴 했다지만, 저 정도면 난이도를 올리기 전에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 수준은 되었다는 소리다.

'난이도를 올리길 잘했네.'

연지 녀석의 라이벌을 포함해 괜찮은 상대가 많다며 만족해한 나는 다음 대진표를 짜기로 했다.

그리고 떠오른 대진표는 내 의도를 다분히 담아 정해졌다.

첫 경기 다이그란트 대 하연지.

두 번째 경기 세렌 대 가이란.

경기가 정해지자마자 다이그란트가 크게 콧방귀를 내쉬며 연지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만났군. 방금 당했던 치욕을 제대로 치르게 해 주마."

"시끄러. 머저리.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다이그란트의 위협에 연지는 내색 하나 안 하고 욕부터 박아 넣었다.

그 말 그대로 연지는 지금 다이그란트를 신경 쓰고 있지도 않았다.

현재 녀석의 온 신경은 오로지 한 명, 세렌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세렌 쪽은 연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지만.

"하, 썩을. 어린 용들 버릇이 없는 건 알고 있었다만, 네년은 확실히 짓밟아야 할 모양이다."

그리 말한 다이그란트는 성큼성큼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에 세렌을 노려보던 연지도 몸을 돌려 그를 따라 경기장 위로 올라왔고, 두 사람은 신호를 기다리며 마주 보았다.

"후회하게 해 주마."

그 순간 성난 다이그란트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시작 신호가 크게 울리며 경기장을 채웠다.

이어지는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다이그란트가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오자 연지도 그에 맞섰다.

연지의 마음이 딴 데 가 있지만, 다이그란트는 녀석이 무시할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와 몇 차례 검담을 나누자 연지도 서서히 세렌은 잊어 두고 다이그란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끅."

다이그란트가 오러의 출력을 올리자 한 차례 밀린 연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맹공을 받아쳤다.

그러나 점차 거세지는 다이그란트의 공격을 계속 맞서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결국 한번 검을 튕겨내고 뒤로 물러났다.

"도망만 칠 속셈인가 보지?"

도발하는 다이그란트의 말에 땀을 한 방울 흘린 연지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났다.

"집중하는 중이니까. 닥치고 있어."

"입버릇 한 번 고약하군."

분노가 실린 가벼운 행동거지였지만, 다이그란트는 방심하지 않았다.

연지가 보여 줬던 낙뢰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그조차 명백히 타격을 입었다.

그 뜻은 즉, 연지가 절대 무시할 만한 정도의 상대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기에 그는 겉으로는 이래도 생각보다 냉정하게 연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혹여나 연지가 오러를 끌어모아 검술을 펼치려고 하면 재빠르게 그 흐름을 꿰뚫어 막았고, 그렇게 틈을 노린 그의 검은 몇 번이나 연지를 베었다.

오러도 오러지만, 그의 검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에 비해 현재 연지는 경험은 둘째치고, 기본적인 호흡이 거친 데다가 오러도 꽤나 뒤죽박죽이었다.

그의 공세를 견디기 위해 오러를 끌어올리다 보니 저리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연지의 가슴팍과 어깨가 동시에 베였다.

연지의 입에서는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핏물이 경기장 바닥을 메우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이 녀석의 입가에서 퍼져 나가자, 다이그란트의 눈이 곡선으로 휘었다.

그런 그를 보며 연지가 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 자세가 낙뢰의 준비 자세임을 눈치챈 다이그란트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또 통할 것 같으냐? 아니, 애초에 통하지도 않았다."

다이그란트는 낙뢰를 정면에서 맞고도 움직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연지였지만,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녀석의 검을 향해 미친 듯이 오러가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만 죽어라!"

자포자기인가.

맞아도 버틸 수 있지만, 발동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이그란트의 검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어둠 속성 오러가 주변을 집어삼킬 듯 휘감기자, 그의 오러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으로 관객들의 표정이 겁에 질렸다.

그만큼 흉악한 오러가 다이그란트의 검에 깃들어져 있던 것이다.

마치 어둠 그 자체.

진심으로 연지를 죽이고자 꺼내 든 오러는 소드 엠페러급의 오러였다.

상위 십룡 다이그란트 절기

흑수연락(黑收淵落)

오러는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의 형태를 가진다.

그것은 어찌 보면 환상이고, 달리 보면 환영이다.

하나 눈앞에 들이닥치는 그것을 환상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진짜 같았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듯 극에 다다른 오러는.

현실을 뛰어넘는다.

다이그란트가 사용한 오러가 칠흑의 연못을 띄웠다.

그 연못의 중심에는 연지가 홀로 서 있었고, 연못의 밑바닥은 끝없이 녀석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목숨을 거두기 위하여 칠흑과 같은 연못이 연지를 천천히 밑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끝끝내 머리까지 삼켜졌다.

하나 그 속에서도 연지의 검은 고고히 하늘로 향해져 있었다.

그 검에는 녀석의 모든 것이 담긴 오러가 흉흉히 빛나고 있었고, 곧 하늘에서 그에 응답하듯 세찬 번개가 내리쳤다.

그 번개는 칠흑의 연못에 커다란 물결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곧 연못은 다시금 제 모습을 찾더니, 미미한 잔물결만 남았다.

다이그란트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띨 찰나.

갑자기 연못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분명 끝없는 깊이의 연못에 삼켜졌을 거로 생각했던 연지가 경기장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전신에서 튀기는 스파크에 연못은 몸을 움츠러트렸고, 연지의 두 눈동자가 경악한 다이그란트와 마주쳤다.

"정말로 안 통할 거 같아?"

눈가에서조차 흘러나오는 스파크.

하연지 십식(十式)

진 · 낙뢰(眞落雷)

이내 모든 것을 토해 내여 내려친 천둥은 주변으로 향하지 않고 연지의 몸에 담겼다.

그 오러의 잔상은 소드 엠페러인 다이그란트의 오러를 박살 낼 정도였고, 그 위력에 그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뻔히 보였다.

연지가 사용한 진 · 낙뢰는 얼마 안 가서 풀릴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고 다이그란트가 연지와 거리를 두려 했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자신이 이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

하나 연지가 그걸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세차게 휘둘러진 검에 다이그란트가 급히 그것을 막았다.

하나 그는 연지의 힘 앞에 짓눌려 자세가 무너지더니, 다이그란트가 딛고 있던 바닥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힘의 압력에 다이그란트의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흐르자, 자신이 오러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그는 거칠게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러나 연지의 힘과 오러는 그 이상이었다.

전신에서 흐르는 스파크는 다이그란트를 그대로 짓눌러 압살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자 다이그란트의 눈도 점차 다급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꽉 깨물어지더니, 다이그란트는 결심한 듯 중얼거렸다.

"썩을, 여기서 이걸 꺼낼 생각은 없었는데."

그 순간 다이그란트의 전신에서 검은색의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연지가 오러의 출력을 더 높였을 때, 다이그란트의 모습은 이미 변형되어 있었다.

이전보다 2배는 커진 몸, 등 뒤로 나타난 피막이 자리한 칠흑의 날개, 얼굴 외형과 몸 외형까지 완전히 드래곤에 가깝게 바뀐 그의 입가에서 연기가 흩어져 나왔다.

일순간 시야가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오러를 일으켜 여파가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막았던 나는 혀를 찼다.

그대로 뒀다면 경기장이 통째로 날아갈 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룡."

뒤에서 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71화

헌룡, 듣기론 용족은 지룡천에서 본연의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계에서는 힘에 어느 정도 제약이 걸리는데, 용인화가 대표적이다.

용인화는 인간과 드래곤이 뒤섞인 용족의 모습, 그러나 그들의 본연의 모습은 드래곤이기에 그들의 용인화는 반쪽짜리다.

그러한 용족이 지룡천에 올랐을 때 진정한 자신의 힘을 되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헌룡이다.

그 헌룡을 다이그란트는 하계에서 사용한 것이었다.

방금 어둠은 그가 내뿜은 브레스.

그것만으로 일대가 날아가 버릴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어둠이 점차 걷히고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타난 다이그란트의 입가에서 뭉글뭉글 검은색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흥 하고 연기를 한 차례 내뱉은 후 앞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브레스 한 번으로 몸 절반에 상처를 입은 연지가 있었다.

힘겹게 숨을 내쉬는 연지를 두고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쪽을 힐끗 보았다.

자신의 브레스라면 일대를 날려 버렸어야 하는 데 주변이 멀쩡한 걸 보고 내가 막은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천성, 끝내라. 네 딸은 더 이상 못 싸운다."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양 꼬리로 한 차례 바닥을 내려치는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싫은데."

"...머리가 비었나? 다음 브레스를 맞으면 네 딸은 끝이다."

"아니, 우리 꼬맹이 아직 서 있잖아."

내 말을 듣고 다이그란트의 시선이 연지에게로 향했다.

연지는 만신창이였다.

가까스로 숨을 내쉬고 있긴 했지만,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한 수준이었고 그건 일반 관객들의 눈에도 그랬다.

"아둔하긴. 네 딸은 죽을 거다."

그리 말한 다이그란트가 마무리를 위해 브레스를 한 번 더 내뿜으려는 순간 연지의 입이 조용히 열렸다.

"...허세는 약자 앞에서나 통하는 거야."

그 말과 함께 순간 연지가 바닥을 박찼다.

다이그란트는 즉시 브레스를 내뿜었고 또다시 칠흑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칠흑을 내 오러로 막을 것도 없었다.

"무슨."

브레스를 내뿜던 다이그란트마저 당황한 눈초리였다.

연지의 검 앞에 다이그란트의 브레스가 양단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이그란트의 헌룡은 강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 브레스, 아무리 그라고 한들 하계에 용족에게는 제약이 존재한다.

첫 브레스 이후 다이그란트는 제약을 받기 시작했고, 그 증거로 그의 두 번째 브레스는 첫 브레스보다 훨씬 약했다.

"네년, 설마!"

브레스를 내뿜던 다이그란트가 소리쳤다.

그 말대로 연지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오러는 이전과 달랐다.

스파크가 튀고 있는 오러는 차츰차츰 브레스를 억눌러 나갔고, 다이그란트의 두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소드 엠페러.

전투 중 연지가 그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사실 진 · 낙뢰를 썼을 때부터 연지는 이미 소드 엠페러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그저 그 사실을 다이그란트가 뒤늦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연지의 능력치는 소드 엠페러에 진작 도달해 있었다.

단지, 깨달음이 부족했을 뿐.

그리고 그 깨달음은 진 · 낙뢰를 사용했을 때 채워지고 말았다.

다이그란트의 눈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소드 엠페러는 급이 다르다.

이제 막 발을 들였다고 한들, 자신과 같은 영역에 들어선 연지의 검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서히 그의 몸을 옥죄어 오는 제약 탓에 브레스의 화력 또한 줄어들고 있었다.

헌룡은 그에게도 마지막 수단이었던 것이다.

퍼부어지는 공세 속에서 다이그란트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끝끝내 그의 브레스를 뚫고 연지가 다이그란트를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필살기를 꺼냈던 만큼 제약에 옥죄어진 다이그란트는 필사적으로 연지의 검을 받았다.

처음에는 헌룡의 보정으로 연지의 검을 맞받아치던 다이그란트였지만, 그의 검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그에 반해 연지의 검은 더더욱 매서워졌다.

휘두를 때마다 연지의 오러는 마치 모든 걸 불살라 버릴 듯이 커졌고, 다이그란트는 그 힘 앞에 침음했다.

그리고 끝끝내 그의 가슴팍을 연지가 가른 순간 다이그란트의 두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내가 질 리가!"

소리를 내지르며 필사적으로 다이그란트는 검을 휘둘렀다.

그 행위는 겁에 질린 동물의 마지막 몸부림과 별다른 바 없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 내 브레스를 맞고도 어떻게!"

피를 토하는 외침에 나는 다이그란트 녀석이 눈에 띄게 행동이 굼떠진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연지가 엠페러의 영역에 들어선 것에 놀란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녀석이 자신의 브레스를 맞고도 멀쩡히 움직이는 것에 더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더더욱 공포로 작용했고, 어느새 다이그란트에게 패배의 기운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크하악!"

연지의 검에 또 한 차례 베인 다이그란트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런 그를 보며 숨을 한차례 가다듬은 연지는 검을 틀어쥐었다.

하연지 이식(二式)

뇌염성뢰(雷炎聲雷)

휘감아 오른 불꽃과 번개가 동시에 검 위에 물들었다.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다이그란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든 검은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선명한 핏물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 틈을 타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이그란트의 목을 손으로 붙잡은 연지는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브레스를 발동시켰다.

"진짜 필살기는 마지막에 쓰는 거야."

"아아아아악!"

그 비명을 끝으로 일직선으로 뻗어진 연지의 브레스가 다이그란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브레스에 직격당한 다이그란트의 동공은 사라져 새하얀 흰자를 보였고, 곧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채 쓰러졌다.

나였다면 진짜로 머리를 날렸을 텐데, 연지는 마지막에 힘을 뺀 것이었다.

엉망이 된 연지가 나를 힐끔 보자,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하연지 승."

"이겼다! 상위 십룡을 꺾었어!"

"괴물 신인 탄생이다!"

내가 승리 선언을 하자마자 관객들이 폭발적인 환호와 외침이 쏟아졌다.

그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내려온 연지는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어때? 나도 이제 엠페러야."

"의사."

그 말을 내뱉자마자 쓰러지는 연지를 받은 나는 의사를 불렀다.

그러곤 미리 꺼내 두었던 포션을 녀석에게 뿌리며 의사에게 치료받도록 두었다.

어부지리가 꽤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패는 다 사용해서 이겼다.

일어나면 칭찬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의사가 정신을 잃은 다이그란트를 옮겼다.

뒤이어 세렌이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방금까지 연지의 경기를 지켜보던 그녀는 꽤나 진지한 눈빛이었고, 나는 세렌의 상대가 올라오자 경기를 시작했다.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승리를 쥔 것은 세렌이었다.

이전에는 드래곤 로드의 차기 후보라는 아티쿠스의 딸.

하나 이제는.

"드래곤 로드의 딸이다!"

"저분, 드래곤 로드의 따님이야!"

관객들 사이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지와 만난 이후, 그녀의 아버지 아티쿠스는 드래곤 로드의 자리에 올랐다.

그 결과, 그녀의 신분도 차기 드래곤 로드 딸에서 드래곤 로드의 딸이 되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경기장에 우뚝 선 세렌은 입을 열었다.

"하천성."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세렌은 잠시 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곧 말을 이었다.

"당신의 딸인 하연지를 꺾고 나면 저와 싸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네 아버지가 너에게 시킨 일인 모양이지?"

상위 십룡마저 나에게서 용살탑의 열쇠를 빼앗지 못했다.

그 사실은 드래곤 로드에 귀에까지 들어갔을 텐데, 그는 자신의 딸에게도 똑같은 시련을 준 것이었다.

그녀가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용살탑의 열쇠를 되찾으려는 것도 있겠지만.

"네, 용살탑의 열쇠를 얻는다 한들, 당신을 쓰러트리지 않고 지룡천로 오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그녀가 용살탑을 오르기 위한 조건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지룡천에 오르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나 했더니,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불붙은 듯 타오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좋아. 받아들여 주지. 그 전에."

나는 내 등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뒤에서 나타난 것은 연지, 방금 치료하러 들어간 주제에 그새 냉큼 기어 나온 것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 꼬맹이를 이긴 다음에 이야기야."

연지가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이 세계에서 가장 치료 마법 수준이 높은 녀석을 의사로 구해 놓은 만큼 웬만한 건 다 치료되었을 거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을 보고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신호에 맞춰 폭음이 터지고 연지와 세렌의 인영이 겹쳤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검합에 의해 오러가 스파크를 튀며 주변으로 번져 났다.

오러 겨루기를 하며 검 사이로 맹렬히 서로를 노려본 둘은 한 차례 물러서곤 다시금 부딪쳤다.

연지는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더더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그에 비해 세렌 쪽은 본인은 이 승부보다는 뒤에 있을 승부가 더 중요하다는 양 최대한 페이스 조절을 하며 싸워 나가고 있었다.

"아까 이야기 들었어. 하천성이랑 싸우고 싶다며."

으르릉거리듯 연지의 입에서 노성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전에 나를 꺾어야 할 텐데."

갓 엠페러의 오른 연지의 오러가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딴 태도로 날 이기고 갈 수 있을 거 같아?!"

콰앙!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연지의 오러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급히 물러선 세렌의 인상은 조금 찌푸려져 있었고, 그녀는 검을 천천히 검집으로 되돌렸다.

"그러네. 그때도 전력을 다했어야 겨우 이겼지."

마치 과거를 추억하듯 속삭인 세렌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세계의 절반이 베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연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세렌의 발검은 이전에도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빨랐다.

그것을 계속해서 갈고 닦은 결과 그녀의 발검은 이 세계의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만큼의 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증거로 연지의 가슴팍과 팔에서는 핏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녀석이 그녀의 공격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소리조차 쫓지 못하는 고속의 발검술을 눈앞에서 목격한 연지는 전신에서 오러와 함께 용인화가 발동시켰다.

붉은색 비늘과 꼬리가 생성된 연지의 눈이 샛노랗게 변하였고 그런 연지를 보며 세렌이 입술을 떼었다.

"그래, 반응하지 못한다면 상시 오러를 발동시키면 된다고 판단한 거지."

그리 말한 세렌은 검을 쥔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연지가 세렌에게 검을 휘둘렀고, 세렌의 검은 그보다 빨리 움직이었다.

"하지만 실수야."

용을 베는 자

용살섬(龍殺殲)

"꺄아악!"

처음으로 연지의 비명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용살섬, 용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 연지의 오러와 비늘을 뚫고 그녀에 내부에 직접 닿았다.

마치 용광로에 담가진 양 오러가 뒤틀린 연지는 고통스러운 듯 바닥의 널브러졌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세렌은 검을 뽑았다.

"내 검술은 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야. 넌 절대로 날 이길 수 없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나, 세렌은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줄곧 검을 단련해 온 모양이었다.

'오러를 용을 죽이는 데에만 단련시켰군.'

오러는 그녀가 살아온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용인화를 사용하면 반쪽짜리여도 용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의 오러만을 베기 위해 만든 검에 연지가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다이그란트와는 달리 세렌은 방심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연지를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는 양 들어 올려진 검에 용살섬을 담은 오러가 다시금 깃들고, 이내 그대로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늘에 있던 천장이 사라졌다.

72화

당황한 관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여기저기서 도망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드러난 경기장의 하늘 위에는 10명의 사람이 날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피막이 달린 날개를 펼친 채 경기장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등진 그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향해 있었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죄인 하천성, 우리는 상위 십룡이다. 드래곤 로드의 명으로 네놈의 목을 취하러 왔다.]

상위 십룡의 증거라는 양 그들 중 한 명에게서 용언이 터져 나왔다.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한차례 후벼 판 나는 아까 뻗은 다이그란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도 상위 십룡, 아니었냐?"

[하계에서 패배한 녀석은 상위 십룡의 자격을 박탈했다. 저런 녀석과 같은 취급 하지 마라.]

"아, 그래. 그래서 저놈도 패배했는데, 너희라고 뭐 다를 것 같냐?"

개미가 열 마리로 늘어나 봤자 뭐가 되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니, 그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뭘 모르는군. 당연히 다르다.]

그 순간 10명의 몸이 동시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이그란트 때와는 달리 수십 미터까지 커진 녀석들도 더러 있었고, 그들은 완전히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10마리의 드래곤이 나타나자 관객들 사이에서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녀석들마저 있었다.

그만큼 10마리의 드래곤이 동시에 내뿜는 오러는 보통 사람이 견딜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계의 제약 따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의 비명 속에서 용언이 터져 나오자 일대가 오러에 휩쓸렸다.

그 강대한 오러의 앞에 혼절한 자들마저 생겨났다.

그들은 곧 나에게 오러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오러의 압력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양.

그 기운에 휩싸인 나는 연지와 세렌 쪽을 보았다.

상위 십룡들이 전부 등장하자 세렌은 당황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곧 그녀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도 그럴 게 방금 검을 내질렀던 그 장소에 연지의 검이 우웅하고 소리 내어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위 십룡이 나타나기 전부터 연지는 이미 세렌의 검을 막고 있었다.

자신의 검이 막혔다는 사실에 세린의 눈이 찌푸려지자 핏물을 머금은 연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어딜 한눈팔아."

연지의 몸에서 오러가 폭발적으로 흘러나온 순간, 세렌은 녀석의 검을 피해 거리를 두었다.

"용살섬이 제대로 들어갔을 텐데."

"들어갔지. 아파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거 결국 용인화만 안 쓰면 의미 없는 거잖아?"

"...용인화도 안 쓰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용인화는 용족이 자신의 힘을 전력으로 쓰면 자연스레 변하게 되는 생리 현상과도 같다.

그걸 안 쓰겠다는 소리는 전력으로 싸우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딴 것 필요 없어. 용족의 피가 흐르기는 하지만, 내 피에는 다른 녀석의 피도 하나 더 있거든."

그리 말한 연지의 검에서 화염 속성이 사라지고, 오로지 전 속성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망할 하천성의 피가."

내 피면 감사해야지.

참 버릇없게 자랐다며 혀를 찬 나는 검을 빼 들었다.

저 둘은 알아서 잘 싸울 것 같으니, 나는 경기장을 지켜 주기로 했다.

상위 십룡이 헌룡을 하자마자 겁에 질린 듯 새까만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러가 발아래에 집중된 순간 나는 이미 하늘에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상위 십룡 한 마리의 위에 안착했다.

"무지렁이들. 애들 싸움 방해하지 말고 꺼져."

내가 외친 순간, 세상을 지울 만큼 강력한 브레스가 사방에서 쏟아져 왔다.

"성좌 녀석들아. 기다렸지. 너희가 고대하던 시간이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흥분한 기색을 보입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큰 기대를 품습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슬쩍 당신을 지켜봅니다.]

늘어나는 성좌들의 메시지 속에서 나는 검을 빼 든 채 입가에 진한 호선 하나를 그렸다.

* * *

당황스러운 상황에 연속이다.

세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공을 뒤덮은 헌룡한 상위 십룡이 나타났을 때 그들에게 뿜어져 나온 압박감은 세렌마저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과연 상위 십룡은 다르다 이건가.

아직 자신은 멀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득바득 익힌 용살섬조차도 그들에게는 닿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살섬이 통용되지 않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머리 위를 가득 메운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오러로 인해 몸이 삐걱거리고 있건만, 눈앞에 여자아이는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세렌마저도 연지의 맹공에 서서히 상위 십룡에 대한 존재를 잊어 가기 시작했다.

용살섬. 용인, 즉 드래곤들을 절명 시키고자 만들어 낸 기술.

하나 그러한 용살섬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렌은 연지를 손쉽게 쓰러트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면 그녀가 선언한 대로 이후 단 한 번도 용인화를 쓰지 않고 자신과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용인화는 용족에게는 일종의 습관이다.

전력을 다하면 자연스럽게 발동되는 습관, 그런데 그런 생물적 본능을 억누르고 연지는 인간 상태로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연지의 입가에 호기로운 미소가 걸렸다.

그 표정을 보고 세렌이 불길한 기운을 느끼자 연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용살섬이라는 걸 사용 할 때는 너도 용인화를 못 하는 모양이지?"

히죽거리며 내뱉은 말을 듣고 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해 주지 않아도 연지는 이미 눈치챈 듯싶었다.

연지의 말대로 세렌의 용살섬은 자신의 용인화조차 발동하지 못하게 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용인화 상태에서 용살섬의 오러를 발동하면 세렌조차도 피해를 입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

연지는 강하다.

최근에 맞서 본 사람 중에서도 뛰어났다.

특히, 상처가 아무리 늘어나도 쓰러지지 않는 저 끈질김은 세렌조차도 질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뿐이다.

맹공을 펼치고 있는 연지라고는 하나, 자신보다 훨씬 눈에 띄게 지쳐 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더 강한 것은 나다.

"그건 네 착각이지."

그 순간, 마치 세렌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연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연지 십식(十式)

진 · 낙뢰(眞落雷)

낙뢰가 연지를 향해 내리쳤다.

끌어 오르는 오러가 모조리 그녀의 몸속 깊숙이 스며들자, 한순간에 오러의 격이 달라졌다.

신체와 오러 모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지자 세렌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다이그란트와 싸우던 연지를 직접 목격했던 세렌이다.

연지의 저 기술은 진작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마주하고 나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술인지 알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오러를 전부 소모 시켜 몇 단계나 성장해 버리는 진 · 낙뢰를 쓰자,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세렌은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근육을 타고 올라왔다.

전 속성의 오러가 마치 맹수처럼 자신의 몸을 미친 듯이 물어뜯기 시작했다.

세렌의 전신이 서서히 핏물로 물들어 가고, 그에 따라 연지의 기세는 물오른 양 강해졌다.

'버텨. 버텨야 해.'

연지의 진 · 낙뢰는 한눈에 보아도 단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붓는 기술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출력은 점차 약해질 것이고, 힘이 다했을 때 연지는 자신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몸이 연지의 공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연지의 공격 앞에 자신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진 · 낙뢰를 사용한 연지는 강했다.

'다이그란트가 헌룡을 사용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이런 걸 눈앞에 두고 가지고 있는 수를 다 쓰지 않고서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까득 하고 세렌이 입술을 깨물어졌다.

입술을 깨문 탓에 흐른 피가 턱을 적셨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여기서 연지의 출력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버티려면.

용인화.

세렌의 목가와 얼굴을 비늘이 뒤덮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솟아난 뿔과 꼬리가 흉흉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의 주위에 오싹한 오러의 기류가 흘러나왔다.

채엥!

"크흑?!"

연지의 검과 맞부딪친 순간 세렌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용인화를 사용하여 자신도 출력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지의 공격은 이전보다도 더 막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세렌의 눈동자에 연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자신이 용인화를 발동하는 그 순간에 맞춰 똑같이 용인화를 발동한 연지가.

'설마.'

노렸다는 건가.

용살섬을 쓰는 동안 용인화를 못 쓰는 걸 알아챈 연지는, 그걸 확인하자마자 진 · 낙뢰를 사용하여 몰아넣음으로써 자신이 용인화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걸 전부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한없이 단순무식해 보이던 연지의 계략에 속았다는 사실에 세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용인화를 풀고 용살섬을 사용하면.'

늦는다.

용인화를 푸는 즉시 연지의 검을 이겨 내지 못해 그녀에게 당한다.

그렇다고 지금의 상태에서 더욱 출력이 높아진 연지를 따라가기에는 자신의 용인화는 모자랐다.

세렌의 얼굴이 서서히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하는 동안 연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말했지. 나부터 꺾어야 한다고."

그 한마디에 이어 세렌의 검이 연지의 검에 부서질 듯 울었다.

이대로면 진다.

고작해야 이런 애 한 명한테 꺾여서 어쩌자는 건가.

세렌이 이렇게나 단련하며 강해지던 이유는 단 하나다.

'아버지를 죽이고 드래곤 로드에 오르기 위해.'

지금까지 줄곧 수련해 왔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세렌은 약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려졌음에도 평생을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명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이명을 벗기 위해 여기까지 왔단 말이다.

고작 거쳐 가야 할 벽 하나 못 넘어서야 되겠는가.

생각을 마친 세렌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용을 베는 자

용살섬(龍殺殲)

용인화를 발동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용을 죽이는 오러가 그녀의 전신에서 풍겼다.

까득, 까드득 하고 오러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연지를 향해 그 오러를 전력으로 방출했다.

후에 일은 아무래도 좋다.

여기서 반드시 연지를 쓰러트리겠다.

그런 집념이 느껴지는 오러였다.

채엥!

검이 닿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살섬의 오러가 연지를 집어삼키고자 달려들고, 곧 세렌과 연지가 용살섬의 오러 속에 뒤덮였다.

비명이 울려 퍼지며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 세렌은 검을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오러에 자신이 쓰러질 수는 없다는 양 그녀는 악착같이 버텼다.

푸욱.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자신의 복부를 꿰뚫는 감촉과 함께 선명하게 들린 소리에 세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거기에는 방금까지 자신에게 휘두르던 검이 박혀 있었고, 그것을 목격한 순간 세렌의 눈동자가 앞으로 향했다.

연지가 서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용인화와 진 · 낙뢰를 펼치고 있던 연지가.

하나 세렌의 눈에 비춘 연지는 용인화나 진 · 낙뢰는커녕 미약한 오러마저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확실하게 세렌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73화

왈칵, 입가에서 핏물이 샘솟았다.

턱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리는 동안 세렌은 연지의 상태를 깨달았다.

진 · 낙뢰를 쓴 반동으로 그녀의 오러가 모조리 소멸해 버렸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용살섬이 닿기도 전에 용인화가 강제로 풀려 버렸다는 것 또한.

우연일까, 아니면 전부 계산된 행동일까.

그 의문을 풀고 싶었지만, 세렌은 서서히 자신의 시야가 꺼져감을 느끼곤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세렌을 내려다보며 연지는 몇 차례 숨을 고르더니, 품에서 포션 병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오래전 하천성이 몬스터 소굴에 자신을 던져둘 때 주었던 포션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는 종류였다.

그걸 쓰러진 세렌에게 적당히 뿌려 둔 연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끝났냐."

"뭐 하는 거야. 자기 딸 경기 안 지켜봐?"

퉁명스럽게 연지가 말하자 하천성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등 뒤에는 방금까지 흙빛으로 뒤덮여 있던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구름마저 모조리 사라져 새파란 창공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는 열 마리의 용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며 용의 위상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전설에서나 나오는 상위 십룡조차 하천성에게 전혀 상대가 못 되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 걸까.

하지만 그 의문도 얼마 안 갔다.

한계치까지 사용했던 몸이 비상벨을 울리듯 연지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 허옇게 질리는 시야 사이로 연지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목격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마자 연지는 소리치려 했지만,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입조차 벙긋거릴 수 없었다.

그걸 보며 하천성은 쓰러지는 그녀를 받고, 연지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황금색의 용포를 둘러 주며 말했다.

"너 스스로 용살탑에 오를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거다. 그만 쉬어라."

그 한마디를 끝으로 연지의 시야가 꺼졌다.

* * *

연지가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용포를 두른 채 녀석을 바닥에 눕게 해 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갈라진 하늘에서는 나도 조금은 따끔거릴 정도의 오러가 느껴졌고, 그 기운의 주인인 듯한 거대한 무언가가 열린 틈 사이에서 나를 엿보고 있었다.

"직접 내려와. 한판 하고 싶으면 해 줄 테니까."

하늘을 올려다보고 내가 말하자 우웅 하고 대기가 한차례 울렸다.

그리고 그 울림은 곧 언어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이것 봐라.

"네 녀석 사도에서 준성좌로 격이 올랐구나?"

핫 하고 가벼운 웃음소리가 나왔다.

난이도를 최상급으로 만들어 놨더니, 사도일 터인 녀석이 준성좌로 올라갈 줄이야.

30층에서 준성좌가 나온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지 않을까 싶은데.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전부 9번째 하계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9번째 하계, 아무래도 참가자들이 입장하는 순서대로 평행 세계에 하계가 생겨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느낌상 31층에 있는 드래곤 로드는 그런 하계들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 모양이었다.

재미난 상황을 관람하고 싶은 성좌들의 압박 탓에 9번째 하계는 최고 난이도로 변했고, 그 영향을 받아 드래곤 로드도 사도에서 준성좌로 등극하고 만 것이다.

아무리 준성좌라도 성좌다.

자신의 층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녀석이니 여러 가지 제약이 녀석을 옭아매고 있을 것이다.

진명이 없는 성좌는 자신의 층이 아닌 이상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니, 아이러니하게도 드래곤 로드는 제약에 의해 오히려 사도 때보다도 약해졌을 수도 있다.

"잘됐네. 딱 기다려. 꼬맹이 녀석이 드래곤 로드가 돼야 하거든."

나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내 목적은 다음 층에 가기 위함, 그러기 위해서라도 연지는 드래곤 로드가 되어 줘야만 했다.

그러니 그 목표 대상인 드래곤 로드는 연지가 쓰러트려야만 하는 적이었다.

그 적이 약해졌다는데 내가 기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이 일은 오히려 당신이 실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수?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드래곤 로드의 말이 돌아왔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모든 것은 31층에 오게 되면 알게 될 거라 말합니다.]

내 의문에 별다른 대답 없이 하늘이 닫혔다.

드래곤 로드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랄까, 굉장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런 예상은 항상 빗겨 나가지 않는 만큼 나는 한차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올라가 보면 안다. 이건가.

한 명도 남지 않는 경기장을 둘러본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연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경기장 밖으로 나오자 내가 쓰러트린 상위 십룡들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주변에는 그들이 쓰러지고 나서야 겨우 하나둘 사태 파악을 위해 경기장 근처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나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은 채 연지를 들고 드라고니스의 중심부 용살탑의 앞으로 향했다.

용살탑의 앞에 도착하자 내 앞을 가로막는 용족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전의는 전혀 없었고, 그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겨우 내 앞에 선 느낌이었다.

귀찮았기에 녀석들을 향해 오러를 방출하자, 그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고 나는 아무도 없는 용살탑의 입구 앞에 털썩 앉았다.

"일어났지."

내가 연지를 부르자 녀석이 용포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내일 네 생일이다."

그런 연지를 보고 나는 녀석의 생일을 언급했다.

내일은 7월 4일, 연지가 태어난 지 15년이 되는 해이었다.

"그리고 용살탑에 오를 자격이 되는 날이고."

그리 말한 내가 연지를 돌아보자 녀석은 용포를 풀며 말없이 내 옆에 앉았다.

그러면서 내가 올려다보고 있던 하늘을 따라 보았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은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천성, 내가 지룡천에 오르면 넌 어디로 가는 거야?"

"지룡천에는 나도 가야 하는데 뭔 소리냐."

31층에 오르려면 지룡천에 가야 한다.

그렇기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자 연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게 아니잖아. 넌 더 먼 곳을 보고 있잖아."

최근 들어 나에 대해서 안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들이 많아지고 있는 느낌인데.

"네가 알 거 없어."

"...."

냉정하게 대답하자 연지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러곤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지가 내게 조심히 물어왔다.

"...나도 같이 갈 수 있어?"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연지도 알 것이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그렇기에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꽤 커진 연지의 손가락이 내 옷깃을 살며시 잡았지만, 녀석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손길이 마치 쭉 자신과 함께 있을 거지라는 물음이 담긴 듯하여 나는 손을 들어 연지의 손을 떼었다.

그 순간 하늘에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자리했다.

"자식은 부모한테 독립해야 하는 법이야."

"내가 독립하는 게 아니라, 네가 떠나려는 거잖아."

"그게 그거지. 결국, 홀로서기 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와. 그게 부모든 자식이든."

그리 말한 나는 연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시간이 네게 곧 올 뿐이야."

"...있어야 할 때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으면서."

"그걸 갚으려고 열심히 놀아 줬잖냐?"

연지가 8살이 될 때까지 시간 생략을 했기에 녀석의 어릴 적 기억에는 내가 없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조금 씁쓸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이 층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방증이겠지.

떠날 시간이다.

이제는 31층을 클리어하고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

이야기에는 언제나 끝이 있는 법이다.

아무리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지더라도 끝에서는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다음 층을 향해 가야 하는 자의 숙명이다.

내 시야가 시간 생략 기능에 닿았다.

12시가 지나는 순간 연지는 15살이 되고 그 즉시 용살탑을 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12시로 시간을 바꾸면 보다 빨리 31층에 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시간 생략 기능에서 나는 눈을 떼었다.

결국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다.

'크라운 로드만이 영원히 5년의 세계 속에서 갇혀 있을 뿐.'

이곳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그렇기에 나는 연지와 함께 30층에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흐르는 걸 조용히 느꼈다.

* * *

12시, 별자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운 시간. 나와 연지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합니다. 9번째로 30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당신의 클리어를 아쉬워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클리어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도 직접 이동할 시간은 주겠다는 듯 즉시 이동 기능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연지를 힐끔 보았다.

그러자 내게서 받은 용살탑의 열쇠를 쥔 연지는 탑 앞으로 걸어갔고, 곧 그 열쇠로 용살탑의 문을 열었다.

나에 의해 1년 만에 열린 용살탑이 환한 빛을 쏟으며, 우리 앞에 계단을 드러냈고 나와 연지는 그걸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이 위가 그 유명한 지룡천이란 말이지?"

조금 기대된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연지의 말에 나도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크라운 로드의 본 시간대로라면 고작 하루지만, 30층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상당히 길었다.

드디어 한 층 또 클리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드래곤 로드 녀석이 했던 원망이 섞인 듯한 충고가 떠올랐다.

'난이도를 올린 것은 내 실수였다는 말.'

그 실수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지만 나는 고민을 뒤로한 채 마저 층을 올랐다.

몇 시간 뒤, 한참 층계를 오른 끝에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이 문은 용족만이 열 수 있는 문이다.]

그 순간 계단의 끝에 자리 잡은 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에 그려진 용인 듯싶었고, 내가 연지에게 눈짓하자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양팔로 연지가 문을 꾸욱 누르자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바닥이 구름으로 이루어진 도원향과도 비슷한 장소가 펼쳐졌다.

구름 위로 복숭아나무들이 수없이 자리한 걸 보며 연지는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었다.

"용들이 산다기에 삐죽삐죽한 산이 잔뜩 있을 줄 알았더니, 예쁜 곳이었네."

잠시 연지가 복숭아꽃을 구경할 동안 나는 눈앞에 떠오른 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31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 2부' 용들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 세계는 드래곤의 진정한 고향, 지룡천. 당신의 자식은 드래곤 로드의 최초의 시련을 이겨 내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련도 돌파하여 드래곤 로드에게 도전해 봅시다! ]

드래곤 로드에게 도달할 때까지 시련이 더 있다는 건가.

"거기 누구냐?"

조금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복숭아를 따고 있던 연지가 반응했고, 나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이 목소리는.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 복사꽃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미의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르며, 그 미를 이겨 내는 방식 또한 다릅니다.]

메시지가 떠오른 순간 내 시선의 끝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연지 또래의 15살로 보이는 남성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남성을 얼마간 보던 나는 눈가를 짚었다.

"꼬맹이, 내가 잘생기긴 했지만 떠올릴 남자가 그렇게 없었냐?"

74화

내가 메시지를 받은 것처럼 연지 쪽도 나와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듯싶었다.

그래서인지 연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왜!"

"뭐, 딸의 이상형은 아빠와 닮은 사람이라는 말도 종종 있긴 하니까."

"아니라고! 그딴 말 역겹거든?!"

거기에 서 있는 것은 15살 무렵의 나였다.

아직 앳됨이 묻어 나오는 내 모습을 보며 여러모로 잘 구현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연지가 씩씩거리며 검을 뽑았다.

"몰라! 이딴 시련 빨리 끝내 버릴 거야!"

그 순간 연지가 오러를 일으키며 15살 무렵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연지는 하늘을 날았다.

연지가 달려드는 즉시 반응한 사내는 녀석의 검을 받아 치더니, 그대로 복부를 걷어차 날려 버린 것이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복숭아나무 사이를 나뒹구는 연지를 보고 있으니 사내가 으르릉거렸다.

"갑자기 칼부터 들이밀다니. 죽고 싶지?"

말투까지 진짜 나네.

게다가 문제가 하나 있다.

'강하잖아.'

성좌의 힘으로 만들어졌을 테니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계가 구현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을 지닌 듯싶었다.

즉, 이 녀석은 지금 이 세계관 최강자다.

'연지 녀석이 날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지 잘 알겠구만.'

나는 그제야 미의 기준이 누구나 다르다는 말의 의미를 눈치챘다.

연지의 미의 기준은 강함이다.

그리고 그 강함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당연히 나였을 테고, 그 기준을 토대로 시련이 연지 속에 있는 나를 시각화한 것이다.

문제는 그게 최악의 수였다는 거다.

'이 시련, 드래곤 로드를 잡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냐?'

느낌상 이 녀석을 꺾어야만 이번 시련을 클리어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별천도를 뽑으려 하자 파츠츳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당신의 시련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알림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시련은 내 개입을 허용하지 않게 하고자 제약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의 시련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15년이나 들여 자식을 키우게 만든 게 이딴 이유였나.

이번 층은 전부 연지를 믿고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층이었다.

'짜증 나네.'

파츠츳 하고 또다시 스파크가 튀는 동안에도 내 몸에서 은은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스테이터스는 진작 성좌의 힘을 넘어섰다.

그런 만큼 이 층이 옭아매는 제약 따위 언제든지 박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 층에 영향이 갈 것이다.

내 오러를 느낀 탓일까, 연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내 사냥감이야."

어느새 연지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방금 복부가 걷어차인 주제에 사냥감이라고 이야기하는 연지를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곤 오러를 풀었다.

"이겨라. 저런 분신조차도 못 이겨서 되겠냐."

"시끄러. 저거 쓰러트린 다음은 하천성, 너야."

그리 말하며 연지는 검을 늘어트린 채 용인화를 발동했다.

전력을 내기 위한 용인화.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드래곤의 힘이 제약되는 하계에서와 달리 지룡천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다.

그렇다는 건 용족의 진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으니.

[뭔가 족쇄 하나가 풀린 기분인데.]

바로 연지에게 내포되어 있던 진정한 용족의 힘이 풀렸다는 뜻이었다.

등 뒤에 피막이 있는 붉은색의 날개와 함께 머리 위에 거대한 뿔이 생겨난 연지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며 놀라고 있었다.

상위 십룡과는 달리 인간의 모습이 다분히 남아 있는 연지의 몸에서는 이전보다도 훨씬 강대해진 오러가 피어올랐고, 녀석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충분할 거 같은데.]

용언을 터트리며 미소와 함께 연지가 바닥을 박찼다.

이전과는 훨씬 빨라진 속도로 날아간 연지는 15살 무렵의 나와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만큼 그 또한 전 속성의 오러를 뿜어냈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하연지 일식(一式)

뇌명발검(雷鳴俗劍)

게다가 연지가 보아온 나이기에 아무렇지 않게 내 검술마저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 맞서 내 검술을 개량한 연지의 검이 부딪쳤고 맹렬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아까까지 아무리 용족의 제약이 풀린 연지라고 할지언정 이기지 못할 것 같았던 15살 무렵의 내가 조금씩 기세가 꺾여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미의 기준이 연지에게 맞춰져 있다는 건.'

미의 기준을 측정한 연지의 생각에 따라 언제든지 그 상대의 능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저기서 날뛰고 있는 연지는 방금 풀린 제약 덕분에 나를 꺾을 수 있을 거라는 의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때릴까.'

나와 연지의 격차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고자 주먹이 자연스레 들어 올려졌지만, 나는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억눌렀다.

여기서 연지의 기세를 꺾어 버리면 내 분신이 다시금 최강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저 녀석이 내 분신을 쓰러트리고 나서 쥐어박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둘의 오러가 다시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서로의 전신에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뒤이어 도원향의 하늘 위에 새까만 구름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둘의 오러가 구름을 향해 뻗어져 나온 순간 섬광이 장소를 뒤덮었다.

구식(九式)

낙뢰(眞落雷)

하연지 십식(十式)

진 · 낙뢰(眞落雷)

분신의 낙뢰와 연지의 진 · 낙뢰가 장소를 일대를 소멸시켰다.

방금까지 우후죽순처럼 나 있던 복숭아나무들이 쓸려 나가고, 그 자리를 번개가 메꾸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연지만이 고고히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달뜬 미소가 그려져 있었고, 그 표정을 본 순간 창 하나가 떠올랐다.

[첫 번째 시련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연지의 앞에 또 다른 문 하나가 쿠웅 하고 내려왔다.

문을 본 연지는 나를 획 하니 돌아보더니,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눈을 반짝이었다.

나는 연지의 앞에 다가가 녀석의 머리를 쿠웅 하고 내려쳤다.

"악!"

"깝치지 마라."

어딜 내 앞에서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날 넘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각인시켜 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연지에게 문을 가리켰다.

"어서 문이나 열어라. 넘어가게."

"보통 이럴 때는 자식이 나를 뛰어넘었구나 하며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 분신 하나 잡았다고 날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뭣하면 한 대 더 맞을래?"

내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불만스레 볼을 부풀린 연지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더니, 우리는 또 새로운 장소에 와 있었다.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시련이 내려왔다.

그 이후 연지는 총 9가지의 시련을 클리어해야만 했다.

첫 시련 때와 같이 각종 귀찮은 종류의 시련이 계속해서 내려왔고, 그때마다 어떻게든 시련을 클리어해 나갔다.

그렇게 모든 시련을 클리어하는데 총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즈음.

마지막 문 앞에 도착한 순간 알림창 하나가 또다시 떠올랐다.

[모든 시련을 끝마쳤습니다. 드래곤 로드에 도전할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지막 시련을 떠올리며 지쳤다는 양 바닥에 주저앉은 연지를 보고 나는 문을 가리켰다.

"뭘 쉬어. 가야지."

"아무것도 안 했다고 쉽게 말하지 마. 일주일 동안 고군분투했거든?"

"네 시련이지. 내 시련이냐."

개입하려면 할 수 있지만, 연지의 시련이었던 만큼 나는 일주일 동안 쭉 손 놓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키워 온 녀석인 만큼 알아서 시련을 잘 클리어했고, 마지막 시련까지 무사히 완료해 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래곤 로드 후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튜토리얼 같은 거다.

진짜는 이 앞에 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투덜거리던 연지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문을 밀었다.

그러자 시련 때와 같이 환한 빛이 우리 두 사람을 감쌌다.

곧 눈을 떴을 때는 수많은 탑과 같은 건물들이 구름 위에 늘어서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이 진짜 지룡천, 드래곤들의 세계였다.

시선을 한 차례 돌리자 수많은 용족이 본래의 모습으로 여기저기 지나다니고 있었다.

방금 막 지룡천에 오른 우리를 신경 쓰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면 우리와 같이 지룡천로 올라오는 자들은 흔한 일인 듯싶었다.

"드래곤 로드는 어디 있을까?"

"금방 찾을걸."

신기한 듯 건물들을 둘러보는 연지의 말에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은 수많은 탑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탑에 꽂혀 있었다.

그 탑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기운은 준성좌의 것이라고 할 만한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다.

분명 저기에 드래곤 로드 녀석이 있으리라.

"...하천성?"

탑을 지켜보던 중, 내 옆을 지나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를 아는 듯 이름을 부른 녀석에게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성숙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여자가 서 있었다.

어린 얼굴에서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담한 키를 가진 그녀는 얼굴에 그려진 선홍색 아이라인이 눈에 띄었다.

"구천옥녀."

"네가 왜 여깄지? 보이지 않기에 우리보다 한참은 앞서갔을 거로 생각했건만. 이제야 31층에 올라올 줄이야."

그 말에 29층에 묶였던 일이 떠오르자 나는 혀를 찼다.

그 층만 아니었다면 나는 구천옥녀의 말대로 그들보다 더 빠르게 탑을 올랐을 것이다.

"누구야. 숨겨 둔 여자 친구야?"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눈치껏 빠져 있어라."

내 말을 듣고 연지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구천옥녀에게 물었다.

"그건 됐고. 네가 여기 있다는 건 검왕이랑 다른 녀석들도 아직 이 층에 머무르고 있다는 거로 봐도 되는 건가?"

"그렇다마는."

내 물음을 듣고 구천옥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내가 의문을 표하자, 그녀는 표정을 지우곤 말했다.

"이야기는 됐다. 어쨌거나 너도 31층을 클리어할 생각일 테니."

"그런데."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투로 녀석을 바라보자, 구천옥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숨을 깊이 내쉬더니 내게 다가섰다.

"하천성, 네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이라는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구천옥녀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이 층을 어서 빨리 클리어해 줘. 대협을 구해야 해."

"그건 뭔 헛소리야?"

누구한테나 고개를 숙일 녀석이 아니었기에 내가 더더욱 의구심을 보이자, 구천옥녀는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꾸욱 누른 채 한심스럽다는 양 숨을 내뱉었다.

"대협이 층에 먹혔다."

층에 먹혔다는 말을 쓸 때는 단 하나다.

성좌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층에 올라가기를 포기했을 때.

그리고 그건 대협이 곧 이 층에 남기를 택했다는 것이었다.

항상 검왕 내 뒤에서 너털웃음을 짓던 그를 잠시 떠올린 나는 눈살을 서서히 찌푸렸다.

"나한테 이걸 맡기려는 이유는? 너희들이 진작했으면 됐잖아."

"자신이 키운 자식이 드래곤 로드가 되는 마지막 방법은 봤겠지."

그 말에 나는 방금 봤던 창을 떠올렸다.

드래곤 로드에게 도전장을 내밀라는 말이었다.

"대협의 S급 클래스를 본 적 있나?"

있다.

이 녀석들 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최전선에 섰던 인간이니까.

대협의 또 다른 이명은.

성좌를 잡아먹는 자다.

75화

그 순간 나는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드래곤 로드 녀석이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한 것과 올라오면 알 수 있다는 것.

"대협이 드래곤 로드를 삼켰나."

"...그래. 어제 갑작스레 드래곤 로그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에 오른 순간 대협이 그를 삼켜 버렸다."

나는 쯧 하고 한 차례 혀를 찼다.

대협의 S급 클래스는 '성투전' 이라는 이름의 클래스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 클래스는 초기에는 층에 존재하는 성좌의 권능을 빌릴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독자적으로 거기에 몇 가지 클래스를 더 조합해 성좌의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기술로 개조한다.

이 클래스로 능력을 삼키면 다음 층에 넘어가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권능은 유지되었기에, 그는 황제 친위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자로 불렸다.

'그건 성좌가 그저 권능을 조금 빌려주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지. 성좌 본연의 힘 그 자체였으니.'

참가자들이 성장하면서 언젠가 성좌를 쓰러트릴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긴 하나 딱 거기까지다.

성좌는 하늘에 수놓은 별들만큼 수없이 많고, 참가자들이 쓰러트릴 수 있는 성좌의 수는 그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50층부터는 층을 하나의 성좌만 관리하는 게 아니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구천옥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15년은 길었어. 우리도 오랫 동안 크라운 로드를 올랐지만, 이번 층은 그중에서도 긴 편에 속했지. 그리고 그 기나긺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에는 충분했어."

"대협은 뭐가 목적인 거냐?"

"내가 타인의 과거사를 볼 수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이전에 이 녀석 덕을 봤으니까.

"대협의 과거사를 본 거냐."

"봤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남의 과거를 멋대로 보는 짓은 기분 나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사안이 있기에 나는 이야기해 보라는 양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목 주변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대협이 지구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자신의 딸 때문이야."

분명 크라운 로드에 들어오기 직전, 대협의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였다.

자식이 있어도 이상한 나이는 아니다.

"뭐야, 설마 이 층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딸과 똑같이 생겨서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흔해 빠진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흔히 있는 이야기다.

층에서 만난 자가 옛 연인이나 가족과 똑같이 생겨 층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러나 초입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회귀를 겪은 자들은 그것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 그것뿐이라면 괜찮았겠지. 하지만 그와는 다른 문제야. 대협은 크라운 로드에 소환되기 직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기 위해 버스에 타고 있었어. 그리고 흔해 빠진 이야기처럼 그 버스는 사고로 인해 전복되었지. 그 후, 버스에서 눈을 뜬 대협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앞에 내려앉은 철근이었어. 딸과 아내가 그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거든. 그런 앞자리를 완전히 뭉갠 거대한 철근과 그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핏물. 그것이 크라운 로드에 들어오기 전 대협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야."

그리 말한 구천옥녀는 고개를 들어 지룡천에서 가장 높은 탑을 바라보았다.

"대협의 딸과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몰라. 그래서 대협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줄곧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자 했는데. 하필 이 층에서 자신의 딸과 다시 만나고 말았어. 태어났을 때부터 그의 딸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단 한 번의 시간 생략 없이 15년 동안 키우고 말았다고."

애가 타는 듯 구천옥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구천옥녀가 가진 과거사를 들여다 보는 심안 클래스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님을 느꼈다.

그녀는 대협의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느낀 듯싶었다.

지난 회차 동안 수많은 참가자가 층의 이야기에 마비되어 그 세계에 빠지고 말듯이, 그녀 또한 타인의 과거사를 눈앞에 보고 그 기억에 몰입하여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다.

악당의 불쌍한 과거를 보게 되면 주인공의 권선징악이 썩 달갑지는 않듯이, 때로는 알지 못하기에 쉽게 다짐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대협의 딸은 6살이었어. 이 층에서 태어난 그의 딸은 지금 15살이 되었고."

죽었을지도 모를 딸이 커가는 미래를 봐 버린 아버지.

그것이 현재의 대협이었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한 뒤에 그에게 돌아올 것은 무엇일까.

사고로 인해 죽은 딸과 아내의 소식일까, 혹은 둘 다 무사하다는 희소식일까.

모른다.

그것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전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협은 황제의 친위대에 들어가 최전선에 섰다.

그 진실을 확인하고자.

그러나 30층에서의 15년은 그런 대협의 의지를 좀 먹은 모양이다.

미세하게 벌어져 있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발을 붙잡아 버린 것이다.

"준성좌를 삼켜 버린 대협을 우리로는 이기지 못해. 이전 층에서 15년이나 있었던 만큼 각자 성장했지만, 대협도 그만큼 강해져 버렸으니까. 그래서 하천성 네게 부탁하는 거야."

구천옥녀의 눈이 불안한 듯 흔들렸다.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던 그녀가 보인 행동에 나는 코웃음 치고 말았다.

'깜빡 속을 뻔했구만.'

구천옥녀는 지금까지 8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살아온 베테랑 회귀자다.

그런 그녀가 과거사를 직접 체험하고 감정 소모를 겪는다?

물론 겪기야 하겠지.

하지만 닳고 닳은 그 감정이 이제 와서 조금 감정을 소모하는 것 정도로 저만큼 불안해 보일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이미 내 앞에서 한 번 심안 클래스를 사용한 적 있었으니까.

28층에서 화초선의 과거사를 봤던 구천옥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었다.

그녀 또한 대협만큼이나 잔혹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잖은 신파 연기는 그쯤 하지? 그냥 솔직해지자고."

내 반응을 봤기 때문일까. 눈을 한 차례 떨고 있던 구천옥녀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곤 귀찮은 표정으로 검지로 입가를 꾹 누른 채 나를 쳐다봤다.

"좀 쉽게 말려들어 주지 그래? 그래도 꼴에 회귀자라 이거야?"

"넌 오늘부터 회귀자를 그만두고 싶나 보지?"

위협 섞인 내 말에 구천옥녀는 쀼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옆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쓸어 넘겼다.

구천옥녀를 보고 있던 나는 드래곤 로드가 있는 탑을 가리켰다.

"그래서 너희들이 직접 대협을 어쩌지 못한 진짜 이유나 말하시지?"

아무리 준성좌를 삼킨 대협이라고 할지라도 황제의 친위대로 최전선에 섰던 검왕 일행이다.

그들 전부가 힘을 합친다면 대협을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텐데 나에게 맡긴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너도 짐작은 했잖아. 간단해. 층의 제약이야."

역시 그건가.

"드래곤 로드에게 도전할 수 있는 건 네 뒤에 있는 아이처럼 우리가 30층에서 키워 온 자식들뿐이야. 그리고 준성좌를 삼킨 대협은 우리의 아이들로는 도저히 이기지 못해. 기껏해야 오러를 다룰 뿐이니까."

골치 아픈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연지와 같은 용족과 우리의 차이는 단순하다.

그건 바로 클래스의 유무다.

내가 모든 것을 해치울 수 있는 능력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일성에게 목이 베였던 적이 있듯이 이들도 마찬가지다.

클래스를 가진, 그것도 클래스를 다루는데 닳고 닳은 회귀자라면 더더욱 이길 가능성이 작다.

"대협이 용들의 군주를 삼킨 이상 지금 드래곤 로드는 그야. 층에 제약이 있으니 우리는 그에게 가해를 가하지 못해."

"나라고 다를 것 같냐?"

"다르겠지."

단언한 구천옥녀는 핫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너 능력치를 한계까지 돌파했잖아."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내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눈치챘나.

아니, 지금까지 이 녀석들 앞에서 힘을 보여 준 적이 꽤 있었지.

회귀자로 살아온 이들이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하다.

999레벨의 황제의 힘을 바로 옆에서 봐 온 이들이니 그와 비교해 결론을 내린 거겠지.

"당연히 이미 31층 성좌의 힘은 진작 넘겼을 거니까. 층의 제약은 결국 성좌가 거는 것. 그보다 강해진 네게 층의 제약은 이미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층의 제약은 언제든지 박살 낼 수 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층이 무너진다. 층에는 나름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평소에는 일단 막무가내로 부수고 보던 단순무식한 녀석이 이럴 때는 왜 신중해?"

"신중할 수밖에. 층이 무너지면 다음 층으로 못 간다는 소리니까. 구천옥녀, 솔직하게 굴자고. 지금 네 목적은 층의 클리어가 아니라 나를 이용해 대협을 구하고 설득하여 이번 층을 다시 도전할 속셈이잖아?"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 말에 틀린 점은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대협의 과거사에 빠져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녀는 자신과 함께해 온 동료들을 매우 아낀다.

그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층의 클리어보다는 동료와 함께하기를 택하는 것이 구천옥녀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은 층의 클리어다.

"난 이번 층을 다시 할 생각 없어."

"그럼 어쩔 건데. 네가 키운 아이가 대협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대협은 강해. 괜히 황제와 함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아니라고."

"아니, 이길걸."

나는 멀뚱멀뚱 우리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연지를 돌아보았다.

"내가 키운 녀석 좀 쌔거든."

"...너도 딸 바보가 된 거야?"

"헛소리 말고 지금 대협이 키운 녀석은 어디 있어. 너희들이 데리고 있지?"

이 녀석들도 바보는 아니다.

대협에게 가장 중요한 카드일 터인 그의 딸을 대협에게 어떻게든 빼 왔을 것이다.

내가 다 알고 있다는 듯 구천옥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우리가 데리고 있어. 지금쯤 검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야."

"그럼 그 애 나한테 넘겨."

"어쩌려고?"

"검왕 성격상 대화로 어떻게든 대협을 설득시킬 속셈이지."

그 여자는 너무 착해 빠졌다.

최전선에 선 인간들은 대부분 감정이 닳아 버리는데도 아직까지 그 성격을 유지하는 그녀는 천성이 크라운 로드와 안 맞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정곡을 찌르자, 구천옥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검왕의 그러한 점은 구천옥녀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아니, 넘길 필요도 없어. 그냥 내가 납치할 테니까."

"그 아이로 협박이라도 할 속셈이야?"

"잘 알고 있네. 눈앞에서 딸 팔다리라도 잘라 주면 정신 차리겠지."

내 말을 듣고 구천옥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옅어졌다.

마치 지금까지 봐온 녀석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양 차갑게 식은 눈동자였다.

"...결국 너도 회귀자구나."

"당연한 소리하지 마."

"검왕 녀석에게 너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말해야겠네."

그녀가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

내게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구천옥녀는 말없이 내게 대협의 아이와 검왕이 있을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대협은 구해 주지. 그 뒤에 대협의 정신 캐어는 알아서 해."

그리 말한 나는 멀어져 가는 구천옥녀의 시선을 뒤로하고 장소로 향했다.

그런 내 뒤를 연지가 졸졸 따라오다가 내 옆에 서더니 입술을 열었다.

"정확히는 잘 몰라도 다른 방법이 있는 거지?"

"시끄러워."

76화

"내가 아는 하천성은 입이 험하고 행동은 거친 데다가 머리는 바보여도 이상하게 진심으로 모질게는 못 대하던데."

나는 연지의 머리를 한 차례 내려쳤다.

그러나 연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거렸다.

젠장, 망할 층, 빨리 클리어해 버려서 이 녀석을 영원히 보지 않든가 해야지.

역시 30층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하며 나는 구천옥녀가 말해 준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한 탑이 있었다.

탑은 마치 백화점처럼 여러 물건들이 창문 너머에 전시되어 있었고, 나는 그걸 본체만체 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외부도 그러했지만, 내부는 정말로 백화점과 똑같았다.

여기저기 용족으로 보이는 자들이 쇼핑을 하고 있었고, 그들을 맞이하는 점원도 같은 용족들이었다.

내부를 흥미 없이 둘러보던 나는 에스컬레이터에 시선이 향했고, 이내 연지와 함께 그걸 타고 올라갔다.

"신기하다. 이거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이래서 촌놈들은."

"내가 촌놈이면 내 아빠도 촌놈인데."

"아, 그래? 그놈 참 딸 한 번 바보같이 키웠네. 나였으면 이렇게 안 키웠는데."

"맞아. 날 바보같이 키운 바보지."

참지 못한 내가 검을 빼 들려 하자, 연지도 검을 뽑으려 했다.

참 곱게도 자랐다. 좀 더 어릴 때부터 두드려 팼어야 했는데.

"하천성?"

오늘 참 여럿에게 이름 불린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옮기자, 거기에는 검왕이 서 있었다.

여전히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는 나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천옥녀한테 소식을 듣고 왔다. 대협의 딸은 어디 있어?"

"호핫, 하천성 씨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카페 한구석에서 열심히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마술사가 보였다.

언제나 싱글벙글은 그를 보고 시선을 옆으로 옮기자, 거기에는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네 명의 용족이 앉아 있었다.

넷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곧 그들이 검왕네가 키워 온 자식들임을 눈치챘다.

'한눈에 보아도 누가 누구 자식인지 알겠군.'

넷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그 부모를 똑 닮아 있었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정작 크라운 로드 시간으로는 얼마 안 되었을 텐데?"

"30층에서 15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럼 오랜만인 셈이죠."

마술사의 대답에 나는 혀를 찼다.

역시 이 녀석들 모두 15년을 고스란히 보내며 30층에서 성장해 온 모양이었다.

회귀자들은 이미 한 번 고레벨 대를 찍어 본 만큼 자기만의 성장 방식을 다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보다 하천성, 구천옥녀한테 듣고 왔단 건...."

"대협이 드래곤 로드 녀석을 삼켰다고 했잖아. 그걸 해결하려고."

"...어떻게?"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넘기려고 했지만, 과연 검왕도 회귀자인가.

그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나를 직시했다.

검왕도 알고 있는 것이다.

대협의 일을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카드는 대협의 딸이라는 것을.

"하천성,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만 이번 일에 가장 쉬운 해결법을 알아. 그리고 당신이 크라운 로드를 어떻게든 클리어하고 싶은 것도."

최단으로 클리어할 방법을 지금 택하려는 게 아니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검왕을 돌아보았다.

구천옥녀는 내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협의 딸을 이용해 대협을 협박하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납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런 행위를 하는 즉시 내게 학을 떼겠지만.

하지만 검왕과 구천옥녀는 다른 사람이다.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이해하더라도, 또 다른 이는 납득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를 막겠다고?"

내 몸에서 오러가 번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오러가 주위를 잠식하기 시작하자, 카페에 있던 용족들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왕을 똑바로 직시하였다.

검왕은 성장했다.

대충 보아도 내가 30층에서 기른 연지보다 강하다.

그야 그럴 것이다.

이전 회차에서 그녀는 나보다 훨씬 높은 레벨을 가진 채 황제 친위대로서 크라운 로드를 공략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전보다 아무리 강해진 그녀라도 서로의 스텟 차이는 어마무시하다.

그리고 이 벌어진 간극은 그녀가 크라운 로드에서 5년을 전부 보내더라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검왕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오지랖 괴물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절대로 대협의 딸을 넘기지 않을 속셈이었다.

'내가 자길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건가.'

나를 믿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하는 건지.

어느 쪽 방향이어도 무모하다고 생각한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있어. 딱히 누군가가 희생될 필요 없는 방법이."

하지만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검왕의 눈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 알았어."

"넌 대체 내 어디를 믿는 거냐? 그냥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할 거란 생각은 안 해?"

"회귀자는 다들 거짓말쟁이지만, 당신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 싶어 하잖아."

기껏해야 이번 회차에서 겨우 나를 알게 된 여자가 왜 이렇게까지 날 신뢰하는 걸까.

참, 이해 못 하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돌렸다.

"됐다. 대협의 딸은 내가 데려간다."

그리 말한 나는 검왕을 지나쳐 마술사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아까 말했듯이 그들이 키운 자식들이 4명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 대협과 가장 닮은 딸 앞에 다가섰다.

"네가 대협의 딸이지. 따라와 줘야겠다. 대협, 녀석을 구하는 데 네가 필요하거든."

내 말에 대협의 딸은 잠시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를 구할 수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아니, 애초에 이 녀석.

"...네 아버지가 제 뜻으로 움직인 걸 자신이 방해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지?"

대협과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곧 스리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아빠가 한 일 인걸요. 전 아빠의 뜻을 존중해요."

"그게 널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이냐."

눈살을 찌푸린 나는 짜증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도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듯 내게 말해 왔다.

"아빠는 늘 불안해했어요. 제가 용살탑에 오르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고, 또 고민했어요. 그러면서도 저한테 혹여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나서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셨죠. 제가 아빠의 뜻을 저버리고 당신과 함께 갈 이유가 있나요? 그게 아빠가 바라는 일이 아닐 건 데도요?"

그녀의 눈에는 진한 고집이 느껴졌다.

15년간 함께 살아온 대협은 자신이 더 잘 안다는 듯.

갑자기 나타난 네가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마술사나 검왕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대협의 딸을 붙들고 있을 뿐, 그녀는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대협은 줄곧 자신의 아이에게 말해 온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 그리고 그 끝을.

"아빠는 저를 사랑해 주셨어요. 아빠는 세상 어느 누구 보다 좋은 사람이에요. 전 그런 아빠한테 키워진 딸이에요. 절 그토록 사랑해 준 아빠가 한 일이 모두 저를 위한 거라는 것도 알고요. 아빠가 제게 부탁한 마지막 말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이었어요."

"그건 그냥 무책임한 말일 뿐이다."

"무책임하지 않아요. 이건 제 행복을 바라는 말이었으니까요. 그걸 당신이 비난할 이유는 없어요."

힘을 써야 하나.

대협의 딸은 암만 보아도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냥 기절시켜 데려가는 게 더 현명하지 않나.

"정말 꽉 막혔네요. 그 나이 먹고 아빠, 아빠 부끄럽지도 않으신가요?"

그런 순간 옆에서 느긋이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자애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구천옥녀의 아들로 보이는 그는 힐난하는 눈으로 대협의 딸을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를 보자 히죽 웃었다.

"어린애 짓도 정도 것이죠. 자식은 언제나 부모의 품을 벗어나야 합니다. 아빠의 마지막 말이라니, 정말 고리타분한 머릿속이네요."

"당신,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자신과 남의 고민의 무게가 같으리란 법은 없어."

그러자 이번에는 검왕의 딸이 대협의 딸 편을 들어주었다.

역시 오지랖 넓은 건 유전인 듯싶었다.

"호핫, 다들 참 쓸데없는 고민이네요. 어차피 그렇게 고집부려 봤자 저분이 곧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갈 게 뻔한데 말이죠."

그 와중에 마술사와 똑같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낸 그의 아들이 상황 파악을 하며 이야기했다.

기절시킬 거란 말에 대협의 딸이 내게 경계의 눈빛을 띄우자 나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 말 대로야. 난 널 기절 시켜서라도 데리고 갈 거다. 그러기 싫으면 제 발로 따라와."

"하천성, 머저리."

본격적으로 협박을 하려던 순간 연지가 내 발목을 걷어찼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녀석의 발차기를 맞은 나는 연지의 이마를 내려쳤고, 이마를 감싸고 있는 연지에게 말했다.

"뭔 짓이야?"

"너야말로 협박해서 어쩌자는 거야. 하여튼 어른들은 저기로 빠져 있어."

자기가 해결해 보겠다는 양 손을 휙휙 휘젓는 연지의 모습에 나는 잠깐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다는 건가.

확실히 애들은 애들끼리 잘 어울리게 되는 법이긴 하다만.

하는 수 없이 애들 사이에 껴서 차를 마시고 있던 마술사를 끌고 나온 나는 미리 다른 자리를 잡은 검왕 앞에 있는 의자를 빼 앉았다.

"골치지. 애들은."

미소 지은 검왕의 말에 나는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뒤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갑자기 부모가 된 척하지 마. 그래봤자 다음 층에 가면 다 사라질 녀석들이라고."

"그런 것 치곤 하천성, 당신도 저 애와 아주 많이 친해진 것 같던데."

"네 눈이 이상한 거겠지."

내 말을 듣고도 검왕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땠어. 그동안. 힘든 일은 없었고?"

"너 좀 이전보다 나이 든 말투다?"

"나이는 늘 먹어 가고 있는걸. 몸만 이전으로 돌아갈 뿐."

검왕은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크라운 로드에 소환됐다.

그녀도 이전 층에서 시간 생략 기능을 많이 사용한 듯 그다지 많은 세월을 보내지 않은 듯싶었지만, 지금 외형은 20대 중반은 되어 보였다.

"당신은 환골탈태했지. 부럽네. 피부 엄청 좋아 보여."

"부러우면 너도 해. 어차피 4년 뒤면 다시 20살로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외모를 가꾸는 게 별 의미 없게 느껴져."

그리 말하고 있지만, 안 가꾼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검왕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기품과 아름다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크라운 로드에 들어오기 전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대쉬를 했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그다지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를 보고 그저 아름답다고 느낄 뿐.

크라운 로드를 반복하며 나 역시도 조금씩 사람으로서 마모되어 가고 있어서인지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젠장, 정신적으로 고자라도 된 기분이잖아. 엿 같네.'

어서 빨리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해서 좋은 여자를 만나 사귀지 않고서는 이 상태가 안 끝날 거라 생각한 나는 혀를 찼다.

77화

"너 아직도 안 가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순간 마침 돌아온 구천옥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어서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내게 핀잔을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나는 뒤를 가리켰다.

"설득 중이다."

"설득해서 뭐 하게. 어차피 기절시켜서 데려갈 거 아니야?"

구천옥녀랑 내 사고는 꽤 비슷한 건가.

괜히 기분 나쁜데.

"방법이 있다고 해서."

"방법이라고?"

검왕의 말에 구천옥녀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자기들이 해결했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설명해 줄 이유는 없을 텐데?"

"나도 네가 딱히 그럴 거라고도 생각 안 했어."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궁금하다며 숨기지 말고 말해 달라 합니다.]

그 순간 별천도가 우웅 하고 한 차례 울렸다.

그 소리에 검왕과 마술사, 구천옥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자,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러졌다.

"별천도."

['별천도'가 울상을 짓습니다.]

"하천성 씨, 벌써부터 배후성을 얻으셨습니까?"

"아니, 그 녀석들이 멋대로 눈 하나 달아 놨을 뿐이야."

이것만큼은 자기도 놀랐다는 양 반응하는 마술사의 놀란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정정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구천옥녀가 별천도를 내려다보았고, 그녀는 곧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손으로 입가를 눌렀다.

"그렇구나. 그럴 생각이었나."

"그럴 생각이었다니?"

검왕이 의문을 보이자 구천옥녀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직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줄 알았더니 생각이 있긴 했나 보네."

"시끄러워."

멋대로 남의 계획을 눈치채 놓고 아는 척하는 구천옥녀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자, 검왕이 의아하다는 투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중에 너한테 좋은 검이라도 하나 선물해 줘야겠네."

키득거리는 구천옥녀를 보고 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눈치 빠른 회귀자 녀석. 나 혼자만 회귀했으면 좋았을 텐데.

"끝났어."

그렇게 잠시 눈을 반짝이는 셋을 노려보고 있을 즈음, 나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연지가 서 있었고, 녀석의 뒤로 대협의 딸이 보였다.

"아링이가 도와주겠대."

통성명까지 했나.

아까까지 그렇게나 경계해 놓고 연지의 설득에 넘어오다니.

'이 녀석, 바보라서 설득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지를 보고 있자 그녀는 '속으로 내 욕했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정정하지 않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협의 딸 앞으로 다가갔다.

"돕겠다는 건 진심이겠지."

"...당신을 도우려는 게 아니에요. 제 아빠 때문이니까요."

이유가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곧바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은 나는 내 쪽을 돌아보고 있는 셋에게 말했다.

"너흰 미리 작별 인사나 준비해. 그리고 따라오지 마라. 방해된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연지와 아링을 데리고 백화점을 나와 드래곤 로드의 탑을 향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임에도 상당히 친해진 듯 두 사람은 재잘거리면서 내 뒤를 따라왔고, 우리는 얼마 안 가 드래곤 로드의 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탑은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은은한 오러가 둘려 있었다.

하지만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는 곧바로 오러를 손으로 찢으며 탑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내가 안으로 들어온 순간 탑 내부에서 경보음이 거칠게 울렸다.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탑을 지키던 용족들이 뛰어 내려오기 시작하자, 나는 검을 빼 들려는 연지에게 손짓해 멈추게 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 순간 내 몸에서 흘러나온 오러가 탑을 뒤덮었다.

내 뒤에 서 있던 연지와 아링은 오싹함을 느낀 듯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에 그쳤지만, 정면에서 달려오던 용족들은 모조리 바닥에 쓰러졌다.

"뭘, 뭘 하신 거죠?"

"그냥 오러로 위협한 거다."

그리 말하는 동안 내 몸에는 옅은 츠즈즛 하고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드래곤 로드의 탑을 습격한 것이 연지가 아닌 나였기에 층의 제약이 휘감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약 한 마리씩 때려잡았다면 본연의 힘을 쓰지 않고서는 제약에 묶여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으리라.

"올라간다."

쓰러진 용족들을 지나쳐 우리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로 계속해서 이어진 계단은 용살탑보다 높았다.

나는 탑을 오르는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낌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 연지와 아링도 침묵한 채로 뒤따랐다.

이윽고 우리는 탑의 맨 꼭대기에 도착했다.

계단의 끝에는 붉은색의 문과 용의 현상을 한 문고리가 웅장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문을 잠시 바라본 나는 연지를 돌아보았다.

"꼬맹이."

"응."

내 부름에 연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잠자코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앞에 드래곤 로드가 있다."

"알아."

"...넌 드래곤 로드랑 싸우지 못할지도 몰라."

연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내 계획대로 한다면 연지는 드래곤 로드와 싸울 이유가 없어진다.

그것은 내가 여태껏 그녀에게 심어 주었던 목표가 아무런 가치도 없어졌음을 뜻했다.

"그래서 뭐?"

들려온 연지의 목소리는 태평했다.

마치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다는 양.

"어차피 너보다 약할 거 아니야. 강해지고 싶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지 딱히 난 드래곤 로드가 되고 싶어서 노력한 건 아니거든?"

싱겁게 웃음 지은 연지를 보고 나는 긴말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연지의 말에 대답한 나는 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쿠웅 하고 문을 밀자 자욱한 연기가 한 차례 주변을 메웠고, 그 안개가 사라지니 드래곤이 똬리를 튼 듯한 왕좌가 눈앞에 보였다.

널따란 광장을 어둑하게 만드는 은은한 빛의 조명 아래 자리한 왕좌의 위에 앉은 한 남자는 마치 잠이라도 든 양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대협."

[준성좌 '용들의 ―주' 가 천천히 눈을 뜹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대협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샛노란 눈동자로 주위를 직시했다.

단지, 행위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내 등 뒤에 있던 연지가 숨이 막힌 듯 목가에 손을 올렸다.

녀석 나름대로 대항하듯 오러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기절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게 전부였다.

준성좌.

비록 반 푼이 성좌라 할지라도 성좌는 성좌다.

층의 주민에게는 아득한 신의 영역인 그들은 눈짓 한 번으로 층의 주민을 지울 수 있는 자들이다.

[하천성.]

그렇게 이름을 부른 순간, 준성좌의 오러가 내 몸을 덮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육체에 뚫린 모든 곳에서 피를 쏟고 쓰러졌을 차원이 다른 오러의 격이었지만, 나는 그 기운을 귀찮은 듯 손을 휘저어 털어 내었다.

"거치적거리니 성좌의 목소리를 빌려서 말하지 마. 그냥 네 입으로 말해라. 대협."

[미안하군.]

"지금의 내 몸으론 아직 조절이 미숙한지라."

겨우 성좌의 목소리를 거두고 사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대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9번째 하계는 잘 보았네. 대단하더군. 성좌가 낼 수 있는 최상위 난이도에서도 자네는 강했지. 상위 십룡을 쓰러트리던 모습은 경악스럽더군."

그 무렵 대협은 아직 드래곤 로드를 삼키기 전이었을 텐데도 보았다는 듯이 말하는 건 기억을 이어받은 거겠지.

하지만 그게 완전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네 녀석 아직 용들의 군주 녀석을 다 삼키지 못했군."

"맞네. 내가 한 일 또한 층의 규율을 어기는 짓이니, 제약이 묶여 있어서 말일세."

[준성좌 '용들의 ―주'가 미소를 짓습니다.]

녀석의 말대로 대협의 성좌의 수식언은 아직 제대로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약은 점점 줄고 있네. 얼마 안 가서 제대로 수식언을 붙일 수 있겠지."

"그딴 짓을 했다간 영원히 이 층에 묶일 걸 알고도 그러는 거냐?"

50층 이후의 진명을 가진 성좌와 진명을 가지지 못한 성좌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다.

진명을 가진 성좌는 어느 곳이든 자기 마음대로 개입 가능하며 오갈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능력이다.

그러나 진명이 없는 성좌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관리하는 층에 묶여서 산다.

진명을 얻기 전까지 그들은 평생토록 자신의 층에 평생토록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층에서 태어난 준성좌들도 같다.'

이전 회차에서 대협은 그들의 권능을 탐하여 이용할 뿐 성좌 그 자체가 되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즉시 해당 층에 갇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대협은 완전히 성좌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로 이 층에 영원히 머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회귀자들은 원래 다 또라이지만, 넌 그중에서도 심하네."

혀를 찬 나는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다. 대협, 거래를 하자."

"거래라면?"

그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치, 뭘 말할지 알고 있다는 양.

그의 반응을 보고 한 차례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별천도에는 성좌들의 눈이 달려 있다. 준성좌라 할지라도 성좌, 층이 클리어된다고 해서 층의 주민들처럼 기억이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아."

아링이 어딘가 불안한 듯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지금이라도 용들의 군주 녀석을 풀어 주고 네 딸에게 드래곤 로드를 잡게 해. 그렇다면 네 딸은 드래곤 로드가 되어 준성좌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별천도는 너에게 주지. 그렇담 네 딸과 언제든 연락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 말이 내뱉어진 순간 아링의 입에서 체념한 듯한 탄식이 이어졌다.

"...그걸론 안돼요."

아링의 목소리에 내가 그녀를 돌아본 찰나.

[준성좌 '용들의 ―주'가 아쉬움이 담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대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왜 그딴 엿 같은 표정 짓고 있냐."

괜스레 바보가 된 기분에 내가 대협을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왕좌의 몸을 깊게 기댄 채 내 물음에 대답을 해 주었다.

"이 층은 앞으로 영원히 클리어되지 않을 걸세."

'영원히'라는 말을 듣고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5년이 지나면 어차피 모조리 초기화야."

크라운 로드는 5년마다 과거로 돌아간다.

그 사실은 대협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원히'라는 말을 그리 쉽게 담다니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하지만 내 지적에도 대협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하천성, 자네는 완전히 성좌가 된 참가자를 본 적 있나?"

없다.

그런 미친 짓을 할 녀석은 없었으니까.

"크라운 로드의 1층의 성좌 '조소하는 신데렐라'는 성좌변동이 일어났음에도 아직도 자신의 층을 유지하고 있었지. 모든 기억을 간직 한 채로."

"...그 녀석이 진명을 가진 성좌라는 건 잊은 모양이지? 네 녀석은 일개 준성좌를 삼켰을 뿐이야. 진명 없는 녀석 중에서도 최하위라고."

"걱정하지 말게. 다음에 삼킬 성좌는 정해져 있으니까."

[준성좌 '용들의 ―주'가 '31층의 주인'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놈은 단단히 미친 새끼였다.

78화

"층의 시간 만큼은 성좌의 뜻대로 흐르니 괜찮은 생각 같지 않나?"

"그런 짓을 했다간 네 딸이 죽어도 너 혼자만 영원히 살아갈 거다."

층의 주민과 달리 성좌에게 수명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도 그런 짓을 할 거냐는 물음에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괜찮네. 적어도 내 딸이 살아 있을지 죽었을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한 인생이지 않겠나? 그걸 위해서라도...."

대협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에게서 흘러나온 바람 속성의 오러가 주위를 마구잡이로 찢어발기며 잠식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치켜올린 그의 손에 준성좌급 오러가 맺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크라운 로드는 클리어되어서는 안 되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네놈이 야신 새끼들이랑 뭐가 다르냐!"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부정하지 않겠네. 하지만 이게 내 선택일세. 자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진 않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양보할 생각은 없네."

그러나 대협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을 내렸다는 양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까득 이가 갈렸다.

검왕 녀석들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을 구하려고 하다니 이해가 안 갔다.

'아니, 구하지 못한 게 맞겠지.'

수식언이 다 채워졌다면 진명도 없고 층 또한 없는 대협은 오히려 약해졌을 것이다.

층을 지배하는 성좌가 있는 이상 준성좌는 멋대로 힘을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녀석은 아직 수식언을 전부 채우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대협은 제약 없이 자기 힘을 전부 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썩을, 반대로 수식언을 다 채우는 순간 저 녀석은 그 즉시 제약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31층 성좌부터 집어삼킬 거다.'

그랬다간 훨씬 더 최악의 꼴이 나겠지.

'구천옥녀 그 여자, 분명히 여기까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그걸 알고도 날 여기로 보냈다는 것은 계획이 실패하면 결국 크라운 로드 클리어를 위해서라도 층을 부순다는 선택지를 택할 것까지 계산한 걸 거다.

대협이 층의 주인이 되는 것만큼 최악인 상황은 없으니까.

구렁이 같은 여자 같으니라고.

"...그래서 제가 따라오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아빠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입술을 깨문 채 아링은 대협에게서 눈을 돌렸다.

자신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인 대협이지만, 본인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에 허망한 감정을 느끼는 듯싶었다.

"꼬맹이!"

준성좌의 오러에 잠식된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오러를 힘껏 담아 외쳤다.

그러자 한순간 우리 주위에 대협의 오러가 깨져 나갔고 연지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나는 층의 제약 때문에 대협 녀석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내가 층의 제약을 무시해 버린다면 그 즉시 층은 붕괴되기 시작할 거다.

그렇다고 아링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아빠에게 대항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싸울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다.

"결국 드래곤 로드를 쓰러트릴 녀석은 너인 모양이다."

내 말을 듣고 한 차례 눈을 깜빡인 연지는 곧 실소를 흘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나한테 맡기지 그랬어?"

그러면서도 연지의 표정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방금까지 준성좌급의 오러에 휩싸여 옴짝달싹도 못 했던 녀석이건만, 언제 그랬냐는 듯 지금은 웃고 있는 것이다.

"받아라."

나는 연지에게 별천도를 던져 주었다.

내게서 검을 받은 연지가 그걸 내려다보자 별천도에서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별천도에는 진명을 가진 성좌부터 최상위 성좌까지 수많은 녀석이 흥미를 위해 눈을 달아 두었다.

비록 그들에게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이겠지만, 이것도 성좌의 힘이다.

그 기운이 서린 별천도는 준성좌에게 맞서기에 절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손에 용천성의 용포가 나타났다.

이어서 황금색의 용포가 연지의 어깨 위에 둘리자, 별천도를 쥔 채 연지는 대협을 향해 맹렬히 투지를 불태웠다.

내가 이 녀석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다.

"이겨라."

내 말을 듣고 별천도를 꾸욱 쥔 연지는 눈동자를 빛냈다.

"난 지금까지 진 적 없어."

그 순간 연지의 몸에 낙뢰가 떨어졌다.

대협을 상대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함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어이, 대협 딸."

연지의 전신에서 치솟는 전 속성의 오러를 보며 나는 아링을 불렀다.

그러자 힘없이 아링이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그 녀석에게 말해 주었다.

"네가 말했지. 네 아빠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그리 말한 나는 이제는 많이 커버린 연지를 보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잘 봐 둬라. 정말로 없는지."

그리고 연지가 세상을 박찼다.

* * *

번개와 바람이 소용돌이쳤다.

서로를 집어삼킨 두 오러는 엉겨 붙으며 주위를 모조리 박살 내고 있었고 어느새 이곳을 가리던 천장은 오래전에 날아가고 없었다.

탑의 일부가 무너지며 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이 장소에는 닿지 못한 채 흩어져 사라졌다.

서로의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이 교차하며 스쳐 지나갔다.

한쪽은 권격을 휘두르고 있는 대협.

다른 한쪽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연지였다.

발과 양손에 바람 속성의 오러를 두른 대협은 그야말로 권신이었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고 어떠한 공격에도 튕겨 내는 바람의 망토는 그의 공격을 자유자재로 펼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대협을 상대로 연지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전력을 다한 전 속성의 오러가 사방으로 터져 나오며 매섭게 바람을 쫓아냈다.

마치 폭풍우가 치더라도 사람들은 천둥소리에 더 화들짝 놀라듯.

그녀는 폭풍 속에서 번개를 미친 듯이 쏟아 내고 있었다.

별천도가 전 속성의 오러를 받아 한없이 빛났다.

성좌들에 의해 성검이 되어 버린 별천도는 준성좌의 오러마저도 서슴없이 베어 나갔다.

그렇게 주먹과 검이 부딪친 순간 그 파장으로 일대가 또 날아가 버렸다.

이제는 탑이 완전히 무너져 주변이 초토화되었으나 두 사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언뜻 번개 사이로 핏물이 튀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바람 사이로도 핏물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모여든 주위 사람들이 멍하니 세계를 멸망시킬 것 같은 전투를 지켜보았다.

폭풍 속에서 녹색 빛의 용이 나타났다.

그에게서 일어난 바람은 쏟아진 번개를 더더욱 압박했다.

그에 대응하듯 붉은색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에게서 일어난 번개에 화염이 깃들며 바람을 악착같이 밀어내었다.

두 용은 끝없이 뒤엉키며 하늘로 올라갔고, 칠흑 같은 하늘 속에서 번개와 바람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려왔다.

그사이 하늘에서는 어느새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둘의 싸움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낸 듯이 쏟아지는 빗물 속에서 우리는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용 한 마리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소리를 내질렀고, 지상으로 낙하하던 용은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그 용은 입에서 진한 핏물을 흘리며 한 차례 몸을 푸르르 떨었다.

이윽고 열린 하늘에서 용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늘이 상당히 벗겨져 그 또한 엉망이었지만, 용은 자신이 승자라는 양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 준성좌 '용들의 ―주' 가 끝을 선언합니다. ]

"하천성! 대협을 막아라!"

두 용의 싸움을 보며 사태를 파악한 구천옥녀가 달려와 외쳤다.

결국 수단이 전부 틀어졌으니, 지금 당장 내가 나서서 층을 붕괴시켜 달라는 뜻이었다.

[곧 준성좌 '용들의 ―주'의 수식언이 완성됩니다.]

그러는 사이 수식언의 완성이 직전까지 다가왔다.

"하천성!"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달려온 구천옥녀가 내 등을 마구 두드렸지만, 나는 녹색 빛의 용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끝이 아니야."

그런 순간 구천옥녀의 어깨를 잡은 검왕이 지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락한 자리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빗물에 씻겨 나가자, 그 속에서 똬리를 튼 용 한 마리가 서서히 우리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알잖아! 층의 주민으로는 안 된다고!"

하나 다시 일어나려는 붉은 용을 보고도 구천옥녀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대로라면 대협을 여기서 잃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녀는 간절한 눈을 한 채 내 옷깃을 흔들었다.

"구천옥녀."

그런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나는 녀석의 이름을 한 번 불러 주었다.

"넌 이 층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냐?"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자신의 힘을 일부 '하연지'에게 하사합니다.]

초조한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을 때 31층의 성좌마저 연지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마치 지지 말라는 양, 이겨 달라는 양 성좌 또한 그리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성좌의 격을 품은 붉은색 용이 다시금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곧이어 녀석에게 목이 물린 녹색 용은 거칠게 소리를 토해 내며 다시 엉겨 붙기 시작했다.

번개가 다시 힘을 되찾았다.

[준성좌 '용들의 ―주'가 노성을 터트립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하연지'의 승리를 바랍니다.]

"아니다."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번개는 녹색의 용을 미친 듯이 두들겨 팼고, 그러자 그는 당황한 듯 바람으로 상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붉은색 용의 투지를 불태우게 할 뿐이었다.

"우리는 항상 외부인일 뿐이야."

녹색의 용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곳의 주인공은."

낙뢰가 내려쳤다.

"언제나."

바람이 멎어 가기 시작했다.

"녀석들이다."

그리고 녹색의 용이 추락했다.

지상에 떨어진 용은 서서히 대협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추락한 자리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건지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고, 그런 대협의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연지가 내려왔다.

녀석 또한 엉망진창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용천성의 용포로 모든 것을 가려 줄 수는 없는 데다가, 그녀 자신도 전력을 쏟아 낸 만큼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였다.

그러나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호쾌하게 뱉은 연지는 하늘 위로 별천도를 드높이 들어 올렸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은 연지가 쥔 별천도를 빛내 주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드래곤 로드'가 새롭게 정해졌음을 공표합니다.]

[새로운 '드래곤 로드'는 '아티쿠스'에서 '하연지'로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공지가 떠오른 순간 대협의 몸에서 아티쿠스가 갈라져 나오며 굴러떨어졌다.

수식언이 완성되지 않았던 만큼 준성좌의 본래 힘의 출처는 아티쿠스에게 있었기에 드래곤 로드가 바뀌자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쓰러트렸다고? 준성좌를 삼킨 대협을?"

구천옥녀는 옆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대협이 쓰러질 거란 경우의 수는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31층의 성좌가 네 딸을 도울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몰라. 내가 알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