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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그런 무책임한...."

자신의 이마를 감싸고 비틀거린 구천옥녀의 곁에 한 여자아이가 스쳐 지나갔다.

대협의 딸, 누구도 자신의 아버지는 막을 수 없다고 말한 그녀가 대협에게로 뛰어가고 있었다.

"아빠."

아링이 자신의 아버지를 애타게 불렀다.

그 부름에 바닥에 쓰러진 대협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조용하게 읊조린 한마디와 함께 대협의 손이 아링에게로 향했다.

"나는 또 구하지 못하는 거니?"

대협의 얼굴에 씁쓸함이 깃들었다.

그러자 순간 그의 손을 아링이 맞잡았다.

15년. 본래 자신의 딸보다도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자신의 또 다른 딸은 아버지의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하게 잡았다.

"아빠, 아빠는 저한테서 누굴 보고 있는 건가요?"

줄곧 참아 왔던 물음이라는 양 아링이 말을 내뱉은 순간, 대협의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저에게 먼 언니가 있는 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저를 볼 때마다 아빠가 그 언니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그 말에 대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저는 언니가 아니에요. 전 아빠의 또 다른 딸이잖아요."

그리 말한 아링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대협의 볼에 떨어졌다.

"아빠, 가야죠. 전 이제 다 컸어요. 하지만 아빠가 알고 있는 언니는 아직 너무도 어리잖아요."

그 눈물과 마주한 대협의 몸이 한 차례 떨려왔다.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저의 언니를 만나러 가야죠."

대협은 어느새 아링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이.

혹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을 울부짖었다.

그런 대협을 아링은 감싸 안은 채 그저 말없이 그의 눈물을 받아 줄 뿐이었다.

"...저번에 내가 도와준 빚을 갚은 셈 쳐."

치졸하게 살기는.

그렇게 말한 구천옥녀와 검왕 일행이 대협에게로 가는 동안 나는 연지의 앞으로 걸어갔다.

대협이 다시 층을 오르도록 설득시키는 것은 전부 저 녀석들의 몫이다.

내 일은 여기까지인 셈이다.

"고생했다."

그리 말 한마디를 던지자 연지는 하늘로 올렸던 별천도를 내려놓곤 나를 돌아보았다.

[축하합니다. 4번째로 31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가 당신에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ㅈ 𝕻ㅣית…𝔇ㄱℑ𝓤𝓣𝓤… ]

그리고 클리어 알림이 나타났다.

하나 마지막 말은 무언가에 의해 뭉개진 듯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나는 그 순간 연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층 클리어를 뒤로 미룹니다.]

연지의 몸에서 준성좌의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티쿠스에게 드래곤 로드를 이어받자마자 준성좌로 각성한 그녀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천성."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당신에게 전투 퀘스트를 제시합니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 가 새로운 31층 클리어 조건을 추가합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준성좌 '용들의 군주'의 조건에 동의합니다.]

멋대로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연지를 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향해 별천도를 던졌다.

이어서 내가 별천도를 받아 주자 연지는 용천성의 용포를 벗어 던지고는 원래 자신이 사용하던 검 한 자루를 들었다.

['추가 발생 퀘스트' 준성좌 '용들의 군주'를 쓰러트려라.]

[클리어 보상 : '31층 클리어.']

나 원, 어이없는 녀석.

내가 쥔 별천도에서 전 속성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준성좌가 되자마자 패륜이라니 정말 딸 한 번 잘못 키웠다.

"후회하지 마라."

"내 인생에서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연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는 첫날 나와 마주했던 연지를 떠올렸다.

태어나자마자 시끄럽게 울던 녀석, 목청소리 하나는 이때부터 타고난 것 같았다.

서로의 검이 교차하자 준성좌의 오러와 내 오러가 한 차례 부딪쳤다.

두 번째 마주했을 때는 3살 정도였던가.

자길 키우러 왔다고 하니 아니라고 대답하며 쿠션 사이로 얼굴을 처박던 꼬맹이가 떠올랐다.

보아하니 이때부터도 좀 모자랐던 것 같다.

곧이어 하늘에서 떨어진 두 개의 낙뢰가 각각 우리 둘에게 떨어졌다.

세 번째는 8살이었지.

도발 조금 했다고 무턱대고 덤벼든 녀석을 나는 가지고 놀다시피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첫 패배에 분개하는 녀석을 은근슬쩍 꾀어내어 그때부터 연지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하얗게 변한 공간 속에서 연지와 내 검이 서로에게 찔러 들어갔다.

급하게 고개를 튼 연지가 내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나는 연지의 검을 오러로 튕겨 내 버렸다.

아드득, 연지가 이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음부터는 쭉 함께였다.

멍청하긴 했지만,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악착같이 배우는 성격만큼은 날 조금 닮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 녀석을 키웠다.

그렇게 소드 엑스퍼트 상급에 오르고, 더 나아가 소드 마스터 그리고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도달하며 연지는 나날이 커갔다.

분명 내 팔뚝 하나도 되지 못했던 녀석이 어느새 자라 나와 머리 하나 밖에 차이나지 않을 만큼 커졌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보아 온 나를 보는 저 눈동자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크흑!"

나와의 힘겨루기에서 오러의 격을 밀린 연지가 신음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준성좌가 되어서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건지 연지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고,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가볍게 비웃어주었다.

"그게 끝이냐?"

"그럴 리가!"

내 비웃음에 열 받은 연지의 전신에서 전 속성의 오러와 화염이 동시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하연지 십식(十式)

진 · 낙뢰(眞落雷)

다시금 용의 모습이 된 연지는 공간을 찢어발기며 내게 덮쳐들었다.

나는 그런 연지를 향해 별천도를 겨누어 주었다.

"내가 너한테 안 보여 준 게 하나 있거든."

토옹, 귓가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하나 울려 퍼졌다.

태양이 급히 내게 놀라 도망치고 그 속에서 연지와 내가 마주했다.

연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아직도 그런 걸 남겨 두었냐는 비난이 섞인 미소였다.

내 입가에도 호선이 그려졌다.

평생을 내 뒤나 따라오라는 의미의 비웃음 섞인 미소였다.

십식(十式)

전야(電夜)

아득한 밤에 번개가 휘몰아친다.

그 번개 속에서 용은 견디지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번개의 밤이 끝났을 무렵 조용해진 그곳에서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용에서 사람으로 돌아온 연지는 바닥에 누운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천성."

내 이름을 부른 연지는 웃고 있었다.

"내 아빠는 강하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아빠라고 부른 연지는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갈 거지?"

"그래."

하늘 위에서 층계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이었고 나는 그걸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땠어. 이만하면 나도 좀 강해졌어?"

연지가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나는 녀석에게 대답해 주었다.

"한참 멀었어."

"하, 하하!"

내 대답을 듣고 연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연지의 눈에서 서서히 눈물이 한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 쫓아갈 거야."

내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양 연지는 눈을 꽉 감았다.

"쫓아가고 또 쫓아가서 지금 한 말 평생 후회하게 해 줄 거야."

"마음대로 해라."

그리 말한 나는 연지를 지나쳐 계단을 향하기 시작했다.

내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던 연지는 나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 난 아빠한테 뭐였어?"

마지막 질문은 참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물음을 듣고 나는 연지를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 던져 주었다.

"내 딸."

그걸 끝으로 내 시야가 뒤바뀌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당신의 클리어에 기뻐합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이 당신을 지목합니다.]

['31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이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성좌 녀석의 지목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내가 향할 곳은 언제나 같았다.

다음 층.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좀 더 싸우기를 바랐다고 투덜거립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좋은 마무리였다고 만족해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습니다.]

그사이에 한 놈 늘었군.

아니, 한 놈이 아닌가.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당신보다 강해지겠다 선언합니다.]

별천도 녀석이 일부러 보여 준 듯한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곤 앞을 직시했다.

가자.

다음 층으로.

* * *

32층, 내 눈앞에서 거센 눈바람이 휘날렸다.

눈바람 속에서 천천히 걸어가며 나는 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눈으로 훑었다.

['32층의 주인' '백발의 겨울성'이 당신을 환영합니다.]

['32층의 주인' '백발의 겨울성'이 32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영원한 겨울 속에 갇힌 영웅' 오래전 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 영웅은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겨울 마녀를 무찌르고자 오랜 시간 그녀와 맞섰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겨울 마녀를 봉인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만, 겨울 마녀의 마지막 저주일까요. 세계는 영원한 겨울이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영웅을 믿어 주던 오래된 지인들도 전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죠. 영웅은 고뇌합니다.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겨울 마녀의 봉인을 풀면 세계는 다시 멸망을 향해 갈 테지만, 지금 또한 멸망이 아닌지.]

묵시록 같은 세계관인가.

귀찮은 곳에 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보온을 위해 용천성의 용포를 몸에 둘렀다.

오러를 두르는 것보다 이게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밟으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층의 클리어와 관련된 것은 앞에 언급된 영웅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놈을 찾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아이템 보상을 받겠다."

[30층 클리어 보상으로 염황의 진노가 지급되었습니다.]

[31층 클리어 보상으로 울리는 자명종이 지급되었습니다.]

내 호명에 두 개의 아이템 보상이 들어왔다.

"슬슬 쓸 만한 게 들어 오기 시작할 때인데."

30층대. 여기까지 올라오면 이제 괜찮은 등급의 아이템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기 아이템 류는 나한테 크게 의미가 없으니.'

무엇보다 스텟을 최대치로 찍은 만큼 나는 해당 수치를 올려 주는 스텟형 아이템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별천도에 어떠한 출력을 내더라도 부서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강화 아이템을 발라 둔 만큼 무기도 굳이 바꿀 필요성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것들보다 층을 클리어하는 데 도움 되는 아이템이 내게 가장 유용하다.

"아이템 설명."

[염황의 진노 (에픽)]

설명 : 어떠한 것이라도 불태울 수 있습니다. 단지, 사용한 본인도 불타 없어집니다.

* 일회성 소모 아이템

[울리는 자명종 (에픽)]

설명 : 항상 시끄럽게 울리는 자명종입니다. 잠이 든 자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네, 어떠한 잠에 빠지더라도 깨웁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일지라도요.

"...쓰레기잖아."

이름을 보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80화

Chapter 8. 겨울에도 태양은 존재한다.

아이템을 나는 이번에는 상태 창을 켰다.

31층의 성좌가 나를 지목한 만큼 무슨 권능이 생겼는지 알아야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죽어 가는 모든 것의 고통을 포근히 얼싸안아 줍니다.

죽음이 닥친 그대에게도 삶의 마지막 행복이 함께하기를.

'이건 또 뭔.'

권능 설명에 기다랗게 한숨을 내쉰 나는 상태 창을 껐다.

보아하니 죽는 녀석한테 마약이라도 넣어 주는 권능인 모양인데, 나에게는 당연히 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쓰레기만 잔뜩 주기는.'

31층의 성좌 놈이 있을 방향으로 퉷 하고 불량스레 침을 뱉은 나는 층을 클리어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 앞에 있는 녀석은 앞으로 세 명.'

한 명은 하일성 그놈일 것이고, 거기에 더해 두 명이나 더 있다.

야신일 수도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놈은 층을 오르고 있지 않은 것 같으니.

'썩을, 검왕 일행 녀석들도 빠른데 그것보다 빠른 놈들이라면.'

최상위권 순위에 있는 녀석밖에는 안 떠올랐다.

그 생각에 랭커들을 확인해 보고자 순위권을 일람하는 기능을 사용하니, 창이 눈앞에 생겨났다.

1위 패왕

2위 나락

3위 대협

4위 검왕

5위 진선

그 사이 순위가 상당히 변동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전 회차에 없던 패왕.'

두 글자를 보자마자 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놈 하일성이다.

엿 같은 인간이지만 특출난 재능을 지닌 건 맞다. 그걸 증명하듯 크라운 로드 안에서도 이렇게 앞서가고 있지 않은가.

회귀자들을 재치고 1위에 올라 버린 하일성의 존재에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것보다 대협이 3위라.'

크라운 로드의 레벨을 올리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두 번째가 자주 언급된 깨달음.

세 번째가 층에서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업적이다.

그 업적은 지금껏 보지 못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당연히 그러한 업적은 옳은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는 등의 선악이 아닌 성좌들에게 얼마나 큰 임팩트를 남겼는가다.

대협은 준성좌를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업적이 인정되어 상당히 많은 레벨이 올랐을 텐데 그런 녀석을 제치고 2위에 오른 남자가 있었다.

나락.

'이 또라이 새끼는 아직도 살아 있었나.'

과거 황제가 1위로 선두를 달리고 있을 때, 야신과 함께 그를 바짝 쫓던 녀석.

그러면서도 황제도 야신도 어느 편도 들지 않고 혼자 제 사는 맛에 살아가는 아웃사이더.

그가 바로 나락이었다.

'앞에 달리고 있는 녀석 중 한 명은 전 회차의 황제 친위대에 속했던 그 진선이 맞으려나. 이 녀석은 난 잘 모르는데.'

황제 친위대에 속해 있긴 했으나 진선은 이상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녀석이었으니, 나보다 검왕 일행이 그녀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그건 그렇고 검왕 녀석 4위까지 레벨을 올렸을 줄이야.'

본래는 9위였던 그녀의 순위를 잠깐 보곤 나는 순위 창을 껐다.

어찌 되었든 나보다 앞서간 녀석들이 이 층에 아직 남아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태다.

우선 층 클리어 조건에 필요한 그 영웅이라는 녀석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와! 별님들 보이세요? 이번 골격은 예사롭지가 않네요!"

그런 순간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던 만큼 내 눈살이 찌푸려졌고, 자연스레 발걸음은 점차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아, 꽝이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무덤 언박싱은 아직 많이 남아 있거든요. 아,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냉동 보물 창고라고 해야 하려나."

헛소리를 지껄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절벽 위에 서자 저 멀리 금빛 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파헤치는 놈이 하나 보였다.

삽이랑은 전혀 안 어울리게 양복 차림인 녀석은 땅을 팔 때마다 나오는 뼈를 들고 연신 희희낙락하며 떠들어 댔고, 나는 절벽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나락."

녀석의 이름을 부른 순간, 바닥을 파헤치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는 나를 마주하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곧 '오오.' 하며 과장스럽게 소리를 내뱉었다.

"하천성 님이군요."

분명 나와 별다른 면식이 없는 놈일 텐데 녀석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양 굴었다.

"성좌 녀석들이 가르쳐 준 거냐?"

"기업 비밀입니다."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누르며 음침하게 웃는 나락을 보고 나는 한 차례 혀를 찼다.

나락 or 미치광이.

녀석에게 이러한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간단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유명인과 만남에 즐거워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 가 어서 공격해 보라며 지시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나락에게 '싫어요'를 누릅니다.]

최상위 성좌들마저도 알고 있는 녀석.

아마 황제 다음으로 성좌에게 유명 할 터인 나락은.

성좌 방송이라는 알 수 없는 짓거리를 해 대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주 콘텐츠는 어이없게도 무덤 언박싱이라는 미친 짓이다.

녀석이 사용하는 클래스는 성좌들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프로치 하는 방송이라는 클래스와 네크로맨서 계열.

성좌들 중 다수는 새로운 도전자가 미친놈일수록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한다.

나락은 그런 성좌들에게 가장 알맞은 녀석이었고, 그 결과 성좌들은 나락에게 적극적인 후원 공세를 펼쳤다.

후원 공세는 당연히 나락을 강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고, 그로 인해 나락은 야신의 뒤이은 랭커 자리를 굳건하게 유지했다.

저번 회차에서는 황제에게 밀렸지만.

'지금은 황제가 없는 상황이니.'

열심히 성좌 몰이를 하며 독주 중인 거겠지.

"아, 하천성 님한테 그걸 시험해 보자고요?"

그 순간 성좌들의 메시지를 받은 건지 나락은 키득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이 짜증 났기에 내가 별천도를 빼 들려 하자 나락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런 짓 하면 큰일 납니다. 같은 방송인끼리 그러면 안 되죠."

"누가 같은 방송인이라는 거냐?"

내가 눈살을 확 찌푸리자 나락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하천성 님, 지금도 방송 중이시면서 무슨 소린가요?"

그러곤 내게 뽑은 별천도를 가리키자 나는 얼굴을 감쌌다.

썩을.

"그건 됐다. 나락, 그것보다 정보 좀 얻고 싶은데."

"층을 클리어하시려고요?"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락을 보고 있자 녀석은 다시 한 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저도 딱히 모은 정보는 없어서요. 그리고 그것보단 언박싱이 더 재밌기도 하고."

정보가 없다는 말에 나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이놈이랑 더 대화해 봤자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 얘기 좀 해요. 요즘 인기인이시잖아요."

"누구 마음대로 인기인이야?"

"사실상 별님들의 원 픽이신걸요? 제 방송에서도 계속 언급되시고요."

스리슬쩍 옆에 붙는 나락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를 내뱉으려 했다.

미끌.

그 순간이었다.

눈 쌓인 바닥 아래 빙판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새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나는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나락은 말없이 눈을 돌려주었지만 절대 눈을 돌리지 않는 녀석들이 있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비웃습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비웃습니다.]

['오만의 아틀리에' 가 눈을 돌립니다.]

[준성좌 '용들의 군주'가 한심해합니다.]

떠오르는 성좌의 메시지에 이마에 한 차례 주름이 진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오러를 두른다 한들 발의 마찰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기에 어이없이 넘어진 나는 하늘을 향해 별천도를 들어 올렸다.

"X발."

욕설을 내뱉은 순간 내 오러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오러는 순식간에 별천도 위로 맺혔고 나는 그 즉시 하늘을 베었다.

방금까지 새까맣게 몰려 있던 구름이 내 오러에 부딪치자 파직파직 하고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그 모습은 오러가 오러에게 대항하는 것 같았고, 그걸 본 나는 서서히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저 구름은 그냥 날씨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오러로 만들어 낸 거였다.

하나 내 오러에 거세게 대항하던 구름은 얼마 못 가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나갔다.

겨우 뚫린 하늘에서 태양이 내리쬐자, 나는 짜증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천도를 어깨 위에 걸쳤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턱을 잠시 매만졌다.

내용상에서 겨울이 도래한 건 겨울 마녀의 봉인이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냥 구름만 다 지워 버리면 되겠는데.'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띠어졌다.

결국 이 겨울이 문제란 거면 그 문제를 지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나름 자가 복구 능력을 지닌 듯한 구름 형태의 오러지만, 내 일격 한 번으로 그 재생력을 제대로 못 쓰고 있으니.

"와, 대단하네요! 얼마나 스텟을 올렸기에 그런 오러가 가능한가요? 별님들 보이시나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하천성 님입니다!"

그 순간 희희낙락하는 나락의 목소리에 나는 녀석이 곁에 있었음을 깜빡했다.

검을 휘두를 때 이놈도 같이 날려 버렸어야 했는데.

한 차례 혀를 찬 나는 나락을 신경 쓰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녀석에게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안 이상 대화할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뒤를 나락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넌 왜 따라오냐?"

"저희는 층을 클리어해야 하잖아요? 당연히 그 길이 보이면 따라가야죠."

"개소리 마. 그냥 내가 방송에 나오니까 성좌들이 마음에 들어 해서 그런 거겠지."

"눈치가 빠르시네요. 하천성 님의 말대로 하천성 님 방송은 좀 폐쇄적이잖아요? 그래서 별님들이 더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나락은 존경스럽다는 눈빛을 취했다.

"별님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한 그 점. 저는 정말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별님들을 원할 때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 모습, 마치 절벽 위의 한 떨기 꽃과 같은 고고함! 별님들을 마구마구 자극하는 그 점은 존경스러워요!"

"그런 짓 한 적 없거든?"

"네, 그렇기에 존경하는 거죠. 모든 걸 의도하면 결국 들통 나는 법이니까요. 그 순수함이 바로 별님들이 하천성 님을 주목하는 이유에요."

반짝거리는 나락의 눈을 보며 나는 황제를 떠올렸다.

이 녀석 황제한테도 이런 태도를 취했던 것 같은데.

'황제 말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었지.'

말 한마디조차 나눈 적 없는 녀석이 이제는 이런 태도라.

저번 회차와 달리 이번 회차는 나도 어지간히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며 나는 별천도를 뽑아 나락을 위협했다.

"그딴 목적이라면 더 꺼져. 성좌 놈들한테 놀아나는 머저리를 데리고 갈 줄 아냐?"

전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오러가 마치 폭풍우를 치듯 주위를 감싸며 나락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락 또한 내 오러에 반응하듯 맞부딪쳐 왔다.

문제는 녀석의 몸에 휘감기기 시작한 오러가 한 종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역시 이놈.'

나락이 하는 짓거리가 짜증 나는 이유는 녀석의 방송을 통해 성좌가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 오러들은 대부분 성좌의 오러였고 내가 나락에게 공격할 기미가 보이자 얼씨구나 하고 개입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성좌들은 전부 나한테 호승심을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그것도 층의 개연성 따위는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진명을 가진 녀석들일 것이다.

"한판 해보자고?"

"그럴 리가요. 자자, 별님들 진정해요."

금방이라도 성좌들의 오러와 내 오러가 맞부딪칠 것 같아 나락이 급히 제지를 가했다.

하지만 그의 제지에도 성좌들의 오러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나락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 날뛰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블랙 넣습니다."

하나 블랙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성좌들의 오러가 급히 꺼져 나갔다.

그 모습을 내가 지켜보고 있자 나락은 어깨를 으쓱이곤 내게 말해 왔다.

"그러지 마시고 같이 다녀요. 뒤에서 조용히 따라갈 테니까요. 혹시 몰라요, 제가 도움이 될지?"

능청스레 웃고 있는 나락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곧 몸을 돌렸다.

알아서 하라는 내 태도를 보고 나락은 희희낙락하며 뒤를 따라왔고,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81화

"저기, 자네 저게 무엇인 거 같나?"

하천성이 자리를 떴을 무렵 눈 속을 헤치며 걷던 무리 하나가 있었다.

거센 눈발, 뼛속까지 시린 추위, 그 속에서 빛줄기 하나를 발견한 남자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구름 위 태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눈에 헛것이라도 보이나?"

"...아니, 잘못 본 게 아닐세. 나도 보여."

남성의 말에 무리의 소속원들도 하나둘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둘러 그 자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태양이 내리쬔 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땅이 엿보였다.

그 땅을 보고 그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땅에 도착한 그들의 눈에 비춘 것은 정말로 태양이었다.

저 끔찍한 겨울 구름 사이로 10년 만에 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경악한 자들은 물론, 몇몇은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까지 훔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땅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있었다.

"...태양사도님일세."

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태양사도님 이라면."

"설마."

그들의 등 뒤에는 하나같이 동일한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그 마크는 전부 태양을 문양화 시킨 마크였고, 우두머리인 듯한 남성에게로 모인 그들의 눈빛이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하나가 있었다.

마치 이곳에 강림하기라도 한 듯 진하게 남겨진 발자국이.

"예언이 드디어 이뤄지기 시작한 게야. 태양신께서 드디어 사도님을 보내셨다."

"오, 오오오!"

"태양께서 드디어 우리를 인도하는 겐가!"

두 손을 모아 누군가가 태양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발자취가 남겨져 있네. 태양사도님의 발자취야. 어서 빨리 뒤쫓아야만 하네. 태양사도님을 모셔야만 해."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안 제일 먼저 발자국을 발견한 그가 외쳤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신의 사도라도 된 양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야지. 가야 해!"

"태양사도님의 뒤를 따라야만 해!"

"다른 이들에게도 연락하게나! 모두와 함께 태양사도님을 모셔야지!"

그리 외친 사람들은 신의 발자취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름은 태양신도.

멸망 직전인 이 세계에 남은 광신도였다.

* * *

"자 이번이 몇 번째였죠. 이번 가챠에서는 슬슬 SR 하나쯤은 나왔으면 좋겠네요."

이 녀석의 주둥아리는 하루 종일 멈추질 않는 건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나는 쉬어 가기 위한 동굴에 앉아 열심히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나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나락뿐만 아니다.

이 층도 나한테는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도, 가도 눈뿐이니. 뭘 알아낼 수가 없잖아.'

하루 동안 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정보는 단 하나도 얻지 못했고, 결국 눈발이 더 거세져 제대로 앞도 보이지 않자 그냥 근처에 있던 동굴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아까처럼 한 번 제대로 눈구름을 지워 버릴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힘을 꽤 써야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저런 눈구름 정도는 상당히 소멸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 경우 층에 영향을 얼마나 끼치게 되느냐. 이건데.'

층의 클리어 조건은 당연히 해당 층의 성좌에게 달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눈구름이 층 클리어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모르기에 섣불리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괜히 짜증 나게 층을 만들어 놔서는.'

아포칼립스 류는 딱 질색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 올린 나는 별천도를 쥐었다.

하지만 이대로 눈 속만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뭔가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어야....

"와아아아아아아! 떴다! 떴어요! 드디어 떴어요!"

"야, 시끄러워."

마치 발악하듯 바닥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나락의 시끄러운 외침에 생각이 묻히자, 욕설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온 나는 검을 들었다.

역시 저놈은 조져 놔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감각에 무언가 스쳐 지나간 것이다.

나락에게서 시선을 뗀 내 눈이 동굴 밖으로 향하고, 그곳에 거센 눈발 사이로 검은색 인영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인영은 서서히 형태를 가지고 곧이어 사람이 되었고, 그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미안하다. 잠깐, 쉬어 가도 되겠나?"

우리가 먼저 있었기 때문일까, 안으로 들어선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잠깐 묵례를 하곤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놈.'

층에는 늘 그렇듯 세계관 최강자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남성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100퍼센트다.

이 녀석이 이번 층을 클리어할 열쇠일 것이다.

"시선이 너무 거센데."

내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는 한마디와 함께 후드를 벗었다.

주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외모였는데, 그 얼굴에 피로가 잔뜩 묻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한테 볼 일이라도 있나?"

그의 물음에 나는 이번 층 설명에 적혀 있던 영웅을 떠올렸다.

촉이 왔다.

"겨울 마녀를 봉인한 걸 아직도 후회하고 있나?"

내가 미끼를 던진 순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그 반응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이 녀석이 바로 그 영웅이다.

"네놈이 겨울 마녀에 대해 어떻게 알지?"

"이래저래 귀가 밝아서."

내 대답을 듣고 그는 잠시 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상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듯한 시선으로 나를 천천히 훑더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꽤 오랫동안 겨울이 온 만큼 제대로 된 옷을 구하기 힘들 텐데, 매우 고급스러운 옷차림이군."

"내가 오러를 좀 잘 다뤄서 말이야."

"능글맞게 굴기에는 겨울이 온 지도 10년이다. 그런 말로 넘어가 주지는 않아."

그리 말한 그는 등에 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안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낸 그는 내게 물음을 던졌다.

"이 책이 뭔지 아나?"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책을 펼치더니 한 페이지에서 책을 넘기는 것을 멈췄다.

"이건 방금 네가 말한 겨울 마녀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10년 뒤, 자신의 봉인을 풀어줄 자가 나타날 거라 적혀 있지."

아무래도 겨울 마녀 녀석은 예언가라도 되는 듯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게 나인 것 같다?"

"그래, 이렇게 겨울이 도래한 세계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

그리 말한 영웅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겨울을 끝내 보고자 겨울 마녀의 봉인을 풀려던 자들에 의해 난 소문."

그에게서 흉악스러운 오러가 풍기기 시작했다.

"주홍빛 머리를 가진 사내를 보면 도망쳐라."

짧은 순간 남성의 인영이 사라졌다.

그의 창은 순식간에 내 목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는 창의 진격에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한 차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주먹에 맞은 영웅을 바닥에 내리꽂았고, 나는 기절한 녀석을 두고 책으로 다가갔다.

"와, 보통 더 대화해 보려거나 하지 않나요?"

"뭐 하러 귀찮게."

"저래 보여도 이 세계관 최강자인 거 같은데 자비가 없네요."

옆에서 얌전히 보고 있던 나락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콧방귀를 내쉬며 방금 녀석이 꺼내 두었던 책을 쥐었다.

녀석은 이 책을 예언서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 책에 관련된 정보들이 전부 적혀 있으리라.

기절한 영웅을 내버려 둔 채 나는 책을 펼쳤다.

하나 책을 펼친 내 눈빛이 서서히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어이."

바닥에 박힌 영웅의 머리를 콕콕 찔러 보고 있던 나락이 내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그대로 책의 내용을 보여 주었고 나락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네요."

"네 눈에도 그러냐?"

나락의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책은 모든 페이지가 백색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는 양.

하지만 영웅은 분명 이 책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이 굴었다.

이 녀석이 미쳤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성좌의 설계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세계의 주민들만 볼 수 있는 책이라면.'

"한 번 확인해 볼까요?"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나락이 말 걸어왔다.

녀석의 클래스가 네크로맨서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락이 삽으로 바닥을 콩 찍었다.

그 순간 바닥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고 그 손은 곧 몸을 끌어 올려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시체는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렸다.

그런 시체에게 나락이 한 차례 손짓을 하자 언데드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아, 어어."

한 차례 목소리를 내뱉은 시체는 목을 감싸며 목소리를 조절했고, 곧 정상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부르셨나이까. 주인이시여."

나락에게 고개를 숙이며 언데드가 인사를 올렸다.

그 인사에 나락은 미소를 지은 채 내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시체 씨, 저 책에 내용이 보이나요?"

"확인해 보겠나이다."

내가 시체에게 책을 건네주자 그는 내게서 받은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훼손된 글자가 일부 있기는 하나 읽을 수는 있나이다."

"역시."

언데드의 대답을 듣고 나는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든 층의 인물들과 연관되도록 성좌가 의도해 둔 설정이었다.

"책의 내용 좀 알려 줘."

"알려 주세요."

내 지시에 나락이 언데드에게 부탁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우리에게 내용을 알려 주고자 책을 대충 읽었다.

"이 책은 과거 겨울 마녀란 존재에 의해 쓰인 책입니다. 내용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이 적혀 있으며, 그 뒤로는 예언서와 같이 이후의 일들이 적혀 있긴 합니다."

"예언 내용은?"

"자신이 봉인되고 10년 뒤, 태양 교단과 함께 누군가가 자신의 봉인을 풀어 끝없이 이어지던 겨울이 끝내고 세상의 축복이 다시금 돌아올 거라는 예언입니다. 반대로 봉인을 풀지 못했을 때의 예언은 세상이 영원한 겨울에 갇힐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양신도?"

"오랜전부터 존재하던 종교입니다. 지금은 언젠가 태양이 다시 하늘에 나타나 줄 거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예언이 내려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힘들어지면 종교에 기대는 사람이 있으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예언이라고 하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 예언이라는 건?"

"겨울 마녀라는 말을 빼고 태양신을 넣으면 상당히 유사합니다."

어찌 되었든 관련된 부분이 있다는 건 사실이군.

"그 태양신도라는 녀석들은 어디 있는데?"

"세계 각지에 어디에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주 종교이기에.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들이 어디에 있다고 특정 짓기에는...."

언데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발로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건가.

게다가 책에는 봉인을 풀 방법은 적혀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아는 건.'

내가 기절시킨 이 영웅 녀석이겠지.

하지만 느낌상 이 녀석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겪은 층의 패턴상 최강자들은 늘 그래왔으니까.

"너 겨울 마녀가 봉인된 장소는 알아?"

"으음, 겨울 마녀라는 자는 잘 모르나 태양신님이 봉인된 장소라면 태양신도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다행히 위치까지 숨겨져 있지는 않나.

"하천성 님, 하천성 님."

그나마 편하게 상황이 흘러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옆에 있던 나락이 말을 걸어왔다.

그의 부름에 내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하천성 님은 저자에게 정보를 뜯어내고 싶은 거 아닙니까?"

영웅을 가리키며 나락이 말해오자 나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해 왔다.

"그렇담 저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부탁?

내 시선이 미묘하게 변한 순간 나는 녀석이 말한 의도를 눈치챘다.

나락은 네크로맨서 계 클래스 소유자.

녀석에 의해 되살아난 언데드들은 지금 이 시체와 같이 녀석의 명령을 무조건 따른다.

그렇다는 건.

'영웅을 죽이고 언데드로 되살리면.'

모든 정보를 실토할 것이다.

82화

즉, 층을 클리어하는데 가장 빠른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쉬운 방법을 제시해 드렸는데."

"거래 조건은?"

그런 걸 그냥 해 줄 리가 없다.

내가 물음을 던지자 그는 그저 작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제가 콘텐츠 하나를 생각하고 있어서요. 그거에 참여를 한 번해 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싫어."

두루뭉술한 거래 조건은 무조건 거절이다.

내가 단칼에 잘라 버리자 눈을 깜빡인 나락은 양손을 휘저었다.

"하천성 님에게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콘텐츠입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됐죠!"

"네가 말하는 건 결국 성좌 방송을 위한 거잖아. 난 성좌랑 깊이 연관될 생각 없다."

"와아, 크라운 로드에서 별님들이랑 연관되지 않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자신은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나락은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됐다는 양 삽을 들었다.

"그럼 저만 정보를 얻어 두죠."

그 순간 나락이 쥔 삽에 급속도로 오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오러는 영웅의 목 따위 가볍게 잘라 버릴 듯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고, 기운을 머금은 삽을 영웅의 목을 향해 순식간에 내려쳤다.

"하천성 님? 이건 무슨 의도로 봐야 합니까."

하나 나락의 삽이 그에게 닿기 직전 내 검이 그걸 막았다.

영웅의 목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삽의 진로를 가로막은 나는 몸에서 오러를 스멀스멀 뿜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얻지 못할 정보를 남이 가로채려는 데, 두 눈 뜨고 보고 있을 것 같냐."

"제가 층을 클리어하면 하천성 님도 같이 클리어되실 텐데요."

"클리어는 내 손으로 한다. 더 이상 내 앞에 누가 가도록 둘 생각 없다."

내 대답을 듣고 나락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영웅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적인 대응은 아니시겠죠?"

"오늘 처음 본 녀석이 죽든 말든 뭔 상관이야. 난 그냥 네놈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만약 내가 네크로맨서 클래스를 가지고 있었으면 곧바로 실행했을 거다.

내 대답을 듣고 나락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흘러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훔쳤다.

"참, 별님들은 다들 절 좋아해 주시는데, 유달리 참가자분들은 절 싫어하시는 사람들이 많네요."

"사이코를 좋아하는 녀석은 성좌밖에 없다. 어쨌든 난 이 녀석을 네 손에 넘어가게 두지 않을 거다."

내가 진심임을 눈치챈 것일까, 영웅을 죽이려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된다는 뉘앙스의 말에 나락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녀석의 앞에서 직접 내 힘을 보여 준 적이 있기에 나락은 금세 생각을 접은 듯하였다.

"어쩔 수 없죠. 전 하천성 님과 적이 되고 싶지 않으니. 제 적은 야신으로 충분해요."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네놈도 야신을 싫어했나?"

"그 사람이랑은 생리적으로 안 맞거든요."

나락이 히죽 웃었다.

야신과 이 녀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몰라도 나락에게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태양신도라는 놈들을 찾아야겠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반응을 보인 나는 영웅 녀석에게 용천성의 용포를 덮었다.

연지 녀석 때는 자동 공격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적으로 간주하는 녀석에게 모조리 내 전 속성 오러를 뿜을 것이다.

이걸로 녀석이 기절한 동안 아무도 못 건드리리라.

"혼자서 찾으러 가실 겁니까?"

"처음부터 쭉 혼자 움직이고 있었는데, 네가 따라온 것뿐이야."

"저의 도움을 받으셔 놓고 이러긴가요."

"때마침 쓸모가 있어 이용한 거다."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나락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자기 타협과 변명이 수준급이시네요. 세상을 편하게 사는 법을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비꼬냐?"

"전 그런 사람이야말로 크라운 로드를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도 유연하게 굴 줄 알아야죠."

이 새끼 비꼰 건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해 드린 게 있으니, 보상 심리에 의해 하천성 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예정이죠. 이렇게 서로서로 멋대로 구는 거면 괜찮지 않나요?"

나락을 째려보던 나는 녀석의 간사스러운 웃음을 보고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런 내 행동에 나락은 이번에도 옳다구나 하며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하천성 님은 크라운 로드에 들어오기 전에 뭐하셨나요?"

나는 녀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녀석은 내가 대답하건 말건 주둥아리를 열심히 털어대었다.

"대답을 못 하는 건 더러운 일을 하셨다는 뜻인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시체 안치실에서 일했어요. 가끔씩 끔찍한 꼴로 오는 시체도 있었고, 경찰들에게 죽은 사람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도 들었죠."

나락은 이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생활도 꽤 재밌긴 했지만, 사실 지금이 더 재밌긴 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나락을 힐끔 돌아보았다.

"네 녀석도 층을 오르지 않는 놈이냐?"

"제가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는 층을 오르는 거랍니다. 저, 늘 위에 있잖아요?"

확실히 내 기억 속에서 나락은 언제나 맨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자신보다 앞에 가는 사람을 구태여 막지도 않았으며, 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층을 클리어해 나아갔다.

'확실히 이놈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진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각자의 어떠한 목표가 있고 그것들은 대부분 층을 클리어해서 지구로 돌아가는데 중점이 잡혀 있었지만, 이놈은 그 초점이 아예 다른 것이다.

새삼 왜 성좌 녀석들이 이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깨달았다.

이야기를 만들어 낸 성좌에게 나락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즐겨 주는 자였으니까.

"하천성 님은 층이 즐거웠던 적 없나요?"

"없어. 개 같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 싶을 뿐이야."

애초에 층이 즐거운 시점에서 대부분에 참가자는 거기서 끝이다.

즐거운 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기에 영원히 그곳에 묶여 버릴 테니까.

뭐가 되었든 결국 이 녀석이 특이한 거다.

"황제는 저랑 비슷했죠. 그는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유달리 황제와는 친하게 구는가 싶더니, 그도 이 녀석 과였나.

'아니, 적어도 목표 없이 달리는 인간은 아니었으니 황제는 나락과는 또 다른 사람이라 봐야겠지.'

거세진 눈발을 올려다보며 나는 이전 회차에서 클리어하지 못했던 것을 탄식했다.

역시 썩을 야신들을 다 제거해 버렸어야 했는데.

"그런데 제가 보기엔 하천성 님도 저랑 같은 사람이라 서요."

"헛소리 마."

"별님들한테 계속 들리고 있어요. 누구보다 층을 진심으로 클리어하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제가 하천성 님께 관심 가진 이유도 그런 거거든요."

더 이상 말하면 주둥아리를 찢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자 나락이 냉큼 말을 그만두었다.

눈치 빠른 놈.

얼마 동안 눈 위를 밟으며 짜증스레 걸어갔을까, 저 멀리서 커다란 울음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혹시나 해서 나락을 두고 먼저 달려가 보자, 거기에는 웬 5층 건물만 한 곰이 성을 내며 소리치고 있었다.

'쯧, 꽝인가.'

잘못 판단했다고 혀를 찬 나는 그 곰에게서 시선을 떼곤 몸을 돌리려 했다.

"쿠어어엉!"

그러나 나를 눈치챈 것일까, 곰이 갑작스레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녀석은 흰색 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붉은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게걸스럽게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별천도를 뽑았다.

"귀찮게 굴기는."

휘두른 검날에 한순간 오러가 깃들고, 그 순간 곰의 몸이 반 토막 났다.

짐승을 조각 낸 오러는 주변 눈발을 헤치며 땅을 갈랐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과하게 힘을 줬음을 눈치채곤 검을 거두었다.

"자비 없으시네요."

"날 공격하는 놈한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어."

"그래도 꽤 레벨이 높은 것 같은데요?"

집채만 한 곰에게 관심 가진 나락의 모습을 보며 나는 대충 말했다.

"가질 거면 가지던가."

"있으면 좋긴 한데. 딱히 메리트는 없어 보이네요."

"아, 으아! 여, 여기는!"

그리 말한 나락이 무릎을 펴고 일어나는 동안 녀석을 따라오던 언데드가 당황한 듯 외쳤다.

그러고 보니 나락 녀석 아까 이 세계 주민 시체를 언데드로 소환하고 나서 책을 맡겨 두곤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내가 바라보자 언데드는 횡설수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주인이시여 여, 여기는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금기 구역인 타천신장이나이다. 영원한 겨울이 도래한 뒤, 세계의 신수들이 살 곳을 찾아 그나마 가장 질 좋은 토지를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하여 괴물이 된 탓에 마경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나이다.

이곳 근처는 사람도 생물도 없는 타락한 신수들만 가득한 지옥도, 당장 나가셔야 하나이다!"

사람이 없다는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타천신장 크기가 어느 정도인데."

"그, 그건 저도 짐작할 수가...."

짐작할 수 없단 건 이 녀석 말대로 이 근처에는 사람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는 이상 우회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 방법이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왔던 길로 다시 가는 거겠지만, 돌아가도 나오는 건 동굴뿐.

"됐어. 그렇담 그냥 뚫어."

나는 차라리 직진하기로 했다.

쭈욱 직진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타천신장을 빠져나가게 될 테니까.

"아니, 제 말을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여기는."

"그게 뭐. 방금 저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못 봤냐?"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언데드에게 뒤에 있는 사체를 가리키자 그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신수든 뭐든 나한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나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굴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옆을 따라온 나락이 언데드에게 괜찮다고 원래 고양이 같은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며 헛소리를 한 탓에 녀석을 한 번 진심으로 벨 뻔했다.

이후 언데드의 말대로 가는 족족 타락한 신수들이 나타났다.

녀석들의 몸집은 처음 잡은 곰과 같이 매우 커다랬고 성질 또한 더러웠다.

하나 내 앞에서는 병아리만도 못한 녀석들이었기에 나는 손쉽게 모조리 죽여 주었다.

그렇게 나아가자 어느새 무슨 소문이라도 퍼진 걸까, 한 마리씩 나오던 녀석들이 수천 마리가 모여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전쟁이라도 할 음산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뒤에선 언데드가 이미 죽었음에도 공포에 질려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수천 마리의 타락한 신수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고, 나는 그들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필사적으로 대항하며 내게 온갖 능력들을 퍼부은 녀석들이었지만, 이내 모조리 그 목이 날아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타락한 신수들을 죽인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머리 위에 왕관 같은 것을 쓴 거대한 원숭이와 마주했다.

하얀색 털로 뒤덮인 녀석은 처음 보았던 곰의 10배는 될 것 같은 망치를 들고 내게 미친 듯이 뛰어 왔고 나는 별천도를 뽑았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검집 안에서 휘몰아친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뛰어오던 원숭이의 몸이 두 동강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어야 했으나, 이 괴수는 그 상태로도 움직이며 내게 망치를 휘둘렀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발을 들어 원숭이의 일격을 가볍게 막곤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걷어찼다.

하늘로 날아간 원숭이의 머리가 곧 바닥에 나뒹굴자, 나는 흥 하고 소리를 내뱉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위험천만하네요. 휘유, 방금 전 녀석은 저도 위험했을 것 같습니다."

"내 옆에 가만히 따라만 다닐 거면 더 이상 지껄이지 마라."

"저는 하천성 님만 믿고 있답니다. 방금 몬스터는 '제천대성'이 지상을 뜨면서 남겨 둔 자손 중 한 명일 것 같아서 무서웠거든요."

"하?"

갑작스럽게 최상위 성좌 중 한 명의 진명 언급하자 나는 나락을 돌아보았다.

이 새끼가.

83화

['돌원숭이'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너 이 새끼 일부러 말했지?"

"네? 제가요?"

나락이 난처하다는 양 고개를 기울이자 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제천대성. 그나마 알려진 최상위 성좌 중 한 명으로, 그중에서도 상당히 질이 나쁜 놈으로 유명하다.

왜냐면 과거 서유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었다며 자신 있게 진명을 외친 머저리 탓에 한 층이 궤멸당했던 사실은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X발, 제천대성이 우리가 아는 서유기의 제천대성과 크라운 로드의 제천대성이 다른 존재라는 걸 누가 알았겠냐고.'

말 그대로 이름만 같았으니, 서유기에 나오는 제천대성이라 착각한 머저리에 의해 붕괴한 층은 복구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녀석도 회귀자인 만큼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지금 나락은 내 앞에서 돌원숭이의 진명을 언급한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진명을 언급하면 네 녀석도 그놈 눈에 들어간다는 거 몰라?"

그 말에 나락은 시치미 뚝 떼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 자신은 성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데다가, 거기에는 최상위 성좌들도 몇몇 있으니 제천대성을 어떻게든 말려 주리라 생각하고 이 지랄을 한 거다.

"너...."

"그리고 하천성 님도 있잖아요."

['서릿발의 고양이'가 깔깔 웃습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느려터진 '돌원숭이'에게 이제야 왔냐며 비웃습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돌원숭이'의 등장을 못마땅해합니다.]

['돌원숭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별똥들이 여기서 뭐 하냐며 고개를 기울입니다.]

나락이 말한 순간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하천성 님을 지켜보시는 별님들이 말이죠."

"썩을, 더 이상 헛소리하면 네 목을 벨 거다."

"이전에 하천성 님께서 제게도 야신이 싫냐고 물으셨죠."

금방이라도 목을 베려고 별천도를 뽑으려던 순간 나락이 화제를 돌렸다.

"하천성 님한테 지금 일은 필요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많은 별님들의 도움이 하천성 님한테 있어야 할 테니까요."

"지금 그걸 네 멋대로."

"야신, 지금 하천성 님으론 절대로 죽이지 못할 거에요."

그 말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가진 클래스, 하천성 님은 모르시지 않나요?"

"넌 그걸 알고 있다는 거냐."

"어렴풋이는 알죠. 지금 맨 위를 달리고 있는 패왕과 야신이 어떤 관계인지도. 그리고 야신의 목적이 결국 하천성 님의 목적의 큰 방해물이라는 것도."

이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내 눈빛이 날카롭게 떠지자 나락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때 가면 저한테 고마워하실지도 몰라요."

"고맙기는 얼어 죽을."

['돌원숭이'가 당신에게 무언가 보여 달라며 손짓합니다.]

나락이 제멋대로 벌인 짓에 열 받은 찰나에 나는 들려온 메시지에 성질이 폭발해 외쳤다.

"꺼져. 원숭이 새끼야. 볼 거 없으니까."

['서릿발의 고양이'가 꼴 좋다며 박수를 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들썩들썩거리며 어깨를 떱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돌원숭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돌원숭이'의 인상이 험악해집니다. 강제로 층에 개입해 요소를 추가하려 합니다.]

이 썩을 원숭이.

['서릿발의 고양이'가 재미로 취소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겸사겸사 취소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완고하게 반대합니다.]

['돌원숭이'가 분노하며 성을 내기 시작합니다. 지금 당장 별똥들을 찾아가 곤죽을 내줄 것을 결심합니다.]

하나 전 층부터 달라붙은 최상위 성좌로 보이는 녀석들이 제천대성의 행동을 제지했다.

나락에게 시선을 옮기자 녀석은 '거봐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뒤 나락에게 협박 투로 말했다.

"야신의 정보를 털어놔라. 그렇다면 이 일로 죽이지는 않을 거다."

"살벌하네요. 좋아요. 이것저것 잔뜩 이야기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말했다간 바로 절 죽이시려 들 거잖아요?"

눈치 빠른 영악한 새끼.

"하천성 님 화가 좀 풀리면 이야기하죠."

그리 말하며 나락이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앞서 나가자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녀석을 걷어찼다.

그렇게 내게 걷어차여 하늘 높이 올라간 뒤, 눈밭을 나뒹군 나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봤다. 그러자 나는 흥하고 콧방귀를 내쉬었다.

"내가 그냥 둘 거 같았냐? 죽이지 않아도 죽일 만큼 패는 방법도 있거든?"

"와, 성격 참 불같으셔라. 지금 이 상황은 분을 삼키고 그냥 넘어가 주는 타이밍이 아니었나요?"

눈 속에 파묻힌 나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매우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녀석에게 웃어 주었다.

"아닌데?"

그리 말하고 내 검을 쓰윽 휘둘렀다.

별천도에 맺힌 오러에 의해 눈밭이 박살이 나며 눈사태가 되어 나락을 덮쳤고, 녀석은 그 눈 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뒤졌든 말든 그걸로 조금은 화가 풀린 나는 별천도를 검집으로 되돌렸다.

"으아, 나락님!"

옆에 떨어져 있던 언데드가 기겁하며 열심히 눈 더미를 파헤쳤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진짜로 뒤진다."

나는 소복이 나락을 뒤덮은 눈더미를 향해 외쳐 주곤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이래야 하천성이라며 좋아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그냥 죽이지 그랬냐며 아쉬워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누군가를 이용하는 자는 정의의 응징이 필요하다 말합니다.]

['돌원숭이'가 '서릿발의 고양이'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

['서릿발의 고양이'가 사라졌습니다.]

시끄러운 성좌들의 메시지를 뒤로하고 나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락을 눈 속에 파묻어 둔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겨우 나 혼자가 되어 조용해진 상황에 마음 편하게 걷고 있을 즈음, 나는 지척에 자리한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꼬락서니가 이상한데."

하지만 멀리서 보이는 마을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거센 눈발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은색 연기들과 매캐한 냄새, 그리고 귓가에는 사람들의 비명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아, 망할 준비된 이벤트.'

며칠을 찾아 헤맨 마을, 갑작스러운 이벤트.

성좌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갔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뜀박질 한 번에 마을 안까지 들어온 나는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를 느꼈다.

그러자 즉시 오러를 피워 사람의 인기척을 쫓기 시작했고, 곧 마을 중심에 있는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 즉시 인기척을 쫓아 광장에 도착한 순간, 거기에 잔뜩 밀집된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엉망진창이었고, 무릎을 꿇은 채 추위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둘러싼 자들은 털북숭이 설인 무리였다.

지능을 가진 듯한 그들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잠시 후 잘린 사람의 머리를 들고 와 그들의 앞에 던졌다.

"꺄아아아악!"

"아, 아아! 로잔님."

마을의 주축인 사람이라도 되는 듯 그의 머리를 본 사람들이 깊은 절망에 빠졌다.

뭔지는 몰라도 뻔하디뻔한 상황에 나는 사람을 위협하듯 서 있는 설인의 옆에 다가가 섰다.

내 인기척을 못 느낀 설인이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 비명을 지르던 이들이 자신의 옆으로 시선을 옮기는 걸 보곤 따라 고개를 돌렸다.

"크훙?"

이상한 소리를 내뱉은 설인이 나를 발견한 찰나 나는 팔꿈치로 놈을 쿠웅 찍었다.

그러자 넘어진 설인이 옆에 있던 놈과 엉겨 붙으며 나뒹굴자 눈이 한 차례 튀었다.

"크와아아아악!"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설인들이 내가 적임을 간주하고 괴성을 내지르며 위협해왔다.

"조용해라."

그러나 나는 그런 설인에게 한마디만 내던졌다.

내 한마디에 설인 모두가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기 다소곳이 모여서 앉아 있어."

내 뒤편을 가리킨 순간 설인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가 거기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구세주다. 구세주야!"

"구세주님!"

그러자 사람들이 내게 손을 모아 칭송하기 시작했다.

"어이, 너희들."

"구세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것보다...."

"아아, 살았다. 살았다고!"

"설인들한테서 살았어!"

빠직.

나는 한순간 머릿속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들어 짜증 나는 일이 많았던 탓에 지금의 내 상태는 꽤 시한폭탄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락으로 인해 잔뜩 뭉쳐 있던 분노가 터지자 내 눈빛이 사나워졌다.

"너희들도 쟤들 옆에 무릎 꿇고 앉아."

그러자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 변했다.

"에, 예?"

"가라고."

그리고 한마디를 더하니 흠칫한 이들이 상황을 눈치채곤 설인들의 옆으로 달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결국 내가 눈빛으로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자, 그제야 사람들도 제대로 무릎 꿇고 앉았다.

그걸 확인한 나는 광장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내 앞에는 설인과 마을 사람들이 다소곳이 무릎 꿇은 채 앉아 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 그들을 보고 턱을 치켜든 채 다리를 꼰 채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태양신도인 놈은 손든다."

* * *

이후 나는 설인과 마을 사람에게서 태양신도를 찾았다.

그들의 말은 모두 똑같았다.

며칠 전, 마을에 머무르던 모든 태양신도가 별말도 없이 떠나 버렸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을을 찾아 기껏 기뻐했더니 태양신도가 없다라.

집을 뒤져 보면 뭐라도 나올까 싶어 살펴보았지만,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그, 여기서 10km 정도 가면 거기에 마을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마을은 태양신도들이 만든 마을인지라 찾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도중 마을 주민 한 명이 들려준 말을 듣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마을을 목표로 잡기로 했다.

"그, 그냥 가실 겁니까?"

내가 떠날 기색을 보였기 때문일까. 마을 사람 한 명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행동에 나는 아직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설인들을 힐끗 보곤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마을 주민이 내 의중을 눈치채곤 얼른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대로 가시면 저희는 다 죽습니다! 설인들의 손에 마을의 남자들이 거의 다 죽었습니다! 제발!"

그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곤 설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설인들은 두려운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러가 맺힌 내 귀에 그들의 뱃속에 깊이 우러나오는 배고픔이 들려왔다.

이마를 잠깐 매만지던 나는 짜증스레 숨을 내쉬곤 설인들에게 한 방향을 가리켰다.

"너희들 타천신장인지 뭐시기인지라고 아냐?"

설인들은 웅성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무언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거기 신수들을 내가 다 죽였거든? 그 시체들 꽝꽝 언 채로 사방에 널려 있을 거다. 그거 먹어."

그것들을 다 먹은 이후에는 나도 모른다.

이 녀석들이 이 마을을 다시 덮치든 말든 나는 당장의 사태만 해결해 줄 속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수군거리던 설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여기 있는 이상 그들이 마을 사람을 잡아먹을 방법은 없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보던 나는 그나마 살았다며 안도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힐끔 보았다.

행색은 엉망에다가 집들 중 일부는 부서졌고, 건장한 성인 남자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다.

남은 건 늙은이와 어린아이 혹은 여자들.

이 녀석들도 얼마 안 가 이 끝없는 겨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먹을거리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앞으로의 미래가 뻔히 보였다.

84화

사람들 얼굴 사이에 절망이 스쳐 갈 때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곤 별천도를 뽑았다.

마을 주민들이 내 행동에 의문을 보이던 찰나 검에 오러가 몰려들었고, 이내 터져 나온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순식간에 생긴 구름의 틈 사이로 햇살이 내리쬈다.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하며 내게로 시선을 돌리고, 나는 덤덤하게 검을 허리춤에 넣은 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보를 내준 거에 대한 보답이었다.

"저, 저기!"

내가 마을을 나서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서둘러 뒤따라오며 나를 불렀다.

그 부름에 내가 힐끔 녀석들을 보자, 그들은 나를 마치 신처럼 보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서, 성함이라도."

내가 가는 길을 방해할 생각은 없는 건지 그들은 그저 이름 하나만을 남겨 달라 부탁했다.

"하천성."

어려울 것도 없는 일에 한마디 던져 준 뒤, 내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보이는 그들을 두고 떠났다.

10km.

나라면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가볍게 속도를 높여 달렸다.

그렇게 얼마 안 가 첫 마을에서 얻은 정보대로 한 촌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속도를 높여 마을 앞까지 다가가자 그곳 앞에 세워진 돌에 태양 마크로 보이는 문양이 그려져 있음을 발견했다.

'옳거니.'

당첨임을 예감한 나는 곧바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마을은 겨울을 버티고자 무게가 나가는 돌들로 지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 태양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마을 안에 있을 사람들을 찾기 위해 오러를 퍼뜨렸다.

하나.

'아무도 없네.'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태양신도들은 다 떠났다더니 이곳도 마찬가지였나.

자꾸 단서가 잡힐 듯 안 잡히자 한 차례 눈살을 찌푸린 나는 옆에 있던 집의 문을 열었다.

냉기가 느껴지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나뒹구는 물건들이 보였다.

역시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만약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면 바닥에 나뒹구는 물건들에 먼지가 쌓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이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나는 이내 사람들이 급하게 마을을 떴음을 눈치챘다.

마을의 크기는 크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정확한 이유를 찾고자 다른 집들도 뒤져 보기 시작했다.

"고생하시네요."

마을 이곳저곳을 뒤져 보고 있었을까, 나는 이전에는 분수대였던 것 같은 오래된 구조물에 앉아 있는 나락과 마주쳤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앞을 무시하며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든 생각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러곤 나를 가만히 보고 있는 나락을 향해 말했다.

"야, 그냥 너도 와."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나락은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절 쓰기로 마음먹었나요?"

"내 옆에서 꿀 빨려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어. 제천대성을 나한테 붙여 놓은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거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고만 있는 녀석을 보니, 군대에서 겪은 꿀빨러들이 생각나서 괜히 쥐어박고 싶어졌다.

내 말을 들은 나락은 눈을 한 번 끔뻑이더니 어깨를 으쓱거리곤 삽으로 바닥을 통 두드렸다.

그 순간 녀석의 발밑에서 수백 구의 언데드들이 일어났고, 그들은 곧바로 집 여기저기로 들어갔다.

"참 이상한 포인트에서 저한테 부탁하시네요."

나는 나락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집을 마저 뒤졌다.

그러나 이 집에서 얻은 거라곤 태양 마크가 그려진 로브 하나뿐이었다.

'일단 이건 가져가 둘까.'

자기들 소속과 같은 로브를 두르고 있으면 경계심을 줄여 줄 테니까.

로브를 대충 두르며 밖으로 걸어 나오자 마침 광장 중심에 소환한 언데드들과 나락이 있었다.

녀석은 언데드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하였고, 곧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정보는."

"네, 마을의 촌장이 살았던 거로 추측되는 집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네요."

그 말과 함께 직접 보라는 양 내게 편지를 건네주자 나는 녀석에게 받은 편지를 살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태양사도께서 강림하였다. 모든 태양신도는 그분의 발자취를 쫓도록.]

짧은 편지 내용.

그중 태양사도의 강림이라는 내용을 읽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야기를 개입하기 시작하니까 본격적으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태양사도가 누굴까요?"

"아마 성좌의 사도 같은 거겠지."

타이밍상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나는 편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태양사도가 강림했든 말든 일단 이놈들을 쫓아야 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에 별다른 위치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락 또한 마을에서 다른 단서는 더 못 찾은 것 같고.

'또 뱅뱅 돌겠군.'

쓸데없이 큰 땅덩어리에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을 즈음 나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본격적으로 태양신도를 한 번 찾아볼까요?"

그 말에 내가 물끄러미 나락을 바라보자, 녀석은 히죽 하고 웃음 지었다.

"하천성 님은 죽어도 제게 부탁하려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별님들도 슬슬 답답해하시니 그냥 제가 움직일게요. 이번에는 하천성 님이 절 따라오실 차례에요."

그 순간 나락의 그림자 속에서 뼈로 된 동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동물들은 이미 지시를 받은 양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날거나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나 문제는 그 수였다.

녀석의 그림자에서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뼈로 된 그들은 수천을 넘어서 수만에 다가서는 듯싶었고, 그런 무수한 숫자의 짐승을 소환하는 와중에도 나락은 여유로웠다.

'현 2등이라더니.'

아무리 하급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이 눈발 속에서 움직이려면 적어도 오러는 둘러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눈 속에 파묻혀 부서질 테니까.

그걸 모르지 않는 듯, 나락이 소환한 언데드들은 전부 나락의 오러를 품고 있었다.

몇백 마리 수준이라면 모를까, 만 단위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락의 오러가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성좌의 힘이냐."

"네, 별님들이 지원해 주시고 있는 거랍니다. 하천성 님도 지원받으실래요?"

"필요 없어."

싱글벙글 웃는 나락에게 콧방귀를 내쉬어 주자 녀석은 방정맞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 모습은 '처음부터 저한테 부탁했으면 아무런 고생도 안 했을 텐데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부러 자존심을 건드리는 짓을 하는 나락의 모습에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을 또 한 번 걷어찼다.

"어쭈."

그러나 이번에는 내 발길질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나락이 미소 지었다.

"두 번은 안 당하죠."

"그럼 세 번도 피해 보던가."

"정말 왜 이러세요. 저희 그냥 좋게좋게 넘어가죠. 하천성 님 나름대로 정보를 얻으면서 여기까지 도달한 거잖아요? 결과보단 때론 과정이 중요할 때도 있는 법이랍니다."

"그냥 네 면상이 마음에 안 들어."

"다음부터는 가면이라도 준비해야겠네요."

"네가 하는 그 능글맞은 모든 행동이 날 열 받게 하거든?"

"별님들은 좋아하시던데 참 이상하네요."

나는 진심으로 발끝에 오러를 모았다.

나락을 축구공으로 생각하며 녀석이 좋아하는 그 성좌들과 같은 하늘에 박아 주고자.

"발견했네요."

그 순간 무언가 찾은 듯 말을 내뱉은 나락이 이래도 찰 거냐는 듯 비에 맞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진심을 뺀 상태로 걷어차곤 녀석의 등 위를 털썩 깔고 앉았다.

"위치부터 말해라."

"그냥 곱게 칭찬해 주시면 어디 덧나시나요?"

"너한테는 죽어도 칭찬 안 해."

나는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는다고 맹세했다.

층에서 만난 녀석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부족했고, 그러한 능력 미달이 결국 층을 클리어하는 데 방해된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러나 짜증 나게도 이런 나조차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자존심 상한다.

저런 머저리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내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이.

'하일성 놈은 이런 놈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혼자서 위로 올라갔는데.'

뒤통수가 아릿하게 땅겨오기 시작했다.

'썩을.'

나는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어 내었다.

평생을 그 새끼에게 비교당해 살아온 나다.

시기와 질투로 얼룩져 있던 것은 과거의 나였건만, 하일성의 등장에 현재의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나 하천성이야.'

그 새끼와 비교당하면 어떠랴.

나는 내 방식이 있다.

그놈이라는 족쇄에 평생 묶일 순 없었다.

"후우."

입가에 흘러나온 숨결이 새하얗게 변하여 하늘 위로 올라갔다.

털어 내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하일성은 잠시 잊자. 그놈 때문에 조바심이 너무 커졌어.'

5회차나 반복해온 삶이다.

비록 응어리는 남아 있지만, 그것에서 눈 돌리는 법이야 충분히 배웠다.

나는 이제 지구에서처럼 하일성과 비교만 당하던 머저리가 아니다.

그놈이 나를 앞질러간다면.

나는 끝까지 뒤를 쫓아서 부숴 줄 뿐이다.

"나락."

생각을 정리한 내가 나락을 부르자 녀석이 내 밑에서 비적비적 기어 나오며 시선을 옮겼다.

"도와라."

듣는 이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기분 나쁠 명령조.

그러나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걸 알아차린 것일까, 나락은 내 명령에 가까운 말투에도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잠깐 사이 뭔가 떨쳐낸 모양이네요. 회귀자들의 특징이죠.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던 걸 금방 정리하는 것. 수많은 이야기를 보아 왔기에 배우게 되는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패널티라면 패널티인."

"시끄러워. 도우라면 도와. 말이 많아. 넌."

"별님들과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말이 많아져서요."

역시 이놈한테 도우라고 한 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가요. 안내할게요."

그 말을 한 나락이 발걸음을 옮기자 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곤 그 뒤를 쫓았다.

"우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태양신도에게로 갈게요."

"얼마나 발견한 거냐?"

"꽤 여기저기에 있던데요. 한 가지 사실은 어느 지점으로 모이고 있다는 거려나요."

모이고 있다는 건 태양사도라는 것이 그 지점에 있다는 거겠지.

"속력을 좀 높여서 따라가 볼까요?"

"그러든가."

"까칠하시기는."

위치를 아는 이상 굳이 느리게 갈 이유는 없었기에 우리는 속력을 높였다.

성좌의 가호를 잔뜩 받고 있는 나락은 눈발 속에서도 손쉽게 달렸고,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 안 가 우리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눈발 속을 필사적으로 헤쳐 나가는 그들은 두꺼운 옷 위에 모두 동일하게 태양의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태양신도들이었다.

"합류한다."

그 말을 남기고 나는 태양신도들에게 다가갔다.

눈발이 거세서일까, 내가 바로 근처까지 왔음에도 눈치 못 챈 그들을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이보게."

내 부름에 걸어가던 남성 한 명이 고개를 돌렸다.

이내 나를 발견한 그는 내가 자신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곤 물음을 던졌다.

"자네는?"

"북부지방에 태양신도일세. 개인적 일 때문에 멀리 갔다가 태양사도님께서 강림하셨다는 말에 허둥지둥 이동하고 있었네만, 마침 자네들이 보이더군. 자네들도 태양사도님을 뵈러 가는 게 아닌가?"

"오오, 그렇구만. 이리 오게. 혼자서는 힘들지."

내 말을 듣고 그는 얼른 나를 무리에 넣어 주었다.

역시 내 상황 판단력과 연기력은 어디서든 빛을 발한다.

85화

"뒷사람은?"

내가 자화자찬을 하는 동안 뒤따라온 나락에 대해 묻는 말에 나는 적당히 대답했다.

"아, 오는 길에 만났네. 세상이 너무 지쳐 태양신도가 되고 싶다더군."

"새로운 신도로구만. 저자는 참 운이 좋네. 입도하자마자 태양사도님을 뵐 수 있다니. 천운이 따른 게야."

광신도 아니랄까 봐 특유의 감격하는 표정에 나는 미소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광신도면 어떠랴.

이놈들이 가는 길에 층의 클리어가 달려 있기에 나는 재잘거리는 남성의 이야기를 흘려들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정도 그들과 눈 속을 헤치며 나아갔을까, 어느덧 무리 사이에 완전히 끼인 나는 저 멀리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이 무리의 목표는 저 집인 듯하였고, 예상대로 그들은 곧장 그곳으로 나아갔다.

"다 왔구만."

오러를 써서 미리 확인한 나에 비해 한참 늦게 집을 발견한 태양신도가 환호하듯 말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눈 탓에 다 쓰러져 가는 집 앞에 도착하자 태양신도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 무리의 대표인 건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얼어붙은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태양은."

그의 행동에 안쪽에서 암구호 같은 게 들려왔다.

"지지 않는다."

태양신도가 익숙한 듯 대답하자, 그 순간 문이 아닌 문 옆에 있던 바닥이 덜컹하고 열렸다.

거기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고, 태양신도는 우리에게 내려가자는 양 눈짓했다.

'하긴, 눈이 이렇게나 쏟아지는데 지상에 집을 세워 놓는 것보단 지하가 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차가운 계단을 밟으며 한참을 내려갔을 즈음 끝끝내 철문 앞에 도착했고, 태양신도 몇 명이 붙어 낑낑거리며 그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열린 순간, 지상과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내부는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난방이 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들어오자 안에 있던 다른 신도가 따듯한 공기가 빠질까 싶어 바로 문을 닫았다.

개미굴같이 안쪽에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길을 얼마간 살피던 때, 입구에서 서성이던 다른 태양신도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오오, 왔구만. 고생했네. 어느 지역에서 왔나?"

"서쪽 아시온 지역일세."

"거의 다 왔군. 안으로 들어와서 몸 좀 녹이게나. 쉴 곳을 안내해주겠네."

"아, 그러고 보니 새로운 신도 한 명이 있네. 아직 세례를 받기 전인지라 세례를 좀 받을 수 있겠나?"

당연하지만 세례 대상은 나락이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나락의 얼굴이 한순간 굳은 찰나, 말을 받은 신도가 당차게 외쳤다.

"당연히 받을 수 있지. 신녀님께 바로 말해두겠네."

그리고 곧바로 신도 한 명에게 끌려가는 나락에게 나는 친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꼴좋다.

이후 내부에 쉴 수 있게 마련된 집으로 이동할 동안 나는 안을 살폈다.

세계 곳곳에 있는 태양신도들을 모인 만큼 그 숫자가 꽤 많았다.

멸망해 가는 묵시록적인 세계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이만큼이나 있다니.

인간의 생존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방송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전 신도들은 중앙 강당으로, 전 신도들은 중앙 강당으로. 대주교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니 지금 바로 중앙 강당으로 와 주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 또한 덩달아 뒤따라갔다.

그들이 언급한 강당에 도착하자 단상 위에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서 있었고, 그는 사람들이 모인 걸 확인한 뒤 마이크를 들고 섰다.

"흠흠."

대주교인 듯한 그가 한 차례 헛기침하자 주위 소리가 조용해졌다.

"태양사도님의 발자취를 쫓는 선발대에서 새로운 계시가 들어왔네."

나는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드디어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 얻을 모양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계시는 한 마을과 관련된 계시일세. 태양사도께서 설인들의 손에서 미천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곳에 태양을 내려 주셨네."

대주교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양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태양사도님의 발자취를 쫓는 일은 계속되고 있네. 새로운 계시가 오면 바로 말해 주도록 하겠네."

이거 하나를 알리려고 이렇게 사람들을 모은 건가.

하지만 사람들은 대주교의 말에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 신녀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단상 위로 웬 여자 한 명이 뛰어들었다.

주홍빛의 머리카락과 상당히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그녀는 당황한 대주교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았다.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주위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두가 신녀의 말을 경청하고자 귀를 기울였고, 그녀는 한 차례 숨을 고르더니 앵두 빛 입술을 열었다.

"태양사도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신다는 계시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동자가 의문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말에 의미를 해석한 그들은 희번뜩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발대의 태양사도님의 마지막 발자취가 저희 대성당에서 끊어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태양사도님께서 저희를 직접 뵈러 오신 겁니다!"

그녀의 열렬한 외침에 주위에서 엄청난 환호 소리가 퍼졌다.

"태양 만세!"

"태양 만세!"

양손을 위로 뻗으며 외치는 자들을 보며 나는 광신도가 어떤 것인지 두 눈으로 보았다.

미친 새끼들.

"오늘 대성당에 들어오신 태양신도분들은 지금 바로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신녀의 말에 하나둘 단상 위로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오르기 싫었지만, 오늘 새로운 태양신도들을 맞이했던 사람들이 다가오자 단상 위로 올라서야만 했다.

쯧, 나는 어차피 관계없건만.

'누구냐? 태양사도라는 녀석은.'

"오셨네요."

단상 위에 오른 자들을 둘러보던 순간, 나는 이미 나보다 단상 위에 먼저 올라온 나락과 마주쳤다.

아까 세례를 받아야 한다며 끌려가더니, 아쉽게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천성 님 제가 세례 도중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어요."

나락은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살피던 도중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락은 미소를 짓더니, 내 귓가에 소곤소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듣자 하니 이전에도 계시가 더 있었다고 하네요."

"근데?"

그게 어쨌냐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 나락은 히죽 웃으며 내게 이전에 내려진 계시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태양사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어느 한 외딴곳.

한 무리의 태양신도들이 지나가던 도중 항상 껴 있던 겨울 구름이 뚫려 있던 장소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태양을 마주했고, 이 사실을 곧바로 대성당에 알렸다.

이후 대성당에서는 최정예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엄청난 실력을 이용해 태양사도의 발자취를 뒤쫓았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이 지금까지 찾아낸 것은 세 가지.

이것을 태양신도들은 계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태양사도께서 머무른 동굴.

이 동굴에서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세계 자체를 뒤바꿀만한 오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흔적에는 역적인 이 겨울을 도래시킨 장본인의 흔적도 있었고, 그들은 추측상 태양사도께서 직접 역적과 맞서 자신들에게 태양을 내려 주고자 했다고 칭했다.

그들은 동굴을 신성시하고 태양사도께서 머무른 '태양 동굴'이라 칭하였다.

두 번째로 태양사도가 직접 멸한 타천신장.

가장 비옥한 토지인 타천신장을 타락한 신수들이 차지한 탓에 태양신도들은 지금껏 수없이 굶주려 왔다.

그렇기에 태양사도께서 그들을 가엽게 여겨 태양신도들을 위한 비옥한 땅을 준비해 주고자 모든 신수들을 지웠다고 한다.

이곳을 비옥의 땅, '태양이 서린 대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세 번째로 방금 들었던 한 마을을 구한 이야기까지 온 순간.

나는 어이없는 신격화 이야기에 눈가를 잠시 동안 매만졌다.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오는 기분인데 왜일까.

"재밌지 않나요?"

"어디가 재밌다는 거냐?"

"전 재밌는데요."

웃고 있는 면상을 부숴 버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 나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이내 시선을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방금 신녀라고 불린 여자가 내 등 뒤에 서 있었고, 얼마간 나는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순간이었다.

신녀가 내 품에 안긴 것은.

눈물을 흩뿌리며 안긴 신녀의 모습에 태양신도들이 놀라며 하나둘 내게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아, 아아! 태양신님! 드디어 태양사도님을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나이까."

여기저기서 탄성 섞인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잠시 동안 바라보던 나는 이마를 탁하니 쳤다.

그래, X발.

내가 그 염병할 태양사도였다.

"태양사도님, 인사 한번 하시지요."

내 품에서 떨어져 나온 신녀의 말에 나는 이마를 친 손을 내리곤 단상 앞에 섰다.

"어, 나다."

"와아아아아아!"

"태양 만세!"

"태양 만세!"

그리고 한마디를 한 순간, 열광적인 호응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잠깐 동안 바라보던 나는 내 연기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을 감쌌다.

받아들이는 건 익숙하다.

재벌가 막내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괜히 달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5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반복해 온 만큼 나도 꽤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건 오히려 기분이 잡쳤다.

단순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인 거다.

'그냥 부수고 나갈까.'

아니, 이것도 이 층을 클리어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장관이네요. 별님들도 즐거우시죠?"

일단 다 필요 없고 나락을 족쳐야 할 거 같다.

"태양사도님 신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주먹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나를 향해 허리를 구십도 넘게 숙인 신녀의 말에 나는 후우 하고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가 어떻게든 흘러가고 있는 마당에 수틀린다고 망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단상을 내려가려 했다.

"안됩니다! 태양사도님의 발이 감히 이러한 땅에 닿다니요!"

하나 그 순간 신녀가 내 앞을 막았다.

그녀를 잠시 멍하니 보고 있자 갑자기 단상 아래쪽에서 가마 같은 것을 든 자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급히 계단 아래에 가마를 준비시켰다.

이건 또 뭐냐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자, 그들은 태양사도를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양 열심히 눈을 반짝이었다.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 속에서 내가 가마 위에 오르자 주변에서 '태양사도의 마차'라며 호들갑을 떨어 대었다.

참는다.

참자.

가마는 아까 신녀가 말했던 대로 대성당으로 이동했고, 그러는 동안 내 뒤로 모든 태양신도들이 따랐다.

녀석들은 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넙죽 절을 올렸고, 몇몇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내 뒤를 따라왔다.

무언가 말이라도 하면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았기에 나는 그냥 무표정하게 물건처럼 배송되어 주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간 옮겨졌을까, 신당이라고 불리는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가마에서 내리려 하는 순간 혹여나 내 발이 땅에 닿을까 싶어 태양신도들이 자신들의 웃옷을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마를 한 번 감쌌다가 그냥 됐다는 양 그 옷을 밟고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신께서 밟아 주신 옷이야."

"이 옷은 이제 영원히 자손에게 물려줘야만 해!"

그냥 제대로 된 옷을 사줘라.

미친놈들 같으니.

86화

신당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묵시록 세계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양탄자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행히 양탄자 위에서부터는 태양신도는 옷을 깔지 않았고 나는 심신이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내 앞에 각종 과일들이 비치되었다.

전부 태양 마크 문양이 찍힌 과일들이었고,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눈을 반짝이는 태양신도들을 보고 말했다.

"나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원이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신의 사도 명령이라 그런지 말은 참 잘 듣네 하며 생각할 즈음, 내 앞에 놓인 포도를 입안 가득 채운 나락을 보았다.

볼이 다람쥐 같은 모양이 된 나락을 보고 있자 녀석은 꿀꺽하고 포도를 삼키더니 내게 절을 올렸다.

"예이, 뭐든 말씀하시지요. 태양사도님."

"그래, 아무래도 오늘 태양사도의 첫 처형식이 있어야 할 모양이다."

"그거 큰일이군요. 이 나락 얼른 처형식 준비를 하겠습니다."

"네 목만 잘 보이게 들어 올려라. 그걸로 충분하니까."

나락을 죽이고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덜컥하고 신당의 문이 열리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아까 나를 태양사도로 지목한 신녀가 서 있었고, 그녀는 문을 닫은 뒤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방금 흘린 눈물은 잊은 지 오래라는 양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는 호기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종류의 눈을 이전에 본 기억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태양사도님."

"너 사도냐?"

내가 한마디를 툭 던진 순간 신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네, 저는 '백발의 겨울성'님의 사도 태양 신녀 라우라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세계에 부속품인 것을 알고 있는 존재, 사도.

하나 이번 회차에서 만났던 사도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임무에 상당히 충실한 편인 듯하였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사도인 것이 자랑스러운 눈치였다.

'간혹 있지.'

사도들도 성향은 다들 다르니까.

이런 녀석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래서 날 태양사도로 굳이 만들어 낸 이유는? 내가 태양사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너도 알 텐데."

내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양탄자 위에 털썩 앉자 그녀는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아뇨. 당신은 태양사도가 맞으십니다. 저희 세계에서 앞으로 태양사도의 역할을 하셔야 할 테니까요."

"내 역할이라는 건?"

"저의 오라버니이자 역적인 라호라의 손에서 태양신을 되찾음으로써 당신은 진정한 태양사도가 될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이전에 보았던 영웅 녀석을 떠올렸다.

동시에 그를 자신의 오라버니라 지칭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와 같은 주홍색임을 보고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러곤 신녀의 볼을 양손으로 콱하고 쥐었고, 그녀는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방금 한 짓거리는 내가 태양사도가 아닌 걸 알고도 한 짓거리라 이거지."

"어웁, 그, 필, 필요한 일이라 생각해서...."

내가 서서히 볼을 잡아당기자 당황한 신녀가 급히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내 얼굴을 더 찌푸리게 만들뿐이었다.

"대접받는 건 익숙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대접은 오히려 기분 나쁘거든?"

"시, 시정하겠습니다."

우부붑 하고 소리를 낸 신녀의 볼을 탁하니 놔 주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뺨을 열심히 매만졌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는 층의 상황을 되새겼다.

어찌 되었든 이야기는 확실히 제대로 흘러가고 있긴 한 모양인데.

'분명 이 층에 대한 설명은.'

상당히 두루뭉술한 편이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영웅은 고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설명.

이래저래 이야기는 흘러 가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 빈 곳이 너무 많았다.

'그렇담 이번 층은 그 고민을 끝내는 게 목적이라는 소리인가.'

확실히 겨울 마녀의 예언에도 그런 게 적혀 있긴 했었다.

10년 뒤인 오늘 태양신도를 이끌고 자신의 봉인을 풀 자가 나타날 거라고.

그게 나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이번 층은 변화구 없이 직구로 들어오는 타입.'

어쨌든 막힘없이 층이 팍팍 진행되고 있는 건 좋다면 좋은 거겠지만 괜시리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라우라. 네 녀석 혹시 겨울 마녀라는 걸 아나?"

"겨울 마녀? 아."

그 순간 내 말을 듣고 라우라는 비웃음을 흘렸다.

"바보 같은 저희 오라버니가 망상증으로 꾸며 낸 이야기 말이로군요."

라우라를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꾸며 낸 이야기라고?

내 의문을 눈치채고 라우라가 그것에 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바로 태양신님을 봉인해 버린 장본인입니다. 매일같이 그분이 저희 세계를 멸망시키고 있다며 모함하더니, 끝내는 태양신님을 직접 봉인하는 만행을 저질렀죠. 그 일로 이 세계에는 인해 영원한 겨울이 도래하고 말았건만, 오라버니는 아직도 그분을 겨울 마녀라 지칭하며 다니고 있군요. 멍청한 것."

자신의 오빠를 경멸하듯 말한 그녀의 눈에는 고집스러운 감정이 깊게 담겨 있었다.

"태양신님에게 전사로서 선택까지 받고 그 힘을 누린 주제에 은혜는 조금도 모르고 그딴 짓이나 벌이다니. 그래도 꼴에 강하니까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오라버니에게 태양신님의 봉인을 풀 태양석을 빼앗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예언대로 태양사도님께서 오셨으니까요."

반짝거리는 별과 같은 눈으로 라우라가 이쪽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아는 정보와 이 녀석, 그리고 그 영웅놈이 아는 정보의 차이점이 있다.'

사도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사도란 성좌가 일부러 만들어 낸 일종의 버그와도 같은 요소.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리고 있는 사도들의 돌발 행동을 참가자가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만든 녀석들이다.

그렇기에 사도들이 말하는 정보는 객관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시선에서 세계를 해석한 주관적인 정보도 있다.

'어디까지가 오해고 진실일지.'

머리를 한차례 긁적인 나는 우선 이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놈에게서 태양석인지 뭔지를 찾아와 달라는 거냐."

"네,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였다면 처음 붙잡았을 때 데려올 걸 그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쉬운 마음을 삼키고 나는 나락을 돌아 보았다.

"나락, 그 녀석 위치는?"

"네네, 알고 있습니다."

쯧, 썩을 자식, 유용 하지라도 말지.

"저 속으로 욕하셨죠."

"어."

욕했다는 것을 숨김 없이 말해도 저 환한 미소가 사라지지가 않는 게 더 짜증난다.

"바로 가시려고요?"

우리의 빠른 행동력에 놀란 라우라가 우리를 돌아보자 나는 신당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담 적어도 태양신도 몇 명이 따라가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따라올 수 있으면 말이지."

* * *

역적.

10년 전 나에게 주어진 호칭.

그 호칭을 떠올리며 나는 눈밭 위를 걸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만 같은 저 구름들을 보며 나는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내가 부르기를 겨울 마녀, 세계에서는 태양신이라 불리는 마녀를 떠올랐다.

새하얀 입김이 다시 한 번 내뱉어졌다.

10년이라는 세월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눈밭을 걷고 있었다.

"...다시 올 거라 생각했다."

그 순간 내 시선이 뒤를 향했다.

거기에는 한 남성이 있었다.

나와 마주한 그는 태양신도의 옷을 입고 있었다.

"태양사도가 되기로 했나?"

"그딴 거 내 알 바 아니고."

퉁명스럽게 말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태양신도의 옷을 짜증 난다는 양 벗어 던졌다.

그러곤 별 문양이 인상적인 검 한 자루를 뽑아 내게 겨누었다.

"태양석이란 걸 내놓아 줘야겠다."

태양석, 태양신도 녀석들이 얼음 마녀의 심장을 그렇게 말하곤 했다.

결국 겨울 마녀의 예언대로 흘러간다는 건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그려졌다.

그러나 내 눈빛은 죽지 않았다.

이 남자는 강하다.

실제로 나는 그에게 공격당했을 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절했었다.

그때 그가 내게서 태양석을 되찾아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한 생각이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질 수 없다.

그가 태양 사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 순간부터.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오러가 속에서 휘몰아쳐 오르며 전신으로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눈이 녹아들어 가고 대기가 놀라 멋대로 꿈틀거렸다.

오로지 태양신, 겨울 마녀를 죽이고자 만들어 낸 내 오러.

달이 나타나면 태양은 져야만 한다.

그렇기에 나는 달이 되리라.

월광(月光)

내 등 뒤의 태양을 지울 달이 떠올랐다.

* * *

'이 녀석의 오러.'

나락에게서 장소를 들은 뒤 알아서 쫓아오라는 말을 하고 뛰어나온 지 몇 분.

속력을 높여 달린 결과, 나는 금방 역적이라는 라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녀석은 이전에 본 모습과는 달랐다.

녀석이 사용한 오러는 나조차도 거슬릴 만큼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오러의 수준을 넘었군. 이건 클래스 급이다.'

참가자와 층의 주민의 큰 차이점은 클래스라고 언급한 적 있다.

참가자는 클래스를 사용할 수 있고, 층의 주민은 그걸 배우지 못한다.

하나 그 규율을 무시하는 것들이 간혹 있는데.

그동안 살아온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의지가 생긴 오러가 간혹 참가자들이 사용하는 클래스급으로 변모하곤 한다.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오러가 정말로 클래스라는 것은 아니라, 그저 비유에 불과 하지만.

'저건 클래스만큼의 강제성을 가진다.'

그러한 오러를 참가자들은 기원 그 자체란 뜻의 '오리진'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전 층에서 연지 녀석의 상대였던 세렌이 사용한 검술, 용을 반드시 죽이는 용살섬도 이와 같은 오리진의 영역이다.

'이 녀석의 오리진은.'

태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는 달빛.

그리고 그 강제성은 태양신도 녀석들과 어울린 나에게도 해당되어 있었다.

뭐가 되었든 나는 태양사도라며 추앙받고 있었으니까.

그 순간 라호라가 모습을 감추었다.

[A클래스 검의 길이 발동 중입니다.]

달빛이 깃든 창날이 순식간에 내 목을 꿰뚫으려는 잔상이 보인 순간, 나는 즉시 별천도를 들어 그 창을 막았다.

채엥!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일순간 울려 퍼지자, 내 몸이 한 차례 기우뚱하고 기울어졌다.

힘에서 내가 밀렸다는 소리다.

그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내가 밟고 있던 눈 조각이 가루처럼 흩날렸다.

새하얀 눈 대신 드러난 대지가 라호라의 힘에 놀라 갈라지고, 그 땅 아래로 나와 라호라가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하아, 이거 참."

헛웃음을 흘린 내 눈빛이 변했다.

오리진은 강제성을 가지는 만큼 어떠한 상대라고 할지라도 해당 조건에만 부합한다면, 반드시 행하는 것을 실행시킬 수 있다.

즉, 이 녀석은 지금 내 급으로 강하다는 소리였다.

이내 검을 타고 내 오러 또한 흘러나왔다.

고작해야 조금 뿜어져 나온 오러 한 번에 주위 공간이 멋대로 일그러져 나가고 주변이 풍비박산되기 시작했다.

파직.

그리고 울린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의 꼬리가 끝없는 선로가 되어 서로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87화

그리고 동시에 나는 입가에 슬그머니 그려지는 미소에 멈칫하였다.

'이런.'

설마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건가.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일그러진 공간을 타고 휘몰아친 번개가 주위를 모조리 삼켜 나가기 시작했다.

월광(月光)

월광섬창(月光閃槍)

달빛의 모든 것을 머금어 우주까지 집어삼킬 듯한 빛의 창이 주위를 모조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서릿발의 고양이'가 흥분된 기색을 보입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서로를 죽이라며 환호성을 터트립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안타까운 눈길을 보냅니다.]

['돌원숭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지켜봅니다.]

달빛과 번개가 끊임없이 부딪쳐 나가고 내 몸이 땅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번쩍 든 순간 날아든 창날을 가까스로 맞받아치고, 나는 별천도 위로 오러를 끌어모았다.

즐겁다.

X발. 그래, 즐겁다.

지금까지 하일성을 포함해서 단 한 번도 내 힘을 전력으로 써 본 적 없던 내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도 싸움에 미친 녀석이라는 건가.

크라운 로드를 돌파하려면 아직 남은 층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거기에다가 최근 들어 급격하게 줄어든 전투에 나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동감에 거친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나는 검을 하늘 위로 올렸다.

그러자 물방울 하나가 귓가에 맺히며 떨어져 내렸다.

몰아치는 오러가 하늘에 닿자, 그 순간 일대가 빛에 휘감겼다.

이내 떨어져 내린 낙뢰가 내 전신에 부딪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쭈뼛거리며 섰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구식(九式)

진 · 낙뢰(眞落雷)

"그래, 와라! 라호라! 전력으로 부딪쳐라!"

내 외침과 함께 달빛을 전신에 머금은 라호라의 부릅뜬 눈이 번뜩였다.

"쿨럭!"

그 순간 라호라의 입과 눈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를 보고 터져 나오는 낙뢰 속에서 내 눈동자가 한 차례 흔들렸다.

이를 아득 깨문 라호라가 앞발을 내디디며 내게 창을 뻗어 왔지만, 그 일격에는 이전과 같은 힘은 없었다.

"크아아아!"

다시 한 번 그가 소리를 내지르며 창을 휘둘러 왔지만, 라호라는 낙뢰에 의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오러조차 제대로 견디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클래스와 오리진의 유일한 차이점을 떠올리고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모공 전체에서 핏물을 쏟아 낸 라호라의 창이 더 이상 진격조차 하지 못하고 달빛이 희미해져 갔다.

자신이 쏟아 낸 핏물 속에 주저앉은 라호라를 보고 나는 서서히 오러를 꺼트리곤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클래스와 오리진의 차이점.

'클래스는 강제성을 발동시켜도 본인에게 부담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리진은 부담을 오롯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딱 하나의 차이.

그러나 이 차이는 커도 너무나 컸다.

나를 대상으로 오리진을 발동시킨 라호라는 일순간 나와 엇비슷한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을 다루자, 그걸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상대가 나빴다.'

내가 아니었다면 라호라의 능력은 태양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무적이었다.

그러나 내 힘은 라호라가 견딜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라호라의 육체론 애초에 내 힘의 최대 출력을 따라오지 못할 거란 건 알고 있었어.'

만약 그가 정말로 내 힘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었다면 그 즉시 층이 붕괴해 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나조차도 한순간 긴장할만한 힘에 오랜만에 흥분하여 잠시 잊고 말았다.

'소드 엠페러로는 택도 안 될 테고, 하다못해 화경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견뎌 내었을 텐데.'

물론 화경이 되던 그 이상인 현경이 되던 최소한 생사경에 올라 나와 같이 환골탈태를 하지 않고서는 모든 결과는 자멸이었겠지만.

아쉬움의 탄식을 터트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나는 바닥에 무릎 꿇은 라호라를 내려다보았다.

숨을 몰아쉬는 라호라는 어떻게든 일어나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도 이러한데 내부는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 짐작이 안 간다.

"나, 는!"

고작 스스로 자멸하는 결과를 보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양 다시금 라호라의 오러가 휘몰아쳤다.

하나 그 오러도 얼마 안 가 꺼지고 말았다.

과도한 출혈로 녀석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쯧."

혀 차는 소리를 한 차례 내뱉은 나는 회복용 아이템 하나를 꺼내어 라호라의 상처 위에 부어 주었다.

이걸로 회복하는 건 택도 없을 테지만, 적어도 생명 연장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김샜군.'

괜히 찝찝해진 기분에 별천도를 만지작거린 나는 검을 허리춤으로 옮겼다.

고개를 들자 나는 완전히 날아가 버린 일대가 보였다.

낙뢰까지 사용했기 때문일까, 하늘에 있던 구름도 이곳만큼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고 당분간 이 공간이 채워질 것 같지는 않았다.

"와와와! 대박, 진짜 대단한 싸움이었어요!"

그 순간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나락이 뼈로 된 호랑이 위에 올라탄 채 손뼉을 치고 있었다.

녀석의 주위에는 은은한 빛이 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성좌의 가호로 우리가 벌인 싸움의 여파를 견딘 듯싶었다.

"시끄러워. 대단한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걸 대단하다고 하지 않고 뭐라 표현하나요? 세계 최대의 크레이터가 하나 생긴 수준인데요."

오러의 여파로 움푹 파인 형태의 벽을 통통 두드리며 말하는 나락을 두고 나는 라호라를 들었다.

그러곤 크레이터 바깥으로 걸어 나오자, 저 멀리서 열심히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는 태양신도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방금 온 듯 그들은 나를 보고 방향을 틀더니 곧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이, 이건 대체."

"아, 아아. 태양사도님."

숨을 몰아쉬며 자신들이 직접 눈앞에 본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양 경악을 내비쳤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라호라의 품에서 태양석이라는 것을 찾아내었다.

꽁꽁 얼어붙어 있는 심장을 보고 이것이 태양석임을 짐작했다.

"안, 된다."

그새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라호라가 신음을 내뱉으며 태양석을 되찾으려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유리 공작으로 벽 하나를 세운 뒤 녀석을 기대게 하곤 물었다.

"라호라, 이야기를 듣고 싶다. 태양신도 녀석들이 멋대로 태양사도라고 부르고 있지만 난 그런 거랑은 상관없다. 그저 이 세계를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네 설명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려 한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본 라호라의 입술이 열렸다.

"겨, 울 마녀는 악, 이다."

자기의 생각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를 품은 눈동자.

과연 남매라서 그런 건지, 라호라의 눈에도 고집스러움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담 넌 저 구름을 해결할 수 있냐?"

우리의 싸움 탓에 구름 일부가 사라져 햇볕이 내리쬐고 있긴 하나, 라호라도 알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이 겨울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그렇기에 녀석은 자기 나름대로 줄곧 고민해 왔겠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으리라.

"태양신이든 겨울 마녀든 일단 부활시킨다. 이대로 두어 봤자 아무것도 안 돼."

"안, 된다! 그 녀석은!"

"너, 내 힘을 직접 경험해 봤잖아."

내가 한마디를 툭 던져 주자 라호라의 입술이 깨물어졌다.

"겨울 마녀고 뭐고 해결할 거니까 그냥 누워 있어."

그리 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태양사도님!"

소식을 듣고 온 걸까, 마침 등장한 신녀 라우라가 급히 이쪽으로 왔다.

그녀는 유리 벽에 기대고 있는 라호라를 보고 눈을 번뜩였다.

"역적!"

그와 함께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라우라가 달려들려 하자, 나는 그녀의 이마를 턱 하니 잡아 제지했다.

"놔 주세요! 역적을 제 손으로 죽여야...!"

그리고 나는 시끄럽게 굴었기에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들어 올린 나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라우라에게 말했다.

"너 마법 쓸 줄 아냐."

"네? 네, 어느 정도는요."

"그럼 적어도 너희가 태양신도 녀석들과 지내고 있는 대성당이라는 곳에 네가 보고 있는 장면 공유하는 마법 정돈 쓸 수 있지?"

내 말에 얼떨떨해하면서도 라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허리춤에 내려 포대처럼 든 상태로 나는 말했다.

"태양신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이, 이렇게 가시게요?"

"시간 아까워. 위치나 말해."

당황하면서도 라우라가 위치를 알려 주자 나는 녀석에게 용천성의 용포를 덮어씌운 뒤, 곧바로 발끝에 오러를 모아 뛰었다.

용포 속에서도 속도감이 느껴지는지 라우라가 내리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달렸기에 얼마 안 가 신녀가 알려 준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빠르셔라."

그 순간 고개를 힐끔 돌리자, 뭘 썼는지 몰라도 내 뒤를 바짝 쫓아온 듯한 나락이 있었다.

녀석을 잠깐 보다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나는 성안으로 들어섰다.

"태양신은 어디 있냐?"

"저기, 저쪽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용포 속에서 가녀린 손가락 내밀어 방향을 가리키자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10년이나 겨울의 풍파를 당한 탓인지 이미 다 무너져 내린 성안을 한동안 걷자, 이윽고 성 중심에 위치한 얼음과 그 속에 갇힌 한 여자가 보였다.

심장 부분이 뻥 뚫린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얼음 속에 가둬져 있었고, 나는 라우라를 아슬아슬하게 안 보일 위치에 내려다 두었다.

"용포 쓰고 마법을 시전한 채로 여기서 가만히 지켜봐라. 움직이면 그 즉시 이걸 부술거다."

내가 태양석을 들고 위협하자, 단순히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님을 알아챈 라우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는 태양석을 든 채로 얼음 여자 앞에 다가갔다.

"봉인을 푸시게요?"

"아니."

나락의 질문에 나는 태양석을 옆에 내려다 두었다.

그러곤 별천도를 뽑은 나는 천장을 향해 들어 올렸다.

"다치기 싫으면 물러나 있어."

그 한마디와 함께 별천도로 맹렬하게 오러가 모이기 시작했다.

몰려든 오러는 하늘을 향해 뻗어져 나갔고, 그 순간 천장과 구름을 꿰뚫고 섬광이 내리꽂혔다.

구식(九式)

낙뢰(落雷)

떨어진 낙뢰가 천장을 꿰뚫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겨울 구름 일부를 찢어 놓았다.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별천도를 집어넣은 나는 곧바로 품에서 아이템을 하나를 꺼냈다.

"그건."

나는 본 적이 없지만, 나락은 그렇지 않은지 그의 눈이 미묘하게 변했다.

울리는 자명종.

어떤 잠에 빠지더라도 무조건 깨울 수 있는 아이템.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봉인도 잠이라면 잠이니.'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시험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자명종을 내려 둔 나는 그 위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자명종이 소리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한테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얼음 속에서 괴로운 듯 엉굴을 찌푸리던 마녀가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끝내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러곤 얼마간 멍을 때리던 그녀는 곧 우리를 인식하곤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게 되네."

88화

"어라, 알고 하신 거 아니었어요?"

"난 이거 처음 봤는데."

"하긴, 그거 좀처럼 보기 힘든 아이템이니까요."

의외로 좋은 거였나.

"한 번 키면 아이템 창에 넣어도 안 꺼지거든요. 부숴 버리지 않으면 잠을 못 자요."

아니, 쓰레기다.

일회용 쓰레기.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효과가 있었다.

"나락, 너도 다른 데로 꺼져 있어."

"네네."

내 말에 순순히 물러가는 나락을 뒤로한 채, 나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마녀 앞으로 다가섰다.

"야."

[...넌 누구냐?]

얼음 속에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인지 전음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년 뒤에 네 봉인을 풀 사람을 예언했으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거냐?"

그 말에 입술을 뻐끔거리던 마녀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무슨 소리냐. 봉인이 아직 풀리지 않았거늘.]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마녀를 보고 나는 무너져 내린 천장 위 구름을 가리켰다.

[어서 봉인을 풀어라. 영원히 겨울 속에 갇혀 있고 싶은 것이냐?]

"무슨 소리냐?"

마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마녀도 나를 따라 머리를 갸웃하더니, 곧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기기 시작했다.

[뭐, 뭐?]

당황한 음색이 섞인 마녀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자신의 얼음을 감싼 것은 다름 아닌 태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마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10년이나 흘렀잖아. 해결 방법 하나 못 찾을 거로 생각했냐?"

[내 마법을 인간 따위가 파훼했다고?!]

내 비웃음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머릿속에 추측을 그려 나갔다.

나는 현재 이 세계의 사정을 전부 아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던 중 부분부분 정보를 접해 들은 것을 통해 라호라와 라우라 사이에 무언가 다른 오해가 섞여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 여자가 정말로 마녀인지 혹은 태양신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적어도 자기가 겨울 구름을 만들었다는 건 시인했구만.'

이제 막 깨어난 잠, 갑작스레 내리쬐는 햇볕이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마주하면 사람은 당연히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가장 먼저 떠올린 말을 내뱉고 만다.

오만이 뒤섞인 그녀의 말 한마디가 성안에 울려 퍼진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자신이 한 발언이 실수였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내 입꼬리가 휘어 올라갔다.

"인간 따위라니. 그렇담 역시 저 겨울 구름은 네가 한 짓이렷다."

[실언했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나는 그저 혹여나 더 큰 재앙이 올까 싶어 걸어 놓은 마법을 말한 것이다. 내가 잠들 동안 태양이 제 활동을 못 할까 봐 수를 써 두었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정정하는 마녀를 보고 나는 턱을 매만졌다.

하긴,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려면 이 정도 상황 대처는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렇담 나는 다른 수를 띄워 보기로 했다.

"마녀, 솔직하게 말하지. 지금 보이는 햇빛은 이곳밖에 드리우지 않았다. 아직 세계는 겨울 구름에 갇혀 있지. 나는 너와 거래를 하러 이곳에 온 거다."

내 말을 듣고 마녀의 금색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나의 의중을 떠보려는 듯한 그녀를 보고 나는 별천도로 벽의 일부를 무너뜨렸다.

그 순간 무너진 벽 사이로 머나먼 곳에 아직 남아 있는 겨울 구름이 마녀의 눈동자에 들어왔고, 이내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걱정하지 말 거라. 거래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으니 가여운 양이여. 그저 내 봉인을 풀어 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내가 어떻게 믿지?"

[지금까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런 마녀를 보고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자 마녀는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고, 나는 그녀의 앞에 털썩 앉았다.

"그래, 그렇담 거래는 취소하지. 이제는 협박을 좀 해 볼까?"

[협박이라니?]

"내가 널 마녀라고 부르고 있는 시점에서 너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마녀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네 눈앞에 있는 이 자명종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울릴 거다. 네가 다시 봉인의 잠에 들려고 해도 끊임없이 울리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냐?]

"지금 햇볕을 다시 내리쬐게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내 전신에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 속성을 띠고 있는 오러가 주위를 잠식하고 순식간에 마녀의 얼음 속까지도 침투하자 압박감이 그녀를 조였다.

내 오러에 당황한 마녀의 눈이 부릅떠지고, 나는 그러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걸 틀어 놓은 상태로 세계를 한 바퀴 돌 거다.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네가 해 놓은 마법 정도야, 파괴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지. 결국에는 다 없앨 수 있을 거다."

[저, 저건 하늘이 내린 저주다! 태양신인 나를 봉인했기에 내린 저주이거늘, 너 따위가 어떻게!]

"나는 그 하늘이 내려 준 태양사도라서 말이야. 태양사도의 역할을 잘해 내면 하늘에서 태양신으로 승격시켜 준다는 말을 받고 왔지."

[무엄하다! 어딜 감히 태양사도를 사칭하는 게냐!]

"하하, 그렇지. 근데 넌 태양신을 사칭했잖냐?"

별천도를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검을 어깨 위에 올렸다.

"내가 하려던 거래는 어디까지나 시간이 아까워서 해 본 제안이다. 내 오러를 직접 느껴봤으니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넌 잘 알겠지."

마녀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네 앞에 있는 자명종은 선물로 주지. 넌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니까. 앞으로 평생토록 그 자명종과 함께해라. 난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이곳을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될 성지로 지정해 두마. 아, 물론."

나는 바닥의 있는 태양석을 쥐고 몸을 돌렸다.

"이건 내가 평생 가지고 있을 거야."

[거기 서라!]

자신의 봉인을 풀 유일한 열쇠가 내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마녀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를 도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거로 생각하느냐! 내 아이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거 같으냐!]

나는 무시했다.

[그동안 세계가 먼저 멸망할 것이다! 겨울을 이기지 못한 자들이 속속히 전부 죽어 나갈 것이다!]

나는 또다시 무시했다.

[태양신인 내가 천벌을, 천벌을!]

계속해서 무시했다.

[멈춰. 제발. 멈춰라. 그 이상 나가면 나는 절대로 세계를 구원 해주지 않을 것이다. ]

끝까지 무시했다.

내 발이 입구 바로 앞에 닿고, 나는 별천도를 한 번 휘둘렀다.

그 순간 성의 주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고, 암석들이 점차 마녀를 파묻어 가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안돼! 멈춰다오. 제발 멈춰! 봉인을 풀어다오! 그럼 그 즉시 겨울 구름을 지워 주겠다!]

자신의 시야를 점차 가려가기 시작하는 암석들 사이로 마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와 멀어졌다.

[...내 잘못이다! 전부 내가 저지른 짓이니까! 살려다오! 겨울 구름은 내가 만든 것이란 말이다! ]

겨우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나는 우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내 시선이 천천히 뒤로 향하자 암석 사이로 겨우 나와 눈이 마주친 마녀가 달달 떨고 있었다.

"참, 의지박약이네. 하루 정도는 참았어야지?"

아무래도 이 녀석 이런 류의 협박을 당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나야 시간 낭비 안 했으니 좋다마는.

"라우라."

내가 부르자 하늘에서 말을 탄 나락이 내려왔고, 곧 그 뒤에 앉아 있던 라우라가 천천히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비어 있었고, 나는 그런 라우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본인이 직접 시인했는데."

"...."

라우라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옷소매를 꾸욱 쥘 뿐.

지금까지 믿어 온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진 탓인지, 그녀는 사고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듯싶었다.

알아서 머릿속을 정리하도록 일단 라우라를 내버려 둔 나는 별천도를 한 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겨울 마녀를 둘러싼 암석들이 한 번에 잘려 나갔고, 나는 다시 마녀의 앞에 다가섰다.

"고생했다. 마녀."

[넌, 넌,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우라를 보고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마녀가 분노에 몸을 떨며 말하자 나는 녀석의 가슴 구멍에 태양석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환한 빛이 한 차례 머금어지고 얼음이 갈라져 내리자,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마녀가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그것은 명백히 공격 마법으로 그녀가 노리는 것은 뒤편에 있는 라우라였다.

하지만 나는 그 즉시 마녀의 목을 갈랐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목이 바닥을 나뒹굴고 그녀는 자신에 죽음을 인지 못 한 듯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마지막까지 태양신의 지위를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던 추한 발버둥이었다.

"태양신님!"

"본인 입으로 아니라는데 정신 좀 차리지."

목이 날아가 버린 마녀를 보고 라우라가 비명을 지르자 나는 나락 녀석을 돌아보았다.

"나락, 이제 네가 일할 차례다."

"정말 이 정도면 저한테 도움을 많이 받으신 거 아닌가요? 하천성 님도 참 지조가 없으셔라."

"시끄러워. 하라면 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하자 나락은 어깨를 으쓱한 뒤, 죽은 마녀의 목 앞에 다가갔다.

그러곤 나락은 삽으로 바닥을 쿠웅 찍었다.

"1차 실패요."

저래 보여도 마녀의 경지가 상당히 높아서일까, 나락은 언데드로 만드는 걸 한 번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녀석의 눈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고, 이내 두 번째로 삽을 바닥에 찍었다.

"2차 실패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실패라고 말한 나락의 삽에 녀석의 오러가 맹렬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참고로 3번째 실패하면 언데드로 부활 안해요."

느긋이 말을 내뱉은 나락은 마치 사신이라도 된 양 칠흑 같은 오러가 주위로 발산되고, 나락의 삽이 다시금 바닥을 향해 찍혔다.

"흐악!?"

그 순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새하얗게 질린 사람 머리 하나가 눈을 번쩍 뜨고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뭐가, 뭐가 일어난 거냐? 대체 무슨 일이?!"

소리를 치는 마녀를 신경 쓰지 않고 나락은 머리카락을 쥐어 들어 올리더니 그녀의 몸 앞에 내려다 두었다.

그러자 한 차례 부르르 떨린 마녀의 몸이 일어나 자신의 머리를 소중히 감싸 들었다.

"짜란, 듀라한이에요."

"듀라한, 듀라한?!"

히죽 웃는 나락의 말에 마녀가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자 마녀는 숨소리조차 밖으로 내뱉지 못했고, 나락은 과장되게 양팔을 벌리며 말해왔다.

"자, 하천성 님. 피날레를 장식할 때네요."

"겨울 마녀."

마녀를 부르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이쪽으로 향했다.

언데드가 된 이상 그녀는 자신을 되살린 나락의 명령을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는 건.

"겨울을 끝내라."

세상에 봄이 다시금 찾아온다.

89화

사람들의 눈에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유리 벽에 기대어 점차 다가오는 죽음을 느끼던 라호라는 과거를 떠올렸다.

천 년 전 전설로 내려오던 빙하기.

하지만 한 여자가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자, 세계를 가득 메우던 구름이 사라지고 세상에는 다시 봄이 왔다.

그걸 본 자들은 그녀를 태양신이라 떠받들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렇게 살아 있는 신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깨달았다.

그 여자가 빙하기를 도래한 범인이며,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추앙받기 위함이었음을.

'썩을.'

그것뿐이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태양신이 된 그 마녀는 10년을 주기로 그해에 태어난 여자아이를 신녀로 뽑아 왔다.

기존에 태양신이 깃들었던 자는 태양신의 힘을 온전히 다 견디지 못하기에 20살이 되는 해 기력이 다해 죽고 만다.

그렇기에 신녀가 20살이 되는 마지막 해에 태양신이 깃들어야 할 다음 신녀가 있어야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뽑힌 신녀는 10살까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을 누리고, 10살이 되는 해에 태양신이 깃든다.

그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고 말았다.

신녀가 받쳐진 그 날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지나가던 중 신당 사이로 비춘 그 모습이.

마녀는 자신이 깃들었던 자신이 원래 깃들었던 신녀의 몸을 찢고 그 흉물스러운 몸으로 새로운 신녀의 입안으로 파고들던 그 끔찍한 모습이.

그걸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건 괴물이다.

인간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깨달았다.

우리가 떠받드는 태양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괴물에 불과했다고.

그리고 다음 날.

다음 신녀가 정해졌다.

그건 다름 아니라 그날 태어난 내 여동생 라우라였다.

처음에는 받아들이려고 했다.

태양신의 본모습이 괴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단지 인간의 편협한 시선을 통해 느낀 혐오감이었기에, 높은 차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내 선입견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 10년간 나는 계속해서 자신을 단련했다.

그리고 수련을 통해 세상 어느 누구도 오르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 순간, 나는 비로소 보고 말았다.

태양신은 태양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마녀야말로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자였다.

자신에게 반항을 보이는 나라가 있다면, 그 즉시 그곳에 겨울을 도래시키거나 가뭄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가짜 태양신에게 잘못했다며 빌었고, 그러면 마녀는 그들에게 태양을 되찾아 준 척하였다.

전부,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녀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약하기에. 아니, 그 마녀는 일부러 자신을 적대하는 강한 인간이 나오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이렇게 해 온 거다.'

마녀는 태양신을 수호하는 가문을 정해 두었다.

그 가문은 언제나 최고의 전사를 배출해 오던 유서 깊은 핏줄을 지닌 가문들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모아 온 것이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강자가 자신의 손안에서만 나타나도록.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태양신의 부름을 듣고 전사로서 불려간 자들이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 또한 그러해서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사로 선택받은 자는 신계로 나아가 신계를 지킬 전사가 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다 거짓부렁이었다.

강해질 싹이 보이면 그녀는 사전에 제거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강인한 자에게 태양신의 전사라는 말을 붙이고, 그들 죽여 온 마녀가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곧 나도 태양신의 전사로 선택받았다.

강해지고 있던 나를 마녀가 눈치채고 만 것이었다.

'나도, 내 여동생도, 내가 살아온 가문도.'

전부 마녀의 손아귀 속에서 놀아나다가 죽을 운명이란 말인가.

그날, 나는 내 가문을 버리고 떠났다.

그런 뒤 세계 곳곳에서 태양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느낀 자들을 모았다.

태양신 쪽에서도 이를 눈치채고 몇 번이나 공격해 왔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우리에게 마녀가 지금까지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한 확신을 줄 뿐이었다.

이후, 태양신을 겨울 마녀라 부르며 우리는 마녀를 죽이고자 필사적으로 싸워 나갔다.

거짓 태양신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다.

그로 인해 수많은 자들이 죽어 나갔고 사라졌다.

길고 긴 싸움 끝에 겨울 마녀를 내 손으로 죽이기 직전.

내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신녀로 선택받은 여동생 라우라였다.

「대체 왜 태양신님을 죽여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거야! 이 괴물아!」

라우라는 도리어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너무나 어렸기에 내가 미처 겨울 마녀의 곁에서 데려 나오지 못한 라우라는 완전히 마녀의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다.

그 틈을 타 겨울 마녀가 내 허점을 노리고 공격했다.

그 공격에 당한 나는 마지막 일격을 날리지 못했고, 겨울 마녀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웃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 거라. 라우라. 모든 건 예언대로이니.」

그 순간, 겨울 마녀의 몸이 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이 삽시간에 겨울 마녀를 뒤덮었을 때, 나는 내 검에 모든 것을 담아 내던졌다.

날아간 검은 겨울 마녀의 심장을 꿰뚫었고, 그로 인해 바닥에 떨어진 심장은 그녀의 몸처럼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그걸 시작으로 겨울 마녀가 지내던 성이 모조리 얼어붙기 시작했다.

내가 급히 몸부림치는 라우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그것은 영원한 겨울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내 라우라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런 라우라를 붙잡지 못했고, 다시금 성으로 얼음 마녀에게서 떨어져 나온 심장을 주워들었다.

심장은 얼음 속에서 아직도 뛰고 있었다.

이것을 깨부순다면 얼음 마녀는 완전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얼음 마녀가 세계에 뿌려 놓은 겨울 구름은 그녀만이 풀 수 있다.

이걸 깨부수는 순간, 세계의 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손으로 겨울 마녀를 다시 살릴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지금까지 함께해 온 자들이 죽어 나갔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내 손으로 겨울 마녀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난."

이미 자신의 손에서 모든 것이 떠나갔다는 것을 인지한 라호라의 탄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뜨린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저, 저기 봐!"

"겨울이...."

그런 순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라호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까지 자신의 흐릿한 그림자로 뒤덮여 빛 한점 들지 않던 땅에 점차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라호라의 고개가 천천히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태양사도와의 싸움으로 겨울 구름을 일부 지웠기 때문에 오는 햇볕인 걸까.

하나 곧이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구름 따위는 조금도 없는 환한 하늘이었다.

태양이 내리쬐고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 속에서 라호라의 눈동자가 한 차례 떨렸다.

"겨울 마, 녀가."

부활했단 말인가.

결국.

침음을 내뱉으며 라호라는 일어나려 했다.

겨울 마녀를 제 손으로 다시 죽여야만 한다.

세상을 다시 그 마녀의 손에 쥐여 줄 수는 없었다.

"뭐 하냐?"

그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라호라의 시선이 향한 순간 거기에는 유리 벽 위에 올라가 앉아 있는 태양사도 하천성이 있었다.

"겨울 마녀를 결국 되살린 거냐!"

피를 토하듯 라호라가 외치자, 하천성은 귀찮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네 동생한테 들어라."

그러곤 자신은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양 하천성은 유리 벽에서 내려왔다.

그런 그를 보고 다시 무어라 외치려던 순간, 하천성과 대조되듯 그곳에 라우라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

라우라의 등장에 라호라가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저 멀리 수많은 태양신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녀를 멍하니 보고 있던 라호라의 앞에서 라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했습니다."

라우라의 사과를 듣고 라호라는 입술을 달싹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라우라는 태양신녀.

그동안 자신을 역적이라 부르짖었던 그녀가 사과해 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 떻게."

자신이 평생을 바쳐도 이뤄 내지 못할 거로 생각하여 10년씩이나 고민에 휩싸인 채 살아왔는데, 어떻게 단 한 번에.

하나 그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라호라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런 그를 라우라가 급히 받은 순간에도 라호라의 시선은 하천성에게로 향해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의미 모를 말을 하천성이 내뱉은 순간, 라호라는 그동안 쌓아 두었던 고민들이 하나둘 흩어져 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흩어져 가는 고민 속에서 일생의 절반을 바쳐 싸워 온 끝에 맞이한 평온함 속에서 눈을 감았다.

* * *

[축하합니다. 3번째로 32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32층의 주인' '백발의 겨울성'이 당신에 클리어에 기쁨을 표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업하셨습니다!]

[좀 더 많은 성좌들이 당신을 인식합니다.]

[5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당신의 지명이 정해지기 시작합니다.]

별천도에 눈이 달리기 전까지는 일부러 타임 리셋으로 레벨을 낮춰 왔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무색해져 타임 리셋을 그만뒀더니 어느새 50레벨에 오른 모양이었다.

내 이전 지명은 뇌제.

본래는 지명 따위 전혀 관심 없었지만, 나락이 했던 왕이라는 말 때문인지 나는 이끌리듯 상태 창을 켰다.

그리고 그 지명을 확인한 순간 나는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어라, 지명이 정해지신 모양이네요?"

"별로 알 거 없어."

나락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양 굴자, 녀석은 '에이 그러지 말고'라고 말하며 내 옆에 엉겨 붙었다.

"이번에는 제가 도와주신 것도 꽤 있고 한데 그냥 좀 말해 줘요."

녀석을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멈춘 나는 한 차례 한숨을 머금곤 입을 열었다.

"천왕(天王)."

툭 내던진 내 말에 눈을 깜빡거린 나락이 곧 입가를 가리고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참 하'천'성 님께 잘 어울리는 지명이네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랬나요."

그리 말한 나락은 내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왕위에 오른 걸 축하드려요. 하천성 님, 크라운 로드는 하천성 님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한 모양이네요."

신이 난 얼굴을 지은 나락은 이제는 몸이 반투명해져 사라져 가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층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또 기대할게요."

"다음에 만나면 죽일 거다."

"참, 독설가다우셔라."

그러던 순간 나는 나락에게 묻지 않은 걸 떠올리곤 녀석을 홱 하니 돌아보았다.

"야, 잠깐만 네 녀석 아직 야신의 정보 안 말해 줬잖...."

그 말을 끝으로 내 시야가 사라지고 나는 계단 앞 공간에 내던져졌다.

시야가 사라지기 직전 히죽 웃던 나락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까득 이를 부딪쳤다.

'이 새끼를 그냥.'

다음 층으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지만, 나는 그 생각을 접었다.

됐다.

나한테는 층을 클리어하는 게 우선이니까.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죽인다.'

마음속 다짐과 함께 내 다리는 그렇게 또 한 번 계단을 올랐다.

90화

Chapter 9 ― 어른이 아이에게

['33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당신의 입장에 앞발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합니다.]

[이번 층은 시나리오 층입니다. 33층부터 35층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각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마다 다음 층이 열립니다.]

[개인 클리어 층입니다. 하지만 첫 입장 시 팀 등록을 한 자들과는 함께 입장이 가능합니다.]

오르자마자 떠오른 인사말과 함께 시나리오 층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번에 여러 층을 오르는 건 편하다만, 이런 유형은 항상 까다로웠던 적이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자 곧바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33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이번 층은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따라야 함을 알립니다.]

'역할극인가.'

시나리오 층에 더해 역할극.

역할극의 경우, 외형이 아예 뒤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전에 여자가 되었던 29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이번 층에서는 절대로 그런 꼴이 되어서는 안 될 텐데.

[당신을 측정하기 시작합니다.]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의 역할이 정해졌습니다.]

그 순간 빛이 눈앞을 휘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나는 지구에서 내가 지냈을 법한 고급스러운 현대식 방에 있었고, 그 때문에 벙벙해진 얼굴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매만졌다.

"뭐야? 이 거구는."

2m는 될 법한 몸뚱이에 양복 아래 터질 듯하게 드러난 근육질.

거기에 붉은색의 사자머리까지 더해져 누가 보아도 최종 악당의 포스가 느껴지는 모습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다음 말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역할은 세계 불굴의 온라인 VR게임 1위 기업 PK소프트의 회장 아들이자 S급 헌터 강철민입니다.]

[세계는 지금 대 혼란의 시대, 여기저기서 매일같이 게이트가 터져 나오고 그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곡소리가 울립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S급 헌터인 당신은 그럴 때마다 나타나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요. 다가오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에는 당신의 힘으로 역부족합니다. 종말의 시간이 오기 전에 힘을 내서 세계의 멸망을 막을 열쇠를 찾아보도록 하죠!]

[주의하세요. 이 층에서는 당신의 능력치가 강철민의 능력치로 설정됩니다. 제한 상태를 강제로 해제할 시 동화율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동화율이란? 당신이 역할극의 적절한 연기자인지 판단하는 실시간 체크 시스템입니다. 동화율이 모두 떨어질 경우,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 즉시 세계는 당신을 배제하고자 할 것입니다.]

[현재 동화율 50%]

대한민국까지 집어넣은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을 보고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능력치 제한."

내가 역할극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역할극은 인물과의 동화율을 중요시한다.

어느 정도 타협은 해 주는 편이지만, 그 인물이 반드시 하지 않을 행동 같은 걸 하게 되면 동화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하아, 진짜."

눈살을 찌푸린 나는 하는 수 없이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았다.

[PK소프트의 회장 아들 강철민/천왕(天王) 하천성]

[크라운 로드 5회차]

지명 성좌 : '조소하는 신데렐라', '파나만의 피리', '잔혹함의 물든 인사', '나태로운 즐거움', '하늘을 걷는 신사'

오러 속성 : 운(雲)/전(電)

나이 : 31세(24세)

LV.327(50)

체력 388(50,000)

마력 370(50,000)

힘 499(50,000)

지력 250(50,000)

민첩 462(50,000)

남은 스텟 : 250(사용불가)

―스킬창―

S클래스 [백귀야행]

A클래스 [백귀화]

B클래스 [강철 신체]

C클래스 [돈줄]

(사용 불가)F클래스 [타임 리셋]

(사용 불가)F클래스 [그대로 멈춰라]

(사용 불가)A클래스 [검의 길]

(사용 불가)A클래스 [용천성의 호포]

[클래스가 비어 있습니다.]

'썩을, 오러 속성마저 바꿔 놓은 거냐.'

완전히 바뀐 상태 창을 전부 읽고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나마 다행히 이 세계관 내에서 나름 최강으로 군림할 수 있는 능력치를 부여받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몸에 흐르는 힘 자체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약해진 건 오랜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확실히 힘을 쓰려면 쓸 수 있는 느낌이지만.'

그 즉시 동화율이 개판이 나겠지

[준성좌 '용들의 군주' 가 지금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틈 봐서 기어오르기는.

연지를 무시하고 나는 이번에는 S급 클래스 쪽을 눈으로 흘겼다.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S급 클래스.

당장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이런 상황에 무턱대고 써 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확인해 둬야 할 건.'

나는 내가 항상 사용하던 별천도를 들어 보았다.

연극이라는 특색에 맞게 별천도도 강철민이 사용하는 대검으로 바뀌어 있었고, 나는 그걸 뽑아 오러를 둘러보았다.

평소에 자리하던 전 속성의 기운이 아닌, 희미한 흰 색깔의 오러가 검 위로 스며들자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엠페러급은 되는 건가.'

회귀자인 나한테 깨달음 같은 것은 의미 없다.

무엇보다 강철민의 몸은 이미 스텟상으로는 엠페러급이었으니, 그 정도 힘을 사용할 수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재 동화율 47%]

하지만 본래의 강철민은 소드 엠페러급이 아니라는 양 동화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쯧, 아무래도 전투에서는 그랜드 마스터급으로 움직여야 할 듯싶었다.

'분명히 운 속성 회귀자 녀석이 한 명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녀석이 어떻게 움직였더라.'

[게임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즉시 게임에 접속하세요!]

머릿속에 곰곰이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던 순간 나는 시끄럽게 울리는 안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었고, 힐끗 보니 게임이 켜져 있는 듯하였다.

별천도. 아니, 별천대검을 내려 두고 컴퓨터 앞으로 다가간 나는 우선 의자를 빼 앉았다.

'몇 년 만에 보는 온라인 RPG 게임이냐.'

과거에 나름 게임을 즐겼기 때문일까, 익숙한 패널들을 보며 나는 살짝 흥미를 느꼈다.

그러면서 마우스를 잡은 순간, 나는 움찔거리며 한 차례 어깨를 떨었다.

강철민의 기억이 제멋대로 스며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할극은 단서를 찾아내면 본래 몸 주인의 기억이 일부 돌아오는데, 지금이 그러했다.

"아, 이 느낌 최악인데."

뇌를 누군가 멋대로 주무르는 느낌이라 거부감에 치를 떨고 있자 강철민의 기억이 선명히 보였다.

세계 불굴의 온라인 VR 게임 1위 기업 PK소프트의 회장 아들이자 S급 헌터 강철민.

최근, 헌터 일에 지쳐 피로를 풀려는 도중 그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 철민아.

그의 친구 서강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전화에 강철민은 피로한 표정을 지었다.

서강선은 친구라곤 하나 그를 자주 귀찮게 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 최근에 너희 아버지 게임 시작했다.

"그게 왜?"

―너도 하자고. 요즘 너 좀 지쳐 있잖아.

서강선의 말에 강철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자신은 좀 지쳐 있기는 했기에 부정은 안 했다.

―게임 좀 하면서 한숨 돌리는 게 어때? 이거 생각보다 재밌어. '헌터였던 내가 판타지 세계로 간다면?!'이라는 주제인데 웃겨. 너희 아버지 회사 게임 잘 만들더라.

그 말을 듣고 강철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친구인 서강선은 이래 보여도 자신과 함께 사선을 넘나든 헌터다.

사상 최악의 사태,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 것도 벌써 7년.

최근 메인 게이트는 휴식 기간이라도 가지라는 양 가동이 멈춘 지도 한 달째이다 보니, 그 또한 서브 게이트를 제외하면 줄곧 대기 상태였다.

―어차피 게임이니 언제든 끄고 나가면 그만이고, 괜찮지 않냐? 그리고 이거 꽤 현실이랑 비슷해서 실제 몸 쓰는 느낌이 나니까 우리 같은 헌터들은 훨씬 게임하기 편하거든.

"...생각은 해 볼게."

―응, 이미 택배 붙여 놨다. 지금쯤 집 앞에 게임기 도착했을 테니까, 얼른 켜라.

그걸 끝으로 서강선이 먼저 전화를 끊어 버리자, 강철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서강선 아니랄까 봐 늘 멋대로 굴기 일쑤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강철민은 마침 울린 초인종에 택배를 받았다.

그러곤 이번만큼은 서강선을 따라 게임을 해 보기로 하였다.

기억 회상이 끝나자 나는 고개를 털어 기억을 대강 저편에 던져두었다.

"뭐가 됐든 게임을 하라 이거지."

이만큼이나 자세히 설명해 준 만큼 이 게임에 분명 층을 공략하는데 필요한 것이 있으리라 판단한 나는 마우스를 놓곤 VR 게임 기기를 들었다.

"나 원, 정작 지구에서는 이런 건 본 적도 없는데."

하지만 강철민의 기억 덕분일까, 나는 익숙하게 VR 기기를 착용하곤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게임 기기가 컴퓨터와 동기화되며 전원이 켜졌고, 나는 곧 3D 온라인 게임 디스 헌터에 직접 접속할 수 있었다.

[게임 캐릭터 생성을 하세요.]

크라운 로드에서 게임을 하게 될 줄이야.

어이없는 상황을 느끼며 나는 대강 게임 캐릭터를 생성했다.

닉네임은 하천성으로 했지만, 다행히 동화율은 안 내려갔다.

그렇게 게임 캐릭터 생성이 완료됐다는 말에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자,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도시 풍경이 보였다.

머리 위에 뜬 상태 창의 내용은 튜토리얼. 그리고 마침 저 멀리서 몬스터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잠깐 본 나는 손을 한 차례 쥐었다 폈다가를 반복했다.

그래픽 특유의 느낌이 손에 남아 있긴 했지만, 현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검 한 자루가 보였다.

[낡은 장검(일반)]

레벨 제한 : 1

공격력 : 1

내구력 10/10

익숙하게 검을 뽑아낸 나는 날을 확인하곤 띠링! 하고 울리는 알림 음에 고개를 들었다.

[튜토리얼 퀘스트. 몬스터를 처치하고 보상을 얻으세요!]

"흐음."

살짝 흥미가 돋은 나는 달려오는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상당히 약하다.

거기다가 몸에는 오러 특유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 세계라면 몰라도 게임 안에서는 오러나 능력치가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건 뭐랄까, 크라운 로드에서 회귀를 했을 때의 느낌과 상당히 유사했다.

달려오는 몬스터, 아마 오크로 추정되는 녀석을 보며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며 반대편 발로 지면을 박찬 순간, 내 몸이 녀석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자 오크가 들어 올린 무기를 조잡하게 휘둘러 왔다.

아무리 몸이 약해졌다 한들 전투를 경험해 온 세월이 있었기에 손쉽게 무기를 피한 나는 오크의 배에 다리를 내질렀다.

퍼억!

하나 꽤 묵직한 소리가 울렸음에도 오크는 두 다리를 지탱한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둥그런 오크의 배는 생각보다 상당히 단단했다.

내 공격 때문일까, 열이 받은 오크가 다시금 무기를 휘둘러 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검으로 받아내자 오크의 힘이 내 검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묵직한 공격을 받아 본 게 얼마만이더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크의 몽둥이를 검으로 흘린 뒤, 그 즉시 녀석의 목에 검끝을 찔러 넣었다.

파고든 검에 의해 오크의 목에서 핏물이 튀었고, 녀석은 끄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그 순간 알림 음과 함께 데이터화하면서 사라지는 오크를 보며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

조금 재밌다.

91화

지난 몇 개월간 능력치를 최대로 찍고 나서 전력으로 단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는 나다.

그러나 이 잠깐의 공방을 통해 오랜만에 전투다운 전투를 했다.

'게다가 여기선 죽어도 죽는 게 아니야.'

이곳은 VR 게임.

나는 처음으로 목숨을 걸지 않고 그저 내가 즐기기만 해도 되는 상황에 놓였다.

목숨이 걸린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은 생각 이상으로 차이가 크다.

아무리 능력치를 최대치로 찍은 나라도 하일성에게 목이 베인 적이 있듯이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는 늘 목숨을 잃기 쉬우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다.

"흐으음."

조금이지만 이전보다 살짝 더 흥미가 강해졌다.

이 층은 조금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다.

[스텟을 확인해보세요. 스텟은 패널을 이용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스텟을 확인해 보라는 말에 나는 손을 움직여 메뉴 창을 켜 빨간색 불이 들어온 '스텟'란 누른 뒤, 현재의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천성]

칭호 : 이세계로 넘어온 헌터

직업 : 없음

LV.1

체력 10

마력 10

민첩 10

지력 10

힘 10

남은 스텟 : 5

적혀 있는 스텟의 표기 방식은 현실의 상태 창과 다를 바 없었다.

이쪽은 딱히 흥미가 없었기에 나는 그냥 민첩에 투자해 두곤 스텟 창을 껐다.

[튜토리얼을 끝마쳤습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띠링!

[지구와 통하는 게이트가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당신의 몸이 어딘가로 전이되기 시작합니다.]

그 말과 함께 환한 빛이 쏟아지고, 눈이 부셔 다시금 눈을 깜빡인 순간, 나는 어느 이름 모를 마을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방식의 게임인 듯했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여기저기 유저로 추정되는 자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메인 퀘스트. 다른 세계의 모험자여, 당신의 앞날을 위해 우리가 준비한 것이....]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창을 꺼 버리곤 검을 어깨 위에 올렸다.

퀘스트고 뭐고 누군가의 말을 따라가는 건 크라운 로드 때부터 질색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사냥.'

이 약해 빠진 몸으로 오랜만에 전투하는 거다.

* * *

"비상! 비상! 드디어 접속했습니다!"

하천성이 강철민의 몸으로 이제 막 '디스 헌터' 게임을 시작했을 무렵 어느 한 사무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뛰어나온 사원 여성은 디스 헌터의 게임 담당 운영자 중 한 명으로 그녀는 다급하게 자신의 윗사람에게 지금의 상황을 전했다.

"뭣이?! 그분께서 드디어 게임을?!"

온라인 VR 게임 1위 기업 PK소프트의 회장 아들.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S급 헌터.

몸과 얼굴은 험하게 생겼지만,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타. 게이트의 최전선에 서는 강철민!

그가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들의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곽 부장, 올해 42세.

게임 운영자 중 가장 높은 짬인 그는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과거의 퇴근길, 자신이 탔던 지하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올해로 35세. 여전히 독신인 그는 오늘도 쓸쓸한 퇴근길에 올랐다.

아직은 과장이었던 그는 피곤에 찌든 기분을 느끼며 지하철을 탔고, 곧 잠시 잠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덜컹거린 지하철이 급격하게 멈추고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놀란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 있던 것은 게이트였다.

3년 전, 세계 각지에서 열린 게이트로 대한민국은 한때 커다란 곤욕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헌터들 덕분에 상황이 많이 나아지자, 한시름 놓아 이제는 남 일처럼 느껴졌던 게이트가 자신이 탄 지하철에 나타난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 순간 게이트 속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제일 먼저 맨 앞에 있던 여성을 덮치려하자, 곽과장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를 밀어내었다.

하나 곽과장은 곧 그 행동을 후회했다.

여성을 밀치자마자 몬스터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나 죽는구나.'

여자 한 번 못 사귀어 보고 이렇게 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콰앙!

거친 파괴음이 울리고, 주변을 뒤덮은 연기 속에서 곽과장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가 본 것은 거대한 한 남자의 등이었다.

양복 차림에 대검 한 자루를 쥔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늠름했고, 곽과장은 그 뒷모습을 보며 한 차례 몸을 떨었다.

그는 바로 강철민.

그때 당시 B급 헌터이자, 올해 20살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회장의 아들인.

"살았다. 살았어! 헌터가 왔어!"

누군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곽 과장의 눈에 그건 너무 이른 이야기였다.

그는 가까이 있었기에 보았다.

자신을 구하려다 몬스터에게 찢긴 강철민의 팔이.

"뒷문이 열려 있으니 모두 도망쳐라. 그동안 이 녀석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하지만 강철민은 덤덤하게 말했다.

상처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 말에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곽 과장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뒤따라 갔다.

그러면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두고 그저 도망만 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홀로 몬스터와 싸우는 남자를.

"그날, 나는 그분께 목숨을 구원받았지."

눈물을 흘리며 그는 눈가를 찍었다.

그 뒤 자신이 구해 준 여성과 결혼에 골인한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 이야기 몇 번이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술자리 때마다 똑같은 소리를 하는 곽 부장의 모습을 늘 마주했던 사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강철민이라고요. 강철민. 메인 게이트 최전선을 앞다퉈 서는 세계 랭커 2위! 대한민국 종말의 날 때 대한민국을 구해 낸 영웅! 그러면서도 다른 질 낮은 헌터들과는 달리 자신을 띄우거나 TV 출연 같은 일들은 일절 하지 않고, 재벌가 아들이면서도 일탈 같은 사소한 기삿거리조차 없이 마치 굳센 바위처럼 오로지 게이트에만 집중하는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희대의 헌터라고요!"

"알지. 알아. 암 알고말고."

"강철민이 저희 게임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주가가 폭등할 겁니다. 자연스레 게임 광고 효과가 될 거고요."

"그건 딱히 상관없다만."

"아니, 이게 중요한 거잖아요! 자기 아빠 게임이라고 해도 광고 한 번 안 해 주던 사람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게임을 했는지는 몰라도 놓쳐서는 안 될 대어잖아요! 그거 아시잖아요. 강철민이 쓰는 물품이 어쩌다 기사에 오르면 그날 그 물품 모조리 다 팔리는 거. 강철민의 사생팬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됐고. 다른 유저들 모르게 빨리 히든 직업이나, 유니크 아이템 좀 잔뜩 드려. 우리 강철민 님이 게임을 재미없어 하실까 걱정된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곽부장이 말하자 사원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걸 제안하려고 급하게 온 거긴 한데요."

"뭐 해? 어서 전부 다 드려. 유저한테 나중에 들켜서 욕먹더라도 내가 욕먹을 테니 얼른 해. 내가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 오늘에서야 결실을 맺는군."

"정말 곽 부장님 강철민 사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래도 티 나게 드리면 걸릴 테니까, 슬쩍슬쩍 찔러 넣겠습니다!"

투덜거리면서도 사원은 오케이를 외치며 뛰어갔다.

그렇게 '강철민 디스 헌터 오구오구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히든 퀘스트 등장! 성유물의 유래, 당신의....]

"싫어."

[히든 직업 발생! 이 퀘스트....]

"싫어."

[히든 유물 발견 이벤트! 지금 당장....]

"아, 싫다니까."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뜨는 이벤트들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 놈의 게임이 이렇게 이벤트가 많은 건지.

개나 소나 히든을 붙여놓은 이벤트를 보며 나는 손을 휙휙 젓곤 낡은 검을 쥐었다.

내가 온 곳은 저레벨 사냥터.

나도 과거에는 온라인 게임을 해 본 경력이 꽤 있기 때문에 익숙하게 맵을 찾아 사냥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나는 인터넷 창을 켰다.

VR 게임이긴 하나 인터넷은 사용 가능했고, 나는 오랜만에 지구에서 생활하는 느낌을 받으며 디스 헌터 게임의 정보 사이트를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뜨는 사이트를 보며 빙고라고 외친 나는 그곳에 들어가 보았다.

사이트에 쭉 나열된 메뉴를 훑으며 정보 게시판으로 온 나는 '사냥터'라고 검색했다.

[디스 헌터 초보자를 위한 사냥터 가이드!

우선 여러분들은 디스 헌터 튜도리얼을 진행하며 레벨 5를 찍으셨을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사냥터를 어떻게 돌아야 하는지 안내해 드릴 테니 이대로 따라가시면 됩니다.

신목의 들판(레벨 5~10) > 신목의 숲(레벨 11~15)....]

사냥터의 이름들을 대강 눈으로 읽던 나는 턱을 매만졌다.

사냥터 레벨도 레벨이지만, 마지막 문장에 내가 이 게임에서 줄곧 궁금했던 것이 적혀 있었던 탓이다.

[디스 헌터는 일반 온라인 게임과 다르게 현실성을 추구하여 레벨 1이라 한들 컨트롤만 있다면 레벨 100의 몬스터도 잡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직 헌터 분들이 디스 헌터를 하면 간혹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레벨 1때 레벨 100의 몬스터를 잡으면 레벨도 빨리 오르기도 하니, 컨트롤이 되시는 분들은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는 게 좋긴 합니다.

하지만 주의하세요.

여러분은 현직 헌터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레벨에 맞는 사냥터에 가서 성장하는 재미를 느껴 주세요.

제가 그동안 뉴비분들이 말도 안 되는 사냥터에 가서 죽는 걸 너무 많이 봐서 말해 주는 겁니다.]

적힌 말을 보고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친히 미끼를 던져 주셨는데 내가 안 물 수가 있나.

"레벨 100 사냥터라, 좋지."

어디 크라운 로드 5회차로 다져진 실력을 한 번 검증해 볼까.

* * *

어느 숲속.

"자자, 여러분들 오늘도 디스 헌터 부캐 마궁사 육성 방송 시작했습니다."

유쾌한 남성의 목소리가 한 차례 울려 퍼졌다.

그는 올해 24살로, '섭섭'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디스 헌터 전문 게임 스트리머였다.

그가 룰렛을 돌려 이번에 키우게 된 것은 디스 헌터 내에서도 똥 직업으로 유명한 마궁사.

비록 D급 헌터이긴 하나 나름대로 헌터 일을 경험해 본 그는 디스 헌터에서 섬세한 컨트롤로 유명한 스트리머였다.

시청자 수는 500명 정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착실하게 인지도를 쌓아 나가고 있었다.

언젠가 열심히 성장해서 꼭 대기업 스트리머가 되겠다며 다짐을 한 그는 이번 마궁사 육성이 자신의 영상 채널에서도 쏠쏠한 반응이 나오고 있기에 큰 기대감을 가졌다.

"이번 사냥터는 레벨 100대입니다. 지금 제 레벨이 50이니, 슬슬 마궁사 키우기도 빡세지기 시작하네요."

시청자와 대화를 나누며 100레벨대 사냥터에 들어온 그는 마궁사 전용 활을 들었다.

그의 특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선에 몬스터를 사냥하며 시청자들에게 희열감을 주는 것.

마궁사라는 직업이 원체 보잘것없는 직업인지라 레벨 업이 힘들긴 했지만, 자신보다 높은 고레벨대 몬스터를 사냥을 하는 건 그걸 잊을 만큼 즐거웠다.

디스 헌터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유도 정석을 타면 정석대로 성장하는 재미를, 왕도가 아닌 사도로 나아가도 자신이 자초하여 올리는 난이도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니까.

"아! 첫 몬스터 떴죠! 바로 갑니다!"

눈앞에 100레벨대 몬스터 파자몽이라는 붉은색 드래곤이 등장하자 스킬 질주를 사용하여 몬스터에게 접근했다.

이내 화살을 쏘아내자 파자몽은 섭섭이를 인식하고 그 즉시 공격을 가해 왔고, 그는 능숙하게 파자몽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좋아. 잡을 수 있겠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신들린 컨트롤로 끝끝내 파자몽을 쓰러트린 그는 기쁨의 소리를 내질렀다.

50레벨이나 차이 나는 파자몽을 똥직업 마궁사로 쓰러트렸다.

시청자들도 분명히 좋아할 거란 생각에 채팅창을 보던 찰나, 그는 곧 채팅창 반응에 고개를 기울였다.

[형, 제발 고개 좀 돌려!]

[섭섭아 거기 뭐 이상한 거 있다니까. 소통좀 해라! 제발!]

[빨리 가보라고 이 XX아.]

난리 난 채팅창에 섭섭이는 눈을 깜빡였다.

시청자들이 훈수질하는 거야 일상다반사였지만,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92화

"어, 그러니까 여기로 다시 가 보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시청자들이 단체로 이러고 있으니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서둘러 시청자들이 말한 곳으로 가보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절벽, 아까 전 파자몽을 발견하고 뛰느라 지나친 절벽이었다.

용케 그 틈에 뭔갈 봤다고 생각하며 절벽 아래쪽을 살펴보자 저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저?'

레벨 제한이 없는 디스 헌터인 만큼 어느 곳에든 유저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는 시청자들의 의문을 풀기 위해 절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이해 못 할 광경이 들어왔다.

딱 보아도 입고 있는 아이템 전부가 초보자용인 유저 한 명이 파자몽에게 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라면 그저 뉴비가 또 객기를 부리며 높은 레벨대 사냥터에 왔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섭섭이 본인이 컨트롤로 유명한 스트리머이기에 안다.

저 움직임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미친 컨트롤이었다.

'뭐, 뭐시여? 저건.'

입을 쩌억 벌린 채 파자몽을 사냥하고 있는 유저를 보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벨이 낮은 만큼 턱없이 모자란 스텟으로 인한 차이 때문인지, 파자몽이 전신에 두른 비늘을 그의 검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곧바로 파자몽의 유일한 약점인 목 아래의 역린만을 집요하게 공격해 나가고 있던 것이다.

파자몽은 인공지능이 상당히 높아서 상대에 따라 공격 패턴을 바꿔 사냥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유저는 파자몽의 모든 공격을 피하며 유린하고 있었다.

[닉네임 지금 검색해 보니까 레벨 2임;;]

[미쳤다. 형, 특종이야. 특종.]

[진짜 2잖아? 괴물이다. 미친, 괴물이다!]

한창 싸움을 지켜보던 중 채팅창에 올라온 말에 그는 눈을 부릅떴다.

레벨 단, 2.

튜토리얼을 막 끝냈을 때의 레벨이다.

디스 헌터 내에서 컨트롤 뛰어난 스트리머로 유명한 자신이 50레벨 마궁사로 겨우 잡은 파자몽을 전직도 안 한 레벨 2가 잡고 있다고?

하나 황당함으로 물들었던 그의 표정은 얼마 안 가 순식간에 변모했다.

'정신 차리자. 섭섭쓰, 이거 기회다. 이 영상 내 채널에 올리면 어떻게든 입소문 타서 대박 난다.'

디스 헌터 스트리머이자, 유튜버인 자신의 감이 말하고 있다.

자신이 드디어 대박 날 소재를 지금 눈앞에서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 *

터업.

파자몽이랬나?

레벨 100대 사냥터에 진입하고 1시간 정도 흘렀을 즈음.

[축하합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그렇게 불리는 붉은색 용가리를 1시간이나 걸려 쓰러트린 나는 녀석의 머리 위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현실에서처럼 진득하게 땀이 묻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진한 전투의 여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짜로 죽는 것은 아닐지언정 직감적으로 이 녀석의 공격을 한 대라도 맞으면 게임 캐릭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꽤 몰입해서 싸운 것이다.

'현실에서도 한 대 맞고 죽는 건 일상다반사이긴 한데.'

크라운 로드에서 살아오며 그 한 대를 피하지 못해 죽은 녀석을 많이 봐 왔던 나는 오랜만에 드는 피로감에 미소를 지었다.

크라운 로드를 5회차나 반복 해오며 내가 전투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하나 이번 일을 토대로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외줄타기 같은 위험천만한 스릴을 상당히 즐긴다는 것을.

지난 몇 달간 그러한 경험은 하일성 녀석 때 말고는 한 번도 없었던 탓인지, 나는 줄곧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하, 썩을. 이놈의 크라운 로드 때문에 이상한 성향이 생겼잖아."

사선을 몇 번이고 넘어온 탓일까, 지구에서는 없었던 성향이 생겼음을 깨달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뿜어지는 엔도르핀만큼 인간을 취하게 하는 마약은 없다고.

그동안 개소리로 치부했지만, 정작 내가 그 상황에 놓이고 보니 부정을 할 수가 없다.

'나도 미쳤구만. 미쳤어.'

크라운 로드를 5회차씩이나 반복했으니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은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최강도 좋지만 가끔은 약자로서 싸워 나가는 것도 해 볼 만한 거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정신 차려야지. 까닥했다간 층에게 먹힐라.'

재미는 재미고 이제 스트레스를 풀었으니 나는 슬슬 층의 공략법에 대해 고민했다.

게임에 들어오면 어련히 알아서 성좌가 이야기 진행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해 줄 거로 생각했건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히든 직업! 드래곤 슬레이어....]

"싫다고."

눈앞에 또 뜨는 창에 눈살을 찌푸리며 거절할 찰나, 나는 뒤에서 들린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등에 활을 멘 채 늑대 머리 후드를 쓴 한 남자가 있었다.

머리 위에 '섭섭마궁사'라는 닉네임이 뜨는 것을 보아하니 그도 유저인 듯싶었고, 나는 곧바로 의문을 보였다.

"누구?"

내가 그에게 물음을 던지자,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털어 내더니 내게 싹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방송을 하고 있는 섭섭이라는 사람인데요. 유저님이 파자몽과 싸우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어서 이야기를 좀 여쭙고자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싫어."

단칼에 거절하자 섭섭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저기, 어떻게 안 될까요?"

초조한 섭섭이의 말에 다시금 대답하려던 순간 나는 말을 멈췄다.

혹시나 이 녀석이 층을 클리어하는데 필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없지 않으니까.'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지 해 봐야 하는 법.

이번에는 스트레스도 적당히 풀었으니 어울려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곧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섭섭이에게 말했다.

"해 줄게."

내 대답을 듣고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서둘러 아이템 창에서 여러 아이템들을 꺼내 들더니, 테이블과 소파가 세팅되었다.

이런 건 왜 들고 다니는 걸까.

하지만 나는 더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다리를 꼰 채로 녀석을 보며 고개를 까닥거리자 섭섭이는 눈을 반짝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흠흠, 그럼 우선 혹시 레벨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섭섭이의 말에 나는 아까 내가 레벨이 올랐던 것을 깨달았다.

상태 창을 켜보자 적힌 레벨은 21이었기에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21."

"그럼 저, 혹시 파자몽을 잡기 전 레벨은...."

"아마 2였나."

스텟을 찍으며 대강 말하자 다음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내가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섭섭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저 표정 낚시꾼이 대어를 발견했을 때의 표정인데.

"그 표정, 기분 나쁜데."

내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음에도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지 어딘가 홀린 표정을 지었다.

이후 녀석은 나에게 직업 같은 것도 물어왔고 나는 전직한 적 없다고 대답하자, 더더욱 녀석의 반응이 이상해져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양 굴기 시작했다.

"저, 혹시 닉네임은 하천성이라고 적혀 있는데. 본명도 같습니까?"

"그래."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기에 대답한 순간 나는 말문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몸은 강철민인가 하는 녀석이었는데.

'뭐, 상관없나.'

적당히 넘기면 되겠거니 하고 가만히 있자 아까까지 열심히 질문하던 섭섭이가 이번에는 망설이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 표정을 본 내가 말 할 거 있으면 빨리하라고 시선으로 재촉하자 섭섭이의 입이 열렸다.

"방금 그야말로 신과 같은 컨트롤로 몬스터를 잡는 걸 보고 조심히 여쭙는 겁니다만. 하천성 님은 혹시 현실에서 헌터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질문을 듣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말을 멈췄다.

이 녀석의 반응을 보며 나는 앞에서 읽었던 말을 떠올렸다.

현직 헌터와 같이 몸을 쓰는 일을 하면 할수록 디스 헌터와 같은 게임에서는 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헌터 일을 한다고 바로 밝히는 게 좋은 걸까.

'이 게임도 강철민 녀석 아버지 게임이라고 했었지.'

아직 층의 공략도 잘 모르는 마당에 섣부른 행동은 좋지 않다.

그렇담 여기서는 그냥 넘기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알아서 생각해."

모호한 대답을 던지자 그는 알아서 해석한 듯 고개를 세차게 아래위로 흔들었다.

"질문은 끝났지? 슬슬 일어나고 싶은데."

대화를 해 본 결과 이 녀석은 그다지 층의 공략과는 관련 없는 녀석일 것 같았다.

"자, 잠깐만요!"

그렇기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녀석은 급히 나를 말렸다.

무슨 볼일이 더 있냐는 표정으로 녀석을 돌아보자 그는 내가 바로 가 버릴까 싶어 서둘러 말했다.

"혹시 이번에 방송으로 송출된 영상을 제 채널에 업로드해도 괜찮을까요?"

그 말에 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영상 채널에 업로드라.

'방송을 한다는 놈인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2레벨 유저가 100레벨 몬스터를 잡는 건 흔한 일은 아닌 모양인데.'

층과 관련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거라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미끼 정도는 던져 놓아 보자고 생각한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제가 나중에 영상 잘되면 좋은 아이템 선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이제 더 말을 나눌 시간은 없다는 양 손을 휘젓곤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섭섭이는 내 등을 향해 '꼭 메일 넣겠습니다!'라고 연신 외쳐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미끼가 통하면 어련히 알아서 풀리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남는 시간 동안 사냥이나 하기로 했다.